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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20 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2. 2016.01.17 새해맞이 산사 나들이, 예산 금오산 향천사 (산사의 조촐한 설경) 2

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 '


▲  윤봉길이 태어난 광현당

▲  저한당

▲  윤봉길이 남긴 글씨들

 


 

차디찬 겨울 제국과 따스한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초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홍성
과 예산(禮山)을 찾았다.
충남의 금강산으로 추앙받고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을 둘러보고 덕산(德山)으로 나와
늦은 점심으로 얼큰하게 육개장을 섭취했다. 용봉산을 크게 1바퀴 돌아 몸이 좀 피곤했으
나 일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여 수덕사(修德寺)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유적(
충의사)의 문을 두드렸다.

윤봉길(尹奉吉) 의사 유적은 그가 자란 저한당을 비롯해 도중도의 광현당과 부흥원, 윤봉
길 의사 기념관, 충의사, 그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윤봉길과는 관련은 없지만 보너스로 보부상유품전시관도 있다.

윤봉길 의사 유적은 통째로 사적 229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예산 윤봉
길 의사 유적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순서는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되나 나는 저한당을 시
작으로 도중도와 부흥원, 윤봉길의사 기념관, 보부상유품전시관, 충의사, 배용순 여사 묘
역 순으로 둘러봤다.


▲  옛 국도변에 자리한 저한당 서쪽 돌담길


 

♠  윤봉길 의사(義士)가 성장기를 보냈던 저한당(狙韓堂) 주변

▲  저한당

저한당은 윤봉길(1908~1932) 의사가 1911년부터 1930년 봄까지 살았던 집으로 1911년에 가족
을 따라 도중도에서 저한당으로 이사를 왔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3.1
운동이 터지면서 왜정(倭政)의 식민지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하여 동생인 윤성
의(尹聖儀)와 함께 한학(漢學)을 공부했는데, 워낙 영특하여 15살 때 천재로 칭송을 받았다.
(나는 그 나이 때 뭐했나...?)
1921년부터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계속 한문학을 익혔으며, 1926년에 집에 서당을 차
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문물을 틈틈이 익혔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공동묘지 묘표(墓
標) 사건이 발생하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서당에서 평화롭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글을 모르는 청년 하나가 마을 인근 덕
숭산(德崇山) 공동묘지에 있는 팻말을 모조리 뽑아들고 와서 자기 아비의 묘비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에 묘비를 찾아주긴 했으나 문제는 그 청년이 아버지 묘비는 물론이고 다른
묘비까지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않은 채, 죄다 뽑아 온 것이다. 그러니 어찌 묘비의 위치를
알 수 있겠는가?
이에 큰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아이들보다 청년들의 교육이 시급함을 깨닫고 야학회(夜學會)
를 창설해 지역 주민들의 문맹퇴치에 나섰다. 또한 민족의 경제자립이 자주독립의 지름길임을
인식하고 구매조합(購買組合) 조직과 양계(養鷄), 양돈(養豚) 등을 장려하여 농촌 경제자립운
동을 펼쳐나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18세에 불과했다. 나는 그 나이 때 학교에서 잠만
열라게 잤는데, 역시 위인은 떡잎부터가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짓고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으며, 1929년에는 도중도에
부흥원(復興院)을 만들고 매월 14일에 계몽강연회(啓蒙講演會)를 개최하여 농촌계몽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그해 2월 18일에는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學藝會)를 열고 촌극(寸劇)인 '토
끼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하면서 매우 성공리에 막을 내렸
다. 바로 이 연극 때문에 왜정은 그를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란 농민 단체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고,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조직해 농민의 단결과 애국사상 고취에 나섰다. 허나 왜정은 그런 행동이 독립운동이라며 쓸
데없이 꼬투리를 잡았다. 하여 왜경(倭警)에 여러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윤봉길은 독
립운동이 아닌 단순한 교육이라고 했지만 왜정은 무조건 독립운동이라며, 더 이상 하지 말라
고 강요했다. 농민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것까지 왜정이 쓸데없이 태클을 거니 그는 이곳에서
의 활동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1930년 3월 6일, 그 유명한 7글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을 나
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시를 남기고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윤봉길은 부인과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1932년 상해 의거(義擧) 이후 왜정의 감시와 탄
압 속에 눈물과 독립에 대한 의지로 이 집을 지켰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곳에 살다가 1972
년 윤봉길 의사 유적을 몽땅 국가 사적으로 삼으면서 국가에서 집을 매입해 성역화 작업에 들
어갔다. 그래서 그해 8월 유족들은 정든 집을 떠나 인근으로 이사갔으며, 1974년 집을 중수했
다. 지금도 관리가 지극정성이라 마치 여인네들이 살고 있는 듯, 집이 매우 깨끗하다.

남쪽을 바라보며 선 저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초가(草家)로 오래된 마을과 민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이다. 1911년에 지어진 것으로 창고와 부엌으로 쓰이는 'ㄱ' 모양의 건
물과 방 2개가 딸린 건물 등 부속 건물 2채(담장 밖에 뒷간을 포함하면 3채)를 거느려 총 3채
가 한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다.
건물에 딱히 특별한 부분은 없으나 윤봉길의 오랜 손때가 묻어있고 그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이 담긴 터전으로 유서가 깊으며, 그의 유가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집의 이름인 저한당(狙韓堂)은 한국을 건져낸다는 뜻이니, 즉 우리나라를 왜정에서 건져
내 독립을 이루고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다.

* 저한당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 (덕산온천로 182-10)


▲  돌담에 둘러싸인 저한당 외경

▲  저한당으로 인도하는 대문
두 부속건물 사이로 조촐하게 담을 만들고 문을 내어 정겨운 모습을 자아낸다.

▲  방 2개와 광으로 이루어진 부속건물

▲  창고와 부엌

▲  저한당 뒤쪽 장독대

▲  뒷간과 소나무

▲  글씨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저한당 현판

▲  주인이 가고 없는 저한당 방


▲  저한당에 봉안된 잘생긴 윤봉길 의사의 영정

▲  윤봉길 의사 동상

▲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탑

저한당 주변에는 오른쪽 주먹을 쥐며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과 1965
년에 세워진 의거 기념탑, 교육관 등이 있으며 나무가 많고 잔디가 곱게 깔려 정갈한 분위기
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 주변을 기와 돌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성역의 경계를 그었다.


▲  저한당 주변
심술쟁이 겨울도 그를 흠모하는 것일까? 저한당에서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하만물을 위해 빨리 떠나주면 좋으련만~~

▲  도중도로 이어지는 저한당 동쪽 돌담길
지긋한 전통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기 그지 없다.


 

♠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고 농민계몽을 위해 힘쓰던 현장
도중도(島中島)

▲  도중도 광현당 정문

저한당을 둘러보고 남쪽으로 나오면 대치천이라 불리는 개천이 나온다. 그 개천에 걸린 '도중
도교'를 건너면 윤봉길이 태어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도중도 구역에 들어서게 된다.

도중도는 윤봉길의 증조부 때부터 정착해 살던 곳으로 1908년 6월 21일 광현당에서 윤황(尹璜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경주김씨인 김원상(金元祥)이며, 본관은 파평 윤씨, 본명은
우의(禹儀)이다. 봉길이란 이름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그는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으며,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야학
회를 비롯해 계몽강연회,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도중도란 이름은 '조선반도 속의 섬, 조선
반도 가운데의 섬으로 왜인(倭人)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란 뜻에서 윤봉길이 지은 것
으로 예전에는 순 100% 섬이었지만 도중도교 서쪽 개천에 흙으로 둑을 닦아 그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면서 99% 섬이 되버렸다. 큰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조촐한 개천 안에 이런 커
다란 섬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뿐이다.

도중도에는 윤봉길의 체취가 서린 광현당과 부흥원이 있고, 무궁화(無窮花)를 비롯해 온갖 야
생화를 심은 무궁화학습원이 부흥원 동쪽에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난 전나무길이 곳곳
에서 운치를 자아내며, 섬 동쪽에는 씨름장과 그네, 급수대, 쉼터를 갖춘 넓은 잔디밭이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로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다.
또한 섬 주변을 개천이 둘러싸고 있으며, 섬 남쪽에는 물을 모아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
다. 하여 여름에 오면 연꽃의 화려한 향연에 그야말로 두 눈이 환장할 지경이다.

* 도중도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80-1 (시량부흥길 21)


▲  넓은 공원 분위기의 도중도 내부

▲  광현당 서쪽에 자리한 매헌 윤봉길 유허비(遺墟碑)

▲  광현당(光顯堂)

도중도 가운데에 자리한 광현당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곳으로 저한당과 마찬가지로 초가이
다. 이 집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정착한 증조부(曾祖父)인 윤자 때부터
살았다고 하며, 조선 후기 초가로 광현당이라 불리는 본당 외에 3채의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윤봉길은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에 새롭게 장만한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고, 이후 그
의 친척이 잠시 살다가 버려진 이후 나라에서 매입하여 1974년에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저한
당과 마찬가지로 관리가 잘되어 있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듯 깨끗하며, 광현당이란 이름은
윤봉길을 빛으로 비유해 그의 태어남을 높이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다.

▲  광현당 대문과 펄럭이는 태극기

▲  적막이 감도는 광현당

▲  광현당 부엌
부엌이 양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  광현당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생기가 넘쳐
보인다.

▲  담장을 두른 광현당 뒷모습

▲  우진회기공비(禹進會記功碑)

우진회는 1944년 2월 15일 윤봉길의 4촌과 6촌, 제자들이 만든 단체로 윤봉길이 만든 월진회
를 계승했다. 1946년 4월 29일 월진회로 이름을 갈았으며, 2011년 4월 29일 윤봉길 문화축제
때 우진회의 업적을 기리고자 광현당 앞에 기공비를 세웠다.


▲  부흥원 옆에 자리한 연자방아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했던 연자방아로 지금은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한 여러 농사 도구들

▲  부흥원 뒤쪽에 그림처럼 펼쳐진 전나무 숲길

▲  부흥원(復興院)

광현당 동쪽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리한 부흥원은 1928년에 윤봉길이 세웠다. 공동묘지 묘
표사건에 크게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야학당을 만들어 저한당 사랑방에서 운영했는데, 참여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도중도에 부흥원을 만들고 1928년 2월 25일에 자필로 대들보에 글씨를
새겨 상량식(上梁式)을 가졌다. (대들보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있음)
그는 이곳을 3대 목표운동의 장으로 삼았는데, 그 3대란 무지 타파, 가난 타파, 단결이다. 무
지(無知) 타파를 위해 야학과 독서회, 학예회를 벌였고, 가난 타파를 위해 농촌 공동구매와
저축, 생활 개선을, 단결을 위해 월진회와 수암체육회, 공동작업과 공동식수 작업을 벌였다.
그의 개혁적인 활동에 왜정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태클을 걸자 바로 여기서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상해 의거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974년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  부흥원 현판의 위엄
부(復)가 마치 도(渡)처럼 보인다.

▲  아직은 황량한 무궁화학습원

▲  겨울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그네

▲  도중도 남쪽에 조성된 연꽃 연못


 

♠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 (왼쪽에 보이는 집은 보부상유품 전시관)

충의사 남쪽(저한당 북쪽 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1973년부터 1977년까
지 진행된 윤봉길 유적 성역화 사업 때 관리사무소와 함께 세워졌다. 이후 2001년 기념관 옆
에 윤봉길의 어록(語錄)을 담은 윤봉길어록탑을 만들었으며, 2002년에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그해 12월에 속세에 문을 열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봉길의 손때가 자욱한 유품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윤봉길
일가에서 쓰던 그릇과 서적, 벼루를 비롯하여 그의 찰나(刹那)와 같은 인생을 다룬 영상관과
매직비전 11대, 다오라마 등이 그의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그의 유품(遺品) 중에
회중시계와 지갑, 중국화폐, 도장, 손수건, 안경집, 일기, 월진회창립취지서, 농민독본, 형틀
대, 편지 등은 '윤봉길의사 유품'이란 이름으로 '보물 568-2호, 568-3호'로 지정되었다.

* 윤봉길의사 기념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5 (덕산온천로 183-5, ☎
  041-339-8233)
* 윤봉길의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그릇, 수저, 놋대야 사진을 클릭한다.

▲  윤봉길 일가가 사용했던 그릇과
수저, 놋대야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읽은 명심보감과 그가
사용한 벼루와 등잔대 - 보물 568-3호

▲  윤봉길의 글씨 (해석은 각자 알아서)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쓴 온갖 서적들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직접 그린 월진회 깃발 - 보물 568-3호
팔방미인이던 윤봉길은 지식 소양도 대단할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깃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무궁화는 마치 뭉개구름 속에서 방긋
피어나는 태양처럼 찬란해 보인다.

▲  부흥원 대들보 - 보물 568-3호
옛 부흥원의 유물로 1928년 2월 25일 부흥원 상량식 때 윤봉길이
대들보에 기념 메세지를 남겼다.

◀  윤봉길이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 가족들
에게 남겼다는 7글자의 시 - 보물 568-3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
을 나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다)' 물이 흐르듯 유연한 곡선의 서체에 그의
비장함이 엿보인다.


▲  월진회 창립취지서(보물 568-2호)와 통장(보물 568-3호)

1929년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월진회를 만든 윤봉길은 창립 취지서(趣旨書)를 남겨 그 뜻을 천
하에 밝혔다. 월진회 통장은 저축운동을 위해 그가 회원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그가 직접 만들
었다고 하며,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지금 21살이면 완전 애기인데...)


▲  윤봉길이 1929년에 쓴 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 - 보물 568-2호

▲  농민독본(農民讀本) - 보물 568-2호

1927년 농민들을 대상으로 야학당을 운영했을 때 그가 직접 편저한 책으로 모두 3권으로 이루
어져 있다. 지금은 2권과 3권 일부만 남아있으며, 왼쪽 책은 세월의 녹이 검게 그을려져 있다.
책에 수록된 우리나라 지도가 무척 인상적인데, 부산과 왜열도 사이를 조선해협이라 표시했다.


▲  위친계취지서(爲親契趣旨書) - 보물 568-3호
윤봉길이 부모의 상사(喪事) 등을 위해 친척을 중심으로 조직한 위친계의 취지서이다.
나라의 독립과 경제 부흥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그의 높은 의식을 보여준다.

▲  우리의 옛 땅 동북아를 누빈 윤봉길의 위엄
지도에 나온 동북아 일대는 우리의 옛 땅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히
차지해야 될 땅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윤봉길이 중원대륙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  윤봉길이 1932월 1월 30일 상해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그해 1월에 벌어진 왜군의 상해 침략에 대한 내용이 소상히 나와있다. 왜군이
상해를 공격하자 장개석(蔣介石)의 중국군이 1달 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상해를 빼앗기고 많은 중원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은 가족에게 장엄한 각오가 서린 7자의 시를 남기고 만주로 홀로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간이 쫄깃해진 왜경은 몰래 미행을 붙이면서 평안북도 선천(宣
川)에서 붙잡고 만다. 하여 45일 동안 옥고(獄苦)를 치르고 바로 만주로 넘어가 그곳에서 그
와 뜻이 같은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을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허나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1930년 12월 홀로 산동반도 청도(靑道, 칭
따오)로 넘어가 1931년 여름까지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으며, 여기서 번
돈 대부분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청도도 적당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는 상해로 가야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1931년 8월 상해로 갔다. 상해에 있는 프랑스 조계(租界)인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머물며 박
진(朴震)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영어를 익혔다. 그렇게 주경야독(
晝耕夜讀)을 하다가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을 했고, 그해 겨울 드디어 백범 김구
(白凡 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  윤봉길이 홍구공원 의거 2일 전에 김구에게 보낸 자신의 이력서들
이력서 옆에는 사진에는 빠져있지만 상해에서 사용한 중국제 수첩이 있다.

▲  윤봉길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찍은 증명사진
(오른쪽은 자필로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  조금은 어설프게 재현된 홍구공원 의거 현장

1932년이 되자 왜국은 왜인 승려 처단 사건을 구실로 상해 사변을 일으켰다. 장개석이 1달 동
안 저항을 했으나 결국 상해를 내주고 말았으며, 상해를 점령한 왜군이 승리에 도취해 왜왕(
倭王) 생일인 4월 29일에 왜왕 생일 축하 및 전쟁 승리 축하 기념식을 상해 시내에 있는 홍구
공원(虹口公園)에서 갖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와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
始榮), 조소앙(趙素昻)에게 자신의 거사 계획을 밝히고 거사를 구상했다. 성공적인 거사를 위
해 채소장사로 가장해 기념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신분을 세탁했으며, 김홍일(金弘一)이
만든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준비하고 폭탄 던지는 법을 배워 실수가 없게끔 자신을 채찍질했
다.
드디어 4월 29일 아침, 그는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 폭탄 1개를 가지고 기념
식장으로 들어갔다. 공원을 지키던 왜군이 검문을 했으나 왜인이라고 속이니 그냥 들여보내주
었다.
왜인들만의 즐거운 잔치였던 그 행사가 거의 막을 내릴 무렵, 1만 명의 군중 사이에 묻혀있던
그는 기념식 단상 앞을 지키던 기마헌병 앞까지 들어와 물통폭탄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 물통이 단상에 떨어지는 순간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식장에서 오만을 띈 미소로 행사를 치
르던 왜인 고위층 7명이 모두 꼬꾸라졌다. 단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행사를 구경
하던 관중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을 붙잡고 도망치느라 바뻤다. 왜군 또한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니 충분히 빠져나와 다음 거사를 준비할 틈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윤봉길은 피신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왜군은 그를 체포했다.

윤봉길이 준 크나큰 선물에 감동하여 기절한 7명의 왜인 고위층 중에, 상해 왜인 거류민(居留
民) 두목인 가와바다 사다쯔구(河端貞次)는 사경을 헤매다가 다음날 바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1932년 1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운 왜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5월
에 폐기되었다. 또한 제3함대 두목인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은 중상을 입고 눈병신이
되었으며, 주중일본공사 시케미쓰(重光癸)는 우측 다리가 절단되어 다리 병신이 되었다. 기타
2명도 막심한 중상을 입었다. 즉 2명이 폐기되고 5명이 병신이 된 것이다. 그 5명은 왜국 백
성들이 바친 세금이나 갉아먹으며 식충이처럼 살다가 골로 갔다.


▲  의거 이후 연행되는 윤봉길 사진
기념식장을 흔쾌히 아수라장으로 만든 물통 폭탄과 폭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업혀가는 왜군 장수 사진도 있다.

▲  상해 의거 관련 왜국 조일신문 보도
왜국은 상해 폭탄변사(爆彈變事)라고 표현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변사겠지~~
윗사진은 폭탄에 아작이 난 기념식장, 아랫 사진은 왜군에게 잡혀 호송되는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왜국 군법회의로 넘겨져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형을 선고받
았다. 그를 심문하던 왜군은 그가 상해사변에 앙심을 품은 대륙 사람인줄 알았으나 조선 사람
이란 사실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상해 왜군 헌병대에 갇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그는 그해 11월 18일 왜열도로 호송되었으
며, 20일 오사카(大阪) 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다시 가나자와(金澤)로 옮겨져 거기서 12
월 19일 총살형을 받으니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한편 상해 사변에서 개망신을 당해 절치부심에 빠진 중화민국(中華民國) 지도자 장개석(장제
스)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특히 상해사변을 일으킨 원흉들이 대거 폐기되었다는
소식은 겁 많은 중원대륙 지도층을 비롯한 대륙 민중들까지 모두 환호하게 만들어 한국에 아
주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개석은 '쓸데없이 머릿수만 많은 4억 대륙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고 두고두고 격찬했으며, 1933년 5월 그의 제의로 남경
(南京)에서 김구와 회담을 했다.
여기서 장개석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서로 돕고 지내자며 손을 내밀었고, 임시정
부와 중원대륙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광복군은 장개석의 지원과 비호를 받으며 독립활동을 전
개했다. 그리고 왜국이 패망할 때까지 서로 상부상조했다. 윤봉길의 의거로 잠시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크게 고취되었고, 우리의 독립활동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윤봉길의 최후 장면과 그가 갇혀있던 가나자와 형무소

▲  장개석이 윤봉길의 동생 윤남의에게 보낸 친필서한과 기념사진

▲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 전기문을 낸 곽상훈에게 보낸 축하 친필 서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윤봉길의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에 13년 동안 매장
되었다. 왜국이 패망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과 가나자와에 거주하던 박동조, 서성민으로 이
루어진 발굴단이 1946년 3월 4일 발굴을 시작해 6일에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유해는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의 유해와 함께 그해 5월 부산에 도착해 공설운
동장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7월 7일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최초로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되었다. 또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
국장이 추서되어 그의 의거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  윤봉길이 날린 그 유명한 도시락/물통 폭탄 (모형)
공원을 지키던 왜군을 감쪽같이 속이고 임무를 완수한 도시락/물통 폭탄의 위엄
겉은 그저 흔한 도시락과 물통이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폭탄이 들어있다.

▲  윤봉길 의사의 유품 (안경집부터 대륙 화폐까지) - 보물 568-2호
윤봉길을 사형시킨 왜국은 그의 몸에서 나온 유품을 덕산에 있는 유가족에게
보내주며 은근히 악어의 눈물을 보였다.

▲  윤봉길이 상해 의거 때 지녔던 지갑과 대륙 화폐 - 보물 568-2호

▲  윤봉길이 죽기 전까지 사용했던 손수건
손수건에 점처럼 찍힌 빨간 것은 그의 거룩한 피이다.

▲  회중시계(懷中時計)와 도장

윤봉길의 유품 중에 회중시계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계는 원래 김구 주석이 쓰
던 것으로 상해 의거를 벌이던 4월 29일 아침, 김구와 마지막으로 만나면서
'선생님의 시계가 많이 녹슬었군요. 제 시계는 이제 쓸 일이 없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제안을 하여 서로의 시계를 바꾼 것이다. 그의 시계를 받은 김구의 마음은 참 착잡했을 것이
다. 솟구쳐 나오려는 사나이의 눈물을 서로가 억지로 참아가며 시계를 서로의 정표로 바꿔야
했던 그 참담한 현실을..


▲  1962년 우리나라 정부가 윤봉길에게 바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윤봉길이 마지막으로 짊어진 형틀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의 몸을 묶었던 형틀
대이다.
가로목과 세로목이 있는데, 세로목은 두 팔을
묶었고, 가로목은 머리부터 허리까지 묶었다.
이 형틀대는 그가 묻힌 노다산 공동묘지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세로목만 나왔으며
이후 이 땅에 들어와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안
착하여 보물 568-2호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보물급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비
참하고 쓰라린 존재가 아닐까 싶다.


▲  윤봉길 의사의 흉상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옆에 자리한 윤봉길어록탑


 

♠  충의사(忠義祠)

▲  충의사로 인도하는 홍살문

윤봉길 의사 유적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충의사는 윤봉길의 충혼이 깃든 사당으로 1968년에
지어졌다. 1978년 4월에 사당과 삼문을 증축하고 주변을 정비했는데, 사당과 충의문의 색이
그 흔한 사당 건물의 색깔이 아닌 베이지색을 띄고 있다. 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리된 것으로 그 시절 성역화시킨 모든 사당은 모두 베이지색으로 떡칠을 했다. 이유는 그가
좋아하는 색이기 때문이라나..?
어쨌든 1979년 이후 많은 사당이 본연의 색깔을 되찾았으나 이곳은 아직 베이지색을 고수하고
있다.


▲  2마리의 사자가 문을 지키는 충의문(忠義門)의 위엄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이 이용하는 문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굳게 닫아 둔다.

▲  충의사 본전(本殿)

▲  충의사에 봉안된 윤봉길의 영정 (정우성 화백의 그림)

그에게 있어 저렇게 편안히 앉아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저런 영웅이 여럿 나타나 세상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하건만 이젠 그런 것도 무뎌딘 것일까..?
윤봉길 같은 이가 나라의 주인이 된다면 나라와 백성이 많이 편안해질텐데 너무 젊은 나이에
숨진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그의 영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참배록에 '봉길이 형님 나 다녀갔소. 잘 봐주시오!'의 뜻으로
나의 보잘것 없는 이름을 살짝 남겨본다.


▲  늦은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는 연못의 조촐한 분수대
충의사와 배용순 여사 묘소 중간에 연못을 두어 성역(聖域)의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덜어낸다.

▲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裵用順) 여사의 묘역

충의사와 연못 서쪽에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다. 바로 그곳에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 여
사의 묘역이 조용히 자리하여 남편의 사당을 바라본다.
배용순은 1922년 그와 혼인하여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상해 의거 이후 왜정의 감시로 적
지않은 마음 고생을 겪으며 저한당을 지켰고, 1974년 성역화 사업에 따라 나라에서 유적 일대
를 매입하면서 인근으로 이사가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에 적지 않은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
와 유족의 마음 같아서는 남편(윤봉길)의 무덤 곁에 있고 싶겠지만 멀리 서울 효창공원에 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당이 바라보이는 서쪽 소나무 숲에 무덤을 쓴 것이다.


▲  보부상(褓負商) 유품 전시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충의사 사이에 팔작지붕을 지닌 기와집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윤봉
길과 관련이 있는 집이겠지 생각을 하겠지만 현실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보부상 유품 전
시관이다. 윤봉길 유적에 왠 뜬금 없이 보부상 유품 전시관이 있는 것일까? 신라시대 문화유
산으로 도배가 된 경주(慶州)에서 고구려 호우를 보는 것 마냥 꽤 이채롭다.

보부상 유품 전시관은 예산과 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부상의 조직적 단체인 예덕상무사(禮
德商務社)의 유품을 머금은 공간이다. 보부상은 일종의 행상(行商)으로 보상(褓商)과 부상(負
商)을 합친 말인데, 보상은 부피가 가볍고 돈이 나가는 물건을 짊어지며 팔았고, 부상은 부피
가 크고 값이 싼 생활용품과 먹거리를 지게에 이고 다녔다.

보부상은 고려 후기에 여진족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한 이성계(李成桂)를 부상 백
달원이 발견해 치료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 조정도 보부상에게는 조금 관대하여 여러 혜택을 주었고, 곳곳에서 보
부상이 조직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밥벌이를 하였다. 그들은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는 쌀
이나 무기를 짊어지고 아군을 도왔는데,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을 지키던 권율에게
쌀을 날라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갇힌 인조와 군사들에게 쌀과 먹을 것
을 날라주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皇國協會)가 결성되어 어용단
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예산/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서와 유
물을 남겼는데, 그 유물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공간을 윤봉길 의사 유적에 세운 것이다.
아무래도 윤봉길과 관련이 없는 곳이다 보니 관람객들의 발길이 조금 적은 편인데, 우리나라
상업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니 잠시 둘러보는 것도 정신적으로도 지식적으로도 매우 유익할 것
이다. 결코 손해될 것은 없다.


▲  예덕상무사 시절의 문서와 도장들

▲  보부상들이 팔던 양반용 물건들 - 삿갓과 부채 등

보부상 유품 전시관에 전시된 예덕상무사 유물(인장 6개, 인궤 1개, 청사초롱 2개, 공문서 16
점)은 '보부상 유품'이란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스크롤의 압박이 상
당한 본글의 사정상 보부상 유품은 2장만 담았으며, 예덕상무사와 유품에 대한 내용은 생략한
다.

이리하여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끝으로 윤봉길을 폄하하고 테러
라고 치부하는 꼴통 매국노들과 뇌가 없는 머저리들이 여럿 있는데, 이런 것들은 정말 산소와
물이 아깝다. 테러와 의거의 차이부터 공부하길 권한다. 왜인이 저렇게 말하는 건 이해를 하
겠으나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 불가이다. 이는 이승만 시
절에 친일매국노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일어난 잔혹한 결과이다.
윤봉길이나 안중근(安重根),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같은 걸출한 인재나 영웅이 많이 나와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매국노를 말끔히 청산하고 처단하여 역사를 바로 잡는 그날이
오길 간절히 고대한다. 역사 청산이 없는 이상 이 땅의 미래도 없다.

* 보부상유품 전시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20-6 (덕산온천로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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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산사 나들이, 예산 금오산 향천사 (산사의 조촐한 설경)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예산 금오산 향천사(香泉寺) '

▲  제각각의 모습을 지닌 천불전의 천불(千佛)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으면 온갖 기대감이 나를 설레게 한다. '올해는 잘될거야','돈
많이 벌겠지~!' 등의 바램 말이다. 그런 희망을 품으며, 새해 첫 답사지로 어디를 갈까 궁
리하다가 문득 충남 예산에 시선이 멈추어 그곳에 있는 향천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으나 급하게 갈 이유가 전혀 없어 느림의 미학(美學)이나 누릴 겸, 굼
벵이 1호선 전철을 타고 방학역에서 아산시 신창역까지 내려갔다. 거리는 자그마치 130km,
소요시간은 3시간이다. 그것도 서울역에서 천안으로 가는 급행 전철(1일 3회, 평일만 운행)
의 노력 덕분이다.
그렇게 나의 근성을 오랜만에 테스트하며 수도권 전철의 최남단인 신창역에서 잠시 대기를
탔다가, 예산읍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40분을 달려 예산읍내 동쪽 쌍송배기(쌍송
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쌍송배기는 아산이나 신례원, 삽교, 덕산 방면 예산군내버스의 종점이자 유구, 청양(靑陽)
방면으로 넘어가는 요충지로 향천사까지는 2k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게다가 길도 잘
닦여져 있고 오르막도 거의 없어 산책 삼아 가볍게 거닐면 된다.


▲  향천사 가는 길
읍내를 벗어나도 일주문 직전까지 속인(俗人)들의 집은 계속 줄을 잇는다.


 

  향천사에 들어서다

▲  향천사 일주문(一柱門)

향천사입구인 예산초교에서 20분 정도 걸으니 일주문이 흔쾌히 마중을 한다. 일주문은 절의 정
문으로 대부분의 절이 필수로 갖추고 있다. 절에 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존재로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역할도 하지만 마음을 하나로 다듬고 절로 들어서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일주문은 2003년 10월에 세워졌는데, 문을 받치는 2개의 기둥은 가운데가 좀 볼록하며, 기둥
위에는 양쪽으로 누런 꼬랑지의 용 2마리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어 마치 견우와 직녀를 보는 듯
하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평방(平枋) 앞에는 '금오산 향천사(金烏山 香泉寺)'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글씨가 좀 간결해보이면서도 필력이 넘쳐 보인다. 그리고 뒤쪽에도 현판이 있는데, '호
서가람천불선원(湖西伽藍千佛禪院)'이라 쓰여 있어 향천사의 성격을 쿨하게 알려준다.


▲  서로 마주보며 일주문을 수식하는 용 2마리

▲  기둥에 몸을 의지한 용과 그의 꼬랑지

▲  일주문의 뒷모습과 절의 성격을
담은 8글자 현판


▲  창건 유래비가 있는 계단길 입구

일주문을 들어서 1분 정도 가면 넓다란 공간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향천사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고, 오른쪽은 금오산 등산로, 정면에 보이는 계단길은 경내로 통
한다. 그러니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호젓하게 계단길로 가는 것이 좋다. 차량을 이용해 경내로
들어서거나 금오산 등산을 원할 경우는 오른쪽 길을 이용하면 된다.

돌계단 앞에는 절의 창건 유래를 머금은 창건 유래비와 붉은 글씨로 향천사라 쓰인 표석이 있으
며, 이들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외부에서 보이지 않던 향천사의 건물이 지붕부터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2번째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  경내로 인도하는 1번째 돌계단 ~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  2번째 돌계단 너머로 얼굴을 보이는 극락전

▲  잠시 물 1모금의 여유
둥그런 석조(石槽)에는 자연이 베푼 약수가 넘칠 정도로 가득하다.

▲  1번 째 계단보다 조금은 각이 선 2번 째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향천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향천사 경내 (극락전 주변)

※ 예산 향천사의 간략한 내력(來歷)
예산읍내 동북쪽 금오산(223m) 밑에 포근히 둥지를 튼 향천사는 예산 땅에서 수덕사(修德寺) 다
음가는 절로 655년(백제 의자왕 14년)에 백제의 고승 의각선사(義覺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의각이 세웠는지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 외에는 입증할 기록이 없어 그저 답답할 따름
이지만 경내에 있는 9층석탑이 7세기 중반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 하므로 그것이 맞다면 대충 창
건 시기는 맞아 떨어진다.

향천사를 세웠다고 전하는 의각선사는 백제 승려로 652년 백제의 별채인 왜열도로 건너가 백제
사(百濟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가 뜻한 것이 있어서 바로 당나라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3년 동안 오자산(五子山)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면서 석불 3,053개를 비롯하여 전단향(旃檀香
)나무로 만든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16나한상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655년 당나라에 온 백제 사신을 따라서 귀국했는데, 귀국하면서 오자산에서 만든 석불을 바리바
리 싣고 왔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오산현(예산) 북포 해안에 이르렀으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석불들을 계속 배에 방치했다. 이때 배 안에서 종소리가 나 해변에 진동했다
고 하여 부근 마을 이름을 종성리(鐘聲里)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각의 방황을 보다 못한 금까마귀 1쌍이 찾아와 지금의 절 자리를 알려주었다
고 한다. 그래서 의각은 그 자리에 향천사를 세워 석불을 봉안하고 까마귀에게 보은(報恩)을 하
는 차원에서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의각이 만들었다는 불상의 존재는 나오
지 않음)

그렇게 절이 창건된 이후, 승려 도장(島藏)이 잠시 절을 관리했다. 그러나 660년 가을, 백제가
허망하게 망하자. 백제의 속방(屬邦)인 왜국으로 건너갔다.
왜왕(倭王, 아마도 제명여왕이나 천지왕으로 생각됨)은 그에게 귀의(歸依)할 것을 부탁했고, 마
땅히 갈 곳이 없던 그는 그 청을 받으니 왜왕이 기뻐서 동량지원수(棟梁之願袖)란 존호(尊號)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옛 백제 땅으로 돌아와 향천사와 송림사(松林寺)에 머물렀는데, 698년(신라 효소왕 7년)
신라 왕실의 지원으로 동관음전과 서로전, 동선당, 향적전, 관음암 등 400여 칸의 건물과 암자
를 지었다고 하며, 그 이후 호서 제일의 명찰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840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그는 837년 당나라로 건너가 840년 석
불 1,053개를 가지고 귀국하여 향천사에 천불전과 극락전을 지었다고 한다.

▲  천불선원 표석

▲  향천사 창건 유래비

1359년(공민왕 5년)에는 극락전에 아미타3존불을 봉안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된 것을
멸운(滅雲)이 1596년에 중건하여 100여 칸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는 승병 7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승려이다.

1702년에는 범종을 새로 만들었고, 1950년 6.25때 많은 건물이 파괴된 것을 보산(寶山)이 10년
동안 주석하면서 중건했다. 이후 1971년 극락전을, 1982년에는 서선당과 당월당을 새로 지었으
며, 1985년 천불전과 나한전을 해체 복원하고, 1986년 범종각을 짓고 부설(附設) 향천유치원을
만들었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천불전과 나한전, 산신각 등 약 10동에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9층석탑을 비롯하여 천불전과 부도, 괘불도
와 오여래/사보살 팔금강도(국가 등록문화재 627호) 등이 있다. 그외에 1702년에 조성된 범종(
梵鍾,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71호)도 있으나 보호를 위헤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가있다. 또
한 천불전을 통해 천불선원(千佛禪院)을 강조하며 천불도량으로 절을 키우고 있다.

산사(山寺)이긴 하지만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은 아니며, 읍내에서 무척이나 가깝고 일주문 부근
까지 속인들의 주택이 밀려와 산사의 질감이 조금은 떨어지는 면이 있다. 허나 조용하고 그윽한
분위기는 여전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마음을 가다듬기에는 손색이 없으며, 서울 화계사(華溪寺)
처럼 서양인 승려들이 많이 머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절을 둘러보고 시간이 괜찮다면 그를 품고 있는 금오산이나 관모산(391m)을 오르는 것도 괜찮다.
절에서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그들 정상에 이르며, 정상에서는 시내처럼 넓은 예산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眺望)이 천하 명품급이다. 금오산은 읍내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로 향천사
주변 등산로에 의자와 체육시설, 약수터가 마련되어 있다.

▲  향천사 부도군

▲  향천사 범종각

※ 향천사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① 열차나 전철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예산역 하차
* 수도권 1호선 신창행 열차나 서울~신창 누리로 열차를 타고 신창역 하차
② 예산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예산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산행 직행버스가 3~4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전(서부/동부), 천안, 청주, 서산, 보령에서 예산행 직행버스 이용
* 서대전이나 공주에서 예산행 직행버스를 이용할 경우 임성에서 내리면 된다. 임성에서 향천사
  까지 도보 25분. (임성 정차를 확인바람)
③ 현지 교통
* 예산역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쌍송으로 들어가는 아무 군내버
  스나 타고 쌍송배기 하차 → 버스에서 내려 왼쪽(동쪽)으로 가면 쌍송3거리이다. 여기서 왼쪽
  (아리랑로) 길로 가면 임성정류장을 지나서 향천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쌍송배기에서
  향천사까지 도보 30분 거리) 만약 예산초교를 경유하는 버스를 탔을 경우 예산초교 하차.
* 신창역에서 예산군내버스 420번(1일 8회 운행)을 타고 쌍송배기 하차
* 예산터미널 내부나 바깥 정류장에서 쌍송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쌍송배기 하차 (중간에 예산
  초교 경유하는 차도 있음) 또는 공주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임성 하차
④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 당진~영덕고속도로 → 예산수덕사나들목을 나와서 예산 방면 → 주교5거리에서 예산로로 진입
  → 쌍송3거리에서 좌회전 → 향천사 이정표에서 우회전 → 향천사

*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57 (향천사로 117-20 ☎ 041-335-3556)

▲  향천사 천불전

▲  향천사 서래암(西來庵)


 

 

  향천사 극락전, 서선당 주변

▲  청기와가 입혀진 극락전(極樂殿)

향천사의 법당(法堂)인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1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원래는 그 우측 나한전 자리에 있었으며, 1983년 옛 극락전을 철거하면서 지금의 건물이
극락전이 되었다. 불단에는 단향목으로 만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1359년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또는 조선 초기나 중기라고 함)
아미타불은 양쪽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탱화를 비롯한
수많은 불화(佛畵)들이 내부를 곱게 수식한다. 이들 불화는 1993년에 제작된 것이다.
절의 중심 되는 건물이라 그런지 특별히 푸른 빛깔이 나는 청기와를 입혀 법당의 품격을 높였다.


▲  나한전(羅漢殿)과 9층석탑

극락전 우측에는 1983년에 옛 극락전을 부시고 만든 나한전이 자리해 있다. 나한전은 부처의 제
자인 16나한(羅漢)의 보금자리로 그 앞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9층석탑이 우중층하게
서 있다.

◀  위와 아래의 피부색 다른 향천사9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4호
향천사9층석탑은 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로
높이가 3.75m이다. 이 탑은 이곳의 2번째 주지
를 지낸 도장(島藏)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하
며, 백제가 사라진 이후인 7세기 중/후반에 조
성된 백제 탑의 후예이다.
이렇게 지긋한 나이를 지니고 있지만 탑신(塔身
)과 기단(基壇) 부분의 피부 색깔이 너무나 틀
려 상당히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기단부는 그
래도 고된 세월의 때가 자욱하여 까무잡잡하지
만 탑신은 그와는 상반되게 하얀 피부를 드러내
고 있기 때문이다.
탑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절을 파괴하면서 탑을 아작냈기 때문이다. 절에
는 원래 2기의 석탑(5층탑이라는 설이 있음)이
있었는데, 모두 파괴되어 흩어진 것을 모아서
하나의 탑으로 수습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
었다고 한다. 그러니 본래 9층석탑으로 보기도
어렵다.

새로 만든 2중의 네모난 바닥돌 위에 얹혀진 이 탑은 2중의 헌 바닥돌 위에 1층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9층탑을 얹힌 형태로 3층까지는 탑신이 잘 남아있으나 4층부터는 탑신이 없어지고, 여
기저기 깨진 지붕돌만 포개진 모습으로 놓여져 있다. 얇고 넓적한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
을 두고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사각 받침돌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살짝 놓여있다.
비록 백제시대 탑은 아니지만(일부에서는 백제 탑이라고 함) 백제탑을 계승한 탑으로 온전하게
남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준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우물

▲  우물 좌측에 자리한 척화실(拓花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무척 낯설다.


▲  서선당(西禪堂)
극락전 뜨락 우측에 넓게 자리한 서선당은 승려들의 거처인 요사(寮舍)로 1982년에
새로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크다.


▲  서선당 옆에 놓인 나무 장작들

나무 장작들 참 오랜만에 본다. 옛날에는 정말 흔했지만 연탄과 가스, 석유에 밀려 이제는 찾아
보기 힘든 기억 속의 풍물시가 되어버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방을 대펴주는 용도로 쓰
지는 않을 터이고, 아마도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쓰는 것 같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궁이에
서 지은 밥과 누룽지가 갑자기 간절해지는구나 ~~


▲  서선당 옆에 'ㄱ'모습의 요사 (북쪽에서 본 모습)
서선당 바로 옆에 자리한 건물은 공양간을 갖춘 요사로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툇마루 앞뜨락에는 네모난 석조와 함께 세수를 하거나 설겆이나 빨래를 하는
공간이 있어 옛 한옥 생활을 느끼게 한다.


▲  서선당 옆 'ㄱ'모습의 요사 (남쪽에서 본 모습)

▲  서선당에 달린 조그만 종 (공양시간입니다. 땡땡땡~~)
공양시간을 알릴 때 쓰는 소중한 종이다. 종이 기지개를 켜고 은은한 종소리를
베풀면 곳곳에 흩어진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들어 즐거운 공양(식사)시간을
갖는다. 먹는 것 만큼 즐거운 것이 또 어디 있으랴~~


▲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
흰 수염의 대머리인 산신을 비롯하여 호랑이와 동자 등 산신의 주요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산신의 사자(使者)인 호랑이는 용맹함보다는 귀여움이
묻어난 모습으로 표현되어 거의 고양이 같다.


▲  잠시나마 하얀 지붕을 이룬 나한전(오른쪽)과 극락전(왼쪽)

▲  경내에서 천불전으로 넘어가는 다리


 

 

  향천사의 상징적인 공간, 천불전(천불선원)

▲  경내 서쪽에 따로 자리를 닦은 천불선원(千佛禪院)

경내에서 조그만 계곡을 건너 서쪽 언덕을 오르면 따로 담장을 두른 천불선원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천불도량(千佛道場)을 자처하는 향천사의 중심이자 성지와 같은 공간으로 천불전 주변에
부속 건물 2동을 만들고 이를 담장으로 둘러 천불선원으로 삼았다. 예전에는 속인(俗人)들의 출
입을 통제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  활짝 열린 천불선원 문

천불선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 문이 유일한데, 문의 높이가 좀 낮다. 키가 어느 정도 되는 사
람은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높이를 낮게 한 것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게 만들어 천불에 대한 예의를 표하게 하려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천불전에
임하라는 의미이다.
문 양쪽에는 자연석을 차곡차곡 얹혀서 만든 기와 돌담이 정겨운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눈이 두텁게 입혀진 천불전 뜨락과 부속 건물들
천불전의 부속 건물들은 승려의 생활 및 수행 공간으로 좌측에 자리한 건물은
절의 여러 집기를 보관하는 창고 역할도 담당하고 한다.

▲  향천사 천불전(千佛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3호

천불선원의 중심인 천불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
물이다. 경내에서 극락전에 버금가는 건물로 현판에 쓰인 이름 그대로 1,000불을 봉안했다.
이 건물은 의각이 당나라 오자산에서 직접 만든 3,053기의 불상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
지보살, 16나한을 봉안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하며, 840년에 보조국사가 당나라에서 1,053기의
불상을 가져와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596년에 멸운이 다시 중건했으며,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1986년에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새 건물을 지어 옛날의 구수한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경내에서 9층석탑과 부도를 제외하고 고찰이라 내세울 만한 자취
가 사라진 것이다. 건물을 다시 지었음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은 것은 불단에
봉안된 불상 때문인 듯 하며, 천불의 조성시기는 전설과는 달리 조선 초기로 보인다.

건물의 이름 그대로 1,000기의 불상이 있어야 되지만 정확하게는 그보다 1.5배 많은 1,515기의
불상이 불단을 어지럽게 메우고 있다. 이는 이 땅에 널린 천불전의 불상 수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로 그 흔한 이름 천불보다는 눈에 좀 띄게 천오백불(1,500불)이라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천불과 3천불은 많지만 1,500불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이들 천불은 미혼자의 혼인 대상자 인물을 점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우리나라 7천 만 인구 마냥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으로 개성들이 넘친다. 모두 하얀 불상으로 작은 불상은 대부분 석고상(
石膏像)이고, 큰 불상은 돌로 만들어졌다.


▲  천불전 천불 (천불상이라 쓰고 천오백불이라 부르면 됨)

문을 열고 적막이 깃든 천불전으로 들어서니 가운데 큰 불상을 비롯하여 1,500의 불상이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정면으로 쏠리는 1,500의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
울 정도이다. 마치 1,500의 관중 앞에 선 음악가나 연기자가 된 기분이랄까..? 나는 수줍게 향
로에 향을 피우고 3배를 올린 다음, 사진을 찍고 나왔는데, 나의 깜짝 공연이 그들에게 썩 마음
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  똑같은 모습은 하나도 없는 가지각색의 천불들

천불을 조성하던 당시 승려와 민중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것은 아닐까? 저 많은 불상을 만
드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텐데, 얼굴 표정(즐거운 표정, 신나는 표정, 귀여운 표정, 우울한
표정,.)과 머리칼(나발과 소발), 덩치(큰 덩치, 작은 덩치, 키다리), 옷, 그리고 자리까지(연화
좌를 갖춘 불상도 여럿 있음) 모두 다르게 만들어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다. 이는 투철한 장인
정신과 불심(佛心)이 빚은 정성 어린 작품들이라 하겠다.


▲  불단이란 관중석에 앉아 나의 공연을 구경하는 천불의 위엄

▲  흐릿한 눈빛의 불상
불상이 하도 많아서 슬쩍 하나 가져가도 모를 것 같다. 기분 같아서는 집에 하나
가져오고 싶은데, 내가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해 마음 속으로만 그러고 말았다.

▲  천불선원 앞에서 바라본 향천사 경내
나무들이 시야를 좀 방해하긴 하지만 보는 데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천불선원 앞에 자라난 나이 350년의 느티나무
(예산군 보호수 8-13-1-252호)

너무 장대하게 오래 살아서 자신의 나이도 아마 모를 것이다. 추정 나이는 350년 정도라고 하며,
높이는 20m로 천불선원에 늘 그늘을 드리워준다. 장대한 세월을 먹고 자란 그의 허리 둘레는 약
3.1m이다.


 

♠ 향천사 마무리

▲  천불선원에서 부도, 서래암(西來庵)으로 가는 길

천불선원에서 서쪽으로 작은 계곡을 하나 더 건너면 금오산 등산로와 함께 'ㄱ'모양의 기와집이
눈에 진하게 들어올 것이다. 그 기와집은 서래암이란 건물로 별도의 암자가 아닌 향천사 소속의
불전이다. 그 서래암 옆에는 부도 4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들 가운데 고색이 좀 짙은 2
기를 주목하기 바란다.


▲  향천사 부도군(浮屠群)

▲  향천사 의각/멸운의 부도(가운데는 멸운의 탑비)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9호

부도 4기 가운데 왼쪽에 검은 때가 자욱한 부도는 절을 세웠다는 의각의 부도라고 전하여, 오른
쪽에 대추처럼 생긴 부도는 16세기에 활약했던 멸운의 부도이다.

까무잡잡한 피부로 상당한 고색이 느껴지는 왼쪽 부도는 두툼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약간 동그란 탑신을 얹혔다. 그리고 8각형의 지붕돌을 올리고, 머리장식으로 꼭대기를 마
무리한 제법 수려한 모습이다.
기단부 아래 받침돌은 8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구슬을 이은 듯한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무늬를 새겼으며, 위에는 잎을 아래로 한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 받침돌은 8개 모서리에 기
둥을 새기고 각 면마다 불교의 법을 지키는 이들을 조각해 부도의 건강을 기원했다. 윗쪽 받침
돌에는 잎을 위로 향한 연꽃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에 서까래를 표현했고, 윗쪽 면에는 모서리
마다 조각을 돌출되게 새겨 아름다움을 보탰다. 그리고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을 두었는데, 가
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에 근래에 새로 얹힌 새하얀 피부의 장식을 얹혀 놓아 아까 9층석탑처럼
약간의 어색한 조화를 선보인다.

절에서는 이 부도를 의각의 승탑(僧塔)이라고 주장하는데, 만약 그게 맞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탑이 된다. 허나 해동(海東)에서 부도가 등장한 것이 신라 후기이므로 이는 전혀 근
거가 없다. 부도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승려의 사리는 그냥 자연에 뿌리거나 부도와는 다른 별도
의 시설에 봉안했다고 한다. 의각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신라 승려 자장율사(慈藏律師) 같
은 경우는 사리를 석혈(石穴)에 봉안했다고 전하며, 그보다 이른 신라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일
반적인 3층석탑에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이 부도의 조각 수법을 볼 때 이르면 고려, 늦어도 조선 초기 것으로 여겨지며, 향천사를
거친 이름 모를 승려의 탑을 의각의 것으로 둔갑시킨 모양이다.


▲  검은 피부의 왼쪽 부도
위에만 하얗고 나머지는 까무잡잡하여 마치 위에만 고양이 세수로 씻은 듯 하다.
위에 얹혀진 옥의 티가 아니더라도 제법 수려한 부도임은 분명하다.

▲  온갖 무늬로 정신이 없는 부도의 기단부

▲  부도의 머리 부분


▲  멸운당대사의 비석

오른쪽에 자리한 대추 모양의 부도는 멸운의 부도이다. 그 옆에 멸운의 비석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한 듯 싶다.
이 부도는 두툼한 바닥돌 위에 8각의 기단을 두고 대추 모양의 탑신을 올렸으며, 그 위를 지붕
돌로 마무리한 형태로 일종의 석종형(石鐘形) 부도이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밑에
는 면마다 2개씩의 액자 모양을 새기고, 윗쪽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지붕돌은 밑쪽에 서까래
를 새기고, 모서리마다 돌출된 조각을 두어 왼쪽 부도에 비해 다소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부도의
조그만 화려함을 불어넣었다. 그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검은 부도와 멸운의 부도 사이에 솟아난 멸운당 비석은 뒤쪽에 '강희(康熙) 47년 무자월일립(戊
子月日立)'이라 쓰여있어 1708년에 세워졌음을 귀뜀해 준다. 비석의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해 멸운의 부도보다 더 고색의 기운을 풍긴다.

▲  멸운 부도 옆에 새롭게 자라난 부도

▲  향림당대용선사(香林堂大用禪師, 1921~
2006)의 부도


▲  겨울에 잠긴 향천사 동쪽 금오산 산길
소쩍새가 우는 그날 거추장스러운 설피(雪皮)를 걷어차고 기지개를 켜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1시간 가량 향천사를 정신 없이 둘러보니 시간이 어느덧 점심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내 곳
곳에 흩어진 승려들이 종소리에 공양간으로 우루루 몰려가면서 겨울 산사의 적막함은 더욱 진해
졌다. 혹여 공양(供養)에 낄 수 있을까 싶어서 새가슴마냥 공양간 주변을 조금 기웃거려봤지만
먹고 가라는 손길은 없었다. 그래서 쿨하게 체념하고 향천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무거
운 발걸음을 하였다.
일주문에 이르니 밖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던 번뇌(煩惱)가 반가이 나를 맞이해 준다. 이렇게 하
여 향천사 새해 맞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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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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