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2.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3. 2018.06.01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4. 2017.05.30 고려대 뒤쪽에 묻힌 작고 고즈넉한 절집, 귀티가 넘치는 오래된 보살상과 마애불을 간직한 안암동 보타사 (개운산)
  5. 2017.05.24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6. 2017.04.07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7. 2016.05.28 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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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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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사찰 ~ 안암동 개운사 '

▲  개운사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초파일 절 투어 코스를 근사하게 닦은 다음, 오전 11시에 길을
나섰다.
이번 초파일에는 서울 동북부 지역(동대문구, 성북구, 노원구)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 등 여러 곳을 둘러보았는데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후식도 배불리
챙겨먹으며 정신없이 신나게 절투어를 즐기니 어느덧 안암동(安岩洞)에 있는 개운사에 이
르렀다. (먹는 재미 때문에 초파일 절투어를 벌이는 것은 절대로 아님;;;)

개운사는 정말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있음에도 인연이 참 지지리
도 없던 절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역사가 짧거나 없는 듯 자리한 것도 아니다. 엄연히 서
울에 이름난 고찰이자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로 일주문부터 사람들로 봐글봐글하다.


 

♠  조선 초기에 창건된 도심 속의 사찰,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렸던 ~ 개운산 개운사(開運山 開運寺)

개운산<안암산(安岩山)> 남쪽 끝에는 서울의 주요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고즈넉하게
자리해 있다. 안암동로터리에서 개운사로 이어지는 길(개운사길)은 고려대를 낀 서울의 주요
대학가로 학생과 청춘들로 늘 마를 날이 없는 번잡한 곳이다. 예전에는 개운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城北川)으로 흐르던 개천을 옆에 끼고 있었으나 그 졸졸졸~♪ 소리도 듣지 못하게끔
말끔히 봉인해버렸고, 고려대가 개운산과 개운사 사이를 끊고 건물을 지으면서 겨우 가늘게
개운산을 붙잡고 있다.

고려대와 주택가의 확장으로 절의 북쪽과 서쪽은 고려대에 감싸여있고, 남쪽과 동쪽은 주택들
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허나 그 동쪽도 얼마 안간 보타사부터 고려대에 막히니 자연히 3면
이 고려대에 포위된 꼴이다. 게다가 절 주변은 하숙집과 고시원, 식당, 술집, 피시방, 갖은
편의시설이 즐비해 고요함을 추구하는 절과는 너무 맞지가 않다. 완전 절과 밖이 180도 딴 세
상인 것이다.
허나 경내 주변에 나무가 그런데로 무성해 바깥과는 그런데로 다른 색채를 보인다. 그리고 경
내로 들어서면 여기가 대학가의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나름 고즈넉한 분
위기를 자아내며, 속세의 소음은 절을 둘러싼 나무들과 풍경 물고기가 모두 우걱우걱 씹어먹
는다.

그럼 개운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개운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학과 대광아파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영도사(
永導寺)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창건 이후 400년 가까이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
기가 썩 개운치가 않다.
과연 무학이 세웠는지는 개운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인근에 쟁쟁한 절(보문사, 미타사, 청
룡사, 연화사 등)이 적지 않아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세가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779년 절은 강제로 개운산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정조(正祖)의 후
궁인 원빈(元嬪) 홍씨<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의 묘역, 명인원(明仁園>을 바로 절 옆에 잡았
기 때문이다. 하여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은 절을 옮겼다. (또는 1730년에 이전했다고 함)

절 이름이 언제 개운사로 바뀌었는지는 역시나 개운치가 않다. 인파당이 절을 옮기면서 이름
을 갈았다는 설도 있고, 고종(高宗)이 어린 시절 영도사의 도문 처소에서 잠시 양육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863년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에서 개운사로 고쳤
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송담 수훈이 지장탱, 시왕탱, 사자탱 등을 봉안했고, 1873년에 명부전(冥府殿)을 중건
했다. 1880년에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883년 불상 2개를 개금하고 감로탱,
팔상도, 신중탱, 산신탱 등을 봉안했다. 그리고 1885년에 아산에서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
를 가져왔는데 1935년에 왜정(倭政)이 국방 헌납을 이유로 강탈해 갔다.

1912년 왜정이 사찰령(寺刹令)을 시행하자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고 김
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했다. 1913년 조선 황실 소유의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 소
유로 등록했으며,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講院)을 개설하면서 불교 개혁 및 교육의 근
원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1929년에 권범운(權梵雲) 등이 독성전을 중건했고,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지었으며,
한때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1955년 대처승(帶妻僧)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가 열리기도 했
다. 허나 이후 조계종으로 갈아탔고, 조계종 종정(宗正)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총무원(總務院)
간판까지 달았다. 또한 1981년 중앙승가대학을 경내로 이전해 오랫동안 불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은 경기도 김포시에 가 있음)

넓은 경내에는 1993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명부전, 미타전, 종각, 선방, 중
앙승가대학 건물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다. 이중 선방은 수도권에서 제법 큰 규모
를 자랑한다.
허나 절 건물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이라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
古色)의 농도는 매우 얇은 실정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속은 오래 숙성된 문화유산이 풍부하
여 절의 오랜 내력을 그런데로 가늠케 해준다. 비록 다른 곳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보물로 지
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감로도와 신중도, 팔상도, 지장시
왕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일괄 등 보물 1점, 지방문화재 5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1879
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동쪽에 대원암과 보타사가 있다. 대원암(大圓庵)은 구한말과 왜정 때 활약했던
고승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계 석학을 배출했던 현장이며, 보타사(普
陀寺)는 옛 칠성암(七星庵)으로 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된 것을 절로 바꾼 것이다. 이곳에는 국
가 보물로 지정된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과 고운 자태의 금동보살좌상이 있으니 꼭 둘러보
기 권한다.


▲  개운사 일주문(一柱門) (2014년)

개운사에 이르면 제일 먼저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문짝도 없는 열린 모습으로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초파일 향연의 장으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문의 머리인 맞배
지붕이 너무 육중해 문 기둥이 애처롭게 보일 정도이다.
지붕과 평방(平枋) 사이에는 금색으로 쓰여진 개운사 현판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문 좌우로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빙 둘러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넓게 닦여진 주차장이 펼쳐지는데 그 너머 북쪽 언덕에 선방과 종각, 나무
로 경내를 꽁꽁 가린 개운사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일주문 안쪽 동쪽에는 비석들이 옹기종
기 모여있으며, 주차장 서쪽에는 중앙승가대학으로 쓰였던 정진관이 있다. (공양간은 정진관
옆 건물에 있음)


▲ 개운사의 20세기 역사를 머금고 있는 비석들
지붕돌을 지닌 비석부터 대머리 비석까지 10여 기의 비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왜정과 20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공덕비와 기념비로 가장 이른 것은
1931년에 지어진 승려 경허의 공덕비이다.

▲  개운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주차장을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날씬한 자태의 관음보살입상이 나온다. 이 석불은 20세
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주변에 검은 때가 조금 피어있어 약간 고색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감로수가 담긴 정병(政柄)을 꼭 쥐어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대학가로 떠들썩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주변에
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그의 임시 광배(光背) 역할을 한다.

             ◀  개운사 3층석탑
관음보살입상 바로 옆에는 잘생긴 3층석탑 1기
가 자리해 있다.
개운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20세기 후반에 조성
되었는데 반듯한 바닥돌과 2중의 기단(基壇),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을 두루 갖추어 안정
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탑은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
슨 사연인지 경내 외곽에 두었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종각 남쪽)
오색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  범종(梵鍾)을 품은 종각과 연등으로 뒤덮힌 선방 옆길
일주문과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선방 옆구리를 지나야 된다.

▲  2층 규모의 선방(禪房)

선방 옆구리를 오르면 대웅전과 선방, 명부전, 미타전에 감싸인 대웅전 뜨락에 이른다. 뜨락
에는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추가되어 6색 연등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는데, 뜨
락을 기준으로 남쪽에 대방이라 불리는 선방이 장대한 덩치로 남쪽을 굽어본다.
선방은 1921년에 중창된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지어졌다. 밑층에는 종
무소 등이 들어있으며, 윗층은 선방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방으로 꼽히는데, 한참 개운사
가 교육과 불교 개혁에 나섰을 때, 선방은 그 공간으로 분주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선방 앞에는 중생들에게 떡과 수박, 커피, 녹차 등을 제공하는 공간을 두어 초파일의 훈훈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도 공양밥을 먹으려고 했으나 절 도착 직전(16시)에 그만 마감이
되버려 꿩 대신 닭으로 간단히 떡과 수박을 섭취하였다.


▲  연등이 하늘을 훔친 대웅전 뜨락
연등의 두터운 물결 앞에 그 장대한 대웅전도 눈치를 살살 보며 간신히 그 일부만
드러내 보이니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에 자리한 하늘 세계의 궁궐 같다.

▲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과 깨알 같은 복전함들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
된 관정대(灌頂臺)에 서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다른 절의 아기부처상은 그래도 키
가 좀 있으나 여기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것보다 훨씬 작다.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줌마 신도의 도움과 권유를 받으며 나무 바가지에 물을 가
득 담아 아기부처의 머리에 물을 껴얹은 관불(관정)의식을 행한다. 날이 날인지라 나도 그 의
식에 동참해 그를 냉수마찰을 시켜주니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환해진 듯 보였다. 하지
만 저녁이 오고 신나던 초파일이 저물면 아기부처는 강제로 어두컴컴한 창고로 돌아가 내년을
고대해야 된다. 이렇게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喜悅)은 대단할 수 밖에...


 

♠  개운사의 보물창고, 미타전(彌陀殿)과 대웅전(大雄殿)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타전

대웅전 뜨락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미타전이 자리해 있다. 미타전
의 주인장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절의 제일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 홀로 봉안되어 있다. 그는 원래 명부전에 얹혀 살았으나 1995년 몸 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
물이 쏟아져 나오자 지금의 미타전을 손질해 그의 전용 공간으로 삼았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649호

서방정토가 있다는 서쪽을 바라보고 앉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으로 도
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 118cm, 무릎 너비는 92cm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근래 조성된 것처럼 젊어 보이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고려 후기에 조성
된 나이 지긋한 불상으로 개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특히 1995년에 그의 몸 속에서
발원문을 비롯한 고려시대 문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오랫동안 숨겨졌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가치도 몇 곱절이나 높아졌다.

우선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검은색으로 꼽슬인 나발이며, 머리 정상에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다. 이마에는 하얀 백호가 찍혀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
러져 있으며, 눈은 지그시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작고, 입술은 붉으며, 검은 수염이 얕
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어 보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중생
의 고충에 귀만 기울인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인 하품
중생인(下品中生印)의 변형을 짓고 있으니 이는 화성 봉림사(鳳林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물 980호
)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 수인과 비슷하다.

개운사에서 마련한 목조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체격이 당당해 보이
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발바닥을 드러낸 이른바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불상의 몸을 가린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신라시대 법의보다 두터워 보이며, 옷 주름
은 그럴싸하게 접혀 있다.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가리고 가슴 부분은 드러냈는데, 가슴 밑에 표
현된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띠 매듭이 없다. 이런 형태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19호), 서울 수국사(守國寺) 목
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580호, ☞ 관련글 보러가기)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이
거의 일치한다.
이 불상은 이렇게 단엄(端嚴)한 상호와 세련된 조각 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
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線描), 보존 상태 양호로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가 순도 100% 고려 후기 불상임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의 몸 속에서 나온 유물들 덕
분이다.


▲  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중간대사 원문 (문화재청 사진)

불상 뱃속에서는 3장의 귀중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이중 '중간대사 원문(中幹大師 願文
)'은 1274년에 작성된 아미타여래좌상 개금(改金) 발원문으로 문서의 크기는 '54x56cm'이다.
이 문서는 1274년에 아산 축봉사(竺鳳寺)에 있던 본 불상을 개금하면서 남긴 것인데, 이를 통
해 불상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조성 시기는 늦어도 1273~1274년, 이르면 13세
기 초/중반임을 귀뜀해 준다. (1274년 이전에 제작됨)
특히 이 땅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重修願文)으로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중수원문(1280년)보다 6년이나 빠르며 13세기 불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더
욱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최춘 원문(崔椿 願文)'은 금불복장조성 발원문으로 '56x55.5cm' 크기이며, '천정 혜
흥 원문(天正 惠興 願文)'은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한 10종의 대원(大願)을 담은 발원문으로
'37x220cm' 크기인데 이들 2장은 1322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중간대사 원문을 비롯한 발원문
3장은 신변 보호를 위해 조계사 옆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과 발원문 3장은 한 덩어리로 보물 1649호로 지정되었다.

발원문 외에도 전적(典籍)류 28점, 문서 13점도 발견되었다. 불상 뱃속에 나온 유물을 복장유
물(腹臟遺物)이라 부르는데, 1995년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던 명부전에 정신 나간 도둑이 들어
와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를 훔쳐갔으며 아미타여래좌상 뱃속까지 손을 대어 사리
장치가 든 후령통(候鈴筒)까지 가져갔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상의 뱃속이 강제로 개방
된 것이다. 이때 개방된 뱃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경판(經板) 15점, 옛 사경(寫經) 7
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佛書)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 그리고 발원문 3점
등 총 41건 58점이 빛을 보았다.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전적 28점 중 22점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간행된 오래된 경전이고, 나머지 4종 6책은 조선 때
간행된 목판본이다. 오래된 22점 가운데 목판본 도장(道藏)인 '영보경(靈寶經)'과 필사본 '보
살보행경(菩薩本行經)'을 제외하고 모두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단일 불상의 복
장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다.
이들 유물을 통해 1274년 개금 이후 4번 이상 중수를 벌였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후기부터 고
려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불경과 문서들이 들어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 후기와 고려 초에 간행된 불경들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상태로 그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발원문과 별도로 전적류 21점은 '개운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 복장 전적
'이란 이름으로 보물 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현재 발원문을 따라 불
교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16건 33종은 별도로 '개운사 목 아미타불좌상 복장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29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원래 복장유물 전체가 이 등급에 있었으나 2010년
4월에 발원문과 전적 21점을 따로 떼어내 보물로 지정하면서 3개의 다른 이름과 등급을 지니
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불상과 불상 뱃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이 유별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문화재 복장 유물은 개운사와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아쉽게도 복장유물 어느 것
도 만나지 못했다. 보존 관리상 개방을 거의 안하기 때문이다.


▲  초파일이 준 고마운 선물, 개운사 괘불(掛佛)

대웅전 뜨락에는 아기부처상 외에도 매우 보기가 힘든 괘불까지 왕림을 하여 나를 무척 들뜨
게 하였다. 그렇다면 괘불이 도대체 무엇이건데 나를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
괘불은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불화(佛畵)로 초파일과 절의 주요 행사일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왠만한 운으로도 만나기가 어려우며 그나마 만날 확률이 높은
날이 초파일이다. 내가 평소에도 많은 오래된 절을 돌아다님에도 초파일에 무조건 절 답사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레어템<raretem, rare(희귀한)+item(물건)의 합성어>인 괘불을
보고자 함이다.
허나 초파일이라고 100% 외출을 하진 않는다. 이번 초파일에 4곳의 절집을 갔지만 겨우 개운
사에서만 괘불을 봤을 뿐이다. 확률로 따지면 1년에 정말 1번 정도 보는 꼴이다. 그러니 괘불
을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기 바란다. 레어템 중의 초레어템을 만났으니 말이다. (당첨은 장담
못함)

개운사 괘불은 1879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나한(羅漢) 등이 그려져 있다. 저
녁이 다가옴에 따라 그 큰 그림이 절반 정도 둘둘 말려져 있는데 괘불 밑에는 그의 거처인 길
쭉한 괘불함이 입을 벌리며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괘불은 그리 들어가고 싶은
눈치는 아닌 것 같다. 함에 들어가면 긴 시간을 갇혀 지내야되기 때문이다. 괘불 앞에는 중생
이 진상한 과일과 떡이 놓여져 있고 복전함이 무려 2개씩이나 설치되어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한다.


▲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본 괘불의 뒷모습
붉은 색의 문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  개운사 대웅전

개운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다. 2006년에 단청 불사를 했으며, 선방 다음으로 큰 건물(정진관 등의 현대식 건물은 제외)
로 뜨락보다 3~4m 정도 높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다진 탓에 무척 우람해 보인다. 건
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팔상도 등의 여러 그림이 깃들여져 있는데, 이중 팔상도
와 신중도, 현왕도, 지장시왕도는 지방문화재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림이 봉안된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대웅전 가운데 칸에서 굽어본 뜨락과 관불의식의 현장
개운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채운 연등이 저 밑에 보이니 마치 오색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조그만 석가불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 앞에는 불단이 무너질 정도로 온갖 음식과 과일들이 진상되어 있다.

▲  개운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2호

감로도는 물과 육지에서 방황하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고자 부처의 법을 강론하고 음
식을 베푸는 수륙재(水陸齋)를 위한 그림이다.
신중도 이상만큼이나 등장 인물이 많고 무대가 넓어서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그림 상단에는 7
명의 여래(如來)와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배치했고, 하단에
는 의식 장면과 아귀상, 지옥상, 윤회하는 중생도 등 6도중생이 담겨져 있다. 산수와 구름으
로 적절히 경계를 그었고, 다채로운 모습의 인물들과 적/녹/청/황/백색이 어우러진 색감과 안
정적인 필치(筆致),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1883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래가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죽은 이들
의 위패와 영정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개운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3호

대웅전 동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걸려있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
는 신들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림 중
앙에는 제석천(帝釋天)과 천룡(天龍) 등이 자리해 있고,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신들이 배치되
어 있는데 1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액자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  개운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출생부터 열반까지 8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것으로 1883년에 조성되
었다. 그림의 보호를 위해 액자 안에 담겨 있으며, 각 부분에 대한 설명은 쿨하게 생략한다.


▲  개운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저승
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멤버들이 담겨진 것으로 1870년에 제작되었다. 지장보살
밑에는 동자 2명이 그의 육환장(六環杖)과 두건을 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  개운사 마무리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뜨락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지장보
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10왕),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봉안되
어 있는데, 1995년에 도둑이 침투해 잠시 쑥대밭이 되었던 우울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때 지
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그리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후령통 등이 사라졌다.
이후 지장보살상과 없어진 시왕상 등을 다시 만들어 채웠고 뱃속이 열린 아미타여래좌상을 미
타전으로 옮겼으며, 뱃속 유물은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가져가 정밀 연구를 벌여 그 정체를 밝
혔다.


▲ 지장보살상과 지장후불탱(지장시왕도)
1995년 이후에 새로 만든 지장보살상 뒤쪽에는 고색이 물오른 지장후불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명부전 식구를 그림에 옮겨 놓은 것이다.

▲  모습도 제각각인 시왕상과 시왕탱
시왕상 뒷쪽에 걸린 시왕탱 4점은 1870년에 제작된 것이다.

▲  개운사만의 특별한 초파일 이벤트, 부처되기 포토존
저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해보자. 그러면 누구든 부처가 된다. (물론 무늬만~~~) 광배
부분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었으면 실감이 좀 컸을 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명부전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칸마다 다른 이름의 현
판을 내걸고 있다. 가운데 칸은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공간인 금륜전(金輪殿)으로 특별히
전(殿)으로 대우했으며, 서쪽은 산신(山神)의 공간인 산령각(山靈閣), 동쪽은 독성(獨聖, 나
반존자)의 공간으로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天台閣)이라 했
다. 허나 각 칸마다 이름만 달리 했을 뿐, 하나의 삼성각으로 봐도 무관하다.

이 건물은 1929년에 중건했는데, 처음에는 독성각(獨聖閣)이라 불렸으며, 이후 산신과 칠성이
추가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독성상과 독성탱
독성탱은 1930년에 제작된 것으로 붉은 계통의 옷을 입은 독성 할배와 문관(文官),
승려, 천태산,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앞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독성 할배상이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돋보이는 산신상과 산신탱

그림에 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된 듯 싶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옷
을 입은 산신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고, 그 좌우로 귀엽기 그지 없는 모습의 호랑이
와 동자가 있으며, 그들 뒤로 산과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산신탱의 기본 요소는 모두 갖
추고 있다. 그리고 산신탱 앞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 할배상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  그림만 홀로 있는 칠성탱

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 신앙으로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어엿하게 불교의 일원이 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을 정
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아무래도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는 존재다보니)

삼성각을 끝으로 약 1시간 반 가량 이루어진 개운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에 깃든 문
화유산은 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제외하고 모두 눈과 사진에 담았고, 거기에 생각치도 못
했던 괘불까지 친견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볼거리를 100% 초과 달성했다.
이렇게 개운사를 배부르게 둘러보고 동쪽에 자리한 보타사로 이동했다. 주차장 동쪽으로 나있
는 문을 이용해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온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보타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안암동 개운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정도 가면 일주문이 나오며 그 문을 들어서면 개운사 경
  내이다.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5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산4-11 (개운사길 73 ☎ 02-926-4069
* 개운사 홈페이지는 아래 연등길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개운사를 뒤로하며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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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5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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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뒤쪽에 묻힌 작고 고즈넉한 절집, 귀티가 넘치는 오래된 보살상과 마애불을 간직한 안암동 보타사 (개운산)


'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 서울 개운산 보타사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
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투어 코스를 아름답게 짠 다음, 초파일 오전 길
을 나섰다.

우선 청량리 뒷쪽 회기동(回基洞)에 자리한 연화사(蓮華寺)와 월계동(月溪洞)에 있는 기
원사(祈願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를 말끔히 챙겨보
고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떡도 든든히 챙겨 먹었다. (너무 배불리 먹어서 며칠 동
안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음) 그런 다음 안암동 개운사(開運寺)로 이동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그 부근에 자리한 보타사로 넘어갔다.

보타사는 개운사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구석진 숲속에 묻혀 있는데 나와 같은 서
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10여 년 전에 딱 1번 가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 깃든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이 국
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도 인연을 다시 이어붙이는데 크게 한몫했음>

개운사 주차장 동문을 나와 주택가를 지나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오고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원암이 가장 먼저 마중을 한다.


▲  활짝 열린 보타사 정문


 

♠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석전 박한영과 탄허가 주석했던 유서 깊은 현장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초
행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함정이며, 그의 정체
는 개운사의 부속암자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큰 기와집 1동이 거의 전부인 아주 단촐한 절로 암자(庵子)란
이름에 가장 충실한 규모를 하고 있는데, 그 옆에는 중앙승가대학 동문회 건물이 우뚝 자리하
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대원암은 1845년 지봉선사(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
)은 우기(祐祈)이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고 한다. 북한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
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개운사의 그늘에 가려진 암자이지만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 받는 석전 박한
<石顚 朴漢永, 법명은 정호, 영호>과 탄허(呑虛)가 주석하여 불교 교육과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다.
박한영(1870~1948)은 근세 한국 불교 3대 강백(講伯)의 하나로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 한시(
漢詩), 서법(書法) 등 이른바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했던 당대 제일의 석학이다. 그 시절 제일
가는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조차도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
는데, 석전 선생한테는 물어볼 것이 있다'
며 그에게 만큼은 한 수 접어주었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 것이다.

석전은 전북 완주(完州) 출신으로 19세에 전주 인근 위봉사(威鳳寺)에서 출가를 했다. 스승인
금산에게 '정호(鼎鎬)'란 법명을 받았으며, 26세에 순창 구암사에 들어가 설유의 법통을 받고
법명을 영호(暎湖)라 했다.
27세부터 법주사(法住寺)와 해인사(海印寺),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강의를 했고, 선운사(禪
雲寺)의 큰 승려인 백파(白波)의 선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그의 호를 따 '석전'이라 했다. 석
전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백파에게 우정의 뜻으로 선물한 호이다.

1910년 이후,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이 땅의 불교를 지키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조선 불교를 왜열도 조동종(曹洞宗)에 통합하려는 만행을 저지르려고 하자
이를 막았다. 1913년에는 불교잡지인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해 왜정(倭政)의 조선불교
왜식화(倭式化)를 강하게 비판하고 왜의 대한제국(大韓帝國) 강제 합방을 규탄했으며, 불교의
혁신을 강조했다. 그리고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큰 활약을
보였다.

1926년 대원암에 들어와 이곳의 조실(祖室)로 지내면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 교육에 나
섰다. 그러자 승려 뿐 아니라 많은 문학가와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았
는데, 그중에는 신석정(辛夕汀), 조지훈(趙芝薰), 뒷끝이 영 좋지 못했던 서정주(徐廷柱)와 이
광수(李光洙) 등이 있었다.
그중 왜정과 독재정권에 심하게 아부를 떨어 주옥 같은 작품을 무색케 하였던 서정주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서울중앙고보(중앙중고교)와 고창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여 방황하고 있었는데
그를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로 데려와 제자로 기른 이가 바로 석전이었다. 그 인연
으로 둘은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서정주는 그를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 찬양하며 평
생 은혜를 갚지 못함을 아쉬워 했다고 한다. 하여 석전이 남긴 한시 130수를 한글로 번역해 그
원고를 가지고 있다가 2006년에 비로소 공개되었다. <석전은 서정주의 친일짓거리와 친독재행
위를 보며 지하에서 피눈물을 바가지로 흘렸을 것이다>

또한 그의 문하에는 20세기 중/후반 이 땅의 불교계를 이끈 운허와 지관 등 이름 높은 승려들
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우리나라 불교 학승(學僧)의 대부분이 그의 배움을 이어갈 만큼 불교계
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1945년 이후, 조선불교 중앙총무원회 제1대 교정을 지냈고 1946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을 지냈다. 이후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48년 열반에 들었다.
그는 많은 한시와 수필을 남겼는데, 최남선이 그의 작품을 '석전시초(石顚詩抄)','석림수필(石
林隨筆)','석림초(石林抄)' 등 9권의 책으로 정리했으며 수필도 500여 편이 남아있다.

▲  대원암 어칸(가운데 칸)과 현판

▲  조그만 석불과 탄허 역경(譯經) 기념비
(가운데), 그리고 석전 박한영 기념비


대원암을 거쳐간 2명의 큰 승려 중 마지막인 탄허(1913~1983)는 전북 만경(김제) 출신으로 원
래 이름은 김금택(金金宅)이다. 법명은 택성()이며,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인 이극종에게
한학을 배워 도학에도 능했다.
15살에 도(道)에 대한 답을 얻고자 고승 한암(漢岩, 1876~1951)과 서신문답을 주고받았고, 그
인연으로 하여 1934년 한암이 머물던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를 찾아가 출가하여 그의 열성 제
자가 되었다.

이후 월정사 조실과 연수원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을 지
냈고 1967년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이 되어 대원암에 머물며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큰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다.
그는 동양철학에도 해박하여 왜열도와 대만에서 화엄학 등을 강의했으며, 대만대학교에서 비교
종교에 대한 특강으로 세계적인 석학으로 찬양을 받았다. 말년에는 월정사(月精寺)에서 지내다
가 1983년 7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으며, 나라에서는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와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삼삼하게 닦여진 숲이 펼쳐진다. 이곳은 안암동(安岩洞) 주택가 바로 옆으로
녹음이 짙은 나무들로 완전 그늘을 이루고 있어 마치 첩첩한 산속의 암자나 신선의 산중(山中)
거처를 찾은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주변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졌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 숲속에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
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연등이나 보물 지정 경
축 현수막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과연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 송덕비와 사적비 등 비석 4기가 서 있고 그 옆에 아기자기
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작은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계단 끝에 자리한 일주문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에는 고운 연등이 길게 드리워져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
조시키고 있다. 그 계단을 올라서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을 맞이하는
데, 일주문이라고 하지만 그냥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숲속 막다른 곳에 자리한 보타사


 

♠  개운산(開運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겉은 작아도
보물급 문화유산을 2점이나 품은 실속파 절집 ~ 안암동 보타사(普陀寺)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질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러다보니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
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해 그야말로 매우 조용하다는 뜻의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안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남쪽을 제외하면 모두가 막혀버린 궁
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로가 흘러가 차량의 소음이 조금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에는 고려대 안암학사가 있다.

이 절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하여 개운사나 대원
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고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으며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부근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
가 발견되었고, 단순히 오래된 존재로만 구전되어 오던 상태였으나 조사 결과 고려 후기에 조
성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듬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고, 2014년에는 국가 보물로 흔쾌히
승진까지 했다. 또한 요사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遊戱坐) 스타일
로 그도 서울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
를 2개나 거느리게 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
상 등의 빵빵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절이 매우 소소한 모습이라 눈에 별 부담 없이 살
필 수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도리로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분을 들게 하여 이곳이 서울 한
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현재 새 건물을 짓느라 경내가 좀 어수선함)


▲  대웅전 앞에 차려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새로 지은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요사가 자리해 있다.

대웅전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외출 나온 아기부처가 화사하게 꾸며진 꽃밭 가운
데에 서 있다. 바로 중생들에게 관불의식을 받고자 함이다. 하지만 절을 찾은 중생이 별로 없
다보니 관불 수요도 저조하여 거의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좀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갇혀 지내야 되는데 저녁이 다가옴에 따라 사람들 발길도 줄어드니 아기부처와
돈을 좋아하는 불전함의 마음은 그저 타들어갈 뿐이다. 그들에게 초파일 해는 너무 짧다.
 
아기부처상 앞에는 파라솔을 지닌 동그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누구든 먹을 수 있도
록 떡(절편)과 수박이 놓여져 절의 훈훈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구니들이 바로 채워놓아 먹거리가 마르지를 않는다. 나도 떡과 수박을 수없이 집어
먹으며 이른 저녁 배를 채웠다.


▲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대웅전 석가불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부가 아
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순 100% 금동색으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
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
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진상한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다. 이
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못했다.


▲  온갖 호법신(護法神)들이 그려진 신중도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위태천(韋太天) 등 온갖 호법신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그야말로 정신을 다 빼놓는다.

▲  후불탱의 황금 자리를 버리고 옆으로 비켜 선 영산회상도

◀  경내 좌측에 자리한 선방과 쉼터
선방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전통 찻집이나
여염집 한옥 같은 분위기이다. 그 앞에는
탁자와 의자를 두어 녹차 등을
제공하고 있었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磨崖佛)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그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짙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닦여져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개운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강제로 발견되었다.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하는데 그는 이미 바
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을 것이다. 서울 굴지의 오래된 절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그 그늘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을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
은 참으로 대단하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로 지정
되었으며,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감정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
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다소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들
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
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 뿐
이라는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술은 붉은
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는 스
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으며, 엄지와 3
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으며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불상을 지켜
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록
이 부실하여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부족한 상상력을
꺼내본다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처럼 앞으로 조금 튀어나온 형태가 아닐까 싶다.
마애불은 바로 그것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남았고, 건물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녹아버려 이렇게 상처 만이 남았다.

불상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패는
마애불 제작 당시<또는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
상불보살)'이라 쓰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
자들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이 칠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의 친척뻘인 옥천암 마
애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한다.

하나같이 거대하고 개성이 강한 수많은 석불과 마애불이 등장했던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마애불
로 그가 아무리 장대하다 한들, 초파일을 맞이하여 허공을 가득 수놓은 연등의 물결 앞에선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연등이 그 앞에 진하게 아른거려 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마애불의 밑도리와 팔에는 중생들이 무심히 얹혀놓은 동전들이 수북한데 가히 1만원은 넘을 것
이다. 저 돈이야 다 뻔한 데로 가겠지만 부디 속세의 어두운 구석을 위해 쓰기를 바란다. 그게
마애불의 지극한 뜻이자 그의 존재의 이유이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옆에 파인 홈은 지금은 전설이 되버린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이다.

▲  마애보살좌상의 아랫도리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  보타사 요사(선방)

대웅전 옆에는 여염집 모습의 요사가 자리해 있다. 선방과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건물로 예전에는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되었는데, 저 안에 보타사의 나머지 꿀단지가
들어있으니 꼭 들어가보자. 다행히 절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주는데 다소 호의적인 편이라 사진
촬영에도 흔쾌히 협조를 해준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 종무소 공간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그만
금동불이 봉안된 불단이 나올 것이다. 그 불상은 포즈도 참 특이한데, 그가 바로 마애보살좌상
과 더불어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이다. <현재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 건
물을 짓고 있음, 금동보살좌상의 거처도 임시로 변경된 상태, 친견 가능 여부는 절에 문의 요
망>


▲  유리막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과 붉은 색채의 후불탱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물 1818호

요사 불단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
리는 의자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불상(보살상)의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시대부터 생겨났으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기
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
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 사찰 보타사에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였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아다
니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이렇게 보타사의 마르지 않는
꿀샘이 되어 우리 앞에 자리해 있는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지
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
관을 유린시킬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
고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은 보통 당시 귀족이나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조성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쁜 모
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
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
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이라 오래된
것은 절대 아니다.


▲  유리막의 눈치를 피하고자 옆에서 담은
금동보살좌상의 위엄~~!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서 그나마
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비
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
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되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
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절 사람들이 별 거부감 없이 속세에 쿨하게 공개를 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니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보살상 뒤에는 붉은 색채로 이루어진 후불탱이 그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고, 불단 바닥도 순 빨
간색이라 주변이 너무 화사하다.


▲  금동보살좌상 보물지정서의 위엄
난생 처음으로 본 문화재 지정서, 문화재청이 금동보살좌상에게 달아준 일종의
훈장이다. 허나 그의 희소 가치를 본다면 저 정도 종이 문서와 보물 등급도
너무 부족해 보인다.

▲  연등의 배웅을 받으며 보타사를 떠나다 ~~

보타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인근 개운사에서 1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고적한 이곳까지 울려 퍼진다. 그만큼 서로는 가까운 거리이다. 이제 햇님이 퇴근하고 어둠의
커텐이 내려오면 우두커니 하늘을 가리던 연등도 제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내고 연등의 이름
값을 할 것이다.

정말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초파일 하루, 많은 절을 답사하면서 공양
밥과 다양한 먹거리, 문화유산, 괘불(掛佛), 초파일 분위기를 마음껏 누렸다. 이날만큼은 왜이
리 해가 짧은지 퇴근 본능이 발동한 햇님을 계속 중천에 붙잡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목적한 바를 거의 이루며 하루를 정말 야무지고 알차게 보내 마음은 뿌듯하다. 이리하
여 보타사를 끝으로 초파일 절투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암동 보타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동쪽(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가면 개운사 일주문인데 그 앞에 보타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의 안내를 따라 가면 된다. 안암역에서 도보 10분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10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중랑차고지 방향은 안암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8
(개운사길 60-46 ☎ 02-923-4067)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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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5월 1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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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 석가탄신일에 즐긴 사찰 나들이 ~ 서울 연화사, 기원사 '

▲  연화사 대웅보전

▲  연화사 천수관음도

▲  기원사 대웅전

 


 

평소에도 답사와 출사, 산책 등으로 많은 절집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석가탄신일(사월 초파
일, 이하 초파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찰 투어를 벌인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절
투어에 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는 아니다. (나는 무교임)
그럼에도 초파일을 챙기는 것은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
양밥과 과일, 떡 등 갖은 먹거리까지 풍성하여 그 흥겨움을 더해주며, 특히 평소에는 개방
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으로 대해 답사쟁이의 카메라를 무력화시키는 절<주로 문화
유산을 간직한 인지도가 별로인 현대 사찰과 오래된 절들~>도 이날만큼은 대부분 경계심을
푼다. 하여 이때를 이용해 그런 절을 찾아가 문화유산을 아낌없이 친견하고 사진에 담는다.

초파일이 코앞에 아른거리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아직 발자국을 남기
지 못한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대상으로 정처(定處)를 물색하였다. 초
파일에는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마음 편히 집에서 가까운 서울 시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몇 배 이상으로 서울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미답지(未踏地
) 사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몇 남지 않은 미답지 사찰을 열심히 쥐어짜니 적당한 절 두 곳이 걸려들었다. 바로
경희대 옆에 자리한 연화사와 월계동의 기원사이다.
연화사는 연산군 시절에 세워진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오래된 볼거리가 없는 절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탱화 여러 점이 2013년에 무더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되면서 관심도 없던 그곳에 슬슬 구미가 오른 것이다.
또한 월계동 기원사는 1980년에 창건된 사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가 2점이나 있다.
하여 이들을 먼저 살펴보고 예전에 갔던 오래된 절 여러 곳을 추가로 둘러보기로 했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회기동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경희대학교 병원 바로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자리해 있다. 바로 옆에 큰 덩치를 자랑
하는 경희대 병원 건물이 있다보니 절 건물은 거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인데, 마치 큰 바위에
붙은 조그만 들꽃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공간이 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소나무
가 무성한 한적한 숲속이었다. 그때는 청량리(淸凉里) 북쪽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엄
비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으며, 절 북쪽에는 천장산(141m)이 자리해 연화사와
의릉<懿陵, 조선 20대 군주인 경종의 능>을 감쌌다. 그래서 연화사는 자연히 '천장산 연화사'
를 칭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55년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바로 옆에 학교 건
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덩달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강제로 180도 달라지
게 되었다. 게다가 연화사를 품었던 천장산은 경희대로 인해 서로 끊어졌고, 절 사방으로 경희
대(경희여중고, 경희대병원)에 완전히 감싸여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조계종(曹溪宗) 소속인 이 절은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
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폐비윤씨는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로 그 이름을 아주 요란하게
남긴 여인이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 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허나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
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원찰의 이름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절이 매우 작았던 모양임)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연산군 자신은 강화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고, 연화사 역시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
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
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 인기가 대단했다. 그
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
름이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虛)의 도움
으로
다시 일으켰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하여 여러 불
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 '천장산 묘련사 중건기(重建記)'를 남
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
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
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
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고 적고 있어 연화장 세계에서 절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경희대가 절 옆에 터를 닦으면서 도
심 속의 절이 되어버렸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묘는 1969년 경희대에 밀려 서삼릉
(西三陵)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 건
물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시
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 등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2013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아미
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 등이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
으로 대은 돈희(
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
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해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
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掛佛)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불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상당수 삼성
각과 대웅보전 1층에 포진해 있다.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들어서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
색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초파일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 등을 파는 건물이 있다. 초파일 분위기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사
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  대웅보전 뜨락에서 펼쳐진 초파일 오후 법회

▲  시장통을 이루고 있는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가득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
교용품 판매, 간식과 음료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좁은 터에 사람까지 많
은데 천막까지 주렁주렁 지었으니 마치 콩나무시루의 버스나 교실을 보는 듯, 공간이 좀 답답
하다.
전통차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조그만 청자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무슨 차였는지는 벌써

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1잔 들이키니 속이 좀 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팝콘은 공짜로 제공
하고 있어 그 기나긴 줄에 동참하여 1봉지를 챙겼다. 그 외에 연등만들기와 다른 간식류는 돈
을 받고 있었다.

▲  무애당(無礙堂)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1993년에 새로 지어진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나반존자)>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숙
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해 절을 대놓고 엿본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을 담은 3개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도와 산신도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독성도는 그들보다 나이가 더 많음에도 아직 지정문화
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고 독성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도 아니다.


▲  삼성각 석가불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불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다. 내
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고색(古色)의 향기이니 내가 그 향기에 이끌려 이제서야 이곳 연화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
(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
물러 있었는데,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쿨하게 흡수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
을 정도이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
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
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그림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명 환조(
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자리해 있다. 칠
성도만큼이나 고색이 끼어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촐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
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중앙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자 모양
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왼
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서 있으며, 왼쪽에
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도 많이 닮아있어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
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의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그
림으로 아줌마 자세로 편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오래되
었다.


 

♠  연화사의 심장부, 대웅보전(大雄寶殿)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가 있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대웅보전(2층) 내부

석가불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로 대동하며 자리해 있고, 영산회상
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 온갖 음식들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음식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실 뿐, 먹
을 수도 손을 댈 수도 없다. 그러니 음식 모두 승려와 신도의 뱃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하
여 때만 잘맞으면 저 음식들을 얻어먹을 수 있다.
허나 이번에는 그런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려와 절에서 일하는 신도의 허락 없이
마구 집어먹지는 말자~~! 그건 제사음식을 마구 집어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연등이 알록달록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2층) 앞부분
대웅보전 가운데 칸 앞에서는 아기부처에게 물을 끼얹는 관불(灌佛)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  관불의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웅보전 2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
정대(灌頂臺)에 우뚝 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도와주고 있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
번 관정을 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하여 기나긴 관불의식 행렬에 동참하여 아기부처를 시
원하게 냉수마찰을 시켜주었다.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 싶었는데 햇님
이 퇴근하고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그
러니 오늘 실컷 냉수마찰을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다른 절에서도 관불의식을 많이 해봤지만 이곳
은 의식을 거행한 사람들에게 손수건을 하나씩
나눠주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수건에는 연화사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빨간 바탕과 파란 바탕
2가지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적지않은 절(성당과 교회도 그렇고)들이
사세 확장과 돈 벌기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어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데, 절이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속세를 위해 모든 것을 베푸는
존재가 되야 한다. 더러운 속세를 정화시키는
한 송이 연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초파일
주인의 뜻이며 절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다.

 ◀  꽃밭에 선 아기부처,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코끼리 위에 홍련(紅蓮) 모양의 관정대를
얹히고 그 위에 오른손을 치켜든 아기부처를
세웠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  대웅보전 1층 금동석가3존불과 금동후불목각탱
금동으로 지어진 닫집 안에 금동 피부를 한 석가불이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대동하여 앉아 있고, 그 뒤로 금동으로 도배된 후불목각탱이 자리해 있는데
너무 화사한 나머지 두 눈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대웅보전 1층은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중앙에는 금동(金銅)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후불목각
탱이 자리해 있고, 그 우측 벽에 연화사의 주요 보물인 신중도와 천수관음도, 지장시왕도가 액
자 안에 나란히 담겨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위
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동그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
며 머리에 보관(寶冠)을 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이
그린 것으로 이중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기도 지역
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준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도는 가운데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
道明尊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 만큼이나 정신없
어 보이는 이 그림은 언제 그려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연화사 불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슬쩍 제작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로 앉아있으며, 투
명한 흑색두건을 쓰고 오른손에 보주(寶珠), 왼손에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살의 신광(身光)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이 들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림의
인물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의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 역시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울 청룡사(靑龍寺)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
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
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流派)의 사승(師僧)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대웅보전 1층에서 특히 눈여겨볼 그림은 바로 천수관음도이다. 지금이야 천수관음을 담은 그림
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정작 오래된 천수관음도는 이 땅에 매우 드물게 남아있다. 그 희귀한
그림이 무려 연화사에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淸菴 雲照) 등이 1901년에 그린 것으로 바다 중앙
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 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든 4비(臂)를 비롯해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놓아 관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혼을 다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월
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관음
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음보살의 얼굴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천수관음도의 위엄

▲  대웅보전 1층 천정을 가득 수놓은 조그만 연등의 앙증맞은 물결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절이 조그만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겠지만 이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
는 초파일 분위기에 너무 취해있다 보니 1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경
내를 살폈지만 만나기가 꽤 까칠한 괘불을 친견하지 못했으니 그를 보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또
인연을 지어야 될 것 같다. 그래도 그를 제외하면 계획한 바를 모두 누렸으니 오늘은 이 정도
로 충분하다.

초파일에 절에 왔다면 공양밥은 반드시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지겹게 호강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시간
도 점심 시간을 지난 상태라 뱃속에선 밥달라며 난리를 친다. 그래서 공양(供養)을 먹고자 공
양간이 있는 대웅보전 지하로 내려갔다.
방에는 이미 사람들로 거의 만원, 연화사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한 공양밥 1그릇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무생채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
고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딱히 개성은 없으나 절을 열심히 둘
러보고 먹는 밥이라 정말 꿀맛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잠시나마 정든 연화사를 나왔다. 나에게는 그날 연화사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회기동 연화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의중앙선 회기역(1번 출구)에서 동대문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의료원입구
  4거리 하차<거리가 가까워 도보로 가도 상관없음, 도보 9분>  길 맞은편(서쪽) '경희대로3길
  '로 들어서 쭉 가다가 CU경희스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화사이다.
* 서울시내버스 201, 273번을 타고 경희대입구 하차, 도보 7분 (경희대병원 서쪽에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법등의 역사는 매우 짧으나 오래된 보물 2점을 간직한
조그만 절집 ~ 월계동 영축산 기원사(祈願寺)


▲  기원사 정문

연화사를 둘러보고 젊은 층으로 번잡한 경희대 주변을 벗어나 회기시장으로 나왔다. 여기서 광
운대역(옛 성북역) 부근에 있는 기원사를 가고자 서울시내버스 261번(석관동↔여의도)을 타고
월계3거리에서 하차, 월계동(月溪洞) 주택가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광운로17길)
의 끝에 기원사가 문을 활짝 열며 중생을 맞는다.

기원사는 일주문을 두지 않고,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기와 담장에 정문을 내어 마치 교외
에 자리한 별장이나 커다란 한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와 해우
소를 갖춘 기와집이 있고, 정면에 뜨락과 팔작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이 있다. 그 건물은 요사
와 선방, 종무소, 공양간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그 앞에서 오른쪽(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보이
지 않던 대웅전이 고개를 내민다.
대웅전 뒷쪽으로 가면 수풀이 우거진 쉼터와 석굴 모양의 삼성각이 있는데, 여기가 경내의 끝
이다. 절의 규모는 꽤 조촐하나 앞서 연화사보다 터가 좀 너르며, 건물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주변이 확 트여있어 체감상 더 넓게 보인다. 반면 연화사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주
변이 경희대 건물에 포위되어 있어 좀 답답한 구조이다.


▲  기원사에서 바라본 월계동 지역

월계동 주택가 뒷쪽이자 영축산(靈鷲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기원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비
구니 절집이다. 이 땅에 흔한 현대 사찰의 하나로 없는 것이 없다는 인터넷 조차도 고개를 갸
우뚱거릴 정도로 정보도 거의 없고 인지도도 낮다. 서울을 거의 꿰고 산다는 나도 기원사의 존
재를 안 것은 채 몇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 절을 내가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 2점을 보기 위함이다.
그들의 소환(?)을 받아 발을 들인 기원사는 그런데로 절집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뒤에 월계근린공원으로 포장된 영축산이 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풍기고 있다. 주택가
와 영축산 숲이 경계를 이룬 곳에 절이 둥지를 튼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사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를 않아 나중에
기원사를 다시 찾아 창건송덕비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절은 1980년에 함경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인 한혜숙(당시 60대)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지었다. 그러니 그가 기원사의 창건주(創建主)가 된다. 절이 세워지자 승려 지연(知淵)이 주지
승이 되어 절을 꾸렸으며, 오래된 독성도와 산신도를 입수하여 절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
았다.
현재 법당인 대웅전을 위시해 요사, 삼성각 등 4~5동의 건물이 경내를 채우고 있으며, 비구니
절이다보니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기원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영축산이다. 해발 96m의 조그만 동네 뒷산으로 월계동 한복판에 벌
러덩 누워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불교에서 매우 좋아하는 산 이름이다. 부처가 설법을
했던 산이 바로 영축산(영취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의 산에는 절이 꼭 있기 마련이라<통
도사(通度寺)를 품은 산 이름도 영축산> 혹시 기원사가 이름이 전하지 않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오래된 절도 없는 산이 왜 영축산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원사가 들어선 이
후 절에서 그 산을 '영축산'으로 부르면서 그것이 자연히 퍼져 얼떨결에 산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남쪽을 바라보는 기원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그 주변을 돌난간으로 둘렀다. 겉으
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밑층을 반지하 형태로 먼저 깔고 그 위를 돌로 덮어 대웅전
을 올렸다. 밑층에는 신도들의 공간과 창고가 있다.

▲  영축산 기원사 창건 송덕비(頌德碑)
창건주 한혜숙을 기리는 송덕비이다.

▲  대웅전 뒷쪽에 마련된 그늘진 쉼터
자연에 둘러싸인 포근한 공간이다.


▲  대웅전 계단 옆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불교의 큰 대목인 초파일임에도 경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관불의식 현장도 꽤
나 한산했는데 다른 절들은 그 의식의 현장을 하나만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계단 좌우로 2개나
배치했다.
꽃에 감싸인 아기부처는 물기가 마를 정도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며 아까운 초파일 시간을 부질
없이 죽이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으며, 그의 곁에는 하얀 피부의 보시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  대웅전 석가불과 붉은 색채의 석가후불탱
붉은 닫집 밑으로 이글거리는 모습의 광배(光背)를 두룬 석가불이 홀로 앉아
미소를 머금으며 중생들이 헌상한 음식을 바라본다.

▲  하늘에 칠해진 4가지의 색깔, 대웅전 뜨락을 가득 채운 네모난 연등
다른 절들은 보통 동그란 연등을 매달지만 이곳은 네모난 연등으로
절의 하늘을 훔쳤다. (정문과 요사 주변은 동그란 연등을 달았음)

▲  연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대웅전 옆구리 돌담길
돌담 너머는 영축산 숲으로 경내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없다.

대웅전 뒷쪽에 숨겨진 삼성각은 2004년에 지어
졌다. 지형을 이용하여 다진 석굴(石窟) 모양
의 돌집으로 건물 내부와 천정, 문은 나무로
손질했으며 문 앞에는 머리를 2갈래로 묶은 조
그만 문수동자상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삼성각
을 지킨다.

건물 내부 중심에는 산신이, 방 좌우에는 독성
과 칠성이 한 자리씩 차지하며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는데, 산신의 공간이 유독 넓고 그
위로 높게 동그란 천정을 내어 산신이 사실상
삼성각의 주인임을 알려준다. 바로 이 건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와 독성도가 있으
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삼성각과 귀여운 문수동자상


▲  기원사 독성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독성도는 천태산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을 담은 그림이다.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은
시선을 오른쪽(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향해 있는데 오른손은 무릎에 놓았으며, 그의
허전한 머리 뒤에는 하얀 광배가 그를 비춘다.
그는 빨간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법의(法衣)를 입었는데, 옷 끝단에는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
며, 그의 오른쪽에는 나무 밑둥치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세발향로가 얹혀져 있다. 소나무 그늘
위로 하얀 구름이 흘러가며 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붉은 햇님이 살짝 모습을 비춘다.

그림 우측 하단에 화기(畵記)가 있지만 푸른 안료로 덧칠을 하는 통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
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조성되었는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에 감싸인 상태로 '供養(공양)','
圓(원)' 등 몇 자만 겨우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얀색과 청색을 같
이 사용하는 색채감과 구도는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에서 많이 나타나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되었음을 귀띔해주고 있으며, 제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20세기 후반에 기원사에 안착
하여 이곳의 듬직한 후광이 되었다.


▲  기원사 산신도와 석조 산신상

▲  기원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5호

독성과 칠성은 그림만 걸려있지만 산신은 그림 외에 돌로 만든 산신상까지 갖추고 있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어흥~! 거리는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석조 산신상 뒤에는 독성도와 더불
어 이곳의 오랜 보물인 산신각이 걸려있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도포와 푸른 두건을 걸친 산신이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다. 머리는 좌우
만 조금 남은 대머리로 수염이 무성하며,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여인이 주전자와 찻
잔을 들며 서 있다. 보통 산신도에는 동자만 나오기 마련인데, 산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자까
지 등장을 시켰다. 호랑이는 산신 맞은편에서 산신을 바라보며 어흥~! 거리고 있는데, 아마도
산신이 제때 밥을 주지 않아 항의하는 모양이다. 보통 호랑이가 산신 뒤나 옆에 있기 마련이지
만 여기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산신 옆에는 소나무가 있고 구름과 해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데, 굵은 줄기에 태점을 찍고 옅
은 수묵을 사용하여 줄기를 표현해 오래된 노송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명도가 높은 청
색을 사용하고 손발에 음영법이 쓰이는 등 19세기 말 이후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독성도와 달리 그림 밑부분 좌측에 화기가 남아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화기에 따르면 을유년(1885년) 5월 1일에 조성되어 전라남도 나한산 사태암(어딘지 모르겠음)
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전라남도란 명칭은 1896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니 아마도 화기를 그 이
후에 작성하거나 수정한 것 같다. 1885년에는 전북, 전남, 제주도가 모두 전라도였기 때문이다.
금어 우곡(雨谷)과 수산 근혜(守山謹惠) 등이 그림을 그렸고, 시주는 식성(湜惺) 등이 했으며,
어찌된 영문인지 제자리를 잃고 천하를 방황하다가 기원사에 흘러들어와 안착을 하였다.

◀  나이가 한참 어린 칠성도
독성도와 산신도에만 한참 눈이 가있다 보니
칠성도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  기원사 공양밥의 위엄

열심히 경내를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엄습한다. 부지런히 일을 마쳤으니 공양 1그릇 들고 가
야 되겠지. 하여 이곳의 인심도 확인할 겸, 요사 공양간을 찾았다. 시간이 15시가 넘었지만 밥
은 아직 제공되고 있었다.
밥그릇에는 갖은 나물이 버무려져 있었는데, 밥주걱이 부러지도록 밥을 담고 고추장을 푼 다음
오뎅국이 든 그릇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절에서 차려준 공양 자리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자리가 여의치 않았으나 비구니의 배려로 요사 1층에 들어가 다시금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진다.

이곳 공양밥도 연화사와 마찬가지로 비빔밥이다. 밥과 콩나물, 무생채, 고사리 등 온갖 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빨갛게 해먹으면서 되는데, 특이하게 무와 오뎅, 미역이 든 오뎅국도 제공해 주
었다. 그렇데 공양을 마치고 그릇을 반납하니 뜨락에서 음료수와 솜사탕, 얼음 슬러시를 제공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러시 1컵 받아 먹으며 후식까지 채웠다.
이렇게 기원사의 훈훈한 인심을 체험하고 잠시나마 정든 그곳을 뒤로 한 채, 유독 짧아보이는
초파일의 낮을 원망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콩 볶듯 길을 움직였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월계동 기원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광운대역(1,2번 출구)에서 광운대 방면으로 가면 월계3거리이다. 3거리를 건너
  서 광운대 쪽으로 직진하면 기원사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
  가다가 광운로17길로 진입하여 직진하면 그 길의 끝에 기원사가 있다. 단 길이 조금 복잡해
  초행인 경우 햇갈릴 수 있으니 감이 잡히지 않으면 주민들에게 문의한다.
* 서울시내버스 261, 1017, 1137, 1140번 시내버스를 타고 월계3거리 하차, 도보 6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1동 392-106 (광운로17길 48-47, ☎ 02-918-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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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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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 낙산 동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탑골승방 보문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보문사 석굴암


 

매년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친한 후배들과 함께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에 나섰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그날 초파일 나들이는 서울 강북의 여러 오래된 절을 거쳐 보문사
에서 그 마무리를 지었는데, 때이른 무더위와 적지 않은 산행, 너무나 알찬(?) 일정으로
몸은 거의 녹초가 되버렸다.
18시 경, 시원한 국수로 저녁을 때우며 그날 일정을 곱게 정리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여전한 해를 보니 다시 욕심이 싹트면서 후식거리로 절 1개를 더 챙겨보기로 했다. 그러
자 일행들은 힘들다며 다들 정색을 한다. 그래서 기절 직전(?)인 후배는 고이 집으로 보
내고 나머지 1명과 보문동(普門洞)에 있는 보문사의 산문을 찾았다.


 

♠  보문사(普門寺) 입문

▲  보문사의 정문인 호지문(護持門)

보통 절들은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을 경내 밖으로 내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보문사
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보문역4
거리나 보문역에서 절로 가는 길목에 억지로 일주문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절과 속세
의 경계이자 정문으로 쓰였던 동쪽에 2층 규모의 호지문을 지어 일주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도
맡게 했다.
호지문이란 계속 지킨다는 뜻으로 이는 천왕문의 역할을 뜻한다. 비록 우람한 사천왕(四天王)
은 없으나 대신 수위실을 두어 수위들이 사천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 위에는 '호지문'
현판이 걸려있고 팔작지붕을 취한 2층에는 '보문사' 현판을 두어 이곳의 존재와 이름을 속세에
밝힌다.

호지문 앞에는 초파일 특수를 노린 행상들이 진을 치며 솜사탕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을 팔
고 있었고, 절로 들어가는 길목의 가게들도 앞다투어 양초와 공양미 등을 내밀며 초파일 특수
를 나누고 있었다.


▲  봉축한마당 막바지 공연 (춘향전으로 여겨짐) ▼

호지문을 들어서면 바로 초파일 공연으로 떠들썩한 향운각 뜨락이다. 여기서부터 보문사 경내
가 시작되는데, 뜨락 너머로 종각과 법보전 등이 보이고, 공연장 뒤에는 2층으로 이루어진 향
운각(香雲閣)이 자리한다.
향운각 1층은 매점과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2층은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그
앞뜨락에 공연장을 닦아 흥겨운 봉축한마당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  꽃동산처럼 꾸며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공연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파일의 백미(白眉)인 관불의식의 현장이 나온다. 꽃으로
곱게 치장된 공간 한복판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아기부처를 두었는데 거의 1년 만에 외출이라
잔뜩 즐거움에 잠긴 모습이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부으며 슬쩍 소
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 마련된 복전함은 관불의식의 덕을 톡톡히 보며 디룩디룩 배를 채운다.


▲  보문사 괘불(掛佛)

관불의식 현장 바로 뒤쪽에는 괘불이 거룩하게 자리하여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괘불은 초파일
이나 절 행사일에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비싼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지
금까지 270곳이 넘는 고찰(古刹)을 답사했음에도 그를 만난 절은 고작 열 손가락 내에 불과하
다. <보문사, 홍은동 옥천암, 우이동 도선사, 돈암동 흥천사, 강남 봉은사, 고양시 흥국사 정
도> 그것도 봉은사(奉恩寺)와 도선사(道詵寺)를 제외하면 모두 초파일에 만났다. 그러니 초파
일에 기를 쓰고 절투어를 벌어야 괘불(특히 오래된 괘불)에 대한 가려움을 어느 정도 긁을 수
있다.

보문사 괘불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괘불<2004년 초파일에 친견했음>로 이번이 2번째 인연이
다. 정정한 그를 다시 만나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보문사는 8~9회 정도 인연을 지었
음) 그의 구조를 보면 중앙에 큰 석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보살(菩薩)로 보이는 작은 존재를
두었다. 20세기 중반에 제작되어 매우 반질반질하며 탱화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8각9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 보문동과 안암동(安岩洞) 지역
약간의 산지를 낀 절이라 조망은 썩 별로이다.

① 보문사의 역사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駱山, 낙타산), 그 동쪽 줄기에 단종(端宗)의 왕비
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애환이 서린 동망봉(東望峰)이 있고, 바로 그 봉우리 동쪽에 비
구니 사찰의 성지(聖地)이자 천하 유일의 불교 종파인 보문종(普門宗)의 중심지 보문사가 둥지
를 틀고 있다.

그렇다면 보문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불교 학자 겸 승려인 권상로(權相老, 1879~1965
)는 고려 중기인 1115년(예종 10년) 담진국사
(曇眞國師)가 창건했다고 주장했다. '보문사일신
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보문사의 창
건배경과 담진국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고려 때부터 비구니들이 머물며 나라의 안녕과 제왕
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는 니사(尼寺)로 언급하고 있다.
허나 아무리 그러면 무엇하랴.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아무런 기록과 유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계속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혹
여 경내를 싹 뒤엎고 조사를 벌이면 땅 속에서 고려나 조선 초/중기 주춧돌이나 그 시절 유물
이 나올 수도 있지만 뒤집을 여건도 되지 못한다.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1692년 묘첨(妙沾)이 대웅전을 중건했다고 한
다. 1826년 수봉법총(秀峰法聰)이 만세루를 세우고 1827년에는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을 세워
제법 가람을 이루었으며, 1842년에는 영전(永典)이 대웅전과 만세루를 개조했고, 1867년 지장
시왕도를 비롯한 여러 탱화를 조성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금훈(錦勳)이 좌우승당을 새로 지
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문사와 바로 이웃에 자리한 미타사(彌陀寺)를 하나로 묶어 '탑골승방(僧房)'이
라 불렀는데, 그 시절 도성(都城) 밖에 있던 4개 비구니 승방의 하나였다. 그 4개 승방이란 탑
골승방과 옥수동(玉水洞)의 두무개승방<미타사(彌陀寺), 두무개는 옥수동 옛 이름>, 석관동(石
串洞)의 돌곶이승방<청량사(淸凉寺)와 연화사(蓮花寺), 돌곶이는 석관동의 옛 이름>, 창신동(
昌信洞)의 새절승방<청룡사(靑龍寺)>으로 이들은 궁궐 상궁(尙宮)과 후궁이 머리를 깎고 말년
을 보냈던 그들의 마지막 의지처였다.
탑골승방은 이름 그대로 탑골에 있는 승방인데, 보문동(普門洞)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으며, 그
유래는 고려 초(1047년)에 조성된 미타사 5층석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탑이 있음)

왜정(倭政) 이후에는 1928년 긍탄(亘坦)이 대규모 불사를 벌였는데, 대웅전 석가3존불을 개금(
改金)하고 관음전과 대웅전, 좌우승당을 증축하는 한편, 칠성각과 삼성각을 세웠다. 1945년에
는 보문사의 큰 여승으로 일컬어지는 송은영(宋恩榮)이 주지로 들어와 1980년대까지 불사를 벌
였는데 지금의 가람은 거의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땅을 크게 확보하여 선불장과 범종각, 극락전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을 지었으며, 1971년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1972년에 왜정 때 주지를 지낸 긍탄과 보문종을 개창했다. 보문종
은 천하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천하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파자파티를 종조
(宗祖)로, 신라 때 비구니인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보문종이 개창된 그해에 보문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석굴암(당시 이름은 석불암)이 완성되었
다. 1970년 8월 1일 착공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석재는 화강암 2,400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 포대로 경주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1978년에 거대한 사리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1986년에는 황법준이 대웅전과 좌
승당을 개조했으며, 1987년 석불암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8년 주지 이름을 딴 은영
유치원을 세워 복지/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었으며.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동원정사와 만불전
을 지었다.
현재는 인태가 주지승으로 있으며, 보문종의 중심지로 천하에 30여 절을 말사(末寺)로 거느리
고 있다. (미대륙과 왜열도에도 말사가 4곳 있음)

보문사 대지는 1만여 평으로 건물은 무려 20여 동(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꽤 많음). 머무
는 비구니는 150명이 넘는다. 소장문화유산은 보물 1164-2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3~4,
5~7<5권 2책>과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 지방문화재 3점(이들은 모두 1867년에 제작
됨), 그리고 19세기 이후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수식과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
幡)이 전하고 있다. 그중 묘법연화경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조선 초에 간행되었으나
원래부터 보문사 것은 아니다. (묘법연화경은 관람 불가)

② 보문사의 구조
절의 정문인 호지문을 들어서 정면으로 계속 가면 석굴암과 사리탑, 선불장으로 이어진다. 그
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정문을 들어서 곧장 가면
알아서 법당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곳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여 초행인 사람은 대웅전도 없는
절로 여기기가 쉽다. 나도 처음에는 대웅전도 못보고 갔으니 말이다.

허나 대웅전은 향운각 뒷쪽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다른 건물도 아닌 법당이 말이
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 분위기로 그 길의 끝에 대웅전과 묘슬전, 보광전 등이
자리해 있다. 이처럼 절의 중심 건물이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 그늘진 곳에 있는 것은 대웅전
주변이 원래 보문사 영역으로 그 공간에 현대식 주택의 건물을 마구 심다보니 이렇게 독특한
구조가 된 것이다. 반면 새로 편입된 서남쪽 부분은 석굴암과 몇몇 건물만 닦아놓아 다소 여유
가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경내는 크게 옛 도심 같은 대웅전 구역과 신도시 같은 서남쪽 구역(석굴암, 선불장)으
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구역 북쪽에 미타사가 있음)

경내 서쪽 석굴암 주변은 숲이 좀 우거져 있는데, 석굴암과 8각9층석탑 서쪽 숲속에는 비구니
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솔길이 있다. 허나 이곳 외에는 나무는 별로 없으며, 주변이 온통 아파
트와 주택가라 산사(山寺)
의 내음은 다소 떨어진다. 옛날에야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이 진했으
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을 가만히 두지 않으면서 도시 속에 고립된 별천지
가 되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도 상당히 식은 상태라 조금은
안타깝다. (대웅전과 삼성각 정도만 고색이 조금 피어있음)

※ 보문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보문역 1번 출구에서 도보 3분
* 서울시내버스 103, 142, 152, 272, 273, 1014, 1111,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문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보문사길 20) <☎ 02-928-3797>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닫집, 용머리 장식)


 

♠  보문사 대웅전(大雄殿) 구역

▲  연등에 가려진 대웅전

완전 동네 골목길 같은 향운각과 남별당 사잇길로 들어가면 동쪽을 바라보고선 대웅전이 나타
난다.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위엄에 대웅전은 감히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간신히
계단과 아랫도리만 드러낸다. 지붕과 윗도리는 하늘과 함께 연등에 의해 말끔히 지워진 상태,
이날만큼은 연등이 하늘과 속세의 경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문사의 법당(중심 건물)으로 이곳이 경내의 옛 중심이다. 지금도 여전히 중심이긴
하지만 일반 주택과 뒤섞인 구석진 곳이라 그 실감이 덜하다. 그러다보니 경내에 편입되어 개
발된 서남부 구역에 비해 무게감도 좀 떨어져 보이고 햇살도 엉거주춤하는 그늘진 곳이라 조금
은 칙칙하기까지 하다.
대웅전 구역은 경내에서 가장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데, 대웅전과 묘승전, 심우당, 삼성각 등은
기와집을 취하고 있지만 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많아 마치 조그만 마을 같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佛殿)이다.
1842
년과 1865년 중건을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했다. 이 자리에는
보문사를 세웠다는 담
진국사가 정진했다는 토굴이 있었다고 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지장도 등
의 탱화와 1928년에 조성된 범종, 경전(經傳)을 보관하는 경궤(經櫃) 등이 있다. (범종과 경궤
의 보관 위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8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석가3존불이 자리해 있다. 가운데 석가불은 인자하고 동
자승 같은 귀여운 표정이며, 그 좌우로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석가불과 덩치가 비슷하거나 조금 커 보인다.

그들 뒤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가불도(석가모니후불탱)가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걸려 있
다. 비단에 그려진 이 탱화는 가로 140cm, 세로 180cm 크기로 1867년에 제작되었다. 관련 화기
(畵記)가 구석에 남아있는데, 석가불이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
을 담고 있으며, 그 아랫족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고, 석가불 머리 위쪽에 관음
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는 10대 제자와 화불(化佛) 2위를 넣었다. 그리고 화면 사방에는 사
천왕을 배열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았다.
색감은 붉은색을 많이 썼고, 보살과 사천왕상은 모두 두광(頭光)을 지녔다. 이는 그 시절 탱화
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표현기법이 정교하고 구도 또한 좌우 대칭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9호

대웅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절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을 몽땅 머금은 탱
화이다. 비단에 채색된 가로 200cm, 세로 140cm의 크기로 1867년에 그려졌는데 앞에 석가불도
와 비슷한 색상과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도의 중심 멤버인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은 그림 상단에, 용왕(龍王)은 중앙에, 위태천(
韋太天)은 하단에 배치했고, 여러 산신과 복덕대신(福德大神), 토지대신(土地大神), 가람대신(
伽藍大神)과 인도의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등 10여 명을 빼곡히 배치하여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대웅전 앞쪽에 자리한 심우당(尋牛堂)
2006년에 참선 수행을 위해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로 템플라이프와 행사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시왕전(十王殿) 내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장보살의 공간이다.
시왕(十王)이 담긴 금동목각탱이 건물
내부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  심우당과 마주하고 있는 묘승전(妙勝殿)

묘승전은 예전 좌승당(左僧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조그만
석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 감로
탱, 지장시왕도, 1916년에 그려진 신중도와 현왕도(現王圖) 등이 건물 내부를 채우고 있다.


▲  묘승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  흐릿한 모습의 묘승전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0호

묘승전 우측 벽에는 3개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왼쪽이 신중도, 가운데가 지장시왕도, 오른쪽
이 현왕도(現王圖)이다. 처음에는 지장시왕도의 위치를 몰라 깜박 넘어갈 뻔 했으나 묘승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절을 나가기 바로 전에 부랴부랴 묘승전으로 들어갔다.
텅 빈 묘승전 내부는 불단을 제외하고 모두 컴컴한 상태, 불을 켰으나 지장시왕도 쪽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이 높아 사진에 담기가 힘들었다. 그때 시간도 초파일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되는 19
시 직전이고 비구니와 신도 아줌마가 언제 들어와 잔소리를 던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새가슴마
냥 저 정도만 담고 철수했다.

비단에 그려진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응석(應釋)이 제작한 것으로 가로 145cm, 세로 200cm 크
기이다. 그림 한복판에 커다란 금니(金泥)가 칠해진 원을 닦아 그 안에 지장3존을 그렸고,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위와 아래 두 줄로 저승의 시왕(十王)을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석류를 비롯한 여러 지물을 가진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판관(判官), 녹
사(錄事), 우두(牛頭), 마두(馬頭), 나찰(羅刹), 사자(使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을
빼곡히 배치했다. 색감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도) 가운데 구도의
특이함과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  대웅전 뒤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북쪽 구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이 건물은 칠성(七星)
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탱은 1874년에 조성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3점의 불화 다음으로 연세가 지긋하다. 허나 지방문화재 불화만 크게 의식을 했지 칠성탱의
존재를 깨닫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보문사 석굴암, 사리탑 구역

▲  범종각(梵鍾閣)

▲  법보전에서 바라본 범종각 2층

호지문에서 석굴암으로 가려면 범종각을 지나야 된다. 범종각 밑도리를 통해 가도 되고, 범종
각 직전 왼쪽 계단을 통해 접근해도 된다. (거리는 비슷함)

범종각은 누각 형태로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에 석굴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석굴암으로 인
도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2층에는 범종과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의
사물(四物)이 깃들여져 있다. 이들 사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예전에는 범종을 새벽에 3
번, 점심에 12번, 저녁에 28번을 쳤으나 지금은 새벽과 저녁에만 친다.


▲  뱉어낼 물이 없어 멀뚱히 혀만 내민 채 고통 받고 있는 용머리
보문사도 오래된 절이라 자체 샘터가 있었다. 허나 개발의 칼질로 도심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면서 수질이 악화되고 물줄기까지 끝내 끊기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바가지도 그를 떠나버렸다.

▲  석굴암 북쪽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용머리 샘터를 지나 윗쪽으로 오르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석굴암 구역이다. 석굴
암을 20m 앞둔 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산령각
이다.

산령각은 산신을 봉안한 공간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3년에 지어졌는데, 경내에서 가장 명당(明堂)으로 꼽히는 터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삼성각에서 이미 산신을 봉안하고 있어 산신을 위한 공간이 2개나 있는 셈인데, 삼성각의 산신
은 일반적인 산신이고, 산령각은 보문사를 품은 낙산의 산신을 위한 공간으로 보문사에서 낙산
을 위해 만든 특별한 건물이다. (산신탱 외에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도 있음)

▲  정면에서 바라본 산령각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독성탱


▲  보문사의 명물인 석굴암(石窟庵)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서쪽 끝에 보문사의 제일가는 명물이자 꿀단지인 석굴암이 있다.
딱히 내세울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보문사에 단비를 뿌려준 존재로 절을 크게 일군 송은영 주
지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경내 서쪽 야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활용해서 조성했는데, 석굴암이란 그 이름 그대
로 경주(慶州)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본존불(本尊佛)을 제외하면 경주의
그것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므로 괜히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주 석굴암에 왔다고 우기지는
말자.

이곳 석굴암은 1970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화
강암은 2,400톤, 철재 25톤, 돔용 시멘트 10,000포대, 석공과 조각 담당자는 연 45,000명, 노
동자는 연 25,000명에 이르는 보문사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총감독을 맡은 이는 현대화가인 한
봉덕 화백으로 석공예(石工藝)에도 일가견이 있어 봉원사(奉元寺)에 석불을 만든 적이 있었다.

1970년 7월, 주지 송은영이 봉원사를 찾았는데, 거기서 한봉덕이 만든 석불을 보고 그만 반하
고 말았다. 안그래도 큰 석불을 지을 계획이라 봉원사에 머물던 탱화 명장(名匠)인 만봉에게
석불을 만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여 같이 한봉덕을 찾아 석불 건립을 의뢰했다.
의뢰를 맡은 한봉덕은 공사에 앞서 경주 석굴암을 찾아 그곳을 스케치하면서 석불을 만들었다.
처음 조성 계획은 본존불만 만드는 것이었으나 공사 때문에 여러 차례 석굴암을 다녀오면서 그
만 석굴암 전체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주지를 설득하여 판을 크게 벌였고
그렇게 보문사 스타일의 석굴암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석굴암의 면적은 1,000평, 건평은 65평으로 본존불에 쓰인 화강암만 15톤에 달한다. 불상 높이
는 3.38m이며, 석굴 내부에 문 3개를 두었다. 허나 석굴 자리가 넓지 못해 팔부중상(八部衆像)
은 만들지 않았다.
석굴암 내부 배치는 바깥 복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배치했고, 석굴 안에 본존불을 두었는데,
그 주위로 10대 제자와 관음보살, 대범천왕(大梵天王), 석가탑(釋迦塔) 등을 두어 경주와는 조
금 다르다. 처음에는 석불암(石佛庵)이라 불렀으나 1987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복도
좌우에 난 통로를 통해 본존불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석굴암 내부 - 본존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바깥에만 머물렀다.

▲  석굴암을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의 위엄

▲  보문사 8각9층석탑(사리탑)

석굴암에서 남쪽으로 가면 칼처럼 날렵하게 솟은 8각9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 탑은 1979년에
주지 송은영이 만든 것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석굴암도
그렇고 이 탑도 그렇고 송은영은 기존의 명성이 높은 불교 문화유산을 본떠서 만드는 것을 좋
아했던 모양이다.
탑 안에는 당시 자운(慈雲)이 스리랑카에서 얻어온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했는데, 그 연
유로 간편하게 사리탑<탑전(塔殿)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기도 한다.


▲  8각9층석탑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로

▲  돌담 너머로는 비구니들만의 숨겨진 오솔길이 있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일반인은 출입 통제)

▲  선불장(選佛場)
1958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강당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법보전(法寶殿)
보문사 어른 승려의 요사채이다.


▲  경내 서남쪽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속세를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간으로 1970년에 세워졌
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죽은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어 그들을 위한 제사가 치루어진다. 그래서 건물 주변에 조금
은 으시시한 하얀 연등을 두른 것이다.


▲  괘불의 철수 현장

경내를 둘러보고 향운각 앞으로 내려오니 괘불이 사람들에 의해 둘둘 말려지고 있었다. 아쉽지
만 괘불함으로 들어가야 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존재가 석가불이긴 해도 인
간이 편의상 만들고 봉안하는 그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 입맛에 맞춰 나왔다가 다시 들어
가야 되는 것이 괘불 부처의 운명이다.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햇살을 볼까?? 점점 작아지는
괘불 석가불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진다.


▲  이제는 헤어져야될 시간~~ 괘불은 끝내 접히고 말았다.

▲  초파일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예불

괘불이 철수하자 경내를 1바퀴 돈 승려와 신도들은 관불의식 현장 앞에 모여 초파일 저녁 예불
을 올린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조그만 연꽃 모형을 하나 얻고 총총히 내 제자리
로 돌아왔다.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하루, 벌써 그날이 재생이 불가능한 과거가 되
었다는 현실이 참 소름이 돋긴 하지만 그 짧은 초파일 하루를 정말 야무지게 쓴 것 같아 정말
뿌듯하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나들이는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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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인왕산 환희사 (인왕산 북쪽 능선) '

▲  환희사 경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서
울 시내 절 투어에 나섰다. 이번에는 절을 좋아하는 후배 2명이 동참을 하였는데, 오전 11
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제일 먼저 정릉동(貞陵洞)에 자리한 오래된 절, 봉국
사(奉國寺)의 문을 두드렸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과 탱화를 중심으로 경내를 마음껏 누비며 온갖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과 떡, 전으로 이루어진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다듬었다. 그런 다음 인왕산 환
희사로 이동하고자 110번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홍제동(弘濟洞)으로 이동 중, 홍제천(弘濟
川) 변에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을 내민 옥천암(玉泉庵)이 진하게 손짓을 하자, 계획에
도 없던 그곳에 잠시 발을 들였다. 거기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느라 분주한 고려시대 백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친견하고 두툼한 떡(백설기)을 하나씩 쥐어들며 잠시 잊었던 환희
사로 이동을 재촉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참 애매한 거리이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도 참 어정쩡하여 때이른 무
더위를 무릅쓰고 인왕산을 더듬기로 했다. 옥천암 서남쪽 유원하나아파트에 인왕산으로 넘
어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타고 북쪽 능선(기차바위 북쪽)을 거쳐 서남쪽으로 내려가
면 1시간 이내에 환희사에 도착한다.
다만 그렇게 가려면 해발 280m까지 올라가야 된다. 절을 목적으로 왔는데, 뜻하지 않게 강
제 등산을 하게 되니 후배들은 버스를 타고 가자며 정색을 한다. 허나 내 마음은 석불처럼
굳어졌다. 산과 산사(山寺)는 물과 물고기와 같은 사이인데 산을 좀 타면 어떠하리~! 몸은
좀 힘들어도 보람은 그만큼 클 것이며 청정한 산내음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환희
사는 산속에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더라도 산을 좀 올라가야 된다.


 

♠  인왕산을 넘다 (개미마을, 홍심약수터, 옥동약수터)

▲  신록의 도화지를 이룬 인왕산 산길
(유원하나아파트에서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산길)


옥천암과 가까운 유원하나아파트는 인왕산 북쪽 끝 세검정로 길가에 자리한 아파트이다. 천박
한 개발의 칼질이 인왕산 북쪽과 서쪽, 남쪽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면서 성냥갑 아파트를 잔뜩
지어올려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인왕산의 시야를 가리며 농락한다. 특히 통일로로 이어지는 의
주로(義州路) 동쪽은 더욱 심각해 여유 공간도 없을 것 같은 가파른 산자락을 헤집고 온갖 아
파트를 지어놓아 미관을 찌푸리게 한다. 굳이 인왕산을 희롱하며 저렇게 잔뜩 아파트를 지어야
했는지 의문일 따름이다. 이 땅의 개발은 언제나 개념을 탑재하고 바른 길을 갈지 정말로 답이
없다.

유원하나아파트 남쪽에 인왕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조촐한 운
동시설과 공원이 나온다. 여기서 용천약수터를 거쳐 기차바위 능선으로 가려고 했으니 길을 잘
못들어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그곳을 강제로 거치
게 되었다.
개미마을로 가는 길은 둘레길마냥 느긋하다. 게다가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이 우리를 보
듬으며,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아비규환 같은 속세에 우리를 보고
저리 웃어주는 존재는 거의 흔치 않은데 이렇게 대자연의 위로를 받으니 마음도 편해진다. 그
런 길을 10분 정도 가면 개미마을의 동쪽 부분에 이른다.


▲  벽화마을의 성지(聖地)로 거듭난 개미마을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과 더불어 서울 도심 속의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은 인왕산 북서쪽 자
락 100m 고지에 터를 닦은 산동네(달동네)이다. 허나 도시의 흔한 달동네와 달리 숲이 무성한
산자락에 감싸여 있어 완전 산골 벽지마을 같다. 거기에 뻐꾸기가 뻐꾹뻐꾹~♪ 노래하니 그런
기분은 더해져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내 자신도 햇갈려 순식간에 강원도 산골 마을로 순
간이동을 당한 줄 알았다.

이곳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지하철 3호선 홍제역과 가깝고, 서울 도심
이 바로 지척이다. 그런데도 이런 산골 마을이 도심 턱밑에 자리해 서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
고 있으니 이런 것을 보면 서울도 참 넓긴 넓은 모양이다. 서울하면 대부분 키다리 빌딩과 사
람, 수레로 뒤엉킨 복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으로 알지 이런 시골 분위기는 생각을 못한다. 그
게 바로 서울에 대해 가지는 흔한 오류이다.

개미마을은 약 15,000평 규모로 200여 가구에 4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다. 오래된 마을
까지는 아니고 6.25 이후에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천막을 걸치고 살면서 자연
히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옹기종기 천막을 이룬 마을의 모습이 인디언마을과 비슷하다
고 하여 '인디언촌'이라 불렸는데,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리 불렸다
는 설도 있어 바깥에서 이곳을 썩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도 그런 이름이 싫어서 적당한 이름을 물색하다가 1983년 개미마을을 이름으로 삼
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개미를 닮았다고 하여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며, 애당
초 마을의 이름은 없었다.

이곳은 가난하고 고된 동네로 서민의 애환과 나날이 격해지는 빈부격차의 현실에 한숨을 쉬게
만드는 곳이다. 독거노인을 비롯해 일용노동자와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주류를 이루며,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힌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마을 위쪽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으나 여느 산동네와 마찬가지로 경사가 각박해 눈이 쌓이면 통행에 꽤 애를 먹는다. 그리고
연탄을 연료로 많이 사용하여 색깔이 벗겨진 살색 연탄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문화촌에서 들어오는 북쪽 골목(세검정로4길)길이 전부
이다. 그 길로 마을버스와 차량들이 오간다. 마을버스는 산간 벽지처럼 서너 시간에 1대 정도
들어올 것 같지만 거의 10분 간격으로 들어와 접근성은 양호하며, 요즘은 좀 살만해졌는지 차
량을 가진 집도 좀 늘었다. 북쪽 외에는 3면이 죄다 산으로 막혀있으며, 인왕산 산길로는 인왕
산 정상이나 환희사, 홍은동 유원하나아파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 2자가 속세에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요즘 지나치게 유행을 타고 있는 벽화마
을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이곳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고자 서대문구청과 금호건
설이 '빛 그린 어울림 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에 성균관대와 건국대, 추계예술대, 상명대, 한성대의 미술 전공 학생들이 몰려와 각기 다른
5개의 주제로 51가지의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한 달동네가 화사한 그림 마을로 변신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던 마을 사람들도 그림판이 된 마을에 싱글벙글 웃었고, 벽화마을로 크게 언론
을 타자 마을 주민과 약간의 인왕산 등산꾼이 고작이던 이곳에 사진쟁이와 관광꾼들의 발길이
늘면서 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성장했다. 또한 이곳과 동대문 이화(梨花)마을을 시작으로 많은
산동네와 시골 마을이 이를 따라하면서 전국적으로 너무 쓸데없이 벽화마을이 유행을 타게 된
것이다.
허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임에도 사진 본능에 충실해 갖은 민폐를 부리는 사진쟁이가 적지가 않
고, 어렵게 사는 그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며 무시하는 이들도 많아 마을 사람들과 적지 않은
충돌이 생긴다. 마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시도한 벽화마을의 폐해인 셈으로 단순히 외지인들
이 들어와 그림만 그렸을 뿐,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벽화만 두룬 산골 분위기 그
윽한 마을일 뿐이다. 하여 뭣도 모르는 이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와 '이게 전부야?' 실망
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진쟁이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할만한 꺼리가 없으니 단
지 사진만 찍고 가거나 인왕산을 오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여 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리 이익이 되
질 않는다.

이렇게 관광객과 마을 주민과의 조금은 불편한 동거를 줄이려면 마을을 개량하고 주민들도 이
득을 보도록 해줘야 된다. 예를 들면 도심과 가까운 잇점을 이용하여 1박 머물 수 있는 캠핑장
이나 산골, 농촌마을 체험 현장으로 활용하거나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처럼 농작
물과 원예물을 재배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으며, 예술인들을 초대하여 북촌(北村)처럼
갖은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예술마을로 키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미마을은 아직 개발 계획은 없다. 허나 벽화마을로 뜬 적이 있으니 졸부들의 마수를 경계해
야될 것이며, 마을을 둘러볼 때 사진을 찍는다며 허락도 없이 집에 침투하거나 사생활을 침해
하는 등 호들갑을 떠는 행위는 삼가해야 된다. 그리고 개미마을 하나만으로는 50% 부족하니 인
왕산 등산이나 인근 부암동 답사를 겯드리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홍제동 개미마을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1,2번 출구 중간)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면 개미마을까지 들
  어간다.
* 서울시내버스 110, 153, 7018, 7730번을 타고 문화촌현대아파트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
  으로 환승 또는 도보 15분 (평창동이나 부암동 방면에서 갈 경우에는 길 건너 정류장에서 서
  대문 07번으로 환승)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일대


▲  개미마을 동쪽 부분

우리는 개미마을의 동쪽만 스치듯 지나갔다. 이런 인위적인 벽화마을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
문이다. 강원도 산골 같은 한적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단순히 벽화를 보
자고 또 오는 것은 싫다.

개미마을 동쪽 끝에는 홍심약수터가 있다. 처음에는 홍삼약수터로 알고 '이름이 참 건강하네~~
물에 홍삼의 기운이 있나?' 싶었는데, 이름을 다시 보니 홍심이었다. 받침 하나에 약수터의 이
름과 이미지가 싹 바뀌는 순간이다.
이 샘터에는 인왕산이 베푼 약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가뭄이라 그 양이 시원치 못하다. 수질은
다행히 적합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이 나오는 구멍이 위에 2~3개가 더 있는데, 윗쪽이 아래 보
다 물이 더 잘나온다.

우리는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갈증을 해소하며 두 다리를 잠시 쉬었다. 오후 한참 시간이라
날은 덥고 땀은 약수터를 이룰 정도라 미동도 하기 귀찮았다. 허나 환희사를 목적으로 왔으니
목적은 달성해야 뒷탈이 없다. 그래서 나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홍심약수터에서 10분 정도 오르니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능선에 이른다. 이 능선은 장차 기차
바위 능선으로 변신을 하는데,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고, 그 직전 280m 고지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사방이 뻥 뚫린 능선길로 서쪽으로 개미마을과 서대문구, 은평구가, 동쪽은 부
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자하문고개가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제법 일품이며, 소나무가 매우 삼
삼하여 솔내음이 진동을 한다.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1)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2)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밑에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홍제동과 홍은동을 비롯하여
백련산(白蓮山) 산줄기와 은평구 일부가 바라보인다.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은동과 홍제동 일대를 비롯하여 산골고개 너머로 은평구와 서울~고양
경계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비슷한 높이로 북악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부암동이 보인다.

▲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서쪽인 홍제동으로 좀 내려가다가 남쪽으로 가늘고 가파르게 이어진 산
길로 접어들면 바위로 이루어진 옥동약수터가 나온다.
이곳은 한때 인왕산 서쪽을 대표했던 약수터로 물 뜨는 동네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으나 서대문
구청의 관리 소홀과 약수터를 지키는 노공(老公) 회원들의 감소, 수질의 부적합 판정으로 이제
는 초라한 행색이 되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작년 초여름에 발자국을 그은 경험이 있어 길은 훤하다. 이곳에서 계곡을
하나 건너면 조그만 약수터와 큰 바위가 나오며, 그들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6~7분 정도 내려가
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연등을 두른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환희사이다.


▲  전원주택 같은 환희사 외경


 

♠  인왕산 서쪽 자락에 소리없이 안긴 조촐한 산사(山寺),
오래된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한 인왕산 환희사(歡喜寺)

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338m)은 바위로 이루어진 각박한 경사의 암산(巖山)이
다. 시내에서 보면 산이 대개 협소해 보이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가보면 생각 외로 넓어 놀라게
된다. 겉과 달리 속은 깊고 넓은 것이다.

인왕산에서 가장 경사가 각박하고 건물 지을 자리도 없을 것 같은 서쪽 자락에 조그만 비구니
절인 환희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너무 없는 듯 자리해 있어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나도 그만큼 등잔 밑이 어두웠다.

이 절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보의 바다로 자부심이 대단한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곳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았다. 하여 누가 언제 창건하고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
는 절에 가서 묻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그만큼 법등(法燈)의 역사와 인지도의 끈이 매
우 낮은 것이다.
절이 있기 전에는 부근에 무당이 굿을 하거나 사람들이 수행을 하는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그
인근에 터를 닦고 환희사를 세워 지금은 인왕산의 주요 사찰로 성장했다.

나는 오래된 절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소장 문화유산이 있거나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같은 경
우를 제외한 80년도 안된 절에는 거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환희사에 주목을 하고 초파
일에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이 무려 2점이나 있기 때문으로 그들의 존재
가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이나 인왕산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
며, 20세기 중반 어느 때에 외지에서 모두 업어온 것이다. 역사가 짧고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환희사에서는 이들 불상을 후광(後光)으로 삼아야 장차 절을 꾸리기가 수월하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용화전, 요사로 쓰이는 건물 3동이 전부로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 일주문
(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했다. 경내는 작은 편으로 건물 3동에 딱 걸맞는 크기라 두 눈에 쏙
넣고 봐도 부담이 없다.
경내 북쪽과 동쪽, 남쪽은 경사가 급하며, 서쪽으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닦여져 있다. 절 주변은 속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이 울창해 산사의 기운을 더해주
며 남쪽에 조촐하게 계곡이 흘러간다.
이곳은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아기자기하다. 여인들의 공간이다보니 이쁘게 꾸
며진 것이다. 경내 곳곳에는 그들의 손맛이 담긴 온갖 귀여운 인형과 장식물이 놓여 있고, 뜨
락은 산뜻하여 먼지 하나 앉을 틈이 없다. 게다가 찬불가나 불교 관련 음악이 아닌 클래식 같
은 잔잔한 음악을 주로 틀어놓아 색다른 기분을 건넨다.
또한 다른 현대 사찰과 달리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어 평일이나 주말 낮에 오면 종종
차 1잔 얻어마실 수 있으며, 편안한 기분으로 절을 둘러보거나, 쉼터에서 쉬거나, 예불을 보거
나 사진 출사를 하게끔 배려해 주는 착한 절이다.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신경
이 다소 예민할텐데도 말이다. 허나 그렇게라도 해야 간접적으로나마 절의 존재를 조금씩 알릴
수 있다. 인지도가 누적이 되야 사람이 찾아오고 그에 따른 수입도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18시 이후에는 초파일 등의 경우가 아니면 대문을 걸어잠구며, 18시까지는 밖으로 나가줘
야 된다. (비구니가 대문을 닫으니 나가라고 함) 연약한 비구니들의 공간이고 문화유산을 지키
그렇게 하는 모양이니 그거 외에는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절 밑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장에서 대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요사(寮舍)이다. 이 건
물은 경내를 가리며 자리해 있는데, 그 흔한 기와집이 아닌 일반 주택으로 되어있어 겉으로 보
면 절집이 아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이다. 경내를 두른 연등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곳을 절로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 상식 밖에 요사를 지나면 뜨락이 나오면서 그보다 한층 높은
곳에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그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용화전이 나오니 이들은 다행히 기와
집이라 나름 절집의 분위기를 풍긴다.

절이 작고 조촐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음이 있으나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머무는 시
간은 조금 길어진다. 작년에도 인왕산 정상을 찍고 홍제동으로 넘어오면서 이곳을 들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용화전에 담긴 석불입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갈 기회를 노리다가 이번 초파일에 인연을 지은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왕
산을 넘어서 왔다. 그들 불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 절
의 존재를 길이길이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들 덕분에 이렇게 정갈한 비구니 사찰을 알게 되니
나로써는 고마울 따름이다.

절에 들어서니 오후 행사가 막 끝난 터라 경내가 꽤 부산하다. 뜨락 서쪽과 정자에는 가족 단
위 신도와 산꾼, 노공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 10~20대로 이루어진 행사 요원(학생 신도들)들은
행사 뒷처리와 먹거리를 파느라 바쁘다. 이곳 이전에 갔던 봉국사와 옥천암은 먹을거리를 무상
으로 제공했는데, 이곳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공양이나 떡은 꿈도 못꾼다. 게다
가 판매 가격도 속세만큼이나 야박하니 아무래도 초파일 특수를 노려 재정을 채우려는 모양이
다. 부처와 관음보살의 뜻에 따라 중생을 위해야 될 절이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것도 썩 좋
은 것은 아니다.


▲  대문 주변에 자리한 5층석탑
이 석탑은 왜정 때(또는 1950~60년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2층 지붕돌과 3,4,5층 몸돌에는 고색의 때가 약간 피어있다.

▲  연등이 춤을 추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뜨락 북쪽에는 석불입상을 세우고 서쪽에는 7층석
탑을 세웠는데, 그 주위에 아기자기한 장식물이 널려 있어 사진기를 흥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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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사 요사 -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다.

▲  인자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석불입상과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
대문 앞 5층석탑과 조금 비슷한 모습이다.

▲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상

▲  돌 위에 얹혀진 인형들

▲  이쁘게 치장된 뜨락 화단

▲  오리 솟대(왼쪽)와 인형의 만남


▲  환희사 대웅전(大雄殿)

▲  환희사 목불좌상(아미타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7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절 규모에 걸맞게 조촐한 모습이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아주 작은 관음보살과 법륜(法輪
)이란 동그란 바퀴를 두광(頭光)으로 두른 지장보살이 자리해 소위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고, 좌우 벽에는 신중탱(神衆幀), 산
신탱(山神幀), 독성탱(獨聖幀), 칠성탱(七星幀) 등의 탱화가 빼곡히 자리하여 삼성각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불단에 앉아 넉넉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목불좌상, 그는 원래 연천(漣川)에 있던 심
원사(心源寺)에서 넘어온 것이다. 심원사는 연천 지역에서 꽤 명성이 높았던 절로 6.25 때 파
괴되자 그곳에 있던 숱한 불상들이 고향을 잃고 외지로 흩어졌다. 이 목불좌상도 그중 하나로
환희사에서 어떻게 수습하여 이곳의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
이 불상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로 17세기 중반 전후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며, 덩치는 작은 편이나 그를 협시(夾侍)하는 좌우 불상이 그보다 훨씬 작아 여기
서만큼은 제법 커보인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로 그 사이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두 눈
은 명상에 잠긴 듯 포근히 감겨 있다. 눈썹 사이에 푸른 백호가 찍혀있고. 작은 코는 오똑 솟
아있으며, 조그만 입술에는 미소가 넉넉히 드리워져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수염이 나있고,
볼살은 별로 없는 작고 갸름한 얼굴로 작은 얼굴을 선호하는 젊은 현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다. 볼살이 절제되어 있으니 볼살이 많은 불상이나 포대화상(布袋和尙)보다는 더 미남으로 보
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복잡하다는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
나를 취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는 중부지방 목불상(木佛像)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6년 9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의 지위를 얻었다.

▲  대웅전 우측의 불화들
(영산회상도, 신중탱, 독성탱 등)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용화전


▲  환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8호

대웅전 좌측에는 용화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안에는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예전 명칭은 판석부조불입상(板石浮彫佛立
像)으로 발음하기도 참 어렵다.

이 석불은 두꺼운 판석(板石)에 새긴 입상(立像)으로 마애불(磨崖佛)과도 다소 비슷하다. 고려
석불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앞서 목
불좌상과는 달리 신체 비례와 조형감이 많이 떨어진다. 그 역시 다른 곳에서 가져왔으며, 고향
이 어디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 여기서는 막연히 미륵불(彌勒佛)로 심
심치 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

판석 위에 새겨진 석불은 보는 시각에 따라 고색의 기운도 별로 느껴지지 않아 근래 것으로 착
각하기도 쉽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다 씻겨가거나 눈과 코, 입의 위치만 확
인할 수 있는 정도이며,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머리 뒤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동그란 두광이 그를 밝혀주며, 몸에는 양 어깨를 가린 법의(法衣
)가 입혀져 있다. 가슴 밑은 얼굴처럼 닳은 부분이 많고, 몸 뒤에는 신광(身光)이 묘사되어 있
다. 석불입상 옆에는 조그만 귀여운 석상이 있는데, 서로 피부가 비슷해 같은 셋트임을 느끼게
한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이 아닐까 살짝 점쳐본다.


▲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지나치게 큰 정병(政柄)을 두 손에 쥐어들며 명상에 잠겨있다. 저 병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를 졸라서 1잔 받아보고 싶다.

▲  환희사의 조그만 극락, 대웅전 우측 정자 쉼터
누구든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쉴 수 있는 쉼터로 간식도 먹을 수 있게끔
조그만 탁자도 닦여져 있다.

▲  정자에 걸린 현판과 음악을 흘려보내는 조그만 스피커의 위엄~~

▲  정자 뒷쪽 풍경
그림 같은 산책로가 수풀 사이로 나 있으나 그 길이는 인생처럼 짧다.

▲  정자에서 바라본 경내 뜨락

▲  환희사를 뒤로하고 다시 속세로 컴백하다

초파일 특수로 간만에 북새통을 이룬 환희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빈 공간이 늘어간다. 음료
수도 거진 팔았는지 이내 장사도 접고 행사를 돕고 정리하던 앳된 여인네들도 일부만 남았다.
손바닥만한 이곳에서 목적한 2개의 불상을 질리도록 보고 정자 쉼터에서 지친 두 다리를 쉬고
16시에 그곳을 뒤로하며 속세로 길을 향했다.
시내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길 옆에는 인왕산에 몇 안되는 조그만 계곡이 온
전한 모습을 보이며 흘러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풍부해 밤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던 곳으로 이 골짜기를 '큰절골', 남쪽 청련사 부근 계곡을 '작은절골'
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계곡은 큰절골이라 부르면 되나 요즘에는 '환희사계곡'으로도 불린다.
절까지 길을 닦느라 계곡 북쪽이 좀 깎이거나 콘크리트에 묻힌 옥의 티가 상당하지만 계곡이
맑은지 동네 아이들이 냇물을 뒤집으며 수중 동물을 탄압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환희사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인왕산현대아파트와 홍제원현대
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길은 진정을 되찾으며, 5분 정도 더 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
온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면 의주로와 홍제역으로 바로 이어지는데, 마을버스를 탈 것도 없
이 5분 더 발품을 팔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가 알아서 모습을 비춘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을 겯드린 환희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
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하얀 암반을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환희사계곡(큰절골)

※ 인왕산 환희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
  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3번을 타고 인왕산현대아파트117동 종점에서 내려 도보 10분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1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인왕아파트교차로에서 우회전)
* 환희사는 보통 18시까지 개방한다. 그 이후는 들어가지 못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2동 산1-1 (☎ 02-735-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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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시정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음) 그러니 보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로 나오
   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5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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