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3.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2. 2022.01.02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3. 2018.01.30 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삼성산 염불사

▲  삼성산 염불사(염불암)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염불사에서 바라본 천하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

▲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염불사에서 바라본 안양 지역
(비봉산, 수리산)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과 차디찬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
이 팽팽히 맞붙던 3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안양(安養)에 있는 염불사와 망해암을 찾았
다.

삼성산(三聖山, 480m) 남쪽 자락에 자리한 염불사를 가려면 안양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
는 안양예술공원을 거쳐야 된다. 예술공원을 가르며 안쪽으로 들어서면 염불사로 인도하는
포장길(예술공원로245번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20~25분 정도 묵묵히 오르면 염불사가 활
짝 모습을 비춘다.


▲  소나무 그늘 밑에 앉아 삼성천을 굽어보는 안양정(安養亭)
<안양사입구 동쪽에 자리함>

▲  염불사로 인도하는 숲길(예술공원로245번길)
봄의 해방군이 거의 문턱까지 이르렀지만 삼성산 숲은 여전히 겨울 속을 방황한다.
허나 소쩍새가 울 때면 저들도 겨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활짝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삼성산 남쪽 자락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며 안양을 굽어보고 있는 ~ 삼성산 염불사(念佛寺)

삼성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깃든 염불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삼성산에서 삼막사(三幕
寺, ☞ 관련글 보기) 다음으로 큰 절이다. 오랫동안 삼막사의 부속 암자로 있으면서 염불암(
念佛庵)이라 불렸으나 근래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 '암(庵)'에서 '사(寺)'로 칭호를 높였다.

절의 이름은 신라 중기에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윤필(潤筆)이 이곳에 있던 토굴(土窟)에
서 불도를 닦으며 염불을 올렸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전한다. 윤필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
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으나 다들 신빙성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
다.
또한 926년(또는 936년)에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치고자 삼성산 옆을 지나다가
안양사 창건설화(☞ 관련글 보기)에도 등장하는 능정(能正)이 삼성산 자락에서 좌선(坐禪)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염불사의 전신(前身)인 안흥사(安興寺)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 때 유물이 전혀 없고 안양사(安養寺) 창건 설화와도 상당수 비슷해 이 역시 신빙
성은 떨어진다. 1407년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왕명으로 관악산의 여러 절과 함께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경내에 500년 묵은 보리수나무가 있어 이때쯤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
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이 없다가 1857년에 이르러 청허(淸虛)와 도인(道人)이 칠성각을 세
웠다. 1904년과 1927년에 중수했으며, 1930년에는 세심루(洗心樓)를 세우고, 1932년에 산신각
, 1941년에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 그리고 1964년에 미륵불을 세우고, 1992년에 대웅전
을 옮겨 크게 중창했으며, 2000년에 나한전을, 2008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지었다.

석축을 높게 다져 크고 작은 건물을 심었는데, 칠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20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에서 풍기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다. 소장문화유산은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500년 묵은 보리수와 19세기에 조성된 승탑(부도) 3기, 바위에 새겨진 마애승탑(磨崖僧塔, 마
애부도) 2기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마애부도는 못봤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 염불전, 칠성각, 영산전, 산신각 등 약 10동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뒷쪽에는 소나무가 솟은 멋드러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데,
그 벼랑에도 조그만 건물과 미륵불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그렇다고 요
란하게 벼랑을 밀어버린 것은 아니며 약간의 손질만 가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안양예술공원에서 삼막사, 삼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황금 길목이라 자연히 절을 둘러보는 수
요도 제법 되는 편이며, 벼랑에 닦여진 산신각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삼성산과 안양시내 풍
경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어루만져준다.

* 염불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2 (예술공원로245번길 150, ☎ 031-
  471-2300)

▲  옛 대웅전 자리에 세워진 염불전(念佛殿)

▲  염불전 앞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  요사(寮舍) 앞뜨락과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장독대들(왼쪽)
장독대에는 어떤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그 속살을 들춰보고 싶다.

▲  염불사 대웅전(大雄殿)

돌계단을 타고 경내로 들어서면 남쪽을 굽어보는 대웅전과 염불전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그 우측 염불전 자리에 있
었는데, 1992년에 주지 성수화상이 의상과 원효, 윤필 3명의 고승이 수도를 했던 터로 여겨진
다는 현재 자리로 옮겨 크게 지었다.
현재 염불사의 사세를 보여주듯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을 받치며 촘촘히 박혀있는 공포
는 그 아름다운 섬세함에 감탄이 새어 나오게 한다. 건물 주변으로 하얀 피부의 난간석을 둘
렀으며, 계단 앞에는 석사자 2기를 배치해 혹시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 대비했다.

대웅전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석가여래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
스처를 취한 석가여래 좌우로 수려한 자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시
립(侍立)해 있는데, 이들은 1992년에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웅전 좌측 석조관세음보살상

대웅전 좌측에는 2008년에 새로 지은 석조관세음보살상이 있다.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의 좌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쥐어든 지장보살(地
藏菩薩)이 관세음보살보다 훨씬 낮은 연화대(蓮花臺)에 서 있고, 우측에는 산신(山神)이 의자
에 앉아 있다. 그들 뒤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병풍처럼 들러져 있는데, 벼랑 윗쪽 소나무
사이로 독성각이 아찔하게 버티고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앞뜰에는 독특한 모습을 지닌 새하얀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8각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조그만 기단을 깔고, 그 위로 부처가 새겨진 8각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했는데, 그가 있기 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조차 없었다.

        ◀  염불사 보리수(菩提樹)
탑 옆에는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보리
수가 자라고 있다.
보리수의 원래 이름은 '보디 브리크샤(Bodhivr
iksa)'로 부처가 붓다가야 보리사에 있는 보리
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불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무화과와 흡사한
뽕나무과 상록수로 인도대륙 힌두교에서도 신
성시 여기는 나무이기도 하다.

보리수는 우리나라에는 그리 많지 않은 나무로
아무리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심장한
나무라고 해도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예외가 없
다. 제국의 시련을 겪어야 되기 때문이다. 나
무를 감싸던 푸른 잎들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간절
히 염원한다.

이 나무는 15세기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심었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적어도 조선 초기
에 염불사가 숨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500년의 장대한 나이를
먹었지만 높이 12m, 둘레 1.2m로 비슷한 나이의 다른 나무에 비해 체격은 조그만 편이며, 
양시 보호수 5-2호
의 작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羅漢殿)
염불전 뒤쪽에는 1990년대에 지어진 나한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0년에 조성된 500나한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염불사 산신각(山神閣)

대웅전과 나한전 뒤쪽에는 기암괴석으로 그윽한 높은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염불사의
든든한 후광이자 절을 더욱 장엄하게 꾸며주는 그 벼랑에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영산전,
미륵불 등이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미륵불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마치 천
하가 내 발 밑에 펼쳐진 듯, 천하 일품을 자랑한다.

대웅전 뒷쪽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제일 먼저 절벽 사이 좁은 공간에 들어앉은 산신
각을 만나게 된다. 경내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집으로 조선 후
기부터 전해오던 것을 1932년에 중수했다. 지붕은 목조이나 건물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산신도가 걸려 있다.
이곳에 서면 경내는 물론이고 삼성산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과 안양을 서쪽에서 보듬은
수리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삼성산 남쪽 산자락과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  독성각(獨聖閣)

산신각에서 동쪽으로 난 조그만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벼랑 위에 조마조마하게 버티고 앉
은 독성각이 나온다. 석조관세음보살상 바로 뒷쪽 벼랑으로 경내에서 가장 궁색하고 위험한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많은 자리 가운데 굳이 이곳에 힘들게 독성각을 닦았는지 의문이다.
독실한 불심(佛心)이 낳은 결과일까? 아니면 경내의 명물로 키우려는 욕심의 산물일까?

독성각은 산신각과 거의 쌍둥이꼴 모습으로 1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은 목조로 이루어
져 있고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바로 앞이 천길 낭떠러지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
다. 비록 난간이 둘러져 있긴 해도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으며 촘촘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산신각과 비슷한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
며, 건물 내부에는 근래에 그려진 독성탱이 걸
려있다.
독성탱에는 독성(獨聖) 할배와 동자, 사슴, 소
나무, 그의 본거지인 천태산(天台山)이 담겨져
있다.

   ◀  독성 가족의 단란함이 깃든 독성탱

산신각을 지나면 절벽에 등을 대며 남쪽을 바
라보고 선 석조미륵불이 모습을 비춘다. 1960
년에 주지인 기석화상의 꿈속에 미륵불이 나타
나 이마를 쓱쓱 어루만지며
'마애석불을 만들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당시 기석은 낡고 퇴락한 염불암을 다시 일으
킬 궁리를 했었는데, 미륵불의 현신에 용기를
얻고 1964년부터 5년간 공을 들여 석불을 완성
하고 공덕비를 세웠다.
미륵불은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서 있으
며, 전체적으로 풍만한 느낌을 던진다. 머리에
는 2중으로 된 보관(寶冠)을 썼고, 얼굴은 다
소 경직되어 보이며, 입가에는 넌지시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을 살짝 위로한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 왼손으로 여원인을 취하
며 안양 시내를 굽어보는 미륵불 옆에는 산신
각과 쌍둥이 꼴인 영산전이 있다.

▲  염불사 석조미륵불

미륵불에서 더 올라가면 그 계단의 끝에 칠성
각이 수비병처럼 자리해 경내를 굽어본다.
칠성각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겉보기와 다르게 1857년에 지어져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벼랑 사이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앉았으나 산신
각과 독성각보다는 조금은 여유로워 정면 2칸,
측면 1칸의 구조를 지녔으며, 내부에는 1979년
에 제작된 칠성탱이 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칠성각(七星閣)


▲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펼쳐진 칠성각 칠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앞서 산신각보다 조망의 품질이
조금은 높아졌다. (그래봐야 보이는 범위는 비슷함)

▲  19세기에 조성된 염불사 부도(승탑)들

영산전에서 대웅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나한전 서쪽에 자리한 부도
<浮屠, 승탑(僧塔)> 3형제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부터 도일당(道日堂), 인봉당(印奉堂), 서영
당(西影堂) 탑인데,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싹 집합시킨 것이다. 그들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탑신 피부에 탑 주인과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조
성 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단 도일당은 조성 시기 부분이 마멸됨)

▲  도일당탑

▲  인봉당탑

◀  서영당탑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왼쪽에 자리한 도일당탑은 높이 167cm로 바닥돌은 없다. 장대한 세월의 무심한 장난으로 탑이
두 동강이 난 것을 다시 붙였는데, 중간에 난 금이 그 흔적이다. 탑 중앙에는 얇게 홈을 파서
깨알처럼 글씨를 넣었으나 마멸이 심하며 탑 꼭대기에는 동그란 보주(寶珠)를 두었다.

중앙에 있는 인봉당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늘씬한 자태에 탑신을 올리고 반구형 보주로 마
무리를 지은 탑으로 높이 143cm, 조성 시기는 1816년이다. 도일당탑처럼 탑 앞쪽을 다듬어 글
씨를 넣었는데, 글씨가 아직은 선명하여 한자를 조금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리 무리는 없다.
그리고 오른쪽에 자리한 서영당탑은 1810년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이 탑의 거의 2/3를 차지
할 정도로 무척 크고 견고하다. 자연석을 가져와서 조금 손질을 가해 바닥돌로 깔고 탑과 반
구형 보주를 올렸는데, 옆에 있는 승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들은 19세기 초반 염불사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존재이자 경내에서 보리수 다음으
로 오래된 존재로 이들 외에도 경내 부근에 바위에 새겨진 19세기 마애승탑 2기가 있으나 인
연이 닿지 못해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음)


▲  염불사를 뒤로하며



 

♠  삼성산 남쪽 비봉산 자락에 높이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일몰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망해암(望海庵)

▲  망해암으로 인도하는 비봉산 숲길(임곡로)

안양예술공원 남쪽에는 삼성산과 관악산의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이 누워있다. 그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는 망해암이란 고찰(古刹)이 안양시내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그곳에 늙
은 석불 하나가 깃들여져 있고 조망과 일몰이 천하일품이라는 풍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과는 계속 인연이 닿지 않았고, 어느 3월 첫 무렵에 이르러 억지로 인
연을 붙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곳을 찾았다. (삼성산 염불사와 같은 날에 간 것은 아니나
같은 지역에 있고 서로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안양역(1호선)에서 안양마을버스 3-1번을 타고 비산1동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서 내렸다. 여
기서부터 두 다리에 의지해 오르막길(임곡로)을 올라가야 되는데, 처음에는 아파트와 학교,
주택들이 좌우에 펼쳐져 있으나, 5~6분 정도 오르면 싱그러운 비봉산 숲길이 펼쳐져 속세의
번뇌를 털어준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절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구불구불한 숲길을 20여
분 오르면 해발 200m 고지에 들어앉은 망해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
서 도보 30분 정도 걸리며, 안양예술공원에서도 망해암까지 산길이 이어져 있다.


▲  일몰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망해암 종무소(宗務所)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2층 건물로 윗층에서 바라보는 조망과
일몰 맛이 아주 좋다. (윗층 바깥 통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한 지붕 두 가족, 2층 건물
윗층은 천불전(千佛殿), 아랫층은 지장전

▲  지장전(地藏殿) 석조지장보살좌상
큰 바위를 다듬어 그의 거처를 닦았다.


망해암은 북쪽으로 안양예술공원과 삼성산이 보이고, 완전히 확 트인 서쪽으로 안양시내와 수
리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정말 좋으면 수리산 너머로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오는데
, 서해바다가 강제로 땅으로 매립되면서 바다를 볼 기회는 많이 줄었다. 어쨌든 바다까지 보
이는 매력 때문에 절의 이름도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란 뜻에 망해암이 되었으며,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과 일몰, 안양 야경(夜景)이 아주 진국이라 안양9경의 제4경이자 으뜸으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
大師)가 창건했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경내에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늙은 석조여래입상이 전하고 있어 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07년 서울을 위협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싹 누르고자 관악산과 삼성산 주변의
절을 중창했는데, 이때 중건의 혜택을 받았다고 전하며, 1803년에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
혜경궁홍씨)의 지원으로 중창했다. 그리고 1863년 대연화상이 증수했으며, 이후 6.25때 파괴
된 것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용화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천불전, 지장전, 종무소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 때 지어진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그는 용화전에 들
어있는데, 그의 보개에 1479년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그때 지어진 것으로 봤으나
석불의 감정 결과 고려 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여 보개에 쓰여진 내용은 석불 중수나 석
불 보개를 씌운 시기로 보인다.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꽤 늙은 석불이고, 그와 관련된 글씨를 품고 있음에도 그 흔한 지방
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가 2022년 5월에 비로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 재미난 전설이 하나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을 대략 이렇다. 조선 세종 시절
, 남부지방에서 조세를 싣고 서울로 향하던 배가 인천 월미도(月尾島) 부근을 지나다가 거센
풍랑으로 침몰 위기에 빠졌다. 선원들은 크게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던 그때 뱃머리에서 난데없
이 승려가 나타나 혼란에 빠진 선원들을 진정시켰고, 그 사이 풍랑은 멈추었다.
선원들은 승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어느 절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승려는 관악산 망해암에서
왔다고 답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은 서울에 도착해 조세 수송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그 승려에게 답례를 하고자 망해암
을 찾았다. 허나 승려는 없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석불만 법당에 덩그러니 있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고하니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이 매
년 공양미 1섬씩을 석불에게 보냈으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배로 조세나 쌀을 나르던 선원이나 관리가 절에 시주를 하며 뱃길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여기서 인천 앞 서해바다까지 바라보이니 기원을 하기에도 딱 좋다.
그들의 건의로 나라에서도 조세 수송의 안전을 위해 공양미를 보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픽션이란 양념을 적당히 넣어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망해암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55-1 (임곡로245, ☎ 031-443-5559)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  석불입상의 거처인 용화전(龍華殿)
용화전 밑에는 2층 건물을 두어 요사,
선방 등으로 사용한다.


▲  용화전에 봉안된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83호

용화전에 소중히 깃든 석조여래입상은 망해암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이곳의 대표 보물이다.
이렇게 보면 어깨와 얼굴, 보개(寶蓋)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것은 불단 때문에 가슴 아래가
강제로 가려진 것일 뿐, 나머지 부분은 잘 남아있다. 하여 불단 옆에서 봐야 그의 가려진 옆
구리와 아랫도리 모두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6월에 건물 마루에 오랫동안 가려진 밑도리를 들춰내 그의 다리와 발, 대좌 일부를
새로 확인했음)

이 석불은 높이 3.4m로 보개 밑에 '성화(成化) 15년 4월'이라 쓰여있어 1479년 4월에 석불을
중수하거나 보개를 씌웠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는 그때 조성된 석불로 봤으나
평가 결과 고려 초/중기 것으로 나와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제일 오래된 석불로 꼽힌다.
육계(무견정상)가 솟은 머리에는 둥근 모습의 보개가 씌워져 있으며,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을
칠했으나 지금은 많이 지워졌다. 상호와 신체는 하얀색으로 분을 칠했으며, 나발을 갖춘 머리
는 다소 마모되었다.
머리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있으며,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듯한 두 눈은 반쯤 떠서 아래를 보
고 있고, 입과 코는 두툼하다. 양쪽 귀는 매우 크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두껍
게 처리했다.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과 검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렸다. 20세기 이후 조금 변형되긴 했으니 상태는 괜찮은 편으로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진
탓에 고려와 조선 초기 석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앞서 망해암 전설에서 선원을 구한 승려의 화신으로 나오며, 조정에서도 공양미를 보내 그를
챙겨줄 정도로 그가 있기에 망해암도 이렇게 무탈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망해암에 왔다면
이 석불도 꼭 챙겨보기 바란다. 그를 놓치면 망해암의 50%를 놓친 것과 다름이 없다.

▲  옆에서 바라본 석조여래입상의 위엄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부분이 싹 모습을 비춘다. 약간의 변형과
세월을 탄 흔적이 좀 있으나 건강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  용화전 지킴이, 신중탱(神衆幀)

▲  망해암에서 바라본 안양시내와 수리산


▲  오늘도 해는 진다. 망해암에서 바라본 일몰

천하를 따사롭게 대피던 햇님은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그 틈을 타서 달님이 주관하는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고 검
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른다.
하여 여기서 바라보는 일몰과 조망 외에도 안양의 야경도 정말 일품인데, 이날 야경까지는 생
각이 없고 날씨도 추우므로 야경은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로 내던지고 안양예술공원으
로 쿨하게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3월 2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안양 삼성산 삼막사, 석수동 석실분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3층석탑
▲  삼막사3층석탑
 



 

겨울 제국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를 완전히 휘어잡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삼성산
삼막사를 찾았다.
삼성산(三聖山, 481m)을 오르면 삼막사는 거의 거쳐가기 마련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
려있던 12시에 서울대입구역(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6515번(양천차고지
↔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청, 서울대를 지나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
다. 바로 여기서 삼막사를 찾기 위한 삼성산 산행을 시작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를 지나 호암산(虎
巖山, 385m) 정상 부근에서 속세(俗世)에서 가져온 먹거리(김밥, 과일, 과자 등)로 간단
히 점심을 때웠다.
호암산 정상에서 삼성산까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삼성산 서북쪽 능선이 펼쳐져 있는
데, 능선길이 느긋하고 각박한 구간이 별로 없어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장군
봉과 운동장바위, 446봉을 지나 15시에 삼성산 정상 서남쪽에 자리한 삼막사에 도착했다.


▲  경내에서 내려다본 삼막사 일주문(一柱門)



 

♠  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삼성산의 대표 산사,
~ 안양 삼막사(三幕寺)

▲  밑에서 바라본 삼막사 - 마치 산 위에 닦여진 요새를 보는 것 같다.

삼성산 정상(481m) 서쪽 36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막사는 삼성산(三聖山)의 대표적인 고찰(古
刹)이다. 오래된 절들은 그럴싸한 창건 설화나 사연을 하나씩은 지니고 있기 마련인데, 이곳
역시 창건 설화 한 토막을 내밀고 있다.
때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시절인 677년, 신라(新羅) 불교의 핵심 인물인 원효
(元曉)와 의상(義湘), 윤필(潤筆) 3명의 고승이 삼성산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는데, 원
효가 지은 막이 1막, 윤필은 2막, 의상은 3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자리에 절을 세우면서 그들이 막을 지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삼막사라 하였으며 산
이름도 삼성산이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삼성(三聖)은 3명의 성인으로 원효, 의상, 윤필을 뜻
한다. 하지만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의 좌우를 지키는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삼성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 이름을 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삼성산에는 절이 많았다. (지금도 많음)

삼성산의 이름은 그렇다쳐도 삼막사 창건설화는 어디까지나 삼막사에서 지어낸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창건 시기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상은 당나
라에서 가져온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추구하면서 왕경(王京, 경주)과 그
가 지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등 10개 사찰에 주로 머물러 있었으며, 원효 또한 불교 대중화
를 위해 민중에 뛰어들던 시기이므로 그가 지은 절은 정작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절 이름인 '
삼막'은 어디서 나왔을까?
관음사(觀音寺)로 불리던 신라 후기 또는 고려 때, 절이 나날이 융성하여 도량의 짜임이 송나
라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격하게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자연스레 삼막사
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는데, 절에서 창건 설화를 지으면서 한자를
바꾸고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신라 고승 3명을 강제로 등장시켜 그들이 막을 치고 머물렀다고
설화를 짠 것이다. 그러니 절의 처음 이름도 '삼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후기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道詵)이 절을 중건하고 불상을 봉안하여 관음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며, 고려 태조(太祖)가 중수하여 다시 삼막사로 바꿨다고 전한다. 태조는 삼막사
남쪽에 있는 염불사(念佛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안양사(安養寺, ☞ 관련글 보러가기) 창
건 설화에도 절찬리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백제(後百濟)를 치러 갈 때, 그 길목인 삼성산에
여러 절을 짓거나 중수를 도와준 것으로 여겨진다.

1348년 나옹(懶翁)과 지공(指空)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날렸고,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나라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1398년 왕명으로 중건했다. 그 인연으로 북
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동쪽에 불암
사(佛巖寺,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중 삼막사는 남쪽에 있으므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역할을 했는데, 그 연유로 남왈삼막(南
曰三幕)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으나 법당이 타지 않아서 그들은 참회를 하고 철수했다고 전하
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1880년에는 의민(義旻)이 명부전을 짓고,
1881년 칠성각을 지었으며,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池雲英)이 절 옆에 백련
암을 지어 은거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천불전과 명부전, 망해루, 대방, 칠성각, 육관음전 등 10여 동이 있으며, 상당수의
건물이 지형상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
석탑과 명부전, 사적비, 남녀근석, 마애3존불 등이 있고, 삼귀자 바위글씨와 감로정 등의 비
지정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아낌없이 대변해준다. 특히 3층석탑은 이곳에서 가장 늙
은 존재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이라 절이 적어도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음을 알려준다.

삼막사는 삼성산 정상부 서쪽 요충지에 자리하여 산꾼과 답사꾼들이 많이 찾아오며, 특히 삼
성산 정상을 가거나 삼성산을 가로지를 경우 거의 꼭 거쳐야되는 황금 길목에 위치해 사람들
로 늘 북적거린다. 게다가 절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도 가능하다. (서울대와 삼
성산성지, 호압사, 경인교대, 안양예술공원에서 등산으로 1~2시간 정도 걸림)
또한 서울과 안양(安養) 도심에서 가깝고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괜찮으며, 공기질
이 좋을 때는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잡힌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4 (삼막로 478, ☎ 031-471-5978)


▲  삼막사 명부전(冥府殿)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서울대와 호압사, 호암산 주변, 경인교대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일주문에서 계단길을 오
르면 비로소 삼막사 경내에 이른다. 경내는 일주문 윗쪽에 높이 자리해 있는데, 망해루와 범
종각 등을 바깥에 내밀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경내 북부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천불전과 망해루 등 다
른 건물들이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명부전은 거의 혼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
향(南向) 건물이 이 땅에서 일반적이긴 하지만 이곳만큼은 그 원칙은 서향(西向)이 진리이다.
(물론 지형적인 영향이 크지만;;)
이 건물은 1880년에 의민이 지은 것으로 1975년에 수리를 했다. 네모난 장대석(長臺石)으로
다진 기단(基壇)을 2단으로 깔고 그 위에 집을 얹혔는데, 현재 맞배지붕 건물에 흔치 않은 방
풍판(防風板)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팔작지붕인 것을 개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태로 귀포의 용머리 조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으며, 건물 내부에
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시왕상은 명부전 이상으로 늙은 보물이다.


▲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4개의 지물, 사물(四物)이 담겨진
범종루(梵鍾樓)

▲  삼막사 망해루(望海樓)

범종루와 함께 경내를 가리고 앉은 망해루는 삼막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진 것을 20세기에 중건했는데, 건물 이름 그대로 바
다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나 인천(仁川)과 시흥(始興), 안산(安山) 지역의 갯벌이
마구 매립되어 육지가 늘어남에 따라 바다는 그만큼 멀어졌고, 대기오염도 툭하면 말썽을 부
려 이제는 공기질이 아주 좋은 날이 아닌 이상은 바다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망해루' 이
름 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막사는 서울을 지키는 남쪽 비보 사찰이라 선비와 관리들의 출입이 잦았는데, 그중에는 백
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쓸데없이 능했
던 송시열(宋時烈) 마저 질리게 만든 문인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 직전에 삼막사를 찾아 망해루에 걸터앉으며 시 1수를 지었다.

 푸른 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
 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
 이때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
 눈 들어 산하를 보니 시름을 이길 수 없도다

허나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시가 될 줄은... 이처럼 망해루는 문인들 시에 종
종 등장했으며, 현재는 주로 강당의 역할을 맡고 있다.


▲  망해루 옆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경인교대를 비롯하여 안양 석수동, 광명 남부 지역, 시흥시,
그리고 멀리 인천 땅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이날은 아무리 인상을
쓰고 살펴도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  청기와를 지닌 육관음전(六觀音殿)

명부전 옆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6명의 관세음보살이 봉안된 육관음전이 청기와 지붕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칸을 구분 짓
는 기둥이 돌로 이루어져 있어 나름 이형(異形)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다양한 관세음보살을 모아놓은 육관음전 내부

▲  삼막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2호

육관음전과 천불전 중간 높은 곳에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
려운 석축 윗쪽 바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인데, 보통 석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다소 구석진 곳에 두어 사람의 손길을 피하게 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삼막사 출신인 승려 김윤후(金允
侯)가 몽골(원나라)의 제2차 침공(1232년) 때 처인성(處仁城, 용인 남쪽)에서 몽골군 우두머
리인 살리타이를 처단하여 대승을 거둔 것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살례탑'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김윤후는 이후 충주(忠州)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그 위엄을 크게 떨쳤으며, 나라에서 상장군(
上將軍) 직을 내리려고 했으나 쿨하게 거절했다.

탑의 높이는 2.55m로 조그만 편인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3층 탑
신은 옥개석(屋蓋石, 지붕돌)만 겨우 남은 실정이다.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며, 탑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장식이 하얀 피부
를 드러내고 있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탑 뒤에는 소나
무들이 푸르름을 드러내며 탑의 우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  감로정 석조 옆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삼막사는 육관음전이라 하여 6명의 관세음보살을 두었는데, 밖에도 마애불(磨崖佛)
비슷하게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두어 관음도량처럼 꾸몄다.

▲  감로정 석조(甘露井 石槽)

3층석탑 바로 밑에는 삼막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감로정 석조가 누워있다. 삼성산이 베푼 감
로(甘露) 같은 약수가 늘 넘칠 정도로 쏟아져 나와 대자연 형님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
는데, 감로를 머금은 거북 모양의 석조에는 고색의 때와 주근깨가 자욱하다. 그 역시 삼막사
의 오래된 유물 중 하나로 앞쪽에 '甘露井(감로정)'이란 글씨와 183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글씨가 있어 그의 이름과 경력을 알려준다.

거북 모양의 석조 옆에 원통형 석조는 근래 마련된 것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뚜껑이 닫힌 거
북 석조에서 직접 물을 떠다 마셨다. 지금은 옆으로 홈을 내서 물이 원통형 석조로 흘러내려
와 그것을 마시면 된다. 특히 이 석조에는 조선 정조 때 인물인 김창영(金昌永)의 탄생 설화
가 전하고 있다.


▲  삼막사의 법당 역할을 하는 천불전(千佛殿)

육관음전 못지 않게 청기와 지붕을 드러내고 있는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역시나 서쪽을 향하고 있다.
천불전이란 이름 그대로 1,000개의 조그만 불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이 땅의 7천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이다. 귀찮아서 건물 내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현재 법당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건물 뒷쪽에는 원효가 수행했다고 전하는 토굴(土窟)이 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宗務所) 옆 쉼터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아직까지 남은
식량이 있어서 커피와 과자 등을 꺼내 잠시나마 조촐한 향연을 즐긴다. 서쪽 전방에 펼쳐진
일품 조망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며,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
람은 번뇌와 온갖 상념을 싹 털어간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삼막사의
나머지 부분을 보고자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보통 천불전과 명부전, 육관음전, 3층석탑이 있는 경내가 삼막사의 전부로 착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삼막사의 함정이다. 아직 사적비와 삼귀자, 마애불, 남녀근석 등의 문화유산이 남아있
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을 지나치면 삼막사의 절반 밖에는 못보는 것이다.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거 말끔하게 보고 가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삼막사에 대한 작은 예의가 될 것이다.
사적비와 삼귀자는 경내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마애불과 남녀근석(칠성각 구역)은 5~6분 정
도 산을 타야 된다.


▲  삼막사 사적비(事蹟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길을 접어들면 바로 왼쪽 높은 곳에 빛바랜 비석 하나가 눈에 아른
거릴 것이다. 그는 삼막사의 일기장인 사적비로 네모난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인데, 삼막사 창건 설화부터 조선 후기까지 내력이 적혀있으나 아쉽게도
비문(碑文) 상당수가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관악산맥 삼성산 밑에 있다는 것과 절 이름이 삼막사로 향로봉이 왼쪽에 있다는 것, 사
적비를 1707년에 세웠음을 알리는 내용만 간신히 확인이 가능하다.


▲  산신각 - 바위에 새겨진 마애 산신탱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에 깃든 산신탱이 마중을 한다. 지팡이를 든 대머리 산신 할배를 중심으
로 동자와 호랑이, 소나무, 구름, 햇님 등을 담았는데, 색을 입히지 않아서 윗쪽을 제외하면
모두 하얀색이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말이다.
이렇게 산신탱을 닦고 그 주변을 노천식 산신각(山神閣)으로 삼았는데, 산신탱 앞에는 중생들
이 올린 막걸리와 사탕, 과자, 떡 등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삼귀자(三龜字) 바위글씨를 머금은 바위

예전에는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가려면 무조건 사적비와 삼귀자 앞을 지나가야 했다. 허
나 지금은 질러가는 길이 생겨서 그들 앞을 굳이 지나갈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들은 삼막사의
오랜 보물들이니 이곳이 초행이라면 꼭 살펴보기 바란다.

산신탱을 지나치면 기묘하게 생긴 삼귀자 바위글씨가 발목을 붙잡는다. 바위 피부에 쓰인 글
씨는 모두 거북 귀(龜)로 그 글씨를 전서체 등 다양한 모습으로 디자인하여 새긴 것인데, 오
른쪽 글씨는 그나마 귀자 비슷하게 생겼으나 무슨 부적 분위기가 나고, 가운데 글씨는 엉금엉
금 기어가는 거북이(또는 무당벌레) 모습 같으며, 왼쪽 글씨 또한 거북이를 닮았다.
이들 삼귀자는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의 친형 지운영(地雲英, 1852~1935)
이 이곳에 소박하게 백련암(白蓮庵,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을 짓고 은거했을 때 쓴 것으로 지
석영이야 워낙 인지도가 높아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그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운영은 여기서 관세음보살 누님을 친견하는 꿈을 꾸고 너무 기뻐 새겼다고 하며, 삼귀자 이
웃 바위에 '관음몽수장수 영자(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해서 그 소감을 밝혔다.

삼귀자 글씨의 크기는 왼쪽부터 높이 74cm, 77cm, 86cm이며, '불기(佛紀) 2947년 경신중양 불
제자 지운영'이란 글씨가 있어 1920년에 그가 썼음을 귀띔해 준다. 그리고 옆 바위에는 시주
자 명단이 적힌 명문이 있다.


▲  거북귀(龜)의 화려한 변신, 삼귀자(3개의 거북귀) 바위글씨의 위엄
명필가는 이렇게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악필가는 살아있는 글씨마저
죽여버린다.

▲  삼귀자 안내문 뒷쪽 바위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 바위글씨



 

♠  삼막사 마무리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①

삼막사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까지는 5~6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그만큼 외딴 곳에 떨어
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까지는 돌로 길을 잘 닦아놓아 통행에 어려움은 없으며, 혹시나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연분홍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다.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②

▲  삼막사 남녀근석(남근석) - 경기도 지방민속문화재 3호

삼막사 경내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 칠성각 구역에 이르면 아주 재미있게 생긴 바위가 마
중을 한다. 바로 삼막사의 백미이자 이곳에서 꼭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근석(男根石)과 여근
석(女根石)이다.
이들은 2개의 바위로 남쪽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남근석이, 북쪽에는 여인네의 은밀한
부분을 닮은 여근석이 누워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특히나 여근
석은 그 부분과 너무 닮아서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거시기하게 생긴 돌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이른바 성기신앙(性器信仰)
의 대상으로 격하게 숭배를 받았다. 이 바위를 만지며 기원을 하면 아들 낳기와 출산에 효험
이 있다고 전해져 석가탄신일과 7월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특히 아줌마들)이 찾아온다.
남근석의 높이는 1.5m, 여근석은 1.1m로 삼막사는 이 바위를 매우 애지중지 다루고 있다. 여
자를 멀리해야 되는 절간에서 예민하게 생긴 바위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점이 참 이채롭기
까지 하는데, 이는 모두 절의 인지도와 수입을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에는 그들
옆에 마애불을 세우고 칠성각을 세워 칠성신앙까지 어우러진 현장으로 만들었다.


▲  대자연 형님의 심술궂은 작품, 여근석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여근석의 위엄
앞이나 옆이 아닌 바로 위에서 보면 기가 막히게 실감이 난다. 마치 그 모습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느낌. 나는 쑥쓰러워서(?) 위에서 사진을 담지 않고
약간 옆에서 살짝(?) 담았다. 이거 좀 무안해서 말이지 ~~~!

▲  바위에 씌워진 삼막사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바위에 깃든 마애3존불의 거처로 1881년에 지어졌다. 바위와 마애불에 맞게 짓다 보
니 지붕이 2겹이 되어버렸는데, 마애불이 바라보는 서쪽에 문과 성인 키 정도의 계단을 내었
다. 전실(前室)처럼 자리한 건물 내부는 마치 석굴(石窟) 마냥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중
생들이 달아놓은 조그만 인등(引燈)이 강인한 협동심을 드러내며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삼막사 마애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4호

칠성각에 담긴 마애3존불은 칠성(치성광여래)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
보살(月光菩薩)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존재를 칠성이라 한 것은 건물 이름이 바로 칠성각
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칠성각인데 엉뚱한 존재가 중심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연화좌(蓮花座)에 앉아있는데, 보관(寶冠)을 눌러쓴 양쪽 보살상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칠성은 두 손을 가부좌(跏趺坐)를 튼 무릎 위에 대고 보륜(寶輪)를 들고 있
다.
수인(手印)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얼굴부터 옷주름까지 진하게 남아있어
형태를 알아보는데 문제는 없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마애불 밑에는 고맙게도 '乾隆二十八年癸未八月日化主悟心'이란 명문이 있어 1763년 계미년 8
월에 화주(化主) 오심이 조성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 땅에 칠성을 담은 그림(칠성탱, 칠
성도)은 많지만 이렇게 바위에 마애불로 새긴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조성 관련 명
문까지 새겨져 있어 당시 마애불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

마애3존불의 눈, 입, 귀, 눈썹이 매우 선명하나 코는 닳아져 형태만 남아있다. 이는 그 코를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아낙네들이 그의 코를 마구 갈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성
기신앙의 현장이 옆에 있으니 그 현상은 심했으리라, 그렇게 중생들에게 코까지 떼였으니 마
애불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마애불이 누구를 위해 있는가? 바로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 중생을 위해 기꺼이 코 하나 내놓는 것은 그들의 임무이며, 코는 나중
에 새로 달아도 된다.


▲  칠성각을 뒤로하며



 

♠  삼성산 서남쪽 능선에 숨겨진 아주 늙은 무덤,
석수동 석실분(石室墳)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6호

이렇게 삼막사를 고루고루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이제 고개가 아픈지 슬슬 지
평선 너머로 내려앉을 준비를 한다.
염불사(염불암)를 둘러보고 안양예술공원으로 내려갔는데,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삼
성산의 숨겨진 명소이자 은자(隱者)인 석수동 석실분을 이날의 마지막 메뉴로 둘러보기로 했
다.

석수동 석실분은 안양예술공원 공영주차장 뒷쪽에 있는 석수동 마애종(磨崖鍾)을 기준으로 삼
아서 찾는 것이 편하다. 마애종에서 서쪽 길(예술공원로117번길)로 들어가면 막다른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예술공원로 117번길)로 접어들면 안양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쭉 올라가면 된다. 이곳은 옛날
에 광산이 있던 곳으로 마을의 밥줄이던 광산이 없어지면서 가옥 몇 채와 폐광의 흔적만 황량
하게 남아 늦은 시간에 오면 으시시함까지 느끼게 한다.

석실분을 알리는 이정표는 다행히 넉넉하게 닦여져 있어 길을 잃을만하면 나타나 길을 비춰준
다. 심지어 무덤 50m 전까지도 이정표가 있다. (석수동 마애종에서 도보 20분 거리)

▲  돌탑 위에 피어난 석실분 이정표

▲  석실분으로 인도하는 산길

▲  북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  동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석수동 석실분은 삼성산 서남쪽 능선 30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국시대 무덤이다. 보통 고구려
무덤들은 흙무덤과 돌무덤(4세기 이후) 중심으로 주로 평지에 널려있고, 백제 무덤은 거의 흙
무덤 중심으로 바깥은 흙으로, 안은 돌로 돌방(석실)을 만든 구조인데, 대체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다. (백제 돌무덤도 석촌동고분군을 비롯해 일부 남아있음) 그리고 신라 무덤은 흙으로
다지고 안에 돌방을 넣은 형태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고, 가야는 특이하게 산자락이나 능선
을 주로 선호했다.

우리가 찾은 석수동 석실분은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가야 무덤이 아닐까 싶지만. 가야의 무덤
은 아니다. 가야(伽倻)의 영역은 경기도에 이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히 삼국시대 무덤
으로만 여겨질 뿐, 정확한 조성 시기와 무덤 주인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
으나 무덤 안에 석실을 다지고 윗도리에 흙으로 봉분(封墳)을 씌웠으며, 바깥과 석실(石室)을
잇는 연도(羨道)가 없는 횡혈식고분(橫穴式古墳)인 것으로 보아 6~7세기 이후 신라 무덤으로
여겨진다.
비록 봉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심술쟁이 자연의 손길, 일확천금을 노린 도굴꾼의 검
은 마수로 오래 전에 녹아 없어졌지만 석실까지 갖춘 규모와 안양시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한 점으로 보아 안양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나 지방 세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왜 하필이면 이런 첩첩한 산능선에 무덤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양사 동쪽 산자락에도 늙은
고분이 1기 있다고 하며(이곳은 확인하지 못했음), 지형 조건을 통해 조그만 고분이 더 숨겨
져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나 아직까지 이 무덤을 포함하여 주변을 싹 뒤집지는 못했다.

무덤은 산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옛날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라 발견된
유물은 없다. 들리는 풍문에는 여기서 금관(金冠)과 금귀걸이가 나왔다고 전하는데, 진위 여
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히 높은 인물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흙으로 다진 봉분은 무참히 벗겨나가 흔적은 없으며, 석실과 석실 천정을 이루던 거대한 판석
(板石)이 대머리처럼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이다. 석실 내부는 길이가 3.4~4.5m, 폭 1.5~1.7
m, 높이 85~100cm이며,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동/서/북벽을 쌓았고, 남쪽 벽은 커다란 판
석 1매로 축조했다. 그리고 3개의 넓다란 판석으로 석실을 덮었는데, 가운데 판석이 파괴되어
무덤의 속살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연도가 생기기 이전 형태로 여겨지며,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흥군(始興郡)
35. <고분>,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의 후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여기서 귀부는 안양사 귀부로 여겨지나 확실치는 않
음)

▲  세상을 향해 입을 벌린 석실분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①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②

무덤 내부는 문화유적 보호 차원에서 들어가면 안되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상태라 살짝 들어
가 볼 수 있다. 하지만 깊이가 1.5m 정도로 깊고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없어 다리에 무리가
없도록 조심을 기해 내려가야 된다.

주인도 오래전에 떠나버린 무덤 내부는 상석(床石)처럼 놓인 돌을 빼고는 텅 비어 있다. 무덤
이라기보다는 임시 거처나 아지트 같은 기분이다. 소름이 끼치는 무덤의 속살이지만 이곳을
알리는 문화유산 안내문이 없고, 옛 고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게 무덤인지 군사시설인지,
숨겨진 아지트인지 헷갈릴만하다. 누가 이런 곳에 무덤을 쓸 것이라 생각을 하겠는가. 죽어서
도 권력과 부귀를 누리고 싶었던 옛날의 어느 부질없는 망족(望族, 귀족)의 욕심이 이 무덤을
탄생시켰고, 그 욕심에 대한 혹독한 대가로 사람과 자연, 세월에 의해 여러 차례 털리고, 파
괴되는 비운을 맞으며 '내가 과연 무덤일까?' 이곳의 성격마저 크게 흔들어 놓았다.

햇살이 조금씩 내려앉은 석실 내부는 오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다. 학우봉과 삼
막사 방면으로 산길이 나있지만 다소 외진 숨겨진 곳이라 이곳을 지나는 산꾼의 수요는 별로
없으며 석실분 내부는 포근하고 비바람을 피하기에 좋아 간단한 먹거리나 손전등을 갖춘다면
염치불구하고 하룻밤 살짝 머물고 싶은 곳이다. 물론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그리해서는 안되
지만 정말 나만의 비밀 공간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간다.


▲  석수동 석실분에서 바라본 천하, 안양시내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안양을 서쪽에서 감싸는 수리산이다.


무덤 밖에서 눈 아래로 펼쳐진 속세를 바라보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수리산과 삼성산 사
이에 둥지를 튼 안양시내를 바라보니 그곳이 나의 영지(領地)인양 거만한 착각에 마음이 잠시
즐거워진다. 무덤 주인도 아마 그런 것 때문에 노비와 백성들을 닥달하여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은 아닐까?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
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면 검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환상적인 야경
을 선보인다. 안양의 야경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안양예술공원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망해
암(望海庵)도 좋지만 석수동 석실분도 엄지를 강하게 치켜들며 추천하고 싶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236-9


▲  석수동 석실분에서 맞이한 일몰
이렇게 하여 삼성산, 삼막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12월 1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묵은 해의 끝에 찾아간 안양예술공원, 안양사터 나들이 '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안양사지와 김중업박물관

▲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  석수동 마애종


 

새해가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건만 벌써 연말의 끝에 이르렀다. 이제 며칠이 흐르면
올해는 완전히 끝나고 새해로 포장된 날이 밝아와 연말 우울감에 빠진 인간들에게 새해
의 부질 없는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은 챗바퀴처럼 비슷한 데를 돌
고 또 돈다. 하여 연말의 우울감도 잠시 잊을 겸,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로 삼성산 남쪽
에 길게 누운 안양예술공원을 찾았다.

안양예술공원은 삼성산(三聖山)과 관악산(冠岳山)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으로 경관이 아
름답고 볼거리가 풍부하여 소풍 및 등산/답사/출사/피서 수요가 대단하다. 게다가 접근
성도 매우 좋고 서울과도 지척이라 계절과 날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 마를 날이 없다.
관악산과 삼성산이 사이좋게 빚어놓은 삼성천을 따라 서울대 관악수목원까지 길게 이어
져 있는데 비록 예술공원을 칭하고 있지만 원래는 안양유원지로 70여 년의 기나긴 역사
를 간직한 서울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이다.
1950년대에 벌써부터 수영장이 생겼을 정도로 서울 근교의 제일 가는 유원지로 미친 존
재감을 드날렸으나 1990년대 이후 서서히 망해가던 것을 2005년에 안양시에서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자 안양예술공원으로 새롭게 간판을 갈아치우고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
젝트'를 도입했다.
그 프로젝트에 따라 국내외 예술 작가의 예술 작품 50여 점을 공원에 설치하여 '지붕이
없는 미술관'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고, 삼성천과 산책로, 편의시설 등을 정
비하고 조명시설까지 갖추어 야경(夜景)까지 배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유원지
기능을 완전히 내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원래부터 삼성산과 관악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유원지라 그 성격을 완전히 갈아엎는 것은 어렵다. 휴양과 나들이, 유원지의 기능을 바
탕으로 문화와 예술을 얹힌 것이 지금의 안양예술공원이 되겠다.


▲  안양예술공원을 촉촉히 어루만지는 삼성천 (안양워터랜드 주변)


 

♠  칙칙한 공장을 걷어내니 숨겨진 절터가 기지개를 켜는구나~~!
제약공장에서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거듭난 상큼한 현장
~ 안양사터(安養寺)터와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안양예술공원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옛 유유산업과 안양사터를 만나게 된다. 예술공원의 젖줄
인 삼성천 북쪽에 자리한 이들은 예술공원의 어귀로 예술공원로(공원 산책로)에서도 훤히 바
라보이는데 예전에는 유유산업이란 제약 공장이 들어앉아 고얀 연기로 하늘과 삼성산을 찌르
던 현장이었다.
삼성산과 안양유원지의 아름다운 경관을 적지 않게 들쑤시던 유유산업은 1959년에 유특한 회
장이 세웠다. 비나폴로 등의 비타민을 생산하던 제약 공장으로 공장 건물은 당시 건축의 1인
자로 삼일빌딩과 평화의문, 프랑스대사관 등을 설계했던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했
으며, 굴뚝과 경비실까지 모두 그의 손에서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공장이 들어앉은 터는 안양의 지명 유래가 되었던 안양사터였다. 허나 그
때까지만 해도 바깥으로 드러난 절터의 흔적은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약간의 주춧돌
뿐이었고 오로지 경제 개발이 우선이었던 시대라 절터를 싹 밀고 공장을 닦았다.

이후 안양유원지 초입에서 의약 발달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던 유유산업은 2007년, 공장
증축을 꾀했으나 인허가 제한으로 어렵게 되면서 48년 동안 기대던 안양 공장을 버리고 충북
제천(堤川)으로 둥지를 옮겼다.
유유산업이 그렇게 자리를 뜨자 안양시는 공장과 부지를 240억에 매입했으며, 문화재청의 권
고에 따라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제외하고 모두 부셨는데, 그 과정에서 공장에 가려져
고통받던 절터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차에 걸쳐 발굴조
사를 벌인 결과 '안양사(安養寺)'라 쓰인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안양사터임이 밝혀졌으며,
중초사와 안양사가 별개의 존재가 아닌 같은 존재임이 드러났다.

안양사터의 등장으로 잔뜩 흥이 오른 안양시는 이곳을 김중업박물관과 안양사지 전시관을 갖
춘 복합문화공간이자 안양예술공원을 수식하는 상큼한 꿀단지로 꾸미기로 마음 먹고 2013년에
발굴로 어수선했던 안양사지를  복원했다. 그리고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손질하여 드디
어 2014년 3월 28일, 안양 최초의 박물관이자 안양사터까지 아우른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때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2달 동안 열렸으며 2017년 9월에는 평촌에 있
던 안양박물관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2개의 박물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김중업의 일생과 작품을 다룬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관련
문헌 자료, 안양시의 역사와 문화를 머금은 안양박물관, 그리고 특별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이들 전시관은 모두 김중업이 설계했던 옛 유유산업 건물을 다듬은 것으로 뜨락에는 옛
안양사터가 펼쳐져 있어 신라 후기와 고려, 조선, 현대까지 모두 아우른 문화/역사의 공간이
다.


▲  중초사지(中初寺址) 3층석탑과 당간지주

유유산업이 멋모르고 깔고 앉았던 안양사터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시절인 826
년에 창건된 중초사(中初寺)에서 비롯되었다.
중초사는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약간의 건물터를 남겼는데 당간지주의 겉모습은 그저 흔한 모
습이지만 이 땅에서 유일하게 조성 시기와 공사 참여자 이름, 절 이름이 담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것만으로 이미 다른 당간지주와 크게 차별화된 가치가 높은 보물이다. 특히 안양사에
묻혀 잊혀질뻔한 중초사의 이름 3자를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으며, 바로 그 명문 덕에 일찌감
치 보물 4호라는 큼지막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조성 명문은 서쪽 돌기둥 바깥쪽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26년 8월 6일, 절 동쪽 승악(僧岳, 관악산으로 여겨짐)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
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돌을 가져와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827년 2월 30일에 완
성되었다.
이때 황룡사(皇龍寺) 주통<州統, 승려의 직책으로 국통(國統) 밑임>인 항창화상(恒昌和尙)이
공사를 지휘했으며, 상화상(上和上)은 진행법사, 정좌<貞坐, 승직(僧職)의 하나>는 연숭법사,
사사<史師, 승려를 통솔하고 사무를 돌보는 자리>는 2명으로 묘범법사와 칙영법사. 전도유내
<典都唯乃, 승직의 하나>는 2명으로 창악법사와 법지법사, 도상(徒上)은 2명으로 지생법사와
진방법사, 작상<作上, 승직의 하나이나 역할은 확실치 않음>은 수남법사이다'


당간지주 동쪽 돌기둥의 윗쪽은 살이 좀 뜯겨져 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석수장이들이 석재로
쓰고자 뜯어간 것이라고 한다.


▲  중초사지 당간지주 - 보물 4호

중초사는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太祖)의 지원으로 크게 몸집을 불리게 된다. 안양사 창건설
화에 따르면 900년에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후백제)으로 출정하면서 안양을 지나던
중, 삼성산 꼭대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며 떠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을 살펴보다가 구름 밑에서 능정(能淨)이란 나이 지긋한 승려를 만났다.

능정과 이야기를 나눈 왕건(王建)은 서로 뜻이 잘 통하자 너무 기분이 좋았던지 그를 만난 자
리에 절을 세웠다. 그것이 안양사의 시초라는 것이다. 허나 900년이면 왕건의 왕씨 세력은 고
작 송악(松嶽, 개성) 일대가 전부였고, 황해도(黃海道)의 여러 지방 세력과 더불어 당시 한참
신라 북부를 평정하고 있던 궁예(弓裔)와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던 시기
였다. 그러니 900년은 전혀 맞지가 않다.
하지만 왕건의 지원을 받은 것은 확실해보이며 연도(年度)의 오류는 흔한 일이므로 고려를 세
운 918년 이후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또한 설화에는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러 가던
중이라고 했으니 후백제를 치러 가던 중에 잠시 들렸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중초사 주지로 여겨지는 능정과 마음이 잘맞자 두둑히 지원을 내려 절을 중창케 했고 경
내 남쪽에 벽돌로 7층전탑을 세웠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좋은 세상을 이루고 싶은 심정
을 담아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뜻하는 안양(安養)으로 절 이름을 바꾸게 했다. 제왕(帝王)이
발걸음을 하고 지원을 내렸을 정도면 절도 어느 정도 명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능정 또
한 도선국사(道詵國師)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명망을 갖춘 승려였을 것이다.
참고로 극락정토는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야 나온다는 이상의 세계
로 안양세계(安養世界), 안양정토(安養淨土)라고도 한다. 수도권 굴지의 도시로 인구 70만을
지닌 안양시의 이름도 바로 이 안양사에서 유래되었다. 불교색이 진한 이름이긴 하지만 의미
만큼은 정말 일품이다.

고려 중기에는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잠시 들려서 능정의
영정에 참배한 적이 있으며, 특히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 1314~1388)장군과도 인연
이 꽤 깊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양사에서 하룻밤 머문 적이 있었는데, 전탑을 바라보며 태조가 안양사를 경
영했던 의미를 되새기고 스스로에게 '제가 나중에 잘되고도 이 탑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하
늘에 계신 신령이 내려다 보실 것입니다'
다짐을 했다.

이후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 제일 높은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자 안양
사 주지인 혜겸(惠謙)과 함께 옛 시절의 다짐을 실행코자 전탑을 새롭게 중수했다. 그는 자신
의 재물과 신도들의 지원을 모아 쌀과 콩, 베 등을 마련했고 양광도(楊廣道, 경기도와 충청도
) 안렴사(按廉使)에게 명을 내려 군납미(軍納米)를 감액하여 경비를 마련하고 장정을 모았다.
그래서 1381년 8월 공사를 시작해 그해 10월 완성을 보았는데, 완성이 되자 우왕이 내시 박원
계(朴元桂)를 보내 향을 하사하고, 승려 1천여 명으로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치르면서 사리
12개와 불아(佛牙) 1개를 탑에 봉안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때 탑 중수에 시주를 한 관리와 귀족, 부자가 3천 명에 이르렀으며, 1382년 탑에 단청을 장
식하고 1383년에는 탑 안에 그림을 그렸는데, 동쪽 벽에는 약사회(藥師會), 남쪽 벽에는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에는 미타극락회(彌陁極樂會), 북쪽에는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를
그리고 탑을 둘러싼 회랑(廻廊) 12칸에는 벽마다 부처와 보살, 인천(人天)을 그려놓았다. 이
들 단청과 그림을 그리는데 동원된 인원은 400여 명, 소요된 쌀은 595석, 콩 200석, 베 1,155
필에 이르렀고, 전탑 중수가 완료되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은 자신의 도은집(陶隱集)에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를 남기며 최영을 찬양했다.

조선으로 들어와서도 왕실과 사대부와의 교류는 빈번하여 1411년 태종(太宗)이 충청도 온양(
溫陽)으로 온천욕을 가다가 잠시 들렸으며, 안양사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찬란하게 광을 냈던 안양사는 16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사라지고 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거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거친 파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쫄딱 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안양사터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 등을 속세에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혀있다가 1959년
엉뚱하게 유유산업이 절터를 깔고 앉았고 공장 주변에는 집들이 들어찼다. 하여 제자리에 안
양사 재건이 어렵게 되자 1960년대에 동북쪽 산자락에 새 안양사를 짓고 안양사의 유물로 여
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옛 안양사의 뒤를 자처하고 있다.


▲  중초사지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4호

당간지주 옆에는 조금 부실하게 생긴 3층석탑이 멀뚱히 서 있다. 높이 약 3.6m의 석탑으로 당
간지주보다 다소 늦은 고려 중/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때는 중초사가 아닌 안양
사 시절이니 '안양사지 3층석탑'이 적당한 명칭이겠으나 아직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이 탑은 원래 지금보다 동쪽에 있었으나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탑의 기단(基壇)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부(塔身部)에 비해 기단부가 훨씬 커서 전체
적으로 균형이 떨어지고 볼품이 좀 떨어진다. 하지만 당간지주의 후광(後光) 덕인지 보물 5호
라는 큼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1997년 1월 문화재지정등급 재조정으로 결국 지방문화재
로 등급이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보물 5호의 자리는 비어있음)


▲  삼성천을 향해 누워있는 중문(中門)터

안양사터의 구조는 남쪽에 중문터와 남회랑터를 두어 경내를 감싸고, 중문을 들어서면 전탑터
와 금당이 나온다. 금당 북쪽에는 설법단터와 승방터가 있고, 동쪽에는 동회랑터, 서쪽에 서
회랑터를 두었다.
하지만 공장 건물을 모두 철거하지 못했고 공장 주변에 집과 건물이 가득하여 아쉽게도 절터
를 모두 파내진 못했다. 겨우 금당(법당)과 전탑, 그 주변만 속살을 캤을 뿐이다. 허나 지금
까지 드러난 모습도 충분히 입을 벌어지게 만드니 나중에 나머지를 싹 뒤집으면 지금보다 훨
씬 장대한 안양사터의 진면목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중문터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안양박물관 사이에는 중문터가 누워있다. 옛 유유산업 건물을 밀어버린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 건물터의 하나로 지금까지 확인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인데
절 바깥에서 법당(法堂)으로 가려면 거의 반드시 중문을 거쳐야 된다.
중문 앞에는 삼성천이 흐르고 있는데 절로 인도하는 돌다리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중문 옆
건물(안양박물관)을 밀어버리지 않고 박물관으로 활용하면서 중문터 일대를 완전히 캐내진 못
했다. 대략 중문의 전체적인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여겨지며, 중문지 북쪽 13m 거리
에 안양사의 명물인 전탑터가 있다.


▲  중문터 남쪽에 널려있는 석물들
안양사터 발굴로 다시 햇살을 본 주춧돌과 계단, 석탑, 석등의 석재 등
여러 석물이 놓여져 있다.


▲  남회랑(南回廊)터

중문터를 들어서면 바로 북쪽에 전탑터가 있고 그 서쪽에 남쪽 회랑터가 있다. 김중업박물관
남쪽에 자리한 남회랑은 북쪽으로 강당터와 이어지는데, 회랑 동서방향으로 2차에 걸쳐 중복
된 건물터 형태를 보여준다. 회랑 남측 건물터에 추가적으로 흙을 얹힌 사실이 확인되어 북측
건물터가 먼저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북측 건물터는 남북 3.21m, 동서 26.6m에 달한다.
동회랑터는 안양박물관과 담장으로 인해 완전하게 조사를 벌이지 못했으며, 서회랑터는 남북
약 70m, 동서 6m로 추정된다. 또한 남회랑터 일대에서 신라 후기 기와조각과 막새, 토기파편
등이 출토되어 중초사 시절부터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임을 귀뜀해준다.


▲  안양사의 명물, 전탑터

금당터와 중문터 사이에는 네모난 터가 바짝 누워 있다. 이 자리가 바로 고려 태조가 세우고
최영장군이 중수했다는 7층전탑이 어깨를 활짝 피며 푸른 하늘을 받쳐든 현장이다.
금당터 정면 6m 앞에 자리한 이 탑은 그 동안 기록에만 있었으나 안양사터 발굴로 인해 전탑
터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전탑은 전설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비록 그 장대했던 전탑의 모
습은 녹아없어지고 그 터만 메마르게 남았지만 발굴 결과 남북 9.62m, 동서 5.29m에 이르러
백제의 미륵사지5층석탑 이상만큼이나 웅장한 탑이었음이 밝혀졌다.

전탑터 기단부는 암갈색 사질점토층에 삼성천 냇돌을 섞어서 다졌고, 그 위에 냇돌과 사질점
토층을 채워서 다졌다. 전탑터 남쪽 답도시설 일부에 벽돌과 기와편들이 확인되었는데, 전탑
옥개석(屋蓋石) 위에는 기와가 덮혀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고려시대 백자와 분청자 연봉 등이
기와와 함께 출토되어 최영장군 중수설을 진하게 뒷받침해준다. 안양사의 상큼한 상징이었던
이 탑은 조선 초/중기 때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전탑터와 금당터

▲  두 터의 공존 ~ 금당(金堂)터와 옛 유유산업 공장터의 기둥

전탑터 북쪽에 자리한 금당(법당)은 안양사의 중심 건물로 건물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안
양사의 위엄에 걸맞게 금당도 제법 컸을 것으로 여겨지나 동쪽에 자리한 옛 공장 건물을 모두
부시지 않고 기둥과 지하 구조물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겨두어 겨우 반쪽만
조사를 벌인 탓에 정확한 규모는 아직 모른다.
금당터에서는 9개의 적심이 확인되었으며, 적심은 정면 1칸, 측면 4칸 규모로 기둥간의 거리
는 정면 360~370cm, 측면은 270~280cm 정도이다. 공공예술도 좋지만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기
둥의 모습도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이 땅에 흔한 콘크리트 건물 기둥이니 그들을 싹
뽑아 주변으로 옮기고 금당터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  강당터와 동회랑터, 특별전시관

▲  강당터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강당터는 교육 공간으로 정면 9칸(동서 39.5m), 측면 4칸(남북 14.4m)
에 이르는 거대한 터이다. 건물 어칸(가운데 칸)에서는 대좌(臺座) 시설이 양쪽으로 마련된
형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주 황룡사터 강당터의 내부와 비슷하여 안양사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건물을 받치던 초석은 자연석을 일부 손질했으며, 기둥 자리에는 40~50cm의 원주가 사용되었
다. 그리고 초석 밑에 예전 건물터(중초사 시절 건물)의 원형 초석이 발견되어 이전보다 50~
60cm 정도 높아졌음이 드러났으며, 강당 좌우로는 동회랑과 서회랑을 이어주는 조그만 건물터
가 배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강당터 북쪽에 수북히 쌓인 기와편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을 한데 수습하여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 보잘 것 없는 기와 파편을 저렇게 쌓아두니
왠만한 대(臺)와 단(壇)이 부럽지가 않다.

▲  승방(僧房)터

강당터 북쪽에 자리한 승방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정면 9칸, 측면 1칸의 동/서향 장방형(
長方形) 건물로 터 전체를 모두 들추지 못해 완전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다. 건물터 남쪽과
북쪽 기단부에선 기와편들이 많이 나왔는데 조선 중기에 어떤 연유로 절이 파괴되어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지붕의 기와들이 그대로 떨어져 쌓인 것으로 보인다.
기둥 간의 거리는 4.05~4.25m, 측면은 5.1m로 기와편 가운데 '안양사'라 쓰인 기와가 발견되
어 이곳의 정체를 살짝 알려주었다.

안양사터는 양주 회암사(檜巖寺)터, 북한산 삼천사(三千寺)터와 더불어 서울 인근에 몇 남지
않은 커다란 절터 유적(조그만 절터는 제외)으로 그 가치는 중초사지 당간지주 못지 않다. 사
적(史蹟)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주변을 싹 밀
고 안양사터의 숨겨진 속살까지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들춰낸 것은 기껏해야 절
반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박물관의 공통 휴일인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안양사터만 둘러보고 나왔다.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석수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관악역(2번 출구)에서 5530, 5624, 5625,
  5626, 5713, 1, 51, 9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양예술공원에서 하차, 도보 10분 (관악역 2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 지하철 1호선 안양역(1번 출구)에서 안양마을버스 2번 안양예술공원행 차량을 타고 안양박
  물관(김중업건축박물관) 하차 (반드시 예술공원행을 타야됨)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관람정보 (2018년 1월 기준)
* 박물관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매주 월요일, 설날, 한가위 당일 휴관)
* 박물관 입장료는 없음 (특별 전시 때는 상황에 따라 유료 입장)
* 안양사지는 언제든 관람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안양예술공원로 103번길4 ☎ 031-687-0909)
*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안양사의 유물로 천하에서 단 하나뿐인 바위 종
석수동 마애종(石水洞 磨崖鐘)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2호

▲  석수동 마애종을 품은 보호각

안양사터 동쪽이자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북쪽에는 기와 보호각에 감싸인 석수동 마애종이 조
용히 웅크리고 있다. 마애종을 품은 바위에는 사람들이 치성을 올린 흔적(촛불이나 불에 그을
린 흔적)이 많은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질 만큼 범상치 않은 자태를 지녔다. 그런 탓일
까? 그의 남쪽 피부에는 승려와 종을 묘사한 마애종이 새겨져 있는데,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
崖佛)은 기러기의 털처럼 많이 널려있지만 바위 종은 천하에서 오직 이것 뿐이다.

종각(鐘閣)을 묘사한 듯 'ㅍ'자 공간 안에 두툼히 새겨진 마애종은 9개의 유두가 달린 2개의
유곽을 지닌 범종으로 종 위에 쇠사슬이 단단히 묘사되어 있으며, 범종의 기본 메뉴인 음통, 상대, 유곽, 당좌, 하대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종 우측에는 종을 치는 승려가 새겨져 있
다.
공중에 높이 떠있는 듯한 마애종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며, 조각 수법과 종류, 종신(
鐘身)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안양사터 바로 옆에 자리해 있어
안양사의 유물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예전
에는 중초사의 유물로 여겨졌는데, 조선총독부
에서 1924년에 만든 '고적급유물등록대장'에도
'중초사지 마애종'으로 표시했다.
중초사나 안양사나 같은 곳이니 어느 이름이든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이제 안양사의 정체가
훤히 드러난 만큼 '안양사지 마애종'으로 이름
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마애종 보호각


▲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석수동 마애종

무려 1,000년 가까운 지긋한 나이에도 마애종의 건강 상태는 썩 양호하며, 승려와 종의 모습
을 무난히 살펴볼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바위에 이런 독특한 것을 새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의 유일한 존재로 서울 가까이서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희소성이 큰 보물이건만 아직도 국가지정 보물이 아닌 지방문화재 등급에 머물러 있다
는 현실에 고개가 좀 갸우뚱하지만 그까짓 인위적인 등급이 무슨 대수겠는가. 비록 보호각 때
문에 마애종 앞까지는 다가갈 순 없지만. 종을 향해 귀를 쫑긋 기울이면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올 것만 같다.

참고로 관악산 동쪽 문원계곡 입구에는 이 땅의 유일한 마애 승려 얼굴상이 있다. <마애승용
군(磨崖僧容群)이라고 함> 이렇게 관악산 자락에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1종류도
아닌 무려 3종류(중초사지 당간지주, 마애종, 마애승용군)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운데
예로부터 잘생기고 험준한 산은 산악신앙(山岳信仰)과 불교의 성지(聖地)로 널리 추앙을 받았
으니 관악산 또한 그중의 하나로 그 덕을 제대로 본 것 같다.

* 석수동 마애종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32


▲  안양사 입구 삼성천 바위에 닦여진 어느 예술작품 (무슨 작품일까?)


 

♠  옛 안양사의 뒤를 이은 조촐한 절집,
삼성산 안양사(安養寺)

▲  경내 입구에 자리한 안양사 표석

석수동 마애종에서 동쪽으로 3~4분 정도 가면 안양사입구이다. (안양예술공원입구에서 예술공
원로를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면 안양사 이정표가 나옴) 사람들로 늘 붐비는 예술공원길과 달
리 안양사 길은 종종 스치는 산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나그네의 두 귀를 간지럽힐
뿐, 거의 고적한 편으로 그 길의 끝에 안양사가 왕년의 영광을 꿈꾸며 조용히 둥지를 틀었다.

경내 입구에는 마치 서예 작품을 보듯 기품이 넘치는 안양사 표석이 서 있는데, 그 표석을 지
나면 버려진 집 1채와 다소 볼품이 떨어지는 연못이 나오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주차장과
안양사 경내에 이른다.
이곳 안양사는 앞서 언급한 안양사(안양사터)의 뒤를 이은 사찰로 원 자리를 잃음에 따라 지
금의 자리에 새롭게 자리를 닦았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비구니 사찰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고색의 향기를 조
금이나마 보태고 있다.
경내는 크게 명부전이 있는 남쪽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가람
이 허벌나게 큰 것도 아니며, 단지 둘 사이에 소나무 숲이 자리해 있어 자연히 구분이 된 것
뿐이다.

▲  푸른 지붕을 지닌 요사(종무소)

▲  소나무 밑에 자리한 샘터

명부전(冥府殿)을 중심으로 한 남쪽 구역에는 종무소와 명부전, 기묘한 자세로 솟아나 명부전
을 지키는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 밑에는 산사(山寺)의 필수품인 약수터가 있는데, 삼성산이
베푼 청정한 샘물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와 조그만 석조(石槽)를 가득 채운다. 마침 목도 마
르고 해서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개운하다.
 
남쪽 구역의 유일한 불전(佛殿)인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地 藏菩薩)과 저승<명부(冥府)>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으며, 명부전을 지나 솔내음이 진동하
는 오솔길을 오르면 미륵불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 구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내가 숲을 경계
로 둘로 나눠진 점이 이곳의 큰 특징이다.


▲  안양사 명부전과 소나무

▲  홀쭉하고 넉넉한 표정의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명부전 내부를 가득 채운다.

▲  경내 북쪽 구역으로 인도하는 짧은
소나무 숲길

▲  심검당과 경내를 지키는 호랑이상

안양사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북쪽 구역에는 심검당과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해 이
곳의 오랜 보물인 승탑과 귀부가 있다. 심검당 주변에 자리한 호랑이상과 두꺼비상은 이곳을
지키는 용도로 배치해 놓은 것으로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인상이 강하다. 절에 볼일이 있어
서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귀여운 표정 앞에 자신의 소임도 깜빡 잊고 길을 돌아설 것이
다.


▲  안양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금동을 입힌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잘 다듬어진 수작(秀作), 하지만 중요한 탑신 부분을 잃어버린
안양사 승탑<僧塔, 부도(浮屠)>

대웅전 앞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로 자욱한 승탑과 귀부가 단짝처럼 자리해 있다. 승탑(부도)
은 머릿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그의 인
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듯, 승탑의 알맹이인 탑신(塔身)은 오래 전에 상실되어 머
리 부분과 아랫도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탑의 높이는 1.4m로 누구의 승탑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원래 인근 숲에 있던 것을
업어왔다.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진다.


▲  안양사 귀부(龜趺)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3호

승탑을 바라보며 넓직하게 앉아있는 귀부는 안양사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유일한 지정문화재
로 비석의 일부이다. 용머리가 받쳐들던 비신(碑身)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
는 모습이 묘사된 비석의 머리 부분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이미 사라진 상태이다.
이 귀부는 고려 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원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안양사와 관련
된 유물로 여겨진다. 비석의 성격은 그 중요한 비신이 없어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대략 승려의
탑비(塔碑)나 안양사의 사적비(事蹟碑)로 여겨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金
富軾)이 비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귀부의 등에는 등껍데기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비신이 심어져 있던 비좌(碑座)는 치아가 빠
진 모양처럼 무척 허전해 보인다. 엄금엄금 기어갈 것 같은 용머리(귀부)의 높이는 1m, 길이
3m, 너비 2.18m로 머리와 수염, 4개의 발, 등껍데기, 살랑살랑 흔드는 꼬랑지 등이 섬세히 표
현되어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귀부 주위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석주(石柱)
18개를 심었다.

귀부의 원래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1942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수
록된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고
분)의 관한 기록이 있다.

24. <석비귀부(石碑龜趺), 석등(石燈)> 동면 안양리(東面 安養里, 현 안양시) 불곡(佛谷, 국
유림) - 석비귀부는 길이 10척, 폭 7척, 높이 3척5촌으로 석비는 분쇄되어 파편의 일부만 남
아 곁에 넘어져 있으며, 석등 하나와 폐정(廢井) 하나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불곡이라는 사
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의 이름 등은 알지 못한다.

35. <고분(古墳)>,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 후
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  꼬랑지가 옆으로 늘어진 귀부의 뒷모습

▲  당당한 자태의 귀부 앞모습

▲  귀부의 옆 모습

▲  미륵불 곁에 새로 지은 나한전(羅漢殿)


▲  속세를 굽어보는 안양사 미륵불(彌勒佛)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안양사의 든든한 후광인 미륵불이 있다.
1976년에 조성된 안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높이는 거의 20m에 이르며 얼마나 키다리던지 바
로 밑에서 바라보니 고개가 아파서 뚝 떨어질 것 같다.
온몸이 온통 하얀 피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에는 면류관(冕旒冠)과 비슷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처를 취했으며,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높다랗
게 서서 남쪽을 굽어 본다. 석불 양쪽으로 계단을 만들었고, 그 앞에 넓게 기도처를 닦았다.

▲  미륵불 옆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山神閣)

▲  대웅전에 봉안된 금동석가3존불

경내를 이렇게 둘러보고 미륵불에게 3배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들이밀어본다. 기도를 올리니
소망이 들어진 듯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나는 저 미륵불에게 해준 것이 전혀 없는데 염
치없이 나의 소망만을 요구하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정작 그 소망도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미륵불도 공무원들처럼 민원만 받고는 모르쇠로 일관~~)
안양사를 끝으로 연말에 벌인 안양예술공원 주변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양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28 (안양예술공원로 131번길 ☎ 031-471-
  4848)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1월 1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