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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3.17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2. 2019.02.03 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아차산 보루 나들이 (4보루, 3보루,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 봄나들이 (아차산 보루 식구들) '

아차산 정상(아차산3보루)

▲  아차산 정상부 (아차산3보루)

아차산4보루 아차산2보루

▲  아차산4보루

▲  아차산2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부
드러운 동쪽 지붕이다.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아침과 낮, 그리고 일몰 이후(야간 등
산)까지 고루고루 찾아와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고 있는데, 이미 200번 넘게 찾은 아차산
이지만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드디어 저물고 봄의 해방군이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
을 했는데, 분량상 본글에서는 아차산4보루 이후 구간만 다루도록 하겠다.
(이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龍馬山)과 망우산(忘憂山)을 제외한 아차산 식구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남한)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
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던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사이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무심히 지나가
절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시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
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흙속에 묻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
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크게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
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독특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허무하게 사라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의 독특
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터만 아련히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는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다.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
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얹혔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다 보니 안에 버젓이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터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못하도록 방
수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
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정말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 속으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나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여기
서 휴식을 취하거나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
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
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곳과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1보루, 시루봉 보루, 홍련
봉 보루 2곳은 한 덩어리로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로 지정되었다.

고구려(고구리)는 경기도와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요동반도, 만주(길림성, 흑룡강성) 일대
, 연해주, 하북성, 산서성(山西省), 내몽고(內蒙古) 일대를 차지한 북쪽의 크나큰 나라였고,
백제(百濟)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왜열도(倭列島), 산동반도, 강남과 오월(吳
越) 등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 월남 일대까지 장악한 남쪽의 크나큰 나라였다.
그 두 나라가 크게 충돌한 곳의 하나가 바로 한강 유역이며, 한강 남쪽의 송파/강동구 지역에
는 백제의 국도(國都)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또는 그에 버금가는 주요 도시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강력한 라이벌인 백제를 견제하며 한강 유역을 지키고 필요에 따라 백제 본
토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인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에 보루 등의 군사시설
을 주렁주렁 달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이들 보루는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차지하여 고구려 견제용으로 활용하다가 8세기 이후 전
략적인 가치가 상실되면서 모두 버려지게 된다. 그 시절 신라는 북쪽으로 최소 요동반도까지
차지했으며, 산동반도와 강남, 오월 지역에도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정상과 3보루

▲  소나무가 무성한 아차산 주능선길 (4보루에서 정상 방향)

아차산4보루에서 낙타고개(아차산성 북쪽)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의 연속이다. 오르막 길도 일
부 있으나 거의 내리막 일색이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능선길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구려
가 심어놓은 보루(4보루, 3보루, 5보루, 6보루, 1보루)들이 주렁주렁 깃들여져 멀게만 느껴지
던 고구려를 직접 체험하게 해준다. 또한 좌우로 시야가 확 트여 조망이 아주 예술이며 여기
서 바라보는 야경 맛과 일출, 일몰 풍경이 참 진국이다.

이처럼 길이 좋고 조망 또한 일품이니 새해 해돋이와 아침, 낮, 일몰 직후 야간 등산까지 상
당한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하여 너무 깊은 밤(23시 이후)이 아닌 이상은 늘 사람들이 있으
며 서울에서 남산(南山), 인왕산(仁王山) 다음으로 저녁 수요가 많은 뫼가 아차산~용마산일
것이다. (나도 아차산 야간 등산을 100번 넘게 했음)
또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서울둘레길2코스(화랑대역↔광나루역, 12.3
km)도 이곳을 흠모하며 아차산 주능선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간다.

▲  아차산3보루 북쪽 오르막길

▲  아차산 정상을 알리는 나무 기둥


▲  아차산의 지붕, 아차산3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 정상(295.7m)에 깃든 아차산3보루는 성벽 둘레 약 450m, 내부면적 약 6,500㎡로 정상
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보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2005년에 보루 일부를 들추
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의 식량 창고로 추정된다.
허나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꺼낸 상태라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한 기능과 숨겨
진 이야기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아차산3보루

3보루 외곽은 나무가 무성하나 3보루 안쪽은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처럼 풀이 벗
겨진 흙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어 말끔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다.
이는 보루터 보존을 위해 그렇게 밀어버린 것이다.
보루터 한복판으로 탐방로를 내었고, 그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낮은 금줄을 설치
했는데, 지키는 이가 없다 보니 금줄을 넘는 이가 종종 눈에 띈다. 이곳은 아차산 정상이긴
하지만 완만한 능선이라 정상 같은 느낌은 별로 나지 않으며, 3보루 동쪽에 우회길이 있다.
 
* 아차산3보루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아차산4보루 못지않은 일품 조망을 보여주는 3보루, 한강(아리수)을 중심으로 왼쪽에 구리시
와 남양주시(도농, 다산, 덕소) 지역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강동구와 하남시가 무성한
아파트숲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누가 아파트의 농도가 진한지 경쟁하듯이 말이다.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그리고 남한산과 검단산 등

▲  아차산3보루에서 수습된 보루터 성돌들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생전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그것이 아차산이 우리에게 건네는 영원한 숙제이다.

▲  바위들이 울퉁불퉁 펼쳐진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3보루에서 아차산5보루 방향)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①
광진구와 성동구, 한강, 송파구, 강남구 등 (멀리 보이는 산은 관악산)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용마산 너머로 멀리 남산서울타워를 지닌 남산과 인왕산(仁王山),
북악산(백악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이 아차산의 일품 계곡으로 꼽히는 긴고랑계곡이다.
그 오른쪽 뫼는 용마산, 왼쪽은 아차산이며, 그들 너머로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이 흐릿하게 두 망막에 박힌다.



 

♠  아차산 마무리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3보루에서 주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범굴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살짝 손짓
한다. 여기서 주능선을 버리고 그 손짓을 따라가면 바로 봉긋 솟은 언덕이 나타나는데, 그는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그 언덕에 아차산 보루의 막내인 6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6보루는 2005년에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생김새가 마치 옛 무
덤이나 보루터처럼 생겨서 눈썰미가 좀 있다면 정말 의심을 가져볼만한 존재로 아차산 보루의
발견 순서대로(남쪽을 기준으로 함)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아직 발굴조사는 벌이지 않았으며, 여기서 발견된 옛 불씨는 흙을
덮어서 보존하고 있다. 그가 보루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아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생김
새가 자연산 같지 않아서 속히 조사를 벌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6보루를 처
음 본 것이 2013년인데 아직까지도 조사를 받지 못했으니 아차산 보루 유적과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진 것 같아 실로 우려스럽다.


▲  아차산2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6보루에서 범굴사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봉우리(해발 276.2m)가
있다. 봉우리 주변에는 금줄이 둘러져 있고, 안내문 1개가 나그네들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는
데, 금줄 너머 봉우리에 고구려가 심어놓은 아차산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 봉우리를 활용해 보루를 다졌는데,
둘레 50m 정도의 조그만 보루이다. 그 보루는 영원한 분해자인 자연과 세월에 의해 모두 와해
되고 돌탑 남쪽에 치로 여겨지는 성벽 3단이 바깥에 노출되어 분해자의 압박을 견디다가 보존
을 위해 흙으로 덮어 묻었으며, 그 주위로 금줄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다.

보루터 주변에서는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의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보루터 복판에 돌탑
이 있는데, 지나가는 이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
을 이루고 있는 돌 상당수는 2보루터 성돌로 보루를 이루던 돌이 돌탑의 일원으로 새로 거듭
난 것이다.

2보루터는 인근 6보루터와 비슷하게 숲이 자리해 있다. 2보루터에 깃든 고구려의 장대한 기상
과 이곳의 유구한 역사를 무럭무럭 먹고 자란 탓일까?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대머리처럼 허전
한 2보루터의 새로운 녹색 머리칼로 그 공간을 보듬는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 남양주, 강동구, 하남 지역


아차산2보루 옆에는 동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조망 좋은 곳이 있다. 이곳은 범굴사(대성암)로
인도하는 너럭바위 윗쪽으로 여기서는 한강을 비롯해 구리시, 남양주, 하남, 강동구, 송파구,
성남 지역과 아차산성(阿且山城) 등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조망 범위는 앞서 4보루, 3보루와 많이 비슷하여 감흥은 그리 크지 않다. 비슷한 조망
이 4보루부터 계속 따라왔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서쪽과 북쪽이 빠지고 남쪽으로 아
차산성과 송파구, 성남 지역이 조망권에 추가된 정도..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워커힐 뒷통수(골프장)가 바로 앞에 보이고 푸르른 한강 너머로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南漢山), 검단산, 예봉산~운길산 산줄기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정면에 솟은 산에 아차산성이 안겨져 있다. 그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멀리 성남 지역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서울 속의 작은 민통선, 아차산성 - 사적 234호 (확대해서 바라본 모습)

아차산은 20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으나 정작 아차산성 내부는 아직까지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차산성은 아직까지도 금지된 구역으로 몇 년 전부터 광진구청에서 저곳을 해방시킬 계획을
세웠고, 꾸준히 개방 떡밥이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희망고문에 머물러 있다. 아차산성
의 적지 않은 땅을 가진 워커힐이 소국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이 휴전선 등 예민한 곳에 있거나 군부대에 있다면 금지된 구역이 이해가 가나 저곳
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누가 들으면 아차산성이 휴전선 부근에 있는 걸로 알겠다.
속히 속세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2보루에서 다시 주능선으로 나와 남쪽으로 하염없이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봉우리
가 나타난다. 그가 아차산1보루이다. (중간에 아차산5보루가 있으나 여기서는 통과함)
1보루가 넘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잘나서가 아니다. 남쪽을 기준으
로 발견된 순서대로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3보
루)을 이어주었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  작은 봉우리 같은 아차산1보루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4보루를 참
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보는 것도 의미
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
니까 말이다.

* 아차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27


▲  아차산1보루의 남쪽 끝

아차산1보루를 둘러보고 낙타고개와 영화사(永華寺)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사진에 담는 것
은 1보루에서 완전히 마무리를 지어 더 이상 다룰 것은 없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복습한 아차산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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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서울 아차산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3보루

▲  아차산4보루

 


 

아차산은 해발 295.7m의 뫼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 강북 지역의 동남
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서울 광진구,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九
里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
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지금 널리 쓰이는 '아차(峨
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이라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한 산처럼 보이지만 천하가 서울 도심의 주산(主山)인 북악
산<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더 키가 작은 이 산을 격하게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
高句麗)의 영광스런 역사가 두텁게 깃든 거룩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차디찬 북방(北
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린 유일한 곳으로 그 값어치는 남다르다.

양아치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그래도 좁은 땅 남북으로 갈
라져 70년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경영
했던 고구려와 발해(渤海), 백제, 옛 조선(고조선), 금(金)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은 실로
크다. (저 잃어버린 방대한 옛 땅을 언제나 되찾을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인지도가 낮은 동네 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아차산 일
대에 큰 산불이 났는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정체 불명
의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지던 성으로 돌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중랑천
을 건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서울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다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적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로 인해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구리시는 1994년 아차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
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
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
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경
쟁을 벌였고, 서울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등산/답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야등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게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일품 조망(眺望)으
로 관악산과 수락산(水落山)의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
면 사람이나 산이나 때와 조건을 정말 잘 만나야 된다. 만약 그가 이북이나 만주 같은 곳
에 누워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꿀단지는 되진 못했을 것이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과 아차산성(阿且山城)

▲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친수계곡 입구)

아차산과의 첫 인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간
등산으로 2~3번을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주말과 평일 야간 등산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
다가 2017년부터 다시 줄고 있다. (2018년에는 1~2번 정도 찾음)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라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
기는 커녕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
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일품 조망)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아차산으로 인도하
는 골목길을 쫓았다. 언덕길을 10여 분 오르면 동의초교(영화사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친수계곡 입구(고구려정 방면 산길)이며, 워커힐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아차산생태공원
이 모습을 비춘다. 우리는 여기서 소나무숲길을 통해 아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참고로 아차
산생태공원 남쪽에는 아차산 보루의 남쪽 끝인 홍련봉 보루 유적이 있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1)

▲  아차산 소나무숲길 (2)
소나무가 삼삼하여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이라도 이곳만큼은 힘을 못쓴다.

▲  소나무숲길에서 아차산성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

▲  아차산의 얼굴, 아차산성 - 사적 234호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쳐내면서 서쪽
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로 선을 그으면서 아차산성(阿且山城)을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란 이름 외에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있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곳이 되었다. 위례성으
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
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
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게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요구했다. <백제는 동성
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를 둘러싸고 북위와 크게 경쟁을 벌여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보
기좋게 묵사발을 만들기도 했음>
허나 그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크게 발끈하여 3만의 군사를 휘몰
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한성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
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해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
한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
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으로 조선 이후 지금까지 위례성을 찾느라 그야말로 진
땀을 빼고 있는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
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
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
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하여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장대한 세월과 자
연에 의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안내문의 내용들

산성의 둘레는 약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
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
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
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
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
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
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2018년 7월에는 망대터 일대에서 건물터 10동과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초기 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깨진 구리거울 조각과 모형 철제마(鐵製馬), 철촉 등의 철기류도
나와 삼국시대 때 산성 안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남
벽 일대에서 사다리꼴 형태의 집수시설과 목간, 씨앗 등이 나왔고, 집수시설 위에 닦여진 배
수로에는 부여 부소산성 출토품과 비슷한 대형 철촉이 나옴)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한 부
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싹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의 거의 유일하게 접근
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다. <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
직까지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을 찾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 내로 들어간 적이 없
다. 그곳이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민주화란 것이 참으로 힘들
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 서벽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아차산성 북벽 - 철책과 자연에 꽁꽁 감싸여 들어갈 틈이 없다.

▲  아차산성과 고구려정 사이에 자리한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리와 1
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
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보루가 주렁주렁 달린 아차/용마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서쪽은 친
수계곡,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이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 위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
다.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대성암(범굴사)과 구리 지역을
원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무덤 갈림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아주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일품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
산줄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2)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 남쪽 봉우리와 강동, 송파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3)
한강과 구리, 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한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
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지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이다. 여
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
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행사가 절찬리에 열린다. (그때는 산이 무너질 정
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음)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
가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는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 사
이를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1
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룬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5보루와 함께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
된 4보루를 흔쾌히 참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
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
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
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한 덩어리로 묶
어 국가 사적 455호로 삼았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5보루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죄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남
아있는 상태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
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내었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쓴 것으로 보는 견해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
러고보니 정말 신라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
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
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
리시, 남양주시 서부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터 돌탑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사이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
나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
대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겨지며, 나무 곁에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북쪽 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 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중원대륙과 만주를 제패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담
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
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  아차산의 정상인 아차산3보루 유적 - 사적 455호

명품소나무 2호에서 6보루 입구를 지나면 아차산3보루가 있는 너른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해발 295.7m(296m)이다.

3보루는 아차산에 깃든 보루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 둘레는 약 450m, 내부 면
적은 약 6,500㎡로 여겨지며, 정상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 중 가장 규
모가 크다. 2005년 보루 일부를 들추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 식량 창고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하지만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조사된 상태라 하루 속히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
한 기능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허전한 모습의 아차산3보루

3보루터를 품은 봉우리는 마치 대머리처럼 황량한 모습이다. 봉우리 외곽은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봉우리 일대는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 마냥 풀이 벗겨진 흙색 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정상
정상 주변 나무는 보루터 보호를 위해 대부분 밀어버렸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이것이 바로 아차산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이다.

▲  아차산3보루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상당수는 3보루 성돌과 이곳에 있던 건물터
주춧돌로 여겨진다.

▲  아차산3보루 남쪽 끝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조금 각박하다.

▲  아차산3보루 북쪽 끝
계단을 이루고 있는 돌은 보루터의 일부이다.


아차산3보루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아차산4보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글의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4보루 이후부터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아차산4보루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내부

▲  아차산4보루 저수시설터

* 아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광장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 2019년부터 본인 답사기에서 교통정보와 관람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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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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