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바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10.08 청양의 꿀명소를 거닐다 ~~ 우산, 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나들이 (청양3층석탑, 소원바위)
  2.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청양의 꿀명소를 거닐다 ~~ 우산, 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나들이 (청양3층석탑, 소원바위)

청양 우산(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 충남의 내륙을 거닐다. 청양 겨울 나들이 '

천장호와 출렁다리

▲  천장호와 출렁다리

청양 우산 숲길 겨울 운무에 잠긴 우산

▲  청양 우산 숲길

▲  겨울 운무에 잠긴 우산

 



 

겨울 제국의 한복판인 1월의 어느 덜 추운 날, 충남의 지붕인 청양(靑陽)을 찾았다. 청양
땅은 20대의 한복판인 2000년대 이후 딱 2번째 방문으로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곳이다.
하여 몸뚱이와 정신이 더 늙기 전에 청양의 신선한 공기도 맛보고 그곳의 미답처(未踏處)
도 여럿 지우고자 흔쾌히 청양을 택했다.

아침 일찍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청양으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싣고 90분 정
도를 달려 청양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발을 들인 청양읍내는 겨울 안개가
두텁게 내려앉아 가시거리가 100m 이내였는데, 마치 무너진 하늘의 구름 속에 갇힌 듯 눈
에 뵈는 것이 제대로 없어 잠시 방향 감각을 잃었으나 이내 감각을 되찾고 읍내 동북쪽에
자리한 우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청양읍내의 포근한 뒷산, 우산(牛山) 둘러보기

▲  새벽에 내린 눈으로 얇게 하얀 옷을 걸친 우산 숲길

우산은 해발 237m의 조촐한 뫼로 청양읍내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쉼터이다. 겉보기에는 천하에
그저 흔한 뒷동산이라 '이곳에 뭐 볼게 있을까?' 의문이 들겠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서면 생각
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작지만 넉넉한 그의 품에는 백제 때 지어진 우산성과 읍내에서 넘
어온 석조여래3존입상과 3층석탑 등 고색이 깊은 문화유산이 있고, 칼바위와 떡바위, 가족바
위 등 대자연이 빚은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능선부에 포진해 있으며 짙은 숲에 산책로까지 잘
닦여져 있어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게다가 호국(護國)의 신이 된 청양 사람들의 위패가 봉안된 충령사(忠靈祠)가 남쪽 자락에 기
대고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만큼 우산은 청양읍의 소중한 뒷산이자 성역이다.

나는 우산 남쪽인 청양읍사무소(청양읍행정복지센터)에서 접근했는데 그 길을 오르면 충령사
와 그곳을 관리하는 '용암사(봉안사)'란 작은 절이 마중을 나온다.


▲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 보물 197호

충령사 옆에는 용암사란 현대 사찰이 있다. 그 밑을 가만히 보면 맞배지붕을 지닌 기와 건물(
보호각)과 3층석탑이 층층이 자리한 모습이 눈에 보일 것인데, 그 보호각 안에 늙은 석조여래
3존입상이 고된 몸을 벽에 기대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석불은 읍내리1구의 일명사터(逸名寺址)로 전하는 절터에 있던 것으로 1961년 밑에 있는
3층석탑과 함께 용암사 경내로 이전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지금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을 짓고 그 안으로 옮겼다. (건물을 짓기 전에는 벽만 있었음)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가지고 있는데 본존불 키는 310cm, 좌측 보살은 223cm, 우측 보살
은 225cm이다. 장대한 세월에 오랫동안 두드려 맞은 흔적이 역력하고 광배 같은 경우는 날라
간 부분도 적지 않으나 얼굴부터 대좌까지 그런데로 잘 남아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주인공답게 좌우 보살상에 비해 덩치와 키가 크다. 머리에는 무견정상(육계)
이 솟아있고 얼굴은 고된 세월에 지쳐 많이도 울었는지 표정이 좀 지워졌으며, 어깨는 넓고
옷은 가슴부터 발목까지 U자형으로 주름을 이루면서 내려왔고 다리 사이에는 바지 자락이 표
현되어 있다.
몸통을 윤기나게 해주는 광배는 배 모양으로 불상과 같은 돌에 조성되었는데 파손이 심해 원
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우며 두 발을 딛고 있는 대좌는 4각형으로 각 면에 안상(眼象) 3개를
새겨놓았다.
왼쪽 협시보살은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절단이 난 것을 붙여놓은 것으로 얼굴은 본
존불과 비슷하며 허리를 약간 왼쪽으로 틀어 본존불을 향하고 있다. 옷은 밑부분이 넓게 퍼져
마치 두터운 겨울 옷을 걸친 듯 하다. 그리고 오른쪽 협시보살은 왼쪽 것과 비슷하나 얼굴 윤
곽이 둥굴고 앳되어 보이며 몸매가 아주 좋아 한참 물이 오른 젊은 여인네를 모델로 하여 지
은 것 같다.

그들은 당당한 신체 표현과 강인한 신체 묘사, 유려한 각선 등에서 높은 솜씨를 보이고 있지
만 평판적인 신체 묘사와 형식화된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밑에서 바라본 석조여래3존입상
서 있을 힘도 부족하여 그들 뒤에 벽을
설치해 비빌 구석을 마련해 주었다.

▲  석조여래3존입상이 거처하는 맞배지붕
보호각 (뒤에 보이는 건물은 용암사)


▲  청양3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48호

석조여래3존입상 밑에는 작고 잘생긴 3층석탑이 있다. 그는 3존입상과 함께 일명사터에 있던
것으로 청양군청 뒤쪽으로 이전되었다가 1961년 석불과 함께 용암사에 안착했다.
네모난 바닥돌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基壇)을 두었으며, 3층의 탑신(塔身)과 노
반(露盤), 앙화(仰花, 연꽃모양 장식)를 둔 머리장식을 차례로 올렸다. 1층 탑돌에는 네모난
문고리 장식이 있으며 탑 높이는 310cm, 조성시기는 고려 때로 여겨진다.

상처가 많은 석불과 달리 건강상태도 양호하며 머리장식도 잘 남아있어 꽤나 감동을 준다. 이
정도면 능히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어 보이나 무슨 영문인지 상처 투성이 석불은 보물
, 멀쩡한 석탑은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지정 기준이 참 아리송하다.

       ◀  청양3층석탑과 돌기둥 3기
3층석탑 옆에는 받쳐들 것을 상실한 채, 막연
히 하늘을 이고 있는 돌기둥이 있다. 이들 기
둥은 모두 3기로 일명사지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 주춧돌로 추정된다.


▲  겨울에 잠긴 우산 숲길

용암사 밑에 자리한 늙은 석불과 석탑을 둘러보고 우산의 속살로 들어섰다. 아침 산책과 운동
을 나온 지역 사람들이 이따금 보일 뿐, 바람의 소리가 전부일 정도로 적막한데, 숲길도 매우
고와서 무척 탐이 난다.

산의 이름인 우산은 비올 때 쓰는 그것이 아닌 음매음매~ 소를 뜻하는 이름으로 그 이름에 걸
맞게 우산에 닦여진 산길을 추스려 '우산슬로길'이라 하였다. 여기서 슬로(slow)는 느리다는
뜻의 양이(洋夷) 말로 소의 발걸음이 느리니 천천히 둘러보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모
양이다.
허나 아름다운 우리말을 놔두고 굳이 배배 꼬인 꼬부랑 영어를 써야 했는지 관련 공무원 철밥
통들의 사상이 심히 의심된다. '우산 느림길'이나 '우산 여유길'이라고 하면 참 좋았을 것을
굳이 외래어로 지어야 했는지 참으로 회의감이 든다. (이 땅의 아주 몹쓸 '영어 사대주의'의
폐해임)

우산슬로길은 칼바위길(2.43km)과 약수길(2.38km), 산성길(1.65km)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길
로 가던 봉화대과 우산성, 칼바위는 끼게 되어있으나 산이 작아서 굳이 코스에 연연할 필요는
없으며, 봉화대와 청룡정, 우산성, 용암사를 모두 겯드려 속성으로 보면 1시간 정도, 길게 잡
으면 90~120분 정도(휴식시간, 촬영시간 포함)면 넉넉히 산을 1바퀴 둘러볼 수 있다.


▲  솔내음이 춤을 추는 우산 소나무숲길

▲  숲을 뚫고 들어와 우산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아침 햇살의 위엄
햇님이 찬란한 햇살을 쏘며 겨울에 잠긴 우산을 깨운다.

▲  어둠과 낮의 경계에 서다. 우산 소나무숲길

▲  우산성(牛山城) - 충남 지방기념물 81호

우산 윗부분에는 옛 백제(百濟)가 씌워놓은 우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다. 산꼭대기 주변
을 빙둘러서 다진 테뫼식 산성(山城)으로 둘레는 약 965m로 파악되고 있는데, 경사가 있는 동
쪽을 제외하고 모두 돌로 다졌으며 높이는 최대 7m, 폭은 6m 정도 된다. 남벽과 동벽이 만나
는 곳과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부분이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데 이들은 장대(將臺) 자리로 여
겨진다.
동남쪽 모서리와 동북쪽 모서리에는 성벽 바깥으로 네모 모양으로 성곽을 다진 이른바 치성(
雉城) 흔적이 있으며, 성벽에서 약 2m 안쪽에 문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북문터 부근에는 50x50m 규모의 건물터가 있고 그 서쪽 봉우리 정상에서 19x2m 규모의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되었으며, 백제 때 토기와 고려 때 어골문(魚骨文) 기와조각, 조선 때 기와조각
이 발견되어 우산성이 백제부터 조선까지 골고루 쓰였음을 귀띔해준다. 그 외에 우물 2개가
있었다고 전하나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  우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북문터와 봉화대
헝클어진 성곽 위에 닦여진 계단을 통해 우산성 북쪽 밖으로 나갈 수 있다.

▲  눈옷을 뒤집어쓰며 나지막하게 누운 우산성 북쪽 성곽
(북문터 주변)

▲  윤곽만 남은 우산성 동쪽 성곽 ①
우산성 동쪽은 가파른 벼랑이 상당수이다. 하여 돌로 다지지 않고 지형을
가파르게 다듬어 마치 성곽의 윤곽처럼 다져놓았고 성곽 방어를 위해
그 밑으로 수풀을 잔뜩 심었다.

▲  윤곽만 남은 우산성 동쪽 성곽 ②

▲  구름 위에 올라서다 ① 우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모습

청양읍내를 감쪽같이 훔쳐간 안개(운무), 우산 윗도리에 이르니 그 운무가 내 밑에 하얗게 펼
쳐져 있다.
'내가 이리 높이 올라왔나??'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이렇게 보니 해발 1,000m 이상 올라온
기분이다. 허나 현실은 200m 정도이다. 겨우 200m 높이를 올라왔을 뿐인데 이런 황홀한 광경
을 보다니. 그렇다고 그날 종일 비나 눈이 온 것도 아니다.
운무는 우산 밑에 낮게 누워 읍내와 키 작은 것들을 삼켜버렸고 우산 높이 이상의 뫼들만 고
개를 들고 있다. 저 너머로 보이는 뫼들은 청양의 진산인 칠갑산(七甲山)이다.


▲  구름 위에 올라서다 ② 우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모습

▲  우산 떡바위

우산성 동쪽 성곽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데 떡바위를 비롯한 상큼한 모습의 바위들이 줄지어
포진해 있어 우산의 조촐한 만물상(萬物相) 같은 곳이다. 떡바위는 떡과 비슷하게 생겨서 생
긴 이름으로 거의 인절미처럼 보이는데 우산을 빚은 대자연이 먹고 남은 떡이 딱딱하게 굳어
져 돌이 된 모양이다.


▲  수풀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민 떡바위 부근 우산성
(동남쪽 성곽)

▲  우산 가족바위
바위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습이 마치 가족처럼 보인다.

▲  위에서 바라본 가족바위 (왼쪽에 각이 똑바로 진 바위)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① (떡바위 주변에서 바라본 모습)
이렇게 보니 천하를 뒤덮은 운무가 마치 너른 호수처럼 보인다. 왼쪽에
작게 보이는 건물은 우산 남쪽 봉우리에 자리한 청룡정이다.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② (칠갑산 방향)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③ (청양읍내 방향)

▲  우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청룡정(靑龍亭)
우산 남쪽 봉우리에 들어앉아 청양읍내를 살피고 있는 청룡정은 6각형 정자로
1984년 10월에 지어졌다. 조망이 아주 일품으로 우산에 발을 들였다면
이곳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  짙은 운무에서 서서히 해방되는 청양읍내
아침 햇살이 운무를 강제 해산시키며 그들로부터 청양 지역을 해방시키고 있다.
하여 이제 비로소 청양읍내가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다.

▲  서서히 걷히는 운무 (칠갑산 방향)

▲  우산을 정리하며~~~

* 우산성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백천리 산69-5외
* 읍내리 석조여래3존입상, 청양3층석탑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산4-2



 

♠  칠갑산 자락에 묻힌 그림 같은 호수, 천장호(天庄湖)

▲  천장호 전망대

우산을 2시간 정도 거닐고 내려오는 사이, 읍내를 오리무중(五里霧中)처럼 짙게 감싸던 운무
가 싹 걷혔다. 파란 하늘과 햇님이 안개에 놀란 천하를 진정시키며 겨울 제국의 차가운 기운
도 조금씩 잠재운다.

읍내로 들어와 다음 행선지인 천장호를 가고자 군내버스터미널을 찾았다. 청양읍에서 천장호
는 시외직행버스와 청양군내버스가 운행하고 있는데 직행버스(청양시외터미널에서 승차)는 1
시간에 1~2회꼴로 있고, 군내버스도 비슷한 간격(1일 16회 정도)으로 다닌다. 속 편하게 직행
버스를 타는 것이 낫겠지만 시골군내버스가 격하게 땡겼고 마침 20분 뒤에 차가 있어 그 시간
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정산행 군내버스가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칠갑산 북쪽 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칠갑산로를 15분 정도 달려 천장호(천장리)
에 나를 내려놓는다. 칠갑산로는 청양과 공주를 잇는 주요 도로이나 우회 국도가 생기면서 조
금은 한가해졌다. (천장호, 칠갑산 관광 수요는 여전히 많음)


▲  천장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장호와 칠갑산

▲  확대해서 바라본 천장호와 출렁다리(가운데 다리)

천장호전망대는 천장호가 잘 바라보이는 칠갑산로 도로변 벼랑에 자리해 있다. 천장호 정류장
에서 서쪽으로 도보 3분 거리로 2016년 9월에 지어졌으며 전망대의 면적은 610㎡이다.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대에 걸맞게 돛대 모양을 여럿 달아서 마치 배를 연상케 하는데, 이곳에 올라서
면 천장호 일대와 출렁다리는 물론 칠갑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천장호 관광객들은 출렁다리와 천장호만 생각하여 이곳은 잘 오지 않는데 천장호의 전경을 싹
담을 수 있는 곳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천장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장호
북쪽과 칠갑산 산줄기

▲  청양고추를 귀엽게 표현한 캐릭터

천장호전망대에서 천장호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 저 밑에 바라보이는 천장호로 내려갔다.
천장호는 1월 평일임에도 청양의 대표 명소에 걸맞게 관광객들이 많았다.
주차장을 지나면 식당들이 앞다투어 맛난 냄새를 풍기며 나그네를 유혹하는데 그 유혹을 지나
면 출렁다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산책로가 고속도로처럼 펼쳐진다. 청양의 특산품인 고추를
형상화한 캐릭터와 2층 규모의 황룡정, 소금쟁이고개길이 차례로 나타나며, 그 길의 끝에 출
렁다리가 있다.

▲  황금색 지붕의 황룡정
천장호 장식용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  천장호 출렁다리로 내려가는 산책로
(소금쟁이고개)


▲  오늘도 푸르기 그지 없는 천장호

천장호는 농업용 저수지로 이곳의 지명인 천장리(天庄里)에서 이름을 땄다. 1972년 12월에 짓
기 시작하여 1979년 완성을 보았는데 면적은 1,200ha로 물이 청정하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칠갑산을 수식하는 경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다. 거기에 한때 우리나라 최장의 출
렁다리로 추앙을 받았던 출렁다리까지 한복판에 걸쳐놓아 천장호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한
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천장호 출렁다리의 위엄을 몸소 체험하고자 함이다.


▲  천장호 소금쟁이고개

출렁다리 동쪽은 호수를 향해 길게 삐죽 나온 지형으로 서,남,북이 호수에 접해있다. 지금은
3면이 호수에 둘러싸여 있지만 원래는 소금쟁이고개라 불리던 고갯길로 청양에서 정산, 공주
를 이어주던 길목이다. 이곳이 소금쟁이고개라 불린 사연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옛날의 어느 봄날, 소금장수가 이곳을 넘다가 잠시 소금지게를
세워놓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담배나 피워야될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징하게 으르렁거리자
염통이 쫄깃해진 소금장수는 지게를 받치던 작대기를 들고 호랑이에 대항했다. 그러자 지게가
넘어지면서 시장에서 산 그릇과 볏짚가마니에 들어있는 소금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단순한 호랑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다가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렇
게 호랑이를 물리친 소금장수는 아랫도리가 이상해 살펴보니 글쎄 소변이 흘러내린 것이 아닌
가?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바지에 실례를 한 것이다.

그날 밤, 주막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소문이 널리 퍼
져 이곳 이름이 소금쟁이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즉 소금쟁이가 호랑이를 물리치고 동시에 실
례까지 범했던 고개란 뜻이 된다. 허나 지금은 고개가 아닌 육지와 출렁다리를 잇는 자라목
같은 지형이 되버렸고 고갯길의 역할은 호수 북쪽에 닦여진 도로(칠갑산로)가 맡게 되었다.


▲  천장호 서쪽 황룡 쉼터에서 바라본 소금쟁이고개


▲  소금쟁이고개에서 출렁다리를 이어주는 접속 다리

▲  옆에서 바라본 접속다리와 출렁다리의 빨간 고추 기둥

▲  드디어 건너게 되는 천장호 출렁다리

천장호 출렁다리는 흔들다리의 일종으로 2007년 11월에 착공하여 2009년 7월 28일 완성을 보
았다. 길이 207m, 높이 24m, 폭 1.5m 규모로 한때는 이 땅에서 가장 크고 긴 흔들다리였으며,
동양에서 2등으로 컸다. (지금은 이보다 큰 흔들다리와 출렁다리가 많이 생겨났음)
약 30~40cm 정도 흔들리게 설계되어 있어 스릴감을 주며 중간중간에 다리 밑 호수가 잘 보이
도록 거울 바닥을 깔아서 염통의 쫄깃함을 더해준다. 물론 단단하게 지어졌겠지만 혹시나 그
판을 밟으면 밑으로 쑥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이 일어나 나도 모르게 그 바닥은 피해 움직였다.
다리 길이는 겨우 207m에 지나지 않으나 염통을 적지않게 자극시키다보니 체감거리는 그 5배
는 되는 것 같다. 세상에 이보다 긴 200m가 또 어디에 있을까?


▲  출렁다리 한복판에서
다리의 거울 바닥 밑에는 얼어붙은 호수가 차갑게 입을 벌리고 있다.

▲  유연하게 솟구친 출렁다리의 위엄

▲  출렁다리 서쪽에서 바라본 천장호
호수 너머 벼랑에 천장호전망대가 있다.

▲  출렁다리 서쪽에 자리한 용(왼쪽)과 호랑이 조형물(오른쪽)

출렁다리를 건너면 용과 호랑이상이 마중을 하면서 길은 3갈래로 갈린다. 칠갑산 등산이 목적
이라면 서쪽 산길로 들어서면 되며, 호수도 둘러보고 이곳의 오랜 명물인 소원바위도 보고 싶
다면 북쪽 산책로(천장호 둘레길)로 가면 된다. 남쪽도 호수 산책로이나 길이 중간에 끊긴다.

출렁다리 서쪽에 자리한 용과 호랑이상은 단순한 장식용이 아닌 칠갑산의 유래와 전설을 상징
하고자 세운 것이다. 칠갑산은 만물생성의 7대 근원인 '七'자와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첫 자
이자 싹이 난다는 뜻에 '甲'자로 이루어져 있어 생명의 발원지를 뜻한다고 한다. (산자락에 7
명의 장수가 태어날 명당이 있어 칠갑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옴)
또한 이곳에는 1,000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승천을 준비하던 황룡(黃龍)이 있었는데 부근에 살
던 아이가 위급에 처하자 직접 다리를 놓아 아이를 구했다고 하며. 이를 지켜본 호랑이는 산
에 들어가 칠갑산을 지키는 영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악을 다스리고 복을 준다는 황
룡의 기운과 영험한 기운을 지닌 호랑이의 기운이 같이 서려있어 여기서 기도를 하면 복을 받
고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천장호 둘레길에서 바라본 출렁다리의 위엄

▲  호수 옆구리에 닦여진 천장호 둘레길 (소원바위 입구)
호수의 서쪽을 따라 나무데크식으로 둘레길을 닦았다. 길을 잘 다져놓아서
거닐기에 아주 좋으며, 둘레길을 한 굽이 지날 때마다 천장호와
출렁다리는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천장호 마무리 (소원바위)

▲  천장호 둘레길에서 만난 칠갑산의 수호신, 금색 황룡상 (황룡 쉼터)

호수를 따라 펼쳐진 천장호둘레길은 해가 짧다는 구실로 다 돌지 않고 황룡상이 있는 쉼터까
지만 갔다. 마음 같아서는 둘레길을 다 돌면 좋겠지만 그 정도만 돌아도 천장호에 대한 성의
는 충분히 보였다 여겨진다.
거기서 쿨하게 길을 되돌려 소원바위를 보고자 잠시 호수를 버리고 언덕길을 오르니 길 중턱
에 천장호의 오랜 명물인 소원바위가 모습을 비춘다.


▲  황룡 쉼터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  겨울 가뭄으로 수분이 다소 줄어든 천장호 상류 부분

▲  소원바위로 인도하는 언덕길 (천장호둘레길)
언덕을 넘으면 내리막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다시 호수길과 만난다. 즉 둘레길
북쪽 구간은 '출렁다리 서쪽→소원바위입구→소원바위→호수길→
소원바위입구'로 순환형으로 짜여져 있다.

▲  주름선이 선명한 소원바위 (잉태바위)

천장호에 왔다면 출렁다리도 좋지만 꼭 만나야될 존재가 있다. 바로 소원바위이다. 그 모습이
마치 구석기시대에 절찬리에 쓰였던 주먹도끼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기자신앙(祈子信仰)의 현장으로 입소문이 났던 바위이다.
이 바위가 아이를 기원하는 현장이 된 것은 고려 때로 여겨지는데 다음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
이 전하고 있다.

그 시절 시집간 딸이 5년이 넘도록 아이를 얻지 못하자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가 이곳에서 700
일 동안이나 정성을 기울여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칠갑산 수호신(산신)이 감동을 먹고 딸이
혼인 7년차가 되던 해에 바위에서 살을 떼어내 임신이 되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장성하여 용호장군(龍虎將軍)에 이르렀고 거란군(요나라)을 때려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마치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탄생설화 같지만 그는 아니
다.

최근에는 인근 목면에 거주하는 유모 할머니가 44살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해 애태우는 아
들을 위해 매일 이 바위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혼인 7년차에 드디어 임신에 성공, 2013년 10월
29일에 건장한 아들을 얻었다. 앞서 전설도 혼인 7년차에 아이를 얻었고 이번 것도 7년차이니
이 바위는 결혼 7년차의 사람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소망을 빌면 거의 이루어진다고 하여 소원바위라 불리게 되었으며, 아이(특히 아들)를 기원하
던 현장이다보니 잉태바위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특히 천장호는 풍수지리상 여자의 자궁형상
이라 임신과 자손의 번창을 상징한다고 하며 그 이유로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바위 앞에 걸린 줄에는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종이가 가득 매달려 있고, 바위 피부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들이밀며 붙인 동전이 즐비하다.


▲  주름이 가득한 소원바위 (잉태바위)

소원바위 앞에는 기도 자리가 닦여져 있다. 한쪽에는 소원을 적을 하얀 종이(소원지)와 펜이
비치되어 있어 종이에 소박하게 소망을 적어 바위 앞에 매달린 줄에 매듭을 지어 붙여놓았다.
이들 소원지는 일정 시기마다 소원 성취를 이루라는 뜻에서 모아서 소각을 하는데 그가 과연
명성처럼 영험하다면 내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소문이 거짓이니
망치를 가져와 항의 표시를 해도 그는 할말이 없을 것이다.

바위 바로 앞에는 바구니가 놓여있는데 거기에는 1,000원 지폐가 담겨져 있었다. 사람들이 소
망을 접수하면서 놓고 간 것으로 그 돈은 과연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갈지 궁금하다. 설마 바
위가 직접 챙기는 것은 아닐 것이고 천장호 관리사무소나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무속인이
나 종교인이 챙길 것이다. 재주는 바위가 부리고 돈은 사람이 챙기는 것이다.

* 천장호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 (천장호길 24, 천장호 관리사무소 ☎ 042-
  940-2723)


▲  천장호 남쪽 부분

▲  출렁다리를 건너 다시 소금쟁이고개로

▲  천장호를 나오다 ~~~ (천장호 산책로)

소원바위에 약소하게 소원 하나를 들이밀고 출렁다리로 나왔다. 여기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꼼
짝없이 출렁다리를 이용하거나 칠갑산을 넘어야 되는데, 아무리 다리가 무섭다고 해도 산 하
나를 통째로 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체감거리가 긴 출렁다리를 건너 천장호 정류장으로 나왔다. 천장호전망대를 포함해 천장호 일
대에서 머문 시간이 2시간, 둘레길을 제대로 돌았다면 3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서 벌써부터 땅꺼미가 기지개를 펼 준비를 한다.

천장호 정류장에서 정산(서정리)으로 가고자 버스를 기다리는데 여기는 시외직행버스와 군내
버스 모두 정차한다. 그러니 먼저 오는 것을 타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도 군내버스가 당첨이
라 그를 타고 정산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하며 한겨울에 벌인 청양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9월 21일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이 이루어집니다. <단

  블로그는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12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