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5코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3.03.05 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2. 2022.11.13 봉천동 낙성대, 관악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관악산 구간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낙성대공원, 무당골)

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삼성산 성주암 호암산 북쪽 능선길

▲  삼성산 성주암

▲  호암산 북쪽 능선길

 



 

여름 제국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던 6월의 끝 무렵,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虎
巖山, 393m)을 찾았다.
툭하면 찾아오는 호암산 앓이도 잠시 해소하고 호암산과 삼성산(三聖山)에 아직까지 살
아남아 내 속을 긁는 몇 남지 않은 미답처들도 싹 정리하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의 고개
가 서서히 꺾이던 15시에 서울대 정류장에서 길을 시작했다.
(산행시간 약 3시간, 산행거리 약 9~10km)



 

♠  관악산호수공원과 삼성산 성주암(聖主庵)

▲  삼성산과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신림로 숲길

삼성산과 관악산(冠岳山, 632m)의 주요 북쪽 기점인 서울대 정류장에서 짙은 숲에 감싸인 도
로를 따라 15분 정도 가면 관악산호수공원이 잘빠진 호수와 자하정, 귀여운 석구상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오로지 성주암 등의 미답처(未踏處)에 정신이 팔려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
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못이긴 척 잠시 발을 들였는데, 이곳은 서울대에서 관악산, 삼성산
으로 오를 때 꼭 거쳐가는 곳으로 바쁘면 돌아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잠깐 들린다고
큰일 날 것은 없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귀염둥이, 석구상(石狗像)
관악산 호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장만한 것으로 호암산 한우물 부근에 있는
석구상을 축소, 재현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실물보다는 이곳
석구상이 훨씬 귀엽게 다가온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호수

지금은 상큼한 호수공원으로 있지만 예전에는 계곡물을 이용한 수영장이 있었다. 그 수영장은
문을 닫았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흉물스럽게 있던 것을 1996년 12월부터 거의 1년에 걸쳐 손
질을 하여 1997년 12월 자연과 어우러진 호수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공원에는 그 이름값을 하는 호수와 자하정, 석구상(1997년 11월 제작됨), 나무다리 2개, 분수
대, 쉼터 등이 있으며, 소나무 외 18종 9,180주, 초화류 수련 등 3,190본을 심어 아름답게 다
듬었다. 이렇게 싱그러운 공간이건만 바람직하지 않게도 옥의 티가 하나 있어 심히 불편함을
준다. 바로 왜정(倭政)과 독재 세력에 철저히 빌붙어 영혼을 팔고 부귀영달을 누렸던 서정주(
1915~2000)의 시비(詩碑)가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는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에서 30년이나 서식하여 관악구와도 인연이 깊다. 게다가 20
세기 주요 시인으로 쓸데없이 꼽히다보니 관악구청이 그의 그릇된 점을 살피지도 않고 문학적
업적만 내세우며 이렇게 개념도 없이 시비를 세운 것이다. 또한 서울시는 그보다 한술 더 떠
그의 남현동 2층 양옥을 인수해 내부 손질을 거쳐 그의 유품과 문학작품을 취급하는 기념관으
로 세상에 내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오히려 때려 부시고 연못을 파야 될 판에<예로부터 역적(逆賊)의 집은 말끔히 부시고 그 자리
에 연못을 팠음> 관악구와 서울시가 앞장을 서서 그의 흔적을 붙잡아 찬양하고 있으니 행정관
청 철밥통들의 역사의식과 개념들이 이렇게도 없다. <관악구는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도난을 당하자 이것도 쉬쉬하여 크게 욕을 먹은 화려한 전력이 있음>


▲  오늘도 평화로운 호수

호수는 거의 생태연못 수준으로 수초(水草)가 많고 오리와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그 자체이다.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여기서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
기 같다. 섬 복판에는 동그란 섬까지 띄워놓아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숲 너머로 서울대 농업
생명과학대학 건물이 고개를 내밀며 이곳의 경치를 시샘한다.

    ◀  연못에 두둥실 띄워진 동그란 섬
섬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깥 세상을 거부하며
고고하게 솟아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미치
지 않는 곳이라 마음껏 나래를 펼치며 그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  호수공원의 화려한 입술, 자하정(紫霞亭)
1997년에 지어진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살
짝 들려진 처마의 선이 꽤 경쾌하고 아름답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자하정과 호수, 그리고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  호수를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의 위엄
오늘도 저들이 있기에 호수는 평안하다.

▲  성주암을 알리는 표석
관악산 호수공원을 둘러보고 성주암으로 이동했다. 공원에서 성주암까지 10분
거리로 관악산119산악구조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성주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성주암 대웅전(大雄殿)

삼성산 북쪽 끝자락이자 돌산 동쪽에 성주암(聖住庵)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원
효대사(元曉大師)가 677년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가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성주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즉 원효대사를 성스러운 존재로 높인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
은 아쉽게도 없는 실정이다.

14세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태정원년<泰定 元年, 원나라(몽골) 태
정제의 연호, 1324년>이라 쓰인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때 창건되거나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
다. 그것이 성주암에서 나온 것 중 가장 늙은 유물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삼막사(三幕寺), 안흥사<安興
寺, 염불사>, 망일사<望日寺, 망월암>와 더불어 관악산의 4개 사찰로 나오며 성주사(聖住寺)
로 기록되어 있다. (삼성산을 관악산의 일원으로 보기도 함) 또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시흥
읍지(始興邑誌)'에는 삼막사, 호압사(虎壓寺), 염불사(念佛寺)와 함께 4개 절의 하나로 나와
있어 삼성산 일대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던 절임을 알려준다.
1883년 금화형기가 만든 현왕탱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으며 오래된 석탑도 1기 있었으나 왜정
(倭政) 때 왜인이 빼돌렸다.

1897년 만월(滿月)이 폐허가 된 절터에 작은 암자를 지어 법등(法燈)을 다시 켰고 1966년 혜
담(慧潭)이 중창을 했다. 1971년 화강석을 이용해 대방(大房)을 지었고 1981년 종연(宗演)이
3년에 걸쳐 대웅전을 지었으나 1997년 10월 화재로 대웅전 등 목조 건물이 모두 날라가고 말
았다. 이때 서울과 경기도의 40여 사찰이 불의의 방화를 당했다.
이후 주지 재홍(才弘)의 지도 아래 승려와 신도들이 임시 천막을 치고 3년에 걸쳐 불사(佛事)
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2006년 12월 관악구 전통사찰로 지정을 받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대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늙은 유물은 커녕 고색도 다
말라버려 오랜 역사를 무색하게 한다. 절은 북/서/남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확
트여있어 관악산이 훤히 바라보이며 마치 알둥지처럼 자리 또한 포근하다. 게다가 절이 암자
에 걸맞게 아담하여 두 눈에 쏙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대방 뒤쪽으로 돌산과 호암
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 성주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198 (신림로 15-250, ☎ 02-877-7180)

▲  성주암 대방(大房)
종무소와 선방, 요사(寮舍), 공양간의 역할을
하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그 뒤쪽에
호암산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다.

▲  11면 관세음보살상
큰 얼굴 하나에 작은 얼굴 10개 등, 11개의
얼굴을 지닌 관세음보살이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관악산을 지그시 바라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화려한 닫집
마침 유가족들이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성주암에서 바라본 관악산의 위엄
성주암은 관악산 조망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다. 바로 정면에 관악산이
마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  대웅전 뒤쪽 바위에 주렁주렁 달린 칠성탱과 산신탱, 약사여래상

성주암은 다른 절과 달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머금은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이나 산신각 등의 건물이 없고, 대신 대웅전 뒤쪽의 그늘진 암벽을 활용해 칠
성탱과 산신탱을 두어 노천 삼성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바위 피부를 무작정 깎아서 만든 것은 아니며 별도의 돌판에 그들을 새겨 벼랑 앞에
두었다. 그리고 산신탱 위쪽 벼랑에는 석조(石造) 약사여래좌상을 두었는데 그가 경내에서 가
장 높은 곳을 장식하고 있다.

▲  하얀 피부의 석조 칠성탱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매끈하다.

▲  산신 가족이 담긴 석조 산신탱(밑)과
석조 약사여래좌상(위쪽)


▲  5층석탑과 마니차

성주암은 바로 눈에 보이는 대웅전 주변이 전부가 아니다. 대웅전 뒤쪽 벼랑에 칠성탱과 산신
탱 등이 있으며, 대방 뒤쪽으로 가면 8각으로 다듬은 참한 모습의 석탑과 그를 반원(半圓) 모
양으로 둘러싼 마니차가 있기 때문이다.

5층석탑은 성주암의 유일한 탑으로 8각의 바닥돌과 연꽃무늬와 팔부중상(八部衆像) 등이 새겨
진 기단석(基壇石) 위에 8각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를 보륜(寶輪) 등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탑 뒤에는 '마니차'란 동그란 돌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그는 티벳불교에서 전래된 것
으로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인데,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같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티벳 글자가 새겨진 마니차

마니차 밑에 있는 검은 피부의 돌판에는 1997년 이후 절 중창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빼
곡히 적혀있다. 저들이 있기에 성주암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외형 확장과 재물
에 욕심내지 말고 오직 사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 속세(俗世)를 위해 사는 아름다운 절이
되기를 바라면서 성주암과의 첫 인연을 정리한다.



 

♠  호암산과 서울둘레길5코스 거닐기

▲  성주암에서 호암산으로 인도하는 산길

5층석탑을 지나면 돌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그 길을 오르면 돌산 북쪽
으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와 관악산둘레길 2구간(서울대 정류장↔국제산장아파트, 4.7km)과 만난다.
둘레길 대신 하늘과 가까운 곳을 원한다면 호암산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을 이용
하면 되며 관악산둘레길 2구간이 장군봉 북쪽까지 동행을 한다. (둘레길의 위치상 삼성산둘레
길이 맞지만 관악산둘레길을 칭하고 있음)

나는 산봉우리 대신 성주암과 호암산 북쪽 능선 등의 미답처 개척을 위해 왔으므로 호압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울둘레길5코스를 택해 길을 재촉했다.


▲  솔내음이 오각을 간지럽히는 돌산 북쪽 산길

▲  서울둘레길5코스 약수사 윗쪽 구간

돌산 북쪽에서 호압사까지 서울둘레길5코스 구간은 느긋한 길의 연속이다. 오르락과 내리락이
반복되지만 호압사 직전 구간을 빼면 그 기복은 별로 없으며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藥水寺
), 삼성산성지 등의 조촐한 명소들이 연이어 포진해있어 가는 길이 심심치 않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 윗쪽~삼성산성지 구간)

잣나무와 메타세콰이아, 단풍나무를 빽빽히 심고 그 짙은 그늘에 쉼터를 닦았다. 숲 그늘에는
의자와 평상 등을 넉넉히 깔아 잠시 쉬어가거나 낮잠, 독서, 간식 섭취에 아주 좋으며 숲속도
서함도 비치하여 독서의 여유도 누리게끔 했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앞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①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②
오로지 정면에 보이는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맹수처럼 삼성산성지는 쿨하게
통과했다. 어차피 적지 않게 인연을 지은 곳이다.

▲  수풀을 앙증맞게 다져놓은 서울둘레길5코스 (삼성산성지~호압사 구간)

▲  호암산 밑에 이르다 (사진에 보이는 산이 호암산 정상)

삼성산성지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호압사 분기점에 이른다. 이곳에는 넓게 쉼터가 닦여져
있는데, 남쪽으로 각박하게 이어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호암산 정상에 이르며 호압사는
쉼터 서쪽에 펼쳐져 있다.
호암산에 가면 보통 호압사를 끼고 가는지라 이곳 분기점은 아주 낯이 익다. 여기서 보통 호
압사와 서울둘레길5코스 석수역 방향인 서쪽, 삼성산성지와 서울둘레길5코스 서울대 방향인
동쪽, 정상과 한우물 방향인 남쪽으로만 주로 갔지 북쪽 길은 단 1번도 가지를 않았다. 아무
래도 동/서/남쪽으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서울둘레길5코스 등
호암산의 알짜배기 명소들과 잘생긴 바위들, 일품 조망들이 펼쳐져 있고, 삼성산과도 이어지
므로 버릇처럼 자꾸 가던 쪽으로만 간 것이다. 반면 북쪽은 딱히 흥미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북쪽을 개척하고자 찾은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독산자락길)과 목달산

▲  호압사분기점 북쪽 헬기장

호암산 북쪽 능선은 시흥동과 독산동(禿山洞), 난곡 사이로 펼쳐진 긴 산줄기이다. 북쪽으로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져 금천구(衿川區)의 북쪽 지붕이자 관악구(冠岳區)의 서쪽 지붕을 이
루는데, 선우공원 주변은 따로 목달산이라 불리며, 그 산줄기를 따라 '독산자락길'이 호압사
분기점에서 독산고교(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독산고교까지 욕심을 냈으나 산길이 생각 밖으로 너무 길었다. '아니 이렇게나 긴
산줄기였나?' 크게 놀라며 1시간이나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곳 남쪽인 쌍용아파트에서 길을
접고 철수했다. 몸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도 임박했기 때문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은 북쪽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러다보니 길도 완만하
고 숲도 삼삼해 여름 햇살도 눈치를 보며 내려앉는다. 정면만 본다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을 거니는 기분이나 좌우로 시가지가 진하게 바라보여 그 감흥을 50% 이상 떨어트린다. 이
는 1960년대 이후 서울이 나날이 비대해짐에 따라 개발의 칼질이 호암산과 목골산의 살을 마
구 후벼 팠기 때문이다.
다행히 늦게나마 도시공원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이 정도라도 남게 된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아마도 호암산 북쪽 능선의 대부분은 절단이 났을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③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④

▲  독산자락길(호암산 북쪽 능선길) 시흥4동과 난향동 경계 구간
이쪽에 이르면 시흥4동과 난향동(난곡) 주택가가 능선 좌우로 너무 깊게 들어와
산세 폭이 200m 내외로 확 좁혀진다. 허나 이곳을 지나면 목골산이
나오면서 다시 산세가 넓어진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목골산(163m)은 호암산의 북쪽 끝이자 삼성산의 서북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뫼이다. 독산동
과 시흥4동, 난곡(난향동, 난곡동, 미성동)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 자락에는 선우공원이 넓
게 자리해 있다.
서쪽과 남쪽은 경사가 조금 있으나 북쪽과 동쪽은 완만하며 선우공원을 중심으로 미성동둘레
길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이 둘레길은 독산고교 뒤쪽에서 시작해 정심초교 뒤쪽 → 관악구
민방위교육장 → 목골산 북쪽 자락 → 선우공원 동부 → 영산홍동산을 거쳐 독산고교로 이어
지는 3.4km의 순환형 길이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  목골산에서 만난 이정표 의자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의자는 처음 본다. (동네 사람들이 만든 것임)

▲  잠시 하늘로 솟구치는 목골산 능선길

▲  목골산 미성동둘레길

▲  목골산 영산홍동산

선우공원 북쪽에 영산홍이 잔뜩 깃든 영산홍동산이 있다. 영산홍은 4~5월에 홍자색(紅紫色)
꽃을 피우는데 내가 갔던 때는 6월 말이라 영산홍은 커녕 그 떨어진 잎도 없었다. 이는 영산
홍의 잘못이 아닌 철을 맞추지 못하고 찾아온 나의 불찰이다. 다음에 영산홍 철에 다시 한번
찾아와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맛보고 싶다.


▲  목골산을 내려가며

영산홍동산을 내려가니 쌍용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 북쪽 산이 독산자연공원이나 시간도 이
미 18시가 넘었고 몸도 지친 터라 쿨하게 길을 접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성주암부터 해서 적
지않은 미답지를 지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 삼성산~호암산~목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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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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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낙성대, 관악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관악산 구간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낙성대공원, 무당골)

낙성대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관악 강감찬축제, 관악산 서울둘레길 5코스)


' 낙성대, 관악 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늦가을 나들이 '

낙성대 안국사

▲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3층석탑 관악산 무당골

▲  낙성대3층석탑

▲  관악산 무당골

 



 

늦가을이 익어가는 매년 10월 중/하순에는 강감찬 장군의 유적인 낙성대에서 '관악 강참
찬축제'가 열린다. 관악구(冠岳區) 제일의 축제로 등극한 그의 명성을 나의 침침한 망막
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축제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그곳을 찾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에서 낙성대까지는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이라고 하여도
완전 북쪽 끝에서 남쪽 끝이라 아무리 빠른 지하철로 가도 1시간 이상은 걸린다. 낙성대
역(2호선)에서 답답한 땅굴을 벗어나 낙성대로 가다가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 길을 동
쪽으로 조금 틀어 낙성대동 주택가로 들어섰다. 밀림 같은 주택가 한복판에 옛 낙성대터
(강감찬 생가터)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
 서울 지방기념물 3호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지금은 '낙성대동'이란 행정동명을 쓰는 봉천동(奉天洞) 218번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
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으로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
기서 남쪽으로 1리 정도 떨어진 낙성대공원과 안국사 일대를 일컬으나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
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나 하위
권 대학교의 이름이 아니니 오해가 없기 바란다~~!>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왕조의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
이 근처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
어진 그는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니 그곳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옛 시흥군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 있었다.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가(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학문을 관장하는 4번째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
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니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났음을 문곡성을 빌려서 표현했을 것이
다.

당시 고려는 중원대륙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대륙의 사신, 무
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고려의 내해(內海)
나 다름이 없는 서해바다를 오갔다.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하여 개
경에서 남쪽으로 파견된 관리나 칙사(勅使)가 지나갔을 가능성이 크며,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
서 지나가지도 않았을 중원대륙 사신으로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려나 조선은 중원
대륙을 동경했고 군침을 흘렸던 것이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기도 하다. 그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
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못한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갯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 보이나 그게 코앞에 다가왔을 때는 정말 답이 없는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렸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은 형편없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러다가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탄생지를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탑
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으로 그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곳을 지키다가 1974년 안국사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
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고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대
유지(遺址)
'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 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나
무와 꽃이 가득해 조촐하게 소공원 역할을 한다. 강감찬 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
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곳 일대를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다면 꼭 발굴조사를 벌
였으면 좋겠다.

* 강감찬 생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3층석탑
이 새 낙성대로 옮겨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
를 달래고자 1974년에 세워졌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로 하
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
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
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을 세
웠으며 그 위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
고 다투는 모습을 담은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  낙성대유허비의 뒷모습

비석 높이는 2~3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3층석탑과 함께 나이가 꽤 지긋했던 향나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
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렸는데 그것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
살 가까이가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엮어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蘭谷)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
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년 서울시 보호수 1-23호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
한 나무를 찾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
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이 누워있음)



 

♠  관악 강감찬축제의 현장,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공원)

▲  강감찬축제 공연이 열리고 있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향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로 가는 길목
에 자리한 이곳은 1974년 6월에 조성된 것으로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공원에는 관악구의 대표 축제 '관악 강감찬축제'가 떠들썩하게 열
리고 있었다. 축제를 보고 즐기려는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데, 음악 공연과 다
양한 문화/전통 체험, 강감찬을 주제로 한 역사포럼, 장터(먹거리 장터 포함) 등이 주류를 이
룬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화/전통 체험이 풍성해 아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장
소로 딱 그만이다.

관악 강감찬축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자 벌이는 축제로 안국사에 제를 지내는 '낙성대 인
헌제'에서 비롯되었다. 1988년 추석(9월 20일)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관악구의 예전 대표 축제
인 '관악산 철쭉제'와 통합되어 '관악 강감찬축제'로 크게 몸집이 커졌다. (관악산 철쭉제는
사실상 없어짐)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안국사와 낙성대공원 일대에서 강감찬을 주제로 한 출병식, 전승
행렬 거리 퍼레이드, 역사포험 등의 이벤트, 고려민속촌과 벽란도21, 주민화합 한마당, 다채
로운 문화/전통 체험행사, 음악회, 전시회 등이 열린다. 나는 혼자 간 터라 간단히 1바퀴 둘
러보고 안국사로 넘어갔다.


▲  안국사로 인도하는 싱그러운 숲길
저 숲길의 끝에 안국사와 강감찬전시관이 있다.

▲  강감찬전시관

안국사 앞에는 근래 닦여진 강감찬전시관이 놓여져 있다. 이곳은 강감찬 장군의 생애와 3차례
에 걸쳐 이루어진 고려와 거란(요)과의 전쟁, 그 전쟁을 최종 마무리 지은 귀주대첩(龜州大捷
)을 다루고 있는데, 전시 유물은 모두 모조품이며 해설과 디오라마 중심으로 짜여져 그 시절
의 이해를 최대한 돕고 있다. (전시관 내부는 사진 촬영 가능)


▲  강감찬이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양식의 시(왼쪽)와
강감찬의 일대기를 다룬 강감찬전(姜邯贊傳)


강감찬의 한시는 오세창(吳世昌)이 고려부터 20세기 초까지 옛 사람들의 필적을 모은 근역서
휘(槿域書彙)에 수록되어 있다. 그 부분을 복사해서 이곳에 전시한 것으로 여기서 근역은 조
선을 뜻한다. (즉 무궁화 나라)
옆구리에 놓인 강감찬전은 우기선(禹基善)이 1908년에 지은 것으로 일한주식회사에서 단행본
으로 간행했다. (그 역시 모조품)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윤기가 철철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지닌 안국문은 안국사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이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약간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
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
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되며, 계단 남쪽에
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표석이 있다.


▲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낙성대 표석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표석은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성대
3글자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월 11일, 상량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월 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공사비는 4.5억원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내
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낙성대 표석 밑도리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딱딱하게 쓰여있어 독재시대
의 우울했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허나 어찌하랴 이 역시 이곳을 거쳐간 엄연한 역사인 것을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짓게 한 이를 너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內三門)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
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
진 원효로 남이(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호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
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리는 존재로 13세
기에 지역 사람들과 후손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웠다. 공덕을 기린다
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
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주(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
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로 묶인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이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의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 말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 스타일이라 다른 절의 탑을 가져와 이곳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여길
수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는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운 탑이
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원나라)와
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보기 좋게 참
교육시켜 나라를 구해주길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基壇
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 글씨가 새겨져 있
어 이 탑의 정체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
년 이상 묵은 늙은 탑이나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에 왔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는 갈
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6자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
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
소 거북함을 들게 한다. 허나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
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거나 내용을 좀 순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표석과 나무를 뽑아버리자는 것은 절대로 아님>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
되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
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푸른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본떠서 지었는데 그 무량수전의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 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리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듯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이 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
습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
휘하여 대충 때려 맞춘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면서 본전에 이렇게 걸리게 되
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겼던
김은호(金殷鎬)의 제자라 그의 화풍을 조금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년 1월 11일에서 12일 사이에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악구
청은 이를 신고하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의 나이
를 이유로 거절 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줄 것
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넸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
단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
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상상으로 근래에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었다면 정
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크게 털렸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늦가을에 잠긴 본전 뒷쪽 풍경
관악산에 접해있는 본전 뒤쪽 풍경도 제법 경치가 있으니 앞모습만
살피지 말고 뒷모습도 둘러보기 바란다.

▲  태극마크가 걸린 안국사 홍살문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낙성대공원 분수대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는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다. 1997년 10월 청
동(靑銅)으로 지은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
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지원으로 기존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했다.

★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의 아들이다. 금천강씨는 진
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에 자리를 닦았으
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이란 큰 감투를 받았다.

강감찬은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
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민중을 통해 신화처럼 미화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
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
인을 만나 그를 통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
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순진하게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仁憲)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가 부지기수이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
악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30대까지 금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그의 30대 중반 이전 기록이 너무 빈약함)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 개경으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 갑과(甲科)로 급
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그를 장군이라 부르다보니
자연히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인 윤관(
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갖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를 도입해 인재를 발
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
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난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①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그대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시오?'
호통을 치니 관속들
은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
게 맞지 않는다.

②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
리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
구리의 입을 막게 했으나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
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③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
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
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치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④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
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을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요동반도 일대의 강동6주(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재미를 보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
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해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
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년)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온 전란이 있었
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했다'
적혀있
어 그의 공이 엄청났음을 알려준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옛 조선과 고
구려, 발해의 그늘에서 오랫동안 살아갔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
나라는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하여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만 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벌써 칠순이었다.

거란군이 압록강<鴨綠江, 현재 요하(遼河)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님>을 넘어 고려의 영역에 들
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기병 1만2천을 뽑아 압
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기병을 매복시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주(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
신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털었고, 거란군이 요동반도 어딘가
로 여겨지는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
고 소배압의 거란군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본 소배압
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벌였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털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린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
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
란에게는 개망신의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이와 같
이 심한 적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을 정도이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싹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들고 개경으로 개선했다. 현종은 너
무 기뻐서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나와 연회를 베풀었으며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친히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冊封)했다. 1030년에는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
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오히려 3일에 1번씩 입궐토록 명했다. 그랬던
현종이 그해 붕어(崩御)하고 덕종(德宗)이 제왕이 되자 1031년 6월 사직이 수용되었다.
허나 바로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왕은 3일 동안 조회
를 멈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
國侯)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配享)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해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
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숙한 태
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
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했던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려를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대첩
에서 완전히 털린 거란도 이제는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 朝)
를 요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고려의 반격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쟁에 지친 상태라 딱히 거란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강동6주를 완
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으며, '내원'과 '포주' 등 극히 일부 지역은 거란이 점거했다. 이들 지
역은 요서(遼西)나 요하 주변 지역으로 고려가 여러 번 공격했으나 거란이 굳게 수비하여 점
령하지 못했으며,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시절에 비로소 회복했다. 그리고 12세기 초까
지 압록강(요하) 가교 사건 등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
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
었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적이 얼마나
장대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
용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
안 무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지석(誌石)을 발견해 무덤을 복원했다.

* 낙성대 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짧게 거닐은 관악산 서울둘레길 5코스 (낙성대~남현동)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낙성대 동쪽 산길 (서울둘레길5코스)

축제로 떠들썩한 낙성대를 둘러보니 어느덧 16시가 넘었다. 다음 정처(定處)는 딱히 정한 것
이 없어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서울둘레길5코스(이하 5코스)가 갑자기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서울둘레길은 총 8코스 157km로 이루
어져 있다. 이중 5코스는 사당역에서 관악산 북쪽 자락, 낙성대, 서울대 정문, 삼성산(三聖山
) 북쪽 자락, 호암산(虎巖山) 옆구리를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13.5km의 도보길로 관악산
둘레길과도 조금 겹치는데, 관악산과 삼성산, 호암산 등 뫼 3개를 거치다 보니 오르락내리락
이 무수히 반복된다. 허나 해발도 낮고 길의 난이도도 초급으로 무난하다. 즉 사지만 멀쩡하
면 어린이도 쉽게 완주할 수 있는 코스다. (5코스 완주는 4~5시간 정도 걸림)


▲  5코스에서 바라본 관음사(觀音寺) 능선 (사당능선)

5코스는 낙성대공원을 지나간다. 안국사 남쪽 산길로 접어들면 관악산 북쪽 산자락을 지나 사
당역으로 이어지는데,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해발 100~200m대를 구불구불 지나간다. 길
북쪽은 확 트여있고 딱히 시야를 방해할 뫼나 높은 존재가 없어서 낮은 높이치고는 조망도 괜
찮은 편이다.


▲  5코스에서 바라본 신림동, 봉천동 지역

▲  5코스에서 바라본 낙성대동, 사당동, 동작동, 서초구 지역
멀리 남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늦가을에 잠긴 5코스 산길 속으로 (무당골 서쪽)

▲  조촐하게 생긴 무당골 서쪽 계곡

▲  무당골 굴

5코스 낙성대~관음사 구간 중간 정도에 무당골이란 계곡이 있다. 이름 그대로 무당들이 굿을
했던 산악/무속신앙의 현장으로 그 현장의 중심이 바로 무당골 굴이다. 둘레길이 그 앞을 흐
르면서 그의 존재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고 나도 이렇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굿과 치성 장소로 바쁘게 살아와 굴 주위 피부가 온통 시커멓다. 굿/
치성에 촛불을 쓰기 때문이다. (특히 저녁과 밤에 치성 수요가 많았음)
비록 간의 기별도 안가는 얇은 수준이지만 작은 굴까지 지니고 있는데, 현재 무속행위는 통제
되어 있으나 치성이나 기도 행위는 밤을 중심으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우리네 속세살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리라.


▲  촛불 등에 그을린 흔적들이 아주 요란한 무당골 굴

▲  무당골에서 바라본 관악구의 평화로운 모습 (낙성대동, 봉천동 지역)

▲  무당골 동쪽 5코스 구간

무당골을 지나 관음사까지 욕심을 부리려고 했으나 햇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몸 또한 지쳐서
관음사 이전인 남현흥화브라운빌아파트(남현동)로 미련없이 내려갔다. 비록 짧게 타긴 했지만
남현동~낙성대 구간 둘레길을 오랜만에 복습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낙성대, 관악산 서울둘레길5코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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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0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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