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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7.02.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을 거닐다. 안산 나들이 ~~~ (영천시장,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
  4. 2016.08.12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대축제)
  5. 2014.08.21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한 송이 연꽃
 



 

여름 제국의 무더운 한복판에 이르면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살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봉원사에서 열
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2003년에 처음 시작하여 벌써 20년 가까이 이르렀는데, 봉원사 연꽃은 이미 지겹게 인연
을 지었다. 허나 여름에는 친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을 꼭 봐줘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봉원사 연꽃축제날의 서광이 밝아오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의 문을 두드
렸다. 이번에는 바로 봉원사로 가지 않고 안산자락길을 반바퀴 정도 돌아 봉원사로 들어
섰는데, 경내로 들어서니 벌써부터 연꽃 향기가 후각을 마구 찌르고, 연꽃의 아름다움이
속세살이로 오염된 두 눈과 정처 없는 마음을 찌르며, 연잎의 살랑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찔러댄다.



 

♠  봉원사(奉元寺) 입문 (만월전, 명부전, 미륵전)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
刹)로 꼽히는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
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
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
이 없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御)한 이
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것을 1651년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며, 이후 동,서 요사채가 불
타자 극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
을 옮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는데,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봉원사가 떠난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
역인 수경원(綏慶園)이 1764년에 닦여졌는데,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願刹) 역할까지 자연스럽게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으며
,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는 큰 비운을 겪는다.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 패거리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
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삼천불전과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와 범종, 약사불회도, 산신도, 독성도, 시왕도 및 사자/장군도, 도량장엄용 불화(오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십이지신도), 도량장엄용 불화(칠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의소제
각 편액, 용암사(龍巖寺) 감로왕도, 반야암(般若庵) 목조관음보살좌상, 반야암 목조석가여래
좌상, 반야암 석조보살좌상 등 지방문화재 20점 정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 모두 2014년 이후
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용암사와 반야암은 봉원사의 부속 사찰임)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국가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
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
문화축제'를 칭하고 있는데, 봉원사 연꽃축제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
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봉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안산자락길에서 조금 내려가면 기와집 일색의 봉원사 뒷통수가 보인다. 그 뒷통수가 점점 커
지면서 제일 먼저 만월전이 마중을 나오는데, 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봉원사 경내를 거쳐
가기 때문에 자연히 산꾼의 왕래도 잦아 늦은 시간에도 길을 열어둔다.

만월전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곳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이곳에는 1894년에 조성된 약사불회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와 1904년에 그려진 독성도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6호), 1905년에 조성된 산신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가 봉안되
어 있는데, 이 건물은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는지 늘 굳게 잠겨져 있어 봉원사를 여러 번 왔
음에도 단 1번도 그 속살을 구경한 적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만월전 앞에는 극락전이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
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아미타
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자
애수'란 어여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
무가 그늘을 베풀고 있다. 나이는 100~150년
정도로 여겨지는데, 왜 자애수라 불리는지는
모르겠다.


▲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삼봉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한다. 하지만 내 눈이 안경이
라고 내 침침한 두 눈에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
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기 때문에 역시 의구심이 든다.
허나 봉원사가 태조 이성계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열었던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
로 한 글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
로 교체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을 수도 있다.

또한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정릉(貞陵)
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란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서울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
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이완용이 쓴 주련을 싹 뜯어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

녹색 승려 머리에 금동 피부를 지닌 지장보살상은 지장전의 주인장으로 좌우로 도명존자(道明
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十王)과 판관(判
官), 사자(使者), 인왕상, 동자 12위 등이 자리해 명부전 식구들은 총 33기이다.
2019년 7월 말에 지방문화재 지정 신청을 위해 그들을 조사했는데, 지장보살상 몸속에서 조성
발원문 2점과 후령통 2점, 묘법연화경 일부가 나왔고, 도명존자 몸속에서는 명주저고리와 명
주천, 무독귀왕에서는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가 나왔다. 그리고 좌측 판관상에서 후령
통 3점과 1546년에 제작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3
), 성종 시절에 쓰여진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2호
), 묘법법화경(일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 당시 발원문(發願文)은 3개가 나왔는데, 제작시기와 만든 사람, 시주자 등의 정보를 담
고 있으나 처음 봉안되었던 절 이름은 없다. 또한 대좌(臺座) 상면에 쓰인 조성기를 통해 수
조각승 색난(色難)을 비롯한 18명이 1704년 6월 30일에 완성했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무독귀왕이 들고 있는 네모난 지물 밑면에 숨겨진 묵서명(墨書名)을 통해 1858년에 봉
원사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여 비록 그들의 제자리를 확인할 수 없지만 1858년을 전후로 봉
원사에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조성시기와 제작자 등을 알려주는 발원문과 글씨를 남겨둔 제작자의 작은 배려 덕에 여
러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봉원사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1호로 지정됨)

그리고 지장보살 뒤에 든든히 걸린 지장시왕도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는 목재로 딴 패널
형태로 관리 소홀로 화기(畵記) 부분이 사라져 자세한 정보는 알 도리가 없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위왕, 시왕상, 보살상, 공양천녀상, 동자상, 시방불상이 빙 둘러싸
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불화에 많이 쓰인 바림기법으로 옷주름 표현을 하고 있으며, 연화문(蓮花紋)
과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모란화문, 운문(雲紋), 동심원문(同心圓文), 나비문, 칠보문 등
이 장식되어 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 황색 등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채도
가 낮고 탁한 색조를 보인다. 특히 상/하단에는 얼룩이 심하며 피부색도 많이 변색되었고 곳
곳에 보채(補彩)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의복 문양, 무독귀왕상과 시왕상이 쓴 관, 손에 들고
있는 지물, 지장보살상의 광배 등은 금니(金泥) 기법을 사용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지장시왕도과 비교하여 19세기 후반 불화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 지
장시왕도의 일반적인 도상 형식과 다르게 간략화되어 집중도 있는 화면과 공간 구성이 돋보인
다.

▲  명부전 옆구리에 자리를 닦은 연꽃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
을 세워 그날의 높은 뜻을 기린다.


▲  미륵전(彌勒殿)과 7층석탑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낸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그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를 지닌 7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는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
나는 석탑 양식으로 20세기 중~후기에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봉원사 칠성각, 삼천불전, 대웅전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6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보금자리이다. 허
나 이상하게도 칠성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봉원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약사여래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치성광여래도(서울 지방
문화재자료 80호
)가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
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들어있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세음보살
누님이 용선을 타고 파도를 즐기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다.

▲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 수각(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는 거의
마를 날이 없다. 특히 한여름에는
연꽃보다 샘물이 더 반갑지.


▲  삼천불전과 3층석탑(가운데 탑)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봉원사 산사음악회 (범패 공연이 한참 펼쳐지고 있다)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를 위시해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열린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되며 거의 무한 리필임, 차가 매우 시원함) 그
리고 17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⅓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절 축제를 이용하여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의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
겨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에서 바라본 삼천불전

▲  연꽃의 향연을 바라보는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18세기 중반 건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
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부질없이 또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으로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은 것을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치명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3존상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호법신들의 정모 현장, 신중도(神衆圖)

신중도에 빼곡하게 담긴 존재들이 모두 절과 석가여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이라고 한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그들을 담아놓아 너무 정신이 없는데, 여러 번의 화마(火魔)로 많은 것을
잃은 봉원사라 그런 사고가 다시는 없도록 호법신은 싹 소환하여 담은 모양이다. 저들의 한결
같은 보호가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지.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아미타불이 극락왕생하는 고혼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들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다소 낡아보이는 영안각(靈晏閣)

▲  단촐한 1칸짜리 건물, 전씨영각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雲水閣)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을 봉안하
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봉원사에 넘긴 전성기
부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마다 절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
데 절에서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하면서 사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
줄 정도이니 시주한 돈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역시나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
는 모양이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염불당)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과 맵시를 견주면서 연꽃축제의 열기는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
보이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그들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이라도 싹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연분홍 연잎을 4박자로 펼쳐보인 홍련의 경쾌함

▲  홍련을 희롱하는 나비
연꽃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닫은 홍련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푸른 연잎 밑에서 여름 햇살을 피하는 연꽃

▲  아주 화사하게 피어난 홍련

저토록 아름다운 연꽃이지만 그 미모는 불과 1달도 못 가서 꺾이고 만다. 한참 물이 오른 지
금이야 사람들이 서로 보려고 아우성을 떨지만 그때가 되면 누가 저들을 챙겨 보겠는가? 그래
서 인생은 부질없는 모양이다.


▲  푸른 연잎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홍련

▲  산바람을 즐기며 목운동을 하는 홍련 3자매의 위엄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 같은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푸른 연잎 속에 홀로 솟은 홍련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연꽃들

▲  방긋 웃는 푸른 연잎과 그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연꽃들

▲  작게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푸른 연잎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바라보이는 대방

▲  봉원사 대방<大房,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
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
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
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
소했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고루고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聖地)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하얀 피부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높이 37cm
에 작은 불상으로 경주 불석으로 조성되었는데, 그는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
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깃든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
데, 그때 들어온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의 뱃속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과 '팔엽대홍련지도', '준제구자천원지도', '열금강지방
지도' 등 각종 다라니가 나왔는데, 그들을 머금은 복장 주머니에는 '證明臣 華應 亨眞 謹封(
증명신 화응 형진 근봉)'이라 쓰인 띠를 둘렀다. 허나 이들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화응
형진이 봉안한 것이지 불상 조성 당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으며, 추사 김정희(金正喜)
가 쓴 현판과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대방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이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넉넉히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
란 글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
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의 뒷모습 (건물 왼쪽 문짝에 그려진 것이 이만봉이 그린 신장도)
대웅전과 대방 앞은 물론 절의 숨겨진 뒤쪽까지 숙성된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돌덩어리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연꽃 밀림 너머에서 바라본 대방
지금은 연꽃 밀림이 되었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8월 말) 이곳은 원래의 모습
(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연꽃 밀림에서 바라본 삼천불전의 야경
산사음악회의 밤은 깊어만 가고...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몰랐
다. 그야말로 연꽃이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봉원사에는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늙은 나무(느티나무, 회화나무)와 16나한상,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등의 볼거리가 더 있으나 이들을 사진에 담지 않았고 시간이 늦
어 제대로 친견하지 못해 본글에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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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대웅전 뜨락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봉원사에서 열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조계사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연꽃축제로 2012년 이후 매년 인연을 짓고 있는데, 여름
이 왔으니 친(親) 여름파인 연꽃을 구경해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
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연꽃 축제날이 다가왔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후배 여인네를 만나 서울
시내버스 272번(면목4동↔남가좌동)을 타고 이대부고(봉원동)에서 하차, 다시 7024번으로
환승하여 봉원사 종점에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이 막히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변
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완전 대
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 종점으로 쓰이는 봉원사 주차장에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
쪽으로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석종형(石
鐘形)부터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들 7~8기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마을은 절 턱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붙어있으며 나무도 많아 산골마을 같은 분
위기이다. 여기가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곳 일대를 봉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조금은 빛바랜 하얀 비석이 애타게 눈
길을 구걸한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는 '조낭자 희정 유애비'로 비석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
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
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碑身)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적지않게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자주 신세 한탄을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부족했던 애정이 그녀
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
춧돌로 그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①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다보니 풍
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었다. 높
이는 18m, 둘레 4.3m로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단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②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
여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는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와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을 판매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연못 윗쪽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羅漢像)이 있다. 이들은 2001년 6월에 봉안된 것
으로 나한상 북쪽에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
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
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얌전히 절을 이전했다.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
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이 들어앉았다.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으로 이전되어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남아있음)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
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
으며,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그의 현판 2개가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
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들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대웅전과
몇몇 건물, 조선 후기 탱화들은 많이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
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와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0호), 반야
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그들 중 범종만 속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
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9년을 기준으로 벌써 17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
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
꽃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
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을 견주며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달군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들
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싹 정화시켜준다.


▲  삼삼하게 우거진 연꽃 밀림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하얀 피부와 연분홍 피부가 적절히 섞인 청초한 연꽃

▲  웃음 짓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낸 홍련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오늘도 방긋 웃는 연잎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①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②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③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④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⑤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
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두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데 그때 업어온 것으로 보이며,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
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해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
에 있음) 등이 건물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
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
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과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
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
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6.25 시절의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컸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또 부질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  봉원사 범종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찾기는 매우 쉬움) 그는 예산 덕산(德山)
에 있던 가야사(伽倻寺)의 것으로 1760년에 조성되었다. 여기서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의 명당(
明堂) 욕심으로 파괴된 그 절이다.
종 높이는 84.5cm, 입지름 61cm으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동종 중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 감돌고 있다. 또한 종형도 천판에서 시작된 외선(外線)이 종신(鐘
身) 2/4부분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올라가다가 3/4부분에서 종구까지 완만하게 떨어지고 있다.

편평한 천판(天板)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는 2마리의 용의 용뉴를 표현했으며, 그 아래 종신
은 2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종신을 크게 3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단에만 다양한
도안을 장엄하였다.
천판 아래에는 내부에 '옴'자가 새겨지고 외곽에 돌기를 표현한 원권(原權)의 범자 8개가 부
조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꼴 형태인 연곽 4개가 있는데, 사선문으로 연곽대를 구획하고,
그 안에는 연뢰(蓮蕾) 9개를 표현했다. 그리고 연곽 사이에 빈 공간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
는 보살입상 2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준제진언(準提眞言)'을 간략하게 표기했다.

종 피부에는 종의 탄생시기와 봉안처 외에 덕산과 예산, 대전(회덕, 진잠), 천안, 결성, 옥천
지역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고, 사장(私匠)인 이만돌(李萬乭), 신덕필(申德必), 최종취(崔宗就
) 등 3인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의 상태가 양호하고 경상도 이씨 일파의 대표적 장인인 이만돌이 만든 작품 양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명문을 통해 종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후분 동종의 양식과 사장
에 대한 계보, 활동을 연구하는제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했는데, 그 과
정에서 범종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 종은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 안착하면서 서울살이를 하
고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3년 승려 안진호가 작성
한 '봉원사지' 제9절 제3항에 봉원사의 재산으로 기재되어있어 늦어도 20세기 초에 들어온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원군이 왕실 원찰의 하나인 이곳에 넘겼을 가능성도 있으나 범종이 묵비권
을 행사하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고 그 휴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으니 명당의 치명
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산신탱
이 산신은 돈이 좀 있는지 앳된 동자와 동녀를 4명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호랑이는 귀여운 것이 토실토실하여 귀티가 넘쳐 보인다.
(다른 산신탱은 동자가 1~2명 정도임)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
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
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  물이 졸졸 쏟아져 나오는 수각(水閣)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
靈駕)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
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3층석탑에서 바라본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 그리고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보통 전통 공연을 처음에 내밀고, 초청 가수
(대부분 트로트) 공연을 제일 뒤에 내민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하나 상황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17시(또는 18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
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
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1/3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사찰 축제를 이용해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
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
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놀고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인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리고 있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지
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지장보살
상과 시왕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10왕 끝에는 패기가 짙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자리해 명부의 식구들을 지킨다.

명부전에 왔다면 지장보살과 시왕상도 좋지만 명부전 현판은 꼭 눈에 넣도록 하자.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다면 무려 620년을 묵은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하지만 내 눈으로 봐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는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던지라 역시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봉원사가 태조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연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로 한 글
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로 교체
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라
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여기
저기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
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  명부전 옆구리에서 만난 아리따운 홍련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
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며, 그 인등으로 인하여
인등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이 서 있는데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
식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한없이 밉기만
하다. 그렇게 나오기가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해야지. 꼭 56.7억년 후에 나타
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 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
기이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다. 아미타불과 박정희 전대통령 내외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자
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150~200년 정
도 된 것으로 여겨지나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내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살피지 못
했다. (만월전은 올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음)


▲  삼천불전 앞 산사음악회 무대에서 펼쳐진 즉석 그림 전시회
봉원사 화승이 무대에서 즉석으로 그린 그림을 삼천불전 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그림에 담겨진 붉은 꽃은 이곳 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이다.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연
꽃이 그야말로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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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을 거닐다. 안산 나들이 ~~~ (영천시장,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 안산 (무악산 동봉수대) '

▲  무악산 동봉수대(안산 동쪽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천하만물의 마지막 희망, 늦가을이 세월의 저편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혹독한 겨울 제국(帝
國)이 한참 기세를 올리던 11월 끝 무렵, 떠나가는 늦가을 누님의 뒷자락이라도 잡아볼 생
각에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안산을 찾았다.

오후 3시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독립문 남쪽에 있는 영천시장에서 떡복이와 오뎅,
튀김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원래 시장은 일정에 없었으나 안산에 가다보니 자연히
지나치게 되었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쿨하게 못지나치듯 시장 먹거리를 온전히 뿌리치기
가 어려웠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그래서
잠시 안산을 잊고 먹거리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독립문 삼호아파트 뒷쪽으로 흘러가는 안산
자락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따라 안산의 남쪽 기점인 천연뜨란채아파트로 이동, 거기서부
터 안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안산(鞍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안산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멀리 관악산과 호암산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 도심 북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
주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
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남짓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마치 말과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하는 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된 것으로 <안(鞍)은 안장을 뜻함>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또한 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서울의 남주작
(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지만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
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하여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3시간 내외
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정상부(동쪽 정상)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
어 누구든 부담없이 안길 수 있으며, 편한 둘레길의 정석으로 추앙받는 안산자락길이 산 허리
에 둘러져 있다. 게다가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가 넘는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
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지금도 안산 정상에 군사시설이 있음)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
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
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
니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
비췄다. 그리고 군사<군사 중에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여들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흰 옷을 즐겨입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
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
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되겠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무악재를 눈치를 보며 넘었
으며,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던 현장이기도 하다.

안산의 포근한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
연동, 홍제1동, 무악재역,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근래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
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
'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허브공원, 흔들
바위, 안산자락길, 메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 등의 명소가 즐비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이렇게 착한 산임에도 오랫동안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 남산에게 제대로 가려져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안산자락길을 계기로 동네 명소에서 벗어나 서울 굴지의 꿀단지로 훨훨 나래
를 펼치고 있다.

※ 안산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① 봉원사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지하철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
  서 7024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에서 하차, 동쪽
  (오른쪽) GS25시(봉원동4거리) 앞에서 7024번 시내버스로 환승 또는 도보 10분
② 천연동
*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7,8번 출구)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2번(대) 천연뜨란채아파트 방
  면 차량을 타고 뜨란채아파트 101동 종점에서 하차
③ 독립문역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 3번 출구에서 1분 정도 가면 통일로23길 골목길이 나온다. 그 가파른
  골목길을 5~6분 정도 오르면 안산자락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  안산 숲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시내 (남산과 N서울타워도 덤으로)

▲  안산 산책로에서 만난 조촐한 쉼터

천연동에서 안산 정상까지는 능선길을 따라 30~40분 정도 걸리는데, 경사가 거의 느긋하고 길
도 잘 닦여져 있다. 능선길이라 오로지 직진을 고수하면 무난하게 봉수대가 있는 정상으로 갈
수 있으며, 서울 도심과 독립문, 서대문구/마포구 지역만 보이던 시야도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정비례로 늘어나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늦가을의 향연을 누린 나무들은 무심히 다가온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거추장스러운 잎을 떨
구고 초라한 몰골로 내년 봄을 기다린다. 몇몇 나무들은 나뭇잎을 단단히 붙들며 가을을 끝까
지 고수하지만 이미 하늘마저 겨울로 가득차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은 귀를 접으며 인
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산꾼들은 낙엽의 사각사각 소리가 듣고자 그들을 밟고 지나간다. 낙
엽의 처절한 말로를 보면서 '올해도 완전 저물었구나, 이제 곧 1살이 강제로 누적되겠지~!' 싶
은 우울감이 나를 감싼다.


▲  안산 능선길 동쪽으로 보이는 독립문 주변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안산 능선길에서 바라본 천연동, 서대문 주변과 서울 도심

▲  정상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안산천약수터

안산 정상을 10여 분 정도 앞둔 곳에서 길은 능선길과 서북쪽 길로 갈린다. 정상으로 빨리 가
고 싶다면 능선길을 이용하면 되나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경사가 좀 각박하여 각별한 주
의가 필요하다. 하여 잠시 여유를 갖고 서북쪽 길로 우회하니 안산에 별처럼 널린 안산천약수
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샘터로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안산이
베푼 약수를 몇 바가지나 들이키니 목구멍과 몸 속의 불이 싹 진화되는 것 같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산악회에서 만든 조그만 건물이 여럿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가
면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모습을 비춘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2층 정자(亭子)로 여
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은 안산 정상이다.


▲  겨울에 잠긴 안산 오솔길 (안산천약수터에서 무악정 방향)
발자국 소리, 낙엽 밟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기 그지 없다.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안산의 구수한 명물로 나그네들의 포근한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에 이른다.

▲  무악정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서대문구와 마포구, 한강 너머로 강남, 동작, 관악, 영등포구 지역과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H' 마크의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안산 동쪽 정상에 자리한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의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
다. 하여 자유로운 땅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 이하 '안산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리보다 약간 낮을 뿐,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봉수대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중앙으로 빠
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세종 20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
수대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
한 무악재에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구한말(舊韓末)에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
만 아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대충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들어앉은 관
계로 재현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하였으나 주위가 문화재와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현
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단의 석
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된 것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이나
마 피어있는데 반해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
부이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중앙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다.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을 찔렀다.

▲  새롭게 두룬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여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
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
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좀 잃게 되었다.
아무리 호랑이 담배 빨던 시절에 없어진 것을 복원한 거라고 해도 철저하게 고증하여 재현했으
면 좋겠다. 입맛대로 변형을 가하면 그건 더 이상 문화유산이 아니다.


▲  안산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인왕산(仁王山)의 위엄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이겠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40m 이상 더 높다.
그래도 서울의 우백호(右白虎)가 아니던가~~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
닌 서울을 두 발 아래 두며 제대로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이때만큼은 천제(天帝)도 황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바로 밑에 무악재를 비롯하여 인왕산, 독립문, 홍제동, 홍은동, 신촌,
서울 도심부,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비롯해 멀리로는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虎巖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이곳에 왜 봉수대를 씌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
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홍제동과 홍은동, 불광동, 평창동,
북한산 서남부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연신내를 비롯하여 멀리 고양과 파주 지역의
산줄기까지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도심
도심을 이루는 빌딩숲 너머로 남산과 N서울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4)
바로 밑에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도심부와 남산,
서울 동부, 강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5) 안산 남부와 도심부, 신촌 지역
우리가 저 밑의 안산 남쪽 기점(천연뜨란채아파트)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꽤나 올라왔다. (초여름 사진)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6)
안산 남부와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여의도 63빌딩을 비롯하여
동작구와 관악산, 호암산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7)
일몰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대문구와 마포구, 강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8)
인왕산 남쪽과 서대문독립공원, 도심부, 서울 동부 지역을 비롯해
불암산과 아차산 산줄기가 까마득하게 바라보인다.

▲  정상 바로 밑 바위 (정상 동쪽)
정상 동쪽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다.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가파르며
그나마 서쪽이 좀 접근이 편하다.


안산 정상에서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며 열심히 사진에 담으니 시간은 어느덧 6시가 되
었다. 산바람은 더욱 매서워져 바람과 맞닿은 얼굴이 아플 정도이며,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달
님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특히 산에서는 평지보다 일찍 해가 떨
어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뒷탈이 없다. 아무리 안산이 작은 산이라고 해도 염연히 뫼는 뫼이기
때문이다.

짙어져가는 땅거미에 안산 정상을 내주고 봉원사 방면으로 내려가는데 금세 어두워졌다. 길이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져 조금 정신이 없었으나 길눈과 지리에 밝은 나의 직감을 믿고 내
려가니 어느덧 봉원사 경내에 이른다. 봉원사는 일몰 이후에 모든 건물을 잠궈놓기 때문에 그
규모에 맞지 않게 벌써부터 어둠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봉원사와 절 밑에 펼쳐진 마을(봉원사 승려들의 집이 대부분)을 지나면 7024번 종점과 봉원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서울역으로 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대기시간이 길어
서 봉원동로터리, 이대부고까지 더 내려갔다. 거기까지만 가면 도심으로 가는 버스는 물 흐르
듯 넘쳐난다.

이대부고 정류장에 이르러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북촌(北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무리 명소나 맛집을 많이 안다고 해도 정작 필요할 때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내 돌
머리의 단점이다. 하여 생각난 감에 북촌으로 흔쾌히 넘어가기로 했다.

퇴근/하교 손님들로 가축 수송을 이룬 272번 시내버스(면목4동↔남가좌동)를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북촌으로 들어섰다. 한정식을 먹자는 의견이 있어서 마땅한
곳을 물색하던 중, 마침 부근에 '다정'이란 한정식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 가봤던 집을
생각했으나 새로운 집을 개척할 겸, 별 미련 없이 그 집의 사립문을 열었다.


▲  김치 등의 밑반찬과 보쌈, 잡채, 굴

▲  고기 8조각 보쌈의 위엄

▲  달랑 3종류 6조각 전의 초라함

▲  제일 마지막에 나온 칼국수의 위엄

다정에서 2만원대의 한정식을 주문하였다. (가격은 변동 가능) 시장한 배를 달래며 맛이 어떨
까 기대를 하고 있으니 얼마 안가서 김치 등의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굴
과 보쌈, 잡채, 전이 차례대로 나왔는데 (그 외 몇 가지가 더 있었으나 생각이 안 남) 높은 가
격에 비해 성인 남자들이 먹기에는 양이 적었다.
좀 두둑하게 나왔으면 좋으련만 쥐꼬리마냥 찔끔찔끔 나오니 나오기가 무섭게 동이 난다. 다행
히 주인 아지매가 인심이 좀 있는지 전과 잡채, 몇몇 반찬을 더 갖다주었으나 그것으로는 택도
없었다.

그렇게 메인 메뉴를 처리하고 나니 제일 끝에 칼국수가 나온다. 칼국수 대신 밥을 먹어도 되지
만 칼국시가 양이 많다고 하여 그것을 택했다. 조개와 호박, 면발이 어우러진 칼국수는 국물이
꽤 진국이었다. 국수와 호박도 괜찮았지. 칼국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배가 덜 찼지만 국수로 인
해 배는 완전히 만땅이 되었다. 이건 완전 한정식보다 칼국수가 더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비싼 한정식을 끝으로 11월 안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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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대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 대웅전 뜨락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
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바
로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하고 있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그것이다. <그냥 축제도 아니
고 무려 대축제..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신통치 않아 서울 사람들도
많이 모르는 실정이다. 주말에는 답사꾼, 사진꾼, 산꾼 등이 좀 몰리긴 하지만 평일은 피
서철임에도 한산한 편이라 보다 적극적인 홍보가 절실해 보인다.

7월 한복판에 봉원사 연꽃 축제 소식을 접하고 연꽃에 대해 입맛을 다시며 흔쾌히 축제를
기다렸다. 그 축제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적이 있지만 여름이 왔으니 친(親)여름파
인 연꽃의 향연을 1번은 꼭 봐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
큼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축제일이 다가오자 후배 여인네와 함께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서대문역
(5호선)에서 봉원사 턱 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8분 정도를 달려 봉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
, 꼬리를 무는 차량들의 정체와 사람들의 엄청난 물결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
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는 곳은 봉원사 주차장으로 그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숯가마
찜질방이 있다. 여기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이곳에는 석종형(石鐘形)부터 8
각원당형(八角圓堂形)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
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상관은 없다.
마을은 절 바로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거의 붙어있으며 나무도 제법 많아 마치
벽지 산골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이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 일대를 봉
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
문이다.


▲  봉원사 종점에서 봉원사로 인도하는 길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애타게 눈길
을 보낸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
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
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을 기리는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
나 절에 시주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남긴다는 뜻의 유애비(遺哀碑)를 칭하는 것을
보니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
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
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고 한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
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
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
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신세 한탄
을 자주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지극히 부족했던 관심과 애정이 그녀를 죽음
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자리해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춧돌로 비각은 오래 전에(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함) 녹아 없어졌다.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가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도 구석에 있어 진짜 지나치기가 쉽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
다보니 풍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
었다. 높이는 18m, 둘레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가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
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 나무에서도 완
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
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 장안에서 규모가 제법 있는 절이지만 아직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
했다. 그러니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가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를 팔고 있으며,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
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는 것 같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
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우려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봉원사에 크게 재정을 지원했던 전성기(全星基)
의 송덕비(頌德碑)가 담겨져 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다.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하얀 연꽃의 수수한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수조를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
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과 백련(白蓮)까지 늦
여름에 나타나는 수련(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모여 있다. 어여쁜 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와 대
자연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연꽃들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무슨 근심이 있는지 입을 오므린 홍련
저 홍련에서 심청(沈淸) 누님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건물 이름
그대로 범종이 담겨져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
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정도를 길게 하
고자 함이라 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
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
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의 하나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고,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
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국사 창건설은 거의 신뢰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
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했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
御)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하니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
란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 수경원(綏慶園)을 1764년에 조성했다.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
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
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리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말, 무심한 총탄과 폭탄이 무수히 날라와 광복
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까지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대웅전과 몇몇 건물만 간신히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
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1994년 쓰러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
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고, 2011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
),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370호
), 반야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이들은 2014년 여름 이후에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
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
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
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봉원사는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곳으로 숲속에 묻힌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이다.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기도 하며, 접근성과 교통도 그런데로 착한 편이라 속세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온 듯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맑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6년을 기준으로 벌써 14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도 전통차 시음,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절에서 안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숨은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까지 올라
가면 동쪽 정상부에 서울 지방기념물 13호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
대는 근래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홍제동, 독립문 방면으로 내려가면 되며, 안산 둘레에는
도심의 아름다운 숲길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안산자락길(7.4km)이 아주 편안하게 닦여져 둘레
길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4번 출
  구)에서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경복궁역(3호선) 1번 출구를 나와서 사직동주민센터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
  고(봉원동)에서 하차, 봉원사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여름(7월 말~8월 초)에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영산재를 비롯해 산사음악회와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2016년에는 7월 30일 딱 하루만 축제를 했음)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을 하는데, 퇴근
  이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이 절을 지킨다. (연꽃축제 기간에는 대웅전은 늦게까
  지 문을 열어둠)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대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홍련을 희롱하는 잠자리
연꽃 봉오리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방긋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내 보인 백련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
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당시 봉원사 주지인 영월이 6.25로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던 중,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
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세우고 대방
으로 삼았다. 그래도 명세기 대원군의 별장 건물인데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
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으며, 추사 김정희(金
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
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
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
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
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
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인간문화재인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아서 이곳에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숨겨진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자리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운수각(雲水閣)과 영안각(靈晏閣)

▲  영안각과 전씨영각(靈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
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넘긴 전성기 부
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忌日)마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데, 이렇게 사
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줄 정도면 시주한 재산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절이나 속세
나 돈 앞에서는 역시나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절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
유까지 하며 찬양을 하니 말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
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미국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
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
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駕
)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과 좌우에 가득 널린
조그만 3천불의 위엄

▲  삼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를 돌리면 불교 경전을 다 이해하고
더불어 소원까지 성취된다고 한다.

▲  저보다 정신이 없는 그림이 또 있을까?
100명이 넘는 호법신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  화려하기 그지없는 삼천불전 내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금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
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
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
승정(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진신사리 보유 사찰
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
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
음껏 뽐낸다.

▲  삼천불전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좁게나마 신촌과 서대문구,
마포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저 수인(手印)은 무슨 제스쳐일까?


▲  삼천불전 서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3) - 서울시 보호수 13-2호
봉원사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높이 21.5m, 둘레는 4.4m이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1972년) 추정 나이가 430년이라고 하니 그 사이 40년이 얹혀져
470여 년의 장대한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  삼천불전 주변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
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
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
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자리해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을 보니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게 맞는다면 거의 620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
개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
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
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명부(저승)
식구들을 지킨다.


▲  명부전 옆구리에 둥지를 튼 연꽃 무리들 (거의 연잎만 있음)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
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彌勒佛)이 그저 밉기만 하
다. 그렇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 후에 나타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는 살
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아리따운 홍련

▲  삼천불전의 숨겨진 부분 - 절 주차장

봉원사에 조촐히 닦여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연꽃이 앗아간 나의 마음을 간신히 되찾아 절을 나올 때는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삼천불
전 서쪽으로 내려갔다. 경내에서 볼 때는 1층(아래 공양간을 합치면 2층)이지만 그 밑에 숨바
꼭질을 하는 공간이 있어 삼천불전은 거의 4층 규모이다. 물론 지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저런 모습이 나온 것이다.

삼천불전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도 봉원사 주차장이다. 그 주차장을 지나니 봉원사의
숨겨진 나머지 보호수 1그루(느티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  봉원사 느티나무 (4) - 서울시 보호수 13-5호

이 느티나무는 민가 옆에 비스듬히 자리해 있다. 하늘을 향한 높이는 23m, 둘레는 3m로 보호수
로 지정된 1981년 당시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80여 년으로 보면 된다. 나무가
특이하게 절을 향해 45도 정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절을 향한 일편단심을 보여준다.

이 나무를 끝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
는다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괘불도와 반야암(봉원사의 부속 암자)에 깃든 지방문화재
불상들을 꼭 두 눈에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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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8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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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 서울 봉원사(奉元寺)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연꽃의 위엄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연꽃을 주인공으로 한 연꽃축제가 천
하 곳곳에서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아직 인지도는 낮
지만 연꽃축제를 하나 가지고 있으니, 바로 2003년부터 봉원사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연꽃
문화대축제이다.

무더위가 한참 물이 오르던 7월 끝 무렵에 봉원사 연꽃 소식을 접했다. 여름이 왔으니 친
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은 한번은 봐줘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여 번
잡한 주말을 피해 평일 중에 날을 잡아 후배 여인네와 봉원사를 찾았다.
오후 2시에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봉원사 턱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산(鞍山) 자락에 묻힌 봉원사 종점에 발을 내린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마을이다. 아무리 인구 1,000만의 서울이라고 해서 높은 건
물과 번잡한 거리, 무수한 인파들만 있는 것은 아닐진데, 서울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
때문일까? 서울 장안에서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다들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
가 눈부터 의심한다.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봉원사 주차장은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찜질방이 자리해 있고 봉
원사로 가는 길목에는 민가들이 조촐하게 사하촌(寺下村)을 이룬다. 이 마을은 봉원사 승
려들이 주류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산다. 이는 봉원사가 혼인을 허용
하는 태고종(太古宗)의 중심지라 그런 것인데 다들 별도의 집과 거처를 가지고 있어 절의
필수 요소인 요사와 선방 등 승려의 숙식공간은 매우 적다. 그러다보니 경내 밑까지 승려
들의 집이 형성되어 절과 마을의 경계가 참 애매모호하며, 집들 사이로 나무가 많아 첩첩
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마을 같은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봉원사 주변은 개발제한구
역임)

종점에서 봉원사를 향해 몇걸음 가다보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부도전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석종형(石鐘
形) 승탑과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있다. 비석
은 대략 9기로 다들 왜정(倭政) 이후에 만든 것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때깔이 무지
곱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조낭자 희정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인데. 조그만 구멍가
게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눈길을 보낸다. 허나 구
석에 서 있어 정면만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호기심이 많은 본인인지라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과 관련된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나 절에 공헌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전한다는 뜻의 유애비(遺
哀碑)를 칭하는 것이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그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남편은 사업
에 바빠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살
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
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시주
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고 나와있다. 허나 실질적인 이유는 그녀의 순탄치 못했던 인생과 남편의 애정 부족이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놓여져 있는데, 이들은 비석을 씌우던 비각의 주춧돌로 비
각은 오래 전에(아마도 6.25 때 파괴된 듯) 사라지고 비석만 멀뚱히 남아있다.


▲  봉원사로 올라가는 길 (유애비 주변)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무려 5그루나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차례대로 지나 경내 직전에 이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오
르막길에 있다보니 인간의 불안전한 눈의 착시로 풍채가 더욱 대단해 보이는데, 보호수 지정 당
시 추정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약 40년이 더해져 약 340~350살 정도 되었다. 높이는
18m, 둘레는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도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
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또 나타나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준다.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발을 딛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갖추지 못했고, 절과
마을의 경계도 조금은 애매하며 이들 나무가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나이가 더 들었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가 1972년으
로 약 440~450년 정도 묵었으며, 그보다 키가 좀 작고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갖은 전통차와 식혜를 팔고 있으며, 불
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고 있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자아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비각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全星基)를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들어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둔 것을 보면 시주액이 어마
어마했던 모양이다. (역시 돈이 최고!!)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연못 북쪽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의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통을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까지 늦여름에 나타나는 수련
(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있다. 이쁜 꽃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의 마음을 표현하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들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활짝 개인 연분홍 연꽃의 위엄

▲  평범한 물통 속에 뿌리를 내린 연꽃들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애듯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이
들어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 정도를 길게 하고자 함이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소상히 적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봉원사 경내

※ 도심과 가까운 포근한 산사이자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聖地)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
왕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刹) 봉원사가 포근히 터를 닦았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고 그나마 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하니 창건 시기에 대한 신뢰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愚
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
고 전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했는데, 그 내용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한 삼은(三隱)의 1명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조선 건국 이전에 그리했거나(그래도 한
때 가까웠던 사이이니) 또는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면서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이후 1748년 영조(英祖)가 절을 옮기라며 지금의 땅을 하사
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고,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란 친필 현판
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기존 자리에는 그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
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을 만들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이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
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또한 수경원이 연세대에 들어선 이후 그곳의 원찰(願刹) 역
할까지 도맡게 되면서 법등(法燈)이 꺼질 일은 거의 없게 된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벌였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
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28일 무심한 총탄과 폭탄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이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어 한줌의 재
가 되고 만다. (그나마 대웅전과 몇몇 건물은 살아남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 공덕동(孔德洞) 동
도공고(현 서울디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
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헐값으로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무리를 하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
정문화재인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한 주
지 혜경이 신도의 지원을 모아 1994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았다.
2009년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
고, 2011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대방), 극락전, 만월전, 미륵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대웅
전이 화재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면서 지정유형문화재는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하나
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의 기능 보유자인 만봉이 주석하
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후학을 기르고 있어
영산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
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
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이 절은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다. 접근성과
교통도 모두 착한 수준으로 도시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속세에 유린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첩첩한 산골에 들어선 듯
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청정하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1주 동안 펼쳐보이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울 장안 유일의 연꽃축제로 그 이름하여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부른다. 허나 '봉원사 연꽃
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대웅전 뜨락을 비롯해 절 전체가 연
꽃 향연의 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다른 연꽃축제와 달리 연꽃을 연못이나 논두렁에 가꾸
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에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

절에서 안산으로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또다른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에는 서울 지
방기념물 13호
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대는 1994년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연희동이나 홍제동, 독립문, 서대문역(천연동) 방면으로 내려가면 된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4년 8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에서 7024
  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을 나와 적선동 정류장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
  봉원동) 하차, 봉원사길로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봉원동4거리)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한여름(7월 말~8월 말 사이)에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축제 시작일과 마지막날,
  주말에는 영산재를 비롯해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가 열리며 굳이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7~8월 내내 연꽃을 선보인다. (☞ 2014년은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열림)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하는데, 퇴근 이
  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 서넛이 절을 지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연꽃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여인의 앵두 입술보다 더 진한 홍련 -
'어서 꽃잎을 펼쳐보여야 될텐데!!' 허나 몸은 그의 마음처럼 잘 따라주질 않는다.

▲  활짝 핀 홍련

▲  대방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 사이에 놓인 길 -
마치 연꽃 논두렁길을 걷는 기분이다. 허나 축제가 끝나고 수조가 모두
사라지면 원래의 모습(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이제 막 피어난 홍련과 전성기를 누리고 너덜너덜해진 홍련

▲  활짝 웃는 백련과 심기가 편찮은 홍련

▲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이 저 연꽃에서 환생하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미소가 아름다운 백련

▲  연을 담은 수조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서쪽에서 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죄다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현 서울디
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6.25로 파괴된 대방을 다시 짓고자 궁리하던 중, 이병도의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
군의 흔적을 부시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당시 봉원사 주지 영월
은 아소정 본채를 구입, 그 목재로 도화주 김운파와 함께 1966년 대방을 재건했다.
그래도 아소정의 유일한 흔적인데, 내부는 좀 절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하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
습을 유지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기존보다 축소/변형한 점이 몹시 아쉽다. 비록
왕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하고 적지않게 모습이 바뀌었지만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대원군 시절의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
에서 삼천불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그것도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다고 하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
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를 비롯한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주불(主佛)로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옮겨온 것이며, 예
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金正
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
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대방에 걸린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라당 말아먹었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해 내부에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검은 가루가 되었으니 6.25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봉원사
가 축적한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은 했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가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종이 하나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
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를 강제로 불지르게 하고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그 자리로 이전했는데, 그때 타지 않고 남은 종을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라고 한다.
가야사터 자리가 명당은 명당이라 그의 아들이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
라를 말아먹었으니 거참 명당의 숨겨진 가시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좌측을 꾸며주는 신중탱을 비롯한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우측을 꾸미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 등의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火魔)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나름이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에 넘어가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
다.


▲  대웅전 우측 계단에 진열된 연꽃들

▲  운수각(雲水閣)

▲  영안각(靈晏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각
으로 고참 승려의 생활 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동안
혼백(魂魄)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연
령은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부부
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기일(忌日)에 절에서 제를 지낸다. 역시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
쩔 수 없는 모양이다. 봉원사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까지 하고 있으니 말
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의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
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고,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동
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간신히 완성을 보았
다. 무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떠나보내는 어이없는 비극을 겪었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애기같은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시주로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의 위엄

▲  삼천불전 내부 우측

▲  삼천불전 내부 좌측


▲  괘불(掛佛) 제작 현장

16세기부터 전국에 번지기 시작한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영산재 등 불교의 주요 행사 때 거는 큰
불화이다. 그러다보니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는 비싼 몸으로 200곳이 넘는 고찰을 기웃거린 나도
겨우 10번 남짓 친견했다. 마침 삼천불전 내부에서 괘불 제작을 하고 있어 잠시 지켜보았는데,
그림이 얼마나 큰지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아이처럼 보일 정도이다. 처음으로 보는 괘불 제작
현장, 저들의 갖은 정성에 의해 불교미술사의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괘불은 그렇게 눈을 뜬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
마사(寺)를 방문했다. 그때 그곳 대승정인 그나니사라가 부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
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는데, 그 사리를 봉안하고자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
후에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웠다.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원칙에 따라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껏 드러낸다.

▲  3층석탑 옆에 세워진 석가모니
진신사리탑비

▲  조선후기 선각자인 이동인이 이곳에 있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삼천불전 앞에 배치한 연꽃들

▲  이동인 손가락 조형물 주변에 피어난 연꽃의 분홍물결~~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빛이 바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
와 신들의 무리가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
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의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걸려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08년 8월 주시경
(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국어연구학
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어 봉원
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을 세워 그날을 기억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鄭道傳)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
을 보니 고색의 기운은 그리 짙어보이진 않는다. 허나 만약 정도전이 쓴 것이 맞다면 거의 620
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개
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대
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적
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
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저승의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
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저승의
식구들을 지킨다.

▲  지장보살 좌우에 늘어선 저승의 10왕과 여러 영가들의 영정
인간은 죽으면 저승으로 내려가 10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염라대왕(閻羅大王)의
입김이 커서 그에게 심판을 받는 7주에 염라대왕에게 잘 보이려는 뜻에서 49재를 지낸다.
물론 49재를 지낸다고 해서 무조건 극락으로 빠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이용한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라 불
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이상으로 흘
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그저 밉기만 하다. 그렇
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을 채워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엄연한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
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
는 살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어여쁜 홍련

▲  봉원사를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힘없는 발걸음을 하다

봉원사에 펼쳐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속세로 나온 우리는 저녁을 먹고자 삼청동(三淸洞)으로 이동했다. 바로 삼청동으로 간 것은 아
니고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북악산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실/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에
들어가 잠시 여름 제국의 기운이 늦춰지길 기다렸다가 삼청동으로 이동했다.


▲  우물집에서 먹은 뚝배기불고기와 반찬의 위엄

삼청동은 맛집의 성지(聖地)답게 온갖 식당과 찻집/까페가 즐비하다. 게다가 청와대나 국무총리
공관 등의 국가 시설이 많아 고위 공무원과 상류층들이 자주 찾아 맛도 괜찮은 편이다. 다만 가
격이 썩 착하지 않은 것은 큰 함정.
이번에는 기존에 갔던 식당들은 모두 제쳐두고 새로운 집을 개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발견한 집
이 삼청동 가장 북쪽 구석에 자리한 우물집이다. 이곳은 삼청공원과도 가깝고,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칠보사(七寶寺) 방면으로 도보 1분 거리로 2층 양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물집은 냉면과 한우고기로 유명한 식당인데, 한우고기는 너무 비싸서 우리 같은 서민이 먹기
에는 겁이 나고, 그렇다고 냉면을 먹자니 뭔가 허전하여 우리는 뚝배기불고기를 주문했다. 면보
다는 밥이 배를 채우는 데 좋기 때문이다. 냉면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허전하다. 그래서 만두
같은 부식물을 시키게 되고 그것이 자금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집은 냉면과 뚝배기불고기의 가격이 7,000원선(지금은 다를 수 있음)으로 다른 식당보다 가
격이 좀 착하다. 서울 장안 유명 냉면집의 냉면은 거의 8천원~1만원대, 뚝배기불고기도 6~8천원
대니 말이다.

냉면 전문집에서 뚝배기불고기를 시킨 탓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밥을 기다리니 제일 먼저
반찬이 깔린다. 그런데 반찬이 생각 외로 푸짐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무려 6가지나 되기 때문
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상추와 고추, 쌈장까지 나오며, 특히 감자조림이 맛있어서 1번 더 리필
을 했다.
반찬이 나오고 얼마 뒤 본메뉴인 뚝배기불고기와 쌀밥이 차려진다. 뚝배기불고기는 내 입맛에는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상추에 쌈장을 듬쁙 바르고 고기와 밥을 담아 입에 쏙 넣으니 목구멍이
정신을 못차린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인사동으로 넘어와 전통찻집에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다
가 저녁 늦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연꽃의 찰라와 같은 인생처럼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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