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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정릉 북한산 봉국사(奉國寺) '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봉국사 석조여래좌상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이 되면 3가지의 볼거리가 나를 바쁘게 만든다, 서울연등축
제(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특별전이 그것인데, 이중 가장 흥
겨운 것이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과 그 1주 전에 열리는 서울연등회이다.  (간송미술관 특
별전 2014년부터 미술관 대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고 있음, 특별전 기간도 연장됨)

간송미술관 특별전은 별 인연이 없으면 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초파일은 비가 와도 절대
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도 아니고 평소에도 많은 절을 다녀 지금까지 300곳
에 이르는 사찰을 들락거렸지만 초파일에 굳이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는 이유는 초파
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양밥과 떡 등 온갖 먹거리까지 그 흥겨
움을 보탠다. (공양밥 때문에 그럴지도??)

초파일이 다가오자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미답(未
踏)으로 남은 고찰(古刹)을 물색해본다. 초파일 만큼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마음 편하게 가까
운 시내 고찰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왠만한 고찰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근현대
사찰은 거의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는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지만 개방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꽤나 인색하게 구는 곳은 뺐음>
그래서 아주 옛날에 가보거나 1~2번 정도 간 곳을 포함하여 서울 강북 일대를 대상으로 코스
를 짰는데, 이번에는 후배 2명도 같이 가기로 하여 이동이 편하게끔 동선을 고려했고, 그 첫
답사지로 20년 전에 딱 1번 가봤던 정릉 봉국사를 선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서광이 밝았다. 그 서광을 받으며 오전 11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국민대로 가는 1213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에서 발을 내린다. 봉국사가 비록
도선사(道詵寺), 길상사(吉祥寺) 만큼이나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생의 발길이 적지
않은 절이라 일주문부터 사람과 수레가 꼬리를 꼬리를 문다.


♠  봉국사 입문

▲  봉국사 일주문(一柱門)의 뒷모습 - 지붕에 세월이 달아준
푸른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서울의 북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정릉로는 시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다.
거기에 고가도로로 된 내부순환도로까지 있어
수레의 굉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런 정신없는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봉국사
의 정문이다.
북한산(삼각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부순환로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 시
야도 시원치 못하며, 문의 크기가 상당하여 시
작부터 중생의 기를 죽인다. 여기는 그런식으로
속세의 기운을 다스리는 모양이다.
문 앞쪽과 뒷쪽에는 절의 이름(삼각산 봉국사)
이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까지 200m 정도의 가파
른 오르막이 펼쳐져 다시 한번 중생의 기를 죽
인다. 절이 산중턱에 있고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이 일주문을 경유하는 북쪽 언덕길 뿐이라 꿩
대신 닭을 택할 권리는 없다. 그저 자존심을 곱
게 접고 길을 임하는 수 밖에..


▲  천왕문(天王門)과 범종루(梵鍾樓)를 품고 있는 일음루(一音樓)

일주문을 들어서면 2층 규모의 건물이 중생을 맞는다. 1층에는 천왕문 현판이, 2층에는 범종루
현판이 있어, 한지붕 밑에 2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담겨져 있는데, 이 건물을 통틀어 일음루라
부른다. 일음루는 범종루의 다른 이름으로 그 일음(하나의 소리)이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이다.
이 건물은 1979년 10월에 주지 현근(玄根)이 세웠는데, 일음루 편액과 주련은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이 썼고, 천왕문 현판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의 글씨이다.


▲  일음루의 뒷모습 - 일음루 현판이 뒷쪽에 달려 있다.

▲  천왕문 사천왕상(四天王像)
천왕문 양쪽에 늘어서 중생을 검문하는 사천왕, 허나 일음루 옆에 수레를
위한 길이 따로 닦여 있어 사천왕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는 없다.

▲  여염집 같은 종무소(宗務所)

일음루를 지나면 주차장이 나온다. 수레를 끌고 온 이들은 여기서 수레를 접어야 되는데, 주차
공간이 넉넉치 못해 바퀴를 동동 굴리는 수레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수레 주인은 주차장 관리
요원과 자리를 두고 말싸움을 벌여 석가탄신일의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기도 한다. 봉국사가 교
통이 불편한 시골에 있다면 이해라도 하지만 교통편도 괜찮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해 있는데, 잠
깐 편하자고 굳이 수레를 끌고와 불편과 혼잡에 기름을 껴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이런 날은
그저 대중교통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180도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길의 끝에 산중턱에 둥지를 튼 봉국사가 자
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정릉의 원찰(願刹)이자 약사도량(藥師道場), 봉국사(奉國寺)
북한산(삼각산)의 가장 남쪽 산줄기에 자리한 봉국사는 139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나옹선사(奈翁禪師)가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근래에는 무학대사 창건설로 완전 굳어진 모양이다.
무학은 이곳에 절을 짓고 약사여래불을 봉안해 약사사(藥師寺)라 했다고 전하며, 1468년에는 세
조(世祖)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이후 정릉(貞陵)이 복원된 17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이 없어 창건 시기
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게 한다. 게다가 조선 초기 유물은 하나도 없으니 무학이 정녕 창건한 것
인지 아니면 15세기의 세조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인지, 정릉이 복원된 이후에 지어진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

봉국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669년 이후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260년 가까이 속세
의 뇌리 속에 잊혀져 쑥대밭이 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정릉을 현종(
顯宗)의 명에 따라 1669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정자각(丁字閣)과 전례청(典禮廳) 등 정릉의 부
속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인근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이곳을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나라를 받든다는 착한 뜻에서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왕실에 더욱 잘보여 절
을 크게 꾸려보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소산일 것이다. 참고로 봉국사는 정릉과 같은 산자락에
안겨져 있으며, 정릉에서 바로 북쪽 300m 거리에 자리해 있어 원찰의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성질이 난 군인들에 의해 절이 피해를 입었고, 1883년 한
계(漢溪), 덕운(德雲)이 중건했다. 1885년 3월에는 명부전에 지장탱을 조성했으며, 1898년에 운
담(雲潭), 영암(永庵), 취봉(翠峰)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도를 봉안했다.
1913년에 주지 종능(宗能)과 화주 월하봉연(月荷奉蓮)이 칠성각을 중건했고, 1938년 화주 금파(
錦坡)가 조인섭(趙寅燮)의 시주로 염불당을 새로 지었다. 1979년에는 주지 현근이 2층 크기의
일음루를 세워 범종루와 천왕문으로 삼았고, 1986년에 산신각을 중수하고 만월보전에 신중탱을
봉안했으며, 1991년에 천불전에 신중탱을 봉안했다.
1994년 3월에는 안심당을 새로 마련해 승려와 신도의 수행처로 활용하고 있고, 주지 선관과 신
도들이 합심해 경내에 나무 1,000여 그루와 온갖 꽃을 심어 도량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살렸다.
그래서 경내에 제법 나무가 무성하여 산사의 티가 진하게 된 것이다.

일주문이 정릉로 도로변에 있어서 그렇지 일주문과 일음루를 지나면 산사의 내음이 오각을 간지
럽힌다. 정릉로와 내부순환도로가 절 앞에 있고 주택가와 가깝지만 숲에 짙게 둘러싸인 경내는
아늑하고 적막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기분이다. 지금이야 속세의 기운이 절 밑까지 올라와 실감
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완전 첩첩한 산주름 속이었다. 한양(서울) 도성에서 오려면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을 나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야 했는데 워낙 외진 곳이라 호랑이의 등장
이 잦았다.

일주문은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내 서쪽과 남쪽, 동쪽은 야산이라 정릉천이
있는 북쪽이 그나마 진입이 쉬웠다. 그래서 그곳에 문을 내고 속세와 왕래했으며, 그 길이 절과
속세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경내는 일주문에서 각박한 오르막길을 200m 올라야 나오는데, 법
당(만월보전)은 지형상의 이유로 동쪽을 향하고 있고, 명부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법당 뒤쪽
에는 높은 벼랑이 병풍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독성각과 산신각을 아슬아슬하게 걸쳐놓
았다. 이는 경내 확장이 용이하지 못해 그리 한 것이다.
이렇게 조촐한 경내에는 만월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 천불전, 산신각, 독성각, 납골당인 연화
원 등 약 10동의 건물이 터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목조석가여래좌상, 석조여래
좌상,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일괄,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351호
), 지장시왕도, 시왕도와 사자상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2014
년 1월에 한꺼번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도 양호해 접근성은 진짜 좋다. 몇 시간이나 발품을 팔아
야 되거나 수레도 겁을 집어먹는 깊은 산중의 산사에 가기가 여의치 않을 때 아주 잠깐의 발품
으로 언제든 안길 수 있는 산사(山寺)로 산사의 기운을 나름 진하게 간직하고 있어 속세의 기운
을 잠시 털어버리기에 좋다.

※ 정릉 봉국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71, 1213,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 하차
* 지하철 4호선 미아3거리역(1,6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4번 출구에서 1213번, 6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4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장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637 (정릉로 202 ☎ 02-919-0211~2)
* 봉국사 홈페이지(연화원 포함)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초파일 분위기에 잠긴 봉국사 경내


♠  봉국사 만월보전, 명부전 주변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滿月寶殿)

경내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진짜 봐글봐글하다. 때가 점심시간이라 공양밥을 먹고자 사람들이 만
월보전 뜨락에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데, 지금 그 꼬리에 동참을 하더라도 공양밥이 내 손에 오
기까지는 30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밥은 나중에 먹고 일단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뜨락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만월보전은 이곳의 법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불전(佛殿)인데, 만월보전이란 약사전(藥師殿)의 다른
이름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봉국사가 약사도량을 칭하다보니 자연히 약사여래와
그의 거처가 절의 중심이 되었다.

만월보전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손질한 것이다. 만월
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에 있으며, 그 글씨를 확대한 새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불상과 용이 그려진 기둥
불단 가운데가 석조여래좌상, 왼쪽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
오른쪽은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4호)


만월보전 불단에는 이곳에 주인으로 약사불로 통하는 석조여래좌상을 가운데에 두고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배치했다.
이중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어깨가 넓고 둥글며,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수그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고, 간략해진 옷 주름으로 신체 윤곽이 뚜렷하고 부
피감이 있어 보이는 점으로 보아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해맑은 표정의 만월보전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7호

봉국사의 든든한 밥줄인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로 정확한 시기는 전해오지 않
는다. 불상의 얼굴은 거의 동그랗고 볼에는 살이 좀 있어 보이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두 눈은 가늘고 살며시 뜨
며 중생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본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얼굴 크
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으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모두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이고,
그 가운데에 하얀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목에는 불상에 흔한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어깨를 감싼 통견
(通肩)이
다.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그 옷깃과 띠가 직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된 것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두 손은 다리 위에 모아 금색이 칠해진 무엇인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의 필수
품인
약합(藥盒)로 근래에 금색을 입혔다.

불상을 만들 때 해맑은 동자승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그의 동그란 얼굴은
해맑고 귀여워 보
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의 꽃을 머금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즐거움과 웃음을 앗아가도 그
는 그 웃음을 되찾아주고 치료해주는 의원인 셈이다. 약합보다는 그의 얼굴이 그야말로 약이다.
자신을 보며 늘 웃어주고 밝은 표정을 지어주는 불상 앞에 어느 누가 즐겁지 않으리..? 찰거머
리같은 번뇌도 속세의 부정한 기운도 그 앞에서는 모두 털리게 되어있다.

이 약사불은 도금을 입히지 않고 원초적인 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신체 비례도 거
의 맞고 세부 묘사도 충실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괜찮은 작품으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나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보물급으로도 손색이 없다. 다행히 조선 후기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
던 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석조여래좌상과 석가후불탱화

▲  호법신(護法神)을 있는데로 끌어 담은 신중탱
법당에 필수적으로 걸어놓는 신중탱은 법당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
허나 그림에 그려진 이들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정신이 없다.

▲  봉국사 5층석탑
만월보전 뜨락에 날씬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서있다. 이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저들 이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도 없었다.

       ◀  천불전(千佛殿)과 느티나무
남쪽을 바라보고 선 천불전은 석가3존불과 조그
만 금동불 1,000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들이 합
심하여 금빛을 발산하니 그 찬란함에 눈이 마비
될 지경이다.
천불전 앞에는 60여 년 묵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 9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높이는 약 16m
정도로 경내에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  천불전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존불과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의 위엄
조그만 불상은 중생들의 돈으로 조성된 원불(願佛)이다. 즐거운 초파일을 맞이하여
후하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보며 봉국사 승려를 대신하여 흐뭇한 미소로 답을 한다.

▲  천불전 옆에 자리한 안심당(安心堂)
승려와 신도들의 수행을 위해 1994년 3월에 지어졌다.

▲  봉국사의 보물 창고, 명부전(冥府殿)

만월보전의 옆구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부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1989년
에 중건된 것인데,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지장시왕도, 시왕도,
사자도 등이 푸짐하게 봉안되어 있어 경내의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다.
특히 건물 현판은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것이 이채로우며, 현판의 색깔도 검은색이 아닌 붉
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된 것이 꽤 돋보인다. 이런 현판은 여기서도 가까운
흥천사(興天寺) 명부
전(☞ 흥천사글 보러가기)에도 있어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거기 명부전과
여기 명부전이 너무나 닮았다.


▲  명부전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권속일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5호
그 뒤에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2호

명부전 불단에 봉안된 조그만 지장3존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금동 옷을 입은 지장보살상
은 녹색 승려머리로 조금 매서운 맵시로 앉아있는데, 북한산(삼각산) 동쪽에 있는
본원정사(本
精舍) 지장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 본원정사글 보러가기)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무독귀왕(無毒鬼王)협시(夾侍)해 있는데, 얼굴이 좀
순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들 뒤에는 1885년에 제작된 지장시왕도가 든든하게 걸려있고, 그 좌우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인 시왕상을 비롯하여 판관(判官), 녹사, 시자상, 동자상, 인
왕상 등이 거의 빠짐없이 자리를 메운다. 시왕도와 사자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19세기 후
반 불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
밑줄에 자리한 상은 판관, 녹사, 시자상

◀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여운
인왕상(仁王像)과 사자도
(시왕도와 사자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3호)


♠  봉국사 마무리

▲  산신각이 달려있는 경내 뒤쪽 벼랑

만월보전 뒤쪽(서쪽)에는 거의 80도 가까이 솟은 벼랑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다. 그 옹색한 곳에
계단을 내고 좁은 자리를 간신히 닦아서 독성각과 산신각을 내는 기적을 내었는데, 산신각은 각
한 계단을 1분 정도 올라야 된다.
봉국사가 이런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산신각을 걸친 것은 경내가 썩 넓지가 않고,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는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 벼랑 윗부분
에 자리를 닦은 것이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예전에는 광응전(光膺殿)이란 생소한 이름으로
불렸다. 산신각이니 당연히 산신(山神) 할배가 중심이 되야겠지만 중심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
상이 차지하고 있으며, 산신과 관음보살상이 그 좌우에 자리해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약사도량
을 내세우다보니 경내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이곳까지 약사여래를 둔 모양이다.

이곳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각박하지만 다행히 거리는 짧아서 그런데로 올라갈 만하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워 조망은 좋을 것 같지만 숲의 패기가 드높아 조망은 썩 좋지 못하다. 숲
에 가려 경내와 정릉동 일부가 보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 주변이 낭떠러지라
추락사고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뒷탈이 없다. 사고가 나면 제아무리
영험하다는 산신, 약사여래라도 구제해주지 못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산신각

▲  산신각 중수 공덕비(功德碑)


▲  산신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약사여래상, 관음보살)
이들과 후불탱화는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다. (산신각도 마찬가지)

▲  산신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  독성각(獨聖閣, 위쪽)과 용왕단(龍王壇, 아랫쪽)

▲  용왕단 (독성각 바로 밑에 있음)

월보전과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입구 사이에 용왕단이 자리해 있다. 말그대로 용왕(龍王)
의 거처로 용왕과는 전혀 관련도 없어보이는 이런 산속에 그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이채롭다.
바다 용왕이 바다에서 먼 이런 산골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곳에 용왕단을 세운 것은 지금은 제대로 안나오지만 약수터를 지키고자 세운 것이다. 용왕이
라고 해서 꼭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미치는 모든 곳이 그의 관리 영역이다. 허나 독
성, 산신과 달리 번듯한 건물이 아닌 노천에 있어 절에 봉안된 다른 존재와 크게 차별을 두었다.
용왕의 거처는 둥근 초석을 깔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 용이 새겨져 있으나 색
이 퇴색해서 제대로 안보면 지나치기 쉽다. 마주보는 용머리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렸는
데, 이는 최근에 세운 것이며, 그 안쪽을 파서 얕은 감실(龕室)을 두고 거기에 용을 탄 용왕을
봉안했다.


▲  벼랑 위에 둥지를 튼 독성각

용왕단 위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독성각이 벼랑 바위에 아찔하게 걸터 앉아있다. 이곳은 독성(獨
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조성된 독성상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독성각을 가려면 만월보전 좌측에서 올라가야 되는데, 산신각보다는 접근이 쉽다. 다만 건물 정
면 바깥은 벼랑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괜히 뒷걸음질하다가 자칫 골로 가는 수가 있다. 건물 크
기도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손바닥만한 규모라 3명만 들어가도 숨쉬기 힘들다. 추락을
염려하여 2줄로 안전 난간을 둘렀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 보인다.


▲  독성상과 독성탱 - 초파일 특수로 그에게 올려진 제물이 꽤 풍족하다.
며칠 동안 독성 식구들 제대로 회식했을 듯~~

▲  독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오른쪽 녹색 천막에서는 전을 팔고 있었다.

▲  봉국사에서 먹은 점심 공양의 위엄

국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3시가 되었다. 경내도 다 구경했으니 이제 점심을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래줘야 되겠지. 공양줄도 제법 줄어든 상태라 줄에 동참하여 공양을 받았다.
이곳 공양은 다른 절집과 비슷한 비빔밥이다. 밥과 갖은 나물, 고추장이 그릇에 담겨
이들을
비벼먹으면 되며, 작은 그릇에는 물김치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떡도 1봉지씩 나눠주면서 후식
도 배려했다.

공양을 받는 건 좋으나 경내가 사람들로 가득하다보니 밥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산
신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즐거운 공양시간을 갖는다. 이들 공양밥 외에도
전과 간식도 있는데, 이들은 돈 주고 사먹어야 된다. 전 1장은 1~2천원선, 후배 1명이 전을 2장
사와서 같이 먹었다. 한참 배가 고플 시간이고 바깥에서 소풍 나온 듯 밥을 먹으니 밥과 물김치,
전이 모두 꿀맛 같다. 밥에 담긴 고추장은 양이 적당하여 모두를 붉게 물들이는데 충분했고, 물
김치는 맛이 시원하여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게 즐겁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봉국사를 뒤로하며 다음 절로 이동했다. 이날 우리의 갈 길
은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만 둘러보고 끝낼 수도 있지만 달랑 1곳으로 초파일 절투어
를 땡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1년에 딱 하루 있는 날이니 이날만큼은 좀 무리하여 초파일 분위
기를 내내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봉국사 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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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5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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