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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폐허의 절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다.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곳 ~~ 보령 성주사지

 


' 폐허의 옛 절터를 거닐다, 보령 성주사지 '

▲  눈에 뒤덮힌 폐허의 성주사지

 


겨울 제국의 한복판을 헤매던 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예산과 보령 지역을 찾았다.
우선 예산에 먼저 들려 예산읍내 근처에 있는 향천사(香泉寺. ☞ 관련글 살펴보)를 둘
러보고 예산역으로 나온 다음, 장항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보령시(保寧市)의 관문, 대
천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장항선 대천역과 보령시외터미널이 보령시내 도심인 옛 대천역에서 현 자리로 이전을 했
지만 보령시내버스 대부분은 여전히 옛 보령역을 기/종점으로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그
곳까지 20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 오천(鰲川)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자 했다. <충청수
영성(忠淸水營城)과 오천항을 보려고 했음>
허나 버스 시간도 맞지 않고 일몰까지 코앞에 다가와 그야말로 마음이 급해졌다. 겨울의
한복판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경) 그래서 시내와 가까운 성주사
터나 갈까 해서 성주/웅천행 정류장에서 시간표를 확인하니 성주사터 앞까지 가는 800번
대 버스(백운사행)가 곧 올 시간이다. 하여 꿩 대신 닭으로 성주사지를 가게 되었다.

그 버스를 타고 보령시청을 지나 성주고개의 눈치를 덜어준 성주터널을 통과하니 서해안
과는 전혀 다른 첩첩한 산골의 성주면이 펼쳐진다. 충남 서해안 지역은 거의 평지이지만
이렇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거의 강원도(江原道) 산골 분위기가 나타나니 마치 강원도까
지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성주면사무소에서 왼쪽(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성주천(聖住川)을 따라 들어가는데, 하늘
을 가리며 늘어선 오래된 가로수들의 유혹에 그만 성주사지를 하나 앞둔 성주초교(성주2
구)에서 내리고 말았다. 허나 여기서 성주사지까지는 도보 5분 거리에 지나지 않아 별로
부담도 없다.
이곳 가로수는 100~200년 정도 숙성된 느티나무로 10여 그루의 조촐한 모습이다. 이들은
성주천의 범람을 막고자 조성된 일종의 제림(堤林)으로 동네의 정자나무 역할도 겸한다.


▲  성주천과 나란히 이어진 성주초교 앞 가로수길(심원계곡로)

▲  가로수길의 제일 어른인 200년 묵은 느티나무 -
보령시 보호수 8-1-11-5-479호
성주천을 향해 몸을 구부리며 하천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우수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나무 높이 15m, 둘레 2.8m

▲  돌담 사이로 난 저 계단을 오르면 폐허의 현장 성주사지가 모습을 비춘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곳, 허나 지금은
폐허의 현장이 되버린 거대한 옛 절터, 성주사지(聖住寺址)
- 사적 307호

성주산(聖住山) 남쪽 평지에 포근히 자리를 깐 성주사터는 백제 법왕(法王, 재위 599~600)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법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영혼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
하며 처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였다. 백제의 마지막 국도(國都)인 부여(扶餘)에서 서해바다
로 가는 길목에 있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때는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이곳 주지로 머물면서 선종(禪宗)을 보급하는 한편,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를 개창해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다.
선종은 경전 중심의 학문적이고 귀족들이 선호하던 교종(敎宗)과 달리 문자를 통하지 않고 오
로지 참선을 중시하던 사상이라 백성들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다보니 성주사를 찾는 신도의 수
가 급증하면서 그 인기에 힘입어 절을 크게 중창했는데,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庫舍) 50
여 칸 등 1,000여 칸을 자랑했으며, 이곳에 머물던 승려만 2,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에 문성왕은 무염을 성인(聖人)이라 칭하며 그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의 '성주사'란 이름을
내렸다.
이렇게 신라 막판에 선종 사찰의 하나로 번영을 누리던 성주사는 고려 이후 마땅한 사적(事蹟)
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 석등이 전하는 것으로 봐서는 조선 때까지 법등(法燈)을 그런
데로 유지했던 모양이다. 허나 이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다
시는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전설처럼 사라져 허망함을 던진 성주사터는 속인들의 경작지로 변했고, 그 밭두렁 사이로
성주사의 옛 영광을 숨죽여 간직한 석탑과 석등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불상이라도 남아있
었으면 사람들이 와서 예불도 올리고 보호각도 짓고 했을 터인데, 그러지도 못했다. 절터 한쪽
에 있는 석불입상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인근에서 가져온 석불로 성주사와는 관련이 없다.

근래에 절터를 정비하면서 절터의 목을 단단히 죄고 있던 경작지를 모두 밀어버렸으며,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드넓은 면적의 절터에는 국보 8호인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중앙3층
석탑과 서3층석탑, 동3층석탑, 5층석탑, 석등, 석계단, 석불입상 등의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널
려있다. 이 중 국보가 1점, 보물이 3점이나 된다. 또한 중문터(동문터)와 강당터, 금당터, 화
랑터, 삼천불터 등의 건물터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으며. 신라 후기 불상의 머리와 백제와 신라
, 고려의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성주사의 옛 영화로움을 속삭여주고 있다.
가람배치는 중문(동문터)과 석탑, 금당, 강당으로 이어지는 배치이나 3층석탑 2기 대신에 5층
석탑을 둔 것이 특이하며, 금당 뒤로 3층석탑이 3기나 몰려있어 기존 신라 사찰의 가람배치와
는 조금 틀리다.

현재 절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넓지만 절터 일대를 완전히 조사한 것은 아니다. 절
터 주위로 돌담이 길게 둘러져 있는데, 이는 절터에서 출토된 돌을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담
장으로 만든 것이며 그렇다고 그 돌담이 성주사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돌담 안
에 감싸인 절터도 아직까지도 절반 이상이 미발굴지로 남아있고, 절의 명성을 봤을 때 절터 서
쪽 산자락과 절터 북쪽에 자리한 마을도 모두 성주사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부분 발굴만 할 것이 아니라 언제 한번 절터와 주변 산자락, 마을까지 속시원하게 뒤엎
어 발굴조사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성주사의 숨겨진 행적과 보물이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성주사의 왕년의 모습은 남겨진 그림이 없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그 당시에 맞게 상상의 나래
를 살찌우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인도식이나 아랍식, 유럽식으로 엉뚱하게 상
상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 전통 사찰의 맞게 상상을 하면 될 것이다.
4기의 석탑에 둘러싸인 금당은 이 땅의 흔한 법당(法堂) 이름인 대웅전(大雄殿)으로 불렸을 것
이고, 아마도 맞배지붕을 지녔을 것 같다. 그 옆에는 동서로 길쭉한 건물터가 있는데, 이는 삼
천불전(三千佛殿)터라고 한다. 건물의 이름처럼 3,000기의 조그만 불상이 불단을 가득 메우며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3층석탑 뒤에는 남북으로 긴 강당(講堂)터가 있으며, 금당터 남쪽에
는 회랑터가 있다. 그리고 성주사의 제일 보물은 낭혜화상탑비는 강당터 서쪽에 두어 절을 크
게 키운 그를 두고두고 기린다. 절의 건물 배치는 현재 이 정도만 살을 드러내고 있어 나머지
는 아직 수수께끼에 머물러 있다.

※ 성주사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① 보령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장항
  선 열차를 타고 대천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나며, 동서울터
  미널에서 1일 10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3회 떠난다.
* 인천, 부천, 고양, 성남, 안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서부, 복합, 유성), 천안, 아산, 공주, 서산, 군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서부터미널과 논산, 부여에서 성주 경유 보령행 직행버스(1일 6회)를 타고 성주 하차.
  성주사지까지 도보 15분
② 현지교통
* 대천역과 보령터미널에서 시내(옛 대천역)로 나가는 1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령요양벙원에
  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백운사, 먹방, 심원동으로 가는 800번대 시내버스(1일 12회 운
  행)로 환승하여 성주사지에서 하차.
  차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 성주, 외산으로 가는 800번 시내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성주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이들 버스는 모두 옛 대천역에서 출발한다.
* 보령터미널에서 성주 경유 부여, 서대전행 직행버스(1일 6회)를 타고 성주 하차.

★ 성주사지 관람정보
* 성주사지 문화유산해설사가 9시부터 18시(겨울에는 17시까지)까지 근무한다.
*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  설피(雪皮)를 뒤집어 쓴 성주사터
대머리처럼 허전한 절터를 하얀 눈이 두텁게 감싸준다.


▲  문화재발굴체험 학습장
절터 동쪽에 담장을 갖춘 기와집을 만들어 문화재발굴 체험장으로 삼았다.
평일 오후라 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는 적막만이 감돈다.
체험문의는 보령관광안내소(☎ 041-932-2023, 대천역 소재)

▲  동문터로 인도하는 돌계단

▲  돌계단을 오르면 중문터인 동문(東門)터가 나타난다.
큼직한 주춧돌이 동문의 옛 모습에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  남쪽 회랑(回廊)터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회랑의 모습은 신라 사찰의 대명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대웅전 주변 회랑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듯 싶다. 금당 주변을 회랑으로 두룬 것은
신라와 고려 절의 특징이다.

▲  남쪽 회랑터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동문터와 회랑터가 접히는 부분에서 바라본 금당터 주변

▲  성주사지 석등(石燈)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훤칠한 키의 5층석탑 그늘에 자리하여 조금은 초췌해 보이는 이 석등은 조선 초기 것으로 여겨
진다. 석탑 주변에 이리저리 조각나서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에 수습한 것으로 네모난 창이
4개나 뚫린 화사석(火舍石) 밑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에는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
식을 얹혔다. 화사석 받침 밑과 석등의 제일 밑부분인 바닥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석등
의 기둥은 신라나 고려의 석등보다는 굵기가 가는 편이다. 별 꾸밈이 없는 수수한 모습으로 절
이 있던 시절에는 부처의 광명(光明)을 상징하듯 경내를 환하게 밝혀주었을 것이다.

▲  성주사지 5층석탑 - 보물 19호

금당터 앞에 자리한 5층석탑은 성주사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이다. 금당터 뒤쪽에 있는 3층석탑 3형제와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거의 비슷하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
신을 얹힌 형태로 성주사가 한참 잘나가던 9세기 후반 탑으로 여겨진다.
기단 바로 위쪽에는 네모난 괴임돌을 끼워 두었는데, 탑에 괴임돌을 두는 것은 고려시대 탑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식이다. 이 탑은 괴임돌이 하나기 때문에 그 이전 단계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고,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고개를 들었
으며, 탑신은 위로 올라갈 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비율로 균형이 잡히고 우아한 모습을 자랑한
다. 탑 위쪽에는 머리장식인 노반(露盤)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없다.


▲  동남향(東南向)을 취한 금당터

금당터는 특이하게도 동쪽도 남쪽도 아닌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 방향을 그리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터 동쪽에 흐르는 성주천에 맞추고자 함일 수도 있고, 신라의 왕도(王都)인 경주
를 바라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허나 딱히 증거가 없으니 상상 속에서 더 이상 끌어오지를
못한다.

신라 후기에 지어졌을 금당은 이렇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 그 위에는 텅 비었
다. 금당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상상 속 도화지에 그 모습을 그려본다.


▲  성주사지 석계단(금당 동쪽 계단)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40호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2개가 있는데, 위로 올라갈 수록 계단의 폭이 줄어드는 형태를 취하
고 있다. 동쪽을 향한 계단 양쪽 소맷돌에는 수려한 조각의 사자상(獅子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돌계단이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허나 공무원의 관리소홀로 인해
1986년 도둑을 맞아 그때 생긴 상처를 간직한 계단만 남아있으며, 그때 사라진 사자상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어여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들 돌계단과 사라진 사자상은 금당이 세워진 신라 후기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금당터 중앙에 자리한 연화대석(蓮花臺石)

금당터 중앙에 자리한 연화대석은 금당에 봉안했던 불상의 보금자리로 불상과 좌대(座臺)는 전
란 중에 사라지고 좌대를 받치던 밑부분만 남아있다. 옛날에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대석(臺石)
위에는 눈이 소복히 내려앉아 그를 보듬는다. 그래도 대석에 새겨진 연꽃잎은 선명하고 두툼하
게 살아있어 채색만 적당하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 같다.


▲  금당 서쪽 석계단 - 동쪽 계단과 달리 위,아래가 일정한 폭을 유지한다.


 

  성주사지 금당터 주변

▲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삼천불전(三千佛殿)터
향천사 천불전(千佛殿) 1,500불의 2배가 넘는 불상이 있었다는 삼천불전터
허나 지금은 터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삼천불전 생전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각자의 상상 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  금당터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3층석탑 3형제
(왼쪽부터 서3층석탑, 중앙3층석탑, 동3층석탑)

▲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 보물 20호

금당터 뒤쪽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3층석탑 3형제가 서로를 보듬으며 정을 누리고 있다. 이
들 3형제는 위치에 따라서 편의상 중앙/동/서3층석탑이라 불리는데, 정확히는 서남/중앙/동북
이 맞다. 그렇다고 서남3층석탑, 동북3층석탑이라 부르기는 뭐하니 흔히 쓰는 동/서3층석탑으
로 이름을 잡은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정광(定光), 약사(藥師), 가섭(
迦葉) 등 3여래(三如來)의 사리탑(舍利塔)이라고 전한다.

3층석탑 형제의 맏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3층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
로 성주사가 구산선문의 하나로 한참 상한가를 치던 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 바로 위쪽에는 5층석탑과 마찬가지로 괴임돌을 하나 끼워두었으며, 1층 탑신이 2층과 3층
보다 훨씬 커 보인다.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겼는데, 자물쇠 모양을 가운데에 두고 그 자물쇠 밑에 동
물 얼굴 모양의 문고리 1쌍을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을 채
웠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귀퉁이 끝이 아주 살짝 올려져 마치 병아리가 날
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인 노반이 있으며, 그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고,
그 위를 복발(覆鉢)로 마무리하였다.
1층 탑신 모서리와 기단 모서리 부분이 좀 손상된 것을 빼고는 그런데로 상태는 양호하며, 문
짝과 자물쇠 문양이 새겨진 것 외에는 이 땅에 흔한 신라탑의 모습이다. 안내문에는 경쾌하고
화려하다고 하는데, 딱히 그런 점은 다가오지 않는다.


▲  중앙3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문짝과 자물쇠, 문고리 문양
문짝과 자물쇠, 문고리 문양이 있지만 정작 문짝을 여는 열쇠 문양은 없다.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를 열 수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이나
성주사의 숨겨진 역사를 밝혀줄 무엇인가가 나오지는 않을까?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며 저 문고리를 따고 싶다.

▲  성주사지 동3층석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6호

3층석탑 3형제 중 동북쪽에 자리한 동3층석탑은 중앙3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중앙과 서3층
석탑은 국가지정 보물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유독 이 탑만은 유일하게 지방문화재의 지
위에 머물러 있다. 어차피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정한 등급이긴 하지만 서로 비슷한 시기에 비
슷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는데, 왜 하나는 등급이 달라야되는지 그 기준이 참 아리송할 따름이다.

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에 탑신을 얹힌 형태로 기단 바로 위쪽에 괴임돌이 끼워져있
으며, 1층 탑신의 남/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1쌍의 고리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이며, 귀퉁이 끝이 살짝 올려져 있다. 조성시기는 역시나 9세기 중/후반으로 보
인다.


▲  성주사지 서3층석탑 - 보물 47호

3층석탑 3형제의 둘째라고 할 수 있는 서3층석탑은 중앙/동3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역시나
기단 위쪽에 괴임돌을 두었고, 1층 탑신에는 동물 얼굴 모양의 문고리 1쌍을 새겼는데,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씻겨 내려가 거의 희미해진 모습이다. (자물쇠 문양은 없음) 지붕돌은
밑면이 4단으로 되어있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려져 있으며, 머리장식은 노반만 남아있다.
1971년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에서 네모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가득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미 도굴을 당한 듯 싶다. 조성시기는 9세기 중/후반으로 탑
의 높이는 4m이다. 이는 3형제 모두 같다.


▲  서3층석탑 1층 탑신에 화석처럼 남겨진 문고리 장식

▲  장대한 세월에 흔적마저 사라진 3층석탑 뒤쪽 강당(講堂)터
강당은 승려와 신도들의 교육 및 행사 공간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73호

이 석불은 마치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은 듯한 우울한 모습으로 얼굴은 거의 타원형이다. 타원
형 얼굴을 지닌 불상은 그리 흔치가 않은 편으로 머리는 머리칼이나 육계를 표현하지 않은 그
냥 맨피부이며, 얼굴 부분은 마치 단단히 화상을 입은 듯, 돌의 겉면이 떨어져 나가 누런 색을
이룬다. 얼굴은 좀 고통스러워 보이며, 목부분도 돌의 겉면이 나갔다.
몸통은 군데군데 표면이 벗겨진 상처가 있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무슨 제스쳐인지
는 모르겠다. 오른손은 왼손 밑에 조그맣게 표현되어 있으며 아랫도리는 없다. 아마도 얼굴과
상반신만 만들어 땅에 심은 듯 싶다.

그는 원래 성주사에 있던 것이 아닌 근처 어딘가에서 옮겨온 것으로 석불을 받치고 있는 바닥
돌의 움직인 흔적이 이를 입증한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에 많이 보이는 불상 형태로 조선 중
기나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성주사가 사라진 이후, 인근에 방치된 석불을 사람들이
수습해 가져온 듯 싶다.
고향을 떠난 것은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의 미래를 위해서는 참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에 원래 자리에 있었다면 관리나 제대로 받았을까? 성주사터라는 보령 제일의 꿀단지에 숟가락
을 얹히고 들어앉았으니 이렇게 관리도 받고 사람들의 주목도 받는 것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의 뒷모습
뒤에는 별다른 조각은 없다. 다만 뒷통수 가운데 주위로 돌껍질이 죄다 벗겨나가
심한 탈모증 환자를 보는 듯 하다.

▲  성주사지 서쪽 경계에 쌓은 돌담
절터에서 나온 무수한 돌로 절터 주변에 길게 돌담을 쌓았다.
담의 모습이 조그만 성곽 같다.


 

  최치원의 문장이 담긴 성주사터 제일의 보물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 - 국보 8호

▲  비각 안에 담긴 낭혜화상탑비

강당터 서남쪽에는 성주사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보물이 있다. 바로 낭혜화상탑비이다. 비각
(碑閣) 안에 소중히 안긴 이 비석은 성주사를 크게 일으키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
창한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로 높이가 5m에 이른다. 글씨들이 깨알같이 적힌 비신(碑身)
은 절 뒤쪽 성주산에서 많이 나오는 유명한 돌,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빚었다. 1,100년이 넘
는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글씨들이 온전하여 남포오석의 위엄을 더욱 높여준다.

비석을 받쳐든 귀부는 거북의 머리로 깨지고 다친 부분이 많아 안타까운 마음을 솟게 한다. 이
는 임진왜란 때 생긴 상처로 보인다. 머리 위쪽에는 둥근 뿔이 나 있고, 회오리 모양의 눈썹이
표현되어 있으며, 등에는 2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가운데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표현되
어 있다. 구름무늬 위에는 비신을 꽂은 비좌(碑座)가 있다. 귀부는 파손이 심해 흙에 묻혀 있
던 것을 1974년에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비신에는 앞쪽에만 글씨가 쓰여있는데, 낭혜화상의 생애와 업적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비
신 위쪽의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다. 비신 위에 얹혀진 이수(螭首)는 밑부분에 연꽃을 두르
고 그 위에 구름과 함께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반룡(蟠龍)의 모습을 조각했는데, 너무 섬세하
여 흑백영화 속에 나오는 용을 보는 듯 하다.


▲  낭혜화상탑비

비석의 주인공인 낭혜화상 무염(801~888)은 무열왕(武烈王)의 8세손으로 신라 왕족이다. (성은
김씨임) 801년(애장왕 1년) 금수저로 태어나 13살에 출가를 했으며, 821년 당나라로 건너가 불
교를 공부하고 845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오합사(성주사)의 주지가 되면서 선종을 널리 보급하여 신라 후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창하게 되었고, 신도가 급증하자 절을 크게 일으키니 문성왕이 성주사란 이름을
내려 그를 기렸다.
888년 87세의 나이로 성주사에서 입적을 하니 진성여왕(眞聖女王)은 낭혜(朗慧)란 시호를 내리
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하였다.

비문을 쓴 이는 신라 후기에 대표적인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이며, 그의 사촌이자 당대의 명필
로 꼽히는 최인곤(崔仁滾)이 글씨를 썼다. 그런 연유로 최치원이 썼다는 사산비문(四山碑文)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여기서 사산비문이란 이곳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하동 쌍계사 진감선
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
碑), 경주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로 모두 신라 후기에 이름난 비석들이다. 나는 성주사 낭혜
화상탑비를 끝으로 사산비문과 모두 인연을 지었다.

비석의 조성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890년에 낭혜화상의 사리탑(소재 불명)을 만들었다는 기록
이 있으므로 그때쯤 해서 만든 듯 싶다. 비석에는 그의 생애 외에도 가문에 대해서도 나와있는
데,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왕족임에도 6두품(六頭品)으로 신분이 낮아진 적이 있었다. 그래
서 무염이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승려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비석의 원래 이름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로 이름이 좀 길다. 그래서 근래 문화재청에서 '백
월보광' 4글자를 빼고 '낭혜화상탑비'로 이름을 줄였다.
신라 후기에 지어진 비석 가운데 가장 큰 풍채를 자랑하며, 깨진 부분이 많지만 화려하고 아름
다운 조각 솜씨를 엿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으며, 거기에 최치원의 명문장까지 깃들여져 있어
신라 후기 최고의 비석이자 성주사터의 제일 가는 보물로 손꼽힌다.


▲  상처가 심한 낭혜화상탑비의 귀부
눈 위쪽에 회오리 모양의 문양이 눈썹이라고 하는데, 마치 1대 얻어맞아서
눈이 핑 돌아가는 모습 같아 약간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비석이 꽂힌 비좌 부분
마치 소용돌이 치는 물결이 그대로 화석(化石)으로 굳은 듯한 구름무늬 위에
비좌를 두어 육중한 비신을 꽂았다.

▲  귀부의 뒷쪽 부분
귀부의 등에는 등갑무늬가 근래에 새겨진 듯 선명하게 남아있고 덩치에 비해
조그만 꼬랑지가 하늘을 향해 귀엽게 말려져 있다.

▲  비석의 꼭대기인 이수
회오리 모양의 연꽃무늬 위에 구름과 반룡이 새겨져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  글씨가 선명하게 남은 비신
1,100년이 넘은 나이에도 글씨들은 정정하다.

▲  비각 안에 담긴 낭혜화상탑비


▲  낭혜화상탑비 옆에 수습된 기와조각과 주춧돌

▲  낭혜화상탑비 옆에 누운 석물 (정체는 모르겠음)

▲  성주사지 서북쪽 구석에서 바라본 성주사터
절터를 비추던 햇님이 조금씩 발을 빼면서 깊은 골짜기인 이곳에도
어둠의 땅꺼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성주사터를 1시간 반 정도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세상을 열렬히 비추던 햇님도 슬슬
막을 치며 그만의 공간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한 토막 신화가 되어 사라진 성주사터, 대머리처럼 허전하고 황량한 절터에 탑비와 석탑을 안
테나처럼 드러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왔다. 다행히 보령 굴지의 명소이자 답사의 필수 코스
로 인기를 얻으면서 휴일에는 많은 이들이 절터를 보듬으러 온다. 게다가 성주산과 성주산자연
휴양림, 성주계곡, 보령 석탄박물관, 심연동계곡, 백운사(白雲寺) 등의 명소가 가까이에 있어
이들을 1~2개 겯드리면 더욱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에 이루어진 성주사지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역시 황량한 절터
는 겨울에 찾아가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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