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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7.23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강서구 개화산 (강서둘레길, 미타사, 치현산)



'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 나들이 '
(강서둘레길, 미타사, 꿩고개산)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미타사 석불입상

▲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미타사 석불입상

▶ 개화산 호국공원(호국충혼비)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서울 서쪽 끝에 솟은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강서구(江西區)의 상큼한 지붕이자 김포국
제공항의 뒷동산이다.
동쪽에 솟은 치현산(꿩고개산)까지 개화산의 영역으로 북쪽은 한강과 맞닿아 있으며, 동
/서/남은 평지로 비록 산은 작으나 평지 속에 홀로 솟은 잇점으로 낮은 키에 비해 조망(
眺望)이 아주 좋다. 게다가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해 거닐기에 좋으며, 약사사와 미
타사 등의 오래된 절과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신선바위, 봉화대, 개화산호국공원, 치
현산(꿩고개산) 등의 다양한 명소들, 그리고 강서둘레길과 개화산자락길 등의 일품 숲길
까지 넉넉히 품은 알찬 뫼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매력에 일찌감치 녹아들어 매년 1번 이
상은 꼭 발걸음을 한다.

개화산의 옛적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라고 한다. 신라 때 주룡이란 도인(道人)이 이곳
에 살았는데, 매년 9월 9일에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
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
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워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라 했으며, 그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
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그리고 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과 궁산 양천고성(陽川古城)터와 더불어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로 개화산 정상과 꿩고개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해 변경의 소식을 남산으
로 전달했으며, 6.25때는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했다. 특히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
산이 코끼리, 행주산(幸州山, 행주산성)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
는 액운을 막고, 서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으로
크게 소개하고 있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계절의 여왕 한복판에 찾은 이번 개화산 나들이는 약사사(
藥師寺)에서 시작해 개화산자락길과 강서둘레길1코스, 신선바위, 미타사를 거쳐 치현산(
꿩고개산)까지 싹 둘러보며 개화산을 철저히 복습했다.



 

♠  개화산 둘러보기 (개화산전망대에서 호국충혼비까지)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자락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따라 5~6분 가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해맞이공원 개화산전망대

약사사 북쪽이자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해 하늘공원과 은평구, 서대
문구, 마포구 지역, 남산, 북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
해 조망의 가성비는 높다.
또한 이곳은 동쪽으로 시야가 트여있어 해맞이에 최적화된 곳이라 개화산해맞이공원이란 이름
으로 살아가고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조선에서 제일 작은 고을, 양천현(
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는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일부)의
명소를 아낌없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8경첩(陽川
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이 변한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
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李秉淵)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
긴 것이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호관어(杏
湖觀漁)는 행호(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절두산성지)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복원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하늘공원(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개화산해맞이공원)
이곳에 있는 헬기장과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과 예비군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이들 시설은 건드리면 안된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원래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개화산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 양천고성(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 봉수대, 봉화산
(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월에 재
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가 금지된 구역이라 북
쪽으로 250m 떨어진 봉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으며, 나중에 개
화산 정상이 해방되면 그곳으로 옮겨져 크게
손질될 것이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상사마을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6-1호

봉화정에서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 개화산숲길을 잠시 접고 강서둘레길 3코스(개화산전망
대↔서남환경공원 북쪽, 4.56km)를 따라 상사마을로 내려갔다.
상사마을은 개화동 북쪽 끝이자 개화산 북서쪽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북쪽에는 행주대교와 한
강이 있고 동쪽은 마을을 포근히 감싼 개화산, 남쪽에는 부석마을과 내촌마을, 서쪽에는 김포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여기서 행주대교와 이어지는 서쪽 도로(개화동로)를 넘어가면 경
기도 김포시임>

마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며, 부석마을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마
을이다. <예전에는 김포공항 서쪽 평야 한복판에 자리한 과해동(果海洞)이 서쪽 끝을 이루었
으나 김포공항 확장으로 마을이 철거됨> 마을 동쪽 끝에는 개화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으며, 그 앞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마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71년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410년이었다. 그
러니 그새 50여 년이 강제로 얹혀져 460년 정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높이 22
m, 둘레 4.45cm로 상사마을이 적어도 400~500년 정도 되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인데, 은행나
무는 스스로 싹을 틔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심은 것이다. 그러니 이 나무도
당시 마을 촌장이나 선비가 심었을 것이다.
나무 옆에는 상은약수터가 있으나 이미 옛날에 숨통이 끊겨 물이 마른지 오래되었으며, 지금
은 마을 창고로 쓰여 이곳이 예전 약수터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  상사마을에서 개화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강서둘레길 3코스)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 1코스, 개화산둘레길)

상사마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다시 개화산으로 올라와 개화산숲길에 임했다. 도보길이 천하
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그 야심작을 내놓았으니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강서둘레길은 개화산을 중심으로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1코스는 개화산을 1바퀴 도
는 3.35km의 상큼한 산길이다. 그래서 개화산둘레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오르락내리락이 도
돌이표처럼 반복될 뿐, 힘든 구간은 거의 없으며, 60분 이내면 충분히 1바퀴가 가능하다. 여
러 전망대가 닦여져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약사사 윗쪽과 개화산전망대, 미타
사 윗쪽, 신선바위,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지나간다. 하여 이 길과 개화산자락길을 같이
돌면 개화산의 80% 이상을 둘러보는 것과 같다.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희대의 세금 낭비의 현장,
아라뱃길이나 구경하라고 만든 의미 없는 전망대이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공항을 비롯하여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크게 누워
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는데, 산신이 이곳을 지나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산신이
나 신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여겨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개화산 호국충혼비(개화산호국공원)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호국충혼비(김포지구 전투위령비)를 지닌 개화산 호국공원이 마
중을 한다. 나그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곳은 6.25 때 이곳에서 전사한 국군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가 터지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
이었음) 지역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까지 후퇴했
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탄약과
식량보급이 끊겼고,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1사단 12연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 1,100여 명이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이후 호국신(護國神)이 된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 31일에 충혼비를
세우고 매년 6월과 가을걷이가 끝나는 11월에 지역 주민들과 1사단 군부대 장병들이 같이 위
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충혼비와 태극기,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전부였으나 추모의벽과 명각비, 기
념조형물을 새로 닦고 주변을 산듯하게 정비하여 2017년 12월 개화산 호국공원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충혼비 뒤에 병풍처럼 둘러진 검은 피부의 추모의 벽에는 개화산에서 산화
한 1,100용사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푸른 잔디와 개화산의 녹음(綠陰)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으로 호국신들을 기리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평화로운 모습의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주변)


 

♠  서울에서 가장 서쪽 끝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개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해 김포공항과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미타사는 서울에서 가장 서
쪽 끝에 자리한 절이다. 약사사와 함께 개화산에 안긴 늙은 절로 19세기에 '김대공'이 석불입
상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찰(願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1924년 절 아래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는데, 이때를 절의 실질적인 창건시기로 보고 있다.

그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 때 모두 파괴되었으며, 이후 자리를 조금 달리하
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
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고 있다.

숲에 감싸인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석불, 5층석탑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금의 미타사를 있게 한 오래된 석불입상이 있다. 바로 그를 보고자 이
곳에 온 것이다.

▲  여염집 모습의 미타사 법당
겉은 이래도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  법당에 신세를 지고 있는
산신탱과 칠성탱


이곳의 법당은 그 흔한 기와집 불전(佛殿)이 아닌 여염집 스타일의 집으로 1970년대에 중건되
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여래3존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조성된 것이며, 산신과 독성, 칠성 식구들도 법당의
신세를 지고 있다. 그리고 왜정(倭政) 때 석고로 만든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도 있는데,
그는 석불입상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은 존재로 원래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절이 파괴
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
지고 있다가 경주(慶州)의 어느 절로 넘긴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왔다. 무려 40년 이상 타
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그는 개화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화풀이용으로 괴롭히다가 우물에 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석불좌상
커다란 바위에 들어앉아 비행기가 수시로 뜨는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김포공항 비행기들이 늘 무탈한 것도 그의 묵묵한 가피 덕이
아닐까 싶다.

▲  미타사 석불입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

석불입상 뒤쪽에는 경내의 유일한 돌탑인 5층탑이 있다.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탑으로 석탑은 보통 법당 앞이나 경내 안쪽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자리가 여의
치 않아서 석불입상 뒤쪽 산자락에 두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한 것인데,
그로 인해 미타사는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석불입상은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가장 늙은 존재로 여기서는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
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근래 교체된 대좌(
臺座)을 제외하고 석불 자체는 순수 늙은 석불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러 번
땅속에 묻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세기에 김대공이 그를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석
불 옆에 절을 세웠다고 전하며, 1924년에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 현 요사 자리에 미륵
당을 지어 봉안했다. 즉 미타사는 석불의 후광(後光)으로 지어진 절이다.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석불을 지금 자리로 옮겼으며,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교체했
고, 옛 대좌는 석불 주변에 두었다.

석불 머리에는 동그란 갓돌이 씌워져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
한 삶을 살아서 그리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
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 때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
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도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입상과 함
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석불입상의 옛 대좌
커다란 석불입상이 사용했던 늙은 대좌로 근래 새 대좌로 갈아탔다. 하여
옛 대좌는 옆으로 물러나 막연히 허공을 이고 있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강서둘레길1코스(개화산숲길)로 돌아와 남쪽으로 조금 가
면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나무데크 형태로 닦여진 전망대로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과 그
곳을 오가는 비행기 구경에 최적화된 곳이다. 하여 전망대 이름도 하늘길이다. 여기서는 김포
공항 뿐 아니라 김포평야와 인천 계양구, 계양산(桂陽山), 부천 북부 지역, 김포 고촌읍 지역
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 수준도 괜찮은 편이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가 5분이 멀다하고 공
항을 들락거려 김포국제공항의 높은 위엄을 보여준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평야와 개화동, 계양산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나무데크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 서쪽 길로 갈아탔
다.
개화산자락길은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사 표석~개화산전망대' 구간의 동쪽 길과 '하
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구간의 서쪽 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 길은 북까페 주변
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찬양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을
긴장시킬 정도로 큰 편안함을 보여준다. 북까페 주변을 제외하고는 흙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사가 느긋해 거닐기 좋으며, 길 중간에 근래 세운 개화산 정상 표지석이 있다.


▲  방화근린공원 방면 개화산숲길
개화산 자락길 무장애숲길을 지나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 숲길로 갈아타고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치현산이란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개화산 동쪽에 솟은 작은 뫼, 치현산(雉峴山, 꿩고개산)

▲  치현산 공원길 입구

개화산 동쪽에는 꿩고개(70.5m)라 불리는 야트막한 산줄기가 있다. 개화산의 일원으로 방화동
(傍花洞) 시내와 한강 사이에 자리하여 강바람을 막아주는 병풍 같은 존재로 동서로 짧게 이
어져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꿩고개(또는 꿩고개산), 한자로는 치현산이라 부른다.
이곳이 꿩과 관련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2가지 설이 있다. 지금은 실감이 별로겠지만 옛날
에는 꿩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꿩사냥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 꿩고개라 불렸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 치(雉)가 꿩 외에도 성곽에 달린 방어시설도 뜻한다.
아무래도 개화산이 강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였고, 정상에 개화산
동봉수대가 있다보니 방어시설을 뜻하는 치를 사용했다가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이름 꿩
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꿩고개에는 강서둘레길 2코스인 공원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하나로 이루어진 1코스(개화산숲
길)와 달리 2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시작점은 개화산숲길과 만나는 방화근린공원이며,
여기서 산길과 벚꽃길(수레길)로 분리되어 있다. 분리된 길은 마곡서광아파트 부근에서 잠시
만나지만 여기서 서남환경공원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2갈래로 갈려 공원을 1바퀴 돈다. 총 길
이는 4.5km로 서광아파트 서쪽은 산, 동쪽은 평지 공원이라 길은 거의 느긋하다.


▲  주민 혐오 공간에서 친화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방화근린공원 벚꽃길

방화택지 북쪽이자 개화산과 꿩고개산 사이에 넓게 터를 다진 방화근린공원은 1996년에 조성
되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이 땅의 흔한 시민공원이나 수목이 울창하고 연못과 분수대, 광장, 물레방아 등이 공원 곳곳을 수식하고 있으며, 쉼터가 많아 소풍 장소로는 아주 제격이
다.
산책로가 개화산과 꿩고개산으로 핏줄처럼 이어져 있고, 불법주차와 덤프트럭의 통행으로 꽤
나 시끄럽던 공원 북쪽 길을 손질하면서 100여 그루의 벚꽃을 심어 상큼한 벚꽃길을 닦았다.
하여 이제는 서울의 어엿한 벚꽃 명소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  숲이 무성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짙은 녹음 속으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치현산 북쪽 벼랑에 매달린 치현정(雉峴亭)

치현산에 왔다면 꼭 가봐야 되는 명소가 있다. 바로 산 북쪽 벼랑에 깃든 치현정이란 팔각형
정자이다. 이곳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존재는 아니지만 강서구에서 한참
강서둘레길을 닦던 2012년, 강서구새마을금고협의회에서 만든 것으로 한강이 바라보이는 벼랑
에 자리한 탓에 조망도 제법 괜찮아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야경이 아주 일품이다.
하여 겸재의 '행호관어(杏湖觀漁)'의 현대판 버전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으로 말이다.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이곳도 결코 그
진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행주대교, 일산신도시
치현정 바로 앞으로 올림픽대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펼쳐져 차량의 굉음이 대단하다. 그러니 그 소음을
감안하고 이곳의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 건너에 길게 누운 뫼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현장인 행주산이다.
행주산 앞 한강을 예전에는 행호라 불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③
방화대교와 고양 화전 지역, 앵봉산~봉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 노고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산은 작지만 숲이 생각 외로 짙어 마치 깊은 산골에 푹 묻힌 기분이다.

▲  치현산을 정리하며,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치현산 능선을 완전히 가로질러 산 동쪽 끝에 자리한 치현둘레소공원으로 내려갔다. 마곡서광
아파트 북서쪽에 자리한 작은 공원으로 치현산을 중심으로 한 꿩고개근린공원의 일원이다. 강
서둘레길2코스가 이곳을 지나며 동쪽을 서남물재생센터와 서남환경공원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여 치현산까지 겯드린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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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7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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