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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7.16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2. 2019.06.15 커다란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 (서울둘레길, 맛있는 공양밥 1그릇)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 초여름 산사 나들이, 수락산 학림사 ~~~~~

▲  학림사 경내

▲  학림사 석불좌상

▲  수락산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슬슬 고개를 들던 7월의 첫 무렵, 서울의 동북쪽 지붕인 수락
산을 찾았다.
수락산(水落山, 638m)은 그의 그늘인 상계1동에 8년을 살면서 수없이 안겼던 뫼로 지금은
도봉산(道峯山) 그늘인 도봉동에 살고 있지만 가끔식 중랑천(中浪川)을 건너 수락산의 품
을 찾는 편이다.
수락산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학림사로 올라가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의 북쪽 종점인 당고개역에서 상계3,4동 달동네를 가로질러 수락산의 품으로 들어섰
는데, 길이 좀 복잡하긴 해도 햇갈릴만 하면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니 헤맬 염려는
거의 없다.

달동네를 벗어나니 여름 제국(帝國)의 은혜로 연두연두하게 익은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
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다.


▲  녹음에 잠긴 학림사 가는 길

▲  학림사 200m 직전 (학림사 부도 앞)


 

♠  학림사 입문 (부도와 석불좌상)

▲  학림사 부도(浮屠)

숲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발을 잠시 쉴 수 있는 나무 벤치와 수락산 안내도, 그리고 늙은 티
가 풍기는 부도(승탑) 2기가 마중을 한다.

이들 부도는 학림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다정함이 물씬 풍기는
부부처럼 다가온다. 왼쪽에 조금 평퍼짐한 부도는 남편, 오른쪽에 홀쭉한 부도는 아내, 그들
이 나에게 기념촬영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대추알 모양의 길쭉한 탑을 얹히
고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누구의 부도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중 1기에 '상궁(尙宮)~
' 명문이 있어 학림사에서 여생을 마친 궁궐 상궁의 부도임을 귀뜀해준다. 부도는 원래 경내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부도에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자욱해 중후한 멋을 풍긴다.

▲  나무 벤치와 부도

▲  부도의 뒷모습


▲  학림사 약사전(藥師殿)

부도를 지나 학림사 안내문에 이르면 오른쪽에 약사전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안내문 옆
높은 곳에 담장을 두르고 들어앉은 약사전에는 학림사에서 자랑하는 오랜 보물이자 영험하기
로 이름난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해온 약사전은 모두 경내에 있었다. 허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경내로 들어서
는 길목에 세워두어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먼저 찾게 하였으니 그만큼 약사불이 학림사의 간
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쓰인 현판을 보니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힘이 넘쳐보이는데 '藥(약)'자가 '茶(다)'로 보인다. 건물 주변
으로는 담장이 빙 둘러져 있으며 건물 앞에는 석등 1기가 멀뚱히 서 있다.


▲  학림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약사전의 주인장인 석불좌상은 키가 불과 77cm(어깨 너비 53cm)에 불과한 아주 왜소한 석불이
다. 신체 비례가 너무 떨어져 얼굴 높이가 신체의 거의 2/5에 이를 지경이며, 석불이 앉아있
은 연화대좌(蓮花臺座)는 높이 42cm로 석불보다 덩치가 더 크다. 연꽃이 위로 향한 앙련(仰蓮
)과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대좌를 화사하게 꾸며주고 있는데, 자신보다 큰 대좌 위에 앉
은 모습이 마치 조그만 아이가 커다란 의자에 걸터앉은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석불
은 거의 네모난 얼굴로 두 눈은 살짝 감겨져
있고 코는 깎여나가 윤곽만 남아있다. 입술에
는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중생의 소망
을 모두 들으려는 듯, 커다란 두 귀를 지녔다.

목은 두꺼워서 어깨와 단단히 붙었고, 가슴 앞
에 모은 그의 손에는 조그만 약합이 들려져 있
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배꼽
밑 아랫도리는 보이지가 않는데, 오래전에 사
라진 것으로 여겨지며, 그 모습을 통해 아마도
입상(立像)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림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옆에서 바라본 석불좌상과 대좌


▲  학림사 경내 직전 (오른쪽 계단은 용굴암, 수락산 정상 방면)


덕릉고개 너머에 있는 흥국사(☞ 관련글 보러가기)가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좀 유명하다면
학림사는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명성이 조금 자자하다.
학림사란 이름은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이른바 학지포란(鶴之抱卵)의 지
세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런 지세에는 무거운 돌로 만든 탑이나 석물은 가급적 피해
야 된다는데 근래에 3층석탑과 5층석탑, 석불 등을 잔뜩 지어놓아 자칫 알이 깨져 탈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671년에 원효대사(元曉大
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8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순항(金淳
恒)이 쓴 '학림암중수기(鶴林庵重修記)'에
'절의 내력을 적은 문서가 모두 사라져 절을 창건한 이와 절의 사적(事蹟)을 알지 못한다'

였으니 원효대사의 창건설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나옹화상 혜근(懶
翁和尙 慧勤, 1320~1376)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학림암중수기에는 언급조차 없다.

중수기에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는 건 16세기 이후로 임진왜란 시절인 1597년에 절이 소실
되었다고 한다.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터만 남은 이곳에 법당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
켜 세웠으며, 1780년에 최백(崔伯), 궤징(軌澄) 두 승려가 중수하고 1830년에 다시 손질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문 닫기 직전에 이르자 1880년 영상(景惺), 경선(慶船) 두 승려가 나서
절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허나 돈이 한 푼도 없어 애태우다가 마침 판관 하도일(判官 河道一)
이 절을 찾아오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절의 사정을 전해들은 하도일은 서울로 돌아가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학림사 중수를 건의했
고 이에 황후는 천금의 하사금을 지원했다. 그 돈으로 중수가 마무리되자 단청은 찬란하여 빛
을 발했다고 하며, 부처의 성전은 의연하게 자리잡았다고 중수기에는 적고 있다.

1918년 4월 주지 금운(錦雲)이 중수를 했는데 승려 연응(淵凝)이 '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
鶴林庵大房與各殿閣重修記)'에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해 작
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報施)해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의 귀감이 될만하다'
고 기록했으니
중수 이전 절의 상태가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과 지척이라 매년 봄과 가을 제사 때마다 많은 제물을 부담
했다. 심지어는 절을 묘역에 포함시키는 등 그 폐해가 컸다고 하며, 1927년에는 도정궁(都正
宮) 소유가 되면서 절을 찾는 중생이 줄어 수입이 감소하기도 했다.

흥국사처럼 왕실의 원찰(願刹)은 아니나 궁궐 상궁들이 자주 드나들며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
고 퇴직하여 오갈 데 없는 상궁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6.25 때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어 다시 쇠퇴의 늪에 빠졌으나 1985년 전각들을 개축하고 대
웅전, 오백나한전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4년에 노원역 부근에 7층 규모의 불교회관을 지어
올리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선불당, 청학루, 약사전, 삼성각, 오백나한전 등 9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신불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
와 석불좌상,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 지방문화재 3점이 있다. 이중 괘불(掛佛
)은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어려워 아예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부도 2기 등의 비지정문화재가 추가로 전하고 있다.

학이 알을 품은 지세라 그런지 포근함이 느껴지며, 비록 시내와 가깝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
선듯 산사(山寺)의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산1
(덕릉로129가길 241 ☎ 02-936-1700)


▲  학림사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
계곡과 나란히 한 산길을 1km 오르면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
용굴암(龍窟庵)이 나온다.


 

♠  학림사 경내 둘러보기

▲  학림사 해탈문(解脫門)과 108계단

약사전을 지나 100m 정도 가면 경내로 인도하는 108계단 앞에 이른다. 계단 중간에는 해탈문
이 걸려있는데, 문 바깥 쪽에는 우람한 모습의 금강역사(金剛力士)상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사자를 탄 천진난만한 표정의 문수동자(文殊童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중생
을 맞는다. 그들 뒤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그려져 있어 천왕문(天王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  108계단에서 만난 원숭이들 - 그들의 자세에는 모두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108계단에는 4쌍(8마리)의 귀여운 원숭이 조각이 배치되어 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
부터 눈을 가린 원숭이, 귀를 막은 원숭이,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까지 적
당히 거리를 두며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의 자세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학림사에서
그저 눈요기나 하라고 갖다놓은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쁜 말을 내뱉을 바에는 차
라리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좋다. 그 다음 눈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것을 보지 말란 뜻이며,
귀를 막은 원숭이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다. 끝으로 두 손을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
이는 이들을 모두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면 해탈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를 제외한 3가지의 원숭이는 속인(俗人)들에게 중요한 충고 3가지를 자
세로써 보여주고 있다. 나쁜 것을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극
락처럼 아름다울 것인데 사람은 동물과 신(神) 중간에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라 좀처
럼 지키려 들질 않는다. 원숭이의 메세지를 뼛속 깊이 새기며 계단 끝에 이르면 청학루 뜨락
이다.


▲  학림사 청학루(靑鶴樓)와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108계단의 끝에는 포대화상과 2층 누각의 청학루가 자리해 있다. 설법전(說法殿)이라 불리기
도 하는데, 대웅전으로 통하는 1층 좌우에 종무소(宗務所)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
인다. 2층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불암산이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며, 돌로 다진 청학루
밑에는 공양간 등이 들어있다.

청학루 앞에는 4명의 동자승을 안고 있는 똥배 포대화상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복덕원
만(福德圓滿)한 인상을 지닌 그는 많은 절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축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시주를 하거나 인간사의 길흉
을 점쳤다는 승려로 미륵불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배를 만지면 복이
오거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그의 배를 살살 문지르며 소망을 들
이민다.


▲  청학루에서 바라본 불암산의 위엄

▲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도량을 자처하는 절답게 대웅전 밑에 오백나한이 봉안된 오백나한전을 두었다.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오래된 약사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대
동하여 약사여래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그 좌우로 16나한상, 그 뒤로 조그만 500나한을 빼
곡히 배치해 놓았다.
이 땅의 7,000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색채를 지닌 500나한의 모습은 이곳을 둘
러보는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오백나한전 내부 오백나한상과 약사여래3불좌상, 16나한상
오백이 넘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을 향하고 있으니 건물로 들어서는
내가 부담스러워 마주보기가 쑥쓰러울 지경이다.

▲  석조약사여래3불좌상 및 복장유물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6호

500나한과 16나한 등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약사여래3불좌상은 가운데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조성 시기는 수락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중기 또는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나한(羅漢)들이 죄다 칼라 색채를 지닌데
반해 약사여래3불좌상은 온통 하얀 피부과 검은 머리로 이루어져 흑백사진을 이룬다.
이들은 옥돌로 조성된 것으로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구부정한 자세이다. 표정은 동
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작고 귀엽기 그지 없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가운데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어 그의 정체를 알려주며, 불상의 바닥면에는
복장공이 있고, 내부에는 복장(腹臟)이 들어있으나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다.


▲  오백나한전과 마주한 선불당(選佛堂)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선불장(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  웃음을 묻어나게 하는 동자상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엉덩이를 요염하게 쳐들며 연꽃 향기에 심취해 있다.
동자승의 연꽃 심취를 돕고자 대웅전과 소나무가 그에게 늘 그늘을
드리우며 여름 햇살을 막아준다.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높은 계단 위에 위엄 돋게 자리한 대웅전은 학림사의 법당(法堂)으로 198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우기고 있
는 청동석가여래좌상이 있으며, 석가여래상 뒤로 1985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가 있고 좌
우 벽면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천불탱 등이 깃들여져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대웅전 내부는 마침 영가(靈駕)를 위한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유난히 귀가 큰 석가여래상은 청동(靑銅)으로 빚어 금색을 입힌 것으로 좌우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절에서는 이 석가여래상이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절의 역사나
불상의 양식을 볼 때 조선 불상으로 여겨진다. 옛날이야 신라 불상이라고 우기면 다 통했지만
이제는 불교미술사학과 불상의 시대별 양식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이니 함부로 우기다가
는 망신만 당한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다.


▲  멋드러진 노송(老松) 1그루
대웅전 뜨락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로 그의 나이는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약 100~150년 정도로 여겨진다. 보호수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3층석탑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탑으로 2중으로 된
기단부가 탑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청학루와
오백나한전, 5층석탑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1985년에 지어진 1칸짜리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긴 산신탱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  특이한 모습의 4사자 3층석탑
사자가 있는 부분이 1층을 이룬다.


▲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

경내 서쪽에 서 있는 석조미륵불입상은 근래에 세운 것이나 몸통에 검은 때가 약간 입혀져 나
이가 조금 들어 보인다. 처음에는 100년 이상 먹은 미륵불인가 싶었는데 대략 20년 정도 되었
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을 지닌 석불로 연화대좌 위에 우뚝 서 있으며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데 생김새가 석탑의 옥개석(屋蓋石)과 상륜부(相輪部)를 얹혀놓은 것 같다.

이렇게 학림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옆 산길을 통해 노원골 남쪽 능선으로 올라갔다. 여기
서 능선을 통해 귀임봉을 거쳐 노원골로 내려갈 생각에서였다.


 

♠  수락산 귀임봉

▲  노원골 남쪽 능선길 (당고개공원 갈림길)

노원골 남쪽 능선길은 영원암 뒷쪽 노원골갈림길에서 귀임봉을 거쳐 수락산보루(堡壘)까지 이
어지는 환상의 지붕길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느긋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길로 좌
우로 좁게나마 천하가 펼쳐져 있어 조망 또한 좋다. 예전 상계1동에 살 적에 즐겨찾던 산길로
약간의 오르막만 감내하면 도달할 수 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능선길은 귀임봉에서 아주 조금 흥
분기를 보인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는
데, 수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왼쪽에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당고개역, 상계3,4동 지역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대자연이
수락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도봉동,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장대한 산줄기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창동, 도봉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노원구, 중랑구 지역

수락산보루까지 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보루 봉우리 직전에서 노원골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대부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하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흔쾌히 미루고 미련 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깝고 나에게도 매우 익숙한 곳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당고개역 → 학림사 → 노원골 남쪽 능선 → 귀임봉 → 노원골'로 소요
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수락산 학림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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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6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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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 (서울둘레길, 맛있는 공양밥 1그릇)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불암산 학도
암 ~~~~~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학도암 마애사리탑

▲  약사전 석조약사3존불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다
무척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
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경기도 지역과 멀리 경북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2003년)까지 찾아가곤 했으
나 2011년부터는 서울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인다. 서울 시내에도 오래된 절이 제법 많
고 역사는 짧아도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을 찾아다니
기가 어언 10여 년, 이제는 미답(未踏)으로 남은 절이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뿐인 초파일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예전에 가봤던
오래된 절 중, 문화유산을 보유한 절까지 포함시켜 절 투어 동선을 짜보았다. '어디를
가야만 잘갔다고 칭찬을 들을까~?' 장소를 물색하다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에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학도암은 이미 여러 번이 인연을 지은 절이나 정작 마애사리탑은 만나지 못했다. 그는
2015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새내기 문화유산으로 아직까진 낯설은 마애사리탑의 생
김새도 구경하고 학도암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그곳을 이번 초파일의 첫 답사지
로 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꿈나라에서
서둘러 벗어나 오전 11시에 도봉동 집을 나섰다. 집 부근에서 도봉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창동역(1,4호선)으로 이동한 다음, 중계본동으로 가는 114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
여 노원우체국에서 두 발을 내린다.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중계본동의 여러 아파트를 지나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골목(중계
로14다길)으로 들어섰는데, 날이 날인지라 절로 향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징하게 말뚝을 박은 노원교회를 지나면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들
대신 불암산의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숲 바로 직전에는 황금색 배들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배밭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토산품인 먹골배로 봉화산(烽
火山)과 태릉 주변, 불암산 주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번잡한 시가지가 주로 연상
되는 서울에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배밭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에서 고구려 청동
호우를 만난 듯 꽤나 낯설고 신선하다.

불암산의 시원스런 산바람에 번뇌를 살짝 부탁하며 숲길을 오르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
로 추앙받는 서울둘레길이 마중한다. 총 거리가 무려 157km에 이르는 서울둘레길은 불
암산둘레길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살방한 산길의 정석인 둘레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연등의 물결을 따라 계속 오르막길을
고집하면 보이지 않던 학도암 경내와 주차장이 슬슬 꽁무니를 비춘다. 여기서 잠시 경
내를 접어두고 주차장 직전 오른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를 주목해보자. 그 바위 피부
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마애사리탑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하지만 너무 없는 듯
자리하고 있어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불암산 숲길
녹음(綠陰)에 잠긴 나무들이 시원한 내음을 베풀며 벌써부터 달라붙은
더위의 산물(땀)을 싹 단죄한다.


 

♠  학도암(鶴到庵) 입문 (마애사리탑)

▲  학도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4호

경내 직전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는 마애사리탑 2기가 살짝 서려있다. 마애사리탑이란 적당
한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고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조선 후기(19세기)에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 사찰에서 나타나는 서울 스타일의 사리탑<승탑(僧塔)>이다. 현재 학도암과 도봉산 천축
사(天竺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으며,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상도동 사자암(
獅子庵)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전할 뿐, 널리 유행하지는 못했다.

마애사리탑을 지닌 절은 하나 같이 산중에 자리해 있어 사리탑을 닦을 자리가 여의치 못했고
재정도 넉넉치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여 절 부근 바위를 활용해 조촐하게 공간을 다듬고 감
실을 닦은 다음 사리함을 봉안한 마애사리탑이 반짝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반 승탑보다 제작
비용도 많이 저렴하며 공간도 적게 잡아먹을 뿐 아니라 바위만 있으면 되니 갖추기는 쉽다.


▲  바위에 문신처럼 새겨진 마애사리탑
왼쪽은 '청신녀월영영주지탑', 오른쪽은 '환
당선사취근지탑'


학도암 마애사리탑은 바위 피부에 비석 모양으로 길쭉하고 얕게 자리를 만들고 윗쪽에 네모난
감실을 두어 사리함을 봉안했다. 하지만 그 감실은 오래전에 털렸고 그곳에 깃든 사리함 등의
유물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다.

왼쪽 사리탑은 '청신녀 월영영주지탑(淸信女 月影靈珠之塔)'으로 월영영주란 여인의 납골당이
다. 승려도 아닌 여인 신도의 사리탑을 경내 밑에 만들어줄 정도라면 절에 대한 공헌이 꽤 컸
던 모양이다. '嘉慶(가경)二十四年 己卯十月'이란 글씨가 옆에 새겨져 있어 가경24년 을묘년(
1819년) 10월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고 있으며, 오른쪽에 대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
가 하나 있을 뿐,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그리고 오른쪽 사리탑은 '환□당선사 취근지탑(幻□堂禪師 就根之塔)'으로 '환(幻)'과 '堂'
사이에 마치 총탄이 요란하게 할퀴고 간 듯, 크게 구멍이 나서 그 사이에 자리한 1자는 확인
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글씨는 멀쩡하여 '환ㅇ당 취근 선사'의 사리탑임을 알려준다.
조성 시기는 쓰여있지 않으나 돌을 다듬은 수법이나 양식으로 미루어 왼쪽 사리탑과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다만 누가 더 나이가 많은 지는 견주기가 어렵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마애사리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감실이 잘 남아있으며, 고맙게
도 사리탑 주인공과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하여 뒤늦게나마 2015년 8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만약 그 글
씨가 없었다면 비록 서울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라고 해도 그 가치
를 저평가 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리탑을 조성한 옛 사람들의 작은 센스가 이들의 가치를 돋보이게 해주어 사리탑의 미
래까지 챙겨준 것이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학도암 (오른쪽 바위 위에 석조지장보살상이 있음)

학도암의 낯선 존재, 마애사리탑을 둘러보고 초파일의 흥겨움으로 가득 묻어난 학도암 경내로
들어섰다. 절은 가파른 경사에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포근히 자리를 닦았는데 주차장에서 경
내로 인도하는 길은 크게 2개로 계단길과 차량을 위해 넓게 지은 오른쪽 길이 있다. 어느 길
로 가던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되나 이들 모두 경사의 압박이 조금 있어 잠시 숨을 헐떡이게
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중계본동과 하계동, 월계동,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새 건물 냄새가 진동하는 대웅전(大雄殿)

몇년 만에 다시 찾은 학도암은 세월의 흐름 그 이상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뇌리 속에 깊히 박힌 학도암의 모습 대신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또다른 모습이 나를 맞이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선방, 요사(寮舍),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모두 도맡았던 법당이 대웅전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2014년에 그 건물을 부시고 번듯하게 대웅전을 지어올렸고 지장보살상이 있
던 자리에는 종무소를 닦았다. (지장보살상은 바위 쪽으로 밀려남) 그리고 대웅전 아랫쪽에는
공양간을 갖춘 요사를 두어 철저히 분업화시켰다. 하여 예전보다는 정리되고 깔끔한 모습이지
만 한편으로는 낯설게 다가온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관음보살로 이
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뜨락에는 하얀 천막과 의자를 넉넉히 깔아 중생들의 편의
를 배려하였고, 관불의식의 현장도 닦아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도암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현판의 위엄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학도암은 불암산(507m) 서남쪽 자락 160m 고지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절이다. 숲이 무성
하고 작은 계곡이 옆에 흐르며, 멋드러진 바위가 주변에 포진해있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
다. 예로부터 이렇게 빼어난 경승지에는 학과 관련된 전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이곳 역
시 학이 날라와 머물렀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하여 학이 왔다는 뜻의 학도암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이 절은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불암산 어딘가에 있던 옛 암자를 옮겨와 창건했다고 한
다. 허나 그 암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불암산에는 적당한 절터도 전해오
지 않는다. 게다가 관련 기록도 남아있질 않아 창건 시기에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
나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17~1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70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주에 힘입어 절 뒤쪽 바위에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을 새겼으며
1875년에 벽운화상(碧雲和尙)이 절을 중창했다. 1878년에는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마애관
음보살을 보수했고, 1885년 벽운화상이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출신 화승(畵僧)인 경선(慶船)
에게 부탁하여 불상 1구를 개금(改金)하고 불화 6점을 봉안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922년 성담(聖曇)이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 소유로 넘어갔던 절 소유의 산림 10여 정보를 매
입하여 절의 경계를 넓혔으며, 1966년에 주지 김명호가 법당을 중건했다. 1970년 영산회상도
를 봉안하고 1972년에 삼성각에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2000년에는 마애불 옆에 있는
조그만 자연동굴을 넓혀 석조약사3존불을 안치해 약사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2005년에 승려 무이
(無二)가 법당 남쪽 공터를 닦아 석조지장보살상을 봉안했고, 2014
년에 다용도로 쓰이던 법당을 밀고 새로 대웅전과 요사, 종무소를 짓고 대웅전 밑에 공양간을
지어 2016년에 완성을 보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약사전,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마애사리탑을 간직하고 있다.

개발의 칼질이 절 밑 500m 아래까지 밀고 들어와 옛날과 달리 속세와 많이 가까워졌지만 짙은
숲이 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어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분위기를 잘 간직하
고 있으며, 절의 규모도 아담하여 두 눈으로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3 (종계로14다길 89 ☎ 02-930-6555)

▲  바위 위에 자리를 닦은 지장보살좌상
(2005년에 조성됨)

▲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마애관음보살좌상과
그를 품은 거대한 바위


 

♠  학도암 둘러보기

▲  초파일 특수를 위해 고생하는 아기부처의 관불의식 현장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년 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왔
다. 그 적지 않은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낸 터라 간만에 외출에 신이 난 표정
인데, 절을 찾은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관정)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아기부처 바로 옆에는 옥의 티처럼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
다본다. 마치 오늘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  대웅전, 종무소 앞에서 바라본 경내 뒷쪽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삼성각(三聖閣)
마애관음보살 우측 구석에 삼성각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972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진 칠성탱

▲  산신 식구들의 단란함이 느껴지는 산신탱


▲  석굴 형식으로 이루어진 약사전(藥師殿)

마애관음보살과 삼성각 사이에 동굴을 품은 장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도리에 약사전
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원래는 1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동굴로 그 내부에 기
도처로 쓰이는 공간이 있었으나 2000년에 동굴 내부를 넓히고 다져서 약사여래좌상과 일광보
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하고 약사전으로 삼았다.
약사전은 석굴 불전(佛殿)으로 한여름에는 시원하고 한겨울에는 따스해 경내의 조촐한 피서지
역할도 도맡고 있다.


▲  약사전 석굴에 자리를 닦은 석조약사3존불
연꽃 무늬가 새겨진 대좌에 앉아 왼손에 약합(藥盒)을 쥐어든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보관(寶冠)을 눌러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를 지킨다.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경내 뒷쪽이자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학도암의 자랑이자 꿀단지인 마애관음보살좌상이 있
다. 약사전을 품은 바위보다 2배 이상이나 커다란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는데 자신이 의
지한 바위만큼이나 장대한 규모로 마애불의 높이가 무려 13.4m에 이른다. 허나 허공을 가득
메운 알록달록 연등이 그의 모습을 온전하게 담는 것을 허용치 않아 사진에 담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1870년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조성되었다. 보통 고려
시대 마애불은 각기 개성이 넘치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반해 조선시대 마애불은 스케일
이 무척이나 좁아터졌던 조선을 닮아서 덩치가 대체로 작았다. (건물이나 성문도 이전 시대보
다 많이 작아짐) 허나 이 불상은 고려 마애불의 화신(化身) 마냥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여 명
성황후의 커다란 야망이 마애불에 고스란히 깃들여진 듯하다.
1870년 한씨 일가의 시주로 마애불을 보수했으며, 불상 왼쪽에 그와 관련된 50여 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조성시기와 제작자, 시주자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서울 지역에서는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에 깃든 고려시대 마애여래좌상(☞ 관련글 보
러가기
)에 버금가는 규모로 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된 선각 마애불이다. 이제 150년 정도
묵은 한참 때라 선의 아름다운 미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특이하게도 관음보살을 그 대
상으로 하여 조성했는데, 이 땅에서 오래된 마애불이 수천 개가 있지만 정작 관세음보살이 주
인공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  온전하게 담은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위엄
(2010년 4월)

▲  연등의 눈치를 피하며 옆에서 담아본
마애관음보살좌상


▲  마애관음보살의 얼굴

마애관음보살의 얼굴은 가늘면서도 볼에 살이 좀 있어 보인다. 좌우로 길쭉한 눈은 지그시 감
겨져 있고 그 위에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이 떠 있다. 그 눈썹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두텁
게 박혀있고, 코는 크고 두툼하여 복스럽게 보인다. 불상이 선각으로 얕게 조성되었지만 코만
큼은 돋음새김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약간 비뚤어져 보이는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전
체적인 얼굴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얼굴 주변을 밝히는 동그란 두광(頭光) 안에 보관을 표현했는데, 하얀 피부의 돌에 조각을 해
서 그렇지 정말로 호화로운 보관이다. 이마 위쪽에는 연화대좌를 갖춘 조그만 석가불의 모습
이 보이는데, 보관에 따로 불상까지 갖춘 관음보살은 처음이라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보
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冠帶) 양쪽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주렁주렁 달려 있어 보관에 대한 군침을 진하게 자극시키는데, 그가 잠시 보관을
내려놓는 사이에 살짝 가져가 머리에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  마애관음보살의 밑도리

마애불은 활짝 핀 연꽃대좌 위에 앉아있는데, 그 대좌 위로 오른쪽 발이 발가락, 발바닥과 함
께 보인다. 왼발은 옷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마애불로 조각 솜씨는 섬세하고 화려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마애
불로 꼽힐 만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져 있어 마애불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려준다.
마애불 앞에는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석등(石燈) 2기가 마애불 주변의 어둠을 몰아낸다.


▲  마애관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천하 (중계동과 노원구, 성북구 지역)
마애관세음보살 누님의 가피가 있기에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지역들은
오늘도 평안하다.

▲  학도암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초파일 절 투어 재미의 하나이자 백미(白眉)는 바로 공양밥 섭취이다. 지금까지 두 눈과 사진
기를 흥분이 넘치도록 호강을 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마애관음보살좌상이고 뭐고 바로 공양밥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접고
경내를 우선 둘러보았다. 경내가 조촐하고 마애관음보살과 마애사리탑을 빼면 고색의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답사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가 없다.

공양간 주변은 이미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학도암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
한 공양밥은 실외에서 나눠주고 있었는데, 그 주변과 공양간 실내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
이다. 다행히 밥을 받는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아서 금방 밥을 받았다.
이곳 공양밥은 밥이 담긴 그릇에 호박과 콩나물, 시금치 등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이른 더위와 비빔밥의 매운 맛을 잠재우고자 시원한
미역냉국이 딸려 나왔고, 후식용으로 수박 1조각과 절편이 담긴 떡 1봉지도 같이 제공되어 아
주 넉넉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었다. (밥과 나물은 리필 가능함)

팔이 부러질 정도로 나온 공양밥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어던지고
공양간 내부로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잡고 공양밥 섭취에 임한다. 양이 많아 보이던 공양밥이
지만 시장기가 상당해 숟가락 몇 번 만에 이내 빈 그릇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수박과 절편까
지 섭취하니 그야말로 점심 1끼 배부르게 잘먹었다.
그렇게 공양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후식거리로 믹스 커피도 준비되어 있어 커피까지 1잔 챙
겨먹으며 식곤증을 단죄했다. 그 시간에도 학도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초파일 분위기를 누리고
자 꾸역꾸역 들어왔고, 공양간 역시 계속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 공양을 끝으로 오랜만에 찾은 학도암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나에게는 그
날 학도암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학도암을 뒤로하며 ~~~ (불암산 숲길)

▲  중계본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12호

중계본동 시내로 나오니 중계로 길가에 오래된 느티나무 하나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길을 붙
잡는다. 뭔가 싶어서 호기심에 살펴보니 110년 정도 묵은 보호수 느티나무였다.
그는 높이 17m, 둘레 3.4m로 2005년에 서울시 보호수의 등급을 받았다. (그 당시 추정 나이는
약 100년) 예전에는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였지만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고 아파
트가 마구 들어서면서 이제는 가로수의 역할로 바뀌었다. 길 건너편에도 오래된 보호수가 있
으나 모두 쿨하게 무시하고 다음 미답지 사찰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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