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암석불좌상'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5.15 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2. 2013.10.15 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 도봉산 봄나들이 (천축사, 마당바위, 포대능선) '

▲  도봉산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봄이 막바지 전성기를 누리던 5월 첫 무렵에 이웃 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우
리 동네 뒷산이자 서울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40m)을 찾았다.
도봉산은 집에서도 잘 보이는 꽤나 가까운 존재임에도 북한산<北漢山, 삼각산(三角山)>에
오랫동안 마음이 기울면서 많이도 소홀했던 곳이다. 하여 도봉산에 안긴 천축사와 미답지
여러 곳을 지울 겸, 도봉산의 섭섭한 마음도 풀어줄 겸해서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고 불
과 네 정거장 거리인 도봉산 종점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후배와 파도처럼
몰려드는 등산객 인파 속으로 들어가 푸르름이 가득한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도봉산에서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천축사로 도봉산 종점에서 1시간 올라가야 된다. 광륜사
와 지금은 황량한 터로 변해버린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지나면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
데, 여기서 직진하여 20분 정도 가면 도봉산장(도봉산대피소)이다. 이곳에서 산장을 끼고
북쪽 길로 가면 포대능선과 만월암이고, 서쪽에 조그만 폭포가 있는 가파른 길로 15분 정
도 가면 천축사이다.
자존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고 산과 자연에 순응하며 묵묵히 산길을 걷다보면 나
올 것 같지 않던 천축사가 금세 돌기둥 정문을 꺼내 보이며 반갑게 맞이한다.


▲  조촐한 천축사 정문
절이 가파른 산자락에 있어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둘 공간이 없다.
그래서 저렇게 조촐하게 정문을 만들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천축사 입문

▲  불단을 가득 메운 불상<청동보살군상(靑銅菩薩群像)>의 대파노라마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상들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으로
이루어진 불단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불을 비롯하여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일종의
원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천축사에 새로운 명물로 그들을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이는데, 100기가 넘는 불상이
일제히 앞쪽을 바라보니 이건 관객들 앞에 서 있는 연극배우처럼 무안이 들 정도이다. 하여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옆으로 피했다.


▲  슬슬 모습을 비춘 천축사 경내 (대웅전)

청동보살입상에서 1굽이를 돌면 서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내 뒷
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
광(後光)이 되어준다.
굽이친 곳에서 경내까지는 약 100m 거리로 산길 중간에는 등산객들이 잠시 두 다리를 쉴 수 있
도록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네모난 석조(石槽)
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옥계수(玉溪水)로 가득한데 맑고 깨끗한 약수로 속
세에 이름이 나있다. 여기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물을 담아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외친다.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조그만 돌통에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늘 가득하다.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부도(浮屠)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가 자욱한 부도가 완전한 모습이 아닌 옥개석(屋蓋石)과 중대석(中臺
石), 하대석(下臺石) 등 일부가 수습되어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로 연꽃잎을 비
롯하여 사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의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모르겠으나 조선시대 부도로 보이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천축사의 무관심 앞에 형편없이 깨지고 씻겨내려간 고된 모습으로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
고 있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의 내력
도봉산 만장봉 동쪽 자락에 자리한 천축사는 673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수도를 하다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해 제자를 시켜 암자를 짓고
맑은 샘물이 나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이름 지으니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허나 당시 도봉산은 좁아터진 신라의 서북쪽 변방 지역으로 당나라와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한
참 전쟁을 벌이던 시절이다.
왕경(王京, 경주)에서도 멀고 전쟁으로 시끄러운 변경에 원효(元曉)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1인
자인 의상이 굳이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무왕의 허가를 받아
그 유명한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왕경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불교 발전에 힘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
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니 조선 태
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후기에 창건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뿔이 나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에
게 던져버리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
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
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케 했는데, 고려 후
기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
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王
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 적당한
자국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절이 망한 듯 싶으며,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
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으며, 1862년
에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량을 희
사했다.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년에 화주 성
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신중탱, 지장
탱을 조성했다. 허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하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泰)
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한
때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無門關)을 이 시기에 만들었다. 1959년에
는 주지 용태가 불사를 벌이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과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예전 천축사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에 몇 안되는 비구니(比丘尼) 사찰로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참선 수행공간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
도가 아주 최상급이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와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3호),
목조석가3존불,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 마애사리탑(서울지방문화재자료 65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고, 오래된 부도와 천축사 편액 등이 전한다. 화류목조용상이라 불리는
목조불단은 문정왕후가 내렸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건물은 모
두 새로 지은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둥지를 틀었으며, 이미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사세 확장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골의 산사치고는 그런데로
넓은 편이다. 게다가 경내 주변은 숲이 무성하며, 속세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중 사찰이라 제아
무리 번뇌라 해도 감히 추격하지 못한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깝고, 1시간 정도의 등산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이어서 잠시 속세에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와 안기고 싶은 절집
이다. 산바람도 솔솔 부니 한여름에도 시원하며, 시원한 샘물이 1년 내내 흘러나와 한모금 마시
면 정말 오장육부가 정화되는 것 같다.
또한 산신각이나 대웅전 앞에서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 등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
로 괜찮다. 

※ 도봉산 천축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1시간 30분 (도봉산역 1번 출구 → 도봉산 141번
  종점 → 광륜사 → 도봉서원 → 도봉산장 → 천축사)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정도 줄일 수 있다.
* 천축사 정기 법회가 있는 날에는 도봉산 주차장에서 도봉서원까지 셔틀차량이 운행된다. 여름
  에는 6시 30분부터 10시까지(겨울에는 7시부터) 운행되며, 도봉서원부터 걸어가야 된다. 깊은
  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차량은 아예 접근이 불가능하다.
* 누구든 점심공양이 가능하다. 대웅전 남쪽에 있는 공양간에서 공양에 임하면 된다. (겨울에는
  안주는 경우도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천축사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  연등의 붉은 물결 앞에 윗도리가 사라진 독성각(獨聖閣)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 준비로 부산한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 앞이다. 산자락에 자리한 천
축사는 대웅전 구역과 북쪽 무문관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웅전 구역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 원통전, 석굴이 있다.

대웅전 남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허공을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으로 윗도리가 보이질 않는다. 마
치 구름이나 안개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처럼 말이다. 윗도리를 보려면 산신각으로 오르
는 계단에서 봐야 된다.
이 건물은 달랑 1칸짜리의 조촐한 팔작지붕 건물로 현공(玄公)이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2002년
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  색채가 무지 고운 독성탱(獨聖幀)과 석고독성상
독성탱은 주지 선응이 화주가 되어 금어(金魚) 권성준이 제작했다.

▲  연등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신각(山神閣)

독성각 옆에는 높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산신각을 두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건물
로 독성각과 마찬가지로 달랑 1칸짜리이다. 단 지붕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으며, 2003년에 현
공이 보수했다.
산신각 내부에는 1979년에 주지 지형(知亨)이 화주가 되어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 산신탱
호랑이가 2마리가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두 눈에는 광채가 초롱초롱 빛나
어두운 밤에 본다면 정말 염통이 쫄깃해질 것 같다. 호랑이 사이로 지긋한
하얀 수염의 산신 할배가 앉아있는데, 앉아 있는 폼이 다른 산신탱과는
다르다. 그외에 동자 3명을 배치했으며, 소나무와 산도 묘사되어 있어
산신탱에 있어야 될 요소들은 모두 갖추었다.

▲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우측 위쪽에 자리한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그나
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어여쁜 누님의 모습을 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
화로는 천수천안(千手天眼)관음탱과 칠성탱(七星幀)을 봉안했는데, 천수천안관음탱은 1980년에
주지 지형과 금어 조정우가 만든 것이며, 칠성탱은 1979년에 금어 김용회가 제작한 것이다.


▲  원통전 불단에 봉안된 관음보살좌상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후불탱화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  천축사 대웅전 주변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장대한 바위가 있으니 그 바위 밑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시
원한 석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玉泉)이 여기서 용솟
음치고 있는데, 불공 때 공양하는 용도로만(천축사 승려들도 이 물을 마실 듯)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석굴 내부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여 일종의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으며, 좌우에 조그
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두었다. 속설(俗說)에는 태
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그 전설을 통해 천축사를 거쳐갔던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오래된 굴임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약사불을 안치하고 내부를 손질한 건 근래이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입술이 유난히 붉은 약사여래좌상이 약합(藥盒)을 쥐어들고 속세를 걱정한다.
약사여래의 머리 뒤쪽에는 3줄의 두광(頭光)을 그어 그를 빛나게 수식하며
그가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불상 오른쪽에 붉은 바가지가 있는 부분이 바로 옥천이다.

▲  약사여래좌상 좌우 암벽에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조그만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저 두 보살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대웅전 북쪽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각(梵鍾閣)과 원초적 생리
를 해결하는 해우소가 있다. 그리고 굳게 닫힌 기와문이 더 이상의 진행을 막는데, 그 문 너머
로 절집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3층짜리 신식 건물이 눈을 심히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 건물이 천
축사의 상징물인 무문관이다.

무문관은 수행을 위한 건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지었다. 건물의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
음을 얻는 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苦行)을 본받아 4년 또는 6
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
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매우 적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
우 4명만 통과한 것이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가뭄에 콩나듯 하여 시민선원
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어서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도전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을 그냥 놀려두기도 그래서 속세에 개방해 시민선방
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화
류수목조용상(樺榴樹木彫龍床, 목조불단)과 천축사 편액이 있다.


▲  대웅전(大雄殿) 목조석가3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
어졌다고 하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만든 것이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 요사채로 쓰이며,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 제
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
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3존불로 여기고 무시했으나 근래 석가불 뱃속에서는 이른바 복장(
腹臟) 유물이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원문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들을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
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으며, 1730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
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3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 불상 양
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고 형식
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불상이나 불화 조
성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다. (발원문 하나에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
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대웅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탱

▲  2004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  천축사 비로자나3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목조석가3존불 좌측에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불화는 비로자나삼신불도이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
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그림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오른쪽에는 석가불이 자리해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
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목리문(木理紋, 나무결 무
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
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
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
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
으며, 각기 각자의 물건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지만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
(慧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하였다.


▲  꽃창살과 용머리 장식으로 무척 현란한
천축사 대웅전 앞부분

경선당은 천축사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
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 응석 불화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
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等○○奉爲 王妃殿下辛亥生閔氏 玉體恒
安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尙宮
)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명
성황후)의 옥체가 항상 편안하고 성수만세 하기
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귀뜀해 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당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
천축사가 속세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천축사와 작별을 고하다 ~~ (대웅전)

금지된 곳인 무문관을 제외한 경내 곳곳을 40분 정도 둘러본 것 같다. 2개의 10년 전인 초등학
교 6학년 시절,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는데, (그래봐야 지금까지 2번 가봤음) 그때는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보리수(菩提樹)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아련히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나무는 세
월의 고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천축사를 뒤로 하고 포대능선으로 가고자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도봉산의
주능선과 자운봉, 만장봉도 같이 보고자 하는 의도로 올라갔지만 그 길은 파란만장했다.


 

♠  도봉산의 지붕 거닐기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천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마당처럼 넓은 바위가 하얀 피부를 드러낸다. 그 바위가 마당바위
로 바위에 올라서면 도봉산 산줄기는 물론 서울 북부 지역이 두 눈에 훤히 달려와 조망이 가히
천하 일품이다.
이곳은 길이 3갈래로 갈리는 요충지로 만장봉과 포대능선으로 오르는 길, 관음암(觀音庵)과 오
봉으로 가는 길, 그리고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로 나눠진다. 우리의 목적지는 포대능선이
므로 제일 힘든 만장봉 길을 택했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도봉산 남쪽 줄기와 우이암(관음바위)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는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북부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 이런 소중한 허파가 있다는 것은 대자연이 내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두고두고 잘 아껴야 하건만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마당바위에서 각박한 산길을 20분 정도 개미처럼 오르면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주변에 도
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니 여기서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으로
이어지며, 북쪽은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만장봉의 위엄

▲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740m)은 도봉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그 역시 금지된 봉우리로 묶여있는데, 역시나 통행금지 안내문을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운봉과 만장봉은 오르지 않고 (남북통일 될 때까지 오래 살아야 되니까) 자운봉고개에
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양이다.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의 위엄으로 Y처럼 생겼다고 하여 속칭 와이계곡이라 불리며 왼쪽 길은 와이계곡 우회길이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와이계곡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에 박힌 철
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 의지해 조금씩 움직이는데, 완전 손
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다락능선 입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우회하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 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이다.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 북부 지역
(우리 동네 도봉동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와 포대(砲臺) 등 추억이 되버린 군사 시설이 여럿 남아있다.
포대능선이란 이름도 바로 능선에 있던 포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와이계곡을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
고 상처받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포대능선 716m 봉우리(다락능선 입구)에서 도봉산역 방향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런 산중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려고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다.
중간에 자운봉 동쪽 밑에 자리한 조그만 암자 만월암(滿月庵)에 들려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석
불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을 친견하고, 다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여 도봉산 종점으
로 내려왔다. (만월암과 그 이후에 둘러본 곳은 생략) 그런 다음 순두부와 파전, 동동주로 간단
히 저녁 뒷풀이를 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봉산이 내 제자리와 매우 가까우니 그것 하나는 너무 좋다. 금방 돌아와서 지친 몸을 뉘울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여 5월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내가 도봉산 곁에 계속 머무는 동안
그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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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 서울 도봉산(道峯山) 나들이 '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주변)

▲  도봉산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험준한 도봉산 포대능선

▲  자운봉(紫雲峰)고개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봄이 한참 무르익던 5월 노동절에 옆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도봉구(道峰區)의 든든
한 뒷산인 도봉산을 찾았다.
도봉산 141번 종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도봉서원과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산중턱에 자리한 천축
사(天竺寺)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런 다음 마당바위를 거쳐 각박한 산길을 개미처럼 올라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직전에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남쪽 주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
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 가면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자운봉(740m)은 도봉산(道峯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데, 통행금지 안내문을 쿨하게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
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능선을 비롯한 주능선은 도봉산의
지붕으로 북쪽은 멀리 사패산까지, 남쪽은 우이암을 거쳐 우이동(牛耳洞)까지 이어진다.


▲  자운봉고개에서 바라본 의정부 시내 (건너편 산은 수락산)

◀  순도 100% 바위 봉우리인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고개에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
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
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
양이다. <그래봐야 북한산(삼각산), 용문산, 태백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 형님 앞
에서는 고개도 못듬>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 길이며, 왼쪽 길은 능선에서 조금 떨어진 구간이다. 그래서 빨리 가려는 생각에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지금까지 보였던 순한 양에서 악한 이리의 모습을 보이며, 등산객을 당황하게 한다.
코스가 완전 지옥이기 때문이다.


▲  포대능선 남쪽 능선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남쪽 <칼바위와 우이암,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포대능선 남쪽 능선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
에 박힌 철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가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게 의지해 조금씩 움직
이는데, 완전 손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송곳처럼 뾰족한 바위 위를 갈 때는 발바닥도 아프다고 난리를 친다. '우악~~ 이런 길
이 다 있다니..? 지옥이 따로 없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716m 봉우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거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을 장식하는 바위 봉우리의 위엄
포대능선이란 이름은 불교에 많이 등장하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산에 절이 유난히 많으니까 말이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서울 북부 지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우리 동네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를 비롯해 추억이 되버린 군부대 시설이 여럿 있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포대능선 남쪽 능선길을 간신히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
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道峰區)
와 노원구(蘆原區)를 비롯해 강북구,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
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고 상처받
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하늘 아래로 곱게 펼쳐진 의정부 남부와 서울 북부, 가운데에
보이는 고가도로는 수도권 외곽순환고속도로이다.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오봉(五峯)과 양주시 장흥면 지역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716m 봉우리에서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  만월암에서 포대능선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길
경사가 워낙 미친 수준이라 나무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의 편의를 제공했다.
하늘로 이어진 계단일까? 끝없이 펼쳐진 계단길, 내려갈 때야 쉽지만,
올라갈 때는 그야말로 진땀을 빼게 한다.


♠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조그만 석굴 암자 ~ 도봉산 만월암(滿月庵)

▲  큰 바위 밑에 기묘하게 자리한 만월암 만월보전(滿月寶殿)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동쪽(도봉산역 방향)으로 20분 정도 내려가면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보일 것이다. 바로 그 바위 밑에 석굴 암자(庵子)인 만월암이 묘하게 둥지를 틀어 두 눈을 놀라
게 한다.

만월암은 자운봉 동쪽 약 50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중암자로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
한 절이기도 하다. (이곳이 서울의 최북단임)
이 절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시절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 지역은
신라의 변방으로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唐)이 한참 전쟁을 벌이던 때이다. 게다가 의
상은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전에는 주로 왕경(王京, 경주)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연구 및 귀족 불교를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왕경에서 1,000리 밖에 떨
어진 이곳 변방까지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다.

이곳의 지형은 커다란 바위가 지붕을 이루고 있고 2개의 바위가 양쪽에서 그를 받치는 기둥 역
할을 하며, 그 사이에 조촐하게 공간이 생겨 조그만 자연산 동굴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등산
로와 이정표가 잘 닦여져 있어 찾기야 쉽겠지만 옛날에는 찾기가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
러다보니 조용히 참선에 임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라 오래전부터 보덕굴(普德窟)이라 불리는 참선
석굴도량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애당초 절이나 암자는 없었고, 그냥 참선을 위한 동굴이 전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봉산에는 천축사와 망월사(望月寺), 회룡사(回龍寺), 원통사(圓通寺) 등의 크고 작은 오
랜 고찰이 많으니 그 절에 머무는 승려들의 비밀 수행 장소로도 널리 쓰였을 것이다.

지금의 만월암이 생긴 것은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불좌상을 통해 17~18세기 정도로 보이는데, 불
상이 1784년에 개금(改金)되었다는 명문이 있어, 적어도 1700년대(빠르면 1600년대)에 조성되었
을 것이다. 절이란 불상이 있어야 영업이 되니 17~18세기에 조촐하게 암자로 태어났음을 가늠케
하며, 암자의 이름인 만월(滿月)은 석불좌상이 약사여래불이라 그를 상징하는 뜻에서 지어진 이
름이다. (신라 중기 창건설은 그냥 뽀송뽀송한 거품임)

불상을 봉안하고 번듯한 암자로 거듭났지만 따로 건물을 짓지 않고 그냥 동굴을 법당으로 다듬
어 사용한 듯 싶으며, 1940년에 여여거사(如如居士) 서광전(徐光前)이 건물을 짓고 중창을 벌였
다. 그러다가 2002년에 혜공이 만월보전을 지었고, 2004년에 산신각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석굴 자리에 지은 만월보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산신각 등 달랑 건물 2동이 전
부이다. 만월보전은 법당과 요사(寮舍)의 역할을 겸하는데, 서쪽 칸은 법당, 동쪽 칸은 요사(寮
舍)와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며, 건물의 크기는 작고 투박하다. 아무래도 궁벽한 곳에 있다보니
불사(佛事)가 어려워 바위 뒤쪽에 자리를 마련해 산신각을 만들었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이 주변을 밀어 건물을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절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그리 하려면 애궂은 숲
을 밀어야 된다. 내 바램이지만 만월암은 지금의 모습이 딱 좋다. 그냥 소박한 석굴도량으로 속
세 곁에 남았으면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작은 암자이건만 다행히 소장문화유산이 하나 있어 절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지는 않는
다. 바로 만월보전의 주인인 석불좌상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도 다 그를 보기 위함
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포대능선 지옥 체험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암자에는 승려 1명이 머물고 있으며, 그를 돕는 할머니보살 1명이 낮시간에 암자를 지킨다. 외
진 곳에 있어 석가탄신일이 임박했음에도 연등 수입이 적어 큰일이라고 한다. 이곳 외에도 주변
암자들도 경영난이 심각하다고 하며, 이곳에서 가장 큰 절인 천축사도 연등 수입이 많이 줄었다
고 그런다.


▲  만월암 산신각(山神閣)

만월보전에서 바위 너머 북쪽 산자락에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만월보전에서 여기까지는 도보 2
분 거리로 법당과도 제법 떨어져 있어 별개의 공간처럼 다가온다.
이 건물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은 것으로 건물 외벽은 갑옷처럼 돌로 둘렀고, 목조 지붕에는
동기와를 올렸다. 2004년에 혜공이 지었으며,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

하얀 수염에 하얀 바탕의 옷을 입은 산신이 중심에 앉아 있고, 그 좌우로 호랑이 2마리가 제법
성난 성난 표정으로 그의 곁을 지킨다. 아마도 산신이 제때 임금을 주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지금까지 본 산신탱 호랑이 가운데 가장 패기가 넘치는 모습임) 그리고 앳된 표정의 동자(童子
) 3명이 양쪽 가장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  만월암 바위 위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이 바위 밑에 바로 만월보전이 자리해 있다.

▲  만월보전 현판 - 글씨에 생기가 서린 듯 하다.

바위 밑에 자리한 만월보전은 만월암의 중심 건물로 예전 석굴 자리이다. 2002년에 혜공이 지은
건물로 한정된 자리를 활용하다 보니 정면 4칸, 측면 1칸의 'ㄱ'자 모습이 되었으며, 서쪽 칸은
법당으로, 동쪽 칸은 요사로 쓰인다. 요사에는 만월선방(滿月禪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법
당과 요사를 바로 이어주는 문은 없고, 툇마루를 통해 이동하면 된다.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인 석불좌상을 비롯하여,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 1969년에 만든 석
가모니후불탱화와 신중탱, 사천왕탱, 산신탱이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  만월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神衆幀)
1969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등장인물이 복잡해 정신을 다 빼놓는 다른 신중탱과
달리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인다.

▲  만월보전 우측 벽에 걸린 산신탱

만월암은 산신탱이 2개나 있다. 이 그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각에 봉안된 것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이다. 앞서 산신각의 그것처럼 호랑이가 많이 성이 나 있으며, 꼬랑지는 산신의
머리를 칠 기세이다. 그리고 동자 2명은 산신의 지팡이와 여러 물건을 들며 산신 옆에 서 있다.


▲  만월암 석불좌상(가운데 큰 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석불좌상은 만월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소중한 밥줄이다. 포근한
인상을 지으며 속세를 굽어보는 그는 피부부터 옷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원래는 금동불(金銅佛)로 근래에 호분을 씌워 백불(白佛)이 되버린 것이다.

그의 왼손에는 빨간색의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임을 알 수 있으며,
약합 안에는 중생의 갖은 병을 치유하는 약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약으로 여기까지 온 나부터
치료해주면 좋으련만 약합의 뚜껑은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의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것인지 어깨까지 늘어졌다. 코는 오목하
고 눈은 지그시 떴는데, 눈동자가 진하며,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듯, 매우 붉다. 불상이 지나치
게 하얗다보니 더 진하게 보이는 것이다.

예전 석굴 석벽에 '乾隆四十九年六月日佛像改金施...'이란 명문(銘文)이 있어 건륭(乾隆) 49년
6월, 즉 1784년에 시주를 받아 개금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개금시기 이전이
확실하고 불상의 양식까지 고려한다면 최대 1600년대까지 가능하며, 참선용 석굴에서 암자로 태
어난 시기도 불상이 조성된 그 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8cm로 좌우에는 근래에 만든 하얀 피부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
菩薩)을 협시(夾侍)로 두어 약사여래3존불을 이루었다. 사람 키에 가까운 높이와 단정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의(通肩衣)에 보이는 옷 주름 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 도봉산(서울 구역)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획득했
으며(1999년에 지정됨), 만월암에 한줄기 빛으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듬직한 존재이다.

만월보전 앞에는 샘터가 있다. 샘터라고 해서 물이 늘 졸졸졸 나오고 석조에 마냥 물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 수도꼭지로 물을 틀어서 마시는 형태로 이곳을 거쳐가는 등산객들의 지친 목을
달래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물은 마음껏 마셔도 되며, 반드시 꼭지를 잠그기 바람)
물을 마시고 절을 둘러보니 할머니보살이 커피 1잔 하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1잔 달라고 그러니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건네준다. 커피를 마시며 석불좌상과 만월보전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으니
부처님을 찍으면 실례라고 잔소리를 건넨다. 그래서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표정을 바로 하
고는 그냥 둔다.

만월암이 워낙 작다보니 외딴 산골에 묻힌 여염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게다가 앉아
갈 수 있도록 툇마루도 있고, 석조약사불의 인자함도 깃든 곳이다 보니 아비규환의 속세를 등지
며 하룻밤 청하고 싶다. (단 해우소 상태는 장담 못함) 번뇌도 멋모르고 뒤쫓아오다가 떡실신할
정도로 깊은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암자로 만약 아무도 없는 버려진 공간이었다면 나만의 비밀
아지트로 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만월암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아쉽지만 다시 길을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
기 때문이다. 보살 할머니가 합장을 하며 '이제 망월사로 가십니까?' 그러니 내가 '아니요. 속
세로 내려갑니다'

※ 도봉산 만월암, 포대능선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이동, 만월암까지는 1:40~50분, 포대능선은 2:00
  ~2:10 소요, <도봉산역(도봉산역 중앙차로 정류장) → 도봉산 141번종점 → 광륜사 → 도봉서
  원 → 도봉산장 → 만월암 → 716m봉우리 → 포대능선>
  포대능선은 거기서 20분 정도 추가>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줄일 수 있다.
* 만월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29-1 (☎ 02-955-3719)


▲  밑에서 바라본 만월암 만월보전
만월암 석불좌상 문화재 안내판이 만월보전 앞이 아닌 밑에 세워져 있다.
그만큼 만월보전 주변이 협소하다.


♠  도봉산 마무리

▲  도봉서원(道峯書院) 복원 조감도(鳥瞰圖)

만월암을 등지고 정신없이 내려가니 천축사와 길이 갈리는 도봉산장이다. 여기서부터 길은 수월
하여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에 이른다. 허나 도봉서원은 서원
주변을 철제 담장으로 빙 두르며 복원 공사에 여념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공사는 2014년까
지 진행되며, 조감도에 나온 모습대로 재현된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나름 희소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한때 서울에
는 노량진(鷺梁津)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암사동(岩寺洞) 한강변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있었
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내리친 서원철폐령에 앞다투어 사라지고 말았다. 구암서원은 그
나마 조두비(俎豆碑)와 주춧돌이 남아있고, 민절서원은 사육신묘(死六臣墓) 사당이 대체 역할을
하고 있다.

도봉산입구에서 천축사나 자운봉, 우이암으로 가려면 꼭 지나야되는 목좋은 곳에 자리한 도봉서
원은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원래는 도봉산에 제일 가는 사찰이었다는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
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다고 전하며, 조선 말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사당을 비롯한 서원의 주요 건물은 1574년에 완성되었으나 남언경이 병에 걸려 양주목사를 그만
두자 서원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고, 뒤를 이어 양주목사가 된 이제민(李齊閔)과 이정암(李廷馣)
이 나머지 공사를 진행하여 1579년 완성을 보았다.
서원이 완성되자 조정에서 도봉(道峯)이란 사액을 내려 도봉서원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1608년 이후에 중건했다. 1696년에는 도봉서원 단골이던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으
며, 1723년 조정을 장악하던 세력의 압박으로 송시열의 위패가 추방되기도 했으나 1775년 영조
의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제삿밥을 받게 되었다. 서울 근교의 유명 서원으로 많은 유
생들이 찾아와 한가롭게 성리학이나 논하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아작
이 나고, 위패는 땅에 매장되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임시로 단이 설치되어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냈으나 6.25가 터지
면서 그마저 중단되고 만다. 그러다가 1972년 '도봉서원 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우와 신문(
神門)을 복원했으나 왕년의 모습에 1/4도 안되는 규모이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정로사
(靜老祠)는 3칸 규모로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
에 향사를 지낸다. (지금도 지냄)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로 한때 재산은 전답 700여 평
이 있었다.

사우 외에는 복원을 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윤곽이 남아있고 이율곡(李栗谷)의 '도봉서원기'를
비롯하여 옛 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복원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2012년부터 기존 건물을
눕히고 한참 복원공사를 벌이고 있는데, 2014년 서원이 완성되면 서울 유일의 서원이자 도봉산
을 수식하는 명소로 선비문화 체험의 장으로 한몫 단단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봉구청에서
서원 활용에 매우 열성적임) 또한 공사중에 옛 영국사의 흔적이 나오면 주춧돌은 서원 주변에
두고, 불상 등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넘겨서 유생들에 의해 비명에 간 영국사도 조금은 위로해주
었으면 좋겠다.
도봉서원 주변 도봉계곡은 서울 근교 으뜸 계곡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서원의 주인인 조광조는
이곳을 즐겨찾기 했으며, 조정 일을 마치면 수레를 몰아 이곳에서 놀았다고 전한다. 또한 송시
열의 수제자로 도봉서원 운영에도 관여한 권상하(權尙夏)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원래부터
경기도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 찬양했고, (당시 도봉동은 경기도 양주목 관할)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한양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면 도봉산과 삼각산을 언급하는데, 그 계곡과
수석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도봉계곡)과 중흥동(重興洞, 북한산성계곡)이 가장 뛰어나다'했다.

이들 계곡에는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수증(金壽增)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
월 도봉서원과 하나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지정되었다.


▲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 바로 앞 계곡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고산앙지란 옛 사람들
이 필수로 배웠던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김수
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산앙지 4글자 가운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계곡물에 잠겨 있으며, 앙(仰)은 절반 정도
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가뭄 때면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위쪽에 쓰인 고산(高山)
은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다. 이들 글자 가운데 산(山)은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
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를 새긴 시기가 적혀있는데 경진(庚辰) 7월 (밑
에 부분은 물에 잠겨 안보임)이라 쓰여 있다.


▲  광륜사(光輪寺) 앞에 솟아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5호

도봉서원을 지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광륜사란 절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법등(法燈)의 역
사가 만월암의 신중탱(1969년 제작)보다 더 짧아보이는데, 연혁이 담긴 안내문을 보니 이곳 역
시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쓰여있다.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의상대사를 천축사와 만월
암, 광륜사가 아주 사이좋게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경내에 오래된 유물은 전혀 없고, 고색의 기운이 말라 구체적인 창건 시기는 파악하기 힘드나
이이(李珥)가 남긴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에 광륜사의 옛 이름인 만장사(萬丈寺)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고려 때나 늦어도 조선 초에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한때는 영국사, 천축사와 더불어 도봉산의 대표적인 절이었으나 영국사가 강제로 폐사되면서 그
영향으로 쇠락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터만 간신히 남은 것을 조선 후기
에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가 부친인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집안 선산(先山)
과 가까운 만장사터에 지금의 절을 짓고, 인근에 별장을 지어 자주 찾아왔다. <인근 녹야원(鹿
野苑)에 조대비 별장이 남아있음>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조대비 별장을 가끔 찾아와 국정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도 했다.
1970년 이후 금득보살이 절을 크게 중창했으며, 2002년에는 신도들의 열화와 같은 시주에 힘입
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이때 무주당 청화대종사가 절의 이름을 광륜사로 갈았다.

광륜사 앞에는 2그루의 나이 지긋한 나무가 서로 앞다투어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윗 사진
의 나무는 나이가 약 215년(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기준임, 지금은 약 250년)으로 높이 17m,
나무 둘레가 3.8m에 이르며, 광륜사에서 관리한다. 아마도 도봉서원을 들락거리던 선비들이 중
간 휴식처로 삼고자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  광륜사 앞에 솟아난 2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4호
나무 높이 18m, 둘레 1.9m로 앞의 나무보다
키가 1m 더 크고, 둘레가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무지 날씬한 나무이다.
(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165년, 지금은 200년)


▲  도봉산 서원마을터<서원동(書院洞)> 표석

도봉서원 밑에 형성된 서원마을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절로 따지면 일종의 사하촌(寺下村)과
비슷한 마을이다. 이곳에 있던 마을은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국립공원 일대를 정비하면서 모두
밀어버렸다.


▲  북한산국립공원 표석의 위엄
도봉산이 편의상 북한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버렸지만 북한산과 도봉산은
엄연히 다른 산이다.

▲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산탐방지원센터 부근에 있는 도봉동문 바위글씨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받는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멸망한 명나라에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이며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던 어리석
은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한다.
도봉동문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대학자가 쓴 글씨가 그런지 필체가
아주 율동을 부린다.


▲  도봉산에서 먹은 순두부찌개와 해물파전의 위엄

도봉산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를 가르킨다. 오후 2시에 올라
갔으니까 5시간 동안 도봉산을 방황한 셈이다. (도봉산 종점 → 천축사 → 마당바위 → 자운봉
고개 → 포대능선 → 716m봉우리 → 만월암 → 도봉서원 → 도봉산 종점)

도봉산(도봉동 지구)은 두부와 순두부 음식이 유명하다. 도봉산 종점과 도봉산탐방지원센터 사
이에 등산복/등산용품 가게와 온갖 식당이 밀집된 공간이 있는데, 그곳의 두부 음식이 괜찮다.
예전에 가봤던 식당에 가볼까 궁리를 하다가 적당한 식당(식당 이름은 까먹음)에 들어가 자리를
피고 앉았다.

나는 순두부조치(찌개)를 시키고, 후배는 산채비빔밥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만 먹으면 무척 허
전하니 산행뒷풀이용으로 해물파전 1장과 동동주 1동이도 같이 주문했다.
제일 먼저 해물파전이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덩어리가 제법 크다. 처음에는 시장기가 상당하여
이거 가지고 되겠나 싶었는데, 먹고 보니 계속 커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맛은 괜찮아 파전 그
릇을 모두 비웠다. 파전을 1/3정도 먹은 시점에서 순두부찌개와 산채비빔밥, 동동주, 밑반찬이
나타나니 파전에게 일제히 쏠린 시선을 2/3 이상 덜게 해준다.

순두부찌개는 속세에서도 종종 먹는 음식인데, 순두부도 많고, 조개도 많이 들어가 있고, 그런
데로 먹을 만하다. 밑반찬은 김치와 콩나물, 산채나물 등 3가지 정도이며, 동동주 같은 경우는
양이 깊어서 배부른 배를 꾸역꾸역 억지로 눌러가며 간신히 동이를 비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봉
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매년 10월 중순 주말에는 도봉구 가을축제의 일환으로 도봉산축제가 열린다. 도봉산 공영주차
장과 생태공원, 도봉산 제1휴식처(광륜사 부근) 일대에서 등산대회와 도봉서원 추향제(秋享祭),
자연음악회, 도봉산 사찰음식전, 산사음악회 등을 선보이며, 보통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문의 도봉문화원 ☎ 02-905-4026, 도봉구청 문화관광과 ☎ 02-2091-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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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0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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