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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20 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 '


▲  윤봉길이 태어난 광현당

▲  저한당

▲  윤봉길이 남긴 글씨들

 


 

차디찬 겨울 제국과 따스한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초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홍성
과 예산(禮山)을 찾았다.
충남의 금강산으로 추앙받고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을 둘러보고 덕산(德山)으로 나와
늦은 점심으로 얼큰하게 육개장을 섭취했다. 용봉산을 크게 1바퀴 돌아 몸이 좀 피곤했으
나 일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여 수덕사(修德寺)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유적(
충의사)의 문을 두드렸다.

윤봉길(尹奉吉) 의사 유적은 그가 자란 저한당을 비롯해 도중도의 광현당과 부흥원, 윤봉
길 의사 기념관, 충의사, 그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윤봉길과는 관련은 없지만 보너스로 보부상유품전시관도 있다.

윤봉길 의사 유적은 통째로 사적 229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예산 윤봉
길 의사 유적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순서는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되나 나는 저한당을 시
작으로 도중도와 부흥원, 윤봉길의사 기념관, 보부상유품전시관, 충의사, 배용순 여사 묘
역 순으로 둘러봤다.


▲  옛 국도변에 자리한 저한당 서쪽 돌담길


 

♠  윤봉길 의사(義士)가 성장기를 보냈던 저한당(狙韓堂) 주변

▲  저한당

저한당은 윤봉길(1908~1932) 의사가 1911년부터 1930년 봄까지 살았던 집으로 1911년에 가족
을 따라 도중도에서 저한당으로 이사를 왔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3.1
운동이 터지면서 왜정(倭政)의 식민지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하여 동생인 윤성
의(尹聖儀)와 함께 한학(漢學)을 공부했는데, 워낙 영특하여 15살 때 천재로 칭송을 받았다.
(나는 그 나이 때 뭐했나...?)
1921년부터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계속 한문학을 익혔으며, 1926년에 집에 서당을 차
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문물을 틈틈이 익혔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공동묘지 묘표(墓
標) 사건이 발생하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서당에서 평화롭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글을 모르는 청년 하나가 마을 인근 덕
숭산(德崇山) 공동묘지에 있는 팻말을 모조리 뽑아들고 와서 자기 아비의 묘비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에 묘비를 찾아주긴 했으나 문제는 그 청년이 아버지 묘비는 물론이고 다른
묘비까지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않은 채, 죄다 뽑아 온 것이다. 그러니 어찌 묘비의 위치를
알 수 있겠는가?
이에 큰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아이들보다 청년들의 교육이 시급함을 깨닫고 야학회(夜學會)
를 창설해 지역 주민들의 문맹퇴치에 나섰다. 또한 민족의 경제자립이 자주독립의 지름길임을
인식하고 구매조합(購買組合) 조직과 양계(養鷄), 양돈(養豚) 등을 장려하여 농촌 경제자립운
동을 펼쳐나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18세에 불과했다. 나는 그 나이 때 학교에서 잠만
열라게 잤는데, 역시 위인은 떡잎부터가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짓고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으며, 1929년에는 도중도에
부흥원(復興院)을 만들고 매월 14일에 계몽강연회(啓蒙講演會)를 개최하여 농촌계몽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그해 2월 18일에는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學藝會)를 열고 촌극(寸劇)인 '토
끼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하면서 매우 성공리에 막을 내렸
다. 바로 이 연극 때문에 왜정은 그를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란 농민 단체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고,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조직해 농민의 단결과 애국사상 고취에 나섰다. 허나 왜정은 그런 행동이 독립운동이라며 쓸
데없이 꼬투리를 잡았다. 하여 왜경(倭警)에 여러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윤봉길은 독
립운동이 아닌 단순한 교육이라고 했지만 왜정은 무조건 독립운동이라며, 더 이상 하지 말라
고 강요했다. 농민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것까지 왜정이 쓸데없이 태클을 거니 그는 이곳에서
의 활동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1930년 3월 6일, 그 유명한 7글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을 나
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시를 남기고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윤봉길은 부인과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1932년 상해 의거(義擧) 이후 왜정의 감시와 탄
압 속에 눈물과 독립에 대한 의지로 이 집을 지켰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곳에 살다가 1972
년 윤봉길 의사 유적을 몽땅 국가 사적으로 삼으면서 국가에서 집을 매입해 성역화 작업에 들
어갔다. 그래서 그해 8월 유족들은 정든 집을 떠나 인근으로 이사갔으며, 1974년 집을 중수했
다. 지금도 관리가 지극정성이라 마치 여인네들이 살고 있는 듯, 집이 매우 깨끗하다.

남쪽을 바라보며 선 저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초가(草家)로 오래된 마을과 민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이다. 1911년에 지어진 것으로 창고와 부엌으로 쓰이는 'ㄱ' 모양의 건
물과 방 2개가 딸린 건물 등 부속 건물 2채(담장 밖에 뒷간을 포함하면 3채)를 거느려 총 3채
가 한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다.
건물에 딱히 특별한 부분은 없으나 윤봉길의 오랜 손때가 묻어있고 그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이 담긴 터전으로 유서가 깊으며, 그의 유가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집의 이름인 저한당(狙韓堂)은 한국을 건져낸다는 뜻이니, 즉 우리나라를 왜정에서 건져
내 독립을 이루고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다.

* 저한당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 (덕산온천로 182-10)


▲  돌담에 둘러싸인 저한당 외경

▲  저한당으로 인도하는 대문
두 부속건물 사이로 조촐하게 담을 만들고 문을 내어 정겨운 모습을 자아낸다.

▲  방 2개와 광으로 이루어진 부속건물

▲  창고와 부엌

▲  저한당 뒤쪽 장독대

▲  뒷간과 소나무

▲  글씨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저한당 현판

▲  주인이 가고 없는 저한당 방


▲  저한당에 봉안된 잘생긴 윤봉길 의사의 영정

▲  윤봉길 의사 동상

▲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탑

저한당 주변에는 오른쪽 주먹을 쥐며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과 1965
년에 세워진 의거 기념탑, 교육관 등이 있으며 나무가 많고 잔디가 곱게 깔려 정갈한 분위기
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 주변을 기와 돌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성역의 경계를 그었다.


▲  저한당 주변
심술쟁이 겨울도 그를 흠모하는 것일까? 저한당에서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하만물을 위해 빨리 떠나주면 좋으련만~~

▲  도중도로 이어지는 저한당 동쪽 돌담길
지긋한 전통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기 그지 없다.


 

♠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고 농민계몽을 위해 힘쓰던 현장
도중도(島中島)

▲  도중도 광현당 정문

저한당을 둘러보고 남쪽으로 나오면 대치천이라 불리는 개천이 나온다. 그 개천에 걸린 '도중
도교'를 건너면 윤봉길이 태어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도중도 구역에 들어서게 된다.

도중도는 윤봉길의 증조부 때부터 정착해 살던 곳으로 1908년 6월 21일 광현당에서 윤황(尹璜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경주김씨인 김원상(金元祥)이며, 본관은 파평 윤씨, 본명은
우의(禹儀)이다. 봉길이란 이름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그는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으며,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야학
회를 비롯해 계몽강연회,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도중도란 이름은 '조선반도 속의 섬, 조선
반도 가운데의 섬으로 왜인(倭人)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란 뜻에서 윤봉길이 지은 것
으로 예전에는 순 100% 섬이었지만 도중도교 서쪽 개천에 흙으로 둑을 닦아 그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면서 99% 섬이 되버렸다. 큰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조촐한 개천 안에 이런 커
다란 섬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뿐이다.

도중도에는 윤봉길의 체취가 서린 광현당과 부흥원이 있고, 무궁화(無窮花)를 비롯해 온갖 야
생화를 심은 무궁화학습원이 부흥원 동쪽에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난 전나무길이 곳곳
에서 운치를 자아내며, 섬 동쪽에는 씨름장과 그네, 급수대, 쉼터를 갖춘 넓은 잔디밭이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로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다.
또한 섬 주변을 개천이 둘러싸고 있으며, 섬 남쪽에는 물을 모아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
다. 하여 여름에 오면 연꽃의 화려한 향연에 그야말로 두 눈이 환장할 지경이다.

* 도중도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80-1 (시량부흥길 21)


▲  넓은 공원 분위기의 도중도 내부

▲  광현당 서쪽에 자리한 매헌 윤봉길 유허비(遺墟碑)

▲  광현당(光顯堂)

도중도 가운데에 자리한 광현당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곳으로 저한당과 마찬가지로 초가이
다. 이 집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정착한 증조부(曾祖父)인 윤자 때부터
살았다고 하며, 조선 후기 초가로 광현당이라 불리는 본당 외에 3채의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윤봉길은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에 새롭게 장만한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고, 이후 그
의 친척이 잠시 살다가 버려진 이후 나라에서 매입하여 1974년에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저한
당과 마찬가지로 관리가 잘되어 있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듯 깨끗하며, 광현당이란 이름은
윤봉길을 빛으로 비유해 그의 태어남을 높이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다.

▲  광현당 대문과 펄럭이는 태극기

▲  적막이 감도는 광현당

▲  광현당 부엌
부엌이 양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  광현당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생기가 넘쳐
보인다.

▲  담장을 두른 광현당 뒷모습

▲  우진회기공비(禹進會記功碑)

우진회는 1944년 2월 15일 윤봉길의 4촌과 6촌, 제자들이 만든 단체로 윤봉길이 만든 월진회
를 계승했다. 1946년 4월 29일 월진회로 이름을 갈았으며, 2011년 4월 29일 윤봉길 문화축제
때 우진회의 업적을 기리고자 광현당 앞에 기공비를 세웠다.


▲  부흥원 옆에 자리한 연자방아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했던 연자방아로 지금은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한 여러 농사 도구들

▲  부흥원 뒤쪽에 그림처럼 펼쳐진 전나무 숲길

▲  부흥원(復興院)

광현당 동쪽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리한 부흥원은 1928년에 윤봉길이 세웠다. 공동묘지 묘
표사건에 크게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야학당을 만들어 저한당 사랑방에서 운영했는데, 참여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도중도에 부흥원을 만들고 1928년 2월 25일에 자필로 대들보에 글씨를
새겨 상량식(上梁式)을 가졌다. (대들보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있음)
그는 이곳을 3대 목표운동의 장으로 삼았는데, 그 3대란 무지 타파, 가난 타파, 단결이다. 무
지(無知) 타파를 위해 야학과 독서회, 학예회를 벌였고, 가난 타파를 위해 농촌 공동구매와
저축, 생활 개선을, 단결을 위해 월진회와 수암체육회, 공동작업과 공동식수 작업을 벌였다.
그의 개혁적인 활동에 왜정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태클을 걸자 바로 여기서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상해 의거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974년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  부흥원 현판의 위엄
부(復)가 마치 도(渡)처럼 보인다.

▲  아직은 황량한 무궁화학습원

▲  겨울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그네

▲  도중도 남쪽에 조성된 연꽃 연못


 

♠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 (왼쪽에 보이는 집은 보부상유품 전시관)

충의사 남쪽(저한당 북쪽 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1973년부터 1977년까
지 진행된 윤봉길 유적 성역화 사업 때 관리사무소와 함께 세워졌다. 이후 2001년 기념관 옆
에 윤봉길의 어록(語錄)을 담은 윤봉길어록탑을 만들었으며, 2002년에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그해 12월에 속세에 문을 열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봉길의 손때가 자욱한 유품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윤봉길
일가에서 쓰던 그릇과 서적, 벼루를 비롯하여 그의 찰나(刹那)와 같은 인생을 다룬 영상관과
매직비전 11대, 다오라마 등이 그의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그의 유품(遺品) 중에
회중시계와 지갑, 중국화폐, 도장, 손수건, 안경집, 일기, 월진회창립취지서, 농민독본, 형틀
대, 편지 등은 '윤봉길의사 유품'이란 이름으로 '보물 568-2호, 568-3호'로 지정되었다.

* 윤봉길의사 기념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5 (덕산온천로 183-5, ☎
  041-339-8233)
* 윤봉길의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그릇, 수저, 놋대야 사진을 클릭한다.

▲  윤봉길 일가가 사용했던 그릇과
수저, 놋대야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읽은 명심보감과 그가
사용한 벼루와 등잔대 - 보물 568-3호

▲  윤봉길의 글씨 (해석은 각자 알아서)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쓴 온갖 서적들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직접 그린 월진회 깃발 - 보물 568-3호
팔방미인이던 윤봉길은 지식 소양도 대단할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깃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무궁화는 마치 뭉개구름 속에서 방긋
피어나는 태양처럼 찬란해 보인다.

▲  부흥원 대들보 - 보물 568-3호
옛 부흥원의 유물로 1928년 2월 25일 부흥원 상량식 때 윤봉길이
대들보에 기념 메세지를 남겼다.

◀  윤봉길이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 가족들
에게 남겼다는 7글자의 시 - 보물 568-3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
을 나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다)' 물이 흐르듯 유연한 곡선의 서체에 그의
비장함이 엿보인다.


▲  월진회 창립취지서(보물 568-2호)와 통장(보물 568-3호)

1929년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월진회를 만든 윤봉길은 창립 취지서(趣旨書)를 남겨 그 뜻을 천
하에 밝혔다. 월진회 통장은 저축운동을 위해 그가 회원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그가 직접 만들
었다고 하며,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지금 21살이면 완전 애기인데...)


▲  윤봉길이 1929년에 쓴 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 - 보물 568-2호

▲  농민독본(農民讀本) - 보물 568-2호

1927년 농민들을 대상으로 야학당을 운영했을 때 그가 직접 편저한 책으로 모두 3권으로 이루
어져 있다. 지금은 2권과 3권 일부만 남아있으며, 왼쪽 책은 세월의 녹이 검게 그을려져 있다.
책에 수록된 우리나라 지도가 무척 인상적인데, 부산과 왜열도 사이를 조선해협이라 표시했다.


▲  위친계취지서(爲親契趣旨書) - 보물 568-3호
윤봉길이 부모의 상사(喪事) 등을 위해 친척을 중심으로 조직한 위친계의 취지서이다.
나라의 독립과 경제 부흥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그의 높은 의식을 보여준다.

▲  우리의 옛 땅 동북아를 누빈 윤봉길의 위엄
지도에 나온 동북아 일대는 우리의 옛 땅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히
차지해야 될 땅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윤봉길이 중원대륙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  윤봉길이 1932월 1월 30일 상해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그해 1월에 벌어진 왜군의 상해 침략에 대한 내용이 소상히 나와있다. 왜군이
상해를 공격하자 장개석(蔣介石)의 중국군이 1달 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상해를 빼앗기고 많은 중원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은 가족에게 장엄한 각오가 서린 7자의 시를 남기고 만주로 홀로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간이 쫄깃해진 왜경은 몰래 미행을 붙이면서 평안북도 선천(宣
川)에서 붙잡고 만다. 하여 45일 동안 옥고(獄苦)를 치르고 바로 만주로 넘어가 그곳에서 그
와 뜻이 같은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을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허나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1930년 12월 홀로 산동반도 청도(靑道, 칭
따오)로 넘어가 1931년 여름까지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으며, 여기서 번
돈 대부분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청도도 적당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는 상해로 가야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1931년 8월 상해로 갔다. 상해에 있는 프랑스 조계(租界)인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머물며 박
진(朴震)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영어를 익혔다. 그렇게 주경야독(
晝耕夜讀)을 하다가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을 했고, 그해 겨울 드디어 백범 김구
(白凡 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  윤봉길이 홍구공원 의거 2일 전에 김구에게 보낸 자신의 이력서들
이력서 옆에는 사진에는 빠져있지만 상해에서 사용한 중국제 수첩이 있다.

▲  윤봉길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찍은 증명사진
(오른쪽은 자필로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  조금은 어설프게 재현된 홍구공원 의거 현장

1932년이 되자 왜국은 왜인 승려 처단 사건을 구실로 상해 사변을 일으켰다. 장개석이 1달 동
안 저항을 했으나 결국 상해를 내주고 말았으며, 상해를 점령한 왜군이 승리에 도취해 왜왕(
倭王) 생일인 4월 29일에 왜왕 생일 축하 및 전쟁 승리 축하 기념식을 상해 시내에 있는 홍구
공원(虹口公園)에서 갖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와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
始榮), 조소앙(趙素昻)에게 자신의 거사 계획을 밝히고 거사를 구상했다. 성공적인 거사를 위
해 채소장사로 가장해 기념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신분을 세탁했으며, 김홍일(金弘一)이
만든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준비하고 폭탄 던지는 법을 배워 실수가 없게끔 자신을 채찍질했
다.
드디어 4월 29일 아침, 그는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 폭탄 1개를 가지고 기념
식장으로 들어갔다. 공원을 지키던 왜군이 검문을 했으나 왜인이라고 속이니 그냥 들여보내주
었다.
왜인들만의 즐거운 잔치였던 그 행사가 거의 막을 내릴 무렵, 1만 명의 군중 사이에 묻혀있던
그는 기념식 단상 앞을 지키던 기마헌병 앞까지 들어와 물통폭탄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 물통이 단상에 떨어지는 순간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식장에서 오만을 띈 미소로 행사를 치
르던 왜인 고위층 7명이 모두 꼬꾸라졌다. 단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행사를 구경
하던 관중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을 붙잡고 도망치느라 바뻤다. 왜군 또한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니 충분히 빠져나와 다음 거사를 준비할 틈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윤봉길은 피신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왜군은 그를 체포했다.

윤봉길이 준 크나큰 선물에 감동하여 기절한 7명의 왜인 고위층 중에, 상해 왜인 거류민(居留
民) 두목인 가와바다 사다쯔구(河端貞次)는 사경을 헤매다가 다음날 바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1932년 1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운 왜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5월
에 폐기되었다. 또한 제3함대 두목인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은 중상을 입고 눈병신이
되었으며, 주중일본공사 시케미쓰(重光癸)는 우측 다리가 절단되어 다리 병신이 되었다. 기타
2명도 막심한 중상을 입었다. 즉 2명이 폐기되고 5명이 병신이 된 것이다. 그 5명은 왜국 백
성들이 바친 세금이나 갉아먹으며 식충이처럼 살다가 골로 갔다.


▲  의거 이후 연행되는 윤봉길 사진
기념식장을 흔쾌히 아수라장으로 만든 물통 폭탄과 폭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업혀가는 왜군 장수 사진도 있다.

▲  상해 의거 관련 왜국 조일신문 보도
왜국은 상해 폭탄변사(爆彈變事)라고 표현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변사겠지~~
윗사진은 폭탄에 아작이 난 기념식장, 아랫 사진은 왜군에게 잡혀 호송되는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왜국 군법회의로 넘겨져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형을 선고받
았다. 그를 심문하던 왜군은 그가 상해사변에 앙심을 품은 대륙 사람인줄 알았으나 조선 사람
이란 사실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상해 왜군 헌병대에 갇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그는 그해 11월 18일 왜열도로 호송되었으
며, 20일 오사카(大阪) 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다시 가나자와(金澤)로 옮겨져 거기서 12
월 19일 총살형을 받으니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한편 상해 사변에서 개망신을 당해 절치부심에 빠진 중화민국(中華民國) 지도자 장개석(장제
스)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특히 상해사변을 일으킨 원흉들이 대거 폐기되었다는
소식은 겁 많은 중원대륙 지도층을 비롯한 대륙 민중들까지 모두 환호하게 만들어 한국에 아
주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개석은 '쓸데없이 머릿수만 많은 4억 대륙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고 두고두고 격찬했으며, 1933년 5월 그의 제의로 남경
(南京)에서 김구와 회담을 했다.
여기서 장개석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서로 돕고 지내자며 손을 내밀었고, 임시정
부와 중원대륙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광복군은 장개석의 지원과 비호를 받으며 독립활동을 전
개했다. 그리고 왜국이 패망할 때까지 서로 상부상조했다. 윤봉길의 의거로 잠시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크게 고취되었고, 우리의 독립활동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윤봉길의 최후 장면과 그가 갇혀있던 가나자와 형무소

▲  장개석이 윤봉길의 동생 윤남의에게 보낸 친필서한과 기념사진

▲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 전기문을 낸 곽상훈에게 보낸 축하 친필 서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윤봉길의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에 13년 동안 매장
되었다. 왜국이 패망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과 가나자와에 거주하던 박동조, 서성민으로 이
루어진 발굴단이 1946년 3월 4일 발굴을 시작해 6일에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유해는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의 유해와 함께 그해 5월 부산에 도착해 공설운
동장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7월 7일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최초로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되었다. 또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
국장이 추서되어 그의 의거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  윤봉길이 날린 그 유명한 도시락/물통 폭탄 (모형)
공원을 지키던 왜군을 감쪽같이 속이고 임무를 완수한 도시락/물통 폭탄의 위엄
겉은 그저 흔한 도시락과 물통이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폭탄이 들어있다.

▲  윤봉길 의사의 유품 (안경집부터 대륙 화폐까지) - 보물 568-2호
윤봉길을 사형시킨 왜국은 그의 몸에서 나온 유품을 덕산에 있는 유가족에게
보내주며 은근히 악어의 눈물을 보였다.

▲  윤봉길이 상해 의거 때 지녔던 지갑과 대륙 화폐 - 보물 568-2호

▲  윤봉길이 죽기 전까지 사용했던 손수건
손수건에 점처럼 찍힌 빨간 것은 그의 거룩한 피이다.

▲  회중시계(懷中時計)와 도장

윤봉길의 유품 중에 회중시계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계는 원래 김구 주석이 쓰
던 것으로 상해 의거를 벌이던 4월 29일 아침, 김구와 마지막으로 만나면서
'선생님의 시계가 많이 녹슬었군요. 제 시계는 이제 쓸 일이 없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제안을 하여 서로의 시계를 바꾼 것이다. 그의 시계를 받은 김구의 마음은 참 착잡했을 것이
다. 솟구쳐 나오려는 사나이의 눈물을 서로가 억지로 참아가며 시계를 서로의 정표로 바꿔야
했던 그 참담한 현실을..


▲  1962년 우리나라 정부가 윤봉길에게 바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윤봉길이 마지막으로 짊어진 형틀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의 몸을 묶었던 형틀
대이다.
가로목과 세로목이 있는데, 세로목은 두 팔을
묶었고, 가로목은 머리부터 허리까지 묶었다.
이 형틀대는 그가 묻힌 노다산 공동묘지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세로목만 나왔으며
이후 이 땅에 들어와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안
착하여 보물 568-2호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보물급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비
참하고 쓰라린 존재가 아닐까 싶다.


▲  윤봉길 의사의 흉상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옆에 자리한 윤봉길어록탑


 

♠  충의사(忠義祠)

▲  충의사로 인도하는 홍살문

윤봉길 의사 유적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충의사는 윤봉길의 충혼이 깃든 사당으로 1968년에
지어졌다. 1978년 4월에 사당과 삼문을 증축하고 주변을 정비했는데, 사당과 충의문의 색이
그 흔한 사당 건물의 색깔이 아닌 베이지색을 띄고 있다. 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리된 것으로 그 시절 성역화시킨 모든 사당은 모두 베이지색으로 떡칠을 했다. 이유는 그가
좋아하는 색이기 때문이라나..?
어쨌든 1979년 이후 많은 사당이 본연의 색깔을 되찾았으나 이곳은 아직 베이지색을 고수하고
있다.


▲  2마리의 사자가 문을 지키는 충의문(忠義門)의 위엄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이 이용하는 문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굳게 닫아 둔다.

▲  충의사 본전(本殿)

▲  충의사에 봉안된 윤봉길의 영정 (정우성 화백의 그림)

그에게 있어 저렇게 편안히 앉아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저런 영웅이 여럿 나타나 세상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하건만 이젠 그런 것도 무뎌딘 것일까..?
윤봉길 같은 이가 나라의 주인이 된다면 나라와 백성이 많이 편안해질텐데 너무 젊은 나이에
숨진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그의 영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참배록에 '봉길이 형님 나 다녀갔소. 잘 봐주시오!'의 뜻으로
나의 보잘것 없는 이름을 살짝 남겨본다.


▲  늦은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는 연못의 조촐한 분수대
충의사와 배용순 여사 묘소 중간에 연못을 두어 성역(聖域)의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덜어낸다.

▲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裵用順) 여사의 묘역

충의사와 연못 서쪽에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다. 바로 그곳에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 여
사의 묘역이 조용히 자리하여 남편의 사당을 바라본다.
배용순은 1922년 그와 혼인하여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상해 의거 이후 왜정의 감시로 적
지않은 마음 고생을 겪으며 저한당을 지켰고, 1974년 성역화 사업에 따라 나라에서 유적 일대
를 매입하면서 인근으로 이사가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에 적지 않은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
와 유족의 마음 같아서는 남편(윤봉길)의 무덤 곁에 있고 싶겠지만 멀리 서울 효창공원에 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당이 바라보이는 서쪽 소나무 숲에 무덤을 쓴 것이다.


▲  보부상(褓負商) 유품 전시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충의사 사이에 팔작지붕을 지닌 기와집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윤봉
길과 관련이 있는 집이겠지 생각을 하겠지만 현실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보부상 유품 전
시관이다. 윤봉길 유적에 왠 뜬금 없이 보부상 유품 전시관이 있는 것일까? 신라시대 문화유
산으로 도배가 된 경주(慶州)에서 고구려 호우를 보는 것 마냥 꽤 이채롭다.

보부상 유품 전시관은 예산과 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부상의 조직적 단체인 예덕상무사(禮
德商務社)의 유품을 머금은 공간이다. 보부상은 일종의 행상(行商)으로 보상(褓商)과 부상(負
商)을 합친 말인데, 보상은 부피가 가볍고 돈이 나가는 물건을 짊어지며 팔았고, 부상은 부피
가 크고 값이 싼 생활용품과 먹거리를 지게에 이고 다녔다.

보부상은 고려 후기에 여진족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한 이성계(李成桂)를 부상 백
달원이 발견해 치료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 조정도 보부상에게는 조금 관대하여 여러 혜택을 주었고, 곳곳에서 보
부상이 조직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밥벌이를 하였다. 그들은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는 쌀
이나 무기를 짊어지고 아군을 도왔는데,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을 지키던 권율에게
쌀을 날라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갇힌 인조와 군사들에게 쌀과 먹을 것
을 날라주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皇國協會)가 결성되어 어용단
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예산/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서와 유
물을 남겼는데, 그 유물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공간을 윤봉길 의사 유적에 세운 것이다.
아무래도 윤봉길과 관련이 없는 곳이다 보니 관람객들의 발길이 조금 적은 편인데, 우리나라
상업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니 잠시 둘러보는 것도 정신적으로도 지식적으로도 매우 유익할 것
이다. 결코 손해될 것은 없다.


▲  예덕상무사 시절의 문서와 도장들

▲  보부상들이 팔던 양반용 물건들 - 삿갓과 부채 등

보부상 유품 전시관에 전시된 예덕상무사 유물(인장 6개, 인궤 1개, 청사초롱 2개, 공문서 16
점)은 '보부상 유품'이란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스크롤의 압박이 상
당한 본글의 사정상 보부상 유품은 2장만 담았으며, 예덕상무사와 유품에 대한 내용은 생략한
다.

이리하여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끝으로 윤봉길을 폄하하고 테러
라고 치부하는 꼴통 매국노들과 뇌가 없는 머저리들이 여럿 있는데, 이런 것들은 정말 산소와
물이 아깝다. 테러와 의거의 차이부터 공부하길 권한다. 왜인이 저렇게 말하는 건 이해를 하
겠으나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 불가이다. 이는 이승만 시
절에 친일매국노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일어난 잔혹한 결과이다.
윤봉길이나 안중근(安重根),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같은 걸출한 인재나 영웅이 많이 나와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매국노를 말끔히 청산하고 처단하여 역사를 바로 잡는 그날이
오길 간절히 고대한다. 역사 청산이 없는 이상 이 땅의 미래도 없다.

* 보부상유품 전시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20-6 (덕산온천로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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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2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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