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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29 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2. 2013.10.15 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 도봉산 봄나들이 '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윗무수골)

▲  능원사 용화전

▲  도봉사

 


 

도봉산(道峯山, 739.5m)이 뻔히 바라보이는 그의 포근한 그늘, 도봉구 도봉동(道峰洞)에서
15년이 넘게 서식하고 있지만 그에게 안긴 횟수는 의외로 매우 적다. 그가 집에서 멀면 모
르지만 버젓히 그의 밑에 살고 있음에도 이렇다. 그렇다고 내가 산을 싫어하거나 돌아다니
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도봉산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하
게도 손과 발이 잘 가질 않았다. (도봉산 밑도리까지 포함하여 1년에 2~3번, 많으면 4~5번
정도 찾는 편임)
그래도 우리 동네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인데, 가끔은 가줘야 도봉산도 서
운해 하지 않겠지? 하여 거의 1년 여 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해가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
고 도봉산 종점으로 이동했다. 거리는 불과 정류장 4개. 때가 때인지라 내려오는 산꾼들의
행렬이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온다. 거센 파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요트를 타듯 그들을
뚫고 북한산둘레길 안내도가 있는 통일교에 이른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도봉서원(道峰書院), 천축사(天竺寺), 도봉산 정상, 포대능선, 만월암
(滿月庵) 방면으로 이어지고, 왼쪽 통일교를 건너면 능원사와 도봉사로 이어지는데 북한산
둘레길은 여기서 '도봉옛길'이란 부속 간판을 달고 남북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마음 같아서는 정상까지 가고 싶으나 늘 시간을 구실로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능원사
, 도봉사 방면 도봉옛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을 5분 정도 오르면 황금색으로 치장한 능
원사가 마중을 한다.


▲  능원사, 도봉사로 인도하는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구간)


 

♠  황금사원을 꿈꾸는 현대 사찰, 도봉산 능원사(能園寺)

도봉사 동쪽에 둥지를 튼 능원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음) 따끈
따끈한 산사(山寺)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도 못했다. 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에는 무뚝뚝한 편이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문화유산을 간
직한 절을 제외하면 딱히 눈길도 주지 않지만 동양 최대의 황금 사원으로 유명한 서울 구산동
수국사(守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황금 사원으로 꾸몄다는
점이 꽤나 끌렸다. 솔직히 인간 가운데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인
최영(崔榮)장군 등을 빼고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도봉산 능원사는 여주 능원사의 말사(末寺)로 그들 모두 미륵불(彌勒佛)을 내세운 미륵도량이
다. 근래 지어진 절이라 딱히 볼거리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불교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황금을 테마로 황금색 단청(丹靑)을 모든 건물에 입혀 찬란한 황금사원임을 속세에 진하게 어
필하고 있다. 절 앞을 지나던 산꾼들도 황금색 건물에 매료되어 자연스레 경내를 기웃거리니
능원사의 마켓팅은 크게 성공한 셈이다.

황금 단청은 중원대륙에서 문을 열거나 대륙을 장악했던 나라의 궁궐에서 즐겨 애용했던 것으
로 그들은 하나 같이 황제(皇帝)를 칭했는데, 황색이 바로 황제를 상징한다. 하여 황금색 단
청과 지붕을 선호했다. (그게 중원대륙의 법칙이기도 했음) 반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배
달 민족은 황금색 단청과 기와를 즐겨하지 않고 다양한 색채를 입힌 이른바 컬러풀(colorful)
한 단청을 선호했다.
근래 들어 수국사와 여수 향일암(向日庵) 원통보전(圓通寶殿), 그리고 이곳 능원사에서 황금
색 단청을 선보이며 단청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이렇게 부처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금
빛찬란한 단청미를 탄생시켰고, 현대 사찰에 무정한 나를 황금을 미끼 삼아 이곳으로 낚은 것
이다.

능원사는 경내로 인도하는 일주문부터 황금색 단청을 입혀놓아 벌써부터 황금 사원의 냄새를
진동시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곧게 깔린 짧은 길이 펼쳐지고 바로 법음각과 용화전, 철웅
당 등이 모습을 비춘다. 경내는 법당(法堂)인 용화전을 비롯해 법음각. 철웅당(鐵雄堂) 등 5~
6동의 건물이 전부인 조촐한 규모이나 건물에 죄다 황금색 떡칠을 하여 마치 조그만 황궁(皇
宮)
같다.

▲  능원사 일주문(一柱門)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  범종을 머금은 법음각(法音閣)
그 흔한 범종각 대신 부처의 소리를 뜻하는
법음각을 칭했다. 건물의 모습도 4각형이
아닌 6각형을 취했다.

▲  용화전 뒷쪽에 숨겨진 샘터
능원사에는 2곳의 샘터가 있어 중생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  능원사 용화전(龍華殿)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는 무려 용을 잡아먹는다는 금시조(金翅鳥)를 배치하여
화마 등 악귀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능원사의 중심 건물인 용화전은 용화세계의 주인공이자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
륵불의 거처이다. 이곳이 미륵도량이다보니 자연히 용화전이 법당의 역할을 도맡게 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과 커다란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는
거의 황금색 일색이라 사치와 장엄함의 깊이를 더욱 짙게 해준다.
건물 내부에는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가세존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다들 자애로운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 뒷쪽에는 헤아림이 무색할 정도로 조
그만 금동불(金銅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니 건물 전체가 그야말로 금색 투성이다.


▲  용화전 불단에 봉안된 미륵불(가장 큰 불상)과 석가여래(제일 오른쪽),
약사불(미륵불 왼쪽), 관세음보살<가장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보살상>

▲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화전 현판과 단청, 공포, 수막새의 위엄

공포와 단청이 죄다 황금색으로 도배된줄 알았더만 가까이서 보니 붉은색, 녹색, 파란색 계열
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어 단청의 고유 맛은 그런데로 살렸다. 용화전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윗쪽에는 봉황을 배치하여 지붕 용마루에 배치된 금시조와 함께 만약에 모를 화마(火魔)의 공
습에 대비한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황금색에 눈이 먼 나머지 불지르기 아깝다
고 판단하여 그냥 돌아서지는 않을까?


▲  용화전의 경쾌한 뒷모습

▲  용화전 뜨락에 세워진 하얀 피부의 5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의 매끈함을 자랑한다.

▲  용화전 주차장 - 숲 너머로 수락산(水落山, 638m)이 바라보인다.

▲  능원사의 또다른 샘터

용화전 밑에는 석조를 갖춘 샘터가 놓여져 있다. 앙련(仰蓮)이 새겨진 반원 모양의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물이 호수를 이루고, 그 옆에는 용과 구름무늬 등이 새겨진 네모난 석조가 있
는데, 동그란 여의주(如意珠)를 단단히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이 인상적이다.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있어야 되고 그래야 승천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석조에 새겨진 무늬
를 보면 용의 손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눈에 띄어 마치 여의주 획득 기념으로 하
늘로 요란하게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담은 듯 하다.

* 능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02 (도봉산길 87 ☎ 02-954-6060)


▲  여의주를 문 용머리

천하에 무려 300곳이 넘는 절을 돌아다니며 많은 샘터를 보았고 샘터에 달린 용머리, 거북이
조각도 무수히 보았지만 이곳처럼 여의주까지 문 용머리는 처음 본다. 아마도 능원사의 원대
한 꿈을 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간략하게 표현한 듯 싶은데, 너무 겉모습과 돈에만 연연하
지 말고 부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어디선가 숨어서 직무유기를 일삼으나 마음만큼은 속
세 걱정에 잠 못이루는 미륵불의 마음처럼 철저하게 속세를 위하는 공간이 되기를 주문해본다.


▲  능원사에서 도봉사로 올라가는 숲길 (도봉옛길)


 

♠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도봉산의 오래된 고찰 ~
도봉사(道峰寺)

능원사를 둘러보고 도봉옛길을 따라 서쪽으로 2~3분 가면 도봉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도봉사
가 슬그머니 모습을 비춘다.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도봉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고려 초인 968년에 혜거국사
(惠居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971년 혜거가 광종(光宗)의 초청으로 궁궐 원화전(元和殿)
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강의하자 감동을 먹은 광종은 칙령(勅令)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오직 3곳만은 머물러 두어 움직이지 말 것이며, 문하의 제자들이 주지를 상
속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이를 규정하라'
하였다.
이때 고달원(高達院, 여주 고달사)과 희양원(曦陽院, 문경 봉암사), 도봉원(道峰院)을 특별선
원으로 삼았는데, 그 도봉원이 바로 도봉사로 여겨진다.

1010년 요(遼)나라(거란) 성종이 강조(康兆)의 난과 목종(穆宗)의 폐위를 이유로 40만의 대군
을 휘몰아 고려를 침공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강조는 직접 30만 군사를 이끌
고 검차(劍車)와 잘 훈련된 군사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만 방심하는 통에
크게 패하고 만다. 강조는 포로로 잡혀 처단되고 거란군은 그 기세로 폭풍 질주하자 현종(顯
宗, 재위 1009~1031)은 눈물을 머금고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은 채충순(蔡忠順, ?~1036)의 호위를 받으며 임진강을 건너 창화현(昌化縣, 의정부)에 이
르렀는데,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자 왕을 시종하던 이들은 뿔뿔히 도망치고 채충순과 지채문(
智蔡文, ?~1026) 등이 적을 격퇴하여 왕을 지켰다.
지채문이 왕의 말고삐를 잡고 지름길로 도봉사에 들어가 여기서 잠시 국정을 살폈으며, 거란
군이 계속 추격하자 한강을 건너 멀리 나주(羅州)까지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도봉사에서 잠
시 머문 인연으로 현종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6천 권 상당수를 그곳에서 제작하게 했다.
또한 고려 중기 때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 1145~1229)은 1170년 승과(僧科)의 선선(禪
選)에 급제했는데, 그의 이름은 전학돈(田學敦)이다. 바로 그해 삼각산(북한산)을 찾아 도봉
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꿈에서 산신(山神)이 나타나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쿨
하게 지겸으로 이름을 갈았다.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은 도봉사 바로 북쪽 산너머에 있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을 복원하
고자 기존 건물을 부시고 터를 정비하면서 5개월 정도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뜻밖에도 옛 영
국사(寧國寺) 시절의 고려 때 유물 77점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2014년 8월 21일 국립고궁
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되었는데 그중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가 있어 도봉사에서 빌려오거나
(또는 가져오거나) 또는 영국사의 옛 이름이 도봉사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영국사는 도
봉서원에 있던 도봉산의 대표 사찰로 1573년 유림들이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을 깔았다.

여기까지 보면 도봉사는 고려 때 꽤나 잘나갔던 절임을 알 수 있다. 허나 13세기 이후 근대까
지 적당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전쟁과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13
세기 이후 이렇다할 내력이 없는 것을 보면 13세기 중반 몽골(원)의 지긋지긋한 침
공에 때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현재 도봉사는 장대한 내력의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이 전
혀 없고, 오래된 유물도 기껏해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치성광여래3존도가 고작이다. 하여
고려 때 도봉사가 이곳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도봉서원에 있던 영국사가 도봉사란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도봉서원터에서 발견된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는 그런 의
견에 크게 부채질을 한다.

한참 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봉사는 19세기 후반에 벽암(碧巖)이 현 자리에 절을 세우고
도봉사를 칭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한때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절의 명성을 아낌없이 드날렸으나 종파 간의 갈등과
주지승의 재정 낭비로 2006년에 절 전체가 경매에 나오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절이 북한산
국립공원 내부에 있어 경매 수요가 없다가 다행히 적당한 임자를 만나 조금씩 불사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2층짜리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정사, 산신각, 선방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
장문화유산과 오래된 유물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치성광여래삼존도(熾盛光如來三尊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9호
, 관람이 거의 어려움)가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151호
지정된 철불좌상(고려 초기 불상)도 가지고 있었으나 2006년 절 경매 이후 한국불
교미술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애당초 도봉사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왜정 말기에 왜
인(倭人)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에 있던 자명사가 가지고 있
다가 자명사가 철거되자 도봉사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밖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뿌리탑과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심우도 등의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절 앞에는 비록 짧지만 메타세콰이어 숲길이 닦여져 있다.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이 절
앞을 지나가고, 경내가 숲에 포근히 감싸인 푸른 지대로 도심이 지척임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도봉산 그늘에 산지 15년이 넘었고, 서울에 흩어진 오래된 절 상당수에 발도장을 찍었지만 도
봉사는 이번이 첫 인연이다. 2005년 석가탄신일에 인연을 지으려고 했지만 무리한 사찰 순례
일정으로 찾지 못하고 이제서야 격하게 인연을 짓는다.


▲  활짝 열린 도봉사 정문

도봉사는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대신 절과 산길의 경계에 여닫이식 철제 정
문을 두어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한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문이 일주문을 흉내내며 활
짝 열려있지만 달님의 세상이 되면 미련 없이 문을 꽁꽁 걸어잠궈 열린 마음의 일주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정문 앞 우측에는 금동을 씌운 지장보살상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며 중생을 맞이하고 정
문 좌측 담장 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  정문 옆 담장에 그려진 심우도
심우도는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여 10단계로 표현한 그림이다. 10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며 보통
법당 바깥 벽에 많이 그려둔다.

▲  정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연등길

정문을 들어서면 뿌리탑까지 곧게 오르막 길이 펼쳐져 있다. 길 좌우로 요사(寮舍), 선방(禪
房) 등으로 쓰이는 건물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뿌리탑과 대웅전이 모습
을 드러낸다.

▲  계단 옆 경사면에 꽃으로 다듬은
커다란 절 마크

▲  경내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3층석탑과
여러 공덕비들


▲  도봉사의 명물, 뿌리탑

대웅전 앞에는 불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머금은 뿌리탑이 장대한 모
습으로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1990년대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
여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봉사와 삼천사(三千寺), 승가사(僧伽寺), 조계
사(曹溪寺) 등이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가 수만 과가 넘는다고 하더니만 아직도
나눠줄 수량이 많은 모양이다. (상당수 인도와 동남아에서 가져온 것임)

1982년 3월 한국외대 부총장 최창성 교수가 태국(타이) 국립사원 홧벤짜마버핏의 종정(宗正)
프라풋타부이윙을 초빙해 원각회(圓覺會)에서 법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태국에서
진신사리 3과를 얻게 되었고, 부총장은 도봉사에 이를 기증했던 것이다.

탑의 기단은 특이하게 계란처럼 동그란 모습인데, 이는 공(空)을 뜻한다고 한다. 그 위에 5층
의 몸돌을 세웠으며, 1층 몸돌은 유난히 두텁다. 그 안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동쪽에 관
세음보살, 남쪽에 석가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지장보살상을 새기고 그 주변에 16나한상
을 둘렀다. 탑 주위로 12지신을 새긴 난간을 둘렀고, 탑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두었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땅에 흔한 탑이 아닌 특이한 모습의 이형탑(異形塔)으로 탑 밑에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본따서 만든 석가불이 당당한 체격으로 앉아있으며, 그 앞
에는 석등 2기가 서 있다. 그들 좌우로 뿌리탑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뿌리탑의 장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  도봉사 대웅전(大雄殿)

뿌리탑 뒷쪽에 자리한 대웅전은 도봉사의 법당으로 이 땅에 흔치 않은 2층짜리 목조 불전(佛
殿)이다. 근래에 지어진 건물로 겉모습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이며, 불단에는 관세음보살과 지
장보살, 석가불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 자리에는 원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앉아있었으나 그가 절을 떠나자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어 본존불의 자리
를 채웠다.

▲  우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  좌측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6층석탑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상징물인 육환장과 꽃을 쥐어들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사이에 석가불이 연꽃대좌(臺座)에 앉아 중생을 굽어본다. 그들 뒤에
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바퀴 모양의 금동 전륜(轉輪)이 두광(頭光)처럼 떠있다.

▲  대웅전 지장탱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대웅전 내부 좌우 벽에는 지장탱과 신중도, 석가불도 등의 탱화 4점이 걸려있다. 이중 지장탱
과 신중도는 빛바랜 때가 좀 낀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머
지 탱화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  대웅전 양쪽에 배치된 가릉빈가 운판(雲版)과 6층석탑

운판은 범종, 법고, 목어와 더불어 불교 의식에 쓰이는 4물(四物)의 일원으로 보통 범종과 같
은 방을 쓰기 마련이다. 허나 도봉사는 절의 필수품인 범종(梵鐘)이 없어서 운판을 범종 대신
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웅전 좌우에 일주문 축소판 모양의 건물을 세우고 커다란 운판을 북
처럼 걸어두어 아침 3시 새벽예불과 오후 6시에 도봉산에 은은하게 운판 소리를 울린다. 운판
피부에는 불교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 극락조(極樂鳥)>를 새겨 조촐하게 조형미를 고려했
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정사
(極樂精舍, 극락전)

▲  극락정사의 주인인 금동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대웅전 우측에는 빈자일등상이라 불리는 생소
한 이름의 석물이 자리해 있다. 처음에는 보이
는 모습 그대로 코끼리 등에 용과 연꽃무늬 등
이 새겨진 대좌를 얹히고 그 위에 선 관세음보
살 누님 상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를 뜻하는 빈자
일등상이었다.
빈자일등상은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
女難陀品)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인도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주로 구걸로 삶을 연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 석가모니가
찾아왔다. 인도의 대중스타가 된 그의 방문 소
식에 나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몰려가 공양과
등불을 올리며 그를 환영했는데, 난타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궁색한 형편이
라 그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로 나가 구걸을 했으나 겨우 1푼 정도의 돈을 마련하
는데 그쳤다. 그 돈을 들고 기름 장수를 찾아가 기름을 청했으나 당시 1푼으로는 어림도 없었
다. 기름 장사도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난타가 눈물로 단장의 심정으로 호소하니 기름 장수도 이내 태도를 바꿔 돈하고 상관
없이 많은 양의 기름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이에 단단히 감동을 먹은 난타는 절을 100번 이상
올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등불을 들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이 갖다 놓은 등불들
사이에 정성스럽게 놓았다. 마치 그가 보아주기를 바라듯이..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등불의 밥줄인 기름이 말라 감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등
불이 죄다 꺼졌으나 이상하게도 난타의 등불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등불
은 더욱 밝고 힘차게 타오르는 것이다. 그 등불을 본 석가모니는 난타의 사연을 전해 듣게 되
었고 결국 그를 여자 승려인 비구니(比丘尼)로 받아들여 제자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빈자일등의 사연이다. 즉 물질과 풍요로움보다는 빈약하나 정성과 정신이 더 소
중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돈님을 숭배하고 사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제대로 귀감이 되는 내용
이지만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것이 인간인지라 빈자일등은 여전
히 외면을 받고 있고, 부자1등만 찬양을 받는 것이 현재의 세태이다. (종교도 예외는 아님)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하며, 인도에서 많이 살고 있는 동물이다. 또한 그 위에 있는 여인
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아닌 바로 빈자일등의 주인공, 난타이다. 도봉사에서 빈자일등상을 세
운 것도 그 교훈을 닮겠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겉모습과 돈에만 치중하지 말고 비록 소박하더
라도 중생을 위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허름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은 그 이름 그대로 산신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산신
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같은 자리에 봉안했다. 산신각은 절에 따라 독성 외에 칠성(七聖,
치성광여래)까지 봉안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도봉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
인 치성광여래3존도가 여기에 있나 싶어 기웃거려 보았으나 값비싼 존재라 이곳에는 없었다.
하긴 도봉사에서 가장 비싼 몸인데, 이런 가건물에 봉안할 리는 없겠지.


▲  산신각 산신과 독성

호랑이 등을 의자 삼아 앉아있는 산신, 그 곁에는 하얀 머리의 독성이 나란히 앉아 마치 경로
당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그들이 앉은 방석은 다르지만 이렇게 산신과 독성이 같은 자리에
봉안된 것을 여기서 처음 본다. 그들 뒤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산이 그려진 산신
탱이 걸려있다
.

* 도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494-2 (도봉산길 89, ☎ 02-954-7743)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사 앞에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능원사와 도봉사를 차례대로 둘러보고 그들 앞
을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을 타고 무수
골로 넘어갔다.
도봉옛길은 다락원에서 광륜사, 도봉동문(道峰
洞門) 바위글씨,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
역, 윗무수골을 거쳐 무수골 세일교로 이어지
는 3.1km의 산길로 거의 느긋한 수준이며, 통
행이 좀 어려운 곳에는 나무데크길 닦아 통행
의 편의성을 높였다.
게다가 도봉사와 광륜사 등의 오래된 절과 도
봉동문 바위글씨, 진주류씨묘역, 광륜사 느티
나무 등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볼거리도 산재
해 있어 역사의 향기도 진하다.
옛날 서울에서 도봉산과 도봉서원으로 가던 산
길이라 도봉옛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다락원에서 '다락원길'로 간판을 바꾸어 북쪽
으로 흘러가고, 무수골에서는 '방학동길'로 간
판을 갈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도봉사 앞에는 비록 짧지만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며 하늘과 이
른 무더위를 긴장시킨다. 메타세콰이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천하에서 매우 오래된 화석나무
로 2차 세계대전 시절에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다.
이 나무에 단단히 매료된 아메리카와 유럽 양이(洋夷)들은 그 나무를 가져가 그들 나라에 심
었고, 이렇게 서양식 이름표를 달며 천하에 보급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에 미국산
나무가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메타세콰이어 하면 다들 전남 담양(潭陽)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
곳은 이제 담양을 넘어 천하의 메타세콰이어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고 있는데, 시작은 단
순히 도로 가로수였으나 점차 관광지로 몸값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담양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다.
도봉사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조성된지 얼마 안된 것으로 나이는 비록 적지만 훤칠한 키를 자
랑하며, 늘씬하게 솟은 모습이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참고로 서울에서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 외에 서남물재생센터공원과 용산가족공원, 안산자락길, 하늘공원 등
이 있다.


▲  도봉옛길 도봉사 서쪽 관문

▲  무덤을 잃은 채, 약간 기울어진 문인석(文人石)

도봉옛길을 굳이 2개로 나눈다면 다락원~도봉사 구간과 도봉사~무수골의 남쪽 구간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도봉사~무수골 구간은 다락원~도봉사 구간보다 완만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에 조선 전기에 조성된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도봉산 자락이 명당(明堂) 자리로
이름이 높았고, 서울과도 가까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자리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도봉산 자락인 방학동(放鶴洞)과 도봉동에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중 도봉옛길 남쪽에 자리한 무수골에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묘역(☞ 관련글 보기)과
과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묘역, 함열남궁씨묘역, 도봉옛길에 자리한
진주류씨묘역 등은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잘남아있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자연의 일부로 녹
아든 묘도 적지 않다.
도봉사에서 도봉옛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문인석 1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덤을 잃
고 홀로 남아있다. 그는 고된 세월에 매우 지쳤는지 옆으로 좀 기운 상태로 이를 안스럽게 본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세워 문인석의 등을 받쳐들게 했다.
허나 문인석이 아무리 우울한 처지라고 해도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무
덤을 잃고 버려진 자신에게 그런 배려를 한 점에서 문인석도 적지 않게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
다. 문인석이 지켰을 무덤은 그 주변을 파보면 아마 나올 것이다.


▲  무덤이 졸지에 조그만 언덕이 되버린 현장

문인석 부근에는 버려진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밑에 석축까지 있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양
반가의 무덤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덤이 버려지면서 봉분(封墳)에는 공자(孔子) 무덤처럼 무
려 나무까지 자라났다. 앞서 문인석이 이 무덤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나 문인석이 입을 열지
않으니 낸들 알 도리가 없다.


▲  도봉옛길 고갯길 (진주류씨묘역 북쪽)

▲  도봉옛길 (진주류씨묘역 부근)

▲  진주류씨묘역 류양 신도비(柳壤 神道碑)

도봉옛길 남쪽 구간 중간에는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산길 좌우에 자리해 있어 만나기
도 매우 쉬운데 산길 가에 이 묘역의 제일 어른인 류양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진주류씨 류양 일가의 묘역으로 15세기에 활약했던 류양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 이후 무덤 자리로 매입했다. 그 토지에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양이 제일 먼저 묻혔고,
그의 아들인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류첨정
(柳添汀), 류첨정의 아들인 좌의정(左議政) 류보(
柳溥)와 진양군(晉陽君) 류영(柳濚), 류영의 아들인 진명군(晉溟君) 류사기(柳師琦), 류보의
아들인 사헌부 감찰 류사상(柳師尙) 묘 등이 자리한다. 이들은 15~16세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근래에 무덤에 다소 손질을 가하긴 했으나 조선 전기 무덤 양식을 그런데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는 진주류씨의 제각(祭閣)이 있다.

북한산둘레길 이전에는 한가한 산골로 산꾼의 왕래도 드물었으나 둘레길이 개척되면서 산꾼들
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둘레길이 묘역 중앙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로 그 존재가
드러난 명소의 하나로 묘역은 다행히 개방되어 이들을 둘러볼 수 있으나 몇몇 몰지각한 산꾼
들이 묘역에 자리를 피고 밥이나 간식을 먹거나 나물을 캐는 행위 등을 벌이고 있어 묘역을
개방한 진주류씨 집안의 뜻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묘역은 그들 조상의 무덤이자 소중
한 문화유산으로 무덤을 둘러보거나 답사를 하는 것 외에 행위는 무조건 삼가해야 된다.
묘역 사진은 본인의 귀차니즘으로 담지는 않았고 최근에 만든 류양 신도비만 담는 선에서 끝
냈다. 도봉산 자락에 널린게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다보니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관문

진주류씨묘역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윗무수골 관문이 나온다. 그 관문을 지나면 윗무수
골로 무수골 윗쪽에 자리해 있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은 도봉산 자락에 묻힌 산
골마을로 밭과 계곡이 펼쳐져 있고, 숲이 무성해 이곳이 정녕 서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
든다. 갑자기 지방의 어느 시골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①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②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은 무수골 세일교까지 1차선 크기의 시골길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 거니는 시골길의 맛은 참 담백하다.

▲  윗무수골과 무수골이 만나는 세일교 주변

윗무수골 관문에서 7분 정도 시골길을 거닐면 무수골과 만나는 세일교이다. 여기서 도봉옛길
은 묵은 이름을 버리고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어 연산군묘 방면으로 흘러간다. 세일교를 건
너 무수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주인인 영해군파묘역이 나오며, 산골을 무색케하는 너
른 논이 펼쳐져 있어 이곳이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될 정도로 고개를 또 갸우뚱하게 만든다.


본글은 여기서 끝, 무수골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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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 서울 도봉산(道峯山) 나들이 '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주변)

▲  도봉산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험준한 도봉산 포대능선

▲  자운봉(紫雲峰)고개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봄이 한참 무르익던 5월 노동절에 옆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도봉구(道峰區)의 든든
한 뒷산인 도봉산을 찾았다.
도봉산 141번 종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도봉서원과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산중턱에 자리한 천축
사(天竺寺)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런 다음 마당바위를 거쳐 각박한 산길을 개미처럼 올라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직전에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남쪽 주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
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 가면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자운봉(740m)은 도봉산(道峯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데, 통행금지 안내문을 쿨하게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
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능선을 비롯한 주능선은 도봉산의
지붕으로 북쪽은 멀리 사패산까지, 남쪽은 우이암을 거쳐 우이동(牛耳洞)까지 이어진다.


▲  자운봉고개에서 바라본 의정부 시내 (건너편 산은 수락산)

◀  순도 100% 바위 봉우리인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고개에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
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
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
양이다. <그래봐야 북한산(삼각산), 용문산, 태백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 형님 앞
에서는 고개도 못듬>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 길이며, 왼쪽 길은 능선에서 조금 떨어진 구간이다. 그래서 빨리 가려는 생각에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지금까지 보였던 순한 양에서 악한 이리의 모습을 보이며, 등산객을 당황하게 한다.
코스가 완전 지옥이기 때문이다.


▲  포대능선 남쪽 능선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남쪽 <칼바위와 우이암,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포대능선 남쪽 능선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
에 박힌 철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가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게 의지해 조금씩 움직
이는데, 완전 손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송곳처럼 뾰족한 바위 위를 갈 때는 발바닥도 아프다고 난리를 친다. '우악~~ 이런 길
이 다 있다니..? 지옥이 따로 없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716m 봉우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거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을 장식하는 바위 봉우리의 위엄
포대능선이란 이름은 불교에 많이 등장하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산에 절이 유난히 많으니까 말이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서울 북부 지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우리 동네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를 비롯해 추억이 되버린 군부대 시설이 여럿 있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포대능선 남쪽 능선길을 간신히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
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道峰區)
와 노원구(蘆原區)를 비롯해 강북구,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
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고 상처받
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하늘 아래로 곱게 펼쳐진 의정부 남부와 서울 북부, 가운데에
보이는 고가도로는 수도권 외곽순환고속도로이다.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오봉(五峯)과 양주시 장흥면 지역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716m 봉우리에서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  만월암에서 포대능선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길
경사가 워낙 미친 수준이라 나무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의 편의를 제공했다.
하늘로 이어진 계단일까? 끝없이 펼쳐진 계단길, 내려갈 때야 쉽지만,
올라갈 때는 그야말로 진땀을 빼게 한다.


♠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조그만 석굴 암자 ~ 도봉산 만월암(滿月庵)

▲  큰 바위 밑에 기묘하게 자리한 만월암 만월보전(滿月寶殿)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동쪽(도봉산역 방향)으로 20분 정도 내려가면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보일 것이다. 바로 그 바위 밑에 석굴 암자(庵子)인 만월암이 묘하게 둥지를 틀어 두 눈을 놀라
게 한다.

만월암은 자운봉 동쪽 약 50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중암자로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
한 절이기도 하다. (이곳이 서울의 최북단임)
이 절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시절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 지역은
신라의 변방으로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唐)이 한참 전쟁을 벌이던 때이다. 게다가 의
상은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전에는 주로 왕경(王京, 경주)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연구 및 귀족 불교를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왕경에서 1,000리 밖에 떨
어진 이곳 변방까지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다.

이곳의 지형은 커다란 바위가 지붕을 이루고 있고 2개의 바위가 양쪽에서 그를 받치는 기둥 역
할을 하며, 그 사이에 조촐하게 공간이 생겨 조그만 자연산 동굴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등산
로와 이정표가 잘 닦여져 있어 찾기야 쉽겠지만 옛날에는 찾기가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
러다보니 조용히 참선에 임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라 오래전부터 보덕굴(普德窟)이라 불리는 참선
석굴도량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애당초 절이나 암자는 없었고, 그냥 참선을 위한 동굴이 전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봉산에는 천축사와 망월사(望月寺), 회룡사(回龍寺), 원통사(圓通寺) 등의 크고 작은 오
랜 고찰이 많으니 그 절에 머무는 승려들의 비밀 수행 장소로도 널리 쓰였을 것이다.

지금의 만월암이 생긴 것은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불좌상을 통해 17~18세기 정도로 보이는데, 불
상이 1784년에 개금(改金)되었다는 명문이 있어, 적어도 1700년대(빠르면 1600년대)에 조성되었
을 것이다. 절이란 불상이 있어야 영업이 되니 17~18세기에 조촐하게 암자로 태어났음을 가늠케
하며, 암자의 이름인 만월(滿月)은 석불좌상이 약사여래불이라 그를 상징하는 뜻에서 지어진 이
름이다. (신라 중기 창건설은 그냥 뽀송뽀송한 거품임)

불상을 봉안하고 번듯한 암자로 거듭났지만 따로 건물을 짓지 않고 그냥 동굴을 법당으로 다듬
어 사용한 듯 싶으며, 1940년에 여여거사(如如居士) 서광전(徐光前)이 건물을 짓고 중창을 벌였
다. 그러다가 2002년에 혜공이 만월보전을 지었고, 2004년에 산신각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석굴 자리에 지은 만월보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산신각 등 달랑 건물 2동이 전
부이다. 만월보전은 법당과 요사(寮舍)의 역할을 겸하는데, 서쪽 칸은 법당, 동쪽 칸은 요사(寮
舍)와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며, 건물의 크기는 작고 투박하다. 아무래도 궁벽한 곳에 있다보니
불사(佛事)가 어려워 바위 뒤쪽에 자리를 마련해 산신각을 만들었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이 주변을 밀어 건물을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절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그리 하려면 애궂은 숲
을 밀어야 된다. 내 바램이지만 만월암은 지금의 모습이 딱 좋다. 그냥 소박한 석굴도량으로 속
세 곁에 남았으면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작은 암자이건만 다행히 소장문화유산이 하나 있어 절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지는 않는
다. 바로 만월보전의 주인인 석불좌상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도 다 그를 보기 위함
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포대능선 지옥 체험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암자에는 승려 1명이 머물고 있으며, 그를 돕는 할머니보살 1명이 낮시간에 암자를 지킨다. 외
진 곳에 있어 석가탄신일이 임박했음에도 연등 수입이 적어 큰일이라고 한다. 이곳 외에도 주변
암자들도 경영난이 심각하다고 하며, 이곳에서 가장 큰 절인 천축사도 연등 수입이 많이 줄었다
고 그런다.


▲  만월암 산신각(山神閣)

만월보전에서 바위 너머 북쪽 산자락에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만월보전에서 여기까지는 도보 2
분 거리로 법당과도 제법 떨어져 있어 별개의 공간처럼 다가온다.
이 건물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은 것으로 건물 외벽은 갑옷처럼 돌로 둘렀고, 목조 지붕에는
동기와를 올렸다. 2004년에 혜공이 지었으며,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

하얀 수염에 하얀 바탕의 옷을 입은 산신이 중심에 앉아 있고, 그 좌우로 호랑이 2마리가 제법
성난 성난 표정으로 그의 곁을 지킨다. 아마도 산신이 제때 임금을 주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지금까지 본 산신탱 호랑이 가운데 가장 패기가 넘치는 모습임) 그리고 앳된 표정의 동자(童子
) 3명이 양쪽 가장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  만월암 바위 위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이 바위 밑에 바로 만월보전이 자리해 있다.

▲  만월보전 현판 - 글씨에 생기가 서린 듯 하다.

바위 밑에 자리한 만월보전은 만월암의 중심 건물로 예전 석굴 자리이다. 2002년에 혜공이 지은
건물로 한정된 자리를 활용하다 보니 정면 4칸, 측면 1칸의 'ㄱ'자 모습이 되었으며, 서쪽 칸은
법당으로, 동쪽 칸은 요사로 쓰인다. 요사에는 만월선방(滿月禪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법
당과 요사를 바로 이어주는 문은 없고, 툇마루를 통해 이동하면 된다.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인 석불좌상을 비롯하여,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 1969년에 만든 석
가모니후불탱화와 신중탱, 사천왕탱, 산신탱이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  만월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神衆幀)
1969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등장인물이 복잡해 정신을 다 빼놓는 다른 신중탱과
달리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인다.

▲  만월보전 우측 벽에 걸린 산신탱

만월암은 산신탱이 2개나 있다. 이 그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각에 봉안된 것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이다. 앞서 산신각의 그것처럼 호랑이가 많이 성이 나 있으며, 꼬랑지는 산신의
머리를 칠 기세이다. 그리고 동자 2명은 산신의 지팡이와 여러 물건을 들며 산신 옆에 서 있다.


▲  만월암 석불좌상(가운데 큰 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석불좌상은 만월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소중한 밥줄이다. 포근한
인상을 지으며 속세를 굽어보는 그는 피부부터 옷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원래는 금동불(金銅佛)로 근래에 호분을 씌워 백불(白佛)이 되버린 것이다.

그의 왼손에는 빨간색의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임을 알 수 있으며,
약합 안에는 중생의 갖은 병을 치유하는 약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약으로 여기까지 온 나부터
치료해주면 좋으련만 약합의 뚜껑은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의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것인지 어깨까지 늘어졌다. 코는 오목하
고 눈은 지그시 떴는데, 눈동자가 진하며,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듯, 매우 붉다. 불상이 지나치
게 하얗다보니 더 진하게 보이는 것이다.

예전 석굴 석벽에 '乾隆四十九年六月日佛像改金施...'이란 명문(銘文)이 있어 건륭(乾隆) 49년
6월, 즉 1784년에 시주를 받아 개금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개금시기 이전이
확실하고 불상의 양식까지 고려한다면 최대 1600년대까지 가능하며, 참선용 석굴에서 암자로 태
어난 시기도 불상이 조성된 그 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8cm로 좌우에는 근래에 만든 하얀 피부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
菩薩)을 협시(夾侍)로 두어 약사여래3존불을 이루었다. 사람 키에 가까운 높이와 단정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의(通肩衣)에 보이는 옷 주름 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 도봉산(서울 구역)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획득했
으며(1999년에 지정됨), 만월암에 한줄기 빛으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듬직한 존재이다.

만월보전 앞에는 샘터가 있다. 샘터라고 해서 물이 늘 졸졸졸 나오고 석조에 마냥 물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 수도꼭지로 물을 틀어서 마시는 형태로 이곳을 거쳐가는 등산객들의 지친 목을
달래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물은 마음껏 마셔도 되며, 반드시 꼭지를 잠그기 바람)
물을 마시고 절을 둘러보니 할머니보살이 커피 1잔 하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1잔 달라고 그러니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건네준다. 커피를 마시며 석불좌상과 만월보전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으니
부처님을 찍으면 실례라고 잔소리를 건넨다. 그래서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표정을 바로 하
고는 그냥 둔다.

만월암이 워낙 작다보니 외딴 산골에 묻힌 여염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게다가 앉아
갈 수 있도록 툇마루도 있고, 석조약사불의 인자함도 깃든 곳이다 보니 아비규환의 속세를 등지
며 하룻밤 청하고 싶다. (단 해우소 상태는 장담 못함) 번뇌도 멋모르고 뒤쫓아오다가 떡실신할
정도로 깊은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암자로 만약 아무도 없는 버려진 공간이었다면 나만의 비밀
아지트로 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만월암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아쉽지만 다시 길을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
기 때문이다. 보살 할머니가 합장을 하며 '이제 망월사로 가십니까?' 그러니 내가 '아니요. 속
세로 내려갑니다'

※ 도봉산 만월암, 포대능선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이동, 만월암까지는 1:40~50분, 포대능선은 2:00
  ~2:10 소요, <도봉산역(도봉산역 중앙차로 정류장) → 도봉산 141번종점 → 광륜사 → 도봉서
  원 → 도봉산장 → 만월암 → 716m봉우리 → 포대능선>
  포대능선은 거기서 20분 정도 추가>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줄일 수 있다.
* 만월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29-1 (☎ 02-955-3719)


▲  밑에서 바라본 만월암 만월보전
만월암 석불좌상 문화재 안내판이 만월보전 앞이 아닌 밑에 세워져 있다.
그만큼 만월보전 주변이 협소하다.


♠  도봉산 마무리

▲  도봉서원(道峯書院) 복원 조감도(鳥瞰圖)

만월암을 등지고 정신없이 내려가니 천축사와 길이 갈리는 도봉산장이다. 여기서부터 길은 수월
하여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에 이른다. 허나 도봉서원은 서원
주변을 철제 담장으로 빙 두르며 복원 공사에 여념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공사는 2014년까
지 진행되며, 조감도에 나온 모습대로 재현된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나름 희소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한때 서울에
는 노량진(鷺梁津)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암사동(岩寺洞) 한강변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있었
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내리친 서원철폐령에 앞다투어 사라지고 말았다. 구암서원은 그
나마 조두비(俎豆碑)와 주춧돌이 남아있고, 민절서원은 사육신묘(死六臣墓) 사당이 대체 역할을
하고 있다.

도봉산입구에서 천축사나 자운봉, 우이암으로 가려면 꼭 지나야되는 목좋은 곳에 자리한 도봉서
원은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원래는 도봉산에 제일 가는 사찰이었다는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
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다고 전하며, 조선 말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사당을 비롯한 서원의 주요 건물은 1574년에 완성되었으나 남언경이 병에 걸려 양주목사를 그만
두자 서원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고, 뒤를 이어 양주목사가 된 이제민(李齊閔)과 이정암(李廷馣)
이 나머지 공사를 진행하여 1579년 완성을 보았다.
서원이 완성되자 조정에서 도봉(道峯)이란 사액을 내려 도봉서원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1608년 이후에 중건했다. 1696년에는 도봉서원 단골이던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으
며, 1723년 조정을 장악하던 세력의 압박으로 송시열의 위패가 추방되기도 했으나 1775년 영조
의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제삿밥을 받게 되었다. 서울 근교의 유명 서원으로 많은 유
생들이 찾아와 한가롭게 성리학이나 논하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아작
이 나고, 위패는 땅에 매장되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임시로 단이 설치되어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냈으나 6.25가 터지
면서 그마저 중단되고 만다. 그러다가 1972년 '도봉서원 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우와 신문(
神門)을 복원했으나 왕년의 모습에 1/4도 안되는 규모이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정로사
(靜老祠)는 3칸 규모로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
에 향사를 지낸다. (지금도 지냄)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로 한때 재산은 전답 700여 평
이 있었다.

사우 외에는 복원을 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윤곽이 남아있고 이율곡(李栗谷)의 '도봉서원기'를
비롯하여 옛 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복원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2012년부터 기존 건물을
눕히고 한참 복원공사를 벌이고 있는데, 2014년 서원이 완성되면 서울 유일의 서원이자 도봉산
을 수식하는 명소로 선비문화 체험의 장으로 한몫 단단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봉구청에서
서원 활용에 매우 열성적임) 또한 공사중에 옛 영국사의 흔적이 나오면 주춧돌은 서원 주변에
두고, 불상 등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넘겨서 유생들에 의해 비명에 간 영국사도 조금은 위로해주
었으면 좋겠다.
도봉서원 주변 도봉계곡은 서울 근교 으뜸 계곡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서원의 주인인 조광조는
이곳을 즐겨찾기 했으며, 조정 일을 마치면 수레를 몰아 이곳에서 놀았다고 전한다. 또한 송시
열의 수제자로 도봉서원 운영에도 관여한 권상하(權尙夏)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원래부터
경기도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 찬양했고, (당시 도봉동은 경기도 양주목 관할)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한양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면 도봉산과 삼각산을 언급하는데, 그 계곡과
수석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도봉계곡)과 중흥동(重興洞, 북한산성계곡)이 가장 뛰어나다'했다.

이들 계곡에는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수증(金壽增)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
월 도봉서원과 하나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지정되었다.


▲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 바로 앞 계곡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고산앙지란 옛 사람들
이 필수로 배웠던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김수
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산앙지 4글자 가운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계곡물에 잠겨 있으며, 앙(仰)은 절반 정도
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가뭄 때면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위쪽에 쓰인 고산(高山)
은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다. 이들 글자 가운데 산(山)은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
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를 새긴 시기가 적혀있는데 경진(庚辰) 7월 (밑
에 부분은 물에 잠겨 안보임)이라 쓰여 있다.


▲  광륜사(光輪寺) 앞에 솟아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5호

도봉서원을 지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광륜사란 절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법등(法燈)의 역
사가 만월암의 신중탱(1969년 제작)보다 더 짧아보이는데, 연혁이 담긴 안내문을 보니 이곳 역
시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쓰여있다.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의상대사를 천축사와 만월
암, 광륜사가 아주 사이좋게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경내에 오래된 유물은 전혀 없고, 고색의 기운이 말라 구체적인 창건 시기는 파악하기 힘드나
이이(李珥)가 남긴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에 광륜사의 옛 이름인 만장사(萬丈寺)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고려 때나 늦어도 조선 초에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한때는 영국사, 천축사와 더불어 도봉산의 대표적인 절이었으나 영국사가 강제로 폐사되면서 그
영향으로 쇠락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터만 간신히 남은 것을 조선 후기
에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가 부친인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집안 선산(先山)
과 가까운 만장사터에 지금의 절을 짓고, 인근에 별장을 지어 자주 찾아왔다. <인근 녹야원(鹿
野苑)에 조대비 별장이 남아있음>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조대비 별장을 가끔 찾아와 국정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도 했다.
1970년 이후 금득보살이 절을 크게 중창했으며, 2002년에는 신도들의 열화와 같은 시주에 힘입
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이때 무주당 청화대종사가 절의 이름을 광륜사로 갈았다.

광륜사 앞에는 2그루의 나이 지긋한 나무가 서로 앞다투어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윗 사진
의 나무는 나이가 약 215년(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기준임, 지금은 약 250년)으로 높이 17m,
나무 둘레가 3.8m에 이르며, 광륜사에서 관리한다. 아마도 도봉서원을 들락거리던 선비들이 중
간 휴식처로 삼고자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  광륜사 앞에 솟아난 2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4호
나무 높이 18m, 둘레 1.9m로 앞의 나무보다
키가 1m 더 크고, 둘레가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무지 날씬한 나무이다.
(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165년, 지금은 200년)


▲  도봉산 서원마을터<서원동(書院洞)> 표석

도봉서원 밑에 형성된 서원마을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절로 따지면 일종의 사하촌(寺下村)과
비슷한 마을이다. 이곳에 있던 마을은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국립공원 일대를 정비하면서 모두
밀어버렸다.


▲  북한산국립공원 표석의 위엄
도봉산이 편의상 북한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버렸지만 북한산과 도봉산은
엄연히 다른 산이다.

▲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산탐방지원센터 부근에 있는 도봉동문 바위글씨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받는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멸망한 명나라에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이며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던 어리석
은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한다.
도봉동문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대학자가 쓴 글씨가 그런지 필체가
아주 율동을 부린다.


▲  도봉산에서 먹은 순두부찌개와 해물파전의 위엄

도봉산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를 가르킨다. 오후 2시에 올라
갔으니까 5시간 동안 도봉산을 방황한 셈이다. (도봉산 종점 → 천축사 → 마당바위 → 자운봉
고개 → 포대능선 → 716m봉우리 → 만월암 → 도봉서원 → 도봉산 종점)

도봉산(도봉동 지구)은 두부와 순두부 음식이 유명하다. 도봉산 종점과 도봉산탐방지원센터 사
이에 등산복/등산용품 가게와 온갖 식당이 밀집된 공간이 있는데, 그곳의 두부 음식이 괜찮다.
예전에 가봤던 식당에 가볼까 궁리를 하다가 적당한 식당(식당 이름은 까먹음)에 들어가 자리를
피고 앉았다.

나는 순두부조치(찌개)를 시키고, 후배는 산채비빔밥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만 먹으면 무척 허
전하니 산행뒷풀이용으로 해물파전 1장과 동동주 1동이도 같이 주문했다.
제일 먼저 해물파전이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덩어리가 제법 크다. 처음에는 시장기가 상당하여
이거 가지고 되겠나 싶었는데, 먹고 보니 계속 커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맛은 괜찮아 파전 그
릇을 모두 비웠다. 파전을 1/3정도 먹은 시점에서 순두부찌개와 산채비빔밥, 동동주, 밑반찬이
나타나니 파전에게 일제히 쏠린 시선을 2/3 이상 덜게 해준다.

순두부찌개는 속세에서도 종종 먹는 음식인데, 순두부도 많고, 조개도 많이 들어가 있고, 그런
데로 먹을 만하다. 밑반찬은 김치와 콩나물, 산채나물 등 3가지 정도이며, 동동주 같은 경우는
양이 깊어서 배부른 배를 꾸역꾸역 억지로 눌러가며 간신히 동이를 비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봉
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매년 10월 중순 주말에는 도봉구 가을축제의 일환으로 도봉산축제가 열린다. 도봉산 공영주차
장과 생태공원, 도봉산 제1휴식처(광륜사 부근) 일대에서 등산대회와 도봉서원 추향제(秋享祭),
자연음악회, 도봉산 사찰음식전, 산사음악회 등을 선보이며, 보통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문의 도봉문화원 ☎ 02-905-4026, 도봉구청 문화관광과 ☎ 02-2091-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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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0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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