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구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8.11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도심의 달달한 뒷동산, 초안산 (초안산분묘군, 월계동 비석골근린공원)
  2.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도심의 달달한 뒷동산, 초안산 (초안산분묘군, 월계동 비석골근린공원)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나들이 (초안산 분묘군)



'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

초안산 숲길

▲  봄이 무르익은 초안산 숲길

초안산의 조선시대 무덤들 비석골근린공원

▲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  비석골근린공원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화창한 날, 집에서 무척 가까운 초안산(楚安山)을
찾았다.

초안산(114.1m)은 도봉구 창동(倉洞)과 노원구 월계동(月溪洞)에 걸쳐있는 야트막한 뫼로
내가 서식하고 있는 도봉구(道峰區)의 남쪽 끝을 붙잡고 있다.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흙산으로 산세는 아주 느긋하며, 서쪽에는 우이천(牛耳川)이, 동쪽에는 중랑천(中浪川)이
흘러 마치 산을 둘러싸고 도는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동쪽과 서쪽은 자연히 배산임수라는
착한 지형을 띄면서 무덤이나 마을, 집 자리로는 아주 그만이다. 그래서 초안산 주변에는
안골, 녹천, 벼루말, 각심사 등 여러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현재는 개발의 칼질에 모두
날라가 이름만 희미하게 남아있음)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밖 10리 안<성저십리(城底十里)>에는 대놓고 무덤을 닦을 수
가 없어 천상 도성 10리 밖에 무덤을 써야 했는데 배산임수의 조건을 지닌 초안산이 10리
밖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런 조건들이 묘하게 맞아 떨어져 구파발의 이말산(莉 茉山)
과 더불어 서울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양반사대부부터 내시, 상궁, 중인,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신분을 초
월하며 묻혀 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무덤만 1,100여 기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를 이루게 되었다. 산 전체가 거의 무덤밭인 것이다. (무덤은 20세기까
지 들어섰음) 초안산이란 이름도 죽은 이들의 편안한 안식처를 정한다는 뜻이니 그야말로
이곳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비록 서울 지역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란 조금은 후덜덜하고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
지만 그 덕에 2000년 이후 조금씩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조선시대 무덤 양식과 변천
을 한 자리에서 더듬을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으면서 '서울 초안산분
묘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40호로 지정되었다. <산 전체가 아닌 무덤이 몰려있는 곳
들이 사적으로 지정됨, 사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319,503㎡>
초안산에 안긴 무덤 가운데 내시 무덤이 무려 100여 기에 이르러 '내시산(內侍山)','내시
네 산'이란 별명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무덤은 거의 서쪽(서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는 그들이 일했던 궁궐과 충성을 바쳤던 제왕이 서쪽<정확히는 서남쪽~>에 있어 죽어서도
그 일편단심을 보이고자 함이라 한다.

그렇게 산을 가득 뒤덮은 무덤들은 아쉽게도 예안이씨묘역(정간공 이명 묘역) 등 극히 일
부를 제외하고 관리 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사람들의 못된 손장난 등으로 적지
않게 고통과 파괴를 당했다. 하여 형체를 온전하게 남긴 무덤은 별로 없으며 문인석과 상
석, 묘표 등 석물만 일부 남아있거나 납작해진 봉분이 고작인 무덤이 태반이다. 그러다보
니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이 태반이다. 
다행히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나라와 관할 구청(도봉/노원구)의 보호를 받게 되어 고
통도 많이 줄었지만 워낙 무덤이 많다보니 그 관리도 여간 어렵지가 않다.

초안산은 북한산(삼각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그 주변을
마구 들쑤시면서 서로 끊긴 상태이다. (산줄기의 윤곽만 남아있음) 게다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971년 '초안산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음에도 행정관청의 오랜 무관심과 관
리 소홀로 적지 않은 살을 인간에게 내주면서 그 영역도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히 서울시
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자연의 기운이 많이 살아났다.
그 결과 맹꽁이, 무당개구리, 청개구리 등 다양한 양서류와 파충류가 안기는 공간이 되었
으며, 2006년에는 서울에서 최초로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이 발견되기도 했다. 도시 한
복판에 외로이 자리한 초안산에서 말이다. 또한 2012년에는 생태계 복원 차원에서 두꺼비
, 도룡뇽, 산개구리 등 3종 1,500여 마리를 방사하기도 했다.
한때 골프연습장이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고자 난리법석을 피우기도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산을 지켰다. 그만큼 창동, 월계동 사람들의 소중한 쉼터이자 꿀단지로 뿌리 깊
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초안산은 녹천역(1호선)과 창동주공3단지, 창동주공4단지, 도봉문화정보도서관 서쪽 생태
다리, 창3동어린이집, 초안1단지아파트, 비석골근린공원, 청백1단지, 초안산체육공원에서
올라가면 된다. 정상까지는 넉넉잡아서 15~30분 정도 걸리며, 창동주공3단지에서 오를 경
우에는 30~40분 정도 잡으면 된다.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무덤군을 비롯해 비석골근린공원과 각심재, 정간공 이명 묘역, 허공
바위, 잣나무숲, 세대공감공원, 초안산공원캠핑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축구장과 배드민턴
장 등의 체육시설도 닦여져 있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낮아 지역 사람들이 주로 찾는 쉼터이자 명소로 머물러 있으나 주머
니 속의 뾰족한 송곳처럼 언젠가는 서울의 잘나가는 명소로 거듭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 게다가 늙은 무덤들이 산자락과 산길 도처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흩어져 있으니 내 염
통 상태도 체크하고 소소하게 납량특집도 즐길 겸, 한여름 밤에 야간 산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달님도 등을 돌린 어둑어둑한 밤이면 효과가 더 좋을 듯 싶다. 혹시 아는가 무덤
이나 문인석 등에서 귀신 형님이나 누님이 확 튀어나와 반가이 맞이해줄지도??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초안산 둘러보기 (녹천역에서 정상 주변까지)

▲  봄이 시정(詩情)을 뿌리는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녹천역(1호선) 1번 출구를 나오면 초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경사도 느긋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으며,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은 다양한 색채로 봄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고
나무들은 녹색 옷을 걸치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힘겹게 몰아내고 따스한 기운으로 천하를 해방시키니 세상만물의 찬
양과 우러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봄이 너무 짧다는 것. 봄이 되기가 무섭게 겨
울에 상반되는 여름 제국이 천하를 삼키니 말이다.


▲  느긋한 산길의 정석,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  초안산 북쪽 능선길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오래된 무덤이 없다. 중간에 생태공원으로 거듭
난 세대공감공원과 창동4단지로 내려가는 산길이 실핏줄 만큼이나 복잡하게 엉켜 있으며 이정
표가 많이 부실하여 잘 골라서 움직여야 된다.


▲  초안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초안산 정상

녹천역에서 20분 남짓 오르니 드디어 초안산 정상(114.1m)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태
극기, 정자, 헬기장 등이 있는데, 나무가 울창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나지막하게 누운 뫼의 꼭
대기라 그런지 마치 고양이가 주인 배 위에 올라가 야옹거리며 두리번거리는 기분이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갈리는데, 동북쪽은 녹천역과 창동4단지, 서북쪽은 도봉문화정보도
서관과 창1동, 창3동, 서남쪽은 창3동, 남쪽은 매봉과 월계동이다. 초안산의 오랜 문신이나
다름없는 조선시대 무덤을 보려면 서북쪽과 서남쪽,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며 정상 남쪽 헬기
장 부근부터 무덤의 흔적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정상에 자리한 4각형 정자

▲  'H'마크가 박힌 헬기장


▲  헬기장 남쪽에 자리한 무덤 2기와 묘비

헬기장 남쪽 산길 옆에는 무덤 2기가 납작하게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저거보다 더 컸지만
후손들의 손길에서 벗어난 이후, 대자연과 장대한 세월의 의해 저런 몰골이 되버렸다. 하긴
천하에 어느 누가 대자연과 세월을 이기겠는가?
주변에 비석과 비석을 세우던 비좌(碑座) 등이 널려있어 얼핏 봐도 무덤 티가 나는데, 묘비와
비좌는 제자리를 약간 벗어나 무덤 옆과 뒷쪽에 널부러져 있다.

▲  무덤 뒷쪽에 누운 비좌
비좌에 의지했을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그 빈자리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

▲  헬기장 부근에 외로이 서 있는
문인석 1기


▲  헬기장 남쪽에 있었던 체육시설 (2015년)

헬기장 남쪽에는 체육시설과 너른 공터가 있다. 이 주변에는 자연의 일부로 동화된 무덤의 흔
적과 문인석이 적지 않게 방황하고 있어 무덤이 여럿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초안산의 옛
무덤에 대한 인식이 바닥이었던 20세기 중~후반,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밀어내고 체육시설을
닦았고 상태가 괜찮은 문인석을 주위에 갖다 놓아 이곳의 장식물로 삼았다.
이처럼 무덤 문인석으로 주변을 치장한 체육시설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것인데, 다행히도
근래에 무덤 유적 보호를 위해 배드민턴장을 밀어버렸으며, 지금은 체육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  초안산 정상에서 창3동으로 내려가는 산길
이 산길 주변에도 무덤들이 많다.

▲  무덤 봉분(封墳)은 대자연의 의해 완전 가루가 되었지만 상석과
향로석, 혈(穴)에 해당되는 봉분 뒷쪽은 그런데로 남아있다.



 

♠  초안산 서남쪽 둘러보기 (창3동 구역)

▲  창3동 산자락에서 만난 무덤 3기

초안산 창3동 구역에는 늙은 무덤이 많다. 산자락은 물론이고 산길에도 세월의 무게로 납작해
진 무덤이 널려있어 한밤에 오면 정말 기분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초안
산 분묘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안산에 깃든 무덤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은 좌의정을 지낸 이명(李蓂, 1496~1572)의 무덤이다.
그의 묘는 월계동 예안이씨 묘역(각심재 주변)에 있는데, 예안이씨 외에 밀양박씨(창3동 지역
), 태안이씨(창3동 지역) 묘역 등 3개의 사대부 집안 묘역이 초안산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
들은 후손들의 보살핌이 각별하여 무덤 상당수가 양호하게 남아있다.
이들 외에는 내시, 상궁, 중인, 서민들의 무덤으로 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상당수는 관리
의 손길이 끊겨 초췌한 몰골이다. 특히 100여 기에 이르는 내시 무덤 중에는 김계한(金繼韓,
?~1624)과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제일 오래되었으나, 1993년 김계한의 13세손이 경기도 양주
시 광적면 효촌리로 이장시키면서 이제는 인덕대학 뒷쪽 매봉에 자리한 승극철(承克哲) 부부
묘가 제일 늙은 내시의 무덤이 되었다. 묘비에 의하면 1634년에 조성되었다고 나온다.

현재까지 산에서 확인된 오래된 무덤은 2000년 기준으로 1,154기로 상석 511기, 향로석(香爐
石) 210기, 석인상 169기, 묘비 182기, 비석 대좌 123기, 망주석(望柱石) 58기, 초석 2기, 장
명등 1기이다. 하지만 아직도 땅 속에 잠긴 묘와 석물이 적지 않아 그 갯수는 계속 변동된다.
상황이 이리된 것은 후손에게 버려진 묘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묘들은 대자연과 몰지각
한 인간들의 희롱으로 대부분 우울한 몰골이 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도굴까지 당한 무덤도 적
지 않다.

높은 사람들이나 쓸 수 있던 신도비(神道碑)는 앞서 언급한 집안 묘역에 조금 있고, 그 외의
무덤은 묘표(墓表, 묘비)를 지녔다. 묘표는 15세기 형식인 하엽방부형(荷葉方趺形)은 일부이
고, 17~18세기 형식인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의 묘표가 대부분이다. 특히 방형(方形)의 비대
만 남은 것이 많은데 윗면에는 연판문이나 당초문(唐草紋), 옆면에는 안상문이나 운문(雲紋)
을 새기거나 아무 문양도 없는 것이 많았다. 이는 중인과 내시, 상궁, 서민의 무덤이 많기 때
문으로 풀이된다.

남아있는 석인상은 3대 가문 묘역을 비롯해 적지 않게 흩어져 있고 쌍계를 갖춘 동자석(童子
石)도 많다. 이들 석인은 대부분 17~18세기 것으로 18세기 중반 이후 사실주의 양식의 석물도
적지 않아 무덤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상석(床石)은 장방형의 상석 받침을
지닌 형태거나 향로석이 상석 받침과 연결되어 겸용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많다. 이러한 석상
의 형식은 17세기 이후에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상석 받침과 겸용으로 만든 향로석은 18세기
이후 초안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석물을 통해 빠르면 15세기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7~18세기에 폭발적으로 늘
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 넓지 않은 산에 무덤이 마구 들어서니 자연히 묘역 구성은 간소
한 밀집형이 주류를 이루며 석물들은 단순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곳은 특히나 내시묘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조선 제일의 법전(法典)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에 내시의 묘는 도성 10리 밖에 두라는 규정이 있어 그거에 맞는 이곳과 구파발 이말산(莉茉
山)이 무덤 자리로 격하게 선호되었다.
초안산에 안긴 1,100여 기의 무덤들은 '서울 초안산 분묘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40호로 지정
되었으며, 조선 중/후기에 걸쳐 긴 시간에 조성된 조선시대 공동묘지로 비록 상태가 양호한
석물은 별로 없으나 나름대로 무덤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초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1동, 창3동 / 노원구 월계2동
* 초안산 분묘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 등


▲  문인석과 동자석까지 갖춘 무덤들 - 이들은 사대부의 무덤으로
무덤의 상태는 그런데로 양호하다.

▲  오랜 세월 표정을 잃지 않으며 주인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의 일편단심

▲  비석과 상석, 동자석을 갖춘 무덤
비석에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라 쓰여있어
통정대부로 추증된 이의 무덤임을 알려준다.

▲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무덤 앞에
자리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무덤

▲  산자락에 가득 깔린 옛 무덤의 물결


▲  봄이 곱게 붓질을 한 생생한 수채화, 창3동 주택가와 초안산 경계선

▲  창3동 주택가에서 초안산으로 오르는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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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창3동 지역을 비롯해 쌍문동(雙門洞)과 수유동(水踰洞) 지역이
낮게 바라보인다. 그들 너머로 보이는 장대한 산줄기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 등이 거뜬히 시야에 잡힌다.
그만큼 이곳과 저곳은 가깝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①
인간이 빚은 봉분은 사라지고 감쪽같이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어 나무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결국 무덤도 인생처럼 부질 없는 것이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②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③

▲  봉분은 사라지고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3기

▲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진 망주석
하늘을 향해 우뚝 섰던 망주석은 땅바닥에
쳐박혀 산길의 일부가 되었다.


▲  창3동 산자락의 작은 소나무숲

▲  소나무숲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무덤 상석들
이곳에는 상석을 갖춘 무덤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소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마치 칼질을 당한 듯, 윗도리가 잘려나간 가련한 문인석

▲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의 비애
봉분은 말끔히 파괴되어 겨우 흔적만 남아있고, 누렇게 뜬 낙엽이 그 자리에 한가득
쌓여 허전함을 달래준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 1기와 윗도리만 겨우 남은
상석이 제자리를 지켜 이곳에 무덤이 있었음을 강하게 어필한다.

▲  피부가 누렇게 뜬 비석(묘표)
피부가 손상되어 글 해독이 불가능하다.

▲  세월에 지쳐 쓰러진 비석이 상석을
베게 삼아 하늘을 바라본다.



 

♠  초안산 동남쪽 둘러보기 (월계동 구역)

▲  초안산 정상에서 비석골근린공원으로 내려가는 산길

초안산 정상에서 남쪽 길로 내려가면 월계동 청백1단지와 비석골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도 늙은 무덤이 적지 않게 흩어져 있는데, 4각형 정자 쉼터에 이르면 산길 동쪽으로 철
조망이 빙 둘러져 있다. 그 안쪽은 예안이씨 땅으로 정간 이명을 중심으로 한 예안이씨 묘역
이 둥지를 틀었다.

▲  산길에 널부러진 상석들

▲  수풀에 파묻힌 고적한 상석


▲  파괴된 무덤에 남아있는 조그만 문인석과 상석 (바로 옆이 산길)
문인석이 상석보다 작은 경우는 처음 본다.

▲  4각형 정자 쉼터 (왼쪽 철조망 너머가 예안이씨 묘역)

▲  장대한 세월을 예민하게 탄 시커먼 피부의 문인석
무덤은 사라지고 문인석만 남아 있는데, 자신의 우울한 처지에
너무 울었던 탓일까? 얼굴이 거의 지워졌다.

▲  숲속에서 숨바꼭질을 당하고 있는 상석과 묘표

▲  세월의 때가 진하게 낀 검은 피부의 묘표와 상석
무덤 봉분은 진작에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산길이 뚫렸다. 무덤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무덤 자리를 밟고 지나가니
저 세상에서도 속이 편치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럴려고 무덤을
썼나~~!' 자괴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  산비탈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 (묘표와 상석)

▲  월계고등학교 뒷쪽 숲길 (비석골근린공원 부근)

▲  비석골근린공원 서쪽 산자락에 안긴 옛 무덤들 (내시묘로 추정됨)



 

♠  초안산 비석골근린공원과 궁중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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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골근린공원 내부 ▼

초안산 남쪽 끝에는 비석골근린공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염광여자메디텍고등학교와
월계고등학교 사이로 비석이 많다고 해서 비석골이라 불렸는데, 그 비석이란 다름 아닌 초안
산에 널린 묘표(묘비)들이다.

이곳은 초안산을 비롯해 노원구 곳곳에서 수습된 문인석과 동자석, 묘표를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공원 주소가 '노원구 월계동'이라 노원구 석물만 있음) 그래서 자연히 문화유산을 겯
드린 상큼한 시민공원이 되었는데, 매년 4월 하반기에는 '임금님과 충신의 만남이 시작된다'
는 주제로 '태강릉 • 초안산 궁중문화제(이하 궁중문화제)'가 열린다.
궁중문화제는 딱히 축제가 없어 애를 태웠던 노원구청이 개최하는 지역 축제로 태강릉(泰康
陵, 중종의 왕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 명종과 인순왕후 김씨의 능인 강릉>
과 비석골
근린공원 일대에서 열리는데, 태강릉은 제왕과 왕후의 지체높은 무덤이고 초안산은 궁궐에서
일했던 내시와 상궁들이 많이 묻혀있으니 이들을 하나로 묶어 궁중문화제란 그럴싸한 행사를
지어낸 것이다.

이 행사에는 어가행렬과 다양한 전통체험, 안골 치성제, 음악회, 포토존, 장터 등이 열리는데
, 내가 이번에 초안산을 찾은 이유 중의 하나도 궁중문화제를 약간이나마 맛보기 위함이다.
허나 내가 도착한 시간은 벌써 17시, 행사도 완전 끝 무렵에 이르러 음악 공연의 끝부분과 약
간의 전통 체험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  신명나는 궁중문화제 음악 공연 (통기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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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철수해버린 관상보기 체험장
나는 과연 무슨 상일까? 물론 관상이나 손금, 사주는 100% 믿으면 곤란하다.

▲  역시나 텅 비어버린 초안산 안골치성제 천막

서울 도심과 한참이나 떨어진 초안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안골, 녹천(鹿川), 각심절, 벼루
말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불어닥친 개발의 칼질로 죄다 사라지고 그 이
름마저도 이제 희미해져 기억 속으로 꼴까닥하기 직전이다. 그나마 녹천역 남쪽에 있던 녹천
마을이 시골 풍경을 간드러지게 드러내며 늦게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자비 없는 개발의 칼질에
결국 2015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강제 퇴장당하고 만다.

옛날 마을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 하나씩은 있었다. 치성제나 당제(堂祭)
등 이름은 틀리지만 본질은 비슷한 마을 제사로 안골 역시 치성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단
합을 도모했다. 안골 치성제는 조선 초기 이후부터 전래된 것으로 소 1마리가 7개의 칼을 맞
고 쓰러져 있던 것을 잡아서 안골, 각심사(각심절), 벼루말 사람들이 매봉 남쪽 허공바위에서
제를 지내니 그것이 안골 당제(치성제)의 시초라고 한다.
그 사연으로 제를 지낼 때는 꼭 7개의 식칼을 놓는다. 왜 하필이면 7개의 칼을 맞은 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상서로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만 불쌍함;;)

옛날에는 소 1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제를 지냈으나 20세기 이후 약식으로 지내고 있으며 제각
(祭閣)을 두어 제사 도구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고 말았다.
제는 1년에 3회를 지냈는데, 2월 초하루는 통합적으로 제를 지냈고, 6월 초하루는 할머니산제
라하여 간소하게 소 내장을 갖추어 지냈으며, 10월 초하루에는 소를 통째로 잡아서 지냈다.
제주(祭主)는 마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나이 많은 남자를 뽑았는데, 3일간 바깥 출입을 금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준비했다.

허나 198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마을이 강제로 사라지면서 마을 사람 대부분은 다른 곳으
로 가버리고 9대째 안골에 살고 있는 박점순 할머니가 마을 제사를 지키고 있어 다행히 치성
제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요즘은 10월 초하루에만 제를 지내며 그날이 되면 각지에 흩어진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허공바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단에는 대추, 밤, 사과의 3색 과일
과 생소고기를 올리고 향과 초를 켜 옛날부터 전해오던 식칼 7개와 놋숟가락을 놓는다.


▲  비석골근린공원을 장식하고 있는 문인석과 망주석들 ▼

공원 한쪽에는 문인석 13기가 무리지어 있다. 이들은 염광학원과 옛 경춘선 철로변, 영축산(
靈鷲山), 수락산(水落山)에서 가져온 것으로 16~19세기에 조성된 것들인데 세월의 때를 진하
게 탄 문인석부터 피부가 하얀 문인석까지 다양한 모습들이라 문인석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
는 아주 좋은 곳이다.


▲  서로 상반된 피부 색깔을 지닌 문인석들

▲  망주석들 - 염광학원과 불암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키 작은 동자석들 - 염광학원과 영축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빛바랜 묘표(묘비)와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비석이 너무 낡아서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저들을 거느리던 봉분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저들만 겨우 남아 공원에 안착했다.

▲  비석골근린공원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 (초안산로5길, 청백3단지 옆)

축제 막바지라 짐싸기 바쁜 비석골근린공원을 벗어나 초안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각심재(恪心
齋)와 정간 이공묘를 찾았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보수 공사 중이라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정간 이공 묘역과 신도비도 접근이 통제된 상태)
그래서 별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사진에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
다. 어차피 내 서식지와도 가까운 곳이니 그들의 몸단장이 끝난 이후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 없다.

이렇게 하여 초안산 봄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비석골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779 (월계로45가길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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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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