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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0.08 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2. 2017.09.27 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북한산 노적사, 태고사



' 북한산 산사 나들이 (노적사, 태고사)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북한산(삼각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명성이 높은 서울과 경기도의 주요 도시인 고양(高陽
)을 끼고 있는 수도권 제일의 자연 공원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이다. 번잡한 지역에 누워
있다 보니 찾는 이가 실로 엄청나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에 이른다. 하여 탐방밀도 부
분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서울의 든든한 진산(鎭山)이자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고 있
는데, 봄을 몰아낸 여름이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오래간만에 북한산
(삼각산)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연신내역(3,6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
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북한산과 도봉산(道峯山), 노고산(老姑山
) 산꾼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는데, 버스는 간신히 바퀴를 움직이며 시내를 빠져나와 북
한산성입구에서 승객 60%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와 서암사(西巖寺)터를 지나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튼 산골 마을로 북한산
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되었다.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으며,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
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지 형성되었는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倭政)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관리 소홀과 잇따른 자연재해로 북한산성과 마
을이 크게 훼손되자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
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1개 연대
를 보내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쟁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
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
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나 주민들의 항의로 인해 1974년 모든 집에 식당
허가를 내주게 된다. 그래서 식당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등산물품 가게도 생겨났다.

이후 마을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
한산의 자연 보전과 계속되는 말썽을 해소하고자 마을을 폭파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이주 사업을 단행했다.
처음에는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북한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해 주면
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렇게 고향을 떠나자 북한
산성계곡의 옥의 티를 선사했던 집들을 죄다 부시고 주변 생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
심지에 '북한동역사관'을 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흘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짧게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나 마을로 인해 크게 망가졌던 자연 경관이 활짝 피
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 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된다. 솔직히 마을은 음식과 간식 가격이
비쌌다. 그 돈으로 시내에서 2배의 양을 사오는 것이 더 이득이다.


▲  북한동 향나무 (나이 약 400년)
옛 북한동마을의 수호목으로 그에게 병이 생기면 마을 전체에 병이 생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의 지극정성이 대단했다. 허나 마을은 북한산(삼각산) 생태계를
위해 모두 사라지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성밖으로 나가면서
아무도 없는 마을을 홀로 지키고 있다.



 

♠  노적봉 밑에 둥지를 튼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 북한산 노적사(露積寺)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시로 진국사는
지금의 노적사이다.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30분 정도 올라가면 중성문(中城門)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3분 정도 가면 왼쪽에 노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밀고, 그 길을 오르면 노적
봉(露積峰) 밑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노적사가 모습을 비춘다.

노적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712년 성능(性能)이 창건하여 진국사(鎭國寺)라 했다. 성
능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숙종(肅宗) 때 승군(僧軍)의 대장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에 임명되어 북한산성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산성 안에 있는 중흥사(重興寺)와 태고사를
보수하고, 노적사<현재 상운사(祥雲寺)>와 서암사(西巖寺) 등 절 10곳을 지어 북한산 승병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또한 중흥사와 태고사에 30년간 머물면서 북한산성과 북한산(삼각산)에 있는 절, 유적, 행궁
(行宮), 관청, 기타 여러 시설 등을 정리한 '북한지(北漢誌)'를 작성하기도 했다.

창건 이후 이렇다 할 내력(來歷)도 남기지 못한 채, 감쪽 같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중흥사(重
興寺)와 국녕사(國寧寺)가 사라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 화재나 자연재해로 강제로 문
을 닫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있던 것을 1960년 승려 무위(無爲)가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짓고 노적봉 밑에 있다는 뜻에서 노적사라 하였다.

1977년 현 주지인 종후가 재정을 털어 절을 크게 확장시켜 삼성각과 나한전, 종각, 요사 등을
새로 세웠으며, 대웅전을 크게 손질했다. 2000년 12월에는 노적사의 오랜 내력이 인정되어
통사찰 201호
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2002년 6월 불의에 화재로 종각과 요사가 전소되
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6년 4월 종후가 히말라야산맥에 묻힌 네팔 팔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기증받았는데, 2009년 극락전 뒤에 3층사리탑을 세우고, 극락전을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
다. 그리고 삼보당 2층을 대웅전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나한전, 대웅전, 삼성각, 동인당 등 5~6동의 건
물이 있으며, 고색의 때는 진작에 녹아내려 소장문화재는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조성된 돌
사자상이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절 배후에는 인수봉을 닮은 노적봉이 든든한 모습으로 절을 지켜주고 있으며, 인근 태고사와
비슷하게 작고 조촐한 산사로 인적도 별로 없어 조용하고 아늑하다.
 
* 노적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331 (대서문길 311-35 ☎ 02-353-5016)


 노적사 적멸보궁(寂滅寶宮)

경내로 들어서면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의 보금자리 범종
각(梵鍾閣)이 나오고, 그 범종각을 지나면 흙이 곱게 입힌 뜨락이 나온다. 그 뜨락 옆에는 2
층 건물인 대웅전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정면에 보이는 계단 끝에는 적멸보궁이 서쪽을 굽
어본다.

이곳의 법당인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지
어졌다. 허나 공간이 좁고 퇴락하여 1986년에 증축해 지금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으며, 처음에
는 대웅전으로 삼았으나, 2007년 극락전으로 현판을 갈았고, 2009년에는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러니까 50년 동안 이름을 2번이나 바꾼 셈이다.

극락전 시절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아우른 아미타3존상으로 불단을 구성했으나 적멸보궁으로 바뀌면서
그들을 대웅전으로 옮기고 불단 뒤쪽에 창을 내어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이 보이게끔 했
다. 물론 적멸보궁이니 불단에는 그 흔한 불상도 없다. 그 외에 1987년에 그려진 지장탱, 신
중탱, 아미타후불탱 등이 내부를 구석구석 수식한다.


▲  노적사 대웅전(大雄殿)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원래 삼보당(三寶堂)이라 불렸으
나, 2층을 새롭게 손질하여 대웅전으로 삼았으며, 극락전에 있던 불상을 옮겨왔다. 1층은 승
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지하1층에는 공양간이 자리해 있다.


▲  노적사 동인당(東印堂)
예전 지장전(地藏殿)으로 지금은 요사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노적사 나한전(羅漢殿)

적멸보궁의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은 부처와 그의 열성 제자인 나
한(羅漢)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그 자리에는 뒤쪽으로 물러난
삼성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철거하여 나한전을 새로 지었으며, 건물 외벽을 수식하는 벽화는 2002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밑에는 2개의 샘터가 있는데, 노적봉이 아낌없이 베푼 샘물이 콸콸 쏟아
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쿨하게 해결해준다.
(왼쪽 샘물은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으나, 오른쪽 샘물은 예불용으로 아무나 마실 수 없음)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나한상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나한전 뜨락에 자리한 약사여래좌상과 지구를 든 석조미륵불

▲  성림당 월산대종사(聖林堂 月山大宗師) 기념비와 3층사리탑

나한전 뜨락 우측에는 약사여래좌상과 석조미륵불이, 좌측에는 3층사리탑과 근래에 지어진 월
산대종사 기념비가 자리한다.
석조미륵불(彌勒佛)은 원래 3층사리탑 옆에 있었으나 월산 대종사 기념비를 세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절을 빛낸 월산이 석조미륵불보다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손에는 동그
란 무엇인가가 들려져 있는데,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지구를 위
/아래로 구분하는 경도와 위도가 나와있으며, 중간에 우리나라가 선명하게 새겨져 눈길을 끈
다. 마치 선서를 하듯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모습이 충주 미륵리절터에 있는 미륵리석불
(彌勒里石佛)을 연상케 한다.

 ◀  석가여래의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
별다른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노적사의 새
로운 명물로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겨져 있다.

노적사 주지인 종후는 2006년 네팔에 있는 팔
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선물 받았다. 그래서 2009년에 3층석탑을 만
들어 사리를 봉안했고, 그 곁에 진신사리 기
증 증명서를 세웠다.
탑의 모습은 불국사의 석가탑(釋迦塔)과 닮은
꼴로 근래 들어 이 땅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절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니 과연 어디까지가
진품인지 모르겠다.


▲  인공 바위로 이루어진 노적사 스타일의 삼성각(三聖閣)

나한전에 이르면 '경내는 이게 전부구나, 더 이상 없겠지'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리기가 쉽다
. 바로 나한전이 뒤를 고스란히 가렸기 때문이다. 또한 언뜻 보아도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
을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나한전 옆구리를 지나면 그 뒤쪽에 전혀 불전(佛殿
)으로 보이지 않는 인공 바위로 울퉁불퉁 조성된 공간이 나온다. 얼핏 봐서는 무슨 창고가 아
닐까 싶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에 '삼성각'이란 현판이 걸려있어 건물의 정체를 두고 아리
송에 빠진 중생을 깨우치게 한다.

예전에는 천막으로 크게 둘러 정말 창고나 실내 체육공간처럼 보였는데, 돈 좀 쏟아부었는지
천막을 걷어내고 인조 돌을 더덕더덕 붙여 놀이공원의 인공폭포나 놀이시설처럼 정말 어색하
게도 만들어버렸다. 차라리 조촐하게 작은 기와집을 올려 삼성각으로 삼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은데, 전혀 불전의 품격이 보이질 않는다.

원래 삼성각은 나한전 자리에 1963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동인당으로 바뀐 지장전과 비
슷한 규모를 지녔다. 허나 그런 삼성각을 부시고 나한전을 지었는데, 그 뒤쪽에 대충 천막으
로 자리를 닦고 삼성각으로 삼았으며, 근래에 인조 돌을 덧붙여 부조화의 공간이 되버린 것이
다.


▲  석굴 같은 분위기의 삼성각 내부

삼성각 내부는 없어 보일 것 같은 외부와 달리 넓고 아늑하다. 불단에는 칠성(七星)을 비롯해
독성(獨聖, 나반존자)과 산신(山神)이 석상으로 자리해 있으며, 그들 뒤에는 커다란 돌이 비
스듬히 자리해 있는데, 그 모습이 그들을 덮칠듯 아찔해 보인다.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한
아름씩 담은 고운 연등들이 환상적인 색채를 내며 내부를 환하게 비춘다.


▲  노적사에서 섭취한 점심공양의 위엄
흰쌀밥에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절 공양밥이다.
밥과 함께 국도 제공되었는데, 맛도 괜찮고 노적사의 인심도 훈훈하여
배불리 먹고 갈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떡도 얻을 수 있음
(점심시간은 12~13시, 일반인도 공양 가능)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노적사를 둘러보고 다시 북한산성계곡으로 나와서 20분 정도 오르면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가 마중한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
후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
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
에는 경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
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매우 조촐하여 거의 산중암자의 분위기가 진
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한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이 사찰로 자부심이 강하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위시해 산신각과 요사 등, 3~4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원증국
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이나 간직하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알려
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늙은 귀룽나
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차량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깊숙한 산중이라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한 곳이
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산새도 감히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번뇌라
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의 무거운 짐과 번뇌를 북한산성계곡에 모조리 내던지고 며
칠 조용히 안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 태고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녹음(綠陰)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
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70년, 높이 23m, 허리둘레는 2.3m에 이르며, 성하(盛夏)의 길목이라 꽃 대
신 푸른 옷을 걸치고 중생을 맞는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를 품은 비각(碑閣)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물
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
홍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
암사(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
문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삼각
산) 중흥사에 들어왔고,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
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몽골)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원나라 제왕인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 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불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
제하여 속리산(俗離山) 암자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문인지 병
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
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
려 3은(三隱)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 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
那寺)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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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씨익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몸뚱이에는 푸른 이끼들이 자리도
가리지 않고 싹을 피워 귀부의 건강을 조금 위협한다.

▲  원증국사탑비의 머리 부분
비석의 머리인 이수에는 구름 무늬가 얇게 새겨져 비석의 미를 한층 끌어 올린다.

▲  2009년에 조성된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의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
건했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 머물다가 2009년에 입적했는
데, 태고사 창건주(원증국사)의 비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경내에서 원증국사탑으로 오르는 길목에 산신(山神)을 봉안한 산신각이 있다. 특이하게도 돌
과 바위로 지어졌으며, 건물 내부는 거의 석굴(石窟)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는 현대
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들의 희생이 있기
에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거의 흑백 비슷했으나 나중에 채색을 했다. 색
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그다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새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
자(童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늙어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행들에
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그래서 먹고 살려고 저 산신의 비서로 취직한 것이다'

▲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
국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넋이 담긴 부도탑으로 그가 입적하
자 그가 세웠던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
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
저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기단의 아랫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
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국사에 대한 신임과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원증국사탑만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이름은 모르겠음)의 탑
을 원증국사탑 아래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
고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위쪽 부도를 바라보고 있으
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태고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대성암과 대남문(大南門)을 거쳐 구기동(舊基
洞)으로 하산했다. 본글은 노적사와 태고사를 중심으로 다룬 글이라 그 외에 자잘한 내용은
쿨하게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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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9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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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호남선의 종점, 목포 늦여름 나들이 '

   

▲ 유달산 노적봉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갓바위입구 포구
▼ 갓바위

   



늦여름과 초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 첫 무렵에 예향(藝鄕)의 고을이자 전남 제일의 항구도
시인 목포(木浦)를 찾았다.
목포는 무려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곳과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잘 닿지가 않았다. 하여 이번
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붙여 목포행 무궁화호 첫 열차에 속세에 찌든 몸을 담고 느림의 미학(美
學)을 음미하며 거의 5시간을 달려 호남선(湖南線)의 오랜 종점, 목포역에 이르렀다.
목포에서의 정처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
은 유달산 동부와 달성사, 그리고 갓바위이다.


 

♠  유달산(儒達山) 겉돌기

▲  노적봉(유달산입구)에서 유달산으로 인도하는 계단

목포역에서 시내를 가로질러 노적봉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유달산의 관문인 노적봉 주차장(
유달산입구)이다. 속세에서 유달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중심 관문으로 이곳 외에도 어민동산과
조각공원, 목포시사 등에도 산길이 있으나 관광객들은 보통 노적봉에서 오른다. 이곳에 너른
주차장이 있고 접근성도 괜찮기 때문이다.

유달산(228.3m)은 목포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시내 서쪽에 들어앉아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실질적인 종점으로 호남의 개골(皆骨)로 일컬어졌으며 영혼이 거쳐가는
산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영혼이 나중에 선비를 뜻하는 한자로 바뀌
어 유달산으로 간판을 바꾼 것이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아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넉넉잡아 30~40분 정도면 충분하며 유달산의 정상
인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삼등바위, 고래바위, 투구바위, 노적봉 등 20개가 넘는 개성파 바위
들이 앞다투어 산을 멋지게 수식하고 있다. 이들은 목포8경의 으뜸인 유산기암(儒山奇巖)의 현
장으로 지금은 목포9경으로 재편되어 '유달산풍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달산의 품에는 대학루와 달선각, 소요정, 낙조대 등의 정자가 있고, 조각공원과 특정자생식
물원, 노적봉예술공원, 목포시사, 달성사, 오포대(午砲臺) 등의 명소가 있으며, 2.7km의 유달
산 일주도로(유달로)와 뚜벅이를 위한 유달산 둘레길이 둘러져 있다. 또한 산자락에는 왕자귀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천하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산에 왔다면 정상은 한번 가주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목포시내를 비
롯하여 서해바다와 점점이 찍힌 크고 작은 섬들이 앞다투어 두 눈에 들어와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다. 게다가 사방(四方)이 확 트여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이곳 정상은 한참 20대의 중반을 달리고 있던 2002년 초, 심야열차로 목포에 내려와 새벽에 검
은 도화지 속을 가르며 올라간 추억이 있다. 그때 일등바위에 걸터앉아 불끈 솟아오르는 해돋
이를 보며 목이 터져라 환호를 질렀었지~! (허나 지금은 우울이 파도를 치는 30대 후반 ㅠㅠ)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밤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렇게 오랜만에 찾은 유달산이지만 이번에는 뫼 깊숙히 안기지 않고 노적봉과 목포시사, 달성
사 등 유달산의 겉만 돌고 철수했다.


▲  노적봉예술공원 미술관 야외공연장

노적봉 주차장 서쪽에는 노적봉예술공원이 자리해 있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공원은 3층 꼭대기
로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며 공연장 옆에 '노적봉예술공원'이라 쓰인 건물로 들어가 내려가면 미
술관과 홍보관이 나온다.
이곳은 2009년 7월에 문을 연 목포 종합 홍보관 겸 미술관으로 지상 2층과 옥상(3층)으로 이루
어져 있다. 1층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작품과 목포 지역 서화가의 작품을 다루는 미술관으로
, 2층은 목포의 역사와 지리, 문화, 예술 등을 다루고 있으며, 3층 옥상은 야외공연장으로 쓰
이고 있다. 허나 이곳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곳이라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유달
산으로 등을 돌렸다.

★ 노적봉 예술공원 미술관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2가 1-4 (유달로 116, ☎ 061-270-8300)


▲  노적봉(露積峯)

노적봉 주차장(유달산입구) 뒤쪽에 노적봉이라 불리는 울퉁불퉁한 큰 바위가 있다. 속세(俗世)
에서 유달산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대자연이 빚은 해발 60m의 바위로 남해바다의 영
원한 해신(海神),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뛰어난 전략과 숨결이 서린 현장이다.

때는 1597년 겨울, 그 유명한 명량대첩(鳴梁大捷)으로 적선 133척을 격파하고 왜군 1만여 명을
물고기 간식으로 만든 이순신은 목포 앞바다에 뜬 고하도(高下島)에 주둔하며 남해로 진출할
준비를 했다.
왜군들은 언제 이순신이 나타나 자신들의 목을 칠지 전전긍긍하며 수시로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이순신은 바다가 잘 보이는 노적봉에 이엉(볏짚)을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새벽에는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왜군은 그의 계략에 제대로 속아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도
망을 쳤으니 그 연유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달산의 상징이자 이순신의 손길이 담긴 노적봉은 매우 거친 바위라 오르는 것이 통제되어 있
다. 바위 주변에는 산책로가 둘러져 있어 방향마다 달리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맨
살을 완전히 드러내기가 부끄러웠는지 얇게나마 푸른 덩굴 옷을 걸치고 있다. 근래에는 노적봉
큰바위 얼굴이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바위 꼭대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 얼굴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두고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고 있는 모습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노적봉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에도 좋다고 하여 인근 다산목과 함께 소원을 비는 현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노적봉 (바위 정상이 사람 얼굴과
좀 비슷하게 생겼음)

▲  동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북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노적봉 동쪽에 심어진 옛 목포MBC 표석
1980년 5.18 시절 방송매체들이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5.18을 폭동으로,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는 보도를 내보내자 분노한 목포 시민들이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5.18
탄압을 규탄했던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이다. 그 현장이던 목포MBC는 다른 곳으로
둥지를 옮겼고 저렇게 표석 하나를 남겨 놓아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전한다.


▲  새천년 시민의 종

노적봉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그 안에는 2000년 10월에 조성된 커다란 종,
새천년 시민의 종이 담겨져 있다.
2000년에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여 목포시에서 6억 원을 들여 만든 종으로 옛날에 정오 12시를
알렸던 오포대(午砲臺) 자리에 세웠다. 종은 199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서울대 정밀기계설계 공동연구소에서 제작 설계를 하고, 김응현 선생이 종에 글씨를
새겼으며 종각의 현판인 '시민종각(市民鐘閣)'은 전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남겼다.
보통 종은 33번을 치기 마련이나 이 종은 희망찬 21세기의 염원을 담아 만든 것이라 하여 특별
하게 21번을 친다.


▲  노적봉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계단을 내려가면 옛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289호)이 나온다.

▲  온갖 거시기한 상상을 유발시키는 노적봉 다산목(多産木) 아랫도리


▲  노적봉 다산목

노적봉 남쪽에는 유달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
한 다산목이란 나무가 있다. 이들 나무는 팽나
무로 나무 줄기는 뼈만 앙상한 다리 같은 모습
인데 그들이 갈라져 가랭이를 벌리고 있는 듯
한 부분은 여인의 은밀한 부분과 비슷하게 생
겨 먹어 온갖 예민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킨
다.

이 나무는 1900년대 초반에 발견된 것으로 여
한목(한스러운 여인나무)이라 불렸다고 한다.
나이는 150년 정도로 1910년경에 어미나무(여
한목)의 뿌리에서 새끼나무가 자라나자 그를
다산목이라 했다.
인근 주민들만 알고 지내던 숨겨진 존재로 이
들 나무를 보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하여 노
적봉 주변 동네의 출산율이 목포의 다른 동네
보다 높았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자연의 경이
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걸작이다보니 보기만해
도 밤일(?) 생각이 간절하고 힘 또한 불끈 솟
는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의 아주 비밀스러운 성기/기자신앙(性器/箕子信仰)의 대상물로 오랫동안 숨바꼭질
을 해왔지만 2000년 10월 새천년 시민의 종을 만들고자 노적봉 주변의 수풀을 손질하는 과정에
서 발견되어 속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목포시청에서 그 나무를 여자나무(여인나무)
라고 부르다가 동네 설화에 따라 다산목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달산의 명물로 키우고 있다.


▲  노적봉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유달산 주위를 도는 드라이브 둘레길, 유달로

▲  점점 멀어져가는 노적봉 (유달로에서 바라본 노적봉)

▲  목포시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나무가 적절하게 고개를 숙이며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  돌담에 둘러싸인 목포시사(木浦詩社) - 전남 지방기념물 21호

노적봉에서 유달산 밑도리를 따라 흘러가는 둘레길을 쫓아 조각공원 방면으로 가다보면 숲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목포시사가 마중을 나온다.

유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목포시사는 1907년 대학자로 칭송받는 정만조(鄭萬朝)가 세웠다. 시
사(詩社)란 선비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문학 동호회 모임터이
다. 1890년 허석제, 여규향 등 지역 문인들이 세운 유산정에서 비롯된 목포시사는 망국의 한
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던 문학결사 단체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시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였으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은 절대로 받지 않았다.
지금도 시사의 성격은 전혀 녹슬지 않았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한시(漢詩) 백일장을 열고 있
다. 그때가 되면 전국에서 100~200명 이상의 문인들이 찾아와 서로의 필력을 겨루며 한시의 명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사를 이루고 있는 건물은 2동으로 앞에 있는
건물이 시사 본당(本堂)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본당에는 정만조의 문집과 구한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과 한시 현판, 백일장 입
선작, 문인들의 원고가 소장되어 있으며 뒷쪽
건물은 시사 관리인의 거처이다.


  목포시사 본당



 

♠  유달산 자락에 안긴 100년 묵은 산사(山寺)
목포 달성사(達聖寺)

▲  달성사 (왼쪽부터 범종각, 명부전, 극락보전, 관음전)

목포시사에서 다시 둘레길을 따라 북쪽으로 2~3분 가면 달성사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에 따라 산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유달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다진 달성사가 모습을 비춘다.

달성사는 목포 지역 유일의 오래된 사찰로 1913년 4월 석가탄신일에 노대련 선사(盧大蓮 禪師)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창건되어 대원사(大願寺)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근
거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1913년 창건 이후 법등(法燈)을 켠지 이제 100여 년이 되었지만 그 짧은 역사도 제대로 정리하
지 못해 많은 내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의 절은 2000년대 초반에 손질된 것으로 고색의 내
음은 싹도 틔우지 못했지만 다행히 다른 곳에서 오래된 불상 2개를 업어와 든든한 밥줄로 삼고
있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바로 그 불상을 보기 위함으로 그들이 만약에 없었다면 이곳에 영
원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삼성각,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산자
락에 크게 2단으로 석축을 다져 1단에는 3층석탑과 요사, 범종각을 두고, 2단에는 극락보전과
명부전, 관음전을 두었다. 그리고 극락보전 뒤쪽에 높이 터를 구축해 삼성각을 세웠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3존불좌상과 목조지장보살반가상 등이 있
으며, 이곳에 있는 우물은 유달산 뿐 아니라 목포에서도 흔치 않은 샘터로 유명하다. 또한 목
포8경의 하나인 달사모종(達寺暮鐘)의 현장으로 이곳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목포 시내의 번
뇌를 잠재운다.


▲  달성사로 올라가는 계단길

▲  경내 밑에 자리한 이형(二形) 석탑
정확한 조성시기는 모르겠으나 때깔이 좀 낀 것으로 봐서는 20세기 초나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탑 같기도 하고 2층탑 같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없는 탑인데 아랫층을 기단으로 본다면 2층이 되겠고, 탑신으로
본다면 3층이 되기 때문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경쾌하게 들려져
살짝 날개짓을 벌이는 것 같다.

▲  경내로 오르는 계단

▲  앞서 이형 석탑 윗도리와 똑같이 생긴
2층 탑신이 계단 옆에 놓여져 있다.

▲  관음전(觀音殿, 2층)과 요사, 공양간(1층)
관음전 밑도리를 활용하여 요사와
공양간을 두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음에는 대웅전을 칭했으나 본존불과의
형편성을 고려해 극락보전으로 바뀌었다.


▲  달성사 목조아미타3존불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8호

극락보전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포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의 이름을 대웅전(大雄殿)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극락보전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들 때문이다.

그들은 1678년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조성된 목불(木佛)로 이들을 조성하면서 남긴
조성발원문(14cmX25cm)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
며 앉아있는 아미타불의 옷은 통견의로 U자형의 옷주름이 물결을 이루고 있으며 1자형의 띠줄
과 연화형 승각기, 우측 어깨의 반단, U자형 군의자락 등이 특징이다. 그의 좌우에는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로 앉아있는데 표정이 좀 무거
워 보이며 17세기 전남 지역의 몇 안되는 목불의 하나로 손꼽힌다.

◀ 극락보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그 앞에 솟은 대련선사창공비(大連禪師彰功碑)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
금자리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다.
그 밑에 밋밋하게 솟은 비석은 절을 세운 노대
련 선사를 기리고자 세운 창공비(彰功碑)이다.

         ◀ 달성사 우물 <옥정(玉井)>
극락보전 뒷쪽에는 정(井)과 샵(#) 모양의 진
수를 보여주는 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선 그를
옥정이라 하여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노대련이
100일 기도 중에 굴착을 하니 기도의 영험인지
30척 바위 속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유달산의 흔치 않은 우물로 물맛이 좋기로 소
문이 자자하며, 여름에는 물이 차고 부정한 사
람이 물을 길으면 일시에 마른다고 한다. (내
가 갔을 때는 물 구경도 못했음)

  종무소(宗務所) 겸 요사(寮舍)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10왕상 (우측)

  명부전 10왕상 (좌측)


  달성사 목조지장보살반가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9호

극락보전 옆에는 지장보살과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있다. 다
른 건물은 다 지나치더라도 극락보전과 명부전 내부는 꼭 살펴보도록 하자. 바로 달성사의 보
물이 담겨져 있기 때문으로 특히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반가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반가상(半
跏像)으로 매우 희소성이 높다.

푸른색의 승려 머리를 선보이며 동자처럼 해맑
은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상은 1565년 나주 웅
점사<熊岾寺, 현재 운흥사(雲興寺)>에서 조성
된 것으로 조성 관련 내용이 조성발원문(13cmX
143cm)에 소상히 나와있다.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3존불처럼 낯선 이곳으
로 흘러들어왔는데, 언제 무슨 경로로 왔는지
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 불상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은 표정 속에
는 눈썹과 가늘게 뜬 눈, 오똑한 코, 붉은 입
술이 담겨져 있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島
)가 획 그어져 있다.
왼쪽 다리는 가부좌(跏趺坐)를 취하고 있고 오
른쪽 다리는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이런 형태
의 불상은 17세기 이전에는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고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우 사실적
으로 묘사되었으며 지방문화재가 아닌 국가 보
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인다.

그가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그를 위해 근래에 특별한 제작된 것으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을 정도 탐이 난다. 그의 좌우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
明尊者)가 밝은 색채를 띄며 서 있다.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 툇마루에 앉아 불만에 잠긴 두 다리를 쉬었다. 툇마루에 식당에서 많
이 볼 수 있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무려 공짜이다. (지금은 없으며 종무소에서 승려가 전통
차를 달여서 제공해줌, 단 그가 종무소 방에 머물고 있을 때에 한함) 그래서 2잔이나 뽑아 마
셨지.
속세에 대한 근심을 잠시 바람에 날리며 툇마루에 앉아있으니 종무소에서 일하던 여인네가 다
가와 말을 건넨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는데 어디서 오셨나면서 과자와 녹차를 권
한다. 뜻밖에 호의에 고마움을 표하며 과자와 녹차를 마셨고 배고픈 마음에 과자를 더 청하니
초코과자를 더 건네준다. 그렇게 간식을 섭취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아쉽지만 작별을
고하고 절을 떠났다.

달성사에 대해서는 운좋게 오래된 불상을 업어온 20세기 초반 사찰, 1번 오면 그만인 그런 정
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절의 호의에 또 오고 싶은 긍정적인 사찰로 인식이 돌변했다. 그래서
얼마 전 봄에도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승려에게 차를 여러 잔 대접 받으며 차담(茶啖)을 주고
받았다.

※ 유달산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① 목포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수서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오송역, 서대전역, 익산역, 광주송정역
  에서 목포행 각종 열차 이용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목포행 고속버스가 40~6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목포행 직행버
  스가 1일 5회 떠난다.
* 고양(백석), 성남, 수원, 안산, 인천, 천안, 세종, 전주, 광주, 여수, 부산(사상), 창원(마
  산)에서 목포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목포역에서 유달산입구(노적봉)까지 도보 12분, 달성사는 약 25분
* 목포종합터미널에서 물 흐르듯 자주 다니는 목포역, 삼학도, 해양대 방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목포역 정류장에서 도보 이동, 또는 노선 굴곡이 심한 2, 60번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
  YMCA나 유달산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60번은 연산동으로 크게 돌아감)

③ 승용차
* 서해안고속도로 → 죽림나들목에서 고하대로 직진 → 삽진고가교 → 북항교차로에서 좌회전
  → 해양대학로 → 유달로 → 달성사입구 → 유달산주차장, 노적봉

★ 유달산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입장료는 공짜, 주차비는 경차 30분에 500원, 중형은 500원, 대형은 1,000원
* 유달산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 노적봉 관광안내소 061-270-8411)
* 달성사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317-1 (유달로 173 ☎ 061-244-1489)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작품, 갓바위 - 천연기념물 500호

  갓바위 입구 포구

유달산과의 짧은 인연을 쿨하게 마무리짓고 갓바위로 가고자 시내로 나왔다. 뱃속을 달래고자
목포역 부근으로 내려와 마땅한 식당을 물색하다가 다양한 종류의 순두부찌개를 내놓는 '수가
정'이란 식당에 눈에 들어와 소고기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곳은 10여 가지의 순
두부찌개를 취급하는데 찌개와 돌솥밥이 같이 나온다. 돌솥에 담긴 밥에 뜨거운 물을 넣어 푹
우린 다음 순두부와 같이 냠냠하는 것으로 그런데로 숟가락을 들만하다.

그렇게 시장한 배를 배불리 달래고 목포역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남항과 하당 사이에
자리한 갓바위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이곳도 엄연한 목포 도심이건만 시골
어촌 풍경이 여전히 진하다. 목포만(木浦灣) 너머로 영산강하구둑을 비롯하여 지역 발전과 돈
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는 대불공단 공장들이 바다 건너로 보이고 바다와 포구에는 갖은
어선들이 조각배처럼 수면 위를 장식하고 있어 평화로운 어촌 풍경을 자아낸다.

버스정류장에서 갓바위로 인도하는 산책로를 들어서면 중간에 갓바위 뒷통수로 오르는 입암산(
立巖山) 산길이 있으며, 직진을 고수하면 나무로 다진 해안산책로(보행교)가 나온다. 이 산책
로는 갓바위를 두 다리로 편하게 구경할 수 있게끔 2008년 4월 10일에 설치된 298m의 길로 동
쪽은 하당신도시 달맞이공원과 이어진다.
밀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1m 정도 육지쪽으로 올라왔다가 썰물이 지면 바닷물을 따라 내려가는
산책로로 바다를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 한다. 보행교에는 야간 조명을 설치하여 통행 편의
는 물론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까지 선사하고 있다.


  갓바위 입구 앞바다(목포만) - 바다 건너는 대불공단

▲  갓바위와 이웃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新安) 해저 유물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발견된 온갖 묵은 보물들이
담긴 이 땅 최초의 해양박물관이다.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 갓바위 서쪽 보행교


  서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서남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입암산 남쪽 바닷가 벼랑에 자리한 갓바위는 대자연이 긴 세월을 두고 빚은 심오한 작품이다. 아직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 자연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손질
되고 있어 몇백 년 이후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자아낼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갓바위는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갓바위란 단순한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움만 더하게 하는 그는 2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
쪽(서쪽) 바위는 모자가 달린 외투나 옷을 껴입은 모습처럼 보여 사오정 시리즈로 유명한 귀머
거리 사오정과 비슷해 보이며 오른쪽(동쪽) 바위는 갓보다는 철모를 쓰고 있는 군인 같다.
예전에는 갓처럼 보였겠지만 그만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모자 달린 옷이나 철모처럼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라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아닐
까 싶지만 저게 모두 순수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
겠는가.

갓바위가 이런 요상한 형태가 된 것은 이곳이 바닷물과 담수가 만나는 곳으로 암석 표면에 파
도가 치거나 안개가 끼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수
분에 들어있던 실리카 성분이 침전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
모양의 경질부와 아랫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風化穴)이 형성된 것이다. 파도와 해
류, 바다 바람에 의해 바위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장으로 다른 풍화혈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
도 있다.

이곳을 물든 저녁 노을과 갓바위와 해안 벼랑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무척 아름다워 예로부터
목포8경의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로 꼽혔으며 파도와 바닷바람에 의해 바위가 이렇게도 성
형이 될 수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현장으로 2009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목포9경의 일원임)


  정면에서 바라본 갓바위의 위엄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전설 보따리가 꼭 담겨져 있
기 마련이다.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갓바위 역시 그 예외는 아닌데 그들이 붙여놓은 전설
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가 수염을 태워먹던 어느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
다. 그는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는데 살림살이는 늘 궁핍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매
우 지극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소금 장사로는 생계가 어려워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이 돈은 주지도 않고 부려먹
기만 하는지라 1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집에 와보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어 방문을 열어
보니 글쎄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미 식어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이 집을 비운 사이 그는 숨줄
을 놓은 것이었다.
청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양지바른 곳에 묘자리를 잡고 관을 모시고 가던 중,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설은 그냥 그렇
게만 나와있음) 청년은 다시 한번 불효를 통회(痛悔)하며 울부짖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고 자책하며 평생 갓을 쓰고 관이 빠진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후 그곳에 2개의 바위
가 불쑥 올라왔는데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불렀다.

다른 전설로는 부처가 나한(羅漢)을 이끌고 영산강을 건너 이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모르
고 놓고 간 삿갓이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갓바위 대신 중바위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앞 전설이 효도를 소재로 한 것이라면 뒷 전설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으로 효행사상을 장려하
고자 갓바위를 이용한 선비들과 이곳에 오지도 않은 부처와 나한을 내세워 바위를 포교의 소재
물로 삼은 승려들의 투철한 영업 정신이 교차된 현장이다.

바위가 해변 벼랑에 있다보니 육지에서는 그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배를
타고 봐야 했었지. 바로 그런 고충을 해결하고자 2008년 4월 갓바위 주위에 해안보행교를 만들
어 두 다리로 언제든 갓바위를 만날 수 있게 배려했으며 조명시설까지 설치해 야경까지 덤으로
제공한다.


  갓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 바다에 돌출된 모자 끝부분을 손으로 만지면
가루처럼 뚝 부러질 것만 같다. 정말 만져보고 싶은데 위치가 저러니
이렇게 바라보는 선에서 그 미련을 접어야 된다.

▲  아랫도리가 긁힌 갓바위 동쪽 벼랑 (윗쪽은 입암산 전망대)
이들도 갓바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저 모양이 되었다. 마치 사람들이
도구를 이용해 긁은 모습처럼 말이다.


  갓바위 바로 앞 보행교

  갓바위 동쪽에 둥지를 튼 하당신도시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주변

  갓바위 뒷통수에 펼쳐진 입암산 산길

  입암산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갓바위 뒤쪽은 해안 언덕으로 목포자연사박물관 뒷쪽에 누운 입암산의 일부이다. 그 언덕에는
산책로가 닦여져 있는데 갓바위 뒷통수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해조음을 듣고 자라난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우거져 있고 그 산을 넘으면 하당 달맞이공원으로 이어진다. 갓바위에 왔다면 바
다와 바위만 볼 것이 아니라 입암산 산길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이처럼 갓바위는 산과 바위, 바다, 3박자가 깔끔하게 어우러진 경승지이자 유달산과 자웅을 겨
루는 목포 제일의 명소이다.

갓바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찬란했던 햇님의 기운도 슬슬 망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땅꺼
미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목포에서의 볼일도 그런데로 다 마쳤으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와
야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더 머물며 인근 지역까지 살펴보고 싶지만 그럴 준비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하여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여기서 가까운 목포종합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수
원행 마지막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9월 초 목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목포 갓바위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목포역 건너편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바위(갓바위) 하차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 정류장에서 목포시내버스 112번을 타고 우미파크빌5차에
  서 하차, 여기서 해안산책로나 달맞이공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0분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나 서쪽 버스터미널 후문 정류장에서 900번(900번A) 좌석
  버스를 타고 갓바위터널 하차, 갓바위터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5분

*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통행가능시간
- 하절기 5시~24시 (동절기는 23시까지)
- 태풍과 호우, 폭설, 안개 등의 기상악화 시에는 접근 통제

* 갓바위 서쪽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061-270-20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자연사박
  물관(☎ 061-270-8367, ☞ 홈페이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061-270-8480, ☞ 홈페이지),
  남농기념관(☎ 061-276-0313), 목포문학관(☎ 061-270-84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문화예
  술회관(☎ 061-270-8484, 홈페이지 보기) 등의 박물관과 전시/예술공간이 몰려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갓바위문화타운’이라 부르는데, 갓바위와 이들 몇 개를 같이 묶어서
  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특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땅 최초의 해양
  문화재 박물관으로 신안 서해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갓바위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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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9월 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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