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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9.12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문경 운달산 김룡사



'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

▲  문경 김룡사
 



 

여름 제국이 서서히 내리막을 보이던 8월의 끝 무렵. 문경(聞慶)에 있는 운달산 김룡사를
찾았다.
아침이 열리기가 무섭게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점촌, 상주행 직행버스에 몸
을 실었다. 허나 아침부터 차가 오지게 막혀 무려 1시간이나 늦게 점촌(店村)에 도착했다.
그래서 김룡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간만에 차이로 놓쳤고, 다음 버스는 무려 2시간 이후에
나 있다.
하여 다른 곳을 급히 물색했으나 딱히 땡기는 대체 장소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에도 시간이 애매하여 그냥 계획대로 다음 버스를 타고 김룡사로 들어가기로 했다.

졸지에 2시간 가까운 잉여 시간이 생겨버려 무엇을 할까 궁리했으나 답은 역시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점촌시내를 간단히 둘러보는 것이다. 시내에 마땅한 명소가 없어
서 점촌전통시장과 점촌역 등 시내를 돌며 중간에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도 하는 등, 억
지로 시간을 죽여가며 시내 북부에 자리한 점촌시내버스터미널로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니
김룡사행 좌석버스가 타는 곳으로 다가와 활짝 입을 연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터미널을 출발했다. 우리의 버스는
산양과 산북을 거쳐 김룡사까지 곧게 가더니 갑자기 산골로 비집고 들어가 석봉리 지역까
지 강제투어를 시켜주어 점촌 출발 50분 만에 김룡사 종점에 이르렀다.

김룡사 종점에는 여느 유명 사찰과 마찬가지로 식당들이 가득 진을 치고 있는데, 절을 목
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 같은 그들을 지나치면 그림 같은 숲길이 펼쳐지면서 속세(俗
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소독시켜준다.


▲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  김룡사 숲길, 해우소

▲  녹음(綠陰)에 잠긴 김룡사 숲길

김룡사 주차장(종점)에서 김룡사로 이어지는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홍하문 현판을 내건 일주
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일주문 천정에 걸린 '雲達山金龍寺(운달산김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로 명성이 높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으로 문 주변에는 오래된 비석 2기 등, 비석 3기가
있다. (비석 내용은 모르겠음)


▲  홍하문(紅霞門)이라 불리는 김룡사 일주문(一柱門)과
김규진이 남긴 '운달산 김룡사' 현판

▲  일주문에서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여름 제국의 강렬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김룡사입구 3거
리가 나온다. 여기서 김룡사는 오른쪽 전나무
숲길로 들어가면 되며, 직진하면 운달계곡(김
룡사계곡) 상류와 대성암, 양진암 등의 암자,
운달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김룡사 입구에 차곡차곡 구축된 돌탑

요즘 전국적으로 둘레길과 온갖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하면서 이곳 역시 그 유행에 호응하여
'김룡사 둘레길'을 천하에 내놓았다.
김룡사에서 대성암과 화장암, 양진암을 경유해
다시 김룡사로 돌아오는 2.6km의 산길로 그야
말로 김룡사와 산내 암자 순환 코스이다. 대성
암까지는 길이 널널하며 양진암과 화장암은 산
을 좀 타야 되지만 둘레길에 걸맞게 초급 수준
이다.

김룡사 경내 직전에는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고 있다. 비록 긴 거리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며 김룡사에 대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한낮에도 햇님을 가려 어두울 정도로 그 숲길
을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보장문이 마중을
한다.


◀  김룡사를 목전에 둔 싱그러운 전나무숲길


▲  금강문(金剛門)의 역할을 하는 보장문(寶藏門)

솟을대문처럼 생긴 보장문은 김룡사의 2번째 문이다. 하지만 굳이 그의 밑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다. 바로 옆에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보장문은 금강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60년대에 소실된 것을 옛 건물을 축소하여 중건했
다. 문짝에는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들의 검문을 통과하면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나오며, 그 너머로 김룡사 경내가 층층이 펼쳐진다.


▲  300년 이상 묵은 김룡사 해우소(解憂所)

보장문을 들어서 오른쪽을 보면 고색에 깃든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모습도 단촐하고 요상한
냄새까지 약간 풍기기도 하는데, 그 건물은 300년 이상 김룡사 사람들의 생리적 볼일을 묵묵
히 받아주던 해우소(뒷간)이다.
사진으로 보면 1층 같지만 엄연한 2층으로 윗층에는 볼일을 보는 공간을 남녀 구분하여 만들
었고, 밑층에는 생리적 볼일이 생산한 쾌쾌묵은 물질이 쌓여 있다. 이들 물질은 절에서 퇴비
로 사용했으나,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물질 공급도 여의치 않아 매우 한가한 처
지가 되었다.
그래도 김룡사에서 대웅전, 공루 다음으로 늙은 건물이고 사찰 해우소의 대명사로 통하는 순
천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 뒷간이라 문화유산급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허나 아직까지 그 흔한 지방문화재 등급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다
소 껄끄럽고 예민한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 그런 것일까? 뒷간에 대한 이 땅의 사람들의 생각
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뒷간의 역사와 옛 구조를 조사하는 학자, 교수도 거의
없다고 함)


▲  주차장과 경내 밑부분 (보제루와 천왕문)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 천왕문(天王門)


김룡사는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층층이 구축하고 등급에 맞게 건물
을 두었다. 석축의 높이는 2~3m 정도로 주차장에서 1단 석축을 오르면 범종각과 천왕문이며,
2단 석축을 오르면 보제루 밑도리, 그리고 3단 석축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 중심에 이른다.

▲  하얀 피부를 드러낸 석조 사천왕상
원래 나무로 만든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그 큰 것을 누가 훔쳐가서 돌로 다시
만들었다. 피부들이 너무 흰색이라 마치 하얀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모습 같은데, 끝없이 몰려드는 속세의 분진가루 같은
기운을 막느라 그리 된 모양이다.

▲  운달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연꽃 석조(石槽)

절에 왔으니 약수 한 모금은 마셔야 되겠지. 굳이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경내에 샘터가 있으
면 꼭 바가지를 깨워 마신다. 절의 인심과 산의 넉넉한 마음도 읽어볼 겸 말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과 오장육
부가 싹 시원해진다.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물빛이 우유빛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
다. 그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잠
시 김룡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운달산(雲達山) 남쪽 자락에 안긴 김룡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김천 직지사(直指寺)의 말사
(末寺)이다.
588년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해 운봉사(雲峰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무려 1,100년 동안 마땅한 사적(事績)도
전하는 것이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품게 한다. 1624년에 혜총선사(慧總禪師)
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절의 첫 중창 기록이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가 17세기 중반에 조성
된 대웅전과 삼장탱화 정도라 빠르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늦으면 1624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진다.

혜총이 그의 제자인 광제(廣濟)와 묘정(妙渟), 수헌(守軒)과 함께 1년 동안 공을 들여 선방,
승방, 법당 등을 완성해 혜총도장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1643년 여름, 화재로 말끔히 소실된
것을 1649년에 의윤(義允)과 무진(無盡), 태휴(太休) 등이 중수했으며, 계속 경내를 확장하여
왜정(倭政)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로 성장했다.
허나 워낙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이라 교통이 불편하여 말사 가운데 하나인 김천 직지
사에게 그 감투를 넘기고 그의 그늘로 들어갔다. 1940년에는 요사와 범종각을 중수했으며, 이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 이름이 운봉사에서 김룡사로 바뀐 것은 조선 후기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봉사 입구인 용소(龍沼
)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지극 정성으로 불공을 올렸는데, 용소에 살던 용왕(龍王)
이 그 불공에 감동을 먹어 딸을 그에게 시집 보냈다. (또는 김씨가 죄를 짓고 운달산에 숨어
살다가 신의 딸을 만나 혼인했다고 함)
그들 부부는 아들을 낳자 이름을 '김용(金龍)'이라 했으며, 나날이 집안이 번창하니 지역 사
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者)라 불렀다. 또한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던지 마을 이름도 그의 이
름을 따서 김용리라 했으며, 절 이름 또한 김용사로 갈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지원이 상당
하여 그 은혜를 기리고자 절 이름까지 그의 이름에 맞춘 모양이다.
이 전설 외에도 금선대(金仙臺)의 '금'과 용소폭포의 '용'을 따 금룡사(김룡사)로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해온다.

비록 31본산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왕년에는 48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
은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전, 금륜전, 명부전, 보제루, 명부전, 응진전 등 무려 30여 동(부속
암자 포함)을 지니고 있어 여전히 큰 규모를 자랑한다.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大成庵)과 화장
암(華藏庵), 양진암(養眞庵), 금선대 등 4곳이 있는데, 이중 양진암은 1658년에 지어졌고, 나
머지는 18~19세기에 세워졌다. 이들 암자는 모두 비구니 도량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640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와 '사료수집(史料
蒐集, 국가등록문화재 635호)','대본산 김룡사 본말사 연혁 원고(국가등록문화재 636호)'를
위시해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제상(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85호), 대웅전, 영산회상도, 석
불입상, 3층석탑, 양진암 신중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쇠북과 삼장탱화,
해우소, 노주석, 업경대, 지장탱, 시왕탱 등의 오래된 유물이 있다.
또한 1670년에 사인비구(思印比丘)가 만든 동종(김룡사 동종, 보물 11-2호)도 있었으나 1990
년대 중반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겨 지금은 없다.

속세의 기운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첩첩한 산골에 묻혀있으며, 절을 둘러싼 숲이 매
우 삼삼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 풍경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소리의 전부일 정도로 적막
하기 그지 없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내음을 누리기에 아주 좋다. 또한 비구니 절집이라 경
내도 참 정갈하고 차분하며, 절을 둘러싼 풍경 또한 일품이라 문경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끝으로 김룡사에는 대승사(大乘寺)의 불을 껐다는 동자승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역
시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지나치게 영리한 동자승과 그를 의심하는 어른 승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언젠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절의 요지경 갈등이나 일종의 시기심을 전설
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듯 싶다.
 
김룡사가 꽤 잘나가던 시절(고려 때라고 함)에 영리하게 생긴 동자승이 있었다. 어느 날 주지
승이 저녁에 먹을 상추를 씻어 오라고 시켰다. 하여 계곡으로 내려가 상추를 씻고 있으려니
난데없이 동쪽 산 너머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을 살펴보니 글쎄 산너머
에 있는 대승사에서 불이 난 것이 아니던가.
대승사 승려들은 불을 잡기는커녕, 불에게 단단히 희롱을 당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어 자칫
절 하나가 화마(火魔)에게 통째로 날라갈 판이었다.

동자승은 염불을 외운 다음 물을 소쿠리에 담아 산 너머를 향해 열심히 퍼부었다. 그 물은 동
자승의 주문에 힘입어 대승사까지 태풍의 기세로 날라갔고, 한참 만에 간신히 불길이 잡혔다.
그제서야 동자승은 다시 상추를 마저 씻으려고 했으나 소쿠리로 물을 정신없이 퍼붓는 과정에
서 상추까지 죄다 날라가 거의 몇 잎밖에 남지 않았다. 하여 주지승에게 혼날까봐 걱정이 되
었으나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서둘러 절로 돌아갔다.
한편 주지승은 그를 기다리다가 지쳐 뚜껑이 제대로 폭발한 상태였다. 게다가 배도 무지 고픈
상태였으니 오죽했으랴. 그런데 동자승이 몇 잎 남지 않은 상추를 들고 헐레벌떡 왔으니 안그
래도 폭발한 뚜껑, 더 폭발하여
'왜 늦게 왔냐. 상추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역정을 내며 그의 종아리를 때렸다, 동자승은 앞
서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매를 맞고 말았다.

그날 밤, 동자승 옆에 누운 승려가 무슨 일로 매를 맞았냐며 물었다. 그래서 낮에 있던 일을
설명해주었는데, 솔직히 누가 그걸 믿겠는가? 그 말을 들은 승려는 웃기지 말라며 비웃었고,
자기 말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듯싶어 이튿날 새벽, 미련 없이 절을 떠나고 말았다.

동자승이 사라진 것을 안 승려들은 그가 대승사의 불을 껐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두고 서
로 수근거리다가 승려 하나가 대승사에 직접 갔다오기로 했다.
가보니 전날 불이 났다고 했다. 불을 끄지 못해 애태우던 중 어디선가 상추와 함께 물줄기가
날라와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룡사 승려들은 동자승이 비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를 찬양했다. 허나 한번 떠난 동자승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김룡사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김용길 372, ☎ 054-552-7006)



 

♠  김룡사 대웅전 주변

▲  경내 중심부를 가리고 앉은 콧대 높은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건물로 교육이나 설법(說法)을 하는 강당(講堂)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보통 1층 가운데 칸에 법당 등 경내 중심부로 인도하는 통로를 내나 여
기서는 모두 틀어막고 건물 옆구리에 계단을 내어 법당으로 가도록 했다.
건물이 워낙 장대한 모습이라 절 중심부를 완전히 가리고 앉았는데, 이는 경내 중심부를 외부
에 노출시키지 않고자 그리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흔히 보이는 가람 형태이다.


▲  김룡사의 중심부, 대웅전 주변

보제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 중심부로 들어섰다. 뜨락을 중심으로 정면에 법당인 대웅전이 남
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웅전 맞은편에는 보제루, 뜨락 우측에는 설선당, 좌측에는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解雲庵)이 있다.


▲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을 지닌 설선당(設禪堂, 경흥강원)

대웅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은 예전 향응각(凝香閣)으로 경흥강원(慶興講院)이라 불리
기도 한다.
이 건물은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70평짜리 온돌방을 가지고 있는데, 장판지만 무려 120
장이 소요될 정도로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이자 최대의 강원(講院) 건물로 위엄이 자자하다. 게
다가 온돌을 때는 아궁이 또한 장대하여 어린이가 서서 들어갈 정도로 크다.
김룡사의 왕년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으며, 큰 승려
로 추앙을 받는 성철(性徹, 1912~1993)이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흥강원
이란 현판이 측면에 걸려 있으며, 강당과 숙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조각이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露柱石)

▲  단촐한 모습의 동쪽 노주석

뜨락 남쪽에는 이쁘게 조각된 돌기둥 2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들의 정체는 노주석
으로 야간에 불을 피워 그 위에 올려놓거나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용도로 쓰였다.
절에 흔한 석등(石燈)과 서원이나 향교의 정료대(庭燎臺)와 성격이 비슷하며, 화광대(火光臺)
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김룡사 노주석은 서로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데, 다른 모습 만큼이나 서로 태어난 시기도 다르
다. 조각이 유난히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은 1940년에 설선당 중수 기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
이 176cm, 불을 피우던 꼭대기 폭은 75cm로 대웅전을 향한 피부면에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
씨 10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ㅇㅇ十五年 庚辰十月日(경진십월일)'로 앞줄 2자가 고의적으
로 뭉개져 있었다.

고약했던 왜정 때 조성된 탓에 혹시 왜왕(倭王
)의 연호가 쓰이지 않았을까 싶어 1940년 경진
년을 찾아보니 왜왕 소화(昭和) 15년이 있었다.
즉 그때 조성된 것이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입에 담기도 구역질 나는 그 연호를 지우면서
일종의 옥에 티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점만 뺀다면 이 노주석은 제법 휼륭한 작
품이다. 연꽃봉오리가 늘씬하게 깃들여져 있고
각 면마다 조그만 연꽃잎이 앙증맞게 있다. 그
리고 밑에는 '亞' 무늬가 있다.
동쪽 노주석은 높이 179.5cm, 꼭대기 폭 75cm
로 돌기둥 윗쪽에 구름 무늬가 있다. 그는 강
희(康熙) 51년, 1712년(임진년) 3월에 조성된
것으로 서쪽 노주석보다 단촐한 모습이다.

노주석은 김룡사 외에 대승사, 봉암사(鳳巖寺)
등 문경 지역 고찰(古刹)에서 유난히 많이 나
타나고 있는데, 노주석이 있는 대신 탑이 없는
점도 특징이다. 이는 대승사에서 시작된 문경
지역 사찰만의 개성이라고 보면 될 듯 싶다.

▲  서쪽 노주석에 새겨진 글씨들
왜왕 연호가 빡빡 지워져 있다.


▲  김룡사 대웅전(大雄殿)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53호

남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2중으로 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이 건물의 6할을 차지할 정도로 육중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건물의 규모도 꽤 크다.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기단 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을 세
워 높이가 하나 같이 일정하지가 않다. 허나 기둥 모두 대웅전의 중심 쪽으로 약간씩 기울어
져 있어 안정감을 주며, 커다란 지붕 처마를 받치고자 공포(空包)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
하게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비록 영가(靈駕)의 49재 행사로 대웅전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천정에는 천녀(天女), 비
천상(飛天像) 등 다양한 존재들이 그려져 있으며, 1644년에 조성된 삼장탱화가 좌측 벽에 걸
려있고, 성균대사(省均大師)가 그린 영산회상도가 삼세불좌상(석가여래불, 아미타불, 약사불)
의 뒤를 든든히 받쳐준다.
삼세불좌상은 1649년에 설잠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9년에 경북도청에 이들 삼세
불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면서 불상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을 살펴본 결과,
1658년에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아직 삼세불은 비지정문화재임)


▲  대웅전 삼세불좌상과 영산회상도(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24호)

영산회상도는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비단 바탕에 그려진 탱화로 높이 5.2
m, 너비 4.3m 규모인데, 그림 가운데에 석가여래가 크게 그려져 있고, 그를 중심으로 앞에는
4위의 보살이 일렬로 있으며, 좌우로는 8위의 보살이 서 있다. 그림 상단에는 가섭존자와 아
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와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포함한 사자관을 쓴 건달파, 그
리고 사자관을 쓴 야차와 4명의 금강이 있으며, 하단에는 비파, 검, 용과 여의주, 탑 등의 연
장을 쥐어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탱화는 제작 당시부터 이곳 대웅전 삼세불좌상의 후불벽에 꾸준히 있었다. 화기(畵記) 부
분이 훼손되어 제작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룡사사료수집'에 의하면, 1648년에 제작된 불화
들이 낡아 1803년에 적지 않은 탱화를 새로 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때 사불산 화승
홍안(弘眼)과 신겸(愼謙)을 중심으로 18명이 탱화 제작에 참여했다.

영산회상도에 나타난 사불산화파의 특징을 살펴보면, 측면향을 한 보살의 얼굴형은 타원형에
눈 부분은 들어가고 이마와 볼을 튀어나오게 표현했고, 채색은 홍색과 녹색을 선명하게 대비
되도록 진채(珍菜)를 사용했으며, 보살과 사천왕 등의 장신구와 지물은 돋음기법에 금을 칠했
다. 특히 존상 구성에서 지장보살이 권속으로 표현된 점이 가장 주목된다. 지장보살은 아미타
불회도에서 8대 보살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나 19세기 전반 사불산화승들은 지장보
살을 주요 권속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김룡사 영산회상도는 조선 후기 후불도 양식을 고수하
는 한편 화면 구성과 존상 구성 및 상호 표현, 채색법 등에서 사불산화파의 특징적인 도상과
화풍이 잘 드러난 불화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2018년 12월 뒤늦게나마 지방문화재에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측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종무소와 선방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


▲  괘불(영산회괘불도)이 담긴 길쭉한 괘불함 (대웅전 뒷쪽)

1703년에 제작된 김룡사 영산회괘불도는 국가 보물 1640호로 지정된 비싼 몸이다. 비싼 만큼
이나 만나기도 여간 힘들지가 않아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 때만 반짝 얼굴을 드러낼 뿐이며,
대부분의 날을 괘불함 속에서 지낸다. 괘불이 워낙 큰 그림이라 그의 보금자리 또한 길쭉한데,
기분 같아서는 그 함을 열어 괘불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만 그럴 위치가 되지 못한다.

괘불의 신상이 적힌 화기에는 제작시기와 기원문, 시주자 5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김
룡사 대신 운봉사로 나와있어 18세기까지 운봉사로 불렸음을 알려준다.


▲  빛바랜 쇠북 <청동금고(靑銅金鼓)>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밥 시간과 예불 시간, 기타 주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쓰인다.



 

♠  김룡사 마무리

▲  김룡사의 창고인 공루(空樓)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98호

해운암 뒷쪽에는 고색이 제법 느껴지는 2층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그는 절의 살림살이와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인 공루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누각 형태를 취하고 있다. 1624년에 지
어져 여러 번 중건을 거쳤는데, 2층에는 1칸, 1층은 1칸, 2칸, 1칸 규모로 방이 나뉘어져 있
으며, 원래 자리를 지키면서 절 창고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 가치가 있음에도 오랫
동안 비지정문화재에 서러움을 간직하며 살다가 2022년 6월에 이르러 경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얻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김룡사에는 특이한 늙은 존재들이 많다. 앞서 해우소도 그렇고, 노주석도, 그리고
창고까지. 역시 김룡사가 예사롭지 않은 큰 절임을 귀뜀해준다.


▲  앞에서 바라본 공루

▲  김룡사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보금
자리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하며
석가여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해 3존
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작고 귀엽다.
16나한 또한 다들 제각각의 모습으로 옷과 얼
굴, 머리스타일, 포즈가 모두 틀리며, 그들 뒤
로 16나한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좌우 모서리에는 신중도와 독성도가 걸
려 있는데, 독성도(獨聖圖) 같은 경우 그 주인
공이 나한의 일원인 나반존자(那畔尊者)이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  응진전 석가3존상

▲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12호

응진전 식구 중 16나한상과 제석천 2구, 사자(使者) 2구가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6나한상은 가부좌(跏趺坐)를 튼 모습으로 각자의 표정, 옷차림, 연장을 취하고 있으며, 보관
(寶冠)을 눌러쓰고 홀을 쥐어든 제석천 2구와 두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든 사자 2구가 그 주변
에 자리한다. 이들은 1709년에 조각승 수연(守衍) 등이 조성한 것으로 수연의 스승인 승호파(
勝湖派) 양식에 기반한 17세기 말~18세기 초기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  김용사 금륜전(金輪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금륜전이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  금륜전 식구들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금륜전이란 이름답게 칠성(치성광여래) 식구를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산신 식구,
오른쪽에는 혼자 유유자적하는 독성이 자리해 있다. 독성탱 같은 경우
앞서 응진전에 있음에도 이곳에도 별도의 독성탱을 두었다.

▲  극락전(極樂殿)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보금자리로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

▲  상선원(上禪院)

상선원은 이름 그대로 윗 선원으로 성철 등 많은 선승(禪僧)들이 머물던 곳이다. 허나 지금은
요사로 쓰이고 있으며, 고승(高僧)들의 진영(眞影) 35점과 1830년에 조성된 시왕탱, 1858년에
조성된 지장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  김룡사 경내에서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하얀 들꽃이 가득해 마치 소금이 뿌려진 듯 하다.

▲  소나무숲에 자리한 김룡사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67호

경내 동쪽 산자락에는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숨겨져 있다. 경내에서 그곳까지는 산길이 살짝
이어져 있는데, 3층석탑은 산길에서 다소 떨어진(그래봐야 길에서 다 보임) 소나무숲 바로 앞
에 외로이 떨어져 있다.

이 탑은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체 높이는 2.85m이다. 바닥돌과 1층 기단, 3층 탑신(塔身)
,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으로 탑과 석불입상을 경내 중심이 아닌 경내 뒷쪽 구석
에 둔 것은 그들이 꼴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단죄하고 운달산의 촉맥(
促脈)을 보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히 그것
뿐이다.
한때 이들을 천왕문 앞으로 옮기기도 했으나 절의 전통을 지키고자 1989년 10월에 다시 원위
치시켰다.


▲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계단 (사진 중앙에 석불이 있음)

▲  소나무숲에 자리한 석불입상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55호

김룡사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석불입상이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8각형 기단 위에 연화
대좌를 깔고 그 위에 2.27m의 석불을 올렸는데, 머리에 주름선이 많이 있어 나발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평온한 모습으로 눈썹이 구부러져 있고, 눈은 가늘게 떠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
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입은 살짝 다물고 있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무엇이든
들을 자세가 되어 있다.
몸통에는 얕은 새김이 이리저리 주름선을 자아내고 있는데, 두 손에 약합 같은 것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려준다. 그의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에 선이 거의 지워졌다.

그는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거의 민불(民佛) 스타일의 석불이다. 3층석탑과 함께 비보풍수
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인데, 절 자리가 와우형혈(臥牛形穴)이라 그 이름에 걸맞게 소를 모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 당시 유행했던 약사신앙을 내세워 이곳에 석불입상(석조약사여래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까? 31본산에서 밀려난 것 외에는 절에 딱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비보풍수
의 덕인지 그냥 운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보장문 앞에 펼쳐진 전나무숲길

이렇게 김룡사를 둘러보니 1시간 반 정도가 정말 훌쩍 가버렸다. 나름 꼼꼼하게 봤다고 여겼
으나 나중에 보니 명부전(冥府殿)을 빼먹었다. 거기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지장3존상이
있는데, 명부전이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보니 보기 좋게 놓친 것이다. 영산회괘불도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적이야 원래부터 만나기 어렵고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마음을 비웠지만 명부전은 늘 열려있는 공간이라 정말 곡소리를 내고 싶은 심정이다.


▲  조촐한 모습의 김룡사계곡(운달계곡)

▲  김룡사를 뒤로하며 (김룡사 숲길)

김룡사를 나와서 부속암자도 둘러보려고 했으나 버스 시간이 임박해 그만 발길을 돌렸다. 여
기서 버스 하나 놓치면 2시간 이상 강제 대기를 해야 되고 그리되면 이후 일정에 차질이 생긴
다, (이후에 들릴 곳이 있었음)
그래서 대성암 등의 부속암자는 쿨하게 포기하고 절입구에 조촐하게 펼쳐진 김룡사계곡(운달
계곡)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쉰 다음, 자리를 떴다. 명부전 목조지장3존상도 놓치고 부속 암자
들도 싹 놓쳤으니 결국 다시 와야 될 명분을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과 또 인연이 닿을지
는 솔직히 장담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나를 못참게 하는 미답처(未踏處)들이 천하에 수두룩하
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 김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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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8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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