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임봉'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7.16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2. 2019.09.24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3. 2018.10.05 서울의 동북쪽 지붕 ~ 수락산 벽운동계곡, 귀임봉 나들이 (염불사, 황자굴)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 초여름 산사 나들이, 수락산 학림사 ~~~~~

▲  학림사 경내

▲  학림사 석불좌상

▲  수락산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슬슬 고개를 들던 7월의 첫 무렵, 서울의 동북쪽 지붕인 수락
산을 찾았다.
수락산(水落山, 638m)은 그의 그늘인 상계1동에 8년을 살면서 수없이 안겼던 뫼로 지금은
도봉산(道峯山) 그늘인 도봉동에 살고 있지만 가끔식 중랑천(中浪川)을 건너 수락산의 품
을 찾는 편이다.
수락산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학림사로 올라가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의 북쪽 종점인 당고개역에서 상계3,4동 달동네를 가로질러 수락산의 품으로 들어섰
는데, 길이 좀 복잡하긴 해도 햇갈릴만 하면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니 헤맬 염려는
거의 없다.

달동네를 벗어나니 여름 제국(帝國)의 은혜로 연두연두하게 익은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
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다.


▲  녹음에 잠긴 학림사 가는 길

▲  학림사 200m 직전 (학림사 부도 앞)


 

♠  학림사 입문 (부도와 석불좌상)

▲  학림사 부도(浮屠)

숲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발을 잠시 쉴 수 있는 나무 벤치와 수락산 안내도, 그리고 늙은 티
가 풍기는 부도(승탑) 2기가 마중을 한다.

이들 부도는 학림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다정함이 물씬 풍기는
부부처럼 다가온다. 왼쪽에 조금 평퍼짐한 부도는 남편, 오른쪽에 홀쭉한 부도는 아내, 그들
이 나에게 기념촬영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대추알 모양의 길쭉한 탑을 얹히
고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누구의 부도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중 1기에 '상궁(尙宮)~
' 명문이 있어 학림사에서 여생을 마친 궁궐 상궁의 부도임을 귀뜀해준다. 부도는 원래 경내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부도에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자욱해 중후한 멋을 풍긴다.

▲  나무 벤치와 부도

▲  부도의 뒷모습


▲  학림사 약사전(藥師殿)

부도를 지나 학림사 안내문에 이르면 오른쪽에 약사전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안내문 옆
높은 곳에 담장을 두르고 들어앉은 약사전에는 학림사에서 자랑하는 오랜 보물이자 영험하기
로 이름난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해온 약사전은 모두 경내에 있었다. 허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경내로 들어서
는 길목에 세워두어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먼저 찾게 하였으니 그만큼 약사불이 학림사의 간
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쓰인 현판을 보니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힘이 넘쳐보이는데 '藥(약)'자가 '茶(다)'로 보인다. 건물 주변
으로는 담장이 빙 둘러져 있으며 건물 앞에는 석등 1기가 멀뚱히 서 있다.


▲  학림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약사전의 주인장인 석불좌상은 키가 불과 77cm(어깨 너비 53cm)에 불과한 아주 왜소한 석불이
다. 신체 비례가 너무 떨어져 얼굴 높이가 신체의 거의 2/5에 이를 지경이며, 석불이 앉아있
은 연화대좌(蓮花臺座)는 높이 42cm로 석불보다 덩치가 더 크다. 연꽃이 위로 향한 앙련(仰蓮
)과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대좌를 화사하게 꾸며주고 있는데, 자신보다 큰 대좌 위에 앉
은 모습이 마치 조그만 아이가 커다란 의자에 걸터앉은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석불
은 거의 네모난 얼굴로 두 눈은 살짝 감겨져
있고 코는 깎여나가 윤곽만 남아있다. 입술에
는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중생의 소망
을 모두 들으려는 듯, 커다란 두 귀를 지녔다.

목은 두꺼워서 어깨와 단단히 붙었고, 가슴 앞
에 모은 그의 손에는 조그만 약합이 들려져 있
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배꼽
밑 아랫도리는 보이지가 않는데, 오래전에 사
라진 것으로 여겨지며, 그 모습을 통해 아마도
입상(立像)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림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옆에서 바라본 석불좌상과 대좌


▲  학림사 경내 직전 (오른쪽 계단은 용굴암, 수락산 정상 방면)


덕릉고개 너머에 있는 흥국사(☞ 관련글 보러가기)가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좀 유명하다면
학림사는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명성이 조금 자자하다.
학림사란 이름은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이른바 학지포란(鶴之抱卵)의 지
세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런 지세에는 무거운 돌로 만든 탑이나 석물은 가급적 피해
야 된다는데 근래에 3층석탑과 5층석탑, 석불 등을 잔뜩 지어놓아 자칫 알이 깨져 탈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671년에 원효대사(元曉大
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8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순항(金淳
恒)이 쓴 '학림암중수기(鶴林庵重修記)'에
'절의 내력을 적은 문서가 모두 사라져 절을 창건한 이와 절의 사적(事蹟)을 알지 못한다'

였으니 원효대사의 창건설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나옹화상 혜근(懶
翁和尙 慧勤, 1320~1376)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학림암중수기에는 언급조차 없다.

중수기에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는 건 16세기 이후로 임진왜란 시절인 1597년에 절이 소실
되었다고 한다.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터만 남은 이곳에 법당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
켜 세웠으며, 1780년에 최백(崔伯), 궤징(軌澄) 두 승려가 중수하고 1830년에 다시 손질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문 닫기 직전에 이르자 1880년 영상(景惺), 경선(慶船) 두 승려가 나서
절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허나 돈이 한 푼도 없어 애태우다가 마침 판관 하도일(判官 河道一)
이 절을 찾아오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절의 사정을 전해들은 하도일은 서울로 돌아가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학림사 중수를 건의했
고 이에 황후는 천금의 하사금을 지원했다. 그 돈으로 중수가 마무리되자 단청은 찬란하여 빛
을 발했다고 하며, 부처의 성전은 의연하게 자리잡았다고 중수기에는 적고 있다.

1918년 4월 주지 금운(錦雲)이 중수를 했는데 승려 연응(淵凝)이 '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
鶴林庵大房與各殿閣重修記)'에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해 작
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報施)해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의 귀감이 될만하다'
고 기록했으니
중수 이전 절의 상태가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과 지척이라 매년 봄과 가을 제사 때마다 많은 제물을 부담
했다. 심지어는 절을 묘역에 포함시키는 등 그 폐해가 컸다고 하며, 1927년에는 도정궁(都正
宮) 소유가 되면서 절을 찾는 중생이 줄어 수입이 감소하기도 했다.

흥국사처럼 왕실의 원찰(願刹)은 아니나 궁궐 상궁들이 자주 드나들며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
고 퇴직하여 오갈 데 없는 상궁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6.25 때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어 다시 쇠퇴의 늪에 빠졌으나 1985년 전각들을 개축하고 대
웅전, 오백나한전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4년에 노원역 부근에 7층 규모의 불교회관을 지어
올리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선불당, 청학루, 약사전, 삼성각, 오백나한전 등 9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신불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
와 석불좌상,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 지방문화재 3점이 있다. 이중 괘불(掛佛
)은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어려워 아예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부도 2기 등의 비지정문화재가 추가로 전하고 있다.

학이 알을 품은 지세라 그런지 포근함이 느껴지며, 비록 시내와 가깝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
선듯 산사(山寺)의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산1
(덕릉로129가길 241 ☎ 02-936-1700)


▲  학림사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
계곡과 나란히 한 산길을 1km 오르면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
용굴암(龍窟庵)이 나온다.


 

♠  학림사 경내 둘러보기

▲  학림사 해탈문(解脫門)과 108계단

약사전을 지나 100m 정도 가면 경내로 인도하는 108계단 앞에 이른다. 계단 중간에는 해탈문
이 걸려있는데, 문 바깥 쪽에는 우람한 모습의 금강역사(金剛力士)상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사자를 탄 천진난만한 표정의 문수동자(文殊童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중생
을 맞는다. 그들 뒤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그려져 있어 천왕문(天王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  108계단에서 만난 원숭이들 - 그들의 자세에는 모두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108계단에는 4쌍(8마리)의 귀여운 원숭이 조각이 배치되어 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
부터 눈을 가린 원숭이, 귀를 막은 원숭이,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까지 적
당히 거리를 두며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의 자세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학림사에서
그저 눈요기나 하라고 갖다놓은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쁜 말을 내뱉을 바에는 차
라리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좋다. 그 다음 눈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것을 보지 말란 뜻이며,
귀를 막은 원숭이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다. 끝으로 두 손을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
이는 이들을 모두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면 해탈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를 제외한 3가지의 원숭이는 속인(俗人)들에게 중요한 충고 3가지를 자
세로써 보여주고 있다. 나쁜 것을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극
락처럼 아름다울 것인데 사람은 동물과 신(神) 중간에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라 좀처
럼 지키려 들질 않는다. 원숭이의 메세지를 뼛속 깊이 새기며 계단 끝에 이르면 청학루 뜨락
이다.


▲  학림사 청학루(靑鶴樓)와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108계단의 끝에는 포대화상과 2층 누각의 청학루가 자리해 있다. 설법전(說法殿)이라 불리기
도 하는데, 대웅전으로 통하는 1층 좌우에 종무소(宗務所)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
인다. 2층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불암산이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며, 돌로 다진 청학루
밑에는 공양간 등이 들어있다.

청학루 앞에는 4명의 동자승을 안고 있는 똥배 포대화상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복덕원
만(福德圓滿)한 인상을 지닌 그는 많은 절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축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시주를 하거나 인간사의 길흉
을 점쳤다는 승려로 미륵불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배를 만지면 복이
오거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그의 배를 살살 문지르며 소망을 들
이민다.


▲  청학루에서 바라본 불암산의 위엄

▲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도량을 자처하는 절답게 대웅전 밑에 오백나한이 봉안된 오백나한전을 두었다.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오래된 약사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대
동하여 약사여래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그 좌우로 16나한상, 그 뒤로 조그만 500나한을 빼
곡히 배치해 놓았다.
이 땅의 7,000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색채를 지닌 500나한의 모습은 이곳을 둘
러보는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오백나한전 내부 오백나한상과 약사여래3불좌상, 16나한상
오백이 넘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을 향하고 있으니 건물로 들어서는
내가 부담스러워 마주보기가 쑥쓰러울 지경이다.

▲  석조약사여래3불좌상 및 복장유물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6호

500나한과 16나한 등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약사여래3불좌상은 가운데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조성 시기는 수락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중기 또는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나한(羅漢)들이 죄다 칼라 색채를 지닌데
반해 약사여래3불좌상은 온통 하얀 피부과 검은 머리로 이루어져 흑백사진을 이룬다.
이들은 옥돌로 조성된 것으로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구부정한 자세이다. 표정은 동
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작고 귀엽기 그지 없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가운데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어 그의 정체를 알려주며, 불상의 바닥면에는
복장공이 있고, 내부에는 복장(腹臟)이 들어있으나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다.


▲  오백나한전과 마주한 선불당(選佛堂)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선불장(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  웃음을 묻어나게 하는 동자상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엉덩이를 요염하게 쳐들며 연꽃 향기에 심취해 있다.
동자승의 연꽃 심취를 돕고자 대웅전과 소나무가 그에게 늘 그늘을
드리우며 여름 햇살을 막아준다.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높은 계단 위에 위엄 돋게 자리한 대웅전은 학림사의 법당(法堂)으로 198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우기고 있
는 청동석가여래좌상이 있으며, 석가여래상 뒤로 1985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가 있고 좌
우 벽면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천불탱 등이 깃들여져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대웅전 내부는 마침 영가(靈駕)를 위한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유난히 귀가 큰 석가여래상은 청동(靑銅)으로 빚어 금색을 입힌 것으로 좌우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절에서는 이 석가여래상이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절의 역사나
불상의 양식을 볼 때 조선 불상으로 여겨진다. 옛날이야 신라 불상이라고 우기면 다 통했지만
이제는 불교미술사학과 불상의 시대별 양식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이니 함부로 우기다가
는 망신만 당한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다.


▲  멋드러진 노송(老松) 1그루
대웅전 뜨락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로 그의 나이는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약 100~150년 정도로 여겨진다. 보호수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3층석탑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탑으로 2중으로 된
기단부가 탑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청학루와
오백나한전, 5층석탑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1985년에 지어진 1칸짜리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긴 산신탱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  특이한 모습의 4사자 3층석탑
사자가 있는 부분이 1층을 이룬다.


▲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

경내 서쪽에 서 있는 석조미륵불입상은 근래에 세운 것이나 몸통에 검은 때가 약간 입혀져 나
이가 조금 들어 보인다. 처음에는 100년 이상 먹은 미륵불인가 싶었는데 대략 20년 정도 되었
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을 지닌 석불로 연화대좌 위에 우뚝 서 있으며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데 생김새가 석탑의 옥개석(屋蓋石)과 상륜부(相輪部)를 얹혀놓은 것 같다.

이렇게 학림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옆 산길을 통해 노원골 남쪽 능선으로 올라갔다. 여기
서 능선을 통해 귀임봉을 거쳐 노원골로 내려갈 생각에서였다.


 

♠  수락산 귀임봉

▲  노원골 남쪽 능선길 (당고개공원 갈림길)

노원골 남쪽 능선길은 영원암 뒷쪽 노원골갈림길에서 귀임봉을 거쳐 수락산보루(堡壘)까지 이
어지는 환상의 지붕길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느긋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길로 좌
우로 좁게나마 천하가 펼쳐져 있어 조망 또한 좋다. 예전 상계1동에 살 적에 즐겨찾던 산길로
약간의 오르막만 감내하면 도달할 수 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능선길은 귀임봉에서 아주 조금 흥
분기를 보인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는
데, 수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왼쪽에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당고개역, 상계3,4동 지역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대자연이
수락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도봉동,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장대한 산줄기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창동, 도봉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노원구, 중랑구 지역

수락산보루까지 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보루 봉우리 직전에서 노원골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대부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하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흔쾌히 미루고 미련 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깝고 나에게도 매우 익숙한 곳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당고개역 → 학림사 → 노원골 남쪽 능선 → 귀임봉 → 노원골'로 소요
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수락산 학림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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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6월 2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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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  서울의 동북쪽 지붕, 수락산 여름 나들이
~~~~~
(수락산보루, 도선사, 동막골)

   
서울둘레길 수락산 동막골 구간

▲ 수락산보루
◀ 서울둘레길 동막골 구간
▶ 동막골 숲길
▼ 도선사 석삼존불상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는 수락산(水落山, 638m)은 상계1동에 살던 10대~20대 시
절 나의 뒷동산이다. 지금은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道峰洞)에서 도봉산(道峯山, 720m)의
그늘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수락산이 뻔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종종 그의 품을 찾
곤 한다. 그곳에는 계곡과 명소, 오래된 절 등 구수한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수락산 서울 구역에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를 일부라도 지우고자 아직 발자국
을 남기지 못한 수락산 보루터와 서울둘레길 수락산 구간 일부, 그리고 오래된 석불을 간
직한 도선사를 찾았다.


 

♠  수락산 노원골과 수락산보루터

▲  노원골 (노원골약수터 주변)

이번 수락산 나들이는 수락산의 주요 기점의 하나인 노원골에서 시작했다. 상계1동에 살 적에
노원골과 인근 수락골(벽운동계곡)을 많이 이용했는데, 물을 뜨러 갈 때는 보통 노원골을 선
호했다. 수락골은 제대로된 샘터를 만나려면 상당히 올라가야 했지만 수락골은 조금만 올라가
도 샘터가 무수히 나왔기 때문이다.

노원골은 수락산을 장식하는 주요 계곡으로 노원골 북쪽 능선과 남쪽 능선 사이에서 발원(發
源)하여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허나 계곡 밑까지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수락산과 속세
의 경계선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중랑천으로 넘겨지고 있다. 이는 인근 수락골도 마찬
가지로 서울에 있는 많은 계곡의 잔인한 현실이기도 하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운 얼음은 소
쩍새가 울 때면 알아서 녹기 마련이지만 인간이 씌운 복개천의 굴레는 좀처럼 벗기기가 힘들
다.

노원골이 수락골보다 골짜기는 작아도 바위와 반석이 많고, 계곡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숲이
짙으며, 수심도 얕아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게다가 경관 또한 아름다워 예로부
터 지역 피서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아왔다. 작지만 매우 야무진 계곡이었던 것이다. 특히 노
원골약수터 주변은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반석이 넓게 깔려있다.
허나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를 너무 쥐어짜면서 계곡을 불리던 냇물은 거의 말라버렸다.
제아무리 잘생긴 바위도, 아름다운 계곡 풍경도 다 물이 있어야 빛을 발하기 마련이거늘, 물
이 별로 없으니 바위와 반석도 일개 돌덩어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심술쟁이 여름 제국이 이
멋드러진 계곡을 무더위란 폭격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을 만든 것이다.

노원골 기점에서 8~9분 정도 오르면 노원골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한때 수락산에서 잘나가
던 약수터였으나 약수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후, 완전 죽은 샘터
가 되었다. 물이 마지막으로 용솟음친지 꽤 되었는지 물기 조차 더듬기가 어렵다. 상계1동 시
절에 이곳 물도 참 많이 마셨는데, 이렇게 맥없이 끊기고 말았다.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이 소망을 넣으며 하나, 둘 쌓은 돌무더기가 어느덧
큰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박한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돌탑이라
그 모습 또한 소박하기 그지 없다.
 

노원골약수터에서 남쪽 산길을 오르면 노원골 남쪽 능선과 수락산보루로 이어진다. 경사는 그
리 각박하지는 않은데, 그 길을 1분 오르면 왼쪽(동쪽)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 그 길로 접
어들면 바로 조그만 샘터가 하나 있었다. 한때 나의 즐겨찾기 약수터였으나 노원골약수터처럼
숨통이 끊어져 참 애석하기 그지 없다.
인간의 탐욕과 개발의 칼질이 춤추는 속세의 악한 기운이 어느덧 이곳까지 구렁이 담 넘듯 들
어와 수락산을 위협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운동 시설을 갖춘 약수터가 나오고, 길은 좀 각박해진다. 하지만 그만
큼 능선으로 가는 길도 빨라, 상계1동 시절에 이 산길을 자주 오르곤 했다. 잠깐의 고통을 감
내하면 완만한 능선길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노원골 남
쪽 능선에 이르고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귀임봉은 동쪽으로 가면 되고, 수락산보루
는 서쪽으로 서서히 내려가면 된다.


▲  노원골약수터 남쪽 산길에서 바라본 수락산 산줄기
가운데 왼쪽 봉우리가 수락산 정상이다. 같은 수락산이지만 노원골은
수락산 정상과 거리가 제법 멀다.

▲  수락산보루(堡壘)터 - 사적 455호

노원골 남쪽 능선이 귀임봉을 거쳐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상계동 아파트단지를 바로 앞에 두고
마지막 용솟음을 치는 봉우리에 고구려(高句麗)가 남긴 작은 점, 수락산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수락산에서 가장 서남쪽이자 시내와 가장 가까운 봉우리로 수락산 영역에서 가장 전방
에 자리해 있다. 높이는 192.5m로 수락산의 제일 막내 봉우리이지만 수락산 산줄기와 이어진
동북쪽과 북쪽을 제외하면 모두 평지라 조망이 썩 일품이다. 그래서 봉우리에 올라서면 남쪽
과 동남쪽으로 불암산(佛巖山)과 노원구 일대, 멀리 중랑구와 봉화산(烽火山)이 시야에 들어
오고, 서쪽으로 옛 마들평야를 회색빛으로 물들인 상계동(上溪洞) 아파트단지와 도봉구, 강북
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이 시야에 잡힌다.
이처럼 위치가 휼륭하니 옛 사람들이 그냥 둘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거의 전쟁을 잊고
살지만 옛날, 특히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했다. 그때는 이런 봉우리가 천금
보다 비싼 법이라 일찍이 고구려는 이곳에 보루를 심어 서울 지역을 지켰다.

만주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서울 강북을 점유한 것은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
廣開土太王, 재위 392~413) 시절이다. 그는 재위 초반에 백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서울 강
북과 경기도 이북을 점령했는데, 백제(百濟) 또한 산동반도(山東半島)를 비롯한 중원대륙의
넓은 해안 지역과 왜열도(倭列島)를 점유한 무시못할 나라라 더 이상 남하를 못하고 한강을
두고 대치했다. 대신 말발굽을 서쪽과 북쪽, 동쪽으로 돌려 신나게 영토 확장을 벌였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보호국인 북연(北燕)을 완전히
접수하고 라이벌인 북위(北魏)를 위협하며 황하 유역과 내몽골 지역인 지두우(地豆于)까지 영
역을 넓혔다. 그리고 숙적인 백제를 공격하고자 아차산성(阿且山城) 주변에 보루를 주렁주렁
닦고 바로 한강 너머로 보이는 백제의 국도(國都), 한산<漢山, 위례성(慰禮城) 서울 송파/강
동 지역>을 수시로 염탐하며 때를 찾다가, 드디어 475년 한강을 건너 한산을 점령, 백제 개로
왕(蓋鹵王)을 처단하고 한산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경기 남부와 충북, 경북 포항(浦項
)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  봉긋 솟은 봉우리에 자리한 수락산보루

서울과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이 지역을 다스리고 백제와 신라(新羅)의 공격에 대비하
고자 전략적 요충지인 서울과 경기 북부에 많은 성과 보루를 구축하거나 백제가 쓰던 것을 수
리하여 사용했다. 여기서 보루란 성보다 작은 요새로 돌과 목책으로 구축했는데, 작은 것은
수십 명, 큰 것은 수백 명이 주둔하며 산성(山城)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보루는 주로 서울 동쪽 산줄기에 주렁주렁 달렸는데, 한강과 가까운 구의동 홍련봉(紅蓮峰)을
시작으로 아차산과 용마산(龍馬山), 망우산(忘憂山), 봉화산 산줄기에 크고 작은 보루를 닦아
아차산성(阿且山城)을 보조했다. 그리고 수락산에도 보루를 설치해 북쪽(사패산)과 남쪽 아차
산을 연결했다. 수락산보루에서 남쪽을 보면 봉화산이, 서북쪽으로 사패산을 품은 도봉산이
바라보여 이곳에 보루를 둔 고구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북쪽으로 사패산(賜牌山), 의정부 천보산(天寶山), 양주 불곡산(佛谷山), 도락산(道樂
山), 독바위(양주시 옥정동)에 보루를 설치했는데, 아차산부터 천보산까지는 중랑천과 3번 국
도를 쭉 따라가고 있어 이들이 당시 주요 교통로였음을 귀뜀해준다. 양주 이북은 보루는 거의
없고,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은대리성, 당포성, 포천 반월성(半月城) 등의 온갖 성곽을
지어 경계망을 촘촘히 했다.

허나 그렇게 강성했던 고구려는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 중원대륙의 여러 나라, 돌궐(突厥)
등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많은 땅을 잃고 만다. 551년 경에는 백제와 신라에 의해 한강 유역
을 상실하게 되었고, 아차산성까지 신라에 떨어지면서 결국 경기 북부로 물러나게 된다. 백제
의 뒷통수까지 치며 서울 지역을 장악한 신라는 고구려 보루 상당수를 내버렸고, 불곡산보루
등 일부만 수리해서 쓴 것으로 보이나 끝내는 모두 버려지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대단한 건축물이라 해도 사람의 손때가 식은 것은 그리 오래 못간다. 결
국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대자연의 태클 앞에 모래성처럼 녹아내리고 말았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수락산보루터 (그 너머로 귀임봉이 보인다)

수락산보루는 장수태왕 시절인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초에 구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
가 둥지를 튼 봉우리 정상부는 평탄하며, 북쪽과 동서쪽은 조금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남쪽
은 완만한 경사이다.
이 보루는 상계동에 있다고 해서 상계동보루라 불리기도 했는데, 요즘은 수락산보루로 널리
불린다. 이곳은 6세기 중반 이후 버려져 터만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때 발견되었으며, 왜정
이 1942년에 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상계동 성터가 2개소로 나와있어 이곳이 그중 하
나로 여겨진다.

보루는 봉우리 정상부에서 3~4m 아래로 빙돌아가며 돌을 쌓았는데, 전체 둘레는 약 150m 정도
이며, 북쪽 부분이 약간 찌그러진 타원형이다. 그리고 집수시설로 보이는 함몰 부분이 2곳이
있다.
보루의 밑도리만 간신히 남아 흙에 묻히고 잡초와 섞여졌으며, 보루의 존재가 잊혀진 채, 오
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면서 석축은 흩어지거나 가루가 되었다. 심지어 정상부에 체
육시설까지 들어서면서 간신히 남은 보루의 흔적마저 숨기가 바빴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이후,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에서 많은 보루가 발견되었고,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 불곡산 등 땅속에 잠자던 보루들이 대거 밖으로 나오면서 수락산보루도 다시
금 빛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고구려앓이가 전국적인 유행을 타면서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
산 보루는 고구려의 장대한 유적이자 남한의 대표 고구려 흔적으로 단단히 덕을 보게 되었다.

수락산보루를 발굴조사하면서 많은 고구려 토기와 성돌, 보루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조사가
끝나자 이들을 모두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나무와 풀을 심어 가려놓았다.


▲  서쪽에서 바라본 수락산보루터

그렇다면 보루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워낙 단단히 녹아내려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근래 복원된 아차산4보루를 참고로 하여 그 모습을 크게 축소하면 대충 그림은
그려질 것이다. 봉우리가 작고 보루의 둘레도 고작 150m 내외라고 하니 그냥 이 땅에 흔한 봉
수대 규모 정도로 보면 될 듯 싶다. 거기에 군사들이 머물 공간과 무기 창고, 보루를 보호할
목책 정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며, 규모가 작기 때문에 50명 내외가 머물며 수비한 것으로 여
겨진다.

보루가 우뚝 서있던 봉우리 정상은 풀만 좀 돋아 있다. 거기에 누런 흙바닥마저 황량히 드러
나고 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하기까지 하다. 그 주변은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과
들꽃이 짙게 우거져 고구려의 흔적을 가리고 있어 안내문이 아니면 이곳이 정녕 보루가 있던
곳인지 조차 햇갈린다. 그만큼 자연에 쏙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  수풀로 가득한 수락산보루터 남쪽
숲 너머로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봉화산이 바라보인다


수락산보루는 2004년 10월에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 보루와 더불어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란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묶음에 들어간 보루는 총 17기인데, 수락산은 아차산과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그 묶음에 넣어버렸다. 차라리 이곳은 별도로 사적으로 지정하거나 서
울 지방기념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굳이 먼 거리를 무릅쓰고 한 덩어리로
모은 것이 궁금하다. 만주와 요동(遼東), 북한을 제외한 이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이니
너무 짜게 굴지 말고 후하게 등급을 매겨 관리했으면 좋겠다.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귀임봉과 수락산 산줄기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불암산(507m)의 위엄

수락산보루를 지닌 봉우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보루터가 있으니 편하게 보루봉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봉우리지만 그 옛날 고구려가 남긴 한 줄기 점 때문에 비록
아차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촐하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아직 이름을 지니지 못한 봉우리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우리의 자랑스런 고구려
가 백제를 뚫고 이곳을 차지해 보루를 씌우고 남방을 경영했던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더냐~!
내가 서식하는 근처에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런 고구려 유적이 있다는 것이 참 반갑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 105-1


 

♠  수락산 서울둘레길과 동막골

▲  수락산보루에서 온곡초교로 내려가는 숲길

수락산보루와 이렇게 첫 인연을 짓고 온곡초교 방면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계단이 닦
여져 있으나 경사가 속세를 닮은 듯, 조금 가파르다. 허나 소나무가 하늘과 속세(俗世)를 가
릴 정도로 삼삼하게 우거져 솔내음의 향도 진하며, 그늘의 깊이도 크다. 숲 너머로 보람아파
트를 비롯한 상계동의 회색빛 아파트들이 가까이 바라보여 도심 속 산길을 거니는 기분을 진
하게 선사하는데, 산길 중간에 그 유명한 서울둘레길과 만난다.

서울둘레길은 서울시가 야심차게 닦은 둘레길로 서울 주위를 1바퀴 도는 길이다. 총 8개의 코
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거리는 157km에 이르는데, 그 1코스가 도봉산역에서 시작해 수락산
과 불암산 허리를 지나 화랑대역에서 끝을 맺는 길로 거리는 14.3km이다. 2개의 산을 들락거
려야되서 서울시에서는 난이도를 상급으로 책정해 사람들을 괜히 긴장을 타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섭거나 걱정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다만 산 구간이 길어서 상급으로 책정된
것이다. 길도 잘 닦여져 있고,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나 거닐 수 있는 대중적인 둘레길이니
너무 겁은 먹지 말자~!
또한 도봉산역 동쪽인 창포원 관리사무소 앞과 불암산 우회코스 갈림길, 그리고 화랑대역(6호
선) 4번 출구 앞 공원에 서울둘레길 스탬프가 있으니 완주를 하거나 그곳을 지나가면 기념 도
장을 찍고 가기 바란다.


▲  잘 닦여진 수락산 서울둘레길 (수락산보루 부근)

수락산보루에서 동막골 도선사까지는 서울둘레길을 타기로 했다. 귀임봉과 학림사(鶴林寺)를
경유해서 가는 것이 조금은 빠르겠지만, 수락산 허리에 깔아놓은 서울둘레길 1코스도 엄연한
미답처이므로 미답처를 하나라도 더 지울 겸, 느긋한 둘레길을 이용했다.
수락산보루 주변과 상계3동 일부 구간은 끊긴 길을 잇고자 새로 길을 뚫거나 나무로 길을 내
었고, 시내가 잘 보이는 곳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두 눈까지 호강을 시켜준다. 게다가 숲도
짙어 시원한 산바람이 적당히 땀까지 털어준다.


▲  수락산 서울둘레길 (학림사 부근)

▲  석천(石泉)약수터
학림사 동남쪽 계곡에 묻힌 석천약수는 바위 밑에서 물이 나오는 샘터이다.
하여 이름도 석천이다. 아직은 적합 판정을 유지하고 있어 마음껏
마셔도 되며, 졸고 있는 컵을 깨워 실타래처럼 답답하게 나오는
샘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뻥뚫린 듯 시원해진다.

▲  석천약수터 부근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  수락산 서울둘레길 동막골 서쪽 구간
서울 시내가 바로 지척임에도 마치 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수락산 동막골

수락산 남쪽에 자리한 동막골은 수락산의 주요 골짜기이다. 이곳 동막골은 골짜기가 깊고 숲
이 무성해 일찌감치 유원지로 개발이 되었다. 그래서 동막골유원지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수락산 보호를 위해 행락 시설은 거의 철거되고 나무를 짙게 깔았으며, 골짜기에 도선사와 송
암사, 도안사 등 많은 절이 둥지를 틀어 계곡 중류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다.

동막골은 경관이 아름답고 자연 환경이 잘 남아있는 현장으로 2010년에 노원구청이 저수량 4
만8천톤 규모의 저수지를 계곡에 만들려고 생난리를 치다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가 있다. 서울시도 그 사업에 타당성이 없다고 노원구에 공문을 보낸 터라 다행히 전시행정의
부질없는 삽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2014년에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동막골과 북악산(백악산) 삼청동천(삼청공원), 북
악산 백사실계곡(백사골), 인왕산 백운동천(白雲洞天)의 생태계 조사를 벌였는데, 모두 1급수
를 유지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특히 동막골에서는 북방산개구리와 좀주름다슬기 등 도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수중 동물이 크
게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 비록 이곳이 수락산의 주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 수요가 높아
때는 많이 벗겨지긴 했으나 아직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동막골 도선사입구

▲  도선사를 알리는 표석

동막골에서 울창한 숲길을 따라 윗쪽으로 가면 도선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여기
서 그의 안내를 받아 동쪽 길로 가면 얼마 안가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이 모습을 비춘다.


▲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수락산 유아숲은 서울시가 동막골에 조성한 이름 그대로 어린이를 위한 숲체험장이다. 유아를
둔 가족과 유치원, 어린이집의 소풍 장소로 수풀과 꽃을 심은 초화원을 비롯해 올챙이숲속교
실, 모험놀이마당, 교구놀이마당, 모래놀이터, 계곡물놀이마당, 숲속휴게소 등을 갖추고 있으
며, 먹거리를 가져와 섭취하는 것은 괜찮으나 밥 짓는 등의 취사행위는 절대로 안된다.
유아숲 체험장도 좋지만 동막골이 골도 깊고 숲도 짙으므로 넓게 범위를 잡아 산림욕장을 닦
는 것은 어떨까 싶다. 마침 서울에는 호암산(虎巖山) 외에는 마땅한 산림욕장도 없고 자연휴
양림도 없다.
자연휴양림은 서울 땅에서는 좀 무리가 있고 숲이 넓은 이런 곳에 제대로 된 산림욕장을 닦고
자연보호를 더 엄격히 하여 도심 속의 신선한 청량제로 가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귀여운 개구리가 인상적인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안내도

▲  유아의 꿈을 먹고 자란 들꽃들의
조그만 세상, 초화원

▲  유아숲 놀이터와 쉼터


▲  동막골계곡에 자리한 계곡물놀이마당 ▼


▲  도선사로 인도하는 숲길


 

♠  동막골에 둥지를 튼 조촐한 산사, 오래된 석불을 후광으로
삼아 절을 꾸리는 수락산 도선사(導善寺)

수락산 동막골에는 수락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역사가 짧은 절집으로 그중 도선사가 동막골 상류 구석에 살짝 둥지를 틀었다.

도선사하면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도선사(道詵寺)를 떠올릴 것이다. 도선대사의
이름을 딴 북한산 도선사는 서울 뿐 아니라 천하에도 널리 알려진 오래된 절이기 때문이다.
허나 수락산 도선사는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완전 다르다. 이름을 풀이하면 선함으로 인도하
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가 짧고 인지도도 매우 적다.
내가 현대 사찰인 도선사를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불을 보기 위함이다. 솔
직히 그거 때문에 온 거지 그것도 없었다면 아마 영원히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선사에 오래된 석불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절들 상당수가 속
세에 배타적인 기질(외지인 경계, 사진 촬영 금지 등)이 짙어 사전에 어떤 곳인지 인터넷에서
살펴보았다. 아주 적게나마 도선사 관련 데이터들이 나왔는데, 절을 찾은 이들이 담은 석불
사진도 제법 나왔다. 그래서 속세에 그리 경계적인 곳은 아니라 판단되어 출동한 것이다.

같은 동막골에 있음에도 산꾼과 피서객으로 분주한 유아숲 체험장과 동막골 산길과 달리 이곳
은 꽤 한적하다. 수락산이 부는 산바람 소리가 그야말로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깨고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도선사에서 기르는 멍멍이들이다. 덩치도 쥐방
울만한 것들이 나를 보자 세상이 꺼지도록 짖어대는데, 그 소리가 귀신마저 도망치게 할 정도
로 매서웠다.
내가 도둑질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영 좋지 않은 사람도 아니건만, 단지 저들에게 익숙치 않다
는 이유로 단순한 저것들의 견제를 받으니 참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주차장 옆에 보이는 종무소(宗務所)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으니 아무도 없어 간신히 개
들의 견제를 뚫으며 계곡(동막골) 다리를 건너 경내로 진입했다. 다행히 주지승이 나와 그들
을 제지하니 그것들도 이내 멍멍~ 개소리를 멈추고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계를 푼다. 승려는
절에 잘 왔다면서 쭉 둘러보라고 하길래, 석불을 보러 왔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니 마음껏 사진
에 담아가라고 그런다. 그런데로 인심도 있는 셈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도선사의 인지도가 조
금은 올라가는 것을 그는 안 것이다.


▲  도선사 요사(寮舍)와 2층으로 이루어진 뒷쪽 법당

도선사는 이 땅에 흔치 않은 조동종(曹洞宗) 소속으로 1920년경 청운대선사(靑雲大禪師)가 여
기서 수행을 하다가 세운 절이다. 이곳에는 원래 조그만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많은 승려와
사람들이 찾아와 불도를 닦거나 산신에게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도선사는 산
신기도도량을 칭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는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현주지인 대은(大隱)이 30년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으로 불렸으며, 2005년에는 천하에서 가장 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을 봉안
하여 크게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2층 법당을 비롯해 산신각과 범종각, 천고루, 요사, 종무소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2층 대웅전에는 절의 꿀단지이자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3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어 절의 듬
직한 후광 역할을 한다. 이제 100년 남짓 된 현대 사찰이라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인근 학
림사와 흥국사(興國寺), 동막골에 묻힌 여러 절 등 쟁쟁한 절이 많다보니 이런 오래된 불상이
라도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어야 그나마 경쟁이 된다. 비록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이곳의 새
로운 명물이라고 하나 석3존불상에 비하면 아직 한참이나 경력이 짧다.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하늘과 숲이 전부일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히 묻혀있으며, 찾
는 이도 별로 없어 고적한 산사의 멋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도선사 윗쪽 계곡과 주
변 숲은 자연생태가 매우 양호하여 서울시에서 2008년 12월에 '수락산 야생동물,식물 보호구
역'으로 지정했다. (서울시 고시 제2009-496호) 하여 절 윗쪽 숲과 계곡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그 덕에 도선사는 청정한 환경 속에서 법등(法燈)을 유지하고 있다.

▲  다양한 손짓의 관세음보살상 3자매

▲  큰 북과 운판을 지닌 천고각(天鼓閣)

▲  커다란 석축 위에 세워진 6각형 범종각
석축 밑도리에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이 새겨져 있다.

▲  인조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어엿하게 기와집으로 만들지 않고 특이하게
인조 암벽으로 산신각을 꾸몄다.


▲  2005년에 조성된 청동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天眼觀世音菩薩)상

경내 남쪽에는 도선사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자리해 있다. 이름도 허
벌나게 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란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지닌 관세음보살로 이 땅의 천
수천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그만큼 도선사에서 모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존재
인 것이다.
인자함이 깃든 관세음보살의 큰 얼굴 위에는 그의 조그만 얼굴이 가득 달려있고, 그 위에 부
처의 작은 머리가 있다. 이들 얼굴은 1,000개의 눈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보살상 뒷쪽에
는 손과 팔이 수두룩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중 두 손이 지팡이와 극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
고 있다. 그를 반짝반짝 빛내주는 광배(光背)는 금색과 검은색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광배 아랫쪽은 마치 칼로 싹둑 자른 듯, 생략되어 있고, 윗쪽은 봉긋 솟아있어 보주형을 이룬
다. 그가 앉은 연꽃 대좌(臺座)는 검은색을 띄고 있으며, 그 밑에 돌로 만든 큰 기단을 두고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  꽃을 든 남자의 새로운 버전? 꽃을 든 산신상 (산신각 내부)

붉은 옷을 입은 수염 지긋한 산신이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에 꽃을 들고 호랑이 등에 앉
아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신상과 산신도(산신탱)을 봐왔지만 저런 색다른 산신은 처음이다.
절을 찾은 여심(女心)을 위한 도선사의 배려이자 마켓팅은 아닐까? 뭔가 크게 개성적이고 독
특해야 눈에 띄는 법이니 말이다.

 ◀  지붕만 한옥, 나머지는 양옥인 2층 법당
요사 뒷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법당은 경내
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층은 극락전(極樂殿,
큰법당) 및 영가(靈駕)들을 위한 납골당(納骨
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요즘 많은 절에서 납
골당을 운영하여 수익을 내고 있다.

2층은 대웅전(大雄殿)으로 석삼존불상과 금동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는 석3존불
이 대웅전의 중심이었으나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면서 조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이다. 그
래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석3존불이 보이니 금동석가불보다 가장 먼저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도선사 석삼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1호

대웅전 서쪽 불단에 자리한 석3존불상은 도선사의 듬직한 후광이자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도
선사에서는 그들을 '천년의 미소'라 하여 격하게 띄워주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쳐 얼마나
울었을까? 얼굴이 거의 지워져 미소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돌로 다진 석불(石佛)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속사정이야 알 수는 없지
만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도선사의 보물로 묻어가고 있다. 그들이 앉은 복련(伏
蓮)대좌는 도선사에서 마련한 것이고, 그들 뒤로 돌로 다져진 후불탱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
으며, 그 주변을 인조 암벽으로 둘러 석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3존불상의 본존불(가운데 석불)

  석3존불상의 향우측 협시상

석3존불 중앙에 자리한 석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
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동그란 얼굴은 마멸이 심해 눈썹과 코 정도만 확인이 가능하다. 목
은 매우 두꺼우며, 옷은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식이고, 어깨와 무릎에는 넓은 띠
주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부처상의 흔한 앉은 자세인 결가부좌(結跏趺坐)로 보
이나 너무 축약되었다.

가운데 석불 왼쪽(향우측 협시상)에 자리한 보살상은 머리에 원통형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
은 다리 위에 대고 화염보주(火炎寶柱) 같은 물건을 들고 있으며, 양 어깨 위에는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눈과 코, 눈썹 정도 확인이 가능하나 너무 지워진 상태이며, 허리가
너무 짧고 아랫도리가 낮아, 마치 윗도리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석3존불상의 향좌측 협시상

  2층 대웅전 내부

오른쪽 보살상(향좌측 협시상)은 머리가 날라가 없어진 것을 석고로 대충 만들어 붙였다. 그
래서 옆 석불과 달리 눈과 코, 입이 그런데로 달려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고, 몸통 정
면은 통견식으로 법의(法衣)를 입은 듯 하며, 양쪽 어깨에는 옷주름이 있으나 뒷면에는 편단
우견식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두 손은 무릎 위에 대소 선정인(禪定印) 비슷
한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이들 석불은 너무 간결하게 표현되어 덩치도 매우 작으며, 얼굴도 거의 지워지고 훼손도 심하
다. 게다가 신체 비례도 너무 떨어져 근래 대충 만든 석불이나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
나 그들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있고 안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 석불의 전통을 계승
한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시대에 조성된 석불이 별로 없어 2009년 3
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이들은 근래 조성된 것
으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이 어엿하게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석3존불보다 더 화려하고 덩치도 있지만 고색
을 밝히는 나의 두 눈에는 오로지 석불만 보일
뿐, 저들에게 간 시선의 양은 별로 되지 않는
다.


  도선사를 뒤로하며 (사진을 클릭하면 도선사 홈페이지가 번쩍 뜸)

도선사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다 되어간다. 이날 수락산에서 목적한 곳과 모두 인연을 지
었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릴 것도, 미련 둘 것도 없다. 이것으로 충분히 보람찬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여름에 벌인 수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렇다고 수락산과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153-1 (덕릉로145길 103 ☎ 02-936-0419)
* 도선사 홈페이지는 윗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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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북쪽 지붕 ~ 수락산 벽운동계곡, 귀임봉 나들이 (염불사, 황자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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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여름 나들이 ~~~~~

▲  수락산 산줄기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 지역



수락산(水落山, 638m)은 서울 동북부 끝으머리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노원구 상계동(上溪
洞)과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에 걸쳐져 있다. 북한산(삼각산), 도봉산(道峯山
), 관악산과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산으로 격하게 찬양을 받고 있으며, 북한산(836m)과
도봉산(740m) 다음으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뫼로 서울의 주요 지붕을 이루고 있
다.

수락산은 북한산(삼각산)에 비해 덩치는 작으나 멋드러진 바위와 계곡이 많고, 산세가 유
려해 꽤 야무진 산이다. 거대한 암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라 하여 수락산이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산 정상부와 능선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온갖 모습의 바위(물개바위, 기차바위, 코끼리바위)들이 포진해 있다. 또한 물이 들어가
는 산이라 약수터도 푸짐하며, 벽운동계곡과 수락골(수락계곡), 동막골, 금류계곡(청학리
계곡), 석림사계곡, 거문돌계곡 등의 알찬 계곡도 아낌없이 품고 있다.

예로부터 명산(名山)에는 절이 많은 법, 수락산도 명산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온 뫼라 흥
국사(興國寺), 학림사(鶴林寺), 염불사, 용굴암(龍窟庵), 내원암(內院庵), 석림사(石林寺
) 등 오래된 절을 품고 있다. 그 가운데 흥국사에는 다량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고 학
림사 또한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여 고색의 위엄을 과시한다.
그밖에 노강서원(鷺江書院)과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묘, 수락산보루(堡壘) 등 오랜 명소
가 있고, 현대 사찰인 도선사(道詵寺)에는 지방문화재인 석삼존불상이 있다.

수락산 등산은 수락산역과 당고개역(학림사), 온곡초교, 동막골, 덕릉고개, 흥국사, 청학
리, 장암역(석림사), 산곡동(검은돌마을)에서 오르면 되는데, 수락산역과 당고개역, 청학
리에서 많이들 올라간다. 정상까지는 2~3시간 정도 걸린다.
수락산은 덕릉고개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불암산(佛巖山)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으며 동쪽
은 국사봉, 퇴뫼산과 살짝 이어져 있다.

나에게 있어 수락산은 꽤 인연과 추억이 깊은 산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산행으로 여
러번 찾은 적이 있으며, 1994년에 수락산 그늘인 상계1동 아파트단지에 살게 되면서 수락
산은 나의 뒷동산이 되었다. 벽운동계곡과 수락골은 나의 쉼터이자 놀이터가 되었고 수락
산의 상계1동 구역은 계곡부터 약수터, 산길까지 나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수락산의 품에 수 없이 안기며 그와 진한 정을 과시했으나 2002년 겨울에 도봉동(
道峰洞)으로 이사를 가면서 수락산과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이
사를 갔느냐? 그것도 아니다.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으로 조금 갔을 뿐, 집 부근 중랑천(
中浪川)에 가면 수락산 산줄기가 훤하게 바라 보인다.
그 이후 수락산에 안긴 횟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꼭대기도 1~2번 가본 것이 고작이다. 한
때는 나의 뒷동산으로 나를 수없이 안아주었던 수락산, 허나 그에게 오랫동안 무심(無心)
을 보이며 살아오다가 그의 품이 문득 생각나 여름의 한복판에 카메라에 물통 1개 짊어지
고 오랜만에 수락산을 찾았다.

집에서 수락산까지는 그런데로 가까운 거리라 두 발에 의지하여 걸어갔다. 중랑천 둑방길
을 따라 노원교를 건너 수락산역까지 도보 20분, 여기서 10분을 더 가면 벽운동계곡 하류
이다. 계곡 밑까지는 회색빛 아파트가 가득 들어차 수락산을 가리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 모두 아름드리 숲이었다.


▲  벽운동계곡 하류에 세워진 수락산 표석의 위엄


 

♠  수락산 벽운동계곡 (벽운동 기점에서 염불사까지)

▲  벽운동계곡(碧雲洞溪谷) 하류

벽운동계곡(벽운계곡)은 수락산의 주요 계곡의 하나로 수락동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벽운동
이란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조선 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선비와 양반들의 발길
이 빈번했으며, 그들이 우수한 경관에 부여하는 동천(洞天)의 지위까지 누리면서 벽운동천(碧
雲洞天)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곡을 유람에서 끝내지 않고 별장까지 지어 머문 이가 있다. 바로 사도세자(思
悼世子)의 장인이자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다. 그
는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져 별장을 지었는데, 계곡에 바위가 하얗게 드러난 수락산 절경이
골짜기와 어우러져 마치 흰구름이 머무는 것 같다며 벽운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계곡 뿐 아니
라 계곡 밑에 자리한 마을까지 벽운동(碧雲洞)이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이후 홍봉한이 영의정이 되고 조정의 실세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벽운동 별장을 찾았다.
그로 인해 벽운동은 자연히 양반들의 순례 명소가 되었고, 혜경궁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벽운동계곡은 바위와 암반이 많고, 상류와 중류에 폭포와 소(못)이 여럿 널려 있다. 계곡 하
류(염불사 직전)는 수심이 얕고 숲이 무성하며 쉬어갈 자리도 넉넉하여 적은 발품으로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덕성여대생활관 직전 계곡 북쪽에는 벽운동마을을 이루고 있는
식당들이 터를 닦고 있어 백숙과 도토리묵, 파전 등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허나 좀 더 세련
된 경관을 원한다면 하류를 버리고 과감히 위로 올라가길 권한다.

염불사를 지나면 암반들이 적지 않게 펼쳐지며, 벽운산악회를 지나면 이 계곡에서 가장 큰 폭
포(그래봐야 높이 5m도 안됨)와 못이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큰 암벽과 조촐한 폭포 줄기
를 볼 수 있으나 더 이상은 괜찮은 곳이 없다.


▲  수락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벽운동계곡길(동일로250길)

▲  물이 거의 말라버린 벽운동계곡 (덕성여대생활관 뒤쪽)

벽운동계곡 기점에서 염불사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이 길은 '김시습 문화 산책로'란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하
나였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梅月堂)이 이 계곡에서 잠시 은둔을 했었다. 하여 그를 기리고
자 그런 이름을 씌운 것이다. 허나 그와 관련된 유적과 설화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다.
포장길(동일로250길)이 싫다면 계곡 길로 가도 되며, 덕성여대생활관 북쪽 계곡에는 벽운동천
을 비롯한 바위글씨들이 숨어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계곡길은 염불사 부근까
지 이어져 있다.

포장길 중간에는 펜스가 둘러진 덕성여대 생활관이 있다. 이곳이 바로 홍봉한의 벽운동 별장
자리로 우우당(友于堂)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마저 근래에 철거되어 주춧돌만 남은 실
정이다. 그는 'ㄱ' 모습의 건물로 우우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썼다고 전하나 세월
의 거친 흐름 속에 누가 잡아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홍봉한이 꽤 잘나갔던 시절에는 사랑
방으로 쓰였는데 손님들로 늘 부산했다고 하며, 혜경궁 홍씨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계곡 경치
를 즐기며 감수성과 서정성을 키워나갔다.

홍봉한이 사라진 이후, 그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가 19세기 후반에 서예가로 유명한 국봉 이
병직(鞠峰 李秉直)의 고조부가 사들였다. 우우당 바깥 계곡 바위에는 벽운동천(碧雲洞天), 운
원수(雲源壽), 국봉(鞠峰), 소국(小鞠) 등의 바위글씨가 있는데, 이는 이병직이 새겼다고 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병직은 국봉 외에 송은(松隱)이란 호도 가지고 있는데, 교육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후학 양성에 공을 들이다가 결국 거덜이 났다. 그래서 1957년 6월 덕성학원에서 매입해 생활
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한옥 상당수를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우우당만 겨우 남게
되었다가 그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성북동 성락원(城樂園), 부암동 석파정(石坡亭)과 더불어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별장(
별서) 유적인 만큼 서울시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적극적으로 지켜주었으면 좋으련만 현
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  벽운동계곡의 주름진 반석들 (염불사 부근)

▲  염불사 정문 (오른쪽은 시립수락양로원)

벽운동계곡 기점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염불사가 있다.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
一柱門) 대신 철로 된 철문이 일주문의 역할을 도맡고 있는데 낮시간이라 문은 활짝 열려있다.
철문을 들어서면 바로 날씬하게 솟은 염불사 표석이 중생을 맞이하고, 그를 지나면 허전한 주
차장과 아주 짧은 숲길이 나오면서 바로 염불사 경내가 모습을 내민다.

염불사는 수락산 그늘에 살던 시절, 수없이 수락산의 품을 오갔음에도 1번도 들어간 적이 없
었다. 왜냐?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생각을 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길도 주지 않던 그곳에 이렇게 발을 들인 것은 생각 외로 좀 오래된 절이고 무려
지방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최근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인터넷의 도
움이 무지 컸다.
절이 오래되었음에도 내력을 알리는 안내문 조차 꺼내놓지 않았으니 그동안 지나친 것은 어쩌
면 당연하다. 오래된 역사에다 문화유산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런 절만 보면 격하게 구미가 땡
기는 것이 본인의 습성인지라 이번에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  염불사(念佛寺) 경내 (왼쪽이 큰법당, 오른쪽이 대웅전)

수락산 벽운동계곡에 조촐히 터를 닦은 염불사는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 아마도 조
선 중기나 후기에 살짝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서울에는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우기는 절이 유난히도 많다. 아무래도 그가 고려 말~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승려이고 서울 천도에도 크게 관여를 했으며,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니 그동안 많은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던 원효(元曉)나 의상(義湘), 도선(道詵) 등의
쾌쾌묵은 존재보다는 더 무게감이 컸을 것이다.

어쨌든 창건 이후 오랫동안 마땅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03년에 상궁(尙宮) 김씨
가 돈을 대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지장전을 지었다. 이때 자신의 부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주머니를 남겼다.
6.25 때 절이 파괴된 것을 다시 지어 영몽사(靈夢寺)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후 쌍몽사(雙蒙寺
), 염불사(念佛寺)로 간판을 바꾸었다. 1965년에는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
신(山神)의 덕이라며 절에 산신각을 지어주었으며, 2005년에 2층짜리 큰법당을 짓고, 대웅전
을 부시고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큰법당과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독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腹臟) 일괄','지장시왕도'가 있
다. 이중 목관음보살좌상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나 원래부터 이곳 불상은 아니며 지
장시왕도와 함께 다른 곳에서 넘어온 것이다.

절이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고색의 기운은 싹 말라버렸으며, 수락산의 주요 산길인 벽운
동계곡 산길 옆에 자리해 있어 산꾼들의 떠드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근히 들려 온다. 허나
절을 감싸고 있는 짙푸른 나무들이 그 소리를 크게 걸러주니 고적한 산사의 기운을 누리기에
부족함은 없으며, 일렁이는 숲과 멋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산바람과 물바람, 풍경소리에
번뇌가 싹 달아난다.

▲  한글 현판이 인상적인 염불사 큰법당

▲  큰법당 석가3존불

경내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큰법당을 찾았다. 이곳에 염불사의 보물이 있을 듯 해서이다. 큰
법당은 이곳의 중심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2층 건물이다. 1층은 요사(寮舍)
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2층이 큰법당으로 옆으로 난
계단을 통해 오르면 된다. (1층 내부에서 올라가도 됨)

큰법당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단에 장엄하게 자리한 석가3존불은 문수보살(文殊菩薩)
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 뒤로 후불탱이 자리해 있고,
윗쪽에는 붉은 단청을 칠한 닫집이 화려하게 보궁(寶宮)을 이룬다. 천정에는 7마리의 새 모형
이 날개를 활짝 퍼득이며 날고 있다.
석가3존불 좌우에는 조그만 감실(龕室)을 가득 만들어 작은 금동불(金銅佛)을 안치했는데 이
들은 중생들에게 시주를 받아 달아준 원불(願佛)로 죄다 금빛을 내고 있어 너무 화사하다 못
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허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은 대충 봐도 된다. 다 2005년 이후에 조
성된 따끈따끈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봐야 되느냐? 석가3존불 옆을 보면 3중으
로 이루어진 조그만 붉은 기와 닫집이 보일 것이다. 닫집 밑에는 유리막에 감싸인 불상이 있
는데, 그가 바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목관음보살좌상이다. (그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0호

목관음보살좌상은 1695년에 조성된 보살상이다.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는 63
cm로 조그만 편인데, 그의 뱃속에서 조성시기가 담겨진 발원문(發願文)과 후령통(候鈴筒), 법
화경(法華經) 3책, 주사다라니 등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어 그의 정체를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
발원문에 따르면 박삼룡과 박용산 등의 시주로 전라도 장흥 사자산 봉일암과 수도암(修道庵)
의 불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조각승인 득우와 덕희가 만들었다.
봉일암과 수도암이 어떤 절이고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집을 잃고 이러지러 옮겨
다니던 것을 어찌어찌하여 이곳 염불사까지 흘러들어왔다.

그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발원문이 남아있
어 17세기 후반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보여준다. 비록 보살상의 한계로 법당 불단을 차지하
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났지만 석가3존불과 달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특별히 유
리막까지 씌워 그를 보호한다.

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무늬의
보관(寶冠)을 씌워져 있다. 보관은 귀까지 내
려와 있는데, 여러 장식물이 주렁주렁 달려있
고,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가 약간 보인다. 넓
은 이마 한복판에는 동그란 백호가 찍혀 있고,
눈썹은 약간 구부러져 있으며, 눈초리는 가늘
고 길다.
코는 조그맣고, 입술은 붉으며, 수염이 가늘게
표현되어 있는데,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살이
좀 올라 보인다.

▲  옆에서 바라본 목관음보살좌상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덮고 있는데, 가슴 쪽은 드러
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옷주름
선은 아래로 유려하게 흐르고 있고, 대좌(臺座)를 일부 덮고 있다. 붉은색 대좌는 닫집과 함
께 절에서 마련한 것으로 그의 거처가 은근히 탐이 난다.


▲  상궁김씨의 복장주머니와 목관음보살좌상에서 나온 복장 유물들

큰법당 남쪽 벽에는 오래된 문서와 주머니를 머금은 액자가 걸려있다. 이것들이 뭔가? 살펴보
니 글쎄 괘불(掛佛)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복장 유물이 아닌가? 보통 절에서 복장유물은 공개
를 거의 하지 않는다. 혹 한다고 해도 박물관을 통해서 살짝 할 뿐인데, 유물 모두 부피가 가
벼운 것들이라 신변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허나 염불사는 박물관도 아닌 그들 법당에 복장
유물을 과감하게 공개하는 위엄을 보였다.

액자 왼편에 있는 호리병 모양의 물건은 1903년에 상궁김씨가 지장전을 지어주면서 자신의 부
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만든 발원문을 담은 복장주머니이다. 천하에 무려 300곳
이 넘는 절을 찾아갔지만 복장주머니는 처음 본다. 수락산이 이렇게 귀한 선물을 내려주는구
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액자 오른편에 있는 문서는 목관음보살좌
상 뱃속에서 나온 문서로 법화경(法華經)과 주사다라니이다. 글씨는 모두 붉은색인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  염불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복장 유물 액자 옆에는 빛바랜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1869년에 위국과 그의 처 박씨,
유오 등이 별세한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조성한 것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
금암당 천여(錦巖堂 天如)가 그의 제자 취선(就善), 묘영(妙英)과 함께 그렸다.
처음에는 동대문 밖 감로암(甘露庵)에 있었으나 6.25로 염불사 탱화들이 죄다 못쓰게 되자 급
한데로 감로암에 있던 이것을 소환하여 봉안했다.

그림 중앙에는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이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발산하며 하얀 대좌에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고, 그 좌우로 저승의 10왕과 문관(文官)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일제히 지장보살을 바라보며 서 있다. 등장 인물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다소 여유로
운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필선과 정교한 금니 문양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19세기 탱화 채색은 거의 원색적인데 비해 이 탱화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색채 대비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채도를 낮추어 은은하면서도 맑은 17세기 불화 채색 양식을 보여준다.

큰법당 보물들을 한참 살펴보고 있으니 1층에서 신도 아저씨가 올라와 주름진 인상을 보이며
왜 사진을 찍냐고 물어본다. 하여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인상을 풀면서 여러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예전에 서울시에서 이들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관련 문화유산을 사진에 담아갔는데, 복
장 유물은 방바닥에 펼쳐놓고 사진에 담았다고 하며 그때 찍은 복장유물 사진이 절에 있으니
필요하면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는데, 아직까지 관련 사진
은 오리무중이다. 허나 솔직히 필요는 없다.
지방문화재 보유 기념으로 2008년 4월 26일에 알만한 가수를 소환하여 '염불사 산사음악회'를
떠들썩하게 열기도 했다. 안그래도 오래된 내력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는 열악한 형편인데 이
렇게 지방문화재를 지니게 되었으니 이만한 꿀단지가 없다.
그 외에 개인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을 고하고 법당을 나왔다.

          ◀  염불사 지장전(地藏殿)
큰법당 뒷쪽에는 지장전과 이제 막 피어난 마
애약사여래좌상이 있다.
지장전은 1903년 상궁 김씨가 지어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었으며, 내부에는 지
장전의 주인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저승 10
왕, 금강역사상, 시왕탱, 지장탱 등이 봉안되
어 있다.

▲  색채감이 넘치는 지장전 내부

▲  근래 조성된 마애약사여래좌상

▲  1지붕 2가족, 산신각과 독성각

▲  산신 가족을 담은 붉은 색채의 산신탱
오른쪽 벽에는 붉은 칠성탱이 걸려있다.

지장전을 지나면 큰 바위와 산신각(山神閣)이 나온다. 산신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65년에 신도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신의 덕이라며 흔쾌히 지어
준 것이다.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봉안하고 있는데, 칠성(치성광여래) 가
족을 담은 칠성탱은 산신탱 옆에 놓았으나 독성의 공간은 그 옆에 독성각(獨聖閣)이란 독자적
인 현판을 달며 1칸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지붕은 하나, 건물 이름과 현판은 2개를 이루고
있다. 건물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뒷배경으로 자리한 산신각의 모습이 마
치 산꼭대기 부근 바위에 홀로 자리한 모습처럼 보인다.

※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가면 수락산입구 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쪽
  으로 들어서 은빛3단지를 지나면 벽운동계곡이다. 염불사는 수락산입구 교차로에서 도보 15
  분
* 벽운동계곡은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으니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벽운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 염불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51 (동일로250길 44-142, ☎ 02-938-9395)


 

♠  수락산 영원암(靈源庵)과 황자굴(皇子窟)

▲  싸리나무 담장에 감싸인 귀틀집 (지붕은 너와지붕)

염불사를 둘러보고 벽운동계곡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10분 정도 오르면 벽운산악회 직전에
벽운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면 벽운산악회와 수락산 정상 방면으로 이어지며, 오른
길로 가면 영원암과 수락골(노원골)로 이어진다. 나의 목적지는 하늘과 맞닿은 정상이 아닌
영원암(황자굴)과 귀임봉이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

벽운교과 영원암 사이에는 수락산 도시산림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산림청에서 2002년에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고자 닦은 것으로 산길에 숲과 자연 정보를 담은 책상과 안내문, 귀
틀집 등을 설치해 숲의 대한 이해와 숲 체험을 돕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두충나무가 많이 자
라고 있어 조촐하게 산림욕을 겯드린 산책 명소로 쏠쏠하다.


▲  영원암 산길

영원암 산길은 벽운동계곡과 수락골(노원골) 윗쪽을 이어주는 길로 인적은 별로 없다. 도시산
림공원을 지나면 산길은 조금 각박해지는데, 여름 제국의 무더위 태클에 땀은 비오듯 하고 숨
도 은근히 차다.
그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산중턱 벼랑 밑에 자리한 영원암이 슬며시 모습을 비춘다. 이곳
은 상계1동에 서식했던 시절에 여러 번 왔던 암자인데 이번에 이리 발걸음을 한 것은 황자굴
이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  영원암 중심 구역 (오른쪽 건물이 나한전)

수락산 서남쪽 산중턱 270m 고지에 살짝 둥지를 튼 영원암은 20세기에 지어진 아주 조촐한 암
자이다. 워낙 이름이 없는 곳이라 인터넷에도 정보가 거의 없는 실정인데 암자 뒷쪽에 눈썹바
위처럼 생긴 황자굴이 있어 예전부터 수행 공간이나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고색의 멋을 풍기는 문화유산은 아직 여물지도 못한 상태이며, 나한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독
성각,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산신각은 여기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앞서 귀틀집에서 서쪽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된다. 아마도 이곳만큼 경
내와 산신각의 거리를 멀리 둔 절은 없을 것이다.

절간 같다는 말이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산바람 소리와 나의 발자국 소리가 이곳 소
리의 전부일 정도로 고적하기 그지 없으며, 인적도 거의 없어 이곳이 나의 비밀 아지트가 된
기분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이곳에 잠시 푹 안겨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영산전에 봉안된 뜻밖에 존재들
용왕 2명과 용 2마리

▲  시골 농가 분위기의 요사


영원암 중심 구역에는 나한전과 영산전, 요사가 있다. 나한전(羅漢殿)은 석가불과 그의 제자
인 나한을 봉안한 건물로 절에는 따로 법당급의 건물이 없어 나한전이 법당의 역할을 수행하
고 있다. 어차피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으니 법당의 자격으로도 그리 손색은 없으며, 건물 앞
에는 수락산이 베푼 약수가 나오는 샘터가 있어 절과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다. 그리고 뜨락에
는 누구나 쉬어갈 수 있도록 평상(平床) 등의 쉼터가 닦여져 있다.

나한전 옆에는 바위 밑에 자리를 닦은 건물이 있다. 현판은 없으나 기둥에 부착된 조그만 하
얀 딱지를 보니 영산전(靈山殿)이라 쓰여 있다. 영산전이라면 부처의 생애를 담은 8개의 그림,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 건물인데 문을 여니 정작 팔상도는 온데간데 없고 엉뚱하게 용을 타
고 있는 용왕 2기가 나를 맞이한다. 아니 이건 뭐지? 겉은 영산전인데 속은 완전 용왕각이었
던 것이다. 아마도 하얀 딱지에 건물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용왕은 물을 관리하
는 존재임)

▲  6각형 모습의 독성각

▲  금색 옷을 걸친 독성

나한전 뒷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특이하게 6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 뒷쪽에는 황자굴이라 불리는 큰 암벽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독성각 옆으로 난
산길을 통해 굴까지 오를 수 있다. 허나 길 끝에서 벼랑을 좀 타야 되기 때문에 길이 조금 위
험하다. 비록 돌과 시멘트로 길을 닦긴 했지만, 바로 밑이 아찔한 낭떠러지이고 길까지 고르
지를 못하니 각별히 주의가 요망된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눈썹바위 모습의 황자굴

황자굴이라고 해서 동굴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이름에 파닥파닥 낚이지 말자. 벼
랑 윗부분에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곳을 바로 황자굴이라 부르는 것이다. 굴 윗쪽에
는 바위가 눈썹처럼 크게 돌출되어 굴을 감싸고 있어 마치 석모도(席毛島)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 관련글 보러가기)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이곳이 황자굴이 되었을까? 천하에서 제일 크다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 조차도 '
황자굴이 뭐임? 먹는거임?'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황자굴은 말그대로 황제의 아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마침 인근에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
후(明成皇后) 민씨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때 줄행랑을 치다가 잠시 들려 기도를 올렸
다고 전하는 용굴암이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황자굴은 명성황후의 아들<나중에 순종(純宗) 황
제>이 숨거나 기도를 올렸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순종은 황태자(皇太子) 시절, 수락산에 온 적도 없고, 임오군란 때 모후(母后)를 따라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냥 용굴암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따라서 용굴암은 황후, 이곳은 황태
자가 각각 숨어 지냈다는 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봐야될 것이다.


▲  황자굴 바로 직전 (돌과 시멘트로 계단을 다짐)

▲  황자굴 내부
비바람을 피하기에는 아주 제격인 황자굴에는 조그만 단과 하얀 패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이 언급되어 있는 걸 보면 독성을 봉안한 공간인 듯 싶다.

▲  황자굴에 봉안된 패

▲  황자굴에서 바라본 도봉산

▲  석굴로 이루어진 칠성각(七星閣) 내부

나한전과 좀 떨어진 칠성각은 바위를 파서 만든 일종의 석굴이다. 석굴 내부는 한여름임에도
시원하기 그지 없는데, 광배를 갖춘 하얀 피부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얀 피부 일색인 칠성(
치성광여래) 7기가 그 좌우와 뒷쪽에서 석가불을 지킨다. 보통 칠성각은 칠성탱이란 탱화를
걸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석고로 칠성상을 만들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든
모습과 겉모습, 머리 장식까지 죄다 비슷하지만 표정만큼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 영원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1 (☎ 02-937-1973)


 

♠  수락산 마무리 (귀임봉)

▲  구암약수터

영원암을 둘러보고 수락골 쪽으로 오르다보면 하얀 바위 밑에 자리한 구암약수터가 모습을 비
춘다. 조그만 파이프를 통해 수락산이 베푼 물이 실타래처럼 조금씩 흘러나오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컵에 가득 담아 들이키니 속이 시원하다. 이곳은 좀 외진 곳이라 인적은 그리 없으며,
속세와 멀리 거리를 둔 곳이라 수질은 아직 양호하다.


▲  구암약수터에서 수락골 능선길로 인도하는 길
영원암에서 수락골 능선으로 가는 산길은 가파른 산자락이다. 그래서 길 옆은
늘 아찔한 경사가 벼랑처럼 펼쳐져 있다.

▲  수락골 능선길 영원암입구 (왼쪽 길은 영원암, 오른쪽 길은 수락산 정상)

구암약수터에서 다시 길을 재촉하면 수락골 능선길로 이어진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수
락골과 수락산역 방면, 동쪽으로 올라가면 용굴암과 도솔봉, 수락산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수
락골 갈림길 부근 숲속에 예전에 종종 물을 뜨러 가던 약수터가 있어 찾아보았으나 길이 바뀌
었는지 찾지 못했다.


▲  수락골 갈림길 주변 조망대에서 바라본 노원구와 도봉구 지역,
그리고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힘찬 산줄기

▲  수락골 갈림길에서 귀임봉으로 인도하는 수락골 남쪽 능선길

수락골 갈림길에서 귀임봉으로 이어지는 수락골 남쪽 능선길로 접어들었다. 이 산길은 상계1
동과 상계3,4동 경계를 가르며 서남쪽으로 달리는 산줄기로 중간에 바위가 일품인 귀임봉이
있고, 산줄기의 끝 봉우리에는 고구려(高句麗) 유적인 수락산보루터가 있다. 길 중간에는 학
림사와 당고개역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어 속세와도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다.

능선길이 매우 완만하고 부드러우며 숲이 짙어서 여름 햇살도 살짝 몸을 사리며 200~300m 고
지라 약간의 등산으로 충분히 접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능선 양쪽으로 수락산 산줄기와 노원
구(蘆原區)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까지 일품이다. 마치 천상(天上)의 산책로를 거니는 기
분이다. 그래서 내가 수락산에서 가장 즐겨찾던 산길이기도 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달리던 능선길은 귀임봉에 이르러
아주 조금 흥분을 한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약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수
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상계3,4동 지역
상계3,4동은 서울에서 가장 동북쪽 동네로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여 있다. 허나 아직 달동네가 적지 않게 남아있어 이 땅의 몹쓸
고질병인 빈부격차의 극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수락산이 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지역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창동, 도봉구, 성북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1동과 도봉동, 도봉산

수락산보루까지 거침없이 내려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귀임봉에서 수락골
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바로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며 미련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까우니 수락산
이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종종 찾아와 그의 품에 안길 생각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수락산역 → 벽운동계곡 → 염불사 → 영원암 → 수락골 갈림길 → 귀임
봉 → 수락골'로 소요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4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수락산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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