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충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6.29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지붕길,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자락길~현충원길 나들이
  2. 2017.06.29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서달산, 현충원 숲길)
  3. 2015.06.24 도심 속의 푸른 허파 ~ 서울 국립현충원, 동작충효길 나들이 (현충원숲길, 창빈안씨묘역)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지붕길,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자락길~현충원길 나들이

 


' 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현충원길)

▲  고구동산길 잣나무숲길

▲  서달산 정상

▲  현충원길


 

더운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조금씩 세력을 다지던 초가을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동작충효길을 찾았다.
동작충효길은 서울 동작구(銅雀區)가 야심차게 내놓은 도보길이다. 도보길 유행에 따라 제
주올레길, 지리산둘레길, 북한산둘레길, 서울둘레길, 해파랑길 등 온갖 둘레길이 생겨났는
데, 동작구도 그 시류를 타고 산과 공원, 한강을 잇는 도보길을 닦아 동작충효길이란 간판
을 내건 것이다. 여기서 충효(忠孝)는 동작구 관내에 있는 국립현충원과 노량진 사육신묘(
死六臣墓)에서 따온 명칭이다.

동작충효길은 총 7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별로 넓지 않은 동작구에 이렇게 많은 코스가
가능한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하긴 하지만 충분히 쥐어짜면 못할 것도 없다.
제1코스는 본글의 주인공인 고구동산길(3.4km)로 노들역에서 서달산을 거쳐 현충원 상도출
입문까지, 제2코스는 현충원길(3.4km)로 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동작역까지 이어진다.
제3코스는 한강나들길(4.6km)로 동작역에서 한강을 따라 노량진역까지, 제4코스는 노량진
길(3.4km)로 노량진역에서 용마산을 거쳐 신대방3거리역까지. 제5코스는 보라매길(2.9km)
로 신대방3거리역에서 보라매공원을 거쳐 보라매역까지 이어진다.
제6코스는 동작마루길(4.8km)로 신대방3거리역에서 국사봉을 거쳐 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제7코스는 까치산길(4.4km)로 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까치산을 거쳐 사당역까지 이어진다.


 

♠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 (고구동산)

▲  고구동산길 노들역 시작점

동작충효길1코스 고구동산길 나들이는 노들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하면 아주 편리하다. 지하철
9호선이 노들역을 지나가고 있고, 부근에 1호선(노량진역)이 빗자루 배차로 운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시내버스 노선이 노들역 주변을 물 흐르듯 빈번히 운행해 접근성이 아주 좋기 때문이
다.

노들역에서 상도터널 쪽으로 가면 서쪽에 나무가 우거진 산이 보이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계
단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그 길이 바로 고구동산길 북쪽 시작점이다. 그 계단을 오르면 '고
구동산'이란 조그만 뫼의 품에 들어서게 되면서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고구동산길(3.4km)은 노들역에서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이어지는 길로 고구동산과 서달
산 등 뫼 2개를 지난다. 이들은 모두 숲을 지니고 있어 길 대부분이 숲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택가와 아파트 사이에 완충지대처럼 자리한 숲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중앙대 후문에서 서
달산 생태다리 구간은 상도동과 흑석동(黑石洞)의 경계를 가르는 산줄기를 지나가며, 잣나무
숲과 소나무숲이 짙게 닦여져 있어 예사로운 숲길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또한 서달산 정상까
지 이어지는 동작구의 북쪽 지붕길이기도 하다.


▲  한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짙게 우거진 고구동산길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

▲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①

▲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②

▲  노량진근린공원 고구동산길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

고구동산은 노량진과 상도동(上道洞)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산 중앙(상도터널 윗쪽, 본
동) 정상부에 노량진근린공원이 자리해 있다.
노량진근린공원에는 게이트볼장과 배드민턴장, 축구장, 농구장, 간단한 운동기구 등의 운동시
설과 조망대, 산책로, 정자쉼터 등이 있으며, 조망대는 한강과 여의도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
에 위치해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특히 천하 제일의 불꽃축제로 추앙을 받는 여의도불꽃축제
를 바로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는 명당으로 불꽃의 향연을 코 앞에서 누릴 수 있다.

* 고구동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흑석동 (노량진근린공원 : 동작구 본동 486-2)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여의도와 63빌딩, 한강, 마포 지역이 바라보인다.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1호선 전철과 온갖 철도가 매일 수백 차례씩 오가는 한강철교를 비롯해
원효로, 마포 지역과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숲 너머로 한강과 노들섬, 용산, 남산(南山) 등이 바라보인다.

▲  노량진근린공원에서 중앙대 후문으로 넘어가는 고구동산길
공원을 지나 남쪽으로 가면 다시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고구동산길은
그 숲속을 가르며 중앙대후문까지 거침없이 흘러간다.

▲  푸른 철책이 둘러진 고구동산길 (강남초교 동쪽)

▲  강남초교 동쪽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고구동산길의 백미, 잣나무숲길

▲  서달산으로 인도하는 고구동산길

고구동산에서 남쪽으로 나오면 차량들이 오가는 흑석로가 나온다. 여기서 잠시 숲길이 끊기면
서 처음 온 사람들을 적지 않게 동요하게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당황할 필요는 없다. 고구동
산길은 여기서 상도동 패리스아파트까지 잠시 시멘트 도로의 신세를 지는 것일 뿐, 끊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흙으로 된 산길(숲길)이다.

흑석로로 진입하여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중앙대후문이다. 후문 입구 커브를 지나면 바로 3
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남쪽) 길(상도로53길)로 조금 가면 고구동산길의 부활을 알리
는 나무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고구동산길의 나머지 부분과 서달산이 흔쾌히 펼
쳐진다.


▲  중앙대와 상도동 사이를 지나는 고구동산길

중앙대후문~서달산 생태다리 구간은 상도동과 흑석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를 따라 이어진
다. 이 산줄기는 개발의 칼질이 미치지 않은 자연 공간으로 그 능선에 동작충효길을 살짝 얹
혔는데, 산줄기는 길지만 산길 좌우로 주택과 아파트가 진하게 보일 정도로 그 폭은 좁다.


▲  고구동산길의 자랑, 잣나무숲길

고구동산길 중간인 중앙대후문~숲속도서관 사이에 잣나무숲이 짙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고
구동산길의 자랑이자 백미로 동작구가 동작충효길을 만들면서 잣나무를 더욱 확충했다.
잣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많이 베푸는 나무로 그들이 우거진 숲은 산림욕 장소로 아
주 좋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잣나무숲이 있다니 그저 놀
라울 따름인데, 동작충효길은 나에게 여러 번 신선한 충격과 공포를 주니 범상치 않은 둘레길
이 분명하다.


▲  잣나무숲길 ①

▲  잣나무숲길 ②
이곳에서 만큼은 서울을 잊어도 좋다. 도시와 머나먼 산골이라 우겨도
손색이 없으니 말이다.

▲  잣나무숲길 ③④

▲  잣나무숲길 ⑤

▲  잣나무숲길 ⑥

잣나무숲 남쪽에는 숲에 완전히 묻힌 동작충효
길 숲속도서관이 있다. 숲이 얼마나 삼삼한지
한낮에도 거의 어두울 지경인데, 숲내음이 가
득한 숲속 한복판에 어린이와 동네 주민을 위
해 초소 건물을 손질하여 도서관을 닦았다.
이런 숲속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술술
머리 속에 잘 들어올 것만 같은데, 9시부터 18
시까지 운영하며, 평일에는 가끔 빗장을 닫아
거는 경우가 있다. 도서관 북쪽에는 청강정이
란 네모난 정자가 있으며 주변에 의자와 탁자
를 지닌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  4각형 정자인 청강정(淸康亭)


▲  장봉옥 영모비와 송덕비 <백운암 창건주 장대보화(張大寶華) 송덕비>

숲속도서관에서 초화원 쪽으로 조금 가면 장봉옥 송덕비와 영모비를 만날 수 있다. 단 고구동
산길에서 남쪽으로 조금 비껴있기 때문에 지나치기가 쉽다.

비석에 쓰인 장대보화 장봉옥(1904~1981)은 누구일까? 내 돌머리에는 전혀 정보가 없는 존재
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정한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했던 여
인이었다. 그리고 이름 대신 쓰인 대보화(大寶華)는 그의 법명(法名)이다.

장봉옥은 1904년 8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동덕여학교를 졸업하여 돈이 많은 친일파 관료의 소
실(첩)로 들어갔는데, 남편 몰래 조경한(趙擎韓) 등의 독립운동가를 도우며 독립운동 자금도
넉넉히 지원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신문에서는 그를 '광복군의 어머니'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1930년대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을 다녔는데, 안국동에 있
는 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가 열심히 수행을 하며 깊은 불심을 다졌고, 그 인연으로 불교계에
주요 승려, 인사들과 두루두루 알고 지냈다. 그리고 1950년대에 마야부인회를 조직하여 불교
지도자의 면목까지 보여주었다.

6.25 이후 어머니가 별세하자 그의 명복을 빌고자 그동안 모은 돈을 싹 털어 현재 비석이 있
는 자리를 중심으로 20,000평의 부지를 매입해 1961년에 백운암(白雲庵)을 지었다. 백운암은
현재 상도선원(上道禪院)의 모태가 된다.
또한 남편이 죽자 그의 막대한 재산까지 물려받았는데, 그 돈으로 크게 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벌었으며, 도심 한복판인 무교동(武橋洞) 일대 땅을 거의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자랑했다. 그 재력을 기반으로 온갖 불사(佛事)에 나서 불교계에서 '불사를 많이 일으킨 화주
보살'로 격하게 칭송을 받았다.

그는 백운암 주변에 160여 채의 연립주택을 지어 '나라사랑반'이란 이름 짓고 전몰군경의 유
가족과 집이 없는 어려운 이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노인대학을 지어 노인들을 배
려했고, 1964년 성조장학회를 세워 학생과 청년, 어려운 이웃을 넉넉히 도왔다. 그 장학회는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어쨌든 그 공로로 1966년 서울시경으로부터 '청소년 선도 유공
자 표창장'을, 1979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한평생 모은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풀면서 불법(佛法)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
았고, 노승과 불교 수행자들에게도 극진히 대접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보살'이라 추앙했고,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서옹(西翁)도 그를 크게 찬양하며 종종 백운암
에 들려 법문을 전했다.

딱히 자녀가 없던 그는 수양딸을 1명 맞이했는데, 그가 1982년 어음사기 사건으로 천하를 크
게 경악하게 했던 '장영자' 그 사람이었다. 장영자도 불교 신자로 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
던 장봉옥은 그를 수양딸로 삼아 많은 것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는 장영자 사건 1년 전(198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만약 더 살았더라면 못된 수양딸로 인
해 자칫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을 지도 모른다.

지붕돌을 지닌 장봉옥 송덕비는 1974년 서옹이 직접 비문을 쓰고 지어준 것이다. 그 옆에 자
리한 영모비는 독립운동가로 그의 신세를 졌던 백강 조경한(1900~1993)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나라사랑반' 주민과 상도동 주민들을 대표해 1982년 4월에 세운 것이다. 그는 비문(碑
文)에
'나라사랑반 주민들이 장여사의 시은(施恩)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우니 이 땅에 보은의 씨
앗이 살아있음을 기뻐하며 기꺼이 비문을 쓴다'
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 비석과 장봉옥의 무덤은 백운암 뒷쪽에 있었으나 이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절은
아랫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비석과 묘소까지 제자리를 잃고 김포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2010
년 비석만 지금의 자리로 돌아와 옛 백운암 자리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
사회와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의 흔적이건만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부동
산 수익에 눈이 어두운 졸부와 위정자들은 그런 이들의 흔적마저 온전히 놔두지를 않는다. 이
게 이 나라의 몹쓸 현실이다.


 

♠  서달산 서쪽 자락 (초화원, 생태다리, 서달산자락길)

▲  온갖 화초가 향연을 벌이는 초화원(草花園)

장봉옥 송덕비를 지나면 온갖 화초가 자라고 있는 초화원(서달산 야생초화원)이 모습을 드러
낸다.
이곳은 서달산의 서쪽 자락으로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미꽃과 구절초, 붓꽃, 톱풀 등
야생화 30여 종을 음지와 양지에 맞게 배치했다. 이곳 역시 동작충효길을 닦으면서 조촐한 규
모로 조성된 것으로 화초가 한참 기지개를 켜는 봄이나 무성함을 이루는 여름, 처절한 아름다
움을 선보이는 가을에 와야 제대로 된 초화원을 누릴 수 있다.


▲  녹음(綠陰)이 짙은 초화원

▲  초화원 수풀들

▲  상록잔디패랭이


▲  초화원과 이웃한 암석원(Rock Garden)
둥근 바위와 꼬리풀 등 30여 종의 꽃과 풀이 돌과 함께 배치한 공간으로
초화원과 거의 비슷하다.

▲  옥잠화

▲  이름도 참 특이한 큰꿩의비름만추

▲  이름도 초롱초롱한 초롱꽃

▲  여름이 깃든 암석원 내부


▲  숲이 무성한 초화원 남쪽

초화원과 암석원 주변에는 자연학습원과 수목학습원, 2015년 11월에 닦여진 유아숲체험장 등
이 있다. 이들은 나무와 여러 화초를 심은 공간으로 그리 넓지 않은 산자락을 활용하여 자연
과 관련된 많은 것을 닦아 놓아 집약적 공간 활용도는 정말 높다.


▲  수목학습원 부근 숲길

▲  서달산 생태육교

서달산 생태육교는 상도동과 흑석동을 잇는 도로(서달로)로 인해 강제로 끊긴 서달산 자락을
연결하고 양쪽 산의 동물 이동을 위해 닦여진 것이다. 육교 밑에는 터널을 뚫어 차량의 통행
을 배려했으며, 생태육교 윗도리에는 산책로를 닦고 나무와 온갖 풀을 심어 산의 자연스런 일
부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감쪽 같이 만들었다.
육교 동북쪽에는 달마사(達磨寺)란 80여 년 묵은 절이 있는데, 그 절 이름을 따서 육교 동쪽
산자락을 달마공원이라 부르기도 하며, 고구동산길과 별도로 '서달산자락길'이 따로 가지를
뻗어 숭실대 후문 쪽으로 이어진다.


▲  서달산 생태육교에서 바라본 흑석동과 한강, 남산

▲  조그만 새집을 주렁주렁 머금은 나무조각과 의자
새집이긴 하지만 너무 작아서 어느 새도 들어오기 어렵다. 하여 새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 같은 장식물이다.

▲  소나무숲을 따라 이어진 서달산자락길

생태육교 동쪽 서달산 자락에는 소나무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그래서 이곳을 피톤치드체험장
으로 삼았는데, 앞서 잣나무숲 만큼이나 삼삼해 다시금 이곳이 서울임을 잊게 만든다.
소나무숲 밑부분에는 나무로 도보길을 닦아 서달산자락길을 내었는데 숭실대 후문까지 이어지
며, 고구동산길과 서달산 정상으로 가려면 무조건 산을 오르면 된다.


▲  하늘을 훔친 서달산 소나무숲
피톤치드가 진하게 꿈틀거리는 싱그러운 자연의 현장이다.

▲  국립현충원 서남쪽 철책길 (서달산 정상 북쪽)
현충원과 속세의 경계에 푸른색 철책을 삼엄하게 둘러놓아 국가의 성역을 지킨다.
그 철책을 따라 산길이 나있는데, 고구동산길도 그 철책길을 잠시 거쳐간다.


 

♠  서달산(西達山) 정상과 현충원길

▲  서달산 정상

서달산(179m)은 동작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뫼로 동작구의 대표 지붕이다. 국립현충원을
품은 특별한 뫼로 화장산(華藏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화장사(華藏寺,
현재 호국지장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산세가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라 하여 공작
봉(孔雀峰)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달산의 범위는 현충원 주변과 달마공원, 서달로 서쪽 잣나무숲까지로 숲이 무성하여 동작구
의 허파 역할을 한다. 현충원이 조성되면서 서달산 정상을 비롯한 현충원 외곽이 현충원 영역
에 꽁꽁 묶였는데, 동작구가 그 외곽을 시민 공간으로 삼고자 서울시, 국방부와 협상해 2009
년 8월 현충원 영역(묘지공원)에서 근린공원으로 풀렸다. 즉 현충원 철책 바깥은 자유의 공간
으로 해방된 것이다.
이를 기리고자 2010년 봄, 정상에 동작대란 조망대를 세웠고, 주변 산길과 숲을 정비해 아주
휼륭한 시민들의 쉼터로 거듭났다.

서달산 정상에는 정상 표석과 토지지신(土地之神) 표석, 동작대, 쉼터, 운동장 등이 있으며, 산세도 완만하다. 이곳에 편히 오려면 국립현충원과 호국지장사를 거치거나 달마사, 중앙대
후문에서 접근하면 되며, 노들역이나 동작역에서 동작충효길을 따라 들어가도 된다.


▲  서달산 정상에 세워진 동작대(銅雀臺)

동작대는 서달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상징물로 2010년 봄에 지어진 3층짜리 8각형 정자(亭子)
이다. 동작대하면 3세기 초반, 조조가 업(業) 부근에 세운 동작대가 떠오를 것인데, 이 동작
대는 그 동작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한자만 같음) 그 이름도 동작구에서 따온 것이다.
정자 옆에는 윗층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별도로 내어 새로운 정자 형태를 그려내고 있는
데, 정자가 아무리 높아도 숲에 몽땅 감싸여 있어 조망은 별로 시원치 못하다. 

동작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동작대 3층에 올라 나무들의 눈치를 피해가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 상도동과 사당동, 관악구 지역, 관악산, 여의도 등이 시야에 잡히며, 북쪽은 겨우 서
달산 정상만 시야에 들어온다.

▲  동작대 현판의 위엄

▲  동작대에서 바라본 상도동 지역

▲  동작대에서 바라본 관악산(冠岳山)의
위엄

▲  서달산 정상에서 상도출입문으로
이어지는 고구동산길


▲  동작충효길의 허브,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 앞 갈림길

▲  현충원과 속세를 이어주는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

서달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7~8분 가면 현충원 상도출입문이 나온다. 노들역에서 시작된 고구
동산길은 여기서 흔쾌히 그 끝을 맺는데, 고구동산길 뿐만 아니라 현충원길(2코스)과 동작마
루길(6코스), 까치산길(7코스) 등 무려 4코스의 시작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상도출입문은 현충원의 남쪽 후문으로 6시부터 18시까지(주말과 현충일은 19시까지) 문을 열
어둔다. 그 문을 들어서면 바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와 국립현충원으로 이어지며 문 안쪽
에는 초소가 있어 혹시나 방향을 잃고 들어올지 모를 속세의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우리는 여기서 현충원길로 갈아타 동북쪽으로 이동했다. 현충원길(3.4km)은 상도출입문에서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숲길로 현충원 철책을 따라 이어져 마치 국경선을 거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철책 안쪽은 영원한 성역인 현충원이요, 우리가 걷는 바깥은 속세이다. 이 구간 역시 서달산
동쪽 자락으로 숲이 짙으며 길 북쪽 종점(동작역, 이수폭포)을 제외하면 각박한 구간은 없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사당2,3동과 정금마을로 내려가는 산길이 여럿 있다.


▲  현충원길에서 바라본 한강
숲 너머로 한강에 발을 담군 동작대교와 반포대교, 한남대교 등이 바라보인다.

▲  끝없이 펼쳐진 현충원길과 현충원 철책의 위엄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①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②

▲  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메모리얼 게이트(Memorial Gate)

현충원길에는 메모리얼 게이트란 문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문은 현충원에 봉안된 순국선열
을 추모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문의 지붕은 태극모양처럼 넝실거리게
했고, 기둥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허나 그런 심오한 의미와 다르게 문의 이름
은 어렵게 영어로 되어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문 이름은 보나마나 서울시나 동작구청 공무원들이 없는 지식 쥐어짜서 만든 이름으로 보이는
데, 굳이 영어로 이름을 삼아야 폼이 나는 것일까? 그냥 순국선열의 문이나 애국의 문으로 하
면 정녕 안되는 것일까? 이 땅의 정말 과하기 그지 없는 영어 사대주의는 실로 역겹기가 그지
없다.


▲  굳게 닫힌 사당출입문
현충원의 동쪽 후문으로 개방 시간은 앞서 상도출입문과 같다.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③

현충원길은 예전에 완주를 했기 때문에 1/3 정도만 거닐다가 사당3동으로 쿨하게 빠졌다. 일
몰도 적지 않게 눈치를 주고 있고, 나와 일행도 모두 지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동작충효길(고구동산길, 현충원길), 서달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나
중에 억지로라도 인연을 지어 동작충효길의 나머지 구간도 모두 맛보고 싶다.

* 서달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상도동, 사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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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6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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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서달산, 현충원 숲길)

 


' 6월 맞이 산사 나들이,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지장사) '

▲  호국지장사 지장전(지장보살입상)


 

국립서울현충원은 호국영령들이 잠든 이 땅의 영원한 성역(聖域)이다. 그러다보니 재미
없고 딱딱하며 어려운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창시
절 소풍이나 백일장으로 가본 것이 고작인 사람이 적지 않으며 그곳으로 나들이를 가자
고 하면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도 많다. 아무래도 나들이나 산책 등으
로 가기에는 왠지 실례가 될 것 같은 무겁고 조심스러운 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
산(백악산), 남산과 더불어 서울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듬직한 허파로 숲이 울창해 다
양한 동식물이 의지하고 있다. (현충원 외곽으로 숲이 짙게 둘러져 있음~) 게다가 현충
원 산책로는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이며, 창빈안씨(昌嬪安氏
)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등의 문화유산, 호국지장사 같은 오래
된 절까지 품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풍부하다.
현충원은 분명 3척동자도 다 아는 그런 곳이지만 그곳의 매력과 속살을 제대로 알고 즐
기는 사람은 적은 것이다. 그러니 너무 딱딱한 쪽으로 현충원을 대하지 말고 숨겨진 매
력까지 모두 살피기 바란다. <매년 4월에는 현충원의 백미인 수양벚꽃축제가 열림>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冠岳山)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
에는 지명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銅雀洞 國立墓地)'라 했으나 2006년에 '국립서울현
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이른바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으로 통
하기도 한다. 즉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
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고 있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
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
러 내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으로 명당 중의 명당으
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깊은 곳에 호국의 신을 모셨으니 그들의 후손들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자격 미달의 작자들도 여럿 섞여있어서 그럴까? 아직까진 그 효과
가 시원치 못하다. <친일파들의 무덤은 꼭 뽑아버려야 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에 걸린 6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14시, 동작역(4,9호선)에서 일행
들을 만나 현충원으로 향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장사 등 현
충원에 깃든 오래된 명소를 둘러보고 서달산 동작대(銅雀臺)로 넘어갔는데 여기서는 현
충원 뒤쪽에 자리한 호국지장사(화장사)만 다루도록 하겠으며,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호국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라 불리는 오래된 절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에 묻힌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
임을 깨닫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에 도
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서로 시기가 안맞음~)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
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자리인지라 그곳에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우기고 있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
에서 작성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다~'
내용이 있어 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
기도 하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藏庵)이
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다. 이곳의 조선 초기 이전의 역사를 속시원히 밝혀줄
역사 기록과 유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쓸데없이 말만 무성한 것이다.

절의 내력이 그나마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때 창
빈안씨묘역이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宣祖)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
릉(銅雀陵)으로 높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
寺)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
으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에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상
을 개금하고 구품탱과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 칠성각을 새로 지
었다.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감로탱, 신
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고, 1920년에 대방을
수리했으며 1936년에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그곳에 안장된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그래서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
보살의 원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화장사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
장사'라고도 함>로 이름을 갈았다. 그야말로 현충원과 호국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에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심우당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능인보전
은 서북향) 경내 남쪽에는 약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
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성
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좌상
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다는 신라 후기 3층석탑
이 1기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
하고 있으며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
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지만 현충원과 한강, 한강 너머 지역(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
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
가 국립묘지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
이다. (그의 무덤은 창빈안씨묘역 북쪽에 있음)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없을 것이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
약 현충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8번 출구에서 현충원 정문을 거쳐 도보 20~25분
* 국립현충원(동작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350번, 360번, 362번, 462번, 640번, 752번, 5524
  번, 6411번, 9408번(광역)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관람정보 (2017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국립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 ☎ 1577-9090, 02-813-9625)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호국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다. 그 길을 오르면 커다란 아름
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
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오래된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
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에 아무리 천
근만근 무겁다는 번뇌도 줄행랑을 치고 만다. 허나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서 우두커니 기다
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나 성불(成佛)은 그저 먼 세상의 이야기 같다.


▲  지장사 약수터와 그곳을 지키는 약왕보살(藥王菩薩)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조그만 연못과 산사의 필수 요소인 약수터가 나온다. 약합을 쥐어
든 약왕보살이 엷은 미소를 보이고 있고 그의 앞에는 약수와 샘터 관리비 좀 보태라며 돈통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기분을 약간 깨게 한다. 하지만 물은 무료이니 마음껏 누려도 된다.

이곳은 물을 뜨는 수요가 많아 아침과 휴일에는 상도동, 사당동 사람들이 몰려와 물을 담아가
며 가뭄에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호국신과 대자연의 가호가 깃들여진 모양
이다. <현재 약수터는 남쪽으로 50m 정도 옮겨졌으며, 기존 자리에는 동그란 석조와 아기부처
상이 세워짐>

▲  신이 난듯한 우측 사천왕상(四天王像)

▲  열이 난듯한 좌측 사천왕상

약수터를 지나면 좌우로 돌로 만든 4천왕상이 나온다. 그들의 거처인 천왕문을 따로 두지 않고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에 석상(石像)으로 둔 것으로 비파와 칼을 든 우측 천왕들은 비파 연주에
흥이 난 표정이고, 좌측 천왕들은 악귀(惡鬼)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열불이
난 표정 같다.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사천왕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지장사 경내가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단촐한 모습
의 능인보전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철불좌상과 약사후불탱,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
리를 메우고 있어 꼭 둘러봐야 되는 건물이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佛壇)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경내에서 3층석
탑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철불(鐵佛)은 이름 그대로 철로 다진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
려 초에 많이 나타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
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조금이나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느 어부의 꿈에 이 불상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가 그물을 치니 녹
슨 채로 버려진 불상이 걸려들었다. 그래서 그를 수습하여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집에 모셨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데, 불상이 좀 심성이 삐딱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
부터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또한 어부가 강이나 바다에서 불상을 발견하여 절을
만들거나 절에 기증했다는 전설이 많은데 이는 불상을 옮기던 배가 가라앉거나 취급 부주의나
재해로 강에 떨어지거나 떠내려온 불상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향을 잃어버린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진
하고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그의 전체적
인 표정은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매우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
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조성된 몇 안되는 철불약사불로 그 당시 약사불 신앙에 중요한 자
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
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각자의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고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철불좌상 주변을 가득 메운 원불의 금빛 물결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앞에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린 것
이다. 그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
중탱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
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능인보전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능인보전 우측 벽에 걸린 아미타불도는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1870년 원명긍우(圓明肯祐), 경
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 식구
들을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
길을 끌며 옷의 묘사가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
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  호국범종이 봉안된 범종각(梵鍾閣)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안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는데, 현충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호국범종이라 불린다.


▲  하얀 피부의 승탑(僧塔, 부도)과 검은 피부의 비석들

능인보전과 범종각 뒷쪽에는 때깔이 고운 승탑 2기와 비석 여러 기가 숨겨져 있다. 이중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승탑은 부처의 사리가 담겨진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고양시 대자동 봉
덕사(奉德寺)에 있었다. 그는 1983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으로 옮겨진 이유에 대해선 딱히 알
려진 것은 없다.
그리고 승탑 앞에는 사리를 봉안한 기념으로 세운 봉안비(奉安碑)와 봉안공덕비(功德碑)가 있
는데 모두 봉덕사에서 넘어온 것이다.

그 우측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 4기는 1938년부터 1949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크게 시주를
한 이들을 기리고자 세운 기념비이다.


 

♠  조그만 불교미술관 호국지장사 대웅전(大雄殿)

▲  지장사 대웅전

지장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크다. 상당히 너른 대웅전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조선 후
기에 그려진 불화들이 내부를 가득 수식하여 그야말로 조그만 불화박물관을 이룬다,
그리고 건물 앞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연등은 위정자들이 현충일을 맞이해 생색내기로 단 것으
로 그들의 부질없는 욕심이 담겼는지 일반 백성들의 연등보다 배 이상이나 크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3층석탑

대웅전 옆에 있는 3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앞뜰에 있었다. 그는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
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하는데,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
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한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장사에서 가져와
보수를 했으며 지금은 대웅전 옆구리에 두었다.

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거의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상륜부(相輪部)와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
여 오래된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범종각 옆으로 옮겨졌으며 그 자리에는 물을 머금은 동그란 석조가 들어섰음>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불과 목각후불탱

▲  대웅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외 3명의 화승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
분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하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에서 19세
기 후반의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대웅전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만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내용은 잘
모르겠다.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후반 불화양식을 반영한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스카웃된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조금의 여백
도 없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림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白眉)
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깔이 퇴색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지장시왕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렸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
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
다. 원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한 광배, 도식(圖式)적
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
으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어 있다.


▲  능인보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주변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종무소(宗務所), 오른쪽이 심우당>

▲  대웅전 옆구리에 지어진 새 요사

대웅전과 종무소 뒤쪽에는 청심당 등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으로 쓰이는 건물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대웅전 바로 옆구리에 자리한 건물(윗 사진)은 2010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곳은
원래 공터였다.
건물의 모습이 기와집이 아닌 요즘 시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택 모습이라 다소 이색적인데,
그 옆에는 2016년에 새로 지어진 'ㄷ'자 모습의 청심당이 있다.

요사(寮舍)나 선방(禪房)은 공양간이나 교육이나 법회, 접대용으로 쓰이는 공간을 제외하면 절
의 사사로운 공간이라 거의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잘 들어가지는 않는 편인데, 예전
대웅전에 있었다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를 반드시 잡아 술래잡기를 끝내고 싶은 집념이 활활 불
타오르면서 요사 주변을 기웃거렸다. 요사에 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종무소 옆에 있는 공양간을 먼저 살폈는데 마침 문이 열러 있어서 그 사이로 시선
을 넣었으나 그림 같은 건 없었다, 하여 대웅전 옆에 있는 건물로 가서 창문 안으로 시선을 쓱
넣으니 글쎄 오래된 그림 2개가 나란히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확인해보니 극락9품도와 현왕도
였다. (지금은 다른 건물로 옮겨짐)
그들을 발견하고 마음 속으로 쾌재를 외쳤으나 주변에 아줌마 신도들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는 못했고, 그렇다고 대놓고 사진에 담기도 그래서 창문을 살짝 열고 새가슴처럼 대충 사진에
담았다. 물론 신도와 승려에게 허가를 받고 마음 편히 사진에 담는 것이 좋겠지만 생활공간인
요사이다보니 협조를 안해줄 듯 싶었다.


▲  요사 안에 담긴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왼쪽 그림)와
현왕도(現王圖, 오른쪽 그림)


극락9품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 산선관(散線觀)
인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錦湖
若效)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念佛庵)의 극락구품도
와 함께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
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옆에 있는 현왕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9호로 1893년에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렸다. 현
왕이란 염라대왕을 일컫는 것으로 죽어서 3일만에 그에게 심판을 받은 장면을 담았다. 화면은
둥근 구조 안에 그의 심판 장면을 그렸는데, 현왕의 우람한 체구와 세밀한 얼굴묘사에서 비교
적 예스러운 양식이 나타난다. 얼굴과 옷주름을 획일적으로 묘사했고 꽃무늬와 구름을 단색으
로 처리해 19세기 후반 불화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구품도와 현왕도를 찾아냄으로써 그들과의 부질없는 숨바꼭질은 끝이 났으며 이곳에 있는
지정문화재는 괘불도를 빼고 모두 인연을 짓게 되었다. 괘불이야 평상시에는 친견이 불가능한
아주 비싼 존재이니 석가탄신일이 아닌 이상은 아예 체념한 상태이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극락전, 삼성각, 지장전)

▲  지장보살입상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화

▲  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불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
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끈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
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
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석가불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폭의 좌우
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한 색채 등
은 20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반영하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존재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는 바
로 뒤에 있는 독성도의 독성 머리 때문에 머리에 큰 혹이 난 것처럼 보인다.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
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
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랑살랑거
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산신 옆에 서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를 보는
듯 단란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가 제작했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
무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이
던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
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지장사의 명물,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입상)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명물은 경내 뒤쪽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
좌(예전에는 2,500좌를 칭했음)에 달하는 조그만 석조지장보살의 장대한 물결이 아닐까 싶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꽤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지만 노천 법당으
로 석불이나 마애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
성각, 대웅전에 서린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에 잠든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
록 기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길쭉한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바라보는 지장보살의 뒷
통수에는 동그란 모양의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어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만
들어 가히 장관을 이룬다.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자리한 늘씬한 5층석탑들

지장보살 좌우에는 홀쭉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자리해 있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
닌 이들은 오래된 때가 조금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거의 걸려들지를 않
아서 꽤 애를 태우게 한다. 탑의 형식을 봤을 때는 왜정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지장보살상(지장전)

지장전을 장엄하게 꾸민 정성이 부디 명부(冥府, 저승)를 감동시켜 이곳에 깃든 호국신들이 하
나의 낙오자도 없이<단 친일파와 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없는 작자들은 싹 무관지옥이나 떨어져
라~!> 극락왕생하길 기원하며 간만에 벌인 호국지장사 나들이를 마무리 짓는다. (그 외의 장소
는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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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푸른 허파 ~ 서울 국립현충원, 동작충효길 나들이 (현충원숲길, 창빈안씨묘역)

 

 

' 국립 서울현충원, 동작충효길 산책 '

▲  국립현충원

 


6월 6일 현충일이 다가오면 거의 본능적으로 국립현충원(國立顯忠園, 국립 서울현충원)을 찾
는다. 그곳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국심이 대단한 것도 아
니다. 다만 석가탄신일에는 그날 본능에 따라 절을 찾듯이 현충일에는 그에 어울리는 현충원
을 찾아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이들을 기리며 현충일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현충원이 나라의 성스러운 공간이다 보니 나들이로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할 뿐더러 그저 무덤
밖에 없는 재미없고 딱딱한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생 시절 소풍
으로 간 것이 고작인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그곳에 가자고 하면 거의 대부분
'현충원에 나들이를 가자고? 거기 뭐 볼 거 있어?'하면서 화들짝 놀란다. 나들이로 가기에는
왠지 부담이 가는 곳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지 둘은 모
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남산(南山) 등과 더
불어 서울의 대기를 정화시키는 커다란 허파로 숲이 짙고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게다가 현충원을 외곽으로 둘러싼 산책로는 어디에 던져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로
상도동과 사당동, 흑석동 후문으로 가는 길은 오솔길의 갑(甲)을 이루며, 매년 4월에는 이곳
의 명물인 수양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조촐하게 벚꽃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또한 창빈안씨
묘역과 부안군 이석수묘역, 호국지장사 등 문화유적과 오래된 절까지 소리소문 없이 품고 있
어 오래된 볼거리까지 넉넉히 선사한다. 현충원은 3척 동자도 다 아는 곳이지만 그곳의 숨겨
진 속살을 아는 사람은 무척이나 적은 것이다.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전국에 흩어진 6.25 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에는
지명을 따 '동작동국립묘지(銅雀洞國立墓地)'라 불렀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
름을 갈았다. (국립현충원이라 많이 부르며,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
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지형이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
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지세라 하여 장군대좌형(將軍對
座形)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
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서쪽인 우백호(右白
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서달산)을 감싸 흘
러 내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명당 중의 명당으로 통
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모셨으니 마땅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하건만 아직까진 그 효과가 시원치 못하다.

본글에서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 현충원내부순례길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호국지장사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겠음)


♠  국립현충원의 오랜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의 배꼽 부분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묘역이 있다. 그 서쪽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그곳에 현충원의 숨겨진 오랜 속살인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
이 조선왕실의 오래된 무덤이 박혀있으니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
니 말이다.
허나 현충원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묘역은 이곳에 오랜 주인으로 이 일대가 대부분 그
의 묘역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1954년 이곳에 국립묘지를 만들면서 묘역은 크게 축소되기 시작
했고 1965년 이승만의 묘역을 창빈묘역 북쪽에 쓰면서 묘역의 동쪽이 떨어져나갔다. 상황이 이
러니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그야말로 잉여로운 존재가 되버린 것
이다. 그래서 아는 이가 드문 것이다. 또한 2009년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을 바로 남쪽에
쓰면서 남쪽 부분까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스런 점은 2011년 이후 묘역 북쪽에 그의 묘
역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안내판도 없었음)
그래서 '이 무덤은 뭐지?' 호기심 삼아 찾는 이의 발걸음이 조금 늘었다.

묘역의 주인인 창빈안씨(1499~1549)는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집
안이 어려워 1507년 궁녀(宮女)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총애를 받고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로 덕망(德望)이 높
았다. 그리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사랑을 받았으며, 시어
미의 후원에 힘입어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얼마 뒤 숙용<淑容, 내명
부 종3품>으로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
(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명종 4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며, 처음에는 양주땅 장흥(현 양주시 장
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에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로 하
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나마 호강을 하게 된다. 그는 왕위계승권과는 거리
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쪼잔한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높
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이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막대한 공을 들인다. 1577년에는 할
머니에게 창빈(昌嬪)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을 현충원 일대로
확대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서 동작릉(銅雀陵)이라 했
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은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덕릉(德陵)으로 높였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선조는 그릇이 작고 생각이 좁았던 군주로 마땅한 업적은 없다. 임진왜란도 잘 대처했으면 일찍
종료를 시키거나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 안일한 생각과 간신배들과 어우러진 무능한 대처로 국
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한참 손녀뻘되는 왕비<인
목대비(仁穆大妃)>와 재미를 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런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
리로 돌아온 것으로 창빈의 아름다운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
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숙종 9년) 왕명에 따라 묘역 남쪽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
데,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寧
府知事)를 지낸 왕족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중종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
다. 심지어 어린 애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품을
알만하다. 그의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은 오늘날 고위 공직자 등의 권력층과 돈에 치여 사는 상
류층들이 배워야 될 인품이 아닐까 싶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府
尉)가 전부이다. 그의 성격상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도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우측 문인석(文人石)

▲  좌측 문인석


▲  무덤의 주인이 쓰인 묘표(墓表)
묘표의 이수에는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어 속인들의 눈길을 끈다.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의 묘역은 그녀의 청렴함처럼 조촐하기 그지없다.
전형적인 후궁의 무덤 양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
는 현란한 조각의 이수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조그만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
우로 망주석(望柱石) 1쌍이 서 있다. 봉분 뒤쪽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무덤 앞에는 문인석 1
쌍이 한결같은 표정으로 홀을 들며 무덤을 지킨다.

  ◀▲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사진 3장>
이 비석은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3m이
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다른 신도
비와는 완전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곧
게 솟은 사각형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
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
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있다.


♠  국립현충원에 꽁꽁 숨겨진 오래된 속살, 부안군 이석수 묘역
(扶安君 李碩壽 墓域)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9호

▲  정면에서 본 이석수 묘역
(뒷쪽에 자리한 무덤이 이석수의 손자인 이선룡 내외의 무덤)


▲  뒷쪽에서 본 이석수 묘역

국립현충원 서쪽에는 6.25시절에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경찰들의 충혼(忠魂)을 기리는 경찰충혼
탑이 있다. 충혼탑 바로 북쪽(현충원 정문 방면)에는 3거리가 있는데, 3거리에서 서쪽 산자락을
살펴보면 숲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산길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산길을 20초 정도 오르면
창빈안씨묘역과 더불어 현충원의 숨겨진 속살의 하나로 지금까지 꽁꽁 숨어지내던 숨바꼭질의
달인 부안군 이석수 묘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이석수 묘역을 알게된 것은 2010년이다. 우연히 나의 머리에 입력된 그 묘역은 현충원 안
에 있다고 하는데, 현충원 안내도와 홈페이지에는 그 묘역의 위치를 알리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
다. 게다가 다녀간 이들도 전혀 없어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 위치에 대한 정보가 걸려들지 않았
다. 그래서 열심히 조사를 벌이다가 그 위치를 알게 된 것이다.
현충원은 참 많이도 갔지만 창빈안씨묘역은 2007년에나 발걸음을 했고, 호국지장사도 2006년에
나 처음 갔다. 이제 현충원의 숨겨진 오래된 속살은 다봤구나 싶었는데, 이석수 묘역까지 교묘
하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그의 묘역을 찾아 술래를 면하게 되었다.

현충원의 터줏대감인 창빈안씨묘역도 처음에는 안내도에 나와있지 않다가 이제는 아주 작게나마
표시를 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 예전보다 찾기는 쉬워졌다. 허나
이석수 묘역은 아직까지 그 흔한 안내판도 없고 현충원 안내도에서 나와있지 않다. 그야말로 아
주 극소수만 찾는 현충원의 꼭꼭 숨겨진 속살인 것이다.
내가 갔을 당시에도 충혼탑 주변과 3거리에는 사람들이 좀 있었으나 산길과 묘역에는 인적은 커
녕 움직이는 어떤 것도 없었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가니 3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엥 저
기에 뭐있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  홀을 쥐어들며 묵묵히 묘역을 수호하는 문인석(文人石)들

서달산 북쪽 자락에 자리한 이석수 묘역은 조선 성종(成宗)의 손자인 부안군 이석수(1524~1598)
와 그의 2번째 부인인 평강 채씨(平康 蔡氏)의 무덤이다. 호석(護石)도 없이 봉분만 두툼하게
부풀어져있고, 그 앞에 묘표와 상석(床石), 혼유석을 두었으며, 문인석 1쌍을 배열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은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작은 규모이다.

이석수는 성종과 명빈김씨(明嬪金氏)의 소생인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의 아들로 처음에 창
선대부 부안정(彰善大夫 扶安正)에 봉해지고, 나중에 명선대부 도정(明善大夫 都正)을 제수받았
으며, 임진왜란 때는 손자가 되는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선무종훈(宣武從勳)이 되었다. (선조의
할아버지인 중종과 이석수는 이복형제임)
1598년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자 선조는 정의대부 부안군(正義大夫 扶安君)이란 시호를 내리고
창빈안씨묘역 서쪽 산자락을 주어 무덤을 쓰게 했는데, 선조가 그의 부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
院君)묘역과 더불어 성역화시키기에 혈안이 되있던 창빈묘역의 서쪽 땅을 떼어 무덤을 쓰게 할
정도면 그의 신임이 제법 두터웠음을 보여준다.

이석수 무덤 뒷쪽에는 그의 손자인 순안군 이선룡(順安君 李善龍) 내외의 무덤이 야트막하게 솟
아있는데, 왼쪽 봉분에는 그와 전처(前妻)인 남원윤씨가, 오른쪽에는 나중에 받아들인 여흥민씨
가 묻혀있다. 이들 무덤은 봉분만 조촐하게 솟아있으며, 일체의 석물은 하나도 없어 일반 백성
들의 무덤처럼 수수하게 보인다.


▲  부안군 묘표

부안군 묘표는 지붕돌과 비신, 비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을 꽂은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 같
은 것이 섬세하게 묘역의 초라함을 조금이나마 커버해준다. 상태가 양호한 비신(碑身)에는 부안
군의 5대손인 이태제(李泰齊)가 1727년(영조 3년)에 비를 세웠다는 내용부터 해서 부안군의 전
처인 김해 허씨(金海 許氏)와 맏아들의 묘역이 양주 장흥에 있다는 것이 쓰여 있으며, 뒷쪽에는
비석의 조성시기가 쓰여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살짝 들려져 선의 미를 선사한다.


▲  약간 측면에서 바라본 이석수 묘역

▲  이석수 묘역 남쪽에 자리한 경찰충혼탑

※ 국립현충원 (창빈안씨묘역, 부안군 이석수묘역) 찾아가기 (2015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4,7,8번 출구에서 도보 1분, 4호선을 이용할 경우 4번 출구가 가까우
  며, 9호선을 이용할 경우 7,8번 출구가 가깝다.

★ 국립현충원 관람정보 (2015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쉬는 날은 없으나 동절기 토요일과 휴일에 한해 사진/유품전시관은 휴관함
* 국립현충원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 국립현충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작역과 이어지는 정문과 동문이 있으며, 흑석동 후문과 상도
  동 후문, 사당동 후문 등 3개의 후문이 있다.
* 국립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 ☎ 1577-9090, 02-813-9625)
* 부안군 이석수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1-2


♠  국립현충원 외곽 ~ 현충원내부순례길, 동작충효길(현충원길)

▲  호국지장사와 상도동 후문을 이어주는 현충원내부순례길

호국지장사에서 상도동 후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은 현충원의 남쪽 산책로인 현
충원 내부순례길로 상도동 후문에서 지장사를 거쳐 사당동 후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길을
둘러싼 숲이 매우 삼삼하여 도심 속의 공간이라 사실을 까맣게 잊게 해주며, 나무들이 베푼 산
내음에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길 양쪽에는 서울의 주요 허파인 현충원의 숲을 지키고자 녹색 철
책이 빙 둘러져 있어 숲으로의 접근을 막는다.

이 숲길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어느 정도 오르면 길은 평탄해지고 이윽고 현충원과 속세(俗世
)의 경계를 가르는 높다란 녹색 철책이 나타나 이 세상의 끝에 온 기분과 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  녹음에 묻힌 현충원내부순례길

▲  현충원 철책을 만나기 직전

▲  현충원과 속세를 이어주는 상도동 후문(상도 출입문)

지장사에서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속세로 이어지는 상도동 후문이 나온다. 후문이라고
하지만 개인집 대문이나 휴전선, 통제구역 철책 사이에 난 조그만 철문이며, 문 안쪽에 초소가
있어 혹시 방향을 잃어 들어올지도 모르는 속세의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상도동 후문에서 동작구의 둘레길인 동작충효길과 만나게 된다. 동작충효길은 동작구(銅雀區)의
야심작으로 2010년부터 2년 동안 갈고 닦은 길이다. 구내(區內)에 국립현충원이 있는 것을 착안
해 이름도 그럴싸한 동작충효길이라 명명된 이 길은 총 6코스로 산과 녹지대, 한강변을 따라 펼
쳐져 있으며,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부족해 동네 명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허나 조금씩 존
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조만간 서울 굴지의 도보길로 격하게 추앙받을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도보길이기 때문이다.


▲  동작충효길 안내도 (동작구청 홈페이지 참조)

현충원 상도동 후문에서는 동작충효길 1코스인 고구동산길(노들역 배수지공원~상도동 후문)과 2
코스인 현충원길(상도동 후문~동작역), 6코스인 동작마루길(상도동 후문~국사봉,빙수골마을공원
), 7코스인 까치산길(상도동 후문~사당역)이 만나는 분기점이다. 여기서 4개의 충효길이 시작되
고 끝을 맺는 충효길 교통의 요충지인 셈이다.

동작충효길이란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터라 생각치도 못한 존재 앞에 약간 멍을 때렸다. 원래
는 숭실대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동작구의 새로운 꿀단지, 충효길
에 등장으로 코스를 수정해야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그냥 지나치면 정말 섭하다.
여기서 노량진으로 갈까? 아니면 사당역? 아니면 동작역? 3개의 갈림길을 두고 궁리하다가 현충
원 경계를 따라 이어진 현충원길에 호감이 더 가서 그 길을 택했다.
현충원길은 현충원의 녹색 철책을 따라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길로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
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철책 안쪽은 성스러운 현충원이요. 내가 걷고 있는 바깥은 속세로 현충
원을 많이 들락거렸지만 경계선과 주변 산책로는 처음 간다. 정말 현충원은 뜨면 뜰수록 계속
용솟음치는 마르지 않는 샘이나 물건이 마구 나오는 마술 상자 같은 곳이 아닐 수 없다.


▲  현충원 철책과 나란히 이어진 현충원길 - 상도동 후문 북쪽

▲  현충원길 학수약수터 부근

▲  현충원길 사당동 후문 북쪽 오르막길

현충원길은 현충원 남쪽과 동쪽 산줄기에 닦은 산길로 이미 두툼하게 솟은 곳이라 길의 북쪽 종
점인 동작역이나 이수폭포를 제외하고는 급하게 솟거나 내려앉는 구간은 없다. 다만 이 길이 은
근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사당2동이나 사당3동, 정금마을 등에서 오를 때는 길이 좀 각박하다.

길 중간에는 사당3동으로 내려가는 길과 남묘(南廟), 사당동 후문, 정금마을과 갯마을, 이수폭
포 등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10개 정도 된다. 이중 남묘는 동묘(東廟)와 더불어 1599년 명나라
에서 금 4,000냥을 보내 지으라고 했던 관우(關羽)의 사당으로 원래는 서울역 동쪽에 있었다.
그러다가 주변이 개발되면서 1970년대에 사당3동 산동네로 떨려났고 지금은 거의 개인 절로 쓰
이고 있는데, 현충원길에서 남묘의 두꺼운 지붕들이 보인다. 그곳도 잠시 들릴까 하다가 귀찮아
서 그냥 지나쳤다. (내부 관람이 어려운 곳임)


▲  정금마을, 동작초교 갈림길

▲  끝없이 펼쳐진 현충원길과 현충원 철책의 위엄 (정금마을 갈림길 부근)

▲  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메모리얼 게이트(Memorial Gate)

현충원길에는 이렇게 생긴 문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문은 현충원에 봉안된 순국선열을 추모하
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문의 지붕은 태극모양처럼 넝실거리게 했고, 기둥
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허나 그런 심오한 의미와 다르게 문의 이름은 어렵게 영
어로 되어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문 이름은 보나마나 동작구청 공무원들이 없는 지식 쥐어짜서 만든 이름으로 보이는데, 굳이 영
어로 이름을 삼아야 폼이 나는 것일까? 그냥 순국선열의 문이나 애국의 문으로 하면 안되는거니
? 이 땅의 정말 과하기 그지 없는 영어 숭상은 실로 역겹기 그지 없다.


▲  현충원길의 거의 북쪽 끝인 이수갈림길에서 이수폭포로 가는 소나무길

▲  이수폭포 위에 세워진 단촐한 모습의 동작정(銅雀亭)

현충원길의 북쪽 마지막 갈림길이 이수갈림길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동작역과 국립현
충원 동문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이수폭포와 동작대로로 연결된다. 나는 여기서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와 보다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이수폭포로 방향을 잡았다.

이수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속세로 나가려는 나의 마음을 마지막으
로 사로잡는다. 길의 경사는 꽤 각박하여 오르기가 힘들며, 내려갈 때는 미끄러질 위험이 크게
도사린다. 게다가 길 왼쪽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거의 80도에 가까운 낭떠러지로 동작대로
와 지하철 4호선 터널이 보일락말락한다.
그 길을 정신 없이 내려가니 동작정이라 불리는 작고 단아한 정자가 나타난다. 이제 다 내려온
것이다.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동작정 안에는 어느 속인이 벌러덩 누워 책을 보고 있
었는데, 무척 그늘진 곳이라 피서지로는 딱 그만이다. 정자 앞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조그만 개
울이 있는데, 정자 서남쪽에서 발원해 이수폭포로 떨어진다. 이 물은 자연수가 아닌 수돗물이다.

▲  동작정 앞에 놓인 나무다리

▲  이수폭포 윗쪽


▲  여름의 제국을 긴장시키는 이수폭포의 위엄

동작정에서 1분 정도 내려가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동작대로와 함께 시원하게 쏟아지는 이
수폭포가 여름의 제국을 무척 똥줄타게 만든다. 이 폭포는 자연산이 아닌 인공폭포로 동작충효
길을 닦으면서 조성한 것인데, 폭포는 2개로 이루어져 서로 아름다움과 위엄을 뽐낸다. 성난 물
줄기가 쏟아져 하얀 비단이 아래로 드리운 듯 하며, 우렁찬 소리가 바위와 주변을 뒤흔들어 현
충원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과 여름의 제국이 놀라 도망칠 정도이다.

폭포 주변 암벽에는 소나무와 여러 수풀을 심어 폭포의 운치를 돕고 있으며, 폭포 앞에는 조촐
하게 쉼터를 만들었다. 이곳에 앉아 폭포를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정말 삼척(三陟) 미인폭포 전
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시간가는 줄도 모르며 더위도 잠시 잊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현충일 기념 국립현충원과 동작충효길(현충원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수폭포(동작정), 현충원길 찾아가기 (2015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3번 출구를 나오면 현충원길이 나오며, 동작대로를 따라 6분 정도 가
  면 이수폭포가 나온다. 여기서 동작정을 거쳐 각박한 길을 오르면 현충원길과 만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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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6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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