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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2. 2016.08.01 피서 성지 순례 ~~~ 경기 북부 제일의 명품 계곡,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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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성지 순례 ~~~ 경기 북부 제일의 명품 계곡,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 포천(抱川) 백운계곡, 흥룡사 여름 나들이 '

▲  포천 백운계곡


 

무더운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번영을 누리던 7월 한복판에 수도권 피서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 받고 있는 포천(抱川) 백운계곡을 찾았다.
그날은 백운계곡 외에도 피서의 새로운 성지로 주목 받고 있는 비둘기낭폭포도 염두에 두
고 도봉동 집을 나섰다. 허나 비둘기낭폭포는 교통이 매우 좋지 않은데다가 포천시청에서
불과 5분이란 시간 차이로 그곳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 다음 차는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되기에 그 폭포는 포기하고 백운계곡으로 길을 잡았다.
이제 피서철의 시작이고 그날은 평화로운 평일이라 사람도 별로 없으므로 혼자 가도 전혀
꿀릴 것은 없었다.

오전 11시에 집에서 포천시내버스 72-3번을 타고 의정부시와, 경기도2청사, 축석고개, 송
우리를 지나 포천시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달랑 5분 차이로 비둘기낭폭포(대회산리
)로 가는 버스를 놓쳐 바로 백운계곡으로 눈을 돌렸다. 하여 이동으로 가는 포천좌석버스
138-5번(도평리↔의정부역)을 잡아 타고 1시간을 정신 없이 내달려 이동에서 발을 내린다.
이동(二東)은 갈비와 막걸리로 유명한 포천 동북부 끝 동네로 수많은 명산과 계곡을 품고
있다. 그래서 수도권 피서의 성지이자 소고기, 술의 성지로 일찌감치 명성을 날리고 있으
며, 전방과도 가까워 군부대도 많이 포진해 있다. 

이동에서 백운동(백운계곡)까지는 7km 남짓의 가까운 거리이나 시내버스는 겨우 하루에 5
~6번 밖에 없고 시간도 전혀 맞지가 않는다. 그러니 천상 화천군 사창리로 넘어가는 직행
버스의 신세를 져야 된다.
이 직행버스(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는 40~6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 운이 좋은지 딱 5~
6분 만에 그 반가운 모습을 비춘다. 그래서 그 버스를 잡아타고 10분 정도를 달려 백운동
에 발을 내린다. 이 노선은 이동 외에도 도평리 버스종점과 일동에서도 승차가 가능하다.


 

♠  백운계곡(白雲溪谷), 흥룡사 입문

▲  백운교에서 바라본 백운계곡 (광덕고개, 사창리 방향)

▲  백운교에서 바라본 백운계곡 (도평리 방향)

경기도(京畿道) 북부권(의정부, 동두천, 연천, 포천)과 동부권(남양주, 가평, 양평)에는 기라
성 같은 계곡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단연 으뜸이자 명성이 자자한 계곡은 아무래도 포천 백
운계곡이 아닐까 싶다.
이 계곡은 영평8경의 하나로 조선시대부터 썩 잘나갔던 명소였다. <선유담(仙遊潭)이 영평8경
의 일원임> 그 전통과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아 지금도 수도권의 이름난 계곡이자 피서의 성
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것을 반영하듯 372번 지방도(포화로)와 나란히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식당과 숙박업소, 캠핑장이 즐비하며, 주말과 피서철에는 등산과 나들이, 피서 수요
가 급증해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는 372번 지방도는 물론 인근 이동, 일동까지 차량들로
단단히 몸살을 앓는다.

백운계곡은
백운산 서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흥룡사를 경유하는 계곡과 광덕고개 서남쪽
에서 발원하여 372번 지방도를 따라가는 물줄기('선유담계곡'이라고도 함)를 일컫는데, 이들은
백운교에서 하나가 되어 도평천(都坪川)이 되고, 수입리에서 수입천(水入川)과 합쳐져 영평천
(永平川)으로 간판을 바꾼 다음, 전곡 동쪽에서 한탄강(漢灘江)과 합쳐진다.

직행버스가 바퀴를 멈춘 백운동 정류장은 백운교에서 동쪽으로 약 230m 지점에 있는데, 여기서
찻길을 따라 백운교로 가는 것보다는 정류장 남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 가기를 권한다. 차량 왕
래가 빈번해 그들의 눈칫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약한 매연까지 무심히 떠넘기고 가
버리니 청정한 계곡과 삼삼한 숲으로 이루어진 이곳까지 와서 그런 굴욕을 당하기는 싫다.

백운교 남쪽에는 이동갈비집이 쭉 늘어서 있는데, 그 남쪽에 차량들이 바퀴를 뻗으며 자는 주
차장이 넓게 자리한다. 허나 피서철 직전이고 주중이라 빈 공간이 90%를 넘으며, 식당들도 사
람보다 빈 자리가 훨씬 많아 매우 한산하다. 다들 피서철 대목을 꿈꾸고 있을텐데, 날씨가 그
들의 마음을 몰라주고 비를 마구 퍼부으니 그들도 참 속이 탈 것이다.

백운계곡 주차장을 지나면 삼삼한 숲에 묻힌 오솔길이 나온다. 그 길을 접어들면 채 2분도 안
되어 흥룡사 표석이 있는 흥룡사입구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흥
룡사 경내가 펼쳐진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하였으나 계곡과 삼삼
한 숲이 속세의 기운을 털어버리기에 딱 그만이라 이것으로도 일주문의 대체 역할은 충분하다.


▲  흥룡사입구

▲  금색 피부를 지닌 포대화상(布袋和尙)과 깨알같은 불전함

흥룡사 경내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금빛 피부를 자랑하는 똥배 포대화상이 불전함을 들이밀며
돈을 요구한다. 어떻게 절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돈부터 요구하고 있는지 절에 대한 이미
지를 순식간에 부정적으로 몰아놓는다.
그런 포대화상을 지나치면 정면에 우람하게 생긴 대웅전이, 왼쪽에는 요사와 찻집이, 오른쪽에
는 샘터와 공양간이 자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흥룡사의 내력을 더듬어 보도록 하자.

※ 백운계곡을 옆에 낀 심산유곡의 절집, 세속화된 불교의 씁쓸한 흑역사를 보여주었던 현장,
   ~~ 백운산 흥룡사(白雲山 興龍寺)
부드러운 백운산 봉우리와 삼삼한 숲, 그리고 청결하고 수려한 경치의 백운계곡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흥룡사는 백운산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내원사(內院寺)라 했다고 우
기고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은 절 자리를 잡고자 나무로 3마리의 새
를 만들어 날려 보냈고 그중 하나가 앉은 자리가 마음에 들어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절에서 지은 설화일 뿐이며, 조선 초기까지 적당한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어 도선국사 창건설의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그나마 오래된 유물은 17세기 승탑이고, 몇줄
전해오는 조선 초기 기록도 딱히 신빙성은 떨어져 보이니 아마도 조선 초/중기에 조촐한 암자
나 수행처 수준으로 법등(法燈)을 연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고려 태조 때 비보사찰로 창건되
었다는 설도 있으나 역시나 물음표일 따름..)

조선 초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했다고 하며, 1407년에는 왕실의 복을 비는 88개 자복
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이때 잠시 천태종(天台宗)의 일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
한 세조는 그의 어필족자(御筆簇子)를 하사했다고 하나 아쉽게도 그 족자는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전하지 않는다.
그나마 기록과 유물이 보다 확실해지는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이다. 1638년 무영
(無影)이 제자
시십(時什), 인해(印海) 등과 법당과 시왕전 등 14채, 500여 칸의 건물을 중건했다고 하며, 불
상을 개금(改金)하고 종을 만들어 창건 당시보다 절이 컸다고 전한다. 1639년에는 무영의 제자
지혜(智惠)가 100여 칸의 상선암(上禪庵)을 지었으며, 1648년에는 청암(淸巖)이 50여 칸의 보
문암(普門庵)을 지었고, 1786년에는 태천(泰天)이 절을 중건하고 이름을 백운사(白雲寺)로 갈
았다.

1922년 설하(渫河)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흑룡사로 이름을 고쳤다가 얼마 안가서 흥룡사로 갈았
으며, 6.25때 절이 잿더미가 된 것을 1957년 지금의 위치에 관음전을 지어 절을 재건했다. 이
후 1982년에 백운당을, 1987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990년에 요사인 원각당을 새로 지었
다. 그리고 1993년에는 기존의 대웅전과 백운당을 싹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너른 크기의 대웅
전을 지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평범한 내력을 지녔구나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려
하는 종교의 지나친 세속화, 그리고 종교 단체들의 지나친 재물 욕심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
적인 사건이 바로 이곳에서 터져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자고로 승려란 부처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뜻에 따라 자신을 불태우며 중생을 챙기고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거늘 그것을 역행하는 땡중과 절이 너무 많다.
때는 1987년, 절 주변이 백운계곡 관광지로 지정되자 흥룡사 주지는 크게 돈 욕심을 내며 종단
(宗團)의 승인 없이 멋대로 개발업자와 손을 잡고 그들에게 절 땅을 빌려주었다. 허나 개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개발업자 또한 하나 같이 비리비리하여 개발 주체가 계속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절과 개발업자와의 손실과 갈등이 커지면서 2015년까지 무려 30여 건의 소송에 휘
말렸고, 개발 실패에 따른 손실이 무려 11억에 이르렀다.
욕심꾸러기 주지는 그 부채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법원은 절과 절 토지(약 20만 평)를 경매
에 넘기겠다고 통보를 했다. 그러자 주지는 울상이 되어 흥룡사를 관리하는 윗 사찰인 봉선사
(奉先寺)에 애걸을 했고, 봉선사는 절의 정상화를 위해 심사숙고 끝에 그 돈을 치뤄주고 절을
살렸다. (그 돈도 대부분 중생들이 내준 시주금임)
그런 흑역사를 겪은 흥룡사는 그렇게 벼랑 끝에서 살아났다. 땡중들의 돈 욕심에 중생들의 피
땀어린 시주로 이룩된 절이 자칫 홀라당 날라갈 뻔한 것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각당, 요사, 공양간, 청산다원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포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청암당승탑이 고작이다. 그외에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묘화당승탑이 있는데, 이들 승탑이 경내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존재이
자 조선시대 유물로 그들 외에는 고색의 내음은 찾기 힘들다.

삼삼한 백운산 숲에 둘러싸여 청정한 기운이 가득하며, 백운계곡의 청아하고 낭랑한 계곡 소리
에 아무리 무서울 게 없다는 번뇌도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다.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깊은 산골의 절집으로 절 바로 밑에까지 식당과 숙박업소가 즐비하게 들어섰지만 그들 사이에
짧게나마 숲이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어 산사의 분위기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또한 길손들을
위해 찻집과 쉼터 등을 갖추고 있어 백운계곡 나들이나 백운산 등산 때 잠시 두 발을 쉬어가기
에 좋으며, 원각당 옆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를 파는 찻집이 있어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
릴 수 있다.

※ 포천 백운계곡, 흥룡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이동 경유 사창리행 직행버스(30~60분 간격, 1일 20여 회 운행)를 타고 백
  운동 하차 (흥룡사는 도보 6~7분 거리)
* 1호선 의정부역(4,5번 출구를 나와서 가능역 방면으로 도보 5분 거리에 정류장이 있음)과 의
  정부터미널에서 138-5, 138-7번 좌석버스를 타고 이동이나 도평리에서 하차, 백운동으로 들
  어가는 3번 시내버스(1일 5회)나 사창리행 직행버스로 환승
* 인천종합터미널, 안양(WK웨딩하우스 앞)에서 와수리행 직행버스(1일 8회)를 타고, 이동이나
  도평리에서 사창리행 직행버스나 3번 시내버스로 환승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접근 가능)
① 서울 → 의정부(민락로) → 포천 방면 43번 국도 → 만세교에서 37번 국도로 우회전 → 일
   동교차로에서 이동 방면 47번 국도 → 도평교차로에서 우회전 → 도평3거리에서 좌회전 →
   흥룡사입구(백운교)에서 우회전 → 흥룡사, 백운계곡
② 서울(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 퇴계원나들목에서 이동 방면 43번 국도 → 서파 → 도평교
   차로에서 우회전 → 도평3거리에서 좌회전 → 흥룡사입구에서 우회전 → 흥룡사, 백운계곡
* 흥룡사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38 (포화로 236-73 ☎ 031-535-7363)
* 매년 겨울에 백운계곡에서 '백운계곡 동장군 축제'가 열린다. 보통 12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열리며, 눈썰매와 전통 썰매, 얼음성 놀이동산, 전통 팽이, 눈사람 만들기, 모닥불체험, 눈
  조각 전시회, 얼음조각 전시회, 향토음식 체험관, 포천농특산물 판매 등의 행사가 있다.
  (축제 문의 ☎ 031-535-7242, 동장군축제 홈페이지는 ☞ 이곳을 쿨하게 클릭한다)
* 흥룡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흥룡사 찻집(청산다원)과 천막 쉼터


 

♠  흥룡사 둘러보기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이곳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3년에 옛 대웅전과 백운당
을 부시고 만든 것이다. 바깥 벽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십우도(十牛圖)
등이 그려져 있으며, 내부 불단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래서 건물도 아미타불의 본거지인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바라보고자
서쪽을 향하고 있다. (지형상의 이유도 있음)

▲  흥룡사 원각당(圓覺堂)
종무소와 요사(寮舍)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건물로 문수원(文殊院)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석조지장3존상
대웅전 곁에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이
경내를 굽어본다.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
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나란히
자리하여 야외 지장전의 역할을 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5층석탑과 뜨락

대웅전 뜨락에 심어진 5층석탑은 근래에 조성되어 피부가 매우 하얗고 부드럽다. 기단부(基壇
部)에는 8명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한 자리씩 차지해 앉아 있고 1층 탑신(塔身)에는 사방불
(四方佛)을 새겨 절과 탑의 영원한 안전을 염원한다. 그렇게 철통 같이 지켰건만 내부의 적으
로 인해 절이 경매에 넘어갈
했으니 그들의 가호도 다 부질 없었던 모양이다.


▲  대웅전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원불(願佛)의 금빛 물결
아미타3존불은 1999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좌우에는 원불로 조성된 조그만 원불이
금빛 대물결을 이룬다. (아마도 3천불은 될 듯..? 저게 도대체 다 얼마야..?)

▲  흥룡사 샘터<수각(水閣)>
백운산이 베푼 옥계수로 그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듯 물이 늘 넘친다.

▲  가까이서 본 샘터(수각)의 위엄
석조 위에 지붕을 씌우고 조촐하게
수각으로 삼았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새롭게 터를 다졌다. 이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것
으로 단청(丹靑)을 칠하지 않아 조금 오래되어 보일 뿐, 대웅전과 원각당에 비해 한참 후배이
다. 내부에는 대웅전에 얹혀살던 산신탱을 비롯하여 독성탱과 칠성탱을 봉안되어 있어 삼성각
이란 이름값을
다.

▲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묻어난 산신탱

▲  칠성(七星)이 모두 모인 칠성탱

  동자 2명을 거느리며 여유롭게 앉아있는
독성(獨聖, 나반존자) 가족을 담은 독성탱 -
이들 삼성각 탱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산
신탱으로 무려 2000년에 제작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흥룡사 경내)

▲  흥룡사에서 만난 새끼고양이의 위엄
(누런 고양이가 알록달록 고양이에게 시비를 걸다)


내를 둘러보던 중 원각당 옆에서 새끼고양이 3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2마리는 검
은털과 흰털, 누런털이 적절히 섞여있고, 다른 하나는 오로지 누런털 옷을 입고 있다.
이들은 땅바닥에서 풀과 돌을 희롱하고 있었는데, 누런 묘공이 갑자기 풀 희롱에 열중하는 알
록달록 묘공(猫公)에게 시비를 건다. 시비를 건다고 해서 멱살을 잡거나 서로 발톱을 견주며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묘공의 흔한 놀이로 쥐나 조그만 동물을 잡기 위한 일종의 훈련도
겸한다.


▲  풀과 나뭇잎을 희롱하다~~

▲  경내 동쪽에 자리한 승탑(부도)들

▲  어깨를 나란히 한 승탑(僧塔)들 - 제일 오른쪽 팔각원당형 승탑이
청암당부도(포천시 향토유적 35호)

경내를 나와 백운계곡 안쪽으로 향하면 왼쪽에 돌담이 둘러진 공간이 있다. 그 안에 3기의 승
탑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청암당
(淸巖堂)과 묘화당(妙化堂), 운경대선
사자광탑(雲鏡大禪師慈光塔)으로 흥룡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이곳의 유일한 고색의 유물이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흥룡사의 오랜 내력이 참 무색했을 것이다. (운경대선사탑은 제외)

그들 가운데 뚜껑처럼 생긴 왼쪽 승탑은 운경대선사의 자광탑으로 190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
나 2000년 2월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는 1940년에 잠시 이곳 주지를 지
낸 인연이 있어서 이곳과 봉선사에 승탑을 만들었는데, 왜정 시절에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조선
민족해방당을 지원하다 걸려 옥고를 치루기도 했으며, 6.25때 모두 타버린 봉선사를 다시 세우
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운데 자리한 석종형(石鐘形) 승탑은 묘화당의 것으로 조금은 뾰족한 모습인데, 탑신 앞에 '
묘화당 영조(妙化堂 灵照), 강희 20년(康熙二十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승탑의 주인과 조
성 연대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강희 20년이면 1681년(안내문에는 1781년으로 한참이나 잘
못 나옴)으로 승탑의 높이는 153cm이다.

오른쪽에 자리한 청암당(淸巖堂)승탑은 동그란 승탑에 8각의 지붕돌을 얹힌 일종의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탑신 중앙에 '청암당' 3글자가 새겨져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게 해준다. 그는 1648년
흥룡사의 부속 암자인 보문암을 창건했다고 전할 뿐, 딱히 다른 정보는 없으며, 그곳에 있다가
근래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탑의 높이는 156cm이다.

이들 승탑은 길가에서도 매우 잘 보이므로 (탑신에 새겨진 글씨는 잘안보임) 굳이 담장을 넘을
필요는 없다. (담장 내부는 출입 금지를 권하고 있음) 글씨는 카메라로 최대한 줌을 땡기면 왠
만해선 다 보인다.


 

♠  백운계곡(흥룡사계곡)에서 즐긴 짧은 피서

이렇게 흥룡사를 둘러보고 백운계곡으로 길을 향했다. 백운계곡 중 흥룡사를 거쳐가는 계곡은
편의상 흥룡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은 수도권 제일의 계곡답게 수량도 많고, 물도 깨끗하며, 골도 깊고, 바위와 암반도 많다.
예로부터 경승지로 널리 칭송을 받았으며, 백운계곡의 일원인 선유담(372번 지방도에 있음)이
영평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흥룡사 역시 이 계곡에 퐁당 반해 계곡 옆에 절을 지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백운산 등산도 아니며, 흥룡사 관람과 백운계곡을 조금 따라 올라가 잠시
발을 담구며 쉬는 것이다.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이 아닌지라 그 좋은 계곡에는 사람이 거의 없
었다. 만약 1주 뒤에 왔다면 평일이라도 무척 미어터져 정신이 없었을텐데, 그 이전에 와서 한
적한 계곡의 모습에 위안을 받는다. 사람이 많은 것보다는 고적한 것이 보기도 좋고, 자연에도
좋다. 사람이 없으니 계곡에 쓰레기도 없고, 그들의 괴롭힘이 없으니 백운산과 계곡도 더욱 신
이 난다. 그만큼 자연에게 있어 인간은 전혀 도움이 안되는 존재이다.


▲  등산로와 나란히 달리는 흥룡사계곡

흥룡사계곡은 승탑을 기준으로 15분 정도만 올라갔다. 그 정도만 가니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하나는 백운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계곡을 건너는 것이다. 애당초 산을 타는 것
은 염두에 두지 않아 계곡을 건너려고 했으나 전날까지 계속된 장맛비로 계곡물이 늘어 건너는
것이 거의 어렵게 되었다. 물론 무리를 해서 건너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몸을 혹사시
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갈림길에서 과감히 길을 멈추고 거추장스러운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던져 계곡에 꼬
질꼬질한(?) 발과 다리를 담구며 그들을 잠시 호강시켜주었다. 얼마나 시원하던지 흘러나온 땀
이 바로 줄행랑을 친다. 비록 온몸으로 계곡과 진한 스킨쉽은 하지 못했지만 혼자 와서 그렇게
노는 것도 좀 처량해보인다. 그냥 발과 다리만 담구며 적절히 피서를 즐기면 그만이다.


▲  내가 잠시 머물던 곳 (이름은 딱히 없음)

▲  바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폭포

계곡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으려니 여름의 제국이 꽤나 심술이 난 모양이다. 난데없이 소나기
를 퍼붓는데, 좀 내리나 싶더니만 멈추고, 그러다가 또 쏟아지고, 그렇게 심술을 부린다. 허나
다행히 내리는 양은 별로 없어 물가에 앉을 자리를 만들고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계곡에 다리
를 담구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거의 15시 40분이 되었다. 거의 1시간 이상을 머문 셈인데 그 사이 지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완전 나 혼자 이 좋은 계곡을 독점하여 누린 셈이다. 영원히 그러면 좋
을텐데 아쉽게도 일시적인 독점이다. 사람이 없으니 정말 신선(神仙)이 나타나 같이 놀자고 하
거나, 좋은 선녀를 소개시켜주거나, 내기바둑 1판 두자고 청할 것 같았다. 허나 신선은 사람이
만든 상상 속의 존재이니 나타날 일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신선이 반할 경치를 지녔다. 기분
같아서는 속세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이곳에 숨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게 현실이
아님을 알기에 잠시나마 정든 마음을 훌훌 털고 계곡을 등졌다.


▲  녹음이 우거진 백운산 산길

▲  흥룡사계곡

▲  숨겨진 조그만 폭포와 소(沼)

흥룡사에서 저녁공양을 17시부터 8시까지 하는데, 좀만 버티면 그 시간이다. 일반인에게도 밥
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행도 없고 나 혼자이니 잘만 구워삶으면 저녁 해결도 가능할 듯 싶
었다.
그래서 바로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등산로를 잠시 벗어나 계곡으로 내려갔다. 조그만 샛길이
호기심을 자극시켰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내려가니 크기는 작지만 조촐한 폭포와 폭포수가 담긴 소가 있는데, 물의 색깔이 인
간이 만든 비루한 색이 아닌 완전 대자연의 짙은 푸른색이다. 수심은 약 1.5m 내외로 보였는데.
기분 같아서는 정말 풍덩하고 싶은 매혹적인 곳이다. 다음에 여러 명과 피서를 올 일이 있다면
이곳에 진을 치고 놀고 싶으나 과연 그날이 올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그런 폭포를 뒤로 하고 다시 흥룡사를 찾으니 주춤했던 소나기가 다시 퍼붓기 시작한다. 그런
데 아까와는 달리 매우 쎄차게 쏟아진다. 그래서 비를 피하고자 공양간으로 들어갔는데, (16시
30분 경) 할머니 보살 1명이 열심히 밥과 반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인도 공양을 할 수
있냐고 물으니 혼자 왔냐고 그런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그러면 5시 반에 오란다. 승려가
먼저 밥을 먹고 그 다음 신도나 절과 관련된 사람들이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고
모락모락 저녁밥을 꿈꾸며 시간이나 때울 겸, 인적이 없는 삼성각에 들어가 50분 정도 시간을
때웠다.
나무로 만든 건물 내부는 매우 시원하며 잠시 졸음의 희롱을 즐기며 벽에 등을 기대 졸기도 하
였다. 절집에서 조촐하게 나만의 극락(極樂)을 즐긴 셈이다. 다행히 그동안 이곳까지 오는 사
람이 없어 그 시간 동안 삼성각을 마음껏 독차지했다. 

17시 20분이 되자 삼성각을 어슬렁 나와 공양간으로 갔다. 할머니 보살이 나를 보더니 어여 들
어오라고 그런다. 안으로 들어가니 승려 3명과 일꾼 2명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합장
(合掌)을 하고, 공양에 들기 시작했다. 이곳 공양밥은 하얀 쌀밥을 기본으로 약 5~6가지의 나
물이 있으며 거기에 무려 김치찌개까지 있다. (물론 고기는 없음) 이들 외에도 보기 힘든 산나
물도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그릇에 밥과 나물을 터질 정도로 담아 꾸역꾸역 비벼먹고 거기에 김치찌개까지 겯드리니 이것
이 정녕 흥룡사 공양 스타일이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다. 그렇게 즐겁게 배를 채우고 할머니
보살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아까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
며 소나기를 내던지더만 이제는 평온하다.

절을 나오기 전, 새끼 묘공이 있던 원각당을 찾았다. 절을 지키며 노느라 지쳤는지 원각당 툇
마루에 서로 부비적거리며 달콤하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정처없는 내 마음을 크게 흔든다. 나도 그 틈에 끼어 같이 자고 싶은데, 그건 민폐겠지. 그들
틈에 끼어서 자면 열대야에 도망친 잠도 무척 잘 올 것 같다.


▲  원각당 툇마루에서 주무시고 있는 새끼 묘공의 위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 같다.


이번 나들이에서 가장 인상이 깊은 존재는 흥룡사 새끼 묘공과 저녁 공양이다. 공양은 보살의
후한 인심에 다음날 점심까지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배를 채웠고, 새끼 묘공은 묘공 특
유의 귀여움을 보이며 나의 시선을 잡아맸다. 그들이 있어 고색(古色)의 내음도 거의 없고 문
화유산도 빈약하며, 돈 욕심에 얼룩진, 내 입장에서는 썩 끌리지 않는 흥룡사가 또 찾고 싶을
정도로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다음에 간다면 새끼 묘공은 어른이 되어있으려나...?


▲  흥룡사와 백운계곡의 모든 것을 뒤로하며 속세로 다시 나오다.

흥룡사를 나오니 시간은 6시가 넘었다. 더 이상 정처를 둘 곳도 없기에 백운동 정류장으로 미
련없이 나와 바깥으로 나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담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백
운계곡, 흥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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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7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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