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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3.17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2. 2021.06.03 한탄강 언덕에 살짝 깃든 고구려의 작은 흔적, 연천 은대리성
  3. 2020.01.24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나들이
  4. 2019.11.06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5. 2019.02.03 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아차산 보루 나들이 (4보루, 3보루,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 봄나들이 (아차산 보루 식구들) '

아차산 정상(아차산3보루)

▲  아차산 정상부 (아차산3보루)

아차산4보루 아차산2보루

▲  아차산4보루

▲  아차산2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부
드러운 동쪽 지붕이다.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아침과 낮, 그리고 일몰 이후(야간 등
산)까지 고루고루 찾아와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고 있는데, 이미 200번 넘게 찾은 아차산
이지만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드디어 저물고 봄의 해방군이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
을 했는데, 분량상 본글에서는 아차산4보루 이후 구간만 다루도록 하겠다.
(이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龍馬山)과 망우산(忘憂山)을 제외한 아차산 식구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남한)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
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던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사이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무심히 지나가
절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시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
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흙속에 묻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
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크게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
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독특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허무하게 사라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의 독특
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터만 아련히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는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다.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
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얹혔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다 보니 안에 버젓이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터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못하도록 방
수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
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정말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 속으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나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여기
서 휴식을 취하거나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
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
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곳과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1보루, 시루봉 보루, 홍련
봉 보루 2곳은 한 덩어리로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로 지정되었다.

고구려(고구리)는 경기도와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요동반도, 만주(길림성, 흑룡강성) 일대
, 연해주, 하북성, 산서성(山西省), 내몽고(內蒙古) 일대를 차지한 북쪽의 크나큰 나라였고,
백제(百濟)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왜열도(倭列島), 산동반도, 강남과 오월(吳
越) 등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 월남 일대까지 장악한 남쪽의 크나큰 나라였다.
그 두 나라가 크게 충돌한 곳의 하나가 바로 한강 유역이며, 한강 남쪽의 송파/강동구 지역에
는 백제의 국도(國都)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또는 그에 버금가는 주요 도시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강력한 라이벌인 백제를 견제하며 한강 유역을 지키고 필요에 따라 백제 본
토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인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에 보루 등의 군사시설
을 주렁주렁 달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이들 보루는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차지하여 고구려 견제용으로 활용하다가 8세기 이후 전
략적인 가치가 상실되면서 모두 버려지게 된다. 그 시절 신라는 북쪽으로 최소 요동반도까지
차지했으며, 산동반도와 강남, 오월 지역에도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정상과 3보루

▲  소나무가 무성한 아차산 주능선길 (4보루에서 정상 방향)

아차산4보루에서 낙타고개(아차산성 북쪽)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의 연속이다. 오르막 길도 일
부 있으나 거의 내리막 일색이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능선길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구려
가 심어놓은 보루(4보루, 3보루, 5보루, 6보루, 1보루)들이 주렁주렁 깃들여져 멀게만 느껴지
던 고구려를 직접 체험하게 해준다. 또한 좌우로 시야가 확 트여 조망이 아주 예술이며 여기
서 바라보는 야경 맛과 일출, 일몰 풍경이 참 진국이다.

이처럼 길이 좋고 조망 또한 일품이니 새해 해돋이와 아침, 낮, 일몰 직후 야간 등산까지 상
당한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하여 너무 깊은 밤(23시 이후)이 아닌 이상은 늘 사람들이 있으
며 서울에서 남산(南山), 인왕산(仁王山) 다음으로 저녁 수요가 많은 뫼가 아차산~용마산일
것이다. (나도 아차산 야간 등산을 100번 넘게 했음)
또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서울둘레길2코스(화랑대역↔광나루역, 12.3
km)도 이곳을 흠모하며 아차산 주능선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간다.

▲  아차산3보루 북쪽 오르막길

▲  아차산 정상을 알리는 나무 기둥


▲  아차산의 지붕, 아차산3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 정상(295.7m)에 깃든 아차산3보루는 성벽 둘레 약 450m, 내부면적 약 6,500㎡로 정상
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보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2005년에 보루 일부를 들추
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의 식량 창고로 추정된다.
허나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꺼낸 상태라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한 기능과 숨겨
진 이야기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아차산3보루

3보루 외곽은 나무가 무성하나 3보루 안쪽은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처럼 풀이 벗
겨진 흙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어 말끔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다.
이는 보루터 보존을 위해 그렇게 밀어버린 것이다.
보루터 한복판으로 탐방로를 내었고, 그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낮은 금줄을 설치
했는데, 지키는 이가 없다 보니 금줄을 넘는 이가 종종 눈에 띈다. 이곳은 아차산 정상이긴
하지만 완만한 능선이라 정상 같은 느낌은 별로 나지 않으며, 3보루 동쪽에 우회길이 있다.
 
* 아차산3보루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아차산4보루 못지않은 일품 조망을 보여주는 3보루, 한강(아리수)을 중심으로 왼쪽에 구리시
와 남양주시(도농, 다산, 덕소) 지역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강동구와 하남시가 무성한
아파트숲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누가 아파트의 농도가 진한지 경쟁하듯이 말이다.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그리고 남한산과 검단산 등

▲  아차산3보루에서 수습된 보루터 성돌들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생전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그것이 아차산이 우리에게 건네는 영원한 숙제이다.

▲  바위들이 울퉁불퉁 펼쳐진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3보루에서 아차산5보루 방향)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①
광진구와 성동구, 한강, 송파구, 강남구 등 (멀리 보이는 산은 관악산)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용마산 너머로 멀리 남산서울타워를 지닌 남산과 인왕산(仁王山),
북악산(백악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이 아차산의 일품 계곡으로 꼽히는 긴고랑계곡이다.
그 오른쪽 뫼는 용마산, 왼쪽은 아차산이며, 그들 너머로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이 흐릿하게 두 망막에 박힌다.



 

♠  아차산 마무리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3보루에서 주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범굴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살짝 손짓
한다. 여기서 주능선을 버리고 그 손짓을 따라가면 바로 봉긋 솟은 언덕이 나타나는데, 그는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그 언덕에 아차산 보루의 막내인 6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6보루는 2005년에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생김새가 마치 옛 무
덤이나 보루터처럼 생겨서 눈썰미가 좀 있다면 정말 의심을 가져볼만한 존재로 아차산 보루의
발견 순서대로(남쪽을 기준으로 함)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아직 발굴조사는 벌이지 않았으며, 여기서 발견된 옛 불씨는 흙을
덮어서 보존하고 있다. 그가 보루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아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생김
새가 자연산 같지 않아서 속히 조사를 벌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6보루를 처
음 본 것이 2013년인데 아직까지도 조사를 받지 못했으니 아차산 보루 유적과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진 것 같아 실로 우려스럽다.


▲  아차산2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6보루에서 범굴사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봉우리(해발 276.2m)가
있다. 봉우리 주변에는 금줄이 둘러져 있고, 안내문 1개가 나그네들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는
데, 금줄 너머 봉우리에 고구려가 심어놓은 아차산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 봉우리를 활용해 보루를 다졌는데,
둘레 50m 정도의 조그만 보루이다. 그 보루는 영원한 분해자인 자연과 세월에 의해 모두 와해
되고 돌탑 남쪽에 치로 여겨지는 성벽 3단이 바깥에 노출되어 분해자의 압박을 견디다가 보존
을 위해 흙으로 덮어 묻었으며, 그 주위로 금줄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다.

보루터 주변에서는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의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보루터 복판에 돌탑
이 있는데, 지나가는 이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
을 이루고 있는 돌 상당수는 2보루터 성돌로 보루를 이루던 돌이 돌탑의 일원으로 새로 거듭
난 것이다.

2보루터는 인근 6보루터와 비슷하게 숲이 자리해 있다. 2보루터에 깃든 고구려의 장대한 기상
과 이곳의 유구한 역사를 무럭무럭 먹고 자란 탓일까?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대머리처럼 허전
한 2보루터의 새로운 녹색 머리칼로 그 공간을 보듬는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 남양주, 강동구, 하남 지역


아차산2보루 옆에는 동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조망 좋은 곳이 있다. 이곳은 범굴사(대성암)로
인도하는 너럭바위 윗쪽으로 여기서는 한강을 비롯해 구리시, 남양주, 하남, 강동구, 송파구,
성남 지역과 아차산성(阿且山城) 등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조망 범위는 앞서 4보루, 3보루와 많이 비슷하여 감흥은 그리 크지 않다. 비슷한 조망
이 4보루부터 계속 따라왔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서쪽과 북쪽이 빠지고 남쪽으로 아
차산성과 송파구, 성남 지역이 조망권에 추가된 정도..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워커힐 뒷통수(골프장)가 바로 앞에 보이고 푸르른 한강 너머로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南漢山), 검단산, 예봉산~운길산 산줄기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정면에 솟은 산에 아차산성이 안겨져 있다. 그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멀리 성남 지역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서울 속의 작은 민통선, 아차산성 - 사적 234호 (확대해서 바라본 모습)

아차산은 20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으나 정작 아차산성 내부는 아직까지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차산성은 아직까지도 금지된 구역으로 몇 년 전부터 광진구청에서 저곳을 해방시킬 계획을
세웠고, 꾸준히 개방 떡밥이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희망고문에 머물러 있다. 아차산성
의 적지 않은 땅을 가진 워커힐이 소국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이 휴전선 등 예민한 곳에 있거나 군부대에 있다면 금지된 구역이 이해가 가나 저곳
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누가 들으면 아차산성이 휴전선 부근에 있는 걸로 알겠다.
속히 속세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2보루에서 다시 주능선으로 나와 남쪽으로 하염없이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봉우리
가 나타난다. 그가 아차산1보루이다. (중간에 아차산5보루가 있으나 여기서는 통과함)
1보루가 넘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잘나서가 아니다. 남쪽을 기준으
로 발견된 순서대로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3보
루)을 이어주었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  작은 봉우리 같은 아차산1보루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4보루를 참
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보는 것도 의미
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
니까 말이다.

* 아차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27


▲  아차산1보루의 남쪽 끝

아차산1보루를 둘러보고 낙타고개와 영화사(永華寺)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사진에 담는 것
은 1보루에서 완전히 마무리를 지어 더 이상 다룰 것은 없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복습한 아차산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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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언덕에 살짝 깃든 고구려의 작은 흔적, 연천 은대리성

연천 은대리성(한탄강)



' 연천에서 만난 고구려의 작은 흔적, 전곡 은대리성 '
연천 은대리성



 

여름 제국(帝國)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7월의 한복판에 경기도 북부에 자리한 연천
(漣川)을 찾았다. 남북분단의 비애가 서린 연천 고을에서 가장 큰 읍내이자 구석기유적
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는 전곡읍(全谷邑)까지 어찌어찌 가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찾은 전곡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마침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은대리성을 더듬
기로 했다.

은대리성은 전곡읍내 서쪽에 위치한 연천군보건의료원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보건의료원 내부를 거쳐야 된다.



 

♠  한탄강 언덕에 깃든 옛 고구려(高句麗)의 조그만 성
연천 은대리성(隱垈里城) - 사적 469호

▲  은대리성 내부

한탄강(漢灘江)과 주상절리로 유명한 차탄천(車灘川)이 만나는 삼각형 지형 강변 언덕에 장대
한 세월이 묻힌 은대리성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한탄강은 용암대지의 하천 침식작용으로
주상절리(柱狀節理) 등의 벼랑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 3각형 모양의 강변 언덕도 적지 않다.
강변은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윗쪽에 평지가 벼랑과 반대 방향으로 점차 넓어지는
형태로 은대리성도 바로 그 지형을 바탕으로 닦여진 것이다.

은대리성은 적당한 기록도 없이 이곳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는데, 1995년에 발간된 연천군사료
집에 의해 속세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과 토지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이곳을 찾아 간단하게 발굴/지표조사를 벌였고, 2003년에 단국대 매장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정식으로 발굴이 이루어져 성의 실체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성의 평면은 삼각형으로 3면은 막다른 벼랑이고, 동쪽만 속세로 이어진 평지라 수비하기에는
딱 좋은 요새이나 만약 성이 적군에게 털린다면 이건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항복하기
싫다면 싸우다 죽던지, 아니면 벼랑에 몸을 던지던지 해야 된다. 이는 무조건 성을 사수하고
만약 성이 함락되면 성과 함께 최후를 마치라는 제왕(帝王)의 차가운 배려가 담긴 것이다.

성은 크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의 폭은 동서 400m, 남북 130
m, 둘레 1,005m의 조그만 규모로 외성의 동벽은 평지를 가로질러 축조되었다. 성벽 내부는 점
토와 모래로 다지고 외벽은 돌로 쌓았는데, 다른 성과 달리 현무암(玄武岩)을 사용한 것이 특
징이다.
동벽의 길이는 60~120m, 성벽 높이는 6m 정도로 성벽 상당수가 대자연과 세월의 태클로 녹아
내려 북쪽으로 가면서 2~3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동벽의 내벽 부분에는 기둥을 설치했던 흔
적이 나왔고, 최소 2번 이상 성을 고쳐 쌓았음이 밝혀졌다.
내성은 길이가 230m 정도로 성의 핵심부이다. 여기서는 대형 건물터가 하나 나왔으며, 외성을
포함하여 문터 3개, 치성(雉城) 3개소(어떤 자료는 2개소), 도랑 흔적이 확인되었다. 치성은
성의 북동쪽과 북문터 서쪽, 남문터 서쪽에 있었으며, 북문터와 남문터 치성은 8x5 규모로 '
ㄷ'자형으로 돌출되었다.

성에서 수습된 유물은 별로 없으나 상당수가 토기 파편이며 소량의 철기편이 나왔다. 토기 상
당수는 고구려 토기(土器)로 약간의 백제 토기도 나왔는데, 동벽을 처음 쌓은 시기와 일치하
는 배수구 바닥에서 고구려 토기가 집중적으로 나와 이곳이 고구려성임을 알려준다.

전곡 지역은 오랫동안 백제(百濟)의 영역으로 북방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였다. 4세기 후반, 고
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백제를 공략하면서 한강 이북을 점유했고, 이때 전곡과 연천
지역도 고구려의 그늘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곡을 비롯한 한탄강 주변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이자, 강을 낀 천험의 요새지로 포천 반월성(半月城, ☞ 관련글 보
)과 호로고루(瓠蘆古壘), 은대리성 등 작은 성을 많이 구축했다. 그러니 빠르면 5세기 초/
중반, 늦어도 5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먼저 세웠을 가능성도 있
으나 요즘은 거의 고구려성으로 몰고 가고 있음)
이후 백제가 신라와 합심해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6세기 중반에 한강 유역을 차지하
게 되었는데, 한강에 군침을 흘린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을
가로채는 비열한 짓을 벌인다. 그 기세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함경도 남부까지 북진
을 하였고, 이때 은대리성도 신라에게 털리게 된다.

은대리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이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는지 아니면 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신라가 잠깐 이용하다가 주변
성과 통폐합시키거나 7세기 중반 이후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곳은 방치되어 수풀이
무성한 자연의 공간이 되었다.

성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은대리를 따서 붙인 것으로 2003년 이후 동벽과 북벽 일부를 손질
했다. 허나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복원하지 못하고 성 밑도리에 돌을 입히는 선에서 끝나버
려 거의 토성(土城)으로 남아있으며, 남벽에는 목책(木柵)을 다시 세웠다. 성 내부와 토성에
는 풀을 곱게 입혀 싱그러운 녹색 도화지가 되었으며, 토성과 목책, 도랑 외에 흔적은 모두
풀로 뒤덮었다.

연천에는 은대리성 외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여겨지는 당포성(堂浦城), 호로고루성 등의 성
곽 유적이 있는데, 모두 3각형 지형의 강가 언덕 평지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라 고구려 축성술
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남한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으로 그 가치와 희소성이 높다.


▲  연천군보건의료원에서 은대리성으로 인도하는 언덕길
(언덕 위가 바로 은대리성)

▲  어설프게 복원된 은대리성 동벽과 남문터

성벽 밑도리는 돌을 끼워 넣었으나 나머지는 그냥 흙만 다져 복원했다. 그래서 졸지에 팔자에
도 없는 토성이 되버린 은대리성. 이러면 이곳이 토성인줄 알지 누가 석성으로 보겠는가? (나
도 토성으로 알았음..)

▲  남벽과 마주한 남문터 서쪽

▲  동벽 중앙 부분

▲  동벽 동쪽

▲  동벽 내부


▲  동벽 남문터에서 바라본 천하 (보건의료원 산책로와 소나무숲, 한탄강)

▲  동벽 동쪽에서 바라본 천하 (보건의료원 산책로, 소나무숲)

▲  토성이 되버린 동벽 윗쪽
지금은 토성이라 이런 곳에서 과연 수비가 가능할까 싶겠지만 나중에 석성으로
재현된다면 지금과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  동벽과 성 내부

▲  은대리성 내부
지금은 온통 초록 도화지라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곳에는 건물과 군사 주둔지가
있었다. 성 내부와 건물, 주둔지의 모습, 군사들의 삶에 대해서는 딱히
정답이 없는 실정, 그러니 저 푸른 도화지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자.

▲  푸른 수풀 너머에는 북벽이 있었다. (북벽도 벼랑임)

▲  남벽에 설치된 목책 - 목책이 여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  수풀과 뒤엉킨 남벽 목책

▲  도랑 흔적
도랑은 빗물이나 생활용으로 쓰인 물을 바깥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성 안에서
아직 우물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식수는 인근 산이나 한탄강에서
힘들게 운반했을 것이다.

▲  남벽 목책 너머로 보이는 한탄강

▲  서쪽에서 바라본 은대리성 내부

▲  은대리성 내부를 가로지르는 황토색 산책로



 

♠  한탄강전망대와 3형제바위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가는 숲길 입구

은대리성은 조그만 성이라 학술조사나 정밀 답사까지 벌이지 않는 이상은 금방 둘러본다. (길
어봐야 30~40분, 보통 사람은 10~20분 정도) 그래서 좀 싱거울 수 있는데, 이것이 은대리성의
전부는 아니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 대륙을 누비던 통 큰 고구려의 성곽 유적인데 설마
이것으로 끝나겠는가..? 고구려 유적은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성 서쪽을 보면 우거진 숲이 보일 것이다. 솔내음이 그윽한 숲 오솔길을 따라가면 그 길의 끝
에 한탄강전망대가 자리한다. 소나무숲과 전망대도 엄밀히 따지면 은대리성 내부로 성곽 서단
(西端)에 해당된다.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①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②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③

▲  벼랑에 자리한 한탄강전망대

오솔길 끝에 자리한 전망대는 의자가 여럿 있는 것이 전부인 그야말로 친환경적인 전망대이다
. 이곳에 서면 한탄강(왼쪽)과 차탄천(오른쪽)이 하나가 되어 하류로 흘러가는 현장이 보이는
데 여름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 때문에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간에 오르거나
난간 너머에서 아슬아슬하게 보거나, 겨울에 와서 보던가 해야 제대로 보인다.
한탄강 물소리가 얼마나 패기가 진한지 여기까지 울린다. 차탄천 너머 서쪽은 군남면 지역이
고, 한탄강 너머 남쪽은 전곡읍 고능리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탄강 (파주 방향)

▲  수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하는 삼형제바위

전망대에는 조그만 안내문이 있는데, 그 안내문에는 임진강과 차탄천 합류지점에 있는 삼형제
바위에 대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담겨져 있다. 삼형제란 이름 그대로 조그만 바위 3개가 나
란히 수면 위에 고개를 들고 있는데, 무성한 수풀이 시야를 방해하여 본의 아니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어느 과부가 삼형제를 기르고 있었다. 그들 형제
는 우애가 참 깊었는데 어느 날 여름, 일을 하다가 무더위에 지쳐 한탄강에서 물놀이를 했다.
그런데 막내가 부주의로 깊은 곳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그를 구하고자 형들이 다가갔지만 결국
그들 모두 강제로 저승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졸지에 아들을 모두 잃은 과부는 강가로 달려가 3달 동안 대성통곡을 했는데, 3달 뒤에 삼형
제의 형상이 강 가운데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이후 해마다 이곳에서 익사사고가 발생하여 큰 바위에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 그들을 달
랬다고 전했다고 하니 전설을 통해 인근에 살던 삼형제가 강에서 사고를 당하자 그들의 넋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내면서 바위를 그들의 화신으로 삼은 모양이다. 설마 그들의 시신이 바위
로 변할리는 없을테니 말이다.

전망대에 잠시 머물며 한탄강의 유유히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여름이라 낮이 무척 길어 아직도 한낮 같고 더위의 기운도 거의 여전한 것 같다. 다
만 한탄강의 보우로 그 기운이 많이 수그러들었고 땀이 나오기가 무섭게 강바람이 그들을 털
어가니 땀도 나오는 것을 포기한다.

전망대를 나와 은대리성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고 연천군보건의료원을 거쳐 전곡읍내로 나왔
다. 이렇게 하여 은대리성 여름 나들이는 그 막을 고한다.

* 은대리성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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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나들이 '

▲  망우산, 용마산 산줄기

▲  아차산4보루

▲  망우산1보루


 

여름 제국이 저물고 가을이 서서히 고개를 들던 9월의 한복판에 나의 즐겨찾기 산의 하나
인 아차산을 찾았다.
아차산은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이자 해돋이와 일몰 명소로 유명하여 오랫동안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야무진 산이다. (나들이와 산행, 답사, 야간 등산 팬들이 많음) 산세
가 완만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마음 편히 안길 수 있으며, 산 좌우가 죄다 평지
다보니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거룩한 넋이 깃든 보루가 20개 가까이 펼쳐져 있고, 아차산성과 아차산3
층석탑, 온달샘석탑, 석실고분 등의 문화유산과 영화사(永華寺)와 범굴사 등의 오래된 절,
긴고랑계곡, 관룡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해 눈이 마음이 심심치가 않다.
아차산 북쪽에는 용마산, 그 북쪽에는 망우산이 자리해 있는데, 이름만 다를 뿐, 모두 아
차산 식구들이며, 조선 때는 아차산의 영역이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이르렀다.
(본글은 편의상 아차산4보루부터 시작하겠음)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용마산에서 바라본 아차산4보루 (사진 가운데가 4보루)

아차산4보루는 아차산(용마산 ,망우산 제외)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남한에 있는
고구려 성터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꽤 남다른데,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서 발견된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나머지 보루는 터만 간신히 남은 것에 비하면 상태가 다소 나았던 것이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않았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 (2개의 치로 이루어진 부분)

구리시(九里市)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
움을 받으며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5~6세기에 쌓은 보루임이 명백해졌
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구리시(4보루가 구리시 땅임)에서 2008년부터 복원
을 적극 추진하여 2년 동안 공을 들여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달려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을 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
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
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했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
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남쪽에는 이중치를 두었는데, 두 성벽 사이가 서로 떨어져 있어 보루 출입구로 여겨
지며, 고구려 축성 양식의 하나인 들여쌓기 형식이 잘 깃들여져 있다.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로 이루어진 독특한 치가 눈길을 끈다. 전체 길이 13.2m로 나무로 목
책(木柵)이 둘러진 중간에 2.5m의 뚫린 공간이 있어 이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
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아마도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에 이슬처럼
사라진 구의동(九宜洞)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보루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며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쌓여져 있어 안정감을 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이 쏟아져 나와 인근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대 병참
기지로 추정된다.

▲  4보루 서남쪽 치

▲  4보루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남쪽 계단을 통해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
님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앙상하게 터만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
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 내부가 어땠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
는 숙제이다.

건물터는 7개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1호 건물터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여기서는 온
돌유구 2기와 주춧돌,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 투구 등이 나와 높은 사람이 머물던 곳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3호 건물터 밑에서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
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이를 통해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지었던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4보루 1호 건물터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는 2개의 저수시설이 나왔다. 이들은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이들의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
'670x610x깊이 350cm'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앞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4보루는 아차산 능선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어 북쪽을 제외하고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서
울 광진구와 성동구, 송파구,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속시원히 시
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새해 해돋이 수요가 많다. 게다가 아차
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능선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하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강동구, 송파구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산줄기 중간에 자리한 용마산(龍馬山)

▲  아차산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4보루에서 북쪽 능선길을 10여 분 정도 가면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은 용
마산, 북쪽은 망우산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용마산 정상을 찍고 망우산으로 가기로 했다.

아차산과 망우산 사이에 자리한 용마산(348m)은 아차산의 일원으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
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한다.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아차산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아차산보다 50m 이상 키가 크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울 동부와 구리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찌감치 고구려와 신라가 능선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지금까
지 발견된 보루는 7개로 1,2,4,5보루는 고구려, 3,6,7보루는 신라(新羅)가 세운 것으로 여겨
진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
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를 죽였다. 그러자 용
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
나 전설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해오고 있어 아마도 무인(武人)을 차
별하던 고려 중기나 조선시대에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말목장이 있었는데, 용마급 말
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산이라 했다는 이야기
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듯 싶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중랑구 면목4동/면목7동


▲  헬기장이 되버린 용마산4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능선 갈림길에서 용마산 정상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헬기장이 있다. 바로 이곳에 고구
려가 심어놓은 조그만 점, 4보루가 있었다.
용마산4보루는 성벽 둘레 약 228m로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灰黑色) 연질토기와 대형 항
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북서쪽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다. 동쪽 능선에 보루를
이루던 석축터가 일부 남아있고, 동쪽과 서쪽의 중간 지점인 저지대는 집수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 서울시에
서 다시금 조사한 결과 하나의 보루로 확인되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
며, 하루 속히 주변을 싹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구수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꺼냈으면 좋겠
다.


▲  용마산4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왼쪽 산)과 용마산 사이 움푹 들어간 골짜기는 긴고랑이다.
그 너머로 광진, 성동, 송파, 강남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힌다.

▲  시내를 향하고 있는 용마산 조망대

용마산4보루를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용마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남서쪽 길로 내려가면 서
울을 향해 고개를 쳐든 조망대가 있으니 꼭 가보기 바란다. 그곳의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 조망대는 정면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마치 하늘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기분인데, 산
으로 막힌 동쪽을 제외하고 북쪽, 서쪽, 남서쪽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눈 밑으로 천하 최
대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 시내가 납작하게 바라보인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 중랑
, 동대문, 성북, 도봉, 중구, 송파, 강남, 서초, 동작, 용산구 지역과 남산, 도봉산, 북한산(
삼각산), 북악산(백악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
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용마산 서남쪽 산줄기와 긴고랑을 비롯해 광진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광진구, 중랑구, 동대문구, 강남구, 한강, 중랑천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도봉구, 북한산, 도봉산 등이 바라보인다.

▲  밋밋하게 솟은 용마산 돌탑 (아차산~망우산 주능선)
아차/용마산을 꾸미면서 새로 심은 돌탑으로 딱히 의미는 없다.

▲  용마산 돌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 동쪽 자락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하남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용마산 조망대에서 다시 아차산~망우산 능선길로 나와서 북쪽으로 향했다. 헬기장을 지나 부
드럽게 이어진 능선길을 고집하면 돌탑 하나가 넉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그를 지나치면
얼마 안가 헬기장이 나오는데, 그곳에도 고구려가 뿌린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용마산5보루
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
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지역이, 동쪽으로는 한강과 구리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보루를 세워 아차~용마~망우산 주변을 지켰던 것이
다.
성벽 둘레는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의 조그만 보루로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
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미 헬기장이 들어앉으면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했
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하였다. 허나 이곳 역시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
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  헬기장에 짓눌린 보루의 현실 - 용마산5보루
산 밑을 바라보며 위엄을 부렸던 보루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정말 세월무상 그 자체로다.

▲  용마산5보루에서 바라본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동쪽 천하
구리시 아천동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 산줄기 북쪽에 자리한 망우산(忘憂山)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망우산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어 통행은 그리 어렵지는 않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서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
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우리는 망우산을 조금 둘러보고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망우산은 해발 281m로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이루고 있다. 아차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위치
상 망우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북쪽은 망우리고개까지 이어진다. 서울 시민들의 사후 안식처
로 그 유명한 망우리시립묘지(망우리 공동묘지)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리공원으로 세탁되었다.

망우산에는 고구려가 심어놓은 보루 유적이 3곳 발견되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흔적만 남
아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환자 상태이다. 하여 1보루만 아차산보루군의 일원으로 사적 455
호의 지위를 부여했다. 다행히 그곳은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 가면 된다.


▲  망우산 산길 (1보루 방면)

망우산에는 망우리시립묘지가 넓게 누워있다. 이곳이 졸지에 서울 시민들의 사후(死後) 공간
이 된 것은 왜정(倭政) 시절로 이태원(梨泰院)에 있던 공동묘지를 서울 시가지 확장을 위해
1933년 이곳으로 모두 옮겼다.
공동묘지를 옮긴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굳이 망우산을 고른 이유
가 있었다. 바로 인근에 자리한 조선 최대의 왕릉(王陵) 밀집 구역 동구릉(東九陵)을 엿먹이
기 위함이었다. 동9릉은 망우산 동북쪽에 자리해 있는데, 동9릉과 한줄기로 이어진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써서 동9릉의 기를 누르려고 했다. 이는 왜정이 산마다 천박하게 말뚝을 박으며,
이 땅을 모욕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무덤이 많이 조성되어 최대 3만 기 넘게 들어찼으나 이후 이장을 장려하면서
지금은 절반 이하로 크게 줄었다. 특히 이곳에는 독립운동가와 문학가, 정치인들도 적지 않
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오세창(吳世昌), 안창호(安昌浩), 종두법으
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이 꽤 있다. 안창호 선생 등 일부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아직도 많은 20세기 초~중반 역사 인물들이 묻혀 있어 그들 무
덤을 찾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립묘지를 1바퀴 돌던 5.2km의 순환도로는 손질하여 1998년 5월에 '사색의 길'이란 그럴싸한
간판을 달았는데, 숲이 짙고 기운이 맑아 산책 명소로도 아주 좋으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
름답다.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사색의 길은 완전 동화 속의 풍경, 선경(仙境) 그 자체이
다.


▲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망우산1보루는 망우산 남쪽 끝 봉우리(해발 280.3m)에 자리해 있다.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
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
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싹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온다. 허나 이들은 매우 심각한 상태라 문화재청에서도 현
재 손을 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모두 갈아 엎어야 된다. 그래야 망우산 보루에 대한 진실이 나오기 때문이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1보루 옆구리를 지나는 탐방로
보루 보존을 위해 보루 아랫쪽과 윗쪽 옆구리에 탐방로를 냈다.

▲  망우산1보루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
후손들의 손길이 그쳤는지 무덤이 잡초에 완전 뒤덮여 주변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묘비와 상석(床石)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들도
없었다면 이 무덤은 자연 속에 완전히 잊혀졌을 지도 모른다.


망우산1보루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되었다. 저녁 시장기가 한참 피어오를 시간이
된 것이다. 아차산역에서 시작된 아차산 답사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배도 고프다. 게
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 임박으로 여기서 곱게 길을 접고 용마산 북쪽 갈림길로 돌아왔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사가정공원으로 길을 잡았다. 중간에 용마제일약수터가 있는데, 아직은
적합 수준이라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털어낸다. 산에서 약수터나
샘터만큼 반가운 존재가 없다.


▲  용마제일약수터

▲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는 계곡길

용마제일약수터에서 계곡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망우산 서남쪽에 자리를 닦은 사가정
공원에 이른다. 공원을 지나면 시내의 모습이 더욱 짙게 다가오고 공원 입구인 용마한신아파
트 교차로에서 아차~용마~망우산 나들이의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배인 현장, 아차~용마~망우산 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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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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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 가을 산사 나들이 ~ 화성 봉림사 (당성) '

▲  비봉산 봉림사


 

가을이 한참 숙성되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화성시 서부에 자리한 봉림사를 찾았다. 수원
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갈증에 지친 목구멍을 달랠 겸 커피 음료를 섭취하며 갈만한 곳
을 물색하다가 아직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남양(南陽) 봉림사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
다.
수원역(수원역 환승센터)에서 봉림사까지는 수원 400-4번(광교웰빙타운↔마도면 바이오단
지입구)을 타면 되는데 그 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봉림사입구에 두 발을 내린
다. 예전에는 남양/사강/서신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북양1통에서 40여 분 발품을 팔
아야 했으나 근래에 봉림사입구까지 가는 버스편이 생겨 접근성은 좀 좋아졌다. (단 배차
간격이 좀 긴 것이 함정)

봉림사입구에서 일주문 바로 밑까지는 온갖 공장들로 즐비해 꽤나 어수선한 모습이다. 공
장 굴뚝에는 수시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찔러대고, 온갖 소음이 우리의 두 귀를 연신
때려댄다. 게다가 대형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길바닥은 늘 헝클어진 모습이다. 지금까지
3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을 찾았지만 여기처럼 공장 지대를 한참이나 지나야 되는 절은 처
음이다.


 

♠  봉림사(鳳林寺) 둘러보기


▲  봉림사 일주문(一柱門)


▲  껍데기만 남은 천왕문(天王門)

어미도 몰라본다는 세월의 모진 풍파와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로 아비규환처럼 변해버린 북양
동 바닥을 가로질러 비봉산(飛鳳山)의 품으로 들어선다. 거의 끝이 보이지 않던 공장의 행렬,
이러다가 공장이 절까지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 일주문의 위엄 앞에 개발
의 칼질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애미, 애비도 못알아본다는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라
고 해도 양심은 있는지 오래된 절과 그곳을 품은 산까지는 완전히 건드리지는 못했다.
공장과 시가지에 밀려 잔뜩 기가 죽었던 비봉산도 일주문의 응원에 가슴을 피며 호젓한 숲길
을 그려내 보이고 산사(山寺)로 인도하는 산길 분위기도 서서히 회복하면서 일주문 앞까지 펼
쳐진 혼란한 풍경에 제대로 놀란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의 정문이자 속세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일주문에는 '비봉산 봉림사'란 현판이 있어 이곳의
이름을 알려준다. 바로 옆에 도로가 나 있어 굳이 문의 아랫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겠지만 그
래도 절에 왔으니 그의 체면도 세워줄 겸, 문의 밑도리를 지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얼마 안가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의 거처로 일주문을 지나온 중생을 검문하는 곳인데, 이곳에 있어야 될 사천왕은 어디로 마실
을 갔는지 보이질 않고 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들락거렸지만 이렇게 비
어있는 천왕문은 처음이다. 시작부터가 참 이상했던 봉림사. 허나 다행히 사천왕은 멀리 가지
않고 범종루 밑으로 자리를 옮겨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봉림사 숲길
숲에서 갑자기 선녀가 튀어나와 나를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호젓한 숲길이다.

▲  경내를 가리고 선 범종루(梵鍾樓)와 금강역사(金剛力士)상

숲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2층 범종루가 계단을 늘어뜨리며 우리를 마중한다. 범종루 앞에
는 우람한 체격에 성난 표정을 지은 금강역사 4기가 자리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우리를 쫄
게 만드는데, 우측 뒷쪽의 금강역사는 무려 바위까지 들며 위협을 한다.
아무래도 개발의 칼질이 일주문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와 절을 위협하니 절 입장에서도 그리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눈을 부릅뜨며 성난 표정을 지은 저들을 경내 앞에
내세워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며 더 이상 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  범종루 1층에 자리한 사천왕들

금강역사의 검문을 거쳐 범종루의 밑도리를 들어서면 사천왕의 검문을 받게 된다. 이들은 원
래 천왕문에 있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금강역사와 함께 든든하게 절을 지키고 있는데 성
난 포즈의 금강역사와 달리 사천왕의 얼굴은 귀엽기만 하다. 이들의 공간을 따로 사천왕각(四
天王閣)이라 부르며, 그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매우 조촐한 크기의 봉림사 경내가 펼쳐진다.


▲  봉림사 3층석탑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법당인 극락전, 왼쪽에는 요사와 선방으로 쓰이는 봉향각, 오른
쪽에는 3층석탑과 1708년에 지어진 'ㄴ'자 건물을 부시고 다시 지은 설법전이 자리한다. 바로
가까이에 자리한 3층석탑은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사리 6과를 봉안하고자 1979년에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의 백미(白眉)로 통하는 석가탑(釋迦
塔)과 많이도 닮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림사의 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종무소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봉향각(奉香閣)

▲  설법전(說法殿)
1883년에 조성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서쪽과 남쪽으로 감싸고 있는 화성시(華城市)의 주요 시
가지이자 화성시청을 품고 있는 남양 동쪽 비봉산 자락에 봉림사가 고즈넉하게 안겨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시절,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잦은
침공을 부처의 힘을 빌려 물리치려는 심보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당항
성(黨項城)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와도 가까워 그들과의 싸움이 늘 그치지가 않았다. 특히
당항성은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을 하던 무역항으로 이곳이 끊기면 신라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절을 창건할 때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이 이곳으로 날라와 숲에 앉았다고 하여 봉황의 숲이란
뜻에서 봉림사라 불리게 되었으며, 절을 품은 산도 봉황이 날라왔다는 뜻의 비봉산이라 불리
게 되었다. 허나 신라 중기(7세기)에 창건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이나 유적이 전
혀 없어 과연 그때 지어졌는지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 지정(至正)
22년(1362년)이란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어 최소 14세기 이전부터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초/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본격적인 사적(事蹟)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이다. 1621년 안모(安暮)와 자현(慈賢)
이 대웅전과 망양루(望洋樓),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다고 전하며, 1708년 요사를 중건했다.
그리고 1883년과 1887년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지장시왕탱, 신중탱, 칠성탱을 새로 조성했고,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새로 개금하는 과정에서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중 사
리 6과를 담고자 뜨락에 3층석탑을 세우고, 나머지 유물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龍珠寺)
효행박물관으로 보냈다.
1988년 삼성각을 새로 짓고, 1992년 요사채와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주지로 부임한 성무(性無)가 도로와 주차장을 깔고 가람을 정비하여 지금에 이른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물인 극락
전과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탱화 여럿이 전하고 있다.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봉향
각과 설법전, 삼성각, 천왕문 7~8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불상을
간직한 오래된 절이라 처음에는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절인줄 알았으나 정작 와보니 생각보
다 매우 작은 절이라 다시 한번 놀랬다.
허나 절이 아담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비록 절 밑까지 속세의 기운이
밀어닥쳤지만 일주문과 천왕문, 비봉산의 가호로 경내 주변은 무성한 숲을 이루며 한적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드러낸다. 허나 산을 조금만 벗어나면 공장과 시가지 등 속세의 기운이
이빨을 드러내니 졸지에 속세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642 (주석로80번길 139, ☎ 031-356-9117)


▲  봉림사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범종루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북향(北向)을 하고 있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화강암으로 높이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조촐하고 묵직하게 들어앉은 극락전은 조
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예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불렸으나 아미타불(阿彌陀佛) 거처에
걸맞게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불단에는 봉림사의 제일 가는 꿀단지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1883년에 제작
된 아미타후불탱과 지장시왕탱 등이 그를 수식한다. 특히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경기도
에서 활약했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수일(守一), 태삼(台三)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가운데 불상) - 보물 980호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3존불이 저마다 미소 경쟁을 벌이며, 온화한 표정으
로 중생을 맞이한다. 아미타불 좌우에 자리한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허전한
옆구리를 달래고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夾侍) 보살상이며,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아미
타후불탱은 1883년에 제작된 것이다.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78년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했을
때, 그의 뱃속에서 수많은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때 지정(至正) 22
년(1362년)이라 쓰인 묵서명이 나와 최소한 1362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며, 1583년
에 새로 개금(改金)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높이 88.5cm, 무릎 폭 78cm의 작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이 두툼하게 솟아있으며, 살짝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박혀 있다. 얼굴은 단아하고 온
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데, 코는 작지만 오똑하게 솟았고, 붉고 조그만 입술 위에는 수염이
살짝 그어져 있다. 두 귀는 중생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通肩) 스타일로 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처리되어 있고, 옷은 띠매듭 대
신 3줄의 옷주름으로 처리했다.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전적(典籍) 8종과 사리병, 섬유류, 종자류, 각종 구슬, 부적 등으로 이들은 '봉
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전적일괄'이란 어려운 이름으로 보물 1095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사리와 법화경(法華經)을 제외하고 모두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가 있다.

아미타불 좌우에는 가히 1,000기는 넘을 듯한 조그만 금동불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이들은 중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  조그만 연못과 다리를 갖춘 샘터

▲  봉림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칠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
로 1988년에 지어졌다.
남쪽을 바라보는 곳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서해바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칠성탱이
자리해 있는데, 칠성탱은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19세기 후반 경기도에서 활약한 혜산축연의
작품으로 나름 가치가 높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두고 그 좌우로 월광보살(月光菩薩)과
일광보살(日光菩薩),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는데, 붉은 색과 청색이 잘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19세기 후반 경기도 불화 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산신탱과 독성탱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주름진 산이 표현된 산신탱은 1984년에,
편하게 앉은 독성 할배와 동자,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진 독성탱은
1991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경내

우리는 삼성각에 들어가 염치불구하고 10분 정도 쉬었다. 건물이 매우 작아서 장정 2명이 들
어가 앉으니 완전 꽉찬다. 여기서 세월과 세상, 근심을 잠시 잊으며 없는 듯 쉬고 있다가 밖
으로 나와 봉향각 툇마루에도 걸터앉아 산사의 고적함을 즐겨본다.

햇님도 슬슬 퇴근할 때가 되었는지 찬 기운이 조금씩 엄습해온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
런 절간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기에 억지로 발을 떼며 경내를 나왔다.
절에는 하얀 털의 멍멍이 3마리가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를 일주문까지 배
웅을 해주고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일부러 배웅해준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늘
번잡한 일주문 밑과 달리 절은 고적하기 그지 없으니 그도 사람이 그리웠나보다. 그만큼 봉림
사는 한적한 절간이었다.


▲  봉림사를 뒤로하며, 하얀 털의 멍멍이가 일주문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  신라의 대외무역항인 옛 당항성, 화성 당성(唐城)
- 사적 217호

봉림사에서 남양, 마도, 사강을 지나 서신 방면으로 조금 가면 당성<唐城, '黨城'이라 쓰기도
함>이란 오래된 산성(山城)을 만날 수 있다. (당성이 봉림사와 가까워 편의상 봉림사 글에 통
합했음, 당성은 몇 년 전 3월 말에 갔었음)

당성은 옛 당항성<唐項城, 또는 黨項城>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당성이란 이름은 모를지언정 당
항성 3글자는 아마 지겹도록 들어봤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허벌나게 등장했던, 그것
도 주관식 문제의 단골로 필수로 외워야 했던 그 이름이다. 그 당항성이 바로 화성시에 있는
당성이다.

당성은 서해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남양반도(南陽半島) 서남쪽 구봉산(九峯山)에 위치한
다. 산 정상부와 동쪽 계곡, 서남쪽 능선에 걸쳐 성벽을 쌓았으며, 지금은 간척으로 많이 메
워졌지만 예전에는 산 서쪽까지 서해바다가 넝실거렸다.
백제가 처음 당항성을 지었으며,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점령하여 당성군(唐城
郡)이라 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장악하여 당항성으로 이름을 갈았
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당항성을 점령하면서 서해바다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원(中原)대륙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거나 직접 남해바
다를 돌아서 가야 했으니 자연히 대륙과의 교류는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당항성은 대륙을 이어주던 신라의 대외무역항으로 이곳을 통해 중원 왕조와 교류를 했다. 그
런 중요성 때문에 신라는 이곳을 꿀단지처럼 애지중지했다. 문무왕(文武王) 이전까지 이곳만
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구려, 백제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 그들은 자주 이곳을 공
격했고 빼앗긴 적도 1~2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라는 국력마저 딸려 그들을 상대하기 벅찼으
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사수했다.

당나라를 비롯한 중원대륙으로 가는 신라 사신과 상인, 승려는 대부분 이곳을 거쳤으며, 나중
에 무열왕(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도 백제에 대해 복수의 개거품을 잔뜩 물며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넘어가 당태종(唐太宗)에게 아부를 떨었다. 결국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고구려
와 백제 멸망의 발판을 당항성을 통해 닦은 셈이다.
문무왕 이후 백제가 거닐던 서해(西海)와 서남해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698년 이후 신라 이북
에 발해(渤海)가 들어서 대륙과의 육로가 끊기면서 당항성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경덕왕(景德王) 때는 당항성 지역을 당은군(唐恩郡)이라 고쳐 부르며 당나라에 잘보이고자 애
를 썼다. 그리고 신라 후기에는 창궐하는 해적을 막고자 당성진(唐城鎭)을 두었다.

신라가 망하면서 500년 가까이 번영을 누리던 당항성은 풍비박산이 났다. 무역항과 대외교류
의 기능이 거의 사라져 해안기지의 기능으로 크게 축소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성을 수리한
흔적이 있어 방어용으로 조선 중기까지 쓰였음을 보여주나 그 이후 제대로 버려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쇠퇴하고 만다.

당성은 산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되었다. 백제는 테뫼
식 성을 만들었는데, 테뫼식 성의 둘레는 약 360m 정도로 기단(基壇) 바깥쪽을 보축(補築)하
여 성벽을 견고하게 했으며, 성 남서쪽 높은 곳에 축조된 흔적이 남아있다. 6세기 이후 신라
가 차지하면서 협소한 산성을 넓히고자 포곡식 성을 쌓아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현재의 성은 신라 때 것으로 그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포곡식 성의 둘레는
약 1.1km로 예전에는 당성의 내성(內城)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신라 후기 유물이 출토되면서
신라 말에 설치된 당성진 성곽으로 여기고 있다.

현재 동문(東門)터와 남문터, 북문터, 우물터, 건물터가 있으며, 서쪽 성곽 정상부에 조선 때
지어진 망해루(望海樓)로 여겨지는 건물 주춧돌이 있다.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체
로 잘 남아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2~5m 정도이다. 여장 등의 방어시설은 녹아 사라졌고, 성의
지형은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당성을 품은 구봉산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산으로 동쪽을 제외하고는 산이 없어
조망이 매우 좋다. 게다가 바다가 지척이라 대륙으로 가는 관문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  당성으로 가는 숲길

당성 입구인 신흥사 정류장에서 7~8분 정도를 오르면 당성을 지키는 관리소가 나온다. 관리소
동쪽에는 건물터와 성터에서 수습된 돌들이 조그만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서쪽에 지
붕돌과 이수(螭首)를 갖춘 당성사적비가
우람한 모습으로 속인을 맞는다.


▲  당성 관리소 동쪽에 모인 옛 당성의 성돌들

신라 제일의 무역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참말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과 자연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성 안에 모든 것은 주저앉고 성벽과 건물을 이루던 돌은 잔해가 되어 산 곳곳
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당당히 성벽의 일부로 살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당항성의 내력이 적힌 당성 사적비(史蹟碑)

▲  당성 은행나무 숲길

당성사적비를 지나면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 숲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부여 잡는다. 만추(晩
秋) 때 왔더라면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그림 같은 현장이겠지만 겨울 제국이 모든 것을
공출해 가면서 앙상히 뼈만 드러낸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봄이 바로 앞까지 온 것 같
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제국의 잔당들이 설치고 있으니 은행나무들도 마음 놓고 은행잎을 틔우
지 못한다. 어여 얼어붙은 뿌리에 완연한 봄이 내려와 메마른 가지에 살이 붙었으면 좋겠다.
(이때가 3월 초였음)
폐허가 되버린 옛 성에서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숲길로 늦봄이나 가을에 거닐고 싶은 길이다.

숲길을 지나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상관은 없으며, 넉넉잡
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1바퀴를 돈다. 가파른 구간이 별로 없고, 성 남쪽에서는 궁평항과 제
부도(濟扶島),
서신 앞바다가, 서쪽에서는 땅으로 매립된 서신 서부 지역과 대부도(大阜島)가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박힌 섬들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바다도
겨우 보일 정도이다.

성곽 외에는 장대한 세월에 죄다 휩쓸려 내려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폐허의 현장이
다. 중간중간 옛 건물터와 주춧돌, 성돌의 무더기가 눈에 띄며, 은행나무 숲길 끝에는 출토된
기와조각을 차곡차곡 올려 만든 돌탑이 눈길을 끈다.


▲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이루어진 돌탑
메마른 수풀을 이불로 삼아 늦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복을
걸친 헝클어진 머리의 처녀귀신 누님처럼 보인다.

▲  기와 돌탑 주변의 건물터
건물이 녹아내린 흔적을 자연이 수풀로 보듬으면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  소나무가 우거진 남쪽 성곽

▲  솔내음이 가득 깃들여진 남쪽 성곽

▲  남문터
성문의 흔적은 없고, 성곽이 끊어진 움푹 패인 부분이 옛날 이곳에
성문이 있었음을 아련히 전해줄 따름이다.

▲  남문터 동쪽 성곽

▲  남문터 서쪽 성곽

▲  서남쪽 성곽

▲  서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지역과 대부도)
바다가 산 아래 마을까지 넝실거렸으나 거의 육지로 바뀌면서 바다는 저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산 너머로 대부도가 아련히 얼굴을 내민다.

▲  서쪽 성곽 정상부에 자리한 망해루터 주춧돌
당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이곳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던 망해루가 있었다.
망해루는 조선 후기에 녹아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누각 주춧돌과
성돌이 한데 고여 커다란 돌무더기를 이룬다.

▲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  성곽이 잠시 끊어진 북문터
북쪽을 바라봤을 북문과 문루의 모습이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진다.

▲  힘차게 뻗은 동북쪽 성곽

▲  동북쪽 성곽 부근의 건물터

건물 주춧돌과 성돌이 모여 거대한 돌의 나라를 이룬다. 건물터와 성문터에 작게 안내문을 두
어 답사객의 이해를 도왔다면 무척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상당히 아쉽다.
저런 식의 건물 유적은 겉으로만 보면 버려진 돌의 의미 없는 공간으로 비춰져 지나치기가 쉽
다.


▲  동남쪽 성곽 (1)

▲  동남쪽 성곽 (2)

보잘 것 없는 돌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이루며 거대한 산성을 일구었다. 수석에 끼지도 못하는
저들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그것이 뭉치고 모이면서 하늘까지도 겁을 먹게 만든 요새를 이
루어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성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당성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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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0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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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서울 아차산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3보루

▲  아차산4보루

 


 

아차산은 해발 295.7m의 뫼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 강북 지역의 동남
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서울 광진구,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九
里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
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지금 널리 쓰이는 '아차(峨
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이라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한 산처럼 보이지만 천하가 서울 도심의 주산(主山)인 북악
산<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더 키가 작은 이 산을 격하게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
高句麗)의 영광스런 역사가 두텁게 깃든 거룩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차디찬 북방(北
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린 유일한 곳으로 그 값어치는 남다르다.

양아치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그래도 좁은 땅 남북으로 갈
라져 70년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경영
했던 고구려와 발해(渤海), 백제, 옛 조선(고조선), 금(金)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은 실로
크다. (저 잃어버린 방대한 옛 땅을 언제나 되찾을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인지도가 낮은 동네 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아차산 일
대에 큰 산불이 났는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정체 불명
의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지던 성으로 돌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중랑천
을 건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서울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다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적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로 인해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구리시는 1994년 아차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
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
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
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경
쟁을 벌였고, 서울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등산/답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야등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게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일품 조망(眺望)으
로 관악산과 수락산(水落山)의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
면 사람이나 산이나 때와 조건을 정말 잘 만나야 된다. 만약 그가 이북이나 만주 같은 곳
에 누워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꿀단지는 되진 못했을 것이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과 아차산성(阿且山城)

▲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친수계곡 입구)

아차산과의 첫 인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간
등산으로 2~3번을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주말과 평일 야간 등산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
다가 2017년부터 다시 줄고 있다. (2018년에는 1~2번 정도 찾음)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라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
기는 커녕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
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일품 조망)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아차산으로 인도하
는 골목길을 쫓았다. 언덕길을 10여 분 오르면 동의초교(영화사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친수계곡 입구(고구려정 방면 산길)이며, 워커힐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아차산생태공원
이 모습을 비춘다. 우리는 여기서 소나무숲길을 통해 아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참고로 아차
산생태공원 남쪽에는 아차산 보루의 남쪽 끝인 홍련봉 보루 유적이 있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1)

▲  아차산 소나무숲길 (2)
소나무가 삼삼하여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이라도 이곳만큼은 힘을 못쓴다.

▲  소나무숲길에서 아차산성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

▲  아차산의 얼굴, 아차산성 - 사적 234호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쳐내면서 서쪽
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로 선을 그으면서 아차산성(阿且山城)을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란 이름 외에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있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곳이 되었다. 위례성으
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
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
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게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요구했다. <백제는 동성
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를 둘러싸고 북위와 크게 경쟁을 벌여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보
기좋게 묵사발을 만들기도 했음>
허나 그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크게 발끈하여 3만의 군사를 휘몰
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한성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
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해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
한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
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으로 조선 이후 지금까지 위례성을 찾느라 그야말로 진
땀을 빼고 있는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
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
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
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하여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장대한 세월과 자
연에 의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안내문의 내용들

산성의 둘레는 약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
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
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
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
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
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
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2018년 7월에는 망대터 일대에서 건물터 10동과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초기 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깨진 구리거울 조각과 모형 철제마(鐵製馬), 철촉 등의 철기류도
나와 삼국시대 때 산성 안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남
벽 일대에서 사다리꼴 형태의 집수시설과 목간, 씨앗 등이 나왔고, 집수시설 위에 닦여진 배
수로에는 부여 부소산성 출토품과 비슷한 대형 철촉이 나옴)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한 부
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싹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의 거의 유일하게 접근
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다. <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
직까지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을 찾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 내로 들어간 적이 없
다. 그곳이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민주화란 것이 참으로 힘들
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 서벽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아차산성 북벽 - 철책과 자연에 꽁꽁 감싸여 들어갈 틈이 없다.

▲  아차산성과 고구려정 사이에 자리한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리와 1
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
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보루가 주렁주렁 달린 아차/용마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서쪽은 친
수계곡,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이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 위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
다.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대성암(범굴사)과 구리 지역을
원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무덤 갈림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아주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일품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
산줄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2)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 남쪽 봉우리와 강동, 송파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3)
한강과 구리, 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한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
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지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이다. 여
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
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행사가 절찬리에 열린다. (그때는 산이 무너질 정
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음)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
가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는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 사
이를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1
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룬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5보루와 함께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
된 4보루를 흔쾌히 참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
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
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
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한 덩어리로 묶
어 국가 사적 455호로 삼았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5보루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죄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남
아있는 상태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
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내었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쓴 것으로 보는 견해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
러고보니 정말 신라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
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
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
리시, 남양주시 서부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터 돌탑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사이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
나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
대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겨지며, 나무 곁에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북쪽 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 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중원대륙과 만주를 제패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담
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
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  아차산의 정상인 아차산3보루 유적 - 사적 455호

명품소나무 2호에서 6보루 입구를 지나면 아차산3보루가 있는 너른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해발 295.7m(296m)이다.

3보루는 아차산에 깃든 보루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 둘레는 약 450m, 내부 면
적은 약 6,500㎡로 여겨지며, 정상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 중 가장 규
모가 크다. 2005년 보루 일부를 들추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 식량 창고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하지만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조사된 상태라 하루 속히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
한 기능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허전한 모습의 아차산3보루

3보루터를 품은 봉우리는 마치 대머리처럼 황량한 모습이다. 봉우리 외곽은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봉우리 일대는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 마냥 풀이 벗겨진 흙색 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정상
정상 주변 나무는 보루터 보호를 위해 대부분 밀어버렸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이것이 바로 아차산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이다.

▲  아차산3보루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상당수는 3보루 성돌과 이곳에 있던 건물터
주춧돌로 여겨진다.

▲  아차산3보루 남쪽 끝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조금 각박하다.

▲  아차산3보루 북쪽 끝
계단을 이루고 있는 돌은 보루터의 일부이다.


아차산3보루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아차산4보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글의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4보루 이후부터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아차산4보루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내부

▲  아차산4보루 저수시설터

* 아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광장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 2019년부터 본인 답사기에서 교통정보와 관람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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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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