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맛집'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5.07.27 [피서 성지 순례]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트래킹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2. 2015.06.02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3. 2015.05.08 부산의 지붕을 거닐다 ~ 금정산, 원효암 봄나들이 (범어사, 고당봉, 금샘, 산성막걸리)
  4. 2015.01.28 겨울 축제의 성지,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5. 2014.11.10 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 산책 (최순우옛집, 삼청각, 북악산) 2
  6. 2014.08.21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7. 2014.07.11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작품 ~ 예천 회룡포 (내성천, 회룡포마을, 비룡산, 장안사)
  8. 2014.07.02 충남의 조그만 금강산, 기암괴석이 일품인 홍성 용봉산 (용봉산 자연휴양림)
  9. 2014.05.20 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10. 2014.03.02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피서 성지 순례]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트래킹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산책 '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해운대해수욕장

▲  해운대해수욕장

▲  문텐로드 오솔길

▲  송정해수욕장


 


반년 가까이나 천하의 절반을 지배하던 겨울 제국(帝國)이 완전 저물고 봄이 하늘 아래 세

상을 말끔히 해방시킨 4월 첫 무렵 주말에 따뜻한 남쪽,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의 오랜 단골집인 광안동(廣安洞)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인근 고깃집에서 삼겹
살에 곡차(穀茶, 술)를 들이키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를
마시고 자정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오전, 찬란한 여명과 선배의 재촉에 졸린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해는 이미 중천에
올라 천하를 비춘다. 아직까지는 초봄이지만 따스한 남쪽이라 한낮에는 다소 더울 듯 싶어
반팔 옷을 지원받아 착용하고 그 위에 긴 옷을 걸쳤다. 역시나 시작부터 덥기 시작하여 광
안동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반팔로 다녔다. 이렇게 나갈 채비를 하고 11시 정도 집을 나
섰다.

그날 일정은 동백섬에서 시작하여 해운대해수욕장, 달맞이고개, 청사포, 구덕포를 경유 송
정까지 해안을 따라 거닐며 봄꽃 구경까지 겸한 10여 리의 해안 산책으로 광안역에서 부산
시내버스 40번(청강리공영차고지↔구덕운동장)을 타고 해운대 직전인 운촌에서 내렸다. 바
로 여기서부터 대장정의 해안 산책이 시작된다.


▲  해운대 대우마리나아파트 벚꽃길 ▼

운촌 서쪽 부근에 대우마리나아파트가 있다. 그 아파트 주변 도로에 벚꽃이 장관을 이루며
길다란 벚꽃길을 이루고 있는데,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겨울 눈이 봄의 눈치를 받은 탓일까
? 그대로 벚꽃으로 변한 듯하다. 대자연이 빚은 순백(純白)의 아름다움 앞에 우리가 할 일
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찍기 밖에는 없다. 잔잔히 스치는 바람에 벚꽃잎은 비처럼 우
수수 흩날리며 대지를 적시고,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수 차례씩 앗아간다. 이런 풍경
이 바로 조그만 선경(仙境)이 아니겠는가?


▲  순백의 종결자 - 벚꽃의 위엄
겨울 제국의 오랜 시련을 극복하고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피운 벚꽃들
허나 저들의 천하도 김옥균(金玉均)의 3일 천하만큼이나 짧으니
사람이든 꽃이든 인생이란 정말 무상한 것 같다.


♠  해운대의 꽃 ~ 동백(冬柏)섬 (동백공원)
부산 지방기념물 46호

▲  동백섬 산책로 (최치원 동상에서 해운대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

대우마리나아파트 동쪽 길을 가면 동백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남쪽으로 길을 건너 동백교란 다
리를 건너면 숲이 무성한 해운대의 꽃, 동백섬(동백공원)이 펼쳐진다.
해운대해수욕장 서남쪽에 자리한 동백섬은 그 이름 그대로 동백나무의 섬으로 원래는 해변 앞에
두둥실 뜬 조그만 섬이었다. 그러다가 수영강(水營江)과 장산(萇山)에서 흘러내린 흙과 모래가
억겁의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이면서 동백섬과 해변을 조금씩 이어주었고 끝내는 하나가 되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부가 되었다.

동백과 해송(海松)이 무성한 이곳은 신라가 망해가던 9세기 후반, 최치원(崔致遠)이 벼슬을 버
리고 천하를 방랑하던 중 이곳 풍경에 단단히 매료되어 동백섬 남쪽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머문 기념으로 누리마루 동쪽 해변에 '해운대(海雲臺)'란 바위글씨를 남겼는데, 해운대란
지명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하며, 해운(海雲)은 그의 수많은 호 중의 하나이다. <고운(孤雲)
이 대표적인 호임>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수많은 문인(文人)들이 해운대의 명성을 듣고 앞다투어 찾아와
시와 글, 그림을 남겼으며, 대한8경의 하나이자 부산 제일의 관광지로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
고 있다. 흔히 해운대하면 해운대해수욕장과 해운대역(2호선) 주변 번화가를 생각하기 쉽지만
해운대의 원조는 바로 동백섬이다.

동백섬을 이루는 야트막한 언덕은 운대산(雲臺山)이라 불리는데, 그 정상에는 최치원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조그만 최치원 유적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산책로와 누리마루는 사람들로 미어
터지지만 정상 주변은 그 1/10 정도로 인적이 적다. 이는 관광객 상당수가 바다만 생각하지 공
원을 이루는 산(언덕)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안 산책로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거미줄처럼 형성되어 있으므로 어디로 오르든 정상으로 통
하며, 해수욕장과 이어지는 동쪽 해변에는 인어공주상과 해운대 바위글씨가 있고, 남쪽 해변에
는 등대와 2005년 APEC 21개국 정상회의가 열렸던 세계적인 명소, '누리마루 APEC하우스'가 둥
지를 틀었다.

울창한 해송과 여인네의 입술처럼 붉은 동백, 그리고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천하 제일의 명승지
로 해운대의 얼굴이며,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았다면 누리마루를 포함한 동백섬 일대를 꼭 둘러보
기바란다. 동백섬 일대는 길게 잡아도 1~2시간 내외면 충분히 둘러본다.


▲  동백섬 서쪽 해변에서 희미하게 다가오는 광안대교(廣安大橋)

▲  동백섬 남쪽 산책로 (누리마루 입구)

▲  동백섬 남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천하 (멀리 보이는 산은 이기대)
아무리 천재화가라고 해도 결코 나오기 힘든 바다의 푸른 빛깔~~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만든 천연 물감만 할까?

▲  누리마루APEC하우스(누리마루)

동백섬 남쪽 해안에는 2005년 APEC 정상회의가 열렸던 특이한 모습의 건물, 누리마루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벗삼으며 자리해 있다. 해운대의 새로운 꿀단지로 크게 조명을 받은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누리마루 APEC 하우스'로 '누리'는 세계, 세상을 뜻하는 우리 말이며, '마루'는 정상,
꼭대기를 의미하는 우리 말이다. 그러니까 순수 우리말로 '세계의 우두머리들이 모이는 집'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누리마루는 부산시가 194억의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지은 것으로 2004년 9월에 공사를 시작
하여 2005년 9월 30일에 완공을 보았다. 건물 높이는 지상 3층의 24m, 연건평은 905평으로 그
모습은 우리나라 전통 정자(亭子)를 모델로 하였으며, 지붕은 동백섬의 아름다운 능선을 형상화
하였다. 건물을 받치는 12개의 기둥은 부산의 역동적인 모습을, 내부 장식은 우리나라의 전통문
화를 시각적으로 나타내었고, 대들보 형태로 만들어 단청을 입힌 로비 천장과 대청마루를 닮은
로비 바닥, 경주 석굴암(石窟庵)의 천정을 모방한 정상회의장, 그리고 구름 모양을 형상화한 오
찬장까지, 건물 곳곳에 이 땅의 전통 양식이 짙게 배어 있다.

2층에는 오찬장과 행사요원실, 간이주방, 홀 등이 있으며 3층에는 회의장, 정상대기실, 수행원
대기실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 바로 제3차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나라 우두머리와 수행원, 언론 기자들은 앞을 다투며 역대 정상회의장 가운
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평가했다.

APEC회의가 역사의 일부로 사라진 이후, 2006년 2월까지만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으나 해운대의
새로운 명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자 애초의 생각을 바꾸고 지금까지도 별일이 없는
이상은 계속 속세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 나에게도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라 간만에 들어가 보
려고 했으나 내 마음 같지 않던 선배의 거부권 행사로 그냥 통과하고 말았다.

★ 누리마루 관람정보 (2015년 7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입장은 17시까지, 매주 1째 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국제회의나 기타
  주요 행사가 있을 때는 관람 제한)
* 공개된 구역만 고분고분 다녀야 되며, 일반인 금지구역은 애써 들어가지 말 것.
* 입장료는 없으며, 내부 사진촬영은 자유이다. (단 약간의 제약이 있음)
* 1층에는 APEC 기념품점이 있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동백로 116)
* 누리마루 홈페이지는 위의 누리마루 사진을 클릭한다 (문의 ☎ 051-744-3140)


▲  동백섬 등대
해운대 주변을 지나는 배들을 위해 오늘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등대.
등대 주변 풍경이 너무 속시원하여 가슴이 확 트이고도 남음이 있다.

▲  해운대 바위글씨 - 부산 지방기념물 45호

동백섬 등대에서 동쪽(해운대해수욕장이 바라보이는 쪽) 아래 자갈밭으로 시선을 옮기면 '海雲
臺'란 글씨가 새겨진 울퉁불퉁한 피부의 바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이 바로 해운대의 지
명 유래가 된 현장으로 9세기 후반 최치원이 직접 새긴 것이라고 전한다. (해운은 그의 호)
허나 글씨의 건강 상태가 1,100년 묵은 것 치고는 너무 양호한 것 같고 최치원을 흠모하던 이들
이 절경이 좋은 곳에 그와 관련된 적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붙인 터라 별로 믿을 바는 되지 못한
다. 아마도 후대에 그를 기리던 누군가가 썼을 지도 모른다. 다만 고려 후기에 활약했던 정포(
鄭誧 1309~1345)의 시에
'대는 황폐하여 흔적이 없고, 오직 해운(海雲)의 이름만 남았구나'
라는 구절이 있어, 그 당시에
도 저 글씨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위글씨가 바닷가에 있어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괴롭힘을 받은 탓에 가운데 글씨인 '雲'
자가 조금은 닳았으나 나머지 글씨는 거의 양호하여 시력이 좋고 한자만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
리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관광특구 해운대 지역의 유일한 문화유적이건만 눈여겨 보는 이는 별로 없다. 한결같이 바닷가
경치와 누리마루에만 혼들이 빠져있을 뿐이다.


▲  동백섬 정상에 자리한 최치원 동상
동백섬을 이루는 운대산 정상에 최치원의 동상이 있다. 동상 좌우로 병풍처럼
늘어선 하얀 벽면에는 이은상(李殷相)과 김충현(金忠顯)이 직접 쓴 최치원의
시 10편이 새겨져 있으며, 동상 앞에는 넓게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해안 산책로와 달리 이곳은 인적이 적어 한적해서 좋다.

              ▲  최치원 유적비
그가 정녕 해운대의 전설처럼 이곳에 머물렀는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오로지 잠시 머물렀다
는 한토막 야사 하나만으로 유적비를 세우고 동
상을 세워 그의 유적지를 조성한 것이다.

▲  최치원 동상 동쪽에 자리한 2층 해운정
(海雲亭)
최치원의 후손과 그를 기리는 이들이
세운 정자로 별로 특별한 것은 없다.


▲  최치원 동상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책로
동백섬은 해안도 아름답지만 동백꽃 향기로 무성한 정상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단연
백미가 아닐까 싶다. 허나 아쉽게도 많은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해안산책로와
누리마루만 볼 뿐, 이렇게 아름다운 해운대의 속살을 지나치고 만다.

▲  최치원 동상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책로 (2)

※ 동백섬(동백공원)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동백역(1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누리마루와 최치원동상은 도보 20분)
* 부산 139, 307, 1003번(좌석) 시내버스를 타고 동백섬입구 하차, 도보 5~6분
* 동백섬 북쪽과 송림공원 주변에 주차장이 있다. 공짜 주차를 원한다면 동백섬 민영주차장 서
  남쪽에 자리한 무료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휴일에는 늘 미어터짐)

★ 동백섬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음, 주차비 징수 (공짜 주차장도 있음)
* 누리마루 주변 일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  대한8경의 한 곳이자 부산의 화려한 입술
해운대해수욕장(海雲臺海水浴場)

해운대해수욕장은 우리나라 해수욕장의 대명사이자 수백만의 피서객이 몰려오는 피서의 성지(聖
地) 및 국제적인 관광지이다. 예로부터 백사청송(白沙靑松)과 동백섬의 수려한 경관으로 대한8
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경승지인데, 신라 때부터 명성이 자자하여 해운대 온천에 신라 귀족들이 
놀러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9세기 후반에 최치원이 이곳 풍경에 퐁당퐁당 빠진 나머지 동백섬에
잠시 머물며 자신의 호 중 하나인 해운(海雲)을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곳 이름
이 해운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시인묵객들들이 해변이 닳도록 찾아와 해운대의 아름다움을 시와 노래로 표현했고, 20
세기에 들어와서 해수욕장과 온천, 동백섬을 중심으로 꾸준히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해마다 헤아
리기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국내외 관광객들로 시장통을 이루는 어엿한 세계적인 명소로 성장했
다. 우리나라의 주요 관광 특구로 부산에 처음 가본 사람이라면 필수로 들려야 되는 부산 초보
관광지의 하나이기도 하다.

해운대해변은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서 물놀이 하기에 좋으며, 여름에는 모래사장이
꺼지도록 피서객들이 몰려와 뉴스에 자주 회자되기도 한다. 피서철 휴일에는 최대 수십만 명이
백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봄/가을/겨울 주말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는다.

해안 길이는 1.6km로 부드러운 곡선의 해안을 따라 여러 호텔과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섰으며, 해
운대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아쿠아리움이 있다. 해변 서쪽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동백
섬과 해변의 경계를 짓고 있으며, 해변 동쪽에는 횟집이 즐비한 미포가 있고, 그 미포를 지나면
달맞이고개이다.

※ 해운대해수욕장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3,5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부산 139, 307, 1003번(좌석) 시내버스를 타고 해운대해수욕장 하차

★ 해운대해수욕장 관람정보

* 해수욕장 개장기간은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 주차공간 - 4,800대 정도 <주차 요금은 1시간에 3~4천원선>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문의 해운대관광안내소 ☎ 051-749-5700)
*
해운대해수욕장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해운대해변 서쪽 (동백섬을 온몸으로 가린 부산 웨스틴조선호텔)
바다는
잔잔한 물결로 백사장 모래를 어루만지며 서로의 정을 확인한다.

▲  백사장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흔적과 그들의 추억들이 서려있다.
잔디처럼 부드러운 바다와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선 백사장. 해와
달도 반하여 서로 다툰다는 해운대는 부산의 백미이다.


▲  백사장 뒤에 마련된 소나무 산책로
산책로의 길이는 인간의 부질없는 인생만큼이나 짧다.

▲  해수욕장에서 만난 어느 조각품
새가 퍼덕퍼덕 날개짓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해변 동쪽을 장악한 백구(白鷗, 갈매기)들 (비둘기도 약간 있음)
해변 서쪽과 중앙은 사람들로 봐글거리지만 미포와 이웃한 동쪽은 한산하다.
사람 대신 하얀 갈매기들이 해변을 장악하며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꾸린다.

▲  해운대해변 동쪽에 자리한 미포
해운대와 오륙도(五六島), 부산항 주변을 도는 관광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으로
횟집들이 갈매기 수만큼이나 즐비하다.

▲  열차도 발길을 끊은 미포 철길건널목

미포 철길건널목은 바다가 코앞에 보이는 시가지에 위치한 탓에 해운대의 명물로 꼽힌다. 드라
마와 영화의 단골 촬영지로 부근 주막들은 드라마/영화 광대들과 촬영 관계자들이 거쳐간 흔적
들이 요란하게 남아있고 식당들은 그것을 내세워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자 애를 쓴다.

이 건널목은 포항에서 부산을 잇는 동해남부선의 일부이나 2013년 12월 송정~해운대 구간 철로
가 직선화되면서 더 이상 열차가 지나가지 않는다. 그로 인해 해운대~미포~청사포~구덕포를 거
쳐 송정으로 이어지던 낭만의 해안 구간은 폐선되었다.
허나 이 구간은 역사 속으로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꽤 아까운 구간이니 요즘 철도 직선화와 비수
익 구간 등으로 버려진 철로를 레일바이크(Rail Bike)로 활용하거나 강릉과 삼척을 잇는 해안테
마열차를 운영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미포 건널목 왕년의 시절 이곳을 지나던 동대구발 부전행
새마을호 열차의 위엄
한때 새마을호는 고급, 쾌속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높은 가격에 비해
실속이 무척 떨어지는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  미포 건널목 부근 할매집원조복국집에서 먹은 복국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나들이와 답사에서 먹는 재미를 빠
뜨릴 수 없다. 마침 시간은 오후 1시, 시장기가 하늘을 찌르는 시간이다.
무엇을 먹을까 망설이다가 건널목 부근 복국집에 시선이 멈추면서 그곳에 들어갔다. 식당 내부
벽에는 건널목을 거쳐간 영화 광대들이 남긴 각가지 싸인들이 가히 벽지를 이룬다. 심심풀이로
그 싸인들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갖은 반찬과 밥, 복국이 차례대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콩나물
과 복어, 파 등이 일체를 이룬 복국 뚝배기를 뚝딱 비우니 해장을 한 듯 속이 개운하다. 이렇게
점심을 먹고 가득찬 배를 두드리며 달맞이고개로 이동했다.


♠  해운대의 눈썹, 달맞이고개와 해운대의 숨겨진 속살, 청사포

▲  달맞이고개 ▼

달맞이고개는 해운대 동쪽 해안가에 두툼히 솟은 언덕이다. 내륙 쪽은 완만하게 솟아있지만 해
안 쪽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급하며 그 해안의 끝에 동해남부선 철도가 간신히 자리를
비집고 지나다녔다.
바닷가에 둥지를 튼 언덕으로 절경이 아름답고 조망이 일품이며, 예로부터 이곳과 부근 청사포
에서 바라보는 저녁달이 운치가 있어서 달맞이고개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달빛 사냥
장소로 제격인 달맞이고개는 해운대가 부산시내의 일부가 되어 급속히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서 고개 자락에는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섰으며, 바다와 마주한 달맞이길 주변에는 미술
관과 갤러리, 찻집(까페), 주막들이 정신없이 뿌리를 내렸다.

해운대의 화려한 눈썹 같은 달맞이고개는 달맞이길이 중심이다. 봄에는 벚꽃놀이 장소로 사람들
을 끌어모으며, 수려한 경관으로 휴일에는 늘 사람과 수레들로 몸살을 앓는다. 달맞이길은 미포
5거리에서 송정에 이르는 고갯길로 부산의 주요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며, 4발 수레의 눈치를 받
기 싫다면 문텐로드(Moontan Road)라 불리는 오솔길도 아주 괜찮다. 어쩌면 오솔길이 달맞이길
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문텐로드는 달맞이길 남쪽 해안 언덕에 자리한 달맞이동산(해운대 달맞이공원)에 조성된 오솔길
로 앞서 누리마루처럼 우리말로 적당한 이름을 지어주어도 좋을 터인데 왜 굳이 영어로 지었는
지 관련 공무원들의 사상이 의심된다.


▲  문탠로드 코스 (해운대구청 홈페이지 참조)

문텐로드는 달빛나들목이나 달맞이길입구에서 들어가면 되며 달맞이어울마당과 바다전망대로 이
어진다. 물론 청사포로 넘어가도 된다. 해안 언덕에 자리해 있어 끊임없는 해조음을 감상할 수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여 동백섬, 암남공원 못지않은 경관을 우려낸다.

※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중동역 5,7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가면 미포5거리이다. 그 5거리를 남쪽으
  로 건너면 바로 달맞이고개(달맞이길)가 시작된다. 문텐로드는 달맞이동산 방면으로 조금 가
  다보면 오른쪽에 나온다.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00, 141, 2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미포 문
  텐로드입구' 하차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  달맞이길에서 바라본 천하
왼쪽으로 아련히 보이는 산은 이기대, 오른쪽에 진하게 보이는 곳은 동백섬과 해운대

▲  소나무가 무성한 문텐로드 오솔길
해조음을 먹고 자란 소나무들이 베푼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정신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  문텐로드 바다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물감이 흐드러진 동해바다가 달맞이 해변을 살포시 어루만진다.

▲  문텐로드 오솔길

▲  송림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청사포 방파제와 등대

▲  달맞이고개 밑을 지나는 동해남부선 -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청사포(靑沙浦) 마을의 봄

달맞이고개에서 해안 쪽으로 넘어가면 해운대의 숨겨진 속살, 청사포가 모습을 비춘다. 해운대
와 송정 사이 바닷가에 둥지를 튼 조그만 포구로 남쪽은 바다가 넝실거리고 나머지 3면은 산에
꽁꽁 둘러싸여 있다. 부산의 부도심인 해운대 지척에 있음에도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어촌에 발을 들인 듯 마을의 분위기는 평화롭고 한가롭기 그지 없으며, 도심 속의 한적한 어촌
이자 교통이 불편한 벽지로 부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포구의 이름인 청사포는 말 그대로 푸른 모래의 포구이다. 하지만 원래는 사(沙)가 아닌 뱀이나
용을 뜻하는 사(蛇)였다. 즉 푸른 뱀의 포구인 청사포(靑蛇浦)였던 것이다. 포구 이름의 대해서
는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를 빨던 머나먼 옛날, 갓 혼인을 한 남자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
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자 아내는 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곳(이곳을 망부송과 망부대라고
부름)에 올라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애타게 기다렸다. 그 여인의 정성에 감동을 받은 동
해 용왕(龍王)은 푸른 용을 급파하여 실종된 남편과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연유로 푸른
용을 뜻하는 청사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허나 시간이 흘러 마을 사람들은 동네 이름에 뱀을 뜻
하는 사(蛇)가 있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래서 은근슬쩍 사(沙)로 바꿨다는 것이다.

이곳은 동해와 남해 경계에 자리해 있어 예로부터 낚시터로 명성이 높았으며, 회와 조개구이를
파는 주막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조개구이가 유명하여 매스컴을 탄 조개구이 식당이 여럿 있다.
허나 맛은 거의 비슷비슷하니 무작정 유명한 집에만 목숨 걸고 줄 서지 않아도 된다. 또한 앞의
전설에서 여인이 남편을 기다리던 장소를 망부대(亡婦臺)라 부르며, 그곳에 있는 400년 묵은 소
나무를 망부송(亡婦松)이라 부른다. 이들은 청사포의 명소로 너무 바다와 조개구이에만 목숨걸
지 말고 꼭 둘러보길 권한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몰라 지나치고 말았음)
청사포 마을은 매년 풍어제(風魚祭)를 지내는데 무려 400년 이상이나 이어졌다. 그 풍어제는 해
운대 풍어제의 기원이 되었으며. 근래에 소소하게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이미 몇천 년 전
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속세에서 이곳을 찾아가려면 어지간해서는 달맞이고개를 넘어야 된다. 속세로 나가는 수레길은
고개 쪽으로 난 길(청사포로)이 전부라 휴일 저녁에는 외식을 즐기려는 수레들로 자주 막힌다.
그나마 근래 4차선으로 확장되어 다소 숨통이 트였다. 허나 사람은 수레보다는 출입이 자유로워
청사포로 외에도 문텐로드 산길이나 송정으로 넘어가는 가느다란 해안길을 이용해도 된다.

※ 청사포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해운대전화국(2호선 해운대역 1번 출구에서 도보 2분)이나 2호선 장산역(5번 출구)에서 청사
  포로 들어가는 해운대구 마을버스 2번 이용 (20~25분 간격)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  청사포를 동서로 가르는 옛 동해남부선
산 윗쪽에 건물이 빽빽히 우거진 달맞이고개(달맞이길)가 보인다.

▲  청사포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수평선 너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지구가 정말 둥글긴 둥근 모양이다.

▲  월척을 꿈꾸는 강태공 (청사포~구덕포 중간)


♠  해운대 동쪽에 자리한 송정해수욕장, 구덕포

▲  구덕포 해안

청사포 북쪽 끝에는 주차장을 갖춘 커다란 식당이 있다. 언뜻 보면 길이 끊어져 보여 '왔던 길
을 되돌아가야 되나?' 싶은 좌절감이 생길 수 있지만 주차장을 지나면 바닷가로 내려가는 가느
다란 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면 바로 송정까지 갈 수 있다.
길은 바다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철길 옆도 지나고 낭떠러지 부분도 제
법 있으므로 반드시 주의를 요한다. 이렇다 할 안전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길 중간중간에 바다
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바다를 원한다면 조심스레 내려가면 된다.

청사포에서 송정으로 가는 해안길은 아는 이가 적고 인적이 적어 한적하고 호젓한 해안 산책을
누릴 수 있다. 해변 바위에는 강태공들이 드문드문 진을 치며 월척을 위해 낚시대를 드리운다.


▲  구덕포(九德浦) 마을

청사포에서 해안 산책로를 15분 정도 가면 조그만 어촌마을, 구덕포가 모습을 비춘다. 송정해수
욕장 남쪽에 자리한 구덕포는 미포, 청사포와 더불어 해운대3포(浦)라 불리는데, 미역과 멸치,
조개가 많이 생산되며, 청사포와 마찬가지로 해산물을 다루는 횟집과 식당, 그리고 민박 등의
숙박업소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이곳으로 1박 여행이나 모임을 오는 부산 지역 학교나 단체,
동호회가 많다.
마을 남쪽과 동쪽은 바다로 막혔고, 서쪽은 산지가 가로막고 있어 오로지 북쪽만 외부로 뚫려있
다. 길도 송정으로 통하는 북쪽 길이 유일하다. 그래서 속세에서 이곳에 오려면 무조건 송정을
거쳐야 된다. 청사포는 그래도 마을까지 들어오는 마을버스라도 있지 구덕포는 그딴 것도 없다.
송정까지 와서 20분 정도 걸어야 된다.

구덕포는 옛날 함안조씨 일가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마을 서남쪽 산자락에 당
집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14일과 6월 14일에 용왕제(龍王祭) 거릿대장군제를 지낸다.


▲  구덕포 표석의 위엄

▲  송정해수욕장(松亭海水浴場)

해운대 동쪽에 자리한 송정해수욕장은 해운대와 달맞이고개(신곡산)를 사이에 두고 자리해 있다.
부산의 주요 해수욕장의 하나로 꼽히며 백사장 길이는 1.2km, 면적은 62,150㎡이다. 여름에는
수십 만의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피서의 성지로 수백 만이 모여드는 해운대보다는 조금은 한가하
며, 조개구이와 해산물을 취급하는 식당과 민박 등의 숙박시설이 가득하다.
해변 동쪽 끝에는 죽도산(竹島山)이라 불리는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언덕이 있는데 해발이 고작
24.2m이다. 산이라기 보다는 야트막한 언덕이 더 어울릴 것이다. 죽도산은 원래 해변 앞에 떠있
던 죽도(竹島)란 섬으로 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연륙되어 한반도의 일원이 되었다. 죽도산은 죽
도공원이라 불리기도 하며, 남쪽 해변에 송일정(松日亭)이란 있다. 특히 송정해변과 죽도공원에
서 지켜보는 일출과 월출은 가히 장관이다.

송정은 옛날에는 '갈개', '가을포(加乙浦)'라 불렸다. 지금은 없지만 바닷가에 갈대가 무성했다
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 고종 시절 이곳 출신으로 승지(承旨)에 올랐던 노영경이 자신이 바닷가
에서 태어났음을 감추고자 멋대로 송정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갈개 외에 '광어골'로
불리기도 했다.

※ 송정해수욕장(구덕포, 송정역)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38, 39, 63, 100, 100-1, 141, 181, 20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송정해수욕장입구 하차 (100, 181번은 송정해수욕장까지 들어감)
* 부산지하철 2호선 장산역 1번 출구에서 182번 시내버스, 10번 출구에서 38, 139, 1001번 시내
  버스 이용 (139번은 해운대역으로 다소 돌아감)
* 부전역과 태화강역, 경주역, 포항역, 동대구역에서 출발하는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송
  정역에 정차한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

 
▲  송정역(松亭驛) - 등록문화재 302호

송정해수욕장 북쪽에는 한때 동해남부선의 일원이던 송정역이 자리해 있다. 이 역은 1940년대에
동해남부선의 간이역으로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철제
창고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띄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2006
년 문화유산의 새로운 등급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때 동해남부선 열차가 모두 정차하던 역으로 피서의 꿈을 안고 찾아온 나그네들로 북적거렸지
만 2013년 12월 동해남부선 송정~해운대 구간이 직선화되면서 지금보다 더 북쪽에 새 송정역이
지어졌다. 그로 인해 열차는 모두 그곳으로 갔고, 역의 임무도 새 역이 전담하게 되었다. 기존
송정역은 그래서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한 신세가 되었는데, 아마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
다면 건물의 목숨 조차도 위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 없다.

송정역을 끝으로 해운대 동백섬에서 시작된 해운대~송정 해안 투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구
덕포와 문텐로드를 제외하면 예전에도 여러 번 발걸음을 했었고, 해운대 같은 경우는 정말 지겹
게도 찾았지만 이번처럼 깔끔하게 둘러본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적지 않은 거리를 걸었지만
푸른 바다와 언덕, 봄꽃, 숲길을 겯드린 풍경이 절대로 지루하지 않았기에 정말 짧은 거리를 걸
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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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7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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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정릉 북한산 봉국사(奉國寺) '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봉국사 석조여래좌상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이 되면 3가지의 볼거리가 나를 바쁘게 만든다, 서울연등축
제(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특별전이 그것인데, 이중 가장 흥
겨운 것이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과 그 1주 전에 열리는 서울연등회이다.  (간송미술관 특
별전 2014년부터 미술관 대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고 있음, 특별전 기간도 연장됨)

간송미술관 특별전은 별 인연이 없으면 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초파일은 비가 와도 절대
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도 아니고 평소에도 많은 절을 다녀 지금까지 300곳
에 이르는 사찰을 들락거렸지만 초파일에 굳이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는 이유는 초파
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양밥과 떡 등 온갖 먹거리까지 그 흥겨
움을 보탠다. (공양밥 때문에 그럴지도??)

초파일이 다가오자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미답(未
踏)으로 남은 고찰(古刹)을 물색해본다. 초파일 만큼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마음 편하게 가까
운 시내 고찰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왠만한 고찰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근현대
사찰은 거의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는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지만 개방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꽤나 인색하게 구는 곳은 뺐음>
그래서 아주 옛날에 가보거나 1~2번 정도 간 곳을 포함하여 서울 강북 일대를 대상으로 코스
를 짰는데, 이번에는 후배 2명도 같이 가기로 하여 이동이 편하게끔 동선을 고려했고, 그 첫
답사지로 20년 전에 딱 1번 가봤던 정릉 봉국사를 선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서광이 밝았다. 그 서광을 받으며 오전 11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국민대로 가는 1213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에서 발을 내린다. 봉국사가 비록
도선사(道詵寺), 길상사(吉祥寺) 만큼이나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생의 발길이 적지
않은 절이라 일주문부터 사람과 수레가 꼬리를 꼬리를 문다.


♠  봉국사 입문

▲  봉국사 일주문(一柱門)의 뒷모습 - 지붕에 세월이 달아준
푸른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서울의 북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정릉로는 시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다.
거기에 고가도로로 된 내부순환도로까지 있어
수레의 굉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런 정신없는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봉국사
의 정문이다.
북한산(삼각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부순환로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 시
야도 시원치 못하며, 문의 크기가 상당하여 시
작부터 중생의 기를 죽인다. 여기는 그런식으로
속세의 기운을 다스리는 모양이다.
문 앞쪽과 뒷쪽에는 절의 이름(삼각산 봉국사)
이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까지 200m 정도의 가파
른 오르막이 펼쳐져 다시 한번 중생의 기를 죽
인다. 절이 산중턱에 있고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이 일주문을 경유하는 북쪽 언덕길 뿐이라 꿩
대신 닭을 택할 권리는 없다. 그저 자존심을 곱
게 접고 길을 임하는 수 밖에..


▲  천왕문(天王門)과 범종루(梵鍾樓)를 품고 있는 일음루(一音樓)

일주문을 들어서면 2층 규모의 건물이 중생을 맞는다. 1층에는 천왕문 현판이, 2층에는 범종루
현판이 있어, 한지붕 밑에 2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담겨져 있는데, 이 건물을 통틀어 일음루라
부른다. 일음루는 범종루의 다른 이름으로 그 일음(하나의 소리)이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이다.
이 건물은 1979년 10월에 주지 현근(玄根)이 세웠는데, 일음루 편액과 주련은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이 썼고, 천왕문 현판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의 글씨이다.


▲  일음루의 뒷모습 - 일음루 현판이 뒷쪽에 달려 있다.

▲  천왕문 사천왕상(四天王像)
천왕문 양쪽에 늘어서 중생을 검문하는 사천왕, 허나 일음루 옆에 수레를
위한 길이 따로 닦여 있어 사천왕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는 없다.

▲  여염집 같은 종무소(宗務所)

일음루를 지나면 주차장이 나온다. 수레를 끌고 온 이들은 여기서 수레를 접어야 되는데, 주차
공간이 넉넉치 못해 바퀴를 동동 굴리는 수레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수레 주인은 주차장 관리
요원과 자리를 두고 말싸움을 벌여 석가탄신일의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기도 한다. 봉국사가 교
통이 불편한 시골에 있다면 이해라도 하지만 교통편도 괜찮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해 있는데, 잠
깐 편하자고 굳이 수레를 끌고와 불편과 혼잡에 기름을 껴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이런 날은
그저 대중교통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180도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길의 끝에 산중턱에 둥지를 튼 봉국사가 자
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정릉의 원찰(願刹)이자 약사도량(藥師道場), 봉국사(奉國寺)
북한산(삼각산)의 가장 남쪽 산줄기에 자리한 봉국사는 139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나옹선사(奈翁禪師)가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근래에는 무학대사 창건설로 완전 굳어진 모양이다.
무학은 이곳에 절을 짓고 약사여래불을 봉안해 약사사(藥師寺)라 했다고 전하며, 1468년에는 세
조(世祖)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이후 정릉(貞陵)이 복원된 17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이 없어 창건 시기
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게 한다. 게다가 조선 초기 유물은 하나도 없으니 무학이 정녕 창건한 것
인지 아니면 15세기의 세조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인지, 정릉이 복원된 이후에 지어진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

봉국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669년 이후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260년 가까이 속세
의 뇌리 속에 잊혀져 쑥대밭이 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정릉을 현종(
顯宗)의 명에 따라 1669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정자각(丁字閣)과 전례청(典禮廳) 등 정릉의 부
속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인근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이곳을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나라를 받든다는 착한 뜻에서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왕실에 더욱 잘보여 절
을 크게 꾸려보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소산일 것이다. 참고로 봉국사는 정릉과 같은 산자락에
안겨져 있으며, 정릉에서 바로 북쪽 300m 거리에 자리해 있어 원찰의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성질이 난 군인들에 의해 절이 피해를 입었고, 1883년 한
계(漢溪), 덕운(德雲)이 중건했다. 1885년 3월에는 명부전에 지장탱을 조성했으며, 1898년에 운
담(雲潭), 영암(永庵), 취봉(翠峰)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도를 봉안했다.
1913년에 주지 종능(宗能)과 화주 월하봉연(月荷奉蓮)이 칠성각을 중건했고, 1938년 화주 금파(
錦坡)가 조인섭(趙寅燮)의 시주로 염불당을 새로 지었다. 1979년에는 주지 현근이 2층 크기의
일음루를 세워 범종루와 천왕문으로 삼았고, 1986년에 산신각을 중수하고 만월보전에 신중탱을
봉안했으며, 1991년에 천불전에 신중탱을 봉안했다.
1994년 3월에는 안심당을 새로 마련해 승려와 신도의 수행처로 활용하고 있고, 주지 선관과 신
도들이 합심해 경내에 나무 1,000여 그루와 온갖 꽃을 심어 도량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살렸다.
그래서 경내에 제법 나무가 무성하여 산사의 티가 진하게 된 것이다.

일주문이 정릉로 도로변에 있어서 그렇지 일주문과 일음루를 지나면 산사의 내음이 오각을 간지
럽힌다. 정릉로와 내부순환도로가 절 앞에 있고 주택가와 가깝지만 숲에 짙게 둘러싸인 경내는
아늑하고 적막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기분이다. 지금이야 속세의 기운이 절 밑까지 올라와 실감
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완전 첩첩한 산주름 속이었다. 한양(서울) 도성에서 오려면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을 나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야 했는데 워낙 외진 곳이라 호랑이의 등장
이 잦았다.

일주문은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내 서쪽과 남쪽, 동쪽은 야산이라 정릉천이
있는 북쪽이 그나마 진입이 쉬웠다. 그래서 그곳에 문을 내고 속세와 왕래했으며, 그 길이 절과
속세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경내는 일주문에서 각박한 오르막길을 200m 올라야 나오는데, 법
당(만월보전)은 지형상의 이유로 동쪽을 향하고 있고, 명부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법당 뒤쪽
에는 높은 벼랑이 병풍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독성각과 산신각을 아슬아슬하게 걸쳐놓
았다. 이는 경내 확장이 용이하지 못해 그리 한 것이다.
이렇게 조촐한 경내에는 만월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 천불전, 산신각, 독성각, 납골당인 연화
원 등 약 10동의 건물이 터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목조석가여래좌상, 석조여래
좌상,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일괄,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351호
), 지장시왕도, 시왕도와 사자상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2014
년 1월에 한꺼번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도 양호해 접근성은 진짜 좋다. 몇 시간이나 발품을 팔아
야 되거나 수레도 겁을 집어먹는 깊은 산중의 산사에 가기가 여의치 않을 때 아주 잠깐의 발품
으로 언제든 안길 수 있는 산사(山寺)로 산사의 기운을 나름 진하게 간직하고 있어 속세의 기운
을 잠시 털어버리기에 좋다.

※ 정릉 봉국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71, 1213,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 하차
* 지하철 4호선 미아3거리역(1,6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4번 출구에서 1213번, 6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4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장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637 (정릉로 202 ☎ 02-919-0211~2)
* 봉국사 홈페이지(연화원 포함)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초파일 분위기에 잠긴 봉국사 경내


♠  봉국사 만월보전, 명부전 주변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滿月寶殿)

경내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진짜 봐글봐글하다. 때가 점심시간이라 공양밥을 먹고자 사람들이 만
월보전 뜨락에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데, 지금 그 꼬리에 동참을 하더라도 공양밥이 내 손에 오
기까지는 30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밥은 나중에 먹고 일단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뜨락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만월보전은 이곳의 법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불전(佛殿)인데, 만월보전이란 약사전(藥師殿)의 다른
이름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봉국사가 약사도량을 칭하다보니 자연히 약사여래와
그의 거처가 절의 중심이 되었다.

만월보전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손질한 것이다. 만월
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에 있으며, 그 글씨를 확대한 새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불상과 용이 그려진 기둥
불단 가운데가 석조여래좌상, 왼쪽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
오른쪽은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4호)


만월보전 불단에는 이곳에 주인으로 약사불로 통하는 석조여래좌상을 가운데에 두고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배치했다.
이중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어깨가 넓고 둥글며,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수그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고, 간략해진 옷 주름으로 신체 윤곽이 뚜렷하고 부
피감이 있어 보이는 점으로 보아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해맑은 표정의 만월보전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7호

봉국사의 든든한 밥줄인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로 정확한 시기는 전해오지 않
는다. 불상의 얼굴은 거의 동그랗고 볼에는 살이 좀 있어 보이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두 눈은 가늘고 살며시 뜨
며 중생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본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얼굴 크
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으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모두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이고,
그 가운데에 하얀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목에는 불상에 흔한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어깨를 감싼 통견
(通肩)이
다.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그 옷깃과 띠가 직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된 것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두 손은 다리 위에 모아 금색이 칠해진 무엇인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의 필수
품인
약합(藥盒)로 근래에 금색을 입혔다.

불상을 만들 때 해맑은 동자승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그의 동그란 얼굴은
해맑고 귀여워 보
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의 꽃을 머금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즐거움과 웃음을 앗아가도 그
는 그 웃음을 되찾아주고 치료해주는 의원인 셈이다. 약합보다는 그의 얼굴이 그야말로 약이다.
자신을 보며 늘 웃어주고 밝은 표정을 지어주는 불상 앞에 어느 누가 즐겁지 않으리..? 찰거머
리같은 번뇌도 속세의 부정한 기운도 그 앞에서는 모두 털리게 되어있다.

이 약사불은 도금을 입히지 않고 원초적인 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신체 비례도 거
의 맞고 세부 묘사도 충실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괜찮은 작품으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나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보물급으로도 손색이 없다. 다행히 조선 후기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
던 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석조여래좌상과 석가후불탱화

▲  호법신(護法神)을 있는데로 끌어 담은 신중탱
법당에 필수적으로 걸어놓는 신중탱은 법당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
허나 그림에 그려진 이들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정신이 없다.

▲  봉국사 5층석탑
만월보전 뜨락에 날씬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서있다. 이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저들 이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도 없었다.

       ◀  천불전(千佛殿)과 느티나무
남쪽을 바라보고 선 천불전은 석가3존불과 조그
만 금동불 1,000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들이 합
심하여 금빛을 발산하니 그 찬란함에 눈이 마비
될 지경이다.
천불전 앞에는 60여 년 묵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 9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높이는 약 16m
정도로 경내에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  천불전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존불과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의 위엄
조그만 불상은 중생들의 돈으로 조성된 원불(願佛)이다. 즐거운 초파일을 맞이하여
후하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보며 봉국사 승려를 대신하여 흐뭇한 미소로 답을 한다.

▲  천불전 옆에 자리한 안심당(安心堂)
승려와 신도들의 수행을 위해 1994년 3월에 지어졌다.

▲  봉국사의 보물 창고, 명부전(冥府殿)

만월보전의 옆구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부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1989년
에 중건된 것인데,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지장시왕도, 시왕도,
사자도 등이 푸짐하게 봉안되어 있어 경내의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다.
특히 건물 현판은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것이 이채로우며, 현판의 색깔도 검은색이 아닌 붉
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된 것이 꽤 돋보인다. 이런 현판은 여기서도 가까운
흥천사(興天寺) 명부
전(☞ 흥천사글 보러가기)에도 있어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거기 명부전과
여기 명부전이 너무나 닮았다.


▲  명부전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권속일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5호
그 뒤에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2호

명부전 불단에 봉안된 조그만 지장3존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금동 옷을 입은 지장보살상
은 녹색 승려머리로 조금 매서운 맵시로 앉아있는데, 북한산(삼각산) 동쪽에 있는
본원정사(本
精舍) 지장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 본원정사글 보러가기)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무독귀왕(無毒鬼王)협시(夾侍)해 있는데, 얼굴이 좀
순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들 뒤에는 1885년에 제작된 지장시왕도가 든든하게 걸려있고, 그 좌우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인 시왕상을 비롯하여 판관(判官), 녹사, 시자상, 동자상, 인
왕상 등이 거의 빠짐없이 자리를 메운다. 시왕도와 사자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19세기 후
반 불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
밑줄에 자리한 상은 판관, 녹사, 시자상

◀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여운
인왕상(仁王像)과 사자도
(시왕도와 사자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3호)


♠  봉국사 마무리

▲  산신각이 달려있는 경내 뒤쪽 벼랑

만월보전 뒤쪽(서쪽)에는 거의 80도 가까이 솟은 벼랑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다. 그 옹색한 곳에
계단을 내고 좁은 자리를 간신히 닦아서 독성각과 산신각을 내는 기적을 내었는데, 산신각은 각
한 계단을 1분 정도 올라야 된다.
봉국사가 이런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산신각을 걸친 것은 경내가 썩 넓지가 않고,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는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 벼랑 윗부분
에 자리를 닦은 것이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예전에는 광응전(光膺殿)이란 생소한 이름으로
불렸다. 산신각이니 당연히 산신(山神) 할배가 중심이 되야겠지만 중심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
상이 차지하고 있으며, 산신과 관음보살상이 그 좌우에 자리해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약사도량
을 내세우다보니 경내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이곳까지 약사여래를 둔 모양이다.

이곳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각박하지만 다행히 거리는 짧아서 그런데로 올라갈 만하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워 조망은 좋을 것 같지만 숲의 패기가 드높아 조망은 썩 좋지 못하다. 숲
에 가려 경내와 정릉동 일부가 보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 주변이 낭떠러지라
추락사고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뒷탈이 없다. 사고가 나면 제아무리
영험하다는 산신, 약사여래라도 구제해주지 못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산신각

▲  산신각 중수 공덕비(功德碑)


▲  산신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약사여래상, 관음보살)
이들과 후불탱화는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다. (산신각도 마찬가지)

▲  산신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  독성각(獨聖閣, 위쪽)과 용왕단(龍王壇, 아랫쪽)

▲  용왕단 (독성각 바로 밑에 있음)

월보전과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입구 사이에 용왕단이 자리해 있다. 말그대로 용왕(龍王)
의 거처로 용왕과는 전혀 관련도 없어보이는 이런 산속에 그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이채롭다.
바다 용왕이 바다에서 먼 이런 산골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곳에 용왕단을 세운 것은 지금은 제대로 안나오지만 약수터를 지키고자 세운 것이다. 용왕이
라고 해서 꼭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미치는 모든 곳이 그의 관리 영역이다. 허나 독
성, 산신과 달리 번듯한 건물이 아닌 노천에 있어 절에 봉안된 다른 존재와 크게 차별을 두었다.
용왕의 거처는 둥근 초석을 깔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 용이 새겨져 있으나 색
이 퇴색해서 제대로 안보면 지나치기 쉽다. 마주보는 용머리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렸는
데, 이는 최근에 세운 것이며, 그 안쪽을 파서 얕은 감실(龕室)을 두고 거기에 용을 탄 용왕을
봉안했다.


▲  벼랑 위에 둥지를 튼 독성각

용왕단 위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독성각이 벼랑 바위에 아찔하게 걸터 앉아있다. 이곳은 독성(獨
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조성된 독성상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독성각을 가려면 만월보전 좌측에서 올라가야 되는데, 산신각보다는 접근이 쉽다. 다만 건물 정
면 바깥은 벼랑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괜히 뒷걸음질하다가 자칫 골로 가는 수가 있다. 건물 크
기도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손바닥만한 규모라 3명만 들어가도 숨쉬기 힘들다. 추락을
염려하여 2줄로 안전 난간을 둘렀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 보인다.


▲  독성상과 독성탱 - 초파일 특수로 그에게 올려진 제물이 꽤 풍족하다.
며칠 동안 독성 식구들 제대로 회식했을 듯~~

▲  독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오른쪽 녹색 천막에서는 전을 팔고 있었다.

▲  봉국사에서 먹은 점심 공양의 위엄

국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3시가 되었다. 경내도 다 구경했으니 이제 점심을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래줘야 되겠지. 공양줄도 제법 줄어든 상태라 줄에 동참하여 공양을 받았다.
이곳 공양은 다른 절집과 비슷한 비빔밥이다. 밥과 갖은 나물, 고추장이 그릇에 담겨
이들을
비벼먹으면 되며, 작은 그릇에는 물김치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떡도 1봉지씩 나눠주면서 후식
도 배려했다.

공양을 받는 건 좋으나 경내가 사람들로 가득하다보니 밥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산
신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즐거운 공양시간을 갖는다. 이들 공양밥 외에도
전과 간식도 있는데, 이들은 돈 주고 사먹어야 된다. 전 1장은 1~2천원선, 후배 1명이 전을 2장
사와서 같이 먹었다. 한참 배가 고플 시간이고 바깥에서 소풍 나온 듯 밥을 먹으니 밥과 물김치,
전이 모두 꿀맛 같다. 밥에 담긴 고추장은 양이 적당하여 모두를 붉게 물들이는데 충분했고, 물
김치는 맛이 시원하여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게 즐겁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봉국사를 뒤로하며 다음 절로 이동했다. 이날 우리의 갈 길
은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만 둘러보고 끝낼 수도 있지만 달랑 1곳으로 초파일 절투어
를 땡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1년에 딱 하루 있는 날이니 이날만큼은 좀 무리하여 초파일 분위
기를 내내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봉국사 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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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지붕을 거닐다 ~ 금정산, 원효암 봄나들이 (범어사, 고당봉, 금샘, 산성막걸리)

 


' 부산 금정산(金井山)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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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산의 상징, 금샘


 

차디찬 겨울 제국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3월 첫 무렵에 부산(釜山)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금정산을 찾았다.
바로 전날 부산 광안동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穀茶)를 마시며 간
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졸린 눈을 비비며 그날의
목적지인 금정산 산행을 떠났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49번(노포역↔광안동)을 타고 금정산 기점의 하나인 범어사 입구
에서 내리니 시간은 벌써 정오를 가리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점심을 먹기로 하
고 부근 식당에서 콩나물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으로 뱃속을 위로하고 범어사입구 종점에서
등산객들로 미어터지는 부산시내버스 90번에 간신히 매달려 범어사 턱밑에 발을 내린다.

범어사(梵魚寺)는 부산을 대표하는 고찰(古刹)이자 경남권 3대 사찰의 하나로 지금까지 세
번 발걸음을 했다. 2002년 이후 정말 오랜만에 찾았지만 별로 땡기지 않아 그냥 항아리 겉
돌 듯 바로 통과해 버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원효암과 금정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범어사의 상징이자 천하에 널린 일주문(一柱門)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조계문(曹溪門, 보물 1461호)을 지나 왼쪽 산길로 진입, 북문 쪽으로 조금 가
다가 원효암으로 가는 산길로 진입했다. 여기서 원효암까지는 대략 1km이다.


▲  원효암으로 가는 산길


♠  금정산에 묻힌 도심 속의 산중암자 원효암(元曉庵)

▲  꾸밈 없는 소박함, 원효암 정문

해발 500m 고지에 자리한 원효암은 범어사의 부속암자로 금정산 동쪽 자락에 안긴 아담한 산중
암자이다. 삼삼하게 우거진 숲속에 숨은 듯 자리해 있어 바깥에서는 어지간해서는 보이지를 않
는다.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었다면 지나가는 새 조차도 이곳에 절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원효암은 절 이름 그대로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정산에서 미륵사(彌勒
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원효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부산 앞바다에 무려 5만 척의 왜군이 밀
려오자 도술을 부려 물리친 곳이라 한다. 허나 신라 왕실의 측근으로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교를 이끌었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바쁘게 살던 그가 과연 이곳까지 내려와 절을 지을 여유
가 있었는지 과연 궁금할 따름이다. 그가 세웠다는 일말의 증거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신라 중기에 활약했던 원효와 의상은 3살짜리 아이도 줄줄 욀 정도로 유명하여 신라 후기 이후
창건된 많은 절들이 앞다투어 그들을 이용했다. 그들이 창건했다는 식으로 그럴싸하게 창건 설
화를 꾸민 것이다. 어떤 절은 아예 그들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 원효사, 의상암(義湘庵)을 칭하
고 있으니 극락에 가있을 원효와 의상이 '엥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을 절을 지었나?' 놀랄지도 모
른다.

그러면 원효암은 언제 지어졌을까? 유감스럽게도 절과 관련된 역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경내 동쪽에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에 문을 연 것
으로 여겨진다. 즉 탑이 있으니 절이 있는 것이다. 원래 위치는 동편3층석탑 일대로 언제부터인
가 터만 남아오던 것을 조선 중/후기에 지금에 자리에 다시 지었으며, 1906년에 성월선사(聖月
禪師)가 1906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무량수각을 비롯하여 요사와 심검당 등 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
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와 목조관음보살, 아미타3존도(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41호)
를 비롯해 오래된 부도, 방광탑(放光塔) 등이 있다. 또한 1950년대에 우물에서 원효대사가 쓰던
것이라 전하는 옥돌의 도장이 발견되어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절의 땅을 구분짓고자 경내을 둘러싼 숲 주위로 촘촘히 철조망을 둘러 휴전선 철책 마냥 은근히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는데, 철조망 사이로 2~3개의 문을 내어 조촐하게 일주문으로 삼았으며,
이들 문은 범어사와 금정산성 북문으로 이어진다.


▲  원효암동편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호

하늘과 나무만 보이는 첩첩한 산주름 속의 암자로, 원효암을 가려면 철조망 정문을 거쳐야 된다.
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 내리막 길로 가면 운치가 깃들여진 전나무
숲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전나무 그늘에 오래된 3층석탑과 부도(浮屠) 3기가 뿌리를
내렸다.

3층석탑은 원효암 동쪽에 있어서 원효암동편3층석탑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원효암동3층석탑이라
불렸으며, 이는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이다.


동편3층석탑은 높이 약 1.9m로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원효암
은 원래 이곳에 있었는데, 이 탑을 통해 절이
적어도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귀뜀해주며,
원효암의 옛 금당(金堂)터를 알려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
을 세운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기단은 없고 바
닥돌 바로 위에 탑신이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는데, 2층과 3층은 돌의 재
질이나 비례로 보아 나중에 손질된 것으로 보인
다. 제법 두터워 보이는 옥개석(屋蓋石)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어 곡선의 미를 선사하
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세
월의 검은 때가 낀 것을 빼면 대체로 상태는 양
호하나 탑의 기본 요소인 기단이 없어 다소 어
색해 보인다. 기단이 있었다면 제법 볼만했을텐
데 말이다.


▲  석종형(石鐘形) 부도 3형제

3층석탑과 마주한 부도 3형제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모두 석종형 스타일이다. 위의 사진
을 기준으로 왼쪽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 받침 위에 방금 피어오른 연꽃 봉오리처럼 탑신이
얹혀져 있고, 오른쪽 부도는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  원효암의 백미, 전나무 숲길

원효암의 백미는 경내로 인도하는 전나무 숲길이 아닐까 싶다. 비록 잠깐의 짧은 거리이지만 전
나무가 늘씬한 몸매로 하늘을 가리며 늘어서 있어 동화 속의 풍경처럼 정겹기 그지없어 마치 순
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만큼이나 아름다운 절이 아닐까 싶은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  옛 사람들이 바위에 남겨놓은 바위글씨

▲  경내 직전에 펼쳐진 대나무 숲길

전나무 숲길은 절과 가까워지면서 녹음(綠陰)이 서린 대나무 숲길로 변화한다. 푸르름의 한복판
에 서 있으니 늦겨울은 정말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대나무들이 앞다투어 잎을 피우며 경내 앞
쪽을 가득 메우니 말이다. 바람이 스치는 대나무 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귀가 정화되며 마음
속에 가득한 번뇌도 잠시나마 와해되는 듯 하다.

     ◀  원효암 경내로 오르는 계단과 문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경내로 오르는 계단이 나
온다. 계단 끝에는 허름하게 생긴 기와문이 있
는데, 문 좌우에는 담장을 둘렀으며, 돌로 축대
를 쌓아 터를 다졌다. 바로 저 문을 들어서면
절간 같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숲속에 없는
듯 자리한 원효암 경내가 펼쳐진다.


▲  아늑하고 조용한 원효암 경내 (정면에 기와집이 법당인 무량수각)


▲  무량수각 툇마루와 단청이 곱게 입혀진
기둥과 천정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넓고 잔잔한 뜨락
이 펼쳐진다. 뜨락 너머에는 이곳의 법당(法堂)
인 무량수각(無量壽閣)이 뜨락을 굽어본다.
무량수각은 조선 중기 이후 원효암이 이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지은 건물로 여겨지며, 적어도
200년 이상 묵은 듯 고색의 때가 넘친다. 현판
에는 '無'가 '天' 비슷하게 쓰여있어 천량수각
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그는 엄연히 '無'이다.
'無'의 다른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나중에
법당 우측에 'ㄱ'자 모습의 건물을 붙이면서 지
금과 같은 독특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속은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우측과 좌측은 엄밀
히 다른 성격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좌측은 법
당이고 우측은 공양간 및 종무소로 쓰인다. 법
당에는 원효암 현판과 무량수각 현판이 걸려 있
으며, 특이하게도 툇마루를 가지고 있어 잠시
두다리를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퇴색한 마루에
는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움푹 들어간 부분도
있으나 아직은 튼튼하다. 기둥 윗부분과 천정에
는 환하게 단청이 칠해져 건물을 수식한다.

▲  다소 빛이 바랜 원효암 현판의 위엄

▲  글씨가 꿈틀거리는 듯한 무량수각 현판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무량수각은 허름해 보이는 외부와 달리 내부는 깔끔하여 오래된 티가 별로 풍기질 않는다. 불단
은 2개가 마련되어 있는데, 우측에는 목조관음보살이, 좌측에는 지장보살이 한 자리씩 차지해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건물 이름은 분명 아미타불의 거처인 무량수각인데 아미타불은 온데간
데 없고, 전혀 관련도 없는 이들이 대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  무량수각 좌측 불단에 자리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지장탱화
지장보살상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그 크기가 작아 유리막 안에 특별히 봉안했다.
지장보살의 뒤를 받쳐주는 지장탱화는 색채가 다소 바래 보여 적어도
100년 정도는 묵은 듯 싶다.

▲  원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6호

무량수각 우측 불단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18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범어사에 있는
여러 불상과 비슷하게 생겨 범어사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고, 입술에는 엷은 미소를 띄우며 중생을
맞는다. 볼살은 두텁고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듣고자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몸에는 두꺼
운 법의(法衣)를 걸치고 있고, 왼손은 다리 위에 대고 오른손은 아미타9품인과 비슷한 수인(手
印)을 취하고 있다.
부산 지역에 몇 안남은 17~18세기 보살상으로 한때 도난을 당하여 왜열도로 넘어갔다가 현몽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래서 영험이 뛰어나다고 명성이 자자하며, 그의 신변보호를 위
해 짙게 유리막을 봉했다.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 이해는 되지
만 폐쇄된 공간에 갇힌 듯 그도 꽤 답답할 것이다.


▲  무량수각 우측 샘터
금정산이 중생에게 베푼 소중한 선물로 그 뒤로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무언가를 담은 장독대들이 늘어서 있다.

▲  원효암서편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2호

원효암에는 2기의 오래된 석탑이 있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동편3층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경
내 서쪽에 자리한 서편3층석탑이다.

서편3층석탑은 높이 2.33m로 경내에서 서북쪽으
로 30m 떨어진 공터에서 수습해 온 것이다. 2중
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것으로 대자연
과 세월의 괴롭힘이 상당했는지 성치 않은 부분
이 별로 없을 정도인데, 바닥돌은 거의 파괴되
었고 아래층 기단은 옆이 뭉개졌으며, 탑의 머
리장식 일부도 날라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은 탱주가 사라졌고, 탑신 역시 1층만
남아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2층과 3층 탑
신을 새로 만들어 붙였다. 각층 옥개석에는 밑
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모서리는 세월
의 거친 흐름에 죄다 휩쓸려나갔다.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동편3층석탑과 더불
어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서편3층석탑 부근에 자리한 부도

서편3층석탑 부근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맵시가 고운 석종형부도가 서 있다. 기단에 검
은 이끼가 끼어 있고, 돌의 피부가 제대로 바래 있어 제법 묵은 부도임을 알 수 있는데, 부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목조관음보살상과 더불어 원효암의 조선 후기 유물이다.

이렇게 원효암를 말끔히 둘러보고 경내 서쪽에 가늘게 난 산길을 타고 금정산으로 향했다. 산성
북문까지는 25분 정도 걸렸는데, 처음에는 원효암 뒷쪽에 자리한 의상대(義湘臺)와 원효봉에 가
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고당봉과 금샘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 금정산 원효암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 부산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 5,7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범어사로 올라가는
  길(청룡예전로)이 나온다. 그 길을 오르면 삼신교통 종점이 있는데 거기서 범어사행 90번 시
  내버스를 타고 범어사 하차, 범어사를 거쳐 40분 정도 오르면 된다. 90번 버스는 평일에는 15
  ~20분 간격, 휴일에는 10분 내외 간격으로 운행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원효암까지 찻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범어사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
  우고 올라가야 된다.
* 원효암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25 (☎ 051-508-4008)


♠  부산의 지붕 거닐기 ~ 금정산성(金井山城) 북문에서 고당봉까지

▲  금정산성 북문(北門) - 사적 215호

금정산 지붕에 길게 둘러진 금정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산성(山城)으로 왕년에는 길이가
18km에 달했다고 한다. (북한산성은 약 9.5km) 허나 지금은 ¼도 안되는 4km 정도의 성벽만 간
신히 남아 있다.
지금의 성은 17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67년 경상좌수영 통제
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 보수를 조정에 건의한 적이 있으며, 아마도 신라나 고려 때 왜구
(倭寇)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707년 성이 너무 넓어서 성의 중간 부분에 남북을 가르는 중성을 쌓았으나, 1774년에 성이 너
무 커서 수비가 어렵다며 폐지했다. 1806년에 성을 다시 손질했으나 왜정 때 철저히 파괴된 것
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복원공사를 벌여 동문(東門)과 서문, 남문, 수구문(水口門)을 복원하
고,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마치 사극 세트장의 성문처럼 간결하게 생긴 북문은 해발 590m에 자리해 있는데, 문의 높이가 3
m 정도이다. 문은 동그랗게 구부러진 모습이 아닌 네모난 형태로 문 위쪽에는 여장을 쌓고 조그
만 팔작지붕 문루(門樓)를 세웠으며, 문의 규모는 서문(西門)에 비해 상당히 왜소하다.

문을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야 고당봉이다. 직진하면 미
륵사와 금성동, 왼쪽은 성곽길을 따라 원효봉과 의상봉, 동문으로 이어진다. 북문에서 고당봉까
지는 넉넉잡아 25분 정도 걸리며,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좀 급해진다.


▲  북문에서 정상 방면으로 이어지는 금정산성 성곽 (북문 북쪽)
저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가 고당봉이다.

▲  북문에서 동문 방면 금정산성 성곽 (북문 남쪽)

▲  부드러운 곡선의 원효봉~의상봉 능선

▲  고당봉 밑에 자리한 고모영신당(姑母靈神堂)

고당봉을 2분 정도 앞둔 지점에 이르면 돌담을 두른 붉은 벽으로 된 고모영신당이란 사당을 만
나게 된다. 이 사당은 고당봉에 깃들여진 고모영신(姑母靈神)을 모신 일종의 산신당(山神堂)과
같은 곳으로 1920년대에 범어사 신도인 밀양박씨 할머니의 유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임종에 임하면서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고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
제(姑母祭)를 지내달라. 그러면 고당봉의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지켜주겠다'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범어사 승려들은 그 유언을 받들어 고당봉 밑에 사당을 지어 1년에 2번(음력 1월 15일,
5월 5일) 제를 지내니 범어사가 나날이 흥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제사를 지냄)

우리의 토속 사당인 산신당이나 성황당은 기와나 나무로 만든 집이 딱 어울리는데 이곳은 근래
에 새로 지은 붉은 시멘트 집이 신당(神堂)의 역할을 하여 다소 어색할 따름이다. 허나 이곳은
고지대라 거센 바람과 눈,비에 자주 시달려 안전과 관리를 위해 시멘트 집을 지어 고모영신을
봉안한 것이다. 신당 옆에는 어린이 키높이 정도의 관리실이 있으며, 신당에는 누구나 절을 올
릴 수 있다.


▲  고모영신당에 봉안된 산왕대신(山王大神, 산신)과 고모영신 위패
활짝 웃는 두 송이의 꽃을 비롯하여 여러 문양이 그려진 단청이
 식상한 신당 내부를 아름답게 꾸며준다.


고당봉(801.5m)은 금정산의 정상으로 부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다. 바위 봉우리로 이
곳에 올라서면 금정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두 눈
아래 들어오고, 금정산 분지에 둥지를 튼 금성
동을 비롯하여 부산 북부 지역과 양산(梁山),
김해 대동면, 기장군(機張郡) 서부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다.

이 봉우리는 범어사 창건 설화에도 등장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
나 왈
'폐하, 태백산에 의상(義湘)이란 승려가 있습니
다. 그는 항상 3,0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화엄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과 제신(
諸神), 천왕(天王)이 그를 따라다니며 수행을
합니다.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에 이르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시 금색이
며, 사시사철 마르지를 않습니다.

▲  고당봉(故堂峰) 표석의 위엄

 

그 우물에는 범천(梵天)에서 오색(五色) 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가 헤엄치고 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의상과 함께 금정산에 가시어 7일 밤낮 화엄신중을 독성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불
이 금색신으로 화현하시고 동해에 임하되 왜구가 자연히 물러날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문무왕은 아침에 바로 의상대사를 소환하여 그와 금정산에 들어가 7일 밤낮을 일
심으로 독경하니 그 장소가 바로 고당봉이란 것이다. 고당(姑堂)이란 '원래 불가에서 부처의 화
엄일승(華嚴一乘)인 최고의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웠다'는 뜻으로 금정산 꼭대기에 기치를 꽂아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중생을 위해 법문을 강설했다는 의상대
사의 뜻에 따라 고당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범어사에서 그럴싸하게 다듬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  등산객들로 가득한 고당봉

고당봉에는 많은 산꾼들이 진을 치며 정상에 올랐다는 쾌감에 젖어있다. 고당봉 표석은 그들의
인기 사진모델로 정상에 올랐다는 인증 사진을 찍느라 표석 주변은 늘 부산하다. 한두 사람이나
한 단체가 찍기가 무섭게 바로 다른 이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여 부산 북부 지역과 양산, 낙동강(落東江), 김해
대동면, 기장군 서부 일대가 두 눈에 박혀 눈이 그야말로 호사를 누린다. 간만에 하늘과 맞닿은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니 속세살이에 상처 받은 마음이 쾌유가 된 듯, 속이 시원하다.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1)
김해 대동면과 낙동강, 양산 남부(물금, 범어, 양산신도시) 일대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2)
금정산 남쪽 줄기(원효봉, 의상대)와 그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부산 동래(東萊) 지역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3)
금정산 동쪽 줄기와 금정구, 기장군 서부 지역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4)
금정산 북쪽 줄기(장군봉)와 양산시 동면, 덕계 지역


♠  금정산의 유래가 된 금정산의 성지(聖地)
금샘<금정(金井)> - 부산 지방기념물 62호

▲  금샘을 품은 바위
여러 바위를 디딤돌로 삼은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금샘이 있다.


정상에 올랐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가야 되는 법, 10분 정도 머물며 천하를 바라보다가 금샘
으로 넘어갔다.
금샘은 고당봉에서 동쪽으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데, 고당봉 동쪽으로 내려가야 된다. 빙글빙글
머리를 환장하게 만드는 빙글계단을 내려가 바위를 몇 개 넘으면 금정산과 부산의 성지인 금샘
이 그 영롱한 모습을 비춘다.

금샘은 고당봉 동쪽에 솟아난 커다란 바위 위에 있는 패인 웅덩이로 범어사 창건설화의 현장이
다. 바로 금빛이 나는 물고기(金魚)가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그곳이다. 그래서 금
빛 물고기가 놀았다는 뜻에서 금샘(金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산 이름도 자연히 금정
산이 되었다. 물론 그런 물고기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바위 꼭대기에 저렇게 묘하게 물이 안착
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 신비로울 따름이다.
백악기 말인 8,000만 전부터 형성된 화강암체가 오랜 세월 풍화과정과 기후변화를 거치면서 만
들어진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으로 낙동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낮에 햇빛으로 데워지고, 데워
진 바위가 밤이 되면 주변 수분을 흡수하는 작용으로 금샘 물이 차가워진다고 한다. 지금도 10
월 해질 무렵에 금샘을 보면 물 안에 물고기 형상의 홈이 파여있는데, 저녁노을과 단풍빛이 반
사되어 금빛 물로 변하고, 바람이 불면 마치 마치 금빛물고기가 거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금샘에 모인 물은 바깥으로 나갈 공간이 없기 때문에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물
맛은 어떨까? 금샘이란 말 그대로 수질도 그에 버금가야 적당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무늬만 샘
이다. 물이 고인 웅덩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비와 눈이 내리지 않는 이상은 물이
들어올 때가 없고, 그곳에서 마를 때까지 고여있기 때문에 물은 속세처럼 썩는다. 가까이 다가
가서 보면 물 속에 여러 부양물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수질이 좋지 않으니 금샘이라 하여
괜히 물을 섭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화려한 이름과 달리 수질만큼은 독샘인 것이다.
금샘의 물이 마르면 큰 재앙이 온다고 범어사에서 믿고 있으나, 물이 마르기가 무섭게 또 비가
내리니 물은 늘 마를 날이 없다. 금샘까지는 접근이 가능하나 주변이 험해 사고 위험이 도사리
므로 괜한 오만을 부리지 않도록 한다.

※ 금정산 고당봉, 금샘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 범어사에서 북문을 거쳐 고당봉까지 약 60분, 금샘은 70분 소요
* 금성동주민센터<① 1호선 온천장역 3번 출구, 길 건너편에서 203번 좌석버스 이용 / ② 2,3호
  선 덕천역 10번 출구와 2호선 화명역 6번 출구에서 금정구 마을버스 1번 이용>에서 북문까지
  70~75분, 고당봉까지 90~95분, 금샘은 100~105분 소요

* 금샘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산2-1


▲  가까이서 본 금샘의 위엄
백두산(白頭山)에 천지(天池)가 있고 한라산(漢拏山)에 백록담(白鹿潭)이 있다면
금정산에는 그들의 축소판인 금샘이 있다.

▲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구, 기장군 철마면 지역

▲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산 동/남쪽 줄기와 북문(움푹 들어간 부분)

▲  북문에서 금성동으로 내려가는 길

금샘을 둘러보고 남쪽 샛길을 거쳐 북문으로 내려왔다. 북문에서 금성동으로 통하는 넓은 길로
내려가면서 오랜만에 미륵사를 찾아 그곳의 청정한 약수를 먹고 싶었으나 몸이 지친 상태로 그
냥 통과했다. 거기까지는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미륵사입구를 지나 10분 정도 가면 산길을 둘러싼 숲의 삼삼한 물결은 잠시 멈추고 잡초와 조그
만 나무가 무성한 벌판이 잠시 펼쳐진다. 이곳은 예전 농장과 마을이 있던 곳으로 금정산 정화
사업으로 모두 철거되었다. 예전에는 껍데기만 남은 교회가 수풀에 묻혀 버려져 있더만 그 역시
말끔히 철거되어 흔적조차 없다.


▲  옛 마을과 농장이 있던 곳(왼쪽 바위 봉우리 밑에 미륵사가 있음)

▲  산내음이 가득 깃든 금성동 가는 숲길
숲길은 대체로 평탄하여 산책 삼아 걷기에 좋으며 거의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솔솔나부끼는 바람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  금정산성 중성 - 사적 215호

금정산의 허리를 가르는 중성은 의상봉 남쪽 제4망루에서 국청사 북쪽을 거쳐 서문으로 이어지
는 약 2km의 성곽으로 여장과 성문은 사라지고 성벽만 일부 남았다. 성벽 위로 수풀이 무성하여
인간의 건축물은 자연 앞에선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  도토리묵과 산성막걸리

등산을 하면 도토리묵, 파전을 겯드린 동동주나 막걸리 1잔이 간절해진다. 금성동에는 등산객과
도시인을 상대로 한 주막들이 즐비한데 이곳의 명물인 산성막걸리와 염소고기를 비롯하여 도토
리묵과 파전, 백숙 등을 취급한다.
간만에 등산으로 몸이 무거워진 우리는 어느 주막에 들어가 도토리묵을 주문했다. 물론 산성막
걸리도 마셨지, 얼마나 콸콸 잘 흡입이 되던지 우리는 순식간에 막걸리 3명을 마셨다. 배추김치
와 당근 등이 잘 어우러진 도토리묵도 맛이 괜찮아 목구멍이 신난다고 쾌재를 부른다. 도토리묵
말고도 다른 것도 먹을까 했으나 시내로 나가 먹기로 하고 자리를 훌훌 털고 나왔다.
이렇게 소소하게 등산 뒷풀이를 마치고 금성동의 중심인 금성동주민센터에서 시내로 나가는 부
산좌석버스 203번을 타고 한계령(寒溪嶺)만큼이나 험준한 산성고개를 넘어 온천장역(1호선)으로
나왔다.

이리 하여 부산의 지붕 금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닿으면 제
대로 된 금정산 본전 종주를 하고 싶다.


▲  국청사 입구에서 바라본 파리봉과 상학산
그 아래로 금성동 마을이 포근하게 터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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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축제의 성지,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

▲  화천 산천어축제 맨손잡기 현장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떠오르면 천하 곳곳에서 다채로운 겨울 축제가 열린다. 겨울 제국(
帝國)의 철권통치에 기가 죽어 집밖을 나서기가 쉽지는 않지만 축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겨울
제국에 맞설 수 잇는 명분을 준다. 축제를 보러~ 즐기러~~ 강원도 내륙과 경기도 동북부, 경
북 내륙, 전북 내륙, 왜열도 북해도 등 겨울 축제의 성지(聖地)를 찾아 사람들은 먼 길도 마
다하지 않고 성지 순례를 떠난다.

우리나라 겨울 축제의 오랜 성지는 뭐니뭐니해도 태백산(太白山) 눈꽃축제일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태백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강력한 라이벌이 여럿 등장했으니, 그중 하
나가 바로 화천 산천어축제이다. 올해 같은 경우는 토/일요일에만 10만 명 이상이 찾을 정도
로 나날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이제는 이 땅을 넘어 해외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외국 관
광객들도 적지 않게 찾아온다. 예전 미국(米國) 양키의 모 방송에서는 세계의 겨울 7대 불가
사의의 하나라며 이 축제를 격하게 띄워주기도 했다.

화천 산천어축제는 이미 2010년 겨울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화천읍 본행사장이 아닌, 토고미
마을에서 낚시를 했다. 그때 일행 10여 명이 얼음 구멍에 달라붙어 3시간 동안 고작 1마리를
잡는게 그쳤지.. (☞ 관련글 보러가기) 그때 산천어를 잡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커서 다음에
간다면 반드시 산천어의 씨를 말리리라 부질없는 다짐을 했다. 그러다가 이번 1월에 다시 기
회를 잡아 후배 여인네와 화천을 찾았다.

화천 산천어축제와 평창 송어축제, 가평/인제 빙어축제 등에 가려면 견지대라는 조그만 낚시
대를 가져가야 된다. 물론 현지에서 구입해도 상관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견지대, 미끼, 훌치
기 도구를 합쳐서 거의 5천원 이내에 파는 것을 축제장 현지에서는 견지대 하나만 사도 무려
5천원 이상을 요구한다. 게다가 축제 기간이라 수요가 많으니 현지 상인들이 배가 불러 불친
절하게 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인터넷과 낚시전용가게에서 미리 사가지고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인터넷에서 3천원대 견지대와 미끼를 구입했다.

드디어 낚시를 떠나는 날 아침, 월척을 꿈꾸며 집을 나섰다. 겨울의 차디찬 태클을 물리치며
전철을 타고 상봉역으로 이동, 거기서 여인네를 만나 춘천(春川)행 전철을 타고 80분을 달려
남춘천역에 발을 내렸다. (상봉~춘천 경춘선 전철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남춘천역에서 인근에 자리한 춘천터미널로 이동하여 화천행 직행버스를 타는데, 군부대 면회
수요와 산천어축제 수요로 인해 거의 50~60m 정도의 대기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기겁을 할만
한 그 대기줄 앞에 언제 버스를 타고 가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임시차가 적절히 투입되어
줄을 선지 30분 만에 춘천을 뜰 수 있었다. (춘천~화천 직행버스는 30~40분 간격)

만석의 기쁨을 누리며 춘천터미널을 출발한 우리의 버스는 춘천역에서 승객 20여 명을 더 태
워 완전 짐짝수송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춘천시내를 벗어났고 춘천댐을 지나니 단단히 얼어
붙은 북한강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여전히 2차선을 고집중인 화천행 5번 국도를 구불구불 따
라 하얀 수채화가 된 강원도의 산하(山河)를 즐기며 출발 50분 만에 화천터미널에 도착했다.


♠  화천 산천어축제 들어가기

▲  천일막국수에서 먹은 막국수의 위엄

화천에 도착하니 점심 직전이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점
심을 먼저 들고 낚시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축제장에도 먹을 곳이 많지만 강원도 산골의
향토 음식인 막국수가 진하게 땡긴다. 그래서 미리 적당한 막국수집을 조사하여 화천3거리 부근
에 자리한 천일막국수를 찾았다.

시골 식당의 향기가 묻어난 이 집은 막국수와 편육, 닭갈비 등을 내놓고 있는데, 막국수의 맛을
1마디로 표현하면 달콤하다. 남북분단을 상징이나 하듯 반토막난 삶은 계란과 오이, 깨, 육수가
어우러져 춘천/화천 스타일의 막국수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반찬은 김치와 나박김치가 전부이다.
정식이나 백반도 아니고 국수이니 반찬은 저 정도면 충분하지.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마치고
무료로 제공되는 후식 커피를 1잔씩 마시며 밖으로 나오니 밥 먹기 전에는 제법 칼처럼 날카롭
던 화천의 바람이 조금은 시원하게 다가온다.


▲  화천3거리 스케이트장과 산천어등
▲  중앙로에 조성된 선등거리 (화천3거리에서 화천대교 방향)

화천읍내는 산천어축제로 읍내 전체가 거의 잔치 분위기였다. 화천3거리에는 스케이트장이 조성
되어 있고, 화천3거리에서 화천대교로 이어지는 중앙로에는 온갖 산천어등을 허공에 잔뜩 메달
아 거대한 선등거리를 이루고 있다. 햇님의 위엄이 천하 구석구석 미치고 있는 시간이라 등들이
단순한 모형으로 잠자코 있지만 해가 커텐을 치고 나면 서로 몸을 밝히며 장대한 등축제 거리로
변신한다.
산천어축제에 왔다면 낮에는 산천어 낚시와 여러 체험거리를 즐기고, 저녁에는 선등거리의 둥축
제를 구경하면 산천어축제의 낮과 밤을 고루고루 둘러보게 된다.


▲  화천천 위에 조성된 산천어축제장의 레포츠 공간

산천어축제의 중심은 화천읍내 북쪽과 동쪽을 흐르는 화천천(華川川)이다. 이 하천은 북한강 지
류의 하나로 겨울 제국이 입힌 얼음을 30cm 이상 두께로 불려 그 위에 축제장을 깔았는데, 축제
장 길이가 약 1.8km 정도 된다. 축제가 끝나면 축제의 장이던 화천천 얼음판을 녹여 그 흔적을
지운다. 그래서 다른 때에 오면 이곳이 정말 흥성하던 그 축제의 현장인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
도이다.


▲  산천어축제의 백미, 산천어 맨손잡기 현장 (배머리교 서쪽)

▲  산천어 용사들이 비장의 각오로 맨손잡기 현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  차가운 물에 발을 담구며 몸을 푼다. (맨손잡기 현장)

▲  드디어 시작된 산천어 맨손잡기 (산천어 학대 현장)

배머리교 서쪽에는 산천어 맨손잡기 현장이 있다. 호랭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되듯
이 산천어를 맨손으로 잡으려면 물에 흔쾌히 들어가야 된다. 한여름이면 들어갈 만하지만 동황
제(冬皇帝)의 위엄에 천하가 오들오들 떠는 1월의 한복판에 차디찬 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쉽
지가 않다. 그렇다고 행사를 위해 특별히 따스한 물을 내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온수가 나오면
산천어가 힘을 못쓰기 때문에 공정한(?) 게임 법칙에 따라 차가운 물을 링에 풀었다.

산천어 맨손잡기는 산천어낚시 입장료와 별개로 가격이 다소 야박하다. 거의 1~2시간 간격으로
맨손잡기(평일은 1일 4회, 주말은 6회 이상)를 진행하는데, 입장료를 내고 참가를 신청한 다음
탈의실로 들어가 행사장에서 준비한 붉은 반팔 티와 검은 반바지로 갈아입고 순서대로 맨손잡기
링 바깥에 대기한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링으로 들어가 앉으면서 반드시 발을 물에 담가야 되며, 여기서 잠시 몇
가지 게임을 하다가 서로에게 물공격을 가하면서 차가운 물에 적응한 다음 온몸을 내던져 산천
어를 잡는다. 산천어가 잘 잡히지 않다보니 온몸이 물에 풍덩하기 일쑤고 적어도 하반신은 물에
젖기 마련이다. 산천어는 1인당 3마리 이하로 제한하고 있으며, 용감하게 나선 사람은 사회자가
특별히 1~2마리를 얹혀주기도 한다. 게임 시간(링에서 물고기 잡는 시간)은 3분 정도로 물이 매
우 차가워 감기 걸리기 쉽겠구나 싶지만 오히려 냉기로 겨울 제국에 대항하는 것이니 감기도 스
스로 도망친다. 그렇게 산천어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다음, 밖으로 나와 따뜻한 물이 나오는 족
욕장 천막에 들어가 씻으면 된다. 링에 나선 사람 중에 양이(洋夷)들도 적지 않은데, 산천어 하
나 잡겠다고 아주 목숨을 건다.

맨손잡기 현장을 구경하려면 링 주변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배다리교 위에서 보는 것이 괜찮다.
옆에서 보는 거와 위에서 보는 거는 정말 천지 차이다. 그렇게 그 현장을 둘러보고 산천어 얼음
낚시터로 갔다.
얼음낚시터는 현장접수 장소와 예약접수 장소로 구분되어 있는데, 여인네가 미리 인터넷에서 예
약을 해서 예약접수 장소로 가면 된다. 그 장소는 맨손잡기 바로 서쪽에 자리한다. 반면 현장접
수는 배머리교 남쪽에 있는데, 주말에 가는 경우에는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예약 접수 장소로 가서 예약을 확인하면 표를 2장 준다. 하나는 그냥 표이고, 다른 하나는 출입
증으로 잘보이는 곳에 달아야 된다. 단순 1회 입장이 아닌 1일 내내 입장으로 바깥으로 잠시 나
갔다 들어올 때 그걸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꼭 잘 간수해야 된다.


♠  화천 산천어축제 즐기기

▲  산천어를 낚기 위한 얼음구멍
얼음구멍을 파려면 현장에 준비된 얼음끌대를 쓰면 된다.


표를 받고 예약접수 얼음낚시터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허벌나게 많다. 거의 화천군 인구를 초
과한 머릿수(화천군 인구가 27,000명)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축제로 벌어들인 돈이
어마어마하겠지. 포크레인 수십 대를 동원하여 돈을 쓸어담아도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 축제를 통해 음식점과 숙박업소, 온갖 가게들, 화천을 운행하는 시외버스 회사, 화천에 온갖
관광지들도 그 덕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인공으로 뚫은 얼음 구멍 하나씩 차지해 월척을 꿈꾸는 강태공(姜太公)이 되
어 낚시에 임한다. 우리도 간신히 적당한 자리를 찾아 낚시를 시작했는데, 과연 잡히기나 할련
지 모르겠다. 그 인파 가운데 고기를 낚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편, 한동안 낚시에 정적이 감
돌다가 '와 잡았다!' 소리에 일제히 그곳을 향해 부러움 반 경쟁심 반으로 시선이 모아진다.

산천어축제장에서 풀어놓는 산천어는 이곳 토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구입하거나 수입한 산천
어(송어의 일종)를 푼 것이다. 일정 시간이 되면 산천어를 담은 차가 와서 랜덤으로 아무 구멍
이나 산천어를 풀어넣는데, 그때가 되면 가라앉은 낚시터의 분위기와 강태공들의 사기가 다시
상승된다. 이때 산천어를 가져온 인부들에게 이곳에 제발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낚시를 하려면 싱싱한 미끼와 온갖 도구가 필요한데, 이곳은 수질 오염을 이유로 생미끼와 훌치
기를 금하고 있다. 그러니 오로지 견지대 등의 낚시대와 물고기 모양의 미끼에 의존해야 된다.
물론 훌치기 등의 도구를 몰래 들이거나 경험치가 풍부하면 많이 잡을 수는 있지만 상당수는 오
로지 축제장의 요구에 따라 견지대에 의존한다. 그러니 장소와 운빨이 매우 중요하다. 운이 좋
으면 1마리 잡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세월만 낚는 것이다.
축제장으로 들일 수 있는 것은 낚시 의자와 깔고 앉을 것, 그리고 간식거리 정도이다. 얼음박스
는 반입이 안되며, 대신 물고기를 담을 수 있는 봉투를 1인당 1개씩 준다. 또한 1인당 3마리로
제한을 하고 있으나 그건 따로 검사를 하지 않는다.

산천어축제는 인간에게는 여가를 즐기는 축제와 체험의 현장이다. 허나 산천어에게는 자신을 죽
이는 학살의 현장이다. 미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그날 그들의 인생은 무참히 끝나기 때문이다.
혹 잡히지 않더라도 물을 가둬서 얼음을 얼린 터라 밖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수명을 며칠 연장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으며, 결국에는 모두 횟감이나 구이로 전락하게 된다.


▲  드디어 잡힌 산천어의 위엄
낚시에 임한지 1시간 여 만에 드디어 산천어 1마리가 걸려들었다.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이렇게 쫑나게 만드는구나..

▲  산천어 2마리 포획

▲  산천어보다 사람이 더 많은 산천어 얼음낚시 현장

▲  산천어 얼음낚시터에서 바라본 화천의 산과 하늘
유난히 맑고 푸른 하늘이 산천어바보들을 바라본다. 그날 하늘나라로
강제로 소환된 산천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늘나라 수용능력이
초과되어 어쩔 수 없이 환생한 산천어도 혹 있지는 않을까?


3시간 동안 낚시를 하면서 4마리를 잡았다. 4마리를 강제로 세상 및 황천 구경을 시켜준 셈이다.
시간도 벌써 16시에 이르렀고, 슬슬 인원도 빠지는 분위기라 산천어 탄압을 그만두고 자리를 정
리했다.

잡은 산천어를 들고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궁리하다가 절반은 회, 나머지는 구이로 먹기로 했다.
그런데 회와 구이를 해주는 행사 천막은 기다리는 사람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늘어서 있
었다. 힘들게 잡은 산천어를 잡아먹는 것도 참 쉬운 것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집까지 가져갈 수
도 없는 노릇이니 무작정 그 대열에 합류했다.

회(회센터)와 구이 장소(구이터)는 서로 떨어져 있는데, 구이터가 대기 인원이 좀 적어 먼저 되
었고 회센터는 40분 정도 기다려 회뜨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산천어를 넘기면 칼로 잘 다져 회
로 만들어주는데, 회와 구이 모두 1마리당 2,000원이다.
잡은 산천어가 많은 경우에는 옆 사람에게 1~2마리 넘기라 권하기도 하며, 그렇게 산천어의 한
맺힌 하직 현장을 거쳐 회를 받는 곳으로 가서 계산을 하면 되는데, 이때 소주와 상추, 초장도
구입할 수 있다. 허나 그냥 회만 먹기는 뭐하니 태반이 소주나 상추, 초장을 구입한다. 이들을
모두 구입하면 2마리 기준으로 9,000~10,000원 정도 든다. 초장은 다 먹지도 못할 정도이나 상
추는 좀 부족하며, 소주는 3천원 정도이다. 그리고 다른 먹거리를 원한다면 인근에 있는 먹거리
천막에서 오뎅이나 메밀전병 등을 사들고 와도 된다. 또한 산천어를 잡지 못했을 경우 산천어회
도 사먹을 수 있는데, 이건 가격이 대개 비싸다. (2~3만원선)

그렇게 회와 구이를 들고 빈 자리에 가서 자신을 희생해 (물론 강제로 희생된 것이지) 신(神)과
동물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에게 일용의 양식을 주신 산천어에게 고마움
과 위로를 올리며 조촐하게 낚시 뒷풀이를 한다. 우리가 잡은 산천어로 이렇게 한상 차려 먹게
되니 소원은 성취한 셈이다. 산천어에게는 미안하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이 아비규환 같은 세상
을 살아가려면 먹고 살고 즐겨야 되지 않겠는가?
부디 산천어와 송어/빙어축제 때 학살된 물고기들은 다음 세상에 꼭 인간이나 그 이상의 존재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랄 뿐이요. 반대로 그들을 많이 잡은 사람들에 한해 내세에는 송어나 산
천어로 태어나 축제장에서 그들의 입장을 실감나게 체험해야 서로가 공평할 것이다.


▲  산천어회와 산천어구이
회와 구이 모두 맛이 좋다. 2마리를 회로 떴는데 양은 몇 젖가락 되지도 않는다.
저중에 남은 것은 쌈장 뿐..

▲  산천어축제 스케이트장

▲  산천어축제 얼음썰매장

산천어회와 구이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머지 축제 현장을 둘러보았다. 한참 즐거움에 빠져있
는 얼음썰매장과 스케이트장을 비롯해 현장접수 얼음낚시터, 사륜구동(ATV) 체험장 등을 지나
화천 농산물과 먹거리를 파는 천막으로 갔다.
여기서 산천어축제 입장권과 같이 받은 농특산물교환권 5천원권 2장으로 다시금 먹거리를 사먹
으려고 했는데, 오로지 농특산물 구입에만 쓸 수 있다고 그런다. 그 교환권 외에 화천사랑상품
권도 있는데 이것만 먹거리에 사용이 가능하다. 허나 그건 얼음썰매나 기타 레포츠를 이용해야
받을 수 있다. 햇님이 꼴까닥 넘어가기 전이고 몸도 지쳐있어 썰매나 사륜구동 등을 타기도 뭐
해 살짝 자비를 청하니 메밀전병만 해주겠다고 그런다. 마침 내가 먹고 싶은 것이 그거였는데..
그래서 메밀전병과 화천동동주 1병을 더해서 다시금 배를 채운다.

메밀전병은 좀 맵기는 했지만 맛은 고소했고, 거기에 동동주까지 걸치니 몸이 싹 대펴지면서 졸
음이 나를 희롱하려 든다. 아까 먹은 산천어회/구이도 완전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 그들까지
뱃속에 넣으니 배가 터지려고 그런다. 그래서 그날은 따로 저녁은 먹지 않았다.


▲  산천어축제 레포츠 장소

▲  화천천과 북한강이 하나가 되는 곳 (화천교)

산천어축제장 남쪽에는 현장접수 낚시터와 얼음을 얼리지 않은 루어낚시터가 있다. 그곳을 지나
면 화천교가 나오며, 여기서 화천천과 북한강이 만난다.
북한강은 얇게 얼음이 얼었는데, 주변은 온통 눈의 세상이다. 화천대교를 지나니 강 남쪽 위라
리로 이어지는 부교(浮橋)가 놓여져 있는데, 강 남쪽에 산천어축제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이 있
어 접근 편의를 위해 가설한 것이다. 다리의 길이는 350m 정도로 깊은 강을 건너야 되는 터라
체감 거리는 한 1km 정도 되는 것 같다. 쫄깃해지는 염통을 진정시키며 그 부교를 건너면 화천
체육관과 화천민속박물관이다.


▲  얼어붙은 북한강 - 소쩍새가 우는 날이면 강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나겠지

▲  북한강 부교 - 다리가 조금씩 흔들려 간을 은근히 쫄깃하게 만든다.
강 북쪽은 화천읍내, 다리 건너로 보이는 강 남쪽은 화천민속박물관,
화천체육관 등이 있는 하남면 위라리이다.

▲  영롱하게 피어난 선등거리 (화천읍내 중앙로)

북한강 부교를 왕복하고 화천대교로터리로 나오니 여기서 화천3거리까지 길게 선등거리가 형성
되어있다. 마침 햇님이 퇴근하고 달님이 세상을 비추는 시간이라 햇님의 위엄에 움츠려있던 산
천어 선등이 서로 오색영롱한 불빛을 다투며 어두운 읍내 거리를 비춘다.
선등거리는 중앙로를 중심으로 읍내에 약 5km 정도 형성이 되어있는데, 총 24,000여 개의 산천
어등이 읍내를 장엄한다. 산천어의 수많은 피로 화천의 겨울과 백성들을 책임지며, 산천어축제
도 이렇게 발전한 것이니 선등도 모두 그들로 채운 것이다.
이 거리는 보통 12월 말부터 2월 말까지 운영하며, 17시 30분에서 22시까지 불을 밝힌다.


▲  어둠 속 터널 같은 선등거리 (화천읍내 중앙로)

선등거리를 지나 화천터미널로 나오니 산천어축제나 군면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사람들
이 몇십m 길게 줄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임시차가 배차되어 앉아 갈 수 있었는데, 서서 가는
사람들은 춘천역까지 다리를 혹사시켜야 했다.
춘천터미널에서 두 발을 내려 터미널 옆에 자리한 이마트에 잠시 들렸다가 남춘천역으로 이동하
여 상봉행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전철은 자리가 널널해 넓게 자리를 누리며, 잠시 꿈나
라 투어를 청했다. 꿈나라에서도 산천어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러다 산천어에게 쫓기
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이렇게 하여 화천 산천어 축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화천 산천어축제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화천행 직행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춘천에서 화천행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춘천역 경유)
* 서울에서 경춘선 전철이나 경춘선 Itx-청춘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춘천터미널 도보 7분 거리)
  이나 춘천역 하차
* 화천터미널에서 산천어축제장인 화천천까지는 도보 15분 이내 거리, 맨손잡이 장소와 예약접
  수 얼음낚시터는 배다리교 서쪽, 현장접수낚시터는 화천군청 옆 화천초등학교 방면으로 가면
  된다. (무조건 화천천만 찾으면 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화천군청이나 화천초교, 화천대교 남단, 화천정보산업고, 홍천국
  토관리사무소 화천출장소 등을 이용하면 됨)
① 서울 → 경춘국도 → 춘천시내<또는 403번 지방도(서면) 경유> → 춘천댐 → 화천읍내(산천
   어축제장)
②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을 나와서 양구 방면 46번 국도 → 신북교차로 → 용산교차로 (
   또는 오음리, 파로호 경유) → 화천읍내

★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 관람정보 (2015년 1월 기준)
* 축제 기간 : 2015년 1월 10일부터 2월 1일까지 (8:30~18:00)
* 입장료 - 중학생 이상과 어른 12,000원 / 초등학생과 경로, 국가유공자 8,000원
* 영유아 얼음낚시는 입장료 없음 (금,토 1일 3회 / 일요일 1일 2회 운영)
* 낚시 시간은 8:30~18:00, 1일 최대 인원은 1만4천명 (예약 6천명, 현장 8천명)
* 산천어축제 관련 정보나 온갖 체험 정보, 온라인 예약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화천천 일원 (☎ 1688-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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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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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 산책 (최순우옛집, 삼청각, 북악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城北洞) 산책 '

▲  삼청각 편운정

 


서울 도심의 갑옷인 한양도성, 그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과 동북문에 해당되는 혜화문
(惠化門, 동소문)을 나서면 바로 성북동이 도심과 다른 모습으로 고개를 내민다. 서울의 주산
(主山)이자 영원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서울의 늠름한 진산(鎭山) 북
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인 성북동은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쎈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 분위기를 자랑하며 다소 예민한 지정학
적 위치상 개발의 물결도 잠잠하다. 하여 성북동에 오면 서울특별시 성북구가 아닌 교외(郊外
)로 나온 듯한 기분이 물씬 든다.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는 제단인 선잠단과 영성단(靈
星壇)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지역의 대부분은 왕실 소유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 성락
원(城樂苑) 등의 사대부 별장(별서)이 나타났고, 구한말과 왜정 때는 부자와 문인들이 앞다투
어 들어와 집과 별장을 지으니 이종석 별장과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간송 선생의 보화각 등
이 그 대표적인 흔적이다.
왜정(倭政) 시절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머물면서 이 땅의 독립을
염원했고,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은 드넓은 땅을 프랑스 양이(洋夷)에게 사들여 북단장(北
壇壯)과 보화각(葆華閣)을 지어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연구하였다. 보화각은 나중에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거듭났다.

해방 이후에는 성북동비둘기로 유명한 김광섭(金珖燮)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들어와 성북동
의 아름다운 정취를 벗삼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고, 이 땅의 미술사학에 크게 이바지한 최순우
선생은 간송 선생을 도우며 성북동 한쪽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또한 청와대와 서울 도심과 가까운 이점으로 나는 새도 알아서 떨어지게 한다는 고위관료들도
많이 들어와 살았다.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북악산 아랫도리에 삼청터널이 뚫
렸고, 대원각과 삼청각 등의 고급요정이 뿌리를 내려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
렸다. 그리고 1968년 1.21사태 때 김신조의 북한 공비 패거리들이 성북동 북쪽 산자락을 통해
줄행랑을 치다가 우리 군에게 토벌되는 등, 남북분단의 얼룩진 역사가 서려있기도 하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성북동을 둘러싼 북/서/남쪽 북악산 산줄기의 통행이 전면 통제되면서 성북
동은 도심 속의 막다른 섬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부유층과 권력층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통제 구역도 많았던 성북동은 1990년대 이후 변
화의 바람이 불면서 고급 요정을 모두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을 시켰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
수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새로 단장했고, 대원각은 주인인 김영한(길상화)이 법정(法頂)에게
기증해 절(길상사, ☞ 관련글 보러가기)로 거듭났다. 또한 2006년 이후 북악산이 조금씩 개방
되면서 숙정문을 비롯한 북악산 주능선은 제한적이긴 해도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고, 2009년
에는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 방면 산길이 거의 빗장을 열었다.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성북동의 지형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
완사명
월형
(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완사명월형이란 '밝은 달빛 아래 비
단을 펼쳐놓은 형세'로 그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갖은 졸부(간송 전형필은 제외)들이 밀고 들
어와 본의 아니게 졸부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다. 수레가 없으면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도
안좋고 걸어다니기에는 숨이 차는 산동네인 성북동이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괜히 땅값만 치솟아 서민들은 들어갈 공간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땅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 꼬집기도 한다. (졸부들 집은 성북로 북쪽과 명수학교
주변에 몰려 있고, 성북로 남쪽은 서민들이 주로 살고 있음)
나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은근히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있는 명소들이 많
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대궐만하고 대문이 성문(城門)
처럼 두터워도 위대하신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명소를 보
러온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집들을 보러온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
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가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답사객의 신분으로 성북동
을 살펴보자. 더러운 졸부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명당의 기운도 좀 누리면서 말이다.

성북동은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성도 나름 괜찮고 아름다운 명소도 즐비하다. 적어도 4
~5시간 정도의 발품으로 충분히 들러볼 수 있으며(간송미술관과 북악산은 별도) 발품을 팔 가
치도 충분하다. 게다가 분위기를 내세운 찻집과 까페, 맛집, 조촐한 미술관(갤러리)들이 산재
해 있어 먹고 마시고 수다 떠는 이른바 5감의 재미를 덩달아 즐길 수 있다.

본글에서는 성북동 가운데서도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선잠단터와 심우장
, 삼청각을 소개한다.


  양잠(養蠶)의 번성을 기원하던 조선시대 제단의 흔적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83호

▲  선잠단터 표석과 누런 잔디

성북초등학교 3거리 동북쪽에 조선시대 주요 제단이던 선잠단이 있다. 지금은 잔디로 덮여있는
옛터와 근래에 세워진 선잠단터 표석, 홍살문만이 옛날 이곳이 신성한 장소였음을 아련히 귀뜀
해주고 있을 뿐, 제단의 흔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럼 선잠단은 무엇을 하던 곳일까? 이곳은 누에를 관장하는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양잠의 번성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공간으로 그 제례를 선잠례(先蠶禮)라고 한다. 선잠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개국 이후, 8년 정도 중단되었다가 1400년(정종 2년) 3월 초사일(
初四日)부터 다시 행해졌다.
세종은 각 도에 괜찮은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했으며 중
종(中宗)은 각 도의 분산된 잠실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잠실)와 서초구(잠원동) 일대로 집합시
켰다.
<서울 잠원동 신반포16차아파트 부근 도로변에 그 당시 재배했던 400년 묵은 뽕나무 1그
루가 죽은 채 남아 서울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

1471년 성종은 선잠례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 밖 지금의 자리에 선잠단
을 세웠는데.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비슷하나 남쪽으로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
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어 궁궐 잠실에서 키운 누에에게 먹였다. 1477년에는 창
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어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이른바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선잠례는 매년 3월 초사일에 지내는데 신하를 보내 제례를 주관했으며, 풍악을 울리고 제를 지
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종의 제례악(祭禮樂)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의식은 순종 시절까지 이
어져 오다가 1908년 7월(순종 융희 원년) 순종 황제가 '칙령(勅令) 제50호<향사리정(享祀
釐整)
에 관한 건>'를 발표하여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당과 제단을 대거 정리하면서 선잠단과 선농단(
先農壇, 서울 제기동)의 신위를 모두 사직단으로 옮겼고, 선잠단은 몸뚱이만 남게 되었다.
 
왜정 때는 왜인(倭人)들이 원 모습을 알지 못하게끔 깔끔하게도 파괴시켰고, 그 터마저 민간에
팔아 먹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1939년 선잠단터
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인 보물 17호로 지정해 앞/뒤가 전혀 안맞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부
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문화재로 지정하다니 망국의 제단을 아주 제대로 엿먹인 셈이다.

해방 이후, 터만 황량하게 남아 오던 것을 1990년 이후, 성북구청에서 선잠단 주변 528평을 매
입하여 홍살문을 세우고 뽕나무를 심었으며, 제단터에는 표석과 잔디를 입혔다. 그리고 1993년
부터 다시 선잠제를 여니 1908년 이후 85년 만에 부활이다.

성북구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열리는 성북구의 대표 축제인 아리랑축제에 맞춰 선잠제(先蠶祭)
를 거행한다. 제례가 열리는 날과 일부 행사/축제일을 제외하고는 문이 굳게 닫혀있으며, 굳이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미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920-3413)에 문의를 한다. 허나 바깥
에서도 보일 것은 다 보이기 때문에 굳이 월담을 하면서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참고로 선잠단터 북서쪽인 성북초교 뒤쪽에는 농업을 관리하는 별인 영성(靈星)에게 제를 지내
던 조선시대 제단인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이 역시 1908년에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선잠단과
더불어 폐쇄되었다.


▲  선잠단 홍살문
나라에서 신성시 하던 제단은 사라지고 홍살문의 위엄은 녹슨지 오래건만
다시 솟아난 홍살문은 예전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애써 안간힘을 쓴다.

▲  뽕나무로 무성한 선잠단터 내부
60~70년 묵은 아름드리 뽕나무들이 조촐하게 숲을 이룬다. 이들 뽕나무는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었다.

▲  선잠단터 표석에서 바라본 모습

간송미술관과 가까워 그곳을 찾을 때마다 후식으로 꼭 둘러보는 선잠단터. 역사의 뒤안길에 묻
힌 이곳에는 그저 망국의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무성하게 우거진 뽕나무는 이곳의 허전함을 조
금이나마 덮어준다.
 
※ 선잠단터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동쪽)으로 1분 걸으면 성북초교3거리가 나
  오는데, 길 건너 홍살문 뒷쪽 언덕이 선잠단터이다, 도로변에 있어서 홍살문이 어떻게 생겼는
  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선잠제례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아리랑축제 기간에 열리며 자세한 일정은 성북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여기를 클릭)를 참조한다.
* 선잠단터 내부를 보고 싶다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920-3413)에 문의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인물,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라 고고미
술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의 옛집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근래에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성북동의 새로운 꿀단지이다. 속
세에 이름을 떨친 지는 4~5년 정도로 나날이 답사객들이 늘고 있어 주말에 가면 늘 번잡하다.

최순우 옛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으나 뜻있는 시
민들이 발벗고 나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시민들
이 지키고 가꾼 시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집의 주인이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熙淳)으로 개성 송도(松都)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물관장
인 고유섭(高裕燮)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전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한강다리 폭파로 미쳐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과 보화각이라 불림>에 있던 무수
한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그것을 포
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간송은 훈민정음과 일부 문화유산만 급히 챙기고
한강을 건너 피난감)
그들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
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
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다시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똥개훈련을 시켰고, 손
재형은 일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감고 아픈 시늉까지 벌이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완전히 포
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했던 것이며, 그 인연으로 간송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  최순우 선생 왕년의 모습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
었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바로 이곳 성북동
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논
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檀園金弘道 在
世年代攷)','겸재정선론(謙齋鄭敾論)','한국의
불화(佛畵)','혜원신윤복론(蕙園申潤福論)','이
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
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
에 기대서서','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가 1976년에 구입하여 19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의지하던 집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의 집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외로
운 신세가 되었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소식을 접한
뜻있는 이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하여 그 집을 매입하면서 개발의 칼날
은 보기 좋게 부러지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지치고 초췌해져 있었다. 하여
내셔널트러스트는 돈을 모아 2003~2004년에 복원 공사를 벌었고,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하여 지킨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
여 나무와 풀, 꽃 등이 뜰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꾸듯 동자상과 맷돌 등 다
양한 석물을 가져와 작지만 넓고 알찬 느낌을 준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
는 높은 담벼락이 있어 그늘이 가득해 시원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툇마루에 앉아 도심 속의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볼거리가 열려 늘 사람들
로 분주한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시민 곁에 다가서고 있다. 길상화가 길상사(吉詳寺)란 절을
속세에 선물로 안겼듯이 이곳 최순우옛집은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시민들
에게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품인 것이다. 또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
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동네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나들이를 벌일 경우 가장 먼저 들러보는
것도 좋으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면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을 디저
트 삼으며 잠시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4년 11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홍익중고 하차, 또는 5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어 찾기는 쉽다
* 관람기간 : 4월 1일 ~ 11월 30일까지 (12~3월은 개방안함)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최순우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


▲  밋밋하게 솟은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숙인 현장이기도 하다.

▲  굳게 닫힌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은 소나무


▲  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를 비롯해 이 집을 거쳐간 이들의 목을 축여주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수풀 사이에 고개를 내민 조그만 동자상
최순우 옛집을 복원하면서 천하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  조그만 맷돌과 빗물과 꽃잎을 머금은 돌쟁반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안채 뒤쪽 툇마루 (4월 중순)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내부 접근은 통제되어
있으므로 문 밖에서 관람 요망)

▲  안채 뒤쪽 툇마루
서울에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  마루에 놓인 함지박

▲  뒷뜨락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들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저들은 알맹이가 텅빈 장식용 장독이다.

▲  장독대 앞에 둥그런 돌탁자
탁자 주변에는 키 작은 7개의 돌의자가 머리에 방석을 쓰며 달처럼 둘러져 있다.

▲  돌이 박힌 뒷뜨락 산책로와 장승을 닮은 조그만 석상 2기

▲  다양한 석조물이 있는 뒷뜨락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여러 도장과 최순우의 어록 1구절
혜곡의 손때가 묻어난 도장들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혜곡의 유품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
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
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면 담
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권력실세들이 드나들던 고급요정(料亭)에서 시민들의 전통문화공간으로
거듭난 현장 - 성북동 삼청각(三淸閣)

▲  북악산 한양도성 북쪽 산길에서 바라본 삼청각

성북동의 가장 서쪽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한양도성이 지나는 북악산 본줄기와 북악하늘길이 지나는 북쪽 산줄기 사이 150m
고지로 성북동에서 제일 막다른 곳이다.

삼청각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정
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7.4남북
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권력실세와 졸부들의 공간
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전통문화
의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개방되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며 산책과 전통문화를 즐
길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된 현장으로 이는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대원각은 그곳
의 주인인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 법정에게 통째로 기증하여 절로 변신한 곳으로 비록 과
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성북동의 새로운 꿀단지로 크게 두각을 드러낸 이곳은 북악산 등산의 기점으로 숙정문과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를 수 있으며, 2009년 개방된 북악하늘길, 속칭 김신조루트를 통해 북악산길로
넘어갈 수 있다. 또한 삼청터널을 통해 바로 서울 도심으로 이어지며, 한양도성 앞을 흐르는 산
길을 거쳐 말바위를 경유하여 삼청공원과 북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된 공간이라 해도 여전히 고급요정의 이미지가 깃들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
의 높은 음식/차 가격, 시중보다 비싼 전통문화체험, 온갖 피로연, 가족행사 공간에 경악을 금
치 못하지만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백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삼청각 무료셔틀버스가 1일 12회(10~21시) 운행한다. (17~20시는 매시 20분, 그외는 정각에
  출발) 경유지는 종로1가 영풍문고(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을지로입구역(2호선/1번 출구),
  프레스센터(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광화문 교보문고(5호선 광화문역 3번 출구) 등이며,
  을지로입구역에선 삼청각 출발시간에 20분 정도를 더하면 된다.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
  차, 성북로를 쭉 따라가거나, 주암아파트 옆길로 11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으며, 삼청각 이용객에 한해 공짜)
① 광화문4거리 → 삼청동길 → 삼청공원 → 삼청터널 → 삼청각
② 한성대입구역 → 성북로 → 성북동종점 → 삼청각

★ 삼청각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음
* 일화당 1층에는 고급한식당, 그 윗층에는 찻집 다원이 있다. (가격은 좀 비쌈)
* 매월마다 다채로운 문화공연이 열리고 있으며, 다래와 규방공예, 한복체험, 한국요리 등의 전
  통문화체험강좌가 열린다. (물론 유료임)
* 전통혼례와 가족연회, 세미나 공간도 갖추어져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30-115 (☎ 02-765-3700)
* 삼청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솟을대문 모습의 삼청각 정문 (그 옆에 삼청각 표석이 있음)
사람들은 기와집 정문으로, 수레들은 북쪽 문으로 들어간다.


▲  지방의 시골길 같은 삼청각, 홍련사 앞길

▲  궁궐의 돌담처럼 기품이 돋보이는 삼청각 돌담길
끝없이 펼쳐진 돌담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는 유하정과 천추전이 있다.

▲  천추당(千秋堂)
고풍과 기품을 갖춘 전통 한옥으로 가족모임이나 돌잔치 장소로 쓰인다.
수용인원은 34명 정도로 소나무가 둥지를 튼 주변 뜨락이 아름답다.


▲  유하정(幽霞亭)
삼청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유하정은 팔각형 정자로 그 곁에 북악산 계곡물이
흐른다. 이곳은 전통문화 배움터나 기업 세미나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3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  벚꽃나무 밑에 자리한 편운정(片雲亭)
유하정 뒤쪽에는 편운정이라 불리는 네모난 원
두막 쉼터가 있다. 여기서 편운(片雲)은 구름조
각이란 뜻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삼청각을 인수한
기념으로 지었다. 정자를 칭하고 있지만 원두막
에 가까운 모습이며, 그렇다고 화려함이 배여난
삼청각에 걸맞는 모습도 아니다. 그저 수수하고
조촐한 쉼터로 누구든 편안히 신발을 벗고 들어
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편운정 곁에는 벚꽃나무 1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봄의 절정 때는 한송이 눈이 되어 대
지로 내려앉는 벚꽃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깃들
여진 현장이다.


▲  유하정과 편운정 곁을 흐르는 북악산 계곡

이끼가 낀 하얀 피부의 반석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며 그 사이로 서울의 허파, 북악산이 베푼 청
정한 계곡물이 큰 세상을 향해 졸졸졸~~♬ 흘러간다. 계곡의 내음과 숲의 맑은 내음, 솔솔 하늘
을 가르며 불어오는 산바람은 편운정에서 발길을 멈춘 나그네의 오염된 마음과 정신을 씻기기에
충분하다. 깊숙한 산골에서나 누릴 법한 자연의 향기와 풍경을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도심 한
복판에 버젓히 박혀있는 것이 참 신선할 따름이다. 물론 이곳이 청정한 모습을 간직하게 된 것
은 국가의 예민한 곳을 두루 품은 북악산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  청천당(廳泉堂)
고즈넉함이 묻어난 양반가 별채의 모습으로 연회나 약혼식 장소로 쓰인다.
수용인원은 60명 정도로 독립적인 앞뜨락을 갖추고 있다.

◀  일화당 뜨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5호로 70년을 묵은
소나무이다. 게다가 삼청각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하다.


▲  삼청각의 중심 건물인 일화당(一和堂)

한옥의 당당함이 깃들여진 일화당은 삼청각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곳의 중심 건물이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때 대표단 만찬이 열렸던 유서 깊은 장소로 사진을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실
은 2층 규모(실제로는 3층)이다.

사진에 나온 2층은 각종 연회나 혼례식 장소로 쓰이며, 다양한 전통공연이 열리는 200석 규모의
공연장과 전통차와 커피,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다. 다원은 야외 테라
스가 있어 눈 앞에 펼쳐진 성북동과 북악산(백악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를 누릴 수 있다. 1층에는 한식당이 있는데 정갈한 전통한식을 먹을 수 있으며(가격이 비싼 것
은 함정). 일화당 앞뜨락과 전통놀이마당에서는 종종 전통놀이와 각종 행사가 열린다.


▲  일화당 다원 테라스에서 바라본 천하 (동쪽 방향)
성북동과 북악산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그 너머로 동대문구, 성북구 지역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  일화당 1층 벽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일화당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추상화인 모양이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그린다 한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 할까?

▲  모양도 가지각색인 일화당 장독대들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 것이다.


▲  익한당으로 넘어가는 남천문(南天門)
궁궐 후원의 문을 보는 듯 기품이 돋보인다.

▲  일화당 동쪽 송림에 안긴 취한당(翠寒堂)
아담하고 편안한 모습의 별채로 가족단위의 소규모 행사 장소로 쓰인다.
취한당 서쪽에는 비슷한 모습을 지닌 동백헌(東白軒)이 있으며,
가족모임이나 다례, 전통요리 체험 공간으로 쓰인다.



▲  쌍다리돼지불백에서 먹은 돼지불고기백반

▲  서울왕돈까스에서 먹은 왕돈까스

성북동은 볼거리도 풍성하지만 한정식과 한식 종류를 다루는 식당부터 누룽지백숙 등의 영양식,
칼국수와 만두, 돈까스 등의 분식을 다루는 집, 찻집과 까페 등 다양한 먹거리의 맛집들이 즐비
하다. 그중에서 돼지불고기백반과 돈까스집이 눈에 많이 띄는데, 돼지불고기백반집은 쌍다리정
류장 부근에 있고, 돈까스는 성북초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쌍다리 부근에 있다.
제일 위의 사진은 돼지불고기백반으로 이름난 쌍다리돼지불백(쌍다리기사식당)에서 먹은 돼지불
백인데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 반찬과 상추, 상추쌈, 조개국이 백반을 이
룬다.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데, 고깃집이 1인 손님은 받지를 않으니 집이 아니면 해먹기가 그렇
다. 여기는 그런 점을 해소해준다. 그래서 1인 손님이 제법 많다. 가격은 7,000원으로 그런데로
그런데로 저렴하다. 이곳은 원래 택시기사들이 주로 찾던 기사식당이었으나 지금은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다. 

아랫 사진은 서울왕돈까스에서 먹은 왕돈까스로 크기가 정말 왕만큼 크다. 성북동에 이런 왕돈
까스집이 유독 많은데,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성북동 돈까스집은 특이하게 고추와 고추장이
나온다는 것, 특별한 맛은 없으나 양이 많아서 배불리기는 좋다. 돈까스 리필도 때에 따라 가능
하다. 가격은 8,000~9,000원으로 이 집 옆에는 같은 돈까스를 다루는 오박사네돈까스가 있어 서
로 경쟁이 치열하다.

♣ 성북동 추천 명소와 음식점
* 추천 명소 - 최순우 옛집, 선잠단터, 간송미술관, 이종석별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가
  (家)>, 심우장, 북정마을, 삼청각, 성락원, 길상사, 한국가구박물관,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
  하늘길), 북악산(백악산) 산행, 숙정문, 와룡공원, 한양도성 등
* 음식점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쌍다리돼지불백(돼지불고기 백반, 02-743-
  0325), 성북동돼지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금왕돈까스(02-763-9366), 서울돈
  까스(02-766-9370), 성북동메밀수제비/누룽지백숙(02-764-0707),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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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 서울 봉원사(奉元寺)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연꽃의 위엄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연꽃을 주인공으로 한 연꽃축제가 천
하 곳곳에서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아직 인지도는 낮
지만 연꽃축제를 하나 가지고 있으니, 바로 2003년부터 봉원사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연꽃
문화대축제이다.

무더위가 한참 물이 오르던 7월 끝 무렵에 봉원사 연꽃 소식을 접했다. 여름이 왔으니 친
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은 한번은 봐줘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여 번
잡한 주말을 피해 평일 중에 날을 잡아 후배 여인네와 봉원사를 찾았다.
오후 2시에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봉원사 턱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산(鞍山) 자락에 묻힌 봉원사 종점에 발을 내린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마을이다. 아무리 인구 1,000만의 서울이라고 해서 높은 건
물과 번잡한 거리, 무수한 인파들만 있는 것은 아닐진데, 서울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
때문일까? 서울 장안에서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다들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
가 눈부터 의심한다.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봉원사 주차장은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찜질방이 자리해 있고 봉
원사로 가는 길목에는 민가들이 조촐하게 사하촌(寺下村)을 이룬다. 이 마을은 봉원사 승
려들이 주류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산다. 이는 봉원사가 혼인을 허용
하는 태고종(太古宗)의 중심지라 그런 것인데 다들 별도의 집과 거처를 가지고 있어 절의
필수 요소인 요사와 선방 등 승려의 숙식공간은 매우 적다. 그러다보니 경내 밑까지 승려
들의 집이 형성되어 절과 마을의 경계가 참 애매모호하며, 집들 사이로 나무가 많아 첩첩
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마을 같은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봉원사 주변은 개발제한구
역임)

종점에서 봉원사를 향해 몇걸음 가다보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부도전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석종형(石鐘
形) 승탑과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있다. 비석
은 대략 9기로 다들 왜정(倭政) 이후에 만든 것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때깔이 무지
곱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조낭자 희정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인데. 조그만 구멍가
게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눈길을 보낸다. 허나 구
석에 서 있어 정면만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호기심이 많은 본인인지라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과 관련된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나 절에 공헌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전한다는 뜻의 유애비(遺
哀碑)를 칭하는 것이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그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남편은 사업
에 바빠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살
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
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시주
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고 나와있다. 허나 실질적인 이유는 그녀의 순탄치 못했던 인생과 남편의 애정 부족이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놓여져 있는데, 이들은 비석을 씌우던 비각의 주춧돌로 비
각은 오래 전에(아마도 6.25 때 파괴된 듯) 사라지고 비석만 멀뚱히 남아있다.


▲  봉원사로 올라가는 길 (유애비 주변)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무려 5그루나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차례대로 지나 경내 직전에 이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오
르막길에 있다보니 인간의 불안전한 눈의 착시로 풍채가 더욱 대단해 보이는데, 보호수 지정 당
시 추정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약 40년이 더해져 약 340~350살 정도 되었다. 높이는
18m, 둘레는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도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
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또 나타나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준다.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발을 딛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갖추지 못했고, 절과
마을의 경계도 조금은 애매하며 이들 나무가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나이가 더 들었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가 1972년으
로 약 440~450년 정도 묵었으며, 그보다 키가 좀 작고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갖은 전통차와 식혜를 팔고 있으며, 불
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고 있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자아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비각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全星基)를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들어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둔 것을 보면 시주액이 어마
어마했던 모양이다. (역시 돈이 최고!!)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연못 북쪽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의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통을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까지 늦여름에 나타나는 수련
(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있다. 이쁜 꽃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의 마음을 표현하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들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활짝 개인 연분홍 연꽃의 위엄

▲  평범한 물통 속에 뿌리를 내린 연꽃들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애듯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이
들어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 정도를 길게 하고자 함이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소상히 적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봉원사 경내

※ 도심과 가까운 포근한 산사이자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聖地)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
왕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刹) 봉원사가 포근히 터를 닦았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고 그나마 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하니 창건 시기에 대한 신뢰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愚
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
고 전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했는데, 그 내용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한 삼은(三隱)의 1명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조선 건국 이전에 그리했거나(그래도 한
때 가까웠던 사이이니) 또는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면서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이후 1748년 영조(英祖)가 절을 옮기라며 지금의 땅을 하사
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고,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란 친필 현판
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기존 자리에는 그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
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을 만들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이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
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또한 수경원이 연세대에 들어선 이후 그곳의 원찰(願刹) 역
할까지 도맡게 되면서 법등(法燈)이 꺼질 일은 거의 없게 된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벌였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
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28일 무심한 총탄과 폭탄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이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어 한줌의 재
가 되고 만다. (그나마 대웅전과 몇몇 건물은 살아남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 공덕동(孔德洞) 동
도공고(현 서울디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
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헐값으로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무리를 하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
정문화재인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한 주
지 혜경이 신도의 지원을 모아 1994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았다.
2009년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
고, 2011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대방), 극락전, 만월전, 미륵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대웅
전이 화재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면서 지정유형문화재는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하나
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의 기능 보유자인 만봉이 주석하
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후학을 기르고 있어
영산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
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
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이 절은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다. 접근성과
교통도 모두 착한 수준으로 도시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속세에 유린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첩첩한 산골에 들어선 듯
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청정하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1주 동안 펼쳐보이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울 장안 유일의 연꽃축제로 그 이름하여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부른다. 허나 '봉원사 연꽃
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대웅전 뜨락을 비롯해 절 전체가 연
꽃 향연의 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다른 연꽃축제와 달리 연꽃을 연못이나 논두렁에 가꾸
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에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

절에서 안산으로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또다른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에는 서울 지
방기념물 13호
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대는 1994년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연희동이나 홍제동, 독립문, 서대문역(천연동) 방면으로 내려가면 된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4년 8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에서 7024
  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을 나와 적선동 정류장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
  봉원동) 하차, 봉원사길로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봉원동4거리)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한여름(7월 말~8월 말 사이)에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축제 시작일과 마지막날,
  주말에는 영산재를 비롯해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가 열리며 굳이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7~8월 내내 연꽃을 선보인다. (☞ 2014년은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열림)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하는데, 퇴근 이
  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 서넛이 절을 지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연꽃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여인의 앵두 입술보다 더 진한 홍련 -
'어서 꽃잎을 펼쳐보여야 될텐데!!' 허나 몸은 그의 마음처럼 잘 따라주질 않는다.

▲  활짝 핀 홍련

▲  대방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 사이에 놓인 길 -
마치 연꽃 논두렁길을 걷는 기분이다. 허나 축제가 끝나고 수조가 모두
사라지면 원래의 모습(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이제 막 피어난 홍련과 전성기를 누리고 너덜너덜해진 홍련

▲  활짝 웃는 백련과 심기가 편찮은 홍련

▲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이 저 연꽃에서 환생하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미소가 아름다운 백련

▲  연을 담은 수조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서쪽에서 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죄다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현 서울디
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6.25로 파괴된 대방을 다시 짓고자 궁리하던 중, 이병도의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
군의 흔적을 부시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당시 봉원사 주지 영월
은 아소정 본채를 구입, 그 목재로 도화주 김운파와 함께 1966년 대방을 재건했다.
그래도 아소정의 유일한 흔적인데, 내부는 좀 절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하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
습을 유지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기존보다 축소/변형한 점이 몹시 아쉽다. 비록
왕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하고 적지않게 모습이 바뀌었지만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대원군 시절의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
에서 삼천불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그것도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다고 하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
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를 비롯한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주불(主佛)로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옮겨온 것이며, 예
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金正
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
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대방에 걸린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라당 말아먹었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해 내부에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검은 가루가 되었으니 6.25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봉원사
가 축적한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은 했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가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종이 하나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
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를 강제로 불지르게 하고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그 자리로 이전했는데, 그때 타지 않고 남은 종을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라고 한다.
가야사터 자리가 명당은 명당이라 그의 아들이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
라를 말아먹었으니 거참 명당의 숨겨진 가시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좌측을 꾸며주는 신중탱을 비롯한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우측을 꾸미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 등의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火魔)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나름이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에 넘어가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
다.


▲  대웅전 우측 계단에 진열된 연꽃들

▲  운수각(雲水閣)

▲  영안각(靈晏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각
으로 고참 승려의 생활 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동안
혼백(魂魄)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연
령은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부부
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기일(忌日)에 절에서 제를 지낸다. 역시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
쩔 수 없는 모양이다. 봉원사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까지 하고 있으니 말
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의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
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고,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동
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간신히 완성을 보았
다. 무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떠나보내는 어이없는 비극을 겪었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애기같은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시주로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의 위엄

▲  삼천불전 내부 우측

▲  삼천불전 내부 좌측


▲  괘불(掛佛) 제작 현장

16세기부터 전국에 번지기 시작한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영산재 등 불교의 주요 행사 때 거는 큰
불화이다. 그러다보니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는 비싼 몸으로 200곳이 넘는 고찰을 기웃거린 나도
겨우 10번 남짓 친견했다. 마침 삼천불전 내부에서 괘불 제작을 하고 있어 잠시 지켜보았는데,
그림이 얼마나 큰지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아이처럼 보일 정도이다. 처음으로 보는 괘불 제작
현장, 저들의 갖은 정성에 의해 불교미술사의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괘불은 그렇게 눈을 뜬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
마사(寺)를 방문했다. 그때 그곳 대승정인 그나니사라가 부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
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는데, 그 사리를 봉안하고자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
후에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웠다.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원칙에 따라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껏 드러낸다.

▲  3층석탑 옆에 세워진 석가모니
진신사리탑비

▲  조선후기 선각자인 이동인이 이곳에 있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삼천불전 앞에 배치한 연꽃들

▲  이동인 손가락 조형물 주변에 피어난 연꽃의 분홍물결~~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빛이 바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
와 신들의 무리가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
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의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걸려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08년 8월 주시경
(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국어연구학
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어 봉원
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을 세워 그날을 기억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鄭道傳)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
을 보니 고색의 기운은 그리 짙어보이진 않는다. 허나 만약 정도전이 쓴 것이 맞다면 거의 620
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개
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대
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적
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
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저승의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
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저승의
식구들을 지킨다.

▲  지장보살 좌우에 늘어선 저승의 10왕과 여러 영가들의 영정
인간은 죽으면 저승으로 내려가 10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염라대왕(閻羅大王)의
입김이 커서 그에게 심판을 받는 7주에 염라대왕에게 잘 보이려는 뜻에서 49재를 지낸다.
물론 49재를 지낸다고 해서 무조건 극락으로 빠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이용한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라 불
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이상으로 흘
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그저 밉기만 하다. 그렇
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을 채워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엄연한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
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
는 살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어여쁜 홍련

▲  봉원사를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힘없는 발걸음을 하다

봉원사에 펼쳐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속세로 나온 우리는 저녁을 먹고자 삼청동(三淸洞)으로 이동했다. 바로 삼청동으로 간 것은 아
니고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북악산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실/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에
들어가 잠시 여름 제국의 기운이 늦춰지길 기다렸다가 삼청동으로 이동했다.


▲  우물집에서 먹은 뚝배기불고기와 반찬의 위엄

삼청동은 맛집의 성지(聖地)답게 온갖 식당과 찻집/까페가 즐비하다. 게다가 청와대나 국무총리
공관 등의 국가 시설이 많아 고위 공무원과 상류층들이 자주 찾아 맛도 괜찮은 편이다. 다만 가
격이 썩 착하지 않은 것은 큰 함정.
이번에는 기존에 갔던 식당들은 모두 제쳐두고 새로운 집을 개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발견한 집
이 삼청동 가장 북쪽 구석에 자리한 우물집이다. 이곳은 삼청공원과도 가깝고,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칠보사(七寶寺) 방면으로 도보 1분 거리로 2층 양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물집은 냉면과 한우고기로 유명한 식당인데, 한우고기는 너무 비싸서 우리 같은 서민이 먹기
에는 겁이 나고, 그렇다고 냉면을 먹자니 뭔가 허전하여 우리는 뚝배기불고기를 주문했다. 면보
다는 밥이 배를 채우는 데 좋기 때문이다. 냉면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허전하다. 그래서 만두
같은 부식물을 시키게 되고 그것이 자금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집은 냉면과 뚝배기불고기의 가격이 7,000원선(지금은 다를 수 있음)으로 다른 식당보다 가
격이 좀 착하다. 서울 장안 유명 냉면집의 냉면은 거의 8천원~1만원대, 뚝배기불고기도 6~8천원
대니 말이다.

냉면 전문집에서 뚝배기불고기를 시킨 탓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밥을 기다리니 제일 먼저
반찬이 깔린다. 그런데 반찬이 생각 외로 푸짐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무려 6가지나 되기 때문
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상추와 고추, 쌈장까지 나오며, 특히 감자조림이 맛있어서 1번 더 리필
을 했다.
반찬이 나오고 얼마 뒤 본메뉴인 뚝배기불고기와 쌀밥이 차려진다. 뚝배기불고기는 내 입맛에는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상추에 쌈장을 듬쁙 바르고 고기와 밥을 담아 입에 쏙 넣으니 목구멍이
정신을 못차린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인사동으로 넘어와 전통찻집에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다
가 저녁 늦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연꽃의 찰라와 같은 인생처럼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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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8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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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작품 ~ 예천 회룡포 (내성천, 회룡포마을, 비룡산, 장안사)

 

' 자연이 빚은 대작품 ~ 예천 회룡포(回龍浦) '

▲  회룡포

 


가을이 저물고 겨울 제국이 서서히 용솟음치던 11월 끝 무렵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아
침 10시에 예천읍내 남쪽에 있는 개심사지(開心寺址) 5층석탑에서 머나먼 남쪽에서 온 일행들
과 만나 개심사지5층석탑과 초간정(草澗亭). 용문사(龍門寺)를 둘러보고 회룡포입구인 용궁으
로 이동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용궁(龍宮)은 예천읍과 점촌(문경) 사이에 자리한 고을로 예전에는 독자적인 고을이었으나 지
금은 예천군의 일원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이곳은 순대국과 한우고기로 매우 유명한데 우리는
한우구이와 전골을 먹었다. 한우구이는 불판에 야들야들 구워서 상추에 쌈을 싸서 먹거나, 참
기름에 찍어서 먹는데, 입과 목구멍이 간만에 좋은 거 먹는다고 아주 흥분들을 한다. 단 조금
질긴 것이 흠, 거기에 밥이 있으면 정말 밥도둑이 따로 없을텐데, 밥은 마실을 갔는지 나오지
를 않다가 전골(채소와 된장 등이 버무려진 전골)이 등장할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
상당수는 한우구이로 이미 배가 다져진 상태라 그들의 밥을 지원받으며 전골과 밥그릇을 말끔
히 비웠다.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회룡포로 이동했다. 용궁에서 회룡포는 동남쪽
으로 약 7km로 향석리에서 내성천(乃城川)에 걸린 회룡교를 건너 그 길의 끝에 이르면 회룡포
주차장인데, 여기에 수레를 세우고 다시 내성천을 건너면 그 유명한 회룡포 심장부에 발을 들
이게 된다.


▲  회룡포와 속세를 가르는 내성천, 그 위에 걸쳐진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이다.


♠  대자연이 빚은 거룩한 작품, 예천 회룡포(回龍浦) - 명승 16호

▲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예천 굴지의 명소로 성장한 회룡포는 대자연이 장대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이다. 어떻게 저
런 작품이 나왔을까? 보기만 해도 입이 쩍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대자연의 거룩
한 작품 앞에 경외심이 크게 용솟음 치고,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도 싹 정화가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만들지는 못하며, 대자연의 작품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자로 이러쿵 저러쿵 표현한다는 것이 어쩌면 큰 실례일지도 모른다.

육지 속의 섬이자 벽지로 불리는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支流)인 내성천이 휘감아 흐르는 길목
으로 내성천과 낙동강(落東江) 상류에서 많이 나타나는 감입곡류(嵌入曲流) 지형의 백미(白眉)
와 같은 곳이다. 각박한 속세살이를 상징하듯 구불구불 흘러가던 내성천이 회룡포에 이르러 더
욱 굴곡의 진수를 보여주며, 무려 350도나 돌아간다. 직선으로 약 100m면 갈 거리를 무려 30배
인 3km나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내성천도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보다
빨리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심에 육지와 회룡포를 가늘게 이어주는 부분을 열심히 쪼아대
고 있지만 그 지형이 보기와 달리 무척 단단하여 그 100m 밖에 안되는 부분을 아직까지 처리하
지 못하고 하염없이 멀리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에는 저런 지형은 물의 성미 때문에 결국 얇은 부분이 깎여져 물길이 되고 회룡포
같은 지형은 섬이 된다고 배웠다. 허나 회룡포 형님 앞에서는 그 진리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니
자연 계열 교과서의 수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내성천의 지름길 만들기 계획은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소리 없이 그 지형을 쪼아대고 있기 때문이다. 과
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내성천도 지겨운 우회 운행을 안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회룡포는 육지 속의 섬이 아닌 진정한 섬이 될 것이다.

내성천이 회룡포에서 크게 휘감아 돌면서 하천을 따라 내려가던 모래가 회룡포 강변에 차곡차곡
쌓여 곱고 너른 모래사장(백사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굴곡을 피려는 내성천의 필사적인 노력으
로 강 건너 산자락은 자연히 가파른 벼랑을 이루어 되었다. 또한 상류에서 떠내려온 모래와 흙
이 강변에 퇴적되어 자연히 영양가 높은 농경지를 이루었고, 옥토의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이곳
에 들어와 터전을 닦으면서 지금의 회룡포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회룡포는 분명 육지가 분명하나 속세(俗世)에서 들어가려면 무조건 내성천을 건너야 된다. 거의
4면, 350도가 강에 접해있고, 겨우 동쪽에 10도 정도로 아주 가늘게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기 때
문이다. 정말 삽 한번만 뜨면 섬이 될 것 같은 특이한 지형 때문에 육지 속의 섬(섬마을)이 되
어버렸다.

이곳은 산과 강이 휘감아 흐르면서 거의 태극 모양의 조화를 이루며, 내성천의 하성단구(河成段
丘)와 하성도, 범람원(氾濫原)을 확인할 수 있어 침식과 퇴적지형 연구의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
다. 게다가 회룡포 건너에 병풍처럼 늘어선 비룡산(飛龍山)에는 신라 후기 사찰인 장안사(長安
寺)와 백제(百濟)가 세웠다고 전하는 원산성(圓山城), 그리고 봉수대 등이 있어 회룡포의 명승
적 가치를 더욱 북돋아준다.


▲  목가적인 풍경의 회룡포마을 (서쪽 부분)

회룡포란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예전에는 내성포(乃城浦)라 불렸다. 세상에 드러내기
를 꺼려하던 예천에 숨겨진 속살이자 평범한 시골 마을로 그렇게 살아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조
그만 나룻배를 타고 속세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직접 건너기도 했다. 내성천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이다. 또한 동쪽으로 가느다란 부분을 통해 개포면 쪽으로 나가기도 했으나 생활 권역이 용
궁이라 대부분 강을 건너 용궁이나 점촌으로 나갔다. 하지만 일일이 배로 건너기가 귀찮아 외나
무 다리를 놓았지만 여름만 되면 떠내려가기 급하여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예천군청에 민
원을 때려 1997년에 예천군에서 강관(鋼管)과 철발판으로 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다리가
바로 회룡포의 명물인 뿅뿅다리이다. (퐁퐁다리라고 불렀는데, 그게 속세에서 뿅뿅으로 와전되
었음)
또한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산물이나 필수품을 실어 나를 통로가 필요했
다. 아무리 뿅뿅다리가 생겼다고 해도 다리가 매우 작기 때문에 통행용으로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가느다란 동쪽에 길을 내어 수레의 접근과 운송 편의를 도모했으며, 이 길은 개포면 중
심지로 이어진다.

이곳이 속세에 알려진 것은 그다지 얼마되지 않았다. 1997년부터 예천군에서 관광지로 개발하고
자 우선 회룡포 둑방에 왕벚나무를 심고, 공원과 산책로를 닦았다. 그리고 없어진 봉수대를 복
원하는 한편, 철쭉군락지를 조성해 마을을 수식했다. 그러다가 2000년에 드라마 '가을동화' 촬
영지가 되면서 급속도로 뜨기 시작했고, 회룡포의 묘한 지형에 단단히 매혹된 사람들의 입소문
과 언론매체의 끝임없는 찬양으로 이제는 예천 제일의 명소이자 이 땅의 굵직한 명승지로 순식
간에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말 이곳 이름 그대로 가출한 용이 되돌아 올 정도로 잘나가는
명소가 되버린 것이다.

휴일과 휴가철만 되면 많은 관광/답사객들이 몰려와 회룡포 주변은 늘 활기를 누리고, 내성천의
깨끗한 물과 은빛 모래사장으로 피서의 성지로도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팜스테이(Farm
Stay) 체험장소로도 인기를 다지고 있고, 강 건너의 비룡산과 하나가 되어 회룡포권 관광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쏘가리와 은어가 뛰어놀고 있어 그들을 잡아 매운탕을 해먹으면
그 맛은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회룡포 관람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비룡산(240m)에 마련된 회룡대 등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회룡포의 참모습이다. 그냥 회룡포마을을 둘러보고 강변을 거니는 것과 높은 곳에서 회룡포를
굽어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로 어떤 일이 있어도 비룡산에 올라 이곳의 전경을 꼭
보기를 권한다.
비룡산에 오르려면 비룡산 북쪽 자락에 안긴 장안사에서 오르는 길과 회룡포마을에서 강을 건너
오르는 길이 있는데, 수레를 가져왔다면 장안사 밑에 마련된 주차장에 수레를 세우고 오르는 것
이 좀 편하며, 회룡대를 비롯한 산등성이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그야
말로 탄성과 경외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회룡포마을은 뿅뿅다리부터 강변 산책까지 포함하여 짧으면 30분,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충분
하다. 마을과 경작지, 강변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고 강을 건너 비룡산에
올라 회룡포의 전경을 살펴보고 산에 깃든 장안사와 원산성까지 겯드리면 3~4시간 정도 걸린다.

▲  회룡포 백사장

▲  회룡포 둑방 산책로(올레길)

※ 회룡포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용궁 경유 예천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 이용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용궁. 예천행 직행버스(1일 5회) 이용
* 김천, 구미, 상주, 영주, 안동에서 용궁, 예천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역과 구포역, 밀양역, 동대구역, 구미역, 김천역, 영주역에서 경북선 열차를 타고 용궁역
  하차 (1일 3회, 휴일은 4회)
* 용궁정류장(용궁역 부근)에서 회룡포를 경유하여 예천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1일 3회 운행한다.
  예천터미널에서 회룡포 경유 용궁으로 가는 군내버스도 1일 3회 운행 (예천발 8:10, 12:10,
  16:40)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지체말고 택시를 이용하기 바란다. <예천군내버스 시간 문
  의 예천여객 ☎ 054-654-4444>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점촌함창나들목 → 점촌시내 → 용궁 → 향석리 → 회룡포주차장
②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 → 예천역 → 용궁 → 향석리 → 회룡포주차장
- 회룡포 전망대(회룡대)와 장안사로 갈 경우에는 회룡교를 건너서 우회전한다. (좌회전하면 회
  룡포주차장과 회룡포마을) 단 길이 좁고 커브가 많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바퀴를 굴려야 된다.

★ 회룡포 관람정보 (2014년 7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는 없음
* 회룡포마을에서 민박과 오토캠핑, 농촌체험이 가능하다. 자세한건 회룡포마을 홈페이지 참조
* 회룡포마을은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실례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 회룡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395외 (회룡포길 362)
* 회룡포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들을 클릭한다.

▲  회룡포 뿅뿅다리 (마을쪽에서 바라본 모습)

▲  회룡포를 굽어보는 회룡대


♠  회룡포마을 둘러보기

▲  회룡포 뿅뿅다리 (마을쪽에서 바라본 모습)

룡포 주차장은 수레들로 거의 만원이다. 간신히 적당한 곳에 버스를 세우고, 그렇게나 만나고
싶던 유명 인사를 만나러 가듯,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회룡포로 향한다. 주차장 주변은
마을 아지매들이 그들이 재배한 갖은 채소와 과일을 비롯하여 참기름과 막걸리, 동동주 등을 진
열하여 판매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동동주 2잔 얻어마시고 회룡포로 가니 내성천에 걸린 뿅뿅다
리가 우리를 마중한다.

뿅뿅다리는 이름부터가 참 재밌지만 그 생김새도 옛날에 그 흔한 외나무 다리처럼 정겨운 모습
을 하고 있다. 속세와 회룡포를 이어주는 관문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유일한 다리까진 아니다.
마을에서 외지로 잇는 다리는 이거 말고도 서쪽에 뿅뿅다리가 하나 더 있고, 동쪽 가느다란 부
분에 수레를 위한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회룡포의 상징인 이 다리는 앞서에 이른 데로 강관과 구멍이 뚫린 철발판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1997년 예천군청에서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부실한 외나무 다리가 있었
다. 내성천의 수심이 얕고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그냥 나무와 철을 이용해 간단한 모습으로 만
들었는데, 다리가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이전 외나무 다리보다는 튼튼하여 마을 사람들이 편히 
건너고 다닌다. 그들은 다리 발판 구멍에서 물이 퐁퐁 솟는다하여 퐁퐁다리라고 불렀는데, 1998
년 회룡포를 다룬 어느 신문 기자가 난청증세가 있는지 퐁퐁다리를 그만 뿅뿅다리라 잘못 듣고
이를 기사에 내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뿅뿅다리로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퐁퐁보다는 뿅뿅이 더 정감이 간다 하여 뿅뿅다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뿅뿅다리는 두 사람이 교행할 정도의 작은 다리로 다리를 건널 때 흔들다리처럼 조금씩 꿈틀거
릴 뿐 그런데로 건너갈 만하며, 다리에 안전 난간이 없고, 바로 옆이 강이므로 건널 때 주의를
하기 바란다. 물론 강에 빠진다고 죽지는 않는다. 수심이 무척 얕기 때문이다.


▲  회룡포의 자랑, 백사장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의 자랑인 백사장에 발을 디디게 된다. 속세에서 온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진풍경으로 이는 굴곡 노선의 직선화를 꿈꾸던 내성천이 오랜 세월 가다듬은 작품이다.
마치 바닷가 백사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대자연의 위대함을 뼛속까지 느끼게 하며, 백사장의
폭은 거의 100m, 길이도 2km가 넘어 왠만한 바닷가 백사장 못지 않다. 게다가 내성천이 속세의
때를 거의 타지 않은 탓에 수질이 청정하여 은어와 여러 민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지금은 겨울이라 모래사장을 거니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피서철에는 많은 도시인들이 몰려와 백
사장을 가득 메운다.


▲  회룡포 표석

▲  회룡포 표석에서 바라본 너른 백사장과 내성천

백사장에 열심히 발자국을 남기며 걷다보면 회룡포를 알리는 표석이 비스듬히 누워 하늘을 바라
다. 그 표석을 지나 경작지를 5분 정도 지나면 회룡포 서남쪽에 자리한 회룡포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은 이 땅에 흔한 농촌마을로 대략 1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옛날 이곳에 시집을 온 여
인들은 울면서 왔다고 한다. 교통도 안좋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벽지였기 때문이다. 하지
만 지금은 교통도 조금 좋아지고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안해
도 될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노공(老公)들로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은 작지만 그를 둘러싼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을 이룬다. 또한 회룡포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으면서 민박이나 팜스
테이를 하는 집도 많이 늘었다.


▲  정겨운 풍물시 ~ 곶감을 꿈꾸며 열심히 일광욕을 즐기는 감들의 행렬

▲  회룡포마을 돌담길

회룡포 마을길은 뿅뿅다리 남쪽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강변으로 이어진다. 마을에는 근래에
손질한 돌담길이 길게 이어져 마을의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싼 너른 경작
지는 삶에 지친 도시인들의 안구와 마음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한다.
그런 경작지를 구경하며 목가적인 풍경에 취하다보면 금세 서쪽 강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길
은 3갈래로 갈리는데, 용처럼 꿈틀거리는 비룡산이 보이는 북쪽은 마을 올레길로 불리는 둑방길
이며, 남쪽은 마을의 얕으막한 뒷동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은 백사장과 제2뿅뿅다리로 이어지는
데, 그 다리를 건너면 용포마을과 비룡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보통 회룡포마을 나들이는 뿅뿅다리를 건너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강변 갈림길에서 북쪽 둑방길
을 거쳐 다시 뿅뿅다리로 이어지는 반원 모양의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추가 옵션으로 마
을 뒷동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둑방길과 제2뿅뿅다리를 건너 비룡산으로 가는 코스가 있으며, 회
룡포에서 비룡산은 필수로 꼭 가봐야 한이 안생기는 곳으로 이곳에 올라야 진정한 회룡포의 위
엄을 누릴 수 있다.


▲  회룡포 경작지 너머로 둑방길(올레길)과 비룡산이 보인다.

▲  서쪽 강변 갈림길 - 우리네 인생에서 갈림길은 무척이나 많다.
어느 길이 더 안전하고 이익인지 알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가 않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장거리 게임처럼 저장하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을까?

▲  갈대가 출렁이는 서쪽 강변 백사장 너머로 제2뿅뿅다리가 있다.
저 다리를 건너면 용포마을과 비룡산으로 이어진다.
 

▲  마을 올레길로 쓰이는 둑방길
그냥 흙길이었으면 좋으련만 바닥에 꼭 저런걸 깔아야 했을까..?

▲  가을 추수를 마치고 겨울잠에 들어간 회룡포 경작지 ▼
황금들녘의 흔적이 아직은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  소나무가 가로수를 자처하는 회룡포 둑방길 (올레길)

▲  여름에 꼭 안겨보고 싶은 회룡포 백사장

관광객은 많지만 그래도 조용한 풍경을 지닌 회룡포마을과 둑방길(올레길)을 거닐고 뿅뿅다리를
건너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회룡포의 속살을 둘러봤으니 이제는 회룡포의 진수를
봐야 한이 없겠지. 그래서 비룡산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  비룡산 회룡대(回龍臺)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다

▲  회룡대에서 장안사로 내려가는 길
길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의 물결이 바로 장안사이다.


회룡포 주차장에서 수레를 타고 회룡교에서 다리 대신 서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길이 너무나
가늘고, 굴곡도 심하고, 한쪽에는 벼랑까지 있어 덩치가 큰 버스가 안심하고 바퀴를 굴리기에는
매우 버겨운 길이었다. 다행히 그 길을 벗어나 장안사 밑에 마련된 주차장에 바퀴를 접었다. 장
안사까지 바퀴를 굴려도 되지만 버스가 마음을 놓고 바퀴를 접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부
터 부득이 걸어가야 된다. 길이 제법 각박하여 은근히 숨이 차긴 하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회룡포를 굽어볼 생각에 그 힘든 길도 거침없이 올라갔다.

작은 수레들이 모여있는 장안사 주차장을 지나면 장안사(長安寺)가 조촐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은 신라 후기인 759년에 운명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 당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전국 3곳의 명산(名山)에 장안사를 세우니, 그것이 금강산(金剛山) 장안사와 기장(機張) 장안사,
그리고 이곳 장안사라고 한다. 허나 신빙성이 많이 떨어져 믿을 바는 되지 못하며, 금강산이나
기장(부산)의 장안사와 달리 고색의 내음이 거의 없다. 다만 고려 중기 문인(文人)으로 동명왕
편(東明王篇)을 지은 이규보(李奎報)가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가 잔잔히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
려 초기에 문을 연 듯 싶다.
이후 고려 명종(明宗) 때와 1627년, 1755년에 중창을 했으며, 1984년 두타화상(頭陀和尙)이 전
국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장안사의 사세가 말이 아님을 보고 지역 신도들과 힘을 합쳐 지
금의 가람을 일구었다. 고색의 때는 진작에 날라간 상태이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지만 이규보의
시를 통해 이곳의 오랜 역사를 대충 가늠어 볼 수는 있겠다.
2000년 이후 회룡포가 대중적인 명소로 뜨면서 회룡포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비룡산에 등산로를
정비하고 회룡대를 세웠는데, 수레로 회룡대까지 올라갈 경우에는 무조건 장안사를 거쳐야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이곳까지 이익을 보게 되면서 회룡포 관광권의 일원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던 고적한 절이었다.

장안사는 예천 사람들이 공부를 하거나 소망을 기원하던 도량(道場)으로 예전에는 극락전(極樂
殿)이 법당(法堂)이었으나 지금은 대웅전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이규보가 이곳에서 지
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에 이르니 번뇌가 쉬어지는구나
더구나 고명하신 지도림 스님을 친견했음이랴
긴 칼 차고 멀리 떠날 때는
외로운 나그네 마음이더니
1잔 차로 서로 웃으니
오래된 친구의 마음이라

맑은 날 북쪽 개울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지는 서쪽 성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동산 술과 국화는 꿈속에서 찾아드네


장안사는 회룡포에 단단히 정신이 팔린 탓에 경내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솔직히 역사만
좀 오래되었을 뿐, 볼거리도 부실한 절로 여겨 지나쳤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당연
히 사진도 제대로 담지 않았다.
* 장안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산54 (☎ 054-655-1401)


▲  회룡대에서 장안사로 내려가는 계단길

장안사를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비룡산의 산능선이다. 여기까지 숨가쁘게 이어진 등산로
는 약간 진정을 되찾는 듯 보이나, 하늘로 이어질 것만 같은 계단길이 나타나면서 잠깐의 안도
감도 금세 사그러든다. 소나무 숲을 가르며 올라가는 계단길은 소나무가 베푼 솔내음이 그윽하
며 그런 계단길을 오르면 길은 서서히 완만해지면서 잠시 내리막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
을 잠시 내려가면 회룡대 전망대인 회룡대가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다.


▲  조촐한 모습의 팔각정인 회룡대

회룡대는 회룡포의 전경을 보여주고자 비룡산 능선에 닦은 정자이다. 회룡포 답사의 백미(白眉)
라고 할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오르면 대자연이 만들고도 스스로 놀랬다는 작품, 회룡포가 기
가 막히게 연출되어 속인들의 정신줄을 제대로 놓게 만든다. 밑에서 거닐면서 보는 회룡포와 이
렇게 위에서 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정말 천지 차이이다.


▲  명필이 분명한 회룡대 현판의 위엄

▲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 사람들 말대로 삽 한번만 뜨면 정말 섬이 될 것 같은 아슬아슬한
회룡포의 모습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탄사 연발 뿐이다.

▲  회룡대 동쪽 부분
내성천이 무려 350도나 구비구비 돌아가야 했던 것은 바로 사진 가운데 부분을
뚫지 못해서이다. 그것도 정말 삽 한번 뜨면 그만일 듯한 두께임에도 말이다.
내성천의 집요한 굴곡 노선 직선화 프로젝트를 막아선
동쪽 부분이 정말 패기가 돋는다.

▲  회룡대 서쪽 부분
회룡포가 넓긴 하지만 대부분은 경작지로 쓰이며, 마을은 서남쪽 구석에 자리해 있다.

▲  숨은 그림 찾기
사진을 잘 살펴보면 하트(♥)처럼 생긴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난이도는 하


회룡대에 올라 회룡포를 중심으로 한 천하를 실컷 굽어보고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시간은 어
느덧 17시, 이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태양계에서 가장 크다는 햇님도
겨울 제국의 눈치 탓에 슬슬 꽁무니를 뺄 채비를 한다. 
회룡대로 올라갈 때는 길이 각박하여 제법 멀게 느껴졌는데 내려갈 때는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
는데 금세 장안사가 나타난다. 여기서 미끄럼을 타듯 쑥 내려가면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주
차장에 이른다.

졸고 있는 버스를 깨워서 회룡포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회룡교까지 난이도가 강
한 길을 비집고 내려와 회룡교를 건너 향석리(옛 용궁 고을 중심지)를 지나 용궁면 중심지에 이
르러 일행들과 작별을 고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직행버스를 타고 영주(榮州)로 넘어가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고, 남쪽 일행
들은 인근 삼강주막(三江酒幕)에 들려 막걸리 한 사발씩 들고 내려갔다고 한다. 나도 그들을 쫓
아갈 껄 그랬나? 괜히 용궁에서 작별을 고한 것이 후회가 된다. 허나 이미 지나간 거 따져서 무
엇하리, 거기는 다음에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겨울 맞이 예천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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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조그만 금강산, 기암괴석이 일품인 홍성 용봉산 (용봉산 자연휴양림)

 


' 홍성 용봉산(龍鳳山) 나들이 '

▲  신경리에서 바라본 용봉산의 위엄


♠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新耕里 磨崖如來立像) - 보물 355호

봄이 천하만물의 폭발적인 성원에 힘입어 반년 가까이 지구 북반구를 지배한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를 진정시키던 4월 첫 무렵 주말에 홍성 용봉산을 찾았다.

용봉산은 충남의 금강산(金剛山)으로 널리 칭송 받는 산으로 주말에는 천하 곳곳에서 달려온 산
꾼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용봉산 등산로의 주요 기점인 구룡대(九龍臺)를 시작으로 나를 이곳으
로 부른 용봉사(龍鳳寺)를 둘러보고 우측으로 난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이 모습을 비춘다.

신경리 마애불은 하늘로 솟은 바위 피부에 얕게 감실(龕室)을 파고 4m 높이에 석불을 돋음새김
으로 새긴 것으로 용봉사의 옛 유물이다. 용봉사 법당(法堂)은 원래 이곳에 있었다 하며, 1906
년 평양조씨 집안의 명당을 향한 집착으로 건물은 사라지고 마애불만 외롭게 남게 되었다. 마애
불 앞은 법당을 비롯해 3채 정도는 거뜬히 지을 수 있는 평탄하고 너른 공간으로 현재는 예불을
올리는 네모난 야외 기도처가 닦여져 있으며, 숲과 살을 댄 공간 모서리에는 의자를 여럿 두어
나그네로 하여금 잠시나마 마애불의 외로움을 달래주도록 배려했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이 석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민머리 위에 육계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몸통보다
진하게 새겨져 있는데 살이 많아 보이며,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의 마음을 다
독거린다. 눈썹은 서로 마주보며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고, 눈은 완전히 감았다. 그리고 코는
무심한 세월과 무지한 이들의 장난으로 흔적만 남았다.
 
몸통에 걸친 법의(法衣)는 목 밑에서 여러 가닥의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밑에는 가느다란 선으로
처리되었으며, 석불을 받치는 광배(光背)는 바위 피부를 이용해 희미하게 윤곽선만 나타내어 지
나치기가 쉽다.

용봉사 경내 밑에 자리한 마애불처럼 머리와 상체 부분만 진하게 나와있고, 아래로 내려 갈 수
록 양감(量感)이 정비례로 떨어져 조금은 부족한 인상을 남긴다. 다행히도 용봉사 마애불보다
건강 상태도 좋고 선명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눈으로 확인하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앞 너른 공간 (1)
용봉사 법당이 있던 자리로 여겨진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앞 너른 공간 (2)
숲 너머로 용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악귀봉이 보인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에서 바라본 병풍바위의 위엄 (용봉산 동쪽 능선)

신경리 마애불 앞에 뿌리를 내렸을 법당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곳에 올라서면 동쪽 너머로 병
풍바위가 위엄을 부리고 있고, 악귀봉을 비롯한 용봉산의 주요 봉우리가 가까이에 보인다. 또한
용봉사와 신경리, 상하리 일대가 훤하게 바라보여 조망(眺望)도 그런데로 괜찮다. 그런 조망을
낀 능선 정상부에 있으니 그 위풍과 경관은 자못 대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의순 무덤에는 요
사와 선방 등 주요 건물을 세워 법당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실제와 달리 체감 면적도 넓게 보
이도록 했다.

이렇게 마애불을 둘러보고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가 계획에도 없던 용봉산 종주를 단행했다. 어
차피 오르막은 거의 다 오른 상태이고, 여기서 정상도 가까우니 욕심을 조금 더 부려도 그리 문
제될 것은 없다.
마애불에서 3분 정도 가면 용봉산 주능선과 만나는 임간(林間)휴게소에 이른다. 휴게소라고 해서
먹을 것을 파는 매점이나 편의시설이 있는 것이 아닌 그냥 의자와 밥을 먹을 수 있는 탁자가 고
작인 그냥 친환경적인 쉼터이다.


▲  임간휴게소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 예산군 덕산면 지역

▲  전망대(왼쪽)가 있는 봉우리와 병풍바위


♠  용봉산 악귀봉, 노적봉

▲  악귀봉 부근에서 바라본 내포(內浦)신도시 건설현장 (2012년 사진)

홍성 지역의 명산(名山)으로 명성이 자자한 용봉산은 예당평야(禮唐平野) 서쪽 끝에 자리해 있
다. 해발 381m의 작은 산이지만 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많아 예로부터 충남의 금강산, 제
2의 금강산 등으로 일컬어졌고, 산의 모습이 운무(雲霧) 사이를 휘도는 용의 형상과 달빛을 감
아 올리는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용봉산이란 아주 비싼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산 전체가 바위산이라 대자연이 빚어놓은 가지각색의 멋드러진 바위들이 그럴싸한 전설을 품으
며 산을 수식하고 있는데, 산에서 보는 해돋이 광경 또한 천하 일품이다. 그러다보니 국립공원
이나 도립공원, 대도시나 인구 밀집 지역을 낀 산이 아님에도 인기가 나날이 높아져 휴일만 되
면 산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이 산이 속세에 이름을 드러낸지는 그리 오래되진 않았으나 이제는 홍성과 충남의 대표적인 뫼
로 계룡산과 칠갑산, 대둔산(大芚山)을 긴장 타게 만든다.

용봉산에는 백제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용봉사를 비롯해 앞에서 언급한 신경리 마애여
래입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으며, 산 동쪽 자락에는 자연휴양림과 청소년수련원이 있어 자연
과 함께 호젓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 또한 산세가 작다보니 30~40분 정도면 주능선에 이르며,
주능선과 정상을 거쳐 빠르면 2시간 정도면 거뜬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다만 산이 급하게 솟
아있다 보니 경사가 각박하고 위험지대가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산을 구성하는 주요 봉우리로는 북쪽의 수암산을 비롯하여 악귀봉과 노적봉, 최고봉(용봉산 정
상), 투석봉 등이 있으며, 산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자 한다면 장항선 열차를 타고 삽교에서 홍
성으로 이동할 때(또는 그 반대로) 보기 바란다. 정말 찬사가 나올 것이다.


▲  악귀봉 구름다리

임간휴게소에서 용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악귀봉까지는 주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걸린다.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보이고, 하늘과도 무척이나 가까워 마치 학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다. 또
한 천하가 발 밑으로 보이니 천하를 손에 넣은 듯 즐거운 기분마저 넝실거린다.

악귀봉은 해발 369m로 용봉산에서 2번 째로 높다. 왜 악귀봉이란 기분 나쁜 이름을 지니게 되었
는지는 모르겠으나 멀리서 보면 악귀처럼 보이거나 그만큼 험준한 봉우리라서 사람들이 그런 이
름을 강제로 씌운 모양이다. 굳이 다른 이름도 많은데 왜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이란 것들이 좋지도 않은 이미지의 이름을 붙였는지 악귀봉도 무척 서운해
할 것이다.


▲  삽살개바위
삽살개보다는 엄지손을 치켜든 모습처럼 보인다. 엄지손바위란 이름도 좋지 않을까?
참고로 용봉산에 있는 바위 이름은 거진 홍성군청에서 보이는 모습에 따라 멋대로
지어 붙인 것이다.

▲  악귀봉에서 바라본 용봉산 줄기 ~ 노적봉과 용봉산 정상(최고봉)

용봉산이 좀 작다보니 각 봉우리와 바위 간의 거리도 짧다. 허나 짧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된다.
산에서의 거리는 평지의 최대 2배 정도 되기 때문이다. 임간휴게소에서 악귀봉까지 0.38km라 쓰
여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0.7km에 가깝다. 그런 숫자의 농간에 괜히 마음을 놓지 말고 서두르지
말 것이며, 자존심을 곱게 접어 산행에 임해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산은 자신을 만만히 보거나
무시하는 이를 가만 두지 않는다.


▲  악귀봉에서 본 내포신도시 현장 (2012년 사진)
충남도청 이전과 충남 서부지역 발전을 위해 예당평야 서쪽에 내포신도시를 닦았다.
내포 조성으로 용봉산 접근성은 예전보다 좋아졌고, 내포의 후광으로
용봉산의 존재감도 그만큼 두터워졌다.

▲  사람들로 가득한 악귀봉 주변

▲  물개바위에서 전망대로 내려가는 길

▲  두꺼비바위 - 바위 봉우리가 병풍을 이루며 절경을 자아낸다.

▲  확대해서 본 두꺼비바위
내 눈이 이상한 건지 두꺼비로 보이지는 않고 고개를 들고 있는 멍멍이로 보인다.

        ◀  하늘로 곧게 솟은 행운바위
서울 관상감(觀象監)의 관천대(觀天臺)처럼 생
긴 바위가 엉뚱하게 행운바위란 이름으로 등산
객들의 심심풀이 표적이 되고 있다. 아마도 바
위 꼭대기에 움푹 들어간 공간 때문에 돌을 던
져 행운을 비는 기복(祈福) 형태의 바위가 된
듯 싶은데, 등산객들이 무심히 던진 돌이 탑 정
상에 수북히 쌓여 조그만 돌탑을 이룬다.


▲  행운바위 꼭대기 너머로 본 용봉산 북쪽 줄기

▲  행운바위 주변에서 본 악귀봉

▲  노적봉에서 본 내포신도시 남쪽

▲  아직도 갈 길이 먼 용봉산 정상 (노적봉에서 바라본 모습)

악귀봉에서 노적봉까지는 0.23km로 10분 정도 걸린다. 가는 길은 그런데로 양호한 수준, 노적봉
은 악귀봉과 용봉산 정상(최고봉) 사이의 봉우리로 해발 350m이다. 이곳에는 시원한 아이스크림
과 음료수를 파는 행상이 있는데, 속세(俗世)보다 2배를 더 얹혀 팔고 있었다. 하긴 여기까지
들고 온 수고가 있으니 산에서 그 정도면 그러려니 봐줄 만은 하겠다.
행상은 '아이스케키 사세요~~!' 소리를 치는데, 땀도 흘리고 목도 마른 등산객들의 심리를 제대
로 들쑤셔 금세 1통을 비웠다. 나도 목이 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었는데, 정말 꿀맛이 따
로 없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 것일까?


▲  노적봉에서 본 홍성 지역 (홍북면과 홍성읍)


♠  용봉산 정상과 최영장군 활터

▲  용봉산 정상을 이루고 있는 최고봉(最高峯, 381m)

노적봉에서 최고봉까지는 0.36km로 8분 정도 걸린다. 최고봉은 용봉산의 꼭대기로 삼각(三角)처
럼 솟은 바위가 아담하게 정상을 이루고 있는데, 최고봉이란 가장 높은 봉우리란 뜻으로 근래에
지어진 이름이다.
바위 정상에는 용봉산 정상을 알리는 표석이 있는데, 산꾼들이 정상에 왔음을 알리는 인증 사진
을 찍느라 표석 주변은 늘 부산하다. 한 사람이나 한 단체가 사진을 찍기가 무섭게 바로 다른
이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으니 말이다. 그래서 잠깐 비어있는 틈을 이용해 정상 표석을 사진에
담았다.


▲  용봉산 정상 표석의 위엄

▲  용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홍성 홍북면과 예당평야
용봉산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까지 펼쳐진 드넓은 대지가 예당평야이다.
이렇게 보니 이 땅도 결코 좁지는 않은 모양이다.

▲  용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내포신도시 건설 현장 (2012년 사진)

마치 불모의 사막에 한줄기 도시를 짓는 듯, 드넓은 예당평야 서쪽에 자리를 닦아 충남의 야심
작 내포신도시를 조성했다. 홍성군과 예산군의 경계 지점으로 2013년에 대전(大田)에 있던 충남
도청을 비롯해 충남교육청, 충남지방경찰청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계속해서 주거지를 조성
하고 있어 2016년에 대략 공사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
공공기관과 각종 회사의 이전으로 홍성과 예산에 적지 않은 인구와 기대감을 더해줄 것이며, 그
리되면 용봉산은 내포의 듬직한 뒷동산이 되어 안그래도 많은 산꾼이 더 늘어나 이름 석자도 더
욱 견고해질 것이다. 다만 개발의 칼질은 저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며, 신도시와 용봉산의 영
역을 엄격히 구분 지어 용봉산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일이 없어야 될 것이다.


▲  최영 장군 활터에 자리한 정자

최고봉에서 용봉산 자연휴양림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정자가 있는 봉우리(339m)가 나온다. 이
곳은 '~~봉' 대신 '최영장군활터'라 불리는데, 정자에 올라서면 내포신도시를 비롯해 예당평야
와 홍성 서북부 지역, 예산 서부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이 꽤 일품이다.

봉우리 이름에 등장하는 최영(崔瑩)은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로 동아시아를 누비며 80회 가
까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며, 금을 돌처럼 여겨 검소하게 살았고, 백성을 살피고 나라를
지켰던 명장이다. 바로 그가 태어난 곳이 홍성이다.
그는 어린 시절 용봉산에서 무예를 닦았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하며,
그 연유로 최영장군활터가 되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로 그를 흠모하는 지역 사람들이
용봉산에서 조망이 제일 좋은 이곳을 그가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힌 곳으로 삼고 그럴싸한 전설을
덧붙였는데,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최영은 어린 시절 말을 타고 무예를 연마하다가 문득 말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말
에게 '내가 여기서 화살을 쏘겠다. 만약 너가 화살보다 먼저 도착하면 맛있는 상을 줄 것이고,
화살이 먼저 도착하면 너의 목을 베겠다. 어떠냐?'

그러자 말이 '좋다. 흔쾌히 해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 찬 모습을 드러냈다.

최영은 말을 타고 지금의 최영장군활터에서 동남쪽으로 5km 떨어진 홍성읍 은행정 방향으로 화
살을 날렸다. 그러자 말은 목이 걸린 일이라 화살이 날라가기 무섭게 그곳으로 번개처럼 달려갔
다. 허나 목적지에 이르니 화살은 보이지가 않았다. (말의 품종이 무엇이길래..? 5km를 단숨에
갔단 말인가?) 발끈한 최영은 화살이 먼저 도착한 것이라 여기고 말의 변명도 듣지 않은 채, 단
칼에 죽이고 말았다. 바로 그때 산에서 쐈던 화살이 무심히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최영은 자신의 경솔함에 크게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자고 약
속했던 자신의 말을 그 자리에 묻어주었는데, 홍성읍 은행정 옆에 금마총이라 불리는 말무덤이
바로 최영의 말 무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전설은 이곳 뿐만 아니라 광주 무등산(無等山)에도 전해온다. 그곳에는 김덕령(金
德齡)이 최영과 같은 테스트를 했는데,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다만 말을 죽이기 직전에 화살이
지나가 김덕령의 말은 목숨을 건진다. 이들 전설은 그들을 흠모하는 지역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
나 아무리 우수한 말이라고 해도 5km를 단숨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아무리 높은 곳에서 활을
쏴도 그 사정거리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그런 말도 안되는 테스트로 자신의 말을 죽이려고 했던 속 좁은 위인으로까지 비쳐질 수
도 있으니 그리 썩 바람직한 전설은 아닌 것 같다.


▲  최영장군 활터 정자 옆에 뿌리를 내린 돌탑 -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  최영장군 활터에서 바라본 홍성 지역과 예당평야

▲  기묘하게 자리한 흔들바위

최영장군활터를 지나면 길이 다소 아찔해 질 것이다. 마치 천길 낭떠러지 같은 절벽을 내려오는
듯한 기분이 진하게 들면서 긴장감의 끈을 더욱 조여야 된다. 여기서 자연휴양림까지는 손에 잡
힐 듯 바라보이는데, 내포신도시와 홍성, 예산 지역이 파노라마처럼 숨가쁘게 펼쳐진다.

활터에서 조금 내려가면 암석 위에 기묘하게 목을 붙잡고 있는 흔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흔들바
위는 손이나 몸으로 밀면 조금 흔들리다 마는 바위로 설악산(雪嶽山) 흔들바위가 그 갑(甲)이다.
있는 힘을 힘껏 가하면 바위를 저 아래로 떠밀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좀처럼 밀리지 않는다. 어
찌 저렇게 자리를 잡았는지, 장대한 세월의 태클이 적지 않았음에도 제자리를 끝까지 고집한 흔
들바위의 집념과 절개가 참으로 대단하다.


▲  온갖 기암으로 치장된 용봉산 사자바위 능선


♠  용봉산 마무리

▲  용봉산 자연휴양림 표석

용봉산 최고봉에서 최영장군활터와 흔들바위를 지나 25분 정도 정신 없이 내려가면 용봉산자연
휴양림 내부에 이른다. 이곳은 야외취사장을 비롯하여 산림휴양관과 숲속의 집, 청소년수련원,
체육시설 등의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다.


▲  산림체험전시관

숲속의 집과 청소년수련원 사이에 자리한 산림체험전시관은 2층 규모로 홍성(洪城)의 역사와 문
화, 자연을 다루고 있는데, 1층은 전시관과 휴식공간으로 쓰이며, 2층은 휴양림관리사무소로 쓰
인다.
용봉산을 찾는 사람은 허벌나게 많지만 정작 산림체험전시관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그곳에 대한 관심이 없다. 다들 용봉산에 눈이 멀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지나간다고 잠시 둘러보고 나왔다.

* 산림체험전시관 관람시간 : 10시부터 16시 30분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산림체험전시장을 지나면 청소년들의 심신수련 및 단체 숙박을 위한 청소년수련원이 있다. 수영
장과 교육관까지 갖춘 우람한 규모로 그곳을 지나면 용봉산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통해 주차장에 이르니 시간은 13시가 넘었다. 내가 10시에 용봉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3시간 이상을 산속에 묻혀있던 것이다.

이렇게 용봉산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덕산(德山)으로 가는 홍성군내버스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 예산군 덕산으로 넘어갔다. 덕산은 예산군 서부에 자리한 고장으로 그 유명한 덕산온천과
윤봉길(尹奉吉)의사 유적지, 수덕사(修德寺), 남연군(南延君)묘 등의 굵직한 명소를 간직하고
있어 관광 수요가 대단하다.

아직 점심 끼니를 때우지 못해 예전 남연군묘에 갔을 때 갈비탕을 먹었던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그새 망했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적당한 식당을 물색하다가 '불고기나라'란 이름의 큰 식
당이 눈에 들어와 그곳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내부가 썰렁해 식사가 되는지 문의하니 된다고 해서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
를 잡고 하루 종일 고생한 두 다리를 쉬게 했다.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육개장이 땡
겨서 그것을 시켰는데, 처음에는 그리 기대는 하지 않았다.


▲  덕산 불고기나라에서 먹은 육개장의 위엄

기다리는 시간만큼 지루하고 긴 것은 없다. 고속으로 흘러가는 세월을 저속으로 흘러가게 하려
면 기다리는 것을 많게 하면 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는데, 15분 정도를 간신히 기다리니 나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육개장과 밑반찬이 내 앞에 차려진다. 정갈하게 차려진 밑반찬은 배추김치
와 파김치, 콩나물과 메추리알로 수저를 들어 육개장을 들어보니 생각 외로 맛이 괜찮다. 소고
기도 제법 들어가 있고, 고기와 계란, 파, 고사리 등이 버무러진 육개장 국물은 얼큰하고 맛깔
스러웠다.

그렇게 배고픈 배의 불만을 잠재우며, 열심히 숫가락을 움직여 밥과 육개장, 밑반찬까지 싹 먹
어치웠다. 육개장은 국물까지 죄다 섭취하고, 밥은 밥알 하나도 허용치 않았으니 무척 배가 고
프긴 했나보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나니 졸음이 슬쩍 찾아와 배 깔고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하
려든다. 그 희롱에 떨어지면 몸에도 좋지 않고, 나는 아직 가야 할 길이 있길래 커피로 졸음에
대항하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추후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 용봉산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① 홍성 경유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홍성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에서 홍성행 고속버스가 1일 8회 떠나며,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5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2회 떠난다.
* 인천, 성남, 안산, 대전(서부/동부/유성), 천안, 서산, 보령에서 홍성행 직행버스 이용
② 내포신도시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에서 내포행 고속버스가 1일 8회,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5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2회 떠난다. (모두 홍성까지 운행함)
* 인천, 성남, 대전(서부/동부/유성), 천안, 청주, 보령, 서산에서 내포시행 직행버스 이용.
③ 예산 경유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예산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에서 예산행 고속버스가 1일 5회,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3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4회 떠난다.
* 인천, 천안, 대전(서부/동부), 서산에서 예산행 직행버스 이용
④ 현지교통
* 홍성터미널(홍성역을 나와서 도보 5분 거리)에서 용봉산 경유 내포(도청)/덕산/수덕사행 900
  번대 군내버스를 타고 용봉산 하차 (1일 20여 회 운행)
* 내포신도시 도청대로 환승센터(고속/직행버스 정류장)에서 용봉산까지 군내버스(1일 30여 회
  운행) 또는 택시 이용 (도청대로 환승센터 ☎ 041-333-2914)
* 예산터미널과 예산역에서 덕산, 도청 경유 용봉산행 군내버스 1일 14회 운행

⑤ 승용차 (용봉산 자연휴양림 주차장은 휴양림 숙박객만 사용 가능)
* 서해안고속도로 → 홍성나들목을 나와서 홍성 방면 29번 국도 → 옥암2교차로에서 좌회전 →
  소향3거리 우회전 → 덕산통4거리 좌회전 → 용봉산입구 → 용봉산주차장 (용봉사까지 접근
  가능)
* 당진대전고속도로 → 고덕나들목을 나와서 덕산 방면 40번 국도 → 덕산119안전센터 직진 →
  내포신도시 도청대로 → 용봉산입구 → 용봉산주차장

★ 용봉산/용봉산자연휴양림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1,000원(단체 800원) / 청소년과 군인 800원(단체 600원) /
  어린이 400원(단체 200원) / 자연휴양림 숙박시설 사용자는 입장료 면제
* 주차료 - 소형 3,000원 / 대형 5,000원
* 용봉산 자연휴양림 숲속의 집은 10인용 5동으로 성수기 1박은 15만원, 비수기 1박은 10.5만원
  이다.
* 자연휴양림 산림휴양관에는 4인실과 6인실이 있다. 4인실은 성수기 1박은 5만원, 비수기 1박
  은 3만 5천원이며, 6인실은 성수기 1박 7만원, 비수기 1박 4만 9천원이다.
* 자연휴양림 숙박시 개인세면도구는 지참해야 되며, 예약과 문의는 용봉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
  를 참조한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됨)
* 용봉산자연휴양림 -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 104-57 (용봉산2길 87, ☎ 041-630-1785)


▲  용봉산 등산로 안내도
(사진을 클릭하면 용봉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가 번쩍 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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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6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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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석가탄신일 맞이 산사 나들이 ~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약사전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사 호국보탑

▲  승가사 약사전

▲  호국보탑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도 등라(藤蘿) 휘어잡네
처마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명 높은 스님 있어 공(空)한 것 보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 조선 초기 문신 정인지(鄭麟趾)가 승가사에서 지은 시


 

5월 공휴일의 하나인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이 드디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초파일은 주말
과 겹쳐서 자연스럽게 여러 날 연휴가 형성되었는데, 초파일이 그 연휴의 끝이었다. 그래서 초
파일 전날에 사전 몸풀기용으로 서울에 있는 적당한 고찰을 물색하다가 가본지 20년이 넘은 북
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기로 했다.

해가 조금씩 고개가 꺾이던 오후 2시에 길음역에서 후배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
고지↔신설동)을 타고 북악터널, 평창동을 지나 구기동(舊基洞)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졸부
들의 집과 빌라로 경관이 꼬질꼬질해진 구기동계곡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탐방지원센터가 나
오며, 이곳을 지나면 비로소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된다.
구기동은 옆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더불어 북한산 자락에 안겨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게다가
명당(明堂)의 기질도 있다고 전해져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졸부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살았는
데, 문제는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어 쥐처럼 계속 북한산(삼각산)의 살을 갉아먹고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경관이 적지 않게 유린을 당했다.
더 이상 졸부들로 인해 북한산이 망가지지 않도록 신축/증축을 금하는 한편, 기존 집들도 모두
밀어버려 서울의 영원한 허파이자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숨통을 확 트이게 했으면 좋겠다.

구기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졸부들의 집과 무자비한 개발의 칼질에 기가 죽은 구기동계곡도 슬
슬 본성을 되찾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숲도 더욱 짙어져 때이른 더위를 잊게 만
든다. 그런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하면 문수암(文殊庵)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지며, 왼쪽으로 가면 승가사와 비봉이다.
우리는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김밥과 과자, 음료수 등으로 배를 채운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꿀을 바른 듯 죄다 꿀맛이다. 우리가 사온 김
밥은 모두 5줄인데, 이중 4줄을 먹었고, 과자와 음료수도 절반 정도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이
일파만파로 몰려와 우리를 희롱한다. 그 희롱에 잠시 무방비로 있다가 자리를 싹 털고 다시 길
을 재촉했다. 승가사까지는 30분을 더 가야되기 때문이다.

구기갈림길에서 승가사까지는 경사가 좀 각박한 편이나, 구기동계곡의 상류인 승가사계곡이 바
로 옆에서 시원한 바람과 냇물로 응원하고 있어 그리힘들지는 않다. 그 산길을 25분 정도 오르
면 승가사 갈림길에 이른다.


▲  승가사 갈림길 -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모두 승가사로 통한다.
(사람은 왼쪽 계단길 추천, 오른쪽 길은 수레를 위한 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로 치장된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갈림길에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사의 내력과 가람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무
려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주변이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거
를 당했던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하여 지금의 문을 두었으며,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호국보탑까지는 숨가쁜 계단길의 연속이다. 연등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면
청운교(靑雲橋)라 불리는 장대한 계단이 기를 질리게 만드는데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
事蹟碑)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는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계단길 (내려갈 때 찍은 모습)
계단 왼쪽에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이 승가사 사적비이다.

▲  감실 불당까지 갖춘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서 있는 호국보탑 앞에서 다시 한번 주
눅이 든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이었음을 속
세에 강조하면서 조국 통일도 염원하고 절의 위세도 크게 강조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이
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참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
던 허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서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
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씩 재현했
고 사방(四方)에 문을 냈다.
감실 안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키
도록 했다. 감실이 매우 좁기 때문에 승려만 들어가서 예불을 올리며, 탑 주위로는 문수/보현동
자상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다.

탑신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漢)
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9층탑 99기, 화엄경(華嚴經
)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큰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몇백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르니 미리 봐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민족통일호국보탑 공덕비

▲  위에서 바라본 호국보탑의 위엄


▲  호국보탑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北岳山, 사진 중앙에 엷게 보이는 산줄기)과 인왕산(오른쪽), 그들 너머로
서울 도심이 어렴풋이 바라보인다.

▲  산자락에 요새처럼 자리한 승가사 - 호국보탑에서 올려다본 모습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
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은 옛길이다. (옛길로 가면 포대화상을 만
날 수 있음)


♠  북한산 제일의 고찰이자 서울 근교 명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
고려시대 보물 2개를 간직한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

▲  산신각에서 바라본 승가사 경내 (대웅전 구역)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이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국보 3호)가 서있던 비봉(碑峰)
동쪽 45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승가사는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많은 문인(文人)들이 찾아와
안긴 명소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산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찬양을 받았다.

북한산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4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에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로 칭송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
)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 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
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
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
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고려의 천하로 바뀐 이후,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
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선종(宣宗)의 칙령(勅令)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
숙종 3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宗)과 함께 세검정에 있던 장의사(藏義
寺)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속하
게 되었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온
청나라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5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80년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절터에 뒹굴던 돌을 골라
건물을 재건했으며, 구한말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으로 절을 수리했다.

1941년 도공(道空)이 중수를 벌였고,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려나갔으나 6.25때 모두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다가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 등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켰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
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7년 동안 갈고 닦아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
리는 등, 왕년의 위엄을 되찾고자 열심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신없이 건물을 지었으며, 비
록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적묵당, 승가굴을 개조한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
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시대에 거대한 마애불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과 역시 고려 때 조성된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밖에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碑座),
그리고 경내 동쪽에 조선 후기 승탑 등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주변 풍경이 빼어나 고려
와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元淳)은 이곳의 풍경을 8줄의 시로 표현하고 있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고 하늘과도 가까워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
오기 힘들며, (번뇌는 절 밑에서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다. 또한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공기도 청정하며,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거기에 보물급 문화재를 2점이나 품고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비구니의 낭낭한 불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해탈의 기분마저 들게 한다.


▲  나무 장작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서래당 공양간 부뚜막
이제는 시골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그리운 풍경으로 서울에서 저런 풍경을 만나니
무지 신선하고 반갑다. 쇠솥 안에서 모락모락 익고 있는 국의 맛은 어떨까?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군침이 고인다.


※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6호
  선 역촌역(3번 출구)에서 7212번 시내버스(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
  나 승가사입구 하차, 승가사까지 도보 약 70분, 현대빌라에서 구기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
  이 좀 무난하며, 승가사입구에서 비봉4길(건덕아파트)과 승가산림초소를 거쳐 가는 수레길은
  경사가 좀 각박하다.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은평차고지↔이북5도청)를 타고 현대빌
  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승가사까지 수레길이 닦여 있으나 길이 험하고 상태가 넉넉치 못하며, 일반 차량은 출입을 통
  제한다. (승가사와 국립공원 차량만 통행 가능)
* 승가사 셔틀차량을 이용하면 보다 편리하게 승가사까지 올라갈 수 있다. <승가사입구 정류장
  에서 동북쪽으로 난 비봉4길(승가사 방면)을 오르면 셔틀 타는 곳이 있음, 운행 정보는 승가
  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 02-379-2996)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에
는 서래당(西來堂), 동쪽에는 적묵당(寂默堂)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뜨락에 들어서니 서래당
앞에서 연등 주문을 받는 아줌마 보살이 밝은 표정을 내비치며 연등 하나 다시라고 그런다. 허
나 연등 시주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가난한 중생이라 돈이 없다고 답을 하니 표정이 180도 싹
바뀐다. 결국 여기도 돈이 갑 중의 갑(甲)이던가? 잠시나마 씁쓸한 기분이 나를 엄습한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지어서 1980
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전생(全生)을 그린 전생도와 심우도가 그
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6년에 중창되었다. 겉
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
을 공양(供養)으로 제공하는데, 산꾼과 답사객, 신도 등 누구나 먹고 갈 수 있다.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비구니의 선방(禪房)
이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랗
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랫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이며,
윗층은 범종각으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인 점이 눈길을 끈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4발 수레가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
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비구니가 잠든 종을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리가 매우 은은하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불과 후불탱화

대웅전 내부는 모조리 개금(改金)을 한 목각(木刻)탱화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봉
안된 석가불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된 표정
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에는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도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운 금동
후불탱을 배치하여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나한의 일원으로 천태산(天台山)에서
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가
새겨진 독성탱(獨聖幀)

▲  칠성탱(七星幀)과 신중탱(神衆幀)
이들은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1985년과
1986년에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좌측 벽에 그려진 전생도의 일부 -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다보니 물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다.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승가사 산신각, 약사전 주변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불을 비롯해 석
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부감과 식
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화는 1987년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영산전 불단
석가불과 미륵불(미래불), 제화갈라보살(과거불)이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무려 경주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

▲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이 새겨진 16나한탱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으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이 있는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산신각에 올라 동쪽(좌측) 밑을 잘 살펴보면 길쭉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비석 1기가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1780년에 쓰러진 승가사를 재건한 성월선사(城月禪師)의 탑과 탑비로 비문
에는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序(비명병서)'라 쓰여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는
데,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를 받은 것이 이채롭다. 그리고 '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 이
란 내용도 있어 1802년 8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여래좌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
계 오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을 만나게 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불전(佛殿)으로 1972
년에 착공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
라 공사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를 한데 몰아 넣은 지장탱화가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
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혔다는 것이다.


▲  명부전 지장탱화 - 명부전에서 지장탱화만 달랑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옛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채 놓여져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塔身)이 겨우 한 덩이씩만 남았다. 탑신이 지
붕돌보다 큰 것을 보면 아마도 제일 아랫층 탑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
은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며,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저들이 온몸으로 증명해준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구일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암
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밝혀진 바는 없으나 고려 중기 승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아닐까 여겨지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때
윗도리가 몽땅 사라져 비석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
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오질 않을까 싶은데, 그
작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에 자리한 자연산 석굴(石窟)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서린 오래된 굴로 승가굴(僧伽窟)이
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
굴 중수비를 남기기도 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
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니 아마도 쾌유가 됐던 모양이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대
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를 올리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사의 주요 보물인 석조승가대사좌상이 홀로 봉안되어 있는데, 정작 약사전의 주
인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없고, 승가대사상이 약사불의 자리와 직무를 대신하고 있다.

약사전의 주인인 승가대사(僧伽大師)는 인도의 승려로 당나라로 넘어가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
단했던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신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태가 그의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에 만들어진
확실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는 130cm이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중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
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으로 그의 표정을 보면 속세에서 상처받은 눈와 마음도 보기좋게 정화될 것만 같고
그 앞에 다가서면 '아이고 힘들지?'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 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蓮花臺, 근래에 만든 것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충북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에 있는 4사자3층석탑의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가
지고 있다.

대사상 뒤에 자리한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땅에 흔치 않은 오래된 승려상으로 약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
에서 일광욕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에 못지
않게 양호하여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조선 중기에 일어난 2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은 사라
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 보물
로 승진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보물 등급 외에는 아직 1,000까지
간 문화재 등급이 없는데 (국보가 300, 사적이 500, 서울 지방유형문화재가 300단위)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고려 초기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 보물 215호

▲  마애불로 올라가는 108계단의 위엄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약사전을 나와서 향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마음을 놀라게 만
든다. 그 계단은 절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꿀단지인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이 집채만한 바위에 둥지를 틀었다.

연화교(蓮花橋)란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까지 각
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다보면 멀리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가 떠오르듯 크
고 웅장하게 솟아오르고,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에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위엄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도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
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의 하
나지만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의 거리
를 두고 있고, 승가사의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지정
명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이었으나 지금은 마애여래좌상으로 무려
2글자나 줄였다. (정식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서울에서는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또는 비슷한) 연세가 높은 마애불(磨崖佛)이다.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승가사의 장대한 내력을
과시하는 산증인으로 승가대사상은 조성 관련 글씨라도 있지만 이 불상은 그것 마저 없어서 누
가 더 형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승가대사상이 1살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직각을 이루며 솟아난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피부
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그였지만 여전히 정정한데 반해 나는
10대 꼬마에서 30대의 한복판으로 적지 않게 늙어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조선 중기 전란 때 파괴된 것이 아닐까 싶지만 마애불에 적
당한 외상이나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거나 자연재해로 무너진 것
으로 보인다.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가 보호각의 흔적)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
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
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
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워넣어
앞으로 크게 노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 무
늬를 새겼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하
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우
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름
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화대(蓮花臺)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를 취했
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앙련(仰蓮)이 윗쪽에, 반대
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듯 싶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고려 초기의 대표적
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
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는 1980년
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불상 같다.

고려 초/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는 지방 세력의 일종
의 세력(勢力) 과시용으로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서울 지역 세력의 지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승가사가 고려 왕실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서린 절이라 제왕과 왕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
들을 투입하여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서울은 남경(南京)이라 불리는 고려의 주요 도시
의 하나였고, 고려의 제왕들이 종종 순행을 했던 곳이다. (남경의 중심지는 서울 종로구의 경복
궁, 청와대 일대로 여겨짐)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고려 초기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일부러 드러누웠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히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승가사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둥
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또한 바위 주변은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
으니 괜히 바위 꼭대기에 오르거나 불상을 만지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하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마애불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승가사 마무리

▲  12지신상이 새겨진 동쪽 옛길
(경내 바로 밑쪽)

▲  12지신상의 하나로 어디론가 터벅터벅
가고 있는 말

마애불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대웅전과 산신각 주변에서 조금 머물다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
음을 기약하며 등을 돌렸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호국보탑으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길 대신 동쪽 옛길로 갔다. 옛길은 조금 돌아가는
편이지만 예전에 승가사에 갈 때 꼭 거쳤던 길로 어차피 둘 다 호국보탑으로 이어진다.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제대로 묘사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원래 호국보탑 부근에 있었다. 그러다가 호국보탑이 생기면서
옛길 중턱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에 겨운 모습이
애를 여럿 둔 뚱보 엄마 같다.

▲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승가산림초소 주변

▲  승가산림초소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절을 둘러보고 나오니 배가 슬쩍 고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은 김밥과 과자, 물을 모두 꺼내서
싹 섭취를 하고 올라올 때와 다르게 수레길로 내려왔다. 수레길은 4발 수레를 위해 닦은 길로
경사가 가파르고 울퉁불퉁해 오르기가 쉽지 않은 길인데, 중간에 승가사 셔틀차량이 노인들을
여럿 태우고 뒤뚱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수레를 위한 길이라도 경사가 급하고 노면 상태가 고
르지 못해 운전도 꽤 쉽지가 않을 것이다.

수레길을 20분 정도 정신없이 내려가니 승가산림초소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잠시 소나무가 송림
(松林)을 이루는데, 그들이 아낌없이 불어주는 솔내음에 정신과 마음이 약간이나마 개운해진다.
산림초소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혜림정사란 조그만 절과 함께 빌라와 주택들이 시야를 가린다.
자연에서 아비규환의 속세로 완전히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빌라를 끼고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구기동계곡이 나오며, 계곡 끝에서 비봉길로 들어서면 구기터널3거리로 이어진다.

비록 찰라와 같은 짧은 코스였지만 엄연히 등산도 했고 시간도 18시가 넘었으니 근사하게 저녁
뒷풀이를 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서 먹을까 고심하다가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옛날민속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두부음식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구기터널에서 신영3거리로 가
는 길목에 있다.


▲  옛날민속집에서 먹은 보리밥의 위엄

무엇을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오랜만에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보리밥을 먹
은 지도 꽤 되었다. 그리고 잠깐이긴 하지만 산도 탔으니 동동주로 목을 시원하게 축여야 밥맛
이 더욱 날 것읻. 그래서 동동주도 1병 주문했다.

5분 정도 지나자 제일 먼저 동동주와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반찬이 예전보다 많
아졌네? 알고보니 오른쪽의 전과 김치, 하얀 묵 등 6가지는 원래 밑반찬이고, 왼쪽 5그릇은 보
리밥에 비벼먹을 나물로 콩나물과 당근, 생채, 상추 등 7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찬이 많아진 것
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저녁 식사의 주인공인 보리밥과 비지찌개가 등장한다. 보리밥은 커다란 양은 냄
비에 담겨져 있는데, 담긴 양은 냄비가 아까울 정도로 적다. 보리밥 외에 구수한 된장찌개와 콩
비지가 따라 나왔는데, 이들은 모두 보리밥용으로 보리밥에 딸려 나오는 나물과 찌개가 많으니
가격에 비해 본전 뽑기는 좋다. (단 고기는 없음)

보리밥에 나물 7가지와 콩비지, 된장찌개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리니 어엿한 비빔밥이 되었고
적어보이던 밥도 그들이 더해져 양이 남부럽지 않게 늘었다. 거기에 누런 동동주까지 겯드리니
정말 제왕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열심히 먹고 보니 밥그릇은 맨바닥을 드러냈고, 나물과 반찬
도 겨우 일부분만 남았을 뿐이다.
식사가 끝나자 누룽지와 수정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다. 누룽지는 맛이 구수했고, 수정과는 맛
이 달고 시원해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이렇게 기분 좋게 저녁을 마치고 신영3거리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9시 반, 여기서 길음역으
로 넘어가 후배들과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니 이리하여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나
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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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5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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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
용연사 석조계단
▲  용연사 석조계단


 

겨울 제국(帝國)의 기세가 슬슬 꺾이던 3월 첫무렵에 대구 지역의 오랜 고찰, 용연사를 찾
았다.

서울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대구역에 도착,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
고 서쪽 종점인 대곡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용연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배차간
격이 참 아름다운 수준이라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다행히 대기 10분 만에 그곳으로 들어가
는 달성5번 시내버스(대곡역↔용연사↔현풍,유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옛 지기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우며 그 버스를 타고 화원읍, 반송리를 지나 비
슬산 북쪽 골짜리에 자리한 용연사 주차장에 두 발을 내리니 곧바로 용연사 매표소가 흐뭇
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엥 여기도 입장료를 받았었나?'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매표소
아줌마가 직업 본능에 따라 밖으로 나와 돈 받을 준비를 갖춘다. 그때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줌마 신도가 있었는데, 그의 뒤를 바짝 뒤쫓으니 나를 같은 신도라 여기고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매표소에 적힌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1,500원..

매표소를 무사히 지나 7분 정도 오르면 비슬산 계곡물이 한데 모인 용연지(龍淵池)가 나타
나고 이어 일주문도 얼굴을 드러낸다.


♠  용연사 입문 (일주문, 천왕문)

▲  용연사 일주문인 자운문(紫雲門)

용연지를 지나면 수레들의 쉼터인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중간에는 고색이 깃든 일주문(一柱
門)이 뿌리를 내렸는데, 4발 수레들에게 둘러싸여 약간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이다. 다른 절은
거의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게 하지만 여기는 일주문 옆에 수레길을 내고 그로 인해 문이
옆으로 상당히 밀려난 형세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이 아닌 수레길로 경내를 오간다.

절의 일주문은 보통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이곳 일주문은 특별히 붉은 구름이란 뜻의 자운문이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 부분이 현저히 커서 공포와 지붕 등 문의 윗부분이 문 높이의
거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육중해 보인다. 지붕을 받치는 문 기둥은 그런데로 굵직함을 지
녔지만 커다란 윗도리 때문에 오랜 세월 어찌 저들을 받쳤을까? 걱정이 들 정도이다. 공포와 평
방(平枋)에는 단청이 채색되어 있으나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퇴색했다.

▲  적멸보궁, 석조계단 입구

▲  경내로 인도하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면
용연사 경내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용연사 문화유산 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가 있다. 내가 나타나니 해설사
아저씨가 모습을 비추며 용연사 안내문을 하나 건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며 길을 재촉하니 길은 이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로 가면
석조계단(적멸보궁), 오른쪽은 경내로 우선은 경내부터 살피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갔다.

경내 직전에는 계곡에 걸린 극락교(極樂橋)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절의 주문에 따라 속세의 온
갖 기운과 번뇌를 내려놓고 경내로 임하면 되는데,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天王門)
이 나타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온몸을 가리며 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서 천왕문은 이용하지 못하고 그 옆으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검문을 거치면 바로 2층 규모의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안양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
(四物)이 담겨져 있는데, 보광루(寶光樓)라 불린 것을 근래에 안양루로 이름을 갈았다.


▲  천왕문 밑에 자리한 둥그런 석조

▲  절에 왠 악어?

천왕문 밑에는 둥그런 석조(石槽)가 있는데 샘물 대신 먼지만 가득한 거의 죽은 샘터이다. 그런
데 그런 석조 옆에는 생뚱맞게도 악어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자비(慈悲)와 평화를 강조하는
절집에 왠 무시무시한 악어상이 있는 것일까? 악어와 관련된 불교 설화는 딱히 들어본 적도 없
고. 그렇다고 용연사 주변에 악어 서식지나 관련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
도나 소승불교가 전파된 동남아에 악어가 있으니 그곳에 혹 관련 설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
중에 해설사에게 문의를 했다.
그 답변에 따르면 이 악어상은 어느 신도의 집 정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년 전에 절에
기증을 했는데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이 자리에 두었다는 것이다. 사연이 생각 외로 정말 엉뚱
하다. 신도가 준 것이니 차마 안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내에 두기에도 조화롭지 않으니 혹
여 찾아올지 모르는 화마(火魔)와 나쁜 기운이나 막으라고 천왕문 밑에 둔 듯 싶다.

그럼 여기서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용연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안양루의 뒷모습

▲  극락전과 뜨락

※ 비슬산 북쪽에 포근히 안긴 고찰, 비슬산 용연사(琵瑟山 龍淵寺)
팔공산(八公山)과 더불어 대구를 크게 보듬은 비슬산(琵瑟山)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 많은
데, 그중에서 북쪽 계곡에 안긴 용연사가 단연 갑(甲)이다. <유가사는 을(乙) 정도>

용연사는 후삼국시대의 한복판인 912년<신라 신덕왕(神德王) 원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
했다고 전한다. 보양은 청도에 운문사(雲門寺)를 세운 인물로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
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바다 용이 용궁(龍宮)으로 초청해 그를 대접했다.
용은 자신의 아들인 이목(璃目)을 딸려 그를 호위케 했는데, 마침 나라에는 가뭄이 극성이라 보
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설화이지만 그 연유로 절 이름
에 용(龍)이 들어간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까지 내세우며 창건설화를 그럴싸하게 지어냈지만 정작 창건 이후 조선 초기까
지 이렇다 할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다만 극락전 앞에 고려 때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고려 때부터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띔해준다.

절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419년으로 그때 승려 천일(天日)이 망해가던 용
연사의 모습이 슬픈 마음이 솟구쳐 크게 중창을 했다고 한다. 허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603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과 탄옥(坦玉), 경천(敬天)에게 명해
다시 짓도록 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해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1650년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별똥이 떨어져 대웅전과 요사가 불에 탔으며, 이듬해 일언(一彦
)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세웠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이 대웅전
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세웠으며, 1661년
까지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
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지었다. 또한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18세
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어 무
려 200칸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이야 팔공산 동화사(桐華寺)가 대구 지역
사찰의 으뜸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동화사가 용연사의 말사(末寺)였다.

1673년에는 임진왜란 때 통도사(通度寺)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옮긴 부처의 사리를 다시 통도
사로 가져오면서 그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고 사리를 담을 사리탑(舍利塔)과 석조계단(石造戒
壇)을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1676년(숙종 2년)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
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 이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1708년 사리탑을 중수했고, 1715년 찬화(粲和)가 대웅전과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丹靑)을
새롭게 입혔다. 중수를 마치자 172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狡吏)인 임수간에게 청해 중수비를
세웠는데, 그 중수비에 의하면 당시에는 부속 암자로 명적암과 은적암, 보리암과 법장암이 있었
으며, 절 계곡에 용문교과 천태교 등 5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1726년 1월 불이 나
서 대웅전과 다수 건물이 소실되었고, 1728년에 중건을 했는데, 이때 법당 이름이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갈린 듯 싶다.


이렇게 대구 굴지의 사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연사는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
으로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면서 처지가 서로 뒤바뀌고 만다. 이후 1934년 석가사리
탑을 수리하면서 탑 주위에 석주(石柱)를 둘렀으며, 그 이후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산전과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등 약 16~17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계단과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과 복장
유물 등 보물 2점과 3층석탑과 극락전 등 지방문화재 2점을 지녔다. 그리고 부속 암자로는 은적
암(隱寂庵)과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을 거느리고 있다.

대구의 남쪽 지붕인 비슬산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틀었고,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기
운 또한 청정하며, 티끌 없이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며 청정한 기운을 돕는다. 시내와도
멀리감치 거리를 두고 있고, 산새의 지저귐과 바람의 소리가 잔잔하게 경내를 감싸며 산바람에
흥분한 풍경물고기가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풀어 산사의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용연사에서 비슬산을 거쳐 유가사나 비슬산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까지는 4시간 정
도 걸린다.

※ 용연사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달성2번,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탄다. 달성2번은 지선
  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반드시 용연사행(1일 8회)을 확인하고 타야 된다. 잘못탈 경우 엉뚱
  한 곳으로 강제투어를 당할 수 있다.
  달성5번은 용연사를 경유하여 현풍, 유가사(瑜伽寺)까지 다니며 1일 10회 다닌다. 또한 주말
  과 휴일에는 600번 버스 일부가 '대곡역~용연사~비슬산휴양림~유가사' 구간을 1일 10회 운행
  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일주문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① 구마고속도로 → 화원옥포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반송리 → 용연사
② 대구시내 → 화원 → 간경교에서 좌회전 (또는 화원에서 명곡지구를 거쳐 명곡로 경유) →
   반송리 → 용연사

★ 용연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5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 청소년 1,200원 (단체 800원) / 어린이
  800원 (단체 400원)
* 용연사 점심공양은 맛이 제법 좋다. 공양시간은 12~13시이며, 음력 초하루나 석가탄신일, 기
  타 절 행사가 있을 때는 연장될 수 있다.
* 용연사 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해설사의 용연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10시부터 18시까지(겨울 17시) 근무하며, 설과 추석 연휴에는 쉰다. (근무 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용연사길 260 ☎ 053-616-8846)


♠  용연사 극락전 주변 둘러보기

▲  요사채와 삼성각

경내 중앙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이 뜨락을 굽어보며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
고, 뜨락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뜨락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종무소, 요사채, 안양루가 포근히
감싸는 형태로 법당 하나에 탑이 하나인 이른바 1금당 1탑 형식의 가람배치를 취했다.


▲  용연사 극락전(極樂殿)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41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53년에 지어졌다. 1726년 화재로 무너진 것
을 1728년에 중건했는데, 이때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간판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좌우로 반토막 크기의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있어 중심 건물로
서의 기품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건물의 가운데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았으며,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얹히고 전면에 운각과 용을 장식해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 - 보물 1813호

극락전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이들은 1655년에 당시 유명한 조각승이던
도우(道祐)가 만든 것으로 근래에 아미타불 뱃속에서 후령통과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복장전
적(腹臟典籍) 등 발원문 8점과 후령통 3점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불상 조성 시기와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이 속시원히 밝혀져 17세기 불상 연
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1762년에 작성된 중수개금기까지 딸려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올해(2014년) 1월 20일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이 한 덩어리로 국가지정 보물 1813호로 단
번에 승진되었다.
 
보물의 지위를 누린 아미타불과 좌우 보살의 표정에는 자비로움이 가득하여 속세살이에 지친 중
생을 위로하며 그들 뒤에는 1777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용연사 3층석탑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28호

극락전 뜨락에 서 있는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고려시대 탑
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옥개석 받침이 4단인 것과 옥개 낙수면이 짧고 추녀가 얇
은데 반해 받침이 높은 형식으로 이들을 통해 신라 탑에서 변질된 고려 탑으로 여겨진다.
탑 높이는 3.2m로 근래에 보수를 벌여 깨지거나 부실한 부분을 보충했으며, 장대한 세월의 때가
곳곳에 역력하다.


▲  빛바랜 목조 구시

극락전 곁에는 나무로 만든 길쭉한 목조 구시가 누워있다. 이 구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나무
통으로 쌀을 담거나 법회나 행사 때 공양용으로 쓰였는데, 왕년에는 거의 100명 분의 밥을 담았
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밥 대신 먼지만 가득하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구시의 체면도 살려줄 겸, 그를 깨끗히 손질하여
옛날 공양 체험 이벤트를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  삼성각 밑에 누운 두꺼비상의 위엄
조각 수법이 아까 전 악어상과 비슷하다. 아마도 악어상을 기증한 신도가
악어와 같이 넘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  선열당(禪悅堂)이라 불리는 요사(寮舍) 정면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넓은 방을 갖추고 있다.
점심공양은 요사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  용연사 영산전(靈山殿)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석가3존불과 16나한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를 협시한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그림들
오른쪽부터 산신할배의 산신탱,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독성할배의
느긋함이 돋보이는 독성탱


♠  용연사 명부전 주변, 그리고 점심공양

▲  요사에서 명부전으로 넘어가는 불이문(不二門)

용연사는 중심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석조계단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구역
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명부전 구역은 경내
의 중심인 극락전 구역 남쪽에 있는데 요사 옆구리와 불이문을 지나 청운교(靑雲橋)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온다. 이 구역에는 명부전과 사명당, 독산각이 자리해 있다.


▲  불이문에서 바라본 명부전 구역
명부전을 비롯한 건물 3동이 조촐하게 구역을 이룬다.

▲  용연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다. 처마 밑에는 어느 갑술년(甲戌年)에 쓰인 공덕기(功德記)와 관음계(觀音契) 현판이 걸
려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
온화한 미소를 드리우며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해 나란히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문을 꽁꽁 걸어잠군 사명당(四溟堂)

명부전 곁에 높이 축대를 쌓고 황토색 담장을 걸치며 들어앉은 사명당은 절의 가장 어른인 주지
승이 머무는 주지실이다. 원래는 관음전(觀音殿)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절 중창을 지시
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고자 사명당이라 했다. 사명당 곁에는 독산각(獨山閣)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으며, 이들 건물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명부전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요사채

명부전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극락전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13시, 1시간 가까이 경내를 방황
하니 시장기가 가득 피어올라 나를 괴롭힌다. 경내에는 적막한 산사의 이미지를 지키듯,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공양간이 있는 요사 뒤쪽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사람들(아줌마와 할머니가
대부분)로 북새통을 이루어 썰렁한 바깥과 완전 대조를 보인다. 그 시간 절에 발을 들인 사람들
2/3 이상이 요사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점심시간은 13시까지인데, 사람들이 많아 아직도 공양(供養)을 제공하고 있었다. 요사로 들어가
일반인도 공양이 가능한가 물으니 당연히 그렇다며 한숟가락 들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기쁜
표정을 띄며 신발을 벗고 요사로 들어가 공양 행렬에 동참했다. 약간 붉은 양파를 비롯한 갖은
채소가 버무려진 그릇에 주걱으로 밥을 담아주는데, 많이 달라고 청하니 2주걱을 더 준다.
밥과 함께 숭늉 1그릇과 떡을 하나씩 거머쥐고 마땅한 자리를 찾았으나 사람들로 미어터져 두
다리를 편히 할 자리가 마땅치가 않았다. 간신히 좁게나마 자리가 하나 생겨 그곳에 낑겨 앉아
열심히 점심 공양에 임했다.


▲  용연사 점심공양의 위엄

공양밥은 다양한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이다. 붉은 양파와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 등의 나물
이 흰쌀밥과 고추장과 조화를 이루며 어엿한 비빔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용연사 공양밥은 공양간 아줌마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 제법 맛이 좋았다. 지금까지 섭취한
공양밥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공양밥 최악의 종
결자는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은 경산 갓바위(선본사) 공양이었다. 절 나들이에서 공양을 하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지만 안타깝게도 중생들에게 널리 공양을 펼치는 절이 그리 많지 않다.

밥그릇을 아주 깨끗히 비우고, 숭늉과 떡을 먹고 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나를 감싸고
돈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5분 정도 머물렀으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와 자리를 내주고 방을 나섰다. 동화사나 갓바위처럼 그렇게까지 유명한 절도 아닌데 사람(특히
신도들)이 많은 걸 보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어 문의를 하니 음력 초하루라고 그런다.
자리를 뜨면서 공양할 때 발견하지 못한 된장국을 1그릇 섭취하고 숭늉도 2그릇이나 더 마신 다
음 내가 먹은 그릇을 목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용연사 석조계단, 적멸보궁

▲  적멸보궁 입구

▲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계단

기분 좋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용연사의 나머지 부분인 석조계단(적멸보궁)으로 이동했다. 적멸
보궁 입구에는 일주문을 닮은 문이 서 있는데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琵瑟山 龍淵寺 寂滅寶宮
)'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 잘 다듬어진 계단을 한발짝씩 오르면 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적멸보궁과 비슬
산으로 갈린다. 초소를 지나니 아까 문화유산 해설사(이하 해설사) 아저씨가 초소에서 나와 구
경 잘했냐고 묻는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 잘 둘러
봤다고 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주마간산처럼 보고 가는데 반해 1시간 이상 꼼꼼히 본
것 같다며 칭찬의 말을 건네면서 적멸보궁을 안내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그를 따라 적멸보
궁으로 들어갔다.

▲  용연사 주변을 정비한 기념으로 세운 정비불사공덕비(整備佛事功德碑)

▲  시원스런 지붕의 적멸보궁 정문 -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용연사 3대 구역의 하나인 금강계단 구역은 높이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적멸보궁과 향로전을 두
고 가장 높은 뒷쪽에 자리를 다져 석조계단과 사리탑을 세웠다.

석조계단을 가리고 선 적멸보궁(이하 보궁)은 극락전에 버금가는 지체 높은 건물로 보통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앞에 둔다. 사리탑에 불사리(佛舍利)가 있으므로 적멸보궁 불단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빈 자리로 둔다. 살짝 휘어진 2개의 활주가 지붕 추녀를 받들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덩어리가 매우 섬세하다. 보궁 어칸(가운데 칸) 앞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그 계단은 법회(法會) 때 절의 고참 승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단 외에는 보
궁으로 접근하는 계단이 쉽게 보이질 않아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코 그 계단을 오르
락거린다. 허나 건물 양쪽에 보궁으로 가는 계단이 있으니 가운데 계단을 오르는 실례는 범하지
않도록 한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가면 어디 법을
지키라는 명언처럼 예의는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  적멸보궁 내부
불단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뒤에 유리창을 내어 석조계단과 사리탑이 보이게끔 했다.

▲  적멸보궁 곁을 지키는 향로전(香爐殿)
적멸보궁을 관리하는 건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적멸보궁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건물들

적멸보궁 좌우에는 고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은 따로 이름이
없다고 하며, 사리탑과 석조계단을 관리하던 승려의 숙소나 예불을 하던 공간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굳게 문을 봉한 채, 적멸보궁의 좌우를 호위한다.


▲  용연사 석조계단(石造戒壇) - 보물 539호

적멸보궁 뒤에는 용연사의 상징인 석조계단이 자리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며,
네모난 기단에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을 심어 부처의 불사리를 봉안했다. 계단(戒壇)은 흔히 말
하는 오르락 내리락 계단이 아닌 수계의식(受戒儀式)을 거행하던 곳으로 통도사(通度寺) 금강계
단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 사리탑을 파괴하자 사명대사가 사리를 수습하여 금강산으로 가져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어찌하면 좋을 지를 문의했다. 서산은 본래 있던 곳에 마땅히
되돌려 줘야 한다고 답을 하니,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두고 만약을 위해 다른 하나는 제자 선
화(禪和)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어딘지??)에 봉안토록 했다. 허나 그때는 아직 경상도 지방이
안정되지 못했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왜열도(倭列島)에 사신으로 가게 되면서 사리를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임시로 두었다.
그 이후 사명이 입적하자 제자 청진(淸振)이 각림사에 봉안한 사리함을 용연사로 가져와 모시면
서 신도들과 상의하여 사리탑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서산과 사명의 뜻을 모두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를 통도사로 보내고 1과만 용연사 북쪽에 봉안했으며, 사리탑은 1673년에 완성되었다.

이 탑은 2단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큼직한 네모난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얇은 원형 괴임돌을
2개 포개 석종형 사리탑을 올렸다. 사리탑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을 지
나면서 좁아지는 것이 영락없이 범종을 닮았는데, 탑 윗부분에는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
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새겼다. 2단의 기단 중 윗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4면을 8칸으로 나눈 뒤, 칸마
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새겼다. 아래 기단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했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해 지금은 경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며, 기단 주변으로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8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
워 연결했다. 난간에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했으나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옆에 조금 비뚤어진 석등(石燈)은 계단에 난간을 달았을
때 같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계단 주변에는 황토 담장을 둘렀고, 계단의 보호를 위해 계단
앞쪽에 보호철책을 두르면서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한다고 함)

이곳 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이 땅의 대표적인 계단으로
꼽히며, 계단에 얽힌 이야기처럼 정말 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수 차례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도굴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고 한다.


▲  석조계단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석조계단비 - 비석 이름은
'사바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다.

▲  적멸보궁 부근에 터를 닦은 승탑 형제들

향로전 뒤쪽 담장 너머에 조선 후기 승탑 7기가 1열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들은 죄다
석종 스타일로 별도로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파 각민(松坡覺敏, 1596~1675), 다른 하
나는 동운 혜원(東雲慧遠, 1637~1702)의 비석이다. 승탑의 주인이나 승탑 이름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 승탑 5기가 숨겨져
있다.

적멸보궁과 석조계단을 둘러보면서 해설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것은 정말 은하
계에 널린 별만큼이나 많은데 정작 질문 거리가 생각이 안난다. 머릿 속에서 간신히 질문 거리
를 긁어내어 물어보면서 의문 거리를 일부나마 해소했으나 머리가 장식용이라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해설사는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초청 강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통
도사에서 해설사를 하다가 용연사로 넘어왔는데 각 절마다 익혀야 될 내용이 너무 많아서 힘들
다고 한다. 간신히 용연사의 모든 것을 꿰었는데. 다른 절로 근무지가 바뀌면 그 절에 대해 처
음부터 공부를 해야 된다. 또한 관람객들이 대충 둘러보고 가는 게 다반사라 너무 사물을 볼 줄
모른다며 따끔한 충고도 건넨다. 상황이 이러니 질문을 건네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
렇게 자신을 귀찮게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구시티투어버스가 들어왔다. 가이드 2명이 양이(洋夷) 여자 관광
객 2명을 데리고 와서 석조계단을 구경시켜주고 해설사와 인사를 하며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더 머물러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벌써 4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2시간 남짓 있다 갈려고 했는데, 시간
도 참 빠르다. 게다가 부산(釜山)에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 되는 터라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속세로 나가는 버스가 20분 뒤에 있길래 매표소 밑 주차장까지 가려고 했으나 마침 해설사와 안
면이 있는 신도 아줌마 3명이 수레를 끌고 속세로 나가려고 하자 해설사가 그들에게 나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넣으면서 그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렇게 짧지만 용연사와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갔다.

나를 태워준 아줌마 신도는 모두 대구 사람<1명은 인천 사람으로 대구로 시집 왔음>이다. 수레
를 끌고 온 아줌마는 시지동에서 왔는데, 그들은 절에서 가져온 고사떡과 사과를 나에게도 아낌
없이 나눠주었다.
화원으로 나와서 아줌마 2명과 작별을 고하고 인천 출신 아줌마 신도와 대구시내버스 655번을
타고 대곡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환승하여 칠성역에서 나머지 작별을 고했다.

이날은 원래 팔공산 부인사(夫人寺)를 가려고 했으나 교통이 좋지 못해 용연사로 바꿨다. 허나
용연사에서 맛있는 점심공양도 먹고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했으며(해
소하면 뭐하나? 다 까먹는데) 아줌마 신도의 도움으로 쉽게 속세로 나왔고, 그들에게 떡과 사과
를 나눠 받는 등, 푸짐한 인심을 느꼈다. 부인사로 갔으면 아마도 이런 것을 누리진 못했을 것
이다. 용연사로 가게 된 것도 다 이런 인연들과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라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었던 것 같다.
용연사에게 나는 잠깐 스치고 사라지는 존재이고, 내 입장에서도 용연사는 1번 아니면 2번 정도
스치는 그런 장소이지만, 지금까지의 사찰 나들이 가운데 제법 인상과 정이 깊었으며, 여러 좋
은 경험과 넉넉한 인심을 체험했던 것 같다. 용연사에서 겪은 그 추억과 인연을 고이 간직하며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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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2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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