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 계룡산 갑사(甲寺) '
갑사 대적전과 승탑
▲  갑사 대적전과 승탑


겨울의 제국이 서서히 저물어 가던 2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계룡산을 찾았다. 중악(中嶽)
이라 불리며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부터 신성시되오던 계룡산의 맑은 정기를 듬뿍 받고 싶
은 마음에서였다. 저번 주만해도 날씨가 겁나게 추웠는데, 이번 주는 좀 포근하여 두꺼운 잠
바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뫼에 오르면 좀 춥겠지? 그래서 그보다 1단계 낮은 잠바
와 두툼한 장갑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동학사(東鶴寺)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동학사 경내를 둘러보고 오뉘탑이라 불리는 청량사지 5
/7층석탑에서 잠시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배를 채운 다음 삼불봉(三佛峰)으로 올라가 천
하를 굽어본다. 여기서 금잔디고개로 내려와 신흥암(新興庵)에서 잠시 발을 멈추며 천진보탑
(天眞寶塔)을 친견하고 갑사 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문폭포(龍門瀑布)에서 다시 발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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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폭포에서 갑사 방면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대성암이란 작은 암자가 나온다. 여기서 다
리를 건너면 대나무에 둘러싸인 길이 나오고 운치가 서린 그 대나무길을 지나면 슬슬 갑사의
건물이 해가 떠오르듯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시 갑사에 대한 급한 마음을 접고 왼쪽 길
로 들어가 보자. 보통은 그 길을 외면하고 지나치지만 그건 갑사에 대한 큰 실수이다. 그 길
로 들어서면 갑사계곡의 으뜸인 명월담(明月潭)이 있고 유리 지붕이 얹혀진 공간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고려시대 불상인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자리해 있다.


♠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

갑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명월담 왼쪽에 큰 바위가 있다. 바위 위쪽에는 대나
무가 삼삼하게 자라고 있고, 바위 밑에는 얕게 판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 안에 석조약사불이
둥지를 트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갑사 동쪽 자락에 자리한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왜정(倭政) 시절에 악
덕 친일파로 악명 높은 윤덕영(尹德榮)이 옮긴 것이라고 한다. 키가 남자 성인만한 조그만 불상
으로 머리에는 큼직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다. 얼굴은 조금 길며, 중생들의 소망을 하
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귀가 어깨까지 닿았다.

몸에 걸친 옷은 가슴을 약간 드러내고 있으며,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밑에는 반원형
의 옷주름이 표현되었으며, 왼손에 조그만 약병을 쥐고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불
상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 석굴에 들어앉아 비와 바
람, 눈 등 자연의 괴롭힘에서 자유로우니 덕분에 건강은 양호하다. 허나 친일파의 의해 강제로
옮겨진 점은 조금은 찜찜한데,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예전에는 불상과 기도를 올리는 조그만 노천 공간만 있었으나 그의 건강 및 중생들의 예불 편의
를 위해 유리 지붕을 얹혀 보호각을 만들었다. 또한 예불 공간을 확장했으며, 조그만 석등(石燈
)을 석불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 기준)에 주렁주렁 설치했는데, 좀 어색해 보인다.


▲  석조약사여래입상의 조촐한 보금자리

▲  가까이서 본 석조약사여래입상

▲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는 명월담

석굴에 들어앉은 석불을 가까이서 친견하니 얼굴에 비해 몸이 너무나 커 보인다. 표정도 걱정에
시름하는 중생들처럼 그렇게 밝아 보이진 않는다. 그의 발 밑에는 그의 인기를 보여주듯 꽃 2송
이가 살짝 놓여져 있다.

석불 동쪽에는 갑사계곡의 백미(白眉)인 명월담이 있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잠시 한숨을
돌리는 공간으로 옛 사람들이 새긴 '명월담(明月潭)'을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이 주변에는 윤덕영의 별장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를 팔아먹고 왜정의 지원의 배때기를 가득 불
리며 명월담의 정취를 누렸다고 한다.
그럼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갑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백제 때 창건된 계룡산 사찰의 으뜸, 갑사(甲寺)
계룡산 서쪽에 안긴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阿
道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는 고구려 불교를 전하고자 신라로 건너갔는데, 그는 일선군(
一善郡, 경북 구미)의 부호(富戶)인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며 신라에 고구려식 불교 포교의 임
무를 수행하고 귀국하는 길에 계룡산을 지나갔다.
그런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오르는 광경에 넋을 잃고 빛이 발하는 곳을 찾아가니
그곳이 바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보탑에 예를 올리고 갑사를 창건했
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진보탑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신흥암과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이다. 허
나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은 전혀 없으며, 천진보탑 전설도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백제의
국도(國都)인 공주와 부여하고도 가깝고 계룡산의 오랜 명성을 생각해 보면 백제 때 창건된 것
은 확실해 보인다.

창건 이후 556년<위덕왕(威德王) 2년> 혜명(慧命)이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했다고
하며,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한다. 679년(신라 문무왕 18년)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불전 1,000칸을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종(華嚴宗) 10대 사찰의 하
나로 성장했다고 한다.
887년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킨 영규대사(靈圭大師)
가 잠시 머물렀다. 그는 조헌(趙憲)과 의기투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금산(錦山) 연곤평에서 조헌과 의병 700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1597년 영규대사에 대한 복수로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고
1654년 크게 중창을 벌였다. 1875년에는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수했으며, 1899년 적묵당을 지었
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로 들어갔으며, 6.25전쟁 때는 다
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갑사란 이름은 으뜸 또는 첫째 가는 절이란 뜻으로 갑(甲)에는 1등의 뜻이 있다. 이외에 한자는
다르지만 갑사(岬寺), 갑사사(岬士寺), 계룡갑사(鷄龍甲寺) 등으로 불리웠으며, 18세기 후반 산
의 이름을 딴 계룡갑사란 이름도 적지 않게 쓰였다.

고색이 만연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적묵당, 전해당, 삼성각, 보장각, 팔상전, 표충원,
범종루, 강당, 대적전 등 약 20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어 규모도 상당하며, 대성암과 내원암, 신
흥암 등을 부속암자로 거느리고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보 298호인 삼신불괘불탱화를 비
롯하여 철당간과 승탑, 동종, 월인석보판목 등 보물 4점과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사적비, 강당,
대웅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다. 장대한 역사에 걸맞게 풍부한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절은 크게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과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대
적전 구역 등, 3개로 나눌 수 있다. 원래는 대적전 구역이 절의 중심이었으나 1604년 대웅전 구
역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중심지가 그곳으로 이전되고 대적전은 변두리가 되었다. 그 이후 북쪽
으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경내가 무지 넓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넓은 대지에 건물이 대
도시처럼 촘촘히 박힌 것도 아니다. 대웅전 구역을 빼면 다 널널하게 자리해 있다.
계룡산의 주요 사찰이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만 깊은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깊은 산골에 터를 잡고 있어 산사의 고요함과 고즈넉함을 누리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절을 둘러
싼 숲도 무성하고 유리처럼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면서 청정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또한
역사의 숨결이 서린 볼거리도 매우 푸짐하니 눈과 마음도 배불리 호강을 누리며 정화가 된다.

갑사는 계룡산으로 오르는 3대 기점의 하나로 등산객과 답사객, 신도들의 발길이 빈번하며, 여
기서 금잔디고개를 거쳐 동학사로 내려가거나 연천봉을 거쳐 신원사로 내려가도 된다.

※ 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① 공주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공주행 고속버스가 25~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수원, 성남, 천안, 청주, 대전(서부, 동부, 유성), 보령에서 공주행 직행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에 있는 시내버스터미널에서 갑사행 공주시내버스 320, 322번이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공주시외/고속터미널에서 갈 경우는 시내(산성동 방향)로 들어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금강(공주대교)을 건너자마자 옥룡동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옥룡동주민센터 정류장
  에서 320, 32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면 빠르다. (공주터미널에서 시내버스터미널까지 택시로 5
  분 거리)
② 대전 유성/논산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유성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직행버스가 10~25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성남, 수원, 천안, 청주, 전주, 익산, 광주에서 유성행 직행버스 이용
* 유성시외버스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유성시외터미널에서 서쪽(공주 방면)으로 120m 지점>에
  서 갑사로 가는 공주시내버스 340, 341, 342번 시내버스 이용 (1일 7회 운행, 대전지하철 유
  성온천역(6번 출구)과 현충원역(3번 출구) 경유)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을 나와서 공주/논산 방면 23번 국도 → 신공주대교 → 계룡
  → 계룡저수지 → 갑사 주차장
* 호남고속도로(회덕~논산) → 유성나들목을 나와서 공주 방면 32번 국도 → 공암 → 청벽대교
  건너기 전에서 갑사 방면 → 내흥리 → 갑사주차장

★ 갑사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단체 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600
  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매년 가을(10월)에 영규대사를 추모하는 추모재와 산사음악회를 연다.
* 갑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사찰예절과 새벽예불, 사물체험, 숲길
  명상 등을 하며, 참가비는 성인 5만원, 어린이 3만5천원이다. 신청은 갑사 홈페이지의 템플스
  테이 메뉴에서 하면 되며, 자세한 것은 전화로 문의하거나 갑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 041-857-8981~2)
* 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갑사 배치도를 클릭한다.


▲  갑사 경내 배치도 (갑사 홈페이지 참조)


♠  갑사 둘러보기 (1) 종각, 강당 주변

▲  갑사 종각(鐘閣)

석조약사불을 친견하고 경내로 들어서면 강당 앞에 단촐한 모습의 종각이 있다. 종각에는 조선
중기에 조성된 동종이 소중히 안겨져 있다.


▲  갑사 동종(銅鍾) - 보물 478호

이 동종은 당시 조선 국왕이던 선조(宣祖)의 만
수무강을 기원하고자 1584년에 만든 것으로 높
이 1.3m, 입지름 91cm의 조그만 종이다. 명세기
왕을 위해 만든 것이니 조선 정부나 공주 관아
의 지원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종 꼭대기에는 음관(音觀)이 없고 대신 2마리의
용이 종을 들고 있으니 이는 조선시대 종의 특
징이다. (그 이전에는 용통=음관이 있었음)
종의 견대(상대)에는 물결모양의 꽃무늬를 둘렀
고, 밑에는 연꽃무늬와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
다. 범자 역시 조선 동종의 특징.. 상대 밑에는
4곳의 네모난 유곽이 있으며 그 안에 볼록 나온
9개의 유두가 있다.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1개씩 뽑는다고 한다.

종신(鐘身) 아랫쪽에는 동그란 모양의 당좌가
있는데 여기는 종을 치는 부분이며, 4개의 당좌
사이로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이 있다.

어둠의 시절 당시 왜정(倭政)이 헌납(獻納)을 구실로 가져가면서 자칫 그들의 전쟁무기로 사라
질 뻔했으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 아름다운 종은
무기의 일부로 변했을지도 모르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종각 옆에 있는 약수터

종각 맞은편에는 산사(山寺)에는 으레 있는 약수터가 있다. 고개를 들며 웅크린 거북이가 쉬지
않고 옥계수를 뽑아내 물이 마를 날이 없다. 계룡산이 중생에게 베푼 물로 바가지에 가득 담아
1모금을 들이키면 세상 시름과 몸 속의 떼가 싹 내려간 듯 오장육부와 마음이 시원하다고 쾌재
를 부른다.

▲  강당 옆에 경내로 인도하는 돌문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루(梵鍾樓)
2003년에 새로 만들었다.


▲  갑사 강당(講堂)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95호

온몸을 다해 경내를 가리고 있는 강당 자리에는 원래 해탈문(解脫門)이 있었으며, 강당은 해탈
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었다. 그러다가 해탈문을 없애고 강당을 해탈문 자리로 밀어 대웅전 뜨락
을 넓혔다. 해탈문의 빈 공간에는 돌을 채워 강당 전면을 석축 바깥에 돌출시켰고, 나무 기둥을
세우면서 지금의 누각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외에는 단청이 퇴락하고 문짝이 바뀐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승려들이 공부를 하며 법문(法文)을 강론하던 교
육 공간이다. 조선 초기에 지어졌으며, 1597년에 불탄 것을 조선 후기에 다시 세웠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 나온 배흘림기둥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히 공포를 박은 다포(多包) 양식
이다. 강당 정면에는 갑사의 다른 이름인 '鷄龍甲寺(계룡갑사)'라 쓰인 현판이 당당한 풍채로
걸려 있는데, 이는 충청도절도사(節度使) 홍재의가 썼다고 한다. 글씨는 특이하게 파란색이다.


▲  휘황찬란한 강당 내부

강당 내부에는 동쪽에 불단을 두고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두었다. 그 뒤에
는 후불탱화 대신 거의 1,000개의 달하는 조그만 금동불을 빼곡히 배치하여 지장보살의 뒤를 든
든하게 받쳐준다. 금동불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금빛 찬란함에 두 눈이 가히 마비될 지경이다.
 


♠  갑사 둘러보기 (2) 사적비, 팔상전 주변

▲  갑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보장각(聖寶寶藏閣)

강당 앞에서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직진하면 성보보장각을 중심으로 한 갑사의 북쪽 구역이 펼
쳐진다. 사람들이 대부분 대웅전 구역만 보고 갈 뿐, 북쪽 구역은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이곳
에는 팔상전과 표충원, 사적비, 성보보장각 등의 볼거리가 있으므로 반드시 눈에 넣고 가길 바
란다.

맞배지붕의 단아한 모습을 지닌 성보보장각은 갑사가 지닌 동산문화유산들이 들어있다. 허나 시
간이 늦었는지 문을 굳게 닫아 걸어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  갑사의 역사가 담긴 사적비(史蹟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2호

성보보장각 정면에는 해우소가 있고, 여기서 일주문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사적비가 자리
해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사적비는 갑사의 내력이 담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 비좌(碑座)를
만들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운 다음 솥뚜껑처럼 생긴 지붕돌을 얹혔다. 비석 4면에는 모두 글씨를
새겼는데, 일부는 손상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비석에 금이 들어있다는
잘못된 이야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캐고자 비석을 괴롭히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한다.

1659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이천(李志賤, 1589~1683)이 짓고, 공
주목사 이기징(李箕徵)이 글씨를 썼다.


▲  갑사 표충원(表忠院)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성보보장각 뒤쪽에 담장에 둘러싸인 건물이 있는데, 그 앞쪽은 표충원, 뒤에는 팔상전이 있다.
표충원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38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뜨락에는 영규대사비가 세워져 있다.

▲  영규대사비

▲  저 문을 들어서면 표충원이다.


▲  갑사 팔상전(八相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4호

표충원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팔상전은 조선 후기 건물이다. 부처의 일대기를 8부
작으로 나눠 그린 팔상탱화(八相幀畵)가 있어서 흔히 팔상전이라 부른다. 팔상탱화 외에 신중탱
과 석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으로 나름대로의 격조를 갖
추었다. 팔상전 정면에는 툇마루를 지닌 요사(寮舍)가 있으며, 팔상전을 나와 산을 조금 오르면
내원암(內院庵)이 나온다.


▲  담장 너머로 본 보장각(寶藏閣)

팔상전을 나오면 정면에 담장에 둘러진 대웅전 구역이 보인다. 그중에서 담장도 안심이 안되는
지 녹색 펜스까지 치고 사나운 견공(犬公)까지 옆에 둔 맞배지붕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보물 582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판목(版木)을 간직한 보장각이다.

월인석보는 1459년(세조 4년) 세조의 명으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
을 합쳐 만든 불교대장경이다. 여기서 석보는 부처의 일대기를 뜻한다. 본래는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21권 46매만이 남아있다. 갑사의 월인석보는 1569년 충청
도 한산(서천군 한산면)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논산 쌍계사(雙磎寺
)에서 보관하던 것을 왜정 때 갑사로 넘어왔다.
계수나무에 돋음새김으로 새겼고, 판목의 오른쪽 밑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들의 이름이 있
으며,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 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는 보호를 위해 속세에는 공개하지 않으며, 사자암에서 가져온 석조보살입상도 저 안에 있다.
(성보보장각에 있을 수도 있음)


♠  갑사 둘러보기 (3) 대웅전 주변

▲  갑사 대웅전(大雄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5호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을 살피고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으로 넘어갔다. 이 구역은 1604년
절을 중건하면서 새롭게 개척한 곳으로 대웅전은 원래 대적전 주변에 있었다. 절의 법당(法堂)
인 대웅전이 개척지에 생겼으니 그 주변이 흥(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원래 자리였던 대적
전 구역은 변두리로 밀려나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로 인적이 드물 지경이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답게 규모가 매우 상당하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도 높이가 거의 2.5m에
이르러 그의 거창함을 더욱 끌어올린다. 대웅전 현판도 내 키에 이를 정도로 큼지막하여 주눅이
앞다투어 밀려온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불전으로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양식이다. 건물 내
부는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고,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비롯하여 3존불과 4개의 보살상을 봉안
하여 눈길을 끈다.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뜨락에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
탑을 닮은 5층석탑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철거했다.


▲  대웅전 현판의 위엄
현판의 글씨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현판 글씨는
1669년에 쓰여진 것으로 석봉체 계통의 명필(名筆)을 자랑한다.

▲  대웅전 불단

대웅전 볼단에는 건물만큼이나 육중한 3존불이 자리를 지킨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阿
彌陀佛)과 약사불(藥師佛)이 좌우에 앉아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
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
현보살(普賢菩薩) 등이 서 있는데, 한결같이 자비로운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이한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진해당(振海堂)
승려들의 생활공간 및 선방으로 쓰인다.

▲  대웅전 뜨락 좌측의 적묵당(寂默堂)
요사 겸 종무소로 쓰이며, 1899년에 세워졌다.


▲  갑사 삼성각(三聖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3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조선 후기
에 지어졌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사이에 담장을 놓아 속인의 접근을 통제했으나 이제는
삼성각까지 접근이 가능해졌다. 대신 뒤쪽의 대적선원과 승탑은 여전히 통제 구역이다.

▲  산신탱화와 산신상

▲  칠성탱화


▲  계곡을 바라보며 자리한 갑사 전통찻집
예전 2004년 3월에 왔을 때 일행들과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던 기억이 솔솔 떠오른다.


♠  갑사 둘러보기 (4) 대적전, 철당간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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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탑(功牛塔)

▲  공우탑에 새겨진 '功牛塔(공우탑) 명문

전통찻집에서 계곡을 건너면 조그만 3층석탑이 나온다. 겉으로 보면 3층 탑신(塔身)만 있는 것
으로 보이지만 기단부(基壇部)는 땅 속에 묻혀 윗부분만 햇살을 받고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
가 아닌 부속 암자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공우탑이란 말 그대로 절 중창 때 크
게 도움을 준 우공(牛公)의 부도탑이라고 하며, 짧막한 전설 한토막이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백제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44) 시절, 이곳에 절을 세울 때에 일이다. 목재
를 운반하던 소가 냇물을 건너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아마도 과로사인 듯 싶다. 소
가 죽자 지금의 자리에 그를 묻고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전설의 스토리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
는 일이나 그 시기가 100% 의문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략 384년으로 전설에 나오는
시기는 그 이전이다. 불교도 들어오지 않은 시절에 어찌 절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설이
과연 사실이라면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 되겠지만 탑의 양식을 보면 전혀 신뢰
성이 없다. 아마도 고려나 조선 때 절을 중건하면서 목재를 운반하던 소가 숨지자 그를 화장하
여 지금의 탑을 세웠을 것이다.
1층 탑신에는 '臥塔起立人道偶合 三層己巳厥功居甲<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우
연히 합치되었네, 3번을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다>
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
며 2층에는 '牛塔', 3층에는 '功'이 새겨져 있어 이 탑이 절에 공을 세운 소를 위해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절 건축에 헌신하다 죽은 동물을 위해 탑을 만들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던 승려의 지극한 마음과
심하게 부려먹었던 그들의 미안한 마음까지 느낄 수 있는 정(情)이 담긴 문화유적이라 하겠다.


▲  갑사의 옛 중심지를 지키는 대적전(大寂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공우탑에서 전통찻집으로 나가지 말고 안쪽으로 좀 들어가면 대적전이 나온다. 경내를 3개로 나
누면 이곳은 대적전 구역에 해당된다. 지금은 경내에서도 한참 외곽으로 밀려나 한적하기 그지
없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엄연한 갑사의 중심 구역이었다. 대웅전도 원래는 대적전 옆에 있
었다.
그러다가 1597년 절이 파괴되고 1604년 절을 다시 일으킬 때 계곡 건너에 자리를 다져 대웅전을
지었고, 자연히 그 일대가 흥하면서 절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면 원래 중심지였던 대적전 구역
은 대적전과 돌담에 둘러싸인 요사를 다시 짓는 선에서 더 이상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경내 변두리로 밀려나고 만다.

대적전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의 거처이다. 허나 이곳에는 비로자나불
대신에 석가불과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단 위에
천정을 1단 올려 닫집의 효과를 내고 있다.

대적전의 창건 시기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대적전은 18세기부터 많이 나타나는 다
포식 공포의 법식화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공포의 구성에 화려한 초각의 경향을
보이는 등 18세기 이후 불전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도리통의 협칸을 어칸에 비해 1/2정도
로 줄인 것은 19세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건축 특성과 함께 현판에 쓰인 명문으
로 보아 현판이 씌어진 182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 주변에는 옛 주춧돌과 기와가
널려 있어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

▲  갑사 승탑(僧塔) - 보물 257호

대적전 뜨락에는 수려한 자태로 속인(俗人)들의 안구를 정화시켜주는 아름다운 승탑(부도)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의 것은 아니며, 절 뒤편 산자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지금의 자
리로 수습한 것이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여러 조각을 베푼 3단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차례로 얹
힌 형태로 기단은 위로 올라갈 수록 줄어든다. 기단 밑부분에는 사자와 용, 구름을 어지럽게 새
겼는데, 승탑을 둘러싸고 심하게 각축전을 벌이는 듯,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기단 중간에
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배치했다. 탑신
을 받치는 윗부분에는 연꽃을 둘렀고, 탑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겼다. 그리고 다른 4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탑을 지키게 했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여 지붕 모양을 정교하게
따랐으며, 머리 장식은 옛날에 없어지고 나중에 달아놓은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로 꼭대기를
마무리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승탑에 비해 목조건축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기단부의 화려한 조각은 승탑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
다. 누구의 승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 갑사 인근에 터를 닦은 이름 모를 암자가 남긴 유
일한 유물이다.


▲  철당간에서 대적전으로 오르는 길

▲  갑사 철당간(鐵幢竿) - 보물 256호

대적전에서 일주문으로 내려가면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철당간을 만나게 된다. 양쪽 2개의 돌기
둥이 가운데에 있는 철기둥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데, 여기서 양쪽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
柱)라고 하며, 가운데 철기둥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철당간이라 부른다.

철기둥은 현재 24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28개였다고 하며, 1893년 7월 25일 벼
락을 맞아 4개가 떨어져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너무 하늘로 노출이 되있다보니 피뢰침 작
용을 받은 듯 싶다. 그것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웅장했을 것이고, 하늘을 찌르
는 그의 모습에 하늘은 더욱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철통을 보좌하는 돌기둥은 별 꾸밈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멋대가리가 떨어진다. 꾸밈이나 화려함은 통하
지 않는다.
이 철당간은 680년에 세웠다고 하나 근거는 없으며, 당간의 양식을 보아 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철당간은 갑사를 비롯하여 청주시 도심
에 있는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전부로 그만큼 희소가치가 상당하다.

철당간이 얼마나 높은지 주변 나무들을 죄다 압도한다. 그의 높이는 15m가 넘으며, 나무들은 기
껏해봐야 10m가 고작이다. 거기에 겨울 제국의 모든 것을 공출당한 상태이니 그 왜소함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철당간을 세웠을까?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은 아닐까?
용두사지 철당간 설화를 보면 청주 고을이 북쪽으로 떠내려가자 이를 막고자 세웠다고 한다. 갑
사의 철당간 역시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이 풍수적으로 배의 지형을 상징한다하여 떠
내려가지 말란 의미와 함께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부분을 보충하고 마을과 절의 안녕을 기원하려
는 의미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  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철당간을 둘러보고 계곡을 건너 일주문으로 향했다. 겨울에 잠긴 갑사 숲길을 거닐면 사천왕(四
天王)의 보금자리인 사천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2002년에 지은 것으로 내부에는 사천왕
상이 봉안되어 절을 찾은 중생들을 검문한다.


▲  겨울 제국의 신민이 되어 봄을 열망하는 갑사 숲길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의 눈치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저들은
환하게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갑사 숲길 (일주문 → 천왕문 방향)
갑사로 가는 숲길은 갑사가 품은 또다른 보물이다. 겨울이라 그렇지
봄과 여름, 늦가을에는 매우 매혹적인 숲길이다. 

▲  갑사 일주문(一柱門)

갑사 일주문은 1998년에 만든 것으로 현판에는 절의 이름인 '계룡산 갑사'가 쓰여 있다. 문이라
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다.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하겠다는 부처의 뜻이 담긴 것
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가 나오고, 이윽고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주막촌
이 펼쳐진다. 절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하는데, 산채비빔밥이나
파전, 도토리묵, 동동주, 백숙, 된장찌개 등을 판매한다. 휴일이면 주막촌이 시끌벅적할텐데 평
일이라 썰렁함이 진하게 감돈다. 몇몇 집은 아예 문을 닫아걸고 쉬었다.
이곳에 오니 시간은 어느덧 6시, 햇님은 달님에게 업무를 넘기고 천하는 다시 땅거미의 세상이
되었다. 오전에 계룡산을 오를 때 점심은 대충 때우고 저녁은 황제처럼 먹기로 했지. 그래서 점
심은 동학사 주막촌에서 산 김밥 4줄과 컵라면, 계란으로 동학사와 남매탑에서 반반씩 먹었다.
이제 저녁시간이고 하니 먹을 곳을 물색하다가 서울식당이란 곳에 들어갔다. 이 집도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가 몇년 만에 맞는 손님처
럼 환하게 맞이한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그날 매출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거의 주말 장사니)

식당에 자리를 피고 된장찌개와 묵밥, 해물파전을 주문했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고, 등산을
한 탓에 시장기가 하늘을 찌른다. 드디어 나타난 저녁밥상, 나오기가 무섭게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총동원해 열심히 배를 채운다. 처음에는 배고픔에 눈이 뵈는 것이 없어 양이 적어 보
였으나 먹고나니 양이 많았다. 파전은 덩어리가 커서 간신히 다 먹었고, 묵밥과 된장조치(찌개)
는 조금 남겼다. 반찬도 맛있는 것은 동이 나고 몇몇은 반 정도 남았다. 동동주나 막걸리도 1잔
하면 좋겠지만 술은 땡기지 않아 그냥 식사만 했다.

그렇게 황제처럼 저녁을 마치고 커피 1잔 뽑아마시며 갑사 주차장으로 갔다. 여기서 속세로 나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날이 어두워지니 따스한 기운 대신 제법 매서운 산바람이 우리를
희롱한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려 공주시내버스 320번을 타고 공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아간 계룡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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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2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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