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마도, 서해갯벌, 안흥성...)

 


' 태안(泰安)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갯벌
▲  신진도 갯벌


천하를 꽁꽁 버무리던 겨울 제국의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중순에 태안반도(泰安半島)
에 중심인 충남 태안(泰安)을 찾았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태안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약 2시간을 달려 태안의 관문인 태안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신진도(마도)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40여 분을 달
려 신진도(新津島) 포구에 두 발을 내린다.


♠  안흥 앞바다에 떠 있는 그림 같은 섬
한반도와 다리 하나로 이어진 신진도(新津島)

▲  안흥항에서 바라본 신진도 동쪽

▲  한반도와 신진도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신진대교

신진도는 태안반도의 일부를 이루는 정죽반도(程竹半島) 서쪽 끝으머리에 달려있다. 안흥과 마
주보고 있는 이 섬은 원래 안흥과 이어진 육지라고 하는데, 자연의 위대한 힘에 강제로 섬으로
분리되면서 나루터가 새로 생기는 통에 신진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신진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성종(成宗) 시절로 해안 방비를 위해 만호청(萬戶廳)을
이곳에 설치했다고 하며, 고려와 남송(南宋)을 오가는 고려 사신과 남송 사신이 이곳에서 잠시
닻을 접고 산제(山祭)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섬은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후망봉(後望峰)이란 봉우리로 높이가 132m
이다. 섬의 둘레는 약 7km이며, 태안반도와 마주하는 동쪽은 물굽이가 크게 들어와있고, 동남부
해안은 해식애(海蝕崖)를 이룬다.
푸른 송림과 기암괴석, 그리고 자연의 보고(寶庫)인 갯벌이 어우러진 이곳에 개발의 물결이 밀
려온 것은 1979년이다. 1978년 안흥항이 1종항구로 지정되었는데, 안흥항이 좁아서 총 222억원
을 들여 신진도와 마도, 부억도를 연결하여 외항(外港)을 조성해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1989
년 58,000평을 매립 3만평에 배후지를 조성하여 숙박시설과 식당을 만들었다.

1995년에는 한반도와 신진도를 잇는 신진대교(新津大橋)가 개통되어 다시 한반도의 어엿한 일부
가 되면서 더 이상 바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수레와 두 다리로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으며,
, 다리의 개통으로 정죽반도 서쪽 끝이 안흥에서 신진도를 거쳐 마도까지 연장되었다. 신진도와
마도는 1987년 7월 방파제가 축조되어 서로 끈끈하게 이어졌고, 썰물 때는 안흥과 신진도 사이
에 바닷길이 열리기도 한다.
섬을 이루는 마을은 섬 북서쪽의 신진마을과 동쪽 아래목마을이 있으며,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다. 주요 수산물은 멸치와 삼치, 우럭 등이 있으며, 일부는 양식업(養殖業)도 한다. 신진
도항은 신진항, 안흥외항으로도 불리며, 2종항구로 800여 척의 어선을 수용할 수 있다.

신진도는 딱히 명소나 해수욕장은 없지만 신진도항 뒤쪽에 솟은 후망봉에 오르면 신진도항과 마
도, 안흥항을 비롯하여 가의도(賈誼島)와 정족도, 목개도 등 망망대해(茫茫大海)에 그려진 조그
만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조망(眺望)이 천하일품이다. 또한 물고기가 잘 잡혀 바다낚시터로도
명성이 높으며, 민박과 모텔, 해수탕 등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이 많고 조개구이와 생선회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 많아 1박2일 야유회 등으로 놀러오기 적당하다.
비록 한반도와 이어진 가까운 섬으로 외딴섬의 내음은 많이 씻겨내려갔지만 대신 언제든지 편하
게 안길 수 있는 장점이 섬의 관광 가치를 높여주었다.

신진도 서쪽에 자리한 마도(馬島)는 그 모습이 달리는 말과 비슷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마
섬, 말섬 등으로 불린다. 면적은 0.25㎢로 매우 작으며, 안흥8경의 하나인 마도기암(奇巖)이 있
는 곳이다. 약 20세대의 주민이 거주하며 신진도와 마찬가지로 어업과 숙박업으로 생계를 꾸린
다. 바다낚시로 유명하여 참조기와 새우, 갈치 등이 많이 잡히며, 신진도와 이어주는 방파제 서
쪽에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유물과 조개더미가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산지
에는 보리수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태안에서 신진도행 군내버스가 마도 포
구까지 들어간다.

※ 신진도, 마도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 남부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태안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강남은 1
  일 11회, 남부터미널은 30~4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은 1일 4회 운행)
* 인천, 부천, 수원, 안양, 성남, 고양, 대전(동부), 천안, 아산, 군산, 공주에서 태안행 고속/
  직행버스 이용
* 태안터미널에서 신진도(마도)행 군내버스가 1일 19회 운행한다. (20시 막차는 신진도주차장까
  지만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서산나들목에서 서산방면 32번 국도 → 태안군청 → 장산교차로에서 안흥
   방면 603번 지방도 → 신진대교 → 신진도, 마도

* 서해의 해금강(海金剛)으로 일컬어지는 안흥8경의 현장을 1바퀴 도는 안흥유람선(☎ 041-674-
  1603)이 신진도항에서 출발한다. 운행코스는 5가지로 사자바위와 가의도, 독립문바위, 정족도
  , 목개도 등을 돌며 소요시간은 1시간에서 3시간 정도이다. 비정기선으로 30명(또는 60명) 정
  도가 모이면 출발한다. 자세한 운행정보는 이곳을 클릭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


▲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을 다독거리는 신진도항(안흥외항)
신진도항은 새우깡의 제왕 갈매기를 몰고 다니는 어선들로 늘 부산하다.


▲  신진도항에 정박한 어선을 보호하는 방파제가 보인다.
왼쪽 방파제에는 빨간 등대가 오른쪽에는 하얀 등대가 나란히 자리하여
바다의 밤길을 비춘다.

▲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 왼쪽 언덕은 부억도의 옛 흔적이다.
부억도는 마도와 더불어 신진도 주변을 장식하던 섬이었으나
신진도항을 만들면서 신진도의 일부로 흡수되고 말았다.

▲  포구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어선들

▲  신진도항 북쪽에서 바라본 마도의 모습

▲  신진도와 마도를 이어주는 방파제길 ▼
갯벌을 메꾸고 돌을 차곡차곡 얹혀 두 섬을 하나처럼 끈끈하게 이어준다.


▲  마도에서 바라본 신진도항

▲  신진도 북쪽 갯벌
갯벌은 서해바다의 매력이자 자연의 보고이다. 그런 갯벌이 인간의 의해 계속 축소되고
사라지고 있으니 이러다가 갯벌이란 단어가 낯설어지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그날이 되면 인간들도 감히 무탈하지는 못할 것이다.

▲  마도 갯벌에 고단한 몸을 기대며 휴식을 취하는 어선들

▲  신진도와 마도를 잇는 방파제에서 바라본 신진도항
마을 뒤쪽에 보이는 산이 신진도의 진산(鎭山)인 후망봉(132m)

신진도와 마도는 딱히 흥미가 나질 않았다. 신진도항 남쪽 방파제와 후망봉을 비롯해 신진도와
마도 구석구석을 살펴야 도리겠지만 별로 땡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1시간
정도 머물고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인연에 내던지며 육지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
고 안흥항으로 넘어갔다.


▲  안흥항과 신진대교

안흥항(안흥내항)은 정죽반도 끝에 자리한 항구로 서해 중부의 중심 어항(漁港)이자 충남의 대
표적인 항구이다. 백제(百濟) 때부터 항구의 역할을 했다고 하며,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5
세기 이후 이곳을 중원대륙 진출의 주요 기지로 삼으면서 많은 무역선과 수군이 들락거렸다.

안흥항의 확장을 위해 신진도에 외항이 조성되면서 많은 어선들이 그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예전
에 비해 많이 한가해졌다. 그 이후로 안흥항은 내항(內港), 신진도항은 외항으로 불린다. 허나
여전히 어항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으며, 신진도항도 엄연히 따지만 안흥항의 확장판이다.

이곳은 바다낚시터로 명성이 높아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월척을 꿈꾸며 찾아온다. 항구 앞바
다는 수심이 60~70m에 이르러 우럭이 많이 잡히며 우럭낚시의 본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서
해의 해금강으로 불리는 안흥8경의 현장이 안흥 앞바다에 보석처럼 박혀있으며, 안흥 뒷산에 조
선 중기에 축성된 안흥성이 남아있다.


▲  안흥항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의 넓은 가슴
저 바다에 조그만 배를 띄우고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극락의 세계를 찾아 떠나고 싶다.


♠  서해바다를 지키고자 조선 중기에 축성된 성곽 ~ 안흥성(安興城)
충남 지방기념물 11호

▲  안흥성 북문인 감성루(坎城樓)

안흥성은 1655년(효종 6년)에 축성된 석성(石城
) 겸 산성(山城)으로 태안8경의 2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이다.
효종 시절에 김석견(金石堅)이 서해안을 방어하
고자 안흥진성(安興鎭城)의 축성을 강하게 건의
하자 효종(孝宗)은 지경연사(知經筵事) 이후원(
李厚源)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에 이후원이
'안흥은 바다를 낀 천연의 요새로 군사를 주둔
하고 양곡을 저장하면 안으로 강도(江都)의 표
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통제
할 수 있습니다'

▲  감성루(북문)의 뒷모습

그 말을 들은 효종은 옳거니 여기며 바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게 명을 띄워 안흥성을
쌓게 했는데, 이때 인근 19개 고을의 정남(丁男, 16~60세 남성)이 징발되었다.

안흥성의 본래 이름은 안흥진성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안흥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종3품
무관인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여 성을 지켰다. 1894년 동학운동(東學運動)이 일
어나자 동학군(東學軍)과 관군과의 싸움으로 성내(城內)의 건물과 문루가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동학군이 진압된 이후 성은 버려져 방치되었다. 그 이후 성내 건물은 모두 파괴되고 그 자리에
는 마을이 들어섰다.

성의 둘레는 1,714m, 높이는 3~4m이며, 동문<수성루(壽城樓)>과 서문<수홍루(垂虹樓)>, 남문<복
파루(伏波樓)>, 북문<감성루(坎城樓)>의 4문을 두었다. 허나 지금은 북문만 문루(門樓)가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성곽(城郭)은 북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진
하게 남아있으며, 성곽의 방어시설인 여장은 모두 분실되었다. 북문은 바다에 접해있어 지대가
낮으나 서문과 남문, 동문은 산등성이에 자리해 있으며, 북문에서 동문과 서문으로 가는 성곽은
경사가 급하다.
서문에 이르면 쪽빛의 서해바다가 눈과 마음을 시리게 만들며, 여기서 산을 내려가면 바로 안흥
항으로 이어진다. 동문을 지나면 산과 논, 바다가 어우러진 태안 정죽리의 산하가 거침없이 펼
쳐지는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다소 급해 내려갈 때 주의가 필요하다.


▲  안흥앞바다를 굽어보는 서문(수홍루)
문루인 수홍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녹아 없어지고 성문만 남았다.
고색의 떼가 잔뜩 낀 성곽은 수천년 묵은 고고학 유적지를 연상케 한다.

▲  서문 북쪽 성곽

▲  서문 안쪽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차곡차곡 쌓인 성곽은 주먹처럼 조그만 돌부터 성인 남자의 몸집만한
커다란 돌까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꽉 여물어져 있다. 고색의 무게가 진하게 입혀진 성곽에는
수풀이 무성히 자라 허전한 윗부분을 마치 대머리를 덮듯 따스하게 덮어준다. 딱딱한 성돌에는
이곳의 청정함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이끼가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며 기생을 한다. 맨돌에도 식
물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의 위대함에 그저 입만 벌어질 뿐이다.
수천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만든 안흥성, 돌로 쌓아서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지만 자연 앞에서는
역시나 장난감 성에 불과하다. 동학운동 이후 버려진 성은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해 이렇게
황량하게 변한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그것이 집이든 성이든 사람의 손길이 꾸준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천하제일의 고구려 성이라도 자연 앞에 무책임하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
제이다.


▲  성돌에 낀 오랜 세월의 주름살
이끼 등의 지의류(地衣類)가 성돌에 뿌리를 내려 그들만의 조그만 나라를 꾸린다.

▲  옛 수홍루의 기와조각이 하나의 화석(化石)이 되어 땅에 박혀있다.

▲  서문에서 바라본 안흥앞바다 (서해바다)
성내마을 사람들은 안흥으로 갈 때 서문을 거쳐간다.

▲  안흥성이란 둥지에 포근히 안긴 성내마을

성내 한복판에는 성내마을이 포근히 자리해 있는데, 20호 정도가 산다. 마을 서쪽은 밭이 약간
펼쳐져 있고, 남쪽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눈을 심히 불편하게 한다. 마을
동북쪽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국사란 조그만 절이 터를 닦았다.


▲  동문에서 바라본 천하 (정죽리 일대)

성내 한복판에는 성내마을이 포근히 자리해 있는데, 20호 정도가 산다. 마을 서쪽은 밭이 약간
펼쳐져 있고, 남쪽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눈을 심히 불편하게 한다. 마을
동북쪽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국사(泰國寺)란 조그만 절이 터를 닦았다.


▲  안흥성의 동문(수성루)

동문은 서문과 마찬가지로 문루는 녹아 없어지고 뻥뚫린 성문만 있다. 그래도 서문에 비해서는
성문의 천정이 매우 두텁다. 성문 사이로 산과 논이 어우러진 정죽리의 산하가 눈에 들어온다.


▲  동북쪽 성벽에 터를 일군 태국사(泰國寺) - 전통사찰 47호

태국사는 법당과 요사가 전부인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절로 특이하게 성벽 위에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백제 무왕(武王)이 국태보안(國泰保安)을 빌고자 634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태국사라고 하는데, 관련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편할 것
이다.

조선 세종(世宗) 때에는 명(明)나라 사신의 무사항해를 빌고자 세종의 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나
명나라 사신이 굳이 이곳을 지나갈 이유가 없으니 그 또한 신뢰가 떨어지며, 임진왜란 때는 승
병이 주둔했다고 한다. 1894년 동학군과 관군의 싸움으로 안흥성이 피해를 입자 그때 절도 파괴
되어 오랫동안 흔적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82년에 비로소 중창되었다.
고색의 내음은 매서운 세월의 태풍 앞에 모조리 흩날리면서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다만 오
랜 내력이 인정되어 충청남도에서 전통사찰로 지정했다.

안흥성 동북쪽 높은 산자락에 자리해 있고 나무가 별로 없어 산사의 내음은 많이 떨어지나 성내
에서 제법 높은 곳에 있다보니 조망은 제법 괜찮다. 허나 경내에는 그 흔한 석탑이나 승탑 등의
석물은 없어 맞배지붕을 지닌 법당이 아니었다면 그냥 개인 주택으로 오인하기가 쉽다.

태국사를 둘러보니 마도를 출발하여 태안으로 가는 버스시간이 5분도 남질 않았다. 그걸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을 허공에 내던져야 된다. 그러면 천상 안흥성을 또 1바퀴 돌아야 되겠지. 
절에서 북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제법 비탈진 길인데, 그 길을 정신없이 내달려 간신히 버스를
잡아타고 속세로 나갔다.

안흥성은 태안8경의 하나로 꼽히는 태안의 주요 관광지긴 하지만 편의시설과 두 발을 쉴 수 있
는 휴식처가 없다. 게다가 성곽길이 제대로 정비되어있지 않아 성곽을 돌 경우 걸음에 조심을
요한다.

▲  태국사 법당(法堂)

▲  태국사 요사(寮舍)

※ 안흥성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태안터미널에서 신진도(마도)행 군내버스를 타고 죽리(성안)에서 하차하면 바로 북문이다. 안
  흥에서 내릴 경우 산길을 이용하여 서문으로 오를 수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서산나들목에서 서산방면 32번 국도 → 태안군청 → 장산교차로에서 안흥
   방면 603번 지방도 → 안흥성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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