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늦겨울 산행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 계룡산 나들이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
계룡산 삼불봉에서 바라본 천하
▲ 삼불봉에서 바라본 천하



계룡산 동쪽에 자리한 동학사(東鶴寺, ☞ 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홍살문 부근에 자리를 잡
아 속세에서 사온 김밥과 계란으로 점심을 때웠다. 고작 김밥 2줄과 계란 2개를 먹었지만 포
만감의 행복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와 우리를 희롱하려든다. 허나 우리는 그들의 희롱을 물
리치고 남매탑으로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동학사에서 남매탑까지는 거의 40분 거리이다. 처음에는 경사도 완만하고 길 옆에 계곡도 흐
르지만 탑과 한발자국 가까워질 수록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힘겨워진다. 계곡 역시 어
디로 마실을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묵묵히 길을
오르다보면 보이지 않던 남매탑이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 동학사에서 남매탑으로 오르는 산길


♠ 동학사의 옛 자리를 지키는 2기의 석탑, 의남매의
애련한 전설이 가슴을 여미게 하는 남매탑(男妹塔 = 오뉘탑)

동학사에서 삼불봉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삼불봉 밑에 평탄한 장소
가 나온다. 그곳에 계룡산의 명물인 남매탑 2기가 서로를 보듬으며 속세를 굽어본다. 탑이 있던
자리는 동학사의 전신(前身)으로 전해지는 청량사(淸凉寺)의 옛터로 고려 때까지 이곳에 둥지를
트고 있다가 조선 초기에 지금의 자리로 내려와 동학사로 이름을 갈았다.
남매탑은 각각 5층과 7층석탑으로 정식 명칭은 절터의 이름을 따서 청량사지5층석탑, 청량사지7
층석탑이다. 청량사 시절의 유물로 이들이 남매탑이라 불리게 된 믿거나 말거나 사연은 다음과
같다.

동학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회의화상(懷義和尙)의 스승 상원조사(上願祖師)가 큰 돌을 허리에
이고 계룡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호랑이가 슬금슬금 다가와
'야 힘들지. 내가 흔쾌
히 도와줄께!'
뒤에서 돌을 받쳐주어 쉽게 돌을 운반했다. 상원은 그 돌로 남매탑 자리에 조촐
하게 초암(草庵)을 짓고 불도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호랑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상원이 '어인 일로 왔냐?' 그러니 호랑이
'밥을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렸어!' 하면서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원은 뼈를 제거
해주고 '앞으로 사람을 해치지 마라!!' 따끈한 잔소리를 던지니 호랑이가
'우리도 요즘 먹고 살
기가 힘들다보니 음식을 가릴 여유가 없어. 하지만 앞으로 흔쾌히 주의할께~~!!'
고맙다며 고
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얼마 뒤 호랑이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어디서 아리따운 여인 1명을 물어와 그의 초암 앞에 던
져놓고 '상원아 나와봐라~ 좋은거 가져왔어' 그러면서 사라졌다. 그가 혼자 사는 것을 눈치채고
여인과 짝을 지어 잘살라는 뜻에서 그런 기특한 짓을 한 모양이다. 허나 상원은 이미 출가한 승
려이다. 호랑이는 그 점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그때 여인은 의식을 제대로 잃은 상태였
으므로 상원은 좋든 싫든 그 여인을 수습하여 간호를 해주었다.
그녀가 깨어나자 신분을 확인했는데, 경상도 상주(尙州) 지역에 이름있는 집안인 김화공(金化公
)의 딸이었다. 그가 어찌 계룡산 호랑이에게 납치되었는지 자세한 경위는 알 도리가 없지만 어
쨌든 호랑이가 물건은 제대로 가져온 셈이다.

상원의 간호를 받고 쾌차한 여인은 그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상원 역시 마찬가지였
다. 딸을 애타게 찾던 김화공 내외는 상원에게 혼인을 제안했고, 여인 역시 이를 원하며 상원의
마음을 들쑤셨다. 마음의 공황에 빠져 방황하던 상원은 공황에 빠진 자신을 원망하며 결국 혼인
을 거절했다.
여인은 눈물로 다시 혼인을 청했으나 상원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상원도 그러곤 싶겠지만
이미 승려가 된 몸이고 그동안 쌓은 불도도 아깝고 하니 자기 자신도 무척 애간장이 탔을 것이
다. 그래도 서로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들인지라 인연을 차마 저버리지는 못하겠고 대신 의남
매(義男妹)가 되어 같이 불도를 닦자고 제안을 했다. 비록 혼인은 아니지만 남매가 되어 서로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의남매가 되어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때로는
채찍질도 해가며 불도에 더욱 정진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세상을 뜨자 (누가 먼저 죽었는지는 모름~~) 상원의 열성제자인 회의화상은
여인의 부친인 김화공의 지원을 받아 탑을 세워 그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한다. 허나 이들
탑의 조성시기는 공교롭게도 신라 후기가 아닌 고려 중기라 전설의 신빙성을 보기 좋게 떨어뜨
린다. 아마도 회의화상의 스승 상원조사에 관한 한 토막 전설이 청량사에 전해져 온 것을 나중
에 동학사에서 탑과 연관을 지어 재구성한 듯 싶다. 전설에 나오는 호랑이가 날라다 준 여인은
상원조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거나 청량사에 시주를 많이 한 여인을 모델로 한 듯 싶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전설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주 희방사(喜方寺)와 통영 도솔암(兜
率庵)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온다. 결말만 다를 뿐, 시작과 과정은 같다. 호랑이가 나타나 목
구멍에 걸린 가시를 빼달라고 청했고, 이를 빼주자 아름다운 여인을 납치하여 그에게 건넨다.
그런데 여인들은 모두 귀족이나 유력 집안의 딸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여인의 부친이 감사의 뜻
을 표하고 자신의 딸과 혼인해줄 것을 부탁하나 승려는 모두 거절한다. 남매탑에서는 승려와 여
인이 의남매가 되었지만 희방사와 도솔암은 여인의 집안에서 절을 지어주는 선에서 끝낸다.

허나 이들 전설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전설을 통해 상주 지역 김화공이라는 유
력집안에게 지원을 받았음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정말로 혼사 이야기도 있었을지도 모름) 그
리고 전설에 호랑이를 넣은 이유는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며 사람들도 호랑이를 크게 무서워하
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신성시하는 경향이 컸다. 고구려 고분을 보면 좌청룡 우백호(右白虎)라
하여 하얀 호랑이가 푸른 용과 나란히 그려져 있으며, 산신(山神) 신앙에도 호랑이가 등장한다.
단군설화에도 성질 급한 호랑이가 나오고,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효자동의 효자비(孝子碑) 전
설에도 박창선이란 사람이 매일 호랑이를 타고 선친(先親)의 묘를 찾아갔다는 것, 후백제 견훤
(甄萱) 설화에도 견훤이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라 그 기운으로 무예가 뛰어나고 나라를 세웠다
는 것. 기타 여러 설화와 전설에서 호랑이가 중요한 존재로 나온다.

이처럼 호랑이가 대단한 존재이기에 호랑이를 등장시켜 창건설화의 격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호랑이 대신 여우, 늑대, 수달, 곰을 등장시켰다면 조금은 이상했을 것이다. 여우나 늑대,
곰이 승려에게 목에 걸린 뼈를 빼달라는 것도 그렇고, 그들이 감사의 뜻으로 여인을 납치하여
건네는 모습도 생각해보니 좀 어색하고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런 짐승들 보다는 호랑이를 집어
넣는 것이 설화의 격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나의
허접스러운 생각일 뿐. 정답은 아니다.

어쨌든 이 남매탑은 그 이름 그대로 다정한 오누이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80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청량사는 창건 이후 고려 때 무너진 것을 조선 초기에 저 아래로 내려가 동학사
로 다시 태어났다. 옛 청량사 자리에는 남매탑 외에 3층석탑도 있었으나 3층석탑은 동학사로 내
려갔으며, 남매탑 밑에는 상원암(上元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옛 청량사터를 지킨다.

조그만 여동생 탑인 5층석탑은 보물 1284호, 오빠 탑인 7층석탑은 보물 1285호이다. 상원암과
남매탑은 동학사에서 관리한다.

※ 남매탑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① 버스 이용 (동학사3거리 경유 / 서울에서 제일 빨리 가는 방법임)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계룡(신도안)행 직행버스를 타고 동학사(동학사3거리) 하차, 동학사3거
리(학봉3거리)에서 걸어가거나 학봉3거리(또는 학봉리) 정류장에서 동학사로 들어가는 대전시
내버스 107번이나 공주/논산시내버스를 타고 동학사 종점으로 이동 (학봉3거리에서 겨우 3정
거장임)
② 버스 이용 (유성 경유)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광주와 전주, 청주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③ 철도 이용 (대전역 경유)
* 서울역, 영등포역, 수원역, 광명역, 천안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대전역 하차
* 부산역, 마산역, 동대구역, 울산역, 포항역, 구미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 제천역, 충주역에서 대전행 충북선 열차 이용
④ 현지 교통 (유성, 대전, 공주, 논산에서 동학사까지)
* 대전역과 유성시외터미널에서 대전시내버스 107번 이용 (17~20분 간격)
* 대전지하철 1호선 현충원역(3번 출구), 유성온천역(5번 출구), 용문역(5/8번 출구)에서 107번
시내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동학사행 시내버스 1일 3회 (시간이 맞지 않으면 유성행 5번
시내버스를 타고 박정자에서 107번으로 환승)
* 논산역과 논산터미널에서 동학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21번이 1일 6회(휴일은 4회) 운행
⑤ 승용차로 가는 경우
* 호남고속도로지선(회덕~논산) → 유성나들목 → 공주방향 32번 국도 → 박정자3거리 좌회전
→ 동학사 주차장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 → 공주방향 23번 국도 → 월송교차로에서 대전방향 32번 국
도 → 박정자삼거리에서 우회전 → 동학사
⑥ 현지 등산
* 동학사 종점 → 동학사 홍살문 → 남매탑 (1시간 10분)

★ 남매탑 관람정보
* 동학사나 갑사를 거쳐서 갈 경우 입장료를 내야 된다.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천원(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500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동학사 ☎ 042-825-2570)


▲ 남매탑에서 바라본 계룡산 남쪽 줄기

▲ 남매탑을 후광으로 삼아 절을 꾸리는 상원암

남매탑 서쪽 밑에는 상원암이란 조촐한 암자가 들어앉았다. 법당 겸 종무소 및 요사(寮舍)로 쓰
이는 팔작지붕 기와집과 가건물이 전부인 그야말로 조그만 암자로 동학사에서 관리한다. 법당은
1970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법당 앞에 서면 계룡산 남쪽 줄기가 훤히 두 눈에 들어와 마음을 시
원하게 해준다.
법당 뜨락 동쪽에는 등산객들이 쉬어가며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데,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밥과 간식을 먹으면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는 모
습이 정겹다. 우리도 한쪽에 앉아 동학사에서 남긴 김밥과 간식을 먹었고, 무려 2,000원의 거금
으로 마련한 컵라면에 뜨끈한 물을 부어 김밥과 겯드려서 먹었다. 그 맛이 얼마나 꿀맛 같던지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는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지 맛이 좋은 것 같다. 집에서 먹는 라면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천상(天上)의 맛이다.

그렇게 또다른 점심을 마치고 천막으로 된 공양매점을 찾았다. 상원암 경내에 있지만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무인매점으로 여기서 커피 1잔 뽑아 마실려고 했는데, 무려 500원씩이나 한다. 그
외에 양초나 공양미, 휴지 등은 속세보다 곱절을 얹혀 팔고 있었다. 관리인이 없기 때문에 돈은
불전함에 알아서 넣으면 되는데, 엄청난 가격에 입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는다.
그래도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조금은 쌀쌀하고 식곤증까지 밀려와 가격에 상관없이 1잔 뽑아 마
실려고하는데, 동전을 넣는 투입구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커피 버튼을 꾹 눌러보
니 종이컵이 나오면서 알아서 커피가 담긴다. 동전은 그 옆에 마련된 철제 불전함에 소정의 돈
을 알아서 넣으면 된다.
우리는 커피를 4잔이나 뽑아 마시고 500원 정도를 넣었다. 우리 같은 가난한 중생에게까지 그렇
게까지 돈을 가져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부처와 절은 아비규환에서 허우적거리며 신음하거나
없는 중생을 위한 존재이지 돈을 위한 존재는 아니니까 말이다.


▲ 상원암 공양매점

▲ 청량사지5층석탑 - 보물 1284호

▲ 청량사지7층석탑 - 보물 1285호

남매탑의 여동생인 5층석탑은 겉으로 보면 3층으로 보인다. 허나 그는 엄연한 5층석탑이다 기단
부(基壇部)로 착각하기 쉬운 길쭉한 1층 부분과 희미하게 남은 5층 부분 때문이다.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단의 기단을 벽돌처럼 쌓고 5층의 탑신을 얹은 형태로
얼핏보

벽돌처럼 쌓은 모전탑을 연상케 한다. 탑신의 각층 옥개석(屋蓋石)은 얇고 넓으며, 1,2층 옥개
석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 넣은 구조이다. 3,4층 탑신과 옥개석은 따로 돌 1개씩
이며, 4층 옥개석 받침은 1단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5층은 탑신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옥개
석이 없어져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탑 꼭대기에는 둥근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탑의 형태를 가만보면 백제 탑의 백미(白眉)인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을 많이도 닮았
다.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허무하게 막을 내린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를 비롯한 옛 백제의 본토
에서는 고려 후기까지 정림사지 석탑과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들이
곳곳에 솟아났다. 이 탑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탑이 위로 올라가면서 생략된 부분이 있고, 조
각 수법이 일정치가 않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의 내용처럼 신라 후기에 조
성된 탑이 아닌 것이다.

5층석탑의 곁을 지키는 오빠탑 7층석탑은 5층석탑보다 1.5배 정도 높다. 전체적인 모습은 5층석
탑과 비슷하며, 네모난 바닥돌 위에 1단의 기단을 세우고 7층의 탑신을 얺힌 형태로 5층탑과 마
찬가지로 1층 탑신이 지나치게 크다.
기단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딴 돌로 세웠으며, 1층 탑신에는 네모난 감실(龕室)을 새겼다. 감실
은 불상을 봉안하는 공간으로 현재는 아무 것도 없으며, 옆면에는 문비로 보이는 아주 얕게 파
여진 부분이 있다. 옥개석 받침수는 1층이 2단이고 7층이 1단이며, 2층과 3,4층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1층이 지나치게 크고 꼭대기로 올라갈 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균형은 크게 떨어진다. 탑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만 있을 뿐, 머리 장식은 없다.

탑의 양식을 보면 백제 2대 탑의 하나인 미륵사지석탑과 익산 왕궁리(王宮里) 5층석탑으로 이어
지는 양식으로 5층탑처럼 생략된 부분이 많고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이들 탑은 장대한 세월의 흐름 앞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자 1981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 남매탑 주변에 흩어진 거북돌 ▼

남매탑 주변 공터에는 거북 모양의 돌이 가득 널려있다. 눈과 코, 입이 표현되지 않았을 뿐 머
리 부분이 돌출되어 영락없는 거북이다. 저기에 비석만 세우면 귀부(龜趺)를 갖춘 비석이 된다.
이들의 등 부분은 평탄하여 앉기에도 좋으며, 등산객들의 쉼터로 사랑을 받고 있다. 돌을 보면
자연이 빚은 것이 아닌 거북 모양으로 인위적으로 다듬었는데, 왜 남매탑 주변에 이들을 배치시
켰는지는 모르겠다. 옛날부터 있던 것은 아닌듯 싶으며, 동학사에서 남매탑과 더불어 명물로 만
들고자 갖다둔 것이 아닐까 싶다.


▲ 상원암에서 만난 묘공(猫公)의 위엄
상원암 쉼터 주변에 누런색 털옷을 입은 묘공 두 분이 어슬렁거린다.
상원암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등산객들이 준 음식을 잽싸게 받아먹고
양지 바른 곳에 주저앉아 잠시 단잠의 여유를 즐긴다.


♠ 삼불봉(三佛峰)에서 천하를 바라보다

▲ 삼불봉 정상

남매탑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가파른 길을 다시 10분 정도 오르면 삼불봉고개이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가면 삼불봉과 관음봉, 직진으로 바로 내려가면 금잔디광장과 갑사
로 통한다. 지금까지는 눈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았는데, 하늘과 많이 가까운 곳이라 삼불봉 가
는 길은 눈이 가득히 쌓여있다.

눈으로 미끄러운 산길을 헤쳐가며 3분 정도 가면 삼불봉으로 오르는 철제계단이 나온다. 계단의
경사는 속세살이처럼 매우 가파르며 간신히 2명이 교행할 정도로 좁다. 올라갈 때는 계단만 보
고 오르니 덜하겠지만 내려갈 때는 정말로 아찔하다. 그런 계단길을 2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삼
불봉 정상이다.

삼불봉(三佛峰)은 해발 775m로 계룡산에서 3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
天皇峰, 845m)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며, 2번째로 높은 쌀개봉(827m) 역시 마찬가
지다. 그나마 속인들이 속 편히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바로 삼불봉이다. 삼불봉이란
이름은 동학사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3명의 부처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삼불봉의 눈 덮힌 풍경은 계룡8경의 제2경으로 치고 있다. 허나 눈이 대부분 녹고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로 그 원대한 설경(雪景)은 볼 수 없었다. 이곳에 오르면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멀
리 대전시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조망(眺望)도 가히 천하 일품이다.

※ 삼불봉 찾아가기
1. 동학사
→ 남매탑 → 삼불봉고개 → 삼불봉
(1시간 20분)
2. 갑사 → 용문폭포 → 신흥암 → 금잔디광장 → 삼불봉고개 → 삼불봉 (2시간)
3. 동학사 → 은선폭포 → 관음봉고개 → 관음봉 → 삼불봉 (2시간 30분)


▲ 삼불봉에서 관음봉(觀音峯)으로 이어지는 능선
관음봉으로 가는 능선길은 조금 험하다. 특히 눈이 쌓인 겨울에는 더욱 그렇다.
관음봉을 거쳐 신원사나 은선폭포로 내려갈 수 있다.

▲ 삼불봉에서 바라본 천하 (계룡산 남쪽 능선)

▲ 삼불봉에서 바라본 남매탑
사진 가운데로 남매탑이 희미하게 보인다.

▲ 삼불봉에서 바라본 계룡산 북쪽 능선과 공주(公州)의 산하

▲ 삼불봉고개 (금잔디광장 쪽에서 바라본 모습)

삼불봉에서 잠시 천하를 굽어보고 삼불봉고개로 내려왔다. 관음봉 쪽은 눈으로 길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삼불봉고개를 경계로 남매탑 방면은 눈이 없지만 금잔디광장 방면은 그 반대로 완연
한 눈길이다.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다. 같은 공주 땅이고 해발
도 비슷한데 말이다. 이는 갑사 방면 길이 남매탑 방면에 비해 볕이 잘 들지 않기 때문에 눈이
길게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다.

내려가는 것이 쉬울 듯 하지만 눈 때문에 자칫 벌러덩 미끄러질까 염려되어 나무들에게 민폐를
잔뜩 끼치며 조심조심 내려갔다. 이런데서 괜히 방심하다가 자칫 미끄러지면 이건 정말 대책이
없다. 그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돌다리도 두들겨 패는 심정으로 가는 것이 제일이다.


▲ 금잔디고개로 가는 산길
눈이 바다를 이루며 쌓여있는 산길에 나의 발자국을 화석처럼 무수히 남겨본다.
겨울의 제국이 지면 나의 흔적도 눈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겠지~~
그래서 인생이란 덧없고 부질없는 모양이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사라질 것이니 말이다.

▲ 헬기장이 있는 금잔디고개

삼불봉고개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헬기장을 갖춘 금잔디고개에 이른다. 금잔디고개라고 하여
금잔디가 입혀진 것은 아닌데 왜 그런 이름을 지녔는지 궁금하다. 이곳은 수정봉(675m)을 비롯
하여 관음봉과 연천봉, 갑사, 동학사 방면으로 통하는 요충지로 넓은 반상과 의자와 탁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평일이라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여기서 길을 멈추고 요기를 하거나 쉬
었다 가는 등산객들로 미어터진다.


♠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었다고 전하는 자연산 바위 천진보탑(天眞寶塔)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68호

▲ 천진보궁에서 올려다 본 천진보탑

금잔디고개에서 갑사 방면으로 25분 정도 정신없이 내려가면 신흥암(新興庵)이란 조그만 산중암
자가 모습을 비춘다. 이 절은 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이 왕위에 오르던 420년에 아도화상(阿道
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는 전혀 신뢰할 바가 못되며, 갑사의 부속암자로 훨씬 후대
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경내에는 법당인 천진보궁을 비롯하여 산신
각과 요사 등 4~5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천진보궁 뒤에는 절을 먹여 살리는 든든한 밥줄이자
신비의 바위로 통하는 천진보탑이 높이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 계룡산 북서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신흥암

▲ 신흥암 천진보궁(天眞寶宮)

신흥암의 법당인 천진보궁은 천진보탑을 등지며 자리해 있다. 법당임에도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불단과 불화, 나한상(羅漢像)만이 가득한데, 이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천진보탑 때
문이다. (물론 그 바위에 정말 진신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음) 이 건물은 적멸보궁(
寂滅寶宮)과 비슷한 성격으로 보면 되겠다.

경내에서 천진보탑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보여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가파른 언덕에 있
어 현실은 다르다. 산신각을 끼고 1분 정도 올라가야 되며, 약간이지만 낭떠러지길이 있어 주의
를 요한다.


▲ 천진보궁 내부
불상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주인 없는 방석만 3중으로 두텁게 덮여 있다.
불단(佛壇) 뒤로 넓게 창문을 내서 천진보탑이 시야에 들어오게끔 했는데,
이는 적멸보궁의 특징이다.

▲ 천진보탑 가는 길목에 자리한 신흥암 산신각(山神閣)

▲ 천진보탑의 위엄

신흥암을 굽어보며 자리한 천진보탑은 명칭은 탑이지만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바위이다.
원래는 계룡산의 평범한 바위로 그 생김새가 자못 위엄이 있어 옛날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대상물로 인기를 누렸을 듯 싶다. 그러다가 바위 밑에 신흥암이 둥지를 틀면서 석가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퍼뜨려 졸지에 부처의 사리탑이 되었고, 천진보탑이란 거창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바위에는 다음에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부처가 열반하자 인도의 아육왕은
구시나가라국에 있는 사리탑에서 많은 양의 사리를 발견했다.
그는 이를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나눠 주었는데, 그때 사천왕(四天王) 가운데 북쪽을 담당하던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을 계룡산으로 보내 이 바위 안에 석가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이다.
(당시 인도와 한반도는 교류도 없었음) 그 이후 갑사를 창건했다는 아도화상이 이를 발견하여
천진보탑이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설처럼 바위 안에 부처의 사리가 있을까? 이는 바위 속을 들춰내지 않는 이상은 확
인할 길도 없으며, 사리함(舍利函)을 넣을 만한 구멍도 없다. 이는 신흥암에서 퍼트린 어디까지
나 전설이다. 이런 전설을 천하에 퍼트려 절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많은 불자들을 유치하여 그
들에게 시주를 받는다. 그래서 그 시주로 신흥암 승려들도 먹고 살고, 여유가 된다면 사세(事勢
)도 확장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절을 꾸리고자 바위를 부처의 사리탑으로 둔갑시켜 그럴싸하게
전설을 만든 것이다.


▲ 거대한 봉우리처럼 보이는 천진보탑과 수정봉(오른쪽 봉우리)

천진보탑은 부처의 사리가 들어있다는 전설과 함께 신비한 현상으로 유명하다. 바로 바위가 스
스로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현상이 그것이다.
예로부터 이 바위에 진실한 마음을 담아 기도를 올리면 방광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며, 바위 왼
쪽 경사면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곳의 방광 장면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6.25 이
후이다. 당시 갑사 부근에 주둔하던 미국 병사가 어느 날 늦은 저녁 신흥암 주변이 환해지는 모
습을 보고 호기심에 신흥암까지 올라가 그 신비의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고 한다. 또한 1994년 2
월에도 저녁에 방광이 발하여 소방관이 출동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사실일까? 우리가
갔을 때는 대낮이라 그런 현상은 볼 수 없었다.

그 현상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는 모른다. 직접 안봤기 때문에.. 그것이 초자연적인 현상
인지 아니면 신흥암에서 조작한 건지는.. 허나 이런 현상을 굳이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그
냥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바위는 온통 하얀 피부로 되어있다. 외모도 정말 수려하고 잘생겼다. 그런데 바위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남근(男根)과도 어느정도 닮은 것 같다. 어쨌든 석가의 사리가 봉안되었다는 전설
부터 스스로 빛을 발하는 신기한 현상, 남근을 닮은 모습까지 보면 볼수록 자연의 위대한 조각
솜씨에 경탄에 경탄만 거듭 나올 뿐이다. 자연의 찬란한 작품 앞에 인간의 작품은 언제든 사라
질 수 있는 초라한 먼지에 불과하다.


※ 천진보탑(신흥암) 찾아가기
1. 동학사 → 남매탑 → 삼불봉고개 → 금잔디고개 → 신흥암 (1시간 50분)
2. 갑사 → 용문폭포 → 신흥암 (50분)


▲ 얼음에 가려진 용문폭포(龍門瀑布)

신흥암을 뒤로 하고 갑사 방면으로 15분 정도 내려가면 갑사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문폭포가 모
습을 드러낸다. 폭포의 높이는 10m도 되지 않는 작은 폭포이지만 수정보다도 맑은 계곡물이 큰
세상을 꿈꾸며 바위를 타고 소(沼)로 떨어지는 모습이 정말 일품이다. 허나 심술쟁이 겨울제국
이 그의 아름다움에 부아가 터졌는지 얼음과 눈으로 폭포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게다가 폭포를
알리는 이정표나 안내문이 없어 그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폭포 앞 바위에는 '용문폭(龍門瀑)'이라 쓰인 거대한 바위글씨가 있다. 이 글씨는 폭포의 수려
함에 반한 옛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글자 크기가 거의 60cm를 넘는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보이기도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바위가 그들의 낙서(?)로 조금은
흉하게 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다.

겨울제국이 혹여 눈치챌라 숨을 죽이며 폭포로 떨어지는 계곡물, 소쩍새가 울면 겨울이 강제로
씌운 얼음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용문폭(龍門瀑)' 바위글씨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추후에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글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2년 3월 19일부터


Copyright (C) 201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