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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9.02.23 천하에서 제일 큰 청동좌불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천안 태조산 각원사 ~~ (태조산 성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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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8.04.24 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6. 2018.02.26 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탄산약수를 찾아서,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지석묘, 춘천의 먹거리들)
  7. 2018.01.23 의성 허준과 겸재 정선의 체취가 깃든 옛 양천고을의 중심터, 서울 가양동 둘러보기 ~~~ (양천향교, 소악루, 궁산, 양천고성터)
  8. 2017.07.18 백두대간 한복판에 뉘어진 신비의 탄산약수,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9. 2017.05.08 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10. 2017.04.21 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우이암,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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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문사동 바위글씨

▲  도봉산 (주능선, 자운봉)


 

봄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5월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서울의 북쪽 지붕, 도
봉산(道峯山)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데서 방긋거리던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점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 등을 넉넉히 사들고 무수골을 통해 도봉산의 포근한 품
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골 마을로 논까지 갖추고 있는 무수골을 지나 원통사계곡(
보문사계곡, 무수골 상류)을 오른다. 계곡은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즐비하고 수심이 얕
아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 계곡을 30분(무수골공원지킴터 기준)
정도 오르면 우이암(관음봉) 밑에 자리한 원통사(圓通寺)에 이른다.

원통사는 관음성지로 일컬어지는 우이암(관음봉)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관음도량(觀音
道場)으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후기 정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짐) 절은 오래되긴 했으나 건물은 죄다 20세기 이후 것들이라 고색의 기운은 말
라버렸으나 대신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사찰 중 북한산(삼각산) 일선사(一禪寺) 다음으
로 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서울 사찰 조망 부분 2위임)
약사전(藥師殿) 거북바위에 깃들여진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뒤엎기 전, 여기서 기도를 했는데, 그 마지막 날,
하늘나라의 상공(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여 그것을 기
리고자 조선 말에 이곳을 찾은 사대부가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원통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10여 분 정도 각박한 산길을 올라 드디어 우이암(
관음봉) 서쪽 봉우리에 이르렀다. (우이암 이전의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
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다.
그래서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과 선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
(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
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크고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바라보인다.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
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암벽 등반을 위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으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불교 성지로 격하
게 추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라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남아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
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
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과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 동쪽 자락 등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무려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햇님, 별님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
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가 추가로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
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
을까? (현실은 시궁창 인생 ㅠㅠ)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하여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더듬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
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
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으로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이보다 좋은 정
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자리를 털고 우이암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의 위엄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  우이암능선과 문사동계곡(問師洞溪谷)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우이암을 중앙으로>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
듬히 기대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
댄 모습으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 누님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비뚤어진 주장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
의 눈이 비정상임을 보여준다. 빠른 시일 내에 제 이름을 회복한다면 우이암능선도 관음봉능
선으로 이름을 갈아야 될 것이다.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광진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무수골 등)

▲  우이암능선 조망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조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 위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되며,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북한산 북쪽 능선(상장봉)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우이암능선분기점이다. 여기서 직진하면 지붕
길을 따라 칼바위, 오봉, 도봉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동쪽은 보문능선으로 도봉산 종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쪽은 우이령(牛耳嶺)으로 이어지나 금지된 길인 비법정 탐방로이다. 그러
니 도봉산의 건강을 위해 아예 가지도 말자~~!
우리는 목적지인 우이암(관음봉)을 찍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붕길을 고집하지 않고 쿨하게 보
문능선으로 내려갔다.


▲  보문능선에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

▲  산악신앙의 현장,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돌탑으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  경쾌하게 몸을 푸는 문사동계곡 상류

내려가는 길이긴 하지만 느낌상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 산길에 연두연두하게 익은 나
무들과 진달래 등의 봄꽃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산바람이 종종 스쳐가며 조금씩 꿈틀거리는 땀
의 기운을 털어간다. 보이지 않던 계곡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살짝 다가와 낭랑한 물소리를 들
려준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상류로 전날까지 넉넉히 내린 봄비로 인해 물이 아주 넘쳐 흐
른다.

문사동계곡은 무수골(원통사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
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사동계곡이 단연 갑(甲)으로 상류 부분은 작고 조촐한 모
습이라 두드러지는 풍경은 별로 없지만 속세로 내려갈수록 일품 풍경이 펼쳐져 두 눈을 제대
로 호강을 시킨다. 주름지고 잘생긴 바위와 벼랑은 물론 폭포도 여럿 나타나 산행의 여흥을
제대로 돋구며 특히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과 구봉사 주변이 최고의 절경으로 꼽힌다.
이 계곡은 용어천계곡과 합쳐져 도봉계곡으로 간판을 바꾸며, 도봉역에서 무수골에서 나온 무
수천과 하나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다시 한강으로 흘러간다. 문사동은 도봉계곡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동천(道峰洞天)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밑에 도봉서원이 자리해 있어서
서원 유생과 선비들의 피서지로 명성을 누렸다.


▲  문사동(問師洞) 바위글씨

문사동계곡의 이름표인 문사동 바위글씨는 하늘을 향해 약간 고개를 든 바위 피부에 깃들여져
있다. 문사동이란 '스승을 모시는 곳','스승에게 묻는 곳'이란 뜻으로 도봉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스승과 함께 학문을 논하거나 경치를 즐기거나 팔자좋게 탁족(濯足) 등의 피서를 즐
겼던 현장이다. 그래서 계곡 이름도 교육에 걸맞게 문사동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바위글씨는 초서체(草書體)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가 조금 까다로운데,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글씨 크기는 41x16cm으로 예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바위글씨전' 포스
터에 절찬리에 실렸던 명필이기도 하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도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후기에 서원 유생이 남긴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글씨 주변은 문사동계곡에서 가장 아
름다운 절경을 자아내고 있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  가까이서 바라본 문사동 바위글씨의 위엄
동(洞)은 그런데로 알아보겠는데, 나머지 글씨는 진짜 해독 불가 수준이다.
(초서체 글씨들이 그런 경향이 큼)

▲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풍경

계곡이 흘러가는 글씨 건너편에는 주름진 폭포와 벼랑이 펼쳐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이
런 절경에는 늘 신선(神仙) 전설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는 없는 모양이다. 하긴 고리타분한
유생들이 지겹게 찾아와 쓸데없는 사상 논쟁이나 일삼고 있으니 신선 형과 선녀 누님들도 딱
히 오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  층층이 주름진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폭포

▲  문사동계곡 마당바위 갈림길
이곳에서는 자운봉, 윗마당바위(천축사 윗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  도봉산 마무리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  문사동계곡 중류

문사동계곡의 절경은 도봉계곡까지 연거푸 이어진다. '과연 도봉산 3대 계곡의 위엄이 전혀
녹슬지 않았구나' 감탄사를 마구 쏟아내며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지고 말았다.
대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절경, 그 절경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장으로 감히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무례가 아닐까? 아무리 좋은 단어를 마구마구 갖다붙여도 이곳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
을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그냥 '와~~!' 탄성만 자아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  문사동계곡 중류 (보문능선, 성불사입구)

계곡을 옆구리에 낀 넓적바위가 지나가는 산꾼을 유혹한다. 아직 봄이니까 그냥 지나쳤지, 한
여름이었다면 정말 뿌리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온몸으로 풍덩은 하지 않더라도 냄새가 모락
모락 나는 두 발을 꺼내들고 계곡을 휘저으며 피서삼매를 즐겼을 것이다~~!


▲  돌과 계곡이 어우러진 문사동계곡 중류 (성불사입구 부근)

▲  문사동계곡 서광폭포
폭포가 귀신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굉음을 울리며 굵은 명주실 같은
하얀 물줄기를 뽑아낸다. 그렇게 내려온 폭포수는 폭포 밑에 닦여진
담(潭)에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긴 여정을 떠난다.

▲  옆에서 바라본 서광폭포의 위엄
폭포의 높이는 5m에 불과하지만 그 매력과 위엄은 어느 폭포 못지 않다.

▲  폭포가 여러 겹으로 펼쳐진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서광폭포를 지나면 구봉사(龜峰寺)라 불리는 절집이 나온다. 법당인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요
사(寮舍), 범종각, 커다란 금동미륵불을 지닌 조그만 현대 사찰로 이 주변이 '문사동' 바위글
씨 주변과 함께 문사동계곡의 대표적인 흥미거리로 꼽힌다. 구봉사는 아마도 이들의 후광을
단단히 보고자 이곳에 둥지를 튼 모양인데, 층층이 이루어진 암벽에 키 작은 폭포가 여러 개
걸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꽤 청아하다.


▲  주름진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이 주변 바위에 가득하다. 그만큼 도봉산도 늙었다.

▲  문사동계곡과 연등이 둘러진 산길 (구봉사 주변)
나무와 꽃들이 급하게 흐르는 계곡을 천연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  온갖 바위들이 재주를 부리는 문사동계곡 산길 (금강암 주변)

▲  연등이 허공을 가르는 금강암 주변 문사동계곡

구봉사에서 1굽이를 지나면 비구니 절집, 금강암(金剛庵)이 마중을 한다. 이곳 역시 구봉사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그곳을 지나면 천축사와 포대능선, 자운
봉에서 내려오는 산길과 합쳐져 사람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길은 더욱 수월
해져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터에 이른다.

도봉서원(道峰書院)은 서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이곳에는 원래
도봉산에서 가장 잘나갔던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으며, 조선 말
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것을 임시로 단을 설치해 봄과 가을에
제를 지냈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972년 사당인 정로사(靜老祠)와 신문(神門)을 복원
했으나 왕년의 1/4도 안되는 규모였다. 허나 서울 유일의 서원이라는 큰 매력 덕분에 서울시
가 39억의 돈을 들여 2011년 기존의 건물을 밀어버리고 2014년 완공을 목표로 복원 공사에 들
어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옛 영국사 시절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불교계와 이해관계가 제대로 얽히게
되었고, 그때까지 지어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계속 허전하게 터
만 남은 상태이며, 터 일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언제 복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유교 쪽도
그렇고 불교 쪽도 영국사 복원을 계속 우기고 있는 실정이라 졸지에 뜨거운 감자가 되버렸다.
괜히 벌인 복원공사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  거친 물살의 희롱을 받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터에서 잠시 앞 계곡(도봉계곡)을 살펴보자. 그러면 계곡에 반쯤 잠긴 바위에 새겨진
고산앙지 바위글씨가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 고산앙지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하여 김
수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서원이 조광조
를 배향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 글씨는 특이하게도 계곡물의 영향을 받는 자리에 새겨져 있어, 계곡 수량에 따라 보이는
범위가 천차만별인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물에 잠겨 있어 심한 가뭄이 아닌 이상
은 보기가 참 힘들며, '앙(仰)'은 물이 많으면 역시나 보기가 힘드나 보통 때는 절반에서 1/3
정도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갔을 당시는 수량이 풍부해 '앙지' 2자는 강제 잠수 중이었다.
물의 희롱을 받는 '앙지'와 달리 '고산(高山)' 2자는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살을 즐기고 있는
데 '산(山)'이 마치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
가 새겨진 시기<경진 칠월(庚辰 七月)>가 쓰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이것 외에도 여러 바위
글씨들이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으니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도봉계곡과 문사동계곡 일대에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
수증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
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월 도봉서원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로 지정되었다.

* 도봉서원과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동문(道峰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서원터에서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를 간직한 광
륜사(光輪寺)가 나오고 여기서 다시 2분 정도 가면 도봉탐방지원센터 부근 큰 바위에 깃들여
진 도봉동문 바위글씨가 마중을 한다.
이 4자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 받던 조선 중기 문인이자 멸망한 명(明)나라에 과한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인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전
한다. 도봉동문이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유명 문인이 쓴 글씨라
그런지 필체가 요란하게 율동을 부린다. 도봉서원 단골 고객 중에는 송시열도 있었다.


▲  저녁으로 먹은 삼겹살쌈밥의 위엄

도봉산 종점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17시가 되었다. 모락모락 김이 풍기는 저녁 밥에 곡차(穀茶
) 1잔이 그리워질 시간이라 산행 뒷풀이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종점 부근에 있는 쌈밥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고기를 겯드린 쌈밥집으로 우리는 삼겹살 쌈밥을 먹었는데, 삼겹살과 콩나물, 계란찜
, 무채, 김치, 된장찌개를 비롯해 상추, 양배추, 깻잎 등이 푸짐히 쏟아져 나왔다. 밥은 처음
에는 조금 주었으나 필요한 경우 더 제공해준다. 이들을 밥에 버무려 비빔밥처럼 해먹으면 되
며, 상추와 양배추에 노릇노릇 익은 삼겹살을 1점 넣어 쌈을 싸먹어도 된다. 이런 풍성한 찬
에 곡차가 없으면 안되겠지? 하여 막걸리를 시켜서 2병 정도 겯드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
봉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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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 예천 삼강주막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천하 해방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이틀 일정으로 강원도 내륙과 충북 동부, 경북 서북부 지역을 돌았다.
강원도 홍천과 평창, 영월 지역을 둘러보고 충북 땅으로 넘어가 내 시골인 단양(丹陽) 외
가쪽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사촌들과 늘어지게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찾은 시골
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넘기고 아침 10시에 콩
볶듯 길을 나섰다.

간만에 단양에 왔으니 단양 명소는 1곳 가줘야 서운함이 덜하겠지? 하여 단양팔경의 일원
인 사인암(舍人岩)을 둘러보고 바로 경북 땅으로 넘어갔다. 사인암에서 방곡을 거쳐 남쪽
으로 내려가면 바로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어진다.

경북으로 갈아타면서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한때 천하의 주목을 격하게 받았던 삼강
주막을 가기로 했다. 그밖에 예천 명봉사(鳴鳳寺)와 문경 김룡사(金龍寺) 등도 뜨겁게 거
론이 되기는 했으나 이미 절을 여럿 들린 터라 바로 삼강주막으로 총알처럼 이동했다.
(강원도와 단양 사인암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이 땅에 마지막 옛날 주막, 이제는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한
삼강주막(三江酒幕) - 경북 지방민속문화재 134호

낙동강(洛東江)과 내성천(乃城川), 금천 3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예천 삼강(三江)포구에 이 땅
의 마지막 전통 주막으로 추앙받고 있는 삼강주막이 있다. 지붕과 집이 온통 누런 피부로 이
루어진 초가(초가집)로 싸리나무 담장으로 둘러진 초가가 진짜 삼강주막이며, 나머지는 예천
군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격하게 띄울 때 새로 닦아놓은 것들이다.

삼강포구(삼강나루)는 안동과 의성, 청송, 군위, 영천, 대구, 경주, 울산 등 경북 내륙과 경
남 동부 지역에서 서울로 갈 때 거의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니 일찌감치 교통 요충지로 성
장하여 상인과 나그네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장터가 발전했다. 청운(淸雲)의 꿈을 가지고 과거
를 보러가는 영남 선비들도 적지않게 삼강나루의 신세를 졌으며, 양반과 선비, 상인(보부상),
뱃사공, 농사꾼 등 다양한 계층이 자리를 비비며 국밥과 술을 먹고, 주막 방에서 같이 자고,
배를 타던 현장이다. 삼강주막은 바로 그런 삼강나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지어진
주막의 하나이다.

삼강주막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 땅의 흔한 초가이다. 물론 그 건물이 있기 전부터 주막은
쭉 있었다. 주막의 규모는 조그만 초가 1동이 전부로 방 2개와 툇마루 1개, 부엌을 갖춘 집약
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변소는 바깥에 따로 설치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흔
한 초가이지만 이 땅에 유일한 옛 주막으로 어마어마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 자료로
도 아주 휼륭한 존재이다.

삼강나루를 거쳐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거나 하룻밤 머물면서 주막의 가치를 반질반질
하게 해주었고, 마르지 않고 쏟아지는 손님들로 주막 주인은 삽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번
영을 누렸다. 또한 삼강나루에 있던 장터와 다른 주막들도 다 같이 번영을 누리며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큰 홍수로 삼강나루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다른 주막과 건물은 죄
다 떠내려가고 오로지 이 주막만 살아남아 이곳의 유일한 주막으로 독점을 누렸다.

1940년대 후반,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酒母)라 불리는 유옥연 할머니(1917~2005)는 이 주막
을 인수했다. 그때 그의 나이 30대, 1940년에 남편을 여윈 그녀는 2남2녀를 키우고자 주막 경
영에 뛰어든 것이다.
이곳이 교통 요충지라 목이 좋고 음식 솜씨도 뛰어나 강에 다리가 놓이기 이전까지는 그런데
로 먹고 살았다. 허나 시대가 격하게 흘러 1980년대에 다리(삼강교)가 생기자 사람들의 발길
은 95% 이상 끊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주막과 동고동락하던 나룻배는 망했고, 주막 역시 경영에 영원한 빨간불이 켜지면
서 크게 궁색한 처지가 된다. 기껏해야 동네 단골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의 전
부가 담긴 주막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주막은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업
종을 전환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이 땅의 마지막 주모로 60여 년을 살다가 2005년
10월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그때서야 강제로 주막을 놓게 된다.

주인이 가고 없는 주막은 자연히 폐가로 버려져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으나 이곳의 가치를 뒤
늦게 깨달은 예천군에서 2007년에 이곳을 인수해 예전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주막을 운
영할 주모를 공개적으로 선별해 인근 마을에 사는 권씨 할머니가 주모로 뽑혀 유옥연 할머니
의 뒤를 이었으나 군청과 마을과의 갈등으로 지금은 예천군에서 삼강마을에 위탁을 맡겨 마을
에서 공동 운영한다.

옛 주막은 아직 쓸만하지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고, 건물이 협소해 주막으로 활용
하지 않고 그냥 문화유산 관람용으로 두었다. 주막 뒷쪽에는 500년 묵은 회화나무가 예나 지
금이나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주막 주변에 초가(1930년대 홍수로 사라진 사공과 보부상숙
소도 재현함)와 원두막을 잔뜩 지어 주막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주막 음식은 새 집에 들
어가서 먹어야 된다.
주막 앞에는 누런 흙이 곱게 입혀진 뜨락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조촐하게 돌담길이 재현되
어 정겨움을 더한다. 이는 예천군에서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키우면서 달아놓은 것이다. 그만
큼 이곳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열렬한 홍보와 투자 끝에 이제는 회룡포(回龍浦)와 더불어
예천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으며, 하루 방문객 수는 주말 기준 최대 300~400명 정도 된다.
하지만 너무 겉모습과 상업주의에 열중한 나머지 주막의 구수한 맛이 변질되어 '옛날 주막 분
위기가 안난다','너무 돈장사가 아닌가?','완전 민속촌을 재현했다' 등의 쓴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어떤 신문은 이곳에 있는 청량음료 자판기를 두고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나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맛도 그런데로 괜찮고, 가격도 적당하다고 본다. 또한 두부와 도
토리묵, 막걸리, 칼국수 등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며, 주말에 찾을 경우 엄청
나게 밀려드는 사람들로 좀 어수선하기는 해도 옛 주막을 바탕으로 소소하게 전통의 장을 만
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원래부터 주막이었고, 주막 주변은 장터였기 때문이다. 게다
가 주막 남쪽에 자리한 삼강마을은 삼강주막마을로 이름을 바꾸고 전통체험과 농촌체험, 민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삼강주막을 중심으로 매년 9~10월에 3일 일정으로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를 벌이고 있
는데, 막걸리 마시기, 막걸리와 전통음식 전시/판매, 공연과 가요제, 민속놀이 체험, 예천군
특산물장터, 사진/그림 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 삼강주막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리길 27 ☎ 055-655-3132)
* 삼강주막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강주막 동쪽에 재현된 누런 돌담길
푸른 대나무까지 머금고 있으니 그 풍경이 참 정겹기 그지 없다.
이 돌담길은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꾸미면서 닦여진 것이다.

▲  온통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삼강주막 관광지

▲  초가 원두막 2채와 삼강주막(오른쪽 초가)

주모 할매가 방이나 부엌에서 튀어나와 '술 한잔 들고 가이소~!','국밥 1그릇 들고 가이소~!'
할 것 같은 삼강주막, 옛 주모가 가고 없는 삼강주막은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옆에 재현된 후
배 초가들에게 그 짐을 넘겼다.
솔직히 기존 주막을 손질하여 그 방이나 툇마루, 마당에 놓인 상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
람을 벗삼아 술 1사발, 국밥 1그릇을 섭취해야 진정한 옛 주막 멋이 날 것인데, 지방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임)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그것까지는 싫었던 모양이
다. 그러다보니 툇마루와 주막 방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오로지 부엌만 들어갈 수 있어 완
전 금지된 주막이 되어 버렸다.

허나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 가운데 식당이나 민박, 전통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는 집들이 적지
않다. 삼강주막은 길어봐야 100여 년 정도 되었고, 근래 손질을 하여 거의 새집처럼 되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눈요깃감으로 둘 것이 아니라 주막 체험용으로 좀 바쁘게 굴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만 집이 좁기 때문에 보조용 초가를 여럿 두어 수용 공간을 늘리고, 음식 조리는
보조용 초가나 조리 공간을 두어 처리하면 될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삼강주막과 회화나무

▲  낙동강 둑에서 바라본 삼강주막


▲  구수한 모습의 삼강주막 툇마루
삼강나루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저 좁은 툇마루와 방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삼강주막 부엌
연기에 그을린 검은 때가 삼강주막의 왕년의 위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밥과 국을 끓이던 쇠솥은 무심하게 내려앉은 먼지의 눈치를 보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벽화처럼 자리한 삼강주막의 백미, 외상결재장부

삼강주막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이 있다. 바로 부엌과 바깥 흙벽에 새겨진 외상결재장부이
다. 장부라고 해서 종이에 쓰인 것은 아니며, 그 흔한 한글과 한자, 숫자도 없다. 세로와 가
로로 그어진 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여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의 추상화나
문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옛 주모인 유옥연 할매의 작품으로 그는 글자를 모르던 까막눈이라 자신만의 전용 글
자를 만들어 이렇게 외상장부를 작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단골 외상 손님은 늘 있는 법이라
그들의 편의를 위해 벽에 그만의 표시법으로 장부를 만들어 손님을 관리했으며, 외상을 했을
경우 세로로 줄을 긋고, 외상값을 치룬 경우에는 가로로 줄을 그었다. 줄은 불쏘시개를 이용
해 흙벽에 그었다. 허나 세로줄만 있고 가로줄이 없는 것도 적지 않아 외상값을 다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글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주모 할매의 깊은 뜻과 철학, 외상 손
님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깃들여져 있다.


▲  부엌에 빼곡히 새겨진 외상결재장부 ▼


▲  주막 밖에 차려진 재래식 변소
삼강주막은 건물이 작기 때문에 싸리나무 담장 밖에 따로 변소를 두었다.
현재 변소는 무늬만 남은 상태~~ 변을 보려면 주막 외곽에 설치된
현대식 변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  주막 밖에 덩그러니 놓인 들돌

변소 뒷쪽에는 '들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돌로
여겼으나 옆에 있는 들돌의 유래 안내문을 보니 180도 달라 보인다.
들돌이란 일종의 성인식 도구로 옛날 농촌의 남자 아이들이 성장하여 농부(어른)로 인정을 받
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즉 10대 중반에 저 돌을 들어야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돌의 무게는 10~20kg 정도 될 것 같은데, 성인식 도구치고는 좀 무겁고 거친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농촌에서 살려면 힘을 써야 되는 일이 1~2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또한 삼강나루는 사람과 물류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그에 따라 물건을 나를 인력이 많이 필요
했다. 그래서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정했다고 한다. 돌을 완벽하게 들면 좀
많이 받고, 못들면 그냥 아웃, 중간 정도 들면 중간 정도 품삯을 받았다. 이 돌은 삼강주막과
더불어 이곳에 전하던 오래된 유물로 겉보기와 달리 역사적 값어치가 충분하다.


▲  삼강주막의 오랜 벗, 회화나무 - 예천군 보호수 11-27-12-23호

강주막 뒷쪽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삼강주막의 오랜 터줏대감
이자 이곳의 듬직한 정자나무인 그는 약 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197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추정 나이가 약 450년> 높이는 20m 정도 되며, 그 북쪽에는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이 있
다.


▲  강바람만 가득한 낙동강 삼강나루터 (오른쪽 다리가 삼강교)

강주막 뒷쪽 둑방을 오르면 잃어버린 땅(북한, 요동반도, 만주, 연해주, 왜열도 등)을 제외
한 이 땅에서 가장 긴 강, 낙동강이 도도한 물결을 드러낸다. 이곳이 바로 삼강주막의 든든한
밥줄이자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인 삼강나루터로 문경에서 내려온 주흘산맥(主屹山脈)
과 안동에서 온 학가산맥(鶴駕山脈), 그리고 멀리 대구에서 올라온 팔공산맥(八公山脈)의 끝
자락이 만나며,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명도 3개의 물줄기가
만난다는 뜻의 '삼강'이 되었다.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상도에서 서울과 중부지방으로 이동할 때 거쳐가던 길목으
로 이곳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한 소금배가 이곳까지 올라와 교류를
했고, 서울과 대구(大邱)를 잇는 군사도로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그런데로 성
황을 이루었다. 나룻배는 2척을 굴렸는데, 큰 배는 주로 가축과 화물을, 작은 배는 사람을 수
송했으며, 장날에는 밀려드는 수요로 최대 30회 이상을 운행했다.
허나 현대화의 거친 물결과 어미도 몰라보는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불어닥치면서 1980년대
나룻배를 대체할 삼강교가 강 위에 놓이게 된다. 그로 인해 나룻배는 밥줄이 끊겨 사라지고
삼강나루의 영광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며 겨우 삼강주막만 남아 나룻터를 지켰던 것이다.

2007년 이후 쓰러진 삼강주막이 복원되고, 이곳 일대가 예천군의 야심 속에 관광지로 부상하
면서 2013년에 체험학습용으로 나룻배 1척을 장만해 나룻터에 띄워놓았다. 하지만 내가 찾았
을 때는 배는 움직이기는 커녕 늦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봄이 천하를 완전히 해방
시킨 이후에 움직일 모양이다.

▲  삼강나루를 한방에 보내버린 삼강교

▲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 물줄기


▲  삼강주막 옆에 재현된 보부상과 사공 숙소 초가집

삼강주막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초가들이 즐비하여 자칫 삼강주막의 오랜 일원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근래에 닦아놓은 것들로 삼강주막을 너무 말끔히 손질을 한 탓에 기존 주
막과 새 초가가 서로 비슷한 모습과 피부를 지니게 되어 서로 구별이 가질 않는다.

새 초가 가운데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라 불리는 초가가 있다. 원래 1900년대에 지어진 숙
소가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가고 사라진 것을 2008년에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삼강주막과 비슷한 구조로 지었다. 허나 이곳에는 더 이상 보부상과 사공이
없어 그 이름과 달리 현역에서 물러난 삼강주막의 역할을 대신하여 밥과 술을 먹는 길손들이
이용한다.


▲  주막으로 쓰이는 조그만 초가 (방 안에서 음식 섭취 가능)

▲  내부가 비어있는 초가 창고

삼강주막을 둘러보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점심도 아직 들지 못한 상태이고 그 유명한 삼강
주막에 발을 들였으니 주막 밥은 한번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하여 파전과 두부, 도토리묵, 잔치국수, 소고기국밥을 두루두루 시켰다. 다만 차량을 가
져왔기 때문에 아쉽지만 막걸리 등의 곡차(穀茶)는 섭취하지 않았다.

이곳이 주막이긴 하지만 사극처럼 시골 아낙네들이 옛 복장을 입고 머리를 딴 주모가 밥이나
술상을 갖다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자. 그런 주모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주막 초가들 한쪽에
음식을 조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을 해야 되며, 음식이 나오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먹으면 된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서
야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는 음식을 들고 비어있는 초가로 들어가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곡차가 없어 아쉽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라 음식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고, 가격도 시중과 거의
비슷하거나 저렴한 편이다. 시장한 점심 기운을 잠재우고자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니
많아보였던 음식들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송송(깍두기)도 밥도둑이
따로 없어 그것 마저 동이 났다. 역시 금강산은 식후경(食後景)이다.


▲  삼강주막에서 먹은 음식의 위엄
두부와 도토리묵, 파전, 잔치국수, 소고기국밥


아직 해가 중천이라 다음 답사지를 물색하다가 속리산(俗離山) 동쪽에 숨겨진 폭포를 찾기로
하고 인절미를 약간 구입해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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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서 제일 큰 청동좌불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천안 태조산 각원사 ~~ (태조산 성불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천안 태조산 각원사~성불사 '

▲  각원사 청동좌불상


 

겨울이 무르익어가던 12월 중엽, 친한 후배들과 충남 제일의 도시인 천안(天安)을 찾았다.
천안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청동대좌불로 유명한 각원사로 태조산(421m)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태조산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이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태조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전 9시 반에 방학역(1호선)을 출발, 중간중간에 후배들이 합류하여 12시가 지나서 천안
역에 도착했다. 그 장대한 거리를 후배들과 수다를 떨며 가니 체감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
다.
천안역에 이르러 태조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천안시내버스 24번(각원사↔동우아파트)을 타
고 20분 정도를 더 들어가 각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각원사(覺願寺) 입문 (203계단, 청동좌불상)

▲  각원사 밑에 자리한 연화지(蓮花池)

시내버스가 바퀴를 돌리는 각원사 종점 주변은 각원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각원사는 법등(法燈)를 켠지 겨우 4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천하
제일의 청동불상으로 1980년대부터 유명세를 타면서 신도와 관광객, 답사객들이 구름처럼 몰
려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절 밑에 자연히 식당이 들어서고 조촐하게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주말과 휴일이면 관광버스가 족히 100대나 줄을 이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그날은 평일
이라 찾는 이도 별로 없어 식당들도 절간처럼 한산하다. 그런 식당촌을 지나면 절 밑에 형성
된 연화지란 호수가 나온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워놓은 눈과 얼음으로 호수 또한 고요하기
그지 없는데, 그런 호수를 반바퀴 돌면 경내로 인도하는 203계단이 중생의 기를 죽인다.


▲  겨울이 씌워놓은 굴레를 뒤집어쓰며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는 연화지

▲  시작부터 중생의 기를 단죄하는 203계단 <무량공덕(無量功德) 계단>

연화지에서 각원사로 가는 길은 2가지가 있는데, 203계단을 오르면 바로 청동대불(청동대좌불
)로 이어지며 잘 닦여진 2차선 길을 따라가면 각원사 경내로 통한다. 어느 길로 가든 청동대
불과 경내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가면 되지만 기왕 왔다면 203계단으로 올라가 청동대불과 경
내를 둘러보고 2차선 길로 내려오는 것을 권한다. 마치 하늘에 닿은 듯, 장대하게 펼쳐진 203
계단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3계단은 '무량공덕 계단'이라 불리며, 1977년 11월에 조성되었다. 절에서 많이 애용하는 숫
자인 108보다 95가 더 많으니. 이는 108번뇌 소멸 기원 계단, 아미타불의 48가지 소망을 기원
하는 계단, 관세음보살의 32가지 화신(化身)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32응신(應身) 계단, 속세를
살아가는데 맺어지는 12인연 계단, 불(佛)/법(法)/승(僧) 3보(三寶)에 귀의하는 3도(三道) 계
단을 모두 합쳐 203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계단을 오름으로써 이들을 모두 누리는 셈이 된
다.


▲  203계단을 오르면 청동대불로 인도하는 돌길이 나온다.

'저걸 언제 다 오르나?' 계단의 미친 압박에 주눅부터 진하게 든다. 허나 계단은 누구나 오르
기 쉽게 규칙적으로 놓여져 있어 그리 힘든 건 없다. 속세살이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
르다보면 금세 계단 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희열에 잠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
다.
계단 정상에 이르면 돌이 깔린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지나면 광장처럼 넓은 길이 나오면서 청
동대불이 서서히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낸다.


▲  남북통일기원 대불봉안공덕비(南北統一祈願 大佛奉安功德碑)
청동대불이 완성되자 그 기념으로 불상 서북쪽에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공덕비를 세웠다.

▲  이보다 큰 좌불상은 없다 ~ 각원사 청동대불<靑銅大佛, 청동대좌불>

경내 북쪽에 위엄 돋게 자리한 청동대좌불(청동대불)은 각원사의 상징이자 든든한 밥줄로 천
안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각원사가 크게 유명세를 탄 것도 바로 이 청동대불 때문으로 1975년
4월 김영조(金永祚)를 비롯한 많은 중생들의 시주와 남북통일의 염원을 받아 조성하기 시작하
여 2년에 인고 끝에 1977년 5월 9일에 완성을 보았다.

불상 조각은 홍익대 교수 최기원(崔起源)씨가 담당했는데, 신라 불상의 정수로 추앙받는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모델로 삼았으며, 높이 15m, 몸무게 60톤, 귀 길이 175cm, 손톱
길이 30cm, 그가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의 원 둘레만 30m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좌불상
으로 손꼽힌다. 불상 안에는 부처의 사리와 불교 서적, 불상 조성에 돈을 낸 100만 명의 이름
이 들어 있으며, 불상 재질이 매우 우수하여 수명이 족히 1만 년은 갈 것이라고 한다.
비록 4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불상이지만 고색의 때가 조금은 피어나 겉 연령은 200년 이상은
들어보이며, 앞으로 70~80년 정도가 지나면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여 국가 중요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집을 좋아하는 편이
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제외하고는 현대 사찰에 대한 관심은 다소
야박한 편이다. 그럼에도 고색의 기운이 채 피지도 못한 각원사를 찾은 것은 바로 이 청동대
불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위엄

불상의 정체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그래서 서방정토가 있
다는 서쪽을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불상이 얼마나 큰 지 불상 주변을 돌
아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점처럼 보인다.


▲  밑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아찔한 위엄
내 키가 크다 한들 그에게는 고작 귀 크기에 불과하고 내가 아무리 손톱을
게을리 관리한다 한들, 그의 손톱 길이의 1/60도 안된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그의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

◀  청동대불의 늠름한 뒷모습

    ◀  청동대불을 지키는 설법전(說法殿)
청동대좌불 북쪽에 자리한 설법전은 1978년에
지어진 것으로 청동대불을 관리하며 대법회
등의 행사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건물 내부에
는 공양 물품을 파는 가게와 의자를 갖춘 쉼
터가 있다.


 

♠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천안12경의 하나,
각원사(覺願寺) 둘러보기

▲  청동대불에서 바라본 각원사의 설경

천안의 진산인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둥지를 튼 각원사는 1975년 4월에 경해법인(鏡海法印)이
창건했다. 법인은 1931년 9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1946년 10월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6.25가 터지자 해인사에 머물며 절을 지켰고, 1950년 10월 경주로 탁
발을 나갔다가 석굴암에 잠시 들려 본존불에게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큰 도량을 짓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후 세상이 조금 진정되자 불교와 문학 공부에 박차를 가해 마산 해인대학 문학과와 종교학
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사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거쳐 1967년 9월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69년에 왜열도로 넘어가 대동문화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 들어갔으며, 1972년 11월 낡은 다다미방을 구해 '해동선원'을 개원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오사까에서 사업을 하는 재일교포 부부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김영조<金
永祚, 법명은 각연(覺然)>와 정정자<鄭貞子, 법명 자연심(自然心)> 부부로 김영조씨가 당뇨병
으로 고생을 하자 법인을 찾아와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
법인의 지도 아래 100일 관음기도를 올리니 2~3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건
강을 거의 회복했다. 이에 김영조는 고마움의 뜻으로 동경(東京)에 절을 하나 마련하여 그에
게 주었고, 절 이름은 그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명월사(明月寺)라 하였다. 그런데 법인이 그
절을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총무원에 재산 등록을 해버리자 김영조는 크게 아쉬워하며
'귀국할 때 명월사를 팔고 국내에 절을 지으십시요' 충고를 했다. 이에 법인은 '명월사가 개
인 재산이 아닌 재일동포의 안식처로 남았으면 합니다'
답을 하니 김영조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기가 돈을 댈테니 고국에 큰 불상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바로 귀국하여 마땅
한 자리를 물색하다가 태조산 자락이 명당이라 그곳에 각원사를 세웠고, 곧바로 청동불상 조
성을 추진하여 1977년 5월 천하 최대의 좌불상인 청동대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청동대불로 각원사의 존재가 급격히 뜨자 예전 석굴암 본존불에게 고백했던 남북통일을 기원
하는 큰 도량의 꿈을 이루고자 현 주지승인 서대원과 함께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거대한 절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 불국사(佛國寺)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와 더불어 20세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큰 사찰이자 현대 불교의 성
지(聖地)로 격하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은 건평 200평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꼽히며, 2002년에는
각원사 불교대학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절을 크게 일군 법인은 각원사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에도 눈을 돌려 왜열도 야마구치현의 광명사(光明寺)와 미대륙 필라델피아에 관음사(觀音
寺)를 세웠으며, 각원사를 주지 서대원과 다른 승려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경 명월사에 들어
가 해외 포교에 주력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칠성전, 산신전, 천불전, 관음전, 경해원, 성종루, 개
산기념관, 영산전 등 10여 동의 굵직한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짧다보니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어나지 못했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산속에 제대로 묻혀 있어 산사(
山寺)의 고즈넉한 기운은 넉넉히 배여있으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천안12경의 제6경으로 손
꼽힌다. 또한 천안 시내와 가깝고 접근성도 양호하여 쉽게 안길 수 있는 점도 이곳의 큰 장점
이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도량이라 그럴까? 이곳에서 들리는 염불 소리가 통일을 애타게 부르짖은
이 땅의 소리 같다.

          ◀  각원사 칠성전(七星殿)
청동대불에서 경내로 내려가면 가장 먼저 칠성
전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1979년에 지어졌는데, 내부에는
칠성(七星)이 그려진 칠성탱(七星幀)과 나한상
(羅漢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흔한 칠성각(
七星閣) 대신 그보다 1단계 높은 칠성전을 칭
하고 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  색채가 고운 칠성탱과 그 앞에 줄지어 앉은 다양한 색채의 나한상들

▲  각원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칠성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대한 규모의 대웅보전이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각원사의
법당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건평(建坪) 360평에 달하는 팔작지붕 집으로 이 땅의 목조 건
물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 건물을 짓고자 10여 년 동안 목재 100여 만 재를 구입하여 1992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34개의 주춧돌을 깐 다음 4년 동안 갈고 닦아 1996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내부
불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미리 조성되어 대웅보전 완공을 기
다리고 있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네모난 기단(基壇)은 높이가 거의 3m이며, 기단부터 건물, 닫집, 불상까
지 모두 청동대불 만큼이나 몸집이 대단해 대불에서 놀란 마음을 다시금 놀래케 한다.


▲  대웅보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이 고운 미소를 선보이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다.
관세음보살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들은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 대성자모(大聖慈母) 관세음보살이라 불린다.

         ◀  각원사 천불전(千佛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천불전은 원래 산신의
공간인 산신전으로 1979년 9월에 지어졌다.
2000년 10월 새로운 산신전이 옆에 완성되자
천불전으로 간판을 바꾸고 천불을 봉안했다.


▲  천불전 내부
커다란 석가불을 중심으로 조그만 석가불 1,000상이 그를 둘러싸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수놓는다.

▲  각원사 산신전(山神殿)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자 함일까? 지붕 밑에 날카롭게 고드름이 달려있다.


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산신전은 2000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현재 천불전이 산신전이
었다. 산신전은 우리의 토속신인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보통 각(閣)을 칭하기 마련이나 이
곳은 앞서 칠성전처럼 특별히 전(殿)으로 격을 높였다. 그만큼 산신과 칠성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뜻일 거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붉은 옷을 입은 산신과 동자(童子),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등장한다.

▲  반야원(般若院) 서쪽에서 바라본
경내와 태조산


▲  한 지붕 두 가족, 영산전(靈山殿, 1층)과 개산기념관(開山記念館, 2층)

반야원 옆에는 영산전과 개산기념관이 한 지붕을 이루고 있다. 돌로 이루어진 1층은 영산전으
로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나한이 봉안되어 있는데, 16나한도 아닌, 500나한도 아닌, 무
려 1,250나한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2층은 절을 개산(開山, 창건)
한 법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그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원사에서 나름 중요한 곳이지만
시간을 핑계로 그냥 통과하였다.


▲  이 땅에서 가장 큰 범종의 보금자리, 성종루(聖鐘樓)

2층 누각으로 장엄하게 이루어진 성종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이 담긴 공간으로 일종의 범종각이다. 그 흔한 범종각을 칭하지 않고 성종루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이곳 범종의 이름이 성종(聖鐘)이기 때문으로 1984년 5월에 조성된 20톤
짜리 종이다.
성종루는 1990년 4월에 지어진 것으로 329평 규모이며 이 땅의 범종각 계열 중 제일 크다. 그
러니까 각원사는 노천 청동대불과 목조 1층 법당, 범종각 등 무려 3가지에서 규모 부분 1등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1-3 (각원사길 245 ☎ 041-561-3545)
* 각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연화지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2차선 길

각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1시간이 뚝딱 흘렀다. 나름 열심히 살피긴 했지만 현대 사
찰이다보니 청동대불 외에는 그리 크게 관심이 가질 않았고 개산기념관 등은 그냥 빼먹고 말
았다.
그렇게 각원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태조산에 안긴 또다른 사찰, 성불사로 서둘러 길을 향했
다.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해가 많이 짧아졌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


 

♠  태조산에 안긴 오래된 절집, 성불사(成佛寺)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


▲  성불사 일주문(一柱門)

태조산에는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원사와 성불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그들은 비록 같은
태조산에 안겨있지만 서로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각원사는 역사는 매우 짧지
만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청동대좌불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불국사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규모도 크다. 반면 성불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지만 규모도 작고 한참 후배인 각원사의 위엄에 눌려 거의 존재감이 없어 보일 정도
이다. 하여 속인(俗人)들은 각원사를 많이 찾아오지 성불사는 별로 모른다.

각원사와 성불사는 직선거리로 불과 600m에 불과해 금방이면 도달할 듯 싶지만 안서e편한세상
1차, 2차아파트로 크게 돌아가야 된다. (산길이 있긴 하지만 자세히는 모르겠음) 그 거리는 약
2.5km, 도보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조금 편하게 가고 싶다면 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 정거
장 거리인 부경파크빌,안서e편한세상 정류장에서 내려서 800m 정도 올라가면 되지만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속 편하게 걸어가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성불사까지 도보로 이동했는데, 30분 정도면 갈 줄 알았더만 거의 40분 이상이 걸린다.
뉘엿뉘엿 무심히 사라지는 햇님에 부랴부랴 서둘렀지만 일주문에 이르니 땅꺼미의 농도가 90%
이상으로 진해져 더욱 긴장감을 타게 만든다. 야경 사진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불사는 경내와 멀리감치 떨어진 곳까지 일주문을 내려보내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겨울 제국
의 의해 지붕이 하얗게 변한 일주문 양쪽에는 코끼리상과 사자상이 자리하여 혹시 모를 속세의
불온한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 경내가 나올 듯 싶었는데, 아직도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 거리는 얼마 안
되도 거의 느긋한 길로 이루어진 각원사(203계단 제외)와 달리 죄다 오르막길이고, 절이 가까
워질 수록 경사가 더욱 흥분을 한다. 게다가 눈까지 두툼히 깔려있으니 걸음도 은근히 더딜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오르막 한굽이를 오르니 야외 공연장의 돌로 다진 객석 같은 석축이 장대하
게 펼쳐지고 그 위로 성불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야외 공연장 객석 같은 석축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성불사

▲  성불사 느티나무 (천안시 보호수)
경내를 코앞에 둔 경사지에 나이 800년을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겨울 제국에게 모두 털려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그의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려 봄의 해방군을 애타게 염원하는 것 같다.

▲  눈 지붕을 이룬 성불사 칠성각 (오른쪽)

▲  태조산의 옥계수를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성불사 샘터

느티나무에서 1굽이를 더 오르면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공양간 등을 모두 갖춘 4~5층 건물
앞에 이른다. 이제 비로소 경내에 이른 것이다. 각박한 경사를 이용하여 건물을 짓다보니 다층
건물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옆을 오르면 법당인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  성불사 요사/선방 옆에서 바라본 천하 (천안시내)

각원사와 더불어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안긴 성불사는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또는
목종(穆宗) 시절에 혜선국사(惠禪國師)나 혜조대사(惠照大師, 조선 태조 때라는 설도 있음)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다시 중건했으며,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이 창건될 당시(또는 고려 후기) 하늘에서 백학(白鶴) 1쌍이 날아와 대웅전 뒷쪽 바위에 앉
아 부리로 열심히 불상을 새겼다. 그러기를 49일째, 불상이 완연하게 모습을 갖추며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나뭇꾼의 인기척에 놀라 불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래
서 이를 부처의 계시로 여기고 절을 세웠는데, 불상을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성불사(成不寺
)로 했다가 뒤에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불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칠성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
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내음을 느끼게 한다. 또
한 성불사 자체는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30m 고지 가파른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제법 좋으며, 여기서 남쪽 능선을 통해 태조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  성불사 산신각(왼쪽)과 대웅전(大雄殿, 오른쪽)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금동석가3존불
이 봉안되어 있다. 좌우 협시불인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은 어여쁜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정작 3존불의 주인인 석가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자리에 없다.
하여 도난을 당했나 싶었으나 석가불의 빈 자리 뒷쪽에 창이 있는 것이다. 대웅전 뒷쪽에는 지
방문화재인 마애석가3존불이 있는데, 그 마애불이 바로 비어있는 자리의 주인, 즉 3존불의 중
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별도의 불상을 두지 않고 불단을 두는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비슷한
모습을 취했다.


▲  가운데 자리가 빈 대웅전 석가3존불 (왼쪽 지장보살, 오른쪽 관음보살)
비어있는 본존불 자리는 창 너머로 보이는 마애3존불의 것이다.

▲  대웅전 우측 벽에 걸린 빛바랜 영산회상도와 현왕탱(現王幀)
석가3존불 뒷쪽에 창을 내는 바람에 후불탱인 영산회상도가 우측 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옆에는 붉은 색채가 중심을 이룬 현왕탱이 자리해 있는데, 이들
그림은 빛이 좀 바랜 것으로 보아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보인다.

▲  성불사 마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대웅전 뒷쪽에는 고된 세월을 견딘 커다란 바위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의 꺼무잡잡한 피부
에는 마애석가3존불과 16나한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장대한 세월을 겪는 동안 무거운 상
처를 입으면서 간신히 형체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 어둠까지 깔리니 숨은 그
림을 찾듯 더욱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된다. (겨우 몇몇 상만 시야에 들어왔음)

바위에 새겨진 불입상(佛立像)은 돋음새김으로 새겼으나 바위의 절리현상으로 인해 얼굴과 신
체의 전면이 크게 절단이 났으며, 머리 꼭대기인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과 손의 형태, 옷무
늬 등은 고려 때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밑도리가 넓은 옷 밑으로 발가락이 선명한 오른쪽
발이 나와 있으나 왼발은 사라지고 없다.
바위 우측면 하단 중심에는 연화대좌가 있고, 좌우에 공양상(供養像) 또는 금강역사(金剛力士)
로 보이는 2구가 있다. 연화대좌 위에는 작은 연화대좌가 놓여져 있고, 거기에 석가불이 앉아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했으
며, 얼굴은 눈과 입이 크게 표현된 둥글넓적한 모습이다.

석가불 좌우의 협시보살과 16나한상은 손상은 심하나 서로 마주보는 모습과 수도하는 모습 등
각자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고, 나한상 주위 바위 면을 둥글게 파서 마치 감실(龕室)이나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성불사 마애불은 바위 한 면에 석가3존불과 16나한을 덩어리로 새긴 것으로 이 땅에서 거의 유
일한 케이스이며, 도식화(圖式化)가 덜 된 것으로 보아 14~15세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성불사 석조보살좌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86호

야외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 옆에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건물 이름을 까먹음..)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그만 석조보살좌상이 담겨져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성불사의 것이 아니었다. 1990년에 지금은 세종시로 간판을 바꾼 연기군 조치
원(鳥致院) 부근 대성천에서 준설공사를 벌이다가 발견된 것으로 신도들의 노력으로 이곳에 안
착을 해 성불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예전에는 종무소 안에 두었으나 근래에 그를 위
한 집을 지어 이렇게 집까지 가지게 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67cm, 어깨 넓이 34.5cm, 무릎 넓이 54.5cm로 등에 달린 광배(光背)의 윗부분이
깨져나가 붙여 놓았다. 오른쪽 무릎도 조금 깨진 상태이며, 무릎에서 오른쪽으로 가늘고 긴 균
열이 있어 조금씩 메워 놓은 상태로 거신광배(擧身光背)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옷주름은 굵으면서 매우 도식적이며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왼손은 배 밑에 두었다. 두
팔은 몸에 비해 길지만 가늘고 두 손은 작으며, 연꽃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관세음보
살로 여겨지지만 미륵불의 도상(圖像)으로 유행한 점도 있어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석불로 보이겠지만 보기 드문 형식의 석불로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성불사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8-8 (성불사길 144 ☎ 041-565-4567)


▲  강추위 앞에서도 향긋한 미소를 잃지 않은
풍만한 모습의 석조관세음보살좌상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와 일몰의 끝 모습
(성불사로 인도하는 고갯길과 천안시내)

햇님의 퇴근 본능에 쫓겨 서둘러 성불사에 들어와 잠깐을 방황하는 사이 시간은 18시가 되었다.
서서히 줄어드는 햇님의 흔적에 의지해 열심히 사진에 담았지만 역시나 신통치가 못했고, 머나
먼 수평선 너머로 햇님이 완전히 꽁무니를 감추면서 달님은 햇님의 나머지 흔적마저 지우며 천
하를 검게 태운다.
경내에 있는 문화유산은 모두 살펴보아서 다행이지만 눈이 적지 않게 깔린 상태라 칠성각 등은
접근도 하지 못했고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더 머물기도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춥고 배도 고프
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중요한 볼거리는 다 보았으나 이쯤에서 성불사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절을 내려갔다.

시간도 어느덧 저녁 시간이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밥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저녁을 어
디서 무엇을 먹을까를 두고 즐거운 고민을 벌이다가 각원사 밑에 줄지어 선 식당촌에서 해결하
고자 그곳으로 넘어갔다. 어느 집에서 먹을까 궁리하던 중, 그냥 장군도 아닌 무려 대장군(大
將軍)식당이란 위엄 돋는 이름의 식당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다. 태조산이란 이름
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양병했다고 해서 비롯된 것이다보니 그 밑에서 군권을 총괄하는 자리인
대장군을 식당 이름으로 삼은 모양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임에도 내부는 한산하다. 우리가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는 격하게 반
기며 방 안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처음에는 그냥 비빔밥 같은 것을 먹을까 했으나 날씨도 춥고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해 버섯전골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잠시 뒤 밑반찬이 정갈하게 깔리고 버섯전골이 등장한다. 전골이 뽀글뽀글 익자 국자를 이용해
전골을 퍼서 먹는데, 버섯전골이란 이름이 무색치 않게 버섯이 매우 많다. 거기에 소고기와 당
면, 두부, 갖은 채소가 버무려져 하나의 버섯전골을 이루는데 국물도 제법 얼큰하고 맛이 좋다.
전골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죄다 밥도둑의 자격이 충분하며,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
라 시장기까지 강하게 돋아있어 전골이고 반찬이고, 밥까지 거의 비워버렸다. 거기에 답사 뒷
풀이용으로 막걸리까지 겯드리니 황제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그렇게 저녁을 배불리 먹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소화도 시킬 겸 상명대 천안캠퍼스 남쪽까
지 걸어갔다가 천안시내버스 24번을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천안 태조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대장군식당에서 먹은 버섯전골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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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나주 불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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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회사 석장승
◀ 원진국사 부도
▶ 불회사 진여문과 사천왕문
▼ 불회사 대웅전

불회사 진여문, 사천왕문
   

 


 

겨울 제국이 천하만물의 격한 미움을 받으며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던 12월 첫 무렵에 따
뜻한 남쪽 땅인 전남을 찾았다. 그 전남에서 내가 격하게 반응을 보인 곳은 나주(羅州)의
유서 깊은 고찰 불회사이다. (불회사를 목적지로 정함)

오랜만에 햇님보다 일찍 부지런을 떨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을 뚫고 한강을 건너 영등포역
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호남의 중심지인 광주(光州)로 가는 첫 열차를 타고 5시간 가까
이를 달려 광주역에 두 발을 내리니 겨울 제국에게 점령된 북쪽과 달리 가을의 따스한 기
운이 나를 맞이한다.

광주역에서 불회사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접근성도 영 좋지가 않다. 예전에는
광주역을 비롯한 광주 도심부에서 불회사입구까지 바로 가는 나주시내버스가 있었으나 이
제는 남평에서 무조건 환승을 해야된다. (남평에서도 40~50분 정도 들어가야 됨)


 

♠  불회사 입문 (석장승, 원진국사부도)

▲  불회사 일주문(一柱門)

불회사입구에 이르니 웅장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나왔다. 문 현판에는 '초전성지 덕룡산
불회사(初傳聖地 德龍山 佛會寺)' 10글자가 쓰여있는데, 여기서 초전성지란 '불교가 처음 전
해진 성지'란 뜻이다. 이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66년에 창
건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땅 최초의 절이란 자부심을 담은 것이다. 허나 그 창건설은
그저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며, 실제 그가 불교를 들고 백제를 찾은 것은 384년이다.


▲  일주문 부근에 자리한 도암선사부도(道巖禪師浮屠)와 하얀 승탑

일주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승탑(부도) 2기와 비석 1기, 그리고 속세와 그들을 이어주는 돌다
리를 만나게 된다. 승탑은 돌다리보다 1단 높은 곳에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왼쪽 승탑이 도암선사의 승탑이다.

도암선사(1805~1883)는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중창했던 승려로 성은 차씨이다. 1817년 백양
사 심옥(心沃)에게 출가하여 1827년 인월(印月)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하루에 1끼
만 먹으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전국의 이름난 승려를 찾아가 불경을 익혔다.
1840년 화월(華月)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이때부터 백양사에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율
을 엄히 지키도록 했으며, 백양사 뒷쪽 백학봉 밑에 자리한 석실(石室)에 들어가 10여 년 동
안 불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천진암(天眞庵)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883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이승을 뜨자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 탑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했는데, 승탑과 관련된
어떠한 안내문도 없어 무심히 지나치기가 쉽다. 그 옆에는 한참이나 후배인 하얀 피부의 승탑
이 서있고, 그 앞에 하얀 승탑의 주인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도암선사 승탑(부도)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승탑으로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났다.

▲  불회사 숲길 (일주문과 주차장 사이)

▲  그림처럼 펼쳐진 불회사 숲길 (석장승 직전)

불회사 숲길은 자연의 향이 그윽한 아리따운 숲길이다. 사찰 숲길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곡
성 태안사(泰安寺) 숲길과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길을 바짝 긴장시킬 정도로 아름
답기 그지 없는데, 300~400년 묵은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이 무성해 온갖
내음을 누릴 수 있다. 특히 대웅전 뒷쪽에는 춘백(春栢)이 삼삼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5월에
연두빛으로 막 피어날 때 바라보는 대웅전과 그 뒷산의 모습은 놓치기 아까운 봄 풍경으로 꼽
힌다.
게다가 단풍이 늦게 들고 늦게 지기 때문에 11월 후반까지 단풍의 향연을 즐길 수 있고, 단풍
색깔이 광주 인근에서 가장 곱다고 한다. 허나 그 좋은 시기가 싹 지나간 시점이라 단풍은 거
의 다 지고 간신히 나뭇가지에 붙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초췌한 단풍잎만 남아있을 뿐이라
안그래도 늦가을이다 연말이다해서 우울해진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더욱 우울의 끝으로 밀어
넣는다. (불회사 비자나무 숲은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됨)


▲  불회사 석장승 - 국가 민속문화재 11호

랫 주차장에서 3~4분 정도 가면 불회사의 오랜 상징이자 지킴이인 석장승 1쌍이 마중을 한
다.
장승은 예로부터 부정한 기운을 막는 존재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웠다. 지킴이 역할 외에도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청동기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선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회사 석장승은 절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는데, 절 수호와 절의 경계를 알리는 기능을 담
당했다. 그러니까 석장승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불회사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길 양쪽에
1기씩 자리해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며, 돌난간을 두룬 네모난 보금자리에 퉁방울 눈으로 뻣뻣
하게 서 있다. 서쪽 장승은 남자(이하 남장승), 오른쪽 장승은 여자(이하 여장승)로 초보자가
봐도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쉽게 구분이 간다.

남장승(키 315cm, 몸둘레 170cm)은 여장승보다 키가 크며, 동그란 큰 눈은 왕방울처럼 부라리
고 있고, 세모난 코는 주먹처럼 크다. 입은 일자로 그어져 있고, 입 밑에는 수염이 약간 묘사
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불상의 무견정상(無見頂相)처럼 두툼히 솟아 있다.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5자가 쓰여 있고, 얼굴 표정은 약간 인상을 쓰고 있
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얼굴치고는 좀 귀엽다.

그의 동반자인 여장승(키 180cm, 몸둘레 162cm)은 인심 좋은 아지매를 보듯 표정이 매우 부드
럽다. 두 눈은 남장승 못지 않은 왕방울로 눈 위에는 살짝 구부러진 눈썹과 광장처럼 넓은 이
마가 있으며, 코는 남장승 못지 않게 크다. 입은 아래로 살짝 구부러져 엷은 미소까지 띄우고
있으며,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주장군(周將軍)' 3글자가 쓰여 있는데 원래 이름은 상
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남장승에 비해 키는 작으나 다정한 표정이며, 둘다 귀엽고 익살스
러운 포스로 무서움은 커녕 즐거움을 준다.


아무리 굳은 얼굴이거나 인상을 쓴 얼굴도 그
들을 보면 절로 주름이 풀어질 것이다. 그리고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넋이 나가 본연의 임무를 깜빡 잊고 돌
아갈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진리가 아닐까?
이들 석장승은 서쪽 산너머에 있는 운흥사(雲
興寺) 석장승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1719년 전
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장승을 숭배하
는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된 존재이자 이
땅에 몇 안되는 사찰 장승으로 가치가 높다.

▲  여장승을 늘 살피는 남장승

▲  남장승을 바라보는 여장승

▲  남장승의 뒷모습과 여장승


  연리지(連理枝)라 불리는 느티나무(가운데 나무) -
나주시 보호수 15-4-12-6호


석장승을 지나면 왼쪽 숲에 불회사의 또다른 명물인 연리지가 나온다.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 엉켜있는 모습이 마치 남녀가 예민한(?) 짓거리를 하는 모습처
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절 주변에서 그런 연리지가 종종 목격되어 그것도 참 흥미로운
데 여색을 멀리하며 불도에 정진해야 되는 승려의 한이 모여 나무로 표출된 모양이다.

연리지는 가뭄에 콩 날 정도로 희귀한 나무라 나라의 경사나 부모에 대한 효성, 화목한 부부
등을 상징하며, 그의 수종(樹種)은 느티나무이다. 높이는 30m에 이르러 하늘을 가릴 정도이고
둘레는 1.5m로 키에 비해 꽤 늘씬하다. 나이는 약 600년으로 짐작된다.


▲  불회사 사적비와 소나무

연리지를 지나면 불회사의 장대한 역사를 머금은 사적비(事蹟碑)가 나온다. 듬직하게 생긴 귀
부(龜趺)와 글씨가 빼곡히 담겨진 검은 피부의 빗돌,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2마리가
생동나게 새겨진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성된지 얼마 안되어 윤기가 주르르 흐른다. 그런 사적비 옆에는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소나무가 주변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원진국사부도로 오르는 산길

▲  진여문 부근의 승탑들

사적비를 지나면 불회사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덕룡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원진국사
부도를 보고자 한다면 그 산길을 꼭 오르기 바란다. 조그만 계곡을 건너서 대나무숲으로 들어
서면 좌우로 갈라진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부도(승탑)가 나온다.
나는 사적비 뒷쪽 산길을 몰랐던 터라 진여문까지 갔음에도 부도를 알리는 길이 없어 그냥 지
나칠까 했었다. 허나 부도와의 술래잡기는 끝내야겠다 싶어서 길도 없고 경사도 각박한 진여
문 남쪽 산자락을 무대포 정신으로 올라가서 끝내 술래 신세를 면했다.

진여문 남쪽에는 승탑(僧塔) 2기가 초췌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눈길을 호소한다. 오른쪽 승탑
은 탑신(塔身)이 온전히 남아있고, 6각형 머릿돌에는 중생들이 올려놓은 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위에는 돌기둥이 서 있는데, 피부색이 전혀 틀려 승탑의 일원은 아니었던 듯 싶다.
탑의 밑도리는 돌에 묻혀 윗도리만 간신히 고개를 내민다.
왼쪽 승탑은 거친 세월의 흐름을 과민하게 탔는지 머릿돌과 바닥돌만 간신히 남은 처량한 신
세이다. 이들 승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  머릿돌과 바닥돌만 남은 가련한 승탑

▲  불회사 원진국사부도(圓眞國師浮屠)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5호

경내 남쪽 산자락에 원진국사부도가 살짝 터를 닦고 있다. 원진국사 승형(承逈, 1171~1221)은
능엄선(楞嚴禪)의 주창자로 성은 신씨, 고향은 경북 상주(尙州)이다.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
부인 시어사(侍御史) 신광한(申光漢)에게 양육되었으며, 13세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출
가하여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197년 스승인 동순(洞純)이 입적하자 승과(僧科)를 포기하고 수도에 정진했으며, 명종(明宗)
이 그의 소문을 듣고 특별히 불러 초선(初選)을 치르게 했다. 이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
들어가 지눌(知訥)에게 법요(法要)를 받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불한 뒤 크
게 감응을 얻었으며, 춘천 청평사(淸平寺)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릉엄경(首
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
이란 이자현의 문수원기(文殊院記)에 크게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 인연으로 불법(佛法)을 알릴 때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겠
다고 발원했으며, 이후 이 땅의 선종(禪宗)에서 크게 숭상을 받게 되었다.

1210년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쳤고, 1213년에 삼중대사(
三重大師), 1214년에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포항 보경사(寶
鏡寺)에 머물렀다. 1220년에는 희종(熙宗)의 4째 아들인 경지(鏡智)의 스승이 되었고, 1221년
능엄경을 설법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자리를 옮겨 승려치고는 젊은 50세에 입적했다.

고종(高宗)은 그에게 원진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보경사에 그의 승탑을 세웠으나 사리의 일부
를 가져와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도 승탑을 두었다. 탑신 밑도리에 연우(延祐, 원나라 인
종의 연호) 4년 5월에 세웠다는 글씨가 있어 1318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탑신 앞
쪽에는 해서체(楷書體)로 '圓眞國師 通照之塔(원진국사 통조지탑)'이라 쓰여있어 탑의 이름과
주인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높이 1.7m의 조촐한 모습으로 조각 기법이 형식화되어 딱히 섬세한 면은 없으며, 탑신과 지붕
돌이 8각이고 그 밑도리는 동그란 전형적인 8각원당형 승탑이다. 또한 탑신에 탑의 주인공과
탑 이름, 조성 연대가 쓰여있어 고려 후기 승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바로 이 점이 이 승탑의 강한 매력이다.


▲  승탑의 주인과 탑 이름이 희미하게 쓰여있다. (원진국사 통조지탑)


 

♠  불회사 진여문, 대웅전 주변

▲  한몸으로 이루어진 진여문(眞如門)과 사천왕문(四天王門)

원진국사부도와의 숨바꼭질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경내를 코앞에 둔 진여문으로 향했다. 진여
문은 하나로 이어진 사천왕문과 함께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계곡 위에 홍예 돌다리
를 걸치고 그 위에 복도식 건물을 씌웠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한 지붕을 이고 있는 사천왕문
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목상(木像) 대
신에 그림 4개가 자리를 대신한다.
사천왕문은 원진국사부도가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사천왕의 검문을 거치면 비로소 불
회사 경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부처의 모임터를 뜻하는 불회사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홍예 돌다리를 갖춘 진여문

▲  사천왕문 사천왕도

▲  2층으로 이루어진 대양루(大陽樓)

▲  대양루의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천수전(千手殿)

불회사는 덕룡산 북쪽 자락 숲속에 포근히 터를 닦은 오래된 절이다. 경내 앞쪽(남쪽)에는 계
곡이 흐르고, 뒷쪽(북쪽)으로 산을 베게 삼아 누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사방이 덕
룡산의 첩첩한 산줄기에 감싸인 고적한 곳이다. 절 입구에서 절까지 속세의 민가(民家)도 거
의 없으며, 절 부근에는 적당한 마을도 없다.

이 절은 366년(또는 384년)에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366년이면 고구려(
高句麗)에 불교가 전해지기 무려 6년 전이고, 백제는 18년 전이 된다. (가야는 제외) 불회사
가 366년 창건설을 자신 있게 우기는 것은 1978년 큰법당 기와 불사 때 발견된 '호좌(호남 좌
도) 남평 덕룡산 불호사(불회사의 옛 이름) 대법당 중건 상량문(上樑文)'
에 366년<동진(東晉)
태화 원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유로 이 땅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
해진 초전성지(初傳聖地) 임을 일주문을 통해 아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불회사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 땅의 불교사를 다시 정리해야 되겠지만 굳이 그리할 필요는 없
을 것 같다. 마라난타의 366년(384년) 창건설은 어느 기록에도 없고, 백제 유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야의 불교 전래설도 외면받고 있는 마당에 불회사의 366년 창건설은 어디 주목이
나 받겠는가?

창건 이후, 656년에 희연조사(熙演祖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
師)가 중창을 하고, 1264년에 원진국사가 크게 중창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원진은 앞서 그
의 승탑에서 밝혔듯이 1171년에 태어나 1221년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뜬금없이 1264년이라니
? 원진이 입적한지 53년 뒤에 홀연히 부활하여 절을 중창했단 말인가?? 허나 경내 주변에 그
의 승탑이 있으니 원진이 절을 손질한 것은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창건했을 지도 모르겠
다.

1798년 화재로 절 전체가 소실되자 주지인 지명(知明)이 1799년에 중건을 했으며, 절의 원래
이름은 부처를 지킨다는 뜻의 불호사(佛護寺)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큰법
당에서 나온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808년 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절을 크게 손질하여 기존의 가람
(伽藍)배치 외에 동쪽에 진여각과 요사채, 대양루 등을 건립하여 절의 몸집을 더욱 늘렸다.

절을 수식하는 전설 가운데 호랑이와 도승의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 참의(參議) 벼슬을 지낸 조한용(이하 승려)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
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벼슬을 그만두고 승려가 되었다.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1벌로 천
하를 떠돌던 그는 불회사에 이르자 쇠락한 절의 모습에 발끈하여 절 중창을 계획하고 주변 마
을로 탁발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탁발을 하고 절로 돌아오다가 난데없이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호랑
이는 그를 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을 흘려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의 출현에 염통
이 적지않게 쫄깃해졌던 그는 용기를 내어 입을 살펴보니 글쎄 목에 비녀가 걸려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사람을 잡아먹지 말아라. 그것을 약속하면 내 비녀를 뽑아주마' 그러자 호랑
이가 '알았어. 앞으로 사람은 해치지 않을테니 비녀 좀 뽑아줘!' 그래서 비녀를 뽑아주니 호
랑이는 고마움을 표하고 사라졌다.

그해 겨울, 호랑이가 그를 찾아왔다 '야 나와봐! 아주 좋은 거 가져왔어!' 그가 나와보니 호
랑이가 어디서 아리따운 여인네를 물어다 마당에 놓고 간 것이 아닌가. 호랑이가 앞서 은혜를
갚고자 참 기특한 일을 하였지만 이미 출가한 몸이라 대놓고 흑심을 품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혼절한 여인을 외면하기도 그래서 일단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알고보니 안동(安東) 만석꾼
김상 공(이하 김공)의 외동딸이었다.
여인이 기력을 회복하자 남장을 시켜 안동으로 데려가니 김공은 너무 기뻐 크게 보답할 길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에 불회사 복원에 필요한 시주를 청하니 김공이 쾌히 승락하자, 승려는
가지고 온 걸망을 꺼내 쌀을 담아 달라고 했다. 걸망이 너무 작아서 이거 얼마나 들어가겠는
가 싶어 김공의 부인은 우려했으나 아무리 부어도 끝없이 들어가는 쌀을 보며, 크게 놀라 아
예 곳간을 열테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이에 승려는 신통력으로 공양미를 절로 보냈다고 하며, 그때 쌀을 보관한 곳이 인근 화순 중
장터라고 한다.

김공이 준 쌀로 불회사 대웅전을 지으며, 좋은 날을 택해 상량식을 올리려고 했으나 일이 너
무 장대하여 그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뒷산 봉우리에 올라가 '호법 선신중이
시여! 부처의 대작불사가 해가 짧아 원만히 회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피를 드리워 주소서
'
기도를 올리니 해가 잠시 길을 멈추면서 제시간에 상량식을 마쳤다고 한다.
이후 그가 기도를 한 자리에 암자를 세우고 해를 멈추게 한 곳이라 하여 일봉암(日奉庵)이라
했으나 6.25 때 파괴되어 샘터만 남았다.

그 승려는 말년에 건너편에 남암(南庵)이란 암자를 짓고 머물렀는데 아침과 저녁마다 까만 새
가 날라와 뒷편에 있는 잣나무 가지에 앉아 승려와 대화를 했다고 하며, 그 나무를 흑조수(黑
鳥樹)라 불렀다고 한다. 그 나무는 남암터에 2그루가 있었으나 태풍으로 하나가 쓰러지고 지
금은 1그루만 남아있다. (현재 부속 암자는 모두 사라진 상태)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등에 싱그럽게 둘러싸인 경내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명부전, 대양루, 심
검당, 사운당, 천왕문, 진여문, 불국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건칠비로자나불좌상, 민속문화재인 석장승, 지방문화재
인 원진국사부도, 소조보살입상 등이 있고, 그외에 도암선사부도와 조선 후기 승탑, 연리지,
괘불지주 등이 있어 고색의 내음도 숲내음 만큼이나 진하다.

※ 나주 불회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광주 전남대후문과 산수5거리, 조선대, 광주1호선 남광주역(3번 출구), 백운광장, 인성고(
  효천역)에서 나주시내버스 999, 999-1번을 타고 남평정류장에서 하차 → 중장터, 도동 방면
  으로 가는 나주 200번으로 환승하여 불회사 하차 (1일 10회 운행)
* 나주터미널과 영산포터미널에서 나주 403번을 타고 불회사 하차 (1일 13회 운행)
* 승용차 (석장승과 일주문 사이에 주차장이 있으며, 경내에도 있음)
① 광주 → 남평읍내 → 도래마을 → 다도 → 불회사입구 우회전 → 불회사
② 광주 → 칠구재터널 → 도곡온천입구 → 도암면 → 운주사입구 → 중장터 우회전 → 불회
   사입구 → 불회사

* 불회사 입장료는 없음
* 불회사는 산사힐링체험(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7~8월에 열리는 관음대참회 수련
  회, 매월 3째주 토요일에 1박 2일로 열리는 주말산사문화체험, 녹차(비로다)만들기 체험 등
  이 있으며, 자세한 일정과 가격은 불회사 홈페이지를 참조하거나 전화로 문의한다.
*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999 (다도로 1224-142 ☎ 061-337-3440)
* 불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불회사 경내와 부드러운 곡선의 덕룡산

▲  대웅전 주변 (대웅전 우측에 극락전, 삼성각 등이 있음)

사천왕문을 지나면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2층 대양루가 나타난다. 대양(大陽)이란 큰 햇님
으로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데, 1층은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와 종무소(宗務所), 차 1잔과
공양물품을 판매하는 비로다경실이 있다. 여기서 비로다(榧露茶)는 불회사에서 생산되는 녹차
(綠茶)로 절 주변 비자나무 밑에서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찻잎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로다는 오랜 역사를 가진 불회사의 살아있는 전통으로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고 있는 마라난
타가 불회사를 세우고 재배한 차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
로 이 땅에서 처음으로 차가 재배된 곳이라고 주장까지 하나 실제 재배 시작 시기는 조선시대
> 불회사 녹차로 인해 이곳의 예전 지명은 다소(茶所)였으며, 다도면(茶道面)이란 이름도 바
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2층은 대양루 대신 천수전이란 별도의 간판을 달고 있는데,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을 봉
안하고 있으며, 온갖 새와 토끼, 물고기, 소나무, 과일 등을 담은 그림이 평방(平枋) 등에 그
려져 있다. 보통 사찰의 벽화나 그림은 부처를 찬양하고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담기 마련이나
천수전은 그 규칙을 와장창 깨고 민화(民畵)나 사대부들이 그리는 그림처럼 치장되어 있다.


▲  불회사 대웅전 - 보물 1310호

대양루 밑도리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3단의 기단 위에 높직하게 들어앉아 남쪽을 바라보
는 대웅전 앞에 이른다.
불회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추녀를 살짝 들어올
린 모습이 마치 새가 날개짓을 하듯 경쾌하기 그지 없는데 상량문을 통해 1799년에 중건되었
음이 밝혀졌다.

건물 정면에 달린 문짝은 4분합의 빗살문으로 두터운 통판자로 짜서 창살무늬, 불상, 새와 꽃
등이 꽃살문을 이루며 장식되어 있었으나, 6.25 시절에 공비들이 그들의 소굴을 덮기 위해 모
두 약탈해 갔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礎石)은 덤벙주초로 비교적 큰 편이며, 그 위에 세
운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준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전/후면의 각 주칸에는 외3출목, 내4출목 공포를 2조씩, 양
측면에는 1조씩 배치했으며, 내부에는 화려한 연꽃봉오리형으로 마무리 지었다. 특히 용 4마
리를 건물 안팎으로 치장하여 법당의 장엄함을 드높였는데, 정면 어칸(가운데 칸)에 2마리의
용머리가 있고, 그 꼬리는 건물 내부 대들보 밑에서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있다. 또한 천정 중
앙 대들보에도 용 2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건물 양측면 중앙에는 건물 내부로 2개의 충량(衝樑)을 걸어 그 머리를 용머리로 장식하여 큰
대들보에 걸쳤는데 이런 결구법은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내부 천정은 빗천정과 우
물천정을 같이 했는데, 빗천정에는 물고기, 연꽃무늬 등을 조각하여 달았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새와 연꽃 등이 그려진 아름다운 우물 천정과 대들보에 고개를 대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용 2마리


건물 내부와 바깥에 용 장식을 달고 연꽃봉오리 등을 장식한 기법은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
웅보전에도 나타나고 있어 같은 장인이나 그 후학들이 만들었음을 짐작케 하며, 조선 후기 건
립 당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2001년 4월에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호에서 보물로 지
위가 높아졌다.


▲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용의 살랑거리는 꼬리와 붉게 채색된 천정

▲  대웅전 비로자나3존불
가운데 본존불이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1545호
좌우 협시불은 불회사 소조보살입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67호


불회사의 상큼한 보물 창고인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 대신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중심으
로 한 비로자나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의 중심인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들어 금칠을
입힌 이 땅에 흔치 않은 건칠불(乾漆佛)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붉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그의 전용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
고 있으며, 머리는 검은색 나발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 있다. 두 귀는 어깨까
지 축 늘어져 중생의 조그만 하소연까지 듣고자 애쓰고 있고, 얼굴은 약간 굳은 듯한 표정이
지만 입가에서는 엷게 미소가 퍼지고 있다.
그의 좌우에 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은 흙으로 빚어서 만든 조선 초기
보살상으로 1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잘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불상/보살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  불회사 마무리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우에는 온갖 군소 건물들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데, 좌측 바로 옆에는 명부전
이 둥지를 틀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1402년에 세워져 1799년에 중수되었으며,
근래 손질을 했는지 고색의 기운이 대웅전 보다는 못해 보인다.


▲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육환장(六環杖)을 쥐고 있는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밝은 색채의 10왕을 비롯한 저승의 식구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좌측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에 중건되었는데, 예전 이름은 칠성각(七星閣)이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을 비롯해 용
왕(龍王)까지 봉안하고 있으며, 그들을 담은 탱화는 모두 근래에 새로 제작되었다.

▲  용을 타고 짙푸른 바다를 질주하는
용왕의 모습이 담긴 용왕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한전(羅漢殿)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16나한 그리고 고려 때 절을 크게
일으킨
원진국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예전 이름은 영산전)

▲  나한전 석가불과 16나한상

▲  원진국사의 진영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아미타불과 영가
(靈駕)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공양간과 요사(寮舍)로 쓰이는 사운당
1층은 공양간, 2층은 요사이다.


▲  어처구니를 상실한 옛 맷돌
불회사 승려와 중생들의 공양밥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맷돌, 이제는 절의
찬란했던 역사를 머금은 화석이 되어 대양루 부근에 조용히 누워있다.
어처구니가 불이 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애타게 그리워하겠지.

▲  진여문 부근 숲길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불회사를 열심히 둘러보고 대양루 부근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기
분 같아서는 속세(俗世)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이곳에서 며칠 머물고 싶지만 내가 있
어야 될 곳이 아니기에 다시 속세로 아쉬운 발걸음을 땐다.
절을 둘러싼 비자나무와 춘백, 소나무의 청정한 내음을 배불리 들어마시며 결코 지루하지 않
는 숲길을 뚜벅뚜벅 걸으니 어느새 연리지와 석장승이 나타나 배웅을 한다. 그들을 지나치기
가 싫어 앞서 지겹게 봤음에도 다시 사진에 담느라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냈고, 다시 길을 재
촉하니 주차장과 도암선사부도, 일주문이 나타난다.


▲  불회사 숲길과 단장의 이별을 하다.
나중에 또 인연을 지을 수 있을까? 그때는 덕룡산과 운흥사(雲興寺) 석장승까지
모두 살펴보고 싶다.

▲  불회사 숲길 (주차장 부근)

불회사입구 정류장에서 다시 두 다리를 쉬며 버스를 기다렸다. 목포로 가야 되기 때문에 나주
시내(영산포, 나주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면 정말 대환영인데 20분 정도 기다리니 남평으로
가는 나주 200번이 나타나 입을 벌린다. 남평으로 나가면 나주시내로 가는 시내버스가 수시로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첩첩한 덕룡산 골짜기에서 탈출했다.
남평으로 나와 영산포로 가는 999번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나주시내 북부에 자리한 나주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아직 점심도 제대로 때우지 못한 상태라 나주곰탕이나 한 뚝배기 들고자 터미널 서쪽 금성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나주곰탕 골목을 찾았다. 이곳은 예전에 2~3번 와본 적이 있는데, 어
느 집으로 갈까 궁리하다가 7년 전에 들렸던 곰탕집으로 들어갔다.


▲  잘 차려져 나온 나주곰탕의 위엄

내가 곰탕집을 찾은 시간은 15시대라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송송(깍두기)과 김치, 양파, 고추
장 등의 밑반찬을 거느린 곰탕이 내 앞에 차려지자 시장기가 왕성하게 솟구쳐 곰탕과 밑반찬
들은 이내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성이 차질 않아서 국물과 밥을 더 청하여 아주 든든하
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먹고 부근에 있는 나주목문화관과 정수루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목포로 넘
어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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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2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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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부암동 산책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하
게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付岩洞)이 포근히 안
겨져 있는데서울 도심과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라 '
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의구심을 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
를 지니고 있다.

부암동은 3개의 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세검정로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가늘게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을 뿐, 6층을 넘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원이 딸린
주택이거나 빌라들이며, 밭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특히 산자락에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
방의 시골 마을이나 산골 읍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도심이 바로 코 앞임에도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지정학적 위치로 오랜 세월 개발제
한에 묶인 탓이다.
이렇듯 도심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그곳에 깃든 아름다운 풍경으로 조선 초부터 양반사
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 싶었던 그
들의 팔자 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경승지와 흔적을 빚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암동에는 오래된 볼거리가 풍부해 옛 것과 자연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를 유
혹한다.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옛 별서(別墅) 유적인 백석동천(白石洞天)이 숨
겨져 있고, 백사골 상류에는 도심 속 두메산골로 통하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강원도 산
간의 분위기를 선사하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
없는 야망이 서린 무계정사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구한말에 지어진 반
계 윤웅렬 별장, 인왕산 자락의 경승지인 청계동천(淸溪洞天), 석파정의 별당과 순정효황
후의 집이 하나로 묶여진 석파랑 등이 있다.
그 외에 응선사 산신도(山神圖), 성불사 금동보현보살좌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고,
울미술관,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등의 미술관, 산모퉁이 등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와 찻
, 온갖 식당들로 즐비하다.

부암동 북쪽으로 흘러가는 홍제천(弘濟川)197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소풍, 피서지로
각광을 받던 곳으로 세검정,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춘원 이광수(春園 李
光洙)의 별장터, 탕춘대성과 홍지문이 있다. 또한 서쪽으로 조금 확장하면 옥천암과 그곳
에 깃든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서울 장안에서 4대문 안을 제외하고 문화유적과 볼거리가 많이 산재한 동네로 넉넉잡아 5
~6시간 정도면 상당수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을 던져 더 많은 곳
을 더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다.

부암동은 나의 즐겨찾기의 1곳으로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봄의 한
복판을 맞이하여 다시 부암동으로 들어가 홍제천을 따라 여러 명소를 흔쾌히 사진에 담았
고 그 명소를 요리하여 이렇게 글로 다시 내놓는다.


 

♠  도성 밖 경승지이자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던,
허나 개발의 칼질로 이제는 이름만 남은, 세검정
(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

신영동3거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멋드러진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을 바라
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한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좌
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세우니 그것이 세검정의 시작이
라고 한다. 물론 그때는 세검정이라 불리지 않았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그들은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자하문(창의문)을 뚫
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로 옹
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
하고 칼을 씻었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영
조 시절인 1748년 총융청(摠戎廳)이 탕춘대 자리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세검정이 지어졌다. (
이때 새로 정자를 지었다고 함)
이후 이곳은 자하문 밖(자문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는데 1749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이 벗 25명과 여기서 봄놀이를 가졌으며, 1790년 정조 임금이 연융대(鍊戎臺)에서 활쏘기 시
험을 참관하고 세검정에 들렸다가 정자에 걸린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을 보고 시를 남기
니 내용은 이렇다.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臨御)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1791년 여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이곳을 다녀가 세검정의 명물인 물구경을 했다. 1941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세검정도'
참조하여 복원했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
림 같은 현장이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채취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특히 1899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들이 여기로 소풍을 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
'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자하문) 밖으
로 화류(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
..'

왜정(倭政) 이후,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과 홍
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온 동네에 진동했
.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하여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
기 나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했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
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그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적한 반석(磐石)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시대에 사초를 깨
끗히 세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조선왕조실록의 모태가 되는 사초(史草)를 실록(實錄)으로 편찬한 다음, 사초에 적힌
글씨를 물로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
)을 가졌는데 이때 바위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인 차일(遮日)을 치며 잔치를 했다. 하여 차
일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차일암에는 차일 기둥을 세우고자 파놓은 구멍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
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이나 주변 환경이 고약하게 변한 탓에 이제는 그러기가 곤란해졌
. 비록 인간들이 주변에 씌워놓은온갖 굴레들은 어쩌지 못해도 홍제천의 수질만큼은 더 깨
끗하게 거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동쪽으로 200m 남짓의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간
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 세검정 밑에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옆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물이 아직 깨끗하지 않으니 손이나 발은 담구지 말자.


▲  늦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부암동의 꿀단지, 백사실계곡(백사골)이 숨겨져 있다.


세검정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을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탕춘대(蕩春臺)터 표석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
홍제천 바위에 자리했다. (표석은 그 위치가
아님) 이후 영조 시절에 여기서 군사를 훈련시
키면서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갈렸다.
(세검정 동쪽 길가)

         ◀  탕춘대 한지마을터 표석
조선 때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
) 소속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세검정초
교 정류장 부근)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기와집,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

세검정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
너편으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이 석파정 별당
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 1903~1981)의 별서였다.
그는 1945년 왜열도로 건너가 왜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가지고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받아온 인물로 유명하며, 6.25시절 서울을 점령
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
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내기도 했다.

소전은 금수저 출신(전남 진도 대지주의 아들임)으로 1963년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집을 새
로 짓지 않고 도심에 있던 김옥균(金玉均) 가옥, 박영효(朴泳孝) 가옥, 이완용(李完用) 별장,
기생 나합(羅閤) 양씨의 집 등의 한옥을 구입하여 그 자재로 집을 지었다. 또한 태평로 확장
으로 덕수궁(경운궁)의 동쪽 돌담이 철거되었을 때 이를 모두 매입해 석파랑 돌담과 정원 축
대를 쌓을 때 사용했는데 자그마치 트럭 30대 분이었다고 한다. (운현궁 돌담도 사들였음)

그의 별서는 1969년 완성을 보았으며, 1958년에 매입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
(玉仁洞) 집을 별서 북쪽에 두고, 같은 해에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에서 가져
온 별당은 뒤쪽에 두었다. 또한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재력이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자기의 별서를 조그만 한옥 전시장으로 꾸민 소전은 1981년 세상을 떴고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주인이 바뀌면서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다. 석파정 별당의 이름을 따서 석
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빗
장이 열려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소로 크게 존
재감을 드러내어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늘고 있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개인 식당이기
때문에 별당을 비롯한 건물 내부는 마구 들어가서는 안되며, 18시나 일몰 이후에는 식당 영업
을 위해 관람을 가급적 피해주기 바란다.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나 서로 떨어진지 60년이 넘은 상태고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
은 석파랑 소유임>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그 안에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에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석파랑 본채 동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과 스톤힐 정문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안 음식과 와인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전
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완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그 옆에 빨간 피부
를 지닌 홍지동 산신각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
당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지금은 모두에게 개방된 착한 문이지만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는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 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인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이를 매각하자 소전이 매입하여 옮겨놓
은 것이다.
비록 제자리는 잃었지만 소전 덕분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
스란히 배여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
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양한 석물, ,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세검정교회) 하차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1711, 7016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시내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
  3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랑 본채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뜻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
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
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시화
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다.
런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
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버렸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과 홍지문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


▲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
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
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
서 서성(西)으로도 불리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세우려고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8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
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
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오간대수문 (동쪽 모습)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
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지내온 홍지문은 19211,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하
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지 홍수로 싹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은 금지 구역이 되었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쪽 성곽 2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또한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북쪽에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
검정과 옥천암까지 이어진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이다.


 홍지문의 야경 (홍지문의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고운
빛깔의 와운문(渦雲紋)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한 경우에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북한산 끝자락 홍제천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마애불을 간직한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다보면 하
얀 암반이 일품인 하천 건너로 하얀 피부의 커다란 마애불상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백불'로 많
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
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홍
제천변에 있어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가 된 19
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불'은 구한
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정말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
한 문이 있는데, 그가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
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일원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슷
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고려 후기에
같은 사람이나 지역 세력가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
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들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보기좋게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옆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인해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절에서 동전을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
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도심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금
색으로 되어있다가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
까지 정말 관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
들의 소원과 고충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고민거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들어주느라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닐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
로 그들을 맞이해 고충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
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조그만 기와문을 지나면 조촐한 옥천암 경내가 펼쳐진다.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음보살이다보니 자
연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이 땅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
부심이 대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1396년에 태조의 도
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
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의 기능
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었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
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사세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유산이 없고 주택가와 접해 있
어 고색과 산사의 내음이 크게 말라버렸다.

▲  요사의 기능도 겸하고 있는 설법전
옥천암 뜨락에도 변함없이 늦가을이 찾아와
이렇게 고운 작품을 남겼다.

▲  옥천암의 법당인 수덕전(修德殿)
수덕전과 설법전은 그 사이에 조그만 벽돌집
을 만들어 거의 하나로 이어져 있다.


▲  수덕전 아미타여래좌상

옥천암은 관음도량이라 보도각 백불이 중심 불상이나 법당에는 따로 아미타불(아미타여래좌상
)을 봉안했다. 불단에는 아미타불 홀로 있으며,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은 없다. 불상 주위로
석가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의 불화가 수덕전 내부
를 진하게 수식하고 있는데, 그중 독성탱화가 1954년에 제작된 것으로 백불을 제외하고 제일
오래되었다.


▲  왜식(倭式)으로 지어진 옥천암 5층석탑
5층석탑은 예전에 수덕전 정면 우측에 있었으나 담장 쪽으로 옮겨졌다. 날씬하게
솟은 석탑의 탑신(塔身)에는 조그만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어 내부가 보인다.


▲  수덕전 우측에 세워진 키 작은 석등과 3층석탑
사람 키보다 작은 석탑은 2,3층 탑신이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있는데 조금 오래되어
보인다. 예전(2010년 이전)에는 그가 없었으나 근래에 주변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탑의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음)

◀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옥
천암 괘불(掛佛)의 위엄
청아한 색채로 그려진 이 괘불은 근래에 조성
된 것이다. 이전 시대의 괘불보다 키와 덩치는
작지만 담길 것은 모두 담겨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간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와
중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
로 차려진 제물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옥천암을 끝으로 부암동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워낙에 많이 찾았던 곳이라 마치
우리 동네처럼 친근한 곳이다. (부암동은 나를
기억이나 해줄까?)

▲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와 징검다리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옥천암(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도보 2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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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탄산약수를 찾아서,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지석묘, 춘천의 먹거리들)



' 한겨울 춘천 나들이 '


▲  춘천 추곡약수


 

겨울 제국(帝國)의 혹독한 통치 속에서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의 막이 올랐다. 강제로 나
이 1살이 누적되니 기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한복판이다. 하여 꿀꿀한 기분도 좀 달래
고 조촐하게 몸보신도 누릴 겸, 요즘 한참 관심을 두고 있는 탄산 약수를 찾기로 했다.
탄산 약수는 태반이 강원도와 경북 산골에 묻혀 있어 서울에서 찾아가기가 그리 녹녹치가
못하다. 예전에는 서울에도 '천호약수'란 꽤 유명했던 탄산 약수가 있었지만 천박한 개발
의 칼질로 이제는 흔적도 없다. 그나마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탄산 약수는 춘천 추곡약수
, 비록 춘천(春川)이라고는 하지만 화천군과 양구군과 맞닿은 춘천의 북쪽 끝으머리에 자
리해 있다. 허나 교통편은 다른 탄산 약수와 달리 조금은 봐줄만한 편이라 흔쾌히 추곡약
수를 찾기로 하고 친한 후배와 길을 떠났다.

햇님이 하늘 중천에 걸려있던 오전 11시, 7호선과 경의중앙선, 경춘선이 만나는 상봉역에
서 그를 만나 경춘선 전철(청량리~상봉~춘천)을 타고 80여 분을 내달려 남춘천역에 두 발
을 내렸다.
남춘천역 서쪽인 온의4거리에서 추곡약수까지 들어가는 춘천시내버스 18번을 타면 되지만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 부득이 춘천시외터미널로 이동하여 양구(楊口)행 직행버스를 타기
로 했다. 허나 무려 50분 뒤에나 차가 있어 그 사이 점심이나 먹고자 바로 이웃에 자리한
이마트에서 늦은 점심을 때웠다.

점심을 먹고도 아직 20분이나 남아있어 터미널에서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양구 경
유 속초행 직행버스가 슬그머니 타는 곳에 귀여운 얼굴을 들이민다. 그 버스를 타고 소양
강을 건너 신북읍과 천전리를 지나 우리나라 최장의 도로 터널로 등극한 배후령터널을 지
난다. 이 터널(5.1km)은 2012년 3월에 개통되었는데 터널 이전에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배
후령 고갯길을 힘들게 넘어야 했다.
배후령터널을 지나 화천군의 산하(간척리)를 잠시 거치다가 다시 춘천 땅으로 진입, 추곡
3거리(북산지서)에서 내렸다. 이곳은 인적도 거의 없는 첩첩한 산골로 4발 차량들의 굉음
외에는 소리라는 것이 거의 없다. 남쪽에는 소양호가 살짝 모습을 보이고 있고, 동쪽에는
양구로 인도하는 수인터널이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산으로 막힌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 같은 지형이다.


 

♠  추곡약수 둘러보기

▲  추곡약수 가는 길 (추곡약수3거리~약수터 입구)

우리가 찾는 추곡약수는 추곡3거리에서 2km 정도 들어가야 된다. 추곡3거리 바로 동쪽에 추곡
약수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46번 국도 직선화로 무척이나 한가해진 왼쪽 길(소양호로)로 들
어선다. (직진하면 수인터널) 국도 직선화 이전에는 춘천과 양구를 오가던 차량들이 구불구불
소양호로를 이용했으나 직선 도로가 뚫리면서 차량들이 죄다 편한 새 길로 바퀴를 돌려 이제
는 추곡약수와 사명산, 소양호 상류 접근용으로 간신히 도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주말이면 그래도 추곡약수와 사명산을 찾는 차량들이 좀 있을 터인데 평일이라 차량의 왕래가
없어 2차선 도로가 무척이나 넓고 외로워 보인다. 그 길을 거의 독점하며 북쪽으로 가다보면
약수터 입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소양호로를 버리고 북쪽 추곡약수길로 진입하면 된다.


▲  추곡약수 입구로 마중나온 익살스런 장승들

▲  추곡리 물푸레나무 - 춘천시 보호수 33호

그저 산바람 소리가 전부인 고적한 추곡약수길을 걷다보면 길 왼쪽에 커다란 나무 1그루가 잠
시 나좀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잡는다. 나무 앞에는 그의 간략한 소개가 담긴 회색 피부의 안
내문이 있어 살펴보니 춘천시 보호수로 지정된 나이 지긋한 물푸레나무이다.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털려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는 이 나무는 나
이가 약 360여 년<2009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으로 높이 10m, 둘레 360cm
이다. 추곡약수를 안내하던 오랜 길잡이로 나무에 돌이나 동전을 던져 가지 사이에 딱 들어앉
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어 '아들나무'란 별명도 지니고 있다.


▲  추곡약수길 (남쪽 방향, 물푸레나무를 조금 지난 지점)

▲  추곡약수길 (북쪽 방향, 추곡약수 마을 직전)

▲  시내버스가 바퀴를 돌리는 추곡약수 정류장

물푸레나무를 지나 5분 정도 가면 추곡약수 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에는 넓은 공터와 버스 정
류장이 있는데, 춘천시내버스 18번이 여기서 바퀴를 돌려 춘천시내와 오항리로 이동한다. 그
버스를 타면 시외직행버스의 1/3가격으로 약수터 밑까지 편하게 접근할 수 있지만 1일 5회 밖
에 안다닌다는 커다란 함정이 있어 시간표를 미리 확인해야 뒷탈이 없다.


▲  추곡약수 가는 길 (마을에서 약수 방면)

▲  아련한 전설이 되버린 천연기념물 장수하늘소 발생지 비석

마을 동쪽 옆구리를 지나면 추곡약수와 사명산을 안내하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그들을 지
나면 계곡을 옆구리에 낀 오르막길이 약수까지 이어지며 약수 밑까지 계곡과 길을 따라 집이
들어서 있다. 이들 집은 상당수 추곡약수로 끓인 닭백숙을 다루는 식당으로 평일이라 손님이
없어 거의 문이 닫혀 있다.

추곡사란 조그만 절이 길 남쪽 언덕에 자리해 있고, 한때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 75호로 소양
호에 싹 털려 영원히 사라진 '춘천 장수하늘소 발생지'를 알리는 조그만 비석이 우두커니 자
리해 우수에 젖어있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가기 일쑤지만 이 비석은 한때 지정문화재 앞에 안내문과 함
께 세우던 것으로 소양댐이 앗아간 장수하늘소와 북산면의 산하를 잠시 생각하게 만든다. 속
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진 춘천의 장수하늘소 발생지는 여기서 가까운 북산면 추전리 지
역으로 비석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여기도 발생지의 일원이었던 모양이다.

소양댐 건설로 추전리를 비롯한 북산면의 산하가 강제로 물에 잠기자 추전리 산중턱에 있었던
장수하늘소 발생지가 물에 묻혔고 장수하늘소는 지구의 암덩어리, 인간을 원망하며 그렇게 자
취를 감추고 말았다. (1973년 천연기념물에서 정리되었음)


▲  추곡약수 아랫약수

약수터 길 끝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추곡약수가 둥지를 틀고 있다. 사명산(四明山, 1198m)
서남쪽 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춘천에서도 가장 벽지이자 북쪽 끝으머리로 칼처럼 솟아 구름을
베게로 삼은 높은 뫼들과 소양호로 이루어진 북산면의 소중한 꿀단지이다.

추곡약수는 윗약수와 아랫약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약수는 1812년에 김원보(金元甫, 또는 강
원보)가 사명산 산신(山神)의 계시를 받아 발견했다고 전하며, 아랫약수는 약 100년 이전에
맹인 김성련(金成練)이 이곳을 지나다가(아마도 윗약수를 마시러 온 듯) 돌부리에 채여 넘어
지니 바로 그 자리에서 샘이 솟았다고 전한다.


▲  눈에 뒤덮힌 아랫약수 주변 (가운데 4각 지붕이 아랫약수,
오른쪽 주황색 지붕집은 식당)

이 약수는 보통 약수가 아닌 신비롭기 그지없는 탄산 약수로 철분과 나트륨, 탄산염, 황산염,
염소, 불소, 망간, 구리, 칼슘 등이 들어있어 물이 붉은 색을 띈다. 물은 톡 쏘는 쓴 맛으로
여기에 설탕을 타면 거의 천연사이다가 된다. 물맛은 일반 약수보다 다소 쓰지만 위장병과 빈
혈, 부인병, 신경통, 무좀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하며, 이 물로 밥을 지으면 밥이 파랗게 물
이 오르면서 일반 밥과 달리 꼬들꼬들하고 맛이 좋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한약 같은 약수가 무척 싫었다. 하여 입에도 대지 않았었지. 그런
데 그 물로 지은 밥은 맛이 있어 몇 그릇을 뚝딱 비우곤 했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그렇게나
동경했던 어른이 되면서 그렇게나 싫어했던 탄산 약수는 없어서 못마실 정도로 달콤한 약수로
바뀌었다. 나이가 들면 맛도 자연히 바뀌기 마련이지만 그만큼 건강을 챙겨야되는 우울한 나
이대에 이른 것이다.


▲  김원보가 약수를 발견한 것을 기리고자 그의 후손 자매가(손녀라고
되어있음) 1992년에 만든 추곡약수 발견내력 표석

▲  추곡약수 윗약수

추곡약수는 몸보신을 위해 왔으므로 마치 달콤한 음료수를 마시듯 몇 바가지를 마셔댔다. 몸
에 좋다고 하니 두둑히 마셔야 후회가 없지. 게다가 멀리서 왔으니 그 본전은 뽑아야 된다.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지만 속이 좀 덥수룩했는데 정말 약수의 효과인지 꼬르륵 말썽을 부리
던 뱃속이 잠잠해진 것 같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 같아서는 약수터 물이 마
르도록 더 퍼마시고 싶지만 위 용량의 한계가 있어서 더 마시진 못했다. 약수터 안내문을 보
니 1일 권장량이 1리터 이하라고 한다. (그날 아마 1.5리터는 마셨을 듯)


▲  추곡약수 윗약수 - 샘 주변이 시뻘겋다.

▲  겨울에 잠긴 추곡약수 윗계곡 (계곡은 출입 금지)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디며 조용히 봄을 잉태한 계곡, 소쩍새가 우는 그날
거추장스런 눈과 얼음을 박차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  추곡사(楸谷寺) 가는 길

추곡약수 마을에서 약수로 가는 길목 남쪽 산중턱에 추곡사란 조그만 산사(山寺)가 자리해 있
다. 약수를 마시고 내려오면서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약수 하나만 보기에도 좀 허전하여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길목에 있으니 잠깐의 발품이면 충분하다.
추곡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확한 창건 시기는 모르겠다. 원래 이름은
명도암(明道庵)이었으나 지역 이름을 따서 추곡사로 갈았다. 숲에 둘러싸인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법당임에도 규모가 꽤 단출하다. 산신각도 대
웅전과 닮은 꼴이며, 대웅전 내에는 문수/보현보살을 대동한 금동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
안되어 있어 있을 것은 거의 다 갖추고 있다.

▲  간단한 모습의 추곡사 대웅전(大雄殿)

▲  추곡사 요사(寮舍)

▲  산신이 봉안된 산신각(山神閣)

▲  금빛찬란한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  밝은 색채의 산신탱 - 두광(頭光)을 갖춘 너그러운 표정의 산신과
밥을 며칠 못먹었는지 까칠한 표정을 지은 호랑이, 그리고
앳된 모습의 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 춘천 추곡약수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① 춘천까지
* 청량리역, 상봉역, 망우역, 퇴계원역, 평내호평역에서 경춘선 전철을 타고 남춘천역이나 춘
  천역 하차
* 용산역, 청량리역, 상봉역, 평내호평역에서 경춘선 ITX-청춘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이나 춘
  천역 하차
* 동서울터미널, 강남 센트럴시티, 잠실역(5번 출구)에서 춘천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인천, 부천, 고양, 구리, 성남, 수원, 평택, 강릉, 원주, 청주, 천안, 대전(복합), 전주,
  대구(북부, 동대구), 울산, 부산에서 춘천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춘선 남춘천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영서로)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온의4거리이
  다.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강남동(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인데, 여기서 춘천시내버
  스 18번을 타고 추곡약수에서 내린다. <춘천시외터미널을 나와서 왼쪽(북쪽)으로 가면 온의
  4거리, 여기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면 강남동 정류장>
  버스는 1일 5회 운행하며, 후평동에서 7:30, 9:05, 11:35, 15:40(하절기 16:35), 19시에 출
  발한다. (강남동은 15분 정도 추가)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춘천시외터미널에서 양구행
  직행버스를 타고 북산지서에서 내려 2km 걷는다. (직행버스는 40~60분 간격, 춘천역 경유)
③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에서 양구 방면 5번 국도 → 배후령터널 → 간척3거리 → 추곡
  약수3거리에서 좌회전 → 추곡약수

*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추곡리 (추곡약수길 89-1)


 

♠  소양강 하류에 남아있는 청동기 유적 천전리지석묘(泉田里支石墓)
- 강원도 지방기념물 4호

추곡약수에서 조촐하게 약수 몸보신을 하며 사명산의 청정한 기운까지 누리다가 약수에 대한
미련을 애써 지운 채, 다시 추곡3거리(북산지서)로 나왔다. 그냥 춘천시내로 나갈까 하다가
추곡약수 하나로는 무척이나 허전하여 시내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천전리지석묘를 후식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마침 춘천~양구 직행버스가 천전리지석묘 근처인 춘천국유림관리소에 정차
한다.

직행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중, 그렇게나 보기 힘든 18번 시내버스가 시내에서 나와 추곡
약수로 들어갔다. 이 차는 추곡약수에서 바퀴를 돌려 다시 추곡3거리로 나왔다가 북산면사무
소가 있는 오항리로 들어가는데 그를 타면 참 저렴하게 천전리로 넘어갈 수 있지만 시내 방면
은 무려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된다. 시간은 이미 16시가 넘은 상태, 그때까지 햇님이 우리
를 기다리지 않기에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비싼 직행버스를 타야 되는데 이 직행버스도 좀
처럼 나타나질 않는다. 게다가 일몰 직전의 산골이라 칼바람이 춤을 추며 우리의 폭력성을 적
지 않게 테스트한다.
그렇게 기다린지 40분 만에 춘천행 직행버스가 짜잔 모습을 비추었다. 그의 등장에 잔뜩 일그
러진 표정은 긍정적인 표정으로 씨익 바뀌었지. 거의 비행기 이륙 수준으로 질주하는 그를 잡
아타고 간척3거리와 배후령터널을 지나 거의 20분 만에 천전리 춘천국유림관리소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천전나들목 입구 3거리인데 여기서 길 오른쪽에 천전리
지석묘를 알리는 갈색 피부의 이정표가 나온다. 그의 안내로 겨울잠에 잠긴 농산물 비닐하우
스 단지를 지나면 그 길의 끝에 천전리지석묘가 웅크리고 있다.


▲  고된 세월에 새까맣게 탄 서쪽 지석묘(고인돌)

소양강 북쪽, 천전리 경작지에 자리한 천전리지석묘(고인돌)는 2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
에 시신과 유물을 담은 돌방을 낸 다음 커다란 뚜껑돌을 씌운 탁자식이다. 이들은 세력의 우
두머리나 부족장의 무덤으로 예전에는 10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5기만 남은 상태이며, 다른 고
인돌에 비해 덩치가 작은 편이나 드물게 돌방이 잘 남아있다.

고인돌 뚜껑돌의 길이는 2.2~2.6m 정도이고, 기둥(받침돌)의 높이는 1~1.1m 정도이며, 돌방에
서 돌화살촉 3개와 대롱구슬,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돌방에는 잡석만 무성하며,
이들 고인돌을 통해 옛 조선(朝鮮)이 대륙을 호령했던 청동기시대에 춘천 지역에 조그만 세력
이 있었음을 귀뜀해준다. 이 세력은 점차 춘천 지역을 다스렸던 맥국(貊國)으로 발전하거나
혹은 그 세력에 강제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은 가련한 고인돌
천전리고인돌 형제 중 가장 덩치가 작다.

▲  검은 피부가 되버린 동쪽 고인돌들

▲  돌방을 꽁꽁 가리고 있는 동쪽 고인돌 (왼쪽에 꼬꾸라진 커다란 돌은
예전에 사라진 고인돌의 뚜껑돌)

▲  가장 동쪽 고인돌

※ 춘천 천전리지석묘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① 대중교통 (현지교통, 춘천국유림관리소 하차)
* 경춘선 남춘천역(1번 출구)에서 11, 150번 시내버스 이용 (150번은 다소 돌아감)
* 남춘천역(1번 출구)을 나와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온의4거리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건
  너서 강남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11, 18, 18-1번 시내버스 이용
* 춘천역(1번 출구)에서 11, 12, 150번 시내버스 이용
* 춘천국유림관리소에서 하차하여 동쪽(소양댐)으로 200m 가면 천전리지석묘를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에서 양구 방면 5번 국도 → 천전나들목을 나와서 소양댐 방면
  좌회전 → 천전리지석묘 입구 (차는 이곳에 주차)
*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685-7


천전리고인돌을 보고나니 땅꺼미는 완전 짙어져 세상은 검은색 도화지가 되었다. 소양호와 칼
처럼 솟은 산들로 둘러싸인 춘천분지 특유의 칼바람과 맞서며 종일 돌아다녔더니 저녁 시장기
가 강하게 피어오른다. 저녁은 이미 정처를 정해둔 상태라 춘천의 명물인 닭갈비와 막국수,
빙어회를 내놓는 식당으로 즐비한 윗샘밭(천전리)을 버리고 춘천시내버스 13번을 타고 춘천시
내로 들어갔다.

신북읍과 소양2교, 강원도청을 차례로 지나 동부시장에서 내려 남쪽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가
니 효자동(孝子洞)에 자리한 별당막국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남부4거리 부근 약사동
으로 이전됨) 바로 이날 저녁을 처리할 집이다.
자리에 앉아 무엇을 먹을까 잠시 즐거운 고민을 벌이다가 춘천스타일에 맞게 막국수와 메밀전
병, 감자전을 주문했다. 잠시 뒤 따끈한 육수와 붉은 김치, 백김치 등 김치 2종류가 차려진다.
김치도 제법 숙성이 되서 맛이 좋았고, 백김치도 입에 잘 들어가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그리
고 바로 감자전과 메밀전병이 수줍은 듯 앞에 차려졌는데 감자전은 강원도에서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감자전 맛이고, 메밀전병은 정선5일장과 동해(東海) 북평5일장에서 먹던 그 맛과 비
슷하다. 전병은 거의 20덩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하다.
이윽고 춘천스타일 음식의 제왕인 막국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국수는 춘천을 비롯한 강원도
의 토속음식으로 국수와 계란 반토막, 돼지고기, 당근, 오이 등이 버무러져 막국수를 이루고
있다. 식당 종업원의 안내로 지정된 육수를 조금 부어서 막 비벼 먹으니 제법 맛이 살아난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을 모두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살짝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  감자전과 메밀전병, 김치 2종류

▲  막국수의 위엄

식당을 나오니 날씨는 더욱 심술을 부려 바람이 더욱 까칠해졌다. 이제는 쿨하게 집으로 돌아
가야 될 시간, 남춘천역까지 걸어가 경춘선 전철을 타고 미련없이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춘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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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허준과 겸재 정선의 체취가 깃든 옛 양천고을의 중심터, 서울 가양동 둘러보기 ~~~ (양천향교, 소악루, 궁산, 양천고성터)

 

'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서울 가양동 나들이 '

▲  궁산에 복원된 소악루(小岳樓)

▲  궁산 산책로

▲  소악루에서 바라본 한강


한강 가을물결 무명베를 펼쳐놓은 듯
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이 가볍다.
사방들녘 바라보니 누런구름 일색인데
양천 일사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 1797년 정조 임금이 양천 관아를 방문하면서 남긴 시


 

여름 제국의 패기가 기승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서구 가양동(加
陽洞)을 찾았다.

가양동은 한강(아리수)이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동네로 1992년까지 김포평야(金浦平
野)의 일부를 이루던 농촌이었다. 허나 인근 등촌동(登村洞)과 더불어 아파트단지가 조성
되면서 시가지의 일부로 변해버렸다. 지금이야 강서구(江西區)의 일원이자 서울의 1개 동
에 불과하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부터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이자 양천허씨
의 영원한 고향으로 많은 명소를 숨죽여 품고 있다.

양천 지역은 신라 중기까지 제차파의(齊次巴衣)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 공
암(孔巖)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후기에 김해허씨 일가가 공암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김해허씨 시조<가락국 김수로왕
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이자 양천허씨의 시조가 되는 허선문(許宣文)이 구암
공원 서쪽에 있는 허가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하고자 군
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을 제공한 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의 지
위를 얻었다. 이후 태조는 그의 공을 더욱 치하하고자 장경공(莊景公)의 작위(爵位)와 함
께 공암을 본관으로 내리면서 양천허씨의 명실상부한 시조가 된다.

공암은 1301년 양천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고을 관청이 잠시나마 신정동 연의골로 옮겨
지기도 했으나 조선시대에는 가양동 궁산 남쪽이 쭉 양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200여 고을 가운데 가장 작은 고을로 계속 현(縣)에 머물러 있다가, 1895년 조선8도
를 23부로 개편했을 때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다가 13도제를
하면서 경기도 양천군이 되었다. 허나 1914년 김포군에 강제 통합되면서 오랫동안 독립적
인 고을을 유지했던 양천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1963년 옛 양천 일대가 서울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강서구(江西區)에서 남쪽 일대
를 양천구(陽川區)로 분리하면서 잊혀진 옛 이름 양천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양천 고을의 범위는 현재 강서구와 양천구, 영등포구를 비롯하여 구로구 일부, 김포시 고
촌읍 일부로 매우 작았다. 김포평야의 일부로 너른 평야가 고을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고
을 북쪽에는 한강이 흘러 수많은 선박들이 오갔다. 허가바위 부근에는 서울과 행주나루를
잇는 공암나루가 있었고 광주바위와 소요정(逍遙亭), 소악루 등 한강을 옆구리에 낀 멋드
러진 명승지가 즐비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양천현감(縣監)으로 부임
하여 양천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낌없이 그림에 담았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쓴 허준(
許浚)의 고향이기도 하다.

서울의 일원이 된 이후, 오랫동안 김포평야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시골 마을로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개발이 가양동 일대를 칼질하면서 전원 풍경이 퇴색되고 그 화려했던 명소
들마저 적지 않게 희생되거나 궁색한 처지가 되었다.
한강 남쪽을 가르는 올림픽도로가 닦이면서 허가바위와 궁산 북쪽까지 넝실거리던 한강은
북쪽으로 밀려났으며, 가양택지 개발로 광주바위는 옛날의 명성을 잃고 구암공원 한쪽 구
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현재 가양동의 명소들은 양천허씨와 관련된 구암공원 주변과 양천 고을과 관련된 궁산 일
대로 나눠볼 수 있다. 구암공원에는 광주바위와 양천허씨의 성지(聖地)인 허가바위, 허준
과 이 땅의 한의학을 집대성한 허준박물관이 있으며, 궁산(宮山)에는 서울 유일의 향교인
양천향교와 오래된 성터인 양천고성터, 근래에 복원된 소악루, 양천관아터, 겸재정선미술
관, 궁산 산책로 등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거리도 가까워 넉넉잡아 4~6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  옛 양천현아(陽川縣衙)터

양천향교 남쪽에는 양천 고을을 관리하던 관아가 있었다. 양천현아는 중앙에 고을 현감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 종해헌(宗海軒)>이 있었고, 동쪽에 객사(客舍)인 파릉관(巴陵館)
이, 북쪽에는 향교가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읍치(邑治)라고 한다. 주목할 점은 이 땅의
옛 고을 중 동헌과 객사, 향교 등의 읍치가 50m 반경 내에 싹 몰려있는 곳이 이곳 양천뿐
이라는 것이다. (양천은 읍치와 고을을 지킬 읍성도 갖추지 못했음)

종해헌 남쪽에는 아전들이 일을 보는 길청이 있었고, 향청(鄕廳) 동쪽에는 장교청(將校廳
)이, 그 좌우로 창고가 있었으며, 종해헌 부근까지 한강수가 넝실거렸다고 한다. 허나 왜
정(倭政)에 의해 이들은 고약하게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겨우 향교만 살아남았다.
현재 동헌 자리에는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찼고 객사 자리에는 홍원사란 절이 둥지를 틀었
다. 그 외에 사직단(社稷壇), 성황사 등이 향교 주변에 있었으나 겨우 성황사만 남아있다.


 

♠  옛 양천고을 교육의 중심지, 서울 유일의 향교로 주목을 끄는
양천향교(陽川鄕校) - 서울 지방기념물 8호

▲  양천향교 홍살문

향교(鄕校)는 조선 정부가 서울을 제외한 각 고을에 세운 유교식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
학교와 비슷하다. 양천향교는 양천고을의 유교식 교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서울 유일의 향교란
점이 크게 주목을 끈다. 지금은 서울의 일부로 조용히 묻혀있지만 1914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
도에 속한 별도의 고을이었다. 그래서 향교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향교는 1411년에 창건되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 이후 교육 기능이 상실되고 제
사기능만 남으면서 슬슬 황폐화된 것을 1945년 명륜전을 중수했으며, 1965년 대성전과 외삼문
을 보수했으나 많이 부실했다. 하여 1977년 복원 계획을 수립, 1980년 복원공사에 들어가면서
1981년 1차 복원공사를 마무리 했으며, 1986년 2차 보수를, 1994년에 3차, 2007년에 4차 보수,
그리고 2008년에 전면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1990년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양천향교'가 아닌 '양천향교
터'이다. 아마도 1980년 이후 기존 건물을 싹 갈아서 그렇게 이름을 정한 모양으로 근래에 복
원된 탓에 고색의 무게는 크게 내려앉아 다소 아쉬움을 선사한다. 항상 문이 닫힌 여타 향교
와 달리 속세에 늘 개방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향교 앞에는 여느 향교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뾰족한 홍살문이 아주 차갑게 나그네를 맞이한
다. 홍살문 서쪽에는 유예당(遊藝堂)과 전통놀이마당이 있으며, 홍살문을 지나면 향교로 들어
서는 외삼문과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 서쪽에는 가양동 일대에서 수습된 비석 9기가 똘똘 뭉
쳐 있는데, 이들은 양천현감이나 이곳에 들린 경기도관찰사(觀察使)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
비(不忘碑)이다.

좌측만 열린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조그만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은
향교 학생들의 숙식공간이다. 그런 동/서재를 바라보고 있는 명륜당(明倫堂)은 교육 공간으로
지금의 교실이나 강의실과 같다. 향교에서 2번째로 중요한 건물이라 규모가 우람하며 현역에
서 은퇴한 신세지만 여전히 위엄이 넘친다.
명륜당 옆구리를 지나면 높다란 계단 끝에 내삼문이 있는데 그 문을 지나면 향교의 중심인 대
성전(大成殿)에 이른다. 허나 내삼문은 석전대제(釋奠大祭) 외에는 늘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
고 있어 굳이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리자에게 요청하기 바란다. 허나 최근에 복원된 건물이
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이 향교에는 서울 유일의 홀기(笏記)인 양천현 홀기가 전하고 있다. 이는 양천고을 현감이 참
여하는 행사와 의식 절차를 적은 것으로 홀기 11종, 축문(祝文)과 제문(祭文) 3종 등, 14종의
문건을 하나의 서첩(書帖)으로 만든 것이다. 내용은 객사에서 지내는 망궐례(望闕禮)를 비롯
하여 사직대제(社稷大祭), 성황제(城隍祭), 려제(癘祭), 알성례(謁聖禮)와 국상시(國喪時) 곡
반례(哭班禮) 등으로 19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4호이다.

◀  양천현 홀기 (문화재청 사진)
이 문서는 관람이 거의 불가능하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외삼문(外三門)
보통은 좌측문(동쪽문)만 열려있고 가운데 문은 석전대제 때만 열린다.

▲  외삼문 우측에 옹기종기 모인 비석들

외삼문 우측에 심어진 비석 9기는 양천 고을의 오랜 역사를 가늠케 해주는 유물로 양천현감과
경기도관찰사의 선정비 및 불망비이다. 저들 중 진정으로 비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자는 몇이
나 될까? 태반은 형식적인 비석이거나 세금 착취를 위해 만든 비석일 것이다.
가장 오른쪽의 비석은 고색의 무게가 크게 깃들여져 중후함이 느껴지며, 앞줄 가운데 비석은
특별하게도 기와 모양의 지붕돌을 지녔다.

▲  서재(西齋)
일반 백성 자재들의 숙소로 그 모습은
동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동재(東齋)
양반이나 관리 자재들의 숙소로 지금은
관리사무소로 쓰인다.


▲  공자왈 맹자왈이 들릴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교육 공간으로 교궁(校宮)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통 학생 30~50명이 수업을 받았으
며, 교수(敎授) 1명과 직원 1명이 교육을 담당했다. 비록 갑오개혁 이후 교육의 기능은 사라
졌지만 지금은 지역 주민과 초/중/고생을 위한 한문과 서예 등의 교양 강좌가 열리고 있어 명
륜당의 기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  글씨에 힘을 불어넣은 듯한 명륜당
현판의 위엄

▲  대성전을 품은 채, 입을 봉한
내삼문(內三門)


대성전(大成殿)은 향교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자 중심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5성(공
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과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우리나라 18
현(최치원,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등)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위치가 높은 건물이라
보통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둔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내삼문은 늘 굳게 닫혀져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은데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계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담장 너머로 보려고 해도 가파른 곳에 높게 울타리를 친 터
라 대성전의 얼굴 조차 보기 힘들며, 문틈으로 보이는 범위도 매우 한정적이다. 일개 대성전
의 얼굴이 그렇게 비쌌단 말인가? 보물로 지정된 장수향교 대성전(보물 272호)이나 강릉향교
대성전(보물 212호)도 저렇게 비싸게 놀지는 않는데 말이다.


▲ 대성전 우측에 자리한 전사청(典祀廳)
대성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우측에 자리한 맞배지붕의 전사청만 온전하게 보인다.
전사청은 제례와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  명륜당 뒤쪽 굴뚝
흙과 기와로 닦여진 그 모습도 정겨운 굴뚝
2개가 명륜당 뒤에 숨어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양천향교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강서농협이 있다. 농협
  앞 골목길(양천로49길)을 따라서 7분 정도 쭉 들어가면 양천향교가 나온다.
* 지하철 5호선 발산역(3번 출구)에서 6630, 6645, 6657번 시내버스를 타고 양천향교역(휴먼빌
  아파트) 하차, 길 건너편에 있는 강서농협으로 건너가서 양천로49길 골목길로 진입하여 쭉
  들어가면 된다.


★ 양천향교 관람정보 (2017년 12월 기준)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다.
*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정(丁)이 들어가는 1번째 날>에 석전대제를 지낸다.
* 양천향교역 내부에 향교홍보관을 운영하고 있어 향교 홍보물과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외삼
  문에 방명록과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다. 이 땅에 많은 향교가 있지만 이렇게 홍보물과 홈페
  이지까지 갖춘 향교는 거의 없다.
* 단체관람을 원할 경우 미리 연락을 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 성년례와 혼례, 상례와 제례 등의 가정의례와 한문, 예절, 충효 등의 교양강좌를 운영한다.
  자세한건 전화 문의 또는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양천로47나길 53 ☎ 02-2659-0076)
* 양천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가양동의 든든한 뒷동산, 궁산(宮山) 둘러보기

▲  녹음이 짙은 궁산 산책로

양천향교 뒤쪽에는 가양동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는 궁산(74.3m)이 야트막하게 누워있다.
한강변에 솟은 조촐한 뫼로 가양동에는 궁산 외에 탑산도 있었으나 개발의 난도질을 당해 겨
우 허가바위 주변만 남아있는 상태이며, 궁산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평지인 가양동에서 유독 하늘 높이 솟은 궁산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
鎭山)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한강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삼국시대부터 한강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 자락에는 희미하게나마 백제나 신라 때 지어진 옛 성터가 있으며, 임
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관군과 의병들이 집결하여 왜군을 격퇴했다. 18세기에는 겸재 정선이
양천 고을의 현감으로 부임와서(1740~1744년까지) 궁산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 현장
이 바로 소악루이다. 또한 6.25시절에는 국군이 주둔하며 북한군을 격퇴했다.

궁산에는 양천고성터와 복원된 소악루, 관산성황당, 양천향교 등의 오래된 명소가 있으며, 조
망이 일품이라 한강을 배경으로 한 주변 풍경이 아주 예술이다. 강서구에서는 궁산을 근린공
원(면적 약 133,700㎡)으로 삼아 산책로와 운동시설, 조망터 등을 만들었으며, 양천향교 서쪽
과 겸재정선미술관, 마곡금호어울림아파트 쪽에 산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산이 워낙 작아
서 빨리 둘러보면 30분 정도, 아주 여유롭게 둘러보면 1~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소악루
와 궁산 정상은 한강을 낀 야경 출사 장소로 썩 괜찮은 곳이다.


▲  궁산의 작은 꽃, 소악루(小岳樓)

한강이 두 눈에 바라보이는 궁산 북쪽 절벽에 단아하고 조촐한 맵시의 소악루가 있다. 이 누
각은 조선 영조 때 동복(同福, 화순군 동복면) 현감을 지낸 이유(李糅)가 궁산 강변 악양루(
岳陽樓)터에 재건한 것으로 중원대륙 동정호(洞庭湖)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의 경치에 버금간
다하여 소악루라 하였다. 즉 작은 악양루인 셈이다. (이유는 동정호의 악양루를 가본 적도 없
음)

소악루에 오르면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인왕산(仁王山)과 안산(鞍山) 등 서울 도심을 둘러싸
고 있는 산과 멀리 관악산(冠岳山),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가까이로 탑산과 선유
봉(仙遊峰), 한강 줄기가 이어져 예로부터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겸재 정선도 소악루에 올
라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당시의 경관이 고스란히 담
겨져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소악루는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원래 위치는 가양동 산6-4번지 세숫
대바위 근처로 여겨지는데, 이미 아파트들이 첩첩하게 들어선 상태라 제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1994년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각이라기 보다는 공원에 지은 아담한 정자 같다. 게
다가 흙이 아닌 보도블록 바닥에 뿌리를 내린 탓에 정취와 옛 명성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복
원을 하더라도 소악루와 주변 풍경을 배려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 역시 대충대충 탁상행정이
빚어낸 폐해이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1)
한강을 벗삼아 시원스레 뚫린 올림픽도로와 한강에 다리를 담군 가양대교,
그 너머로 쓰레기를 발판 삼아 어엿한 산맥이 된 하늘공원이 바라보인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한강 건너편은 고양시 덕은동과 현천동 지역, 저 멀리 북한산(삼각산)의
힘찬 줄기가 살짝 위용을 드러내 보인다.

▲  목멱조돈(木覓朝暾)

소악루에는 겸재가 궁산에서 그렸다는 진경산수화 복사본과 해당 그림의 해설판이 있다. 그러
니 그림에 담겨진 풍경과 실제 풍경을 대조해보며 주변 풍경을 대해보기 바란다. 억겁의 세월
이 한강수처럼 흐르는 동안 그림에 담긴 모습과 현재 모습이 참 많이도 달라졌지만 산줄기만
큼은 그림에 그려진 그대로이다.

목멱조돈은 겸재 정선이 1740년 궁산에서 바라본 남산을 그린 그림이다. 높이 솟은 두 줄기의
산은 북한산(삼각산)이며, 그 아래 야트막하게 목멱산(木覓山, 남산)이 솟아있다. 그 주변에
노고산과 와우산, 만리동고개, 애오개 등의 윤곽이 보이며, 지금은 하늘공원에 가려 만리동고
개와 애오개는 보이지 않는다.


▲  안현석봉(鞍峴夕熢)

안현(鞍峴, 갈마재)은 연세대 뒷산인 안산(鞍山)이다. 겸재가 안산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저
녁 봉화불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이를 그림에 담은 것으로 가까이에 탑산과 광주바
위(그림 오른쪽 아래)를 그림 앞쪽에 끌어낸 것을 보면 궁산에서 탑산과 안산을 바라본 풍경
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소악후월(小岳候月) -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그림 왼쪽에 소악루가 있고, 그 부근에 조그만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그곳이 소악루를 세운 이
유의 집으로 여겨진다. 그림 오른쪽에는 탑산, 선유봉 등이 있고, 멀리 남산과 와우산이 보름
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밑에 바위 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  양천고성터(陽川古城址) - 사적 372호

소악루 서쪽 산자락에 아련히 남아있는 양천고성터는 궁산 정상부에 축조된 것으로 길이 220m
, 면적은 29,370㎡인 조그만 산성(山城)이다, 백제 또는 신라 중기(6~7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성 이름은 딱히 전해오는 것이 없어 고을 이름인 양천을 따서 양천의 옛 성이란 뜻
의 양천고성이라 불린다. 한강과 접한 북쪽은 경사가 급하며, 남쪽은 느긋하다.

성과 관련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
지(大東地志)' 등에 전하며 성벽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적심석(積心石)과 성돌이
몇몇 남아있고, 높이 2~3m 정도의 성곽 윤곽이 일부 남아 이곳에 산성이 있었음을 희미하게
전할 따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권율(權慄) 장군이 오산 독산성(禿山城, 세마대)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곳
에 잠시 머물다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일구어냈으며,
행주산성과 오두산성(파주 통일전망대에 있음) 등과 더불어 한강을 지키던 요새였다.


▲ 양천고성의 흔적
한강을 지키던 산성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나무와
수풀만이 가득하다. 역시나 인간이 만든 것은 대자연 앞에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  민간신앙이 깃들여진 관산성황당(關山成隍堂)

궁산 정상부 남쪽 소나무숲에 자리한 관산성황당은 가양동의 안녕을 기원하던 마을 당집이다.
여기서 관산은 궁산의 옛 이름으로 보통 성황당의 한자는 '城隍堂'인데 반해 이곳은 '城' 대
신 '成'을 쓰는 특이함을 보인다.

이 당집은 '도당(都堂)할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도당할매는 서울 지역 당집에서 많이 봉안하
는 존재이다.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成隍祠)가 성산(궁산의 옛
이름)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500년 이상 묵었음을 보여준다.

성황당의 도당할매는 백성들의 번영과 행복을 도와주고 악귀를 몰아내주며,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준다고 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고 굿을 벌인다. 당집은 퇴
락된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정비했는데 덕분에 오래된 당집 분위기가 완전히 퇴색되고
말았다. 당집이라기 보다는 그냥 창고 같은 분위기다.

조선 후기에 황진(黃瞋)이란 사람이 이곳과 관련된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한강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띠웠더라
산 위에 남아있던 성의 담장(양천고성)도 다 없어졌는데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 사람을 본따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한다.


▲  누런 풀밭의 궁산 정상

궁산은 거의 야트막한 뒷동산 수준이지만 주변에 마땅한 산이 없어 그 존재가 무척 커 보인다.
그래서 사람이든 산이든 위치를 정말 잘 잡아야 된다.
정상 서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은 물론 행주산성, 서울 서부 지역이 거
침없이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로 휼륭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산6,7,8일대


▲ 궁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강에 다리를 담군 다리는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을 거쳐 서울역까지 달리는 공항전철
다리이다. 그 너머로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방화대교가 있으며, 사진 가운데에
자리한 산이 행주대첩의 현장,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  궁산 서쪽 산책로

▲  공항칼국수에서 먹은 버섯칼국수의 위엄

이렇게 가양동 나들이를 마치고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김포공항 입구에 있는 공항칼국수집을
찾았다. 가양동이나 등촌동에서 먹어도 되지만 문득 공항칼국수 생각이 간절하여 송정역까지
6631번 시내버스를 타고 그 집을 찾은 것이다.

김포공항입구교차로에 둥지를 튼 공항칼국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30여 년 묵은 집이다. 그
곳에 들어가니 본격적인 저녁 시간 이전(18시 이전)임에도 사람들이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버섯칼국수를 주문했는데 끓여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닌 국수사리
와 버섯, 채소가 한몸이 된 검은 피부의 냄비가 나와서 마련된 버너에 몸을 푹 끓인다. 그렇
게 5분 이상을 두면 버섯칼국수가 보글보글 자신을 끓이면서 진국이 된다. 반찬은 고작 김치
하나가 전부, 허전한 반찬을 보며 그래도 2가지는 나와야 덜 허전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버섯
과 어우러진 칼국수와 국물을 입에 넣는 순간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쏙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김치도 적당히 숙성이 되서 입맛에 그런데로 맞았는데 어느 정도 먹기가 무섭게 식당 아줌마
가 알아서 김치를 갖다주어 김치 수급문제는 없었다.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칼국수는 젓가락이나 국자로 각자의 그릇에 담아 먹는 것인데 너무 시
장한 나머지 국수와 버섯이 귀해지자 국수사리 하나를 시켰고, 국물에 밥 2개를 볶아서 말끔
히 냄비를 비운다. 국물과 하나가 된 볶음밥 역시 맛이 괜찮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찾아간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가양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칼국수 국물에 밥까지 싹 비벼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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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한복판에 뉘어진 신비의 탄산약수,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 탄산약수의 성지를 찾아서 ~~~

홍천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

▲  삼봉약수터



 

봄이 겨울의 잔여 세력을 토벌하며 천하평정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원도를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후배가 차를 렌트하여 1박2일 일정으로 강원도와 충북, 경북 지역을 유람
하기로 했는데 렌트카의 장점을 최대한 뽑고자 대중교통 접근성이 매우 고통스러운 곳을
중심으로 아주 아름답게 동선을 짰다. 그래서 요즘 한참 관심을 가지고 있는 탄산약수를
먼저 찾기로 하고 적당한 약수를 물색, 홍천 삼봉약수터에 격하게 반응을 보여 그곳을 1
번 답사지로 정했다.

아침 8시, 능동(陵洞) 어린이대공원 부근을 출발하여 우선 주유소에 들어가 2일 동안 수
고를 해줄 차량에게 밥을 두둑히 먹이고 긴 여정에 들어갔다. 사람이든 차량이든 동물이
든 무조건 배불리 먹고 봐야 된다.

언제나 번잡한 서울 시내를 벗어나 강변북로와 경강로(6번국도)를 신나게 달려 구성포에
서 56번 국도(구룡령로)로 진입했다. 칼처럼 솟은 산 사이를 구불구불 돌아 창촌에 이르
니 동쪽으로 보이는 산 정상부에 하얀 눈이 버젓히 쌓여있어 하늘에 그만큼 가까이 왔음
을 느끼게 한다.
12시 반 정도에 드디어 삼봉약수터를 품은 삼봉자연휴양림 입구에 도착했다. 같은 홍천(
洪川) 땅임에도 홍천읍에서 무려 80여km나 떨어진 곳이니 정말 허벌나게도 멀다. 참고로
홍천군은 우리의 실지(失地, 북한과 요동, 만주, 왜열도)를 제외한 이 땅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으로 면적이 무려 1817.96㎢에 달한다. (서울의 약 3배임)
고을 대부분이 산지로 동쪽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허리인 태백산맥이 흘러가 고산준령
을 이루며 칼처럼 솟은 뫼 사이로 적게나마 경작지가 누워있어 그곳에 주로 마을이 형성
되어 있다.

수해(樹海)에 잠긴 휴양림길을 들어서면 4동으로 이루어진 한옥지구와 제2야영장, 제1야
영장이 차례로 마중을 나오고, 주차장을 지나면 관리사무소(매표소)가 차단기로 길을 막
고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쳐다본다. 삼봉약수터를 비롯한 매표소 북쪽은 유료(有料)의 땅
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리가 없기 때문에 순순히 입장료와 주차비를 치르니 그
제서야 차단기가 씨익 웃으며 올라간다.

햇빛지구 숙박동과 황토지구 숙박동을 지나니 조촐하게 닦인 약수터 주차장이 마중을 나
온다. 차량은 여기서 더 이상 바퀴를 굴릴 수 없으며 바로 계곡 너머로 삼봉약수터가 바
라보인다. (매표소 옆 주차장에 차량을 두고 삼봉약수터까지 걸어가도 됨, 1km 거리)


▲  삼봉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와 매표소



♠  삼봉자연휴양림에 묻힌 신비의 약수, 삼봉약수터(三峯藥水)
- 천연기념물 530호

홍천에서 제일 벽지로 통하는 광원리 산골, 가칠봉 남쪽 자락 계곡에 삼봉약수터가 조용히 웅
크리고 있다.
삼봉약수는 일반 약수와는 차원이 틀린 탄산약수로 맛이 은근히 쓰다. 물 색깔이 붉어서 주변
이 온통 붉은 색을 이루고 있는데, 이 물에 설탕을 타면 천연사이다가 되고, 이 물로 밥을 지
으면 푸른색으로 꼬들꼬들 익어 맛이 좋다.

이 땅<만주와 북한 등 잃어버린 땅은 제외>의 탄산약수는 강원도와 충북, 경북 산골에 몰려있
는데, 그 수가 별로 많지 않다. 탄산약수의 대표적인 성지(聖地)로는 세계 3대 광천수(鑛泉水)
의 하나로 꼽히는 청주 초정약수가 있으며, 제법 이름이 알려진 약수로는 설악산 오색약수, 인
제 방동약수와 개인약수, 양구 후곡약수, 홍천 삼봉약수, 춘천 추곡약수, 평창 방아다리약수,
정선 화암약수, 봉화 오전약수, 청송 달기약수, 세종시 부강약수 등이 있다. 서울에도 천호약
수라고 수도권 제일의 탄산약수가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숨통이 끊어진지 이미 오래
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 가본 기억이 있음)

삼봉약수를 끼고 있는 계곡 이름이 실론계곡인데, 그 이름을 따서 실론약수(實論藥水)라 불리
기도 했으며 <'실룬약수'라 하기도 했음> 가칠봉(柯七峰, 1240m)과 사삼봉(私蔘峰, 1107m), 응
복산(應伏山, 1360m) 세 봉우리 중간에 자리해 있어 삼봉약수라 부르기도 한다. <물이 나오는
구멍이 3개라 하여 삼봉이란 이야기도 있음>

수질이 매우 우수하여 우리나라 명수(明水) 100선의 하나로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으며, 철분
과 망간, 불소, 탄산이온 등 무려 15가지의 성분이 담겨져 있어 빈혈, 당뇨병, 신경통, 위장병
에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나 역시 위장병을 자주 달고 사는 가련한 현대인이라 어린 시절 입
에도 대지 않았던 탄산약수에 격하게 흥분을 보이면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탄산약수를 찾
아가 약수가 마르고 닳도록 본전을 뽑고 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건강을 챙길 나이가 된 것이
다.


▲  삼봉약수터

삼봉약수터는 3개의 혈(穴)로 이루어져 있다. 대자연 형님이 내린 신비의 물을 보호하고자 뚜
껑을 씌워 놓았는데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신 다음 다시 뚜껑으로 봉해야 된다. 어느 혈의 물을
마시든 색깔과 맛은 거의 같으며 탄산약수 특유의 약간 쓴 냄새가 조금 풍긴다. 그리고 혈 주
변은 약수의 영향으로 온통 시뻘겋다.

◀▲  신비의 물이 용솟음치는 삼봉약수터의
3개의 혈들 - 가뭄에도 거의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이 먼 곳까지 힘들게 왔으니 약수는 원없이 마셔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비록 물통을
준비하지 못해 서울까지 수송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몸 속에 가득 넣어 위장을 거의 탄산화시켰
다. 3개의 구멍의 물을 모두 마셨는데, 총 1.5리터는 마신 것 같다.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정
말 입에도 대기 싫었던 탄산약수였는데, 이제는 입맛이 변했는지 달콤하기까지 한다. 이런 내
모습이 과연 제대로 된 모습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었다는 쓰라린 신호일까?


▲  삼봉약수터 옆을 흐르는 계곡
때 묻지 않은 청정한 계곡으로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열목어(熱目魚)가
소리 없이 서식하고 있으며, 한여름에도 물이 차가워 5분 이상 발을 담그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린다.

▲  삼봉약수터 옆 이팝나무 숲속에 조성된 약수지구 숙박동

삼봉약수터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삼봉자연휴양림은 1992년 산림청에서 조성한 국립휴양림이
다. 산골 벽지에 묻혀있어 접근성도 별로 안좋고 가는 길도 험하지만 그런 고생을 감수하고 안
긴 휴양림은 이곳이 속세인지 신선의 숨겨진 세계인지 햇갈릴 정도로 풍경이 청초하고 침엽수
와 활엽수가 절제된 조화를 이룬 숲은 매우 울창해 그동안의 고생을 싹 가시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임)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자라난 키다리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천연림을 이루고 있고, 열목어가
마음 놓고 꼬리를 흔들 정도로 계곡이 청정하며, 탄산약수의 성지로 추앙받는 삼봉약수터를 품
고 있다. 또한 이곳을 둘러싼 공기는 순수함을 자랑해 바깥 세상의 공기와는 맛과 질부터가 확
연히 틀리다. 이렇게 모든 것이 청정한 곳이니 휴양과 피서지로도 아주 휼륭하다.

휴양림에는 한옥 숙박동과 햇빛, 황토, 약수지구 등에 숙박동(객실 25개)이 있으며, 야영장 55
개, 주차장 4곳, 물놀이장 1곳이 있다. 광원리 계곡(실론계곡)이 휴양림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속세로 흐르며, 삼봉약수터 북쪽에는 숲체험코스와 숲속교실, 그리고 가칠봉 정상으로 인도하
는 산길이 닦여져 있다. 또한 첩첩한 산골에 맞게 산촌 겨울나기 놀이체험과 숲해설 프로그램,
산림문화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과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홍천행 직행버스 이용
* 수원, 성남, 고양(일산), 의정부, 속초, 춘천, 원주, 청주, 대전(복합), 전주, 대구(북부),
  포항, 울산, 부산(동부)에서 홍천행 직행버스 이용
* 홍천터미널에서 내면(창촌)행 직행버스가 1일 11회, 군내버스는 1일 3회 운행
* 내면(창촌)에서 목맥동, 명개리행 군내버스(1일 5회)를 타고 삼봉자연휴양림 하차
  (내면 출발시간 - 6:40, 9:00, 12:00, 16:40, 18:25)
* 승용차
① 영동고속도로 → 속사나들목을 나와서 속사, 진부 방면 → 속사3거리에서 좌회전 → 운두령
   → 자운교차로 직진 → 창촌3거리 우회전 → 창촌(내면) → 원당3거리 직진 → 삼봉자연휴
  양림입구 → 삼봉자연휴양림(삼봉약수터)
② 서울춘천고속도로 → 동홍천나들목을 나와서 홍천 방면 → 구성포교차로에서 서석 방면 56
   번 국도 → 솔치재터널 → 서석 → 율전3거리 우회전 → 창촌3거리 좌회전 → 창촌(내면)
   → 원당3거리 직진 → 삼봉자연휴양림입구 → 삼봉자연휴양림(삼봉약수터)

★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관람정보 (2017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000원(단체 800원), 청소년 600원(단체 500원), 어린이 300원(단체 200원)
  <단체는 20명 이상>
* 관람시간 : 9~18시 / 숙박시설 이용시간 : 15시~다음날 12시까지
* 주차비 : 1,500~5,000원 (1일 기준)
* 삼봉자연휴양림 예약과 이용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리 산197-1 (삼봉휴양길 276, ☎ 033-435-8536)


▲  삼봉약수터 동쪽에 자리를 닦은 황토지구 숙박동


 

♠  막국수와 운두령(雲頭嶺)

▲  홍천에서 먹은 막국수와 여러 김치들

바가지에 불이 나도록 약수를 마시고 약수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14시가 넘었다. 휴양림을
품은 가칠봉까지 올라간다면 더욱 금상첨화겠지만 애당초 휴양림보다는 몸보신을 위한 약수터
에 더 큰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약수터에만 초
롱초롱 눈빛이 갔지. 하여 약수터 주변을 살펴보는 선에서 삼봉과의 인연을 흔쾌히 마무리지었
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 혹 인연이 닿는다면 그때는 휴양림에서 호젓한 하룻밤을 보
내고 싶다.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휴양림을 벗어나 점심 장소를 물색했다. 점심 시간도 많이 지났고, 지
금까지 딱히 먹은 것도 없어 뱃속에서는 배고프다며 계속 꼬르륵 소리로 불만을 표출한다.
창촌으로 나오던 중, 어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막국수와 백숙 등을 팔고 있
었는데, 강원도 산골에 왔다면 그곳의 토속 음식인 막국수나 전병, 메밀전, 메밀전병 등은 먹
어줘야 후회가 없다. 그래서 그곳에 차를 대고 식당에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단체 손님들로 시끌벅적했는데 안쪽 방에 자리를 잡고 막국수를 주문했다. 더
많은 것을 먹으면 좋겠지만 그날 충북 단양(丹陽)까지 먼 길을 가야되기에 위장을 너무 흥분시
키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그래서 일단은 막국수로 입가심을 하고 저녁에 황제처럼 먹기로
했다.


▲  두둑하게 나온 막국수의 위엄

막국수 주문을 하자 김치 3종류와 막국수 육수가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
내니 드디어 주인공인 막국수가 큰 그릇에 담겨 나타난다. 김가루와 계란, 오이, 깨 등이 버무
려진 막국수는 전형적인 강원도 막국수 스타일로 거기에 육수를 넣어 먹으면 되는데 육수와 국
수도 얼큰하고 김치도 맛이 괜찮았다.
국수나 냉면이 1끼 식사로는 좀 허전하긴 하지만 이곳은 양이 많아서 그릇을 싹 비우니 뱃속이
완전 만땅이 되버렸다. 그 틈을 노려 식곤증이 스르륵 밀려와 배깔고 자라며 희롱을 하니 정말
벌러덩 눕고 싶다. 허나 갈 길이 멀기에 서비스로 제공되는 자판기 커피로 식곤증에 맞서며 오
후 단잠에 빠진 차량을 깨워 다시 부르릉 시동을 건다.

바로 단양으로 넘어가기에는 해가 아직 있어서 그 길목에 자리한 영월(寧越)에 잠시 들려 적당
한 정처(定處)를 찾기로 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운두령이란 무지막지한 고개를 넘어
야 된다. 그는 강원도에 널린 험준한 고개의 하나로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 경계에 자리
해 있으며,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장평과 진부, 영동고속도로로 이어진다.

운두령의 높이는 1,089m로 고개 시작부터 꼬부랑 고갯길의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며 차와 사람
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한쪽은 가파른 오르막. 반대편은 밑이 보이지 않는 아찔한 내리막
으로 특히 차량이 넘나드는 고개 가운데 정선 만항재(1,330m) 다음으로 높아 운두령의 위엄을
실감케 한다.
운두령이란 이름은 늘 구름과 안개가 넘나든다는 시적인 뜻으로 그만큼 안개가 자주 낀다. 우
리가 지나갈 때는 다행히 쾌청했으나 미칠 정도로 고갯길 굴곡이 심해 자존심을 곱게 접고 바
퀴를 순진하게 굴려야 뒷탈이 없다. 그렇게 고개에 임하면 전혀 나올 것 같지 않던 운두령 정
상에 이르게 된다.


▲  운두령 정상 (평창 방향)

▲  운두령 정상 (홍천 내면 방향)

하늘과 맞닿은 운두령 정상에는 토산품을 파는 운두령쉼터와 주차장이 있다. 하지만 차량의 통
행이 많지 않아서인지 요란한 수준은 아니며 그냥 조그만 가게 수준이다. 고개 주변에는 겨울
의 부흥을 꿈꾸는 눈들이 여전히 남아 천하를 노리고 있고, 바깥에 마련된 화장실은 그들로 인
해 초토화(?)를 당해 잠시 기능이 상실되었다. 도로 휴게소의 기본 요소인 화장실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볼일은 쉼터 주변에서 알아서 봐야 된다.

운두령은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장대한 높이에 비해 조망 범위
는 그리 넓지 않다. 고개 주변에는 그보다 높은 산들이 칼처럼 솟아 병풍을 이루고 있기 때문
이다. 북쪽으로는 홍천군 내면 지역, 남쪽은 평창군 용평면 지역이 바라보이며, 양 옆으로 계
방산(桂芳山, 1577.3m)의 산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계방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있는데, 그
길로 2시간 30분 정도 얌전하게 오르면 계방산 정상에 이른다.


▲  운두령에서 계방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

운두령에서 잠시 바퀴를 접으며 하늘과 가까운 곳의 공기를 만끽하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구불구불 고갯길을 내려와 노동리에 이르니 미친 기운을 보인 운두령
길은 이내 흥분을 가라앉는다. 그런 상태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현장 이승복(李承福)
기념관을 지나 속사(束沙)에서 우회전하여 평창(平昌)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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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기장 죽성리 일대) '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와 동해바다
(정면에 큰 나무가 죽성리해송)

▲  죽성리왜성

▲  죽성리 월전포구


 

 

지루했던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전히 천하를 접수했던 4월의 한복판에 겨울로부터 해방된
기분도 만끽할 겸, 그리운 얼굴도 보고자 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은 이 땅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로 북쪽은 울산 울주군(蔚
州郡), 서쪽은 경남 창원과 김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너른 동해바다를 품고 있
으며,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는 큰 지역이다.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잠시 대구에서 발길을 멈추고 팔공산(八公山)에 안긴 파계사(把溪
寺)와 성전암(聖殿庵)을 둘러보며 산사(山寺)의 봄 풍경을 즐겼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런 다음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에 있는 친
한 형님 집에 문을 두드렸다.

저녁을 먹고자 광안리 해변 인근을 거닐다가 소금구이 닭갈비집이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를 피고 닭갈비에 소주를 여러 잔 걸치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물론 1차로 끝나면 섭하
지. 하여 집으로 돌아와 2차를 하며 다음날 나들이 장소를 모의하다가 새벽 1시에 꿈나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부시시 잠에서 깨니 벌써 9시였다. 그
날 일정은 다소 길기 때문에 잠에서 벗어나기 싫은 게으른 몸을 억지로 끌며 세수를 하고
10시에 광안동을 나섰다. 광안역 정류장에 이르니 그의 후배 하나가 합류하여 3명이서 기
장군(機張郡) 동해바다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동)을 타고 수영로터리, 해운대, 송정역
, 청강리를 지나 기장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기장지구대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건너편 정
류장에서 죽성리로 가는 기장군 마을버스 6번을 기다리니 5분도 안되어 버스가 나타나 활
짝 입을 벌린다.
주말 나들이 수요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바퀴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석을 이루었다. 우리는
재빨리 탑승하여 앉아갈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입석 신세를 면치 못할 뻔했다. 비
록 죽성리까지 10분 정도 거리에 불과하지만 서서 가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힘든 것은 마
찬가지이다.
버스는 시간이 되자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몸을 움직였다. 죽성사거리와 기장
군청 남쪽 고개, 신천리를 지나 죽성초교에서 두 발을 내리니 바로 남쪽 언덕에 우리의 1
번째 목적지인 죽성리 해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6그루가 합심하여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룬 오래된 소나무
죽성리해송(竹城里海松) - 부산 지방기념물 50호

▲  죽성리해송의 위엄

죽성리 두호마을 서쪽에는 얕으막한 언덕이 푸른 초원처럼 누워있다. 대부분 경작지가 이루어
진 그 언덕 정상에는 유난히도 초록 빛을 발하는 장대한 소나무가 동대해(東大海)를 굽어보고
있으니 그 나무가 바로 이곳의 오랜 명물인 죽성리 해송이다.

죽성리 해송은 소나무의 일종인 곰솔로 줄기 껍질이 다른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
이라 불리기도 하며, 바닷가 소나무란 뜻의 해송(海松)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곰솔은 남쪽
바닷가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데 소금기가 서린 짠 바닷바람에도 잘 견딘다.
이 나무는 겉으로 보면 1그루로 보이지만 6그루의 나무가 한 지붕을 이룬 것으로 높이 약 10m,
나무 지름이 30~40m에 달한다. 나이는 250~300년 정도로 여겨지며 언덕에 있는 경작지를 바닷
바람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곰솔 가족은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
며 서로를 보듬고 있으며, 거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어 안내문을 살피지 않으면 정말 1
그루의 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나무의 키가 훤칠하게 크고 덩치도 제법 있으며, 반경 0.5리 이내에는 키 큰 나무도 거의 없어
세상 중심에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웅장함을 진하게 풍긴다. 그리고 나무의 자태도 아름답고 바
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정상에 자리해 있어 사진쟁이와 그림쟁이들이 많이 찾는다.

해송의 그늘로 들어서면 나무들 사이로 조그만 당집인 국수당이 끼여있다. 나무가 제법 풍채를
드러내며 자라나자 마을 사람들이 나무 사이에 당집을 만들어 마을 성황신을 모시는 국수당으
로 삼았는데,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제물을 푸짐하게 차리고 풍어제(風魚祭)를 지낸다. 이 땅
의 어느 마을이든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당집이 있지만 나무 사이에 당집을 둔 경우는 별로
없다.

* 죽성리해송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49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 두호마을과 동대해

▲  해송 밑에 둥지를 틀어 마을을 지키는 국수당(성황당)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국수당은 풍어제 등 당제(堂祭) 외에는 굳게 닫혀져 있다.
나무 밑도리 사이에 당집이 깃든 흔치 않은 곳으로 당집 좌우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내부를 보호한다.

▲  솔잎과 솔방울, 거기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까지 듬뿍 더해져 가지가
거의 땅으로 내려 앉았다. <철기둥을 세워 가지가 땅에 완전히
주저앉지 않도록 막고 있음>

▲  죽성리해송 인근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기장 미역
기장은 미역이 유명하다. 이렇게 해송 인근에 널어두었으니 해송의 기운도
양념으로 듬뿍 더해져 더욱 최상품으로 끌어올려줄 것이다.


 

  죽성리에서 만난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 부산 지방기념물 48호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왜성 (산꼭대기에 보이는 성)

죽성리해송에서 서쪽(바다와 반대쪽)을 보면 높다란 언덕 위로 성곽 하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까
이에 보일 것이다. 그 성곽이 바로 임진왜란이 이곳에 남긴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이다.

해송에서 정겨운 시골길을 5분 정도 가면 왜성을 품은 언덕 밑에 이른다. 이곳에는 주차장, 해
우소가 있는데, 여기서 성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타고 2~3분 오르면 왜성의 아랫도리에 이
른다. 계단은 답사 편의를 위해 기장군에서 닦은 것으로 계단 옆에 흙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
니 개인 취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왜성 아랫도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왜성의 중심부이고, 중심부 서남쪽에 왜성 꼭대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왜성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천수대(天守臺)터가 있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
성(大阪城)에 있는 푸른 지붕을 지닌 큰 기와집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죽성리왜성은 1593년 봄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왜군과 지역 주민을 동원해 쌓은 순수
100%의 왜성(倭城)이다. 한참 북진을 하며 세를 과시하던 왜군은 1593년에 접어들어 조선의 대
대적인 토벌 작전과 왜열도에서는 맛보기 힘든 강추위로 고전하면서 순식간에 울산과 기장, 부
산, 창원 등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밀려나기 싫었던 왜군은 바다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과 언덕에 성을 쌓고 자기 집 마냥
들어앉아 장기전을 준비했다. 그들이 해안가 언덕을 선호한 것은 수비력 강화와 서로 간의 긴
밀한 연락 및 병력/군수물자 수송 편의, 그리고 위급시 신속히 줄행랑을 치고자 함이다.

이 왜성은 죽성리 뒤쪽 언덕에 자리해 있는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과 부산왜성 중간에 자
리해 서로를 연결하였다. 성 둘레는 약 960m, 성벽 높이 4m로 3단으로 축성되었으며, 성내(城
內) 면적은 11,776평 정도로 왜성 가운데 큰 편에 속한다. 장방형(長方形)의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은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진 이른바 들여쌓기 공법이다. 이 공법은 천하
제일의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했던 고구려(高句麗)의 축성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왜열도에서는 기장성(機張城)이라 부른다. 지금도
왜열도에서 많이 답사를 온다고 하는데, 1598년 왜군이 도망친 이후 성이 버려지면서 천수대와
성문, 주요 시설이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
다. 허나 성곽은 쓸데없이 잘 남아있어 왜성 가운데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때 사적 52호의 외람되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으나 1997년 사적에서 정리되어 버려졌다가 부
산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수습해 죽성리해송, 죽성성당, 죽성리 해변과 한 덩어리로 묶어 기장군
의 주요 명소로 키우고 있다.

왜성 주변은 상당수 경작지로 쓰이고 있으며, 왜성 북쪽과 계단이 있는 남쪽에는 소나무가 조
금 우거져 마치 양쪽에만 머리숱이 조금 있는 대머리를 보는 듯 하다.


▲  죽성리왜성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계단 주변은 유난히 소나무가 무성하여 이 땅을 요란하게 거치고 간 아픈 과거를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 하다. 그런다고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  풀이 잔잔히 돋아난 죽성리왜성의 아랫부분

▲  약간 비스듬히 누운 죽성리왜성의 본성(本城)

▲  왜성 외곽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던 성문터
왜성은 작은 산이나 언덕에 짧게 몇 겹으로 두룬 덩어리 같은 형태라 딱히
긴 성이 없다. 그나마 서생포왜성이 좀 긴 편에 속한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항과 두호마을
저 포구에 배를 정박해 주변 왜성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고 끝내는 저곳을 통해 줄행랑까지 쳤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
평화로운 어촌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와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하다.
바닷가에 죽성리 두호마을과 월전마을(사진 오른쪽)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과 포구 주변에는 경작지가 많아 나무가 별로 없다.

▲  왜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애타게 열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  왜성의 중심인 본환(本丸, 본성)

▲  연병장처럼 넓은 본환 - 잡초가 잔잔히 녹색 물결을 이룬다.

▲  죽성리왜성 서쪽에 길게 누운 봉대산(烽臺山) 북쪽 자락

죽성리왜성은 계곡이 없는 낮은 언덕에 자리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 왜성 서쪽에 있는
봉대산에서 식수를 운반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후방이라 물 수송에
는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봉대산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음>

▲  본환의 서북쪽 성곽

▲  북쪽에서 바라본 본환 내부


▲  죽성리왜성의 꼭대기인 천수대(天守臺)터

왜성 정상부에 자리한 천수대는 왜장이 자고, 먹고, 부하들을 지휘하던 공간으로 사방이 확 트
여 조망(眺望)도 일품이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성이나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축소판
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했을 천수대의 모습이
자못 대단했을 것이며, 조선군의 공격 가능성이 적은 후방이라 왜장은 무척 편하게 지냈을 것
이다. (조선군이 서생포왜성을 점령해야 이곳을 마음 편히 공격할 수 있었음)

※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① 부산시내에서 기장읍까지
* 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81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1번
  은 해동용궁사, 대변으로 다소 돌아감)
* 지하철 2호선 장산역(5/7번 출구 사이)에서 182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30~40
  분 간격)
* 지하철 4호선 안평역(4번 출구)에서 36, 183, 188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3,
  188번을 탔을 경우 기장중학교, 기장성당에서 내려도 됨)
* 부산대병원(1호선 토성역 9번 출구), 남포동, 부산역, 경성대 부경대역(1번 출구)에서 1003
  번 급행좌석버스를 타고 기장성당이나 기장지구대 하차
* 동해선 전철(부전↔일광)이나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기장역에서 하차, 1번 출구
  를 나와서 4분 정도 걸으면 기장중학교 정류장이다.
② 기장에서 죽성리까지
* 기장지구대, 기장중교(기장역 1번 출구), 기장성당에서 기장군 마을버스 6번(20~40분 간격)을
  타고 죽성초교 하차, 해송까지는 도보 5~6분, 왜성은 10분 정도 소요 / 황학대는 두호마을에
  서 내리면 되며, 월전마을은 월전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③ 승용차
* 부산시내(반송/해운대) → 죽성4거리에서 죽성리 방면 죽성로로 진입 → 죽성초교 → 죽성리
  해송, 죽성리왜성, 죽성성당 (왜성 밑에 주차장 있음 / 해송은 인근 길가에 주차)

* 죽성리왜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일원


 

  죽성리 바닷가 둘러보기 (황학대, 죽성성당)

▲  죽성항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황학대)

▲  죽성리의 오랜 경승지, 황학대(黃鶴臺)

씁쓸한 화석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죽성리왜성을 둘러보고 죽성항(죽성포구)으로 나왔다. 죽성
리는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어촌이지만 볼거리와 해산 먹거리가 풍성하
여 생각 외로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든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죽성리해송과 왜성이 있고, 바
닷가에는 황학대와 드라마 촬영지였던 죽성성당이 있으며 마을 남쪽에는 월전마을이 있다. 먹
거리는 죽성리 북부인 두호보다는 남부인 월전이 더 많은데, 이곳은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죽성항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조촐한 바위 동산이 포구의 운치를 조금 돋구고 있다. 이 동산은
기장의 오랜 명승지인 황학대로 예전에는 거의 섬이었으나 방파제와 항만 시설이 닦이면서 육
지로 흡수되었다.


▲  황학대의 동남쪽 부분

황학대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야 워
낙 유명한 인물이니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가 여기서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1616년(광해군 8년)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북인(北人) 일파의 죄상을 밝히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린 것이 원인이 되어 서울에서 2,000리 이상 떨어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떨려
났다. 그러다가 1년 뒤, 거기서 3,000리 이상 떨어진 기장 죽성리로 이송되어 7년이나 유배생
활을 했다. 귀양살이 때문에 조선 땅을 남북으로 완전 종주를 했던 것이다. 토가 나올 정도로
그 먼거리를 강제로 이동하느라 고산도 무척 진을 뺐을 것이다.

윤선도는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松島)를 옛날 신선이 황학(黃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황학루(黃鶴樓)와 견주어 황학대로 멋대로 이름을 갈고 매
일같이 찾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
그는 여기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의 주옥 같은 시 6개를 남겼으며, 죽성리 뒷산
인 봉대산에 자주 올라가 약초를 캐어 병에 걸린 지역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거나 치료를 해
주니 죽성 사람들은 그를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던 윤선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20세기 후반에 방파제와 항만 공사로 백사장 또
한 이슬처럼 사라졌으며, 강제로 연륙되어 육지의 일부가 되버리면서 옛 운치도 다소 녹아내렸
다. 게다가 이곳을 덮고 있는 소나무도 1995년 수해로 뿌리가 뽑히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로
도 계속 나무들이 말라가면서 황학대는 그야말로 세월의 무덤 같은 곳이 되버렸다.
다행히 기장군청에서 1,000만원의 돈을 들여 황학대를 살피면서 나무들이 다시 살아났고 웃음
을 잃었던 황학대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이곳의 풍경을 크게 수식해주는 꿀단지가 되었다.


▲  황학대의 정상 부분
윤선도 뿐 아니라 지역 선비들과 동네 사람들이 술 1잔의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두호마을 당집
바다에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굳게 닫힌 문짝에 3색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다.

▲  죽성항의 평화로운 풍경
바깥 세상은 아비규환처럼 숨가쁘게 흘러가건만 이곳은 모든 게 정지된 듯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죽성리왜성이 활용되던 임진~정유란 시절에는
왜군들의 배로 득실거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  바닷가에 자리한 죽성성당

두호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서양 동화에나 나올법한 작은 성당(聖堂)이 있다. 이 성당은 2009년
에 방영된 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장으로 콩 볶듯이 지어진 것으로 겉모습만 성당이다.
아담하게 생긴 성당과 주변의 해안 풍경이 아름다워 죽성리의 새로운 명소로 추앙받고 있으며,
처음에는 죽성성당이라 불리다가 드라마 이름을 따서 '드림성당'으로 바꾼 것을 다시 죽성성당
으로 갈았다. 지어진지 10년도 되지 않았건만 건물이 벌써부터 노화현상을 보여 2017년 2월 새
로 지었는데, 이때 지역 사람들이 종교적인 부분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여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싹 치워버렸다. 그래서 정체가 더 아리송한 성당 아닌 성당이 되어버렸다.

▲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하얀 피부의
성모마리아상 (지금은 없음)

▲  옆에서 바라본 죽성성당
성당 바로 옆에 등대가 붙어있다.


▲  죽성성당 주변 바닷가에 드러누운 울퉁불퉁 바위들

▲  죽성리의 어느 장어구이집에서 먹은 장어구이

죽성리 일대를 정신없이 누비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아침도 먹지 못한 터라 뱃속은 그야말
로 폭동 직전, 하여 불만에 잠긴 뱃속을 달래고자 점심 장소를 물색하다가 월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두호마을은 회와 조개, 장어구이를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지만 장어구이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월전마을에 밀려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반해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월전마을의 많
은 식당들은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주차장이 바라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황제처럼 먹을 요량으로 남정네에게 무척
이나 좋다는 장어구이와 모듬조개구이를 주문했다. 이렇게 장어와 조개구이를 먹으니 곡차 1잔
을 겯드려야 되겠지. 그래서 동동주도 넉넉히 시켰다.


▲  모듬조개구이의 위엄

자신을 불태우는 숯불 위에 먼저 장어를 올려 모락모락 익혀 입에 넣는다. 장어는 맛이 좀 별
로였으나 장어 후속으로 구운 모듬조개구이는 맛깔스러웠다. 큰 조개 안에 조개살을 비롯해 파
와 마늘 등이 버무려져 하나의 작품처럼 나왔는데,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우니 거기서 나오
는 육수(조개의 눈물)가 제법 끝내줬다. 그래서 서로 조개를 더 챙기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밑반찬은 김치와 도토리묵, 상추, 산채나물 등 대략 8가지 정도가 펼쳐졌다. 밑반찬도 그런데
로 맛이 괜찮아 밥도둑이 따로 없었으며, 금세 동이 나고 더 달라고 한 것이 가히 5번은 넘을
듯 싶다. 동동주도 금세 1동이를 비워 하나를 더 불렀는데 배가 불러 간신히 2번째 동이를 비
웠고, 메밀막국수로 식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어대니 폭동 직전이던 뱃속은 며칠을 굶어도 끄떡 없을 정도로 가득 찼고, 식
곤증의 일환으로 졸음이 슬쩍 마수를 부리자 후식 커피로 그들을 쫓아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일행들은 송정(松亭)까지 걸어가자고 했으나 여기서 거기까지는 20리가 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  남쪽에서 본 월전마을 (월전포구, 월전방파제)

죽성리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월전마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시
내버스나 마을버스는 일체 없으며, 1.5~2차선 정도의 길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어진
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大
邊)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민가(民家)가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월전, 죽성으로 외식을 가거나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3분이 멀다하고 지나
갔고 대변에서 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도 종종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
가 있는 곳을 빼고는 어디든 자유롭게 바다 곁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내용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언젠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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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성) '

▲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아차산5보루

▲  아차산성

 


 

아차산은 해발 287m(또는 285m)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린 큰 산줄기이다. 서울 강북의
동남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과 불암산>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다. <봉화산
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이르러 지금 널리 쓰이는 '
아차(峨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으로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은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
까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하고 흔한 산이지만 천하가 서울의 북현무(北玄武)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키가 더 작은 이 산을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의 영광스러
운 역사가 진하게 배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과 만주, 요동, 요서(遼西) 등 차디찬 북
(北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유일한 현장으로 그 값어치는 실
로 대단하다.
천박한 오랑캐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안그래도 좁아터진 땅,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70
여 년 넘게 아옹다옹거리며 살아온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다스렸던 고구려(高句麗
)와 발해(渤海), 백제(百濟), 옛 조선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거의 동네 뒷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큰 산불이 터졌는
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이상한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들춰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진 장대한 성으로 돌성과 토성(土城)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
는데, 중랑천을 건너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학설
도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
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의 발견으로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격하게 솟은 구리시(구리문화원)는 1994년 아차
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꿀단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
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오랫동안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도 했고, 아차산의 존재감이 나날이 커짐에 따라 등산
과 답사 수요까지 계속 상승 곡선을 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와 일품 조망으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 서울 야등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으며, 천하 둘레
길의 성지인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아차산코스)도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며 남북으로 흘
러간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고 아름다운 산세 덕에 관악산(冠岳山), 수락
산(水落山) 등 쟁쟁한 뫼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
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때와 장소를 정말 잘 만나야 된다.


 

♠  고구려를 품은 꿀단지, 아차산 입문

▲  친수계곡 입구에 자리한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계절의 여왕으로 추앙받는 5월의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아차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
데에 걸려있던 14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길을 시작하여 음료수와 떡, 과자 등을 사들고 아차
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을 쫓았다.

아차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인연을 지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
간 등산으로 여러 번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야간과 낮 산행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다. 내
가 좋아하는 뫼의 하나다보니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기는 커녕 집에 온 듯,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큰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
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아차산 남쪽 밑에 자리한 아차산 생태공원에서 잠시 발을 멈추어 속세에서 사온 먹거리를 섭취
하고 잠시 아차산을 등지며 남쪽에 솟은 홍련봉을 오른다. 그 언덕은 구의2동 주택가와 아차산
공원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아차산 보
루의 최남단인 홍련봉 보루(堡壘)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


▲  홍련봉 보루 입구 (아차산 만남의 광장 맞은편)
홍련봉 코스는 딱 1보루까지만 길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된다. (1보루 이후는 길이 막힘)


▲  한참 조사를 받고 있는 홍련봉(紅蓮峰) 2보루 - 사적 455호

해발 60m 정도의 홍련봉 정상은 급한 경사와 달리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장대한
기골을 지닌 아차산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 남쪽은 평지라 조망도 나름 괜찮다. 또한
지척에 보이는 한강 너머로 강동, 송파 지역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오니 이런 곳에 산성이나
보루를 구축하면 제법 아름다운 요새가 된다.
하여 이곳에 일찌감치 매료된 옛 사람들은 보루를 3개씩이나 닦았는데 정상 북서쪽(북보루, 2
보루)과 남동쪽(남보루, 1보루)에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루를 세웠으며, 홍련봉 남쪽 작
은 봉우리에도 보루 유적이 있다. 허나 그 유적은 정립회관 체육시설과 군사시설로 이미 아작
난 상태이다.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우리가 갔을 당시 2보루는 한참 발굴조사를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4년 이후 여러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아직도 다 캐내지 못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끄집어
내려는 학자들의 불굴의 집념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서 보루 주변은 접근이 통제된 상태라
그 통제에 순응하며 금줄 너머로 그 뜨거운 현장을 지켜보았다.
발굴로 인해 강제로 흙색 속살을 드러내며 황량한 몰골이 되었지만 발굴이 끝나면 다시 자연의
옷과 돌을 입혀 보루를 산듯하게 복원할 계획이다.

2보루는 둘레 약 190m의 타원형 모양으로 남북 폭이 최대 85m, 동서 42m이다. 정상 일대를 평
탄하게 다듬고 조촐하게 보루를 쌓았는데 북서쪽에서 약 40m까지는 보루 주위의 토루(土壘)와
비슷한 높이로 흙이 깎여져있고 남동쪽 부분은 토루보다 2m가 낮다.


▲  홍련봉(紅蓮峰) 1보루 - 사적 455호

2보루에서 동쪽 숲길을 100m 가면 1보루가 나온다. 여긴 발굴조사가 끝났는지 2보루와 달리 인
적이 없어 한적했는데, 넓직한 푸른 덮개로 보루의 속살을 가리고 있었다.
이 보루는 서쪽 2보루와 비슷한 모습으로 둘레가 약 150m에 이르는 타원형이다. 폭은 최대 57m
, 최소 36m 정도이며, 남한 최초로 고구려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어 아차산 보루의 중심 역할
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발굴 휴유증을 보듬고자 덮개를 뒤집어쓰며 곤히 잠든 보루를 건들
기가 그래서 굳이 그의 등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보루와 달리 오래전에 확인이 된 유적으로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성터로 나와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속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버
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구리문화원이 아차산 일대를 뒤집으며 문화유적 정밀지표 조사
를 벌였고, 이곳이 고구려 보루로 크게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여 2004년 고려대 매장문화재
연구소에서 홍련봉1보루의 속살을 털면서 고구려의 신성한 유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홍련봉 보루의 신상을 털어보면 대략 이렇다. 아차산보루와 비슷한 5~6세기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보루 안에 온돌을 갖춘 건물과 물을 보관하는 저수시설, 물을 밖으로 내
보내는 배수시설, 토기와 기와를 생산하던 조그만 가마터가 있었다. 북쪽 평탄지에는 저수시설
이 나왔는데, 바닥에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있으며, 흙을 파서 찰흙을 입힌 뒤 석축으로 벽면
을 쌓았다. 2005년에 확인된 가마터 흔적에서는 온돌 3기가 나왔고, 온돌을 폐기한 후 모래를
섞은 흙을 다져 가마터 시설을 조성한 흔적이 나왔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가 나왔으며, 보루 밖에는 'ㄴ'자로
판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도로 시설이 나왔고, 2013년 여름 이후에는 마른 해자의 흔적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다. 이는 남한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 해자였던 것
이다. 해자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곽 주위에 두룬 물줄기로 북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에
서 드러났는데 규모는 길이 204m, 폭 1.5~2m, 깊이 0.6~2.5m, 단면 형태는 'U'자형과 'V'자형
이다.
이들은 흙을 파서 내,외벽을 이루고 있는데, 외벽 일부에는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을 연결했으며 동/서쪽 내벽은 석축 성벽이다.

그리고 고구려 토기와 연꽃무늬 와당(기와), 철제 깃대, 철촉, 삽날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토기 중 '官瓮(관옹)'이 새겨진 붉은 토기와 '庚子(경자)'가 새겨진 토기가 있었다.
여기서 경자는 520년(또는 460년)을 뜻하며, 이를 통해 보루가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유물과 시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시설 흔적이 나왔던 아차산3보루와 더불어 아차
산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던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여겨지며, 연꽃무늬 와당을 통해 아차산 보루
의 중심지였음을 귀뜀해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이 아차산의 중요한 목구멍이 되었을까? 아마도 한강이 가까운 탓이 아닐
까 싶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시절 고구려는 중원대륙 진출에 대한 몸풀기로 아리수(阿利
水, 한강) 이북을 점령했고, 장수태왕(長壽太王) 말엽인 475년에는 한강을 건너 경북 중부까지
장악했다.
한강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요충지로 그 강을 통해 아차산을 비롯한 남쪽 후방으로 물자를 수
송했을 것은 뻔한 이치이니 강과 가깝고 아차산과 바로 이어지는 홍련봉과 인근 구의동(정립회
관), 자양동에 보루를 쌓아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삼은 것이다.

허나 6세기 중반 신라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그 기세로 아차산까
지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털리고 말았다. 이는 온달(溫達)장군의 설화
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신라는 이곳을 활용하여 한강과 서울 지역을 수비하고 고구려를 견
제했으나 8세기 이후 군사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완전히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보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고, 대자연의 힘
에 의해 아차산의 일부로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 억겁의 세월동안 자연에 강제로 묻히며 한이
단단히 쌓였을 홍련봉보루, 이제 그 한을 풀고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특히 고구려)를 모
두 풀어주기를 염원해본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 홍련봉 보루 유적'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1호의 지위를 누리
고 있었으나 사적 455호로 지정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홍련봉 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4-13


▲  홍련봉 1보루 밑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바로 보이는 아파트가 워커힐아파트이다.

▲  홍련봉 보루 조감도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홍련봉 보루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소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아차산성으
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는 것이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숲은 아차산생태공원의 일원으로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이다. 소나무
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달달한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살
포시 다가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삼국시대 주요 격전지였던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1)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룩하
게 자라난 나무와 수풀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오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 주변을 꾸준히 다듬
으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그런데로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귀신도 지릴
정도로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으
면서 한자 논쟁은 그런데로 종결이 되었으나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그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노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아차'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
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니 한자 이름도 그렇고 별칭까지 참 복잡하다.
그만큼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꽤 복잡했던 곳이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대왕(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
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이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
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고구
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동성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크게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음>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같이 치
자고 들쑤시는 일이 발생했다. (북위는 백제의 요구를 거절함)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으로 성문과 도성(都城)을 불태웠고, 개로왕은 급히 도성을 버리고 줄행
랑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인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허나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상태로 그를 잡고자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런 사실을 알 턱이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이 왕에게 절을 하면서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바쳤다.

그렇게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바다 건너 왜열도와 중
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
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이 땅의 학자들이 위례성을 찾느
라 오랫동안 진땀을 뺐던 것이다. (장수태왕 큰형님 너무 나빠여~~!)


▲  아차산성 서벽 (2)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구리 지역을 효과적
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
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
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
는 점이다. 이는 오랜 라이벌인 백제를 크게 의식하고 경계하고 있었음을 뜻하며 그만큼 백제
는 고구려의 강력한 적이었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
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대륙을 다스렸던 고구려가 사라지고(668년) 신라가 황해도와 강원도 지역을 간신히 장악하면서
아차산은 전방 신세에서 벗어났다. 즉 좁아터진 신라 땅의 한복판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
차산은 할 일이 크게 줄어들어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결국 산성과 보루는 완전히 버려지게 되
었다. (신라 말에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짐) 보루는 대자연과 세월의 의해 모두 아작이 났지
만 아차산성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으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
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있다. 장대(장
대터)는 전쟁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
다란 왕개벚꽃나무 1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충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리고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
았다.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
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望臺)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
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모두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
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감감
무 소식이다.
<2017년 광진구청장이 신년사에서 아차산성을 복원 정비하고 4계절 힐링공간을 위한 아차산 문
화벨트 조성사업을 마무리해 아차산둘레길과 연계한 문화탐방 명소로 만들겠다고 언급했음>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다. 다만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인터넷 용어로 민주화가 되
는> 날이 있는데, 바로 1월 1일 아침, 아차산 해맞이 행사 때이다.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
은 아니다. 그때만 되면 산꾼들이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산성으로 마구 넘어 들어가는데
그 행렬에 살짝 묻어 들어가면 된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만큼은 아차산 일대가 수
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니 단속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
꼬지만 안하면 된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에 문의하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의 속살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곳이 속칭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기다리고는 있지만 그 민주화라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구의역(1번 출구)에서 광진구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영화사입구 하차, 동쪽으로
  펼쳐진 '영화사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 만남의광장이며, 여기서 소나무숲
  산길로 들어서 10분 정도 오르면 된다.
*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1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5분 (길이 좀 복잡함)
*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2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7분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저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
리와 1보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 부분의 굽
은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그대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이며, 서쪽은 친수계곡과 영화사, 동쪽은 온달
샘석탑과 대장간마을, 우미내계곡으로 이어진다.


▲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달려가는 숲길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산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들어앉은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누구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위치 하나는 좋아 보임)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범굴사(대성암)와 아차산3층석탑을 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간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1보루, 5보루)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허벌나
게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하늘 밑에 펼쳐진 천하를 훤히 굽어볼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
지로 삼았고 신라 또한 이곳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광진구, 강동, 송파, 남한산성, 대모산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치른 것을 기리고자 돌을 쌓아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
이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아차산 해맞이축제'가 절찬리에 열린다.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 성동, 송파,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성과 검단산(黔丹山)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3)
'S' 라인을 보여주고 있는 한강과 구리,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시 와부읍 지역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나온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가 된 것
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난간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을 이
어주는 요새였으며, 동과 남,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
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어 1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봉우리가 무너질 지경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아차산4보
루를 흔쾌히 참고하여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산의 일부로 흡수된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생전의 모
습을 담은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
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묶어 사적 455호로 지정
했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에 씌웠던 성벽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
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가 고구
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고보니 정말 신라 고분처럼
생겼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리시,
남양주시(도농, 덕소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아차산5보루 정상에 닦여진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여겨지며,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
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사진 중앙에 보이는 곳이 태왕사신기 촬영지로 조성된 고구려대장간 마을이다.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나
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대
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
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란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
겨지며 나무 곁에는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광진, 성동, 동대문구 지역
오른쪽 구석에 남산서울타워도 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고구려의 기상을 닮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의 감
투를 받았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명품소나무 3호는 아직 없음)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  아차산 마무리

▲  아차산6보루

명품소나무 2호와 아차산3보루 사이에 아차산보루의 막내라 할 수 있는 6보루가 언덕처럼 봉긋
이 자리해 있다.
언덕처럼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
다. 허나 아직까지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
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이곳에서 나왔던 옛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적지 않은 아차산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
리라 여겨지며 속히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5보루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가운데 보이는 산자락에 아차산성이 누워있고, 그 너머로 한강과 강동,
송파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지역

아차산의 품에 들어설 때 처음에는 아차산 정상까지 가려고 했다. 허나 그 힘찬 발걸음은 6보
루에서 뚝 멈추고 말았다. 일몰 시간도 지척인데다가 다들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아쉽지만 주능선은 이쯤에서 놓아두고 동쪽으로 내려가 범굴사(대성암)을 경유하여 무덤
갈림길로 돌아왔다.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 구리, 하남 지역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강동, 송파 지역

▲  크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高句麗亭)

무덤 갈림길에서 낙타고개 방면으로 내려가면 서쪽에 붉은 기와를 지닌 2층 고구려정이 손짓을
한다.
아차산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은 팔각정 모습으로 이곳에는 원래 1984년에 지어
진 콘크리트 팔각정이 있었다. 허나 노후로 정자 전체가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2008년 1
월에 철거했으며, 고구려 유적의 성지에 걸맞게 고구려 스타일로 다시 짓기로 하고 2009년 2월
착공하여 그해 7월 완성을 보면서 정자 이름을 고구려정이라 하였다.
정자에 쓰인 목재는 300년 이상 묵은 금강송을 사용했는데, 기와는 고구려 왕궁인 평양 안학궁
(安鶴宮)과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 문양과 현무, 주작 그림
은 쌍영총(雙楹塚)과 강서(江西)중묘 등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해 남한 최초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재현한 의미 깊은 현장이다.

고구려정은 바위 위에 곧게 자리해 고구려가 늘 응시하던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자 밑에
넓게 닦여진 넓적바위는 예로부터 기가 왕성한 장소로 알려져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자 내부는 마루로 이루어져 1층에서 신발을 벗고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되는데 솔솔 불어오
는 산바람에 번뇌를 휘날리며 독서를 하게끔 도서함이 갖추어져 있다. (독서는 자유이나 책을
가져가는 것은 안됨)

▲  야외 도서관을 꿈꾸는 고구려정 도서함

▲  천정에 그려진 주작(朱雀)의 위엄


▲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현무(玄武)와 연꽃무늬의 위엄

▲  고구려정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구 구의/자양/성수동 지역과
송파, 강남 지역)

▲  주름진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넓적바위
아차산 동쪽 자락인 우미내계곡 북쪽에도 이런 비슷한 바위가 누워있다.

▲  밑에서 바라본 고구려정

고구려정에서 잠시 다리를 쉬었다가 정자 밑으로 펼쳐진 넓적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바위 자체
가 산길로 쓰이고 있는데, 미끄러운 면이 별로 없어 산행에는 크게 불편은 없다. 다만 비/눈이
오거나 얼음이 언 경우에는 바위도 흥분기를 보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된다.

아차산공원(동의초교 동쪽)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 그렇게 높이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하
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을 갔다왔더니 시장기도 강하게 요동을 친다. 그래서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에서 뜨끈한 갈비탕에 파전, 거기에 곡차(穀茶) 여러 잔을 겯드리며 황제처럼 저녁을
먹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나들이는 흐릿한 과거의 일부가 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 식당에서 먹은 갈비탕과 파전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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