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권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23.12.05 부산의 소금강, 금정산 금강공원 겨울 나들이 <동래온천 온정개건비,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2. 2023.09.03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깃든 국경의 섬, 부산 대마도 <이즈하라,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아소만>
  3. 2022.12.31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작은 계곡과 폭포를 지닌 고즈넉한 산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4. 2020.09.22 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5. 2017.08.07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40리를 거닐다 (죽성리 월전, 대변항, 죽도, 오랑대, 해동용궁사)
  6. 2017.05.08 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7. 2016.09.26 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산을 거닐다 ~~~ 배산 (배산성터, 진달래밭)
  8. 2015.07.27 [피서 성지 순례]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트래킹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9. 2015.05.08 부산의 지붕을 거닐다 ~ 금정산, 원효암 봄나들이 (범어사, 고당봉, 금샘, 산성막걸리)
  10. 2014.11.28 늦가을 억새의 성지, 부산 승학산 억새 나들이

부산의 소금강, 금정산 금강공원 겨울 나들이 <동래온천 온정개건비,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부산의 소금강, 금강공원


' 부산의 소금강을 거닐다. 금정산 금강공원 '
금강공원 소나무숲
▲  금강공원 소나무숲
 



 

새해를 코앞에 둔 1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우리나라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다.

이번 부산 나들이는 운 좋게 얻은 수서고속전철(SRT) 무료 쿠폰을 이용해 아주 기분 좋
게 다녀왔는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7시에 수서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몸을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경부선의 남쪽 종점인 부산역에
두 발을 내렸다.

부산은 북쪽으로 울산(蔚山) 울주군, 서쪽은 경남 창원(昌原)과 맞닿아 있으며, 동쪽은
동해바다에 접해 있고,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른다. 벌써 70번 넘게 인
연을 지은 곳이라 딱히 땡기는 미답처(未踏處)가 없어 아주 부질없는 추억팔이도 할 겸,
가슴을 시리게 했던 옛 추억이 아련히 깃든 몇 곳을 그날의 메뉴로 삼았다.

부산에 이르자 제일 먼저 서면(西面) 부근에 자리한 선암사(仙巖寺, ☞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즐거운 추억이 여러 겹이나 쌓여있는 해운대(海雲臺)로 넘어가 늦은 점심으로
소고기국밥 1그릇을 말았다.
그렇게 시장한 뱃속을 달래고 저 앞에 아른거리는 해운대 해변도 간만에 가볼까 했으나
해가 짧은 시기라 쿨하게 접고 해운대역(2호선)에서 부산시내버스 31번(송정↔모라주공
아파트)을 타고 동래(東萊)로 넘어가 온천장 뒤쪽에 있는 금강공원을 찾았다.

동래의 뜨거운 현장인 온천장(溫泉場, 동래온천지구)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잠시 금강공원을 접어두고 온천장 거리를 배회하니 나를 여기로 부른 용각과 온정
개건비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동래온천의 빛바랜 일기장과 온천 용왕신의 공간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와 용각(龍閣)


▲  온정개건비(부산 지방기념물 14호)와 욕탕으로 쓰였던
옛 석조(石槽)


천하 제일의 온천으로 오랫동안 명성이 높았던 동래온천(東萊溫泉)은 해운대온천과 더불어 부
산 지역의 대표적인 온천이다. 동래온천 일대를 흔히 온천장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래 지역의
뜨거운 혈맥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온천은 온정(溫井), 탕천(湯泉)이라 불리기도 했음>

동래온천이 속세를 향해 언제부터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신문왕(神
文王, 재위 681~692) 시절 재상을 지냈던 충원공(忠元公, 김충원)이 683년 장산국(萇山國) 온
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 들판에서 쉬었다는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록이 있다. 여기서 장산국온천이 동래온천이라고 하니 적어도 신라 중기부터 온
천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온천물이 얼마나 좋은지 계란이 익을 정도로 물이 뜨겁고 병든 사람이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
다고 하며<온정개건비에 '탕에 들어가 목욕하면 모든 질병을 고친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음
> 고려 후기 문신(文臣)인 정포(鄭誧, 1309~1345)가 이곳을 다녀가 온천에서 받은 감동을 시
로 남기기도 했다.

온천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와 욕실이 지금까지 남아있네
물줄기 오는 곳 멀지 않으니 욕조가 항상 따뜻하네
1년을 질병에 시달린 몸 반나절 목욕으로 씻은 듯하네


1617년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중풍을 치료하고자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다. 그는 정포의 후손이기도 한데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지역 선비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30일이나 머물면서 온천욕을 41회나 했다. 그의 동래 나들이는 제자들이 세심
하게 정리하여 기록을 했으니 그것이 바로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이다. <여기서 봉산은 동
래의 별칭임>
그 기록에 따르면 동래온천에는 신라 제왕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돌로 된 욕조가 있었으며, 욕
조 하나는 5~6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욕조 윗부분 돌구멍에서 온천수가 나왔고 소문
대로 너무 뜨거워 손발을 급하게 담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온천 본전을 뽑고 그해 9월 4일 고향 칠곡(漆谷)으로 돌아왔는데, 안색과 기혈이 전보
다 좋아져 사람들이 목욕의 효과라고 찬양했다. 정구는 그의 조상인 정포처럼 동래온천의 덕
을 톡톡히 본 것이다.

1691년 온천의 옛 천원(泉源) 부근을 파서 새로운 천원을 발견해 돌로 다진 2개의 욕탕과 욕
사(浴舍)를 새로 지었다. 1730년과 1740년에 중수했으나 건물이 낡고 탕까지 막히자 1765년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가 크게 손질하여 남탕과 여탕을 나눈 9칸짜리 건물을 지
으니 그 모습이 마치 상쾌하고 화려해 꿩이 나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동래 지역의 큰 경사였던 그 중수를 영원히 기리고자 1766년 온정개건비를 세웠으며, 비문(碑
文)은 동래 유생인 송광적(宋光迪)이 작성했다.

비석의 몸매는 높이 1.47m, 폭 64cm, 두께 21cm로 10행x16자가 쓰여져 있으며, 그 앞에는 욕
조처럼 생긴 석조가 누워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 후기에 쓰였던 욕조(浴槽)로 유일하게 1기만
남아있다. 거의 1인용 수준인 저 탕에 몸을 푹 끓이는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온정개건비 자리에서 온천수를 뽑아 올렸으며, 이후 물 뽑는 자리가 바
뀌면서 지금은 동래온천의 과거를 보관하는 공간이 되었다.


▲  삼문으로 이루어진 용각의 정문, 온정용문(溫井龍門)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는 용각 뜨락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용각은 온천수를 관리한
다는 용왕<龍王, 용왕신>이 봉안된 건물로 매년 음력 9월 9일에 온천수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용신제(龍神祭)를 지내며 착한 품질의 온천물이 계속 나오기를 염원한다.
온천장의 성역과 같은 곳이라 관리와 정성이 대단하며, 제삿날과 일부 날을 제외하고 용 문신
이 굵게 그려진 온정용문은 굳게 닫혀 있어 내부 진입은 거의 어렵다. 허나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키 작은 담장 너머로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 용각 모두 확인이 가능하니 굳이 무리를 하
면서까지 담을 넘을 필요는 없다.


▲  용왕이 봉안된 팔작지붕 용각

용각을 둘러보고 잠시 넣어두었던 금강공원으로 길을 향했다. 온천장을 벗어나 '금강공원로'
를 따라가던 중, 계속 뭔가 허전한 구석을 느꼈다. 골목에 꽉 차게 들어앉아 금강공원의 관문
역할을 했던 망미루(望美樓)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싶어 고개를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는데 알고 보니 2014년에 그의 제자리였던 동래부 동헌(東軒)으로 이전
되었다.

금강공원로 끝에는 금정산(金井山)의 동쪽 밑도리를 가르는 '우장춘로'가 있는데, 그 길로 접
어들면 금강공원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 온정개정비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35-26 (금강로124번길 23-17)



 

♠  부산의 작은 소금강(小金剛), 금강공원(金剛公園)

▲  금강공원 정문
정문 옆에 입장료를 징수했던 옛 매표소의 흔적이 남아있다.


금정산 동남쪽 자락에는 부산의 소금강이자 대표적인 공원으로 추앙을 받는 금강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기암괴석, 계곡이 어우러진 수려한 절경을 자랑해 마치 작은 금강산(金剛
山)과 같다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는데, 1940년 왜정(倭政)에 의해 공원으로 개발되
어 금강원이라 불렸으며, 1972년 부산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공원 전체가 문화재 보호구역이
되었으나 1993년 지방기념물에서 정리되면서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방되었다.
1973년 6월부터 입장료를 받으면서 31년간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쳐다보았으나 2004년
7월 무료로 바뀌었다.

공원의 면적은 2,220,372㎡로 금정산 540m 고지까지 빠르게 이어주는 금강케이블카가 있으며,
임진동래의총과 금정사,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 부산민속예술관, 이영도 시비(詩碑), 지석영
선생 공덕비, 허종배선생 기념비 등의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동래 중심지에서 강제로 이전
된 독진대아문과 이섭교비, 내주축성비 등도 잠시 이곳의 신세를 졌으나 모두 제자리로 돌아
가 지금은 임진동래의총만 남아있다.

마치 아무렇게나 놓여진 바위가 계곡과 어우러져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빚어내고 있으며, 거
미줄처럼 닦여진 산책로가 그 절경 사이를 가르고 있어 나들이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금정산
까지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빠르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금강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되며, 공원
안쪽에는 소나무 숲을 지붕으로 삼은 둘레길이 펼쳐져 있다.

이 공원은 벌써 3번째 인연으로 상큼한 추억이 서린 현장이기도 하다. 그 현장을 이렇게 홀로
다시 찾으니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공원은 거의 그대로인데 예전의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어 기억 조차 희미하고 '나'라는 존재도 그 사이 적지 않게 나이가 누적되면서 볼품이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 덧없기만 하다.

* 금강공원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27-9 (우장춘로 155 ☎ 051-860-7880)
* 금강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선생 공덕비

송촌(松村) 지석영(1855~1935)은 서울 출신으로 부산과도 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
반 부산 제생원(濟生院)에서 종두법(種痘法)을 익혀 이 땅에서 천연두를 완전히 뿌리뽑는데
공헌했으며, 1895년에는 동래부사로 부임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왜인(倭人)의 밀수 무역을
때려잡기도 했다.


▲  거북바위 (금강케이블카 남쪽)
거북이 몸을 잔뜩 움츠린 듯한 모습이다.

▲  금강공원의 자랑, 소나무 숲길

▲  대자연의 돌 창고는 아니었을까? 돌과 바위로 가득한 금강공원
금강공원의 제일 큰 매력은 공원 곳곳에 널린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돌덩어리들이다. 왜정이 이곳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그들의 어설픈
조경(造景) 방식에 따라 배치한 바위도 있지만 상당수는
거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제자리로 돌아간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터

독진대아문은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으로 왜정 때 이곳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2014년 12월
망미루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그가 80여 년 동안 발을 붙였던 자리에 작게 표석을 세워
떠나간 그를 추억한다.

독진대아문 안쪽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강제로 옮겨진 이섭교비(利涉橋碑)와 내주축성비(來州
築 城碑)가 있었으나 2012년 9월 다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섭교비는 낙민치안센터 앞 둑,
내주축성비는 원래 자리(동래경찰서)가 어려워 동래읍성 북문으로 옮겨짐>


▲  빛바랜 동래금강원 표석(표지석)
독진대아문터를 지나면 왜정 때 세워진 동래금강원 표석이 모습을 비춘다.

▲  금강공원 연못
금정산이 베푼 물을 막아서 만든 그림 같은 연못으로 연못 한복판에
돌다리를 다져 풍경을 한껏 돋군다.

▲  북쪽에서 바라본 연못
물 색깔이 유난히 푸르다. 그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하며
그들의 삶터를 지킨다. (수심이 2~3m 정도 됨)

▲  서쪽에서 바라본 연못

▲  소나무숲을 가르며 흘러가는 금강공원 둘레길

예전 금강공원에 왔을 때는 딱 독진대아문 자리까지만 가고 길을 돌렸다. 그 이상은 딱히 볼
거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번에는 그 선을 넘어 미답의 공간으로 남아있
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 보았는데, 푸른 연못과 돌다리, 그리고 소나무숲과 둘레길까지 오히
려 독진대아문 밑보다 풍경이 훨씬 진국이었다. 나의 그릇된 생각이 공원의 진풍경을 만나지
못하게 시야를 가렸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금강케이블카를 타고 금정산성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공원 위쪽에서 길을 접고 북쪽 방향 둘레길로 들어섰다.
둘레길은 그윽하게 우거진 소나무들이 하늘을 훔치며 늘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오각과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중간에 계곡과 연못, 쉼
터가 있으며, 걷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  계곡과 만나는 금강공원 둘레길
수심이 얕은 조그만 소(沼)가 길 옆에 펼쳐져 있다.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②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③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④

▲  계곡을 막아서 다진 금강공원 북쪽 연못

금강공원 둘레길을 이 정도 거닐고 임진동래의총을 보고자 동쪽으로 내려갔다. 부산민속예술
관 옆을 지나 남쪽으로 빠지면 태극 문신을 지닌 기와집 문(외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
서면 그 길의 막다른 곳에 금강공원의 유일한 사적(史蹟)인 임진동래의총이 있다.



 

♠  금강공원의 문화유산들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  임진동래의총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외삼문은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 있었다. 태극마크가 요동치는 가운데 문과 왼쪽 문은 제
향이 있는 날에만 주로 열리므로 평소에는 굳게 입을 봉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20기의 늙은 비석들이 1열로 늘어서 조촐하게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비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들로 동래 시가지 정비로 이곳으로 강제 집합된 것
인데, 대부분 동래부사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처럼 허전한 비석, 푸른 피부의 비석까지 부산 인구만큼이나 다
양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불망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목민관
(牧民官)이 얼마나 있을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비석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적지 않은 비석
들이 그와 상관없이 지어져 외람되게 선정비를 칭하고 있을 것이다.

▲  외삼문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비석들 (모두 20기임)

▲  임진동래의총으로 인도하는 길 ▲
외삼문에서 내삼문 구간 길바닥에는 박석이 꼼꼼히 입혀져 있다. 무덤 주위로
소나무가 삼삼하여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며, 길 왼쪽
담장 너머는 금정사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임진동래의총 내삼문(內三門)
내삼문도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있다.

▲  임진동래의총 충혼각(忠魂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동래의총이 이곳에 안착했던 1974년에
지어졌다. 충혼각 바로 뒤쪽 높은 곳에 임진동래의총이 있으며, 보통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무덤에 예를 표하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된다.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 부산 지방기념물 13호

임진동래의총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래 사람들이 안
장되어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釜山鎭)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부의 중심인 동래성을 공
격했는데, 성을 지키는 유리한 입장임에도 왜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앞에 금방 털리고 만
다.
이때 전사하거나 살해된 동래성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은 대부분 남문 해자(垓子)와 그 부근에
버려졌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읍성을 수축했을
때 옛 남문터에서 적지 않은 유골과 포환(砲丸),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하여 그 시신을 거두
어 삼성대(三姓臺) 서쪽 구릉지(내성중학교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
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란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이 무덤의 첫 이름이다.

조선 조정에서 제사 비용을 위해 제전(祭田)을 내리고 동래향교에 제사를 맡겨 매년 한가위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순절일(4월 15일)에는 관에서 장사(壯士)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왜정은 토지개간을 이유로 무덤을 영보단(永報壇, 복천박물관 자리) 부근으로 강제 이장시켰
는데, 이후 비석도 그곳으로 추방시켰다. 그러다가 1974년 복천동 개발로 다시 짐을 싸고 지
금의 자리에 안착했으며, 그때 '임진동래의총'으로 이름을 갈았다. 즉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
서 순절한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이란 뜻으로 여기서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에 붙
이는 이름이다.
제향은 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에 무덤 밑에 있는 충혼각에서 지내고 있으며, 동래구
청에서 직접 주관하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임진동래의총

임진동래의총과 충혼각은 동래읍성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정에 의해 제자리를 떠났
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등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쁨을 누렸지만 임진동래의
총은 제자리에 이미 건물이 들어찬 상태이다. 그렇다고 그 부근으로 옮기자니 무덤의 덩치도
크고 딸린 식솔(충혼각, 외삼문, 내삼문, 돌담)도 많아 그들을 수용할 자리가 여의치 않다.
하여 무덤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곳에 눌러 살고 있다. 허나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도 자리가 괜찮아 계속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덤 앞에는 제물을 올릴 수 있는 상석(床石) 1기가 누워 있으며, 무덤 밑도리에는 호석을 둘
렀는데, 무덤 정면 밑에는 제를 지내는 충혼각이 있고, 뒤쪽에는 담장을 둘러 성역의 경계를
구분 지었다. 이 담장은 외삼문에서 임진동래의총까지 빙 둘러져 있다.

* 임진동래의총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 17-7


▲  충혼각 옆구리에 있는 '임진전망유해지총' 비석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그가 작성했다. 비석 높이는 103cm,
너비 45cm로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 8자를, 뒷면에는 10행 분량으로
무덤의 내력을 기록했다.

▲  금정사 보제루(金井寺 普濟樓)

임진동래의총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금정사로 넘어갔다. 비록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문이 닫혀져 있어 외삼문으로 나가 보제루로 빙 돌아가야 된다.

금정사 자리는 원래 동래부 사형장으로 죄인들의 목을 가차없이 썰었던 으시시한 곳이다. 바
로 그 현장에 1954년 승려 금우가 그 원혼을 달랜다며 인적도 거의 없던 이곳에 절을 세웠다.
석주가 중건하여 선학원(禪學院)에 등록했으며, 현재 대웅전과 보제루, 칠성각, 요사 등 5동
정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 있는데 바로 그를 보고자 간만에 금정사에 발을 들였다.

* 금정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282 (우장춘로 157-59 ☎ 051-555-1208)


▲  소나무숲에 감싸인 고적한 금정사 경내 (정면 건물이 대웅전)

▲  보제루 부근에 자리한 5층석탑

▲  대웅전 옆구리에 있는 칠성각(七星閣)


▲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금정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멀리 전북 완주군(完州郡)에서 넘어온 것
이다.
1677년 혜희(慧熙)를 중심으로 한 7명이 제작하여 고산현(완주군 북부) 대둔산(大芚山) 용문
사(龍門寺)에 봉안했던 것으로 그 절이 사라지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곳에 안착했다. 좌우
에 조그만 협시보살(夾侍菩薩)은 그의 허전한 옆구리를 채워주고자 근래 붙여놓은 것으로 서
로간의 덩치가 너무 차이가 나 마치 아비와 어린 자식들이 나란히 앉아 가족 사진을 찍는 것
같다.

머리는 나발(꼽슬)로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신체에 비해 머리와 얼
굴이 지나치게 크다. 고개는 앞으로 조금 내밀어 밑을 굽어보는 모습인데, 이는 조선 후기 불
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정면 밑을 바라보고 있으며,
코와 붉은 입술은 조그맣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통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수인(手
印)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무릎의 너비가 상반신보다 넓어 안정감이 있으
며, 법의가 발까지 모두 가리고 있다.

이 불상이 속세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그의 뱃속에서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기 때문이
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7종 8점의 경전류, 목판으로 찍어낸 수백 매의 다라니가 쏟아져 나
왔는데, 조성발원문을 통해 그의 탄생시기와 고향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의 주인 역할
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석가여래상 옆을 지키던 협시상으로 다른 협시상은 전주(全州) 일출암
에 있다고 한다.
후령통에서는 조성발원문 외에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동으로 만든 오보병(五寶甁)이 나왔고 경
전류에서는 당시 훈민정음(訓民正音) 표기법이 남아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
다. 게다가 판각 연대도 나와 있어 조선시대 만다라 연구에도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바로
옛 사람들의 그런 배려가 불상의 과거는 물론 그 시절의 여러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그것들이 이 아미타불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다.
복장유물은 절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어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나 그들을 오랫동안 품었던 아미
타여래좌상은 이렇게 대웅전에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금정사를 둘러보니 벌써 17시가 넘었다. 어둠의 기운이 스르륵 내려와 밝은 기운을 잡아먹으
니 햇님도 그 등쌀에 떠밀려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한다. 비록 낮은 짧지만 그날 목적한 정처(
定處)를 싹 둘러보니 은근히 배가 부르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고, 당일 일정으로
콩 볶듯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야 된다. 아무리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
열차가 2시간대로 연결해준다고 하지만 여전히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온천장 부근에서 저녁으로 순대국밥을 섭취하고 지하철로 구포역(龜浦驛)으로 이동하여 서울
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고된 몸을 실었다. 부산으로 올 때는 고속열차(무료 쿠폰 사용)로
왔으나 제자리로 돌아갈 때는 느림의 미학도 느낄 겸,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빈약한 내 지갑
의 사정도 고려할 겸, 빨간색 무궁화호를 이용했다.
열차표를 판매하는 구포역 역무원이 은근히 고속열차를 권하며(무궁화호를 타면 지하철 막차
못탑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지갑을 자꾸 흥분시키려고 했지만, 빨리 가나 느리게 가나 서울
만 가면 되고 서울의 교통과 지리는 지구에서 본인을 능가할 사람이 없으므로 흔쾌히 거절했
다. <역무원의 지하철 막차 설교에 속으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름>

서울역까지는 5시간이 걸려 자정 너머에 도착했으며,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
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문득 깨어보니 난 내 방에 있었다. 부산에 갔다온 것이 아리송할 정도
로 말이다. 그렇게 그날은 흩어져 나의 기억력까지 햇갈리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벌처럼 날라가 개미처럼 올라왔던 부산 연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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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협에 길쭉하게 깃든 국경의 섬, 부산 대마도 <이즈하라,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아소만>

대마도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아소만, 와타즈미신사)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만관교 주변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여호도(메고시마)


* 대마도의 본토는 우리나라(대한민국)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떠있는 부산 대마도를 찾았다.
대마도는 2004년 가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태풍이 계속 초를 치면서 인연이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5월에 이르러 다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흔쾌히 도와주어 100% 대마도 상륙 확정이다.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일행들을 만나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
고속해운)에 몸을 실었다. 배는 고요하기 그지 없는 대한해협을 유유히 가로질러 2시간
20분 만에 대마도의 주요 관문인 이즈하라<엄원(嚴原)>항에 우리를 무사히 가져다 주었
다. 드디어 대마도에 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처음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 낯익은 모습인
데,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런 즐거운 흥을 회충처럼 생긴 왜열도 글
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가나는 신라가 만든 이두식 글자임)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는 5개의 유인도와 102개의 무인도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708㎢이다. 남북이 꽤 길쭉하여 제법 큰 섬으
로 다가오는데, 남북 길이가 82km, 동서 길이는 최대 18km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옛 땅의 일부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맡고 있었으며, 우
리의 동남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
경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아주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매우 저렴한 금액과 짧은 시간으로 외
국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
이 많은 편이다. (2017년에 70만 명이 찾았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꼭
회복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첫날은 이즈하라 시내의 여러 명소를 돌아다녔다. 만송각(반쇼가쿠)이란 왜식(倭式) 식
당에서 본토식이 가미된 대마도 토속음식인 이시야키(石燒)와 이리야키(いリやき)로 거
하게 저녁을 먹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둘째 날 오
전에 둘러본 곳만 다루었다.



 

♠  대마도를 2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협곡과 그 협곡에 놓인
만관교(万關橋, 만제키바시)

▲  만관교(만제키바시)

대아호텔에서 대마도의 첫 저녁이자 첫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 햇살의 성화에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1층 온천탕(바닷물을 가져와서 끓인 것임)에서 몸을 푹 삶고 1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
었다.
아침은 본토의 밥상보다도 크게 떨어지는 왜식(倭式) 정식을 먹었는데 밥도 그렇고 반찬도 그
렇고 양이 매우 적었다. 하여 식당 직원에게 리필을 요청하니 반찬은 일절 안되고 밥만 된다
고 그런다. (반찬도 없이 어찌 밥을 먹나?) 본토 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임에도 식당 운영은
좁쌀처럼 왜열도 스타일로 하는 것이다.

아침을 먹고 객실(3층 다다니방)로 올라가 여장을 꾸리고 나오니 우리를 태울 버스가 대기하
고 있었다. 30인승 정도의 중형버스로 일행을 모두 태우자 대아호텔을 뒤로하며 이즈하라 시
내로 내려갔다.
어제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이즈하라 시내의 아침 풍경은 마치 텅 빈 영화세트장처럼 너무 적
막하여 우리가 어제 이곳을 거닐었는지도 햇갈리게 만든다.

이즈하라를 벗어난 버스는 북쪽을 향해 열심히 바퀴를 굴려 게치와 대마공항(쓰시마 야마네코
공항)의 밑도리를 지나 어느 다리 앞에서 바퀴를 멈춰섰다. 그곳이 둘째 날의 첫 답사지인 만
관교이다.


▲  만관교 서쪽 아소만

대마도(면적 708㎢) 본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2개의 섬이 구분되는 곳이 바로 만관교가 있는 만관협곡(만관운하)이다.
만관월(万關越, 만관키코시)과 남쪽에 있는 대선월(大船越, 오후나코시), 북쪽의 소선월(小船
越)은 해발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매우 낮고 대마도에서 가장 폭이 좁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소선월은 왜에서 신라와 당으로 보낸 사신이 지나
가던 곳이며, 대선월은 대마도 최초의 운하이나 폭이 좁음)
허나 배를 밀거나 들고 가는 식으로 운반하거나 반대쪽으로 넘어가 배를 갈아타는 식이라 불
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국 해군은 선박의 왕래와 대한해협의 제해권 장악을 위
해 1897년에 만관월에 삽질을 가해 1901년 운하를 완성시켰다. 그것이 바로 만관협곡(만관운
하)이며, 운하 삽질로 나온 흙과 바위는 운하 동쪽에 있는 메고시마의 육지 매립에 쓰였다.

운하의 등장으로 아소만과 마우라만(삼포만, 三浦灣)은 완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 짧은 거리 때문에 배를 직접 운반하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했었다. 운하 위에는 1901년 80m
길이의 나무 다리(만관교)를 지어 운하로 끊어진 남쪽과 북쪽을 잇게 했으며, 1956년 기존의
다리를 부시고 81.6m의 새 다리를 닦았고, 1996년 현재의 다리를 새로 닦아 대마도의 북섬과
남섬을 끈끈하게 붙잡고 있다. 다리 길이는 210m, 폭 10m, 높이 25m로 2차선 도로와 뚜벅이길
을 갖추고 있다.

대마도의 중심지인 이즈하라에서 히타까츠를 비롯한 북섬으로 가거나 반대로 가는 경우 무조
건 이 다리를 건너야 된다. 주변 풍경도 그런데로 볼만하여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았으며 협곡 동쪽인 메고시마(여호도, 女護島) 포구로 내려가면 협곡과 다리의 전경을 싹
살펴볼 수 있다.


▲  만관교 서쪽 만관협곡 (아소만 방향)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메고시마 포구(왼쪽 마을),
구스보(久須保, 오른쪽 산지)

▲  만관운하를 닦은 기념으로 2005년에 세워진 개삭비(開削碑)

▲  만관교 주변(구스보, 메고시마) 지도



 

♠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아소만과 그 아소만을 굽어보는
에보시다케(烏帽子岳)전망대

▲  오로지 전망을 위해 설치된 에보시다케전망대

만관교를 짧게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도요타마마치(풍옥정, 豊玉町)에 이
르러 와타즈미신사 방면 길로 좌회전하여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으니 에보시다케전망대 주차
장이 마중을 나온다.

에보시다케는 해발 176m의 낮은 뫼로 와타즈미신사의 바로 뒷산이다.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
여져 있는데 전망시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오로지 조망을 위한 공간으로 주변이 온통 낮은
산과 무성한 숲, 바다 일색이라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이곳에 올라서면 서쪽과 서남쪽, 동쪽으로 리아스식 해안과 무수한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아
소만이 훤히 바라보이며, 그 모습이 마치 월남(越南,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일명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린다. 바로 그 풍경 때문에 이 궁벽한 곳에 전망대를 닦은 것이
다.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은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는 본토의 부산(釜山)까지 흐릿하
게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서 부산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나 공기가 깨끗한 겨울
에는 잘하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전망대 밑까지 1.5차선 크기의 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차에서 내려 각박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
면 된다.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꼭 전망대에 들려 일품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이곳은 워낙 산골벽지라 시내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풍옥정의 중심 마
을인 니이(仁位)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거나 와타즈미신사를 경유하는 투어버스(이즈하라↔
히타까츠)를 타고 걸어서 들어가야 된다.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포구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①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②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③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④

▲  숲에 묻혀있는 에보시다케전망대 남쪽 봉우리

▲  주차장에서 바라본 에보시다케
붉은 피부의 버스는 본토 관광객을 태우고 온 버스들이다. 그들 너머로 높은 산이
보이는데 그 봉우리가 에보시다케로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여져 있다.

▲  에보시다케 주차장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주변



 

♠  신라와 가야 사람들이 고향을 꿈꾸며 세웠던 도해궁이자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입구

에보시다케전망대를 둘러보고 왔던 길로 나와 와타즈미신사 남쪽 숲길에서 내렸다. 여기서 무
성한 삼나무 숲길을 들어서면 와타즈미신사로 바로 이어진다.

와타즈미신사는 팔번궁신사(하치만구신사), 해신신사(가이진신사, 海神神社)와 더불어 대마도
의 대표적인 신사이다. 초대 왜왕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이며, 평안시대(平安時代, 헤이안시대
)의 율령 등이 담긴 연희식(延喜式, 엔기시키)의 신명장(神名帳, 진묘초)에도 나올 정도로 대
마도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신사이다.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신사 주변은 삼나무와 대나무, 편백나무 등이 짙게 숲을 이루고 있다. 만송원의 두터운 삼나
무숲처럼 햇살이 제대로 맥을 못추는 숲길 속에 신사 도리이와 토요타마히메의 분묘 비석이
있으며, 그 숲길의 끝에 와타즈미신사 배례전이 있다.

▲  금줄이 쳐진 삼나무숲 도리이

▲  풍옥희(도요타마히메) 분묘 비석

풍옥희(豊玉姬,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는 와타즈미신사 설화에 나오는 용왕의 딸이다.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세워 비석으로 삼았는데, 그 피부에 풍옥희지분묘(豊玉姬之墳墓)
라 쓰여있다.
얼핏보면 풍옥희의 무덤으로 볼 수 있겠으나 비석에 쓰인 것과 달리 그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
이었으며, 신사가 조성되기 전까지 제단으로 쓰였다. 또한 비석의 글씨 색깔이 금색으로 되어
있는데 왜열도에서 비석 글씨에 금분을 쓴 것은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 이후이다. 그러
니 이 비석은 그 이후에 세워진 것이 되며, 이때부터 제단이 무덤으로 둔갑된 것으로 보인다.


▲  와타즈미신사 직전 삼나무숲길

▲  금줄이 쳐진 신사 앞 돌덩어리

이곳에 신사를 짓고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지으면서 이름 없는 돌덩어리까지
의미와 이야기를 구절구절 붙여놓았다. (이 돌덩어리는 안내문이
없어서 무슨 의미의 바위인지는 모르겠음)

▲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이 봉안된 신전(神殿)
배례전 뒤쪽 높은 곳에 신전이 자리해 있다. 신전은 제삿날 외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다.


와타즈미신사는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와 하늘에서 내려온 히코호호 데미노미코
토의 사당이다. (이름도 참 징그럽게도 어렵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新羅) 또는 가야(伽倻)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 있었다. 도리이가 가락국(
駕洛國)의 중심지라는 김해나 신라 서라벌(경주)을 향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
또는 가야) 사람들이 조상신을 봉안한 사당을 세우면서 고향을 향해 사당과 문을 세웠다. 하
여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 지은 신궁이란 뜻에서 도해궁(渡海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왜가 대마도를 침탈하면서 왜식 신사로 모습이 변질되었고, 신사의 설화를 적
당히 각색하면서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이 되었는데, (최초 왜왕이 가야 출신이라고 함) 이
곳에 얽힌 설화를 잠시 끄집어내보면 대략 이렇다.

하늘의 신인 다까비무스비(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내려온 니니기에게 히코호호테미노
미코토(이하 히코호호)란 아들이 있었다.
히코호호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가 형에게 빌린 낚시 바늘을 바다에 빠트리고 말았는데, 그
바늘을 찾으려고 바다를 헤매다가 '시오츠라'란 신의 도움으로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
미코토(이하 도요타마)를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용궁에서 3년 동안 팔자 좋게 지내다가 문득 예전에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이 생각이 났다.
하여 장인인 용왕의 도움을 받아 그 바늘을 찾아 지상으로 올라와 형을 만났는데, 그때 도요
타마는 만삭의 몸이라 같이 나오지를 못했다. 하여 여동생인 다마요리노히메미코토(이하 다마
요리)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바다 밖으로 나와 현재 와타즈미신사 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도요타마는 산통을 느껴 손수 해변에 집을 짓고 남편에게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면 안돼~~!'
당부를 했다.

허나 사람의 심리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결국 훔쳐보게 되었는데, 글쎄 큰 뱀이
산고(産苦)로 정신없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완전히 혼돈의 상태
가 되었고, 원래 모습을 들켜버린 도요타마는 너무 열받아서 막 낳은 아들을 해변에 버리고
우나자까를 메워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나자까는 용궁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문이 나타나고 메우면 사라짐)
이때 버리고 간 아들이 '우가야 후기아에즈(이하 우가야)'로 별명은 '이소라 에비스'이다.

우가야는 장성하여 작은 이모인 다마요리와 혼인했다. 서로 나이 차이가 좀 있을텐데 어쨌든
이모와 조카가 혼인을 한 것이다. 그들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초대 왜왕(倭王)이라는
신무(神武)이다.
이 설화를 통해 왜왕족은 천신(天神)의 부계(父系)와 해신(海神)의 모계가 만나 이루어진 혈
통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곳이 왜왕실의 발원지임을 크게 어필하고 있다. 동시에 근친혼도
대놓고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와 고려도 근친혼이 심했음)

가야는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해 구주(九州, 규슈) 등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 입맛에
맞는 지방 정권을 세워 통치했다. 그때 가야 본토에서 보낸 왕족이나 관리, 또는 새로운 삶터
를 꿈꾸며 건너간 가야 사람이 초대 왜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대마도와 꽤 유별난 인
연이 있었던 듯 싶으며 그로 인해 이곳에 그의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왜가 가야와 백제, 신라에 종속되고 그들에게 오지게 영향을 받았던 과거를 싹 왜곡
하고 지우면서 왜국 중심의 역사관을 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초대 왜왕의 대마도 이북의 족
적은 지워졌고 이곳 신사의 봉안 주체까지 바꾸어 왜왕실의 발원지로 내세웠다. 그것도 모자
라 난데없이 천신과 해신(용왕)까지 등장을 시켜 왜왕이 그들의 자손이란 허무맹랑한 설화까
지 지어 붙였다. (현실은 가야, 신라, 백제 사람들의 후손들임)


▲  와타즈미신사 배례전(拜禮殿) 내부와 바로 앞에 걸린 색동줄
신사에 예를 표할 때는 방울이 달린 색동줄을 당기면서 방울소리를 낸다. 이는
신사에 봉안된 존재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자 함으로 이후 2번 예를
표하고 2번 박수를 친 다음 1번 절을 한다.

▲  금색으로 쓰인 봉축성혼기념비(奉祝成婚記念碑)
1993년 현재 왜왕인 덕인(德人, 나루히토)의 혼인을 기리고자 신사에서 아부용으로
세운 것이다. (덕인은 2019년 5월 부왕인 아키히토의 양위를 받아 왜왕이 됨)
왜국은 아직도 미개한 부분이 적지 않아서 날짜를 표기할 때
왜왕의 연호를 쓰는 별종 짓을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 대마도가 왜화가 되면서 신불(神佛) 통합으로 기존 신사들이 이름이 바뀌었고
절과 마을 사당이 적지않게 신사로 강제 전환되었다. 와타즈미신사 역시 신사로 전환되었는데,
이곳 지명인 와타즈미(와타쓰미)란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고 왜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라 신공황후(神功皇后) 개소
리나 늘어놓는 팔번궁신사보다 나은 곳이다. <신공황후 바로 이전 시절에 신라가 시마네와 야
마구치를 공격하여 왜왕 또는 그에 준하는 높은 작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음>
게다가 신사 주위로 조엽수림(照葉樹林)이 매우 울창하며 북방계와 대륙계 식물이 해안 주변
에 섞여 있어 많은 새들이 머문다. 그래서 신사 주변 숲은 장기현(長崎縣, 나가사키) 천연기
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신사 앞에 바다(니이아소만)가 펼쳐져 있어 경관도 괜찮다.


▲  붉은 피부의 오미쿠지

저 붉은 통에 100엔 동전을 넣으면 운세가 적힌 종이가 나온다. 그 종이를 오미쿠지라 하는데
운세가 괜찮게 나왔으면 가져가도 되며, 영 좋지 않게 나왔을 때는 나무나 붉은 통 위 금줄에
묶어둔다. 그러면 신이 나쁜 운세가 좋게 되도록 빌어준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와타즈미신사
의 배때기를 불려주는 붉은 통이다.


▲  소원 나무판을 다는 곳(에마)

나무판 뒤쪽에 말이 그려져 있어 에마(畵馬)라 부른다. 소원 내용과 주소, 이름을 적어서 달
면 되는데 주소는 꼭 적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소원이 그 주소지로 날라가 소원성취가 된
다는 것이다.
소원을 적는 나무판은 돈을 내고 사야 되며 소원판 장사는 이곳의 짭짤한 돈줄이다.

▲  배례전 앞 1번 도리이

▲  배례전 앞 도리이와 코마이누상(拍犬)

배례전 앞 도리이 옆에는 오래된 코마이누상 1쌍이 있다. 이들은 신사를 지키는 개의 석상으
로 원래는 고려 개이다. 그것이 대마도와 왜열도로 넘어와 신사 등을 지키는 존재가 된 것이
다.
이곳 코마이누상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 다 특이하게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
를 모두 가지고 있다. 천하에 널린 개의 석상 중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암컷은 입을 다물고 있
는 모습인데, 이는 사람이 죽을 때 보통 입을 다물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입을 벌리고 죽는 경우도 많음;;) 그에 반해 수컷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  2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와타즈미신사

▲  2번 도리이

▲  땅과 바다의 경계에 자리한 3번 도리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야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변치 않은 듯, 여전히 그들의
본거지를 향하고 있다. 이곳이 왜화가 되면서 사당은 신사로 바뀌고
이렇게 도리이까지 설치되었지만 이곳의 본마음은 여전한 것이다.

▲  와타즈미신사의 백미, 바다에 세워진 도리이들
와타즈미신사를 상징하는 풍경으로 3번 도리이 너머로 4번 도리이와
5번 도리이가 바다에 발을 담구고 있다.


와타즈미신사 앞에는 5개의 도리이가 있다. (숲속에 있는 도리이는 제외) 이렇게 도리이를 5
개를 둔 것은 5욕(五欲)으로부터 해탈하라는 의미라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3개의 도리
이는 땅에 있고, 2개는 니이아소만이라 불리는 바다에 있는데 이는 용왕이 이들 도리이를 통
해 신사로 들어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즉 용왕을 위한 이정표이다.

바다에 설치된 도리이는 썰물 때는 거의 육지처럼 있다가 밀물 때는 도리이의 밑부분이 물에
잠기며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최대 2m까지 잠긴다고 하는데 바로 그 풍경이 이곳 신
사의 백미이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썰물 때라 1개만 물 위에 있었다.

▲  3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니이아소만

▲  신사 석조(石槽)

신사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있다. 생김새가 본토의 샘터와 비슷하고 바가지까지 있어서 자세
한 사연을 모르면 본토 사람의 본능상 물 1모금 들이키기 쉬운데 절대로 물을 마시는 샘터가
아니다. 이곳은 신사 참배 전에 손을 씻는 곳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손을 씻고 입을 닦는
다. 그런 다음 참배에 임하면 된다.


▲  이소라 에비스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비늘바위)

비늘바위는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인 도요타마히메가 출산 장면을 훔쳐본 남편에게 절망하여
아들(이소라 에비스)을 버리고 용궁으로 들어갔다는 우나자까이다. 용궁으로 들어갈 때만 문
이 생긴다고 하는데 얼핏보면 설화를 끼워 맞추고자 인위적으로 만든 듯 싶으나 엄연한 자연
산 바위이다. 또한 아들인 이소라 에비스를 버린 곳이라 하여 '이소라에비스'라 부르기도 한
다.

이렇게 하여 와타즈미신사 일대를 그런데로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부근에 있는 에보시다케전
망대와 함께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했으나 2019년 9월에 신사를
관리하는 원숭이가 본토 관광객에게 무례를 범한 일이 발생하여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20년 이후, 중공 잡것들이 천하에 악의적으로 퍼트린 코로나 전염병으로 대마도를 찾는 본
토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가 2022년 이후 조금씩 늘고 있는데, 와타즈미신사 원숭이
들이 여전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본토 사람들에게 계속 시건방을 떨자 요즘에는 대마도 여행
상품 대부분이 이곳을 차창(車窓) 관광으로 때우고 있다. 즉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
이다.
그나마 에보시다케전망대로 가는 길목이라 차창 관광으로 봐준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그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와타즈미신사 원숭이들만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니 참 근시안적인 원숭이들이 아닐 수 없다. (왜열도 원숭이들은 이곳을 비
롯한 대마도에는 별로 오지도 않음)

와타즈미신사를 떠난 우리의 버스는 니이로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별도
의 글에서(☞ 관련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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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 작은 계곡과 폭포를 지닌 고즈넉한 산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 연말 산사 나들이, 부산 백양산 선암사 '
선암사 용왕당과 폭포
▲  선암사의 명물, 용왕당과 폭포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해의 끝 무렵에 이르렀다. 새해가 묵은 해가
되어 퇴장을 서두르고 또 다른 해가 바로 코앞에 대기를 하고 있으니 세월의 미친 속도
감에 그저 충격과 공포일 따름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번개처럼 흐르며 세상만물을
희롱해도 나의 역마살은 결코 잠재우지 못한다.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를 장식할 장소를
두고 고민에 들어간 것이다.

비록 나를 부르는 곳은 단 1곳도 없지만(ㅠㅠ) 가고 싶은 곳은 정말 많다. 천하에 잔뜩
흩어진 명소를 두고 어디를 갈까? 물색하던 중 뜻밖에 선물이 날라왔다. 2016년 12월에
개통된 수서고속전철(SRT)에서 열차 이용 무료 쿠폰을 보내온 것이다. (SRT열차에 한해
어디든 1회 무료 이용) 간만에 좋은 선물을 받으니 흩어진 기분이 하나로 뭉친 듯 마음
이 무지 즐겁다.
그 무료 쿠폰을 등에 업고 여행 범위를 1,000리 밖까지 넓혀 처음에는 목포(木浦) 지역
을 생각했으나 갑자기 부산(釜山)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흔쾌히 방향을 잡고 아침 표
를 예약했다.

새벽 공기가 무겁던 5시,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시내버스를 1회 환승하여 수서역으
로 이동했다. 시간이 아직 남아있어 주변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7시에 부
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시속 200~300km로 시원스럽게 질주를 하며 천안아산, 대전, 김천구미, 동대구를
거쳐 9시 24분, 경부선의 영원한 종점, 부산역에 이르렀다. 불과 몇 달 만에 와보는 부
산 땅이지만 마치 처음 발을 들인 듯 마음이 설렌다.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부산역을 나와서 부산시내버스 17번을 타고 당감동(堂甘洞) 선암사입구로 이동했다.



 

♠  백양산 선암사 입문

▲  선암사로 인도하는 가파른 언덕길 (백양산로)

선암사입구에서 백양산 선암사까지는 북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백양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올
라가야 된다. 중간에 당감뜨란채아파트 뒤쪽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으나 그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예전처럼 백양산로를 쫓아갔다. (내려갈 때 지름길의 존재를 발견했음)

동양초교를 지나면 울창한 숲이 펼쳐지면서 계곡 흐르는 소리가 나의 멍멍한 두 귀를 때린다.
길 옆으로 선암사계곡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산속에 계곡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이곳
이 부산 도심 지척이라 처음에는 '내 귀가 미쳤나?' 착각을 들게 했다. 허나 그는 백양산이
빚은 자연산 계곡이 맞다.
선암사계곡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선암사 경내에 묶여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림의
떡보듯 바라보는 선에서 멈춰야 되며 그 이상의 흥분을 보여서는 절대 곤란하다. 선암사를 벗
어난 계곡은 '동천(東川)'이란 이름으로 부산 앞바다로 흘러가며, 절 밑까지 밀려온 시가지에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서면(西面) 남쪽 광무교에서 다시 햇살을 보며 바다로
향한다.


▲  백양산로 끝에 자리한 선암사 주차장 (경내 직전)

▲  속세로 길을 재촉하는 선암사계곡 (주차장 부근)

계곡 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다소 정화는 되었지만 대신 길의 경사는 좀 각박해진다.
허나 그 거리는 그리 길지 않으며, 그 길의 끝에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선암사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이르면 길은 3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은 선암사 추모관과 애진봉, 백양산으로 이어
지고, 정면에 보이는 빡빡한 계단길은 선암사 경내로, 오른쪽은 어린이대공원 방면으로 백양
산나들숲길 5코스(선암길)이다. <선암길이 선암사 앞을 지나고 있음, 애진봉 방면도 그 길의
일원임>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대문처럼 생긴 일주문(一柱門)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계곡 물소
리에 잠긴 선암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선암사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선방(禪房)

▲  대웅전 우측을 지키는 관음전(觀音殿)

부산 도심의 대표 지붕이자 부산에서 2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백양산(白楊山, 641m) 동남쪽 자
락에 선암사(仙巖寺, 仙岩寺)가 아늑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선암사는 2008년 이후 거의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이곳은 부산의 한복판이나 다름이 없는 곳
이다. 도심이 바로 지척에서 아른거리고 있건만 삼삼한 숲과 해맑은 계곡, 경쾌하게 흐르는
폭포까지 지니고 있어 첩첩한 산골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며 산사의 내음도 꽤 진하다.

선암사는 675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견강사(見江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안타깝게도 없는 실정으로 1867년에 작성된 '선암사 중수기(重修記)
'에는 802년 동평현(부산진구 지역) 성내(城內)에 처음 창건되었다고 나와 있어 이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400년 부산포(釜山浦) 동북쪽으로 절을 이전하였는데, 이때 선암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절 뒷산 절벽 바위에서 신라의 국선(國仙)인 화랑도(花郞徒)가 수련을 했다고 해서 선암사라
했다고도 하고, 산이 높고 바다까지 바라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라 가히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그리 했다는 설도 있다.
허나 이와 상반되게 견강사에 딸린 산중 암자로 선암사가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견
강사는 조선 중기에 초량왜관(草梁倭館) 부근인 자성대(子城臺)로 자리를 옮겼는데, 작은 암
자였던 선암사가 견강사의 자리를 대신하여 몸집을 불리면서 동평현에서 가장 큰 절이 되었다
고 한다. 즉 견강사의 부속 암자가 지역의 중심 사찰로 성장한 것이다.

1483년 각초(覺招)가 중창을 했으며, 1568년 신연이 중수를 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말끔
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681년 승당(僧堂)을 다시 지어 불상을 개금했고, 1718년 선오가
크게 중수했으며, 1866년 동악과 신겸이 돈을 모아 이듬해 중수를 벌였다.
20세기에는 뛰어난 선승(禪僧)으로 추앙을 받던 승려들이 이곳을 거쳐가며 절을 일구었는데,
혜월(慧月, 1861~1937)이 1921년부터 주지로 머물렀고, 1951년에는 향곡혜림(香谷蕙林, 1912~
1978)이 주지로 있었으며, 1955년에는 석암혜수(昔巖慧修)가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리고
2002년에는 시민들을 위해 선암도서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극락전, 관음전, 조사전, 용왕당, 산신각
, 칠성각, 추모관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모두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된 것들이라 고
색의 기운은 미약하다. 또한 추모관(납골당)과 공양간은 경내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절의 영
역이 보기와 달리 제법 넓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괘불탱(부산 지방문화재자료 27호)과 청동북(부산 지방문화재자료 37호)
, 3층석탑,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 등 지방문화재 4점과 조선 후기에 조성된
승탑(부도)군, 500년 정도 묵었다는 나한상 등이 있다. 이중 3층석탑은 많이 퇴락하긴 했지만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견강사의 유일한 유물이며, 괘불(掛佛)은 석가탄신일 등 극
히 일부 날에만 외출을 나오는 꽤 만나기 힘든 존재이다.

그밖에 원효대사가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우기고 있는 늙은 철불(鐵佛)과 19세기에 제작된 원
효대사의 진영(眞影)도 있었다. <원효대사는 인도에 간 적도 없으며, 철불은 신라 후기에 잠
깐 등장하는 불상 형태임> 1957년에 간행된 '부산교육'과 1966년에 발간된 '개항90년', 1969
년에 나온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도 언급되었던 존재로 적어도 1970년대까지 전해오고 있었
으나 관리소홀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름)

예전에는 바다가 보였다고 하나 지금은 키다리 빌딩이 즐비한 시가지에 시야가 막혀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동백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있으며, 계곡과 폭포가 경내를
가로지르고 있어 경관 하나는 마치 신선 세계처럼 상큼하다. 범어사(梵魚寺)와 마하사(摩訶寺
), 기장 장안사(長安寺)와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시내와도 무척 가깝고 접근
성도 좋은 편이다.

* 선암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 628 (백양산로 138, ☎ 051-803-7573)
* 선암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선암사 대웅전(大雄殿)

선암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인 청
동북을 품고 있다. (청동북의 위치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하여 그것을 보려고 했으
나 마침 오전예불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선암사의 뜻인 모양
이나 또 인연이 닿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  지장보살과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冥府殿)

▲  용왕당과 극락전 구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에 뿌리를 내린 잘생긴 소나무

선암사 경내는 가파른 지형을 따라 크게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과 명부전이 있는 대
웅전 구역이 제일 밑이고, 거기서 1단계 높은 곳에 용왕당 구역, 다시 1단계 높은 곳에 3층석
탑이 있는 칠성각 구역, 그리고 제일 위쪽에는 조사전을 두었다.


▲  야외 법당으로 이루어진 용왕당(龍王堂)

용왕당은 병풍처럼 솟은 벼랑 밑 폭포 옆에 자리해 있다. 비록 '당(堂)'을 칭하고 있지만 건
물은 없으며, 이글거리는 동그란 두광(頭光)을 지닌 용왕상과 그에게 예를 표하는 야외 공간
이 전부이다. 특이한 것은 각(閣)이나 전(殿)이 아닌 마을의 용왕당처럼 당을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암사에 용왕상을 세운 것은 2003년이다. 비록 여기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곳에
서 바다가 넝실거리고 있고 경내에 계곡이 흐르고 있으므로 일종의 마켓팅과 새로운 명물을
구축하고자 용왕당을 닦은 것이다. 용왕은 물을 관리하는 존재로 불경을 용궁(龍宮)에 모아놓
고 지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이는 용왕이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에게 떠넘긴 의
무이다. 또한 용왕이 물을 관장하고 있으므로 폭포 옆에 그의 거처를 마련했다.

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있는 용왕은 마치 사천왕(四天王) 같은 모습으로 조금 무섭게 생겼는
데, 그 앞에는 살짝 구부러진 작은 돌다리를 두었고 그 옆에는 폭포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높은 벼랑이 칼처럼 솟아 그늘을 드리우며 선암사를 더욱 아름답고 신비롭게
수식해준다. 벼랑 옆에는 돌로 다진 높은 석축이 있는데, 그 위에는 3층석탑과 칠성각이 자리
해 있다.
용왕상 주변에 서면 폭포에서 서늘한 기운이 불어와 마치 동굴에서 부는 바람 같다. 하여 한
여름에 찾아와 이곳에 있으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을 것이다.


▲  선암사 용왕 불사공덕비(佛事功德碑)
2003년에 용왕당을 지은 기념으로 세운 비석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자랑한다.

▲  용왕상과 벼랑 밑에 자리한 폭포
경내에 자연산 폭포를 둔 절은 그리 흔치가 않다. 허나 이곳은 하나도 아닌
무려 여러 개의 작은 폭포를 지닌 특별함을 보이고 있다.

▲  용왕당에서 칠성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계단길
계단이 얼마나 각박한지 계단 옆에 줄까지 달아놓았다. 맨정신으로 오가기가
어렵다면 쓸데없는 자존심을 잠시 날리고 줄의 신세를 지기 바란다.



 

♠  선암사 마무리

▲  선암사3층석탑 - 부산 지방문화재자료 53호

칠성각 구역에는 칠성각과 극락전, 산신각, 3층석탑이 있다. 이중 칠성각 뜨락 한복판에 앉은
뱅이 신세로 자리한 3층석탑을 꼭 살펴보자. 비록 생김새는 우울하지만 고려 말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는 탑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견강사의 유일한 흔적으로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존재이다.

석탑이라고 하지만 겨우 옥개석(屋蓋石) 3매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하여 그를 3층석탑으로 막
연히 추정하고 있다. 옥개석 사이를 두툼히 채웠던 탑신(塔身)과 탑의 밑도리를 이루던 기단(
基壇)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싹 침몰한 상태이며, 옥개석도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
다. 그러면 최소 5층석탑까지는 되었을 것이다.
부산의 많은 절이 잿더미가 되었던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되어 저런 고통스런 모습이 된
것으로 여겨지며 옥개석의 크기를 보아 같은 탑의 부재(部材)가 분명해 보인다. 1층 옥개석은
땅과 맞닿은 밑도리가 흙에 많이 파묻혀 있으며, 낙수면과 옥개석 받침 등의 치석(治石)은 좋
은 편이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 달린 머리장식은 근래에 선암사에서 덧붙인 것이다.

   ◀ 세월의 모진 풍파가 느껴지는 3층석탑
옥개석 피부에는 푸른 이끼 옷이 덮여져 있어
이곳의 청정한 기운과 탑의 장대한 내력을 느
끼게 한다. 비록 앉은뱅이 신세나 다름이 없지
만 선암사의 지긋한 역사를 온 몸으로 알려주
는 산증인이다.

▲  3층석탑을 굽어보는 칠성각(七星閣)
달랑 1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칠성 식구들의
거처이다.

▲  칠성각과 산신각 사이를 경쾌하게
흘러가는 선암사계곡

◀  계곡 바람이 지나가는 벼랑 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벼랑 그늘에 산신 할배의 거처인 1칸짜리
산신각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  극락전(極樂殿)
칠성각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3존상
<가운데 불상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5호>


극락전의 주인장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고려 후기 것으
로 여겨진다.
선암사의 빛바랜 일기장인 '선암사기(記)'에 따르면 고려 말 왜구들이 빼돌려 그들의 본거지
에 절을 지어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강제로 제자리를 떠난 불상이 단단히 뿔이 났는지 그 지
역 사람들이 비명횡사로 계속 죽어나가자 염통이 쫄깃해진 그 잡것들은 다시 배에 실어 웅천
에 있던 성흥사(聖興寺, 창원시 진해구)에 기증했다고 전한다.
이후 선암사로 흘러들어왔으며, 왜구에게 납치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불상으로
그 사연이 전해지면서 영험이 있는 불상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전설의 불상이 이것이 아닌
다른 불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유리막에 감싸인 아미타불은 온화한 표정을 지은 동그란 얼굴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양 손은 제1손가락과 제3손가락을 맞
댄 채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있는데, 오른팔은 팔꿈치를 접어 가슴 높이에서 손바닥이 보이
도록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왼팔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가슴 밑에 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
)을 취하고 있다.
그의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는데, 복장개부 입구에서 얼굴 부위까지
책자형 경전과 향, 중수 사실을 기록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발원문에는 중수 시기와 참
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불상의 양식으로 봤을 때 불상과 발원문의 시기가 그
리 일치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옛 사람들이 넣어둔 발원문 덕분에 이 불상은 2008년 지
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선암사의 꼭대기, 조사전(祖師殿)

칠성각 뒤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조사전이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로 보통 절 꼭대기에는 삼성각이나 산신각을 두기 마련이나 여기는
조사전을 위쪽으로 올리고 그들을 1단계 밑에 깔았다. 정면과 측면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원효대사를 비롯해 이곳을 거쳐간 승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여기서 길은 벼랑으로 막
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  조사전에 봉안된 승려의 진영
가운데 승려가 원효대사인듯 싶다. 좌우는 누구인지 모르겠음..

▲  선암사에서 바라본 백양산 애진봉(589m)

선암사 경내를 둘러보고 명부전 서쪽 길을 가니 너른 밭과 공양간이 나온다. 마침 점심 때라
절의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간 앞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외지인은 안된다는 차가운 안내문이
공양간 문에 자석처럼 붙어있었다. (자리 협소를 이유로 제공하지 않는다고 함)
하여 허탈감을 애써 뒤로 하며, 절 뒤쪽에 아른거리는 애진봉이나 잠깐 올라가기로 했다. 애
진봉은 백양산의 일원으로 부산 최대의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곳인데, 선암사에서 애진봉 정
상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허나 몇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귀차니즘이 거세게 밀려오면서 선암사 서쪽 소나무숲에서 발길
을 돌렸다. 이렇게 바로 철수하니 정말 밥을 조금 먹다만 기분이다. 허나 땡기지가 않으니 어
쩌겠는가.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는 수밖에...


▲  애진봉으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  선암사 서쪽 소나무숲

▲  선암사 약수터

다시 공양간으로 내려오니 그 옆구리에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가 있었다. 쉼터에는 간단한 먹
거리와 염주,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쉼터 의자에는 산꾼 여럿이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를 섭취하고 있었다.
쉼터 옆에는 선암사 약수터가 있는데 지역에서 꽤 알려진 약수로 물의 낭비를 줄이고자 수도
꼭지를 달아 물을 통제하고 있었다.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목구멍에 들이
키니 물이 빛의 속도로 목구멍과 폐부를 시원하게 적셔준다.
선암사 경내로 다시 들어가 청동북이나 보고 가려고 대웅전을 기웃거렸으나 아직 예불은 끝나
지 않았다. 새가슴마냥 문 밖에서 청동북의 안부를 확인해 보았으나 내부가 다 보이지 않아
쿨하게 포기하고 일주문과 각박한 계단을 통해 선암사를 나와 다음 정처로 이동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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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미우다해수욕장, 한국전망대)


▲  대마도 미우다해수욕장

대마도 한국전망대

▲  한국전망대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킨의 장수 은행나무)


* 대마도의 본토는 대한민국(우리나라)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 2020년 이후 부산과 대마도를 잇는 뱃편은 1도 없으며 찾는 이도 없다.
* 본글은 2019년 이전에 간 것임을 밝힌다.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떠있는 대마도를 찾
았다.
대마도(對馬島)는 2004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그때마다 태풍이 초를 치면서 가지
를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5월에 이르러 1박2일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보우하사 100% 상륙 확정이다.

부산과 구주(규슈, 九州) 사이에 자리한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
는 708㎢의 덩치로 유인도 5개, 무인도 102개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
북으로 길쭉하다보니 제법 큰 섬으로 다가오며(남북이 82km, 동서 18km) 우리가 잃어버
린 옛 땅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의 동남
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경(國境)
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매우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저렴한 금액과 극히 짧은 시간으로 해
외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상당했
다. (2018년에 무려 40만 명이 찾았음) 허나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반드시 회복
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고속해운)에 나
를 담고 2시간 20여 분을 항해하여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엄원(嚴原)>에 도착했다.
다행히 바다가 순하게 굴어 뱃길은 매우 순탄했는데 바다가 종종 격하게 흥분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그때는 배멀미 등의 고통을 각오해야 된다. (대마도 2번째 방문 때는 3m가
넘는 파도로 완전 지옥을 맛보았음;;)
처음으로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뭐랄까.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이
나 낯익은 모습이다.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 즐거운 흥을 마치 회충
이나 세균처럼 생긴 못생긴 왜열도 글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첫날은 도보로 이즈하라 시내를 돌아다녔다. 오후 6시까지 여로(旅路)를 듬뿍 살찌우다
가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즈하라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면서 첫 날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다음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적게 나온 왜식 정식을 먹고 둘
째 날을 시작했다. (밥은 리필이 되지만 반찬은 안됨)
이 날은 전용버스로 히타까쯔까지 여러 명소를 겯드리며 이동하는 일정으로 대마도를 2
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교(만제키바시), 에보시다케 전망대, 와타즈미신사를 둘러보
고 대마도 북섬의 동쪽 도로인 39번 지방도(도요타마마치~사가~긴~슈시~히타까츠)를 따
라 북쪽으로 향했다.

대마도 39번 지방도는 겨우 구색만 맞춘 좁은 2차선 길로 거의 산악길 일색이라 구불구
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굴곡을 순화하고자 일부 구간에는 터널과 다리가 닦여졌으나
아직까지도 많이 부족하여 운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북섬 서쪽 도로인 382번 국
도(가미아카타마치 경유)도 있으나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잇는 길은 39번 지방도가 조금
지름길이다.
하여 본토 사람을 태운 관광버스는 39번 지방도를 주로 이용을 하고 있는데, 이 구간에
는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슈시강 단풍길, 나루타키폭포 등의 명소가 있다. 이들은 대마
도 여행상품에서 많이 취급하는 것들로 우리는 그중에서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를 들리기
로 했다.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왕래하는 시내버스와 투어버스는 382번 국도를 이용함)


 

  대마도 및 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백제 사람이 심었다고 전하는
장송사(長松寺) 백제은행나무 <긴의 장수은행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대마도의 북쪽 끝을 이루고 있는 상대마정(上對馬町, 가미쓰시마마치)의 남쪽 구석에는 '긴(
琴)'이란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름도 달랑 1글자인 그 마을에는 장송사란 작은 절이 있는데,
바로 그 뜨락에 대마도에서 가장 늙은 은행나무가 푸른빛 장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 높이
솟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추정 나이가 약 1,500년으로 대마도 및 왜국(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대마도가 본토의 그늘에 묻혀있던 시절부터 대마도의 부모 나무라 불렸으며, 둘레가 63.6m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상은 높이 23m, 둘레 12.5m이다.
백제(百濟) 사람이 심었다고 전해져 예로부터 백제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왜열도의
은행나무는 백제가 속방(屬邦)인 왜에 불교를 내리면서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여
이곳 나무 역시 그 과정에서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지금은 '긴'이 작고 하찮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는 대마도 북부의 관문으로 바쁘게 살았다. <신숙주(申叔舟)가 1471년에 쓴 '해동제국기(海東
諸國記)'에는 40여 호의 집이 있다고 나와있음>
장송사에 있는 나무라 하여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라 하며, 지역 이름을 따서 '긴의 장수은행
나무','긴의 대은행(銀杏木)', 왜어로는 '킨노오이쵸'라 부른다.

1798년 낙뢰를 맞아 가지가 부러지고 나무 속살이 탄 적이 있으며, 1809년에 작성된 대마기사
(對馬記事)에는 '바다에서 보면 울창하여 산과 같다'고 나와있어 낙뢰의 상처에도 그 위엄을
크게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50년 태풍 29호로 기둥나무가 아작나기도 했으나 옆에서 조그만 나무가 자라나 크게 가지를
넓히고 새 잎이 피어났다. 1990년에 열린 '국제 꽃과 초록의 박람회' 때 기획된 '신일본 명목
(名木)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조금씩 성장을 보이고 있어 생명력만큼은 젊은
나무 못지 않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백제은행나무', 그리고 백제에서 전래되었음을 안내문에 표시했으
나 역사 왜곡의 달인, 왜국이 대마도와 우리 본토의 끈끈한 인연을 자르고자 백제 두 글자를
지워버렸다. 하여 요즘에는 '긴의 장수은행나무'로 명칭을 고정시키고 그 이름을 강요하고 있
다. (왜는 대마도가 가야와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영역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지배와 영향
을 받은 흔적과 기록을 왜곡하거나 지우고 있음)


▲  사람을 작은 개미로 만들어버리는 백제은행나무의 위엄

▲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을 1,500년 이상이나
꾸역꾸역 섭취한 백제은행나무의 단단한 아랫도리

▲  은행나무 그늘에 묻힌 조그만 신사와 붉은 도리이
본토의 마을 서낭당과 같은 존재로 대마도가 왜화(倭化)가 되면서 저런
신사(神社)로 변질되었다. (매년 신사에서 제사를 지냄)


대마도 뿐 아니라 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추앙하고 있으나 정작 국가 천연기념물이 아
닌 장기현(나가사키) 지방 천연기념물 등급에 머물러있다. (1961년에 지정되었음) 본토 같았
으면 진작에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 크게 애지중지되었을텐데, 그보다 낮은 지방문화재 등급
에 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싶다. (본토와 관련된 나무이고, 대마도가 원래 본토
땅이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을 일부러 낮게 매긴 모양임)


▲  장송사 법당(法堂)

백제은행나무의 후광(後光)과 그늘을 아낌없이 받고만 있는 장송사는 조동종(曹洞宗) 소속으
로 법당과 요사(寮舍)가 전부인 조그만 절이다. 겉으로 보면 20세기 사찰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으나 무려 조선 때부터 있어온 절로 고려 현종(顯宗) 때 조성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인쇄 목판을 소리없이 간직하고 있다. (인쇄본은 11세기 이후에 많이 인쇄되어 보급되었으나
지금은 상당수가 왜열도에 있음)
대마도에서도 다소 외진 이런 구석탱이에 그런 존재가 숨어있다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울 따름
인데, 왜구가 약탈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고려 말에 고려 조정이 왜구의 공격을 불력(佛力)으
로 막고자 왜열도와 가까운 대마도에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장송사로 흘러들어와 이
곳의 듬직한 보물이 된 것이다. (대장경 인쇄본은 관람 불가)

본토 관광객들이 은행나무를 보러 많이 찾고 있으나 정작 절 승려나 동네 사람들은 거의 콧배
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단순히 백제은행나무를 보러 오는 곳이라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흥분시킬 건덕지가 없다. 그냥 조용한 절과 마을이 전부이다.

▲  '일본일수령 긴의 대은행(一樹齡
琴の大銀杏)' 나무판

▲  법당에 걸린 왜열도 스타일의
조그만 종


▲  히타까츠항 (항구 서쪽)

백제은행나무를 둘러보고 가을 단풍길로 유명한 주지(舟志, 슈시)와 나루타키폭포 입구를 지
나 히타까츠(히타까쓰, 比田勝)로 이동했다.

히타까츠는 상대마정(가미쓰시마마치)의 중심 마을로 대마도 북부의 중심지이자 북쪽 관문이
다. 대마도에서 2번째로 큰 동네로 동서로 길쭉한 어촌 마을이며, 그 앞바다가 북/서/남 3면
이 육지와 접해있고 그 3면이 동쪽에서 들어온 바다를 감싸고 있어 항구로 아주 적합하다. 대
마도가 지형이 꽤 거칠다보니 항구로 크게 부릴만한 곳이 이곳과 이즈하라 정도로 외지를 잇
는 여객선은 오로지 이 두 곳에서만 뜬다.
히타까츠에서는 부산과 하카타를 잇는 여객선이 오가고 있는데, 부산까지는 1시간 10~30분 정
도 걸린다. 그러니 대마도에 일찍 상륙하고 싶다면 히타까츠를 이용하면 된다. (이즈하라는 2
시간 20분 이상 걸림)


▲  오늘도 평화로운 히타까츠항
잔잔한 파도가 이곳의 적막을 살짝 건드리고 있고 바다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다.

▲  단조로운 모습의 히타까츠항 건너편 (히타까츠항 남쪽)

▲  히타카츠 마을 (시내라고 하기에는 동네가 작음)

히타까츠 마을은 마치 한물 간 영화세트장처럼 한적하기 그지 없다. 본토에서 배가 들어오거
나 남쪽이나 한국전망대 쪽에서 본토 사람들을 실은 관광버스가 오면 히타카츠 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잠깐씩 활기를 되찾다가 그들이 빠져나가면 다시 끝없는 고요 속으로 잠긴다.

이곳에는 본토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게다가 본토 말을 구가하는
지역 사람들도 많아서 언어 소통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  히토쓰바타고에서 먹은 왜식 우동과 유부초밥의 초라한 위엄

우리는 히타까츠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히토쓰바타고'란 왜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발
음도 어려운 히토쓰바타고는 왜어(倭語, 일본어)로 이팝나무를 뜻한다. 즉 이팝나무식당이다.
히타까츠에서 이름난 식당으로 우동, 회, 왜식 정식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대마도 여행 상품
중의 히타까츠에서 점심을 먹는 일정이 있으면 이곳과 본토 사람이 하는 식당으로 많이 간다.

여기서는 우동과 유부초밥 2개, 왜식 김밥 2개, 그리고 약간의 고등어회가 차려졌다. 우동은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양이 적었고, 고등어회 역시 여러 명이 같이 누리기에는 양이 빈약
하여 1인당 1~2개씩 집어먹으니 이내 빈 그릇이 되었다. 반찬은 단무지와 오랜지가 전부로 저
것을 다 섭취해도 왠만한 성인 남자들은 배가 차지 않는다. 그야말로 왜열도 애들의 좁쌀 같
은 마음처럼 나온 것이다. 하긴 외딴 섬에 물가도 비싸고 이윤도 많이 남겨야되니 그렇게 좁
쌀처럼 굴어야 돈이 남을 것이다.


▲  몇 조각 나오지 않은 고등어회

대마도 주변은 고등어와 방어가 많이 잡힌다. 이곳 밥상에 올라온 저 고등어 역시 대마도 산
일 것이다. 허나 정신줄 놓은 왜국(일본)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해역에서 잡은 물고기를 전
국에 저렴하게 유통시키고 있어 조금은 꺼림칙하다. 수산물 뿐 아니라 육류, 채소, 쌀, 심지
어 맥주(아사히맥주)까지 후쿠시마산을 대놓고 퍼트리고 있어 왜열도에서 음식을 섭취할 때
꼭 주의가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왜열도에 안가는 것이 좋음)


 

♠  대마도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 미우다(三字田)해수욕장

점심 후식거리로 찾아간 미우다 해변은 히타까츠에서 차로 5분 거리이다. 해변 주차장에서 확
트인 동쪽으로 가면 이국적 분위기의 미우다 해변이 쓱 나타나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을 무
심히 뒤흔든다.

미우다 해변은 미우다하마(三字田濱)라 불리기도 한다. 대마도의 이름난 해변으로 왜국 해수
욕장 100선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리 넓은 해변은 아니나 하얀색 고운 모래와 에메
랄드빛 같은 푸르른 바다, 해변을 둘러싼 산, 바로 앞에 떠있는 바위섬까지 서로 어우러져 아
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히타까츠항처럼 북/서/남이 산과 접해있고, 그 3면이 동
쪽에서 들어오는 바다를 깊이 둘러싸 자연산 방파제가 되어주고 있으며, 수심도 얕아 어린이
를 동반한 물놀이 장소로 아주 좋다.
이곳은 대마도의 필수 여행지로 대마도 여행 상품에서 90% 이상 취급하고 있다. 2018년에 40
만 명이 대마도에 발을 들였다고 하니 그중 30만 이상은 이곳에 발자국을 남겼을 것이다. 게
다가 히타까츠항에서도 매우 가까워 본토 사람들이 캠핑, 피서, 낚시로 많이 찾아온다.

▲  미우다해변의 명성을 알려주는
일본100선 해수욕장 표석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①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②

▲  나그네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바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다면 그 유혹에 흥분하여 무조건 풍덩했을지도 모른다.

▲  미우다 해변과 이곳의 상큼한 장식물, 바위섬
해변 바로 앞에는 작은 바위섬이 두둥실 떠있다.

▲  바위섬을 점거한 사람들

▲  대자연이 미우다에 내린 보물, 바위섬
바위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만약 저 섬이 없었다면 해변의 운치도 50% 이상
떨어졌을 것이며, 해변과 섬 사이에 수심도 안정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  미우다해변 북쪽 부분

▲  미우다해변의 평화로운 풍경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목을 내민 저곳은?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보이는 곳은 도노사키(전기, 殿崎)로 저곳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왜국이 자화자찬용으로 닦아놓은 '일러우호의 언덕'이 있다.

왜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그 강하다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마도에서 요행으로 때려잡
았다. 그때 영혼까지 썩 털려 방황하는 러시아군을 대마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집으
로 데리고 와 그들을 재워주고 밥을 제공했으며 씻을 수 있게 뜨거운 물도 마련해주었다는 것
이다. 하여 왜는 그것을 엄청 강조하며 러일 우호 및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현장이라고 빡빡
우겨대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는 다소 얄밉고도 씁쓸한 현장으로 몇몇 여행상품에
서는 저곳을 트래킹 명소로 들리고 있다.


 

♠  대마도 북쪽 끝에 자리한 본토 바라기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  한국전망대(한국전망소)

미우다해변을 둘러보고 이번 대마도 나들이의 마지막 답사지인 한국전망대로 이동했다. 상대
마정 북부순환로(히타까츠~미우다~도요~와니우라~오우라~히타카츠)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
면 한국전망대 입구가 마중을 나오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가파른 1차선 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와니우라 해안 언덕 정상에 자리한 한국전망대는 대마도의 최북단(부속 섬은 제외)으로 이름
그대로 대마도의 주인인 우리나라(한국)를 바라보는 전망대이다. 1997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본토식으로 지어졌는데, 본토의 한옥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서울 탑골공
원에 있는 팔각정(八角亭)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으며, 건축자재도 모두 본토에서 가져왔다.

오로지 본토 바라기로 지어진 곳으로 여기서는 본토의 부산이 바라보인다. 거리는 약 50km로
날씨가 좋으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나 우리가 갔을 때는 바다 구름이 조금 낀 상태라 부산
은 커녕 영도(影島)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날씨를 잘 맞춰서 가야 된다. 날씨에 따라 '한국
전망대'가 되느냐 단순히 '대한해협 전망대'가 되느냐 갈리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바라보는 부산의 야경(夜景)은 천하일품이라 그 야경을 찍으러 사진쟁이들의 발
걸음이 잦다. 낮에는 비록 부산이 두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밤에는 아주 지독한 흐린 날씨만
아니라면 90% 이상 부산 야경 구경이 가능하다. 여기서 부산 앞바다까지 어둠을 몰아내려는
어떠한 빛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 해변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
제까지 여기서 구경을 할 수 있다. (밤에는 오로지 부산 지역만 야경이 환함)

▲  정면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  동쪽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이곳에 전망대를 세운 것은 단순히 부산이 바라보여서가 아니다. 왜정 때 대마도에 징용 등으
로 온 본토 사람들이 설과 추석에 바다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본토를 바라보며 망향의 한
을 달래던 곳이기 때문이다.

1997년 이곳이 지어졌을 때는 부산과 대마도가 뻔히 보임에도 서로를 잇는 뱃편이 없어 본토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한국전망대는 다소 한가했다. 그러다가 1999년 뱃편이
생겼고, 본토가 바라보이는 그 잇점 하나로 본토 사람들의 발걸음이 크게 늘면서 대마도의 필
수 관광지로 성장했다.
이곳 외에도 여기서 가까운 가미아카타마치의 좌호만(佐護灣, 사고만) 해안에도 부산을 바라
보는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그곳 이름은 '이국이 보이는 언덕전망대(異國の見える丘展望臺)'
로 날씨가 좋으면 능히 부산이 바라보인다. 허나 한국전망대의 위엄에 눌려 본토 사람들의 발
길은 적으며, 대마도 여행상품에서도 거의 취급을 하지 않는다.


▲  한국전망대 밑에 펼쳐진 와니우라 포구
이곳은 대마도에서 가장 북쪽 마을이다.


전망대는 2층 규모로 2층에 대마도 관련 여러 정보와 여기서 담은 부산 사진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허나 특별한 것은 없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오로지 본토 바라기용 명소이다.
본토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부산과 대마도가 정말 가깝구나','대마도는 우리 땅','본토와 이
리 가까운데 어찌하여 원숭이들 땅이 되었나?','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해방시키자' 이런 생각
들을 많이 할 것이다.
반면 왜인들은 '한국 땅이 참 가깝다','한국을 반드시 점령하자~' 이런 생각들을 하겠지. 말
로는 대마도와 가까운 부산을 바라보는 단순한 전망대라고 하지만 속뜻은 모른다. 이래서 이
중성이 심한 왜열도 원숭이들을 늘 경계해야되며 반드시 때려잡아야된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대한해협 (부산 방향)
저 흐릿한 수평선 너머로 부산이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오늘은
바다 구름이 너무 짙어서 조망의 품질은 이것이 전부이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海栗島, 우니지마)

앞바다에 길쭉하게 떠있는 섬은 해율도(우니지마)이다. 저곳이 대마도와 왜국에서 가장 우리
나라와 가까운 최전방으로 해상자위대 군부대를 두어 매의 눈으로 북쪽을 감시하고 있다. 나
중에 우리가 대마도를 무력으로 해방시킨다면 제일 먼저 저곳을 초토화시켜야 된다.


▲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
(윗쪽 비석이 순난지비, 밑의 검은 피부의 표석이 2003년 3월 7일에 세운 것)


한국전망대 앞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가 있다. 돌로 크게 2중의 석단(石壇)을 쌓고 그
위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비석을 올렸는데, 비석의 이름 그대로 역관사의 순난(殉難)을 기억하
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1703년 2월 5일(양력 3월 7일) 조선 역관사 108명과 대마도 선원 4명을 태운 배가 부산포(釜
山浦)를 출발해 대마도로 향했다. 허나 대마도 코 앞인 와니아루 앞바다에서 격한 파도를 극
복하지 못하고 침몰했고, 배에 탄 112명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역관사는 오늘날 공무직 통역사로 대마도와 왜국에서는 그 108명이 모두 대마도 21대 도주(島
主)인 종의진 조문 및 새 도주가 된 종의방 취임 축하를 위해 왔다고 그런다. 허나 한 나라의
왕도 아니고 조선에 속한 변방 섬 도주 따위에 조문과 취임식에 그 많은 인원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때 왜열도는 지방 세력(번주)들이 중앙(에도막부)과 따로 놀던 시절이었다. 하여 규슈와 혼
슈의 많은 지방 세력들은 조선에 조공(朝貢)을 보내거나 정치적,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
다. 마침 대마도주 조문과 취임 축하를 위해 역관사를 보낼 일이 있어서 그 배에 에도막부와
지역 세력들에게 파견하는 역관들까지 싹 태워서 보낸 것이다. 아무리 조선의 항해술이 우수
하다고 해도 거친 바다를 뚫고 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지라 한꺼번에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마도 직전에서 침몰하여 그 아까운 외교 인재들이 싹 변을 당한 것이다.

이후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1991년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 순난지비를 세웠으나 그들의
이름은 모두 애석하게도 전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가문가사료(宗家文庫史料)'에서 그들
의 이름을 머금은 묵서소책자(墨書小冊子)가 발견되었고, 그들의 300주기가 되는 2003년 3월
7일 기존 순난비 앞에 그들의 명단을 적은 표석을 세웠다.
그때 역관사의 대표는 정역(正譯)인 한천석(韓天錫)이며, 부역(副譯)은 박세량(朴世亮) 등 20
여 명, 50여 명의 중관(中官), 20여 명의 하관(下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존재는 대마
도에서 이렇게나마 남게된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는 거리는 무척 가까우나 바다가 종종 흥분기를 보여 선박 침몰 사고가 많이
있었다. 특히 한국전망대 앞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 주변이 가장 말썽으로 1459년 통신사
(通信使)를 태운 배 2척이 침몰해 1명을 빼고 모두 사망한 일이 있었으며,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대마도로 적지 않게 표류해와 대마도주는 그들을 표민옥(漂民屋)에 수용하여 고향으
로 보냈다. (대마도주는 표류민들의 표민옥 숙박비를 조선 조정에 청구했음)


▲  한국전망대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산책로

한국전망대는 주변 조망까지 포함해서 20~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히타까츠 뱃시간 때
문에 20분 남짓 머물다 떠났지만 시간이 널널하다면 주차장 동쪽에 있는 풍포대(豊砲臺)유적
과 주차장 서쪽 언덕에 있는 조그만 신사도 같이 보기 바란다. 신사는 와니우라 마을의 서낭
당 같은 존재로 근래 지어진 작은 건물이나 대마도 해안 마을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
으며, 풍포대는 왜정 때 대마도 보호를 위해 닦여진 요새의 하나이다.


▲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우리를 옮겨줄 대아고속해운 오션플라워호

한국전망대를 끝으로 대마도 답사는 아쉽게도 마무리가 되었다. 부산행 마지막 뱃시간 때문에
미우다해변과 한국전망대에서 머문 시간이 다소 짧지만 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 보통 봄과 여
름, 가을에는 부산행 마지막 배가 16시대에 있고, 겨울과 초봄에는 15시대에 있는데, 그 시간
에 따라 히타카츠 주변 일정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다시 히타카츠 마을로 돌아와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면세점(免稅店)에 들렸다. 대마도가 우
리의 옛 땅이나 지금은 외세가 불법 점거하고 있는 상태라 해외로 분류되고 있다. 해외여행에
서 면세점 방문은 필수라 이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건강식품과 화장품, 빵과 초
콜렛 등의 간식류, 기념 장식용, 담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대마도를 찾는 본토
사람 중에는 오로지 면세점 쇼핑 때문에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행들은 담배와 화장품, 왜식 된장인 나토 등의 건강식품을 많이 샀으나 나는 돈도 없고 딱
히 땡기는 것이 없어서 아주 저렴한 고양이 장식물을 샀다. 이른바 오른발을 들고 복을 부른
다는 고양이상이다. 가격은 400엔 정도로 기억한다.
그렇게 면세점의 호주머니를 넉넉히 채워주고 히타카츠 여객터미널로 넘어갔다. 한산한 히타
까츠 마을 거리와 달리 여객터미널은 본토로 돌아가는 본토 사람들과 부산을 찾는 대마도 애
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 30분 정도 대기하다가 16시 넘어서 부산으로 가는 대아고속해운의 오션플라워(Ocean
flower)호에 몸을 싣는다. 이 배는 전날 부산에서 이즈하라로 내려왔을 때 탄 배로 하루만에
다시 신세를 진다.

시간이 되자 배는 입을 모두 봉하고 미끄러지듯 대한해협으로 나간다. 다행히 파도는 잔잔했
고 여로를 너무 살찌우다보니 몸이 고단하여 40분 이상 꿈나라를 방황했다. 그렇게 1시간 10
여 분을 달려 부산항국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날 아침에 이곳을 출발해 다음날 오후
늦게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말 1박2일 짧기는 짧다. 하긴 인생도 짧다고 하는데 그까짓
1박2일은 정말 티끌만도 못하지.

여기서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2004년부터 벼르고 별러서
이제서야 건너간 대마도, 옛날 가야와 신라, 백제가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마도와 대
한해협을 지겹도록 건너갔고 660년 이후, 백제가 망하자 수만 명의 백제 사람들이 대한해협을
거쳐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인 왜로 넘어갔다.
신라는 종종 군사를 보내 대마도와 왜를 쳤고, 신라 후기에는 신라해적이라 표현된 신라 수군
과 지방 세력의 수군이 대한해협과 대마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니며 크게 위엄을 과시했다.
(894년 대마도를 공격한 신라해적은 후백제 수군으로 여겨짐) 고려 현종(顯宗) 때는 발해(渤
海) 후손의 일원인 여진족 수군이 대마도와 규슈를 초토화시켰으며, 1274년과 1281년 고려와
원(몽골) 연합군 역시 대마도와 규슈를 아작냈다.
조선통신사는 왜열도와 대마도 단속을 위해 이 거친 바다를 건너갔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많
은 본토 사람들이 이 바닷길을 건너 대마도와 왜열도로 건너갔다.

다음에 대마도를 찾을 때는 꼭 여권 없이 갈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2년 뒤 방문에도 여권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만큼 대마도는 우리에게 애증의 땅이다. 휴전선 이북 회복도 급하지만 툭
하면 독도(獨島)가 지네 땅이라 개소리나 일삼는 왜국의 헛소리 대응용으로 대마도는 꼭 걸고
넘어가 반드시 우리 영역으로 해방시키기를 꿈꿔본다.
대마도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어여 우리를 왜열도 원숭이들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솔직히 왜
국도 대마도를 변두리 섬으로 여겨 크게 관심도 없고 완전 외면 수준이다. 심지어 왜열도 애
들은 대마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들도 수두룩 하다고 한다. 만약 본토 부산에 편입되면
대마도는 지금보다 훨씬 환경이 좋아지고 찾는 이가 100% 이상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대마도
가 살려면 예전 주인에게 오는 것이 맞다. (물론 지나친 난개발은 안됨)

이렇게 하여 대마도 첫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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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40리를 거닐다 (죽성리 월전, 대변항, 죽도, 오랑대, 해동용궁사)



'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죽성리 월전에서

대변을 거쳐 해동용궁사까지) '

▲  연화리 앞바다 (멀리 보이는 곳은 대변항)


 

  월전에서 대변까지

▲  남쪽에서 바라본 월전포구

기장읍 동쪽 죽성리(竹城里)에서 시작된 우리의 기장 동해바다 봄나들이는 죽성리 일대의 명소
<죽성리해송(海松), 죽성리왜성(倭城), 황학대(黃鶴臺), 죽성성당>를 두루 둘러보고 월전을 거
쳐 대변으로 향했다. <기장 죽성리 부분은 ☞ 이곳을 흔쾌히 클릭
>

월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대중교통은 하나도 없으며, 1.5~2차
선 정도의 길(기장해안로)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펼쳐진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
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여럿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별장처
럼 생긴 집들이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대변이나 월전으로 외식을 하러 가거나 드라이
브를 나온 차량들이 수시로 매연을 뿜고 지나갔고, 대변~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
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가 있는 곳과 몇몇 장소를 빼고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  가지각색의 기암들이 율동을 부리는 월전 남쪽 바닷가

▲  바다와 자갈과의 속삭임
물이 얼마나 푸르던지 4월 중순이란 시간을 잊고 풍덩풍덩 들어가고 싶다.

▲  바닷가에서 만난 튤립(Tulip)의 위엄
아주 잘익은 빨간 튤립 6송이와 노란 튤립 2송이가 바다 바람을 따라 경쾌하고도
귀엽게 봄의 율동을 선보인다.

▲  월전과 대변 사이의 바닷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설마 저기서 석유를 시추하는 것은 아니겠지?

▲  잠시 우리가 왔던 북쪽(죽성, 월전)을 돌이켜보다.

▲  대자연의 물감이 빚어낸 동대해

아무리 천재화가라 한들 대자연 형님이 빚은 작품 앞에서는 그저 한줄기 낙서에 불과하다. 아
무리 용을 써서 흉내를 내어 본들 저런 빛깔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색깔만 하리요. 그만큼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럼에도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거나 섬기지는 못할 망정 계속 괴롭히고 정복하려고만 드니 자연
의 인내력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지 의문이다. 그의 인내가 폭발하면 결국 서로가 좋지 못할
텐데 말이다.


▲  대변 북쪽 바닷가
이 부근에 영화 '친구'를 찍은 바닷가가 있다.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
수영하고 놀던 그 현장 말이다.

▲  대변 동쪽 방파제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대변항이 끝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대변항(大邊港) 둘러보기

▲  대변항의 심장부에 들어서다, 대변항 어시장

월전에서 3km를 가니 나올 것 같지 않던 대변이 방파제를 시작으로 서서히 속살을 보이기 시작
한다. 바다를 따라가면서 수다도 떨고 이리저리 사진도 찍고 바다에 무심히 돌도 던지며 가다
보니 그 거리가 썩 지루하지 않았던 것이다.


▲  대변항 앞바다
방파제가 남,북으로 길게 방패처럼 둘러져 있고 동쪽에는 죽도가 떠있어
파도와 태풍에도 거의 끄떡없는 안전한 항구의 요건을 갖추었다.


이름도 좀 거시기한 대변리(大邊里)에 뉘어있는 대변항은 기장군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기장을
포함한 부산을 대표하는 어촌(漁村)으로 천하에 제법 알려진 곳이다. 기장의 명물인 미역과 멸
치회로 유명하며, 매년 4월에는 기장 멸치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대변항은 거의 'C'자 모양으로 육지쪽으로 크게 움푹 들어갔는데, 항구의 남북 폭은 300m 정도
이며, 항구 앞에는 죽도란 조그만 섬이 두둥실 떠 있어 자연산 방파제가 되어준다. 하여 일찍
부터 어촌으로써 크게 발전을 누렸으며 방파제까지 2중으로 두르면서 안전한 항구로 그 품격을
높였다.
새벽을 시작하는 도시, 기장 고을에 걸맞게 아침 일찍부터 바다로 조업을 떠나는 배들로 대변
항은 정신이 없으며 동이 트면 어시장도 활기를 누린다. 늦은 시간까지 싱싱하고 물오른 해산
물을 구경하고 먹을 수 있으며, 이곳으로 끌려온 생선과 해산물은 다양한 판매 경로를 통해 서
울을 비롯한 천하로 절찬리에 팔려나간다.
 
대변리 한복판에 있는 대변초교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질없는 쇄국정책의 꿈이 담긴
척화비(斥和碑)가 있는데 학교 바깥에서도 바라보이며, 기장읍내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토암도
자기공원이 있다. 또한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오랑대공원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는 죽성
리와도 이어져 대변항을 중간지 또는 기/종점으로 삼아 해안 산책이나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


※ 대변항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부산 지하철2호선과 동해선 벡스코역(9번 출구)에서 부산시내버스 139, 181번을 타고 대변이
  나 대변항입구 하차
* 부산 지하철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181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 동해선 송정역(1번 출구 건너편)에서 139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
① 부산시내 → 송정3거리 우회전 → 기장해안로 → 대변항 (또는 송정3거리에서 직진하여 연
   화육교 교차로나 청강4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도 됨)
② 부산시내(반송) / 울산 → 기장군청 → 청강4거리 좌회전 → 대변항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  풍어(豊魚)를 꿈꾸며 항구에 몸을 기대 고단한 몸을 쉬는 어선들

▲  대변항 풍경
평화로운 어촌 풍경이 오염된 안구를 조금이나마 정화시켜준다.

▲  바다 너머로 보이는 대변항 북쪽과 붉은 피부의 등대

▲  대자연이 대변 앞바다에 살짝 던져놓은 푸른 점 하나, 죽도(竹島)

앞서 죽성리에 황학대가 있다면 대변리에는 죽도가 있다. 둘 다 섬이긴 하나 황학대는 연륙되
어 버렸고 오직 죽도만 섬으로 남아있는데, 기장 지역의 유일한 섬으로 (조그만 바위섬 제외)
예로부터 기장 제일의 해안 명소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기장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섬의 모습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며 대나무가 많아 죽도란 흔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비
오는 날 밤에 빗방울이 대나무잎을 스치면서 내는 청아한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부여잡으면서
야우(夜雨)의 승경으로 꼽히기도 했다. 또한 시원한 샘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애용했으며, 조
그만 암자가 있었으나 이미 옛날에 사라지고 없다.

예전에는 육지와 200m 정도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락거렸으나 주변 바다를 야금야
금 메우면서 섬의 덩치가 조금 불었다. 그래도 섬의 성격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으나 섬 전체
가 어느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금지된 섬이 되버렸다.
섬 주인은 육지까지 다리를 가설해 섬을 한반도에 단단히 붙들어 두었으나 기왕 다리까지 만든
거 대변항의 상징으로 속세에 개방해 관광지로 꾸미면 어떨까 싶다. 허나 섬 주인은 그럴 생각
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원래부터 기장의 공유 명소였던 죽도를 왜 혼자서만 누리고 있는지 그
저 야속할 따름인데 기장군에서 섬을 매입하거나 섬 주인과 협의하여 시민들의 품으로 흔쾌히
돌려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  대변항 남쪽 앞바다 - 푸른 물감이 잔잔한 여울을 이룬다.

▲  대변항 남쪽에서 바라본 연화리

▲  대변항 앞바다 바위를 점거한 구공(鷗公, 갈매기)들
사람들의 손이 미치기 어려운 조그만 바위섬에 구공들이 들어와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꾸린다. 한때 새우깡의 제왕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입맛이 고급이
되었는지 이제는 별로 거들떠도 안보는 것 같다.

▲  대변항 남쪽 풍경 (녹음이 우거진 중간 부분이 죽도)


 

  연화리에서 오랑대까지

▲  연화리에서 멀리감치 바라본 대변항

▲  물빛이 진한 연화리 앞바다

대변항에서 연화리 앞바다까지는 길이 이어져 있다. 길가에는 해산물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많
이 있는데 4월의 한복판임에도 벌써부터 옷깃을 풀게하는 철모르는 더위와 죽성리부터 걸어온
피곤함으로 잠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며 두 다리를 달래기로 했다.
허나 가게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마침 이쁘게 치장된 까페 하나가 사막 속에 오아시스
처럼 나타나 우리를 손짓한다. 그를 보는 순간 시원한 걸 마시며 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솟
구쳐 별 망설임 없이 그곳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빙수를 먹으려고 했으나 여름에만 판다고
해서(그때 날씨가 거의 여름이었음;;;) 흔한 이름의 커피 종류를 시켰다.

여기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10리 이상 부려온 두 다리의 불만도 잠재우고 이른 더위의 압박
에서 벗어나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린다. 까페는 2층 규모인데, 차를 마시러 온 가족 단
위와 중년층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  연화리 까페에서 마신 커피의 위엄

▲  멀리서 본 오랑대(五郞臺)

까페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바
다 위에 높이 뜬 햇님은 퇴근시간이 점점 늦어짐을 원망하며 햇살의 강도를 점차 줄이면서 퇴
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화리 까페에서 바다를 따라 1km 정도를 가니 머리에 조그만 건물과 탑을 지고 있는 허벌나게
큰 바닷가 바위가 모습을 비춘다. 그가 바로 오랑대이다.


▲  꼬깔모자를 연상시키는 오랑대 (꼭대기에 자리한 건물은 용왕각)

오랑대는 기장의 주요 해안 명소의 하나이다. 조선 어느 때에 이곳으로 유배를 온 사람이 있었
는데, 그의 친구 5명이 머나먼 이곳까지 놀러와 오랑대 바위에서 곡차(穀茶)를 겯드리며 가무(
歌舞)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한다. 그래서 5명의 선비를 뜻하는 뜻에 오랑대란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임)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 광경이 가히 장관으로 주변에는 멋드러진 기암괴석이 많다. 오랑대를
원시적인 모습으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으련만 오랑대 바닷가에 자리한 혜광사(慧光寺)가 그곳
을 접수하여 바위 꼭대기에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용왕각(용왕단)을 달면서 보기가 좀 딱하
게 되었다. 용왕각 지붕에는 괴상하게도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을 올려놓았는데 멀리서 보면 오
랑대 용왕각의 모습이 마치 만화에 나오는 꼬깔모자처럼 보인다.


▲  오랑대 지붕에 자리한 용왕각

▲  용왕각에 봉안된 동해 용왕상

오랑대를 옆구리에 낀 혜광사는 법등(法燈)이 매우 짧은 현대 사찰이다. 오랑대 옆에 터를 다
지고 들어선 바닷가 절집으로 대자연이 빚은 오랑대를 휼륭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린
다.
오랑대 용왕각에는 용왕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좌우에는 앳된 동자(童子)상이 있으며 용왕 뒤
로 유리창을 내어 그의 활동무대인 동대해가 보이게끔 했다. 지붕에는 네 모서리에 용머리를
달아 건물의 품격을 높이려고 애썼으나 시멘트 집이라 썩 정감은 가지 않는다. 절집답게 목조
기와집으로 지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 오랑대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부산시내버스 100, 181번을 타고 혜광사 하차, 혜
  광사 방면으로 도보 7~8분 (100번이 그나마 배차간격이 짧다. 139번과 181번은 거의 20분 간
  격)
* 부산 동해선 송정역(1번 출구 건너편)에서 139번 시내버스를 타고 혜광사 하차.
* 승용차 (혜광사에 주차장 있음)
① 부산시내 → 송정3거리 우회전 → 기장해안로 경유 → 혜광사입구 우회전 → 혜광사
② 부산시내(반송) / 울산 → 기장군청 → 연화육교 교차로 좌회전 → 기장해안로 → 혜광사입
   구 좌회전 → 혜광사

* 오랑대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혜광사 ☎ 051-721-3167)


▲  1칸 규모로 조촐한 용왕각

▲  오랑대 주변 풍경 - 낚시삼매에 빠진 강태공들이 여럿 보인다.

▲  오랑대에서 바라본 대변항

오랑대를 둘러보고 바다를 따라 해동용궁사 방면으로 이동했다. 허나 군부대로 그만 길이 막혀
부득이 혜광사 뒤쪽 산길을 이용해 기장해안로로 탈출했다.

기장해안로 주변은 혜광사입구부터 당사리까지 관광단지와 쇼핑타운를 짓는다면서 산과 들판을 
죄다 밀어버려 폐허의 공간처럼 아주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인근에 오랑대와 해동용궁사, 대
변항, 국립수산과학원, 국립부산과학관 등의 명소를 받쳐주기 위한 관광단지라고 우기고 있으
나 굳이 그런 것이 없어도 이들 명소를 찾는 발길은 여전하다. 고위 위정자 밥버러지들이 그저
개발과 돈, 치적 쌓기에만 급급해 안그래도 좁은 강토를 자꾸 바람직하지 않게 건드리니 실로 
씁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개발의 칼질과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시랑리를 지나니 어느덧 용궁사입구
에 이르렀다. 여기서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다가 이곳
까지 온 거 잠깐 들리기로 했다.
용궁사는 2000년과 2014년에 가본 기억이 있는데, 오랜만에 발을 들인 바닷가 사찰, 용궁사는
관람객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경내 곳곳에 불전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돈을 요구하고
있고 바닷가든 대웅전(大雄殿) 앞이든 사람들이 징그럽게 많아서 거의 사람들 뒷통수만 본 것
같다. 이곳은 딱히 정도 들지 않고 사진에 담고 싶은 생각도 없어 대충 1바퀴 살피고 나왔다.

용궁사를 나오니 시간은 18시, 송정까지 마저 행군할까 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걷는 것은 여기
서 쿨하게 접고 부산시내버스 181번(기장 청강리↔센텀시티)에 고된 몸을 싣고 시내로 나왔다.

이날 죽성리에서 용궁사까지 걸은 거리는 거의 40리 정도, 우스개 소리로 거의 몇 달 걸을 분
량을 그날 하루에 다 걸었고, 바다도 정말 지겹게 두 눈에 넣어서 당분간 바다를 안봐도 섭섭
하지 않을 듯 싶다.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판을 벌인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는 재생이 불가능한 아련한 과거의
일부로 산산히 흩어지고 말았다. 역시나 사람의 인생은 무상(無常)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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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기장 죽성리 일대) '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와 동해바다
(정면에 큰 나무가 죽성리해송)

▲  죽성리왜성

▲  죽성리 월전포구


 

 

지루했던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전히 천하를 접수했던 4월의 한복판에 겨울로부터 해방된
기분도 만끽할 겸, 그리운 얼굴도 보고자 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은 이 땅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로 북쪽은 울산 울주군(蔚
州郡), 서쪽은 경남 창원과 김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너른 동해바다를 품고 있
으며,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는 큰 지역이다.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잠시 대구에서 발길을 멈추고 팔공산(八公山)에 안긴 파계사(把溪
寺)와 성전암(聖殿庵)을 둘러보며 산사(山寺)의 봄 풍경을 즐겼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런 다음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에 있는 친
한 형님 집에 문을 두드렸다.

저녁을 먹고자 광안리 해변 인근을 거닐다가 소금구이 닭갈비집이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를 피고 닭갈비에 소주를 여러 잔 걸치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물론 1차로 끝나면 섭하
지. 하여 집으로 돌아와 2차를 하며 다음날 나들이 장소를 모의하다가 새벽 1시에 꿈나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부시시 잠에서 깨니 벌써 9시였다. 그
날 일정은 다소 길기 때문에 잠에서 벗어나기 싫은 게으른 몸을 억지로 끌며 세수를 하고
10시에 광안동을 나섰다. 광안역 정류장에 이르니 그의 후배 하나가 합류하여 3명이서 기
장군(機張郡) 동해바다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동)을 타고 수영로터리, 해운대, 송정역
, 청강리를 지나 기장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기장지구대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건너편 정
류장에서 죽성리로 가는 기장군 마을버스 6번을 기다리니 5분도 안되어 버스가 나타나 활
짝 입을 벌린다.
주말 나들이 수요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바퀴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석을 이루었다. 우리는
재빨리 탑승하여 앉아갈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입석 신세를 면치 못할 뻔했다. 비
록 죽성리까지 10분 정도 거리에 불과하지만 서서 가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힘든 것은 마
찬가지이다.
버스는 시간이 되자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몸을 움직였다. 죽성사거리와 기장
군청 남쪽 고개, 신천리를 지나 죽성초교에서 두 발을 내리니 바로 남쪽 언덕에 우리의 1
번째 목적지인 죽성리 해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6그루가 합심하여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룬 오래된 소나무
죽성리해송(竹城里海松) - 부산 지방기념물 50호

▲  죽성리해송의 위엄

죽성리 두호마을 서쪽에는 얕으막한 언덕이 푸른 초원처럼 누워있다. 대부분 경작지가 이루어
진 그 언덕 정상에는 유난히도 초록 빛을 발하는 장대한 소나무가 동대해(東大海)를 굽어보고
있으니 그 나무가 바로 이곳의 오랜 명물인 죽성리 해송이다.

죽성리 해송은 소나무의 일종인 곰솔로 줄기 껍질이 다른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
이라 불리기도 하며, 바닷가 소나무란 뜻의 해송(海松)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곰솔은 남쪽
바닷가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데 소금기가 서린 짠 바닷바람에도 잘 견딘다.
이 나무는 겉으로 보면 1그루로 보이지만 6그루의 나무가 한 지붕을 이룬 것으로 높이 약 10m,
나무 지름이 30~40m에 달한다. 나이는 250~300년 정도로 여겨지며 언덕에 있는 경작지를 바닷
바람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곰솔 가족은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
며 서로를 보듬고 있으며, 거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어 안내문을 살피지 않으면 정말 1
그루의 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나무의 키가 훤칠하게 크고 덩치도 제법 있으며, 반경 0.5리 이내에는 키 큰 나무도 거의 없어
세상 중심에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웅장함을 진하게 풍긴다. 그리고 나무의 자태도 아름답고 바
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정상에 자리해 있어 사진쟁이와 그림쟁이들이 많이 찾는다.

해송의 그늘로 들어서면 나무들 사이로 조그만 당집인 국수당이 끼여있다. 나무가 제법 풍채를
드러내며 자라나자 마을 사람들이 나무 사이에 당집을 만들어 마을 성황신을 모시는 국수당으
로 삼았는데,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제물을 푸짐하게 차리고 풍어제(風魚祭)를 지낸다. 이 땅
의 어느 마을이든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당집이 있지만 나무 사이에 당집을 둔 경우는 별로
없다.

* 죽성리해송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49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 두호마을과 동대해

▲  해송 밑에 둥지를 틀어 마을을 지키는 국수당(성황당)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국수당은 풍어제 등 당제(堂祭) 외에는 굳게 닫혀져 있다.
나무 밑도리 사이에 당집이 깃든 흔치 않은 곳으로 당집 좌우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내부를 보호한다.

▲  솔잎과 솔방울, 거기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까지 듬뿍 더해져 가지가
거의 땅으로 내려 앉았다. <철기둥을 세워 가지가 땅에 완전히
주저앉지 않도록 막고 있음>

▲  죽성리해송 인근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기장 미역
기장은 미역이 유명하다. 이렇게 해송 인근에 널어두었으니 해송의 기운도
양념으로 듬뿍 더해져 더욱 최상품으로 끌어올려줄 것이다.


 

  죽성리에서 만난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 부산 지방기념물 48호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왜성 (산꼭대기에 보이는 성)

죽성리해송에서 서쪽(바다와 반대쪽)을 보면 높다란 언덕 위로 성곽 하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까
이에 보일 것이다. 그 성곽이 바로 임진왜란이 이곳에 남긴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이다.

해송에서 정겨운 시골길을 5분 정도 가면 왜성을 품은 언덕 밑에 이른다. 이곳에는 주차장, 해
우소가 있는데, 여기서 성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타고 2~3분 오르면 왜성의 아랫도리에 이
른다. 계단은 답사 편의를 위해 기장군에서 닦은 것으로 계단 옆에 흙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
니 개인 취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왜성 아랫도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왜성의 중심부이고, 중심부 서남쪽에 왜성 꼭대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왜성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천수대(天守臺)터가 있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
성(大阪城)에 있는 푸른 지붕을 지닌 큰 기와집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죽성리왜성은 1593년 봄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왜군과 지역 주민을 동원해 쌓은 순수
100%의 왜성(倭城)이다. 한참 북진을 하며 세를 과시하던 왜군은 1593년에 접어들어 조선의 대
대적인 토벌 작전과 왜열도에서는 맛보기 힘든 강추위로 고전하면서 순식간에 울산과 기장, 부
산, 창원 등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밀려나기 싫었던 왜군은 바다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과 언덕에 성을 쌓고 자기 집 마냥
들어앉아 장기전을 준비했다. 그들이 해안가 언덕을 선호한 것은 수비력 강화와 서로 간의 긴
밀한 연락 및 병력/군수물자 수송 편의, 그리고 위급시 신속히 줄행랑을 치고자 함이다.

이 왜성은 죽성리 뒤쪽 언덕에 자리해 있는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과 부산왜성 중간에 자
리해 서로를 연결하였다. 성 둘레는 약 960m, 성벽 높이 4m로 3단으로 축성되었으며, 성내(城
內) 면적은 11,776평 정도로 왜성 가운데 큰 편에 속한다. 장방형(長方形)의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은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진 이른바 들여쌓기 공법이다. 이 공법은 천하
제일의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했던 고구려(高句麗)의 축성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왜열도에서는 기장성(機張城)이라 부른다. 지금도
왜열도에서 많이 답사를 온다고 하는데, 1598년 왜군이 도망친 이후 성이 버려지면서 천수대와
성문, 주요 시설이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
다. 허나 성곽은 쓸데없이 잘 남아있어 왜성 가운데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때 사적 52호의 외람되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으나 1997년 사적에서 정리되어 버려졌다가 부
산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수습해 죽성리해송, 죽성성당, 죽성리 해변과 한 덩어리로 묶어 기장군
의 주요 명소로 키우고 있다.

왜성 주변은 상당수 경작지로 쓰이고 있으며, 왜성 북쪽과 계단이 있는 남쪽에는 소나무가 조
금 우거져 마치 양쪽에만 머리숱이 조금 있는 대머리를 보는 듯 하다.


▲  죽성리왜성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계단 주변은 유난히 소나무가 무성하여 이 땅을 요란하게 거치고 간 아픈 과거를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 하다. 그런다고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  풀이 잔잔히 돋아난 죽성리왜성의 아랫부분

▲  약간 비스듬히 누운 죽성리왜성의 본성(本城)

▲  왜성 외곽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던 성문터
왜성은 작은 산이나 언덕에 짧게 몇 겹으로 두룬 덩어리 같은 형태라 딱히
긴 성이 없다. 그나마 서생포왜성이 좀 긴 편에 속한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항과 두호마을
저 포구에 배를 정박해 주변 왜성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고 끝내는 저곳을 통해 줄행랑까지 쳤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
평화로운 어촌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와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하다.
바닷가에 죽성리 두호마을과 월전마을(사진 오른쪽)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과 포구 주변에는 경작지가 많아 나무가 별로 없다.

▲  왜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애타게 열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  왜성의 중심인 본환(本丸, 본성)

▲  연병장처럼 넓은 본환 - 잡초가 잔잔히 녹색 물결을 이룬다.

▲  죽성리왜성 서쪽에 길게 누운 봉대산(烽臺山) 북쪽 자락

죽성리왜성은 계곡이 없는 낮은 언덕에 자리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 왜성 서쪽에 있는
봉대산에서 식수를 운반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후방이라 물 수송에
는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봉대산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음>

▲  본환의 서북쪽 성곽

▲  북쪽에서 바라본 본환 내부


▲  죽성리왜성의 꼭대기인 천수대(天守臺)터

왜성 정상부에 자리한 천수대는 왜장이 자고, 먹고, 부하들을 지휘하던 공간으로 사방이 확 트
여 조망(眺望)도 일품이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성이나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축소판
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했을 천수대의 모습이
자못 대단했을 것이며, 조선군의 공격 가능성이 적은 후방이라 왜장은 무척 편하게 지냈을 것
이다. (조선군이 서생포왜성을 점령해야 이곳을 마음 편히 공격할 수 있었음)

※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① 부산시내에서 기장읍까지
* 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81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1번
  은 해동용궁사, 대변으로 다소 돌아감)
* 지하철 2호선 장산역(5/7번 출구 사이)에서 182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30~40
  분 간격)
* 지하철 4호선 안평역(4번 출구)에서 36, 183, 188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3,
  188번을 탔을 경우 기장중학교, 기장성당에서 내려도 됨)
* 부산대병원(1호선 토성역 9번 출구), 남포동, 부산역, 경성대 부경대역(1번 출구)에서 1003
  번 급행좌석버스를 타고 기장성당이나 기장지구대 하차
* 동해선 전철(부전↔일광)이나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기장역에서 하차, 1번 출구
  를 나와서 4분 정도 걸으면 기장중학교 정류장이다.
② 기장에서 죽성리까지
* 기장지구대, 기장중교(기장역 1번 출구), 기장성당에서 기장군 마을버스 6번(20~40분 간격)을
  타고 죽성초교 하차, 해송까지는 도보 5~6분, 왜성은 10분 정도 소요 / 황학대는 두호마을에
  서 내리면 되며, 월전마을은 월전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③ 승용차
* 부산시내(반송/해운대) → 죽성4거리에서 죽성리 방면 죽성로로 진입 → 죽성초교 → 죽성리
  해송, 죽성리왜성, 죽성성당 (왜성 밑에 주차장 있음 / 해송은 인근 길가에 주차)

* 죽성리왜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일원


 

  죽성리 바닷가 둘러보기 (황학대, 죽성성당)

▲  죽성항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황학대)

▲  죽성리의 오랜 경승지, 황학대(黃鶴臺)

씁쓸한 화석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죽성리왜성을 둘러보고 죽성항(죽성포구)으로 나왔다. 죽성
리는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어촌이지만 볼거리와 해산 먹거리가 풍성하
여 생각 외로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든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죽성리해송과 왜성이 있고, 바
닷가에는 황학대와 드라마 촬영지였던 죽성성당이 있으며 마을 남쪽에는 월전마을이 있다. 먹
거리는 죽성리 북부인 두호보다는 남부인 월전이 더 많은데, 이곳은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죽성항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조촐한 바위 동산이 포구의 운치를 조금 돋구고 있다. 이 동산은
기장의 오랜 명승지인 황학대로 예전에는 거의 섬이었으나 방파제와 항만 시설이 닦이면서 육
지로 흡수되었다.


▲  황학대의 동남쪽 부분

황학대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야 워
낙 유명한 인물이니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가 여기서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1616년(광해군 8년)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북인(北人) 일파의 죄상을 밝히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린 것이 원인이 되어 서울에서 2,000리 이상 떨어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떨려
났다. 그러다가 1년 뒤, 거기서 3,000리 이상 떨어진 기장 죽성리로 이송되어 7년이나 유배생
활을 했다. 귀양살이 때문에 조선 땅을 남북으로 완전 종주를 했던 것이다. 토가 나올 정도로
그 먼거리를 강제로 이동하느라 고산도 무척 진을 뺐을 것이다.

윤선도는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松島)를 옛날 신선이 황학(黃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황학루(黃鶴樓)와 견주어 황학대로 멋대로 이름을 갈고 매
일같이 찾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
그는 여기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의 주옥 같은 시 6개를 남겼으며, 죽성리 뒷산
인 봉대산에 자주 올라가 약초를 캐어 병에 걸린 지역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거나 치료를 해
주니 죽성 사람들은 그를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던 윤선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20세기 후반에 방파제와 항만 공사로 백사장 또
한 이슬처럼 사라졌으며, 강제로 연륙되어 육지의 일부가 되버리면서 옛 운치도 다소 녹아내렸
다. 게다가 이곳을 덮고 있는 소나무도 1995년 수해로 뿌리가 뽑히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로
도 계속 나무들이 말라가면서 황학대는 그야말로 세월의 무덤 같은 곳이 되버렸다.
다행히 기장군청에서 1,000만원의 돈을 들여 황학대를 살피면서 나무들이 다시 살아났고 웃음
을 잃었던 황학대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이곳의 풍경을 크게 수식해주는 꿀단지가 되었다.


▲  황학대의 정상 부분
윤선도 뿐 아니라 지역 선비들과 동네 사람들이 술 1잔의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두호마을 당집
바다에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굳게 닫힌 문짝에 3색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다.

▲  죽성항의 평화로운 풍경
바깥 세상은 아비규환처럼 숨가쁘게 흘러가건만 이곳은 모든 게 정지된 듯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죽성리왜성이 활용되던 임진~정유란 시절에는
왜군들의 배로 득실거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  바닷가에 자리한 죽성성당

두호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서양 동화에나 나올법한 작은 성당(聖堂)이 있다. 이 성당은 2009년
에 방영된 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장으로 콩 볶듯이 지어진 것으로 겉모습만 성당이다.
아담하게 생긴 성당과 주변의 해안 풍경이 아름다워 죽성리의 새로운 명소로 추앙받고 있으며,
처음에는 죽성성당이라 불리다가 드라마 이름을 따서 '드림성당'으로 바꾼 것을 다시 죽성성당
으로 갈았다. 지어진지 10년도 되지 않았건만 건물이 벌써부터 노화현상을 보여 2017년 2월 새
로 지었는데, 이때 지역 사람들이 종교적인 부분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여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싹 치워버렸다. 그래서 정체가 더 아리송한 성당 아닌 성당이 되어버렸다.

▲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하얀 피부의
성모마리아상 (지금은 없음)

▲  옆에서 바라본 죽성성당
성당 바로 옆에 등대가 붙어있다.


▲  죽성성당 주변 바닷가에 드러누운 울퉁불퉁 바위들

▲  죽성리의 어느 장어구이집에서 먹은 장어구이

죽성리 일대를 정신없이 누비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아침도 먹지 못한 터라 뱃속은 그야말
로 폭동 직전, 하여 불만에 잠긴 뱃속을 달래고자 점심 장소를 물색하다가 월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두호마을은 회와 조개, 장어구이를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지만 장어구이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월전마을에 밀려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반해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월전마을의 많
은 식당들은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주차장이 바라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황제처럼 먹을 요량으로 남정네에게 무척
이나 좋다는 장어구이와 모듬조개구이를 주문했다. 이렇게 장어와 조개구이를 먹으니 곡차 1잔
을 겯드려야 되겠지. 그래서 동동주도 넉넉히 시켰다.


▲  모듬조개구이의 위엄

자신을 불태우는 숯불 위에 먼저 장어를 올려 모락모락 익혀 입에 넣는다. 장어는 맛이 좀 별
로였으나 장어 후속으로 구운 모듬조개구이는 맛깔스러웠다. 큰 조개 안에 조개살을 비롯해 파
와 마늘 등이 버무려져 하나의 작품처럼 나왔는데,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우니 거기서 나오
는 육수(조개의 눈물)가 제법 끝내줬다. 그래서 서로 조개를 더 챙기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밑반찬은 김치와 도토리묵, 상추, 산채나물 등 대략 8가지 정도가 펼쳐졌다. 밑반찬도 그런데
로 맛이 괜찮아 밥도둑이 따로 없었으며, 금세 동이 나고 더 달라고 한 것이 가히 5번은 넘을
듯 싶다. 동동주도 금세 1동이를 비워 하나를 더 불렀는데 배가 불러 간신히 2번째 동이를 비
웠고, 메밀막국수로 식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어대니 폭동 직전이던 뱃속은 며칠을 굶어도 끄떡 없을 정도로 가득 찼고, 식
곤증의 일환으로 졸음이 슬쩍 마수를 부리자 후식 커피로 그들을 쫓아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일행들은 송정(松亭)까지 걸어가자고 했으나 여기서 거기까지는 20리가 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  남쪽에서 본 월전마을 (월전포구, 월전방파제)

죽성리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월전마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시
내버스나 마을버스는 일체 없으며, 1.5~2차선 정도의 길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어진
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大
邊)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민가(民家)가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월전, 죽성으로 외식을 가거나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3분이 멀다하고 지나
갔고 대변에서 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도 종종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
가 있는 곳을 빼고는 어디든 자유롭게 바다 곁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내용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언젠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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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산을 거닐다 ~~~ 배산 (배산성터, 진달래밭)



' 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동산, 배산 '

부산 배산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이자 우리나라 2번째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부산(釜山) 도심 한복
판에 배산(盃山, 254m)이란 조그만 산이 솟아있다.
이 산은 연제구 연산동과 수영구 망미동(望美洞)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남쪽으로 금련산
(金蓮山)과 바짝 이어져 있다. 허나 그 사이로 연산로와 주택가가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
들의 각별한 사이를 끊어버려 졸지에 시가지에 포위된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하긴 배산
뿐이겠는가?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는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섬이 되어버린 가련한 작
은 산들이 적지 않다.

산의 모양이 마치 술잔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라 하여 배산이라 불리며, 254m의 높이로
대도시 도심 속에 박힌 뫼치고는 제법 높아 보인다. 허나 부산은 백양산(白羊山)과 승학
산, 시약산, 황령산 등 400~600m급 산들이 도심 속에 무수히 포진해 있어 254m 정도로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서울에 서식하고 있는 내가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배산을 주목한 것은 이미 오래전에
일이다. 배산 서북쪽 자락에 연산동고분군(連山洞古墳群)을 2006년에 간 적이 있기 때문
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새까맣게 잊고 살다가 다시금 배산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여 인
연을 엿보다가 봄이 한참 기지개를 켜던 4월, 광안동에 사는 선배와 해운대(海雲臺), 송
정(松亭) 20리 해안산책(☞ 관련글 보러가기)을 즐기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배산을 찾았
다.

송정에서 부산시내버스 141번(송정↔당감동)을 타고 배산역(3호선)에서 하차하여 무작정
배산이 보이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워낙 인지도가 낮은 동네 뒷산이라 이정표가 거의 없
어 여러 골목을 들쑤신 끝에 드디어 연산병원 부근에서 산길을 찾아 배산의 품으로 들어
섰다.

배산에는 무척이나 오래된 배산성(盃山城, 부산 지방기념물 4호)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 초반에 동래(東萊) 지역에 둥지를 튼 거칠산국(居漆山國) 때 축성된 것으
로 여겨져 그 나라의 조촐한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칠산국은 1세기 후반까지 숨을 쉬다가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얼마 뒤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이 접수하여 가야(伽倻)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 가
락국 제왕(帝王)이 보낸 관리나 지역 세력이 배산에 머물며 이곳을 다스리다가 법흥왕(
法興王) 시절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배산 서북쪽 자락에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인 연산동고분군(부산 지방기념물 2호)
이 있는데 이들은 배산성을 토대로 이 지역을 다스렸던 지배층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배산성은 산 정상을 둘러싸고 만든 테뫼식으로 산 허리 부분과 정상에 축성되었으며, 쌍
가락지 모양의
2중성으로 흙으로 다져진 토성(土城)이었다. 허나 신라 중기 이후 버려지
면서 억겁의 세월과 대자연의 집요한 괴롭힘으로 웅장했을 토성은 쏴르르 녹아내리고 토
성 기초 부분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산 일대에서 가야~신
라시대 그릇 조각과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옛날 이곳의 상황을
희미하게 전해준다.

배산에는 이렇게 배산성터와 연산동고분군 외에 거칠산국 사람들이 썼다고 전하는 우물
터가 있다. 이 우물터는 근래에 정비되었으나 우리는 아쉽게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해 가
지 못했다.
그 외에 겸호대
(謙戶臺)란 명소가 있었는데 김겸호란 선인(仙人)이 노닐었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라 전하며, 고려 말에 정추(鄭樞, 1333~1382)가 동래현령(東萊縣令)을 지냈을
때 그곳에서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위치가 막연히 배산 위라고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하지만 그가 지었다는 겸호대 시는 우리 곁에 잘 살아
남아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謙孝濯濯似蓮花
胸呑八荒氣凌霞
回首肯羨萬戶邑
翩翩來徒神仙家

겸효의 밝은 빛은 연화를 닮고
가슴으로 품은 기품 속세를 떠났구나
고개를 돌리니 만호읍이 바로 거긴데
휘적휘적 신선가를 오간다

지금은 주거지가 되버린 배산 동북쪽 밑 부산광역시립 연산도서관 자리에는 거울바위가
있었다. 바위의 이름 그대로 아마도 거울처럼 생긴 모양이다. 옛날에 어느 문둥병 환자
가 거울바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여 그 바위를 내리쳤다고 하며, 어느 여인을
사모하던 남자가 그 바위에 비친 자신의 못생긴 얼굴에 발작하여 돌로 쳐서 깨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바위는 흔적도 없이 한 토막 전설이 되어버렸다.


 

♠  배산 둘러보기

▲  배산으로 올라가는 길 (배산 정상 아래쪽)

배산의 경사는 정상 주변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르지만 그 외에는 완만하다. 지금은 시민
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산책을 즐기는 평등한 공간이 되었지만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수염
태워먹던 시절에는 거칠산국의 지배층이 머물던 중심지였고, 신라나 가야의 일원으로 있던 시
절에는 지방 세력이나 관리, 군인들이 철통같이 머물던 차별된 공간이었다.
허나 배산의 존재의 이유가 하락함에 따라 평범한 뒷동산으로 버려지게 되었고 그렇게 세월의
저편으로 묻혀지게 되었다. 게다가 부근의 황령산, 금정산, 장산 등 쟁쟁한 산에 가려져 지역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동네 명소로 부산 내에서도 인지도가 미약하다.
그나마 2006년, 3호선 배
산역의 등장으로 배산의 존재감이 조금씩 부각되었을 뿐이다.

산은 작지만 시가지 한가운데에 봉긋 솟아있어 이곳에 오르면 수영구와 연제구, 동래구, 해운
대구, 부산진구 일대가 시야에 거침없이 박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야말로 조망(
眺望) 하나는 일품이다.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1)
수영구(水營區) 지역과 광안리, 해운대 앞바다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2)
배산 남쪽 봉우리와 금련산 사이에 비집고 들어선 연산3,6동과 망미1동 지역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3) 연산2,4,6동과 부산진구 지역

▲  배산 동쪽 바위 봉우리
저 바위 봉우리 밑에 오래된 우물터가 있다.

▲  배산의 정상(254.9m)
이곳은 배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현장이다. 거칠산국과 신라, 가야 시절에는
지역 지배층들이 제사나 주요 의식을 지냈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봉우리
주변으로 배산성터 흔적이 얇게 남아있으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연산병원에서 여기까지는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렸다.

▲  정상 부근에 솟아난 돌탑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애듯한 현장으로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쌓은
다양한 돌들이 차곡차곡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연제구와 동래구 일대
자라의 목처럼 삐죽 나온 북쪽 산자락 끝에 연산동고분군이 안겨져 있다.
저곳까지 배산의 영역이며, 연제구와 동래구 시가지 너머로 부산의
영원한 진산(鎭山), 금정산(金井山)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동래구와 해운대구 서부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연산동 동부와 해운대구 서부
반여동과 재송동 너머로 부산 동부의 으뜸 산, 장산(萇山, 634m)이 바라보인다.


▲  순백의 미학(美學)을 지닌 벚꽃으로 하얗게 타오르고 있는 배산 봉우리
(봉우리 꼭대기가 배산 정상)

▲  진달래로 가득한 연산4동으로 내려가는 길

배산 서쪽 자락에는 분홍 피부를 지닌 진달래꽃이 가득 피어있다. 이곳은 부산 진달래꽃의 성
지(聖地)로 아무렇게나 생긴 바위들도 많이 포진해 있어 고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도심 한
복판에서 이런 풍경을 만나기도 힘든 터라 갑자기 먼 지방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매년 4월만 되면 배산 일대에 진달래가 연분홍 향연을 펼쳐보이지만 아직까지 그들을 주인공으
로 하는 지역 축제나 행사는 없는 모양이다. 연제구청에서 한번 추진해보면 좋을 듯 싶은데 말
이다.


▲  배산 서쪽 자락 소나무숲과 하얀 바위들

우리는 배산 정상에서 서쪽 능선을 거쳐 연산동고분군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허나 통제되는 길
이 여럿 있었고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엉뚱하게도 연산4동 혜원정사 쪽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혜원정사는 배산 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절로 법등(法燈)의 역사는 짧다. 그 주변으로 천지암과
감천사 등의 조그만 절들이 들어서 있는데, 분위기가 산골에 들어온 듯 꽤 시골스럽다.
혜원정사를 지나면 연산4동 주택가가 펼쳐지며, 10분을 내려가니 연일시장이 나온다. 연산동고
분군은 이미 옛날에 인연을 지은 터라 딱히 미련은 없어 바로 광안동으로 복귀하여 그날의 나
들이를 마무리 하였다.

배산이 더 이상 개발의 칼질에 다치지 않고 지금 모습 그대로 부산 사람들 곁에 있어주길 고대
하며 보잘것 없는 본글을 마친다. ~~


※ 배산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 배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럿 있으나 여기서는 연산4동 혜원정사와 연산6동 연산병원 코스만
  소개한다.
* 지하철 3호선 배산역 6번 출구를 나와서 1분 정도 가면 부산은행 연미지점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연수로213길)로 들어서 3~4분 쭉 들어가면 남양아파트로 아파트 입구에서 왼
  쪽으로 빠지면 바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배산북로)로 3분 오르면 연산병원
  입구로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미주택 뒷쪽으로 산길이 있다.
* 지하철 1,3호선 연산동역 8번 출구를 나와서 9분 정도 가면 연산터널 바로 직전에 혜원정사
  와 연산동고분군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 지시에 따라 오른쪽 골목길(고분로68번길)로
  들어서면 고분군으로 오르는 산길과 혜원정사로 이어진다. (연산동고분군은 연산터널 윗쪽
  에 있음)
* 배산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 38-6번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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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성지 순례]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트래킹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산책 '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해운대해수욕장

▲  해운대해수욕장

▲  문텐로드 오솔길

▲  송정해수욕장


 


반년 가까이나 천하의 절반을 지배하던 겨울 제국(帝國)이 완전 저물고 봄이 하늘 아래 세

상을 말끔히 해방시킨 4월 첫 무렵 주말에 따뜻한 남쪽,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의 오랜 단골집인 광안동(廣安洞)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인근 고깃집에서 삼겹
살에 곡차(穀茶, 술)를 들이키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를
마시고 자정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오전, 찬란한 여명과 선배의 재촉에 졸린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해는 이미 중천에
올라 천하를 비춘다. 아직까지는 초봄이지만 따스한 남쪽이라 한낮에는 다소 더울 듯 싶어
반팔 옷을 지원받아 착용하고 그 위에 긴 옷을 걸쳤다. 역시나 시작부터 덥기 시작하여 광
안동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반팔로 다녔다. 이렇게 나갈 채비를 하고 11시 정도 집을 나
섰다.

그날 일정은 동백섬에서 시작하여 해운대해수욕장, 달맞이고개, 청사포, 구덕포를 경유 송
정까지 해안을 따라 거닐며 봄꽃 구경까지 겸한 10여 리의 해안 산책으로 광안역에서 부산
시내버스 40번(청강리공영차고지↔구덕운동장)을 타고 해운대 직전인 운촌에서 내렸다. 바
로 여기서부터 대장정의 해안 산책이 시작된다.


▲  해운대 대우마리나아파트 벚꽃길 ▼

운촌 서쪽 부근에 대우마리나아파트가 있다. 그 아파트 주변 도로에 벚꽃이 장관을 이루며
길다란 벚꽃길을 이루고 있는데,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겨울 눈이 봄의 눈치를 받은 탓일까
? 그대로 벚꽃으로 변한 듯하다. 대자연이 빚은 순백(純白)의 아름다움 앞에 우리가 할 일
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찍기 밖에는 없다. 잔잔히 스치는 바람에 벚꽃잎은 비처럼 우
수수 흩날리며 대지를 적시고,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수 차례씩 앗아간다. 이런 풍경
이 바로 조그만 선경(仙境)이 아니겠는가?


▲  순백의 종결자 - 벚꽃의 위엄
겨울 제국의 오랜 시련을 극복하고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피운 벚꽃들
허나 저들의 천하도 김옥균(金玉均)의 3일 천하만큼이나 짧으니
사람이든 꽃이든 인생이란 정말 무상한 것 같다.


♠  해운대의 꽃 ~ 동백(冬柏)섬 (동백공원)
부산 지방기념물 46호

▲  동백섬 산책로 (최치원 동상에서 해운대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

대우마리나아파트 동쪽 길을 가면 동백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남쪽으로 길을 건너 동백교란 다
리를 건너면 숲이 무성한 해운대의 꽃, 동백섬(동백공원)이 펼쳐진다.
해운대해수욕장 서남쪽에 자리한 동백섬은 그 이름 그대로 동백나무의 섬으로 원래는 해변 앞에
두둥실 뜬 조그만 섬이었다. 그러다가 수영강(水營江)과 장산(萇山)에서 흘러내린 흙과 모래가
억겁의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이면서 동백섬과 해변을 조금씩 이어주었고 끝내는 하나가 되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부가 되었다.

동백과 해송(海松)이 무성한 이곳은 신라가 망해가던 9세기 후반, 최치원(崔致遠)이 벼슬을 버
리고 천하를 방랑하던 중 이곳 풍경에 단단히 매료되어 동백섬 남쪽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머문 기념으로 누리마루 동쪽 해변에 '해운대(海雲臺)'란 바위글씨를 남겼는데, 해운대란
지명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하며, 해운(海雲)은 그의 수많은 호 중의 하나이다. <고운(孤雲)
이 대표적인 호임>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수많은 문인(文人)들이 해운대의 명성을 듣고 앞다투어 찾아와
시와 글, 그림을 남겼으며, 대한8경의 하나이자 부산 제일의 관광지로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
고 있다. 흔히 해운대하면 해운대해수욕장과 해운대역(2호선) 주변 번화가를 생각하기 쉽지만
해운대의 원조는 바로 동백섬이다.

동백섬을 이루는 야트막한 언덕은 운대산(雲臺山)이라 불리는데, 그 정상에는 최치원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조그만 최치원 유적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산책로와 누리마루는 사람들로 미어
터지지만 정상 주변은 그 1/10 정도로 인적이 적다. 이는 관광객 상당수가 바다만 생각하지 공
원을 이루는 산(언덕)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안 산책로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거미줄처럼 형성되어 있으므로 어디로 오르든 정상으로 통
하며, 해수욕장과 이어지는 동쪽 해변에는 인어공주상과 해운대 바위글씨가 있고, 남쪽 해변에
는 등대와 2005년 APEC 21개국 정상회의가 열렸던 세계적인 명소, '누리마루 APEC하우스'가 둥
지를 틀었다.

울창한 해송과 여인네의 입술처럼 붉은 동백, 그리고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천하 제일의 명승지
로 해운대의 얼굴이며,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았다면 누리마루를 포함한 동백섬 일대를 꼭 둘러보
기바란다. 동백섬 일대는 길게 잡아도 1~2시간 내외면 충분히 둘러본다.


▲  동백섬 서쪽 해변에서 희미하게 다가오는 광안대교(廣安大橋)

▲  동백섬 남쪽 산책로 (누리마루 입구)

▲  동백섬 남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천하 (멀리 보이는 산은 이기대)
아무리 천재화가라고 해도 결코 나오기 힘든 바다의 푸른 빛깔~~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만든 천연 물감만 할까?

▲  누리마루APEC하우스(누리마루)

동백섬 남쪽 해안에는 2005년 APEC 정상회의가 열렸던 특이한 모습의 건물, 누리마루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벗삼으며 자리해 있다. 해운대의 새로운 꿀단지로 크게 조명을 받은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누리마루 APEC 하우스'로 '누리'는 세계, 세상을 뜻하는 우리 말이며, '마루'는 정상,
꼭대기를 의미하는 우리 말이다. 그러니까 순수 우리말로 '세계의 우두머리들이 모이는 집'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누리마루는 부산시가 194억의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지은 것으로 2004년 9월에 공사를 시작
하여 2005년 9월 30일에 완공을 보았다. 건물 높이는 지상 3층의 24m, 연건평은 905평으로 그
모습은 우리나라 전통 정자(亭子)를 모델로 하였으며, 지붕은 동백섬의 아름다운 능선을 형상화
하였다. 건물을 받치는 12개의 기둥은 부산의 역동적인 모습을, 내부 장식은 우리나라의 전통문
화를 시각적으로 나타내었고, 대들보 형태로 만들어 단청을 입힌 로비 천장과 대청마루를 닮은
로비 바닥, 경주 석굴암(石窟庵)의 천정을 모방한 정상회의장, 그리고 구름 모양을 형상화한 오
찬장까지, 건물 곳곳에 이 땅의 전통 양식이 짙게 배어 있다.

2층에는 오찬장과 행사요원실, 간이주방, 홀 등이 있으며 3층에는 회의장, 정상대기실, 수행원
대기실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 바로 제3차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나라 우두머리와 수행원, 언론 기자들은 앞을 다투며 역대 정상회의장 가운
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평가했다.

APEC회의가 역사의 일부로 사라진 이후, 2006년 2월까지만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으나 해운대의
새로운 명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자 애초의 생각을 바꾸고 지금까지도 별일이 없는
이상은 계속 속세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 나에게도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라 간만에 들어가 보
려고 했으나 내 마음 같지 않던 선배의 거부권 행사로 그냥 통과하고 말았다.

★ 누리마루 관람정보 (2015년 7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입장은 17시까지, 매주 1째 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국제회의나 기타
  주요 행사가 있을 때는 관람 제한)
* 공개된 구역만 고분고분 다녀야 되며, 일반인 금지구역은 애써 들어가지 말 것.
* 입장료는 없으며, 내부 사진촬영은 자유이다. (단 약간의 제약이 있음)
* 1층에는 APEC 기념품점이 있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동백로 116)
* 누리마루 홈페이지는 위의 누리마루 사진을 클릭한다 (문의 ☎ 051-744-3140)


▲  동백섬 등대
해운대 주변을 지나는 배들을 위해 오늘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등대.
등대 주변 풍경이 너무 속시원하여 가슴이 확 트이고도 남음이 있다.

▲  해운대 바위글씨 - 부산 지방기념물 45호

동백섬 등대에서 동쪽(해운대해수욕장이 바라보이는 쪽) 아래 자갈밭으로 시선을 옮기면 '海雲
臺'란 글씨가 새겨진 울퉁불퉁한 피부의 바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이 바로 해운대의 지
명 유래가 된 현장으로 9세기 후반 최치원이 직접 새긴 것이라고 전한다. (해운은 그의 호)
허나 글씨의 건강 상태가 1,100년 묵은 것 치고는 너무 양호한 것 같고 최치원을 흠모하던 이들
이 절경이 좋은 곳에 그와 관련된 적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붙인 터라 별로 믿을 바는 되지 못한
다. 아마도 후대에 그를 기리던 누군가가 썼을 지도 모른다. 다만 고려 후기에 활약했던 정포(
鄭誧 1309~1345)의 시에
'대는 황폐하여 흔적이 없고, 오직 해운(海雲)의 이름만 남았구나'
라는 구절이 있어, 그 당시에
도 저 글씨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위글씨가 바닷가에 있어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괴롭힘을 받은 탓에 가운데 글씨인 '雲'
자가 조금은 닳았으나 나머지 글씨는 거의 양호하여 시력이 좋고 한자만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
리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관광특구 해운대 지역의 유일한 문화유적이건만 눈여겨 보는 이는 별로 없다. 한결같이 바닷가
경치와 누리마루에만 혼들이 빠져있을 뿐이다.


▲  동백섬 정상에 자리한 최치원 동상
동백섬을 이루는 운대산 정상에 최치원의 동상이 있다. 동상 좌우로 병풍처럼
늘어선 하얀 벽면에는 이은상(李殷相)과 김충현(金忠顯)이 직접 쓴 최치원의
시 10편이 새겨져 있으며, 동상 앞에는 넓게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해안 산책로와 달리 이곳은 인적이 적어 한적해서 좋다.

              ▲  최치원 유적비
그가 정녕 해운대의 전설처럼 이곳에 머물렀는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오로지 잠시 머물렀다
는 한토막 야사 하나만으로 유적비를 세우고 동
상을 세워 그의 유적지를 조성한 것이다.

▲  최치원 동상 동쪽에 자리한 2층 해운정
(海雲亭)
최치원의 후손과 그를 기리는 이들이
세운 정자로 별로 특별한 것은 없다.


▲  최치원 동상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책로
동백섬은 해안도 아름답지만 동백꽃 향기로 무성한 정상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단연
백미가 아닐까 싶다. 허나 아쉽게도 많은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해안산책로와
누리마루만 볼 뿐, 이렇게 아름다운 해운대의 속살을 지나치고 만다.

▲  최치원 동상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책로 (2)

※ 동백섬(동백공원)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동백역(1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누리마루와 최치원동상은 도보 20분)
* 부산 139, 307, 1003번(좌석) 시내버스를 타고 동백섬입구 하차, 도보 5~6분
* 동백섬 북쪽과 송림공원 주변에 주차장이 있다. 공짜 주차를 원한다면 동백섬 민영주차장 서
  남쪽에 자리한 무료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휴일에는 늘 미어터짐)

★ 동백섬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음, 주차비 징수 (공짜 주차장도 있음)
* 누리마루 주변 일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  대한8경의 한 곳이자 부산의 화려한 입술
해운대해수욕장(海雲臺海水浴場)

해운대해수욕장은 우리나라 해수욕장의 대명사이자 수백만의 피서객이 몰려오는 피서의 성지(聖
地) 및 국제적인 관광지이다. 예로부터 백사청송(白沙靑松)과 동백섬의 수려한 경관으로 대한8
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경승지인데, 신라 때부터 명성이 자자하여 해운대 온천에 신라 귀족들이 
놀러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9세기 후반에 최치원이 이곳 풍경에 퐁당퐁당 빠진 나머지 동백섬에
잠시 머물며 자신의 호 중 하나인 해운(海雲)을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곳 이름
이 해운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시인묵객들들이 해변이 닳도록 찾아와 해운대의 아름다움을 시와 노래로 표현했고, 20
세기에 들어와서 해수욕장과 온천, 동백섬을 중심으로 꾸준히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해마다 헤아
리기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국내외 관광객들로 시장통을 이루는 어엿한 세계적인 명소로 성장했
다. 우리나라의 주요 관광 특구로 부산에 처음 가본 사람이라면 필수로 들려야 되는 부산 초보
관광지의 하나이기도 하다.

해운대해변은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서 물놀이 하기에 좋으며, 여름에는 모래사장이
꺼지도록 피서객들이 몰려와 뉴스에 자주 회자되기도 한다. 피서철 휴일에는 최대 수십만 명이
백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봄/가을/겨울 주말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는다.

해안 길이는 1.6km로 부드러운 곡선의 해안을 따라 여러 호텔과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섰으며, 해
운대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아쿠아리움이 있다. 해변 서쪽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동백
섬과 해변의 경계를 짓고 있으며, 해변 동쪽에는 횟집이 즐비한 미포가 있고, 그 미포를 지나면
달맞이고개이다.

※ 해운대해수욕장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3,5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부산 139, 307, 1003번(좌석) 시내버스를 타고 해운대해수욕장 하차

★ 해운대해수욕장 관람정보

* 해수욕장 개장기간은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 주차공간 - 4,800대 정도 <주차 요금은 1시간에 3~4천원선>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문의 해운대관광안내소 ☎ 051-749-5700)
*
해운대해수욕장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해운대해변 서쪽 (동백섬을 온몸으로 가린 부산 웨스틴조선호텔)
바다는
잔잔한 물결로 백사장 모래를 어루만지며 서로의 정을 확인한다.

▲  백사장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흔적과 그들의 추억들이 서려있다.
잔디처럼 부드러운 바다와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선 백사장. 해와
달도 반하여 서로 다툰다는 해운대는 부산의 백미이다.


▲  백사장 뒤에 마련된 소나무 산책로
산책로의 길이는 인간의 부질없는 인생만큼이나 짧다.

▲  해수욕장에서 만난 어느 조각품
새가 퍼덕퍼덕 날개짓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해변 동쪽을 장악한 백구(白鷗, 갈매기)들 (비둘기도 약간 있음)
해변 서쪽과 중앙은 사람들로 봐글거리지만 미포와 이웃한 동쪽은 한산하다.
사람 대신 하얀 갈매기들이 해변을 장악하며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꾸린다.

▲  해운대해변 동쪽에 자리한 미포
해운대와 오륙도(五六島), 부산항 주변을 도는 관광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으로
횟집들이 갈매기 수만큼이나 즐비하다.

▲  열차도 발길을 끊은 미포 철길건널목

미포 철길건널목은 바다가 코앞에 보이는 시가지에 위치한 탓에 해운대의 명물로 꼽힌다. 드라
마와 영화의 단골 촬영지로 부근 주막들은 드라마/영화 광대들과 촬영 관계자들이 거쳐간 흔적
들이 요란하게 남아있고 식당들은 그것을 내세워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자 애를 쓴다.

이 건널목은 포항에서 부산을 잇는 동해남부선의 일부이나 2013년 12월 송정~해운대 구간 철로
가 직선화되면서 더 이상 열차가 지나가지 않는다. 그로 인해 해운대~미포~청사포~구덕포를 거
쳐 송정으로 이어지던 낭만의 해안 구간은 폐선되었다.
허나 이 구간은 역사 속으로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꽤 아까운 구간이니 요즘 철도 직선화와 비수
익 구간 등으로 버려진 철로를 레일바이크(Rail Bike)로 활용하거나 강릉과 삼척을 잇는 해안테
마열차를 운영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미포 건널목 왕년의 시절 이곳을 지나던 동대구발 부전행
새마을호 열차의 위엄
한때 새마을호는 고급, 쾌속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높은 가격에 비해
실속이 무척 떨어지는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  미포 건널목 부근 할매집원조복국집에서 먹은 복국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나들이와 답사에서 먹는 재미를 빠
뜨릴 수 없다. 마침 시간은 오후 1시, 시장기가 하늘을 찌르는 시간이다.
무엇을 먹을까 망설이다가 건널목 부근 복국집에 시선이 멈추면서 그곳에 들어갔다. 식당 내부
벽에는 건널목을 거쳐간 영화 광대들이 남긴 각가지 싸인들이 가히 벽지를 이룬다. 심심풀이로
그 싸인들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갖은 반찬과 밥, 복국이 차례대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콩나물
과 복어, 파 등이 일체를 이룬 복국 뚝배기를 뚝딱 비우니 해장을 한 듯 속이 개운하다. 이렇게
점심을 먹고 가득찬 배를 두드리며 달맞이고개로 이동했다.


♠  해운대의 눈썹, 달맞이고개와 해운대의 숨겨진 속살, 청사포

▲  달맞이고개 ▼

달맞이고개는 해운대 동쪽 해안가에 두툼히 솟은 언덕이다. 내륙 쪽은 완만하게 솟아있지만 해
안 쪽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급하며 그 해안의 끝에 동해남부선 철도가 간신히 자리를
비집고 지나다녔다.
바닷가에 둥지를 튼 언덕으로 절경이 아름답고 조망이 일품이며, 예로부터 이곳과 부근 청사포
에서 바라보는 저녁달이 운치가 있어서 달맞이고개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달빛 사냥
장소로 제격인 달맞이고개는 해운대가 부산시내의 일부가 되어 급속히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서 고개 자락에는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섰으며, 바다와 마주한 달맞이길 주변에는 미술
관과 갤러리, 찻집(까페), 주막들이 정신없이 뿌리를 내렸다.

해운대의 화려한 눈썹 같은 달맞이고개는 달맞이길이 중심이다. 봄에는 벚꽃놀이 장소로 사람들
을 끌어모으며, 수려한 경관으로 휴일에는 늘 사람과 수레들로 몸살을 앓는다. 달맞이길은 미포
5거리에서 송정에 이르는 고갯길로 부산의 주요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며, 4발 수레의 눈치를 받
기 싫다면 문텐로드(Moontan Road)라 불리는 오솔길도 아주 괜찮다. 어쩌면 오솔길이 달맞이길
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문텐로드는 달맞이길 남쪽 해안 언덕에 자리한 달맞이동산(해운대 달맞이공원)에 조성된 오솔길
로 앞서 누리마루처럼 우리말로 적당한 이름을 지어주어도 좋을 터인데 왜 굳이 영어로 지었는
지 관련 공무원들의 사상이 의심된다.


▲  문탠로드 코스 (해운대구청 홈페이지 참조)

문텐로드는 달빛나들목이나 달맞이길입구에서 들어가면 되며 달맞이어울마당과 바다전망대로 이
어진다. 물론 청사포로 넘어가도 된다. 해안 언덕에 자리해 있어 끊임없는 해조음을 감상할 수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여 동백섬, 암남공원 못지않은 경관을 우려낸다.

※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중동역 5,7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가면 미포5거리이다. 그 5거리를 남쪽으
  로 건너면 바로 달맞이고개(달맞이길)가 시작된다. 문텐로드는 달맞이동산 방면으로 조금 가
  다보면 오른쪽에 나온다.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00, 141, 2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미포 문
  텐로드입구' 하차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  달맞이길에서 바라본 천하
왼쪽으로 아련히 보이는 산은 이기대, 오른쪽에 진하게 보이는 곳은 동백섬과 해운대

▲  소나무가 무성한 문텐로드 오솔길
해조음을 먹고 자란 소나무들이 베푼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정신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  문텐로드 바다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물감이 흐드러진 동해바다가 달맞이 해변을 살포시 어루만진다.

▲  문텐로드 오솔길

▲  송림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청사포 방파제와 등대

▲  달맞이고개 밑을 지나는 동해남부선 -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청사포(靑沙浦) 마을의 봄

달맞이고개에서 해안 쪽으로 넘어가면 해운대의 숨겨진 속살, 청사포가 모습을 비춘다. 해운대
와 송정 사이 바닷가에 둥지를 튼 조그만 포구로 남쪽은 바다가 넝실거리고 나머지 3면은 산에
꽁꽁 둘러싸여 있다. 부산의 부도심인 해운대 지척에 있음에도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어촌에 발을 들인 듯 마을의 분위기는 평화롭고 한가롭기 그지 없으며, 도심 속의 한적한 어촌
이자 교통이 불편한 벽지로 부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포구의 이름인 청사포는 말 그대로 푸른 모래의 포구이다. 하지만 원래는 사(沙)가 아닌 뱀이나
용을 뜻하는 사(蛇)였다. 즉 푸른 뱀의 포구인 청사포(靑蛇浦)였던 것이다. 포구 이름의 대해서
는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를 빨던 머나먼 옛날, 갓 혼인을 한 남자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
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자 아내는 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곳(이곳을 망부송과 망부대라고
부름)에 올라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애타게 기다렸다. 그 여인의 정성에 감동을 받은 동
해 용왕(龍王)은 푸른 용을 급파하여 실종된 남편과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연유로 푸른
용을 뜻하는 청사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허나 시간이 흘러 마을 사람들은 동네 이름에 뱀을 뜻
하는 사(蛇)가 있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래서 은근슬쩍 사(沙)로 바꿨다는 것이다.

이곳은 동해와 남해 경계에 자리해 있어 예로부터 낚시터로 명성이 높았으며, 회와 조개구이를
파는 주막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조개구이가 유명하여 매스컴을 탄 조개구이 식당이 여럿 있다.
허나 맛은 거의 비슷비슷하니 무작정 유명한 집에만 목숨 걸고 줄 서지 않아도 된다. 또한 앞의
전설에서 여인이 남편을 기다리던 장소를 망부대(亡婦臺)라 부르며, 그곳에 있는 400년 묵은 소
나무를 망부송(亡婦松)이라 부른다. 이들은 청사포의 명소로 너무 바다와 조개구이에만 목숨걸
지 말고 꼭 둘러보길 권한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몰라 지나치고 말았음)
청사포 마을은 매년 풍어제(風魚祭)를 지내는데 무려 400년 이상이나 이어졌다. 그 풍어제는 해
운대 풍어제의 기원이 되었으며. 근래에 소소하게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이미 몇천 년 전
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속세에서 이곳을 찾아가려면 어지간해서는 달맞이고개를 넘어야 된다. 속세로 나가는 수레길은
고개 쪽으로 난 길(청사포로)이 전부라 휴일 저녁에는 외식을 즐기려는 수레들로 자주 막힌다.
그나마 근래 4차선으로 확장되어 다소 숨통이 트였다. 허나 사람은 수레보다는 출입이 자유로워
청사포로 외에도 문텐로드 산길이나 송정으로 넘어가는 가느다란 해안길을 이용해도 된다.

※ 청사포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해운대전화국(2호선 해운대역 1번 출구에서 도보 2분)이나 2호선 장산역(5번 출구)에서 청사
  포로 들어가는 해운대구 마을버스 2번 이용 (20~25분 간격)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  청사포를 동서로 가르는 옛 동해남부선
산 윗쪽에 건물이 빽빽히 우거진 달맞이고개(달맞이길)가 보인다.

▲  청사포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수평선 너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지구가 정말 둥글긴 둥근 모양이다.

▲  월척을 꿈꾸는 강태공 (청사포~구덕포 중간)


♠  해운대 동쪽에 자리한 송정해수욕장, 구덕포

▲  구덕포 해안

청사포 북쪽 끝에는 주차장을 갖춘 커다란 식당이 있다. 언뜻 보면 길이 끊어져 보여 '왔던 길
을 되돌아가야 되나?' 싶은 좌절감이 생길 수 있지만 주차장을 지나면 바닷가로 내려가는 가느
다란 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면 바로 송정까지 갈 수 있다.
길은 바다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철길 옆도 지나고 낭떠러지 부분도 제
법 있으므로 반드시 주의를 요한다. 이렇다 할 안전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길 중간중간에 바다
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바다를 원한다면 조심스레 내려가면 된다.

청사포에서 송정으로 가는 해안길은 아는 이가 적고 인적이 적어 한적하고 호젓한 해안 산책을
누릴 수 있다. 해변 바위에는 강태공들이 드문드문 진을 치며 월척을 위해 낚시대를 드리운다.


▲  구덕포(九德浦) 마을

청사포에서 해안 산책로를 15분 정도 가면 조그만 어촌마을, 구덕포가 모습을 비춘다. 송정해수
욕장 남쪽에 자리한 구덕포는 미포, 청사포와 더불어 해운대3포(浦)라 불리는데, 미역과 멸치,
조개가 많이 생산되며, 청사포와 마찬가지로 해산물을 다루는 횟집과 식당, 그리고 민박 등의
숙박업소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이곳으로 1박 여행이나 모임을 오는 부산 지역 학교나 단체,
동호회가 많다.
마을 남쪽과 동쪽은 바다로 막혔고, 서쪽은 산지가 가로막고 있어 오로지 북쪽만 외부로 뚫려있
다. 길도 송정으로 통하는 북쪽 길이 유일하다. 그래서 속세에서 이곳에 오려면 무조건 송정을
거쳐야 된다. 청사포는 그래도 마을까지 들어오는 마을버스라도 있지 구덕포는 그딴 것도 없다.
송정까지 와서 20분 정도 걸어야 된다.

구덕포는 옛날 함안조씨 일가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마을 서남쪽 산자락에 당
집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14일과 6월 14일에 용왕제(龍王祭) 거릿대장군제를 지낸다.


▲  구덕포 표석의 위엄

▲  송정해수욕장(松亭海水浴場)

해운대 동쪽에 자리한 송정해수욕장은 해운대와 달맞이고개(신곡산)를 사이에 두고 자리해 있다.
부산의 주요 해수욕장의 하나로 꼽히며 백사장 길이는 1.2km, 면적은 62,150㎡이다. 여름에는
수십 만의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피서의 성지로 수백 만이 모여드는 해운대보다는 조금은 한가하
며, 조개구이와 해산물을 취급하는 식당과 민박 등의 숙박시설이 가득하다.
해변 동쪽 끝에는 죽도산(竹島山)이라 불리는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언덕이 있는데 해발이 고작
24.2m이다. 산이라기 보다는 야트막한 언덕이 더 어울릴 것이다. 죽도산은 원래 해변 앞에 떠있
던 죽도(竹島)란 섬으로 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연륙되어 한반도의 일원이 되었다. 죽도산은 죽
도공원이라 불리기도 하며, 남쪽 해변에 송일정(松日亭)이란 있다. 특히 송정해변과 죽도공원에
서 지켜보는 일출과 월출은 가히 장관이다.

송정은 옛날에는 '갈개', '가을포(加乙浦)'라 불렸다. 지금은 없지만 바닷가에 갈대가 무성했다
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 고종 시절 이곳 출신으로 승지(承旨)에 올랐던 노영경이 자신이 바닷가
에서 태어났음을 감추고자 멋대로 송정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갈개 외에 '광어골'로
불리기도 했다.

※ 송정해수욕장(구덕포, 송정역)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38, 39, 63, 100, 100-1, 141, 181, 20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송정해수욕장입구 하차 (100, 181번은 송정해수욕장까지 들어감)
* 부산지하철 2호선 장산역 1번 출구에서 182번 시내버스, 10번 출구에서 38, 139, 1001번 시내
  버스 이용 (139번은 해운대역으로 다소 돌아감)
* 부전역과 태화강역, 경주역, 포항역, 동대구역에서 출발하는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송
  정역에 정차한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

 
▲  송정역(松亭驛) - 등록문화재 302호

송정해수욕장 북쪽에는 한때 동해남부선의 일원이던 송정역이 자리해 있다. 이 역은 1940년대에
동해남부선의 간이역으로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철제
창고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띄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2006
년 문화유산의 새로운 등급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때 동해남부선 열차가 모두 정차하던 역으로 피서의 꿈을 안고 찾아온 나그네들로 북적거렸지
만 2013년 12월 동해남부선 송정~해운대 구간이 직선화되면서 지금보다 더 북쪽에 새 송정역이
지어졌다. 그로 인해 열차는 모두 그곳으로 갔고, 역의 임무도 새 역이 전담하게 되었다. 기존
송정역은 그래서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한 신세가 되었는데, 아마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
다면 건물의 목숨 조차도 위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 없다.

송정역을 끝으로 해운대 동백섬에서 시작된 해운대~송정 해안 투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구
덕포와 문텐로드를 제외하면 예전에도 여러 번 발걸음을 했었고, 해운대 같은 경우는 정말 지겹
게도 찾았지만 이번처럼 깔끔하게 둘러본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적지 않은 거리를 걸었지만
푸른 바다와 언덕, 봄꽃, 숲길을 겯드린 풍경이 절대로 지루하지 않았기에 정말 짧은 거리를 걸
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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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7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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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지붕을 거닐다 ~ 금정산, 원효암 봄나들이 (범어사, 고당봉, 금샘, 산성막걸리)

 


' 부산 금정산(金井山)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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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산의 상징, 금샘


 

차디찬 겨울 제국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3월 첫 무렵에 부산(釜山)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금정산을 찾았다.
바로 전날 부산 광안동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穀茶)를 마시며 간
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졸린 눈을 비비며 그날의
목적지인 금정산 산행을 떠났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49번(노포역↔광안동)을 타고 금정산 기점의 하나인 범어사 입구
에서 내리니 시간은 벌써 정오를 가리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점심을 먹기로 하
고 부근 식당에서 콩나물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으로 뱃속을 위로하고 범어사입구 종점에서
등산객들로 미어터지는 부산시내버스 90번에 간신히 매달려 범어사 턱밑에 발을 내린다.

범어사(梵魚寺)는 부산을 대표하는 고찰(古刹)이자 경남권 3대 사찰의 하나로 지금까지 세
번 발걸음을 했다. 2002년 이후 정말 오랜만에 찾았지만 별로 땡기지 않아 그냥 항아리 겉
돌 듯 바로 통과해 버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원효암과 금정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범어사의 상징이자 천하에 널린 일주문(一柱門)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조계문(曹溪門, 보물 1461호)을 지나 왼쪽 산길로 진입, 북문 쪽으로 조금 가
다가 원효암으로 가는 산길로 진입했다. 여기서 원효암까지는 대략 1km이다.


▲  원효암으로 가는 산길


♠  금정산에 묻힌 도심 속의 산중암자 원효암(元曉庵)

▲  꾸밈 없는 소박함, 원효암 정문

해발 500m 고지에 자리한 원효암은 범어사의 부속암자로 금정산 동쪽 자락에 안긴 아담한 산중
암자이다. 삼삼하게 우거진 숲속에 숨은 듯 자리해 있어 바깥에서는 어지간해서는 보이지를 않
는다.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었다면 지나가는 새 조차도 이곳에 절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원효암은 절 이름 그대로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정산에서 미륵사(彌勒
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원효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부산 앞바다에 무려 5만 척의 왜군이 밀
려오자 도술을 부려 물리친 곳이라 한다. 허나 신라 왕실의 측근으로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교를 이끌었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바쁘게 살던 그가 과연 이곳까지 내려와 절을 지을 여유
가 있었는지 과연 궁금할 따름이다. 그가 세웠다는 일말의 증거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신라 중기에 활약했던 원효와 의상은 3살짜리 아이도 줄줄 욀 정도로 유명하여 신라 후기 이후
창건된 많은 절들이 앞다투어 그들을 이용했다. 그들이 창건했다는 식으로 그럴싸하게 창건 설
화를 꾸민 것이다. 어떤 절은 아예 그들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 원효사, 의상암(義湘庵)을 칭하
고 있으니 극락에 가있을 원효와 의상이 '엥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을 절을 지었나?' 놀랄지도 모
른다.

그러면 원효암은 언제 지어졌을까? 유감스럽게도 절과 관련된 역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경내 동쪽에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에 문을 연 것
으로 여겨진다. 즉 탑이 있으니 절이 있는 것이다. 원래 위치는 동편3층석탑 일대로 언제부터인
가 터만 남아오던 것을 조선 중/후기에 지금에 자리에 다시 지었으며, 1906년에 성월선사(聖月
禪師)가 1906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무량수각을 비롯하여 요사와 심검당 등 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
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와 목조관음보살, 아미타3존도(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41호)
를 비롯해 오래된 부도, 방광탑(放光塔) 등이 있다. 또한 1950년대에 우물에서 원효대사가 쓰던
것이라 전하는 옥돌의 도장이 발견되어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절의 땅을 구분짓고자 경내을 둘러싼 숲 주위로 촘촘히 철조망을 둘러 휴전선 철책 마냥 은근히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는데, 철조망 사이로 2~3개의 문을 내어 조촐하게 일주문으로 삼았으며,
이들 문은 범어사와 금정산성 북문으로 이어진다.


▲  원효암동편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호

하늘과 나무만 보이는 첩첩한 산주름 속의 암자로, 원효암을 가려면 철조망 정문을 거쳐야 된다.
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 내리막 길로 가면 운치가 깃들여진 전나무
숲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전나무 그늘에 오래된 3층석탑과 부도(浮屠) 3기가 뿌리를
내렸다.

3층석탑은 원효암 동쪽에 있어서 원효암동편3층석탑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원효암동3층석탑이라
불렸으며, 이는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이다.


동편3층석탑은 높이 약 1.9m로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원효암
은 원래 이곳에 있었는데, 이 탑을 통해 절이
적어도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귀뜀해주며,
원효암의 옛 금당(金堂)터를 알려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
을 세운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기단은 없고 바
닥돌 바로 위에 탑신이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는데, 2층과 3층은 돌의 재
질이나 비례로 보아 나중에 손질된 것으로 보인
다. 제법 두터워 보이는 옥개석(屋蓋石)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어 곡선의 미를 선사하
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세
월의 검은 때가 낀 것을 빼면 대체로 상태는 양
호하나 탑의 기본 요소인 기단이 없어 다소 어
색해 보인다. 기단이 있었다면 제법 볼만했을텐
데 말이다.


▲  석종형(石鐘形) 부도 3형제

3층석탑과 마주한 부도 3형제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모두 석종형 스타일이다. 위의 사진
을 기준으로 왼쪽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 받침 위에 방금 피어오른 연꽃 봉오리처럼 탑신이
얹혀져 있고, 오른쪽 부도는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  원효암의 백미, 전나무 숲길

원효암의 백미는 경내로 인도하는 전나무 숲길이 아닐까 싶다. 비록 잠깐의 짧은 거리이지만 전
나무가 늘씬한 몸매로 하늘을 가리며 늘어서 있어 동화 속의 풍경처럼 정겹기 그지없어 마치 순
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만큼이나 아름다운 절이 아닐까 싶은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  옛 사람들이 바위에 남겨놓은 바위글씨

▲  경내 직전에 펼쳐진 대나무 숲길

전나무 숲길은 절과 가까워지면서 녹음(綠陰)이 서린 대나무 숲길로 변화한다. 푸르름의 한복판
에 서 있으니 늦겨울은 정말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대나무들이 앞다투어 잎을 피우며 경내 앞
쪽을 가득 메우니 말이다. 바람이 스치는 대나무 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귀가 정화되며 마음
속에 가득한 번뇌도 잠시나마 와해되는 듯 하다.

     ◀  원효암 경내로 오르는 계단과 문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경내로 오르는 계단이 나
온다. 계단 끝에는 허름하게 생긴 기와문이 있
는데, 문 좌우에는 담장을 둘렀으며, 돌로 축대
를 쌓아 터를 다졌다. 바로 저 문을 들어서면
절간 같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숲속에 없는
듯 자리한 원효암 경내가 펼쳐진다.


▲  아늑하고 조용한 원효암 경내 (정면에 기와집이 법당인 무량수각)


▲  무량수각 툇마루와 단청이 곱게 입혀진
기둥과 천정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넓고 잔잔한 뜨락
이 펼쳐진다. 뜨락 너머에는 이곳의 법당(法堂)
인 무량수각(無量壽閣)이 뜨락을 굽어본다.
무량수각은 조선 중기 이후 원효암이 이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지은 건물로 여겨지며, 적어도
200년 이상 묵은 듯 고색의 때가 넘친다. 현판
에는 '無'가 '天' 비슷하게 쓰여있어 천량수각
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그는 엄연히 '無'이다.
'無'의 다른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나중에
법당 우측에 'ㄱ'자 모습의 건물을 붙이면서 지
금과 같은 독특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속은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우측과 좌측은 엄밀
히 다른 성격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좌측은 법
당이고 우측은 공양간 및 종무소로 쓰인다. 법
당에는 원효암 현판과 무량수각 현판이 걸려 있
으며, 특이하게도 툇마루를 가지고 있어 잠시
두다리를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퇴색한 마루에
는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움푹 들어간 부분도
있으나 아직은 튼튼하다. 기둥 윗부분과 천정에
는 환하게 단청이 칠해져 건물을 수식한다.

▲  다소 빛이 바랜 원효암 현판의 위엄

▲  글씨가 꿈틀거리는 듯한 무량수각 현판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무량수각은 허름해 보이는 외부와 달리 내부는 깔끔하여 오래된 티가 별로 풍기질 않는다. 불단
은 2개가 마련되어 있는데, 우측에는 목조관음보살이, 좌측에는 지장보살이 한 자리씩 차지해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건물 이름은 분명 아미타불의 거처인 무량수각인데 아미타불은 온데간
데 없고, 전혀 관련도 없는 이들이 대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  무량수각 좌측 불단에 자리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지장탱화
지장보살상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그 크기가 작아 유리막 안에 특별히 봉안했다.
지장보살의 뒤를 받쳐주는 지장탱화는 색채가 다소 바래 보여 적어도
100년 정도는 묵은 듯 싶다.

▲  원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6호

무량수각 우측 불단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18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범어사에 있는
여러 불상과 비슷하게 생겨 범어사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고, 입술에는 엷은 미소를 띄우며 중생을
맞는다. 볼살은 두텁고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듣고자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몸에는 두꺼
운 법의(法衣)를 걸치고 있고, 왼손은 다리 위에 대고 오른손은 아미타9품인과 비슷한 수인(手
印)을 취하고 있다.
부산 지역에 몇 안남은 17~18세기 보살상으로 한때 도난을 당하여 왜열도로 넘어갔다가 현몽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래서 영험이 뛰어나다고 명성이 자자하며, 그의 신변보호를 위
해 짙게 유리막을 봉했다.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 이해는 되지
만 폐쇄된 공간에 갇힌 듯 그도 꽤 답답할 것이다.


▲  무량수각 우측 샘터
금정산이 중생에게 베푼 소중한 선물로 그 뒤로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무언가를 담은 장독대들이 늘어서 있다.

▲  원효암서편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2호

원효암에는 2기의 오래된 석탑이 있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동편3층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경
내 서쪽에 자리한 서편3층석탑이다.

서편3층석탑은 높이 2.33m로 경내에서 서북쪽으
로 30m 떨어진 공터에서 수습해 온 것이다. 2중
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것으로 대자연
과 세월의 괴롭힘이 상당했는지 성치 않은 부분
이 별로 없을 정도인데, 바닥돌은 거의 파괴되
었고 아래층 기단은 옆이 뭉개졌으며, 탑의 머
리장식 일부도 날라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은 탱주가 사라졌고, 탑신 역시 1층만
남아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2층과 3층 탑
신을 새로 만들어 붙였다. 각층 옥개석에는 밑
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모서리는 세월
의 거친 흐름에 죄다 휩쓸려나갔다.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동편3층석탑과 더불
어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서편3층석탑 부근에 자리한 부도

서편3층석탑 부근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맵시가 고운 석종형부도가 서 있다. 기단에 검
은 이끼가 끼어 있고, 돌의 피부가 제대로 바래 있어 제법 묵은 부도임을 알 수 있는데, 부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목조관음보살상과 더불어 원효암의 조선 후기 유물이다.

이렇게 원효암를 말끔히 둘러보고 경내 서쪽에 가늘게 난 산길을 타고 금정산으로 향했다. 산성
북문까지는 25분 정도 걸렸는데, 처음에는 원효암 뒷쪽에 자리한 의상대(義湘臺)와 원효봉에 가
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고당봉과 금샘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 금정산 원효암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 부산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 5,7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범어사로 올라가는
  길(청룡예전로)이 나온다. 그 길을 오르면 삼신교통 종점이 있는데 거기서 범어사행 90번 시
  내버스를 타고 범어사 하차, 범어사를 거쳐 40분 정도 오르면 된다. 90번 버스는 평일에는 15
  ~20분 간격, 휴일에는 10분 내외 간격으로 운행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원효암까지 찻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범어사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
  우고 올라가야 된다.
* 원효암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25 (☎ 051-508-4008)


♠  부산의 지붕 거닐기 ~ 금정산성(金井山城) 북문에서 고당봉까지

▲  금정산성 북문(北門) - 사적 215호

금정산 지붕에 길게 둘러진 금정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산성(山城)으로 왕년에는 길이가
18km에 달했다고 한다. (북한산성은 약 9.5km) 허나 지금은 ¼도 안되는 4km 정도의 성벽만 간
신히 남아 있다.
지금의 성은 17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67년 경상좌수영 통제
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 보수를 조정에 건의한 적이 있으며, 아마도 신라나 고려 때 왜구
(倭寇)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707년 성이 너무 넓어서 성의 중간 부분에 남북을 가르는 중성을 쌓았으나, 1774년에 성이 너
무 커서 수비가 어렵다며 폐지했다. 1806년에 성을 다시 손질했으나 왜정 때 철저히 파괴된 것
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복원공사를 벌여 동문(東門)과 서문, 남문, 수구문(水口門)을 복원하
고,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마치 사극 세트장의 성문처럼 간결하게 생긴 북문은 해발 590m에 자리해 있는데, 문의 높이가 3
m 정도이다. 문은 동그랗게 구부러진 모습이 아닌 네모난 형태로 문 위쪽에는 여장을 쌓고 조그
만 팔작지붕 문루(門樓)를 세웠으며, 문의 규모는 서문(西門)에 비해 상당히 왜소하다.

문을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야 고당봉이다. 직진하면 미
륵사와 금성동, 왼쪽은 성곽길을 따라 원효봉과 의상봉, 동문으로 이어진다. 북문에서 고당봉까
지는 넉넉잡아 25분 정도 걸리며,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좀 급해진다.


▲  북문에서 정상 방면으로 이어지는 금정산성 성곽 (북문 북쪽)
저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가 고당봉이다.

▲  북문에서 동문 방면 금정산성 성곽 (북문 남쪽)

▲  부드러운 곡선의 원효봉~의상봉 능선

▲  고당봉 밑에 자리한 고모영신당(姑母靈神堂)

고당봉을 2분 정도 앞둔 지점에 이르면 돌담을 두른 붉은 벽으로 된 고모영신당이란 사당을 만
나게 된다. 이 사당은 고당봉에 깃들여진 고모영신(姑母靈神)을 모신 일종의 산신당(山神堂)과
같은 곳으로 1920년대에 범어사 신도인 밀양박씨 할머니의 유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임종에 임하면서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고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
제(姑母祭)를 지내달라. 그러면 고당봉의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지켜주겠다'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범어사 승려들은 그 유언을 받들어 고당봉 밑에 사당을 지어 1년에 2번(음력 1월 15일,
5월 5일) 제를 지내니 범어사가 나날이 흥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제사를 지냄)

우리의 토속 사당인 산신당이나 성황당은 기와나 나무로 만든 집이 딱 어울리는데 이곳은 근래
에 새로 지은 붉은 시멘트 집이 신당(神堂)의 역할을 하여 다소 어색할 따름이다. 허나 이곳은
고지대라 거센 바람과 눈,비에 자주 시달려 안전과 관리를 위해 시멘트 집을 지어 고모영신을
봉안한 것이다. 신당 옆에는 어린이 키높이 정도의 관리실이 있으며, 신당에는 누구나 절을 올
릴 수 있다.


▲  고모영신당에 봉안된 산왕대신(山王大神, 산신)과 고모영신 위패
활짝 웃는 두 송이의 꽃을 비롯하여 여러 문양이 그려진 단청이
 식상한 신당 내부를 아름답게 꾸며준다.


고당봉(801.5m)은 금정산의 정상으로 부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다. 바위 봉우리로 이
곳에 올라서면 금정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두 눈
아래 들어오고, 금정산 분지에 둥지를 튼 금성
동을 비롯하여 부산 북부 지역과 양산(梁山),
김해 대동면, 기장군(機張郡) 서부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다.

이 봉우리는 범어사 창건 설화에도 등장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
나 왈
'폐하, 태백산에 의상(義湘)이란 승려가 있습니
다. 그는 항상 3,0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화엄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과 제신(
諸神), 천왕(天王)이 그를 따라다니며 수행을
합니다.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에 이르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시 금색이
며, 사시사철 마르지를 않습니다.

▲  고당봉(故堂峰) 표석의 위엄

 

그 우물에는 범천(梵天)에서 오색(五色) 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가 헤엄치고 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의상과 함께 금정산에 가시어 7일 밤낮 화엄신중을 독성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불
이 금색신으로 화현하시고 동해에 임하되 왜구가 자연히 물러날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문무왕은 아침에 바로 의상대사를 소환하여 그와 금정산에 들어가 7일 밤낮을 일
심으로 독경하니 그 장소가 바로 고당봉이란 것이다. 고당(姑堂)이란 '원래 불가에서 부처의 화
엄일승(華嚴一乘)인 최고의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웠다'는 뜻으로 금정산 꼭대기에 기치를 꽂아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중생을 위해 법문을 강설했다는 의상대
사의 뜻에 따라 고당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범어사에서 그럴싸하게 다듬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  등산객들로 가득한 고당봉

고당봉에는 많은 산꾼들이 진을 치며 정상에 올랐다는 쾌감에 젖어있다. 고당봉 표석은 그들의
인기 사진모델로 정상에 올랐다는 인증 사진을 찍느라 표석 주변은 늘 부산하다. 한두 사람이나
한 단체가 찍기가 무섭게 바로 다른 이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여 부산 북부 지역과 양산, 낙동강(落東江), 김해
대동면, 기장군 서부 일대가 두 눈에 박혀 눈이 그야말로 호사를 누린다. 간만에 하늘과 맞닿은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니 속세살이에 상처 받은 마음이 쾌유가 된 듯, 속이 시원하다.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1)
김해 대동면과 낙동강, 양산 남부(물금, 범어, 양산신도시) 일대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2)
금정산 남쪽 줄기(원효봉, 의상대)와 그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부산 동래(東萊) 지역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3)
금정산 동쪽 줄기와 금정구, 기장군 서부 지역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4)
금정산 북쪽 줄기(장군봉)와 양산시 동면, 덕계 지역


♠  금정산의 유래가 된 금정산의 성지(聖地)
금샘<금정(金井)> - 부산 지방기념물 62호

▲  금샘을 품은 바위
여러 바위를 디딤돌로 삼은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금샘이 있다.


정상에 올랐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가야 되는 법, 10분 정도 머물며 천하를 바라보다가 금샘
으로 넘어갔다.
금샘은 고당봉에서 동쪽으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데, 고당봉 동쪽으로 내려가야 된다. 빙글빙글
머리를 환장하게 만드는 빙글계단을 내려가 바위를 몇 개 넘으면 금정산과 부산의 성지인 금샘
이 그 영롱한 모습을 비춘다.

금샘은 고당봉 동쪽에 솟아난 커다란 바위 위에 있는 패인 웅덩이로 범어사 창건설화의 현장이
다. 바로 금빛이 나는 물고기(金魚)가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그곳이다. 그래서 금
빛 물고기가 놀았다는 뜻에서 금샘(金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산 이름도 자연히 금정
산이 되었다. 물론 그런 물고기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바위 꼭대기에 저렇게 묘하게 물이 안착
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 신비로울 따름이다.
백악기 말인 8,000만 전부터 형성된 화강암체가 오랜 세월 풍화과정과 기후변화를 거치면서 만
들어진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으로 낙동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낮에 햇빛으로 데워지고, 데워
진 바위가 밤이 되면 주변 수분을 흡수하는 작용으로 금샘 물이 차가워진다고 한다. 지금도 10
월 해질 무렵에 금샘을 보면 물 안에 물고기 형상의 홈이 파여있는데, 저녁노을과 단풍빛이 반
사되어 금빛 물로 변하고, 바람이 불면 마치 마치 금빛물고기가 거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금샘에 모인 물은 바깥으로 나갈 공간이 없기 때문에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물
맛은 어떨까? 금샘이란 말 그대로 수질도 그에 버금가야 적당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무늬만 샘
이다. 물이 고인 웅덩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비와 눈이 내리지 않는 이상은 물이
들어올 때가 없고, 그곳에서 마를 때까지 고여있기 때문에 물은 속세처럼 썩는다. 가까이 다가
가서 보면 물 속에 여러 부양물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수질이 좋지 않으니 금샘이라 하여
괜히 물을 섭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화려한 이름과 달리 수질만큼은 독샘인 것이다.
금샘의 물이 마르면 큰 재앙이 온다고 범어사에서 믿고 있으나, 물이 마르기가 무섭게 또 비가
내리니 물은 늘 마를 날이 없다. 금샘까지는 접근이 가능하나 주변이 험해 사고 위험이 도사리
므로 괜한 오만을 부리지 않도록 한다.

※ 금정산 고당봉, 금샘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 범어사에서 북문을 거쳐 고당봉까지 약 60분, 금샘은 70분 소요
* 금성동주민센터<① 1호선 온천장역 3번 출구, 길 건너편에서 203번 좌석버스 이용 / ② 2,3호
  선 덕천역 10번 출구와 2호선 화명역 6번 출구에서 금정구 마을버스 1번 이용>에서 북문까지
  70~75분, 고당봉까지 90~95분, 금샘은 100~105분 소요

* 금샘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산2-1


▲  가까이서 본 금샘의 위엄
백두산(白頭山)에 천지(天池)가 있고 한라산(漢拏山)에 백록담(白鹿潭)이 있다면
금정산에는 그들의 축소판인 금샘이 있다.

▲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구, 기장군 철마면 지역

▲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산 동/남쪽 줄기와 북문(움푹 들어간 부분)

▲  북문에서 금성동으로 내려가는 길

금샘을 둘러보고 남쪽 샛길을 거쳐 북문으로 내려왔다. 북문에서 금성동으로 통하는 넓은 길로
내려가면서 오랜만에 미륵사를 찾아 그곳의 청정한 약수를 먹고 싶었으나 몸이 지친 상태로 그
냥 통과했다. 거기까지는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미륵사입구를 지나 10분 정도 가면 산길을 둘러싼 숲의 삼삼한 물결은 잠시 멈추고 잡초와 조그
만 나무가 무성한 벌판이 잠시 펼쳐진다. 이곳은 예전 농장과 마을이 있던 곳으로 금정산 정화
사업으로 모두 철거되었다. 예전에는 껍데기만 남은 교회가 수풀에 묻혀 버려져 있더만 그 역시
말끔히 철거되어 흔적조차 없다.


▲  옛 마을과 농장이 있던 곳(왼쪽 바위 봉우리 밑에 미륵사가 있음)

▲  산내음이 가득 깃든 금성동 가는 숲길
숲길은 대체로 평탄하여 산책 삼아 걷기에 좋으며 거의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솔솔나부끼는 바람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  금정산성 중성 - 사적 215호

금정산의 허리를 가르는 중성은 의상봉 남쪽 제4망루에서 국청사 북쪽을 거쳐 서문으로 이어지
는 약 2km의 성곽으로 여장과 성문은 사라지고 성벽만 일부 남았다. 성벽 위로 수풀이 무성하여
인간의 건축물은 자연 앞에선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  도토리묵과 산성막걸리

등산을 하면 도토리묵, 파전을 겯드린 동동주나 막걸리 1잔이 간절해진다. 금성동에는 등산객과
도시인을 상대로 한 주막들이 즐비한데 이곳의 명물인 산성막걸리와 염소고기를 비롯하여 도토
리묵과 파전, 백숙 등을 취급한다.
간만에 등산으로 몸이 무거워진 우리는 어느 주막에 들어가 도토리묵을 주문했다. 물론 산성막
걸리도 마셨지, 얼마나 콸콸 잘 흡입이 되던지 우리는 순식간에 막걸리 3명을 마셨다. 배추김치
와 당근 등이 잘 어우러진 도토리묵도 맛이 괜찮아 목구멍이 신난다고 쾌재를 부른다. 도토리묵
말고도 다른 것도 먹을까 했으나 시내로 나가 먹기로 하고 자리를 훌훌 털고 나왔다.
이렇게 소소하게 등산 뒷풀이를 마치고 금성동의 중심인 금성동주민센터에서 시내로 나가는 부
산좌석버스 203번을 타고 한계령(寒溪嶺)만큼이나 험준한 산성고개를 넘어 온천장역(1호선)으로
나왔다.

이리 하여 부산의 지붕 금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닿으면 제
대로 된 금정산 본전 종주를 하고 싶다.


▲  국청사 입구에서 바라본 파리봉과 상학산
그 아래로 금성동 마을이 포근하게 터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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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억새의 성지, 부산 승학산 억새 나들이

 


' 부산 승학산(乘鶴山) 억새 나들이 '

▲  억새밭 너머로 보이는 승학산 정상

 


늦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0월 끝 주말에 오랜만에 부산(釜山)을 찾았다. 경북 안동과 의
성(義城) 지역을 답사하고 오후 늦게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해수욕장과 광안대교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제를 구경했다.
광안리 해변으로 나가서 구경하려고 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거
친 물결을 뚫고 나가기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집(빌라 5층)에서 구경을 했지. 집에서 해변까지
는 1k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라 주변 빌라들이 시야를 좀 방해해서 그렇지 보일 것은 거의 다
보인다.
그렇게 불꽃축제를 구경하고 곡차(穀茶) 1잔을 겯드리며 달이 기울도록 회포를 풀다가 다음날
10시 스르륵 잠이 깨었다. 12시에 간단히 점심을 먹고 어디를 갈까 궁리하다가 철이 철인만큼
억새의 향연을 보고자 억새의 주요 성지(聖地)인 승학산으로 길을 향했다.

광안역에서 부산좌석버스 1001번(청강리↔하단,동아대)을 타고 부산 도심을 가로질러 하단 동
아대입구에서 발을 내린다. 시내에서 승학산으로 오르는 길이 여럿 있지만 제일 쉬운 길은 구
덕꽃마을에서 오르는 것이고, 가장 가파른 길은 동아대에서 오르는 것이다. 허나 꽃마을 코스
는 거리가 긴 반면, 동아대 코스는 가파른 만큼 코스가 짧고 굵직하다.

동아대(東亞大)는 승학산 서쪽 자락에 터를 닦은 학교라 경사가 좀 급하다. 학교 정문에서 가
장 위쪽인 한림생활관까지는 거의 해발 60~70m 차이가 나면서 벌써부터 숨이 차려고 한다. 시
내와 살을 맞대고 있는 학교의 아랫부분과 승학산 숲과 이웃한 윗부분과는 정말 공기도, 온도
도 확연히 틀린 것 같다. 만약 전공/교양수업이 윗부분에서 주로 이루어진다면 학생들은 정말
고역이겠지. 허나 다행히도 하단역에서 교내 공과대학까지 사하구 마을버스 10번이 10분 내외
간격으로 다녀주어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 되어 준다.

주말이라 썰렁한 동아대 경내를 가로질러 한림생활관에 이르니 학군단 건물 뒤로 산길이 보인
다. 여기는 대략 해발 170m고지로 그 길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승학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며,
동아대와 사하구 일대, 남해바다가 훤히 두 눈에 박힌다.


♠  승학산 등산 (동아대에서 정상까지)
`
▲  승학산 등산로 (동아대 방면)

동아대를 벗어나 10분 정도 오르니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승학산 능선의
가장 서쪽 봉우리(해발 210m)가 나오고, 동쪽으로 가면 승학산이다. 갈림길 주변에는 어느 산악
회에서 행사를 요란하게 벌리고 있어 꽤나 번잡했다.

승학산으로 가는 산길은 동아대 만큼은 아니지만 가파르기는 마찬가지다. 힘들긴 하지만 등산이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북한산(삼각산), 관악산, 금정산보다는 애교 수준임> 바람에 흔
들리는 억새를 꿈꾸며, 노릇노릇 익어가는 단풍을 구경하며, 산 아래 펼쳐진 천하를 관망하며,
그렇게 산에 임하면 금세 승학산의 서쪽 봉우리에 이른다. 여기는 약 400m 고지이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1)
엄궁동과 사상(沙上)공단, 낙동강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2)
사하구(하단, 괴정, 감천, 신평)와 을숙도, 남해바다가 보인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3)
- 낙동강 위에 길게 누운 을숙도(乙淑島)
섬 가운데로 낙동강하구둑이 무심히 옥의 티를 내며 지나간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4)
사하구(괴정동, 감천동) 지역

▲  세모처럼 솟은 저 봉우리가 승학산 정상이다.
정상 서쪽 봉우리에서 정상까지는 넉넉히 20분 정도 잡으면 된다.

▲  정상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정상 서쪽 봉우리가 보인다.

▲  승학산 정상(496m) 표석

동아대 입구를 출발하여 쉬엄쉬엄 오른 끝에 드디어 승학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다른 산
과 마찬가지로 산의 이름과 해발이 쓰인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실제 정상은 표석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승학산은 부산 본토 서남쪽에 솟아난 산으로 해발 496m이다. 산의 이름은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無學大師)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폈는데, 이곳의 산세가 준엄하고 기세가 대단해 마치
학이 나는 듯하다 하여 학을 탄다는 뜻의 승학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산세가 대단한 건 사실이다.

이 산은 부산에서 억새 명소로 매우 유명하다. 정상 동쪽 제석골에 수만 평에 달하는 억새밭(억
새군락)이 장엄하게 깔려 있는데, 가을에 아주 장관을 이루며, 강원도 정선(旌善) 민둥산의 억
새밭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억새가 바람에 따라 흔들릴 때 그 특유의 바람 스치는
소리는 속세에 오염된 청각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부산 도심에는 대도시임에도 승학산이나 구덕산처럼 400~500m급 산이 즐비해 산을 타다보면 정
말 강원도나 내륙 산간 지역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게다가 이렇게 너른 억새밭까지 있으
니 이는 하늘이 바다와 더불어 부산에 내린 크나큰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승학산의 이름 3자가 부산에서만 알 정도로 인지도가 낮다는 것이다.

승학산은 동쪽으로 구덕산(九德山, 565m), 시약산(時藥山, 523m)과 이어져 있으며, 등산은 동아
대학교와 구덕꽃마을, 사하구청 북쪽 제석골(제석골 산림공원)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동네 주민들이 살짝 이용하는 소소한 등산로가 여럿 있으며, 동아대에서 정상을 찍고
구덕꽃마을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 거기서 욕심을 더 내서 엄광산과 구봉산을 거쳐 대청공원
(민주공원)이나 수정산, 동구까지 산을 탈 수 있다.

※ 승학산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① 동아대 : 부산1호선 하단역 9번 출구에서 사
하구마을버스 10번을 타고 동아대 공대2호관에
서 하차, 한림생활관을 지나면 바로 승학산의
품이다.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림
② 당리동(제석골) : 부산1호선 당리역(사하구
청) 3번 출구에서 사하구마을버스 2-1번을 타고
동원베네스트2차아파트 종점에서 하차
③ 구덕꽃마을 : 부산1호선 서대신역 4번 출구
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
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
번을 타고 구덕꽃마을 종점 하차. 거기서 서쪽
길로 오르면 구덕산과 승학산으로 이어진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당리동
/ 사상구 엄궁동
 

◀  사하구청에서 승학산 정상에 심은
새천년미래웅비사하(千年未來雄飛沙下) 표석


▲  승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능선
저 초원 같이 넓은 곳이 바로 승학산 억새밭(군락)이다.


♠  억새의 성지, 승학산 억새밭

▲  승학산 억새밭을 거닐다

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이곳의 명물인 억새밭(억새군락)에 이른다. 대장관을
이루며 능선에 드넓게 터를 닦은 억새밭은 멀리서 보면 양이나 말이 풀을 뜯는 초원처럼 보인다.
산바람과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이곳 억새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내는 바람 스치는
소리가 청각을 제대로 정화시킨다. 겉으로 보면 약해 보이지만 군락을 이룬 억새는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하며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지키는 강인한 존재
이다. 흔히 억새와 갈대를 햇갈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둘이 생긴 모습은 비슷하다. 허나 갈대는
물가에 자라는 존재이고, 억새는 물과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존재이다.

넓은 억새밭 가운데에 전망대를 두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는데, 조망(眺望)이 가히 천하(
天下) 일품이다. 억새밭은 억새의 보호를 위해 지정된 길 외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괜히
들어가서 억새와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지 않도록 한다.


▲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억새밭의 위엄

▲  억새밭 사이에 난 산책로
억새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산책로를 거닌다.

▲  억새밭 너머로 승학산 정상이 보인다 ▼


▲  억새밭 한쪽에 마련된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돌탑
억새밭을 찾은 속인들이 조그만 소망을 빌며 쌓은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억새밭 너머로 승학산 동쪽 줄기와 구덕산이 보인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일그러진 인상을 보이고 있다.

▲  억새의 즐거운 가을 향연

▲  비탈진 억새밭 너머로 사하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이 제석골)

▲  시간 도둑이 따로 없는 억새밭 - 돌아서기 싫은 발길을
억지로 잡아 떼며 억새밭과 작별을 고한다.

▲  구덕산을 가리고 선 승학산 동쪽 봉우리
해발 487m로 구덕산의 서쪽 봉우리이기도 하다.


♠  승학산 마무리

▲  검게 그을려진 구름과 안개 사이로 사상구 지역이 흐릿하게 보인다.

▲  승학산 동쪽 봉우리를 넘다 - 저 너머로 보이는 산은 구덕산

승학산 억새밭을 넘으면 수레가 들어올 수 있는 쉼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동쪽으로 가는 길은 2
개이다. 하나는 동쪽 봉우리(구덕산 서쪽 봉우리)를 직접 넘는 것, 다른 하나는 봉우리 허리에
둘러진 길을 가는 것이다. 후자는 길이 포장되어 있고, 큰 오르막이 없어 편하긴 하나, 많이 돌
아가야 된다. 반면 전자는 산을 직접 넘어야 되지만 그 산을 넘으면 바로 구덕산 서쪽으로 이어
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회길 대신 산을 넘는 편을 택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오른 승학산 정상이
나 서쪽 봉우리보다는 완만하며, 비에 젖은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니 봉우리 정상이다.

봉우리를 넘어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덕산 아래에 이르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구덕꽃마을,
오른쪽 오르막길이 구덕산(九德山, 565m) 정상, 오른쪽 내리막 길이 억새밭으로 가는 허리길이
다. 구덕산 정상은 군사/방송 관련 시설이 자리해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  구덕꽃마을로 내려가는 길

인생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갈 때가 있다. 지금까지 승악산 능선을 타며 서쪽 봉우
리와 승학산 정상, 동쪽 봉우리까지 신나게 올랐으니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 된다. 더 이상 올라
갈 곳도 없다.

내려가는 길은 봉우리 허리길과 구덕꽃마을 방면 길이 있는데, 꽃마을까지는 1차선 크기의 길이
포장되어 있어 통행에 불편은 없다. 구덕산 정상에 자리한 군/방송 시설 때문에 길을 포장한 것
이다.

여기서 꽃마을까지는 대략 2km로 순전히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내리막 가속을 덧붙이면 금세 내
려간다. 길 주변에는 울긋불긋 타오른 단풍과 푸른 옷을 걸친 나무들이 앞에서는 환한 모습으로
뒤에서는 장차 다가올 겨울 제국(帝國)을 걱정하며 시름에 잠겨 있다. 이제 올해도 다 갔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이 얹혀질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시름 속에 들어가 버린다. 새해가 시
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이 코앞이니 세월이란 참 유수처럼 빠르다는 말이 허언은 아
닌 듯 하다. 고려 후기 문신인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歌)처럼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다른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막으려고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온다는 시가 점점 실감이 난다.

꽃마을로 열심히 내려가고 있으려니 구덕문화공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오른쪽에 나온다. 이 공원
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는 없던 터라 근래에 만든 공원이겠지 싶어 그냥 직진을 고수했는데, 꽃
마을이 슬슬 모습을 보이면서 강제로 구덕문화공원이 내 앞에 나타난다. 아까 전 이정표는 공원
으로 바로 내려가는 지름길 계단이었던 것이다. 계단으로 가나 포장 길로 가나 어차피 구덕문화
공원은 꼭 거쳐야 된다.


▲  구덕문화공원(九德文化公園) 목석원예관

구덕문화공원은 꽃마을 서쪽, 구덕산 북쪽 자락에 터를 닦은 공원이다. 2004년 11월 교육역사관
과 다목적관 개관을 시작으로 문을 연 이 공원은 2005년 11월 목석원예관을 열었고, 2006년에는
민속생활관과 다목적광장을 만들었다. 특히 2005년 11월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때는 참가국 우두머리의 부인들이 방문한 곳이기도 하며, 구덕산과 승학산을 후광으로 한
도심 속의 자연/문화공간으로 정감이 가득 일어나는 곳이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싱그러운 공간으로 나무가 무성하며, 공원 곳곳에 장독대와 석탑, 석등
, 문인석 등의 석인을 비롯하여 여러 조각물을 배치하는 등, 아기자기하게 꾸며 소소하게 볼거
리를 제공한다. 석물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공간을 옛돌마당이라 불리는데, 이곳의 석물은 오
래된 것은 없고, 공원을 닦으면서 만든 것들이다. 다만 석등(石燈) 가운데 우리식이 아닌 왜식(
倭式)으로 만든 것이 적지 않아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전시실(교육역사관, 민속생활관, 목석원예관)과 옛돌마당 외에 편백숲 명상의 길, 솟대
동산, 인공폭포와 놀이마당, 산마루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에 있는 전시관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교육역사관은 이 땅의 교육 역사를 다룬 공간으로 디
오라마와 유물 등으로 옛날 교육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교육내용과 과정, 서예
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고, 개화기 이후에 편찬된 교과서와 60~70년대 초등학교 교실 재현, 6.25
시절 천막 학교 등이 재현되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진하게 불러일으킨다. 전시자료는 약 600점
정도 된다.

그 다음 문을 연 목석원예관은 나무와 돌, 꽃을 다룬 공간이다. 괴석류와 돌과 나무로 만든 작
품들, 수목과 지피식물(地被植物) 등이 원예관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민속생활관은 옛날 생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농기구와 짚풀용품, 주거생활용품, 호패와 민화(民畵, 속화), 초가집
모형 등 유물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허나 이들 전시관의 전시물은 다른 데서도 지겹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으며, 다만 공원을 이루는 숲이 삼삼하고 산책로도 괜찮
게 깔려져 있어 산책이나 데이트, 산림욕 장소로 아주 적당하다. 게다가 위치도 구덕산과 승학
산 가는 길목에 있어 산을 타고 내려와 잠깐 안겨보는 것도 괜찮다.

※ 구덕문화공원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부산1호선 서대신역 4번 출구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번을 타고 구덕꽃마을 종점 하차. 거기서 서쪽 길(승학산 방면)
  로 오르면 나온다.
* 일반인 차량은 공원까지 들어올 수 없으므로, 꽃동네에 주차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 관람시간 : 9시 ~ 18시 (11~2월에는 17시까지)
* 관람료는 없으며, 3개의 전시실은 매주 월요일 문을 닫아 걸고 쉰다.(단 공원 관람은 가능함)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3가 산18-15 (꽃마을로 163번길 73, ☎ 051-240-3521~23)
* 구덕문화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목석원예관에서 유일하게 사진에 담은 사후천년이란 작품
나무가 죽어 돌로 굳은 화석(化石)이라고 한다.

▲  밋밋하게 솟아난 솟대
솟대 위에 오리는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는 중간 역할을 상징한다.

▲  다양한 석물들이 반기는 구덕문화공원 옛돌마당 산책로
장승(벅수)과 온갖 석인들, 석등, 석탑 등이 주변을 수식한다.

▲  무인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는 싱글벙글 무인석(武人石)

▲  웃음을 머금은 문인석(文人石)의 물결

▲  산책로에서 만난 왜식 석등
석등을 만들려면 우리식으로 제대로 만들 일이지 그냥 왜식으로 대충
만들어 공원에 갖다 두었다. (대충 전시행정의 표본)

▲  구덕문화공원 남쪽 산책로

우리는 목석원예관만 둘러보고 내려왔는데, 글쎄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는 것이다. 처음
에는 적게 내리더만 시간이 가면서 정비례로 빗방울도 주먹만큼 굵어진다. 그래서 속보로 꽃마
을로 내려오니 마침 시내로 나가는 서구마을버스 1번이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 버스는 이미 가
축수송 지경이라 다음 차를 탈까 했지만 빗방울의 눈치도 있고 해서 그 버스에 올라타 짐짝의
일원이 되었다.

오랜 만에 찾은 부산 도심 속의 산골마을 구덕꽃마을, 등산객을 상대로 하는 주막들이 가득 늘
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산이나 산사 입구에 터를 닦은 관광단지를 방불케 한다. 도심이 바로 밑
인데, 도심과 지척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손님을 가득 실은 마을버스는 이제야 만족을 한 듯, 시동을 걸고, 그 자리에서 유턴하여 마을을
등지고 시내로 내려간다. 휴일이라 등산/나들이 손님들이 많으니 그날 입금은 정말 상당할 것이
다. 운행을 마치고 아마도 고기회식을 하지 않았을까?

내려가는 고갯길이 구불구불하여 손잡이를 잡으며 어여 도착하기를 소망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구덕운동장과 서대신역까지 가야 내리니 자리가 생기는 것보다는 빨리 도착하여 내리는 것이 낫
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온 마을버스는 부산시내로 들어서 구덕운동장에서 우리를 내려놓는다. 여기서 시내
버스를 타고 서면(西面)에서 환승하여 광안동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대략 17시 30분, 이렇게 하
여 부산 승학산 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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