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권 사진,답사기/부산 해안 지역'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23.09.03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깃든 국경의 섬, 부산 대마도 <이즈하라,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아소만>
  2. 2020.09.22 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3. 2017.08.07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40리를 거닐다 (죽성리 월전, 대변항, 죽도, 오랑대, 해동용궁사)
  4. 2017.05.08 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5. 2015.07.27 [피서 성지 순례]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트래킹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6. 2014.01.16 부산의 상징을 거닐다 ~ 오륙도 (등대섬, 오륙도등대, 백운포)
  7. 2013.07.18 바다와 해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 경승지, 부산 몰운대 (다대포해변)
  8. 2012.07.16 부산신항만 앞에 떠있는 그림 같은 섬 ~ 가덕도 나들이 (가덕도등대)
  9. 2011.04.20 해운대 (해운대해수욕장, 철길건널목)
  10. 2011.03.18 부산 오륙도 (2)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깃든 국경의 섬, 부산 대마도 <이즈하라,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아소만>

대마도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아소만, 와타즈미신사)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만관교 주변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여호도(메고시마)


* 대마도의 본토는 우리나라(대한민국)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떠있는 부산 대마도를 찾았다.
대마도는 2004년 가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태풍이 계속 초를 치면서 인연이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5월에 이르러 다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흔쾌히 도와주어 100% 대마도 상륙 확정이다.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일행들을 만나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
고속해운)에 몸을 실었다. 배는 고요하기 그지 없는 대한해협을 유유히 가로질러 2시간
20분 만에 대마도의 주요 관문인 이즈하라<엄원(嚴原)>항에 우리를 무사히 가져다 주었
다. 드디어 대마도에 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처음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 낯익은 모습인
데,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런 즐거운 흥을 회충처럼 생긴 왜열도 글
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가나는 신라가 만든 이두식 글자임)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는 5개의 유인도와 102개의 무인도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708㎢이다. 남북이 꽤 길쭉하여 제법 큰 섬으
로 다가오는데, 남북 길이가 82km, 동서 길이는 최대 18km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옛 땅의 일부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맡고 있었으며, 우
리의 동남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
경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아주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매우 저렴한 금액과 짧은 시간으로 외
국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
이 많은 편이다. (2017년에 70만 명이 찾았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꼭
회복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첫날은 이즈하라 시내의 여러 명소를 돌아다녔다. 만송각(반쇼가쿠)이란 왜식(倭式) 식
당에서 본토식이 가미된 대마도 토속음식인 이시야키(石燒)와 이리야키(いリやき)로 거
하게 저녁을 먹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둘째 날 오
전에 둘러본 곳만 다루었다.



 

♠  대마도를 2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협곡과 그 협곡에 놓인
만관교(万關橋, 만제키바시)

▲  만관교(만제키바시)

대아호텔에서 대마도의 첫 저녁이자 첫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 햇살의 성화에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1층 온천탕(바닷물을 가져와서 끓인 것임)에서 몸을 푹 삶고 1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
었다.
아침은 본토의 밥상보다도 크게 떨어지는 왜식(倭式) 정식을 먹었는데 밥도 그렇고 반찬도 그
렇고 양이 매우 적었다. 하여 식당 직원에게 리필을 요청하니 반찬은 일절 안되고 밥만 된다
고 그런다. (반찬도 없이 어찌 밥을 먹나?) 본토 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임에도 식당 운영은
좁쌀처럼 왜열도 스타일로 하는 것이다.

아침을 먹고 객실(3층 다다니방)로 올라가 여장을 꾸리고 나오니 우리를 태울 버스가 대기하
고 있었다. 30인승 정도의 중형버스로 일행을 모두 태우자 대아호텔을 뒤로하며 이즈하라 시
내로 내려갔다.
어제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이즈하라 시내의 아침 풍경은 마치 텅 빈 영화세트장처럼 너무 적
막하여 우리가 어제 이곳을 거닐었는지도 햇갈리게 만든다.

이즈하라를 벗어난 버스는 북쪽을 향해 열심히 바퀴를 굴려 게치와 대마공항(쓰시마 야마네코
공항)의 밑도리를 지나 어느 다리 앞에서 바퀴를 멈춰섰다. 그곳이 둘째 날의 첫 답사지인 만
관교이다.


▲  만관교 서쪽 아소만

대마도(면적 708㎢) 본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2개의 섬이 구분되는 곳이 바로 만관교가 있는 만관협곡(만관운하)이다.
만관월(万關越, 만관키코시)과 남쪽에 있는 대선월(大船越, 오후나코시), 북쪽의 소선월(小船
越)은 해발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매우 낮고 대마도에서 가장 폭이 좁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소선월은 왜에서 신라와 당으로 보낸 사신이 지나
가던 곳이며, 대선월은 대마도 최초의 운하이나 폭이 좁음)
허나 배를 밀거나 들고 가는 식으로 운반하거나 반대쪽으로 넘어가 배를 갈아타는 식이라 불
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국 해군은 선박의 왕래와 대한해협의 제해권 장악을 위
해 1897년에 만관월에 삽질을 가해 1901년 운하를 완성시켰다. 그것이 바로 만관협곡(만관운
하)이며, 운하 삽질로 나온 흙과 바위는 운하 동쪽에 있는 메고시마의 육지 매립에 쓰였다.

운하의 등장으로 아소만과 마우라만(삼포만, 三浦灣)은 완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 짧은 거리 때문에 배를 직접 운반하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했었다. 운하 위에는 1901년 80m
길이의 나무 다리(만관교)를 지어 운하로 끊어진 남쪽과 북쪽을 잇게 했으며, 1956년 기존의
다리를 부시고 81.6m의 새 다리를 닦았고, 1996년 현재의 다리를 새로 닦아 대마도의 북섬과
남섬을 끈끈하게 붙잡고 있다. 다리 길이는 210m, 폭 10m, 높이 25m로 2차선 도로와 뚜벅이길
을 갖추고 있다.

대마도의 중심지인 이즈하라에서 히타까츠를 비롯한 북섬으로 가거나 반대로 가는 경우 무조
건 이 다리를 건너야 된다. 주변 풍경도 그런데로 볼만하여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았으며 협곡 동쪽인 메고시마(여호도, 女護島) 포구로 내려가면 협곡과 다리의 전경을 싹
살펴볼 수 있다.


▲  만관교 서쪽 만관협곡 (아소만 방향)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메고시마 포구(왼쪽 마을),
구스보(久須保, 오른쪽 산지)

▲  만관운하를 닦은 기념으로 2005년에 세워진 개삭비(開削碑)

▲  만관교 주변(구스보, 메고시마) 지도



 

♠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아소만과 그 아소만을 굽어보는
에보시다케(烏帽子岳)전망대

▲  오로지 전망을 위해 설치된 에보시다케전망대

만관교를 짧게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도요타마마치(풍옥정, 豊玉町)에 이
르러 와타즈미신사 방면 길로 좌회전하여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으니 에보시다케전망대 주차
장이 마중을 나온다.

에보시다케는 해발 176m의 낮은 뫼로 와타즈미신사의 바로 뒷산이다.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
여져 있는데 전망시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오로지 조망을 위한 공간으로 주변이 온통 낮은
산과 무성한 숲, 바다 일색이라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이곳에 올라서면 서쪽과 서남쪽, 동쪽으로 리아스식 해안과 무수한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아
소만이 훤히 바라보이며, 그 모습이 마치 월남(越南,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일명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린다. 바로 그 풍경 때문에 이 궁벽한 곳에 전망대를 닦은 것이
다.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은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는 본토의 부산(釜山)까지 흐릿하
게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서 부산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나 공기가 깨끗한 겨울
에는 잘하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전망대 밑까지 1.5차선 크기의 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차에서 내려 각박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
면 된다.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꼭 전망대에 들려 일품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이곳은 워낙 산골벽지라 시내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풍옥정의 중심 마
을인 니이(仁位)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거나 와타즈미신사를 경유하는 투어버스(이즈하라↔
히타까츠)를 타고 걸어서 들어가야 된다.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포구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①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②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③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④

▲  숲에 묻혀있는 에보시다케전망대 남쪽 봉우리

▲  주차장에서 바라본 에보시다케
붉은 피부의 버스는 본토 관광객을 태우고 온 버스들이다. 그들 너머로 높은 산이
보이는데 그 봉우리가 에보시다케로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여져 있다.

▲  에보시다케 주차장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주변



 

♠  신라와 가야 사람들이 고향을 꿈꾸며 세웠던 도해궁이자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입구

에보시다케전망대를 둘러보고 왔던 길로 나와 와타즈미신사 남쪽 숲길에서 내렸다. 여기서 무
성한 삼나무 숲길을 들어서면 와타즈미신사로 바로 이어진다.

와타즈미신사는 팔번궁신사(하치만구신사), 해신신사(가이진신사, 海神神社)와 더불어 대마도
의 대표적인 신사이다. 초대 왜왕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이며, 평안시대(平安時代, 헤이안시대
)의 율령 등이 담긴 연희식(延喜式, 엔기시키)의 신명장(神名帳, 진묘초)에도 나올 정도로 대
마도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신사이다.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신사 주변은 삼나무와 대나무, 편백나무 등이 짙게 숲을 이루고 있다. 만송원의 두터운 삼나
무숲처럼 햇살이 제대로 맥을 못추는 숲길 속에 신사 도리이와 토요타마히메의 분묘 비석이
있으며, 그 숲길의 끝에 와타즈미신사 배례전이 있다.

▲  금줄이 쳐진 삼나무숲 도리이

▲  풍옥희(도요타마히메) 분묘 비석

풍옥희(豊玉姬,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는 와타즈미신사 설화에 나오는 용왕의 딸이다.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세워 비석으로 삼았는데, 그 피부에 풍옥희지분묘(豊玉姬之墳墓)
라 쓰여있다.
얼핏보면 풍옥희의 무덤으로 볼 수 있겠으나 비석에 쓰인 것과 달리 그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
이었으며, 신사가 조성되기 전까지 제단으로 쓰였다. 또한 비석의 글씨 색깔이 금색으로 되어
있는데 왜열도에서 비석 글씨에 금분을 쓴 것은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 이후이다. 그러
니 이 비석은 그 이후에 세워진 것이 되며, 이때부터 제단이 무덤으로 둔갑된 것으로 보인다.


▲  와타즈미신사 직전 삼나무숲길

▲  금줄이 쳐진 신사 앞 돌덩어리

이곳에 신사를 짓고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지으면서 이름 없는 돌덩어리까지
의미와 이야기를 구절구절 붙여놓았다. (이 돌덩어리는 안내문이
없어서 무슨 의미의 바위인지는 모르겠음)

▲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이 봉안된 신전(神殿)
배례전 뒤쪽 높은 곳에 신전이 자리해 있다. 신전은 제삿날 외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다.


와타즈미신사는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와 하늘에서 내려온 히코호호 데미노미코
토의 사당이다. (이름도 참 징그럽게도 어렵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新羅) 또는 가야(伽倻)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 있었다. 도리이가 가락국(
駕洛國)의 중심지라는 김해나 신라 서라벌(경주)을 향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
또는 가야) 사람들이 조상신을 봉안한 사당을 세우면서 고향을 향해 사당과 문을 세웠다. 하
여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 지은 신궁이란 뜻에서 도해궁(渡海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왜가 대마도를 침탈하면서 왜식 신사로 모습이 변질되었고, 신사의 설화를 적
당히 각색하면서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이 되었는데, (최초 왜왕이 가야 출신이라고 함) 이
곳에 얽힌 설화를 잠시 끄집어내보면 대략 이렇다.

하늘의 신인 다까비무스비(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내려온 니니기에게 히코호호테미노
미코토(이하 히코호호)란 아들이 있었다.
히코호호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가 형에게 빌린 낚시 바늘을 바다에 빠트리고 말았는데, 그
바늘을 찾으려고 바다를 헤매다가 '시오츠라'란 신의 도움으로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
미코토(이하 도요타마)를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용궁에서 3년 동안 팔자 좋게 지내다가 문득 예전에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이 생각이 났다.
하여 장인인 용왕의 도움을 받아 그 바늘을 찾아 지상으로 올라와 형을 만났는데, 그때 도요
타마는 만삭의 몸이라 같이 나오지를 못했다. 하여 여동생인 다마요리노히메미코토(이하 다마
요리)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바다 밖으로 나와 현재 와타즈미신사 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도요타마는 산통을 느껴 손수 해변에 집을 짓고 남편에게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면 안돼~~!'
당부를 했다.

허나 사람의 심리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결국 훔쳐보게 되었는데, 글쎄 큰 뱀이
산고(産苦)로 정신없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완전히 혼돈의 상태
가 되었고, 원래 모습을 들켜버린 도요타마는 너무 열받아서 막 낳은 아들을 해변에 버리고
우나자까를 메워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나자까는 용궁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문이 나타나고 메우면 사라짐)
이때 버리고 간 아들이 '우가야 후기아에즈(이하 우가야)'로 별명은 '이소라 에비스'이다.

우가야는 장성하여 작은 이모인 다마요리와 혼인했다. 서로 나이 차이가 좀 있을텐데 어쨌든
이모와 조카가 혼인을 한 것이다. 그들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초대 왜왕(倭王)이라는
신무(神武)이다.
이 설화를 통해 왜왕족은 천신(天神)의 부계(父系)와 해신(海神)의 모계가 만나 이루어진 혈
통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곳이 왜왕실의 발원지임을 크게 어필하고 있다. 동시에 근친혼도
대놓고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와 고려도 근친혼이 심했음)

가야는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해 구주(九州, 규슈) 등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 입맛에
맞는 지방 정권을 세워 통치했다. 그때 가야 본토에서 보낸 왕족이나 관리, 또는 새로운 삶터
를 꿈꾸며 건너간 가야 사람이 초대 왜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대마도와 꽤 유별난 인
연이 있었던 듯 싶으며 그로 인해 이곳에 그의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왜가 가야와 백제, 신라에 종속되고 그들에게 오지게 영향을 받았던 과거를 싹 왜곡
하고 지우면서 왜국 중심의 역사관을 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초대 왜왕의 대마도 이북의 족
적은 지워졌고 이곳 신사의 봉안 주체까지 바꾸어 왜왕실의 발원지로 내세웠다. 그것도 모자
라 난데없이 천신과 해신(용왕)까지 등장을 시켜 왜왕이 그들의 자손이란 허무맹랑한 설화까
지 지어 붙였다. (현실은 가야, 신라, 백제 사람들의 후손들임)


▲  와타즈미신사 배례전(拜禮殿) 내부와 바로 앞에 걸린 색동줄
신사에 예를 표할 때는 방울이 달린 색동줄을 당기면서 방울소리를 낸다. 이는
신사에 봉안된 존재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자 함으로 이후 2번 예를
표하고 2번 박수를 친 다음 1번 절을 한다.

▲  금색으로 쓰인 봉축성혼기념비(奉祝成婚記念碑)
1993년 현재 왜왕인 덕인(德人, 나루히토)의 혼인을 기리고자 신사에서 아부용으로
세운 것이다. (덕인은 2019년 5월 부왕인 아키히토의 양위를 받아 왜왕이 됨)
왜국은 아직도 미개한 부분이 적지 않아서 날짜를 표기할 때
왜왕의 연호를 쓰는 별종 짓을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 대마도가 왜화가 되면서 신불(神佛) 통합으로 기존 신사들이 이름이 바뀌었고
절과 마을 사당이 적지않게 신사로 강제 전환되었다. 와타즈미신사 역시 신사로 전환되었는데,
이곳 지명인 와타즈미(와타쓰미)란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고 왜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라 신공황후(神功皇后) 개소
리나 늘어놓는 팔번궁신사보다 나은 곳이다. <신공황후 바로 이전 시절에 신라가 시마네와 야
마구치를 공격하여 왜왕 또는 그에 준하는 높은 작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음>
게다가 신사 주위로 조엽수림(照葉樹林)이 매우 울창하며 북방계와 대륙계 식물이 해안 주변
에 섞여 있어 많은 새들이 머문다. 그래서 신사 주변 숲은 장기현(長崎縣, 나가사키) 천연기
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신사 앞에 바다(니이아소만)가 펼쳐져 있어 경관도 괜찮다.


▲  붉은 피부의 오미쿠지

저 붉은 통에 100엔 동전을 넣으면 운세가 적힌 종이가 나온다. 그 종이를 오미쿠지라 하는데
운세가 괜찮게 나왔으면 가져가도 되며, 영 좋지 않게 나왔을 때는 나무나 붉은 통 위 금줄에
묶어둔다. 그러면 신이 나쁜 운세가 좋게 되도록 빌어준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와타즈미신사
의 배때기를 불려주는 붉은 통이다.


▲  소원 나무판을 다는 곳(에마)

나무판 뒤쪽에 말이 그려져 있어 에마(畵馬)라 부른다. 소원 내용과 주소, 이름을 적어서 달
면 되는데 주소는 꼭 적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소원이 그 주소지로 날라가 소원성취가 된
다는 것이다.
소원을 적는 나무판은 돈을 내고 사야 되며 소원판 장사는 이곳의 짭짤한 돈줄이다.

▲  배례전 앞 1번 도리이

▲  배례전 앞 도리이와 코마이누상(拍犬)

배례전 앞 도리이 옆에는 오래된 코마이누상 1쌍이 있다. 이들은 신사를 지키는 개의 석상으
로 원래는 고려 개이다. 그것이 대마도와 왜열도로 넘어와 신사 등을 지키는 존재가 된 것이
다.
이곳 코마이누상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 다 특이하게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
를 모두 가지고 있다. 천하에 널린 개의 석상 중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암컷은 입을 다물고 있
는 모습인데, 이는 사람이 죽을 때 보통 입을 다물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입을 벌리고 죽는 경우도 많음;;) 그에 반해 수컷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  2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와타즈미신사

▲  2번 도리이

▲  땅과 바다의 경계에 자리한 3번 도리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야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변치 않은 듯, 여전히 그들의
본거지를 향하고 있다. 이곳이 왜화가 되면서 사당은 신사로 바뀌고
이렇게 도리이까지 설치되었지만 이곳의 본마음은 여전한 것이다.

▲  와타즈미신사의 백미, 바다에 세워진 도리이들
와타즈미신사를 상징하는 풍경으로 3번 도리이 너머로 4번 도리이와
5번 도리이가 바다에 발을 담구고 있다.


와타즈미신사 앞에는 5개의 도리이가 있다. (숲속에 있는 도리이는 제외) 이렇게 도리이를 5
개를 둔 것은 5욕(五欲)으로부터 해탈하라는 의미라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3개의 도리
이는 땅에 있고, 2개는 니이아소만이라 불리는 바다에 있는데 이는 용왕이 이들 도리이를 통
해 신사로 들어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즉 용왕을 위한 이정표이다.

바다에 설치된 도리이는 썰물 때는 거의 육지처럼 있다가 밀물 때는 도리이의 밑부분이 물에
잠기며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최대 2m까지 잠긴다고 하는데 바로 그 풍경이 이곳 신
사의 백미이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썰물 때라 1개만 물 위에 있었다.

▲  3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니이아소만

▲  신사 석조(石槽)

신사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있다. 생김새가 본토의 샘터와 비슷하고 바가지까지 있어서 자세
한 사연을 모르면 본토 사람의 본능상 물 1모금 들이키기 쉬운데 절대로 물을 마시는 샘터가
아니다. 이곳은 신사 참배 전에 손을 씻는 곳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손을 씻고 입을 닦는
다. 그런 다음 참배에 임하면 된다.


▲  이소라 에비스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비늘바위)

비늘바위는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인 도요타마히메가 출산 장면을 훔쳐본 남편에게 절망하여
아들(이소라 에비스)을 버리고 용궁으로 들어갔다는 우나자까이다. 용궁으로 들어갈 때만 문
이 생긴다고 하는데 얼핏보면 설화를 끼워 맞추고자 인위적으로 만든 듯 싶으나 엄연한 자연
산 바위이다. 또한 아들인 이소라 에비스를 버린 곳이라 하여 '이소라에비스'라 부르기도 한
다.

이렇게 하여 와타즈미신사 일대를 그런데로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부근에 있는 에보시다케전
망대와 함께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했으나 2019년 9월에 신사를
관리하는 원숭이가 본토 관광객에게 무례를 범한 일이 발생하여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20년 이후, 중공 잡것들이 천하에 악의적으로 퍼트린 코로나 전염병으로 대마도를 찾는 본
토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가 2022년 이후 조금씩 늘고 있는데, 와타즈미신사 원숭이
들이 여전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본토 사람들에게 계속 시건방을 떨자 요즘에는 대마도 여행
상품 대부분이 이곳을 차창(車窓) 관광으로 때우고 있다. 즉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
이다.
그나마 에보시다케전망대로 가는 길목이라 차창 관광으로 봐준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그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와타즈미신사 원숭이들만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니 참 근시안적인 원숭이들이 아닐 수 없다. (왜열도 원숭이들은 이곳을 비
롯한 대마도에는 별로 오지도 않음)

와타즈미신사를 떠난 우리의 버스는 니이로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별도
의 글에서(☞ 관련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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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미우다해수욕장, 한국전망대)


▲  대마도 미우다해수욕장

대마도 한국전망대

▲  한국전망대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킨의 장수 은행나무)


* 대마도의 본토는 대한민국(우리나라)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 2020년 이후 부산과 대마도를 잇는 뱃편은 1도 없으며 찾는 이도 없다.
* 본글은 2019년 이전에 간 것임을 밝힌다.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떠있는 대마도를 찾
았다.
대마도(對馬島)는 2004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그때마다 태풍이 초를 치면서 가지
를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5월에 이르러 1박2일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보우하사 100% 상륙 확정이다.

부산과 구주(규슈, 九州) 사이에 자리한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
는 708㎢의 덩치로 유인도 5개, 무인도 102개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
북으로 길쭉하다보니 제법 큰 섬으로 다가오며(남북이 82km, 동서 18km) 우리가 잃어버
린 옛 땅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의 동남
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경(國境)
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매우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저렴한 금액과 극히 짧은 시간으로 해
외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상당했
다. (2018년에 무려 40만 명이 찾았음) 허나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반드시 회복
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고속해운)에 나
를 담고 2시간 20여 분을 항해하여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엄원(嚴原)>에 도착했다.
다행히 바다가 순하게 굴어 뱃길은 매우 순탄했는데 바다가 종종 격하게 흥분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그때는 배멀미 등의 고통을 각오해야 된다. (대마도 2번째 방문 때는 3m가
넘는 파도로 완전 지옥을 맛보았음;;)
처음으로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뭐랄까.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이
나 낯익은 모습이다.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 즐거운 흥을 마치 회충
이나 세균처럼 생긴 못생긴 왜열도 글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첫날은 도보로 이즈하라 시내를 돌아다녔다. 오후 6시까지 여로(旅路)를 듬뿍 살찌우다
가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즈하라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면서 첫 날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다음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적게 나온 왜식 정식을 먹고 둘
째 날을 시작했다. (밥은 리필이 되지만 반찬은 안됨)
이 날은 전용버스로 히타까쯔까지 여러 명소를 겯드리며 이동하는 일정으로 대마도를 2
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교(만제키바시), 에보시다케 전망대, 와타즈미신사를 둘러보
고 대마도 북섬의 동쪽 도로인 39번 지방도(도요타마마치~사가~긴~슈시~히타까츠)를 따
라 북쪽으로 향했다.

대마도 39번 지방도는 겨우 구색만 맞춘 좁은 2차선 길로 거의 산악길 일색이라 구불구
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굴곡을 순화하고자 일부 구간에는 터널과 다리가 닦여졌으나
아직까지도 많이 부족하여 운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북섬 서쪽 도로인 382번 국
도(가미아카타마치 경유)도 있으나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잇는 길은 39번 지방도가 조금
지름길이다.
하여 본토 사람을 태운 관광버스는 39번 지방도를 주로 이용을 하고 있는데, 이 구간에
는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슈시강 단풍길, 나루타키폭포 등의 명소가 있다. 이들은 대마
도 여행상품에서 많이 취급하는 것들로 우리는 그중에서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를 들리기
로 했다.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왕래하는 시내버스와 투어버스는 382번 국도를 이용함)


 

  대마도 및 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백제 사람이 심었다고 전하는
장송사(長松寺) 백제은행나무 <긴의 장수은행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대마도의 북쪽 끝을 이루고 있는 상대마정(上對馬町, 가미쓰시마마치)의 남쪽 구석에는 '긴(
琴)'이란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름도 달랑 1글자인 그 마을에는 장송사란 작은 절이 있는데,
바로 그 뜨락에 대마도에서 가장 늙은 은행나무가 푸른빛 장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 높이
솟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추정 나이가 약 1,500년으로 대마도 및 왜국(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대마도가 본토의 그늘에 묻혀있던 시절부터 대마도의 부모 나무라 불렸으며, 둘레가 63.6m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상은 높이 23m, 둘레 12.5m이다.
백제(百濟) 사람이 심었다고 전해져 예로부터 백제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왜열도의
은행나무는 백제가 속방(屬邦)인 왜에 불교를 내리면서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여
이곳 나무 역시 그 과정에서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지금은 '긴'이 작고 하찮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는 대마도 북부의 관문으로 바쁘게 살았다. <신숙주(申叔舟)가 1471년에 쓴 '해동제국기(海東
諸國記)'에는 40여 호의 집이 있다고 나와있음>
장송사에 있는 나무라 하여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라 하며, 지역 이름을 따서 '긴의 장수은행
나무','긴의 대은행(銀杏木)', 왜어로는 '킨노오이쵸'라 부른다.

1798년 낙뢰를 맞아 가지가 부러지고 나무 속살이 탄 적이 있으며, 1809년에 작성된 대마기사
(對馬記事)에는 '바다에서 보면 울창하여 산과 같다'고 나와있어 낙뢰의 상처에도 그 위엄을
크게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50년 태풍 29호로 기둥나무가 아작나기도 했으나 옆에서 조그만 나무가 자라나 크게 가지를
넓히고 새 잎이 피어났다. 1990년에 열린 '국제 꽃과 초록의 박람회' 때 기획된 '신일본 명목
(名木)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조금씩 성장을 보이고 있어 생명력만큼은 젊은
나무 못지 않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백제은행나무', 그리고 백제에서 전래되었음을 안내문에 표시했으
나 역사 왜곡의 달인, 왜국이 대마도와 우리 본토의 끈끈한 인연을 자르고자 백제 두 글자를
지워버렸다. 하여 요즘에는 '긴의 장수은행나무'로 명칭을 고정시키고 그 이름을 강요하고 있
다. (왜는 대마도가 가야와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영역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지배와 영향
을 받은 흔적과 기록을 왜곡하거나 지우고 있음)


▲  사람을 작은 개미로 만들어버리는 백제은행나무의 위엄

▲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을 1,500년 이상이나
꾸역꾸역 섭취한 백제은행나무의 단단한 아랫도리

▲  은행나무 그늘에 묻힌 조그만 신사와 붉은 도리이
본토의 마을 서낭당과 같은 존재로 대마도가 왜화(倭化)가 되면서 저런
신사(神社)로 변질되었다. (매년 신사에서 제사를 지냄)


대마도 뿐 아니라 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추앙하고 있으나 정작 국가 천연기념물이 아
닌 장기현(나가사키) 지방 천연기념물 등급에 머물러있다. (1961년에 지정되었음) 본토 같았
으면 진작에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 크게 애지중지되었을텐데, 그보다 낮은 지방문화재 등급
에 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싶다. (본토와 관련된 나무이고, 대마도가 원래 본토
땅이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을 일부러 낮게 매긴 모양임)


▲  장송사 법당(法堂)

백제은행나무의 후광(後光)과 그늘을 아낌없이 받고만 있는 장송사는 조동종(曹洞宗) 소속으
로 법당과 요사(寮舍)가 전부인 조그만 절이다. 겉으로 보면 20세기 사찰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으나 무려 조선 때부터 있어온 절로 고려 현종(顯宗) 때 조성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인쇄 목판을 소리없이 간직하고 있다. (인쇄본은 11세기 이후에 많이 인쇄되어 보급되었으나
지금은 상당수가 왜열도에 있음)
대마도에서도 다소 외진 이런 구석탱이에 그런 존재가 숨어있다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울 따름
인데, 왜구가 약탈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고려 말에 고려 조정이 왜구의 공격을 불력(佛力)으
로 막고자 왜열도와 가까운 대마도에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장송사로 흘러들어와 이
곳의 듬직한 보물이 된 것이다. (대장경 인쇄본은 관람 불가)

본토 관광객들이 은행나무를 보러 많이 찾고 있으나 정작 절 승려나 동네 사람들은 거의 콧배
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단순히 백제은행나무를 보러 오는 곳이라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흥분시킬 건덕지가 없다. 그냥 조용한 절과 마을이 전부이다.

▲  '일본일수령 긴의 대은행(一樹齡
琴の大銀杏)' 나무판

▲  법당에 걸린 왜열도 스타일의
조그만 종


▲  히타까츠항 (항구 서쪽)

백제은행나무를 둘러보고 가을 단풍길로 유명한 주지(舟志, 슈시)와 나루타키폭포 입구를 지
나 히타까츠(히타까쓰, 比田勝)로 이동했다.

히타까츠는 상대마정(가미쓰시마마치)의 중심 마을로 대마도 북부의 중심지이자 북쪽 관문이
다. 대마도에서 2번째로 큰 동네로 동서로 길쭉한 어촌 마을이며, 그 앞바다가 북/서/남 3면
이 육지와 접해있고 그 3면이 동쪽에서 들어온 바다를 감싸고 있어 항구로 아주 적합하다. 대
마도가 지형이 꽤 거칠다보니 항구로 크게 부릴만한 곳이 이곳과 이즈하라 정도로 외지를 잇
는 여객선은 오로지 이 두 곳에서만 뜬다.
히타까츠에서는 부산과 하카타를 잇는 여객선이 오가고 있는데, 부산까지는 1시간 10~30분 정
도 걸린다. 그러니 대마도에 일찍 상륙하고 싶다면 히타까츠를 이용하면 된다. (이즈하라는 2
시간 20분 이상 걸림)


▲  오늘도 평화로운 히타까츠항
잔잔한 파도가 이곳의 적막을 살짝 건드리고 있고 바다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다.

▲  단조로운 모습의 히타까츠항 건너편 (히타까츠항 남쪽)

▲  히타카츠 마을 (시내라고 하기에는 동네가 작음)

히타까츠 마을은 마치 한물 간 영화세트장처럼 한적하기 그지 없다. 본토에서 배가 들어오거
나 남쪽이나 한국전망대 쪽에서 본토 사람들을 실은 관광버스가 오면 히타카츠 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잠깐씩 활기를 되찾다가 그들이 빠져나가면 다시 끝없는 고요 속으로 잠긴다.

이곳에는 본토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게다가 본토 말을 구가하는
지역 사람들도 많아서 언어 소통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  히토쓰바타고에서 먹은 왜식 우동과 유부초밥의 초라한 위엄

우리는 히타까츠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히토쓰바타고'란 왜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발
음도 어려운 히토쓰바타고는 왜어(倭語, 일본어)로 이팝나무를 뜻한다. 즉 이팝나무식당이다.
히타까츠에서 이름난 식당으로 우동, 회, 왜식 정식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대마도 여행 상품
중의 히타까츠에서 점심을 먹는 일정이 있으면 이곳과 본토 사람이 하는 식당으로 많이 간다.

여기서는 우동과 유부초밥 2개, 왜식 김밥 2개, 그리고 약간의 고등어회가 차려졌다. 우동은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양이 적었고, 고등어회 역시 여러 명이 같이 누리기에는 양이 빈약
하여 1인당 1~2개씩 집어먹으니 이내 빈 그릇이 되었다. 반찬은 단무지와 오랜지가 전부로 저
것을 다 섭취해도 왠만한 성인 남자들은 배가 차지 않는다. 그야말로 왜열도 애들의 좁쌀 같
은 마음처럼 나온 것이다. 하긴 외딴 섬에 물가도 비싸고 이윤도 많이 남겨야되니 그렇게 좁
쌀처럼 굴어야 돈이 남을 것이다.


▲  몇 조각 나오지 않은 고등어회

대마도 주변은 고등어와 방어가 많이 잡힌다. 이곳 밥상에 올라온 저 고등어 역시 대마도 산
일 것이다. 허나 정신줄 놓은 왜국(일본)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해역에서 잡은 물고기를 전
국에 저렴하게 유통시키고 있어 조금은 꺼림칙하다. 수산물 뿐 아니라 육류, 채소, 쌀, 심지
어 맥주(아사히맥주)까지 후쿠시마산을 대놓고 퍼트리고 있어 왜열도에서 음식을 섭취할 때
꼭 주의가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왜열도에 안가는 것이 좋음)


 

♠  대마도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 미우다(三字田)해수욕장

점심 후식거리로 찾아간 미우다 해변은 히타까츠에서 차로 5분 거리이다. 해변 주차장에서 확
트인 동쪽으로 가면 이국적 분위기의 미우다 해변이 쓱 나타나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을 무
심히 뒤흔든다.

미우다 해변은 미우다하마(三字田濱)라 불리기도 한다. 대마도의 이름난 해변으로 왜국 해수
욕장 100선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리 넓은 해변은 아니나 하얀색 고운 모래와 에메
랄드빛 같은 푸르른 바다, 해변을 둘러싼 산, 바로 앞에 떠있는 바위섬까지 서로 어우러져 아
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히타까츠항처럼 북/서/남이 산과 접해있고, 그 3면이 동
쪽에서 들어오는 바다를 깊이 둘러싸 자연산 방파제가 되어주고 있으며, 수심도 얕아 어린이
를 동반한 물놀이 장소로 아주 좋다.
이곳은 대마도의 필수 여행지로 대마도 여행 상품에서 90% 이상 취급하고 있다. 2018년에 40
만 명이 대마도에 발을 들였다고 하니 그중 30만 이상은 이곳에 발자국을 남겼을 것이다. 게
다가 히타까츠항에서도 매우 가까워 본토 사람들이 캠핑, 피서, 낚시로 많이 찾아온다.

▲  미우다해변의 명성을 알려주는
일본100선 해수욕장 표석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①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②

▲  나그네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바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다면 그 유혹에 흥분하여 무조건 풍덩했을지도 모른다.

▲  미우다 해변과 이곳의 상큼한 장식물, 바위섬
해변 바로 앞에는 작은 바위섬이 두둥실 떠있다.

▲  바위섬을 점거한 사람들

▲  대자연이 미우다에 내린 보물, 바위섬
바위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만약 저 섬이 없었다면 해변의 운치도 50% 이상
떨어졌을 것이며, 해변과 섬 사이에 수심도 안정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  미우다해변 북쪽 부분

▲  미우다해변의 평화로운 풍경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목을 내민 저곳은?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보이는 곳은 도노사키(전기, 殿崎)로 저곳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왜국이 자화자찬용으로 닦아놓은 '일러우호의 언덕'이 있다.

왜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그 강하다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마도에서 요행으로 때려잡
았다. 그때 영혼까지 썩 털려 방황하는 러시아군을 대마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집으
로 데리고 와 그들을 재워주고 밥을 제공했으며 씻을 수 있게 뜨거운 물도 마련해주었다는 것
이다. 하여 왜는 그것을 엄청 강조하며 러일 우호 및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현장이라고 빡빡
우겨대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는 다소 얄밉고도 씁쓸한 현장으로 몇몇 여행상품에
서는 저곳을 트래킹 명소로 들리고 있다.


 

♠  대마도 북쪽 끝에 자리한 본토 바라기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  한국전망대(한국전망소)

미우다해변을 둘러보고 이번 대마도 나들이의 마지막 답사지인 한국전망대로 이동했다. 상대
마정 북부순환로(히타까츠~미우다~도요~와니우라~오우라~히타카츠)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
면 한국전망대 입구가 마중을 나오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가파른 1차선 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와니우라 해안 언덕 정상에 자리한 한국전망대는 대마도의 최북단(부속 섬은 제외)으로 이름
그대로 대마도의 주인인 우리나라(한국)를 바라보는 전망대이다. 1997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본토식으로 지어졌는데, 본토의 한옥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서울 탑골공
원에 있는 팔각정(八角亭)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으며, 건축자재도 모두 본토에서 가져왔다.

오로지 본토 바라기로 지어진 곳으로 여기서는 본토의 부산이 바라보인다. 거리는 약 50km로
날씨가 좋으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나 우리가 갔을 때는 바다 구름이 조금 낀 상태라 부산
은 커녕 영도(影島)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날씨를 잘 맞춰서 가야 된다. 날씨에 따라 '한국
전망대'가 되느냐 단순히 '대한해협 전망대'가 되느냐 갈리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바라보는 부산의 야경(夜景)은 천하일품이라 그 야경을 찍으러 사진쟁이들의 발
걸음이 잦다. 낮에는 비록 부산이 두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밤에는 아주 지독한 흐린 날씨만
아니라면 90% 이상 부산 야경 구경이 가능하다. 여기서 부산 앞바다까지 어둠을 몰아내려는
어떠한 빛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 해변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
제까지 여기서 구경을 할 수 있다. (밤에는 오로지 부산 지역만 야경이 환함)

▲  정면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  동쪽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이곳에 전망대를 세운 것은 단순히 부산이 바라보여서가 아니다. 왜정 때 대마도에 징용 등으
로 온 본토 사람들이 설과 추석에 바다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본토를 바라보며 망향의 한
을 달래던 곳이기 때문이다.

1997년 이곳이 지어졌을 때는 부산과 대마도가 뻔히 보임에도 서로를 잇는 뱃편이 없어 본토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한국전망대는 다소 한가했다. 그러다가 1999년 뱃편이
생겼고, 본토가 바라보이는 그 잇점 하나로 본토 사람들의 발걸음이 크게 늘면서 대마도의 필
수 관광지로 성장했다.
이곳 외에도 여기서 가까운 가미아카타마치의 좌호만(佐護灣, 사고만) 해안에도 부산을 바라
보는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그곳 이름은 '이국이 보이는 언덕전망대(異國の見える丘展望臺)'
로 날씨가 좋으면 능히 부산이 바라보인다. 허나 한국전망대의 위엄에 눌려 본토 사람들의 발
길은 적으며, 대마도 여행상품에서도 거의 취급을 하지 않는다.


▲  한국전망대 밑에 펼쳐진 와니우라 포구
이곳은 대마도에서 가장 북쪽 마을이다.


전망대는 2층 규모로 2층에 대마도 관련 여러 정보와 여기서 담은 부산 사진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허나 특별한 것은 없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오로지 본토 바라기용 명소이다.
본토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부산과 대마도가 정말 가깝구나','대마도는 우리 땅','본토와 이
리 가까운데 어찌하여 원숭이들 땅이 되었나?','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해방시키자' 이런 생각
들을 많이 할 것이다.
반면 왜인들은 '한국 땅이 참 가깝다','한국을 반드시 점령하자~' 이런 생각들을 하겠지. 말
로는 대마도와 가까운 부산을 바라보는 단순한 전망대라고 하지만 속뜻은 모른다. 이래서 이
중성이 심한 왜열도 원숭이들을 늘 경계해야되며 반드시 때려잡아야된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대한해협 (부산 방향)
저 흐릿한 수평선 너머로 부산이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오늘은
바다 구름이 너무 짙어서 조망의 품질은 이것이 전부이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海栗島, 우니지마)

앞바다에 길쭉하게 떠있는 섬은 해율도(우니지마)이다. 저곳이 대마도와 왜국에서 가장 우리
나라와 가까운 최전방으로 해상자위대 군부대를 두어 매의 눈으로 북쪽을 감시하고 있다. 나
중에 우리가 대마도를 무력으로 해방시킨다면 제일 먼저 저곳을 초토화시켜야 된다.


▲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
(윗쪽 비석이 순난지비, 밑의 검은 피부의 표석이 2003년 3월 7일에 세운 것)


한국전망대 앞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가 있다. 돌로 크게 2중의 석단(石壇)을 쌓고 그
위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비석을 올렸는데, 비석의 이름 그대로 역관사의 순난(殉難)을 기억하
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1703년 2월 5일(양력 3월 7일) 조선 역관사 108명과 대마도 선원 4명을 태운 배가 부산포(釜
山浦)를 출발해 대마도로 향했다. 허나 대마도 코 앞인 와니아루 앞바다에서 격한 파도를 극
복하지 못하고 침몰했고, 배에 탄 112명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역관사는 오늘날 공무직 통역사로 대마도와 왜국에서는 그 108명이 모두 대마도 21대 도주(島
主)인 종의진 조문 및 새 도주가 된 종의방 취임 축하를 위해 왔다고 그런다. 허나 한 나라의
왕도 아니고 조선에 속한 변방 섬 도주 따위에 조문과 취임식에 그 많은 인원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때 왜열도는 지방 세력(번주)들이 중앙(에도막부)과 따로 놀던 시절이었다. 하여 규슈와 혼
슈의 많은 지방 세력들은 조선에 조공(朝貢)을 보내거나 정치적,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
다. 마침 대마도주 조문과 취임 축하를 위해 역관사를 보낼 일이 있어서 그 배에 에도막부와
지역 세력들에게 파견하는 역관들까지 싹 태워서 보낸 것이다. 아무리 조선의 항해술이 우수
하다고 해도 거친 바다를 뚫고 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지라 한꺼번에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마도 직전에서 침몰하여 그 아까운 외교 인재들이 싹 변을 당한 것이다.

이후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1991년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 순난지비를 세웠으나 그들의
이름은 모두 애석하게도 전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가문가사료(宗家文庫史料)'에서 그들
의 이름을 머금은 묵서소책자(墨書小冊子)가 발견되었고, 그들의 300주기가 되는 2003년 3월
7일 기존 순난비 앞에 그들의 명단을 적은 표석을 세웠다.
그때 역관사의 대표는 정역(正譯)인 한천석(韓天錫)이며, 부역(副譯)은 박세량(朴世亮) 등 20
여 명, 50여 명의 중관(中官), 20여 명의 하관(下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존재는 대마
도에서 이렇게나마 남게된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는 거리는 무척 가까우나 바다가 종종 흥분기를 보여 선박 침몰 사고가 많이
있었다. 특히 한국전망대 앞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 주변이 가장 말썽으로 1459년 통신사
(通信使)를 태운 배 2척이 침몰해 1명을 빼고 모두 사망한 일이 있었으며,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대마도로 적지 않게 표류해와 대마도주는 그들을 표민옥(漂民屋)에 수용하여 고향으
로 보냈다. (대마도주는 표류민들의 표민옥 숙박비를 조선 조정에 청구했음)


▲  한국전망대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산책로

한국전망대는 주변 조망까지 포함해서 20~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히타까츠 뱃시간 때
문에 20분 남짓 머물다 떠났지만 시간이 널널하다면 주차장 동쪽에 있는 풍포대(豊砲臺)유적
과 주차장 서쪽 언덕에 있는 조그만 신사도 같이 보기 바란다. 신사는 와니우라 마을의 서낭
당 같은 존재로 근래 지어진 작은 건물이나 대마도 해안 마을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
으며, 풍포대는 왜정 때 대마도 보호를 위해 닦여진 요새의 하나이다.


▲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우리를 옮겨줄 대아고속해운 오션플라워호

한국전망대를 끝으로 대마도 답사는 아쉽게도 마무리가 되었다. 부산행 마지막 뱃시간 때문에
미우다해변과 한국전망대에서 머문 시간이 다소 짧지만 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 보통 봄과 여
름, 가을에는 부산행 마지막 배가 16시대에 있고, 겨울과 초봄에는 15시대에 있는데, 그 시간
에 따라 히타카츠 주변 일정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다시 히타카츠 마을로 돌아와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면세점(免稅店)에 들렸다. 대마도가 우
리의 옛 땅이나 지금은 외세가 불법 점거하고 있는 상태라 해외로 분류되고 있다. 해외여행에
서 면세점 방문은 필수라 이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건강식품과 화장품, 빵과 초
콜렛 등의 간식류, 기념 장식용, 담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대마도를 찾는 본토
사람 중에는 오로지 면세점 쇼핑 때문에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행들은 담배와 화장품, 왜식 된장인 나토 등의 건강식품을 많이 샀으나 나는 돈도 없고 딱
히 땡기는 것이 없어서 아주 저렴한 고양이 장식물을 샀다. 이른바 오른발을 들고 복을 부른
다는 고양이상이다. 가격은 400엔 정도로 기억한다.
그렇게 면세점의 호주머니를 넉넉히 채워주고 히타카츠 여객터미널로 넘어갔다. 한산한 히타
까츠 마을 거리와 달리 여객터미널은 본토로 돌아가는 본토 사람들과 부산을 찾는 대마도 애
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 30분 정도 대기하다가 16시 넘어서 부산으로 가는 대아고속해운의 오션플라워(Ocean
flower)호에 몸을 싣는다. 이 배는 전날 부산에서 이즈하라로 내려왔을 때 탄 배로 하루만에
다시 신세를 진다.

시간이 되자 배는 입을 모두 봉하고 미끄러지듯 대한해협으로 나간다. 다행히 파도는 잔잔했
고 여로를 너무 살찌우다보니 몸이 고단하여 40분 이상 꿈나라를 방황했다. 그렇게 1시간 10
여 분을 달려 부산항국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날 아침에 이곳을 출발해 다음날 오후
늦게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말 1박2일 짧기는 짧다. 하긴 인생도 짧다고 하는데 그까짓
1박2일은 정말 티끌만도 못하지.

여기서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2004년부터 벼르고 별러서
이제서야 건너간 대마도, 옛날 가야와 신라, 백제가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마도와 대
한해협을 지겹도록 건너갔고 660년 이후, 백제가 망하자 수만 명의 백제 사람들이 대한해협을
거쳐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인 왜로 넘어갔다.
신라는 종종 군사를 보내 대마도와 왜를 쳤고, 신라 후기에는 신라해적이라 표현된 신라 수군
과 지방 세력의 수군이 대한해협과 대마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니며 크게 위엄을 과시했다.
(894년 대마도를 공격한 신라해적은 후백제 수군으로 여겨짐) 고려 현종(顯宗) 때는 발해(渤
海) 후손의 일원인 여진족 수군이 대마도와 규슈를 초토화시켰으며, 1274년과 1281년 고려와
원(몽골) 연합군 역시 대마도와 규슈를 아작냈다.
조선통신사는 왜열도와 대마도 단속을 위해 이 거친 바다를 건너갔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많
은 본토 사람들이 이 바닷길을 건너 대마도와 왜열도로 건너갔다.

다음에 대마도를 찾을 때는 꼭 여권 없이 갈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2년 뒤 방문에도 여권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만큼 대마도는 우리에게 애증의 땅이다. 휴전선 이북 회복도 급하지만 툭
하면 독도(獨島)가 지네 땅이라 개소리나 일삼는 왜국의 헛소리 대응용으로 대마도는 꼭 걸고
넘어가 반드시 우리 영역으로 해방시키기를 꿈꿔본다.
대마도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어여 우리를 왜열도 원숭이들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솔직히 왜
국도 대마도를 변두리 섬으로 여겨 크게 관심도 없고 완전 외면 수준이다. 심지어 왜열도 애
들은 대마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들도 수두룩 하다고 한다. 만약 본토 부산에 편입되면
대마도는 지금보다 훨씬 환경이 좋아지고 찾는 이가 100% 이상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대마도
가 살려면 예전 주인에게 오는 것이 맞다. (물론 지나친 난개발은 안됨)

이렇게 하여 대마도 첫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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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40리를 거닐다 (죽성리 월전, 대변항, 죽도, 오랑대, 해동용궁사)



'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죽성리 월전에서

대변을 거쳐 해동용궁사까지) '

▲  연화리 앞바다 (멀리 보이는 곳은 대변항)


 

  월전에서 대변까지

▲  남쪽에서 바라본 월전포구

기장읍 동쪽 죽성리(竹城里)에서 시작된 우리의 기장 동해바다 봄나들이는 죽성리 일대의 명소
<죽성리해송(海松), 죽성리왜성(倭城), 황학대(黃鶴臺), 죽성성당>를 두루 둘러보고 월전을 거
쳐 대변으로 향했다. <기장 죽성리 부분은 ☞ 이곳을 흔쾌히 클릭
>

월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대중교통은 하나도 없으며, 1.5~2차
선 정도의 길(기장해안로)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펼쳐진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
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여럿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별장처
럼 생긴 집들이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대변이나 월전으로 외식을 하러 가거나 드라이
브를 나온 차량들이 수시로 매연을 뿜고 지나갔고, 대변~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
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가 있는 곳과 몇몇 장소를 빼고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  가지각색의 기암들이 율동을 부리는 월전 남쪽 바닷가

▲  바다와 자갈과의 속삭임
물이 얼마나 푸르던지 4월 중순이란 시간을 잊고 풍덩풍덩 들어가고 싶다.

▲  바닷가에서 만난 튤립(Tulip)의 위엄
아주 잘익은 빨간 튤립 6송이와 노란 튤립 2송이가 바다 바람을 따라 경쾌하고도
귀엽게 봄의 율동을 선보인다.

▲  월전과 대변 사이의 바닷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설마 저기서 석유를 시추하는 것은 아니겠지?

▲  잠시 우리가 왔던 북쪽(죽성, 월전)을 돌이켜보다.

▲  대자연의 물감이 빚어낸 동대해

아무리 천재화가라 한들 대자연 형님이 빚은 작품 앞에서는 그저 한줄기 낙서에 불과하다. 아
무리 용을 써서 흉내를 내어 본들 저런 빛깔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색깔만 하리요. 그만큼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럼에도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거나 섬기지는 못할 망정 계속 괴롭히고 정복하려고만 드니 자연
의 인내력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지 의문이다. 그의 인내가 폭발하면 결국 서로가 좋지 못할
텐데 말이다.


▲  대변 북쪽 바닷가
이 부근에 영화 '친구'를 찍은 바닷가가 있다.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
수영하고 놀던 그 현장 말이다.

▲  대변 동쪽 방파제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대변항이 끝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대변항(大邊港) 둘러보기

▲  대변항의 심장부에 들어서다, 대변항 어시장

월전에서 3km를 가니 나올 것 같지 않던 대변이 방파제를 시작으로 서서히 속살을 보이기 시작
한다. 바다를 따라가면서 수다도 떨고 이리저리 사진도 찍고 바다에 무심히 돌도 던지며 가다
보니 그 거리가 썩 지루하지 않았던 것이다.


▲  대변항 앞바다
방파제가 남,북으로 길게 방패처럼 둘러져 있고 동쪽에는 죽도가 떠있어
파도와 태풍에도 거의 끄떡없는 안전한 항구의 요건을 갖추었다.


이름도 좀 거시기한 대변리(大邊里)에 뉘어있는 대변항은 기장군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기장을
포함한 부산을 대표하는 어촌(漁村)으로 천하에 제법 알려진 곳이다. 기장의 명물인 미역과 멸
치회로 유명하며, 매년 4월에는 기장 멸치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대변항은 거의 'C'자 모양으로 육지쪽으로 크게 움푹 들어갔는데, 항구의 남북 폭은 300m 정도
이며, 항구 앞에는 죽도란 조그만 섬이 두둥실 떠 있어 자연산 방파제가 되어준다. 하여 일찍
부터 어촌으로써 크게 발전을 누렸으며 방파제까지 2중으로 두르면서 안전한 항구로 그 품격을
높였다.
새벽을 시작하는 도시, 기장 고을에 걸맞게 아침 일찍부터 바다로 조업을 떠나는 배들로 대변
항은 정신이 없으며 동이 트면 어시장도 활기를 누린다. 늦은 시간까지 싱싱하고 물오른 해산
물을 구경하고 먹을 수 있으며, 이곳으로 끌려온 생선과 해산물은 다양한 판매 경로를 통해 서
울을 비롯한 천하로 절찬리에 팔려나간다.
 
대변리 한복판에 있는 대변초교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질없는 쇄국정책의 꿈이 담긴
척화비(斥和碑)가 있는데 학교 바깥에서도 바라보이며, 기장읍내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토암도
자기공원이 있다. 또한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오랑대공원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는 죽성
리와도 이어져 대변항을 중간지 또는 기/종점으로 삼아 해안 산책이나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


※ 대변항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부산 지하철2호선과 동해선 벡스코역(9번 출구)에서 부산시내버스 139, 181번을 타고 대변이
  나 대변항입구 하차
* 부산 지하철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181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 동해선 송정역(1번 출구 건너편)에서 139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
① 부산시내 → 송정3거리 우회전 → 기장해안로 → 대변항 (또는 송정3거리에서 직진하여 연
   화육교 교차로나 청강4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도 됨)
② 부산시내(반송) / 울산 → 기장군청 → 청강4거리 좌회전 → 대변항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  풍어(豊魚)를 꿈꾸며 항구에 몸을 기대 고단한 몸을 쉬는 어선들

▲  대변항 풍경
평화로운 어촌 풍경이 오염된 안구를 조금이나마 정화시켜준다.

▲  바다 너머로 보이는 대변항 북쪽과 붉은 피부의 등대

▲  대자연이 대변 앞바다에 살짝 던져놓은 푸른 점 하나, 죽도(竹島)

앞서 죽성리에 황학대가 있다면 대변리에는 죽도가 있다. 둘 다 섬이긴 하나 황학대는 연륙되
어 버렸고 오직 죽도만 섬으로 남아있는데, 기장 지역의 유일한 섬으로 (조그만 바위섬 제외)
예로부터 기장 제일의 해안 명소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기장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섬의 모습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며 대나무가 많아 죽도란 흔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비
오는 날 밤에 빗방울이 대나무잎을 스치면서 내는 청아한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부여잡으면서
야우(夜雨)의 승경으로 꼽히기도 했다. 또한 시원한 샘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애용했으며, 조
그만 암자가 있었으나 이미 옛날에 사라지고 없다.

예전에는 육지와 200m 정도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락거렸으나 주변 바다를 야금야
금 메우면서 섬의 덩치가 조금 불었다. 그래도 섬의 성격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으나 섬 전체
가 어느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금지된 섬이 되버렸다.
섬 주인은 육지까지 다리를 가설해 섬을 한반도에 단단히 붙들어 두었으나 기왕 다리까지 만든
거 대변항의 상징으로 속세에 개방해 관광지로 꾸미면 어떨까 싶다. 허나 섬 주인은 그럴 생각
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원래부터 기장의 공유 명소였던 죽도를 왜 혼자서만 누리고 있는지 그
저 야속할 따름인데 기장군에서 섬을 매입하거나 섬 주인과 협의하여 시민들의 품으로 흔쾌히
돌려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  대변항 남쪽 앞바다 - 푸른 물감이 잔잔한 여울을 이룬다.

▲  대변항 남쪽에서 바라본 연화리

▲  대변항 앞바다 바위를 점거한 구공(鷗公, 갈매기)들
사람들의 손이 미치기 어려운 조그만 바위섬에 구공들이 들어와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꾸린다. 한때 새우깡의 제왕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입맛이 고급이
되었는지 이제는 별로 거들떠도 안보는 것 같다.

▲  대변항 남쪽 풍경 (녹음이 우거진 중간 부분이 죽도)


 

  연화리에서 오랑대까지

▲  연화리에서 멀리감치 바라본 대변항

▲  물빛이 진한 연화리 앞바다

대변항에서 연화리 앞바다까지는 길이 이어져 있다. 길가에는 해산물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많
이 있는데 4월의 한복판임에도 벌써부터 옷깃을 풀게하는 철모르는 더위와 죽성리부터 걸어온
피곤함으로 잠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며 두 다리를 달래기로 했다.
허나 가게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마침 이쁘게 치장된 까페 하나가 사막 속에 오아시스
처럼 나타나 우리를 손짓한다. 그를 보는 순간 시원한 걸 마시며 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솟
구쳐 별 망설임 없이 그곳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빙수를 먹으려고 했으나 여름에만 판다고
해서(그때 날씨가 거의 여름이었음;;;) 흔한 이름의 커피 종류를 시켰다.

여기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10리 이상 부려온 두 다리의 불만도 잠재우고 이른 더위의 압박
에서 벗어나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린다. 까페는 2층 규모인데, 차를 마시러 온 가족 단
위와 중년층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  연화리 까페에서 마신 커피의 위엄

▲  멀리서 본 오랑대(五郞臺)

까페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바
다 위에 높이 뜬 햇님은 퇴근시간이 점점 늦어짐을 원망하며 햇살의 강도를 점차 줄이면서 퇴
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화리 까페에서 바다를 따라 1km 정도를 가니 머리에 조그만 건물과 탑을 지고 있는 허벌나게
큰 바닷가 바위가 모습을 비춘다. 그가 바로 오랑대이다.


▲  꼬깔모자를 연상시키는 오랑대 (꼭대기에 자리한 건물은 용왕각)

오랑대는 기장의 주요 해안 명소의 하나이다. 조선 어느 때에 이곳으로 유배를 온 사람이 있었
는데, 그의 친구 5명이 머나먼 이곳까지 놀러와 오랑대 바위에서 곡차(穀茶)를 겯드리며 가무(
歌舞)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한다. 그래서 5명의 선비를 뜻하는 뜻에 오랑대란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임)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 광경이 가히 장관으로 주변에는 멋드러진 기암괴석이 많다. 오랑대를
원시적인 모습으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으련만 오랑대 바닷가에 자리한 혜광사(慧光寺)가 그곳
을 접수하여 바위 꼭대기에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용왕각(용왕단)을 달면서 보기가 좀 딱하
게 되었다. 용왕각 지붕에는 괴상하게도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을 올려놓았는데 멀리서 보면 오
랑대 용왕각의 모습이 마치 만화에 나오는 꼬깔모자처럼 보인다.


▲  오랑대 지붕에 자리한 용왕각

▲  용왕각에 봉안된 동해 용왕상

오랑대를 옆구리에 낀 혜광사는 법등(法燈)이 매우 짧은 현대 사찰이다. 오랑대 옆에 터를 다
지고 들어선 바닷가 절집으로 대자연이 빚은 오랑대를 휼륭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린
다.
오랑대 용왕각에는 용왕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좌우에는 앳된 동자(童子)상이 있으며 용왕 뒤
로 유리창을 내어 그의 활동무대인 동대해가 보이게끔 했다. 지붕에는 네 모서리에 용머리를
달아 건물의 품격을 높이려고 애썼으나 시멘트 집이라 썩 정감은 가지 않는다. 절집답게 목조
기와집으로 지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 오랑대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부산시내버스 100, 181번을 타고 혜광사 하차, 혜
  광사 방면으로 도보 7~8분 (100번이 그나마 배차간격이 짧다. 139번과 181번은 거의 20분 간
  격)
* 부산 동해선 송정역(1번 출구 건너편)에서 139번 시내버스를 타고 혜광사 하차.
* 승용차 (혜광사에 주차장 있음)
① 부산시내 → 송정3거리 우회전 → 기장해안로 경유 → 혜광사입구 우회전 → 혜광사
② 부산시내(반송) / 울산 → 기장군청 → 연화육교 교차로 좌회전 → 기장해안로 → 혜광사입
   구 좌회전 → 혜광사

* 오랑대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혜광사 ☎ 051-721-3167)


▲  1칸 규모로 조촐한 용왕각

▲  오랑대 주변 풍경 - 낚시삼매에 빠진 강태공들이 여럿 보인다.

▲  오랑대에서 바라본 대변항

오랑대를 둘러보고 바다를 따라 해동용궁사 방면으로 이동했다. 허나 군부대로 그만 길이 막혀
부득이 혜광사 뒤쪽 산길을 이용해 기장해안로로 탈출했다.

기장해안로 주변은 혜광사입구부터 당사리까지 관광단지와 쇼핑타운를 짓는다면서 산과 들판을 
죄다 밀어버려 폐허의 공간처럼 아주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인근에 오랑대와 해동용궁사, 대
변항, 국립수산과학원, 국립부산과학관 등의 명소를 받쳐주기 위한 관광단지라고 우기고 있으
나 굳이 그런 것이 없어도 이들 명소를 찾는 발길은 여전하다. 고위 위정자 밥버러지들이 그저
개발과 돈, 치적 쌓기에만 급급해 안그래도 좁은 강토를 자꾸 바람직하지 않게 건드리니 실로 
씁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개발의 칼질과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시랑리를 지나니 어느덧 용궁사입구
에 이르렀다. 여기서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다가 이곳
까지 온 거 잠깐 들리기로 했다.
용궁사는 2000년과 2014년에 가본 기억이 있는데, 오랜만에 발을 들인 바닷가 사찰, 용궁사는
관람객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경내 곳곳에 불전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돈을 요구하고
있고 바닷가든 대웅전(大雄殿) 앞이든 사람들이 징그럽게 많아서 거의 사람들 뒷통수만 본 것
같다. 이곳은 딱히 정도 들지 않고 사진에 담고 싶은 생각도 없어 대충 1바퀴 살피고 나왔다.

용궁사를 나오니 시간은 18시, 송정까지 마저 행군할까 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걷는 것은 여기
서 쿨하게 접고 부산시내버스 181번(기장 청강리↔센텀시티)에 고된 몸을 싣고 시내로 나왔다.

이날 죽성리에서 용궁사까지 걸은 거리는 거의 40리 정도, 우스개 소리로 거의 몇 달 걸을 분
량을 그날 하루에 다 걸었고, 바다도 정말 지겹게 두 눈에 넣어서 당분간 바다를 안봐도 섭섭
하지 않을 듯 싶다.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판을 벌인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는 재생이 불가능한 아련한 과거의
일부로 산산히 흩어지고 말았다. 역시나 사람의 인생은 무상(無常)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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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기장 죽성리 일대) '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와 동해바다
(정면에 큰 나무가 죽성리해송)

▲  죽성리왜성

▲  죽성리 월전포구


 

 

지루했던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전히 천하를 접수했던 4월의 한복판에 겨울로부터 해방된
기분도 만끽할 겸, 그리운 얼굴도 보고자 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은 이 땅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로 북쪽은 울산 울주군(蔚
州郡), 서쪽은 경남 창원과 김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너른 동해바다를 품고 있
으며,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는 큰 지역이다.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잠시 대구에서 발길을 멈추고 팔공산(八公山)에 안긴 파계사(把溪
寺)와 성전암(聖殿庵)을 둘러보며 산사(山寺)의 봄 풍경을 즐겼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런 다음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에 있는 친
한 형님 집에 문을 두드렸다.

저녁을 먹고자 광안리 해변 인근을 거닐다가 소금구이 닭갈비집이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를 피고 닭갈비에 소주를 여러 잔 걸치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물론 1차로 끝나면 섭하
지. 하여 집으로 돌아와 2차를 하며 다음날 나들이 장소를 모의하다가 새벽 1시에 꿈나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부시시 잠에서 깨니 벌써 9시였다. 그
날 일정은 다소 길기 때문에 잠에서 벗어나기 싫은 게으른 몸을 억지로 끌며 세수를 하고
10시에 광안동을 나섰다. 광안역 정류장에 이르니 그의 후배 하나가 합류하여 3명이서 기
장군(機張郡) 동해바다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동)을 타고 수영로터리, 해운대, 송정역
, 청강리를 지나 기장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기장지구대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건너편 정
류장에서 죽성리로 가는 기장군 마을버스 6번을 기다리니 5분도 안되어 버스가 나타나 활
짝 입을 벌린다.
주말 나들이 수요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바퀴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석을 이루었다. 우리는
재빨리 탑승하여 앉아갈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입석 신세를 면치 못할 뻔했다. 비
록 죽성리까지 10분 정도 거리에 불과하지만 서서 가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힘든 것은 마
찬가지이다.
버스는 시간이 되자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몸을 움직였다. 죽성사거리와 기장
군청 남쪽 고개, 신천리를 지나 죽성초교에서 두 발을 내리니 바로 남쪽 언덕에 우리의 1
번째 목적지인 죽성리 해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6그루가 합심하여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룬 오래된 소나무
죽성리해송(竹城里海松) - 부산 지방기념물 50호

▲  죽성리해송의 위엄

죽성리 두호마을 서쪽에는 얕으막한 언덕이 푸른 초원처럼 누워있다. 대부분 경작지가 이루어
진 그 언덕 정상에는 유난히도 초록 빛을 발하는 장대한 소나무가 동대해(東大海)를 굽어보고
있으니 그 나무가 바로 이곳의 오랜 명물인 죽성리 해송이다.

죽성리 해송은 소나무의 일종인 곰솔로 줄기 껍질이 다른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
이라 불리기도 하며, 바닷가 소나무란 뜻의 해송(海松)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곰솔은 남쪽
바닷가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데 소금기가 서린 짠 바닷바람에도 잘 견딘다.
이 나무는 겉으로 보면 1그루로 보이지만 6그루의 나무가 한 지붕을 이룬 것으로 높이 약 10m,
나무 지름이 30~40m에 달한다. 나이는 250~300년 정도로 여겨지며 언덕에 있는 경작지를 바닷
바람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곰솔 가족은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
며 서로를 보듬고 있으며, 거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어 안내문을 살피지 않으면 정말 1
그루의 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나무의 키가 훤칠하게 크고 덩치도 제법 있으며, 반경 0.5리 이내에는 키 큰 나무도 거의 없어
세상 중심에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웅장함을 진하게 풍긴다. 그리고 나무의 자태도 아름답고 바
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정상에 자리해 있어 사진쟁이와 그림쟁이들이 많이 찾는다.

해송의 그늘로 들어서면 나무들 사이로 조그만 당집인 국수당이 끼여있다. 나무가 제법 풍채를
드러내며 자라나자 마을 사람들이 나무 사이에 당집을 만들어 마을 성황신을 모시는 국수당으
로 삼았는데,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제물을 푸짐하게 차리고 풍어제(風魚祭)를 지낸다. 이 땅
의 어느 마을이든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당집이 있지만 나무 사이에 당집을 둔 경우는 별로
없다.

* 죽성리해송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49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 두호마을과 동대해

▲  해송 밑에 둥지를 틀어 마을을 지키는 국수당(성황당)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국수당은 풍어제 등 당제(堂祭) 외에는 굳게 닫혀져 있다.
나무 밑도리 사이에 당집이 깃든 흔치 않은 곳으로 당집 좌우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내부를 보호한다.

▲  솔잎과 솔방울, 거기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까지 듬뿍 더해져 가지가
거의 땅으로 내려 앉았다. <철기둥을 세워 가지가 땅에 완전히
주저앉지 않도록 막고 있음>

▲  죽성리해송 인근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기장 미역
기장은 미역이 유명하다. 이렇게 해송 인근에 널어두었으니 해송의 기운도
양념으로 듬뿍 더해져 더욱 최상품으로 끌어올려줄 것이다.


 

  죽성리에서 만난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 부산 지방기념물 48호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왜성 (산꼭대기에 보이는 성)

죽성리해송에서 서쪽(바다와 반대쪽)을 보면 높다란 언덕 위로 성곽 하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까
이에 보일 것이다. 그 성곽이 바로 임진왜란이 이곳에 남긴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이다.

해송에서 정겨운 시골길을 5분 정도 가면 왜성을 품은 언덕 밑에 이른다. 이곳에는 주차장, 해
우소가 있는데, 여기서 성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타고 2~3분 오르면 왜성의 아랫도리에 이
른다. 계단은 답사 편의를 위해 기장군에서 닦은 것으로 계단 옆에 흙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
니 개인 취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왜성 아랫도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왜성의 중심부이고, 중심부 서남쪽에 왜성 꼭대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왜성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천수대(天守臺)터가 있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
성(大阪城)에 있는 푸른 지붕을 지닌 큰 기와집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죽성리왜성은 1593년 봄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왜군과 지역 주민을 동원해 쌓은 순수
100%의 왜성(倭城)이다. 한참 북진을 하며 세를 과시하던 왜군은 1593년에 접어들어 조선의 대
대적인 토벌 작전과 왜열도에서는 맛보기 힘든 강추위로 고전하면서 순식간에 울산과 기장, 부
산, 창원 등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밀려나기 싫었던 왜군은 바다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과 언덕에 성을 쌓고 자기 집 마냥
들어앉아 장기전을 준비했다. 그들이 해안가 언덕을 선호한 것은 수비력 강화와 서로 간의 긴
밀한 연락 및 병력/군수물자 수송 편의, 그리고 위급시 신속히 줄행랑을 치고자 함이다.

이 왜성은 죽성리 뒤쪽 언덕에 자리해 있는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과 부산왜성 중간에 자
리해 서로를 연결하였다. 성 둘레는 약 960m, 성벽 높이 4m로 3단으로 축성되었으며, 성내(城
內) 면적은 11,776평 정도로 왜성 가운데 큰 편에 속한다. 장방형(長方形)의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은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진 이른바 들여쌓기 공법이다. 이 공법은 천하
제일의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했던 고구려(高句麗)의 축성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왜열도에서는 기장성(機張城)이라 부른다. 지금도
왜열도에서 많이 답사를 온다고 하는데, 1598년 왜군이 도망친 이후 성이 버려지면서 천수대와
성문, 주요 시설이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
다. 허나 성곽은 쓸데없이 잘 남아있어 왜성 가운데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때 사적 52호의 외람되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으나 1997년 사적에서 정리되어 버려졌다가 부
산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수습해 죽성리해송, 죽성성당, 죽성리 해변과 한 덩어리로 묶어 기장군
의 주요 명소로 키우고 있다.

왜성 주변은 상당수 경작지로 쓰이고 있으며, 왜성 북쪽과 계단이 있는 남쪽에는 소나무가 조
금 우거져 마치 양쪽에만 머리숱이 조금 있는 대머리를 보는 듯 하다.


▲  죽성리왜성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계단 주변은 유난히 소나무가 무성하여 이 땅을 요란하게 거치고 간 아픈 과거를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 하다. 그런다고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  풀이 잔잔히 돋아난 죽성리왜성의 아랫부분

▲  약간 비스듬히 누운 죽성리왜성의 본성(本城)

▲  왜성 외곽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던 성문터
왜성은 작은 산이나 언덕에 짧게 몇 겹으로 두룬 덩어리 같은 형태라 딱히
긴 성이 없다. 그나마 서생포왜성이 좀 긴 편에 속한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항과 두호마을
저 포구에 배를 정박해 주변 왜성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고 끝내는 저곳을 통해 줄행랑까지 쳤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
평화로운 어촌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와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하다.
바닷가에 죽성리 두호마을과 월전마을(사진 오른쪽)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과 포구 주변에는 경작지가 많아 나무가 별로 없다.

▲  왜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애타게 열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  왜성의 중심인 본환(本丸, 본성)

▲  연병장처럼 넓은 본환 - 잡초가 잔잔히 녹색 물결을 이룬다.

▲  죽성리왜성 서쪽에 길게 누운 봉대산(烽臺山) 북쪽 자락

죽성리왜성은 계곡이 없는 낮은 언덕에 자리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 왜성 서쪽에 있는
봉대산에서 식수를 운반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후방이라 물 수송에
는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봉대산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음>

▲  본환의 서북쪽 성곽

▲  북쪽에서 바라본 본환 내부


▲  죽성리왜성의 꼭대기인 천수대(天守臺)터

왜성 정상부에 자리한 천수대는 왜장이 자고, 먹고, 부하들을 지휘하던 공간으로 사방이 확 트
여 조망(眺望)도 일품이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성이나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축소판
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했을 천수대의 모습이
자못 대단했을 것이며, 조선군의 공격 가능성이 적은 후방이라 왜장은 무척 편하게 지냈을 것
이다. (조선군이 서생포왜성을 점령해야 이곳을 마음 편히 공격할 수 있었음)

※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① 부산시내에서 기장읍까지
* 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81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1번
  은 해동용궁사, 대변으로 다소 돌아감)
* 지하철 2호선 장산역(5/7번 출구 사이)에서 182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30~40
  분 간격)
* 지하철 4호선 안평역(4번 출구)에서 36, 183, 188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3,
  188번을 탔을 경우 기장중학교, 기장성당에서 내려도 됨)
* 부산대병원(1호선 토성역 9번 출구), 남포동, 부산역, 경성대 부경대역(1번 출구)에서 1003
  번 급행좌석버스를 타고 기장성당이나 기장지구대 하차
* 동해선 전철(부전↔일광)이나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기장역에서 하차, 1번 출구
  를 나와서 4분 정도 걸으면 기장중학교 정류장이다.
② 기장에서 죽성리까지
* 기장지구대, 기장중교(기장역 1번 출구), 기장성당에서 기장군 마을버스 6번(20~40분 간격)을
  타고 죽성초교 하차, 해송까지는 도보 5~6분, 왜성은 10분 정도 소요 / 황학대는 두호마을에
  서 내리면 되며, 월전마을은 월전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③ 승용차
* 부산시내(반송/해운대) → 죽성4거리에서 죽성리 방면 죽성로로 진입 → 죽성초교 → 죽성리
  해송, 죽성리왜성, 죽성성당 (왜성 밑에 주차장 있음 / 해송은 인근 길가에 주차)

* 죽성리왜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일원


 

  죽성리 바닷가 둘러보기 (황학대, 죽성성당)

▲  죽성항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황학대)

▲  죽성리의 오랜 경승지, 황학대(黃鶴臺)

씁쓸한 화석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죽성리왜성을 둘러보고 죽성항(죽성포구)으로 나왔다. 죽성
리는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어촌이지만 볼거리와 해산 먹거리가 풍성하
여 생각 외로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든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죽성리해송과 왜성이 있고, 바
닷가에는 황학대와 드라마 촬영지였던 죽성성당이 있으며 마을 남쪽에는 월전마을이 있다. 먹
거리는 죽성리 북부인 두호보다는 남부인 월전이 더 많은데, 이곳은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죽성항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조촐한 바위 동산이 포구의 운치를 조금 돋구고 있다. 이 동산은
기장의 오랜 명승지인 황학대로 예전에는 거의 섬이었으나 방파제와 항만 시설이 닦이면서 육
지로 흡수되었다.


▲  황학대의 동남쪽 부분

황학대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야 워
낙 유명한 인물이니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가 여기서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1616년(광해군 8년)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북인(北人) 일파의 죄상을 밝히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린 것이 원인이 되어 서울에서 2,000리 이상 떨어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떨려
났다. 그러다가 1년 뒤, 거기서 3,000리 이상 떨어진 기장 죽성리로 이송되어 7년이나 유배생
활을 했다. 귀양살이 때문에 조선 땅을 남북으로 완전 종주를 했던 것이다. 토가 나올 정도로
그 먼거리를 강제로 이동하느라 고산도 무척 진을 뺐을 것이다.

윤선도는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松島)를 옛날 신선이 황학(黃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황학루(黃鶴樓)와 견주어 황학대로 멋대로 이름을 갈고 매
일같이 찾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
그는 여기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의 주옥 같은 시 6개를 남겼으며, 죽성리 뒷산
인 봉대산에 자주 올라가 약초를 캐어 병에 걸린 지역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거나 치료를 해
주니 죽성 사람들은 그를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던 윤선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20세기 후반에 방파제와 항만 공사로 백사장 또
한 이슬처럼 사라졌으며, 강제로 연륙되어 육지의 일부가 되버리면서 옛 운치도 다소 녹아내렸
다. 게다가 이곳을 덮고 있는 소나무도 1995년 수해로 뿌리가 뽑히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로
도 계속 나무들이 말라가면서 황학대는 그야말로 세월의 무덤 같은 곳이 되버렸다.
다행히 기장군청에서 1,000만원의 돈을 들여 황학대를 살피면서 나무들이 다시 살아났고 웃음
을 잃었던 황학대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이곳의 풍경을 크게 수식해주는 꿀단지가 되었다.


▲  황학대의 정상 부분
윤선도 뿐 아니라 지역 선비들과 동네 사람들이 술 1잔의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두호마을 당집
바다에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굳게 닫힌 문짝에 3색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다.

▲  죽성항의 평화로운 풍경
바깥 세상은 아비규환처럼 숨가쁘게 흘러가건만 이곳은 모든 게 정지된 듯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죽성리왜성이 활용되던 임진~정유란 시절에는
왜군들의 배로 득실거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  바닷가에 자리한 죽성성당

두호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서양 동화에나 나올법한 작은 성당(聖堂)이 있다. 이 성당은 2009년
에 방영된 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장으로 콩 볶듯이 지어진 것으로 겉모습만 성당이다.
아담하게 생긴 성당과 주변의 해안 풍경이 아름다워 죽성리의 새로운 명소로 추앙받고 있으며,
처음에는 죽성성당이라 불리다가 드라마 이름을 따서 '드림성당'으로 바꾼 것을 다시 죽성성당
으로 갈았다. 지어진지 10년도 되지 않았건만 건물이 벌써부터 노화현상을 보여 2017년 2월 새
로 지었는데, 이때 지역 사람들이 종교적인 부분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여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싹 치워버렸다. 그래서 정체가 더 아리송한 성당 아닌 성당이 되어버렸다.

▲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하얀 피부의
성모마리아상 (지금은 없음)

▲  옆에서 바라본 죽성성당
성당 바로 옆에 등대가 붙어있다.


▲  죽성성당 주변 바닷가에 드러누운 울퉁불퉁 바위들

▲  죽성리의 어느 장어구이집에서 먹은 장어구이

죽성리 일대를 정신없이 누비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아침도 먹지 못한 터라 뱃속은 그야말
로 폭동 직전, 하여 불만에 잠긴 뱃속을 달래고자 점심 장소를 물색하다가 월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두호마을은 회와 조개, 장어구이를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지만 장어구이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월전마을에 밀려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반해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월전마을의 많
은 식당들은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주차장이 바라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황제처럼 먹을 요량으로 남정네에게 무척
이나 좋다는 장어구이와 모듬조개구이를 주문했다. 이렇게 장어와 조개구이를 먹으니 곡차 1잔
을 겯드려야 되겠지. 그래서 동동주도 넉넉히 시켰다.


▲  모듬조개구이의 위엄

자신을 불태우는 숯불 위에 먼저 장어를 올려 모락모락 익혀 입에 넣는다. 장어는 맛이 좀 별
로였으나 장어 후속으로 구운 모듬조개구이는 맛깔스러웠다. 큰 조개 안에 조개살을 비롯해 파
와 마늘 등이 버무려져 하나의 작품처럼 나왔는데,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우니 거기서 나오
는 육수(조개의 눈물)가 제법 끝내줬다. 그래서 서로 조개를 더 챙기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밑반찬은 김치와 도토리묵, 상추, 산채나물 등 대략 8가지 정도가 펼쳐졌다. 밑반찬도 그런데
로 맛이 괜찮아 밥도둑이 따로 없었으며, 금세 동이 나고 더 달라고 한 것이 가히 5번은 넘을
듯 싶다. 동동주도 금세 1동이를 비워 하나를 더 불렀는데 배가 불러 간신히 2번째 동이를 비
웠고, 메밀막국수로 식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어대니 폭동 직전이던 뱃속은 며칠을 굶어도 끄떡 없을 정도로 가득 찼고, 식
곤증의 일환으로 졸음이 슬쩍 마수를 부리자 후식 커피로 그들을 쫓아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일행들은 송정(松亭)까지 걸어가자고 했으나 여기서 거기까지는 20리가 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  남쪽에서 본 월전마을 (월전포구, 월전방파제)

죽성리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월전마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시
내버스나 마을버스는 일체 없으며, 1.5~2차선 정도의 길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어진
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大
邊)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민가(民家)가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월전, 죽성으로 외식을 가거나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3분이 멀다하고 지나
갔고 대변에서 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도 종종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
가 있는 곳을 빼고는 어디든 자유롭게 바다 곁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내용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언젠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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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4월 2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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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성지 순례]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트래킹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 부산 해운대~송정 바다 산책 '
(동백섬,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해운대해수욕장

▲  해운대해수욕장

▲  문텐로드 오솔길

▲  송정해수욕장


 


반년 가까이나 천하의 절반을 지배하던 겨울 제국(帝國)이 완전 저물고 봄이 하늘 아래 세

상을 말끔히 해방시킨 4월 첫 무렵 주말에 따뜻한 남쪽,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의 오랜 단골집인 광안동(廣安洞)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인근 고깃집에서 삼겹
살에 곡차(穀茶, 술)를 들이키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를
마시고 자정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오전, 찬란한 여명과 선배의 재촉에 졸린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해는 이미 중천에
올라 천하를 비춘다. 아직까지는 초봄이지만 따스한 남쪽이라 한낮에는 다소 더울 듯 싶어
반팔 옷을 지원받아 착용하고 그 위에 긴 옷을 걸쳤다. 역시나 시작부터 덥기 시작하여 광
안동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반팔로 다녔다. 이렇게 나갈 채비를 하고 11시 정도 집을 나
섰다.

그날 일정은 동백섬에서 시작하여 해운대해수욕장, 달맞이고개, 청사포, 구덕포를 경유 송
정까지 해안을 따라 거닐며 봄꽃 구경까지 겸한 10여 리의 해안 산책으로 광안역에서 부산
시내버스 40번(청강리공영차고지↔구덕운동장)을 타고 해운대 직전인 운촌에서 내렸다. 바
로 여기서부터 대장정의 해안 산책이 시작된다.


▲  해운대 대우마리나아파트 벚꽃길 ▼

운촌 서쪽 부근에 대우마리나아파트가 있다. 그 아파트 주변 도로에 벚꽃이 장관을 이루며
길다란 벚꽃길을 이루고 있는데,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겨울 눈이 봄의 눈치를 받은 탓일까
? 그대로 벚꽃으로 변한 듯하다. 대자연이 빚은 순백(純白)의 아름다움 앞에 우리가 할 일
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찍기 밖에는 없다. 잔잔히 스치는 바람에 벚꽃잎은 비처럼 우
수수 흩날리며 대지를 적시고,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수 차례씩 앗아간다. 이런 풍경
이 바로 조그만 선경(仙境)이 아니겠는가?


▲  순백의 종결자 - 벚꽃의 위엄
겨울 제국의 오랜 시련을 극복하고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피운 벚꽃들
허나 저들의 천하도 김옥균(金玉均)의 3일 천하만큼이나 짧으니
사람이든 꽃이든 인생이란 정말 무상한 것 같다.


♠  해운대의 꽃 ~ 동백(冬柏)섬 (동백공원)
부산 지방기념물 46호

▲  동백섬 산책로 (최치원 동상에서 해운대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

대우마리나아파트 동쪽 길을 가면 동백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남쪽으로 길을 건너 동백교란 다
리를 건너면 숲이 무성한 해운대의 꽃, 동백섬(동백공원)이 펼쳐진다.
해운대해수욕장 서남쪽에 자리한 동백섬은 그 이름 그대로 동백나무의 섬으로 원래는 해변 앞에
두둥실 뜬 조그만 섬이었다. 그러다가 수영강(水營江)과 장산(萇山)에서 흘러내린 흙과 모래가
억겁의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이면서 동백섬과 해변을 조금씩 이어주었고 끝내는 하나가 되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부가 되었다.

동백과 해송(海松)이 무성한 이곳은 신라가 망해가던 9세기 후반, 최치원(崔致遠)이 벼슬을 버
리고 천하를 방랑하던 중 이곳 풍경에 단단히 매료되어 동백섬 남쪽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머문 기념으로 누리마루 동쪽 해변에 '해운대(海雲臺)'란 바위글씨를 남겼는데, 해운대란
지명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하며, 해운(海雲)은 그의 수많은 호 중의 하나이다. <고운(孤雲)
이 대표적인 호임>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수많은 문인(文人)들이 해운대의 명성을 듣고 앞다투어 찾아와
시와 글, 그림을 남겼으며, 대한8경의 하나이자 부산 제일의 관광지로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
고 있다. 흔히 해운대하면 해운대해수욕장과 해운대역(2호선) 주변 번화가를 생각하기 쉽지만
해운대의 원조는 바로 동백섬이다.

동백섬을 이루는 야트막한 언덕은 운대산(雲臺山)이라 불리는데, 그 정상에는 최치원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조그만 최치원 유적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산책로와 누리마루는 사람들로 미어
터지지만 정상 주변은 그 1/10 정도로 인적이 적다. 이는 관광객 상당수가 바다만 생각하지 공
원을 이루는 산(언덕)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안 산책로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거미줄처럼 형성되어 있으므로 어디로 오르든 정상으로 통
하며, 해수욕장과 이어지는 동쪽 해변에는 인어공주상과 해운대 바위글씨가 있고, 남쪽 해변에
는 등대와 2005년 APEC 21개국 정상회의가 열렸던 세계적인 명소, '누리마루 APEC하우스'가 둥
지를 틀었다.

울창한 해송과 여인네의 입술처럼 붉은 동백, 그리고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천하 제일의 명승지
로 해운대의 얼굴이며,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았다면 누리마루를 포함한 동백섬 일대를 꼭 둘러보
기바란다. 동백섬 일대는 길게 잡아도 1~2시간 내외면 충분히 둘러본다.


▲  동백섬 서쪽 해변에서 희미하게 다가오는 광안대교(廣安大橋)

▲  동백섬 남쪽 산책로 (누리마루 입구)

▲  동백섬 남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천하 (멀리 보이는 산은 이기대)
아무리 천재화가라고 해도 결코 나오기 힘든 바다의 푸른 빛깔~~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만든 천연 물감만 할까?

▲  누리마루APEC하우스(누리마루)

동백섬 남쪽 해안에는 2005년 APEC 정상회의가 열렸던 특이한 모습의 건물, 누리마루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벗삼으며 자리해 있다. 해운대의 새로운 꿀단지로 크게 조명을 받은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누리마루 APEC 하우스'로 '누리'는 세계, 세상을 뜻하는 우리 말이며, '마루'는 정상,
꼭대기를 의미하는 우리 말이다. 그러니까 순수 우리말로 '세계의 우두머리들이 모이는 집'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누리마루는 부산시가 194억의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지은 것으로 2004년 9월에 공사를 시작
하여 2005년 9월 30일에 완공을 보았다. 건물 높이는 지상 3층의 24m, 연건평은 905평으로 그
모습은 우리나라 전통 정자(亭子)를 모델로 하였으며, 지붕은 동백섬의 아름다운 능선을 형상화
하였다. 건물을 받치는 12개의 기둥은 부산의 역동적인 모습을, 내부 장식은 우리나라의 전통문
화를 시각적으로 나타내었고, 대들보 형태로 만들어 단청을 입힌 로비 천장과 대청마루를 닮은
로비 바닥, 경주 석굴암(石窟庵)의 천정을 모방한 정상회의장, 그리고 구름 모양을 형상화한 오
찬장까지, 건물 곳곳에 이 땅의 전통 양식이 짙게 배어 있다.

2층에는 오찬장과 행사요원실, 간이주방, 홀 등이 있으며 3층에는 회의장, 정상대기실, 수행원
대기실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 바로 제3차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나라 우두머리와 수행원, 언론 기자들은 앞을 다투며 역대 정상회의장 가운
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평가했다.

APEC회의가 역사의 일부로 사라진 이후, 2006년 2월까지만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으나 해운대의
새로운 명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자 애초의 생각을 바꾸고 지금까지도 별일이 없는
이상은 계속 속세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 나에게도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라 간만에 들어가 보
려고 했으나 내 마음 같지 않던 선배의 거부권 행사로 그냥 통과하고 말았다.

★ 누리마루 관람정보 (2015년 7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입장은 17시까지, 매주 1째 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국제회의나 기타
  주요 행사가 있을 때는 관람 제한)
* 공개된 구역만 고분고분 다녀야 되며, 일반인 금지구역은 애써 들어가지 말 것.
* 입장료는 없으며, 내부 사진촬영은 자유이다. (단 약간의 제약이 있음)
* 1층에는 APEC 기념품점이 있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동백로 116)
* 누리마루 홈페이지는 위의 누리마루 사진을 클릭한다 (문의 ☎ 051-744-3140)


▲  동백섬 등대
해운대 주변을 지나는 배들을 위해 오늘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등대.
등대 주변 풍경이 너무 속시원하여 가슴이 확 트이고도 남음이 있다.

▲  해운대 바위글씨 - 부산 지방기념물 45호

동백섬 등대에서 동쪽(해운대해수욕장이 바라보이는 쪽) 아래 자갈밭으로 시선을 옮기면 '海雲
臺'란 글씨가 새겨진 울퉁불퉁한 피부의 바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이 바로 해운대의 지
명 유래가 된 현장으로 9세기 후반 최치원이 직접 새긴 것이라고 전한다. (해운은 그의 호)
허나 글씨의 건강 상태가 1,100년 묵은 것 치고는 너무 양호한 것 같고 최치원을 흠모하던 이들
이 절경이 좋은 곳에 그와 관련된 적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붙인 터라 별로 믿을 바는 되지 못한
다. 아마도 후대에 그를 기리던 누군가가 썼을 지도 모른다. 다만 고려 후기에 활약했던 정포(
鄭誧 1309~1345)의 시에
'대는 황폐하여 흔적이 없고, 오직 해운(海雲)의 이름만 남았구나'
라는 구절이 있어, 그 당시에
도 저 글씨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위글씨가 바닷가에 있어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괴롭힘을 받은 탓에 가운데 글씨인 '雲'
자가 조금은 닳았으나 나머지 글씨는 거의 양호하여 시력이 좋고 한자만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
리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관광특구 해운대 지역의 유일한 문화유적이건만 눈여겨 보는 이는 별로 없다. 한결같이 바닷가
경치와 누리마루에만 혼들이 빠져있을 뿐이다.


▲  동백섬 정상에 자리한 최치원 동상
동백섬을 이루는 운대산 정상에 최치원의 동상이 있다. 동상 좌우로 병풍처럼
늘어선 하얀 벽면에는 이은상(李殷相)과 김충현(金忠顯)이 직접 쓴 최치원의
시 10편이 새겨져 있으며, 동상 앞에는 넓게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해안 산책로와 달리 이곳은 인적이 적어 한적해서 좋다.

              ▲  최치원 유적비
그가 정녕 해운대의 전설처럼 이곳에 머물렀는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오로지 잠시 머물렀다
는 한토막 야사 하나만으로 유적비를 세우고 동
상을 세워 그의 유적지를 조성한 것이다.

▲  최치원 동상 동쪽에 자리한 2층 해운정
(海雲亭)
최치원의 후손과 그를 기리는 이들이
세운 정자로 별로 특별한 것은 없다.


▲  최치원 동상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책로
동백섬은 해안도 아름답지만 동백꽃 향기로 무성한 정상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단연
백미가 아닐까 싶다. 허나 아쉽게도 많은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해안산책로와
누리마루만 볼 뿐, 이렇게 아름다운 해운대의 속살을 지나치고 만다.

▲  최치원 동상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책로 (2)

※ 동백섬(동백공원)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동백역(1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누리마루와 최치원동상은 도보 20분)
* 부산 139, 307, 1003번(좌석) 시내버스를 타고 동백섬입구 하차, 도보 5~6분
* 동백섬 북쪽과 송림공원 주변에 주차장이 있다. 공짜 주차를 원한다면 동백섬 민영주차장 서
  남쪽에 자리한 무료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휴일에는 늘 미어터짐)

★ 동백섬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음, 주차비 징수 (공짜 주차장도 있음)
* 누리마루 주변 일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  대한8경의 한 곳이자 부산의 화려한 입술
해운대해수욕장(海雲臺海水浴場)

해운대해수욕장은 우리나라 해수욕장의 대명사이자 수백만의 피서객이 몰려오는 피서의 성지(聖
地) 및 국제적인 관광지이다. 예로부터 백사청송(白沙靑松)과 동백섬의 수려한 경관으로 대한8
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경승지인데, 신라 때부터 명성이 자자하여 해운대 온천에 신라 귀족들이 
놀러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9세기 후반에 최치원이 이곳 풍경에 퐁당퐁당 빠진 나머지 동백섬에
잠시 머물며 자신의 호 중 하나인 해운(海雲)을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곳 이름
이 해운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시인묵객들들이 해변이 닳도록 찾아와 해운대의 아름다움을 시와 노래로 표현했고, 20
세기에 들어와서 해수욕장과 온천, 동백섬을 중심으로 꾸준히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해마다 헤아
리기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국내외 관광객들로 시장통을 이루는 어엿한 세계적인 명소로 성장했
다. 우리나라의 주요 관광 특구로 부산에 처음 가본 사람이라면 필수로 들려야 되는 부산 초보
관광지의 하나이기도 하다.

해운대해변은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서 물놀이 하기에 좋으며, 여름에는 모래사장이
꺼지도록 피서객들이 몰려와 뉴스에 자주 회자되기도 한다. 피서철 휴일에는 최대 수십만 명이
백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봄/가을/겨울 주말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는다.

해안 길이는 1.6km로 부드러운 곡선의 해안을 따라 여러 호텔과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섰으며, 해
운대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아쿠아리움이 있다. 해변 서쪽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동백
섬과 해변의 경계를 짓고 있으며, 해변 동쪽에는 횟집이 즐비한 미포가 있고, 그 미포를 지나면
달맞이고개이다.

※ 해운대해수욕장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3,5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부산 139, 307, 1003번(좌석) 시내버스를 타고 해운대해수욕장 하차

★ 해운대해수욕장 관람정보

* 해수욕장 개장기간은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 주차공간 - 4,800대 정도 <주차 요금은 1시간에 3~4천원선>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문의 해운대관광안내소 ☎ 051-749-5700)
*
해운대해수욕장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해운대해변 서쪽 (동백섬을 온몸으로 가린 부산 웨스틴조선호텔)
바다는
잔잔한 물결로 백사장 모래를 어루만지며 서로의 정을 확인한다.

▲  백사장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흔적과 그들의 추억들이 서려있다.
잔디처럼 부드러운 바다와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선 백사장. 해와
달도 반하여 서로 다툰다는 해운대는 부산의 백미이다.


▲  백사장 뒤에 마련된 소나무 산책로
산책로의 길이는 인간의 부질없는 인생만큼이나 짧다.

▲  해수욕장에서 만난 어느 조각품
새가 퍼덕퍼덕 날개짓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해변 동쪽을 장악한 백구(白鷗, 갈매기)들 (비둘기도 약간 있음)
해변 서쪽과 중앙은 사람들로 봐글거리지만 미포와 이웃한 동쪽은 한산하다.
사람 대신 하얀 갈매기들이 해변을 장악하며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꾸린다.

▲  해운대해변 동쪽에 자리한 미포
해운대와 오륙도(五六島), 부산항 주변을 도는 관광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으로
횟집들이 갈매기 수만큼이나 즐비하다.

▲  열차도 발길을 끊은 미포 철길건널목

미포 철길건널목은 바다가 코앞에 보이는 시가지에 위치한 탓에 해운대의 명물로 꼽힌다. 드라
마와 영화의 단골 촬영지로 부근 주막들은 드라마/영화 광대들과 촬영 관계자들이 거쳐간 흔적
들이 요란하게 남아있고 식당들은 그것을 내세워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자 애를 쓴다.

이 건널목은 포항에서 부산을 잇는 동해남부선의 일부이나 2013년 12월 송정~해운대 구간 철로
가 직선화되면서 더 이상 열차가 지나가지 않는다. 그로 인해 해운대~미포~청사포~구덕포를 거
쳐 송정으로 이어지던 낭만의 해안 구간은 폐선되었다.
허나 이 구간은 역사 속으로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꽤 아까운 구간이니 요즘 철도 직선화와 비수
익 구간 등으로 버려진 철로를 레일바이크(Rail Bike)로 활용하거나 강릉과 삼척을 잇는 해안테
마열차를 운영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미포 건널목 왕년의 시절 이곳을 지나던 동대구발 부전행
새마을호 열차의 위엄
한때 새마을호는 고급, 쾌속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높은 가격에 비해
실속이 무척 떨어지는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  미포 건널목 부근 할매집원조복국집에서 먹은 복국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나들이와 답사에서 먹는 재미를 빠
뜨릴 수 없다. 마침 시간은 오후 1시, 시장기가 하늘을 찌르는 시간이다.
무엇을 먹을까 망설이다가 건널목 부근 복국집에 시선이 멈추면서 그곳에 들어갔다. 식당 내부
벽에는 건널목을 거쳐간 영화 광대들이 남긴 각가지 싸인들이 가히 벽지를 이룬다. 심심풀이로
그 싸인들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갖은 반찬과 밥, 복국이 차례대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콩나물
과 복어, 파 등이 일체를 이룬 복국 뚝배기를 뚝딱 비우니 해장을 한 듯 속이 개운하다. 이렇게
점심을 먹고 가득찬 배를 두드리며 달맞이고개로 이동했다.


♠  해운대의 눈썹, 달맞이고개와 해운대의 숨겨진 속살, 청사포

▲  달맞이고개 ▼

달맞이고개는 해운대 동쪽 해안가에 두툼히 솟은 언덕이다. 내륙 쪽은 완만하게 솟아있지만 해
안 쪽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급하며 그 해안의 끝에 동해남부선 철도가 간신히 자리를
비집고 지나다녔다.
바닷가에 둥지를 튼 언덕으로 절경이 아름답고 조망이 일품이며, 예로부터 이곳과 부근 청사포
에서 바라보는 저녁달이 운치가 있어서 달맞이고개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달빛 사냥
장소로 제격인 달맞이고개는 해운대가 부산시내의 일부가 되어 급속히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서 고개 자락에는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섰으며, 바다와 마주한 달맞이길 주변에는 미술
관과 갤러리, 찻집(까페), 주막들이 정신없이 뿌리를 내렸다.

해운대의 화려한 눈썹 같은 달맞이고개는 달맞이길이 중심이다. 봄에는 벚꽃놀이 장소로 사람들
을 끌어모으며, 수려한 경관으로 휴일에는 늘 사람과 수레들로 몸살을 앓는다. 달맞이길은 미포
5거리에서 송정에 이르는 고갯길로 부산의 주요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며, 4발 수레의 눈치를 받
기 싫다면 문텐로드(Moontan Road)라 불리는 오솔길도 아주 괜찮다. 어쩌면 오솔길이 달맞이길
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문텐로드는 달맞이길 남쪽 해안 언덕에 자리한 달맞이동산(해운대 달맞이공원)에 조성된 오솔길
로 앞서 누리마루처럼 우리말로 적당한 이름을 지어주어도 좋을 터인데 왜 굳이 영어로 지었는
지 관련 공무원들의 사상이 의심된다.


▲  문탠로드 코스 (해운대구청 홈페이지 참조)

문텐로드는 달빛나들목이나 달맞이길입구에서 들어가면 되며 달맞이어울마당과 바다전망대로 이
어진다. 물론 청사포로 넘어가도 된다. 해안 언덕에 자리해 있어 끊임없는 해조음을 감상할 수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여 동백섬, 암남공원 못지않은 경관을 우려낸다.

※ 달맞이고개, 문텐로드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중동역 5,7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가면 미포5거리이다. 그 5거리를 남쪽으
  로 건너면 바로 달맞이고개(달맞이길)가 시작된다. 문텐로드는 달맞이동산 방면으로 조금 가
  다보면 오른쪽에 나온다.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00, 141, 2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미포 문
  텐로드입구' 하차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  달맞이길에서 바라본 천하
왼쪽으로 아련히 보이는 산은 이기대, 오른쪽에 진하게 보이는 곳은 동백섬과 해운대

▲  소나무가 무성한 문텐로드 오솔길
해조음을 먹고 자란 소나무들이 베푼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정신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  문텐로드 바다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물감이 흐드러진 동해바다가 달맞이 해변을 살포시 어루만진다.

▲  문텐로드 오솔길

▲  송림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청사포 방파제와 등대

▲  달맞이고개 밑을 지나는 동해남부선 -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청사포(靑沙浦) 마을의 봄

달맞이고개에서 해안 쪽으로 넘어가면 해운대의 숨겨진 속살, 청사포가 모습을 비춘다. 해운대
와 송정 사이 바닷가에 둥지를 튼 조그만 포구로 남쪽은 바다가 넝실거리고 나머지 3면은 산에
꽁꽁 둘러싸여 있다. 부산의 부도심인 해운대 지척에 있음에도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어촌에 발을 들인 듯 마을의 분위기는 평화롭고 한가롭기 그지 없으며, 도심 속의 한적한 어촌
이자 교통이 불편한 벽지로 부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포구의 이름인 청사포는 말 그대로 푸른 모래의 포구이다. 하지만 원래는 사(沙)가 아닌 뱀이나
용을 뜻하는 사(蛇)였다. 즉 푸른 뱀의 포구인 청사포(靑蛇浦)였던 것이다. 포구 이름의 대해서
는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를 빨던 머나먼 옛날, 갓 혼인을 한 남자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
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자 아내는 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곳(이곳을 망부송과 망부대라고
부름)에 올라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애타게 기다렸다. 그 여인의 정성에 감동을 받은 동
해 용왕(龍王)은 푸른 용을 급파하여 실종된 남편과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연유로 푸른
용을 뜻하는 청사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허나 시간이 흘러 마을 사람들은 동네 이름에 뱀을 뜻
하는 사(蛇)가 있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래서 은근슬쩍 사(沙)로 바꿨다는 것이다.

이곳은 동해와 남해 경계에 자리해 있어 예로부터 낚시터로 명성이 높았으며, 회와 조개구이를
파는 주막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조개구이가 유명하여 매스컴을 탄 조개구이 식당이 여럿 있다.
허나 맛은 거의 비슷비슷하니 무작정 유명한 집에만 목숨 걸고 줄 서지 않아도 된다. 또한 앞의
전설에서 여인이 남편을 기다리던 장소를 망부대(亡婦臺)라 부르며, 그곳에 있는 400년 묵은 소
나무를 망부송(亡婦松)이라 부른다. 이들은 청사포의 명소로 너무 바다와 조개구이에만 목숨걸
지 말고 꼭 둘러보길 권한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몰라 지나치고 말았음)
청사포 마을은 매년 풍어제(風魚祭)를 지내는데 무려 400년 이상이나 이어졌다. 그 풍어제는 해
운대 풍어제의 기원이 되었으며. 근래에 소소하게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이미 몇천 년 전
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속세에서 이곳을 찾아가려면 어지간해서는 달맞이고개를 넘어야 된다. 속세로 나가는 수레길은
고개 쪽으로 난 길(청사포로)이 전부라 휴일 저녁에는 외식을 즐기려는 수레들로 자주 막힌다.
그나마 근래 4차선으로 확장되어 다소 숨통이 트였다. 허나 사람은 수레보다는 출입이 자유로워
청사포로 외에도 문텐로드 산길이나 송정으로 넘어가는 가느다란 해안길을 이용해도 된다.

※ 청사포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해운대전화국(2호선 해운대역 1번 출구에서 도보 2분)이나 2호선 장산역(5번 출구)에서 청사
  포로 들어가는 해운대구 마을버스 2번 이용 (20~25분 간격)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  청사포를 동서로 가르는 옛 동해남부선
산 윗쪽에 건물이 빽빽히 우거진 달맞이고개(달맞이길)가 보인다.

▲  청사포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수평선 너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지구가 정말 둥글긴 둥근 모양이다.

▲  월척을 꿈꾸는 강태공 (청사포~구덕포 중간)


♠  해운대 동쪽에 자리한 송정해수욕장, 구덕포

▲  구덕포 해안

청사포 북쪽 끝에는 주차장을 갖춘 커다란 식당이 있다. 언뜻 보면 길이 끊어져 보여 '왔던 길
을 되돌아가야 되나?' 싶은 좌절감이 생길 수 있지만 주차장을 지나면 바닷가로 내려가는 가느
다란 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면 바로 송정까지 갈 수 있다.
길은 바다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철길 옆도 지나고 낭떠러지 부분도 제
법 있으므로 반드시 주의를 요한다. 이렇다 할 안전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길 중간중간에 바다
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바다를 원한다면 조심스레 내려가면 된다.

청사포에서 송정으로 가는 해안길은 아는 이가 적고 인적이 적어 한적하고 호젓한 해안 산책을
누릴 수 있다. 해변 바위에는 강태공들이 드문드문 진을 치며 월척을 위해 낚시대를 드리운다.


▲  구덕포(九德浦) 마을

청사포에서 해안 산책로를 15분 정도 가면 조그만 어촌마을, 구덕포가 모습을 비춘다. 송정해수
욕장 남쪽에 자리한 구덕포는 미포, 청사포와 더불어 해운대3포(浦)라 불리는데, 미역과 멸치,
조개가 많이 생산되며, 청사포와 마찬가지로 해산물을 다루는 횟집과 식당, 그리고 민박 등의
숙박업소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이곳으로 1박 여행이나 모임을 오는 부산 지역 학교나 단체,
동호회가 많다.
마을 남쪽과 동쪽은 바다로 막혔고, 서쪽은 산지가 가로막고 있어 오로지 북쪽만 외부로 뚫려있
다. 길도 송정으로 통하는 북쪽 길이 유일하다. 그래서 속세에서 이곳에 오려면 무조건 송정을
거쳐야 된다. 청사포는 그래도 마을까지 들어오는 마을버스라도 있지 구덕포는 그딴 것도 없다.
송정까지 와서 20분 정도 걸어야 된다.

구덕포는 옛날 함안조씨 일가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마을 서남쪽 산자락에 당
집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14일과 6월 14일에 용왕제(龍王祭) 거릿대장군제를 지낸다.


▲  구덕포 표석의 위엄

▲  송정해수욕장(松亭海水浴場)

해운대 동쪽에 자리한 송정해수욕장은 해운대와 달맞이고개(신곡산)를 사이에 두고 자리해 있다.
부산의 주요 해수욕장의 하나로 꼽히며 백사장 길이는 1.2km, 면적은 62,150㎡이다. 여름에는
수십 만의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피서의 성지로 수백 만이 모여드는 해운대보다는 조금은 한가하
며, 조개구이와 해산물을 취급하는 식당과 민박 등의 숙박시설이 가득하다.
해변 동쪽 끝에는 죽도산(竹島山)이라 불리는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언덕이 있는데 해발이 고작
24.2m이다. 산이라기 보다는 야트막한 언덕이 더 어울릴 것이다. 죽도산은 원래 해변 앞에 떠있
던 죽도(竹島)란 섬으로 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연륙되어 한반도의 일원이 되었다. 죽도산은 죽
도공원이라 불리기도 하며, 남쪽 해변에 송일정(松日亭)이란 있다. 특히 송정해변과 죽도공원에
서 지켜보는 일출과 월출은 가히 장관이다.

송정은 옛날에는 '갈개', '가을포(加乙浦)'라 불렸다. 지금은 없지만 바닷가에 갈대가 무성했다
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 고종 시절 이곳 출신으로 승지(承旨)에 올랐던 노영경이 자신이 바닷가
에서 태어났음을 감추고자 멋대로 송정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갈개 외에 '광어골'로
불리기도 했다.

※ 송정해수욕장(구덕포, 송정역)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38, 39, 63, 100, 100-1, 141, 181, 20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송정해수욕장입구 하차 (100, 181번은 송정해수욕장까지 들어감)
* 부산지하철 2호선 장산역 1번 출구에서 182번 시내버스, 10번 출구에서 38, 139, 1001번 시내
  버스 이용 (139번은 해운대역으로 다소 돌아감)
* 부전역과 태화강역, 경주역, 포항역, 동대구역에서 출발하는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송
  정역에 정차한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

 
▲  송정역(松亭驛) - 등록문화재 302호

송정해수욕장 북쪽에는 한때 동해남부선의 일원이던 송정역이 자리해 있다. 이 역은 1940년대에
동해남부선의 간이역으로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철제
창고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띄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2006
년 문화유산의 새로운 등급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때 동해남부선 열차가 모두 정차하던 역으로 피서의 꿈을 안고 찾아온 나그네들로 북적거렸지
만 2013년 12월 동해남부선 송정~해운대 구간이 직선화되면서 지금보다 더 북쪽에 새 송정역이
지어졌다. 그로 인해 열차는 모두 그곳으로 갔고, 역의 임무도 새 역이 전담하게 되었다. 기존
송정역은 그래서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한 신세가 되었는데, 아마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
다면 건물의 목숨 조차도 위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 없다.

송정역을 끝으로 해운대 동백섬에서 시작된 해운대~송정 해안 투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구
덕포와 문텐로드를 제외하면 예전에도 여러 번 발걸음을 했었고, 해운대 같은 경우는 정말 지겹
게도 찾았지만 이번처럼 깔끔하게 둘러본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적지 않은 거리를 걸었지만
푸른 바다와 언덕, 봄꽃, 숲길을 겯드린 풍경이 절대로 지루하지 않았기에 정말 짧은 거리를 걸
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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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7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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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상징을 거닐다 ~ 오륙도 (등대섬, 오륙도등대, 백운포)

 


' 부산의 상징, 오륙도(五六島)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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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륙도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백운포 방파제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  백운포 방파제


여름의 제국(帝國)이 봄을 몰아내고 한참 성하(盛夏)의 기반을 닦던 6월 중순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다.
광안리 해변과 가까운 광안동(廣安洞)의 친한 형님 집에 여장을 풀고 달이 기울도록 회포(懷
抱)를 풀다가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간단한 차림으로 오륙도와 백운
포를 찾았다. 광안역에서 백운포까지는 거리도 가깝고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
동)이 바로 앞에까지 데려다주니 접근성은 참 좋다.

백운포(白雲浦)는 용호동 남쪽 해안으로 체육공원과 남구국민체육센터, 해군기지가 있고, 서
쪽에는 숲이 무성한 신선대(神仙臺)가 있다. 신선대는 태종대(太宗臺)에 버금가는 해안 경승
지로 유명했으나 신선대컨테이너터미널과 항구 조성으로 옛날의 운치가 많이 녹아내렸다.


▲  백운포에서 바라본 오륙도

▲  백운포 방파제
백운포 둑방에는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월척을 꿈꾸며 낚시삼매에 빠져있고
한국해양대를 품은 조도(朝島)와 영도 태종대가 그리 멀지 않게 바라보인다.


▲  수레들로 가득한 오륙도선착장 주차장


♠  부산의 아담한 상징, 오륙도(五六島)에 들어서다 - 명승 24호

▲  오륙도 - 명승 24호
(가장 왼쪽부터 방패섬과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천하

용호동 앞바다 부산만(釜山灣)에 두둥실 떠 있는 오륙도는 6개로 구성된 바위섬이다. 그렇다면
6개의 섬이란 뜻의 육도(六島)라 불려야 맞는 것 같은데 왜 5와 6을 같이 붙인 오륙도가 된 것
일까? 이는 섬의 구성원인 방패섬과 솔섬 때문이다. 이들은 썰물 때는 하나의 섬이 되지만 밀물
때는 엄연히 2개의 섬으로 나눠진다. 이렇게 기가 막힌 자연의 눈속임으로 하루에 2번씩 5개의
섬이 되었다가 6개의 섬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그 이름도 오륙도가 된 것이다.

오륙도는 12만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이어진 조그만 반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장대한 세
월이 흐르면서 거센 파도의 시달림에 따른 침식작용으로 한반도와 분리되었으며, 그마저도 내버
려두지를 않아 5~6개의 섬으로 쪼개졌다. (선착장 부근 지질과 방패섬의 지질적 구성이 동일하
여 옛날에 서로 이어져 있었음을 보여줌)


오륙도
란 이름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東萊府誌 山川條)에 '오륙도는 절영도(絶影
島, 영도)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뫼의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으니 동쪽에
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기록이
있어 조선 말 이전부터 오륙도라 불렸음을 보여준다.
 
섬의 구성원을 보면 육지와 가장 가까운 방패섬은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막아준다는 뜻이며, 방패
섬과 거의 한몸인 솔섬은 섬 꼭대기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방패섬
과 솔섬을 합쳐서 '우삭도'라 부르기도 한다.
그 다음 수리섬은 갈매기를 노려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곳이란 뜻이며, 송곳섬은 작고 뾰족하게
생겨서, 굴섬은 오륙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커다란 굴이 있는데, 천정에서 흐르는 물로 능히 1
명 몫의 식수는 해결할 수 있다고 하여 굴섬이라 부른다.
등대섬은 오륙도 형제 가운데 가장 한반도에서 먼 섬으로 선착장에서 1km 해상에 있는데, 오륙
도등대를 달고 있어서 등대섬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섬에 평탄한 곳이 있어서 밭섬이라 불렸으
며, 등대 직원과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어 오륙도 유일의 유인섬이다.


오륙도 부근은 조류가 무지 빨라 이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은 공양미(供養米)를 바다에 던져 해신
(海神)을 달랬다고 한다. 근래까지 용신제(龍神祭)를 지내기도 했으며, 신라 후기에는 동아시아
바다를 점유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오륙도 앞 항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단골 소재로 많은 시와 노래에 등장했으며, 그중에서 노산 이은상(李殷
相)의 오륙도란 시가 유명하다. 부산을 드러내는 오랜 상징이자 관문으로 동해바다와 왜열도에
서 부산항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오륙도의 눈치를 보며 지나야 된다.

오륙도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섬이지만 낚시터로도 명성이 높아 섬만 둘러보고 가는 관광
객에 비해 낚시꾼의 비중이 매우 높다. 오륙도 식구를 비롯하여 오륙도일자(一字)방파제(북항방
파제)에는 굳은 날씨를 제외하고는 늘 낚시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반도에서 오륙도에 가려면 일단 용호동 오륙도선착장으로 가야된다. 거기서 오륙도를 이어주
는 유람선을 타면 되는데, 일정한 운항시간표는 없다. 대체로 30~5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
는 거의 20~30분 간격으로 자주 뜬다. 운항노선은 선착장을 출발하여 오륙도일자방파제를 먼저
들른 다음 등대섬과 굴섬, 수리섬, 방패섬을 두루 돌고 육지로 돌아온다. (운항순서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음)
일반 관광객은 오륙도등대가 있는 등대섬에서 많이 승/하선을 하지만 낚시꾼들은 등대섬을 포함
해 배가 다니는 모든 섬과 방파제에서 승/하선을 한다. 등대섬과 방파제에는 배를 대는 공간이
있어 거기서 타면 되지만 나머지 섬은 따로 들리는 곳이 없다. 손을 흔들어 승차 의지를 밝히면
그 부근에 세워준다. 섬과 방파제를 찾은 사람들은 배가 끊기기 전에 나와야 되며, 그렇지 않으
면 섬에서 강제로 1박을 보내야 된다. 운항시간은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 후까지이다.

동해바다와 남해바다가 만나는 공간에 자리한 오륙도는 가까이로 신선대와 백운포를 비롯해 조
도와 영도, 태종대가 보이며, 동구(東區), 해운대 일대가 두 눈에 박힌다. 태종대와 더불어 부
산의 해금강(海金剛)으로 전혀 손색이 없으며, 예전에는 부산 지방기념물 22호였으나 2007년 문
화재청 지정 명승 24호로 승진되었다.

▲  방패섬

▲  수리섬과 송곳섬

▲  굴섬

▲  송곳섬

※ 오륙도 찾아가기 (2014년 1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경성대부경대역(5번 출구를 나와서 부경대 방면)에서 27, 131번 시내버스를
  타고 오륙도SK뷰 후문에서 하차, 오륙도 선착장까지 도보 5분
* 부산지하철 1호선 부산역(10번 출구)에서 27번 시내버스 이용
* 오륙도 선착장에서 오륙도 유람선이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 후까지 운항한다. 2척이 운
  항하며, 운임은 어른 1만원, 어린이는 5천원이다. (유람선 문의 ☎ 051-626-8953)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936~941


▲  선착장 주변 풍경

▲  선착장 서쪽 풍경

오륙도선착장을 비롯한 오륙도SK뷰아파트 주변은 2008년까지만 해도 용호농장과 조그만 마을이
전부인 도심 속 시골이었다. 마을 북쪽에는 이기대를 품은 장산봉이 있고, 오륙도와 이기대, 신
선대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해안 풍경의 갑(甲)을 자랑하던 곳이다.
개발의 칼질은 정말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평화롭던 현장이었는데, 개발의 물결이 소리소문도
없이 밀려오면서 마을과 농장, 숲을 아작 내고 거대한 옥의 티인 아파트가 무차별 솟아났다. 그
리고 선착장 입구까지 넓은 신작로(新作路)가 들어섰으며, 개발의 칼질이 여기저기 난도질을 하
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적지 않은 손상을 주었다. 굳이 여기까지 밋밋한 회색빛 고층아파트를 심
어 오륙도를 눌러야 했는지 관계 당국 철밥통들의 수준이 참 의심된다. 그냥 산듯하게 공원으로
꾸며 태종대나 암남공원에 버금가는 해안 관광지로 꾸미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오륙도를 제
외하고는 주변이 너무 다르게 변질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다.


▲  바위를 희롱하며 하얀 물보라를 자아내는 바다

오륙도선착장 주변은 오륙도를 찾은 탐방객과 낚시꾼들로 북새통이다. 그들이 끌고 온 수레들로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고, 바닷가와 선착장, 주차장 주변에는 해산물을 파는 길거리 행상들로 조
그만 먹거리촌을 이룬다.

선착장 매표소에서 오륙도 뱃표를 구입하니 어른 1인당 무려 10,000원씩이나 한다. 운임은 왕복
요금으로 섬과 방파제에서 다시 한반도로 나올 때는 그냥 타면 된다. 뱃표를 사들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배를 기다리는데, 오륙도 덕분에 정말 간만에 바닷배를 타본다.


▲  한반도와 오륙도를 이어주는 오륙도 유람선
낚시꾼과 관람객들의 소중한 발이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드디어 배가 선착장에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방파제와 오륙도에서 주섬주섬
태운 사람들이 말끔히 내리자 선장의 안내로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승선을 한다. 그렇게 약 20여
명의 승객을 태운 배는 승선이 끝나자 바로 뱃고동을 울리며 바다로 향한다. 우리는 갑판으로
나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시로 모습을 달리하는 바다와 오륙도를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배는 코앞에 보이는 오륙도를 등 뒤에 두고 서쪽에 있는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방파제)로 먼저
갔다. 섬처럼 떠 있는 길다란 방파제에는 이미 강태공들로 자리가 없을 지경인데, 여기서는 오
륙도보다 영도가 더 가깝게 보인다.
방파제에서 볼일을 마친 배는 잠시 잊었던 오륙도로 방향을 돌려 오륙도의 핵심이자 가장 남쪽
인 등대섬에 뱃머리를 댄다. 여기서 낚시꾼을 제외한 관광객이 죄다
내렸다.


▲  잠시 뒤를 바라보는 여유 - 오른쪽 벼랑에 오륙도 스카이워크라는
새로운 명물이 생겼다. (내가 갔을 당시에는 그딴 것은 없었음)


♠  부산의 조그만 해금강, 오륙도 둘러보기

▲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방패섬과 솔섬 (우삭도)
육지와 제일 가깝지만 수영으로 가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일자방파제
다음으로 낚시꾼들이 제일 많이 포진한 곳으로 방패섬 앞부분에
넓고 평탄한 곳이 있어 안전하게 낚시하기에 좋다.

▲  유람선에서 바라본 방패섬(왼쪽)과 솔섬(오른쪽)
썰물 때라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솔섬은 머리 꼭대기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솔섬이라 불리는데, 온갖 풍우를 겪으며 의연함을
잃지 않은 키 작은 소나무의 패기가 무척 돋보인다.

▲  오륙도 인근의 옥의 티, 오륙도SK뷰아파트
허허벌판에 무책임하게 세운 도시처럼 보인다. 저 아파트를 지울 수 있다면
이기대를 품은 장산봉이 속 시원히 미소를 보일텐데..

▲  오륙도와 한반도 사이로 아련하게 보이는 저곳은
해운대 지역이다.

▲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로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이 포근히 둥지를 닦았다.

▲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방파제)
방파제는 배를 대는 곳이 마련되어 있어 거기서 여기서 승/하선을 하면 된다.
방파제 너머로 조도와 영도 일대가 바라보인다.

▲  두 푸른색의 만남
아무리 천재화가가 그린다고 해도 결코 나오기 힘든 자연의 색깔~~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만든 천연의 물감만 하리?

▲  오륙도일자방파제에서 바라본 오륙도
오륙도선착장에서 그렇게나 가까이 보이던 오륙도와 저만치나 떨어져 버렸다.

▲  수리섬(왼쪽)과 송곳섬
수리섬은 독수리들이 갈매기 사냥을 위해 모여드는 곳이라 하며, 송곳섬은
작고 뾰족하게 생겨서 불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수리섬은 낚시를
원할 경우 배를 세워주지만 가파른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낚시 장소로는 위험하다.

▲  송곳섬과 굴섬
굴섬은 오륙도 형제 가운데 가장 큰 섬으로 한 사람 몫의 식수가 나오는
커다란 굴이 있어서 굴섬이라고 한다. 섬 대부분이 깎아지른 절벽이라
배는 섬 서쪽에만 잠깐 멈춰준다.


▲  송곳섬의 위엄
바다가 오랜 세월을 빚은 대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찍기 밖에는 없었다.


▲  수리섬 쪽에서 바라본 굴섬
굴섬은 발디딜 평평한 곳이 없는 각박한 경사의 바위섬이다. 허나 그런
척박한 섬에도 불구하고 월척을 꿈꾸는 낚시꾼들의 발길은 막지 못한다. 
비록 위험하긴 하지만 방패섬이나 백운포보다는 인적이 적고
수심이 깊으니 월척의 확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  도시와 바다가 어우러진 부산의 자화상과
굴섬에 뱃머리를 대고 낚시꾼을 태우는 유람선


♠  오륙도등대(五六島燈臺)와 등대섬 둘러보기

▲  오륙도등대와 등대섬

등대섬은 오륙도의 백미로 오륙도등대를 품고 있다. 예전에는 정상에 평탄한 곳이 있어서 밭섬
이라 불렸는데 지금은 등대섬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명함을 내밀고 있다. 아무래도 등대가 있으
니 자연히 등대섬으로 강하게 각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륙도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등대섬 꼭대기에 등대(燈臺)가 둥지를 튼 것은 1937년이다. 그
해 11월 최초 점등을 했으며, 1971년에는 무신호(전기폰)를 설치했고, 1998년 등탑(燈塔)을 개
량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래서 마치 섬을 누르고 앉은 거대한 요새처
럼 다가온다. 그해 12월에는 등명기(燈明機)를 개량했으며, 등대 높이는 53.35m, 면적은 3,416
㎡이다.
예전 오륙도등대 사진을 보면 야트막한 하얀 등대건물이 마치 둥지에 새가 앉은 듯 사뿐한 모습
이었으나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규모도 커지고 등탑의 높이도 상당해져 오히려 섬을 능가하는 수
준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예전보다 주변 풍경과의 어울림이 좀 떨어져 보인다.
 
유람선이 등대섬 뱃터에 머리를 대자 우리는 섬에 상륙했다. 뱃터는 승/하선이 가능하도록 벼랑
아랫쪽에 설치된 것으로 여기서 등대까지는 계단을 올라야 된다. 계단 중간에는 섬의 동쪽 해변
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거기서 굴섬의 남쪽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등대는 가운데 전망대까지만 오를 수 있는데, 등탑은 출입금지이며, 현재 해양항만청 소속 등대
직원들이 2인1조로 3박4일 간격으로 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속세와 무척 가깝긴 해도 배를 타
고 들어가야 되는 엄연한 외딴섬이니 이곳 등대지기도 외로운 신세를 면할 수는 없다.


▲  등대섬 뱃터에서 등대로 오르는 꼬불꼬불 계단길
길이 각박하고 계단 밑은 바닷물이 넝실거리는 벼랑이므로 절대 주의해야 된다.

▲  등대섬 동쪽에서 바라본 굴섬의 옆구리

바다 파도가 허구헌날 오륙도를 쪼아대며 심술을 부리니 육지에서 떨어져 나가고 다시 5,6개의
섬으로 조각난 것이 십분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파도가 저리 보면 약하고 부드러운 것처럼 보여
설마 바위의 피부를 깎겠나 싶지만 띠끌 모아 태산이라고 저런 파도가 1~2번도 아닌 무량의 세
월 동안 친다고 생각해보라. 그 파도 앞에 성할 수 있는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백운포와 신선대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부산시내 (영도와 중구 일대)
하늘을 수놓은 구름의 모습이 가히 예술이다.

▲  지적측량기준점

▲  지적측량기준점에 적힌 내용들

▲  부산 앞바다를 밝히는 등탑
등탑의 높이는 27.55m에 이른다.

▲  조망이 일품인 등대 전망대에
마련된 8각형 쉼터


▲  등대 전망대에서 굽어본 천하
바다 한가운데로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 방파제)가 보이며, 그 뒤로 건물숲을
이루고 있는 동구와 중구 일대가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  등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왼쪽에 길게 누운 산이 태종대이다. 오륙도를 품은 용호동에서 영도까지는
육상으로 가면 제법 거리가 되지만 바다로 가면 정말 지척이다.
(오륙도에서 영도까지는 4km 남짓)

▲  망망대해에 뜬 외로운 배 1척

▲  오륙도등대의 위엄 ▼


▲  우리가 탈 배가 굴섬 인근으로 오고 있다.

오륙도와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 등대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등대 관리인이 다들 어디로
갔는지 얼굴을 거의 내밀지 않아 전망대와 후미진 곳에서 요란하게 판을 벌이며 밥과 술을 먹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수용하거나 간단하게 차 1잔, 간식 1끼 때울 수 있
는 매점이나 까페 같은 것이 있었다면 돈도 좀 벌고, 관광객들도 간단하게 출출함을 달랠 수도
있고, 아무데서나 음식판을 벌이며, 거기서 버려지는 쓰레기도 줄일 수 있고, 정말 금상첨화였
을텐데, 등대의 생각은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예전 가덕도(加德島)등대(☞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 2번째 등대 방문인 오륙도 등대, 기분 같아
서는 속세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며칠 머물고 싶었다. 허나 내가 있어야될 곳은 이런 외
딴섬이 아닌 속세이다. 고독한 등대지기가 될 여유도 없이 한반도로 나가는 유람선이 다가와 승
선을 보챈다. 그래서 속세에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을 싣고 등대와 오륙도와의 인연을 모두
정리하며 육지로 나왔다.

대자연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작품을 감히 인간의 하찮은 말과 단어를 빌려 표현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어쩌면 자연에 대한 불경죄인지도 모르며,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
수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 훨씬 이상으로 알차고 아름다운 섬이자 남해와 동해의 위대한 합
작품, 오륙도 나들이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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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해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 경승지, 부산 몰운대 (다대포해변)

 


' 부산 몰운대(沒雲臺)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몰운대 동쪽 화손대 해변


여름의 제국이 한참 기반을 닦던 6월의 한복판에 천하 제일의 항구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
다.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경북 청도(淸道)에서 잠시 가던 걸음
을 멈추고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남산 낙대폭포(☞ 관련글 보러가기)를 만났다. 그런 다음에
다시 남쪽으로 달리는 열차에 의지해 오후 늦게 부산에 진입했다.

부산에 들어와 형님에게 연락을 취하니 남포동 국제시장(國際市場)으로 오라고 그런다. 그래
서 부랴부랴 그곳으로 가 형님을 만나고 그의 지인 3명과 함께 부산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족
발집에서 족발에 곡차(穀茶)를 겯드리며 회포를 풀었다. 알콜이 어느 정도 누적된 우리는 인
근 파전집에서 동동주에 파전을 먹으며 2차를 치렀고, 자정이 넘자 택시를 잡아 타고 서면으
로 이동하여 바(bar)에서 3차를 즐겼다. 거기서는 맥주를 무려 5병이나 섭취했다.

새벽 2시가 넘자 술에 쩔은 몸을 택시에 담고 광안동(廣安洞) 형님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
자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깨보니 글쎄 방바닥에 엎어진 채로 자고 있던
것이 아닌가..? 거실에 덮고 자라며 이불이 깔려져 있었는데, 왜 그 좋은 데를 놔두고 이런
차가운 바닥에서 불쌍하게 자게 된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는 과음으로 3시 이후 필
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거실에 들어가 이불을 똘똘 말고 몇시간을 더 취침하니 술에서 완전히
해방된 듯 정신이 개운하다. 술은 정말 떡이 되도록 과음을 했지만 부산 소주가 뒷끝이 덜하
다보니 술은 금방 깬다. (서울 소주 같으면 다음날 하루 종일 시체놀이 해야됨)

해가 중천(中天)에서 손짓할 무렵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그날 목적지인 다대포(몰운대)로 출
발했다. 여기서 다대포까지는 거리가 멀어 빠르고 편하게 가고자 급행좌석버스를 이용했는데,
광안역에서 1001번 좌석버스(청강리↔하단,동아대)를 타고 부산역에서 1000번 좌석버스(다대
포↔서면)
로 환승하여 1시간 정도에 다대포해수욕장 정류장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서쪽 백사장이 다대포해수욕장이고, 나무가 우거진 동쪽 언덕이 바로 몰운대인데, 몰
운대는 예전에 2번이나 와본 적이 있어 결코 낯설지가 않은 곳이다. 그곳으로 가려면 횟집거
리(몰운대1길)를 지나야 되는데, 이곳은 꼼장어구이가 매우 유명하다.


▲  몰운대 서쪽에 자리한 다대포(多大浦)해수욕장
다대포해변은 곧 다가올 피서철에 대비하여 한참 몸단장 중이었다.
바다 너머 안개 속에 얇게 몸을 드러낸 산은 부산신항만 개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된 가덕도(加德島, ☞ 관련글 보러가기)이다.


♠  부산 서남 해안 제일의 경승지 - 몰운대(沒雲臺)
부산 지방기념물 27호

▲  쭉쭉 뻗은 송림의 터널 - 몰운대 산책로

몰운대는 부산 본토 서남쪽 끝으머리에 자리한 해안 언덕(해발 78m)으로 남해바다와 낙동강(洛
東江) 하구가 만나는 부분에 자리한다. 울창한 송림(松林)과 기암괴석,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경승지로 해운대(海雲臺), 태종대(太宗臺)와 더불어 부산 3대(臺)로 꼽히며, 만주에서 시작된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동남쪽 종점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 몰운도(沒雲島)란 작은 섬이었으나 낙동강에서 떠내려 온 토사가 쌓이면서 육지인
다대포와 이어져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일부가 되었다. 육지가 된 시점에 대해서는 16세기 정도
로 여겨지며, 고구마로 유명한 조엄
(趙樟)의 해사일기(海槎日記)에는 신라 이전부터 조그만 섬
이었다고 나온다. 그는 몰운대를 두고 '아리따운 여자가 꽃 속에서 치장을 하는 것 같다'며 찬
사를 아끼지 않았다.

몰운대란 이름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면 그들에 잠겨 대(또는 섬)이 보이지 않는다
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즉
구름에 잠긴 대(또는 섬)란 시적(詩的)인 뜻이 된다. 또한 이순신(李
舜臣) 장군의 부하 장수로 여러 해전에서 이름을 떨친 정운(鄭運)이 몰운대의 이름을 듣고는 몰
운대의 운(雲)과 자신의 이름인 운(運)이 음이 같다며 아몰대(我沒臺)라 했다고 한다. 아몰대는
즉 '내가 사라지는 대'란 뜻이니 그 의미가 대충은 맞아 떨어진 것일까? 1592년 10월 1일 부산
대첩 때 전사하고 만다. 그때 이순신 수군은 바로 몰운대 앞바다에서 왜군을 격파하며 지나갔다.

몰운대 중앙 부분에는 다대포객사가 있고, 남쪽 끝으머리에는 부산대첩 때 전사한 정운의 순의
비(殉義碑)가 있다. 원래 순의비 주변 해안가를 몰운대라 일컬었다. 그리고 동쪽에는 화손대(花
孫臺)가 있는데, 이곳은 몰운대와는 별개의 장소이나 몰운대의 일원으로 묻힌지 오래되었으며,
서쪽에는 넓은 백사장의 다대포해변이 펼쳐져 있고, 육지와 연결된 북쪽에는 횟집거리와 다대1
동 아파트단지가 있다.


참고로 다대포해변과 몰운대 사이에서 신석기시대와 철기시대(鐵器時代)에 만들어진 패총(貝塚,
조개더미)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1934년 홍수로 거진 사라졌으며, 왜정(倭政) 때 발굴
된 유물은 동아대 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66년에 발굴조사를 1차례 더 벌였다.


▲  해송(海松) 솔내음이 그윽한 몰운대 산책로
몰운대로 들어서면 해송에서 우러나오는 솔내음의 향이 후각을 즐겁게 해주며
시원한 바닷바람이 땀의 염통(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  몰운대 시비(詩碑)
조선 선조 때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낸 이춘원(李春元)이 몰운대를 찬양하며
지은 시가 담긴 표석으로 1999년 6월 사하지역발전협의회에서 세웠다.

浩蕩風濤千萬里
白雲天半沒孤臺
扶桑曉日車輪赤
常見仙人賀鶴來

호탕한 바람과 파도가 천리, 만리로 이어졌는데
하늘과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  다대포객사(多大浦客舍)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3호

몰운대 산책로를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면 다대포객사라 불리는 기와집이 나그네를 맞는다. 몰
운대의 중심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객사(客舍)란 제왕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봉안하고 출
장 나온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관사이다. 고을과 규모가 큰 진(鎭)에 설치하는데, 이 객사
는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1825년에 중수했다고 전한다.
원래는 다대포진(多大浦鎭)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다대초등학교 자리에 첨사청(僉使廳, 다대포
첨사가 공무를 보던 관청)과 나란히 있었으나 1904년 다대포사립실용학교(현 다대초교)가 들어
서면서 학교 건물로 쓰였다가 1970년 부산시교육위원회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1980년 기둥과 마루를 보수했으며, 부산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객사 건물로 가치가 크다.

다대포객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회원관(懷遠館)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
데 객사와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여 이 건물이 과연 객사(회원관)가 맞는지 여전히 의문의 꼬리
를 가지고 있다. 1970년에 첨사청 건물을 가져와 객사로 둔갑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뻥뚫려
있는 모습은 궐패를 봉안한 정당(正堂)과 좌우 익사(翼舍)를 거느린 객사라기보다는 정자에 가
까운 모습이란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부산시청에서는 '이 건물이 회원관이란 명백한 근거는 없으나 현 객사가 첨사청이
었다는 주장도 일부 주민의 이야기일 뿐, 이를 뒤집을 만한 근거는 안된다'고 해명을 했다. 또
한 객사가 뻥뚫린 모습을 하게 된 것은 1904년 이후 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이 개축되어 원
형을 잃었기 때문에 지붕과 기둥만 원형대로 살렸다고 그런다. 즉 이 건물이 100% 객사가 아니
라는 것이다. (첨사청일 가능성도 크지만 객사가 첨사청의 일원인 경우는 그게 그거임, 1980년
대 부산 관련 여행서적에는 다대포객사가 아닌 첨사청으로 많이 나왔음)

참고로 다대포진은 경상좌도(慶尙左道) 7진(七鎭)의 하나였다. 왜군의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로
다른 진보다 2배의 병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대포진을 관리하는 첨사(僉使)는 정3품으로 다른
첨사보다 관등(官等)이 높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와 거의 동격인 대우를 받았다. 그만큼 다
대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4월 14일, 왜군이 다대포를 공격하자, 당시 다대포첨사(僉使) 윤흥
신(尹興信, ?~1592)이 필사적으로 방어를 했으나 머릿수에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함락되고 만
다. 그는 첨사청(僉使廳)과 객사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마구 던지며 끝까지 분전했으나 결국 장
렬히 산화했으며, 그의 아우 윤흥제(尹興悌)도 난군(亂軍) 중에 전사했다.

객사 주변에는 보호철책을 둘러 속인(俗人)의 접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개방하여 신발을 벗고 들
어갈 수 있다. (상황과 시기에 따라 통제될 수 있음) 더운 여름에 객사 마루에 누워 시원한 바
닷바람을 벗삼아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거 같은데, 낮잠이나 간식을 먹는 행위는 통제
되어 있으니 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


▲  잘 다져진 석축 위에 안착한 다대포객사

다대포 객사를 둘러보고 앞으로 나오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화손
대와 자갈마당이 나오고, 직진(남쪽)하면 몰운대 남쪽에 자리한 정운공(公) 순의비를 만날 수
있다. 허나 아쉽게도 남쪽 구역은 해군부대가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그를 못보
는 마음이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어찌하리. 남쪽으로 가려는 발을 억지로 멈추고 동쪽으로 방향
을 틀었다.

정운공 순의비는 비록 출입통제구역이지만 1년에 딱 1번 들어갈 수 있다. 바로 그의 향사(享祀)
를 지내는 음력 9월 1일이다. 그날은 그가 부산대첩에서 전사한 10월 1일을 음력으로 계산한 것
으로 사하구청의 주관으로 해군의 도움을 받아 제사를 올린다. 이때 지역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
도 들어가 제향과 순의비를 관람할 수 있으며, 제례에 참여하거나 구경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
공하는데, 맛이 꽤 좋다고 한다. 다음에 그의 기일(忌日)에 맞춰 이곳을 찾을 생각이긴 한데,
그게 과연 언제가 될지는 장담 못하겠다.

정운공 순의비
▲  속세에 1년에 딱 하루 공개되는 정운공 순의비 - 부산 지방기념물 20호
(부산 사하구청 홈페이지 사진 참조)

다대포객사 공터에서 왼쪽(동쪽) 길로 2분 정도 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바닷가에 있어서 그런지
약간 짠 맛이 나지만 그래도 시원하여 마실만은 하다. 그 약수터를 지나 바다 쪽으로 길게 튀어
나온 곳으로 가니 오른쪽에 자갈마당이라 불리는 자갈밭이 펼쳐져 있다.

자갈들이 곱게 입혀진 자갈마당은 옛날에 친구와 놀았던 추억이 서린 곳으로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태풍으로 망가진 것 외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자갈밭 주변 바위
와 벼랑에는 낚시꾼들이 세월을 낚듯 낚시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잡혔으려나..?

자갈밭에서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사방이 바다로 막힌 침운대(沈雲臺)가 나온다. 침운대는 구
름이 잠긴다는 뜻으로 대(臺) 정상에는 버려진 군사시설이 있다. 여러 그루의 나무가 바다를 바
라보며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분위기를 우려내고 있으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서는 구평동 두송반도와 암남공원, 멀리 영도 태종대까지 시야에
들어오며 감천항과 다대항으로 들어서는 배들이 보인다.

이렇게 자갈마당과 침운대 구역을 둘러보고 화손대 방면 오솔길을 거닐어 본다. 자갈마당에서
화손대입구까지는 약 1km, 오솔길 동쪽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길 양쪽으로 숲이 무성하다.
그 오솔길을 절반 정도 가다보면 몰운대의 명물인 구름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약 10m 정도
되는 조그만 다리지만 사람이 건널 때마다 흔들거려 흔들다리라는 흔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런 다리는 송도에 있는 암남공원에도 있으며, 다리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으나 말라버린 상태
이다.

구름다리를 건너서 10분 정도 가면 화손대 입구가 나온다. 화손대는 몰운대 동쪽으로 길게 튀어
나온 곳으로 낚시터로 명성이 높다. 몰운대를 지금까지 3번이나 발을 들였지만 화손대는 귀찮다
는 명분으로 가지도 않아 이번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  바다와 자갈의 속삭임이 살며시 들려오는 자갈마당

▲  자갈마당 너머로 보이는 큰 섬은 쥐섬, 그 옆에 작은 섬은 동호섬이다.

▲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는 통금의 땅, 몰운대 남쪽이 보인다.

▲  침운대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자연이 빚어 띄워놓은 조각배 같은 섬들(동섬, 등대섬)이 앞바다를 수식한다.

▲  등대가 자라고 있는 등대섬
바다에 잠기기 쉬운 한줌도 안되는 바위섬에 뿌리를 내린 조그만 등대.
겉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몰운대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안전을 위해
오늘 밤도 밤길을 비추며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다.

▲  동섬(왼쪽), 쥐섬(가운데), 동호섬(오른쪽) 형제
아비규환의 속세를 등지고 저런 섬에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종종 일어난다.
허나 현실은 그와 반대 ~~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침운대 바위 해변
바로 가까이에 화손대가 보이고, 그 너머로 두둥실 떠있는 모자섬과 구평동 두송반도가,
저 멀리 희미하게 모습을 비춘 곳은 영도 태종대이다. 이른 피서객과
강태공(姜太公)들이 자리를 점거하며 한가로운 주말 오후를 보낸다.

▲  몰운대 흔들다리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흔들다리를 깨우면 변함없이 삐꺽삐꺽 소리로 약간의 미동을
보이며 화답을 건넨다. 그래서 흔들다리이다.


♠  몰운대의 동쪽을 도맡고 있는 화손대(花孫臺) 둘러보기

▲  화손대로 인도하는 호젓한 숲길

화손대입구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동안 몰운대 속의 미답지로 남아있던 화손대를
가보기로 했다. 그곳으로 가려면 제법 가파른 고개를 하나 넘어야 되는데, 나무가 삼삼하게 우
거져 거의 숲터널을 이루고 있다. 숲터널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군헬기장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내리막 길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급하게 이어진다. 내리막 길의 끝에는 바다가 눈 앞에 보이면
서 1명 정도 갈 수 있는 해안 벼랑길이 펼쳐지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몰운대의 동쪽 끝인 화
손대에 이르게 된다. 벼랑길은 다소 위험하고 난간 같은 시설이 부족하므로 각별히 주의가 필요
하다.

화손대는 높다란 대(臺)나 정자가 아닌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가이다. 남쪽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벼랑길 북쪽은 칼로 싹둑 다듬은 듯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낚시터로 유명하여
강태공들의 발길이 잦으며, 감성돔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예전에는 숭어잡이도 쏠쏠했으나 가
덕도 개발로 이제는 구경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다대포항과 구평동 두송반도, 다대조선소 등이 가까이에 보이며, 방파제와 이어
진 팔봉섬을 비롯하여 솔섬과 고래섬 등의 작은 섬이 주변을 수식한다.


▲  유연하게 구부러진 자연터널 숲길

▲  화손대 바라본 모자섬
쥐섬보다 작은 조그만 무인도로 작은 암초를 여럿 거느리고 있다.

▲  화손대에서 바라본 몰운대 남쪽과 침운대
몰운대가 겉으로 보기에는 작아 보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면 은근 넓은 지역이다.
바다 건너 침운대(자갈마당)에서 화손대까지는 넉넉잡아 20분 거리이다.

▲  화손대 해변에서 바라본 모자섬
이렇게 보니 마치 고슴도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  화손대 해변에서 바라본 풍경
솔섬(사진 왼쪽)이 육지 가까이에 붙어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구평동 두송반도와
암남공원이 보인다. 그리고 저멀리 태종대(오른쪽에 튀어나온 부분)가
살며시 모습을 비춘다.

▲  화손대 해변으로 내려가는 벼랑길

▲  낚시삼매에 빠진 강태공들

▲  넓은 반석으로 이루어진 화손대 해변


▲  화손대 북쪽 해변
여기서 더 이상 해변을 타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
산과 바다에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  카메라 셔터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한 화손대
파도소리만이 철썩철썩 고요를 깨뜨리며 바위와 정을 속삭인다.

▲  화손대 앞바다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꿈꾸는 무슨 세상이 감춰진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정말 지구가 둥글긴 둥근 모양이다.

▲  몰운대 산책로 (화손대입구에서 몰운대입구 방향)
집으로 몰래 가져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산책로이다.

▲  몰운대 산책로 (화손대입구~몰운대입구)
몰운대는 통제구역인 정운공 순의비와 화손대를 제외하고는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어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  몰운대 횟집거리에서 먹은 꼼장어의 위엄

몰운대를 2시간 가량 둘러보고 속세로 나오니 시장기가 무척 돋는다. 안그래도 밥을 일찍 먹고
나와서 허기가 쩔었는데, 나들이에 따른 허기짐까지 더해지니 견디기가 괴로울 지경이다. 그래
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다대포의 명물인 꼼장어구이를 먹기로 했다.

꼼장어가 나오기에 앞서 메추리알과 당근, 김치 등의 밑반찬이 깔리자 이들을 주섬주섬 먹고나
니 맵게 꾸며진 꼼장어구이가 나타난다. 조금 맵긴 해도 맛은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시장기가
상당하여 꼼장어와 함께 버무러진 파와 양파까지 말끔히 비웠다. 거기에 맥주 1잔 겯드리니 목
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외친다.
꼼장어를 다 먹고 밥을 2개 볶아서 먹었는데, 이또한 맛이 일품이다. 밥까지 싹 비우고, 커피 1
잔 마시며 식곤증의 희롱을 잠시 즐기다가 길을 나섰다. 비가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그렇게 걱정
할 수준이 아니라서 서면 근처의 정묘사(鄭廟祠)로 길을 옮겼다. 이후 부분은 사정상 생략하며,
몰운대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몰운대, 다대포 찾아가기 (2013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1호선 신평역(4번 출구)에서 2, 11, 338번 시내버스를 타고 다대포해수욕장 하차
* 부산지하철 1호선 당리역(사하구청) 5번 출구에서 11번, 3번 출구에서 2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지하철 1호선 괴정역(6번 출구)에서 96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서부터미널(2호선 사상역 5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쪽)에서 338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역(1호선 부산역 5번 출구)에서 2, 1000번 시내버스 이용
* 다대포해수욕장과 몰운대 입구에 주차장(488대 수용) 있음 (몰운대까지 접근 불가)

★ 몰운대, 다대포 관람정보 (2013년 7월 기준)
* 다대포해수욕장 개장시기는 7~8월
* 몰운대 남쪽 정운공 순의비는 제향일인 음력 9월 1일 낮에만 출입이 가능하다.
* 다대포의 새로운 명물인 다대포꿈의낙조분수는 음악과 조명에 맞춰 분수 물줄기가 춤을 추는
  부산 최초의 음악분수로 물높이가 최대 55m에 이르며, 시민들의 신청곡 및 사연을 접수받아
  음악분수공연에 반영한다.
* 꿈의낙조분수 공연시간 (2013년 여름 기준, 매주 월요일은 쉼)
① 체험분수 - 매일 6회 (11시, 14시, 15시, 16시, 18시, 평일 야간 음악분수 공연 후 1회 / 주
   말에는 야간 음악분수 1부 공연 후 1회, / 회당 10~20분)
② 음악분수 - 매일 20시 (주말과 공휴일은 20시, 21시로 20분씩 운영)
* 꿈의낙조분수 문의는 ☎ 051-220-5891~2 (낙조분수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
* 몰운대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4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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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7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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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신항만 앞에 떠있는 그림 같은 섬 ~ 가덕도 나들이 (가덕도등대)


' 부산 가덕도(加德島) 나들이 (가덕도 등대) '

가덕도 대항
▲ 가덕도 대항포구

가덕도 새바지 돌섬

가덕도등대

▲ 대항새바지 앞바다에 뜬 돌섬

▲ 가덕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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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해운대해수욕장, 철길건널목)

















부산 오륙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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