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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12 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2. 2013.04.26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3. 2013.04.08 법정스님과 길상화의 고운 넋이 깃들여진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 성북동 길상사

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 태백산(太白山) 눈꽃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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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 설경

장공(長空)에 뛰어들어 안개 속에 파묻히니
 비로소 정상에 오른 줄 알았네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주위의 뭇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에 내려앉네
 구름 따라 몸이 날으니 학(鶴)의 등에 올라탄 듯
 돌을 밟고 허공에 길이 걸렸으니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가
 비 그치자 골짜기마다 시냇물이 흘러넘치니
 굽이굽이 오십천(五十川) 건널 일이 걱정스럽네


*
고려 후기 문신인 근재 안축(謹齋 安軸, 1282~1348)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

 


겨울의 한복판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진한 설경을 맛보고자 강원
도 태백(太白)을 찾았다. 마침 후배 하나가 태백 서쪽 동네인 고한(古汗)에 잠시 머물고 있어
서 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을 찾기로 했다.

원래는 설 연휴 전날 아침에 일찌감치 열차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급히 일이 생겨서 내려가는
것을 취소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에 급히 연락을 넣어 심야 열차로 가겠다고 하니 사북역에
서 대기하여 합류하겠다고 그런다.

설날 연휴인지라 태백까지 열차표를 힘들게 예약히고 21시 반에 대문을 나섰다. 방학역에서 1
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신통치 못한 배차를 자랑하는 중앙선 용문(龍門)행 전철로 갈아
타서 근 1시간을 달려 용문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대기를 타다가 강릉(江陵)행 심
야 무궁화호 막차에 몸을 싣는다.
거의 2년 만에 타보는 추억의 심야열차, 옛날에는 서울에서 당일로 오가기 버겨웠던 광주, 목
포, 여수, 경주, 부산, 동해 등 장거리를 갈 때 많이 타고 다녔는데, 도로망이 나날이 좋아지
면서 안그래도 비좁은 국토가 더 좁아져 2006년부터 탈 일이 크게 줄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1
년에 1회도 타질 않는다.

용문에서 태백까지는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자리에 앉아 잠을 간곡히 소환해 봤지만 잠이 좀
처럼 강림하질 않으니 아무래도 잠님이 나를 원치 않은 듯 싶다. 한밤중이라 차창 밖 풍경은
온통 검은 도화지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불빛이 그런 도화지에
살짝 작은 점을 찍는다. 그렇게 뜬 눈으로 원주와 제천, 영월, 예미를 지나 사북역에 이르니
대기하던 후배가 열차에 올라타 옆 자리에 앉는다.

정선과 태백의 경계를 가르는 두문동재터널을 지나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태백 관내로 들어서
니 창 밖 풍경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선 땅까지 별로 보이지도 않던 눈이 터널을 지나
서부터는 완전 눈천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차창 밖 검은 도화지는 하얀 색이 추가되어 2색
의 흑백 도화지가 되었다. 단지 터널 하나에 천지가 뒤바뀐 것이다.

열차는 강원도의 산주름을 열심히 지나 드디어 태백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멈추자 등산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적막이 감돌던 태백역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 넣는다.
밥이나 먹을 겸 식당을 찾아보니 역전 주변 식당은 죄다 자고 있었고, 실비집 한 곳만 환하게
불을 밝히며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니 열차에서 내린 등산객 10여 명 정
도가 밥을 먹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생각한 것과 달리 맛이 괜찮았다. 고기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고
밑반찬도 가짓수가 많아서 찬이 제법 풍성했다. 저녁을 먹고 왔지만 다시 시장기가 강하게 돋
으면서 밥을 2그릇이나 먹고 찌개와 반찬을 죄다 비우고서야 식당을 나섰다.

아침이 멀지 않았으니 찜질방에서 잠시 눈이나 붙이자고 했으나 후배는 여관에서 편하게 자자
면서 자기가 방값 내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터미널(역 앞에 터미널 있음) 인근 여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아침 8시 반이 되자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스르륵 잠에서 깨었다. 4시간 밖에는 못잤지만, 더
이상 잠도 오질 않는다. 나는 태백산을 보러 여까지 온 것이지 잠이나 퍼자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꿈나라에서 허우적거리는 후배를 강제로 깨워 9시 반에 여관을 나섰다.

고원(高原)의 도시, 태백이라 제법 추울 줄 알았더만 아침임에도 그다지 춥지는 않다. 터미널
로 들어서니 마침 당골로 가는 태백시내버스 7번이 기지개를 켜고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태백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터미널에서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까지는 20~25분 정도 걸린다.


▲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 앞)


♠  하얗게 분을 칠한 태백산(太白山, 1567m) 간보기

▲  태백산관리사무소에서 당골광장으로 오르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태백산관리사무소 앞이다. 우리나라의 신령스러운
산인 태백산의 안기려면 반드시 매표소를 거쳐야 되는데, 등산객들의 호주머니를 뚫어지라 쳐다
보는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하얗게 분을 바른 태백산의 모습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말끔히 정화시켜준다.

이곳에 온 목적은 오랜만(거의 7년 만)에 태백산 정상(1567m)과 천제단(天祭壇, 1561m)을 보고
자 함인데, 후배가 겨울 산행에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 정상까지 가는 것은
어려웠다. 괜히 그랬다가 119헬기를 불러야 될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식
총(虎食塚)까지만 갈까 하다가 눈이 제법 많고 미끄러워 후배가 오르기 힘들다고 투정하여 당골
광장에서 1km 정도만 오르고 철수하고 말았다.

태백산은 우리나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쪽 척추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중심 산으로 위엄
돋는 산의 이름만큼이나 험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정작 올라보면 별로 힘들지 않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산(金剛山)이나 설악산과 달리 순수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肉山)이
라 능선의 곡선이 완만하고 산세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스와 수레로 800~900m 고지(당
골, 백단사, 유일사, 금천동)까지 올라갈 수 있어 거기서부터 등산에 임하면 되며, 제일 단거리
인 유일사와 백단사에서 정상까지 2시간, 당골에서는 2시간 30분(문수봉 경유는 3시간 30분) 정
도면 충분히 닿는다. (금천에서는 4시간 소요)

매표소에서 당골광장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 길의 연속이다. 4발 수레들도 마음껏 바퀴를 굴리
게끔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있는데, 길이 온통 눈투성이라 수레들도 겁을 먹고 가기를 꺼려한다.


▲  태백산 눈썰매장 입구

▲  한참 몸단장중인 눈조각품

태백산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지만 눈으로 뒤덮힌 겨울이 단연 갑(甲)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겨울 산행의 성지(聖地)로 백설(白雪)이 두텁게 쌓인 겨울 산행의 장쾌함을 누리고자
많은 산꾼들이 몰려온다. 봄과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 산꾼이 훨씬 많다고 하니 기온이 낮을 수
록 찾는 이가 반비례로 늘어난다. 그리고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는 눈꽃축제(눈축제)를 벌이는
데, 이 축제는 겨울 축제의 성지이자 대명사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미국(米國)을 비롯한 여
러 나라에서 이 축제를 찬양했고, 미국의 CNN방송은 한국에서 가봐야 될 50곳의 하나로 선정하
며 찬양의 수준을 높였다. 솔직히 태백산은 국내에서만 머물기는 진짜 아까운 산이다. 국내 명
소/축제를 넘어 세계적인 겨울 축제와 명소의 성지로 우뚝 서기를 고대해 본다.

태백산은 겨울 산행의 성지, 겨울 축제의 성지이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던 옛날부터 제천의
식(祭天儀式)을 거행하던 성지였다. 산 정상에는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문화재 228호)과 장군
단(將軍壇)이 있는데, 이들은 천하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숨져 태
백산신으로 추앙 받은 단종(端宗)에게 제를 올리던 곳으로 돌로 쌓은 조촐한 제단이지만 강화도
참성단(塹星壇)만큼이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이렇게 하나도 아니고 3가지의 성지로 일
컬어지니 태백산의 명성은 나날이 하늘을 찌른다.


▲  설송(雪松) 밑에 자리한 석탄박물관 표석

▲  태백석탄박물관(太白石炭博物館)

당골광장 동북쪽에 자리한 태백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탄 전문 박물관으로 1997년 5월
에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나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벌여 이제는 태백
에서 꼭 가봐야되는 명소로 단단히 부각되었다.

박물관 규모는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8개의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단순히 석
탄 관련 내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와 지질(地質)을 시작으로 광물(鑛物)의 탄생
과 종류, 화석(化石), 석탄과 탄광 관련 문서와 기계/장비, 탄광 정책 관련 자료, 태백 관련 향
토자료, 탄광 광부들의 생활상, 탄광갱도 체험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3층에서 지하로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는 층수가 아닌 -100m 단위로 거의 -900m까지 수치가 내려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 마치 탄광 엘리베이터를 탄 듯한 오싹함을 선사한다. 지하층으로 내려오면 탄광 체험 갱도관
이 있으며, 그곳을 나오면 기념품과 특산품을 파는 기념품점이 나온다.

태백석탄박물관은 지금까지 2번 구경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려올 때 관람을 했다. 박물관과 관
련된 내용은 이쯤에서 정리를 하겠으며,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는데, 보통 1시간 반 정도, 길게
는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  제1전시실 지질관에서 만난 자수정(紫水晶)의 위엄
지질관에서는 자수정 같은 귀에 익은 광물부터 낯설은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지구 곳곳에서 수집한 광물 진품이 진열되어 있다.


※ 태백석탄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2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해야 됨, 쉬는 날 없음)
* 입장료는 공짜인 듯 싶지만 엄연히 태백산도립공원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166 (천제단길 195 ☎ 033-552-7730 / 033-550-2743)
* 석탄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자수정 사진을 클릭한다.


▲  당골광장 부근에 조성된 공원과 연못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연못도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당골광장에서 문수봉으로 올라가는 길
당골광장에서 산길은 2개로 갈리는데, 왼쪽은 제당골과 문수봉으로, 오른쪽은
호식총과 망경사, 천제단으로 이어진다. 문수봉으로 가도 천제단까지
갈 수 있으나 3시간 30분 정도 잡아야 된다.

▲  막바지 매뭇새를 다듬고 있는 눈축제장

태백산의 백미(白眉) 중 하나인 눈축제는 보통 1월 중순에 열린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열리
기 직전이라 축제 분위기도 누리지 못하고 축제를 위해 조성된 눈조각품만 바깥에서 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했다.


▲  설림(雪林)으로 들어서다 (문수봉 방면)

▲  설림에 한가운데에 서다.
키가 큰 늘씬한 수목들이 앞다투어 하늘을 가리면서 산길이 좀 어둡다.
나무들은 겨울 제국이 내린 눈을 소복으로 삼으며 묵묵히 봄을 기다린다.

▲  고려 후기 문인인 안축(安軸)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가 담긴 표석
시의 내용은 앞부분에 있음 (당골광장에서 망경사 방면)


♠  태백산 마무리

▲  태백산의 또 다른 수호신 석장승 - 강원도 지방민속문화재 4호

당골광장에서 단군성전 입구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별다른 모양이 없는 석상이 마중한다. 이 석
상은 바로 석장승으로 원래는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미루둔지(장승둔지)에 있었는데, 1960년대
에 망경사로 옮겼다가 1987년 태백문화원이 지금의 자리에 안착시킨 것이다. 

장승의 모습을 보면 얼굴 부분이 손상된 문인석(文人石)처럼 보이기도 하며, 미륵상으로 보이기
도 한다. 얼굴이 워낙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알기 힘들며, 머리에는 관(冠)처럼 생긴 것
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얼굴 양쪽에는 귀로 보이는 길쭉한 부분이 있다.
그의 탄생시기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천제단 가는 길목인 태백산 북쪽에 자리해 있어 성
역(聖域) 임을 알리는 역할과 이정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덩달아 산신의 수호신상의 역
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 부분이 많이 닳아있어 마을의 수호신까지 겸한 것으로 여
겨진다. 예전에는 장승 옆에 3마리의 오리가 새겨진 솟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석장승이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정작 강원도에는 이 장승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태백산 정상 천제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장승
<장생(長生)>을 많이 세워 성역(聖域) 및 이정
표의 역할을 했으며, 장승모랭, 장승백이, 장승
둔지, 장승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어 태백 땅
에 장승이 제법 많았음을 보여준다.
허나 무심한 세월과 몰지각한 사람들의 만행으
로 장승은 죄다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전설 속
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오로지 당골의 석장승만
살아 남아 태백이 왕년에는 장승의 낙원이었음
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따름이다. 참고로 태백의
조선시대 지명인 장생은 바로 장승에서 유래된
것이다.
<태백을 이루는 동네의 하나인 장성(長省)이 장
생에서 변경된 이름임>


▲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하얀 숲터널 (석장승에서 망경사 방면)

▲  당골계곡과 함께 이어진 산길
이 세상에 색깔은 하얀색과 하늘색, 갈색(나무 줄기) 밖에 없는 것 같다.

▲  설림 속을 거닐다
집으로 고이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절경이다. 허나 나는 조물주가
아닌지가 저 풍경을 가져오지는 못하고 대신 사진이란 것으로
그 장면을 복사해 담아가지고 왔다.

▲  단군성전 앞에 마련된 단군상
명세기 우리의 국조(國祖)인데, 보호각 하나 놓아드려야 되는거 아닐까?
저렇게 눈과 바람을 맞게 놔두는 것은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  단군성전(檀君聖殿)

석장승을 지나 대략 1km 정도만 전진하고 발걸음을 접고 말았다. 후배가 힘들다고 그러니 더 이
상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발길을 접
었다. 발을 돌린 지점은 아마도 해발 1,000m 정도 될 것이다. (당골광장이 거의 850m임)

내려가는 길에 당골광장 남쪽에 자리한 단군성전에 들렸다. 이 성전은 옛 조선(朝鮮)의 시조이
자 우리의 국조인 단군의 사당으로 1975년에 구성된 '국조단군봉사회'가 1982년에 성금을 모아
창건하고 단군성전이라 하였다. 그의 사당을 이곳에 지은 것은 그에게 제를 지내는 천제단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성전을 수리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성전 현판의 글씨는 신덕선이 썼다.

비록 오래된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현장이다. 하지
만 등산객과 탐방객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등산로에서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 되
는 곳에 있기도 하지만 썩어빠진 이 땅의 권력층에 의해 점차 오염되가는 역사교육의 부실과 무
관심 조장도 한몫한다.


▲  단군성전에 봉안된 단군 영정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진 단군의 영정(影幀),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적이다. 단
군은 옛 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의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한 제정일치(
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를 비롯하
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과 만주, 요서,
화북(華北) 일부를 다스린 동아시아 강대국이다. 조선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나
산소도 아까운 식민사관(植民史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반도 북부와 요동으로 크게 축소시켰다.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의 지배권을 차지하
려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를 비롯한 서쪽
2,000리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기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
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국방력을 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
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복하고 그 자신감으로 조선을 협박했다.
조선이 반발하며 먼저 대륙을 공격하자 한무제는 이때다 싶어 군사를 보내 반격을 가했는데, 한
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러자 뚜껑이 단단히 열린 한무제가 다시
군사들을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군(漢軍)은 정비를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
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우거왕(右渠王)이 반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
해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
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데,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강단사학자와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쪽으로 보고 있다. 한4군의 하나로 유
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도 낙랑국과 낙랑군(樂浪郡) 2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의견이 분
분하나 대체로 낙랑국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그러니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맞다. 만약 낙
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명
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
族)으로 대표되는 조선에서 만들어 대륙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
륙으로 넘어가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대흥안령산맥 쪽에서 발생
한 홍산문명(紅山文明)도 조선의 찬란했던 흔적이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  하얀 기와집이 된 단군성전 삼문(三門) - 단군성전에서 바라본 모습
성전 뜨락에는 눈이 수북하게 덮여 설경의 극치를 이룬다.

▲  단군성전 삼문 - 바깥에서 본 모습
눈이 지붕에 가득하니 혹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눈 자체는 거의 무게가 없지만 저리 두툼하게 쌓이면 정말 몇톤이 되버린다.

▲  석장승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  눈축제를 위해 조성된 커다란 눈 이글루
마치 눈을 뒤집어 쓴 거대한 석실고분(石室古墳) 같다.

▲  당골광장에서 당골 종점으로 내려가는 길

▲  당골 통나무집에서 먹은 곤드레밥과 반찬들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눈 속에 애써 묻으며 당골 종점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은
12시, 뱃속에서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여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적당한 곳을 찾다가 통나
무집이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이곳은 여행사 단체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신발을 벗어야 되는 뜨끈한 방에 들어가 곤드레밥
과 해물파전, 동동주,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잠시 뒤 콩나물과 더덕, 김치, 두부 등 8가지의 정
갈한 밑반찬이 앞에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양념장이 버무러진 커다란 두부는 반찬의 갑(甲)으
로 두부 맛이 좋아 2번 정도 더 시킨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반찬을 먹고 있으니 곤드레밥과 소고기국밥 등의 식사가 나타난다. 곤드레밥은 정선과 평창, 영
월, 태백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곤드레나물을 비롯한 산채 나물과 김가루가 버무려진 일종의 비
빔밥이다. 곤드레밥에는 늘 구수한 된장찌개가 짝궁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의 찌개는 두부가 풍
부하다. 그렇게 먹고 있으려니 동그란 해물파전과 동동주가 3차로 나타난다.
파전은 가격에 비해 좀 커보인다. 허나 반찬과 곤드레밥으로 어느 정도 배가 들어찬 상태기 때
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전은 일부를 남기고 거진 다 먹었는데, 뱃속에서 그만
보내라고 북소리가 울린다. 그러다보니 동동주는 둘이서 절반 밖에 마시질 못했다.


▲  해물파전의 위엄

이렇게 풍성하게 점심을 먹으니 졸음이 슬쩍 나를 희롱하며 배 깔고 한숨 자라고 보챈다. 졸음
의 희롱을 과감히 내던지고, 커피와 식당 내부 연탄 난로에서 대핀 보리차를 여러 잔 마시며 식
곤증과 추위를 몰아내고 밖으로 나선다.

이렇게 태백산과의 짧은 인연을 마치고, 어디로 갈까 머리를 굴리다가 미인폭포로 가기로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향했다. 이후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란다.
(☞ 미인폭포 보러가기)

★ 태백산 당골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① 철도 이용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태백역으로 가는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6회(휴
  일에는 7회) 운행한다.
* 강릉역과 동해역에서 청량리행 열차(1일 6회, 휴일 7회)를 타고 태백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북부)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직통은
  1일 9회 운행)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안산,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 원주, 제천, 삼척, 강릉, 영주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터미널에서 당골행 7번 시내/좌석버스가 1일 20여 회 운행
④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고한 → 태백시내 →
  당골주차장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상동 → 유일사/백단
  사 → 당골주차장

※ 태백산 관람 정보 (2014년 2월 기준)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 (단체 1,500원) / 학생,군인 1,500원 (단체 1,000
  원) / 어린이 7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대형 4,000원 / 소형 2,000원
* 태백산 눈축제는 1월 중/하순에 2주 정도 열린다. (열리는 시기는 매해마다 다름)
* 당골에는 콘도형 태백산민박촌이 있다. 현재 15동 73실이 있으며,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된다.
  ☞ 태백산 민박촌 홈페이지 가기 (문의 ☎ 033-553-7440~41)
* 태백산 눈썰매장 이용료 : 어른 5,000원 / 어린이 4,000원
* 태백산 당골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태백산도립공원 사업소 ☎ 033-550-2741~42)
* 태백산도립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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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2월 4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에 있는 네모난 박스 안의 손가락 View on을
   흔쾌히 눌러주세요. 댓글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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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종로구 부암동(付岩洞) '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北岳山),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 들
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이 포근히 감싸여 있는데 서
울 도심과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곳이 정녕 서울
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풍경을 간직하고 있
다.

부암동은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구의 일부로 아늑한 전원 분위기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경
승지가 즐비해 북촌(北村), 성북동(城北洞)과 더불어 두고두고 나의 마음을 앗아가는 곳이
다. 부암동의 주요 경승지로는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을 비롯해 세검정(洗劍亭),
홍지문(弘智門), 석파정, 무계정사터, 반계 윤웅렬별장, 능금마을, 북악산, 청계동천 바위

글씨 등이 있으며, 석파정을 옆구리에 낀 서울미술관을 위시하여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유금와당박물관 등 미술관과 박물관도 풍부해 문화의 향기도 진하기 그지 없다.

본글에서는 부암동 명소의 일부인 석파정 별당과 무계정사터(무계동 바위글씨), 청계동천,
반계윤웅렬 별장 등을 소개한다.
☞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보러가기
부암동 명소 (장의사지 당간지주/세검정/홍지문 등) 보러가기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상명대입구 4거리에 이르면 4거리 서남쪽에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은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으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소전 손
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이 살던 곳이다.

소전은 6.25 시절, 서울을 접수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
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그곳의 문화유산을 지켜냈으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답사기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집은 원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집으로 인왕
산 동쪽인 옥인동(玉仁洞)에 있었다. 그러다가 소전이 1958년에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 거처로
삼았으며, 그 기세를 몰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기와집을 하나도 아닌 2채나 누릴 정도면 소전도 꽤 부자였
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는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이들 집은 모두 다른 이에게 넘어가 한정식당으로 변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달았다.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이다. 가
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다. 그리고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진하게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내부
를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개
되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진리에 따라 별당을 원자리로 돌려놓는 것도 괜찮
을 듯 싶은데,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이다.


▲  적막에 사로잠긴 석파정 별당
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석파랑 정원 (오른쪽 계단 너머에 석파정 별당이 있음)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던 대원군의 별장
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이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별당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석파랑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
는데,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고 빠르다.


▲  150년 묵은 감나무가 무럭무럭 익어가는 석파랑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벽
이 그대로 남아있다. 뜰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에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문이다.
또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를
비롯한 다양한 석물과 나무. 꽃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석파랑은 고급 한정식당이라 가격이 매우 얄미운 수준이다. 점심 상차림은 55,000원에서 11만원
대, 저녁은 95,000원에서 15만 5천원이나 한다. 그것도 10%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와 서비스
비(Service Charge)는 제외이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가기 힘든 아득한 곳이지만 졸부들에게는 그저 가뿐한 장소다. 이 땅에서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님이 많고 봐야 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더러운 세상이니 말이다. 아
직 이곳의 밥은 먹어보진 못했지만 돈을 몇 달치 모아서라도 한번은 먹어보고 싶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번,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 하차 (1,2호선 시청역 4/7번 출구에서 1711, 70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 8153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3분
* 지하철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정 만세문 사진을 클릭한다.
* 석파랑 영업시간 : 12시~15시, 18시~22시 (설날, 추석연휴는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암동의 지명유래가 된 부침(붙임)바위는 바위 피부 곳곳에 난 구멍에 돌을 대고 비비면서 소
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부터 뿌리 깊던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민간 신앙의 현장으로 아들을 원하는 서울 장안의 아낙네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바위의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자하문고개를 넘어온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명물인 부침
바위를 산산조각 내면서 이제는 그의 어떠한 흔적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근래에 세운
바위터 표석이 이곳에 예전 그가 있었음을 아련하게 전할 따름이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멋드러진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과 인간들의 속물 근성 앞에 많은 바위가 희생을 당했다. 그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 버렸다.


♠  야망의 사나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꿈이 깃든 현장
화려한 별장은 온데간데 없고 무계동 바위글씨만 아련히 남은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석파랑에서 석파정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을 지나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로5가길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 표석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을 들어서 왼쪽으로 20~30도 각도를 바라보면
커다란 나무를 간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뜨락 동쪽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커다란 고개가 들고 있다. 거기가 바로 한 토막 전설이 되버린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
사의 옛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번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으로 그의
호에서 보이듯 꽤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무예에도 꽤 일가견이 있었다. 이렇게 문무(文武)를 두루두루 겸비한 인재로 세종의 18명 아들
가운데서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에는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1430
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
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세종이 붕어(崩御)한 이후,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
(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
한 인물 가운데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
를 장악,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앉혀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
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세력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그는 창의문 북쪽에 별장을 지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
군(孝寧大君)의 별장이 잠시 있던 곳이다. 안평대군은 이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
았다고 하여 무계동(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계정사<武溪精舍, 또는 무이정사(武
夷精舍)>라 했다.
그리고 힘깨나 쓰는 장정을 모집해 숙식을 제공하며 자신의 사병을 꾸준히 키워나가는 한편 용
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文仁)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의 꿀단지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대군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
玉)에게 무기를 지원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나마 황표정사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그
의 명을 단축시킨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동생의 무력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순식간
에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처단했다. 방심하고 있던 안평은 꼼짝없이 포박되어 반역의 죄를 뒤집
어 쓰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수양은 썩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곧 강화도 서쪽인 교동도(喬
桐島)로 추방했으며,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사약 한사발을 보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방심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토하고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역사에서 쓰라리게 퇴장을 당한 안평대군은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
년(1747년)에 이르러서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건의로 복관되면서 죽은 지 300년 만에 편하
게 눈을 감게 되었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파괴되었으며, 권력을 향한 그의 강인한 정
열이 느껴지는 무계동 바위글씨만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무계정사였음을 속삭일 뿐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들
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또한 정사 앞에는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화, 거문고에 두루 능했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
담정을 짓고 문인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며, 궁중에 소장된 서화(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중원
대륙의 서화들을 연구하거나 소개하는 등, 당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또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고
칭송하며 그의 글씨를 서로 받아가려고 굽신거렸다고 한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억 속에 두
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게 하니, 그
그림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왜국에 가 있으며, 2009
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현장인 무계정사
터를 찾는 답사객의 수가 잠시나마 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子
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
온묘의 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의왕시 소재) 등
의 비문이 전한다.

'武溪洞' 바위글씨 곁에 자리한 낡은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집으로 구한말이나
왜정 때 지어진 것이다. 2005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쥐방울 만한 견공(犬
公) 2마리가 바위와 집을 철통같이 지켜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바위글씨를 봐야 했다. 허나
이제는 그들도 안평대군의 부질없는 꿈을 따라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
리하고 있다.

2007년 이후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 집터'로 변경되었
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
화관광과로 연락을 하거나 철문의 헝클어진 틈을 요령껏 뚫고 들어가면 된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버스로 부암동주민센터 하차
  창의문로5가길을 따라 도보 5~6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  현진건집터에서 바라본 무계정사터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기와집과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남쪽 구석에는 은단천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이제는 표석으로만 남은 현진건 집터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그
의 초라한 집이 좀 남아있었으나 개념도 밥말아먹은 개발의 칼질에 무침히 짓밟혀 지금은 표석
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도 명세기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지방문화재나 등록
문화재로 삼아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효석(李孝石) 생가처럼 문학 테마 관광지로 특
성화시키면 정말 꿀단지가 되었을 것을 무작정 개발만 내세우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
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현진건집터 표석으로 나와 인왕산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그런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즐
거운 기분이다. 동네가 산지에 있다보니 오르막길이 꽤 많지만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다. 게
다가 인왕산과 북악산이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도시의 탁한 기운도 거의 없어 머리도 맑아진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이란 바위글
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글씨는 작고 얇은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낙서를 남긴 것이다. 지금이
야 계곡 대부분이 주택 개발로 생매장을 당해
실감이 썩 나지 않겠지만 반계 윤웅렬 별장 뒤
쪽에 얇게 흐르는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
이다.

청계동천 바위 주변은 개인 땅이라 바위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바로 길가에 있기 때문에 관람
과 촬영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확대해서 본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에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忠
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
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와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국(倭國)을 둘러보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
설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으나 곧바로 터진 임오군란(壬午
軍亂)으로 왜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곧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
었으나,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막을 내리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
革) 때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
라 상해(上海)로 도망쳤으며, 몇 년 뒤 다시 컴백해 법무대신을 지냈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다가 1911년 인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윤웅렬의 아들 가운데 그 유명한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다. 그는 개화파 지식
인의 하나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민
중 계몽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 교육에 헌신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허나 이후 친일파로
갈아타면서 부친과 더불어 쌍으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별장은 처음에는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윤웅렬이 골로 가면서 3
째 아들인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에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광채, 문간
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고
,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윤웅렬 시절부터 전해오던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
게 꾸몄다. 사랑채 지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돋보이게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도성(都城) 밖 부암동에 세
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
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과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1년에 어
느 졸부가 이곳을 사들이면서 싹 정비해 그들을 내버렸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들고 담장을 추
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는데, 보수공사 기간에 공사 관계자의 흔쾌한 허가로
2층 테라스를 비롯하여 별장 내부를 구석구석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암동이 요즘 인기를 누리면서 찾는 이가 쓸데없이 늘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거의 오지 않는다.
설령 용케 왔다고 해도 속사정을 알지 못하니 그저 담장만 찍고 돌아갈 뿐이다.

별장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소유자의 뜻에 따라 절대로 속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지만 이 괜찮은 한
옥을 집주인 일가만 야속하게 누리지 말고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그냥 누리면 좀 미안하
니 요즘 인기를 더하고 있는 한옥체험장(한옥 민박, 게스트하우스)으로 개방하면 어떨까?
북촌과 전주한옥마을, 경주 양동민속마을, 안동의 몇몇 기와집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옥 체험/
숙박 장사를 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곳 집 크기는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편이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매우 상쾌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깊
숙한 산골 마을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가 그윽하며, 집에 딸린 방이 많고 한옥의 흔치 않은
2층 테라스까지 두고 있으니 소문만 잘나면 어지간한 한옥 숙박집 이상의 인기를 얻을 것이다.
게다가 도심과 가깝고 교통도 괜찮으며, 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접근성도 그만하면 딱이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2011년 후반에 새로 지은 바깥 대문
예전에는 그냥 뻥 뚫린 공간이었다
.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는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

별장 뒤쪽에는 이곳만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石築)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
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작품이 되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가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단단히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으로 슬며시 들어와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빚은 것
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인왕산에서 흘러온 계곡이 이 바위에서 아담하게 폭포
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체를 타고 흐르
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줄기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을 쌓고 계단을 만
들었는데, 붉게 타오른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인 바위와 폭포

▲  폭포 밑에 모인 인왕산 계곡물

티끌 없이 맑은 계곡물이 폭포 밑에 마련된 조그만 담(潭)에 옹기종기 모여 기나긴 여행을 준비
한다. 여기서 숨을 돌리고 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드니 그 아쉬움은 정말 대단하겠지. 그
런 못에 낙엽들도 몰려와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주변 나무들은 조그만 못에 비
친 자신을 바라보며 막바지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세상 폼나게 살다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불의 화신일까..? 붉게 물이 오른 단풍잎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사랑채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랑채 바로 옆에
는 붉은 피부의 서양식 2층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큼직한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옥상 테라스와 벽
돌집은 이곳만의 진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현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한 케이스이다.


▲  측면에서 바라본 2층 벽돌집과 사랑채
붉은 벽돌로 치장한 벽돌집에 중후한 멋이 엿보인다.

▲  별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 -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문간채이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남쪽 산자락
정말 시리도록 아름다운 늦가을 풍경이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뒤쪽 (서쪽)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어 계단을 타고 2층으
로 올라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2층 테라스로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아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다. 하지만 산자락에
나무가 무성해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으며,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잔잔히 다가오는 선선한 바
람을 맞으면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싹 가시는 듯 하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  텅 비어있는 벽돌집 2층

※ 반계 윤웅렬 별장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무계정사 참조, 무계정사 입구 현진건집터에서 큰 골목길로 직진하면 된다.
* 개인 소유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관계자의 허가를 받드시 받기 바란다.
* 여기서 인왕산의 품으로 6분 정도 들어가면 자하미술관(02-395-3222)이 있으며, 미술관 직전
  에서 부암약수터를 거쳐 인왕산으로 올라가도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  부암동 나들이를 마치고 자하손만두에서 먹은 떡만두국
색이 입혀진 만두가 나그네의 입맛과 시각을 제대로 자극시킨다.

부암동을 둘러보니 슬슬 어둠이 내려오면서 시장기가 감돈다. 답사와 등산에서 먹는 재미만큼이
쏠쏠한 것은 없지. 마침 자하문고개까지 올라온 터라 자하문길과 북악산길이 만나는 고개 중턱
에 자리한 자하손만두를 찾았다.
이 만두집은 서울식 만두를 파는 곳으로 서울에서 만두로 꽤 유명한 집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
을 지닌 만두는 입안에서 살살 녹기가 바쁘며, 만두집이라 만두와 떡국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층 양옥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뜨락에도 상을 놓고 손님을 맞는데, 휴일 저녁이라 자리가 거의
없다. 우리는 편수와 떡만두국을 먹었는데, 가격이 몹시나 얄미운 수준이다. 편수는 11,000원,
만두국은 무려 12,000원이나 한다. 내가 먹은 만두국 가운데 가장 허벌나게 비싸다. 그렇다고
나같은 장정이 먹기에도 썩 넉넉한 양도 아님. 만두를 겯드린 식사를 하려면 2인 기준으로 3~4
만원대는 잡아야 된다.

반찬은 김치와 송송(깍두기)이 전부이며, 식사를 마치면 후식으로 잘 익은 수정과를 준다. (지
금도 주는 지는 모르겠음) 고개 중턱에 자리한 탓에 자리만 잘 잡으면 인왕산과 부암동을 바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산자락이라 밤공기가 좀 차다.


▲  편수의 위엄
편수는 소고기와 표고버섯, 오이 등이 들어간 만두로 그 모양이 참 이쁘다.
저들의 모습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꼭꼭 품고 있는 모습 같은데, 그 껍질을
벗기면 잘 버무려진 편수의 내용물이 수줍은 듯 속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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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4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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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과 길상화의 고운 넋이 깃들여진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 성북동 길상사


' 성북동 길상사 나들이 '

▲  길상사의 명물, 관음보살상


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간송미술관과
더불어 성북동(城北洞)의 대명사이자 꿀단지로 자리잡은 길상사는 2007년부터 문턱이 닳도
록 찾은 절이건만, 그곳에 제대로 퐁당퐁당 빠졌는지 성북동의 여러 명소와 더불어 자꾸만
손과 발이 가는 곳이다. 나는 묵은 내가 나는 오래된 절집을 좋아하는지라 역사가 짧은 절
은 어지간해서는 관심을 잘 주지 않는데, 길상사는 그 예외인 것이다. 매년 5~7번 정도 발
걸음을 하여 어언 30회가 넘게 찾았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데, 성북초교에서 선잠로를 따라 12분 정도 가면 길
상사가 뚜렷히 모습을 비춘다. 그 12분의 짧은 구간은 졸부들의 으리으리한 금입택(金入宅)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장이다. 보기만 해도 주눅이 잔뜩 들고 마음 마저 편치 않게 만든다.
졸부들의 폐쇄성과 이 땅에서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이 담장은 높고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衝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보인다. 그것으
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방범장치가 겹겹이 설치되어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편하게 응시한다.

저택과 고급빌라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을 내민 나무들로 삼삼한 숲길만큼이나 푸르름이 가
득하다. 도심과 가까움에도 분위기도 차분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지. 그래서 나는 서울에
서 늦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창덕궁 후원, 부암동과 더불어 성북동을 1순위로 꼽는다.
비록 나처럼 없는 사람들이 오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곳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주눅들 필요까지
는 없다. 제아무리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앞에선 모두 모래성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기 때문이
다. 괜히 기죽지 말고 당당히 가슴을 피며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이 우
리나라의 0.1%가 산다며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졸부들의 소굴이 된 것도 바로 명당의 기
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들이 다 가져가게 두지 말고 성북동을 거닐
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넋이 깃들여진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절이 거의 숲을 이루다보니 나무에 가려
건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연등까지 가세해 그들의
숨바꼭질을 더욱 부추긴다.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가 홍수를 이루
는 성북동 북쪽에 자리해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북한산(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
를 가로질러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같이 어우러진
사찰 풍경도 제법 아름답고 도심에 있음에도 북악산 백사골만큼이나 공기도 청정하다. 경내는
고요하고 아늑해 중생의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볼거리가 두
눈을 호강시킨다.

길상사는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깃든 절도 아니
다. 역사는 겨우 16년, 절로 태어난 것은 18년으로 나보다 한참 나이가 적다. 이곳이 법등(法燈
)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명세를 두드러지게 탄 것은 군사정권 시절 권력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고
급요정에서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절로 거듭난 전대미문의 현장이며, 무소유(無所有)의 저자이
자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요정을 기증
한 김영한(길상화)의 이야기는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참고로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13시 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으며, 다음날 순
천 송광사(松廣寺)로 운구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의
탄생 과정
길상사의 전신은 성북동 서쪽에 있는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
원각(大元閣)이다. 권력층과 부자들이 찾아와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사람이
바로 김영한이다.

김영한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일찍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16세에 궁중아악과 가
무(歌舞)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로 들어가 진향(眞香)이란 이름으로 기
생이 되었다. 그는 왜열도를 여행하다가 문학가로 유명한 백석(白石, 1912~1995)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그녀를 자야(子夜)라 불렀다. 그들은 혼인을
약속했으나 백석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해 결국 이별하고 만다.

오기가 생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공부에 전념하여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
며, 몇 편의 수필과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썼다. 또한 예전 기생을 했던 경
력을 바탕으로 고급 식당을 차리고자 도심과 가까운 곳을 물색하다가 계곡이 흐르는 지금의 길
상사 자리를 사들여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냈다. <성북동에 서린 명당의 기운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이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
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고급 요정으로 명성을 날린다.

대원각 단골들이 정/재계에서 죄다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대
박 수입을 자랑했던 김영한, 허나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
같이 살았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달았고 그 와중에 법
정의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친견해 여러 법문을 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놓기로 결심, 1987년 법정에게 절집
으로 써달라며 대원각을 통채로 기증했다. 허나 갑작스런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펄펄 뛰며
거절했다. 당시 대원각의 면적은 7천여 평, 시가는 무려 1,000억원을 헤아렸다.

김영한은 그에 굴하지 않고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1995년 법정은 그곳을
받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고치고 송광
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그해 12월 14
일 개원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천주교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구름처
럼 참석했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
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길상화(吉祥花)란 법명과 함께 염주를 받
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말년을 지내던 그는 1999년 11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
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는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스님의 영정

중생의 오열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火葬)되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
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조촐하게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우리
나라 졸부들과 달리 모든 것을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공수래 공수거의
진리를 일찍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손도 남기지 못했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그의 눈물 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
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감동
의 싹과 눈물을 틔우게 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로 진흙탕이 된 성북동 부촌(성북길 북
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길상사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걸어다니거나 행색이 초라한 행자를 이상히 여겨 경
찰에 신고를 하는 요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길상화 공덕비

▲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둔 길상헌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기존 요정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
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다 보니 문화유산은 딱히 없으나 오
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며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에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다. 법회 때는 고(故)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쓴다.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는데,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봉은사
(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정도는 될 것이다.

* 속인(俗人)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
1.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하는 1박 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
여하거나 3박 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
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
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
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선원 출입시
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2. 침묵의집 - 길상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침묵의집은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
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
이란 테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
간이다. 이용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이용이 가능하
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3. 템플스테이(Temple Stay) - 1달에 2번 열리는 주말선수련회는 수련형 템플스테이로 1박 2일
일정으로 이루어진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배, 차담, 자유포
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5만원이다. (기타 여름선수련
회와 2~4시간 일정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아래 사진들을 클릭바람)

▲  2012년 11월에 지은 길상보탑

▲  설법전

※ 길상사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
  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성북초교3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 선잠로를
  따라 들어간다. (이정표가 갈림길마다 설치되어 있어 찾기는 쉬움)
* 길상사 셔틀버스가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동원마트(6번 출구를 나와서 50m 직진)에서 1일 8
  회 운행한다. 출발시간은 8:30, 9:20, 9:40, 10시, 12시, 13시, 15시, 16:30분이다.
* 매년 음력 10월 7일에는 길상화 기제가 열린다.
* 매년 음력 1월 26일에는 법정의 추모 법회가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위의 길상보탑과 설법전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들어서려면 '三角山 吉詳寺(삼각산 길상사)'라 쓰인 중층 구조의 일주문(정
문)을 들어서야 된다. 이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으며, 정문을 들어서면 초록
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풍기는 길상사 내부가 펼쳐진다.


▲  생전 처음 본 일주문 천정 그림 (봉황일까? 극락조일까?)

일주문은 경내로 들어서려면 꼭 거쳐야되는 문이기에 별 생각 없이 드나들었는데, 생각해보니
문 천정을 한번도 못봤다. 천정에 무엇이 있겠나 싶어 별다른 기대 없이 고개를 90도 올려보았
는데, 글쎄 그곳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무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랑지를 가진 새 2마리가 장
엄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난데없는 그림의 등장에 나의 눈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곳에 그려진 새를 거의 봉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봉황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이다보
니 딱히 봉황을 키울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만약 봉황이 아니라면 불교에서 많이 키우는 극락조
<極樂鳥, 가릉빈가>가 아닐까 싶으며, 그림이 꽤 수작(秀作)이라 어떻게 저런 곳에 교묘하게 숨
어 지나가는 중생의 머리통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등잔 위/아래가 어두웠다.


▲  정랑(해우소) 부근에 자리한 소각장
축문(祝文)을 비롯한 여러 문서를 불태우는 곳으로
그의 상반신 피부가 검게 그을려져 있다.

▲  일주문을 들어서 설법전 방면으로 바라본 모습

      ◀  길상사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을 오르면 설법전 앞에 늘
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해 있다. 길상사
를 상징하는 명물로 꽤나 명성이 높은 존재인데,
그 흔한 관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고개를 갸우
뚱하게 만든다.

이 관음보살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
로 삼아 소박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
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긴 했지만 유럽
왕이 쓰던 왕관과 비슷한 모습이다.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왔으며,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
(聖母)의 얼굴인데, 거의 천주교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다. 오른손은 번쩍 들어 시무외인(施無畏
印)을 취했고, 왼손에는 보관과 더불어 관음보
살의 필수 요소인 감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
고 있으며, 손 아래쪽은 아무런 조각이 없다.

그렇다면 길상사는 왜 관음보살상을 그 흔한 모습으로 만들지 않고 낯선 모습으로 한 것일까?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최종태씨가 만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순수한 관음보살로 만들지 않고 성모 마리아를 적지 않게 섞어 보살이 아닌 거의 불
모(佛母)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길상사만의 독특한 서양식 관음보살상이 생겨난 것이다.
2000년 4월 28일에 이곳에 봉안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불상의 면모는 떨어지나 불교
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낸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며,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
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관음보살상 맞은편에 자리한 샘터

산사(山寺)에는 어김없이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산사는 아니지만 길상사도 나름 산사의
분위기가 자욱한지라 인근 계곡물을 끌어와 범종각 밑에 조촐하게 샘터를 냈다. 길상사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쿨하게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졸고 있는 나무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목
구멍에 넣으니 몸과 마음 속에 낀 떼와 번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하다. 샘터 위
쪽에는 바로 범종각(梵鍾閣)이 자리해 있다.


▲  설법전, 관음보살상 앞뜨락 (겨울 풍경)

▲  오색구름을 이룬 연등 위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지금의 종은 2009년 9월에
다시 만든 것이다.

▲  관음보살 옆에 조그만 석불(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
(線刻磨崖像)이 꽤 이채롭다. 이 불상은
예전에 극락전 좌측에 있었다.


▲  길상사 느티나무 (사진 가운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관음보살상 주변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있다. 나누는 기쁨 동쪽에 자리한 느티나무와
더불어 길상사 이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던 터줏대감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
아 제법 어엿하게 성장했다. 후배 나무들과 함께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여름의 제국도
그의 기세 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그의 나이는 170여 년(안내문에는 165년이라 나옴), 높이는 12m, 둘레는 2.5m이다.


▲  길쭉한 모습의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
堂)으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불전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금동석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는데,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
럼 동그랗게 에워싸 대장관을 이룬다.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깔끔하고 넓은 설법전 내부

▲  미소를 한가득 품은 금동석가불좌상과 조그만 옥불의 대물결

볼살이 푸짐한 석가불의 표정이 너무나 환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의 모든 것이 산듯하게 금동으로 장엄되어있으며, 이 불상은
2000년 8월에 조성되었다.

▲  설법전 앞뜨락을 가득 메운 하얀 연등의 물결
소복을 입은 듯한 하얀 연등은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연등이다.

▲  설법전 남쪽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성북동 동부와 동선동(東仙洞), 낙산(駱山)이 바라보인다. 조망은 썩 좋은 편은 아님~~

▲  바람 속 향기 (2012년 버전)

설법전 남쪽에 자리한 바람속 향기 쉼터는 이름 그대로 바람에 번뇌를 흩날리며 일다경(一茶頃)
의 향기를 누리는 공간으로 길다방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2012년
11월에 만든 길상보탑(吉祥寶塔)이 자리해 있으며, 쉼터는 그 모습 그대로 정랑 서쪽으로 밀려
났다.
길상보탑은 4사자 7층석탑으로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
가 함께 한 종교간 교류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영안모자 회장이 탑을 무상으로 지어준 것으로
길상사의 유일한 석탑이다. 탑 안에는 복장봉안품이 들어있으며,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에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편도 아닌데, 장차 다른 탑을 염두에 두고 그리 했는지도 모르겠다.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주변

▲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측 칸
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들이 예
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시 잊으며
쉬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마치 집 주인이나 마님이
된 기분이다.
극락전 앞뜰을 가득 메워 하늘을 가린 고운 빛깔의 연등은 속세와 천상 세계(혹은 부처의 세계)
를 가르는 구름처럼 신비롭기만 하다.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중앙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년 11
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서
있으며, 왼쪽에는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두 협시불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으며, 그들 뒤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후불탱화가 있다.


▲  극락전 뜨락에 자라난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로 대원각 초창기나 그 이전에 싹을 틔운 것으로 여겨진다.

하늘을 가린 연등의 위엄이 대단해 극락전 좌측 칸에서 사진에 담았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자 봄의 절정을 누리는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나누는 기쁨 동쪽에는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느티나무가 둥지를 틀었다. 이 나무는 나
이가 무려 270년에 이르며 높이 12m, 둘레는 3.2m에 이른다.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성
장하여 삼삼한 숲속에 들어선 기분을 선사한다.


▲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과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
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롭게 지은 것으로 2004년 10월 17일에 상량식(上樑
式)을 가져 2005년 5월 8일에 완성을 보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놓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든 지장보살이 밝은 미
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염라대왕이 그를 협시(夾侍)하고 있으
며, 붉은 색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하루 종일 잔잔히 울리는
지장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전
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을 들
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물이
묻힌 비밀의 석실(石室)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
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다.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3존불 벽
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보
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 나오는 아미
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해 나
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불과 아리따운 모습의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지장전 뜨락과 연못
장차 다가올 여름의 향연을 준비하는 연(蓮)들이 막바지 와신상담 중이다.


♠  길상사 마무리

▲  계곡 건너 숲속에 묻힌 길상헌(吉詳軒)
고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다.
김영한이 마지막 밤을 지내며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며,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싸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려준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은 공간이다. 나
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북한산 남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길
상사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러간다.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옛 요정의 흔적으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3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길상헌이, 그 다
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를 만나게 되며. 그 다음 다리는 나무그늘과 조그만 집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유마선방 등이 빼곡히 자리를 메운다.


▲  길상화 공덕비로 인도하는 나무 다리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
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년 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
골을 뿌렸다.

나도 나중에 졸부들 못지 않은 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해 '그렇다'는 대답은 자신이 없다. 그보다는 우선 돈좀
왕창 벌어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 그렇
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이가 절단나는 법이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뿐, 자
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동천(吉詳
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에 대원
각을 세웠다고 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의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한다. 비록 작지만 폭포가
2개나 있는데,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가늘어 속
세의 삶처럼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  경내 서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요정 시절 접대 공간으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  숲속의 오솔길 같은 경내 서쪽 산책로 ▼

경내 서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 전나무 숲길, 내소사 전나
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는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진영각<眞影閣, 예전 행지실(行持室)>

경내 가장 서쪽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의 손때가 묻힌 저서와 유품
들이 전시되어있다.
원래 이곳은 고참 승려의 생활공간인 행지실이었다. 그러다가 2013년에 법정의 진영각으로 삼아
속세에 공개했으며, 저번 3월 7일 그의 3주기를 맞이하여 김호석 화백이 그린 진영을 봉안했다.
길상사를 야무지게 키운 인물이고 현대 불교의 한획을 그은 고승이니 그를 기리는 공간은 당연
있어야 될 것이다. 그래야 법정의 정통을 이었다는 자부심도 드높이고 법정을 좋아하는 팬들의
성원에도 보답하며 그들의 추모를 길이길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하다. 길상사하면 법정과 더불어 진하게 생각나는 인물. 길상화를 위한 건
물이 없는 것이다. 절은 법정이 키웠어도 절을 탄생시킨 1등 주역은 길상화인데, 그를 위한 건
물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 길상화 공덕비로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두고두고 기렸으면 좋으련만,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와 동등한 비
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여염집 분위기의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간판을 갈았다.

▲  적묵당 앞에 동그란 연못
물이 태산처럼 고인 연못에는 개구리의 운동장인 연잎이 장차 여름의 향연을 꿈꾼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명상을 하며 쉬어가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시부터 17시
(일요일은 16~17시)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이다.

◀  침묵의집에 걸린 불화
불화 앞 탁자에는 송광사 목조3존불감의
모조품이 자리를 지킨다.


▲  길상사에서 누린 일다경의 여유 (매실차와 오미자차)

길상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지장전 옆에 자리한 '나누는 기쁨' 찻집(길상사 찻집)에서 기분 좋게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다. 예전과 달리 리필이 안된다고 하여 많이 달라고 했더니 곱상하게 생긴
찻잔 대신 키다리 음료수 컵에 가득 담아 내준다. 보통 찻잔의 2배 이상의 양을 담아준 것이다.
차에는 잣 2~3덩어리를 조각배처럼 띄워주어 차의 맛을 높여주며, 차와 커피의 가격은 2,000~
4,000원 선으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비해 절반에서 1/3 정도 저렴하다.

전통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긴 시간이 거의 30분 정도이다. 차의 솔솔한 향기와 차와 함께 즐긴
담소의 재미에 길상사 기둥이 썩어 문드러지고 해가 뉘엿뉘엿 꽁무니를 숨긴 것도 모르고 머물
렀던 것이다. 그야말로 찻값 본전을 제대로 뽑은 셈이다.


▲  성북동 돼지갈비집에서 먹은 돼지갈비의 위엄

속세로 나오니 어느덧 모락모락 저녁밥이 그리운 시간이다. 그래서 성북동 맛집에서 먹을 수 있
는 음식을 두고 궁리하다가 성북동 돼지갈비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말그대로 돼지갈비를 겯드린 백반을 내놓는 식당으로 3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원래 택시기사가 많이 찾던 기사식당이나 성북동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늘어나자 그 후광을 단단히 받았다. 바로 옆에는 같은 메뉴를 다루는 쌍다리식당이 있어 경쟁이
대단하며, 돼지고기와 갈비백반은 1인 6~7천원으로 가격도 괜찮다. 밑반찬은 상추와 김치, 마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맑은 조개국이 백미로 국물이 시원하다.
한때 손님의 폭풍 증가로 배때기가 부른 나머지 불친절이 대단했다고 하나, 내가 갔을 때는 나
름 친절을 보였다. 허나 식후 커피는 무료 제공에서 100원으로 바뀌었는데, 왠만한 집은 동전이
없다고 하면 흔쾌히 제공하나 여기는 잘 안준다. 그거 원가가 얼마나 한다고 참..

길상화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았던 부처와 관음
보살 누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
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며 이
만 본글의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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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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