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산사 나들이 ~ 아름다운 숲길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색의 절집, 곡성 동리산 태안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곡성 태안사(泰安寺) '

▲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겨울 제국의 부흥을 꿈꾸며 1달 넘게 천하를 어지럽히던 꽃샘추위가 봄에게 말끔히 꼬리가 잡
히면서 비로소 진정한 봄의 세상이 도래했다. 하늘 아래 세상을 겨울의 제국주의(帝國主義)로
부터 해방시킨 봄을 찬양하며 연초부터 가고자 했던 곡성 태안사를 찾았다.

전국에 널린 미답지의 하나로 베일의 가려진 곡성에 첫 발을 내리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
침 곡성 5일장이었다. 터미널 근처에 마련된 5일 장터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서울에선 아
직 꽃망울도 피우지 못한 벚꽃이 여기서는 한참 절정을 누리며 순백의 미를 자랑
다.

태안사 버스 시간까지는 여유가 넉넉해 그 사이에 점심을 먹고자 읍내로 들어섰다. 허나 장터
와 달리 읍내는 썰렁함이 감돈다.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읍내를 이리저리 서성이니 삼기국밥
이란 국밥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순간 순대국 생각이 간절하여 그 집에 들어가 메뉴판을 살피
니 암뽕순대국밥이란 특이한 국밥이 있어 주인 아지매에게 뭐냐고 물어봤다.
이에 아지매는 암뽕은 암돼지를 잡아서 만든 순대국밥이라면서 이 집의 주메뉴라고 설명을 한
다. 그래서 이름도 재밌고 해서 그것을 주문했다.

얼마 뒤 내 앞에 차려진 암뽕순대국밥, 밥은 양이 좀 적었지만, 순대국은 순대와 파, 여러 고
기가 버무려져 정말 풍성했다. 순대는 함경도 순대처럼 꽤 두꺼운데 몇 개를 집어먹으니 뱃속
에서 용량이 초과되었다고 신호가 날라올 정도다. 파가 많아서 맛을 더욱 띄워주며, 팔뚝만한
순대에는 무려 21가지의 재료가 들어갔다고 하며, 고기들도 입 속에서 살살 녹아 목구멍이 즐
겁다. 밑반찬은 김치와 송송(깎두기), 양파, 양념장과 고추장이 나왔다.


▲  한상 차려져 나온 암뽕순대국밥의 위엄

이렇게 점심을 먹고 맛있다고 운을 띄우니 주인 아지매는 커피 1잔을 타주며 환송해준다. 커피
를 마시니 시간은 버스 시간 10분 전, 서둘러 터미널로 뛰어가 태안사행 군내버스를 탔다.

5일 장의 후광으로 상당한 손님을 태운 버스는 읍내로 바로 가지 않고 장터로 갔다. 장터 남문
에 이르니 장을 본 노공(老公)들이 우루루 몰리면서 차는 그야말로 가축수송의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 그 많은 승객 가운데 나를 빼면 모두 노공들, 지방 인구 감소와 농촌 고령화 현상의 심
각함이 버스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수도권은 지방 인구를 계속해서 빨아먹어 점점 비대해
지는데 지방은 빨대 끝에 있는 쥬스처럼 사람 수가 나날이 홀쭉해지니 이도 참 큰일이다.

곡성역을 지나 오지리까지 노공들은 계속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지 못한 노공들은 장터에서
사온 물건에 몸을 의지하며 주변 사람들과 사투리로 구수하게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런 풍경은
서로 인상이 쓰고 경계나 품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정겨운 광경이지. 그래서 지
방에 가면 가급적 군내/시내버스를 탄다. 지역 사람들의 삶의 향기가 담긴 풍경이 그립기 때문
이다. 비록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그런 현장 속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
겁다.

섬진강(蟾津江)을 따라 이어지는 17번 국도를 달리며 레일 바이크(Rail Bike)로 수입이 쏠쏠한
옛 전라선 철로와 나란히 달리기를 20분, 호남의 대성리/청평으로 일컬어지는 압록에 이른다.
압록에서 오른쪽 18번 국도로 꺾어 보성강(寶城江)을 따라 달리는데, 한참 벚꽃과 보성강에 시
선을 둔 사이 버스는 태안3거리를 지나친다. 다리를 건너야 태안사인데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의문을 품고 있으니 곧바로 죽곡면주민센터가 있는 태평리에서 차를 돌려 다시 태안3거리로 돌
아와 그제서야 보성강을 건넌다.
이제 다왔구나 안심을 하고 있으니 버스는 그 안심에 먹칠을 하는 듯 태안사가 있는 동쪽을 놔
두고 서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버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니 1차선 크
기의 농로를 한없이 비집고 들어가 비봉에서 바퀴를 돌린다. 알고보니 곡성 장날에만 특별히 1
일 2회 운행한다는 비봉 경유 차였다. (장날 이외에는 들어가지 않음)
덕분에 생각치도 못한 곳을 강제투어 당하고 다시 태안교로 나와 동남쪽으로 10분을 달리니 비
로소 태안사입구에 도착했다. 곡성에서 5일장과 비봉 경유의 여파로 무려 1시간 20분이나 걸렸
다.
(보통은 40분 정도 걸림)


♠  태안사 숲길 (태안사입구 ~ 능파각)

▲  태안사 입구

태안사입구에는 다른 고찰(古刹)과 비슷하게 주막촌이 둥지를 트고 있다. 허나 태안사는 입구에
뿌리를 내린 주막 3~4곳이 전부라 그리 번잡하지는 않다. 게다가 평일이니 그 한적함은 자연히
배가 된다. 속세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며 주막을 지나면 대자연에 잠긴 오솔길이 나타난다.


▲  태안사 입구 벚꽃길

태안3거리에서 태안사 입구까지는 벚꽃가로수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겨울제국의 오랜 시련
을 극복하고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트린 그들에게 어느새 마음을 내주고 만다. 허나 저들의 천
하도 김옥균(金玉均)의 3일 천하만큼이나 짧으니 사람이든 꽃이든 인생은 무상한 모양이다.


▲  장절공 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太師 申先生 靈蹟碑)

주막촌을 들어서면 조촐하게 생긴 비각(碑閣) 하나를 만나게 된다. 절을 찾은 사람들은 다들 무
시하고 넘어가기 일쑤지만 무엇이든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서 그를 기
웃거렸다. 무슨 사연이 있으니 비석이 있지 않겠는가?

비각에는 '장절공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太師 申先生 靈蹟碑)'라 쓰인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처음에는 태안사나 마을에 공적이 있는 사람의 비석으로 여겼으나 장절공이란 낯익은 이름이 계
속 마음에 걸려 조사를 해보니 곡성 출신으로 태조 왕건(太祖 王建)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開
國功臣) 신숭겸(申崇謙)의 영적비였다. 여기서 신선생은 신숭겸을 뜻한다.

그는 927년 후백제의 빛나는 승리, 고려의 무참한 패배로 마무리 된 대구 공산(公山)에서 전사
했다. 그때 그의 말이 잘려진 주인의 머리를 물고 태안사 뒷산으로 달려와 3일 동안 구슬피 울
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를 발견한 태안사 승려가 신숭겸의 머리와 말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에
묻었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경내에 제단을 두어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절 입구에 세워
진 영적비는 절과 고을 사람들이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신숭겸에 대한 고장 사람들의 강한
긍지가 묻어나 있다.

▲  비각에 새겨진 동물 장식
비각 좌우에 하얀 동물 장식이 평방(平枋)을
받치고 있다. 토끼로 보이면서도 기지개를
켜는 개로도 보이는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  경내로 인도하는 1번째 다리
자유교(自由橋)


주막촌을 지나면 계곡을 옆구리에 낀 오솔길이 나타난다. 절까지는 2km 거리로 총 4개의 다리를
거쳐야 되는데, 그 1번째가 자유교다.
보통 절에 갈 때 만나는 계곡과 다리는 번뇌를 떠내려 보내고 해탈(解脫)을 하라는 의미가 있다.
허나 그 번뇌란 것은 쉽사리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태안사는 계곡을 따라 1개도 아닌 4개
의 다리를 놓아 인내를 가지고 번뇌를 내던질 것을 중생에게 주문한다.

자유교는 번뇌와 속세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로 다리를 건너면 옛 매표소와 주차장이 나오
고, 길도 비포장길로 변신한다. 대부분의 절은 절 앞까지 포장길을 뚫었는데 반해 이곳은 여전
히 비포장길을 고수하고 있다. 수레들에게는 다소 불편할진 몰라도 그 덕분에 산사로 가는 고적
한 분위기가 진하게 우려져 오히려 정감이 가고 좋다. 길의 폭이 산길처럼 작았다면 그런 느낌
은 더욱 컸겠지만 절도 먹고 살아야되고 수레 편의도 고려해야되니 그것까지는 무리일 것이다.


▲  자유교 건너의 동리산 태안사 표석의 위엄

▲  늘씬한 전나무 숲길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전나무 숲길을 닮은 아름다운 길이다.

▲  겨울에서 느리게 깨어나고 있는 태안사 오솔길

태안사 오솔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급한 오르막길도 없고 그냥 평탄한 길의 연속이다. 속인
(俗人)의 집은 절 입구에만 있을 뿐, 절까지는 단 1채도 없다. (중간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전부임) 숲이 삼삼하고 계곡이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산새의 지저귐이 오솔길의 적막을 살포
시 깨뜨리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산사로 가는 길의 진수를 보여준다. 절까지 2km에 이르는
적지 않은 거리지만 가는 길이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자연과 동화되어 걷다보면 '어머나 벌써
다왔어?' 싶을 정도로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아직까지 겨울에 잠겨있는 숲길이 처량하기까지 하지만 곳곳에 봄의 기운이 싹트고 나무들도 서
서히 살을 불릴 채비를 한다. 새소리와 물소리에 속세의 오염된 귀가 정화되며, 잔잔히 불어오
는 산바람에 속세의 때가 싹 가시는 듯 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해탈의 경지로 다가서는 것
같은 기분이 엄습하면서 속세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이대로 들어가 다시는 속세에
얼굴을 내밀지 말까? 아 갈등된다~~. 허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겠는가? 나는 절과 자연에 영원히
묻히러 가는 것이 아닌 답사를 온 나그네일 뿐이다.

태안사는 볼거리도 풍부하지만 오솔길과 계곡도 태안사의 매력을 수식하는 아름다운 존재이자
얼굴이다. 부디 개발의 난도질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유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봄의 서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태안사 오솔길
비포장길의 위엄이 영원하길 고대한다. 괜히 방문자와 수레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콘크리트로 떡칠을 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  3번째 다리인 반야교(般若橋)
다리 난간에는 12지신상이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있다.

◀  12지신상의 하나인 말의 위엄
내가 말띠다 보니 ~~~


▲  마지막 다리인 해탈교(解脫橋)

4개의 다리를 필터로 삼아 철저히 번뇌를 거르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이 다리를 건너면서 해탈
의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허나 그 경지에 이룬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리 다리를 4
중, 10중으로 둬도 속세에 길들여진 중생은 물론 승려 상당수도 그것을 맛보기 힘들다. 번뇌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떠내려가겠는가?


▲  더 큰 세상을 꿈꾸며 열심히 물길을 재촉하는 태안사계곡


♠  태안사의 얼굴인 능파각(凌波閣)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2호

지루하지 않는 오솔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주차장과 절 안내문이 나오고, 바로 계곡 위에 사뿐
히 걸린 아름다운 능파각이 마중을 나온다.

능파각은 태안사의 얼굴이자 모델로 누각(樓閣)의 역할과 금강문(金剛門)의 기능까지 도맡고 있
는 누각식 다리이다. 그러니까 다리와 문, 누각 3개의 역할을 지닌 셈이다. 주변 풍경이 빼어나
아름다운 여인네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뜻한다는 능파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850년(신라 문성왕 11년) 혜철대사(惠哲大師)가 지었다고 하며, 941년(고려 태조 23
년)에 광자대사(廣慈大師)가 보수했다고 한다. 그 이후 파손된 것을 1767년(영조 43년)에 다시
지었으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특히 일주문과 더불어 6.25전쟁 때도 살아남
은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다리 양쪽에 바위를 이용해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2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보통 옛 다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걸치지
만 능파각은 교각도 없이 지은 나무 다리로 이 땅에선 매우 드문 케이스다. 천정에는 여러가지
동물상을 천정에 조각했으며,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수려한 풍경을 자아낸다. 


▲  계곡 양쪽에 양 다리를 걸치고 계곡을 굽어보는 능파각

▲  능파각 천정에 매달린 용머리 장식
귀여움이 묻어난 용머리가 눈을 부라리고
입을 벌리며 중생을 검문한다.

▲  능파각의 늘씬한 뒷모습


▲  충의문(忠義門), 문 너머로 경찰충혼탑이 보인다.

능파각에서 절로 가는 길은 2갈래로 갈린다. 능파각을 건너 신선의 세계로 통할 것 같은 오솔길
로 가도 되고, 능파각을 건너지 않고 큰 길로 가도 된다.

능파각을 오른쪽에 두고 길을 오르면 베이지 색이 입혀진 충의문과 함께 경찰충혼탑이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6.25의 뼈아픈 현장으로 그 당시 이곳을 지키다 산화한 우리 경찰의 충혼
이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잠시 숙연하게 한다.

때는 1950년 여름,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지 겨우 1달 만에 전라도 상당수를 점령했다. 당시 곡
성경찰서장 한정일은 부하 경찰과 함께 곡성을 지키기로 마음 먹고 태안사 보제루를 작전지휘소
로 삼아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950년 7월 29일 북한군 603기갑연대가 하동에서 남원으로 이동하고자 곡성 압록교를
지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압록교 부근에 매복하여 기습을 가해 북한군 55명을 생포하거나 죽
이고, 트럭과 싸이카 및 총 70여 점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뚜껑이 뒤집힌 북한군은 경찰의 근거지가 태안사임을 알아내고 8월 6일 기습 공격을 했다. 우리
경찰은 그들과 맞섰으나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48명 전원이 전사했으며, 이때 태안사
는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 이후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성금을 모아 절 옆에 자리를 마련해 충혼탑을 세우고, 매년 8
월 6일에 유족과 지역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다가 나라에서 1985년 현재의 충혼탑과 호국관
을 세워 매년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2000년에는 그들이 승전했던 압록에 승전탑(勝戰塔)
을 세워 그날의 함성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보통 절에는 나라를 지키다 호국(護國)의 신이 된 이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 있지만
이렇게 충혼탑까지 둔 곳은 태안사가 거의 유일하다.


▲  1985년에 세운 경찰충혼탑(警察忠魂塔)
그들의 함성과 충혼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6.25와 같은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부디 저들의 피가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호국관(護國館)

▲  충혼불멸(忠魂不滅) 표석


▲  충혼탑 뒤쪽에 둘러진 병풍석
1950년 당시 어둠에 저항하며 산화한 경찰들의 전투 장면을 어설프면서도
약소하게 처리한 얕음새김의 조각품이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양쪽에는
그들에게 바치는 진혼시(鎭魂詩)가 장엄하게 자리를 차지고 있다.

▲  경찰충혼탑을 지나 경내로 가는 길목에 심어진 커다란 돌탑


♠ 연못에 심어진 태안사3층석탑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70호

▲  북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연못
탑이 있는 섬까지는 조그만 나무다리가 놓여져 그에게 인도해준다.

경찰충혼탑에서 잠시 옷깃을 여미고 안으로 향
하면 경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길 왼쪽
에 잔디가 깔린 언덕이 나온다. 언덕 너머로 3
층석탑이 작게 바라보이는데, 그 언덕을 오르면
둥그런 넓은 연못이 나오고, 3층석탑은 연못 중
앙에 두둥실 뜬 동그란 섬에 단아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 연못은 일주문 서쪽에 자리해 있다. 능파각
과 더불어 태안사의 백미(白眉)로 주변 만물들
이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
념이 없다.
섬에 자리한 석탑은 이전에는 광자대사탑 앞에
있었다. 그때는 기단부 면석 1매와 1층 옥개석,
2/3층 탑신(塔身)이 사라진 상태였지. 그러다가
연못과 섬을 만들어 이곳으로 옮기면서 사라진
부분을 보충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연못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혔으며, 그 위에 머리장식을 두었다. 탑을 옮기
면서 바닥돌을 넓게 깔아 탑이 제법 커 보이며, 탑신부는 옛 석재와 새 것을 적당히 섞었고 머
리장식은 노반(露盤)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붙였다.
신라 말 석탑 양식을 갖춘 고려 초기 석탑으로 여겨지며, 광자대사탑 부근에 옥개석이 하나 더
있고 금강선원 앞 축대에도 옥개석이 있어 쌍탑(雙塔)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4.17m로 연못을 굽어보는 탑의 위엄이 자못 넘쳐보인다.


▲  연못 동쪽 바위에 얹혀진 조그만 돌탑들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얹힌 조그만 돌탑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계를 이룬다. 바위 오른쪽
에는 석탑 옥개석이 얹혀져 있는데, 연못에 있는 3층석탑의 일부거나 씽탑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  태안사 일주문(一柱門)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3호

▲  고색의 무게가 서린 일주문의 위엄
동리산은 태안사를 품고 있는 봉두산(鳳頭山)의 옛 이름이다. 산이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하여 동리산이라 불렸으며, 오동나무는 봉황이 서식하는 나무라고 한다.


연못을 지나면 능파교에서 갈라진 길이 다시 합쳐지면서 절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속
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문으로 절의 정문인 능파각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문은 937년 광자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1683년 각현선사가 다시 지었다. 1917년 영월(映月
)선사가 중수하고 1980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능파각과 더불어 격동의 6.25시절에
도 살아남은 건물로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문 정면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 쓰인 커다란 현판이, 뒤쪽에는 '봉황문(鳳凰門)'
이란 작은 현판이 걸려있다. 민흘림으로 이루어진 일주문 기둥은 중심기둥 외에 각각 2개의 기
둥이 더 있는데, 이는 지붕과 공포를 받치는 보조용 기둥이다. 문을 보면 현판이 걸린 평방 위
쪽 공포(空包)와 지붕이 육중해 기둥 2개로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별도로 2개씩을 더
두어 중심 기둥을 돕게 한 것이다.
천정 좌우에는 눈을 부릅뜨고 여의주를 문 용머리 장식이 서로 마주보며 달려있어 촘촘히 박힌
공포덩어리와 곱게 입혀진 단청과 더불어 문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 준다.

▲  일주문 천정 좌측 용머리 장식

▲  일주문 천정 우측 용머리 장식


▲  일주문에서 속세로 가는 길
집으로 살짝 가져와 두고두고 거닐고 싶은 길이다.

▲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일주문에서 경내까지는 인생처럼 짧긴 하지만 전나무 숲길이 푸르게
펼쳐져 한폭의 그림을 이룬다.


※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지 ~ 태안사의 내력
동리산이라 불린 봉두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태안사는 742년(신라 경덕왕 원년)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여 대안사(大安寺)라 했다고 한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에 '有舍名曰 大安其寺也'란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대안사라 불리는
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시절에는 혜철대사(惠哲大師)가 절을 크게 일으키고 태안사
로 이름을 갈았다. 그는 이곳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열어 선
종(禪宗) 보급에 열을 올렸는데, 그가 이곳을 택한 것은 경치가 아름답고 속세와 어느 정도 거
리를 두고 있어 수행하기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시조
인 도선국사(道詵國師)도 20대 시절 이곳에서 혜철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선종은 교종(敎宗)에 대항하여 신라 말에 유행했던 불교 종파로 교리를 중심으로 한 교
종과 달리 참선(參禪)을 중시하여 경전을 어려워했던 백성과 지방세력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고려 태조 시절에는 혜철의 손제자(孫弟子)인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가 중창을 벌였는데,
그 규모가 건물 40여 동, 110칸에 이르렀다고 하며, 법당에는 1.4m 높이의 철조약사여래(鐵造藥
師如來)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순천 송광사(松廣寺)를 말사(
末寺)로 두었다고 하니 왕년의 위엄이 한때나마 호남 하늘을 가리고도 남았음을 보여준다. (지
금은 화엄사의 말사임)

1223년(고종 10년)에는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우(崔瑀)가 왕명을 받들어 중건을 했고, 조
선 세종(世宗) 때는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곳에 머물며 왕실의 복을 빌고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바라를 남기기도 했다.
1684년에 중창된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해 오다가 6.25전쟁 때 이곳에 숨어 곡성 수
비를 꾀하던 곡성경찰서 경찰을 치고자 북한군이 기습을 가하면서 능파각과 일주문을 제외한 모
든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당시 화마(火魔)에 사라진 건물이 15동에 이른다.

1969년 대웅전을 복원했으며, 계속 복원불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
을 중심으로 약사전, 삼성각, 보제루, 해회당, 적묵당, 천불전 등 15~16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채우고 있으며, 적인선사탑, 광자대사탑, 광자대사탑비, 청동 대바라, 동종 등 보물 5점과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고 있어 고색의 무게를 진하게 간직한다. 또한 절 전체는 전남 지방문
화재자료 23호
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속세의 기운이 범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있고 찾는 이도 별로 많지 않아 한
적한 편이다. 게다가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깊으며, 절로 인도하는 오솔길도 사색하기에 좋은
아름다운 길로 신선의 세계로 여겨질 정도이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을 때 마냥 묻혀
지내고 싶은 절집으로 속세에 오염된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


♠  태안사의 장대한 역사가 담긴 승탑(僧塔)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태안사의 장대한 역사가 서린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가 있다. 광
자대사탑을 비롯하여 고려부터 조선까지를 망라한 승탑 7기와 광자대사탑비, 탑의 옥개석 등이
보금자리를 가득 메우는데, 그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광자대사탑과 탑비이다.


▲  아찔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광자대사탑비(廣慈大師塔碑) - 보물 275호

광자대사비는 태안사에서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새와 용머리, 보주(寶珠), 구름
무늬 등 다양한 문양이 비석의 수려함을 크게 돋보이게 한다. 아쉽게도 비신(碑身)은 오래 전에
도괴되어 우측에 따로 자리해 있으며, 비신이 빠진 것을 빼면 고려 초기 비석의 으뜸급임은 분
명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광자대사 윤다는 혜철의 손제자로 864년에 태어나 8살에 출가했다고 한다. 태
안사에 들어와 혜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고 돌아와 태안
사를 크게 일으켜 세웠다.
945년(혜종 2년) 81세로 입적하자 혜종(惠宗)은 '광자(廣慈)'란 시호를 내리고 그의 행장을 적
어 950년 비석을 세워주었다.

1941년 태안사 사적기에 '1928년 중건 당시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인선사탑비와 광자대사탑비의 이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  발을 움직이며 입에서 무언가를 쏟아낼 것 같은 광자대사탑비 귀부

▲  광자대사탑비의 이수 부분

▲  이수 중앙에 새(극락조?) 문양

▲  광자대사탑비의 뒷모습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의 비석 귀부는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별다른 상
처 없이 건재함을 과시한다.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이 벌려져 있고, 목에는 주름무늬가
세세히 표현되어 적당히 색칠을 가한다면 정말 거북이의 목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비석이 심어
진 비좌(碑座)에는 구름 무늬가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빼곡히 자리를 채우며, 그의 등에는
등껍데기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꼬리는 하늘로 말려져 있다.

비석 꼭대기를 장식하는 이수에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대신 날개를 활짝 편 새가 눈길
을 끄는데, 극락조(極樂鳥)로 일컬어지는 가릉빈가(迦陵頻伽)로 여겨진다. 파괴된 얼굴을 제외
하면 발톱부터 목부분까지 정교하게 박혀있어 하얀 새가 지금이라도 당장 하늘로 날라갈 것 같
다. 새 조각 밑에는 탑비 주인공 이름이 적혀있던 것으로 보이나 파손이 심해 확인이 어렵다.
이수 양쪽 끝에는 용머리가 달려있으며, 새 뒤쪽과 좌우에 3개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이
수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가득 수놓여 있고, 곳곳에 용의 몸통을 조각하여 모서리에 조각된 용과
조화를 꾀했다.

▲  이수 모서리에 용머리와 보주

▲  탑비에서 떨어져 나온 비신(碑身) 부분

광자대사탑비 옆에 나란히 놓인 비석은 원래 광자대사탑비의 비신으로 파손이 심해 판독하기가
거의 어려운 상태다. 허나 다행히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비
문의 내용이 실려있어 그 내용을 알게 해준다. 내용은 광자대사의 생애와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
한 대우를 받았던 일, 불가에 입문한 것 등이다.


▲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 보물 274호

광자대사비 옆에는 광자대사가 잠들어있는 승탑이 있다. 이 승탑 역시 탑비를 닮아 수려하기는
마찬가지라 바닥돌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8각의 탑신을 차례대로 얹혔으며,
그 위를 머리장식으로 마무리한 8각원당형 부도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부 밑 받침돌 위에 가운데 받침이 올려져 있으며, 윗받침에
는 16잎씩 연꽃을 2줄로 나열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탑신은 앞,뒷면 모두 향로 모양을
새겼고, 그 옆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지붕돌의 추녀는 너무 얇게 올려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과 보주를 비롯한 머리장식이 완전하게 남아있는데, 조각솜씨가
매우 섬세하고 조화로워 고려 초기 부도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  광자대사탑 옆에 자리한 조선시대 승탑
한참 선배인 광자대사탑과 탑비의 높은
명성에 눌려 거의 무명의 부도로 살아간다.


▲  일주문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들이 아늑하게 숲길을 이루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태안사 대웅전 주변

▲  경쾌하게 추녀를 들어올린 대웅전(大雄殿)

일주문 전나무숲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태안사 중심부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 뜨락에는 곧 다가올 불교의 경축일 석가탄신일을 대비하여 동서로 길게 줄을 치고 연등
을 달고 있었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태안사의 법당으로 광자대사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가 6.25때 파괴된 것을 1969년에 다시 세웠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한 아
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태안사를 빛낸 혜철국사와 광자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물
론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影幀)이다. 그리고 부처의 10대 제자의 영정을 비롯해 석가불의 본생
도(本生圖)로 내부 벽을 장엄했고, 내부 좌측에 조그만 동종(銅鐘)이 놓여있는데, 자칫 지나치
기가 쉽다. 하지만 그 종은 1457년에 주조되어 1581년에 다시 만든 조선 초기 종으로 태안사의
주요 보물 중 하나이니 꼭 살펴보자.
이 종에는 제작과 관련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조선시대 동종의 변화 과정을 담은 점이
인정되어 보물 1349호로 지정되었다. 그 종을 사진에 담으려는 찰라 갑자기 인천(仁川)에서 단
체로 온 신도들이 대웅전을 빼곡히 점거하는 통에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하는 아미타불, 그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갖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승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란히 자리한다.

▲  대웅전 정면에 자리한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강당의 역할을 하는 건물로 조선시대 절은 보통 법당 앞에 누(樓)를 두어 그 아랫도리
로 경내를 오르도록 했다. 허나 이곳은 아랫도리 대신 옆구리에 길을 내 돌아가는 형식을 취했
으며, 6.25때는 곡성 경찰이 이 건물을 작전지휘소로 삼아 북한군에 항전했다.

         ◀  보제루에 걸린 목어(木魚)
파란 피부를 지닌 목어는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
의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보통 절은 사물(四物
)이라 불리는 목어, 범종, 운판(雲版), 법고(法
鼓)를 갖추고 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목어가 유
일하며 그 흔한 범종각도 아직 없다.
지느러미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허공을 헤엄치는
커다란 목어의 자태가 꽤 인상적이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그의 등을 타고 가볼까..?

▲  종무소의 역할을 겸하는 적묵당(寂默堂)

▲  어처구니를 상실하며 옛 추억에 젖은 맷돌


▲  해회당(海會堂)

해회당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태안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바라가 있는데, 바라란 불교의식(불교 무용의 하나인 바라춤이나 설법, 큰 행사 등) 때 쓰는 접
시 모양의 악기로 2개가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놋쇠로 만드는데, 놋쇠판 중앙에 구멍을
뚫고 끈을 매어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낸다.
 
태안사 바라는 지름이 92cm, 둘레가 자그마치 3m에 이르는 규모로 효령대군이 남긴 것인데, 별
다른 손상이 없어 지금도 별무리 없이 쓰인다. 허나 워낙 무거워 두 사람 이상이 같이 들어서
사용하며, 바라 피부에는 정통(正統) 12년(1447년)에 만들어졌다는 내용과 효령대군이 아우인
세종 내외와 왕세자<훗날 문종(文宗)>의 복을 빌고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다.

대바라는 태안사 일급의 보물인만큼 속세에 공개를 하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서 적묵당에 문의
를 했으나 역시나 안된다고 그런다. 대바라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 앞에선 절대 안심할 수는 없다. 무덤의 육중한 석물도 아무렇지 않게 훔
쳐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래서 깊숙한 곳에 두어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다. 그외
에 1770년 고흥 능가사(楞伽寺)에서 만든 금고(金鼓)가 내부에 있는데, 지름이 1m가 넘는다고
한다. 금고는 반자(飯子)라 불리기도 한다.


▲  태안사 청동 대바라 - 보물 956호 (문화재청 사진)

▲  물이 없는 것처럼 나를 속인 석조(石槽)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석조는 늘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도꼭지
로 물을 통제하기 때문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종일 물이 나와 석조를 메우는 형태가 아니다. 그
래서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중생은 물이 없구나 싶어서 넘어간다. 나 역시 속았지. 허나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오니 신도 1명이 꼭지를 틀어서 물을 마시는 장면을 보고는 정말 한대 맞은 기분
이었다. 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나오는 것을 왜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을까?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근래에 만든
건물로 약사불의 거처이다. 정면 가운데 칸이
좌우 협칸보다 크게 설정되어 있다.


▲  삼성각 좌측에 봉안된 독성도(獨聖圖)


▲  약사전에 봉안된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약사전의 주인인 약사불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취하며 왼손에는 중생의 고통을 치료할 약이
담겨진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그시 굽어보는 그의 뒤쪽에는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있는데, 이는 벽에 받친 그림이 아닌 유화(油畵) 그림판이다. 임창수(林昶壽) 화백(畵伯)이 그
린 것으로 전통 안료를 쓰지 않고 유화로 한 것이 특징이며, 닫집이나 불상을 수식하는 장식물
이 없어 대웅전 불단보다 다소 허전하다.

◀  고참 승려의 공간인 염화실(拈花室)과
적인선사탑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보물 273호


▲  적인선사탑 앞에 마련된 배알문(拜謁門)

선원 북쪽,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안사의 개산조사(開山祖師)라 할 수 있는 혜철대사의
승탑이 넓게 터를 닦았다. 절을 세운 이는 3명의 신승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정체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혜철을 태안사의 시조로 여긴다. 그의 승탑은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
照輪淸淨塔)'이란 길고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어 외우기도 좀 어렵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태안사 적인선사탑')

부도에 잠들어 있는 혜철(惠哲)은 성이 박씨(朴氏), 자는 체공(體空)으로 785년 경주에서 태어
났다. 16세에 출가하여 806년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814년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지장(西
堂地藏)에게 심인(心印)을 받았다.
839년 귀국하여 태안사에 들어가 절을 크게 일으키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열어 선종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861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경문왕(景文王)은 적인(寂忍)이란 시호
를 내렸다.


▲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의 위엄

872년에 조성된 적인선사탑은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이곳에 서린 다른 보물과는 달리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절을 개창한 시조에 걸맞게 규모가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나 아찔한
아름다움에 두 눈이 마비될 정도이다. 승탑은 네모난 넓은 기단 위에 심어져 있는데, 거의 석가
불의 세존사리탑에 버금가는 대우로 위엄이 철철 넘쳐 흐른다.
탑 앞에는 높은 어른을 뵌다는 뜻의 배알문이 있는데, 높이가 다소 낮다. 하여 키가 큰 사람은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이는 머리를 숙여 정중히 예를 표하라는 의미다.

적인선사탑은 광자대사탑과 마찬가지로 8각원당
형의 승탑이다. 2중의 바닥돌 위에 8각 하대석
(下臺石)을 두어 각 면마다 방향과 형태를 달리
한 사자 1구를 새겼다. 중대석(中臺石)은 높이
가 낮으나 격을 잃지 않았으며, 상대석(上臺石)
에는 하늘을 향해 꽃잎을 펼친 앙련(仰蓮)이 3
중으로 조각되어 탑신부를 우러르는 것 같다.

탑신 전면에는 문비(門扉)라 불리는 네모난 문
짝이 새겨져 있고, 탑신 위쪽 지붕에는 지붕선
이 세세히 표현되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相
輪)에는 복발과 앙화(仰花), 보륜이 차례대로
장식되어 있고, 보주로 꼭대기를 마무리 했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오래된 승탑임에도 근래 만든 것처럼 정정하며 탑의 피부는 조금 회색 빛
깔을 띌 뿐, 장대한 세월의 때와 상처는 전혀 없다. 온후한 기품이 돋보이고 거의 완전히 보존
되어 신라 후기에 가장 우수한 승탑으로 칭송을 받는다. 특히 6.25 때 북한군이 이곳까지 습격
해 절을 죄다 불질렀음에도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적인선사탑과 동백나무 (승탑 오른쪽 나무가 동백나무)

▲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청정탑 우측에는 혜철의 생애와 업적을 담은 청정탑비가 부도를 바라보며 자리한다. 이 비석은
오래 전에 비신(碑身)이 파괴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비신을 새로 만들어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귀부와 이수는 옛날 것이며 비신에 적힌 비문은 다행히 탁본한 것이 경내에 전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으나 광자대사탑비에 비하면 조금은 수준이 떨어진다. 또한 1928년 절
을 중건할 때 광자대사탑비의 이수를 옮겨와 청정탑비의 이수로 썼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뒤바
뀌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 (일주문에서 능파각으로 가는 길)

▲  솔내음이 충만한 오솔길 (성기암 입구)

태안사 곳곳을 사진에 담으며 머문 시간이 거의 1시간, 시간이 집으로 갈 시간이라며 자꾸 나가
자고 보챈다. 나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속세에서 살아갈 운명이기에 마음만은 능파각 기
둥에 살짝 걸어놓은 채, 속세로 길을 떠났다.

절을 나오면서 계곡 동쪽에 있다는 천불전(千佛殿)과 산왕각(山王閣)은 가지 않았으며, 태안사
의 부속암자인 성기암은 가려다가 귀찮아서 통과했다. 이렇게 다음에 다시 찾을 구실을 남기며
자연과 벗삼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태안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는다.

※ 곡성 태안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익산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
  라선 열차를 타고 곡성역 하차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곡성행 고속버스가 1일 1회(15시) 떠난다.
* 광주에서 곡성행 직행버스가 15~40분 간격. 전주에서는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곡성터미널에서 태안사입구 경유 원달리행 군내버스가 1일 7~8회 다니며, 곡성역을 경유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능파각까지 진입 가능, 능파각과 조태일시문학관에 주차장 있음)
① 순천완주고속도로 → 황전나들목을 나와서 곡성방면 17번 국도 → 압록교를 건너 좌회전 →
   태안3거리에서 좌회전(다리를 건넘) → 태안사입구 → 태안사
② 남해고속도로 → 석곡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석곡에서 압록 방면 우회전 → 죽곡 → 태
   안교3거리에서 우회전 → 태안사입구 → 태안사
*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
061-362-4906,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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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3년 5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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