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권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23.11.17 보석 같은 이름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금산 진악산 보석사 <1,000년 묵은 보석사 은행나무>
  2. 2022.06.13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늦겨울 나들이 (의열사, 금성산, 조왕사,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와 서동공원)
  3. 2021.10.08 청양의 꿀명소를 거닐다 ~~ 우산, 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나들이 (청양3층석탑, 소원바위)
  4. 2020.11.03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5. 2020.03.20 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6. 2019.02.23 천하에서 제일 큰 청동좌불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천안 태조산 각원사 ~~ (태조산 성불사)
  7. 2018.01.12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평지 읍성이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현장, 서산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8. 2017.03.05 눈덮힌 폐허의 절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다.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곳 ~~ 보령 성주사지
  9. 2016.01.17 새해맞이 산사 나들이, 예산 금오산 향천사 (산사의 조촐한 설경) 2
  10. 2015.11.07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우리나라 민속마을의 성지 ~ 아산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보석 같은 이름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금산 진악산 보석사 <1,000년 묵은 보석사 은행나무>

금산 보석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금산 보석사 ~~~
금산 보석사
 



 

겨울이 무심히 깊어가던 1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금산 보석사를 찾았다. 햇님이 막 출근
하던 7시에 건대입구역(2/7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서울을
벗어났는데, 다람쥐 챗바퀴 같은 일상과 내 인생의 99.9%를 머물렀던 서울을 잠시라도 벗
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만큼 마음 설레는 것은 없다.

일행의 차를 타고 2시간 정도를 달려 충북 청주(淸州)의 어느 고찰을 첫 답사지로 둘러본
다음 1시간을 더 달려 인삼의 고장인 충남 금산군(錦山郡)으로 들어섰다.
금산에 왔으니 인삼(人蔘)은 구경하고 가야 후회가 없겠지. 하여 금산읍내에 있는 인삼국
제시장에서 조촐히 몸보신도 할 겸 인삼갈비탕으로 점심을 섭취했는데, 인삼이 든 갈비탕
을 먹어서 그럴까? (인삼은 별로 들어있지 않았지만 생각 외로 가격은 저렴했음;) 장거리
이동과 추위, 식곤증으로 적지 않게 지친 몸에 잠시나마 화색이 도는 것 같다. 그 기세로
이번 나들이의 2번째 메뉴로 금산읍내에서 20리 남짓 떨어진 보석사를 찾았다.



 

♠  진악산 보석사(眞樂山 寶石寺) 입문

▲  보석사 일주문(一柱門)

보석사는 20대의 한복판에 첫 인연을 지었다. 그 이후 10여 년 만에 이렇게 2번째 인연을 짓
게 되었는데, 그때도 겨울의 한복판이었고 이번에도 한겨울이다. 즉 겨울에만 이상하게 인연
이 닿아서 보석사의 겨울 풍경만 다시 복습하게 된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맞배지붕을 지닌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예전
에는 현판이 없었는데 그새 '진악산 보석사'라 쓰인 현판이 새로 돋아나 이곳의 정체를 속세
에 알린다.


▲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23호

일주문을 지나면 전나무숲길이 시작되면서 의병승장비를 머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모습을
비춘다.
이 비석은 1840년 조선 조정에서 임진왜란 시절 토왜(討倭)에 힘쓰다가 전사한 영규대사(靈圭
大師)를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높이는 4m이다. '의병승장'이란 바로 영규대사를 말하는 것으
로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 비문(碑文)을 짓고, 금산군수 조취영(趙冣永)이 글씨를 썼는데,
비석 앞에 큼지막하게 쓰인 '의병승장(義兵僧將)' 4자는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가 썼
다.
비석 왼쪽 옆구리에는 창건화주(創建化主) 낙봉대인(樂峯大仁) 등 비석을 세울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옆구리에는 김병주가 '의병승장' 글씨를 쓴 사실이 기
록되어 있다.

1940년에 어느 개념 없는 왜인 경찰이 애궂은 이 비석에 해코지를 하여 비각을 부시고 '의병
승장' 글씨를 망가뜨려 땅에 묻은 것을 1945년에 정요신(鄭堯臣) 등 지역 사람들이 찾아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비석은 다시 일어났으나 그때의 휴유증으로 글씨가 크게 훼손된 상태라
심히 안타까움을 준다.

▲  비각에 담긴 의병승장비

▲  비각 뒷쪽에 자리한 여러 비석들


▲  보석사 전나무숲길 ①

일주문에서 은행나무 전까지 전나무 숲길이 싱그럽게 펼쳐져 있다.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
은 전나무들이 고품격의 그늘과 숲내음을 베풀고 있는데, 그들이 불어주는 내음이 온갖 번뇌
로 정신이 없는 머리와 마음을 차분하게 다듬어준다.


▲  보석사 전나무숲길 ② 은행나무 방향

▲  경내 직전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탑들
고색이 낀 이들은 조선 후기 승탑(僧塔)들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지붕돌을 지닌 승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  경내를 가리고 있는 돌담과 범종루(梵鍾樓)

보석사는 바깥에서 경내가 보이지 않게끔 담장을 꽁꽁 둘러 혹시 모를 좋지 않은 기운을 경계
한다. 경내와 바깥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범종루 밑도리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차
량 접근을 위해 뚫어놓은 동쪽 문으로 들어서도 된다.


▲  선원(禪院)으로 쓰이는 보석사 심검당(尋劍堂)

▲  말라버린 동그란 석조(石槽)

진악산이 베푼 물이 날개짓을 하는 극락조(極樂鳥)의 작은 입을 통해 석조를 가득 채우고 있
어야 되거늘 한겨울이라 물이 완전 말라버렸다. 그러다보니 극락조는 실업자 신세가 되어 멍
한 모습으로 석조를 바라본다. 물을 뱉어내지 않으면 저 극락조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석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금산 지역의 명산(名山)으로 추앙을 받는 진악산(732m) 남쪽 자락에 이름도 꽤 있어 보이는
보석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인 885년에 조구대사(祖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시절, 절 앞산에
금광이 있었는데, 거기서 금을 캐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며, 그 연유로 보석사란 간판을 달
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9세기 말에 창건되었는지는 의심이 가지만 경내 앞에 1,000년 이상을
헤아리는 늙은 은행나무가 있어 창건시기는 그런데로 맞는 듯 싶다.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6세기 후기에 영규대사가 이곳에 머물며 도를
닦았으며,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조헌(趙憲)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에게 공격을 당한
왜군이 화풀이로 이곳을 불질러버렸다.

이후 17세기에 중건되었으며,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원으로 중창되어 왕실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1912년에는 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로 전북 지역 33개 사찰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강원(講
院)까지 갖추어 많은 학승(學僧)을 배출하기도 했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31본산에서 밀
려나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그늘에 묻히게 되었다. (금산 땅은 원래 전북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에 충남으로 넘어감)
 
아담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의선각, 산신각, 요사, 심검당, 범종루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절의 이름 유래가 되었던 금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보석처럼 비싼 돌도
이제 하나도 없지만 금산의 대표적인 늙은 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장대한 은행나무와 대웅
전, 목조석가여래3존좌상, 의병승장비, 의선각 등의 보석 같은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어 보
석사란 이름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특히 은행나무는 이곳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로 추
정 나이는 무려 1,000년 이상, 40m의 큰 키를 자랑한다.

* 보석사 소재지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11 (보석사1길 30, ☎ 041-753-1523)



 

♠  보석사 둘러보기

▲  보석사 대웅전(大雄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보석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식 맞배지붕 집이다. 돌로
높이 다진 석축 위에 아담하게 들어앉아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1882년에 재건되었다. 그때 지붕에 넣은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어 그
내용을 담은 안내문이 앞에 마련되어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존좌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대웅전은 보석사의 보물 창고 같은 곳이니 내부를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불단에는 탄탄한 금동 피부를 지닌 목조석가여래3존좌상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들을 맞
이하고 있다. 이들은 단정한 인상과 균형 잡힌 신체로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불상으
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성 관련 복장(腹臟)유물이
나 문서 등이 없어 자세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17~18세기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
여래상은 오른쪽 어깨를 살포시 덮은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법의를 입고 있다.
석가여래상 좌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문수보살 배 부분과 양 무릎에는 꽃무늬 장식 등이 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비슷한 연배로 여겨지는 후불탱이 고색의 내음을 드러내며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법당 수호를 책임지는 호법신(護法神)들이 빼곡히
담겨진 신중탱(神衆幀)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기허당(騎虛堂)
기허당은 예전 진영각(眞影閣)으로 절을 세운 조구대사와 영규대사(기허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예전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서산대사(西山大師),
영규대사의 진영이 있었으나 모두 불의의 도난을 당하여 봉안 주체를
조구대사, 영규대사로 변경하고 새로 진영을 마련했다.

▲  영규대사(왼쪽)의 진영과 조구대사의 진영(오른쪽)

영규대사는 그의 진영이 여럿 남아있어서 그의 생전의 모습이라 여겨지지만 조구대사는 기록
도 매우 부실하여 생전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하여 막연히 미남형으로 그려놓았다. 그래도
절 창건자인데 너무 추남처럼 그리면 좀 그렇겠지.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좋은 대상은 좋게
표현하고, 나쁜 대상은 좋지 않게 그린다. (악귀들은 다 괴물처럼 표현되고, 선하거나 친한
존재들은 모두 미남, 미인으로 표현됨)


▲  보석사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산신각이 있다.
이름 그대로 산신의 거처로 건물의 높이가 낮아서 현판과 풍경물고기가
머리에 닿을 정도이다.

▲  산신각 산신탱

산신탱에는 하얀 수염의 산신 할배를 중심으로 동자 2명, 호랑이, 소나무, 산, 폭포 등이 담
겨져 있다. 다른 산신탱과 달리 호랑이가 2마리나 있어 다른 산신들보다 장사가 잘되는 모양
이다. 노동법 개정으로 호랑이들 급여도 만만치 않을텐데 말이다.


▲  나와 같은 눈 높이에 있는 산신각 풍경물고기

풍경물고기는 보통 손이 닿지도 않을 높은 위치에 매달려 있어 그야말로 그림의 풍경물고기였
다. 허나 이곳은 높이를 낮추어 바로 내 눈높이에서 딸랑딸랑 풍경 소리를 내고 있어 그를 직
접 만져볼 수도 있고 툭툭 치며 소리를 유발시킬 수도 있다.
풍경(바람방울) 밑에 달린 물고기는 푸른 하늘을 그의 바다로 삼으며 몸을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는데, 그의 눈을 보면 번쩍 떠있다. 이는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열심히 수행하라는 뜻
이다. 또한 화재를 막고자 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  의선각(毅禪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29호

대웅전 맞은편에는 'ㄱ'자 모습의 의선각이 있다. 이곳은 영규대사가 머물며 수련을 하던 곳
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9세기에 중건했다. 건물에게 씌워진 '의선'은 굳은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으로 조선 조정이 영규대사에게 내린 이름이다.
의선각 현판은 창녕위 김병주가 쓴 것이며 현재는 요사 겸 선방으로 쓰이고 있는데,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의연한 모습을 지닌 의선각 현판의 위엄

▲  경내에서 바라본 보석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365호

▲  앞에서 바라본 보석사의 자연산 보석, 은행나무

보석사에 왔다면 대웅전 내부와 더불어 꼭 살펴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이곳의 자연산
보석인 은행나무이다.
경내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이 큰 나무는 추정 나이가 무려 1,000년 이상을 헤아린다.
높이 40m(어떤 자료에는 34m), 나무둘레 10.72m(11m)로 이 땅의 은행나무 중 가장 지존으로
꼽히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은행나무(☞ 관련글 보기) 다음 수준으로 덩치가 크다.

보석사를 세운 조구대사가 제자 5명과 함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6
그루를 심었다고 하며 그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점차 하나로 합쳐졌다고 전한다. 나무의 나
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구대사의 창건시기와 그런데로 맞아떨어져 절의 신라 말기 창건설을
그런데로 뒷받침해준다.

나무가 너무 늙다 보니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내려왔고, 다시 거기서 가지가 자라나 하늘
로 오르고 있다. 뿌리는 100여 평의 땅속에 단단히 퍼져 있으며, 뿌리에서 2~3m 높이에 싹이
수없이 돋아나 있어 그의 뜨겁고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천하를 그의 그늘로 모두 덮
어버릴 정도로 장대한 수형(樹形)을 자랑해 보석사 경내가 거의 그늘에 묻혀있다고 해도 과언
은 아니다.
너무 오래 살아서일까? 세상에 뭐그리도 걱정이 많은지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미리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심지어는 24시간을 운다고도 하는데, 1945년 광복
과 6.25전쟁 때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하여 마을을 지키는 신성한 존재로 오랫동안 애지
중지되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15일(경칩)에 보석사 승려와 석동리 마을 주민들이 은행나무
에 대신제를 지낸다.


▲  은행나무 그늘에 세워진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표석
표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은행나무 앞에서는 일개 작은 자갈일 뿐이다.

▲  기린암(麒麟巖)

은행나무 옆에는 푸른 이끼 옷은 입은 기린암이란 바위가 있다. 여기서 기린(麒麟)은 목이 긴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로 이곳 은행나무를 기린으로 표현한 듯 싶다. 또렷하게 새겨진 기린
암 바위글씨 밑에는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이름 3자가 빼곡히 적혀있다.


▲  보석사 옆구리를 지나는 계곡 (보석사계곡)
지금은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보며 바짝 엎드려 있지만 소쩍새가 우는
그때가 되면 겨울이 씌워놓은 것들을 모두 박차며 일어설 것이다.

▲  보석사를 뒤로하며 (전나무숲길)

은행나무를 끝으로 오래간만에 찾은 보석사 복습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예전에는 계곡을
따라 진악산을 아주 조금 올라가긴 했으나 남쪽 길이 한참이라 절만 살펴봤다. 다음에 만약
인연이 된다면 늦가을에 찾아와 황금색 은행잎을 휘날리는 은행나무를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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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늦겨울 나들이 (의열사, 금성산, 조왕사,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와 서동공원)

부여 늦겨울 나들이 (의열사, 금성산, 조왕사, 궁남지)



' 부여 늦겨울 나들이 '

금성산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  금성산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궁남지와 포룡정 국립부여박물관 석조여래입상

▲  궁남지와 포룡정

▲  국립부여박물관 석조여래입상



 


천하의 바다를 주름잡으며 거대한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 바다 건너 왜열도를
속방으로 거느리고 중원대륙(서토)의 수많은 해안 지역(요서에서 오월까지)을 점령해 다
스렸으며, <월남(越南, 베트남)과 동남아까지 장악했다는 설도 있음> 5세기 후반에는 산
동반도(山東半島)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북위(北魏)와 자웅을 겨루어 그들의 수십만 기병
을 묵사발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를 주름잡던 백제는 660년 7월, 신라(新羅)~당(唐) 연합군
의 공격과 나라의 내부 분열로 허무하게 그 막을 내리고 만다.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都邑)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그때는 사비성(泗沘城)이라
불렸다. 백제 26번째 군주인 성왕(聖王, 재위 523~554)은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538년 웅진(공주로 여겨짐)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는데, 왕년에는 15만 호(戶)
의 약 80만 인구를 지녔던 대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고구려 평양성은 21만 호, 신라 경
주는 17만 호)
허나 지금의 부여읍내를 보면 이곳이 과연 15만 호를 지녔던 현장인지 의문이 벌컥 든다.
터가 좀 작기 때문이다. 하여 사비가 부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으며,
중원대륙(서토)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장엄했던 사비성은 백제 멸망 이후, 조그만 고을로 전락하여 부여란 이름
으로 충남의 조그만 군(郡)으로 살아가고 있다.

겨울 제국의 기운이 조금씩 덜해가던 2월의 끝 무렵, 옛 백제의 영광을 느끼고자 간만에
부여를 찾았다. 거의 11년 만에 방문으로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아침 일찍 남부터미
널로 이동하여 부여로 가는 시외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부여까지는 거의 2시간 거리, 부여시외터미널에 도착하자 바로 첫 답사지인 의
열사로 이동했다. 그곳에 가려면 부여의 대표 명소로 꼽히는 정림사지(定林寺址)의 북쪽
돌담길을 지나가야 되는데, 돌담 너머로 정림사터와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잠시 들렸다 가
라며 진하게 유혹의 눈짓을 보낸다.
허나 그들은 20대 시절에 실컷 둘러본 터라 쿨하게 통과했으나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유
혹을 뿌리치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  백제와 고려, 조선의 충신을 봉안한 조그만 사당
의열사(義烈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14호

▲  담장 밖에서 바라본 의열사

부여문화원 뒷쪽이자 금성산 서쪽 자락에는 의열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575년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이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 충신인 부여성충(扶餘成忠, 흔히 성충이라 불림)과
흥수(興首), 계백(階伯). 그리고 고려 후기 충신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자 세웠다.
홍가신은 그들의 충의(忠義)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대단함에도 천하에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손수 사당을 세웠는데, 1577년 나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부여 출신
으로 선조 때 활동했던 정택뢰(鄭澤雷), 인조 때 문신인 황일호(黃一皓)를 추가 배향하여 백
제와 고려, 조선을 아우르는 6명의 인물을 봉안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6명)

1641년 사당을 새로 지었으며, 1866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가 이후 읍내 부근 용정리 망월산에 다시 지었다. 그러다가 1971년 현 자리로 이전되어 지금
에 이른다.

▲  굳게 닫힌 의열사 삼문(정문)

▲  뒷쪽에서 바라본 의열사

의열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당 외에 재실(齋室) 1동을 갖춘 조촐한 규
모이다. 내가 갔을 당시는 태극마크가 그려진 삼문(三門)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서 담장 바
깥에서 까치발로 대충 내부를 살폈다. 담장이 낮기 때문에 바깥에서 봐도 충분하므로 굳이 무
리하면서까지 담을 넘거나 문을 두드릴 필요는 없다.
매년 3월 20일, 9월 20일에 제향을 올리며, 사당 밖에는 의열사의 역사를 담은 의열사비가 있
다.

▲  적막이 스치는 의열사 뜨락

▲  의열사비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46호

의열사와는 실과 바늘의 관계인 의열사비는 1723년에 이간(李柬)이 썼다. 의열사의 건립 과정
과 역사, 이곳에 배향된 인물에 대해 적혀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빗
돌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지은 단촐한 모습으로 용정리 망월산에 있던 것을 1971년 이
곳으로 옮겨왔다.

사당 앞에 서면 부여읍내가 전체는 아니지만 상당수 시야에 들어온다. 겨우 조그만 언덕을 올
라왔을 뿐인데도 이 정도까지 보이는 것은 읍내가 금강(백마강) 주변 평지에 둥지를 틀고 있
어서이다. 읍내를 둘러싸고 북쪽에 부소산(扶蘇山), 동쪽에 금성산이 있고, 서쪽과 남쪽은 백
마강에 감싸여 있다.

* 의열사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3 (의열로29번길 11-33)


▲  금성산의 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계백문 생태다리

의열사 동쪽에 금성산으로 이어지는 조그만 길이 있다. 그 길을 오르면 쉼터를 갖춘 공원(남
령근린공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계백문'이라 불리는 생태다리가 마중을 한다.

계백문은 계백로 도로 개설로 금성산과 의열사가 있는 산자락이 절단되자 그 끊어진 맥을 잇
고자 도로 위에 만든 일종의 생태다리이다. 온갖 수풀과 소나무를 가득 심고 그 중간에 박석
을 입힌 산책로를 내었는데, 이것이 도로 위에 만든 생태다리인지 그냥 산의 일부인지 모를
정도로 아주 감쪽 같이 만들었다. 다리 양쪽 사이드에는 노란색 바탕에 백제 깃발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백제 요새를 거니는 기분과 함께 이곳이 백제의 옛 도읍이었음을 잊지 않게 한다.

이 생태다리가 계백문이 된 것은 바로 계백로에 있기 때문이다. 황산벌(논산시 연산으로 여겨
짐)에서 신라의 5만 대군과 맞서다가 장렬히 전사한 계백 장군의 이름을 딴 도로로 계백에 대
한 부여 사람들의 마음과 자긍심을 진하게 비추고 있으며, 부여군청로터리에는 그의 동상까지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계백문 생태다리

▲  금성산 숲길 (성화대 방향)

계백문을 넘어 경사진 산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느긋하게 펼쳐진 서쪽 숲길로
가면 무로정과 성화대로 이어지는데, 무로정 주변에는 몸을 푸는 운동시설이 여럿 있다.


▲  인간의 제일 큰 꿈, 불로(不老)를 담은 무로정(無老亭)

금성산 서쪽 봉우리에 자리한 무로정은 1977년 12월 부여군수 정연달이 지었다. 정자의 이름
인 '무로'는 늙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간들의 가장 큰 소망을 머금고 있다.

허나 아쉽게도 이 세상 누구도 늙음에서 자유
로운 존재는 없다.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
歌)처럼 아무리 철통 같이 늙음이 오는 것을
막아도 결국 지가 알아서 찾아온다.
그러니 '무로'는 인간의 큰 꿈이면서도 부질없
는 꿈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읍내 중장년층
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 그들의 희망을 저
격하고자 이런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  필체가 또렷한 무로정 현판의 위엄

 


 

♠  부여읍의 포근한 뒷동산, 금성산(錦城山)

▲  부여읍내를 굽어보는 금성산 성화대

부여읍내 동쪽에 자리한 금성산은 해발 124m의 야트막한 뫼이다. 읍내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
산으로 낙화암(落花巖)과 고란사(皐蘭寺), 백마강(白馬江)을 품은 부소산은 많이들 알고 찾아
가지만 금성산은 인지도가 낮아 찾는 이는 별로 없다. 아직까지는 지역 사람들의 숨은 뒷동산
인 것이다.

허나 이곳은 낮은 명성과 달리 부여의 꿀단지 같은 산이다. 산세가 넓고 길쭉해 부여읍의 동
쪽 지붕길을 이루고 있으며, 멀리 능산리고분군과 청마산성(靑馬山城)까지 이어진다. 경사도
완만하고 포근하며, 숲이 짙어 정상 주변은 산림공원으로 가꿔지고 있다.
또한 조왕사(금성산) 석불좌상과 의열사, 금성산성터, 백제 와적기단 건물터 등의 늙은 문화
유산과 성화대, 국립부여박물관 등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특히 성화대에 오르면 부여읍내와
부소산, 백마강이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매우 일품이다. 그러니 부여에 왔다면 그 흔한
곳들만 살피지 말고 금성산에도 꼭 안겨 보기 바라며 성화대에서 부여읍내를 굽어보며 한때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위엄을 날렸던 사비성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각자 그려보기 바란다.

* 금성산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가탑리


▲  사비 백제의 상징, 금동대향로가 새겨진 성화대(聖火臺)

금성산은 백제 후기에 오산, 부산(浮山)과 더불어 삼영산(三靈山)의 하나인 일산(日山)으로
깊히 신성시된 산이라 전한다. 백제가 번성했을 때는 이들 삼영산의 신(神)들이 자주 왕래를
했다는 전설이 있어 조촐한 겉모습과 달리 백제와 부여 땅의 중요한 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
으며, 부여의 대표적인 축제인 백제문화제가 열리기 전에 이곳 성화대에서 삼신제(三神祭)를
지낸다.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정림사지와 백마강, 부산도 바라보임)

금성산은 부여읍내가 훤히 바라보이고, 읍내 동쪽에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부여를 지키는 요
충지로 매우 애지중지되었다. 하여 백제는 이곳에 산성을 쌓아 도성(都城)을 지켰고, 신라~당
연합군과 내부 배신자들에 의해 700년 이상 묵은 백제가 멸망하자 전국에서 백제부흥군이 들
고 일어나 신라~당 연합군을 부소산성 일대로 몰아넣고 금성산에 목책을 세워 도성 탈환을 노
렸다.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남부 (궁남지 주변과 백마강)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북부 (백마강과 구드래, 부소산)

성화대는 서쪽으로 펼쳐진 부여읍내를 굽어보고 있다. 읍내 전체는 물론 백마강과 규암면 지
역, 금성산과 함께 삼영산의 하나였다는 부산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오는데, 부소산은 읍내(남
쪽) 방향을 향해 이런 조망을 보기가 어려워 금성산이 부소산도 감당하지 못한 그 조망을 유
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금성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금성산에는 소나무가 많아 솔내음의 품질도 좋은 편이다. 기왕 뫼에 왔으니 그 정상도 가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통과하고 조왕사로 내려갔다. 솔직히
15분 정도만 가면 금성산 꼭대기로 왕복 30분에 머무는 시간 10분을 더해서 40분이면 충분하
거늘 그것도 귀찮아서 발길을 돌려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다소 후회가 든다. 그렇다
고 나중에 또 간다는 보장도 없거늘 다시 가야 되는 빌미만 만들고 말았다.


▲  조왕사 윗쪽 산길 (성화대 남쪽)

▲  금성산의 소중한 선물, 조왕사 약수터

조왕사 동쪽에는 금성산의 젖줄인 조왕사 약수터가 있다. 부여읍내에서 유명한 약수터로 겨울
가뭄이 극심이지만 금성산의 마음이 넉넉한지 이곳만큼은 가뭄을 잊어도 좋다. 백제 후기부터
부여를 보듬던 금성산이니 그 마음이 오죽하랴.
겨울 단잠에 빠진 빨간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갈증과 몸속의 체증
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없다.


▲  금성산 조왕사(朝王寺)

조왕사는 금성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내가 금성산을 찾은 주된 이유는
바로 조왕사에 머물고 있는 늙은 석불을 보고자 함이다.
그 석불은 1913년 금성산 남쪽 자락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1919년 김병준이란 사람이
석불을 봉안하고자 불당 1칸을 지으니 그것이 조왕사 100년 역사의 시작이었다. 절 이름인 '
조왕'은 '제왕을 조근(朝覲)한다'는 뜻으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은 조선 왕조를
섬기려는 의도에서 지어졌다고 전한다.
1981년 요사(寮舍)를 새로 짓고, 1984년 왜인(倭人) 불자들이 보낸 돈으로 종각(鐘閣)을 지었
으며, 1987년 홍수로 발견된 옛 석탑의 부재를 수습해 대웅전 앞에 복원했다.

손바닥만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종각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석불좌상과 석탑 등의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  조왕사 석탑 - 부여군 향토유적 13호

잔디가 입혀진 대웅전 뜨락에는 고색의 기운이 짙은 엉성한 모습의 석탑이 있다. 그는 1987년
여름 홍수 때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부근에 묻혀 있던 석탑의 부재(部材)들이 거친 홍수로 다
시금 햇살을 보게 되자 그들을 꺼내 3층석탑으로 일으켜 세웠다.
바닥돌과 기단(基壇), 1층 탑신은 전혀 어색함이 없어 하나의 탑이었음을 보여주나 2층과 3층
은 발견된 탑돌과 지붕돌을 대충 끼어 맞추면서 상당히 어색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서로가
이토록 맞지가 않으니 아마도 2기 이상의 탑이 뒤엉켜 쓰러져 있던 것으로 보이며, 탑의 양식
으로 보아 조선 때 것으로 여겨진다.


▲  금성산 석불좌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3호

대웅전 안에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석불좌상이 소중히 봉안되어 있다. 그는 금성산 남쪽 자락
이름 없는 절터에 묻혀있던 것으로 1913년에 발견되었다.
다시 햇살을 보게 된 이후, 병을 낫게 해주고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영험한 석불로 소문이 나
면서 동네 사람들이 애지중지했으나 딱히 거처가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다닌 것을 1919년에 비
로소 집이 생겼다. 그것이 지금의 조왕사이다.

그는 고려 때 석불로 거의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는데, 얼굴 부분이 다소 검게 탄 것을 제외
하면 상태도 그런데로 양호하다.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있는 지권인(智拳印) 비슷한 수인
(手印)을 선보이고 있어 비로자나불로 여겨지며, 검은 꼽슬머리에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
이 얕게 솟아있다. 검은 때가 자욱한 얼굴은 마치 뚱보 아지매처럼 풍만한 모습이며, 길쭉한
눈썹과 눈, 코, 조그만 입, 귀가 남아있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남아있으며, 어깨는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가 앉
은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비록 확인은 못했지만 대좌 밑부분에
귀꽃이 핀 안상(眼象)과 밑을 향해 잎을 펼친 복련(伏蓮)이 새겨져 있다. (정면이 아닌 옆에
서 보면 연꽃대좌의 밑도리도 볼 수 있음) 석불의 높이는 127cm, 좌대 높이 96cm, 대좌 너비
는 95cm이다.

나는 그에게 삼배를 올리며 슬쩍 나의 민원을 넣어보았다. 접수가 제대로 되었는지는 석불이
무표정으로 일관하여 알 도리가 없지만 마음만큼은 잠시나마 편해진 기분이다. 석불 뒤에는
석가여래후불탱이 있으며, 주위로 신중탱 등의 그림이 법당(法堂)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조왕사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0-3 (계백로 334-47, ☎ 041-835-4091)


▲  금성산에서 읍내로 내려가는 길 (오른쪽 펜스 너머가 국립부여박물관)

조왕사를 둘러보고 서쪽 길을 따라 읍내로 내려갔다. 길 남쪽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넓게 둥
지를 틀고 있는데, 원래는 부소산 남쪽 관북리에 있었으나 1993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규모가 더욱 장대해졌다.
오랜만에 발을 들인 부여 땅이라 그를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어 1시간 정도 박물관 내부를 둘
러보았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으니 부담도 정말 없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대한 내용은 이쯤에서 쿨하게 자르도록 하겠음)

▲  박물관 뜨락에서 만난 부여 동사리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21호

▲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普光寺 大普光禪
師碑) - 보물 107호

▲  당 유인원 기공비(唐 劉仁願 紀功碑) -
보물 21호

▲  제2전시관에 재현된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3존불



 

♠  백제 무왕(武王)이 만든 매우 오래된 백제시대 정원 유적
부여 궁남지(宮南池) - 사적 135호

▲  연꽃의 거대한 보금자리, 서동공원(薯童公園)

부여읍내 남쪽에 자리한 궁남지는 읍내 북쪽에 부소산성(낙화암, 고란사)과 구드래, 읍내 중
간에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와 더불어 부여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는 이 지역의 대표 명소
이다. 2002년 이후 궁남지 주변에 연꽃을 위한 연못과 논두렁을 가득 만들어 연꽃을 주렁주렁
심으면서 이제는 천하 제일의 연꽃 성지(聖地)이자 축제 장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다.

연꽃이 나래를 펼치는 한여름이나 9월에 왔더라면 그들의 즐거운 향연에 두 망막이 제대로 호
강을 누렸을텐데, 비수기나 다름이 없는 겨울 제국의 한복판에 오니 연못과 논두렁에는 누렇
게 뜬 식물만 가득하다. 그들이 바로 연꽃이었다. 비록 지금은 한결같이 우울한 모습이나 겨
울 제국의 압정(壓政) 속에도 몰래 봄을 잉태하며 소쩍새의 울음 소리를 기다린다.

여름 제국의 한복판(7월)에는 천하 제일의 연꽃 축제인 '부여서동연꽃축제'가 성대히 펼쳐진
다. 공원과 축제 이름에 들어간 서동(薯童)은 백제 30대 군주인 무왕(재위 600~641)의 휘(諱,
제왕의 이름, 본 이름은 부여서동)로 그가 궁남지를 닦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서동공원은 궁남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공원 한복판에 궁남지가 연꽃처럼 자리해 이곳의 정취
를 크게 돋군다. 공원 북쪽과 서쪽, 남쪽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고, 담장도 갖추지 않은 사방(
四方)이 개방된 형태로 동,서,남,북 어디로든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하다.

▲  서동공원 연꽃 논두렁 산책로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①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②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③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지금은 폐허의 현장이나 다름이 없지만 앞으로 4개월 이후면 사정이 180도 달라진다.
서동공원은 바로 그 여름에 와야 그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궁남지와 부여 속의 조그만 섬, 포룡정(抱龍亭)

궁남지는 634년 백제 무왕이 궁성(宮城) 남쪽에 조성했다. 그 연유로 이곳 이름이 궁남지(宮
南池)가 되었는데, 무왕은 가까운 백마강을 놔두고 멀리 20여 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들
여 연못을 채웠고, 그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연못 한복판에 섬을 만들어 삼신
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했다.
이 땅에 남아있는 가장 늙은 궁궐 정원 유적으로 어떤 자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
라고 나와있는데, 인공 연못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백제는 위례성(慰禮
城, 서울 송파구~강동구 지역으로 여겨짐)을 도읍으로 삼던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부터 궁
궐에 연못을 만들었으며, 고구려 또한 그랬다. 다만 남아있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없으며, 궁
남지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연못 유적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 아닌, 현존
하는 가장 오래된 연못임)

고구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의 거친 남하정책에 위례성이 싹 털리자 백제는 급
히 웅진(熊津, 공주로 여겨짐)을 새 도읍으로 삼았다.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격파하고
중원대륙(서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드높였던 동성왕(東城王)은 웅진 왕궁 안에 크게 연못
을 만든 바 있으며, 이후 무왕이 사비성 궁궐 남쪽에 연못과 별궁(別宮)을 만들어 놀았다.
이렇듯 백제의 조경 기술은 천하 제일의 수준급이라 신라는 물론 백제의 속국이자 별채였던
왜열도에도 전해져 왜열도 조경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백제가 사라진 이후, 궁남지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려졌고, 방장선산을 본따 만들었다는 섬
과 연못 또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다. 그러다가 1965년부터 2년 동
안 복원공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허나 연못은 원래 크기의 ⅓ 이하로 축소
복원되었으며, 섬은 방장선산 대신 포룡정이란 정자를 지어 옛날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그
래도 작게나마 연못과 섬이라도 건진 것이 어디랴.


▲  세상을 향해 작게 다리를 내민 궁남지

▲  동쪽에서 바라본 궁남지

▲  서남쪽에서 바라본 궁남지

▲  포룡정으로 인도하는 나무다리

비록 연못이 왕년의 시절보다 덩치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넓다. 지금도 이러하니 왕
년에는 완전 바다처럼 보였을 것이다. 백제 무왕이 자신의 위엄과 백제의 힘을 천하만방에 강
조하고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만들었으니 말이다.
무왕과 그의 뒤를 잇는 의자왕은 여기서 왕족, 귀족들과 화려하게 연회를 벌이며 종종 뱃놀이
까지 즐겼다. 저 연못과 별궁을 짓고자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적지 않은 이들이 공사
중에 다치거나 죽어갔다. 또한 망족(望族, 왕족, 귀족)들의 여흥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도 적
지 않게 들어갔으니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연못이라도 남겨주어 백제의
우수했던 조경 기술에 대해 작게나마 속삭여준다.

연못 한복판에는 동그란 섬이 두둥실 띄워져 있는데, 이 섬이 옛날 방장선산이 있던 현장이라
고 한다. 부여 속의 작은 섬으로 그곳에 가려면 남쪽을 향해 뻗은 나무 다리를 건너야 된다.
이 다리 역시 궁남지를 복원하면서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의 나무다리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
라 백제 것과는 완전히 차이가 있다. 물론 무왕 시절에도 섬을 잇는 다리는 있었을 것이나 다
리와 관련된 존재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지금 다리는 1987년에 유실된 것을 다시 만든 것이다.

섬과 세상을 유일하게 이어주는 나무다리는 두 사람이 교행할 정도로 폭이 좁고 난간 또한 아
주 낮다. 그렇다고 특별히 안전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연못의 깊이도 2~4m에 이르니 다리
에서 장난을 치거나 뛰어가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말자.


▲  포룡정 나무다리 한복판

▲  포룡정 서쪽에서 바라본 나무다리

▲  동그란 섬에 지어진 포룡정

▲  김종필이 1973년에 쓴 포룡정 현판

▲  포룡정 동쪽에서 바라본 나무다리

포룡정은 1965년에 섬을 다시 재현하면서 지은 네모난 정자이다. 포룡이란 용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무왕의 탄생설화에서 따왔다고 한다. 허나 그 이름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1965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섬과 포룡정은 백제 시절과는 거리가 멀게 콩 볶듯 재현된 것이라 나중
에 꼭 시대에 맞게 손을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포룡정 현판은 1973년(계축년)에 김종필이 쓴 것이며, 내부에는 2005년에 작성된 포룡정기가
걸려있다.


▲  포룡정에서 바라본 연못 건너 풍경 (사진 중앙에 돛단배가 있음)

▲  버드나무가 심어진 궁남지 연못 산책로

▲  땅에 기대어 고된 몸을 쉬고 있는 돛단배 (주로 주말에 배를 띄움)

▲  궁남지 백제우물 유적

궁남지 남쪽에는 백제우물 유적이 누워있다. 우물은 보존 및 위험방지를 위해 흙과 잔디로 빼
곡히 덮어두어 내부 확인은 불가능하다. (우물유적 옆에 내부 사진을 첨부한 안내문이 있음)
우물의 깊이는 6.2m, 상부 너비 0.9~1m, 하부 너비 1m의 평면원형으로 궁남지 남쪽에 있는 것
으로 보아 별궁 우물로 여겨진다. 우물 속에서는 백제시대 와전과 토기, 농기구의 목제류, 동
물뼈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으며, 백제시대 우물 양식과 토목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  궁남지 남쪽 연꽃 논두렁 ①

▲  궁남지 남쪽 연꽃 논두렁 ②

궁남지와 서동공원 일대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공원 서쪽에 자리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군수리사지가 다른 데로 마실을 갔는지
찾지를 못했다. 예전에 분명 갔던 곳으로 내가 10년 이상 찾지 않은 사이에 공원 주변 지도가
많이 바뀌긴 했어도 거의 99.99% 이상은 다 찾아가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발견하지 못해
0.01%의 실수율을 보이고 말았다. 나도 이제 늙은 것인가? 아니면 군수리사지의 얄미운 숨바
꼭질 장난인가?

시간은 어느덧 15시 30분, 햇님도 뉘엿뉘엿 퇴근 준비를 서두른다. 그날 일정은 백마강을 건
너 규암리에 있는 수북정(水北亭)과 자온대(自溫臺)까지 보는 것이었는데, 겨울 제국이 심술
을 부리면서 날씨도 좀 추워지고, 몸도 상당히 지쳐서 그들을 다음으로 모두 이월처리하고 나
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또 인연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숨쉬는 동안에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부여 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궁남지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궁남로 52 ☎ 041-830-2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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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꿀명소를 거닐다 ~~ 우산, 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나들이 (청양3층석탑, 소원바위)

청양 우산(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 충남의 내륙을 거닐다. 청양 겨울 나들이 '

천장호와 출렁다리

▲  천장호와 출렁다리

청양 우산 숲길 겨울 운무에 잠긴 우산

▲  청양 우산 숲길

▲  겨울 운무에 잠긴 우산

 



 

겨울 제국의 한복판인 1월의 어느 덜 추운 날, 충남의 지붕인 청양(靑陽)을 찾았다. 청양
땅은 20대의 한복판인 2000년대 이후 딱 2번째 방문으로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곳이다.
하여 몸뚱이와 정신이 더 늙기 전에 청양의 신선한 공기도 맛보고 그곳의 미답처(未踏處)
도 여럿 지우고자 흔쾌히 청양을 택했다.

아침 일찍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청양으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싣고 90분 정
도를 달려 청양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발을 들인 청양읍내는 겨울 안개가
두텁게 내려앉아 가시거리가 100m 이내였는데, 마치 무너진 하늘의 구름 속에 갇힌 듯 눈
에 뵈는 것이 제대로 없어 잠시 방향 감각을 잃었으나 이내 감각을 되찾고 읍내 동북쪽에
자리한 우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청양읍내의 포근한 뒷산, 우산(牛山) 둘러보기

▲  새벽에 내린 눈으로 얇게 하얀 옷을 걸친 우산 숲길

우산은 해발 237m의 조촐한 뫼로 청양읍내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쉼터이다. 겉보기에는 천하에
그저 흔한 뒷동산이라 '이곳에 뭐 볼게 있을까?' 의문이 들겠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서면 생각
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작지만 넉넉한 그의 품에는 백제 때 지어진 우산성과 읍내에서 넘
어온 석조여래3존입상과 3층석탑 등 고색이 깊은 문화유산이 있고, 칼바위와 떡바위, 가족바
위 등 대자연이 빚은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능선부에 포진해 있으며 짙은 숲에 산책로까지 잘
닦여져 있어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게다가 호국(護國)의 신이 된 청양 사람들의 위패가 봉안된 충령사(忠靈祠)가 남쪽 자락에 기
대고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만큼 우산은 청양읍의 소중한 뒷산이자 성역이다.

나는 우산 남쪽인 청양읍사무소(청양읍행정복지센터)에서 접근했는데 그 길을 오르면 충령사
와 그곳을 관리하는 '용암사(봉안사)'란 작은 절이 마중을 나온다.


▲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 보물 197호

충령사 옆에는 용암사란 현대 사찰이 있다. 그 밑을 가만히 보면 맞배지붕을 지닌 기와 건물(
보호각)과 3층석탑이 층층이 자리한 모습이 눈에 보일 것인데, 그 보호각 안에 늙은 석조여래
3존입상이 고된 몸을 벽에 기대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석불은 읍내리1구의 일명사터(逸名寺址)로 전하는 절터에 있던 것으로 1961년 밑에 있는
3층석탑과 함께 용암사 경내로 이전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지금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을 짓고 그 안으로 옮겼다. (건물을 짓기 전에는 벽만 있었음)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가지고 있는데 본존불 키는 310cm, 좌측 보살은 223cm, 우측 보살
은 225cm이다. 장대한 세월에 오랫동안 두드려 맞은 흔적이 역력하고 광배 같은 경우는 날라
간 부분도 적지 않으나 얼굴부터 대좌까지 그런데로 잘 남아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주인공답게 좌우 보살상에 비해 덩치와 키가 크다. 머리에는 무견정상(육계)
이 솟아있고 얼굴은 고된 세월에 지쳐 많이도 울었는지 표정이 좀 지워졌으며, 어깨는 넓고
옷은 가슴부터 발목까지 U자형으로 주름을 이루면서 내려왔고 다리 사이에는 바지 자락이 표
현되어 있다.
몸통을 윤기나게 해주는 광배는 배 모양으로 불상과 같은 돌에 조성되었는데 파손이 심해 원
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우며 두 발을 딛고 있는 대좌는 4각형으로 각 면에 안상(眼象) 3개를
새겨놓았다.
왼쪽 협시보살은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절단이 난 것을 붙여놓은 것으로 얼굴은 본
존불과 비슷하며 허리를 약간 왼쪽으로 틀어 본존불을 향하고 있다. 옷은 밑부분이 넓게 퍼져
마치 두터운 겨울 옷을 걸친 듯 하다. 그리고 오른쪽 협시보살은 왼쪽 것과 비슷하나 얼굴 윤
곽이 둥굴고 앳되어 보이며 몸매가 아주 좋아 한참 물이 오른 젊은 여인네를 모델로 하여 지
은 것 같다.

그들은 당당한 신체 표현과 강인한 신체 묘사, 유려한 각선 등에서 높은 솜씨를 보이고 있지
만 평판적인 신체 묘사와 형식화된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밑에서 바라본 석조여래3존입상
서 있을 힘도 부족하여 그들 뒤에 벽을
설치해 비빌 구석을 마련해 주었다.

▲  석조여래3존입상이 거처하는 맞배지붕
보호각 (뒤에 보이는 건물은 용암사)


▲  청양3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48호

석조여래3존입상 밑에는 작고 잘생긴 3층석탑이 있다. 그는 3존입상과 함께 일명사터에 있던
것으로 청양군청 뒤쪽으로 이전되었다가 1961년 석불과 함께 용암사에 안착했다.
네모난 바닥돌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基壇)을 두었으며, 3층의 탑신(塔身)과 노
반(露盤), 앙화(仰花, 연꽃모양 장식)를 둔 머리장식을 차례로 올렸다. 1층 탑돌에는 네모난
문고리 장식이 있으며 탑 높이는 310cm, 조성시기는 고려 때로 여겨진다.

상처가 많은 석불과 달리 건강상태도 양호하며 머리장식도 잘 남아있어 꽤나 감동을 준다. 이
정도면 능히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어 보이나 무슨 영문인지 상처 투성이 석불은 보물
, 멀쩡한 석탑은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지정 기준이 참 아리송하다.

       ◀  청양3층석탑과 돌기둥 3기
3층석탑 옆에는 받쳐들 것을 상실한 채, 막연
히 하늘을 이고 있는 돌기둥이 있다. 이들 기
둥은 모두 3기로 일명사지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 주춧돌로 추정된다.


▲  겨울에 잠긴 우산 숲길

용암사 밑에 자리한 늙은 석불과 석탑을 둘러보고 우산의 속살로 들어섰다. 아침 산책과 운동
을 나온 지역 사람들이 이따금 보일 뿐, 바람의 소리가 전부일 정도로 적막한데, 숲길도 매우
고와서 무척 탐이 난다.

산의 이름인 우산은 비올 때 쓰는 그것이 아닌 음매음매~ 소를 뜻하는 이름으로 그 이름에 걸
맞게 우산에 닦여진 산길을 추스려 '우산슬로길'이라 하였다. 여기서 슬로(slow)는 느리다는
뜻의 양이(洋夷) 말로 소의 발걸음이 느리니 천천히 둘러보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모
양이다.
허나 아름다운 우리말을 놔두고 굳이 배배 꼬인 꼬부랑 영어를 써야 했는지 관련 공무원 철밥
통들의 사상이 심히 의심된다. '우산 느림길'이나 '우산 여유길'이라고 하면 참 좋았을 것을
굳이 외래어로 지어야 했는지 참으로 회의감이 든다. (이 땅의 아주 몹쓸 '영어 사대주의'의
폐해임)

우산슬로길은 칼바위길(2.43km)과 약수길(2.38km), 산성길(1.65km)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길
로 가던 봉화대과 우산성, 칼바위는 끼게 되어있으나 산이 작아서 굳이 코스에 연연할 필요는
없으며, 봉화대와 청룡정, 우산성, 용암사를 모두 겯드려 속성으로 보면 1시간 정도, 길게 잡
으면 90~120분 정도(휴식시간, 촬영시간 포함)면 넉넉히 산을 1바퀴 둘러볼 수 있다.


▲  솔내음이 춤을 추는 우산 소나무숲길

▲  숲을 뚫고 들어와 우산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아침 햇살의 위엄
햇님이 찬란한 햇살을 쏘며 겨울에 잠긴 우산을 깨운다.

▲  어둠과 낮의 경계에 서다. 우산 소나무숲길

▲  우산성(牛山城) - 충남 지방기념물 81호

우산 윗부분에는 옛 백제(百濟)가 씌워놓은 우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다. 산꼭대기 주변
을 빙둘러서 다진 테뫼식 산성(山城)으로 둘레는 약 965m로 파악되고 있는데, 경사가 있는 동
쪽을 제외하고 모두 돌로 다졌으며 높이는 최대 7m, 폭은 6m 정도 된다. 남벽과 동벽이 만나
는 곳과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부분이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데 이들은 장대(將臺) 자리로 여
겨진다.
동남쪽 모서리와 동북쪽 모서리에는 성벽 바깥으로 네모 모양으로 성곽을 다진 이른바 치성(
雉城) 흔적이 있으며, 성벽에서 약 2m 안쪽에 문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북문터 부근에는 50x50m 규모의 건물터가 있고 그 서쪽 봉우리 정상에서 19x2m 규모의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되었으며, 백제 때 토기와 고려 때 어골문(魚骨文) 기와조각, 조선 때 기와조각
이 발견되어 우산성이 백제부터 조선까지 골고루 쓰였음을 귀띔해준다. 그 외에 우물 2개가
있었다고 전하나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  우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북문터와 봉화대
헝클어진 성곽 위에 닦여진 계단을 통해 우산성 북쪽 밖으로 나갈 수 있다.

▲  눈옷을 뒤집어쓰며 나지막하게 누운 우산성 북쪽 성곽
(북문터 주변)

▲  윤곽만 남은 우산성 동쪽 성곽 ①
우산성 동쪽은 가파른 벼랑이 상당수이다. 하여 돌로 다지지 않고 지형을
가파르게 다듬어 마치 성곽의 윤곽처럼 다져놓았고 성곽 방어를 위해
그 밑으로 수풀을 잔뜩 심었다.

▲  윤곽만 남은 우산성 동쪽 성곽 ②

▲  구름 위에 올라서다 ① 우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모습

청양읍내를 감쪽같이 훔쳐간 안개(운무), 우산 윗도리에 이르니 그 운무가 내 밑에 하얗게 펼
쳐져 있다.
'내가 이리 높이 올라왔나??'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이렇게 보니 해발 1,000m 이상 올라온
기분이다. 허나 현실은 200m 정도이다. 겨우 200m 높이를 올라왔을 뿐인데 이런 황홀한 광경
을 보다니. 그렇다고 그날 종일 비나 눈이 온 것도 아니다.
운무는 우산 밑에 낮게 누워 읍내와 키 작은 것들을 삼켜버렸고 우산 높이 이상의 뫼들만 고
개를 들고 있다. 저 너머로 보이는 뫼들은 청양의 진산인 칠갑산(七甲山)이다.


▲  구름 위에 올라서다 ② 우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모습

▲  우산 떡바위

우산성 동쪽 성곽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데 떡바위를 비롯한 상큼한 모습의 바위들이 줄지어
포진해 있어 우산의 조촐한 만물상(萬物相) 같은 곳이다. 떡바위는 떡과 비슷하게 생겨서 생
긴 이름으로 거의 인절미처럼 보이는데 우산을 빚은 대자연이 먹고 남은 떡이 딱딱하게 굳어
져 돌이 된 모양이다.


▲  수풀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민 떡바위 부근 우산성
(동남쪽 성곽)

▲  우산 가족바위
바위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습이 마치 가족처럼 보인다.

▲  위에서 바라본 가족바위 (왼쪽에 각이 똑바로 진 바위)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① (떡바위 주변에서 바라본 모습)
이렇게 보니 천하를 뒤덮은 운무가 마치 너른 호수처럼 보인다. 왼쪽에
작게 보이는 건물은 우산 남쪽 봉우리에 자리한 청룡정이다.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② (칠갑산 방향)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③ (청양읍내 방향)

▲  우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청룡정(靑龍亭)
우산 남쪽 봉우리에 들어앉아 청양읍내를 살피고 있는 청룡정은 6각형 정자로
1984년 10월에 지어졌다. 조망이 아주 일품으로 우산에 발을 들였다면
이곳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  짙은 운무에서 서서히 해방되는 청양읍내
아침 햇살이 운무를 강제 해산시키며 그들로부터 청양 지역을 해방시키고 있다.
하여 이제 비로소 청양읍내가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다.

▲  서서히 걷히는 운무 (칠갑산 방향)

▲  우산을 정리하며~~~

* 우산성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백천리 산69-5외
* 읍내리 석조여래3존입상, 청양3층석탑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산4-2



 

♠  칠갑산 자락에 묻힌 그림 같은 호수, 천장호(天庄湖)

▲  천장호 전망대

우산을 2시간 정도 거닐고 내려오는 사이, 읍내를 오리무중(五里霧中)처럼 짙게 감싸던 운무
가 싹 걷혔다. 파란 하늘과 햇님이 안개에 놀란 천하를 진정시키며 겨울 제국의 차가운 기운
도 조금씩 잠재운다.

읍내로 들어와 다음 행선지인 천장호를 가고자 군내버스터미널을 찾았다. 청양읍에서 천장호
는 시외직행버스와 청양군내버스가 운행하고 있는데 직행버스(청양시외터미널에서 승차)는 1
시간에 1~2회꼴로 있고, 군내버스도 비슷한 간격(1일 16회 정도)으로 다닌다. 속 편하게 직행
버스를 타는 것이 낫겠지만 시골군내버스가 격하게 땡겼고 마침 20분 뒤에 차가 있어 그 시간
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정산행 군내버스가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칠갑산 북쪽 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칠갑산로를 15분 정도 달려 천장호(천장리)
에 나를 내려놓는다. 칠갑산로는 청양과 공주를 잇는 주요 도로이나 우회 국도가 생기면서 조
금은 한가해졌다. (천장호, 칠갑산 관광 수요는 여전히 많음)


▲  천장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장호와 칠갑산

▲  확대해서 바라본 천장호와 출렁다리(가운데 다리)

천장호전망대는 천장호가 잘 바라보이는 칠갑산로 도로변 벼랑에 자리해 있다. 천장호 정류장
에서 서쪽으로 도보 3분 거리로 2016년 9월에 지어졌으며 전망대의 면적은 610㎡이다.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대에 걸맞게 돛대 모양을 여럿 달아서 마치 배를 연상케 하는데, 이곳에 올라서
면 천장호 일대와 출렁다리는 물론 칠갑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천장호 관광객들은 출렁다리와 천장호만 생각하여 이곳은 잘 오지 않는데 천장호의 전경을 싹
담을 수 있는 곳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천장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장호
북쪽과 칠갑산 산줄기

▲  청양고추를 귀엽게 표현한 캐릭터

천장호전망대에서 천장호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 저 밑에 바라보이는 천장호로 내려갔다.
천장호는 1월 평일임에도 청양의 대표 명소에 걸맞게 관광객들이 많았다.
주차장을 지나면 식당들이 앞다투어 맛난 냄새를 풍기며 나그네를 유혹하는데 그 유혹을 지나
면 출렁다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산책로가 고속도로처럼 펼쳐진다. 청양의 특산품인 고추를
형상화한 캐릭터와 2층 규모의 황룡정, 소금쟁이고개길이 차례로 나타나며, 그 길의 끝에 출
렁다리가 있다.

▲  황금색 지붕의 황룡정
천장호 장식용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  천장호 출렁다리로 내려가는 산책로
(소금쟁이고개)


▲  오늘도 푸르기 그지 없는 천장호

천장호는 농업용 저수지로 이곳의 지명인 천장리(天庄里)에서 이름을 땄다. 1972년 12월에 짓
기 시작하여 1979년 완성을 보았는데 면적은 1,200ha로 물이 청정하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칠갑산을 수식하는 경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다. 거기에 한때 우리나라 최장의 출
렁다리로 추앙을 받았던 출렁다리까지 한복판에 걸쳐놓아 천장호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한
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천장호 출렁다리의 위엄을 몸소 체험하고자 함이다.


▲  천장호 소금쟁이고개

출렁다리 동쪽은 호수를 향해 길게 삐죽 나온 지형으로 서,남,북이 호수에 접해있다. 지금은
3면이 호수에 둘러싸여 있지만 원래는 소금쟁이고개라 불리던 고갯길로 청양에서 정산, 공주
를 이어주던 길목이다. 이곳이 소금쟁이고개라 불린 사연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옛날의 어느 봄날, 소금장수가 이곳을 넘다가 잠시 소금지게를
세워놓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담배나 피워야될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징하게 으르렁거리자
염통이 쫄깃해진 소금장수는 지게를 받치던 작대기를 들고 호랑이에 대항했다. 그러자 지게가
넘어지면서 시장에서 산 그릇과 볏짚가마니에 들어있는 소금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단순한 호랑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다가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렇
게 호랑이를 물리친 소금장수는 아랫도리가 이상해 살펴보니 글쎄 소변이 흘러내린 것이 아닌
가?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바지에 실례를 한 것이다.

그날 밤, 주막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소문이 널리 퍼
져 이곳 이름이 소금쟁이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즉 소금쟁이가 호랑이를 물리치고 동시에 실
례까지 범했던 고개란 뜻이 된다. 허나 지금은 고개가 아닌 육지와 출렁다리를 잇는 자라목
같은 지형이 되버렸고 고갯길의 역할은 호수 북쪽에 닦여진 도로(칠갑산로)가 맡게 되었다.


▲  천장호 서쪽 황룡 쉼터에서 바라본 소금쟁이고개


▲  소금쟁이고개에서 출렁다리를 이어주는 접속 다리

▲  옆에서 바라본 접속다리와 출렁다리의 빨간 고추 기둥

▲  드디어 건너게 되는 천장호 출렁다리

천장호 출렁다리는 흔들다리의 일종으로 2007년 11월에 착공하여 2009년 7월 28일 완성을 보
았다. 길이 207m, 높이 24m, 폭 1.5m 규모로 한때는 이 땅에서 가장 크고 긴 흔들다리였으며,
동양에서 2등으로 컸다. (지금은 이보다 큰 흔들다리와 출렁다리가 많이 생겨났음)
약 30~40cm 정도 흔들리게 설계되어 있어 스릴감을 주며 중간중간에 다리 밑 호수가 잘 보이
도록 거울 바닥을 깔아서 염통의 쫄깃함을 더해준다. 물론 단단하게 지어졌겠지만 혹시나 그
판을 밟으면 밑으로 쑥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이 일어나 나도 모르게 그 바닥은 피해 움직였다.
다리 길이는 겨우 207m에 지나지 않으나 염통을 적지않게 자극시키다보니 체감거리는 그 5배
는 되는 것 같다. 세상에 이보다 긴 200m가 또 어디에 있을까?


▲  출렁다리 한복판에서
다리의 거울 바닥 밑에는 얼어붙은 호수가 차갑게 입을 벌리고 있다.

▲  유연하게 솟구친 출렁다리의 위엄

▲  출렁다리 서쪽에서 바라본 천장호
호수 너머 벼랑에 천장호전망대가 있다.

▲  출렁다리 서쪽에 자리한 용(왼쪽)과 호랑이 조형물(오른쪽)

출렁다리를 건너면 용과 호랑이상이 마중을 하면서 길은 3갈래로 갈린다. 칠갑산 등산이 목적
이라면 서쪽 산길로 들어서면 되며, 호수도 둘러보고 이곳의 오랜 명물인 소원바위도 보고 싶
다면 북쪽 산책로(천장호 둘레길)로 가면 된다. 남쪽도 호수 산책로이나 길이 중간에 끊긴다.

출렁다리 서쪽에 자리한 용과 호랑이상은 단순한 장식용이 아닌 칠갑산의 유래와 전설을 상징
하고자 세운 것이다. 칠갑산은 만물생성의 7대 근원인 '七'자와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첫 자
이자 싹이 난다는 뜻에 '甲'자로 이루어져 있어 생명의 발원지를 뜻한다고 한다. (산자락에 7
명의 장수가 태어날 명당이 있어 칠갑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옴)
또한 이곳에는 1,000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승천을 준비하던 황룡(黃龍)이 있었는데 부근에 살
던 아이가 위급에 처하자 직접 다리를 놓아 아이를 구했다고 하며. 이를 지켜본 호랑이는 산
에 들어가 칠갑산을 지키는 영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악을 다스리고 복을 준다는 황
룡의 기운과 영험한 기운을 지닌 호랑이의 기운이 같이 서려있어 여기서 기도를 하면 복을 받
고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천장호 둘레길에서 바라본 출렁다리의 위엄

▲  호수 옆구리에 닦여진 천장호 둘레길 (소원바위 입구)
호수의 서쪽을 따라 나무데크식으로 둘레길을 닦았다. 길을 잘 다져놓아서
거닐기에 아주 좋으며, 둘레길을 한 굽이 지날 때마다 천장호와
출렁다리는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천장호 마무리 (소원바위)

▲  천장호 둘레길에서 만난 칠갑산의 수호신, 금색 황룡상 (황룡 쉼터)

호수를 따라 펼쳐진 천장호둘레길은 해가 짧다는 구실로 다 돌지 않고 황룡상이 있는 쉼터까
지만 갔다. 마음 같아서는 둘레길을 다 돌면 좋겠지만 그 정도만 돌아도 천장호에 대한 성의
는 충분히 보였다 여겨진다.
거기서 쿨하게 길을 되돌려 소원바위를 보고자 잠시 호수를 버리고 언덕길을 오르니 길 중턱
에 천장호의 오랜 명물인 소원바위가 모습을 비춘다.


▲  황룡 쉼터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  겨울 가뭄으로 수분이 다소 줄어든 천장호 상류 부분

▲  소원바위로 인도하는 언덕길 (천장호둘레길)
언덕을 넘으면 내리막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다시 호수길과 만난다. 즉 둘레길
북쪽 구간은 '출렁다리 서쪽→소원바위입구→소원바위→호수길→
소원바위입구'로 순환형으로 짜여져 있다.

▲  주름선이 선명한 소원바위 (잉태바위)

천장호에 왔다면 출렁다리도 좋지만 꼭 만나야될 존재가 있다. 바로 소원바위이다. 그 모습이
마치 구석기시대에 절찬리에 쓰였던 주먹도끼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기자신앙(祈子信仰)의 현장으로 입소문이 났던 바위이다.
이 바위가 아이를 기원하는 현장이 된 것은 고려 때로 여겨지는데 다음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
이 전하고 있다.

그 시절 시집간 딸이 5년이 넘도록 아이를 얻지 못하자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가 이곳에서 700
일 동안이나 정성을 기울여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칠갑산 수호신(산신)이 감동을 먹고 딸이
혼인 7년차가 되던 해에 바위에서 살을 떼어내 임신이 되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장성하여 용호장군(龍虎將軍)에 이르렀고 거란군(요나라)을 때려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마치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탄생설화 같지만 그는 아니
다.

최근에는 인근 목면에 거주하는 유모 할머니가 44살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해 애태우는 아
들을 위해 매일 이 바위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혼인 7년차에 드디어 임신에 성공, 2013년 10월
29일에 건장한 아들을 얻었다. 앞서 전설도 혼인 7년차에 아이를 얻었고 이번 것도 7년차이니
이 바위는 결혼 7년차의 사람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소망을 빌면 거의 이루어진다고 하여 소원바위라 불리게 되었으며, 아이(특히 아들)를 기원하
던 현장이다보니 잉태바위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특히 천장호는 풍수지리상 여자의 자궁형상
이라 임신과 자손의 번창을 상징한다고 하며 그 이유로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바위 앞에 걸린 줄에는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종이가 가득 매달려 있고, 바위 피부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들이밀며 붙인 동전이 즐비하다.


▲  주름이 가득한 소원바위 (잉태바위)

소원바위 앞에는 기도 자리가 닦여져 있다. 한쪽에는 소원을 적을 하얀 종이(소원지)와 펜이
비치되어 있어 종이에 소박하게 소망을 적어 바위 앞에 매달린 줄에 매듭을 지어 붙여놓았다.
이들 소원지는 일정 시기마다 소원 성취를 이루라는 뜻에서 모아서 소각을 하는데 그가 과연
명성처럼 영험하다면 내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소문이 거짓이니
망치를 가져와 항의 표시를 해도 그는 할말이 없을 것이다.

바위 바로 앞에는 바구니가 놓여있는데 거기에는 1,000원 지폐가 담겨져 있었다. 사람들이 소
망을 접수하면서 놓고 간 것으로 그 돈은 과연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갈지 궁금하다. 설마 바
위가 직접 챙기는 것은 아닐 것이고 천장호 관리사무소나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무속인이
나 종교인이 챙길 것이다. 재주는 바위가 부리고 돈은 사람이 챙기는 것이다.

* 천장호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 (천장호길 24, 천장호 관리사무소 ☎ 042-
  940-2723)


▲  천장호 남쪽 부분

▲  출렁다리를 건너 다시 소금쟁이고개로

▲  천장호를 나오다 ~~~ (천장호 산책로)

소원바위에 약소하게 소원 하나를 들이밀고 출렁다리로 나왔다. 여기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꼼
짝없이 출렁다리를 이용하거나 칠갑산을 넘어야 되는데, 아무리 다리가 무섭다고 해도 산 하
나를 통째로 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체감거리가 긴 출렁다리를 건너 천장호 정류장으로 나왔다. 천장호전망대를 포함해 천장호 일
대에서 머문 시간이 2시간, 둘레길을 제대로 돌았다면 3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서 벌써부터 땅꺼미가 기지개를 펼 준비를 한다.

천장호 정류장에서 정산(서정리)으로 가고자 버스를 기다리는데 여기는 시외직행버스와 군내
버스 모두 정차한다. 그러니 먼저 오는 것을 타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도 군내버스가 당첨이
라 그를 타고 정산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하며 한겨울에 벌인 청양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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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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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 여름맞이 산사 나들이 ~ 논산 쌍계사, 송불암 '

▲  쌍계사 대웅전

▲  쌍계사의 자랑, 대웅전 꽃창살

▲  송불암 미륵불


 

여름이 봄을 몰아내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충남 논산(論山)을
찾았다.
논산으로 멀리 발걸음을 한 것은 그곳 쌍계사의 꽃창살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유명하다 하
여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겠지?
다행히 쌍계사입구까지는 시내버스가 1일 10여 회 오가고 있어 접근편도 벽지치고 양호하
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논산역으로 보냈다.
논산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어 논산역 동쪽에 자리한
논산시내버스 종점(덕성여객)으로 이동해 차를 기다렸다. 논산시내버스는 일부 외곽 지선
을 제외하고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 
 
세월이 무지 빠르다고 하는데 정작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은 반대로 느린 것 같다. 잡생각
을 머리 속에 마구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시간을 죽이니 어느덧 출발시간이다.
그래서 타는 곳으로 나가니 쌍계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405번(논산역↔임화리)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잡아타고 논산시내를 가로질러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
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성삼문(成三問)묘소<이곳에는 그의 다리 한쪽이 묻혀있다고 함>
를 지나 쌍계사입구인 중산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잘 닦여진 2차
선 도로(중산길)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된다.


▲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중산길


 

♠  쌍계사(雙磎寺) 입문

▲  강병흠과 평택임씨 정려비(旌閭碑)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은 인적도 거의 없는 고적한 길이다. 집도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
낼 뿐, 거의 산과 밭으로 이루어진 자연 지대로 살며시 스쳐가는 산바람 소리, 가끔씩 지나가
는 차량 소리가 이곳 소리의 전부이다. 그런 길을 혼자 유유자적 거니니 마치 그 길을 통째로
전세를 낸 듯한 즐거운 기분이 가득 들고 걷는 길도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그런 길을 약 1km 정도 가면 길 왼쪽에 돌로 만든 특이한 비각(碑閣)과 그 안에 담긴 매끈한
피부의 비석이 잠깐 나좀 보고 가라며 하소연을 한다. 하여 잠시 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강병
흠(姜抦欽)과 평택임씨(平澤林氏) 부부의 정려비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강병흠은 진주강씨로 구한말과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어느
한겨울에 부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자 저수지의 두꺼운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
은 적이 있으며,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며 병간호를 했는데, 꿈속에서
친할머니가 나타나 아버지의 병에는 산삼이 최고라며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하여 다음날 그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으며, 결국 그가 사
망하자 무려 6년씩이나 시묘살이를 했는데, 불효에 대한 자책감으로 옷자락에 항상 돌을 담고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포석효자(包石孝子)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강병흠의 부인인 평택임씨도 대단한 열녀(烈女)라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남편이 죽자
자결을 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의 효행과 열행(烈行)
을 기리고자 1922년에 정려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1칸짜리 기와 정려각을 씌웠으나 건물이 낡자 1993년에 지금의 석조물을 세우고 내
부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김용제(金容濟)가 짓고, 이종성(李鍾聲)이 글씨를 썼으며, 비문
에는 '孝子僉知中樞府事 姜抦欽 閭配, 烈女 淑夫人 平澤林氏之閭(효자 첨지중추부사 강병흠
정려, 열녀 숙부인 평택임씨지여)'라 쓰여 있다.

           ◀  열녀 해주오씨 비석
강병흠 부부의 정려비에서 잠깐 옷깃을 여미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얼마 안가 고색의 때를 절
반 정도 탄 해주오씨 열녀비가 모습을 비춘다.
비석 주인공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비
석의 상태로 보아 19세기 인물로 여겨지며, 앞
서 평택임씨 못지 않은 열녀였던 모양이다.

           ◀  영명각(靈明閣) 입구
쌍계사 주차장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늘씬한
숲길과 함께 영명각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영명각은 1975년에 농업진흥공사가 금강(錦江)
유역 300핵타르의 개답(開畓) 공사를 벌이면서
무연고 무덤 유골 3,000기를 수습해 봉안한 납
골당이다.
이후 건물을 확장하여 논산시민의 납골당(논산
시 공설봉안당)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쌍계사 밑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수, 절골소류지(沼溜地)

영명각입구 맞은편에는 너른 호수인 절골소류지가 있다. 작봉산(불명산)이 베푼 청정한 물이
쌍계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대장정을 준비하는데,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소류지의 자태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영명각 입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숲길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숲, 그 숲이 베푸는 숲내음과 그늘, 거기에 옆에
붙은 소류지까지, 이곳만큼은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비켜간다.

▲  쌍계사 부도(浮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0호

길을 거닐다보면 왼쪽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부도는 모
두 9기로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에 이곳으로 모두 집합시켰다.
고색의 내음을 깊게 내뿜고 있는 그들은 석종형(石鐘形) 6기,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탑 3기
로 이루어져 있다. 석종형은 높이 150cm 내외로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을 깔고 그 위의 기단
(基壇)과 석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바닥돌과 기단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새겨 맨돌
의 식상함을 덜어준다.
옥개석 부도는 높이 130cm 내외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대좌를 받치는 바닥돌은 4
각 또는 6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기단부(基壇部)에는 연꽃무늬 연주문과
화문(花紋)이 새겨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구슬 장식이
얹혀져 있다.

이들 부도 중 2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翠峰堂 慧燦大師之屠(취봉당 혜천대사 부도)','梅
憲~~之塔(매현 ~~의 탑)' 정도의 글씨만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글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흐트러져 알 수가 없으며, 부도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후기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부도

▲  쌍계사 중건비(重建碑)

부도의 보금자리 한쪽에는 중건비라 불리는 비석이 미운 오리새끼 마냥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는 1739년에 쌍계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높이 156cm, 너비 78cm이며, 땅바닥에 자연석
을 깔아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홈을 파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운 다음에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쌍계사의 내력을 머금은 절의 일기장으로 비석 앞면에 절의 내력을, 뒷면에는 시주자의 이름
이 새겨져 있으며, 김낙증(金樂曾)이 찬(撰)을 하고, 이화중(李華重)이 글씨를, 김낙조(金樂
祖)가 글을 새겼다.


▲  쌍계사 봉황루(鳳凰樓)

숲길을 지나면 주차장과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에 감싸인 주차장 좌우로 2개의 조그만
계곡이 소류지로 흘러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쌍계사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2개의 계곡
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다.

주차장을 굽어보는 봉황루는 쌍계사의 정문이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장만
하지 못해서 소류지 숲길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속세(俗世)와 절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제
아무리 천하의 독종, 번뇌라 한들 삼삼한 숲과 소류지의 경계를 뚫고 절까지 침투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 또한 번뇌라 아무리 던져본들 그 자리를 맴돌아 결국
소류지 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봉황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누각이다. 정문 외에 조
촐하게 강당(講堂)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딱히 고색의 내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1층에는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그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솟아오른다.
2층에는 북과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이란 시가 적힌 현판이 있는데, 이 시는 5
언율시(五言律詩)로 어느 노승(老僧)이 1779년에 이곳을 찾아 지은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18세기에는 봉황루가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쌍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
록 하자.


▲  봉황루의 뒷모습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 - 1779년 어느 노승이 지음

고루에 나홀로 누워                  高樓我獨臥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心適上飛天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衆峀雲留白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群溪月影輝
석등은 불실을 밝게 비추고           夕燈明佛室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朝雨暗仙扉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日賞金沙池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身忘俗諦歸

▲  봉황루 2층에 있는 태극마크 북

▲  경내 북쪽 석축 위에 닦여진 돌탑들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논산 쌍계사는 작봉산(鵲峰山, 419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동/서/남이 모두 작봉산 산줄기
에 막혀있고, 오로지 북쪽만 뚫려있기 때문이다.
쌍계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작봉산'으로 '불명산(佛明山)'이란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데, 이
는 산의 옛 이름이 불명산이기 때문이다. 하여 쌍계사는 절에 어울리게 '불명산 쌍계사'를 칭
하고 있다.

쌍계사는 10세기 후반에 이곳에서 가까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대사(慧命大師)가 창
건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믿을 바가 못되며, 창건자와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
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다. 다만 고려 후기 서화가였던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이
발원하여 중건했다는 내용이 중건비에 적혀있어 이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끝 무렵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절의 연기(緣起)를 썼다고 전하며, 초창기 절 이름
은 백암사(白庵寺) 또는 백암(白庵)이었다.

왕년에는 500~600여 칸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호서(湖西) 제일의 대가람(大伽藍)을 자랑했는
데, 극락전을 비롯해 선원(禪院), 관음전, 동당(東堂), 서당(西堂),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등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잘나갔던 쌍계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
서 크게 야위어 갔고, 여러 번의 화재로 1716년에 대웅전 등을 중창했으나 1736년 다시 화재
가 찾아와 1739년에 중건을 하고 중건비를 세웠다.
조선 후기와 왜정(倭政) 때는 그런데로 절을 유지했으며, 6.25 시절에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
가 별 피해는 없었다. 이후 별다른 큰 불사(佛事) 없이 지금에 이른다.

절은 지형을 이용해 넓게 터를 다졌는데, 북쪽과 서쪽, 동쪽에 석축과 돌담을 쌓고, 북쪽 가
운데에 봉황루를 내어 정문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봉황루, 나
한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뜨락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
이다. 한때는 그 뜨락에도 건물이 가득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모두 사라지면서 수풀
만 무성하게 된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지방문화재인 부도
가 있으며, 계룡산 갑사(甲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머물고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 판각
이 원래 이곳에 있던 것으로 여기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쌍계사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많이 서려 있다. 그 전설을 모두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그중 일부만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① 창건설화 - 먼 옛날, 하늘의 상제(上帝)가 이 땅에 절을 하나 짓고자 자신의 아들을 내려
보냈다. 아들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천하에 진귀한 나무를 구해와서 주변 경치
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을 세웠다.
② 하마비(下馬碑) 전설 - 때는 고려 후기 어느 날, 쌍계사 주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승
려 1명이 나타나
'그곳에 쫓기는 승려가 찾아 올 것이니 잘 대접하시오. 허나 임금 왕(王) 자의 성을 가진 사
람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이후 세상이 더 혼란해지면서 많은 승려가 난을 피해 쌍계사로 들어오니 주지는 그들을 모두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을 뒤흔들 듯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군사가 절을 향해 달
려오고 있던 것이다. 절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에 떨자 주지는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기 시작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독경을 외웠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절로 치닫던 말들이
절 앞에서 서로 뒤엉키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말을 탄 군사들은 말들의 때아닌 발작 증세
에 모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계속 생기자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또한
말이 때거지로 죽은 곳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웠는데, 세월이 지나자 엉뚱하게
도 죄 지은 사람의 죄를 풀어주는 영험이 있는 비석으로 둔갑되어 불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
다.

* 쌍계사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 (중산길 192 ☎ 041-741-2251)


▲  봉황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쌍계사 둘러보기

▲  쌍계사 연리근(連理根)

논산 쌍계사는 솔직히 대웅전만 알았지 나머지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절의 역사도 제법 오래되
고 보물로 지정된 장대한 대웅전도 있으니 절 규모도 어느 정도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정
작 경내로 들어서니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른 허전한 모습의 쌍계사가 나를 맞이했다.

봉황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이는데,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
도 제법 떨어져 있다. 봉황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뜨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나 그냥 뜨락만 있
을 뿐, 연리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건물이 가득 있었겠지만 다 사라
지고 빈 자리만 남은 것이다. 뜨락 서쪽에는 오래된 연리근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동쪽에
는 조그만 요사와 선방이 자리한다. 그리고 건물 상당수는 대웅전 좌우와 뒷쪽에 띄엄띄엄 떨
어져 있다.
이렇게 경내에 놀고 있는 땅이 많으니 요란하게 중창불사를 벌일 만도 한데 아직은 그럴 생각
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뜨락이 너무 허전하니 조촐하게 건물 몇 개라도 세워 그 공허함을
달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이렇게나 넓은 법당(法堂) 뜨락도 처음 보고, 경내 중심에 이렇게
공터가 넓은 절도 처음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연리근

대웅전 뜨락 서쪽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연리근은 겉으로 보면 1그루 같지만 엄연한 2그루의
느티나무(괴목나무)이다. 이들은 서로 뿌리가 만나 이렇게 하나의 나무처럼 되었는데,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서로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 연리근은 수백 년(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음) 묵은 장대한 나무로 쌍계사의 오랜 내력을 알
려주는 소중한 산증인이다. 나무의 덩치가 대단하여 그늘 또한 넓기 그지 없는데, 나무 밑에
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늘의 질감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이곳만큼은 무더위를
잊어도 좋다.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오른쪽 맞배지붕 건물)
선방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그 앞에 조그만 건물은
찻집으로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부는 유료)

▲  동그란 석조(石槽)
작봉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석조에는 그가 베푼 옥계수로 작은
바다를 이룬다. 목마름을 단죄하고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외친다.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명부전은 20세기 초에 지어
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
王),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
데, 보통 절 건물은 가운데 문은 닫고 좌/우측 문을 열어두어 통행하게 하나 여기는 그 반대
로 가운데 문을 이용토록 했다.


▲  명부전 중심에 앉아있는 온후한 표정의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왼쪽), 도명존자(오른쪽)

▲  명부전 식구들
저승의 10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金剛力士), 동자(童子) 등


▲  나한전(羅漢殿)
20세기 초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 석가여래상과 석가후불탱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조그만
16나한(十六羅漢)들

  ◀  나한전의 젊은 버전,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칠성(七
星)을 비롯해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
자)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각 내부 - 왼쪽부터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왼쪽 나무가 연리근, 오른쪽 건물이 요사)


▲  석조관세음보살상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최근에 장만한 관세음보살상이 자리를 폈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풍만하고 복스러운 것이 마치 중년 비구니 같은데, 비가 내려도 얼굴 부분은 절대로 젖지 않
는다고 한다. 하여 절에서 신비한 관세음보살상이라며 크게 치켜세우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어려운 현상 같은데, 그게 계속 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석조보살상은 아닌 모양이다.

관세음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얇아보이는 옷을 걸치며 가슴 주
위로 여러 장식을 둘렀는데,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가득하다.


▲  관세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쌍계사 경내

▲  쌍계사 대웅전 - 보물 408호

쌍계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 바로 이곳 법당인 대웅전이다. 바깥만 볼 것이 아니라 안에
도 말끔히 살펴보자. 그래야 저승에 가서도 염라대왕 형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쌍계사에서 대웅전의 비중은 막대하며 '대웅전은 곧 논산 쌍계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
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법당에 걸맞게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솔직히 너무 일
방적으로 큼) 이상하리만큼 경내에 노는 공터가 많아 참 허전하기 그지 없는데, 그 허전함과
절의 조촐함을 대웅전이 제대로 커버를 해줄 만큼 든든한 모습이라 사진에 나오는 사람과 대
웅전을 비교하면 크게 실감이 날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살짝 치켜진 추녀마루의 선이 참 곱다.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모습 같은데, 지붕이 건물 2층과 맞먹을 정도로 육중하기 그지 없
어 건물 밑도리가 그 큰 지붕을 어떻게 받쳐들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평방(平枋)
위에는 촘촘히 박힌 공포가 그 지붕을 받들고 있는데, 안쪽은 5출목(出目), 밖은 4출목이다.
이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심어놓은 양식을 다포(多包)양식이라고 한다.

대웅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작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절이 세워진 고려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무너진 것을 1716년에 중창했고 화재로 또 전소된 것을 1739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기둥은 굵고 희귀한 나무를 사용했는데, 그중 가운데 좌측 2번 째 기둥이 칡덩굴나무로
되어있다. 이 기둥은 윤달이 들은 해(4년에 1번, 2016년, 2020년, 2024년~)에 몸으로 안고 돌
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1번을 안고 돌면 하루를 앓다가 가고, 2번을 안으면 2일, 3번 돌면 3일이라고 하는데, 유난히
3을 좋아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습성상 3일은 앓고 가야 서운하지 않는다며 보통 3번을 안고
간다고 한다.
또한 염라대왕이 논산 쌍계사 출신인지 '자네 논산 쌍계사 다녀왔는가?' 물어본다고 한다. 그
러니 만약을 대비하여 쌍계사를 꼭 챙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웅전 문짝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쌍계사하면 대웅전 꽃창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을 다녀간 답사쟁이들은 하나 같이 꽃창살
을 쌍계사 제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나도 꽃창살의 풍문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인데, 직접 그
들을 보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꽃창살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부안 내소사(來蘇寺
) 대웅보전의 염통까지 제대로 쫄깃하게 할 정도로 말이다.
회오리 모양과 바람개비 모양의 꽃잎 문양이 문짝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꽃잎 사이로 나
뭇잎 문양까지 달려 있어 실제 꽃잎이 달려있는 듯하다. 물론 자연산 보다는 좀 못해도 진짜
꽃들도 시샘을 보낼 정도로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851호

대웅전 불단에는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각자 스타일에 맞는 후불탱을 뒤에 걸
치며 후덕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대웅전이 크니 집 주인인 석가여래와 그의 협시불(夾侍佛)
까지 덩달아 장대하여 대웅전과 꽃창살에 놀란 눈과 가슴을 더욱 놀라게 만든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조각승 원오(元悟)가 수조각승을 맡아 신현(信玄)과
청허(淸虛), 신일(神釰), 희춘(希春) 등 4명과 함께 1605년에 조성했다. 그때 쌍계사는 무려
2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저들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가여래 좌우로 약사여래(
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자리해 3불을 이루고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앙련의 반대)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로 장엄하게 앉아있는데,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커다란 덩치
에 비해 손과 팔은 작아 보인다.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있지만 오른쪽이 더 진하며, 이를 변
형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고 부른다.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법의(法衣) 자락도
규칙적인 간격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고, 좌우 불상도 크기만 약간 작을 뿐, 대체로 석가여
래를 따라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법의를 걸쳤다는 것이다.

이들 뱃속에서는 아주 고맙게도 발원문(發願文) 등 복장유물 4점이 나왔는데, 발원문에 통해
1605년이라는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제작에 참여한 승려 이름을 알게 되었다. 분명한 제작
시기와 함께 조각승 원오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충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5
년 3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대웅전 천정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웅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기 바란다. 온갖 기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천정
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을 어느 정도 정화를 시켜줄 것이다.
천정에는 커다란 들보와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 용머리, 닫집, 25개의 네모로 이루어진 우물
천정(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천정에 우물천정 하나씩 있음),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迦陵頻伽)> 등이 정신없이 짜여져 있다. 들보와 공포에는 단청이 곱게 칠해져 있고, 용은 동
쪽 들보에 몸을 대고 불단을 굽어본다. 불상 위에는 붉은 기와집의 닫집과 천개(天蓋)가 있는
데, 마치 조그만 궁궐을 보는 듯 하며, 하얀 극락조가 날개를 퍼득이며 천정을 날고 있다. 그
야말로 휘황찬란이라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우물천정과 두툼한 들보, 그 들보에 몸을 기댄 용, 그리고
칠보궁(七寶宮)이란 현판을 내건 붉은 기와집의 닫집

▲  극락조가 날아다니는 천정 (들보와 닫집, 보개, 우물천정)
이곳이야말로 불국토(佛國土)의 축소판이 아닐까?

▲  대웅전 천정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을
빼곡히 담은 그림으로 법당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  대웅전 앞에 놓인 헝클어진 석재들
석탑의 일부로 여겨지는 연꽃무늬 석재와
맷돌의 일부가 나란히 놓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었다.


▲  이렇게 큰 뜨락을 본 적이 있는가?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과 봉황루

박석이 깔린 길이 봉황루에서 대웅전 앞까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허전한 공
간으로 있지만 혹시 아는가? 나중에 조그만 도시처럼 번잡한 공간이 될지도? 허나 너무 복잡
한 모습보다는 이렇게 여백의 미가 넘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  쌍계사를 뒤로하며 소류지에 버려둔 번뇌와 다시 만나다 ~~

겉모습은 작지만 대웅전 하나로도 알맹이가 큰 쌍계사를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보았다. 대웅전
내부를 뚫어지라 살펴보았고, 이곳에 서린 문화유산은 불상의 복장유물을 제외하면 모두 눈에
넣었다. 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곳에 정이 들었는지 속세로
나가는 길에도 여러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쌍계사에서 중산리로 나와 가게 문에 부착된 버스 시간을 보니 20분 뒤에 온다고 그런다. 딱
히 할 것도 없어서 정류장 주변을 서성이며 안그래도 빠른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시내
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나타나 활짝 입을 연다. 하여 그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논산역으로 나
왔다.

아직 일몰까지 여유가 넘쳐서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우리나라 서원의 주요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돈암서원(遁岩書院)을 가보기로 했다. 허나 서원은 격하게 땡기지는 않아서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연산에 자리한 송불암 미륵불로 장소를 바꿨다. 서원보다는 절이 볼 것도 많
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산시내에서 송불암이 있는 연산(連山)까지는 시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제법 다닌다. 대전
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데다가 구한말까지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연산현)이었기 때문이다.

논산역에서 연산, 계룡시 방면으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03번을 타고 1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
연산에 진입, 연산 남쪽인 연산구4거리에서 내렸다. 여기서 우회국도 개설로 많이 한가해진
옛 1번 국도 2차선 도로(황룡재로)를 따라 동쪽(계룡 방면)으로 6~7분 정도 가면 송불암 입구
이고, 거기서 송불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송불암이 모습을 비
춘다.


 

♠  오래된 미륵불과 소나무를 간직한 조그만 절
~ 논산 송불암(松佛庵)

▲  송불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송불암은 옛 절터에 지어진 작은 비구니 절로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곳에 서린 오래된 미
륵불을 보고자 함이다.

송불암에 있던 옛 절은 미륵불을 통해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보다 동쪽으로
50m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절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미륵불과 주춧돌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46년에 인근 신양리에 살던 동상태의 어머
니가 2칸짜리 집을 짓고 절로 삼아 미륵불을 관리했다. 이것이 현재 송불암의 시작이다.
이후 1970년에 승려 경연이 절을 물려받아 주지승이 되었는데, 미륵불 바로 옆에 소나무가 석
불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다고 하여 송불암이라 하였다.

송불암에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가 한토막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어느 날, 법력이 높은 노승(老僧)이 기도를 마치고 걸망을 짊어지며 천하를 돌아다
니다가 연산 고을 인근 황룡산에 올라 땅을 살펴보니 절을 지으면 크게 될만한 명당(明堂) 자
리였다. 하여 그곳을 점찍어두며 주변을 보니 광산김씨가 중심이 된 부자 마을이 있었고, 마
을 외딴 자리에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광산김씨 청년이 나와 무
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승은
'황룡산에 명당 자리가 있다기에 여기서 불법(佛法)을 전할까 하오'

답을 하니 청년은
'이곳은 유생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그러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풀막을 짓고 도를 깨우쳐 볼까 하오'
그러니 청년이
'그러면 무엇을 먹고 입으며 혼자 쓸쓸히 어떻게 살려고 하시오?'
물었다. 노승은
'원래 중은 풀뿌리, 나무열매로 양식을 삼고, 송락과 초목으로 의복을 대신하며, 법당이 없으
면 바위굴을 불당으로 삼소. 그러니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노승
의 시원스런 답에 청년은 감동을 먹고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하룻밤 자고 가라며 호
의를 베풀었다.

이렇게 청년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노승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얼굴을 보니 3일 뒤에 죽을 상이 아닌가? 이걸 청년에게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궁리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잘 쉬었소.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부디 화를 내지 마시오.
아까 당신의 아머니를 잠깐 뵈었는데, 3일 후 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 것이오. 그러면
인근 범바위골에 묘를 쓰되 황금돌을 절대 건드리지 마시오. 그곳이 괜찮은 명당자리요'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갑자기 뚜껑이 뒤집혀
'뭐라고? 이 땡중이 미쳤나? 빨리 꺼져!!'
성을 내며 노승을 쫓아냈다.

그런데 과연 3일 후 아침, 청년의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이에 청년은 크게 놀라 통곡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노승이 한 말을 상기시켜 보았다. 범바위골에 묻으라는 말이 생각나 그곳에 묘
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니 황금돌이 나왔는데, 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는 기억이 안나서
그만 그 돌을 들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수많은 벌이 앵~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땅에 흔치 않던 벌명당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벌들은 노승 때문에 보금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벌의 우두
머리가
'그 땡중 때문에 우리 터전을 빼앗겼다. 빨리 그 작자를 단죄하러 가자~~!'
잔뜩 이를 갈고 무더기로 날라다니며 노승을 찾아 다니다가 인근을 지나던 그를 발견하고 집
중 폭격을 가해 말그대로 벌집을 만들어 죽였다.

이후 노승의 저주가 씌워진 탓인지 연산마을에는 10년 홍수, 10년 가뭄, 10년 전염병으로 완
전 몹쓸 땅이 되버렸다. 마을의 실세이던 광산김씨 집안에서 회의를 열어 상황이 이리 된 것
은 우리들 때문에 노승이 벌에 쏘여 죽은 것이라 규정하고 그의 넋을 위로할 겸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다. 그랬더니 재앙은 멈추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 곁에 소나무 1그루가 홀연히 자라나 그를 향해 가지를 뻗으면서 위로 자라지 않
고 아래로만 자라니 사람들은 그 소나무가 노승의 후신이라 여기며 기도를 올렸고 소원을 성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출가하여 크게 된 승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전
한다.

물론 전설을 다 믿으면 이는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을 통해 마을의 평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절을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딱히 뒷끝이 없는 다른 벌명당 전설과 달리 승려의 말
을 지키지 않다가 명당의 기운은 커녕 오히려 마을이 풍비박산이 나자 그 승려를 위로하고자
절을 세워 간신히 마을의 안녕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이채롭다. 일종의 승려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나오니 승려와 절, 불상을 잘 대접하라는 옛 석불사의 뜻이 아닐까?

▲  개구리의 조촐한 운동장, 동그란 연못

▲  대웅전 앞 연꽃 석조

송불암은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비구니 절이라 경내는 깔끔하
고 정갈하며, 경내 동쪽에 창건 설화에 나오는 소나무와 이곳의 후광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
불이 자리해 있다.

▲  2000년에 새로 지어진 대웅전

▲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요사


▲  미륵불과 소나무가 있는 경내 동쪽

▲  송불암 미륵불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3호

송불암 미륵불은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높이는 4.25m, 둘레 1m로 머리에는 네모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넉넉한 인상으로
눈과 눈썹, 코, 입이 모두 완연하게 남아있으며, 두 귀는 목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
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통에는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얇은 새김으로 새겨진 옷주름선은 발목까지 내려왔으며, 왼
손은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몸 옆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 같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화무늬가 있고, 옷자락 밑으로 석불의 발과 발가락
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석불 옆에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소나무가 누워있다. 정말 노승의 넋이 담긴 것인지 하늘로 곧
게 자라지 못하고 석불을 향해 아래로만 자라나 끝내는 석불의 하늘을 가린 것이다.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의 불력(佛力)이나 매력에 끌린 듯 그를 덮고 있었는데, 소나무가 갈수록 오버(?
)를 하면서 석불이 마치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자 2000년에 지금의 자리로 석불을
옮기고 소나무를 싹둑 정리했다.


▲  송불암 소나무 - 논산시 보호수

미륵불과 더불어 송불암의 오랜 명물인 소나무는 미륵불 앞에 마치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을 하고 있다. 그의 미륵불에 대한 마음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석불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존
재이기도 한데. 2000년에 미륵불을 현 자리로 옮기고 소나무를 크게 손질하여 얌전하게 만들
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70년으로 그 적지 않은 나이에 비해 높이는 낮다. 다만 아랫쪽으로만 성장
을 하여 지금처럼 처진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있는 석탑

소나무 그늘과 석불 주변에는 세월에 지쳐 쓰러진 주춧돌과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들은
미륵불과 더불어 옛 석불사의 유물로 석탑은 2기가 있는데, 윗 사진의 탑은 아랫도리만 간신
히 남아있으며, 그 주위에 버려진 주춧돌과 자잘한 돌들이 모여 있어 서로를 의지한다.


▲  석불 옆에 자리한 조그만 석탑
몇층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신의 일부와 옥개석이 이리저리 깨진 채 남아있다.
그 위로 동그란 돌이 마치 공기돌처럼 놓여있다.

▲  미륵불 주변에 흩어진 주춧돌들 ▲
이들은 미륵불을 보호하던 건물의 주춧돌로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보호각이
미륵불을 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높이가 4m가 넘으니 그 건물
또한 장대했을 것이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지고 간신히 주춧돌만 남아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미륵불의 뒷모습과 소나무
미륵불 뒷모습은 딱히 손질을 하지 않아 울퉁불퉁하다.

▲  미륵불의 귀여운 발과 연꽃무늬 대좌
발가락이 상식 밖으로 지나치게 커서 그 모습이 마치 손에 낀 장갑이나
글러브 같다.

▲  송불암과 논산을 뒤로하며~~~

송불암을 30분 정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더 이상 갈 곳도, 마음을
줄 곳도 없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름 맞이 논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 송불암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6-3 (황룡재로 92-18 ☎ 041-733-6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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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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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 '


▲  윤봉길이 태어난 광현당

▲  저한당

▲  윤봉길이 남긴 글씨들

 


 

차디찬 겨울 제국과 따스한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초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홍성
과 예산(禮山)을 찾았다.
충남의 금강산으로 추앙받고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을 둘러보고 덕산(德山)으로 나와
늦은 점심으로 얼큰하게 육개장을 섭취했다. 용봉산을 크게 1바퀴 돌아 몸이 좀 피곤했으
나 일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여 수덕사(修德寺)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유적(
충의사)의 문을 두드렸다.

윤봉길(尹奉吉) 의사 유적은 그가 자란 저한당을 비롯해 도중도의 광현당과 부흥원, 윤봉
길 의사 기념관, 충의사, 그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윤봉길과는 관련은 없지만 보너스로 보부상유품전시관도 있다.

윤봉길 의사 유적은 통째로 사적 229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예산 윤봉
길 의사 유적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순서는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되나 나는 저한당을 시
작으로 도중도와 부흥원, 윤봉길의사 기념관, 보부상유품전시관, 충의사, 배용순 여사 묘
역 순으로 둘러봤다.


▲  옛 국도변에 자리한 저한당 서쪽 돌담길


 

♠  윤봉길 의사(義士)가 성장기를 보냈던 저한당(狙韓堂) 주변

▲  저한당

저한당은 윤봉길(1908~1932) 의사가 1911년부터 1930년 봄까지 살았던 집으로 1911년에 가족
을 따라 도중도에서 저한당으로 이사를 왔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3.1
운동이 터지면서 왜정(倭政)의 식민지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하여 동생인 윤성
의(尹聖儀)와 함께 한학(漢學)을 공부했는데, 워낙 영특하여 15살 때 천재로 칭송을 받았다.
(나는 그 나이 때 뭐했나...?)
1921년부터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계속 한문학을 익혔으며, 1926년에 집에 서당을 차
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문물을 틈틈이 익혔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공동묘지 묘표(墓
標) 사건이 발생하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서당에서 평화롭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글을 모르는 청년 하나가 마을 인근 덕
숭산(德崇山) 공동묘지에 있는 팻말을 모조리 뽑아들고 와서 자기 아비의 묘비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에 묘비를 찾아주긴 했으나 문제는 그 청년이 아버지 묘비는 물론이고 다른
묘비까지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않은 채, 죄다 뽑아 온 것이다. 그러니 어찌 묘비의 위치를
알 수 있겠는가?
이에 큰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아이들보다 청년들의 교육이 시급함을 깨닫고 야학회(夜學會)
를 창설해 지역 주민들의 문맹퇴치에 나섰다. 또한 민족의 경제자립이 자주독립의 지름길임을
인식하고 구매조합(購買組合) 조직과 양계(養鷄), 양돈(養豚) 등을 장려하여 농촌 경제자립운
동을 펼쳐나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18세에 불과했다. 나는 그 나이 때 학교에서 잠만
열라게 잤는데, 역시 위인은 떡잎부터가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짓고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으며, 1929년에는 도중도에
부흥원(復興院)을 만들고 매월 14일에 계몽강연회(啓蒙講演會)를 개최하여 농촌계몽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그해 2월 18일에는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學藝會)를 열고 촌극(寸劇)인 '토
끼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하면서 매우 성공리에 막을 내렸
다. 바로 이 연극 때문에 왜정은 그를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란 농민 단체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고,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조직해 농민의 단결과 애국사상 고취에 나섰다. 허나 왜정은 그런 행동이 독립운동이라며 쓸
데없이 꼬투리를 잡았다. 하여 왜경(倭警)에 여러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윤봉길은 독
립운동이 아닌 단순한 교육이라고 했지만 왜정은 무조건 독립운동이라며, 더 이상 하지 말라
고 강요했다. 농민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것까지 왜정이 쓸데없이 태클을 거니 그는 이곳에서
의 활동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1930년 3월 6일, 그 유명한 7글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을 나
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시를 남기고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윤봉길은 부인과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1932년 상해 의거(義擧) 이후 왜정의 감시와 탄
압 속에 눈물과 독립에 대한 의지로 이 집을 지켰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곳에 살다가 1972
년 윤봉길 의사 유적을 몽땅 국가 사적으로 삼으면서 국가에서 집을 매입해 성역화 작업에 들
어갔다. 그래서 그해 8월 유족들은 정든 집을 떠나 인근으로 이사갔으며, 1974년 집을 중수했
다. 지금도 관리가 지극정성이라 마치 여인네들이 살고 있는 듯, 집이 매우 깨끗하다.

남쪽을 바라보며 선 저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초가(草家)로 오래된 마을과 민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이다. 1911년에 지어진 것으로 창고와 부엌으로 쓰이는 'ㄱ' 모양의 건
물과 방 2개가 딸린 건물 등 부속 건물 2채(담장 밖에 뒷간을 포함하면 3채)를 거느려 총 3채
가 한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다.
건물에 딱히 특별한 부분은 없으나 윤봉길의 오랜 손때가 묻어있고 그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이 담긴 터전으로 유서가 깊으며, 그의 유가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집의 이름인 저한당(狙韓堂)은 한국을 건져낸다는 뜻이니, 즉 우리나라를 왜정에서 건져
내 독립을 이루고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다.

* 저한당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 (덕산온천로 182-10)


▲  돌담에 둘러싸인 저한당 외경

▲  저한당으로 인도하는 대문
두 부속건물 사이로 조촐하게 담을 만들고 문을 내어 정겨운 모습을 자아낸다.

▲  방 2개와 광으로 이루어진 부속건물

▲  창고와 부엌

▲  저한당 뒤쪽 장독대

▲  뒷간과 소나무

▲  글씨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저한당 현판

▲  주인이 가고 없는 저한당 방


▲  저한당에 봉안된 잘생긴 윤봉길 의사의 영정

▲  윤봉길 의사 동상

▲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탑

저한당 주변에는 오른쪽 주먹을 쥐며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과 1965
년에 세워진 의거 기념탑, 교육관 등이 있으며 나무가 많고 잔디가 곱게 깔려 정갈한 분위기
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 주변을 기와 돌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성역의 경계를 그었다.


▲  저한당 주변
심술쟁이 겨울도 그를 흠모하는 것일까? 저한당에서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하만물을 위해 빨리 떠나주면 좋으련만~~

▲  도중도로 이어지는 저한당 동쪽 돌담길
지긋한 전통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기 그지 없다.


 

♠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고 농민계몽을 위해 힘쓰던 현장
도중도(島中島)

▲  도중도 광현당 정문

저한당을 둘러보고 남쪽으로 나오면 대치천이라 불리는 개천이 나온다. 그 개천에 걸린 '도중
도교'를 건너면 윤봉길이 태어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도중도 구역에 들어서게 된다.

도중도는 윤봉길의 증조부 때부터 정착해 살던 곳으로 1908년 6월 21일 광현당에서 윤황(尹璜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경주김씨인 김원상(金元祥)이며, 본관은 파평 윤씨, 본명은
우의(禹儀)이다. 봉길이란 이름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그는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으며,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야학
회를 비롯해 계몽강연회,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도중도란 이름은 '조선반도 속의 섬, 조선
반도 가운데의 섬으로 왜인(倭人)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란 뜻에서 윤봉길이 지은 것
으로 예전에는 순 100% 섬이었지만 도중도교 서쪽 개천에 흙으로 둑을 닦아 그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면서 99% 섬이 되버렸다. 큰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조촐한 개천 안에 이런 커
다란 섬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뿐이다.

도중도에는 윤봉길의 체취가 서린 광현당과 부흥원이 있고, 무궁화(無窮花)를 비롯해 온갖 야
생화를 심은 무궁화학습원이 부흥원 동쪽에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난 전나무길이 곳곳
에서 운치를 자아내며, 섬 동쪽에는 씨름장과 그네, 급수대, 쉼터를 갖춘 넓은 잔디밭이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로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다.
또한 섬 주변을 개천이 둘러싸고 있으며, 섬 남쪽에는 물을 모아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
다. 하여 여름에 오면 연꽃의 화려한 향연에 그야말로 두 눈이 환장할 지경이다.

* 도중도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80-1 (시량부흥길 21)


▲  넓은 공원 분위기의 도중도 내부

▲  광현당 서쪽에 자리한 매헌 윤봉길 유허비(遺墟碑)

▲  광현당(光顯堂)

도중도 가운데에 자리한 광현당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곳으로 저한당과 마찬가지로 초가이
다. 이 집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정착한 증조부(曾祖父)인 윤자 때부터
살았다고 하며, 조선 후기 초가로 광현당이라 불리는 본당 외에 3채의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윤봉길은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에 새롭게 장만한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고, 이후 그
의 친척이 잠시 살다가 버려진 이후 나라에서 매입하여 1974년에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저한
당과 마찬가지로 관리가 잘되어 있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듯 깨끗하며, 광현당이란 이름은
윤봉길을 빛으로 비유해 그의 태어남을 높이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다.

▲  광현당 대문과 펄럭이는 태극기

▲  적막이 감도는 광현당

▲  광현당 부엌
부엌이 양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  광현당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생기가 넘쳐
보인다.

▲  담장을 두른 광현당 뒷모습

▲  우진회기공비(禹進會記功碑)

우진회는 1944년 2월 15일 윤봉길의 4촌과 6촌, 제자들이 만든 단체로 윤봉길이 만든 월진회
를 계승했다. 1946년 4월 29일 월진회로 이름을 갈았으며, 2011년 4월 29일 윤봉길 문화축제
때 우진회의 업적을 기리고자 광현당 앞에 기공비를 세웠다.


▲  부흥원 옆에 자리한 연자방아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했던 연자방아로 지금은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한 여러 농사 도구들

▲  부흥원 뒤쪽에 그림처럼 펼쳐진 전나무 숲길

▲  부흥원(復興院)

광현당 동쪽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리한 부흥원은 1928년에 윤봉길이 세웠다. 공동묘지 묘
표사건에 크게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야학당을 만들어 저한당 사랑방에서 운영했는데, 참여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도중도에 부흥원을 만들고 1928년 2월 25일에 자필로 대들보에 글씨를
새겨 상량식(上梁式)을 가졌다. (대들보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있음)
그는 이곳을 3대 목표운동의 장으로 삼았는데, 그 3대란 무지 타파, 가난 타파, 단결이다. 무
지(無知) 타파를 위해 야학과 독서회, 학예회를 벌였고, 가난 타파를 위해 농촌 공동구매와
저축, 생활 개선을, 단결을 위해 월진회와 수암체육회, 공동작업과 공동식수 작업을 벌였다.
그의 개혁적인 활동에 왜정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태클을 걸자 바로 여기서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상해 의거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974년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  부흥원 현판의 위엄
부(復)가 마치 도(渡)처럼 보인다.

▲  아직은 황량한 무궁화학습원

▲  겨울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그네

▲  도중도 남쪽에 조성된 연꽃 연못


 

♠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 (왼쪽에 보이는 집은 보부상유품 전시관)

충의사 남쪽(저한당 북쪽 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1973년부터 1977년까
지 진행된 윤봉길 유적 성역화 사업 때 관리사무소와 함께 세워졌다. 이후 2001년 기념관 옆
에 윤봉길의 어록(語錄)을 담은 윤봉길어록탑을 만들었으며, 2002년에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그해 12월에 속세에 문을 열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봉길의 손때가 자욱한 유품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윤봉길
일가에서 쓰던 그릇과 서적, 벼루를 비롯하여 그의 찰나(刹那)와 같은 인생을 다룬 영상관과
매직비전 11대, 다오라마 등이 그의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그의 유품(遺品) 중에
회중시계와 지갑, 중국화폐, 도장, 손수건, 안경집, 일기, 월진회창립취지서, 농민독본, 형틀
대, 편지 등은 '윤봉길의사 유품'이란 이름으로 '보물 568-2호, 568-3호'로 지정되었다.

* 윤봉길의사 기념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5 (덕산온천로 183-5, ☎
  041-339-8233)
* 윤봉길의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그릇, 수저, 놋대야 사진을 클릭한다.

▲  윤봉길 일가가 사용했던 그릇과
수저, 놋대야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읽은 명심보감과 그가
사용한 벼루와 등잔대 - 보물 568-3호

▲  윤봉길의 글씨 (해석은 각자 알아서)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쓴 온갖 서적들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직접 그린 월진회 깃발 - 보물 568-3호
팔방미인이던 윤봉길은 지식 소양도 대단할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깃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무궁화는 마치 뭉개구름 속에서 방긋
피어나는 태양처럼 찬란해 보인다.

▲  부흥원 대들보 - 보물 568-3호
옛 부흥원의 유물로 1928년 2월 25일 부흥원 상량식 때 윤봉길이
대들보에 기념 메세지를 남겼다.

◀  윤봉길이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 가족들
에게 남겼다는 7글자의 시 - 보물 568-3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
을 나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다)' 물이 흐르듯 유연한 곡선의 서체에 그의
비장함이 엿보인다.


▲  월진회 창립취지서(보물 568-2호)와 통장(보물 568-3호)

1929년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월진회를 만든 윤봉길은 창립 취지서(趣旨書)를 남겨 그 뜻을 천
하에 밝혔다. 월진회 통장은 저축운동을 위해 그가 회원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그가 직접 만들
었다고 하며,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지금 21살이면 완전 애기인데...)


▲  윤봉길이 1929년에 쓴 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 - 보물 568-2호

▲  농민독본(農民讀本) - 보물 568-2호

1927년 농민들을 대상으로 야학당을 운영했을 때 그가 직접 편저한 책으로 모두 3권으로 이루
어져 있다. 지금은 2권과 3권 일부만 남아있으며, 왼쪽 책은 세월의 녹이 검게 그을려져 있다.
책에 수록된 우리나라 지도가 무척 인상적인데, 부산과 왜열도 사이를 조선해협이라 표시했다.


▲  위친계취지서(爲親契趣旨書) - 보물 568-3호
윤봉길이 부모의 상사(喪事) 등을 위해 친척을 중심으로 조직한 위친계의 취지서이다.
나라의 독립과 경제 부흥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그의 높은 의식을 보여준다.

▲  우리의 옛 땅 동북아를 누빈 윤봉길의 위엄
지도에 나온 동북아 일대는 우리의 옛 땅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히
차지해야 될 땅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윤봉길이 중원대륙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  윤봉길이 1932월 1월 30일 상해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그해 1월에 벌어진 왜군의 상해 침략에 대한 내용이 소상히 나와있다. 왜군이
상해를 공격하자 장개석(蔣介石)의 중국군이 1달 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상해를 빼앗기고 많은 중원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은 가족에게 장엄한 각오가 서린 7자의 시를 남기고 만주로 홀로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간이 쫄깃해진 왜경은 몰래 미행을 붙이면서 평안북도 선천(宣
川)에서 붙잡고 만다. 하여 45일 동안 옥고(獄苦)를 치르고 바로 만주로 넘어가 그곳에서 그
와 뜻이 같은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을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허나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1930년 12월 홀로 산동반도 청도(靑道, 칭
따오)로 넘어가 1931년 여름까지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으며, 여기서 번
돈 대부분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청도도 적당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는 상해로 가야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1931년 8월 상해로 갔다. 상해에 있는 프랑스 조계(租界)인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머물며 박
진(朴震)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영어를 익혔다. 그렇게 주경야독(
晝耕夜讀)을 하다가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을 했고, 그해 겨울 드디어 백범 김구
(白凡 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  윤봉길이 홍구공원 의거 2일 전에 김구에게 보낸 자신의 이력서들
이력서 옆에는 사진에는 빠져있지만 상해에서 사용한 중국제 수첩이 있다.

▲  윤봉길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찍은 증명사진
(오른쪽은 자필로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  조금은 어설프게 재현된 홍구공원 의거 현장

1932년이 되자 왜국은 왜인 승려 처단 사건을 구실로 상해 사변을 일으켰다. 장개석이 1달 동
안 저항을 했으나 결국 상해를 내주고 말았으며, 상해를 점령한 왜군이 승리에 도취해 왜왕(
倭王) 생일인 4월 29일에 왜왕 생일 축하 및 전쟁 승리 축하 기념식을 상해 시내에 있는 홍구
공원(虹口公園)에서 갖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와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
始榮), 조소앙(趙素昻)에게 자신의 거사 계획을 밝히고 거사를 구상했다. 성공적인 거사를 위
해 채소장사로 가장해 기념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신분을 세탁했으며, 김홍일(金弘一)이
만든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준비하고 폭탄 던지는 법을 배워 실수가 없게끔 자신을 채찍질했
다.
드디어 4월 29일 아침, 그는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 폭탄 1개를 가지고 기념
식장으로 들어갔다. 공원을 지키던 왜군이 검문을 했으나 왜인이라고 속이니 그냥 들여보내주
었다.
왜인들만의 즐거운 잔치였던 그 행사가 거의 막을 내릴 무렵, 1만 명의 군중 사이에 묻혀있던
그는 기념식 단상 앞을 지키던 기마헌병 앞까지 들어와 물통폭탄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 물통이 단상에 떨어지는 순간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식장에서 오만을 띈 미소로 행사를 치
르던 왜인 고위층 7명이 모두 꼬꾸라졌다. 단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행사를 구경
하던 관중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을 붙잡고 도망치느라 바뻤다. 왜군 또한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니 충분히 빠져나와 다음 거사를 준비할 틈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윤봉길은 피신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왜군은 그를 체포했다.

윤봉길이 준 크나큰 선물에 감동하여 기절한 7명의 왜인 고위층 중에, 상해 왜인 거류민(居留
民) 두목인 가와바다 사다쯔구(河端貞次)는 사경을 헤매다가 다음날 바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1932년 1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운 왜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5월
에 폐기되었다. 또한 제3함대 두목인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은 중상을 입고 눈병신이
되었으며, 주중일본공사 시케미쓰(重光癸)는 우측 다리가 절단되어 다리 병신이 되었다. 기타
2명도 막심한 중상을 입었다. 즉 2명이 폐기되고 5명이 병신이 된 것이다. 그 5명은 왜국 백
성들이 바친 세금이나 갉아먹으며 식충이처럼 살다가 골로 갔다.


▲  의거 이후 연행되는 윤봉길 사진
기념식장을 흔쾌히 아수라장으로 만든 물통 폭탄과 폭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업혀가는 왜군 장수 사진도 있다.

▲  상해 의거 관련 왜국 조일신문 보도
왜국은 상해 폭탄변사(爆彈變事)라고 표현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변사겠지~~
윗사진은 폭탄에 아작이 난 기념식장, 아랫 사진은 왜군에게 잡혀 호송되는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왜국 군법회의로 넘겨져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형을 선고받
았다. 그를 심문하던 왜군은 그가 상해사변에 앙심을 품은 대륙 사람인줄 알았으나 조선 사람
이란 사실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상해 왜군 헌병대에 갇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그는 그해 11월 18일 왜열도로 호송되었으
며, 20일 오사카(大阪) 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다시 가나자와(金澤)로 옮겨져 거기서 12
월 19일 총살형을 받으니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한편 상해 사변에서 개망신을 당해 절치부심에 빠진 중화민국(中華民國) 지도자 장개석(장제
스)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특히 상해사변을 일으킨 원흉들이 대거 폐기되었다는
소식은 겁 많은 중원대륙 지도층을 비롯한 대륙 민중들까지 모두 환호하게 만들어 한국에 아
주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개석은 '쓸데없이 머릿수만 많은 4억 대륙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고 두고두고 격찬했으며, 1933년 5월 그의 제의로 남경
(南京)에서 김구와 회담을 했다.
여기서 장개석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서로 돕고 지내자며 손을 내밀었고, 임시정
부와 중원대륙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광복군은 장개석의 지원과 비호를 받으며 독립활동을 전
개했다. 그리고 왜국이 패망할 때까지 서로 상부상조했다. 윤봉길의 의거로 잠시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크게 고취되었고, 우리의 독립활동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윤봉길의 최후 장면과 그가 갇혀있던 가나자와 형무소

▲  장개석이 윤봉길의 동생 윤남의에게 보낸 친필서한과 기념사진

▲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 전기문을 낸 곽상훈에게 보낸 축하 친필 서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윤봉길의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에 13년 동안 매장
되었다. 왜국이 패망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과 가나자와에 거주하던 박동조, 서성민으로 이
루어진 발굴단이 1946년 3월 4일 발굴을 시작해 6일에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유해는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의 유해와 함께 그해 5월 부산에 도착해 공설운
동장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7월 7일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최초로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되었다. 또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
국장이 추서되어 그의 의거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  윤봉길이 날린 그 유명한 도시락/물통 폭탄 (모형)
공원을 지키던 왜군을 감쪽같이 속이고 임무를 완수한 도시락/물통 폭탄의 위엄
겉은 그저 흔한 도시락과 물통이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폭탄이 들어있다.

▲  윤봉길 의사의 유품 (안경집부터 대륙 화폐까지) - 보물 568-2호
윤봉길을 사형시킨 왜국은 그의 몸에서 나온 유품을 덕산에 있는 유가족에게
보내주며 은근히 악어의 눈물을 보였다.

▲  윤봉길이 상해 의거 때 지녔던 지갑과 대륙 화폐 - 보물 568-2호

▲  윤봉길이 죽기 전까지 사용했던 손수건
손수건에 점처럼 찍힌 빨간 것은 그의 거룩한 피이다.

▲  회중시계(懷中時計)와 도장

윤봉길의 유품 중에 회중시계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계는 원래 김구 주석이 쓰
던 것으로 상해 의거를 벌이던 4월 29일 아침, 김구와 마지막으로 만나면서
'선생님의 시계가 많이 녹슬었군요. 제 시계는 이제 쓸 일이 없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제안을 하여 서로의 시계를 바꾼 것이다. 그의 시계를 받은 김구의 마음은 참 착잡했을 것이
다. 솟구쳐 나오려는 사나이의 눈물을 서로가 억지로 참아가며 시계를 서로의 정표로 바꿔야
했던 그 참담한 현실을..


▲  1962년 우리나라 정부가 윤봉길에게 바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윤봉길이 마지막으로 짊어진 형틀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의 몸을 묶었던 형틀
대이다.
가로목과 세로목이 있는데, 세로목은 두 팔을
묶었고, 가로목은 머리부터 허리까지 묶었다.
이 형틀대는 그가 묻힌 노다산 공동묘지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세로목만 나왔으며
이후 이 땅에 들어와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안
착하여 보물 568-2호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보물급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비
참하고 쓰라린 존재가 아닐까 싶다.


▲  윤봉길 의사의 흉상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옆에 자리한 윤봉길어록탑


 

♠  충의사(忠義祠)

▲  충의사로 인도하는 홍살문

윤봉길 의사 유적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충의사는 윤봉길의 충혼이 깃든 사당으로 1968년에
지어졌다. 1978년 4월에 사당과 삼문을 증축하고 주변을 정비했는데, 사당과 충의문의 색이
그 흔한 사당 건물의 색깔이 아닌 베이지색을 띄고 있다. 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리된 것으로 그 시절 성역화시킨 모든 사당은 모두 베이지색으로 떡칠을 했다. 이유는 그가
좋아하는 색이기 때문이라나..?
어쨌든 1979년 이후 많은 사당이 본연의 색깔을 되찾았으나 이곳은 아직 베이지색을 고수하고
있다.


▲  2마리의 사자가 문을 지키는 충의문(忠義門)의 위엄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이 이용하는 문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굳게 닫아 둔다.

▲  충의사 본전(本殿)

▲  충의사에 봉안된 윤봉길의 영정 (정우성 화백의 그림)

그에게 있어 저렇게 편안히 앉아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저런 영웅이 여럿 나타나 세상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하건만 이젠 그런 것도 무뎌딘 것일까..?
윤봉길 같은 이가 나라의 주인이 된다면 나라와 백성이 많이 편안해질텐데 너무 젊은 나이에
숨진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그의 영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참배록에 '봉길이 형님 나 다녀갔소. 잘 봐주시오!'의 뜻으로
나의 보잘것 없는 이름을 살짝 남겨본다.


▲  늦은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는 연못의 조촐한 분수대
충의사와 배용순 여사 묘소 중간에 연못을 두어 성역(聖域)의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덜어낸다.

▲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裵用順) 여사의 묘역

충의사와 연못 서쪽에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다. 바로 그곳에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 여
사의 묘역이 조용히 자리하여 남편의 사당을 바라본다.
배용순은 1922년 그와 혼인하여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상해 의거 이후 왜정의 감시로 적
지않은 마음 고생을 겪으며 저한당을 지켰고, 1974년 성역화 사업에 따라 나라에서 유적 일대
를 매입하면서 인근으로 이사가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에 적지 않은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
와 유족의 마음 같아서는 남편(윤봉길)의 무덤 곁에 있고 싶겠지만 멀리 서울 효창공원에 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당이 바라보이는 서쪽 소나무 숲에 무덤을 쓴 것이다.


▲  보부상(褓負商) 유품 전시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충의사 사이에 팔작지붕을 지닌 기와집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윤봉
길과 관련이 있는 집이겠지 생각을 하겠지만 현실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보부상 유품 전
시관이다. 윤봉길 유적에 왠 뜬금 없이 보부상 유품 전시관이 있는 것일까? 신라시대 문화유
산으로 도배가 된 경주(慶州)에서 고구려 호우를 보는 것 마냥 꽤 이채롭다.

보부상 유품 전시관은 예산과 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부상의 조직적 단체인 예덕상무사(禮
德商務社)의 유품을 머금은 공간이다. 보부상은 일종의 행상(行商)으로 보상(褓商)과 부상(負
商)을 합친 말인데, 보상은 부피가 가볍고 돈이 나가는 물건을 짊어지며 팔았고, 부상은 부피
가 크고 값이 싼 생활용품과 먹거리를 지게에 이고 다녔다.

보부상은 고려 후기에 여진족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한 이성계(李成桂)를 부상 백
달원이 발견해 치료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 조정도 보부상에게는 조금 관대하여 여러 혜택을 주었고, 곳곳에서 보
부상이 조직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밥벌이를 하였다. 그들은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는 쌀
이나 무기를 짊어지고 아군을 도왔는데,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을 지키던 권율에게
쌀을 날라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갇힌 인조와 군사들에게 쌀과 먹을 것
을 날라주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皇國協會)가 결성되어 어용단
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예산/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서와 유
물을 남겼는데, 그 유물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공간을 윤봉길 의사 유적에 세운 것이다.
아무래도 윤봉길과 관련이 없는 곳이다 보니 관람객들의 발길이 조금 적은 편인데, 우리나라
상업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니 잠시 둘러보는 것도 정신적으로도 지식적으로도 매우 유익할 것
이다. 결코 손해될 것은 없다.


▲  예덕상무사 시절의 문서와 도장들

▲  보부상들이 팔던 양반용 물건들 - 삿갓과 부채 등

보부상 유품 전시관에 전시된 예덕상무사 유물(인장 6개, 인궤 1개, 청사초롱 2개, 공문서 16
점)은 '보부상 유품'이란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스크롤의 압박이 상
당한 본글의 사정상 보부상 유품은 2장만 담았으며, 예덕상무사와 유품에 대한 내용은 생략한
다.

이리하여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끝으로 윤봉길을 폄하하고 테러
라고 치부하는 꼴통 매국노들과 뇌가 없는 머저리들이 여럿 있는데, 이런 것들은 정말 산소와
물이 아깝다. 테러와 의거의 차이부터 공부하길 권한다. 왜인이 저렇게 말하는 건 이해를 하
겠으나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 불가이다. 이는 이승만 시
절에 친일매국노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일어난 잔혹한 결과이다.
윤봉길이나 안중근(安重根),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같은 걸출한 인재나 영웅이 많이 나와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매국노를 말끔히 청산하고 처단하여 역사를 바로 잡는 그날이
오길 간절히 고대한다. 역사 청산이 없는 이상 이 땅의 미래도 없다.

* 보부상유품 전시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20-6 (덕산온천로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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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서 제일 큰 청동좌불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천안 태조산 각원사 ~~ (태조산 성불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천안 태조산 각원사~성불사 '

▲  각원사 청동좌불상


 

겨울이 무르익어가던 12월 중엽, 친한 후배들과 충남 제일의 도시인 천안(天安)을 찾았다.
천안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청동대좌불로 유명한 각원사로 태조산(421m)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태조산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이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태조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전 9시 반에 방학역(1호선)을 출발, 중간중간에 후배들이 합류하여 12시가 지나서 천안
역에 도착했다. 그 장대한 거리를 후배들과 수다를 떨며 가니 체감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
다.
천안역에 이르러 태조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천안시내버스 24번(각원사↔동우아파트)을 타
고 20분 정도를 더 들어가 각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각원사(覺願寺) 입문 (203계단, 청동좌불상)

▲  각원사 밑에 자리한 연화지(蓮花池)

시내버스가 바퀴를 돌리는 각원사 종점 주변은 각원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각원사는 법등(法燈)를 켠지 겨우 4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천하
제일의 청동불상으로 1980년대부터 유명세를 타면서 신도와 관광객, 답사객들이 구름처럼 몰
려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절 밑에 자연히 식당이 들어서고 조촐하게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주말과 휴일이면 관광버스가 족히 100대나 줄을 이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그날은 평일
이라 찾는 이도 별로 없어 식당들도 절간처럼 한산하다. 그런 식당촌을 지나면 절 밑에 형성
된 연화지란 호수가 나온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워놓은 눈과 얼음으로 호수 또한 고요하기
그지 없는데, 그런 호수를 반바퀴 돌면 경내로 인도하는 203계단이 중생의 기를 죽인다.


▲  겨울이 씌워놓은 굴레를 뒤집어쓰며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는 연화지

▲  시작부터 중생의 기를 단죄하는 203계단 <무량공덕(無量功德) 계단>

연화지에서 각원사로 가는 길은 2가지가 있는데, 203계단을 오르면 바로 청동대불(청동대좌불
)로 이어지며 잘 닦여진 2차선 길을 따라가면 각원사 경내로 통한다. 어느 길로 가든 청동대
불과 경내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가면 되지만 기왕 왔다면 203계단으로 올라가 청동대불과 경
내를 둘러보고 2차선 길로 내려오는 것을 권한다. 마치 하늘에 닿은 듯, 장대하게 펼쳐진 203
계단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3계단은 '무량공덕 계단'이라 불리며, 1977년 11월에 조성되었다. 절에서 많이 애용하는 숫
자인 108보다 95가 더 많으니. 이는 108번뇌 소멸 기원 계단, 아미타불의 48가지 소망을 기원
하는 계단, 관세음보살의 32가지 화신(化身)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32응신(應身) 계단, 속세를
살아가는데 맺어지는 12인연 계단, 불(佛)/법(法)/승(僧) 3보(三寶)에 귀의하는 3도(三道) 계
단을 모두 합쳐 203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계단을 오름으로써 이들을 모두 누리는 셈이 된
다.


▲  203계단을 오르면 청동대불로 인도하는 돌길이 나온다.

'저걸 언제 다 오르나?' 계단의 미친 압박에 주눅부터 진하게 든다. 허나 계단은 누구나 오르
기 쉽게 규칙적으로 놓여져 있어 그리 힘든 건 없다. 속세살이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
르다보면 금세 계단 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희열에 잠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
다.
계단 정상에 이르면 돌이 깔린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지나면 광장처럼 넓은 길이 나오면서 청
동대불이 서서히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낸다.


▲  남북통일기원 대불봉안공덕비(南北統一祈願 大佛奉安功德碑)
청동대불이 완성되자 그 기념으로 불상 서북쪽에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공덕비를 세웠다.

▲  이보다 큰 좌불상은 없다 ~ 각원사 청동대불<靑銅大佛, 청동대좌불>

경내 북쪽에 위엄 돋게 자리한 청동대좌불(청동대불)은 각원사의 상징이자 든든한 밥줄로 천
안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각원사가 크게 유명세를 탄 것도 바로 이 청동대불 때문으로 1975년
4월 김영조(金永祚)를 비롯한 많은 중생들의 시주와 남북통일의 염원을 받아 조성하기 시작하
여 2년에 인고 끝에 1977년 5월 9일에 완성을 보았다.

불상 조각은 홍익대 교수 최기원(崔起源)씨가 담당했는데, 신라 불상의 정수로 추앙받는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모델로 삼았으며, 높이 15m, 몸무게 60톤, 귀 길이 175cm, 손톱
길이 30cm, 그가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의 원 둘레만 30m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좌불상
으로 손꼽힌다. 불상 안에는 부처의 사리와 불교 서적, 불상 조성에 돈을 낸 100만 명의 이름
이 들어 있으며, 불상 재질이 매우 우수하여 수명이 족히 1만 년은 갈 것이라고 한다.
비록 4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불상이지만 고색의 때가 조금은 피어나 겉 연령은 200년 이상은
들어보이며, 앞으로 70~80년 정도가 지나면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여 국가 중요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집을 좋아하는 편이
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제외하고는 현대 사찰에 대한 관심은 다소
야박한 편이다. 그럼에도 고색의 기운이 채 피지도 못한 각원사를 찾은 것은 바로 이 청동대
불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위엄

불상의 정체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그래서 서방정토가 있
다는 서쪽을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불상이 얼마나 큰 지 불상 주변을 돌
아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점처럼 보인다.


▲  밑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아찔한 위엄
내 키가 크다 한들 그에게는 고작 귀 크기에 불과하고 내가 아무리 손톱을
게을리 관리한다 한들, 그의 손톱 길이의 1/60도 안된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그의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

◀  청동대불의 늠름한 뒷모습

    ◀  청동대불을 지키는 설법전(說法殿)
청동대좌불 북쪽에 자리한 설법전은 1978년에
지어진 것으로 청동대불을 관리하며 대법회
등의 행사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건물 내부에
는 공양 물품을 파는 가게와 의자를 갖춘 쉼
터가 있다.


 

♠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천안12경의 하나,
각원사(覺願寺) 둘러보기

▲  청동대불에서 바라본 각원사의 설경

천안의 진산인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둥지를 튼 각원사는 1975년 4월에 경해법인(鏡海法印)이
창건했다. 법인은 1931년 9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1946년 10월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6.25가 터지자 해인사에 머물며 절을 지켰고, 1950년 10월 경주로 탁
발을 나갔다가 석굴암에 잠시 들려 본존불에게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큰 도량을 짓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후 세상이 조금 진정되자 불교와 문학 공부에 박차를 가해 마산 해인대학 문학과와 종교학
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사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거쳐 1967년 9월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69년에 왜열도로 넘어가 대동문화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 들어갔으며, 1972년 11월 낡은 다다미방을 구해 '해동선원'을 개원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오사까에서 사업을 하는 재일교포 부부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김영조<金
永祚, 법명은 각연(覺然)>와 정정자<鄭貞子, 법명 자연심(自然心)> 부부로 김영조씨가 당뇨병
으로 고생을 하자 법인을 찾아와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
법인의 지도 아래 100일 관음기도를 올리니 2~3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건
강을 거의 회복했다. 이에 김영조는 고마움의 뜻으로 동경(東京)에 절을 하나 마련하여 그에
게 주었고, 절 이름은 그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명월사(明月寺)라 하였다. 그런데 법인이 그
절을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총무원에 재산 등록을 해버리자 김영조는 크게 아쉬워하며
'귀국할 때 명월사를 팔고 국내에 절을 지으십시요' 충고를 했다. 이에 법인은 '명월사가 개
인 재산이 아닌 재일동포의 안식처로 남았으면 합니다'
답을 하니 김영조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기가 돈을 댈테니 고국에 큰 불상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바로 귀국하여 마땅
한 자리를 물색하다가 태조산 자락이 명당이라 그곳에 각원사를 세웠고, 곧바로 청동불상 조
성을 추진하여 1977년 5월 천하 최대의 좌불상인 청동대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청동대불로 각원사의 존재가 급격히 뜨자 예전 석굴암 본존불에게 고백했던 남북통일을 기원
하는 큰 도량의 꿈을 이루고자 현 주지승인 서대원과 함께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거대한 절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 불국사(佛國寺)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와 더불어 20세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큰 사찰이자 현대 불교의 성
지(聖地)로 격하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은 건평 200평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꼽히며, 2002년에는
각원사 불교대학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절을 크게 일군 법인은 각원사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에도 눈을 돌려 왜열도 야마구치현의 광명사(光明寺)와 미대륙 필라델피아에 관음사(觀音
寺)를 세웠으며, 각원사를 주지 서대원과 다른 승려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경 명월사에 들어
가 해외 포교에 주력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칠성전, 산신전, 천불전, 관음전, 경해원, 성종루, 개
산기념관, 영산전 등 10여 동의 굵직한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짧다보니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어나지 못했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산속에 제대로 묻혀 있어 산사(
山寺)의 고즈넉한 기운은 넉넉히 배여있으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천안12경의 제6경으로 손
꼽힌다. 또한 천안 시내와 가깝고 접근성도 양호하여 쉽게 안길 수 있는 점도 이곳의 큰 장점
이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도량이라 그럴까? 이곳에서 들리는 염불 소리가 통일을 애타게 부르짖은
이 땅의 소리 같다.

          ◀  각원사 칠성전(七星殿)
청동대불에서 경내로 내려가면 가장 먼저 칠성
전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1979년에 지어졌는데, 내부에는
칠성(七星)이 그려진 칠성탱(七星幀)과 나한상
(羅漢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흔한 칠성각(
七星閣) 대신 그보다 1단계 높은 칠성전을 칭
하고 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  색채가 고운 칠성탱과 그 앞에 줄지어 앉은 다양한 색채의 나한상들

▲  각원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칠성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대한 규모의 대웅보전이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각원사의
법당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건평(建坪) 360평에 달하는 팔작지붕 집으로 이 땅의 목조 건
물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 건물을 짓고자 10여 년 동안 목재 100여 만 재를 구입하여 1992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34개의 주춧돌을 깐 다음 4년 동안 갈고 닦아 1996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내부
불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미리 조성되어 대웅보전 완공을 기
다리고 있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네모난 기단(基壇)은 높이가 거의 3m이며, 기단부터 건물, 닫집, 불상까
지 모두 청동대불 만큼이나 몸집이 대단해 대불에서 놀란 마음을 다시금 놀래케 한다.


▲  대웅보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이 고운 미소를 선보이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다.
관세음보살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들은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 대성자모(大聖慈母) 관세음보살이라 불린다.

         ◀  각원사 천불전(千佛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천불전은 원래 산신의
공간인 산신전으로 1979년 9월에 지어졌다.
2000년 10월 새로운 산신전이 옆에 완성되자
천불전으로 간판을 바꾸고 천불을 봉안했다.


▲  천불전 내부
커다란 석가불을 중심으로 조그만 석가불 1,000상이 그를 둘러싸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수놓는다.

▲  각원사 산신전(山神殿)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자 함일까? 지붕 밑에 날카롭게 고드름이 달려있다.


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산신전은 2000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현재 천불전이 산신전이
었다. 산신전은 우리의 토속신인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보통 각(閣)을 칭하기 마련이나 이
곳은 앞서 칠성전처럼 특별히 전(殿)으로 격을 높였다. 그만큼 산신과 칠성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뜻일 거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붉은 옷을 입은 산신과 동자(童子),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등장한다.

▲  반야원(般若院) 서쪽에서 바라본
경내와 태조산


▲  한 지붕 두 가족, 영산전(靈山殿, 1층)과 개산기념관(開山記念館, 2층)

반야원 옆에는 영산전과 개산기념관이 한 지붕을 이루고 있다. 돌로 이루어진 1층은 영산전으
로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나한이 봉안되어 있는데, 16나한도 아닌, 500나한도 아닌, 무
려 1,250나한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2층은 절을 개산(開山, 창건)
한 법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그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원사에서 나름 중요한 곳이지만
시간을 핑계로 그냥 통과하였다.


▲  이 땅에서 가장 큰 범종의 보금자리, 성종루(聖鐘樓)

2층 누각으로 장엄하게 이루어진 성종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이 담긴 공간으로 일종의 범종각이다. 그 흔한 범종각을 칭하지 않고 성종루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이곳 범종의 이름이 성종(聖鐘)이기 때문으로 1984년 5월에 조성된 20톤
짜리 종이다.
성종루는 1990년 4월에 지어진 것으로 329평 규모이며 이 땅의 범종각 계열 중 제일 크다. 그
러니까 각원사는 노천 청동대불과 목조 1층 법당, 범종각 등 무려 3가지에서 규모 부분 1등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1-3 (각원사길 245 ☎ 041-561-3545)
* 각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연화지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2차선 길

각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1시간이 뚝딱 흘렀다. 나름 열심히 살피긴 했지만 현대 사
찰이다보니 청동대불 외에는 그리 크게 관심이 가질 않았고 개산기념관 등은 그냥 빼먹고 말
았다.
그렇게 각원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태조산에 안긴 또다른 사찰, 성불사로 서둘러 길을 향했
다.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해가 많이 짧아졌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


 

♠  태조산에 안긴 오래된 절집, 성불사(成佛寺)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


▲  성불사 일주문(一柱門)

태조산에는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원사와 성불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그들은 비록 같은
태조산에 안겨있지만 서로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각원사는 역사는 매우 짧지
만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청동대좌불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불국사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규모도 크다. 반면 성불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지만 규모도 작고 한참 후배인 각원사의 위엄에 눌려 거의 존재감이 없어 보일 정도
이다. 하여 속인(俗人)들은 각원사를 많이 찾아오지 성불사는 별로 모른다.

각원사와 성불사는 직선거리로 불과 600m에 불과해 금방이면 도달할 듯 싶지만 안서e편한세상
1차, 2차아파트로 크게 돌아가야 된다. (산길이 있긴 하지만 자세히는 모르겠음) 그 거리는 약
2.5km, 도보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조금 편하게 가고 싶다면 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 정거
장 거리인 부경파크빌,안서e편한세상 정류장에서 내려서 800m 정도 올라가면 되지만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속 편하게 걸어가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성불사까지 도보로 이동했는데, 30분 정도면 갈 줄 알았더만 거의 40분 이상이 걸린다.
뉘엿뉘엿 무심히 사라지는 햇님에 부랴부랴 서둘렀지만 일주문에 이르니 땅꺼미의 농도가 90%
이상으로 진해져 더욱 긴장감을 타게 만든다. 야경 사진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불사는 경내와 멀리감치 떨어진 곳까지 일주문을 내려보내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겨울 제국
의 의해 지붕이 하얗게 변한 일주문 양쪽에는 코끼리상과 사자상이 자리하여 혹시 모를 속세의
불온한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 경내가 나올 듯 싶었는데, 아직도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 거리는 얼마 안
되도 거의 느긋한 길로 이루어진 각원사(203계단 제외)와 달리 죄다 오르막길이고, 절이 가까
워질 수록 경사가 더욱 흥분을 한다. 게다가 눈까지 두툼히 깔려있으니 걸음도 은근히 더딜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오르막 한굽이를 오르니 야외 공연장의 돌로 다진 객석 같은 석축이 장대하
게 펼쳐지고 그 위로 성불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야외 공연장 객석 같은 석축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성불사

▲  성불사 느티나무 (천안시 보호수)
경내를 코앞에 둔 경사지에 나이 800년을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겨울 제국에게 모두 털려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그의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려 봄의 해방군을 애타게 염원하는 것 같다.

▲  눈 지붕을 이룬 성불사 칠성각 (오른쪽)

▲  태조산의 옥계수를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성불사 샘터

느티나무에서 1굽이를 더 오르면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공양간 등을 모두 갖춘 4~5층 건물
앞에 이른다. 이제 비로소 경내에 이른 것이다. 각박한 경사를 이용하여 건물을 짓다보니 다층
건물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옆을 오르면 법당인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  성불사 요사/선방 옆에서 바라본 천하 (천안시내)

각원사와 더불어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안긴 성불사는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또는
목종(穆宗) 시절에 혜선국사(惠禪國師)나 혜조대사(惠照大師, 조선 태조 때라는 설도 있음)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다시 중건했으며,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이 창건될 당시(또는 고려 후기) 하늘에서 백학(白鶴) 1쌍이 날아와 대웅전 뒷쪽 바위에 앉
아 부리로 열심히 불상을 새겼다. 그러기를 49일째, 불상이 완연하게 모습을 갖추며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나뭇꾼의 인기척에 놀라 불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래
서 이를 부처의 계시로 여기고 절을 세웠는데, 불상을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성불사(成不寺
)로 했다가 뒤에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불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칠성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
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내음을 느끼게 한다. 또
한 성불사 자체는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30m 고지 가파른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제법 좋으며, 여기서 남쪽 능선을 통해 태조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  성불사 산신각(왼쪽)과 대웅전(大雄殿, 오른쪽)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금동석가3존불
이 봉안되어 있다. 좌우 협시불인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은 어여쁜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정작 3존불의 주인인 석가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자리에 없다.
하여 도난을 당했나 싶었으나 석가불의 빈 자리 뒷쪽에 창이 있는 것이다. 대웅전 뒷쪽에는 지
방문화재인 마애석가3존불이 있는데, 그 마애불이 바로 비어있는 자리의 주인, 즉 3존불의 중
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별도의 불상을 두지 않고 불단을 두는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비슷한
모습을 취했다.


▲  가운데 자리가 빈 대웅전 석가3존불 (왼쪽 지장보살, 오른쪽 관음보살)
비어있는 본존불 자리는 창 너머로 보이는 마애3존불의 것이다.

▲  대웅전 우측 벽에 걸린 빛바랜 영산회상도와 현왕탱(現王幀)
석가3존불 뒷쪽에 창을 내는 바람에 후불탱인 영산회상도가 우측 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옆에는 붉은 색채가 중심을 이룬 현왕탱이 자리해 있는데, 이들
그림은 빛이 좀 바랜 것으로 보아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보인다.

▲  성불사 마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대웅전 뒷쪽에는 고된 세월을 견딘 커다란 바위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의 꺼무잡잡한 피부
에는 마애석가3존불과 16나한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장대한 세월을 겪는 동안 무거운 상
처를 입으면서 간신히 형체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 어둠까지 깔리니 숨은 그
림을 찾듯 더욱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된다. (겨우 몇몇 상만 시야에 들어왔음)

바위에 새겨진 불입상(佛立像)은 돋음새김으로 새겼으나 바위의 절리현상으로 인해 얼굴과 신
체의 전면이 크게 절단이 났으며, 머리 꼭대기인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과 손의 형태, 옷무
늬 등은 고려 때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밑도리가 넓은 옷 밑으로 발가락이 선명한 오른쪽
발이 나와 있으나 왼발은 사라지고 없다.
바위 우측면 하단 중심에는 연화대좌가 있고, 좌우에 공양상(供養像) 또는 금강역사(金剛力士)
로 보이는 2구가 있다. 연화대좌 위에는 작은 연화대좌가 놓여져 있고, 거기에 석가불이 앉아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했으
며, 얼굴은 눈과 입이 크게 표현된 둥글넓적한 모습이다.

석가불 좌우의 협시보살과 16나한상은 손상은 심하나 서로 마주보는 모습과 수도하는 모습 등
각자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고, 나한상 주위 바위 면을 둥글게 파서 마치 감실(龕室)이나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성불사 마애불은 바위 한 면에 석가3존불과 16나한을 덩어리로 새긴 것으로 이 땅에서 거의 유
일한 케이스이며, 도식화(圖式化)가 덜 된 것으로 보아 14~15세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성불사 석조보살좌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86호

야외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 옆에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건물 이름을 까먹음..)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그만 석조보살좌상이 담겨져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성불사의 것이 아니었다. 1990년에 지금은 세종시로 간판을 바꾼 연기군 조치
원(鳥致院) 부근 대성천에서 준설공사를 벌이다가 발견된 것으로 신도들의 노력으로 이곳에 안
착을 해 성불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예전에는 종무소 안에 두었으나 근래에 그를 위
한 집을 지어 이렇게 집까지 가지게 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67cm, 어깨 넓이 34.5cm, 무릎 넓이 54.5cm로 등에 달린 광배(光背)의 윗부분이
깨져나가 붙여 놓았다. 오른쪽 무릎도 조금 깨진 상태이며, 무릎에서 오른쪽으로 가늘고 긴 균
열이 있어 조금씩 메워 놓은 상태로 거신광배(擧身光背)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옷주름은 굵으면서 매우 도식적이며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왼손은 배 밑에 두었다. 두
팔은 몸에 비해 길지만 가늘고 두 손은 작으며, 연꽃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관세음보
살로 여겨지지만 미륵불의 도상(圖像)으로 유행한 점도 있어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석불로 보이겠지만 보기 드문 형식의 석불로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성불사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8-8 (성불사길 144 ☎ 041-565-4567)


▲  강추위 앞에서도 향긋한 미소를 잃지 않은
풍만한 모습의 석조관세음보살좌상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와 일몰의 끝 모습
(성불사로 인도하는 고갯길과 천안시내)

햇님의 퇴근 본능에 쫓겨 서둘러 성불사에 들어와 잠깐을 방황하는 사이 시간은 18시가 되었다.
서서히 줄어드는 햇님의 흔적에 의지해 열심히 사진에 담았지만 역시나 신통치가 못했고, 머나
먼 수평선 너머로 햇님이 완전히 꽁무니를 감추면서 달님은 햇님의 나머지 흔적마저 지우며 천
하를 검게 태운다.
경내에 있는 문화유산은 모두 살펴보아서 다행이지만 눈이 적지 않게 깔린 상태라 칠성각 등은
접근도 하지 못했고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더 머물기도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춥고 배도 고프
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중요한 볼거리는 다 보았으나 이쯤에서 성불사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절을 내려갔다.

시간도 어느덧 저녁 시간이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밥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저녁을 어
디서 무엇을 먹을까를 두고 즐거운 고민을 벌이다가 각원사 밑에 줄지어 선 식당촌에서 해결하
고자 그곳으로 넘어갔다. 어느 집에서 먹을까 궁리하던 중, 그냥 장군도 아닌 무려 대장군(大
將軍)식당이란 위엄 돋는 이름의 식당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다. 태조산이란 이름
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양병했다고 해서 비롯된 것이다보니 그 밑에서 군권을 총괄하는 자리인
대장군을 식당 이름으로 삼은 모양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임에도 내부는 한산하다. 우리가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는 격하게 반
기며 방 안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처음에는 그냥 비빔밥 같은 것을 먹을까 했으나 날씨도 춥고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해 버섯전골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잠시 뒤 밑반찬이 정갈하게 깔리고 버섯전골이 등장한다. 전골이 뽀글뽀글 익자 국자를 이용해
전골을 퍼서 먹는데, 버섯전골이란 이름이 무색치 않게 버섯이 매우 많다. 거기에 소고기와 당
면, 두부, 갖은 채소가 버무려져 하나의 버섯전골을 이루는데 국물도 제법 얼큰하고 맛이 좋다.
전골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죄다 밥도둑의 자격이 충분하며,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
라 시장기까지 강하게 돋아있어 전골이고 반찬이고, 밥까지 거의 비워버렸다. 거기에 답사 뒷
풀이용으로 막걸리까지 겯드리니 황제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그렇게 저녁을 배불리 먹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소화도 시킬 겸 상명대 천안캠퍼스 남쪽까
지 걸어갔다가 천안시내버스 24번을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천안 태조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대장군식당에서 먹은 버섯전골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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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평지 읍성이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현장, 서산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 서산 해미읍성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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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 호야나무(회화나무)

▲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에 우리나라 읍성의 성지로 추앙받는 서산 해미읍성을
찾았다.
해미읍성은 이미 여러 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나 눈을 감고 답사를 했는지 미답(未踏)
의 공간이 적지 않다. 하여 그 공간을 싹 지우고자 날씨가 조금 풀린 틈을 이용해 다시
인연을 지었다.


▲  해미읍성 서쪽 망루


 

♠  조선 초기에 축성된 읍성, 천주교 박해의 아픔이 서린
해미읍성(海美邑城) - 적 116호

▲  해미읍성 서남쪽 망루(望樓)

서산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곳에 이름도 이쁜 '해미'란 고을이 있다. <'해뫼'라
고도 불렸음~> 해미(현재 해미면)는 서산시(瑞山市)의 일원으로 서산 제일의 명소인 해미읍성
을 품고 있다.
천하가 해미읍성을 격하게 주목하는 이유는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樂安邑城)과 더불어 이 땅
에서 매우 희귀한 평지 읍성(邑城)이며 또한 제대로 남은 몇 안되는 읍성이기 때문이다.

서산의 필수 답사지로 꼽히는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太宗) 때 축성되었다. 1416년 2월, 태종
은 3째 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과 7,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산 도비산(島飛山)
에서 사냥을 했는데 사냥을 마치고 서산과 태안 일대를 둘러본 다음 해미에 잠시 머물렀다.
이때 왜구(倭寇)의 침범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충청병
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 크게 줄여서 병영(兵營)이라고 함>을 서해바다와 가까운 이곳
으로 옮기기로 마음 먹고 1417년 해미읍성 축성을 지시했다. 그래서 충청도를 비롯하여 멀리
제주도까지 정남(丁男, 16~60세의 남자)을 징발했고 콩볶듯이 공사를 벌여 1421년 완성을 보
았다.

성이 완성되자 병영을 해미로 옮겼으며 종2품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주둔하여 충청도의
군사력을 통솔했다. 해미는 지금은 비록 서산에 속한 고을에 불과하나 1421년부터 1651년까지
230년 동안 역모 이상의 죄인을 처벌하고 사회질서의 기능까지 담당했던 충청도 제일의 군사
도시였다.
1491년 성을 보수했으며, 성 주변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많이 심어 탱자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1579년에는 남해바다의 영원한 해신(海神)인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훈련원(訓練院)의
군관(軍官)으로 파견되어 10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1651년 병영이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으로 이전되면서 해미현 관아가 그 자리에 들어왔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겸영장(兼營將)을 파견해 충청도 서쪽 13고을을 담당하는 호서좌영(湖西
左營, 충청좌영)으로 삼아 여전히 군사 행정을 담당했다. 정조 시절에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
若鏞)이 잠시 유배살이를 하기도 했다.

▲  해미읍성 동쪽 성곽

▲  청허정

해미읍성이 본격적으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정조 이후이다. 전국적으로 천주교도가 폭
발적으로 늘어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는데, 이때 해
미는 관할구역인 13개 고을에서 잡아들인 천주교도를 처리했다. 여기서 처형된 교도는 확인된
수만 1,000명을 훌쩍 넘었으며, 그중에는 이 땅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조부 김진후
(金震厚)도 있었다.

관리와 군인들은 그들에게 천주교 포기를 권했으나 교인 대부분은 거절했다. 그래서 옥사 앞
회화나무(호야나무)에 철사줄로 대롱대롱 매달거나 곤장과 온갖 형벌로 고문을 가했으며, 끝
내는 서문 밖 돌다리로 끌고가 자리개질(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것)로 쳐죽이
거나 화살을 쏴서 죽였다.
허나 잡혀 들어오는 교도가 계속 늘면서 감옥은 미어터질 지경에 이르렀으며, 처리 능력은 그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다. 아무리 죽이고 고문을 해도 별무신통. 하여 여럿을 눕혀 놓고 돌기
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처리하거나 물에 던져 죽였고, 그것도 힘에 부치자 해미천(海美川)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 많은 사람을 한줄로 대롱대롱 엮어 생매장까지 자행하게 된다.

▲  해미읍성 북쪽 성곽

▲  해미읍성 호야나무

1914년 왜정(倭政)은 해미현을 서산군의 일부로 통합시키면서 충청좌도를 담당했던 해미읍성
의 위엄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왜정에 의해 관아는 모두 파괴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해미면사무소와 학교, 민가가 들어섰다. 다행히 읍성은 목숨을 보전했으나 이미 알맹이를 잃
어버린 상태라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읍성이었다.

1973년 발굴 및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성내를 가득 메운 관공서와 학교, 민가를 성밖으로 내
보냈으며, 그 자리에는 사적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이라고 하지만 성 안에는 호야나무와 언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러다가 1995년 이후, 발굴조사를 벌이
면서 옛 관아의 흔적들이 쏙쏙 빛을 보게 되었고 차근차근 복원공사를 벌여나가 동헌과 내아,
옥사(獄舍), 객사, 민속가옥이 지어졌다. 허나 여전히 풀만 돋아있는 공백이 넓어 다소 허전
하게 다가온다.

읍성의 둘레는 1.8km, 내부 면적은 약 20만㎡로 남문과 동문, 서문 등 성문 3개와 암문(暗門)
1개를 지니고 있다. 읍성 구조는 중앙에 동헌이 있고, 주변에 내아와 객사, 옥사 등이 포진해
있으며, 동헌 동쪽에는 언덕이 있다. 언덕에는 청허정과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으며, 동쪽 성
곽 밖에는 해자가 복원되어 있다. 성내 서/남쪽은 평지이고 동쪽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읍성이라고는 하지만 백성들은 성 밖에서 생활했고, 성 안은 동헌과 병영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행정타운이었다.

천하에 온갖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나던 2004년 이후 서산시청은 이 땅 유일의 병영테마 체험
축제인 '해미읍성 병영체험축제'을 내놓았다. 그 축제는 이후 '서산 해미읍성축제'로 이름을
갈았는데 태종대왕 강무행렬, 병영훈련체험, 병영음식체험, 전통공예체험, 전통공연과 연극
등이 열리며, 2008년에는 충남 지정 관광 유망축제로, 2017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우리
나라 유망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때는 충청도의 군사력을 통솔하던 품격 높은 군사도시이자 충청좌도를 담당하던 고을로, 천
주교 박해의 현장으로 두루두루 살아온 살아온 해미읍성, 비록 읍성을 제외하고 모두 근래 복
원되었지만 낙안읍성, 고창읍성(高敞邑城)과 더불어 이 땅에 대표적인 읍성 관광지로 다시금
명성을 누리고 있다.

▲  민속가옥 초가

▲  남문에서 동헌까지 곧게 이어진 길

※ 해미읍성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해미행 직행버스가 1일 9회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 강남센트럴시티에서 서산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산시외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있으며, 직행버스도 자주 있다.
* 예산읍(예산터미널, 예산역)에서 해미행 군내버스가 1일 5회 운행
* 해미정류장(터미널)에서 도보 5분
* 승용차
① 서해안고속도로 → 해미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해미읍성

★ 해미읍성 관람정보 (2017년 12월 기준)
* 주차장은 읍성 남쪽에 있으며,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
* 관람시간 : 하절기(3~10월) 5시 ~ 21시 / 동절기(11~2월) 6시 ~ 19시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40-1 (남문2로 143 ☎ 041-660-2540)
* 매년 10월에 서산 해미읍성축제가 열린다. (서산 해미읍성축제 추진위원회 ☎ 041-669-5050
  , 해미읍성 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


▲  온갖 연이 펄럭이는 해미읍성 서남쪽 성곽


 

♠  해미읍성 둘러보기 (1) - 진남문, 호야나무, 민속가옥

▲  해미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인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의 속살로 들어서려면 진남문(남문)을 지나야 된다. 읍성 성문이 3개나 있지만 속세
에 속시원히 개방된 문은 오직 진남문 뿐이다.
진남문은 읍성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문루(門樓)를 지녔는데 비록 읍성
의 기능은 옛날에 상실되었지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왕년의 위엄을 잃지 않으며 읍성을 찾은
나그네를 굽어본다.

천주교 박해가 극성이던 19세기, 충청좌도 지역에서 잡힌 천주교도들은 이 문을 거쳐 해미관
아로 압송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 문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의 입 같은 문이었지만
천주교도 상당수는 천당으로 가는 관문으로 삼으며 성문을 들어섰다고 한다.


▲  해미읍성의 나이와 조선의 우울한 꼬라지를 알려주는
진남문 안쪽의 붉은 글씨 9자


진남문을 들어서면 아직까지는 공백이 많은 읍성 내부가 거침없이 펼쳐진다. 허나 읍성의 중
심인 동헌까지는 조금의 비뚤어짐도 없이 일직선으로 길이 뻗어 있어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
는데 문을 들어설 때 무작정 정면 돌진하지 말고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목운
동도 할 겸 고개를 180도 돌려 문루로 살짝 시선을 올리면 붉은색으로 쓰인 한자 9자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글씨가 크고 또렷해 장님이 아닌 이상은 보는 데 별 지장이 없으며, 한자도
쉬운 수준이다.

그렇다면 저 붉은 글씨는 무엇일까? 그들은 '황명홍치4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로 여기
서 황명은 조선 정부와 지배층이 꼴사납게 지극 정성으로 받들던 명나라를 높인 말이다. 홍치
는 명나라 군주인 효종(孝宗)의 연호로 홍치 4년은 1491년이며, 신해조는 신해년(辛亥年)에
만들었다는 뜻으로 1491년(성종 22년)에 읍성을 중수했음을 진하게 보여준다.
500년이 넘은 글씨이건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건재함을 과시하나 천하 제일의 호구 국가
로 비루한 목숨을 500년 씩이나 이어온, 심지어 왜열도에게도 역전 당한 조선의 한심함이 돋
보이는 글씨라 하겠다.


▲  진남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과 봉황무늬
색채가 고운 오색영롱한 구름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가는 가운데
봉황이 날개짓을 하고 있다.

▲  진남문을 지나면 동헌까지 큰길이 곧게 펼쳐져 있다.

▲  해미읍성의 새로운 조형물, 프란치스코 해미읍성 방문 기념 조형물

해미읍성은 거의 5년 만에 와본다. 10년이면 정말 강산도 변한다고 이곳도 나처럼 크게 변하
여 낯선 존재들이 여럿 생겨나면서 예전 해미읍성에 익숙해진 나의 눈을 귀찮게 학습을 시킨
다. 그 낯선 것들 중에는 귀엽게 그려진 프란치스코 방문 기념 조형물이 있었다.
이 조형물은 2014년 8월 17일 카톨릭교의 대장이자 로마교황청의 주인인 프란치스코가 이곳을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연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것이다. 흰머리의 프란치
스코 할배가 오른손으로 아이를 안고 왼손으로 다른 아이를 잡고 있는 모습이 참 정겹게 다가
오는데, 그 옆에는 선녀를 닮은 어린 천사가 손짓을 한다. 그들 옆에는 녹색 피부를 지닌 'A'
와 'Ω' 마크가 있는데 이들은 '시작이요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함'을 의미하는 마
크라고 한다.


▲  남문 안쪽에 조성된 여러 초가들 (제일 왼쪽 집이 전통주막)

남문 바로 안쪽은 예전에 공터였다. 허나 그새 여러 초가들이 뿌리를 내려 조촐하게 초가촌을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전통주막과 전통체험장으로 쓰인다.
전통주막은 소머리국밥과 부침개, 두부, 도토리묵, 막걸리, 동동주 등의 식사거리를 판매하며
간식거리로 호떡도 팔고 있다. 가격은 시중과 거의 비슷한 편, 음식은 따뜻한 방에서 먹어도
되고 바깥 평상에 앉아서 먹어도 된다.


▲  동헌으로 가는 길목에 재현된 옛 무기들
한때 천하를 풍미했던 천자총통(天字銃筒)을 비롯한 온갖 화포와 화차(火車),
검차(檢車), 운제 사다리 등이 재현되어 있다. (모두 모조품)

▲  수십 개의 화살을 동시에 날리던 화차
(왼쪽), 로켓포로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크게 쓰인 천자총통(天字銃筒)

▲  기병을 때려잡는데 효과적인 검차(檢車)
고려 때 많이 쓰인 무기로 귀신 문양이
새겨져 있다.


▲  호야나무라 불리는 해미읍성 회화나무 - 충남 지방기념물 172호

남문과 동헌 사이에는 해미읍성의 상징이자 천주교 박해 기념물인 회화나무가 초췌한 몰골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겨울 제국에게 가진 것을 몽땅 털린 그는 앙상한 가지를 높이 쳐들며 애
타게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나무의 사연을 안다면 그 모습이 정말 오싹하게 다
가올 것이다.

호야나무라 불리기도 하는 그의 나이는 약 300년 이상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해미현감이 기념
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난 그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
는 정자나무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이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착한 인상이었던 그는 19세기에 들어서 공포의 나무로 둔갑하여 수많
은 천주교도를 죽음으로 내모는 악역을 강제로 맡게 된다. 이곳으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을
호야나무 동쪽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으며, 나무에 매달아 화살을 쏴 죽이
거나 목을 매어 죽이는 등, 그들의 비명소리가 수십 년 동안 그치질 않았다. 그 시절 철사줄
이 박힌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어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아련하게 전해준다. 한낮이라 그리
실감은 나지 않지만 한밤중이었다면 나무에서 죽어간 원귀(寃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듯, 소
름이 끼쳐 염통이 쫄깃해질지도 모른다.

1940년대에 동쪽 가지가 부러지고, 1969년 가운데 줄기가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받았으
나 재차 부패하면서 2004년 4월 외과수술과 토양개량을 통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살아있
는 천주교 박해 현장으로 천주교에서는 그를 순교 기념물로 삼아 애지중지 하고 있으며, 1950
년대 지어졌다가 철거된 해미공소 강당터에 세운 순교기념비와 근래 만든 순교 조형물을 달아
놓았다. 그러고보면 나무의 팔자가 참 변덕스럽기도 하다.

▲  호야나무 옆에 있는 순교기념비

▲  순교기념비

천주교도들은 어째서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순교라 불리는 죽음을 택했을까? 그들
의 목숨이 한참 지던 19세기는 안동김씨 세력이 권력을 휘어잡고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던 시
절이다. 권력층과 지방관리들은 서로 백성들을 들들 볶았으며, 그들의 고혈을 짜내느라 정신
이 없었다
그에 반해 대다수의 백성들은 계속되는 흉년과 엄청난 조세, 공납(貢納), 역(役)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버겨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민심이 흉흉하거나 나라가 그야말로 개판일 때는 종교나 신앙이 크게 유행하기 마련으로 17세기 중반 청나라에서 건너온 천주교가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
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새로운 종교와 학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천주교가 관심을 받았으나 평등을 강조한 천
주교 교리에 빠져든 양반과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유학에 위배되는 행동이 나타났다. 이
에 위기를 느낀 조선 정부는 그들을 국사범(國事犯)으로 간주하며 천주교 때려잡기에 나서게
된다.

해미읍성을 비롯한 천주교도 처리 장소로 끌려간 천주교도들은 이미 권력층에게 뜯길데로 뜯
기고 시달릴데로 시달린 사람들이라 고통스런 삶을 천주교에 의지하고 있었다. 관리들은 그들
을 고문하면서 은근슬쩍 천주교 포기를 권했으나 대부분 배교(背敎)를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
했다. 그들로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 고통스런 세상을 떠나 천주교의 내세(來世)라는 천
당에 가서 이승에서 못다한 행복을 누리고자 소망했던 것이다.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옥사(獄舍, 감옥)

이곳은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으로 남녀 구별하여 2동으로 재현되어 있다. 충청도 서부 지역(
내포) 곳곳에서 잡아들인 천주교 신자들로 넘쳐났던 현장으로 왜정 때 철거되어 사라진 것을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 약사(略史)'의 기록을 토대로 2004년 이후에 복원하였다.
1950년대에 해미 공소(公所) 신자들이 돈을 모아 감옥터 일대 1,800여 평을 구입하여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 정부에서 해미읍성 관리를 위해 그 터를 사들여 공소 강당을 철거했으며, 대
신 순교기념비를 지어주어 이곳이 공소 자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  서쪽을 바라보는 여자 옥사

 ▲  옥사 안에 재현된 죄수 디오라마

     ◀  옥사 죄수들이 볼일을 보던 뒷간
감방 안에 볼일을 보는 공간이 있는 줄 알았더
만 알고보니 밖에 별도의 뒷간을 두었다. 죄수
들은 옥사를 관리하는 군사에게 부탁하여 저기
서 볼일을 보았던 것이다.

    ◀  옥사와 죄인을 관리하는 포졸(捕卒)
천주교 박해 시절 저들은 제대로 쉬는 날도 없
었을 것이다. 급여는 정말 쥐꼬리보다 더 못했
는데 처리해야될 업무는 나날이 늘고 있으니
말이다.


▲  옥사 남쪽의 복원된 우물
겉모습은 그럴싸하지만 현실은 껍데기만 남은 죽은 우물이다.

▲  읍성 남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민속가옥(초가) 3채

▲  민속가옥 ① 서산 지역 부농(富農)의 집
방 1칸, 부엌 1칸을 기본으로 필요에 따라 칸을 덧붙인 형태로 대청은 없으며
농기구와 농산물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와 부속채를 거느리고 있다.

▲  김이 모락모락 풍길 것 같은 가마솥을
2개나 지닌 부농의 집 부뚜막

▲  부농의 집 뒷쪽에 자리한 토끼와 닭의
보금자리 (토끼와 닭이 살고 있음)

▲  닭장 안을 서성이는 닭
벼슬(관직)이 닭벼슬보다 못하다는
어느 사극의 명언이 생각난다.

▲  뒷간에서 볼일 보는 아이
한참 볼일에 열중하다가 사람들이 쳐다보니
앗 뜨거워라 놀라는 모습이 귀엽다.


▲  민속가옥 ② 텃밭도 갖춘 상인의 집
조선 후기 민가의 보편적인 형태로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초가 3간이다.
장사가 주업이지만 약간의 텃밭과 농기구도 갖추고 있다.

▲  상인 집 텃밭

▲  전통 윷놀이 체험장
조그만 윷과 엄청 큰 윷이 준비되어 있다.


▲  민속가옥 ③ 말단관리인 서리(書吏)의 집
방 2칸, 부엌 1칸으로 이루어진 서산 지역 초가이다.

▲  독서삼매에 빠진 서리 아저씨

▲  집 뒤쪽 장독대


▲  초가 사이에 닦여진 돌담길


 

♠  해미읍성 둘러보기 (2) - 동헌, 청허정 주변

▲  굳게 닫힌 읍성 동문

▲  해미 관아 (정면에 2층 문루가 동헌 내삼문)

진남문에서 정면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가면 그 길의 끝에 담장을 두른 해미읍성 관아가 있
다.
이들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것들로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 쓰인 2층 문루 내삼문
(內三門)을 지나면 관아 중심인데 그 앞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이 나
무는 원래 성 안에 있다가 성 밖으로 반출된 것으로 1977년 3월 이곳을 방문한 최규하(崔圭夏
) 국무총리(國務總理)가 그 나무를 매입하여 이곳에 심게 했으며, 나무 앞에는 그때의 사연이
적힌 표석이 멀뚱히 세워져 있다.

▲  해미 관아 내삼문

▲  동헌 부속건물과 닫혀진 우물


▲  해미읍성 동헌(東軒)

동헌은 지금의 시청, 군청 등의 행정기관과 경찰서, 군부대 기능까지 포함된 관청이다. 해미현
감은 이곳에서 행정, 치안, 군사, 사법 등의 일을 처리하였다.
동헌 서쪽에는 해미현감의 생활공간인 내아(內衙)가 있는데, 내아는 다른 말로 서헌(西軒)이라
고도 한다.


▲  해미동헌에 모여 회의중인 충청좌도 고을 수령들
해미는 충청좌도의 군사 중심지로 좌도에 속한 13고을의 수령(首領)들이
모여 군사, 행정 관련 회의를 하였다.

▲  적막이 감도는 객사(客舍)

동헌 정문 우측에 자리한 객사는 조정이나 출장나온 관원의 숙소이다. 건물 가운데 정청(政廳
)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봉안하여 1달에 2번(초하루, 보름) 제왕에 대한 예를 올
렸는데 그 의식을 어려운 말로 향궐망배(向闕望拜)라고 한다. 이때 현감은 금관조복(金冠朝服
)을 갖추고 의식에 임했다.
현재 해미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통해 1999년 7월에 복원된 것이다.


▲  청허정 언덕에서 바라본 읍성 관아 (동헌, 내아, 객사)

▲  읍성 동부에 봉긋 솟은 청허정 언덕
동헌 뒤쪽이자 읍성 동부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계단을 통해 언덕을 오르면
언덕 정상부에 단아한 모습을 지닌 청허정이 마중을 나온다.

▲  해미읍성 언덕 정상에 자리를 편 청허정(淸虛亭)

해미읍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언덕 꼭대기에 청허정이 자리해 있다. 청허(淸虛)란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1491에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조숙기(曹淑沂)가
세웠다.

해미현감과 병마절도사의 휴식 및 연회 장소, 문인들의 팔자좋은 시회(詩會) 장소로 널리 쓰
였으며, 이곳에 올라서면 읍성 내부가 훤히 바라보여 수시로 여기에 올라 읍성을 점검했을 것
이다.
청허정과 관련된 시로는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청허정기'와 조위(曺偉, 1454~1503)
가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손(李蓀. 1439~1520)에게 올린 '청허정'이란 시가 있으며, 이경전(李
慶全, 1567~1644)의 시와 '청허정연회도'란 그림이 전한다.
허나 1872년 해미 지도에는 청허정이 고지(古地)로 나와있어 그 이전에 이미 녹아 없어진 것
으로 보이며, 왜정 때는 이곳에 외람되게 신사(神社)가 들어앉아 미관을 적지 않게 말아먹기
도 했다.
오랫동안 터만 아련히 남아오던 것을 2011년 복원했으며, 정자 주변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
고 있다.


▲  해미읍성 장승동산

청허정 주변에는 붉은 피부의 장승과 나무색 피부의 장승 20여 기가 옹기종기 모여 장승동산
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예전에는 없던 존재들이라 그저 낯설기만 한데, 그들이 지어진 이유
는 이렇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가 천하를 징하게 어지럽혔을 때, 청허정 언덕의 100~200년 묵은 소
나무들이 적지 않게 쓰러졌다. 이들 중 가망이 없는 나무를 수습해서 만든 것이 바로 장승이
다. 그냥 장승만 지어올리면 재미가 없으니 이 땅의 역대 대통령 10명을 모델로 하여 붉은 피
부의 장승 10기를 앞줄에 세웠는데 그들 얼굴의 특정적인 부분을 강조해서 얼굴을 새기고 그
들의 국정지표를 몸통에 새겼다. 그리고 그 뒷쪽에 토속/해학적으로 지어진 장승을 병풍처럼
포진시켰다.


▲  왼쪽은 이승만 장승, 가운데는 윤보선 장승, 오른쪽은 박정희 장승

▲  솔내음이 가득한 청허정 뒷쪽 소나무숲

예전에 왔을 때는 소나무숲이 상당히 짙었는데, 머리의 탈모 현장 마냥 빈 틈이 많아 보인다.
이는 태풍 곤파스가 요란하게 다녀간 탓이다. 그나마 숲을 복원한 것이 이 정도이다. 부정비
리에 얼룩진 상류/권력층, 나라를 좀먹으며 높은 자리에 들어앉은 친일파 후손들, 나에게 전
혀 도움이 안되는 밥버러지들이나 좀 날려버리지 왜 엉뚱하게 애궂은 나무와 서민들만 건드
린단 말인가? 그러고보면 하늘님(환인) 등의 신이나 정의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의문스
럽다.


▲  고개를 푹 숙인 소나무
하늘이 무서웠던 것일까?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옆으로 자라나 짧게 그만의 그늘을 드리운다.

▲  해미읍성 동쪽 성곽
해미읍성은 안쪽은 흙으로, 바깥은 돌로 쌓은 내탁(內托) 공법으로 축성되었다.
그래서 안과 밖이 모두 돌로 이루어진 낙안읍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해미읍성 동북쪽 성곽과 해자(垓子)
읍성 동쪽에는 방어력을 높이고자 해자를 팠다. (해자는 근래에 복원됨)

▲  읍성 동북쪽에 소리 없이 자리한 암문
(暗門) - 암문은 비상용 문으로 보통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둔다.

▲  굳게 입을 봉한 암문


▲  운치가 깃든 소나무숲 산책로 (성 안쪽)

▲  읍성과 성 밖 해자

읍성을 지키던 여장은 오래전에 없어진 상태라 성곽길을 거닐 때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성
의 높이가 3~4m라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여장이 없는 성곽길은 시멘트가 발라져 있어
다소 어색함을 주며, 성곽과 바깥에 탐방로가 나있어 남문을 기준으로 삼아 안으로 1바퀴, 밖
으로 1바퀴 돌면 적당하다.


▲  읍성에서 바라본 해미 동쪽 (해미향교 방면)
오늘도 해미 고을은 평화롭다.

▲  읍성 북쪽 성곽 - 성곽길을 따라 옛 깃발이 펄럭인다.

▲  해미읍성 서문인 지성루(枝城樓)

서문(지성루)의 성문 홍예와 문루는 근래 복원된 것이고, 홍예문 좌우 성돌은 옛날 것 그대로
이다. 하여 고색이 깃든 성돌과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서문 밖은 천주교 신자를 자리개질로 처리하던 현장으로 순교 현양비와 자리개질을 치던 넓적
한 돌다리(자리개돌)가 놓여져 당시의 우울했던 상황을 아련히 귀뜀한다. 자리개돌은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다가 1986년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1989년 순교현양비를 세웠
으며,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해미순교성지로 옮겨졌고 서문 밖에는 모조품을 두었다.


▲  서문 밖 순교성지에 세워진 순교현양비와 자리개돌(왼쪽에 너른 돌판)

▲  서문 안쪽 활터와 소나무숲

▲  서문 성 바깥 부분

이렇게 하여 2시간에 걸친 해미읍성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예전에 남겨놓은 미답 공간도 말
끔히 처리했다. 다만 성 바깥 탐방로는 귀찮아서 서문 밖 순교지를 포함한 일부만 거니는 선에
서 쿨하게 마무리 짓고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어 인근 미답지인 해미순교성지로 이동했다.
해미읍성에 왔다면 후식거리로 이곳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19세기 읍성에서 자행된 천주교
학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천주교 박해의 현장
~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  해미천에서 바라본 해미순교성지(여숫골)

해미읍내 서쪽, 해미천 건너에 우리나라의 주요 천주교 성지이자 충청도 굴지의 천주교 성지
인 해미순교성지가 자리해 있다. 이곳이 천주교 성지의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천주교 박해 시
절, 신자들을 생매장해서 죽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179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해미에서 처단된 천주교 신자는 기록으로 남은 것만 약 1천여 명
이다. 그중 천주교측 기록 67명, 해미관아측 기록 65명 등 겨우 132명의 이름만 전해오고 있
으며 기록을 자세하게 남기지 않아 처단된 사람은 족히 수천 명은 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는 해미현감과 관리들이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처단했기 때문이다.

해미 관리와 병사들은 관아와 호야나무, 서문 밖에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리했는데 서문 밖은 그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으며, 1866년부터 1868년
까지 생매장 방법을 써서 지금의 성지 자리에 큰 구덩이를 파서 죽였다. 이때 십여 명씩 데리
고 나가 적당한 곳에 구덩이를 파게 하여 모두 밀어넣은 다음 흙과 자갈로 묻었다.
또한 여름에는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신자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꺼꾸로 던져 죽이기
도 했는데, 사람들은 그 현장을 둠벙이라 불렀고, 그것이 변해 '진둠벙이'가 되었다.


이렇게나 잔인했던 생매장 학살 현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로운 경작지가 되었는데, 현장이
현장인지라 농부들이 밭을 갈 때마다 해골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
견된 해골도 적지 않아서 생매장의 증거를 보여준다. 허나 사연을 모르던 농부들은 그 해골을
죄다 버렸고, 그나마 홍수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1935년 서산 본당의 범베드로 신부가 해골 발견 소식을 접하고 이곳을 싹 뒤집어 수
많은 유해와 유품을 발견,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안치했다가 1995년 9
월 20일, 해미순교성지에 봉안했다.
 
1975년 유해가 나온 자리에 순교기념탑을 세웠으며, 그 부근에 1985년 으리으리한 본당을 지
어 '해미순교선열현양회'를 발족, 2000년 8월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03년 6월 기념 성전
을 세워 순교자의 유해를 봉안했다.
2014년 8월에는 로마교황청의 주인인 프란치스코가 이곳을 방문, 여기서 처단된 순교자 3명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김대건의 친할아버지)
을 시복(諡福)했으
며, 다음 날 시복기념비를 제막했다.

이곳 일대를 '여숫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중얼거리던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지역 사람들은 '여수머리'로 알아들었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차 '여숫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주교 측은 해미읍성 감옥터와 호야나무(회화나무), 서문밖, 한티고개를 천주교 성지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매년 10만여 명 정도가 찾고 있다.

▲  해미순교성지 표석의 위엄

▲  기와를 얹힌 해미순교성지 정문

▲  우람하게 지어진 해미순교성지 대성당
('소성당'도 같이 있음)

▲  초가로 이루어진 '이름없는 집'
순교자를 기억하며 '성경이어쓰기'를
하는 곳이다. (누구든 참여 가능)


▲  유해발견지 비석 -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순교자 유해를
발견한 곳에 조촐하게 비석을 세웠다.

▲  서문 밖에 있던 자리개돌(돌다리)
천주교 신자를 자리개질로 처단하던 현장으로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되었다가
1986년 제자리로 돌아왔다. 허나 도로 확장으로 2009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서문 밖 자리에는 대신 모조품을 두었다.

▲  해미읍성 주변에서 수습해온 조선 중~후기 비석 10기
이들은 해미 고을을 다스렸던 병마절도사와 수령의 선정비와 공덕비이다.
허나 저들 가운데 진정 선정비를 받을 만한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

▲  십자가가 있는 노천 야외 성당

▲  연못으로 이루어진 '진둠벙이'


▲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와 순교기념탑

이 무덤은 1935년 이곳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해를 담은 것으로 인근 상홍리 공소 뒷산의 백
씨 문중 묘역에 봉안했다가 1995년 이곳으로 유해를 담았다. 그 뒤로 1975년 지어진 높이 16
m의 순교기념탑이 무덤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앞에는 특이하게도 문인석(文人石) 1쌍이 홀
을 꼭 쥐어들고 자리해 있다.
이곳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들이 묘를 지켜서고 있는 것이 참 이채롭기 그지 없는
데 그들 몸에 자욱한 때를 봐서는 1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보이며, 처음 봉안했던 백씨 문중
묘역에서 가져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순교기념전시관

해미순교성지 가운데 자리에 무덤 봉분처럼 생긴 순교기념전시관이 자리해 있다. 위에는 봉분
(封墳)처럼 하고 밑에 돌로 다져 전시관을 닦았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품과 해미
일대에서 수습된 천주교와 박해 관련 유물, 그리고 이 땅의 천주교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엄숙
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관람은 자유이다.


▲  순교기념전시관에 전시된 칼과 뿔나팔
피부가 꼬질꼬질 녹슨 칼은 천주교 신자를 처단할 때 쓰던 칼이라 전한다.

▲  생매장 현장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품들
사람은 죽어 덧없는 해골이 되고, 그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은 살아남아
순교기념전시관과 우리나라 천주교의 소중한 유물이 되었다.

▲  해미읍성으로 끌려오는 천주교 신자를 형상화한 조각품

천주교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내 마음을 앗아갈만한 존재도 없는지라 바깥에 풀어진 존재만
둘러보고 일찍 관람을 마무리 지었다. 하여 본글에서도 해미읍성과 다르게 아주 간단하게 다
루었다.

해미에서 죽어간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1급 존재는 썩어빠진 나라와 권력층이다. 나라가 평안
하고 백성들의 삶이 넉넉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종교
에 너무 의존하려는 나약한 정신과 무지함, 삶을 포기하고 빨리 천당이나 가려는 마인드도 문
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그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 시절은 그만큼 고달펐던 시대였으니
까. 그리고 시대가 바뀌려는 일종의 격한 통증이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넘어가면 좋을 것이다.

현재 이 나라 꼬락서니도 왠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과 비슷해 보이는데, 더 이상 백성들
을 격한 궁지에 몰아넣어 저런 사태가 나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 단단히 썩어문드러
지고 첫단추부터 잘못된 이런 나라에 그런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사치겠지만...

이렇게 하여 서산 해미읍성 나들이는 미답지 지우기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해미순교성지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해미까지 교통편은 앞의 해미읍성 교통정보 참조
* 해미정류장(터미널)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남문5로를 따가라면 해미천이다. 다리(조산교)를
  건너서 오른쪽(서쪽) 둑방길을 쭉 따라가면 해미순교성지가 나온다. (십자가를 머금은 커다
  란 탑과 성당이 보임) 해미정류장에서 도보 12분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성지1로 13 ☎ 041-688-3183)
* 해미순교성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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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2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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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폐허의 절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다.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곳 ~~ 보령 성주사지

 


' 폐허의 옛 절터를 거닐다, 보령 성주사지 '

▲  눈에 뒤덮힌 폐허의 성주사지

 


겨울 제국의 한복판을 헤매던 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예산과 보령 지역을 찾았다.
우선 예산에 먼저 들려 예산읍내 근처에 있는 향천사(香泉寺. ☞ 관련글 살펴보)를 둘
러보고 예산역으로 나온 다음, 장항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보령시(保寧市)의 관문, 대
천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장항선 대천역과 보령시외터미널이 보령시내 도심인 옛 대천역에서 현 자리로 이전을 했
지만 보령시내버스 대부분은 여전히 옛 보령역을 기/종점으로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그
곳까지 20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 오천(鰲川)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자 했다. <충청수
영성(忠淸水營城)과 오천항을 보려고 했음>
허나 버스 시간도 맞지 않고 일몰까지 코앞에 다가와 그야말로 마음이 급해졌다. 겨울의
한복판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경) 그래서 시내와 가까운 성주사
터나 갈까 해서 성주/웅천행 정류장에서 시간표를 확인하니 성주사터 앞까지 가는 800번
대 버스(백운사행)가 곧 올 시간이다. 하여 꿩 대신 닭으로 성주사지를 가게 되었다.

그 버스를 타고 보령시청을 지나 성주고개의 눈치를 덜어준 성주터널을 통과하니 서해안
과는 전혀 다른 첩첩한 산골의 성주면이 펼쳐진다. 충남 서해안 지역은 거의 평지이지만
이렇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거의 강원도(江原道) 산골 분위기가 나타나니 마치 강원도까
지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성주면사무소에서 왼쪽(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성주천(聖住川)을 따라 들어가는데, 하늘
을 가리며 늘어선 오래된 가로수들의 유혹에 그만 성주사지를 하나 앞둔 성주초교(성주2
구)에서 내리고 말았다. 허나 여기서 성주사지까지는 도보 5분 거리에 지나지 않아 별로
부담도 없다.
이곳 가로수는 100~200년 정도 숙성된 느티나무로 10여 그루의 조촐한 모습이다. 이들은
성주천의 범람을 막고자 조성된 일종의 제림(堤林)으로 동네의 정자나무 역할도 겸한다.


▲  성주천과 나란히 이어진 성주초교 앞 가로수길(심원계곡로)

▲  가로수길의 제일 어른인 200년 묵은 느티나무 -
보령시 보호수 8-1-11-5-479호
성주천을 향해 몸을 구부리며 하천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우수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나무 높이 15m, 둘레 2.8m

▲  돌담 사이로 난 저 계단을 오르면 폐허의 현장 성주사지가 모습을 비춘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곳, 허나 지금은
폐허의 현장이 되버린 거대한 옛 절터, 성주사지(聖住寺址)
- 사적 307호

성주산(聖住山) 남쪽 평지에 포근히 자리를 깐 성주사터는 백제 법왕(法王, 재위 599~600)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법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영혼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
하며 처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였다. 백제의 마지막 국도(國都)인 부여(扶餘)에서 서해바다
로 가는 길목에 있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때는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이곳 주지로 머물면서 선종(禪宗)을 보급하는 한편,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를 개창해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다.
선종은 경전 중심의 학문적이고 귀족들이 선호하던 교종(敎宗)과 달리 문자를 통하지 않고 오
로지 참선을 중시하던 사상이라 백성들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다보니 성주사를 찾는 신도의 수
가 급증하면서 그 인기에 힘입어 절을 크게 중창했는데,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庫舍) 50
여 칸 등 1,000여 칸을 자랑했으며, 이곳에 머물던 승려만 2,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에 문성왕은 무염을 성인(聖人)이라 칭하며 그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의 '성주사'란 이름을
내렸다.
이렇게 신라 막판에 선종 사찰의 하나로 번영을 누리던 성주사는 고려 이후 마땅한 사적(事蹟)
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 석등이 전하는 것으로 봐서는 조선 때까지 법등(法燈)을 그런
데로 유지했던 모양이다. 허나 이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다
시는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전설처럼 사라져 허망함을 던진 성주사터는 속인들의 경작지로 변했고, 그 밭두렁 사이로
성주사의 옛 영광을 숨죽여 간직한 석탑과 석등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불상이라도 남아있
었으면 사람들이 와서 예불도 올리고 보호각도 짓고 했을 터인데, 그러지도 못했다. 절터 한쪽
에 있는 석불입상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인근에서 가져온 석불로 성주사와는 관련이 없다.

근래에 절터를 정비하면서 절터의 목을 단단히 죄고 있던 경작지를 모두 밀어버렸으며,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드넓은 면적의 절터에는 국보 8호인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중앙3층
석탑과 서3층석탑, 동3층석탑, 5층석탑, 석등, 석계단, 석불입상 등의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널
려있다. 이 중 국보가 1점, 보물이 3점이나 된다. 또한 중문터(동문터)와 강당터, 금당터, 화
랑터, 삼천불터 등의 건물터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으며. 신라 후기 불상의 머리와 백제와 신라
, 고려의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성주사의 옛 영화로움을 속삭여주고 있다.
가람배치는 중문(동문터)과 석탑, 금당, 강당으로 이어지는 배치이나 3층석탑 2기 대신에 5층
석탑을 둔 것이 특이하며, 금당 뒤로 3층석탑이 3기나 몰려있어 기존 신라 사찰의 가람배치와
는 조금 틀리다.

현재 절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넓지만 절터 일대를 완전히 조사한 것은 아니다. 절
터 주위로 돌담이 길게 둘러져 있는데, 이는 절터에서 출토된 돌을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담
장으로 만든 것이며 그렇다고 그 돌담이 성주사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돌담 안
에 감싸인 절터도 아직까지도 절반 이상이 미발굴지로 남아있고, 절의 명성을 봤을 때 절터 서
쪽 산자락과 절터 북쪽에 자리한 마을도 모두 성주사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부분 발굴만 할 것이 아니라 언제 한번 절터와 주변 산자락, 마을까지 속시원하게 뒤엎
어 발굴조사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성주사의 숨겨진 행적과 보물이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성주사의 왕년의 모습은 남겨진 그림이 없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그 당시에 맞게 상상의 나래
를 살찌우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인도식이나 아랍식, 유럽식으로 엉뚱하게 상
상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 전통 사찰의 맞게 상상을 하면 될 것이다.
4기의 석탑에 둘러싸인 금당은 이 땅의 흔한 법당(法堂) 이름인 대웅전(大雄殿)으로 불렸을 것
이고, 아마도 맞배지붕을 지녔을 것 같다. 그 옆에는 동서로 길쭉한 건물터가 있는데, 이는 삼
천불전(三千佛殿)터라고 한다. 건물의 이름처럼 3,000기의 조그만 불상이 불단을 가득 메우며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3층석탑 뒤에는 남북으로 긴 강당(講堂)터가 있으며, 금당터 남쪽에
는 회랑터가 있다. 그리고 성주사의 제일 보물은 낭혜화상탑비는 강당터 서쪽에 두어 절을 크
게 키운 그를 두고두고 기린다. 절의 건물 배치는 현재 이 정도만 살을 드러내고 있어 나머지
는 아직 수수께끼에 머물러 있다.

※ 성주사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① 보령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장항
  선 열차를 타고 대천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나며, 동서울터
  미널에서 1일 10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3회 떠난다.
* 인천, 부천, 고양, 성남, 안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서부, 복합, 유성), 천안, 아산, 공주, 서산, 군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서부터미널과 논산, 부여에서 성주 경유 보령행 직행버스(1일 6회)를 타고 성주 하차.
  성주사지까지 도보 15분
② 현지교통
* 대천역과 보령터미널에서 시내(옛 대천역)로 나가는 1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령요양벙원에
  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백운사, 먹방, 심원동으로 가는 800번대 시내버스(1일 12회 운
  행)로 환승하여 성주사지에서 하차.
  차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 성주, 외산으로 가는 800번 시내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성주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이들 버스는 모두 옛 대천역에서 출발한다.
* 보령터미널에서 성주 경유 부여, 서대전행 직행버스(1일 6회)를 타고 성주 하차.

★ 성주사지 관람정보
* 성주사지 문화유산해설사가 9시부터 18시(겨울에는 17시까지)까지 근무한다.
*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  설피(雪皮)를 뒤집어 쓴 성주사터
대머리처럼 허전한 절터를 하얀 눈이 두텁게 감싸준다.


▲  문화재발굴체험 학습장
절터 동쪽에 담장을 갖춘 기와집을 만들어 문화재발굴 체험장으로 삼았다.
평일 오후라 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는 적막만이 감돈다.
체험문의는 보령관광안내소(☎ 041-932-2023, 대천역 소재)

▲  동문터로 인도하는 돌계단

▲  돌계단을 오르면 중문터인 동문(東門)터가 나타난다.
큼직한 주춧돌이 동문의 옛 모습에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  남쪽 회랑(回廊)터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회랑의 모습은 신라 사찰의 대명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대웅전 주변 회랑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듯 싶다. 금당 주변을 회랑으로 두룬 것은
신라와 고려 절의 특징이다.

▲  남쪽 회랑터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동문터와 회랑터가 접히는 부분에서 바라본 금당터 주변

▲  성주사지 석등(石燈)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훤칠한 키의 5층석탑 그늘에 자리하여 조금은 초췌해 보이는 이 석등은 조선 초기 것으로 여겨
진다. 석탑 주변에 이리저리 조각나서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에 수습한 것으로 네모난 창이
4개나 뚫린 화사석(火舍石) 밑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에는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
식을 얹혔다. 화사석 받침 밑과 석등의 제일 밑부분인 바닥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석등
의 기둥은 신라나 고려의 석등보다는 굵기가 가는 편이다. 별 꾸밈이 없는 수수한 모습으로 절
이 있던 시절에는 부처의 광명(光明)을 상징하듯 경내를 환하게 밝혀주었을 것이다.

▲  성주사지 5층석탑 - 보물 19호

금당터 앞에 자리한 5층석탑은 성주사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이다. 금당터 뒤쪽에 있는 3층석탑 3형제와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거의 비슷하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
신을 얹힌 형태로 성주사가 한참 잘나가던 9세기 후반 탑으로 여겨진다.
기단 바로 위쪽에는 네모난 괴임돌을 끼워 두었는데, 탑에 괴임돌을 두는 것은 고려시대 탑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식이다. 이 탑은 괴임돌이 하나기 때문에 그 이전 단계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고,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고개를 들었
으며, 탑신은 위로 올라갈 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비율로 균형이 잡히고 우아한 모습을 자랑한
다. 탑 위쪽에는 머리장식인 노반(露盤)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없다.


▲  동남향(東南向)을 취한 금당터

금당터는 특이하게도 동쪽도 남쪽도 아닌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 방향을 그리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터 동쪽에 흐르는 성주천에 맞추고자 함일 수도 있고, 신라의 왕도(王都)인 경주
를 바라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허나 딱히 증거가 없으니 상상 속에서 더 이상 끌어오지를
못한다.

신라 후기에 지어졌을 금당은 이렇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 그 위에는 텅 비었
다. 금당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상상 속 도화지에 그 모습을 그려본다.


▲  성주사지 석계단(금당 동쪽 계단)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40호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2개가 있는데, 위로 올라갈 수록 계단의 폭이 줄어드는 형태를 취하
고 있다. 동쪽을 향한 계단 양쪽 소맷돌에는 수려한 조각의 사자상(獅子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돌계단이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허나 공무원의 관리소홀로 인해
1986년 도둑을 맞아 그때 생긴 상처를 간직한 계단만 남아있으며, 그때 사라진 사자상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어여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들 돌계단과 사라진 사자상은 금당이 세워진 신라 후기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금당터 중앙에 자리한 연화대석(蓮花臺石)

금당터 중앙에 자리한 연화대석은 금당에 봉안했던 불상의 보금자리로 불상과 좌대(座臺)는 전
란 중에 사라지고 좌대를 받치던 밑부분만 남아있다. 옛날에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대석(臺石)
위에는 눈이 소복히 내려앉아 그를 보듬는다. 그래도 대석에 새겨진 연꽃잎은 선명하고 두툼하
게 살아있어 채색만 적당하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 같다.


▲  금당 서쪽 석계단 - 동쪽 계단과 달리 위,아래가 일정한 폭을 유지한다.


 

  성주사지 금당터 주변

▲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삼천불전(三千佛殿)터
향천사 천불전(千佛殿) 1,500불의 2배가 넘는 불상이 있었다는 삼천불전터
허나 지금은 터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삼천불전 생전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각자의 상상 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  금당터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3층석탑 3형제
(왼쪽부터 서3층석탑, 중앙3층석탑, 동3층석탑)

▲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 보물 20호

금당터 뒤쪽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3층석탑 3형제가 서로를 보듬으며 정을 누리고 있다. 이
들 3형제는 위치에 따라서 편의상 중앙/동/서3층석탑이라 불리는데, 정확히는 서남/중앙/동북
이 맞다. 그렇다고 서남3층석탑, 동북3층석탑이라 부르기는 뭐하니 흔히 쓰는 동/서3층석탑으
로 이름을 잡은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정광(定光), 약사(藥師), 가섭(
迦葉) 등 3여래(三如來)의 사리탑(舍利塔)이라고 전한다.

3층석탑 형제의 맏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3층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
로 성주사가 구산선문의 하나로 한참 상한가를 치던 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 바로 위쪽에는 5층석탑과 마찬가지로 괴임돌을 하나 끼워두었으며, 1층 탑신이 2층과 3층
보다 훨씬 커 보인다.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겼는데, 자물쇠 모양을 가운데에 두고 그 자물쇠 밑에 동
물 얼굴 모양의 문고리 1쌍을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을 채
웠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귀퉁이 끝이 아주 살짝 올려져 마치 병아리가 날
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인 노반이 있으며, 그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고,
그 위를 복발(覆鉢)로 마무리하였다.
1층 탑신 모서리와 기단 모서리 부분이 좀 손상된 것을 빼고는 그런데로 상태는 양호하며, 문
짝과 자물쇠 문양이 새겨진 것 외에는 이 땅에 흔한 신라탑의 모습이다. 안내문에는 경쾌하고
화려하다고 하는데, 딱히 그런 점은 다가오지 않는다.


▲  중앙3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문짝과 자물쇠, 문고리 문양
문짝과 자물쇠, 문고리 문양이 있지만 정작 문짝을 여는 열쇠 문양은 없다.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를 열 수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이나
성주사의 숨겨진 역사를 밝혀줄 무엇인가가 나오지는 않을까?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며 저 문고리를 따고 싶다.

▲  성주사지 동3층석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6호

3층석탑 3형제 중 동북쪽에 자리한 동3층석탑은 중앙3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중앙과 서3층
석탑은 국가지정 보물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유독 이 탑만은 유일하게 지방문화재의 지
위에 머물러 있다. 어차피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정한 등급이긴 하지만 서로 비슷한 시기에 비
슷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는데, 왜 하나는 등급이 달라야되는지 그 기준이 참 아리송할 따름이다.

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에 탑신을 얹힌 형태로 기단 바로 위쪽에 괴임돌이 끼워져있
으며, 1층 탑신의 남/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1쌍의 고리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이며, 귀퉁이 끝이 살짝 올려져 있다. 조성시기는 역시나 9세기 중/후반으로 보
인다.


▲  성주사지 서3층석탑 - 보물 47호

3층석탑 3형제의 둘째라고 할 수 있는 서3층석탑은 중앙/동3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역시나
기단 위쪽에 괴임돌을 두었고, 1층 탑신에는 동물 얼굴 모양의 문고리 1쌍을 새겼는데,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씻겨 내려가 거의 희미해진 모습이다. (자물쇠 문양은 없음) 지붕돌은
밑면이 4단으로 되어있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려져 있으며, 머리장식은 노반만 남아있다.
1971년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에서 네모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가득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미 도굴을 당한 듯 싶다. 조성시기는 9세기 중/후반으로 탑
의 높이는 4m이다. 이는 3형제 모두 같다.


▲  서3층석탑 1층 탑신에 화석처럼 남겨진 문고리 장식

▲  장대한 세월에 흔적마저 사라진 3층석탑 뒤쪽 강당(講堂)터
강당은 승려와 신도들의 교육 및 행사 공간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73호

이 석불은 마치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은 듯한 우울한 모습으로 얼굴은 거의 타원형이다. 타원
형 얼굴을 지닌 불상은 그리 흔치가 않은 편으로 머리는 머리칼이나 육계를 표현하지 않은 그
냥 맨피부이며, 얼굴 부분은 마치 단단히 화상을 입은 듯, 돌의 겉면이 떨어져 나가 누런 색을
이룬다. 얼굴은 좀 고통스러워 보이며, 목부분도 돌의 겉면이 나갔다.
몸통은 군데군데 표면이 벗겨진 상처가 있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무슨 제스쳐인지
는 모르겠다. 오른손은 왼손 밑에 조그맣게 표현되어 있으며 아랫도리는 없다. 아마도 얼굴과
상반신만 만들어 땅에 심은 듯 싶다.

그는 원래 성주사에 있던 것이 아닌 근처 어딘가에서 옮겨온 것으로 석불을 받치고 있는 바닥
돌의 움직인 흔적이 이를 입증한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에 많이 보이는 불상 형태로 조선 중
기나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성주사가 사라진 이후, 인근에 방치된 석불을 사람들이
수습해 가져온 듯 싶다.
고향을 떠난 것은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의 미래를 위해서는 참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에 원래 자리에 있었다면 관리나 제대로 받았을까? 성주사터라는 보령 제일의 꿀단지에 숟가락
을 얹히고 들어앉았으니 이렇게 관리도 받고 사람들의 주목도 받는 것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의 뒷모습
뒤에는 별다른 조각은 없다. 다만 뒷통수 가운데 주위로 돌껍질이 죄다 벗겨나가
심한 탈모증 환자를 보는 듯 하다.

▲  성주사지 서쪽 경계에 쌓은 돌담
절터에서 나온 무수한 돌로 절터 주변에 길게 돌담을 쌓았다.
담의 모습이 조그만 성곽 같다.


 

  최치원의 문장이 담긴 성주사터 제일의 보물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 - 국보 8호

▲  비각 안에 담긴 낭혜화상탑비

강당터 서남쪽에는 성주사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보물이 있다. 바로 낭혜화상탑비이다. 비각
(碑閣) 안에 소중히 안긴 이 비석은 성주사를 크게 일으키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
창한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로 높이가 5m에 이른다. 글씨들이 깨알같이 적힌 비신(碑身)
은 절 뒤쪽 성주산에서 많이 나오는 유명한 돌,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빚었다. 1,100년이 넘
는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글씨들이 온전하여 남포오석의 위엄을 더욱 높여준다.

비석을 받쳐든 귀부는 거북의 머리로 깨지고 다친 부분이 많아 안타까운 마음을 솟게 한다. 이
는 임진왜란 때 생긴 상처로 보인다. 머리 위쪽에는 둥근 뿔이 나 있고, 회오리 모양의 눈썹이
표현되어 있으며, 등에는 2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가운데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표현되
어 있다. 구름무늬 위에는 비신을 꽂은 비좌(碑座)가 있다. 귀부는 파손이 심해 흙에 묻혀 있
던 것을 1974년에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비신에는 앞쪽에만 글씨가 쓰여있는데, 낭혜화상의 생애와 업적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비
신 위쪽의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다. 비신 위에 얹혀진 이수(螭首)는 밑부분에 연꽃을 두르
고 그 위에 구름과 함께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반룡(蟠龍)의 모습을 조각했는데, 너무 섬세하
여 흑백영화 속에 나오는 용을 보는 듯 하다.


▲  낭혜화상탑비

비석의 주인공인 낭혜화상 무염(801~888)은 무열왕(武烈王)의 8세손으로 신라 왕족이다. (성은
김씨임) 801년(애장왕 1년) 금수저로 태어나 13살에 출가를 했으며, 821년 당나라로 건너가 불
교를 공부하고 845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오합사(성주사)의 주지가 되면서 선종을 널리 보급하여 신라 후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창하게 되었고, 신도가 급증하자 절을 크게 일으키니 문성왕이 성주사란 이름을
내려 그를 기렸다.
888년 87세의 나이로 성주사에서 입적을 하니 진성여왕(眞聖女王)은 낭혜(朗慧)란 시호를 내리
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하였다.

비문을 쓴 이는 신라 후기에 대표적인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이며, 그의 사촌이자 당대의 명필
로 꼽히는 최인곤(崔仁滾)이 글씨를 썼다. 그런 연유로 최치원이 썼다는 사산비문(四山碑文)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여기서 사산비문이란 이곳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하동 쌍계사 진감선
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
碑), 경주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로 모두 신라 후기에 이름난 비석들이다. 나는 성주사 낭혜
화상탑비를 끝으로 사산비문과 모두 인연을 지었다.

비석의 조성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890년에 낭혜화상의 사리탑(소재 불명)을 만들었다는 기록
이 있으므로 그때쯤 해서 만든 듯 싶다. 비석에는 그의 생애 외에도 가문에 대해서도 나와있는
데,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왕족임에도 6두품(六頭品)으로 신분이 낮아진 적이 있었다. 그래
서 무염이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승려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비석의 원래 이름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로 이름이 좀 길다. 그래서 근래 문화재청에서 '백
월보광' 4글자를 빼고 '낭혜화상탑비'로 이름을 줄였다.
신라 후기에 지어진 비석 가운데 가장 큰 풍채를 자랑하며, 깨진 부분이 많지만 화려하고 아름
다운 조각 솜씨를 엿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으며, 거기에 최치원의 명문장까지 깃들여져 있어
신라 후기 최고의 비석이자 성주사터의 제일 가는 보물로 손꼽힌다.


▲  상처가 심한 낭혜화상탑비의 귀부
눈 위쪽에 회오리 모양의 문양이 눈썹이라고 하는데, 마치 1대 얻어맞아서
눈이 핑 돌아가는 모습 같아 약간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비석이 꽂힌 비좌 부분
마치 소용돌이 치는 물결이 그대로 화석(化石)으로 굳은 듯한 구름무늬 위에
비좌를 두어 육중한 비신을 꽂았다.

▲  귀부의 뒷쪽 부분
귀부의 등에는 등갑무늬가 근래에 새겨진 듯 선명하게 남아있고 덩치에 비해
조그만 꼬랑지가 하늘을 향해 귀엽게 말려져 있다.

▲  비석의 꼭대기인 이수
회오리 모양의 연꽃무늬 위에 구름과 반룡이 새겨져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  글씨가 선명하게 남은 비신
1,100년이 넘은 나이에도 글씨들은 정정하다.

▲  비각 안에 담긴 낭혜화상탑비


▲  낭혜화상탑비 옆에 수습된 기와조각과 주춧돌

▲  낭혜화상탑비 옆에 누운 석물 (정체는 모르겠음)

▲  성주사지 서북쪽 구석에서 바라본 성주사터
절터를 비추던 햇님이 조금씩 발을 빼면서 깊은 골짜기인 이곳에도
어둠의 땅꺼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성주사터를 1시간 반 정도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세상을 열렬히 비추던 햇님도 슬슬
막을 치며 그만의 공간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한 토막 신화가 되어 사라진 성주사터, 대머리처럼 허전하고 황량한 절터에 탑비와 석탑을 안
테나처럼 드러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왔다. 다행히 보령 굴지의 명소이자 답사의 필수 코스
로 인기를 얻으면서 휴일에는 많은 이들이 절터를 보듬으러 온다. 게다가 성주산과 성주산자연
휴양림, 성주계곡, 보령 석탄박물관, 심연동계곡, 백운사(白雲寺) 등의 명소가 가까이에 있어
이들을 1~2개 겯드리면 더욱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에 이루어진 성주사지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역시 황량한 절터
는 겨울에 찾아가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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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산사 나들이, 예산 금오산 향천사 (산사의 조촐한 설경)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예산 금오산 향천사(香泉寺) '

▲  제각각의 모습을 지닌 천불전의 천불(千佛)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으면 온갖 기대감이 나를 설레게 한다. '올해는 잘될거야','돈
많이 벌겠지~!' 등의 바램 말이다. 그런 희망을 품으며, 새해 첫 답사지로 어디를 갈까 궁
리하다가 문득 충남 예산에 시선이 멈추어 그곳에 있는 향천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으나 급하게 갈 이유가 전혀 없어 느림의 미학(美學)이나 누릴 겸, 굼
벵이 1호선 전철을 타고 방학역에서 아산시 신창역까지 내려갔다. 거리는 자그마치 130km,
소요시간은 3시간이다. 그것도 서울역에서 천안으로 가는 급행 전철(1일 3회, 평일만 운행)
의 노력 덕분이다.
그렇게 나의 근성을 오랜만에 테스트하며 수도권 전철의 최남단인 신창역에서 잠시 대기를
탔다가, 예산읍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40분을 달려 예산읍내 동쪽 쌍송배기(쌍송
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쌍송배기는 아산이나 신례원, 삽교, 덕산 방면 예산군내버스의 종점이자 유구, 청양(靑陽)
방면으로 넘어가는 요충지로 향천사까지는 2k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게다가 길도 잘
닦여져 있고 오르막도 거의 없어 산책 삼아 가볍게 거닐면 된다.


▲  향천사 가는 길
읍내를 벗어나도 일주문 직전까지 속인(俗人)들의 집은 계속 줄을 잇는다.


 

  향천사에 들어서다

▲  향천사 일주문(一柱門)

향천사입구인 예산초교에서 20분 정도 걸으니 일주문이 흔쾌히 마중을 한다. 일주문은 절의 정
문으로 대부분의 절이 필수로 갖추고 있다. 절에 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존재로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역할도 하지만 마음을 하나로 다듬고 절로 들어서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일주문은 2003년 10월에 세워졌는데, 문을 받치는 2개의 기둥은 가운데가 좀 볼록하며, 기둥
위에는 양쪽으로 누런 꼬랑지의 용 2마리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어 마치 견우와 직녀를 보는 듯
하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평방(平枋) 앞에는 '금오산 향천사(金烏山 香泉寺)'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글씨가 좀 간결해보이면서도 필력이 넘쳐 보인다. 그리고 뒤쪽에도 현판이 있는데, '호
서가람천불선원(湖西伽藍千佛禪院)'이라 쓰여 있어 향천사의 성격을 쿨하게 알려준다.


▲  서로 마주보며 일주문을 수식하는 용 2마리

▲  기둥에 몸을 의지한 용과 그의 꼬랑지

▲  일주문의 뒷모습과 절의 성격을
담은 8글자 현판


▲  창건 유래비가 있는 계단길 입구

일주문을 들어서 1분 정도 가면 넓다란 공간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향천사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고, 오른쪽은 금오산 등산로, 정면에 보이는 계단길은 경내로 통
한다. 그러니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호젓하게 계단길로 가는 것이 좋다. 차량을 이용해 경내로
들어서거나 금오산 등산을 원할 경우는 오른쪽 길을 이용하면 된다.

돌계단 앞에는 절의 창건 유래를 머금은 창건 유래비와 붉은 글씨로 향천사라 쓰인 표석이 있으
며, 이들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외부에서 보이지 않던 향천사의 건물이 지붕부터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2번째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  경내로 인도하는 1번째 돌계단 ~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  2번째 돌계단 너머로 얼굴을 보이는 극락전

▲  잠시 물 1모금의 여유
둥그런 석조(石槽)에는 자연이 베푼 약수가 넘칠 정도로 가득하다.

▲  1번 째 계단보다 조금은 각이 선 2번 째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향천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향천사 경내 (극락전 주변)

※ 예산 향천사의 간략한 내력(來歷)
예산읍내 동북쪽 금오산(223m) 밑에 포근히 둥지를 튼 향천사는 예산 땅에서 수덕사(修德寺) 다
음가는 절로 655년(백제 의자왕 14년)에 백제의 고승 의각선사(義覺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의각이 세웠는지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 외에는 입증할 기록이 없어 그저 답답할 따름
이지만 경내에 있는 9층석탑이 7세기 중반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 하므로 그것이 맞다면 대충 창
건 시기는 맞아 떨어진다.

향천사를 세웠다고 전하는 의각선사는 백제 승려로 652년 백제의 별채인 왜열도로 건너가 백제
사(百濟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가 뜻한 것이 있어서 바로 당나라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3년 동안 오자산(五子山)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면서 석불 3,053개를 비롯하여 전단향(旃檀香
)나무로 만든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16나한상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655년 당나라에 온 백제 사신을 따라서 귀국했는데, 귀국하면서 오자산에서 만든 석불을 바리바
리 싣고 왔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오산현(예산) 북포 해안에 이르렀으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석불들을 계속 배에 방치했다. 이때 배 안에서 종소리가 나 해변에 진동했다
고 하여 부근 마을 이름을 종성리(鐘聲里)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각의 방황을 보다 못한 금까마귀 1쌍이 찾아와 지금의 절 자리를 알려주었다
고 한다. 그래서 의각은 그 자리에 향천사를 세워 석불을 봉안하고 까마귀에게 보은(報恩)을 하
는 차원에서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의각이 만들었다는 불상의 존재는 나오
지 않음)

그렇게 절이 창건된 이후, 승려 도장(島藏)이 잠시 절을 관리했다. 그러나 660년 가을, 백제가
허망하게 망하자. 백제의 속방(屬邦)인 왜국으로 건너갔다.
왜왕(倭王, 아마도 제명여왕이나 천지왕으로 생각됨)은 그에게 귀의(歸依)할 것을 부탁했고, 마
땅히 갈 곳이 없던 그는 그 청을 받으니 왜왕이 기뻐서 동량지원수(棟梁之願袖)란 존호(尊號)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옛 백제 땅으로 돌아와 향천사와 송림사(松林寺)에 머물렀는데, 698년(신라 효소왕 7년)
신라 왕실의 지원으로 동관음전과 서로전, 동선당, 향적전, 관음암 등 400여 칸의 건물과 암자
를 지었다고 하며, 그 이후 호서 제일의 명찰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840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그는 837년 당나라로 건너가 840년 석
불 1,053개를 가지고 귀국하여 향천사에 천불전과 극락전을 지었다고 한다.

▲  천불선원 표석

▲  향천사 창건 유래비

1359년(공민왕 5년)에는 극락전에 아미타3존불을 봉안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된 것을
멸운(滅雲)이 1596년에 중건하여 100여 칸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는 승병 7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승려이다.

1702년에는 범종을 새로 만들었고, 1950년 6.25때 많은 건물이 파괴된 것을 보산(寶山)이 10년
동안 주석하면서 중건했다. 이후 1971년 극락전을, 1982년에는 서선당과 당월당을 새로 지었으
며, 1985년 천불전과 나한전을 해체 복원하고, 1986년 범종각을 짓고 부설(附設) 향천유치원을
만들었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천불전과 나한전, 산신각 등 약 10동에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9층석탑을 비롯하여 천불전과 부도, 괘불도
와 오여래/사보살 팔금강도(국가 등록문화재 627호) 등이 있다. 그외에 1702년에 조성된 범종(
梵鍾,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71호)도 있으나 보호를 위헤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가있다. 또
한 천불전을 통해 천불선원(千佛禪院)을 강조하며 천불도량으로 절을 키우고 있다.

산사(山寺)이긴 하지만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은 아니며, 읍내에서 무척이나 가깝고 일주문 부근
까지 속인들의 주택이 밀려와 산사의 질감이 조금은 떨어지는 면이 있다. 허나 조용하고 그윽한
분위기는 여전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마음을 가다듬기에는 손색이 없으며, 서울 화계사(華溪寺)
처럼 서양인 승려들이 많이 머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절을 둘러보고 시간이 괜찮다면 그를 품고 있는 금오산이나 관모산(391m)을 오르는 것도 괜찮다.
절에서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그들 정상에 이르며, 정상에서는 시내처럼 넓은 예산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眺望)이 천하 명품급이다. 금오산은 읍내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로 향천사
주변 등산로에 의자와 체육시설, 약수터가 마련되어 있다.

▲  향천사 부도군

▲  향천사 범종각

※ 향천사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① 열차나 전철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예산역 하차
* 수도권 1호선 신창행 열차나 서울~신창 누리로 열차를 타고 신창역 하차
② 예산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예산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산행 직행버스가 3~4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전(서부/동부), 천안, 청주, 서산, 보령에서 예산행 직행버스 이용
* 서대전이나 공주에서 예산행 직행버스를 이용할 경우 임성에서 내리면 된다. 임성에서 향천사
  까지 도보 25분. (임성 정차를 확인바람)
③ 현지 교통
* 예산역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쌍송으로 들어가는 아무 군내버
  스나 타고 쌍송배기 하차 → 버스에서 내려 왼쪽(동쪽)으로 가면 쌍송3거리이다. 여기서 왼쪽
  (아리랑로) 길로 가면 임성정류장을 지나서 향천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쌍송배기에서
  향천사까지 도보 30분 거리) 만약 예산초교를 경유하는 버스를 탔을 경우 예산초교 하차.
* 신창역에서 예산군내버스 420번(1일 8회 운행)을 타고 쌍송배기 하차
* 예산터미널 내부나 바깥 정류장에서 쌍송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쌍송배기 하차 (중간에 예산
  초교 경유하는 차도 있음) 또는 공주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임성 하차
④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 당진~영덕고속도로 → 예산수덕사나들목을 나와서 예산 방면 → 주교5거리에서 예산로로 진입
  → 쌍송3거리에서 좌회전 → 향천사 이정표에서 우회전 → 향천사

*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57 (향천사로 117-20 ☎ 041-335-3556)

▲  향천사 천불전

▲  향천사 서래암(西來庵)


 

 

  향천사 극락전, 서선당 주변

▲  청기와가 입혀진 극락전(極樂殿)

향천사의 법당(法堂)인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1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원래는 그 우측 나한전 자리에 있었으며, 1983년 옛 극락전을 철거하면서 지금의 건물이
극락전이 되었다. 불단에는 단향목으로 만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1359년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또는 조선 초기나 중기라고 함)
아미타불은 양쪽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탱화를 비롯한
수많은 불화(佛畵)들이 내부를 곱게 수식한다. 이들 불화는 1993년에 제작된 것이다.
절의 중심 되는 건물이라 그런지 특별히 푸른 빛깔이 나는 청기와를 입혀 법당의 품격을 높였다.


▲  나한전(羅漢殿)과 9층석탑

극락전 우측에는 1983년에 옛 극락전을 부시고 만든 나한전이 자리해 있다. 나한전은 부처의 제
자인 16나한(羅漢)의 보금자리로 그 앞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9층석탑이 우중층하게
서 있다.

◀  위와 아래의 피부색 다른 향천사9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4호
향천사9층석탑은 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로
높이가 3.75m이다. 이 탑은 이곳의 2번째 주지
를 지낸 도장(島藏)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하
며, 백제가 사라진 이후인 7세기 중/후반에 조
성된 백제 탑의 후예이다.
이렇게 지긋한 나이를 지니고 있지만 탑신(塔身
)과 기단(基壇) 부분의 피부 색깔이 너무나 틀
려 상당히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기단부는 그
래도 고된 세월의 때가 자욱하여 까무잡잡하지
만 탑신은 그와는 상반되게 하얀 피부를 드러내
고 있기 때문이다.
탑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절을 파괴하면서 탑을 아작냈기 때문이다. 절에
는 원래 2기의 석탑(5층탑이라는 설이 있음)이
있었는데, 모두 파괴되어 흩어진 것을 모아서
하나의 탑으로 수습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
었다고 한다. 그러니 본래 9층석탑으로 보기도
어렵다.

새로 만든 2중의 네모난 바닥돌 위에 얹혀진 이 탑은 2중의 헌 바닥돌 위에 1층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9층탑을 얹힌 형태로 3층까지는 탑신이 잘 남아있으나 4층부터는 탑신이 없어지고, 여
기저기 깨진 지붕돌만 포개진 모습으로 놓여져 있다. 얇고 넓적한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
을 두고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사각 받침돌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살짝 놓여있다.
비록 백제시대 탑은 아니지만(일부에서는 백제 탑이라고 함) 백제탑을 계승한 탑으로 온전하게
남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준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우물

▲  우물 좌측에 자리한 척화실(拓花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무척 낯설다.


▲  서선당(西禪堂)
극락전 뜨락 우측에 넓게 자리한 서선당은 승려들의 거처인 요사(寮舍)로 1982년에
새로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크다.


▲  서선당 옆에 놓인 나무 장작들

나무 장작들 참 오랜만에 본다. 옛날에는 정말 흔했지만 연탄과 가스, 석유에 밀려 이제는 찾아
보기 힘든 기억 속의 풍물시가 되어버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방을 대펴주는 용도로 쓰
지는 않을 터이고, 아마도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쓰는 것 같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궁이에
서 지은 밥과 누룽지가 갑자기 간절해지는구나 ~~


▲  서선당 옆에 'ㄱ'모습의 요사 (북쪽에서 본 모습)
서선당 바로 옆에 자리한 건물은 공양간을 갖춘 요사로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툇마루 앞뜨락에는 네모난 석조와 함께 세수를 하거나 설겆이나 빨래를 하는
공간이 있어 옛 한옥 생활을 느끼게 한다.


▲  서선당 옆 'ㄱ'모습의 요사 (남쪽에서 본 모습)

▲  서선당에 달린 조그만 종 (공양시간입니다. 땡땡땡~~)
공양시간을 알릴 때 쓰는 소중한 종이다. 종이 기지개를 켜고 은은한 종소리를
베풀면 곳곳에 흩어진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들어 즐거운 공양(식사)시간을
갖는다. 먹는 것 만큼 즐거운 것이 또 어디 있으랴~~


▲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
흰 수염의 대머리인 산신을 비롯하여 호랑이와 동자 등 산신의 주요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산신의 사자(使者)인 호랑이는 용맹함보다는 귀여움이
묻어난 모습으로 표현되어 거의 고양이 같다.


▲  잠시나마 하얀 지붕을 이룬 나한전(오른쪽)과 극락전(왼쪽)

▲  경내에서 천불전으로 넘어가는 다리


 

 

  향천사의 상징적인 공간, 천불전(천불선원)

▲  경내 서쪽에 따로 자리를 닦은 천불선원(千佛禪院)

경내에서 조그만 계곡을 건너 서쪽 언덕을 오르면 따로 담장을 두른 천불선원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천불도량(千佛道場)을 자처하는 향천사의 중심이자 성지와 같은 공간으로 천불전 주변에
부속 건물 2동을 만들고 이를 담장으로 둘러 천불선원으로 삼았다. 예전에는 속인(俗人)들의 출
입을 통제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  활짝 열린 천불선원 문

천불선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 문이 유일한데, 문의 높이가 좀 낮다. 키가 어느 정도 되는 사
람은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높이를 낮게 한 것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게 만들어 천불에 대한 예의를 표하게 하려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천불전에
임하라는 의미이다.
문 양쪽에는 자연석을 차곡차곡 얹혀서 만든 기와 돌담이 정겨운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눈이 두텁게 입혀진 천불전 뜨락과 부속 건물들
천불전의 부속 건물들은 승려의 생활 및 수행 공간으로 좌측에 자리한 건물은
절의 여러 집기를 보관하는 창고 역할도 담당하고 한다.

▲  향천사 천불전(千佛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3호

천불선원의 중심인 천불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
물이다. 경내에서 극락전에 버금가는 건물로 현판에 쓰인 이름 그대로 1,000불을 봉안했다.
이 건물은 의각이 당나라 오자산에서 직접 만든 3,053기의 불상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
지보살, 16나한을 봉안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하며, 840년에 보조국사가 당나라에서 1,053기의
불상을 가져와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596년에 멸운이 다시 중건했으며,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1986년에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새 건물을 지어 옛날의 구수한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경내에서 9층석탑과 부도를 제외하고 고찰이라 내세울 만한 자취
가 사라진 것이다. 건물을 다시 지었음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은 것은 불단에
봉안된 불상 때문인 듯 하며, 천불의 조성시기는 전설과는 달리 조선 초기로 보인다.

건물의 이름 그대로 1,000기의 불상이 있어야 되지만 정확하게는 그보다 1.5배 많은 1,515기의
불상이 불단을 어지럽게 메우고 있다. 이는 이 땅에 널린 천불전의 불상 수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로 그 흔한 이름 천불보다는 눈에 좀 띄게 천오백불(1,500불)이라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천불과 3천불은 많지만 1,500불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이들 천불은 미혼자의 혼인 대상자 인물을 점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우리나라 7천 만 인구 마냥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으로 개성들이 넘친다. 모두 하얀 불상으로 작은 불상은 대부분 석고상(
石膏像)이고, 큰 불상은 돌로 만들어졌다.


▲  천불전 천불 (천불상이라 쓰고 천오백불이라 부르면 됨)

문을 열고 적막이 깃든 천불전으로 들어서니 가운데 큰 불상을 비롯하여 1,500의 불상이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정면으로 쏠리는 1,500의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
울 정도이다. 마치 1,500의 관중 앞에 선 음악가나 연기자가 된 기분이랄까..? 나는 수줍게 향
로에 향을 피우고 3배를 올린 다음, 사진을 찍고 나왔는데, 나의 깜짝 공연이 그들에게 썩 마음
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  똑같은 모습은 하나도 없는 가지각색의 천불들

천불을 조성하던 당시 승려와 민중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것은 아닐까? 저 많은 불상을 만
드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텐데, 얼굴 표정(즐거운 표정, 신나는 표정, 귀여운 표정, 우울한
표정,.)과 머리칼(나발과 소발), 덩치(큰 덩치, 작은 덩치, 키다리), 옷, 그리고 자리까지(연화
좌를 갖춘 불상도 여럿 있음) 모두 다르게 만들어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다. 이는 투철한 장인
정신과 불심(佛心)이 빚은 정성 어린 작품들이라 하겠다.


▲  불단이란 관중석에 앉아 나의 공연을 구경하는 천불의 위엄

▲  흐릿한 눈빛의 불상
불상이 하도 많아서 슬쩍 하나 가져가도 모를 것 같다. 기분 같아서는 집에 하나
가져오고 싶은데, 내가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해 마음 속으로만 그러고 말았다.

▲  천불선원 앞에서 바라본 향천사 경내
나무들이 시야를 좀 방해하긴 하지만 보는 데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천불선원 앞에 자라난 나이 350년의 느티나무
(예산군 보호수 8-13-1-252호)

너무 장대하게 오래 살아서 자신의 나이도 아마 모를 것이다. 추정 나이는 350년 정도라고 하며,
높이는 20m로 천불선원에 늘 그늘을 드리워준다. 장대한 세월을 먹고 자란 그의 허리 둘레는 약
3.1m이다.


 

♠ 향천사 마무리

▲  천불선원에서 부도, 서래암(西來庵)으로 가는 길

천불선원에서 서쪽으로 작은 계곡을 하나 더 건너면 금오산 등산로와 함께 'ㄱ'모양의 기와집이
눈에 진하게 들어올 것이다. 그 기와집은 서래암이란 건물로 별도의 암자가 아닌 향천사 소속의
불전이다. 그 서래암 옆에는 부도 4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들 가운데 고색이 좀 짙은 2
기를 주목하기 바란다.


▲  향천사 부도군(浮屠群)

▲  향천사 의각/멸운의 부도(가운데는 멸운의 탑비)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9호

부도 4기 가운데 왼쪽에 검은 때가 자욱한 부도는 절을 세웠다는 의각의 부도라고 전하여, 오른
쪽에 대추처럼 생긴 부도는 16세기에 활약했던 멸운의 부도이다.

까무잡잡한 피부로 상당한 고색이 느껴지는 왼쪽 부도는 두툼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약간 동그란 탑신을 얹혔다. 그리고 8각형의 지붕돌을 올리고, 머리장식으로 꼭대기를 마
무리한 제법 수려한 모습이다.
기단부 아래 받침돌은 8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구슬을 이은 듯한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무늬를 새겼으며, 위에는 잎을 아래로 한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 받침돌은 8개 모서리에 기
둥을 새기고 각 면마다 불교의 법을 지키는 이들을 조각해 부도의 건강을 기원했다. 윗쪽 받침
돌에는 잎을 위로 향한 연꽃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에 서까래를 표현했고, 윗쪽 면에는 모서리
마다 조각을 돌출되게 새겨 아름다움을 보탰다. 그리고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을 두었는데, 가
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에 근래에 새로 얹힌 새하얀 피부의 장식을 얹혀 놓아 아까 9층석탑처럼
약간의 어색한 조화를 선보인다.

절에서는 이 부도를 의각의 승탑(僧塔)이라고 주장하는데, 만약 그게 맞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탑이 된다. 허나 해동(海東)에서 부도가 등장한 것이 신라 후기이므로 이는 전혀 근
거가 없다. 부도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승려의 사리는 그냥 자연에 뿌리거나 부도와는 다른 별도
의 시설에 봉안했다고 한다. 의각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신라 승려 자장율사(慈藏律師) 같
은 경우는 사리를 석혈(石穴)에 봉안했다고 전하며, 그보다 이른 신라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일
반적인 3층석탑에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이 부도의 조각 수법을 볼 때 이르면 고려, 늦어도 조선 초기 것으로 여겨지며, 향천사를
거친 이름 모를 승려의 탑을 의각의 것으로 둔갑시킨 모양이다.


▲  검은 피부의 왼쪽 부도
위에만 하얗고 나머지는 까무잡잡하여 마치 위에만 고양이 세수로 씻은 듯 하다.
위에 얹혀진 옥의 티가 아니더라도 제법 수려한 부도임은 분명하다.

▲  온갖 무늬로 정신이 없는 부도의 기단부

▲  부도의 머리 부분


▲  멸운당대사의 비석

오른쪽에 자리한 대추 모양의 부도는 멸운의 부도이다. 그 옆에 멸운의 비석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한 듯 싶다.
이 부도는 두툼한 바닥돌 위에 8각의 기단을 두고 대추 모양의 탑신을 올렸으며, 그 위를 지붕
돌로 마무리한 형태로 일종의 석종형(石鐘形) 부도이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밑에
는 면마다 2개씩의 액자 모양을 새기고, 윗쪽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지붕돌은 밑쪽에 서까래
를 새기고, 모서리마다 돌출된 조각을 두어 왼쪽 부도에 비해 다소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부도의
조그만 화려함을 불어넣었다. 그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검은 부도와 멸운의 부도 사이에 솟아난 멸운당 비석은 뒤쪽에 '강희(康熙) 47년 무자월일립(戊
子月日立)'이라 쓰여있어 1708년에 세워졌음을 귀뜀해 준다. 비석의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해 멸운의 부도보다 더 고색의 기운을 풍긴다.

▲  멸운 부도 옆에 새롭게 자라난 부도

▲  향림당대용선사(香林堂大用禪師, 1921~
2006)의 부도


▲  겨울에 잠긴 향천사 동쪽 금오산 산길
소쩍새가 우는 그날 거추장스러운 설피(雪皮)를 걷어차고 기지개를 켜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1시간 가량 향천사를 정신 없이 둘러보니 시간이 어느덧 점심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내 곳
곳에 흩어진 승려들이 종소리에 공양간으로 우루루 몰려가면서 겨울 산사의 적막함은 더욱 진해
졌다. 혹여 공양(供養)에 낄 수 있을까 싶어서 새가슴마냥 공양간 주변을 조금 기웃거려봤지만
먹고 가라는 손길은 없었다. 그래서 쿨하게 체념하고 향천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무거
운 발걸음을 하였다.
일주문에 이르니 밖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던 번뇌(煩惱)가 반가이 나를 맞이해 준다. 이렇게 하
여 향천사 새해 맞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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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우리나라 민속마을의 성지 ~ 아산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외암리의 자랑, 돌담길

 


름 제국(帝國)을 몰아낸 가을이 한참 천하를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아산(牙山)
외암리민속마을을 찾았다.
일행들은 전날 당진(唐津) 왜목마을로 여행을 갔는데, 그들은 왜목 남쪽인 장고항에서 1박을
머물렀다. 나는 일이 있어서 함께 가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곳으로 달려가 9시에 도
착했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장고항 서쪽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어 서해바다와 장고항이 훤히 바라
보인다. 일행들과 어울려 아침을 먹고 시간을 때우니 어느덧 방을 비워야 될 시간이 문을 두
드린다. 그래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단 삽교호(揷橋湖)를 거쳐 상경하기로 했다.

삽교호방조제 서쪽에 터를 닦은 삽교호관광지는 가을 행락객과 수레들로 그야말로 만원을 이
룬다. 바닷가에 만든 삽교호함상공원에는 해군 함정을 개조한 함상까페가 있는데, 이곳은 미
운 수준의 입장료를 내야되서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함상공원 외에 북쪽 갯벌 위에 나무 다
리를 놓아 산책로를 내었는데, 여기서 서해대교가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조개구이와 회 등 해산물을 다루는 식당과 가게들이 즐비하여 먹거리
와 수산물시장으로서의 비중이 더 크다.

이렇게 삽교호 관광지를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되었다. 일행 대부분은 피곤함으로 인해 일
찍 상경하고 나를 포함한 팔팔한 7명은 그냥 가기가 아쉬워 주변 명소를 더 둘러보기로 하였
다. 내가 여러 곳을 제시했는데, 처음에는 안성(安城)의 모처로 길을 잡았으나 삽교호방조제
를 건너자 바로 마음이 변해 외암리 민속마을로 방향을 틀었다. 삽교호방조제를 넘으면 아산
땅이고 서일농원은 거리도 제법 머니 아산 지역의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편의상 좋을 것이다.

유난히 신호등이 안받쳐주는 아산시내를 간신히 지나 송악에서 동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외암
리이다. 마을 주차장은 이미 수레들로 완전 초 만원, 마을은 그야말로 나들이 인파로 넝실넝
실 파도를 이룬다. 수레를 세울 데가 없어 주차장을 몇 바퀴를 돌아서야 간신히 공간이 나와
그곳에 수레를 쑤셔 넣었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동쪽 개울(외암천) 건너가 외암리민속마을이다. 그 마을로 들어서려면 돌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
본다. 그래서 일단 입장권(2,000원)을 구입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자 적당한 주막을 물색했다.
허나 주막마다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여기저기 서성인 끝에 매표소에서 50m 떨어진 주막에 간
신히 자리를 잡았다.

외암리도 식후경이라고 허기진 배를 위로하고자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간단히 묵밥과 잔
치국수를 먹기로 했다. 둘 다 가격은 7,000원 선으로 시중보다 조금은 비싼 수준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었다. 여기서 먹지 않으면 언제 먹을지 기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주문했으나 주문량이 가득 밀려 그들을 먹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일찌감
치 나온 밑반찬 김치를 젓가락으로 축내며 애타게 기다리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같았다.
한 20분 정도 기다리니 그렇게나 고대하던 밥과 국수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나는 묵밥을 먹
었는데, 외암리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그냥 이 땅의 평범한 묵밥 수준, 너무나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 동동주 1잔씩을 겯드리며 늦은 점심을 마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외암리민속마을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외암리마을 주막에서 먹은 묵밥의 위엄


♠  500년 묵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중요민속문화재 236호


▲  논밭이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설화산(雪華山, 440m) 서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외암리는 이 땅에 몇 안되는 오래된 민속마
을로 무려 5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자연 환경을 잘 살린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한결같이
옛 모습을 잃지 않아 마을로 발을 들인 순간 조선 후기로 강제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수많은 건축가와 조경전문가들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격찬했으며, TV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아 '태극기 휘날리며'.'취화선','야인시대(SBS)','찬란한 여명(KBS)','임
꺽정(SBS)' 등이 앞다투어 이곳을 거쳤다.

예안이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재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9채의 오래된
기와집과 60여 채의 초가를 비롯해 70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물
레방아 북쪽에 조성된 외암민속관의 기와집과 초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
며,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농업과 음식점, 전통음식 제조/판매로 생계를 꾸린다.

이곳 외암리에 처음 터를 닦은 집안은 '평택진씨' 집안이라고 한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살
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세기 초반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맏사위로 예안이씨 온양파의 시조
인 이사종(李嗣宗)이 들어오면서 마을의 역사가 싹 바뀐다.
이사종은 그 시절 관습에 따라 처가살이―이 풍속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짐―를 했는데, 진한평
이 죽자 그 재산은 딸 3명(아들은 없음)에게 분배―조선 중기까지 부모의 재산은 아들, 딸 모두
에게 균등 분배되었다―
되었다.

이사종의 후손이 번창하면서 외암리는 예안이씨의 터전으로 거듭났으며, 많은 선비와 학자, 과
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숙종 때 대학자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
이 있으며, 11명의 생원(生員), 진사(進士)를 배출했다. 과거 급제자로는 고종으로부터 퇴호거
사란 호를 받은 이정렬(李貞烈, 1868~1950) 등이 있다.

▲  마을 앞에 놓인 섶다리

▲  외암리의 주산(主山)인 설화산

마을의 이름인 '외암'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마을 서쪽에 '시흥역'이란 역
참(驛站)이 있었으며, 그곳의 말을 오양골(현재 외암리)에서 길렀다고 한다. 그 '오양'에서 '외
암'이란 이름이 나왔다는 설과 '외암(巍巖) 이간' 선생의 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의 구조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집들 대부분이 지형의 영향으로
서남향을 취하고 있다. 마을 서쪽과 몇몇 초가 뜰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며, 북쪽과 동쪽으
로 설화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어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설화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마을 동쪽을 거쳐 돌다리 부근에서 광덕산 강당골에서 시작된 외암천
을 만나 마을 북쪽으로 흐른다. 그 냇물을 끌여들여 마을 안에 인위적으로 조그만 물길을 만들
었는데, 이 물줄기는 마을의 여러 집을 거치면서 물을 제공해주며 곳곳에 곡수(曲水)와 아름다
운 연못을 만들어 마을을 한층 아리땁게 수식한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설화산은 불을 상징한다고 하여 마을에 물길을 만들어 화기(火氣)를 막고
자 하는 이른바 방화수(防火水)의 역할도 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멘트를 바르거나 현대식으로 개조된 집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전통민속
마을로 지정되면서 국가 지원으로 '옛 모습 되찾기 사업'을 벌였고, 마을 주민들의 흔쾌한 참여
와 협조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외암리에는 오래된 기와집이 9채 정도 있는데, 이들은 마을에서 꽤 권세있고 떵떵거리던 양반가
이다. 이들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집을 세운 이의 관직명이나 연고 지명을 따라 참판댁,
감찰댁, 참봉댁, 송화댁, 영암댁(건재 고택), 신창댁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모두 조선 말에
지어진 것으로 크기는 작지만 반가(班家)의 기품이 고스란히 깃들여져 있으며, 집주인의 공간인
사랑채와 아녀자의 공간인 안채, 그리고 제사공간인 가묘(家廟)를 갖추고 있고, 오래된 나무와
수석 등이 어우러진 전통정원을 지녔다.

이들 기와집 중에서 건재고택(영암군수댁)이 외암리 기와집의 대표격인데 사랑채 정원에는
소나
무와 은행나무 등을 마당 전체에 심고 왜국(倭國)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전통과 외래
조경이 섞인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어 주목을 끈다. 또한 설화산에서 내려온 계곡
의 물줄기가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하는 특이한 조경을 지녔는데, 특히 한국 음식 3대
명가(名家)의 하나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퇴호거사 이정렬이 살던 참판댁은 툇마루 위에 영친왕(英親王)이 9살에 쓴 '퇴호거사(退湖
居士)란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어 답사객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 집은 외암리의 명물이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연엽주(蓮葉酒)로 유명하다. 이 술은 찹쌀로 빚은 누룩에 연근과 솔잎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술로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다고 하며, 충남 지방무형문화재 11호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과 장독대

▲  초가3간

마을을 이루고 있는 약 60여 채의 초가는 일반 백성들이 살던 집이다. 기와집과 달리 소박하고
단촐한 모습으로 초가삼간(草家三間) 그 자체이다.
현대화의 거친 물결에 그 개체수가 급속히 줄어들어 이제는 오래 숙성된 마을이 아니면 만나기
조차 힘든 초가, 하루 정도는 머물고 싶은 정겨운 우리의 옛 집이다. 하지만 그 집에 아예 눌러
살고 싶은 생각은 눈꺼풀만치도 없다. 왜냐? 나도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초가 대부분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집이란 아무리 오래되고 고귀한 집이라도 사람이 살고 있어
야 집으로써의 빛과 가치를 발한다. 사람의 때가 가득한 집은 건강 상태가 좋은 반면 텅 비어있
는 집은 아무리 건실하게 지어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즉 사람의 손때가 집의 수명을 연장시
키는 비결이라 하겠다.

초가(집)의 형태는 'ㅡ', 'ㄱ'자형이 주류를 이루며, 집 내부를 옹성처럼 가린 'ㅁ'자형도 간혹
눈에 띈다. 뜰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 사과나무 등이 넓게 그늘을 드리워 주며, 몇몇 집은 작
은 텃밭을 갖추었다.

외암리의 자랑은 바로 돌담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을 찾은 나그네의 눈과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
는 마을의 상징으로 그들로 하여금 외암리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만든다.
마을 돌담의 길이는 무려 5.3km에 이른다고 하며, 높이는 거의 1.5m~2m 정도이다. 일종의 들여
쌓기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초가와 기와집, 경작지의 담장 및 경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돌
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 마치 조그만 석성(石城)을 보는 듯 하다.

근래 시골마을의 돌담길이 계속 사라지자 문화재청에서 뒤늦게나마 몇몇 돌담길을 문화재로 지
정해 역사의 뒤안길로 가려고 하는 돌담길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누렇게 익은 초가

▲  돌담길

담장 너머로 마구 가지를 늘어트린 정원수들은 단순하고 밋밋한 돌담을 더욱 멋드러지게 수식한
다. 가을에는 머리 위로 잘 익은 감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돌담길, 그 길을 거닐면 누구나 사색
가가 되고 시인(詩人)이 되며, 조선시대 사람이 된다. 돌담길은 그야말로 과거로 통하는 타임머
신인 셈이다.
저 돌담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치 어디엔가 빨려 들어가듯 그 끝을 향해 부지런히 발길
을 재촉한다. 정겹다 못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은 돌담길의 풍경~ 그 무거운 돌담을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아 사진으로 대리만족을 하련다.

마을에는 오래된 민속 유물이 즐비하다. 집집마다 디딜방아와 물레방아, 연자매, 상여, 장독대
등이 가득해 옛 생활상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기와집 부엌

▲  그네 타기

※ 외암리 민속마을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아산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유구 방면 직행버스(1일 7회)를 타면 외암리 입구인 송악에서 내려준다.
  여기서 외암리마을까지 도보 10분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대천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에서
  하차
*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창행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 하차 (1시간에 1~2회꼴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인천과 수원, 청주, 대전(동부)에서 아산행 직행버스 이용
* 천안시외/고속터미널과 천안역(동부)에서 아산(온양온천역, 아산터미널)행 900번대 시내버스
  가 수시 운행
② 현지교통
* 온양온천역(1번 출구를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과 아산터미널 건너
  편에서 아산시내버스 100, 101번을 타고 역촌1리에서 내리거나 송악면환승센터 종점에서 내린
  다. <역촌1리에서 도보 10분, 송악면환승센터(외암리마을 제2주차장)에서 도보 5분>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은 2곳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경부고속도로 → 천안나들목 → 아산 방면 21번 국도 → 장존교차로에서 송악 방면 → 외암3
  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4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리민속마을

※ 외암리 민속마을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000원 / 어린이,학생,군인 1,000원 (3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민박 손님
  과 아산 시민은 공짜)
* 입장시간 : 9:00 ~ 17:30
* 먹거리는 매표소 부근에 잔치국수와 묵밥, 도토리묵, 두부김치, 파전, 동동주 등의 식사를 파
  는 식당이 여럿 있으며, 물레방아 서쪽 외암민속관에서 떡과 식혜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 매년 10월에는 외암리의 대표 축제인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보통 3일 일정으로 열리며, 국악
  과 연극 공연을 비롯하여 관혼상제, 짚풀 만들기, 추수, 공장(工匠) 체험, 과거시험 등의 다
  양한 행사와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다.
  (그 외에 음력 1월 14일에 장승제가 열리나 이건 마을 사람들의 전통의식 행사임)
* 오래된 초가와 기와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외
  암리에는 20여 채의 가옥이 민박을 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4명에서 20명까지 다양하며, 취사
  도구와 현대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불편한 점은 별로 없다. 가격은 6만원에서 20만원선
  (입실은 14시, 퇴실은 11시까지이며, 바베큐도 가능함, 외암리마을 홈페이지에서 예약)
* 농촌체험(모내기 체험) 및 전통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공방체험과 다듬이체험 등은 주말
  에 상시적으로 체험이 가능하며, 떡메치기체험은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주말에 운영한다.
* 외암민속관 주변에서 투호, 줄타기, 곤장치기, 짚풀 새끼꼬기, 다듬이, 떡매치기, 그네타기
  등을 무제한으로 체험할 수 있다.
* 외암리는 관광지이자 문화유산이기 이전에 주민들이 사는 생활공간이다. 허락 없이 들어가 집
  안을 기웃거리는 일이 없어야 되며,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을 삼갈 것, 비공개 기와
  집과 초가는 그냥 담장 밖에서 바라보면 된다.
* 시간이 된다면 외암리 안쪽 강당골도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외암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84 (외암민속길 42-7 ☎ 041-540-2654, 541-0848)
* 외암리민속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민박, 축제, 전통/농촌체험 등)


▲  마을 동남쪽에 만든 코스모스 밭 너머로 바라본 외암리마을과 설화산


♠  돌다리, 물레방아 주변

▲  외암천에 발을 담군 돌다리를 건너면서 조선 후기로의 과거 여행이
시작된다. 돌다리는 마을로 들어서는 관문의 역할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속세에서 외암리마을로 들어가려면 매표소 북쪽에 난 돌다리를 건너야 된다. 그 다리 외에는 딱
히 이어주는 공간이 없다. 입장료 아낀다고 괜히 대놓고 개울을 건너거나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  외암 이간 신도비(神道碑)

매표소 남쪽에는 훤칠한 키의 비석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딱 봐도 예사롭지 않은
모습인데, 그에 대한 안내문이 없어 사연을 모르는 관광객 태반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외암
리마을에 눈이 먼 나머지 눈길 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비석을 외암리마을의 내력(
來歷)을 담은 사적비(事蹟碑)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외암 이간의 신도비였다.

이간(李柬, 1677∼1727)은 외암리 출신으로 마을 이름을 그의 호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
로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니 외암리에 왔다면 그의 신도비와 묘소를 둘러보는 것
이 외암리와 이간에 대한 당연한 예가 아닐까 싶다.

이 비석은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비문(碑文)을 썼다. 나중
에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다시 쓰고, 이간의 6세손인 이정렬(李貞烈)이 고쳐 썼으며, 원
래는 이간 묘소 앞에 있던 것을 관리를 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물레방아를 품은 초가와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초가 오른쪽)

▲  반석에 새겨진 바위글씨 동화수석(東華水石), 외암동천(巍岩洞天)

물레방아 동쪽 바위에는 2개의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다리 밑에 있음
에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이들은 별로 없는데, 내 일행들 역시 물레방아만 보였지 글씨까지는
몰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셈이다.

이들 바위글씨는 서쪽에는 동화수석(東華水石), 동쪽에는 외암동천(巍岩洞天)이라 새겨져 있는
데, 동화수석 글씨는 높이 50cm, 너비 2m 크기이다. 그 우측에는 기미(己未)란 글씨가, 좌측에
는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쓰여 있어 이백선(1893~1969)이란 인물이 기미년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 기미년은 언제일까? 그 유명한 3.1운동이 일어난 해가 바로 기미년(1919년)
이다. 이백선의 생애에서 기미년은 1919년 딱 하나 뿐이므로 자연히 1919년이 된다. 그리고 동
화는 우리나라를 뜻한다.
외암동천 글씨는 높이 52cm, 너비 175cm로 끝에는 이용찬서(李用瓚書)라 쓰여 있어 이용찬이란
사람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용찬은 이간의 후손으로 해방 이후 판사를 지냈다.

외암동천에서 외암은 당연히 마을의 이름이고, 동천(洞天)은 신선들이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물레방아 주변 개울가에 넓은 반석이 깔려있고 나름
대로 괜찮은 풍경을 자아내니 이용찬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또한 이곳은 외암리 사람
들의 피서 장소이기도 하다.


▲  외암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외암천 (정면에 보이는 다리가 섶다리)

▲  원두막과 장승 (돌다리 북단)
돌다리를 건너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외암민속관,
전통민속체험장으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외암리마을이다.

▲  식혜와 떡을 파는 초가집 매점
여기서 떡메치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식혜와 인절미는 2,000원 선으로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제법 많다.


♠  외암민속관, 외암 이간묘 주변

▲  제각각의 표정과 개성을 지닌 장승들
그들의 익살스런 모습에 마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는
자신의 본분조차 잊고 돌아설 것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

▲  기와집 동쪽에 조성된 정자와 연못

물레방아 북쪽에는 외암민속관과 그곳에 딸린 초가와 기와집, 전통문화/민속놀이 체험현장이 있
다. 외암민속관 일대는 얼핏보면 외암리마을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별도의 공간으로 전통
가옥과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및 외암리마을의 보조를 위해 근래에 터를 다졌다.

이곳에 있는 집들은 거주용이 아닌 전시용으로 한국민속촌의 가옥처럼 실제에 가깝게 재현되어
있으며, 민속관에는 이곳을 거쳐간 드라마, 영화와 관련된 상영물과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또
한 전통혼례를 비롯하여 방망이 다듬이, 줄타기, 투호, 제기, 새끼꼬기, 곤장치기 등을 온몸으
로 즐길 수 있으며, 옛날 농사 기구와 생활유물을 기와와 초가, 그 주변에 골고루 배치하여 볼
거리를 가득 선사한다.


▲  장독대와 짚풀로 만든 김치의 보금자리 김치각
옛날 단양(丹陽) 시골집에 저런 김치각이 있었는데(1990년대 초반까지) 이제는
민속촌이나 고택(古宅)에서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제아무리 김치냉장고가 설친다 한들 김치각의 김치만은 못할 것이다.

▲  서로 쌍둥이 같은 김치각
갑자기 김치각의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 어디가야 흔쾌히 먹을 수 있을까..?

▲  기와집 서쪽에 초가 창고

▲  이제는 듣기조차 힘든 다듬이 체험 현장
겉으로는 엄청 쉬워 보이는데, 실제로 해보니 많은 요령이 필요하다.

▲  투호놀이 현장
저 동그란 통에 투호를 골인시키는 것이 은근히 어렵다.
10번 던져서 1~2번 가까스로 들어갈 정도니 말이다.

▲  줄타기 현장
줄의 거리는 짧아도 저기에 발을 올리면 엄청 길어 보일 것이다.
남의 도움 없이 줄을 완전히 통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거의 5m도 못가서 줄 밖으로 떨어졌음~~

▲  짚풀 새끼꼬기 현장
원두막에 앉아 한가롭게 새끼를 꼬는 것도 보기와 다르게 쉽지가 않다.

▲  곤장 체험 현장
저기에 십(十)자 모양으로 누워 무지막지하게 생긴 곤장을 맞는 현장.
겉으로 보면 별로 아프지 않을 것 같지만 제대로 맞으면 정말
일어나지도 못한다.
곤장 체벌에는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이 있는데,
태형은 곤장 50대, 장형은 100대이다.

▲  누런 초가집의 뒷모습

▲  전통민속체험장, 외암민속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원두막 3형제

▲  비스듬히 누워있는 돌부처(마애불)

석축 밑에 고된 몸을 기대고 선 돌부처, 깨진 돌조각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마애불(磨崖佛
)로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며, 살며시 미소를 선보인다. 불상 앞에
는 중생들이 소망을 들이밀며 얹혀놓은 돌들이 모이고 모여 조촐한 돌탑을 이루고 있다.
이 석불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며, 마을 부근에서 수습해 온 것으로 보인다.


▲  외암리마을의 성지(聖地), 외암 이간 묘소

전통민속체험장 서북쪽으로 송림(松林)이 우거진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밭
을 거쳐야 되는데, 밭 입구에 설치된 조그만 문을 열고 그 언덕을 100m 가량 들어가면 외암리가
낳은 대학자이자 이곳의 성역인 외암 이간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묘소는 이간과 그의 부인 파평윤씨의 합장묘(合葬墓)로 봉분의 크기는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다. 봉분(封墳) 앞에는 무덤의 주인이 적힌 비석과 상석(床石)
밖에 없어 정말 조촐한 모습이다. 대신 소나무가 울창하여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있으며, 남쪽
과 서쪽이 확 트여 경치는 좋다.

외암 이간은 1727년 3월 14일에 50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그해 5월 온양군 유곡에 무덤을 썼는데,
1961년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여 마을 곁에 있게 했다. 신도비 역시 마을로 옮겨와 매표소
부근에 두었다.

이곳은 보통 문(밭 입구에 있는 문)이 닫혀져 있고 적당한 안내문이 없어서 속사정을 모르는 대
부분의 속인들은 거의 찾지 않는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들어오는 소수의 공간이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기와집과 누런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외암리마을 둘러보기

▲  논과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서부

500년의 장대한 역사를 간직한 외암리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규모가 크다. 동서의 길이가 거의
500여m에 이르며, 외암민속관 주변을 포함하여 구석구석 살펴보려면 사진 찍는 시간과 이동시간
을 고려해도 적어도 5~6시간 이상은 걸린다.
허나 관광객 대부분은 마을의 절반도 살피지 않고 가버린다. 그래서 매표소와 거리가 멀수록 사
람의 수는 반비례하여 사람 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마을 서쪽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데, 초가들이 그런 논과 어우러져 목가적(牧歌的)이고 편
안한 풍경을 연출한다.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어 눈이 번쩍 뜨며,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이삭은 고개를 숙이며, 가을 추수의 기쁨을 기다린다.


▲  풍년예감 ~ 외암리 평야

▲  교수댁 앞에 놓인 빛바랜 디딜방아
곡식을 찧는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고 전통체험 및 호기심 충족을
위한 관광용으로 살아가고 있다.

▲  양반가의 품격이 드러난 교수(敎授)댁

교수댁은 외암리를 이루고 있는 9개의 오랜 기와집의 하나로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李容九,
1854~?)가 경학(經學)으로 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를 지냈다고 해서 속편하게 교수댁이라 불린
다.

원래는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별채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았다.
굳게 입을 봉한 대문 앞에 좌절하며 길을 돌아서기는 했지만 10월 중순 짚풀문화제 때는 쿨하게
대문을 연다고 하며, 그때는 전통성년의식과 야생화전시회 등이 열린다.


▲  굳게 닫힌 교수댁 대문 - 대문짝에는 위정자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국태(國泰), 민안(民安)이 쓰여있다.

▲  담장 너머로 본 교수댁
교수댁은 양반가이지만 기와를 얹힌 담장이 아닌 외암리에서 통용되는
수수한 돌담을 집 주변에 둘렀다.

▲  버드나무가 길게 생머리를 늘어뜨린 교수댁 앞길

▲  건재고택<(建齎古宅) 영암군수댁) - 중요민속문화재 233호

건재고택은 외암 이간의 5대손이자 전라도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던 이상익(李相翼, 1848~
1897)이 살던 집이다. 그가 영암군수를 지냈다고 하여 영암군수댁이라 불리기도 하며, 외암 이
간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간의 집과 현재의 집은 자리만 같은 뿐, 완전 틀림)

이상익이 기존의 집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고, 그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 때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는데, 이욱렬의 호인 건재(建齋)를 따서 건재고택이라 불린다. 현재는 그게 정식 명
칭이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나무광과 곳간채, 가묘를 부속으로 두었으며, 사랑채 앞에는
자연경관을 위주로 정원을 만들어 연못과 정자를 만들었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감나무 등의 나
무를 마당 전체에 심고, 왜열도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우리의 전통식과 왜열도 조경이
혼합된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가게 했는데, 연못자리에는 원래 별당이 있었다고 한다.
담장에는 기와를 얹혀 다른 집과 차별을 두었고, 집안에는 300여 점의 오래된 유물이 보관되어
집의 가치를 더욱 돋군다. 특히 이간의 교지(敎旨)는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이나 장소에 제
일 먼저 정착한 사람)의 근거자료가 된다.

외암리마을의 대표적인 기와집으로 평상시에는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발길을 돌려야 된다. 다만
짚풀문화재 때는 관람이 가능하며, 전래동화극을 상영하기도 한다.


▲  건재고택의 사랑채 정원 (담장 너머에서 찍음)

▲  건재고택 앞에 푸르게 자라난 은행나무 (예전 봄에 찍은 사진)

▲  참판댁 사랑채 - 중요민속문화재 195호

외암리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는 참판댁이라 불리는 넓은 기와집이 있다. 이 집은 외암리가 낳은
위인의 1명, 퇴호 이정렬(退湖 李貞烈, 1868~1950)이 살던 곳으로 고종 때 이조참판(吏曹參判)
을 지냈다. 그래서 참판댁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정렬의 할머니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의 이모로 그런 인연으로 황후와 친분
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들은 촌수로 어떻게 되는지..?) 황후는 그에게 필묵과 첨지(籤紙)를 하
사했으며, 17세에 황후에게 왜국을 경계할 것을 진언했다고 한다.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나, 1902년 왜국에 빌붙어 나라를 말아먹는 고위관
료들의 꼬락서리를 보다 못해 그들의 처벌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허나 그것이 통할 리는 없을
터, 그 뜻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그는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외암리로 낙향,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지역 항일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  참판댁에 걸린 퇴호거사(退湖居士) 현판

참판댁에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고종의 아들인 영왕(英王=영친왕)
이 9살에 친히 쓴 현판이다. 이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로 이정렬은 이 현판을 매우 애지중지했다
고 한다. 퇴호거사란 이름은 이정렬의 또 다른 호로 고종이 내린 이름이다.


♠  외암리마을 마무리

▲  마을의 오랜 내력이 차곡차곡 화석(化石)을 이룬 외암리 돌담길

▲  인적이 없는 어느 외암리 돌담길
맨몸이 허전했던 탓일까? 추위에 약한 탓일까? 아니면 치장하고자 함일까?
수풀과 꽃으로 몸을 덮은 돌담이 적지 않다.

▲  늦가을도 가는 길을 멈추고 쉬어가는 외암리 돌담길
돌담 위에 여장만 설치하면 영락없는 성곽(城郭)이나 보루(堡壘)가 된다.

▲  서로 대비되는 돌담길 (녹음이 우거진 건재고택 입구)
왼쪽 돌담은 기와가 입혀지고 뭔가 있어 보이는 양반가 담장,
오른쪽은 성처럼 쌓여진 수수한 모습의 서민가 담장

▲  600년 묵은 느티나무 - 아산시 보호수 8-89호

외암리마을을 남북으로 가르는 간선 골목길 중간, 건재고택 부근에 600년 묵은 느티나무가 넓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21m, 둘레 5.5m에 이르는 외암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
무로 장승제가 열리는 음력 1월 14일에 목신제(木神祭)를 지낸다.

나무의 나이가 600년을 넘었다고 하니 마을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며, 마을의 흥망성
쇠를 묵묵히 지켜보며 마을을 지키던 당산(堂山)나무이자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쉼터와 그
늘을 제공하는 정자나무로써 이곳의 보석 같은 존재이다.


▲  논과 어우러진 마을의 동남부 ▼


▲  서서히 황금빛으로 도약하는 외암리 들녘

▲  사람과 가을꽃의 일그러진 만남 ~ 사람은 싱글벙글, 꽃은 시름시름.
인증샷을 찍는 것도 좋지만 너무 코스모스를 괴롭히지는 말자~~!

▲  가을의 아름다움이 모두 이곳에 깃들여진 듯 하다.

점심 먹는 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 정도 마을을 둘러봤다. 욕심 같아서는 송화댁이 있는 안쪽까
지 들어가고 싶었으나 일행들의 요구로 절반만 둘러보고 길을 돌아섰다. 어차피 예전에 대부분
둘러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 그리 아쉬울 것은 없다. 게다가 일행들은 나를 빼고
전날 밤새고 술마신 탓에 많이 지쳐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외암리 가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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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1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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