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권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4.07.02 충남의 조그만 금강산, 기암괴석이 일품인 홍성 용봉산 (용봉산 자연휴양림)
  2. 2013.08.27 태안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마도, 서해갯벌, 안흥성...)
  3. 2013.03.04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4. 2012.04.21 예산 윤봉길의사기념관 (윤봉길 유품)
  5. 2012.03.21 계룡산 늦겨울 산행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6. 2012.03.10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동학사 (동학사계곡)
  7. 2011.03.14 계룡산 갑사
  8. 2011.03.02 계룡산 삼불봉, 금잔디광장
  9. 2010.02.23 서산 해미읍성 (호야나무)
  10. 2010.02.19 태안 안흥성

충남의 조그만 금강산, 기암괴석이 일품인 홍성 용봉산 (용봉산 자연휴양림)

 


' 홍성 용봉산(龍鳳山) 나들이 '

▲  신경리에서 바라본 용봉산의 위엄


♠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新耕里 磨崖如來立像) - 보물 355호

봄이 천하만물의 폭발적인 성원에 힘입어 반년 가까이 지구 북반구를 지배한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를 진정시키던 4월 첫 무렵 주말에 홍성 용봉산을 찾았다.

용봉산은 충남의 금강산(金剛山)으로 널리 칭송 받는 산으로 주말에는 천하 곳곳에서 달려온 산
꾼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용봉산 등산로의 주요 기점인 구룡대(九龍臺)를 시작으로 나를 이곳으
로 부른 용봉사(龍鳳寺)를 둘러보고 우측으로 난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이 모습을 비춘다.

신경리 마애불은 하늘로 솟은 바위 피부에 얕게 감실(龕室)을 파고 4m 높이에 석불을 돋음새김
으로 새긴 것으로 용봉사의 옛 유물이다. 용봉사 법당(法堂)은 원래 이곳에 있었다 하며, 1906
년 평양조씨 집안의 명당을 향한 집착으로 건물은 사라지고 마애불만 외롭게 남게 되었다. 마애
불 앞은 법당을 비롯해 3채 정도는 거뜬히 지을 수 있는 평탄하고 너른 공간으로 현재는 예불을
올리는 네모난 야외 기도처가 닦여져 있으며, 숲과 살을 댄 공간 모서리에는 의자를 여럿 두어
나그네로 하여금 잠시나마 마애불의 외로움을 달래주도록 배려했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이 석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민머리 위에 육계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몸통보다
진하게 새겨져 있는데 살이 많아 보이며,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의 마음을 다
독거린다. 눈썹은 서로 마주보며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고, 눈은 완전히 감았다. 그리고 코는
무심한 세월과 무지한 이들의 장난으로 흔적만 남았다.
 
몸통에 걸친 법의(法衣)는 목 밑에서 여러 가닥의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밑에는 가느다란 선으로
처리되었으며, 석불을 받치는 광배(光背)는 바위 피부를 이용해 희미하게 윤곽선만 나타내어 지
나치기가 쉽다.

용봉사 경내 밑에 자리한 마애불처럼 머리와 상체 부분만 진하게 나와있고, 아래로 내려 갈 수
록 양감(量感)이 정비례로 떨어져 조금은 부족한 인상을 남긴다. 다행히도 용봉사 마애불보다
건강 상태도 좋고 선명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눈으로 확인하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앞 너른 공간 (1)
용봉사 법당이 있던 자리로 여겨진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앞 너른 공간 (2)
숲 너머로 용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악귀봉이 보인다.

▲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에서 바라본 병풍바위의 위엄 (용봉산 동쪽 능선)

신경리 마애불 앞에 뿌리를 내렸을 법당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곳에 올라서면 동쪽 너머로 병
풍바위가 위엄을 부리고 있고, 악귀봉을 비롯한 용봉산의 주요 봉우리가 가까이에 보인다. 또한
용봉사와 신경리, 상하리 일대가 훤하게 바라보여 조망(眺望)도 그런데로 괜찮다. 그런 조망을
낀 능선 정상부에 있으니 그 위풍과 경관은 자못 대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의순 무덤에는 요
사와 선방 등 주요 건물을 세워 법당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실제와 달리 체감 면적도 넓게 보
이도록 했다.

이렇게 마애불을 둘러보고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가 계획에도 없던 용봉산 종주를 단행했다. 어
차피 오르막은 거의 다 오른 상태이고, 여기서 정상도 가까우니 욕심을 조금 더 부려도 그리 문
제될 것은 없다.
마애불에서 3분 정도 가면 용봉산 주능선과 만나는 임간(林間)휴게소에 이른다. 휴게소라고 해서
먹을 것을 파는 매점이나 편의시설이 있는 것이 아닌 그냥 의자와 밥을 먹을 수 있는 탁자가 고
작인 그냥 친환경적인 쉼터이다.


▲  임간휴게소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 예산군 덕산면 지역

▲  전망대(왼쪽)가 있는 봉우리와 병풍바위


♠  용봉산 악귀봉, 노적봉

▲  악귀봉 부근에서 바라본 내포(內浦)신도시 건설현장 (2012년 사진)

홍성 지역의 명산(名山)으로 명성이 자자한 용봉산은 예당평야(禮唐平野) 서쪽 끝에 자리해 있
다. 해발 381m의 작은 산이지만 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많아 예로부터 충남의 금강산, 제
2의 금강산 등으로 일컬어졌고, 산의 모습이 운무(雲霧) 사이를 휘도는 용의 형상과 달빛을 감
아 올리는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용봉산이란 아주 비싼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산 전체가 바위산이라 대자연이 빚어놓은 가지각색의 멋드러진 바위들이 그럴싸한 전설을 품으
며 산을 수식하고 있는데, 산에서 보는 해돋이 광경 또한 천하 일품이다. 그러다보니 국립공원
이나 도립공원, 대도시나 인구 밀집 지역을 낀 산이 아님에도 인기가 나날이 높아져 휴일만 되
면 산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이 산이 속세에 이름을 드러낸지는 그리 오래되진 않았으나 이제는 홍성과 충남의 대표적인 뫼
로 계룡산과 칠갑산, 대둔산(大芚山)을 긴장 타게 만든다.

용봉산에는 백제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용봉사를 비롯해 앞에서 언급한 신경리 마애여
래입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으며, 산 동쪽 자락에는 자연휴양림과 청소년수련원이 있어 자연
과 함께 호젓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 또한 산세가 작다보니 30~40분 정도면 주능선에 이르며,
주능선과 정상을 거쳐 빠르면 2시간 정도면 거뜬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다만 산이 급하게 솟
아있다 보니 경사가 각박하고 위험지대가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산을 구성하는 주요 봉우리로는 북쪽의 수암산을 비롯하여 악귀봉과 노적봉, 최고봉(용봉산 정
상), 투석봉 등이 있으며, 산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자 한다면 장항선 열차를 타고 삽교에서 홍
성으로 이동할 때(또는 그 반대로) 보기 바란다. 정말 찬사가 나올 것이다.


▲  악귀봉 구름다리

임간휴게소에서 용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악귀봉까지는 주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걸린다.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보이고, 하늘과도 무척이나 가까워 마치 학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다. 또
한 천하가 발 밑으로 보이니 천하를 손에 넣은 듯 즐거운 기분마저 넝실거린다.

악귀봉은 해발 369m로 용봉산에서 2번 째로 높다. 왜 악귀봉이란 기분 나쁜 이름을 지니게 되었
는지는 모르겠으나 멀리서 보면 악귀처럼 보이거나 그만큼 험준한 봉우리라서 사람들이 그런 이
름을 강제로 씌운 모양이다. 굳이 다른 이름도 많은데 왜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이란 것들이 좋지도 않은 이미지의 이름을 붙였는지 악귀봉도 무척 서운해
할 것이다.


▲  삽살개바위
삽살개보다는 엄지손을 치켜든 모습처럼 보인다. 엄지손바위란 이름도 좋지 않을까?
참고로 용봉산에 있는 바위 이름은 거진 홍성군청에서 보이는 모습에 따라 멋대로
지어 붙인 것이다.

▲  악귀봉에서 바라본 용봉산 줄기 ~ 노적봉과 용봉산 정상(최고봉)

용봉산이 좀 작다보니 각 봉우리와 바위 간의 거리도 짧다. 허나 짧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된다.
산에서의 거리는 평지의 최대 2배 정도 되기 때문이다. 임간휴게소에서 악귀봉까지 0.38km라 쓰
여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0.7km에 가깝다. 그런 숫자의 농간에 괜히 마음을 놓지 말고 서두르지
말 것이며, 자존심을 곱게 접어 산행에 임해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산은 자신을 만만히 보거나
무시하는 이를 가만 두지 않는다.


▲  악귀봉에서 본 내포신도시 현장 (2012년 사진)
충남도청 이전과 충남 서부지역 발전을 위해 예당평야 서쪽에 내포신도시를 닦았다.
내포 조성으로 용봉산 접근성은 예전보다 좋아졌고, 내포의 후광으로
용봉산의 존재감도 그만큼 두터워졌다.

▲  사람들로 가득한 악귀봉 주변

▲  물개바위에서 전망대로 내려가는 길

▲  두꺼비바위 - 바위 봉우리가 병풍을 이루며 절경을 자아낸다.

▲  확대해서 본 두꺼비바위
내 눈이 이상한 건지 두꺼비로 보이지는 않고 고개를 들고 있는 멍멍이로 보인다.

        ◀  하늘로 곧게 솟은 행운바위
서울 관상감(觀象監)의 관천대(觀天臺)처럼 생
긴 바위가 엉뚱하게 행운바위란 이름으로 등산
객들의 심심풀이 표적이 되고 있다. 아마도 바
위 꼭대기에 움푹 들어간 공간 때문에 돌을 던
져 행운을 비는 기복(祈福) 형태의 바위가 된
듯 싶은데, 등산객들이 무심히 던진 돌이 탑 정
상에 수북히 쌓여 조그만 돌탑을 이룬다.


▲  행운바위 꼭대기 너머로 본 용봉산 북쪽 줄기

▲  행운바위 주변에서 본 악귀봉

▲  노적봉에서 본 내포신도시 남쪽

▲  아직도 갈 길이 먼 용봉산 정상 (노적봉에서 바라본 모습)

악귀봉에서 노적봉까지는 0.23km로 10분 정도 걸린다. 가는 길은 그런데로 양호한 수준, 노적봉
은 악귀봉과 용봉산 정상(최고봉) 사이의 봉우리로 해발 350m이다. 이곳에는 시원한 아이스크림
과 음료수를 파는 행상이 있는데, 속세(俗世)보다 2배를 더 얹혀 팔고 있었다. 하긴 여기까지
들고 온 수고가 있으니 산에서 그 정도면 그러려니 봐줄 만은 하겠다.
행상은 '아이스케키 사세요~~!' 소리를 치는데, 땀도 흘리고 목도 마른 등산객들의 심리를 제대
로 들쑤셔 금세 1통을 비웠다. 나도 목이 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었는데, 정말 꿀맛이 따
로 없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 것일까?


▲  노적봉에서 본 홍성 지역 (홍북면과 홍성읍)


♠  용봉산 정상과 최영장군 활터

▲  용봉산 정상을 이루고 있는 최고봉(最高峯, 381m)

노적봉에서 최고봉까지는 0.36km로 8분 정도 걸린다. 최고봉은 용봉산의 꼭대기로 삼각(三角)처
럼 솟은 바위가 아담하게 정상을 이루고 있는데, 최고봉이란 가장 높은 봉우리란 뜻으로 근래에
지어진 이름이다.
바위 정상에는 용봉산 정상을 알리는 표석이 있는데, 산꾼들이 정상에 왔음을 알리는 인증 사진
을 찍느라 표석 주변은 늘 부산하다. 한 사람이나 한 단체가 사진을 찍기가 무섭게 바로 다른
이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으니 말이다. 그래서 잠깐 비어있는 틈을 이용해 정상 표석을 사진에
담았다.


▲  용봉산 정상 표석의 위엄

▲  용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홍성 홍북면과 예당평야
용봉산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까지 펼쳐진 드넓은 대지가 예당평야이다.
이렇게 보니 이 땅도 결코 좁지는 않은 모양이다.

▲  용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내포신도시 건설 현장 (2012년 사진)

마치 불모의 사막에 한줄기 도시를 짓는 듯, 드넓은 예당평야 서쪽에 자리를 닦아 충남의 야심
작 내포신도시를 조성했다. 홍성군과 예산군의 경계 지점으로 2013년에 대전(大田)에 있던 충남
도청을 비롯해 충남교육청, 충남지방경찰청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계속해서 주거지를 조성
하고 있어 2016년에 대략 공사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
공공기관과 각종 회사의 이전으로 홍성과 예산에 적지 않은 인구와 기대감을 더해줄 것이며, 그
리되면 용봉산은 내포의 듬직한 뒷동산이 되어 안그래도 많은 산꾼이 더 늘어나 이름 석자도 더
욱 견고해질 것이다. 다만 개발의 칼질은 저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며, 신도시와 용봉산의 영
역을 엄격히 구분 지어 용봉산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일이 없어야 될 것이다.


▲  최영 장군 활터에 자리한 정자

최고봉에서 용봉산 자연휴양림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정자가 있는 봉우리(339m)가 나온다. 이
곳은 '~~봉' 대신 '최영장군활터'라 불리는데, 정자에 올라서면 내포신도시를 비롯해 예당평야
와 홍성 서북부 지역, 예산 서부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이 꽤 일품이다.

봉우리 이름에 등장하는 최영(崔瑩)은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로 동아시아를 누비며 80회 가
까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며, 금을 돌처럼 여겨 검소하게 살았고, 백성을 살피고 나라를
지켰던 명장이다. 바로 그가 태어난 곳이 홍성이다.
그는 어린 시절 용봉산에서 무예를 닦았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하며,
그 연유로 최영장군활터가 되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로 그를 흠모하는 지역 사람들이
용봉산에서 조망이 제일 좋은 이곳을 그가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힌 곳으로 삼고 그럴싸한 전설을
덧붙였는데,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최영은 어린 시절 말을 타고 무예를 연마하다가 문득 말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말
에게 '내가 여기서 화살을 쏘겠다. 만약 너가 화살보다 먼저 도착하면 맛있는 상을 줄 것이고,
화살이 먼저 도착하면 너의 목을 베겠다. 어떠냐?'

그러자 말이 '좋다. 흔쾌히 해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 찬 모습을 드러냈다.

최영은 말을 타고 지금의 최영장군활터에서 동남쪽으로 5km 떨어진 홍성읍 은행정 방향으로 화
살을 날렸다. 그러자 말은 목이 걸린 일이라 화살이 날라가기 무섭게 그곳으로 번개처럼 달려갔
다. 허나 목적지에 이르니 화살은 보이지가 않았다. (말의 품종이 무엇이길래..? 5km를 단숨에
갔단 말인가?) 발끈한 최영은 화살이 먼저 도착한 것이라 여기고 말의 변명도 듣지 않은 채, 단
칼에 죽이고 말았다. 바로 그때 산에서 쐈던 화살이 무심히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최영은 자신의 경솔함에 크게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자고 약
속했던 자신의 말을 그 자리에 묻어주었는데, 홍성읍 은행정 옆에 금마총이라 불리는 말무덤이
바로 최영의 말 무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전설은 이곳 뿐만 아니라 광주 무등산(無等山)에도 전해온다. 그곳에는 김덕령(金
德齡)이 최영과 같은 테스트를 했는데,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다만 말을 죽이기 직전에 화살이
지나가 김덕령의 말은 목숨을 건진다. 이들 전설은 그들을 흠모하는 지역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
나 아무리 우수한 말이라고 해도 5km를 단숨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아무리 높은 곳에서 활을
쏴도 그 사정거리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그런 말도 안되는 테스트로 자신의 말을 죽이려고 했던 속 좁은 위인으로까지 비쳐질 수
도 있으니 그리 썩 바람직한 전설은 아닌 것 같다.


▲  최영장군 활터 정자 옆에 뿌리를 내린 돌탑 -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  최영장군 활터에서 바라본 홍성 지역과 예당평야

▲  기묘하게 자리한 흔들바위

최영장군활터를 지나면 길이 다소 아찔해 질 것이다. 마치 천길 낭떠러지 같은 절벽을 내려오는
듯한 기분이 진하게 들면서 긴장감의 끈을 더욱 조여야 된다. 여기서 자연휴양림까지는 손에 잡
힐 듯 바라보이는데, 내포신도시와 홍성, 예산 지역이 파노라마처럼 숨가쁘게 펼쳐진다.

활터에서 조금 내려가면 암석 위에 기묘하게 목을 붙잡고 있는 흔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흔들바
위는 손이나 몸으로 밀면 조금 흔들리다 마는 바위로 설악산(雪嶽山) 흔들바위가 그 갑(甲)이다.
있는 힘을 힘껏 가하면 바위를 저 아래로 떠밀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좀처럼 밀리지 않는다. 어
찌 저렇게 자리를 잡았는지, 장대한 세월의 태클이 적지 않았음에도 제자리를 끝까지 고집한 흔
들바위의 집념과 절개가 참으로 대단하다.


▲  온갖 기암으로 치장된 용봉산 사자바위 능선


♠  용봉산 마무리

▲  용봉산 자연휴양림 표석

용봉산 최고봉에서 최영장군활터와 흔들바위를 지나 25분 정도 정신 없이 내려가면 용봉산자연
휴양림 내부에 이른다. 이곳은 야외취사장을 비롯하여 산림휴양관과 숲속의 집, 청소년수련원,
체육시설 등의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다.


▲  산림체험전시관

숲속의 집과 청소년수련원 사이에 자리한 산림체험전시관은 2층 규모로 홍성(洪城)의 역사와 문
화, 자연을 다루고 있는데, 1층은 전시관과 휴식공간으로 쓰이며, 2층은 휴양림관리사무소로 쓰
인다.
용봉산을 찾는 사람은 허벌나게 많지만 정작 산림체험전시관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그곳에 대한 관심이 없다. 다들 용봉산에 눈이 멀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지나간다고 잠시 둘러보고 나왔다.

* 산림체험전시관 관람시간 : 10시부터 16시 30분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산림체험전시장을 지나면 청소년들의 심신수련 및 단체 숙박을 위한 청소년수련원이 있다. 수영
장과 교육관까지 갖춘 우람한 규모로 그곳을 지나면 용봉산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통해 주차장에 이르니 시간은 13시가 넘었다. 내가 10시에 용봉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3시간 이상을 산속에 묻혀있던 것이다.

이렇게 용봉산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덕산(德山)으로 가는 홍성군내버스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 예산군 덕산으로 넘어갔다. 덕산은 예산군 서부에 자리한 고장으로 그 유명한 덕산온천과
윤봉길(尹奉吉)의사 유적지, 수덕사(修德寺), 남연군(南延君)묘 등의 굵직한 명소를 간직하고
있어 관광 수요가 대단하다.

아직 점심 끼니를 때우지 못해 예전 남연군묘에 갔을 때 갈비탕을 먹었던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그새 망했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적당한 식당을 물색하다가 '불고기나라'란 이름의 큰 식
당이 눈에 들어와 그곳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내부가 썰렁해 식사가 되는지 문의하니 된다고 해서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
를 잡고 하루 종일 고생한 두 다리를 쉬게 했다.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육개장이 땡
겨서 그것을 시켰는데, 처음에는 그리 기대는 하지 않았다.


▲  덕산 불고기나라에서 먹은 육개장의 위엄

기다리는 시간만큼 지루하고 긴 것은 없다. 고속으로 흘러가는 세월을 저속으로 흘러가게 하려
면 기다리는 것을 많게 하면 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는데, 15분 정도를 간신히 기다리니 나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육개장과 밑반찬이 내 앞에 차려진다. 정갈하게 차려진 밑반찬은 배추김치
와 파김치, 콩나물과 메추리알로 수저를 들어 육개장을 들어보니 생각 외로 맛이 괜찮다. 소고
기도 제법 들어가 있고, 고기와 계란, 파, 고사리 등이 버무러진 육개장 국물은 얼큰하고 맛깔
스러웠다.

그렇게 배고픈 배의 불만을 잠재우며, 열심히 숫가락을 움직여 밥과 육개장, 밑반찬까지 싹 먹
어치웠다. 육개장은 국물까지 죄다 섭취하고, 밥은 밥알 하나도 허용치 않았으니 무척 배가 고
프긴 했나보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나니 졸음이 슬쩍 찾아와 배 깔고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하
려든다. 그 희롱에 떨어지면 몸에도 좋지 않고, 나는 아직 가야 할 길이 있길래 커피로 졸음에
대항하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추후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 용봉산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① 홍성 경유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홍성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에서 홍성행 고속버스가 1일 8회 떠나며,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5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2회 떠난다.
* 인천, 성남, 안산, 대전(서부/동부/유성), 천안, 서산, 보령에서 홍성행 직행버스 이용
② 내포신도시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에서 내포행 고속버스가 1일 8회,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5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2회 떠난다. (모두 홍성까지 운행함)
* 인천, 성남, 대전(서부/동부/유성), 천안, 청주, 보령, 서산에서 내포시행 직행버스 이용.
③ 예산 경유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예산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에서 예산행 고속버스가 1일 5회,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3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4회 떠난다.
* 인천, 천안, 대전(서부/동부), 서산에서 예산행 직행버스 이용
④ 현지교통
* 홍성터미널(홍성역을 나와서 도보 5분 거리)에서 용봉산 경유 내포(도청)/덕산/수덕사행 900
  번대 군내버스를 타고 용봉산 하차 (1일 20여 회 운행)
* 내포신도시 도청대로 환승센터(고속/직행버스 정류장)에서 용봉산까지 군내버스(1일 30여 회
  운행) 또는 택시 이용 (도청대로 환승센터 ☎ 041-333-2914)
* 예산터미널과 예산역에서 덕산, 도청 경유 용봉산행 군내버스 1일 14회 운행

⑤ 승용차 (용봉산 자연휴양림 주차장은 휴양림 숙박객만 사용 가능)
* 서해안고속도로 → 홍성나들목을 나와서 홍성 방면 29번 국도 → 옥암2교차로에서 좌회전 →
  소향3거리 우회전 → 덕산통4거리 좌회전 → 용봉산입구 → 용봉산주차장 (용봉사까지 접근
  가능)
* 당진대전고속도로 → 고덕나들목을 나와서 덕산 방면 40번 국도 → 덕산119안전센터 직진 →
  내포신도시 도청대로 → 용봉산입구 → 용봉산주차장

★ 용봉산/용봉산자연휴양림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1,000원(단체 800원) / 청소년과 군인 800원(단체 600원) /
  어린이 400원(단체 200원) / 자연휴양림 숙박시설 사용자는 입장료 면제
* 주차료 - 소형 3,000원 / 대형 5,000원
* 용봉산 자연휴양림 숲속의 집은 10인용 5동으로 성수기 1박은 15만원, 비수기 1박은 10.5만원
  이다.
* 자연휴양림 산림휴양관에는 4인실과 6인실이 있다. 4인실은 성수기 1박은 5만원, 비수기 1박
  은 3만 5천원이며, 6인실은 성수기 1박 7만원, 비수기 1박 4만 9천원이다.
* 자연휴양림 숙박시 개인세면도구는 지참해야 되며, 예약과 문의는 용봉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
  를 참조한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됨)
* 용봉산자연휴양림 -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 104-57 (용봉산2길 87, ☎ 041-630-1785)


▲  용봉산 등산로 안내도
(사진을 클릭하면 용봉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가 번쩍 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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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마도, 서해갯벌, 안흥성...)

 


' 태안(泰安)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갯벌
▲  신진도 갯벌


천하를 꽁꽁 버무리던 겨울 제국의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중순에 태안반도(泰安半島)
에 중심인 충남 태안(泰安)을 찾았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태안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약 2시간을 달려 태안의 관문인 태안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신진도(마도)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40여 분을 달
려 신진도(新津島) 포구에 두 발을 내린다.


♠  안흥 앞바다에 떠 있는 그림 같은 섬
한반도와 다리 하나로 이어진 신진도(新津島)

▲  안흥항에서 바라본 신진도 동쪽

▲  한반도와 신진도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신진대교

신진도는 태안반도의 일부를 이루는 정죽반도(程竹半島) 서쪽 끝으머리에 달려있다. 안흥과 마
주보고 있는 이 섬은 원래 안흥과 이어진 육지라고 하는데, 자연의 위대한 힘에 강제로 섬으로
분리되면서 나루터가 새로 생기는 통에 신진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신진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성종(成宗) 시절로 해안 방비를 위해 만호청(萬戶廳)을
이곳에 설치했다고 하며, 고려와 남송(南宋)을 오가는 고려 사신과 남송 사신이 이곳에서 잠시
닻을 접고 산제(山祭)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섬은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후망봉(後望峰)이란 봉우리로 높이가 132m
이다. 섬의 둘레는 약 7km이며, 태안반도와 마주하는 동쪽은 물굽이가 크게 들어와있고, 동남부
해안은 해식애(海蝕崖)를 이룬다.
푸른 송림과 기암괴석, 그리고 자연의 보고(寶庫)인 갯벌이 어우러진 이곳에 개발의 물결이 밀
려온 것은 1979년이다. 1978년 안흥항이 1종항구로 지정되었는데, 안흥항이 좁아서 총 222억원
을 들여 신진도와 마도, 부억도를 연결하여 외항(外港)을 조성해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1989
년 58,000평을 매립 3만평에 배후지를 조성하여 숙박시설과 식당을 만들었다.

1995년에는 한반도와 신진도를 잇는 신진대교(新津大橋)가 개통되어 다시 한반도의 어엿한 일부
가 되면서 더 이상 바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수레와 두 다리로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으며,
, 다리의 개통으로 정죽반도 서쪽 끝이 안흥에서 신진도를 거쳐 마도까지 연장되었다. 신진도와
마도는 1987년 7월 방파제가 축조되어 서로 끈끈하게 이어졌고, 썰물 때는 안흥과 신진도 사이
에 바닷길이 열리기도 한다.
섬을 이루는 마을은 섬 북서쪽의 신진마을과 동쪽 아래목마을이 있으며,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다. 주요 수산물은 멸치와 삼치, 우럭 등이 있으며, 일부는 양식업(養殖業)도 한다. 신진
도항은 신진항, 안흥외항으로도 불리며, 2종항구로 800여 척의 어선을 수용할 수 있다.

신진도는 딱히 명소나 해수욕장은 없지만 신진도항 뒤쪽에 솟은 후망봉에 오르면 신진도항과 마
도, 안흥항을 비롯하여 가의도(賈誼島)와 정족도, 목개도 등 망망대해(茫茫大海)에 그려진 조그
만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조망(眺望)이 천하일품이다. 또한 물고기가 잘 잡혀 바다낚시터로도
명성이 높으며, 민박과 모텔, 해수탕 등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이 많고 조개구이와 생선회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 많아 1박2일 야유회 등으로 놀러오기 적당하다.
비록 한반도와 이어진 가까운 섬으로 외딴섬의 내음은 많이 씻겨내려갔지만 대신 언제든지 편하
게 안길 수 있는 장점이 섬의 관광 가치를 높여주었다.

신진도 서쪽에 자리한 마도(馬島)는 그 모습이 달리는 말과 비슷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마
섬, 말섬 등으로 불린다. 면적은 0.25㎢로 매우 작으며, 안흥8경의 하나인 마도기암(奇巖)이 있
는 곳이다. 약 20세대의 주민이 거주하며 신진도와 마찬가지로 어업과 숙박업으로 생계를 꾸린
다. 바다낚시로 유명하여 참조기와 새우, 갈치 등이 많이 잡히며, 신진도와 이어주는 방파제 서
쪽에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유물과 조개더미가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산지
에는 보리수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태안에서 신진도행 군내버스가 마도 포
구까지 들어간다.

※ 신진도, 마도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 남부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태안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강남은 1
  일 11회, 남부터미널은 30~4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은 1일 4회 운행)
* 인천, 부천, 수원, 안양, 성남, 고양, 대전(동부), 천안, 아산, 군산, 공주에서 태안행 고속/
  직행버스 이용
* 태안터미널에서 신진도(마도)행 군내버스가 1일 19회 운행한다. (20시 막차는 신진도주차장까
  지만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서산나들목에서 서산방면 32번 국도 → 태안군청 → 장산교차로에서 안흥
   방면 603번 지방도 → 신진대교 → 신진도, 마도

* 서해의 해금강(海金剛)으로 일컬어지는 안흥8경의 현장을 1바퀴 도는 안흥유람선(☎ 041-674-
  1603)이 신진도항에서 출발한다. 운행코스는 5가지로 사자바위와 가의도, 독립문바위, 정족도
  , 목개도 등을 돌며 소요시간은 1시간에서 3시간 정도이다. 비정기선으로 30명(또는 60명) 정
  도가 모이면 출발한다. 자세한 운행정보는 이곳을 클릭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


▲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을 다독거리는 신진도항(안흥외항)
신진도항은 새우깡의 제왕 갈매기를 몰고 다니는 어선들로 늘 부산하다.


▲  신진도항에 정박한 어선을 보호하는 방파제가 보인다.
왼쪽 방파제에는 빨간 등대가 오른쪽에는 하얀 등대가 나란히 자리하여
바다의 밤길을 비춘다.

▲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 왼쪽 언덕은 부억도의 옛 흔적이다.
부억도는 마도와 더불어 신진도 주변을 장식하던 섬이었으나
신진도항을 만들면서 신진도의 일부로 흡수되고 말았다.

▲  포구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어선들

▲  신진도항 북쪽에서 바라본 마도의 모습

▲  신진도와 마도를 이어주는 방파제길 ▼
갯벌을 메꾸고 돌을 차곡차곡 얹혀 두 섬을 하나처럼 끈끈하게 이어준다.


▲  마도에서 바라본 신진도항

▲  신진도 북쪽 갯벌
갯벌은 서해바다의 매력이자 자연의 보고이다. 그런 갯벌이 인간의 의해 계속 축소되고
사라지고 있으니 이러다가 갯벌이란 단어가 낯설어지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그날이 되면 인간들도 감히 무탈하지는 못할 것이다.

▲  마도 갯벌에 고단한 몸을 기대며 휴식을 취하는 어선들

▲  신진도와 마도를 잇는 방파제에서 바라본 신진도항
마을 뒤쪽에 보이는 산이 신진도의 진산(鎭山)인 후망봉(132m)

신진도와 마도는 딱히 흥미가 나질 않았다. 신진도항 남쪽 방파제와 후망봉을 비롯해 신진도와
마도 구석구석을 살펴야 도리겠지만 별로 땡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1시간
정도 머물고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인연에 내던지며 육지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
고 안흥항으로 넘어갔다.


▲  안흥항과 신진대교

안흥항(안흥내항)은 정죽반도 끝에 자리한 항구로 서해 중부의 중심 어항(漁港)이자 충남의 대
표적인 항구이다. 백제(百濟) 때부터 항구의 역할을 했다고 하며,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5
세기 이후 이곳을 중원대륙 진출의 주요 기지로 삼으면서 많은 무역선과 수군이 들락거렸다.

안흥항의 확장을 위해 신진도에 외항이 조성되면서 많은 어선들이 그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예전
에 비해 많이 한가해졌다. 그 이후로 안흥항은 내항(內港), 신진도항은 외항으로 불린다. 허나
여전히 어항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으며, 신진도항도 엄연히 따지만 안흥항의 확장판이다.

이곳은 바다낚시터로 명성이 높아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월척을 꿈꾸며 찾아온다. 항구 앞바
다는 수심이 60~70m에 이르러 우럭이 많이 잡히며 우럭낚시의 본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서
해의 해금강으로 불리는 안흥8경의 현장이 안흥 앞바다에 보석처럼 박혀있으며, 안흥 뒷산에 조
선 중기에 축성된 안흥성이 남아있다.


▲  안흥항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의 넓은 가슴
저 바다에 조그만 배를 띄우고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극락의 세계를 찾아 떠나고 싶다.


♠  서해바다를 지키고자 조선 중기에 축성된 성곽 ~ 안흥성(安興城)
충남 지방기념물 11호

▲  안흥성 북문인 감성루(坎城樓)

안흥성은 1655년(효종 6년)에 축성된 석성(石城
) 겸 산성(山城)으로 태안8경의 2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이다.
효종 시절에 김석견(金石堅)이 서해안을 방어하
고자 안흥진성(安興鎭城)의 축성을 강하게 건의
하자 효종(孝宗)은 지경연사(知經筵事) 이후원(
李厚源)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에 이후원이
'안흥은 바다를 낀 천연의 요새로 군사를 주둔
하고 양곡을 저장하면 안으로 강도(江都)의 표
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통제
할 수 있습니다'

▲  감성루(북문)의 뒷모습

그 말을 들은 효종은 옳거니 여기며 바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게 명을 띄워 안흥성을
쌓게 했는데, 이때 인근 19개 고을의 정남(丁男, 16~60세 남성)이 징발되었다.

안흥성의 본래 이름은 안흥진성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안흥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종3품
무관인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여 성을 지켰다. 1894년 동학운동(東學運動)이 일
어나자 동학군(東學軍)과 관군과의 싸움으로 성내(城內)의 건물과 문루가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동학군이 진압된 이후 성은 버려져 방치되었다. 그 이후 성내 건물은 모두 파괴되고 그 자리에
는 마을이 들어섰다.

성의 둘레는 1,714m, 높이는 3~4m이며, 동문<수성루(壽城樓)>과 서문<수홍루(垂虹樓)>, 남문<복
파루(伏波樓)>, 북문<감성루(坎城樓)>의 4문을 두었다. 허나 지금은 북문만 문루(門樓)가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성곽(城郭)은 북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진
하게 남아있으며, 성곽의 방어시설인 여장은 모두 분실되었다. 북문은 바다에 접해있어 지대가
낮으나 서문과 남문, 동문은 산등성이에 자리해 있으며, 북문에서 동문과 서문으로 가는 성곽은
경사가 급하다.
서문에 이르면 쪽빛의 서해바다가 눈과 마음을 시리게 만들며, 여기서 산을 내려가면 바로 안흥
항으로 이어진다. 동문을 지나면 산과 논, 바다가 어우러진 태안 정죽리의 산하가 거침없이 펼
쳐지는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다소 급해 내려갈 때 주의가 필요하다.


▲  안흥앞바다를 굽어보는 서문(수홍루)
문루인 수홍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녹아 없어지고 성문만 남았다.
고색의 떼가 잔뜩 낀 성곽은 수천년 묵은 고고학 유적지를 연상케 한다.

▲  서문 북쪽 성곽

▲  서문 안쪽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차곡차곡 쌓인 성곽은 주먹처럼 조그만 돌부터 성인 남자의 몸집만한
커다란 돌까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꽉 여물어져 있다. 고색의 무게가 진하게 입혀진 성곽에는
수풀이 무성히 자라 허전한 윗부분을 마치 대머리를 덮듯 따스하게 덮어준다. 딱딱한 성돌에는
이곳의 청정함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이끼가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며 기생을 한다. 맨돌에도 식
물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의 위대함에 그저 입만 벌어질 뿐이다.
수천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만든 안흥성, 돌로 쌓아서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지만 자연 앞에서는
역시나 장난감 성에 불과하다. 동학운동 이후 버려진 성은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해 이렇게
황량하게 변한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그것이 집이든 성이든 사람의 손길이 꾸준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천하제일의 고구려 성이라도 자연 앞에 무책임하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
제이다.


▲  성돌에 낀 오랜 세월의 주름살
이끼 등의 지의류(地衣類)가 성돌에 뿌리를 내려 그들만의 조그만 나라를 꾸린다.

▲  옛 수홍루의 기와조각이 하나의 화석(化石)이 되어 땅에 박혀있다.

▲  서문에서 바라본 안흥앞바다 (서해바다)
성내마을 사람들은 안흥으로 갈 때 서문을 거쳐간다.

▲  안흥성이란 둥지에 포근히 안긴 성내마을

성내 한복판에는 성내마을이 포근히 자리해 있는데, 20호 정도가 산다. 마을 서쪽은 밭이 약간
펼쳐져 있고, 남쪽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눈을 심히 불편하게 한다. 마을
동북쪽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국사란 조그만 절이 터를 닦았다.


▲  동문에서 바라본 천하 (정죽리 일대)

성내 한복판에는 성내마을이 포근히 자리해 있는데, 20호 정도가 산다. 마을 서쪽은 밭이 약간
펼쳐져 있고, 남쪽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눈을 심히 불편하게 한다. 마을
동북쪽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국사(泰國寺)란 조그만 절이 터를 닦았다.


▲  안흥성의 동문(수성루)

동문은 서문과 마찬가지로 문루는 녹아 없어지고 뻥뚫린 성문만 있다. 그래도 서문에 비해서는
성문의 천정이 매우 두텁다. 성문 사이로 산과 논이 어우러진 정죽리의 산하가 눈에 들어온다.


▲  동북쪽 성벽에 터를 일군 태국사(泰國寺) - 전통사찰 47호

태국사는 법당과 요사가 전부인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절로 특이하게 성벽 위에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백제 무왕(武王)이 국태보안(國泰保安)을 빌고자 634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태국사라고 하는데, 관련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편할 것
이다.

조선 세종(世宗) 때에는 명(明)나라 사신의 무사항해를 빌고자 세종의 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나
명나라 사신이 굳이 이곳을 지나갈 이유가 없으니 그 또한 신뢰가 떨어지며, 임진왜란 때는 승
병이 주둔했다고 한다. 1894년 동학군과 관군의 싸움으로 안흥성이 피해를 입자 그때 절도 파괴
되어 오랫동안 흔적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82년에 비로소 중창되었다.
고색의 내음은 매서운 세월의 태풍 앞에 모조리 흩날리면서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다만 오
랜 내력이 인정되어 충청남도에서 전통사찰로 지정했다.

안흥성 동북쪽 높은 산자락에 자리해 있고 나무가 별로 없어 산사의 내음은 많이 떨어지나 성내
에서 제법 높은 곳에 있다보니 조망은 제법 괜찮다. 허나 경내에는 그 흔한 석탑이나 승탑 등의
석물은 없어 맞배지붕을 지닌 법당이 아니었다면 그냥 개인 주택으로 오인하기가 쉽다.

태국사를 둘러보니 마도를 출발하여 태안으로 가는 버스시간이 5분도 남질 않았다. 그걸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을 허공에 내던져야 된다. 그러면 천상 안흥성을 또 1바퀴 돌아야 되겠지. 
절에서 북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제법 비탈진 길인데, 그 길을 정신없이 내달려 간신히 버스를
잡아타고 속세로 나갔다.

안흥성은 태안8경의 하나로 꼽히는 태안의 주요 관광지긴 하지만 편의시설과 두 발을 쉴 수 있
는 휴식처가 없다. 게다가 성곽길이 제대로 정비되어있지 않아 성곽을 돌 경우 걸음에 조심을
요한다.

▲  태국사 법당(法堂)

▲  태국사 요사(寮舍)

※ 안흥성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태안터미널에서 신진도(마도)행 군내버스를 타고 죽리(성안)에서 하차하면 바로 북문이다. 안
  흥에서 내릴 경우 산길을 이용하여 서문으로 오를 수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서산나들목에서 서산방면 32번 국도 → 태안군청 → 장산교차로에서 안흥
   방면 603번 지방도 → 안흥성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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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 계룡산 갑사(甲寺) '
갑사 대적전과 승탑
▲  갑사 대적전과 승탑


겨울의 제국이 서서히 저물어 가던 2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계룡산을 찾았다. 중악(中嶽)
이라 불리며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부터 신성시되오던 계룡산의 맑은 정기를 듬뿍 받고 싶
은 마음에서였다. 저번 주만해도 날씨가 겁나게 추웠는데, 이번 주는 좀 포근하여 두꺼운 잠
바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뫼에 오르면 좀 춥겠지? 그래서 그보다 1단계 낮은 잠바
와 두툼한 장갑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동학사(東鶴寺)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동학사 경내를 둘러보고 오뉘탑이라 불리는 청량사지 5
/7층석탑에서 잠시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배를 채운 다음 삼불봉(三佛峰)으로 올라가 천
하를 굽어본다. 여기서 금잔디고개로 내려와 신흥암(新興庵)에서 잠시 발을 멈추며 천진보탑
(天眞寶塔)을 친견하고 갑사 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문폭포(龍門瀑布)에서 다시 발을 멈췄다.
계룡산 동학사 보러가기 (클릭)
계룡산 오뉘탑, 삼불봉, 천진보탑 보러가기 (클릭)

용문폭포에서 갑사 방면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대성암이란 작은 암자가 나온다. 여기서 다
리를 건너면 대나무에 둘러싸인 길이 나오고 운치가 서린 그 대나무길을 지나면 슬슬 갑사의
건물이 해가 떠오르듯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시 갑사에 대한 급한 마음을 접고 왼쪽 길
로 들어가 보자. 보통은 그 길을 외면하고 지나치지만 그건 갑사에 대한 큰 실수이다. 그 길
로 들어서면 갑사계곡의 으뜸인 명월담(明月潭)이 있고 유리 지붕이 얹혀진 공간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고려시대 불상인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자리해 있다.


♠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

갑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명월담 왼쪽에 큰 바위가 있다. 바위 위쪽에는 대나
무가 삼삼하게 자라고 있고, 바위 밑에는 얕게 판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 안에 석조약사불이
둥지를 트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갑사 동쪽 자락에 자리한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왜정(倭政) 시절에 악
덕 친일파로 악명 높은 윤덕영(尹德榮)이 옮긴 것이라고 한다. 키가 남자 성인만한 조그만 불상
으로 머리에는 큼직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다. 얼굴은 조금 길며, 중생들의 소망을 하
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귀가 어깨까지 닿았다.

몸에 걸친 옷은 가슴을 약간 드러내고 있으며,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밑에는 반원형
의 옷주름이 표현되었으며, 왼손에 조그만 약병을 쥐고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불
상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 석굴에 들어앉아 비와 바
람, 눈 등 자연의 괴롭힘에서 자유로우니 덕분에 건강은 양호하다. 허나 친일파의 의해 강제로
옮겨진 점은 조금은 찜찜한데,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예전에는 불상과 기도를 올리는 조그만 노천 공간만 있었으나 그의 건강 및 중생들의 예불 편의
를 위해 유리 지붕을 얹혀 보호각을 만들었다. 또한 예불 공간을 확장했으며, 조그만 석등(石燈
)을 석불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 기준)에 주렁주렁 설치했는데, 좀 어색해 보인다.


▲  석조약사여래입상의 조촐한 보금자리

▲  가까이서 본 석조약사여래입상

▲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는 명월담

석굴에 들어앉은 석불을 가까이서 친견하니 얼굴에 비해 몸이 너무나 커 보인다. 표정도 걱정에
시름하는 중생들처럼 그렇게 밝아 보이진 않는다. 그의 발 밑에는 그의 인기를 보여주듯 꽃 2송
이가 살짝 놓여져 있다.

석불 동쪽에는 갑사계곡의 백미(白眉)인 명월담이 있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잠시 한숨을
돌리는 공간으로 옛 사람들이 새긴 '명월담(明月潭)'을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이 주변에는 윤덕영의 별장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를 팔아먹고 왜정의 지원의 배때기를 가득 불
리며 명월담의 정취를 누렸다고 한다.
그럼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갑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백제 때 창건된 계룡산 사찰의 으뜸, 갑사(甲寺)
계룡산 서쪽에 안긴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阿
道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는 고구려 불교를 전하고자 신라로 건너갔는데, 그는 일선군(
一善郡, 경북 구미)의 부호(富戶)인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며 신라에 고구려식 불교 포교의 임
무를 수행하고 귀국하는 길에 계룡산을 지나갔다.
그런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오르는 광경에 넋을 잃고 빛이 발하는 곳을 찾아가니
그곳이 바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보탑에 예를 올리고 갑사를 창건했
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진보탑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신흥암과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이다. 허
나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은 전혀 없으며, 천진보탑 전설도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백제의
국도(國都)인 공주와 부여하고도 가깝고 계룡산의 오랜 명성을 생각해 보면 백제 때 창건된 것
은 확실해 보인다.

창건 이후 556년<위덕왕(威德王) 2년> 혜명(慧命)이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했다고
하며,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한다. 679년(신라 문무왕 18년)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불전 1,000칸을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종(華嚴宗) 10대 사찰의 하
나로 성장했다고 한다.
887년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킨 영규대사(靈圭大師)
가 잠시 머물렀다. 그는 조헌(趙憲)과 의기투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금산(錦山) 연곤평에서 조헌과 의병 700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1597년 영규대사에 대한 복수로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고
1654년 크게 중창을 벌였다. 1875년에는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수했으며, 1899년 적묵당을 지었
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로 들어갔으며, 6.25전쟁 때는 다
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갑사란 이름은 으뜸 또는 첫째 가는 절이란 뜻으로 갑(甲)에는 1등의 뜻이 있다. 이외에 한자는
다르지만 갑사(岬寺), 갑사사(岬士寺), 계룡갑사(鷄龍甲寺) 등으로 불리웠으며, 18세기 후반 산
의 이름을 딴 계룡갑사란 이름도 적지 않게 쓰였다.

고색이 만연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적묵당, 전해당, 삼성각, 보장각, 팔상전, 표충원,
범종루, 강당, 대적전 등 약 20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어 규모도 상당하며, 대성암과 내원암, 신
흥암 등을 부속암자로 거느리고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보 298호인 삼신불괘불탱화를 비
롯하여 철당간과 승탑, 동종, 월인석보판목 등 보물 4점과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사적비, 강당,
대웅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다. 장대한 역사에 걸맞게 풍부한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절은 크게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과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대
적전 구역 등, 3개로 나눌 수 있다. 원래는 대적전 구역이 절의 중심이었으나 1604년 대웅전 구
역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중심지가 그곳으로 이전되고 대적전은 변두리가 되었다. 그 이후 북쪽
으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경내가 무지 넓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넓은 대지에 건물이 대
도시처럼 촘촘히 박힌 것도 아니다. 대웅전 구역을 빼면 다 널널하게 자리해 있다.
계룡산의 주요 사찰이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만 깊은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깊은 산골에 터를 잡고 있어 산사의 고요함과 고즈넉함을 누리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절을 둘러
싼 숲도 무성하고 유리처럼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면서 청정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또한
역사의 숨결이 서린 볼거리도 매우 푸짐하니 눈과 마음도 배불리 호강을 누리며 정화가 된다.

갑사는 계룡산으로 오르는 3대 기점의 하나로 등산객과 답사객, 신도들의 발길이 빈번하며, 여
기서 금잔디고개를 거쳐 동학사로 내려가거나 연천봉을 거쳐 신원사로 내려가도 된다.

※ 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① 공주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공주행 고속버스가 25~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수원, 성남, 천안, 청주, 대전(서부, 동부, 유성), 보령에서 공주행 직행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에 있는 시내버스터미널에서 갑사행 공주시내버스 320, 322번이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공주시외/고속터미널에서 갈 경우는 시내(산성동 방향)로 들어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금강(공주대교)을 건너자마자 옥룡동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옥룡동주민센터 정류장
  에서 320, 32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면 빠르다. (공주터미널에서 시내버스터미널까지 택시로 5
  분 거리)
② 대전 유성/논산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유성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직행버스가 10~25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성남, 수원, 천안, 청주, 전주, 익산, 광주에서 유성행 직행버스 이용
* 유성시외버스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유성시외터미널에서 서쪽(공주 방면)으로 120m 지점>에
  서 갑사로 가는 공주시내버스 340, 341, 342번 시내버스 이용 (1일 7회 운행, 대전지하철 유
  성온천역(6번 출구)과 현충원역(3번 출구) 경유)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을 나와서 공주/논산 방면 23번 국도 → 신공주대교 → 계룡
  → 계룡저수지 → 갑사 주차장
* 호남고속도로(회덕~논산) → 유성나들목을 나와서 공주 방면 32번 국도 → 공암 → 청벽대교
  건너기 전에서 갑사 방면 → 내흥리 → 갑사주차장

★ 갑사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단체 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600
  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매년 가을(10월)에 영규대사를 추모하는 추모재와 산사음악회를 연다.
* 갑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사찰예절과 새벽예불, 사물체험, 숲길
  명상 등을 하며, 참가비는 성인 5만원, 어린이 3만5천원이다. 신청은 갑사 홈페이지의 템플스
  테이 메뉴에서 하면 되며, 자세한 것은 전화로 문의하거나 갑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 041-857-8981~2)
* 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갑사 배치도를 클릭한다.


▲  갑사 경내 배치도 (갑사 홈페이지 참조)


♠  갑사 둘러보기 (1) 종각, 강당 주변

▲  갑사 종각(鐘閣)

석조약사불을 친견하고 경내로 들어서면 강당 앞에 단촐한 모습의 종각이 있다. 종각에는 조선
중기에 조성된 동종이 소중히 안겨져 있다.


▲  갑사 동종(銅鍾) - 보물 478호

이 동종은 당시 조선 국왕이던 선조(宣祖)의 만
수무강을 기원하고자 1584년에 만든 것으로 높
이 1.3m, 입지름 91cm의 조그만 종이다. 명세기
왕을 위해 만든 것이니 조선 정부나 공주 관아
의 지원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종 꼭대기에는 음관(音觀)이 없고 대신 2마리의
용이 종을 들고 있으니 이는 조선시대 종의 특
징이다. (그 이전에는 용통=음관이 있었음)
종의 견대(상대)에는 물결모양의 꽃무늬를 둘렀
고, 밑에는 연꽃무늬와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
다. 범자 역시 조선 동종의 특징.. 상대 밑에는
4곳의 네모난 유곽이 있으며 그 안에 볼록 나온
9개의 유두가 있다.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1개씩 뽑는다고 한다.

종신(鐘身) 아랫쪽에는 동그란 모양의 당좌가
있는데 여기는 종을 치는 부분이며, 4개의 당좌
사이로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이 있다.

어둠의 시절 당시 왜정(倭政)이 헌납(獻納)을 구실로 가져가면서 자칫 그들의 전쟁무기로 사라
질 뻔했으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 아름다운 종은
무기의 일부로 변했을지도 모르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종각 옆에 있는 약수터

종각 맞은편에는 산사(山寺)에는 으레 있는 약수터가 있다. 고개를 들며 웅크린 거북이가 쉬지
않고 옥계수를 뽑아내 물이 마를 날이 없다. 계룡산이 중생에게 베푼 물로 바가지에 가득 담아
1모금을 들이키면 세상 시름과 몸 속의 떼가 싹 내려간 듯 오장육부와 마음이 시원하다고 쾌재
를 부른다.

▲  강당 옆에 경내로 인도하는 돌문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루(梵鍾樓)
2003년에 새로 만들었다.


▲  갑사 강당(講堂)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95호

온몸을 다해 경내를 가리고 있는 강당 자리에는 원래 해탈문(解脫門)이 있었으며, 강당은 해탈
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었다. 그러다가 해탈문을 없애고 강당을 해탈문 자리로 밀어 대웅전 뜨락
을 넓혔다. 해탈문의 빈 공간에는 돌을 채워 강당 전면을 석축 바깥에 돌출시켰고, 나무 기둥을
세우면서 지금의 누각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외에는 단청이 퇴락하고 문짝이 바뀐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승려들이 공부를 하며 법문(法文)을 강론하던 교
육 공간이다. 조선 초기에 지어졌으며, 1597년에 불탄 것을 조선 후기에 다시 세웠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 나온 배흘림기둥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히 공포를 박은 다포(多包) 양식
이다. 강당 정면에는 갑사의 다른 이름인 '鷄龍甲寺(계룡갑사)'라 쓰인 현판이 당당한 풍채로
걸려 있는데, 이는 충청도절도사(節度使) 홍재의가 썼다고 한다. 글씨는 특이하게 파란색이다.


▲  휘황찬란한 강당 내부

강당 내부에는 동쪽에 불단을 두고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두었다. 그 뒤에
는 후불탱화 대신 거의 1,000개의 달하는 조그만 금동불을 빼곡히 배치하여 지장보살의 뒤를 든
든하게 받쳐준다. 금동불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금빛 찬란함에 두 눈이 가히 마비될 지경이다.
 


♠  갑사 둘러보기 (2) 사적비, 팔상전 주변

▲  갑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보장각(聖寶寶藏閣)

강당 앞에서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직진하면 성보보장각을 중심으로 한 갑사의 북쪽 구역이 펼
쳐진다. 사람들이 대부분 대웅전 구역만 보고 갈 뿐, 북쪽 구역은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이곳
에는 팔상전과 표충원, 사적비, 성보보장각 등의 볼거리가 있으므로 반드시 눈에 넣고 가길 바
란다.

맞배지붕의 단아한 모습을 지닌 성보보장각은 갑사가 지닌 동산문화유산들이 들어있다. 허나 시
간이 늦었는지 문을 굳게 닫아 걸어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  갑사의 역사가 담긴 사적비(史蹟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2호

성보보장각 정면에는 해우소가 있고, 여기서 일주문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사적비가 자리
해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사적비는 갑사의 내력이 담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 비좌(碑座)를
만들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운 다음 솥뚜껑처럼 생긴 지붕돌을 얹혔다. 비석 4면에는 모두 글씨를
새겼는데, 일부는 손상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비석에 금이 들어있다는
잘못된 이야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캐고자 비석을 괴롭히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한다.

1659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이천(李志賤, 1589~1683)이 짓고, 공
주목사 이기징(李箕徵)이 글씨를 썼다.


▲  갑사 표충원(表忠院)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성보보장각 뒤쪽에 담장에 둘러싸인 건물이 있는데, 그 앞쪽은 표충원, 뒤에는 팔상전이 있다.
표충원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38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뜨락에는 영규대사비가 세워져 있다.

▲  영규대사비

▲  저 문을 들어서면 표충원이다.


▲  갑사 팔상전(八相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4호

표충원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팔상전은 조선 후기 건물이다. 부처의 일대기를 8부
작으로 나눠 그린 팔상탱화(八相幀畵)가 있어서 흔히 팔상전이라 부른다. 팔상탱화 외에 신중탱
과 석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으로 나름대로의 격조를 갖
추었다. 팔상전 정면에는 툇마루를 지닌 요사(寮舍)가 있으며, 팔상전을 나와 산을 조금 오르면
내원암(內院庵)이 나온다.


▲  담장 너머로 본 보장각(寶藏閣)

팔상전을 나오면 정면에 담장에 둘러진 대웅전 구역이 보인다. 그중에서 담장도 안심이 안되는
지 녹색 펜스까지 치고 사나운 견공(犬公)까지 옆에 둔 맞배지붕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보물 582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판목(版木)을 간직한 보장각이다.

월인석보는 1459년(세조 4년) 세조의 명으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
을 합쳐 만든 불교대장경이다. 여기서 석보는 부처의 일대기를 뜻한다. 본래는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21권 46매만이 남아있다. 갑사의 월인석보는 1569년 충청
도 한산(서천군 한산면)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논산 쌍계사(雙磎寺
)에서 보관하던 것을 왜정 때 갑사로 넘어왔다.
계수나무에 돋음새김으로 새겼고, 판목의 오른쪽 밑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들의 이름이 있
으며,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 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는 보호를 위해 속세에는 공개하지 않으며, 사자암에서 가져온 석조보살입상도 저 안에 있다.
(성보보장각에 있을 수도 있음)


♠  갑사 둘러보기 (3) 대웅전 주변

▲  갑사 대웅전(大雄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5호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을 살피고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으로 넘어갔다. 이 구역은 1604년
절을 중건하면서 새롭게 개척한 곳으로 대웅전은 원래 대적전 주변에 있었다. 절의 법당(法堂)
인 대웅전이 개척지에 생겼으니 그 주변이 흥(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원래 자리였던 대적
전 구역은 변두리로 밀려나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로 인적이 드물 지경이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답게 규모가 매우 상당하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도 높이가 거의 2.5m에
이르러 그의 거창함을 더욱 끌어올린다. 대웅전 현판도 내 키에 이를 정도로 큼지막하여 주눅이
앞다투어 밀려온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불전으로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양식이다. 건물 내
부는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고,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비롯하여 3존불과 4개의 보살상을 봉안
하여 눈길을 끈다.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뜨락에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
탑을 닮은 5층석탑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철거했다.


▲  대웅전 현판의 위엄
현판의 글씨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현판 글씨는
1669년에 쓰여진 것으로 석봉체 계통의 명필(名筆)을 자랑한다.

▲  대웅전 불단

대웅전 볼단에는 건물만큼이나 육중한 3존불이 자리를 지킨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阿
彌陀佛)과 약사불(藥師佛)이 좌우에 앉아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
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
현보살(普賢菩薩) 등이 서 있는데, 한결같이 자비로운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이한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진해당(振海堂)
승려들의 생활공간 및 선방으로 쓰인다.

▲  대웅전 뜨락 좌측의 적묵당(寂默堂)
요사 겸 종무소로 쓰이며, 1899년에 세워졌다.


▲  갑사 삼성각(三聖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3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조선 후기
에 지어졌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사이에 담장을 놓아 속인의 접근을 통제했으나 이제는
삼성각까지 접근이 가능해졌다. 대신 뒤쪽의 대적선원과 승탑은 여전히 통제 구역이다.

▲  산신탱화와 산신상

▲  칠성탱화


▲  계곡을 바라보며 자리한 갑사 전통찻집
예전 2004년 3월에 왔을 때 일행들과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던 기억이 솔솔 떠오른다.


♠  갑사 둘러보기 (4) 대적전, 철당간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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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탑(功牛塔)

▲  공우탑에 새겨진 '功牛塔(공우탑) 명문

전통찻집에서 계곡을 건너면 조그만 3층석탑이 나온다. 겉으로 보면 3층 탑신(塔身)만 있는 것
으로 보이지만 기단부(基壇部)는 땅 속에 묻혀 윗부분만 햇살을 받고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
가 아닌 부속 암자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공우탑이란 말 그대로 절 중창 때 크
게 도움을 준 우공(牛公)의 부도탑이라고 하며, 짧막한 전설 한토막이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백제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44) 시절, 이곳에 절을 세울 때에 일이다. 목재
를 운반하던 소가 냇물을 건너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아마도 과로사인 듯 싶다. 소
가 죽자 지금의 자리에 그를 묻고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전설의 스토리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
는 일이나 그 시기가 100% 의문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략 384년으로 전설에 나오는
시기는 그 이전이다. 불교도 들어오지 않은 시절에 어찌 절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설이
과연 사실이라면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 되겠지만 탑의 양식을 보면 전혀 신뢰
성이 없다. 아마도 고려나 조선 때 절을 중건하면서 목재를 운반하던 소가 숨지자 그를 화장하
여 지금의 탑을 세웠을 것이다.
1층 탑신에는 '臥塔起立人道偶合 三層己巳厥功居甲<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우
연히 합치되었네, 3번을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다>
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
며 2층에는 '牛塔', 3층에는 '功'이 새겨져 있어 이 탑이 절에 공을 세운 소를 위해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절 건축에 헌신하다 죽은 동물을 위해 탑을 만들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던 승려의 지극한 마음과
심하게 부려먹었던 그들의 미안한 마음까지 느낄 수 있는 정(情)이 담긴 문화유적이라 하겠다.


▲  갑사의 옛 중심지를 지키는 대적전(大寂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공우탑에서 전통찻집으로 나가지 말고 안쪽으로 좀 들어가면 대적전이 나온다. 경내를 3개로 나
누면 이곳은 대적전 구역에 해당된다. 지금은 경내에서도 한참 외곽으로 밀려나 한적하기 그지
없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엄연한 갑사의 중심 구역이었다. 대웅전도 원래는 대적전 옆에 있
었다.
그러다가 1597년 절이 파괴되고 1604년 절을 다시 일으킬 때 계곡 건너에 자리를 다져 대웅전을
지었고, 자연히 그 일대가 흥하면서 절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면 원래 중심지였던 대적전 구역
은 대적전과 돌담에 둘러싸인 요사를 다시 짓는 선에서 더 이상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경내 변두리로 밀려나고 만다.

대적전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의 거처이다. 허나 이곳에는 비로자나불
대신에 석가불과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단 위에
천정을 1단 올려 닫집의 효과를 내고 있다.

대적전의 창건 시기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대적전은 18세기부터 많이 나타나는 다
포식 공포의 법식화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공포의 구성에 화려한 초각의 경향을
보이는 등 18세기 이후 불전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도리통의 협칸을 어칸에 비해 1/2정도
로 줄인 것은 19세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건축 특성과 함께 현판에 쓰인 명문으
로 보아 현판이 씌어진 182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 주변에는 옛 주춧돌과 기와가
널려 있어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

▲  갑사 승탑(僧塔) - 보물 257호

대적전 뜨락에는 수려한 자태로 속인(俗人)들의 안구를 정화시켜주는 아름다운 승탑(부도)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의 것은 아니며, 절 뒤편 산자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지금의 자
리로 수습한 것이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여러 조각을 베푼 3단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차례로 얹
힌 형태로 기단은 위로 올라갈 수록 줄어든다. 기단 밑부분에는 사자와 용, 구름을 어지럽게 새
겼는데, 승탑을 둘러싸고 심하게 각축전을 벌이는 듯,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기단 중간에
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배치했다. 탑신
을 받치는 윗부분에는 연꽃을 둘렀고, 탑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겼다. 그리고 다른 4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탑을 지키게 했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여 지붕 모양을 정교하게
따랐으며, 머리 장식은 옛날에 없어지고 나중에 달아놓은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로 꼭대기를
마무리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승탑에 비해 목조건축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기단부의 화려한 조각은 승탑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
다. 누구의 승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 갑사 인근에 터를 닦은 이름 모를 암자가 남긴 유
일한 유물이다.


▲  철당간에서 대적전으로 오르는 길

▲  갑사 철당간(鐵幢竿) - 보물 256호

대적전에서 일주문으로 내려가면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철당간을 만나게 된다. 양쪽 2개의 돌기
둥이 가운데에 있는 철기둥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데, 여기서 양쪽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
柱)라고 하며, 가운데 철기둥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철당간이라 부른다.

철기둥은 현재 24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28개였다고 하며, 1893년 7월 25일 벼
락을 맞아 4개가 떨어져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너무 하늘로 노출이 되있다보니 피뢰침 작
용을 받은 듯 싶다. 그것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웅장했을 것이고, 하늘을 찌르
는 그의 모습에 하늘은 더욱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철통을 보좌하는 돌기둥은 별 꾸밈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멋대가리가 떨어진다. 꾸밈이나 화려함은 통하
지 않는다.
이 철당간은 680년에 세웠다고 하나 근거는 없으며, 당간의 양식을 보아 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철당간은 갑사를 비롯하여 청주시 도심
에 있는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전부로 그만큼 희소가치가 상당하다.

철당간이 얼마나 높은지 주변 나무들을 죄다 압도한다. 그의 높이는 15m가 넘으며, 나무들은 기
껏해봐야 10m가 고작이다. 거기에 겨울 제국의 모든 것을 공출당한 상태이니 그 왜소함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철당간을 세웠을까?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은 아닐까?
용두사지 철당간 설화를 보면 청주 고을이 북쪽으로 떠내려가자 이를 막고자 세웠다고 한다. 갑
사의 철당간 역시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이 풍수적으로 배의 지형을 상징한다하여 떠
내려가지 말란 의미와 함께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부분을 보충하고 마을과 절의 안녕을 기원하려
는 의미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  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철당간을 둘러보고 계곡을 건너 일주문으로 향했다. 겨울에 잠긴 갑사 숲길을 거닐면 사천왕(四
天王)의 보금자리인 사천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2002년에 지은 것으로 내부에는 사천왕
상이 봉안되어 절을 찾은 중생들을 검문한다.


▲  겨울 제국의 신민이 되어 봄을 열망하는 갑사 숲길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의 눈치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저들은
환하게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갑사 숲길 (일주문 → 천왕문 방향)
갑사로 가는 숲길은 갑사가 품은 또다른 보물이다. 겨울이라 그렇지
봄과 여름, 늦가을에는 매우 매혹적인 숲길이다. 

▲  갑사 일주문(一柱門)

갑사 일주문은 1998년에 만든 것으로 현판에는 절의 이름인 '계룡산 갑사'가 쓰여 있다. 문이라
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다.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하겠다는 부처의 뜻이 담긴 것
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가 나오고, 이윽고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주막촌
이 펼쳐진다. 절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하는데, 산채비빔밥이나
파전, 도토리묵, 동동주, 백숙, 된장찌개 등을 판매한다. 휴일이면 주막촌이 시끌벅적할텐데 평
일이라 썰렁함이 진하게 감돈다. 몇몇 집은 아예 문을 닫아걸고 쉬었다.
이곳에 오니 시간은 어느덧 6시, 햇님은 달님에게 업무를 넘기고 천하는 다시 땅거미의 세상이
되었다. 오전에 계룡산을 오를 때 점심은 대충 때우고 저녁은 황제처럼 먹기로 했지. 그래서 점
심은 동학사 주막촌에서 산 김밥 4줄과 컵라면, 계란으로 동학사와 남매탑에서 반반씩 먹었다.
이제 저녁시간이고 하니 먹을 곳을 물색하다가 서울식당이란 곳에 들어갔다. 이 집도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가 몇년 만에 맞는 손님처
럼 환하게 맞이한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그날 매출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거의 주말 장사니)

식당에 자리를 피고 된장찌개와 묵밥, 해물파전을 주문했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고, 등산을
한 탓에 시장기가 하늘을 찌른다. 드디어 나타난 저녁밥상, 나오기가 무섭게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총동원해 열심히 배를 채운다. 처음에는 배고픔에 눈이 뵈는 것이 없어 양이 적어 보
였으나 먹고나니 양이 많았다. 파전은 덩어리가 커서 간신히 다 먹었고, 묵밥과 된장조치(찌개)
는 조금 남겼다. 반찬도 맛있는 것은 동이 나고 몇몇은 반 정도 남았다. 동동주나 막걸리도 1잔
하면 좋겠지만 술은 땡기지 않아 그냥 식사만 했다.

그렇게 황제처럼 저녁을 마치고 커피 1잔 뽑아마시며 갑사 주차장으로 갔다. 여기서 속세로 나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날이 어두워지니 따스한 기운 대신 제법 매서운 산바람이 우리를
희롱한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려 공주시내버스 320번을 타고 공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아간 계룡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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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2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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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윤봉길의사기념관 (윤봉길 유품)












계룡산 늦겨울 산행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 계룡산 나들이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
계룡산 삼불봉에서 바라본 천하
▲ 삼불봉에서 바라본 천하



계룡산 동쪽에 자리한 동학사(東鶴寺, ☞ 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홍살문 부근에 자리를 잡
아 속세에서 사온 김밥과 계란으로 점심을 때웠다. 고작 김밥 2줄과 계란 2개를 먹었지만 포
만감의 행복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와 우리를 희롱하려든다. 허나 우리는 그들의 희롱을 물
리치고 남매탑으로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동학사에서 남매탑까지는 거의 40분 거리이다. 처음에는 경사도 완만하고 길 옆에 계곡도 흐
르지만 탑과 한발자국 가까워질 수록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힘겨워진다. 계곡 역시 어
디로 마실을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묵묵히 길을
오르다보면 보이지 않던 남매탑이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 동학사에서 남매탑으로 오르는 산길


♠ 동학사의 옛 자리를 지키는 2기의 석탑, 의남매의
애련한 전설이 가슴을 여미게 하는 남매탑(男妹塔 = 오뉘탑)

동학사에서 삼불봉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삼불봉 밑에 평탄한 장소
가 나온다. 그곳에 계룡산의 명물인 남매탑 2기가 서로를 보듬으며 속세를 굽어본다. 탑이 있던
자리는 동학사의 전신(前身)으로 전해지는 청량사(淸凉寺)의 옛터로 고려 때까지 이곳에 둥지를
트고 있다가 조선 초기에 지금의 자리로 내려와 동학사로 이름을 갈았다.
남매탑은 각각 5층과 7층석탑으로 정식 명칭은 절터의 이름을 따서 청량사지5층석탑, 청량사지7
층석탑이다. 청량사 시절의 유물로 이들이 남매탑이라 불리게 된 믿거나 말거나 사연은 다음과
같다.

동학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회의화상(懷義和尙)의 스승 상원조사(上願祖師)가 큰 돌을 허리에
이고 계룡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호랑이가 슬금슬금 다가와
'야 힘들지. 내가 흔쾌
히 도와줄께!'
뒤에서 돌을 받쳐주어 쉽게 돌을 운반했다. 상원은 그 돌로 남매탑 자리에 조촐
하게 초암(草庵)을 짓고 불도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호랑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상원이 '어인 일로 왔냐?' 그러니 호랑이
'밥을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렸어!' 하면서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원은 뼈를 제거
해주고 '앞으로 사람을 해치지 마라!!' 따끈한 잔소리를 던지니 호랑이가
'우리도 요즘 먹고 살
기가 힘들다보니 음식을 가릴 여유가 없어. 하지만 앞으로 흔쾌히 주의할께~~!!'
고맙다며 고
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얼마 뒤 호랑이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어디서 아리따운 여인 1명을 물어와 그의 초암 앞에 던
져놓고 '상원아 나와봐라~ 좋은거 가져왔어' 그러면서 사라졌다. 그가 혼자 사는 것을 눈치채고
여인과 짝을 지어 잘살라는 뜻에서 그런 기특한 짓을 한 모양이다. 허나 상원은 이미 출가한 승
려이다. 호랑이는 그 점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그때 여인은 의식을 제대로 잃은 상태였
으므로 상원은 좋든 싫든 그 여인을 수습하여 간호를 해주었다.
그녀가 깨어나자 신분을 확인했는데, 경상도 상주(尙州) 지역에 이름있는 집안인 김화공(金化公
)의 딸이었다. 그가 어찌 계룡산 호랑이에게 납치되었는지 자세한 경위는 알 도리가 없지만 어
쨌든 호랑이가 물건은 제대로 가져온 셈이다.

상원의 간호를 받고 쾌차한 여인은 그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상원 역시 마찬가지였
다. 딸을 애타게 찾던 김화공 내외는 상원에게 혼인을 제안했고, 여인 역시 이를 원하며 상원의
마음을 들쑤셨다. 마음의 공황에 빠져 방황하던 상원은 공황에 빠진 자신을 원망하며 결국 혼인
을 거절했다.
여인은 눈물로 다시 혼인을 청했으나 상원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상원도 그러곤 싶겠지만
이미 승려가 된 몸이고 그동안 쌓은 불도도 아깝고 하니 자기 자신도 무척 애간장이 탔을 것이
다. 그래도 서로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들인지라 인연을 차마 저버리지는 못하겠고 대신 의남
매(義男妹)가 되어 같이 불도를 닦자고 제안을 했다. 비록 혼인은 아니지만 남매가 되어 서로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의남매가 되어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때로는
채찍질도 해가며 불도에 더욱 정진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세상을 뜨자 (누가 먼저 죽었는지는 모름~~) 상원의 열성제자인 회의화상은
여인의 부친인 김화공의 지원을 받아 탑을 세워 그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한다. 허나 이들
탑의 조성시기는 공교롭게도 신라 후기가 아닌 고려 중기라 전설의 신빙성을 보기 좋게 떨어뜨
린다. 아마도 회의화상의 스승 상원조사에 관한 한 토막 전설이 청량사에 전해져 온 것을 나중
에 동학사에서 탑과 연관을 지어 재구성한 듯 싶다. 전설에 나오는 호랑이가 날라다 준 여인은
상원조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거나 청량사에 시주를 많이 한 여인을 모델로 한 듯 싶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전설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주 희방사(喜方寺)와 통영 도솔암(兜
率庵)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온다. 결말만 다를 뿐, 시작과 과정은 같다. 호랑이가 나타나 목
구멍에 걸린 가시를 빼달라고 청했고, 이를 빼주자 아름다운 여인을 납치하여 그에게 건넨다.
그런데 여인들은 모두 귀족이나 유력 집안의 딸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여인의 부친이 감사의 뜻
을 표하고 자신의 딸과 혼인해줄 것을 부탁하나 승려는 모두 거절한다. 남매탑에서는 승려와 여
인이 의남매가 되었지만 희방사와 도솔암은 여인의 집안에서 절을 지어주는 선에서 끝낸다.

허나 이들 전설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전설을 통해 상주 지역 김화공이라는 유
력집안에게 지원을 받았음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정말로 혼사 이야기도 있었을지도 모름) 그
리고 전설에 호랑이를 넣은 이유는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며 사람들도 호랑이를 크게 무서워하
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신성시하는 경향이 컸다. 고구려 고분을 보면 좌청룡 우백호(右白虎)라
하여 하얀 호랑이가 푸른 용과 나란히 그려져 있으며, 산신(山神) 신앙에도 호랑이가 등장한다.
단군설화에도 성질 급한 호랑이가 나오고,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효자동의 효자비(孝子碑) 전
설에도 박창선이란 사람이 매일 호랑이를 타고 선친(先親)의 묘를 찾아갔다는 것, 후백제 견훤
(甄萱) 설화에도 견훤이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라 그 기운으로 무예가 뛰어나고 나라를 세웠다
는 것. 기타 여러 설화와 전설에서 호랑이가 중요한 존재로 나온다.

이처럼 호랑이가 대단한 존재이기에 호랑이를 등장시켜 창건설화의 격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호랑이 대신 여우, 늑대, 수달, 곰을 등장시켰다면 조금은 이상했을 것이다. 여우나 늑대,
곰이 승려에게 목에 걸린 뼈를 빼달라는 것도 그렇고, 그들이 감사의 뜻으로 여인을 납치하여
건네는 모습도 생각해보니 좀 어색하고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런 짐승들 보다는 호랑이를 집어
넣는 것이 설화의 격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나의
허접스러운 생각일 뿐. 정답은 아니다.

어쨌든 이 남매탑은 그 이름 그대로 다정한 오누이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80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청량사는 창건 이후 고려 때 무너진 것을 조선 초기에 저 아래로 내려가 동학사
로 다시 태어났다. 옛 청량사 자리에는 남매탑 외에 3층석탑도 있었으나 3층석탑은 동학사로 내
려갔으며, 남매탑 밑에는 상원암(上元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옛 청량사터를 지킨다.

조그만 여동생 탑인 5층석탑은 보물 1284호, 오빠 탑인 7층석탑은 보물 1285호이다. 상원암과
남매탑은 동학사에서 관리한다.

※ 남매탑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① 버스 이용 (동학사3거리 경유 / 서울에서 제일 빨리 가는 방법임)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계룡(신도안)행 직행버스를 타고 동학사(동학사3거리) 하차, 동학사3거
리(학봉3거리)에서 걸어가거나 학봉3거리(또는 학봉리) 정류장에서 동학사로 들어가는 대전시
내버스 107번이나 공주/논산시내버스를 타고 동학사 종점으로 이동 (학봉3거리에서 겨우 3정
거장임)
② 버스 이용 (유성 경유)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광주와 전주, 청주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③ 철도 이용 (대전역 경유)
* 서울역, 영등포역, 수원역, 광명역, 천안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대전역 하차
* 부산역, 마산역, 동대구역, 울산역, 포항역, 구미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 제천역, 충주역에서 대전행 충북선 열차 이용
④ 현지 교통 (유성, 대전, 공주, 논산에서 동학사까지)
* 대전역과 유성시외터미널에서 대전시내버스 107번 이용 (17~20분 간격)
* 대전지하철 1호선 현충원역(3번 출구), 유성온천역(5번 출구), 용문역(5/8번 출구)에서 107번
시내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동학사행 시내버스 1일 3회 (시간이 맞지 않으면 유성행 5번
시내버스를 타고 박정자에서 107번으로 환승)
* 논산역과 논산터미널에서 동학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21번이 1일 6회(휴일은 4회) 운행
⑤ 승용차로 가는 경우
* 호남고속도로지선(회덕~논산) → 유성나들목 → 공주방향 32번 국도 → 박정자3거리 좌회전
→ 동학사 주차장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 → 공주방향 23번 국도 → 월송교차로에서 대전방향 32번 국
도 → 박정자삼거리에서 우회전 → 동학사
⑥ 현지 등산
* 동학사 종점 → 동학사 홍살문 → 남매탑 (1시간 10분)

★ 남매탑 관람정보
* 동학사나 갑사를 거쳐서 갈 경우 입장료를 내야 된다.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천원(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500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동학사 ☎ 042-825-2570)


▲ 남매탑에서 바라본 계룡산 남쪽 줄기

▲ 남매탑을 후광으로 삼아 절을 꾸리는 상원암

남매탑 서쪽 밑에는 상원암이란 조촐한 암자가 들어앉았다. 법당 겸 종무소 및 요사(寮舍)로 쓰
이는 팔작지붕 기와집과 가건물이 전부인 그야말로 조그만 암자로 동학사에서 관리한다. 법당은
1970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법당 앞에 서면 계룡산 남쪽 줄기가 훤히 두 눈에 들어와 마음을 시
원하게 해준다.
법당 뜨락 동쪽에는 등산객들이 쉬어가며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데,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밥과 간식을 먹으면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는 모
습이 정겹다. 우리도 한쪽에 앉아 동학사에서 남긴 김밥과 간식을 먹었고, 무려 2,000원의 거금
으로 마련한 컵라면에 뜨끈한 물을 부어 김밥과 겯드려서 먹었다. 그 맛이 얼마나 꿀맛 같던지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는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지 맛이 좋은 것 같다. 집에서 먹는 라면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천상(天上)의 맛이다.

그렇게 또다른 점심을 마치고 천막으로 된 공양매점을 찾았다. 상원암 경내에 있지만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무인매점으로 여기서 커피 1잔 뽑아 마실려고 했는데, 무려 500원씩이나 한다. 그
외에 양초나 공양미, 휴지 등은 속세보다 곱절을 얹혀 팔고 있었다. 관리인이 없기 때문에 돈은
불전함에 알아서 넣으면 되는데, 엄청난 가격에 입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는다.
그래도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조금은 쌀쌀하고 식곤증까지 밀려와 가격에 상관없이 1잔 뽑아 마
실려고하는데, 동전을 넣는 투입구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커피 버튼을 꾹 눌러보
니 종이컵이 나오면서 알아서 커피가 담긴다. 동전은 그 옆에 마련된 철제 불전함에 소정의 돈
을 알아서 넣으면 된다.
우리는 커피를 4잔이나 뽑아 마시고 500원 정도를 넣었다. 우리 같은 가난한 중생에게까지 그렇
게까지 돈을 가져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부처와 절은 아비규환에서 허우적거리며 신음하거나
없는 중생을 위한 존재이지 돈을 위한 존재는 아니니까 말이다.


▲ 상원암 공양매점

▲ 청량사지5층석탑 - 보물 1284호

▲ 청량사지7층석탑 - 보물 1285호

남매탑의 여동생인 5층석탑은 겉으로 보면 3층으로 보인다. 허나 그는 엄연한 5층석탑이다 기단
부(基壇部)로 착각하기 쉬운 길쭉한 1층 부분과 희미하게 남은 5층 부분 때문이다.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단의 기단을 벽돌처럼 쌓고 5층의 탑신을 얹은 형태로
얼핏보

벽돌처럼 쌓은 모전탑을 연상케 한다. 탑신의 각층 옥개석(屋蓋石)은 얇고 넓으며, 1,2층 옥개
석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 넣은 구조이다. 3,4층 탑신과 옥개석은 따로 돌 1개씩
이며, 4층 옥개석 받침은 1단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5층은 탑신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옥개
석이 없어져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탑 꼭대기에는 둥근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탑의 형태를 가만보면 백제 탑의 백미(白眉)인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을 많이도 닮았
다.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허무하게 막을 내린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를 비롯한 옛 백제의 본토
에서는 고려 후기까지 정림사지 석탑과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들이
곳곳에 솟아났다. 이 탑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탑이 위로 올라가면서 생략된 부분이 있고, 조
각 수법이 일정치가 않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의 내용처럼 신라 후기에 조
성된 탑이 아닌 것이다.

5층석탑의 곁을 지키는 오빠탑 7층석탑은 5층석탑보다 1.5배 정도 높다. 전체적인 모습은 5층석
탑과 비슷하며, 네모난 바닥돌 위에 1단의 기단을 세우고 7층의 탑신을 얺힌 형태로 5층탑과 마
찬가지로 1층 탑신이 지나치게 크다.
기단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딴 돌로 세웠으며, 1층 탑신에는 네모난 감실(龕室)을 새겼다. 감실
은 불상을 봉안하는 공간으로 현재는 아무 것도 없으며, 옆면에는 문비로 보이는 아주 얕게 파
여진 부분이 있다. 옥개석 받침수는 1층이 2단이고 7층이 1단이며, 2층과 3,4층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1층이 지나치게 크고 꼭대기로 올라갈 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균형은 크게 떨어진다. 탑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만 있을 뿐, 머리 장식은 없다.

탑의 양식을 보면 백제 2대 탑의 하나인 미륵사지석탑과 익산 왕궁리(王宮里) 5층석탑으로 이어
지는 양식으로 5층탑처럼 생략된 부분이 많고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이들 탑은 장대한 세월의 흐름 앞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자 1981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 남매탑 주변에 흩어진 거북돌 ▼

남매탑 주변 공터에는 거북 모양의 돌이 가득 널려있다. 눈과 코, 입이 표현되지 않았을 뿐 머
리 부분이 돌출되어 영락없는 거북이다. 저기에 비석만 세우면 귀부(龜趺)를 갖춘 비석이 된다.
이들의 등 부분은 평탄하여 앉기에도 좋으며, 등산객들의 쉼터로 사랑을 받고 있다. 돌을 보면
자연이 빚은 것이 아닌 거북 모양으로 인위적으로 다듬었는데, 왜 남매탑 주변에 이들을 배치시
켰는지는 모르겠다. 옛날부터 있던 것은 아닌듯 싶으며, 동학사에서 남매탑과 더불어 명물로 만
들고자 갖다둔 것이 아닐까 싶다.


▲ 상원암에서 만난 묘공(猫公)의 위엄
상원암 쉼터 주변에 누런색 털옷을 입은 묘공 두 분이 어슬렁거린다.
상원암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등산객들이 준 음식을 잽싸게 받아먹고
양지 바른 곳에 주저앉아 잠시 단잠의 여유를 즐긴다.


♠ 삼불봉(三佛峰)에서 천하를 바라보다

▲ 삼불봉 정상

남매탑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가파른 길을 다시 10분 정도 오르면 삼불봉고개이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가면 삼불봉과 관음봉, 직진으로 바로 내려가면 금잔디광장과 갑사
로 통한다. 지금까지는 눈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았는데, 하늘과 많이 가까운 곳이라 삼불봉 가
는 길은 눈이 가득히 쌓여있다.

눈으로 미끄러운 산길을 헤쳐가며 3분 정도 가면 삼불봉으로 오르는 철제계단이 나온다. 계단의
경사는 속세살이처럼 매우 가파르며 간신히 2명이 교행할 정도로 좁다. 올라갈 때는 계단만 보
고 오르니 덜하겠지만 내려갈 때는 정말로 아찔하다. 그런 계단길을 2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삼
불봉 정상이다.

삼불봉(三佛峰)은 해발 775m로 계룡산에서 3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
天皇峰, 845m)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며, 2번째로 높은 쌀개봉(827m) 역시 마찬가
지다. 그나마 속인들이 속 편히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바로 삼불봉이다. 삼불봉이란
이름은 동학사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3명의 부처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삼불봉의 눈 덮힌 풍경은 계룡8경의 제2경으로 치고 있다. 허나 눈이 대부분 녹고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로 그 원대한 설경(雪景)은 볼 수 없었다. 이곳에 오르면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멀
리 대전시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조망(眺望)도 가히 천하 일품이다.

※ 삼불봉 찾아가기
1. 동학사
→ 남매탑 → 삼불봉고개 → 삼불봉
(1시간 20분)
2. 갑사 → 용문폭포 → 신흥암 → 금잔디광장 → 삼불봉고개 → 삼불봉 (2시간)
3. 동학사 → 은선폭포 → 관음봉고개 → 관음봉 → 삼불봉 (2시간 30분)


▲ 삼불봉에서 관음봉(觀音峯)으로 이어지는 능선
관음봉으로 가는 능선길은 조금 험하다. 특히 눈이 쌓인 겨울에는 더욱 그렇다.
관음봉을 거쳐 신원사나 은선폭포로 내려갈 수 있다.

▲ 삼불봉에서 바라본 천하 (계룡산 남쪽 능선)

▲ 삼불봉에서 바라본 남매탑
사진 가운데로 남매탑이 희미하게 보인다.

▲ 삼불봉에서 바라본 계룡산 북쪽 능선과 공주(公州)의 산하

▲ 삼불봉고개 (금잔디광장 쪽에서 바라본 모습)

삼불봉에서 잠시 천하를 굽어보고 삼불봉고개로 내려왔다. 관음봉 쪽은 눈으로 길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삼불봉고개를 경계로 남매탑 방면은 눈이 없지만 금잔디광장 방면은 그 반대로 완연
한 눈길이다.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다. 같은 공주 땅이고 해발
도 비슷한데 말이다. 이는 갑사 방면 길이 남매탑 방면에 비해 볕이 잘 들지 않기 때문에 눈이
길게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다.

내려가는 것이 쉬울 듯 하지만 눈 때문에 자칫 벌러덩 미끄러질까 염려되어 나무들에게 민폐를
잔뜩 끼치며 조심조심 내려갔다. 이런데서 괜히 방심하다가 자칫 미끄러지면 이건 정말 대책이
없다. 그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돌다리도 두들겨 패는 심정으로 가는 것이 제일이다.


▲ 금잔디고개로 가는 산길
눈이 바다를 이루며 쌓여있는 산길에 나의 발자국을 화석처럼 무수히 남겨본다.
겨울의 제국이 지면 나의 흔적도 눈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겠지~~
그래서 인생이란 덧없고 부질없는 모양이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사라질 것이니 말이다.

▲ 헬기장이 있는 금잔디고개

삼불봉고개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헬기장을 갖춘 금잔디고개에 이른다. 금잔디고개라고 하여
금잔디가 입혀진 것은 아닌데 왜 그런 이름을 지녔는지 궁금하다. 이곳은 수정봉(675m)을 비롯
하여 관음봉과 연천봉, 갑사, 동학사 방면으로 통하는 요충지로 넓은 반상과 의자와 탁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평일이라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여기서 길을 멈추고 요기를 하거나 쉬
었다 가는 등산객들로 미어터진다.


♠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었다고 전하는 자연산 바위 천진보탑(天眞寶塔)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68호

▲ 천진보궁에서 올려다 본 천진보탑

금잔디고개에서 갑사 방면으로 25분 정도 정신없이 내려가면 신흥암(新興庵)이란 조그만 산중암
자가 모습을 비춘다. 이 절은 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이 왕위에 오르던 420년에 아도화상(阿道
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는 전혀 신뢰할 바가 못되며, 갑사의 부속암자로 훨씬 후대
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경내에는 법당인 천진보궁을 비롯하여 산신
각과 요사 등 4~5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천진보궁 뒤에는 절을 먹여 살리는 든든한 밥줄이자
신비의 바위로 통하는 천진보탑이 높이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 계룡산 북서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신흥암

▲ 신흥암 천진보궁(天眞寶宮)

신흥암의 법당인 천진보궁은 천진보탑을 등지며 자리해 있다. 법당임에도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불단과 불화, 나한상(羅漢像)만이 가득한데, 이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천진보탑 때
문이다. (물론 그 바위에 정말 진신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음) 이 건물은 적멸보궁(
寂滅寶宮)과 비슷한 성격으로 보면 되겠다.

경내에서 천진보탑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보여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가파른 언덕에 있
어 현실은 다르다. 산신각을 끼고 1분 정도 올라가야 되며, 약간이지만 낭떠러지길이 있어 주의
를 요한다.


▲ 천진보궁 내부
불상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주인 없는 방석만 3중으로 두텁게 덮여 있다.
불단(佛壇) 뒤로 넓게 창문을 내서 천진보탑이 시야에 들어오게끔 했는데,
이는 적멸보궁의 특징이다.

▲ 천진보탑 가는 길목에 자리한 신흥암 산신각(山神閣)

▲ 천진보탑의 위엄

신흥암을 굽어보며 자리한 천진보탑은 명칭은 탑이지만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바위이다.
원래는 계룡산의 평범한 바위로 그 생김새가 자못 위엄이 있어 옛날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대상물로 인기를 누렸을 듯 싶다. 그러다가 바위 밑에 신흥암이 둥지를 틀면서 석가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퍼뜨려 졸지에 부처의 사리탑이 되었고, 천진보탑이란 거창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바위에는 다음에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부처가 열반하자 인도의 아육왕은
구시나가라국에 있는 사리탑에서 많은 양의 사리를 발견했다.
그는 이를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나눠 주었는데, 그때 사천왕(四天王) 가운데 북쪽을 담당하던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을 계룡산으로 보내 이 바위 안에 석가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이다.
(당시 인도와 한반도는 교류도 없었음) 그 이후 갑사를 창건했다는 아도화상이 이를 발견하여
천진보탑이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설처럼 바위 안에 부처의 사리가 있을까? 이는 바위 속을 들춰내지 않는 이상은 확
인할 길도 없으며, 사리함(舍利函)을 넣을 만한 구멍도 없다. 이는 신흥암에서 퍼트린 어디까지
나 전설이다. 이런 전설을 천하에 퍼트려 절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많은 불자들을 유치하여 그
들에게 시주를 받는다. 그래서 그 시주로 신흥암 승려들도 먹고 살고, 여유가 된다면 사세(事勢
)도 확장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절을 꾸리고자 바위를 부처의 사리탑으로 둔갑시켜 그럴싸하게
전설을 만든 것이다.


▲ 거대한 봉우리처럼 보이는 천진보탑과 수정봉(오른쪽 봉우리)

천진보탑은 부처의 사리가 들어있다는 전설과 함께 신비한 현상으로 유명하다. 바로 바위가 스
스로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현상이 그것이다.
예로부터 이 바위에 진실한 마음을 담아 기도를 올리면 방광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며, 바위 왼
쪽 경사면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곳의 방광 장면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6.25 이
후이다. 당시 갑사 부근에 주둔하던 미국 병사가 어느 날 늦은 저녁 신흥암 주변이 환해지는 모
습을 보고 호기심에 신흥암까지 올라가 그 신비의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고 한다. 또한 1994년 2
월에도 저녁에 방광이 발하여 소방관이 출동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사실일까? 우리가
갔을 때는 대낮이라 그런 현상은 볼 수 없었다.

그 현상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는 모른다. 직접 안봤기 때문에.. 그것이 초자연적인 현상
인지 아니면 신흥암에서 조작한 건지는.. 허나 이런 현상을 굳이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그
냥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바위는 온통 하얀 피부로 되어있다. 외모도 정말 수려하고 잘생겼다. 그런데 바위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남근(男根)과도 어느정도 닮은 것 같다. 어쨌든 석가의 사리가 봉안되었다는 전설
부터 스스로 빛을 발하는 신기한 현상, 남근을 닮은 모습까지 보면 볼수록 자연의 위대한 조각
솜씨에 경탄에 경탄만 거듭 나올 뿐이다. 자연의 찬란한 작품 앞에 인간의 작품은 언제든 사라
질 수 있는 초라한 먼지에 불과하다.


※ 천진보탑(신흥암) 찾아가기
1. 동학사 → 남매탑 → 삼불봉고개 → 금잔디고개 → 신흥암 (1시간 50분)
2. 갑사 → 용문폭포 → 신흥암 (50분)


▲ 얼음에 가려진 용문폭포(龍門瀑布)

신흥암을 뒤로 하고 갑사 방면으로 15분 정도 내려가면 갑사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문폭포가 모
습을 드러낸다. 폭포의 높이는 10m도 되지 않는 작은 폭포이지만 수정보다도 맑은 계곡물이 큰
세상을 꿈꾸며 바위를 타고 소(沼)로 떨어지는 모습이 정말 일품이다. 허나 심술쟁이 겨울제국
이 그의 아름다움에 부아가 터졌는지 얼음과 눈으로 폭포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게다가 폭포를
알리는 이정표나 안내문이 없어 그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폭포 앞 바위에는 '용문폭(龍門瀑)'이라 쓰인 거대한 바위글씨가 있다. 이 글씨는 폭포의 수려
함에 반한 옛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글자 크기가 거의 60cm를 넘는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보이기도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바위가 그들의 낙서(?)로 조금은
흉하게 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다.

겨울제국이 혹여 눈치챌라 숨을 죽이며 폭포로 떨어지는 계곡물, 소쩍새가 울면 겨울이 강제로
씌운 얼음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용문폭(龍門瀑)' 바위글씨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추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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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2년 3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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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동학사 (동학사계곡)

'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
계룡산 동학사


겨울의 제국이 스르르 그 기운이 다해가던 2월 하순 평일에 후배와 계룡산을 찾았다. 중악(中
嶽)이라 불리며 신성시되오던 계룡산의 맑은 정기를 듬뿍 받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저번 주만
해도 날씨가 겁나게 추웠는데, 이번 주는 은근히 포근하여 두꺼운 잠바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
다. 그래도 뫼에 오르면 좀 추우니 1단계 낮은 잠바와 장갑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서울고속터미널에서 유성행 고속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을 달려 대전(大田)의 부도심인 유성(
儒城)에 이른다. 여기서 대전시내버스 107번(대전역~동학사)을 타고 다시 20분을 내달려 계룡
산의 동쪽 관문인 동학사 종점(학봉리)에 이른다.

휴일 같으면 등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겠지만 평일의 한복판이라 사람들은 별로 없다. 계룡산
그늘에 형성된 주막촌도 썰렁하긴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지나는 등산객들에게 여기서 밥드시고
가라며 목이 터져라 호객행위를 하지만 점심시간임에도 반응이 그리 신통치가 않다.

우리는 김밥과 라면, 과자 등을 사들고 삼불봉 밑에 남매탑이나 동학사에서 간단히 때우고 갑
사(甲寺)로 넘어가서 저녁만큼은 황제처럼 먹기로 했다. 그래서 주막촌 편의점에 들어가 먹을
것을 구입하는데. 김밥과 컵라면이 무려 2,000원씩이나 한다. 김밥은 그래도 시내보다는 덩치
가 크니 봐줄 만 하겠으나, 컵라면은 800원짜리는 2.5배나 얹혀서 아무렇지 않게 파니 어이가
달아날 따름이다. 산 중턱도 아니고 수레가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시내와도 가까운 주막촌에서
말이다. 하지만 산에 올라 먹는 라면과 국물의 맛이 그리워 그냥 질렀다.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주막촌을 지나면 별로 반갑지도 않은 동학사 매표소가 등산객을 맞는다. 국립공원의 입장료는
폐지되었지만 몇몇 오래된 절은 여전히 문화재관람료를 이유로 입장료를 받는데, 동학사도 그
중의 하나로 소장 문화유산이 매우 빈약한데도 어른 기준으로 2,000원이나 받는다. 그래서 비
상용으로 지니고 다니는 대학교 학생증을 제시하여 700원에 입장을 했다.


♠ 동학사 가는 길 (일주문에서 홍살문까지)

▲ 동학사 일주문(一柱門)

매표소를 지나면 겨울에 잠긴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길 옆에는 동학사계곡(溪谷)이 졸졸졸
흐르며 숲길의 정치를 북돋는다. 그런 길을 3분 정도 가다보면 기둥 2개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자 속세와 절의 경계를 가르는 존재로 절 입구에 흔히 있
는 존재이다. 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이 문은 1999년 11월
승려 일연이 지은 것으로 공포(空包)가 촘촘히 박힌 육중한 다포(多包) 양식의 맞배지붕을 2개
의 기둥이 받쳐들고 있는데, 지붕이 너무 큰 나머지 기둥이 안스러울 정도이다. 기둥을 가만히
보니 가운데가 좀 볼록 나왔는데, 아마도 배흘림기둥인듯 싶다.


▲ 조용히 봄을 잉태한 동학사계곡
겨울의 눈치에 숨죽여 지냈던 동학사계곡은 소쩍새가 울 때면 기지개를
활짝 켜며 봄을 맞이할 것이다. 날씨가 영상의 기온을 누리고 있으나
눈은 아직도 계곡의 절반을 뒤덮으며 겨울 제국의 위엄을 과시한다.

▲ 동학사 문턱에 홍살문 - 홍살문을 갖춘 절은 동학사가 유일하다.

일주문을 들어서 17분 정도 가면 홍살문이 있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남매
탑과 삼불봉이며, 직진하면 동학사와 은선폭포로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동학사이다. 그런데 뭔
가 이상한 점이 있다. 절 앞에 특이하게도 홍살문이 있는 것이다. 그럼 홍살문이 무엇인가? 사
당이나 왕릉, 지배층의 묘역, 관아, 향교 문턱에 세우는 존재로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이
다. 여닫는 문이 아닌 공개된 문이란 점은 일주문과 비슷하나 성격은 전혀 틀리다.

그럼 왜 홍살문이 절의 관문인양 세워져 있을까? 그 이유는 당연히 있다. 바로 경내 동쪽에 자
리한 숙모전이란 사당 때문이다. 숙모전은 조선 세조의 명으로 지어진 것으로 단종(端宗)과 사
육신 등을 배향하고 있다. 이렇게 왕명으로 지은 사당이 있으니 그 입구에 홍살문을 두어 엄숙
함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전혀 맞지 않는 홍살문과 절집의 어색한 어울림, 그 현장이 바로 동
학사이다.

문 중앙에는 태극마크가 달려 있고, 다른 곳의 홍살문보다 기둥이나 창살의 굵기가 얇다.


▲ 세진정(洗塵亭)

홍살문을 지나면 길 왼쪽 계곡에 세진정이란 정자가 있다. 6각형의 조촐한 정자로 누구든 발을
들여 쉬어갈 수 있게끔 개방되어 있다. 정자의 이름인 세진은 마음 속 번뇌와 티끌을 계곡에서
말끔히 닦고 깨끗한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란 뜻이다. 즉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정자에 들어가
무심히 흐르는 계곡에 그나마 남은 속세의 미련과 번뇌를 말끔히 내던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
어오라는 동학사의 주문이 담겨진 것이다.


▲ 동학사 앞을 흐르는 동학사계곡

▲ 동학사 범종루(梵鍾樓)

세진정을 지나면 담장에 가려진 숙모전과 더불어 2층 규모의 범종루가 나온다. 범종루에는 중생
구제를 향한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을 비롯한 4물(四物)의 보금자리로 1872년
주지 옥봉이 세웠다. 1974년 범종을 새로 만들었으며, 2000년에 법고(法鼓)와 운판(雲版), 목어
(木魚)를 달았다. 범종루는 범종이 있는 2층만을 일컬으며, 시멘트로 지어진 1층에는 가게를 두
어 사찰용품을 팔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동학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범종루와 육화당(六和堂)
육화당은 1966년 주지 광호가 3년에 공사 끝에 완성된 건물로 대중을 수용하고
공양 및 공부를 하는 대방(大房)의 역할을 한다.


※ 계룡산 동쪽에 안긴 비구니 사찰, 충신의 사당을 간직한 동학사(東鶴寺)
동학사는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을 대표하는 절이다. 계룡산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자리한 이곳
은 724년(신라 성덕왕 22년) 상원조사(上願祖師)의 제자인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지금의 남매탑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타난 곳이라 하여 절의 이름을 청량사
(淸凉寺)라 했으며, 남매탑은 청량사 시절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920년(고려 태조 2년)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고려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면서 원당(願堂)을
세워 고려의 국운을 기원했다고 하며, 936년에는 고려 개국공신이자 문화유씨의 시조인 유차달
(柳車達)이 신라의 3대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석탈해(昔脫解), 김알지(金閼智)를 비롯하
여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자 지금의 자리에 동학사(東鶴祠)란 사당을 지었
는데, 그것이 나중에 절 이름으로 단단히 굳어졌다. 여기서 동학(東鶴)이란 절 동쪽에 학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동방 성리학의 시조인 정몽주(鄭夢
周)의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동학사라 불린다고 함>

천하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면서 절이 소실되었다고 하며, 1394년(조선 태조 2년) 고려 3은(
三隱)의 하나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동학사 승려 운선과 지금의 자리에 절과 제단을 만들고
고려 태조와 공민왕(恭愍王),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제사를 지냈다. 길
재가 죽은 이후 1399년 유방택(柳方澤, 1320~1402)이 포은과 목은, 야은 등 고려3은의 제단을
만들어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 1400년 공주목사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이 삼은단(三隱壇
)이라 하고 그 곁에 삼은각(三隱閣)을 지었다.

1457년(세조 2년)에는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추앙받는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 삼은
단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死六臣)의 초혼제를 지냈다. 얼마 뒤 영월에서 단종(端宗)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嚴興道)가 김시습을 찾아와 단종의 옷을 건네주었으며, 사육신의 제단 위에 단종
의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458년, 세조(世祖)가 충청도 지역을 시찰하면서 미리 통지도 하지 않고 갑자기 동학
사에 들렸다. 세조의 깜짝 등장에 미처 단종의 사당을 숨기지 못한 동학사 승려와 유생들은 간
이 단단히 쫄깃해 졌다. 허나 사연을 들은 세조는 오히려 표정을 바르게 하고는 자신의 업보를
뉘우치는 뜻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 금성대군(錦城大君) 등 자신의 왕위 찬
탈 과정에서 죽어간 280여 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초혼제를 지냈다.
그리고 초혼각(招魂閣)을 세워 단종이 죽은 매년 10월 말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그에 따른 경
비 충당을 위해 10여 결의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동학사(東鶴祠)라는 현판을 내리는 한편, 동
학사 승려와 유생들이 같이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동학사는 특이하게도 경내
에 유교식 사당이 둥지를 트게 되었으며, 절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진 것이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와 관련된 신천영(申天永)의 반란으로 절이 죄다 한줌의 재로 전락되었으
며, 1776년 영조의 4째 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 정후겸(鄭厚謙, 1749~1776)이 토지를
팔아 착복하면서 초혼각 제사가 중단되는 등, 동학사 최대의 아찔한 위기를 맞는다.
그러다가 1814년 금봉화상(錦峰和尙)이 중창을 벌이고 조선 정부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건물을
세웠으나 다시 화재를 만났다. 이후 여러 차례 상소를 하여 학암마을을 경계로 땅 절반 정도를
되찾는다.

1818년 초혼각에 봉안된 이들의 자손들이 초혼각과 동학사의 중간을 호소하는 권선문(勸善文)을
돌리고, 상소를 올려 예조(禮曹)와 관찰부(觀察府)에서 완문(完文)을 내린다. 이때 월인은 충청
도 도승통(都僧統) 겸 초혼각 수호총섭(守護總攝)에 봉해지고 동학사 승려의 전출을 제한한다.
1827년 홍휘익(洪羲翼)이 세조가 내린 도장을 위한 집을 짓고 충청좌도 어사(御使)인 유석(柳奭
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鄭河永)이 전답을 시주하여 다시 제사를 지냈다.

1864년 금강산에 있던 보선(普善)이 이곳에 와 경내의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을 새로 지었다. 이때 초혼각 북쪽 벽에는 단종, 동쪽에는 3은과 엄흥도, 서쪽에는 사육신과 김
시습의 위패를 모셨으며, 조선의 군신(君臣)과 고려의 신하를 같이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
여 3은의 위패는 동학사 판도방(判道房)으로 옮겼다.

1898년 대웅전에 탱화 4점을 봉안하고 1904년 초혼각을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9년에
는 기와중수를 했으며, 6.25전쟁 때 경내가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1956년 숙모전을 중
건하고, 삼은각을 새로 지었으며, 1965년 육화원과 강설전을 지어 승가대학으로 삼았다. 그 이
후 계속 불사에 열을 올려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육화원, 강설전, 숙모전, 삼성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
으며 부속암자로는 관음암과 길상암, 미타암, 상원암, 문수암 등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성각, 3층석탑, 삼은각, 숙모전이 고작이다. 절의 내력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애당초 갑사처
럼 큰 절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초혼각과 숙모전 등의 사당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리면
서 마땅한 불교문화유산을 남기지 못했으며, 볼거리도 빈약하다. 게다가 계곡 주변의 협소한 공
간에 둥지를 틀어 경내 확장도 여의치가 않다. 그래서 절의 규모는 보통 수준이다. 허나 이상하
게도 계룡산에 안긴 절 가운데 인지도가 가장 높아 계룡산하면 동학사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이
곳의 대표적인 절이자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동학사는 비구니 절로 경내가 정갈하고 깨끗하며, 계룡산 깊숙한 산골에 자리하여 고즈넉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계룡산으로 오르는 입구로 여기서 은선폭포를 통해 신원사
(新元寺)로 내려갈 수 있고, 남매탑과 삼불봉을 거쳐 갑사로 내려갈 수 있다.


※ 동학사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① 버스 이용 (동학사3거리 경유 / 서울에서 제일 빨리 가는 방법임)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계룡(신도안)행 직행버스를 타고 동학사(동학사3거리) 하차, 동학사3거
리(학봉3거리)에서 걸어가거나 학봉3거리(또는 학봉리) 정류장에서 동학사로 들어가는 대전시
내버스 107번이나 공주/논산시내버스를 타고 동학사 종점으로 이동 (학봉3거리에서 겨우 3정
거장임)
② 버스 이용 (유성 경유)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광주와 전주, 청주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③ 철도 이용 (대전역 경유)
* 서울역, 영등포역, 수원역, 광명역, 천안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대전역 하차
* 부산역, 마산역, 동대구역, 울산역, 포항역, 구미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 제천역, 충주역에서 대전행 충북선 열차 이용
④ 현지 교통 (유성, 대전, 공주, 논산에서 동학사까지)
* 대전역과 유성시외터미널에서 대전시내버스 107번 이용 (17~20분 간격)
* 대전지하철 1호선 현충원역(3번 출구), 유성온천역(5번 출구), 용문역(5/8번 출구)에서 107번
시내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동학사행 시내버스 1일 3회 (시간이 맞지 않으면 유성행 5번
시내버스를 타고 박정자에서 107번으로 환승)
* 논산역과 논산터미널에서 동학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21번이 1일 6회(휴일은 4회) 운행
⑥ 승용차로 가는 경우
* 호남고속도로지선(회덕~논산) → 유성나들목 → 공주방향 32번 국도 → 박정자3거리 좌회전
→ 동학사 주차장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 → 공주방향 23번 국도 → 월송교차로에서 대전방향 32번 국
도 → 박정자삼거리에서 우회전 → 동학사


★ 동학사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천원(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500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 042-825-2570)
* 동학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동학사 계곡과 등산로 북쪽에 자리한 동학사 경내


♠ 소소한 동학사 둘러보기

▲ 동학사3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앞에는 2m 높이의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그는 원래 남매탑 주변에 있던 것으로 근
래에 이곳으로 옮겨온 청량사 시절의 유물이다. 1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
힌 형태로 기단과 3층 탑신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들어 붙어 완전한 3층석탑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고색의 떼가 가득 입혀진 탑신과 옥개석, 그리고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기단과 3층 탑신이 오랜 시간을 초월하며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탑 주변에 난간석을 둘러 탑을 보호한다.


▲ 동학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동학사의 중심건물로 1980년 새롭게 지었다. 이곳의 법당(法堂)이지만 강설전이나 육
화당 등 한덩치하는 건물들이 여럿 있어서 그런지 조금은 왜소하게 다가온다. 건물 불단(佛壇)
에는 석가여래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신장탱화와 약사회탱, 미타회탱, 현왕탱 등 여러 불화
들이 내부를 수식한다. 이들은 대부분 1898년에 제작되었다.


▲ 동학사 삼성각(三聖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7호

대웅전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1818
년에 지은 것으로 경내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삼성각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들이 그려진 탱화는 1950년대에 제작되었다.


▲ 수줍은 듯 뜨락을 굽어보는 삼성각 현판

▲ 칠성탱화

▲ 산신탱화


▲ 해우소에서 바라본 숙모전(肅募殿) 일대(초혼각터) -
충남 지방기념물 18호

불교 공간으로서의 동학사는 이상이 전부이다. 나머지는 근래에 지은 참선 및 강학(講學), 생활
공간이고 그나마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그들은 여기서 생략한다. 굳이 다룰 필요도 없
다. 지금부터는 동학사만의 특징이자 충신의 넋을 모신 숙모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숙모전은 경내 동쪽에 자리한 유교식 사당으로 매월당 김시습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는 세조
의 왕위찬탈에 뚜껑이 폭발해 낙향하여 동학사에 머물러 있었다. 1456년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
를 도모하다가 새남터(서울 용산)에서 처형되자 밤몰래 찾아가 처참하게 흩어진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노량진 사육신묘(死六臣墓)에 묻어주었다.
1457년 삼은각 옆에 사육신을 위한 단을 설치하고 그들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단종(端宗) 마저
영월에서 강제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잠적한 엄흥도가 살짝 찾아와 단종의 옷
을 건넸다. 김시습은 눈물을 흘리며 단종의 제단을 만들고 옛 주군의 혼을 달랬다.

이렇게 생겨난 사육신과 단종의 제단은 세조의 왕위 찬탈과 조카인 단종을 죽인 것에 발끈한 선
비들과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통곡을 하며 제사를 지냈다. 매
월당은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으나 제사를 지낼 때는 어김없이 찾아와 제사에 임했다.

1458년 세조가 만신창(滿身瘡)이란 병이 생기자 병도 치료할 겸 민생도 살필 겸 해서 충청도를
찾았다. 그는 왕자 시절부터 백부(伯父)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영향으로 불교에 관심이 많았
는데, 충청도에 이름있는 절들을 둘러보다가 동학사까지 오게 되었다.

동학사를 찾은 세조는 삼은각 옆에 '品' 모양의 단을 보고 '저게 무슨 단인가?' 물었다. 동학사
승려와 유생들은 '이젠 죽었구나' 싶어 벌벌 떨며 단종과 사육신의 제단이라고 답을 하니 세조
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업보를 뉘우치고자 자신 때문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비단에 적고
왕명을 내려 초혼제를 지냈다. 또한 그것으로도 성이 차질 않는지 사당인 초혼각(招魂閣)을 짓
게 했다. 초혼제를 지낼 때 세조가 서서 울었다는 바위인 '울바위', 걸음을 자작거렸다고 해서
'자작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절 입구에 남아있다.
이렇게 태어난 초혼각은 조선 정부와 유생들의 지원으로 번성해갔으나 1728년 신천영의 반란으
로 파괴되어 많은 신위(神位)를 분실했으며, 다시 세워 58위를 봉안하다가 1869년 3칸으로 중건
했다.

1883년에는 충청좌도 어사인 유석이 동무(東撫)와 서무(西撫)를 세워 군신(君臣)을 나누어 봉안
했으며, 1904년 숙모전이란 이름을 내리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를 추가했다. 이후 충신 26위
를 더해 89위가 봉안되어 있다.

삼은각과 동계사를 포함한 숙모전 일대는 한 덩어리로 초혼각터라 하여 충남 지방기념물 18호
지정되었으며, 숙모전은 별도로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67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굳게 닫힌 숙모전의 정문 인존문(仁存門)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67호

숙모전은 동학사 경내와 달리 출입이 어렵다. 숙모전의 정문인 인존문이 굳게 입을 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마크가 그려진 인존문이 활짝 가슴을 여는 날은 오로지 제사를 지내는 날 뿐이다.


▲ 삼은각과 동계사

숙모전보다 1단계 낮은 좌측에는 쌍둥이꼴의 삼은각과 동계사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숙
모전의 전신(前身)으로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이들 사당 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사육신과 단
종의 제단이 들어서고 그들을 위한 초혼각이 세워지면서 별도의 공간으로 밀려났으며, 삼은각과
동계사에 봉안된 이들의 중요성 또한 떨어지고 말았다.


▲ 삼은각(三隱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삼은각은 1394년 고려 3은의 하나인 야은 길재가 동학사에 들어와 정몽주의 넋을 위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길재는 동계사 옆에 제단을 만들어 그를 위한 초혼제를 지냈는데, 1399년 유방택이
정몽주의 제단 옆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단을 만들었고, 길재가 죽자 그까지 같이 봉안하여
1400년 삼은각을 만들었다. 그 이후 유방택과 이숭인(李崇仁), 나계종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6
위를 모시고 있다.
삼은각 앞에는 삼은각중건기념비가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 동계사(東鷄祠)

삼은각과 나란히 한 동계사는 이곳 숙모전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신라 관료 출신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 유차달(柳車達)이 936년 동학사에 잠시 들렸는데, 부근 산중에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박제상(朴堤上)의 영정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계사(혹은 동학사)란 사
당을 지어 신라의 다른 시조 2명(석탈해, 김알지)과 함께 제를 지냈다.

이후 고려 3은의 사당과 사육신의 초혼각이 지어지면서 주변으로 밀려났으며, 1728년 신천영의
반란으로 초혼각이 불타면서 덩달아 파괴되었다. 이후 복원되지도 못하고 제사마저 끊긴 채 버
려져 있다가 1956년 9월에 비로소 중건되었다.


▲ 숙모전과 삼은각, 동계사를 관리하는 숙모재(肅募齋)

▲ 동학사에서 남매탑으로 오르는 산길

동학사는 높은 입장료에 비해 볼거리가 너무 빈약하여 거의 20분 만에 관람을 마쳤다. 삼성각에
서 3배를 하며 5분 정도 머무른 시간을 빼면 15분 밖에 되질 않는다.

이렇게 동학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남매탑으로 길머리를 잡는다. 시간이 점심 때라 홍살
문 주변 의자에 자리를 펴고 속세에서 사들고 온 김밥과 계란을 일부 먹었다. 김밥은 4줄을 샀
는데, 그중 2줄과 계란만 먹고 나머지 김밥과 라면은 남매탑에서 먹기로 했다. 배가 고파서 자
꾸 손이 가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여기서 다 먹어치우면 몸이 무거워져 오르기도 힘들다.

동학사에서 남매탑까지는 거의 50분, 남매탑과 가까워질 수록 산길의 경사는 힘겨운 속세살이처
럼 무척이나 각박해진다. 산에 오를 때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곱게 접어 날리고 산과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숭상(崇尙)과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고 천천히 올라야 뒷탈이 없다. 산은 자
신을 만만하게 보고 덤비는 존재를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추후에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 보완 등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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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2년 3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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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갑사





















계룡산 삼불봉, 금잔디광장














서산 해미읍성 (호야나무)


















태안 안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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