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우리나라 민속마을의 성지 ~ 아산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외암리의 자랑, 돌담길

 


름 제국(帝國)을 몰아낸 가을이 한참 천하를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아산(牙山)
외암리민속마을을 찾았다.
일행들은 전날 당진(唐津) 왜목마을로 여행을 갔는데, 그들은 왜목 남쪽인 장고항에서 1박을
머물렀다. 나는 일이 있어서 함께 가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곳으로 달려가 9시에 도
착했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장고항 서쪽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어 서해바다와 장고항이 훤히 바라
보인다. 일행들과 어울려 아침을 먹고 시간을 때우니 어느덧 방을 비워야 될 시간이 문을 두
드린다. 그래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단 삽교호(揷橋湖)를 거쳐 상경하기로 했다.

삽교호방조제 서쪽에 터를 닦은 삽교호관광지는 가을 행락객과 수레들로 그야말로 만원을 이
룬다. 바닷가에 만든 삽교호함상공원에는 해군 함정을 개조한 함상까페가 있는데, 이곳은 미
운 수준의 입장료를 내야되서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함상공원 외에 북쪽 갯벌 위에 나무 다
리를 놓아 산책로를 내었는데, 여기서 서해대교가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조개구이와 회 등 해산물을 다루는 식당과 가게들이 즐비하여 먹거리
와 수산물시장으로서의 비중이 더 크다.

이렇게 삽교호 관광지를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되었다. 일행 대부분은 피곤함으로 인해 일
찍 상경하고 나를 포함한 팔팔한 7명은 그냥 가기가 아쉬워 주변 명소를 더 둘러보기로 하였
다. 내가 여러 곳을 제시했는데, 처음에는 안성(安城)의 모처로 길을 잡았으나 삽교호방조제
를 건너자 바로 마음이 변해 외암리 민속마을로 방향을 틀었다. 삽교호방조제를 넘으면 아산
땅이고 서일농원은 거리도 제법 머니 아산 지역의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편의상 좋을 것이다.

유난히 신호등이 안받쳐주는 아산시내를 간신히 지나 송악에서 동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외암
리이다. 마을 주차장은 이미 수레들로 완전 초 만원, 마을은 그야말로 나들이 인파로 넝실넝
실 파도를 이룬다. 수레를 세울 데가 없어 주차장을 몇 바퀴를 돌아서야 간신히 공간이 나와
그곳에 수레를 쑤셔 넣었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동쪽 개울(외암천) 건너가 외암리민속마을이다. 그 마을로 들어서려면 돌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
본다. 그래서 일단 입장권(2,000원)을 구입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자 적당한 주막을 물색했다.
허나 주막마다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여기저기 서성인 끝에 매표소에서 50m 떨어진 주막에 간
신히 자리를 잡았다.

외암리도 식후경이라고 허기진 배를 위로하고자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간단히 묵밥과 잔
치국수를 먹기로 했다. 둘 다 가격은 7,000원 선으로 시중보다 조금은 비싼 수준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었다. 여기서 먹지 않으면 언제 먹을지 기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주문했으나 주문량이 가득 밀려 그들을 먹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일찌감
치 나온 밑반찬 김치를 젓가락으로 축내며 애타게 기다리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같았다.
한 20분 정도 기다리니 그렇게나 고대하던 밥과 국수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나는 묵밥을 먹
었는데, 외암리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그냥 이 땅의 평범한 묵밥 수준, 너무나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 동동주 1잔씩을 겯드리며 늦은 점심을 마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외암리민속마을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외암리마을 주막에서 먹은 묵밥의 위엄


♠  500년 묵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중요민속문화재 236호


▲  논밭이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설화산(雪華山, 440m) 서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외암리는 이 땅에 몇 안되는 오래된 민속마
을로 무려 5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자연 환경을 잘 살린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한결같이
옛 모습을 잃지 않아 마을로 발을 들인 순간 조선 후기로 강제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수많은 건축가와 조경전문가들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격찬했으며, TV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아 '태극기 휘날리며'.'취화선','야인시대(SBS)','찬란한 여명(KBS)','임
꺽정(SBS)' 등이 앞다투어 이곳을 거쳤다.

예안이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재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9채의 오래된
기와집과 60여 채의 초가를 비롯해 70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물
레방아 북쪽에 조성된 외암민속관의 기와집과 초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
며,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농업과 음식점, 전통음식 제조/판매로 생계를 꾸린다.

이곳 외암리에 처음 터를 닦은 집안은 '평택진씨' 집안이라고 한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살
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세기 초반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맏사위로 예안이씨 온양파의 시조
인 이사종(李嗣宗)이 들어오면서 마을의 역사가 싹 바뀐다.
이사종은 그 시절 관습에 따라 처가살이―이 풍속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짐―를 했는데, 진한평
이 죽자 그 재산은 딸 3명(아들은 없음)에게 분배―조선 중기까지 부모의 재산은 아들, 딸 모두
에게 균등 분배되었다―
되었다.

이사종의 후손이 번창하면서 외암리는 예안이씨의 터전으로 거듭났으며, 많은 선비와 학자, 과
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숙종 때 대학자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
이 있으며, 11명의 생원(生員), 진사(進士)를 배출했다. 과거 급제자로는 고종으로부터 퇴호거
사란 호를 받은 이정렬(李貞烈, 1868~1950) 등이 있다.

▲  마을 앞에 놓인 섶다리

▲  외암리의 주산(主山)인 설화산

마을의 이름인 '외암'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마을 서쪽에 '시흥역'이란 역
참(驛站)이 있었으며, 그곳의 말을 오양골(현재 외암리)에서 길렀다고 한다. 그 '오양'에서 '외
암'이란 이름이 나왔다는 설과 '외암(巍巖) 이간' 선생의 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의 구조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집들 대부분이 지형의 영향으로
서남향을 취하고 있다. 마을 서쪽과 몇몇 초가 뜰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며, 북쪽과 동쪽으
로 설화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어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설화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마을 동쪽을 거쳐 돌다리 부근에서 광덕산 강당골에서 시작된 외암천
을 만나 마을 북쪽으로 흐른다. 그 냇물을 끌여들여 마을 안에 인위적으로 조그만 물길을 만들
었는데, 이 물줄기는 마을의 여러 집을 거치면서 물을 제공해주며 곳곳에 곡수(曲水)와 아름다
운 연못을 만들어 마을을 한층 아리땁게 수식한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설화산은 불을 상징한다고 하여 마을에 물길을 만들어 화기(火氣)를 막고
자 하는 이른바 방화수(防火水)의 역할도 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멘트를 바르거나 현대식으로 개조된 집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전통민속
마을로 지정되면서 국가 지원으로 '옛 모습 되찾기 사업'을 벌였고, 마을 주민들의 흔쾌한 참여
와 협조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외암리에는 오래된 기와집이 9채 정도 있는데, 이들은 마을에서 꽤 권세있고 떵떵거리던 양반가
이다. 이들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집을 세운 이의 관직명이나 연고 지명을 따라 참판댁,
감찰댁, 참봉댁, 송화댁, 영암댁(건재 고택), 신창댁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모두 조선 말에
지어진 것으로 크기는 작지만 반가(班家)의 기품이 고스란히 깃들여져 있으며, 집주인의 공간인
사랑채와 아녀자의 공간인 안채, 그리고 제사공간인 가묘(家廟)를 갖추고 있고, 오래된 나무와
수석 등이 어우러진 전통정원을 지녔다.

이들 기와집 중에서 건재고택(영암군수댁)이 외암리 기와집의 대표격인데 사랑채 정원에는
소나
무와 은행나무 등을 마당 전체에 심고 왜국(倭國)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전통과 외래
조경이 섞인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어 주목을 끈다. 또한 설화산에서 내려온 계곡
의 물줄기가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하는 특이한 조경을 지녔는데, 특히 한국 음식 3대
명가(名家)의 하나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퇴호거사 이정렬이 살던 참판댁은 툇마루 위에 영친왕(英親王)이 9살에 쓴 '퇴호거사(退湖
居士)란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어 답사객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 집은 외암리의 명물이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연엽주(蓮葉酒)로 유명하다. 이 술은 찹쌀로 빚은 누룩에 연근과 솔잎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술로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다고 하며, 충남 지방무형문화재 11호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과 장독대

▲  초가3간

마을을 이루고 있는 약 60여 채의 초가는 일반 백성들이 살던 집이다. 기와집과 달리 소박하고
단촐한 모습으로 초가삼간(草家三間) 그 자체이다.
현대화의 거친 물결에 그 개체수가 급속히 줄어들어 이제는 오래 숙성된 마을이 아니면 만나기
조차 힘든 초가, 하루 정도는 머물고 싶은 정겨운 우리의 옛 집이다. 하지만 그 집에 아예 눌러
살고 싶은 생각은 눈꺼풀만치도 없다. 왜냐? 나도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초가 대부분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집이란 아무리 오래되고 고귀한 집이라도 사람이 살고 있어
야 집으로써의 빛과 가치를 발한다. 사람의 때가 가득한 집은 건강 상태가 좋은 반면 텅 비어있
는 집은 아무리 건실하게 지어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즉 사람의 손때가 집의 수명을 연장시
키는 비결이라 하겠다.

초가(집)의 형태는 'ㅡ', 'ㄱ'자형이 주류를 이루며, 집 내부를 옹성처럼 가린 'ㅁ'자형도 간혹
눈에 띈다. 뜰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 사과나무 등이 넓게 그늘을 드리워 주며, 몇몇 집은 작
은 텃밭을 갖추었다.

외암리의 자랑은 바로 돌담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을 찾은 나그네의 눈과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
는 마을의 상징으로 그들로 하여금 외암리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만든다.
마을 돌담의 길이는 무려 5.3km에 이른다고 하며, 높이는 거의 1.5m~2m 정도이다. 일종의 들여
쌓기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초가와 기와집, 경작지의 담장 및 경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돌
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 마치 조그만 석성(石城)을 보는 듯 하다.

근래 시골마을의 돌담길이 계속 사라지자 문화재청에서 뒤늦게나마 몇몇 돌담길을 문화재로 지
정해 역사의 뒤안길로 가려고 하는 돌담길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누렇게 익은 초가

▲  돌담길

담장 너머로 마구 가지를 늘어트린 정원수들은 단순하고 밋밋한 돌담을 더욱 멋드러지게 수식한
다. 가을에는 머리 위로 잘 익은 감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돌담길, 그 길을 거닐면 누구나 사색
가가 되고 시인(詩人)이 되며, 조선시대 사람이 된다. 돌담길은 그야말로 과거로 통하는 타임머
신인 셈이다.
저 돌담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치 어디엔가 빨려 들어가듯 그 끝을 향해 부지런히 발길
을 재촉한다. 정겹다 못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은 돌담길의 풍경~ 그 무거운 돌담을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아 사진으로 대리만족을 하련다.

마을에는 오래된 민속 유물이 즐비하다. 집집마다 디딜방아와 물레방아, 연자매, 상여, 장독대
등이 가득해 옛 생활상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기와집 부엌

▲  그네 타기

※ 외암리 민속마을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아산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유구 방면 직행버스(1일 7회)를 타면 외암리 입구인 송악에서 내려준다.
  여기서 외암리마을까지 도보 10분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대천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에서
  하차
*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창행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 하차 (1시간에 1~2회꼴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인천과 수원, 청주, 대전(동부)에서 아산행 직행버스 이용
* 천안시외/고속터미널과 천안역(동부)에서 아산(온양온천역, 아산터미널)행 900번대 시내버스
  가 수시 운행
② 현지교통
* 온양온천역(1번 출구를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과 아산터미널 건너
  편에서 아산시내버스 100, 101번을 타고 역촌1리에서 내리거나 송악면환승센터 종점에서 내린
  다. <역촌1리에서 도보 10분, 송악면환승센터(외암리마을 제2주차장)에서 도보 5분>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은 2곳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경부고속도로 → 천안나들목 → 아산 방면 21번 국도 → 장존교차로에서 송악 방면 → 외암3
  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4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리민속마을

※ 외암리 민속마을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000원 / 어린이,학생,군인 1,000원 (3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민박 손님
  과 아산 시민은 공짜)
* 입장시간 : 9:00 ~ 17:30
* 먹거리는 매표소 부근에 잔치국수와 묵밥, 도토리묵, 두부김치, 파전, 동동주 등의 식사를 파
  는 식당이 여럿 있으며, 물레방아 서쪽 외암민속관에서 떡과 식혜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 매년 10월에는 외암리의 대표 축제인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보통 3일 일정으로 열리며, 국악
  과 연극 공연을 비롯하여 관혼상제, 짚풀 만들기, 추수, 공장(工匠) 체험, 과거시험 등의 다
  양한 행사와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다.
  (그 외에 음력 1월 14일에 장승제가 열리나 이건 마을 사람들의 전통의식 행사임)
* 오래된 초가와 기와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외
  암리에는 20여 채의 가옥이 민박을 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4명에서 20명까지 다양하며, 취사
  도구와 현대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불편한 점은 별로 없다. 가격은 6만원에서 20만원선
  (입실은 14시, 퇴실은 11시까지이며, 바베큐도 가능함, 외암리마을 홈페이지에서 예약)
* 농촌체험(모내기 체험) 및 전통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공방체험과 다듬이체험 등은 주말
  에 상시적으로 체험이 가능하며, 떡메치기체험은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주말에 운영한다.
* 외암민속관 주변에서 투호, 줄타기, 곤장치기, 짚풀 새끼꼬기, 다듬이, 떡매치기, 그네타기
  등을 무제한으로 체험할 수 있다.
* 외암리는 관광지이자 문화유산이기 이전에 주민들이 사는 생활공간이다. 허락 없이 들어가 집
  안을 기웃거리는 일이 없어야 되며,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을 삼갈 것, 비공개 기와
  집과 초가는 그냥 담장 밖에서 바라보면 된다.
* 시간이 된다면 외암리 안쪽 강당골도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외암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84 (외암민속길 42-7 ☎ 041-540-2654, 541-0848)
* 외암리민속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민박, 축제, 전통/농촌체험 등)


▲  마을 동남쪽에 만든 코스모스 밭 너머로 바라본 외암리마을과 설화산


♠  돌다리, 물레방아 주변

▲  외암천에 발을 담군 돌다리를 건너면서 조선 후기로의 과거 여행이
시작된다. 돌다리는 마을로 들어서는 관문의 역할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속세에서 외암리마을로 들어가려면 매표소 북쪽에 난 돌다리를 건너야 된다. 그 다리 외에는 딱
히 이어주는 공간이 없다. 입장료 아낀다고 괜히 대놓고 개울을 건너거나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  외암 이간 신도비(神道碑)

매표소 남쪽에는 훤칠한 키의 비석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딱 봐도 예사롭지 않은
모습인데, 그에 대한 안내문이 없어 사연을 모르는 관광객 태반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외암
리마을에 눈이 먼 나머지 눈길 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비석을 외암리마을의 내력(
來歷)을 담은 사적비(事蹟碑)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외암 이간의 신도비였다.

이간(李柬, 1677∼1727)은 외암리 출신으로 마을 이름을 그의 호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
로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니 외암리에 왔다면 그의 신도비와 묘소를 둘러보는 것
이 외암리와 이간에 대한 당연한 예가 아닐까 싶다.

이 비석은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비문(碑文)을 썼다. 나중
에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다시 쓰고, 이간의 6세손인 이정렬(李貞烈)이 고쳐 썼으며, 원
래는 이간 묘소 앞에 있던 것을 관리를 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물레방아를 품은 초가와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초가 오른쪽)

▲  반석에 새겨진 바위글씨 동화수석(東華水石), 외암동천(巍岩洞天)

물레방아 동쪽 바위에는 2개의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다리 밑에 있음
에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이들은 별로 없는데, 내 일행들 역시 물레방아만 보였지 글씨까지는
몰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셈이다.

이들 바위글씨는 서쪽에는 동화수석(東華水石), 동쪽에는 외암동천(巍岩洞天)이라 새겨져 있는
데, 동화수석 글씨는 높이 50cm, 너비 2m 크기이다. 그 우측에는 기미(己未)란 글씨가, 좌측에
는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쓰여 있어 이백선(1893~1969)이란 인물이 기미년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 기미년은 언제일까? 그 유명한 3.1운동이 일어난 해가 바로 기미년(1919년)
이다. 이백선의 생애에서 기미년은 1919년 딱 하나 뿐이므로 자연히 1919년이 된다. 그리고 동
화는 우리나라를 뜻한다.
외암동천 글씨는 높이 52cm, 너비 175cm로 끝에는 이용찬서(李用瓚書)라 쓰여 있어 이용찬이란
사람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용찬은 이간의 후손으로 해방 이후 판사를 지냈다.

외암동천에서 외암은 당연히 마을의 이름이고, 동천(洞天)은 신선들이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물레방아 주변 개울가에 넓은 반석이 깔려있고 나름
대로 괜찮은 풍경을 자아내니 이용찬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또한 이곳은 외암리 사람
들의 피서 장소이기도 하다.


▲  외암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외암천 (정면에 보이는 다리가 섶다리)

▲  원두막과 장승 (돌다리 북단)
돌다리를 건너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외암민속관,
전통민속체험장으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외암리마을이다.

▲  식혜와 떡을 파는 초가집 매점
여기서 떡메치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식혜와 인절미는 2,000원 선으로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제법 많다.


♠  외암민속관, 외암 이간묘 주변

▲  제각각의 표정과 개성을 지닌 장승들
그들의 익살스런 모습에 마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는
자신의 본분조차 잊고 돌아설 것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

▲  기와집 동쪽에 조성된 정자와 연못

물레방아 북쪽에는 외암민속관과 그곳에 딸린 초가와 기와집, 전통문화/민속놀이 체험현장이 있
다. 외암민속관 일대는 얼핏보면 외암리마을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별도의 공간으로 전통
가옥과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및 외암리마을의 보조를 위해 근래에 터를 다졌다.

이곳에 있는 집들은 거주용이 아닌 전시용으로 한국민속촌의 가옥처럼 실제에 가깝게 재현되어
있으며, 민속관에는 이곳을 거쳐간 드라마, 영화와 관련된 상영물과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또
한 전통혼례를 비롯하여 방망이 다듬이, 줄타기, 투호, 제기, 새끼꼬기, 곤장치기 등을 온몸으
로 즐길 수 있으며, 옛날 농사 기구와 생활유물을 기와와 초가, 그 주변에 골고루 배치하여 볼
거리를 가득 선사한다.


▲  장독대와 짚풀로 만든 김치의 보금자리 김치각
옛날 단양(丹陽) 시골집에 저런 김치각이 있었는데(1990년대 초반까지) 이제는
민속촌이나 고택(古宅)에서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제아무리 김치냉장고가 설친다 한들 김치각의 김치만은 못할 것이다.

▲  서로 쌍둥이 같은 김치각
갑자기 김치각의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 어디가야 흔쾌히 먹을 수 있을까..?

▲  기와집 서쪽에 초가 창고

▲  이제는 듣기조차 힘든 다듬이 체험 현장
겉으로는 엄청 쉬워 보이는데, 실제로 해보니 많은 요령이 필요하다.

▲  투호놀이 현장
저 동그란 통에 투호를 골인시키는 것이 은근히 어렵다.
10번 던져서 1~2번 가까스로 들어갈 정도니 말이다.

▲  줄타기 현장
줄의 거리는 짧아도 저기에 발을 올리면 엄청 길어 보일 것이다.
남의 도움 없이 줄을 완전히 통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거의 5m도 못가서 줄 밖으로 떨어졌음~~

▲  짚풀 새끼꼬기 현장
원두막에 앉아 한가롭게 새끼를 꼬는 것도 보기와 다르게 쉽지가 않다.

▲  곤장 체험 현장
저기에 십(十)자 모양으로 누워 무지막지하게 생긴 곤장을 맞는 현장.
겉으로 보면 별로 아프지 않을 것 같지만 제대로 맞으면 정말
일어나지도 못한다.
곤장 체벌에는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이 있는데,
태형은 곤장 50대, 장형은 100대이다.

▲  누런 초가집의 뒷모습

▲  전통민속체험장, 외암민속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원두막 3형제

▲  비스듬히 누워있는 돌부처(마애불)

석축 밑에 고된 몸을 기대고 선 돌부처, 깨진 돌조각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마애불(磨崖佛
)로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며, 살며시 미소를 선보인다. 불상 앞에
는 중생들이 소망을 들이밀며 얹혀놓은 돌들이 모이고 모여 조촐한 돌탑을 이루고 있다.
이 석불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며, 마을 부근에서 수습해 온 것으로 보인다.


▲  외암리마을의 성지(聖地), 외암 이간 묘소

전통민속체험장 서북쪽으로 송림(松林)이 우거진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밭
을 거쳐야 되는데, 밭 입구에 설치된 조그만 문을 열고 그 언덕을 100m 가량 들어가면 외암리가
낳은 대학자이자 이곳의 성역인 외암 이간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묘소는 이간과 그의 부인 파평윤씨의 합장묘(合葬墓)로 봉분의 크기는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다. 봉분(封墳) 앞에는 무덤의 주인이 적힌 비석과 상석(床石)
밖에 없어 정말 조촐한 모습이다. 대신 소나무가 울창하여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있으며, 남쪽
과 서쪽이 확 트여 경치는 좋다.

외암 이간은 1727년 3월 14일에 50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그해 5월 온양군 유곡에 무덤을 썼는데,
1961년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여 마을 곁에 있게 했다. 신도비 역시 마을로 옮겨와 매표소
부근에 두었다.

이곳은 보통 문(밭 입구에 있는 문)이 닫혀져 있고 적당한 안내문이 없어서 속사정을 모르는 대
부분의 속인들은 거의 찾지 않는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들어오는 소수의 공간이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기와집과 누런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외암리마을 둘러보기

▲  논과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서부

500년의 장대한 역사를 간직한 외암리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규모가 크다. 동서의 길이가 거의
500여m에 이르며, 외암민속관 주변을 포함하여 구석구석 살펴보려면 사진 찍는 시간과 이동시간
을 고려해도 적어도 5~6시간 이상은 걸린다.
허나 관광객 대부분은 마을의 절반도 살피지 않고 가버린다. 그래서 매표소와 거리가 멀수록 사
람의 수는 반비례하여 사람 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마을 서쪽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데, 초가들이 그런 논과 어우러져 목가적(牧歌的)이고 편
안한 풍경을 연출한다.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어 눈이 번쩍 뜨며,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이삭은 고개를 숙이며, 가을 추수의 기쁨을 기다린다.


▲  풍년예감 ~ 외암리 평야

▲  교수댁 앞에 놓인 빛바랜 디딜방아
곡식을 찧는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고 전통체험 및 호기심 충족을
위한 관광용으로 살아가고 있다.

▲  양반가의 품격이 드러난 교수(敎授)댁

교수댁은 외암리를 이루고 있는 9개의 오랜 기와집의 하나로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李容九,
1854~?)가 경학(經學)으로 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를 지냈다고 해서 속편하게 교수댁이라 불린
다.

원래는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별채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았다.
굳게 입을 봉한 대문 앞에 좌절하며 길을 돌아서기는 했지만 10월 중순 짚풀문화제 때는 쿨하게
대문을 연다고 하며, 그때는 전통성년의식과 야생화전시회 등이 열린다.


▲  굳게 닫힌 교수댁 대문 - 대문짝에는 위정자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국태(國泰), 민안(民安)이 쓰여있다.

▲  담장 너머로 본 교수댁
교수댁은 양반가이지만 기와를 얹힌 담장이 아닌 외암리에서 통용되는
수수한 돌담을 집 주변에 둘렀다.

▲  버드나무가 길게 생머리를 늘어뜨린 교수댁 앞길

▲  건재고택<(建齎古宅) 영암군수댁) - 중요민속문화재 233호

건재고택은 외암 이간의 5대손이자 전라도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던 이상익(李相翼, 1848~
1897)이 살던 집이다. 그가 영암군수를 지냈다고 하여 영암군수댁이라 불리기도 하며, 외암 이
간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간의 집과 현재의 집은 자리만 같은 뿐, 완전 틀림)

이상익이 기존의 집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고, 그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 때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는데, 이욱렬의 호인 건재(建齋)를 따서 건재고택이라 불린다. 현재는 그게 정식 명
칭이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나무광과 곳간채, 가묘를 부속으로 두었으며, 사랑채 앞에는
자연경관을 위주로 정원을 만들어 연못과 정자를 만들었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감나무 등의 나
무를 마당 전체에 심고, 왜열도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우리의 전통식과 왜열도 조경이
혼합된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가게 했는데, 연못자리에는 원래 별당이 있었다고 한다.
담장에는 기와를 얹혀 다른 집과 차별을 두었고, 집안에는 300여 점의 오래된 유물이 보관되어
집의 가치를 더욱 돋군다. 특히 이간의 교지(敎旨)는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이나 장소에 제
일 먼저 정착한 사람)의 근거자료가 된다.

외암리마을의 대표적인 기와집으로 평상시에는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발길을 돌려야 된다. 다만
짚풀문화재 때는 관람이 가능하며, 전래동화극을 상영하기도 한다.


▲  건재고택의 사랑채 정원 (담장 너머에서 찍음)

▲  건재고택 앞에 푸르게 자라난 은행나무 (예전 봄에 찍은 사진)

▲  참판댁 사랑채 - 중요민속문화재 195호

외암리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는 참판댁이라 불리는 넓은 기와집이 있다. 이 집은 외암리가 낳은
위인의 1명, 퇴호 이정렬(退湖 李貞烈, 1868~1950)이 살던 곳으로 고종 때 이조참판(吏曹參判)
을 지냈다. 그래서 참판댁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정렬의 할머니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의 이모로 그런 인연으로 황후와 친분
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들은 촌수로 어떻게 되는지..?) 황후는 그에게 필묵과 첨지(籤紙)를 하
사했으며, 17세에 황후에게 왜국을 경계할 것을 진언했다고 한다.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나, 1902년 왜국에 빌붙어 나라를 말아먹는 고위관
료들의 꼬락서리를 보다 못해 그들의 처벌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허나 그것이 통할 리는 없을
터, 그 뜻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그는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외암리로 낙향,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지역 항일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  참판댁에 걸린 퇴호거사(退湖居士) 현판

참판댁에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고종의 아들인 영왕(英王=영친왕)
이 9살에 친히 쓴 현판이다. 이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로 이정렬은 이 현판을 매우 애지중지했다
고 한다. 퇴호거사란 이름은 이정렬의 또 다른 호로 고종이 내린 이름이다.


♠  외암리마을 마무리

▲  마을의 오랜 내력이 차곡차곡 화석(化石)을 이룬 외암리 돌담길

▲  인적이 없는 어느 외암리 돌담길
맨몸이 허전했던 탓일까? 추위에 약한 탓일까? 아니면 치장하고자 함일까?
수풀과 꽃으로 몸을 덮은 돌담이 적지 않다.

▲  늦가을도 가는 길을 멈추고 쉬어가는 외암리 돌담길
돌담 위에 여장만 설치하면 영락없는 성곽(城郭)이나 보루(堡壘)가 된다.

▲  서로 대비되는 돌담길 (녹음이 우거진 건재고택 입구)
왼쪽 돌담은 기와가 입혀지고 뭔가 있어 보이는 양반가 담장,
오른쪽은 성처럼 쌓여진 수수한 모습의 서민가 담장

▲  600년 묵은 느티나무 - 아산시 보호수 8-89호

외암리마을을 남북으로 가르는 간선 골목길 중간, 건재고택 부근에 600년 묵은 느티나무가 넓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21m, 둘레 5.5m에 이르는 외암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
무로 장승제가 열리는 음력 1월 14일에 목신제(木神祭)를 지낸다.

나무의 나이가 600년을 넘었다고 하니 마을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며, 마을의 흥망성
쇠를 묵묵히 지켜보며 마을을 지키던 당산(堂山)나무이자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쉼터와 그
늘을 제공하는 정자나무로써 이곳의 보석 같은 존재이다.


▲  논과 어우러진 마을의 동남부 ▼


▲  서서히 황금빛으로 도약하는 외암리 들녘

▲  사람과 가을꽃의 일그러진 만남 ~ 사람은 싱글벙글, 꽃은 시름시름.
인증샷을 찍는 것도 좋지만 너무 코스모스를 괴롭히지는 말자~~!

▲  가을의 아름다움이 모두 이곳에 깃들여진 듯 하다.

점심 먹는 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 정도 마을을 둘러봤다. 욕심 같아서는 송화댁이 있는 안쪽까
지 들어가고 싶었으나 일행들의 요구로 절반만 둘러보고 길을 돌아섰다. 어차피 예전에 대부분
둘러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 그리 아쉬울 것은 없다. 게다가 일행들은 나를 빼고
전날 밤새고 술마신 탓에 많이 지쳐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외암리 가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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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1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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