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축제'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5.11.07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우리나라 민속마을의 성지 ~ 아산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2. 2015.06.24 도심 속의 푸른 허파 ~ 서울 국립현충원, 동작충효길 나들이 (현충원숲길, 창빈안씨묘역)
  3. 2015.05.26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4. 2015.01.28 겨울 축제의 성지,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5. 2014.11.28 늦가을 억새의 성지, 부산 승학산 억새 나들이
  6. 2014.08.21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7. 2014.08.05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4년 8월초 기준)
  8. 2014.05.06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 연등축제 (조계사, 청계천 연등거리, 광통교)
  9. 2014.02.12 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우리나라 민속마을의 성지 ~ 아산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외암리의 자랑, 돌담길

 


름 제국(帝國)을 몰아낸 가을이 한참 천하를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아산(牙山)
외암리민속마을을 찾았다.
일행들은 전날 당진(唐津) 왜목마을로 여행을 갔는데, 그들은 왜목 남쪽인 장고항에서 1박을
머물렀다. 나는 일이 있어서 함께 가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곳으로 달려가 9시에 도
착했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장고항 서쪽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어 서해바다와 장고항이 훤히 바라
보인다. 일행들과 어울려 아침을 먹고 시간을 때우니 어느덧 방을 비워야 될 시간이 문을 두
드린다. 그래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단 삽교호(揷橋湖)를 거쳐 상경하기로 했다.

삽교호방조제 서쪽에 터를 닦은 삽교호관광지는 가을 행락객과 수레들로 그야말로 만원을 이
룬다. 바닷가에 만든 삽교호함상공원에는 해군 함정을 개조한 함상까페가 있는데, 이곳은 미
운 수준의 입장료를 내야되서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함상공원 외에 북쪽 갯벌 위에 나무 다
리를 놓아 산책로를 내었는데, 여기서 서해대교가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조개구이와 회 등 해산물을 다루는 식당과 가게들이 즐비하여 먹거리
와 수산물시장으로서의 비중이 더 크다.

이렇게 삽교호 관광지를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되었다. 일행 대부분은 피곤함으로 인해 일
찍 상경하고 나를 포함한 팔팔한 7명은 그냥 가기가 아쉬워 주변 명소를 더 둘러보기로 하였
다. 내가 여러 곳을 제시했는데, 처음에는 안성(安城)의 모처로 길을 잡았으나 삽교호방조제
를 건너자 바로 마음이 변해 외암리 민속마을로 방향을 틀었다. 삽교호방조제를 넘으면 아산
땅이고 서일농원은 거리도 제법 머니 아산 지역의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편의상 좋을 것이다.

유난히 신호등이 안받쳐주는 아산시내를 간신히 지나 송악에서 동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외암
리이다. 마을 주차장은 이미 수레들로 완전 초 만원, 마을은 그야말로 나들이 인파로 넝실넝
실 파도를 이룬다. 수레를 세울 데가 없어 주차장을 몇 바퀴를 돌아서야 간신히 공간이 나와
그곳에 수레를 쑤셔 넣었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동쪽 개울(외암천) 건너가 외암리민속마을이다. 그 마을로 들어서려면 돌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
본다. 그래서 일단 입장권(2,000원)을 구입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자 적당한 주막을 물색했다.
허나 주막마다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여기저기 서성인 끝에 매표소에서 50m 떨어진 주막에 간
신히 자리를 잡았다.

외암리도 식후경이라고 허기진 배를 위로하고자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간단히 묵밥과 잔
치국수를 먹기로 했다. 둘 다 가격은 7,000원 선으로 시중보다 조금은 비싼 수준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었다. 여기서 먹지 않으면 언제 먹을지 기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주문했으나 주문량이 가득 밀려 그들을 먹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일찌감
치 나온 밑반찬 김치를 젓가락으로 축내며 애타게 기다리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같았다.
한 20분 정도 기다리니 그렇게나 고대하던 밥과 국수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나는 묵밥을 먹
었는데, 외암리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그냥 이 땅의 평범한 묵밥 수준, 너무나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 동동주 1잔씩을 겯드리며 늦은 점심을 마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외암리민속마을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외암리마을 주막에서 먹은 묵밥의 위엄


♠  500년 묵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중요민속문화재 236호


▲  논밭이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설화산(雪華山, 440m) 서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외암리는 이 땅에 몇 안되는 오래된 민속마
을로 무려 5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자연 환경을 잘 살린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한결같이
옛 모습을 잃지 않아 마을로 발을 들인 순간 조선 후기로 강제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수많은 건축가와 조경전문가들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격찬했으며, TV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아 '태극기 휘날리며'.'취화선','야인시대(SBS)','찬란한 여명(KBS)','임
꺽정(SBS)' 등이 앞다투어 이곳을 거쳤다.

예안이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재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9채의 오래된
기와집과 60여 채의 초가를 비롯해 70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물
레방아 북쪽에 조성된 외암민속관의 기와집과 초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
며,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농업과 음식점, 전통음식 제조/판매로 생계를 꾸린다.

이곳 외암리에 처음 터를 닦은 집안은 '평택진씨' 집안이라고 한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살
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세기 초반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맏사위로 예안이씨 온양파의 시조
인 이사종(李嗣宗)이 들어오면서 마을의 역사가 싹 바뀐다.
이사종은 그 시절 관습에 따라 처가살이―이 풍속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짐―를 했는데, 진한평
이 죽자 그 재산은 딸 3명(아들은 없음)에게 분배―조선 중기까지 부모의 재산은 아들, 딸 모두
에게 균등 분배되었다―
되었다.

이사종의 후손이 번창하면서 외암리는 예안이씨의 터전으로 거듭났으며, 많은 선비와 학자, 과
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숙종 때 대학자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
이 있으며, 11명의 생원(生員), 진사(進士)를 배출했다. 과거 급제자로는 고종으로부터 퇴호거
사란 호를 받은 이정렬(李貞烈, 1868~1950) 등이 있다.

▲  마을 앞에 놓인 섶다리

▲  외암리의 주산(主山)인 설화산

마을의 이름인 '외암'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마을 서쪽에 '시흥역'이란 역
참(驛站)이 있었으며, 그곳의 말을 오양골(현재 외암리)에서 길렀다고 한다. 그 '오양'에서 '외
암'이란 이름이 나왔다는 설과 '외암(巍巖) 이간' 선생의 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의 구조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집들 대부분이 지형의 영향으로
서남향을 취하고 있다. 마을 서쪽과 몇몇 초가 뜰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며, 북쪽과 동쪽으
로 설화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어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설화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마을 동쪽을 거쳐 돌다리 부근에서 광덕산 강당골에서 시작된 외암천
을 만나 마을 북쪽으로 흐른다. 그 냇물을 끌여들여 마을 안에 인위적으로 조그만 물길을 만들
었는데, 이 물줄기는 마을의 여러 집을 거치면서 물을 제공해주며 곳곳에 곡수(曲水)와 아름다
운 연못을 만들어 마을을 한층 아리땁게 수식한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설화산은 불을 상징한다고 하여 마을에 물길을 만들어 화기(火氣)를 막고
자 하는 이른바 방화수(防火水)의 역할도 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멘트를 바르거나 현대식으로 개조된 집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전통민속
마을로 지정되면서 국가 지원으로 '옛 모습 되찾기 사업'을 벌였고, 마을 주민들의 흔쾌한 참여
와 협조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외암리에는 오래된 기와집이 9채 정도 있는데, 이들은 마을에서 꽤 권세있고 떵떵거리던 양반가
이다. 이들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집을 세운 이의 관직명이나 연고 지명을 따라 참판댁,
감찰댁, 참봉댁, 송화댁, 영암댁(건재 고택), 신창댁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모두 조선 말에
지어진 것으로 크기는 작지만 반가(班家)의 기품이 고스란히 깃들여져 있으며, 집주인의 공간인
사랑채와 아녀자의 공간인 안채, 그리고 제사공간인 가묘(家廟)를 갖추고 있고, 오래된 나무와
수석 등이 어우러진 전통정원을 지녔다.

이들 기와집 중에서 건재고택(영암군수댁)이 외암리 기와집의 대표격인데 사랑채 정원에는
소나
무와 은행나무 등을 마당 전체에 심고 왜국(倭國)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전통과 외래
조경이 섞인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어 주목을 끈다. 또한 설화산에서 내려온 계곡
의 물줄기가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하는 특이한 조경을 지녔는데, 특히 한국 음식 3대
명가(名家)의 하나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퇴호거사 이정렬이 살던 참판댁은 툇마루 위에 영친왕(英親王)이 9살에 쓴 '퇴호거사(退湖
居士)란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어 답사객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 집은 외암리의 명물이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연엽주(蓮葉酒)로 유명하다. 이 술은 찹쌀로 빚은 누룩에 연근과 솔잎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술로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다고 하며, 충남 지방무형문화재 11호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과 장독대

▲  초가3간

마을을 이루고 있는 약 60여 채의 초가는 일반 백성들이 살던 집이다. 기와집과 달리 소박하고
단촐한 모습으로 초가삼간(草家三間) 그 자체이다.
현대화의 거친 물결에 그 개체수가 급속히 줄어들어 이제는 오래 숙성된 마을이 아니면 만나기
조차 힘든 초가, 하루 정도는 머물고 싶은 정겨운 우리의 옛 집이다. 하지만 그 집에 아예 눌러
살고 싶은 생각은 눈꺼풀만치도 없다. 왜냐? 나도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초가 대부분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집이란 아무리 오래되고 고귀한 집이라도 사람이 살고 있어
야 집으로써의 빛과 가치를 발한다. 사람의 때가 가득한 집은 건강 상태가 좋은 반면 텅 비어있
는 집은 아무리 건실하게 지어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즉 사람의 손때가 집의 수명을 연장시
키는 비결이라 하겠다.

초가(집)의 형태는 'ㅡ', 'ㄱ'자형이 주류를 이루며, 집 내부를 옹성처럼 가린 'ㅁ'자형도 간혹
눈에 띈다. 뜰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 사과나무 등이 넓게 그늘을 드리워 주며, 몇몇 집은 작
은 텃밭을 갖추었다.

외암리의 자랑은 바로 돌담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을 찾은 나그네의 눈과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
는 마을의 상징으로 그들로 하여금 외암리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만든다.
마을 돌담의 길이는 무려 5.3km에 이른다고 하며, 높이는 거의 1.5m~2m 정도이다. 일종의 들여
쌓기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초가와 기와집, 경작지의 담장 및 경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돌
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 마치 조그만 석성(石城)을 보는 듯 하다.

근래 시골마을의 돌담길이 계속 사라지자 문화재청에서 뒤늦게나마 몇몇 돌담길을 문화재로 지
정해 역사의 뒤안길로 가려고 하는 돌담길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누렇게 익은 초가

▲  돌담길

담장 너머로 마구 가지를 늘어트린 정원수들은 단순하고 밋밋한 돌담을 더욱 멋드러지게 수식한
다. 가을에는 머리 위로 잘 익은 감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돌담길, 그 길을 거닐면 누구나 사색
가가 되고 시인(詩人)이 되며, 조선시대 사람이 된다. 돌담길은 그야말로 과거로 통하는 타임머
신인 셈이다.
저 돌담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치 어디엔가 빨려 들어가듯 그 끝을 향해 부지런히 발길
을 재촉한다. 정겹다 못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은 돌담길의 풍경~ 그 무거운 돌담을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아 사진으로 대리만족을 하련다.

마을에는 오래된 민속 유물이 즐비하다. 집집마다 디딜방아와 물레방아, 연자매, 상여, 장독대
등이 가득해 옛 생활상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기와집 부엌

▲  그네 타기

※ 외암리 민속마을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아산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유구 방면 직행버스(1일 7회)를 타면 외암리 입구인 송악에서 내려준다.
  여기서 외암리마을까지 도보 10분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대천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에서
  하차
*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창행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 하차 (1시간에 1~2회꼴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인천과 수원, 청주, 대전(동부)에서 아산행 직행버스 이용
* 천안시외/고속터미널과 천안역(동부)에서 아산(온양온천역, 아산터미널)행 900번대 시내버스
  가 수시 운행
② 현지교통
* 온양온천역(1번 출구를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과 아산터미널 건너
  편에서 아산시내버스 100, 101번을 타고 역촌1리에서 내리거나 송악면환승센터 종점에서 내린
  다. <역촌1리에서 도보 10분, 송악면환승센터(외암리마을 제2주차장)에서 도보 5분>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은 2곳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경부고속도로 → 천안나들목 → 아산 방면 21번 국도 → 장존교차로에서 송악 방면 → 외암3
  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4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리민속마을

※ 외암리 민속마을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000원 / 어린이,학생,군인 1,000원 (3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민박 손님
  과 아산 시민은 공짜)
* 입장시간 : 9:00 ~ 17:30
* 먹거리는 매표소 부근에 잔치국수와 묵밥, 도토리묵, 두부김치, 파전, 동동주 등의 식사를 파
  는 식당이 여럿 있으며, 물레방아 서쪽 외암민속관에서 떡과 식혜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 매년 10월에는 외암리의 대표 축제인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보통 3일 일정으로 열리며, 국악
  과 연극 공연을 비롯하여 관혼상제, 짚풀 만들기, 추수, 공장(工匠) 체험, 과거시험 등의 다
  양한 행사와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다.
  (그 외에 음력 1월 14일에 장승제가 열리나 이건 마을 사람들의 전통의식 행사임)
* 오래된 초가와 기와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외
  암리에는 20여 채의 가옥이 민박을 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4명에서 20명까지 다양하며, 취사
  도구와 현대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불편한 점은 별로 없다. 가격은 6만원에서 20만원선
  (입실은 14시, 퇴실은 11시까지이며, 바베큐도 가능함, 외암리마을 홈페이지에서 예약)
* 농촌체험(모내기 체험) 및 전통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공방체험과 다듬이체험 등은 주말
  에 상시적으로 체험이 가능하며, 떡메치기체험은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주말에 운영한다.
* 외암민속관 주변에서 투호, 줄타기, 곤장치기, 짚풀 새끼꼬기, 다듬이, 떡매치기, 그네타기
  등을 무제한으로 체험할 수 있다.
* 외암리는 관광지이자 문화유산이기 이전에 주민들이 사는 생활공간이다. 허락 없이 들어가 집
  안을 기웃거리는 일이 없어야 되며,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을 삼갈 것, 비공개 기와
  집과 초가는 그냥 담장 밖에서 바라보면 된다.
* 시간이 된다면 외암리 안쪽 강당골도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외암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84 (외암민속길 42-7 ☎ 041-540-2654, 541-0848)
* 외암리민속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민박, 축제, 전통/농촌체험 등)


▲  마을 동남쪽에 만든 코스모스 밭 너머로 바라본 외암리마을과 설화산


♠  돌다리, 물레방아 주변

▲  외암천에 발을 담군 돌다리를 건너면서 조선 후기로의 과거 여행이
시작된다. 돌다리는 마을로 들어서는 관문의 역할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속세에서 외암리마을로 들어가려면 매표소 북쪽에 난 돌다리를 건너야 된다. 그 다리 외에는 딱
히 이어주는 공간이 없다. 입장료 아낀다고 괜히 대놓고 개울을 건너거나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  외암 이간 신도비(神道碑)

매표소 남쪽에는 훤칠한 키의 비석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딱 봐도 예사롭지 않은
모습인데, 그에 대한 안내문이 없어 사연을 모르는 관광객 태반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외암
리마을에 눈이 먼 나머지 눈길 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비석을 외암리마을의 내력(
來歷)을 담은 사적비(事蹟碑)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외암 이간의 신도비였다.

이간(李柬, 1677∼1727)은 외암리 출신으로 마을 이름을 그의 호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
로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니 외암리에 왔다면 그의 신도비와 묘소를 둘러보는 것
이 외암리와 이간에 대한 당연한 예가 아닐까 싶다.

이 비석은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비문(碑文)을 썼다. 나중
에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다시 쓰고, 이간의 6세손인 이정렬(李貞烈)이 고쳐 썼으며, 원
래는 이간 묘소 앞에 있던 것을 관리를 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물레방아를 품은 초가와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초가 오른쪽)

▲  반석에 새겨진 바위글씨 동화수석(東華水石), 외암동천(巍岩洞天)

물레방아 동쪽 바위에는 2개의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다리 밑에 있음
에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이들은 별로 없는데, 내 일행들 역시 물레방아만 보였지 글씨까지는
몰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셈이다.

이들 바위글씨는 서쪽에는 동화수석(東華水石), 동쪽에는 외암동천(巍岩洞天)이라 새겨져 있는
데, 동화수석 글씨는 높이 50cm, 너비 2m 크기이다. 그 우측에는 기미(己未)란 글씨가, 좌측에
는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쓰여 있어 이백선(1893~1969)이란 인물이 기미년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 기미년은 언제일까? 그 유명한 3.1운동이 일어난 해가 바로 기미년(1919년)
이다. 이백선의 생애에서 기미년은 1919년 딱 하나 뿐이므로 자연히 1919년이 된다. 그리고 동
화는 우리나라를 뜻한다.
외암동천 글씨는 높이 52cm, 너비 175cm로 끝에는 이용찬서(李用瓚書)라 쓰여 있어 이용찬이란
사람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용찬은 이간의 후손으로 해방 이후 판사를 지냈다.

외암동천에서 외암은 당연히 마을의 이름이고, 동천(洞天)은 신선들이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물레방아 주변 개울가에 넓은 반석이 깔려있고 나름
대로 괜찮은 풍경을 자아내니 이용찬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또한 이곳은 외암리 사람
들의 피서 장소이기도 하다.


▲  외암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외암천 (정면에 보이는 다리가 섶다리)

▲  원두막과 장승 (돌다리 북단)
돌다리를 건너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외암민속관,
전통민속체험장으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외암리마을이다.

▲  식혜와 떡을 파는 초가집 매점
여기서 떡메치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식혜와 인절미는 2,000원 선으로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제법 많다.


♠  외암민속관, 외암 이간묘 주변

▲  제각각의 표정과 개성을 지닌 장승들
그들의 익살스런 모습에 마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는
자신의 본분조차 잊고 돌아설 것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

▲  기와집 동쪽에 조성된 정자와 연못

물레방아 북쪽에는 외암민속관과 그곳에 딸린 초가와 기와집, 전통문화/민속놀이 체험현장이 있
다. 외암민속관 일대는 얼핏보면 외암리마을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별도의 공간으로 전통
가옥과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및 외암리마을의 보조를 위해 근래에 터를 다졌다.

이곳에 있는 집들은 거주용이 아닌 전시용으로 한국민속촌의 가옥처럼 실제에 가깝게 재현되어
있으며, 민속관에는 이곳을 거쳐간 드라마, 영화와 관련된 상영물과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또
한 전통혼례를 비롯하여 방망이 다듬이, 줄타기, 투호, 제기, 새끼꼬기, 곤장치기 등을 온몸으
로 즐길 수 있으며, 옛날 농사 기구와 생활유물을 기와와 초가, 그 주변에 골고루 배치하여 볼
거리를 가득 선사한다.


▲  장독대와 짚풀로 만든 김치의 보금자리 김치각
옛날 단양(丹陽) 시골집에 저런 김치각이 있었는데(1990년대 초반까지) 이제는
민속촌이나 고택(古宅)에서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제아무리 김치냉장고가 설친다 한들 김치각의 김치만은 못할 것이다.

▲  서로 쌍둥이 같은 김치각
갑자기 김치각의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 어디가야 흔쾌히 먹을 수 있을까..?

▲  기와집 서쪽에 초가 창고

▲  이제는 듣기조차 힘든 다듬이 체험 현장
겉으로는 엄청 쉬워 보이는데, 실제로 해보니 많은 요령이 필요하다.

▲  투호놀이 현장
저 동그란 통에 투호를 골인시키는 것이 은근히 어렵다.
10번 던져서 1~2번 가까스로 들어갈 정도니 말이다.

▲  줄타기 현장
줄의 거리는 짧아도 저기에 발을 올리면 엄청 길어 보일 것이다.
남의 도움 없이 줄을 완전히 통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거의 5m도 못가서 줄 밖으로 떨어졌음~~

▲  짚풀 새끼꼬기 현장
원두막에 앉아 한가롭게 새끼를 꼬는 것도 보기와 다르게 쉽지가 않다.

▲  곤장 체험 현장
저기에 십(十)자 모양으로 누워 무지막지하게 생긴 곤장을 맞는 현장.
겉으로 보면 별로 아프지 않을 것 같지만 제대로 맞으면 정말
일어나지도 못한다.
곤장 체벌에는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이 있는데,
태형은 곤장 50대, 장형은 100대이다.

▲  누런 초가집의 뒷모습

▲  전통민속체험장, 외암민속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원두막 3형제

▲  비스듬히 누워있는 돌부처(마애불)

석축 밑에 고된 몸을 기대고 선 돌부처, 깨진 돌조각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마애불(磨崖佛
)로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며, 살며시 미소를 선보인다. 불상 앞에
는 중생들이 소망을 들이밀며 얹혀놓은 돌들이 모이고 모여 조촐한 돌탑을 이루고 있다.
이 석불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며, 마을 부근에서 수습해 온 것으로 보인다.


▲  외암리마을의 성지(聖地), 외암 이간 묘소

전통민속체험장 서북쪽으로 송림(松林)이 우거진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밭
을 거쳐야 되는데, 밭 입구에 설치된 조그만 문을 열고 그 언덕을 100m 가량 들어가면 외암리가
낳은 대학자이자 이곳의 성역인 외암 이간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묘소는 이간과 그의 부인 파평윤씨의 합장묘(合葬墓)로 봉분의 크기는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다. 봉분(封墳) 앞에는 무덤의 주인이 적힌 비석과 상석(床石)
밖에 없어 정말 조촐한 모습이다. 대신 소나무가 울창하여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있으며, 남쪽
과 서쪽이 확 트여 경치는 좋다.

외암 이간은 1727년 3월 14일에 50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그해 5월 온양군 유곡에 무덤을 썼는데,
1961년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여 마을 곁에 있게 했다. 신도비 역시 마을로 옮겨와 매표소
부근에 두었다.

이곳은 보통 문(밭 입구에 있는 문)이 닫혀져 있고 적당한 안내문이 없어서 속사정을 모르는 대
부분의 속인들은 거의 찾지 않는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들어오는 소수의 공간이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기와집과 누런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외암리마을 둘러보기

▲  논과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서부

500년의 장대한 역사를 간직한 외암리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규모가 크다. 동서의 길이가 거의
500여m에 이르며, 외암민속관 주변을 포함하여 구석구석 살펴보려면 사진 찍는 시간과 이동시간
을 고려해도 적어도 5~6시간 이상은 걸린다.
허나 관광객 대부분은 마을의 절반도 살피지 않고 가버린다. 그래서 매표소와 거리가 멀수록 사
람의 수는 반비례하여 사람 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마을 서쪽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데, 초가들이 그런 논과 어우러져 목가적(牧歌的)이고 편
안한 풍경을 연출한다.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어 눈이 번쩍 뜨며,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이삭은 고개를 숙이며, 가을 추수의 기쁨을 기다린다.


▲  풍년예감 ~ 외암리 평야

▲  교수댁 앞에 놓인 빛바랜 디딜방아
곡식을 찧는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고 전통체험 및 호기심 충족을
위한 관광용으로 살아가고 있다.

▲  양반가의 품격이 드러난 교수(敎授)댁

교수댁은 외암리를 이루고 있는 9개의 오랜 기와집의 하나로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李容九,
1854~?)가 경학(經學)으로 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를 지냈다고 해서 속편하게 교수댁이라 불린
다.

원래는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별채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았다.
굳게 입을 봉한 대문 앞에 좌절하며 길을 돌아서기는 했지만 10월 중순 짚풀문화제 때는 쿨하게
대문을 연다고 하며, 그때는 전통성년의식과 야생화전시회 등이 열린다.


▲  굳게 닫힌 교수댁 대문 - 대문짝에는 위정자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국태(國泰), 민안(民安)이 쓰여있다.

▲  담장 너머로 본 교수댁
교수댁은 양반가이지만 기와를 얹힌 담장이 아닌 외암리에서 통용되는
수수한 돌담을 집 주변에 둘렀다.

▲  버드나무가 길게 생머리를 늘어뜨린 교수댁 앞길

▲  건재고택<(建齎古宅) 영암군수댁) - 중요민속문화재 233호

건재고택은 외암 이간의 5대손이자 전라도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던 이상익(李相翼, 1848~
1897)이 살던 집이다. 그가 영암군수를 지냈다고 하여 영암군수댁이라 불리기도 하며, 외암 이
간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간의 집과 현재의 집은 자리만 같은 뿐, 완전 틀림)

이상익이 기존의 집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고, 그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 때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는데, 이욱렬의 호인 건재(建齋)를 따서 건재고택이라 불린다. 현재는 그게 정식 명
칭이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나무광과 곳간채, 가묘를 부속으로 두었으며, 사랑채 앞에는
자연경관을 위주로 정원을 만들어 연못과 정자를 만들었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감나무 등의 나
무를 마당 전체에 심고, 왜열도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우리의 전통식과 왜열도 조경이
혼합된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가게 했는데, 연못자리에는 원래 별당이 있었다고 한다.
담장에는 기와를 얹혀 다른 집과 차별을 두었고, 집안에는 300여 점의 오래된 유물이 보관되어
집의 가치를 더욱 돋군다. 특히 이간의 교지(敎旨)는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이나 장소에 제
일 먼저 정착한 사람)의 근거자료가 된다.

외암리마을의 대표적인 기와집으로 평상시에는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발길을 돌려야 된다. 다만
짚풀문화재 때는 관람이 가능하며, 전래동화극을 상영하기도 한다.


▲  건재고택의 사랑채 정원 (담장 너머에서 찍음)

▲  건재고택 앞에 푸르게 자라난 은행나무 (예전 봄에 찍은 사진)

▲  참판댁 사랑채 - 중요민속문화재 195호

외암리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는 참판댁이라 불리는 넓은 기와집이 있다. 이 집은 외암리가 낳은
위인의 1명, 퇴호 이정렬(退湖 李貞烈, 1868~1950)이 살던 곳으로 고종 때 이조참판(吏曹參判)
을 지냈다. 그래서 참판댁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정렬의 할머니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의 이모로 그런 인연으로 황후와 친분
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들은 촌수로 어떻게 되는지..?) 황후는 그에게 필묵과 첨지(籤紙)를 하
사했으며, 17세에 황후에게 왜국을 경계할 것을 진언했다고 한다.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나, 1902년 왜국에 빌붙어 나라를 말아먹는 고위관
료들의 꼬락서리를 보다 못해 그들의 처벌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허나 그것이 통할 리는 없을
터, 그 뜻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그는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외암리로 낙향,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지역 항일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  참판댁에 걸린 퇴호거사(退湖居士) 현판

참판댁에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고종의 아들인 영왕(英王=영친왕)
이 9살에 친히 쓴 현판이다. 이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로 이정렬은 이 현판을 매우 애지중지했다
고 한다. 퇴호거사란 이름은 이정렬의 또 다른 호로 고종이 내린 이름이다.


♠  외암리마을 마무리

▲  마을의 오랜 내력이 차곡차곡 화석(化石)을 이룬 외암리 돌담길

▲  인적이 없는 어느 외암리 돌담길
맨몸이 허전했던 탓일까? 추위에 약한 탓일까? 아니면 치장하고자 함일까?
수풀과 꽃으로 몸을 덮은 돌담이 적지 않다.

▲  늦가을도 가는 길을 멈추고 쉬어가는 외암리 돌담길
돌담 위에 여장만 설치하면 영락없는 성곽(城郭)이나 보루(堡壘)가 된다.

▲  서로 대비되는 돌담길 (녹음이 우거진 건재고택 입구)
왼쪽 돌담은 기와가 입혀지고 뭔가 있어 보이는 양반가 담장,
오른쪽은 성처럼 쌓여진 수수한 모습의 서민가 담장

▲  600년 묵은 느티나무 - 아산시 보호수 8-89호

외암리마을을 남북으로 가르는 간선 골목길 중간, 건재고택 부근에 600년 묵은 느티나무가 넓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21m, 둘레 5.5m에 이르는 외암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
무로 장승제가 열리는 음력 1월 14일에 목신제(木神祭)를 지낸다.

나무의 나이가 600년을 넘었다고 하니 마을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며, 마을의 흥망성
쇠를 묵묵히 지켜보며 마을을 지키던 당산(堂山)나무이자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쉼터와 그
늘을 제공하는 정자나무로써 이곳의 보석 같은 존재이다.


▲  논과 어우러진 마을의 동남부 ▼


▲  서서히 황금빛으로 도약하는 외암리 들녘

▲  사람과 가을꽃의 일그러진 만남 ~ 사람은 싱글벙글, 꽃은 시름시름.
인증샷을 찍는 것도 좋지만 너무 코스모스를 괴롭히지는 말자~~!

▲  가을의 아름다움이 모두 이곳에 깃들여진 듯 하다.

점심 먹는 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 정도 마을을 둘러봤다. 욕심 같아서는 송화댁이 있는 안쪽까
지 들어가고 싶었으나 일행들의 요구로 절반만 둘러보고 길을 돌아섰다. 어차피 예전에 대부분
둘러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 그리 아쉬울 것은 없다. 게다가 일행들은 나를 빼고
전날 밤새고 술마신 탓에 많이 지쳐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외암리 가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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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푸른 허파 ~ 서울 국립현충원, 동작충효길 나들이 (현충원숲길, 창빈안씨묘역)

 

 

' 국립 서울현충원, 동작충효길 산책 '

▲  국립현충원

 


6월 6일 현충일이 다가오면 거의 본능적으로 국립현충원(國立顯忠園, 국립 서울현충원)을 찾
는다. 그곳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국심이 대단한 것도 아
니다. 다만 석가탄신일에는 그날 본능에 따라 절을 찾듯이 현충일에는 그에 어울리는 현충원
을 찾아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이들을 기리며 현충일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현충원이 나라의 성스러운 공간이다 보니 나들이로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할 뿐더러 그저 무덤
밖에 없는 재미없고 딱딱한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생 시절 소풍
으로 간 것이 고작인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그곳에 가자고 하면 거의 대부분
'현충원에 나들이를 가자고? 거기 뭐 볼 거 있어?'하면서 화들짝 놀란다. 나들이로 가기에는
왠지 부담이 가는 곳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지 둘은 모
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남산(南山) 등과 더
불어 서울의 대기를 정화시키는 커다란 허파로 숲이 짙고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게다가 현충원을 외곽으로 둘러싼 산책로는 어디에 던져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로
상도동과 사당동, 흑석동 후문으로 가는 길은 오솔길의 갑(甲)을 이루며, 매년 4월에는 이곳
의 명물인 수양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조촐하게 벚꽃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또한 창빈안씨
묘역과 부안군 이석수묘역, 호국지장사 등 문화유적과 오래된 절까지 소리소문 없이 품고 있
어 오래된 볼거리까지 넉넉히 선사한다. 현충원은 3척 동자도 다 아는 곳이지만 그곳의 숨겨
진 속살을 아는 사람은 무척이나 적은 것이다.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전국에 흩어진 6.25 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에는
지명을 따 '동작동국립묘지(銅雀洞國立墓地)'라 불렀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
름을 갈았다. (국립현충원이라 많이 부르며,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
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지형이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
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지세라 하여 장군대좌형(將軍對
座形)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
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서쪽인 우백호(右白
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서달산)을 감싸 흘
러 내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명당 중의 명당으로 통
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모셨으니 마땅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하건만 아직까진 그 효과가 시원치 못하다.

본글에서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 현충원내부순례길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호국지장사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겠음)


♠  국립현충원의 오랜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의 배꼽 부분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묘역이 있다. 그 서쪽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그곳에 현충원의 숨겨진 오랜 속살인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
이 조선왕실의 오래된 무덤이 박혀있으니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
니 말이다.
허나 현충원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묘역은 이곳에 오랜 주인으로 이 일대가 대부분 그
의 묘역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1954년 이곳에 국립묘지를 만들면서 묘역은 크게 축소되기 시작
했고 1965년 이승만의 묘역을 창빈묘역 북쪽에 쓰면서 묘역의 동쪽이 떨어져나갔다. 상황이 이
러니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그야말로 잉여로운 존재가 되버린 것
이다. 그래서 아는 이가 드문 것이다. 또한 2009년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을 바로 남쪽에
쓰면서 남쪽 부분까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스런 점은 2011년 이후 묘역 북쪽에 그의 묘
역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안내판도 없었음)
그래서 '이 무덤은 뭐지?' 호기심 삼아 찾는 이의 발걸음이 조금 늘었다.

묘역의 주인인 창빈안씨(1499~1549)는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집
안이 어려워 1507년 궁녀(宮女)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총애를 받고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로 덕망(德望)이 높
았다. 그리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사랑을 받았으며, 시어
미의 후원에 힘입어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얼마 뒤 숙용<淑容, 내명
부 종3품>으로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
(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명종 4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며, 처음에는 양주땅 장흥(현 양주시 장
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에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로 하
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나마 호강을 하게 된다. 그는 왕위계승권과는 거리
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쪼잔한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높
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이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막대한 공을 들인다. 1577년에는 할
머니에게 창빈(昌嬪)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을 현충원 일대로
확대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서 동작릉(銅雀陵)이라 했
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은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덕릉(德陵)으로 높였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선조는 그릇이 작고 생각이 좁았던 군주로 마땅한 업적은 없다. 임진왜란도 잘 대처했으면 일찍
종료를 시키거나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 안일한 생각과 간신배들과 어우러진 무능한 대처로 국
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한참 손녀뻘되는 왕비<인
목대비(仁穆大妃)>와 재미를 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런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
리로 돌아온 것으로 창빈의 아름다운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
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숙종 9년) 왕명에 따라 묘역 남쪽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
데,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寧
府知事)를 지낸 왕족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중종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
다. 심지어 어린 애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품을
알만하다. 그의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은 오늘날 고위 공직자 등의 권력층과 돈에 치여 사는 상
류층들이 배워야 될 인품이 아닐까 싶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府
尉)가 전부이다. 그의 성격상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도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우측 문인석(文人石)

▲  좌측 문인석


▲  무덤의 주인이 쓰인 묘표(墓表)
묘표의 이수에는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어 속인들의 눈길을 끈다.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의 묘역은 그녀의 청렴함처럼 조촐하기 그지없다.
전형적인 후궁의 무덤 양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
는 현란한 조각의 이수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조그만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
우로 망주석(望柱石) 1쌍이 서 있다. 봉분 뒤쪽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무덤 앞에는 문인석 1
쌍이 한결같은 표정으로 홀을 들며 무덤을 지킨다.

  ◀▲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사진 3장>
이 비석은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3m이
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다른 신도
비와는 완전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곧
게 솟은 사각형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
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
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있다.


♠  국립현충원에 꽁꽁 숨겨진 오래된 속살, 부안군 이석수 묘역
(扶安君 李碩壽 墓域)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9호

▲  정면에서 본 이석수 묘역
(뒷쪽에 자리한 무덤이 이석수의 손자인 이선룡 내외의 무덤)


▲  뒷쪽에서 본 이석수 묘역

국립현충원 서쪽에는 6.25시절에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경찰들의 충혼(忠魂)을 기리는 경찰충혼
탑이 있다. 충혼탑 바로 북쪽(현충원 정문 방면)에는 3거리가 있는데, 3거리에서 서쪽 산자락을
살펴보면 숲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산길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산길을 20초 정도 오르면
창빈안씨묘역과 더불어 현충원의 숨겨진 속살의 하나로 지금까지 꽁꽁 숨어지내던 숨바꼭질의
달인 부안군 이석수 묘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이석수 묘역을 알게된 것은 2010년이다. 우연히 나의 머리에 입력된 그 묘역은 현충원 안
에 있다고 하는데, 현충원 안내도와 홈페이지에는 그 묘역의 위치를 알리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
다. 게다가 다녀간 이들도 전혀 없어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 위치에 대한 정보가 걸려들지 않았
다. 그래서 열심히 조사를 벌이다가 그 위치를 알게 된 것이다.
현충원은 참 많이도 갔지만 창빈안씨묘역은 2007년에나 발걸음을 했고, 호국지장사도 2006년에
나 처음 갔다. 이제 현충원의 숨겨진 오래된 속살은 다봤구나 싶었는데, 이석수 묘역까지 교묘
하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그의 묘역을 찾아 술래를 면하게 되었다.

현충원의 터줏대감인 창빈안씨묘역도 처음에는 안내도에 나와있지 않다가 이제는 아주 작게나마
표시를 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 예전보다 찾기는 쉬워졌다. 허나
이석수 묘역은 아직까지 그 흔한 안내판도 없고 현충원 안내도에서 나와있지 않다. 그야말로 아
주 극소수만 찾는 현충원의 꼭꼭 숨겨진 속살인 것이다.
내가 갔을 당시에도 충혼탑 주변과 3거리에는 사람들이 좀 있었으나 산길과 묘역에는 인적은 커
녕 움직이는 어떤 것도 없었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가니 3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엥 저
기에 뭐있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  홀을 쥐어들며 묵묵히 묘역을 수호하는 문인석(文人石)들

서달산 북쪽 자락에 자리한 이석수 묘역은 조선 성종(成宗)의 손자인 부안군 이석수(1524~1598)
와 그의 2번째 부인인 평강 채씨(平康 蔡氏)의 무덤이다. 호석(護石)도 없이 봉분만 두툼하게
부풀어져있고, 그 앞에 묘표와 상석(床石), 혼유석을 두었으며, 문인석 1쌍을 배열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은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작은 규모이다.

이석수는 성종과 명빈김씨(明嬪金氏)의 소생인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의 아들로 처음에 창
선대부 부안정(彰善大夫 扶安正)에 봉해지고, 나중에 명선대부 도정(明善大夫 都正)을 제수받았
으며, 임진왜란 때는 손자가 되는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선무종훈(宣武從勳)이 되었다. (선조의
할아버지인 중종과 이석수는 이복형제임)
1598년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자 선조는 정의대부 부안군(正義大夫 扶安君)이란 시호를 내리고
창빈안씨묘역 서쪽 산자락을 주어 무덤을 쓰게 했는데, 선조가 그의 부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
院君)묘역과 더불어 성역화시키기에 혈안이 되있던 창빈묘역의 서쪽 땅을 떼어 무덤을 쓰게 할
정도면 그의 신임이 제법 두터웠음을 보여준다.

이석수 무덤 뒷쪽에는 그의 손자인 순안군 이선룡(順安君 李善龍) 내외의 무덤이 야트막하게 솟
아있는데, 왼쪽 봉분에는 그와 전처(前妻)인 남원윤씨가, 오른쪽에는 나중에 받아들인 여흥민씨
가 묻혀있다. 이들 무덤은 봉분만 조촐하게 솟아있으며, 일체의 석물은 하나도 없어 일반 백성
들의 무덤처럼 수수하게 보인다.


▲  부안군 묘표

부안군 묘표는 지붕돌과 비신, 비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을 꽂은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 같
은 것이 섬세하게 묘역의 초라함을 조금이나마 커버해준다. 상태가 양호한 비신(碑身)에는 부안
군의 5대손인 이태제(李泰齊)가 1727년(영조 3년)에 비를 세웠다는 내용부터 해서 부안군의 전
처인 김해 허씨(金海 許氏)와 맏아들의 묘역이 양주 장흥에 있다는 것이 쓰여 있으며, 뒷쪽에는
비석의 조성시기가 쓰여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살짝 들려져 선의 미를 선사한다.


▲  약간 측면에서 바라본 이석수 묘역

▲  이석수 묘역 남쪽에 자리한 경찰충혼탑

※ 국립현충원 (창빈안씨묘역, 부안군 이석수묘역) 찾아가기 (2015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4,7,8번 출구에서 도보 1분, 4호선을 이용할 경우 4번 출구가 가까우
  며, 9호선을 이용할 경우 7,8번 출구가 가깝다.

★ 국립현충원 관람정보 (2015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쉬는 날은 없으나 동절기 토요일과 휴일에 한해 사진/유품전시관은 휴관함
* 국립현충원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 국립현충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작역과 이어지는 정문과 동문이 있으며, 흑석동 후문과 상도
  동 후문, 사당동 후문 등 3개의 후문이 있다.
* 국립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 ☎ 1577-9090, 02-813-9625)
* 부안군 이석수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1-2


♠  국립현충원 외곽 ~ 현충원내부순례길, 동작충효길(현충원길)

▲  호국지장사와 상도동 후문을 이어주는 현충원내부순례길

호국지장사에서 상도동 후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은 현충원의 남쪽 산책로인 현
충원 내부순례길로 상도동 후문에서 지장사를 거쳐 사당동 후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길을
둘러싼 숲이 매우 삼삼하여 도심 속의 공간이라 사실을 까맣게 잊게 해주며, 나무들이 베푼 산
내음에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길 양쪽에는 서울의 주요 허파인 현충원의 숲을 지키고자 녹색 철
책이 빙 둘러져 있어 숲으로의 접근을 막는다.

이 숲길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어느 정도 오르면 길은 평탄해지고 이윽고 현충원과 속세(俗世
)의 경계를 가르는 높다란 녹색 철책이 나타나 이 세상의 끝에 온 기분과 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  녹음에 묻힌 현충원내부순례길

▲  현충원 철책을 만나기 직전

▲  현충원과 속세를 이어주는 상도동 후문(상도 출입문)

지장사에서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속세로 이어지는 상도동 후문이 나온다. 후문이라고
하지만 개인집 대문이나 휴전선, 통제구역 철책 사이에 난 조그만 철문이며, 문 안쪽에 초소가
있어 혹시 방향을 잃어 들어올지도 모르는 속세의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상도동 후문에서 동작구의 둘레길인 동작충효길과 만나게 된다. 동작충효길은 동작구(銅雀區)의
야심작으로 2010년부터 2년 동안 갈고 닦은 길이다. 구내(區內)에 국립현충원이 있는 것을 착안
해 이름도 그럴싸한 동작충효길이라 명명된 이 길은 총 6코스로 산과 녹지대, 한강변을 따라 펼
쳐져 있으며,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부족해 동네 명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허나 조금씩 존
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조만간 서울 굴지의 도보길로 격하게 추앙받을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도보길이기 때문이다.


▲  동작충효길 안내도 (동작구청 홈페이지 참조)

현충원 상도동 후문에서는 동작충효길 1코스인 고구동산길(노들역 배수지공원~상도동 후문)과 2
코스인 현충원길(상도동 후문~동작역), 6코스인 동작마루길(상도동 후문~국사봉,빙수골마을공원
), 7코스인 까치산길(상도동 후문~사당역)이 만나는 분기점이다. 여기서 4개의 충효길이 시작되
고 끝을 맺는 충효길 교통의 요충지인 셈이다.

동작충효길이란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터라 생각치도 못한 존재 앞에 약간 멍을 때렸다. 원래
는 숭실대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동작구의 새로운 꿀단지, 충효길
에 등장으로 코스를 수정해야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그냥 지나치면 정말 섭하다.
여기서 노량진으로 갈까? 아니면 사당역? 아니면 동작역? 3개의 갈림길을 두고 궁리하다가 현충
원 경계를 따라 이어진 현충원길에 호감이 더 가서 그 길을 택했다.
현충원길은 현충원의 녹색 철책을 따라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길로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
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철책 안쪽은 성스러운 현충원이요. 내가 걷고 있는 바깥은 속세로 현충
원을 많이 들락거렸지만 경계선과 주변 산책로는 처음 간다. 정말 현충원은 뜨면 뜰수록 계속
용솟음치는 마르지 않는 샘이나 물건이 마구 나오는 마술 상자 같은 곳이 아닐 수 없다.


▲  현충원 철책과 나란히 이어진 현충원길 - 상도동 후문 북쪽

▲  현충원길 학수약수터 부근

▲  현충원길 사당동 후문 북쪽 오르막길

현충원길은 현충원 남쪽과 동쪽 산줄기에 닦은 산길로 이미 두툼하게 솟은 곳이라 길의 북쪽 종
점인 동작역이나 이수폭포를 제외하고는 급하게 솟거나 내려앉는 구간은 없다. 다만 이 길이 은
근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사당2동이나 사당3동, 정금마을 등에서 오를 때는 길이 좀 각박하다.

길 중간에는 사당3동으로 내려가는 길과 남묘(南廟), 사당동 후문, 정금마을과 갯마을, 이수폭
포 등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10개 정도 된다. 이중 남묘는 동묘(東廟)와 더불어 1599년 명나라
에서 금 4,000냥을 보내 지으라고 했던 관우(關羽)의 사당으로 원래는 서울역 동쪽에 있었다.
그러다가 주변이 개발되면서 1970년대에 사당3동 산동네로 떨려났고 지금은 거의 개인 절로 쓰
이고 있는데, 현충원길에서 남묘의 두꺼운 지붕들이 보인다. 그곳도 잠시 들릴까 하다가 귀찮아
서 그냥 지나쳤다. (내부 관람이 어려운 곳임)


▲  정금마을, 동작초교 갈림길

▲  끝없이 펼쳐진 현충원길과 현충원 철책의 위엄 (정금마을 갈림길 부근)

▲  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메모리얼 게이트(Memorial Gate)

현충원길에는 이렇게 생긴 문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문은 현충원에 봉안된 순국선열을 추모하
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문의 지붕은 태극모양처럼 넝실거리게 했고, 기둥
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허나 그런 심오한 의미와 다르게 문의 이름은 어렵게 영
어로 되어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문 이름은 보나마나 동작구청 공무원들이 없는 지식 쥐어짜서 만든 이름으로 보이는데, 굳이 영
어로 이름을 삼아야 폼이 나는 것일까? 그냥 순국선열의 문이나 애국의 문으로 하면 안되는거니
? 이 땅의 정말 과하기 그지 없는 영어 숭상은 실로 역겹기 그지 없다.


▲  현충원길의 거의 북쪽 끝인 이수갈림길에서 이수폭포로 가는 소나무길

▲  이수폭포 위에 세워진 단촐한 모습의 동작정(銅雀亭)

현충원길의 북쪽 마지막 갈림길이 이수갈림길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동작역과 국립현
충원 동문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이수폭포와 동작대로로 연결된다. 나는 여기서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와 보다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이수폭포로 방향을 잡았다.

이수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속세로 나가려는 나의 마음을 마지막으
로 사로잡는다. 길의 경사는 꽤 각박하여 오르기가 힘들며, 내려갈 때는 미끄러질 위험이 크게
도사린다. 게다가 길 왼쪽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거의 80도에 가까운 낭떠러지로 동작대로
와 지하철 4호선 터널이 보일락말락한다.
그 길을 정신 없이 내려가니 동작정이라 불리는 작고 단아한 정자가 나타난다. 이제 다 내려온
것이다.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동작정 안에는 어느 속인이 벌러덩 누워 책을 보고 있
었는데, 무척 그늘진 곳이라 피서지로는 딱 그만이다. 정자 앞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조그만 개
울이 있는데, 정자 서남쪽에서 발원해 이수폭포로 떨어진다. 이 물은 자연수가 아닌 수돗물이다.

▲  동작정 앞에 놓인 나무다리

▲  이수폭포 윗쪽


▲  여름의 제국을 긴장시키는 이수폭포의 위엄

동작정에서 1분 정도 내려가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동작대로와 함께 시원하게 쏟아지는 이
수폭포가 여름의 제국을 무척 똥줄타게 만든다. 이 폭포는 자연산이 아닌 인공폭포로 동작충효
길을 닦으면서 조성한 것인데, 폭포는 2개로 이루어져 서로 아름다움과 위엄을 뽐낸다. 성난 물
줄기가 쏟아져 하얀 비단이 아래로 드리운 듯 하며, 우렁찬 소리가 바위와 주변을 뒤흔들어 현
충원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과 여름의 제국이 놀라 도망칠 정도이다.

폭포 주변 암벽에는 소나무와 여러 수풀을 심어 폭포의 운치를 돕고 있으며, 폭포 앞에는 조촐
하게 쉼터를 만들었다. 이곳에 앉아 폭포를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정말 삼척(三陟) 미인폭포 전
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시간가는 줄도 모르며 더위도 잠시 잊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현충일 기념 국립현충원과 동작충효길(현충원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수폭포(동작정), 현충원길 찾아가기 (2015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3번 출구를 나오면 현충원길이 나오며, 동작대로를 따라 6분 정도 가
  면 이수폭포가 나온다. 여기서 동작정을 거쳐 각박한 길을 오르면 현충원길과 만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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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6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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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 서울 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나들이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서울연등회 연등 ▲

 


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은 계절의 여왕으로 일컬어진다. 꽃샘추위란 이름으로 4월까지 천하를
어지럽히던 겨울 제국의 잔여 세력이 봄에게 완전히 소탕되면서 세상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다. 이때가 되면 전국에서 많은 축제가 산발적으로 열려 나들이객을 참 바쁘게도 만드는데 그
중에는 서울연등회도 있다.

서울연등회(서울연등축제)는 봄 축제의 백미(白眉)이자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
일의 축제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주말에 열리는데 토요일에는 축제
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이 장충동 동국대에서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종로1가)
까지 장엄하게 펼쳐지며, 일요일에는 우정국로를 중심으로 전통문화마당과 연등놀이가 열린다.
그래서 후배 여인네와 일요일 전통문화마당을 구경하러 나갔다. 이런 좋은 축제는 꼭 봐야 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일요일 전통문화마당 일부와 조계사 주변에 전시된 연등,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조계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북쪽 시작점(안국동로터리)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은 조계사와 우정국로(종각역~안국동로터리) 일대에서 열린다. 우정
국로는 4발 수레들로 늘 번잡한 곳이지만 연등축제만큼은 도로를 통제하여 콧대 높은 수레들의
바퀴를 막는다. 그래서 도심 속 대로를 4발 수레의 눈치 없이 두 다리로 마음껏 거닐 수 있는 1
년에 몇 안되는 날이다.
서울연등축제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 1주 전 주말에 열린다. 주말 전날인 금요일에 조계사
와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통교 구간)에서 전통등 전시회가 그 서막으로 열리
며, 보통 초파일 다음날까지 불을 밝힌다.

축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동국대(東國大) 대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열
린다. 이 마당은 연등행렬의 사전 행사로 관불의식과 법회,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열리며, 18시
부터 연등회의 갑(甲)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동국대 대운동
장을 출발하여 동대입구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4거리 직전까지 이
어지는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커다란 연등(장엄등) 상당수가 등장하면서 연등행렬의 분위
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행렬 진행시간은 3시간 정도로 조계사를 비롯해 서울의 상당수 사찰과 경기도와 지방의 일부 사
찰, 불교 종파와 단체/학교에서 보낸 사람들과 온갖 연등(燃燈)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
보이는 등은 5~10만 개에 이른다고 하니 (2015년은 5만 개) 가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 있어 전혀 식상하지 않다. 게다가
행진 중에 사물놀이와 가벼운 춤 공연, 율동 등이 끊임없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다.

햇님이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빼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어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 시간에는 동대입구역에서 동대문, 동대문에
서 광화문4거리까지 도로를 통제한다.

연등행렬이 광화문4거리와 종로1가 사이에 다 모이면 보통 21시부터 회향(廻向)한마당이 펼쳐진
다. 종각역~광화문4거리 구간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큰 법회와 전통 공연이 펼쳐지며, 거리를
행진한 장엄등(연등)은 이들 구간에서 모두 걸음을 멈추어 사람들의 사진 모델이 되느라 분주하
다. 특히 몇몇 장엄등은 몸을 움직이거나 불, 연기를 쏘는 것도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렇게 회향한마당은 23시경에 막을 내리고, 장엄등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 둔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우
정국로 전체가 온통 축제의 장이 되는데, 불교와 관련된 온갖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
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민속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한쪽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떡이나 파전, 비빔밥, 식혜 등을 사먹으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 체험, 사찰/전통 음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도 많이 만
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전통문화마당은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며 19시쯤 되면 연등놀이의
몸풀기 행사인 연등행렬을 벌인다. 조계사 등 몇몇 절과 불교 단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개량 한
복이나 공연에서 입는 고운 빛깔의 옷을 차려 입고 형형색색의 연등을 들며 커다란 장엄등을 이
끌고 거리를 행진하는데,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과 종로2가, 종각역을 거쳐 조계사 인근 연등
놀이 행사장까지 돈다. 행진 중간에 사물놀이와 조촐한 춤 공연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천천히 이
동한다. (1시간 정도 걸림)
연등놀이 행사장에 이르면 연등회의 마지막 행사인 연등놀이 공연이 펼쳐진다. 앞서 연등행렬에
참여한 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공연부터 현대식 공연까지 다채로운 공
연이 흥겹게 펼쳐지며, 공연 마지막에는 보통 강강술래를 하는데, 공연자와 관람객이 한데 어우
러져 신명나게 몸을 흔든다. 이때 허공에서는 꽃비(분홍색 전통 종이)를 뿌려 흥겨운 분위기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이 공연은 21시대에 끝나며, 이것을 끝으로 이틀 동안 펼쳐진 연등회는 아쉽지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때는 마음이 뻥뚫린 듯 얼마나 허전하던지, 지나간 시간이 원망스럽다.

이렇게 서울연등회는 단순히 불교 축제가 아닌 좁게는 서울, 넓게는 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울리는 대축제로 천하 제일의 축제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다.


▲  우정국로 북부에 자리한 연등/연꽃장식 만들기 체험공간
이곳은 주로 외국 관광객들 위주로 진행된다. (물론 유료임, 돈좀 쓰고 가라는 뜻)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그렇다면 이 연등회는 언제부터 열리
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에서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세를 탄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중/후기에 이미 연등을 밝혔음을 보여준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열어 만백성이 즐겼고, 등을 며칠 동안 밝히면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석가탄신일이 연관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석가탄신
일에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
를 연 것이 그 최초 기록이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
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조정의 불교 탄압으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
속 연등회를 즐겼다. 저녁에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
등은 한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은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각가지 연등을 만들어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시작이 되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96년부터 동대문운동
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후 동국대에서 출발하여 지금에
이른다.


▲  도심 속 대로(大路)에서 펼쳐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배가 볼록 나온 아기부처가 빨간 일산(日傘) 밑에서 중생들의 시원한 하례를 받는다.

▲  멀리 해동(海東)까지 놀러온 태국 불상

5월(어쩔 때는 4월 말)만 되면 나도 모르게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연등회, 그 연등회의 전통문
화마당에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 문화도 만날 수 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몽골, 네팔, 부탄, 베트남,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이 서울연등회의 명성에 앞다투어 찾아와
공간을 하나씩 받아 그들의 불교 문화를 열심히 홍보한다. 이국적인 불상과 불교 용품은 물론
문화 체험과 다과 시식까지 가능하다.


▲  금박을 붙여서 만든 태국 불상의 위엄 ~~!
보시함에 돈이 참 수북하다. 저건 돌아갈 비행기 여비인가..?

▲  진지한 분위기의 도자기 만들기 체험장

▲  북청(北靑)사자놀음 - 중요무형문화재 15호

우정국로 공연장에는 온갖 전통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단연 인기가 높은 것은 북청
사자놀음(북청사자놀이)이 아닐까 싶다. (그외에 남사당놀이도 있음) 서울연등축제에 매년 등장
하는 단골로 우리 땅임에도 전혀 들어갈 방법이 없는 함경남도 북청의 오랜 민속 놀이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놀이와 가면놀이의 일종으로 대륙계와 북방계의 사자춤이 민속화된 대표적
인 예이다. 함경남도에는 많은 사자놀이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이 북
청이다.
북청의 주요 사자놀이패로 북청읍의 사자계(獅子契), 가회면의 학계(學契), 구 양천면의 영락계
(英樂契),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이가 유명했으며, 특히 북청읍 사자는 댓벌 사자라 하여 이촌
/중촌/넘은개/동문밖/후평/북리/당포 사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마을마다 사자의 모습을 달리
해서 놀았다. 그리고 북청 관내에 사자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며 경쟁하면서 사자놀이 패들이 많
이 통폐합되었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 14일에 여러 마을에서 장정들의 편싸움으로 그 막을 올리는데, 대보름달이
만연하게 뜬 뒤에 사자놀음이 펼쳐져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6일 이후에는 초청받은 집을
순회하며 노는데, 마당에 들어가 춤을 추면 사자가 마당을 거쳐 안방문을 열고 큰 입을 벌려 무
언가를 잡아먹는 시늉을 한다. 이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며, 그 다음에 부엌으로 들어가 같
은 행동을 취하고 마당으로 나와 춤을 춘다.
이때 집 주인의 요청이 있으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竈王)과 시렁 앞에 엎드려 그들에게 절을 한
다. 또한 아이를 사자 등에 태우면 오래 산다고 하며, 몰래 사자 털을 뽑아두면 장수한다고 하
여 사자 털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장수를 빌면서 오색포편(五色布片)을 사자 몸에 매어주
기도 했다.

서울에서 한참이나 먼 북청의 사자놀이가 서울로 온 것은 해방 이후이다. 북한의 핍박을 피하고
자 내려온 사자놀이 기능보유자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놀이를 퍼뜨렸는데, 객지라 그런지 고향처
럼 하기에는 좀 힘들고 해서 내용이 좀 달라졌다.
우선 퉁소와 북으로 반주를 하며 애원성춤을 추고, 마당돌이로 하인 꼭쇠(꺾쇠)가 양반을 데리
고 나와 그를 조금씩 야골리면서 마당을 진행한다. 양반이 심심하다고 하니 꼭쇠가 악사(樂士)
, 무동(舞童), 꼽새 등을 불러 한데 판을 벌인 다음 끝에 비로소 사자를 소환한다.

사자는 짐승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용맹하고 무서운 동물이 분명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웃음을 머
금게 하는 귀엽고 해학적인 사자탈과 털이 달린 가죽을 뒤집어 쓰며 어슬렁 나타난다. 보통 2명
이 1마리의 사자를 이루는데. 많을 경우에는 3인 1조가 되기도 한다. 사자는 상좌승(上座僧)과
계속 춤을 추며, 다양한 재주를 부리다가 잠시 쓰러진다. 이에 양반은 상좌승을 불러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외우게 하지만 사자는 꿈쩍도 안한다. 그래서 의원을 소환해 침을 놓으니 그때서
야 일어난다. 이때 꼭쇠가 토끼(예전에는 아이였다고 함)를 먹이니 사자는 먹는 시늉을 하며 굿
거리장단에 맞춰 극을 이끈다.
이에 양반은 기뻐서 사자 1마리를 더 소환하고 사자춤과 상좌승의 승무(僧舞)가 한데 어울린 다
음, 사자가 퇴장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신고산타령' 등을 부르면서 군무를 추고 끝낸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춤의 묘기와 흥겨움, 그리고 악의 기운을 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기능을
수반한 민속놀이로 그 흔한 양반과 파계승(破戒僧) 풍자는 없다.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1)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2)

공연이 끝나면 사자춤을 춘 사람들은 사자탈과 보기만 해도 찜통같은 가죽을 벗고 본모습을 보
인다. 중장년층으로 생각했지만 그 속에서 나온 이들은 뜻밖에도 앳된 20대들. 수많은 옛 무형
자산들이 마땅한 계승자를 찾지 못해 고사 직전에 놓인 것들이 허다한데, 북청사자놀음은 저들
로 인해 무척 든든함을 느낀다. 내가 백발이 되는 먼 훗날까지 길이길이 이어갔으면 좋겠다.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남쪽 시작점(종각역4거리 북쪽)

▲  종각역4거리 북쪽에 마련된 외줄타기 현장
어린이들이 부모 손에 의지하며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에 임한다.

▲  어지간해서는 참 보기가 힘든 괘불(掛佛)도 칠흑같은 괘불함을 박차고
서울로 올라왔다. 괘불 앞에서는 한참 승무가 벌어지고 있다. ▼


♠  서울연등축제 연등의 물결

▲  종각역4거리에 놓인 연등 (2013년)

조계사 북쪽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주변, 그리고 종각역4거리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은행
, 2015년에는 이곳에 연등을 두지 않았음) 주변에는 크고 작은 연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날 연등행렬에 쓰인 장엄등도 몇 개 있음)
이들은 초파일 당일이나 다음날까지 이곳에 있으며, 낮에는 햇님의 눈치로 조용히 색을 입힌 모
형물로 웅크리고 있지만 그가 없는 저녁에는 마음껏 몸을 밝히며 연등의 이름값을 한다.


▲  여의주를 문 푸른 빛깔의 목어 (또는 용)
뒤쪽에 두툼하게 솟은 푸른 빛깔은 꼬랑지가 아닌 바다 물결이다.
물결을 헤치며 자기 갈 길을 가는 목어의 위엄~~


▲  반토막난 생선 쪼가리 목어를 열심히 두드리는 승려

▲  수초 사이를 유유자적 거니는 물고기 (목어를 상징)

▲  연잎과 물고기(목어)를 든 남녀 동자들

▲  하얀 구슬을 품은 연분홍 연꽃

▲  잔뜩 부풀어 오른 하얀 연꽃(백련)

▲  귀엽고 상큼한 모습의 달마대사 연등

▲  요즘 똥개도 물고 댕긴다는 스마트폰 연등
스마트폰 화면을 연등축제에 걸맞게 목어로 채웠다.

▲  우정총국 북쪽에 조촐하게 연등터널을 세웠다.

▲  부엉이 연등

▲  반야용선(般若龍船)
관음보살 누님이 용머리 배의 선장이 되어 망자(亡者)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
나중에 이승을 뜨게 된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꼭 타보고 싶은 배이다.

▲  귀여운 동자승이 탑돌이를 하는 연등과 신들린 모습으로
법고를 치고 있는 승려 연등

▲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는 하얀 코끼리 연등

▲  비파를 연주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칼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 코끼리에 탄 보현동자 연등


♠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중심지이자 도심 속의 조촐한 휴식처
~ 서울 조계사(曹溪寺)

서울 도심의 완전 한복판인 금싸라기 땅, 종로1가 견지동(堅志洞)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
인 조계사가 자리해 있다. 견지동이란 이름은 뜻을 견고히 한다는 뜻으로 조선 때 견평방(堅平
坊, 견지동 주변)에 있던 의금부(義禁府)에서 민원이나 법을 집행할 때 굳은 뜻으로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조계사의 시초는 1910년에 창건된 각황사(覺皇寺)로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옛 중동학교터)에 있
었다. 조선시대에 서울 도심에는 정릉(貞陵)의 원찰인 흥천사(興天寺, 정동에 있었음), 탑골공
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 그리고 명륜동(明倫洞)에 흥덕사(興德寺)가 있었는데, 원각사와 흥
덕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파괴되었고, 흥천사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 사라지면서 서
울 도심의 사찰은 완전 씨가 마르게 된다. 하긴 억불숭유를 강조하던 조선 심장부에 버젓히 절
이 있다면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다.
이후 400년의 공백을 깨고 조계사의 시초인 각황사가 도심에 싹을 내렸다.

1911년 왜정(倭政)이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선포하여 조선의 모든 절을 이토 히로부미의 원
찰(願刹)인 박문사(博文寺,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에 귀속시키려 하자 해인사(海印寺)주지 회광,
마곡사(麻谷寺) 주지 만공(滿空), 승려 용운(龍雲) 등이 급히 각황사에 모여 31본산 주지회의를
열었다. 이때 용운의 제의로 총본산제도를 추진하면서 조계사(각황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사찰로 서서히 싹수를 트게 된다.

1929년 승려 104명이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했다. 당시
절의 규모가 암자보다 못한 수준이라 만해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곳을 명실상부한 조선 불
교의 총본산으로 키우려고 궁리했는데, 지암 종욱(智庵 鍾郁)이 총본산 건설 31본산 주지 대표
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중 1936년 전북 정읍을 기반으로 하던 보천교(普天敎)가 왜정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사
건이 터지면서 보천교의 중심 법당인 십일전(十一殿, 전북 정읍 소재)이 경매로 나왔다. 이 건
물은 1929년에 지어진 천하에서 가장 큰 목조 단층 건물로 지암은 그 건물에 반응을 보이며, 과
감히 매입을 단행했는데, 구입 비용은 무려 12,000원이 들었으며 (지금으로 환산하면 12억 이상
) 그 건물을 모두 분해하여 가져와 대웅전을 지었다.
공사를 맡은 이는 도편수(都片手) 최원식(崔元植)으로 1920년대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
殿) 재건 공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대웅전 건립을 위해 인근 경복궁(慶福宮)과 덕수궁 건
물을 조사했으며, 단청과 벽화를 맡은 이는 당시 그림으로 알아주던 금용 일섭(金蓉 日燮)이다.

1937년 민영환 집터와 우정총국 일대를 사들여 절을 옮겼고, 1938년 10월 25일 준공 봉불식(奉
佛式)을 거행해 서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그 장엄함을 드러냈다. 또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있던 태고사(太古寺, 지금도 있음)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갈았다.
대웅전 건설과 절 이건 비용을 위해 31본산에서 100,402원 47전을 모아 보냈으며, 중앙불교전문
학교 교수였던 권상노(勸相老)가 상량문을 작성했는데, 왜정의 눈치가 심하여 조선총독의 '심전
개발(心田開發)'을 기념하고자 대웅전을 지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한 많은 중생이 각자의 소
중한 물건을 발원문을 첨부해 대웅전에 넣었다.
이토록 천하가 주목할 정도로 요란하게 절을 옮겼지만 정작 경내를 메운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
가 전부였다. 대웅전 하나가 여러 건물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참고로 보천교는 증산교(甑山敎)에서 파생된 것으로 차경석(車京錫)이 교주(敎主)로 있었는데,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십일전 완성을 계기로 신도들로부터 차천자
(車天子)로 추앙을 받았다. 허나 교내 분열과 친일 행적 등으로 말썽이 많았고, 1936년 차경석
이 죽자 왜정은 보천교를 강제로 폐지하고 건물을 경매로 내놓아 짭짤하게 수입을 챙겼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
불교 조계종이 발족했고, 제1대 종정(宗正)으로 한암이 취임했다. 1945년 9월에는 이곳에서 전
국승려대회가 열려 왜정 때 만들어진 사찰령과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롭게 조선불교 교헌
(敎憲)을 제정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무심한 총탄으로 요사가 반이나 날라갔고, 대웅전도 우측 처마에 포탄을 맞
아 상처가 생겼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을 계기로 인근 안국동 선학원(禪
學院)에서 불교 정화운동을 벌이던 승려들이 이곳에 들어와 조계종의 이름을 딴 조계사로 이름
을 갈았다.
허나 그로 인해 비구승과 대처승(帶妻僧)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처승 세력은 조계사를 인정하지
않고 태고사를 고집했다. 그래서 절은 하나인데, 이름은 2개인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고, 비
구를 중심으로 간신히 조계종이 성립되면서 조계사로 이름이 통일되기에 이른다.

2003년에는 대웅전을 해체 보수했는데, 종도리를 받치는 통장혀 중앙부분 장방형 홈에서 1937년
대웅전 건립 때 넣은 상량문을 비롯해 217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시절 생활사와 상황
을 고스란히 전해주었으며, 200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다.

법등(法燈)을 켠지는 이제 100년을 조금 넘었고, 지금에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80년 남짓, 건
물도 대웅전이나 좀 나이가 있을 뿐 고색(古色)의 기운은 그리 익지도 않았다. 오래된 멋도 거
진 없고, 산사의 고즈넉함도 없고, 수수하게 생긴 절집도 아니다보니 그런 절을 선호하는 이들
에게는 썩 좋은 절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다고 도심 속에 박힌 잇점과 속세에 늘 열려있는 공간으로 평일에
는 잠깐 들려 쉬었다가는 직장인과 도시인들이 많다. 아마도 이 땅의 절 가운데 직장인들이 가
장 많이 찾는 절이 아닐까 싶다. 휴일에는 신도와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
고 물갈이가 잘된다. 특히 서울연등회(연등축제)와 석가탄신일에는 발을 들일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며, 축제의 절정에 이른 조계사는 절과 사람의 향기, 그리고 흥겨움이 강하게 묻어난다.
그리고 매일 18시가 되면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을 깨워 회색빛 도심에 잔잔하
게 사물의 소리를 베푼다.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조계종의 본산으로 경내는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나 대웅전과 현대
식 건축물 등 으리으리한 건물이 많다보니 경내가 제법 넓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울 도심 한복
판이라 교통과 접근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조계사는 지금 크기가 딱 좋은 거 같음)
대웅전과 극락전, 설법전, 종무소, 안심당, 범종루,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교대학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천하에 희귀종인 백송
이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대웅전과 석가불도, 목불좌상 등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
고 있다. 또한 대웅전 뜨락에는 500년 묵은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고, 경내 동북쪽에는 우정총국
이 자리해 있다.

번잡한 도심 속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런 도심과 달리 절은 평온하기 그지없으며, 종로1가를
지날 일이 있으면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절집의 하나이기도 하다.


▲  조계사 일주문(一柱門)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조계사의 실질적인 정문이다. 경내가 사방으로 뻥 뚫려있다 보니
진입로가 많아 굳이 일주문의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절의 상징적인 대문이니 경
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나갈 때 거쳐가는 것도 좋다.

원래 조계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절의 필수 요소인 일주문이 없는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
지 2005년 3월 절을 중창하면서 일주문의 백미로 꼽히는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계문을 모방해
하나 장만했고, 2007년 10월에 현판과 주련을 달아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현판과 주련은 당시
한국서예가협회장이던 송천 정하건 선생이 쓴 것이고 서각은 철제 오옥진 선생이 했다.

명세기 이 땅의 중심 절집이다보니 문의 크기는 단양(丹陽) 구인사(求仁寺) 일주문의 다음 가는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도 장대하거니와 특히 폭이 넓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  또 다른 하늘을 이루고 있는 오색 연등의 위엄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장대한 오색 물결 앞에 두 눈이 제대로 놀라
고 만다. 입도 한없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았지~~ 낮도 이러한데, 햇님이 꽁무니를 빼
는 저녁이 되면 더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  연등 밑에 있는 커다란 연꽃무늬 연등

▲  조계사 사적비(事蹟碑)와 법등명(法燈明) 연등

조그만 다양한 연등이 걸린 법등명 수레 옆에 미끈한 피부의 비석이 보일 것이다. 그 비석은 조
계사의 역사를 담은 사적비로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이 2009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지관은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2012년 1월 정릉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입적을
했는데, 그는 조계사에 마땅한 사적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손수 자료를 모아 9천 자에 가
까운 내용을 담았다. 비석의 밑도리와 머리장식인 귀부와 이수는 여주 고달사(高達寺)의 원종국
사탑비(元宗大師塔碑)를 본따서 만들었다.


▲  연꽃을 들고 샤방하게 뛰어가는 동자승과 비파를 연주하는 동자 연등

▲  조계사 관불의식의 현장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 보인다. 허나 석가탄신일이
지나면 강제로 다시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가야 되니 그의 심정도 모르고
떨어지는 해가 무척 야속할 것이다.


▲  왼손을 내밀고 있는 천진불

백송 앞에는 2006년 3월에 만든 천진불이 그 이름 그대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요즘
이런 천진불을 갖춘 절이 제법 되는데, 표정과 모습이 귀여운 것은 좋지만 왼손을 내밀며 '야~
한푼 내놔~!!' 이러는 것 같아서 저 손짓만 고친다면 참 바람직한 천진불이 될 것 같다.

▲  조계사 백송 - 천연기념물 9호

대웅전 동쪽에는 이곳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인 백송이 하얀 피부를 드러내며 경내에 짧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백송은 말그대로 하얀 소나무로 나이를 먹으면서 껍질이 벗겨져 줄기가 회백색이나 하얀색으로
변하는 매우 희귀한 소나무이다. 그들의 고향은 중원대륙 북부이나 그곳에서는 진작에 씨가 말
라버린 상태이며,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기념으로 가져온 백송 일부
가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던 통의동(通義洞)
백송을 비롯해 원효로(元曉路) 백송과 보은(報恩) 백송이 숨을 거두면서 그 개체수는 이제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며, 다행히 그들의 후손이 사릉(思陵) 전통수목 양묘장과 재동(齋洞)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 북쪽, 그리고 창경궁에서 자라나고 있어 품종 전멸은 면했다.

조계사 백송은 5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누가 가져와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높이
는 약 14m, 뿌리부분 둘레 1.85m, 가슴 높이 둘레가 1.8m이며, 수송동(壽松洞)이란 지명도 바로
이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오래된 나무가 있는 동네란 뜻으로 원래는 지금의 수송공원에 있었
으나 그곳에 있던 각황사가 현 위치로 이전되면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져 외과수술을 크게 받을 적이 있는데, 그때 큰 줄기는 절단되
었다. 허나 절을 찾는 사람이 많고, 나무에게 주어진 땅이 좁기 때문에 나무의 기운도 예전 같
지가 않아 이 땅에 오래된 백송이 또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게다가 나무 주위를 연등
으로 화사하게 꾸며놓아 나름 눈요기감을 선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를 가두는 꼴이 되어 조금
은 답답해 보인다. 연등 수입도 좋지만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그에 대한 배려도 절실해 보인다.


▲  조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7호

조계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단층 불전(佛殿)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얼마나 허벌나게
크던지 건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죄다 개미보다 못하게 보인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면적은 무려 155.7평에 이른다. 1936년 왜정
에 의해 해체되어 경매로 나온 보천교 십일전을 거금 12,000원으로 매입하여 그 자재로 만들었
는데, 옛 십일전의 모습도 어느 정도 살렸다.
조계사가 이 큰 건물에 눈독을 들인 것은 조계사가 바로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존재였기 때문이
다. 나날이 힘이 더해지는 왜식 불교에 맞서고 민족 대표 사찰에 걸맞게 법당을 크게 지을 필요
가 대두되면서 때마침 나온 십일전이 그 역할을 하게 되었고, 1938년 완성을 보았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양식을 보이면서도 나름 독특한 양식을 간직한 20세기 초/중기 건물로 사방
에 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안그래도 큰 건물이 더욱 커보인다. 건물 외벽에는 온갖
꽃창살과 벽화가 장엄했으며, 대웅전 건립 기념으로 영암 도갑사(道甲寺)에서 가져온 목불좌상
을 본존불로 삼았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조계사 홈페이지에는 15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옴, 반면 문화재청에는 조
선 전기 양식을 간직한 조선 후기 불상이라고 나옴)
에 조성된 것으로 대웅전 규모에 걸맞지 않
게 많이 왜소하다는 지적이 많자 2006년에 새롭게 거대한 석가3존불을 봉안했다. 목불좌상은 불
단 우측으로 옮겨졌으며, 추후 영산전을 만들면 그곳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이 목불좌상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6호
이다.
그리고 대웅전 현판은 조선 선조(宣祖)의 8번 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해서체로
남긴 화엄사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그 뒤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연병장처럼 넓은 대웅전 내부에는 예불을 하는 중생들로 가득하다.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바친
온갖 제물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이고, 불상은 그것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시
주함에는 돈이 넘쳐나 함이 터질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3존불은 2006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 땅에서 단층 불전에 봉안된 불상 가운데 제
일 크다. 그들이 너무 큰데다가 금빛 찬란해 두 눈이 달아날 지경으로 그들 뒷쪽에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석가불도가 걸려있는데, 불상이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석가불도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로 20세기 초반에
조성되었다. 왜정 때 유명했던 불교미술작가 김일섭(金日燮)이 그린 것으로 그 시절 불교의 모
든 종단이 뜻을 합쳐 만든 불화라는 점과 김일섭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가 인
정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 앞에도 관불의식 장소를 두었다.
철모르고 찾아온 이른 더위에 시원하게 냉수욕을 하는 그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를 다른데로 내보내고 내가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만약 그렇게 되면 관불은 커녕 바가지로 싸대기`맞겠지..?

▲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연등이 의기투합하여 하늘을 완전히 지웠다. 연등은 하늘을 메우는 구름이 되고
그들을 경계로 하늘과 땅으로 나눠진 것 같다. 연등 밑은 밝은 대낮임에도
연등의 위엄에 가려 어둡다.

▲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대웅전 뜨락

▲  조계사의 꿀재미, 연등 구름의 물결
측정불가의 깊은 하늘이 이날만큼은 대웅전 평방 높이로 팍 내려앉은 것 같다.

▲  하얀 연등이 수를 놓은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좌우에 둔 아미타3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극락전, 2층은 설법전(說法殿)으로 쓰인다.

극락전 앞에는 다른 공간과 달리 하얀 연등이 가득한데, 이들은 죽은 이들, 즉 어려운 말로 영
가(靈駕)를 위한 연등이다. 저녁이 되면 일제히 하얀 빛을 발산해 알록달록 연등 빛보다는 다소
엄숙하거나 오싹할 수 있다. 

극락전 남쪽에는 범종루, 안심당(安心堂) 등이 있으며, 안심당 지하층(거의 지상 1층임)에는 만
발(萬鉢)이라 불리는 공양간이 있다. 만발은 1만개의 발우라는 뜻으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  도시를 바탕에 둔 범종루와 극락전(오른쪽)

범종루에는 부처의 메세지를 담은 4개의 물건,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오전 4시와 저녁 6시
가 되면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순으로 치는데, 같은 사물 소리라고 해도 첩첩한 산주름 속
에 자리한 산사에서 듣는 것과 도시 한복판에서 듣는 것이 참 다른 것 같다. 공해가 가득한 곳
에서 들으니 그때만큼은 잠시나마 외딴 산사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지워진 회화나무
대웅전 뜨락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500년 이
상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귀신도 모를 정도로
장대한 나이를 먹은 그는 높이 26m, 둘레 4m로
뜨락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옛날
에는 회화나무가 군락을 이루던 곳으로 회화나
무 우물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허나 그 많던 회화나무는 20세기 이후 죄다 사
라졌으며, 나무 윗도리는 연등 구름에 가려 보
이질 않는다. 이렇게 보니 구름에 감싸인 신묘
한 나무처럼 보인다.

            ◀  조계사 8각10층석탑
대웅전 뜨락에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
석탑(국보 48호)을 유난히도 많이 닮은 8각10층
석탑이 자리해 있다.
조계사는 초창기부터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왜식 석탑이 있었다. 허나 왜식 탑이라 말들이
많자 2009년 가을 기존의 탑을 불교중앙박물관
북쪽으로 치우고 고려 탑의 진수로 꼽히는 월정
사 탑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탑을 세웠다.
탑 피부에는 8여래상, 8보살상, 8신중상 등을
새겼고, 왜식 탑에 들어있던 부처 사리 1과와
조그만 불상 14,000상을 봉안했다. 그 사리는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파라(達磨婆羅)가
기증한 것으로 그외에 논산 쌍계사(雙溪寺)에서
가져온 법화경 7권 1질과 25조 가사 1벌 등을
안치해 이 땅의 중심 사찰 석탑의 위엄을 갖추
었다.

  ◀  조계사 쉼터이자 야외까페인 가피(加被)
대웅전 뜨락 동남쪽에 늘씬한 키의 소나무가 여
럿 심어진 쉼터가 있다. 예전에는 그냥 허전한
공터였으나 조계사 신도회 부회장 오인석의 지
원으로 주변을 손질하여 2011년 4월 야외 까페
로 새로 태어났다.

이곳에 부여된 이름은 '가피'로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뜻이니 완전 사찰
까페에 맞는 이름이다.
(커피와 차는 2~4천원 선)


▲  한국불교 역사문화기념관 북쪽 산책로

조계사 북쪽에는 2005년에 세워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전국 2,000여
곳의 사찰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이 들어있으며, 지하 1층에는 2007년에
문을 연 불교중앙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이 박물관은 이 땅의 불교미술사를 정리하고 다른 절의
문화유산을 위탁 관리/보존하고 있는데, 관람료는 공짜이다. (특별전 제외)

* 불교중앙박물관 관람시간 : 9시~18시 <11~2월은 17시까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우정국로 55 ☎ 02-2011-1960)

     ◀  뒷전으로 밀려난 조계사 7층석탑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북쪽에는 조촐하게 산
책로가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면 왜열
도 스타일로 이루어진 길쭉한 탑을 만나게 되는
데, 그 탑이 대웅전 뜨락에 있던 조계사 7층석
탑이다.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바라가 부처의 사
리를 지참하며 천하의 불교 성지를 찾아 댕기다
가 그해 8월 조선까지 들어 왔다.
조선의 여러 절을 둘러보다가 기분이 너무 좋아
서 사리 1과를 선사했는데, 각황사에서 이를 관
리했다가 사리를 담을 탑이 필요하여 1930년 지
금의 왜식 7층석탑을 지어 그 안에 담았다.
2002년 3월 도량확장 불사로 탑을 옮겼을 때 사
리를 꺼내 친견법회를 봉행했으며, 사리함을 보
수하여 다시 안에 넣었다.

그 이후 왜식 탑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생기자 2009년에 오대산 월정사 8각9층석탑을 모델로 하여
왜식 탑을 대체할 8각10층석탑을 세웠다. 그래서 왜식 탑에 담긴 사리를 새 탑에 넣었고, 왜식
탑은 부시기에는 좀 아까워 그해 10월 인적이 별로 없는 응달진 구석에 자리에 처박아 두었다.
단지 왜식 탑이란 이유에서였다.


▲  7층석탑의 1층 부분 - 난간 무늬와 덩굴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탑을 구석진 곳에 두다보니 처음에는 탑을 완전 아작낸 줄 알았다. 아무리 왜식 탑이라 해도 그
들도 이 땅의 엄연한 역사이자 문화유산이다. 옛 조선총독부나 이 땅의 정기를 흐트리고자 꽂은
말뚝 등 심히 눈꼴사나운 것들은 정리해야 마땅하나 그외에 평범한 것들은 보존하여 관광/역사
자원으로 삼는 것이 좋다.
또한 이 탑은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조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외지에서 만든 것과 백
송, 회화나무는 제외) 각황사와 태고사 시절의 역사가 담겨진 만큼 부시지 않고 자리만 옮긴 것
은 착한 결정이라 본다. 구석에 있어 찾는 이도 별로 없지만 탑 주변에는 늘 꽃이 가득하여 관
리는 그런데로 해주는 모양이다.

이 땅에 거의 흔치 않은 왜식 탑으로 왜인이 만든 것이 아닌 조계사에서 만든 것이며, 가야(伽
倻)를 밀어내고 왜열도를 점유한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왜인들을 교화하고자 불교를 내리면서
그곳에도 불교가 활짝 꽃피게 되었다. 왜열도로 전해진 불교는 차차 그들만의 불교 스타일로 변
화해 갔고, 격동의 구한말 시절, 그들의 불교가 그 전래지인 조선으로 넘어와 왜식 불교가 잠시
성행을 한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 탑을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문화란
다 돌고 도는 것이다.


▲  7층석탑 주변에서 만난 두툼한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조계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경내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장엄등이 슬슬 꿈
틀거리면서 연등회의 마지막인 연등놀이가 기지개를 켰다. 이후 내용은 생략~~~

※ 조계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안국동로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우정국로) 길로
  가면 조계사이다. (도보 6분)
* 조계사 경유 서울시내버스 노선
① 조계사 : 109번(우이동↔광화문), 151번(우이동↔중앙대), 162번(정릉동↔여의도), 172(하계
   동↔상암동), 606(부천시 상동↔종로1가), 1020(정릉동↔종로1가)
② 조계사 건너편 : 151, 162, 172, 401번(장지동↔광화문), 406번(개포동↔광화문), 704번(송
   추,부곡리↔서울역), 7022번(구산동↔서울역), 9401번(분당 오리역↔광화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조계사 홈페이지는 위에 불두화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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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5년 5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5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겨울 축제의 성지,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

▲  화천 산천어축제 맨손잡기 현장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떠오르면 천하 곳곳에서 다채로운 겨울 축제가 열린다. 겨울 제국(
帝國)의 철권통치에 기가 죽어 집밖을 나서기가 쉽지는 않지만 축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겨울
제국에 맞설 수 잇는 명분을 준다. 축제를 보러~ 즐기러~~ 강원도 내륙과 경기도 동북부, 경
북 내륙, 전북 내륙, 왜열도 북해도 등 겨울 축제의 성지(聖地)를 찾아 사람들은 먼 길도 마
다하지 않고 성지 순례를 떠난다.

우리나라 겨울 축제의 오랜 성지는 뭐니뭐니해도 태백산(太白山) 눈꽃축제일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태백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강력한 라이벌이 여럿 등장했으니, 그중 하
나가 바로 화천 산천어축제이다. 올해 같은 경우는 토/일요일에만 10만 명 이상이 찾을 정도
로 나날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이제는 이 땅을 넘어 해외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외국 관
광객들도 적지 않게 찾아온다. 예전 미국(米國) 양키의 모 방송에서는 세계의 겨울 7대 불가
사의의 하나라며 이 축제를 격하게 띄워주기도 했다.

화천 산천어축제는 이미 2010년 겨울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화천읍 본행사장이 아닌, 토고미
마을에서 낚시를 했다. 그때 일행 10여 명이 얼음 구멍에 달라붙어 3시간 동안 고작 1마리를
잡는게 그쳤지.. (☞ 관련글 보러가기) 그때 산천어를 잡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커서 다음에
간다면 반드시 산천어의 씨를 말리리라 부질없는 다짐을 했다. 그러다가 이번 1월에 다시 기
회를 잡아 후배 여인네와 화천을 찾았다.

화천 산천어축제와 평창 송어축제, 가평/인제 빙어축제 등에 가려면 견지대라는 조그만 낚시
대를 가져가야 된다. 물론 현지에서 구입해도 상관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견지대, 미끼, 훌치
기 도구를 합쳐서 거의 5천원 이내에 파는 것을 축제장 현지에서는 견지대 하나만 사도 무려
5천원 이상을 요구한다. 게다가 축제 기간이라 수요가 많으니 현지 상인들이 배가 불러 불친
절하게 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인터넷과 낚시전용가게에서 미리 사가지고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인터넷에서 3천원대 견지대와 미끼를 구입했다.

드디어 낚시를 떠나는 날 아침, 월척을 꿈꾸며 집을 나섰다. 겨울의 차디찬 태클을 물리치며
전철을 타고 상봉역으로 이동, 거기서 여인네를 만나 춘천(春川)행 전철을 타고 80분을 달려
남춘천역에 발을 내렸다. (상봉~춘천 경춘선 전철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남춘천역에서 인근에 자리한 춘천터미널로 이동하여 화천행 직행버스를 타는데, 군부대 면회
수요와 산천어축제 수요로 인해 거의 50~60m 정도의 대기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기겁을 할만
한 그 대기줄 앞에 언제 버스를 타고 가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임시차가 적절히 투입되어
줄을 선지 30분 만에 춘천을 뜰 수 있었다. (춘천~화천 직행버스는 30~40분 간격)

만석의 기쁨을 누리며 춘천터미널을 출발한 우리의 버스는 춘천역에서 승객 20여 명을 더 태
워 완전 짐짝수송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춘천시내를 벗어났고 춘천댐을 지나니 단단히 얼어
붙은 북한강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여전히 2차선을 고집중인 화천행 5번 국도를 구불구불 따
라 하얀 수채화가 된 강원도의 산하(山河)를 즐기며 출발 50분 만에 화천터미널에 도착했다.


♠  화천 산천어축제 들어가기

▲  천일막국수에서 먹은 막국수의 위엄

화천에 도착하니 점심 직전이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점
심을 먼저 들고 낚시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축제장에도 먹을 곳이 많지만 강원도 산골의
향토 음식인 막국수가 진하게 땡긴다. 그래서 미리 적당한 막국수집을 조사하여 화천3거리 부근
에 자리한 천일막국수를 찾았다.

시골 식당의 향기가 묻어난 이 집은 막국수와 편육, 닭갈비 등을 내놓고 있는데, 막국수의 맛을
1마디로 표현하면 달콤하다. 남북분단을 상징이나 하듯 반토막난 삶은 계란과 오이, 깨, 육수가
어우러져 춘천/화천 스타일의 막국수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반찬은 김치와 나박김치가 전부이다.
정식이나 백반도 아니고 국수이니 반찬은 저 정도면 충분하지.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마치고
무료로 제공되는 후식 커피를 1잔씩 마시며 밖으로 나오니 밥 먹기 전에는 제법 칼처럼 날카롭
던 화천의 바람이 조금은 시원하게 다가온다.


▲  화천3거리 스케이트장과 산천어등
▲  중앙로에 조성된 선등거리 (화천3거리에서 화천대교 방향)

화천읍내는 산천어축제로 읍내 전체가 거의 잔치 분위기였다. 화천3거리에는 스케이트장이 조성
되어 있고, 화천3거리에서 화천대교로 이어지는 중앙로에는 온갖 산천어등을 허공에 잔뜩 메달
아 거대한 선등거리를 이루고 있다. 햇님의 위엄이 천하 구석구석 미치고 있는 시간이라 등들이
단순한 모형으로 잠자코 있지만 해가 커텐을 치고 나면 서로 몸을 밝히며 장대한 등축제 거리로
변신한다.
산천어축제에 왔다면 낮에는 산천어 낚시와 여러 체험거리를 즐기고, 저녁에는 선등거리의 둥축
제를 구경하면 산천어축제의 낮과 밤을 고루고루 둘러보게 된다.


▲  화천천 위에 조성된 산천어축제장의 레포츠 공간

산천어축제의 중심은 화천읍내 북쪽과 동쪽을 흐르는 화천천(華川川)이다. 이 하천은 북한강 지
류의 하나로 겨울 제국이 입힌 얼음을 30cm 이상 두께로 불려 그 위에 축제장을 깔았는데, 축제
장 길이가 약 1.8km 정도 된다. 축제가 끝나면 축제의 장이던 화천천 얼음판을 녹여 그 흔적을
지운다. 그래서 다른 때에 오면 이곳이 정말 흥성하던 그 축제의 현장인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
도이다.


▲  산천어축제의 백미, 산천어 맨손잡기 현장 (배머리교 서쪽)

▲  산천어 용사들이 비장의 각오로 맨손잡기 현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  차가운 물에 발을 담구며 몸을 푼다. (맨손잡기 현장)

▲  드디어 시작된 산천어 맨손잡기 (산천어 학대 현장)

배머리교 서쪽에는 산천어 맨손잡기 현장이 있다. 호랭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되듯
이 산천어를 맨손으로 잡으려면 물에 흔쾌히 들어가야 된다. 한여름이면 들어갈 만하지만 동황
제(冬皇帝)의 위엄에 천하가 오들오들 떠는 1월의 한복판에 차디찬 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쉽
지가 않다. 그렇다고 행사를 위해 특별히 따스한 물을 내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온수가 나오면
산천어가 힘을 못쓰기 때문에 공정한(?) 게임 법칙에 따라 차가운 물을 링에 풀었다.

산천어 맨손잡기는 산천어낚시 입장료와 별개로 가격이 다소 야박하다. 거의 1~2시간 간격으로
맨손잡기(평일은 1일 4회, 주말은 6회 이상)를 진행하는데, 입장료를 내고 참가를 신청한 다음
탈의실로 들어가 행사장에서 준비한 붉은 반팔 티와 검은 반바지로 갈아입고 순서대로 맨손잡기
링 바깥에 대기한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링으로 들어가 앉으면서 반드시 발을 물에 담가야 되며, 여기서 잠시 몇
가지 게임을 하다가 서로에게 물공격을 가하면서 차가운 물에 적응한 다음 온몸을 내던져 산천
어를 잡는다. 산천어가 잘 잡히지 않다보니 온몸이 물에 풍덩하기 일쑤고 적어도 하반신은 물에
젖기 마련이다. 산천어는 1인당 3마리 이하로 제한하고 있으며, 용감하게 나선 사람은 사회자가
특별히 1~2마리를 얹혀주기도 한다. 게임 시간(링에서 물고기 잡는 시간)은 3분 정도로 물이 매
우 차가워 감기 걸리기 쉽겠구나 싶지만 오히려 냉기로 겨울 제국에 대항하는 것이니 감기도 스
스로 도망친다. 그렇게 산천어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다음, 밖으로 나와 따뜻한 물이 나오는 족
욕장 천막에 들어가 씻으면 된다. 링에 나선 사람 중에 양이(洋夷)들도 적지 않은데, 산천어 하
나 잡겠다고 아주 목숨을 건다.

맨손잡기 현장을 구경하려면 링 주변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배다리교 위에서 보는 것이 괜찮다.
옆에서 보는 거와 위에서 보는 거는 정말 천지 차이다. 그렇게 그 현장을 둘러보고 산천어 얼음
낚시터로 갔다.
얼음낚시터는 현장접수 장소와 예약접수 장소로 구분되어 있는데, 여인네가 미리 인터넷에서 예
약을 해서 예약접수 장소로 가면 된다. 그 장소는 맨손잡기 바로 서쪽에 자리한다. 반면 현장접
수는 배머리교 남쪽에 있는데, 주말에 가는 경우에는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예약 접수 장소로 가서 예약을 확인하면 표를 2장 준다. 하나는 그냥 표이고, 다른 하나는 출입
증으로 잘보이는 곳에 달아야 된다. 단순 1회 입장이 아닌 1일 내내 입장으로 바깥으로 잠시 나
갔다 들어올 때 그걸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꼭 잘 간수해야 된다.


♠  화천 산천어축제 즐기기

▲  산천어를 낚기 위한 얼음구멍
얼음구멍을 파려면 현장에 준비된 얼음끌대를 쓰면 된다.


표를 받고 예약접수 얼음낚시터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허벌나게 많다. 거의 화천군 인구를 초
과한 머릿수(화천군 인구가 27,000명)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축제로 벌어들인 돈이
어마어마하겠지. 포크레인 수십 대를 동원하여 돈을 쓸어담아도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 축제를 통해 음식점과 숙박업소, 온갖 가게들, 화천을 운행하는 시외버스 회사, 화천에 온갖
관광지들도 그 덕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인공으로 뚫은 얼음 구멍 하나씩 차지해 월척을 꿈꾸는 강태공(姜太公)이 되
어 낚시에 임한다. 우리도 간신히 적당한 자리를 찾아 낚시를 시작했는데, 과연 잡히기나 할련
지 모르겠다. 그 인파 가운데 고기를 낚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편, 한동안 낚시에 정적이 감
돌다가 '와 잡았다!' 소리에 일제히 그곳을 향해 부러움 반 경쟁심 반으로 시선이 모아진다.

산천어축제장에서 풀어놓는 산천어는 이곳 토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구입하거나 수입한 산천
어(송어의 일종)를 푼 것이다. 일정 시간이 되면 산천어를 담은 차가 와서 랜덤으로 아무 구멍
이나 산천어를 풀어넣는데, 그때가 되면 가라앉은 낚시터의 분위기와 강태공들의 사기가 다시
상승된다. 이때 산천어를 가져온 인부들에게 이곳에 제발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낚시를 하려면 싱싱한 미끼와 온갖 도구가 필요한데, 이곳은 수질 오염을 이유로 생미끼와 훌치
기를 금하고 있다. 그러니 오로지 견지대 등의 낚시대와 물고기 모양의 미끼에 의존해야 된다.
물론 훌치기 등의 도구를 몰래 들이거나 경험치가 풍부하면 많이 잡을 수는 있지만 상당수는 오
로지 축제장의 요구에 따라 견지대에 의존한다. 그러니 장소와 운빨이 매우 중요하다. 운이 좋
으면 1마리 잡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세월만 낚는 것이다.
축제장으로 들일 수 있는 것은 낚시 의자와 깔고 앉을 것, 그리고 간식거리 정도이다. 얼음박스
는 반입이 안되며, 대신 물고기를 담을 수 있는 봉투를 1인당 1개씩 준다. 또한 1인당 3마리로
제한을 하고 있으나 그건 따로 검사를 하지 않는다.

산천어축제는 인간에게는 여가를 즐기는 축제와 체험의 현장이다. 허나 산천어에게는 자신을 죽
이는 학살의 현장이다. 미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그날 그들의 인생은 무참히 끝나기 때문이다.
혹 잡히지 않더라도 물을 가둬서 얼음을 얼린 터라 밖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수명을 며칠 연장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으며, 결국에는 모두 횟감이나 구이로 전락하게 된다.


▲  드디어 잡힌 산천어의 위엄
낚시에 임한지 1시간 여 만에 드디어 산천어 1마리가 걸려들었다.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이렇게 쫑나게 만드는구나..

▲  산천어 2마리 포획

▲  산천어보다 사람이 더 많은 산천어 얼음낚시 현장

▲  산천어 얼음낚시터에서 바라본 화천의 산과 하늘
유난히 맑고 푸른 하늘이 산천어바보들을 바라본다. 그날 하늘나라로
강제로 소환된 산천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늘나라 수용능력이
초과되어 어쩔 수 없이 환생한 산천어도 혹 있지는 않을까?


3시간 동안 낚시를 하면서 4마리를 잡았다. 4마리를 강제로 세상 및 황천 구경을 시켜준 셈이다.
시간도 벌써 16시에 이르렀고, 슬슬 인원도 빠지는 분위기라 산천어 탄압을 그만두고 자리를 정
리했다.

잡은 산천어를 들고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궁리하다가 절반은 회, 나머지는 구이로 먹기로 했다.
그런데 회와 구이를 해주는 행사 천막은 기다리는 사람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늘어서 있
었다. 힘들게 잡은 산천어를 잡아먹는 것도 참 쉬운 것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집까지 가져갈 수
도 없는 노릇이니 무작정 그 대열에 합류했다.

회(회센터)와 구이 장소(구이터)는 서로 떨어져 있는데, 구이터가 대기 인원이 좀 적어 먼저 되
었고 회센터는 40분 정도 기다려 회뜨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산천어를 넘기면 칼로 잘 다져 회
로 만들어주는데, 회와 구이 모두 1마리당 2,000원이다.
잡은 산천어가 많은 경우에는 옆 사람에게 1~2마리 넘기라 권하기도 하며, 그렇게 산천어의 한
맺힌 하직 현장을 거쳐 회를 받는 곳으로 가서 계산을 하면 되는데, 이때 소주와 상추, 초장도
구입할 수 있다. 허나 그냥 회만 먹기는 뭐하니 태반이 소주나 상추, 초장을 구입한다. 이들을
모두 구입하면 2마리 기준으로 9,000~10,000원 정도 든다. 초장은 다 먹지도 못할 정도이나 상
추는 좀 부족하며, 소주는 3천원 정도이다. 그리고 다른 먹거리를 원한다면 인근에 있는 먹거리
천막에서 오뎅이나 메밀전병 등을 사들고 와도 된다. 또한 산천어를 잡지 못했을 경우 산천어회
도 사먹을 수 있는데, 이건 가격이 대개 비싸다. (2~3만원선)

그렇게 회와 구이를 들고 빈 자리에 가서 자신을 희생해 (물론 강제로 희생된 것이지) 신(神)과
동물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에게 일용의 양식을 주신 산천어에게 고마움
과 위로를 올리며 조촐하게 낚시 뒷풀이를 한다. 우리가 잡은 산천어로 이렇게 한상 차려 먹게
되니 소원은 성취한 셈이다. 산천어에게는 미안하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이 아비규환 같은 세상
을 살아가려면 먹고 살고 즐겨야 되지 않겠는가?
부디 산천어와 송어/빙어축제 때 학살된 물고기들은 다음 세상에 꼭 인간이나 그 이상의 존재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랄 뿐이요. 반대로 그들을 많이 잡은 사람들에 한해 내세에는 송어나 산
천어로 태어나 축제장에서 그들의 입장을 실감나게 체험해야 서로가 공평할 것이다.


▲  산천어회와 산천어구이
회와 구이 모두 맛이 좋다. 2마리를 회로 떴는데 양은 몇 젖가락 되지도 않는다.
저중에 남은 것은 쌈장 뿐..

▲  산천어축제 스케이트장

▲  산천어축제 얼음썰매장

산천어회와 구이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머지 축제 현장을 둘러보았다. 한참 즐거움에 빠져있
는 얼음썰매장과 스케이트장을 비롯해 현장접수 얼음낚시터, 사륜구동(ATV) 체험장 등을 지나
화천 농산물과 먹거리를 파는 천막으로 갔다.
여기서 산천어축제 입장권과 같이 받은 농특산물교환권 5천원권 2장으로 다시금 먹거리를 사먹
으려고 했는데, 오로지 농특산물 구입에만 쓸 수 있다고 그런다. 그 교환권 외에 화천사랑상품
권도 있는데 이것만 먹거리에 사용이 가능하다. 허나 그건 얼음썰매나 기타 레포츠를 이용해야
받을 수 있다. 햇님이 꼴까닥 넘어가기 전이고 몸도 지쳐있어 썰매나 사륜구동 등을 타기도 뭐
해 살짝 자비를 청하니 메밀전병만 해주겠다고 그런다. 마침 내가 먹고 싶은 것이 그거였는데..
그래서 메밀전병과 화천동동주 1병을 더해서 다시금 배를 채운다.

메밀전병은 좀 맵기는 했지만 맛은 고소했고, 거기에 동동주까지 걸치니 몸이 싹 대펴지면서 졸
음이 나를 희롱하려 든다. 아까 먹은 산천어회/구이도 완전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 그들까지
뱃속에 넣으니 배가 터지려고 그런다. 그래서 그날은 따로 저녁은 먹지 않았다.


▲  산천어축제 레포츠 장소

▲  화천천과 북한강이 하나가 되는 곳 (화천교)

산천어축제장 남쪽에는 현장접수 낚시터와 얼음을 얼리지 않은 루어낚시터가 있다. 그곳을 지나
면 화천교가 나오며, 여기서 화천천과 북한강이 만난다.
북한강은 얇게 얼음이 얼었는데, 주변은 온통 눈의 세상이다. 화천대교를 지나니 강 남쪽 위라
리로 이어지는 부교(浮橋)가 놓여져 있는데, 강 남쪽에 산천어축제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이 있
어 접근 편의를 위해 가설한 것이다. 다리의 길이는 350m 정도로 깊은 강을 건너야 되는 터라
체감 거리는 한 1km 정도 되는 것 같다. 쫄깃해지는 염통을 진정시키며 그 부교를 건너면 화천
체육관과 화천민속박물관이다.


▲  얼어붙은 북한강 - 소쩍새가 우는 날이면 강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나겠지

▲  북한강 부교 - 다리가 조금씩 흔들려 간을 은근히 쫄깃하게 만든다.
강 북쪽은 화천읍내, 다리 건너로 보이는 강 남쪽은 화천민속박물관,
화천체육관 등이 있는 하남면 위라리이다.

▲  영롱하게 피어난 선등거리 (화천읍내 중앙로)

북한강 부교를 왕복하고 화천대교로터리로 나오니 여기서 화천3거리까지 길게 선등거리가 형성
되어있다. 마침 햇님이 퇴근하고 달님이 세상을 비추는 시간이라 햇님의 위엄에 움츠려있던 산
천어 선등이 서로 오색영롱한 불빛을 다투며 어두운 읍내 거리를 비춘다.
선등거리는 중앙로를 중심으로 읍내에 약 5km 정도 형성이 되어있는데, 총 24,000여 개의 산천
어등이 읍내를 장엄한다. 산천어의 수많은 피로 화천의 겨울과 백성들을 책임지며, 산천어축제
도 이렇게 발전한 것이니 선등도 모두 그들로 채운 것이다.
이 거리는 보통 12월 말부터 2월 말까지 운영하며, 17시 30분에서 22시까지 불을 밝힌다.


▲  어둠 속 터널 같은 선등거리 (화천읍내 중앙로)

선등거리를 지나 화천터미널로 나오니 산천어축제나 군면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사람들
이 몇십m 길게 줄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임시차가 배차되어 앉아 갈 수 있었는데, 서서 가는
사람들은 춘천역까지 다리를 혹사시켜야 했다.
춘천터미널에서 두 발을 내려 터미널 옆에 자리한 이마트에 잠시 들렸다가 남춘천역으로 이동하
여 상봉행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전철은 자리가 널널해 넓게 자리를 누리며, 잠시 꿈나
라 투어를 청했다. 꿈나라에서도 산천어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러다 산천어에게 쫓기
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이렇게 하여 화천 산천어 축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화천 산천어축제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화천행 직행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춘천에서 화천행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춘천역 경유)
* 서울에서 경춘선 전철이나 경춘선 Itx-청춘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춘천터미널 도보 7분 거리)
  이나 춘천역 하차
* 화천터미널에서 산천어축제장인 화천천까지는 도보 15분 이내 거리, 맨손잡이 장소와 예약접
  수 얼음낚시터는 배다리교 서쪽, 현장접수낚시터는 화천군청 옆 화천초등학교 방면으로 가면
  된다. (무조건 화천천만 찾으면 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화천군청이나 화천초교, 화천대교 남단, 화천정보산업고, 홍천국
  토관리사무소 화천출장소 등을 이용하면 됨)
① 서울 → 경춘국도 → 춘천시내<또는 403번 지방도(서면) 경유> → 춘천댐 → 화천읍내(산천
   어축제장)
②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을 나와서 양구 방면 46번 국도 → 신북교차로 → 용산교차로 (
   또는 오음리, 파로호 경유) → 화천읍내

★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 관람정보 (2015년 1월 기준)
* 축제 기간 : 2015년 1월 10일부터 2월 1일까지 (8:30~18:00)
* 입장료 - 중학생 이상과 어른 12,000원 / 초등학생과 경로, 국가유공자 8,000원
* 영유아 얼음낚시는 입장료 없음 (금,토 1일 3회 / 일요일 1일 2회 운영)
* 낚시 시간은 8:30~18:00, 1일 최대 인원은 1만4천명 (예약 6천명, 현장 8천명)
* 산천어축제 관련 정보나 온갖 체험 정보, 온라인 예약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화천천 일원 (☎ 1688-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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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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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억새의 성지, 부산 승학산 억새 나들이

 


' 부산 승학산(乘鶴山) 억새 나들이 '

▲  억새밭 너머로 보이는 승학산 정상

 


늦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0월 끝 주말에 오랜만에 부산(釜山)을 찾았다. 경북 안동과 의
성(義城) 지역을 답사하고 오후 늦게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해수욕장과 광안대교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제를 구경했다.
광안리 해변으로 나가서 구경하려고 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거
친 물결을 뚫고 나가기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집(빌라 5층)에서 구경을 했지. 집에서 해변까지
는 1k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라 주변 빌라들이 시야를 좀 방해해서 그렇지 보일 것은 거의 다
보인다.
그렇게 불꽃축제를 구경하고 곡차(穀茶) 1잔을 겯드리며 달이 기울도록 회포를 풀다가 다음날
10시 스르륵 잠이 깨었다. 12시에 간단히 점심을 먹고 어디를 갈까 궁리하다가 철이 철인만큼
억새의 향연을 보고자 억새의 주요 성지(聖地)인 승학산으로 길을 향했다.

광안역에서 부산좌석버스 1001번(청강리↔하단,동아대)을 타고 부산 도심을 가로질러 하단 동
아대입구에서 발을 내린다. 시내에서 승학산으로 오르는 길이 여럿 있지만 제일 쉬운 길은 구
덕꽃마을에서 오르는 것이고, 가장 가파른 길은 동아대에서 오르는 것이다. 허나 꽃마을 코스
는 거리가 긴 반면, 동아대 코스는 가파른 만큼 코스가 짧고 굵직하다.

동아대(東亞大)는 승학산 서쪽 자락에 터를 닦은 학교라 경사가 좀 급하다. 학교 정문에서 가
장 위쪽인 한림생활관까지는 거의 해발 60~70m 차이가 나면서 벌써부터 숨이 차려고 한다. 시
내와 살을 맞대고 있는 학교의 아랫부분과 승학산 숲과 이웃한 윗부분과는 정말 공기도, 온도
도 확연히 틀린 것 같다. 만약 전공/교양수업이 윗부분에서 주로 이루어진다면 학생들은 정말
고역이겠지. 허나 다행히도 하단역에서 교내 공과대학까지 사하구 마을버스 10번이 10분 내외
간격으로 다녀주어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 되어 준다.

주말이라 썰렁한 동아대 경내를 가로질러 한림생활관에 이르니 학군단 건물 뒤로 산길이 보인
다. 여기는 대략 해발 170m고지로 그 길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승학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며,
동아대와 사하구 일대, 남해바다가 훤히 두 눈에 박힌다.


♠  승학산 등산 (동아대에서 정상까지)
`
▲  승학산 등산로 (동아대 방면)

동아대를 벗어나 10분 정도 오르니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승학산 능선의
가장 서쪽 봉우리(해발 210m)가 나오고, 동쪽으로 가면 승학산이다. 갈림길 주변에는 어느 산악
회에서 행사를 요란하게 벌리고 있어 꽤나 번잡했다.

승학산으로 가는 산길은 동아대 만큼은 아니지만 가파르기는 마찬가지다. 힘들긴 하지만 등산이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북한산(삼각산), 관악산, 금정산보다는 애교 수준임> 바람에 흔
들리는 억새를 꿈꾸며, 노릇노릇 익어가는 단풍을 구경하며, 산 아래 펼쳐진 천하를 관망하며,
그렇게 산에 임하면 금세 승학산의 서쪽 봉우리에 이른다. 여기는 약 400m 고지이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1)
엄궁동과 사상(沙上)공단, 낙동강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2)
사하구(하단, 괴정, 감천, 신평)와 을숙도, 남해바다가 보인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3)
- 낙동강 위에 길게 누운 을숙도(乙淑島)
섬 가운데로 낙동강하구둑이 무심히 옥의 티를 내며 지나간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4)
사하구(괴정동, 감천동) 지역

▲  세모처럼 솟은 저 봉우리가 승학산 정상이다.
정상 서쪽 봉우리에서 정상까지는 넉넉히 20분 정도 잡으면 된다.

▲  정상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정상 서쪽 봉우리가 보인다.

▲  승학산 정상(496m) 표석

동아대 입구를 출발하여 쉬엄쉬엄 오른 끝에 드디어 승학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다른 산
과 마찬가지로 산의 이름과 해발이 쓰인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실제 정상은 표석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승학산은 부산 본토 서남쪽에 솟아난 산으로 해발 496m이다. 산의 이름은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無學大師)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폈는데, 이곳의 산세가 준엄하고 기세가 대단해 마치
학이 나는 듯하다 하여 학을 탄다는 뜻의 승학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산세가 대단한 건 사실이다.

이 산은 부산에서 억새 명소로 매우 유명하다. 정상 동쪽 제석골에 수만 평에 달하는 억새밭(억
새군락)이 장엄하게 깔려 있는데, 가을에 아주 장관을 이루며, 강원도 정선(旌善) 민둥산의 억
새밭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억새가 바람에 따라 흔들릴 때 그 특유의 바람 스치는
소리는 속세에 오염된 청각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부산 도심에는 대도시임에도 승학산이나 구덕산처럼 400~500m급 산이 즐비해 산을 타다보면 정
말 강원도나 내륙 산간 지역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게다가 이렇게 너른 억새밭까지 있으
니 이는 하늘이 바다와 더불어 부산에 내린 크나큰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승학산의 이름 3자가 부산에서만 알 정도로 인지도가 낮다는 것이다.

승학산은 동쪽으로 구덕산(九德山, 565m), 시약산(時藥山, 523m)과 이어져 있으며, 등산은 동아
대학교와 구덕꽃마을, 사하구청 북쪽 제석골(제석골 산림공원)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동네 주민들이 살짝 이용하는 소소한 등산로가 여럿 있으며, 동아대에서 정상을 찍고
구덕꽃마을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 거기서 욕심을 더 내서 엄광산과 구봉산을 거쳐 대청공원
(민주공원)이나 수정산, 동구까지 산을 탈 수 있다.

※ 승학산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① 동아대 : 부산1호선 하단역 9번 출구에서 사
하구마을버스 10번을 타고 동아대 공대2호관에
서 하차, 한림생활관을 지나면 바로 승학산의
품이다.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림
② 당리동(제석골) : 부산1호선 당리역(사하구
청) 3번 출구에서 사하구마을버스 2-1번을 타고
동원베네스트2차아파트 종점에서 하차
③ 구덕꽃마을 : 부산1호선 서대신역 4번 출구
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
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
번을 타고 구덕꽃마을 종점 하차. 거기서 서쪽
길로 오르면 구덕산과 승학산으로 이어진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당리동
/ 사상구 엄궁동
 

◀  사하구청에서 승학산 정상에 심은
새천년미래웅비사하(千年未來雄飛沙下) 표석


▲  승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능선
저 초원 같이 넓은 곳이 바로 승학산 억새밭(군락)이다.


♠  억새의 성지, 승학산 억새밭

▲  승학산 억새밭을 거닐다

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이곳의 명물인 억새밭(억새군락)에 이른다. 대장관을
이루며 능선에 드넓게 터를 닦은 억새밭은 멀리서 보면 양이나 말이 풀을 뜯는 초원처럼 보인다.
산바람과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이곳 억새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내는 바람 스치는
소리가 청각을 제대로 정화시킨다. 겉으로 보면 약해 보이지만 군락을 이룬 억새는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하며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지키는 강인한 존재
이다. 흔히 억새와 갈대를 햇갈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둘이 생긴 모습은 비슷하다. 허나 갈대는
물가에 자라는 존재이고, 억새는 물과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존재이다.

넓은 억새밭 가운데에 전망대를 두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는데, 조망(眺望)이 가히 천하(
天下) 일품이다. 억새밭은 억새의 보호를 위해 지정된 길 외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괜히
들어가서 억새와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지 않도록 한다.


▲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억새밭의 위엄

▲  억새밭 사이에 난 산책로
억새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산책로를 거닌다.

▲  억새밭 너머로 승학산 정상이 보인다 ▼


▲  억새밭 한쪽에 마련된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돌탑
억새밭을 찾은 속인들이 조그만 소망을 빌며 쌓은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억새밭 너머로 승학산 동쪽 줄기와 구덕산이 보인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일그러진 인상을 보이고 있다.

▲  억새의 즐거운 가을 향연

▲  비탈진 억새밭 너머로 사하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이 제석골)

▲  시간 도둑이 따로 없는 억새밭 - 돌아서기 싫은 발길을
억지로 잡아 떼며 억새밭과 작별을 고한다.

▲  구덕산을 가리고 선 승학산 동쪽 봉우리
해발 487m로 구덕산의 서쪽 봉우리이기도 하다.


♠  승학산 마무리

▲  검게 그을려진 구름과 안개 사이로 사상구 지역이 흐릿하게 보인다.

▲  승학산 동쪽 봉우리를 넘다 - 저 너머로 보이는 산은 구덕산

승학산 억새밭을 넘으면 수레가 들어올 수 있는 쉼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동쪽으로 가는 길은 2
개이다. 하나는 동쪽 봉우리(구덕산 서쪽 봉우리)를 직접 넘는 것, 다른 하나는 봉우리 허리에
둘러진 길을 가는 것이다. 후자는 길이 포장되어 있고, 큰 오르막이 없어 편하긴 하나, 많이 돌
아가야 된다. 반면 전자는 산을 직접 넘어야 되지만 그 산을 넘으면 바로 구덕산 서쪽으로 이어
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회길 대신 산을 넘는 편을 택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오른 승학산 정상이
나 서쪽 봉우리보다는 완만하며, 비에 젖은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니 봉우리 정상이다.

봉우리를 넘어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덕산 아래에 이르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구덕꽃마을,
오른쪽 오르막길이 구덕산(九德山, 565m) 정상, 오른쪽 내리막 길이 억새밭으로 가는 허리길이
다. 구덕산 정상은 군사/방송 관련 시설이 자리해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  구덕꽃마을로 내려가는 길

인생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갈 때가 있다. 지금까지 승악산 능선을 타며 서쪽 봉우
리와 승학산 정상, 동쪽 봉우리까지 신나게 올랐으니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 된다. 더 이상 올라
갈 곳도 없다.

내려가는 길은 봉우리 허리길과 구덕꽃마을 방면 길이 있는데, 꽃마을까지는 1차선 크기의 길이
포장되어 있어 통행에 불편은 없다. 구덕산 정상에 자리한 군/방송 시설 때문에 길을 포장한 것
이다.

여기서 꽃마을까지는 대략 2km로 순전히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내리막 가속을 덧붙이면 금세 내
려간다. 길 주변에는 울긋불긋 타오른 단풍과 푸른 옷을 걸친 나무들이 앞에서는 환한 모습으로
뒤에서는 장차 다가올 겨울 제국(帝國)을 걱정하며 시름에 잠겨 있다. 이제 올해도 다 갔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이 얹혀질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시름 속에 들어가 버린다. 새해가 시
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이 코앞이니 세월이란 참 유수처럼 빠르다는 말이 허언은 아
닌 듯 하다. 고려 후기 문신인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歌)처럼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다른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막으려고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온다는 시가 점점 실감이 난다.

꽃마을로 열심히 내려가고 있으려니 구덕문화공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오른쪽에 나온다. 이 공원
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는 없던 터라 근래에 만든 공원이겠지 싶어 그냥 직진을 고수했는데, 꽃
마을이 슬슬 모습을 보이면서 강제로 구덕문화공원이 내 앞에 나타난다. 아까 전 이정표는 공원
으로 바로 내려가는 지름길 계단이었던 것이다. 계단으로 가나 포장 길로 가나 어차피 구덕문화
공원은 꼭 거쳐야 된다.


▲  구덕문화공원(九德文化公園) 목석원예관

구덕문화공원은 꽃마을 서쪽, 구덕산 북쪽 자락에 터를 닦은 공원이다. 2004년 11월 교육역사관
과 다목적관 개관을 시작으로 문을 연 이 공원은 2005년 11월 목석원예관을 열었고, 2006년에는
민속생활관과 다목적광장을 만들었다. 특히 2005년 11월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때는 참가국 우두머리의 부인들이 방문한 곳이기도 하며, 구덕산과 승학산을 후광으로 한
도심 속의 자연/문화공간으로 정감이 가득 일어나는 곳이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싱그러운 공간으로 나무가 무성하며, 공원 곳곳에 장독대와 석탑, 석등
, 문인석 등의 석인을 비롯하여 여러 조각물을 배치하는 등, 아기자기하게 꾸며 소소하게 볼거
리를 제공한다. 석물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공간을 옛돌마당이라 불리는데, 이곳의 석물은 오
래된 것은 없고, 공원을 닦으면서 만든 것들이다. 다만 석등(石燈) 가운데 우리식이 아닌 왜식(
倭式)으로 만든 것이 적지 않아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전시실(교육역사관, 민속생활관, 목석원예관)과 옛돌마당 외에 편백숲 명상의 길, 솟대
동산, 인공폭포와 놀이마당, 산마루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에 있는 전시관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교육역사관은 이 땅의 교육 역사를 다룬 공간으로 디
오라마와 유물 등으로 옛날 교육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교육내용과 과정, 서예
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고, 개화기 이후에 편찬된 교과서와 60~70년대 초등학교 교실 재현, 6.25
시절 천막 학교 등이 재현되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진하게 불러일으킨다. 전시자료는 약 600점
정도 된다.

그 다음 문을 연 목석원예관은 나무와 돌, 꽃을 다룬 공간이다. 괴석류와 돌과 나무로 만든 작
품들, 수목과 지피식물(地被植物) 등이 원예관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민속생활관은 옛날 생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농기구와 짚풀용품, 주거생활용품, 호패와 민화(民畵, 속화), 초가집
모형 등 유물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허나 이들 전시관의 전시물은 다른 데서도 지겹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으며, 다만 공원을 이루는 숲이 삼삼하고 산책로도 괜찮
게 깔려져 있어 산책이나 데이트, 산림욕 장소로 아주 적당하다. 게다가 위치도 구덕산과 승학
산 가는 길목에 있어 산을 타고 내려와 잠깐 안겨보는 것도 괜찮다.

※ 구덕문화공원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부산1호선 서대신역 4번 출구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번을 타고 구덕꽃마을 종점 하차. 거기서 서쪽 길(승학산 방면)
  로 오르면 나온다.
* 일반인 차량은 공원까지 들어올 수 없으므로, 꽃동네에 주차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 관람시간 : 9시 ~ 18시 (11~2월에는 17시까지)
* 관람료는 없으며, 3개의 전시실은 매주 월요일 문을 닫아 걸고 쉰다.(단 공원 관람은 가능함)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3가 산18-15 (꽃마을로 163번길 73, ☎ 051-240-3521~23)
* 구덕문화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목석원예관에서 유일하게 사진에 담은 사후천년이란 작품
나무가 죽어 돌로 굳은 화석(化石)이라고 한다.

▲  밋밋하게 솟아난 솟대
솟대 위에 오리는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는 중간 역할을 상징한다.

▲  다양한 석물들이 반기는 구덕문화공원 옛돌마당 산책로
장승(벅수)과 온갖 석인들, 석등, 석탑 등이 주변을 수식한다.

▲  무인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는 싱글벙글 무인석(武人石)

▲  웃음을 머금은 문인석(文人石)의 물결

▲  산책로에서 만난 왜식 석등
석등을 만들려면 우리식으로 제대로 만들 일이지 그냥 왜식으로 대충
만들어 공원에 갖다 두었다. (대충 전시행정의 표본)

▲  구덕문화공원 남쪽 산책로

우리는 목석원예관만 둘러보고 내려왔는데, 글쎄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는 것이다. 처음
에는 적게 내리더만 시간이 가면서 정비례로 빗방울도 주먹만큼 굵어진다. 그래서 속보로 꽃마
을로 내려오니 마침 시내로 나가는 서구마을버스 1번이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 버스는 이미 가
축수송 지경이라 다음 차를 탈까 했지만 빗방울의 눈치도 있고 해서 그 버스에 올라타 짐짝의
일원이 되었다.

오랜 만에 찾은 부산 도심 속의 산골마을 구덕꽃마을, 등산객을 상대로 하는 주막들이 가득 늘
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산이나 산사 입구에 터를 닦은 관광단지를 방불케 한다. 도심이 바로 밑
인데, 도심과 지척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손님을 가득 실은 마을버스는 이제야 만족을 한 듯, 시동을 걸고, 그 자리에서 유턴하여 마을을
등지고 시내로 내려간다. 휴일이라 등산/나들이 손님들이 많으니 그날 입금은 정말 상당할 것이
다. 운행을 마치고 아마도 고기회식을 하지 않았을까?

내려가는 고갯길이 구불구불하여 손잡이를 잡으며 어여 도착하기를 소망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구덕운동장과 서대신역까지 가야 내리니 자리가 생기는 것보다는 빨리 도착하여 내리는 것이 낫
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온 마을버스는 부산시내로 들어서 구덕운동장에서 우리를 내려놓는다. 여기서 시내
버스를 타고 서면(西面)에서 환승하여 광안동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대략 17시 30분, 이렇게 하
여 부산 승학산 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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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 서울 봉원사(奉元寺)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연꽃의 위엄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연꽃을 주인공으로 한 연꽃축제가 천
하 곳곳에서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아직 인지도는 낮
지만 연꽃축제를 하나 가지고 있으니, 바로 2003년부터 봉원사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연꽃
문화대축제이다.

무더위가 한참 물이 오르던 7월 끝 무렵에 봉원사 연꽃 소식을 접했다. 여름이 왔으니 친
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은 한번은 봐줘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여 번
잡한 주말을 피해 평일 중에 날을 잡아 후배 여인네와 봉원사를 찾았다.
오후 2시에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봉원사 턱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산(鞍山) 자락에 묻힌 봉원사 종점에 발을 내린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마을이다. 아무리 인구 1,000만의 서울이라고 해서 높은 건
물과 번잡한 거리, 무수한 인파들만 있는 것은 아닐진데, 서울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
때문일까? 서울 장안에서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다들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
가 눈부터 의심한다.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봉원사 주차장은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찜질방이 자리해 있고 봉
원사로 가는 길목에는 민가들이 조촐하게 사하촌(寺下村)을 이룬다. 이 마을은 봉원사 승
려들이 주류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산다. 이는 봉원사가 혼인을 허용
하는 태고종(太古宗)의 중심지라 그런 것인데 다들 별도의 집과 거처를 가지고 있어 절의
필수 요소인 요사와 선방 등 승려의 숙식공간은 매우 적다. 그러다보니 경내 밑까지 승려
들의 집이 형성되어 절과 마을의 경계가 참 애매모호하며, 집들 사이로 나무가 많아 첩첩
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마을 같은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봉원사 주변은 개발제한구
역임)

종점에서 봉원사를 향해 몇걸음 가다보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부도전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석종형(石鐘
形) 승탑과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있다. 비석
은 대략 9기로 다들 왜정(倭政) 이후에 만든 것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때깔이 무지
곱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조낭자 희정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인데. 조그만 구멍가
게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눈길을 보낸다. 허나 구
석에 서 있어 정면만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호기심이 많은 본인인지라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과 관련된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나 절에 공헌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전한다는 뜻의 유애비(遺
哀碑)를 칭하는 것이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그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남편은 사업
에 바빠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살
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
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시주
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고 나와있다. 허나 실질적인 이유는 그녀의 순탄치 못했던 인생과 남편의 애정 부족이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놓여져 있는데, 이들은 비석을 씌우던 비각의 주춧돌로 비
각은 오래 전에(아마도 6.25 때 파괴된 듯) 사라지고 비석만 멀뚱히 남아있다.


▲  봉원사로 올라가는 길 (유애비 주변)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무려 5그루나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차례대로 지나 경내 직전에 이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오
르막길에 있다보니 인간의 불안전한 눈의 착시로 풍채가 더욱 대단해 보이는데, 보호수 지정 당
시 추정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약 40년이 더해져 약 340~350살 정도 되었다. 높이는
18m, 둘레는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도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
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또 나타나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준다.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발을 딛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갖추지 못했고, 절과
마을의 경계도 조금은 애매하며 이들 나무가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나이가 더 들었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가 1972년으
로 약 440~450년 정도 묵었으며, 그보다 키가 좀 작고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갖은 전통차와 식혜를 팔고 있으며, 불
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고 있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자아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비각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全星基)를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들어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둔 것을 보면 시주액이 어마
어마했던 모양이다. (역시 돈이 최고!!)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연못 북쪽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의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통을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까지 늦여름에 나타나는 수련
(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있다. 이쁜 꽃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의 마음을 표현하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들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활짝 개인 연분홍 연꽃의 위엄

▲  평범한 물통 속에 뿌리를 내린 연꽃들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애듯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이
들어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 정도를 길게 하고자 함이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소상히 적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봉원사 경내

※ 도심과 가까운 포근한 산사이자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聖地)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
왕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刹) 봉원사가 포근히 터를 닦았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고 그나마 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하니 창건 시기에 대한 신뢰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愚
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
고 전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했는데, 그 내용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한 삼은(三隱)의 1명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조선 건국 이전에 그리했거나(그래도 한
때 가까웠던 사이이니) 또는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면서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이후 1748년 영조(英祖)가 절을 옮기라며 지금의 땅을 하사
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고,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란 친필 현판
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기존 자리에는 그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
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을 만들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이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
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또한 수경원이 연세대에 들어선 이후 그곳의 원찰(願刹) 역
할까지 도맡게 되면서 법등(法燈)이 꺼질 일은 거의 없게 된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벌였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
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28일 무심한 총탄과 폭탄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이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어 한줌의 재
가 되고 만다. (그나마 대웅전과 몇몇 건물은 살아남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 공덕동(孔德洞) 동
도공고(현 서울디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
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헐값으로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무리를 하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
정문화재인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한 주
지 혜경이 신도의 지원을 모아 1994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았다.
2009년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
고, 2011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대방), 극락전, 만월전, 미륵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대웅
전이 화재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면서 지정유형문화재는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하나
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의 기능 보유자인 만봉이 주석하
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후학을 기르고 있어
영산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
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
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이 절은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다. 접근성과
교통도 모두 착한 수준으로 도시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속세에 유린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첩첩한 산골에 들어선 듯
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청정하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1주 동안 펼쳐보이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울 장안 유일의 연꽃축제로 그 이름하여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부른다. 허나 '봉원사 연꽃
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대웅전 뜨락을 비롯해 절 전체가 연
꽃 향연의 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다른 연꽃축제와 달리 연꽃을 연못이나 논두렁에 가꾸
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에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

절에서 안산으로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또다른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에는 서울 지
방기념물 13호
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대는 1994년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연희동이나 홍제동, 독립문, 서대문역(천연동) 방면으로 내려가면 된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4년 8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에서 7024
  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을 나와 적선동 정류장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
  봉원동) 하차, 봉원사길로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봉원동4거리)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한여름(7월 말~8월 말 사이)에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축제 시작일과 마지막날,
  주말에는 영산재를 비롯해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가 열리며 굳이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7~8월 내내 연꽃을 선보인다. (☞ 2014년은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열림)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하는데, 퇴근 이
  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 서넛이 절을 지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연꽃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여인의 앵두 입술보다 더 진한 홍련 -
'어서 꽃잎을 펼쳐보여야 될텐데!!' 허나 몸은 그의 마음처럼 잘 따라주질 않는다.

▲  활짝 핀 홍련

▲  대방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 사이에 놓인 길 -
마치 연꽃 논두렁길을 걷는 기분이다. 허나 축제가 끝나고 수조가 모두
사라지면 원래의 모습(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이제 막 피어난 홍련과 전성기를 누리고 너덜너덜해진 홍련

▲  활짝 웃는 백련과 심기가 편찮은 홍련

▲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이 저 연꽃에서 환생하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미소가 아름다운 백련

▲  연을 담은 수조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서쪽에서 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죄다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현 서울디
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6.25로 파괴된 대방을 다시 짓고자 궁리하던 중, 이병도의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
군의 흔적을 부시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당시 봉원사 주지 영월
은 아소정 본채를 구입, 그 목재로 도화주 김운파와 함께 1966년 대방을 재건했다.
그래도 아소정의 유일한 흔적인데, 내부는 좀 절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하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
습을 유지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기존보다 축소/변형한 점이 몹시 아쉽다. 비록
왕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하고 적지않게 모습이 바뀌었지만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대원군 시절의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
에서 삼천불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그것도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다고 하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
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를 비롯한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주불(主佛)로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옮겨온 것이며, 예
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金正
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
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대방에 걸린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라당 말아먹었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해 내부에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검은 가루가 되었으니 6.25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봉원사
가 축적한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은 했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가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종이 하나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
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를 강제로 불지르게 하고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그 자리로 이전했는데, 그때 타지 않고 남은 종을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라고 한다.
가야사터 자리가 명당은 명당이라 그의 아들이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
라를 말아먹었으니 거참 명당의 숨겨진 가시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좌측을 꾸며주는 신중탱을 비롯한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우측을 꾸미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 등의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火魔)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나름이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에 넘어가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
다.


▲  대웅전 우측 계단에 진열된 연꽃들

▲  운수각(雲水閣)

▲  영안각(靈晏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각
으로 고참 승려의 생활 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동안
혼백(魂魄)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연
령은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부부
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기일(忌日)에 절에서 제를 지낸다. 역시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
쩔 수 없는 모양이다. 봉원사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까지 하고 있으니 말
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의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
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고,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동
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간신히 완성을 보았
다. 무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떠나보내는 어이없는 비극을 겪었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애기같은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시주로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의 위엄

▲  삼천불전 내부 우측

▲  삼천불전 내부 좌측


▲  괘불(掛佛) 제작 현장

16세기부터 전국에 번지기 시작한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영산재 등 불교의 주요 행사 때 거는 큰
불화이다. 그러다보니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는 비싼 몸으로 200곳이 넘는 고찰을 기웃거린 나도
겨우 10번 남짓 친견했다. 마침 삼천불전 내부에서 괘불 제작을 하고 있어 잠시 지켜보았는데,
그림이 얼마나 큰지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아이처럼 보일 정도이다. 처음으로 보는 괘불 제작
현장, 저들의 갖은 정성에 의해 불교미술사의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괘불은 그렇게 눈을 뜬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
마사(寺)를 방문했다. 그때 그곳 대승정인 그나니사라가 부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
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는데, 그 사리를 봉안하고자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
후에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웠다.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원칙에 따라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껏 드러낸다.

▲  3층석탑 옆에 세워진 석가모니
진신사리탑비

▲  조선후기 선각자인 이동인이 이곳에 있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삼천불전 앞에 배치한 연꽃들

▲  이동인 손가락 조형물 주변에 피어난 연꽃의 분홍물결~~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빛이 바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
와 신들의 무리가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
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의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걸려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08년 8월 주시경
(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국어연구학
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어 봉원
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을 세워 그날을 기억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鄭道傳)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
을 보니 고색의 기운은 그리 짙어보이진 않는다. 허나 만약 정도전이 쓴 것이 맞다면 거의 620
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개
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대
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적
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
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저승의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
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저승의
식구들을 지킨다.

▲  지장보살 좌우에 늘어선 저승의 10왕과 여러 영가들의 영정
인간은 죽으면 저승으로 내려가 10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염라대왕(閻羅大王)의
입김이 커서 그에게 심판을 받는 7주에 염라대왕에게 잘 보이려는 뜻에서 49재를 지낸다.
물론 49재를 지낸다고 해서 무조건 극락으로 빠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이용한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라 불
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이상으로 흘
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그저 밉기만 하다. 그렇
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을 채워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엄연한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
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
는 살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어여쁜 홍련

▲  봉원사를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힘없는 발걸음을 하다

봉원사에 펼쳐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속세로 나온 우리는 저녁을 먹고자 삼청동(三淸洞)으로 이동했다. 바로 삼청동으로 간 것은 아
니고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북악산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실/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에
들어가 잠시 여름 제국의 기운이 늦춰지길 기다렸다가 삼청동으로 이동했다.


▲  우물집에서 먹은 뚝배기불고기와 반찬의 위엄

삼청동은 맛집의 성지(聖地)답게 온갖 식당과 찻집/까페가 즐비하다. 게다가 청와대나 국무총리
공관 등의 국가 시설이 많아 고위 공무원과 상류층들이 자주 찾아 맛도 괜찮은 편이다. 다만 가
격이 썩 착하지 않은 것은 큰 함정.
이번에는 기존에 갔던 식당들은 모두 제쳐두고 새로운 집을 개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발견한 집
이 삼청동 가장 북쪽 구석에 자리한 우물집이다. 이곳은 삼청공원과도 가깝고,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칠보사(七寶寺) 방면으로 도보 1분 거리로 2층 양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물집은 냉면과 한우고기로 유명한 식당인데, 한우고기는 너무 비싸서 우리 같은 서민이 먹기
에는 겁이 나고, 그렇다고 냉면을 먹자니 뭔가 허전하여 우리는 뚝배기불고기를 주문했다. 면보
다는 밥이 배를 채우는 데 좋기 때문이다. 냉면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허전하다. 그래서 만두
같은 부식물을 시키게 되고 그것이 자금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집은 냉면과 뚝배기불고기의 가격이 7,000원선(지금은 다를 수 있음)으로 다른 식당보다 가
격이 좀 착하다. 서울 장안 유명 냉면집의 냉면은 거의 8천원~1만원대, 뚝배기불고기도 6~8천원
대니 말이다.

냉면 전문집에서 뚝배기불고기를 시킨 탓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밥을 기다리니 제일 먼저
반찬이 깔린다. 그런데 반찬이 생각 외로 푸짐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무려 6가지나 되기 때문
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상추와 고추, 쌈장까지 나오며, 특히 감자조림이 맛있어서 1번 더 리필
을 했다.
반찬이 나오고 얼마 뒤 본메뉴인 뚝배기불고기와 쌀밥이 차려진다. 뚝배기불고기는 내 입맛에는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상추에 쌈장을 듬쁙 바르고 고기와 밥을 담아 입에 쏙 넣으니 목구멍이
정신을 못차린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인사동으로 넘어와 전통찻집에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다
가 저녁 늦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연꽃의 찰라와 같은 인생처럼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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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4년 8월초 기준)

 

서울 - 5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

글 공개시기

링크

1

은평구 진관사, 삼천사, 북한산성 2003, 5 200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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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북구 성북동(간송미술관 / 심우장 / 성락원 / 선잠단터) 2003, 10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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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악구

관악산(낙성대유지 / 낙성대 / 봉천동 마애불) 2004, 2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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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북구 성북동(간송미술관 / 선잠단터) 2004, 10 20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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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5, 5 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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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로구 경복궁, 인사동 2006, 1 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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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은평구 숙용심씨 묘표, 영산군 묘역 2006, 2 200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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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중구 덕수궁 2006, 3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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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중구
종로구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교회, 옛 러시아공사관터,
인사동

2006, 3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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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종로구 창경궁 (1) 2006, 4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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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종로구 창경궁 (2) 2006, 4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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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강남구 봉은사 1 (사월초파일) 2006, 5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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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6, 5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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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대원군별장, 홍지문
보도각백불

2006, 8 200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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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2008, 4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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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2008, 4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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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2009, 1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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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종로구

선희궁터, 청와대분수대, 청와대앞길,
경복궁신무문, 인사동

2008, 11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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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사월초파일)

2008, 5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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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사월초파일)

2008, 5 2009, 5

☞ 글보러 가기

21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이종석 별장

2008, 10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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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노원구 수락산 학림사 2009, 4 2009, 8 ☞ 글보러 가기

23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8, 11 2009, 12 ☞ 글보러 가기

24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08, 5 2010, 4 ☞ 글보러 가기

25

은평구 태화산 수국사 2009, 5 2010, 7 ☞ 글보러 가기

26

종로구 부암동 뒷골마을, 북악산길, 창의문 2010, 1 2011, 3 ☞ 글보러 가기

27

관악구

관악산 관음사, 효민공이경직묘역, 사당동백제요지,
구벨기에공사관

2009, 3 2011, 4 ☞ 글보러 가기

28

성북구

흥천사

2010, 5 2011, 5 ☞ 글보러 가기

29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0, 5 2011, 5 ☞ 글보러 가기

30

종로구

가회박물관, 삼청동(북촌), 인사동

2009, 8 2011, 9 ☞ 글보러 가기

31

성북구

성북동 삼청각, 홍련사, 북악산

2010, 5 2011, 10 ☞ 글보러 가기

32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 양효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묘역

2009, 10 2011, 12

☞ 글보러 가기

33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10, 1 2012, 2 ☞ 글보러 가기

34

종로구

장의사지당간지주, 세검정, 석파정별당, 홍지문

2010, 1 2012, 2 ☞ 글보러 가기

35

강서구

구암공원(광주바위), 허가바위, 허준박물관

2010, 3 2012, 3 ☞ 글보러 가기

36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이윤탁한글영비

2010, 4 2012, 4 ☞ 글보러 가기
37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1, 5 2012, 5 ☞ 글보러 가기
38

동작구

상도동 사자암

2011, 5 2012, 5 ☞ 글보러 가기
39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2010, 6 2012, 6 ☞ 글보러 가기
40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2009, 10 2012, 8 ☞ 글보러 가기
41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길

2011, 5 2012, 9 ☞ 글보러 가기
42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최순우옛집, 선잠단터

2010, 5 2012, 10 ☞ 글보러 가기
4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창덕궁길,
요금문, 고희동가옥, 백흥범가옥, 빨래터

2011, 7 2013, 1 ☞ 글보러 가기
44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2, 5 2013, 4 ☞ 글보러 가기
45 종로구

석파정별당(석파랑), 부침바위터, 무계정사터,
현진건집터, 청계동천, 반계윤웅렬별장

2011, 11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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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종로구

재동백송, 재동초교, 백인제가옥, 북촌3경 일대,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 안국동 윤보선가

2011, 9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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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강북구

북한산 본원정사

2012, 5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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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성북구

정릉동 경국사

2012, 5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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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종로구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2012, 7 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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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도봉구

도봉산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광륜사)

2012, 5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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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2, 10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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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금천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1, 11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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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1, 8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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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종로구
중구

서울연등회 (서울연등축제)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광통교

2013, 5 20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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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종로구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2012, 5 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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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중구

환구단(원구단), 덕수궁 대한문, 성공회 서울성당,
양이재, 구세군 중앙회관

2010, 4 201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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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2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

글 공개시기

링크

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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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화

석모도 보문사, 매음리해변 2004, 11 20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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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화 광성보, 용두돈 2004, 11 20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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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장 2005, 8 20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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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6, 8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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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6, 8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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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6, 5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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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6, 11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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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2007, 12 2008, 3 ☞ 글보러 가기

10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6, 12 2008, 5 ☞ 글보러 가기

11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용암사) 2007, 9 2008, 10 ☞ 글보러 가기
12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7, 11 2009, 3 ☞ 글보러 가기
13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8, 5 2009, 5 ☞ 글보러 가기
14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08, 10 2010, 2 ☞ 글보러 가기
15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08, 11 2010, 12 ☞ 글보러 가기
16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0, 5 2011, 5 ☞ 글보러 가기
17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09, 8 2011, 8 ☞ 글보러 가기
18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08, 4 2011, 8 ☞ 글보러 가기
19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09, 8 2011, 10 ☞ 글보러 가기
20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08, 10 2011, 11 ☞ 글보러 가기
21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08, 11 2011, 12 ☞ 글보러 가기
22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0, 4 2012, 5 ☞ 글보러 가기
23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09, 8 2012, 8 ☞ 글보러 가기
24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09, 5 2012, 10 ☞ 글보러 가기
25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0, 11 2012, 11 ☞ 글보러 가기
26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09, 12 2013, 2 ☞ 글보러 가기
27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2, 3 2014, 3 ☞ 글보러 가기

 

강원도 - 18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2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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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20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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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구 양구 향토사료관, 심곡사 2004, 9 20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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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속초
고성

속초 탑공원, 고성 청간정 2005, 6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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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성 건봉사 2005, 6 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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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창 대관령 양뗴목장 2006, 5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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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5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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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6, 11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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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태백 구문소 2006, 11 2007, 2

☞ 글보러 가기

10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08, 12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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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0, 1 2011, 1 ☞ 글보러 가기
12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0, 1 2011, 2 ☞ 글보러 가기
13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09, 9 2011, 12 ☞ 글보러 가기
14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1 2012, 6 ☞ 글보러 가기
15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09, 10 2012, 7 ☞ 글보러 가기
16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09, 10 2013, 11 ☞ 글보러 가기
17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2, 1 2014, 2 ☞ 글보러 가기
18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2, 6 2014, 7 ☞ 글보러 가기

 

충청북도 - 10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충주

미륵리사터, 미륵리가마터

2003, 7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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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천

빈신사지 석탑, 덕주사, 덕주산성, 송계9곡

2003, 7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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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1

2003, 12

☞ 글보러 가기

4 단양 구인사 2004, 12 200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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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주 상당산성 2005, 6 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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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2 2008, 12

☞ 글보러 가기

7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8, 9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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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09, 10 2011, 11

☞ 글보러 가기

9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09, 11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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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09, 11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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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 12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서산 서산 마애3존불, 보원사터 2004, 8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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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산 진악산 보석사 (1) 2005, 2 2005, 7

☞ 글보러 가기

3 금산 진악산 보석사 (2) / 진악산 자연휴양림 2005, 2 200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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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산 칠백의총 2005, 2 200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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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8, 5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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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3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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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8, 11 2009. 11 ☞ 글보러 가기

8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1, 2 2012. 3 ☞ 글보러 가기

9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1, 2 2012. 3 ☞ 글보러 가기

10

공주

계룡산 갑사

2011, 2 2013. 2 ☞ 글보러 가기

11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0, 2 2013, 8 ☞ 글보러 가기

12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2, 4 2014, 6 ☞ 글보러 가기

 

전라북도 - 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글 공개시기

링크

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8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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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실 오수 의견비, 사선대 / 운서정 2006, 6 2006, 8

☞ 글보러 가기

3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2 2008, 11

☞ 글보러 가기

4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8, 2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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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0, 1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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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09, 9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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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2, 4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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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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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3, 12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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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주 무양서원, 장고분 2005, 4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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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광 내산서원 2006, 10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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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6, 10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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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8, 11 2009, 11 ☞ 글보러 가기

6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08, 11 2010, 1 ☞ 글보러 가기

7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08, 11 2010, 2 ☞ 글보러 가기

8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09, 9 2011, 9 ☞ 글보러 가기

9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09, 9 2011, 10 ☞ 글보러 가기

10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1, 4 2012, 4 ☞ 글보러 가기

11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0, 4 2013, 5 ☞ 글보러 가기

 

대구, 경상북도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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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4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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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 경주읍성, 경주관아터, 옛 경주신사 2005, 11 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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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주

노서동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2005, 11 200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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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동 제비원 석불, 옥동3층석탑 2005, 12 200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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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주 성산관, 쌍충사적비, 성밖숲, 성산동 고분군 2006, 3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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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주
대구

성산동 고분군, 경상감영공원 2006, 3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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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0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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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6, 10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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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8, 2 20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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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7, 12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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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8, 7 2009, 7 ☞ 글보러 가기

12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8, 7 2009, 9 ☞ 글보러 가기

13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09, 6 2011, 6 ☞ 글보러 가기

14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09, 7 2012, 12 ☞ 글보러 가기

15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1, 6 2013, 7 ☞ 글보러 가기

16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1, 3 2014, 2 ☞ 글보러 가기

17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1, 11 2014, 7 ☞ 글보러 가기

 

부산 - 1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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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 장산(폭포사 / 장산폭포) 2005, 4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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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구
연제구

부산근대역사관, 연산동고분군

2006, 4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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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7, 2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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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7, 7 2008, 9 ☞ 글보러 가기
5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7, 11 2009, 1 ☞ 글보러 가기
6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7, 11 2009, 1 ☞ 글보러 가기

7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8, 8 2009, 9 ☞ 글보러 가기

8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09, 4 2011, 1 ☞ 글보러 가기

9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09, 4 2011, 1 ☞ 글보러 가기

10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09, 7 2012, 7 ☞ 글보러 가기

11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09, 4
2009, 6

2012, 12 ☞ 글보러 가기

12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1, 6

2013, 7 ☞ 글보러 가기

13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0, 6

2014, 1 ☞ 글보러 가기

 

울산, 경상남도 - 22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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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8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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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해
부산

은하사, 수로왕비능, 구지봉, 초선대, 봉황동 유적
다대포(몰운대)

2004, 1 200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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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창원 창원 불곡사 2005, 4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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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거제
통영

학동해변, 옥포대첩비, 한산도 2005, 10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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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통영 한산도 제승당 2005, 10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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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4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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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4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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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7, 1 2008, 1 ☞ 글보러 가기
9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7, 1 2008, 1 ☞ 글보러 가기
10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7, 7 2008, 9 ☞ 글보러 가기
11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7, 11 2009, 1 ☞ 글보러 가기
12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8, 10 2009, 6 ☞ 글보러 가기

13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8, 8 2009, 7 ☞ 글보러 가기

14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08, 9 2010, 5 ☞ 글보러 가기

15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08, 10 2011, 7 ☞ 글보러 가기

16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0, 7 2011, 7 ☞ 글보러 가기

17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09, 7 2012, 7 ☞ 글보러 가기

18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08, 10 2012, 9 ☞ 글보러 가기

19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09, 11 2012, 11 ☞ 글보러 가기

20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1, 3 2013, 3 ☞ 글보러 가기

21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0, 7 2013, 9 ☞ 글보러 가기

22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0, 10 2013, 11 ☞ 글보러 가기

 

제주도 지역 - 2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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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서해바다, 한라산(성판악 / 사라악 / 진달래밭) 2005, 8 200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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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 한라산(백록담 / 탐라계곡), 서해바다 2005, 8 200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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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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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5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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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들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5월 이전(2개 제외) 글과 아직 공개되지 않은 답사기는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혹은 모조리 뜨지 않는 글들(주로 2004 ~ 2005년판)이 꽤 많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분류했습니다.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 연등축제 (조계사, 청계천 연등거리, 광통교)

 


' 서울 연등축제 야경 즐기기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연등거리) '

서울연등회 연등

▲  서울 연등축제에서 활약한 연등의 위엄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서울연등회 저녁 연등놀이 (조계사, 우정국로)

▲  연등놀이 행렬의 선봉인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
사천왕들이 중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국동4거리를 거쳐 인사동으로 들어간다.
인사동에 잠입한 나쁜 기운들이 그날따라 똥줄 좀 제대로 탔을 것이다.

계절의 여왕으로 널리 칭송을 받는 5월(4월 말 포함)에는 많은 축제와 볼거리가 천하 곳곳에서
열린다. 그중 단연 갑(甲)은 내 기준이긴 하지만 서울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특별전이 아닐까 싶다.

서울연등회(연등축제)는 서울 및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단단히 자리
를 굳혔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금/토/일에 열리는데, 주말 전날인 금요일부터 조계사(曹溪
寺)와 강남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교4거리 구간)에서 연등 전시회가 그 서막
으로 열리며. 초파일 당일까지 오색영롱하게 불을 밝힌다.
그리고 축제의 중심인 토요일이 되면 장충동 동국대(東國大) 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16시 30
분부터 18시까지 열리는데, 이 마당은 연등행렬을 위한 몸풀기 행사로 관불의식을 비롯해 흥겨
움을 유발하는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펼쳐진다. 그 공연이 끝나면 19시부터 서울연등축제의 갑
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진행된다.
연등행렬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을 출발하여 동대문과 종로를 거쳐 조계사에서
끝을 맺는데, 진행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이며, 조계사를 비롯하여 서울과 전국 사찰, 불교단체
/학교에서 준비한 온갖 연등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보이는 등은 무려 10만 개가 넘는다
고 하니 가
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라 매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여 전혀 식상하지가 않다. (연등행렬시간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부터 조계사까지
도로를 통제함)
햇님이 지평선 너머의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행렬에 나온 연등은 어
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이 조계사에
모두 모이면 그 뒷풀이로 회향(廻向)한마당이 23시까지 펼쳐져 다시금 어깨를 들썩거리게 한다.
또한 그날 행군한 연등의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 종로1가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
은행) 앞에 두어 자정까지 못다한 불을 밝힌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불
교와 관련된 갖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전통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곳곳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불교 음식과 떡, 음
료수 등을 사마시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茶道) 체험, 사찰/전통 음
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까지 두루 만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축제는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여 19시부터 다시 연등놀이를 연다.
이는 전날에 벌이는 연등행렬의 축소판으로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을 1바퀴 돌고 다시 조계사
로 돌아오는 짧은 코스로 진행되며, 조계사에 모이면 모두 함께 신명나게 춤을 추고 어울리는
시간을 갖다가 21시에 모두 마무리를 짓는다.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으며, 서
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도 연등축제가 열린다. 그
렇다면 이 연등회는 과연 언제부터 열리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관련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
에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했던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말에 이미 절에서 연등을 밝혀 축제 비슷하게 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개최하여 만백성이 즐겼고, 연등을 며칠 동안 밝혀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에 본격적으로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
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를 연 것이 그 시초로 여겨지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 정권
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선은 고려와 달리 불교를 탄압하면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속 연등회
를 즐겼다. 저녁에는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등은 한
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을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연등을 만들어 종로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서막을 열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이후 1996년부터는 동대문운동장
(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제는 5월(4월 하순)만 되면 손
꼽아 기다리게 되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 서울연등회 일정과 행사 내용, 연등은 매년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음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사천왕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전통문화마당의 후속편으로 진행되는 연등놀이는 19시에 조계사를 출발하여 인사동을 거쳐 다시
조계사로 돌아와 모두 신명나게 어울린 후 21시에 마무리를 짓는다. 이날 활약하는 연등은 전날
연등행렬에서 몸을 푼 연등으로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짧은 행군에 임한다.
햇님이 꽁무니를 뺀 시간이라 몸을 마음껏 불사르며 중생들의 환호 속에 도심을 누빈다.

연등놀이 시간이 저녁 때다 보니 시장기가 연등처럼 불타오른다. 자고로 부하들의 논공행상(論
功行賞)과 시장기는 미루지 말라는 명언이 있다.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모두 뒷탈이 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연등놀이는 일단 관심에서 꺼두고 저녁을 먹고자 북촌(北村)으로 들어가 어느 기
와집 식당에서 떡국과 만두로 시장기를 잠재우고 슬며시 조계사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21시. 연등놀이 행렬은 마무리되고 거리를 달군 연등은 조계사와 우정국로 곳곳에
포진하여 중생들의 사진 모델로 다시금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우정국로를 장악한 긴 지느러미의 목어

▲  연등 빛깔에 황홀하게 물든 조계사의 야경

▲  극락을 향한 중생의 몸부림 ~ 반야용선(般若龍船) 연등
관음보살이 용머리 배에 중생을 태우고 고통의 바다를 헤치며
극락으로 향한다.  

▲  노루, 소나무가 그려진 연등과 윤장대(輪藏臺) 연등

▲  두광(頭光)을 두룬 다양한 모습의 관음보살 연등

▲  푸른 피부의 범종 연등

▲  종로1가(종각역4거리)를 주름잡은 연등들 ▼


♠  서울연등축제의 마무리 ~ 청계천 연등거리 (전통등 전시회)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서울 도심의 어설픈 젖줄인 청계천(淸溪川)도 서울연등축제의 일원이 되어 한참 연등빛으로 물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4~5월에는 서울연등회 전통등 전시회의 현장으로, 11월에는 서울등축
제의 현장이 되는 명실상부한 천하 등축제의 성지인데, 청계천 연등은 청계광장에서 청계2가까
지로 조그만 연등이 청계천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고, 광통교(廣通橋)와 청계광장 사이에는 커
다란 등을 두둥실 띄워 연등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돋구고 있다.
특히 이 땅의 불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큰 등이 여럿 있으며, 그 옆에 관련 해설을 붙여
놓았다.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2가 방향)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광통교(사적 461호)와 석가탑(釋迦塔) 연등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제일 오래된 다리는
광통교이다. 청계천이 한양도성 가운데를 가르
며 흐르다보니 그것을 경계로 자연히 북촌(北村
)과 남촌(南村)으로 나눠졌고 이를 왕래하고자
광통교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많은 다리를 놓
았다. 이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광통교와
장충단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수표교(水標橋)가
고작이며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청계천 다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광통교
'대(大)광통교','광교(廣橋)'라 불리기도 하
며, 다리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광통방에서 비
롯되었다. 원래는 광교4거리에 있었으나 청계천
복원 때 기존 자리를 되찾지는 못하고 무교동(
무교동4거리~광교4거리 중간)에 재현되었으며,
다리 이름은 광교(광통교)지만 기존 광교4거리
와 햇갈릴 우려가 커 광통교로 거의 못박은 상
태이다.

이 다리는 청계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만큼 기구한 사연도 적지않다. 연등축제 글에 맞지 않
게 광통교 보따리를 푸는 것이 좀 그렇겠만 기왕 이곳에 왔으니 간단하게 한번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광통교는 조선 태조(太祖) 때 흙과 나무로 대충 지은 나무 다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홍수
때마다 거의 남아나지를 못하여 20년 가까이 도성(都城)의 우환거리로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돌다리로 업그레이드시키면서 그 우환은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다리 석재(石材)는 어디
서 충당을 했을까? 그 석재는 정릉(貞陵)의 석물을 차출하여 충당했는데, 정릉은 비록 친어머니
는 아니지만 의붓어머니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다. 그렇다면 왜 의붓어미 능의 석물
을 불손하게도 석재로 썼을까? 이는 그들의 오랜 악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5번째 아들이다. 한씨는
정종과 이방간(李芳幹) 등 6남 2녀로 두었는데, 좋을 날을 1년 앞둔 1391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조의 후실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자연히 부인이 되었는데 조선이 개국되면서
는 현비(賢妃)로 책봉되었다. 현비는 왕실 내명부(內命婦)의 정1품으로 거의 왕비(王妃)로 보면
되겠다.

신덕왕후는 곡산(谷山)강씨 집안으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강윤성
은 많은 무공(武功)을 세워 중앙에 진출한 이성계(李成桂)를 높이 평가하며 강씨 집안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 딸을 그에게 시집을 보냈다. 일종의 정략 혼인인 셈이다. 이렇게 이성계
는 무려 21세 연하를 2째 부인으로 두며 개경(開京)에 머물 든든한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강씨 집안은 토지도 넓고 재정도 풍족해 이성계는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강씨는 이성계를 잘 내
조하며 한씨 소생의 자녀와도 가깝게 지냈고, 조선 개국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현비로 책봉되어 사실상 조선 최초의 왕후가 되었는데, 왕의 지극한 총애를 믿
으며, 권력에 대한 숨겨진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앉
히고자 정도전(鄭道傳)고 남은(南誾) 등, 왕의 최측근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방원 등 한씨 소생
왕자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가 1396년 8월 이방원이 소란을 일으키자 병을 얻어 죽으니 그
의 나이 40세였다.
자신의 숨통을 조이던 강씨가 죽자, 이방원과 이방간(李芳幹) 등은 기회를 엿보다가 1398년 그
유명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나라를 한참 반석 위에 올리고 있던 정도전과 남은 등을 살해
하고 강씨 소생의 이방석. 이방번 형제를 때려 죽인다. 이에 충격을 먹은 태조는 왕위를 내버리
고 함흥(咸興)으로 내려갔으며, 이방원은 2째 형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정종(靖宗)이다.

이어 1400년, 이방간이 박포(朴苞)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의 아우인 이방원을
공격하나 오히려 손쉽게 진압된다. 애시당초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정종은 이때다 싶어 그에
게 서둘러 왕위를 넘기니 그가 바로 조선 3대 군주인 태종(太宗)이다.

드디어 꿈꾸던 왕위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에 대한 증오를 풀고자 그를 후궁으로 격
하시켰고, 강씨를 왕후로 인정하는 기록을 모두 없애거나 왜곡했다. 그리고 도성 안 정동(貞洞)
에 버젓히 자리한 강씨의 정릉을 1409년 지금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추방시키고 그것으로도 모
잘라 봉분(封墳)을 훼손하고 정자각(丁字閣)을 뒤엎으며 애궂은 석물을 생매장시켰다.
그러다가 상국(上國)인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太平館)을 보수할 필요가 제기되자 태종
은 정릉에 쓰인 나무와 석재를 동원하여 태평관 보수에 사용했다. 그리고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
말썽이 많던 광교를 돌다리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12지신상을 비롯한 정릉의 석물을 모조리 끌
어다가 광교의 석재로 사용했다.

그 이후 정릉의 존재를 영구히 은폐시킬 생각으로 수묘인(守墓人)을 두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
으며, 관료와 사대부들도 태종의 눈치로 스스로 강씨의 대한 기록을 지우고 심지어는 족보에서
도 그 존재를 지웠다. 그렇게 태종의 바램대로 강씨와 정릉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
혀져 간 것이다.
그러다가 선조(宣祖) 시절, 선조가 수레를 타고 행차하던 중,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
)이 수레 앞에 엎드려 자신은 그의 후손이라며 군역을 면제해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변
계량(卞季良)이 쓴 문서를 참조하여 능을 다시 찾았으며 현종(顯宗) 때 송시열(宋時烈)의 건의
로 드디어 제대로 된 능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광통교는 이방원의 의붓어머니에 대한 악감정에서 태어난 존재로 그 감정의 정도를 가늠
케 한다. 정릉을 때려 부시고 그 석재로 광통교와 태평관을 손질하면서 태종은 희열이 넘치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반면 신덕왕후는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 역사의 패배자는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한번 몸소리치게 해주는 현장으로 강씨를 파멸시킨 승리자 태종은 후실(첩)의 소
생이 설치지 못하도록 적서(嫡庶)차별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정릉의 희생으로 돌다리로 거듭난 광통교는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로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을 잇는 통로였다. 다리 주변에는 시전(市廛)이 늘어서 있었고, 숭례문을 통
해 도성 밖으로 나가는 제왕의 어가 행렬도 반드시 이곳을 건넜다. 또한 명/청나라 사신도 이
다리를 건넜다.
지금은 제자리를 떠난 수표교와 더불어
매년 정월 보름에 연날리기, 다리밟기 등의 축제가 펼쳐
졌고, 4월 초파일에는 연등행사가 열려 연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영조
(英祖) 시절에 청계천을 크게 정비하면서 노원구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 광통교를 크게 손보
았으며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도심의 골치꺼리인 청계천을 생매장시키면서 수표교를 장충단공
원으로 강제로 옮겼다. 허나 광통교는 옮기지 않고 그냥 생매장을 시킨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래서 40년 가까이 청계천 수레길 밑에 깔려 어둠의 시간을 보내다가 2003년 청계천을 밖으로 끄
집어내면서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것이다.
긴 세월 햇살의 어루만짐을 받지 못해 많이 초췌해진 모습으로 다가온 광통교는 창덕궁과 탑골
공원 등지에 흩어진 다리의 석재를 찾아내어 복원에 활용했으며, 부족한 부분은 새로 돌을 맞추
어 끼워놓았다. 허나 기존 자리는 이미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기존
광교4거리에서 서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복원을 했다.

다리의 모습은 수표교와 많이 비슷하며, 조선 초기 돌다리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인정
되어 2005년 수표교와 오간수교(五間水橋) 등 다른 돌다리 흔적과 더불어
사적 461호로 지정되
었다.
다리 기둥에는 계사년(癸巳年)에 다리를 보수했다는 글씨가 여럿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계사년
은 1413년이다. 그리고 능의 석물로 만든 탓에 다리 북쪽과 남쪽 밑에는 구름무늬가 많은데, 그
사이로 신장상(神將像)이 합장을 선보이며 단아하게 서 있고, 반면 거꾸로 박힌 인물상도 보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 인물의 정체는 불상이라고 한다. 왜 거꾸로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2003년 다리 복원을 대충해서 그리 되었다는 말부터 태종 시절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  신라 문무왕 시절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군을 격퇴했다는
명랑법사(明朗法師) 이야기 연등

▲  황룡사9층목탑과 원효대사 연등

▲  청게천 팔석담(八石潭)을 물들인 연등

청계천 연등거리를 유유자적하니 시간은 어느덧 23시가 넘었다. 이제 1시간만 지나면 그날은 재
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성황리에 열린 서울연등축제도 그렇게 막을 내리고, 조계사와 봉은
사, 청계천 연등은 초파일 당일까지 불을 밝히면서 연등축제의 대미(大尾)를 잡는다. 특히 청계
천 연등(전통등 전시회)은 달 밑에서 종일 불을 밝히는 것이 아닌 자정까지만 불을 밝히며, 연
등의 위엄에 눌려 뒤로 밀려난 달은 그 이후부터 제대로 어깨를 피며 천하를 비춘다.
이렇게 하여 서울연등축제 저녁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서울연등회 연등축제장 (조계사 주변, 청계천)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조계사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에서
   도보 5분
② 청계천 연등 거리(광통교)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에서 도보 2~3분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2번 출구)에서 도보 3~4분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도보 4~5분
* 서울연등축제 홈페이지는 바로 아랫 사진(합장인과 법륜 연등)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 청계천 연등 거리, 광통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 중구 무교동
* 조계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합장인과 법륜(法輪) 연등 (그 오른쪽에 승려가 춤을 추는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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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4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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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 태백산(太白山) 눈꽃 나들이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태백산 설경

장공(長空)에 뛰어들어 안개 속에 파묻히니
 비로소 정상에 오른 줄 알았네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주위의 뭇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에 내려앉네
 구름 따라 몸이 날으니 학(鶴)의 등에 올라탄 듯
 돌을 밟고 허공에 길이 걸렸으니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가
 비 그치자 골짜기마다 시냇물이 흘러넘치니
 굽이굽이 오십천(五十川) 건널 일이 걱정스럽네


*
고려 후기 문신인 근재 안축(謹齋 安軸, 1282~1348)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

 


겨울의 한복판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진한 설경을 맛보고자 강원
도 태백(太白)을 찾았다. 마침 후배 하나가 태백 서쪽 동네인 고한(古汗)에 잠시 머물고 있어
서 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을 찾기로 했다.

원래는 설 연휴 전날 아침에 일찌감치 열차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급히 일이 생겨서 내려가는
것을 취소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에 급히 연락을 넣어 심야 열차로 가겠다고 하니 사북역에
서 대기하여 합류하겠다고 그런다.

설날 연휴인지라 태백까지 열차표를 힘들게 예약히고 21시 반에 대문을 나섰다. 방학역에서 1
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신통치 못한 배차를 자랑하는 중앙선 용문(龍門)행 전철로 갈아
타서 근 1시간을 달려 용문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대기를 타다가 강릉(江陵)행 심
야 무궁화호 막차에 몸을 싣는다.
거의 2년 만에 타보는 추억의 심야열차, 옛날에는 서울에서 당일로 오가기 버겨웠던 광주, 목
포, 여수, 경주, 부산, 동해 등 장거리를 갈 때 많이 타고 다녔는데, 도로망이 나날이 좋아지
면서 안그래도 비좁은 국토가 더 좁아져 2006년부터 탈 일이 크게 줄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1
년에 1회도 타질 않는다.

용문에서 태백까지는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자리에 앉아 잠을 간곡히 소환해 봤지만 잠이 좀
처럼 강림하질 않으니 아무래도 잠님이 나를 원치 않은 듯 싶다. 한밤중이라 차창 밖 풍경은
온통 검은 도화지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불빛이 그런 도화지에
살짝 작은 점을 찍는다. 그렇게 뜬 눈으로 원주와 제천, 영월, 예미를 지나 사북역에 이르니
대기하던 후배가 열차에 올라타 옆 자리에 앉는다.

정선과 태백의 경계를 가르는 두문동재터널을 지나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태백 관내로 들어서
니 창 밖 풍경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선 땅까지 별로 보이지도 않던 눈이 터널을 지나
서부터는 완전 눈천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차창 밖 검은 도화지는 하얀 색이 추가되어 2색
의 흑백 도화지가 되었다. 단지 터널 하나에 천지가 뒤바뀐 것이다.

열차는 강원도의 산주름을 열심히 지나 드디어 태백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멈추자 등산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적막이 감돌던 태백역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 넣는다.
밥이나 먹을 겸 식당을 찾아보니 역전 주변 식당은 죄다 자고 있었고, 실비집 한 곳만 환하게
불을 밝히며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니 열차에서 내린 등산객 10여 명 정
도가 밥을 먹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생각한 것과 달리 맛이 괜찮았다. 고기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고
밑반찬도 가짓수가 많아서 찬이 제법 풍성했다. 저녁을 먹고 왔지만 다시 시장기가 강하게 돋
으면서 밥을 2그릇이나 먹고 찌개와 반찬을 죄다 비우고서야 식당을 나섰다.

아침이 멀지 않았으니 찜질방에서 잠시 눈이나 붙이자고 했으나 후배는 여관에서 편하게 자자
면서 자기가 방값 내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터미널(역 앞에 터미널 있음) 인근 여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아침 8시 반이 되자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스르륵 잠에서 깨었다. 4시간 밖에는 못잤지만, 더
이상 잠도 오질 않는다. 나는 태백산을 보러 여까지 온 것이지 잠이나 퍼자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꿈나라에서 허우적거리는 후배를 강제로 깨워 9시 반에 여관을 나섰다.

고원(高原)의 도시, 태백이라 제법 추울 줄 알았더만 아침임에도 그다지 춥지는 않다. 터미널
로 들어서니 마침 당골로 가는 태백시내버스 7번이 기지개를 켜고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태백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터미널에서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까지는 20~25분 정도 걸린다.


▲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 앞)


♠  하얗게 분을 칠한 태백산(太白山, 1567m) 간보기

▲  태백산관리사무소에서 당골광장으로 오르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태백산관리사무소 앞이다. 우리나라의 신령스러운
산인 태백산의 안기려면 반드시 매표소를 거쳐야 되는데, 등산객들의 호주머니를 뚫어지라 쳐다
보는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하얗게 분을 바른 태백산의 모습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말끔히 정화시켜준다.

이곳에 온 목적은 오랜만(거의 7년 만)에 태백산 정상(1567m)과 천제단(天祭壇, 1561m)을 보고
자 함인데, 후배가 겨울 산행에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 정상까지 가는 것은
어려웠다. 괜히 그랬다가 119헬기를 불러야 될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식
총(虎食塚)까지만 갈까 하다가 눈이 제법 많고 미끄러워 후배가 오르기 힘들다고 투정하여 당골
광장에서 1km 정도만 오르고 철수하고 말았다.

태백산은 우리나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쪽 척추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중심 산으로 위엄
돋는 산의 이름만큼이나 험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정작 올라보면 별로 힘들지 않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산(金剛山)이나 설악산과 달리 순수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肉山)이
라 능선의 곡선이 완만하고 산세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스와 수레로 800~900m 고지(당
골, 백단사, 유일사, 금천동)까지 올라갈 수 있어 거기서부터 등산에 임하면 되며, 제일 단거리
인 유일사와 백단사에서 정상까지 2시간, 당골에서는 2시간 30분(문수봉 경유는 3시간 30분) 정
도면 충분히 닿는다. (금천에서는 4시간 소요)

매표소에서 당골광장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 길의 연속이다. 4발 수레들도 마음껏 바퀴를 굴리
게끔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있는데, 길이 온통 눈투성이라 수레들도 겁을 먹고 가기를 꺼려한다.


▲  태백산 눈썰매장 입구

▲  한참 몸단장중인 눈조각품

태백산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지만 눈으로 뒤덮힌 겨울이 단연 갑(甲)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겨울 산행의 성지(聖地)로 백설(白雪)이 두텁게 쌓인 겨울 산행의 장쾌함을 누리고자
많은 산꾼들이 몰려온다. 봄과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 산꾼이 훨씬 많다고 하니 기온이 낮을 수
록 찾는 이가 반비례로 늘어난다. 그리고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는 눈꽃축제(눈축제)를 벌이는
데, 이 축제는 겨울 축제의 성지이자 대명사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미국(米國)을 비롯한 여
러 나라에서 이 축제를 찬양했고, 미국의 CNN방송은 한국에서 가봐야 될 50곳의 하나로 선정하
며 찬양의 수준을 높였다. 솔직히 태백산은 국내에서만 머물기는 진짜 아까운 산이다. 국내 명
소/축제를 넘어 세계적인 겨울 축제와 명소의 성지로 우뚝 서기를 고대해 본다.

태백산은 겨울 산행의 성지, 겨울 축제의 성지이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던 옛날부터 제천의
식(祭天儀式)을 거행하던 성지였다. 산 정상에는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문화재 228호)과 장군
단(將軍壇)이 있는데, 이들은 천하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숨져 태
백산신으로 추앙 받은 단종(端宗)에게 제를 올리던 곳으로 돌로 쌓은 조촐한 제단이지만 강화도
참성단(塹星壇)만큼이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이렇게 하나도 아니고 3가지의 성지로 일
컬어지니 태백산의 명성은 나날이 하늘을 찌른다.


▲  설송(雪松) 밑에 자리한 석탄박물관 표석

▲  태백석탄박물관(太白石炭博物館)

당골광장 동북쪽에 자리한 태백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탄 전문 박물관으로 1997년 5월
에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나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벌여 이제는 태백
에서 꼭 가봐야되는 명소로 단단히 부각되었다.

박물관 규모는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8개의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단순히 석
탄 관련 내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와 지질(地質)을 시작으로 광물(鑛物)의 탄생
과 종류, 화석(化石), 석탄과 탄광 관련 문서와 기계/장비, 탄광 정책 관련 자료, 태백 관련 향
토자료, 탄광 광부들의 생활상, 탄광갱도 체험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3층에서 지하로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는 층수가 아닌 -100m 단위로 거의 -900m까지 수치가 내려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 마치 탄광 엘리베이터를 탄 듯한 오싹함을 선사한다. 지하층으로 내려오면 탄광 체험 갱도관
이 있으며, 그곳을 나오면 기념품과 특산품을 파는 기념품점이 나온다.

태백석탄박물관은 지금까지 2번 구경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려올 때 관람을 했다. 박물관과 관
련된 내용은 이쯤에서 정리를 하겠으며,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는데, 보통 1시간 반 정도, 길게
는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  제1전시실 지질관에서 만난 자수정(紫水晶)의 위엄
지질관에서는 자수정 같은 귀에 익은 광물부터 낯설은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지구 곳곳에서 수집한 광물 진품이 진열되어 있다.


※ 태백석탄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2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해야 됨, 쉬는 날 없음)
* 입장료는 공짜인 듯 싶지만 엄연히 태백산도립공원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166 (천제단길 195 ☎ 033-552-7730 / 033-550-2743)
* 석탄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자수정 사진을 클릭한다.


▲  당골광장 부근에 조성된 공원과 연못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연못도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당골광장에서 문수봉으로 올라가는 길
당골광장에서 산길은 2개로 갈리는데, 왼쪽은 제당골과 문수봉으로, 오른쪽은
호식총과 망경사, 천제단으로 이어진다. 문수봉으로 가도 천제단까지
갈 수 있으나 3시간 30분 정도 잡아야 된다.

▲  막바지 매뭇새를 다듬고 있는 눈축제장

태백산의 백미(白眉) 중 하나인 눈축제는 보통 1월 중순에 열린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열리
기 직전이라 축제 분위기도 누리지 못하고 축제를 위해 조성된 눈조각품만 바깥에서 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했다.


▲  설림(雪林)으로 들어서다 (문수봉 방면)

▲  설림에 한가운데에 서다.
키가 큰 늘씬한 수목들이 앞다투어 하늘을 가리면서 산길이 좀 어둡다.
나무들은 겨울 제국이 내린 눈을 소복으로 삼으며 묵묵히 봄을 기다린다.

▲  고려 후기 문인인 안축(安軸)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가 담긴 표석
시의 내용은 앞부분에 있음 (당골광장에서 망경사 방면)


♠  태백산 마무리

▲  태백산의 또 다른 수호신 석장승 - 강원도 지방민속문화재 4호

당골광장에서 단군성전 입구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별다른 모양이 없는 석상이 마중한다. 이 석
상은 바로 석장승으로 원래는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미루둔지(장승둔지)에 있었는데, 1960년대
에 망경사로 옮겼다가 1987년 태백문화원이 지금의 자리에 안착시킨 것이다. 

장승의 모습을 보면 얼굴 부분이 손상된 문인석(文人石)처럼 보이기도 하며, 미륵상으로 보이기
도 한다. 얼굴이 워낙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알기 힘들며, 머리에는 관(冠)처럼 생긴 것
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얼굴 양쪽에는 귀로 보이는 길쭉한 부분이 있다.
그의 탄생시기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천제단 가는 길목인 태백산 북쪽에 자리해 있어 성
역(聖域) 임을 알리는 역할과 이정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덩달아 산신의 수호신상의 역
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 부분이 많이 닳아있어 마을의 수호신까지 겸한 것으로 여
겨진다. 예전에는 장승 옆에 3마리의 오리가 새겨진 솟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석장승이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정작 강원도에는 이 장승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태백산 정상 천제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장승
<장생(長生)>을 많이 세워 성역(聖域) 및 이정
표의 역할을 했으며, 장승모랭, 장승백이, 장승
둔지, 장승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어 태백 땅
에 장승이 제법 많았음을 보여준다.
허나 무심한 세월과 몰지각한 사람들의 만행으
로 장승은 죄다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전설 속
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오로지 당골의 석장승만
살아 남아 태백이 왕년에는 장승의 낙원이었음
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따름이다. 참고로 태백의
조선시대 지명인 장생은 바로 장승에서 유래된
것이다.
<태백을 이루는 동네의 하나인 장성(長省)이 장
생에서 변경된 이름임>


▲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하얀 숲터널 (석장승에서 망경사 방면)

▲  당골계곡과 함께 이어진 산길
이 세상에 색깔은 하얀색과 하늘색, 갈색(나무 줄기) 밖에 없는 것 같다.

▲  설림 속을 거닐다
집으로 고이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절경이다. 허나 나는 조물주가
아닌지가 저 풍경을 가져오지는 못하고 대신 사진이란 것으로
그 장면을 복사해 담아가지고 왔다.

▲  단군성전 앞에 마련된 단군상
명세기 우리의 국조(國祖)인데, 보호각 하나 놓아드려야 되는거 아닐까?
저렇게 눈과 바람을 맞게 놔두는 것은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  단군성전(檀君聖殿)

석장승을 지나 대략 1km 정도만 전진하고 발걸음을 접고 말았다. 후배가 힘들다고 그러니 더 이
상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발길을 접
었다. 발을 돌린 지점은 아마도 해발 1,000m 정도 될 것이다. (당골광장이 거의 850m임)

내려가는 길에 당골광장 남쪽에 자리한 단군성전에 들렸다. 이 성전은 옛 조선(朝鮮)의 시조이
자 우리의 국조인 단군의 사당으로 1975년에 구성된 '국조단군봉사회'가 1982년에 성금을 모아
창건하고 단군성전이라 하였다. 그의 사당을 이곳에 지은 것은 그에게 제를 지내는 천제단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성전을 수리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성전 현판의 글씨는 신덕선이 썼다.

비록 오래된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현장이다. 하지
만 등산객과 탐방객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등산로에서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 되
는 곳에 있기도 하지만 썩어빠진 이 땅의 권력층에 의해 점차 오염되가는 역사교육의 부실과 무
관심 조장도 한몫한다.


▲  단군성전에 봉안된 단군 영정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진 단군의 영정(影幀),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적이다. 단
군은 옛 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의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한 제정일치(
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를 비롯하
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과 만주, 요서,
화북(華北) 일부를 다스린 동아시아 강대국이다. 조선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나
산소도 아까운 식민사관(植民史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반도 북부와 요동으로 크게 축소시켰다.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의 지배권을 차지하
려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를 비롯한 서쪽
2,000리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기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
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국방력을 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
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복하고 그 자신감으로 조선을 협박했다.
조선이 반발하며 먼저 대륙을 공격하자 한무제는 이때다 싶어 군사를 보내 반격을 가했는데, 한
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러자 뚜껑이 단단히 열린 한무제가 다시
군사들을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군(漢軍)은 정비를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
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우거왕(右渠王)이 반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
해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
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데,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강단사학자와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쪽으로 보고 있다. 한4군의 하나로 유
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도 낙랑국과 낙랑군(樂浪郡) 2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의견이 분
분하나 대체로 낙랑국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그러니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맞다. 만약 낙
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명
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
族)으로 대표되는 조선에서 만들어 대륙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
륙으로 넘어가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대흥안령산맥 쪽에서 발생
한 홍산문명(紅山文明)도 조선의 찬란했던 흔적이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  하얀 기와집이 된 단군성전 삼문(三門) - 단군성전에서 바라본 모습
성전 뜨락에는 눈이 수북하게 덮여 설경의 극치를 이룬다.

▲  단군성전 삼문 - 바깥에서 본 모습
눈이 지붕에 가득하니 혹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눈 자체는 거의 무게가 없지만 저리 두툼하게 쌓이면 정말 몇톤이 되버린다.

▲  석장승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  눈축제를 위해 조성된 커다란 눈 이글루
마치 눈을 뒤집어 쓴 거대한 석실고분(石室古墳) 같다.

▲  당골광장에서 당골 종점으로 내려가는 길

▲  당골 통나무집에서 먹은 곤드레밥과 반찬들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눈 속에 애써 묻으며 당골 종점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은
12시, 뱃속에서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여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적당한 곳을 찾다가 통나
무집이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이곳은 여행사 단체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신발을 벗어야 되는 뜨끈한 방에 들어가 곤드레밥
과 해물파전, 동동주,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잠시 뒤 콩나물과 더덕, 김치, 두부 등 8가지의 정
갈한 밑반찬이 앞에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양념장이 버무러진 커다란 두부는 반찬의 갑(甲)으
로 두부 맛이 좋아 2번 정도 더 시킨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반찬을 먹고 있으니 곤드레밥과 소고기국밥 등의 식사가 나타난다. 곤드레밥은 정선과 평창, 영
월, 태백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곤드레나물을 비롯한 산채 나물과 김가루가 버무려진 일종의 비
빔밥이다. 곤드레밥에는 늘 구수한 된장찌개가 짝궁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의 찌개는 두부가 풍
부하다. 그렇게 먹고 있으려니 동그란 해물파전과 동동주가 3차로 나타난다.
파전은 가격에 비해 좀 커보인다. 허나 반찬과 곤드레밥으로 어느 정도 배가 들어찬 상태기 때
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전은 일부를 남기고 거진 다 먹었는데, 뱃속에서 그만
보내라고 북소리가 울린다. 그러다보니 동동주는 둘이서 절반 밖에 마시질 못했다.


▲  해물파전의 위엄

이렇게 풍성하게 점심을 먹으니 졸음이 슬쩍 나를 희롱하며 배 깔고 한숨 자라고 보챈다. 졸음
의 희롱을 과감히 내던지고, 커피와 식당 내부 연탄 난로에서 대핀 보리차를 여러 잔 마시며 식
곤증과 추위를 몰아내고 밖으로 나선다.

이렇게 태백산과의 짧은 인연을 마치고, 어디로 갈까 머리를 굴리다가 미인폭포로 가기로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향했다. 이후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란다.
(☞ 미인폭포 보러가기)

★ 태백산 당골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① 철도 이용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태백역으로 가는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6회(휴
  일에는 7회) 운행한다.
* 강릉역과 동해역에서 청량리행 열차(1일 6회, 휴일 7회)를 타고 태백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북부)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직통은
  1일 9회 운행)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안산,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 원주, 제천, 삼척, 강릉, 영주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터미널에서 당골행 7번 시내/좌석버스가 1일 20여 회 운행
④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고한 → 태백시내 →
  당골주차장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상동 → 유일사/백단
  사 → 당골주차장

※ 태백산 관람 정보 (2014년 2월 기준)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 (단체 1,500원) / 학생,군인 1,500원 (단체 1,000
  원) / 어린이 7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대형 4,000원 / 소형 2,000원
* 태백산 눈축제는 1월 중/하순에 2주 정도 열린다. (열리는 시기는 매해마다 다름)
* 당골에는 콘도형 태백산민박촌이 있다. 현재 15동 73실이 있으며,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된다.
  ☞ 태백산 민박촌 홈페이지 가기 (문의 ☎ 033-553-7440~41)
* 태백산 눈썰매장 이용료 : 어른 5,000원 / 어린이 4,000원
* 태백산 당골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태백산도립공원 사업소 ☎ 033-550-2741~42)
* 태백산도립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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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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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2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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