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권 사진,답사기/서울 도심(북촌, 서촌 등)'에 해당되는 글 63건

  1. 2024.02.17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2. 2023.11.06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늦가을 나들이 <정동 회화나무,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3. 2023.06.24 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2
  4. 2023.04.16 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5. 2023.02.06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6. 2022.11.03 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를 거닐다 <필운대, 백사이항복집터, 배화여고, 필운동 홍건익가옥, 월암동> 2
  7. 2022.05.18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덕수궁돌담길 역사 기행 (심슨기념관, 유관순우물, 구 신아일보별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8. 2022.03.18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9. 2022.02.01 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1
  10. 2022.01.09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이자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남산야외식물원, 남산공원길, 남산팔각정, 한양도성)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



'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후원 뒷길
겨울 나들이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구역

▲  중앙고등학교 (본관 주변)

▲  창덕궁 후원 돌담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끝 무렵, 북촌(北村)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와 창덕궁 후
원 뒷길을 찾았다.
북촌과 창덕궁 후원 뒷길은 내 즐겨찾기 명소로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
미 지겹도록 복습을 한 곳이지만 자꾸만 손과 발이 가니 그들에게 단단히 중독된 모양이
다.
마침 며칠 전 겨울 제국(帝國)이 서울에 눈폭탄을 투하했는데 그들의 설경(雪景)이 갑자
기 당겨 눈이 녹을새라 부랴부랴 사진기를 챙겨들고 북촌으로 달려갔다. (본글에서는 중
앙고와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만 다루겠음)



 

♠  북촌의 한류 명소이자 늙은 근대 건축물을 여럿 간직한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교문 옆에 자라난 계동(桂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북쪽 끝자락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이곳은 100년 이상 숙성된 학교로 왜정(倭政) 시절과 1940~1970년대에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
했던 현장이다. 또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했으며, 창덕궁의 금지된 구역인 신선원전(新璿
源殿) 구역을 유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
관광지로 격하게 뜨면서 북촌의 필수 명소로 성장했다.

북촌의 주요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
仁王山)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가회동11번지로 이어
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바로 안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앙상한 가지
를 드러내며 나처럼 추운 시절을 원망하는 그는 높이 20m, 가슴둘레 3.1m의 훤칠한 나무로 오
랜 세월 계동 지역의 수호신으로 숭상을 받아왔다. 하여 매년 가을, 지역 사람들은 오곡백과(
五穀百果)를 차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
를 삼목이식을 하는 등, 나름 의미가 깊은 나무이다.
나무 옆에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
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햇님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운동장 대신 콘크리
트로 다진 너른 뜨락이 닦여져 있으며, 그 공간 복판에 넓고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테두리에
얕게 난간석을 두르고 그 안에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
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
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하니 누가 여길 고등학교라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나 서구의 명문 학교라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이,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으며, 본관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나란히 나타나고 그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비로
소 인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
며 운동장 동쪽 밑에 신선원전과 의효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간략한 역사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
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년 4월에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이 땅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3대 교훈(校訓)으로
삼고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으로 삼았다.
1917년 12월 김성수의 큰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교
를 이전했다. 원파 김기중은 김성수 이상이나 중앙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1운동을 계획
했으며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
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로 개명했다.
1921년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로 본관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으며 1941년에는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강당을 지었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임시로 모표를 바꾸기도 했다. 1940년에는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1941년 한 학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
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
대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
유산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으며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
면서 이 땅의 고등학교 중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전파를 타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북촌의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예전에는 일요일과 공휴일에 학교를 개방했으나 2020년 이후에는 거의 개방하지 않음)
 
* 중앙고등학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6.10만세 기념비 (뒤쪽 건물은 원파도서관)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
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하여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인 6월 10일, 황제의 대여(大輿)가 종로3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
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 운동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중세시대 유럽 성처럼 생긴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으킨 김성수의 큰
아버지인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문을 열었던 인문학박
물관이 야심 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차려진 박물관으로 그 이름 그대로 인문학(人文學)
자료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었으며 북촌의 다른 민간 박물관과 달리 입장료도 저렴하여 참으로
착한 박물관이었다. (어른 입장료가 1,000원이었음) 허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
하듯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창밖에 빗방울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2010년과 2011년에 2
번 관람을 했음)


▲  본관 주변에 세워진 계원 노백린(桂園 盧伯麟) 집터 표석

이곳에는 대한제국 고위 무관이자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던 노백린(1875~1926) 장군의 집
이 있었다.
그는 문무(文武)에 출중했고 기개가 높았으며 공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미대륙에서 최초로 한
인(韓人) 비행학교를 세워 독립군 공군을 양성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와서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을 지냈으며 특히 군사 부분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허나 1926년 1월 22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의 양옥 단칸방에서 조국의 독립을
누리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고를 일구었으나 친일파로 구린 모습을
보였던 김성수는 무려 64살씩이나 살았음)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자리해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에서 유학을 하던 송계백(宋繼白. 1896~
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
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먹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
운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바로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
웠다.


▲  창립30주년 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고려대 본관과 많이도 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는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너지
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었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 있게 쌓
아올렸다. 그래서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 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을 다녔던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
이다. 비록 왜정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쓰이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
로 유서가 깊다. 또한 20세기 중/후반 유명 인
사들이 많이 나온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
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 분위기도 진하게 나온
다. 나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
는 곳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
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
라 효과가 얼마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본관의 뒷모습
마치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  본관 뒤쪽에 숨겨진 빛바랜 종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했던 위엄 돋는 종이었으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할 뿐이며,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
변의 적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
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이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허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본관 뒤쪽에는 붉은 피부의 비슷한 모습을 지닌 서관과 동관이 있다.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으로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자형 구조이다. 본관과는 분위기
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
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소년군 창설과 6.10만세운동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살아간다.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을 포함하
면 3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신관에서 바라본 동관

▲  동관의 뒷모습


▲  선비의 모습으로 지어진 원파 김기중(金祺中) 동상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복판에 원
파(圓坡)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
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龍潭, 전북 진안) 군수(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달려가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위
해 교육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으며 왜열도
로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직접 살폈고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中)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조카(김성수)
에게 운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나 그때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10년을 더 살았다면 친일파로 노선을 바꾼 조카에게 크게 실망
하여 피가 꺼꾸로 솟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결국 그 잘난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교육 사업
에 적지 않게 똥칠을 했다.


▲  신관 앞에 뿌리를 내린 히말리야시다나무 (종로구 2013-43호)
본관을 조금 닮은 신관 앞에는 어려운 이름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히말리야시다나무가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13m, 둘레 190cm 정도로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아마도 왜정 때 학교 행사 기념으로 심은듯싶다.

▲  옛 숙직실터에 새로 지은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기와집이 있다. 네모나게 다져진 석축
위에 계단을 늘어뜨리며 들어앉은 이 건물은 김성수가 1917년에 지은 교장 사택 겸 숙직실(宿
直室)을 복원한 것으로 원래는 대강당 정문 앞에 있었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학교를 찾아와 이곳 숙직실에서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
윤에게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처음으로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했다,
즉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유서 깊은 현장인 것이다.

그 숙직실은 1941년 지금의 강당을 만들면서 철거되었는데 아마도 그런 사연을 알아챈 왜정의
강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73년 지금 자리에 다시 지어 3.1기념관으로 삼았다.
기념관 앞에는 어디서 업어온 문인석이 홀(忽)을 쥐어들고 서 있으며, 건물 뒤로 담장과 울창
한 수목이 보이는데 그곳이 동궐인 창덕궁이다.


▲  겨울에 푹 잠긴 중앙고 산책로 (신관, 동관 옆길)

▲  눈에 뒤덮힌 중앙중고교 운동장과 새 건물로 이루어진 중앙중학교
운동장을 경계로 남쪽은 중앙고등학교, 북쪽은 중앙중학교로 이루어져 있다.



 

♠  중앙고 운동장에서 바라본 창덕궁 신선원전(昌德宮 新璿源殿)
- 사적 122호


▲  비공개로 사람의 손때마저 희미해진 신선원전

중앙고에 왔다면 꼭 살펴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창덕궁의 숨겨진 속살인 신선원전이다.
그렇다고 신선원전이 중앙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에 있었다
면 중앙고가 지금의 자리에 속시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고를 둘러보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축구장 골대가 있는 너른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
장 북쪽에는 중앙중학교가 있고, 그 뒤에 삼삼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데, 이는 와룡산(臥龍山)
으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의 동쪽 끝자락이다. 운동장 서쪽은 가회동(嘉會洞) 주택가로 막
혀있고 동쪽은 철책이 높이 쳐져 있는데, 그 너머로 숲이 펼쳐져 있다.
중앙고 본관이 주는 착시현상을 간파하고 서관과 동관을 거쳐 이곳까지 용케 들어온 사람들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 착시현상에 빠져 본관 앞만 맴돌다가 나가버림) 상당수 운동장만 보
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운동장 동쪽에 철책이 있고 마땅한 안내문도 없으니 비록 밑에 수상한 기와집들이 널려있어도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은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창덕
궁의 비공개 구역인 신선원전, 의효전이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중 유난히 통제구역이 많았던 창덕궁,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21세기 이후 후원(後苑) 상당수와 낙선재(樂善齋)를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신선원전과 의효전 구역은 여전히 대문을 굳게 잠그며 공개를 꺼리고 있
으며, 그런 사유로 이곳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속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즐기는 신선원전은 중앙고 운동장에서만큼
은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그 속살을 일정 부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장이 그곳보다 지
대(地臺)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철책을 통해서 봐야 된다는 한계점이 있다.

중앙고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앙고가 창덕궁 궁역(宮域)보다 조금 지
대가 높긴 하지만 담장이 걸쳐진 곳<운동장 부분 제외>만큼은 교내보다 높으며 민가(民家)의
담장도 아닌 지체 높은 궁궐의 담장이라 감히 건드리기도 그렇다. 허나 운동장만큼은 사정이
달라 운동장이 신선원전과 궁궐 담장보다 더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1973년 운동장을 넓히고자 축대를 높이 다졌기 때문인데, 철조망을 높이 친 것은 자칫 월담을
하거나 운동 도중 공이 넘어가 그곳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일개 학교의 운동장이 궁궐 사당보다 높이 떠있다는 것이 다소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국제적인 호구 짓을 일삼다가 거하게 쪽박을 찬 옛 제국의 잔재물이라고 해도 이렇게
까지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학교 입장에서는 여기 말고는 운동장을 다질 땅
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  신선원전의 옆 모습

▲  신선원전의 두툼한 뒷모습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조선은 명(明)의 충직한 제후국(諸侯國)이
라 명이 망하자 옛 명나라의 제왕을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아주 꼴사나는 이유로 숙
종(肅宗) 때 대보단을 만든 것이다.
대보단에는 고려와 조선을 지극히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과 식량을 과하게 보내주어 조선천자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신종(神宗), 그리고 명
나라를 완전히 끝장낸 마지막 군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해 매년 국가 재정을 축내며 제
사를 지냈다.

창덕궁에 선원전(璿源殿)이 지어진 것은 1656년이다. 이때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에 있던 경
화당(景華堂)을 인정전(仁政殿) 서쪽으로 옮겨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선원전으로 삼
았는데<이를 구(舊)선원전이라고 부름> 1921년 왜정이 대보단을 때려부시고 덕수궁(경운궁)에
있던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구선원전과 덕수궁(경운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과 관련 유
물도 거의 옮겨와 신선원전이라 하였다. (이전의 선원전과 구분하고자 그리 이름을 지었음)

이곳에는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제왕 12명의 어진 48본이 봉안되었으며, 어진을 걸어두
던 12개 감실(龕室)은 1900년대 의궤도설(儀軌圖說)과 일치해 왕실의 전통적인 법식을 충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어진은 6.25가 터지자 서둘러 부산(釜山)으로 옮겼지만 대부분 관리소홀로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었으며, 제례에 쓰였던 의장물 상당수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남아있던 노부(鹵簿, 제
왕이 나들이할 때 갖추던 의장물) 등 대부분의 유물은 2002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상(龍床)과 오봉도(五峯圖), 모란이 그려진 병풍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19~20세기 궁중 미술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감실과 당가(唐家), 용상 등 가구와 시설
물은 주칠(朱漆)이 아닌 황색(黃色)으로 칠했다.

신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사당이란 점 때문에 여전히 비공개를 고집하고 있다. 하여 이
곳에서만큼은 거의 인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의 손때마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요하기만 한 신선원전, 이곳이 과연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
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거기에 사당이라 그런지 종묘(宗廟)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도 적지
않게 배여 나온다. 다행히 늦게나마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년 동안 조사하여 '최후의 진전(眞殿) 창덕궁 신선원전'이란 도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선원전은 의효전(懿孝殿)과 재실(齋室), 수직사(守直舍),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진설청(眞說廳) 등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신선원전 권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
에서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원서동 빨래터에 있는 외삼문(外三門)은 이곳의 정
문이다.


▲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懿孝殿)

신선원전 남쪽에 있는 의효전은 원래 덕수궁(경운궁)에 있었다. 1904년 순종의 왕비인 순명효
황후(純明孝皇后)의 혼전(魂殿)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1921년 덕수궁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
길 때 덩달아 따라왔다.

사진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의효전 옆에는 몽답정(夢踏亭)과 몽답지(夢踏池)란 작은 연못
이 있다. 몽답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지냈던 김성응(金聖應, 1699~
1764)이 지은 것으로 영조(또는 숙종)가 꿈속에서 이 정자를 찾았다고 하여 꿈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뜻의 몽답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조도 몽답정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창덕
궁과 창경궁의 도면인 동궐도(東闕圖)에는 그의 존재가 나와있지 않아서 원래 이곳에 있던 것
은 아닌 듯싶다.


▲  중앙중고 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괘궁정(掛弓亭)

신선원전 구역에서 그나마 제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존재가 괘궁정이다. 이곳은 돌담이 운동
장 축대 밑으로 막 내려가는 비탈진 곳에 있으며, 중앙고 축구부 휴게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괘궁정은 1849년에 지어진 것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
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는 뜻으로 왕실에서 종묘만큼이
나 애지중지했던 대보단 바로 옆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정자를 만든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정자의 모습을 보면 일반 병사들이 연습을 했다기보다는 훈련대장 등 상위 등
급의 무관들이 활 연습을 하거나 군영(軍營)을 바라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듯 싶다.
북영의 군사들은 제왕의 호위를 담당하는데, 제왕이 궁궐을 옮기면 북영 본부도 같이 옮긴다.
제왕이 창덕궁에 머무는 경우에는 궁궐에서 다소 구석인 대보단 인근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괘궁정은 달랑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정자
를 지었다. 얼마나 인적이 없는지 수북히 깔린 눈에 사람 발자국은커녕 새 발자국도 없으며,
정자에 정적만 감도니 언제 사람이 들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 찾
아올지 모를 화마에 대비하여 소화기가 한쪽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운동장 철조망을 통해 신선원전 일대를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구경했지만 언
젠가는 쿨하게 해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반드시 그래야 됨~) 그때가 되면 까치발처럼 힘들
게 구경해야 되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 창덕궁 신선원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 (창덕궁5길 22-4)



 

♠  서울 도심 뒷통수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과 창덕궁 돌담

창덕궁 돌담이 이어진 중앙중학교 동쪽 길을 오르면 고려사이버대학교가 나온다. 이들은 중앙
중고와 함께 고려대학교 계열로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서쪽)은 북촌과 삼청동으
로 이어지며, 돌담이 펼쳐진 오른쪽(동쪽) 길이 바로 창덕궁 후원 뒷길이다. 사이버대학교 갈
림길이 중앙중고의 후문으로 정문과 달리 문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쪽 길로 들어서면 길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서 도심
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동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눈을 뒤집어쓰며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수구문 주변)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
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  북악산(백악산)의 수분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이 베푼 것으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가뭄이 극성일 때
는 수구문도 흐르는 물이 거의 없어 한가하지만,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수구문 철창을 녹여버
릴 정도로 물이 들어온다.


▲  석양이 지는 수구문 주변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릴 수 있을 정도에 후원 뒷길은 옥류정 입구의 너른 공터에서 끝
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는데, 오
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
점(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
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별로 없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한적하고 고즈넉하다. 내가 좋
아하는 길의 일원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해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
둑해진다.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눈에 묻힌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눈에 묻혀있는데, 그는 북악산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와룡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
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에 푹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북악산 와룡산 밑에 자리한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오래된 경승지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일절 없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와룡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정자 이름이 옥류정이 된 것은 북악산(백악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
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도 살짝 이어져 있어 그
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피부로 쓰여진 옥류정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공원길
이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
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  후원 뒷길 고개
여기서는 창덕궁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는데,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다.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감사원에서 성북동을 이어주는 와룡공원길 밑부분
으로 서울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이곳은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의 일부처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담길 주변 역시 나
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격하게 추천하
고 싶다.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며 흘러가는
창덕궁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오
래된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허나 그것은 세월이 해결해줄 것이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은 창덕궁 관람료에 후원 관람료까지 얹혀야 들어갈 수 있는 비싼 공
간으로 성균관대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며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도 시야에 들어온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시멘
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
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겨울 한복판에 찾아간 북촌~창덕궁 후원 뒷길 눈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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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늦가을 나들이 <정동 회화나무,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서울 정동~덕수궁돌담길 산책



'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나들이 '

▲  덕수궁 돌담길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 앞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주요 명소이자 서울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덕수궁 돌담
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데, 꽤 번잡한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지만 나무를 머
금은 공간이 많아서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조선부터 현대까지 600년
이상의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정말 그윽하다. 바로 그 매
력 때문에 오랫동안 천하 사람들의 나들이, 답사 명소로 격한 사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
한 이곳에 퐁당퐁당 빠져 종종 발걸음을 하고 있다.



 

♠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유관순 우물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늦가을이 익어가던 11월의 첫 무렵, 오랫만에 정동을 찾았다. 이번에는 정동4거리(5호선 서대
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정동길로 접근했는데, 그 길을 3~4분 정도 들어가면 야무지
게 자라난 회화나무 1그루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대자연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
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하지만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축했는
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洋夷)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면서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동의 이름 유래가 된 정릉(貞陵)부터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켰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먹고 자란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높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늙은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심
슨기념관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
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는데, 그를 기리
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화~토요일 10~17시, 월요일과 휴일은 휴관)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평
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시 서울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
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는데,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
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 여사의
흉상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 장안에서 가장 전
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했는데, 그 건물은 6.25시절에 파괴되어 사라졌다. 하여 1970년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을 세웠으며,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을 세웠다.

1899년 5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彰義門)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그들의 소풍은 500년에 처음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만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닫은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있다.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
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
나 빨래를 했으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
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지금은 죽은 우물로 뚜껑이 닫혀져 있어 물이 콸콸 치솟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유관순우물과 은행나무
한참 녹음(綠陰)에 젖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우관순우물에 그늘을 드리우며 수채화처럼 고
운 풍경을 자아낸다. 나무의 나이는 약 100년
정도로 여겨진다.


▲  늦가을에 의해 노란 머리가 되버린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지금의 자
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졸업생들의 흔쾌한 후원금으로 팔작지
붕 기와문으로 교체했다. 그러다가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용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조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
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정말로 특별한 여학교였던 것이다.

* 심슨기념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1 (정동길 26, ☎ 02-21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이화학당 교문 안쪽에 누워있는 손탁호텔터 표석

이화학당 부근에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있었다. 이 호텔은
러시아 사람인 손탁(孫澤, Miss Sontag)이 세웠는데, 그가 32살이던 1885년 동생의 남편인 초
대 러시아공사 베베르(Waeber. K)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1895년 친러파를 중심으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손탁 집에 모여서
고종을 경복궁(景福宮)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데려오는 계획을 논의했다. 손탁과 베베르는 그
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끌어냈고, 그 공으로 손탁은 고종으로부터 왕실의
부속건물인 기포드(D.L. Gifford) 선교사의 한옥을 하사 받게 된다.
손탁은 자신이 쓰던 건물을 클럽으로 개조하여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으며 정동구락부
의 호스티스(여주인)가 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을 위한 호텔이 없는지라 조정에서 1902년 2층 규모의 양관을 만들어
고종의 이쁨을 얻은 손탁에게 경영권을 주었다. 그 양관이 바로 손탁호텔<손탁빈관(孫澤賓館)
>로 내부를 서양풍으로 꾸몄다.
조선 정치가와 사업가, 서양 애들, 청나라 애들, 왜국 애들 등 다양한 사람이 이용했으며, 그
들의 숙식 및 모임 장소로 크게 호황을 누렸다. 러일전쟁 때는 영국 수상으로 유명한 처칠이
하룻밤을 묵었고, 1905년 11월에는 이토히로부미가 머물며 을사조약 체결을 위한 행동을 전개
하기도 했다.

손탁호텔은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쓰였고, 1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과 주방, 식당, 커피샵을 갖
추고 있었는데, 특히 커피샵과 서양요리 식당은 이 땅 최초로 의미가 깊으며 외교관들을 모아
놓고 서양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여 이 땅에 처음으로 서양 영화를 소개한 현장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

손탁은 러시아말과 조선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에도 능통해 고종 황제의 통역관으로 활동하
기도 했으며, 조선에서 24년을 머물다가 1909년 조선에서 번 막대한 재산을 싸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의 나라인 러시아가 망했기 때문이다.
왜인 기구찌가 쓴 '한말에 등장한 여성'에서 손탁이 조선에 왔을 때는 선망 받는 30세의 꽃같
은 미모였는데, 떠날 때는 아름답던 얼굴이 파란과 비통으로 시들어 볼품이 없다고 적었다.

러시아로 돌아간 손탁은 별장을 지어 재산을 관리하려고 했는데, 동생의 권유로 재산 대부분
을 러시아은행에 예금하고 나머지는 러시아 기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
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고, 소련공산정권은 손탁의 돈을 모두 몰수해버렸다. 하여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은 손탁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을 뼈저리게 느끼며, 1925년 71세의 나이로 혼인
도 하지 못한 노처녀 상태로 사망하고 말았다.

손탁이 떠난 이후 손탁호텔은 미국인이 관리하다가 그 자리에 감리교학교가 들어섰으며, 1917
년 이화학당이 미국감리교회에서 모금한 23,060달러로 손탁호텔을 인수해 기숙사로 사용했다.
허나 1922년 호텔을 철거하여 그 자리에 프라이홀(Frey Hall)을 세움으로써 손탁호텔의 역사
는 끊기고 만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교문 맞은편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에 하얀 피부의 날씬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 러시아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일찍이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시아를 막아
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는데, 그때 조선
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제공했다. 러
시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고 각
각 면에 출입문을 내었으며,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
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를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
라사(俄羅斯)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전망탑(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
며, 6.25 때 탑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났다. 탑 역시 그때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그 주변에 흩어진 여러 나
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놓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
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모두 끊어진 상태이다.


▲  뒤쪽(북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바로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
의 우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가 저지른 을미사변(乙未事變) 사건으로 고종은 왜를 극히 불신하며 경복궁에서 불
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윤용(
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
하게 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4글자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들은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
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
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시로 폐
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일절 금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전망탑

▲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가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여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했으며, 명성황후의 제단까
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퍼주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지
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다.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서
잠시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면
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싹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대
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잔뜩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
년 독특한 모습의 하얀 피부의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
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
게 묵살되었다. 전망탑에서 남쪽으로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8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이라도 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교문에서 덕수궁 방면으로 3분 정도 가면 고색이 창연한 붉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이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지금의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 공부방에서 비
롯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어서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게 되었
는데,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
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 작업이 무산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 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 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로 지어야 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면서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된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두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가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구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 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중심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묵상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
린다.

* 정동제일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배재학당 동관(培材學堂 東館) - 서울 지방기념물 16호

▲  정면에서 바라본 배재학당 동관

정동교회에서 서소문 쪽으로 넘어가면 고개 정상부(서울시립미술관 서쪽)에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옛 배재학당 동관이 마중을 한다.
이 건물은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100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음에도 키다리 빌딩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 옆에는 배재학원 소속의 배재정동빌딩이 높이 솟아있음)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발상지이자 이 땅 최초로 벽돌로 지어진 학교 건물로 배재중
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대전)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서울에 들어와 스크랜턴의 집을 사들여 1885년 8월, 학생 2명을 모아 가르치면서 배재학당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고종은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으로 '배재학당'
이란 이름을 하사했으며 그해 본관(1887년)이 지어졌다.

아펜젤러는 학당의 설립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
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그는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이라 쓴 학당훈(訓)을 내걸며 일반적인 교육 외
에 연설회, 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
된 인쇄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인쇄시설이다.

학생수가 계속 늘자 1916년 동관을 지었고, 1923년에 서관을, 1933년 대강당을 차례대로 지어
올려 제법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들 건물은 조선인 건축가 심의석이 지었다.
1984년 한참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강동구 고덕동(高德洞)으로 중고등학교 모두를 옮겼으며
동관만 제자리에 두어 옛 자리를 추억하는 용도로 삼았다. 서관은 고덕동으로 가져왔으나 대
강당과 본관 등은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배재공원을 닦았다.


▲  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뒷모습

동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교실로 주로 이용되었다.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남아있고, 외장 및 치장 쌓기 벽돌구조도 뛰어나며 건물의 형태도 휼륭해
이 땅의 근대건축의 주요 지표로 삼을 정도이다.

학교가 강 건너로 가버린 이후, 빈 채로 두었다가 내부를 손질하여 2008년 7월 24일 배재학당
의 역사를 집대성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삼았다. 지하 1층에 사무실을 겸한 학예연구실
을 두었고, 1층에는 체험교실과 상설전시실1, 특별전시실을, 2층에는 상설전시실2, 기획전시
실을, 그리고 3층에는 세미나실과 회의실을 두었다. 이중 1,2층만 관람이 가능하며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하여 배재학당의 140년 역사를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다.

배재정동빌딩 주변에는 1896년에 세워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옛터를 알리는 표석과 신
교육(新敎育) 발상지를 강조하는 표석이 있으며 배재 학생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졸업사진의
단골 촬영지로도 활약했던 늙은 향나무가 옛 교정을 지킨다.


▲  오랜 세월 배재학당을 지켜왔던 향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호

배재학당 향나무는 약 580년 숙성된 나무로 앞서 정동 회화나무보다 10년 정도 늙었다. <1972
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525년> 높이는 16.5m로 동관과 키가 비슷하며
둘레는 2.25m로 높이에 비해 날씬하다.
왜정 때 활약했던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좋아했던 나무라고 전하는데, 미국 하버드대 매캔교
수가 196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우연히 접한 소월의 주옥 같은 시에 완전
히 퐁당퐁당 빠져들었다. 하여 그의 시를 통해 한국 문학을 공부했으며 소월과 인연이 깊다는
이 향나무의 사연을 전해 듣고 그가 죽지 않도록 보살폈다.

또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도 한 토막 전해오고 있는데, 나무 상부에 박힌 못은 임진왜란 시절
에 서울을 점령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묶고자 박았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훤칠
하지만 그때(1592년)는 기껏해야 140살 정도의 키도 작았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겠다. 허나
이 역시 부질없는 전설일 뿐이다. (고약한 왜정이 배재학당의 기운을 누르고자 향나무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전설을 붙인 것으로 여겨짐)


▲  옛 배재학당의 본관 벽돌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887년 배재학당 본관을 지을 때 투입된 붉은 벽돌이다. 본관을 밀어버리면서
벽돌 일부를 남겨 이렇게 박물관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마침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빗장이 활짝 열려 있어 안으로 흔쾌히 들어가보았다. 금지된 구
역을 제외한 개방된 구역을 모두 기웃거려 보았는데, 촬영금지를 알리는 딱딱한 문구가 도처
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어 새가슴 마냥 극히 일부만 사진에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담고
싶지만 지나친 욕심은 늘 탈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가끔씩 새가슴이 되는 것도 괜찮다.


▲  고종이 1887년에 내린 배재학당 현판의 위엄
명필로 유명했던 정학교(丁學敎)가 고종의 어명을 받아 쓴 것으로 김윤식(金允植)이
학교에 전달했다. 아펜젤러는 이를 매우 감사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학교 간판으로 삼았다.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이 땅의 근대교육에 크게 기여한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증(文化勳章證)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 국민장 훈장증과 훈장

▲  배재학당 옛터의 싱그러운 변신, 배재공원

배재학당 동관과 러시아대사관 사이에는 배재공원이 달달하게 자리해 있다. 이곳은 옛 배재학
당 자리로 학교가 강동으로 이전되자 본관 등을 밀어버리고 동관 북쪽에 아담하게 공원을 닦
아 옛 정동 시절을 아련히 추억하고 있다.
공원의 동서 폭은 100m 정도로 조촐한 규모이나 회색빛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로 주변 직
장인들이 많이 의지하러 오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동은 도심 한복판에 박혀있지만 배재공원, 정동공원 등의 공원이 있고 덕수궁(경운궁)과 미
국대사관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게다가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등 500년 이상 묵
은 나무를 중심으로 가로수도 많이 심어져 있어 비록 높은 빌딩이 주변에 즐비해 도심 분위기
는 어쩔 수 없지만 번잡한 분위기는 그리 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한제국 시절과 현대, 그리고
자연이 적절히 섞인 조그만 도시나 별천지라고나 할까? 그것이 정동의 강한 매력이다.

* 배재학당 동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5 (서소문로11길 19, ☎ 02-319-5578)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재공원

▲  늦가을 누님이 살짝 다녀간 서울시립미술관 진입로

정동교회 앞 분수대 교차로에서 박석이 입혀진 숲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옛 대법원(大法院
) 건물에 둥지를 튼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한참 때는 특별전 초청권이나 공짜표를 어디선가
구하여 여인네들과 자주 찾곤 하였는데 이제는 언제 시립미술관을 스쳤는지 기억 조차 희미하
다.

이렇게 하여 정동 늦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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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늦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에 서울 도심의 꿀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는
서촌(西村, 웃대)을 찾았다.
서촌은 원래 서대문과 경희궁(慶熙宮) 주변을 일컬었고, 경복궁 서쪽 동네는 웃대라 불
렸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이들 지역은 서촌으로 합쳐졌다. 요즘에는 경복궁(
景福宮)과 인왕산(仁王山) 사이 지역을 서촌이라 크게 부르고 있으며, 세종이 1397년에
태어난 곳이라 해서 세종마을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촌은 가까운 북촌(北村)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부암동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
속해서 훔치고 있는 내 즐겨찾기 명소로 한때는 북촌처럼 구석구석 누비고 다녀 안가본
골목이 없을 정도이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다른 즐겨찾기 명소들이 생겨나면
서 조금은 시들어졌다.

늦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서촌 앓이가 다시금 도지면서 오래간만에 그곳을 찾았는데, 이
번에는 신교동과 옥인동, 청운동(淸雲洞)의 일부 명소들을 복습했다. (본글에서 선희궁
터와 백세청풍 바위글씨, 청운공원 일부는 늦여름에 담은 사진을 이용했음)


▲  백세청풍 바위글씨

▲  청운공원의 늦가을 풍경



 

♠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사묘(私廟), 선희궁터 사우(祠宇)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서촌 북부에 자리한 신교동(新橋洞)에는 국립서울농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정에는 고색이 깃
든 기와집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 선희궁터의 사우이다.

선희궁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년)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주(神主)를 봉안했
던 왕실의 사묘<私廟, 사친묘(私親廟)라고도 함>이다. 사묘란 왕후(王后) 반열에 들지 못하거
나 추존되지 못한 제왕의 생모(生母)나 친할머니를 위해 지은 사당이다.

영빈이씨는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로 1764
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죽인 자책감에 늘 괴로워하던 영조는 영빈에게 의열(義
烈)이란 시호를 내리고, 1765년 현재 자리에 사당을 지어 의열묘(義烈廟)라 했으며, 사도세자
의 아들인 정조(正祖)는 선희궁으로 이름을 높였다.

1870년 선희궁 신주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원위치시켰으며, 1908년 순종(純
宗)이 칙령(勅令)을 내려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묘(祠廟)을 대거 정리하면서 육상궁에 통합시
키고 선희궁은 사우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했다.
그 빈터에는 1931년 제생원(濟生院) 소속 맹아부(盲兒部)가 둥지를 틀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의 전신이다.


▲  반지하처럼 살아가고 있는 옛 선희궁터 초석

신교동교차로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서울농학교로 다가서면 길 오른쪽(북쪽)에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듯, 콘크리트 밑에 깔린 길다란 석축(石築)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선희궁을
받치던 늙은 초석들로 지금은 그 위에 학교 운동장을 깔았다.


▲  왕실 사당으로써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은 선희궁터 사우

▲  벽돌로 3면을 두룬 선희궁 사우의 뒷모습

▲  화려한 단청이 눈을 부시게 하는 사우 내부
텅 빈 내부에는 부질없는 먼지만이 가득하다.


서울농학교 안쪽에 자리한 선희궁 사우는 툇마루를 갖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정면을 제외하고 모두 벽돌로 둘렀으며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심한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진 기단 위에 가지런히 들어앉아 나름대로 위엄과 기품을 드러내고 있지만 한
참 후배인 키다리 학교 건물 속에 파묻혀 오히려 초라하게 다가온다.

교정에는 옛 선희궁의 식구였던 늙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사우 부근에, 
느티나무는 학교 정문에 있는데 정문에 있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250년이 넘었다. 250년이면
선희궁과 나이가 비슷하니 아마도 선희궁을 짓고 기념 식수로 심은 듯 싶으며, 높이 16m, 둘
레는 4.3m에 이른다. 사람들의 오랜 보살핌과 세월이란 마르지 않는 양분으로 나날이 커져가
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올해도 변함없이 교정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  신교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7호
학교 아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며 삭막한 속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희망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소중한 정자나무이다.


▲  200여 년 묵은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5호
앞의 느티나무와 달리 하늘로 곧게 솟아 늘씬한 자태를 뽐낸다.

▲  서울맹학교 정문과 우당기념관 앞에 자리한 잘생긴 은행나무
나이는 약 100년대로 여겨진다. 그가 걸쳤던 황금옷의 실타래가 풀어지면서
슬슬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한라산(漢拏山)과
덕유산 고지대에서 볼 수 있는 구상나무와 비슷해 보인다.


* 선희궁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1-1 서울농학교 내 (필운대로 103)



 

♠  서촌의 주요 명소였던 옛 청휘각(晴暉閣)터

▲  옥인동(玉仁洞) 산자락에 깃든 청휘각터(옥인동 산47번지)

서촌의 서부를 달리는 필운대로에서 옥인동 북서쪽 주택가를 가로질러 인왕산 자락으로 향하
면 자연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골목길(옥인5길)이 나온다. 길 동쪽은 서촌 주거지, 서쪽은
숲이 무성한 인왕산으로 서촌을 비롯한 서울 도심이 훤히 바라보이고, 인왕산 숲속이라 풍경
도 뛰어나 아름다운 절경만 보면 사죽을 못쓰던 옛날 사람들의 흔적이 반드시 있을 듯싶은데,
그 예상대로 청휘각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발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청휘각은 인왕산 동쪽 계곡의 하나인 옥류동(玉流洞)에 있던 정자이다. 그 옥류동은 인근 청
풍계와 수성동(水聲洞)과 더불어 혼란의 20세기를 거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해 약간의 시냇
물만 남아있는 정도로 개울은 거의 사라졌지만 숲은 여전하여 옛날의 경치를 조금 간직하고
있다.
청휘각이란 '비가 개인 뒤에 맑은 햇살이 비치는 누각'이란 시적(詩的)인 뜻이다.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이곳에 집을 짓고 그 후원에 지은 누정이 바
로 청휘각으로 겸재 정선은 장동 일대(청운동 지역)의 명소 8곳을 선정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청휘각 생전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정선이 아니었다면 청휘각의 생
김새조차 모를 뻔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청휘각

정선이 그린 청휘각 그림을 보면 청휘각 주변은 온통 소나무를 비롯한 숲과 개울 뿐이다. 정
자 밑에는 서촌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청휘각을 후원으로 삼았다는 김수항 집은 나와있
지 않아 그 집은 진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많은 문인(文人)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청휘각은 대중적인 명
소가 되었으며, 그렇게 착했던 청휘각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인왕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
이나 20세기 초반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슬쩍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방과 6.25이
후 정자 밑까지 집들이 들어차 달동네처럼 변하면서 옥류동 계곡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청휘각 주변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아직 자연 지대를 유지하고 있어 청휘각 그림에
담긴 풍경의 절반 정도는 아직 유효하다.

청휘각은 서촌에 널린 소소한 명소에 불과하나 풍경만큼은 능히 갑(甲) 수준이다. 서촌의 조
그만 보탬도 줄 겸, 그리고 잃어버린 옛 경승지를 되찾는 차원에서 그림과 관련 자료를 참조
해 청휘각을 복원했으면 좋겠다. 골목길 밑을 제외하면 모두 숲이니 잃어버린 정자를 다시 일
으킬 공간도 충분하며, 숲과 계곡도 옛 모습 그대로 재현을 시킨다면 정말 금상첨화가 될 것
이다. 


▲  청휘각터로 인도하는 옥인5길 골목길
인왕산과 가까운 옥인동 윗동네는 아직 달동네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  인왕산과 서촌(웃대) 주거지의 경계를 가르는 옥인5길 골목길

▲  옥인동에서 바라본 청운동 주택가와 북악산(백악산)



 

♠  김상용(金尙容) 집터와 정철(鄭澈) 집터

▲  김상용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

서촌의 북쪽 끝을 잡고 있는 청운동은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사이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예로부터 절경을 자랑하던 이곳에는 늙은 바위글씨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백세청풍 바위글씨다. 바위글씨란 바위에 새긴 글씨로 어려운 말로
각자(刻子)라고 하는데, 요즘은 순수 우리말인 바위글씨로 많이 불린다.

백세청풍 바위글씨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새긴 것이다. 지금은 달랑 4자만 남아있지
만 원래는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 8글자로 앞의 4글자는 왜정 때 영구히 지워지고 말
았다.
또한 이들 글씨의 보금자리인 바위 위에 높게 석축을 쌓고 커다란 주택을 세우면서 석축에 제
대로 깔린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 형태가 완전히 사람 발에 깔린 개미 같다. 그나마 뒤늦
게나마 바위 앞에 철책을 둘러 보호에 나서고는 있으니 문화유산 보존에 야박한 이 땅의 현실
에서는 그것으로도 다행이다. 기분 같아서는 바위를 뭉개고 있는 집들과 석축을 말끔히 지워
버려 바위에게 자유를 주고 싶을 정도이다.

바위글씨의 주인공인 김상용은 1607년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려
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짓고 바위에 8글자를 새겼다. 그 연유로 이곳을 흐르던
계곡이 청풍계(淸風溪)라 불리게 되었으며,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白雲洞)의 이름을 따서 지
금의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壯洞)이라 불림>
서촌의 경승지이자 서울 굴지의 명소로 찬양을 받았던 청풍계는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재벌인 미쓰이(三井)가 이곳을 매입하여 건물을 지으면서 개념없이 마구 아작을 내기
시작했다. 졸졸졸~ 흐르던 개울을 생매장시키고 바위를 깨뜨렸으며, 계곡에 단 1채 남았던 옛
건물인 태고정(太古亭) 마저 인부들의 숙소로 유린하면서 끝내 밀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
위글씨까지 손을 대어 글씨의 절반을 지워버렸다.

해방 이후 이곳에는 민가들이 들어차 청풍계가 다시 돌아올 여유도 주지 않았고, 졸부들의 저
택까지 백세청풍 바위에 깔고 앉으면서 이제는 전설 속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인왕제
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긴 겸재 정선이 청풍계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이나 했는지 이곳의 풍경
을 여러 장의 화폭에 담으면서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김상용의 집은 정선의 그림에 나오지 않아 겸재 이전에 사라진 모양이며, 이제는 백세청
풍 바위글씨만이 겨우 남아 그의 집터임을 아련히 귀띔해줄 따름이다.


▲  가까이서 본 백세청풍 바위글씨
옛날 글씨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부터 읽는다. 괜히 풍청세백이라 읽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
 

그럼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은 무슨 뜻일까? 백세(百世)는 100세대를 뜻한다. 대략 1세대를
30년으로 잡으니 무려 3,000년이 된다. 쉽게 말하면 오랜 세월을 뜻한다. 청풍에서 청(淸)은
맑고 높다는 뜻이고 풍(風)은 군자의 덕과 절개를 뜻한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
, '영원토록 변치 않는 높은 선비의 절개','대대로 맑은 가풍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그 유명
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옛 조선(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孤竹國) 사람들로 여기까지는 별 이상
은 없다. 김상용도 선비이자 양반이므로 그런 글귀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며, 양반들에게는
이상향과 같은 내용으로 그들이 자주 쓰던 글귀였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지워진 대명일월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크고 밝은 해와 달이다. 그
것도 맞긴 하지만 여기서 대명(大明)은 조선이 자존심도 버리며 지극히 섬기고 받들던 명나라
를 뜻한다. 그러니 명나라의 해와 달, 즉 명나라의 세상을 의미하며, 거기에 백세청풍까지 더
하면 명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키자는 뜻이 된다.
조선의 위정자들 상당수는 명나라를 '황명(皇明)','대명(大明)' 등이라 높여 불렀다. 게다가
조선의 정치 이념이자 선비와 사대부들이 익혔던 성리학(性理學)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성리학이 문치(文治)에는 좋을지 몰라도 문을 강조하고 무(武)를 멀리하는 함정이 있고, 주희
(朱熹)가 몽골 원나라에게 완전히 구겨진 한족(漢族) 잡종들의 체면을 만회하고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학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선의 위정자와 사대부들은 점
점 명에 대한 꼴사나운 사대주의에 젖게 되고 국방까지 덩달아 등한시 하면서 명나라도 한때
두려워했고 툭하면 북방 세력(여진족 등)을 초토화시켰던 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떨어진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조금 도와준 것을 가지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
라 떠벌리며 더욱 명나라에 딸랑거렸다.

그 명나라가 1644년 풍비박산이 났으니 조선의 선비와 위정자들은 완전 어버이를 잃은 양 크
나큰 충격에 빠졌다. 물론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도 명에 대한 그리
움에 한몫 했다. 명이 사라진 이후 조선 지배층과 유생들 사이에서 '명나라를 회복해야 된다'
,'명나라의 세월로 돌아가야 된다'는 아주 거지 같은 사상이 지배적으로 형성되었는데, 바로
그때 생겨난 단어가 바로 '대명일월' 4자이다. 그들의 꼴통 사대주의로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
들을 도탄에 밀어넣은 지배층과 유학자들의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이념이 담겨 있는 것
이다.

그런데 김상용이 글씨를 새긴 것은 명이 망하기 이전이므로 '대명일월'이란 단어는 아직 두드
러지지 않은 상태다. 그가 1637년에 죽었지만 그때까지도 명은 질기게 명줄을 유지하고 있었
다. 그러면 백세청풍은 몰라도 대명일월은 다른 사람이 새겼을 가능성이 큰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상용을 기리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뜻에
서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1
인자였던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는 말이 있다.


※ 김상용(1561~1637)은 누구인가?
김상용은 안동 김씨로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
하여 검열관(檢閱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승지(承旨)가 되어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으며, 서인(西人)의 일원으로 대
사성(大司成)을 비롯, 여러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서인패거리가 광해군(光海君)에게 반기를
들며 창의문을 뚫고 도성을 범하는 파렴치한 반란을 일으키자<인조반정(仁祖反正)> 거기에 참
여해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라는 큰 자리를 얻었으며,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
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1630년 나이가 70살에 이르러 조정에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우
의정(右議政)에 임명했다. 드디어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는 빈궁(嬪宮)과 원손(
元孫)을 호종하여 급히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해협을 건
너 손쉽게 강화성을 점령하자 그 분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문 문루(門樓)에 화약을 잔뜩 쌓
아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76살씩이나 살았던 인물로 자살을 택한 덕에 죽어서는 충신의 대접을 제
대로 받았다. 인조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강화군 선원면에 그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선원면이란 지명은 바로 그의 호에서 유래됨>


▲  송강 정철 집터

청운초등학교 앞 자하문로 길가에는 송강 정철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과 그의 시가 담긴 시비(
詩碑)들이 줄지어 있다. 정철은 조선 가사문학(歌詞文學)의 1인자로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비
롯한 그의 작품들은 초,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해 일명 학생들과
대입 수험생들의 적이라 불리기도 하며, 국문학사에서도 큰 무게를 가진 인물이다.

※ 송강 정철(1536~1593)은 누구인가?
정철은 연일정씨로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
청(文淸)이며, 기대승(奇大升)과 김인후(金麟厚)의 제자이다.
그는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고, 2째 누이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되면서 궁
중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나중에 명종(明宗)이 되는 경원대군(慶原大君)과 친했다. 1545년 을
사사화(乙巳士禍) 때 계림군이 연관이 되자 정철 일가는 거의 풍비박산이 나고 정철 부자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1551년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의 일가는 집안의 고향인 담양 창평(昌平)으로 집을 옮겼다. 송
강은 형이 장가를 들어 살고 있는 순천에 가다가 우연히 김윤제(金允悌)의 별장(환벽당) 밑
창계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었다.
(환벽당과 창계천 관련 글 ☞ 보러가기)
그는 여기서 10년 동안 공부를 했으며, 이때 기대승 등 당대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이
(李珥)와도 교유했다.

1561년 진사시(進士試)에 붙고, 1562년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붙으면서 전적(典籍) 등을 역
임했으며, 1566년 함경도(咸鏡道)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8년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고 도승지(承旨)로 승진했다. 하지만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고, 3년 동안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이때 그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이 탄생했으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리고 1585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4년을 쉬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굴지의 작품을 남겼다.

1589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곧 이어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직접 다스리
게 되면서 라이벌인 동인 세력을 철저히 때려잡았다. 그 공로로 1590년 좌의정(左議政)이 되
었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世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으나 당시 선조(宣祖)는 인빈(仁嬪)김씨 소
생의 신성군(信城君)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송강의 건의에 뚜껑이 뒤집힌 선조는 그를 진주
와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를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왕의 소환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했으며, 1593년 명나라
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이후 동인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떨려나 강화 송정촌(松亭村)
에 머물다가 5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조선 가사문학의 상징으로 고산 윤선도(尹善道)와 쌍벽을 이루며, 작품으로는 시조 70수
가 전한다.


▲  송강의 시비 ①
산사야음(山寺夜吟)과 함흥객사에 핀 국화

산사야음(山寺夜吟)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
동자승 불러 나가보랬더니
시내앞 나뭇가지에 달만 걸렸네

▲  송강의 시비 ②
백성들 교화용으로 만든 훈민가

▲  송강의 시비 ③ 사미인곡
임금을 그리며 섬기는 마음을 담은 가사이다.

▲  송강의 시비 ④ 관동별곡

▲  송강의 시비 ⑤ 성산별곡(星山別曲)


* 백세청풍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52-111
* 정철 집터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123



 

♠  인왕산 중턱에 깃든 상큼한 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중턱에 넓게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북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간판을 바꾸고 북악산(백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
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
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
원 북쪽에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닦였으며, 2014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
도서관인 청운문학도서관이 들어서 볼거리도 크게 늘었다.
또한 이곳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꽃이 울
창하여 봄꽃 명소, 늦가을 단풍 명소로 격하게 칭송을 받는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
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
과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르는 때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한 나무
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
들. 인간은 그들을 통해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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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서울 북촌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 북촌 나들이 '

소격동 비술나무

▲  소격동 비술나무

천도교 중앙대교당 종친부 경근당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종친부 경근당

 



 

♠  안국역 주변 명소들

▲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호

서울 도심 한복판에 넓게 자리한 북촌(北村)은 청계천 이북 동네를 일컫는다. 한옥(기와집)이
많이 몰려있는 안국역(3호선) 이북 동네(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흔히 북촌한옥마을이라 부
르고 있으며, 내 즐겨찾기 목록에도 일찌감치 등록되어 이미 200번 넘게 발걸음을 했다.
오랜 세월 지겹도록 찾다 보니 이제는 두근거리는 마음도 예전만은 못하나 그래도 잊지 않을
정도로 가끔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변함없는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북촌 산책은 조계사(曹溪寺)에서 시작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는
데, 이미 여러 번씩 복습을 했던 곳이라 이제는 눈 감고도 그들을 그려내고 찾아갈 정도이다.
하지만 좋은 곳은 자꾸 가도 질리지 않는 법, 그들이 잘 있나 확인도 할 겸 해서 겸사겸사 북
촌 마실에 나섰다.


▲  옆에서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위엄
한참 후배들인 현대식 고층건물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100년 묵은 고색의 향기를 마음껏 뿜어댄다.


운현궁(雲峴宮) 서쪽 맞은편에는 천도교의 중심 건물인 수운회관과 붉은 피부를 지닌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중앙대교당은 종교의식과 행사를 치루는 천도교의 중심 교당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孫秉熙)가 세웠다. 그는 300만 교인에게 1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돈을 거둬 무려 22만원의
거금을 장만해서 지었는데, 설계는 왜인(倭人)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시공은 중
원대륙에서 온 장시영(張時英)에게 시켰다.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1919년에 일어
난 3.1운동으로 다소 지체되었다가 1921년 2월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400평 규모로 크게 지으려고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교당이 너무 크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개소리를 떠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의 규모로 축소
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붉은 피부의 벽돌과 화강석으로 다져진 지상 2층, 중앙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 규모로 아
르누보(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세제션(Vienna Secession)풍으로 지어 외형이 견고
하고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은 212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
평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강당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종탑의 바로크 형식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외벽은 대부
분 붉은 벽돌을 쓰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썼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으로 반원아치를 들여
쌓았는데 고딕 양식의 성당 출입문과 비슷하며, 현관 양쪽 끝에는 화강석의 부축벽을 세워 장
식했다.
정면 1층 창은 사각형으로 머리 부분에 3개의 화강석, 2층 반원형 아치창에는 7개의 화강석을
넣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탑 중앙부에도 반원아치의 큰 창과 그 위로 3개의 작은 반원아치
창을 내었다.

내부는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데, 천도교의 중심 교당임에도 딱히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썰렁한 모습이다. 내부와 외부 공간에는 우리 겨례를 상징하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그리 화려하지는 않으며, 비록 조선총독부의 개소리 태클로 작게 지어
졌지만 왕년에는 명동성당(明洞聖堂),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축물로 꼽
혔던 위엄 돋는 건물이다. 또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도 가치가 높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바쁘게 살기도 했으며,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중심이 된 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 (삼일대로 457, ☎ 02-735-7579)


▲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위엄 돋는 겉모습과 달리 1층 속살은 생각보다 조촐하다. 내부 관람은 가능하나
종교의식과 행사가 있을 경우 제한될 수 있으며, 2~4층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늦가을에 잠긴 천도교 중앙대교당 뜨락 은행나무들
은행나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친일 매국노로 악명을 떨친 민영휘(閔泳徽)가
아들인 민병옥에게 지어준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다.

▲  현대빌딩 그늘에 묻힌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보물 1,740호

안국역(3호선)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가는 길목에 하늘 높이 솟은 현대빌딩이 있다. 그 앞
에는 현대빌딩의 위엄에 눌려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견고한 돌덩어리의 늙은 존재가 손짓을
하고 있으니 그가 조선 때 천문과 기상을 담당했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
상을 두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 남아있는데, 하
나는 창경궁(昌慶宮)에 깃든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
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 관천대는 1434년에 설치되었으며, 원래는 현대빌딩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현대
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花崗石臺)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
기기를 올려 24시간 하늘의 눈치와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가만 살펴보면 경주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았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으며, 현대
빌딩 자리에 휘문고보(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겨졌다. 이후 1978년 학교
가 강남으로 건너가면서 1983년 지금의 현대빌딩이 들어섰고, 1984년에 현재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해체/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닦아 대
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는데, 바로 뒤에 현대빌딩이 공룡처럼 버티고 있으니 마치 햇님과
달님의 부질없는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가 힘들다면 현대원서공원으로 옮기
면 좋으련만 개발의 칼질은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고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천문시설의 옛 원로로 현대빌딩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하늘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
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대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며, 처음에는 국가 사적 29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
었으나 2011년 7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관상감 관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0-2 (율곡로 75)

▲  경우궁(景祐宮)터 표석

▲  계동궁(桂洞宮)터 표석

참고로 현대빌딩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이 빌딩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
궁이 있었다.

경우궁은 제왕을 낳은 후궁이나 제왕의 친할머니를 봉안한 왕실의 사친묘(私親廟)로 순조(純
祖)의 생모이자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진 날(양력 1884년 12월 4일), 개화당(開化黨)의 재촉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등이 경복궁을
나와 경우궁에서 하루 머물렀는데, 날씨도 오지게 춥고, 사당이다 보니 편의시설도 부족해 다
음 날, 그 남쪽에 있던 계동궁으로 옮겼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載元)
의 집이다.

갑신정변으로 크게 고생을 했던 고종은 개화당 역적들이 침범하여 더럽혀졌다며, 1886년에 경
우궁을 인왕산 동쪽으로 옮겼으며, 1908년에 국가 제단과 사당을 정리하면서 육상궁(毓祥宮)
에 통합되었다. 경우궁의 건물 일부는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며, 휘문고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경우궁과 계동궁, 관상감이 모두 학교 부지에 들어갔다.



 

♠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과 감사원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구 경기고등학교 - 국가 등록문화재 2호

북촌한옥마을 한복판인 화동(花洞)에는 서울 사람들의 지식 쉼터인 정독도서관이 있다. 화동
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원
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
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金玉均)과 서재필(徐載弼)의 집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모두 몰
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開校) 때 지은 건물의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
쪽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하여 평탄작업
을 벌였다. 이때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교 건물은 1938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기고가 1976년 청
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기자 서울시에서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2.7만점의 비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관 남쪽 건물을 손
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
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이다. 나 역시
여러 번 이곳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펴놓고 엉뚱하게 꿈나라만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뜨락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여 굳이 공부나 서적 대
출이 아니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하여 북촌의 주요 꿀단지로 관광객
들의 발길이 상당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관광지화된 도서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보호수로 지
정된 늙은 회화나무와 여러 역사의 현장들, 오래된 우물 등이 있어 옛 볼거리도 넉넉하다.
예전에는 종친부터에서 넘어온 경근당과 옥첩당도 있었으나 2013년 말에 제자리로 돌아가 지
금은 빈 자리만 있다.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서 과연 공부와 독서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도서관 분위기가 고
즈넉하고 차분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 만큼 고성방가나 독서를 방
해하는 행위는 절대 삼가기 바란다.

* 정독도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도 흔쾌히 머물다 가는 정독도서관 산책로
햇님이 커튼을 치고 달님이 세상을 검게 만들어도 자신을 처절하게 불태우는
단풍나무의 배려에 나무 주변은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즉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책을 보라는 자연의 뜻인 모양이다.

▲  정독도서관 정문 밑에 자리한 화기도감(花器都監)터
임진왜란 이후 조총과 화포(火砲)를 만들고자 화동에 조총청(鳥銃廳)을 설치했다.
이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 북벌(北伐)을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해 육성했으나, 효종(孝宗)이 승하한 이후 완전 흐지부지되고 만다.

▲  화기도감터 표석 부근에 자리한 성삼문(成三問)집터 표석
사육신(死六臣)의 하나로 명성을 날린 성삼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학교인 경기고 자리를 알리는 표석이다.

▲  정독도서관 정원에 있는 김옥균 집터

갑신정변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
諡禮式)이 옛 집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
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1m,
둘레 3.6m의 덩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과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독
서를 장려한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정독도서관에 전하는 늙은 우물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늙은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이 있는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꼬질꼬질한 이름을 남긴 평제(平齊) 박제순의 저택이 있
던 곳으로 1900년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이 우물돌을 발견했다. 의외의 유물이 튀어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24자를 새겼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
뚝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에 낀 고색의 때가 짙었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 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또렷한 글씨

매국노 박제순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박힌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
져 보인다. 그렇다고 저것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더러운 매국노 행위
를 수치스럽게 여겨 20살에 몸 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
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악가로도 절찬리에 활동했다.


▲  감사원 옆에 심어진 취운정(翠雲亭)터 표석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 길가에는 취운정터를 알리는 표석이 누워있다. 이곳은 북
악산(백악산)을 등진 높은 곳으로 북촌 일대와 도심이 두 눈에 바라보여 도성(都城) 안 경승
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제왕이 경복궁에서 종묘(宗廟)나 창덕궁으로 또는 그 반대
로 행차했을 때, 백성들의 번거로움을 덜하고 이목을 피하고자 인적이 드문 이곳을 많이 거쳐
갔다.

미끄러지듯 펼쳐진 도심을 정원으로 삼고 북악산을 베게로 삼은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에 민
씨 패거리의 하나인 민태호(閔台鎬, 1834~1884)가 지은 정자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開化
黨) 인물들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지며 갑신정변을 논의했다고 전한다.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싱겁게 막을 고하자, 창덕궁
북장문으로 쫓겨나온 왜국 공사와 왜군, 그리고 개화당 인물들은 창덕궁 후원 뒷길과 취운정
을 거쳐 경운동에 있던 왜국공사관으로 줄행랑을 쳤다.

한편 정변 소식을 들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885년 미국에서 귀국하자, 정변과 관련
된 인물로 찍혀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포도대장(捕盜大將)이던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다행히 풀려나긴 했으나 대신 7년 동안 조그만 취운정에 갇혀 지내는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1885년 12월부터 시작된 그의 연금생활은 1892년 11월에 마무리가 되었는데, 길고 긴 그 시간
동안 지루함을 달래고자 그 이름 돋는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다. 서유견문은 1889년에 완
성되어 1895년에 정식 출판되었다.


▲  취운정터 부근에 있는 백록정(白鹿亭)터 표석

취운정터 인근에는 도심의 경승지였던 백록정터가 있다. 백록정은 18세기에 경기감사(京畿監
司)를 지냈던 심상훈(沈相薰)이 세운 정자로 취운정과 함께 개화당 인물들이 자주 모여 정변
을 모의하던 곳이다.
빼어난 경승을 자랑했던 취운정과 백록정, 그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개발의 칼질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그들의 이름 3자를 아련히 속삭일 뿐이다.



 

♠  옛 종친부(宗親府)터 주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주변)

▲  종친부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 - 보물 2,151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동쪽에는 2013년 11월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이 자리해 있다. 지금은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관이 들어서 있지만 그곳은 원래 조선
때 관청인 종친부의 옛터이다.
종친부는 제왕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
혼상제와 봉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
에는 제군부(諸君府)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에는 종부시(宗簿寺)
와 합쳐졌고. 1894년에 종정부(宗正府)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
로 쓰였으며,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으로 모두 옮겼다. 그리고
이승당(貳丞堂)과 천한전(天漢殿), 아재당(我在堂) 등 상당수의 건물을 부셔버리고 종친부의
중심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 등 달랑 2동만 남겨 망국 황실을 제대로 욕보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곳에는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 통제구역으로 꽁꽁 묶였으며, 경
근당과 옥첩당은 그런데로 자리를 유지했으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기무사에 테니스장을 지
으면서 죄없는 그들을 추방해버렸다. 하여 가까운 정독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30년 이상 샛
방살이를 하게 된다.
기무사는 2012년 다른 곳으로 흔쾌히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
게 되었는데, 미술관을 짓기에 앞서 발굴조사를 벌여 옛 종친부 건물의 주춧돌과 기초 시설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경근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이승당, 우측에 옥첩당이 익랑(翼廊)
으로 이어져 나란히 배치되었으며, 경근당 앞에는 돌로 다진 월대(月臺)가 있었다는 옛 기록
과 같은 형태의 기초 유구가 나온 것이다.
하여 문화재청은 정독도서관에 있는 경근당과 옥첩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로 결정, 37억의 돈을
들여 기초 유구가 발견된 자리에 그대로 갖다 놓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국
립고궁박물관에 가있던 경근당과 옥첩당의 옛 현판도 손질을 거쳐 제자리로 돌렸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옥첩당과 경근당

서울관 동쪽 뜨락에 자리하여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 경근당은 종친부의 중심 건물로 정면 7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그 앞에는 마치 칼로 싹둑 다듬은 듯, 반듯하게 지어진 월
대가 1단 낮은 높이로 누워있으며, 그 옆에는 부속건물인 옥첩당이 익랑으로 연결되어 왕족과
궁궐 일을 돌보던 관청의 위엄을 보여준다.
옥첩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저들을 정독도서관에서 보던 것이 정말 엊그
제 같은데,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휼륭한 장식물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이곳의 원래 주인이나 조선이 망하고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주인과 부속물이 완
전히 바뀐 것이다.

이들은 서울관 경내에 있으나 주변에 따로 담장을 두르지 않은 열린 공간이라 24시간 언제든
둘러볼 수 있다.


▲  경근당 옆에서 날개짓을 하는 옥첩당
경근당과 옥첩당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종친부 이승당터 표석
경근당 좌측에 있던 이승당은 고약한 왜정에 의해 사라지고, 이곳이 속세에
완전히 해방된 2013년 이후, 표석을 세워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를 붙잡는다.

▲  종친부터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31호

기무사 이전으로 옛 종친부 자리가 해방되면서 그곳에 깃든 늙은 소나무와 비술나무, 우물터
등도 모두 속세에 공개되었다.
이승당터 주변에 푸르게 솟은 소나무는 12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4.5m, 나무둘레 1.9m이
다. 위치를 보아 종친부 관리들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옛날에는 종친부 뜨락, 기무사 시
절에는 기무사 뜨락, 그리고 지금은 서울관 뜨락에 꾸준하게 솔내음과 그늘을 베푼다.


▲  종친부터 우물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

소나무 부근에 종친부터 우물이 동그랗게 누워있다. 그는 1984년 기무사 뜨락 공사 때, 지하
3m에서 발견된 것으로 왜정 때 종친부가 크게 고통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
다.
우물 윗도리의 화강암 2개가 전부로 그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 붙여넣었는데, 돌 상부에 네귀
가 조출(彫出)되어 있으며 우물 내부는 자연석을 쌓아 둥글게 쌓았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
을 구조물 1점이 우물 안에 놓여져 있는데 그는 네 귀가 조출되어 있지 않다.
이 우물처럼 화강암 2덩이를 동그랗게 이어 붙인 우물은 창덕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
원에도 있으며, 그의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우물로 여겨진다. 또한
위치한 곳이 종친부 자리라 조선시대 관청 우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비록 우물이긴 하나 제자리를 잃었고 그 윗도리만 수습해 놓은 것이라 완전히 죽은 우물이다.
그 안에는 물 대신 잡석만 가득 들어있는데, 저리 우울하게 둘 것이 아니라 밑부분을 좀 파서
우물 티는 내게 했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물을 내지는 못해도 겉모습 정도는 챙겨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종친부 경근당, 옥첩당, 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165-10 (삼청로 30)


▲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 서울시 보호수 1-23, 1-24, 1-25호

서울관 서쪽에는 늙은 비술나무 3형제가 나란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무사 시절에는 아무
나 볼 수 없던 나무였으나 이제는 해방되어 마음껏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시대가 많이 변하긴 변했다.

비술나무란 존재가 꽤 생소한데, 그는 느릅나무과의 큰키나무로 우리나라와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과 몽골, 연해주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주로 중부 이북의 평지
와 하천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지리산(智異山) 등 남부지역에도 드물게 자란다. (영어식
학명은 'Ulmuspumila L.)
추위와 공해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 가로수와 녹음수, 공원수로 드물게 쓰이며, 경북 영
양군 주남리의 비술나무 숲이 '영양 주사골 시무나무와 비술나무숲'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
기념물 476호
로 지정되어 있다.
3~4월에 잎이 나기 전에 양성화가 피며, 열매는 5~6월에 익는데, 잘 자란 나무는 높이 20m,
둘레 2m까지 성장한다. 음지나 양지에서 모두 잘 자라며, 토심이 깊고 배수가 양호한 사질양
토(沙質壤土)에서 생육하지만 건조에는 약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릅나무과 식물들 중에서 잎이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 잎 뒷면에 털
이 없다. 또 나무껍질은 느릅나무와 달리 세로로 깊게 갈라지며, 어린 가지가 아주 많은 특징
을 가진다.
늦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나면 가지가 회백색으로 변하며, 회백색이 된 가지는 약효가 있어 한
방에서 통증, 대소변불통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그리고 수피(樹皮) 및 근피(根皮)는 유백피(
楡白皮), 잎은 유엽(楡葉), 꽃은 유화(楡花)라 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유백피는 보통 나무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잘 말린 뒤 달여 복용하는데, 이수(利水), 소종(
消腫), 통림(通淋)에 효능이 있으며, 유엽은 석림(石淋)을 치료하는데 쓰이고, 유화는 소아의
간질(癎疾), 소변불리(小便不利), 상열(傷熱) 치료제로도 쓰인다. 비술나무의 어린잎은 국으
로 끓여 먹기도 한다. 목재는 건축재나 가구재, 선박재 등으로 이용된다. (비술나무는 함경북
도 방언으로 다른 이름은 비슬나무임)

이곳 비술나무 3형제는 서로가 너무 붙어있어 애정이 돈독한 형제처럼 보이는데, 1996년 8월
16일에 모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70여
년 정도 된다. 높이는 17m, 18m, 19m, 나무둘레는 190cm, 240cm, 210cm으로 정자나무 용으로
심어진 듯 싶다.

이곳까지 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햇님은 퇴근을 서두르고 땅꺼미는 서서히 짙어진다. 햇님
의 퇴근을 붙잡으며 더 출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칫 햇님의 노여움을 살 수 있어 지구
의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다. 햇님이 수틀리면 지구 하나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를 고이 보내주고 나도 북촌 산책을 마무리 지으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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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북악산 청운대

▲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북악산 청운대

 



 

가을이 늦가을로 한참 숙성되어 가던 11월의 첫 무렵, 서울 도심의 북현무(北玄武)인 북
<北岳山, 백악산(白岳山)>을 찾았다.

북악산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구석구석 찾고 있는데, 이
번에는 한양도성이 흐르는 주능선(창의문~말바위)을 복습하기로 했다. 이미 지겹도록 복
습한 곳이지만 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몸살 나게 그리워지니 내 전생이 아마도 북악산 고
양이나 산짐승이었던 모양이다.


 

♠  북악산 창의문~백악마루 구간

▲  창의문(彰義門) - 보물 1,881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의 서쪽 관문이자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경계에 자리한 창의문은 자
하문고개를 오랫동안 지켜온 성문이다.
성밖 부암동(付岩洞)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울 도심을
둘러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이다. 여기
서 4소문이란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
小門,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렸으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北小門)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했다. 또한 문 북쪽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에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별서와 그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가 즐비하여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
로 쓰이기도 했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
監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
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늙었을 뿐, 문루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에
중수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의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은 끝
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
(혹은 닭)과 구름무늬


1960년대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 서쪽 50m 남짓 성
곽이 끊어지게 되었다. 하여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
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
간은 도로 위에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봐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
림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고,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
황의 모습 같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늦가을에 잠긴 창의문 안쪽(남쪽) 숲길

창의문을 둘러보고 마치 국경 검문소 같은 창의문안내소를 들어서면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되어 방심하기 쉽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성곽길은 점차 각박한 모
습을 보인다. 하여 쉬엄쉬엄 가라며 돌고래쉼터와 백악쉼터 등 2곳의 쉼터를 두었다. 가쁜 숨
을 내쉬며 발을 움직여야 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거리도 그리 길지가 않다.


▲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돌고래쉼터 구간 (백악마루 방향)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성곽길이 슬슬 흥분기를 보일 쯤에 돌고래쉼터가 모습을 비춘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 주능선을 개방하고 이곳에 쉼터를 닦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며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
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으로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바라보인다.


▲  힘차게 흘러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 방향)
성 안쪽은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바깥은 부암동 지역이다.

▲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

▲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 북악산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비봉능선, 문수봉 등


눈이 시리도록 맑은 푸른 하늘 밑으로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북악산과 북한산(삼
각산)을 빚었고,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은 그 틈에 평창동
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부암동 같은 동네를 닦았다.
사진 왼쪽 동네가 홍지동(弘智洞)과 부암동, 신영동이며, 중앙과 오른쪽은 이 땅에 0.1%가 산
다는 평창동(平倉洞)으로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 빌라가 즐비해 보는 눈이 썩 즐겁지가
않다.


▲  백악마루입구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부암동과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과 북악산 북쪽 자락,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창의문에서 백악마루입구 구간 중에서 '돌고래쉼터~백악마루입구' 구간이 가장 경사가 각박하
다. 안그래도 힘든 가파른 길이 여기서 크게 흥분기를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백악마루에
서 창의문 구간 산세가 거의 급경사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딛다 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백악마루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낸다.


▲  북악산 정상 바위 (백악마루)

창의문안내소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에 이르게 된
다. 여기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 산꼭대기를 뜻하는데,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현장으로 정상 한복판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 사람 키보다 2배 남짓 높은 크고 견고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
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그러니 정상 인증을 하려면 무조건 바위에 올라가기 바란다.

정상 남쪽에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우거져 있으며, 정상 바위와 난간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산길이 있으나 아주 비싼 길이라 출입을 통제
하고 있으며, 난간 너머는 나라의 예민한 구역이니 애써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 멀리 관악산(冠岳山)과 호암산까지 두 눈
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서
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랜 세월 서울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북악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27

▲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부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국가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산
(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서울 도심(종로구, 중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바라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하는 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현재 청와대)에는 넓게 경복궁 후원을 두었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문인 숙정문
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으로 고개 중
턱을 지킨다.
북악산 남쪽 자락인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으며, 북악산이 베푼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
堂)계곡 등이 있었고, 풍경이 아름다워 조선 초기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숙정문 남쪽 주변은 사대부 여인들의 봄꽃놀이 명소로 바쁘게 살았다.
한양도성과 법흥사(法興寺)터, 대은암계곡 바위글씨, 만세동방성수남극 바위글씨 등 여러 문
화유적이 있으며, 북악산 북쪽 자락 백사실계곡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 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짙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
났다. 그들은 툭하면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
가 호랑이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은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하여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
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1.21사태 이후 굳게 닫힌 북악산은 북악산길과 주택가와 접한 일부 산자락만 겨우 출
입이 가능했으나 2000년대 초반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개방되었고, 2006년 4월 1일 홍련사
에서 숙정문, 촛대바위 구간이 해방되면서 굳게 잠겼던 북악산 주능선의 자물쇠가 드디어 열
리기 시작했다.
하여 2007년 4월 5일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 주능선 구간(4.3km)이 싹 해방되었으며, 2009년
에 북쪽 능선의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열렸고, 삼청공원~말바위 구간 등이 해방되었다가
2020년 11월 '북악산길~청운대쉼터','북악산길~곡장' 구간이 추가로 열렸다. 그리고 2022년
봄에 '삼청공원~청운대쉼터','삼청공원~법흥사터~숙정문','칠궁/춘추관~백악정' 등이 더 열려
지금에 이른다.
이렇듯 북악산의 금지된 속살이 많이 열렸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예민한 성격까지 가라앉은 것
은 아니다. 하여 여전히 금지 구역은 적지 않으며, 북악산 주능선과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길,
청와대 주변 길(칠궁/춘추관~백악정)은 탐방시간에 제한이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주로 남아있다. 또한 오랫동
안 금지된 곳으로 엄격히 묶여있던 탓에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
마냥 울창해 서울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어 새들이 많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관악산 등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
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쭉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으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
다.

북악산(백악산)은 '서울 백악산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된 면
적은 3,598,127㎡에 이른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부암동, 삼청동, 명륜동 / 성북구 성북동 (창
  의문안내소 ☎ 02-730-9924,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관악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 동쪽 자락과 성북동,
성북구, 동대문구, 서울 동부 및 동북부 지역


 

♠  북악산 청운대~말바위 구간

▲  청운대(靑雲臺) 표석의 위엄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청운대(293m)가 마중을 한다. 난쟁
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키의 청운대 표석이 이곳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는데, 공간이 넓
고 의자가 넉넉히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특히 말바위나 숙정문, 삼청공원, 북악산길
에서 올라왔다면 여기서 코앞에 보이는 백악마루에 입맛을 다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기 마련
이다.
여기서는 성북동과 북한산(삼각산),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울 도심, 남산 등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아주 일품이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주능선과 동쪽 자락, 성북동, 성북구, 강북구 등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시원스럽게 뻗은 한양도성 청운대~곡장입구 구간 (동쪽 방향)

성곽 바깥 길 북쪽에는 철책이 꽁꽁 둘러져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니는 쫄깃한 기분이다.

▲  청운대쉼터
북악산 주능선에서 가장 너른 쉼터로 군부대 운동장을 개조해 나그네들의
쉼터로 삼았다.

▲  한양도성 촛대바위~곡장입구 구간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과 향긋한 솔내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숙정문과 곡장입구 사이에 있음)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듯 싶은데, 바위 남쪽 밑에서 봐도 그다지 촛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바위 남쪽 밑 탐방로는 2022년 봄에 해방되었으며, 바위 정상부는 여전히 금지구역임)

천하가 북악산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
뚝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뜯어먹겠다는 의
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
도 혼돈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으나 설령 측량용이라고 해도 그건 일부에 불
과함. 대부분은 추악한 의도로 꽂은 것들임)


▲  숙정문 서쪽에서 바라본 성북동(城北洞)
산자락에 포근히 감싸인 동네가 평창동과 더불어 이 땅에 0.1%가
산다고 하는 성북동이다.

▲  한양도성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북쪽을 향해 입을 연 숙정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도성 4대문의 일원이다. 하
여 북문, 북대문(北大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고 규모가 작아 도
성의 대문이라기 보다 산성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이 태
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해 이들 문을 꽁꽁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연유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북한산, 성북동이 고
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고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
(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재
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한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北靖門)
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이 금지된 구역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문루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이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하는 것은 없다.

* 숙정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5-22


▲  한양도성 숙정문~말바위 구간

▲  북악산 말바위

말바위안내소를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성 밖으로 넘어가는 계단길이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을 부시고 길을 낼 수가 없어 부득이 성곽 위로 높게 나무다리를 내어 성밖으로 통
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을 비롯해 성북구, 종로구 동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 성동구, 수락산~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이 훤히 망막에 들어와 조망도 진국이다. 특히 여
기서는 성북동 대부분이 시야에 들어와 성북동전망대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말바위란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가 마중을 한다. 그
는 북악산(백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 때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詩文)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쉬었다고 한다. 하여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북악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한다. 즉 말처럼 생겼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39
년에 시간이 흐른 2007년 4월에 다시 공개가 되었고 관람 통제가 심한 북악산 주능선 구간과
달리 이곳은 아침과 저녁에도 접근이 가능하다.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말바위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남쪽)으로 길이 90도 꺾인다. 성곽과 더 함께
하고 싶어도 군사시설로 길이 완전히 막혀 별수 없이 남쪽 길로 내려가야 되는데, 소나무가
무성한 그 길을 내려가면 북악산 남쪽 자락에 넓게 깃든 삼청공원(三淸公園)이다.

삼청공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나와 취운정(翠雲亭)터 표석이 있는 감사원교차로에서 왼쪽(북
쪽) 길로 가면 성북동과 성대후문으로 인도하는 와룡공원 고갯길(와룡고개)이 펼쳐진다. 이곳
은 도심과 성북동을 바로 이어주는 지름길로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지그재그로 굴곡의
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숲도 삼삼하고 경치도 아름다우며, 특히 벚꽃이 살랑거리는 봄과 단풍
의 향연이 우울한 마음을 부여잡는 늦가을 풍경은 이곳의 갑(甲)으로 꼽힌다.
게다가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조망과 야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길 밑에
는 도심에 숨겨진 뒷길인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너른 숲
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이다.

이렇게 하여 북악산(백악산)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와룡공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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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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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를 거닐다 <필운대, 백사이항복집터, 배화여고, 필운동 홍건익가옥, 월암동>

서촌(웃대) 나들이 ~~~ 필운대(백사 이항복집터), 배화여고 본관과 생활관, 홍건익가옥, 월암동



' 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를 찾아서 ~~~ (필운대, 월암동) '

필운동 홍건익가옥
▲  필운동 홍건익가옥

배화여고 본관 필운대 바위글씨

▲  배화여고 본관

▲  필운대 바위글씨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인 서촌(西村, 웃대)은 인왕산(仁王山) 그늘인 경복궁 서쪽과
경희궁(慶熙宮) 주변 지역을 일컫는다. 원래 서촌은 서대문과 경희궁 주변, 웃대는 경복
궁 서쪽 지역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거의 합쳐졌고, 요즘은 경복궁 서쪽 지역
을 주로 일컫는다.
북촌(북촌한옥마을)과 부암동, 성북동(城北洞), 북한산(삼각산), 호암산 등에 분산된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으로 지겹도록 발걸음을 했으나 그 넓지 않은 동네에 미답처
(未踏處)가 일부 고개를 들고 있다. 하여 그 미답지를 지우고자 여름의 뜨거운 한복판인
7월의 끝 무렵, 오랜만에 서촌(웃대)에 발을 들였다.

서촌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사직단(社稷壇) 뒤쪽에 위치한 배화여고(배화여자대학)를 찾
았다. 그곳에는 필운대 바위글씨와 근대 건축물이 여럿 있는데 근대 건축물은 예전에 싹
인연을 지었으나 필운대는 아직 인연이 닿지 못했다.



 

♠  필운대와 배화여고의 옛 건물들

▲  필운대(弼雲臺) 바위글씨 주변

배화여고 별관 뒤쪽 바위에 '필운대' 바위글씨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이곳은 오성과 한음
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집이 있던 곳으로 원래는 행주대첩의 영웅인 권율(
權慄)장군의 별서(別墅, 별장)였으나 이항복이 그의 딸에게 장가를 든 인연으로 상속을 받았
다. <권율의 집은 근처 행촌동(杏村洞)에 있었음>

이항복은 이곳을 '필운대'라 이름 짓고 지인들과 팔자 좋게 시회(詩會)를 즐겼다. 여기서 필
운(弼雲)은 그의 호(백사, 필운, 오성) 중 하나이자 인왕산(仁王山)의 별칭이다.
1616년 광해군(光海君)은 배화여고 일대를 중심으로 크게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는데 필운대
는 그 후원으로 편입되었으며, 궁궐의 규모는 창덕궁과 예전 경복궁보다 훨씬 컸다고 전한다.
광해군의 야망이 듬뿍 담겼던 인경궁은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이후 팔자가 180도 바뀌
어 창덕궁 건물 복원에 적지 않게 동원되었으며, 이후로도 궁궐이나 관청 건물을 중수, 복원
하거나 신축할 때마다 이곳 건물을 뜯어가면서 17세기 중반에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1813년(또는 1873년)에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외 9명이 필운대 바위에 이름을 남겼는데
이는 옛날에 사라진(인경궁 건설 때 철거된 것으로 보임) 이항복의 옛집 건립과 관련된 것으
로 여겨지며, 1889년 이항복의 후손인 월성 이유원(月城 李裕元)이 이곳을 찾아와 느낀 바를
시로 남겼다. (바위에 새겨져 있음)
필운대 주변은 살구나무가 많고 풍경이 고와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았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도 이곳 경치에 퐁당 빠져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君歌我嘯上雲臺 - 그대는 노랫가락 읊조리고 나는 휘파람 불며 필운대에 오르니
李白桃紅萬樹開 - 오얏꽃 복사꽃 울긋불긋 나무 가득 피었구나
如此風光如此樂 - 이런 좋은 경치에 이 즐거움 또한 멋지니
年年長醉太平盃 - 세세년년 태평 술잔 가득 마시고 취하리라


▲  지금도 또렷한 필운대 바위글씨의 위엄

바위에 진하게 서린 '필운대' 바위글씨는 붉은 피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항복이 썼다고 전하
나 실은 이유원이 쓴 것으로 여겨지며 필체가 선명하여 이곳의 옛 이름과 이항복의 유적임을
아련히 알려준다.
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으나 이미 죽은 상태이며. 바위 윗쪽에는 배화여고에서 씌워놓은 테니
스장 석축으로 보기가 좀 딱하게 되었다. 그리고 글씨 옆에는 이유원과 박효관이 남긴 바위글
씨가 덤으로 달려있어 필운대의 옛 명성을 살짝 속삭여준다.

필운대 바위글씨는 '필운대'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백사 이항복 집터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9호)'로 이름이 갈렸다. 허나 바위글씨와 글씨가 안긴 바위만 있을 뿐,
집터 흔적은 완전히 말라버려 주춧돌 조차 찾아볼 수 없다.


▲  이유원이 남긴 글씨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은 1889년 이곳을 찾아 그 소감을 시로 지어 바위에 남겼다. 시를 통
해 그 시절에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지금은 바위 앞에 학
교 건물이 있고 주변도 매우 어수선하다. 게다가 바위 또한 세월에 많이도 지쳤을까? 가끔씩
돌이 떨어지는지 '낙석주의' 푯말까지 달려있어 세월의 부질없는 흐름을 느끼게 한다.

我祖舊居後裔尋 - 내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蒼松石壁白雲深 - 푸른 소나무와 바위에는 흰구름이 깊이 잠겼다
遺風不盡百年久 -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해오니
父老衣冠古亦今 -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

癸酉月城李裕元題 - 계유년 월성 이유원 지음
白沙先生弼雲臺 - 백사 이항복 선생 필운대


▲  박효관 등이 남긴 글씨

이곳을 거쳐갔던 동추(同樞) 박효관 등 9명의 이름이 하얗게 쓰여져 있다. 1813년(또는 1873
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항복 옛집 건립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은행나무 그늘에 닦여진 배화학당(培花學堂)의 역사들
배화학당의 창시자 '조세핀 필 캠벨'의 흉상(가운데)과 리드(Dr. C.F. Reid)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비(왼쪽), 그리고 2007년에 세워진 배화학당 창립 110주년 및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비(오른쪽)


필운대와 인경궁 옛터에는 배화학당의 역사를 이어받은 배화여고와 배화여중, 배화여자대학이
한 덩어리가 되어 들어앉아있다. 대학과 여중, 여고, 거기에 유치원까지 한 울타리 안에 담긴
흔치 않은 현장으로 여중은 교내 북쪽, 여고는 교내 한복판, 그리고 나머지는 대학이 채우고
있는데, 이화학당(梨花學堂)과 더불어 이 땅에서 제일 오래된 신식학교이자 여학교로 그 내력
의 실타리를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배화학당을 세운 사람은 미국 텍사스에서 건너온 남감리교 소속 여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밸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1920)'이다. 그는 이 땅을 찾은 최초의 여자 선교사로
1897년에 입국, 그들의 목적인 기독교 영업을 위해 조선 여인들의 교육 계몽을 벌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몸을 담았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학생들에게 선교 기금을 받아 경복궁 인근
내자동(內資洞)에 땅을 구입해 '캐롤라이나 학당'을 세우니 그것이 배화학당의 시작이다.

학교를 열자 청나라 여선교사 도라유의 도움으로 2명의 여자 아이와 3명의 남자 아이를 간신
히 모집해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여자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기
숙사를 두어 먹이고 재웠으며 국어와 한문, 성경 등을 가르쳤다.
1902년 통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여 학생 수가 30명으로 늘어났으며, 1903년 남감리교회 여선교
부에서 경비를 지원해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증축했고, 중학교 예비과를 설치했다. 1909년 고
등과를 설치했으며, 1910년 4월 배화학당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때 초대 교장대리로 니콜스
(Nicolls) 여사가 취임했으며 4년제 중학과와 4년제 소학과를 병설했다.
1910년 5월 16일 고등과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친히 축사
를 내려 그들의 졸업을 치하했으며, 그 축사는 윤치호(尹致昊)가 대독했다.

1914년 왜인 교사의 왜어(倭語) 수업을 거부했으며, 1916년 1월에 지금의 자리로 학교를 옮겨
1915년에 미리 지은 과학관 건물에 보통과/고등과/유치원을 넣었다. 이때 3년제 고등과를 4년
제로 개편하였으며, 강원도 홍천(洪川)에서 '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쳤던 남궁억(南宮檍)이
1910년 10월부터 8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는 교가를 작사하고 학생들에게 무궁화 13송이로
우리나라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하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학생들은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했는데, 이
는 남궁억 선생의 영향이 컸던 탓이다. 그리고 1920년에 기숙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여 많은 교
사와 학생이 왜정(倭政)에 잡혀갔다.

1922년 4년제 보통과를 6년제로 바꾸고 대학 예과를 설치했으나 이듬해 폐지했으며, 1924년에
새로 교가를 지었는데 친일파로 더러운 뒷끝을 보였던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노래 가사
를 쓰고, 교사인 루비 리가 작곡을 했다.
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으며, 1926년 캠벨기념관을 신축해 고등과가 이전
했다. 1929년 11월 광주(光州) 학생운동이 터지자 격문(檄文)을 붙이는 등, 만세운동에 동참
하여 왜정의 염통을 잠시 쫄깃하게 만들었으며, 1938년 3월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소학
교로 명칭을 갈았다.
1940년 왜정의 신사(神社) 참배 강요에 선교사들이 반발하여 모두 그들 나라로 돌아가자 경영
난으로 크게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교사 이덕봉과 이만규가 학교를 구할 사람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독지가인 이민천(李閔天)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춘천과 이천, 연기(세종)
, 익산 등지의 전답과 대지 32만평을 쿨하게 기부했던 것이다.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변경했으며, 1944년 7월 왜군 통신부대가 캠벨
기념관을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45년 9월, 경성여자배화학교를 폐교하고 재학생을 종로국민학교로 보냈으며, 1946년 4월, 6
년제로 개편하고 배화여자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허나 1950년 6.25가 터지면서 학교는 부
산(釜山) 초량동으로 내려가 임시 교사를 마련해 운영했으며, 서울 학교는 폭격으로 상당수가
손상되고 말았다.
1951년 5월, 교육법 개정으로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개편했으며, 1977년 배화여자대학을 설
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배화학당 초창기 시절, 이화학당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워낙 남녀유별이 심하다보니 여학생
교육을 모두 여선교사들이 맡아서 했다. 단 한문은 남자 선생이 맡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는 선생이 여학생을 마주 보며 가르치지 않고 항상 뒤로 돌아앉아 여학생의 질문에만 대답을
하거나 선생과 학생 사이에 병풍을 치고 수업을 했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안되는
일이다.


▲  배화여고 캠벨기념관(본관) - 국가 등록문화재 673호

배화여고에는 오랜 내력에 걸맞게 붉은 피부를 지닌 근대 건축물이 3동이 전하고 있다. 그들
은 본관과 생활관, 과학관으로 이중 생활관이 제일 먼저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었고 나
머지 2동은 뒤늦게 2017년 1월에 그 지위를 받았다.

본관(本館)으로 쓰이는 캠벨기념관은 1926년 12월 7일, 캠벨을 기리고자 세운 지상 4층(지붕
층 포함) 건물이다. 1944년 왜군 통신부대가 점거해 사용하기도 했으며 6.25 때 반파된 것을
보수했다.
1977년 대규모의 보수를 벌였으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실내공간을 밝게하고자 창
호를 넓게 구성하고 철근콘크리트 상인방(上引枋)을 사용하는 등, 건립 당시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과학관과 더불어 이 땅의 20세기 초반 근대교육 관련 유적으로 가
치가 높다. 현재는 학교 도서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  캠벨기념관(본관)의 육중한 뒷모습

▲  배화여고 생활관 - 국가 등록문화재 93호

본관 동쪽 경사진 곳에는 생활관이 있다. 그는 20세기 초반(1916년 정도로 여겨짐)에 선교사
숙소로 지어진 것으로 선교사 대부분이 미대륙 출신이라 그럴까? 건물도 그들의 고향인 미대
륙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윌슨 선교사가 집으로 사용했다가 1971년 배화여고에 기증하면서 배화여고 생
활관 및 동창회관으로 쓰이고 있다. (주로 생활관으로 쓰임)

반지하+2층 규모의 건물로 반지하는 완전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거의 3층이나 다름 없다. 건
물 현관은 1층에 있으며 반지하는 비록 노출되어 있긴 하나 현관을 거쳐 내려가야 된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덮었으며, 건물 내부에는 홀과 계단이 있고,
그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건물의 겉모습은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붉은 벽돌을 사용했는데 지붕은 흥미롭게도 한옥의 기
와지붕을 취했다. 그래서 서양식과 우리식이 조화를 이룬 건물로 지붕에는 2개의 붉은 굴뚝을
세워 연기로 하늘을 찌른다. 허나 난방 방식도 이미 바뀐 상태라 이제는 무늬만 굴뚝이 되어
모락모락 연기를 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생활관의 뒷모습

▲  생활관의 옆모습


▲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배화여고 과학관) - 국가 등록문화재 672호

생활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북악산 방향) 다소 빛이 바랜 붉은 피부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그가 교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라는 과학관이다.
 
배화학당이 이곳에 안착했던 1915년에 2층 규모로 지어진 것으로 1922년 3층과 지붕층(4층)까
지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초반에 보통과와 고등과, 유치원이 같이 사용하다
가 1926년 본관이 지어지면서 고등과가 빠졌으며, 현재는 과학관으로 쓰이고 있다.
앞과 뒤쪽에 출입구와 계단을 두고 그 양쪽에 교실을 배치했으며, 건물 이름은 과학관이나 배
화학당 초창기 이름인 '캐롤라이나'를 따서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이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유치원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는 남쪽 회화나무

과학관 동쪽에는 배화여자대학에 딸린 유치원이 있는데 그 북쪽과 남쪽에 훤칠한 외모를 지닌
회화나무 2그루가 사이 좋게 유치원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남쪽 나무는 200년 정도 되었다
고 하며 북쪽 나무는 3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21m, 둘레 4.3m이다.
이들 회화나무 형제는 적당한 연륜을 지니고 있어 서울시 보호수의 자격이 충분하나 어찌된
일인지 북쪽 것만 그보다 말단인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들에
게 인간이 달아주는 한낱 훈장이나 지위 따위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매일 유치원 어린이들이
그의 그늘에서 재롱을 피우며 커가는 모습을 보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것만큼 재
미있고 행복한 볼거리가 또 어디있겠는가.

* 필운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1-2
* 배화여고 생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12 (배화여고 ☎ 02-724-0300)


▲  유치원 북쪽 회화나무 -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2013-60호



 

♠  서촌의 새로운 꿀단지를 꿈꾸는 필운동 홍건익(洪建翊) 가옥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3호

▲  후원에서 바라본 홍건익가옥

배화여고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경복궁역 쪽으로 내려가니 왼쪽(북쪽)에 커다란 한옥 대문이
손짓을 한다. 현대식 주택 사이에서 고풍스런 모습을 드러낸 그곳은 서촌의 새로운 꿀단지로
떠오르고 있는 개량 한옥, 홍건익가옥이다.

이 한옥은 청계천에서 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홍건익이 1936년에 지은 것으로 대
지 740.5㎡에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 등 5동의 집을 낮은 구릉을 따라 자연스럽
게 배치했다. 서울에 오래된 한옥이 즐비하나 후원에 무려 일각문(一角門)과 우물, 빙고(氷庫
)까지 갖춘 곳은 이곳이 유일해 홍건익 일가의 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역시 세상은 돈이
많고 봐야됨)

전통 한옥의 구성과 근대 개량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안채 대청마루 풍혈판에 새
겨진 팔괘 문양, 별채 화초벽에 태극 문양, 이화꽃 문양, 연꽃 문양 등의 장식용 문양도 곳곳
에 남아있다.
허나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그로 인한 관리소홀로 그 아름답던 집은 거의 폐가 수준으로 쇠
퇴했으며, 증축되거나 변형된 부분도 조금 있었다. 허나 전체적으로 건축 당시의 기본 구조
및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며 서울시가 매입해 지방문화재로 삼으면서 더 이상 망가지는 꼴
은 면하게 되었다.
이후 복원공사를 벌여 2015년에 마무리가 되었으나 내부 손질로 2017년 7월에 임시 개방되었
으며 그해 9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너무 새집처럼 변해버린 면도 있으나 인근에 있는 이상
범(李象範) 가옥(☞ 관련글 보기)과 더불어 마음 놓고 두 발을 들일 수 있는 서촌(웃대)의 몇
없는 옛 한옥이며 서촌 관광 안내 및 사랑방,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점차 그 역할과 기
능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  활짝 열린 홍건익가옥 솟을대문
대문 동남쪽에 빌라가 바짝 붙어있어 대문 앞 시야가 좀 답답해 보인다. 게다가
주택들에게 꽁꽁 감싸여있어 담장은 전통식으로 재현하지 못했다.

▲  솟을대문과 대문채 (안쪽 모습)

▲  안채와 안채 대문

안채는 방과 누마루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종종 특별전 같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
으며 내부 관람도 가능하다.
안채 동남쪽에는 행랑채가 있는데 이곳은 관리
사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그 옆에 작게 화장실
이 닦여져 있다.

◀  안채 안쪽

▲  열린 공간으로 거듭난 사랑채

▲  새집처럼 손질된 사랑채 내부 ①


▲  새집처럼 정비된 사랑채 내부 ②

사랑채와 안채 내부에 진열된 가구와 서적들은 홍건익 일가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가옥을 복원하면서 갖다 둔 장식용으로 안채와 사랑채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관람하면 되며 나의 꼬질꼬질한 두 발을 들이기가 너무 미안할 정도로 방과 마루
가 산뜻하게 손질되어 있다.


▲  쉼터와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는 사랑채 마루
이런 곳에서 낮잠 한숨 청하거나 곡차 1잔 들이키면 정말 예술일 것 같다.

           ◀  무늬만 남은 우물
옛날에는 인왕산이 베푼 물로 넘쳐났겠지만 이
제는 그 명이 끊겨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그
러니 우물 뚜껑도 더 이상 열릴 일이 없다.

       ◀  홍건익가옥의 특별함, 별채
사랑채 뒤쪽에 자리한 별채는 여기서 나름 별
장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별채까지 둔 한옥은
별로 없는 편으로 집주인은 여기서 속세살이에
지친 심신을 다독거리거나 독서 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렸을 것이다.

▲  후원으로 인도하는 기와문(일각문)

▲  현대식으로 손질된 후원

가옥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조촐하게 후원이 닦여져 있다. 지금의 후원은 2015년
이후에 손질된 것이라 옛 모습은 거의 잃은 상태로 나무와 화초, 의자 등이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에 올라서면 가옥 경내가 훤히 두 눈에 들어오는데 집 주위로 키다리 빌라가 잔뜩 들어서
있어 은근히 좁아 보인다. 그래도 이 정도의 한옥을 건진 것이 어디랴.

          ◀  후원 뒷쪽 문 (후문)
후원 동쪽(뒷쪽)에 기와문이 있는데 그 문을
나가면 바로 환경운동연합 뜨락이다. 그 뜨락
을 통해 서촌의 주요 간선길인 필운대로와 연
결되며, 이 문을 통해 홍건익가옥으로 들어서
도 된다.


▲  필운동 회화나무 -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2013-92호

환경운동연합 뜨락에 4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가 두텁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홍건익가옥
돌담 바로 옆에 있어 가옥에도 아낌없이 그늘을 베풀고 있는데 높이 13m, 둘레 420cm로 그의
덩치와 연륜으로 보아 서울시 보호수로 삼아도 충분해 보인다. 허나 배화여자대학 유치원 주
변에 있는 회화나무처럼 말단 등급에 머물러 있으니 등급 선정 기준에 그저 고개만 갸우뚱거
린다.


▲  대문을 걸어잠구며 휴식에 들어간 홍건익가옥 (18시 폐장시간)

* 홍건익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88-1 (필운대로1길 14-4, ☎ 02-735-1374)



 

♠  서촌 끝자락에 숨겨진 늙은 바위글씨, 월암동(月巖洞)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  월암동 바위글씨를 품은 바위

홍건익가옥을 둘러보고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미답처 하나를 더 지우기로 했다. 그렇
게 욕심을 부려 찾아간 곳은 송월동(松月洞)에 있는 월암동 바위글씨로 홍건익가옥에서 도보
20분 거리이다. (사직터널 고개를 넘어가야 됨)

월암동 바위글씨는 재개발로 회색빛 아파트 세상으로 강제 개조된 돈의문뉴타운 동쪽 길(송월
길) 바위에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서대문(돈의문) 바로 서쪽이자 한양도성 서쪽 바깥으로 바
위글씨가 깃든 바위는 딱 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하여 도성 밖 경승지로 바쁜 세월을 살
았던 듯 싶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바위 위쪽에 바람직하지 않게 석축을 씌워 길(송월
1길)을 냈으며, 바위 주변으로 집들이 빽빽히 들어서고 심지어 바위글씨 앞까지 집이 들어차
그를 만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러다가 재개발로 도성 밖 송월동 지역을 밀어버리면서 그를 덮던 모든 것들이 싹 걷어졌다.
바위 역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목이 떨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험한
꼴은 면했으며, 바위 앞 아파트가 완성되고 주변이 정비되면서 마음 편히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  월암동 바위글씨의 위엄

이 바위글씨는 누가 썼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허나 그 필치(筆致)로 보아 명/청나라의 장필과
미불의 글씨가 유행했던 조선 중/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결구가 치밀하고 품격이 고고한 글씨
로 1656년에 작성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도 이곳 지명이 확인되고 있어 서울 장안의 옛
지명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재개발 덕에 바위 앞은 확 트였으나 바위 위쪽에 석축과 도로가 족쇄처럼 자리하여 보기에도
참 딱하다. 서울에는 개발의 칼질로 고통받는 옛 경승지와 문화유산이 너무나 많은데 이는 오
로지 개발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개발이 그들에게 씌운 굴레를 싹 제
거해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허나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참고로 이곳 주변에는 친일 음악가로 더러운 뒷끝을 보인 홍난파(洪蘭坡)가옥을 비롯해 권율
장군 집터를 지키는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딜쿠샤, 한양도성,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국립기상박물관 등의 명소들이 깃들여져 있으니 그들도 적당히 후식거리로 둘러보면 정말 배
부른 나들이, 답사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찾아간 서촌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막을 내린다.

* 월암동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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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덕수궁돌담길 역사 기행 (심슨기념관, 유관순우물, 구 신아일보별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정동, 덕수궁돌담길 역사 산책



' 서울 도심의 한복판, 정동~덕수궁돌담길
늦가을 산책 '
덕수궁돌담길
▲  덕수궁돌담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근대문화유산 1번지로 칭송을 받는 곳으로 덕수궁돌담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정동의 대표 명소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궁이었던 덕수궁(
德壽宮, 경운궁)을 핵심으로 구 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 대법
원 청사(서울시립미술관), 구 신아일보 별관, 성공회 서울성당, 구세군중앙회관, 배재학
당 동관, 구 미국공사관 등의 근대문화유산이 풍부히 깃들여져 있으며, 국립 정동극장과
서울시립미술관, 이화박물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등의 문화, 전시 공간도 듬뿍 담겨져
있다. (국립정동극장을 제외하고 모두 기존의 근대 건축물을 활용하고 있음)
그 외에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유관순 우물 등의 문화유산이 있어 정동이 오
랜 시대를 풍미했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영국, 러시아, 미국, 캐나다, 뉴질랜
드 대사관 등 외국 공관도 많이 산재해 있어 외교 1번지로도 통한다.

비록 도심의 한복판이나 회색빛 가득한 시청과 광화문, 종로 주변과 달리 번잡함이 조금
덜하며 나무를 머금은 공간이 많아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현대와 근
대,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600년에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그윽하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오랫동안 서울 사람들의 산책, 나들이 명소로 격한 사
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한 이곳을 즐겨찾기 명소로 삼아 종종 재활용을 하고 있다.

정동은 조선 개국(開國) 시절부터 요란하게 꿈틀거렸던 현장이다. 조선 최초의 릉(陵)인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그 정릉을 지키
고자 조선 최초의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가 그 곁에 지어졌다. 정동이란 이름은 바
로 정릉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나 권력 다툼으로 정릉은 도성 밖 정릉동(貞陵洞)으로 추
방되어 잊혀진 능이 되었고, 흥천사 또한 유생들에게 아작이 나면서 알짜배기 땅에서 방
을 빼야 했다. (지금은 성북구 돈암동에 있음)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동에 저택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임진왜
란 이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行宮)>이 되었으며, 조금씩 별궁(別宮)으로 몸집을 불려
가다가 1897년 대한제국의 중심 황궁(皇宮)으로 크게 거듭나게 된다. 그 궁궐이 바로 덕
수궁<경운궁(慶運宮)>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3배 이상의 크기로 정동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동은 조선(대한제국)의 정치, 행정의 1번지이자 제왕이 사는 곳으로 매우 중
요시되었다. <'정동은 황궁과 가까이 있어 만백성이 우러러 보는 지역'이라며 강조했음>

또한 정동은 19세기 후반, 많은 양이(洋夷)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그들은 서울에 들어와
주로 정동에 서식했는데, 외교관과 군인, 그 가족들, 종교인, 사업가들이 주류를 이루었
으며, 집과 학교, 성당, 교회, 호텔, 공사관 등을 지었다. 바로 여기서 이 땅의 근대 교
육이 시작되었고, 천주교와 기독교 등 여러 서양 종교들이 정동에 본거지를 세워 세력을
확장했다.
그런 인연으로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어 정동길과 덕수궁돌담길만 어슬렁 거려도 근
대사의 주요 부분과 구한말(舊韓末) 건축 양식을 거의 다 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늦가을을 맞이하여 간만에 정동을 찾았는데, 이번에 찾은 정동의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
씩 복습을 했던 곳이다. 허나 복습이란 예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 많이 할수록 좋다.



 

1.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구 신아일보 별관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정동 나들이는 시청역(1,2호선)이나 정동사거리(5호선 서대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번에는 정동사거리에서 첫 발을 떼어 정동길로 들어섰는데 그 길을 3~
4분 정도 가면 야무지게 자라난 회화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
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4대문 안)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500년 이상 제
자리를 지키며 정동의 숱한 변화를 지켜본 유일한 산증인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
무로 성장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
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樹勢)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
축했는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어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릉과 흥천사부터 600년 동안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켜왔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매일 먹고 자라는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늙은 건물인 심슨기념관
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으며, 그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일요일과 공휴일은 문을 닫아걸고 쉬므로 토요일과 평
일에 찾아야 됨)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재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
평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당시 장안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다. 허나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의 흉상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하였다. 허나 그 건물은 6.25 때 파괴되었으며, 1970년에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이 세워졌다. 옛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이 자리를 지킨다.

1899년 5월에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여학생의 꽃구경은 500년에 처음이
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그들의 소풍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말았다.
그의 묘는 이태원(梨泰院)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그 묘지가 망우리 공동묘지(현재 망우리공원)
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왜정(倭政)이 고의적으로 그의 시신과 무덤을
없앴을 것이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봉한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하나 있다. 서울에 몇 남지 않
은 조선시대 우물로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나 빨래를 했다고 하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
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그리고 우수수
은행잎을 털어내는 노란 은행나무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이후 지금
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어느 졸업생의 흔쾌한 후원금으
로 팔작지붕 기와문으로 교체했으며,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
용하여 초기 모습으로 복원했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
다 작은 비석이 우두커니 서있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
고종)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특별한 학교였던 것이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32-1 (정동길26, ☎ 02-21
  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하마비 사진을 클릭한다.

◀  이화학당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사주문 옆 하마비의 위엄


▲  구 신아일보 별관(新亞日報 別館) - 국가 등록문화재 402호

이화학당 사주문에서 시청 방향으로 1분 정도 가면 왼쪽(북쪽)에 붉은 피부의 큰 건물이 마중
을 한다.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건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쉽지만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
역시 고색이 깃든 건물임을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옛 신아일보의 별관으로 1930년대에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지금과 달리 지하 1
층, 지상 2층, 연면적 2,000.53㎡ 규모로 미국 업체인 싱거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의 한국지부로 쓰였다가 1969년 신아일보가 매입했다.

신아일보는 1965년 5월 장기봉(張基鳳)이 창간한 신문으로 처음부터 '상업신문'임을 내세웠다.
다른 수익사업을 병행하지 않고 오직 신문 수입으로 경영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신문사를 꾸렸
는데, 매일 8면의 지면을 제작해 신문계에서 '기적의 신문'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창간호(創刊
號)부터 다색도인쇄(多色度印刷)로 발행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다색도인쇄 신문으로 명성이 높
다.
독자투고란인 '세론(世論)'을 만들어 독자참여제도의 문을 열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종교란'
을 만들어 종교계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또한 '수도권백과','재계화제' 난을 신설하고 '농수
산소식','소비자 페이지','부부교실','부동산' 난을 만들어 생활경제정보를 많이 제공했다.

1975년 기존 건물에 크게 반하지 않는 선에서 4층까지 올리는 등,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으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강제로 경향신문에 통합되면서 사라지고 만다. 이후
2003년 같은 이름의 신아일보가 여의도에 문을 열었으나 예전 신아일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한때는 옛 신아일보의 뒤를 이었다고 내세웠으나 옛 신아일보를 세웠던 장기봉의 반발로 그
부분은 쏙 사라짐>

민간 건물 건축기법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일방향 장선 슬라브(One-
way Joist 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왜정 시절 건축구법과 구조 등이 잘 남아있어 근
대 건축기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1980년 신군부의 어거지성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언
론수난사의 현장으로 나름 가치가 있어서 국가등록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현재는 옛 신아일보를 추억하는 신아기념관으로 일부 쓰이고 있으며, 많은 회사들이 입주하여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 구 신아일보 별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8 (정동길 33, ☎ 02-777-9875)


▲  구 신아일보 별관의 정면 모습
정면에 보이는 붉은색 아치형 문은 지하로 이어지며, 그 위의 문은
건물의 현관이다.



 

2. 구 러시아공사관과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사주문 맞은편(북쪽)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로 하얀 피부의 날씬
한 건물이 두 망막에 들어올 것이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인 러시아
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豆滿江)과 간도를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흥
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
시아를 막아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에 이르러 러시아와 수교를
맺게 되는데, 그때 조선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내렸다. 러시
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그 땅에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
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 면에 출입문을 내고,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이는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고 불
렀기 때문이다.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라사'라고 했음> 전망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
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6.25시절에 탑을 제외한 나머
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탑 역시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주변에 자리한 여러
나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이후 모두 사라졌다가 2019년에 정동
공원에서 덕수궁돌담길(덕수궁길)을 잇는 통로가 일부 재현, 복원되어 '고종의길'이란 이름으
로 속세에 개방되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의 우
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국(倭國)이 저지른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고종은 왜를 불신하며 경복궁에
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
윤용(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는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尹致昊)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
과 을미개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그동안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
시로 폐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금했다.

▲  윤곽만 남아있는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  러시아공사관 남쪽 정동공원에 있는
하얀 피부의 8각형 정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
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
들이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
여 아주 불편하게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갖은 편의를 제공했는데, 명성황후의 제단(
祭壇)까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내리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은 커지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는데,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끊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게
관리를 맡겼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
면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모두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
대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년에
독특한 모습의 하얀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쓸데없이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게 묵살되었다. 전망탑 남쪽으로 약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전혀 없던 것이다.

7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정동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사주문에서 덕수궁(경운궁) 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고색이 창연한 붉
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로
120년이 넘은 노구에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현재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공부방에서 비롯
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기
에 이른다.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이에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작업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어 다시 복원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 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
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롭게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왔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내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도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양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
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린다.
(교회 사정과 행사에 따라 관람이 어려울 수도 있음)

* 정동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3. 정동의 백미, 덕수궁돌담길을 거닐다.

▲  덕수궁 서쪽 돌담길

덕수궁(경운궁) 대한문에서 정동교회까지 이어지는 덕수궁 남쪽 돌담길은 길을 거니는 사람들
로 늘 만원이다. 하지만 정동교회에서 미국대사관저 옆구리를 거쳐 덕수초교로 넘어가는 서쪽
돌담길은 전,의경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발길을 주저하게 된다. '이 무
거운 분위기는 뭘까?' 하고 말이다. 허나 그 길은 누구나 거닐 수 있는 자유로운 길이니 안심
하고 거닐도록 하자~! 그곳이 돌담길의 백미와 같은 곳이다.

서쪽 돌담길 중간에는 야트막한 고개가 솟아있는데 이를 영성문(永成門) 고개라고 한다. 영성
문은 덕수궁 북쪽 구역 문으로 새문안길(서대문~광화문을 잇는 도로) 부근에 있었다. 대한문
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운 문이었는데 덕수궁에서 미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 영국공사관과
이어져 '외교의 문'으로 통하기도 했다.
허나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이 왜정과 짜고 영성문 안쪽의 부지를 왜인(倭人)에게 팔아 막
대한 이득을 취했다. 윤치호(尹致昊)는 이 사건에 크게 뚜껑이 열려 1919년 11월 22일에 적은
그의 일기(윤치호일기)에서
'이 비열한 매국노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
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나중에 윤치호도 친일파 떨거지로 변함)

고종이 세상을 뜨기가 무섭게 왜정은 1920년 2월 영성문과 선원전 일대를 철거했다. 이때 영
성문에서 정동교회로 이어지는 언덕을 깎으면서 서쪽 돌담길이 뚫렸는데, 이를 영성문고개라
불렀다.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잊혀진 상태라 그저 덕수궁 돌담길의
일부로 묻혀져 있다.

▲  호젓하게 펼쳐진 덕수궁 서쪽 돌담길

▲  덕수궁 서쪽 돌담길 (영성문고개)

동쪽의 덕수궁 돌담과 서쪽의 미국대사관저의 높다란 담장 사이로 놓여진 서쪽 돌담길, 좌우
담장 안에는 나무들이 서로 경쟁에 들어간 듯, 앞다투어 담장 밖으로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도심 한복판임에도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차분하며 고즈넉한 궁궐
돌담길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정말 100점짜리 산책로이다.

고갯길이 뚫린 1920년대 이후 이곳은 젊은 남녀들이 남의 이목을 피해 데이트를 즐기던 곳으
로 '사랑의 언덕길'로 통했다. 허나 1950년대 이후 그 명칭도 슬쩍 사라졌으나 여전히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항간에서는 돌담길을 거닐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1973년
가수 진송남이 부른 '덕수궁 돌담길'이란 노래<한산도 작곡, 정두수 작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바로는 작사자인 정두수가 실연을 당하고 비오는 날, 홀로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고 집에 돌아와 자기 심정을 노래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법원이 돌담길 남쪽인 현재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 있어서 부부가 이혼하러 오는 길
이라 하여 연인들이 발길을 꺼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세상풍파를 타면서 헤어지는 길로 오
해를 받게된 것이다. 그러니 돌담길이 섭하지 않도록 그런 속설은 신뢰하지 말자~~!

이렇게 호젓하고 아름다운 돌담길이건만 길 곳곳에 전/의경들이 배치되어 지나가는 사람과 차
량을 지켜보고 있으며, 미국대사관저의 건방지게 높은 담장은 이곳의 옥의 티로 이 땅의 우울
한 현실이 여실히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위엄을 날렸던 덕수궁(경운궁)의 일부였건만 지금은 왕년의 1/3 이
하로 줄어들었으며, 반면 미국의 관할인 미국대사관저는 덕수궁 담장보다 더 높아 망국의 황
궁을 짓누른다. 게다가 그것들이 들어앉은 곳도 덕수궁의 잃어버린 옛 땅이다. 반드시 되찾아
복원시켜야 될 땅인 것이다. 하지만 그 옥의 티는 내가 숨쉬는 동안에는 아마도 지우기 힘들
것 같다.
돌담길을 사진에 담을 때는 미국대사관저 방향은 너무 대놓고 찍지 말기 바란다. (찍으면 제
지를 당할 수 있음) 단 덕수궁 쪽이나 돌담길의 한복판은 간섭을 받지 않는다.


▲  덕수궁의 서쪽 문인 평성문(平成門)

평성문은 덕수궁 중심지(중화전, 함녕전)에서 궁궐 외곽인 중명전 구역과 선원전(璿源殿) 구
역을 이어주던 문이다. 허나 그 구역이 대부분 아작나면서<중명전만 살아남았음> 이제는 덕수
궁의 서쪽 문이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뒷문 신세가 되었다. 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관
람객은 출입할 수 없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영성문고개
왼쪽이 옛 덕수궁 땅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대사관저이고, 오른쪽이 망국의 황궁인
덕수궁(경운궁)이다. 이곳은 서양 스타일로 지어진 2층짜리 돈덕전(惇德殿)
구역으로 지금은 고갯길로 변해버렸다.

▲  영성문고개 돌담길 (정동 방향)

▲  옛 선원전터를 홀로 지키고 선 200년 묵은 회화나무

영성문고개를 지나면 돌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세군 중앙회관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서쪽
담장 너머로 아주 너른 공터가 박혀 있는데, 공터 한복판에 그 허전함을 달래려는 듯, 2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가 홀로 자리해 있다. 이곳은 덕수궁의 옛 땅이자 옛 경기여고 자리로 미
국대사관이 점유하고 있다가 지금은 서울시가 소유하고 있다.
미국 양이들은 2004년 이곳에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를 짓겠다며 한바탕 난리를 부린 적이 있
었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덕수궁(경운궁) 훼손을 막고자 반대 시위를 벌여 숙소 건축은 보기
좋게 좌절시켰으며, 서울시가 이곳을 살펴본 결과 1897년에 지어진 선원전, 흥복전(興福殿)터
임이 밝혀졌다.
선원전은 고종이 역대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자 지은 것으로 왜정 때 파괴되었으며 그
어진들은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그리고 선원전 자리에는 경기여고
가 들어섰다. <현재 경기여고는 개포동에 가 있음>

서울시는 이곳을 해방시켜 덕수궁 복원에 쓸 계획인데, 발굴조사를 벌이는 등 진척이 조금 있
으나 계속 공터로 놀려두고 있다. 서울 도심에 이런 너른 공터가 놀고 있다니 그저 안따까울
따름인데, 예전에는 전/의경들이 공터로 넘어가는 문을 지키고 섰으나 요즘은 경계가 많이 풀
렸다.

이곳을 끝으로 늦가을에 깜짝 방문한 정동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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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탕춘대성, 기차바위, 석굴암)



'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 '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길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인왕산 한양도성길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이다. 하여 그의 품을
지겹도록 오갔지만(100번은 넘게 갔음) 아직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未踏處)들이
여럿 남아있어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그들을 미답 목록에서 흔쾌히 지우고자 겨
울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보이던 11월 끝 무렵에 그곳을 찾았다.

이번 인왕산 나들이는 세검정교차로에서 첫 발을 떼었다, 거기서 세검정로를 따라 남쪽
으로 조금 가면 홍지문(弘智門)이 나오는데, 그 남쪽에 탕춘대성과 인왕산 산길(인왕산
둘레길)이 있다. 그 길이 인왕산 북쪽 기점의 하나(홍지문 기점)이자 인왕산의 가장 북
쪽 끝으로 아직 미답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홍지문 기점으로 접근하려면 세검정교차로에서 세검정길 남쪽 보도로 가거나, 홍지문
·
옥천암 정류장(홍은동에서 세검정 방향)세검정 방향)에서 보도로 접근해야 된다.



 

♠  인왕산(仁王山) 북쪽 능선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탕춘대성과 인왕산둘레길 (홍지문 기점 남쪽)

홍지문 기점 코스는 탕춘대성과 인왕산 북쪽 능선을 거쳐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사
람들의 기를 꽉 잡으려는 듯, 경사가 각박하여 숨을 적지 않게 헐떡이게 하는데, 처음 10~15
분 정도가 좀 고통스러울 뿐, 산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는다. 게다가 산이 크게 흥분을 보이
는 구간은 나무데크 길과 계단을 닦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중간에 가
파른 구간이 여럿 있음)
홍지문에서 기차바위를 거쳐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까지 35~45분 정도 걸리며, 정
상은 거기서 10~15분 정도 추가하면 된다.

산길을 따라 이어진 빛바랜 성곽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이다. 연
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지었다는 탕춘대(蕩春臺)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겹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
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성을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弘濟川)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
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고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
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취소되었다.


▲  산길과 잠시 분리되는 탕춘대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수풀을 위해 동쪽으로 짧게 우회길을 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탕춘대성 인왕산 구간은 홍지문에서 북쪽 능선 사이에 남아있는데, 홍지문 기점에서 5분 정도
올라간 정도까지만 여장이 복원되어 있고 그 이남은 성곽만 남아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되어 있음>

* 탕춘대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외


▲  키 작은 돌담처럼 남아있는 탕춘대성
인왕산 쪽 탕춘대성은 거의 키가 작다. 워낙 각박한 지형에 나무도 무성하여
높이 다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최대 높이는 2~3m 정도)

▲  소나무숲에 묻힌 탕춘대성 (오른쪽 돌무더기가 성곽)
이곳 이후로는 성곽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라 흔적을 더듬기도 힘들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내부순환로와 홍은동 지역>

왼쪽에 부드럽게 곡선을 보인 도로가 서울 도심 주변을 챗바퀴처럼 도는 내부순환로이다. 차
량들의 통행이 빈번하여 그들이 내는 굉음이 나의 두 귀를 마구 때려댄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 탕춘대성 남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 산줄기와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지역>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평창동(平倉洞), 신영동(新營洞) 지역은
인왕산과 북한산, 북악산(백악산)에 포근히 감싸인 분지 지형으로
마치 산악 도시나 마을 같은 아늑한 분위기이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부암동과 북악산>
사진 가운데 산속에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백사골)이
묻혀있다. 그 너머로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졸부 마을
평창동이 곱지 않게 바라보인다.

▲  벼랑을 오르는 계단길 (인왕산 북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북쪽 능선은 탕춘대성에서 기차바위능선 북쪽까지로 그 중간쯤에 동쪽(기차바위 방향
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철조망이 쳐진 구간이 있다. 그 철조망 안쪽이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石坡亭)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 땅이다. (철조망만 있을 뿐, 문이나 개구멍은
보이지 않았음)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  솔내음이 깃든 인왕산 북쪽 능선길
인왕산은 바위도 많지만 소나무도 제법 우거져 있다.

▲  인왕산 북쪽 능선 남쪽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은평구 지역
서울과 은평구의 서쪽 벽이자 서울둘레길이 흐르는 앵봉산(235m)과
봉산(烽山, 209m)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 북쪽 갈림길
여기서 부암동(성덕사)과 홍제동 개미마을, 환희사(歡喜寺)에서 올라온 길이
하나가 되어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내가 천하를 스케치하는 조물주라면 그 밑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졸부들의
흔적을 지우개로 지워 북한산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338m)



 

♠  인왕산 기차바위와 인왕산 주능선(한양도성)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기차바위능선)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찬양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절대 기차처
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
차는 이 땅에서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
라보면 정말 단단하고 두툼한 바위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등급이나 양
쪽이 자비심이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①
바로 앞에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심부는 물론 멀리 동대문구와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강동구, 송파 지역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두 눈이 호사를 누린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과 부암동, 청운동 지역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인왕산 그늘에 묻힌 부암동
부암동 일대가 인왕산 그늘에 푹 잠겨 있다. 그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④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인왕산 북쪽 자락과 홍은동, 홍제동, 백련산, 은평구, 앵봉산~봉산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⑤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 그리고 멀리 강동, 송파, 강남 지역까지;;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기차바위 능선

기차바위를 지나면 한양도성 전까지 내리막이 펼쳐진다. 성곽 앞에 이르면 잠시 오르막이 펼
쳐지면서 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에 발을 들
이게 된다. (기차바위 갈림길)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인왕산 정상이며, 동쪽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과 북악산(백악산)으
로 이어진다. 그날은 정상에 대한 미련이 없었고 눈 감고도 갈 정도로 익숙해진 곳이라 바로
동쪽으로 내려갔다. 정상이란 자리가 탐이 나는 자리긴 해도 그렇다고 늘 좋은 것은 아니다.


▲  기차바위 갈림길 계단 밑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여름 사진)
성벽과 여장의 피부색이 너무 차이가 난다. 성벽은 조선 때 것으로 고색의 때가
자욱한 반면, 여장은 근래에 새로 붙인 것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다.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이미 인왕산의 어깨와 목 부분까지 올라탄 상태라 조망이 가히 천하일품이다.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강제로 업힌 기분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 창의문 방향 ①
성곽길은 계단이 좀 팍팍하여 통행이 조금 고통스러우며, 그 옆에 급한 경사를
조금 순화시킨 계단길이 있어 그 길을 많이 이용한다.


인왕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서울의 든든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388년 압록강을 건너 단동(丹東) 북쪽 위화도(威化島, 현재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그는 1394년 남경(
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서울)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
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으며, 평지는 토성
(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 다시 79,400명을 콩 볶듯이 동원, 49
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축조를 마무리 지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여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해 공사에 들어갔
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정도였다고 하니 그 3배의 인원이 동원된 것이며, 이는 조선
최대의 공사로 꼽힌다.
또한 공사를 너무 닥달하여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그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
한 도성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 도성을 관리하고자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
었으며,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진 덕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성
곽 보수도 1704년 숙종이 벌인 1차례가 전부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창의문 방향 ②>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
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구한말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양이(洋夷)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
었다. 콜브란은 고종(高宗)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
하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
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
나갔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제왕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문제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이다.
을사늑약 이후 왜는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
는 해괴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
(昭義門)>과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물론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국
(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중수하기 시작해 광희문과 숙정문을 손
질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
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  한양도성 여장 너머로 보이는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부암동, 평창동 지역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갈렸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
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어떤 코스로 쌓을지 고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데없이 큰 눈
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었다
.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 쌓인 자리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
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
이라 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허나 신라의 중심지인 서라벌에서 서울이란 말이 유래된 것으로 크게 보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비춘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 성곽길)



 

♠  인왕산 동쪽 자락에 숨겨진 작은 석굴 암자, 흔한 이름에 비해
존재감이 매우 낮은 석굴암(石窟庵)

▲  만수천약수터

기차바위 갈림길에서 성곽길을 5분 정도 내려가면 신교동(新橋洞)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석굴암을 가려면 여기서 성곽과 헤어져야 되기에 그를 버리고 신교동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석굴암 입구로 이어지는 길로 빠져 2~3분 내려가니 만수천약수터가 마중을 나
온다.

만수천은 인왕산 동부의 대표적인 약수터이나 가뭄으로 물이 마르면서 부적합 주홍글씨를 받
은 상태였다. 이곳이 아무리 도심 지척이라고 해도 비가 적당히 내려주고 약수터 주변을 잘
관리하면 충분히 적합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비가 가뭄에 콩 나듯이 거의 내리지를
않으니 물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영 좋지 않은 존재들이 샘물에 활개를 치는 것이
다.
약수터 주변에는 쉼터와 간단히 몸을 풀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있으며, 커다란 바위도 여럿
포진해 있어 인왕산이 바위의 산임을 실감케 한다. 그중 북쪽에 있는 바위에는 작은 자연산
굴이 있는데,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는 기도나 굿을 벌이는 장소로
널리 쓰였다. 인왕산에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다.

▲  만수천약수터 쉼터

▲  겨울잠에 잠긴 석굴암1약수터

만수천약수터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 길로 질러가면 석굴암약수터가 나온다. (왼쪽은 석
굴암입구 초소로 이어짐) 이 샘터는 물낭비를 줄이고자 수도꼭지를 달아 놓았는데, 이곳 역시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부적합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석굴암 부근에도 약수터가 있어 이
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석굴암1약수터라 부르기도 한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석굴암1약수터에서 석굴암까지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닦여져 있다. 마치 하늘로 이어진 것일까
? 계단이 얼마나 길던지 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사 또한 각박하여 오르는 길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계단을 닦아놓아 길이 좀 순해진 것으로 예전에는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산길에 의지해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저 계단의 끝에는 하늘 대신 석굴암이 자리해 있으며, 길 중간에 조망이 괜찮은 장소(바위)가
하나 있다.


▲  서울에 석양이 진다. 석굴암 밑 바위에서 바라본 도심
이곳은 인왕산에 숨겨진 조망 포인트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석굴암은 인왕산 정상 치마바위 동쪽 밑에 둥지를 튼 작은 석굴 암자이다. 장대하게 생긴 바
위가 석굴암의 거의 모든 것으로 그의 밑도리에는 조그만 자연산 석굴이 깃들여져 있다. 호랑
이가 담배에 호기심을 품던 머나먼 시절부터 산악신앙과 무속이 벌여지던 현장이었으며, 20세
기 중반 이후, 수성동계곡 인근에 자리한 불국사(佛國寺)에서 이곳을 접수해 굴 내부를 손질
하고 부속암자인 석굴암으로 삼았다. 암자 이름은 바로 이 석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째 경
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관계를 따라한 느낌마저 든다.

석굴을 법당(法堂)으로 삼아 돌로 만든 석가3존상과 여러 보살상을 두었으며, 문을 남쪽과 동
쪽에 내었다. 석굴 서남쪽에는 산신각 공간이 있으며 숙식을 할 수 있는 건물이 따로 없어 불
국사에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왕래하면서 이곳을 관리한다. 보통 일몰 때 불국사로 돌아
가며, 가끔 기도를 위해 절을 지키기도 한다. 허나 내가 갔을 때(17시 이후)는 경내에 아무도
없는 빈 암자 상태였다. (그래도 소중한 불전함을 지키고자 cctv를 달아놓음;;)

비록 조그만 암자이지만 여기서 동쪽과 동남쪽으로 도심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좋으며
, 그 도심을 이곳의 너른 뜨락으로 삼고 있다. 절 주위로 치마바위와 매바위, 닭바위 등 대자
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들이 많아 풍경 또한 일품이며, 석굴암 주변은
2007년 12월에 지정된 '인왕산 생태경관보전지역'의 하나로 자연경관이 아주 수려하고 소나무
와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박새, 어치, 유리딱새, 소쩍새, 암먹부전나비, 작은주홍부전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등 다양한 새와 곤충이 서식하고 있는 도심 속의 소중한 자연의 보고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내부 (석가3존상)

자연산 굴을 손질한 석굴 내부는 굴의 타고난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좀
면할 정도이다. 사람은 없지만 방석과 난방기구, 선풍기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석굴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머금은 분홍 연등이 가득 매달려 또 다른 낮은 하늘을 이루고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석굴암과 인왕산 치마바위

▲  산신각(山神閣)의 예전 모습
인왕산 산신의 보금자리로 어엿한 기와집이 아닌 바위 앞에
터를 다지고 가건물을 씌웠다.

▲  산신각 마애산신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산신각에는 산신(山神) 가족을 담은 마애산신도가 깃들여져 있다. 신선
처럼 생긴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고양이 같은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고 있으며,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있다.
산신의 위엄과 진지함보다는 동네에 친근한 노인네를 다룬 것 같은 느낌으로 바위에 산신도
를 새긴 예는 서울은 물론 천하에서도 매우 흔치가 않다. 아쉽게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문화재적 가치는 아직 여물지 못했지만 최소 60~70년 이상 숙성되면 거뜬히 지방문화재의 자
리 하나는 따지 않을까 싶다.


▲  석굴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바위 윗쪽 네모난 구멍>

경내의 서남쪽 바위를 숨은 그림을 찾듯 눈으로 잘 더듬어보자. 그러면 바위 윗쪽에 있는 네
모난 구멍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구멍이 18~20세기에 서울 지역 사찰에서 많이 등장했던
마애사리탑으로 바위 피부에 홈을 파고 그 안에 승려나 신도의 사리함을 봉안한 간편한 사리
탑이다. 이 탑은 돈을 크게 들여 탑을 지을 필요도 없으며, 그저 바위만 있으면 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사리탑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기)에 있는 것으로
19세기 초에 조성된 2기가 있으며,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 관련글 보기)에도 19세기 사리
탑 2기가 전한다. 그리고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기)과 석굴암에도 20세기 것이
있는데, 석굴암 것은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는 달랑 구멍(감실)만 남아있다.

석굴암에서 치마바위와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 허나 그 길은 금지된 길이
되었으며, 절 북쪽과 서쪽은 바위와 벼랑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내가 올라온 동쪽 길과 근래
속세에 개방된 남쪽 길이 전부이다.
지금은 비록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인왕산은 한때 서울에서 잘나갔던 암장(암벽장)이었다. 서
울 유일의 암장이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는데, 석굴암에서 시작하여 치마바위 정상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코스로 1968년 1,21사태 이후 인왕산 등산이 통제되었지만 암장은 군부
대에 허가를 받으면 누구든 가능했다. 허나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이 인기 암장으
로 부상했고 실내 암장까지 많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  천향암(天香庵) 돌문

숨겨진 볼거리가 더 없을까 싶어 경내를 더 기웃거리니 북쪽으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보인
다. 마치 보물을 찾으러가듯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득 품으며 그 길로 접어드니 바로 벼랑 길
(밑이 벼랑임)이 나오고 커다란 바위들이 기묘하게 서로 기대선 틈에 자연산 돌문이 나 있다.
서쪽은 그야말로 장대한 바위이고 오른쪽은 그 바위에 몸을 기댄 돌덩어리이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바위에 둘러싸인 샘터와 기도처가 나온다. 이곳을 '천향암'이라 부르는데,
이름으로 봐서는 암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건물 같은 것으로 대충 때우다가 사라진 듯 싶으
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석굴암과 비슷하게 오랫동안 무속/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지금은 석굴암의 부속 공간으로 딱히 주제는 없으나 샘터가 있는 것으로 봐서 용왕(龍
王)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는 듯 싶다.
조그만 샘터에는 물이 고여 있으나 원효대사가 마셨다는 해골에 고인 물처럼 상태가 그리 좋
아 보이진 않는다.


▲  암벽에 감싸인 천향암 샘터

벼랑 길은 천향암에서 뚝 끊겼다. 얼핏 보니 북쪽으로 넘어가는 암릉길이 있는 듯 싶은데, 딱
히 안내문도 없고 햇님도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니 감히 살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북쪽
과 서쪽, 남쪽은 암벽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트여있는 궁벽한 곳으로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도 석굴암 못지 않다.


▲  하늘이 지은 기묘한 돌문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자연산 돌문이 있다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인왕산을 수없이 들락거린
내가 이제서야 이곳을 오다니 그동안 인왕산을 정말 헛 다닌 모양이다. 이런 것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하는 모양이다.


▲  천향암에서 바라본 일몰녘에 서울 도심

▲  석굴암과 인왕산을 뒤로 하며 (석굴암 계단길)

천향암에서는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된다. 바람소리와 낙엽 소리가 전부인 적막한 석굴암과
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계단길을 내려왔다. 석굴암입구에
이르니 햇님은 퇴근 본능에 따라 철수를 했고, 달님이 자리를 이어받아 검은 도화지에 가녀린
한줄기 빛을 선사한다.

이렇게 하여 연말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날 목적했던 인왕산의 미답처를
모두 지우긴 했으나 그 기억 또한 흐릿한 과거의 하나로 싹 사라지니 모든 것이 참 부질없는
것 같다.

* 인왕산 석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산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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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 장면 가옥



' 서울 도심의 숨겨진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길, 명륜동 장면 가옥)
창덕궁 후원 돌담
▲  창덕궁 후원 돌담
 



 

사계절 풍경 중의 오색 단풍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늦가을은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까워 틈이 날 때마다 카메라
를 들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뒤안길로 꽁무니를 빼려는 늦가을 풍경을 붙잡는다.
그렇게 뛰어다닌 곳 중에는 나의 즐겨찾기인 북촌(北村)과 서촌(웃대), 은행나무 명소인
성균관(成均館), 그리고 북촌과 성균관을 빠르게 이어주는 창덕궁 후원 뒷길도 있었다.

북촌(북촌한옥마을)은 이미 200번을 넘게 발걸음을 한 곳이지만 복습의 즐거움이 대단하
여 그날 땡기는 곳을 여럿 둘러보고 취운정(翠雲亭)터 주변 감사원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선다. 그 길이 고려사이버대학교 정문 겸 중앙중고등학교 후문으로 차단봉이 내려앉
은 주차장 정산소 직전에 시야가 확트인 조망대가 있다.
그곳은 중앙중학교 바로 뒷쪽(서쪽) 벼랑으로 여기서는 바로 앞에 중앙중고를 비롯해 창
덕궁과 종로구, 중구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바라보인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중앙중고 뒷쪽으로 이어지는 길 (주차장 정산소)

도로에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고, 얼핏 봐도 길이 막혀 보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길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이곳의 함정,
차단봉은 고려사이버대학과 중앙중고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차량들의 주차비 징수를 위한
것이라 뚜벅이들은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며 길은 성균관대까지 이어져 있으니 걱정
은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기 바란다.


▲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뒷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옥상이 중앙중학교이다. 옥상 오른쪽 너머로 보이는 근대 건축물
은 중앙고등학교 건물이며, 푸른 잔디가 입혀진 운동장 너머로 펼쳐진 너른 숲은 창덕궁
이다. 그런 창덕궁과 중앙중고교 너머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인 서울의 심장부, 종로구와
중구 지역이 시야에 잡힌다.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

주차장 정산소를 지나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로 내려가는 길(후문)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고려대 계열로 중앙고교 북쪽에 새롭게 중앙중학교를 만들고 그 뒷쪽 언덕에 고려사이버
대학교를 만들면서 중/고/사이버대학이 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

중앙중고를 놔두고 계속 직진하면 길은 서서히 경사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창덕궁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
서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북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궐 후원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참으로 고약했던 왜정(倭政)에 의해 고의
적으로 비원(秘苑)이라 놀림을 받았던 창덕궁 후원, 그는 후원<또는 금원(禁苑), 북원(北苑)>
이지 절대 비원이 아니다.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백악산)이 베푼 것으
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  늦가을에 잠긴 후원 뒷길 (너른 공터 직전)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포장길로 된 뒷길은 고개 정상부 너른 공터에서 끝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
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나무데크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
는데, 오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
버스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사람들의 왕래가 적고 한적해서 좋다. 하여 내가 좋아하
는 길의 하나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하여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둑
하니 통행에 조금 주의가 필요하다.


▲  나무데크 계단길 - 너른 공터를 지나 저 계단을 오르면 된다.
(어차피 오르는 길도 하나 밖에 없음)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는데, 그는 북악산(백악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
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 산길과 계곡

▲  현대적 정자 스타일로 지어진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늙은 경승지로 착
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
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없
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와룡고개(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북악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
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옥류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북악
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
도 살짝 이어져있어 그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색깔의 옥류정 현판
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단단히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고개가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정자 동쪽에 성대후문 종점으로 가는 길이 있음)


▲  계곡을 막아서 만든 옥류정 연못

옥류정 앞에는 북악산 물을 머금은 조그만 연못이 닦여져 있다. 2015년에 조성된 것으로 옥류
정에서 잠시 묻힌 계곡은 여기서 다시 속살을 드러내며 졸졸졸~♪ 밑으로 흘러가는데 연못 주
변에는 나무에게 버림 받은 나뭇잎들이 낙엽이란 우울한 존재가 되어 귀를 접고 쓸쓸히 누워
들 있다. 연못은 바로 그들의 인생을 처리해주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하게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다시 창덕궁 후원 뒷길로 (직진하면 돌담길, 중간에 왼쪽으로 가면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 오른쪽은 중앙중고와 북촌 방향)

▲  창덕궁 후원 돌담길 (돌담과 만나기 10m 전)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이곳은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을 이어주는 와
룡고개(와룡공원) 밑부분인데,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달달하게 그려진 수채화처
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
담길 주변 역시 나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으로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성균관대로 내려가는 후원 뒷길
산길을 넘어서 들어간 대학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성대 교정으로 따로 문이나 철조망은 없다. 그냥 들어가면 된다.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곳은 성균관대에서 '사유(思惟)의 길'로 삼고 있다.

▲  창덕궁 후원 뒷길의 동쪽 '사유의 길'

후원 뒷길이 숲이 삼삼하다보니 성균관대에서 뒷길의 교내 구간을 '사유의 길'로 삼았다. 번
잡함이 크게 덜한 후원 숲길에서 책도 보고 명상도 즐기며 속세(俗世)의 온갖 유혹에 취약한
자신의 머리와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유의 길이란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숲도 짙고 산바람도 그윽하여 옛날 선비들 같았으면 공
부를 한다며 정자 하나를 짓고도 남았을 것이다.


▲  성대로 넘어온 후원 돌담 (돌담 안쪽은 창덕궁 후원)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을 마무리 짓다.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옛
날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부는 후원 특별 관람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아주 비싼 곳으로 대운
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시야에 들어오고,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도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포장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
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균관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
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 보
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와 이어지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여닫는 문짝을 만든 것이 고작
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에 창덕
궁에서 고종(高宗)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 패거리와 왜군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급히 소환한 청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원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길로 도망쳤고,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라갔다. 단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北廟)로 들어갔으나 결국 청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국가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明倫洞)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의
하나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
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
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인물인데, 이름도 참 외우기 쉽다. 그래도 익히기가 어렵다
면 대중 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 그리고 약간의 왜식(倭式)까지 절충하여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
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 개혁 의지를 기리
고자 함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관람료 없음)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장면의 흉상(胸像)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져 들어앉은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
으로 사랑채(56.2㎡)와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좀 클 줄 알았더니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해 졸
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대를 누볐던 자유
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빌라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2차선 길인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의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
고, 좌측 기둥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이 집의 주인을 알려준다. 명패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문을 두드리면 (초인종은 없
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해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 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
이 두터운 사람들은 왼쪽으로,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
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
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고 전하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
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의 간략한 생애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에 수
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
으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했으
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
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회연
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해방이 되자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
며, 우익의 일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을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국 맨
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
득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
러났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自由黨)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야망이 쓸데없이 높던 이
기붕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다가 열차 안에서 돌
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에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9년 민주
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장면은 또
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
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창원)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
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욕
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
했으며, 그렇게 1년을 쓸데없이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싹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葬
)으로 치뤄졌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그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가고 10여 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나왔고, 내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자리하고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펌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있고, 안방 북쪽에는 부
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그리고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그걸 신고
움직이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
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을 아련히 알려준다.


▲  장면 가옥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이 여권은 1948년에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오른쪽)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준 훈장의 위엄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받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모습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지금과 달리 한자가 꽤 많으며,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도 무척 이채롭다.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2년 동안 주미대사를 지냈을 때 쓰던 타자기이
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에는 정
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쁜 시간을 지냈다.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 전한다. 기도서 위에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그 껍데기만 남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니던 동그란 도시락통(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 여사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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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마크 베게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편안한 휴식과
숙면을 인도해주었다. 국정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
리라.


▲  3대가 다 모인 장면 가족 사진

▲  장면 가옥 사랑채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과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장면기념관의 일부로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
다. (내부 관람 가능)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과로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복제품)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으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
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은 면하게 했는
데,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계발 5개년 계획서(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그리고 장면 사망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장면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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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이자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남산야외식물원, 남산공원길, 남산팔각정, 한양도성)

서울 도심의 남주작, 남산 봄나들이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봄나들이 '
남산공원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  남산공원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그 한 글자 봄, 그 봄이 반년 가까이 천하를 지배했던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 만물을 따스히 어루만지던 4월의 첫 무렵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상큼한 뒷동산인 남산을 찾았다.

봄이 도래하면서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 등 온갖 꽃과 나무들이 겨울 몰래 잉태했던 꿈
을 펼치며 앞다투어 봄의 나래를 펼친다. 이럴 때는 정말 집에 있기가 너무 섭하지. 하
여 무조건 집을 나서 나들이나 답사, 등산 등으로 봄의 향연(饗宴)을 즐긴다. 그래야만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봄이 비록 겨울 제국과 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꽃샘추위를 말끔히 토벌했지만 황사와 미
세먼지 등 다른 세력이 극성을 부리며 기껏 해방에 들뜬 천하를 유린한다. 몽골과 고비
사막 등에서 일어난 봄의 단골 불청객인 황사야 봄에는 늘 찝적거리던 존재라 그렇다쳐
도 중공 잡것들이 악의적으로 날려보내는 미세먼지 패거리들이 나날이 세력을 불려나가
맑은 하늘 보기가 점점 우울해지고 있다. 우리가 남산을 찾은 날도 그 먼지가 작렬하여
시야가 곱지 못했다.
이럴 때는 집에 틀어박히는 것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좋다고 하나 날씨도 좋고 봄꽃
이 유혹하니 그러기가 힘들다. 특히 역마살 끼가 단단히 낀 나는 더욱 그렇다.


▲  벚꽃이 만연한 그랜드하얏트(Grand hyatt) 서울호텔 앞 산책로
(경리단길에서 남산야외식물원으로 넘어가는 길)



 

♠  남산 남쪽 끝에 자리한 남산야외식물원

▲  남산야외식물원 동쪽 산책로

이번 남산(南山) 나들이는 경리단길과 가까운 남산야외식물원에서 그 첫 단추를 여밀었다. (6
호선 녹사평역에서 경리단길을 거쳐 남산야외식물원으로 접근했음)
남산야외식물원은 남산 남쪽 끝자락에 넓게 둥지를 튼 싱그러운 공간으로 예전에는 외인아파
트 2동이 건방지게 남산을 가리며 흉물스럽게 자리해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그들을 싹 밀
어버리고 9,811㎡ 부지에 야생화공원을 닦으면서 남산야외식물원은 싹을 틔웠다.

1995년 전국 광역단체 시도에서 옮겨온 소나무 80그루로 팔도소나무숲을 닦았으며, 1997년 2
월 야외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4월에는 이 땅의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화 185종
과 나무 93종을 심었고, 생태연못과 조그만 계곡을 덩달아 조성했다. 야생화공원을 포함한 공
원 면적은 59.241㎡, 품고 있는 식물은 10여 개의 주제로 나누어 배치했으며, 현재 식물 269
종 117,132주가 심어져 거대한 야외식물원을 이룬다.

이곳 야외식물원의 중심은 야생화공원이며, 그 외는 그냥 자연공원이다. 숲이 짙고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으며, 야외식물원이라고 해서 입장료를 받거나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은 절
대 아니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포근한 공간이다.


▲  야생화들의 강인한 협동심이 빚어낸 어여쁜 화단

▲  남산야외식물원 야생화공원 산책로

▲  생태계곡 남쪽 종점과 야생화화원
야외식물원 서쪽에는 2002년에 닦여진 생태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서 발원한
조촐한 계곡이 싱그러운 자연을 머금으며 공원을 곱게 수식한다.

▲  생태계곡과 산책로

▲  생태계곡에서 만난 물레방아의 위엄
동그란 물레방아가 이곳의 고운 경치를 크게 돋군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경치였겠지.

▲  단촐하게 생긴 생태계곡 징검다리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정겨운 징검다리이다.

▲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 생태계곡 (서쪽 구간)

▲  수중식물과 개구리가 나래를 펼치는 생태연못 (동쪽)

2002년에 조성된 생태연못에는 연꽃을 비롯해 많은 수중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막 봄에 의해 겨울 제국이 씌운 봉인이 풀린 상태라 수초가 어색한 푸른 머리를 보이며 덥수
룩하게 있지만 곧 여름이 오면 자연 속의 늪지대처럼 무성해질 것이다.
연못은 조촐한 크기로 주변에 산책로와 나무데크길이 닦여져 있으며, 연못 중간에 나무 다리
가 운치를 더한다.

*
남산야외식물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2동 258-148 (소월로323)


▲  생태연못 서쪽

▲  소나무가 무성한 남산 산책로

생태연못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남산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나온다. 남산 남쪽이 대체로 경사
가 각박한 편이라 그 경사를 다소 순화시켜 길을 냈는데, 애국가에도 나오는 남산의 상징 소
나무가 삼삼하여 솔내음이 아주 진하다. 길 중간에는 약수터와 운동시설이 여럿 있으며, 그
길의 끝은 남산 남측순환도로와 만난다.


▲  솔내음이 진하게 깃든 남산 산책로
(남산야외식물원에서 남측순환도로로 올라가는 길)

▲  남산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에 들어서다



 

♠  남산의 하늘길 거닐기

▲  하늘로 이어질 것 같은 남산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남산의 하늘길이자 서울 도심의 남쪽 하늘길인 남산 남측순환도로에 이르자 여기서 정상 방향
인 왼쪽(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때가 때인지라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 산수유 등이 앞다투
어 아름다움을 뽐내며 봄의 향연을 펼치고, 사람들은 그들의 즐거운 향연에 제대로 눈 호강,
마음 호강을 누리며 미세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봄꽃놀이를 즐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워있는 남산(270m, 또는 262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란 아
주 평범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천하에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
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그런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조선 태조(太祖)는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그리고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군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
호란 이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
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
으며 갖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비록 인왕산, 북악산(백악산)만은 못해도 도성 경승지로 명성이 자자하여 양반사대부
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비했다. 허나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倭人)들이 남산 북
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
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으면서 그들
만의 꼬질꼬질한 놀이터로 만들기도 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이던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정이 속좁게 징징거리자 어쩔 수 없이 인왕산(仁王山)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었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잡다한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서울타워(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
되어 남산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벚꽃비가 우수수 대지를 적시는 남산 남측순환도로

비록 친일파 떨거지가 지은 것이긴 하나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
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남산이 베푼 약수터가 뿌리를 내리며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고 있
는데, 그중에서 부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진 상태이다. 그 외에 여러 약수터가 있으나 도심 속에 있다는 단점으로 목
숨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이며, 문을 닫은 약수터도 적지 않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
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이다.

남산은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와 북측순환도로, 그리고 여러 갈래의 탐방로가 있는데, 장
충단공원과 국립극장, 필동(筆洞), 남산골공원, 백범광장, 남산도서관, 남산야외식물원 등에
서 오르는 길이 있다.
또한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남산봉수대, 와룡묘,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남산골공
원)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를 지
니고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도심 속 나들이, 산책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서울을 찾은 타 지역 사람들과 외국인 잡것들 등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
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등의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의 옛 추억이 몇 권
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인데, 내가 제일 많이 안긴 산이 바로 남산
으로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500회 이상은 올랐던 나의 원조 즐겨찾기 명소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지점에서 바라본 천하 (이태원, 용산구 방면)
서토(중원대륙)에서 불법적으로 날라온 더러운 미세먼지에게 서울의 하늘을
도둑질 당했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미세먼지 때문에 가까이에 있는 남산서울타워 조차 희미하게 다가온다.

▲  다시 남측순환도로를 거닐다 (정상 방향)

▲  한양도성과 만나기 직전 남측순환도로

▲  고개를 내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  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길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정상 방향)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게 된다.


▲  서울 도심의 남쪽 머리, 남산 정상(270m)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윗 사진을 클릭한다.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3783-5900)



 

♠  남산 정상 주변

▲  남산 팔각정(八角亭)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는 남쪽,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각각 자리해 있는데, 그중 인파가 가
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높이 236.7m)와 팔각정 주변이다.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李承
晩) 대통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 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나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지만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워있는 국사당터 표석에는 눈길
을 주는 이들이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지나는 이들의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나 거의
외면을 받는 국사당 표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앞서 언급했던 남산의 수호신 목멱대왕의 사
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에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
산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
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
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무속신앙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집과 탑, 비석 등의 부동산 문화유산은 가급적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맞겠지만 사람들로 미
어터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 그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며 우뚝 자리해 있다. 남산
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목멱산봉수대터')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크
게 문제는 없다. 어차피 남산이나 목멱산이나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하여 변방에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주로 산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힘들게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전국 봉수대의 종점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으며, 동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
제도가 폐지되면서 문을 닫았고, 왜정 때 싹 철거되면서 그만 그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에 복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를 모른다고 함;;)

남산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물러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이 되었는
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서 날라오는 봉
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아차산봉수
대터), 봉산 봉수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봉산과 어설프게 재현된 개화산봉수대를 빼고 모두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
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벽돌로 잘 지어진 목멱산봉수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  목멱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울 도심은 어디로 갔지?)
천하의 최대 민폐덩어리 중공이 보낸 미세먼지의 농간으로 바로 밑인 서울
도심도 짙은 안개에 감싸인 듯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차라리
저게 안개였으면 좋겠다.

▲  남산 정상에 묻힌 85타임캠슐
1985년 10월 17일에 묻은 것으로 딱 500년 뒤인 2485년에 봉인을 푼다고 한다.
500년 전 사람들의 물건을 본 그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  남산 숲길 (북측순환도로로 내려가는 길)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려고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게다가 남산은 어린 시절부터 수
없이 안겼던 곳이라 20분 정도 머물고 왔던 길로 내려가 북측순환도로로 질러가는 숲길로 들
어섰다.
이 숲길은 숲이 울창한 아름다운 길로 남산 정상과 북측순환도로, 장충단공원을 빠르게 이어
준다. 예전에는 시멘트 계단길로 닦여져 있었고, 길 좌우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으나 길을
순화시키면서 철조망을 없애고 계단을 크게 줄였다. 허나 길의 상당수는 여전히 시멘트로 되
어 있어 그 점이 아쉽다. 산에 걸맞게 흙길로 깔았다면 발걸음이 더 즐거웠을텐데 말이다.


▲  남산의 숨겨진 숲길 (남산약수터 방면)

숲길을 조금 가다보면 샛길 하나가 살짝 손을 내민다. 그 길은 한양도성 남산약수터 주변 구
간으로 이어지는 따끈따끈한 숲길로 근래 닦여졌는데, 2010년 이후 금지된 땅에서 해방된 남
산의 숨겨진 속살로 성곽 조망대로 이어지며, 성곽 조망대에서 한양도성 밑도리를 따라 남측
순환도로 시작점(남산약수터 입구)까지 이어진다.


▲  아직까지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있는 성곽 조망대 남쪽 한양도성

▲  성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국립극장, 장충동 주변)
여전히 미세먼지 밑에 가려져 보이는 것이 별로 없다.


숲길 성곽 부분에는 성 안과 성 밖을 이어주는 나무 계단이 닦여져 있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
된 귀한 몸을 배려해 성곽 여장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통로를 내었는데,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성곽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  북쪽을 향해 거칠게 달려가는 한양도성 (성곽 조망대 북쪽)

성곽조망대에서 나무 계단을 통해 성 밖으로 넘어가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여기서
남산약수터 입구 갈림길까지는 2010년 이후에 개방된 구간으로 성 바깥에 탐방로를 닦았다.
경사가 다소 거칠어 올라갈 때는 다소 진땀을 빼야 되며, 성곽길(성곽 안쪽)은 성곽 보존과
자연보호 때문에 아직까지 통제의 봉인에서 풀리지 않았다. 하긴 속세에 너무 풀어버리면 남
산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긴다.


▲  성곽 바깥 탐방로 (남산약수터 입구 방향)

▲  각박하게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성곽 조망대 방향)

▲  다시 만난 남측순환도로 (남산약수터 입구)

성곽 탐방로를 내려오면 다시 남측순환도로와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남쪽)은 남산 정상, 왼
쪽은 국립극장 방면이며, 성곽은 도로에서 잠깐 끊겼다가 길 건너편에서 다시 부활하여 제 갈
길을 간다.
우리는 왼쪽 길로 접어들어 국립극장을 거쳐 동대입구역(3호선)으로 내려갔다. 이미 정상을
찍고 내려왔으니 또 올라갈 필요는 없고 오로지 뚜벅이 길로 이용되는 북측순환도로(국립극장
~소파로)도 종종 복습을 하는 길이니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남산 봄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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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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