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찰'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8.06.01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2. 2018.05.04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3. 2018.04.12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둘러보기 ~~~ (능말 은행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묘역,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와 석불입상)
  4. 2018.02.12 법정스님과 길상화(김영한)의 아름다운 넋과 무소유 정신이 깃든 도심 속의 포근한 절집 ~~ 성북동 길상사
  5. 2017.12.08 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6. 2017.10.1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7. 2017.09.27 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8. 2017.08.28 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9. 2017.08.07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40리를 거닐다 (죽성리 월전, 대변항, 죽도, 오랑대, 해동용궁사)
  10. 2017.06.29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서달산, 현충원 숲길)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사찰 ~ 안암동 개운사 '

▲  개운사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초파일 절 투어 코스를 근사하게 닦은 다음, 오전 11시에 길을
나섰다.
이번 초파일에는 서울 동북부 지역(동대문구, 성북구, 노원구)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 등 여러 곳을 둘러보았는데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후식도 배불리
챙겨먹으며 정신없이 신나게 절투어를 즐기니 어느덧 안암동(安岩洞)에 있는 개운사에 이
르렀다. (먹는 재미 때문에 초파일 절투어를 벌이는 것은 절대로 아님;;;)

개운사는 정말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있음에도 인연이 참 지지리
도 없던 절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역사가 짧거나 없는 듯 자리한 것도 아니다. 엄연히 서
울에 이름난 고찰이자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로 일주문부터 사람들로 봐글봐글하다.


 

♠  조선 초기에 창건된 도심 속의 사찰,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렸던 ~ 개운산 개운사(開運山 開運寺)

개운산<안암산(安岩山)> 남쪽 끝에는 서울의 주요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고즈넉하게
자리해 있다. 안암동로터리에서 개운사로 이어지는 길(개운사길)은 고려대를 낀 서울의 주요
대학가로 학생과 청춘들로 늘 마를 날이 없는 번잡한 곳이다. 예전에는 개운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城北川)으로 흐르던 개천을 옆에 끼고 있었으나 그 졸졸졸~♪ 소리도 듣지 못하게끔
말끔히 봉인해버렸고, 고려대가 개운산과 개운사 사이를 끊고 건물을 지으면서 겨우 가늘게
개운산을 붙잡고 있다.

고려대와 주택가의 확장으로 절의 북쪽과 서쪽은 고려대에 감싸여있고, 남쪽과 동쪽은 주택들
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허나 그 동쪽도 얼마 안간 보타사부터 고려대에 막히니 자연히 3면
이 고려대에 포위된 꼴이다. 게다가 절 주변은 하숙집과 고시원, 식당, 술집, 피시방, 갖은
편의시설이 즐비해 고요함을 추구하는 절과는 너무 맞지가 않다. 완전 절과 밖이 180도 딴 세
상인 것이다.
허나 경내 주변에 나무가 그런데로 무성해 바깥과는 그런데로 다른 색채를 보인다. 그리고 경
내로 들어서면 여기가 대학가의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나름 고즈넉한 분
위기를 자아내며, 속세의 소음은 절을 둘러싼 나무들과 풍경 물고기가 모두 우걱우걱 씹어먹
는다.

그럼 개운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개운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학과 대광아파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영도사(
永導寺)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창건 이후 400년 가까이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
기가 썩 개운치가 않다.
과연 무학이 세웠는지는 개운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인근에 쟁쟁한 절(보문사, 미타사, 청
룡사, 연화사 등)이 적지 않아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세가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779년 절은 강제로 개운산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정조(正祖)의 후
궁인 원빈(元嬪) 홍씨<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의 묘역, 명인원(明仁園>을 바로 절 옆에 잡았
기 때문이다. 하여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은 절을 옮겼다. (또는 1730년에 이전했다고 함)

절 이름이 언제 개운사로 바뀌었는지는 역시나 개운치가 않다. 인파당이 절을 옮기면서 이름
을 갈았다는 설도 있고, 고종(高宗)이 어린 시절 영도사의 도문 처소에서 잠시 양육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863년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에서 개운사로 고쳤
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송담 수훈이 지장탱, 시왕탱, 사자탱 등을 봉안했고, 1873년에 명부전(冥府殿)을 중건
했다. 1880년에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883년 불상 2개를 개금하고 감로탱,
팔상도, 신중탱, 산신탱 등을 봉안했다. 그리고 1885년에 아산에서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
를 가져왔는데 1935년에 왜정(倭政)이 국방 헌납을 이유로 강탈해 갔다.

1912년 왜정이 사찰령(寺刹令)을 시행하자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고 김
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했다. 1913년 조선 황실 소유의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 소
유로 등록했으며,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講院)을 개설하면서 불교 개혁 및 교육의 근
원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1929년에 권범운(權梵雲) 등이 독성전을 중건했고,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지었으며,
한때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1955년 대처승(帶妻僧)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가 열리기도 했
다. 허나 이후 조계종으로 갈아탔고, 조계종 종정(宗正)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총무원(總務院)
간판까지 달았다. 또한 1981년 중앙승가대학을 경내로 이전해 오랫동안 불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은 경기도 김포시에 가 있음)

넓은 경내에는 1993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명부전, 미타전, 종각, 선방, 중
앙승가대학 건물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다. 이중 선방은 수도권에서 제법 큰 규모
를 자랑한다.
허나 절 건물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이라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
古色)의 농도는 매우 얇은 실정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속은 오래 숙성된 문화유산이 풍부하
여 절의 오랜 내력을 그런데로 가늠케 해준다. 비록 다른 곳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보물로 지
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감로도와 신중도, 팔상도, 지장시
왕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일괄 등 보물 1점, 지방문화재 5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1879
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동쪽에 대원암과 보타사가 있다. 대원암(大圓庵)은 구한말과 왜정 때 활약했던
고승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계 석학을 배출했던 현장이며, 보타사(普
陀寺)는 옛 칠성암(七星庵)으로 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된 것을 절로 바꾼 것이다. 이곳에는 국
가 보물로 지정된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과 고운 자태의 금동보살좌상이 있으니 꼭 둘러보
기 권한다.


▲  개운사 일주문(一柱門) (2014년)

개운사에 이르면 제일 먼저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문짝도 없는 열린 모습으로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초파일 향연의 장으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문의 머리인 맞배
지붕이 너무 육중해 문 기둥이 애처롭게 보일 정도이다.
지붕과 평방(平枋) 사이에는 금색으로 쓰여진 개운사 현판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문 좌우로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빙 둘러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넓게 닦여진 주차장이 펼쳐지는데 그 너머 북쪽 언덕에 선방과 종각, 나무
로 경내를 꽁꽁 가린 개운사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일주문 안쪽 동쪽에는 비석들이 옹기종
기 모여있으며, 주차장 서쪽에는 중앙승가대학으로 쓰였던 정진관이 있다. (공양간은 정진관
옆 건물에 있음)


▲ 개운사의 20세기 역사를 머금고 있는 비석들
지붕돌을 지닌 비석부터 대머리 비석까지 10여 기의 비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왜정과 20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공덕비와 기념비로 가장 이른 것은
1931년에 지어진 승려 경허의 공덕비이다.

▲  개운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주차장을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날씬한 자태의 관음보살입상이 나온다. 이 석불은 20세
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주변에 검은 때가 조금 피어있어 약간 고색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감로수가 담긴 정병(政柄)을 꼭 쥐어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대학가로 떠들썩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주변에
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그의 임시 광배(光背) 역할을 한다.

             ◀  개운사 3층석탑
관음보살입상 바로 옆에는 잘생긴 3층석탑 1기
가 자리해 있다.
개운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20세기 후반에 조성
되었는데 반듯한 바닥돌과 2중의 기단(基壇),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을 두루 갖추어 안정
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탑은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
슨 사연인지 경내 외곽에 두었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종각 남쪽)
오색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  범종(梵鍾)을 품은 종각과 연등으로 뒤덮힌 선방 옆길
일주문과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선방 옆구리를 지나야 된다.

▲  2층 규모의 선방(禪房)

선방 옆구리를 오르면 대웅전과 선방, 명부전, 미타전에 감싸인 대웅전 뜨락에 이른다. 뜨락
에는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추가되어 6색 연등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는데, 뜨
락을 기준으로 남쪽에 대방이라 불리는 선방이 장대한 덩치로 남쪽을 굽어본다.
선방은 1921년에 중창된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지어졌다. 밑층에는 종
무소 등이 들어있으며, 윗층은 선방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방으로 꼽히는데, 한참 개운사
가 교육과 불교 개혁에 나섰을 때, 선방은 그 공간으로 분주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선방 앞에는 중생들에게 떡과 수박, 커피, 녹차 등을 제공하는 공간을 두어 초파일의 훈훈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도 공양밥을 먹으려고 했으나 절 도착 직전(16시)에 그만 마감이
되버려 꿩 대신 닭으로 간단히 떡과 수박을 섭취하였다.


▲  연등이 하늘을 훔친 대웅전 뜨락
연등의 두터운 물결 앞에 그 장대한 대웅전도 눈치를 살살 보며 간신히 그 일부만
드러내 보이니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에 자리한 하늘 세계의 궁궐 같다.

▲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과 깨알 같은 복전함들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
된 관정대(灌頂臺)에 서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다른 절의 아기부처상은 그래도 키
가 좀 있으나 여기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것보다 훨씬 작다.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줌마 신도의 도움과 권유를 받으며 나무 바가지에 물을 가
득 담아 아기부처의 머리에 물을 껴얹은 관불(관정)의식을 행한다. 날이 날인지라 나도 그 의
식에 동참해 그를 냉수마찰을 시켜주니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환해진 듯 보였다. 하지
만 저녁이 오고 신나던 초파일이 저물면 아기부처는 강제로 어두컴컴한 창고로 돌아가 내년을
고대해야 된다. 이렇게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喜悅)은 대단할 수 밖에...


 

♠  개운사의 보물창고, 미타전(彌陀殿)과 대웅전(大雄殿)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타전

대웅전 뜨락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미타전이 자리해 있다. 미타전
의 주인장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절의 제일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 홀로 봉안되어 있다. 그는 원래 명부전에 얹혀 살았으나 1995년 몸 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
물이 쏟아져 나오자 지금의 미타전을 손질해 그의 전용 공간으로 삼았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649호

서방정토가 있다는 서쪽을 바라보고 앉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으로 도
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 118cm, 무릎 너비는 92cm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근래 조성된 것처럼 젊어 보이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고려 후기에 조성
된 나이 지긋한 불상으로 개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특히 1995년에 그의 몸 속에서
발원문을 비롯한 고려시대 문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오랫동안 숨겨졌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가치도 몇 곱절이나 높아졌다.

우선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검은색으로 꼽슬인 나발이며, 머리 정상에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다. 이마에는 하얀 백호가 찍혀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
러져 있으며, 눈은 지그시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작고, 입술은 붉으며, 검은 수염이 얕
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어 보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중생
의 고충에 귀만 기울인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인 하품
중생인(下品中生印)의 변형을 짓고 있으니 이는 화성 봉림사(鳳林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물 980호
)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 수인과 비슷하다.

개운사에서 마련한 목조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체격이 당당해 보이
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발바닥을 드러낸 이른바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불상의 몸을 가린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신라시대 법의보다 두터워 보이며, 옷 주름
은 그럴싸하게 접혀 있다.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가리고 가슴 부분은 드러냈는데, 가슴 밑에 표
현된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띠 매듭이 없다. 이런 형태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19호), 서울 수국사(守國寺) 목
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580호, ☞ 관련글 보러가기)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이
거의 일치한다.
이 불상은 이렇게 단엄(端嚴)한 상호와 세련된 조각 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
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線描), 보존 상태 양호로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가 순도 100% 고려 후기 불상임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의 몸 속에서 나온 유물들 덕
분이다.


▲  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중간대사 원문 (문화재청 사진)

불상 뱃속에서는 3장의 귀중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이중 '중간대사 원문(中幹大師 願文
)'은 1274년에 작성된 아미타여래좌상 개금(改金) 발원문으로 문서의 크기는 '54x56cm'이다.
이 문서는 1274년에 아산 축봉사(竺鳳寺)에 있던 본 불상을 개금하면서 남긴 것인데, 이를 통
해 불상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조성 시기는 늦어도 1273~1274년, 이르면 13세
기 초/중반임을 귀뜀해 준다. (1274년 이전에 제작됨)
특히 이 땅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重修願文)으로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중수원문(1280년)보다 6년이나 빠르며 13세기 불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더
욱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최춘 원문(崔椿 願文)'은 금불복장조성 발원문으로 '56x55.5cm' 크기이며, '천정 혜
흥 원문(天正 惠興 願文)'은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한 10종의 대원(大願)을 담은 발원문으로
'37x220cm' 크기인데 이들 2장은 1322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중간대사 원문을 비롯한 발원문
3장은 신변 보호를 위해 조계사 옆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과 발원문 3장은 한 덩어리로 보물 1649호로 지정되었다.

발원문 외에도 전적(典籍)류 28점, 문서 13점도 발견되었다. 불상 뱃속에 나온 유물을 복장유
물(腹臟遺物)이라 부르는데, 1995년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던 명부전에 정신 나간 도둑이 들어
와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를 훔쳐갔으며 아미타여래좌상 뱃속까지 손을 대어 사리
장치가 든 후령통(候鈴筒)까지 가져갔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상의 뱃속이 강제로 개방
된 것이다. 이때 개방된 뱃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경판(經板) 15점, 옛 사경(寫經) 7
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佛書)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 그리고 발원문 3점
등 총 41건 58점이 빛을 보았다.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전적 28점 중 22점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간행된 오래된 경전이고, 나머지 4종 6책은 조선 때
간행된 목판본이다. 오래된 22점 가운데 목판본 도장(道藏)인 '영보경(靈寶經)'과 필사본 '보
살보행경(菩薩本行經)'을 제외하고 모두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단일 불상의 복
장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다.
이들 유물을 통해 1274년 개금 이후 4번 이상 중수를 벌였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후기부터 고
려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불경과 문서들이 들어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 후기와 고려 초에 간행된 불경들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상태로 그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발원문과 별도로 전적류 21점은 '개운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 복장 전적
'이란 이름으로 보물 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현재 발원문을 따라 불
교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16건 33종은 별도로 '개운사 목 아미타불좌상 복장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29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원래 복장유물 전체가 이 등급에 있었으나 2010년
4월에 발원문과 전적 21점을 따로 떼어내 보물로 지정하면서 3개의 다른 이름과 등급을 지니
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불상과 불상 뱃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이 유별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문화재 복장 유물은 개운사와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아쉽게도 복장유물 어느 것
도 만나지 못했다. 보존 관리상 개방을 거의 안하기 때문이다.


▲  초파일이 준 고마운 선물, 개운사 괘불(掛佛)

대웅전 뜨락에는 아기부처상 외에도 매우 보기가 힘든 괘불까지 왕림을 하여 나를 무척 들뜨
게 하였다. 그렇다면 괘불이 도대체 무엇이건데 나를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
괘불은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불화(佛畵)로 초파일과 절의 주요 행사일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왠만한 운으로도 만나기가 어려우며 그나마 만날 확률이 높은
날이 초파일이다. 내가 평소에도 많은 오래된 절을 돌아다님에도 초파일에 무조건 절 답사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레어템<raretem, rare(희귀한)+item(물건)의 합성어>인 괘불을
보고자 함이다.
허나 초파일이라고 100% 외출을 하진 않는다. 이번 초파일에 4곳의 절집을 갔지만 겨우 개운
사에서만 괘불을 봤을 뿐이다. 확률로 따지면 1년에 정말 1번 정도 보는 꼴이다. 그러니 괘불
을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기 바란다. 레어템 중의 초레어템을 만났으니 말이다. (당첨은 장담
못함)

개운사 괘불은 1879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나한(羅漢) 등이 그려져 있다. 저
녁이 다가옴에 따라 그 큰 그림이 절반 정도 둘둘 말려져 있는데 괘불 밑에는 그의 거처인 길
쭉한 괘불함이 입을 벌리며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괘불은 그리 들어가고 싶은
눈치는 아닌 것 같다. 함에 들어가면 긴 시간을 갇혀 지내야되기 때문이다. 괘불 앞에는 중생
이 진상한 과일과 떡이 놓여져 있고 복전함이 무려 2개씩이나 설치되어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한다.


▲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본 괘불의 뒷모습
붉은 색의 문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  개운사 대웅전

개운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다. 2006년에 단청 불사를 했으며, 선방 다음으로 큰 건물(정진관 등의 현대식 건물은 제외)
로 뜨락보다 3~4m 정도 높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다진 탓에 무척 우람해 보인다. 건
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팔상도 등의 여러 그림이 깃들여져 있는데, 이중 팔상도
와 신중도, 현왕도, 지장시왕도는 지방문화재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림이 봉안된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대웅전 가운데 칸에서 굽어본 뜨락과 관불의식의 현장
개운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채운 연등이 저 밑에 보이니 마치 오색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조그만 석가불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 앞에는 불단이 무너질 정도로 온갖 음식과 과일들이 진상되어 있다.

▲  개운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2호

감로도는 물과 육지에서 방황하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고자 부처의 법을 강론하고 음
식을 베푸는 수륙재(水陸齋)를 위한 그림이다.
신중도 이상만큼이나 등장 인물이 많고 무대가 넓어서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그림 상단에는 7
명의 여래(如來)와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배치했고, 하단에
는 의식 장면과 아귀상, 지옥상, 윤회하는 중생도 등 6도중생이 담겨져 있다. 산수와 구름으
로 적절히 경계를 그었고, 다채로운 모습의 인물들과 적/녹/청/황/백색이 어우러진 색감과 안
정적인 필치(筆致),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1883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래가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죽은 이들
의 위패와 영정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개운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3호

대웅전 동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걸려있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
는 신들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림 중
앙에는 제석천(帝釋天)과 천룡(天龍) 등이 자리해 있고,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신들이 배치되
어 있는데 1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액자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  개운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출생부터 열반까지 8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것으로 1883년에 조성되
었다. 그림의 보호를 위해 액자 안에 담겨 있으며, 각 부분에 대한 설명은 쿨하게 생략한다.


▲  개운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저승
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멤버들이 담겨진 것으로 1870년에 제작되었다. 지장보살
밑에는 동자 2명이 그의 육환장(六環杖)과 두건을 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  개운사 마무리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뜨락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지장보
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10왕),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봉안되
어 있는데, 1995년에 도둑이 침투해 잠시 쑥대밭이 되었던 우울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때 지
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그리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후령통 등이 사라졌다.
이후 지장보살상과 없어진 시왕상 등을 다시 만들어 채웠고 뱃속이 열린 아미타여래좌상을 미
타전으로 옮겼으며, 뱃속 유물은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가져가 정밀 연구를 벌여 그 정체를 밝
혔다.


▲ 지장보살상과 지장후불탱(지장시왕도)
1995년 이후에 새로 만든 지장보살상 뒤쪽에는 고색이 물오른 지장후불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명부전 식구를 그림에 옮겨 놓은 것이다.

▲  모습도 제각각인 시왕상과 시왕탱
시왕상 뒷쪽에 걸린 시왕탱 4점은 1870년에 제작된 것이다.

▲  개운사만의 특별한 초파일 이벤트, 부처되기 포토존
저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해보자. 그러면 누구든 부처가 된다. (물론 무늬만~~~) 광배
부분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었으면 실감이 좀 컸을 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명부전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칸마다 다른 이름의 현
판을 내걸고 있다. 가운데 칸은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공간인 금륜전(金輪殿)으로 특별히
전(殿)으로 대우했으며, 서쪽은 산신(山神)의 공간인 산령각(山靈閣), 동쪽은 독성(獨聖, 나
반존자)의 공간으로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天台閣)이라 했
다. 허나 각 칸마다 이름만 달리 했을 뿐, 하나의 삼성각으로 봐도 무관하다.

이 건물은 1929년에 중건했는데, 처음에는 독성각(獨聖閣)이라 불렸으며, 이후 산신과 칠성이
추가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독성상과 독성탱
독성탱은 1930년에 제작된 것으로 붉은 계통의 옷을 입은 독성 할배와 문관(文官),
승려, 천태산,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앞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독성 할배상이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돋보이는 산신상과 산신탱

그림에 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된 듯 싶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옷
을 입은 산신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고, 그 좌우로 귀엽기 그지 없는 모습의 호랑이
와 동자가 있으며, 그들 뒤로 산과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산신탱의 기본 요소는 모두 갖
추고 있다. 그리고 산신탱 앞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 할배상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  그림만 홀로 있는 칠성탱

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 신앙으로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어엿하게 불교의 일원이 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을 정
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아무래도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는 존재다보니)

삼성각을 끝으로 약 1시간 반 가량 이루어진 개운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에 깃든 문
화유산은 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제외하고 모두 눈과 사진에 담았고, 거기에 생각치도 못
했던 괘불까지 친견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볼거리를 100% 초과 달성했다.
이렇게 개운사를 배부르게 둘러보고 동쪽에 자리한 보타사로 이동했다. 주차장 동쪽으로 나있
는 문을 이용해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온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보타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안암동 개운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정도 가면 일주문이 나오며 그 문을 들어서면 개운사 경
  내이다.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5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산4-11 (개운사길 73 ☎ 02-926-4069
* 개운사 홈페이지는 아래 연등길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개운사를 뒤로하며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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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5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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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완주 송광사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천하만물의 희망, 봄이 혹독한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를 한참 해방시키던 3월
한복판에 완주(完州)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송광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삼례(參禮)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담고 딱 2시
간을 달려 삼례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전주시내버스 350번(삼례터미널↔평화동
)을 잡아타고 호남의 오랜 중심지, 전주 시내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바로 전주로 안가고
삼례를 거친 것은 전주행 직행버스 이용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한산한
삼례행 버스를 택했다. 어차피 삼례에서 전주는 지척 거리이다.

전주의 도심, 전동(全洞)에 두 발을 내렸으나 송광사로 가는 차 시간이 50분이나 남아있
었다.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점심을 먹기에도 시간이 일러 중앙시장까지 쉬엄쉬엄 걸으며
시간을 억지로 죽였다. 그래도 20여 분이나 남아 정류장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기다리던 전주시내버스 806번(평화동↔앞멀)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벌린다.
전주 806번은 거의 3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벽지 노선으로 그를 놓치면 정말 대책이 없다.
(송광사는 806번 외에도 1개 노선이 더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절망 수준임)
버스는 모래내시장에서 노인들이 가득 타면서 거의 만석의 기쁨을 누렸고 중앙시장 출발
30분 만에 송광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진흙탕이 되버린 오도천을 건너면 송광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짧
은 방죽의 끝에는 완주군 제일의 고찰인 송광사가 일주문을 들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  송광사 앞을 흐르는 오도천

▲  송광사 주차장과 둑방길 나무들


 

♠  종남산(終南山) 남쪽에 들어앉은 오래된 고찰
완주 송광사(松廣寺)

▲  송광사 일주문(一柱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호

송광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양쪽으로 쭉쭉 뻗은 보기만해도 정겨운 기와 돌담을 거느리고 있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홀로 자리해 있지만 이곳은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하여 홀로 있는 것은 면했다. 바로 옆에는 백련다원이란 찻집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바
로 금강문과 함께 경내 건물이 두텁게 모습을 비춘다.
일주문은 속세의 문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어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허나 이곳
은 특이하게도 여닫는 문짝을 달았다. 문짝을 달았다고 해서 사람을 가리는 것은 아니니 어깨
를 피고 들어가도록 하자.

이 문은 맞배지붕 건물로 다른 일주문의 지붕과 달리 간결하고 가벼운 모습이다. 문 기둥 위
쪽과 기둥 사이에 공포(空包) 덩어리를 장식한 다포(多包)식이며, 기둥 앞뒤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진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준다. 문 평방(平枋)에는 '終南山 松廣寺(종남산 송광사)'
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1975년에 승려 서암(瑞岩)이 쓴 것이다.
지금은 경내 앞에 있지만 원래는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나드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 문을
들어서 3km를 더 들어가야 비로소 경내에 이르렀다는 소리로 송광사 땅이 무려 그곳까지 이르
렀다고 한다. 허나 사찰 부지가 계속 줄어들면서 1814년 절과 가까운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고
1944년에 해광극인(海光克仁)이 현 위치로 옮겨 정문으로 삼았다.


▲  일주문 서쪽 돌담

송광사가 산속이 아닌 평지에 둥지를 틀다보니 돌담으로 경내를 빙 둘러 속세의 잡다한 기운
을 경계하고 있다. (서쪽 돌담에 차량 통행을 위해 문을 낸 것을 빼면 거의 돌담으로 감싸임)
고색이 짙은 돌담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시골마을의 담장 같은 정겨운 풍경이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해맑은 표정의 나무 장승 1쌍이 좋은 인연임을 강조하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들의 인사에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긴장감도 많이
풀어진다. 그들을 지나면 바로 금강문이 마중한다.


※ 완주 송광사(松廣寺)의 오랜 내력
종남산의 남쪽이자 오도천 서쪽 평지에 둥지를 튼 송광사는 신라 후기인 867년 보조국사 체징
(普照國師 體澄)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종남산 남쪽에 영험이 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
을 짓고 송광사라 했다는데 이를 입증할 사료도, 그 시절 유물도 전혀 없어 창건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들게 한다. 백제 후기에 창건되어 백련사(白蓮寺)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역
시 마찬가지이다.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이곳을 천태종(天台宗) 소속으로 바꾸었다고 하
며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보조국사의 창건설 말고도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점지설이 있다. 그가 이곳을 지
나다가 영천이란 우물을 발견했는데 (절터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있었고, 절터 한쪽에
영천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함) 그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매우 특이해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이 우물로 인해 이곳에 절을 세우면 크게 될 것이라 여겼으나 당장 절을 세울 여
력이 없어 샘 주변 네 귀퉁이에 돌을 쌓아 자신이 찍어둔 자리임을 밝히고 그곳을 총총히 떠
났다.
이후 순천에서 그 유명한 송광사(松廣寺)를 세우고 머물 때, 제자들에게 '전주 인근 종남산에
괜찮은 절터가 있다. 크게 불법(佛法)이 번창할 곳이니. 그곳에 절을 세워라!'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눌은 고려 중기 고승(高僧)으로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당시 고려 불교계의 1
인자였던 그가 마음에 들어했던 자리에 절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친 것도 이상하거니와 스승의
부탁을 받은 제자들도 그 뜻을 받들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스러울 뿐이다.

지눌이 지나갔다는 시절에서 400여 년을 더한 1622년에 이르자 응호(應浩)와 승명(勝明), 운
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모여 현재 자리에 절을 세웠다. 재정이
여의치 못해 무려 14년 동안 공사를 벌여 1636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당시 무주 적상산(赤裳
山) 안국사(安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주지로 있던 벽암대사(碧岩大師)를 개창조(開創祖
)로 삼았다고 하니 이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로 여겨진다. 당시 절터 자리는 승명의 증조부(
曾祖父)인 이극룡(李克龍)이 기증했다고 한다.

▲  독특한 구조의 송광사 종루

▲  5층석탑 -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다고

1636년 절이 완성되자 벽암대사를 불러 50일 동안이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
천 명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완성을 기념하고자 사적비를 세우고 약사전을 지었
으며, 옛날 지눌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송광사라 했다고 한다. (순천 송광사
가 워낙 대단한 절이라 그곳의 이름을 따고 지눌의 일화를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것으로 여겨
짐) 참고로 종남산이란 이름은 보조국사가 절터를 구하고자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우물이 풍부
하게 솟은 지금의 자리를 발견하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
다. 즉 남쪽으로 가는 것을 마쳤다는 뜻이 된다.

1640년 명부전에 소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을 만들어 봉안했으며, 1641년 왕실의 지원을 받
아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국을 기원하고자 대웅
전에 거대한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봉안했다.
1649년 사천왕상을 조성했고, 1656년에 나한전을 지었으며, 1716년에는 범종을 조성했다. 그
리고 1786년에는 왕실의 지원에 호응하고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목조3전패를
만들고 절을 중수했다. 1813년에는 정준이 약사전을 중수하고, 절의 영역이 크게 줄어듬에 따
라 3km 밖 나드리에 있던 일주문을 조계교 인근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2층이던 대웅전이 기울
자 1층으로 개축했으며, 1814년 명부전 지장후불탱화를 조성했다.

1944년 일주문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고, 1989년에는 삼성각에 탱화를 조성했으며 1993년 대
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복장(腹臟)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2002년에
는 대웅전을 해체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고, 2003년에는 2층이던 관음전과 요사채의 위치
를 바꿨다. 그리고 2004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을 손질했고 2013년 약사전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  소나무에 조금 가려진 나한전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겉보기와 달리 제법 터가 넓은 송광사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천왕문, 금강문, 종루, 지
장전, 극락전, 첨성각,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약사전, 요사 등 대략 16~17동에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종루, 소조사천왕상, 소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복장
유물 등 국가 보물 4점과 일주문과 사적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 동종, 목조3전패, 나한
전, 금강문, 벽암당부도(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44호) 등 9점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산속 평지에 자리한 절로 마을 바로 옆에 자리해있어 산사의 내음은 조금 떨어진다. 그냥 시
골에 있는 한적한 사찰 정도라고나 할까? 요사와 종무소, 세심정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오래
된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건물마다 문화유산이 풍부하여 그들이 풍기는 고색의 내음에 현
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게다가 경내 서쪽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여름과 초가을에는
연꽃의 향연도 구경할 수 있다.

※ 송광사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① 전주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 무궁화호, 누리로)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이
  용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
  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인천공항, 의정부, 고양(화정), 성남, 부천, 안산, 수원, 강릉, 원주, 천안, 대전(복
  합, 유성), 군산, 정읍,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부산(
  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전주역에서 806번 시내버스(1일 5회)를 타고 송광사 하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6번 시내버
  스를 타고 고려병원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814번 시내버스(1일 11회 운행)로
  환승
* 전주고속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3-1번을 타고 모래내시장 정류장에서
  814번으로 환승, 또는 금암광장이나 전주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에서 전동, 전주한옥마을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중앙시장이나 전동성당, 남부시장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너편 정
  류장에서 806, 814번 이용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익산포항고속도로 → 소양나들목을 나와서 진안 방면 26번 국도 → 해월1교차로에서 좌회전
  소양 방면 → 마수교를 건너 우회전 → 송광사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금강문)

▲  사자를 탄 문수동자 (금강문)

★ 송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송광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자율/휴식형과 아름다운 순례길, 1박2
  일 템플스테이 등 3가지가 있으며, 자율/휴식형은 절에 머물며 휴식과 수양을 하는 것으로
  아침/저녁 예불과 공양시간만 지키면 된다. (평일은 언제나 참여 가능), 아름다운 순례길은
  전북에 있는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성지를 걸어서 순례하는 것으로 송광사에서 1박
  2일 숙식을 한다.
*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 (송광수만로 255-16 ☎ 063-241-8090 / 243
  -8091)
* 송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템플스테이 정보와 예약 신청 가능)


▲  금강문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  송광사 천왕문, 금강문

▲  금강문(金剛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3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금강문이 나타나 중생의 번뇌를 검문한다.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부처를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보금자리이다.
문의 천정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정이며, 대웅전 방향 오른쪽 금강역사는 왼손에 칼
을 들고 싸움 태세를 취하며 약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왼쪽 금강역사는 오른손에 뱀(아마
도 코브라일듯)을 꽉 쥐어들며 고개를 약간 틀어 오른쪽을 보고 있다. 눈을 크게 부라리며 당
장이라도 칼로 찌를 태세이지만 얼굴은 거의 해학적으로 생겨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
게 한다.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굳이 싸움을 걸지 않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금강역사 옆에는 앳되고 귀여운 동자가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사자(거
의 강아지처럼 생김)에 탄 동자는 문수동자(文殊童子)이며, 작은 코끼리를 탄 보살은 보현동
자(普賢童子)로 표정이 참 천진난만하다. 저들은 저리 표정이 밝건만, 속세에 찌들어 매일 고
통받고 사는 나는 그렇지가 못하니 그 비결을 묻고 싶을 뿐이다. 저 자리에 앉으면 저렇게 변
하는 것일까? 저들이 잠시 마실 나간 사이 그들의 자리를 빼앗아 앉고 싶다.


▲  금강역사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의 위엄

▲  금강역사와 하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굵직한 당간지주(幢竿支柱)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돌기둥에는 고색의 때가 역력하다.

▲  보수공사에 들어간 천왕문(天王門)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
금자리로 보통 일주문처럼 문짝이 없지만 여기는 여닫는 문짝을 두었다.

이 문은 송광사가 한참 몸을 일으키던 1622년부터 1636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1636년에 세
워진 송광사 개창비(開創碑)에 따르면 처음부터 '문'이 아닌 '전'을 칭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왼쪽 보관(寶冠) 끝 뒷면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 畢金山畵圓主造
像'이란 묵서(墨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순치6년은 1649년이다. (청나라 세조의 연호임)
하여 이를 통해 1649년에 사천왕을 만들어 봉안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왼손에 있는 보탑
(寶塔) 밑에는 '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新造成'이란 묵서명이 있어 1786년에 보탑을 새롭게
만들었음을 살짝 알려준다.

▲  천왕전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 보물 1225호

이들 사천왕상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천왕문이 보수공사에 들어가면서 문 주변으로 철제 담장을 둘렀고, 사천왕상 앞에 보수 관련
시설을 두면서 온전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사천왕상도 아무리 그들의 보금자리를 보수하
는 시설이라고 해도 시야를 가려 마치 철창에 갇힌 듯한 모습이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이다.

◀  아이들을 품으며 행복에 겨워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위엄


▲  송광사의 종루(鐘樓) - 보물 1244호

천왕문을 지나면 살이 과하게 찐 똥배 포대화상이 나온다. 똥배에다가 얼굴에 혹부리까지 잔
뜩 나있으니 성인병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을 듯 싶으나 불교의 주요 성자(聖者)의 하나로
그의 배를 문지르면 아들을 낳거나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중생들의 인기가 대단하다.

포대화상 옆에는 '十'자 모양의 묘하게 생긴 건물이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데 그가 바로 사
물(四物)의 보금자리인 종루이다. 송광사의 백미이자 상징으로 '十' 모양으로 생긴 탓에 예전
에는 십자각(十字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정확히는 12각형으로 이런 형태에 건물은 천하에서
거의 이곳 밖에 없다. 또한 6각형 이상 건물은 오로지 궁궐이나 국가 제단에서만 세울 수 있
었는데 무려 12각형짜리가 어찌 궁궐도 아닌 절에 버젓히 세워져 있는지 딱히 전하는 사연이
없어 호기심을 크게 자극시킨다.

그는 누각 형태의 팔작지붕 건물로 1층은 2층을 받쳐들기 위한 허공일 뿐이며, 서쪽에 마련된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면 중앙에 자리한 범종(梵鐘)을 비롯해 운판(雲版), 법고(法鼓), 목어
(木魚) 등의 사물이 매달려 있다.
이 건물은 대웅전을 1층으로 고친 1814년이나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지붕을 받치
는 공포와 지붕이 절반을 넘을 정도로 커서 1층과 2층 기둥이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쓸데없
는 걱정까지 들 정도이다.

▲  서쪽에서 본 종루

▲  종루 안에 들어있는 사물

종루에는 2개의 종이 걸려있다. 중앙에 자리한 것은 근래 것이고 그 북쪽(대웅전 방향)에 자
리한 것이 1716년에 조성된 동종(銅鐘)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38호이다,

종의 높이는 107cm, 아랫부분 지름은 73cm로 조그만 크기이며, 윗부분에 꽃무늬가 있고 밑에
는 방패 모양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밑에 연주형(練珠形) 돌기 60개가 둘러져 있고 9.5
cm 두께의 띠가 그 밑에 있다. 아랫부분에는 지름 6cm의 원이 8개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 범
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밑 세로 면에 보살상을 새기고 나머지 한 면에는 전패(殿牌)를 두었
다. 전패에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라 쓰여있어 당시 숙종(肅宗)과 왕후, 대왕대
비(大王大妃)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종의 가장 밑부분에는 지름 6㎝ 정도에 보상 당초 무늬를 둘렀으며 강희 55년(1712년) 4월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만들었다는 내용과 건륭(乾隆) 34년(1769년)에 문광득의 시
주로 종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어 시주자의 인적사항을 빼곡히 적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범
종 형태를 보여준다.


▲  송광사 극락전(極樂殿)

천왕문 동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
처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명부전(冥府殿)이었으나 1999년에 바
로 옆에 지장전을 닦으면서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
을 그곳으로 옮기고 이곳을 극락전으로 삼았다.
다른 건물과 달리 문이 중앙에만 있으며, 불단에는 아미타불과 수려한 보관을 쓴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고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가
득 벽을 메우고 있는데 이들은 죽은 이들의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 - 서방정토의 주인답게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있는 존재들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한 커다란 네모난 돌이 누워있다. 그 위에는 오래
된 연화대(蓮花臺)가 있는데, 그 자리에 새로 만든 하얀 피부의 석불이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인다. 이 네모난 돌은 예전 건물에 쓰였던 주춧돌로 보이며, 연화대 역시 예전에 쓰였거나
주변에서 업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잉여로 남은 이들 석재를 한쪽에 모아 자리를 만들고 새로
석불을 안치하여 그들에게도 존재의 가치를 심어주었다.
석재 뒤쪽에는 종이와 쓰레기를 태우는 굴뚝이 자리하여 서로를 의지한다.


▲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1999년에 지어졌다. 극락전에 있던 명부의 식구를 옮겨와 지장전으로 삼았으며, 소
조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한 명부(저승)의 식구들은 164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
어 '소조지장보살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8호로 지정했다.
허나 나는 어리석게도 지장전을 지나치고 말았다. 건물 주변에 그들을 알리는 문화재 안내판
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세심정 앞에 자리한 귀여운 돌부처
그의 포즈가 꼭 '한푼 내놔~' 그러는 것 같다.
그렇게도 돈이 궁했단 말인가?? 그 앞에
놓인 복전함이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  대웅전 동쪽 언덕의 세심정(洗心亭)
근래에 지어진 정자로 모습이 양반가의
정자나 별장 같은 분위기이다. 절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풍경~~


 

♠  송광사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  송광사 요사(寮舍)

세심정 북쪽에 자리한 'ㄱ'자 모습의 건물은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로 예전에는 약사전(藥師
殿)으로 쓰였다. 1636년에 벽암이 세웠다고 하며, 1814년에 중수했는데, 바로 이 요사 뒤쪽에
1636년에 세워진 송광사 사적비(事蹟碑,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그는 일명 송광사 개창비라 불리기도 하는데 신익성(申翊聖)이 비문을 짓고, 선조(宣祖)의 8
번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 역시 그의 존재를 몰라 지나
치고 말았다.


▲  송광사 나한전(羅漢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2호

대웅전의 뒷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선 나한전은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의 보금자리이다.
그들을 거느린 석가불을 중심으로 16나한과 오백나한(五百羅漢), 인왕상(仁王像), 동자상, 사
자상 등이 건물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 나온 유물 중 1656년
에 조성된 발원문이 발견되어 창건시기를 알려준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에 문이 있는 구
조이다. 1656년에 벽암이 세웠으며 1934년에 혜광이 중수했다. 이때 중수로 서까래와 천정 등
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주요 부재와 천정 구성 등은 17세기 불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나한전 석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뚱뚱한 어린이의 얼굴처럼 앳되고 포동포
동해 보인다. 두 귀는 중생들의 고충을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다. 그 좌우에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夾侍)하고 있는데, 보통은 중앙 불상과 협시불은 간격을 짧
게 하여 바로 좌우에 두지만 여기는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배치한 탓에 서로 간의 거리가
길어 마치 독자적인 불상/보살상처럼 보인다.

석가3존불 외에 16나한과 500나한, 범천(梵天)과 제석(帝釋), 동자, 인왕상, 사자상, 천녀상
등 526구가 불단 주변을 빼곡히 메운다. 500나한 중 일부는 나중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복원한 것이며, 석가3존불을 비롯한 나한전 내부의 모든 존재들은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로 지정되었다.


▲  나한전 내부 우측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16나한과 하얀 피부의 조그만 500나한 등이 보인다.

▲  나한전 내부 좌측 - 존상(尊像)들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송광사 삼성각(三聖閣)

나한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로 1980년대에 기존의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
부에는 1989년에 조성된 아주 따끈따끈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

▲  산신탱과 호랑이를 탄 산신상

▲  독성탱과 윗통을 드러낸 독성상

▲  근래에 새롭게 터를 닦은 미륵불

▲  송광사 관음전(觀音殿)

▲  대웅전 뒤쪽 뜨락

종루 서쪽에 자리한 관음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2층이었다. 1층
은 밥을 먹는 공양간, 2층은 관음전으로 쓰였는데 2003년에 2층을 뚝 떼어냈다. 근래에 조성
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으며, 건물 북쪽에는 매점을 겸하는 종무소가 있고 남쪽에는 공
양간 겸 요사로 쓰이는 적묵당이 있다.

대웅전과 나한전 사이에는 소공원 같은 조촐한 뜨락이 있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 자리한 짜투
리 공간으로 예전 주춧돌과 맷돌로 쓰인 돌을 가져와 조촐하게 탁자와 의자로 삼았는데 그 모
습이 참 아기자기하다. 그리고 서쪽에는 조그만 비석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그를 알리는 안내
문도 없고 비석의 내용도 마멸이 심해 멀쩡한 두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절과 관
련된 비석이거나 승려의 탑비(塔碑)인 듯 싶다. (옛 사적비라는 말도 있음)

▲  주름잡힌 어처구니 없는 맷돌이
어엿한 탁자가 되었다.

▲  주춧돌로 보이는 커다란 돌을 탁자로
삼고 주변에 작은 돌을 배치해
의자로 삼았다.

◀  정체가 묘한 오래된 비석
얼핏 보면 내용도 없이 그냥 돌만 비석처럼
세운 것 같다.


 

♠  송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1243호

송광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그 규모가 상
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히 주눅을 들게 만든다. 162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2층이었다.
지금도 1층 치고는 큰데 2층이었으면 거의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 버금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가 건물이 기울면서 1814년 1층으로 고쳤으며, 1857년에 중수했다.
대웅전 현판은 송광사개창비(사적비)를 썼던 선조의 8번째 아들인 의창군이 쓴 것이니 그만큼
왕실과도 인연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대웅전은 다른 건물에 비해 가운데 칸이 조금 좁은 편이며, 건물 외벽에는 1칸당 3개의 그림
을 두어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그림에는 신중과 보살, 나한도 등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법당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적인 구조로 문이 있는 정면은 그림의 높이가 낮다. 또한 겉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여길 수 있지만 대웅전의 매력은 바로 그 안에 있다.
송광사에서 다른 건 다 놓치더라도 대웅전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야 여기까지 들인 차비와 기
름값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건물 내부는 높은 기둥을 4개 세웠으며, 옆면의 평주(平柱)보다 뒤로 물린 다음 후불탱을 봉
안했고 그 앞에 불단을 두어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안치했다. 이 석가3불좌상은 규모가 대웅
전에 버금갈 정도로 장대하여 보는 이를 다시 한번 주눅 들게 만드니 왜 자꾸 중생의 기를 죽
이는지 모르겠다. 또한 건물 천정에는 보개(寶蓋)를 만들고 그 위에 용, 게, 거북 등을 배치
했으며, 중앙 3칸과 양쪽 구석 천정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을 그린 그림 11폭이 있다. 그리
고 석가3불좌상 사이에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3개의 전패(殿牌)를 두었는데, 그 디자인이 매
우 현란하며, 건물 외벽에도 온갖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어 그야말로 하나의 불교미술전시관을
보는 듯 하다.

대웅전 앞에는 원래 5층석탑이 있었다. 그래서 1금당 1탑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근래(2008년 이후)에 미륵불 앞으로 옮겨져 조금은 허전한 형태가 되었다.


▲  대웅전 계단 옆에 고개를 내민 귀수

화마(火魔)의 예고 없는 방문을 막고자 도깨비 얼굴상(귀수)을 건물 정면에 배치했다. 도깨비
라고는 하지만 그리 무서운 표정도 아닌 일주문 장승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그를 본 화마도 자
신의 본분도 저버린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 덕분인지 아직 대웅전은 화마에게 유린된 적
이 없다. 서로를 피곤하게 하며 인상을 찡그리는 강경책보다는 적절히 웃으면서 달래는 회유
책이 한 수 위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석련대(石蓮臺)
거북 비슷하게 생긴 석상 위에 연꽃을 두룬 석련대가 있다. 불상을 올려두는
돌받침대로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세월의 먼지만 가득하다.

▲  온갖 그림으로 가득한 대웅전의 뒷모습
1칸에 3개씩 그림을 배치하여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거기에 천정에 그려진
비천상의 사본 그림까지 배치해 두 눈이 심심해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 서쪽

▲  대웅전 동쪽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약사불 쪽에서 본 모습) - 보물 1274호

▲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아미타불 쪽에서 본 모습)

신발을 벗고 대웅전으로 들어서면 건물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3불좌상
이 마중을 한다. 높이가 무려 5m가 넘는 불상이 1개도 아니고 협시불까지 3개가 있으니 주눅
의 정도는 더하다. 이 땅에 있는 소조(塑造) 불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오래된 법당
의 불상 가운데서도 제일 큰 편에 속한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
타불을 두어 석가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석
가불은 높이 5.5m, 무릎너비 4.05m, 무릎높이
72cm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
고 이마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있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고, 코는
끝이 두툼하며 붉은 입술 주위에는 가늘게 수
염이 표현되어 있다. 표정은 약간 굳어보이며,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다.

석가불 왼쪽의 약사불은 석가불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그의 이름에 걸맞게 왼손에 약합(藥
盒)이 들려져 있다. 높이는 석가불보다 조금
낮은 5.2m이다.

석가불 오른쪽의 아미타불도 석가불, 약사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약사불과 비슷한 높이를 유지
하고 있다.

▲  대웅전 석가불의 위엄

근래에 석가불 몸통에서 조성기(造成記)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비롯한 불경과 사리함,
복장유물을 넣는 후령통(候鈴筒) 등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조성기를 통해 이들 불상
의 조성시기와 조성배경, 만든 이를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성기에 따르면 1641년 6월 29일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
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의 조속한 귀국을 발원하고자 조성된 것이다. 그
러다보니 왕실과 사대부, 백성들의 시주에 힘입어 저렇게 웅대한 규모의 불상이 태어난 것이
다. 또한 명나라와 청의 연호가 같이 들어있으며, 병자호란의 휴유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
지가 강하게 배여있다. 그런 연유로 태어난 탓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조성시기가 명확한 이 땅의 흔치 않은 불상으로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
점과 함께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으
며, 복장유물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현재 김제 금산사(金山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  목조3전패(木造三殿牌)의 하나인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0호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數千秋)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현란한 디자인의 전패 3개가 중생의 두 눈을 매혹시킨다. 약사
불 쪽에는 왕비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있고, 아미타불 쪽에는 세자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석
가불과 아미타불 사이 그늘에는 왕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숨은 듯 자리해 있다.

왕을 위한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를 새기고, 밑에 좌우에는 각각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왕비
와 세자의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 밑에 각각 1마리를 두어 차별을 두었다. 좌대(座臺)도 왕
의 것은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을 조각한 것에 비해 나머지는 복련만 조각했다. 이
들은 운룡문(雲龍紋)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수려하며, 높이도 왕의 전패는 2.28m, 좌우 것
은 2.08m로 이 땅의 전패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왕의 전패 뒷쪽에는 '순치세(順治歲)'에 만든 것이라 쓰여있어 1644년에서 1661년 사이에 조
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귀국을 위
해 만든 것이니 효종(재위 1649~1659) 때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효종(孝宗)이 맞으면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세자인 현종이 된다. 이후 1792년 전패를 수리했다.

법당에 이렇게 왕과 왕비 등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를 두는 경우도 흔치 않은데, 그만
큼 왕실과 인연이 깊고 그들의 지원을 두둑히 입은 절임을 입증하는 유물이라 하겠다.


▲  등장인물이 104명이나 되는 신중탱(神衆幀)

대웅전 서쪽 벽에는 보기만해도 혼을 다 빼놓는 신중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화엄경(華嚴經)
에 나오는 104위의 신중(神衆)을 그린 것으로 다른 신중탱과는 다르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빽
빽하게 들어차 있어 도대체 누가 누군지 눈과 머리가 고통스러울 지경으로 그림 중앙에는 동진
보살과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등을 배치했으며, 1925년에 종인(宗仁)과 상
오(尙旿), 현성(鉉成), 태익(泰翼), 명진(明眞), 해일(海日) 등의 화승(畵僧)이 그렸다.


▲  불단 뒷쪽에 걸린 그림들(극락구품도)

대웅전 내부는 바깥(날씨가 무지 따스했음)과 달리 시원하다. 나무로 된 방바닥은 걸을 때 마
다 삐걱삐걱 소리가 조금씩 나는데 그만큼 건물이 오래되었다는 뜻이 된다. 허나 아무리 쿵쿵
거려도 단단하게 지어졌으므로 무너질 일은 없다.

남들이 잘 안가는 불단 뒷쪽으로 가면 뒷쪽 벽에도 그림이 걸려있다. 1칸당 그림 1폭이 걸려
있어 모두 3폭이 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림마다 구분선이 있어 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1폭당 3개의 그림이 있으니 총 3폭의
9개의 그림이 있는 셈이다.
불가(佛家)에서 8개의 그림은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八相圖)이다. 그럼 9개의 그림은
뭘까? 답은 바로 극락9구품(極樂九品圖)이다. 극락에 대한 9개의 장면을 담은 것으로 이들 그
림은 자세한 정보가 딱히 없어 신중탱과 비슷한 시기 또는 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대웅전 천정에 그려진 주악천인도(奏樂天人圖) ①

불단 뒷쪽 복도를 끝으로 대웅전은 이제 다 봤구나 여겨 나름대로의 포만감으로 철수하기 쉽
다. 허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이 하늘을 우러르고 살듯이 이곳도 반드시 천정을 바라
봐야 된다. 불단 앞 천정에 7개와 좌우 천정에 각각 2개씩 모두 11개의 주악천인도가 대웅전
의 하늘을 빛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놓친다면 대웅전의 4할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저들을 보면서 어찌 저 높은 곳까지 그림을 그렸는지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저런 그림이 떡
하니 있으니 천정이 더욱 빛이 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두 눈은 가히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너
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고개를 90도나 올려서 봐야 되며 워낙 어두운 곳이라 저들을 모두
사진에 담느라 고개가 뚝 부러지는 줄 알았다.


▲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주악천인도 ②

▲  주악천인도 ③

▲  주악천인도 ④ 불단 동쪽 천정

▲  주악천인도 ⑤ 불단 서쪽 천정

▲  송광사 서쪽 연지(蓮池) - 절 너머로 보이는 산이 종남산

오래된 보물이 가득한 송광사 경내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나왔다. 경내 서쪽에는 넓은 연못이
있는데 이들은 연꽃의 보금자리인 연지이다. 연꽃은 여름 제국과 친한 식물이라 지금은 계림
황엽(鷄林黃葉)처럼 볼품이 전혀 없으나 앞으로 3달 이내에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한참 와
신상담(臥薪嘗膽) 중이다.
연못 너머에 보이는 정자는 백련정(白蓮亭)으로 연꽃이 있다면 연못을 1바퀴 둘러보며 백련정
에 발을 들여보고 싶지만 아무 것도 없고 가기도 귀찮고 해서 연못 남쪽만 서성이고 말았다.

참고로 연지 너머 경내 북쪽 산자락에 부도군(浮屠群)이 있다. 부도(승탑) 16기와 비석 2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에는 절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한 벽암당(碧巖堂)의 승탑이 있다. 이 승
탑은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44호로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송광사에서 놓친 것이 도대체 몇 개인지...)


▲  연못 남쪽에 있는 고인돌

연못 남쪽에는 엉뚱하게도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지석묘) 1기가 누워있다. 2개의 돌을 기
둥으로 삼아 뚜껑돌을 얹힌 형태로 이런 고인돌을 북방식(北方式) 고인돌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방식과 남방식이 북쪽과 남쪽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 있어 그것을 나누는 의미는 거의
퇴색되었다.

거의 우리 민족의 특허 유물이나 다름없는 고인돌을 간직한 절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듯
싶다. (내가 가본 300곳이 넘는 절집 중에서 오직 이곳이 유일함~) 그에 대한 자세한 신상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원래부터 있던 터줏대감으로 여겨지며, 이것 외에도 여러 기가 있던 것으
로 보인다. 허나 지금은 오로지 그만 살아남아 돌이킬 수 없는 머나먼 옛날을 그리워한다.


▲  경내 남쪽에 깔린 정갈한 돌담길

이렇게 송광사를 1시간 반 동안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넘었다. 비록 놓친 것이 다수 있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지만 이건 나의 무지에 따른 소산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아무래도 다음
에 또 오라는 송광사의 뜻인 모양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함)
이렇게 하여 봄맞이 송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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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둘러보기 ~~~ (능말 은행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묘역,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와 석불입상)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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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사 3층석탑
◀ 풍산심씨 심사손 묘
▶ 약사사 석불입상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여름이 봄을 밀어내고 천하를 한참 삼키던 6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강서구의 상큼한
뒷동산인 개화산을 찾았다.
개화산은 서울 서쪽 끝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북쪽 끝으머리에 매달린 우리집(도봉동)에
서 꽤 먼 곳이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서로가 끝과 끝이라 거리도 거의 40
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은 걸려 그곳에 가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그
러다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발이 잘안가게 된다.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
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매우 무성하여 풍경도 아
름답다. 산 동북쪽에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
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때 주룡(駐龍)이란 도인(道人
)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
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
도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
(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
주산(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서
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
(獅象之形)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알찬 개화산에는 괘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오래된 석
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
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터, 봉수대, 상사
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 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 둘레길 3.35km)이 닦으면서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를 설치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해
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본글에서는 능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시작으로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약사사를 살
펴보도록 하겠다.


 

♠  옛 능말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 16-3호)와 느티나무(서울시 보호수 16-6호)

개화산에 안기기 바로 직전에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들은
오래 숙성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형제로 삼정초교 남쪽에 작게 터를 닦은 느티어린이공원(이
하 느티공원)에 자리해 있는데 나는 약사사와 미타사, 풍산심씨 심정공파 묘역, 강서둘레길에
만 눈이 어두웠지 그들 고목(古木)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 나들이가 나에게 준 커다란 선물인 이들 나무는 공원 남쪽에 삼삼하게 우거져 공원 전체
에 그늘을 드리우며 무더위를 제대로 긴장 타게 한다. 그들 가운데
몸통이 큰 동쪽 나무 2그
루가 서울시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서쪽 나무 2그루는 그들의 후손임)
가장 둘레가 큰 나무는 은행나무로 높이 11m, 둘레가 4.44m에 이른다.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는 1972년 10월 12일로 그때 추정 나이가 435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의 세월이 강제
로 얹혀져 지금은 480년 정도 된다. 그 옆의 느티나무는 여기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로
높이 17m, 둘레 3.86m이다. 1974년 4월 20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480년
이라 지금은 520년 정도 되었다.

이들은 솔직히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아직까지 말
단 보호수에 머물러 있다. 우리집과 가까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아무 손
색이 없거늘, 오랫동안 보호수로 있다가 2013년 봄에서야 겨우 지방기념물로 승진된 바 있고,
반면 가치는 좀 떨어져 보이는데 외람되게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나무들도 적지 않아 도대체 무슨 기준인지 의문을 내던지게 한다.
허나 이들이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잣대에 관심이나 있을까? 보호수이든 천연기념물이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일 것이다. 올해도 무탈히 잎을 피우고 길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정자나무로
서의 소소한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무는 신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이 아니다.

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심정(沈貞)이 심은 것으
로 전해진다. 중종(中宗) 시절에 심정 일가가 이곳에 정착해 자연마을을 이루었는데, 심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심씨마을<또는 심울(沈蔚)이라 했음>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정곡리, 긴동
리와 함께 옛 방화동을 이루던 마을로 인조 시절에 왕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 1632년
인조에 의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의 능을 양주에서 이곳으로 옮기려다가 터가 좁아서 김포
풍무동으로 옮겼는데 그 연유로
능(陵)이 들어가는 능말(또는 능골, 능리)로 불리게 되었다.

1992년 능말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가해지면서 마을은 강제로 사라졌고, 주민 대부분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 자리에는 방화택지지구가 들어서 성냥갑 아파트와 건물이 잔뜩 심어
지면서 전원(田園) 분위기는 많이 녹아내렸으나 다행히 이들 나무는 개발의 칼질도 쏙 피해가
면서 제자리를 지켜 옛 능말의 추억을 아련히 되새기게 해준다. 만약 보호수 등급이 아니었다
면 아무리 몇백 년 묵은 나무라고 해도 진작에 아작이 났을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의 현실이다.


▲  느티공원 놀이터에서 바라본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의 위엄

능말의 정자나무이자 당산나무였던 이들 나무 형제는 낯선 이들로 이루어진 방화지구의 정자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4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외에는 거의 그대로지만 주변이 싹
낯설게 변해 나무 자신도 가끔 놀랄 것이다. 이제 그들이 옛 능말의 유일한 흔적인 것이다.
개발의 칼질로 고향을 떠난 이들은 능우회(陵友會)란 모임을 결성했는데, 1992년 10월 17일에
그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담긴 '애향(愛鄕) 능말 옛터' 비석을 나무 그늘에 세워 추억 속
으로 사라진 옛 고향을 그리워한다.

* 느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799


▲  개화산약수터

티공원에서 서쪽으로 가면 바로 숲내음이 진동하는 개화산이다. 여기서 북쪽 길로 가면 문
정공파 묘역의 시조(始祖)인 심정 묘역이 나오고, 정면으로 보이는 서쪽 산길을 3분 정도 오
르면 개화산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방화역을 나올 때 마신 커피음료가 목구멍에서 채 마르기도 전이지만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
냥 못지나치듯 샘터를 보면 꼭 물을 한모금 마셔야 발길이 떨어진다. 그래서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마시니 확실히 자연산이 더 좋은 것인지 앞서 마신 음료보다 더 시
원하고 달달하다. 아직 수질은 적합 판정을 받고 있지만 약사사 약수터를 비롯해 개화산에 적
지 않은 약수터가 개발의 칼질에 목이 달아난 상태라 이곳의 미래도 나처럼 장담하기가 어렵
다 부디 다음에 올 때도 이곳의 물을 꼭 마셔야 되는데, 아무쪼록 무탈하기를 기원해 본다.

산길 옆에는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자연 그대로 두지 않고 계곡 양쪽에 시멘트을 발
라 둑처럼 만들면서 아주 심하게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다. 그래도 엄연한 산골인데 돌에 걸
터앉아 발을 담굴 수 있게 해줘야 진정한 계곡이 아닐까 싶다.


▲  개화산약수터 주변 오솔길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

▲  심정(沈貞) 묘역

개화산 동쪽 자락에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이하 문정공파 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들 묘역은 심정을 시작으로 그 자손들 50~60여 기의 묘로 이루어져 있는데 1~2곳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주로 방원중교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금낭화로17
길 주변과 삼정초교 서쪽 산자락에 있음)
이들 무덤 중 심정과 심사손, 심사순, 심수경(沈守慶) 묘역과 그에 딸린 석물, 신도비가 지방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아님) 개화산을 주산(主山)으로 한 명당자리로 명
성이 자자하다.


정공파 묘역의 시조는 심정이다. 그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후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묻혔기 때문이다. 허나 먼저 묻힌 이는 심정의 아들인 심사손
이다. (심정은 1532년, 심
사손은 1528년에 사망)
심정의 묘역은 문정공파 묘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해 있는데, 삼정초교 바로 뒤쪽(서쪽)이다.
이곳에 가려면 느티공원에서 개화산으로 들어서자마자 북쪽 언덕 길로 가면 되는데 심정 쉼터
를 지나 오른쪽을 유심히 보면 샛길이 보인다. 그 길로 들어서면 심정과 심사순의 묘역이 모
습을 드러낸다.

심정(1471~1531)은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으로 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이던 심응(沈膺)이며,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1495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1502년 별과(別科)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503년 수찬(修撰)이 되었다. 1506년 연산군(燕山君)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
안(成希顔) 등에게 붙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가했으며,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
등에 녹훈(錄勳)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며, 귀국하여 남
곤(南袞), 김극성(金克成) 등과 짜고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를 제거하고자 옥사(獄
事)를 벌이지만 실패했다.
1509년 성천부사(成川府使) 등을 지냈고, 1515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했으나 삼사(三司
)의 태클에 물러나고 만다. 1518년 형조판서(刑曹判書) 후보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를 중
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공격을 받아 소인(小人)으로 찍혔고 이조판서이던 안당(安瑭)의
거부까지 겹쳐 결국 떨려나고 만다.

이후 심정은 집과 가까운 가양동(加陽洞) 한강변에 자신의 호를 딴 소요정을 짓고 울분을 달
래다가 아들 심사손까지 사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사림패거리에 대한 원망이 아주 머리 끝
까지 치솟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머리가
좋고 꾀를 잘 내어 주변으로부터 지혜주머니라 불렸는데, 이때부터 그 주머니가 복수의 칼날
을 위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1519년 조광조가 왕에게 중종반정 공신들의 위훈(偉勳) 삭제를 청하면서 훈구파(勳舊派)를 건
드렸다. 이때 심정도 정국공신 자격을 삭탈당했는데 훈구파는 물론 왕의 후궁들까지 조광조에
게 치를 떨게 된다. 바로 이때다 싶어 중종의 후궁인 경빈박씨(敬嬪朴氏)와 짜고 조씨전국<趙
氏專國 : 조씨(조광조)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이란 말을 궁중에 퍼트려 왕을 홀리게 했다.
조광조와 조금 거리를 두던 중종은 그 말에 넘어가고, 훈구파의 주요 인물인 남곤, 홍경주(洪
景舟)와 연합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림패거리를 죄다 아작을 내버렸다. 사림의 핵
심인 조광조와 김식(金湜)은 쓰디쓴 사약을 먹여 영원히 보냄으로써 피맺힌 원한을 아주 속시
원하게 푼 것이다.

이후 남곤과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라 그와 사이좋게 국정을 장악했으며, 1527년 남곤이
죽자 좌의정(左議政) 및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이항(李沆), 김극핍(金克愊)을 수하
에 두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세자<나중에 인종(仁宗)>의 인척 관계자이자 라이벌이던
이조판서 김안로(金安老)를 귀양 보내 제거하려고 했다.
허나 경빈박씨의 동궁(세자) 저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심정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면
서 심정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김안로는 이때다 싶어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
예(權輗)를 구워삶아 심정을 탄핵했으며, 중종의 명으로 평안도 강서군(江西郡)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심정의 부하인 이항과 김극핍까지 엮어
신묘삼간(辛卯三奸, 1531년)으로 내몰면서 끝내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딱
60이었다.

심정의 시신은 그의 일가 뒷쪽 개화산에 묻혔으며, 1534년 부인이 합장되었다. 이후 김안로가
죽자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받으니, 그 연유로 그의 묘역이 문정공파 묘역이 된 것이다.
시호는 받았지만 명종(明宗) 이후 권력의 핵심에 서서 훈구파 못지 않게 파행을 일삼은 사림
파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를 제대로 절단낸 경력 때문이다. 그들은 남
곤과 심정을 한데 엮어 곤정(袞貞)이라 부르며 소인배의 대명사로 손가락질했고, 그것은 지금
까지 전해져 심정하면 개혁을 꿈꾸던 사림을 아작낸 기묘사화의 원흉, 지나친 권력의 화신 등
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각나게 만든다. (나도 그렇음)

심정은 권력욕이 대단하고 자신의 지혜를 과신해 많은 무리수를 두었으며, 끝내 그 무리수로
스스로를 말아먹게 된다. 허나 다행히도 그와 아들 심사순 정도만 권력싸움에 패해 불명예스
럽게 퇴장했을 뿐, 그의 자손들까지 화는 미치지 않았으며, 아들 심사손과 손자 심수경은 많
은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형제간의 우의가 대단해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
지 살펴주었으며, 형제와 가족을 잘 챙겨주었다.

심정의 묘역은 부인(하양허씨)과 합장된 봉분(封墳) 1기와 묘비<묘갈(墓碣)>, 상석(床石), 문
인석 2기가 전부인 조촐한 모습으로 신도비는 없으며, 묘갈은 1579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손
자인 심수경이 짓고, 증손자인 심일취가 글을 썼다.

▲  심정과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  심정묘를 지키는 문인석(文人石) 2쌍
500년 가까운 고된 세월의 무게를 입고 있지만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남아있다. 저들이 멀쩡히
무덤을 지키고 있기에 심정묘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해서 지방
문화재로 지정됨)


▲  심사순(沈思順)과 부인 덕수이씨 묘

심정 묘 밑에는 심사순의 묘가 자리해 있다. 심사순(1496~1531)은 심정의 아들로 자는 의중(
宜中), 호는 묵재(默齋)이다. 심정의 맏형인 심원(沈元)이 아들이 없어서 그의 후사로 들어갔
으며, 시를 잘짓고 문장에 아주 뛰어나 17세에 초시(初試)에 장원해 사림패거리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1516년 진사시(進士試)에 붙었고, 1517년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승문원(承
文院)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그리고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30년 산릉(山陵)에 대한 지문(誌文)을 작성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1531년 그 지문의 글이 문
제가 되어 필적을 대조받기도 했다. 그때 심정 일가를 아작내려는 김안로가 이름을 숨기고 글
을 썼다는 이유를 내세워 옥에 가두었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건만 결국 거
친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의 묘는 부인과 합장된 조그만 봉분과 묘비(묘갈), 상석, 문인석 1쌍이 전부로 바로 정면이
낭떠러지이다. 그 너머(동쪽)로 삼정초교와 방화1단지 아파트가 보이며, 예전에는 경사진 곳
이었지만 방화지구 개발로 인해 각박한 낭떠러지가 싹둑 잘리게 된 것이다.


▲  심정묘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소나무 숲길

▲  심일취(沈日就)와 부인 광산김씨 묘

방원중학교에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 중간에 심사손의 아들인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이번에는 모르고 빼먹었다. 하여 본글에서는 다루지 않
는다. (어차피 예전에 다 봤음)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 직전에 문정공파 묘역을 알리는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판이
있다. 그 동쪽 산자락에 무덤이 여럿 있는데, 윗쪽에 심일취의 묘가, 밑에는 심사손 묘와 신
도비가 자리한다.

심일취는 심수경의 2번째 아들로 자는 중진(仲進)이다. 1547년에 태어나 1573년 식년시(式年
試)에 3등으로 급제했으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지냈으나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문장을 잘 지어 심정과 심사손의 묘갈(墓碣)을 직접 썼으
며, 죽은 이후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상석과 묘갈(묘비),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면 심사손의 묘가 나온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沈思遜, 또는 沈士遜>과 부인 전의이씨 묘

심사손(1493~1528)은 자가 양경(讓卿)으로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1517년 대과(
大科)에 급제했고, 승문원(承文院)과 예문관(藝文館)에서 사필(史筆)을 했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는데, 이때 군무(軍務)를 익혀 그런데로 문무를
겸비하게 되었다.

1525년 의정부(議政府)에 배치되어 사인(舍人)이 되었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홍
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지내던 중, 압록강(鴨綠江) 너머의 여진족이 저항할 조짐을 보이자 중
종은 그의 품계를 높여 만포진(滿浦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했다. 만포는 평안북도 강
계(江界) 서쪽에 자리한 변방이다.
심사손은 덕과 무력으로 여진족(女眞族)을 달래고 정벌하면서 변경을 안정시키니 군사와 여진
족들은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복종했으며, 1528년 1월 진중에 땔감이 부족하자 군사를 이끌
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南滿洲)에서 나무를 벌채하였다. 그때 여진족이 불만을 품고 습격을
하는 통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후퇴했으나 명줄이 다되었는지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면서
사망하고 만다.

사망 소식을 접한 중종은 명신(名臣)을 잃었다며 크게 슬퍼했고, 며칠 동안이나 제때 수라를
들지 못했다고 하니 그만큼 왕의 신망이 대단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의 시신은 그해 3월 11일
개화산에 묻혔으며, 문정공파 묘역의 첫 무덤이 되었다.
부인 전의이씨는 남편이 죽자 기절하여 간신히 소생했으며,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스
럽게 여겼다. 그는 1578년 86세의 나이로 뒤늦게 남편을 따랐다.

심사손의 묘는 봉분 2기, 묘갈(묘비), 상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
정과 심사순도 갖추지 못한 신도비를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심정과 심사순은 권력싸움에
밀려 곱지 않게 죽은 탓에 간신히 문인석 1쌍만 갖추고 끝났지만 심사손은 나름 공적도 크고
왕과 아버지의 후광(後光)도 대단해 신도비까지 두게 된 것이다. 만약 1531년까지 살아있었다
면 그도 무슨 험한 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묘라고 꼭 무탈한 것은 아니다. 2009년 가을에 도굴을 당했기 때문이다. 문정공파
묘역은 정말 도굴은 모르고 살았건만, 도굴범의 마수가 이곳까지 미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이때 무엇이 도굴당했는지 파악된 것은 없다. 무덤 부장품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범인도
아직 잡히지 못해 더욱 분노를 치밀게 만든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 묘갈

▲  부인 전의이씨 묘갈


          ◀
  심사손 신도비(神道碑)
심사손묘 동남쪽에 자리한 이 신도비는 1580년
에 세워졌다. 신도비는 고위 관리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세울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보통 신
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의 동남쪽에 세운다.
비석 높이는 311cm, 폭 120cm로 비문(碑文)은
영의정 홍섬(洪暹)이 짓고, 여성군 송인(宋寅)
이 썼으며, 행온성도호부사 한준(韓準)이 두전
을 썼다.
네모난 비좌(碑座)에 오랜 세월의 때가 멋지게
낀 비문을 세우고, 그 위에 2마리에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를 두었는데,
이수 조각이 꽤 섬세하고 생동적이다.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약사사로 통하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들어가면 심
  수경, 심일취, 심사손의 묘역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계속 직진하면 개화산이다. 여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가면 심정묘와 이어지고, 직진(서쪽)하면 약사사길(금낭화로17길)과 만난다.
* 방화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651, 654, 672, 6629, 6648, 6712, 강서구 마을버스 07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산152-5일대


 

♠  오래된 석불과 석탑을 간직한 개화산의 상징적인 명소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둘러보고 북쪽으로 가면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오른쪽은 약사사, 개
화산전망대로 이어진다. 봉화정과 강서둘레길 1코스 서쪽 구간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속세를 향해 활짝 문을 연 약사사 정문

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가면 개화산의 상징, 약사사가 모습을 비춘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작성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와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
라 때 창건된 것으로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다. 개화산약사암중
건기와 양천읍지도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대신 경내에 고려 때 석탑
과 석불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후기부터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임진왜
란 시절 격전지인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인 가양동이 근방이고, 개
화산은 이들을 이어주는 요충지라 그때 절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어린 시
절 매우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병연
(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으로 있
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
히 알려준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
(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
(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감로당과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
해주며, 석불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
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
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
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겯드린다면 아주 영
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개화산 약사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
   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방원중교 옆으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온다.
   방화역에서 도보 20분
②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직진하면 개화산이며, 여기서 직진을 하거
   나 오른쪽으로 가서 심정묘 직전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약사사로 이어진다. 1번 코스보다는
   5분 정도 빠르다.

* 약사사 공양밥이 꽤 맛이 좋다고 한다.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일반인도 공
  양이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 17길 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범종각과 삼성각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매점과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에는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이 걸려있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공양간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는 독성상(獨聖像)
산신, 칠성과 달리 그림은 없다.

▲  전륜(轉輪)을 쥐어든 칠성상과 다소
빛이 바랜 칠성탱(七星幀)

◀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상과
산신탱(山神幀)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약사사가 적어
도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 높이는 4m로 땅에 바닥
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
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
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한 것들이다.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 앞부분
정면 양쪽 모서리 기둥에는 힘차게 날아오르는 용을 그려놓아 대웅전의 화려함을
더욱 돋군다, 약사사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뜻에게 용을 새겼을 것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겉면이 아닌 내실이다. 너무 겉치례만 차리지 말고
속세와 중생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오래된
존재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조그만 금동석가불이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불단의 많은 불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 아무리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재현된 미륵불(彌
勒佛)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름
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삼아 애지중지한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너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앞에 있는 금동석
가불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그렇다고 실례를 무릅쓰고 확인하기에도 좀 그렇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후배 금동불을 압도하는 석불입상의 위엄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이 범하는 흔한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마라.
생긴 건 저래도 꽤나 알찬 불상이다.

▲  약사사 돌담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 숲길

정말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약사사를 둘러보고 범종각 옆 매점 아줌마에게 이곳의 명물인 약
수터의 위치를 문의했다. (이때는 약수가 없어진 것을 몰랐음) 예전에도 와봤지만 그 약수터
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그 약수는 2013년 봄에 폐쇄되었다는 답변을 듣고 기운이
싹 빠지는 듯 했다. 안그래도 개발의 칼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서울인데 유명한 약수터 하
나가 허무하게 져버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그 칼질을 개념 없이 조정하는 행정관청 밥버
러지들, 개발업자들이 심히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매점 아줌마가 목이 마르면 생수 1병에 500원이니 사먹으라고 그런다. 그래서 가난한 중생이
라 돈이 없다고 둘러대니 물 1컵 먹고 가라며 정수기 물을 제공했다. 약수터가 없으니 절도
천상 정수기 물에 의존하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물을 싹 비우니 아줌마가 더 마시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더 달라고 하니 역시 한가득 담아 제
공한다. 그래도 이곳은 물을 주는 인심이 있구나 싶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절을 나와 개화
산숲길을 거쳐 개화산으로 올라갔다. 이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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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3월 2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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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과 길상화(김영한)의 아름다운 넋과 무소유 정신이 깃든 도심 속의 포근한 절집 ~~ 성북동 길상사


' 성북동 길상사 겨울 산책 '

▲  길상사 관음보살상


 

묵은 해가 천하만물의 아쉬움 속에 그렇게 저물고 따끈따끈한 새해의 햇살이 천하를 막 보
듬던 1월의 첫 주말,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는 1년에 4~5회 이상 찾을 정도로 지겹게 발걸음을 한 곳이다. 허나 도심 속의 별천
지 같은 그곳에 마음이 퐁당퐁당 빠져 질리기는 커녕 자꾸만 손과 발이 간다. 아마도 서울
장안에 있는 사찰 중, 종로에 있는 조계사(曹溪寺)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몸이 길상사의 열성 신도나 법정스님의 팬이냐. 그것도 전혀 아니다.

길상사를 그렇게도 많이 찾았건만 모두 봄과 여름, 늦가을에 갔을 뿐, 한겨울에는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곳의 설경(雪景)을 보고자 벼르고 있었으나 그저 다짐으로만 끝난 채 벌
써 여러 해의 겨울을 흘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묵은해와 새해가 갈리는 시점에 큰 눈
이 내렸는데 이때다 싶어 새해 첫 주말 나들이 메뉴로 그곳을 택했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데 성북초교에서 2차선 골목인 선잠로를 따라 12
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면 됨~) 그 짧은 구
간은 권력층과 졸부들의 번쩍번쩍한 금입택(金入宅)이 덥수룩하게 펼쳐진 현장으로 보기만
해도 주눅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앗아가 버린다.
이 땅에서 나날이 심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거의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
(衝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인다.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해 지나가는 선량한 나그네를 불편하게 응시하고 있으며 고
급빌라와 저택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다.

비록 나같은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곳이긴 하나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
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제아무리 구중궁궐의 저택이라 하여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성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
고 당당히 가슴을 펴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
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에 우리나라의 0.1%
서식한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 따위들이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
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김영한)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녹아든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연등으로 주변을 치장한 극락전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로 가득한 성
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의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를
흐르고 있어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거니와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또한 다른 절에서는 접하기 힘
든 이채로운 볼거리도 여럿 있어 두 눈에 적지않게 흥분감을 던진다.

길상사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요,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든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으로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法燈)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
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시절 권력실세와 졸부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
지하고 찾을 수 있는 절로 변신한 전대미문의 현장이자 무소유(無所有)의 저자로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고급요정을 흔쾌히 기증했던
김영한(길상화)의 인생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법정은 201031113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날 순천 송광
(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위치는
변경 가능)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
  의 영화와 같은 탄생과정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 구석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날
렸던 대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세들과 졸부들이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이가 바로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1916년 부유한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허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집안은 풍
비박산이 났고 거의 팔려가다시피 하여 시집을 가게 되었다. 허나 그의 신랑은 몸이 매우 허
약했고,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곁에 있던 남편이 실수로 우물에 빠져 죽으면서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과부가 되고 만다. (아마도 우물 부근에서 놀다가 빠진 듯함)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의 이성 잃은 구박이 나날이 드쎄지자 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집을
나왔으나 정작 정처(定處)는 없었다. 하여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
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때 나이 16)

그는 가무와 궁중무, 시문 등 기생의 기본 소양을 익혔는데 타고난 미모에 지식과 문학, 예술
적 소질까지 넘쳐나 금세 서울 권번가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게다가 삼천리 문학에 수필까지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거기에 사업 수완도 대단했음)
흥사단(興士團)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1933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나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그가 있다는 함경도 함흥(咸興) 감옥을 찾았다. 허나 만나
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에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는데 거기서 영어 교사로
있던 백석(白石, 1912~1996)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둘은 급 가까워진다.

김영한에게 퐁당퐁당 빠진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 부르며 그녀의 하숙에서 함께 지냈다.
거기서 거의 출퇴근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가 그녀가 서울로 돌아가자 교사직까지 내
던지고 그를 따라 상경, 조선일보에 취직했다. 그리고 청진동(종로1)에 살림을 차리고 서울
과 함흥을 오가며 3년 동안 동거에 들어갔다.
허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어울리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들의 혼인을 쌍수들고
반대했고 극기야 다른 여자에게 강제로 혼인을 시키기에 이른다. 허나 백석은 혼인 첫날 밤에
도망쳐 김영한을 찾았고, 이후에도 그런 행위는 계속 되었다.

백석은 김영한과 부모 사이에서 머리에 쥐가 나도록 갈등하다가 아예 만주로 도망치자고 김영
한에게 제안을 했다. 허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이곳에 있자고 하였고 서로가 조금
씩 갈등의 골을 보이다가 결국 백석 혼자 만주로 훌쩍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그를 비운
에 빠트렸다며 늘 후회했다. (이후 백석은 북한에서 활동했음)
혼자가 된 김영한은 그 외로움을 돈벌이로 풀었다. 돈에 대한 강인한 집녑을 보이며 적지 않
은 재산을 긁어모았고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1, 그녀의 나이 불과 35세에 거금 650만 원
을 들여 현 길상사 자리를 매입해 대원각의 전신이 되는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내었다.
그는 계곡이 흐르고 경치가 빼어났던 그곳에 좋은 예감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 명당 기운에도 적지 않게 욕심을 냈을 것이다.
또한 사업과 함께 공부도 병행하여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몇 편의 수필과 '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쓰기도 했다.

잠시 식당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대원각의 명성에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
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서울의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함)
대원각 단골들이 하나같이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잘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
도 였고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명성
을 드날렸다.

허나 그녀는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 등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하
고 악착같이 살았지만 나이를 강제로 먹으면서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닫던 중, 법정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미대륙 로스앤젤레스에 잠시 머물렀
1987년 그곳으로 설법을 하러 온 법정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법문에 다시 감동의 파도를 느낀 그는 그의 모든 것이 담긴 대원각을 법정에게 기증하기
로 했다. 당시 대원각은 면적 7,000여 평, 건물만 40여 동에 이르렀으며 시가는 무려 1,000
을 헤아렸다. 하지만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놀라며 거절했다. (바로 받
으면 그것 또한 모양새가 좋지 않음) 허나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법정은 1995년 그곳을 받아 일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갑자기 큰 보물단지를 얻게 되어 싱글벙글이 된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갈아 송광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이자 법정이 김영한에게 지어
준 법명인 길상화(吉祥花, 吉祥華)를 따서 길상사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그해 1214일 개원
법회를 열어 길상사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

개원법회에는 천주교의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몰렸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 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
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염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
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인생의 끝 무렵을 보내던 그는 1999111483세의 나이로 외로
운 삶을 놓게되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고 전한다.

중생의 통곡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었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
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 태반의 졸부들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가 대원각을 기증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래봐야 그 사람(
백석)의 시 한줄만도 못하다'
며 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의 눈물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
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한줄기 감동의 싹과 눈물을 선사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이 점거하여 진흙탕이 되버린 성북동
부촌(성북로 북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생겨났다.

▲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냈던
길상헌

▲  조촐한 모습의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요정 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30동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라서 딱히 문화유산은 없
으나 20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절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 법회 때는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
들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
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은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못지 않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들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벌이는 1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여하거나 3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면 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원 출입시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침묵의집 -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이란 테
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용시간은 10~17시이며, 일요
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짧게 이용이 가능하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템플스테이(Temple Stay) -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으로 1달에 2(매월 3/4째주 토~일요일
12일 일정) 정도 열린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 차담, 자유포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무려 5만원으로 이곳
템플스테이에 1회 이상 참여했던 사람은 3만원으로 깎아준다. (여름선수련회와 3~4시간 일정
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 길상사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길상사 하차, 또는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 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앞에 템플스테이의 링크된 부분이나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진입하려려면 '三角山 吉詳寺'라 쓰인 일주문(정문)을 들어서야 된다.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된 것으로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
사 경내가 1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일주문 천정 그림 (봉황일까? 극락조일까?)

일주문을 들어설 때면 다들 정면에 보이는 풍경에만 눈과 마음이 팔려있어 천정을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아마 문을 들어서는 중생의 99.9%는 그냥 앞만 보고 갈 것이다. 그게 사람의 본능
이니까. 허나 여기서 잠시 목운동을 해보자. 고개를 90도 올려다보면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그림이 두 눈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랑
지를 가진 새 2마리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새의 모습을 보니 거의 봉황(鳳凰)과 비슷하다. 그래서 봉황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
이다보니 딱히 봉황을 키울 이유는 없어보여 불교에서 많이 키우는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가 아닐까도 싶다. 그림이 꽤 수작(秀作)으로 어떻게 저런 곳에 교묘하게 숨어서 지나가는 중
생의 머리통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다. 길상사를 30번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그의 존재를 처음 눈치챈 것은 2012년 봄이었으니 진정한 숨바꼭질의 종결자가 아닐 수 없다.

   ◀  이국적으로 생긴 길상사 관음보살상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을 오르면 설법전 앞에
늘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해 있다.
상사를 상징하는 명물로 꽤나 명성이 높은 존
재인데 그 흔한 관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
이건 무슨 스타일의 관음보살인가?' 고개를 좀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아
소탈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머
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긴 했지만 유럽 왕관과
비슷한 모습이며,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
왔다.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 그 자체
라 거의 천주교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게 보인
. 오른손은 번쩍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
취했고, 왼손에는 관음보살의 필수 아이템인
정병(政柄)을 들고 있으며, 손 아래쪽은 아무
런 조각이 없다.

이 이국적인 관음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
로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428일에 봉안
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불상의 면모는 떨어지긴 하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며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겨울 제국의 핍박에 물까지 끊긴 샘터

산사(山寺)에는 어김없이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산사는 아니지만 길상사도 나름 산사
의 분위기가 자욱한지라 인근 계곡물을 끌어와 범종각 밑에 조촐하게 샘터를 냈다. 길상사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봄과 여름, 가을에는 늘 물로 가득했다.
나 지금은 겨울 제국 시절이라 물이 끊겨 연꽃무늬의 석조(石槽) 안에는 물 대신 눈이 가득하
. 그러다보니 바가지들도 딱히 소임거리가 없어 찬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들 있다.


▲  설법전 앞뜨락 (범종각과 샘터, 관음보살상)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 새로 만든 종으로
대체했다.

▲  관음보살 옆에 조그만 석불(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
(線刻磨崖像)의 모습이 꽤 이채롭다. 그는
예전에는 극락전 좌측에 있었다.


▲  길상사 느티나무(왼쪽의 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음보살상 건너편에 자
리한 것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허나 겨울 제국
에게 모든 걸 빼앗겨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련한 신세로 몰래 봄을 잉태하여 쏟아낼 시간을
기다린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19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
m, 둘레는 2.5m이다.


▲  느티나무 그늘 쉼터에서 만난 법정스님 어록

▲  길쭉한 모습의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堂)
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절 건물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다.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침침한 두 눈이 멀 지경
이다. 석가불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무지 넓은 설법전 내부

▲  해맑은 표정의 금동석가불좌상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11월에 새로 심어진 길상보탑이 있다. 4마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
)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길상사에는 그 흔한 석탑
도 하나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중,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인 백성학
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
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흔쾌히 이 탑을 기증했다.

겉보기에는 20세기 탑처럼 보이나 조선 중기(17세기)에 조성된 탑이라고 하며 탑 안에 복장봉
안품을 넣어 봉안했다. 그러다가 2013825,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정도 묵었다는
오래된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처의 오색정골사리, 옹혈사리, 아라한 사리를 입수하
여 그것까지 복장유물로 넣으면서 내부도 아주 빵빵해졌다.

탑이 자리한 자리는 원래 '바람 속 향기'라 불리던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
수 자판기, 조촐한 평상이 있었다. 허나 탑에게 밀려나 201210월 정랑 서쪽으로 자리를 옮
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  사천왕(四天王)이 아로새겨진 기단부와
기단과 탑신의 경계를 이루는 석사자들

▲ 설법전 남쪽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성북동 동부와 동선동(東仙洞), 낙산(駱山)
등이 바라보인다.


 

♠  길상사 극락전과 지장전 주변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
측 칸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
들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
시 잊으며 쉬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
이나 안방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법정의 영정 (영정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11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
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 왼쪽에는 보관을 갖춘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루며, 두 협시보살(夾侍
菩薩)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다. 그들 뒤로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극락전 뜨락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대원각 초창기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만날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황토색과 하얀색(눈),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극락전 뜨락

▲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물,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느티나무가 자리해 있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3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m, 둘레 3.2m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덩치를 갖추었다.


▲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불교용품점도 겸하고 있음)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
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지은 것으로 2004
1017일에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58일 완성을 보았다.
정면 5,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닦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내부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는 지장보살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염라대왕이 있으며, 붉은 색
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종일 잔잔히 울러펴지는
 지장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
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물이 묻힌 비밀의 무덤 석실(石室)처럼 모
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
.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삼존불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
보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나오는
아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
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불과 아리따운 모습의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눈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지장전 뜨락과 연못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깊은 숲속의 절을 보는 듯 하다.

▲ 계곡 건너에 자리한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으며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 인생을 마감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다. 북한산 남
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경내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
러가며,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
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
의 거처인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북쪽 구
석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등이 빼곡히 자
리를 채운다.


▲  길상화 공덕비로 인도하는 나무다리와 길상헌 뒤쪽 담장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
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내가 찾아온 날도 눈이 푹신할 정도로 깔려 그때의 모습이 대략 그려진다.

나도 나중에 그에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우선 돈부터 왕창 긁어모아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서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
이가 절단난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
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
,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
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했다고 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의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하며 조그만 폭포도 2
정도 있는데, 눈과 얼음에 갇혀 나래를 펼치
지 못하고 있다. 소쩍새가 울 때면 거추장스
러운 얼음을 박차고 졸졸졸 깨어나겠지.


 

♠  길상사 마무리 (진영각, 침묵의집)

▲  경내 서북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경내 서북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나무그늘 쉼터
경내 서북쪽 언덕에 2012년에 새롭게 터를 다진 낭만적인 이름의 나무그늘이 있다.
이곳은 좌선을 위한 공간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며 나무 그늘로 가득해
여름 제국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 (단 겨울 제국이 손을 대는 경우,
이곳 사용은 건강을 위해 포기해야됨)


▲  나무그늘에서 바라본 계곡과 길상헌 뒤쪽

▲  진영각(眞影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쪽 구석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
의 유품을 머금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7월부터 법
정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
류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아두었으나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3주기이던 201337(음력 126)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
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
히 그리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나 있어
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우고 불교계의 명망 돋는 승려라고 해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
의 길상사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진영각 중앙에 자리한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3월부터 1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
린 것이다. 전 문화재청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는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
올 것 같다며 격찬을 했는데 진영의 글씨와 진영각 현판은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의 제자
, 승려 기현(奇玄)이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문서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흔쾌히 뿌
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도 두지 않아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마치 동네 골목길 같다.

▲  여염집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  극락전 뒤쪽 자비실
승려의 생활 및 참선 장소로 지붕이 유난히
크다. 절집보다는 거의 별장 같은 분위기로
길상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집이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
부터 17(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 인원
이 찼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지라 기다려야 된다.

◀  침묵의집에 걸린 불화
불화 앞 탁자에는 순천 송광사(松廣寺) 목조
3존불감의 모조품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길상사에서 누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길상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나누는 기쁨' 찻집에서 기분 좋게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다. 곱상
하게 생긴 작은 찻잔에 잣 2~3덩어리를 조각배처럼 둥둥 띄워 제공하는데 (나는 매실차를 마
셨음) 차의 가격은 3,000~5,000원선으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비해 좀 저렴하며 대신 리필이
안된다. (상황에 따라 되는 경우도 있음)
전통차 외에 커피도 판매하고 있고 가격도 그런데로 착한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산사
에서의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길상화(김영한)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던 부
처와 관음보살 누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수행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면서 한겨울에 찾아간 길상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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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김제 모악산 귀신사 '

귀신사 대적광전
▲  귀신사 대적광전

귀신사 3층석탑

귀신사 승탑(부도)

▲  귀신사 3층석탑

▲  귀신사 승탑(부도)


 

겨울 제국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의 첫 무렵에 전북 전주와 김제 지역을 찾았다.
날 전주(全州)에서 친한 후배의 여동생이 시집을 가게되서 그의 요청에 따라 하객 입장으
로 가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그 여동생과 아는 사이도 아니다. 아무리 후배의 피붙이라고
해도 엄연히 모르는 사람이라 여러 날을 두고 궁리하다가 의리상 가주기로 했다.

서울이 본거지인 신부측에서는 하객 수송을 위해 관광버스 2대를 대절했다. 1대는 가족과
친척들을, 다른 1대는 친척 이외에 사람들을 태웠는데, 8시 반에 발산역(5호선)에서 출발
한다고 하여 아침 일찍 길을 서둘렀다. 허나 일부가 늦게 오면서 9시가 좀 지나서야 버스
는 두툼한 바퀴를 움직였다.
신부 예식 시간은 13시로 교통 정체가 없는 이상은 3시간 내외면 충분히 전주에 도달한다.
다행히 별다른 정체는 없어서 정안휴게소 휴식을 포함하여 3시간 20분 정도 걸렸으며,
배 집안에서 마련한 떡과 귤, 과자, 음료수로 아침을 때웠다.

전주 혼인식장(전주역 부근)에 이르니 주말이라 꽤 북새통이다. 아직 시간이 있어 푸짐하
게 나온다는 점심을 잔뜩 기대하며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다가 시간이 되자 준비한 축의
금을 내고 혼인식을 관람했다. 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혼인식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점
심 생각 뿐이었다.
드디어 지루한(?) 예식이 끝나자 윗층 피로연(披露宴) 장소로 이동했다. 점심은 뷔페식으
로 찬이 매우 풍성해 나의 마음을 너무 기쁘게 했는데, 뷔페의 기본 메뉴인 밥, 고기,
, 나물, 채소류를 비롯해 온갖 초밥과 튀김, , 탕과 국수류(설렁탕과 우동, 잔치국수
), 다양한 디저트, 식혜와 맥주 등 먹을거리가 잔뜩 깔려 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원없이 먹고 싶었으나, 위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주어
진 위의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여러 먹거리르 섭취했고, 저녁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배가 채워지자 두 손에 꽉 쥐고 있던 수저를 비로소 놓아주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탈
이 났음 ㅠ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14시 반이 넘었다. 후배는 15시에 하객을 태우고 귀경한다며 어
여 타라고 했으나 오랜만에 전주까지 온 거 그냥 올라가면 좀 섭하다. 이미 정처(定處)
정해둔 상태라 아쉽지만 여기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며 단독 행동에 들어갔다.


 

♠  이름도 무시무시한 귀신사를 찾아서

▲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마을길

전주에서 정해둔 정처는 전주시내 남쪽에 있는 남고산성(南固山城)과 금산사(金山寺)로 넘어
가는 길목에 자리한 김제 귀신사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 보고 싶지만 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서로 거리도 멀어 무조건 하나를 택해야 된다.
후배 가족과 작별하고 전주역 정류장에 발을 멈출 때까지만 해도 전주에 왔으니 전주의 명소
를 보는 것이 어울릴 듯 싶어 남고산성에 크게 무게를 두었었다. 허나 시간이 벌써 16시 직전
이라 지금 열심히 가더라도 그곳에서 강제로 일몰을 맞게 된다. 땅꺼미가 짙어지면 야간 렌즈
나 삼각대가 없는 이상은 사진 담기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남고산성을 내버리고 전주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많이 걸을 필요가 없는 귀신사에 무게를 100% 얹혔다. (전주 경계에서 겨우
2km 거리임)

전주역에서 귀신사를 가려면 전주시내버스 79(전주역금산사)을 타면 된다. 배차간격은 거
25분 정도로 전주시외터미널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한옥마을, 풍남문, 효자동, 삼천동을
거쳐 강원도에 버금가는 고개를 하나 넘으면 행정구역은 전주에서 김제로 갈리면서 귀신사가
있는 청도리(淸道里)에 이른다.

모악산(母岳山) 북서쪽 자락에 안긴 청도리는 조선시대 때 관리와 나그네들의 숙식을 제공하
던 국립 숙박시설, 청도원(淸道院)이 있던 곳이라 하여 청도원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
은 절 밑에 형성된 마을인 사하촌(寺下村)으로 절은 바로 마을 북쪽에 자리해 있으며 오래 걸
을 것도 없이 청도리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4~5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도리 정류장에서 농가와 경작지
사이로 난 마을길(청도5)을 따라 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청도리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180m
떨어진 귀신사입구에서 서쪽 길(청도6)로 방향을 튼다. (전주에서 넘어온 경우는 우회전,
김제는 좌회전) 후자의 경우는 차량을 위해 포장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나는 버스로 왔기 때문
에 정류장과 바로 이어진 마을길을 이용했다.
이제는 흩어진 전설이 되버린 충북 단양(丹陽)의 외가집을 가는 기분처럼 시골 분위기가 그윽
하게 깔린 마을길은 아직 겨울 제국의 치하라 황량하기 그지 없지만 봄의 기운이 슬며시 들어
와 조금씩 녹색 기운을 뿌리며 아직은 거대한 겨울 제국에 대항한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아랫 돌계단

마을길 끝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헝클어진 돌계단이 언덕에 기대어 있다. 그 계
단을 오르면 경내 주차장에 이르는데 돌계단 밑에는 2개의 돌기둥이 우두커니 서 있다.
속세의 민가는 이 계단 앞에서 끝이 나면서 자연히 속세와 절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데
속세의 일부가 되버린 계단 앞은 원래 귀신사의 영역이었다. 옛날에는 경내 외곽에서 중심으
로 인도하는 계단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절이 참 작구나 싶겠지만 귀신사의 왕년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존재로 세월의 줄기찬 태클에 조금은 비뚤어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 허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다.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나 있고, 계단의 기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괜히 복원한답시고 딱딱 맞춘다면 그 모습도 꽤 어색할 것 같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윗 돌계단

아랫 돌계단을 올라 주차장을 지나면 윗 돌계단이 나온다. 아랫 계단과 달리 질서정연한 모습
으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그 계단 너머는 귀신사의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번째 돌계단에서 바라본 청도리(청도원) 마을과 모악산

전북 서부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추앙받는 모악산(794m) 북서쪽 자락에 귀신사(歸信寺)가 포
근하게 자리를 닦았다. 포근한 분위기와 달리 절 이름은 천하에서 가장 후덜덜한 이름으로 사
연을 모르는 이들은 다들 그 귀신(鬼神)인줄 알고 놀라워하거나 오금을 지려한다. 혹자(或者)
는 귀신이 나오는 절로, 다른 혹자는 귀신을 모신 사당 성격의 절로 여기기도 한다. 허나 이
름을 이루고 있는 한자는 그 귀신이 아닌 믿음이 돌아온다는 뜻의 귀신(歸信)이니 괜히 겁을
먹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귀신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 창건설<법왕(法王, 재위 599~600) 시절로 여겨짐>
과 신라 중기 의상대사(義湘大師) 창건설이 있다.
백제 후기 창건설은 17세기에 활약한 자수무경(子秀無竟, 1664~1737)이 쓴 '무경집(無竟集)'
에 백제의 원당(願堂)으로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경내 뒤쪽에 자리한 석수(石獸)는 백제 왕실
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란 견해가 있다. 게다가 인근에 백제 후기 사
찰인 금산사가 있어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열어두고 있다.
그리고 신라 중기 창건설은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인데 당시 이름은 국신사(國信寺.
또는 國神寺)였다고 한다. 허나 정작 백제 때 유물은 없으며, 3층석탑이 창건 당시(6~7세기)
에 것이라고 우기고는 있으나 탑의 양식을 보아 고려 때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에 탑과 석등
, 주춧돌 일부가 신라 후기 것이다. 또한 최치원(崔致遠, 857~?)이 이곳에 머물며 당나라 법
장화상의 일대기를 적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8
기 이후)에 법등(法燈)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1120년대에는 원명국사(圓明國師 1090-1141)가 절을 중창했는데, 그 시절에는 구순사(口脣寺
또는 狗脣寺)로 불렸다고 한다. 이는 절 주변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
지형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없다.
고려 후기인 1376년 왜구(倭寇) 패거리 300명이 귀신사에 들어앉아 갖은 민폐를 부리며 머물
렀는데 이를 병마사(兵馬使) 유실(柳實)이 격퇴했다. 이를 통해 수백 명이 머물 정도로 건물
이 즐비했던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년에는 부속 암자만 8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적광전은 2층 규모였다고 하니 금산사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허나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란 장애물 앞에 절은 심히 좌절을 겪게 된
. 생육신(生六臣)의 하나인 김시습(金時習)이 이곳을 방문해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
시문에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는 내용이 있어 절의 우울한 상태를 알 수 있으
, 시문 제목에 귀신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이름이 바뀌었
음을 알려준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승병(僧兵)을 양성했다고 전하며 정유재란(1597) 때 절이 모두 파괴되어
쓰러진 것을 1601년 이곳을 지나던 염화, 신허가 전각을 여럿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24년 승려 덕기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옛터가 아닌 새로운 곳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하여 3층석탑과 석수가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이 옛터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대적광전에
있는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하여 미륵보전, 시왕전, 천왕문 등이 이때 세워졌으며, 귀신사
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문서인 상량문(上樑文)1633년에 작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덕기의 중창
불사가 1633년에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이 없음을 안타
깝게 여겨 나한전(羅漢殿)을 짓고, 나한전의 주요 식구 25위를 봉안했다.

1657년 비바람으로 전각이 퇴락하자 1657년 대웅전 등을 중수했으며, 1707년과 1715년에 두감
이 대웅전과 팔상전을 새로 짓고 1716년에 팔상전에 불상을 봉안했다. 1873년에는 춘봉(春峰)
이 중창했으며, 1884년 명부전을 중수하고 1914년에 명부전 기와를 개수했다. 그리고 1927
에 명부전, 1934년에 대적광전을 수리했으며, 2005년에 대적광전을 해체/수리했다.

▲  귀신사 3층석탑

▲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3존불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 요사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해 3층석탑,
, 승탑(부도)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특히 부도는 경내에서 300m나 떨어진 마을 남쪽 밭
두렁에 홀로 있어 귀신사의 영역이 이곳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며, 경내 서쪽에는 신라 후기부
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망라한 석탑과 석등의 부재(部材), 건물의 주춧돌 등이
널부러져 있고 경내 직전의 돌계단 2개도 세월에 제법 숙성된 것이다.

모악산 북서쪽 자락에 안겨 있지만 마을 바로 뒤쪽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
떨어진다. 허나 옛터인 경내 북쪽 언덕에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름
과 달리 고즈넉하고 조촐한 분위기로 외형만 지나치게 추구하는 상당수의 큰 절집과 달리 은
근히 정감이 간다. 또한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기 그지 없다.

지금은 금산사보다 별볼일 없는 신세이지만 왕년에는 금산사보다 훨씬 잘나갔던 귀신사, 이곳
도 제대로된 학술/발굴조사를 벌여 경내 북쪽과 청도리 마을, 경작지 일대에 잠들어있는 귀신
사의 숨겨진 과거를 싹 들추었으면 좋겠다.

김제 귀신사 찾아가기 (201711월 기준)
대중교통 (전주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는
  30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고양(화정, 백석), 의정부, 안양, 부천, 성남, 수원, 용인, 평택, 천안, 청주, 대전
  (복합, 유성, 대전청사),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울산, 부산(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전주역 광장과 전주시외터미널, 전주고속터미널에서 전주시내버스 79번을 타고 청도리 하차
  , 도보 5
대중교통 (김제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송정역, 나주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
  차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KTX, SRT) 이용시 익산역이나 정읍역에서 무궁화호나 새
  마을호, 누리로 열차로 환승>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7,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
  행 직행버스가 1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구(서부)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 김제역(역전치안센터 건너편)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건너편에서 금산사를 거쳐 청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5번이 16회 있다. (김제역 기준 6:40, 8:18, 12:13, 14:33, 15:33,
  17:18)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금산사로 가는 5, 5-1번 시내버스(120여 회 운행)를 타고
  금산사에서 전주 79번 버스로 환승하기 바란다.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을 나와서 금산사 방면 712번 지방도 성암4거리에서 좌회
  월평4거리에서 좌회전 팥정이4거리에서 좌회전 백오동3거리에서 좌회전
  도리(귀신사입구) 귀신사

* 입장료와 주차비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 (청도640, ☎ 063-548-0917)


 

♠  귀신사 대적광전, 명부전 주변

▲  선방(禪房)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요사(寮舍)

귀신사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잔잔히 입혀진 뜨락이 펼쳐지면서 바로 정면에 대적광전이 진하
게 모습을 드러낸다. 뜨락 오른쪽에는 요사(선방)가 있고, 왼쪽에는 석탑과 석등의 부재,
돌을 수습한 공간과 영산전이 있으며, 대적광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석수, 3층석탑으로 인도
는 계단이 있다.

요사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승려의 생활공간이다. 그 북쪽에는 장독대가
식을 숙성시키며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는데 잘익은 김치나 고추장 생각을 참 간절하게 만
.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속살을 들춰내고 싶다.
그리고 요사 남쪽에는 견공(犬公)의 보금자리가 있는데, 하얀 털의 백구이다. 처음에는 조용
있더니만 그들을 넌지시 바라보니 은근히 멍멍거리며 구박을 준다. 나는 밤손님이나 화마(
火魔)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생긴 편도 아닌데 왜 그리 눈치를 주는 걸까? 마음 같
아서는
확 몸보신용으로 때려잡고 싶지만 나는 이곳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 그냥 눈감
아주었다
. 마침 요사에서 비구니가 나와 그들을 다독거리니 그제서야 꼬랑지를 내리고 눈을
내린다
.

◀  숙성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귀신사 장독대들


▲  귀신사 영산전(靈山殿)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
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1급 제자인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양쪽에 자리
해 있으며, 그 좌우로 각각 8명씩 16명의 나한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각각 1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들 끝에는 인왕상(仁王像)이 금강역사 못지 않은 위엄 넘치는 포즈로 혹여
문을 두드릴지 모를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  영산전 석가불과 아난/가섭존자

▲  16나한의 우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  16나한의 좌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장식용으로 놓인 동그란 석조(石槽)
보름달을 닮은 이쁘장한 석조에는 물이 한가득
담겨져 있다. 절에 왔으면 물 한모금 마셔줘야
되지만 떠마실 바가지도 없고, 수질도 세속화된
종교 마냥 탁해보여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여 이곳에선 물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런걸 보
고 그림의 떡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  경내 서쪽에 수습된 석탑과 석등 잔재, 건물 주춧돌 무리들

영산전 뜨락에는 석탑과 석등의 잔재, 건물 주춧돌 등이 덩어리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신라 후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넓은 시대를 아우른 것들로 귀신사의 잃어버린 영화를 잘 보
여주는 유물들이다.
세월의 흐름이 귀신사에게는 꽤나 거칠었는지 숱하게 파괴되고 중창됨을 겪으면서 기존의 많은
건물과 석물들이 가루가 되어 저렇게 암담한 신세가 되었다. 이들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하며 깨진 탑재를 모아 한쪽에 엉성하게 석탑을 엮어 놓았다.

▲  길다란 주춧돌에 피어난 1송이 연꽃무늬

▲  우리나라처럼 두 동강이 난 돌덩이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 조각난 탑재를 모아서 엮은 소소한 석탑
탑 옥개석에는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심어놓은
조그만 돌탑들이 무럭무럭 뿌리를 내렸다.


▲  귀신사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물 826

귀신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정면 5,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 건물과 그 안에 담겨진 소조비로자나3불좌상은 귀신사의 왜소함
을 능히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값어치가 높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수수하면서도 좀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주
고 있는데 '귀신사 중수기'에 따르면 원래 2층이었다고 하며, 17세기 초에 1층으로 다시 지었
다고 한다. 2층 이상의 불전(佛殿)은 그리 흔치가 않은 것인데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다 수염
을 태워먹던 시절부터 2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귀신사가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절임을 느끼
게 한다.

정면 가운데 칸(어칸)이 좌우 칸보다 조금 넓은 형태로 이는 조선 후기 건축물에서 많이 나오
는 모습이다. 가운데 칸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고, 나머지는 어칸보다 좀 작게 해서 창문처
럼 한 것이 특징이다. 정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 칸은 벽으
로 만든 것 또한 그만의 특징이다. 기둥 지붕에는 공포 덩어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기둥과 기
둥 사이에도 1개씩을 짜놓아 다포(多包) 양식임을 알 수 있으며, 공포도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나무의 원초적인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가구(架構)는 천정을 높이고자 고주(高柱)의 몸 중간에 보를 꽂아 그 끝이 평주(
平柱) 위에 얹히게 했고, 그 보 위에 다시 보를 얹어 고주 위에 얹혔다. 이는 봉안된 불상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불상 머리 옆에 보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원래 2
(중층)이었던 것을 1층으로 다시 지을 때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1823년과 1934
에 중수를 벌였으며, 2005년 해체/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17세기에는 이 건물과 비슷한 구조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이 많이 지어졌는데, 논산 쌍계사(
雙磎寺) 대웅전, 고창 선운사(禪雲寺) 대웅보전, 경주 기림사(祇林寺) 대적광전이 대표적이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이들보다 규모는 좀 작지만 내부에 고식이 남아있고 전면을 벽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塑造毘盧舍那尊坐像) - 보물 1516

귀신사에 왔다면 이곳의 꽃이자 꿀단지인 대적광전 내부는 꼭 둘러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그만 불상이겠지 싶어 건물 좌측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으나
내 머릿 속에 그려진 조그만 불상은 온데간데 없고 허벌나게 큰 불상이 하나도 아닌 3개씩이
나 나란히 대좌(臺座)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위엄에 제대로 놀라 입이 벌어지더니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인 귀신사
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다 한들 이들 앞에서는 그런 생각도 보기좋게 36계를 치고 만다.

이들 불상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소조불로 합장인(合掌印) 비슷한 제스쳐의 지권인(智拳
)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배치했다. 그들은 건물이 터질 정도로 대단한 위엄을 간직하고 있어 왠
만한 강심장도 뒷걸음을 치게 만드는데 이런 큰 불상이 17~18세기에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런 큰 불상이 유행처럼 생겨난 것은 억불숭유로 쇠퇴를 걷던 불교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
직하여 나라를 지키자 조정에서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정책을 다소 바꾸게 된다. 하여 차별
과 탄압을 줄여주었고 주요 요새(남한산성, 북한산성, 무주 적상산성, 부산 금정산성)에 절을
지어 승병들을 배치했다. 또한 왕실과 사대부가 왕실과 집안의 안녕을 위해 시주를 넉넉히 하
면서 많은 불사가 벌어졌는데, 불교 입장에서는 쇠퇴한 불교를 중흥시키는 안성맞춤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니 중흥에 대한 자신감이 이런 큰 불상으로 표현된 것이며, 왕실과 사대부의
비위도 맞추고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제스쳐도 많이 취했다. 그래서 유난히 조선 후기에는 왕
과 왕비, 세자, 대왕대비의 복을 비는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웅대한 덩치에 비해 얼굴에는 나름 인자한 표정이 깃들여져 그들에 놀란 중생을 진정시킨다.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며,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 밑으로 두 눈은 살며시 뜨고 있다.
코는 오똑하게 솟았고, 붉은 입술은 조그만하지만 엷게 미소를 피우고 있다. 입술 주변에는
검은 수염이 칠해져 있고, 볼살은 매우 두툼하다.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모두
접수하는 안테나가 되어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으로 품격 높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1째 마디에
뻗은 지권인의 특이한 표현은 명나라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또한 허리가 긴 장신형도 명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라고 하며 이렇게 명나라 양식을 양분으로
하여 조선 후기 불상의 또다른 종류를 이루었다.

이들 불상은 귀신사가 쓰러진 몸을 한참 일으키던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633년에 작성된 상량문에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있으며 자수무경의 기
록에는 1624년에 중건된 것으로 나와 그 사이가 맞을 것이다. 불상 뒤에는 각자 그에게 걸맞
은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주지 유견성(柳見星)이 그린 것이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  금색 피부의 화려한 문양을 지닌 전패
(殿牌)와 종이학을 담은 유리통

▲  대적광전 신중탱(神衆幀)

▲  대적광전 산신탱(山神幀)

         ◀  대적광전 독성탱(獨聖幀)
대적광전에는 법당의 청정함을 위해 필수로 배
치하는 신중탱을 비롯하여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탱,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내에는 아직 산신과 독성을 위한 보금자리가
따로 없다보니 이렇게 법당에서 샛방살이를 하
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조성시기는 화기(畵記
)가 없어 알 수 없으나 19세기 후반이나 20
기 초반으로 여겨진다.


▲  귀신사 명부전(冥府殿)

대적광전과 요사 뒤쪽에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를 했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해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들과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봉안되어 있다.

◀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들


 

♠  귀신사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유물들

▲  귀신사의 옛 중심지였던 북쪽 언덕 (석탑과 석수)

대적광전과 명부전 뒤쪽에는 북쪽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귀신사
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3층석탑과 석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 왔다면 대적광전 내부와 더
불어 이곳 유물도 꼭 살펴봐야 뒷탈이 없다. 그만큼 이곳에서 중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전 귀신사의 중심은 바로 이곳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된 귀
신사는 1624년부터 1633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그때 새 자리에 중창을 했
. 그 새로운 자리는 현재 대적광전과 명부전이 있는 언덕 남쪽이며, 이전 자리는 바로 이곳
북쪽 언덕이다. 아직까지는 옛터에 이렇다할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옛터의 자세한
것은 그리 알려진 것은 없으며 석탑과 석수, 사적비 등이 옛터를 지키고 있다. (언덕 북쪽은
대나무가 무성하며, 동쪽은 민가와 경작지가 있음)

옛터 식구의 대표격인 석탑은 화강암으로 다진 4.5m 높이의 조촐한 탑으로 절에서는 창건 당
시인 백제 후기 또는 7세기 중반 탑으로 우기고 있으나 확인 결과 고려 때 탑으로 판명이 났
. 현재 이 땅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탑은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 부여 정림사지(
林寺址) 5층석탑, 경주 분황사(芬皇寺) 석탑 등 3기가 고작이다. (고구려와 부여는 석탑이 아
예 없음)
백제 탑의 상징인 정림사지 5층석탑을 많이 닮은 고려 탑으로 1층 탑신(塔身) 이후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감율은 미륵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는 유난히 옛 백제
땅인 충남, 전라도 지역에 정림사지 탑을 닮은 백제 탑의 후예가 많이 등장하는데 백제를 그
리워하는 지역 백성들의 마음과 지역 색채가 강했던 고려 석탑, 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 탑은 바닥돌 위에 여러 개의 돌을 맞추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했고,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가 평행을 이루다가 귀퉁이에
서 아주 살짝 들려져 있다. 1층 탑신은 매우 크지만 2층부터 확 줄어드는 모습이며, 탑 꼭대
기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  귀신사 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2


▲  귀신사 석수(石獸)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4

3층석탑 옆에는 석수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돌조각이 하나 있다. 웅크리고 앉은 사자의 등
짝에 묘하게 생긴 날씬한 돌기둥이 혹처럼 솟아 하늘을 받들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끝부분이
참 낯이 있다. 이 돌기둥은 바로 남근석(男根石)으로 불교의 상징 동물의 하나인 사자(獅子)
와 남근 숭배<또는 성기(性器) 신앙>가 어우러진 아주 기묘한 석물로 이 땅에서는 오로지 이
곳에서만 있는 희소성 100%의 물건이다.

사자상은 머리를 치켜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랜 세월의 태클로 좀 헝클어지긴 했지만
알아보는데는 아직 지장은 없다. 그의 등에 곧게 서 있는 남근석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랫
부분은 윗부분보다 굵으며 대나무 같이 엷은 마디를 두었다. 그리고 윗부분은 아랫부분보다
굵기가 절반 정도 얇으며, 그 끝부분은 남근의 끝부분과 비슷하게 조각했다.

이 석수는 천하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석물로 왜 귀신사에 이런 것을 두었는지는 2
지 설이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상 이곳이 구순혈(狗脣穴)이란 좋지 않은 형상이라 하여 그 터
를 누르고자 세웠다는 것이며, 다른 설은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內願寺刹)로 남근을 갖춘 사
자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로 남근석을 둔 절은 백제의 내원사찰 뿐이라고 한다. 하여 이
석수를 근거로 귀신사가 백제 후기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것.
석수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백제나 신라가 아닌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돌사자의 길이는 158cm, 높이 62cm, 남근석은 아랫부분의 높이 72cm, 윗부
분은 40cm이다.

석수란 이름은 돌로 만든 동물상이란 뜻이다. 단순히 남근석만 있다면 남근석이라 부르면 되
겠지만 사자까지 있으니 이들을 어우른 마땅한 이름이 없어 부르기 쉽게 '석수'라 칭한듯 싶
.

▲  귀엽게 앉아있는 석수

▲  석탑 주변에 놓인 옛터의 주춧돌


▲  귀신사 사적비(事蹟碑)
귀신사의 내력을 담은 비석으로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옛터 뒤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한바탕 지나갈 때마다 사각사각 하모니 소리를 들려준다.

▲  귀신사 앞 해탈교 (귀신사입구 방면)

귀신사의 오랜 보물을 품고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을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이리하여
귀신사를 다 둘러본 것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건 함정이다. 아직 못본 것이 하나 있기 때문
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마을 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승탑(부도)이다.
기왕 여기까지 먼 발걸음을 했으니 다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싹 다 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경내 경비실을 찾아 부도의 위치를 물으니 마을 남쪽 경작지에 있다고 그런다. 그래서 이번에
는 마을길 대신 찻길을 통해 해탈교를 건너 전주~금산사 지방도로 나가 남쪽으로 걸어갔다.
경내에서 부도까지는 기껏해야 1리 남짓이며, 경내 북쪽 언덕에서 보이는 범위 안에 들어있다.
게다가 도로에서도 바라보이니 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귀신사 승탑(부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3

▲  북쪽에서 바라본 부도

▲  남쪽에서 지켜본 부도

귀신사 부도는 경내에서 0.3km 정도 떨어진 마을 서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고적하게 자리해 있
.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탑신과 지붕돌은 팔각을 취하고 있으며, 누구의 넋이 서린 승탑(
僧塔)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경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왕년의 귀신사가 이곳
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우리가 옛 조선과 고구려, 백제, 발해의 옛 땅과 영광을 생각
하듯 귀신사 승려들도 이 부도와 옛터를 통해 귀신사의 영광을 뼈저리게 생각할 것이다.

부도의 높이는 2.5m로 기단부와 탑신,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비례가 별로 맞지가
않고 모습도 소박하다. 기둥처럼 길쭉한 기단 가운데 받침돌은 여러 겹의 연꽃을 두른 윗받침
돌을 받치고 있고, 그 위에 탑신의 몸돌과 귀퉁이가 치켜 올려진 지붕돌을 얹혔다. 그리고 그
위를 동그란 공 모양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서 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귀신사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며 적어도 부도까지가 귀
신사의 영역이었으니 청도리 마을 상당수는 절의 영역이 된다. 그렇게나 잘 나가던 귀신사가
쇠퇴하면서 경내 중심을 제외한 부분이 모두 속세로 떨어져 나가 청도리 마을을 이루게 된 것
이다.

부도를 끝으로 귀신사 관람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서울로 갈 때는 전주가 아닌 김제(金堤)
를 거쳐가고 싶은데 이곳이 김제 땅임에도 김제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가뭄에 콩 나듯 다니고
오히려 전주시내버스가 더 많이 다닌다.
하여 별로 기대하지 않고 청도리 정류장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김제로 나가는 시간을 물어보니
왠걸 15분 뒤에 버스가 있다고 그런다. 내가 운과 복이 참 지지리도 없는 인간인데 이때만큼
은 용케도 운이 좀 맞아 떨어졌다. 평소에도 그렇게 운이 좀 맞으면 얼마나 좋을꼬? 차 시간
이야 안맞으면 전주로 나가면 그만이 아니던가?

정류장에 들어가 15분의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김제시내버스 5번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이 버스는 청도리 마을회관 앞에서 잠시 바퀴를 접고 쉬다가 출발시간이 되면 외마디 부릉소
리를 남기고 김제로 나간다.
시내로 갈 때는 금산사를 거쳐서 가는데 폭주하는 전주버스와 달리 김제버스는 너무 기어가서
김제역까지 금산사와 원평 대기시간을 포함하여 45분 정도 걸렸다. 그렇게 지루하게 달려 도
착한 김제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고된 몸을 싣고 도돌이표처럼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귀신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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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  삼천사 대웅보전


 

♠  삼천사 입문

▲  알록달록 연등이 길을 안내하는 삼천사 길

따사롭던 5월의 첫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삼천사를 찾았다. 연신내역에서 그들을 만
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고지↔신설동)을 타고 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그곳으로 다가섰다.


▲  그늘에 자리한 족구장 - 이곳은 절터였다.

삼천사 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식당에 딸린 공간이지만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지~.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정말 엊그
제 같거늘,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과 농장의 쉼터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에 옛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주 희미하게 묻혀있다. (안내문은 없음) 그 절터는 공터를 중
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절의 정체
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
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 1'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계곡 상류에 있으며 삼천사터의 일부로 여겨짐>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다보니 훼
손이 심각해 하루 속히 발굴조사가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정말 고려 8대 제왕인
현종(顯宗)과 인연이 아주 깊다는 신혈사의 마지막 흔적이었을지도?


▲  녹음(綠陰)이 짙은 삼천사 가는 길
저 짙푸른 녹음 속에 나를 잠시 숨겨본다.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표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3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돌기둥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
으나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들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주막들이 여럿 모여 앉아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미타교 직전 고갯길

▲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크게 들쑤신 미타교(彌陀橋)

계곡길을 5분 정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
를 넘으면 북한산 일품 계곡의 하나로 널리 추앙받는 삼천사계곡(삼천리골)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풀
리면서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
곡 주변에는 군사시설 일부가 옥의 티처럼 남아있으며, 삼천사와 옛 군부대 수영장 사이 계곡
은 여전히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옛 수영장 이후와 삼천사
위쪽 계곡은 출입이 가능함)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키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년 이
후 높이와 폭을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깔았다. 다리를 업그레이드한 것
은 좋으나 문제는 주변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미타교)에서 삼천사 중간의 짧은 계곡 풍경(밑에 있는 2011년 사진 참조)은 개인적
으로 참 좋아했던 풍경이었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을 깨뜨리고 자잘한 돌이
계곡 주변을 적지 않게 차지하면서 심히 안좋게 변해버린 것이다.


▲  예전의 경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타교 주변)
계곡에 자잘한 돌들만 가득하여 마치 돌의 무덤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  이제는 전설이 되버린 미타교 주변 삼천사계곡의 옛 모습 (2011년)
선녀 누님이 살짝 내려와 목욕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운 절경이었다.
허나 지금은 선녀는 커녕 맷돼지도 외면할 것 같다.


너무나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삼천사계곡에 안타까움의 한숨을 여러 번 날려 보낸다. 자꾸 예전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부질없이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미타교를 건너면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중생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 길을 3분 정도 오르면
옛 발해(渤海)의 국도(國都)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석등(石燈)을 닮은 우람한 석등 1쌍
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오래된 마애불의 인자함이 깃
든 산사, 삼천사 경내가 흔쾌히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삼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경내 직전에 자리한 석등 1쌍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사계곡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磨崖佛)
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
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방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그가 세웠다는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고 그
당시 신라를 둘러싼 천하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왕경(王京, 경주)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
고 있었으며 원효대사 역시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
의 1인자였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
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
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많은 군사를 보
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모조리 데리고 나가
고구려 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군은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遼東)을 용케도 통과, 압록강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부근인 사수<蛇水,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으로 여겨짐>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10만 대군은 몰살을 당했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헛소리를 했던 방효태는 그의 아들과 나란히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한편 서해바다를 건너 평양 서쪽으로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절단났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칠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여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급히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구했다. 당
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느라 급급했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구를
흔쾌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요청을 무시하면 나중에 고구려를 치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고 고구려에게 계속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는데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잡
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한 것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고구
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자 전운이 감도는 북한산(삼각산)에 절을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이르면 신라 말, 늦어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
誌)에는 최
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  삼천사터 금당(金堂) 구역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
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지금과 음은 같지
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천 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절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내었고 20
년 동안 계속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고양시 북한동)에는 대지국사의 탑비(塔碑)
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가 서울역
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져냈다. (2009년
이후에도 여러 번 발굴조사를 했음)
이처럼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절터 유적임에도 이상하게도 북한산 관련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
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그에 합당한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고 있다.
(사적이나 지방기념물 등급이 적당해 보임) 또한 이곳에 있는 대지국사비는 태고사(太古寺) 원
증국사탑비와 더불어 북한산에 있는 고려 때 비석이자 북한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나 그 역
시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절터 관람은 가능함)

※ 북한산 삼천사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 입구 하차 → 삼천사까지 도보 30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 또는 1번과 2번 출구 중간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서 하차
*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삼천사 셔틀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구파발역 출발 시간은
  8:20, 10시, 11시, 13:30) 법회와 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오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석가탄신일에는 저녁까지 수시로 운행
* 삼천사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경내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삼천사 종형사리탑과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 5층석탑, 대웅보전 주변

▲  나한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삼천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4마리의 석사자가 탑신(塔身)을 받들고 있는 5층석탑을 만
나게 된다.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의 마하시사사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승정(大僧正)인 아판디타에게 부처 사리 3과와 나한사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부처사리는
마애불 앞 종형사리탑에 봉안하고 나한사리는 일주문 앞에 이 탑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이 탑은 바닥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여러 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를 둔 다음, 4마리의 사자
와 5층 탑신,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갖춘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제천 빈신사지(頻迅寺
址)의 4사자 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  삼천사의 새로운 명물, 세존진신사리 불탑(佛塔)

5층석탑을 지나면 바로 9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당도 아닌 경내 외곽에 서로 다른 모습
의 탑을 2개씩이나 지어 올린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삼천사는 법당 앞에 탑을 둘 공간이
여의치가 않아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탑을 심은 것이다.

9층석탑 자리는 원래 주차장의 일부로 미얀마 대승정에게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
고 절의 위엄도 제대로 드러낼 겸, 거대한 탑을 또 짓기로 결정하고 2012년 초에 자리를 닦아
그해 5월 완성을 보았다. 이 탑 역시 9층석탑처럼 높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렸는데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을 비슷하게 재현했으며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
는 4두의 금빛 사자상은 인도의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石柱)의 사자상을 모방한 것이다.
금빛 사자상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法輪)에 안치되었고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평화와 생명존중을 천명한 아쇼카왕(인도 마가다왕조의 3대 왕)의 '담마 왕령(王令)'
정신을 새기고자 아쇼카왕의 상징인 4두 사자상을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9류 중생의 안녕과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을 9층탑으로 묘사했다.

탑이 완성되자 진신사리 7과를 비롯해 조그만 금동석가불과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대장경(
大藏經) 1질, 600명의 신도들이 손수 제작한 금강경(金剛經) 600부, 신도들이 기증한 갖은 고
가품을 탑에 넣었다.
탑에게 주어진 첫 이름은 '세존진신 다보 9층대탑(世尊眞身 多寶 九層大塔)'이었으나 '세존진
신사리 불탑'으로 간단히 줄였다. 탑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거의 개미로 보이며, 장대한 탑
의 모습이 마치 삼천사의 탄탄한 재정과 세를 부질없이 과시하는 것 같다.


▲  군인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9층석탑을 지나면 오른쪽 높은 곳에 화강암 통돌로 조성된 지장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이 보
살상은 9층석탑과 5층석탑은 물론 절 서쪽에 있는 34사단 유격훈련장 방향(산을 올려다보면 유
격장이 보임)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34사단 장병들이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훈련을 하는데 해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천사 주지승이 장병들의 덧없는 희생을 막고 더 이상의 사고와 살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원하는 뜻에서 유격훈련장이 보이는 곳에 지장보살입상을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지장보살 형님의 가호가 진하게 피어나 그들
을 지켜준 모양이다.

어진 어미의 모습처럼 자리한 보살상은 8각의 기단을 밑에 깔고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
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으며 8각 대좌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와 도명존자(道明尊者)
, 시왕상 등이 새겨져 있다.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연못 (일주문 앞)

▲  삼천사 일주문(一柱門)

9층석탑을 지나면 문짝을 단 큰 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주문이라 부른다. 보통 일주문은 절
입구나 길목에 세우기 마련으로 미타교와 5층석탑 사이에 일주문을 둘 자리가 넉넉하나 삼천사
는 그 자리를 모두 내버리고 특이하게 대웅보전 입구에 갖다 놓았다.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는데 쓰여진 글씨가 꽤 걸출하여 하늘로 날라
갈 것만 같다.


▲  새끼두꺼비 2마리를 등에 짊어진 어미 두꺼비상 (일주문 난간)
절의 지형 때문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갖다둔 것은 아닐까?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宗務所)와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 차례로 모습을 비춘다. 예전
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절의 법당)을 칭했는데 건물이 얼마나 허벌나
게 큰지 가히 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가 날카롭게 솟아
북한산 봉우리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장보살상,
신중탱, 16나한, 500나한상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대웅보전 앞에도 2마리의 새끼를
등에 진 두꺼비상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신중탱(神衆幀)
모두 104명이 담겨져 있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석가3존불과 후불(後佛)목각탱

석가불이 조그만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불을 이
룬다. 그들 뒤에는 호화롭고 복잡해 보이는 후불목각탱화(木刻幀畵)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삼세불화(三世佛畵)를 표현한 것으로 가운데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배치하고 왼
쪽에 약사회도(藥師會圖), 오른쪽에 극락회도(極樂會圖)를 배치했다.

▲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16나한(羅漢)과 500나한들
우리나라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의상을 취하고 있어 다들 개성들이 넘친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명품급 마애불이자 삼천사계곡의 영원한 은둔자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657호

▲  마애불과 그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눈썹바위

대웅보전 옆구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애불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으니 그가 바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올리는 석조 공간이 넓게 닦여져 있는데 그 공간 밑에는 삼천사계
곡이 일조권을 강제로 빼앗긴 채 숨죽여 흘러간다. 한참 학창 시절이던 1992년 가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계곡을 가리고 앉은 돌로 다진 공
간이 없었고 계곡을 건너면 마애불 앞에 조그만 예불 공간이 전부였다.

서울에 있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①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②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③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④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의 일원으로 고려 초기(멀리 신라 말로 보기도 함)에 조성된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불상 대
부분은 선을 그어 처리했지만 일부는 약간 튀어나온 얕음새김으로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 높
이는 2.6m이다.

이 마애불은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2000년 이후에 사라졌고, 그의 왼쪽(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부분에는 약간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채색을 했던 흔
적들이다. 마애불에 색을 입힌 경우는 이곳과 경북 칠곡군 왜관(倭館) 부근에 있는 노석리 마
애불상군 등이 있다.


▲  마애불 양쪽에는 네모난 구멍이 2개 있는데 저들은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으로 그가 감싸주던 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유난히도 밝고 하얗다.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처럼 말이다.


불상의 머리 뒷쪽에 2겹으로 된 둥근 두광(頭光)이 그를 밝히고 있고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으로 눈은 지그시 감아 명
상에 잠긴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두툼하다. 입은 살짝 오무려 약간의 미소를 선보이고 있고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박혀있다.
그의 키는 얼굴에 비해 꽤 긴 편으로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법의(法衣)를 걸치며 두 어깨를 가
렸고 발 밑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윤기를 흐르는 광배(光背)
가 새겨져 있다.
신체적인 균형이 그런데로 비슷하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배 앞에서 받쳐든 모습인데, 이는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 어깨 좌우와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과 좌우로 길게 파여진 홈이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불을 보호하던 목조 가구(架構)를 씌우던 흔적이다. 그 가구는 오래 전에 자연재해나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불상 위쪽에 있는 눈썹바위의 보호를 받으
면서 눈과 비를 피했다. 게다가 첩첩한 계곡 바위에 자리한 탓에 태풍과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하기에 좋아 거의 천 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바위에 진하게 현신한 듯 건강상태는 좋다.

지금은 이렇게 답사객과 순례객의 발길이 빈번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을 받
지 못했다. 게다가 민간인 통제구역에 묶여 출입도 부자유스러우니 아는 사람과 절 신도만 조
금 찾는 정도였다. 허나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에 꽁꽁 씌워진 통제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삼천사
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이름도 약간이나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었다.


▲  바위에 현신한 듯 두드러진 모습의 마애불 윗부분
불상을 수식하고 있는 두광과 신광은 마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준다.


▲  마애불의 아랫도리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 밑에 그의 두 발이 나와 있는데 발가락이 다소 두터워 보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1992년 가을,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있는 줄 알고 부근 야산
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미지의 세계나 다름이 없던 삼천사까지 들어왔다. 당시 적멸보궁이던
대웅보전 뒷쪽에서 나와 숨바꼭질을 한 마애불을 발견하고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하며 북악산(백악산)의 백석동천<
白石洞天, 백사실계곡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그에게 은근슬쩍 빠져들고 말았지. 하여 매년
적어도 1~2회 정도 그를 찾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비록 인간이 만든 조각물이긴 하지만 여
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지만 예전에는 옛 삼천사로 가던 길목으로 조그만 암자와 계곡, 바위만 있
었다. 그러다가 마애불 주변에 삼천사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경내 한복판이 되었고, 지금의 삼
천사를 일군 성운의 노력으로 오래된 마애불임을 입증받아 1979년 국가 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이 마애불은 영험(靈驗)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중생들이 먼 거리를 걷는 수고로움을 마
다하지 않으며 이곳을 찾는다.


▲  마애불 좌측 면에 새겨진 '일붕선사좌선대(一鵬禪師坐禪坮)' 바위글씨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 서경보 선사가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고자 새긴 것이다.

▲  꼬랑지가 인상적인 귀여운 다람쥐상 (마애불 예불 장소 난간)
(그의 존재의 이유는 모르겠음)

▲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종형사리탑(鐘形舍利塔)

마애불 앞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이 있다. 이 탑은 1988년에 성
운화상이 미얀마 마하시사사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
안하고 있는데 그 연유로 서울에서 제일 처음 적멸보궁을 마련하여 석가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사찰임을 천하에 어필했다.
마애불과 함께 삼천사의 성역으로 무척 애지중지되다가 2012년 진신사리를 담은 거대한 9층석
탑이 지어지면서 중요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  종형사리탑 우측의 세존진신사리비
미얀마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과정과 이유를 소상히 담아 넣었다.


 2층 규모의 산령각(山靈閣)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눈썹바위 옆구리에는 2층짜리 산령각이 있다. 산령각이란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의 다른 이름으로 삼천사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천태각이나 산령각
처럼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을 선택해 중생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산신
각이긴 하지만 독성(獨聖)과 칠성(七星)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한
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2층으로(1층은 창고 등으로 쓰임) 내부 중앙에는 금
칠을 한 거대한 산신탱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은 나무로 돋음새
김으로 새기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상큼하게 처리했으나 돈을 좀 벌었는지 죄다 도금을 하여 금
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산신의 수염과 동자의 머리를 빼고는 모조리 색이 같아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벌이듯 분간이 쉽지 않아 눈만 아프다.

이렇게 산신탱은 삼천사에서 마애여래입상, 세존진신사리탑 다음으로 자랑하는 보물로 비록 고
색의 기운은 없지만 다른 절과 달리 산신을 크게 내세운 산신도량으로 절을 키우면서 '북한산(
삼각산) 산신이 보좌를 튼 절'임을 진하게 자처하고 있다.


▲  요란한 금칠의 산신탱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올려진 공양미들

 독성(나반존자)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칠성들의 회합 현장, 칠성탱


▲  산령각과 마주한 눈썹바위 - 오랜 세월의 주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  산령각에서 굽어본 마애불 예불 공간과 종형사리탑 주변,
그리고 대웅보전의 두툼한 뒷모습

▲  산령각에서 굽어본 삼천사 위쪽 다리
저 다리는 삼천사계곡 등산로로 북한산성과 비봉, 옛 삼천사터로 이어진다.
다리 주변 계곡에는 중생들이 쌓아올린 기하학적인 돌탑들로 가득해
조그만 돌탑의 세상을 이룬다.

 삼천사의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산령각 옆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벽돌 건물이 있다. 천태각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
)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
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고 그가 일어난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이라 했
는데 산령각에 독성탱이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건물까지 두어 대우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열기와 기름냄
새로 가득해 더울 때 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인등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켠
것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힌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매일 치솟는 열을 외부로 배출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 온도를 유지시키는
통풍구가 있으며, 다른 건물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2개로 바깥 문인 여닫이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안쪽 문인 미닫이문은 인등을 지키기 위해 항시 닫혀져 있다. 문을 들락날락 거릴
때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상과 자연석으로 간단하게 손질한 16나한들

천태각 독성은 대머리의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꺼워 보이는 옷(얼마나 더울까?)
, 그리고 배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여유로운 모습이다. 명
상에 잠긴 그의 익살스런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며 그 좌우에는 조그만 16나
한상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한 것이다.


▲  삼천사 위쪽 계곡을 가득 메운 돌탑의 물결

▲  삼천사 돌담길 (삼천사계곡 산길)

삼천사에서 북한산(삼각산)으로 오르려면 종형사리탑 좌측에 있는 대문으로 나가거나 일주문에
서 오른쪽 길로 가야 된다. 마치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기와집이나 궁궐 담장길을 거닐 듯, 운
치가 깃들여진 돌담길은 삼천사의 또다른 명물이라 할만하다.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다~~

 연등의 전송을 받으며 ~~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북한산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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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9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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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호남선의 종점, 목포 늦여름 나들이 '

   

▲ 유달산 노적봉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갓바위입구 포구
▼ 갓바위

   



늦여름과 초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 첫 무렵에 예향(藝鄕)의 고을이자 전남 제일의 항구도
시인 목포(木浦)를 찾았다.
목포는 무려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곳과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잘 닿지가 않았다. 하여 이번
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붙여 목포행 무궁화호 첫 열차에 속세에 찌든 몸을 담고 느림의 미학(美
學)을 음미하며 거의 5시간을 달려 호남선(湖南線)의 오랜 종점, 목포역에 이르렀다.
목포에서의 정처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
은 유달산 동부와 달성사, 그리고 갓바위이다.


 

♠  유달산(儒達山) 겉돌기

▲  노적봉(유달산입구)에서 유달산으로 인도하는 계단

목포역에서 시내를 가로질러 노적봉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유달산의 관문인 노적봉 주차장(
유달산입구)이다. 속세에서 유달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중심 관문으로 이곳 외에도 어민동산과
조각공원, 목포시사 등에도 산길이 있으나 관광객들은 보통 노적봉에서 오른다. 이곳에 너른
주차장이 있고 접근성도 괜찮기 때문이다.

유달산(228.3m)은 목포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시내 서쪽에 들어앉아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실질적인 종점으로 호남의 개골(皆骨)로 일컬어졌으며 영혼이 거쳐가는
산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영혼이 나중에 선비를 뜻하는 한자로 바뀌
어 유달산으로 간판을 바꾼 것이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아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넉넉잡아 30~40분 정도면 충분하며 유달산의 정상
인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삼등바위, 고래바위, 투구바위, 노적봉 등 20개가 넘는 개성파 바위
들이 앞다투어 산을 멋지게 수식하고 있다. 이들은 목포8경의 으뜸인 유산기암(儒山奇巖)의 현
장으로 지금은 목포9경으로 재편되어 '유달산풍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달산의 품에는 대학루와 달선각, 소요정, 낙조대 등의 정자가 있고, 조각공원과 특정자생식
물원, 노적봉예술공원, 목포시사, 달성사, 오포대(午砲臺) 등의 명소가 있으며, 2.7km의 유달
산 일주도로(유달로)와 뚜벅이를 위한 유달산 둘레길이 둘러져 있다. 또한 산자락에는 왕자귀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천하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산에 왔다면 정상은 한번 가주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목포시내를 비
롯하여 서해바다와 점점이 찍힌 크고 작은 섬들이 앞다투어 두 눈에 들어와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다. 게다가 사방(四方)이 확 트여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이곳 정상은 한참 20대의 중반을 달리고 있던 2002년 초, 심야열차로 목포에 내려와 새벽에 검
은 도화지 속을 가르며 올라간 추억이 있다. 그때 일등바위에 걸터앉아 불끈 솟아오르는 해돋
이를 보며 목이 터져라 환호를 질렀었지~! (허나 지금은 우울이 파도를 치는 30대 후반 ㅠㅠ)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밤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렇게 오랜만에 찾은 유달산이지만 이번에는 뫼 깊숙히 안기지 않고 노적봉과 목포시사, 달성
사 등 유달산의 겉만 돌고 철수했다.


▲  노적봉예술공원 미술관 야외공연장

노적봉 주차장 서쪽에는 노적봉예술공원이 자리해 있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공원은 3층 꼭대기
로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며 공연장 옆에 '노적봉예술공원'이라 쓰인 건물로 들어가 내려가면 미
술관과 홍보관이 나온다.
이곳은 2009년 7월에 문을 연 목포 종합 홍보관 겸 미술관으로 지상 2층과 옥상(3층)으로 이루
어져 있다. 1층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작품과 목포 지역 서화가의 작품을 다루는 미술관으로
, 2층은 목포의 역사와 지리, 문화, 예술 등을 다루고 있으며, 3층 옥상은 야외공연장으로 쓰
이고 있다. 허나 이곳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곳이라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유달
산으로 등을 돌렸다.

★ 노적봉 예술공원 미술관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2가 1-4 (유달로 116, ☎ 061-270-8300)


▲  노적봉(露積峯)

노적봉 주차장(유달산입구) 뒤쪽에 노적봉이라 불리는 울퉁불퉁한 큰 바위가 있다. 속세(俗世)
에서 유달산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대자연이 빚은 해발 60m의 바위로 남해바다의 영
원한 해신(海神),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뛰어난 전략과 숨결이 서린 현장이다.

때는 1597년 겨울, 그 유명한 명량대첩(鳴梁大捷)으로 적선 133척을 격파하고 왜군 1만여 명을
물고기 간식으로 만든 이순신은 목포 앞바다에 뜬 고하도(高下島)에 주둔하며 남해로 진출할
준비를 했다.
왜군들은 언제 이순신이 나타나 자신들의 목을 칠지 전전긍긍하며 수시로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이순신은 바다가 잘 보이는 노적봉에 이엉(볏짚)을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새벽에는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왜군은 그의 계략에 제대로 속아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도
망을 쳤으니 그 연유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달산의 상징이자 이순신의 손길이 담긴 노적봉은 매우 거친 바위라 오르는 것이 통제되어 있
다. 바위 주변에는 산책로가 둘러져 있어 방향마다 달리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맨
살을 완전히 드러내기가 부끄러웠는지 얇게나마 푸른 덩굴 옷을 걸치고 있다. 근래에는 노적봉
큰바위 얼굴이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바위 꼭대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 얼굴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두고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고 있는 모습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노적봉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에도 좋다고 하여 인근 다산목과 함께 소원을 비는 현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노적봉 (바위 정상이 사람 얼굴과
좀 비슷하게 생겼음)

▲  동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북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노적봉 동쪽에 심어진 옛 목포MBC 표석
1980년 5.18 시절 방송매체들이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5.18을 폭동으로,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는 보도를 내보내자 분노한 목포 시민들이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5.18
탄압을 규탄했던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이다. 그 현장이던 목포MBC는 다른 곳으로
둥지를 옮겼고 저렇게 표석 하나를 남겨 놓아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전한다.


▲  새천년 시민의 종

노적봉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그 안에는 2000년 10월에 조성된 커다란 종,
새천년 시민의 종이 담겨져 있다.
2000년에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여 목포시에서 6억 원을 들여 만든 종으로 옛날에 정오 12시를
알렸던 오포대(午砲臺) 자리에 세웠다. 종은 199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서울대 정밀기계설계 공동연구소에서 제작 설계를 하고, 김응현 선생이 종에 글씨를
새겼으며 종각의 현판인 '시민종각(市民鐘閣)'은 전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남겼다.
보통 종은 33번을 치기 마련이나 이 종은 희망찬 21세기의 염원을 담아 만든 것이라 하여 특별
하게 21번을 친다.


▲  노적봉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계단을 내려가면 옛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289호)이 나온다.

▲  온갖 거시기한 상상을 유발시키는 노적봉 다산목(多産木) 아랫도리


▲  노적봉 다산목

노적봉 남쪽에는 유달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
한 다산목이란 나무가 있다. 이들 나무는 팽나
무로 나무 줄기는 뼈만 앙상한 다리 같은 모습
인데 그들이 갈라져 가랭이를 벌리고 있는 듯
한 부분은 여인의 은밀한 부분과 비슷하게 생
겨 먹어 온갖 예민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킨
다.

이 나무는 1900년대 초반에 발견된 것으로 여
한목(한스러운 여인나무)이라 불렸다고 한다.
나이는 150년 정도로 1910년경에 어미나무(여
한목)의 뿌리에서 새끼나무가 자라나자 그를
다산목이라 했다.
인근 주민들만 알고 지내던 숨겨진 존재로 이
들 나무를 보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하여 노
적봉 주변 동네의 출산율이 목포의 다른 동네
보다 높았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자연의 경이
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걸작이다보니 보기만해
도 밤일(?) 생각이 간절하고 힘 또한 불끈 솟
는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의 아주 비밀스러운 성기/기자신앙(性器/箕子信仰)의 대상물로 오랫동안 숨바꼭질
을 해왔지만 2000년 10월 새천년 시민의 종을 만들고자 노적봉 주변의 수풀을 손질하는 과정에
서 발견되어 속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목포시청에서 그 나무를 여자나무(여인나무)
라고 부르다가 동네 설화에 따라 다산목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달산의 명물로 키우고 있다.


▲  노적봉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유달산 주위를 도는 드라이브 둘레길, 유달로

▲  점점 멀어져가는 노적봉 (유달로에서 바라본 노적봉)

▲  목포시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나무가 적절하게 고개를 숙이며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  돌담에 둘러싸인 목포시사(木浦詩社) - 전남 지방기념물 21호

노적봉에서 유달산 밑도리를 따라 흘러가는 둘레길을 쫓아 조각공원 방면으로 가다보면 숲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목포시사가 마중을 나온다.

유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목포시사는 1907년 대학자로 칭송받는 정만조(鄭萬朝)가 세웠다. 시
사(詩社)란 선비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문학 동호회 모임터이
다. 1890년 허석제, 여규향 등 지역 문인들이 세운 유산정에서 비롯된 목포시사는 망국의 한
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던 문학결사 단체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시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였으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은 절대로 받지 않았다.
지금도 시사의 성격은 전혀 녹슬지 않았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한시(漢詩) 백일장을 열고 있
다. 그때가 되면 전국에서 100~200명 이상의 문인들이 찾아와 서로의 필력을 겨루며 한시의 명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사를 이루고 있는 건물은 2동으로 앞에 있는
건물이 시사 본당(本堂)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본당에는 정만조의 문집과 구한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과 한시 현판, 백일장 입
선작, 문인들의 원고가 소장되어 있으며 뒷쪽
건물은 시사 관리인의 거처이다.


  목포시사 본당



 

♠  유달산 자락에 안긴 100년 묵은 산사(山寺)
목포 달성사(達聖寺)

▲  달성사 (왼쪽부터 범종각, 명부전, 극락보전, 관음전)

목포시사에서 다시 둘레길을 따라 북쪽으로 2~3분 가면 달성사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에 따라 산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유달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다진 달성사가 모습을 비춘다.

달성사는 목포 지역 유일의 오래된 사찰로 1913년 4월 석가탄신일에 노대련 선사(盧大蓮 禪師)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창건되어 대원사(大願寺)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근
거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1913년 창건 이후 법등(法燈)을 켠지 이제 100여 년이 되었지만 그 짧은 역사도 제대로 정리하
지 못해 많은 내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의 절은 2000년대 초반에 손질된 것으로 고색의 내
음은 싹도 틔우지 못했지만 다행히 다른 곳에서 오래된 불상 2개를 업어와 든든한 밥줄로 삼고
있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바로 그 불상을 보기 위함으로 그들이 만약에 없었다면 이곳에 영
원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삼성각,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산자
락에 크게 2단으로 석축을 다져 1단에는 3층석탑과 요사, 범종각을 두고, 2단에는 극락보전과
명부전, 관음전을 두었다. 그리고 극락보전 뒤쪽에 높이 터를 구축해 삼성각을 세웠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3존불좌상과 목조지장보살반가상 등이 있
으며, 이곳에 있는 우물은 유달산 뿐 아니라 목포에서도 흔치 않은 샘터로 유명하다. 또한 목
포8경의 하나인 달사모종(達寺暮鐘)의 현장으로 이곳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목포 시내의 번
뇌를 잠재운다.


▲  달성사로 올라가는 계단길

▲  경내 밑에 자리한 이형(二形) 석탑
정확한 조성시기는 모르겠으나 때깔이 좀 낀 것으로 봐서는 20세기 초나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탑 같기도 하고 2층탑 같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없는 탑인데 아랫층을 기단으로 본다면 2층이 되겠고, 탑신으로
본다면 3층이 되기 때문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경쾌하게 들려져
살짝 날개짓을 벌이는 것 같다.

▲  경내로 오르는 계단

▲  앞서 이형 석탑 윗도리와 똑같이 생긴
2층 탑신이 계단 옆에 놓여져 있다.

▲  관음전(觀音殿, 2층)과 요사, 공양간(1층)
관음전 밑도리를 활용하여 요사와
공양간을 두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음에는 대웅전을 칭했으나 본존불과의
형편성을 고려해 극락보전으로 바뀌었다.


▲  달성사 목조아미타3존불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8호

극락보전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포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의 이름을 대웅전(大雄殿)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극락보전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들 때문이다.

그들은 1678년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조성된 목불(木佛)로 이들을 조성하면서 남긴
조성발원문(14cmX25cm)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
며 앉아있는 아미타불의 옷은 통견의로 U자형의 옷주름이 물결을 이루고 있으며 1자형의 띠줄
과 연화형 승각기, 우측 어깨의 반단, U자형 군의자락 등이 특징이다. 그의 좌우에는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로 앉아있는데 표정이 좀 무거
워 보이며 17세기 전남 지역의 몇 안되는 목불의 하나로 손꼽힌다.

◀ 극락보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그 앞에 솟은 대련선사창공비(大連禪師彰功碑)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
금자리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다.
그 밑에 밋밋하게 솟은 비석은 절을 세운 노대
련 선사를 기리고자 세운 창공비(彰功碑)이다.

         ◀ 달성사 우물 <옥정(玉井)>
극락보전 뒷쪽에는 정(井)과 샵(#) 모양의 진
수를 보여주는 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선 그를
옥정이라 하여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노대련이
100일 기도 중에 굴착을 하니 기도의 영험인지
30척 바위 속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유달산의 흔치 않은 우물로 물맛이 좋기로 소
문이 자자하며, 여름에는 물이 차고 부정한 사
람이 물을 길으면 일시에 마른다고 한다. (내
가 갔을 때는 물 구경도 못했음)

  종무소(宗務所) 겸 요사(寮舍)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10왕상 (우측)

  명부전 10왕상 (좌측)


  달성사 목조지장보살반가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9호

극락보전 옆에는 지장보살과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있다. 다
른 건물은 다 지나치더라도 극락보전과 명부전 내부는 꼭 살펴보도록 하자. 바로 달성사의 보
물이 담겨져 있기 때문으로 특히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반가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반가상(半
跏像)으로 매우 희소성이 높다.

푸른색의 승려 머리를 선보이며 동자처럼 해맑
은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상은 1565년 나주 웅
점사<熊岾寺, 현재 운흥사(雲興寺)>에서 조성
된 것으로 조성 관련 내용이 조성발원문(13cmX
143cm)에 소상히 나와있다.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3존불처럼 낯선 이곳으
로 흘러들어왔는데, 언제 무슨 경로로 왔는지
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 불상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은 표정 속에
는 눈썹과 가늘게 뜬 눈, 오똑한 코, 붉은 입
술이 담겨져 있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島
)가 획 그어져 있다.
왼쪽 다리는 가부좌(跏趺坐)를 취하고 있고 오
른쪽 다리는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이런 형태
의 불상은 17세기 이전에는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고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우 사실적
으로 묘사되었으며 지방문화재가 아닌 국가 보
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인다.

그가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그를 위해 근래에 특별한 제작된 것으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을 정도 탐이 난다. 그의 좌우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
明尊者)가 밝은 색채를 띄며 서 있다.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 툇마루에 앉아 불만에 잠긴 두 다리를 쉬었다. 툇마루에 식당에서 많
이 볼 수 있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무려 공짜이다. (지금은 없으며 종무소에서 승려가 전통
차를 달여서 제공해줌, 단 그가 종무소 방에 머물고 있을 때에 한함) 그래서 2잔이나 뽑아 마
셨지.
속세에 대한 근심을 잠시 바람에 날리며 툇마루에 앉아있으니 종무소에서 일하던 여인네가 다
가와 말을 건넨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는데 어디서 오셨나면서 과자와 녹차를 권
한다. 뜻밖에 호의에 고마움을 표하며 과자와 녹차를 마셨고 배고픈 마음에 과자를 더 청하니
초코과자를 더 건네준다. 그렇게 간식을 섭취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아쉽지만 작별을
고하고 절을 떠났다.

달성사에 대해서는 운좋게 오래된 불상을 업어온 20세기 초반 사찰, 1번 오면 그만인 그런 정
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절의 호의에 또 오고 싶은 긍정적인 사찰로 인식이 돌변했다. 그래서
얼마 전 봄에도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승려에게 차를 여러 잔 대접 받으며 차담(茶啖)을 주고
받았다.

※ 유달산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① 목포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수서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오송역, 서대전역, 익산역, 광주송정역
  에서 목포행 각종 열차 이용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목포행 고속버스가 40~6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목포행 직행버
  스가 1일 5회 떠난다.
* 고양(백석), 성남, 수원, 안산, 인천, 천안, 세종, 전주, 광주, 여수, 부산(사상), 창원(마
  산)에서 목포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목포역에서 유달산입구(노적봉)까지 도보 12분, 달성사는 약 25분
* 목포종합터미널에서 물 흐르듯 자주 다니는 목포역, 삼학도, 해양대 방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목포역 정류장에서 도보 이동, 또는 노선 굴곡이 심한 2, 60번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
  YMCA나 유달산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60번은 연산동으로 크게 돌아감)

③ 승용차
* 서해안고속도로 → 죽림나들목에서 고하대로 직진 → 삽진고가교 → 북항교차로에서 좌회전
  → 해양대학로 → 유달로 → 달성사입구 → 유달산주차장, 노적봉

★ 유달산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입장료는 공짜, 주차비는 경차 30분에 500원, 중형은 500원, 대형은 1,000원
* 유달산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 노적봉 관광안내소 061-270-8411)
* 달성사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317-1 (유달로 173 ☎ 061-244-1489)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작품, 갓바위 - 천연기념물 500호

  갓바위 입구 포구

유달산과의 짧은 인연을 쿨하게 마무리짓고 갓바위로 가고자 시내로 나왔다. 뱃속을 달래고자
목포역 부근으로 내려와 마땅한 식당을 물색하다가 다양한 종류의 순두부찌개를 내놓는 '수가
정'이란 식당에 눈에 들어와 소고기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곳은 10여 가지의 순
두부찌개를 취급하는데 찌개와 돌솥밥이 같이 나온다. 돌솥에 담긴 밥에 뜨거운 물을 넣어 푹
우린 다음 순두부와 같이 냠냠하는 것으로 그런데로 숟가락을 들만하다.

그렇게 시장한 배를 배불리 달래고 목포역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남항과 하당 사이에
자리한 갓바위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이곳도 엄연한 목포 도심이건만 시골
어촌 풍경이 여전히 진하다. 목포만(木浦灣) 너머로 영산강하구둑을 비롯하여 지역 발전과 돈
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는 대불공단 공장들이 바다 건너로 보이고 바다와 포구에는 갖은
어선들이 조각배처럼 수면 위를 장식하고 있어 평화로운 어촌 풍경을 자아낸다.

버스정류장에서 갓바위로 인도하는 산책로를 들어서면 중간에 갓바위 뒷통수로 오르는 입암산(
立巖山) 산길이 있으며, 직진을 고수하면 나무로 다진 해안산책로(보행교)가 나온다. 이 산책
로는 갓바위를 두 다리로 편하게 구경할 수 있게끔 2008년 4월 10일에 설치된 298m의 길로 동
쪽은 하당신도시 달맞이공원과 이어진다.
밀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1m 정도 육지쪽으로 올라왔다가 썰물이 지면 바닷물을 따라 내려가는
산책로로 바다를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 한다. 보행교에는 야간 조명을 설치하여 통행 편의
는 물론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까지 선사하고 있다.


  갓바위 입구 앞바다(목포만) - 바다 건너는 대불공단

▲  갓바위와 이웃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新安) 해저 유물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발견된 온갖 묵은 보물들이
담긴 이 땅 최초의 해양박물관이다.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 갓바위 서쪽 보행교


  서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서남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입암산 남쪽 바닷가 벼랑에 자리한 갓바위는 대자연이 긴 세월을 두고 빚은 심오한 작품이다. 아직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 자연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손질
되고 있어 몇백 년 이후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자아낼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갓바위는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갓바위란 단순한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움만 더하게 하는 그는 2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
쪽(서쪽) 바위는 모자가 달린 외투나 옷을 껴입은 모습처럼 보여 사오정 시리즈로 유명한 귀머
거리 사오정과 비슷해 보이며 오른쪽(동쪽) 바위는 갓보다는 철모를 쓰고 있는 군인 같다.
예전에는 갓처럼 보였겠지만 그만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모자 달린 옷이나 철모처럼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라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아닐
까 싶지만 저게 모두 순수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
겠는가.

갓바위가 이런 요상한 형태가 된 것은 이곳이 바닷물과 담수가 만나는 곳으로 암석 표면에 파
도가 치거나 안개가 끼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수
분에 들어있던 실리카 성분이 침전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
모양의 경질부와 아랫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風化穴)이 형성된 것이다. 파도와 해
류, 바다 바람에 의해 바위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장으로 다른 풍화혈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
도 있다.

이곳을 물든 저녁 노을과 갓바위와 해안 벼랑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무척 아름다워 예로부터
목포8경의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로 꼽혔으며 파도와 바닷바람에 의해 바위가 이렇게도 성
형이 될 수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현장으로 2009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목포9경의 일원임)


  정면에서 바라본 갓바위의 위엄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전설 보따리가 꼭 담겨져 있
기 마련이다.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갓바위 역시 그 예외는 아닌데 그들이 붙여놓은 전설
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가 수염을 태워먹던 어느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
다. 그는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는데 살림살이는 늘 궁핍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매
우 지극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소금 장사로는 생계가 어려워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이 돈은 주지도 않고 부려먹
기만 하는지라 1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집에 와보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어 방문을 열어
보니 글쎄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미 식어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이 집을 비운 사이 그는 숨줄
을 놓은 것이었다.
청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양지바른 곳에 묘자리를 잡고 관을 모시고 가던 중,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설은 그냥 그렇
게만 나와있음) 청년은 다시 한번 불효를 통회(痛悔)하며 울부짖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고 자책하며 평생 갓을 쓰고 관이 빠진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후 그곳에 2개의 바위
가 불쑥 올라왔는데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불렀다.

다른 전설로는 부처가 나한(羅漢)을 이끌고 영산강을 건너 이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모르
고 놓고 간 삿갓이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갓바위 대신 중바위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앞 전설이 효도를 소재로 한 것이라면 뒷 전설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으로 효행사상을 장려하
고자 갓바위를 이용한 선비들과 이곳에 오지도 않은 부처와 나한을 내세워 바위를 포교의 소재
물로 삼은 승려들의 투철한 영업 정신이 교차된 현장이다.

바위가 해변 벼랑에 있다보니 육지에서는 그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배를
타고 봐야 했었지. 바로 그런 고충을 해결하고자 2008년 4월 갓바위 주위에 해안보행교를 만들
어 두 다리로 언제든 갓바위를 만날 수 있게 배려했으며 조명시설까지 설치해 야경까지 덤으로
제공한다.


  갓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 바다에 돌출된 모자 끝부분을 손으로 만지면
가루처럼 뚝 부러질 것만 같다. 정말 만져보고 싶은데 위치가 저러니
이렇게 바라보는 선에서 그 미련을 접어야 된다.

▲  아랫도리가 긁힌 갓바위 동쪽 벼랑 (윗쪽은 입암산 전망대)
이들도 갓바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저 모양이 되었다. 마치 사람들이
도구를 이용해 긁은 모습처럼 말이다.


  갓바위 바로 앞 보행교

  갓바위 동쪽에 둥지를 튼 하당신도시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주변

  갓바위 뒷통수에 펼쳐진 입암산 산길

  입암산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갓바위 뒤쪽은 해안 언덕으로 목포자연사박물관 뒷쪽에 누운 입암산의 일부이다. 그 언덕에는
산책로가 닦여져 있는데 갓바위 뒷통수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해조음을 듣고 자라난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우거져 있고 그 산을 넘으면 하당 달맞이공원으로 이어진다. 갓바위에 왔다면 바
다와 바위만 볼 것이 아니라 입암산 산길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이처럼 갓바위는 산과 바위, 바다, 3박자가 깔끔하게 어우러진 경승지이자 유달산과 자웅을 겨
루는 목포 제일의 명소이다.

갓바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찬란했던 햇님의 기운도 슬슬 망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땅꺼
미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목포에서의 볼일도 그런데로 다 마쳤으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와
야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더 머물며 인근 지역까지 살펴보고 싶지만 그럴 준비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하여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여기서 가까운 목포종합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수
원행 마지막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9월 초 목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목포 갓바위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목포역 건너편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바위(갓바위) 하차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 정류장에서 목포시내버스 112번을 타고 우미파크빌5차에
  서 하차, 여기서 해안산책로나 달맞이공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0분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나 서쪽 버스터미널 후문 정류장에서 900번(900번A) 좌석
  버스를 타고 갓바위터널 하차, 갓바위터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5분

*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통행가능시간
- 하절기 5시~24시 (동절기는 23시까지)
- 태풍과 호우, 폭설, 안개 등의 기상악화 시에는 접근 통제

* 갓바위 서쪽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061-270-20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자연사박
  물관(☎ 061-270-8367, ☞ 홈페이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061-270-8480, ☞ 홈페이지),
  남농기념관(☎ 061-276-0313), 목포문학관(☎ 061-270-84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문화예
  술회관(☎ 061-270-8484, 홈페이지 보기) 등의 박물관과 전시/예술공간이 몰려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갓바위문화타운’이라 부르는데, 갓바위와 이들 몇 개를 같이 묶어서
  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특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땅 최초의 해양
  문화재 박물관으로 신안 서해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갓바위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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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C) 2017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 단양 사인암 나들이 '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오랜 추위에 지친 천하를 진정시키던 3월 끝 무렵, 친한 후배
와 오랜만에 1박2일 장거리 여행을 나섰다.
렌트카를 이용하여 토요일 아침 8시에 서울을 출발, 백두대간 골짜기에 숨겨진 홍천(洪川
)의 삼봉약수(三峰藥水,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몸에 좋다는 탄산약수를 배터지게
섭취했다. 그런 다음 영월(寧越)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저녁 늦게 단양(丹陽)으로 넘어
갔다.

단양은 충북 동쪽 끝에 뉘어진 산간 고을로 나의 외가 동네(단성면 북하리)이다. 서울 다
음으로 오래 머문 곳으로<다 합쳐봐야 1년도 안됨> 지금은 다들 서울과 인천, 경기도, 원
주 등지로 나가고 모친의 작은아버지(나에게는 삼촌뻘~) 가족만 북하리 남쪽인 북상리(北
上里)에 머물며 터전을 지키고 있다. 바로 그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영월읍에서 제천(提川)을 거쳐 가라는 네비양의 안내를 쿨하게 무시하고 남한강을 따라서
고씨동굴, 영춘면, 향산리, 단양읍을 거쳐 저녁 10시가 넘어서 북상리 친척집에 도착했다.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삼겹살로 늦은 저녁을 들고 새벽 4시까지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
穀茶, 술)를 기울이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곡차의 기운이 몸 속에 진하게 퍼져 이거 아침에 일어날 수나 있겠나 걱정이 들었지만 아
침 9시가 되자 스르륵 잠이 깼다. 천근만근 무거운 두 눈을 비비며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든 다음 10시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고작 12시간 남짓, 간
만에 온 것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허나 같이 간 후배 때문에 더 머물기도 그랬고 그날 경북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올라가야
되서 다음 인연을 격하게 고대하며 단양 친척집을 떠났다.

단양에서 경북으로 가려면 손쉽게 죽령터널(중앙고속도로)을 통하거나 아니면 사인암, 방
곡리를 거쳐 문경으로 넘어가야 된다. 우리는 쉬운 길 대신 미답로인 문경 방면 고갯길을
택했는데 그 길목에 단양8경의 으뜸인 사인암이 요염하게 버티고 있다.
사인암은 예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경북 지역에 크게 비중을 두었으므로
단양은 하룻밤 머무는 선에서 딱 선을 그으려고 했다. 허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창밖에서 자꾸 손짓하는 사인암을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나 잘생긴
사인암을 훌쩍 지나치는 것도 마음에 좀 걸리고 요즘 같은 난세(?)에 다음을 흔쾌히 기약
할 수가 없어 그곳에서 잠시 바퀴를 멈추고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  단양8경의 으뜸이자 운선9곡(雲仙九曲)의 아름다운 입술
사인암(舍人岩) -
명승 47호

단양8경(丹陽八景)이란 단양의 이름난 경승지 8곳을 일컫는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 퇴계 이
황(退溪 李滉)이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단양의 명승지 8곳을 뽑아서
단양8경으로 묶으면서 명나라의 소상8경(瀟湘八景)보다 더 아름답다고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했다. 그 단양8경을 이루고 있는 식구로는 도담삼봉(島潭三峯)과 석문(石門),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荀峯),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등으로 그중 도담3봉과 석문을 제외하고 모
두 옛 단양의 중심지였던 단성(丹城) 주변에 몰려있다. (8곳 중, 5곳만 가봤음)

사인암은 단양8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현장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70m 높이의 기암절벽(奇
巖絶壁)이 사인암의 핵심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절벽에 상하 좌우로 균형 있게 줄이 그어
져 있어 마치 천연의 바둑판을 보는 듯 한데 하늘나라의 신선 형님들이 인간들이 자고 있을 때
살포시 내려와 이 절벽을 바로 눕혀 내기바둑을 한판 두고, 하늘로 올라갈 때는 인간들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끔 하늘을 향해 세워두고 가는 모양이다.
절벽 꼭대기에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닮은 노송(老松)들이 사인암의 운치를 가득 수식하는데,
어찌 저런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혹 바둑판이 비와 눈에
젖을까봐 신선이 심어둔 작은 우산은 아닐까?

이곳은 단양 출신인 고려 후기 대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3~1342)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었을 때 휴양했던 곳이라 전한다. 우탁은 단양우씨 집안으로 원나라에서 들어온 정주학(程朱
學) 서적을 처음으로 터득한 인물인데,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제광(林齊光)이 우탁이 머무
른 것을 기리고자 그의 벼슬 이름을 따서 사인암이라 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인 김홍도(金弘道)도 이곳을 다녀가 멋지게 그림으로 남겼고, 많은 시인묵
객들이 찾아와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이곳의 절경을 즐겼다.

사인암은 남조천(南造川)을 따라 이어진 운선9곡의 하나로 유리처럼 맑은 남조천의 물이 이곳
을 굽이쳐 흘러 안그래도 절경인 경치에 더욱 윤기를 북돋는다. 사인암 옆에는 고려 때 지어졌
다는 청련암(靑蓮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터를 닦았으며, 사인암 입구에는 1977년 6월 지방 유
림에서 세운 역동우탁기적비(易東禹倬紀績碑)가 서 있다.

예전에는 상선암, 중선암 등에 밀려 좀 한적했으나 서서히 단양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주변에
음식점과 민박, 펜션 등이 많이 생겨났으며, 시골 북하리와 10여 리 거리로 가까워 외가 친척
들도 자주 놀러왔던 곳이다. 시골과도 꽤 가까운 곳이 분명하건만 시골을 자주 찾았던 어렸을
적에는 이상하게도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고 (상선암과 중선암, 하선암도 못가봤음) 다 장성
한 이후에야 겨우 인연이 닿아 이렇게 2번 인연을 지었다.


▲  사인암 앞을 굽이쳐 흐르는 남조천
남한강을 향해 격하게 흐르던 남조천의 물줄기도 이곳만큼은 서행하여
사인암의 절경을 즐긴다.

▲  남조천에 조성된 타원형 모양의 섬
사인암과 조금 떨어진 남조천 한쪽에 흙과 돌로 대(臺)을 쌓고 역동우탁기적비와
운치가 깊은 소나무3그루를 심었다. 남조천 물줄기 틈에 자리해 있어
사인암 속의 조그만 섬을 이루고 있다.

▲  역동우탁기적비 주변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사인암

▲  남조천에 사뿐히 걸린 구름다리

▲  우탁의 시를 머금은 커다란 표석

▶ 춘산에 눈 녹인 바람 ◀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 밋태 해묵은 셔리랄 녹여볼가 하노라

☞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봄 바람을 이용해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은 우탁 할배의 부질없는 꿈을 담은 시,
나이를 먹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래서 노인들이 좋아하는 폭포가
'미대륙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라고??)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사인암
그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사인암의 모습도 조금씩 달리 보인다.

▲  바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사인암의 위엄

예전 사인암을 찾았을 때(친척들과 같이 갔음)는 정작 사인암 건너편은 가지 않았다. 그 건너
편에서 바로 정면으로 그를 대하니 정말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이 느껴진다. 마치 바둑
판을 하늘로 향해 곧게 세운 듯한 모습, 절벽 꼭대기에 소나무들이 운치를 뽐내며 절벽의 우산
이 되어주는 모습 등 그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선보이며 1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흉내내지 못할 것이다.


▲  사인암 건너편에서 바라본 청련암


 

♠  사인암에 안긴 조그만 절집, 보기와 달리 깊은 역사를 지닌
청련암(靑蓮庵)


▲  사립문이 활짝 열린 청련암

사인암 옆구리에는 청련암이란 조그만 절집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런 곳에 왠 절이 있나? 싶
을 정도로 좀 쌩뚱맞기도 한데 얼핏보면 근래 지어진 절로 생각하기 쉬우나 현실은 제법 오래
된 절이다.

청련암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말사(末寺)로 1373년(공민왕 22년)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허나 신빙성은 그리 없어 보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710년에 중창하
여 청련암이라 했다고 한다.
원래는 여기서 가까운 대강면 황정리 산28번지에 있었는데, 그 부근에 있었다는 대흥사(大興寺
)의 말사로 있었다. 허나 그 대흥사는 19세기 후반 의병(義兵)과 왜군과의 싸움에서 파괴되었
고, 1954년 소백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황정리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자 청련암도 부
득이 방을 빼야 되서 절의 대들보와 기둥을 들고 사인암 옆에 새롭게 터를 닦았다.

청련암은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암자로 법당인 극락전과 옛 법당, 삼성각, 요
사 등이 전부이다. 2013년 4월 새 극락전을 만들어 법당으로 삼았으며, 옛날의 유물로는 18세
기에 조성된 목조보살좌상이 있다.
사인암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있어 사인암에 온 사람들은 무조건 절에 발을 들이기 마
련이다. 절을 거쳐야만 사인암의 뒷통수로 올라갈 수 있으며, 사인암과 청련암이 완전히 한 덩
어리가 되어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사인암 방문객이 늘면 자연히 절을 찾는 발길도 정비례할
수 밖에 없으니 정말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당시 주지승의 혜안이 참 놀라울 따름!) 사인암
이 건재하는 동안은 청련암은 결코 법등(法燈)이 마를 날이 없을 테니 말이다.


▲  청련암 경내와 사인암의 옆구리

▲  청련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옛 법당 직전에 극락보전이 산듯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2013년 4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
로 경내 제일의 보물인 목조보살좌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건물 내부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
쳐버려 목조보살좌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냥 옛 법당에 계속 있는 줄 알았음


▲  예전에 담은 청련암 목조보살좌상(木彫菩薩坐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09호

청련암 목조보살좌상은 원래 청련암 법당에 봉안되었던 아미타3존불의 구성원인 대세지보살상
(大勢至菩薩像)이다. 1954년 이곳으로 절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만 본존불(本尊佛)을 잃어버렸
으며,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은 엉뚱하게 제천 원각사로 넘어가고 대세지보살상만 간신히 수
습하여 가져왔다. 그래서 협시불이 본존불로 출세하여 불단 중앙에 홀로 봉안된 것이다. 또한
그의 뱃속에서는 여러 복장(腹臟)유물이 나왔으나 근래 도난당하고 말았다.
불상에 입혀진 도금을 벗기고 새로 개금(改金)을 했을 때 목불(木佛)의 형태를 확인했으며 은
행나무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청련암의 옛 유물로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충청도 지역 불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보살상의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 동자가 관음보살의 탈을 쓰고 대신 앉아있는 것 같다. 동자와
같은 귀여움과 해맑은 미소가 진하게 드리워진 그의 표정은 너무 밝아 보는 이의 눈을 눈부시
게 하니 사인암과 청련암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의 표정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냥 돌아갈 것이다.


▲  석불좌상과 옛 법당

극락전으로 쓰인 옛 법당은 법당의 품격과는 좀 거리가 있는 여염집 모습으로 새로운 극락보전
이 지어지자 법당에서 물러나 평범한 신세가 되었다. 현재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목조
보살좌상은 새 극락보전으로 옮겨 청련암 중심 불상의 업무를 계속 수행한다. (이들 불상의 위
치는 절의 사정상 바뀔 수도 있음)
옛 법당 앞에는 조그만 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는데, 원래 새 극락보전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옛 법당에 봉안된 석가3존불

▲  옛 법당에서 바라본 청련암 경내


▲  물이 넘치는 연꽃무늬 석조(石槽)
사인암이 중생들에게 베푼 소중한 옥계수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  우탁의 탄로가(嘆老歌)를 머금은 표석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은 늙음을 탄식하는 시를 여럿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탄로가이다. 아무리 발버
둥을 치며 피부와 건강에 힘써도 세월은 자꾸만 흐르고 자신도 강제로 늙어만 가니 정말 무서
운 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30대의 끝 무렵을 달리고 있지만 탄로가의 시 앞에 무책임하게 나이나 처묵처묵하고 있는
내 모습에 정말 열불이 난다. 물론 나이는 강제로 먹는 것이니 거절을 해도 소용은 없다. 아직
까지는 젊다고 자부를 하지만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신선 세계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몇십~몇백년이라고 하는데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 같다.


▲  탄로가 표석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구름다리
단양은 소백산맥에 묻힌 산골이라 봄과 여름은 늦게 오고 겨울은 일찍 온다.
날은 조금씩 따스함이 더해지고 있으나 비록 힘은 잃었지만 아직까지는
겨울 제국의 세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어 아직까지 제국의 눈치를 본다.
허나 곧 소쩍새가 울 때면 지긋지긋한 겨울을 완전히 떨쳐내며
다들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인암의 뒷통수로 오르는 계단길

어떻게 경사도 꽤 각박한 사인암 뒷통수에 감히 건물을 올릴 생각을 했을까? 청련암 주지승의
기발한 생각<사인암 입장에서는 좀 고달프겠지만>으로 궁색한 자리를 극복하여 좁게나마 터를
다지고 삼성각을 지어 속세를 향해 계단을 늘어뜨렸다. 이로 인해 사인암이 삼성각을 업고 있
는 모습이 되었다.
삼성각으로 인도하는 계단은 보기와 달리 상당히 거칠고 고르지가 못해 오르락내리락 할 때 주
의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삼성각 뒤쪽을 통해 사인암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으나 사인암의 건
강과 안전 문제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애써 오르지 않도록 하며 사인암에 왔다면 삼성각에
꼭 올라가보도록 하자. 이곳을 지나쳤다면 사인암의 거의 절반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  사인암 뒤쪽 바위 틈에 둥지를 튼 푸른 머리의 삼성각(三聖閣)
이 건물은 예전 칠성각(七星閣)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과 석가불

▲  삼성각 독성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우측 바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바위글씨 '퇴장(退藏)'

사인암의 명성이 멀리 우주 밖까지 전해진 것일까? 너무 유별나게 휘갈겨진 글씨가 바위 피부
에 새겨져 있어 그 정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나 그는 외계인의 글씨가 아닌 한
자의 일종인 전서체(篆書體)로 쓰인 '退藏(퇴장, 스스로 물러나 숨는다)'이란 글씨로 조선 전
기에 판교종사<判敎宗師, 불교 교종(敎宗)의 우두머리>를 지낸 운수의 낙관으로 추정될 뿐 확
실한 것은 없다.


▲  삼성각 맞은편 낭떠러지 위에 중생들이 쌓아올린 조그만 돌탑들이
그들의 소망을 머금으며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이룬다. 이곳은
막다른 바위로 바로 밑이 벼랑이니 조심하기 바란다.


▲  삼성각 북쪽 벼랑

▲  삼성각에서 바라본 계단 밑부분과 청련암

이렇게 1시간 동안 사인암과 청련암 세트를 둘러보고 정든 단양 땅에서 퇴장하여 경북 문경 땅
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예천 명봉사(鳴鳳寺)에 가려고 했으나 전날부터 여러 곳의 절을 들린
상태라 후배는 다른 데로 가자고 정색을 한다. (절을 좋아하는 후배임)
그래서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천하의 마지막 주막으로 명성이 높은 예천 삼강주막(三江酒幕)
을 둘러보고 속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여러 폭포를 탐방하기로 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흔쾌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 단양 사인암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① 단양까지
* 동서울터미널에서 단양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에서 단양행 열차가 1일 8~9회 떠난다. (양평, 원주 경유)
* 안산, 원주, 청주, 영주, 안동, 대구(북부)에서 단양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 부전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대전역, 오송역, 청주역에서 영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 교통

* 단양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부근 고수대교 종점, 단양역 입구(단양역3거리 북쪽)에서 사인암
  방면 군내버스 이용 (1일 14회 운행, 대강 경유)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장림4거리에서 좌회전 → 사인암(청련암)


* 사인암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산27 (청련암 ☎ 043-422-1330)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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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40리를 거닐다 (죽성리 월전, 대변항, 죽도, 오랑대, 해동용궁사)



'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죽성리 월전에서

대변을 거쳐 해동용궁사까지) '

▲  연화리 앞바다 (멀리 보이는 곳은 대변항)


 

  월전에서 대변까지

▲  남쪽에서 바라본 월전포구

기장읍 동쪽 죽성리(竹城里)에서 시작된 우리의 기장 동해바다 봄나들이는 죽성리 일대의 명소
<죽성리해송(海松), 죽성리왜성(倭城), 황학대(黃鶴臺), 죽성성당>를 두루 둘러보고 월전을 거
쳐 대변으로 향했다. <기장 죽성리 부분은 ☞ 이곳을 흔쾌히 클릭
>

월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대중교통은 하나도 없으며, 1.5~2차
선 정도의 길(기장해안로)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펼쳐진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
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여럿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별장처
럼 생긴 집들이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대변이나 월전으로 외식을 하러 가거나 드라이
브를 나온 차량들이 수시로 매연을 뿜고 지나갔고, 대변~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
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가 있는 곳과 몇몇 장소를 빼고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  가지각색의 기암들이 율동을 부리는 월전 남쪽 바닷가

▲  바다와 자갈과의 속삭임
물이 얼마나 푸르던지 4월 중순이란 시간을 잊고 풍덩풍덩 들어가고 싶다.

▲  바닷가에서 만난 튤립(Tulip)의 위엄
아주 잘익은 빨간 튤립 6송이와 노란 튤립 2송이가 바다 바람을 따라 경쾌하고도
귀엽게 봄의 율동을 선보인다.

▲  월전과 대변 사이의 바닷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설마 저기서 석유를 시추하는 것은 아니겠지?

▲  잠시 우리가 왔던 북쪽(죽성, 월전)을 돌이켜보다.

▲  대자연의 물감이 빚어낸 동대해

아무리 천재화가라 한들 대자연 형님이 빚은 작품 앞에서는 그저 한줄기 낙서에 불과하다. 아
무리 용을 써서 흉내를 내어 본들 저런 빛깔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색깔만 하리요. 그만큼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럼에도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거나 섬기지는 못할 망정 계속 괴롭히고 정복하려고만 드니 자연
의 인내력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지 의문이다. 그의 인내가 폭발하면 결국 서로가 좋지 못할
텐데 말이다.


▲  대변 북쪽 바닷가
이 부근에 영화 '친구'를 찍은 바닷가가 있다.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
수영하고 놀던 그 현장 말이다.

▲  대변 동쪽 방파제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대변항이 끝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대변항(大邊港) 둘러보기

▲  대변항의 심장부에 들어서다, 대변항 어시장

월전에서 3km를 가니 나올 것 같지 않던 대변이 방파제를 시작으로 서서히 속살을 보이기 시작
한다. 바다를 따라가면서 수다도 떨고 이리저리 사진도 찍고 바다에 무심히 돌도 던지며 가다
보니 그 거리가 썩 지루하지 않았던 것이다.


▲  대변항 앞바다
방파제가 남,북으로 길게 방패처럼 둘러져 있고 동쪽에는 죽도가 떠있어
파도와 태풍에도 거의 끄떡없는 안전한 항구의 요건을 갖추었다.


이름도 좀 거시기한 대변리(大邊里)에 뉘어있는 대변항은 기장군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기장을
포함한 부산을 대표하는 어촌(漁村)으로 천하에 제법 알려진 곳이다. 기장의 명물인 미역과 멸
치회로 유명하며, 매년 4월에는 기장 멸치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대변항은 거의 'C'자 모양으로 육지쪽으로 크게 움푹 들어갔는데, 항구의 남북 폭은 300m 정도
이며, 항구 앞에는 죽도란 조그만 섬이 두둥실 떠 있어 자연산 방파제가 되어준다. 하여 일찍
부터 어촌으로써 크게 발전을 누렸으며 방파제까지 2중으로 두르면서 안전한 항구로 그 품격을
높였다.
새벽을 시작하는 도시, 기장 고을에 걸맞게 아침 일찍부터 바다로 조업을 떠나는 배들로 대변
항은 정신이 없으며 동이 트면 어시장도 활기를 누린다. 늦은 시간까지 싱싱하고 물오른 해산
물을 구경하고 먹을 수 있으며, 이곳으로 끌려온 생선과 해산물은 다양한 판매 경로를 통해 서
울을 비롯한 천하로 절찬리에 팔려나간다.
 
대변리 한복판에 있는 대변초교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질없는 쇄국정책의 꿈이 담긴
척화비(斥和碑)가 있는데 학교 바깥에서도 바라보이며, 기장읍내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토암도
자기공원이 있다. 또한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오랑대공원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는 죽성
리와도 이어져 대변항을 중간지 또는 기/종점으로 삼아 해안 산책이나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


※ 대변항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부산 지하철2호선과 동해선 벡스코역(9번 출구)에서 부산시내버스 139, 181번을 타고 대변이
  나 대변항입구 하차
* 부산 지하철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181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 동해선 송정역(1번 출구 건너편)에서 139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
① 부산시내 → 송정3거리 우회전 → 기장해안로 → 대변항 (또는 송정3거리에서 직진하여 연
   화육교 교차로나 청강4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도 됨)
② 부산시내(반송) / 울산 → 기장군청 → 청강4거리 좌회전 → 대변항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  풍어(豊魚)를 꿈꾸며 항구에 몸을 기대 고단한 몸을 쉬는 어선들

▲  대변항 풍경
평화로운 어촌 풍경이 오염된 안구를 조금이나마 정화시켜준다.

▲  바다 너머로 보이는 대변항 북쪽과 붉은 피부의 등대

▲  대자연이 대변 앞바다에 살짝 던져놓은 푸른 점 하나, 죽도(竹島)

앞서 죽성리에 황학대가 있다면 대변리에는 죽도가 있다. 둘 다 섬이긴 하나 황학대는 연륙되
어 버렸고 오직 죽도만 섬으로 남아있는데, 기장 지역의 유일한 섬으로 (조그만 바위섬 제외)
예로부터 기장 제일의 해안 명소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기장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섬의 모습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며 대나무가 많아 죽도란 흔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비
오는 날 밤에 빗방울이 대나무잎을 스치면서 내는 청아한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부여잡으면서
야우(夜雨)의 승경으로 꼽히기도 했다. 또한 시원한 샘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애용했으며, 조
그만 암자가 있었으나 이미 옛날에 사라지고 없다.

예전에는 육지와 200m 정도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락거렸으나 주변 바다를 야금야
금 메우면서 섬의 덩치가 조금 불었다. 그래도 섬의 성격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으나 섬 전체
가 어느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금지된 섬이 되버렸다.
섬 주인은 육지까지 다리를 가설해 섬을 한반도에 단단히 붙들어 두었으나 기왕 다리까지 만든
거 대변항의 상징으로 속세에 개방해 관광지로 꾸미면 어떨까 싶다. 허나 섬 주인은 그럴 생각
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원래부터 기장의 공유 명소였던 죽도를 왜 혼자서만 누리고 있는지 그
저 야속할 따름인데 기장군에서 섬을 매입하거나 섬 주인과 협의하여 시민들의 품으로 흔쾌히
돌려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  대변항 남쪽 앞바다 - 푸른 물감이 잔잔한 여울을 이룬다.

▲  대변항 남쪽에서 바라본 연화리

▲  대변항 앞바다 바위를 점거한 구공(鷗公, 갈매기)들
사람들의 손이 미치기 어려운 조그만 바위섬에 구공들이 들어와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꾸린다. 한때 새우깡의 제왕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입맛이 고급이
되었는지 이제는 별로 거들떠도 안보는 것 같다.

▲  대변항 남쪽 풍경 (녹음이 우거진 중간 부분이 죽도)


 

  연화리에서 오랑대까지

▲  연화리에서 멀리감치 바라본 대변항

▲  물빛이 진한 연화리 앞바다

대변항에서 연화리 앞바다까지는 길이 이어져 있다. 길가에는 해산물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많
이 있는데 4월의 한복판임에도 벌써부터 옷깃을 풀게하는 철모르는 더위와 죽성리부터 걸어온
피곤함으로 잠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며 두 다리를 달래기로 했다.
허나 가게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마침 이쁘게 치장된 까페 하나가 사막 속에 오아시스
처럼 나타나 우리를 손짓한다. 그를 보는 순간 시원한 걸 마시며 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솟
구쳐 별 망설임 없이 그곳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빙수를 먹으려고 했으나 여름에만 판다고
해서(그때 날씨가 거의 여름이었음;;;) 흔한 이름의 커피 종류를 시켰다.

여기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10리 이상 부려온 두 다리의 불만도 잠재우고 이른 더위의 압박
에서 벗어나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린다. 까페는 2층 규모인데, 차를 마시러 온 가족 단
위와 중년층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  연화리 까페에서 마신 커피의 위엄

▲  멀리서 본 오랑대(五郞臺)

까페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바
다 위에 높이 뜬 햇님은 퇴근시간이 점점 늦어짐을 원망하며 햇살의 강도를 점차 줄이면서 퇴
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화리 까페에서 바다를 따라 1km 정도를 가니 머리에 조그만 건물과 탑을 지고 있는 허벌나게
큰 바닷가 바위가 모습을 비춘다. 그가 바로 오랑대이다.


▲  꼬깔모자를 연상시키는 오랑대 (꼭대기에 자리한 건물은 용왕각)

오랑대는 기장의 주요 해안 명소의 하나이다. 조선 어느 때에 이곳으로 유배를 온 사람이 있었
는데, 그의 친구 5명이 머나먼 이곳까지 놀러와 오랑대 바위에서 곡차(穀茶)를 겯드리며 가무(
歌舞)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한다. 그래서 5명의 선비를 뜻하는 뜻에 오랑대란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임)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 광경이 가히 장관으로 주변에는 멋드러진 기암괴석이 많다. 오랑대를
원시적인 모습으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으련만 오랑대 바닷가에 자리한 혜광사(慧光寺)가 그곳
을 접수하여 바위 꼭대기에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용왕각(용왕단)을 달면서 보기가 좀 딱하
게 되었다. 용왕각 지붕에는 괴상하게도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을 올려놓았는데 멀리서 보면 오
랑대 용왕각의 모습이 마치 만화에 나오는 꼬깔모자처럼 보인다.


▲  오랑대 지붕에 자리한 용왕각

▲  용왕각에 봉안된 동해 용왕상

오랑대를 옆구리에 낀 혜광사는 법등(法燈)이 매우 짧은 현대 사찰이다. 오랑대 옆에 터를 다
지고 들어선 바닷가 절집으로 대자연이 빚은 오랑대를 휼륭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린
다.
오랑대 용왕각에는 용왕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좌우에는 앳된 동자(童子)상이 있으며 용왕 뒤
로 유리창을 내어 그의 활동무대인 동대해가 보이게끔 했다. 지붕에는 네 모서리에 용머리를
달아 건물의 품격을 높이려고 애썼으나 시멘트 집이라 썩 정감은 가지 않는다. 절집답게 목조
기와집으로 지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 오랑대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7번 출구)에서 부산시내버스 100, 181번을 타고 혜광사 하차, 혜
  광사 방면으로 도보 7~8분 (100번이 그나마 배차간격이 짧다. 139번과 181번은 거의 20분 간
  격)
* 부산 동해선 송정역(1번 출구 건너편)에서 139번 시내버스를 타고 혜광사 하차.
* 승용차 (혜광사에 주차장 있음)
① 부산시내 → 송정3거리 우회전 → 기장해안로 경유 → 혜광사입구 우회전 → 혜광사
② 부산시내(반송) / 울산 → 기장군청 → 연화육교 교차로 좌회전 → 기장해안로 → 혜광사입
   구 좌회전 → 혜광사

* 오랑대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혜광사 ☎ 051-721-3167)


▲  1칸 규모로 조촐한 용왕각

▲  오랑대 주변 풍경 - 낚시삼매에 빠진 강태공들이 여럿 보인다.

▲  오랑대에서 바라본 대변항

오랑대를 둘러보고 바다를 따라 해동용궁사 방면으로 이동했다. 허나 군부대로 그만 길이 막혀
부득이 혜광사 뒤쪽 산길을 이용해 기장해안로로 탈출했다.

기장해안로 주변은 혜광사입구부터 당사리까지 관광단지와 쇼핑타운를 짓는다면서 산과 들판을 
죄다 밀어버려 폐허의 공간처럼 아주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인근에 오랑대와 해동용궁사, 대
변항, 국립수산과학원, 국립부산과학관 등의 명소를 받쳐주기 위한 관광단지라고 우기고 있으
나 굳이 그런 것이 없어도 이들 명소를 찾는 발길은 여전하다. 고위 위정자 밥버러지들이 그저
개발과 돈, 치적 쌓기에만 급급해 안그래도 좁은 강토를 자꾸 바람직하지 않게 건드리니 실로 
씁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개발의 칼질과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시랑리를 지나니 어느덧 용궁사입구
에 이르렀다. 여기서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다가 이곳
까지 온 거 잠깐 들리기로 했다.
용궁사는 2000년과 2014년에 가본 기억이 있는데, 오랜만에 발을 들인 바닷가 사찰, 용궁사는
관람객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경내 곳곳에 불전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돈을 요구하고
있고 바닷가든 대웅전(大雄殿) 앞이든 사람들이 징그럽게 많아서 거의 사람들 뒷통수만 본 것
같다. 이곳은 딱히 정도 들지 않고 사진에 담고 싶은 생각도 없어 대충 1바퀴 살피고 나왔다.

용궁사를 나오니 시간은 18시, 송정까지 마저 행군할까 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걷는 것은 여기
서 쿨하게 접고 부산시내버스 181번(기장 청강리↔센텀시티)에 고된 몸을 싣고 시내로 나왔다.

이날 죽성리에서 용궁사까지 걸은 거리는 거의 40리 정도, 우스개 소리로 거의 몇 달 걸을 분
량을 그날 하루에 다 걸었고, 바다도 정말 지겹게 두 눈에 넣어서 당분간 바다를 안봐도 섭섭
하지 않을 듯 싶다.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판을 벌인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는 재생이 불가능한 아련한 과거의
일부로 산산히 흩어지고 말았다. 역시나 사람의 인생은 무상(無常)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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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7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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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서달산, 현충원 숲길)

 


' 6월 맞이 산사 나들이,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지장사) '

▲  호국지장사 지장전(지장보살입상)


 

국립서울현충원은 호국영령들이 잠든 이 땅의 영원한 성역(聖域)이다. 그러다보니 재미
없고 딱딱하며 어려운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창시
절 소풍이나 백일장으로 가본 것이 고작인 사람이 적지 않으며 그곳으로 나들이를 가자
고 하면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도 많다. 아무래도 나들이나 산책 등으
로 가기에는 왠지 실례가 될 것 같은 무겁고 조심스러운 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
산(백악산), 남산과 더불어 서울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듬직한 허파로 숲이 울창해 다
양한 동식물이 의지하고 있다. (현충원 외곽으로 숲이 짙게 둘러져 있음~) 게다가 현충
원 산책로는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이며, 창빈안씨(昌嬪安氏
)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등의 문화유산, 호국지장사 같은 오래
된 절까지 품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풍부하다.
현충원은 분명 3척동자도 다 아는 그런 곳이지만 그곳의 매력과 속살을 제대로 알고 즐
기는 사람은 적은 것이다. 그러니 너무 딱딱한 쪽으로 현충원을 대하지 말고 숨겨진 매
력까지 모두 살피기 바란다. <매년 4월에는 현충원의 백미인 수양벚꽃축제가 열림>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冠岳山)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
에는 지명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銅雀洞 國立墓地)'라 했으나 2006년에 '국립서울현
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이른바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으로 통
하기도 한다. 즉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
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고 있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
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
러 내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으로 명당 중의 명당으
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깊은 곳에 호국의 신을 모셨으니 그들의 후손들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자격 미달의 작자들도 여럿 섞여있어서 그럴까? 아직까진 그 효과
가 시원치 못하다. <친일파들의 무덤은 꼭 뽑아버려야 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에 걸린 6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14시, 동작역(4,9호선)에서 일행
들을 만나 현충원으로 향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장사 등 현
충원에 깃든 오래된 명소를 둘러보고 서달산 동작대(銅雀臺)로 넘어갔는데 여기서는 현
충원 뒤쪽에 자리한 호국지장사(화장사)만 다루도록 하겠으며,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호국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라 불리는 오래된 절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에 묻힌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
임을 깨닫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에 도
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서로 시기가 안맞음~)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
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자리인지라 그곳에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우기고 있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
에서 작성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다~'
내용이 있어 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
기도 하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藏庵)이
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다. 이곳의 조선 초기 이전의 역사를 속시원히 밝혀줄
역사 기록과 유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쓸데없이 말만 무성한 것이다.

절의 내력이 그나마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때 창
빈안씨묘역이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宣祖)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
릉(銅雀陵)으로 높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
寺)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
으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에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상
을 개금하고 구품탱과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 칠성각을 새로 지
었다.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감로탱, 신
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고, 1920년에 대방을
수리했으며 1936년에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그곳에 안장된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그래서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
보살의 원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화장사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
장사'라고도 함>로 이름을 갈았다. 그야말로 현충원과 호국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에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심우당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능인보전
은 서북향) 경내 남쪽에는 약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
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성
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좌상
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다는 신라 후기 3층석탑
이 1기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
하고 있으며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
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지만 현충원과 한강, 한강 너머 지역(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
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
가 국립묘지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
이다. (그의 무덤은 창빈안씨묘역 북쪽에 있음)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없을 것이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
약 현충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8번 출구에서 현충원 정문을 거쳐 도보 20~25분
* 국립현충원(동작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350번, 360번, 362번, 462번, 640번, 752번, 5524
  번, 6411번, 9408번(광역)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관람정보 (2017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국립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 ☎ 1577-9090, 02-813-9625)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호국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다. 그 길을 오르면 커다란 아름
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
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오래된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
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에 아무리 천
근만근 무겁다는 번뇌도 줄행랑을 치고 만다. 허나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서 우두커니 기다
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나 성불(成佛)은 그저 먼 세상의 이야기 같다.


▲  지장사 약수터와 그곳을 지키는 약왕보살(藥王菩薩)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조그만 연못과 산사의 필수 요소인 약수터가 나온다. 약합을 쥐어
든 약왕보살이 엷은 미소를 보이고 있고 그의 앞에는 약수와 샘터 관리비 좀 보태라며 돈통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기분을 약간 깨게 한다. 하지만 물은 무료이니 마음껏 누려도 된다.

이곳은 물을 뜨는 수요가 많아 아침과 휴일에는 상도동, 사당동 사람들이 몰려와 물을 담아가
며 가뭄에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호국신과 대자연의 가호가 깃들여진 모양
이다. <현재 약수터는 남쪽으로 50m 정도 옮겨졌으며, 기존 자리에는 동그란 석조와 아기부처
상이 세워짐>

▲  신이 난듯한 우측 사천왕상(四天王像)

▲  열이 난듯한 좌측 사천왕상

약수터를 지나면 좌우로 돌로 만든 4천왕상이 나온다. 그들의 거처인 천왕문을 따로 두지 않고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에 석상(石像)으로 둔 것으로 비파와 칼을 든 우측 천왕들은 비파 연주에
흥이 난 표정이고, 좌측 천왕들은 악귀(惡鬼)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열불이
난 표정 같다.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사천왕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지장사 경내가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단촐한 모습
의 능인보전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철불좌상과 약사후불탱,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
리를 메우고 있어 꼭 둘러봐야 되는 건물이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佛壇)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경내에서 3층석
탑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철불(鐵佛)은 이름 그대로 철로 다진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
려 초에 많이 나타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
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조금이나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느 어부의 꿈에 이 불상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가 그물을 치니 녹
슨 채로 버려진 불상이 걸려들었다. 그래서 그를 수습하여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집에 모셨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데, 불상이 좀 심성이 삐딱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
부터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또한 어부가 강이나 바다에서 불상을 발견하여 절을
만들거나 절에 기증했다는 전설이 많은데 이는 불상을 옮기던 배가 가라앉거나 취급 부주의나
재해로 강에 떨어지거나 떠내려온 불상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향을 잃어버린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진
하고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그의 전체적
인 표정은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매우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
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조성된 몇 안되는 철불약사불로 그 당시 약사불 신앙에 중요한 자
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
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각자의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고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철불좌상 주변을 가득 메운 원불의 금빛 물결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앞에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린 것
이다. 그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
중탱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
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능인보전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능인보전 우측 벽에 걸린 아미타불도는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1870년 원명긍우(圓明肯祐), 경
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 식구
들을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
길을 끌며 옷의 묘사가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
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  호국범종이 봉안된 범종각(梵鍾閣)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안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는데, 현충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호국범종이라 불린다.


▲  하얀 피부의 승탑(僧塔, 부도)과 검은 피부의 비석들

능인보전과 범종각 뒷쪽에는 때깔이 고운 승탑 2기와 비석 여러 기가 숨겨져 있다. 이중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승탑은 부처의 사리가 담겨진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고양시 대자동 봉
덕사(奉德寺)에 있었다. 그는 1983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으로 옮겨진 이유에 대해선 딱히 알
려진 것은 없다.
그리고 승탑 앞에는 사리를 봉안한 기념으로 세운 봉안비(奉安碑)와 봉안공덕비(功德碑)가 있
는데 모두 봉덕사에서 넘어온 것이다.

그 우측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 4기는 1938년부터 1949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크게 시주를
한 이들을 기리고자 세운 기념비이다.


 

♠  조그만 불교미술관 호국지장사 대웅전(大雄殿)

▲  지장사 대웅전

지장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크다. 상당히 너른 대웅전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조선 후
기에 그려진 불화들이 내부를 가득 수식하여 그야말로 조그만 불화박물관을 이룬다,
그리고 건물 앞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연등은 위정자들이 현충일을 맞이해 생색내기로 단 것으
로 그들의 부질없는 욕심이 담겼는지 일반 백성들의 연등보다 배 이상이나 크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3층석탑

대웅전 옆에 있는 3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앞뜰에 있었다. 그는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
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하는데,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
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한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장사에서 가져와
보수를 했으며 지금은 대웅전 옆구리에 두었다.

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거의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상륜부(相輪部)와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
여 오래된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범종각 옆으로 옮겨졌으며 그 자리에는 물을 머금은 동그란 석조가 들어섰음>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불과 목각후불탱

▲  대웅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외 3명의 화승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
분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하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에서 19세
기 후반의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대웅전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만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내용은 잘
모르겠다.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후반 불화양식을 반영한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스카웃된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조금의 여백
도 없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림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白眉)
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깔이 퇴색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지장시왕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렸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
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
다. 원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한 광배, 도식(圖式)적
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
으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어 있다.


▲  능인보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주변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종무소(宗務所), 오른쪽이 심우당>

▲  대웅전 옆구리에 지어진 새 요사

대웅전과 종무소 뒤쪽에는 청심당 등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으로 쓰이는 건물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대웅전 바로 옆구리에 자리한 건물(윗 사진)은 2010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곳은
원래 공터였다.
건물의 모습이 기와집이 아닌 요즘 시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택 모습이라 다소 이색적인데,
그 옆에는 2016년에 새로 지어진 'ㄷ'자 모습의 청심당이 있다.

요사(寮舍)나 선방(禪房)은 공양간이나 교육이나 법회, 접대용으로 쓰이는 공간을 제외하면 절
의 사사로운 공간이라 거의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잘 들어가지는 않는 편인데, 예전
대웅전에 있었다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를 반드시 잡아 술래잡기를 끝내고 싶은 집념이 활활 불
타오르면서 요사 주변을 기웃거렸다. 요사에 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종무소 옆에 있는 공양간을 먼저 살폈는데 마침 문이 열러 있어서 그 사이로 시선
을 넣었으나 그림 같은 건 없었다, 하여 대웅전 옆에 있는 건물로 가서 창문 안으로 시선을 쓱
넣으니 글쎄 오래된 그림 2개가 나란히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확인해보니 극락9품도와 현왕도
였다. (지금은 다른 건물로 옮겨짐)
그들을 발견하고 마음 속으로 쾌재를 외쳤으나 주변에 아줌마 신도들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는 못했고, 그렇다고 대놓고 사진에 담기도 그래서 창문을 살짝 열고 새가슴처럼 대충 사진에
담았다. 물론 신도와 승려에게 허가를 받고 마음 편히 사진에 담는 것이 좋겠지만 생활공간인
요사이다보니 협조를 안해줄 듯 싶었다.


▲  요사 안에 담긴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왼쪽 그림)와
현왕도(現王圖, 오른쪽 그림)


극락9품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 산선관(散線觀)
인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錦湖
若效)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念佛庵)의 극락구품도
와 함께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
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옆에 있는 현왕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9호로 1893년에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렸다. 현
왕이란 염라대왕을 일컫는 것으로 죽어서 3일만에 그에게 심판을 받은 장면을 담았다. 화면은
둥근 구조 안에 그의 심판 장면을 그렸는데, 현왕의 우람한 체구와 세밀한 얼굴묘사에서 비교
적 예스러운 양식이 나타난다. 얼굴과 옷주름을 획일적으로 묘사했고 꽃무늬와 구름을 단색으
로 처리해 19세기 후반 불화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구품도와 현왕도를 찾아냄으로써 그들과의 부질없는 숨바꼭질은 끝이 났으며 이곳에 있는
지정문화재는 괘불도를 빼고 모두 인연을 짓게 되었다. 괘불이야 평상시에는 친견이 불가능한
아주 비싼 존재이니 석가탄신일이 아닌 이상은 아예 체념한 상태이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극락전, 삼성각, 지장전)

▲  지장보살입상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화

▲  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불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
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끈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
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
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석가불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폭의 좌우
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한 색채 등
은 20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반영하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존재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는 바
로 뒤에 있는 독성도의 독성 머리 때문에 머리에 큰 혹이 난 것처럼 보인다.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
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
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랑살랑거
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산신 옆에 서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를 보는
듯 단란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가 제작했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
무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이
던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
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지장사의 명물,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입상)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명물은 경내 뒤쪽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
좌(예전에는 2,500좌를 칭했음)에 달하는 조그만 석조지장보살의 장대한 물결이 아닐까 싶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꽤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지만 노천 법당으
로 석불이나 마애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
성각, 대웅전에 서린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에 잠든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
록 기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길쭉한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바라보는 지장보살의 뒷
통수에는 동그란 모양의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어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만
들어 가히 장관을 이룬다.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자리한 늘씬한 5층석탑들

지장보살 좌우에는 홀쭉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자리해 있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
닌 이들은 오래된 때가 조금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거의 걸려들지를 않
아서 꽤 애를 태우게 한다. 탑의 형식을 봤을 때는 왜정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지장보살상(지장전)

지장전을 장엄하게 꾸민 정성이 부디 명부(冥府, 저승)를 감동시켜 이곳에 깃든 호국신들이 하
나의 낙오자도 없이<단 친일파와 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없는 작자들은 싹 무관지옥이나 떨어져
라~!> 극락왕생하길 기원하며 간만에 벌인 호국지장사 나들이를 마무리 짓는다. (그 외의 장소
는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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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6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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