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찰'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5.05.26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2. 2015.03.16 서울 도심의 이색 명소 ~ 인왕산과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3. 2015.01.10 이 땅의 유일한 오래된 쌍미륵불,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용암사)
  4. 2014.05.06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 연등축제 (조계사, 청계천 연등거리, 광통교)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 서울 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나들이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서울연등회 연등 ▲

 


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은 계절의 여왕으로 일컬어진다. 꽃샘추위란 이름으로 4월까지 천하를
어지럽히던 겨울 제국의 잔여 세력이 봄에게 완전히 소탕되면서 세상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다. 이때가 되면 전국에서 많은 축제가 산발적으로 열려 나들이객을 참 바쁘게도 만드는데 그
중에는 서울연등회도 있다.

서울연등회(서울연등축제)는 봄 축제의 백미(白眉)이자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
일의 축제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주말에 열리는데 토요일에는 축제
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이 장충동 동국대에서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종로1가)
까지 장엄하게 펼쳐지며, 일요일에는 우정국로를 중심으로 전통문화마당과 연등놀이가 열린다.
그래서 후배 여인네와 일요일 전통문화마당을 구경하러 나갔다. 이런 좋은 축제는 꼭 봐야 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일요일 전통문화마당 일부와 조계사 주변에 전시된 연등,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조계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북쪽 시작점(안국동로터리)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은 조계사와 우정국로(종각역~안국동로터리) 일대에서 열린다. 우정
국로는 4발 수레들로 늘 번잡한 곳이지만 연등축제만큼은 도로를 통제하여 콧대 높은 수레들의
바퀴를 막는다. 그래서 도심 속 대로를 4발 수레의 눈치 없이 두 다리로 마음껏 거닐 수 있는 1
년에 몇 안되는 날이다.
서울연등축제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 1주 전 주말에 열린다. 주말 전날인 금요일에 조계사
와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통교 구간)에서 전통등 전시회가 그 서막으로 열리
며, 보통 초파일 다음날까지 불을 밝힌다.

축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동국대(東國大) 대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열
린다. 이 마당은 연등행렬의 사전 행사로 관불의식과 법회,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열리며, 18시
부터 연등회의 갑(甲)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동국대 대운동
장을 출발하여 동대입구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4거리 직전까지 이
어지는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커다란 연등(장엄등) 상당수가 등장하면서 연등행렬의 분위
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행렬 진행시간은 3시간 정도로 조계사를 비롯해 서울의 상당수 사찰과 경기도와 지방의 일부 사
찰, 불교 종파와 단체/학교에서 보낸 사람들과 온갖 연등(燃燈)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
보이는 등은 5~10만 개에 이른다고 하니 (2015년은 5만 개) 가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 있어 전혀 식상하지 않다. 게다가
행진 중에 사물놀이와 가벼운 춤 공연, 율동 등이 끊임없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다.

햇님이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빼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어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 시간에는 동대입구역에서 동대문, 동대문에
서 광화문4거리까지 도로를 통제한다.

연등행렬이 광화문4거리와 종로1가 사이에 다 모이면 보통 21시부터 회향(廻向)한마당이 펼쳐진
다. 종각역~광화문4거리 구간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큰 법회와 전통 공연이 펼쳐지며, 거리를
행진한 장엄등(연등)은 이들 구간에서 모두 걸음을 멈추어 사람들의 사진 모델이 되느라 분주하
다. 특히 몇몇 장엄등은 몸을 움직이거나 불, 연기를 쏘는 것도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렇게 회향한마당은 23시경에 막을 내리고, 장엄등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 둔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우
정국로 전체가 온통 축제의 장이 되는데, 불교와 관련된 온갖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
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민속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한쪽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떡이나 파전, 비빔밥, 식혜 등을 사먹으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 체험, 사찰/전통 음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도 많이 만
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전통문화마당은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며 19시쯤 되면 연등놀이의
몸풀기 행사인 연등행렬을 벌인다. 조계사 등 몇몇 절과 불교 단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개량 한
복이나 공연에서 입는 고운 빛깔의 옷을 차려 입고 형형색색의 연등을 들며 커다란 장엄등을 이
끌고 거리를 행진하는데,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과 종로2가, 종각역을 거쳐 조계사 인근 연등
놀이 행사장까지 돈다. 행진 중간에 사물놀이와 조촐한 춤 공연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천천히 이
동한다. (1시간 정도 걸림)
연등놀이 행사장에 이르면 연등회의 마지막 행사인 연등놀이 공연이 펼쳐진다. 앞서 연등행렬에
참여한 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공연부터 현대식 공연까지 다채로운 공
연이 흥겹게 펼쳐지며, 공연 마지막에는 보통 강강술래를 하는데, 공연자와 관람객이 한데 어우
러져 신명나게 몸을 흔든다. 이때 허공에서는 꽃비(분홍색 전통 종이)를 뿌려 흥겨운 분위기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이 공연은 21시대에 끝나며, 이것을 끝으로 이틀 동안 펼쳐진 연등회는 아쉽지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때는 마음이 뻥뚫린 듯 얼마나 허전하던지, 지나간 시간이 원망스럽다.

이렇게 서울연등회는 단순히 불교 축제가 아닌 좁게는 서울, 넓게는 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울리는 대축제로 천하 제일의 축제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다.


▲  우정국로 북부에 자리한 연등/연꽃장식 만들기 체험공간
이곳은 주로 외국 관광객들 위주로 진행된다. (물론 유료임, 돈좀 쓰고 가라는 뜻)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그렇다면 이 연등회는 언제부터 열리
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에서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세를 탄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중/후기에 이미 연등을 밝혔음을 보여준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열어 만백성이 즐겼고, 등을 며칠 동안 밝히면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석가탄신일이 연관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석가탄신
일에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
를 연 것이 그 최초 기록이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
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조정의 불교 탄압으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
속 연등회를 즐겼다. 저녁에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
등은 한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은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각가지 연등을 만들어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시작이 되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96년부터 동대문운동
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후 동국대에서 출발하여 지금에
이른다.


▲  도심 속 대로(大路)에서 펼쳐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배가 볼록 나온 아기부처가 빨간 일산(日傘) 밑에서 중생들의 시원한 하례를 받는다.

▲  멀리 해동(海東)까지 놀러온 태국 불상

5월(어쩔 때는 4월 말)만 되면 나도 모르게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연등회, 그 연등회의 전통문
화마당에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 문화도 만날 수 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몽골, 네팔, 부탄, 베트남,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이 서울연등회의 명성에 앞다투어 찾아와
공간을 하나씩 받아 그들의 불교 문화를 열심히 홍보한다. 이국적인 불상과 불교 용품은 물론
문화 체험과 다과 시식까지 가능하다.


▲  금박을 붙여서 만든 태국 불상의 위엄 ~~!
보시함에 돈이 참 수북하다. 저건 돌아갈 비행기 여비인가..?

▲  진지한 분위기의 도자기 만들기 체험장

▲  북청(北靑)사자놀음 - 중요무형문화재 15호

우정국로 공연장에는 온갖 전통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단연 인기가 높은 것은 북청
사자놀음(북청사자놀이)이 아닐까 싶다. (그외에 남사당놀이도 있음) 서울연등축제에 매년 등장
하는 단골로 우리 땅임에도 전혀 들어갈 방법이 없는 함경남도 북청의 오랜 민속 놀이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놀이와 가면놀이의 일종으로 대륙계와 북방계의 사자춤이 민속화된 대표적
인 예이다. 함경남도에는 많은 사자놀이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이 북
청이다.
북청의 주요 사자놀이패로 북청읍의 사자계(獅子契), 가회면의 학계(學契), 구 양천면의 영락계
(英樂契),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이가 유명했으며, 특히 북청읍 사자는 댓벌 사자라 하여 이촌
/중촌/넘은개/동문밖/후평/북리/당포 사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마을마다 사자의 모습을 달리
해서 놀았다. 그리고 북청 관내에 사자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며 경쟁하면서 사자놀이 패들이 많
이 통폐합되었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 14일에 여러 마을에서 장정들의 편싸움으로 그 막을 올리는데, 대보름달이
만연하게 뜬 뒤에 사자놀음이 펼쳐져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6일 이후에는 초청받은 집을
순회하며 노는데, 마당에 들어가 춤을 추면 사자가 마당을 거쳐 안방문을 열고 큰 입을 벌려 무
언가를 잡아먹는 시늉을 한다. 이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며, 그 다음에 부엌으로 들어가 같
은 행동을 취하고 마당으로 나와 춤을 춘다.
이때 집 주인의 요청이 있으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竈王)과 시렁 앞에 엎드려 그들에게 절을 한
다. 또한 아이를 사자 등에 태우면 오래 산다고 하며, 몰래 사자 털을 뽑아두면 장수한다고 하
여 사자 털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장수를 빌면서 오색포편(五色布片)을 사자 몸에 매어주
기도 했다.

서울에서 한참이나 먼 북청의 사자놀이가 서울로 온 것은 해방 이후이다. 북한의 핍박을 피하고
자 내려온 사자놀이 기능보유자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놀이를 퍼뜨렸는데, 객지라 그런지 고향처
럼 하기에는 좀 힘들고 해서 내용이 좀 달라졌다.
우선 퉁소와 북으로 반주를 하며 애원성춤을 추고, 마당돌이로 하인 꼭쇠(꺾쇠)가 양반을 데리
고 나와 그를 조금씩 야골리면서 마당을 진행한다. 양반이 심심하다고 하니 꼭쇠가 악사(樂士)
, 무동(舞童), 꼽새 등을 불러 한데 판을 벌인 다음 끝에 비로소 사자를 소환한다.

사자는 짐승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용맹하고 무서운 동물이 분명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웃음을 머
금게 하는 귀엽고 해학적인 사자탈과 털이 달린 가죽을 뒤집어 쓰며 어슬렁 나타난다. 보통 2명
이 1마리의 사자를 이루는데. 많을 경우에는 3인 1조가 되기도 한다. 사자는 상좌승(上座僧)과
계속 춤을 추며, 다양한 재주를 부리다가 잠시 쓰러진다. 이에 양반은 상좌승을 불러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외우게 하지만 사자는 꿈쩍도 안한다. 그래서 의원을 소환해 침을 놓으니 그때서
야 일어난다. 이때 꼭쇠가 토끼(예전에는 아이였다고 함)를 먹이니 사자는 먹는 시늉을 하며 굿
거리장단에 맞춰 극을 이끈다.
이에 양반은 기뻐서 사자 1마리를 더 소환하고 사자춤과 상좌승의 승무(僧舞)가 한데 어울린 다
음, 사자가 퇴장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신고산타령' 등을 부르면서 군무를 추고 끝낸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춤의 묘기와 흥겨움, 그리고 악의 기운을 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기능을
수반한 민속놀이로 그 흔한 양반과 파계승(破戒僧) 풍자는 없다.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1)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2)

공연이 끝나면 사자춤을 춘 사람들은 사자탈과 보기만 해도 찜통같은 가죽을 벗고 본모습을 보
인다. 중장년층으로 생각했지만 그 속에서 나온 이들은 뜻밖에도 앳된 20대들. 수많은 옛 무형
자산들이 마땅한 계승자를 찾지 못해 고사 직전에 놓인 것들이 허다한데, 북청사자놀음은 저들
로 인해 무척 든든함을 느낀다. 내가 백발이 되는 먼 훗날까지 길이길이 이어갔으면 좋겠다.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남쪽 시작점(종각역4거리 북쪽)

▲  종각역4거리 북쪽에 마련된 외줄타기 현장
어린이들이 부모 손에 의지하며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에 임한다.

▲  어지간해서는 참 보기가 힘든 괘불(掛佛)도 칠흑같은 괘불함을 박차고
서울로 올라왔다. 괘불 앞에서는 한참 승무가 벌어지고 있다. ▼


♠  서울연등축제 연등의 물결

▲  종각역4거리에 놓인 연등 (2013년)

조계사 북쪽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주변, 그리고 종각역4거리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은행
, 2015년에는 이곳에 연등을 두지 않았음) 주변에는 크고 작은 연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날 연등행렬에 쓰인 장엄등도 몇 개 있음)
이들은 초파일 당일이나 다음날까지 이곳에 있으며, 낮에는 햇님의 눈치로 조용히 색을 입힌 모
형물로 웅크리고 있지만 그가 없는 저녁에는 마음껏 몸을 밝히며 연등의 이름값을 한다.


▲  여의주를 문 푸른 빛깔의 목어 (또는 용)
뒤쪽에 두툼하게 솟은 푸른 빛깔은 꼬랑지가 아닌 바다 물결이다.
물결을 헤치며 자기 갈 길을 가는 목어의 위엄~~


▲  반토막난 생선 쪼가리 목어를 열심히 두드리는 승려

▲  수초 사이를 유유자적 거니는 물고기 (목어를 상징)

▲  연잎과 물고기(목어)를 든 남녀 동자들

▲  하얀 구슬을 품은 연분홍 연꽃

▲  잔뜩 부풀어 오른 하얀 연꽃(백련)

▲  귀엽고 상큼한 모습의 달마대사 연등

▲  요즘 똥개도 물고 댕긴다는 스마트폰 연등
스마트폰 화면을 연등축제에 걸맞게 목어로 채웠다.

▲  우정총국 북쪽에 조촐하게 연등터널을 세웠다.

▲  부엉이 연등

▲  반야용선(般若龍船)
관음보살 누님이 용머리 배의 선장이 되어 망자(亡者)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
나중에 이승을 뜨게 된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꼭 타보고 싶은 배이다.

▲  귀여운 동자승이 탑돌이를 하는 연등과 신들린 모습으로
법고를 치고 있는 승려 연등

▲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는 하얀 코끼리 연등

▲  비파를 연주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칼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 코끼리에 탄 보현동자 연등


♠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중심지이자 도심 속의 조촐한 휴식처
~ 서울 조계사(曹溪寺)

서울 도심의 완전 한복판인 금싸라기 땅, 종로1가 견지동(堅志洞)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
인 조계사가 자리해 있다. 견지동이란 이름은 뜻을 견고히 한다는 뜻으로 조선 때 견평방(堅平
坊, 견지동 주변)에 있던 의금부(義禁府)에서 민원이나 법을 집행할 때 굳은 뜻으로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조계사의 시초는 1910년에 창건된 각황사(覺皇寺)로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옛 중동학교터)에 있
었다. 조선시대에 서울 도심에는 정릉(貞陵)의 원찰인 흥천사(興天寺, 정동에 있었음), 탑골공
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 그리고 명륜동(明倫洞)에 흥덕사(興德寺)가 있었는데, 원각사와 흥
덕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파괴되었고, 흥천사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 사라지면서 서
울 도심의 사찰은 완전 씨가 마르게 된다. 하긴 억불숭유를 강조하던 조선 심장부에 버젓히 절
이 있다면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다.
이후 400년의 공백을 깨고 조계사의 시초인 각황사가 도심에 싹을 내렸다.

1911년 왜정(倭政)이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선포하여 조선의 모든 절을 이토 히로부미의 원
찰(願刹)인 박문사(博文寺,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에 귀속시키려 하자 해인사(海印寺)주지 회광,
마곡사(麻谷寺) 주지 만공(滿空), 승려 용운(龍雲) 등이 급히 각황사에 모여 31본산 주지회의를
열었다. 이때 용운의 제의로 총본산제도를 추진하면서 조계사(각황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사찰로 서서히 싹수를 트게 된다.

1929년 승려 104명이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했다. 당시
절의 규모가 암자보다 못한 수준이라 만해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곳을 명실상부한 조선 불
교의 총본산으로 키우려고 궁리했는데, 지암 종욱(智庵 鍾郁)이 총본산 건설 31본산 주지 대표
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중 1936년 전북 정읍을 기반으로 하던 보천교(普天敎)가 왜정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사
건이 터지면서 보천교의 중심 법당인 십일전(十一殿, 전북 정읍 소재)이 경매로 나왔다. 이 건
물은 1929년에 지어진 천하에서 가장 큰 목조 단층 건물로 지암은 그 건물에 반응을 보이며, 과
감히 매입을 단행했는데, 구입 비용은 무려 12,000원이 들었으며 (지금으로 환산하면 12억 이상
) 그 건물을 모두 분해하여 가져와 대웅전을 지었다.
공사를 맡은 이는 도편수(都片手) 최원식(崔元植)으로 1920년대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
殿) 재건 공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대웅전 건립을 위해 인근 경복궁(慶福宮)과 덕수궁 건
물을 조사했으며, 단청과 벽화를 맡은 이는 당시 그림으로 알아주던 금용 일섭(金蓉 日燮)이다.

1937년 민영환 집터와 우정총국 일대를 사들여 절을 옮겼고, 1938년 10월 25일 준공 봉불식(奉
佛式)을 거행해 서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그 장엄함을 드러냈다. 또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있던 태고사(太古寺, 지금도 있음)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갈았다.
대웅전 건설과 절 이건 비용을 위해 31본산에서 100,402원 47전을 모아 보냈으며, 중앙불교전문
학교 교수였던 권상노(勸相老)가 상량문을 작성했는데, 왜정의 눈치가 심하여 조선총독의 '심전
개발(心田開發)'을 기념하고자 대웅전을 지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한 많은 중생이 각자의 소
중한 물건을 발원문을 첨부해 대웅전에 넣었다.
이토록 천하가 주목할 정도로 요란하게 절을 옮겼지만 정작 경내를 메운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
가 전부였다. 대웅전 하나가 여러 건물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참고로 보천교는 증산교(甑山敎)에서 파생된 것으로 차경석(車京錫)이 교주(敎主)로 있었는데,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십일전 완성을 계기로 신도들로부터 차천자
(車天子)로 추앙을 받았다. 허나 교내 분열과 친일 행적 등으로 말썽이 많았고, 1936년 차경석
이 죽자 왜정은 보천교를 강제로 폐지하고 건물을 경매로 내놓아 짭짤하게 수입을 챙겼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
불교 조계종이 발족했고, 제1대 종정(宗正)으로 한암이 취임했다. 1945년 9월에는 이곳에서 전
국승려대회가 열려 왜정 때 만들어진 사찰령과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롭게 조선불교 교헌
(敎憲)을 제정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무심한 총탄으로 요사가 반이나 날라갔고, 대웅전도 우측 처마에 포탄을 맞
아 상처가 생겼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을 계기로 인근 안국동 선학원(禪
學院)에서 불교 정화운동을 벌이던 승려들이 이곳에 들어와 조계종의 이름을 딴 조계사로 이름
을 갈았다.
허나 그로 인해 비구승과 대처승(帶妻僧)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처승 세력은 조계사를 인정하지
않고 태고사를 고집했다. 그래서 절은 하나인데, 이름은 2개인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고, 비
구를 중심으로 간신히 조계종이 성립되면서 조계사로 이름이 통일되기에 이른다.

2003년에는 대웅전을 해체 보수했는데, 종도리를 받치는 통장혀 중앙부분 장방형 홈에서 1937년
대웅전 건립 때 넣은 상량문을 비롯해 217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시절 생활사와 상황
을 고스란히 전해주었으며, 200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다.

법등(法燈)을 켠지는 이제 100년을 조금 넘었고, 지금에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80년 남짓, 건
물도 대웅전이나 좀 나이가 있을 뿐 고색(古色)의 기운은 그리 익지도 않았다. 오래된 멋도 거
진 없고, 산사의 고즈넉함도 없고, 수수하게 생긴 절집도 아니다보니 그런 절을 선호하는 이들
에게는 썩 좋은 절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다고 도심 속에 박힌 잇점과 속세에 늘 열려있는 공간으로 평일에
는 잠깐 들려 쉬었다가는 직장인과 도시인들이 많다. 아마도 이 땅의 절 가운데 직장인들이 가
장 많이 찾는 절이 아닐까 싶다. 휴일에는 신도와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
고 물갈이가 잘된다. 특히 서울연등회(연등축제)와 석가탄신일에는 발을 들일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며, 축제의 절정에 이른 조계사는 절과 사람의 향기, 그리고 흥겨움이 강하게 묻어난다.
그리고 매일 18시가 되면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을 깨워 회색빛 도심에 잔잔하
게 사물의 소리를 베푼다.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조계종의 본산으로 경내는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나 대웅전과 현대
식 건축물 등 으리으리한 건물이 많다보니 경내가 제법 넓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울 도심 한복
판이라 교통과 접근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조계사는 지금 크기가 딱 좋은 거 같음)
대웅전과 극락전, 설법전, 종무소, 안심당, 범종루,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교대학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천하에 희귀종인 백송
이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대웅전과 석가불도, 목불좌상 등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
고 있다. 또한 대웅전 뜨락에는 500년 묵은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고, 경내 동북쪽에는 우정총국
이 자리해 있다.

번잡한 도심 속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런 도심과 달리 절은 평온하기 그지없으며, 종로1가를
지날 일이 있으면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절집의 하나이기도 하다.


▲  조계사 일주문(一柱門)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조계사의 실질적인 정문이다. 경내가 사방으로 뻥 뚫려있다 보니
진입로가 많아 굳이 일주문의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절의 상징적인 대문이니 경
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나갈 때 거쳐가는 것도 좋다.

원래 조계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절의 필수 요소인 일주문이 없는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
지 2005년 3월 절을 중창하면서 일주문의 백미로 꼽히는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계문을 모방해
하나 장만했고, 2007년 10월에 현판과 주련을 달아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현판과 주련은 당시
한국서예가협회장이던 송천 정하건 선생이 쓴 것이고 서각은 철제 오옥진 선생이 했다.

명세기 이 땅의 중심 절집이다보니 문의 크기는 단양(丹陽) 구인사(求仁寺) 일주문의 다음 가는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도 장대하거니와 특히 폭이 넓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  또 다른 하늘을 이루고 있는 오색 연등의 위엄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장대한 오색 물결 앞에 두 눈이 제대로 놀라
고 만다. 입도 한없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았지~~ 낮도 이러한데, 햇님이 꽁무니를 빼
는 저녁이 되면 더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  연등 밑에 있는 커다란 연꽃무늬 연등

▲  조계사 사적비(事蹟碑)와 법등명(法燈明) 연등

조그만 다양한 연등이 걸린 법등명 수레 옆에 미끈한 피부의 비석이 보일 것이다. 그 비석은 조
계사의 역사를 담은 사적비로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이 2009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지관은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2012년 1월 정릉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입적을
했는데, 그는 조계사에 마땅한 사적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손수 자료를 모아 9천 자에 가
까운 내용을 담았다. 비석의 밑도리와 머리장식인 귀부와 이수는 여주 고달사(高達寺)의 원종국
사탑비(元宗大師塔碑)를 본따서 만들었다.


▲  연꽃을 들고 샤방하게 뛰어가는 동자승과 비파를 연주하는 동자 연등

▲  조계사 관불의식의 현장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 보인다. 허나 석가탄신일이
지나면 강제로 다시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가야 되니 그의 심정도 모르고
떨어지는 해가 무척 야속할 것이다.


▲  왼손을 내밀고 있는 천진불

백송 앞에는 2006년 3월에 만든 천진불이 그 이름 그대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요즘
이런 천진불을 갖춘 절이 제법 되는데, 표정과 모습이 귀여운 것은 좋지만 왼손을 내밀며 '야~
한푼 내놔~!!' 이러는 것 같아서 저 손짓만 고친다면 참 바람직한 천진불이 될 것 같다.

▲  조계사 백송 - 천연기념물 9호

대웅전 동쪽에는 이곳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인 백송이 하얀 피부를 드러내며 경내에 짧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백송은 말그대로 하얀 소나무로 나이를 먹으면서 껍질이 벗겨져 줄기가 회백색이나 하얀색으로
변하는 매우 희귀한 소나무이다. 그들의 고향은 중원대륙 북부이나 그곳에서는 진작에 씨가 말
라버린 상태이며,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기념으로 가져온 백송 일부
가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던 통의동(通義洞)
백송을 비롯해 원효로(元曉路) 백송과 보은(報恩) 백송이 숨을 거두면서 그 개체수는 이제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며, 다행히 그들의 후손이 사릉(思陵) 전통수목 양묘장과 재동(齋洞)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 북쪽, 그리고 창경궁에서 자라나고 있어 품종 전멸은 면했다.

조계사 백송은 5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누가 가져와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높이
는 약 14m, 뿌리부분 둘레 1.85m, 가슴 높이 둘레가 1.8m이며, 수송동(壽松洞)이란 지명도 바로
이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오래된 나무가 있는 동네란 뜻으로 원래는 지금의 수송공원에 있었
으나 그곳에 있던 각황사가 현 위치로 이전되면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져 외과수술을 크게 받을 적이 있는데, 그때 큰 줄기는 절단되
었다. 허나 절을 찾는 사람이 많고, 나무에게 주어진 땅이 좁기 때문에 나무의 기운도 예전 같
지가 않아 이 땅에 오래된 백송이 또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게다가 나무 주위를 연등
으로 화사하게 꾸며놓아 나름 눈요기감을 선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를 가두는 꼴이 되어 조금
은 답답해 보인다. 연등 수입도 좋지만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그에 대한 배려도 절실해 보인다.


▲  조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7호

조계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단층 불전(佛殿)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얼마나 허벌나게
크던지 건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죄다 개미보다 못하게 보인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면적은 무려 155.7평에 이른다. 1936년 왜정
에 의해 해체되어 경매로 나온 보천교 십일전을 거금 12,000원으로 매입하여 그 자재로 만들었
는데, 옛 십일전의 모습도 어느 정도 살렸다.
조계사가 이 큰 건물에 눈독을 들인 것은 조계사가 바로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존재였기 때문이
다. 나날이 힘이 더해지는 왜식 불교에 맞서고 민족 대표 사찰에 걸맞게 법당을 크게 지을 필요
가 대두되면서 때마침 나온 십일전이 그 역할을 하게 되었고, 1938년 완성을 보았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양식을 보이면서도 나름 독특한 양식을 간직한 20세기 초/중기 건물로 사방
에 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안그래도 큰 건물이 더욱 커보인다. 건물 외벽에는 온갖
꽃창살과 벽화가 장엄했으며, 대웅전 건립 기념으로 영암 도갑사(道甲寺)에서 가져온 목불좌상
을 본존불로 삼았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조계사 홈페이지에는 15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옴, 반면 문화재청에는 조
선 전기 양식을 간직한 조선 후기 불상이라고 나옴)
에 조성된 것으로 대웅전 규모에 걸맞지 않
게 많이 왜소하다는 지적이 많자 2006년에 새롭게 거대한 석가3존불을 봉안했다. 목불좌상은 불
단 우측으로 옮겨졌으며, 추후 영산전을 만들면 그곳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이 목불좌상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6호
이다.
그리고 대웅전 현판은 조선 선조(宣祖)의 8번 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해서체로
남긴 화엄사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그 뒤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연병장처럼 넓은 대웅전 내부에는 예불을 하는 중생들로 가득하다.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바친
온갖 제물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이고, 불상은 그것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시
주함에는 돈이 넘쳐나 함이 터질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3존불은 2006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 땅에서 단층 불전에 봉안된 불상 가운데 제
일 크다. 그들이 너무 큰데다가 금빛 찬란해 두 눈이 달아날 지경으로 그들 뒷쪽에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석가불도가 걸려있는데, 불상이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석가불도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로 20세기 초반에
조성되었다. 왜정 때 유명했던 불교미술작가 김일섭(金日燮)이 그린 것으로 그 시절 불교의 모
든 종단이 뜻을 합쳐 만든 불화라는 점과 김일섭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가 인
정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 앞에도 관불의식 장소를 두었다.
철모르고 찾아온 이른 더위에 시원하게 냉수욕을 하는 그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를 다른데로 내보내고 내가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만약 그렇게 되면 관불은 커녕 바가지로 싸대기`맞겠지..?

▲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연등이 의기투합하여 하늘을 완전히 지웠다. 연등은 하늘을 메우는 구름이 되고
그들을 경계로 하늘과 땅으로 나눠진 것 같다. 연등 밑은 밝은 대낮임에도
연등의 위엄에 가려 어둡다.

▲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대웅전 뜨락

▲  조계사의 꿀재미, 연등 구름의 물결
측정불가의 깊은 하늘이 이날만큼은 대웅전 평방 높이로 팍 내려앉은 것 같다.

▲  하얀 연등이 수를 놓은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좌우에 둔 아미타3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극락전, 2층은 설법전(說法殿)으로 쓰인다.

극락전 앞에는 다른 공간과 달리 하얀 연등이 가득한데, 이들은 죽은 이들, 즉 어려운 말로 영
가(靈駕)를 위한 연등이다. 저녁이 되면 일제히 하얀 빛을 발산해 알록달록 연등 빛보다는 다소
엄숙하거나 오싹할 수 있다. 

극락전 남쪽에는 범종루, 안심당(安心堂) 등이 있으며, 안심당 지하층(거의 지상 1층임)에는 만
발(萬鉢)이라 불리는 공양간이 있다. 만발은 1만개의 발우라는 뜻으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  도시를 바탕에 둔 범종루와 극락전(오른쪽)

범종루에는 부처의 메세지를 담은 4개의 물건,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오전 4시와 저녁 6시
가 되면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순으로 치는데, 같은 사물 소리라고 해도 첩첩한 산주름 속
에 자리한 산사에서 듣는 것과 도시 한복판에서 듣는 것이 참 다른 것 같다. 공해가 가득한 곳
에서 들으니 그때만큼은 잠시나마 외딴 산사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지워진 회화나무
대웅전 뜨락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500년 이
상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귀신도 모를 정도로
장대한 나이를 먹은 그는 높이 26m, 둘레 4m로
뜨락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옛날
에는 회화나무가 군락을 이루던 곳으로 회화나
무 우물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허나 그 많던 회화나무는 20세기 이후 죄다 사
라졌으며, 나무 윗도리는 연등 구름에 가려 보
이질 않는다. 이렇게 보니 구름에 감싸인 신묘
한 나무처럼 보인다.

            ◀  조계사 8각10층석탑
대웅전 뜨락에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
석탑(국보 48호)을 유난히도 많이 닮은 8각10층
석탑이 자리해 있다.
조계사는 초창기부터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왜식 석탑이 있었다. 허나 왜식 탑이라 말들이
많자 2009년 가을 기존의 탑을 불교중앙박물관
북쪽으로 치우고 고려 탑의 진수로 꼽히는 월정
사 탑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탑을 세웠다.
탑 피부에는 8여래상, 8보살상, 8신중상 등을
새겼고, 왜식 탑에 들어있던 부처 사리 1과와
조그만 불상 14,000상을 봉안했다. 그 사리는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파라(達磨婆羅)가
기증한 것으로 그외에 논산 쌍계사(雙溪寺)에서
가져온 법화경 7권 1질과 25조 가사 1벌 등을
안치해 이 땅의 중심 사찰 석탑의 위엄을 갖추
었다.

  ◀  조계사 쉼터이자 야외까페인 가피(加被)
대웅전 뜨락 동남쪽에 늘씬한 키의 소나무가 여
럿 심어진 쉼터가 있다. 예전에는 그냥 허전한
공터였으나 조계사 신도회 부회장 오인석의 지
원으로 주변을 손질하여 2011년 4월 야외 까페
로 새로 태어났다.

이곳에 부여된 이름은 '가피'로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뜻이니 완전 사찰
까페에 맞는 이름이다.
(커피와 차는 2~4천원 선)


▲  한국불교 역사문화기념관 북쪽 산책로

조계사 북쪽에는 2005년에 세워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전국 2,000여
곳의 사찰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이 들어있으며, 지하 1층에는 2007년에
문을 연 불교중앙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이 박물관은 이 땅의 불교미술사를 정리하고 다른 절의
문화유산을 위탁 관리/보존하고 있는데, 관람료는 공짜이다. (특별전 제외)

* 불교중앙박물관 관람시간 : 9시~18시 <11~2월은 17시까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우정국로 55 ☎ 02-2011-1960)

     ◀  뒷전으로 밀려난 조계사 7층석탑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북쪽에는 조촐하게 산
책로가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면 왜열
도 스타일로 이루어진 길쭉한 탑을 만나게 되는
데, 그 탑이 대웅전 뜨락에 있던 조계사 7층석
탑이다.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바라가 부처의 사
리를 지참하며 천하의 불교 성지를 찾아 댕기다
가 그해 8월 조선까지 들어 왔다.
조선의 여러 절을 둘러보다가 기분이 너무 좋아
서 사리 1과를 선사했는데, 각황사에서 이를 관
리했다가 사리를 담을 탑이 필요하여 1930년 지
금의 왜식 7층석탑을 지어 그 안에 담았다.
2002년 3월 도량확장 불사로 탑을 옮겼을 때 사
리를 꺼내 친견법회를 봉행했으며, 사리함을 보
수하여 다시 안에 넣었다.

그 이후 왜식 탑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생기자 2009년에 오대산 월정사 8각9층석탑을 모델로 하여
왜식 탑을 대체할 8각10층석탑을 세웠다. 그래서 왜식 탑에 담긴 사리를 새 탑에 넣었고, 왜식
탑은 부시기에는 좀 아까워 그해 10월 인적이 별로 없는 응달진 구석에 자리에 처박아 두었다.
단지 왜식 탑이란 이유에서였다.


▲  7층석탑의 1층 부분 - 난간 무늬와 덩굴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탑을 구석진 곳에 두다보니 처음에는 탑을 완전 아작낸 줄 알았다. 아무리 왜식 탑이라 해도 그
들도 이 땅의 엄연한 역사이자 문화유산이다. 옛 조선총독부나 이 땅의 정기를 흐트리고자 꽂은
말뚝 등 심히 눈꼴사나운 것들은 정리해야 마땅하나 그외에 평범한 것들은 보존하여 관광/역사
자원으로 삼는 것이 좋다.
또한 이 탑은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조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외지에서 만든 것과 백
송, 회화나무는 제외) 각황사와 태고사 시절의 역사가 담겨진 만큼 부시지 않고 자리만 옮긴 것
은 착한 결정이라 본다. 구석에 있어 찾는 이도 별로 없지만 탑 주변에는 늘 꽃이 가득하여 관
리는 그런데로 해주는 모양이다.

이 땅에 거의 흔치 않은 왜식 탑으로 왜인이 만든 것이 아닌 조계사에서 만든 것이며, 가야(伽
倻)를 밀어내고 왜열도를 점유한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왜인들을 교화하고자 불교를 내리면서
그곳에도 불교가 활짝 꽃피게 되었다. 왜열도로 전해진 불교는 차차 그들만의 불교 스타일로 변
화해 갔고, 격동의 구한말 시절, 그들의 불교가 그 전래지인 조선으로 넘어와 왜식 불교가 잠시
성행을 한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 탑을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문화란
다 돌고 도는 것이다.


▲  7층석탑 주변에서 만난 두툼한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조계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경내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장엄등이 슬슬 꿈
틀거리면서 연등회의 마지막인 연등놀이가 기지개를 켰다. 이후 내용은 생략~~~

※ 조계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안국동로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우정국로) 길로
  가면 조계사이다. (도보 6분)
* 조계사 경유 서울시내버스 노선
① 조계사 : 109번(우이동↔광화문), 151번(우이동↔중앙대), 162번(정릉동↔여의도), 172(하계
   동↔상암동), 606(부천시 상동↔종로1가), 1020(정릉동↔종로1가)
② 조계사 건너편 : 151, 162, 172, 401번(장지동↔광화문), 406번(개포동↔광화문), 704번(송
   추,부곡리↔서울역), 7022번(구산동↔서울역), 9401번(분당 오리역↔광화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조계사 홈페이지는 위에 불두화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5년 5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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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이색 명소 ~ 인왕산과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仁王山) 나들이 '

▲  인왕산 선바위의 위엄


 

겨울의 제국이 슬슬 고개를 들던 11월 끝 무렵에 일행들과 간만에 인왕산 선바위를 찾았다.
오후 2시에 독립문역에서 그들을 만나 회색빛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무악동(毋岳洞) 동네
를 가로질러 선바위로 올라갔다.
선바위 밑에 자리한 인왕사 입구에 이르니 인왕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  한 지붕 다가족의 특이한 절집,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진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 ~ 인왕산 인왕사(仁王寺)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인왕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다. 이 문은 다른 일주
문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1m 정도 솟은 기단 위에 기둥을 심고 그 기둥에 용을 그려 기둥을
휘감게 했다. 그리고 지붕 길이와 비슷한 평방(平枋) 위에 절 이름을 담은 현판을 내걸어 이곳
의 정체를 속세에 밝힌다.

일주문을 지나면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조그만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
위로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빼곡히 건물을 심은 인왕사 경내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각 건물마다 별도의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
히 갸우뚱하게 한다. 분명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
로 인왕사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자 결점이다.

인왕사는 8개 종단에 15개(절집 수는 변경될 수 있음)의 절이 군락을 이루며 가람을 이룬 절이
다. 그러니까 인왕사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가지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각 절마다 달라 제각각 따로 놀았다.
이는 마치 13개의 연맹국(聯盟國)으로 이루어진 옛 가야(伽倻)와 비슷하다. 가야 역시 가야란
테두리 안에 무려 13개의 나라가 따로 놀지 않았던가.
이렇게 각 절들이 따로국밥처럼 되버리니 서로 갈등이 심해졌다. 하여 4년에 1번씩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절 전체의 살림과 행정을 맡기면서 조금씩 통합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하게 이루어진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와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락전(極樂殿)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외에는 이
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된다.


▲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사 (맞배지붕의 큰 건물이 대웅전)

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역사가 이제 103년 밖에 안된다. 그러다보니 아직 내력(來歷)을
알리는 안내문도 갖추지 못했으며, 죄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라 고색의 향기는 여물지도 못했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인왕사와는 관련이 없던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원래 조선 초기에 창건된 인왕사가 있었다. 지금의 인왕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
재이나 이름이 같다보니 절과 관련된 자료에는 대부분 쾌쾌묵은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4년에 개경(開京)을 버리고 서울
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인왕산 동쪽 자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머물던 승려
조생(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으며,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하
였고, 산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음을 가늠케 한
다. 게다가 태조가 창건한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때
기록에도 가끔 절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에는 인왕산에 안겨있던 인왕사와 복세암(福世庵), 금강굴(金剛窟)이 경복
궁(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와 함께 부셨
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지향하던 군주로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
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절을 다시 일으켰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선바위 밑에 절을 세우고, 선바위를 뜻하는 선암정사(禪巖精舍)
라 하였다. 기도처로 유명한 선바위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세운 듯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취하지 않았으며,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
(大願庵)을 지으면서 인왕사의 한 지붕 다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에는 극락전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왜정의 태클로 인왕사 위쪽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에는 극
락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러다가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
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 및 아들을 비는 기자신앙(祈子信仰) 등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
地)였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도심 속의 무속 현장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 인왕산 서남쪽 자락은 대자연이 빚은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즐비하고 선바
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산자락과 바위, 약수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
다. 게다가 매일 굿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민가(民家)와도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거리낌없이 한데
어우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국사당(國師堂) - 중요민속문화재 28호

선바위로 오르다보면 인왕사 경내 가장 윗쪽에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티가 풍기질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
기부터 존재한 서울을 지키던 신당(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
러 무속신(巫俗神)을 모시고 있으며, 무학대사를 모신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南山) 꼭대기 현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1396년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신성시 했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별탈없이 지내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시절에
강제로 정든 곳을 떠나야 했다. 때는 1925년 왜정이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
宮)을 지었는데,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
라고 요란하게 징징거렸다. 그래서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라 전하는 지금의 자리
로 급하게 이전되었다.
이전할 때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
하 기초는 없다. 그리고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
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드리러 온 이들
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해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드
러나 있으며, 당시 서울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국사당은 거의 매일 굿이 열려 굿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
와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많으며, 특히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나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
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고, 김형재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
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이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
과 10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을 소유한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
를 올리는데,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서울에서는 거의 잊혀진 서울 무속
인들의 안식처이자 그들의 성지로 서울 무속신앙이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현장이다. 또한 국사
당과 선바위 주변은 굿판과 기도장소로 명성이 높아 무속인들과 기도를 하려는 속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 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중요민속문화재 17호로 지정
되었는데, 그림에 그려진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부인, 호구아
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신(軍雄大神), 금
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
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
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
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  무신도의 하나인 아태조(이성계)
(문화재청 사진)

▲  강씨(康氏) 부인
(문화재청 사진)

태조 이성계가 그려진 아태조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
고 전하며,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로 보기도 한다. 허나 태조의 그림이 있으니 그 왕후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에 더 큰 무게가 쏠리고 있으며, 그림 이름도 강씨부인이니 신덕왕후와 성씨도 같다.
그림에 담긴 그들의 얼굴을 보면 태조는 조금 멍해보이고, 강씨는 뭔가 불만이 많은지 인상을
잔뜩 쓴 것 같다.

우리가 국사당에 이를 때는 건물 내부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굿과 관련된 사람들
이 협칸에 머물러 있어서 당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새가슴처럼 잠깐씩 열려진 문을 통해 안을
살짝 보는 선에서 그쳤다. 기분 같아서는 안에 들어가 무신도를 마음껏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괜히 그러다가 크게 안좋은 소리나 들을 듯 싶어서 그만두었다. 무신도와 관련 설명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으니 알아서 참조하기 바란다.


▲  선바위로 올라가는 도중에 바라본 국사당과 인왕사

▲  선바위로 인도하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
계단 너머로 선바위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계단 양쪽에 자리한 석등이
우리 전통식이 아닌 왜식(倭式) 석등인 것이 심히 눈에 거슬린다.
저 석등 좀 갈아치우면 안될까?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바위, 산악신앙 및 기자(祈子)신앙의 오랜 성지,
인왕산 선바위<선암(禪岩)>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4호

인왕산 중턱 해발 140m 고지에 자리한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이자 산악/기자신앙의 성지
로 2개의 커다란 돌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바위(禪岩)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른 법,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며, 한밤중에 그를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그리고 바위 뒤나 옆에서 보면 판초의나 우비,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화를 많이 봤다면 그런 만화에 나오는 이상한 형체의 괴물이 떠오를 수도 있
겠다. (난 선바위를 정면에서 볼 때 마다 만화나 오락에서 나왔던 새 대가리 괴물이 떠오름)

대자연이 인왕산에 기가 막히게 빚어놓은 기묘한 작품으로 보면 볼 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바위 등 준수한 바위들이 많아 인왕산이 과연 바위의 산 임을 실감케
한다. 이 산에 기암괴석이 많은 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기 때문이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또는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인
왕사가 밑에 둥지를 튼 이후에는 불상으로 대우를 받아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
다. 그래서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 부르며, 인왕사의 든든
한 후광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대단하다.

이 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산악신앙 및 아들을 기원
하는 기자(祈子)신앙 및 민간신앙의 성지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들이 바위
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아와 기도를 하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바위 밑에 둥지를 틀면서 불교의 신앙 대상이 되었고, 국사당까지 이곳으로
와 무속 신앙까지 더해져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에 '민간신앙+
불교+무속'이 되버린 셈이고, 선바위부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 상, 무학대사 상, 석불
님, 관세음보살님, 양주, 그리고 붙임바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름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속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 바위는 가만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
를 피우며, 그렇게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의 공식 명칭은 '선바위')

2개의 큰 바위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
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시멘트로 바른 제단이 있으며, 제단 좌우로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촛
불을 가득 지닌 기와집 모양의 함이 있다.


▲  선바위의 깜찍한 뒷태
판초의나 모자 달린 우비를 쓰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보는 것 같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鄭道傳)
의 유교와 무학대사의 불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래서 무학대
사는 전국을 뒤적거리다가 지금의 서울(한양) 땅을 찾고는 크게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살펴보
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 못갈 팔자였다. 그래서 선바위에서 1,000일 기도
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딱 망한 모양이
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國都)가 되는 데에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
지 못하고 침소로 들어와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고, 안쪽 부분의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바위는
그 밖에 있었다. 이에 태조는 하늘의 뜻으로 짐작하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
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단단히 뚜껑이 열려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
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그때 눈이 쌓인 자리에 도성을 만들었
다 하여 설성(雪城), 설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그게 이름이 바뀌어 서울이 되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
징되는 불교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
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교 위에 들
어앉게 되는 것이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
면서 유교가 그 위를 점하게 되고, 나라의 중심
이념이 된 것이며, 불교는 점차 힘을 잃고 밀려
났다. 그래고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하고
는 혹독한 억불숭유의 시련을 겪게 된다.
도성 밖으로 밀려나 졸지에 조선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셈이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그리
고 영산제(靈山祭) 때 바위에서 제를 지내고 있
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
는 사람들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
는 공간으로 조그만 건물을 지었으며, 바위 주
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러 성역으로 삼았다.

▲  측면에서 본 선바위 -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선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옛 국사당 자리에 솟아난 N서울타워(남산타워)가 중앙에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선바위 뒤쪽에 새롭게 터를 다진 인왕사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송림 속에 우뚝 솟은 해골바위

▲  선바위약수터

인왕산에는 남산만큼이나 약수터가 많은데, 선바위 동쪽 계곡에 자리한 약수터도 그중에 하나이
다. 인왕산이 속세에 베푼 고마운 약수이나 물을 보니 수질이 조금은 의심스러워 바가지를 대진
않았다. 이곳은 예전에 굿터 많이 쓰였으나 행정기관에서 굿에 제한을 걸면서 요즘은 약수터 주
변에 조촐하게 파라솔 등으로 머물 자리를 만들어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  선바위 동쪽 벼랑 (선바위약수터는 바로 밑, 윗부분에 솟은 바위가 선바위)


※ 인왕산 선바위(국사당, 인왕사) 찾아가기 (2015년 3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 출구를 나가면 선바위, 국사당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 무악동주민센터를 지나 인왕산현대아이파크아파트 옆
  길을 오르면 인왕사 일주문이 나온다. 독립문역에서 일주문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일주문
  에서 선바위까지는 도보 4~5분 거리
* 독립문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로 들어가면 새마을금고가 나온다. 여기서 오
  른쪽으로 보이는 골든팰리스 앞을 지나면 통일로14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직진하면 무악동주
  민센터이다. 이후는 앞 내용 참조
* 독립문역을 경유하는 시내버스(471, 701, 702, 703, 704, 705, 706, 720, 752, 7019, 7021,
  7025, 9701, 9703, 9709, 6005(공항버스), 서대문마을11번)번을 타고 독립문역 정류장에서
  하차, 독립문역 1,2번 출구를 찾는다.
* 승용차로 인왕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일주문 윗쪽에 주차장 있음
* 매년 5~6월에 국사당에서 인왕산 산신대제가 열린다.

* 인왕사(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 (통일로18가길 20 ☎ 02-737-4434)
* 선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3-4 (통일로18가길 26)


♠  인왕산 마무리

▲  선바위에서 인왕산약수터로 올라가는 산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은 해발 338m의 바위 봉우리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
개를 경계로 북악산(342m)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사이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진다.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안쪽으로 둘러싼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기도 하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도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제왕이 정전
(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과 사직터널,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으
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각박하고 지형이 험하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山勢
)가 작아 보이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기면 보기와 달리 제법 넓으며, 독립문역에서 정상까진 1
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을 찍고 홍제동(환희사, 개미마을)이나 홍지문, 창의문(자하문), 부암동
으로 내려갈 경우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
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한 경관을 돕고 있
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백호
에 걸맞은 위엄을 드러내며 서울을 굽어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하여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남겨 인왕산을 격하게 찬양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선바위와 부암동, 옥인동(玉仁洞), 홍제동에 약수터가
많이 널려 속인(俗人)들의 목을 축여준다. 또한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각박하다보니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숨어버렸다. 선바위와 인왕
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은 계곡이라 하기에도 뭐한 수준이고, 산 서쪽에는 환희사(歡喜寺) 주변
으로 약간의 계곡이 졸졸졸 소리를 낸다.
산 동쪽 옥인동에는 장안 제일의 경승으로 손꼽히던 수성동(水聲洞)계곡이 있으나 옥인아파트로
크게 훼손된 것을 2011년에 복원 공사에 들어가 2012년 여름에 완성되었으며, 효자동(孝子洞)에
는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천(白雲洞天) 계곡이 있었으나 주택가에 생매장당해 흔적도 보기 힘
들다. 부암동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란 계곡이 있었지만 이 역시 생매장당해 반계 윤웅렬 별
서(磻溪 尹雄烈 別墅, ☞ 관련글 보기)에 그 일부만 남았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한양도성 길이 폐쇄
되어 선바위 주변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권 시절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군부대와 초소가 한양도성 능선에 남아있어 통제구역이 조
금 남아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이 대표적이며, 중종과 단경왕후(端敬王后) 신
씨의 슬픈 사연이 서린 치마바위와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던 수성동계곡, 근래에 벽화로 유명해
진 달동네 홍제동 개미마을, 자하문고개 서쪽에 자리한 청운공원과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 관련글 보기),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속, 불교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서울에서 보
기 힘든 무속의 성지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
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선바위 사건으로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정
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다시금 꺾였다.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다'
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 만에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
)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 쪽에서 무학대사에게 태클을 걸고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억불숭유에 불만을 품고 그럴싸하게 지어낸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불만을 품
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 사건을 이괄의 난이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
로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이 오른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
다. 그리고 군사<군사 가운데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
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는데, 조선 사람들은 흰 옷을 주로 입
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
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
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
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된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에
수시로 나타나 횡포를 부렸고, 심지어 종묘까지 침입했다고 하며, 백성들의 피해가 부지기수였
다. 그래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왔으니 인왕
산은 그야말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였다. 허나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묘공(猫公)만 종종 보일 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
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현
(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며 우니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렸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흐흐흐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는 '엥? 수진궁귀신
이라고??' 크게 놀라며 염통과 꼬리를 부여잡고 36계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
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약수터

선바위약수터에서 북쪽으로 5분 정도 오르면 인왕산약수터가 나온다. 아직까지는 수질 적합 판
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뭄 탓인지 물이 실처럼 가늘게 나와 바가지 하나를 채우는데 많은 인내
력을 요한다. 물을 받는 바가지도, 그 물을 마시려는 사람도 그저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과자를 먹으며, 지친 두 다리의 불만을 잠시 달래주었다. 배가 고
파서 그런지 과자에 자꾸 손이 가서 금세 가루만 날리는 빈 봉지가 되었다. 그렇게 일다경(一茶
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모자바위(왼쪽)와 인왕산 성곽능선

▲  소나무 너머로 흐릿하게 다가오는 서울 도심

▲  해골바위 (선바위 동쪽 산자락)

선바위 동쪽 산자락에 해골바위라 불리는 괴상한 모습의 바위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바위 윗
부분에 구멍이 여러 개 파여 있어 마치 손상된 해골바가지를 보는 듯 하며, 화생방훈련 때 쓰는
방독면 마스크와도 비슷해 보인다. 구멍에는 치성의 흔적과 술판의 흔적, 속인(俗人)들이 남긴
하얀 글씨들이 흉물스럽게 화석처럼 박혀 바위에 적지 않은 흠집을 내고 있다.


▲  동쪽에서 본 해골바위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독립문역 주변과 안산(鞍山)
바로 저 장소에서 1623년 이괄의 반란군과 장만의 관군이 충돌했다.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뿌연 천하

▲  모자바위 (오른쪽은 한양도성)

검은 때가 적당히 낀 매끄러운 벼랑 위에 어설프게 쓴 모자처럼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모자바위,
줌을 최대한 땡겨 확대해서 보면 마치 고개를 든 개나 동물로도 보이니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
자로 표현한다는 것이 무례가 될 정도로 대자연의 숭고한 작품에 그저 탄사만 나올 뿐이다.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북←종로구→남)
콧대 높은 서울 도심이 내 발 아래로 펼쳐지고, 나는 하늘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여유롭게 굽어본다. 하늘 아래의 저 세상이
이대로 나의 세상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무악동과 종로구, 중구)

▲  범바위와 그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매바위와 인왕산 정상
산 곳곳에 터를 닦은 각종 바위와 기암괴석들은 대자연이 인왕산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다.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인왕산의 모습은 낙산이나 남산처럼 그저 그랬을 것이고
우백호의 완장마저 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  내려가면서 담은 독립문역 주변 (가까이에 보이는 기와집이 인왕사)

해골바위에서 성곽이 보이는 방향으로 내려가면 한양도성 안으로 인도하는 철계단길이 나온다.
정상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시내로 내려갔다. 어차피 나와 인왕
산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인연이 가능하다. 굳이 오늘 갈 필요는 없지~

이렇게 하여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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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유일한 오래된 쌍미륵불,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용암사)

 


' 가을의 길목에서 만난 쌍미륵불 ~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 石佛立像)'

파주 용미리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
(* 용미리 석불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용미리 마애2불입상'이나 오랫동안
용미리 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이라 불렸으므로 본글에서는 이들 명칭을 같이 썼음)


 

늦가을이 한참 여물어가던 10월 한복판에 쌍미륵불로 유명한 용미리석불(마애2불입상)을 찾
았다.
파주시 문산, 파주, 광탄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
역)을 타고 고양시 동부와 해음령, 용미리 남부 지역을 지나 용미1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
으면 고개 중턱 숲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올 것
이다. 바로 용미리석불이다. 석불 밑에는 그를 후광으로 절을 꾸리는 용암사란 조촐한 절이
있다.


▲  용암사를 알리는 표석

용암사 입구에는 절을 알리는 표석(標石)과 문화재가 있음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석불
을 찾은 중생을 인도한다. 경내 남쪽에는 넓게 주차장이 닦여있으며, 경내까지 계단이 이어져
있다.
경내로 가는 길은 푸른 옷을 걸친 숲길이다. 나무들이 베푼 산내음이 코끝을 강하게 스치면서
번잡한 마음과 뇌리가 말끔히 정화된 듯, 시원해짐을 느끼며, 다른 절과 달리 절의 정문인 일
주문(一柱門)이 없다. 허나 그런 문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 울창한 숲길로 들어섬으
로서 부처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지키는 조그마한 산사(山寺)
~ 장지산 용암사(長芝山 龍巖寺)

▲  용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등, 5층석탑

용미1리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장지산 서쪽 자락에는 용미리석불입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산사, 용암사가 포근히 안겨 있다.

용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창건 시
기는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경내 북쪽에 용미리 석불이 있고, 석불 조성과 관련된 절의 창건 설
―절 이름은 전해오지 않음―가 전해오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로 여겨진다. 허니 창
건 이후 이렇다 할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36년 파주 지역 유지들이 돈을 모아 지금
의 절을 세우고
승려 혜성(慧城)이 그 불사를 담당하여 절 이름을 용암사라 하였다.

절을 이루는 건물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요사, 삼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
금의 절은 1970년대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라 고색(古色)의 멋은 찾아 볼 수 없다. 허나 절
집의 규모가 작고 조촐하여 아늑하기 그지없으며 건물들도 절의 규모 마냥 적당한 크기를 지니
고 있어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무리가 없다.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보전이 있고 그 앞뜰에 5층석탑과 석등 2기가 하얀 피부의 반질반
질한 맵시를 드러내 보인다. 석등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참배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국토
통일 천일기도 광명등(光明燈)이란 기나긴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뜨락 중앙에 자리한 5충석탑
은 예전에 대웅전을 중수했을 때 세웠다.
작지만 위엄이 서려 보이는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8년에 지어졌
다.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뒤에 석가후불탱화가 있으며 주변으로 지장탱화, 감로탱화 등의 불화
(佛畵)가 건물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절의 가람배치는 하나의 금당(=법당, 대웅보전)과 하나의 탑이 있는 1금당 1탑 형식으로 금당과
탑이 용미리 석불을 닮아서 그런지 한결같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긴 절이 들어앉은 지형을
보니 남향(南向)으로 법당을 세우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대웅전 주변에는 요사, 범종각이 있고, 석불로 가는 길목에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  용암사 삼성각(三聖閣)
칠성과 산신, 독성을 봉안한 건물로 원래는
용미리석불에게 기도를 올리는 용도로
세워졌다.

▲  삼성각 부근 공터에 놓여진 돌들
1936년 지금의 용암사를 세울 때 지어진
건물의 주춧돌로 여겨진다.


▲  용미리 석불에서 떨어져 나온 7층석탑과 동자불상

삼성각 좌측에는 소박한 모습의 아담한 동자불상(=동자상)과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7층석탑이
나란히 자리를 지킨다. 그 사이로는 이들의 유래가 적힌 표석이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용미리석불과 한 몸으로 지내던 것으로 1980년대 이전 석불 사진을 보면 동자불상
은 석불의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어깨 위쪽, 7층석탑은 그 오른쪽 아래에 있었
다. 이들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시주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하며, 이승만의 어머니가 용미
리석불에서 아들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려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1954년 이승만이 용암사
를 방문하여 남북통일과 자손을 염원하고자 그들을 만들었는데, 어이없이도 이것을 용미리석불
에 주렁주렁 단 것이다.

그 이후 동자상과 7층석탑이 석불의 미관을 망치고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
면서 1987년 석불에서 떼어내 요사 뒤쪽에 두었다가 2009년에 석불 밑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
여 기념표석을 세웠다. 1987년 이전에는 동자상 때문에 2체불이 아닌 3체불(體佛)로 오인을 받
는 경우가 많았다.
7층석탑은 군살이 없는 날씬한 모습으로 백제의 칠지도(七支刀)를 연상케 만드며 동자상은 어린
동자를 보듯 포근한 표정이다. 그래도 이들은 60년 묵은 것들이라 반백년 세월의 때가 진하게
얼룩져 있다.

절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가볍게 1분 정도 오르면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오게한 주인공,
머리 둘, 몸통 둘이 달린 거대한 불상,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만나게 된다.


▲  요사 뒤쪽에 있던 시절의 동자상과 7층석탑 (2007년 이전)


♠  숨막히게 거대한 고려시대 석불, 독특한 개성과 멋이 넘쳐흐르는
용미리 마애2불입상(磨崖二佛立像, 석불입상) - 보물 93호

고양시 동부와 파주시 동부를 이어주는 용암사 고개, 지금은 2차선 도로(혜음로)가 흘러가고 있
지만 옛날부터 황해도와 개성(開城), 파주(坡州)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주요 길목으로 사람
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 고개 동쪽이자 용암사 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거대한 석불, 용미리 마애2불입
상이 커다란 바위를 몸통 삼아 자리해 있다. 무덤에 깃들여진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
는 것일까? 용미리 시립묘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석불은 오랫동안 미륵불(彌勒佛), 쌍미륵
불 등으로 불려왔으며, 광탄면에 있다고 해서 '광탄석불'로도 불렸다. 예전에 불광동서부터미널
에서 광탄까지 시외완행버스가 다니던 시절에는 석불 아래 정류장 이름도 '미륵불'이었다.
이 석불은 11세기 후반에 고려 선종(宣宗)의 3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전하며 석불의 위용은 한때 잘나갔던 궁주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

바위에 전신상(全身像)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와 갓, 목 부분의 불두(佛頭)를 만들어
얹힌 형태로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마애불(磨崖佛)로
봐도 상관은 없다. 이런 형태의 마애불로 안동 제비원석불(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 그 대표격인
데, 그 석불 역시 자연바위에 몸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를 얹혔다.

본 석불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가 2개, 즉 우리나라 유일의 쌍두불(雙頭佛)이라는 것이다. 절과
속세에서는 그를 쌍미륵불로 추앙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몸 하나의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은 아니
다. 비록 하나의 바위에 의지해 있지만 바위 사이로 마치 둘을 가르듯 틈이 나 있으므로 몸통
둘의 머리 둘로 봐도 무방하다.


▲  석불 앞에 마련된 기도처
중생의 소망이 한가득 담겨진 연분홍 연등의 행렬이 아무도 없는
기도처 주변을 따스히 감싸 흐른다.


석불의 높이는 19.85m, 반올림하면 근 20m에 이르는 장대한 불상으로 바위에 그대로 만든 탓에 
신체비례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이 바로 고려시대 석불이 지닌 강한 특징이자 개성이
니 이에 대해 뭐라 중얼거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 때 만들어진 불상은 다른 시대와 달리 덩
치가 유난히 크며 얼굴과 외모가 수려한 불상보다는 생김새가 정말 가지각색인 개성파 불상들이
많다. 용미리 석불 역시 그 시대의 유행에 충실하여 불상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배어있
는 석불이라 하겠다.


▲  아래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900년의 세월을 견뎌 내면서도 그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바위 사이의 틈을 경계로 왼쪽의 불상은 선비마냥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이다. 보통 불상
들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기 마련인데, 그런 화려함 대신 사람들이 많이 쓰고 다니는 갓을
씌워 놓아 무척 친근하게 다가온다. 은연히 미소가 깃들여진 그의 얼굴은 거의 네모난 모습으로
논산 관촉사(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과도 좀 비슷한 생김새이다. 불상의 얼굴이라기보다
는 그만의 특유하고 재미난 색채가 강하게 배어있으며, 목은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대
고 연꽃을 살짝 들고 있다. 그리고 몸통이 들어앉은 바위에는 옷을 입혀놓았는데, 옷의 주름을
선각으로 세심히 처리했다.

오른쪽 불상은 동그란 갓 대신 네모난 갓, 즉 방립불(方笠佛)을 머리에 걸쳤으며 눈썹과 눈이
길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왼쪽 불상보다 키가 약간 크
지만 덩치는 좀 작다. 하지만 듬직한 몸집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어 은근히 웅장해 보인다.

지역 구전에 따르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네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고 하는
데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모습이다. 금슬이 짙은 부부처럼 다정히 자리하여 중생들을 살펴보
는 모습이 꽤 훈훈해 보인다.

이들의 작품성은 별로 우수한 편(안내문에 그리 나옴)은 못되지만 고려 왕족의 탄생설화가 담겨
져 있고 지방색이 짙은 고려 불상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소망을 들어주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찾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특히 아이가 없어 애태우거나 아이를 원하는 이들의
소망을 잘 들어준다고 한다.

▲  측면에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  용미리 석불의 전경


※ 용미리 석불입상의 설화
고려 13대 군주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적당한 후사가 없어 늘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3번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인주이씨 평장사 이정(李頲)의 딸>의 꿈
에 도승 2명이 나타나 하소연했다.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배가 고프
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주세요'

이상하게 생각한 궁주는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니 그럴싸한 큰 바위가 하나 발견되어 바로 불상
조성에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뒤, 그 도승이 다시금 꿈 속에 나타나 왈 '왼쪽 바위에 미륵불을,
오른쪽 바위에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공양하고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을 얻고,
병이 있는 사람은 완쾌가 될 것입니다'

도승의 부탁대로 두 불상을 새기고 그 밑에 절(이름은 전해오지 않음)을 세워 기도를 올리니 과
연 몇달 뒤, 그렇게나 소망하던 아들 한산후 왕윤(漢山侯 王昀)이 태어났다.

허나 선종은 위의 설화와 달리 아들 왕욱<王昱, 2째 부인 사숙왕후(思肅王后)의 소생으로 14대
헌종>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太子) 왕욱은 심히 병약하여 늘 병을 달고 살았으며 소갈증(消渴
症, 당뇨병)까지 앓고 있던 상황이라 만약을 위해 건장한 아들을 하나 더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보람이 있는지 원신궁주는 한산후 외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아들 2명을 더 낳아 더욱 승승장
구하게 된다.

1094년 선종이 붕어하고 헌종이 제위에 오르자 자신의 오라버니인 '이자의(李資義)'와 공모하여
한산후를 왕위에 세우려고 모반을 꾀하다가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鷄林公 王熙, 뒤에 15대
숙종)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결국 원신궁주 모자는 그 대가로 이름이 전하지 않는 머나먼 곳으
로 추방당하고, 그들의 행적과 사망 시기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잊혀
져 갔다.


▲  앞쪽만 멀뚱히 바라보는 용미리 석불의 뒷통수
저들이 바라보는 곳은 용미리시립묘지 1구역이다.


석불과는 이미 여러 번의 안면이 있다. 몇년 만에 찾았음에도 그들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반면에 나는 그만큼의 세월이 누적되어 인정하긴 싫지만 그만큼 늙고 변해 있었다. 향
을 피워 그들에게 삼배(三拜)의 예를 올리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무언가를 소망한다.
평소에는 찾아와 안부도 전하지 않으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만 찾아와 '이러이러하니 제발좀 살
펴달라'
소망을 비는 것도 조금은 염치가 없는 것 같다. 정작 저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는 나는
과연 그들을 지킬 수 있을까? 나뿐만은 아니지만 소원만 빌러 오는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느껴지
기도 한다.

예불을 올리고 석불의 뒷쪽으로 올라갔다. 석불의 머리 부분까지는 산길이 나 있는데, 그들의
높이가 20m에 이르러 거의 조그만 언덕을 오르는 것 같다. 경사가 다소 있는 산길을 올라 문화
유산 보호 철책을 넘어 석불의 뒷통수로 살짝 숨어든다. 마치 앞쪽만 죽어라 쳐다보는 사람의
뒤쪽으로 살며시 다가가 팍 기습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석불의 뒷부분은 밋밋하고 간소하게 표현된 뒷머리와 목덜미가 전부이다. 그런 머리 위로는 머
리 크기만한 갓이 씌워져 있는데, 갓보다는 탑이나 석등의 윗부분을 보는 것 같다.

천하에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구한 세월의 시련, 그것을 100년도 아닌 900년이나 견뎌
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모습을 간직한 석불을 친견하면서 나도 그처럼 영원히 한결같
은 인생을 살았으면 싶다.

~~~ 이렇게 하여 용미리 석불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용미리 마애2불입상(용암사)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역)을 타고 용암사(용미리 마애2불입상)에서 내린다.
* 703번과 환승이 가능한 전철역 - 5호선 광화문역(6번 출구), 1/2호선 시청역(8번 출구), 1/4
  호선 서울역(3,9-1번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3호선 독립문역(1번 출구), 3호선 녹
  번역(1번 출구),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3호선 삼송역(8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2분)
* 승용차
① 서울시내 → 구파발4거리에서 고양,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도 → 고
   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광탄방면 좌회전
   → 용미리 → 용암사 주차장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을 나와 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
   도 → 고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좌회전
   → 용암사 주차장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9 (용암사 ☎ 031-94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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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2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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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 연등축제 (조계사, 청계천 연등거리, 광통교)

 


' 서울 연등축제 야경 즐기기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연등거리) '

서울연등회 연등

▲  서울 연등축제에서 활약한 연등의 위엄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서울연등회 저녁 연등놀이 (조계사, 우정국로)

▲  연등놀이 행렬의 선봉인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
사천왕들이 중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국동4거리를 거쳐 인사동으로 들어간다.
인사동에 잠입한 나쁜 기운들이 그날따라 똥줄 좀 제대로 탔을 것이다.

계절의 여왕으로 널리 칭송을 받는 5월(4월 말 포함)에는 많은 축제와 볼거리가 천하 곳곳에서
열린다. 그중 단연 갑(甲)은 내 기준이긴 하지만 서울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특별전이 아닐까 싶다.

서울연등회(연등축제)는 서울 및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단단히 자리
를 굳혔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금/토/일에 열리는데, 주말 전날인 금요일부터 조계사(曹溪
寺)와 강남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교4거리 구간)에서 연등 전시회가 그 서막
으로 열리며. 초파일 당일까지 오색영롱하게 불을 밝힌다.
그리고 축제의 중심인 토요일이 되면 장충동 동국대(東國大) 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16시 30
분부터 18시까지 열리는데, 이 마당은 연등행렬을 위한 몸풀기 행사로 관불의식을 비롯해 흥겨
움을 유발하는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펼쳐진다. 그 공연이 끝나면 19시부터 서울연등축제의 갑
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진행된다.
연등행렬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을 출발하여 동대문과 종로를 거쳐 조계사에서
끝을 맺는데, 진행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이며, 조계사를 비롯하여 서울과 전국 사찰, 불교단체
/학교에서 준비한 온갖 연등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보이는 등은 무려 10만 개가 넘는다
고 하니 가
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라 매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여 전혀 식상하지가 않다. (연등행렬시간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부터 조계사까지
도로를 통제함)
햇님이 지평선 너머의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행렬에 나온 연등은 어
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이 조계사에
모두 모이면 그 뒷풀이로 회향(廻向)한마당이 23시까지 펼쳐져 다시금 어깨를 들썩거리게 한다.
또한 그날 행군한 연등의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 종로1가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
은행) 앞에 두어 자정까지 못다한 불을 밝힌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불
교와 관련된 갖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전통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곳곳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불교 음식과 떡, 음
료수 등을 사마시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茶道) 체험, 사찰/전통 음
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까지 두루 만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축제는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여 19시부터 다시 연등놀이를 연다.
이는 전날에 벌이는 연등행렬의 축소판으로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을 1바퀴 돌고 다시 조계사
로 돌아오는 짧은 코스로 진행되며, 조계사에 모이면 모두 함께 신명나게 춤을 추고 어울리는
시간을 갖다가 21시에 모두 마무리를 짓는다.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으며, 서
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도 연등축제가 열린다. 그
렇다면 이 연등회는 과연 언제부터 열리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관련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
에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했던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말에 이미 절에서 연등을 밝혀 축제 비슷하게 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개최하여 만백성이 즐겼고, 연등을 며칠 동안 밝혀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에 본격적으로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
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를 연 것이 그 시초로 여겨지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 정권
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선은 고려와 달리 불교를 탄압하면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속 연등회
를 즐겼다. 저녁에는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등은 한
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을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연등을 만들어 종로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서막을 열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이후 1996년부터는 동대문운동장
(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제는 5월(4월 하순)만 되면 손
꼽아 기다리게 되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 서울연등회 일정과 행사 내용, 연등은 매년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음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사천왕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전통문화마당의 후속편으로 진행되는 연등놀이는 19시에 조계사를 출발하여 인사동을 거쳐 다시
조계사로 돌아와 모두 신명나게 어울린 후 21시에 마무리를 짓는다. 이날 활약하는 연등은 전날
연등행렬에서 몸을 푼 연등으로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짧은 행군에 임한다.
햇님이 꽁무니를 뺀 시간이라 몸을 마음껏 불사르며 중생들의 환호 속에 도심을 누빈다.

연등놀이 시간이 저녁 때다 보니 시장기가 연등처럼 불타오른다. 자고로 부하들의 논공행상(論
功行賞)과 시장기는 미루지 말라는 명언이 있다.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모두 뒷탈이 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연등놀이는 일단 관심에서 꺼두고 저녁을 먹고자 북촌(北村)으로 들어가 어느 기
와집 식당에서 떡국과 만두로 시장기를 잠재우고 슬며시 조계사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21시. 연등놀이 행렬은 마무리되고 거리를 달군 연등은 조계사와 우정국로 곳곳에
포진하여 중생들의 사진 모델로 다시금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우정국로를 장악한 긴 지느러미의 목어

▲  연등 빛깔에 황홀하게 물든 조계사의 야경

▲  극락을 향한 중생의 몸부림 ~ 반야용선(般若龍船) 연등
관음보살이 용머리 배에 중생을 태우고 고통의 바다를 헤치며
극락으로 향한다.  

▲  노루, 소나무가 그려진 연등과 윤장대(輪藏臺) 연등

▲  두광(頭光)을 두룬 다양한 모습의 관음보살 연등

▲  푸른 피부의 범종 연등

▲  종로1가(종각역4거리)를 주름잡은 연등들 ▼


♠  서울연등축제의 마무리 ~ 청계천 연등거리 (전통등 전시회)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서울 도심의 어설픈 젖줄인 청계천(淸溪川)도 서울연등축제의 일원이 되어 한참 연등빛으로 물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4~5월에는 서울연등회 전통등 전시회의 현장으로, 11월에는 서울등축
제의 현장이 되는 명실상부한 천하 등축제의 성지인데, 청계천 연등은 청계광장에서 청계2가까
지로 조그만 연등이 청계천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고, 광통교(廣通橋)와 청계광장 사이에는 커
다란 등을 두둥실 띄워 연등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돋구고 있다.
특히 이 땅의 불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큰 등이 여럿 있으며, 그 옆에 관련 해설을 붙여
놓았다.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2가 방향)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광통교(사적 461호)와 석가탑(釋迦塔) 연등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제일 오래된 다리는
광통교이다. 청계천이 한양도성 가운데를 가르
며 흐르다보니 그것을 경계로 자연히 북촌(北村
)과 남촌(南村)으로 나눠졌고 이를 왕래하고자
광통교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많은 다리를 놓
았다. 이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광통교와
장충단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수표교(水標橋)가
고작이며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청계천 다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광통교
'대(大)광통교','광교(廣橋)'라 불리기도 하
며, 다리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광통방에서 비
롯되었다. 원래는 광교4거리에 있었으나 청계천
복원 때 기존 자리를 되찾지는 못하고 무교동(
무교동4거리~광교4거리 중간)에 재현되었으며,
다리 이름은 광교(광통교)지만 기존 광교4거리
와 햇갈릴 우려가 커 광통교로 거의 못박은 상
태이다.

이 다리는 청계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만큼 기구한 사연도 적지않다. 연등축제 글에 맞지 않
게 광통교 보따리를 푸는 것이 좀 그렇겠만 기왕 이곳에 왔으니 간단하게 한번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광통교는 조선 태조(太祖) 때 흙과 나무로 대충 지은 나무 다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홍수
때마다 거의 남아나지를 못하여 20년 가까이 도성(都城)의 우환거리로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돌다리로 업그레이드시키면서 그 우환은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다리 석재(石材)는 어디
서 충당을 했을까? 그 석재는 정릉(貞陵)의 석물을 차출하여 충당했는데, 정릉은 비록 친어머니
는 아니지만 의붓어머니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다. 그렇다면 왜 의붓어미 능의 석물
을 불손하게도 석재로 썼을까? 이는 그들의 오랜 악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5번째 아들이다. 한씨는
정종과 이방간(李芳幹) 등 6남 2녀로 두었는데, 좋을 날을 1년 앞둔 1391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조의 후실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자연히 부인이 되었는데 조선이 개국되면서
는 현비(賢妃)로 책봉되었다. 현비는 왕실 내명부(內命婦)의 정1품으로 거의 왕비(王妃)로 보면
되겠다.

신덕왕후는 곡산(谷山)강씨 집안으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강윤성
은 많은 무공(武功)을 세워 중앙에 진출한 이성계(李成桂)를 높이 평가하며 강씨 집안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 딸을 그에게 시집을 보냈다. 일종의 정략 혼인인 셈이다. 이렇게 이성계
는 무려 21세 연하를 2째 부인으로 두며 개경(開京)에 머물 든든한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강씨 집안은 토지도 넓고 재정도 풍족해 이성계는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강씨는 이성계를 잘 내
조하며 한씨 소생의 자녀와도 가깝게 지냈고, 조선 개국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현비로 책봉되어 사실상 조선 최초의 왕후가 되었는데, 왕의 지극한 총애를 믿
으며, 권력에 대한 숨겨진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앉
히고자 정도전(鄭道傳)고 남은(南誾) 등, 왕의 최측근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방원 등 한씨 소생
왕자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가 1396년 8월 이방원이 소란을 일으키자 병을 얻어 죽으니 그
의 나이 40세였다.
자신의 숨통을 조이던 강씨가 죽자, 이방원과 이방간(李芳幹) 등은 기회를 엿보다가 1398년 그
유명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나라를 한참 반석 위에 올리고 있던 정도전과 남은 등을 살해
하고 강씨 소생의 이방석. 이방번 형제를 때려 죽인다. 이에 충격을 먹은 태조는 왕위를 내버리
고 함흥(咸興)으로 내려갔으며, 이방원은 2째 형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정종(靖宗)이다.

이어 1400년, 이방간이 박포(朴苞)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의 아우인 이방원을
공격하나 오히려 손쉽게 진압된다. 애시당초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정종은 이때다 싶어 그에
게 서둘러 왕위를 넘기니 그가 바로 조선 3대 군주인 태종(太宗)이다.

드디어 꿈꾸던 왕위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에 대한 증오를 풀고자 그를 후궁으로 격
하시켰고, 강씨를 왕후로 인정하는 기록을 모두 없애거나 왜곡했다. 그리고 도성 안 정동(貞洞)
에 버젓히 자리한 강씨의 정릉을 1409년 지금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추방시키고 그것으로도 모
잘라 봉분(封墳)을 훼손하고 정자각(丁字閣)을 뒤엎으며 애궂은 석물을 생매장시켰다.
그러다가 상국(上國)인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太平館)을 보수할 필요가 제기되자 태종
은 정릉에 쓰인 나무와 석재를 동원하여 태평관 보수에 사용했다. 그리고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
말썽이 많던 광교를 돌다리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12지신상을 비롯한 정릉의 석물을 모조리 끌
어다가 광교의 석재로 사용했다.

그 이후 정릉의 존재를 영구히 은폐시킬 생각으로 수묘인(守墓人)을 두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
으며, 관료와 사대부들도 태종의 눈치로 스스로 강씨의 대한 기록을 지우고 심지어는 족보에서
도 그 존재를 지웠다. 그렇게 태종의 바램대로 강씨와 정릉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
혀져 간 것이다.
그러다가 선조(宣祖) 시절, 선조가 수레를 타고 행차하던 중,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
)이 수레 앞에 엎드려 자신은 그의 후손이라며 군역을 면제해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변
계량(卞季良)이 쓴 문서를 참조하여 능을 다시 찾았으며 현종(顯宗) 때 송시열(宋時烈)의 건의
로 드디어 제대로 된 능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광통교는 이방원의 의붓어머니에 대한 악감정에서 태어난 존재로 그 감정의 정도를 가늠
케 한다. 정릉을 때려 부시고 그 석재로 광통교와 태평관을 손질하면서 태종은 희열이 넘치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반면 신덕왕후는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 역사의 패배자는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한번 몸소리치게 해주는 현장으로 강씨를 파멸시킨 승리자 태종은 후실(첩)의 소
생이 설치지 못하도록 적서(嫡庶)차별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정릉의 희생으로 돌다리로 거듭난 광통교는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로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을 잇는 통로였다. 다리 주변에는 시전(市廛)이 늘어서 있었고, 숭례문을 통
해 도성 밖으로 나가는 제왕의 어가 행렬도 반드시 이곳을 건넜다. 또한 명/청나라 사신도 이
다리를 건넜다.
지금은 제자리를 떠난 수표교와 더불어
매년 정월 보름에 연날리기, 다리밟기 등의 축제가 펼쳐
졌고, 4월 초파일에는 연등행사가 열려 연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영조
(英祖) 시절에 청계천을 크게 정비하면서 노원구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 광통교를 크게 손보
았으며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도심의 골치꺼리인 청계천을 생매장시키면서 수표교를 장충단공
원으로 강제로 옮겼다. 허나 광통교는 옮기지 않고 그냥 생매장을 시킨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래서 40년 가까이 청계천 수레길 밑에 깔려 어둠의 시간을 보내다가 2003년 청계천을 밖으로 끄
집어내면서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것이다.
긴 세월 햇살의 어루만짐을 받지 못해 많이 초췌해진 모습으로 다가온 광통교는 창덕궁과 탑골
공원 등지에 흩어진 다리의 석재를 찾아내어 복원에 활용했으며, 부족한 부분은 새로 돌을 맞추
어 끼워놓았다. 허나 기존 자리는 이미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기존
광교4거리에서 서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복원을 했다.

다리의 모습은 수표교와 많이 비슷하며, 조선 초기 돌다리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인정
되어 2005년 수표교와 오간수교(五間水橋) 등 다른 돌다리 흔적과 더불어
사적 461호로 지정되
었다.
다리 기둥에는 계사년(癸巳年)에 다리를 보수했다는 글씨가 여럿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계사년
은 1413년이다. 그리고 능의 석물로 만든 탓에 다리 북쪽과 남쪽 밑에는 구름무늬가 많은데, 그
사이로 신장상(神將像)이 합장을 선보이며 단아하게 서 있고, 반면 거꾸로 박힌 인물상도 보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 인물의 정체는 불상이라고 한다. 왜 거꾸로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2003년 다리 복원을 대충해서 그리 되었다는 말부터 태종 시절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  신라 문무왕 시절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군을 격퇴했다는
명랑법사(明朗法師) 이야기 연등

▲  황룡사9층목탑과 원효대사 연등

▲  청게천 팔석담(八石潭)을 물들인 연등

청계천 연등거리를 유유자적하니 시간은 어느덧 23시가 넘었다. 이제 1시간만 지나면 그날은 재
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성황리에 열린 서울연등축제도 그렇게 막을 내리고, 조계사와 봉은
사, 청계천 연등은 초파일 당일까지 불을 밝히면서 연등축제의 대미(大尾)를 잡는다. 특히 청계
천 연등(전통등 전시회)은 달 밑에서 종일 불을 밝히는 것이 아닌 자정까지만 불을 밝히며, 연
등의 위엄에 눌려 뒤로 밀려난 달은 그 이후부터 제대로 어깨를 피며 천하를 비춘다.
이렇게 하여 서울연등축제 저녁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서울연등회 연등축제장 (조계사 주변, 청계천)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조계사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에서
   도보 5분
② 청계천 연등 거리(광통교)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에서 도보 2~3분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2번 출구)에서 도보 3~4분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도보 4~5분
* 서울연등축제 홈페이지는 바로 아랫 사진(합장인과 법륜 연등)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 청계천 연등 거리, 광통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 중구 무교동
* 조계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합장인과 법륜(法輪) 연등 (그 오른쪽에 승려가 춤을 추는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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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4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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