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찰'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9.08.25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 2019.06.15 커다란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 (서울둘레길, 맛있는 공양밥 1그릇)
  3. 2019.05.22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4. 2019.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의 은빛 설경 ~~~ (거북바위, 구룡사계곡, 구룡폭포)
  5. 2019.04.01 늦겨울에 즐긴 고즈넉한 산사 나들이, 세종시 운주산 비암사 ~~~ (비암사 도깨비도로)
  6. 2019.02.23 천하에서 제일 큰 청동좌불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천안 태조산 각원사 ~~ (태조산 성불사)
  7. 2019.01.05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8. 2018.08.1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4
  9. 2018.06.29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국제적인 선찰로 명성이 높은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의 석가탄신일 야경)
  10. 2018.06.12 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2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대웅전 뜨락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봉원사에서 열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조계사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연꽃축제로 2012년 이후 매년 인연을 짓고 있는데, 여름
이 왔으니 친(親) 여름파인 연꽃을 구경해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
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연꽃 축제날이 다가왔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후배 여인네를 만나 서울
시내버스 272번(면목4동↔남가좌동)을 타고 이대부고(봉원동)에서 하차, 다시 7024번으로
환승하여 봉원사 종점에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이 막히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변
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완전 대
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 종점으로 쓰이는 봉원사 주차장에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
쪽으로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석종형(石
鐘形)부터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들 7~8기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마을은 절 턱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붙어있으며 나무도 많아 산골마을 같은 분
위기이다. 여기가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곳 일대를 봉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조금은 빛바랜 하얀 비석이 애타게 눈
길을 구걸한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는 '조낭자 희정 유애비'로 비석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
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
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碑身)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적지않게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자주 신세 한탄을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부족했던 애정이 그녀
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
춧돌로 그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①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다보니 풍
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었다. 높
이는 18m, 둘레 4.3m로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단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②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
여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는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와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을 판매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연못 윗쪽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羅漢像)이 있다. 이들은 2001년 6월에 봉안된 것
으로 나한상 북쪽에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
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
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얌전히 절을 이전했다.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
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이 들어앉았다.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으로 이전되어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남아있음)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
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
으며,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그의 현판 2개가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
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들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대웅전과
몇몇 건물, 조선 후기 탱화들은 많이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
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와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0호), 반야
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그들 중 범종만 속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
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9년을 기준으로 벌써 17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
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
꽃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
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을 견주며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달군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들
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싹 정화시켜준다.


▲  삼삼하게 우거진 연꽃 밀림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하얀 피부와 연분홍 피부가 적절히 섞인 청초한 연꽃

▲  웃음 짓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낸 홍련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오늘도 방긋 웃는 연잎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①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②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③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④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⑤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
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두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데 그때 업어온 것으로 보이며,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
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해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
에 있음) 등이 건물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
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
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과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
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
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6.25 시절의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컸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또 부질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  봉원사 범종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찾기는 매우 쉬움) 그는 예산 덕산(德山)
에 있던 가야사(伽倻寺)의 것으로 1760년에 조성되었다. 여기서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의 명당(
明堂) 욕심으로 파괴된 그 절이다.
종 높이는 84.5cm, 입지름 61cm으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동종 중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 감돌고 있다. 또한 종형도 천판에서 시작된 외선(外線)이 종신(鐘
身) 2/4부분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올라가다가 3/4부분에서 종구까지 완만하게 떨어지고 있다.

편평한 천판(天板)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는 2마리의 용의 용뉴를 표현했으며, 그 아래 종신
은 2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종신을 크게 3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단에만 다양한
도안을 장엄하였다.
천판 아래에는 내부에 '옴'자가 새겨지고 외곽에 돌기를 표현한 원권(原權)의 범자 8개가 부
조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꼴 형태인 연곽 4개가 있는데, 사선문으로 연곽대를 구획하고,
그 안에는 연뢰(蓮蕾) 9개를 표현했다. 그리고 연곽 사이에 빈 공간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
는 보살입상 2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준제진언(準提眞言)'을 간략하게 표기했다.

종 피부에는 종의 탄생시기와 봉안처 외에 덕산과 예산, 대전(회덕, 진잠), 천안, 결성, 옥천
지역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고, 사장(私匠)인 이만돌(李萬乭), 신덕필(申德必), 최종취(崔宗就
) 등 3인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의 상태가 양호하고 경상도 이씨 일파의 대표적 장인인 이만돌이 만든 작품 양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명문을 통해 종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후분 동종의 양식과 사장
에 대한 계보, 활동을 연구하는제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했는데, 그 과
정에서 범종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 종은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 안착하면서 서울살이를 하
고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3년 승려 안진호가 작성
한 '봉원사지' 제9절 제3항에 봉원사의 재산으로 기재되어있어 늦어도 20세기 초에 들어온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원군이 왕실 원찰의 하나인 이곳에 넘겼을 가능성도 있으나 범종이 묵비권
을 행사하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고 그 휴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으니 명당의 치명
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산신탱
이 산신은 돈이 좀 있는지 앳된 동자와 동녀를 4명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호랑이는 귀여운 것이 토실토실하여 귀티가 넘쳐 보인다.
(다른 산신탱은 동자가 1~2명 정도임)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
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
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  물이 졸졸 쏟아져 나오는 수각(水閣)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
靈駕)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
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3층석탑에서 바라본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 그리고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보통 전통 공연을 처음에 내밀고, 초청 가수
(대부분 트로트) 공연을 제일 뒤에 내민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하나 상황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17시(또는 18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
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
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1/3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사찰 축제를 이용해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
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
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놀고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인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리고 있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지
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지장보살
상과 시왕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10왕 끝에는 패기가 짙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자리해 명부의 식구들을 지킨다.

명부전에 왔다면 지장보살과 시왕상도 좋지만 명부전 현판은 꼭 눈에 넣도록 하자.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다면 무려 620년을 묵은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하지만 내 눈으로 봐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는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던지라 역시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봉원사가 태조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연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로 한 글
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로 교체
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라
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여기
저기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
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  명부전 옆구리에서 만난 아리따운 홍련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
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며, 그 인등으로 인하여
인등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이 서 있는데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
식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한없이 밉기만
하다. 그렇게 나오기가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해야지. 꼭 56.7억년 후에 나타
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 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
기이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다. 아미타불과 박정희 전대통령 내외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자
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150~200년 정
도 된 것으로 여겨지나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내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살피지 못
했다. (만월전은 올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음)


▲  삼천불전 앞 산사음악회 무대에서 펼쳐진 즉석 그림 전시회
봉원사 화승이 무대에서 즉석으로 그린 그림을 삼천불전 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그림에 담겨진 붉은 꽃은 이곳 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이다.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연
꽃이 그야말로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8월 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커다란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 (서울둘레길, 맛있는 공양밥 1그릇)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불암산 학도
암 ~~~~~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학도암 마애사리탑

▲  약사전 석조약사3존불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다
무척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
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경기도 지역과 멀리 경북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2003년)까지 찾아가곤 했으
나 2011년부터는 서울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인다. 서울 시내에도 오래된 절이 제법 많
고 역사는 짧아도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을 찾아다니
기가 어언 10여 년, 이제는 미답(未踏)으로 남은 절이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뿐인 초파일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예전에 가봤던
오래된 절 중, 문화유산을 보유한 절까지 포함시켜 절 투어 동선을 짜보았다. '어디를
가야만 잘갔다고 칭찬을 들을까~?' 장소를 물색하다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에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학도암은 이미 여러 번이 인연을 지은 절이나 정작 마애사리탑은 만나지 못했다. 그는
2015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새내기 문화유산으로 아직까진 낯설은 마애사리탑의 생
김새도 구경하고 학도암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그곳을 이번 초파일의 첫 답사지
로 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꿈나라에서
서둘러 벗어나 오전 11시에 도봉동 집을 나섰다. 집 부근에서 도봉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창동역(1,4호선)으로 이동한 다음, 중계본동으로 가는 114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
여 노원우체국에서 두 발을 내린다.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중계본동의 여러 아파트를 지나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골목(중계
로14다길)으로 들어섰는데, 날이 날인지라 절로 향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징하게 말뚝을 박은 노원교회를 지나면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들
대신 불암산의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숲 바로 직전에는 황금색 배들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배밭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토산품인 먹골배로 봉화산(烽
火山)과 태릉 주변, 불암산 주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번잡한 시가지가 주로 연상
되는 서울에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배밭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에서 고구려 청동
호우를 만난 듯 꽤나 낯설고 신선하다.

불암산의 시원스런 산바람에 번뇌를 살짝 부탁하며 숲길을 오르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
로 추앙받는 서울둘레길이 마중한다. 총 거리가 무려 157km에 이르는 서울둘레길은 불
암산둘레길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살방한 산길의 정석인 둘레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연등의 물결을 따라 계속 오르막길을
고집하면 보이지 않던 학도암 경내와 주차장이 슬슬 꽁무니를 비춘다. 여기서 잠시 경
내를 접어두고 주차장 직전 오른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를 주목해보자. 그 바위 피부
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마애사리탑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하지만 너무 없는 듯
자리하고 있어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불암산 숲길
녹음(綠陰)에 잠긴 나무들이 시원한 내음을 베풀며 벌써부터 달라붙은
더위의 산물(땀)을 싹 단죄한다.


 

♠  학도암(鶴到庵) 입문 (마애사리탑)

▲  학도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4호

경내 직전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는 마애사리탑 2기가 살짝 서려있다. 마애사리탑이란 적당
한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고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조선 후기(19세기)에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 사찰에서 나타나는 서울 스타일의 사리탑<승탑(僧塔)>이다. 현재 학도암과 도봉산 천축
사(天竺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으며,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상도동 사자암(
獅子庵)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전할 뿐, 널리 유행하지는 못했다.

마애사리탑을 지닌 절은 하나 같이 산중에 자리해 있어 사리탑을 닦을 자리가 여의치 못했고
재정도 넉넉치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여 절 부근 바위를 활용해 조촐하게 공간을 다듬고 감
실을 닦은 다음 사리함을 봉안한 마애사리탑이 반짝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반 승탑보다 제작
비용도 많이 저렴하며 공간도 적게 잡아먹을 뿐 아니라 바위만 있으면 되니 갖추기는 쉽다.


▲  바위에 문신처럼 새겨진 마애사리탑
왼쪽은 '청신녀월영영주지탑', 오른쪽은 '환
당선사취근지탑'


학도암 마애사리탑은 바위 피부에 비석 모양으로 길쭉하고 얕게 자리를 만들고 윗쪽에 네모난
감실을 두어 사리함을 봉안했다. 하지만 그 감실은 오래전에 털렸고 그곳에 깃든 사리함 등의
유물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다.

왼쪽 사리탑은 '청신녀 월영영주지탑(淸信女 月影靈珠之塔)'으로 월영영주란 여인의 납골당이
다. 승려도 아닌 여인 신도의 사리탑을 경내 밑에 만들어줄 정도라면 절에 대한 공헌이 꽤 컸
던 모양이다. '嘉慶(가경)二十四年 己卯十月'이란 글씨가 옆에 새겨져 있어 가경24년 을묘년(
1819년) 10월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고 있으며, 오른쪽에 대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
가 하나 있을 뿐,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그리고 오른쪽 사리탑은 '환□당선사 취근지탑(幻□堂禪師 就根之塔)'으로 '환(幻)'과 '堂'
사이에 마치 총탄이 요란하게 할퀴고 간 듯, 크게 구멍이 나서 그 사이에 자리한 1자는 확인
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글씨는 멀쩡하여 '환ㅇ당 취근 선사'의 사리탑임을 알려준다.
조성 시기는 쓰여있지 않으나 돌을 다듬은 수법이나 양식으로 미루어 왼쪽 사리탑과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다만 누가 더 나이가 많은 지는 견주기가 어렵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마애사리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감실이 잘 남아있으며, 고맙게
도 사리탑 주인공과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하여 뒤늦게나마 2015년 8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만약 그 글
씨가 없었다면 비록 서울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라고 해도 그 가치
를 저평가 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리탑을 조성한 옛 사람들의 작은 센스가 이들의 가치를 돋보이게 해주어 사리탑의 미
래까지 챙겨준 것이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학도암 (오른쪽 바위 위에 석조지장보살상이 있음)

학도암의 낯선 존재, 마애사리탑을 둘러보고 초파일의 흥겨움으로 가득 묻어난 학도암 경내로
들어섰다. 절은 가파른 경사에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포근히 자리를 닦았는데 주차장에서 경
내로 인도하는 길은 크게 2개로 계단길과 차량을 위해 넓게 지은 오른쪽 길이 있다. 어느 길
로 가던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되나 이들 모두 경사의 압박이 조금 있어 잠시 숨을 헐떡이게
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중계본동과 하계동, 월계동,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새 건물 냄새가 진동하는 대웅전(大雄殿)

몇년 만에 다시 찾은 학도암은 세월의 흐름 그 이상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뇌리 속에 깊히 박힌 학도암의 모습 대신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또다른 모습이 나를 맞이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선방, 요사(寮舍),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모두 도맡았던 법당이 대웅전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2014년에 그 건물을 부시고 번듯하게 대웅전을 지어올렸고 지장보살상이 있
던 자리에는 종무소를 닦았다. (지장보살상은 바위 쪽으로 밀려남) 그리고 대웅전 아랫쪽에는
공양간을 갖춘 요사를 두어 철저히 분업화시켰다. 하여 예전보다는 정리되고 깔끔한 모습이지
만 한편으로는 낯설게 다가온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관음보살로 이
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뜨락에는 하얀 천막과 의자를 넉넉히 깔아 중생들의 편의
를 배려하였고, 관불의식의 현장도 닦아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도암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현판의 위엄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학도암은 불암산(507m) 서남쪽 자락 160m 고지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절이다. 숲이 무성
하고 작은 계곡이 옆에 흐르며, 멋드러진 바위가 주변에 포진해있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
다. 예로부터 이렇게 빼어난 경승지에는 학과 관련된 전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이곳 역
시 학이 날라와 머물렀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하여 학이 왔다는 뜻의 학도암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이 절은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불암산 어딘가에 있던 옛 암자를 옮겨와 창건했다고 한
다. 허나 그 암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불암산에는 적당한 절터도 전해오
지 않는다. 게다가 관련 기록도 남아있질 않아 창건 시기에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
나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17~1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70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주에 힘입어 절 뒤쪽 바위에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을 새겼으며
1875년에 벽운화상(碧雲和尙)이 절을 중창했다. 1878년에는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마애관
음보살을 보수했고, 1885년 벽운화상이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출신 화승(畵僧)인 경선(慶船)
에게 부탁하여 불상 1구를 개금(改金)하고 불화 6점을 봉안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922년 성담(聖曇)이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 소유로 넘어갔던 절 소유의 산림 10여 정보를 매
입하여 절의 경계를 넓혔으며, 1966년에 주지 김명호가 법당을 중건했다. 1970년 영산회상도
를 봉안하고 1972년에 삼성각에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2000년에는 마애불 옆에 있는
조그만 자연동굴을 넓혀 석조약사3존불을 안치해 약사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2005년에 승려 무이
(無二)가 법당 남쪽 공터를 닦아 석조지장보살상을 봉안했고, 2014
년에 다용도로 쓰이던 법당을 밀고 새로 대웅전과 요사, 종무소를 짓고 대웅전 밑에 공양간을
지어 2016년에 완성을 보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약사전,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마애사리탑을 간직하고 있다.

개발의 칼질이 절 밑 500m 아래까지 밀고 들어와 옛날과 달리 속세와 많이 가까워졌지만 짙은
숲이 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어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분위기를 잘 간직하
고 있으며, 절의 규모도 아담하여 두 눈으로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3 (종계로14다길 89 ☎ 02-930-6555)

▲  바위 위에 자리를 닦은 지장보살좌상
(2005년에 조성됨)

▲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마애관음보살좌상과
그를 품은 거대한 바위


 

♠  학도암 둘러보기

▲  초파일 특수를 위해 고생하는 아기부처의 관불의식 현장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년 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왔
다. 그 적지 않은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낸 터라 간만에 외출에 신이 난 표정
인데, 절을 찾은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관정)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아기부처 바로 옆에는 옥의 티처럼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
다본다. 마치 오늘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  대웅전, 종무소 앞에서 바라본 경내 뒷쪽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삼성각(三聖閣)
마애관음보살 우측 구석에 삼성각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972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진 칠성탱

▲  산신 식구들의 단란함이 느껴지는 산신탱


▲  석굴 형식으로 이루어진 약사전(藥師殿)

마애관음보살과 삼성각 사이에 동굴을 품은 장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도리에 약사전
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원래는 1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동굴로 그 내부에 기
도처로 쓰이는 공간이 있었으나 2000년에 동굴 내부를 넓히고 다져서 약사여래좌상과 일광보
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하고 약사전으로 삼았다.
약사전은 석굴 불전(佛殿)으로 한여름에는 시원하고 한겨울에는 따스해 경내의 조촐한 피서지
역할도 도맡고 있다.


▲  약사전 석굴에 자리를 닦은 석조약사3존불
연꽃 무늬가 새겨진 대좌에 앉아 왼손에 약합(藥盒)을 쥐어든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보관(寶冠)을 눌러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를 지킨다.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경내 뒷쪽이자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학도암의 자랑이자 꿀단지인 마애관음보살좌상이 있
다. 약사전을 품은 바위보다 2배 이상이나 커다란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는데 자신이 의
지한 바위만큼이나 장대한 규모로 마애불의 높이가 무려 13.4m에 이른다. 허나 허공을 가득
메운 알록달록 연등이 그의 모습을 온전하게 담는 것을 허용치 않아 사진에 담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1870년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조성되었다. 보통 고려
시대 마애불은 각기 개성이 넘치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반해 조선시대 마애불은 스케일
이 무척이나 좁아터졌던 조선을 닮아서 덩치가 대체로 작았다. (건물이나 성문도 이전 시대보
다 많이 작아짐) 허나 이 불상은 고려 마애불의 화신(化身) 마냥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여 명
성황후의 커다란 야망이 마애불에 고스란히 깃들여진 듯하다.
1870년 한씨 일가의 시주로 마애불을 보수했으며, 불상 왼쪽에 그와 관련된 50여 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조성시기와 제작자, 시주자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서울 지역에서는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에 깃든 고려시대 마애여래좌상(☞ 관련글 보
러가기
)에 버금가는 규모로 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된 선각 마애불이다. 이제 150년 정도
묵은 한참 때라 선의 아름다운 미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특이하게도 관음보살을 그 대
상으로 하여 조성했는데, 이 땅에서 오래된 마애불이 수천 개가 있지만 정작 관세음보살이 주
인공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  온전하게 담은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위엄
(2010년 4월)

▲  연등의 눈치를 피하며 옆에서 담아본
마애관음보살좌상


▲  마애관음보살의 얼굴

마애관음보살의 얼굴은 가늘면서도 볼에 살이 좀 있어 보인다. 좌우로 길쭉한 눈은 지그시 감
겨져 있고 그 위에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이 떠 있다. 그 눈썹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두텁
게 박혀있고, 코는 크고 두툼하여 복스럽게 보인다. 불상이 선각으로 얕게 조성되었지만 코만
큼은 돋음새김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약간 비뚤어져 보이는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전
체적인 얼굴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얼굴 주변을 밝히는 동그란 두광(頭光) 안에 보관을 표현했는데, 하얀 피부의 돌에 조각을 해
서 그렇지 정말로 호화로운 보관이다. 이마 위쪽에는 연화대좌를 갖춘 조그만 석가불의 모습
이 보이는데, 보관에 따로 불상까지 갖춘 관음보살은 처음이라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보
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冠帶) 양쪽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주렁주렁 달려 있어 보관에 대한 군침을 진하게 자극시키는데, 그가 잠시 보관을
내려놓는 사이에 살짝 가져가 머리에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  마애관음보살의 밑도리

마애불은 활짝 핀 연꽃대좌 위에 앉아있는데, 그 대좌 위로 오른쪽 발이 발가락, 발바닥과 함
께 보인다. 왼발은 옷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마애불로 조각 솜씨는 섬세하고 화려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마애
불로 꼽힐 만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져 있어 마애불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려준다.
마애불 앞에는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석등(石燈) 2기가 마애불 주변의 어둠을 몰아낸다.


▲  마애관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천하 (중계동과 노원구, 성북구 지역)
마애관세음보살 누님의 가피가 있기에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지역들은
오늘도 평안하다.

▲  학도암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초파일 절 투어 재미의 하나이자 백미(白眉)는 바로 공양밥 섭취이다. 지금까지 두 눈과 사진
기를 흥분이 넘치도록 호강을 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마애관음보살좌상이고 뭐고 바로 공양밥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접고
경내를 우선 둘러보았다. 경내가 조촐하고 마애관음보살과 마애사리탑을 빼면 고색의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답사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가 없다.

공양간 주변은 이미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학도암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
한 공양밥은 실외에서 나눠주고 있었는데, 그 주변과 공양간 실내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
이다. 다행히 밥을 받는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아서 금방 밥을 받았다.
이곳 공양밥은 밥이 담긴 그릇에 호박과 콩나물, 시금치 등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이른 더위와 비빔밥의 매운 맛을 잠재우고자 시원한
미역냉국이 딸려 나왔고, 후식용으로 수박 1조각과 절편이 담긴 떡 1봉지도 같이 제공되어 아
주 넉넉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었다. (밥과 나물은 리필 가능함)

팔이 부러질 정도로 나온 공양밥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어던지고
공양간 내부로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잡고 공양밥 섭취에 임한다. 양이 많아 보이던 공양밥이
지만 시장기가 상당해 숟가락 몇 번 만에 이내 빈 그릇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수박과 절편까
지 섭취하니 그야말로 점심 1끼 배부르게 잘먹었다.
그렇게 공양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후식거리로 믹스 커피도 준비되어 있어 커피까지 1잔 챙
겨먹으며 식곤증을 단죄했다. 그 시간에도 학도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초파일 분위기를 누리고
자 꾸역꾸역 들어왔고, 공양간 역시 계속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 공양을 끝으로 오랜만에 찾은 학도암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나에게는 그
날 학도암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학도암을 뒤로하며 ~~~ (불암산 숲길)

▲  중계본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12호

중계본동 시내로 나오니 중계로 길가에 오래된 느티나무 하나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길을 붙
잡는다. 뭔가 싶어서 호기심에 살펴보니 110년 정도 묵은 보호수 느티나무였다.
그는 높이 17m, 둘레 3.4m로 2005년에 서울시 보호수의 등급을 받았다. (그 당시 추정 나이는
약 100년) 예전에는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였지만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고 아파
트가 마구 들어서면서 이제는 가로수의 역할로 바뀌었다. 길 건너편에도 오래된 보호수가 있
으나 모두 쿨하게 무시하고 다음 미답지 사찰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5월 1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4월 2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의 은빛 설경 ~~~ (거북바위, 구룡사계곡, 구룡폭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 '

▲  구룡사 소나무 숲길


 

울 제국이 막바지에 이르던 2월 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원주에 있는 치악산 구룡사를
찾았다.
그곳을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서울에서 적은 비용에 간단히 갈만한 강원 영서/충청 지
역 명소를 물색하다가 그곳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치악산(雉岳山)은 이 땅의 국립공원의 하나로 구룡사는 치악산의 대표 관문이다. 그곳은
이미 중학교 때 인연이 있으나 그건 어언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간만에 구룡사도
둘러보고 구룡사계곡을 따라 세렴폭포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침 9시에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경의/중앙선 전철로 환승
하여 양평역(楊平驛)에서 내렸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로 갈
아탔는데, 좌석이 없어서 강제 입석을 해야 했다.
원주(原州)의 관문인 원주역에 발을 내리니 바람이 칼날처럼 꽤 매섭다. 멀리 보이는 치
악산과 여러 뫼들은 겨울 제국(帝國)이 내린 하얀 옷을 반쪽씩 입고 있어 한겨울로 돌아
간 기분이다.

원주역에서 구룡사로 가는 원주시내버스 41번(관설동↔구룡사)을 타고 시내를 벗어나 변
두리로 나오니 멀리서만 보이던 하얀 눈이 바로 차창 밖에 진을 치고 있었고, 구룡사 종
점에 두 발을 내리니 여기는 시내와 달리 완전 겨울의 한복판 그 자체였다. 사방에 눈이
내려앉아 부질없는 설경(雪景)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소쩍새가 울면서 겨울잠에 잠
든 천하를 깨우고, 천하만물들은 봄 환영에 여념이 없건만 겨울이 다시금 위엄을 보이며
원상태로 돌리니 완전 다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 되었다.


▲  눈에 덮힌 구룡사 종점 주변 (학곡저수지 방향)


 

♠  구룡사 입문 (황장금표, 부도군, 거북바위)

▲  소나무가 무성한 구룡사 매표소 주변

구룡사 종점 주변에는 나들이꾼과 산꾼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
다. 날씨가 구려서 그런지 주말임에도 산꾼이 별로 없어 식당들은 대체로 썰렁하다.
치악산의 자랑인 황장목(黃腸木) 소나무가 훤칠한 키로 하늘을 훔치며, 그의 밑도리에 그늘을
드리운다.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반가운 그늘이었겠지만, 겨울 끝 무렵이라 그 그늘이 은근히
춥다. 천하를 뒤덮은 눈구름이 잠시 개이고, 구름들 사이로 푸른 하늘과 햇살이 속살을 비추
어 이제 날씨가 개이는구나 싶었지만 그 역시 잠시 뿐이다.

식당 거리 끝에 이르니 썩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나타나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대놓고 노려본
다.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2,500원, 오기 전에는 막연히 2,000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먹고 살기가 나처럼 힘든건지 무려 500원이나 높은 가격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문화유산도 별
로 없는 절이 문화재관람료란 명목으로 고액의 돈을 대놓고 뜯으려 하여 절에서 많이 통용되
었던 여러 할인안을 제시했으나 무조건 정가를 내라고 인상을 쓴다.
그냥 되돌아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다른 대체 장소를 둔 것도 아니어서 울며 겨자먹고 토하
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루었다. (국립공원 고찰 중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며 입장료를 뜯는
절이 여럿 있음)

이유도 불분명한 소위 구룡사의 입장료삥에 불쾌한 마음을 가득 품으며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
서니 바로 왼쪽에 황장금표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오고, 그 안쪽 높은 곳에 황장금표가 나그네
들의 시선도 받지 못하며 보호 난간에 둘러싸인 채, 누워있다.


▲  바위에 새겨진 학곡리 황장금표(黃腸禁標) - 강원도 지방기념물 30호

황장금표는 조선 조정에서 황장목이란 소나무를 보호하고자 백성들의 출입과 벌채를 금지하는
경고 안내문이다. 황장목은 나무 수심부분의 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우수한 소나무로 조
선 왕실에 필요한 물건이나 궁궐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다.
이 금표는 황장목이 자라는 곳 경계 지점에 설치되었는데, 폭 110cm, 높이 47cm, 둘레 270cm
크기의 자연산 바위로 그 피부에 '황장금표' 4자가 조금은 뚜렷하게 눈을 뜨고 있다. 근래에
금(禁)과 표(標) 사이에 동(東)이란 글자가 추가로 확인되어 황장금동표(黃腸禁東標) 5글자가
되었는데, 이는 여기서 동쪽이 황장금표 구역이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 외에도 구룡사
입구 주차장 부근 도로에도 황장금표가 하나 더 있다. (땅속에 좀 묻혀 있음)

조선 초에는 전국 60개소의 황장목 봉산(封山)이 있었으며, '관동읍지(關東邑誌)'에 구룡사가
황장소봉지(黃腸所封地)라 나와있다.


▲  구룡교(龜龍橋)

황장금표를 지나 3분 정도 가면 구룡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여기서 계곡 위에 유연하게 걸린
구룡교를 건너면 소나무 등 온갖 나무로 가득한 구룡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구룡교 난
간 양쪽 끝부분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려있어 다리의 이름값을
돕는다.


▲  겨울에 잠긴 구룡교 주변 구룡사계곡

▲  북쪽을 바라보는 원통문(圓通門)

구룡교를 건너 얼마 안가면 원통문이란 이름의 일주문(一柱門)이 마중을 한다. 겨울이 채색한
하얀 지붕을 머리에 인 원통문 옆에는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절에 왔으면 절의 정문인 일주문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속세에서 가져온 거추장스러운 번뇌를 멀리 날려줄 것을 산바람에 부탁하며 문을 들어선다.


▲  구룡사 승탑(僧塔, 부도)들

일주문을 지나 2분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승탑과 비석이 어우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구
룡사 승려의 넋이 깃든 승탑의 보금자리로 모두 7기가 있는데, 이중 6기가 조선 후기에 조성
된 것이다. 조그만 몸통에 고색의 때가 자욱한 이들은 석종형(石鐘形) 승탑으로 조금씩 모습
을 달리하고 있다.
승탑 사이로 3기의 탑비(塔碑)가 있는데, 세량당 초운대사탑(洗梁堂 楚雲大師塔)과 충허당(沖
虛堂), 뇌파당(雷波堂)의 비석으로 18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조성된 것이다.


▲  무총대선사탑(武總大禪師塔)과 탑비

승탑 무리를 장식하는 승탑 중 가장 앞에 있는 있는 것이 무총대선사의 탑이다. 이곳에서 가
장 큰 승탑으로 뒤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고참 부도 6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를 지킨다.
이 탑과 탑비는 2005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주인인 무총대선사는 구한말(舊韓末)에 활약했
던 승려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하늘과 땅, 사람, 귀신이 모두 분노하자 썩어빠진 권력층 타
도와 토왜(討倭)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전국적으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무총은 승병(僧兵
)을 일으켜 의승장(義僧將)으로 경상도로 내려가 승병 봉기를 시도했고, 경북 예천에서 대구
승려 성기(聖基)가 경상도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짜고 의병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응
징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의 활약은 원주항일기념사업회에서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을 고증
하는 과정에서 밝혀져 뒤늦게나마 그의 승탑과 비를 만들어 그의 애국충절을 기렸다.


▲  승탑 무리와 국사단 사이에 닦여진 쉼터
숲길 한복판에 너른 공간을 닦아 쉼터 겸 식당을 두었다. 앞 공터에는 둥글게 터를
다지고 조그만 돌탑을 테두리 부분에 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구룡사 국사단(局司壇)

쉼터를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은 차량, 오른쪽은 뚜벅이 길인데, 어느 길
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다. 차량의 왕래도 별로 없는 편이고, 어느 길로 가든 구룡사는 나오
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길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높이 터를 다지고 들어선 국사단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
은 절터를 지키는 신을 봉안한 건물로 여기서 국사(局司)는 절터를 뜻한다. 옛날부터 있던 것
으로 예전에는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었으나 근래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덩치를 불렸다.
경내나 경내 인근에 이렇게 국사단을 둔 절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가 대표적이다.

평소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문창살 사이로 속인들이 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는 수
밖에는 없는데,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위패가 봉안되어 있을 뿐, 딱히 다른 것은 보이질 않는
다.


▲  구룡사를 지키던 거북바위

국사단을 지나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목과 몸이 끊어진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뚜벅이길보다는 차량길로 가면 찾기가 더 쉬운데 이 바위가 구룡사의 오랜 지킴이인
거북바위이다.
구룡사에는 2개에 재미난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창건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거
북바위에 얽힌 설화이다. 오랫동안 절의 운을 지키고 선 바위였으나 오히려 사람들의 욕심으
로 목이 끊어져 두 동강이 난 비운의 존재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에서 나오는 산나물 상당수를 왕실에 공납(貢納)했다. 그래서 구룡사 주
지승을 산나물 공납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삼았는데, 산에서 나온 모든 산나물은 모두 주지승
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여기서 통과된 것만 서울로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어
떻게든 심사에서 통과하고자 또는 나물값을 제대로 받고자 주지승에게 별도의 뇌물을 건넸다.
계속되는 뇌물 공세에 입이 귀까지 걸린 주지승은 욕심이 더욱 커져 돈 챙기기에 급급하였고
그로 인해 절의 이미지가 하락하여 자연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절이 몰락한 것은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
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두 귀가 솔깃해진 주지승은 바로 거북바위를 두 동강냈지만 오히려 신도의 수가 줄었
고, 수입이 줄어 문을 닫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구룡사에 반감이 있거나 인근 경쟁
사찰의 승려가 거북바위가 절을 지키는 존재임을 눈치채고 절을 망하게 하고자 그런 말을 던
진 듯 싶다. 그걸 주지승이 생각도 없이 받아들여 절 지킴이 바위를 스스로 아작낸 것이다.

이후 어느 날,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넋두리를 하니 도승이
'절이 몰락한 것은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그 말에 주지승이 귀를 크게 하고
'그건 무슨 말씀이오?'

그러자 도승이
'이 절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주었소. 허나 그 바위를 동강을 내어 혈맥을
끊었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주지승이 애타게 방안을 묻자. 도승은
'거북바위는 이미 죽었으니 그를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九)에서 구(龜)로 바꾸
시오. <그 당시 절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음>'

그 연유로 지금의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이 갈렸던 것이다. 이후 절은 그런데로 흥성을 누려
치악산 제일의 사찰이라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거북바위는 마치 거북이가 오르막을 오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그의 진면목을 보고자 한
다면 거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보기 바란다. 그럼 정말 거북바위의 이름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는 목과 몸통 부분이 붙어있었으나, 생각 없는 주지승이
목을 끊어버려 지금의 비통한 모습이 되었다.


▲  하얀 소복을 걸친 구룡사 은행나무 (강원-원주-38호)

거북바위를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커다란 은행나무가 중생을 맞이한다. 이 나무는 추정 나
이가 약 200년 정도로 높이 19m, 가슴둘레 1.25m에 큰 나무이다. 봄이 곧 도래할 시기라 봄맞
을 준비에 부산해야 되지만 늦겨울이 내린 하얀 눈송이가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들러 붙
어있으니 진정한 봄은 아직도 멀었다. (보통 겨울은 3월까지 감)

은행나무를 지나면 산자락에 터를 다지고 담장과 보광루 등의 여러 굵직한 건물로 속살을 가
린 구룡사 경내 밑에 이르게 된다.


 

♠  치악산 북쪽에 안긴 원주 제일의 고찰, 구룡사(龜龍寺)

치악산 북쪽 자락 소나무숲에 포근히 둥지를 튼 구룡사는 치악산에서 제일 큰 절이자 원주 지
역에서 가장 큰 절이기도 하다. 흔히 치악산에 가면 구룡사를 많이 거쳐간다. 다른 코스도 있
지만 구룡사가 가장 널리 알려졌고 교통도 괜찮기 때문이다.

구룡사는 66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구룡사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의상은 당(唐)나라에 머물며 한참 화엄종(華嚴宗)을 익히던 시절이므로 도저히 시기가 맞지가
않는다. 그는 66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670년에 귀국을 했기 때문이다. 귀국하여 신라 조정의
허가를 받아 세운 것이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의상대사 외에도 무착대사(
無着大師)란 인물이 비슷한 시기에 세웠다고 하나 이를 입증할 기
록과 유물은 전혀 없으며, 조선 초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구룡사
의 이름 3자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경내에 전하는 유물도 모두 조선 후기(18세기 이후) 것으
로 1706년에 만들어진 와당이 제일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구룡사의 바램대로 신라는 커녕 고
려 때 지어졌을 가능성도 적어 보이며, 조선 초나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중기까지도 적당한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으며,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
圖書)에는 85칸의 건물이 있고, 절 앞에 용연(龍淵)이 있어 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를 하면 항
상 반응이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구룡사의 제일 오래된 기록이다. 그 시절에는 보광
루나 대웅전, 승탑(부도), 삼장탱화 등이 조성되던 때이기도 하다.

1895년 이곳 승려인 총무대선사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6.25시절에는 총탄도 비켜
가 딱히 피해가 없었다. 1966년 보광루를 해체복원하고, 1968년에 심검당과 요수를 보수했으
며, 2000년 이후에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큰 규모를 이루게 되었다. 허나 2004
년에는 강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져 안그래도 없는 지정
문화재가 하나 줄어들었다.

▲  구룡사 범종각(梵鐘閣)

▲  설선당과 적묵당(寂默堂)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천불전, 보광루, 설선당(종무소), 응진전, 관음전, 삼성
각, 사천왕문, 국사단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보광루를 빼면 고색의 기운은 별로 없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광루,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74호), 아
미타설법도(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60호), 금고(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61호) 등의 지방문
화재와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으며, 그 외에 삼장보살도(보물 1855호)와 용다사(龍多
寺) 동종(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33호)도 있으나 이들은 신변보호를 위해 멀리 월정사(月精
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설법도, 금고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모두 지나치고 말았음)

구룡사는 하늘을 가리고 늘어선 수해(樹海) 속에 자리해 있으며, 멋드러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승지로 꼽힌다. 계속되는 불사로 커다란 건물이 마구 들어서면서 예전과 달리 조촐하
고 아늑했던 멋은 좀 떨어지긴 했으나 속세(俗世)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첩첩한 산골에 위치
해 있어 번뇌를 털기에는 좋다.
고색의 기운이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재밌는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어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믿거나 말거나 웃고 넘기는 구룡사 창건설화
의상대사(또는 무착대사)는 절을 세울 명당을 찾고자 치악산을 온종일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가 지금의 절자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이유는 이곳 동쪽으로 치악산의 주봉인 비
로봉(毘盧峯)이 있고, 다시 천지봉의 지맥(地脈)이 앞을 가로지른데다가 수려한 계곡이 흐르
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이야 메우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그
곳에 9마리에 용이 살고 있었다. 하여 의상은 연못 앞에서 한숨을 쉬며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어야겠는데, 용이 살고 있으니 그들을 내보내야 일을 할 수 있겠군,
참 난감하구나~~'

그 말을 엿들은 용들은 뚜껑이 단단히 열려 밖으로 나와 의상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땡중! 너가 우리를 내쫓을 생각인가본데,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러니
서로 내기를 하는 건 어떠냐? 우리가 이기면 너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만약 너가 이기면
흔쾌히 이곳을 넘겨주겠다'
용이 의상을 깔보며 자신만만하게 내기를 제안하자 의상은 빙그레 웃으며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고 하느냐?'
그러자 용은
'잠시 뒤에 알게 될 것이다. 각오해라'

답을 하며, 9마리가 모두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비를 쏟아 부어 순
식간에 모든 산들이 물에 잠겼다. 한참 동안이나 비를 퍼부은 용은 의상이 물에 빠져 골로 갔
을 것이라 여기고 비를 거두고 내려왔다. 허나 뜻밖에도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조그
만 배를 띄우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  경내 바깥 부분

▲  천불전(千佛殿)

부시시 잠에서 깬 의상은 그의 멀쩡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 용을 보며
'너희들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냐. 실망이구나.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 차례이니 너희들은 눈
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보아라'

하면서 부적 1장을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뜨거
움을 참지 못한 용은 연못 밖으로 뛰쳐나와 한달음에 동해바다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얼마
나 다급했던지 용 8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8조각으로 쪼개어 도망을 친 것이다. (현재 구룡사
앞산은 동해를 향해 8개의 골이 패여져 있음)
그리고 나머지 용 1마리는 눈이 매우 침침해 멀리 못가고 절 남쪽 구룡소(용연)에 들어가 살
았다고 한다. 그 용은 가뭄 때 비를 빌면 비를 내려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하며, 늦
게까지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구룡사란 이름은 바로 9마리의 용을 내쫓은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구(九)가 구(龜)로 변경됨>

이 창건설화는 구룡사에서 그럴싸하게 내놓은 전설이라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전설의 내용을 통해 현재 절 자리에 9마리의 용으로 표현된 토착 종교 세력이 있었음을 추정
해 볼 수 있다. 절의 창건주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들어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내쫓으려고 했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창건주의 빛나는 승리로 그들을 내쫓고 절을 세운 것을 이런저런 살
을 붙여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구룡사 앞 산줄기

▲  구룡소

* 구룡사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 (구룡사로 500 ☎ 033-732-4800)
* 구룡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설산(雪山)이 되버린 구룡사 앞 산줄기
8마리의 용이 저 산줄기를 쪼개고 도망쳤다고 한다. 얼마나 놀랬으면 그랬을까..

▲  거대한 사천왕문(四天王門)

구룡사는 지형적인 위치로 법당을 비롯한 상당수 건물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경내 앞에 자
리한 사천왕문 역시 용들이 쪼갰다는 동쪽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
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천왕문치고는 특이하게 중층구조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2000년 이후에 지어진 그는 겉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으로 마치 성문처럼 규모가 장대하여 속
인들을 잔뜩 주눅들게 만들며, 우리나라 천왕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  사천왕문 좌측에 자리한 보광공덕탑
(普光功德塔)

▲  사천왕문 우측의 석조미륵불상

▲  각자의 애용품을 지니며 문을 지키고 선 사천왕의 위엄
저들의 검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선다.

▲  보광루(普光樓) -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천왕문을 들어서 높이 걸린 계단을 오르면 보광루가 바로 경내를 가리며 나타난다. 이 건물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19세기 이후에 지어졌다. 누각이다보니 2층 규모로 되어있는데 아
랫층은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으며, 윗층에는 우물마루
로 바닥을 만들고 대웅전이 있는 서쪽을 빼고 싹 벽으로 막아 동쪽으로 창문을 내고 강당(講
堂) 및 법회 공간으로 사용했다.
정면 가운데 칸인 평방(平枋)에는 치악산 구룡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
주며, 누각 아랫층 가운데에 마련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 천천히 위
로 솟아나 웅장한 규모를 드러낸다.
보광루 2층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멍석이 깔려져 있었다. 3명이 3달에 걸쳐 만들었다
고 전하는 이곳의 자랑으로 현재는 보호를 위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어 관람이 어렵다.


▲  보광루 앞에서 바라본 사천왕문 지붕과 치악산 북쪽 줄기
잠시 맑은 하늘을 되찾더니만 곧 구름들이 몰려와 잔뜩 인상을 부린다.
그리고는 다시 폭설을 투하해 치악산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  구룡사 둘러보기

▲  대웅전(大雄殿)

보광루와 마주보고 있는 대웅전은 구룡사의 법당(法堂)으로 한때는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24
의 지위를 누렸던 존재이다. 허나 2003년 화재로 무너지면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었
으며, 이후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으나 날라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봉안된 석가3존불과 신중탱, 감로탱 등
은 모두 2004년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찾을 수 없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란히 3존불을 이루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석가불은 2003년 대웅전 화재에 대한 불만일까? 인상을 조금 쓴 듯 보이며 좌우 협시
불(夾侍佛)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다.

▲  붉은 지붕의 화려한 닫집
너무 휘황찬란하여 눈이 멀 지경이다.

▲  대웅전 우측 영가단(靈駕壇)에 있는
최규하 전대통령 내외 영정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샘터
평소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사람이 샘터 주
변 네모난 공간에 다가서면 알아서 물을 쏟아
내는 21세기형(?) 자동시스템의 샘터이다.

     ◀  천불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
우에 협시해 있다.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
(金銅佛) 1,000기가 빼곡히 들어앉아 일대 장
관을 이룬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정면이 아닌 다소 우측에 비켜 자리한 탑으로 근래에 장만했다.

▲  천불전 좌측에 놓여진 탱화 3점
저들에게 맞는 마땅한 자리가 없는지 천불전 좌측 구석에서 잉여 신세를 지내고 있다.
제일 앞에 놓인 것은 산신탱으로 흰 수염의 산신 옆에 앉은 이는 여자 산신이다.
허나 그림으로 봐서는 완전 산신 부부처럼 다가온다.

▲  천불전 뒤쪽 높다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로 칠성탱은 2000년에,
산신탱과 독성탱은 2002년에 그려졌다.

▲  산신 가족이 그려진 산신탱

▲  칠성 가족이 그려진 칠성탱

▲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

▲  관음보살의 거처인 관음전(觀音殿)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

대웅전 좌측 뒤쪽에 있는 관음전과 응진전은 2000년 이후에 숲을 밀어내고 일군 공간이다. 응
진전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 그리고 조그만 500나한이 봉안되어
있으며, 나한의 모습이 우리나라 7,000만 인구만큼이나 다양하여 눈길을 끈다.


▲  응진전 석가불
석가불 좌우로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 있다.

▲  나한으로 가득한 응진전 내부


▲  고양이 같은 호랑이를 옆에 품은 나한의 위엄 <나반존자(那畔尊者)인듯?>

▲  눈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눈폭탄을 투하한다.


 

♠  치악산 마무리

▲  폭설에 시야마저 흐릿한 사천왕문 주변

절을 둘러보는 사이에 겨울의 사주를 받은 구름들이 전력을 다시 가다듬고 하늘을 가렸다. 아
직 오후 한참 시간이지만 이내 저녁처럼 어두워지고 다시 눈폭탄을 투하하면서 천하는 벌집이
몇 번이나 뒤집힌 듯, 혼란에 빠진다. 겨울 산행 장비를 갖추지 못한 나는 여기서 더 올라갈
것인지. 쿨하게 철수할 것인지를 고심해야 했다. (그날 기상청은 눈이 안온다고 예보했음;;;)

그래도 개념없이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 여기까지 왔는데, 구룡소와 선녀탕까지는 올라가야 직
성이 풀릴 듯 싶어서 사천왕문 남쪽에 있는 구룡사 기념품점에서 조금 대기를 하다가 눈의 공
세가 약간 멎은 틈을 타 다시 길을 나섰다.


▲  구룡소(九龍沼)와 구룡폭포

구룡사 기념품점에서 길을 나선지 1분도 안되어 기가 막힌 풍경이 나의 발길을 붙잡고 늘어진
다. 바로 구룡소이다. 이곳은 절 창건주에게 추방된 9마리의 용 중, 시력이 안좋은 용이 살았
다는 현장이다. 그 용은 이곳에 머물며 가뭄에 비를 내려주는 등, 좋은 일을 하다가 승천했다
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소의 수심이 깊고, 색감이 아주 연해 용이 살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청정함을 자랑하며, 구
룡소 위에는 조촐한 높이의 구룡폭포가 상류의 물을 실타래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구룡소 주
변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계곡에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구룡소 절경에 단단히 시샘한 겨울이 눈을 날리며 그를 가리려고 한다.

▲  구룡소 옆 탐방로 (구룡사 방향)

▲  눈에 뒤덮힌 구룡사계곡 상류
봄을 알리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도 정녕 소용이 없는 것인가?

▲  치악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겨울이 그린 수채화에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인간의 그 잘난 언어와 문자로
감히 대자연의 작품을 표현한다는 것이 건방질 정도로 말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룡자연해설센터

구룡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구룡자연해설센터가 나온다. 이곳은 치악산의 자연과 생태를 살
펴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자연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주변에 여러 꽃과 식물을 심어 자
연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겨울에 의해 완전 눈밭이 되버렸으니 현재로써는 할 것
이 없다. 잎이 피고 꽃이 자라는 3월 말 이후에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  구룡자연해설센터 주변 계곡

구룡자연해설센터에서 나의 발길은 멈추었다. 세렴폭포와 선녀탕까지 올라가고 싶었으나 날씨
도 영 좋지 못해 가고자 하는 의욕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금은 아쉽고 여운이 좀 남지
만 어차피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발길을 180도 돌려 구룡사로 나올 때는 길을 좀 달리하여 계곡 동쪽에 있는 대곡야영장을 경
유했다. 야영장과 식수대는 아직도 겨울의 단잠에 빠져 깨어나질 못했다. 한없이 쏟아지던 눈
도 이젠 고갈이 되었는지 완전히 멎었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삐죽 속살을 드러낸다.

구룡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앞서 언급한 거북바위를 둘러보고(올라갈 때는 어디에 있는지 몰라
서 지나쳤음) 일주문과 구룡교, 황장금표를 거쳐 구룡사 종점으로 내려오니 마침 속세로 나가
는 원주시내버스 41-1번(구룡사↔관설동)이 치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떠날 준비
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에 머뭇거림도 없이 그 버스를 잡아타고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치악산 구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12pt입니다. (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3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늦겨울에 즐긴 고즈넉한 산사 나들이, 세종시 운주산 비암사 ~~~ (비암사 도깨비도로)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세종시 비암사 '


 

겨울 제국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2월의 마지막 주말, 세종시 제일의 고찰(古刹)인 비암사
를 찾았다.

비암사가 있는 세종시(世宗市)는 옛 충남 연기군(燕岐郡)으로 2005년 국가 주도의 행정중
심복합도시를 조성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조선 세종의 묘호(
廟號)를 따 세종시로 간판을 갈았다. 이때 공주시 장기면과 청원군 부강면이 세종시의 일
원이 되었다. (세종시의 정식 이름은 '세종특별자치시')

주말 오전에 일찌감치 집을 나서 간만에 근성도 테스트할 겸, 1호선 전철을 타고 천안(天
安)까지 쭈욱 내려갔다. 소요시간은 2시간 50분. 방학역(1호선)을 기준으로 무려 115km에
달하는 그 장대한 거리를 딱딱한 전철 의자에 의지하여 가야 되는 고행(苦行)의 길이지만
버스와 전철에 최적화된 뼛속 깊은 서민인지라 별 어려움 없이 근성 시험을 마쳤다.

천안역에서 천안시내버스 700번(안서동↔전의)을 타고 소정면과 함께 세종시의 북부를 이
루고 있는 전의면(全義面)으로 이동하여 전의의 중심인 전의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
서 다방리로 들어가는 세종시내버스 82번으로 환승, 전의면의 남쪽 산하를 비집고 들어가
비암사입구에 하차했다.


 

♠  비암사 입문 (도깨비도로)

▲  인간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비암사 도깨비도로 (서쪽에서 본 모습)

비암사입구에서 비암사를 향해 10분 정도 들어가면 도깨비도로가 나타난다. 도깨비도로는 인
간의 두 눈이 결코 정상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현장으로 내리막길을 마치 오르막길처럼 보이게
하는 신기한 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이 땅에는 제주도의 '1100도로'를 비롯하여 속칭 도깨비도로가 여럿 있는데, 말로만 듣던 그
런 길을 직접 겪으니 눈이 요상하게 홀린 듯, 신기하다. 내리막길이 분명한데 올라가는 것처
럼 반대로 보이니 말이다.

이 도깨비도로(Mysterious Road)는 좁고 구불구불했던 비암사 길을 2005년부터 2007년 11월까
지 크게 손질하면서 나온 것으로 출발점(시작점 표시가 있음)에서 보면 꽤 오르막길로 보이지
만 실제로는 120cm 낮은 내리막길이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눈을 믿지 말자.


▲  동쪽에서 본 도깨비도로
이렇게 보면 정말 내리막길처럼 다가오지만 현실은 오르막길이다.

▲  해와 달, 나무의 조그만 거울, 다비숲공원 연못
도깨비도로를 지나 3거리에서 왼쪽(북쪽)으로 들어서면 조그만 연못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부터 경내 주차장 직전까지 다비숲공원 영역으로 연못과 3층석탑,
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  다비숲공원 표석

▲  비암사 부도<浮屠, 승탑(僧塔)>

다비숲공원을 지나 주차장에 이르면 왼쪽(북쪽)에 고색이 짙은 석종형(石鐘形) 승탑 2기가 눈
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 승탑 형제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노란 때가 입혀진 오른쪽 탑은 피부에 '청한당
성정탑(淸閑堂性淨塔)'이라 쓰여 있어 탑의 이름은 성정, 탑의 주인은 승려 청한당임을 알려
준다. 하지만 그의 대한 정보와 탑 조성 시기는 드러난 것이 전혀 없어 한 곡절 아쉬움을 건
넨다.
그리고 왼쪽 승탑은 오른쪽 것과 달리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기단부에 '강희갑
오입탑(康熙甲午入塔)'이라 쓰여 있어 1714년)에 탑이 세워졌음을 살짝 귀뜀해주며, '施主俊
祂(시주준야)'란 글씨도 추가로 새겨져 있어 시주자가 '준야'임을 알려준다.


▲  왼쪽 승탑 기단부에 선명하게 새겨진 '강희 갑오 입탑' 6글자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비암사


※ 세종시 제일의 고찰이자, 백제의 마지막 종묘(宗廟)사찰, 운주산 비암사(雲住山 碑岩寺)
운주산의 한참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비암사는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로 일컬어진
다. 매년 4월마다 백제 제왕과 대신들에게 백제대제(百濟大祭)를 지내기 때문이다. 그 대제로
비암사는 천하에 조금씩 이름 3자를 알리고 있다.

비암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
(五鳳) 원년인 기원전
57년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때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니
100% 맞지가 않는다. 다만 3층석탑에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국보 106호)'이라 불리는
석불비상(石佛碑像)이 발견되었는데, 그 비상에는 계유년(癸酉年)인 673년 4월 혜명대사
(惠明
大師)가 전씨(全氏)를 비롯한 백제 유민들의 뜻을 모아 백제왕과 대신들, 법계중생들의 안녕
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이를 근거로 673년 창건설이 크게 설득을 얻고 있다.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많은 지역을 호령하며 천하의 바다를 름잡았던 백제, 허나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660년 7월 나당연합군과 웅진성주(熊津城主)를 비롯한 매국노에 의해 허망
하게
멸망의 비운을 당하자 백제 유민들은 충청도와 전라도, 왜열도에서 치열하게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왜왕(倭王)상국(上國) 백제의 멸망에 크게 곡소리를 내며 서둘러
배를 만들고 군사를 조련해 백제 부흥군을 도왔다.
비암사를 품은
세종시 지역은 백제의 국도(國都)웅진(熊津, 공주) 바로 동쪽 동네로 백
제 부흥군은 세종시 도처에 웅거해 나당연합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허나 백제 부흥
군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663년 거진 진압되고 만다.

백제 부흥이 물거품이 되자 비암사 주변에 살
았던 전씨를 중심으로 한 유민들은 망국(亡國)
한을 달래고자 673년에 비암사 자리에 백제 왕실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석불비상을 빚었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비상이 완성되자 제사를 올리니 그것이 비암사의 상징이자 백제를 그리
워하는
이들의 가슴을 치는 백제대제(百濟大祭)이며, 그 연유로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이란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이후 4월 15일마다 제를 지냈다고 하며, 그 역사가 무려 1,300년이 넘
는다. 지금은 편의상 양력에 지낸다.

673년 창건설 외에도 후삼국시대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물증은 없다. 다만 경
내에 고려 때 조성된 3층석탑과 8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고려 때도 법등
(法燈)을 유
지했음을 보여주며, 그 이후 뚜렷한
사적(事績)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전역지
(全域
誌)'에 비암사가 나오고, 경내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극락보전과 괘불 등이 있어 그런데
로 절을 꾸렸음을 보여준다.

1960년에 3층석탑에서 앞서 언급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과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
阿彌陀佛碑像, 보물 367호)','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 보물 368호)' 등
이 발견되어 천하에 크게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이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모두 제자리를 떠
나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다.
1991년 대웅전을 새로 지어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1995년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산신각과 요
사 2동을 지었다. 그리고 1996년 범종각을 세우고, 2007년에는 절 진입로를 정비했다. (이때
도깨비도로가 태어남)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산신각, 설선당, 명부전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보전과
3층석탑,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영산회괘불탱화 등의 지방문화재와 800년 묵은 느티나무, 조선
후기 승탑 2기 등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매년 4월 15일에는 백제대제가 성황리에 열리는데, 이때 영산회괘불탱화(세종시 지방유형문화
재 12호
)가 외출을 나와 대제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일
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비싼 존재임)

*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 4 (비암사길 137 ☎ 044-863-0230)


▲  비암사 3층석탑과 극락보전


 

♠  비암사 둘러보기 (느티나무, 극락보전 주변)

▲  비암사 느티나무 - 세종시 보호수 8-17호

주차장에서 비암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느티나무 옆에 늘어진 돌계단을 올라야 된다. 계단 윗
쪽에는 장대하게 자라난 느티나무가 천하를 굽어보며 중생을 검문하고 있는데, 비암사는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이 없어 돌계단과 느티나무가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해주고 있다.
허나 느티나무가 아무리 기골이 장대한들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영혼까지 몽땅 털린 가련한 존
재에 불과하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간절히 봄의 해방군을 열망하는 모습이 석불비상을
만들며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했던 백제 유민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느티나무는 세종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197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 당시 추
정 나이가 약 81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이 얹혀져 대략 850살 정도 되었다. 지방기념물
이나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으나 아직까지 보호수 등급에 머물러 있으니 아무래
도 관련 철밥통들의 보는 눈이 없나 보다. 도깨비도로에 홀린 탓일까?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 7.5m로 방대한 나이에 비해 덩치는 작은 편이며, 잎이 밑에서 피어
나 윗쪽으로 올라가면 흉년, 위에서 아래로 피면 풍년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올해는 과연 잎
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사람의 심리상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것이
니 매년마다 바람직한 곳에서 잎이 시작되어 주변 농민들의 마음에 늘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
면 좋겠다. 그것이 비암사와 느티나무의 중생들을 위한 소임일 것이다.


▲  중생들에게 금연을 권하는 비암사 느티나무
호랑이가 담배를 빨다가 폐암으로 죽었다고 한다. 하여 산에 호랑이가 없는 거라고??
이유야 어쨌든 담배는 백해무익한 존재이니 비암사를 찾거나 본글을 접한
흡연 중생들은 다들 금연에 동참해 천수를 누리기를 바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잘 다듬어진 돌계단

▲  계단의 끝에 등장하는 3층석탑과 극락보전

▲  비암사 3층석탑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3호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정면에 3층석탑과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설선당, 왼쪽에는 범종각과 요
사 등이 경내를 메운다.
극락보전 뜨락에 단정하게 자리한 3층석탑은 땅바닥에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基壇)
과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 등을 지니고 있다. 1982년에 탑을 손질하면서 기단부를 보완하
고 뒤집어져 있던 석재를 바로 잡았으며, 탑신 지붕돌은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고, 밑면에
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 1층은 2층보다 2배 이상 커서 균형이 그리 맞아보이질 않으며,
밑면의 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1960년 탑 꼭대기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기축명아미타불비상','미륵보살반가사
유비상'이 발견되어 창건 시기를 몰라 애태우던 비암사의 한줄기 단비를 뿌렸으며, 비상과 느
티나무를 제외하고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세종시 출범으로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3호
란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연기군 시절에는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19호였음)

▲  비암사 설선당(設禪堂)

▲  범종각과 우측 선방(禪房)


▲  비암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1호

3층석탑이 있는 서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
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이다. 공포(空包)가 평
방(平枋) 위에 촘촘히 박혀있는 다포(多包)양식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도깨비도 모르는 실정
이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된 것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록 법당의 역할을 대웅전에게 넘겨주고 2인자로 밀려났지만 법당 건물의 품격을 잘 간직하
고 있으며, 내부에는 소조아미타불좌상과 화려한 닫집,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민화 스타일의
산신탱, 독성탱,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탱 등이 걸려있다.
이 건물은 연기군 시절에는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79호였으나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세종시 지
방유형문화재 제1호란 큼직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지붕에는 겨울 햇살이 잔잔히 내려앉아 경내를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고
살짝 올려진 추녀는 마치 새의 경쾌한 날개짓을 보는 듯 하다.

▲  비암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13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우람한 모습의 아미타여래좌상이 홀로 자리하여 중생을 맞이한다. 이 불상
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 도금을 입힌 소조상(塑造像)으로 높이 196cm, 어깨 폭
89cm, 무릎 폭 132cm에 이르는 큰 불상이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아주 두툼하게 솟아있고, 중간에 반원 모양의 중간계주
(繫柱)가 있다.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로 꼽슬이 꽤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큰 덩치
에 맞게 푸짐하고 듬직한 인상인데, 볼에 살이 두툼해 거의 사각형에 가깝다. 눈썹은 직선으
로 그어져 있고, 그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박혀있으며, 두 눈은 가늘게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두 귀
는 중생의 조그만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
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양 어깨부터 다리까지 이어져 있고, 어깨는 딱 벌어져 듬직하다. 손
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데, 불상의 생김새를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민화(속화)처럼 그려진 독성탱과
산신탱

▲  극락보전의 지킴이, 신중탱



♠  비암사 마무리

▲  대웅전(大雄殿)과 괘불석주,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1991년에 지어진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극락보전을 대신하여 법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1년에 딱 1번 백제대제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영산회괘
불탱화가 담긴 함이 있다.
이 괘불은 1657년에 화승 신겸(信謙)이 그린 것으로 도상(圖像)의 내용이 그가 1652년에 제작
한 청주 안심사(安心寺) 괘불과 비슷하여 그것을 참고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괘불은 대웅
전 앞에 놓인 붉은 피부의 괘불석주(掛佛石柱)에 몸을 기대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데, 괘불이
그때만 외출을 하여(석가탄신일에도 외출 가능성 있음) 만나기가 꽤 까다롭듯이 석주 역시 그
때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외에는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3존불을 이룬다.

▲  석가3존불 옆에 있는 검은 피부의 '기축명 아미타불 비상' 모조품
비암사에서 발견된 3개의 비상 가운데 하나로 진품은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고
모조품이 덩그러니 앉아 진품을 닮아간다.

▲  비암사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 지장보살입상

대웅전 우측 옆구리에는 근래에 지어진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의 거처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꽤 컬러풀한 스타
일로 그의 좌우에 서 있고, 색채가 고운 지장탱이 그들의 뒤를 받쳐준다.


▲  비암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과 대웅전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1칸짜리 산신각이 있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1칸짜리 건물로 1995년에 지어졌다.

▲  산신각 산신탱과 산신상

산신각에는 흰 수염을 휘날리며 호랑이를 옆에 품은 산신상과 산신탱 2점이 걸려있다. 산신탱
은 보통 1점만 걸려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려 2점이나 걸어두어 산신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기대감을 표시했다. 산신상과 산신탱에 묘사된 호랑이는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마냥 귀엽게 다
가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비암사 경내 (바로 앞 건물이
극락보전의 뒷통수)


비암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절
로 생각했으나 직접 와보니 이게 전부야? 싶을 정도로 조촐한 모습이었다. 극락보전과 대웅전
주변이 전부기 때문이다. 허나 지나치게 겉모습만 추구하며 으리으리함을 강조하는 절보다는
이런 아담한 산사가 적지 않게 정감이 가며, 거기에 고색의 내음도 무척 진하니 정말 금상첨
화가 따로 없다.

이렇게 하여 비암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백제대제를 알았다면 그때를 맞춰서 찾
아와 괘불탱화까지 몽땅 챙겨보는 것인데 그것을 몰라서 다시 와야 될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아마도 다시 인연을 짓자는 비암사의 지극한 뜻인가 보다. 비암사에 간다면 백제대제가 열리
는 4월 15일이나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9~10월에 가는 것을 권한다. 그래야 괘불탱화를 비롯한
비암사의 숨겨진 끼까지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3월 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천하에서 제일 큰 청동좌불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천안 태조산 각원사 ~~ (태조산 성불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천안 태조산 각원사~성불사 '

▲  각원사 청동좌불상


 

겨울이 무르익어가던 12월 중엽, 친한 후배들과 충남 제일의 도시인 천안(天安)을 찾았다.
천안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청동대좌불로 유명한 각원사로 태조산(421m)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태조산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이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태조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전 9시 반에 방학역(1호선)을 출발, 중간중간에 후배들이 합류하여 12시가 지나서 천안
역에 도착했다. 그 장대한 거리를 후배들과 수다를 떨며 가니 체감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
다.
천안역에 이르러 태조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천안시내버스 24번(각원사↔동우아파트)을 타
고 20분 정도를 더 들어가 각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각원사(覺願寺) 입문 (203계단, 청동좌불상)

▲  각원사 밑에 자리한 연화지(蓮花池)

시내버스가 바퀴를 돌리는 각원사 종점 주변은 각원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각원사는 법등(法燈)를 켠지 겨우 4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천하
제일의 청동불상으로 1980년대부터 유명세를 타면서 신도와 관광객, 답사객들이 구름처럼 몰
려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절 밑에 자연히 식당이 들어서고 조촐하게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주말과 휴일이면 관광버스가 족히 100대나 줄을 이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그날은 평일
이라 찾는 이도 별로 없어 식당들도 절간처럼 한산하다. 그런 식당촌을 지나면 절 밑에 형성
된 연화지란 호수가 나온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워놓은 눈과 얼음으로 호수 또한 고요하기
그지 없는데, 그런 호수를 반바퀴 돌면 경내로 인도하는 203계단이 중생의 기를 죽인다.


▲  겨울이 씌워놓은 굴레를 뒤집어쓰며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는 연화지

▲  시작부터 중생의 기를 단죄하는 203계단 <무량공덕(無量功德) 계단>

연화지에서 각원사로 가는 길은 2가지가 있는데, 203계단을 오르면 바로 청동대불(청동대좌불
)로 이어지며 잘 닦여진 2차선 길을 따라가면 각원사 경내로 통한다. 어느 길로 가든 청동대
불과 경내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가면 되지만 기왕 왔다면 203계단으로 올라가 청동대불과 경
내를 둘러보고 2차선 길로 내려오는 것을 권한다. 마치 하늘에 닿은 듯, 장대하게 펼쳐진 203
계단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3계단은 '무량공덕 계단'이라 불리며, 1977년 11월에 조성되었다. 절에서 많이 애용하는 숫
자인 108보다 95가 더 많으니. 이는 108번뇌 소멸 기원 계단, 아미타불의 48가지 소망을 기원
하는 계단, 관세음보살의 32가지 화신(化身)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32응신(應身) 계단, 속세를
살아가는데 맺어지는 12인연 계단, 불(佛)/법(法)/승(僧) 3보(三寶)에 귀의하는 3도(三道) 계
단을 모두 합쳐 203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계단을 오름으로써 이들을 모두 누리는 셈이 된
다.


▲  203계단을 오르면 청동대불로 인도하는 돌길이 나온다.

'저걸 언제 다 오르나?' 계단의 미친 압박에 주눅부터 진하게 든다. 허나 계단은 누구나 오르
기 쉽게 규칙적으로 놓여져 있어 그리 힘든 건 없다. 속세살이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
르다보면 금세 계단 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희열에 잠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
다.
계단 정상에 이르면 돌이 깔린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지나면 광장처럼 넓은 길이 나오면서 청
동대불이 서서히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낸다.


▲  남북통일기원 대불봉안공덕비(南北統一祈願 大佛奉安功德碑)
청동대불이 완성되자 그 기념으로 불상 서북쪽에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공덕비를 세웠다.

▲  이보다 큰 좌불상은 없다 ~ 각원사 청동대불<靑銅大佛, 청동대좌불>

경내 북쪽에 위엄 돋게 자리한 청동대좌불(청동대불)은 각원사의 상징이자 든든한 밥줄로 천
안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각원사가 크게 유명세를 탄 것도 바로 이 청동대불 때문으로 1975년
4월 김영조(金永祚)를 비롯한 많은 중생들의 시주와 남북통일의 염원을 받아 조성하기 시작하
여 2년에 인고 끝에 1977년 5월 9일에 완성을 보았다.

불상 조각은 홍익대 교수 최기원(崔起源)씨가 담당했는데, 신라 불상의 정수로 추앙받는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모델로 삼았으며, 높이 15m, 몸무게 60톤, 귀 길이 175cm, 손톱
길이 30cm, 그가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의 원 둘레만 30m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좌불상
으로 손꼽힌다. 불상 안에는 부처의 사리와 불교 서적, 불상 조성에 돈을 낸 100만 명의 이름
이 들어 있으며, 불상 재질이 매우 우수하여 수명이 족히 1만 년은 갈 것이라고 한다.
비록 4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불상이지만 고색의 때가 조금은 피어나 겉 연령은 200년 이상은
들어보이며, 앞으로 70~80년 정도가 지나면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여 국가 중요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집을 좋아하는 편이
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제외하고는 현대 사찰에 대한 관심은 다소
야박한 편이다. 그럼에도 고색의 기운이 채 피지도 못한 각원사를 찾은 것은 바로 이 청동대
불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위엄

불상의 정체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그래서 서방정토가 있
다는 서쪽을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불상이 얼마나 큰 지 불상 주변을 돌
아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점처럼 보인다.


▲  밑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아찔한 위엄
내 키가 크다 한들 그에게는 고작 귀 크기에 불과하고 내가 아무리 손톱을
게을리 관리한다 한들, 그의 손톱 길이의 1/60도 안된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그의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

◀  청동대불의 늠름한 뒷모습

    ◀  청동대불을 지키는 설법전(說法殿)
청동대좌불 북쪽에 자리한 설법전은 1978년에
지어진 것으로 청동대불을 관리하며 대법회
등의 행사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건물 내부에
는 공양 물품을 파는 가게와 의자를 갖춘 쉼
터가 있다.


 

♠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천안12경의 하나,
각원사(覺願寺) 둘러보기

▲  청동대불에서 바라본 각원사의 설경

천안의 진산인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둥지를 튼 각원사는 1975년 4월에 경해법인(鏡海法印)이
창건했다. 법인은 1931년 9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1946년 10월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6.25가 터지자 해인사에 머물며 절을 지켰고, 1950년 10월 경주로 탁
발을 나갔다가 석굴암에 잠시 들려 본존불에게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큰 도량을 짓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후 세상이 조금 진정되자 불교와 문학 공부에 박차를 가해 마산 해인대학 문학과와 종교학
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사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거쳐 1967년 9월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69년에 왜열도로 넘어가 대동문화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 들어갔으며, 1972년 11월 낡은 다다미방을 구해 '해동선원'을 개원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오사까에서 사업을 하는 재일교포 부부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김영조<金
永祚, 법명은 각연(覺然)>와 정정자<鄭貞子, 법명 자연심(自然心)> 부부로 김영조씨가 당뇨병
으로 고생을 하자 법인을 찾아와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
법인의 지도 아래 100일 관음기도를 올리니 2~3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건
강을 거의 회복했다. 이에 김영조는 고마움의 뜻으로 동경(東京)에 절을 하나 마련하여 그에
게 주었고, 절 이름은 그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명월사(明月寺)라 하였다. 그런데 법인이 그
절을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총무원에 재산 등록을 해버리자 김영조는 크게 아쉬워하며
'귀국할 때 명월사를 팔고 국내에 절을 지으십시요' 충고를 했다. 이에 법인은 '명월사가 개
인 재산이 아닌 재일동포의 안식처로 남았으면 합니다'
답을 하니 김영조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기가 돈을 댈테니 고국에 큰 불상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바로 귀국하여 마땅
한 자리를 물색하다가 태조산 자락이 명당이라 그곳에 각원사를 세웠고, 곧바로 청동불상 조
성을 추진하여 1977년 5월 천하 최대의 좌불상인 청동대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청동대불로 각원사의 존재가 급격히 뜨자 예전 석굴암 본존불에게 고백했던 남북통일을 기원
하는 큰 도량의 꿈을 이루고자 현 주지승인 서대원과 함께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거대한 절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 불국사(佛國寺)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와 더불어 20세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큰 사찰이자 현대 불교의 성
지(聖地)로 격하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은 건평 200평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꼽히며, 2002년에는
각원사 불교대학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절을 크게 일군 법인은 각원사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에도 눈을 돌려 왜열도 야마구치현의 광명사(光明寺)와 미대륙 필라델피아에 관음사(觀音
寺)를 세웠으며, 각원사를 주지 서대원과 다른 승려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경 명월사에 들어
가 해외 포교에 주력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칠성전, 산신전, 천불전, 관음전, 경해원, 성종루, 개
산기념관, 영산전 등 10여 동의 굵직한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짧다보니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어나지 못했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산속에 제대로 묻혀 있어 산사(
山寺)의 고즈넉한 기운은 넉넉히 배여있으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천안12경의 제6경으로 손
꼽힌다. 또한 천안 시내와 가깝고 접근성도 양호하여 쉽게 안길 수 있는 점도 이곳의 큰 장점
이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도량이라 그럴까? 이곳에서 들리는 염불 소리가 통일을 애타게 부르짖은
이 땅의 소리 같다.

          ◀  각원사 칠성전(七星殿)
청동대불에서 경내로 내려가면 가장 먼저 칠성
전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1979년에 지어졌는데, 내부에는
칠성(七星)이 그려진 칠성탱(七星幀)과 나한상
(羅漢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흔한 칠성각(
七星閣) 대신 그보다 1단계 높은 칠성전을 칭
하고 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  색채가 고운 칠성탱과 그 앞에 줄지어 앉은 다양한 색채의 나한상들

▲  각원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칠성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대한 규모의 대웅보전이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각원사의
법당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건평(建坪) 360평에 달하는 팔작지붕 집으로 이 땅의 목조 건
물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 건물을 짓고자 10여 년 동안 목재 100여 만 재를 구입하여 1992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34개의 주춧돌을 깐 다음 4년 동안 갈고 닦아 1996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내부
불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미리 조성되어 대웅보전 완공을 기
다리고 있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네모난 기단(基壇)은 높이가 거의 3m이며, 기단부터 건물, 닫집, 불상까
지 모두 청동대불 만큼이나 몸집이 대단해 대불에서 놀란 마음을 다시금 놀래케 한다.


▲  대웅보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이 고운 미소를 선보이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다.
관세음보살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들은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 대성자모(大聖慈母) 관세음보살이라 불린다.

         ◀  각원사 천불전(千佛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천불전은 원래 산신의
공간인 산신전으로 1979년 9월에 지어졌다.
2000년 10월 새로운 산신전이 옆에 완성되자
천불전으로 간판을 바꾸고 천불을 봉안했다.


▲  천불전 내부
커다란 석가불을 중심으로 조그만 석가불 1,000상이 그를 둘러싸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수놓는다.

▲  각원사 산신전(山神殿)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자 함일까? 지붕 밑에 날카롭게 고드름이 달려있다.


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산신전은 2000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현재 천불전이 산신전이
었다. 산신전은 우리의 토속신인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보통 각(閣)을 칭하기 마련이나 이
곳은 앞서 칠성전처럼 특별히 전(殿)으로 격을 높였다. 그만큼 산신과 칠성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뜻일 거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붉은 옷을 입은 산신과 동자(童子),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등장한다.

▲  반야원(般若院) 서쪽에서 바라본
경내와 태조산


▲  한 지붕 두 가족, 영산전(靈山殿, 1층)과 개산기념관(開山記念館, 2층)

반야원 옆에는 영산전과 개산기념관이 한 지붕을 이루고 있다. 돌로 이루어진 1층은 영산전으
로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나한이 봉안되어 있는데, 16나한도 아닌, 500나한도 아닌, 무
려 1,250나한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2층은 절을 개산(開山, 창건)
한 법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그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원사에서 나름 중요한 곳이지만
시간을 핑계로 그냥 통과하였다.


▲  이 땅에서 가장 큰 범종의 보금자리, 성종루(聖鐘樓)

2층 누각으로 장엄하게 이루어진 성종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이 담긴 공간으로 일종의 범종각이다. 그 흔한 범종각을 칭하지 않고 성종루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이곳 범종의 이름이 성종(聖鐘)이기 때문으로 1984년 5월에 조성된 20톤
짜리 종이다.
성종루는 1990년 4월에 지어진 것으로 329평 규모이며 이 땅의 범종각 계열 중 제일 크다. 그
러니까 각원사는 노천 청동대불과 목조 1층 법당, 범종각 등 무려 3가지에서 규모 부분 1등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1-3 (각원사길 245 ☎ 041-561-3545)
* 각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연화지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2차선 길

각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1시간이 뚝딱 흘렀다. 나름 열심히 살피긴 했지만 현대 사
찰이다보니 청동대불 외에는 그리 크게 관심이 가질 않았고 개산기념관 등은 그냥 빼먹고 말
았다.
그렇게 각원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태조산에 안긴 또다른 사찰, 성불사로 서둘러 길을 향했
다.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해가 많이 짧아졌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


 

♠  태조산에 안긴 오래된 절집, 성불사(成佛寺)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


▲  성불사 일주문(一柱門)

태조산에는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원사와 성불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그들은 비록 같은
태조산에 안겨있지만 서로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각원사는 역사는 매우 짧지
만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청동대좌불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불국사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규모도 크다. 반면 성불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지만 규모도 작고 한참 후배인 각원사의 위엄에 눌려 거의 존재감이 없어 보일 정도
이다. 하여 속인(俗人)들은 각원사를 많이 찾아오지 성불사는 별로 모른다.

각원사와 성불사는 직선거리로 불과 600m에 불과해 금방이면 도달할 듯 싶지만 안서e편한세상
1차, 2차아파트로 크게 돌아가야 된다. (산길이 있긴 하지만 자세히는 모르겠음) 그 거리는 약
2.5km, 도보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조금 편하게 가고 싶다면 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 정거
장 거리인 부경파크빌,안서e편한세상 정류장에서 내려서 800m 정도 올라가면 되지만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속 편하게 걸어가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성불사까지 도보로 이동했는데, 30분 정도면 갈 줄 알았더만 거의 40분 이상이 걸린다.
뉘엿뉘엿 무심히 사라지는 햇님에 부랴부랴 서둘렀지만 일주문에 이르니 땅꺼미의 농도가 90%
이상으로 진해져 더욱 긴장감을 타게 만든다. 야경 사진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불사는 경내와 멀리감치 떨어진 곳까지 일주문을 내려보내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겨울 제국
의 의해 지붕이 하얗게 변한 일주문 양쪽에는 코끼리상과 사자상이 자리하여 혹시 모를 속세의
불온한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 경내가 나올 듯 싶었는데, 아직도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 거리는 얼마 안
되도 거의 느긋한 길로 이루어진 각원사(203계단 제외)와 달리 죄다 오르막길이고, 절이 가까
워질 수록 경사가 더욱 흥분을 한다. 게다가 눈까지 두툼히 깔려있으니 걸음도 은근히 더딜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오르막 한굽이를 오르니 야외 공연장의 돌로 다진 객석 같은 석축이 장대하
게 펼쳐지고 그 위로 성불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야외 공연장 객석 같은 석축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성불사

▲  성불사 느티나무 (천안시 보호수)
경내를 코앞에 둔 경사지에 나이 800년을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겨울 제국에게 모두 털려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그의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려 봄의 해방군을 애타게 염원하는 것 같다.

▲  눈 지붕을 이룬 성불사 칠성각 (오른쪽)

▲  태조산의 옥계수를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성불사 샘터

느티나무에서 1굽이를 더 오르면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공양간 등을 모두 갖춘 4~5층 건물
앞에 이른다. 이제 비로소 경내에 이른 것이다. 각박한 경사를 이용하여 건물을 짓다보니 다층
건물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옆을 오르면 법당인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  성불사 요사/선방 옆에서 바라본 천하 (천안시내)

각원사와 더불어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안긴 성불사는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또는
목종(穆宗) 시절에 혜선국사(惠禪國師)나 혜조대사(惠照大師, 조선 태조 때라는 설도 있음)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다시 중건했으며,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이 창건될 당시(또는 고려 후기) 하늘에서 백학(白鶴) 1쌍이 날아와 대웅전 뒷쪽 바위에 앉
아 부리로 열심히 불상을 새겼다. 그러기를 49일째, 불상이 완연하게 모습을 갖추며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나뭇꾼의 인기척에 놀라 불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래
서 이를 부처의 계시로 여기고 절을 세웠는데, 불상을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성불사(成不寺
)로 했다가 뒤에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불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칠성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
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내음을 느끼게 한다. 또
한 성불사 자체는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30m 고지 가파른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제법 좋으며, 여기서 남쪽 능선을 통해 태조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  성불사 산신각(왼쪽)과 대웅전(大雄殿, 오른쪽)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금동석가3존불
이 봉안되어 있다. 좌우 협시불인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은 어여쁜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정작 3존불의 주인인 석가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자리에 없다.
하여 도난을 당했나 싶었으나 석가불의 빈 자리 뒷쪽에 창이 있는 것이다. 대웅전 뒷쪽에는 지
방문화재인 마애석가3존불이 있는데, 그 마애불이 바로 비어있는 자리의 주인, 즉 3존불의 중
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별도의 불상을 두지 않고 불단을 두는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비슷한
모습을 취했다.


▲  가운데 자리가 빈 대웅전 석가3존불 (왼쪽 지장보살, 오른쪽 관음보살)
비어있는 본존불 자리는 창 너머로 보이는 마애3존불의 것이다.

▲  대웅전 우측 벽에 걸린 빛바랜 영산회상도와 현왕탱(現王幀)
석가3존불 뒷쪽에 창을 내는 바람에 후불탱인 영산회상도가 우측 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옆에는 붉은 색채가 중심을 이룬 현왕탱이 자리해 있는데, 이들
그림은 빛이 좀 바랜 것으로 보아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보인다.

▲  성불사 마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대웅전 뒷쪽에는 고된 세월을 견딘 커다란 바위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의 꺼무잡잡한 피부
에는 마애석가3존불과 16나한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장대한 세월을 겪는 동안 무거운 상
처를 입으면서 간신히 형체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 어둠까지 깔리니 숨은 그
림을 찾듯 더욱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된다. (겨우 몇몇 상만 시야에 들어왔음)

바위에 새겨진 불입상(佛立像)은 돋음새김으로 새겼으나 바위의 절리현상으로 인해 얼굴과 신
체의 전면이 크게 절단이 났으며, 머리 꼭대기인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과 손의 형태, 옷무
늬 등은 고려 때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밑도리가 넓은 옷 밑으로 발가락이 선명한 오른쪽
발이 나와 있으나 왼발은 사라지고 없다.
바위 우측면 하단 중심에는 연화대좌가 있고, 좌우에 공양상(供養像) 또는 금강역사(金剛力士)
로 보이는 2구가 있다. 연화대좌 위에는 작은 연화대좌가 놓여져 있고, 거기에 석가불이 앉아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했으
며, 얼굴은 눈과 입이 크게 표현된 둥글넓적한 모습이다.

석가불 좌우의 협시보살과 16나한상은 손상은 심하나 서로 마주보는 모습과 수도하는 모습 등
각자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고, 나한상 주위 바위 면을 둥글게 파서 마치 감실(龕室)이나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성불사 마애불은 바위 한 면에 석가3존불과 16나한을 덩어리로 새긴 것으로 이 땅에서 거의 유
일한 케이스이며, 도식화(圖式化)가 덜 된 것으로 보아 14~15세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성불사 석조보살좌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86호

야외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 옆에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건물 이름을 까먹음..)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그만 석조보살좌상이 담겨져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성불사의 것이 아니었다. 1990년에 지금은 세종시로 간판을 바꾼 연기군 조치
원(鳥致院) 부근 대성천에서 준설공사를 벌이다가 발견된 것으로 신도들의 노력으로 이곳에 안
착을 해 성불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예전에는 종무소 안에 두었으나 근래에 그를 위
한 집을 지어 이렇게 집까지 가지게 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67cm, 어깨 넓이 34.5cm, 무릎 넓이 54.5cm로 등에 달린 광배(光背)의 윗부분이
깨져나가 붙여 놓았다. 오른쪽 무릎도 조금 깨진 상태이며, 무릎에서 오른쪽으로 가늘고 긴 균
열이 있어 조금씩 메워 놓은 상태로 거신광배(擧身光背)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옷주름은 굵으면서 매우 도식적이며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왼손은 배 밑에 두었다. 두
팔은 몸에 비해 길지만 가늘고 두 손은 작으며, 연꽃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관세음보
살로 여겨지지만 미륵불의 도상(圖像)으로 유행한 점도 있어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석불로 보이겠지만 보기 드문 형식의 석불로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성불사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8-8 (성불사길 144 ☎ 041-565-4567)


▲  강추위 앞에서도 향긋한 미소를 잃지 않은
풍만한 모습의 석조관세음보살좌상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와 일몰의 끝 모습
(성불사로 인도하는 고갯길과 천안시내)

햇님의 퇴근 본능에 쫓겨 서둘러 성불사에 들어와 잠깐을 방황하는 사이 시간은 18시가 되었다.
서서히 줄어드는 햇님의 흔적에 의지해 열심히 사진에 담았지만 역시나 신통치가 못했고, 머나
먼 수평선 너머로 햇님이 완전히 꽁무니를 감추면서 달님은 햇님의 나머지 흔적마저 지우며 천
하를 검게 태운다.
경내에 있는 문화유산은 모두 살펴보아서 다행이지만 눈이 적지 않게 깔린 상태라 칠성각 등은
접근도 하지 못했고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더 머물기도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춥고 배도 고프
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중요한 볼거리는 다 보았으나 이쯤에서 성불사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절을 내려갔다.

시간도 어느덧 저녁 시간이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밥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저녁을 어
디서 무엇을 먹을까를 두고 즐거운 고민을 벌이다가 각원사 밑에 줄지어 선 식당촌에서 해결하
고자 그곳으로 넘어갔다. 어느 집에서 먹을까 궁리하던 중, 그냥 장군도 아닌 무려 대장군(大
將軍)식당이란 위엄 돋는 이름의 식당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다. 태조산이란 이름
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양병했다고 해서 비롯된 것이다보니 그 밑에서 군권을 총괄하는 자리인
대장군을 식당 이름으로 삼은 모양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임에도 내부는 한산하다. 우리가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는 격하게 반
기며 방 안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처음에는 그냥 비빔밥 같은 것을 먹을까 했으나 날씨도 춥고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해 버섯전골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잠시 뒤 밑반찬이 정갈하게 깔리고 버섯전골이 등장한다. 전골이 뽀글뽀글 익자 국자를 이용해
전골을 퍼서 먹는데, 버섯전골이란 이름이 무색치 않게 버섯이 매우 많다. 거기에 소고기와 당
면, 두부, 갖은 채소가 버무려져 하나의 버섯전골을 이루는데 국물도 제법 얼큰하고 맛이 좋다.
전골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죄다 밥도둑의 자격이 충분하며,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
라 시장기까지 강하게 돋아있어 전골이고 반찬이고, 밥까지 거의 비워버렸다. 거기에 답사 뒷
풀이용으로 막걸리까지 겯드리니 황제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그렇게 저녁을 배불리 먹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소화도 시킬 겸 상명대 천안캠퍼스 남쪽까
지 걸어갔다가 천안시내버스 24번을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천안 태조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대장군식당에서 먹은 버섯전골의 위엄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1월 3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나주 불회사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불회사 석장승
◀ 원진국사 부도
▶ 불회사 진여문과 사천왕문
▼ 불회사 대웅전

불회사 진여문, 사천왕문
   

 


 

겨울 제국이 천하만물의 격한 미움을 받으며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던 12월 첫 무렵에 따
뜻한 남쪽 땅인 전남을 찾았다. 그 전남에서 내가 격하게 반응을 보인 곳은 나주(羅州)의
유서 깊은 고찰 불회사이다. (불회사를 목적지로 정함)

오랜만에 햇님보다 일찍 부지런을 떨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을 뚫고 한강을 건너 영등포역
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호남의 중심지인 광주(光州)로 가는 첫 열차를 타고 5시간 가까
이를 달려 광주역에 두 발을 내리니 겨울 제국에게 점령된 북쪽과 달리 가을의 따스한 기
운이 나를 맞이한다.

광주역에서 불회사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접근성도 영 좋지가 않다. 예전에는
광주역을 비롯한 광주 도심부에서 불회사입구까지 바로 가는 나주시내버스가 있었으나 이
제는 남평에서 무조건 환승을 해야된다. (남평에서도 40~50분 정도 들어가야 됨)


 

♠  불회사 입문 (석장승, 원진국사부도)

▲  불회사 일주문(一柱門)

불회사입구에 이르니 웅장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나왔다. 문 현판에는 '초전성지 덕룡산
불회사(初傳聖地 德龍山 佛會寺)' 10글자가 쓰여있는데, 여기서 초전성지란 '불교가 처음 전
해진 성지'란 뜻이다. 이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66년에 창
건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땅 최초의 절이란 자부심을 담은 것이다. 허나 그 창건설은
그저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며, 실제 그가 불교를 들고 백제를 찾은 것은 384년이다.


▲  일주문 부근에 자리한 도암선사부도(道巖禪師浮屠)와 하얀 승탑

일주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승탑(부도) 2기와 비석 1기, 그리고 속세와 그들을 이어주는 돌다
리를 만나게 된다. 승탑은 돌다리보다 1단 높은 곳에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왼쪽 승탑이 도암선사의 승탑이다.

도암선사(1805~1883)는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중창했던 승려로 성은 차씨이다. 1817년 백양
사 심옥(心沃)에게 출가하여 1827년 인월(印月)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하루에 1끼
만 먹으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전국의 이름난 승려를 찾아가 불경을 익혔다.
1840년 화월(華月)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이때부터 백양사에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율
을 엄히 지키도록 했으며, 백양사 뒷쪽 백학봉 밑에 자리한 석실(石室)에 들어가 10여 년 동
안 불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천진암(天眞庵)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883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이승을 뜨자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 탑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했는데, 승탑과 관련된
어떠한 안내문도 없어 무심히 지나치기가 쉽다. 그 옆에는 한참이나 후배인 하얀 피부의 승탑
이 서있고, 그 앞에 하얀 승탑의 주인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도암선사 승탑(부도)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승탑으로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났다.

▲  불회사 숲길 (일주문과 주차장 사이)

▲  그림처럼 펼쳐진 불회사 숲길 (석장승 직전)

불회사 숲길은 자연의 향이 그윽한 아리따운 숲길이다. 사찰 숲길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곡
성 태안사(泰安寺) 숲길과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길을 바짝 긴장시킬 정도로 아름
답기 그지 없는데, 300~400년 묵은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이 무성해 온갖
내음을 누릴 수 있다. 특히 대웅전 뒷쪽에는 춘백(春栢)이 삼삼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5월에
연두빛으로 막 피어날 때 바라보는 대웅전과 그 뒷산의 모습은 놓치기 아까운 봄 풍경으로 꼽
힌다.
게다가 단풍이 늦게 들고 늦게 지기 때문에 11월 후반까지 단풍의 향연을 즐길 수 있고, 단풍
색깔이 광주 인근에서 가장 곱다고 한다. 허나 그 좋은 시기가 싹 지나간 시점이라 단풍은 거
의 다 지고 간신히 나뭇가지에 붙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초췌한 단풍잎만 남아있을 뿐이라
안그래도 늦가을이다 연말이다해서 우울해진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더욱 우울의 끝으로 밀어
넣는다. (불회사 비자나무 숲은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됨)


▲  불회사 석장승 - 국가 민속문화재 11호

랫 주차장에서 3~4분 정도 가면 불회사의 오랜 상징이자 지킴이인 석장승 1쌍이 마중을 한
다.
장승은 예로부터 부정한 기운을 막는 존재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웠다. 지킴이 역할 외에도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청동기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선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회사 석장승은 절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는데, 절 수호와 절의 경계를 알리는 기능을 담
당했다. 그러니까 석장승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불회사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길 양쪽에
1기씩 자리해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며, 돌난간을 두룬 네모난 보금자리에 퉁방울 눈으로 뻣뻣
하게 서 있다. 서쪽 장승은 남자(이하 남장승), 오른쪽 장승은 여자(이하 여장승)로 초보자가
봐도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쉽게 구분이 간다.

남장승(키 315cm, 몸둘레 170cm)은 여장승보다 키가 크며, 동그란 큰 눈은 왕방울처럼 부라리
고 있고, 세모난 코는 주먹처럼 크다. 입은 일자로 그어져 있고, 입 밑에는 수염이 약간 묘사
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불상의 무견정상(無見頂相)처럼 두툼히 솟아 있다.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5자가 쓰여 있고, 얼굴 표정은 약간 인상을 쓰고 있
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얼굴치고는 좀 귀엽다.

그의 동반자인 여장승(키 180cm, 몸둘레 162cm)은 인심 좋은 아지매를 보듯 표정이 매우 부드
럽다. 두 눈은 남장승 못지 않은 왕방울로 눈 위에는 살짝 구부러진 눈썹과 광장처럼 넓은 이
마가 있으며, 코는 남장승 못지 않게 크다. 입은 아래로 살짝 구부러져 엷은 미소까지 띄우고
있으며,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주장군(周將軍)' 3글자가 쓰여 있는데 원래 이름은 상
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남장승에 비해 키는 작으나 다정한 표정이며, 둘다 귀엽고 익살스
러운 포스로 무서움은 커녕 즐거움을 준다.


아무리 굳은 얼굴이거나 인상을 쓴 얼굴도 그
들을 보면 절로 주름이 풀어질 것이다. 그리고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넋이 나가 본연의 임무를 깜빡 잊고 돌
아갈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진리가 아닐까?
이들 석장승은 서쪽 산너머에 있는 운흥사(雲
興寺) 석장승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1719년 전
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장승을 숭배하
는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된 존재이자 이
땅에 몇 안되는 사찰 장승으로 가치가 높다.

▲  여장승을 늘 살피는 남장승

▲  남장승을 바라보는 여장승

▲  남장승의 뒷모습과 여장승


  연리지(連理枝)라 불리는 느티나무(가운데 나무) -
나주시 보호수 15-4-12-6호


석장승을 지나면 왼쪽 숲에 불회사의 또다른 명물인 연리지가 나온다.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 엉켜있는 모습이 마치 남녀가 예민한(?) 짓거리를 하는 모습처
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절 주변에서 그런 연리지가 종종 목격되어 그것도 참 흥미로운
데 여색을 멀리하며 불도에 정진해야 되는 승려의 한이 모여 나무로 표출된 모양이다.

연리지는 가뭄에 콩 날 정도로 희귀한 나무라 나라의 경사나 부모에 대한 효성, 화목한 부부
등을 상징하며, 그의 수종(樹種)은 느티나무이다. 높이는 30m에 이르러 하늘을 가릴 정도이고
둘레는 1.5m로 키에 비해 꽤 늘씬하다. 나이는 약 600년으로 짐작된다.


▲  불회사 사적비와 소나무

연리지를 지나면 불회사의 장대한 역사를 머금은 사적비(事蹟碑)가 나온다. 듬직하게 생긴 귀
부(龜趺)와 글씨가 빼곡히 담겨진 검은 피부의 빗돌,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2마리가
생동나게 새겨진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성된지 얼마 안되어 윤기가 주르르 흐른다. 그런 사적비 옆에는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소나무가 주변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원진국사부도로 오르는 산길

▲  진여문 부근의 승탑들

사적비를 지나면 불회사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덕룡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원진국사
부도를 보고자 한다면 그 산길을 꼭 오르기 바란다. 조그만 계곡을 건너서 대나무숲으로 들어
서면 좌우로 갈라진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부도(승탑)가 나온다.
나는 사적비 뒷쪽 산길을 몰랐던 터라 진여문까지 갔음에도 부도를 알리는 길이 없어 그냥 지
나칠까 했었다. 허나 부도와의 술래잡기는 끝내야겠다 싶어서 길도 없고 경사도 각박한 진여
문 남쪽 산자락을 무대포 정신으로 올라가서 끝내 술래 신세를 면했다.

진여문 남쪽에는 승탑(僧塔) 2기가 초췌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눈길을 호소한다. 오른쪽 승탑
은 탑신(塔身)이 온전히 남아있고, 6각형 머릿돌에는 중생들이 올려놓은 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위에는 돌기둥이 서 있는데, 피부색이 전혀 틀려 승탑의 일원은 아니었던 듯 싶다.
탑의 밑도리는 돌에 묻혀 윗도리만 간신히 고개를 내민다.
왼쪽 승탑은 거친 세월의 흐름을 과민하게 탔는지 머릿돌과 바닥돌만 간신히 남은 처량한 신
세이다. 이들 승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  머릿돌과 바닥돌만 남은 가련한 승탑

▲  불회사 원진국사부도(圓眞國師浮屠)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5호

경내 남쪽 산자락에 원진국사부도가 살짝 터를 닦고 있다. 원진국사 승형(承逈, 1171~1221)은
능엄선(楞嚴禪)의 주창자로 성은 신씨, 고향은 경북 상주(尙州)이다.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
부인 시어사(侍御史) 신광한(申光漢)에게 양육되었으며, 13세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출
가하여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197년 스승인 동순(洞純)이 입적하자 승과(僧科)를 포기하고 수도에 정진했으며, 명종(明宗)
이 그의 소문을 듣고 특별히 불러 초선(初選)을 치르게 했다. 이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
들어가 지눌(知訥)에게 법요(法要)를 받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불한 뒤 크
게 감응을 얻었으며, 춘천 청평사(淸平寺)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릉엄경(首
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
이란 이자현의 문수원기(文殊院記)에 크게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 인연으로 불법(佛法)을 알릴 때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겠
다고 발원했으며, 이후 이 땅의 선종(禪宗)에서 크게 숭상을 받게 되었다.

1210년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쳤고, 1213년에 삼중대사(
三重大師), 1214년에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포항 보경사(寶
鏡寺)에 머물렀다. 1220년에는 희종(熙宗)의 4째 아들인 경지(鏡智)의 스승이 되었고, 1221년
능엄경을 설법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자리를 옮겨 승려치고는 젊은 50세에 입적했다.

고종(高宗)은 그에게 원진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보경사에 그의 승탑을 세웠으나 사리의 일부
를 가져와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도 승탑을 두었다. 탑신 밑도리에 연우(延祐, 원나라 인
종의 연호) 4년 5월에 세웠다는 글씨가 있어 1318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탑신 앞
쪽에는 해서체(楷書體)로 '圓眞國師 通照之塔(원진국사 통조지탑)'이라 쓰여있어 탑의 이름과
주인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높이 1.7m의 조촐한 모습으로 조각 기법이 형식화되어 딱히 섬세한 면은 없으며, 탑신과 지붕
돌이 8각이고 그 밑도리는 동그란 전형적인 8각원당형 승탑이다. 또한 탑신에 탑의 주인공과
탑 이름, 조성 연대가 쓰여있어 고려 후기 승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바로 이 점이 이 승탑의 강한 매력이다.


▲  승탑의 주인과 탑 이름이 희미하게 쓰여있다. (원진국사 통조지탑)


 

♠  불회사 진여문, 대웅전 주변

▲  한몸으로 이루어진 진여문(眞如門)과 사천왕문(四天王門)

원진국사부도와의 숨바꼭질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경내를 코앞에 둔 진여문으로 향했다. 진여
문은 하나로 이어진 사천왕문과 함께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계곡 위에 홍예 돌다리
를 걸치고 그 위에 복도식 건물을 씌웠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한 지붕을 이고 있는 사천왕문
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목상(木像) 대
신에 그림 4개가 자리를 대신한다.
사천왕문은 원진국사부도가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사천왕의 검문을 거치면 비로소 불
회사 경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부처의 모임터를 뜻하는 불회사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홍예 돌다리를 갖춘 진여문

▲  사천왕문 사천왕도

▲  2층으로 이루어진 대양루(大陽樓)

▲  대양루의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천수전(千手殿)

불회사는 덕룡산 북쪽 자락 숲속에 포근히 터를 닦은 오래된 절이다. 경내 앞쪽(남쪽)에는 계
곡이 흐르고, 뒷쪽(북쪽)으로 산을 베게 삼아 누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사방이 덕
룡산의 첩첩한 산줄기에 감싸인 고적한 곳이다. 절 입구에서 절까지 속세의 민가(民家)도 거
의 없으며, 절 부근에는 적당한 마을도 없다.

이 절은 366년(또는 384년)에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366년이면 고구려(
高句麗)에 불교가 전해지기 무려 6년 전이고, 백제는 18년 전이 된다. (가야는 제외) 불회사
가 366년 창건설을 자신 있게 우기는 것은 1978년 큰법당 기와 불사 때 발견된 '호좌(호남 좌
도) 남평 덕룡산 불호사(불회사의 옛 이름) 대법당 중건 상량문(上樑文)'
에 366년<동진(東晉)
태화 원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유로 이 땅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
해진 초전성지(初傳聖地) 임을 일주문을 통해 아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불회사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 땅의 불교사를 다시 정리해야 되겠지만 굳이 그리할 필요는 없
을 것 같다. 마라난타의 366년(384년) 창건설은 어느 기록에도 없고, 백제 유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야의 불교 전래설도 외면받고 있는 마당에 불회사의 366년 창건설은 어디 주목이
나 받겠는가?

창건 이후, 656년에 희연조사(熙演祖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
師)가 중창을 하고, 1264년에 원진국사가 크게 중창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원진은 앞서 그
의 승탑에서 밝혔듯이 1171년에 태어나 1221년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뜬금없이 1264년이라니
? 원진이 입적한지 53년 뒤에 홀연히 부활하여 절을 중창했단 말인가?? 허나 경내 주변에 그
의 승탑이 있으니 원진이 절을 손질한 것은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창건했을 지도 모르겠
다.

1798년 화재로 절 전체가 소실되자 주지인 지명(知明)이 1799년에 중건을 했으며, 절의 원래
이름은 부처를 지킨다는 뜻의 불호사(佛護寺)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큰법
당에서 나온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808년 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절을 크게 손질하여 기존의 가람
(伽藍)배치 외에 동쪽에 진여각과 요사채, 대양루 등을 건립하여 절의 몸집을 더욱 늘렸다.

절을 수식하는 전설 가운데 호랑이와 도승의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 참의(參議) 벼슬을 지낸 조한용(이하 승려)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
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벼슬을 그만두고 승려가 되었다.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1벌로 천
하를 떠돌던 그는 불회사에 이르자 쇠락한 절의 모습에 발끈하여 절 중창을 계획하고 주변 마
을로 탁발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탁발을 하고 절로 돌아오다가 난데없이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호랑
이는 그를 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을 흘려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의 출현에 염통
이 적지않게 쫄깃해졌던 그는 용기를 내어 입을 살펴보니 글쎄 목에 비녀가 걸려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사람을 잡아먹지 말아라. 그것을 약속하면 내 비녀를 뽑아주마' 그러자 호랑
이가 '알았어. 앞으로 사람은 해치지 않을테니 비녀 좀 뽑아줘!' 그래서 비녀를 뽑아주니 호
랑이는 고마움을 표하고 사라졌다.

그해 겨울, 호랑이가 그를 찾아왔다 '야 나와봐! 아주 좋은 거 가져왔어!' 그가 나와보니 호
랑이가 어디서 아리따운 여인네를 물어다 마당에 놓고 간 것이 아닌가. 호랑이가 앞서 은혜를
갚고자 참 기특한 일을 하였지만 이미 출가한 몸이라 대놓고 흑심을 품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혼절한 여인을 외면하기도 그래서 일단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알고보니 안동(安東) 만석꾼
김상 공(이하 김공)의 외동딸이었다.
여인이 기력을 회복하자 남장을 시켜 안동으로 데려가니 김공은 너무 기뻐 크게 보답할 길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에 불회사 복원에 필요한 시주를 청하니 김공이 쾌히 승락하자, 승려는
가지고 온 걸망을 꺼내 쌀을 담아 달라고 했다. 걸망이 너무 작아서 이거 얼마나 들어가겠는
가 싶어 김공의 부인은 우려했으나 아무리 부어도 끝없이 들어가는 쌀을 보며, 크게 놀라 아
예 곳간을 열테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이에 승려는 신통력으로 공양미를 절로 보냈다고 하며, 그때 쌀을 보관한 곳이 인근 화순 중
장터라고 한다.

김공이 준 쌀로 불회사 대웅전을 지으며, 좋은 날을 택해 상량식을 올리려고 했으나 일이 너
무 장대하여 그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뒷산 봉우리에 올라가 '호법 선신중이
시여! 부처의 대작불사가 해가 짧아 원만히 회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피를 드리워 주소서
'
기도를 올리니 해가 잠시 길을 멈추면서 제시간에 상량식을 마쳤다고 한다.
이후 그가 기도를 한 자리에 암자를 세우고 해를 멈추게 한 곳이라 하여 일봉암(日奉庵)이라
했으나 6.25 때 파괴되어 샘터만 남았다.

그 승려는 말년에 건너편에 남암(南庵)이란 암자를 짓고 머물렀는데 아침과 저녁마다 까만 새
가 날라와 뒷편에 있는 잣나무 가지에 앉아 승려와 대화를 했다고 하며, 그 나무를 흑조수(黑
鳥樹)라 불렀다고 한다. 그 나무는 남암터에 2그루가 있었으나 태풍으로 하나가 쓰러지고 지
금은 1그루만 남아있다. (현재 부속 암자는 모두 사라진 상태)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등에 싱그럽게 둘러싸인 경내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명부전, 대양루, 심
검당, 사운당, 천왕문, 진여문, 불국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건칠비로자나불좌상, 민속문화재인 석장승, 지방문화재
인 원진국사부도, 소조보살입상 등이 있고, 그외에 도암선사부도와 조선 후기 승탑, 연리지,
괘불지주 등이 있어 고색의 내음도 숲내음 만큼이나 진하다.

※ 나주 불회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광주 전남대후문과 산수5거리, 조선대, 광주1호선 남광주역(3번 출구), 백운광장, 인성고(
  효천역)에서 나주시내버스 999, 999-1번을 타고 남평정류장에서 하차 → 중장터, 도동 방면
  으로 가는 나주 200번으로 환승하여 불회사 하차 (1일 10회 운행)
* 나주터미널과 영산포터미널에서 나주 403번을 타고 불회사 하차 (1일 13회 운행)
* 승용차 (석장승과 일주문 사이에 주차장이 있으며, 경내에도 있음)
① 광주 → 남평읍내 → 도래마을 → 다도 → 불회사입구 우회전 → 불회사
② 광주 → 칠구재터널 → 도곡온천입구 → 도암면 → 운주사입구 → 중장터 우회전 → 불회
   사입구 → 불회사

* 불회사 입장료는 없음
* 불회사는 산사힐링체험(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7~8월에 열리는 관음대참회 수련
  회, 매월 3째주 토요일에 1박 2일로 열리는 주말산사문화체험, 녹차(비로다)만들기 체험 등
  이 있으며, 자세한 일정과 가격은 불회사 홈페이지를 참조하거나 전화로 문의한다.
*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999 (다도로 1224-142 ☎ 061-337-3440)
* 불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불회사 경내와 부드러운 곡선의 덕룡산

▲  대웅전 주변 (대웅전 우측에 극락전, 삼성각 등이 있음)

사천왕문을 지나면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2층 대양루가 나타난다. 대양(大陽)이란 큰 햇님
으로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데, 1층은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와 종무소(宗務所), 차 1잔과
공양물품을 판매하는 비로다경실이 있다. 여기서 비로다(榧露茶)는 불회사에서 생산되는 녹차
(綠茶)로 절 주변 비자나무 밑에서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찻잎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로다는 오랜 역사를 가진 불회사의 살아있는 전통으로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고 있는 마라난
타가 불회사를 세우고 재배한 차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
로 이 땅에서 처음으로 차가 재배된 곳이라고 주장까지 하나 실제 재배 시작 시기는 조선시대
> 불회사 녹차로 인해 이곳의 예전 지명은 다소(茶所)였으며, 다도면(茶道面)이란 이름도 바
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2층은 대양루 대신 천수전이란 별도의 간판을 달고 있는데,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을 봉
안하고 있으며, 온갖 새와 토끼, 물고기, 소나무, 과일 등을 담은 그림이 평방(平枋) 등에 그
려져 있다. 보통 사찰의 벽화나 그림은 부처를 찬양하고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담기 마련이나
천수전은 그 규칙을 와장창 깨고 민화(民畵)나 사대부들이 그리는 그림처럼 치장되어 있다.


▲  불회사 대웅전 - 보물 1310호

대양루 밑도리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3단의 기단 위에 높직하게 들어앉아 남쪽을 바라보
는 대웅전 앞에 이른다.
불회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추녀를 살짝 들어올
린 모습이 마치 새가 날개짓을 하듯 경쾌하기 그지 없는데 상량문을 통해 1799년에 중건되었
음이 밝혀졌다.

건물 정면에 달린 문짝은 4분합의 빗살문으로 두터운 통판자로 짜서 창살무늬, 불상, 새와 꽃
등이 꽃살문을 이루며 장식되어 있었으나, 6.25 시절에 공비들이 그들의 소굴을 덮기 위해 모
두 약탈해 갔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礎石)은 덤벙주초로 비교적 큰 편이며, 그 위에 세
운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준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전/후면의 각 주칸에는 외3출목, 내4출목 공포를 2조씩, 양
측면에는 1조씩 배치했으며, 내부에는 화려한 연꽃봉오리형으로 마무리 지었다. 특히 용 4마
리를 건물 안팎으로 치장하여 법당의 장엄함을 드높였는데, 정면 어칸(가운데 칸)에 2마리의
용머리가 있고, 그 꼬리는 건물 내부 대들보 밑에서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있다. 또한 천정 중
앙 대들보에도 용 2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건물 양측면 중앙에는 건물 내부로 2개의 충량(衝樑)을 걸어 그 머리를 용머리로 장식하여 큰
대들보에 걸쳤는데 이런 결구법은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내부 천정은 빗천정과 우
물천정을 같이 했는데, 빗천정에는 물고기, 연꽃무늬 등을 조각하여 달았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새와 연꽃 등이 그려진 아름다운 우물 천정과 대들보에 고개를 대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용 2마리


건물 내부와 바깥에 용 장식을 달고 연꽃봉오리 등을 장식한 기법은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
웅보전에도 나타나고 있어 같은 장인이나 그 후학들이 만들었음을 짐작케 하며, 조선 후기 건
립 당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2001년 4월에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호에서 보물로 지
위가 높아졌다.


▲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용의 살랑거리는 꼬리와 붉게 채색된 천정

▲  대웅전 비로자나3존불
가운데 본존불이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1545호
좌우 협시불은 불회사 소조보살입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67호


불회사의 상큼한 보물 창고인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 대신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중심으
로 한 비로자나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의 중심인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들어 금칠을
입힌 이 땅에 흔치 않은 건칠불(乾漆佛)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붉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그의 전용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
고 있으며, 머리는 검은색 나발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 있다. 두 귀는 어깨까
지 축 늘어져 중생의 조그만 하소연까지 듣고자 애쓰고 있고, 얼굴은 약간 굳은 듯한 표정이
지만 입가에서는 엷게 미소가 퍼지고 있다.
그의 좌우에 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은 흙으로 빚어서 만든 조선 초기
보살상으로 1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잘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불상/보살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  불회사 마무리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우에는 온갖 군소 건물들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데, 좌측 바로 옆에는 명부전
이 둥지를 틀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1402년에 세워져 1799년에 중수되었으며,
근래 손질을 했는지 고색의 기운이 대웅전 보다는 못해 보인다.


▲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육환장(六環杖)을 쥐고 있는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밝은 색채의 10왕을 비롯한 저승의 식구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좌측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에 중건되었는데, 예전 이름은 칠성각(七星閣)이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을 비롯해 용
왕(龍王)까지 봉안하고 있으며, 그들을 담은 탱화는 모두 근래에 새로 제작되었다.

▲  용을 타고 짙푸른 바다를 질주하는
용왕의 모습이 담긴 용왕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한전(羅漢殿)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16나한 그리고 고려 때 절을 크게
일으킨
원진국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예전 이름은 영산전)

▲  나한전 석가불과 16나한상

▲  원진국사의 진영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아미타불과 영가
(靈駕)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공양간과 요사(寮舍)로 쓰이는 사운당
1층은 공양간, 2층은 요사이다.


▲  어처구니를 상실한 옛 맷돌
불회사 승려와 중생들의 공양밥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맷돌, 이제는 절의
찬란했던 역사를 머금은 화석이 되어 대양루 부근에 조용히 누워있다.
어처구니가 불이 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애타게 그리워하겠지.

▲  진여문 부근 숲길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불회사를 열심히 둘러보고 대양루 부근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기
분 같아서는 속세(俗世)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이곳에서 며칠 머물고 싶지만 내가 있
어야 될 곳이 아니기에 다시 속세로 아쉬운 발걸음을 땐다.
절을 둘러싼 비자나무와 춘백, 소나무의 청정한 내음을 배불리 들어마시며 결코 지루하지 않
는 숲길을 뚜벅뚜벅 걸으니 어느새 연리지와 석장승이 나타나 배웅을 한다. 그들을 지나치기
가 싫어 앞서 지겹게 봤음에도 다시 사진에 담느라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냈고, 다시 길을 재
촉하니 주차장과 도암선사부도, 일주문이 나타난다.


▲  불회사 숲길과 단장의 이별을 하다.
나중에 또 인연을 지을 수 있을까? 그때는 덕룡산과 운흥사(雲興寺) 석장승까지
모두 살펴보고 싶다.

▲  불회사 숲길 (주차장 부근)

불회사입구 정류장에서 다시 두 다리를 쉬며 버스를 기다렸다. 목포로 가야 되기 때문에 나주
시내(영산포, 나주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면 정말 대환영인데 20분 정도 기다리니 남평으로
가는 나주 200번이 나타나 입을 벌린다. 남평으로 나가면 나주시내로 가는 시내버스가 수시로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첩첩한 덕룡산 골짜기에서 탈출했다.
남평으로 나와 영산포로 가는 999번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나주시내 북부에 자리한 나주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아직 점심도 제대로 때우지 못한 상태라 나주곰탕이나 한 뚝배기 들고자 터미널 서쪽 금성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나주곰탕 골목을 찾았다. 이곳은 예전에 2~3번 와본 적이 있는데, 어
느 집으로 갈까 궁리하다가 7년 전에 들렸던 곰탕집으로 들어갔다.


▲  잘 차려져 나온 나주곰탕의 위엄

내가 곰탕집을 찾은 시간은 15시대라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송송(깍두기)과 김치, 양파, 고추
장 등의 밑반찬을 거느린 곰탕이 내 앞에 차려지자 시장기가 왕성하게 솟구쳐 곰탕과 밑반찬
들은 이내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성이 차질 않아서 국물과 밥을 더 청하여 아주 든든하
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먹고 부근에 있는 나주목문화관과 정수루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목포로 넘
어갔다. 이후 내용은 생략~~~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12월 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 '


▲  문원하폭포

▲  관악산 일명사지

▲  보광사 문원리3층석탑



 

여름이 한참 깊어가던 7월 초에 일행들과 관악산(冠岳山, 632m) 문원계곡을 찾았다. 예전
에는 관악산의 품에 자주 안기곤 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는지 기껏 가봐야
그의 외곽만 겉돌 뿐, 그곳 정상<연주대(戀主臺)>을 오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 버렸다.
연주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관악산과 인연을 짓고자 여름에 걸맞은 정처를 물색하다
가 과천(果川)에 있는 문원계곡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관악산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
踏處)이자 대표적인 피서의 성지(聖地)로 관악산 뒷통수에 자리해 있는데, 문원폭포와 문
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등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1시에 정부과천청사역(4호선)에서 일행을 만나 관악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넓게 깔린 교육원로를 가다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오른쪽에 2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문원계곡으로 인도하
는 길로(이정표가 있음) 길 양쪽에는 철책이 둘러져 답답함을 안겨준다.
그런 길을 4분 정도 들어가면 산림초소가 나오면서 비로소 관악산 산길이 펼쳐진다. 여기
서 서쪽으로 가면 백운사(용운암)란 절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 동북쪽으로 가면 문원계곡 산길이다.


▲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두 행정관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좁고 각박한 길이 되어버렸다.
관악산 탐방객을 위해 길을 조금 트여주면 좋으련만..


 

♠  문원계곡(文原溪谷) 입문

▲  문원계곡의 생매장 현장

문원계곡은 관악산을 수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자
하동천(紫霞洞天) 계곡을 비롯해 관악산계곡(서울대 서쪽), 관음사계곡(남현동), 삼성천계곡
(안양예술공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문원계곡은
아기자기한 변화도 좀 보이고 있고, 높이도 제법 되는 자연산 폭포를 2개나 간직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역에서 문원계곡으로 가는 길목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전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지체높은 정부청사와 여러 공공기관이 단단하게 자리하여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아서 좋음) 그러니 먹거리를 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면
정부과천청사역 10번이나 11번 출구로 나가거나 KT과천지사 정류장에서 내리기 바란다. 그곳
이 과천의 중심지로 식당과 가게가 많다.

문원계곡은 관악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정부청사 서쪽으로 흐르는데, 옛 기술표준원 북쪽에서
그만 강제 생매장을 당한다. 강제로 지하에 묻히는 계곡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 물소리가 귀신
을 쫓아낼 정도로 우렁찬데 아무리 공공기관이라도 계곡이 그리 크지도 않거늘, 계곡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참 아쉽다. 허나 다행히 생매장 구간은 짧아서 옛 기술표준원을 지나면 교육원
로 남쪽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기술표준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되었음)

산림초소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문원
계곡 하류가 나온다. 생매장 직전인 이곳에 폭
포 2개가 연달아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
들은 자연산이 아닌 지형을 이용하여 다듬은
인공폭포이니 속지 말자. 문원계곡의 알짜배기
폭포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된다.

▲  인공(人工)이 가해진 문원계곡 하류 폭포

 


▲  각세도의 성지(聖地), 신계 이선평(晨鷄 李善枰)의 묘역

인공폭포를 지나면 산길 오른쪽으로 소나무 그늘에 묻힌 무덤과 안내문이 손짓을 한다. 전혀
정보가 없는 무덤이라 안내문을 기웃거리니 각세도(覺世道)를 세운 이선평의 묘역이다. 각세
도에서는 그를 도조(道祖)로, 그의 묘는 성묘(聖墓)라 추앙하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선평(1882~1956)은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태산촌(泰山村)에서 태어났다. 조선 2대 군주인
정종(定宗)의 1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정진했는데,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
진무외(天下大寶 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인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의술과
복점(卜占), 풍수지리서를 익혔다고 한다.

수도를 마치고 잠시 세상으로 내려와 군의(軍醫)가 되기도 했으나 1907년 군대해산으로 실업
자가 되자 다시 수도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비봉산(飛鳳山)에 들어가 1,000일 기도
에 돌입했다.
기도를 벌인지 488일째 정오에 남쪽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쓰인 각세도 3자가 나타났다. 그리
고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
滅 永歸靈界)'란 16자의 주문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초하루부터 매일 1자씩 하늘에서 글
씨를 받아 30계명과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1,000일을
채우고 속세로 내려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니 그것이 각세도의 시작이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신도가 3만에 이르렀고, 해방 이후에는 10만까지 늘어났으며, 이선평은
문원계곡 하류에 세심정(洗心亭)이란 초막을 지으며 포교를 벌이다가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1956년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
게 된다. (이선평과 각세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음)

이선평의 묘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성역화 사업을 벌였으며,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
望柱石) 1쌍, 묘비,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를 대충 덤으
로 챙기고 서둘러 문원계곡으로 들어섰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문원계곡 산길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문원계곡 중류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으며, 피서객들의 욕탕이 되버린다.

▲  문원계곡 바위 산길 - 보호 난간이 등산객의 발길을 지켜준다.

문원계곡 산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느긋하다. 산길과 계곡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
다가 바위 산길(이선평 묘역과 문원하폭포 중간)에서 잠시 멀어지는데 바위 벼랑 밑으로 아득
하게 계곡이 보인다.


▲  바위 산길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숲 너머로 과천 시내와 청계산(淸溪山)이 두 눈에 들어온다.

▲  문원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
바위 산길을 지나면 잠시 멀어진 계곡과 다시금 가까워진다. 그 상태는
문원폭포까지 쭉 이어져 서로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  나무다리 주변 문원계곡 중류


 

♠  문원계곡의 꿀단지, 문원하폭포와 문원폭포

▲  관악산 제일의 폭포, 문원하폭포(文原下瀑布)

산림초소에서 천천히 30분 정도 오르면 계곡 상류에 걸린 문원하폭포(이하 하폭포)가 마중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문원폭포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답이 아니었다. 그 문원폭포는 여
기서 더 올라가야 되며, 그 폭포 밑에 있다고 해서 문원하폭포라 불린다. 허나 외모는 문원폭
포보다 하폭포가 훨씬 잘났다. 그래서 문원폭포보다는 하폭포가 이곳의 중심 폭포이자 관악산
제일의 폭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차라리 하폭포를 문원폭포라 하고, 문원폭포를 문원상
폭포나 윗폭포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하폭포는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명주 자락을 늘어뜨린 듯 하얀 물보라를 쏟아내는데, 위에
서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거의 20도 정도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바위
를 타고 힘차게 내려온다.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폭포 밑에는 물놀이 하기에 좋게 얕
은 수심의 못이 형성되어 있으며, 폭포 남쪽에 산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포가 있는
바위는 안전을 위하여 하얀 금줄을 쳐놓았으나 어기는 산꾼이 적지 않다.

관악산은 산세와 바위는 참 일품이지만 문원계곡과 관악산 제일의 경승지로 추앙받던 자하동
천을 빼면 계곡도 평범하고 폭포도 거의 없다. 그나마 문원계곡이 좀 아기자기한 편이고, 그
곳에 빚어진 하폭포와 문원폭포가 관악산에서 제일 화끈하게 폭포의 패기를 보여준다.


▲  위에서 바라본 하폭포

▲  반석으로 이루어진 하폭포 윗쪽

하폭포 옆구리를 통해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반석이 나온다. 문
원계곡을 찾은 산꾼들이 많이 쉬어가는 쉼터로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일명사지와 연주암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문원폭포
가 나온다. 그리고 서북쪽 길로 오르면 육봉과 팔부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연주대)이 목적
이라면 북쪽 마당바위로 오르면 된다.


▲  하폭포 윗쪽에 자리한 마당바위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정경백(鄭景伯) 바위

마당바위 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살짝 밀면 당
장이라도 때굴때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세인데, 그의 피부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정경백'
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바위글씨 때문에 '정경백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정
경백은 사람 이름으로 뭐하던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의 폼을 보니 구한말이나 왜정 때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찾은 정경백은 문원계곡의 뛰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지면서 마당바위 피부가 아닌 이
바위에 이름 3자를 낙서로 남겼다. 인명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도 그의 정보가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평범한 선비거나 글 좀 아는 백성인 듯 싶으며, 바위에 이름을 남긴 인연으로
비록 그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바위와 함께 지금까지 남게 되었고, 관악산의 주요 바
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관악산에 널린 바위 가운데 사람 이름을 취한 바위는 이
것이 유일하다.


▲  정경백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과천과 의왕시내, 청계산, 광교산)

  하폭포에서 문원폭포로 인도하는 산길

   ◀  그늘에 숨겨진 문원폭포(文原瀑布)
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그
늘에 묻힌 문원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폭
포는 위성지도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위용을 속
세에 드러내고 있지만 문원폭포는 숲 그늘 속
에서 수줍게 물보라를 피운다.
폭포의 높이는 10m 정도로 하폭포에 비해 볼
품도 많이 떨어지고 물소리도 차분하다. 거의
90도 각을 이룬 윗부분을 빼면 경사도 거의
40~50도 정도로 물이 미끄럼을 타듯 부드럽게
내려와 착지를 한다.
폭포 옆에는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 밑에 비
와 눈을 피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
다.
거의 석모도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와 좀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태극기를 비롯해 기
도나 굿에 사용하는 물건과 그것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굿이나 기도터로 몰래 쓰이고 있
음을 알려준다.


▲  시원찮게 떨어지는 문원폭포 윗도리

▲  문원폭포 옆 기도처
깎아지른 벼랑 밑도리에 움푹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있어 기도나 굿터로
암암리에 쓰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의 지기(地氣)가 높거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승려와 참선하는 사람들의 수행 공간이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원폭포 아랫 계곡 (왼쪽은 폭포 옆
기도터로 인도하는 길)


 

♠  하늘과 가까운 곳에 숨겨진 옛 절터,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
- 경기도 지방기념물 191호

▲  동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육봉일명사지)

▲  서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하폭포에서 마당바위를 지나 각박한 산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긴 석축이 나온다. 그 석축이
바로 옛 일명사터로 석축 앞에 관련 안내문이 서 있어 등산객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명사터는 육봉(六峰) 밑에 있다고 해서 육봉일명사터라 불리기도 한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육봉일명사지') 절터의 면적은 400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비밀을 캐려는 집념으로 1999년 절
터를 뒤집은 결과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 2점과 석탑(石塔)의 잔재 1기, 우
물 2곳이 나왔고, 조선시대 암막새기와 조각 20여 점이 나왔다. 또한 범어(梵語)가 새겨진 기
와와 무늬가 없는 조그만 기와 등 신라 후기 기와도 여럿 나와 신라 후기에 법등(法燈)을 켰
음을 짐작케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터의 입을 강제로 열면서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중기나 후기에 망한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에 다시
중창되어 그런데로 절을 꾸리다가 17세기 후반에 완전 문을 닫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재정 악화와 주변 사찰과의 경쟁 등이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 무리한 조세와 공납(貢納), 고적한 곳에 위치한 지리적 불리함 등으로> 만약 산사태 등의 자
연재해로 망했다면 절터가 좀 온전하지 못해야 되는데 절터는 너무 선명하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축, 연화문대석이 있는데, 절이 망한지 꽤 되었음에도 절터가 원형을 잃
지않고 잘 남아있어 관악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관악산에는 이곳 외에도 연
주암의 전신(前身)으로 여겨지는 관악사(冠岳寺)터가 있으며, 관악산과 삼성산은 신라 후기부
터 절이 많이 생겨나 북한산(삼각산)과 더불어 수도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특히 연화
문대석은 관악산에 남아있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어
일명사도 왕년에 꽤 잘나갔음을 가늠케 한다.
그 잘나가던 절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늠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고, 건물을 받쳐들던 주춧돌
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받들고 있으니 참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일명사는 스스로를 태
우며 그 위대한 진리인 인생무상 4자를 우리에게 진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허나 그러면 뭐하
나. 인간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 어정쩡하게 들어앉은 존재라 그것을 죽기 전에나 깨달으니
말이다.

일명사터는 하폭포에서 연주암 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는 쉽다. 연화문대석 2기는 절터 한복판
에 박혀있어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석탑의 잔재와 우물은 절터 인근 수풀에 묻혀 있다.
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1


▲  일명사터 석축

▲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일명사터 중앙 건물터
다른 건물터와 달리 규모가 크고 절터 중앙에 자리해 있어 절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여겨진다.

▲  일명사터 동쪽 건물터
조그만 건물이 여럿 뿌리를 내렸던 곳으로 산신각(山神閣)이나 명부전(冥府殿),
요사채 자리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  화석처럼 박힌 연화문대석 형제
이들은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불 대좌(臺座)의
일부로 여겨진다. 관악산의 몇 안되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새겨진 것으로 천하에 짧게나마 주목을 받았다.

▲  절터 북쪽 석축과 돌다리

절터 북쪽과 동쪽에는 조그만 물줄기를 두어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을 아래로 흘러보낸다. 이
렇게 배수 시설까지 갖추어 식수를 해결하고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도
대비를 했는데, 석축 북쪽에는 통돌을 깔아 조그만 돌다리까지 두었다.

일명사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내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오랜만에 연주암까지 오
르고 싶었지만 거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각박한 산길을 올라야 되고, 날씨도 무지 덥다. 하
여 쿨하게 포기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늘 인연도 아님에도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은 그렇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원계곡 하류인 산림초소로 내려와서 바로 속세로 향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애승용군을 찾
았다. 그곳은 산림초소와 매우 가까운데,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든 편은 아니라서 2분 정도 수고하면 바위 2개와 소나무가 마중을 나오는
데, 소나무 서쪽 바위에 '용운암 마애승용군'이 자리해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용운암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 과천시 향토유적 4호

이름도 참 생소한 마애승용군(이하 승용군)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승용(僧容)은 승려의 얼
굴을 뜻한다. 그러니 쉽게 풀이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된다. 승용군 앞에 붙은 용
운암은 부근에 자리한 절 이름으로 예전에는 승용군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촌(洪村) 마애승용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밑에 홍촌이란 마을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
다.

보통 불상이나 보살 등을 바위에 새겨 마애불(磨崖佛)로 삼지만 그들 대신 승려의 얼굴을 새
긴 경우는 천하에서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바위 윗도리에 얼굴 3구가 새겨져 있고, 밑도리에
2구가 간결하게 스며들었는데, 얼굴이 하나 같이 동자승처럼 밝고 귀여운 표정이다. 3명은 정
면을, 2명은 측면(側面)상을 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불상도 아닌 승려 얼굴을 새겼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은 없다. 승려
를 귀족처럼 받들던 고려 때 관악산의 이름 있는 승려를 기리고자 얼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
으나 이 역시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서쪽 자락인 안
양예술공원에 마애종(磨崖鍾)이 새겨져 있는데, 범종과 이를 치는 승려가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악산에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가 1종류도 아닌 2종류가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
다.


▲  바위 윗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3구
가운데와 오른쪽 승려는 정면을 보고 있고, 왼쪽 승려는 옆을 보이고 있다. 눈썹과
살짝 감긴 눈, 코, 입, 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앳된
동자승이나 원숭이처럼 해맑기 그지 없다.

▲  바위 밑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2구
귀마개나 이어폰을 낀 것 같은 왼쪽 승려는 정면을, 오른쪽 승려는 옆을 보고 있다.
승려 얼굴 상 외에도 정체가 아리송한 문양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  승용군 바위 뒤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근래까지 불공 장소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마애미륵불이 있다.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유산 3점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과천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악산 문원계곡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가 과천중앙고 서쪽에 자리한 보광사에 잠시 발을
들였다.
교육원3거리에서 교육원로를 따라 6~7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남쪽)에 보광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손짓을 하는데 그의 손짓에 맞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광사가 모습을 비춘다.

이 땅의 흔한 절 이름의 하나인 보광사, 서울과 수도권에만 우이동(牛耳洞) 보광사, 파주 보
광사(☞ 관련글 보러가기), 남양주 보광사, 그리고 이곳까지 60년 이상 묵은 절만 쳐도 최소
4곳이 넘는다.

관악산 남쪽 자락이자 정부과천청사를 바라보고 선 과천 보광사는 1946년에 창건되었다. 이때
법당 6칸과 요사 1동이 닦았는데 현재의 가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룩된 것으로 2001년
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법당으로 삼았고, 삼성각과 명부전, 설법전 등을 세워 지금에 이른
다.
법등(法燈)이 켜진 역사는 고작 70년 남짓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싹트지도 못했다. 허나 인
근 문원동 절터에서 오래된 3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을 업어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이곳
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조선 후기 불상까지 새로 영입하면서 매우 짧
은 법등에 비해 오래된 문화유산을 3개나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보광사와 관련이 없는 것들
이지만 바로 그들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대에 지어진 그저 그
런 사찰의 하나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로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을 비롯하
여 명부전과 설법전, 삼성각, 요사,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과 요사(寮舍) 같은 경우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밑에도 공간을 만들어 2층을 이루고 있다.

▲  2002년에 지어진 보광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보광사 설법전

◀  관악산이 베푼 물로 늘 만조를 이루는
보광사 샘터과 이끼 옷을 살짝 걸친
석조(石槽)


▲  보광사 경내 동부 <3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석조보살입상>

▲  보광사 문원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9호

툇마루를 간직한 주지실 앞에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관문동 절터(어딘지는 모르
겠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얀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닥돌 위에 얹혀져 있는데 2중의 기단(基
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한 맵시 좋은 탑이다.
이중 바닥돌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층 탑신에는 2중으로 새겨진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얇게 만든 3단의 받침
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 끝은 살짝 올려져 약간 경쾌감을 준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시흥 문원리 3층석탑'이다. 허나 과천은 어엿한 시(市)로 시
흥군에서 분리된지도 30년이 넘었고, 그 문원리도 문원동이 되었건만 명칭은 아직도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 쾌쾌묵은 이름을 현실에 맞게 다듬어 '보광사 3층석탑'이나 '과천 문원
동 3층석탑'으로 갈아야 될 것인데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그래도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이
름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지방문화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명부전 앞에는 오래된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석불은 문원동 15-166번지에서 가져온 것
으로 높이 1.7m 정도 되는 돌에 얇게 선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씌우는 선에서 아주
간단히 처리했다. 허나 세월의 태클로 그 선각도 희미해져 자세히 안보면 석불인지 다른 석상
(石像)인지 햇갈릴 정도이다.

갓으로 머리가 가려진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썹과 눈, 입, 코를 새겼으나 거의 표정이 지워진
상태이고 목은 짧지만 두껍다. 돌을 제대로 깎지 않고 그냥 선각만 했기 때문이다. 왼손은 가
슴에 대어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見)의 법의(法衣)이다.
많이 부실해 보이는 이 석불은 납작한 얼굴과 짧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 도식화된 모습
을 통해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2호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중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고 있
는 불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다. 그 좌우에 자리한 존재들은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과 관음보살로 2001년에 조성되었다.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의 하례를 받고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금칠을 입힌
것으로 원래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있었다고 한다. 6.25가 터지자 어
느 신도가 여주(驪州)로 피신시켰고, 그렇게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이곳에 기증하여
보광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불상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눈썹이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뜨며 북쪽을 바라
본다. 코는 작고 오똑하며, 붉은 입술 위에 검은 수염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굴이 크다보니
볼살도 많아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에 닿는다. 저리 귀가 크니 중생의 민원은 하나도 누
락됨이 없이 잘 들어줄 것이다. (민원도 잘 처리해주는지는 모르겠음)
머리는 나발로 두툼하게 무견정상이 솟아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과 배 사
이에는 연꽃이 새겨진 허리띠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따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양식을 보아 조선 초기 또는 조선 초기 양식을 간
직한 조선 중기 불상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26-21 (교육원로 41, ☎ 02-502-2262)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관악산
절은 작지만 관악산을 앞뜰로 품고 있어 앞뜰 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보광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반이 넘었다. 칼퇴근의 달인 햇님도 뉘엿뉘엿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장대한 관악산도 어둠의 커텐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관악산 보광사, 문원계곡(문원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정부청사입구 교육원3거리이다. 여기서 국
  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인도하는 교육원로를 6~7분 가면 왼쪽에 보광사가 있으며, 15분 정
  도 가면 오른쪽에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여기서 마애승용군까
  지는 6~7분, 문원하폭포까지는 35~40분, 일명사터와 문원폭포는 40~45분 정도 걸린다.
* 441, 502, 540, 541, 542, 1-1, 9, 9-3, 11-1, 11-2, 11-3, 11-5, 103, 777, 303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정부과천청사나 과천주공2,3단지 하차
* 문원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7월 2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국제적인 선찰로 명성이 높은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의 석가탄신일 야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북한산 화계사의 야경 '


▲  화계사 대웅전과 초파일 연등의 향연


 

올해도 변함없이 내가 좋아하는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
일만 되면 어김없이 내가 서식하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이나 비록 역사는 짧지만 문화
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초파일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허나
이번에는 전날 과음으로 인해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고 14시가 넘어서야 겨우
천근만근 같은 두 눈이 떠졌다. 그래서 15시가 넘어서 겨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열심히 걸음을 재촉해 숭인동에 있는 낙산 청룡사(
靑龍寺, ☞ 관련글 보러가기), 삼선동 정각사(正覺寺)를 둘러보고 삼선교(한성대입구역)
로 나오니 벌써 18시를 가르킨다.
3시간 가까이 바쁘게 움직였더만 몸도 좀 피곤하여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철수하려고
했으나 화계사로 가는 151번 시내버스(우이동↔흑석동)를 보는 순간 마음이 변덕을 부려
계획에도 없던 화계사(華溪寺)로 길을 향했다.
아직 해가 조금은 남아있어 벌써 발길을 돌리기에는 다소 아쉬웠고, 연등의 향연이 펼쳐
지는 초파일 야경은 꼭 봐줘야 된다. 게다가 1년에 딱 하루 밖에 없는 날이니 제대로 즐
겨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화계사에 이르니 저녁 시간임에도 절을 찾는 수요가 엄청났다. 많은 사람들이 절에서 나
오고 또 그만큼 들어가기를 반복하여 화계사입구(한신대교차로)는 사람과 차량으로 북새
통을 이루었다. 하긴 서울 동북부 지역(도봉/강북/노원구)에서 도선사(道詵寺) 다음으로
크고 유명한 절집이니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것은 당연하다. 썰물처럼 밀물처럼 들어가고
나오는 인파 속을 헤엄치며 간신히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섰다.

경내를 코 앞에 둔 장소에서 신도 아줌마들이 백설기라 불리는 두툼한 떡을 나눠주고 있
었는데 그 떡을 1개 챙기며 초파일 야경에 잠긴 화계사 경내로 들어섰다. 햇님도 뉘엿뉘
엿 저물어 그만의 비밀 공간으로 숨어들고, 그 틈을 타 달님이 어둠을 내리니 조용히 웅
크리던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낸다. 바로 초파일 풍경의 백미(白眉)인
연등의 향연이 두근두근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화계사의 내력에 대해 간단
히 살펴보도록 하자.


▲  서서히 초파일 저녁 향연을 준비하는 화계사 연등
(대적광전에서 바라본 모습)


 

♠  화계사 입문 (범종각 주변)

▲  화계사 일주문 장엄등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화계사는 1522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신월은 서평군 이공(西平君 李公)의 도움을 받았는데, 나무를 벌채를 하지 않고 인근 부허동(
浮虛洞)에 있었다고 전하는 보덕암(普德庵) 건물(법당과 요사 50칸)을 가져와 절을 세웠다. 아
마도 서평군이 그곳을 접수하여 절 건립에 제공했던 모양이다.
화계사 건립에 희생된 보덕암은 고려 광종(光宗) 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창건했
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보덕암 건물을 단순히 옮겨왔다는 이유로 화계사의 창건시기를
고려 초로 우기기도 했으나 이는 단순히 건물만 가져왔을 뿐, 절의 이름과 성격은 다르므로 엄
연한 별개로 봐야 된다. 그래서 1522년을 창건 시기로 크게 삼고 있으며, 대적광전 앞에 450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절의 창건시기를 그런데로 받쳐준다.

1618년 9월 불의의 화재를 만나 절이 싹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德興
大院君) 집안의 지원을 받아 중창 불사를 벌여 1619년 3월 완성을 보았다.
이후 절이 크게 쇠퇴했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
夫人閔氏)와의 인연 덕분에 다시금 흥한 기운을 얻게 된다. 당시 화계사는 민씨 외가의 원찰(
願刹)로 민씨는 자주 이곳을 찾아 불공을 올렸는데 그러다보니 대원군도 부인 손에 이끌려 이
곳을 찾았다.
당시 대원군과 화계사와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대원군의 야망을 엿보게 하는 설화 한 토막이
세월의 바람을 타며 은은히 전해온다.


▲  반야용선(般若龍船) 장엄등
석가탄신일 1주 전 토요일에 열리는 서울 연등회(燃燈會) 제등행렬에
단골로 참여하는 장엄등이다.


때는 바야흐로 안동김씨 세력이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던 시절의 어느 여름날<헌종(憲宗) 때로
여겨짐>, 대원군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무더운 여름이라 참을 수 없는 갈증으
로 꽤 지친 상태였는데 절 앞 느티나무에 이르니 왠 동자승(童子僧)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꿀
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대원군은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듯, 사발을 신나게 들이키고 물을 준 이유를 물었다. 동자승이
괜히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자 왈 '만인(萬印) 스님께서 이러이러한 손님이 오실
것이니 꿀물을 드리고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대원군은 자신이 올 것을 짐작했던 만인의 예지력에 크게 감탄하며 동자승의 안내로 만인의 방
으로 들어갔다.

대원군과 만인, 이들은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 이번이 초면인지는 모르겠으나 금세 심금
을 터놓고 판이 큰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몰아내고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자신의 야망을 드러냈다. 허나 만인은 그의 야망은 물론이고 장차 나라를
좌지우지할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시치미를 한번 뚝 떼며, '이것도 다 인연의 도리인데, 소승이 어찌하겠습니까? 흔쾌히
알려 드리지요'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냐? 충청도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帝王)이 태어날 명당(明堂)이니 연천(漣川)에 있는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그곳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장차 제왕이 될 왕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명당 자리를 알려주는 것은 좋으나 그 자리에 이미 절이 있다. 절에 몸 담은 승려로써 참으로
몹쓸 말을 한 꼴이 된다. 허나 그렇게 흥선대원군이란 든든한 후광(後光)을 얻게 됨으로써 가
야사에게는 미안하지만 화계사는 이전보다 더 흥하게 된다. 그게 바로 만인이 노린 것이다.

대원군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곳 주지승과 흥정했다. 돈에 함빡 넘어간 주지승은
자기 절에 불을 지르며 탑을 부셨고, 대원군은 남연군 묘를 그곳으로 이전했다. 이후 아들 이
재황(李載晃)이 태어났고, 1863년 조대비(趙大妃)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高
宗)이다. 이렇게 대원군의 꿈은 그런데로 이루어진다. 동시에 만인의 꿈도 실현된다. 허나 그
러면 무엇하랴? 3대도 못가서 나라를 보기 좋게 말아먹었거늘...

▲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화루<寶華樓, 화장루(華藏樓)>

고종 이후, 화계사는 날개를 겹겹히 달게 되는데, 1866년 대원군의 두둑한 지원으로 절을 중수
했으며 이때 지어진 것이 대웅전과 보화루(화장루)이다. 1870년에는 용선(龍船)과 초암(草庵)
이 대웅전을 중수했고, 1875년 화산재근(華山在根)이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을, 성암승의(性庵
勝宜)가 신중탱과 현왕탱, 지장탱 등을 조성했다.

1876년에는 초암이 전년에 궁궐에서 받은 자수(刺繡)로 만든 관음상(觀音像)을 봉안하고자 관
음전을 고쳐지었다. 이 관음상은 1874년 2월 훗날 순종(純宗)이 되는 왕자가 태어나자 그의 수
명장수를 기원하고자 모후(母后)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조대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헌
종의 왕후로 홍대비)의 발원으로 궁녀들이 수를 놓아 만든 것이다. 기존 관음전이 1칸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라 상궁들이 돈을 내었고, 넉넉한 재정 지원에 장인들도 앞을 다투어 건립에
참여해 건물을 짓고 단청하는데 불과 며칠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1877년에는 왕명으로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에 있던 강서사(江西寺)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가져와 화계사에 주었고, 이들을 봉안하고자 1878년 시왕전을 고쳐지었다. 또한 1880년 조대비
가 명부전에 불량답(佛糧畓)을 내렸으며, 1883년 금산(錦山)이 조대비와 홍대비의 지원으로 관
음전의 불량계(佛粮契)를 세웠으며 1885년 산신각을 중수했다.
1897년에는 큰 종을 영주 희방사(喜方寺)에서 가져왔으며 중종(中鐘)은 경도에서 구입하고, 운
판은 멀리 해남 미황사(美黃寺)에서 가져왔다. 이렇게 고종과 순종 시절에는 왕비와 대비, 상
궁의 발길이 빈번해 속세에서는 이곳을 궁(宮)절이라 불렀다. 그만큼 왕실과의 끈이 두터웠던
것이다.

1910년 12월, 월명(越溟)이 임종할 때 강원도 양양에 있던 논 276두락(斗落)을 절에 헌납하면
서 만일염불회가 세워졌으며,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로 편입되
었다.
1921년 3월 현하(玄荷)와 동화(東化) 두 화주가 김창환, 민준기 등의 시주로 관음전과 시왕전
을 중수 단청했고, 이듬해에 대웅전 개금불사를 벌였다. 1925년에는 주지 한찬우(韓讚雨)가 김
종하, 오정근의 지원으로 법당 및 대방 앞뒤 축대를 쌓아 이듬해 7월 완성했으며, 1933년 7월
한글학회 주관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 마련을 위한 모임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때 논의된 통일
안은 그해 10월 세상에 발표되었다.
1937년에는 종식(鍾植)이 낡은 건물을 정비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올라가는 길목 바위
에 마애관음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승려 안진호가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
略誌)'를 편찬했다.

6.25전쟁 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는 없었으며, 1964년 최기남 거사의 가족이 기증
한 최기남의 오백나한을 봉안하고자 천불오백성전을 세웠고, 1972년에 진암(眞菴)이 범종각을
지었다. 197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을 조성했으나 이듬해 관음전이 불에 타면서 소실되었으며,
1975년 진암화상이 퇴락한 산신각을 증축해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1년 4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웠고, 1992년 국제선원을 개원해 외국인 승려의 필수 수행처
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에는 명부전을 보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했고, 2005년에 대웅전을
보수해 지금에 이른다.

▲  대웅전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  천불오백성전

화계사가 외국인 승려의 성지가 된 것은 숭산행원의 오랜 노력 덕분이다. 그는 1970년대에 미
국으로 건너가 서양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 불교를 포교했다.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방
황하던 그들은 숭산의 포교와 설법에 적지 않게 감명을 받았고, 그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5만
명이 넘는 서양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숭산이 해외에 세운 선원은 30개 나라에 120곳이 넘으며, 미국에서 처음 세운 '프로비던스 선
원(禪院)'에서는 1982년 천하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평화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의 열성
적인 해외 포교로 화계사를 찾는 외국인 승려와 승려 희망자가 늘자 계룡산(鷄龍山) 무상사에
제2의 국제선원을 닦아 이들을 수용해 가르치고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 출신 외국인 승려 중에 그 유명한 미국인 현각이 있다. 그는 카톨릭교 집안에
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우연히 숭산의 설법을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불교로 갈아탔고 화계사를 찾아 승려가 되었다. 꽤 열심히 활동하여 현정사(現靜寺, 경북 영주
부석면)의 주지를 지내기도 했으며, 화계사 국제선원의 선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듯 국제적인 수행처로 명성을 날리면서 경내에서 외국인 승려를 보는 것은 이제 일상 생활
이 되었다.

화계사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보화루, 대적광전, 조실당, 천불오
백성전, 교육관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이중 대적광전이 단연 규모가
크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사인비구 제작 동종과 목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등 국가 보
물 2점과 대웅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아미타괘불도 및 오래여도, 탑다라니판, 천
수천안관음변상판 등 지방문화재 9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3그루가 서울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보호수 나무는 이번에 담지 않았음)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 또한 착하여 접근성도 우수하며, 주택가가 바로 지척이지
만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을 누리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다. 국
제적인 사찰이라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인사를 건네는 외국 승려와 수행자의 모습에서 우리
나라 불교의 높은 위상과 인기를 새삼 느끼게 한다.

※ 화계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지하철 우이신설선 화계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2분
*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1번, 1165번 시내버스를 타고 화계사입구
  , 한신대대학원 하차, 도보 10분
* 지하철 4호선 미아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1번 시내버스 이용

* 화계사에서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체험형은 매주 토/일요일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참가비는 5만원이다. (1박 2일 기준) 자유롭게 머물다 가는 휴식형은 화~
  금요일에 운영하며 예불과 식사시간만 지키면 된다. (1박 2일에 5만원) 자세한 정보는 화계
  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487 (화계사길 117 ☎ 02-902-2663, 02-903-3361)
* 화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천하를 향해 연등을 늘어뜨린 범종각(梵鍾閣)

대적광전 옆에 자리한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4물(四物)이
라 불리는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보금자리이다.
범종각은 원래 대적광전 서남쪽에 있던 것으로 2층으로 이루어진 6각형 건물이었다. 1972년 진
암(眞菴)이 대방(보화루)에 얹혀살던 영주 희방사(喜方寺) 출신 동종과 대웅전 처마 밑에 매달
려 거의 썩기 직전이던 법고를 위해 지은 것으로 기존 건물을 부시고 지금 자리에 번듯하게 새
범종각을 지었다.

온갖 연등과 장엄등으로 몸을 치장한 범종각에
는 특이하게 종이 2개씩이나 달려있다. 큰 종은
1978년에 진암이 만든 것이며, 그 옆에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작은 종은 1683년에 제
작된 것으로 1898년 희방사에서 올라왔다. 무게
는 300근 정도 된다.
이 동종은 17세기에 활약했던 사인(思印) 비구
가 만든 8개의 종 가운데 하나이다. 사인은 손
재주가 좋은 승려로 종을 매우 잘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종이 이곳과 강화도, 안성 청룡사(靑
龍寺), 의왕 청계사(淸溪寺), 홍천 수타사(壽陀
寺), 문경 김룡사(金龍寺), 포항 보경사(寶鏡寺
),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전하고 있다.

▲  화계사 동종 - 보물 11-5호

이들 종은 모두 보물 11호 계열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원래는 강화도 동종만 11호였다.
그러다가 2000년에 사인이 만든 종을 죄다 보물로 삼으면서 화계사 동종도 그 혜택을 받게 되
었다. (그 이전에는 비지정이었음) 그만큼 사인이 만든 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우수 종으
로 전통적인 신라 범종 양식을 지키면서 거기의 자신만의 독창성을 집어넣었다.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보물로 종 윗부분 용뉴에 쌍용(雙龍)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상대(
上帶)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했고, 그 밑에 조선 후기 양식을 지닌 유곽(遊廓) 4좌를 두
었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무늬로 채우고, 유곽 안에 있는 9개의 유두는 여섯 잎으로 된 꽃
받침 위에 둥근 꽃잎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유곽 사이에는 '종면경석(宗面磬石)','혜일장명(
惠日長明)','법주사계(法周沙界)'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안성 청룡사 동종에서 같은 내용이
있다. 종 밑도리에는 가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띠 안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며, 종 조성과 관련된 명문(銘文) 200자 정도가 새겨져 있
어 종의 탄생 정보를 알려준다.

이 종이 제자리(희방사)를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은 왕실의 화계사 사랑이 뜨겁기 때문이다. 덕
분에 화계사의 보물은 그만큼 늘어났으며 이곳의 범종 역할을 하면서 하루에 2번 종소리를 날
렸다. 그러다가 1978년 그 곁에 새 범종을 매달면서 그 역할을 후배에게 물려줬고, 국가 지정
보물이란 큰 명예직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종소리를 울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이제 340년 남짓, 아직은 한참 몸을 풀 무탈할 나이이나 절에서 그의 몸을 무척
아끼면서 이제는 거의 무늬만 종이 되었다. 종은 종의 역할을 해야 종다운 것이지, 저렇게 그
림의 떡처럼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종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예외)


▲  연등으로 활활 타오르는 범종각과 그 주변

▲  범종각에 걸린 붉은 연등과 네모 연등, 6각형 연등

시대가 바뀌면 연등과 장엄등에도 변화를 줘야 된다. 그래서 기존의 연등 모습을 탈피하여 네
모, 6각형, 8각형, 온갖 모습의 등까지 다양하게 등장했다. 그런 연등에 그려놓는 그림이나 등
의 형상도 불교 외에도 다채롭게 담고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데 왼쪽 네모 등에는 코끼리
를 탄 두광(頭光)을 두룬 관음보살 누님이 귀엽게 깃들여져 있고, 오른쪽 6각형 연등에는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토끼가 그려져 있어 웃음바이러스를 살짝 건네준다.


▲  기도하는 동자승을 담은 네모난 등(왼쪽)과 카톡 이모티콘
무지(muzi)를 담은 8각형 등

▲  8각형 등에 깃든 카톡 캐릭터 프로도의 위엄
연등에는 현재 유행하는 캐릭터나 온갖 군상(群像)의 존재를 담고 있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변형 연등의 살아가는 정석을 보여준다.

▲  카톡 캐릭터 악동복숭아(어피치, apeach)를 담은 장엄등

▲  연꽃과 달이 그려진 연등

▲  카톡 이모티콘 네오를 담은 8각형 연등


▲  부엉이 부부와 흩날리는 봄꽃이 담긴 6각형 연등

▲  대적광전과 보화루 사이의 허공을 장악한 연등
하늘이 갑자기 건물 높이만큼 확 내려앉은 기분이다.

▲  보화루에 걸린 '삼각산 제일선원(第一禪院)' 현판

대웅전과 대적광전 사이에는 보화루가 자리해 있다. 화장루라 불리기도 하는데 1866년에 지어
진 건물로 대방(大房), 큰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방은 조선 후기에 왕실의 지원을 두둑히 받던 서울 근교 절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물로 이곳
을 비롯해 돈암동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고양 흥국사, 파주 보광사(普光寺)
등에 남아있다. 대방의 역할은 승려의 숙식 및 예불의 목적도 있지만 서울에서 온 왕족과 사대
부들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고 그들만의 별도 예불처를 두어 법당에서 백성들과 함께 예불을 보
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니까 왕족과 귀족을 위한 조금은 아니꼬운 특
별 서비스 공간인 셈이다. 그들이 주요 밥줄이나 다름이 없으니 절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해
야 절도 꾸리고 속칭 소고기도 사묵을 수 있다.

보화루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가 쓴 것이며, 화계사
현판은 1866년 대원군이 절 중수 자금과 함께 보내준 친필 현판이다. 이 현판에는 '대원군장(
大院君章)','석파(石坡)'가 쓰여 있는데, 예서체와 해서를 혼합해서 쓴 명필이다.
1933년에는 이희승(李熙昇), 최현배(崔鉉培) 등 한글학회 소속 국문학자 9명이 보화루에 머물
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했던 유서 깊은 현장으로 그해 10월 그 통일안이 발표되었다.

현재 보화루는 큰방과 종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1974년 불에 탄 관음전에 있었던 관음보살상을
봉안해 관음전(觀音殿)의 역할도 겸한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는 석축 높이 때문에 누(樓) 비슷
한 성격을 지녔으나 대적광전을 지으면서 계단을 없애고 평평하게 다졌으며, 예전에는 보화루
가 외부에서 경내를 감싸서 가리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대적광전이 그 역할을 몇배 이상으로
휼륭히 해내고 있다.


 

♠  화계사 대웅전 주변

▲  윤장대(輪藏臺) 장엄등

보화루 옆에는 윤장대를 흉내낸 장엄등이 중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윤장
대는 여럿 봤지만 장엄등으로 된 그것은 처음인데 윤장대란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
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법회 때 경전을 안에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
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여 '윤장대
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는 식으로 중생들에게 영업을 했다.
비록 장엄등이지만 그 성격에 맞추어 손잡이까지 두어 돌려보도록 했다.


▲  대웅전 옆구리를 가득 메운 연등

▲  화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5호

좌우로 명부전과 삼성각을 거느리며 동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은 화계사의 법당(금당)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66년 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졌으며, 1870년에 중건
했다. 당시 환공야조(幻空冶兆)가 쓴 '화계사 대웅보전 중건기문(華溪寺大雄寶殿重建記文)'에
따르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문짝을 위로 올릴 수 있
다. 그래서 초파일이나 한여름에 가면 보통 문이 위로 들려져 있다. 대웅전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인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의 것으로 여겨지며,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으로 내용은 이렇다.

비로해장전무적(毘盧海藏全無跡) - 비로자나의 법해에는 완전한 자취가 없고
적광묘사역무종(寂光妙士亦無蹤) - 적광묘사 또한 아무런 흔적이 없네.
겁화동연호말진(劫火洞然毫末盡) - 겁화가 훨훨 타서 털끝마저 다해도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 푸른 산은 옛과 같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아미타후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89호)

초파일 순례객들로 정신이 없는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금동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1873년에 조성된 것으로 포근하고 후덕한 표정으로 초파일 생일 인사를 받고들 있는데
그들 뒤로 1875년에 화산당 재근(華山堂 在根)이 그린 아미타후불도가 고색의 향기를 풍기며
든든히 자리해 있으며, 불단 우측에는 법당의 필수 그림으로 1969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이 자리를 지킨다.


▲  연등 위에 하늘이 있고, 그 밑에 인간과 세상이 있다.
연등 밑의 세상, 대웅전에서 바라본 모습

▲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하얀 연등의 엄숙한 향연
대웅전 앞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오색 연등의 화려한 향연이 펼쳐지고 있고
뒷쪽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하얀 연등의 엄숙하면서도 조금은 오싹한 향연이
펼쳐져 잠시 마음을 숙연케 한다.

▲  삼성각(三聖閣)에서 바라본 연등의 향연

▲  1975년에 조성된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천불오백성전 뒤쪽이자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
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1885년에 중수된 산신각(山神閣
)이 있었다. 허나 나이를 먹을수록 퇴락하여 볼품이 없어지자 1975년 주지 진암이 기존의 산
신각을 부시고 새로 지으면서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내부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을 다시 지은 탓에 고색의 내음은 싹 말
라버렸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 - 보물 1822호
그 뒷쪽에 자리한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0호)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878년 초암이 조대비
의 지원을 받아 지었다.
2001년에 건물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개금하거나 개채(改彩)했으며, 명부전 현
판과 주련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로 전해진다.

불단에는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
奈翁和尙)이 만든 것으로 전해졌으나 불상 뱃속에서 나온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1649년에 황
해도 배천군 강서사(江西寺)에서 승려 영철(靈哲), 인명(印明), 상원(尙元), 운혜(云惠) 등이
조성했음이 밝혀졌다.
대적광전 주변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를 제외하고 화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지만 이들
은 원래부터 화계사 것이 아니었다. 배천군 강서사에서 만들어 광조사(廣照寺)에 봉안했던 것
으로 이들이 이곳에 온 사연은 대략 이렇다.

부모를 따라서 화계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금수저 고종은 그곳에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없
음을 알았다. 그도 그것이 절의 필수 요소임을 알았던 모양이다. 하여 화계사에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선사하고자 천하를 수소문하니 광조사의 것이 좋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광조사에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877년 왕명으로 화계사로 가져왔는데 불상 운
송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화계사 승려 봉흔(奉欣)과 위운(威雲), 봉림(奉林)은 광조사를 찾아가 왕명을 전달하고 그곳
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일체를 접수했다. 허나 물가에 이르니 준비되어야 될 배가 없었다.
그들은 당황하여 어찌해야 되나 궁리를 하던 중, 마침 배 1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배를 세우
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뱃사공이 흔쾌히 승낙하며 '나도 당신들을 찾은 모양이오! 어젯밤 꿈
에 할아버님이 나타나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배를 이끌고 강서사로 급히 가라고 하셨는데 아마
도 부처가 지휘했던 모양이오!'
말하면서 흔쾌히 불상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보통 배천군에서 서울까지는 뱃길이 2~3일 정도 걸리는데 그날은 유난히도 바람이 잘 맞아 불
과 반나절도 안되어 뚝섬에 도착했다. 불상을 화계사로 모두 옮기고 사공에게 배삯을 후하게
주었는데 사공은 쿨하게 돈을 거절하며 '할아버님의 현몽과 강바람의 순풍으로 보아 부처의
도움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어찌 배삯을 받겠소? 그 돈으로 차라리 시왕전의 내 장등(張燈)이
나 하나 해주시오'
부탁을 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시왕전에 그의 장등을 밝혔다고 전한다.

▲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푸른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은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을 맞이한다. 몸의 신체 비례가 잘
맞아떨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표현이 부드러워 귀족적인 기풍을 드러낸다. 몸에 걸친 법
의(法衣)는 두께가 상당한데 옷의 주름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좌우에 서 있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도 주인을 따라 황해도에서 이
곳으로 강제로 따라왔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그들 좌우에 늘어선 저승
의 시왕상과 판관(判官), 동자, 사자, 장군상 역시 그곳 출신으로 꽤 준수한 모습이다. 조선
중기 불상과 시왕상을 대표할 만한 존재로 뱃속에서 복장 유물까지 나와 그들의 가치를 더욱
돋구어 주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2014년 3월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
으니 불상을 만든 옛 사람들의 조그만 배려가 그들의 몸값을 비싸게 만들어준 것이다.

지장보살상 뒤에 걸린 지장시왕도와 시왕상 뒤쪽에 걸린 시왕도와 사자도는 1878년 화산재근(
華山在根)과 혜과봉간(慧果奉侃) 등이 상궁들의 시주를 받아 그린 것으로 이들은 순수 화계사
의 불화이다. <'화계사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使者圖)'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2
로 지정됨>


▲  한참 물이 오른 보화루 뜨락 연등
아까보다 빛이 더욱 짙어져 아쉽게 저물어가는 초파일의 밤을 붙잡는다.

▲  마애3존불을 담은 장엄등

▲  계단에 두광(頭光)처럼 떠있는 연등

▲  화계사 초파일의 밤은 그렇게 깊어져만 간다.

화계사는 많이 발걸음을 했던 절이라 이번에는 연등과 장엄등이 중심이 된 초파일 야경을 구
경하는데 거의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들과 대적광전, 천불오백성전, 일
주문, 삼성각 내부(칠성탱 제외) 등은 아예 담지도 않았다. 오로지 연등이 주인공이 된 야경
을 주로 담았다. 왜냐 오늘은 초파일(석가탄신일)이니까..

연등의 향연에 취해 거의 2시간 가까이 경내에 머물렀다. 21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사
람들은 꾸역꾸역 들어오고 경내는 여전히 부산하다. 연등은 더욱 농도를 높이며 절에서 어둠
을 몰아낸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나들이는 내년 초파일을 애타게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6월 1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청룡사 '


▲  바깥에서 바라본 청룡사 우화루(雨花樓)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일에는 꼭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들먹이며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를 벌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자냐? 그것도 아니다. 허
나 언제부터인가 설레는 날의 하나가 되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번에는 어
느 절을 접수할까? 열심히 연구에 몰두했다.
허나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사찰 상당수는 인연을
지은 상태라 미답의 절은 거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선택의 폭은 많이 좁아진 상태. 그렇
다고 서울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아서 옛날에 갔던 사찰 중, 볼거리가 많거나 급격히 소장
지정문화재가 늘어난 절을 선택하여 제일 먼저 낙산 청룡사를 찾았다


하지만 전날 지나친 과음과 새벽 귀가로 인해 15시에 비로소 두 눈이 떠졌다. 퇴근본능에
충실하며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하여 청룡사 밑에 자리
한 창신역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6시가 넘어버렸다.


 

♠  낙산 청룡사 입문 (정업원터 비각)

▲  정업원(淨業院)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호

창신역(6호선)에서 청룡사로 가다보면 경내 직전에 철책이 둘러진 비각(碑閣)이 마중을 한다.
청룡사의 일원인 그 비각은 한많은 인생을 살았던 조선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운 정업원터 비각(정업원구기)이다. 그렇다면 정업원은 무엇을 하던
집이었을까?

정업원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
여 살던 곳이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봐서 고려 초나 중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제왕이 죽으면 그
의 후궁(後宮)과 궁녀는 출가하여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고, 왕족과 귀족 같은 경우 남편이 죽
으면 아내가 출가하여 머물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개경(開京)에 있던 정업원을 서울로 가져왔다. 정업원 위치에
대해서는 창경궁(昌慶宮) 서쪽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설이 있어 정확한 자리는 아리
송한 실정인데 동망봉 설은 정순왕후 송씨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영조가 1771년에 세운
정업원 비석이 그 설을 크게 부추겼다. (그 비석은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후에 세워짐)

정업원에 살던 비구니는 대부분 높은 계급의 여인이었고 주지는 보통 후궁이나 공주(옹주) 등
의 왕족이 담당했다. 그러다보니 왕실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노비와 별사전(別賜田, 제왕
이 특별히 내린 전답), 분수료(焚修料,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는데 드는 비용)를 두둑히 지원
했다. 허나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건의가 끊이지 않아 1448년 일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1457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연산군(燕山君) 시절 다시 폐지되어 그곳에 독서당(讀書堂)이 들어섰다.
하지만 독서당이 옥수동(玉水洞)으로 이전되면서 비어있는 공간이 되었고, 그 공간을 손질하
여 1550년 다시 정업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유생들이 폐지하라며 아주 징하게도 징징거렸고 이에 왕실은 후궁들의 별처라 우기며
인수궁(仁壽宮)이란 간판까지 내걸었으나 유생들의 생떼 같은 반발을 감당하지 못하고 1612년
에 완전 폐지해버렸다. 그때 그곳에 살던 비구니는 모두 성밖 절로 쫓겨났다.

청룡사와 정업원하면 떠오르는 여인은 앞서 언급한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이
다. 단종(端宗, 1442~1457)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떨려나고 끝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
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강제 유배를 떠나자 왕후 역시 강제로 궁궐을 떠나야 했다. 그때 그들
의 나이는 불과 10대 중반, 송씨는 시녀 5명을 데리고 청룡사에 들어왔고, 단종 역시 같은 날
궁을 나와 여기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단종과 인근 영도교(永渡橋)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절로 돌아와 머리를 깎
고 비구니가 되니 이때 허경(虛鏡)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후 매일 동쪽(영월이 동쪽 방향임)에 자리한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단
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동쪽을 향해 크게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아랫마을까지 들렸
다고 한다.

세조(世祖)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조카며느리인 그에게 영빈정동(英嬪貞洞, 영빈전)이란
집을 내리고 식량을 주었으나 송씨는 그 일체를 거절하고 청룡사, 또는 그 인근에 묻혀 살면
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자주동천(자지동천)에서 자줏물로 염색을 들여 그걸 팔았
는데, 염색을 할 때마다 빨간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동천(자지동천)이 되었음>
또한 그를 동정하던 백성들이 끼니 때마다 푸성귀 등의 먹거리를 갖다 주었는데 그 행렬이 매
우 길었다고 하며, 조정에서 이를 못하게 막자 여인들이 몰래 지금의 동묘(東廟) 인근에서 장
터를 열어 송씨를 도우니 세상에서는 그 장터를 '여인시장'이라 불렀다.

송씨는 16세에 강제 죽음을 당한 남편 단종과 달리 무려 81년이나 살았다. 그에게는 참 지옥
같은 삶이었으리라. 1521년에 기나긴 삶의 끈을 간신히 놓았으나 그의 집안 역시 역적으로 몰
려 풍비박산이 난 상태라 마땅히 묻힐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
)의 시댁 집안인 해주정씨 집안에 묻혔다. 그곳이 바로 사릉(思陵)이다.


▲  정업원터<정업원 구기(舊基)> 비석을 머금은 비각
너무 철통같이 머금고 있어 비석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햇살조차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할 저 안에 들어있을 비석은 얼마나 답답할까?

▲  영조가 비석을 세우면서 친히 남긴 현판

1771년 영조(英祖) 임금은 창덕궁에 들렸다가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듣고 이곳을 찾아 비석
을 세웠다.
1칸짜리 비각이 비석을 꽉 조이듯 머금고 있어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업원 옛터(구기)에
서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란 내용이 쓰여 있으며, 비각 앞 현판에는 '前峯後巖
於千萬年(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영조의 친필이다. 그밖에 동망봉
(東望峰)이란 바위글씨도 남겼으나 왜정 때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가루가 되었다.

이 비석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정업원구기'였으나 이름을 쉽게 한다며 단순하게 '정
업원터'로 갈았다. 허나 정업원은 이곳에 있지도 않았다. 송씨로 인해 엉뚱하게 이곳으로 엮
이게 된 것이다.


▲  담장 사이에 자리한 청룡사 일주문(一柱門)

청룡사는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옛날이야 주변이 죄다 숲과 밭두렁이었지만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로 20세기 이후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이제는 완전히 도
시 속에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절 남쪽과 동쪽은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보문동
(普門洞) 주택가가, 서쪽과 북쪽에는 아파트가 높이 들어서 절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절 뒷쪽 언덕에 약간의 숲이 남아있긴 하나 산사(山寺)의 풍경은 와르르 녹아내려 근
처의 안양암(安養庵)처럼 속세에 완전 포위된 모습이다.

청룡사 일주문은 이곳의 정문으로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한다. 절 규모가 작고 주변이 싹 주거
지라 다른 산사와 달리 멀리 일주문을 내보내지 못했다. 문 좌우로 기와돌담을 둘러 절과 속
세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청룡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곳은 엄연히 낙산 자락이고 북한산(삼각산)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낙
산 청룡사'를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낙산(낙타산)이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이라 그리 칭하기가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북한산 남쪽 줄기가 여기까지 이르고
있으니 삼각산을 칭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  약간 빛바랜 모습의 우화루 현판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경내 한복판이다. 정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검당이, 왼쪽에는 요사(寮舍), 일주문 옆구리에는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는 2층 규모의 우화루가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청룡사의 역사에 대해 잠시 풀어보도록 하자.

청룡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고려가 한참 후백제(後
百濟)와 다투던 922년 태조 왕건(王建)이 칙령(勅令)을 내려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들어선
위치가 한양(漢陽,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라 청룡사라 했으며, 비구니
혜원(慧圓)을 초대 주지로 삼으면서 창건 초기부터 비구니 절로 시작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대사(道詵大師)가 태조의 아버지인 왕융(王隆)에게 고
려 건국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이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를 필요가 있다며
개경 주변에 절 10개와 천하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세우도록 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가
그 유언에 따라 절을 세우니 청룡사는 바로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허나 고려 초기 창건설을 입증할만한 유물과 기록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며, 그나
마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기에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식구이다. 게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신뢰할만한 내력들이 쏙쏙 등장하고 있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어쨌든 문을 연 이후, 1036년 만선(萬善)이 1차 중창을 했으며, 1158년 회정(懷正)이 2차 중
창을 벌였는데 부근의 보문사(普門寺)가 문을 연 이후, 처음으로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세기 중반,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절이 제대로 황폐화되자 1299년 지
환(知幻)이 중창했다고 한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혜비(惠妃) 이씨가 말년을 보냈고, 태조 이성계의 딸로 1398년 왕자
의 난으로 남편<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과 두 동생<세자 이방석(李芳碩), 무안대군 이방번
(撫安大君 李芳蕃)>을 몽땅 잃은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출가해 머물렀으며, 단종의 왕후인 정
순왕후 송씨도 이곳에 의지하는 등, 뒷전으로 밀려난 왕실 여인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또한 1405년 태종(太宗)이 무학대사에게 명해 절을 중창케 했고, 1771년 영조가 직접 비석을
내리고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으로 바꾸는 등, 왕실의 지원과 관심도 넉넉했다.

1512년에 법공(法空)이 중창하고 1624년 예순(禮順)이 중창을 했으며, 1813년 화재로 소실되
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과 수인(守仁)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23년 순조(純祖)의 왕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깊은 병에 걸리자 그의 아비인 김조순(金
祖淳)이 청룡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의 효과인지 어의(御醫)의 노력인지는 몰라도 병
세가 호전되자 김조순은 너무 기뻐 절 이름을 다시 청룡사로 갈게 했다. 1853년에는 그의 아
들 김좌근(金左根)이 중창을 하는 등, 나라를 말아먹은 안동김씨 패거리의 원찰(願刹) 역할까
지 도맡으며 제대로 배를 불렸다.

1902년에 정기(正基)와 창수(昌洙)가 중창했고, 1918년과 1932년에는 상근(詳根)이 중창했으
며, 윤호(輪浩)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부분의 건물을 새로 손질하였다. 그리고 1973년
다시금 중창을 크게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지장시왕도

인근 보문사와 함께 서울에 대표적인 비구니(여승) 도량으로 대웅전과 우화루, 명부전, 산령
각, 심검당 등 8~9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지
정된 석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지장시왕도,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가사도, 신중도, 석 삼불상, 독성도, 산신도, 정업원터 등 지정문화재 11점을 간직하
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대웅전, 명부전, 산령각에 분포해 있으며, 구한말에 제작된 가사도(袈裟圖,
울 지방유형문화재 205호
)와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넘어온 석 삼불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7호
)은 심검당에 들어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음)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누리기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도시 속의 조그만 오
아시스 같은 존재로 비구니 고찰의 향기를 잔잔하게 불어주며, 비록 지금의 건물은 1950년대
이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색의 내음은 맡기 힘드나 건물 안에 오래된 불상과 불화
들이 앞다투어 고색의 향기를 불어주고 있다. 그러니 겉모습만 살피지 말고 반드시 대웅전과
명부전, 산령각, 심검당 안에도 들어가 그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청룡사의 진정한 깊
이를 누릴 수 있다. 즉 꿀단지의 단지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꿀을 보란 이야기다.

흥겨운 초파일 분위기에 맛있는 절밥과 먹거리를 기대하고 왔건만 예상 밖으로 절은 무척 썰
렁했다. 오색 연등의 물결과 관불의식의 현장이 없었다면 오늘이 초파일인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아무리 시간이 16시가 넘었어도 아직은 사람이 넘칠 시간인데 생각 밖으로 사람도 너무 없고,
심검당 주변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절밥이나 먹거리를 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먹거리를 챙기지 못한 초파일 절로 쓰라리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곳 이후에 간 절에서는
국수와 떡을 얻어먹었음>

※ 낙산 청룡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동망봉길)를 따라 도보 3분
*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10번 출구)이나 1/4호선 동대문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청룡사(보문파크뷰자이아파트)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동망산길 65, ☎ 02-763-4031)


▲  청룡사 심검당(尋劍堂)
절 뜨락의 하늘을 차지해버린 초파일 오색 연등의 위엄 앞에 심검당은
지붕이 거의 지워지는 굴욕(?)을 당했다.


 

♠  청룡사 명부전, 산령각

▲  청룡사 제일의 보물을 품은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명부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는데, 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해 시왕상과 귀왕(2점), 판관(2점), 사자(2점), 동자상(1점),
장군상(2점)은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이들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로 2014년 3월 지
방유형문화재에서 보물 1821호로 계급이 높아짐)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보물 1821호

명부전에는 파란색 승려 머리를 한 지장보살이 조촐히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다. 돌을 빚어서
금색 옷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
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지장보살상의 높이는 92cm로 얼굴이 거의 네모난 편인데 이는 승일(勝一)이 만든 작품에서 많
이 나타난다. 머리가 좀 크다보니 신체비례가 그리 맞아보이지 않으며 몸에는 얇아보이는 법
의(法衣)를 걸쳤다. 달랑 2가지 색이 전부인 지장보살과 달리 밝은 색채의 옷을 입은 도명존
자와 무독귀왕은 조금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며(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그렇게 나옴),
시왕 같은 경우 각자의 스타일을 지니며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주위에 배열된 시왕상과 그의 식구들(지장탱, 시왕탱 등의 그림은 제외)은
17세기에 승일이 중심이 되어 조성된 것으로 이들은 건강 상태도 좋고 처음 봉안된 절과 불상
을 만든 승려, 시주자 이름이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전하고 있어 17세기 불교 조각을 이해하
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어준다. 즉 그 발원문 때문에 이들이 보물로 승진된 것이라 보면 된다.
조성 관련 절대 기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 기록 덕분에 국보나 보물로 오른
건물이나 불상, 탱화, 조각품이 적지 않다.

조성 관련 글자를 넣어둔 그 당시 절의 작은 배려가 그들을 무척 돋보이게 하였으며, 현재 우
리들에게 적지 않은 그 시절의 상황을 속삭여주는 시간적 유물이다.


▲  색채감이 돋보이는 좌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判官), 시왕탱
이들은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시왕탱과 일부 동자상 제외) 다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명부전 내부를 화사하게 수식한다.

▲  우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 시왕탱

▲  우측과 좌측 가장자리에 자리한 판관과 사자, 금강역사상, 장군도


▲  산령각(山靈閣, 산신각)

대웅전 뒷쪽 높은 곳에는 산신을 봉안한 산령각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달랑 1칸에 불과한 맞
배지붕 건물로 그 안에 100년 이상 묵은 산신도와 독성도가 깃들여져 있다.


▲  산령각 산신도(왼쪽)와 독성도(오른쪽)

▲  청룡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1호

산신도와 독성도는 유리 액자에 담겨져 있어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온전히 사진에 담기는 것
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내 모습도 조금 반사되어 나와 다소 쑥쓰럽다.

산신도는 1902년 4월에 조성되어 봉안된 것으로 금어 두흠(金魚 斗欽)이 그렸으며 비구니 충
근(忠根)이 시주를 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와 긴
꼬랑지를 살랑거리는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다. 그외에 산신의 활동무대인 산과 소나무 등이
있어 산신도의 기본적인 모습은 갖추었으며, 그림 우측 밑에 조성 관련 내용이 적혀있다.


▲  청룡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0호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것으로 산신도와 비슷
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성을 비롯해 동자와 천태산 등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
리막 안에 담겨져 있다.


 

♠  청룡사의 보물 창고, 대웅전(大雄殿)

▲  연등을 뜨락에 늘어트린 대웅전

청룡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안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와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신중도 등이 담겨져 있다.


▲  초파일 행사의 백미,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간만의 외출에 신이 났을까? 그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보인다. 허나 손님도 없고
햇님도 무심하게 기울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1년을 기다려야 된다. 그에게 그 1년은 마치 1,000년과 같으리라...

▲  청룡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칠성도는 칠성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1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
심으로 칠성원군(七星元君)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어 정신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는 참 단
촐한데 반해 칠성도는 식구들이 너무 많다. 그만큼 칠성 식구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이야
기겠지..


▲  영가단(靈駕壇)에 가려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4호

감로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생들에게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解脫)시
킨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그림으로 쓰이며 그림
을 보면 대도시마냥 참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
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
을 묻고 답을 듣는 것이다.
그림은 보통 3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단에는 아미타3존블을 비롯한 7명의 여래(如來)와 지
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그려져 있고, 중간에는 지옥의 고통
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를 그린 반승(飯僧) 장면과 천도의 대상인 아귀(餓鬼)가 공양을 받
들어 먹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 하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양하게 묘
사되었다.


▲  청룡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3호

붉은 색채의 현왕도는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저승의 시왕(10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다룬 그림이다. 그는 현왕(現王)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사람이 숨을 거
두고 3일 뒤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을 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까 죽은 이의 내세와 극락왕생
을 위한 그림이다.

현왕탱은 현왕신앙이 유명하던 조선 후기에 많이 나타나며, 현왕을 비롯하여 판관과 사자 등
저승의 식구들과 그에게 심판을 받는 영가가 그려져 있다.
나도 언젠가 그의 면전에서 저럴 날이 있겠지. 나는 그에게 과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솔직
히 그리 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이득과 명예를 위해 뛸 뿐이다. 이 거지 같은 세
상에서 착하고 순하게 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니까..


▲  청룡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지장시왕도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으나 내가 갔을 때는 대웅전에 머물러 있었다. 1868년에 그
려진 것으로 푸른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닌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비롯하
여 시왕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빈틈 없이 자리해 있다. 그러니까 앞서 명부전의 구성 요소
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3존상은 노란 광배 안에 들어있어 저승의 특별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

이것으로 대웅전에 깃든 오래된 그림은 모두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神衆圖)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피해 이웃 심검당으로 마실을 간 모양이다. 그
리하여 청룡사에 깃든 문화유산 3점(신중도, 가사도, 석 삼불상)과 인연을 짓지 못했다. 아무
래도 다시 또 오라는 청룡사의 뜻인 모양인데 다행히 괘불(掛佛)이나 복장유물처럼 그리 만나
기 어려운 존재들은 아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20세기 후반에 새로 만든 3존불로 가운데 석가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고
그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경내 뒷쪽 언덕에 자리한 하얀 피부의 약사불(藥師佛)

대웅전 뜨락에서 요사 옆으로 난 길을 가면 정업원터 비각 윗쪽이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오
르면 그 길의 끝에 근래 지어진 약사여래불이 환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숲이 약간 우거져 있는데, 그 현장에 터를 닦고
중앙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을 만든 다음 약사여래불을 앉혔다. 주변에는 녹음(綠陰)이
잠긴 나무들이 있고, 북쪽과 동쪽 너머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도시 속에
갇힌 청룡사의 현실을 말해준다.


▲  약사불에서 바라본 숭인동과 동망봉
바로 밑에 보이는 기와집은 산령각과 대웅전, 심검당이다.


약사불 주변에서는 아주 손바닥만한 천하가 조망되고 있는데 청룡사 경내와 숭인동, 숲이 우
거진 동망봉이 그 작은 천하를 이루고 있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숨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남편의 극락왕생
을 빌던 곳으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본 곳이라 하여 동망봉이라 불린다. 그곳에는 숭인근린공
원이 닦여져 있는데, 이렇듯 청룡사와 동망봉, 낙산 동쪽에는 정순왕후의 흔적과 애환이 진하
게 깃들여져 있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청룡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5월 2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2 3 4 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