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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30 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 2018.01.23 의성 허준과 겸재 정선의 체취가 깃든 옛 양천고을의 중심터, 서울 가양동 둘러보기 ~~~ (양천향교, 소악루, 궁산, 양천고성터)
  3. 2017.12.15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옛성길~탕춘대능선~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4. 2017.11.07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5. 2017.10.27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거닐다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공원)
  6. 2017.09.15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7. 2016.12.26 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조문국 경덕왕릉...) 2
  8. 2016.10.29 서울 강남의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구룡산 가을 나들이 (불국사)
  9. 2016.10.19 황토길과 맨발축제의 영원한 성지, 대전 계족산 (장동산림욕장, 계족산황토길, 계족산맨발축제, 계족산성)
  10. 2016.04.12 서울 도심에 포근한 뒷동산을 거닐다. 남산 산책 (한양도성, 남산둘레길, 서울타워, 남산야외식물원...)

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묵은 해의 끝에 찾아간 안양예술공원, 안양사터 나들이 '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안양사지와 김중업박물관

▲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  석수동 마애종


 

새해가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건만 벌써 연말의 끝에 이르렀다. 이제 며칠이 흐르면
올해는 완전히 끝나고 새해로 포장된 날이 밝아와 연말 우울감에 빠진 인간들에게 새해
의 부질 없는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은 챗바퀴처럼 비슷한 데를 돌
고 또 돈다. 하여 연말의 우울감도 잠시 잊을 겸,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로 삼성산 남쪽
에 길게 누운 안양예술공원을 찾았다.

안양예술공원은 삼성산(三聖山)과 관악산(冠岳山)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으로 경관이 아
름답고 볼거리가 풍부하여 소풍 및 등산/답사/출사/피서 수요가 대단하다. 게다가 접근
성도 매우 좋고 서울과도 지척이라 계절과 날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 마를 날이 없다.
관악산과 삼성산이 사이좋게 빚어놓은 삼성천을 따라 서울대 관악수목원까지 길게 이어
져 있는데 비록 예술공원을 칭하고 있지만 원래는 안양유원지로 70여 년의 기나긴 역사
를 간직한 서울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이다.
1950년대에 벌써부터 수영장이 생겼을 정도로 서울 근교의 제일 가는 유원지로 미친 존
재감을 드날렸으나 1990년대 이후 서서히 망해가던 것을 2005년에 안양시에서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자 안양예술공원으로 새롭게 간판을 갈아치우고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
젝트'를 도입했다.
그 프로젝트에 따라 국내외 예술 작가의 예술 작품 50여 점을 공원에 설치하여 '지붕이
없는 미술관'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고, 삼성천과 산책로, 편의시설 등을 정
비하고 조명시설까지 갖추어 야경(夜景)까지 배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유원지
기능을 완전히 내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원래부터 삼성산과 관악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유원지라 그 성격을 완전히 갈아엎는 것은 어렵다. 휴양과 나들이, 유원지의 기능을 바
탕으로 문화와 예술을 얹힌 것이 지금의 안양예술공원이 되겠다.


▲  안양예술공원을 촉촉히 어루만지는 삼성천 (안양워터랜드 주변)


 

♠  칙칙한 공장을 걷어내니 숨겨진 절터가 기지개를 켜는구나~~!
제약공장에서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거듭난 상큼한 현장
~ 안양사터(安養寺)터와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안양예술공원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옛 유유산업과 안양사터를 만나게 된다. 예술공원의 젖줄
인 삼성천 북쪽에 자리한 이들은 예술공원의 어귀로 예술공원로(공원 산책로)에서도 훤히 바
라보이는데 예전에는 유유산업이란 제약 공장이 들어앉아 고얀 연기로 하늘과 삼성산을 찌르
던 현장이었다.
삼성산과 안양유원지의 아름다운 경관을 적지 않게 들쑤시던 유유산업은 1959년에 유특한 회
장이 세웠다. 비나폴로 등의 비타민을 생산하던 제약 공장으로 공장 건물은 당시 건축의 1인
자로 삼일빌딩과 평화의문, 프랑스대사관 등을 설계했던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했
으며, 굴뚝과 경비실까지 모두 그의 손에서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공장이 들어앉은 터는 안양의 지명 유래가 되었던 안양사터였다. 허나 그
때까지만 해도 바깥으로 드러난 절터의 흔적은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약간의 주춧돌
뿐이었고 오로지 경제 개발이 우선이었던 시대라 절터를 싹 밀고 공장을 닦았다.

이후 안양유원지 초입에서 의약 발달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던 유유산업은 2007년, 공장
증축을 꾀했으나 인허가 제한으로 어렵게 되면서 48년 동안 기대던 안양 공장을 버리고 충북
제천(堤川)으로 둥지를 옮겼다.
유유산업이 그렇게 자리를 뜨자 안양시는 공장과 부지를 240억에 매입했으며, 문화재청의 권
고에 따라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제외하고 모두 부셨는데, 그 과정에서 공장에 가려져
고통받던 절터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차에 걸쳐 발굴조
사를 벌인 결과 '안양사(安養寺)'라 쓰인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안양사터임이 밝혀졌으며,
중초사와 안양사가 별개의 존재가 아닌 같은 존재임이 드러났다.

안양사터의 등장으로 잔뜩 흥이 오른 안양시는 이곳을 김중업박물관과 안양사지 전시관을 갖
춘 복합문화공간이자 안양예술공원을 수식하는 상큼한 꿀단지로 꾸미기로 마음 먹고 2013년에
발굴로 어수선했던 안양사지를  복원했다. 그리고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손질하여 드디
어 2014년 3월 28일, 안양 최초의 박물관이자 안양사터까지 아우른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때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2달 동안 열렸으며 2017년 9월에는 평촌에 있
던 안양박물관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2개의 박물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김중업의 일생과 작품을 다룬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관련
문헌 자료, 안양시의 역사와 문화를 머금은 안양박물관, 그리고 특별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이들 전시관은 모두 김중업이 설계했던 옛 유유산업 건물을 다듬은 것으로 뜨락에는 옛
안양사터가 펼쳐져 있어 신라 후기와 고려, 조선, 현대까지 모두 아우른 문화/역사의 공간이
다.


▲  중초사지(中初寺址) 3층석탑과 당간지주

유유산업이 멋모르고 깔고 앉았던 안양사터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시절인 826
년에 창건된 중초사(中初寺)에서 비롯되었다.
중초사는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약간의 건물터를 남겼는데 당간지주의 겉모습은 그저 흔한 모
습이지만 이 땅에서 유일하게 조성 시기와 공사 참여자 이름, 절 이름이 담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것만으로 이미 다른 당간지주와 크게 차별화된 가치가 높은 보물이다. 특히 안양사에
묻혀 잊혀질뻔한 중초사의 이름 3자를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으며, 바로 그 명문 덕에 일찌감
치 보물 4호라는 큼지막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조성 명문은 서쪽 돌기둥 바깥쪽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26년 8월 6일, 절 동쪽 승악(僧岳, 관악산으로 여겨짐)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
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돌을 가져와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827년 2월 30일에 완
성되었다.
이때 황룡사(皇龍寺) 주통<州統, 승려의 직책으로 국통(國統) 밑임>인 항창화상(恒昌和尙)이
공사를 지휘했으며, 상화상(上和上)은 진행법사, 정좌<貞坐, 승직(僧職)의 하나>는 연숭법사,
사사<史師, 승려를 통솔하고 사무를 돌보는 자리>는 2명으로 묘범법사와 칙영법사. 전도유내
<典都唯乃, 승직의 하나>는 2명으로 창악법사와 법지법사, 도상(徒上)은 2명으로 지생법사와
진방법사, 작상<作上, 승직의 하나이나 역할은 확실치 않음>은 수남법사이다'


당간지주 동쪽 돌기둥의 윗쪽은 살이 좀 뜯겨져 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석수장이들이 석재로
쓰고자 뜯어간 것이라고 한다.


▲  중초사지 당간지주 - 보물 4호

중초사는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太祖)의 지원으로 크게 몸집을 불리게 된다. 안양사 창건설
화에 따르면 900년에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후백제)으로 출정하면서 안양을 지나던
중, 삼성산 꼭대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며 떠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을 살펴보다가 구름 밑에서 능정(能淨)이란 나이 지긋한 승려를 만났다.

능정과 이야기를 나눈 왕건(王建)은 서로 뜻이 잘 통하자 너무 기분이 좋았던지 그를 만난 자
리에 절을 세웠다. 그것이 안양사의 시초라는 것이다. 허나 900년이면 왕건의 왕씨 세력은 고
작 송악(松嶽, 개성) 일대가 전부였고, 황해도(黃海道)의 여러 지방 세력과 더불어 당시 한참
신라 북부를 평정하고 있던 궁예(弓裔)와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던 시기
였다. 그러니 900년은 전혀 맞지가 않다.
하지만 왕건의 지원을 받은 것은 확실해보이며 연도(年度)의 오류는 흔한 일이므로 고려를 세
운 918년 이후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또한 설화에는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러 가던
중이라고 했으니 후백제를 치러 가던 중에 잠시 들렸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중초사 주지로 여겨지는 능정과 마음이 잘맞자 두둑히 지원을 내려 절을 중창케 했고 경
내 남쪽에 벽돌로 7층전탑을 세웠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좋은 세상을 이루고 싶은 심정
을 담아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뜻하는 안양(安養)으로 절 이름을 바꾸게 했다. 제왕(帝王)이
발걸음을 하고 지원을 내렸을 정도면 절도 어느 정도 명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능정 또
한 도선국사(道詵國師)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명망을 갖춘 승려였을 것이다.
참고로 극락정토는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야 나온다는 이상의 세계
로 안양세계(安養世界), 안양정토(安養淨土)라고도 한다. 수도권 굴지의 도시로 인구 70만을
지닌 안양시의 이름도 바로 이 안양사에서 유래되었다. 불교색이 진한 이름이긴 하지만 의미
만큼은 정말 일품이다.

고려 중기에는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잠시 들려서 능정의
영정에 참배한 적이 있으며, 특히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 1314~1388)장군과도 인연
이 꽤 깊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양사에서 하룻밤 머문 적이 있었는데, 전탑을 바라보며 태조가 안양사를 경
영했던 의미를 되새기고 스스로에게 '제가 나중에 잘되고도 이 탑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하
늘에 계신 신령이 내려다 보실 것입니다'
다짐을 했다.

이후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 제일 높은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자 안양
사 주지인 혜겸(惠謙)과 함께 옛 시절의 다짐을 실행코자 전탑을 새롭게 중수했다. 그는 자신
의 재물과 신도들의 지원을 모아 쌀과 콩, 베 등을 마련했고 양광도(楊廣道, 경기도와 충청도
) 안렴사(按廉使)에게 명을 내려 군납미(軍納米)를 감액하여 경비를 마련하고 장정을 모았다.
그래서 1381년 8월 공사를 시작해 그해 10월 완성을 보았는데, 완성이 되자 우왕이 내시 박원
계(朴元桂)를 보내 향을 하사하고, 승려 1천여 명으로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치르면서 사리
12개와 불아(佛牙) 1개를 탑에 봉안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때 탑 중수에 시주를 한 관리와 귀족, 부자가 3천 명에 이르렀으며, 1382년 탑에 단청을 장
식하고 1383년에는 탑 안에 그림을 그렸는데, 동쪽 벽에는 약사회(藥師會), 남쪽 벽에는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에는 미타극락회(彌陁極樂會), 북쪽에는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를
그리고 탑을 둘러싼 회랑(廻廊) 12칸에는 벽마다 부처와 보살, 인천(人天)을 그려놓았다. 이
들 단청과 그림을 그리는데 동원된 인원은 400여 명, 소요된 쌀은 595석, 콩 200석, 베 1,155
필에 이르렀고, 전탑 중수가 완료되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은 자신의 도은집(陶隱集)에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를 남기며 최영을 찬양했다.

조선으로 들어와서도 왕실과 사대부와의 교류는 빈번하여 1411년 태종(太宗)이 충청도 온양(
溫陽)으로 온천욕을 가다가 잠시 들렸으며, 안양사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찬란하게 광을 냈던 안양사는 16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사라지고 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거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거친 파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쫄딱 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안양사터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 등을 속세에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혀있다가 1959년
엉뚱하게 유유산업이 절터를 깔고 앉았고 공장 주변에는 집들이 들어찼다. 하여 제자리에 안
양사 재건이 어렵게 되자 1960년대에 동북쪽 산자락에 새 안양사를 짓고 안양사의 유물로 여
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옛 안양사의 뒤를 자처하고 있다.


▲  중초사지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4호

당간지주 옆에는 조금 부실하게 생긴 3층석탑이 멀뚱히 서 있다. 높이 약 3.6m의 석탑으로 당
간지주보다 다소 늦은 고려 중/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때는 중초사가 아닌 안양
사 시절이니 '안양사지 3층석탑'이 적당한 명칭이겠으나 아직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이 탑은 원래 지금보다 동쪽에 있었으나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탑의 기단(基壇)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부(塔身部)에 비해 기단부가 훨씬 커서 전체
적으로 균형이 떨어지고 볼품이 좀 떨어진다. 하지만 당간지주의 후광(後光) 덕인지 보물 5호
라는 큼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1997년 1월 문화재지정등급 재조정으로 결국 지방문화재
로 등급이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보물 5호의 자리는 비어있음)


▲  삼성천을 향해 누워있는 중문(中門)터

안양사터의 구조는 남쪽에 중문터와 남회랑터를 두어 경내를 감싸고, 중문을 들어서면 전탑터
와 금당이 나온다. 금당 북쪽에는 설법단터와 승방터가 있고, 동쪽에는 동회랑터, 서쪽에 서
회랑터를 두었다.
하지만 공장 건물을 모두 철거하지 못했고 공장 주변에 집과 건물이 가득하여 아쉽게도 절터
를 모두 파내진 못했다. 겨우 금당(법당)과 전탑, 그 주변만 속살을 캤을 뿐이다. 허나 지금
까지 드러난 모습도 충분히 입을 벌어지게 만드니 나중에 나머지를 싹 뒤집으면 지금보다 훨
씬 장대한 안양사터의 진면목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중문터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안양박물관 사이에는 중문터가 누워있다. 옛 유유산업 건물을 밀어버린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 건물터의 하나로 지금까지 확인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인데
절 바깥에서 법당(法堂)으로 가려면 거의 반드시 중문을 거쳐야 된다.
중문 앞에는 삼성천이 흐르고 있는데 절로 인도하는 돌다리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중문 옆
건물(안양박물관)을 밀어버리지 않고 박물관으로 활용하면서 중문터 일대를 완전히 캐내진 못
했다. 대략 중문의 전체적인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여겨지며, 중문지 북쪽 13m 거리
에 안양사의 명물인 전탑터가 있다.


▲  중문터 남쪽에 널려있는 석물들
안양사터 발굴로 다시 햇살을 본 주춧돌과 계단, 석탑, 석등의 석재 등
여러 석물이 놓여져 있다.


▲  남회랑(南回廊)터

중문터를 들어서면 바로 북쪽에 전탑터가 있고 그 서쪽에 남쪽 회랑터가 있다. 김중업박물관
남쪽에 자리한 남회랑은 북쪽으로 강당터와 이어지는데, 회랑 동서방향으로 2차에 걸쳐 중복
된 건물터 형태를 보여준다. 회랑 남측 건물터에 추가적으로 흙을 얹힌 사실이 확인되어 북측
건물터가 먼저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북측 건물터는 남북 3.21m, 동서 26.6m에 달한다.
동회랑터는 안양박물관과 담장으로 인해 완전하게 조사를 벌이지 못했으며, 서회랑터는 남북
약 70m, 동서 6m로 추정된다. 또한 남회랑터 일대에서 신라 후기 기와조각과 막새, 토기파편
등이 출토되어 중초사 시절부터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임을 귀뜀해준다.


▲  안양사의 명물, 전탑터

금당터와 중문터 사이에는 네모난 터가 바짝 누워 있다. 이 자리가 바로 고려 태조가 세우고
최영장군이 중수했다는 7층전탑이 어깨를 활짝 피며 푸른 하늘을 받쳐든 현장이다.
금당터 정면 6m 앞에 자리한 이 탑은 그 동안 기록에만 있었으나 안양사터 발굴로 인해 전탑
터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전탑은 전설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비록 그 장대했던 전탑의 모
습은 녹아없어지고 그 터만 메마르게 남았지만 발굴 결과 남북 9.62m, 동서 5.29m에 이르러
백제의 미륵사지5층석탑 이상만큼이나 웅장한 탑이었음이 밝혀졌다.

전탑터 기단부는 암갈색 사질점토층에 삼성천 냇돌을 섞어서 다졌고, 그 위에 냇돌과 사질점
토층을 채워서 다졌다. 전탑터 남쪽 답도시설 일부에 벽돌과 기와편들이 확인되었는데, 전탑
옥개석(屋蓋石) 위에는 기와가 덮혀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고려시대 백자와 분청자 연봉 등이
기와와 함께 출토되어 최영장군 중수설을 진하게 뒷받침해준다. 안양사의 상큼한 상징이었던
이 탑은 조선 초/중기 때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전탑터와 금당터

▲  두 터의 공존 ~ 금당(金堂)터와 옛 유유산업 공장터의 기둥

전탑터 북쪽에 자리한 금당(법당)은 안양사의 중심 건물로 건물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안
양사의 위엄에 걸맞게 금당도 제법 컸을 것으로 여겨지나 동쪽에 자리한 옛 공장 건물을 모두
부시지 않고 기둥과 지하 구조물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겨두어 겨우 반쪽만
조사를 벌인 탓에 정확한 규모는 아직 모른다.
금당터에서는 9개의 적심이 확인되었으며, 적심은 정면 1칸, 측면 4칸 규모로 기둥간의 거리
는 정면 360~370cm, 측면은 270~280cm 정도이다. 공공예술도 좋지만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기
둥의 모습도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이 땅에 흔한 콘크리트 건물 기둥이니 그들을 싹
뽑아 주변으로 옮기고 금당터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  강당터와 동회랑터, 특별전시관

▲  강당터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강당터는 교육 공간으로 정면 9칸(동서 39.5m), 측면 4칸(남북 14.4m)
에 이르는 거대한 터이다. 건물 어칸(가운데 칸)에서는 대좌(臺座) 시설이 양쪽으로 마련된
형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주 황룡사터 강당터의 내부와 비슷하여 안양사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건물을 받치던 초석은 자연석을 일부 손질했으며, 기둥 자리에는 40~50cm의 원주가 사용되었
다. 그리고 초석 밑에 예전 건물터(중초사 시절 건물)의 원형 초석이 발견되어 이전보다 50~
60cm 정도 높아졌음이 드러났으며, 강당 좌우로는 동회랑과 서회랑을 이어주는 조그만 건물터
가 배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강당터 북쪽에 수북히 쌓인 기와편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을 한데 수습하여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 보잘 것 없는 기와 파편을 저렇게 쌓아두니
왠만한 대(臺)와 단(壇)이 부럽지가 않다.

▲  승방(僧房)터

강당터 북쪽에 자리한 승방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정면 9칸, 측면 1칸의 동/서향 장방형(
長方形) 건물로 터 전체를 모두 들추지 못해 완전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다. 건물터 남쪽과
북쪽 기단부에선 기와편들이 많이 나왔는데 조선 중기에 어떤 연유로 절이 파괴되어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지붕의 기와들이 그대로 떨어져 쌓인 것으로 보인다.
기둥 간의 거리는 4.05~4.25m, 측면은 5.1m로 기와편 가운데 '안양사'라 쓰인 기와가 발견되
어 이곳의 정체를 살짝 알려주었다.

안양사터는 양주 회암사(檜巖寺)터, 북한산 삼천사(三千寺)터와 더불어 서울 인근에 몇 남지
않은 커다란 절터 유적(조그만 절터는 제외)으로 그 가치는 중초사지 당간지주 못지 않다. 사
적(史蹟)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주변을 싹 밀
고 안양사터의 숨겨진 속살까지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들춰낸 것은 기껏해야 절
반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박물관의 공통 휴일인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안양사터만 둘러보고 나왔다.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석수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관악역(2번 출구)에서 5530, 5624, 5625,
  5626, 5713, 1, 51, 9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양예술공원에서 하차, 도보 10분 (관악역 2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 지하철 1호선 안양역(1번 출구)에서 안양마을버스 2번 안양예술공원행 차량을 타고 안양박
  물관(김중업건축박물관) 하차 (반드시 예술공원행을 타야됨)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관람정보 (2018년 1월 기준)
* 박물관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매주 월요일, 설날, 한가위 당일 휴관)
* 박물관 입장료는 없음 (특별 전시 때는 상황에 따라 유료 입장)
* 안양사지는 언제든 관람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안양예술공원로 103번길4 ☎ 031-687-0909)
*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안양사의 유물로 천하에서 단 하나뿐인 바위 종
석수동 마애종(石水洞 磨崖鐘)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2호

▲  석수동 마애종을 품은 보호각

안양사터 동쪽이자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북쪽에는 기와 보호각에 감싸인 석수동 마애종이 조
용히 웅크리고 있다. 마애종을 품은 바위에는 사람들이 치성을 올린 흔적(촛불이나 불에 그을
린 흔적)이 많은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질 만큼 범상치 않은 자태를 지녔다. 그런 탓일
까? 그의 남쪽 피부에는 승려와 종을 묘사한 마애종이 새겨져 있는데,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
崖佛)은 기러기의 털처럼 많이 널려있지만 바위 종은 천하에서 오직 이것 뿐이다.

종각(鐘閣)을 묘사한 듯 'ㅍ'자 공간 안에 두툼히 새겨진 마애종은 9개의 유두가 달린 2개의
유곽을 지닌 범종으로 종 위에 쇠사슬이 단단히 묘사되어 있으며, 범종의 기본 메뉴인 음통, 상대, 유곽, 당좌, 하대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종 우측에는 종을 치는 승려가 새겨져 있
다.
공중에 높이 떠있는 듯한 마애종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며, 조각 수법과 종류, 종신(
鐘身)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안양사터 바로 옆에 자리해 있어
안양사의 유물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예전
에는 중초사의 유물로 여겨졌는데, 조선총독부
에서 1924년에 만든 '고적급유물등록대장'에도
'중초사지 마애종'으로 표시했다.
중초사나 안양사나 같은 곳이니 어느 이름이든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이제 안양사의 정체가
훤히 드러난 만큼 '안양사지 마애종'으로 이름
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마애종 보호각


▲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석수동 마애종

무려 1,000년 가까운 지긋한 나이에도 마애종의 건강 상태는 썩 양호하며, 승려와 종의 모습
을 무난히 살펴볼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바위에 이런 독특한 것을 새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의 유일한 존재로 서울 가까이서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희소성이 큰 보물이건만 아직도 국가지정 보물이 아닌 지방문화재 등급에 머물러 있다
는 현실에 고개가 좀 갸우뚱하지만 그까짓 인위적인 등급이 무슨 대수겠는가. 비록 보호각 때
문에 마애종 앞까지는 다가갈 순 없지만. 종을 향해 귀를 쫑긋 기울이면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올 것만 같다.

참고로 관악산 동쪽 문원계곡 입구에는 이 땅의 유일한 마애 승려 얼굴상이 있다. <마애승용
군(磨崖僧容群)이라고 함> 이렇게 관악산 자락에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1종류도
아닌 무려 3종류(중초사지 당간지주, 마애종, 마애승용군)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운데
예로부터 잘생기고 험준한 산은 산악신앙(山岳信仰)과 불교의 성지(聖地)로 널리 추앙을 받았
으니 관악산 또한 그중의 하나로 그 덕을 제대로 본 것 같다.

* 석수동 마애종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32


▲  안양사 입구 삼성천 바위에 닦여진 어느 예술작품 (무슨 작품일까?)


 

♠  옛 안양사의 뒤를 이은 조촐한 절집,
삼성산 안양사(安養寺)

▲  경내 입구에 자리한 안양사 표석

석수동 마애종에서 동쪽으로 3~4분 정도 가면 안양사입구이다. (안양예술공원입구에서 예술공
원로를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면 안양사 이정표가 나옴) 사람들로 늘 붐비는 예술공원길과 달
리 안양사 길은 종종 스치는 산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나그네의 두 귀를 간지럽힐
뿐, 거의 고적한 편으로 그 길의 끝에 안양사가 왕년의 영광을 꿈꾸며 조용히 둥지를 틀었다.

경내 입구에는 마치 서예 작품을 보듯 기품이 넘치는 안양사 표석이 서 있는데, 그 표석을 지
나면 버려진 집 1채와 다소 볼품이 떨어지는 연못이 나오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주차장과
안양사 경내에 이른다.
이곳 안양사는 앞서 언급한 안양사(안양사터)의 뒤를 이은 사찰로 원 자리를 잃음에 따라 지
금의 자리에 새롭게 자리를 닦았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비구니 사찰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고색의 향기를 조
금이나마 보태고 있다.
경내는 크게 명부전이 있는 남쪽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가람
이 허벌나게 큰 것도 아니며, 단지 둘 사이에 소나무 숲이 자리해 있어 자연히 구분이 된 것
뿐이다.

▲  푸른 지붕을 지닌 요사(종무소)

▲  소나무 밑에 자리한 샘터

명부전(冥府殿)을 중심으로 한 남쪽 구역에는 종무소와 명부전, 기묘한 자세로 솟아나 명부전
을 지키는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 밑에는 산사(山寺)의 필수품인 약수터가 있는데, 삼성산이
베푼 청정한 샘물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와 조그만 석조(石槽)를 가득 채운다. 마침 목도 마
르고 해서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개운하다.
 
남쪽 구역의 유일한 불전(佛殿)인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地 藏菩薩)과 저승<명부(冥府)>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으며, 명부전을 지나 솔내음이 진동하
는 오솔길을 오르면 미륵불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 구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내가 숲을 경계
로 둘로 나눠진 점이 이곳의 큰 특징이다.


▲  안양사 명부전과 소나무

▲  홀쭉하고 넉넉한 표정의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명부전 내부를 가득 채운다.

▲  경내 북쪽 구역으로 인도하는 짧은
소나무 숲길

▲  심검당과 경내를 지키는 호랑이상

안양사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북쪽 구역에는 심검당과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해 이
곳의 오랜 보물인 승탑과 귀부가 있다. 심검당 주변에 자리한 호랑이상과 두꺼비상은 이곳을
지키는 용도로 배치해 놓은 것으로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인상이 강하다. 절에 볼일이 있어
서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귀여운 표정 앞에 자신의 소임도 깜빡 잊고 길을 돌아설 것이
다.


▲  안양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금동을 입힌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잘 다듬어진 수작(秀作), 하지만 중요한 탑신 부분을 잃어버린
안양사 승탑<僧塔, 부도(浮屠)>

대웅전 앞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로 자욱한 승탑과 귀부가 단짝처럼 자리해 있다. 승탑(부도)
은 머릿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그의 인
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듯, 승탑의 알맹이인 탑신(塔身)은 오래 전에 상실되어 머
리 부분과 아랫도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탑의 높이는 1.4m로 누구의 승탑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원래 인근 숲에 있던 것을
업어왔다.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진다.


▲  안양사 귀부(龜趺)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3호

승탑을 바라보며 넓직하게 앉아있는 귀부는 안양사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유일한 지정문화재
로 비석의 일부이다. 용머리가 받쳐들던 비신(碑身)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
는 모습이 묘사된 비석의 머리 부분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이미 사라진 상태이다.
이 귀부는 고려 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원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안양사와 관련
된 유물로 여겨진다. 비석의 성격은 그 중요한 비신이 없어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대략 승려의
탑비(塔碑)나 안양사의 사적비(事蹟碑)로 여겨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金
富軾)이 비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귀부의 등에는 등껍데기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비신이 심어져 있던 비좌(碑座)는 치아가 빠
진 모양처럼 무척 허전해 보인다. 엄금엄금 기어갈 것 같은 용머리(귀부)의 높이는 1m, 길이
3m, 너비 2.18m로 머리와 수염, 4개의 발, 등껍데기, 살랑살랑 흔드는 꼬랑지 등이 섬세히 표
현되어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귀부 주위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석주(石柱)
18개를 심었다.

귀부의 원래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1942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수
록된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고
분)의 관한 기록이 있다.

24. <석비귀부(石碑龜趺), 석등(石燈)> 동면 안양리(東面 安養里, 현 안양시) 불곡(佛谷, 국
유림) - 석비귀부는 길이 10척, 폭 7척, 높이 3척5촌으로 석비는 분쇄되어 파편의 일부만 남
아 곁에 넘어져 있으며, 석등 하나와 폐정(廢井) 하나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불곡이라는 사
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의 이름 등은 알지 못한다.

35. <고분(古墳)>,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 후
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  꼬랑지가 옆으로 늘어진 귀부의 뒷모습

▲  당당한 자태의 귀부 앞모습

▲  귀부의 옆 모습

▲  미륵불 곁에 새로 지은 나한전(羅漢殿)


▲  속세를 굽어보는 안양사 미륵불(彌勒佛)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안양사의 든든한 후광인 미륵불이 있다.
1976년에 조성된 안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높이는 거의 20m에 이르며 얼마나 키다리던지 바
로 밑에서 바라보니 고개가 아파서 뚝 떨어질 것 같다.
온몸이 온통 하얀 피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에는 면류관(冕旒冠)과 비슷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처를 취했으며,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높다랗
게 서서 남쪽을 굽어 본다. 석불 양쪽으로 계단을 만들었고, 그 앞에 넓게 기도처를 닦았다.

▲  미륵불 옆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山神閣)

▲  대웅전에 봉안된 금동석가3존불

경내를 이렇게 둘러보고 미륵불에게 3배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들이밀어본다. 기도를 올리니
소망이 들어진 듯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나는 저 미륵불에게 해준 것이 전혀 없는데 염
치없이 나의 소망만을 요구하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정작 그 소망도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미륵불도 공무원들처럼 민원만 받고는 모르쇠로 일관~~)
안양사를 끝으로 연말에 벌인 안양예술공원 주변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양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28 (안양예술공원로 131번길 ☎ 031-471-
  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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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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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허준과 겸재 정선의 체취가 깃든 옛 양천고을의 중심터, 서울 가양동 둘러보기 ~~~ (양천향교, 소악루, 궁산, 양천고성터)

 

'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서울 가양동 나들이 '

▲  궁산에 복원된 소악루(小岳樓)

▲  궁산 산책로

▲  소악루에서 바라본 한강


한강 가을물결 무명베를 펼쳐놓은 듯
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이 가볍다.
사방들녘 바라보니 누런구름 일색인데
양천 일사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 1797년 정조 임금이 양천 관아를 방문하면서 남긴 시


 

여름 제국의 패기가 기승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서구 가양동(加
陽洞)을 찾았다.

가양동은 한강(아리수)이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동네로 1992년까지 김포평야(金浦平
野)의 일부를 이루던 농촌이었다. 허나 인근 등촌동(登村洞)과 더불어 아파트단지가 조성
되면서 시가지의 일부로 변해버렸다. 지금이야 강서구(江西區)의 일원이자 서울의 1개 동
에 불과하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부터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이자 양천허씨
의 영원한 고향으로 많은 명소를 숨죽여 품고 있다.

양천 지역은 신라 중기까지 제차파의(齊次巴衣)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 공
암(孔巖)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후기에 김해허씨 일가가 공암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김해허씨 시조<가락국 김수로왕
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이자 양천허씨의 시조가 되는 허선문(許宣文)이 구암
공원 서쪽에 있는 허가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하고자 군
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을 제공한 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의 지
위를 얻었다. 이후 태조는 그의 공을 더욱 치하하고자 장경공(莊景公)의 작위(爵位)와 함
께 공암을 본관으로 내리면서 양천허씨의 명실상부한 시조가 된다.

공암은 1301년 양천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고을 관청이 잠시나마 신정동 연의골로 옮겨
지기도 했으나 조선시대에는 가양동 궁산 남쪽이 쭉 양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200여 고을 가운데 가장 작은 고을로 계속 현(縣)에 머물러 있다가, 1895년 조선8도
를 23부로 개편했을 때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다가 13도제를
하면서 경기도 양천군이 되었다. 허나 1914년 김포군에 강제 통합되면서 오랫동안 독립적
인 고을을 유지했던 양천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1963년 옛 양천 일대가 서울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강서구(江西區)에서 남쪽 일대
를 양천구(陽川區)로 분리하면서 잊혀진 옛 이름 양천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양천 고을의 범위는 현재 강서구와 양천구, 영등포구를 비롯하여 구로구 일부, 김포시 고
촌읍 일부로 매우 작았다. 김포평야의 일부로 너른 평야가 고을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고
을 북쪽에는 한강이 흘러 수많은 선박들이 오갔다. 허가바위 부근에는 서울과 행주나루를
잇는 공암나루가 있었고 광주바위와 소요정(逍遙亭), 소악루 등 한강을 옆구리에 낀 멋드
러진 명승지가 즐비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양천현감(縣監)으로 부임
하여 양천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낌없이 그림에 담았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쓴 허준(
許浚)의 고향이기도 하다.

서울의 일원이 된 이후, 오랫동안 김포평야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시골 마을로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개발이 가양동 일대를 칼질하면서 전원 풍경이 퇴색되고 그 화려했던 명소
들마저 적지 않게 희생되거나 궁색한 처지가 되었다.
한강 남쪽을 가르는 올림픽도로가 닦이면서 허가바위와 궁산 북쪽까지 넝실거리던 한강은
북쪽으로 밀려났으며, 가양택지 개발로 광주바위는 옛날의 명성을 잃고 구암공원 한쪽 구
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현재 가양동의 명소들은 양천허씨와 관련된 구암공원 주변과 양천 고을과 관련된 궁산 일
대로 나눠볼 수 있다. 구암공원에는 광주바위와 양천허씨의 성지(聖地)인 허가바위, 허준
과 이 땅의 한의학을 집대성한 허준박물관이 있으며, 궁산(宮山)에는 서울 유일의 향교인
양천향교와 오래된 성터인 양천고성터, 근래에 복원된 소악루, 양천관아터, 겸재정선미술
관, 궁산 산책로 등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거리도 가까워 넉넉잡아 4~6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  옛 양천현아(陽川縣衙)터

양천향교 남쪽에는 양천 고을을 관리하던 관아가 있었다. 양천현아는 중앙에 고을 현감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 종해헌(宗海軒)>이 있었고, 동쪽에 객사(客舍)인 파릉관(巴陵館)
이, 북쪽에는 향교가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읍치(邑治)라고 한다. 주목할 점은 이 땅의
옛 고을 중 동헌과 객사, 향교 등의 읍치가 50m 반경 내에 싹 몰려있는 곳이 이곳 양천뿐
이라는 것이다. (양천은 읍치와 고을을 지킬 읍성도 갖추지 못했음)

종해헌 남쪽에는 아전들이 일을 보는 길청이 있었고, 향청(鄕廳) 동쪽에는 장교청(將校廳
)이, 그 좌우로 창고가 있었으며, 종해헌 부근까지 한강수가 넝실거렸다고 한다. 허나 왜
정(倭政)에 의해 이들은 고약하게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겨우 향교만 살아남았다.
현재 동헌 자리에는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찼고 객사 자리에는 홍원사란 절이 둥지를 틀었
다. 그 외에 사직단(社稷壇), 성황사 등이 향교 주변에 있었으나 겨우 성황사만 남아있다.


 

♠  옛 양천고을 교육의 중심지, 서울 유일의 향교로 주목을 끄는
양천향교(陽川鄕校) - 서울 지방기념물 8호

▲  양천향교 홍살문

향교(鄕校)는 조선 정부가 서울을 제외한 각 고을에 세운 유교식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
학교와 비슷하다. 양천향교는 양천고을의 유교식 교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서울 유일의 향교란
점이 크게 주목을 끈다. 지금은 서울의 일부로 조용히 묻혀있지만 1914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
도에 속한 별도의 고을이었다. 그래서 향교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향교는 1411년에 창건되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 이후 교육 기능이 상실되고 제
사기능만 남으면서 슬슬 황폐화된 것을 1945년 명륜전을 중수했으며, 1965년 대성전과 외삼문
을 보수했으나 많이 부실했다. 하여 1977년 복원 계획을 수립, 1980년 복원공사에 들어가면서
1981년 1차 복원공사를 마무리 했으며, 1986년 2차 보수를, 1994년에 3차, 2007년에 4차 보수,
그리고 2008년에 전면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1990년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양천향교'가 아닌 '양천향교
터'이다. 아마도 1980년 이후 기존 건물을 싹 갈아서 그렇게 이름을 정한 모양으로 근래에 복
원된 탓에 고색의 무게는 크게 내려앉아 다소 아쉬움을 선사한다. 항상 문이 닫힌 여타 향교
와 달리 속세에 늘 개방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향교 앞에는 여느 향교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뾰족한 홍살문이 아주 차갑게 나그네를 맞이한
다. 홍살문 서쪽에는 유예당(遊藝堂)과 전통놀이마당이 있으며, 홍살문을 지나면 향교로 들어
서는 외삼문과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 서쪽에는 가양동 일대에서 수습된 비석 9기가 똘똘 뭉
쳐 있는데, 이들은 양천현감이나 이곳에 들린 경기도관찰사(觀察使)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
비(不忘碑)이다.

좌측만 열린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조그만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은
향교 학생들의 숙식공간이다. 그런 동/서재를 바라보고 있는 명륜당(明倫堂)은 교육 공간으로
지금의 교실이나 강의실과 같다. 향교에서 2번째로 중요한 건물이라 규모가 우람하며 현역에
서 은퇴한 신세지만 여전히 위엄이 넘친다.
명륜당 옆구리를 지나면 높다란 계단 끝에 내삼문이 있는데 그 문을 지나면 향교의 중심인 대
성전(大成殿)에 이른다. 허나 내삼문은 석전대제(釋奠大祭) 외에는 늘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
고 있어 굳이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리자에게 요청하기 바란다. 허나 최근에 복원된 건물이
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이 향교에는 서울 유일의 홀기(笏記)인 양천현 홀기가 전하고 있다. 이는 양천고을 현감이 참
여하는 행사와 의식 절차를 적은 것으로 홀기 11종, 축문(祝文)과 제문(祭文) 3종 등, 14종의
문건을 하나의 서첩(書帖)으로 만든 것이다. 내용은 객사에서 지내는 망궐례(望闕禮)를 비롯
하여 사직대제(社稷大祭), 성황제(城隍祭), 려제(癘祭), 알성례(謁聖禮)와 국상시(國喪時) 곡
반례(哭班禮) 등으로 19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4호이다.

◀  양천현 홀기 (문화재청 사진)
이 문서는 관람이 거의 불가능하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외삼문(外三門)
보통은 좌측문(동쪽문)만 열려있고 가운데 문은 석전대제 때만 열린다.

▲  외삼문 우측에 옹기종기 모인 비석들

외삼문 우측에 심어진 비석 9기는 양천 고을의 오랜 역사를 가늠케 해주는 유물로 양천현감과
경기도관찰사의 선정비 및 불망비이다. 저들 중 진정으로 비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자는 몇이
나 될까? 태반은 형식적인 비석이거나 세금 착취를 위해 만든 비석일 것이다.
가장 오른쪽의 비석은 고색의 무게가 크게 깃들여져 중후함이 느껴지며, 앞줄 가운데 비석은
특별하게도 기와 모양의 지붕돌을 지녔다.

▲  서재(西齋)
일반 백성 자재들의 숙소로 그 모습은
동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동재(東齋)
양반이나 관리 자재들의 숙소로 지금은
관리사무소로 쓰인다.


▲  공자왈 맹자왈이 들릴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교육 공간으로 교궁(校宮)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통 학생 30~50명이 수업을 받았으
며, 교수(敎授) 1명과 직원 1명이 교육을 담당했다. 비록 갑오개혁 이후 교육의 기능은 사라
졌지만 지금은 지역 주민과 초/중/고생을 위한 한문과 서예 등의 교양 강좌가 열리고 있어 명
륜당의 기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  글씨에 힘을 불어넣은 듯한 명륜당
현판의 위엄

▲  대성전을 품은 채, 입을 봉한
내삼문(內三門)


대성전(大成殿)은 향교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자 중심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5성(공
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과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우리나라 18
현(최치원,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등)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위치가 높은 건물이라
보통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둔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내삼문은 늘 굳게 닫혀져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은데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계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담장 너머로 보려고 해도 가파른 곳에 높게 울타리를 친 터
라 대성전의 얼굴 조차 보기 힘들며, 문틈으로 보이는 범위도 매우 한정적이다. 일개 대성전
의 얼굴이 그렇게 비쌌단 말인가? 보물로 지정된 장수향교 대성전(보물 272호)이나 강릉향교
대성전(보물 212호)도 저렇게 비싸게 놀지는 않는데 말이다.


▲ 대성전 우측에 자리한 전사청(典祀廳)
대성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우측에 자리한 맞배지붕의 전사청만 온전하게 보인다.
전사청은 제례와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  명륜당 뒤쪽 굴뚝
흙과 기와로 닦여진 그 모습도 정겨운 굴뚝
2개가 명륜당 뒤에 숨어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양천향교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강서농협이 있다. 농협
  앞 골목길(양천로49길)을 따라서 7분 정도 쭉 들어가면 양천향교가 나온다.
* 지하철 5호선 발산역(3번 출구)에서 6630, 6645, 6657번 시내버스를 타고 양천향교역(휴먼빌
  아파트) 하차, 길 건너편에 있는 강서농협으로 건너가서 양천로49길 골목길로 진입하여 쭉
  들어가면 된다.


★ 양천향교 관람정보 (2017년 12월 기준)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다.
*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정(丁)이 들어가는 1번째 날>에 석전대제를 지낸다.
* 양천향교역 내부에 향교홍보관을 운영하고 있어 향교 홍보물과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외삼
  문에 방명록과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다. 이 땅에 많은 향교가 있지만 이렇게 홍보물과 홈페
  이지까지 갖춘 향교는 거의 없다.
* 단체관람을 원할 경우 미리 연락을 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 성년례와 혼례, 상례와 제례 등의 가정의례와 한문, 예절, 충효 등의 교양강좌를 운영한다.
  자세한건 전화 문의 또는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양천로47나길 53 ☎ 02-2659-0076)
* 양천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가양동의 든든한 뒷동산, 궁산(宮山) 둘러보기

▲  녹음이 짙은 궁산 산책로

양천향교 뒤쪽에는 가양동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는 궁산(74.3m)이 야트막하게 누워있다.
한강변에 솟은 조촐한 뫼로 가양동에는 궁산 외에 탑산도 있었으나 개발의 난도질을 당해 겨
우 허가바위 주변만 남아있는 상태이며, 궁산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평지인 가양동에서 유독 하늘 높이 솟은 궁산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
鎭山)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한강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삼국시대부터 한강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 자락에는 희미하게나마 백제나 신라 때 지어진 옛 성터가 있으며, 임
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관군과 의병들이 집결하여 왜군을 격퇴했다. 18세기에는 겸재 정선이
양천 고을의 현감으로 부임와서(1740~1744년까지) 궁산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 현장
이 바로 소악루이다. 또한 6.25시절에는 국군이 주둔하며 북한군을 격퇴했다.

궁산에는 양천고성터와 복원된 소악루, 관산성황당, 양천향교 등의 오래된 명소가 있으며, 조
망이 일품이라 한강을 배경으로 한 주변 풍경이 아주 예술이다. 강서구에서는 궁산을 근린공
원(면적 약 133,700㎡)으로 삼아 산책로와 운동시설, 조망터 등을 만들었으며, 양천향교 서쪽
과 겸재정선미술관, 마곡금호어울림아파트 쪽에 산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산이 워낙 작아
서 빨리 둘러보면 30분 정도, 아주 여유롭게 둘러보면 1~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소악루
와 궁산 정상은 한강을 낀 야경 출사 장소로 썩 괜찮은 곳이다.


▲  궁산의 작은 꽃, 소악루(小岳樓)

한강이 두 눈에 바라보이는 궁산 북쪽 절벽에 단아하고 조촐한 맵시의 소악루가 있다. 이 누
각은 조선 영조 때 동복(同福, 화순군 동복면) 현감을 지낸 이유(李糅)가 궁산 강변 악양루(
岳陽樓)터에 재건한 것으로 중원대륙 동정호(洞庭湖)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의 경치에 버금간
다하여 소악루라 하였다. 즉 작은 악양루인 셈이다. (이유는 동정호의 악양루를 가본 적도 없
음)

소악루에 오르면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인왕산(仁王山)과 안산(鞍山) 등 서울 도심을 둘러싸
고 있는 산과 멀리 관악산(冠岳山),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가까이로 탑산과 선유
봉(仙遊峰), 한강 줄기가 이어져 예로부터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겸재 정선도 소악루에 올
라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당시의 경관이 고스란히 담
겨져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소악루는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원래 위치는 가양동 산6-4번지 세숫
대바위 근처로 여겨지는데, 이미 아파트들이 첩첩하게 들어선 상태라 제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1994년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각이라기 보다는 공원에 지은 아담한 정자 같다. 게
다가 흙이 아닌 보도블록 바닥에 뿌리를 내린 탓에 정취와 옛 명성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복
원을 하더라도 소악루와 주변 풍경을 배려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 역시 대충대충 탁상행정이
빚어낸 폐해이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1)
한강을 벗삼아 시원스레 뚫린 올림픽도로와 한강에 다리를 담군 가양대교,
그 너머로 쓰레기를 발판 삼아 어엿한 산맥이 된 하늘공원이 바라보인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한강 건너편은 고양시 덕은동과 현천동 지역, 저 멀리 북한산(삼각산)의
힘찬 줄기가 살짝 위용을 드러내 보인다.

▲  목멱조돈(木覓朝暾)

소악루에는 겸재가 궁산에서 그렸다는 진경산수화 복사본과 해당 그림의 해설판이 있다. 그러
니 그림에 담겨진 풍경과 실제 풍경을 대조해보며 주변 풍경을 대해보기 바란다. 억겁의 세월
이 한강수처럼 흐르는 동안 그림에 담긴 모습과 현재 모습이 참 많이도 달라졌지만 산줄기만
큼은 그림에 그려진 그대로이다.

목멱조돈은 겸재 정선이 1740년 궁산에서 바라본 남산을 그린 그림이다. 높이 솟은 두 줄기의
산은 북한산(삼각산)이며, 그 아래 야트막하게 목멱산(木覓山, 남산)이 솟아있다. 그 주변에
노고산과 와우산, 만리동고개, 애오개 등의 윤곽이 보이며, 지금은 하늘공원에 가려 만리동고
개와 애오개는 보이지 않는다.


▲  안현석봉(鞍峴夕熢)

안현(鞍峴, 갈마재)은 연세대 뒷산인 안산(鞍山)이다. 겸재가 안산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저
녁 봉화불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이를 그림에 담은 것으로 가까이에 탑산과 광주바
위(그림 오른쪽 아래)를 그림 앞쪽에 끌어낸 것을 보면 궁산에서 탑산과 안산을 바라본 풍경
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소악후월(小岳候月) -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그림 왼쪽에 소악루가 있고, 그 부근에 조그만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그곳이 소악루를 세운 이
유의 집으로 여겨진다. 그림 오른쪽에는 탑산, 선유봉 등이 있고, 멀리 남산과 와우산이 보름
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밑에 바위 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  양천고성터(陽川古城址) - 사적 372호

소악루 서쪽 산자락에 아련히 남아있는 양천고성터는 궁산 정상부에 축조된 것으로 길이 220m
, 면적은 29,370㎡인 조그만 산성(山城)이다, 백제 또는 신라 중기(6~7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성 이름은 딱히 전해오는 것이 없어 고을 이름인 양천을 따서 양천의 옛 성이란 뜻
의 양천고성이라 불린다. 한강과 접한 북쪽은 경사가 급하며, 남쪽은 느긋하다.

성과 관련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
지(大東地志)' 등에 전하며 성벽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적심석(積心石)과 성돌이
몇몇 남아있고, 높이 2~3m 정도의 성곽 윤곽이 일부 남아 이곳에 산성이 있었음을 희미하게
전할 따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권율(權慄) 장군이 오산 독산성(禿山城, 세마대)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곳
에 잠시 머물다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일구어냈으며,
행주산성과 오두산성(파주 통일전망대에 있음) 등과 더불어 한강을 지키던 요새였다.


▲ 양천고성의 흔적
한강을 지키던 산성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나무와
수풀만이 가득하다. 역시나 인간이 만든 것은 대자연 앞에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  민간신앙이 깃들여진 관산성황당(關山成隍堂)

궁산 정상부 남쪽 소나무숲에 자리한 관산성황당은 가양동의 안녕을 기원하던 마을 당집이다.
여기서 관산은 궁산의 옛 이름으로 보통 성황당의 한자는 '城隍堂'인데 반해 이곳은 '城' 대
신 '成'을 쓰는 특이함을 보인다.

이 당집은 '도당(都堂)할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도당할매는 서울 지역 당집에서 많이 봉안하
는 존재이다.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成隍祠)가 성산(궁산의 옛
이름)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500년 이상 묵었음을 보여준다.

성황당의 도당할매는 백성들의 번영과 행복을 도와주고 악귀를 몰아내주며,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준다고 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고 굿을 벌인다. 당집은 퇴
락된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정비했는데 덕분에 오래된 당집 분위기가 완전히 퇴색되고
말았다. 당집이라기 보다는 그냥 창고 같은 분위기다.

조선 후기에 황진(黃瞋)이란 사람이 이곳과 관련된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한강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띠웠더라
산 위에 남아있던 성의 담장(양천고성)도 다 없어졌는데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 사람을 본따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한다.


▲  누런 풀밭의 궁산 정상

궁산은 거의 야트막한 뒷동산 수준이지만 주변에 마땅한 산이 없어 그 존재가 무척 커 보인다.
그래서 사람이든 산이든 위치를 정말 잘 잡아야 된다.
정상 서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은 물론 행주산성, 서울 서부 지역이 거
침없이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로 휼륭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산6,7,8일대


▲ 궁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강에 다리를 담군 다리는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을 거쳐 서울역까지 달리는 공항전철
다리이다. 그 너머로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방화대교가 있으며, 사진 가운데에
자리한 산이 행주대첩의 현장,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  궁산 서쪽 산책로

▲  공항칼국수에서 먹은 버섯칼국수의 위엄

이렇게 가양동 나들이를 마치고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김포공항 입구에 있는 공항칼국수집을
찾았다. 가양동이나 등촌동에서 먹어도 되지만 문득 공항칼국수 생각이 간절하여 송정역까지
6631번 시내버스를 타고 그 집을 찾은 것이다.

김포공항입구교차로에 둥지를 튼 공항칼국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30여 년 묵은 집이다. 그
곳에 들어가니 본격적인 저녁 시간 이전(18시 이전)임에도 사람들이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버섯칼국수를 주문했는데 끓여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닌 국수사리
와 버섯, 채소가 한몸이 된 검은 피부의 냄비가 나와서 마련된 버너에 몸을 푹 끓인다. 그렇
게 5분 이상을 두면 버섯칼국수가 보글보글 자신을 끓이면서 진국이 된다. 반찬은 고작 김치
하나가 전부, 허전한 반찬을 보며 그래도 2가지는 나와야 덜 허전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버섯
과 어우러진 칼국수와 국물을 입에 넣는 순간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쏙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김치도 적당히 숙성이 되서 입맛에 그런데로 맞았는데 어느 정도 먹기가 무섭게 식당 아줌마
가 알아서 김치를 갖다주어 김치 수급문제는 없었다.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칼국수는 젓가락이나 국자로 각자의 그릇에 담아 먹는 것인데 너무 시
장한 나머지 국수와 버섯이 귀해지자 국수사리 하나를 시켰고, 국물에 밥 2개를 볶아서 말끔
히 냄비를 비운다. 국물과 하나가 된 볶음밥 역시 맛이 괜찮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찾아간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가양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칼국수 국물에 밥까지 싹 비벼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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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옛성길~탕춘대능선~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가을 나들이 (탕춘대성)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탕춘대성 암문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은평구

▲  구름정원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천하 둘레길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햇님이 슬슬 고개가 꺾이던 오후 3시, 구기터널에서 길을 시작하여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옛성길로 들어선다. 이 코스는 구기터널3거리에서 탕춘대성 암문, 옛성길전망대를 거쳐 북
한산 생태공원(북한산래미안아파트)까지 이어지는 2.7km의 짧고 굵직한 산길로 구기터널과
독박골에서 오르는 부분이 조금 각박할 뿐, 거기만 오르면 길은 다소 순해진다.

옛성의 주인공이자 이곳의 알맹이인 탕춘대성과 그에 딸린 암문, 옛성길 전망대 등의 명소
가 있으며 거의 능선길이라 조망도 제법 괜찮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완주 가능)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암문)

▲  평창동에서 바라본 탕춘대(蕩春臺) 능선

▲  구기동 주택가를 지나는 옛성길 동쪽

구기터널에서 둘레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라 돈냄새가 요란하게 풍기는 고급 주택가를 지
나면 숲속에 묻힌 그늘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여기가 정녕 서울 도심 종로구(鍾路區)가 맞는
지 물음표를 여러 번 내던지게 하는 외딴 산골 풍경으로 아무리 손등을 꼬집어보아도, 두 눈
을 비벼보아도 이곳은 분명 서울 종로구 구기동(舊基洞)이 맞다. 이 첩첩한 산골까지 주택이
마구 밀려와 150m 고지까지 좁게나마 골목길이 깔려 있다.


▲  옛성길 동쪽 시작점

▲  탕춘대성 암문으로 오르는 옛성길 (1)

옛성길 동쪽 시작점에서 탕춘대성 암문까지는 숨가뿐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다행히 둘레길을
잘 닦아놓아 그리 힘든 구석은 없다.
동쪽 시작점에서 암문까지는 약 10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쉼터가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
여 은은한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과 마음을 적지 않게 치유해준다.


▲  탕춘대성 암문으로 오르는 옛성길 (2)

▲  탕춘대성 암문(暗門) - 탕춘대성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옛성길의 옛성은 바로 탕춘대성을 뜻한다. 조선 19대 군주인 숙종(肅
宗, 재위 1675~1720)은 혹시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
山城)을 크게 증축하고 그 안에 행궁(行宮)과 관청, 창고, 군사시설, 승병(僧兵)을 위한 사찰
을 가득 지어 조그만 산속 도시를 구축했다.
그리고 부암동(付岩洞)과 평창동 지역에 있는 관청과 창고(선혜청, 조지서 등)를 지키고 한양
도성의 방어력을 드높이고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축성했다. 그
성의 이름은 연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세운 탕춘대(蕩春臺)에서 비롯되었다.

이 성은 한양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
弘智門)과 오간대수문을 세웠고, 1718~1719년에 인왕산(仁王山) 동북쪽에서 비봉능선 부근까
지 5.1km의 석성을 쌓았다. 이후 북한산성까지 늘리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고,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거쳐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을 잇는 성곽도 추진했으나 계획에서 끝났다.

한양(서울)의 북쪽을 지키며 별탈없이 지내오던 탕춘대성은 장대한 세월에 짓눌려 여장과 성
벽 곳곳이 망가졌고 1921년 1월에는 홍지문 문루(門樓)가 세월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
너졌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대홍수로 오간대수문까지 떠내려가는 등, 계속 고통을 당해 오
다가 1977년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복원되었다.

바깥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탕춘대성 암문은 높이가 2m 정도로 구기터널 고개 윗쪽에 자리
한다. 암문(暗門)은 일종의 비밀 문으로 잡초와 뒤섞여 예전의 면모는 많이 떨어졌지만 문과
성벽은 그런데로 잘 남아있으며, 성돌이 헝클어져 통행이 힘들어진 성곽 길의 짐을 덜어주고
자 그 옆에 산길을 내었다. 성곽에 오르면 홍은동과 홍제동, 불광동 등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상당수 지역과 신촌, 안산(鞍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암문을 나가면 바로 홍은동(弘恩洞)과 불광동(佛光洞)으로 이어지며 탕춘대성 능선을 따라 남
쪽으로 내려가면 상명대와 세검정, 북쪽으로 올라가면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진다.
< 탕춘대성은 홍지문과 한 덩어리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됨, 지정 명칭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
'>

▲  네모나게 다져진 탕춘대성 암문 안쪽

▲  탕춘대성 암문 바깥쪽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되버린 탕춘대성
인간이 만든 것이 아무리 위엄 돋는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나마 복원을 해서 저 정도라도 유지를 하고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산의 일부로
영영 묻혔을 것이다.

▲  탕춘대성 암문에서 바라본 천하 (1)
구름이 점점이 떠있는 하늘 아래로 홍은동과 홍제동, 안산, 신촌 지역이
바라보인다.

▲  탕춘대성 암문에서 바라본 천하 (2) - 불광동과 연신내, 은평구 지역

▲  송전탑 너머로 족두리봉과 향로봉, 비봉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소나무가 우거진 옛성길 (암문~옛성길전망대 구간)

▲  옛성길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안산, 서대문구 지역

▲  옛성길 전망대

탕춘대성 암문을 지나면 둘레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 차
례 반복될 뿐, 길은 느긋하다. 능선길이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이 두 눈과 마음을 시
원스럽게 다독거려주며, 가까이에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인사를 건넨다. 그런 길을 가볍
게 15분 정도 가면 옛성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옛성길 전망대에 이른다.

이 전망대는 해발 220m 지점에 닦여진 조망터로 북한산의 동남쪽 산줄기와 은평구, 서대문구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 문수봉과 보현봉, 형제봉,
평창동 지역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향로봉과 비봉, 승가봉, 나한봉, 문수봉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불광동 독박골과 족두리봉

인생의 오르막이 있다면 내리막도 반드시 있는 법, 옛성길전망대를 지나면 길은 완전히 내리
막으로 돌변한다. 암문부터 참 온순했던 옛성길은 크게 흥분기를 보여 경사가 좀 각박해지는
데 다행히 내려가는 것이니 망정이지 이 길로 올라왔다면 두 다리가 꽤나 성을 냈을 것이다.
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구기터널 서쪽인 불광동(佛光洞) 독박골이며, 여기서 큰 길(진
흥로)을 건너 북한산래미안아파트 동쪽으로 가면 북한산 생태공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옛성길
은 그 끝을 맺는다.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터널(한국고전번
  역원)이나 독박골(북한산래미안아파트)에서 하차, 7212번을 탔을 경우 구기터널 대신 구기
  동 현대빌라에서 내리면 된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2번 출구)에서 구기터널 방향으로 14분 정도 걸어가면 옛성길과 구
  름정원길이 나온다.
* 지하철 3호선 홍제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홍은
  동 국민주택 종점 하차, 여기서 5분 정도 오르면 옛성길과 만나며 거기서 오른쪽으로 2분
  정도 가면 탕춘대성 암문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 서대문구 홍은1동 / 은평구 녹번동


 

♠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  구름정원길 남쪽(불광사) 시작점

북한산둘레길 옛성길은 북한산생태공원에서 구름정원길로 간판을 바꾼다. 구름정원길은 북한
산생태공원에서 하늘전망대, 선림사, 옛 기자촌 뒷쪽을 거쳐 진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5.2
km의 기나긴 산길로 진관동 화의군(和義君)묘역~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 구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주택가와 아파트 뒷쪽을 지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며 속세를 옆구리에 끼
고 있어 언제든 속세로 뛰쳐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옛성길에 비해선 깊은 산길의 운치는
좀 떨어진다.

산길 이름인 구름정원길은 별다른 뜻은 없다. 그냥 구름의 정원을 거닐 듯 편안한 길이란 뜻
에서 동심 어린 이름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하늘전망대와 기자촌전망대 등의 조망터가 마련
되어 있다.


▲  구름정원길 (북한산힐스테이트 1차 뒷쪽)

▲  구름정원길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래미안아파트와 독박골 주변, 옛성길이 흐르는 탕춘대 능선

▲  구름정원길에서 바라본 천하 (2) 불광동과 녹번동, 백련산(白蓮山)

▲  은평구를 앞 뜨락으로 삼은 하늘전망대

구름정원길의 백미(白眉)는 은평구를 품은 하늘전망대와 길쭉하게 나무로 다져진 다리(데크길
)이 아닐까 싶다. 구름정원길 남쪽 시작점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서쪽으로 돌출된 하늘전
망대에 이르게 되는데 벼랑 위에 설치된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은평
구 일대가 속시원하게 바라보인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불광동과 녹번동, 응암동 지역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불광2동과 은평뉴타운, 앵봉산을
비롯한 은평구 북부 지역

▲  나무 다리에서 바라본 하늘전망대 (사진 가운데 부분)

▲ 산길 한복판에 자리한 소나무 (나무 다리 직전)
하늘전망대 북쪽에서 나무다리까지는 소나무가 삼삼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무데크길을 내다보니 소나무가 길 한복판에 있게 되었는데, 그를 강제로
손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둔 센스와 배려가 무척 돋보인다.

▲  길쭉한 나무 다리 (나무데크길)
이곳은 하늘전망대와 더불어 구름정원길의 상징적인 구간으로 소나무숲 보호와
탐방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게 다리를 깔았다.

▲  북쪽에서 바라본 나무 다리 (하늘전망대 방향)

하늘전망대에서 나무 다리를 지나면 족두리봉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동쪽) 산길을 오
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 자락을 잡고 있는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며, 왼쪽(서쪽)으로
내려가면 불광동 대호아파트, 북쪽으로 직진하면 구름정원길의 나머지 부분이 마저 펼쳐진다.

여기서 둘레길을 따라 5분 정도 전진하면 이름도 긴 북한산힐스테이트3차아파트 뒷쪽이다. 시
간도 어느덧 18시에 임박했고 햇님은 달님과 업무 교대를 하며 칼퇴근을 준비한다. 마음 같아
서는 불광중교까지는 달려가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배도 고프고, 슬슬 지치기도 하여 나
머지 구간은 불투명한 다음으로 넘기고 둘레길 나들이를 접었다. 어차피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무지개와 같은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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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 나들이 '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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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

▲  자지동천(자주동천) 바위글씨

▲  삼군부총무당


 

♠  한양도성(漢陽都城) 혜화문(동소문)에서 낙산공원 구간

▲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혜화동로터리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동소문고개가 막
꺾이기 직전에 한양도성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손을 내민다.

이 탐방로는 낙산을 넘어 동대문(東大門)까지 이어지는 2.3km의 도보길로 2012년에 모두 개통
되었다. (동소문 주변이 마지막으로 개통됨) 처음부터 각박한 경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 길은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완만해진다. 삼선동(三仙洞) 주택가 뒤쪽
을 지나지만 낙산 정상까지 녹지대를 완충지대로 삼아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책
의 기분을 진하게 선사해주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성곽 탐방로는 성곽길과 성곽 바깥길 2가지가 있어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허나 동소문에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진 바깥길만 완전하게 나 있다. 동소문고개
에서 성 안쪽을 보면 나무가 좀 무성해 보이는데 그곳에 카톨릭대 성신교정이 넓게 자리를 깔
고 앉은 터라 낙산공원~동소문 성곽길은 그 중간인 제2전망광장까지만 닦였을 뿐, 거기서 카
톨릭대 담장에 사정없이 가로막혔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낸들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위해 성곽길을 흔쾌히 개방하고 성곽이 끊긴 동
소문고개에는 카톨릭대 교내(혜화동성당)로 내려가는 길을 내면 될 것이다. 물론 끊어진 양쪽
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성곽 모양의 구름다리를 놓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끊긴 거리가 길고 그
높이마저 상당하며 고갯길 도로(동소문로, 창경궁로)의 교통량이 어마어마해 꽤 난공사가 예
상된다.

동소문고개를 기준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암문(暗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거기서 2분을 더 가면 낙산의 정상인 낙산공원 마을버스 종
점에 이르게 된다.


▲  주거지(장수마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낙산 북부에서는 어디서든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산줄기가 시원히 바라보인다.


동소문~낙산 구간의 한양도성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허나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을 먹었
고, 왜정과 6.25전쟁으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면서 새 성돌로 치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검은 성돌과 하얀 피부의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하지
만 둘 사이의 어떠한 갈등도 없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강인한 협동심으로 하나의 성곽을 이
루고 있으니 참 든든해 보인다.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조선의 수도를 지켰던 서울<한양(漢陽)>의 갑옷, 한양도성 - 사적 10호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조선이란 아주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 태
조라고 부른다.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
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국방을 강화하여 버릇 없이 까부는 명나라를 혼내주
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다.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를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는데 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4산(內四山)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 작
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
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싹 다지기로 하고 1422년
1월, 32만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무려 3.2배의 인부들이 동원된 조선 최대의 공사였으며 완전 인원빨로 밀어
붙어 불과 38일만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아무리 현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농번기를 피하려고 늦겨울에 무리하게 작업을 벌
였고 공사의 강도가 높아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다. (공사가 끝나고 귀가 도중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음) 그들의 적지않은 희생과 고통으로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고자 온갖 욕을 들어가
며 단단하게 다졌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
은 별 피해가 없었다. (한양도성 왈 '내가 이럴려고 단단하게 지어진건가? 자괴감 들어' ;;)

1704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신하들의 격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했는데, 그 안에 행궁(行
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
(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며 전차(
電車)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그 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
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이 싹둑 잘리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
한 기관을 만들어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을 밀어버렸고 적지 않은 성곽까지 덤으로 밀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살아남
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
이 가능하며<인왕산 정상 주변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에는 못감,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문을 닫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쌈싸먹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
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
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 대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거의 85도로 서 있는 한양도성의 위엄

옛 한양도성은 두터운 성곽을 지니고 있기에 늘 든든했을 것이다. 그렇게 민초들을 닥달하여
쌓은 단단한 성이건만 그 보람도 없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권력층 때문에 제대로 된 수성전
하나 치르지도 못하고 적에게 떨어지는 수난을 여러 차례나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날, 병자호란...) 성곽은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자 있는 것이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병풍이
아니다.


▲  낙산 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천하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 북한산)


 

♠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에 둥지를 튼
~ 낙산공원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의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한
다.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며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기서 내사산
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있는 북악산<백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
의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의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낙산이 가장 부실하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나 꽤나 야무지고 험준하여 예로
부터 호랑이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산 못지 않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반면 낙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에 있어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수준의 언덕이다.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
환으로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글자로 장난칠 것이 아니라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
지만 낙산 동쪽은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러
니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
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축하지 않았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보다 훨씬
작음>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낙산에 정자나
별장, 거처를 지어 머물렀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
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묵객들이 자
주 발걸음을 했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
명한 이수광(李睟光)의 초가인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애환
이 서린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가 많았던 쌍계
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다.
그 외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
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다투어 안겨져 있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낙산이었
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수많은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아파트와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달동네인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살짝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
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 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 절 보문사(普門寺), 구
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산 중턱에 자리를 피며 산의 미관을 적지않게 말아먹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0
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싹 밀어버
리고 정상 주변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2년 6월 완성을 보았는데, 운동시설과 휴게
소,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광장, 전망광장 등 3개의 광장을 갖추는 한편, 소나무 등 8
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 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 공간
이자 답사/나들이 장소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여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란 별명까
지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 면적은 201.779
㎡)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곽이 잘 남아있다. 1999
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낙산을 조금씩 위로하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였는
데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부 탐방로는 동
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700m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든 구간이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이나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역(6호선)과도 또한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서울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더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비우당, 동망봉, 삼군부총무당 등이
있으니 한 덩어리로 같이 보면 제법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 청룡사
,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의 명소들까지 둘러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 교차로(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길 4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
  7985~6)


▲  낙산 정상부 ① - 낙산공원 마크와 성바깥 산책로

▲  낙산 정상부 ② - 놀이광장 주변

▲  낙산 정상에서 제2전망광장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  낙산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낙산 정상(종로구 마을버스 03번 종점)에서 창신동 방향(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쌍용
아파트2단지 입구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낙산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정류장 남쪽 비탈
에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圓覺寺) 직전에 3칸짜
리 초가가 마중을 한다. 그가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그럼 이곳에는 비
우당만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
위글씨와 샘이 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가는 날이 보수하는 날이라고 지붕을 수리하고 파란 천으로 꽁꽁 덮고
있었다. 지붕을 감싼 천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날을 잘못 찾아온 것을 어찌하리? 어차피 집에
서도 가까운 곳이니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비우당은 어
떤 곳인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우울하게 말하면 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중
고등학교 국사책과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
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유씨 집안이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
성(孟思誠), 황희(黃喜)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
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유재
상의 우산'이란 뜻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다.

유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유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또한 집 주변의 8곳의 경치를 '비우당 8경(八景)'이라 정하고 시
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1. 동지세류(東池細柳) - 동대문 밖에 있던 동지(東池)란 연못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
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지는 현재 없음)
2. 북령소송(北嶺疏松) - 북악산의 산마루가 낮에도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 타락청운(駝酪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4. 아차모우(峨嵯暮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5. 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자지동천)에 드러눕
다. (현재 낙산에는 계곡이 전멸함)
6. 후포채지(後圃菜芝) - 지봉과 상산(商山, 낙산의 동쪽 줄기의 하나)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7. 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다.
8. 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은 흠취를 말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實學)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
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
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
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
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
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굳이 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깥에서 거의 다 보이지만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지동천의
흔적(샘터와 바위글씨)이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담장 밖에서도 보이기는 보임) 비우당
은 복원된지 10년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초가라 고색의 내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지만 자지
동천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  비우당 동쪽 부분 (굳게 닫힌 사립문과 비우당터 비석)
초가 뒤쪽으로 자지동천 표석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천) 표석

▲  비우당 뒷쪽 굴뚝과 자지동천

그럼 이름도 참 거시기한 자지동천(자주동천)은 어떤 사연이 깃든 곳일까?
이곳은 낙산 동쪽에 자리한 오래된 샘터로 조선 6대 군주인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定
順王后) 송씨(1440~1521)의 슬픈 사연이 서린 현장이다.

정순왕후는 여산송씨 집안으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 단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바
로 이듬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단종은 상왕(上王), 송씨
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허나 1457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생애 마지막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송씨는 영도교(永渡橋,
청계8가)까지 울면서 따라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게 된다.
그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이별교, 영이별다리라 불렸고, 그것이 영도교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단종이 떠나면서 송씨 역시 강제로 궁궐을 나와 낙산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했다. 청룡
사는 은퇴한 왕실 상궁(尙宮)과 승하한 제왕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그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씨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세조(世祖)가 마땅히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절과 가까운 자지동샘으로 와서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감을 들여 바위 위에 널어 말렸
으며, 그 비단으로 댕기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서울 장안이나 동묘 주변에 열렸던
여인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때 여기서 비단을 물들이거나 빨래를 할 때 샘물도 그녀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절로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하며, 세상에서는 송씨의 그
런 애환을 위로하고자 함인지, 자주색으로 물들인 샘을 자지동천(자주동천), 자주우물이라 부
르고 바위는 자주바위라 불렀다. 또한 샘터 일대를 자지동(紫芝洞, 자주동),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렀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많은 것 같지만 정식 이름은 자지동천, 자지동이며 여기서 자지는 거시기
한 그것이 아니라 뿌리가 자주색을 띠는 풀인 지초(芝草)를 말한다. 지금이야 샘이 있는 바위
윗쪽에 잡초만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지초가 무성히 자라고 그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도 이곳 이름은 그렇게 거시기하게 나오지만 이 땅의 정서상 상당히 예민한 단어인
지라 당당히 쓰기에는 좀 쑥쓰러운 감이 있어 요즘은 자주동천, 자주동샘으로 희석해서 많이
부른다. 비록 단어는 거시기해도 뜻은 그렇지가 않거늘 마치 홍길동(洪吉童)이 아버지를 아버
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지동천은 자주바위 밑에 파인 'U'자 모양의 돌우물로 왜정 때까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허
나 왜정 이후 개발의 칼질로 낙산의 계곡과 물이 씨가 마르면서 죽은 샘물이 되었다. 송씨를
비롯하여 낙산 동쪽에 살던 여인들이 빨래나 염색/식수용으로 사용하던 샘물로 옛날의 정취는
95% 이상 증발되고 겨우 일부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샘터를 밑도리에 둔 자주바위 피부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쓰인 바위글씨가 있다. 자
지(紫芝) 2글자는 좀 퇴색되긴 했으나 두 눈으로 살피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동천(洞泉)
2자는 꽤 선명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글씨를 쓴 이는 누군지는 전해오는 바는 없
으나 조선 후기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선비가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흔적만 남아있는 자지동천 샘터(자주동샘)

▲  자지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글씨에 검은색을 입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글씨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185cm이다.

▲  자지동천 거북바위

자주바위 윗쪽에는 거북이를 조금 닮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이름도 거북바위
인데 그에게도 정순왕후의 한이 담겨져 있다.
정업원에서 먼저 간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눈물로 잠을 이루던 어느 날, 단종이 거북이를 타
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상히 여기며 아침 일찍 비단을 빨러 자지동샘에 왔는데 어
제까지만 해도 없던 이 거북바위가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바위가 갑자기 불쑥 나타날 리는 없다. 허나 그런 꿈을 꾼 이후, 빨래를 널고 잠시 쉬면
서 바위를 살펴보니 꿈의 영향인지 거북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사연을
동네 아낙들과 승려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그런 전
설로 변해간 것이다.

※ 비우당, 자지동천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쌍용아파트2단지 입구에서 하차, 도로 남쪽 밑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아랫쪽에 있다.
* 낙산공원(낙산 정상)에서 창신역 방면으로 도보 7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7985~6)


▲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호

낙산 동북쪽이자 한성대 바로 서쪽에는 삼선공원(삼선상상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안에는 고
색이 창연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하나 숨겨져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

삼군부(三軍府)는 국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신설했다. 비변사(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군령 최고 기관으로 무부(武府)라 불리기도 했
는데 광화문 남쪽 예조(禮曹)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서(晝仕所)를 합쳐 삼군부라 칭했으며, 1867년 4월에 완전한 조직을 갖
추었다.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군무(軍務)와 군비 강화를 비롯한 숙위 문제와 변방
관리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크게 꺾이면서 1880년 12월 폐지되고 만다.

삼군부총무당은 삼군부가 한참 자리를 잡던 1868년에 현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세워진 것
으로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다. 양쪽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을 거느렸으며, 삼
군부가 폐지된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관청으로 쓰였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후에는 시위대(侍衛隊) 청사로 쓰였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사령
부로 사용되었다.
허나 순종(純宗)이 1926년 붕어한 이후, 보병대는 폐지되었고, 1930년 왜정(倭政)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면서 삼군부의 중심인 총무당을 지금의 자리로 내쫓았다. 또한 덕의당은 부셔버렸
으며, 청헌당(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호)만 홀로 남아있던 것을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로 보내버렸다.

▲  삼군부총무당의 뒷모습

▲  위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길쭉한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구리에 1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조선이 이 땅을 거쳐간 가장 최근의 나라이지
만 왜정의 심술이 극심해 제대로 남은 관아 건물이 별로 없으며 서울 같은 경우는 총무당과
청헌당이 유일하다. 설령 남기더라도 생색내기용으로 거의 1~2동만 남기는 수준으로 망국의
관청을 완전 고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삼군부 같은 경우는 1동만 자리를 지키게 했음)
뒷끝이 쿨해야 서로가 좋거늘, 왜는 섬나라 사람의 비좁은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못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반감만 잔뜩 샀던 것이다.

총무당 주변은 1970년대 이후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었고, 어린이놀이터를 더 확장
하여 완전한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제와서 총무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따로 놀고 있는 청헌당과는 다시 하나로
이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청헌당이 이곳으로 오던지 아니면 총무당이 육사로
가던지 해서 둘을 같이 있게 해주면 보기도 좋을 것 같다. 덕의당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복
원을 해서 옆구리에 붙여주면 될 것이다. 비록 망국의 관청이긴 하나 한때 조선의 군정(軍政)
을 관장했던 현장으로 이렇게 동네 구석 어린이공원에 분산되어 처박혀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좀 딱해 보이기도 한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을 끝으로 낙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분 가면 삼선교로4길(삼군부총무당을 알리
  는 어두운 색깔의 이정표가 있음)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8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과 장
  수마을 표석이 나오면서 좌우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성곽과 반대 방향인 왼쪽
  으로 2분 가면 삼선공원이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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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0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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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거닐다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공원)



'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  낙성대 3층석탑

▲  낙성대 안국사

▲  신림동 굴참나무



봄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며 천하만물을 곱게 물들이던 5월의 첫 주말에 일행들과 낙성대를
찾았다.
이제 5월의 시작임에도 철모르고 찾아온 따스함을 넘어선 더운 기운에 여름이 벌써 근처까
지 진군한 모양이다. 이번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거라고 구라청으로 유명한 기상청에서
입을 모으고 있으니 여름 제국의 시련을 어떻게 견딜지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오후 3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부근 마트에서 간단하게 음료수와 김밥을 사
들고 낙성대(안국사)로 향했다. 그곳으로 갈 때는 낙성대입구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통하는
낙성대로를 따라가면 손을 뒤집듯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렇게 가지 않고 낙성대동 주택가로
조금 돌아갔다. 그 이유는 밀림 같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허나 지금은 주택가 속의
외로운 공원이 된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
서울 지방기념물 3

▲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봉천동 218번지(낙성대동)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이자 귀주
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기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안국사(安國祠) 일대를 일컫지만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
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의 이름이 아님~~!!>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이 근처
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 그
는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가니 그 집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
, 금천구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었는데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
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4번째 별로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나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나 문곡성을 빌려 표현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중원(中原)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의 사신, 무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오갔다. <
중간에 흑산도나 가거도를 경유하기도 함>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당시 남경(南京)>로 돌아
갈 이유는 없다.
이곳을 거쳐가지도 않았을 사신을 애써 끌어들인 것은 온갖 문화가 혼합된 중원의 문화를 좋아
하고 중원대륙을 동경하던 옛 사람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며 앞서 문곡성의 예를
통해 문곡성의 화신(化身)으로 여기고 그의 탄생일에 맞춰 그 별이 떨어진 것으로 탄생설화를
꾸민 듯 하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이 그에게 문곡성이라 존칭하며 굽신거렸으니 그에 맞게 중
원대륙 사신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
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개 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보이나 그게 코 앞에 다가왔을 때는 꽤나 난감한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리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
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강감찬이 세상을
뜬 이후,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이곳이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낙성대라 불렀다.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그의 탄생지를 길이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
탑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이며,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 자리를 지키다가 1974년 이곳 남쪽에 사당인 안국사를 세우면서 탑을 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으며,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
대유지(遺址)'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무와 꽃이 가득하여 조촐하게 소공원의 역할을 한다. 강감찬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 주변을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을 때 꼭 발굴조사를 벌였
으면 좋겠다.

강감찬생가터(옛 낙성대)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왼쪽으로 낙성대역길이 나온다,
  길을 3분 정도 가면 오르막이 나오면서 길이 왼쪽(동쪽)으로 꺾이는데 그 꺾인 길로 2번째
  골목길인 낙성대역4길로 2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긴 옛 낙성대가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낙성대의 상징이던 3층석탑이 새 낙성대로 옮겨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를 지키고자 1974년에 세워진 것이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
로 하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
)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
세웠으며 그 위에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 높이는 2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나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제자리를 떠난 3층석탑과 함께 오랜 숙성을 자랑하는 나이 지긋한 향나
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리는데 그것
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살이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
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묶여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본글 끝 부분에 있음)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 서울시 보호수 1-23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 무심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
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확장/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한 나무를 물색하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高陽市)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
이 누워있음)


 

♠  낙성대공원과 낙성대3층석탑

▲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이동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후문으로 가
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19746월에 조성되었는데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 공원에는 팔작지붕 기와집 매점이 전부였으나 그새 빨간 피부의 도서관과 야외놀이
마당, 전통혼례식장 등을 새로 그려넣어 그때보다 더 활력이 넘쳐보인다.

봄이 내려앉은 공원에는 산책,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거의 시장통을 이루었고, 공원 북쪽에 자
리한 전통혼례식장에서는 혼례가 열리고 있어 하객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우리는 그런 풍경의
일부가 되어 의자에 앉아 바깥에서 가져온 음료수와 김밥을 먹으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  빨간 카페트가 깔린 관악예절원 전통혼례장

▲  안국사로 인도하는 그림 같은 숲길
오랜만에 찾은 새 낙성대에 이런 숲길이 있었다니 결코 낯선 곳이 아님에도
처음 만난 듯 신선하기만 하다.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낙성대공원에서 안국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개이다. 하나는 숲길(윗 사진)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국사 정면으로 난 홍살문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숲길로 들어가 홍살문으로 나오기
로 했다.
숲길 좌우에는 나무들이 봄이 안겨준 좋은 세상에 심취하며 한참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 풍경이 고와 벌써부터 눈이 호강을 누릴 지경인데 늦가을이면 그 화사함에 두 눈이
멀지도 모르겠다.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숲길을 들어서니 안국사 관리사무소가 나오고, 그 옆으로 안국사의 외삼문(外三門)인 안국문이
윤기가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드러내며 위엄을 뽐낸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모두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
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된다. 안국문 앞 계
단은 약 3m 높이로 문의 위엄을 수식하고 있으며, 계단 남쪽에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바위
글씨가 있다.


▲  커다란 돌에 새겨진 낙성대 바위글씨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바위글씨는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
성대 3글자를 자연산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자리가 넓은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11일 상량
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45천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
내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바위글씨 앞 표석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재미없게 쓰여 있어 독재시대의
우울했던 단면을 보여준다.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지은 이를 너
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안국문과 내삼문 중간 (안국문에서 바라본 모습)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진 원효로 남
(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뜬금없이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려주는 존재로 13
,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운 것이다. 공덕을 기
린다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이 얼
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가 되버린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도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
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이라 다른 절에 있던 탑을 가져와 낙성대의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여
기는 경우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서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
운 탑이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
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속시원
히 때려잡아주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의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
壇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라 쓰여 있어 이
탑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년을 묵은 탑이지
만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
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
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  서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남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소 거부감을 들게 한다.
그래도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
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본전을 가리고 선 내삼문(內三門)
저 문을 들어서면 안국사의 본전이 나온다.


 

♠  낙성대 안국사(安國祠)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
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생애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는 이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
殿)을 본따서 지었는데 무량수전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옆에서 본 안국사 본전의 위엄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 많은 사
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렇게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 듯 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습
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휘하
여 그린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
정이 되어 그와 관련된 사당에는 그의 그림이 사당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긴 김은호(
殷鎬)의 제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화풍을 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111일에서 12일 사이에 그만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
악구청은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
의 나이를 이유로 거절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
줄 것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네 주었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 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
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진짜 영정이 아닌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
었다면 정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제대로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직접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본전 뒤쪽 풍경 - 나무들도 강감찬을 존경하는지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본전에 그늘을 드리운다.

▲  차가운 이미지의 상징, 안국사 홍살문 - 그 앞에 어린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어 근엄한 홍살문의 역할을 무색하게 만든다.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 자리한 강감찬 장군의 동상은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장군의 모습을 하
고 있다. 청동(靑銅)으로 다져진 이 동상은 199710월에 세워진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흔쾌한 지원으로 기존의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해 낙성대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다. 금천강
씨는 진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으로 넘어와
터전을 일구었으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이 되었다.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김유신(金庾信)과 최영(崔瑩), 남이(南怡), 이순신(李舜臣) 등과 더
불어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그
들을 통해 크게 부풀려져 신화처럼 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인
을 만나 그와 인연을 맺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들이 부지기수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악
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30대까지 금천에서 대부분을 지냈으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에 과거에 응
, 갑과(甲科)로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흔히 그
를 장군이라 하여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
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
인 윤관(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도입해
인재를 발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너희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나?'
호통을 치니 관속들이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게 맞
지가 않는다.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리
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구리
의 입을 막게 했는데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
.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 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
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하지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
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
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강동6(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주지 않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
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
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
숙흥(金叔興),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행
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
온 전란이 있었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
했다'
적혀있어 그의 공이 실로 엄청났음을 가늠케 한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오랫동안 옛 조
선과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아오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나라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그래서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
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칠순이었다. 남들 같으면 이미 꺾
이고도 남을 나이에도 총대장이 되어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니 그의 건강과 무예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12천을 뽑아 압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
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
게하고 거란군이 그 강을 건너자 쇠가죽으로 다진 둑을 터뜨려 그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
으면서 매복시킨 기병으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신
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사냥했고, 거란군이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성을 나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고 소배압의 거란군
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보고 소배압은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의 우수한 기마병의 힘을 보여주마. 각오해라!' 다짐
하며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걸었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리는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란에게는 개망신에 가까운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
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죄다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
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이란 대작품을 일구고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들고 개경
으로 개선하자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연회를 베풀었다.
현종은 친히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
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했다. 1030년에는 현종에게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문하시중이 되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절대로 안된다며 3일에 1번씩 입궐
토록 했으며 이듬해(1031) 6월이 되어서야 겨우 사직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해 1031,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덕종(德宗)3일 동안 조회를 멈
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
)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평시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
숙한 태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한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
려를 작지만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
대첩에서 완전히 게임이 끝나니 거란도 이제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려의 침공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
쟁으로 지쳐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12세기 초까지 압록강 가교 사건 등을 제외하고
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었
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이 얼마나 두
터웠는지 보여준다. 그의 찬란한 이름은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3척동자도 '강감찬하면 귀
주대첩~!'을 떠올릴 정도로 이 땅의 대표적인 위인의 하나로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녹아내리
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용
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안 무
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후손들이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무덤을 복원했다.

낙성대 안국사(낙성대공원)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낙성대역길이 나오고 그 길로 접어
  들어 왼쪽(남쪽)으로 가면 관악구 마을버스 02번 정류장이 있다. (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음)
  그 버스를 타고 낙성대공원(영어마을) 하차
*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3~4분 직진하면 낙성대입구 교차로이다. 거기서 왼쪽(남쪽) '
  성대로'로 진입하여 도보 12(낙성대역에서 도보 15)
* 매년 103째 주에는 낙성대공원에서 관악 강감찬축제가 열린다. 원래는 '낙성대 인헌제'
  1988년 추석(920) 때 처음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관악구의 주요 축제인 '관악산 철쭉제
  '와 통합하여 관악 강감찬축제로 이름을 갈았다.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강감찬을 주제로 별페스티벌, 출병식과 전승행렬 거리 퍼레
  이드, 주민화합 한마당, 고려촌 테마부스, 작은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가 열리며
  올해(2017)1020~21일에 열린다. (문의 관악구 문화체육과 ☎ 02-879-5605)
* 안국사 관람시간 : 9~18(겨울은 17시까지, 낙성대공원은 24시간 개방,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난곡(蘭谷)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들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에 자리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1-1

낙성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또다른 강감찬 나무를 찾고자 관악
구 서남쪽 끝으머리에 박힌 난곡으로 이동했다.
난곡은 서쪽으로 금천구 독산동, 남쪽은 금천구 시흥동(始興洞)과 맞닿아 있으며 예전에는 신
림동(新林洞)의 일원으로 그 기치 아래 똘똘 뭉쳐있었으나 신림1~10동이 모두 별도의 이름을
칭하게 되면서 신림7동이던 난곡은 난곡동과 난향동으로 분리되었다.

서울 달동네(산동네)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현장으로 달동네 스타일의 분홍색 기와집과 판자
집이 가득했으나 1999년 이후 10년이 넘게 재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몸을 풀면서 동네 상당수
가 성냥갑 아파트와 단독주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음지에는 아직도 달동네의 흔적이 남아있
으며 재개발의 과정에서 많은 가난한 서민들이 강제로 터전을 떠나야 했다. 개발의 칼질은 늘
있는 것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일반 백성들에게는 지나치게 포악하다.

난곡이란 이름은 난초 골짜기란 뜻으로 달동네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이 난곡이
라 불리게 된 것은 정정공(貞靖公) 강사상(姜士尙)의 손자인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 이
곳에서 말년을 보낼 때 난초를 많이 길러 유래되었다는 설과 원래 이름은 낭곡(狼谷)이었는데
강사상의 아들인 강서(姜緖)가 동네 이름이 별로라고 하여 난곡으로 바꾸고 자신의 호도 그리
했다는 설이 있다. 강홍립은 난곡 위쪽에 자리한 조부(祖父), 강사상의 묘역에 묻혀 있다.

난곡에 이르러 난우중학교 정류장에서 내리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 주위로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이 조촐히 터를 이루고 있는데 공원에는 운동시설 여럿이 닦여져 있다.
그 나무의 정체가 궁금해 안내문을 살피니 무려 410살을 먹은 나무로 1972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약 370)
마르기는 커녕 오히려 넘쳐나는 세월의 샘을 양분으로 삼아 키 17m, 둘레 496cm로 어엿한 노거
수로 성장했는데 나무 주위로 속인들의 주택과 건물이 뿌리를 내려 그를 위협한다, 그래도 그
들에 굴하지 않고 정정함을 과시하며 오늘도 공원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난곡로 느티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난우중학교 입구
  에서 하차하면 바로 보인다.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곡동 697-40


▲  건영2차아파트 남쪽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곡로 느티나무를 둘러보고 난곡의 명물인 신림동 굴참나무를 보고자 건영2차아파트로 이동했
. 거리는 1km 남짓, 햇님은 퇴근 본능이 발동해 자꾸만 꽁무니를 숨기려고 한다. 날이 어두
워지면 디카도 흥분하지 못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길은 바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잠시 마트에 들려 음료수로 불만에 잠긴 목을 좀 축이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뚫으며 난곡초교 방면으로 가니 서쪽으로 건영2차아파트가 보인다. 그 아
파트로 다가서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거대한 굴참나무가 마중을 한다.

이 굴참나무는 키 17m, 가슴 높이 둘레 2.5m, 나무 밑부분 둘레가 2.9m로 나이가 무려 1,000
을 헤아린다고 전한다.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연유로 '강감찬나무'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1018년 거란군을 공격하러 출정할 때
이 나무를 심고 무사 귀환을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연 강감찬과 관련이 있는 나무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관악구 지역은 그의 고향으로
그가 남긴 유적과 전설이 허다하며 백성들이 그를 기리고자 붙인 전설도 여럿 있다.
 
나무의 나이가 1,000년이 맞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된다. 아파트 주민들도 강감찬
의 지팡이가 자란 나무로 여기고 있는데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덩치가 작아 고개를 좀 갸우뚱
하게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원래 나무는 옛날에 죽고 그의 후손이 자라나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추정 나이는 250년 정도로 여겨지나 이 역시 정확한 것은 아
니다. (사람은 나이가 적으면 좋지만 문화유산은 오히려 많아야 빛을 보는 법임)

굴참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세포벽(細胞壁)은 물에 젖지 않아 방수
, 방음, 방열 효과가 있어 이 나무로 코르크(cork)를 생산하며 이 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힌 집
이 강원도에서 옛날에 많이 보였던 너와집이다.
나무 인근에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을 딴 은천사(殷川
)란 조그만 절이 나무를 지키고 있으며, 매년 2회 음력 71일과 101일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지냈다고 함)

이 나무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림동 굴참나무'이다. 이는 이곳이 신림동 관할이기 때문인
데 이제는 신림동이 아닌 난곡동이라 불리고 있으니 명칭을 변경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난곡
동 굴참나무'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부르던 저렇게 부르던 그에게는 관심 밖일 것이다. 자신
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가만 두지를 않으니 말이다.

나무의 높이는 앞서 느티나무와 비슷하고, 둘레는 거의 60% 수준으로 얇으나 대신 가지가 좌우
로 넓게 퍼져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느티나무를 압도한다. 게다가 강감찬과 관련도 있고 나이도
오래되다보니 그런 것들이 이들 나무의 팔자를 바꿔놓은 것이다. 느티나무는 겨우 보호수 등급
, 굴참나무는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의 귀한 존재로 말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의 높은 곳으로 아랫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으나 철이 없는 개발의 칼질은
나무 주위로 높게 석축을 쌓고 그곳에 터를 다져 건방지게 아파트와 주차장을 올렸다. 아파트
주차장이 나무의 허리 높이 정도 되는데, 나무 밑에서 보면 그런데로 나무가 커 보이지만 주차
장에서 보면 나무가 몇십 년 밖에 숙성되지 않은 그저 그런 나무로 보인다.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82, 건영2차아파트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들어섰다.
무리 개발의 칼질이 개념을 밥말아 먹어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지닌 굴참나무의 위엄을 건드
리지 말았어야 했거늘, 나무 바로 옆에 아파트를 두게 했으니 참 딱할 따름이다. 나무 동쪽에
있는 집들은 그렇다쳐도 아파트는 좀 가혹했다.
철학과 역사의식이 빈약한 이 땅의 자본주의의 폐해라고나 할까?


▲  동쪽 주택가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태극마크가 새겨진 파란 피부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면 바로 나무 앞이다.

▲  굴참나무의 밑도리
예전에는 이보다 더 너른 땅을 누리고 살았건만 개발의 칼질은 그의 영역을
빼앗아 구석살이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보니 나무 자리가 정말
답답해 보인다. 마치 맹수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은 기분..

▲  아파트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의 밑도리

▲  나무 북쪽에 어이없게도 쓰레기통과 분리수거통을 두어 나무에게
제대로 민폐를 부린다. 쓰레기 악취가 그의 건강에
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  주렁주렁 매달린 굴참나무 꽃
신림동 굴참나무를 끝으로 관악구에서 즐긴 강감찬 장군의 흔적 더듬기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신림동 굴참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강중입구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난곡(난향동) 종점 방향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으로 가
  면 난곡로35길이 나온다. 그 골목길을 계속 들어가면 건영2차아파트가 나오는데, 아파트단지
  로 들어서 쭉 들어가면 나무가 나오며, 아파트 대신 난곡로35번길을 계속 고집하면 난곡초교
  석축으로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도 나무가 나온다.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7~8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721-2 (난곡로35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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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101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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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나들이
(삼청공원, 말바위)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숲이 무성한 서울 도심의 든든한 허파, 삼청공원(三淸公園)

▲  감사원 서쪽에 있는 삼청공원 후문

여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촌(北村)을 찾
았다.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 북쪽으로 가니 어느덧 북촌과 북악산(백악산)의 경계인
삼청공원까지 발길이 가게 되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오랜만에 공원이나 1바퀴 둘러보고자
공원 정문을 통해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북악산 동남쪽 자락에 넓게 누운 삼청공원은 서울 도심의 북쪽 끝으로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
都城)의 북쪽 끝을 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싱그러운 나무가 바다를 이루던 명승지로 서울 사
람들의 오랜 나들이 명소였으며, 봄꽃이 만연할 때는 사대부 여인들이 봄꽃놀이를 즐기던 현장
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삼청동 골짜기를 꼽았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라며 이곳을 표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표현은 유효한데, 공원 일대에는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를 비롯해 노간주
나무, 붉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신갈나무, 때죽나무, 진달래 등 갖은 나무들이 숲을 이
루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멋드러진 바위가 여럿 포진해 있다.

이렇게 서울 사람들의 오랜 산책 명소이자 피서지였지만 공원에 서린 옛 흔적은 북악산 주능선
에 붙어있는 숙정문(肅靖門)과 한양도성 밖에는 없다. 이들은 도성 수비용이니 풍류와는 관련
이 없고 기껏해봐야 관리들이 말을 타고 올라와 시를 지었다는 자연산 바위, 말바위 정도가 있
다. <공원 바깥까지 확대한다면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와 유
길준(兪吉濬)이 유폐되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작성했던 취운정(翠雲亭)터 정도가 있음>

왜정(倭政) 시절인 1934년 3월, 삼청골 일대를 삼림공원으로 삼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1940
년 3월, 총독부고시 208호에 따라 도시계획공원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왜정은 도시계획공원
140개를 발표했는데 삼청공원이 그 1호로 당시 공원 면적은 약 432,000㎡였으며, 소나무를 비
롯한 온갖 나무들로 울림(鬱林)을 이룬 이곳에 산책로와 정자, 의자, 풀장 등을 설치했다.

1945년 이후에는 정몽주 시조비 등의 시비(詩碑), 영무정,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을 계속
해서 설치했고 산책로와 계곡을 정비했으며 삼청동길과 계곡(삼청골) 사이에 나무데크길을 닦
았다. 그리고 근래에 후문 부근에 숲속도서관을 짓는 등, 자연에 크게 반(反)하지 않는 범위에
서 얌전하게 손질을 했다.
공원 손질이 얌전했던 이유는 공원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잔뜩 포진해 있어 천박한 개발
의 칼날을 뚝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에 쏙 묻힌 싱그러운 공간으로 도심 속에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시내 확장과 군부대로 공원 면적은 5만㎡가 줄어 현재는 약 388,109㎡이다.

삼청공원은 도심의 핵심인 광화문(光化門)과 종로에서도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공원과 살을
맞댄 북촌과 삼청동길의 인기가 계속 하늘을 찌르면서 찾는 이도 많이 늘어났다. 숲이 매우 짙
어서 그늘도 꽤 깊으며 조촐하게 자연산 계곡까지 갖추어 북악산 서북쪽 자락에 묻힌 백사실계
곡(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과 더불어 도심 속 피서지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비록 천하에 이름 꽤나 있는 계곡 앞에 명함조차 내밀기 쑥쓰러운 수준이지만 도심 속에서 발
을 담구며 간단하게 피서를 누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대단하다. 공원을 가로질
러 도심으로 향하는 삼청골은 삼청천(三淸川)이라 불리며 청계천 상류의 하나를 이룬다.

시내에서 공원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삼청동(三淸洞)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는 것과 감사원
서쪽의 후문으로 가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다. 북촌에서 들어간다면 후문을 이용하면 되며, 삼
청동길로 접근하거나 마을버스를 이용한다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면 편하다. 또한
2009년에 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뚫리면서 북악산 주능선과 숙정문은 물론 그 너머
성북동(城北洞) 지역까지 바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이 길이 지나가는 북악산 동남
쪽 자락은 오랫동안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금지된 곳으로 산길이 닦이면서 이
곳을 잠궜던 자물쇠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공원 서쪽에는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시작된 삼청동길이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면서 구불구불 또
아리를 튼 2차선 산악도로의 모습을 보이며 삼청터널을 거쳐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 성북동에 서식하던 권력 실세들이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 청와대와 정
부기관에서 삼청각/대원각 등 고급요정으로의 접근 편의를 위해 낸 것으로 당시에는 차량이 많
지 않아 조촐하게 2차선으로 만들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차량들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도로와 터널을 넓혀야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2차선으로 마냥 두고 있는 것이다.

삼청터널과 터널로 이어지는 길(삼청공원~삼청터널 북쪽, 삼청각 구간)은 뚜벅이들의 배려 따
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차량을 위한 길이니 괜히 도보로 가는 일이 없기 바라며 삼청동에
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이 길은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묻혀 속세의 뇌리 속에
잊혀진 상태이다.

※ 삼청공원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 지하철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
  고 삼청동 종점 하차. 이 버스는 삼청동에서 정독도서관입구, 동십자각, 광화문, 시청, 남대
  문을 거쳐 서울역(서울역전우체국 북쪽)까지 운행한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감사원 하차(또는 도보 15
  분), 감사원에서 서쪽(삼청동)으로 내려가면 막다른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공원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삼청동길)
*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25분 정도 걷거나 동십자각 북쪽 법련사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이용
*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이용시간 : 10시~18시 (여름은 20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2-734-3900)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일대 (북촌로 134-1)


▲  삼청공원 후문 안쪽

공원 후문을 들어서면 수목원 같은 삼청공원의 고운 속살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수목원 같지만
속살을 깊이 들어가면 수목원 분위기는 울림으로 변화하고 산내음과 솔내음이 청정한 기운을
볶아내면서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  숲터널을 이룬 삼청공원 산책로 ▼


▲  시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3)의 '차창'이 담긴 시비(詩碑)

차창(車窓)
나는 수족관에 온 한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우리나라 현대 시인의 하나인 김경린이 2003년 세상을 뜨자 그의 후학들이
그가 살았던 삼청동에 그의 대표작, 차창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  동심이 깃든 삼청공원 어린이놀이터
어린이들의 안전과 그들의 흙놀이 공간을 위해 흙으로 놀이터를 닦았다. 나도
어렸을 때 흙장난 참 많이 했었지. 그때는 흙으로 많은 세상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아리송하다.

▲  삼청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옛 약수터
오른쪽에 보이는 네모난 구멍에서 약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으나
이제는 목구멍이 막힌 죽은 샘터가 되었다.

▲  삼청공원 약수터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담는 약수터로 근래 부적합 판정을 받아 찾는 이가 많이 줄었다.
약수터 맞은편 의자에는 1996년 10월 문화체육부에서 세운 근대 소설가 염상섭
(廉想涉, 1897~1963)의 앉아있는 동상이 있었으나 2014년에 치워버렸다.
(염상섭의 생가터가 이곳 부근이라 동상을 세웠음)


▲  비둘기도 이곳 경관에 반해 뒤뚱뒤뚱 산책을 즐긴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비

정몽주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가 담긴 정몽주 시조비는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볼거리로 1973
년에 세워진 것이다. 포은(圃隱)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을 덜 초라하게 해준 3은(三隱)의 하
나로 그의 시조비가 떡하니 있어 이곳과 무슨 관련이 있겠구나 싶지만 실상은 서로 아무런 관
련이 없다.

시조비 오른쪽을 장식하고 있는 시조는 백로가(白鷺歌)로 정몽주의 어머니가 간신과 역신(逆臣
) 등 질이 안좋은 무리와 어울리지 말 것을 훈계하고자 지은 시라고 한다. 허나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이라 나와있고 조선 말 학자인 이희령(李希齡)이 지
은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연산군 시절에 김정구(金鼎九)가 지은 시라고 나와있어 작자에 대
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다.

시조비 왼쪽에는 정몽주가 지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가 쓰여 있다. 이 시는 이성계(李成
桂) 패거리가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인 이방원(李芳
遠, 후에 조선 태종)이 정몽주를 살짝 찾아와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들이밀며 그의 의중
을 물었다.
 허나 정몽주는 그 이름도 높은 단심가로 답을 하며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강하게 내비췄다.
결국 안되겠다 여긴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잔인
하게 처단하고 만다.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과 정몽주를 잃은 고려는 더 이상 지탱
하지 못하고 결국 이성계 패거리에 의해 강제로 휘장을 내리게 된다.



백로가(白鷺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빗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영무정의 4계절' 시비
영무정 보존회에서 2008년 10월에 세운 시비이다.


영무정 시비에서 북쪽을 보면 초록색 철책이 빙 둘러진 후미진 공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속살에는 조그만 폭포가 동천(洞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그 밑에 물이 담겨진 욕조처
럼 생긴 통이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 정자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의 숨겨진 명물, 영
무정이다.

이곳은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노천 목욕탕으로 1960년경에 동네 사람들이 목욕터로 만든 곳이
다. 폭포 밑에 3명 정도 들어갈 크기의 욕조를 만들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차다고 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람 여럿이 욕조에 몸을 담구거나 (물론 옷은 입었음) 주변에 앉아 대
화를 하고 있어서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특히 아저씨와 노공(老公)>의 오랜 목욕터이나 문제는 시민들이 거니는 공원에서
벌거벗고 목욕과 냉수마찰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계속 논란이 불거지자 종로구청에서
이곳을 없애려고 삽을 들었으나 영무정보존회에서 쌍수 들고 반대하여 철거는 하지 못했다. 또
한 방송에도 여러 번 등장해 그 이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철거하기에 좀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여 종로구청은 기존에 있던 펜스를 치우고 초록색 철책을 둘렀으며, 벌거벗고 씻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선에서 영무정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늦은 밤에 몰래 벗고 씻는 이들도 아직 있을 듯 싶으며 구석진 곳이
라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찾기에 좋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내 어린 시절 뒷동산이었던 남산(
南山)의 여러 약수터에는 이런 노천 목욕탕이 거의 딸려있었다. 약수터와 운동시설 옆에 담장
등을 둘러 벗고 씻는 공간을 둔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남산 그늘에 살았을 적에 부친을 따라
남산의 모 약수터에서 냉수마찰을 한 적이 있다. 냉수마찰을 해야 감기가 안걸린다는 말에 깜
빡 속아서 말이다.

영무정이 법에는 다소 저촉은 되지만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자 피서지로 차가운 물이 모였다는
욕조에 들어가 피서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물놀이에 적당한 가벼운 옷차림(속옷바
람은 안됨)으로 통에 들어가길 바라며, 삼청골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누 사용과 음식물 취사행
위를 금하고 있으니 그냥 몸만 시원하게 담구고 오자.


▲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영무정 북쪽)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구부러진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  삼청공원 산책로는 경사가 별로 없어 누구든 마음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오솔길이다.

▲  오랜 가뭄으로 목이 타버린 삼청골
물은 온데간데 없고 흙과 돌만 어지럽게 흩어져 초여름 가뭄의
심각함을 드러낸다.


 

♠  삼청공원의 새로운 산길, 북악산 말바위 산길

▲  말바위 산길 입구

삼청공원 윗쪽에는 북악산 말바위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2008년에 닦기 시작하여 2009년에
완성되어 세상에 선보인 산길로 말바위조망대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으며, 그곳까지는 가볍
게 10~15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갈림길이 있음,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소나무 숲길, 직진하
면 말바위임)

말바위조망대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숙정문 방향)으로 조금 가면 성곽 밖으로 나가는 나무데크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바로 성북동으로 북악하늘길 제3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왼쪽(서
쪽)으로 가면 삼청각과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북악하늘길2/3코스로 이어지고,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와룡공원<여기서 성북동 종점이나 성균관대, 감사원 방면으로 내려가면 됨>으로 이어진다.
 또한 성곽길을 더 가면 말바위안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숙정문을 거쳐 북악산 정상과 창의문
(彰義門, 자하문)으로 넘어갈 수 있어 코스 또한 다양하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코스를 잡으면
된다.
허나 숙정문과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성곽길은 9시부터 16시(동절기는 10
~15시)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을 지참하여 출입증을 작성해야 됨)

삼청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생기기 전에는 거기서 성북동/북악산 방면으로 가는 정
식적인 길이 없었다. 삼청터널이 있지만 거긴 오직 차량 전용이며, 걸어서 간다면 와룡고개로
우회해서 가야했다. 지도에서 보는 거리는 매우 가깝지만 걸어서 가는 체감거리는 이론과 다르
게 꽤 각박했던 것이다.
 허나 말바위 산길이 생김으로써 비록 산을 넘어야되는 부담은 있지만 서로의 거리가 꽤 줄어
들었고 반대로 성북동(삼청각)에서도 삼청공원과 도심 도보 접근이 수월해졌다.

출입절차를 밟아야 되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말바위
등산로와 성곽 밖 북악하늘길은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사시설이 여럿 있으
므로 그곳은 들어가거나 촬영하지 말 것)
 이렇게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뚫렸다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
다. 국가의 예민한 곳으로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고 먼산 쳐다보듯 해야 했던, 잘못
들어갔다가는 정말 총 맞을 것 같던 그곳이 말이다. 이제 도성 남쪽인 북악산 남쪽만 개방되면
북악산은 거의 완전히 해방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청와대와 여러 예민한 시설이 있으니 당
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말바위 입구에 세워진 건강 돌탑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돌탑이든 우선 건강하고 봐야 된다.
건강이 없다면 바닷가의 힘없는 모래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  소나무가 운치를 우려내는 말바위 산길

북악산은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소나무가 유명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
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하여 산이 온통 솔내음의 향기가 진동했다. 허나 왜정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 다른 나무의 유입 등으로 소나무가 많이 줄어 지금은 주능선 주변과 고지대에
주로 남아있다. 삼청공원이나 와룡고개 등 속세와 가까운 곳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속세와 어
느 정도 거리를 둔 고지대에서 소나무들이 이슬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북악산 일대는 오랫동안 금지된 산으로 묶여있다 보니 나무와 식물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면
서 숲이 매우 울창하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삼청공원 일대에서는 직
박구리와 박새, 멧비둘기, 오색딱따구리, 꿩, 노랑지빠귀, 다람쥐, 청솔모 등이 살고 있다.


▲  삼청공원과 말바위 사이에 조성된 쉼터
말바위 등산로는 흙길과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

▲  한양도성 (말바위 방향) - 사적 10호

삼청공원에서 말바위 등산로를 15분 정도 오르면 한양도성(한양성곽)의 여장이 나타난다. 여장
이란 성곽을 수비하고자 두툼하게 돌벽을 쌓고, 중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낸 수비시설인데, 이
곳이 성내(城內)이다 보니 여장 안쪽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장 너머는 성밖으로 바로 성북동이
다.


▲  한양도성 (삼청공원 방향)
서울을 지키던 성곽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일까? 몸에 걸친 담쟁이덩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성곽은 1974년 이후에 복원한 거라 일부 검은 주근깨가 낀 것을 빼고는
대부분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  말바위로 오르는 각박한 계단길 (왼쪽에 보이는 길로 가면 말바위 조망대)

한양도성과 만나는 곳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각박한 각도의 계단길이 나타
난다. (동쪽은 군사시설로 길이 막혀 있음)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말바위인데 계단길 중간에
왼쪽으로 통하는 나무길이 있으며 그 길로 들어서면 말바위 조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북악산 말바위조망대와 말바위

▲  도심을 향해 들어앉은 말바위 조망대

말바위 밑에 자리한 말바위 조망대(전망데크)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로 만든 조망대로 도심
이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천하 굴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밑에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북악산 정상(342m)이나 그 동쪽 봉우리인 청운대(293m), 인왕산(338m)보다 키
가 낮아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도 사대문(四大門) 안쪽으로 좁다. 하여 이곳이 그리 높다는 생
각도 들지 않는다.
 허나 삼청공원을 비롯해 북악산 남쪽 자락과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그리고 그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이 속시원히 바라보며 그런데로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낮은 높이치고는 제법
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과 남쪽 자락
북악산 너머로 인왕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쪽 동네> 일대가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①
바로 정면에 서울의 남주작인 남산이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②
삼청공원과 삼청동, 경복궁 주변 일대가 바라보인다.

▲  북악산의 오랜 명소, 말바위

말바위는 촛대바위와 더불어 북악산에 이름난 바위이다. 이곳까지 삼청공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 북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시대에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
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많이들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북악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자리한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말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
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  말바위의 옆모습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2007
년 4월 다시 공개가 되었다. 그때 말바위에서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제한적으로 개방
되었으며, 말바위는 24시간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  말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에서 숙정문 구간)

▲  도성 밖으로 인도하는 말바위 나무다리와 한양도성 성곽길
탐방객 유의사항 현수막이 걸린 나무다리를 내려가면 도성 밖 성북동이다.
 

말바위와 말바위안내소 중간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나무다리가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
을 부시고 내려가는 길을 낼 수가 없기에 부득이 성곽 위에 나무 다리를 다져 성밖으로 통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과 김신조투르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괜찮다. 여기서
다리를 내려가면 성곽 북쪽 자락길로 삼청각(三淸閣)과 숙정문안내소, 북정마을, 와룡공원, 김
신조루트(북악하늘길) 방면으로 이어지며,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북악산 주능선의 동
쪽 관문인 말바위안내소가 마중한다.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삼청각과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 뒷쪽에는 2009년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숨겨져 있다.

▲  성북동 서부 - 북악산의 두 능선에 막힌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에
자리한 집들은 궁벽과는 거리가 먼 크고 호화로운 집들 투성이다.
빈부격차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장이라
눈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  성북동 일대
성북동은 북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이 지나가는 능선) 사이에 포근히 터를
닦은 도심 속의 전원마을이자 완사명월형(浣絲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시커먼 졸부들이 가득 기어들어와 속칭 이 땅의 0.1%가 사는
비싼 동네가 되어버렸다.

▲  성북동 너머로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다시 삼청공원으로 (말바위 산길 입구)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성밖으로 넘어가 와룡공원을 거쳐 시내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귀찮기도 하여 왔던 길을 다시 재방송하여 삼청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시조비를 거쳐 삼청동길로 나오니 길 동쪽으로 북악산이 베푼 삼청골이 착한 풍경을 도
처에 빚으며 도로와 나란히 흘러간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비리비리한 모습을 보이니 보는 내
가 답답할 따름이다.


▲  가뭄에 타들어가는 가련한 삼청골 (삼청동길 동쪽 계곡)

▲  삼청동길과 삼청골 사이에 만든 뚜벅이용 나무데크길

▲  삼청동길 나무데크길의 남쪽 종점

서울 도심의 거의 흔치 않은 계곡인 삼청골(삼청천)은 공원 남쪽에 있는 삼청테니스장에서 어
두컴컴한 지하로 흘러간다. 개발의 칼질에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이다. 이 물줄기는 삼청동
길을 따라 경복궁(景福宮) 동쪽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옛날 경복궁 주변 사진을 보면
경복궁 동쪽과 북촌 주거지 사이로 하천이 하나 보이니 그가 바로 삼청천이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2분 정도 가면 삼청동 종점(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종점)이 나온다. 삼청동
과 도심을 이어주는 마을버스의 쉼터로 이곳도 엄연한 도심이라 경복궁과 광화문은 물론 시청
까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우리는 지친 몸을 마을버스에 담아 시내로 나왔다. 어차피 종점이라 100% 앉아가는 것은 가능
하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찾아간 북악산 삼청공원, 말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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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조문국 경덕왕릉...)

 

 

' 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  늦가을이 살짝 거쳐간 문소루 가는 길


 

가을이 한참 천하를 곱게 수놓던 10월 끝 무렵에 경북 한복판에 자리한 의성(義城) 고
을을 찾았다.

마침 같은 날, 아는 이들이 주왕산(周王山)으로 여행을 가는지라 그 길목인 안동까지 태
워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내 부탁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아침 7시에 삼송역(3호선)에
서 함께 남쪽으로 출발했다.
지옥 같은 서울 근교의 교통 체증을 간신히 뚫고 영동고속도로에 진입, 여주휴게소에 잠
시 바퀴를 멈추고 교통 정체로 인해 놀란 몸과 차량을 달래며 김밥과 우동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다. 이후로는 신나게 가속도를 붙이면서 11시가 좀 넘어 안동의 주요 관문인
안동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소 아쉽지만 그들과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남쪽(의성)
, 그들은 동쪽(주왕산)으로 제 갈 길로 흩어졌다. 각자의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동터미널에 홀로 남겨진 나는 남쪽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의성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의성은
1996년 이후 2번째 인연인데,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듯 싶다. 이곳에서는 이미 정처(定處)를 정해둔 상태이므로 그곳에 그냥 가기만 하면 된
다. 다만 그날의 종점인 부산(釜山)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해 조금은 서둘러야 된다.

의성터미널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산이 하나 보인다. 그 산을 구봉산이라 하는데 바로 그
곳에 첫 답사지인 문소루가 있다.


 

♠  의성읍의 소중한 명소, 문소루(聞韶樓)와 구봉산(九峰山)

▲  낙엽이 깔린 문소루 가는 길

의성읍내 서쪽에는 이 땅의 흔한 이름의 하천인 남대천(南大川)이 흐르고 있다. 남대천 서쪽에
는 남북으로 길쭉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 산줄기가 의성읍의 든든한 진산(鎭山)
이자 쉼터이며 산림욕장으로 쓰이는 구봉산(211.4m)이다.

구봉산은 말 그대로 9개 봉우리의 산으로 원래는 구성산(九成山)이었으나 왜정(倭政) 때 구봉산
으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는 봉의정(鳳儀亭)이란 정자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고 구봉산 제3봉 아
래쪽에는 조선 중기 때 효자(孝子)인 오천송(吳千松)을 기리고자 숙종(肅宗) 시절에 지어진 소
원정(溯源亭)이 있다. 또한 산 북쪽에는 영남의 이름난 누각이었던 문소루가 자리해 있어 산의
경관을 돋구며, 근래에는 유아숲체험원이 부근(원당리)에 조성되어 꽤 알찬 체험시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30여 점의 차별화된 체험시설을 갖추고 있음)

읍내에서 남대천을 건너면 구봉산과 문소루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난다. 거의 읍내 사람들만 산
책과 운동 삼아 찾는 숨겨진 지역 명소라 주말 한낮임에도 인적이 없다. 고요함만이 가득한 그
길에 요란하게 발자국 소리를 내며 정적을 잠시 깨뜨려 본다.
구봉산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다움을 처절히 선보이며 한편으로는 우수에 잠겨 있다. 좀
있으면 자비가 없다는 겨울 제국(帝國)의 압정(壓政)이 펼쳐질테니 어느 누가 좋아들 하겠는가?
나무들은 아직 단풍과 울긋불긋 타오른 잎을 붙들고 있으나, 절반 이상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쓸쓸한 이름, 낙엽이 되었다. 길바닥에는 낙엽들이 가득 깔려 붉은 카페트를 이루며 나를 맞이
한다. 나 역시 늦가을의 단상 앞에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  길바닥을 메운 낙엽들
바람이 스르륵 빗자루질을 할 때마다 낙엽들은 힘없이 이리저리 날려간다.

▲  은행잎이 가득 입혀진 문소루 가는 길 (문소루 직전)

낙엽을 사각사각 밟으며 한굽이를 오르니 이번에는 은행나무 길이 나타난다. 길바닥에는 은행나
무가 겨울의 도래를 원망하며 훌훌 털어버린 은행잎이 두툼하게 깔려있다. 워낙 두텁게 쌓인 탓
에 콘크리트 길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라 마치 노란 카페트를 깔거나 노란 물감을 입힌
것처럼 보인다. 가벼운 낙엽과 달리 바람의 빗자루질에도 거의 동요하질 않으며, 길이 푹신푹신
해서 그냥 벌러덩 드러눕고 싶은 마음도 조금씩 솟아난다.


▲  은행잎이 노란 카페트를 이룬 문소루 가는 길
아무리 레드(red) 카펫이 부와 명예의 상징이라 해도
자연이 베푼 자연산 노란 카펫만 할까..?

▲  단풍나무 밑에 서서 읍내를 바라보고 있는 문소루 중건 기념비(紀念碑)

▲  의성읍내를 굽어보는 문소루(聞韶樓)

아름다운 문소루에 비 피해 오르니 해가 저문다
풀빛의 푸르름은 역로(驛路)에 닿았고
화사한 복숭아 꽃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술처럼 진하고
살아가는 재미는 점점 깁처럼 얇아간다.
애끓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 고려 후기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문소루에 올라 지은 시
 

구봉산의 제9봉에는 의성의 명물인 문소루가 의성 고을을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문소루는 원래
의성고을 관아에 딸린 누각으로 관아 서북쪽에 있었으며, 문소(聞韶)란 이름은 신라 후기 때 의
성 고을의 이름이다. (고려 초에 의성으로 이름이 갈림)
고려 중기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고려 고종(高宗) 때까지 있
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의성현령(縣令) 이원제(李元濟)가 중건했고
1657년(효종 8년)에 불에 탔다가 1694년 의성현감 황응일(黃應一)이 다시 지었다.

이곳은 관리들의 향연 장소로 이용되었던 공간으로 왕년에는 영남4대루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기
도 했다. 여기서 4대 누각이란 진주(晋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안
동(安東)의 영호루
(), 그리고 이곳 문소루로 영남 지역에서 꽤나 이름이 있는 누각들이다.
그 누각 가운데 문소루가 제일 나이가 많다고 한다.
허나 그런 명성이 있음에도 가장 굴곡진 인생을 가진 비운의 누각으로 6.25전쟁 때 폭격으로 그
만 파괴되고 말았는데, 그때 정몽주와 상촌 김자수(桑村 子粹, 1351~1413), 김지대(金之岱,
1190~1266) 등 여러 문인들의 시가 담긴 현판(懸板)과 이지원(李止遠, ?~1866)의 문소루 중건기
문(重建記文)도 모조리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의성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뒤늦게나
마 1981년 1월 중건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3년 9월 옛 모습을 가급적 되살리며 복원되었
다. 허나 원래 자리에는 이미 건물이 가득 들어차버려 읍내가 훤히 바라보이는 구봉산 제9봉에
새 둥지를 틀었다.

문소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의성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
인다. 풍류를 안다면 술 1병 들고와 눈 아래 펼쳐진 조그만 천하를 바라보며 시 짓기 놀이를 하
거나 달놀이를 즐기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비록 옛 건물이 아닌 근래에 자리를 옮겨 복원했다는 한계점이 있고, 오랜 명성이 바닥으로 추
락된지 오래지만 의성의 명물이자 군민들의 성원으로 다시 태어난 의미 깊은 곳으로 의성 제일
의 명소로 자라날 싹수가 충분한 곳이다. 혹시 아는가? 나중에 영호루와 촉석루를 능가하는 유
명 인사가 될지도 말이다. 그때에 대비해 미리 얼굴을 비추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문소루

▲  글씨의 패기가 느껴지는 문소루 현판


▲  문소루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시(詩) 현판들

▲  '소소구성봉황래의(簫韶九成鳳凰來儀)' 현판
서경(書經)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구절로 '순임금이 음악을 9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는 내용이다.

▲  속세와 문소루 내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 -
신발을 벗고 들어오기 바란다.

▲  문소루에서 바라본 천하 (1) - 의성읍내

▲  문소루에서 바라본 천하 (2) - 의성읍내 원당리와 후죽리

▲  구봉산 능선길

문소루에서 1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바로 읍내로 나갈까 했으나 늦가을에 잠긴
구봉산 산길이 너무 고와서 잠깐의 시간을 던져 구봉산 능선을 더듬기로 했다.

구봉산은 남대천 서쪽에 병풍처럼 자리한 산으로 서쪽은 완만하고 읍내와 남대천이 보이는 동쪽
은 경사가 60도 이상으로 급하여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잘못 발을 놀렸다가는 바로 남대천으
로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능선 산길이 완전 읍내를 굽어보는 산성(山城)이
나 요새를 걷는 기분이다.
구봉산 북쪽 문소루에서 구봉산 정상까지는 대략 2km이다. 그 부근에 소원정과 봉의정, 소원석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넉넉치 못해 중간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  늦가을의 막바지 스케치 현장 ~ 구봉산 능선길
능선길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마치 인간의 인생처럼...

▲  구봉산 능선 오르막길 - 인생이 늘 저렇게 상승곡선이면 얼마나 좋을꼬~~

▲  만추(晩秋)가 깃들여진 구봉산 능선
내리막길 - 인생의 내리막길이 저렇게
화려하고 곱다면 자주 해볼 만할텐데.

▲  능선길에서 만난 당산나무
여기서 저 계단을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지고
왼쪽 내려가는 길로 가면 남대천이다.


▲  남대천으로 내려가는 좁은 산길
왼쪽은 남대천과 맞닿은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깊게 움직이기 바란다.

▲  낭떠러지 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남대천에 이른다.
물길을 막은 저 보(洑) 밑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구봉공원이다.

▲  남대천 징검다리
여기서는 실수로 물에 빠져도 생명에 지장은 없다.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이다.

▲  구봉공원에서 바라본 징검다리와 구봉산 산줄기
남대천과 만나는 구봉산 동쪽은 거의 낭떠러지라 오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다.
저런 곳에 산성(山城)이나 방어시설을 만든다면 정말 요새가 따로 없겠지.

▲  의성읍내로 가다가 만난 늦가을의 서정 -
은행나무의 빛깔이 너무 매혹적이다.

※ 문소루, 구봉산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의성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6회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 떠난다.
* 인천, 대전(복합), 구미, 영천, 부산(동부)에서 의성행 직행버스 이용
* 동대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1일 1회, 부전역과 해운대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에서 1
  일 3회 운행
* 의성역과 의성터미널에서 왼쪽(북쪽)으로 가면 북원4거리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꺾어서
  중앙선 굴다리를 지나면 왼쪽 산 정상에 문소루가 보이며, 의성교를 건너 100m 정도 가면 문
  소루와 구봉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② 승용차 이용시 (문소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주차는 문소루 주변에)
* 중앙고속도로 → 의성나들목을 나와서 의성 방면으로 우회전 → 원당3거리에서 우회전 → 의
  성군새마을회관과 현대자동차 의성지점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문소루로 오르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 문소루

* 문소루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87


 

♠  옛 조문국(召文國)의 영화로움을 숨죽여 간직한
의성 금성산고분군(金城山古墳群) - 경북 지방기념물 128호

문소루와 구봉산을 둘러보고 의성터미널에서 탑리(塔里)로 가는 군내버스를 탔다. 탑리 직전에
자리한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서쪽)으로 큰 무덤들이 즐비한 벌판이 펼쳐지니 그곳이 금성산고
분군이다. (탑리 방면 28번 국도변에 있음)

금성산고분군은 탑리 북쪽인 대리리(大里里)와 초전리에 옹기종기 모인 고분들로 약 200여 기의
옛 무덤이 산재해 있다. 이들은 의성 금성면(탑리) 지역에 있었던 조문국(召文國)의 것으로 그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다. 이들 무덤 사이로 신라 무덤도 다수 섞여 있다.
조문국은 한자 발음에 따라 '소문국'이라고도 하는데, 진한(辰韓)의 일원으로 탑리를 중심으로
둥지를 틀었던 손바닥만한 나라이다. 영역은 의성 남부(길게 잡으면 의성 북/중부까지)와 군위
일부에 불과했으며, 진한연맹이 하나둘 신라에게 먹히는 와중에도 용케 버텨오다가 185년<신라
벌휴왕(伐休王) 2년>에 결국 복속되고 만다.
그 이후 신라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다스리거나 항복한 조문국 왕족이나 귀족에게 이곳을 통치
하게 했을 것이고 이 땅을 발판으로 삼아 상주의 사벌국(沙伐國)과 인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야금야금 점령했다.

조문국에 대한 정보는 이것 외에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거의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금성산고분군은 1960년부터 최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경희대, 경북대 박물관에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앞트기식무덤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변형된 돌무
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토기의 일종으로 의성
지역에서 주로 나오는 '의성양식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금동관(金銅冠)과 금동관 장식
품, 금동제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철제 무기류, 마구류(馬具類)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대구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과 경북대박물관, 2012년에 문을 연 의성조문국박물관에 분산되어 있다.


▲  드넓게 펼쳐진 금성산고분군의 위엄 ▼

금성산고분군이 지금처럼 깔끔히 정비된 것은 근래에 일이다. 겨우 경덕왕릉이라 불리는 1호분
만 봉분(封墳)을 갖추고 있었을 뿐, 나머지는 그냥 경작지로 쓰였다. 그러다가 고분을 발굴하
고 그 무덤을 복원하는 한편, 주변을 말끔히 밀고 정비하면서 일종의 고분공원으로 거듭난 것
이다.

고분의 모습은 흙으로 만든 봉토분(封土墳)으로 다른 고분과 별로 다를 것은 없다. 조문국의 수
수께끼를 한 움큼 간직한 큼지막한 고분들이 듬성듬성 또 다른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
에 조그만 민묘(民墓)들이 수줍은 듯 들어앉았다. 고분은 당연히 옛 조문국이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고, 민묘는 20세기 이후 조성된 인근 백성들의 무덤이니 서로의 신분과 시공(時空)을 초
월하며 한 공간에 어색하게 자리한 것이다.
물론 민묘는 고분군 보호와 정비를 위해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연고가 없는 경우
함부로 이장(移葬)하기도 어렵다. 또한 어차피 같은 무덤이고 모습도 비슷하니 조문국의 무덤과
신라의 무덤, 그리고 현대의 무덤을 비교할 겸, 그냥 두어 고분군의 일원으로 삼는 것도 괜찮다
여겨진다.

손으로 더듬고 싶은 두툼하고 요염하게 솟아난 고분들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는데, 이들 고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천천히 둘러보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또한 이곳의 상징은 경덕왕릉
이라 불리는 1호분으로 이곳 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석물을 갖췄으며, 국도 변에는 문익점 면작
기념비도 있으니 같이 둘러보면 된다.


▲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는 조문국 무인상(武人像)
조문국의 무인이 정말 저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발굴된 무기와 마구류를
토대로 가야나 고구려의 무인을 모방하여 재현한 듯 싶다.

▲  금성산고분군 한쪽에 들어앉은 조그만 민묘들
비록 무덤의 크기와 시대는 틀리지만 저들도 어엿한 금성산고분군의 일원이다.
조문국부터 신라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초월한 다양한 시대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생생한 현장이니 말이다.

▲  국도변에 누운 43호 고분

▲  40호 고분

▲  35호 고분

◀  국도변에 굵직하게 솟은 조문국사적지
(召文國史蹟地) 표석의 위엄
표석에 쓰여진 글씨체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33,34,36,37호 고분

▲  민묘와 옛 고분의 공존

▲  20호 고분

▲  25호 고분

▲  5호 고분

▲  19호 고분


▲  금성산고분군의 서쪽 부분

▲  고분 북쪽에 남아있는 민가
나무 외에는 민가와 고분의 마땅한 경계선이 없어 거의 금성산고분군의 일부처럼 보인다.
저 집도 고분군의 범위가 확대되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전될 수도 있다.

▲  나란히 솟아난 고분 3형제

▲  금성산고분군의 상징, 조문국 경덕왕릉(景德王陵)

금성산고분군은 그냥 몇호분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곳 1호분은 특별히 경덕왕릉이란 이름
을 달고 있다. 게다가 석물까지 갖추고 있으니 특별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열심히 발품을 팔게
만드는 너른 금성산고분군의 서남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무덤으로 이곳의 주인이라고 전하는 경
덕왕(景德王)은 조문국 군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숙종 때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그의 문집(文集)을 통해 옛날부터 막연히 경덕왕릉이
란 이름으로 살아오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나 경덕왕의 존재와 경덕왕릉의 진위여부는 여전
히 수수께끼이다.

왕릉의 둘레는 74m, 높이 8m로 능 앞에는 근래에 만든 1.6m 높이의 비석과 상석(床石), 멀뚱한
표정의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이 세워져 있다.


▲  조촐한 모습의 조문국 경덕왕릉

허목의 문집에는 경덕왕릉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있다.
옛날 이곳에 살던 농부가 외밭을 마련하고자 야트막한 언덕을 갈았다. 밭을 일구던 농부는 우연
히 큼직한 구멍을 발견했는데,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었다.
그는 이상하게 여겨 일손을 멈추고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그 안에는 돌로 만든 석실(石
室)이 있고, 그 둘레에는 금칠(金漆)이 되어 있었으며, 석실 안에는 금칠을 한 소상(塑像)이 있
으니 그 머리에는 금관이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금관을 본 농부는 '이게 웬떡이냐~!!' 욕심이 솟아나 그 금관을 벗기려고 했다. 허나 그의 손이
금관에 닿자 자석처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의성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옛 조문국의 경덕왕이다. 나의 능이 황폐해져서 농부의 외밭이 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속
히 능을 복원토록 하라'
그리고는 능의 위치를 알려주고 사라졌다.

날이 밝자 현령은 사람들을 이끌고 노인이 일러준 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밭이 되기 직전인
고분이 있었다. 이에 현령은 왕릉을 조성했다고 하며, 지금 있는 고분이 바로 그때 조성한 경덕
왕릉이란 것이다. 그런데 석실 안에 들어가 금관에 손을 댄 농부는 어찌되었는지는 나와있지 않
으니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아마도 며칠을 빌고 빌어서 간신히 손을 떼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그 농부가 봤다는 금관과 금칠이 과연 존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곳은 오극겸(吳克謙)이란 농부의 외밭이었다고 한다. 그는 외밭에
원두막을 짓고 밭을 지켰는데, 어느 날 꿈에 조복(朝服)을 입고 금관을 쓴 백발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문국의 경덕왕이다. 너가 지은 원두막이 나의 능 위에 있으니 속히 철거하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농부의 등에 1줄의 글을 쓰고는 사라졌다. 농부는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나보니
등짝에 노인이 쓴 글이 그대로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농부는 너무 신기하여 당장 의성 관아로 달라가 현령에게 꿈의 내용을 말한 뒤, 고을 유지들과
봉분을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 전설을 통해 오랜 세월 지하에 묻혀있다가 조선시대에 경작이나 농경지 개척을 통해 발견
되어 고을 현감과 지역 사람들이 능을 복원하고 제향까지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제향은 1470년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1945년 이후 지역 사람들이 살짝 지내오다가 '경덕왕릉보존회'가 결
성되어 매년 음력 3월에 군수와 군민들이 춘계향사(春季享祀)를 지낸다.

▲  조문국 경덕왕릉 능비

▲  두 손으로 홀(忽)을 들고 선 긴 수염의
문인석과 장명등


▲  경덕왕릉의 동쪽 피부면
무덤 동쪽 피부에 얕게 패인 부분이 있는데 저것이 혹 농부가 발견했다는
그 구멍이 아닐까 싶다.

▲  3호분

경덕왕릉 부근에 자리한 3호분은 높이가 3m, 밑지름이 14.3m~10.7m 내외이다. 여기서 돌무지덧
널무덤, 덧널무덤, 유사돌무지덧널무덤 등 3기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금귀
걸이와 은허리띠, 삼엽문대도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신라 유물로 덧널무덤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류가 나왔다.


▲  6호분

6호분은 북쪽 높이 2.5m, 남쪽 높이가 4m이다. 이 고분 안에서는 적석목관(積石木棺)의 제1묘
곽과 장방형의 토광인 제2묘곽이 들어있다.
제1묘곽에서는 금제세환귀걸이, 은제과대장식, 은제교구 등의 장신구와 T자형 장병무기와 철모,
철촉, 소화두대도 등이 나왔고, 장경호와 고배(高杯), 고배뚜껑 등의 토기류와 11cm나 되는 대
퇴골편이 나왔다. 그리고 제2묘곽에서는 홍색과 갈색의 유리구슬과 장경호(長頸壺), 유개호(有
蓋壺), 고배 등의 토기류가 다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  문익점 면작기념비(綿作紀念碑)
기념비 뒤로 보이는 동그란 지붕이 금성산고분군 방문자센터이다.


28번 국도변 소나무 사이에 문익점 면작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에 왔다면 금성산고분군과 경덕
왕릉과 더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봐야 될 존재로 비록 110여 년 밖에 묵지 않았지만 문익
점이 목화 재배에 성공했던 의미 깊은 곳으로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1329~1398)은 고려 후기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 의
류사(衣類史)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국사책은 물론 역사 수험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 인
사이다. 허나 우리나라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목화솜이 있었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아마
도 기존보다 더 품질이 좋은 목화로 여겨지며, 그 목화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널리 퍼트렸다.
하여 그 점을 너무 부각시키다보니 '목화씨=문익점'이란 공식이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원나라(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3년 만에 귀국했다. 돌아오는 길에 귀양
살이를 했던 금주(錦州)에서 목화씨 5개를 붓대 속에 숨겨와 고향인 산청(山淸)에서 장인인 정
천익(鄭天益)과 함께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그곳이 바로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면작시배
지(綿作始培地, ☞ 관련글 보러가기)이다.
이후 그는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경상도를 돌다가 의성 금성면 일대가 목화씨를 가져온 원나라
금주와 토질이 비슷함을 발견하고 금성면 제오리(堤梧里)에 목화씨를 심어 성공했다. 마침 의성
현감이 그의 손자인 문승로(文承魯)라 그를 시켜 목화를 파종했다고 한다. (또는 조선 태종 때
문익점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파종했다고 함)

이후 문익점의 목화면작을 기념하기 위해 1909년 지역 주민들이 목화밭인 원전(元田)에 기념비
를 세웠다. 그 비석이 바로 윗 사진의 면작기념비이다. 1935년 왜인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
며, 유서 깊은 원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경지 정리로 흔적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 경북도지사의 지시로 면작기념비 주변을 정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금성산고분군을 둘러보고 탑리의 지명 유래가 된 탑리5층석탑을 간만에 보려고 했다. 하지만 시
간도 여의치 않고 영천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몰라서 일단 탑리터미널로 갔다.
터미널로 가니 마침 영천행 직행버스가 올 시간이다. 여기서 외지로 나가는 시외버스가 너무 부
실하고 그걸 1대 놓치면 꼼짝없이 몇 시간 이상을 죽치고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하여 바로 표를 끊고 5분 뒤에 머리를 들이민 영천(永川)행 직행버스를 타
고 의성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의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  문익점 면작기념비(왼쪽이 1909년에 만들어진 것, 오른쪽은 1991년 것)

※ 의성 금성산고분군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탑리까지
* 서울 청량리역에서 8시 25분에 출발하는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양평, 원주, 제천, 단
  양, 영주, 안동경유)
* 부산 부전역에서 7시20분에 출발하는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해운대, 태화강, 경주,
  영천 경유)
* 동대구역에서 16시 30분에 출발하는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하양, 북영천 경유)
*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탑리,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부산 동부터미널(노포동)에서는 1일
  2회 떠난다.
* 영천과 안동에서 탑리행 직행버스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교통
* 의성터미널(의성역) 밖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탑리 방면 군내버스(30~70분 간격)를 타고 금성
  산고분군에서 하차
* 탑리터미널 부근 대리3리 군내버스 정류장과 탑리역 정류장에서 의성 방면 군내버스(20~70분
  간격)를 타고 금성산고분군 하차. (탑리터미널에서 도보 35분, 탑리역에서 도보 25분)
③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군위나들목을 나와서 군위읍 방면 5번 국도 → 동부4거리에서 우회전 → 청
  로교에서 좌회전 → 탑리 우회도로 → 금성산고분군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금성산고분군 서쪽 초전리에 금성산고분군과 조문국의 모든 것을 담은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도보로 20분(차로 3~4분) 거리로 가까우니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박물관 홈페이지 보기)
*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351외 (고분전시관 ☎ 054-83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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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구룡산 가을 나들이 (불국사)



' 서울 강남의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구룡산 가을 나들이 '

▲ 구룡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하늘이 열리고 천하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유서깊은 개천절(開天節, 10월 3일)을 맞이하여
아는 후배와 함께 강남의 듬직한 뒷산, 대모산을 찾았다. 대모산과 개천절은 서로 연관이
있는 존재는 아니나 그날따라 그곳이 격하게 땡겨 그 본능에 따라 대모산(大母山)으로 흔
쾌히 길을 잡았다.

3호선 일원역에서 길을 시작하여 대모산입구교차로에서 남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대모산도
시자연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여기서부터 대모산의 포근한 품으로 파고들면 되며, 우리는
대모산의 유일한 고찰(古刹)인 불국사로 우선 길을 잡았다.


 

♠ 대모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절집
~ 대모산 불국사(大母山 佛國寺)

▲ 대모산 북쪽 자락에 펼쳐진 밭과 비닐하우스, 그 너머로
강남시내가 빼꼼 고개를 들어보인다.


대모산도시자연공원에서 불국사로 인도하는 숲길은 평탄하고 순하기 그지 없다. 옥수수와 온갖
나물, 과일을 파는 아줌마 행상들이 중간중간 자리하여 나그네의 오감을 잠깐씩 흥분시키며 솔
솔 나부끼는 산바람은 가을임에도 버젓히 남아 괴롭히는 더위의 기운을 싹 털어간다.

산길 중간에는 과일과 채소를 기르는 밭이 펼쳐져 있다. 그저 높은 빌딩과 아파트, 호화 주택이
격하게 연상되는 강남스타일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 여기가 과연 서울 강남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린다. 물론 서울이라고 꼭 키다리 건물과 사람, 차량으로 번잡한 거리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서울에 대한 그런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이런 풍경에는 다소
어색해들 한다.
그런 밭 너머로 강남 시내가 이곳을 삼킬 듯 노려보고 있어 내가 서 있는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
이 밀려오지 않기를 부디 바랄 뿐이다. 허공에 떠 있는 구름들도 이곳이 걱정이 되는지 잠시 길
을 멈추고 강남을 굽어본다.


▲ 불국사 약수터

숲길을 10분 정도 오르니 나올 것 같지 않던 불국사가 숲속에서 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산사(山寺)들은 식수 해결을 위해 샘터를 하나 이상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 불국사도 경내 밑
에 약수터를 내밀고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가뭄과 수질 악화로 못마시는 경우가 자주 있음)

물의 낭비를 막고자 수도꼭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졸고 있는 붉은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
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부른다. 그렇게 약수를 마시고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약사보전과 그곳의 주인 약사불(불국사 석불좌상)과 시선이 딱 마주
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불국사의 가람배치와 내력을 흔쾌히 살펴보도록 하자.

대모산 북쪽 자락에는 이름도 참 아름답고 외우기도 참 좋은 불국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흔
히 불국사하면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유명한 경주(慶州) 불국사를 100% 생각하기 마련이라 불국
사에 간다고 하면 따지지도 않고 다들 경주에 가냐고 묻는다. 허나 부처 형님의 나라를 뜻하는
'불국'이란 이름을 경주 불국사 혼자서만 누리면 어디 쓰겠는가? 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불
국사' 간판을 가진 절이 무려 수십 곳이 넘었다. (그나마 오래된 절은 경주와 대모산 불국사가
고작임)

'불국사' 이름의 절 중, 경주 다음으로 2위(1위와 2위의 차이가 넘사벽 수준임)라고 볼 수 있는
대모산 불국사는 약사불을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다. 예전
2008년에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2008년 불국사 답사기 보기) 상당히 많은 세월
이 흘렀음에도 그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법당(法堂)인 약사보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나한전, 가건물 1채를 포함하여 4~5동의 건물이 여전히 경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지형상 북쪽인 강남을 바라보고 있다. 가람(伽藍)배치는 법당 앞에 석탑 1기를 둔1법당
1탑 배치로 절에 흔히 있는 일주문(一柱門) 따위는 없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사세 확
장에 썩 용이한 지형이 아니라서 새로 건물을 짓기에도 여의치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불국사
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이 절은 1352년(공민왕 1년)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창건하여 약사사(藥師寺, 약사절)라 했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설화에 따르면 절 아랫마을(일원동)에서 박씨 농부가 경작을 하고 있었
는데 소가 논 한가운데서 나아가지 않아 살펴보니 글쎄 땅 속에 석불(지금의 불국사 석불좌상)
이 있는 것이었다. 하여 바깥으로 꺼내 가까운 봉은사(奉恩寺)에 넘기려고 했으나 석불이 거부
반응을 보이며 꿈쩍도 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약사절로 보내려고 하니 갑자기 석불이 지푸라
기보다 가벼워져 그곳으로 옮겼다. 그때 불상이 발견된 논을 부처논이라 불렀고 그 옆을 흐르는
개천을 부처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절 아랫마을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석불을 발견하여 마을 뒷산에 자리를 만들어
봉안했는데, 진정국사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1385년에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약사절(약사
사)이라 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설화의 내용처럼 과연 진정국사가 고려 말에 창건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석
불은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이 난 상태라 창건 시기도 그런데로 맞아보인다. 또한 발에서 발견
되었다는 설화를 통해 농사를 기반으로 한 지역 사람들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석불이 조
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옛 절터(일원동 246-12)가 하나 있는데, 그곳이 불국사의 원래
자리라고 한다. 허나 언제쯤 현 위치로 옮겨졌는지는 귀신도 알 수 없는 실정이나 창건 이후로
500년 동안 마땅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다가 1874년 고종(高宗)의 지원으로 중창을 했다고 전하
며, 그때 현 자리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모산 남쪽 헌인릉(獻仁陵)에서 물이 나오자 고종은 그곳과 가까운 약사사 주지에게 의견
을 물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승이 대모산 동쪽(현 성지약수터)의 수맥을 끊으면 된다고 답을 올
려 그렇게 하니 과연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고종은 고마움의 뜻으로 불국정토를 이루라는
뜻에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고종의 꿈에 헌릉(獻陵)에 묻힌 태종(太宗)이 자주 나타나자 그를 달래고자 약사사
를 증축하고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6.25전쟁 때 절이 처참히 파괴되고 오로지 창건 설화에 나온 석불만 살아남았는데, 1963년에 안
양 삼막사(三幕寺)에서 온 권영선 승려가 중창해 법당과 칠성각, 나한전을 세웠다. 이후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1993년부터 3년 동안 불사를 벌여 나한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싹 갈고 탱화를
새로 제작하여 지금에 이른다. 강남에서는 봉은사 다음으로 오래된 절로 신도수가 무려 2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강남구의 거의 유일한 산사로 고색의 향기는 말끔히 씻겨 내려가 과연 오래된 절인지 의문이 날
정도이지만 이곳의 유일한 보물이자 지정문화재인 오래된 석불이 전해오고 있어 나름 오래된 절
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원동 주택가에서 불과 도보 20분 남짓 거리로 접근도 괜찮다. 시
내와 가깝긴 하지만 숲에 푹 묻힌 탓에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리기에 그리 부
족함은 없으며, 으리으리한 경주 불국사와 달리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은근히 정
감이 간다.

절을 둘러보고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강남의 뒷동산인 대모산도 올라가보자. 산세도 대체로 완
만하고 그리 높지 않아 가볍게 산책 삼아 오를 수 있으며, 정상까지 30분 이내면 충분하다. 정
상을 찍고 개포동이나 일원동, 수서역, 자곡동, 염곡동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에는
옛 대모산성(大母山城)의 흔적이 아련히 전한다.


▲ 불국사 삼성각(三聖閣)

돌이 잔뜩 깔린 약사보전 뜨락 우측(서쪽)에는 'ㄱ'자 모습의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커
다란 건물로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실은 2층이며, 1층에는 공양간과 요사(寮舍), 선방(禪房)
등이 담겨져 있고, 2층은 삼성각과 요사로 쓰인다. 원래 칠성각(七星閣)이던 것을 1993년에 새
로 지은 것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 등이 봉안되어 있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약사보전 뒷쪽 높은 곳에는 1964년에 지어진 나한전이 아주 조촐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달랑 1칸에 불과한 맞배지붕 건물로 고색의 향기가 메말라간 불국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불전인데 약사보전과 나란히 마르지 않는 샘인 강남(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불단에는 석가불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3존불을 비롯해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羅漢)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포진하여 건물 내부가 꽉 차보인다.


▲ 나한전 석가3존불 - 온후한 표정으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이한다.

▲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16나한의 위엄

▲ 불국사 약사보전(藥師寶殿)

약사보전(약사전)은 불국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절은 정말 손바닥만한데 반해 법당과 삼성
각은 다소 덩치가 있어서 경내가 다소 협소해 보인다.
약사전 앞에는 근래에 지어진 5층석탑이 하얀 피부를 자랑하며 서 있고, 건물로 오르는 돌계단
좌우에는 수호의 의무를 지닌 돌사자 2기가 자리해 있어 가까이서 보면 사자의 탈을 쓴 고양이
처럼 정말 쓰다듬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들을 보고는
찾아온 본분도 싹 잊고 그냥 돌아갈 것이다.


▲ 단란한 모습의 그들, 3존불도 아닌 무려 약사5존불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불을 중심으로 3존불도 아닌 무려 5존불을 봉안해 눈길을 끈다. 왜 특이하
게 5존불로 불단을 장식했을까? 실제 다른 절에서는 3존불 주변에 별도의 불/보살상을 두는 사
례도 많고 불국사 같은 경우는 경내 확장이 여의치 못해 다른 여래상이나 보살상을 중심으로 한
불전을 더 두기가 곤란하므로 그 역할을 약사전이 싸그리 도맡고 있는 것이다.
즉 약사전이라고 해서 약사불만 집중적으로 취급해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불단 가운데에
약사불을 높게 배치하고 그 좌우로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 4개의 협시보살상을 배치하여 5존불
로 구성했다.

이들 5존불은 한결같이 하얀 피부를 지닌 백불(白佛)로 돌로 만든 석불이다. 자신을 찾은 중생
을 환한 표정으로 맞이하는 그들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 그들의 미소
에 아무리 악귀라 한들 반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5존불은 모두 연꽃이 입혀진 연화대(蓮花臺)에 앉아들 있으며 연꽃은 하늘을 우러러 꽃잎을 벌
린 앙련(仰蓮)이다.


▲ 불국사 석불좌상(약사불, 가운데 석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6호

5존불 가운데 가장 맏이는 가운데에 자리한 약사불이다. 불국사의 오랜 내력을 증명해주는 상징
이자 창건설화에도 등장하는 존재로 대모산 불국사의 존재를 귀뜀해주고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
인 존재이기도 하다.

불국사의 주불(主佛)답게 좌우에 거느린 보살상보다 대좌의 높이가 높다. 그의 우측에는 육환장
(六環杖)을 든 승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약사불 좌측에는 보관(寶冠)을 눌러쓰고 가슴
에 금색 장식을 단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있으며, 양쪽 끝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앉아있다
. 그리고 그들 뒤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도드라지게 돋음새김으로 조성된 후불탱이 든든히 자리
해 있다.

불국사 석불좌상이라 불리는 이 약사불은 앞서 창건설화에서 이른 데로 경작지에서 나왔다고 전
한다. (지역 농민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을 그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음)
불국사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이곳의 든든한 밥줄로 그를 내세워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다. 절에
서는 약사불(약사여래)이라 하여 그 정성이 참 대단하지만 고려 때 약사불과는 다소 차이가 있
어 처음부터 약사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는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여겨진다. 그러던
것을 나중에 약사불로 강제 전환시킨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높이는 79.5cm로 머리의 크기가 신체에 대비하여 너무 크다. 하얀 피부의 몸과 달리 머
리는 검은 색이며 꼽슬인 나발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로 보이는 하얀 혹이 솟아 있으며 홍
예처럼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있다. 지그시 뜬 두 눈으로 중생을 보는 약사불의 표정은
그야말로 인자함이 느껴진다. 오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 살이 두툼해 보이는 양쪽 볼은 정말
손으로 비벼보고 싶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안테나처럼
크다.
그의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석굴암(石窟庵)의 본존불처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형태를 어려운 말로 우견편단(右肩偏袒)이라고 한다. 다리 위에 놓여진 두 손은 선정인(
禪定印)을 취하고 있으며, 손 위로 알 모양의 빨간색 물건이 있는데, 이는 약사불이 늘 지니고
다닌다는 약합(藥盒)이다. 약합에는 중생을 치료하기 위한 그만의 치료제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는 원래 맨돌의 불상이었으나 나중에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것으로 여자들 화
장용으로 많이 사용됨)
으로 하얗게 분을 칠하면서 백불이 되었으며, 그때 원래 모습을 많이 잃
었다. 나말여초(羅末麗初) 시절 유행했던 불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머리와 신체의 비례가 맞
지 않으며, 자연스럽지 않은 옷주름 조각 등으로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대모산 불국사 찾아가기 (2016년 10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일원역 5번 출구에서 6분 정도 걸으면 대모산입구교차로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3분 정도 들어가면 불국사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일원역에서 불국사까지 도보 25분)
* 서울 시내(광화문, 시청, 서울역, 한남동, 여의도, 신림역, 남부터미널, 고속터미널, 압구정
역, 강남역, 삼성역)에서 333, 401
, 402, 461, 3425, 4419번 시내버스를 타고 일원동 한솔아
파트 하차, 바로 보이는 대모산입구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간다. (도보 20분)
* 수서역(3호선, 분당선/1번 출구)과 가락시장역(3,8호선/1번 출구), 잠실역, 성남시 등지에서
333, 401, 402, 461, 3413, 3425, 4419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른마을아파트 하차, 바로 옆에
대모산입구교차로가 있다.(도보 20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산442
(광평로10길 30-71 ☎ 02-445-4543)


 

♠ 대모산(大母山, 293m) 오르기

▲ 나무가 무성한 대모산 정상(293m)

약사불에게 약소하지만 조그만 소망 하나를 들이밀고 법당을 나왔다.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
로 아담한 불국사, 3분이면 다 둘러보고도 남음이 있으나, 강남을 앞뜰로 삼으며 산자락에 아
늑히 녹아있는 산사로 석불좌상의 미소 덕분인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대모산 정상으로 길을 향했다.
불국사에서 정상까지는 넉넉잡아 25분 정도 걸리는데 산길은 정상 서쪽을 제외하고는 그리 각
박하지는 않다. 게다가 산길도 잘 정비되어 있고 이정표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 길눈이 되어주
면서 헤맬 염려는 별로 없다.

보통 하늘을 이고 있는 뫼의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거나 잡초로 이루어진 대머리같은 지형
인데 반해 대모산 정상은 나무가 무성해 하늘이 절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무심기 사
업으로 정상까지 싹 나무로 덮은 모양이다. 정상에 오르면 조망을 바라보는 맛이 참 쏠쏠한데,
그 맛을 더하고자 정상 북쪽 가파른 곳에 조망대를 만들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대모산 조망대에 오르면 앞에 한강을 두고 뒤에 대모산과 구룡산, 우면산(牛眠山)을 둔 전형적
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인 강남 시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송파구, 서쪽으로 서초구 등이
보이고, 한강 너머로 성동구와 광진구, 중구, 동대문구, 멀리는 도봉산(道峯山)과 북한산(삼각
산), 수락산(水落山), 불암산(佛巖山)까지 두 눈에 들어와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강남에서 가
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고 서쪽에 있는 구룡산 외에는 주변이 상당수 평지라 조망의 깊이도 클
수 밖에 없다.

강남의 듬직한 뒷산이자 포근한 쉼터로 단단히 자리를 잡은 대모산은 1977년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본격적으로 공원으로 꾸며진 것은 1989년 이후다. 개포동과 일원동, 수서동, 자
곡동, 내곡동(內谷洞), 세곡동(細谷洞)에 넓게 걸쳐있는 산으로 1980년대 개포동 개발 이전에
는 산세가 양재천(良才川)까지 이르렀다. (1980년대 중반 어렸을 때 대모산을 타고 도곡동까지
내려간 기억이 남)
산의 모습이 늙은 할머니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미산, 대고산(大故山)이라 불렸으나 조선 세종
때 태종의 능인 헌릉이 산 남쪽에 조성되면서 어명에 의해 대모산(大母山)으로 바뀌었다고 한
다. 믿거나 말거나 설에 따르면 산세가 비구니가 앉은 모습 또는 여자의 앞가슴처럼 생겼다하
여 그리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에는 한남정맥(漢南整脈)에 속하는 산이라 했으
며,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廣州牧) 기사에는 '관아 남쪽 30리에 있으며 봉수대가 설치되
어 있다'고 나와있다.

대모산에 안긴 오랜 명소로는 불국사와 대모산성터 등이 있으며, 넓은 산세에 비해 계곡은 매
우 빈약하다. 개포동과 일원동 개발로 계곡들이 상당수 날라갔기 때문이다. 또한 속세로 흘러
가는 다른 계곡도 시멘트를 바르고 요상하게 공구리를 쳐서 볼품이 매우 없다. (개포시영아파
트 방면 계곡) 반면 산에 필수로 있는 약수터는 주변 산 못지 않게 많아서 구룡산을 포함하여
무려 18개소의 샘터가 있다.
또한 도보 산책길의 전국적인 유행으로 강남구청에서는 수서역에서 대모산 북쪽 자락과 구룡산
북쪽 자락을 거쳐 염곡동을 잇는 대모산 둘레길인 강남 그린웨이를 닦았으며,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받는 서울둘레길4코스(대모, 우면산코스)가 대모/구룡산 북쪽 자락
으로 흘러간다. (불국사를 경유함)


▲ 대모산에서 바라본 천하 (1) 개포동과 도곡동, 양재동을 중심으로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가 바라보인다. (남산 서울N타워도 희미하게 보임)

▲ 대모산에서 바라본 천하 (2)
일원동과 수서동을 비롯하여 송파구와 강동구, 광진구, 구리시,
아차산(阿且山)과 불암산, 수락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대모산에서 바라본 천하 (3)
송파구를 중심으로 강동구, 아차산과 멀리 남양주(南楊州)의 산들이 바라보인다.

▲ 흐릿하게 남은 대모산성(大母山城)의 흔적

대모산 정상 서쪽에는 대모산의 갑옷이었던 대모산성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산성(山城)
이긴 하지만 장대한 세월의 거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산산히 헝클어져 산길 주변에 돌이 약
간 뭉쳐있는 형태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모산성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는 실정이
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히 밟고 지나치고 있으며 보호 조치도 딱히 받지 못하고 있다.

산꾼들의 외면을 받으며 굴욕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대모산성은 6~7세기 정도(또는 신라 후기)
에 신라(新羅)가 한강 유역과 서울 지역 수비를 위해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1999년 국립문화
재연구소와 한양대 박물관팀이 발굴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이때 짧은 굽다리 접시를 비롯해
다양한 신라 유물이 발견되었다. 정상을 둘러싸며 조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600m, 내
부 면적은
약 8,276㎡, 성돌은 50~70cm 정도의 자연석과 활석을 이용했다.
봉은사에서 편찬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백제 때 고성(古城)으로 나와있으며, 북
쪽 성벽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일부 확인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성곽을 구축하면서 과반수
이상 날라간 상태였다, 또한 정상 중간 지점에 제단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바위가 널려있는
데 이들 바위에는 달걀 모양의 조각이 50여 개 이상 새겨져 있다. 이들 흔적을 어려운 말로 성
혈(聖穴)이라 하며, 그 흔적을 문신처럼 지닌 바위는 알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 통해 대모
산은 옛 조선시대(고조선)부터 지역에서 꽤나 애지중지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오랫동안 속세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다가 2012년 서울시에서 뒤
늦게 대모산성을 지방기념물로 지정하고자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했다. 허나 여러 가지 이유(사
유지, 강남구의 의지 부족 등)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보호 조치도
계속 보류되어 산꾼들의 발 아래 짓밟히고 있다. 또한 정상 주변에 철탑시설물과 국정원 철책
등이 산성터를 그냥 두지 않아 상태는 더욱 악화되기만 한다.
더 망가지기 전에 서둘러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라도 수습했으면 좋
겠는데, 모든 것이 참 힘들기만 한 이 땅의 현실에서는 참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대모산성은 참고로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산성 유적이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산성 유적으
로는 아차산성(阿且山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 호암산성(虎巖山城), 불암산성(佛巖山城) 등
이 있다.


 

♠ 구룡산(九龍山, 306m) 오르기

▲ 구룡산에서 바라본 천하
(개포동과 도곡동, 강남구 일대와 멀리 남산과 북한산 산줄기까지 바라보인다.


대모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40분 정도 가면 구룡산 정상에 이른다. 구룡산은 대모산보다 13m 정
도 높은데, 산 이름만 다를 뿐이지 두 산은 완전 한 덩어리이다. 엄밀히 말하면 구룡산까지 모
두 대모산의 영역으로 보면 된다.대모산에서 넘어가는 것은 조금 내려갔다 올라가는 거라 정
상 직전의 오르막길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난하나 개포시영아파트와 염곡동에서 오르는 길은 경
사가 좀 각박하다.
예전에는 내곡동이나 헌인릉 쪽에서 이들 산을 오를 수 있었으나 국가정보원(國家情報院)이 내
곡동에 새로 둥지를 튼 이후에는 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구룡산은 개포동과 염곡동, 내곡동에 걸쳐있는데, 예전에는 국수봉(國守峰)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옛날에 부근에 살던 임신부가 용 10마리가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는데, 거기
서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는 통에 용 1마리가 획 놀라 떨어지고 9마리만 승천했다. 그 연유
로 구룡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그때 떨어진 비리비리한 용은 물이 되어 양재천이 되었
다고 한다.

정상에서 서쪽 봉우리를 국수봉이라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이곳에는
바위굴이 있는데, 봉수대를 지키는 군인들이 숙소로 삼았다고 한다. 대모산과 달리
오래된 명
소는 없으며, 대모산과 서로 이어진 탓에 두 산을 같이 누리는 것도 괜찮다. 이들은 아무리 코
스를 길게 잡아도 3시간 이내면 산행이 끝나기 때문이다.

구룡산 정상은 대모산처럼 나무가 좀 우거져있는데, 정상 북쪽에 마련된 조망대는 대모산 못지
않은 일품 조망을 선보인다. 이곳에 오르면 개포동과 도곡동, 포이동을 비롯해 강남구와 서초
구, 용산구, 성동구, 남산 등이 바라보이고, 멀리 북한산과 수락산, 불암산도 시야에 앞다투어
들어온다.


▲ 구룡산에서 바라본 천하
강남구와 송파구, 멀리 북한산과 수락산 산줄기까지 보인다.

▲ 구룡산 정상 직전 (정상 서쪽 50m 전)

▲ 구룡산 북쪽 자락에 있는 개암약수터

구룡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개포시영아파트 방면으로 내려왔다. 정상이란 자리가 좋긴 하
지만 너무 오래 머무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적당히 있다 내려오는 것이 다음 사람을 위해
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허나 사람은 신(神)과 동물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라 그 진리를 모르고 정상이란 자리를 오래 독차지하려고 한다. 너무 욕심을 부리
면 반드시 탈이 생기기 마련이건만 그걸 탈이 생긴 이후에나 깨닫는 것이다.

정상에서 개포시영아파트 방면 산길은 경사가 좀 있다. 내려가는 길이라 망정이지 만약 이 코
스로 올라갔다면 땀 꽤나 흘릴 뻔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내려가니 대모산과 구룡산에 널린 약
수터의 하나인 개암약수터가 나온다. 불국사 약수터 이후로 2번째로 만나는 약수터로 수질은
아직 이상이 없다고 하여 물을 바가지에 가득 담아 흔쾌히 마셔본다. 안그래도 날씨도 덥고 가
져간 음료수가 다 떨어져 갈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 갈증을 싹 풀어주니 몸과 마음이
싹 시원해진다. 약수터 부근에는 동네 사람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있다.

개암약수터부터는 흥분한 산길도 진정을 되찾는다. 그 길을 5분 정도 내려가니 넓직한 오솔길
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가면 차량들의 굉음이 들리면서 구룡터널교차로가 나온다. 일원역에서
시작된 대모산, 구룡산 나들이는 여기서 이렇게 마무리가 된 것이다. 총 소요시간은 불국사 관
람시간을 포함해 3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개천절 맞이 강남 대모산, 구룡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대모산, 구룡산으로 오르는 산길 기점 (불국사, 일원동은 앞서에 언급했으므로 제외)
① 염곡동(청계산입구3거리) - 지하철 7호선 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2호선/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신분당선 양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40, 407, 440, 462, 470,
471, 9404, 9408번 시내버스를 타고 내곡동주민센터나 하나로마트(코트라) 하차
(9404, 9408번은 내곡동주민센터 하차)
② 구룡터널교차로 - 141, 406, 2413, 4425, 6411번 시내버스를 타고 개포우성아파트나 개포주
공1단지 하차
* 지하철 3호선 매봉역(4번 출구)에서 406, 4435번 시내버스 이용
③ 개포동 구룡마을 - 406, 420, 472, 4412. 4435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룡마을 종점 하차
* 지하철 3호선 도곡역(4번 출구를 나와서 왼쪽으로 100m 가면 그랑프리백화점 정류장이 있음)
에서 472, 4432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분당선 개포동역(7번 출구)에서 420번 시내버스 이용
④ 수서역 - 지하철 3호선/분당선 수서역 6번 출구를 나오면 대모산 산길로 이어진다.
⑤ 세곡지구(LH강남힐스테이트아파트) - 논현역, 강남역, 양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40번,
3호선과 분당선 수서역(6번 출구)에서 2412, 3425, 강남03번 마을버스를 타고 세곡중학교(
세명초교) 하차


▲ 구룡산 오솔길 (개포시영아파트에서 구룡산으로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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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길과 맨발축제의 영원한 성지, 대전 계족산 (장동산림욕장, 계족산황토길, 계족산맨발축제, 계족산성)




' 대전 계족산 가을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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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족산의 자랑, 황톳길


 

가을 형님이 한참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0월 한복판에 대전(大田) 제일의 명소
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계족산(鷄足山)을 찾았다.

아침 해가 뜨기가 무섭게 대문을 나서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탔다. 너무
일찍 집을 나선 탓에 시간이 무척 여유로워 새벽 기운으로 약간은 쌀쌀한 전철에 의지하여
수도권 최남단인 평택까지 쭉 내려갔다. 그런 다음 남쪽 어딘가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로
갈아타고 대전의 북쪽 관문인 신탄진(新灘津)역에 두 발을 내렸다.

신탄진역에서 대전 도심으로 들어가는 대전시내버스 2번(급행, 봉산동↔옥계동)를 타고 신
대주공아파트(회덕동)에서 하차, 길 건너편에서 장동으로 들어가는 대전시내버스 74번으로
환승했다.
그 버스를 타고 마치 뱀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불한 장동고개를 넘으니 논과 밭이 펼쳐
진 장동(長洞)이 수줍은 듯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장동은 계족산에 꽁꽁 감싸인 분지(盆地)
로 속세로 나가는 길은 오로지 장동고개가 유일한데, 대전 도심이 멀리도 아니고 바로 코
앞이건만 도심 지척에 이런 산골마을이 숨겨져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이 만
약 서울에 있었다면 그 놀라움은 그야말로 핵폭탄급이었을 것이다.

장동1구를 지나 장동산림욕장에 이르니 승객들 모두 버스에서 내린다. 산림욕장 입구는 겨
우 2차선 도로로 관광객들의 차량이 도로 양쪽과 산림욕장 입구(이하 입구) 주차장을 이미
만땅으로 채운 상태였다. 하여 행사장 주차요원들은 차량들을 장동2구나 장동1구로 보내고
있었고, 관광버스는 공간이 조금 있는 장동2구 쪽으로 유도를 했다. 산림욕장 방향은 오로
지 행사 관련 차량들만 출입을 시켰다.

나와 같이 계족산을 거닐 남쪽 사람들은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아 입구에서 1시간 정도 멍하
게 기다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던지 체감상 며칠은 기다린 기분이다.
계족산과 그곳의 대표 축제인 맨발축제, 둘레길(황톳길) 때문에 1분이 멀다하고 천하 각지
에서 차량들이 몰려들고 사람들도 성난 파도처럼 꾸역꾸역 밀려들어와 이곳의 인기를 가히
실감케 한다.
드디어 남쪽에서 일행을 담은 관광버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버스를 보니 얼마나 반갑던
지, 그제서야 나는 혼자를 면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계족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계족산 맨발축제의 현장 장동산림욕장

▲ 장동산림욕장 정문

대전 도심의 대표적인 산림 휴양지인 장동산림욕장은 계족산성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다. 계
족산의 너른 숲 148ha를 산림욕장으로 꾸며 1995년 6월에 문을 열었는데, 자연휴양림과 비슷하
긴 하나 숙박시설을 갖추지 않아 그냥 산림욕장을 내세우고 있다.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당일치기 나들이/휴식 장소로 널리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천하 명소로
격하게 떠오르고 있는 계족산 황톳길을 비롯해 체육/모험시설과 임간(林間)교실, 숲속의 문고,
잔디광장, 야외무대, 운동기구, 야생화단지, 물놀이장(매년 7~8월에 개장함) 등의 다양한 볼거
리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청정한 계곡물이 산림욕장 한가운데를 가르며 금강(錦江
)으로 유유자적 흘러간다.

산림욕장 정문에서 20분 정도 들어가면 계족산 둘레길인 황톳길이 나타나며, 거기서 다시 30분
정도 발품을 팔면 대전 제일의 산성(山城) 유적인 계족산성이 모습을 비춘다. 반면 계족산 정
상(423m)은 여기서 거리가 좀 되며, 정상을 목표로 한다면 장동2구에서 들어가거나 법동(읍내
동)에서 접근해야 된다.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성은 따로 입장/퇴장 시간은 없으나 취사는 안되며, 도시락이나 간식을
싸오거나 산림욕장 입구에 있는 식당을 이용하면 된다.

산에 꽁꽁 감싸여 녹지가 풍부한 대전에는 이곳 외에도 만인산(萬仞山)자연휴양림, 장태산(長
泰山) 자연휴양림 등의 걸출한 휴양림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장동산림욕장이 가장 도심
과 가깝다.
특히 매년 5월(또는 10월)에 열리는 맨발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대전 향토기업인 맥키스
컴퍼니(옛 선양, O2린 소주 회사임)에서 주최하고 있다. 그곳 회장인 조웅래가 직접 질이 좋은
황토를 구입하여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 둘레길에 넓게 황톳길을 다진 탓에 다른 흙길과 달리
황토색이 매우 진하다. 또한 계족산 맨발축제와 대전맨몸마라톤, 계족산 숲속음악회, 찾아가는
힐링음악회 등을 기획하여 선보이고 있고, 2014년부터 시작된 계족산 코스모스축제에도 후원을
하는 등 자신의 기업을 키워준 대전 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있다.
오로지 돈과 회사키우기에만 눈이 어두워 노동력 착취와 온갖 비리만 일삼는 대기업들이 즐비
한 이 땅의 현실에서 그런데로 개념적인 회사라 할 수 있는데, 그 향토 기업의 적극적인 후원
으로 장동산림욕장과 계족산이 이만큼 성장한 거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사진/서예전시로 분주한 장동산림욕장 산책로

▲ 계곡 건너 숲속에 자리한 임간학교

계족산 맨발축제(Barefoot Festa)는 2006년에 시작되어 매년 5월(또는 10월)에 2일 정도 열린
다. 이 축제는 크게 맨발 걷기대회, 문화예술제(숲속문화체험), 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13km)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숲속문화체험은 장동산림욕장 메인행사장에서 토우 만들기, 염색 체험,
연잎밥 만들기 등 각종 체험과 서예/사진전시회 등을 다루며, 숲속음악회 공연장에서는 연극과
악기 공연, 본 음악회의 중심인 뻔뻔(fun fun)한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
축제와 체험 이벤트는 따로 참여비는 없으며(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은 참가비가 있음) 그냥 가
서 즐기면 된다.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풍부하여 그것을 푸짐한 디저트로 삼아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 나들이를 즐기면 제법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숲속에 잠긴 호수 - 계곡을 막아서 만든 조그만 호수로 늦가을에
잠긴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운 산책로

▲ 온갖 체험과 볼거리로 분주한 맨발축제 메인행사장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에 단단히 눈이 먼 나머지 메인행사장은 그냥 통과했다.

▲ 계족산을 찾은 속인(俗人)들의 황토빛 발자국 화석들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양말로부터 해방된 두 발을 황토에 묻혀 하얀 종이에 찍어 줄에 걸어놓은
것이다.발 크기가 좀 차이가 날 뿐이지 모습은 거의 비슷비슷해 발의 모습만큼은 서로가 평등
을 이루고 있다. 나도 한 줄기 발자국을 남길까하다가 신발을 벗기 귀찮아서 그냥 구경만 했다.


▲ 유난히 누런 계족산 황톳길

숲속음악회 야외무대를 지나 넓은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대전
의 꿀단지인 계족산 황톳길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장동산림욕장에서 이곳까지도 황토가 깔린
황톳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맛보기 버전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2006년 맥키스컴퍼니 조웅래 회장이 깔아놓은 것으로 바로 그해 지인들과 이
곳을 오르던 중, 하이힐을 신고 오르고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하여 자신의 신발을 그에게 빌
려주고 자신은 맨발로 흙길을 걸었는데, 그날 밤 귀가하여 아주 꿀밤을 잤다. 그 맨발의 첫 경
험이 너무 상큼하여 '이 좋은 것을 혼자 누리기가 아깝다' 생각해 바로 전국에 질 좋은 황토를
사들여 깐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황톳길은 계족산성을 품은 계족산 북쪽 봉우리를 둘러싼 순환형 둘레길로 14.5
km에 이른다. 길이 거의 느긋하고 폭이 넓으며, 황토가 두툼하게 입혀져있어 조금은 푹신하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땅의 기운을 느끼며 걷는 사람도 많다. 굳이 맨발축제가 아니더라
도 봄,여름,가을 언제나 맨발 산책이 가능하다. 맨발로 다니라고 황토를 입힌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차량의 접근은 불가하지만 길이 넓어 산악자전거의 출입도 가능하다.

황톳길 1바퀴를 도는데 4~5시간 정도 걸리며,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경치에 취해 사람에 취해
몽롱하게 걷다보면 그 길도 정말 짧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황톳길 중간에는 장동2구, 계족
산 정상, 절고개, 이현동, 대청호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는데, 절고개 갈림길에 이르면 대청호
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 임도3거리 방면 계족산 황톳길

임도3거리 방면으로 황톳길을 따라가다보면 중간에 계족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산
성으로 오르는 길은 느긋한 황톳길과는 달리 속세살이처럼 무척이나 각박해 진땀을 빼게 한다.
처음이야 만만하게 시작해도 산성과 가까워질수록 본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길에
돌이 많아 이곳만큼은 맨발로 오르는 모험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산길을 10~15분
정도 오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계족산성이 밑도리를 시작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삼국시대에 조성된 대전 제일의 고성(古城)
계족산성(鷄足山城) - 사적 355호

계족산 북쪽 봉우리(해발 420m) 정상부에 자리한 계족산성은 길이 1,037m의 테뫼식 산성이다.
예로부터 백제(百濟)가 쌓은 성으로 전해졌으나 1998~1999년 발굴조사 때 백제 유물은 소수로
나오고 신라 유물이 무더기로 나와 신라가 쌓은 것으로 크게 보고 있다.

축성 방식은 충북 보은(報恩)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과 비슷했으며,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신라 토기라 적어도 6세기에 축성되었음을 가늠케 하는
데 문제는 위치이다. 하여 아직까지 논란이 많은 편인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백제의 도읍
인 공주(公州), 부여(扶餘)와 매우 가까운 곳인데다가 금강 서쪽이다. 비록 대전 동쪽인 옥천
관산성(管山城)까지 신라가 진출했으나 대전까지는 다소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으며, 백제가 작
게 쌓은 성을 신라가 6세기 중반 관산성 대승(554년)을 계기로 진출하여 크게 증축한 것을 백
제가 다시 탈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축성 주체가 아리송하니 그 논란을 살짝 피하고자
단순히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산성의 높이는 7~10m로 높은 편이고, 성문은 동문과 서문, 남문을 두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은
서문터이다. 성내(城內)에는 남문터 부근에 봉수대(烽燧臺)터가 있고, 동벽 낮은 곳에는 백제
나 신라 때 것으로 여겨지는 우물터와 저수지터가 있다. 또한 장대(將臺)터를 비롯해 10여 곳
의 건물터가 나왔으며, 여기서는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조선시대 자기파편이 나와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1)
첩첩한 산주름 너머로 신탄진과 대덕테크노밸리, 전민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2)
산 밑에 잘익은 논이 바라보이는 곳이 장동2구, 그 산너머 구름 아래로
전민동과 유성(儒城)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천하 (3)
숲 너머로 대청호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백제가 망한 이후 백제부흥군이 활동하던 옹산성(甕山城)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조선 후기 이
후 버려져 단단히 헝클어진 것을 2000년 이후 서쪽과 남쪽, 동쪽 성벽 일부를 복원했다. 비록
먼저 쌓은 주체가 아리송하긴 하지만 삼국시대 후반에 축성된 성으로 대전의 전략적 중요성을
온몸으로 잘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대전 외곽에는 유난히 삼국시대 산성 유적이 많다.

계족산성이 정상부에 있다보니 조망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서쪽과 북쪽에는 신탄진, 유성, 장
동 일대가,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시야에 들어와 왜 이곳에 힘들여 성을 쌓았는지 십분이해가
된다. 게다가 지형도 험준하여 요새 자리로는 아주 그만이다.

대전에서 제법 하늘과 가깝고 동,서로 확트인 지형이다보니 해돋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어 대전
의 신년 해돋이 명소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해돋이는 물론이고 일몰 풍경도 아름다워 일
출과 일몰을 같이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계족산성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85일대


▲ 계족산성 서문터
신탄진 방향을 바라보며 위엄을 뽐냈을 서문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녹아내리고 지금은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 잡초가 듬성듬성 돋아난 계족산성 성곽길
성곽의 높이가 꽤 되므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기 바란다.

▲ 계족산성 남문터 주변

▲ 대자연이 성벽에 남긴 소소한 작품

▲ 평평한 계족산성 내부 (서문터 안쪽)

계족산성 내부(서문터 안쪽)는 가파른 외부와 달리 평탄하다. 푸른 잡초가 피어난 너른 공간에
산꾼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간식 시간을 갖고 있는데, 뜨거운 가을 햇살을 피해 다들 나무
그늘에 진을 치고 있다.
우리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피고 속세에서 가져온 도시락과 김밥, 과일 등으로 즐거운 점심 시
간을 누렸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거진 꿀맛이다. 그렇게 가져온 음식들을 정
신없이 처리하고 잠시 쉬었다가 산성과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했다. 마음 같아서는 산성을 1바
퀴 돌아보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다음을 기약하며 서문터를 거쳐 황톳길로 내려갔다.


 

♠ 계족산 황톳길과 숲속음악회

▲ 계족산 황톳길

계족산성으로 잠시나마 떨어진 황톳길로 다시 되돌아와 남쪽을 향해 걸었다. 길이 평탄하고 숲
이 터널을 이루어 몸과 마음이 즐거우며 길이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게다가 맨발로 길을 더듬
을 경우 촉감 또한 일품이다.
기분 같아서는 황톳길 1바퀴 본전을 뽑고 싶지만 우리 일정이 그렇게 넉넉치가 못해(숲속음악
회를 봐야됨) 임도3거리에서 발길을 돌렸다.

임도3거리에서 막걸리를 파는 행상이 있어서 일행들과 막걸리를 들이키고 안주로 제공되는 반
찬(이름이 생각이 안남)을 잔뜩 집어 먹었다. 다시 돌아나오는 길에는 나도 맨발족에 가세하여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황톳길에 임했다. 맨발 도보의 성지(聖地)에
왔으니 맨발로도 한번 움직여줘야 되겠지. 가끔 맨발로 이런 곳도 다녀줘야 두 발도 흥분하여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하여 임도3거리에서 산림욕장까지 잠시나마 맨발의 청춘을 누렸다.


▲ 황톳길에서 만난 돌탑

▲ 하얀 천에 그려진 2글자 '좋다' - 황톳길이 정말 좋다.

▲ 황톳길에서 바라본 장동2구 평야와 건너편 산줄기

▲ 살짝 구부러진 황톳길

▲ 쉼터와 운동기구가 있는 임도3거리

▲ 황토머드체험장

계족산성 입구와 임도3거리 중간에는 황톳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황토머드체험장이 있다. 맨
발로 진흙 체험장에 들어가 빨래한 이불을 푹푹 밟듯이 황토를 밟는 것인데, 그 느낌이 매우
시원하고 좋다. 그래서 자꾸 발이 가는 통에 길이 10m 남짓의 머드체험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
지 모른다.
머드체험장에서 누렇게 뜬 발과 다리는 임도3거리 방면에 있는 약수터에서 씻어도 되고, 장동
산림욕장 숲속음악회 부근에 마련된 발씻는 곳에서 씻으면 된다.


▲ 숲속음악회 뻔뻔(fun fun)한 클래식 공연

계족산 황톳길을 일부만 돌고 장동산림욕장으로 내려온 것은 오후 4시부터 진행되는 숲속음악
회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나들이의 백미는 숲속음악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는데, 음악회가 4시부터 한다고 하여 그 시간에 맞춰 3시 반 정도에 숲속음악회 공연장
으로 내려왔다.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부근 발씻는 곳에서 황토에 취한 발을 씻고 공연장으로 넘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막이 열리면서 무대 바로 뒷쪽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남자
성악가 4명(테너, 바리톤), 여자 성악가 1명(소프라노), 여자 피아니스트 1명 등, 8명으로 이
루어진 맥키스오페라 단원들이 나타나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 이름인 '뻔뻔'은 뻔뻔하다가 아니라 재밌다는 뜻의 영어 fun이다. 이름은 진짜 기가 차게
잘 지었다. 이 공연은 2007년 조웅래 회장이 계족산 맨발걷기 후식용으로 고안하여 시작된 것으
로 매월 1회 무료공연으로 시작되었다가 2012년부터 4~10월까지 매주 토/일요일에 절찬리에 열
리고 있다. 미모가 돋보이는 여자 소프라노가 맥키스오페라 단장(단장은 바뀔 수 있음)으로 평
소에 접하기 힘든 클래식을 위트와 유머, 대화를 통한 연극의 요소와 소리와 율동을 통한 뮤지
컬 요소까지 더한 일종의 멀티콘서트 방식으로 1시간 동안 열린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드는 자연 공간에서 이렇게 음악회를 접하는 것도 참 신선한다. 공연에서는
우리나라 가극과 민요, 서양의 클래식과 노래를 선보여 흥을 돋군다. 공연이 재밌어서 앵콜 요
청이 빈번하며 그래서 지정 시간보다 노래를 1~2곡 더 부르기도 한다. 공연이 끝나면 기념촬영
시간까지 있는데, 서로 같이 찍으려고 아주 난리가 아니다. 우리 일행도 단체 사진을 같이 찍
었다.


▲ 홀로 나와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 성악가

▲ 뻔뻔한 클래식 공연 ▼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소프라노가 단연 돋보인다. 시선도 남자들보다는
여자에게만 집중.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 기념촬영 시간 - 웃음을 놓지 않는 에코페라 단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숲속음악회를 끝으로 11시부터 시작된 계족산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6시간 정도
머문 셈이다. 음악회가 끝나자 잠시나마 마음을 빼앗긴 계족산을 뒤로하며 산림욕장 입구로 나
왔다.
6시가 되자 남쪽에서 온 일행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그들의 본거지로 떠났다. 그들이 그렇게 간
이후 나는 관광객들로 가축 수송을 이룬 74번 시내버스에 짐짝처럼 낑겨타 간신히 바깥으로 나
왔고, 이후 파란만장한 상경길을 거쳐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계족산 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계족산 장동산림욕장(계족산성, 황톳길) 찾아가기 (2016년 10월 기준)
* 대전역(1호선 대전역 3번 출구)에서 급행 2번, 611번, 7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동현대아파
트 하차 (512번을 탔을 경우 '회덕동주민센터'나 '대한통운'에서 74번으로 환승)
* 대전복합터미널 건너편에서 급행 2번, 611, 701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동현대아파트 하차
* 신탄진역에서 급행 2번, 703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대주공아파트 하차
* 와동현대아파트(신대주공아파트의 반대편 정류장)에서 74번 시내버스(장동2구↔대한통운, 읍
내동 현대아파트)를 타고 장동지구산림욕장 하차 (40분 간격으로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산림욕장 입구에 주차장 있음, 산림욕장 진입은 불가)
① 경부고속도로 → 신탄진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덤바위3거리에서 우회전 → 회덕역에서 유
턴하여 가변으로 빠져 장동로로 진입 → 장동산림욕장(계족산)

★ 계족산 장동산림욕장(계족산성) 관람정보 (2016년 10월 기준)
* 입장료와 축제 체험비, 주차비는 없음 (에코힐링 마사이마라톤은 참가비 있음)
* 매년 5월(또는 10월)에는 계족산 맨발축제가 열린다. 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밑에 있는
사진을 클릭한다. (맨발축제 문의 ☎ 042-530-1836)
* 매년 10월 초에는 장동만남공원에서 계족산 코스모스축제가 있다. 코스모스꽃길 승마체험을
비롯하여 장원급제 체험, 전통공예품 만들기, 드론 날리기 체험, 전통/연극 공연, 코스모스
와 함께하는 가을 음악회, 산디마을 캠핑 1박2일 민박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 장동산림욕장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63일원
(☎ 042-623-9909)


▲ 장동산림욕장을 나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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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10월 1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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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포근한 뒷동산을 거닐다. 남산 산책 (한양도성, 남산둘레길, 서울타워, 남산야외식물원...)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 나들이 '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 남산 N서울타워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도심

   

 


 

나의 어린 시절 진한 추억이 서려있는 서울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문득 그의 품이 그리워
꼬마 시절의 흐릿한 추억도 잠시 소환해볼 겸, 간만에 남산을 찾았다.

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정말 다양해서 취향에 따라 골라 잡으면 된다. 이번에는 나의 첫 동
네였던 약수동(약수역)에서 남산 나들이의 첫 단추를 여밀었는데, 약수역과 동대입구역(장
충동) 중간 고개 정상부에 두 골목길(동호로17길, 동호로20길)과 만나는 4거리가 있다. 그
왼쪽(남쪽) 골목길(동호로17길)에 남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이 눈짓을 보낸다.


 

♠  한양도성(漢陽都城) 장충동 지구 - 사적 10호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1)

다산동(옛 신당2동, 신당2동과 3동 일대를 약수동이라 불렀음)과 장충동(奬忠洞) 경계에 자리한
성곽을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문화재청에서 그렇게 부름)라 부른다.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반
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옛 타워호텔) 뒷쪽까지 이어지는 약 1.1km의 성곽으로 왜정(倭政)과 6.25
를 거치면서 도성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무거운 상처를 입은데 반해 이 구간은 그 시련을 잘 극
복하여 옛 도성(都城)의 위엄과 고색의 내음을 짙게 선사한다.
허나 '장충체육관~광희문' 구간과 옛 타워호텔 남쪽 구간이 20세기 혼란기를 틈타 장대한 세월
의 의해 지워지면서 양쪽이 모두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장충동 지구 성곽길은 오랫동안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있다가 도보길 유행에 따라 성 바깥에 탐
방로를 내고, 성곽길 또한 모두 해방되면서(신라호텔 구간도 포함) 성 안/바깥 산책이 모두 자
유로워졌다.
이 탐방로는 옛 타워호텔을 거쳐 국립극장, 남산까지 이어지며, 길 중간에 암문이 있어 성곽길
이나 성밖 길로 갈아탈 수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도심의 든든한 갑주, 한양도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던 고려 왕조를 싹 갈아엎
고 조선이란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
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명망이 높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전국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
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보수 작업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가히 조선 최대였다.
아무리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무척이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에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
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되었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
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
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래서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아보고자 온갖 원성을 들
어가며 단단하게 지은 도성이었지만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
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던 도성, 허나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
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
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뽐내던 한양도성은 근대
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하시라며 전차(電
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해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
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문의 양쪽 성벽
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
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괴상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
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고, 1910년 이후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서대문<돈의문
(敦義門)>까지 헐값에 민간에 매각하여 없앴으며,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
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였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발
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문(
城門)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
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
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
공원, 서울시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교, 장충단고개~옛 타워호텔 남쪽, 장충체육관 동쪽~
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고개~성북동>
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
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
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둘러싸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도 크
게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
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곽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
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2)

나의 옛 고향인 약수동(藥水洞) 뒷쪽(서쪽)에 병풍처럼 둘러진 장충동 지구 성곽은 조선 태조와
세종 때 축성된 성벽이 거의 그대로 전하고 있다. 성벽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성돌은 수백 년
이나 숙성된 고색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져 있어 까무잡잡한 피부를 이룬다. 그들 사이로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이 군데군데 자리를 닦으며 선배 성돌을 닮아간다.

성 바깥 탐방로 부분은 예전에는 거의 수풀이 무성했고, 성곽길 통제 구역이라 마음 놓고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세상이 많이 바뀌어 그 자물쇠가 풀리면서 자유롭게 두 다리를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한양도성을 살펴보면 간혹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공사 구역 표시
와 공사 담당 고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적은 것으로 여기서는 담당 고을
과 구역 정도만 나왔는데, '?海始面' 이라 쓰여 있다. (앞 글자는 모르겠음) 그것을 통해 해로
끝나는 고을 사람들의 공사 구간이 여기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참고로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성곽 전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
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해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의 암문(暗門)

한양도성은 4대문 4소문 외에도 숨겨진 암문을 여럿 두었는데, 이 암문도 그중 하나이다. 약수
동(다산동)에서 국립극장과 남산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지름길로 약수동에 살던 시절 많이 이용
했던 문이라 옛 친구처럼 무척 반갑다. 여기서 성안 또는 성바깥 탐방로로 바꿔 탈 수 있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3)
국내외 졸부들이 많이 자고 가는 붉은 색의 신라호텔이 바라보인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쪽 종점 (성곽마루 입구)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시작된 장충동 지구 성곽은 옛 타워호텔 뒷쪽에서 뚝 끊기면서 성곽 탐방
의 흥을 깨뜨린다. 성곽은 남산을 거쳐 북악산까지 내달리고 싶으나 옛 타워호텔과 장충단고개
구간이 복원되지 못해 여기서 옆구리를 보이며 강제로 길을 접고 만 것이다.

이곳에서 성곽길로 갈아타 다시 장충체육관 방면으로 이동해도 되고, 옛 타워호텔 뒷쪽으로 난
산책로로 국립극장 방면으로 넘어가도 된다. 그리고 남쪽에는 성곽마루란 2층 정자가 있으며,
동쪽은 약수동(다산동) 주택가로 6호선 버티고개역과 이어진다.


▲  장충동 지구 남쪽 종점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
내 인생의 거의 40% 가까운 시절을 보냈던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약수동도 그렇고 옛 신당3,4동 지역은 달동네의 정석을 보여주던 동네였는데
개발의 칼질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  성곽 탐방로 (남쪽 종점 주변)

▲  성곽마루 2층 정자(亭子)

성곽마루는 약수동(다산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다산동 주택가 바로 뒷쪽이다. 성곽
탐방로를 닦으면서 새로 지은 정자로 이곳에 오르면 남산 동부와 신당동, 약수동, 한남동, 장충
동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  성곽마루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신당동(新堂洞) 지역

▲  성곽마루에서 바라본 한남동(漢南洞)과 용산구 지역

▲  지워버려야 될 남산의 옥의 티
졸부들이 몸을 푸는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
(옛 타워호텔) 운동시설

▲  타워호텔 남쪽을 거쳐 국립극장으로
넘어가는 탐방로


▲  저만큼 멀어진 성곽마루 정자

성곽마루 입구에서 나무로 만든 탐방로를 따라 가면 옛 타워호텔 경내로 이어진다. 지금은 외우
기도 어려운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로 간판을 갈아서 그 이름만 봐도 적지 않게 눈과 머리를
고달프게 한다. 이름도 외우기 힘들고 말이다,
이곳은 이 땅에 잘나가는 고급 호텔로 졸부들의 낙원과 같은 곳이라 그 이름만큼이나 유쾌한 곳
은 아니다. 한복을 매우 싫어했던 신라호텔과 나란히 손 잡으며 남산의 경관을 해치고 있는 옥
의 티로 도성과 남산 숲 복원을 위해서는 언젠가 쿨하게 지워야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국립
극장도 마찬가지이나 여긴 대중적인 공간이니 봐주자~!)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옛 타워호텔을 지나 국립극장교차로에 이르니 온갖 나들이객들로 길거리가 북새통을 이룬다. 우
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뎅과 번데기 등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 다음, 성난 파도처럼 몰려드
는 인파 속의 하나의 점으로 묻혀 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남산둘레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인데,
북쪽 길은 남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수레의 바퀴 자국을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거의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삼국지의 주요 인물인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와룡묘(臥龍廟)가 있다.
그리고 남쪽 길은 남산 정상과 N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
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되면서 '국립극장→남산 정상 밑→남산도서관' 방
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서식했던 어린 시절, 가족 또는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상춘약수터) 입구까지 차
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갈림길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장으
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조금은 옳지 못하지만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고 해서 몇 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산의 건강과 도보길 활성화를 위해 도로 폭의 1/3 정도를 잘라서 뚜벅이길을 닦았고 차
량 통행에도 크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
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02,03,05번)와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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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공원길 (서울타워 방향)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다시 모습을 비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여기서 정상 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밑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
까지 보다 빨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도로로 가는 것보다는 짧은 거리이고 제일 최근에 개방된 남산의 따끈한 속살 부분이라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성곽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
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으니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에 의해 냉수마찰이
라 불리는 샤워를 받곤 했다. 특히 겨울에도 그랬었지.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감기가 안걸린
다나..?
예전에는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서울에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서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그래서 차츰 사
라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공원길 아랫 전망대

▲  남산공원길 아랫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산 정상까지 가다보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전망대 2곳을 만날 수 있
다. 이들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과 동작
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대모산 등이 사이좋게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
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낙타산)과 더불어 한
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백
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 보면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찾는 휴
식처이며, 경주 남산(468m)과 충주 남산(663m) 등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
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하며, 그 외에 인경산(引
慶山),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리기도 했다.
1395년 태조는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
祠)를 남산 정상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
고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
에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
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은 악명
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비
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
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開化期)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
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고,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이던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으니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쓰레기 잡귀들로 바뀌고 말았다.
왜정이 남산에 남긴 잡다한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
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긴 채, 1945년 8월 패전 당시, 연합군에 살려달라며 비굴
하게 굴던 왜왕(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
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
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인 서
울타워(남산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이름을 N서울타워로 갈았다.


▲  남산공원길 (아랫전망대와 윗전망대 사이)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악
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많은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남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
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남산이 베푼 약수터가 뿌리를 내리며 나그네의 목을 축여주고 있는데, 그중에
서 부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
라진 상태이다. 그외에 많은 약수터가 있으나 도심 속에 있다는 단점으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
다. 이미 몇몇은 부적합으로 문닫기 직전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과 여러 갈래의 계단길, 숲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공원에서 정상 동쪽
까지, 남산도서관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그외에 남산1호터널과 필동, 후
암동(厚岩洞), 남산야외식물원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길 외에는 모두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
의 접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
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
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N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산책.나들이 명소 및 조촐한 등산 명소로 나날이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서울에 오면 꼭 가야 되는 서울의 상징적인 명소로 외국인 관광객까지 날을 가
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든다. (서울을 찾은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
단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 인왕산, 조선 왕궁과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의 옛 추억이
수십 권씩 녹아있는 살아있는 일기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신당동과 금호동 시절 물을 뜨러 온 횟수만 수백 번이 넘고, 친구들과도 지겹도록 올랐다. 그때
는 오로지 두 다리로 돈 한푼 없이 남산 정상과 약수터를 오갔지. 무일푼으로 갔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남산이 베푼 약수와 청정한 기운 뿐이다. 그래도 그때는 참 가슴이 찡할 정도로 재밌
었고 행복했었지. 지금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남산에 안겨도 그때의 기분과 행복은 절대 재현
하기 힘들다.
어린 시절 그렇게나 안겼던 남산은 나이를 먹으면서 그 애정도 푹 식어버렸다. 그나마 요즘 들
어 방문 횟수가 조금 늘긴 했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2~3번도 갈까말까였다. 아마도 옛
시절에 지겹도록 안겼던 탓은 아닐까?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한남동과 보광동, 이태원, 강남, 관악산 산줄기, 국립현충원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동작구 지역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후암동, 용산구, 마포구, 여의도 지역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N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과연 어떻게 만들었을까?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3, 05번 종점)에 이르니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
시내로 내려가는 사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룬다. 시내버스와 관광버스
가 멈추기가 무섭게 무수한 사람들을 뱉어내면서 그 시장통을 더욱 부추긴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없음)
이곳에서 무수한 인파의 물결을 뚫고 경사가 좀 각박한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과 서울타워이며, 서남쪽 남산공원길을 내려가면 남산도서관과 소월길로 이어진다.

※ 남산 정상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6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으로 돌아가면 4거리 남쪽, 국립극장
  방향에 정류장이 있음)에서 02, 03, 05번 시내버스 이용
* 국립극장(남산, 한남동 방향 정류장)에서 02, 03, 0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2번 출구)에서 02, 0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9호선 신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논
  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신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02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
  하차, 정상까지 도보 25~30분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9번 출구에서 03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서울역버스환승센터(9-1번 출구
  )에서 402,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 장충단공원(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도보 50~60분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필동, 예장동, 회현동 / 용산구 후암동, 한남동 등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야외식물원(야생화공원)까지

▲  남산 팔각정(八角亭)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N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 등이 있다. 그 현장에서 남북으
로 펼쳐진 일품 조망을 누려본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로 인도하는 탑처럼 하늘 높이 솟은 N서울타워는 초등학교 시절 2~3번 가
본 인연이 있다. 허나 그 이후로는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정상까지 오더라도 그저 타워
밑에서 좀 맴돌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막상 가려도 해도 미친 입장료로 딱히 땡기지도 않는다.

N서울타워와 남산봉수대 사이에 자리한 팔각정은 서울타워와 함께 남산을 빛내는 보석의 하나다.
이곳에는 1959년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치켜세우고자 그의 호를 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
는데, 1960년 4.19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의 팔각정
을 본 따서 지금의 팔각정을 지어 남산타워를 수식하는 존재로 삼았으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
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팔각정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늘 머물고 있
으며, 정자 자체는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나 N서울타워, 봉수대와 더불어 남산 꼭대기를 수식
해주는 남산의 주요 상징물이다.


▲  남산서울타워 종점 남쪽 한양도성과 오솔길

정상이란 자리에 오래 머물러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적당히 있다가 내려와야 뒷탈이 없다.
이번에는 남산도서관 방면 대신 오던 길로 내려가 남산야외식물원으로 길을 잡았다.

남산공원길 윗전망대를 지나면 야외식물원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살며시 손을 내민다. 남산에서
는 별로 없는 흙길로 남쪽 자락에 조성된 소나무숲을 지나가는데 그 길을 7~8분 정도 내려가니
남산야외식물원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남산야외식물원

소월로와 접한 남산 남쪽 끝에는 남산야외식물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에는 외인아파
트 2동이 남산을 건방지게 가리며 흉물스럽게 있었는데, 1994년 그 아파트를 쿨하게 밀어버리고
9,811㎡ 부지에 야생화공원을 닦으면서 남산야외식물원은 시작되었다. 즉 아파트의 희생으로 태
어난 신선한 공간인 셈이다.

1995년 전국 광역단체 시도에서 옮겨온 소나무 80그루로 팔도소나무숲을 닦았으며, 1997년 2월
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4월에는 이 땅의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화 185종과 나무
93종을 심었고 생태연못을 조성했다.
야생화공원을 포함한 공원 면적은 59.241㎡, 품고 있는 식물은 10여 개의 주제(죽림원, 알뿌리
식물원, 설화/연료식물원, 양치/음지식물원, 팔도소나무단지, 서울시보호식물원, 화목원, 남산
자생식물원, 나무밑 야생화원, 음지식물원, 4계절야생화원, 약용식물원, 향기식물원, 생태연못
등)로 나눠 배치했으며, 현재 식물 269종 117,132주가 심어져 거대한 야외식물원을 이룬다.

이곳 야외식물원의 중심은 야생화공원이며, 그외는 그냥 자연공원이다. 숲이 짙고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으며, 야외식물원이라고 하여 입장료를 받거나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은 절대 아
니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포근한 공간이다. 이처럼 좋은 곳을 이제서야 오다니! 남산을 안방
처럼 들락거린 나인데, 그동안 등잔 밑이 어두웠던 모양이다.


▲  주말 오후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남산야외식물원 산책로

▲  야생화공원 산책로 갈림길

▲  대나무 잎소리가 사각사각 속삭이는 죽림원(竹林園)

▲  전국에서 가져온 소나무의 안식처 팔도소나무단지
남산이 소나무로 유명하다보니 천하에서 80그루의 소나무를 소환해
이렇게 소나무단지를 닦았다.

▲  솔내음이 속세에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는 팔도소나무단지

▲  팔도소나무단지의 상징, 정2품송 맏아들나무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이 땅의 소나무 가운데
단연 스타급의 존재이다. 그 나무가 서울에 살짝 아들을 두니 그가 이곳에 있는 정이품송 맏아
들나무이다.
정2품송의 씨앗을 이용하여 심은 그의 첫 후손 나무로 2010년 4월 5일 식목일에 서울시장과 산
림청장 정광수가 식재했다. 지금은 비록 10살도 안된 나이라 많이 초라하지만 기백(幾百)의 세
월이 흐르면 그 아비처럼 멋드러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내 생애의 그가 어
른이 되는 모습은 볼 수가 없구나.. 사람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나무보다는 생명줄이 훨씬 짧
으니 말이다.


▲  생태연못으로 인도하는 생태계곡 산책로
야외식물원 서쪽에는 2002년에 지어진 생태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서 발원한
조촐한 계곡이 싱그러운 자연을 머금으며 세상으로 흘러간다.

▲  생태계곡의 으뜸 양념, 물레방아의 위엄

▲  수중식물과 개구리가 마음껏 나래를 펼치는 생태연못

2002년에 조성된 생태연못에는 연꽃을 비롯해 많은 수중동물/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식물이 너
무 무성해 마치 자연 속의 늪지대를 보는 듯 한데 연못은 조촐한 크기로 주변에 산책로와 나무
데크길이 놓여져 있으며, 연못 중간에 나무 다리가 운치를 더한다.

생태연못을 끝으로 남산 나들이는 이렇게 막을 고한다. 남산야외식물원은 마치 주마등(走馬燈)
처럼 둘러보았는데, 어차피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다시금
둘러보고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생태연못

※ 남산야외식물원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2번 출구)에서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얏트호텔 하차, 정류장 바로
  뒷쪽이 남산야외식물원이다.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서울역 9-1번 출구)에서 402,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얏트호텔
  하차
* 2호선, 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 9호선 신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논현역 중
  앙차로 정류장, 3호선 신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02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2동 258-148 (소월길 323 ☎ 02-798-3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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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
   로 나오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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