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산사에서 누린 늦가을과 고색의 향기 ~ 대전 고산사

' 과학의 도시, 대전에서 만난 오랜 사찰, 식장산 고산사(高山寺) '


고산사 대웅전
늦가을이 머무는 고산사
고산사에 깃들여진 늦가을



하늘이 유난히도 높고 청명했던 11월의 첫 주말, 첨단과학의 도시를 표방하는 대전(大田)
을 찾았다.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선두 도시와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형성된 근대도시란
이미지가 강하게 배인 탓일까? 그 속에 살아 숨쉬는 대전의 많은 문화유산과 유구한 역사
가 제대로 빛을 못보는 것이 안타깝다. 오히려 대전에도 오래된 문화유산이 있느냐? 반문
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니 말이다.

이번에 대전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대전의 동남쪽 식장산(食藏山, 623m)에 안긴 고산사다.
아침 일찍 1호선 전철로 천안(天安)까지 쭉 내려가 무궁화호 남행열차에 몸을 싣고 금강(
錦江)을 건너 대전에 두 발을 내린다.대전까진 입석표로 갔는데 다행히 임자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자리를 발견하여 편안히 앉아 갈 수 있었다.

대전에 이르러 차비도 아낄 겸 해서 대전지역 교통카드인 한꿈이카드를 하나 장만하고 구
도동 방면으로 가는 511번 시내버스를 타고 고산사입구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 절까지는
이정표가 베풀어져 있어 찾기는 쉬우며 거리도 1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정표를 따라 전원 분위기가 감도는 주택가를 6분 정도 오르면거대한 장벽이 길을 가로
막는다. 장벽 안에선 수레들의 쌩쌩~ 소리가 귀를 때려대니, 바로 대전~통영고속도로이다.
절은 고속도로 아랫도리에 뚫어놓은 굴다리를 지나야 되는데, 길 중간에 고속도로가 거대
한 장벽처럼 놓여있으니 다소 이상할 따름이다.

굴다리를 지나면 가을의 향연이 펼쳐지는 식장산 산길이 시작된다. 식장산은 대전에서 가
장 높은 산으로 대전의 유명 등산지로 꼽힌다. 산의 이름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이곳에 성
을 만들고 군량미를 두었다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재미난 전설로는 옛날에 효
성이 지극한 부부가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밥을 늘 축
내는지라 땅에 묻어 죽이려고 아들을 끌고 산으로 갔다.그들은 열심히 삽질을 하다가 먹
을 것이 쏟아지는 신기한 밥그릇을 발견했다고 한다.그래서 삽질을 멈추고 내려와 그릇의
은혜로 풍족하게 살았다고 하며,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그릇을 이 산에 묻었다고 하여 식
기산(食器山) 또는 식장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설화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음, 대표적인 것이 경주의 손순(遜順) 설화>


고산사와 식장사까지는 수레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포장되어 있다. 경사는
조금 가파른 편으로 속세에서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15분 정도 오르면
고산사의 산문(山門)이 그대들을 맞이할 것이다.

고산사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날 무렵에 이르면, 길 왼쪽으로 계단이 나온다. 계단으로 가
던 넓은 포장길로 가던 고산사에는 이르지만 계단길이 약간 빠르며 바로 대웅전으로 이어
진다. 포장길로 가면 고산사 남쪽에 이르는데 가장 먼저 극락보전 앞에 펼쳐진 넓다란 공
간이 허전하게 다가온다.


▲ 가을내음에 잠긴 고산사 가는 길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급하긴 하지만,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어느덧 고산사의
산문에 이른다. 알록달록 익어간 나무들은 낙엽을 이리저리 휘날리며
가을산을 찾은 나그네를 반긴다.


▲ 고산사로 오르는 호젓한 계단길
수북히 쌓인 낙엽으로 발의 감각을 푹신하게 해준다.


♠ 식장산 서쪽 품에 아늑히 안긴 산사, 아름다운 풍광으로
대전 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 식장산 고산사(高山寺)


대전 시민의 영원한 뒷동산인 식장산 서쪽 자락 평탄한 곳에 포근히 안긴 고산사는 조계종(曹溪
宗) 소속으로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古刹)로 꼽힌다. 빛바랜 대웅전과 부도탑에서 고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이곳은 886년(신라 정강왕 1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그리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다만 절의 가람(伽藍) 구조나 대웅전에 봉안된 고려시대 불상으로
볼 때 고려 전기에 둥지를 튼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을 보수할 때 '법장산 법장사(法藏山 法
藏寺)'라 쓰인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어 식장산과 고산사의 옛 이름을 알려주며, 언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절의 구체적인 내력은 장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상당수 휩쓸려 사라지고 1636년(인조 13년) 수
등국사(守登國師)가 크게 중수를 벌였다고 한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
다.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 산신각, 범종각 등 4~5동으로 절의 규모는 오랜 내
력에 비해 지극히 단촐하다. 특히 극락보전 앞에 펼쳐진 평평한 넓은 공간은 절이 다소 구석으
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던져주며, 대머리처럼 허전하기 그지 없다. 그 넓다란 공간의 일부는 주
차장으로 나머지는 빈 공간으로 버려져 수풀만 고개를 들고 있는데, 그 공간을 활용하여 적당하
게 불사를 확장하면 규모도 있어보이고 빈 터에서 밀려오는 허전함도 다소 달래질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과 목조석가모니불좌상, 아미타불화 등 3점이
있으며, 대웅전 우측에 조선시대 부도 2기가 있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절 경내와 식장산


고산사는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대전 사람들의 나들이 장소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대웅전
주변과 경내 좌측 산자락에 다양한 이쁜 꽃들이 심어져 절을 찾은 중생을 환하게 맞는다. 산중
에 자리하여 산사의 멋과 분위기를 마음껏 드러내 보이며, 규모도 조촐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
기에 부담이 없다. 또한 시내와 가까움에도 산중 깊숙히 들어온 기분으로 속세의 힘든 짐을 잠
시 내려두며 무작정 안기고 싶은 그런 절집이다.

※ 고산사 찾아가기 (2009년 11월 기준)
* 대전역(중앙시장)에서 31,52,501,511,512,514번 시내버스를 타고 고산사입구 하차, 단 501번
은 대성3거리에서 하차 (대성3거리에 고산사입구 이정표가 있음)
* 대전고속터미널(동부터미널)에서 501번 버스를 타고 대성3거리 하차.
* 정부대전청사 남문에서 108번을 타고 대성3거리 하차, 서문(무궁화아파트)에서는 514번 버스
이용
* 고산사입구에서 절까지 걸어서 15분 거리, 대성3거리에서는 16분 거리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진입 가능하며, 주차장은 극락보전 남쪽 공터에 있음)
① 경부고속도로 → 대전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성남4거리에서 좌회전 → 계족로 직진 → 효
동4거리에서 좌회전 → 가오동 → 고산사입구 → 고산사
②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 판암나들목을 나와 좌회전 → 가오동(은어송마을) → 대성동 → 고
산사입구 → 고산사

* 고산사에서 식장사를 거쳐 식장산 정상(623m)까지 1시간 정도 걸리며, 여기서 북쪽 능선을 거
쳐 세천, 판암동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다.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대성동 산3 (☎ 042-282-2263)

▲ 범종각에 걸린 목어(木魚)

▲ 범종각 부근 나무그늘에서 한가로이
노후를 즐기는 맷돌


♠ 고산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고산사 범종각(梵鍾閣)

공허함이 맴도는 극락보전 앞 드넓은 공간의 우측 한켠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범종각이 자
리해 있다.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겨진 범종각에는 사물(四物)이라 불리는
범종, 운판(雲版), 목어(木魚), 법고(法鼓) 등이 담겨져 있다.


▲ 다용도로 쓰이는 고산사 극락보전

너른 공터를 덤덤히 바라보며 미래를 구상중인 극락보전은 근래에 지어진 불전이다. 고산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우측은 극락보전으로, 좌측과 뒤쪽은 종무소(宗務所)와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복합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보전 안에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중심으로 어진 누
님과 같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중생을 맞는다.


▲ 극락보전 내부

극락보전은 불단(佛壇)에 모셔진 불상이 아득하게 보일 정도로 내부가 넓다. 내부에는 죽은 이
에 대한 의식이 열리고 있어 방해가 될까봐 들어가진 않고 문 밖에서 이렇게 내부를 눈에 넣어
본다.

극락보전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긴 간격을
두고 관음보살과 지방보살이 자리해 있는데 아미타불 뒤에 후광(後光)으로 걸린 아미타불화(阿
彌陀佛畵)는 대전 지방유형문화재 33호이다. 이 그림은 1815년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제작된
것으로 족자형태이다. 바탕은 붉은색(거의 붉은색과 검은색의 혼합처럼 보임)으로 처리했고 피
부와 머리를 채색하고 나머지는 금선으로 그렸다.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8명의 보살과 아미
타 8대보살, 사천왕(四天王)을 빼곡히 배치하여 그림이 꽉차 보인다. 좀더 가까이서 대하지 못
하고 이렇게 멀리서 본 것이 다소 아쉬울 따름이나 내 욕심을 채우고자 엄숙히 진행중인 의식에
재를 뿌릴 순 없다.

극락보전 앞뜰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5층석탑이 어여쁜 맵시를 드러내 보인다. 백제
(百濟)탑의 상징인 부여 정림사(定林寺)터 5층
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등 옛
백제 땅에는 그를 닮은 탑이 고려시대부터 지금
까지도 많이 지어지고 있으니 아직도 해양대국
백제를 꿈꾸며 그리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가을햇살에 비친 탑의 모습은 마치 부처의 세계
인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솟은 탑처럼 장엄하
게 밀려오며 동쪽으로 흘러가던 구름조각이 그
의 맵시에 눈에 먼듯, 한참이나 고산사 하늘을
맴돈다.


◀ 정림사 탑의 새로운 부활일까?
고산사 5층석탑


♠ 고산사 대웅전(大雄殿) - 대전 지방유형문화재 10호

극락보전 왼쪽 옆구리로 단아한 풍채의 대웅전이 중생을 맞는다. 고산사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중
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공포(空包)덩어리가 다닥다닥 붙은 다포(多包)식 맞배지붕 집이
다. 군더더기없는 날씬한 모습이쏙 마음에 드는 대웅전은 1636년 수등대사가 중수한 것으로 전
해지며 화려한 닫집을 갖춘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목조석가모니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모니불좌상(木造釋迦牟尼佛坐像)
- 대전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정면이 아닌 대웅전 우측 모퉁이에 마련된 불단에는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도 없이 목조석가모
니불 하나만이 자리를 지킨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은 남쪽을 향한 대웅전과 동쪽을 취하고 있
어 흥미를 끈다.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도 아닌데 왜 동쪽을 지
그시 보고 있을까? 사뭇 궁금할 따름이다. 건물 어칸(정면의 가운데 문 부분)에서 보면 불상 대
신 신중탱화가 정면에 다가오며, 건물 좌측 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석가모니불이 중생을 맞
는다.

이 불상은 조선후기에 나무로 만든 것으로 근래에 도금을 입힌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했다. 머
리는 나발(螺髮)로 얼굴은 조금 네모진 모습인데, 약간 아래를 내려보다는 그의 얼굴은 조금은
무표정해 보이나 입가에서는 나름대로 미소가 흐드러져 부드럽고 편안 느낌을 선사한다. 두터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으며, 법의(法衣)로 온 몸을 걸쳤다.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그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제스쳐를 취했다.

불상 뒤의 후불탱화는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와 마찬가지로 1815년에 운문사에서 그려진 것이라
전한다.

▲ 대웅전 정면에 자리한 신중탱화(神衆幀畵)
부처의 불법(佛法)을 수호한다는 여러 신들로
가득하여 눈이 정신이 없다.

▲ 불단 우측에 놓인 커다란 목탁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무거워 한손으로는
어림도 없다.


▲ 가을햇살을 즐기는 부도(浮屠) 2기

대웅전 우측 뜰에는 고색이 짙어보이는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2기가 오랜 인생지기처럼 다정
하게 자리해 있다. 서로를 의지하며 다독거리고 서 있는 그들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하나
는 회응당 충징대사의 부도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을 알 수 없다. 부도는 승려의 묘탑(墓塔)으
로 그들의 사리를 봉안한다.


▲ 산사의 적막을 살며시 깨뜨리며 은은한 풍경소리로 중생의
귀와 마음을 잡는 대웅전 풍경(바람방울)


▲ 뿜어낼 물이 없어 멀뚱멀뚱 입만 벌린 거북이와 물 대신 세월의 먼지만
가득히 쌓인 연꽃모양의 석조(石槽)
가을가뭄이 고산사의 석조 뿐 아니라 전국 곳곳의 목을 비틀 정도로 심각하다.


♠ 고산사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뒤쪽 높다란 곳에 터를 쌓고 세운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촐한 규모이다. 팔
작지붕 건물로 나무로 새긴 산신탱화(山神幀畵)와 칠성탱화(七星幀畵)를 모시고 있으며,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은 봉안되지 않았다.
이곳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긴 하나 대웅전과 극락보전 뒤통수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범
위는 별로 넓지 않다.

▲ 흰 수염의 산신과 동자(童子), 호랑이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화

▲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어 부처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북두칠성(北斗七星) 가족의
칠성탱화

▲ 극락보전 뒤에 숨은 연못

▲ 정겨운 풍물시 - 새색시의 볼처럼
빨갛게 익어가는 감


산신각 동남쪽 아래, 그러니까 극락보전 바로 뒤로 해자(垓子)처럼 파여진 연지(蓮池)가 길게
둘러져 있다. 올해 연꽃의 향연(饗宴)은 이미 끝나고 푸르름이 깃들여진 연잎들만이 잔치의 뒷
마무리를 하며, 다시금 내년 잔치를 기약한다. 연못이긴 하지만 돌로 다듬어진 산비탈 때문인
지 성 아래에 파놓는 해자처럼 보인다.

넓다란 극락보전의 뒤쪽은 고산사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인 선방이다. 선방 좌측 벽에는 보
기 만해도 정겹고 군침이 꼴깍 넘어가는 가을의 전령 감이 기나긴 줄에 대롱대롱 엮어져 따사로
운 가을햇살에 일광욕을 즐긴다. 저들을 분주히 살펴보고 있으니, 점심공양 그릇을 씻던 할머니
가 감을 말리는 거라며 추워지면 못보니 열심히 찍어두라고 한마디 건넨다. 감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몰래 한줄 챙겨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산길의 끝에 고산사가 가슴을 활짝 열며
속세의 지친 중생을 기다린다.


늦가을에 잠긴 고산사를 약 1시간 동안 둘러보고 다시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
민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산사가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가면서 잠깐이나마 정들었던
고산사의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잠깐 내가 내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많이도 내려왔는지 고산사
의 모습은 사라지고 길을 덮은 짙은 가을의 수목만이 나의 길을 전송한다. 이렇게 하여 과학의
도시 대전에서 만난 고색내음의 산사, 고산사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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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은 2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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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09년 11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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