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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17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 죽산 나들이 ~~~ 태평미륵(매산리석불입상), 죽주산성, 비봉산
  2. 2021.03.31 도봉산의 숨겨진 명소 ~~ 방학동사지(절터),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윗무수골 나들이 (귀록계산 바위글씨, 자현암) 1
  3. 2021.02.19 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4. 2021.02.07 서울의 상큼한 동쪽 지붕, 아차산~서울둘레길 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5. 2021.01.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6.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7. 2020.11.25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8. 2020.11.14 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9. 2020.10.22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2
  10. 2020.10.14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 죽산 나들이 ~~~ 태평미륵(매산리석불입상), 죽주산성, 비봉산

안성 죽산 나들이 (매산리 석불입상, 죽주산성)



' 안성 죽산 나들이 (매산리 석불입상, 죽주산성) '
죽주산성
▲  힘차게 뻗은 죽주산성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한복판에 이
르렀다.
올해 유난히도 혹독했던 겨울 제국(帝國)은 봄의 해방군에게 밀려 소멸 직전까지 가는 듯
싶었으나 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겨울의 잔여 세력들이 도처에서 꽃샘추위를 일으켜 시간
이 다시 1~2월로 돌아가는 듯 했다. 이렇게 꽃샘추위의 패기가 잠시 대단했던 시기에 안
성마춤(안성맞춤)의 고장으로 오랫동안 추앙받고 있는 경기도 안성(安城)으로 짧은 여정
을 떠났다.

점심을 간단히 섭취하고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평택
역에 두 발을 내렸다. 평택역은 경기도 최남단을 장식하고 있는 평택시(平澤市)의 관문으
로 역 남쪽에 있는 평택시외터미널로 이동하여 안성시내버스 370번(평택터미널↔일죽)에
몸을 실어 안성 땅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안성 남쪽 끝에 자리한 청룡사(靑龍寺)에 가려고 했으나 차 시간이 영 맞지 않아
서 청룡사를 흔쾌히 포기하고 안성시내를 가로질러 죽산(竹山)까지 쭉 이동했다. 죽산에
서 봉업사지(奉業寺址) 5층석탑과 태평미륵, 죽주산성을 보고자 함이다.

죽산에 이르러 제일 먼저 봉업사지5층석탑(보물 435호)을 보려고 했으나 잠깐의 방심으로
한 정거장을 지나쳐 거리가 제법 멀어졌다. 게다가 시간도 17시가 넘어 해가 깔딱하기 직
전이다. 하여 봉업사지는 포기하고 바로 매산리로 들어가 태평미륵을 찾았다. 태평미륵은
죽산에서 용인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어 찾기는 매우 쉽다.


▲  태평미륵(매산리 석불입상)의 조촐한 거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태평미륵과 5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의 높이가 조금 낮으므로 키가 큰 사람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뒷탈이 없다.



 

♠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고려 초기 석불, 매산리 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7호

세상에서는 안성을 안성마춤(안성맞춤)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허나 혹자(或者)는 미륵불의 고
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안성에 유난히도 미륵불(彌勒佛)이라 불리는 석불이 많기 때문
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매산리 석불입상은 안성을 수식하는 주요 미륵불로 오랫동안 태평
미륵(太平彌勒)이란 이름으로 지역 사람들의 숭상을 받았다.

태평미륵은 고려 초에 조성된 석불로 높이가 5.6m에 이르러 안성 지역 미륵불 가운데 가장 키
가 크다. 그의 조촐한 안식처인 미륵당(彌勒堂)도 그의 키에 맞추다 보니 자연히 높이가 올라
가 대략 7m정도 되며, 미륵당이란 이름도 태평미륵의 거처란 뜻에서 생긴 것으로 마을 이름도
미륵당이고 인근 버스정류장 이름도 미륵당이다.


▲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한 태평미륵의 위엄

석불은 제법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밑부분에는 온갖 문양이 새겨져 있고, 네
모난 보관 윗부분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세월의 때가 가득 끼어있어 중후한 멋을
보인다. 근래 세수를 한 듯 보관에 비해 조금은 하얀 얼굴은 길고 넓적한 편이며, 볼살이 좀
있어 보인다.
눈썹과 굳게 감긴 눈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며, 두 눈썹 사이로 백호
가 하얗게 남아있다. 코는 끝부분이 오목하고, 입은 다물어져 있는데, 코와 입이 지나치게 작
고 눈 또한 지나치게 커서 균형이 떨어지며, 삼도(三道)가 그어진 목도 지나치게 비대하다.

몸통은 얼굴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보관을 포함한 얼굴 부분이 몸통의 거의 40%를 잡
아먹기 때문이다. 너무 없어보이는 어깨는 둥글게 내려가 있는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두
껍게 표현되었으며, 하체에는 계단식으로 처리된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
슴 앞에 대고 있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듯 싶으며, 손가락을 모두 구부렸다. 왼손은
배 위에 대고 있으며, 양 손목에는 2중으로 된 팔찌를 차고 있다. 몸통을 받치는 두 다리는
꼿꼿하게 서 있으며, 다소 육중하지만 다리 표현은 분명하여 알아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  태평미륵의 얼굴과 보관

▲  태평미륵의 뒷통수와 보관

▲  태평미륵의 가슴 부분과 손

고려 때 조성된 석불은 유난히 덩치가 크고 각기 제각각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논산 관촉사(
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처럼 키와 덩치가 대단한 석불도 부지기수이며, 개성이 넘치고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인기를 모은다. 그 시절 유난히 커다란 석불과 지역색이 강한
석불이 많은 등장한 것은 지방 세력과 부호(富豪)들이 집안의 안녕을 빌고 자신의 세력을 과
시하려는 차원에서 앞다투어 그런 것이며, 지역 석공(石工)들이 주로 석불을 다듬다 보니 투
박하고 거칠고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토속적인 석불이 많이 나왔다.
안성 지역에 널린 미륵불도 대부분 고려 때 것으로 태평미륵 또한 죽산 지역 세력이나 부호가
장만한 것이다. 처음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으며, 미륵신앙(彌勒信仰)이 크게 대두되면
서 지역 백성들에 의해 미륵불로 숭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미륵은 논산 개태사(開泰寺) 석불입상이나 충주 미륵리사지 석불처럼 고려 초기를 대표하
는 석조보살상으로 인정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미륵당5층석탑 - 안성시 향토유적 20호

미륵불 앞에는 납작한 석탑 하나가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다. 겉으로 보면 3층석탑인데 안내문
에는 5층석탑이라 나와있다.
이 탑은 고려 초인 993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탑지석(塔誌石)이 나와
고맙게도 그의 탄생시기를 알려주고 있다. 그 탑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태
평미륵과 한 덩어리처럼 보이나 그는 인근에서 옮겨온 것이라 태평미륵과는 관련이 1도 없다.

고려 때 흔하게 보이는 석탑과 달리 기단(基壇)이 1층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며, 바닥돌과
기단부, 1층 탑신(塔身)까지는 온전하게 남아있으나 2층과 3층, 4층은 탑신은 사라지고 지붕
돌만 애처롭게 남아있고, 5층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완전히 사라졌다. 지붕돌은 귀퉁
이가 좀 상한 것 빼고는 거의 멀쩡하다.
탑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드러내고 있으며, 높이는 1.9m에 불과하나 탑신
이 온전하게 남았더라면 가히 5m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 매산리 석불입상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365-3 (미륵당길 32)



 

♠  죽산을 지키던 오랜 갑주이자 1236년 몽골군을 때려잡았던
전승의 현장, 죽주산성(竹州山城) - 경기도 지방기념물 69호

▲  죽주산성 남치성(南雉城)

태평미륵을 친견하고 차량들이 쌩쌩 바퀴를 굴리는 17번 국도를 따라 북쪽(용인 방면)으로 10
분 정도 가면 죽주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왼쪽의 완만한 산
길을 오르면 한자로 된 죽주산성 표석이 나오고, 몇 굽이를 더 오르면 죽주산성 안내문과 비
봉산 안내도가 있는 너른 공간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북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성은사(聖
恩寺)란 작은 절이 있고, 왼쪽에 산으로 오르는 조금은 각박한 길을 2분 정도 임하면 죽주산
성 동문이 모습을 비춘다.
산성 입구에서 동문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라 10분 정도 걸리며 길이 포장되어 있어 차량 접근
도 용이하다.


▲  윗도리는 사라지고 아랫도리만 남은 죽주산성 동문(東門)
동문은 윗도리인 문루(門樓)는 없고, 아랫도리인 성곽과 홍예만 남아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이다.


비봉산(飛鳳山, 369m)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죽주산성은 신라 후기에 축성된 것으로 외성(外
城)의 둘레가 1,688m, 높이는 2.5m~5m에 이른다. 돌로 튼튼하게 다진 산성(山城)으로 성 내부
중앙에는 1,500m 길이의 내성(內城)과 270m 길이의 중성(中城)을 두어 방어력을 한층 높였다.

죽주산성 남쪽에는 죽산 고을이 있는데, 지금은 안성시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신라 말부터 조
선시대까지 안성을 능가하는 큰 고을로 죽주(竹州)라 불리기도 했다. 산성의 이름은 바로 죽
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죽산 고을의 중심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라가 내리막을 타던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시절에 기훤(箕萱)이 반란을 일으켜
이 성을 접수해 세력을 키웠으며,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운 궁예(弓裔)가 그의 밑에 들어가
잠시 일하기도 했다.

▲  동문 남쪽 성벽

▲  동문 안쪽

고려 때는 성을 수리하여 관리한 것으로 보이며, 1236년 몽골(원나라)의 3번째 고려 침공 때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때 죽주산성을 지켰던 장수는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인 송문
주(宋文胄)로 일찍이 1231년 몽골의 1차 공격 때 귀주성<貴州省, 평북 구성시(龜城市)>에서
박서(朴犀)를 도와 몽골군을 크게 때려잡았던 인물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주성 싸움을 간
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가 몽골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218년 서경(西京, 평양) 근처인 강동성(江東城) 전투였다.
신라 왕족과 고려 사람, 발해 유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털린 거란족의 잔당들이
몽골과 동진국(東眞國) 연합군에게 쫓겨 고려 땅으로 침투해 강동성을 점거하자 당시 고려의
실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은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몽골+동진국 연합군과 강동성을 탈환하고
거란 잔당을 토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골의 강요로 형제국 동맹을 맺었으나 힘만 앞세운 몽골의 무식한 오만함
과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에 고려는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는 몽골의 사신이 고
려 제왕의 어좌(御座) 바로 옆까지 가서 국서(國書)를 주는 무례까지 범하는 등, 고려와 몽골
의 관계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1225년 몽골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의문의 개죽음을
당하자 몽골은 크게 발작하여 고려의 만행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군사를 꾸려 그 유명한 살리
타이를 총대장으로 삼아 1231년 고려를 공격하니 그 지긋지긋한 반백년의 고려 vs 몽골 전쟁
의 서막이 열린다.

▲  남치성 부근 성곽

▲  내성 북쪽

압록강을 건넌 몽골군은 순식간에 고려의 북계(北界, 평안북도)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허나
정주(定州)와 서경(西京)을 점령하지 못해 북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고려군의 무력 또
한 만만치가 않아 몽골군은 크게 고전을 하게 된다. 절치부심에 빠진 살리타이는 든 것도 없
는 머리통을 열심히 굴려 북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귀주성을 공격해 전세를 만회하기로 했
다.

몽골군이 철주성(鐵州城, 평북 철산군)을 점령하고 귀주를 공격하려하자 주변 지역의 고려 장
수와 군사들, 백성들이 귀주성으로 쏙쏙 모여 결전을 준비했다. 귀주성에는 서북면병마사(西
北面兵馬使)인 박서(朴犀)와 부하 장수인 송문주가 지키고 있었다.
귀주성에 당도한 몽골군은 항복 권고 한마디도 없이 바로 공성전(攻城戰)에 들어갔다. 귀주성
은 산자락에 자리한 탓에 공격이 쉽지 않은데, 단순한 살리타이는 단지 머릿수만 믿고 군사를
나눠 쉬지 않고 돌리면서 공격했다. 그렇게 고려군을 지치게 만들어 나중에 한꺼번에 들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을 오르기도 전에 고려군의 화살비에 많은 군사가 죽어나갔다.
이렇게 몽골군이 고전하는 틈을 노려 김경손(金慶孫)이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
가 적군을 무수히 죽였으며, 검은 말을 타고 있던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이자 몽골군은 전의
를 잃고 바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1차 공성전에서 단단히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잠시 작전을 바꾸어 항복한 위주부사(渭州
副使) 박문창(朴文昌)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허나 박서는 '어찌 오랑캐에게 항복을 한단 말
이냐. 너도 고려의 신하이거늘 자존심도 없냐!'
답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박문창을 죽여 그 목
을 몽골군에게 보냈다.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살리타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방패차
와 성문을 부시는 충차(衝車)를 앞세워 성문을 집중공격했다. 허나 성이 산자락이고 성 북쪽
과 동쪽에 동문천(東門川)이 흐르면서 행군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겨우 하천을 건너 성문
앞에 이르렀으나 고려군이 불화살과 큰 돌을 날려 보내면서 충차와 방패차는 산산이 박살이
나고 몽골군은 죄다 사지가 헝클어진 귀신이 되고 말았다.

다시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이번에는 성 밑에 굴을 파고 침투하는 방법을 썼다. 이 작전
에는 '두거'라는 물을 먹인 소가죽을 쓴 이동식 상자와 두거 보호용 누차(樓車)를 보냈는데,
고려군은 용광로에 쇠를 녹여 쇳물을 통에 담아 누차를 향해 마구 던졌다. 쇳물을 뒤집어쓴
누차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면서 누차에 탄 몽골군은 죄다 즉석 통구이가 되었다.
또한 몽골군이 판 갱도에 군사를 보내 굴을 떠받치던 목재 버팀목을 불태우면서 갱도가 무너
져 삽질을 하던 몽골군도 죄다 생매장을 당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나무를 모아
띠로 묶은 다음 불을 붙여 두거 위로 던졌다. 가시나무 가지가 두거에 그대로 박히면서 계속
타오르니 아무리 물을 먹인 소가죽도 소용이 없었고, 그대로 불이 옮겨타면서 작전에 임한 몽
골군은 그대로 폐기처분되고 만다.

▲  서문터 북쪽 성곽

▲  내성(內城)

이렇게 30일 이상 처절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귀주성은 건재했다. 기가 확 질러버린 몽골군
은 인근에 있던 군사들까지 싹 소환해 30여 대의 포차(砲車)를 급히 마련하여 다시 성을 공격
했다.
포차가 무수히 돌덩어리를 날리니 성곽 곳곳에 금이 가고 성내(城內)의 건물도 적지 않게 피
해를 입었다. 성벽의 무너진 틈새를 이용해 몽골군이 기들어오려 했으나 그 앞에 검차(檢車)
를 설치해 적군을 쫓아냈다. 그리고 무너진 틈을 쇠사슬을 엮어서 막았다.

몽골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단단하던 귀주성의 성벽도 슬슬 지쳐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여 박
서는 정예병을 뽑아 성 밖으로 보내 몽골군을 공격했다. 고려군의 기습에 몽골군은 적지 않게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었고, 혼란한 틈을 타 박서가 포차공격을 퍼부으니 그들은 목을 붙
잡고 후퇴했다.

단단히 똥줄을 탄 살리타이는 항복한 고려 왕족의 서신을 이용해 제발 투항좀 해주십사 부탁
을 했으나 박서는 살리타이의 사신을 내쫓았다. 이에 다시 발작한 살리타이는 운제(雲梯) 등
의 공성무기를 모두 동원해 공격에 들어갔다. 허나 고려는 운제 사다리를 파괴하고자 자물쇠
의 걸쇠 모양으로 구부러진 크고 무거운 칼 대우포를 개발해 비치한 상태였다. 대우포의 공격
에 운제는 죄다 박살이 났고, 사다리에 올라탄 몽고군은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천하 최강의 깡패 나라로 악명을 날린 몽골군은 그보다 더 독한 귀주성 앞에 형편없이 꼬랑지
를 내렸고, 결국 공격 1달 만에 공격을 멈추었다. 또한 개경(開京)을 점령하고 돌아오는 몽골
군까지 격파되면서 몽골군의 간이 완전 쫄깃해졌다.
하지만 귀주성과 정반대의 상황이던 고려 조정은 개경이 함락된 휴유증에 몽골과 화의(和議)
를 맺었고, 당시 고려 군주인 고종(高宗)이 지병마사(知兵馬使) 최임수()를 보내 항복
을 종용하는 칙서(勅書)를 전하니 박서는 분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창칼을 내던지고 몽골군
에게 항복하고 만다.
자신들의 힘이 아닌 고려 군주의 칙명으로 어거지로 귀주성의 항복을 받은 몽골군은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철수했는데, 당시 전쟁에 참여한 몽골 장수는 이
런 말을 남겼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군에 있으면서 천하 곳곳의 성지(城地)에 대한 공성전을 무수히 보았지
만 이처럼 지독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항복하지 않은 성을 본 일이 없다. 이 성을 지킨 장수들
은 훗날 모두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역사에 전하지는 않지만 박서도 아마 몽골군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전쟁터에서 늙었지만 너희처럼 징글징글한 오랑캐는 처음이다. 너희들도 고생 많았다'

귀주성대첩 이후 박서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을 했고
송문주는 낭장(郎將)으로 특진되었다가 몇 년 뒤 죽주방호별감이 되어 죽주를 지키게 되었다.

1236년 몽골군이 다시 고려를 침범해 죽산 인근에 이르자, 송문주는 백성을 이끌고 죽주산성
으로 들어갔다. 전에 귀주성에서 송문주에게 혹독하게 당한 몽골군은 그의 이름 3자에 잠시
염통이 쫄깃해져 서둘러 항복을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포를 쏘면서 맹렬히 성을 공격했다.
성문이 부서지는 피해가 있었지만 고려군도 바로 포로 응수하면서 적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
혔고, 몽골군은 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공(火攻)을 펼쳤으나 송문주는 성문을 열고 그
들을 기습해 수천의 몽골군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다시 한번 귀주성의 영웅에게 제대로
털린 몽골군은 공격 15일 만에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쳤다.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

▲  북치성(北雉城), 포루(砲樓)

송문주는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질리도록 경험하여 그들의 전법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효
과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었고, 다시 빛나는 승리를 취하게 된 것이다. 죽산 백성들은 그런
그를 '귀신','신명(神明)'이라 부르며 존경했으며, 그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었
다. 또한 백성들은 그를 기리고자 성 안에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올렸다.
참고로 박서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죽산이 고향이다. 바로 그 죽주산성에서 그의 부하장수
였던 송문주가 몽골군을 격퇴했으니 이것도 참 인연인가 보다. 몽골 애들 입장에서는 지독한
곳에서 지독한 적장과 적군을 만나 허벌나게 개고생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인 청주(淸州)와 충주(忠州)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
충지라 애지중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잠시 점거했으나 황진(黃進)이 기습작전으로
탈환하면서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 지역을 넘보지 못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절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구하고자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들
이 진을 쳤으나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머리를 박고 항복하자 분을 삼키며 철수했
다.

조선 후기에는 조정의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방치되어 나무로 다진 문루 등의 건물은 사라지고
견고한 성곽만 남게 되었다. 성곽 대부분이 남아있으나 외성 북부와 중성은 거의 주저앉았고,
외성 남부와 내성도 곳곳이 벗겨지거나 무너져 아픈 속살을 드러냈으나 2006년 이후 보수공사
를 벌여 외성 남쪽과 내성, 치성(雉城)을 손질해 왕년의 위엄을 조금은 되찾았다.

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으며, 그 외에 성문터 3~4개가 더 있다. 남쪽 끝과 북
쪽 끝에는 치성(남치성, 북치성)을 두었고 외성 북쪽에도 조그만 치성을 3개 정도 만들어 수
비력을 드높였으며, 남치성에는 장대(將臺)터가 아련히 남아있고, 북치성에는 포루(砲樓)터가
있다. 우물은 2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현재 약수터로 쓰인다. 또한 남문 밖에는 도랑을 판
자리가 있어 조촐하게 해자(垓子)를 두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성 내부는 분지(盆地)로 북쪽
과 남쪽을 제외하고는 지형이 평탄해 군사시설과 집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와 절 건물로 쓰이는 집 몇 동이 있다.

죽주산성과 비봉산은 근래에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이정표와 안내문을 설치했으며, 비봉산 정
상을 거쳐 삼죽면이나 죽산리로 내려가도 된다. 산성은 외성 남쪽과 내성 북쪽을 돈다면 대략
30~40분 정도 걸리며, 아직 복원되지 않은 외성 북쪽까지 모두 돌 경우에는 2시간이 넘는다.


▲  죽주산성 안내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안성의 주요 명소이자 대몽항쟁의 승전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이리저리 헝클어진 모습을
보면 인간의 창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그저 허술한 모래성임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근래에 복원을 하였지만 고색의 때가 자욱한 옛돌과 하얀 피부의 새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
고 있으니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내야 서로가 조화를 이룰 것이다.

남치성에 이르면 죽산면 중심지(죽산리)가 두 눈에 바라보이고, 북치성에는 백암 지역이 시야
에 들어와 조망이 일품이며, 평택과 충주, 청주로 통하는 길목에 가파른 곳에 의지해 자리해
있어 천하의 요새임을 실감할 것이다.

* 죽주산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5-1, 106


 

♠  죽주산성 둘러보기 (충의사, 남치성, 서문, 북문)

▲  산성 안 풍경 (동문에서 바라본 모습)

동문을 들어서면 포근하게 분지 지형을 이룬 산성 내부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잡초가 무성한 초지(草地)인데, 이 일대에는 군사시설과 창고(倉庫), 집들이 있었을 것이다.
초지 너머로 집들이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있는데, 가장 왼쪽에 어렴풋이 보이는 기와집이
송문주 장군 사당인 충의사이다.


▲  죽주산성에 유일한 약수터 (죽주산성약수터)

산성이 축성된 신라 후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샘터로 오랫동안 이곳의 목을 축여준 소
중한 샘이다. 1236년 송문주가 이끈 군사와 백성들도 저 물을 먹고 몽골군을 때려잡았으니 이
곳을 지킨 고려 사람들의 힘을 무한대로 솟게 만든 신비의 영천(靈泉)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탐방객과 인근 주민들이 마시는 그저 흔한 약수로 특별한 맛은 없으며, 성내에는 우물이 2개
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약수터만 남았다.


▲  누런 잡초로 가득한 동문 안쪽 초지 (약수터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이곳에 군사시설과 백성과 군사들의 집이 있었을 것이다. 장대한 세월에
푹 파묻힌 이곳을 똑똑 깨우면 죽주산성의 숨겨진 많은 것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송문주 장군 사당(충의사)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푸른 갑주를 입은 소나무들이 길 양쪽에 2열로 늘어서 사당 손님들을 마중한다.
혹 송문주 장군의 병사들이나 그를 존경하던 백성들의 혼이 소나무로
부활한 것은 아닐까?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忠義祠)

성내 서쪽 산자락에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돌로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은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아래를 향해 돌계단을 늘어뜨렸다.
이 사당은 죽산 백성들이 송문주를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백성들은 그를 귀신, 신명이라 부르
며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나중에 사당까지 손수 지어 그를 길이길이 추모했다.

사당의 조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송문주가 세상을 뜬 13세기 말 이후로 보이며, 처음에는
조그만 영당(影堂)으로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가 근래에 지금의 건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충
의사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전남 여수(麗水)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타루비(墮淚碑)처럼 백성과 군사들이 송문주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백성들의 정이 서린 의미 깊은 사당으로 오늘날 저런 사당을 지어 추모할 위정
자(爲政者)가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숲속에 자리한 충의사 - 바로 뒤쪽에 내성 남쪽 성곽이 있다.

▲  산비탈에 의지해 닦여진 서남쪽 성곽

▲  중간에 잠시 길을 접은 남치성(南雉城)
성곽이 약간 비스듬히 쌓였는데, 이는 고구려 축성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축성 양식을 들여쌓기라고 한다.

▲  남치성 장대(將臺)터

산성 서남쪽을 이루는 남치성에는 장대터가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안성의 서부 지역인 죽산
과 일죽 일대가 두 눈에 훤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며, 지금은 성을 지키고 산불을 감시하
는 조그만 초소가 이곳을 지킨다.


▲  남치성에서 바라본 죽산 일대 (멀리 보이는 산은 도덕산)

▲  남치성에서 바라본 일죽 일대

▲  죽주산성 남문(南門)
남문 앞에 도랑을 둔 흔적이 있어 해자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안그래도
오르기 힘든 산비탈인데, 성 앞에 해자까지 두었으니 어찌 적들이
쉽게 점령할 수 있겠는가.

▲  끊김이 없이 힘차게 질주하는 산성 서남부 성곽 (남치성에서 본 모습)

▲  저렇게 보잘것 없는 자연석들이 모여 견고한 죽주산성이 탄생했다.
사람이나 동물, 사물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가치와 팔자가 달라진다.

▲  유연한 곡선을 자랑하는 서쪽 성곽
성곽에는 여장 등의 안전시설이 없고, 성곽길을 이루는 돌도 거칠고 모가 많아서
걷는데 반드시 주의해야 된다. 가급적이면 흙과 성돌 사이 부분으로
걷거나 안쪽 흙길로 걷는 것이 좋다.

▲  외성과 내성이 갈리는 서문(西門)

완만하게 오르막길을 형성하던 성곽길은 서문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내리막을 이룬다. 내리막
을 이루기 전인 서문 남쪽이 죽주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그 내리막의 끝에 커다
란 장대석을 머리에 인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 성곽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문을 지나 북쪽으
로 흐르는 성곽은 죽주산성의 본성인 외성이고, 서문 남쪽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성곽이 내
성이다.


▲  죽주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서문 남쪽 부분

▲  서문에서 바라본 비봉산

▲  뼈대만 남은 서문 안쪽

▲  서문 바깥쪽

서문의 높이는 문의 높이는 2m 정도로 비봉산 정상이나 죽산으로 가려면 이 문을 이용하면 된
다.


▲  서문 동쪽으로 흘러내려가는 내성

▲  서문 북쪽 성곽

성곽을 이루는 성돌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애환과 사연이 차곡차곡 깃들여져 있다. 산성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의 애환부터 신라 후기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이곳에 웅거한 지방 세력
의 사연,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애환과 장수들의 꿈, 1236년 피를 흘리며 이곳을 지킨 고려군
과 백성들의 함성, 그때 전사힌 이의 원통한 넋, 이곳에서 고깃덩어리가 되어 지옥으로 떨어
진 몽골군의 넋까지, 그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깃들여져 산성의 경력과 가치를 드높인다.


▲  자연과 세월에 의해 헝클어진 서문 북쪽 성곽(외성 북부) ▼

외성 북부는 서문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헝클어진 채, 간신히 산성의 윤곽만 남아있다. 이곳
성곽의 높이는 2m 정도로 성곽을 이루던 성돌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성곽길도 거칠
어져 이동하기가 쉽지가 않다. 아직 여기까지는 복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성 북부에는 서치성(西雉城)과 동치성(東雉城) 2개가 있으며, 외성 북문터와 수구(水口)터
등이 있다. 성곽길이 별로 좋지 못하고 급내리막길이라 조금만 가다가 바로 서문으로 돌아왔
다.


▲  남쪽으로 90도 꺾은 내성 - 숲 너머에 보이는 성도 내성임

▲  내성 (내성 북문 부근) - 내성은 높이가 2m 정도이다.

▲  내성 북문~북치성 구간은 성곽길을 동네 담장마냥 시멘트로 발라버려
적지 않은 옥의 티를 보인다. 저럴거면 복원의 의미가 없지 않는가.

▲  내성 북문(北門) - 서문과 비슷한 구조이다.


 

♠  죽주산성 마무리 (북치성 주변)

▲  북치성(北雉城) 포대와 겨울에 잠긴 나무 1그루

죽주산성의 동북쪽 끝으머리에는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북치성이 있다. 이곳은 서문에서
갈라진 내성과 외성이 다시 만나는 곳으로 내성의 동쪽 종점이기도 한데 가파른 곳에 자리한
남치성과 달리 평탄하고 너른 공간으로 돌로 쌓은 포대와 커다란 나무 1그루가 북치성을 지킨
다.
시야가 확 트인 이곳에 올라서면 안성 죽산면/일죽면 북부 지역을 비롯해 용인 백암면 지역이
바라보여 조망이 좋아 전략적 요충지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북치성 끝부분에 마련된 포대는 돌을 던지거나 화포(火砲)를 쏘는 대포나 무기를 비치한 곳으
로 1236년에 이곳에서 적군을 향해 무수히 돌을 날려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이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진 일이 없어 그냥 겉모습만 남아있다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거의 떠내려가면
서 포대의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다.


▲  북치성 포대

▲  포대 가운데 부분

포대는 'ㄷ'자 모습으로 높이는 1m 정도이며,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그 석축 안에 돌을 날
려보내는 무기를 엄폐시켜 전쟁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
포대를 이루고 있는 돌은 주변에서 가져온 큰 돌을 네모나게 다듬은 것으로 석축 밑도리에 동
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성 밑을 바라보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포대의 위치가
북치성 끝부분이라 전쟁이 한참일 경우에는 석축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전방을 확인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 정중앙에 주춧돌처럼 놓인 돌은 돌을 날리는 무기를 두
었던 곳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널린 오래된 산성과 석성(石城) 가운데, 이렇게 포대까지 갖춘 성은 거의 흔치가
않다. 강화도(江華島)를 비롯한 서해바다 쪽에 포대를 둔 성이 많지만 이들은 바다에 설치된
화포용 요새이다.


▲  북치성에서 바라본 천하 - 죽산면과 일죽면 북부 지역과 용인 백암면

▲  북치성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동쪽 성곽
서쪽 성곽과 달리 경사가 좀 완만하여 길이 부드럽다.

▲  동문 북쪽 성곽

동문 주변은 자연과 세월에 의해 가루가 되거나 뭉개진 성돌이 많아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을
많이 입혀 복원했다. 그러다보니 늙은 성돌과 새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하지만 어쩌
겠는가. 늙은 성돌이 많이 사라져 상황이 여의치가 않은 것을 말이다.

동문을 시작으로 죽주산성을 1바퀴 둘러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느 정도 어두워진 상태였다. 서쪽으로 지는 해를 억지로 잡
아가면서 동문을 들어선 것이 17시 20분이었으니 1시간 30분 동안 둘러본 셈이다. 물론 서문
북쪽인 외성 북부는 조금 가다가 말았지만 거긴 성벽 상태가 영 좋지 못해 그런 것이니 거의
80%는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동문을 나와 다시 속세로 내려가니 세상은 비로소 완연한 검정 도화지가 되었다. 상경(上京)
코스를 어떻게 잡을까 머리를 굴리다가 백암에서 저녁을 먹고 용인(龍仁)을 거쳐 올라가기로
했다. 하여 죽주산성 정류장에서 용인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백암으로 넘어가 저녁으로 백암
의 명물인 백암순대국밥을 섭취했다.
백암 계통의 순대국은 처음 먹어보는데, 내장은 적으면서 고기와 순대 덩어리가 많아 비린내
도 거의 없고, 담백하고 얼큰하여 1그릇을 뚝딱 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뜨끈한 국물에 졸음이
몰려와 나를 희롱하니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피를 마시며 졸음을 단죄한다. 이렇게 저녁을 먹
고 장거리를 이동하여 집에 들어오니 거의 자정~~

이렇게 하여 꽃샘추위 속에 찾아간 안성 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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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의 숨겨진 명소 ~~ 방학동사지(절터),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윗무수골 나들이 (귀록계산 바위글씨, 자현암)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자현암)



~~~~~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 나들이
~~~~~

도봉산 방학동사지

▲  도봉산 방학동사지

귀록계산 바위글씨 윗무수골 숲길

▲  귀록계산 바위글씨

▲  윗무수골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20m)은 내가 서식하는 도봉구(道峰區)의 듬직한 뒷
동산이다. 그의 그늘에 묻혀 산지가 어언 20년 남짓,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그의
품을 찾곤 한다. 도봉산을 거의 손바닥 보듯 돌아다니는 본인이지만 그것을 깨는 신선한
존재들이 가끔 나타나 나를 놀래키니 그런 것을 보면 도봉산이 내 손바닥이 아니라 오히
려 내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재롱을 떠는 것 같다.

도봉동 집과 가까운 도봉산 방학동(放鶴洞) 구역에 늙은 바위글씨와 절터 유적이 있음을
근래 알게 되었다. 집 근처에 아직도 그런 미답처(未踏處)들이 숨겨져 있었다니 내심 놀
랐는데, 다른 곳은 몰라도 서울의 미답처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하여 여름 제국(帝國)
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늦여름에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집과도 가까우니 슬슬 걸어가면 된다. 신도봉4거리에서 우이동(牛耳洞) 방면으로 이어지
는 시루봉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면 신방학중학교이다. 여기서 '방학동 전형필(全鎣
弼) 가옥' 옆길로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택시 회사가 있는데, 그 옆에 방학동계곡을 낀
산길로 들어서면 바로 도봉산의 품이다.


 

♠  방학동계곡에서 만난 한줄기 바위글씨

▲  도봉산 방학동계곡 산길

방학동계곡 산길은 시루봉과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인도하는 숲길이다. 방학
동 주민의 소중한 산책 코스로 왕래가 빈번해 산길 또한 잘 닦여있는데, 길과 가깝게 거리를
두고 방학동계곡이 졸졸졸~♪ 교향곡을 선사하며 흘러간다.


▲  숲에 묻힌 방학동계곡 (바위글씨 윗쪽)

방학동계곡은 도봉산 최남단에 자리한 조그만 계곡으로 방학천과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숲이 짙은 계곡 중류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싹둑 다듬은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즐비해 경관도 괜찮은데, 서울 시내와 가까운 이런 계곡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풍류 흔적과
낙서가 거의 있기 마련이다. 그 예상대로 이곳에도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다.
허나 그들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기에 계곡을 더듬으며 알아서 숨바꼭질을 해야 된다.
다행히 숨바꼭질의 난이도는 낮으며 계곡을 따라 한문이 새겨진 바위만 찾으면 술래는 끝이
다.


▲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많은 방학동계곡
자연이 칼로 싹둑 다듬은 것일까? 유난히 각이 지고 반듯한 암반이 많다. 비록
골짜기는 작아도 이 정도의 경치면 충분히 옛 사람들이 반할만하다.

▲  암반 사이를 잔잔히 흐르는 방학동계곡
바위 피부에 푸른 이끼들이 가득해 이곳이 속세의 때를 덜 탄
청정한 곳임을 알려준다.

▲  바위글씨가 서린 조그만 폭포 주변

바위글씨와 숨바꼭질을 벌이며 계곡을 더듬으면 조그만 폭포가 나온다. (산길에서 조금 떨어
져 있음) 사실 폭포라 하기도 좀 민망한 수준인데 그래도 계곡물이 완만하게 누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미끄러지니 엄연한 폭포이다. 바로 이 폭포 주변에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바위글씨
2개가 서려있다.


▲  바위에 의연하게 깃든 귀록계산(歸鹿溪山) 바위글씨

폭포 옆에 90도로 각을 진 바위 피부에는 귀록계산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깃들여져 있다. 바위
에 네모나게 홈을 파고 행서체(行書體)로 글씨를 새겼는데, 그 홈 크기는 77x28cm이다. 그 4
자를 단순히 풀이해보면 사슴이 산과 계곡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귀록(歸鹿)은 그
뜻이 아니라 방학동과 인연이 깊은 귀록 조현명(趙顯命, 1691~1752)의 호이다. 그러니까 조현
명의 산과 계곡, 즉 그의 조그만 세상이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현명은 누구일까?

조현명은 풍양조씨로 조인수(趙仁壽)의 아들이다. 자는 치회(稚晦), 호는 녹옹(鹿翁), 귀록(
歸鹿)으로 모두 '사슴록(鹿)'자가 들어가는데, 이중 귀록은 1731년 이후 2번이나 파직과 복직
을 당했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1713년 진사(進士)가 되고, 1719년 증광시 문과(增廣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
에 진출했다. 1721년 경종(景宗)이 숙종(肅宗)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
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내세워 소론(小論)의 공격으
로 힘들어하던 왕세제를 지켰다. 그 연잉군이 바로 영조(英祖)이다.

1728년 영조를 부정하는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
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반란이 진압되자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
(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
가 되어 영남 남인(南人)을 다독거리며 백성을 보살폈다.
1731년 경상도에서 가장 큰 섬인 대마도(對馬島)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대마도주가 급히 지
원을 애걸했다. 하여 조정에서 쌀을 내리려고 했으나 이를 반대하자 파직을 당했으며, 1733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면서 공조참판(工曹參判)과 총융사(摠戎使), 어영대장(御營大將)
을 지냈다. 허나 1736년 예조판서 시절에 형정(刑政)의 불공평을 상소하다가 또 파직을 당했
다.
다행히 1738년 복직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740년
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74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으며, 1746년 우의정(右議政)
이 되면서 문란해진 양역(良役)을 손질하고자 군액(軍額)과 군역부담자 파악에 착수, 1748년
에 양역실총(良役實總)을 간행하여 왕에게 올렸다.
1749년 청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갔다왔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균역법의 제정
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으로 영돈녕
부사로 물러났다.

조현명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적극 지지하며 양역의 개혁과 온갖 세금의 개선책을 제시
했다. 그리고 많은 문인과 교류를 했는데, 그중에서 김재로(金在魯), 박문수(朴文秀)와 친분
이 깊었다. 그가 남긴 책으로는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 1
수가 전하며,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아직도 뚜렷한 귀록계산 바위글씨의 위엄
300년 가까운 세월이 덧없이 흘렀건만 글씨는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정정한
모습이다.

  바위에 비스듬히 누운 와운폭(臥雲瀑) 바위글씨 (25x94cm 크기로 행서체)

조현명이 방학동계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처음 파직을 당한 1731년 이후로 여겨진다. 벼슬에
서 떨려나자 아버지가 묻힌 방학동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는데 그 묘역이 바로 전형필가옥 뒷
쪽에 있다. (시루봉로 길가 북쪽 언덕) 그때 묘역과 가까운 이 계곡에 홀딱 반해 별서(別墅)
를 짓고 '귀록계산'과 '와운폭'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글씨를 굳이 조현명과 연관 짓는 것은 그가 시루봉 주변 어딘가에 별서를 지은 적이 있
고, 귀록이란 호를 사용했으며, 그의 '귀록집'과 귀록집 권3에 실린 '와운폭우증가련(臥雲瀑
又贈可憐)','와운폭'이란 시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글씨로 100%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
으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계곡 주변에 있었다는 그의 별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지만 1744년 별
서 후원에 명오정(名吾亭, 귀록정)을 짓고 소기영회(小耆英會) 벗들을 불러 시문을 짓고 술을
마시며 놀았으며, 등산을 좋아하여 종종 도봉산과 우이암(관음봉) 부근 원통사(圓通寺)에 올
라가 몸을 풀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와운폭'이란 시를 남겼는데, 이 와운폭을 두고 당시 함경도 함흥
(咸興)의 유명한 늙은 기생과 시를 몇 수 주고 받았다. 그때 기생에게 보낸 시 1수를 보면 다
음과 같다. 정리하면 즉 인생무상... 인간의 인생은 결국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功名文武前身事 - 문무의 공명은 모두 전생의 일만 같고
歌舞繁華一夢間 - 번화한 가무는 한바탕 꿈결처럼 지나갔다
大笑相看頭似雪 - 크게 웃는다 서로 쳐다보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것을
空山斜日水流閑 - 공산에는 해 기우는데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0-1


▲  장수주말농장 옆 산길

방학동계곡에 깃든 2개의 바위글씨를 둘러보고 방학동사지를 찾고자 도봉산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과 만나는 곳에서 계속 직진하면 너른 밭두렁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케 하는데, 그곳은 장수주말농장으로 도봉동과 방학동에 흔한 주말농장의 하나이다.

푸르게 익어가는 밭을 보니 우울했던 마음이 잠시나마 봄이 된 기분이랄까? 수많은 사람과 회
색빛 빌딩숲,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에서 이렇게 밭두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서울 변두리란 소리이다.


 

♠  도봉산에 숨겨진 옛 절터, 방학동사지(放鶴洞寺址)

▲  방학동사지 2단과 3단 석축

장수주말농장에서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숲속에 묻힌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방학동
주민들이 결성한 장수산악회가 약수터 주변에 운동시설을 닦아놓은 것으로 단순히 보면 도시
뒷산에 널린 운동시설과 공원으로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문제는 그 운동시설이 자리한 곳에
돌로 쌓은 심상치 않은 석축(石築)이 요란하게 널려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석축을 이루고 있
는 돌도 꽤 고색이 깊어보여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음을 살짝 속삭인다.

이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곳은 오래된 절터이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절의 이름과 창건 시기, 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하는 내용이 없어 안타
까울 따름인데, 절터에 남아있는 석축과 맷돌은 마지막 날의 충격이 참 대단했던지 여전히 입
을 굳게 닫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근 계곡에 별서를 지었던 조현명의 기록에도 절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절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덮여있어 지역 이름을 따서 편의상 '방학
동사지'라 부른다.

이 미지의 절터에는 돌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석축 3단이 남아있다. 가장 위에 있는 1단 평탄
지는 길이 60m, 너비 17m로 20~120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5단 정도로 쌓아서 구축했다. 터
가 가장 넓어서 법당(法堂) 같은 건물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단 밑에는 2단을 두
었는데, 평탄지 길이 15m, 너비 5m 이며, 석축 길이는 10m, 높이 1.5m로 15~95cm 크기의 석재
를 6단 정도로 쌓았다. 3단 석축 평탄지는 길이 14m, 너비 6m이다. 석축 앞에는 완만하게 내
리막 경사가 펼쳐져 있고, 바위와 온갖 돌들이 널려 있다.

3단의 석축 외에 맷돌과 우물이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이 2003년에 1,100㎡를 조사하면서 어
골문(魚骨文)과 종선문(縱線文), 사선문, '官'이 새겨진 기와, 청자 양각 접시, 청자와 백자,
기와, 토기 파편 등을 건졌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적어도 고려 후기 이전에 절이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중기나 후기에 홀연히 망한 것으로 보인다.


▲  절터 2단 석축 (석축 서편은 시멘트와 현대 벽돌이 섞여 있음)

절이 망한 이유는 억불정책으로 인한 경영 악화도 있을 것이고, 주변에 도선사(道詵寺)나 천
축사(天竺寺) 등의 쟁쟁한 절도 많았으며, 계곡을 낀 숲속이라 자연재해도 늘 도사리고 있으
니 충분히 상상과 추측은 가능하다.
절이 사라진 이후, 터만 황량하게 전해오다가 1970년대 이후 장수산악회에서 이곳에 체육시설
을 닦으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아직까지도 문화유산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 관리의 손
길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그래도 절터 석축과 맷돌이 간신히 남아있으니 눈썰미가 좀 있다면
금세 이곳이 절터였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  돌들이 헝클어진 절터 1단 석축

방학동사지는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제대로 된 절터 유적으로 그 희소성이 크다. 허나 그 가
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버려져 있으니 실로 안타깝다. 그 외에 북한산(삼
각산) 향림사지(香林寺址), 화곡동(禾谷洞)사지, 대모산(大母山) 절터 등이 희미하게 전하고
있다.


▲  절터에 남은 약수터
옛날 이곳에 있던 절 사람들의 식수로 절과 승려는 온데간데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물은 쏟아져 나와 대자연의 넒은 마음을 보여준다.

▲  형태만 남은 절터 맷돌
어처구니가 바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저 맷돌을 통해 절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공양을 했다.

▲  절터 1단 석축 평탄지에 조성된 무심한 체육시설들

터가 너른 1단 석축에는 법당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있었을 법당과 주변 건물 모습
은 어떠했을까? 법당 좌우에는 삼성각(三聖閣)이나 명부전(冥府殿)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건물 크기도 다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이렇게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름도 전하
지 않는 옛 절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절터를 무심히 짓누르고 있는 체육시설과 의자를 싹 밀어버리고 이곳 일대를 싹 뒤집어 조사
를 벌였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도봉사 영국사(寧國寺)터로 여겨지는 도봉서원터처럼 이곳
의 놀라운 비밀이 드러날지도. 지금까지는 그저 간보는 수준의 조사만 벌였기 때문에 토기나
도자기 파편 정도만 수습된 것이다.

▲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진 1단 석축

▲  맷돌 주변 절터 석축과 주춧돌


▲  절터에 있는 마애불(磨崖佛)과 불상복원비

절터 서쪽 바위에는 체격도 늠름하고 잘생긴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 석불은 옛 방학동사
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동네 주민들이 장수산악회를 조직하면서 그 기념으로 1973년
5월에 마련한 것이다. 절도 아니고 산악회에서 자체적으로 마애불을 만들어 봉안한 점이 이채
로운데, 그들은 이곳이 절터였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마애불은 이곳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으나 기독교 애들이 불상에 해코지를 하며 훼손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자 산악회 회장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1993년 음력 4월에 복원하고 불
상복원비를 세웠다.


▲  가까이서 대한 마애불의 위엄

마애불을 살펴보면 윗쪽에 비를 막아줄 보개(寶蓋) 같은 것이 두툼히 씌워져 있다. 머리와 몸
통에는 각각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텁게 달려있어 그를 윤기나게 빛내주고 있으며, 머
리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정상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감았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다물
어진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피어나 있다. 볼살은 풍만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들의 소리만큼은 정말 잘 들을 것 같다.

불상의 체격은 매우 당당해보이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다. 손에는 보주(寶珠) 같은 것을 들
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었으며, 연꽃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명상에
임한다. 대좌 밑에는 법륜(法輪) 2글자가 굵직하게 쓰여 있다.

* 방학동사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8-1


▲  1단 석축 윗쪽에 쌓여진 석축들
절터에서 나온 온갖 돌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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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계곡에 서린 바위글씨와 절터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방학동길을 타고 무수골
로 넘어가기로 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북한산둘레길19구간)은 무수골에서 정의공주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
의 산길이다. 짙은 숲속을 거니는 그림 같은 숲길로 오르락 내리락이 다소 있을 뿐, 살방한
코스이며, 경사도 그리 각박하지 않다. 북한산둘레길의 서울 구간 상당수는 주택가와 산림 사
이를 오가지만 이 코스는 남쪽 구간 일부를 제외하면 시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은 깊은
산길이며, 북쪽인 무수골에서 도봉옛길(북한산둘레길18구간)로 간판을 바꾸고, 정의공주묘역
에서는 왕실묘역길(북한산둘레길20구간)로 간판을 갈고 우이동으로 흘러간다.

방학동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연산군묘 북쪽에 자리한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안맹담(
安孟聃) 묘역, 무수골, 둘레길을 닦으면서 만든 쌍둥이전망대가 있으며, 둘레길과 좀 거리는
있지만 방학동사지와 귀록계산/와운폭 바위글씨가 있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
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수해(樹海)와 속삭임 ~ 방학동길

▲  쌍둥이전망대

방학동길이 흐르는 무수골 남쪽 언덕에 똑같이 생긴 쇳덩어리 구조 2개로 이루어진 쌍둥이전
망대가 있다. 둘레길을 닦으면서 심어놓은 것으로 회전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 윗쪽에 이르는
데, 이곳에 서면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이 그런데로 시야에 박힌다.


▲  하늘과 보다 가까이, 쌍둥이전망대 윗쪽
꼭대기로 올라가보니 그저 그런 하늘 아래 전망대더라..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방학동 구역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노원구, 수락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안개가 극성이었다.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산줄기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  무수골 직전, 야트막한 고갯길 (방학동길)


 

♠  서울 속의 별천지, 도봉산 무수골 (윗무수골)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서울 속의 산골마을이자 도봉산의 숨겨진 비경이며 도봉산의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는 무
수골은 근심이 없는 계곡이란 뜻이다.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
도 있으며,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초기까지는 대장장이가 많이 살아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
'이라 불렸는데, 그 무쇠골이 영해군(寧海君)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
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15세기에 세종 9번째 아들인 영해군이 무수골 명당자리에 묻힌 이후, 그의 후손(전주이씨)들
이 터를 닦았고, 이후 안동김씨와 함열남궁씨, 진주류씨, 개성이씨 등이 이곳에 무덤을 쓴 인
연으로 들어와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골짜기에 영해군파묘역과 함열남
궁씨묘역, 진주류씨묘역,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과 그의 부
인인 태조의 서장녀(序長女) 의령옹주(義寧翁主, ?~1466) 묘역 등 조선시대 무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방학동길 북쪽 종점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속살이 나온다. 그 전에 성신여대 난향
원 돌담길을 지나야 되는데, 길 좌우로 돌담이 둘러져있어 비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
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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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르게 익은 윗무수골 논

난향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온
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삼삼한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너른 편이다. 마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다.
이들 논두렁이 무수골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
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
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  윗무수골 숲길

논두렁을 지나면 250년 묵은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느티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었다는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내외의 묘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식당을 가로 질러 숲속으로 들어서면 무수골의 오랜 주인인
영해군 묘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반면 느티나무에서 왼쪽으로 가면 자현암, 원통사, 우이암(관음봉)으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
다운 숲길 100선은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인데,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
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을 타고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한여름 피서의 성지로 손색이 없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자현암입구 갈림길 (무수골공원 지킴터)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윗무수골 가장 안쪽에 조그만 비구니 암자인 자현암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첩첩한 산주
름 속에 제대로 묻힌 산사(山寺)로 1943년에 승려 김혜향(金慧香)이 이름이 전하지 않은 절터
에 세웠다.
혜향은 자현(慈賢)의 3대 제자의 하나로 스승의 이름을 절 이름으로 삼았는데, 1991년 요사채
를 새로 짓고 2011년에 범종각을 갖추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범종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이 피어나
지 못한 상태라 문화유산은 없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바깥에 석불과 보살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고, 요사채 옆에 노천 부뚜막을 설치해 나무장작으로 밥과 국을 만든다.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그런 부뚜막을 갖추고 있으니 밥맛 하나는 좋을 것 같다.

* 자현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6-2 (도봉로169길 500 ☎ 02-954-2578)

▲  솥뚜껑도 갖춘 부뚜막

▲  대웅전(大雄殿)과 7층석탑

▲  석불과 김혜향 공로비(오른쪽 비석)

▲  칠성과 산신, 독성이 봉안된 삼성각


▲  정헌대부(正憲大夫) 남궁숙 신도비(神道碑, 왼쪽에 보이는 비석)와
후손들이 사는 집과 재실


자현암 못미쳐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남쪽 길로 조금 가면 마치 먼 지방의 깊은 산골에 들어
선 듯, 숲에 감싸인 조촐한 공간이 나온다. 그야말로 숲과 하늘만 보이는 이런 두메산골에 2
채의 집과 너른 텃밭이 펼쳐져 있는데, 한쪽에 근래에 지어진 남궁숙(南宮淑, 1491~1553) 신
도비가 있다.
신도비 뒷쪽 숲에는 남궁숙과 그의 자손들이 묻힌 함열남궁씨 제1묘역이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이후에 조성된 묘역으로 그 입구에 철책과 철문을 둘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도 아니고, 묘역도 다소 젊어져서 철문을 뚫으면서까지 살필 생각은 없
다. 그냥 여기서 길을 접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신도비 주위로 후손이 사는 집과 재실(齋室)
이 있으며, 주변 텃밭은 주말농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함열남궁씨는 무수골과 도봉동 토박이의 일원으로 그들의 묘역은 이곳 외에 무수골 하류인 도
봉초교 뒷쪽(함열남궁씨 제2묘역)에도 있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에 벌인 도봉산 동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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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3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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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강화 교동도 화개산 


~~~~~  강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멍하게 보이는 곳이 북한 땅)

화개약수 화개산 한증막

▲  화개약수

▲  화개산 한증막


 

♠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오르기 (봉수대, 화개산 정상)

▲  읍내리에서 바라본 화개산

여름 제국(帝國)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8월 광복절에 강화도와 황해도(黃海道) 사이에 자리
한 교동도를 찾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별다른 정체 없이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강화도는 꿀
명소가 많다 보니 주말과 휴일에 나들이, 답사 수요가 폭발적이라 교통정체를 피하고자 아침
부터 부지런을 떤 것이다.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의 발인 강화군내버스 18번(1일 11회)을 타고 송해면과 하점면, 인화리
검문소, 교동대교를 지나 황해도를 코앞에 둔 교동도(喬桐島)의 품으로 들어선다. <일반 차량
은 인화리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으나 강화군내버스 18번 승객은 받지 않음, 허나 특수 상황에
는 버스 승객도 검문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교동도 방문객은 무조건 신분증을 지참 요망>

교동도에 들어서 읍내리에 있는 교동읍성(喬桐邑城)과 교동향교(喬桐鄕校), 화개산 남쪽 자락
에 안긴 화개사(華蓋寺)를 둘러보고 화개사 옆 산길을 따라 화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교동
읍성과 교동향교, 화개사 부분은 이곳을 클릭한다)


▲  화개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교동평야

화개산(華蓋山, 269m)은 교동도의 대표 지붕이자 이곳에서 가장 큰 뫼이다. 교동도 동부에 홀
로 솟아있어 교동도의 대부분 지역과 강화도와 석모도, 서검도, 미법도 그리고 바다 북쪽 너
머로 황해도와 개성(開城) 땅까지 속시원히 시야에 들어와 일품 조망을 자랑한다. 이렇듯 북
녘까지 거침없이 내닫는 조망 덕에 이북 실향민들이 자주 찾아와 코앞에 보이는 북쪽을 바라
보며 넋두리를 하거나 망향제(望鄕祭)를 지내기도 했다.

화개산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성혈바위를 비롯해 화개산성, 봉수대, 효자묘, 화개사, 교동향
교, 연산군유배지, 화개약수 등 많은 문화유산과 명소가 깃들여져 있으며, 고려 후기 삼은(三
隱)의 하나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산을 방문하여
'바닷속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 위 옛 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네. 제사 지낸
후 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扶蘇山) 빛이 더욱 푸르구나'

시를 지었다. 그는 화개사에서 독서를 한 적이 있으니 그때 이 시를 지은 모양이다.

교동대교 개통 전에는 거의 교동도와 실향민들의 산으로 숨어있었으나 2014년 7월 다리가 뚫
리면서 등산객과 나들이객 수요가 크게 늘어 강화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화개산 등산은 화개사나 교동면사무소(대룡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다. 화개사를 기준으로
봉수대, 정상, 성혈바위, 북벽망루터, 화개산성 북쪽 성곽, 화개약수, 한증막터를 거쳐 교동
면사무소(대룡리)로 내려가면 되는데, 이 코스는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도 다을새길)의 일부
이기도 하며, 화개약수 주변에 효자묘가, 한증막터 근처에 연산군유배지가 있다. 화개사에서
정상까지는 약 30분 정도, 정상을 찍고 교동면사무소까지는 1시간 30분 내외로 걸린다.


▲  화개산 봉수대(烽燧臺) - 강화군 향토유적 29호

화개사에서 20~25분 정도 오르면 주변이 확 트인 능선에 이르고 곧바로 화개산 봉수대가 마중
을 나온다.

화개산 봉수대는 정상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사방이 확 트여있어 봉수대 자리로는 아주 명당
이다. 현재 가로 4.5m, 세로 7.2m의 석축만 남아있는데,, 불을 피우고 연기를 휘날리던 봉수
시설은 장대한 세월에 녹아 없어졌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여기서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이 지척이라 그 중요성이 매우 컸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는 남쪽으로 강화도 덕산봉수대에서 봉화를 받아 동쪽의 강화도 봉천산(奉天山) 봉수대
로 연락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땅에 수많은 봉수대(봉화대)가 있었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남은 봉수대는 거의 없다. 고
된 세월에 지쳐 우중층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봉수대, 내 나이의 수십 배에 달하는 세월
을 머금고 있는 봉수대 돌은 저렇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으나 나란 존재는 그들의 1% 인생
도 되지 못하니 참 인생은 부질 없는 것 같다.


▲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미법도(彌法島)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봉수대에서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능선길은 나무가 제법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과 숨바꼭질을 하며 움직이기에 좋다.

▲  화개산 정상(269m)

봉수대에서 5~6분 정도 가면 교동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화개산 정상에 이른다. 교동도에
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제일 높은 곳으로 6각형 정자와 초소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지는데, 안개와 구름을 제외하면 시야를
방해하는 존재는 그 어느 것도 없다. 허나 여기서는 북한 땅까지 바라보여 산이 높고 조망이
좋은 만큼 남북분단의 비애도 크게 만든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교동도 서부와 대룡리, 드넓은 교동평야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교동평야를 기름지게 적셔주는 고구저수지가 밑에 보이고, 바다 너머로 그 말로만 듣던 황해
도 연백군(延白郡)과 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철없던 어린 시절(1980~90년대)에는 어른이 되기 전에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어른을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통일은 커녕 아직까지도 이북 땅에 발도 들일 수가 없다.
교동도와 황해도는 3~4km로 매우 가까운 거리지만 그 체감거리는 가히 1억 광년 그 이상으로
문제는 그 거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고구저수지와 교동도 북부를 비롯해 바다 너머로 황해도 연백/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사진 가운데 부분), 바다 너머로 길게 누운
석모도(席毛島)와 기장섬(오른쪽 섬)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⑤
확대해서 바라본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 지역
(사진 가운데 부분에 교동읍성이 있음)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⑥ 석모도와 상주산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⑦
석모도 북부 상주산과 강화도 서부 지역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⑧
읍내리와 남산포(사진 가운데 산), 석모도 북서부와 기장섬, 미법도, 서검도 등

           ◀  화개산 정상 표석

정상에 지어진 정자에는 산꾼들이 자리를 펴
쉬고 있었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어디가
북한 땅인가?','여기가 북한 땅인가?' 따지며
조망을 즐긴다.
정상의 자리란 오래 있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10분 정도 정상을 누리다가 동쪽 능선으
로 철수했다.


 

♠  화개산 내려가기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

▲  성혈(星穴)바위

정상에서 서쪽 능선으로 가면 봉수대, 화개사, 효자묘(중간 갈림길에서 북쪽), 대룡리로 이어
지고, 동쪽 능선으로 가면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로 이어진다. 성혈바위를 지나면 길
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이는데, 화개약수에서 효자묘로 가는 길이 있으며, 효자묘에서 바로 올
라가면 화개사에서 올라온 길과 만난다.

동쪽 능선으로 들어서면 얼마 안가서 성혈바위라 불리는 납작한 바위가 발길을 잡는다. 하얀
금줄이 쳐진 그 안에 얕은 구멍이 여럿 찍힌 성혈바위가 있는데, 성혈이란 바위구멍 그림으로
청동기시대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성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거나 풍요, 다산(多産), 자
연 등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이나 제사 현장으로 보고 있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여기서 제사를
지내거나 주술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성혈 흔적은 자연산 바위 외에도 고인돌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  위에서 바라본 성혈바위
바위 오른쪽에 얕게 파인 동그란 자국들이 성혈이다.

▲  성혈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교동도 읍내리 동부와 석모도 상주산, 강화도 서부가 바라보인다.

▲  북벽 망루(望樓)터

성혈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인다. 그래서 정상 외에는 보이지 않던 북쪽의
산하가 나의 시야를 점유하게 되었고 그런 길을 조금 내려가면 북쪽을 향한 곳에 북벽망루터
가 허전하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북벽망루는 화개산에 두룬 화개산성 북쪽 성벽에 세운 망루로 산성의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한다. 산성에서 2개의 망루터가 발견되었는데, 다른 하나는 여기서 북
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다들 망루를 받쳐들던 돌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황해도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고구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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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도 동북부 (교동대교 방면)
바다 너머로 강화도 양사면 지역이 희미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화개산성(華蓋山城) - 강화군 향토유적 30호

북벽망루를 지나면 오른쪽(북쪽) 숲속에 초췌한 모습의 화개산성이 모습을 비춘다. 화개산의
듬직한 갑옷인 화개산성은 내성(1,013m)과 외성(1,155m)으로 이루어진 산성(山城)으로 총 길
이는 약 2,168m이다.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닦여졌는데, 이 산성이 언제 축성되었
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고려 때 지어진 봉수대를 통해 고려 때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553년에 최세운이 성을 증축했으며, 1591년 외성을 철거하여 교동읍성(지금
의 교동읍성과는 다름)을 쌓았고, 1737년 개축하여 군창(軍倉)을 두었다.

허나 19세기 이후 성은 버려졌고, 관리의 손길이 떠난 산성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의 고약한
심술이 이어지면서 성곽 대부분이 분해되어 겨우 북벽망루와 화개약수 주변, 남쪽 산자락(화
개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  화개산의 젖, 화개약수

화개산성 안내문을 지나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 밑에 자리한 화개약수가 마중을 한다. 교동향
교에 있는 성전약수와 더불어 화개산이 속세에 베푼 약수로 푸른 이끼가 짙게 뒤덮힌 돌에서
물이 쏟아진다. (성전약수보다 물맛이 좋음) 산에 왔으니 산의 마음도 확인할 겸, 약수를 한
모금 마셔야 되겠지.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갈증과 체내(體內)
의 체증이 싹 가시는 것 같다.
약수터에는 나무로 보호각을 만들었으며, 기둥에는 화개약수를 찬양하는 시가 적혀있으니 읊
어보면 다음과 같다.


▲  오랜 세월을 머금은 갸륵한 맛, 화개약수

'화개약수'  석천(石泉) 김흥기

얼마나 품었길래 그 먼길 돌아 졸졸 쉼없이 흐르는가
수없이 오갔을 세기의 지층을 밟고 귀뚜리 우는 밤에도
산주름 굽이치는 돌틈을 비집고 또르르 굴려오는 은빛 맨발의 낙수
허기진 산비탈 길에서 적막을 견뎌온 너, 천년 비밀의 갸륵한 맛

▲  효자묘(孝子墓) - 실상은 효자 아버지의 묘라고 함

화개약수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직진하면 한증막과 교동면사무소로 이어지고, 왼쪽 오르
막길을 오르면 낮은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진 효자묘가 나온다. 이 무덤을 지나 뒷쪽(남쪽)
산길을 오르면 화개사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난다.

효자묘는 야트막한 봉분과 낮은 상석(床石)이 전부인 조그만 무덤이다. 무덤의 이름도 참 모
범적이라 부모들이 딱 좋아할만한 이름인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전하는 것이 없고 그저 막연
하게 효자묘라 불리고 있으니 그 유래는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안내문에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고 나오나 전설
내용은 거의 조선시대 스타일임> 인근 청주골에 병환중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신씨란 젊은이
가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으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교동현 군사로 징발된 부잣집 아들을 대신
하여 군대에 들어갔다. 매일 부친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댓가로 대신 들어간 것이다.
 
신씨는 화개산성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를 묻고자 산 밑 고읍마을로
을 옮겼다. 마침 전쟁(또는 장거리 훈련)에 나갈 일이 있어 무탈하게 돌아오면 산성 북루(北
樓)에 해가 지기 전까지 하얀 적삼을 달기로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무탈하게 돌아온 신씨는 약속대로 북루에 적삼을 달려고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수장(守
長)이 적삼을 빼앗고 관아로 잡아갔다. 당시 문루에 적삼 등의 깃발을 다는 것은 다른 성과
병사들에게 일종의 연락을 취하기 위함인데 수장의 허가도 없이 달려고 하니 당연히 오해를
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약속된 시간까지 적삼은 달리지 못했고, 그 사연을 알 도리가 없는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판단해 성급하게 목숨을 끊고 만다.
신씨를 추궁하던 수장은 그 사연을 알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시신을 산성 안에 안장하고 3년
시묘를 하며 군복무를 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신씨의 효행을 기리고자 장수와 병사들이 매일
아침 무덤에 참배를 했고 참배 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무덤은 효자가
아닌 효자의 아버지 무덤인 것이다. 허나 효자 아버지 무덤이라 하기에는 이름이 기니 효자
신씨를 기릴 겸 효자묘라고 한 것 같다.


 

♠  화개산 마무리

▲  그림처럼 펼쳐진 화개산 서쪽 숲길 (효자묘~한증막 구간)

효자묘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숲길에 취하며 대룡리(교동면사무소)로 내려갔다. 숲이 매우 삼
삼해 제아무리 세상을 녹일 기세인 여름 햇살이라 한들 여기서는 어림도 없다.


▲  빽빽하게 우거진 화개산 숲길

▲  숲길에 달아놓은 조촐한 문
둘레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둘레길 스타일의 문이다.

▲  화개산 한증막(汗蒸幕)

숲길을 내려가니 아주 단단하게 지어진 커다란 돌집이 마중을 나온다. 생김새를 보니 오래된
돌무덤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쪽에 문까지 나있어 마치 북극 사람들이 살던 이글루의 돌버전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 뜻밖에도 옛날 사람들이 이용하던 한증막의 흔적이다.

한증막이란 오늘날 우리 목욕 문화의 일원인 찜질방의 옛 형태로 보면 된다. 이곳 한증막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황토를 밑에 깔고 위에 돌을 쌓아 반 동그라미 모습을 자아냈다.
둘레는 15m, 직경 4.5m, 높이 3m로 인근 냇물에 한증으로 푹 삶은 몸을 식힐 수 있도록 돌을
깐 자리가 남아있다.
돌한증막 작동 원리는 우선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돌집 안에 불을 지펴 온도를 높인 다음
그 재를 꺼낸다. 그런 다음 무성한 생솔가지를 안에 넣어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충분히 낸 다음, 옆 냇물에서 몸을 식힌다. 그렇게 한증(汗蒸)을 반복하고 마지막은 목욕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지금의 찜질방과 같은 방식인 것이다.

이 한증막은 1970년대까지 절찬리에 사용되었으며, 교동도에는 이곳 외에도 수정산과 여러 곳
에 한증막을 두어 섬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지금은 이곳만 남아있다. 솔직히 한증막 유적은 처
음 보는지라 참 생소하기 그지없는데, 이런 한증막 유적은 이 땅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옛
사람들의 목욕/찜질 문화를 귀뜀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국가 민속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전혀 손색은 없어보인다. 그렇게 해야 이 한증막도 우리 곁에 더 오래 있을 것이 아
닌가?

* 한증막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233


▲  냇가 옆 숲속에 터를 닦은 한증막

▲  앞에서 바라본 한증막

▲  한증으로 뜨거워진 몸을 식히던 현장
(냇가에 있음)


▲  한증막 내부로 들어가는 네모난 문

증막 문이 작아서 완전 엎드려서 들어가야 된다. 내부는 옛 무덤의 석실(石室) 같은 모습으
로 너른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 마른 가지 등을 태워 내부를 뜨겁게 달군 다음, 재를 치우고
생솔가지를 바닥에 깔아 한증(찜질)을 하였다.
안에 들어가볼까 했으나 내가 들어가면 자칫 무너질까 겁나서 이렇게 보는 선에서 욕심을 버
렸다. 게다가 버려진지 오래된 한증막이고 한여름이니 안에는 벌레들도 무지 많을 것이다.


▲  연산군유배지로 인도하는 숲길

한증막을 둘러보고 조금 내려가다보면 연산군유배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조선의 제
10대 군주인 연산군(燕山君)이 교동도로 유배를 와서 죽었으니 그 유배처가 남아있을 것이고
그 현장이 이 부근에 있던 모양이다.


▲  연산군유배지 표석 (2014년)

연산군유배지 표석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하얀 피부를
지녔다.
이 땅의 사람들은 연산군(1476~1506)하면 다들 폭군, 신하들 때려죽이기, 불효자, 할머니 죽
인 패륜아, 흥청망청, 기생 잡기 등 그야말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는 우리
가 생각한 것 외로 그렇게 쓰레기 군주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과 폐비윤씨의 아들로 성종의 장자(長子)이다. 폐비윤씨
가 한 성깔 하던 여인이라 성종과 자주 마찰이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종의 어머
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와 성종에 의해 폐비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고, 1482년 사사(賜死)
되고 만다. 성종은 이 사실을 아들이 알까 두려워 신하들에게 100년 동안 윤씨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명했다.

연산군은 왕자 시절부터 말썽을 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그는 10년 이상 허침(
許琛)과 조지서(趙之瑞)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시문(詩文)과 음악, 악기에 매우 능했으며,
많은 시를 남겼다. 또한 효성도 지극해 부왕 성종이 중병으로 눕자 밤을 새며 간호했으며, 자
신의 생일 하례를 취소시켰다. 또한 1494년 부왕인 성종이 승하하자 삼사(三司)의 반대를 뿌
리치고 부왕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도 했다.

1494년 왕위에 오르자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해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여 국방에 신경을 썼고,
두만강(豆滿江)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해 투항한 여진족에게 토지와 상급
을 내렸다. 또한 변방의 안정을 위해 백성들의 이주를 독려했다.
종묘 제도를 정비하고 사창과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를 안정시켜 굶주리는 백성을 구
제했으며, 호적식년(戶籍式年)을 개정해 백성의 불편을 덜었다. 그리고 '경상우도지도(慶尙右
道地圖)','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지리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
帝王詩文雜著)' 을 편찬해 제왕 수업에 귀감으로 삼았다.
또한 성종 이후 계속된 태평성대로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치향락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자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히 단속을 했으며, 전국에 암행어사(暗
行御史)를 풀어 지방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문신(文臣
)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다시 실시해 학
문 발달에 크게 신경을 썼다.

연산군은 신하의 눈치를 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왕권 강화를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
서 그 유명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가 터졌고, 왕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이들이 많이 피를 보았다. 또한 어머니 윤씨의 사망 이유를 알게 되면서 다
소 이성을 잃게 된다.
이렇게 그의 패도정치(覇道政治)가 나날이 심해지자 왕을 갈아야 된다는 무리들이 조금씩 고
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바로 연산군과 가까웠던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이
었다. 성희안은 금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왕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고, 박원종
은 확실치는 않지만 연산군이 그의 누이를 건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은 앙심을
품고 홍경주(洪景舟)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모의했고,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일당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왕은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반란군의 침입에 왕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런 말
도 못했다고 하며, 결국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반란군에게 옥새를 내주고 말았다.

반란군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계비)의 허락을 구해 왕을 동궁(東宮)에 가두고 그녀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데려와 익선관(翼善冠)을 쓴 상태로 왕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이다. 이 사건을 세상에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부른다.

동궁에 유폐된 연산군은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을 통해 궁밖으로 추방되어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 유배된지 2달 뒤인 11월 역질(疫疾)에 걸리자 중종은 약을 보냈는데, 어찌된 영
문인지 불과 며칠 만에 갑자기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기록에는 단순히 병
으로 죽었다고 나와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없는데, 이상한 것은 한겨울에 역질이란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이 보냈다는 약도 상당히 의심쩍다. 그래서 병사가 아닌 독살되었
다는 설이 강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연산군은 교동도에 매장되었으며, 1512년 12월 부인 신씨가 남편의 무덤을
자신의 외조부 땅(서울 방학동)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이 이를 허락해 1513년 2월
왕자의 예로 이장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넣었으나 그 요구는 거절당했다
고 한다. (연산군묘 제사는 처가집인 거창신씨 집안에서 지내고 있음)

그는 왕이었음에도 그 흔한 묘호(廟號)도 받지 못했으며, 시호(諡號)도 없다. 그냥 왕자 시절
의 칭호인 연산군을 그대로 썼다. 김정국(金正國)과 유숭조(柳崇祖) 등은 그에게 시호를 올려
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제사를 받들 것을 건의했으나 중종과 반정파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를 두고 이긍익(李肯翊)은 그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정국 등을
높이 평가하며, 연산군의 제사가 끊긴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 기록했다.

이렇게 죽어서도 왕의 예우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종묘(宗廟)에 배향되
지도 못했다. 또한 무덤도 능(陵)이 아닌 묘(墓)로 사대부의 무덤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의
사초는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로 격하되었다.
이렇듯 중종과 반정파에게 철저히 매장되고 왜곡되었으며, 명종(明宗)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
면서 연산군 3글자는 부정적인 의미이자 폭군의 대명사가 완전히 찍히게 된다. 사림파는 연산
군 때 죽은 사림 계열 사람들, 즉 자신의 선배들을 의로운 인물로 추앙했고, 연산군과 그 측
근은 죄다 쓰레기로 기록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계속 주입시켰다. 이는 패배자에게 인정을
두지 않는 역사의 매정한 현실이다.
승리자는 항상 영광스럽게 포장이 되지만 패배자는 아무리 공적이 뛰어나도 승리자의 구미에
따라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된다. 연산군은 바로 역사의 패배자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산군이 유배살이를 했던 현장은 3곳이 비정되고 있는데, 이곳과 교동읍성 부근, 교동관아터
부근 등이다. 허나 어느 곳이 정답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 교동읍성 부근과
교동관아터 주변은 유배지를 알리는 비석이 있고, 내가 찾은 화개산 유배지는 표석이 있어 서
로 연산군 유배지임을 내세운다. (근래에 그 시절을 재현한 초가와 연산군 인형 등을 설치했
음)


▲  화개산 서쪽 산길 (대룡리)

▲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연산군유배지를 둘러보고 대룡리로 내려갔다. 나를 진하게 감싸던 숲길은 어느덧 끝나고 주변
이 확 트인 평탄한 흙길이 나를 맞이해 교동면사무소까지 쭉 인도한다.
교동면사무소에는 큼지막한 화개산 안내도가 있는데, 안내도를 보니 화개산을 남과 동, 북,
서로 완전히 1바퀴를 돌았다.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로 강화나들길 9코스인 교동도 다을새길
과 코스가 겹친다. 다을새길은 월선포에서 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리시장~
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두루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도보길이다.

교동면사무소를 나오면 바로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에는 대룡시장이
있는데 시간이 흐르다가 제대로 기절한 듯, 1970~80년대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시
장이라고 하나 가게와 음식점이 여럿 있는 짧은 거리에 불과하다.

시장 인근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목마름과 배고픔을 조금 해소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군내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에 부착된 시간표를 보니 30분 뒤에 월선포를 출발한다고 한다. 월선
포에서 대룡리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해는 아직도 여전하나 시간은 이미 17시가 넘었고, 몸도 다소 지친 상태라 더 이상 섬을 둘러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그 지루한 시간, 허나 한번 밖에 없는 그 시간을 억지로 죽여
가며 정류장에 죽치고 앉았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교동도와의 인연은 또 있을 것
이다. 이번에 못가본 곳은 그때 인연을 지으면 될 것이요. 인연이 닿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며 억지로 인연 짓는 것도 딱히 좋지는 못하다.

시간이 되자 강화군내버스 18번이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친구를 만난 양 얼마나 반
갑던지. 그를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교동도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루 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교동도
가 NLL의 동쪽 시작점, 민통선 구역이란 딱지를 떼었으면 좋겠다.

* 화개산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대룡리, 읍내리, 상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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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상큼한 동쪽 지붕, 아차산~서울둘레길 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아차산 봄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우미내계곡)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봄나들이 '


▲  아차산 생태공원 소나무숲

▲  아차산성

▲  온달샘 석탑


 

♠  한강변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 상부암 석보살입상(上浮庵 石菩薩立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0호

▲  상부암 석불의 거처인 상부관음전(上浮觀音殿)

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聖地)이자 야간 등산의 성지로 추앙받는 아차산(峨嵯山,
295m)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1~2달에 1번꼴로 안기고 있다. 그렇게나 자주 안기는 아차
산이지만 며칠도 안가서 아차산 앓이가 도져 그곳에 깃든 미답지(未踏地)를 1개라도 지울 겸
그의 품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바로 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광장동 구석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을 먼저 찾았다.

키다리 아파트와 오피스텔로 즐비한 광장동(廣壯洞) 동쪽 구석 한강변에 늙은 석불 하나가 조
용히 숨어있다. 없는 듯 자리한 그에게 세상이 달아준 이름은 '상부암 석보살입상' 8자. (예
전에는 '상부암 석불입상' 7자였음)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빌딩으로 가득하여 여유 공간도 없
을 것 같은 곳에 1칸짜리 기와집을 지닌 고색의 석불이 숨어 있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
담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석불 이름에 '상부암(上浮庵)' 3자가 들어가 있어 '상부암'이란 암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허나 그런 절은 없으며 그 석불이 떠내려왔다는
뜻에는 지역 사람들이 '상부암'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니 석불 자체가 그냥 상부암이란
노천 암자이다. 
현재는 옆에 있는 광장노인정에서 '상부관음전'이란 맞배지붕 기와집을 씌우고 주변을 정비하
여 석불을 지키고 있다.

▲  상부암 석불로 인도하는 길
(광장노인정 옆)

▲  잔디와 봄꽃이 잔잔히 입혀진
상부암 석불 뜨락과 쉼터


상부암 석불은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 광장동 100번지 막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서쪽과 남쪽
은 키다리 빌딩에 막혀 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막혀있는데, 그 위에 광나루역과 구리시를 잇
는 아차산로가 닦여져 차량들의 굉음이 종일 귀를 때려댄다. 그나마 한강이 있는 동쪽이 조금
시야가 트여있지만 그마저도 강변북로 아차산대교가 시야를 절반 이상 가리고 있어 그야말로
개발의 산물에 포위된 궁색한 처지가 되버렸다.
바로 그런 장소에 있으니 그 존재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서울에 대
해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본인 역시 그의 존재를 안 것은 불과 몇 년 전. 그와의 숨바꼭질에
서 이제서야 술래를 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석불은 언제 생겼을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670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광나루를 건너는 사람들과 주민들의 안녕을 빌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석불의 나이를
측정해보니 대략 후삼국시대나 고려 초(9세기 후반~10세기 초)로 가늠되어 의상대사 설은 신
뢰성이 없다. 다만 옛날에 큰 홍수로 한강을 타고 이곳까지 떠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
으며, 그로 인해 상부암이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 솔직히 홍수로 불상이나 석불이 떠내려가
새로운 곳에 안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 떠내려왔다는 설은 그나마 신뢰가 간다.

이곳에 새로 자리를 잡은 석불은 오랜 세월 광나루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지역 사람들의 보호
와 정성이 대단했다. 원래는 지금보다 밑에 있었으나 빌딩이 들어서면서 1989년 현재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이때 석축을 쌓고 터를 다져서 그의 거처와 조촐한 쉼터를 닦았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것으로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됨)이 두텁게 발라져 하얀 피부의 백불(白佛)로 있었는데, 근래 호분이 벗겨지면서 마치 번데
기에서 벗어난 듯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수백 년 묵은 석불로 짐작을 하고 그를
살펴봤는데 무려 하나의 1,000년을 지낸 아주 늙은 석불이었다.


▲  날씬한 몸매의 상부암 석보살입상

석불은 키가 큰 늘씬한 몸매로 얼굴과 머리가 좀 지나치게 크다.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
無見頂相, 육계)이 두텁게 솟아 있으며, 머리칼 부분이 너무 넓다. 좁은 이마 밑에는 구부러
진 눈썹과 살짝 뜬 눈, 코가 무늬만 남아있으며, 다물어진 입술에는 조금이나마 미소가 피어
있다. 얼굴 살은 조금 있어 보이며, 두 귀는 길쭉하여 중생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목은 좀 두터워보이며, 목 부분이 절단되어 있던 것을 다시 붙였다. 윗도리는 짧지만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이고, 밑도리는 두 다리를 분명하게 나타내어 양감이 뚜렷하다. 몸에 걸친 법
의(法衣)는 양팔을 돌아 계단식 옷주름을 보이며, 가슴 앞에서 'U'자형을 이루다가 다리 사이
로 내려와서 다시 'U'자형의 주름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식 착의법을 하고 있다. 이
는 신라 후기와 후삼국시대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법으로 이를 통해 그 시절 조성되었음
을 대놓고 귀뜀해준다. 또한 석불이 딛고 선 대좌(臺座) 역시 그 시절 연화문(蓮花紋)과 유사
한 것으로 여겨진다.
부분적으로 손상된 부분이 있으나 상태는 거의 괜찮으며, 서울 땅에서 거의 유일한 후삼국시
대 석불로 그 희소가치가 인정되어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석불은 반듯하게 서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그가 한강에서 떠내려왔으니
원래 있었던 동쪽 어딘가를 바라보라는 뜻에서
그렇게 방향을 잡은 것 같다.
건물 또한 그를 따라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건
물 이름은 '상부관음전'으로 지역 사람들이 그
를 관세음보살로 애지중지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석불 뒷쪽은 벽으로 막혀있고, 나머지 3면 또
한 붉은 창살이 배치되어 마치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의 보호도 좋지만 너무 가둬놓은
인상이라 정면 만이라도 창살을 제거하여 중생
들과 보다 가까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  옆에서 바라본 상부암 석불


▲  희미하게 천 년의 미소를 던지는 상부암 석불의 얼굴
신체 비례는 그리 맞지는 않는다. 머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  상부관음전 현판의 위엄

▲  상부암 석불 부근에 자리한 석불좌상

석불이 홀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지역 사람들이 별도의 석불좌상을 옆에 갖다두었다.
그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나 몸통과 그의 대좌에 고색의 때가 조금 깃들여진 것으로 보
아서 20세기 초나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가 잘려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들어서 붙였는데, 몸통과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서로가 익
숙치가 않다. 그의 표정은 나이 지긋한 노공(老公)이 싱글벙글 웃는 듯 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100


▲  녹음이 짙은 워커힐로 (아차산생태공원 방향)

상부암 석보살입상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넘어가고자 워커힐아파트를 통해 워커힐로로 올라
갔다.
2차선 크기의 워커힐로는 서울 장안의 주요 벚꽃 명소로 4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이 순백(純白)의 봄 향연을 펼친다. 길 주변은 나무로 가득해 거의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5~6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이 아름다운 연못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  아차산 숲이 그늘을 드리우는 워커힐로


 

♠  아차산 남쪽 끝에 그림처럼 자리한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생태공원 연못 (습지원)

아차산의 신세대 명소인 아차산생태공원은 도심 속의 싱그러운 생태공원으로 홍련봉(紅蓮峰)
과 더불어 아차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1996~2001년) 계획에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29.5억원
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00년부터 토지 보상과 설계 용역, 공사 다지기를 거쳐 2001년 12
월 31일 만남의 광장이 우선 준공되었으며, 2002년 3월 29일 생태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 면적은 23,450㎡로 생태공원(자생식물원, 나비정원, 습지원)과 만남의 광장, 황톳길과
지압보도, 소나무숲, 생태자료실, 생태관찰로와 자생관찰로, 관상용 논, 재배용 밭, 아차산성
과 보루터에서 발견된 고구려 흔적과 유물을 머금고 있는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을 갖추고 있
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인어공주상 등도 갖추어 공원의 풍치를 돋구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태체험학습 프로그램(조류탐험교실과 곤충교실, 식물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원을 닦은 이후 고라니와 꿩, 해오라기, 쇠박새는 물론 멸종위기종인 맹
꽁이까지 종종 관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 땅에서 처음으로 금개구리까지 목격되어 이곳의
생태계가 적지 않게 살아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무늬만 생태공원이 아닌 진정한 생태공
원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원에는 의자와 쉼터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으며, 숲이 짙고 그늘의 질이 우수해 잠시 시름과
더위를 잊기에 좋다. 또한 아차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이곳을 기점으로 삼아 등산
/답사에 임하면 편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70 (영화사로 145 ☎ 02-450-1192)
* 아차산생태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습지원 사진을 클릭한다.


▲  동쪽에서 바라본 습지원(濕地園)

아차산생태공원의 백미(白眉)이자 아름다운 거울인 습지원(연못)은 그 이름 그대로 습지식물
의 삶터이다. 연못 한복판에 나무로 다진 다리가 걸쳐져 있어 시각의 농간으로 2개의 연못으
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는 1개로 주변 나무와 봄꽃, 지나가는 달과 구름까지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동쪽 못에는 동화의 단골 모델인 인어공주상이
고운 맵시를 드러내며 연못의 운치를 한껏 띄운다.

▲  습지원 동쪽 못

▲  습지원 서쪽 못


▲  습지원의 구수한 양념, 인어공주 누님상

인어공주는 윗도리는 여자 사람, 아랫도리는 물고기로 서양 동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잘빠진 몸매와 아름다운 가슴을 모두 드러낸 채, 바위에 걸터앉아 두툼한 꼬랑지를 흔드는 모
습이 은근 매혹적이라 정처가 없는 내 침침한 두 눈이 자꾸 그에게로 쏠린다. 비록 하얀 피부
가 전부이나 실감나게 색을 입힌다면 지금보다 감동이 더 할 것이다.
그는 습지원을 닦으면서 갖다둔 조각품일 뿐, 아차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곳이 어린이의 생
태학습 체험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순수함의 비중이 아직까지는 높을 그들의 눈높이와 공간의
성격을 배려하여 배치했다.


▲  무거운 동전은 이곳으로?? 연못에 동전을 버리는 공간
인어공주 누님이 바라보는 방향에 동전을 받아먹는 동그란 돌통이 있다. 그곳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나 뭐라나? 그렇게 모인 동전은 광진구청에서
수거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쓴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  생태공원 동쪽 산책로 (생태자료실 동쪽)

▲  아직은 잡초만 무성한 습지원 서쪽 나비정원

▲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아차산 생태자료실 서쪽에는 아차산의 고구려 유물과 유적을 다룬 역사문화홍보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차산은 좁게는 서울과 구리 지역, 넓게는 미수복지를 제외한 이 땅에서 가장 많은 고
구려 유적을 품은 현장이라 고구려가 아차산에 새겨놓은 영광스런 현장들을 집대성하고 이곳
의 역사적 중요성을 천하에 널리 알릴 공간이 절실했다. 하여 광진구에서 1.45억원의 돈을 들
여 2009년 5월에 조촐하게 그 공간을 마련했다.

아차산성을 비롯해 아차산과 용마산, 홍련봉 일대 보루 유적과 이들이 뱉은 유물 일부를 전시
, 소개하고 있으며, 비록 생태공원에 얹혀있는 미약한 신세이나 아차산과 광대했던 고구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지대하여 장차 크게 될 싹수를 가지고 있다. 미수복지(북한, 만주, 요동,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를 제외한 이 땅에서 고구려를 전문으로 다루는 박물관이나 공간
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홍보관 내부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물고 있으며, 고구려 귀족의 복장을 입는 체험코너도 있
다. 아직까지는 전시 유물이 꽤 빈약하고, 아차산 일대로 국한된 점은 어쩔 수 없으나 4~5세
기 고구려 강역도가 너무 작게 나와있어 이 땅에 뿌리깊게 박힌 쓰레기 같은 식민사관의 잔재
가 여전함에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아차산성과 보루 유적이 목적이되 초행길이라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을 우선 둘러보고 답사
에 임하는 것도 좋다. 홍보관이 작기 때문에 아무리 길어봐야 10~20분 내외면 충분하다. (해
설시간은 제외) 그리고 아직까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아차산성 내부를 둘러보고 싶다면 이
곳에 문의를 해보기 바란다.

*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관람정보 : 9시~18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광진구의 역사와 아차산의 고구려 유적을 머금은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내부


▲  홍련봉(紅蓮峰) 1,2보루 조감도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홍련봉(125m) 정상에는 2개의 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5~6세
기에 조성된 것으로 한강과 가까워 아차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가마터
와 저수시설, 배수시설 등이 나왔다. 몇 년에 걸쳐 계속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는 다 풀리지 않았다.


▲  홍련봉과 아차산, 용마산 보루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와 기와조각 ①

아차산을 점령한 신라는 산성과 보루를 손질하여 계속 사용했다. 하지만 신라 후기 이후 사용
가치가 사라져 모두 버려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인간의 손때가 사라지면서 대자연의 의해 헝
클어지고 분해되어 끝내 자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20세기 이후, 1,000년 동안 잠들어있던 그 흔적들이 다시 햇살을 보면서 많은 유물을 토해냈
지만 성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죄다 깨진 상태이다. 하지만 저들의 깨져버린 역사 퍼즐을
푸는 것이 바로 우리가 꼼꼼히 처리해야 될 숙제이다.


▲  홍련봉과 아차산, 용마산 보루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와 기와조각 ②

▲  상큼하게 닦여진 자생식물원 산책로

▲  파릇파릇 새싹이 꿈틀거리는 자생식물원

▲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부부상

아차산성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전사했다고 전하는 온달 장군이다.
그래서 만남의 광장 한쪽에 갑옷을 입고 칼집을 높이 들어올린 온달(溫達)과 아리따운 자태의
평강공주(平岡公主)상을 만들어 이곳의 상징적 장식물로 두고두고 기리고 있다.

평강공주는 고구려 25대 군주인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딸이며, 온달은 그의 사위인
데, 공주의 휼륭한 내조에 힘입어 온달은 1급 장수로 성장해 많은 공을 세웠다.
신라가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세우며 드디어 한강 하류까지 건드리자 온달은 '죽령(竹嶺) 이
북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굳은 다짐을 꺼내 보이며 남쪽으로 달려가 한강
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차산성을 지켰다. 허나 신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성은 함락
되고 온달 자신은 끝내 전사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죽령 이북을 회복하지 못
한 한 때문인지 아무리 힘센 장정이 들어도 관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강공주가 급히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달래니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물론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허나 신라 따위에게 한강 유역과 강원
도, 충북 지역의 많은 땅을 잃고 거기에 고구려의 1급 장수인 온달까지 죽어나갈 정도였으니
이에 대한 고구려의 치욕감이 상당했음을 온달의 설화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온달의
부하들이 온달의 한을 풀기 전(죽령 이북 회복)에는 절대로 관을 운구할 수 없다고 거부한 것
을 우회하여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단양 온달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음)


▲  아차산성 남쪽으로 이어지는 자생식물원 북쪽 산책로

▲  그늘로 가득한 자생식물원 북쪽 산책로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아차산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숲이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아차산성으로 이어지는 아차산 소나무숲 동쪽 산길


♠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골고루 깃든 삼국시대 산성 유적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①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
룩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드니 역
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1~2세기 경)에 국도(國都)인
위례성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
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
산성이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 등의 별칭도 전하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
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하게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
벌인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들쑤셨다. <동성왕(東城王) 시절에 북
위와 산동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다가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크게 때려잡은 적이 있음>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
을 가다가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그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장수로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는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를 비롯해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
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랫동안 진땀을 뺀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②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아차~용마~망우산에 닦인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해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
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
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
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으
며,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
또한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장대터 주변에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묵은 것으
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허나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원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사
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
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광진구청이 워커힐과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
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으며,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 날이 있다. 바로 1
월 1일 아침으로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몰지각한 산꾼들이 그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철책을 넘어 들어가니 그때 살짝 묻어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는 아차산 일대가 수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어 단속
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코지만 안하면 된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이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將臺)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암사대교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과 1보루로 이어지는 능
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럼 생겨서 낙타
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과 아차산 정상, 대성암(범굴사)으로 이어지며, 서쪽
은 친수계곡과 영화사(永華寺) 방면.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으로 대장간마을과 온달샘 석탑으
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줄기차게 들락거렸던 아차산 주능선이나 친수계곡 대신 관심을 1번도
주지 않았던 동쪽 길로 내려갔다.


 

♠  아차산 마무리

▲  너럭바위 전망대

낙타고개 동쪽 길은 구리시 지역으로 아차산에 묻혀있던 미답처였다.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
한 신세계에 발을 들인 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려가니 동쪽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연 너럭
바위가 마중을 한다.
너럭바위는 산비탈에 드러누운 넓직한 바위로 그 윗도리에 전망대를 닦아 좁게나마 천하를 굽
어보게 배려했다. 비록 보이는 범위는 한강과 강동구, 구리시, 하남 미사지구 등이 전부이지
만 낮은 높이 치고는 조망은 괜찮은 편이며, 한강 바람과 산바람이 어우러져 시원하기 그지
없다.


▲  너럭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구리시(아천동, 토평동), 강동구 고덕동과 강일동,
하남시 미사강변지구 등이 바라보인다.

▲  온달샘

너럭바위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숲에 묻힌 온달샘이 나온다. 온달장군이 물을 마셨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과연 그의 손때가 탄 샘터인지는 증명할 방법은 없다. 어
차피 먼저 이름을 쓰는 사람이나 지역이 임자이다.

천하가 봄가뭄으로 심한 갈증을 겪고 있던 때라 샘터의 수량도 그리 시원치는 못하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온달 형님이 1,500년 전에 마셨다는 물 맛은 봐야 되겠지. 비록 그때 물맛과
지금 물맛이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답답하게 쏟아지는
물을 받아 들이키니 갈증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온달샘 주변에는 이곳을 기반으로 한 온달체육회가 닦은 운동시설이 있으며, 샘터 옆에는 우
미내계곡 상류가 예전에 내린 비를 아껴가며 적은 물을 흘려보내고 있고, 그 건너에 납작하게
엎드린 늙은 석탑 하나가 슬그머니 눈길을 주니 그가 바로 온달샘 석탑이다.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되버린 온달샘 석탑

온달샘 계곡 건너편 바위 밑에 있는 온달샘 석탑은 바닥돌과 기단석(基壇石), 지붕돌(옥개석)
2개가 전부인 초췌한 몰골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 겨우 일부만 남아 흩어져 있던 것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이 있는 석재를 수
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일으켜 세웠다.

유실된 부분이 태반이라 탑의 원래 형태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나 기단석도 그렇고 지붕돌도 작
은 것으로 보아 난쟁이 반바지 접은 정도의 작은 탑이었던 같다.
바닥돌의 양식<높은 사분원(四分圓)과 낮은 각형(角形) 괴임>과 기단석의 수법으로 보아 신라
탑의 전통을 이은 고려 탑으로 여겨지며, 탑 주변에 건물터 주춧돌과 석재가 흩어져 있어 이
곳에 조그만 절집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절 역시 어느 세월에게 잡혀갔는지 알 도리가 없
으며, 탑은 온달샘 옆에 있다고 하여 온달샘 석탑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원래
이름은 아니겠지만 현재로써는 모든 것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니 어쩔 수가 없다.

* 온달샘 석탑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  뒷쪽에서 바라본 온달샘 석탑

▲  온달샘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  온달샘 석탑 주변 (우미내계곡)

▲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워커힐 골프장, 강동구 지역)

▲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구리 아천동과 토평동, 한강, 강동구 지역)


온달샘에서 대장간마을로 이어지는 동쪽으로 내려가면 두꺼비바위가 마중을 한다. 아차산은
흙과 화강암이 어우러진 산이라 잘생긴 바위들이 많은데, 온달샘과 우미내계곡 주변에는 너럭
바위와 두꺼비바위, 큰바위얼굴, 석실고분이 있는 넓직한 바위(아직 이름이 없음) 등이 잔뜩
포진해 있어 아차산의 매력을 크게 수식해준다.

두꺼비바위에도 조망대를 닦아 천하를 바라보게 했는데, 앞서 너럭바위보다 해발이 좀 곳이라
그곳과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바라보인다. 여기서 조금 쉬다가 잘닦여진 계단길을 통해 대장
간마을로 내려갔다.


▲  대장간마을에서 두꺼비바위, 온달샘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

▲  하얀 피부의 반석이 짙게 깔린 큰바위얼굴 밑 우미내계곡

두꺼비바위에서 대장간마을로 내려가는 중간에 아주 큰 벼랑이 있는데, 그곳에 '태왕사신기'
촬영 시절(2007년)에 배용준이 발견했다는 '큰바위얼굴'이 있다. 그 벼랑이 잘보이는 곳에 조
망대를 두었는데, 나는 엉뚱한 것을 그 얼굴로 오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사진에
담았다. 허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니었다고;;; 아무래도 다시 찾아오라는 아차산의 깊은 뜻인
가 보다.

큰바위얼굴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우미내계곡이 나오고, '태왕사신기'와 '선덕여왕' 촬영지로
유명한 고구려 테마공간인 대장간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허나 시간이 늦은 상태라 쿨하게 다
음으로 몽땅 넘기고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나의 즐겨찾기 산이니 가까운 시일
에 또 발걸음을 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나를 환송하는 온갖 무리의 장승들 (대장간마을에서 우미내마을 방향)
장승의 표정이 너무 익살스러워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나쁜 악귀들도 그들의 얼굴 앞에 자신의 본분도 내버리며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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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

▲  남산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백범광장 주변


 

여름이 빠르게 익어가던 6월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을
찾았다.
서울 한복판에 누워있는 남산은 내 어릴 적 즐겨찾기 장소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남산 인
근에 살면서 뒷동산 삼아 활보했던 추억 깊은 현장이다. 나는 남산의 물을 먹고 자랐으며,
남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남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이후 남산과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다소 뜸해졌고, 가끔 찾는 정도에서 머물다가
2015년 이후 오후와 저녁,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크게 늘리고 있다.

햇님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14시, 동대입구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장충단공원을 거쳐 국
립극장으로 이동했다. 국립공원교차로에 이르니 남산의 너른 품으로 인도하는 남산공원길
이 가파른 경사를 들이밀며 우리를 맞이한다.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로 북쪽 길은 남
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차들의 바퀴 자국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
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을 봉안한 와룡묘(臥龍廟)란 오래된 사당이 있다.
그리고 남쪽 길(2차선)은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하면서 '국립극장→남산서울타워→
남산도서관' 방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남산에서 무척 가까운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살던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 입구까
지 차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입구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
장으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가는 것은 위법이긴 하나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어서 몇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쪽 길의 40% 정도를 뚜벅이길로 만들고 남산의 건강을 위해 차량 통행의 크게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
(02, 04번)와 시티투어버스,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차를 끌고 온 경우
에는 국립극장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이동하거나 02, 04번 시내버스를 타야 된다.


▲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 남측순환로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모습을 비춘다. 그
리 멀지 않은 과거(2010년 이후)에 성곽 옆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까지 질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짧은 거리라
서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게다가 숲이 짙어서 대낮에도 그늘이 가득해 한여
름에는 시원하다.

성곽 앞에 난 산길의 일부는 예전부터 있던 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남산에서 제법 잘나갔던
남산약수터가 있었다. 남산산악회가 관리하는 곳으로 어린 시절 여러 번 가봤었지. 그곳은 입
구에 철문까지 설치했으며, 오로지 이른 아침에만 문이 열려 아무 때나 접근이 어려웠다. 다
행히 그곳 산길이 개방되어 이제는 자유의 공간이 되었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남산산악회 건
물과 체력 단련시설이 있다.

성곽길(남산산악회 입구)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 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
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겨울에
감기가 안걸린다고 해서 한때 인기가 대단했었다.
예전에는 서울에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여 차츰 사
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 남측순환로 (4월 풍경)

상춘약수터입구를 지나 계속 남측순환로를 따라 가면 크게 구부러지는 남쪽에 2개의 조망대가
있다. 이 구간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
과 동작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 270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
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
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는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
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태조 이성계가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
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
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
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
비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인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1945년 8월 패전 때 연합군에 살려달라고 징징거린 왜왕
(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
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남측순환로 아랫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
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은 물론 도심 야경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약수터가 뿌리를 내려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었는데, 그중에서 부
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
진 상태이며, 다른 약수터도 상당수 문을 닫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
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 남측순환로와 북측순환로, 여러 갈래의 계단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
공원에서 정상까지, 백범광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남산1호터널과 남
산동, 후암동(厚岩洞)에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길 외에는 싹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에 접
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남산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나들이 명소이자 조촐한
등산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며, 예로부터 서울에 오면 꼭 가봐야 되는 서울의 상징
적인 명소로 지방 사람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
드는 서울 관광의 성지이다. 하여 한적한 분위기는 좀 누리기가 어렵다. (서울을 찾은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
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 옛
추억이 몇 권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남동과 보광동, 강남, 관악산과 우면산 산줄기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찌를 듯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  다시 만난 한양도성 - 성곽 밑에도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별로 없음)
무수한 인파 속으로 몸을 던져 하나의 점이 되어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
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며, 오르막길 대신 서남쪽 남측순환로를 내려가면 남산도서관으로
이어진다.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

▲  정상 동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도심과 서울 북부)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N서울타워)는 남쪽에,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 인파가 가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주변이다.

남산서울타워는 236.7m의 키다리 타워로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남산을 든든한 기반으로 삼
아 기둥과 철탑 하나로 하늘을 받들고 있는 웅장한 탑으로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으로 송
출하고자 1969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 1971년 공중선 철탑이 완
성되었고, 1975년 7월에 최종 마무리가 되어 전국 인구의 48%가 이 타워의 전파탑을 통해 방
송을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 10월 속세에 개방되어 남산의 소중한
꿀단지이자 야경과 조망의 진정한 성지로 자리
매김을 했는데,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
山). 수락산(水落山). 관악산(冠岳山), 불암산
(佛岩山) 정상을 빼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그러다보니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밑에서 그를 보려면 고개가 그냥 까
딱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입장료도 꽤 야박한 편, 그래도 관광
수요는 늘 꾸준하여 외국인 선정 서울 명소 1
위의 지위(2012년 서울시청 설문조사 결과)를
누리기도 했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의 위엄

남산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친척과 2~3번 타워에 오른 적이 있었
다. 허나 그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아 그의 품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정상에 오
더라도 그냥 타워 밑도리와 정상 주변에서 좀 머물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가려
고 해도 이상하게 땡기지가 않는다.

* 남산서울타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산1-3 (남산공원길 105 ☎ 02-3455-
  9277)
* 남산서울타워 홈페이지는 아래 팔각정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산 팔각정(八角亭)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 대통
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
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지만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나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운 국사당터 표석에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며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지만 맨날 외면을 받는 그 표
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남산의 수호신인 목멱대왕의 사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산
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
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
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기도처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로 미어터
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
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남산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목멱산봉수대터'가 문화재청 지정 명칭임)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
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문제는 없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산꼭대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이곳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
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며, 동
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문
을 닫았고, 왜정 때 말끔히 철거되면서 그 위치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
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 복
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가 아리송하다고 함;;;)

이곳 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은퇴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차관도 아닌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
이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
서 날라오는 봉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봉산 봉수
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무악산 동봉
수대와 봉화산 봉수대는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목멱산봉수대 내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 동부와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동대문/중랑/성동 권역을 비롯하여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잡힌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남산케이블카 승차장이다.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  남산 마무리

▲  성곽길에서 바라본 용산과 여의도, 서울 서남부 지역

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내려
갈 때야 상관은 없지만 올라갈 때는 거의 혼이 다 빠진다.

남산케이블카를 지나면 도심을 향해 튀어나온 잠두봉 전망대가 손짓을 하는데, 여기서 바라보
는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달까지 올라간 서울의 심장부를
바로 발 밑에 두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까이로 남산3호터널을 오가는 차량의 물결이
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며, 키다리급의 온갖 성냥갑 건축물들이 여기서만큼은 손가락보다 작
게 다가온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장충단공원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거리는 매우 짧지만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남산 산길 가운데 가장 경사진 곳으로 장충단공원이나 국립극장에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남산도서관 방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봐야 넉넉히 2시간이면 족함)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서울 도심 동부와 동대문,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등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남대문시장과 시청,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과 안산(鞍山), 인왕산 등


정상에서 서쪽 성곽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시립남산도서관이다. 이제 남산도 다 내려
온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2020년 11월에 닦여진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면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고자 닦은 백범광장이 나온다. 공원을 이루고 있는 광장 남쪽에는 한양도성이 복
원되면서 나무와 온갖 꽃을 심은 녹지 공간이 대폭 늘어났다. 바로 옆이 키다리 빌딩이 즐비
한 도심이건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 딴 세상을 이루고 있으니 그 역시 남산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다.


▲  백범광장 터널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과 남산을 복원하면서 예전에 도로 공사로 줄기가 끊긴 백범광장과
남산 사이의 산줄기를 다시 이어붙여 그 밑에 터널(소월로3길)을 냈다.

▲  휴일 오후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백범광장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  백범광장 남쪽에 다시 재현된 한양도성 - 사적 10호

백범광장 남쪽과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아주 따끈따끈한 성곽이 있다. 이들은 한양도성의 일
원으로 왜정 때 끊어진 남대문과 남산 구간의 일부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들을 끄집어내고자 백범광장 주변을 싹 뒤집어 조사를 벌였고, 땅속에 묻
힌 성터가 발견되어 그 자리를 바탕으로 성벽과 여장을 복원했다. 재현된 구간은 200m 정도로
최근 지어진 탓에 피부가 아주 하얗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벽에다 그린 성벽 벽화 같다. 남산
도서관 북쪽 성곽터를 조사하여 2020년 11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내었으며, 나머지 사라진
구간도 복원 계획에 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하얀 피부의 성곽 여장 너머로 서울역 동쪽에 자리한 여러 키다리 빌딩이 보이며,
성곽 안쪽에도 탐방로를 내어 억새를 비롯한 온갖 나무와 꽃을 심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서쪽 부분
성곽은 계속 달리고 싶다~~!! 허나 왜정과 개발의 칼질로 끊어진 구간이
적지 않고 복원 속도도 굼벵이보다 느려 그런 날은 아직도 멀었다.

▲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후암동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엄청난 광을 쏟아부으며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고
회색빛 도시도 석양이 짙어지면서 점차 검은 도화지 속에 묻혀간다.

▲  온갖 야생화가 살랑거리는 백범광장 서부

▲  도동3거리에 있는 남산공원 마크

백범광장과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을 뒤로하고 남산공원 출입구의 하나인 도동3거리로 나오
니 시간은 18시가 넘었다. 햇님도 그 기운이 다했는지 84,000광 보다 더 진한 석양을 비추며
슬슬 꽁무니를 내빼고 토끼의 달나라가 하늘 높이 떠올라 땅꺼미의 기운을 북돋는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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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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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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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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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
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조금 있어
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완주가 가능하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인왕산자락길 (수성동 이남 구간, 택견수련터)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은 인왕산자락길은 다시 남쪽으로 각박한 오르막
길을 오른다. (북쪽 방향도 마찬가지임)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오르막길의 야성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친 것을 조금 순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 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길이고, 왼쪽 내리막길
이 인왕산자락길이다. 그러니 자락길을 놓치기 싫다면 무조건 왼쪽으로 붙자. 그 길을 내려가
면 서촌의 일원인 누상동(樓上洞) 주택가와 불과 몇 보 차이로 가까워지며 길은 다시 온순해
진다. 이후 이름 모를 계곡과 체육시설을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을 보이나 그리 각박하지는
않으며, 그 길을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인왕산길이 모습을 비춘다.


▲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방향)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북쪽 계단길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남쪽에는 화장실을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다. 청운공원 이후 가깝게 거
리를 두며 떨어져 있던 인왕산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여기서 잠시 만났다가 이내 헤어진다.
쉼터 남쪽 언덕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이 자락길로 그 계단을 오르면 자락길의 남쪽 종점
인 택견수련터가 마중을 한다.


▲  택견수련터 주변 체육시설
저 산길의 끝에 택견수련터가 깃들여져 있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곳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
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 불리던 임호(林
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
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이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나와 완전 반대임) 하
여 16살에 마을 택견꾼과 더불어 사직골 대표로 출전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이겼으며,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
작했다. 그는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
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으므로 나머
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하여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때 이 땅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
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
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닦았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했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
을 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해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보
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작
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와 5.16으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겼고 법인 설
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의 조교
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여
1964년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허나 그는 해외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
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보고자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
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
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
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
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
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에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닦았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
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시설이 닦
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터
의 역할은 거의 녹슬지 않은 것이다.


▲  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구리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져 있고,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길게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조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그 암릉에 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자락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인 서울 도심을
멍을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속세에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의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
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
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택견수련터 서쪽에는 인왕산길과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려가면 윤동주문
학관부터 3.2km를 함께 한 인왕산자락길은 그 끝을 맺고 인왕산길에 합쳐진다. 소요시간은 사
진을 찍고 쉬는 시간을 합쳐서 넉넉잡아 1시간 반 정도. 경사가 좀 각박한 구간이 여럿 있지
만, 그것은 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산은 산다워야 오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도로만 따라가는 인왕산길과 달리 상당수가 흙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득이한 구간은 나무데
크를 닦아 놓았다. 자락길을 둘러싼 숲은 무성하며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들(청풍
계, 옥류동, 수성동 등)을 대부분 거쳐가면서 인왕산에도 계곡들이 꽤 숨바꼭질을 하고 있음
을 귀뜀해준다. 그 계곡들은 시내에 진입하면서 모두 강제 생매장을 당했으며, 2012년에 복원
된 수성동만 제대로 어깨를 피고 있다. (수성동 역시 조금 흐르다가 생매장 당함)
이처럼 인왕산자락길은 인왕산의 숨겨진 속살과 명소를 아낌없이 드러낸 도심 속의 보석이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사각지대로 이번에 이렇게 인연을 지어 사각지대를 하나 지웠다.

* 인왕산자락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입구
(후문)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는데 길 쪽에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면 그냥 의미없는 바위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황학정 쪽에서
보면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그는 옛 기록에나 남아있던 등과정의 아련한 흔적으로 황학정
방향 바위면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오사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
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 때는 활쏘기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오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
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오사정은 싹 철
거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
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후문(등과정 바위글씨)에서 황학정으로 내려가 그 뒷쪽 바위를 잘살펴보면 황학정8경
을 담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글씨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
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1개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
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황학정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활터이
다.
조선 말까지 서울 장안에는 서촌오사정 등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해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
졌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
여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에게 개방하여 언제
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황학정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
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여 돈을 건네주고 그 건물을 현 자리로 가져왔다.
앞서 소개했던 택견꾼 송덕기 역시 황학정을 해체 이전했을 때 직접 참여하여 손수 건물을 해
체하고 건물 부재(部材)를 가져와 다시 재조립했다. 또한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서 행
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
렀다.

1945년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
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
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
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를 개최함)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도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도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다.

* 황학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32-1582)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걸린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황학정 현판의 위엄

▲  화살을 쏘는 동명성왕, 이성계의 후예들

마침 황학정 회원 4명이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다. 여기서 과녁까지는 약 130~150m. 평소에는
매우 가깝게 여겼던 그 거리가 여기서 보니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南山)보다 더 멀리
느껴질 정도. 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황색 천을 허리에 묶었는데 이는 황학정 국궁 회원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정자 이름
이 누런색, 주황색 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녁까지 거리도 멀고 눈도 침침하여 명중을 했는
지. 외곽에 맞췄는지. 아니면 과녁 밖으로 빗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날라간 화살은 전
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려 황학정으로 옮겨진다.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길 (국궁전시관 옆)

▲  황학정 표석 (황학정 정문)


 

♠  단군성전과 행촌동 은행나무

▲  단군성전(檀君聖殿)

황학정에서 다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면 길 동쪽에 단군성전이 마중을 한다. 단군(檀
君)은 옛 조선을 세운 천하의 시조(始祖)로 그의 단군설화는 3살짜리도 모두 알 만큼 유명하
다. 허접스럽기 그지 없는 양이(洋夷)들의 그리스, 로마 설화를 능가하는 알찬 설화로 삼국유
사(三國遺事)에 그 설화가 실려 있으니 내용을 새삼스레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최고의 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부자가 있었다. 환웅이 하늘 아래
로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는데,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구를 살펴보니 삼위태
백산(三危太白山)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하다 여겨져 천부인(天符印) 3개와 3,000명
의 무리를 주어 지구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으며, 바람과 구름, 비를 관
장하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과 인명(人命), 질병, 형벌, 선악(
善惡)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직접 다스렸다. 이때 굴 속에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청하니, 환웅은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100
일 동안 햇빛을 안보면 사람이 되리라 했다.
그들은 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고, 곰은 21일을 버티
면서 여자 사람이 되니 이가 곧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니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
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옛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장성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옛 조선을 세우니 그때가 기원전 2,333년이
다. 우리 땅은 바로 그때를 단기(檀紀) 1년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니 무려 4,350여 년의 역사
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은 무려 1,908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  단군성전 정문(외삼문)

▲  단군성전 뜨락 은행나무


▲  푸근한 인상의 단군왕검상 (오른쪽에 단군 영정)

※ 단군이 세운 옛 조선(고조선)
오로지 상상으로 제작된 단군상, 그리고 그의 영정,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
적이다. 단군은 옛 조선(고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강제로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
를 비롯하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
만주,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를 포함한 화북(華北) 지역을 다스린 천하 대국이었다. (중원대
륙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서안 등 산서성에는 옛 조선이 세운 거대한
무덤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해 기원전 2333년 건국설도 솔직히 무리가 있다. 산
소도 아까운 식민사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
반도 북부와 요동, 남만주로 크게 축소시켰다.
옛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에 다시금 영향
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
)를 비롯한 2,000리 이상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
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
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했다
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제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
해 사방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리하고 그 자신감으로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협박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우거왕(右渠王)으로 한나라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
부하며 비왕(裨王, 제후왕)을 시켜 사신을 전송케 했다. 허나 섭하는 그 호의에 배은망덕하게
도 마부로 가장한 무사를 시켜 비왕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에 한무제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옛
조선과 가까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님)으로 보내 요동도위(都尉)로 삼았다.

비왕이 암살된 것에 적지 않게 뚜껑이 열린 조선은 섭하가 요동도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
자 바로 한나라를 공격해 그 요동을 점령하고 섭하를 쳐죽었다. 그렇게 조선이 먼저 공격을
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다. 아마도 섭하를 떡밥으로 보내 조선을 건드리
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조선의 반격과 한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했다. 하여 뚜껑이 단
단히 폭발한 한무제가 다시 군사를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나라군은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이 반
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
선 사람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등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이 많으나,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
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로
유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는 낙랑군 외에 비슷한 이름에 낙랑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국
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
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
명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族)
으로 대표되는 조선(또는 은나라)에서 만들어 전파했다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륙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주변에서 일어난 홍산문명(紅山文明) 또한 조선의 찬란했던 흔
적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
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도 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 단군성전(백악전)의 역사
단군성전은 1968년 이숙봉(李淑峰) 여사의 3자매(이정봉, 이숙봉, 이희수)가 세웠다. 이후 사
단법인 현정회(顯正會)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지원으로 성전을 개축했다.

전체 대지면적 약 800㎡, 성전 52.9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
물 색깔이 죄다 베이지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절 그가 좋아하는 색으로 칠했기 때
문이다. 이곳 뿐 아니라 많은 사당과 문화유산이 그 시절 베이지색으로 색 변경을 당했다. 성
전 현판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내외삼문 간판은 이현종이 썼다.
또한 옛 조선이 열렸던 유서깊은 10월 3일 개천절<어천절(御天節)이라고도 함>에는 이곳에서
개천절대제전(開天節大祭典)이 성황리에 열린다. 전통제례와 전통공연, 온갖 체험행사(제례복
체험, 국궁체험 등) 등이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 가능하다.

* 단군성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인왕산로 22, 현정회 ☎ 02-736-6375)


▲  단군성전 앞에 펼쳐진 늦가을 동화

단군성전 남문은 바로 사직공원(사직단)과 이어진다. 허나 평소에는 늘 닫혀있고 사직공원에
서 그곳을 이어주는 길 또한 봉쇄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인왕산길로 우회해 외삼문(外三門)으
로 들어서야 된다. 그 덕분에 사직공원~단군성전 지름길에 인적이 거의 끊기면서 사람의 발자
국 대신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여 늦가을 정취를 아주 진국으로 끌어올린다.
벌써부터 겨울 제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은 나뭇잎을 하
나, 둘 땅바닥으로 털어낸다. 우리는 그 잎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어울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그 이름 말이다. 은행잎이 금지된 길과 그 주변에 수북히 쌓여
이 일대는 그야말로 노란 세상을 이룬다. 마치 황금색 비단이 쫙 깔린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야 귀를 접고 누운 그들을 보면서 늦가을 분위기를 즐기지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
래하며 서서히 끝을 준비한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은행잎, 인간이 지은 건물이나 인생은 모
두 부질 없는 모양이다. 시작이야 어쨌든 그 종점은 다 같지 않던가.


▲  한양도성 밖 인왕산로1길 (인왕산, 무악동 방향)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향)

단군성전 앞 교차로에서 서쪽 인왕산로1길로 들어섰다. 길 왼쪽(남쪽)은 사직동 주택가와 종
로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오른쪽은 인왕산의 싱그러운 숲으로 그 산줄기는 경희궁(慶熙宮)까지
미치지만 숲은 여기서 뚝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인왕산로1길이 속세와 자연의 팽팽한 경계선인
셈이다.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고색이 짙은 한양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크게 5거리를 이루
는데, 성 밖 북쪽 길(인왕산로1길)은 무악동과 인왕산 쪽으로, 서쪽(사직로1가길)은 독립문
방면, 남쪽(송월1길)은 홍파동,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며, 5거리 동쪽(성곽 안쪽) 인왕산입구
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곽길을 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송월1길과 한양도성 (홍파동, 경희궁 방향)

▲  사직동 한양도성 (5거리 서남쪽)
인왕산에서 내려온 한양도성은 여기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직동~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함)

▲  은행잎의 마지막 삶터이자 정모 현장, 한양도성 여장
나무에게 버림받은 은행잎들이 딱딱한 여장 위에 모여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여장 뿐 아니라 그 주변은 온통 황금색 은행잎의 세상이다.

▲  여장 위에 내려앉은 은행잎들

▲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
다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
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
군의 집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으나 건강은 아직 양호하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權慄)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
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
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
이 심은 것이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격하게 내세우고 싶다.

▲  남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북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한 권율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는데 그 집이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 시호는 충장()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시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
랑(禮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고자 했는데, 권율은 주변
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머릿수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이 칼과 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겨우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
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
진하게 된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질 않아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
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
로 그때를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타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바
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도망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마대 전투)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은 것이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에서 왜군에게 깨진 명나라군을 도
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우키타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서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해 여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군사들은 일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
으며,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새 무기도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밥할머
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을 공격
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
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비리비리한 명나라군의 비협조
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그해 7월 인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
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관들 때
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
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숙면이나 제대로 취하고 있
을지 모르겠다.

행촌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한복판에 달달하게 벌였던 인왕산과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딜쿠샤는 시간 관계로 사진에 담지 않고 통과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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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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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 주왕산 늦가을 나들이 '
(절골, 가메봉, 용연폭포, 용추폭포, 주왕계곡)

▲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

▲  용추폭포

▲  절골계곡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기 시작하던 10월의 한복판에 늦가을 단풍 성지로 격
하게 추앙받고 있는 청송(靑松) 주왕산을 찾았다.
주왕산은 대자연이 경북 한복판에 빚은 크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호남 내장산(內藏山)에 버
금가는 단풍의 대표 성지(聖地)이다. 서울에서 약 600리(옛 10리는 약 5km) 거리로 당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좀 넉넉하게 무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 10시, 신도림역(1,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준비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주
왕산이 있는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늦가을 단풍의 화려한 향연과 아직까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주왕산에 대한 강한 설
레임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검은 도화지가 되버린 차창 밖만 열심히 바라보며 나름대
로 주왕산을 그려본다. 말로만 듣던 주왕산의 실물은 어떠할까?? 단풍은 제법 물이 올랐겠
지? 대전사까지 모두 볼 수 있을까? 등등...

서울을 출발하여 약 5시간 30분 만에 주왕산 남쪽 끝에 자리한 주산지 주차장(상이전마을)
에 이르렀다. 아직 새벽 어둠에 잠긴 주차장에는 천하 곳곳에서 산꾼과 나들이꾼을 바리바
리 싣고 온 관광버스로 가득한데,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주차장 모퉁이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먹었다.
밥과 반찬을 가져온 이들이 많았고, 취사 도구까지 가져와 라면과 찌개, 오뎅탕 등을 해먹
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게 갖은 먹거리들이 모두 모이니 그야말로 출장 뷔페가 따로 없
으며, 주차장 옆에는 식당을 겸한 가게가 환하게 불을 켜며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때우고 4시 30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에 자리한 절골교로 이동했다. 그
림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주산지(注山池)도 봤으면 좋으련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여유가 있는 주산지 주차장에서 아침만 먹고 바로 철수한 것이다.
절골교에서 모두 버스에서 내려 절골탐방지원센터까지 12분 정도 걸었다. 여기서 주왕산의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빗장이 열리기가 무섭게 주왕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주왕산 절골, 가메봉, 사창골

▲  주왕산 뒷쪽에 숨겨진 절골

절골(절골계곡)은 주왕산 동남쪽에 깃든 계곡으로 주왕산 뒷통수에 해당된다. 주산천(注山川)
의 상류로 골짜기가 꽤 깊고 숲이 울창하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 불린다. 계
곡 길이는 8km로 주왕산 동쪽 대관령(731m)에서 발원한 갈전골(갈절골)과 신술골이 한데 모여
절골을 이룬다.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피해갈 정
도로 시원하다. 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기암괴석과 반석, 간간히 나오는 조그만 폭포가 운치를
더해주며. 상류로 올라갈수록 풍경의 질이 높아지니 꼭 상류(대문다리)까지는 오르기 바란다.
  
절골코스는 절골탐방지원센터에서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데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너야 된다. 반
듯한 다리 대신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으나 부실한 곳이 적지 않아 자칫 물에 빠지기 쉽다. 하
지만 수심이 얕아 그리 위험은 없으며, 계곡 트래킹 및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절골은 인근 주산지와 함께 '내주왕계곡'이라 불리며, 풍경이 고와 주왕계곡(周王溪谷) 못지
않다. 계곡을 옆에 끼고 상류로 올라가다가 대문다리를 지나서부터 계곡과 서서히 멀어지며,
산길 경사도 점차 각박해져 깔딱 직전까지 이른다. 그렇게 각박한 산길을 오르면 가메봉 동쪽
갈림길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 능선길로 가면 가메봉이다.

* 절골탐방지원센터 → 대문다리 → 가메봉 (3시간 20~30분 소요)


▲  고요함에 잠긴 절골 (절골 중류)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벼랑 사이를 흐르는 절골

▲  늦가을 채색이 짙은 절골 상류
너른 반석과 조촐한 폭포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  가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본 주왕산 남쪽 줄기
산 아랫도리와 중간 도리는 단풍의 향연이 한참이나 해발 700m 이후로는 벌써부터
앙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올해도 거의 저물었음을 실감케 한다.

▲  주왕산 가메봉(882m) 바위와 그 너머로 보이는 왕거암

가메봉은 주왕산 구역에서 두수람(923m), 왕거암(907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주왕산 동
쪽에 자리한 가메봉은 넓직한 바위로 이루어져 동쪽과 남쪽, 서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
며, 하늘에서 가까운 봉우리이나 칼처럼 솟은 뫼에 꽁꽁 둘러싸여 있어 조망의 질은 그리 시
원치 못하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행동식을 섭취하고 주왕계곡으로 내려갔다. (일부는 칼등고개를 경유하
여 주왕산 정상으로 이동)


▲  가메봉에서 바라본 천하 (주왕산 남쪽)
가메봉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  가메봉에서 주왕계곡, 사창골로 내려가는 산길


 

♠  주왕산 사창골, 용연폭포

▲  사창골 상류

가메봉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사창골이 슬쩍 모습을 비춘다. 가메봉
북쪽에서 발원하여 주왕계곡으로 흘러가는 사창골은 숲이 매우 삼삼하고 바위와 소(沼)가 많
아 절골 못지 않은 고운 매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리메기3거리를 지나 40~50분 정도 내려가
면 주왕계곡이 모습을 비춘다.


▲  동그랗게 자리를 닦은 조그만 소(못)
해가 지고 밤이 되면 하늘에서 선녀 누님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못의 사이즈도 선녀 누님에 걸맞게
아담하다.

▲  너른 반석과 조그만 폭포
계곡 주위로는 낙엽이란 쓸쓸한 꼬리표를 단 단풍들이 귀를 접고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다.

▲  풍덩 스킨쉽을 하고 싶은 동그란 소
사창골 냇물은 여기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종점 없는 길을 재촉한다.

▲  사창골 하류 산길
사창골 산길은 하류에 이르러 잠시 계곡과 멀어지고 벼랑길로 돌변한다.
벼랑 밑에는 사창골이 빚은 절구폭포가 있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주왕계곡에 이르게 된다.

▲  주왕계곡 용연폭포(龍淵瀑布, 제3폭포)

주왕계곡(주왕천계곡, 주방천계곡)은 주왕산(720m)의 중심 계곡으로 '내주왕계곡'이라 불리기
도 한다. 주왕산 동쪽에서 발원한 큰골에서 시작하여 주왕산 심장부를 구비구비 돌다가 대전
사를 지나서 주방천(周房川)이란 이름으로 속세로 흘러간다.
용연폭포와 용추폭포, 시루봉, 학소대, 급수대 등 대자연이 빚은 온갖 작품이 가득해 눈을 부
시게 하며, 특히 용추폭포 주변은 주왕산의 모든 것을 긁어모은 것처럼 대장관을 이룬다.
깊은 산골에 숲이 울창하고, 계곡 좌우는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이 적지 않은데, 그런
계곡을 둘러싸고 600m가 넘는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래서 주왕산을 석병
산(石屛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험한 지형을 지닌 탓에 예로부터 산적들이 많았고,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바위 봉우리가 많아 설악산,
월출산(月出山)과 더불어 이 땅의 3대 암산(岩山)으로 격하게 꼽히기도 하며, 경북의 금강(金
剛)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신라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족자(簇子)이자 원성왕(元聖王)에게 밀린 김주원(金周
元)이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 불렸는데, 이후 그는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
졌다. 하여 그 연유로 주왕산으로 이름이 갈린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에 나옹화상이 그리
바꾸자고 해서 이름이 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다른 유래로는 당나라 사람인 주도(周鍍)가 8세기 후반,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칭하며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그래서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 주왕산이 험하다는 풍문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 주변을 약탈하며 후일을 도모하
다가 당나라의 토벌 요청을 받은 신라에게 털리고 자신은 잡혀 처단되었다. 그래서 주왕산이
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마땅한 기록도 없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으며, 조선 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事大主義)에 젖은 지역 유생들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가 있던 중원대륙과
청송의 명산인 주왕산을 연결시켜 지역의 자부심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머리를 싸맸던 유생들
의 그릇된 생각이 지어낸 산물인 것이다.

주왕계곡은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11호로 지정되었다.


▲  용연폭포의 위엄 (윗폭포)

주왕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연폭포는 제3폭포, 쌍폭, 용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간단
하게 제3폭포라 불렸으며, 2단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폭포가 위엄을 자랑하며 하얀 실타래 같
은 물줄기를 밑으로 뽑아낸다. 폭포 밑에는 푸른 못이 펼쳐져 있는데, 영덕 강구항 앞바다와
이어져 용이 머물렀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용연폭포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
다.
윗폭포 옆에는 얕게 파인 3개의 동굴이 있어 폭포의 경관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주며, 물소리
가 우렁차 귀신도 도망을 칠 정도이다. 못 남쪽에는 탐방로와 조망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폭
포를 구경하느라 금방금방 빠지지를 않아 정체가 심하다. 그만큼 폭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제
대로 앗아간 것이다. 우리도 폭포를 구경하느라 한동안 발을 움직이지 못했지. 대자연의 기묘
한 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이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촬영 뿐이다.

▲  용연폭포 옆에 패인 3개의 동굴

▲  푸르게 익은 용연폭포 못 (윗폭포)


▲  용연폭포 아랫폭포
아랫폭포도 윗폭포 못지 않은 장쾌함을 보여준다. 이곳은 못 바로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주왕계곡의 백미, 절구폭포~용추폭포

▲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사창골 협곡

용연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가면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협곡이 마중을 한다
. 앞서 사창골 산길의 아랫쪽으로 사창골의 하류이기도 한데, 그 협곡을 5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절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절구폭포 (제2폭포)

바위 너머 윗쪽에서 2단으로 쏟아지는 절구폭포는 제2폭포라 불리기도 한다. 응회암(凝灰巖)
에 주로 생성되는 절리(암석이 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폭포로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윗폭
포 밑에는 선녀탕(仙女湯)이 수줍은 듯 숨겨져 있으며, 아랫 폭포 밑에는 수심이 얕은 못이
형성되어 있어 물놀이 장소로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사창골 하류로 폭포 주변이 모두 벼랑으로 막혀 길이 없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나가야
된다. 전쟁 때 만약 이곳으로 몰린다면 정말 몰살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궁벽한 곳이나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시리도록 맑아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살짝 숨기고 싶다. 현재 선녀탕과
윗폭포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얌전히 아랫폭포 앞에서만 머물기 바란다.


▲  옆에서 바라본 절구폭포

▲  병풍바위

절구폭포를 둘러보고 주왕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주변 풍경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나도 모르
게 장대한 벼랑에 감싸이게 된다. 그 벼랑은 병풍바위로 계곡 양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솟은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둘러져 그야말로 하늘만 보이는데, 벼랑 밑에는 옥처럼 맑은 주왕계곡이
청정함을 자랑하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발을 전혀 들일 수도 없을 이런 험지에 인간들은 산천유람 욕구를 위해 마구 탐방로를 내었는
데, 벼랑 밑부분에는 혹시나 모를 대자연의 테러(낙석)에 대비해 지붕까지 둘렀다. 주왕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웅장한 멋을 지닌 병풍바위 밑에는 제1폭포라
불리는 용추폭포가 달려있는데, 이곳 풍경은 가히 압권이라 앞서 제2폭포, 제3폭포를 능가한
다.
대자연의 위대한 작품에 혼이 탈탈 털린 속인들은 사진을 찍고 풍경을 구경하느라 좁은 탐방
로는 늘 정체를 빚어 행렬이 다소 버벅거리는데, 풍경이 풍경인지라 정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름 제국이 무더위 갑질로 천하를 뜨겁게 달구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을 정도로
무더위를 잊게 한다. 벼랑에 감싸여 햇살도 마음 놓고 착륙을 못하고, 계곡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니 땀이 붙어있을 재간이 없다.

용추폭포 윗쪽에는 선녀탕이 있고, 그 위에 구룡소(九龍沼)가 있으며, 탐방로 밑은 계곡과 벼
랑으로 되어있어 계곡과 폭포로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대륙의 협곡 같은 병풍바위의 위엄
협곡 사이로 탐방로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보니 주왕산의 옛 이름인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  용추폭포 구룡소
수심도 깊고 지형도 각박한 이곳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  구룡소와 용추폭포 사이에 자리한 선녀탕
선녀 누님들이 들어가기에는 수심이 좀 깊다. 하늘나라 선녀들은
키가 나무만 했던 것일까?

▲  용추폭포(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와 달리 폭포의 정면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칼처럼 솟은 벼랑 밑에 무섭게 펼쳐진 첩첩한 협곡이다.
그나마 탐방로가 닦여져 있으니 이 정도로라도 보는 것이다.

▲  가까이에 있으나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용추폭포 밑 동그란 못

▲  벼랑 사이로 각박하게 이어진 병풍바위 협곡 (서쪽 부분)


 

♠  주왕산 마무리

▲  주름선이 인상적인 시루봉 ▲

병풍바위 협곡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학소교가 나온다. 다리 옆에는 홀로 솟은 날씬한 돌기
둥이 손짓을 하는데, 그 돌기둥이 시루봉이다.
시루봉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그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 피부에는 주름선이 많은데 옆에서 보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완전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무장된 천험의 돌기둥이라 접근은 정말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저 봉우리 위에는 주왕산 산신
이나 신선만의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의 숨겨진 보물이라도? 그러니까 대자연
이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게끔 저렇게 깎아 놓았을 것이다.

이런 절경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붙여놓은 전설이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 그 내용
은 대략 이렇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 한 도사가 바위 위에 올라가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선 2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사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바위 밑에 불을 지폈는데,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며 봉우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게 끝임.


▲  시루봉 밑 주왕계곡


▲  학소대(鶴巢臺)

시루봉 맞은편에는 학소대라 불리는 커다란 낭
떠러지가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며 시루봉과 자
웅을 겨룬다.

계곡 바로 옆에 직각으로 높이 솟아있어 그 장
엄함에 주눅을 들게 만드는데, 시루봉 마냥 낭
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철옹성 마냥 범접하기
가 어려워 보인다.
절벽 꼭대기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세상
을 굽어보고 있으며, 학소대의 덩치가 대단하
여 주변 계곡에 늘 그늘을 드리운다.
옛날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
어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불리며, 그 학소대
밑에 도승(道僧)이 절을 짓고 살았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빨리 피하라고 재촉하므로 밖으
로 나오니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져 절을 덮
쳤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
다.


▲  인간이 만든 비루한 작품, 학소교 (학소대 밑)
대자연의 걸쭉한 작품을 쭉 보다가 인간이 만든 콘크리트 다리를 보니 정말로
못봐주겠다. 아무리 아치형으로 만들어도 거기서 거기임..

▲  급수대(汲水臺)

학소대를 지나면 육중한 바위 봉우리인 급수대가 모습을 비춘다. 그 역시 낭떠러지로 이루어
진 30여m의 주상절리(柱狀節理) 바위로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바위 위에 무자위를 설치해 계
곡 물을 위로 소환했다는 전설이 있어 급수대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주왕의 전설도
거짓이며 급수대의 전설 또한 거짓이다.


▲  주왕계곡 북쪽에 솟아난 벼랑 (이름은 모르겠음)

▲  자하성(紫霞城)터

급수대를 지나 계곡 하류(대전사)로 계속 길을 재촉하면 길 오른쪽에 자하성터가 초췌한 몰골
로 마중을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하여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山城)으로 주방산성, 주왕산성이
라 불리기도 한다. 주왕이 신라군을 막고자 쌓았다고 하나 현실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 때 축
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곳을 거쳐 갔다는 신라 왕족 김주원이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가로챈 김경신(원성왕)을 크게 원망하며, 여기서 잠시 딴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허나
그 마음도 부질 없음을 깨달았는지 강릉(명주)으로 내려가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성 둘레는 12km에 이르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끊임없는 태클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
다 무너지고 지금은 일부만 겨우 남아 있다. 그 모습도 돌무더기처럼 남아있어 자하성터 안내
문이 없었다면 그냥 자연산 돌무더기로 지나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주왕계곡의 흥미로운 존재, 아들바위

자하성터를 지나면 계곡 냇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덩치가 큰 네
모난 바위가 다소 기운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겉모습은 딱히 유별난 것은 없으며, 그냥 계
곡에 놓인 커다란 바위 정도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신비한 존재로 각인되어 옛날부터 아들바위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오랜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아들 선호 사상이 빚은 산물이라고나 할까? 냇가 한복판
에 저런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돌을 던졌을 것이고, 바위 위에 얹혀지면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 확장되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이
야기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그냥 던지면 안된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골인을 해야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왼팔로 던져 골인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새 수법이 바뀐 모양이다. 어쨌든 오랜 세월 사람들이 던질 돌이 바위
위에 수북히 쌓여 그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잠시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 (주왕계곡 하류와 주왕산 산줄기)

▲  주왕계곡 하류 (대전사 동쪽)

▲  주왕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대전사

주왕산에 들어서면서 시간이 되면 주왕굴과 대전사(大典寺)까지 말끔히 둘러보려고 했다. 주
왕산 상의주차장까지 13시까지 모이기로 해서 시간이 좀 넉넉할 줄 알았는데 벌써 12시 반이
넘어버렸다. 상의주차장까지는 앞으로도 30분을 더 가야 된다. 그러니 이들을 제대로 볼 시간
이 없는 것이다.
하여 산을 좀 타야 되는 주왕굴은 다음으로 미루고 상의주차장 직전 길목에 있는 대전사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주왕산의 터줏대감격 존재인
데, 문화유산이 여럿 있어서 사진에 모두 담고 싶었다. 허나 시간 부족이란 현실 앞에 경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쳐야 했다.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보는 것도 단체 활동에 대한 예의는 아니며, 너무 시간에 쫓기듯이 보
느니 쿨하게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얼마나 아쉽던지 아무리 다음에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다음이란 것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울에서 제
법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전사를 지나니 바로 주왕산의 대표 관문인 상의 매표소이다. 이곳은 대전사 때문에
문화재 관람료란 명목으로 입장료를 뜯고 있는데, 매표소 사람들의 눈빛에는 어느 누구도 그
냥 들여보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왕산 상의(대전사)매표소만 입장료를 징수함, 나머지(절골, 월외리 등)는 입장료 없음>

상의매표소를 지나니 다른 유명 산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촌이 징하게 펼쳐진다. 도토리묵과 파
전, 송이, 동동주, 산채비빔밥, 백숙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서둘러 길을 재촉하려는 찰라 낯
익은 얼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적지 않은 일행들이 거기서 동동주 1잔에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늦을까봐 대전사 등 많은 것을 두고 왔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산행
뒤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다면 대전사라도 제대로 보고 오는 건데
갑자기 기분이 허탈해진다.
상황이 뭐 그리 되었으니 다시 대전사로 가기는 틀렸고, 일행들과 어울려 주왕산의 명물인 송
이와 도토리묵, 동동주 1잔을 걸치며 같이 상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상의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왕산과 주왕계곡

상의주차장에 도착하니 13시 20분, 늦게 오는 사람들이 속출하여 13시 40분이 되어서야 출발
을 했다. 주차장에는 산꾼과 나들이꾼을 태운 관광버스와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고 그에 아
랑곳하지 않고 차량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보니 들어오는 길은 정체가 대단하여
많은 차량들이 마을 밑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도 했다.

주왕산을 벗어난 우리는 안동(安東)으로 넘어갔다. 안동댐 주변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안동
의 토속 음식인 헛제사밥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헛제사밥 정식은 일반적인 제삿상
음식과 비슷하다.
헛제사밥의 유래는 조선 때 유생들이 배가 고프거나 비싼 음식을 먹고 싶어서 성현(聖賢)들에
게 제사를 지낸다고 거짓말을 치고 노비와 주변 백성들을 닥달하여 만들게 한 음식상으로 '헛
'이란 접두어를 붙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음식상이 이제는 안동의 대표 밥상이 되
어 전국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곳 헛제사밥 정식은 나물이 버무려진 놋쇠 그릇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인데, 제사 때 쓰는 국
과 간고등어, 전, 떡, 잡채 등이 정식을 이룬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 순식간에 밥과 반
찬을 비우고, 술도 여러 잔 마시니 졸음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식당 남쪽에 자리한 낙동강(落東江)과 월영교에서 잠시 소화 좀 시키다가
16시 30분에 출발했다. 아무리 목적지가 주왕산이라고 해도 마지막 종점은 결국 집이다. 서울
까지는 4시간 정도 걸렸으며, 피곤한 탓에 자다깨다를 무한으로 반복했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무박 2일,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소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아쉬움은
다음이란 인연을 잡아 해결하면 될 것이다.

* 절골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 주왕계곡(용연폭포, 용추폭포 등)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 주왕산국립공원(☎ 054-870-5300)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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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2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 강동구의 북쪽 지붕, 고덕산 나들이 '

▲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여름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5월의 끝 무렵, 강동구(江
東區) 암사동과 고덕동 지역을 찾았다.
선사시대 유적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 관련글 보러
가기)을 먼저 둘러보고 양지마을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동했다.

양지마을(양지말)은 암사3동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약 90호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북쪽
은 고덕산과 이어져 있고 남쪽과 동쪽, 서쪽은 밭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
며 암사동 시내와도 거의 200~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마을 집들은 상당수 전원주택
스타일로 다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뜨락을 갖추고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교
외로 나온 듯 즐거운 기분을 안겨준다. 


▲  아리수로에서 바라본 양지마을 주변 전원(田園) 풍경


 

♠  암사3동에서 고덕산까지

▲  도시인의 안구를 제대로 씻겨주는 암사3동 전원 풍경

▲  암사3동 밭두렁

양지마을을 벗어나 시내와 시골의 경계를 이루는 암사동 북쪽 도로(아리수로)를 따라 동쪽으
로 이동했다. 길 남쪽에는 밋밋하게 솟은 키다리 아파트들이 몰려있고, 북쪽은 녹색 물결이
파도를 치는 경작지와 농가들로 시골 풍경을 이루어 서로 180도의 대비를 보인다.


▲  암사정수센터교차로의 전설, 보리밭의 황금 물결 (2012년)

잘익은 보리가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움직인다. 보리밭 남쪽에는 원두막까지 두어 전원
풍경의 패기를 드높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리암사대교 접속도로 공사로 한 토막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고덕산 강동아름숲길에서 바라본 암사동 강동롯데캐슬퍼스트아파트

암사정수센터교차로 동북쪽에 고덕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고덕산(
高德山)은 해발 90m의 작고 낮은 뫼로 강동구의 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다. 응봉이라 부르기도
하며,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쪽에서 고덕천 서쪽에 이르는 동서로 길쭉한 산줄기로 북쪽은 한
강에 이르고, 남쪽은 암사동과 고덕동 주거지를 보듬고 있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오래된 사연은 꼭 있는 법, 이곳은 고려 말 충신인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이 숨어 살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하나로 형조참의(
刑曹參議)까지 지냈으나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덕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태조는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거절을 당했으며, 친분이 있던 태종 이방원(李芳遠)까지
이곳까지 찾아와 설득을 했으나, 석탄은 평복 차림으로 직접 빚은 술을 대접하며 벼슬을 거절
했다. 하여 태종은 고려에 대해 지조를 지킨 그를 찬양하며 그 높은 덕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동네를 고덕리,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이라 했다. 그 고지봉이 이후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고덕산이 된다. 이후 석탄은 죽어서 고덕동에 묻혔다고 하나 그의 무덤은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는 고덕산 자락에 묻혔는데, 그의 후손들이 주변에 덩달아 묻히
면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이루었다. 그 묘역의 일원이던 이시무는 고덕산 정상에
흙으로 단을 쌓고 국난평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  강동아름숲길

아리수로와 맞닿은 암사정수사업소 동남쪽 숲을 강동아름숲이라 부른다. 이곳은 주민들이 가
꾸고 복원한 유서 깊은 숲으로 2010년 9월 광화문과 강남 등 서울 곳곳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곤파스의 공격으로 이곳에 살던 1,0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단이 나는 사건이 있었다.
하여 강동구는 2012년 4월부터 숲 복원에 들어갔는데, 지역 주민 1,000여 명이 나무 심기에
참여하여 산벗나무 등 1,500그루를 심어 곤파스의 상처를 대부분 지워버렸다.

나무에는 그를 심거나 기증한 시민의 이름과 사연이 깃든 목걸이가 걸려있으며, 조성된지 얼
마되지 않아서 나무들 대부분은 작고 어리다. 허나 100년의 시간이 지나면 삼삼한 숲으로 변
화하여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것이다. 강동아름숲은 이곳 외에도 부근 샘터근린
공원에도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 역시 곤파스로 피해를 본 것을 시민들 참여로 복원되었다.


▲  쉬지않고 이어지는 고덕산 서쪽 숲길

2000년 이후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천하 곳곳에 둘레길 같은 도보길이 닦여지고 있다.
강동구도 그 시류에 합류하여 2011년부터 도보길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도보길의 이
름은 바로 강동그린웨이(Green Way), 즉 녹색 길이다.
그런데 순수한 우리 말도 많건만 왜 굳이 꼬부랑 영어로 기분 나쁘게 이름을 삼았는지 모르겠
다. 도보길을 만들어 지역 사람들의 마실을 크게 배려한 것은 좋으나 영어로 이름을 삼은 점
에서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니 역시 철밥통들의 한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강동그린웨이는 크게 2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고덕산에서 시작해 샘터근린공원, 방
죽공원, 명일공원, 일자산, 둔굴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교차로까지 이어지며, 2단계는 서하
남나들목입구교차로에서 강동대로, 서울아산병원, 한강, 암사동유적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어
진다. 특히 고덕산에서 일자산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까지는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
3코스(고덕,일자산 코스)와도 겹친다.


▲  암사정수사업소 철조망과 나란히 이어진 고덕산 서쪽 숲길
철조망을 따라 걸으니 군작전지역이나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李克培)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廣州李氏 廣陵府院君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0호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극배 묘역

고덕산 서쪽 숲길을 거닐다보면 나무 사이로 무덤들이 복병처럼 모습을 비출 것이다. 암사정
수사업소가 보이는 서쪽에는 큰 비석을 머금은 비각도 있는데, 이들은 이극배를 중심으로 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이다.
무덤은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역의 중심인 이극배 묘 앞에는 암사정수사업소가 철
조망을 치고 있어 마치 휴전선을 앞에 둔 무덤처럼 보인다. 그의 무덤 남쪽에는 고위 관료의
무덤만 지닐 수 있던 신도비와 비각이 있는데, 그 앞에 지나치게 짧은 간격으로 철조망이 쳐
져있어 앞 공간이 좁아 보인다.

※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누구인가?

묘역의 주인공, 이극배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이씨이다.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
峰)으로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어머니는 노신(盧
信)의 딸이다.

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바로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
해 5등인 정과(正科)로 급제했다. 그렇게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
었고,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검찰관(檢察官)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는
데, 직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병조(兵曹) 겸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
다.
1455년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데 힘을 보탠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錄勳
)되었으며, 1457년 예조참의(禮曹參議)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가선대부(嘉善
大夫)에 직과 광릉군(廣陵君)에 작위까지 받았다.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내다가 1460년 두
만강 북쪽에서 세력을 꾸리던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를 정벌하고자 신숙주(申叔舟)
의 종사로 출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을 경진년에 벌인 북정(北征)이라 하여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 하는데, 우량하의 우
두머리인 아비차(阿比車)가 조선에게 처단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두만강 유역을 공격했
다. 이에 뚜껑이 열린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임명해 8,000명의
군사를 주어 시비를 건 우량하 세력을 때려잡도록 했다.

조선군은 회령(會寧)과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으로 진출, 2차에 걸친 정벌 끝에 우량하 세력
의 고위급 인물 90여 명을 죽이고, 군인과 백성 430명을 포로로 잡거나 처단했다. 그리고 900
여 채의 집을 불태우며 정벌을 기분 좋게 마무리 지었다. 이때 간도(間島) 지역을 완전히 접
수하여 12세기 초반, 윤관(尹瓘)장군이 일구었던 동북9성의 옛 땅을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땅
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그저 성리학 몰빵에 평화만 추구하던 조선에게 그런 기대는 무리였
다.
물론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받들던 명나라의 눈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은
동으로 요동(遼東)이 고작이었고, 압록강 중류 이북부터 두만강 이북까지는 여진족의 땅이었
으므로 여진족 소탕을 구실로 의지만 강했다면 충분히 간도 개척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선에게 단단히 깨진 우랑하는 살려달라고 빌면서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그늘에 들어왔고 이
를 계기로 조선의 북쪽 변경은 약간이나마 확대되었다. 이때 두만강 안쪽에 있었으나 여진족
의 땅으로 남아있던 무산군(茂山郡) 지역을 점령해 조선의 땅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곳을
개척하고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다.

북정을 마치고 돌아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62년 호조(戶曹)와 공조(工
曹)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또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어 평안도의
인심을 살폈으며,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등급이 올라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리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승진했고, 1481년부터
2년 동안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백성을 살폈다. 1485년에는 우의정(右議
政)에 오르고 1493년 최고직인 영의정(領議政)을 제수받았으나 노병을 구실로 거절했다. 이후
광릉부원군에 봉해져 최고의 관작을 누리다가 1495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
자 연산군은 익평(翼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도량이 크고 뜻과 생각이 확고했다. 그리고 경학(經學)을 근본을 삼아 도덕 정치를 실천
했고, 관리로써 필요한 지식과 능력, 처신에 뛰어나 약 50년 간 벼슬을 지내면서 영의정을 제
외한 왠만한 고위직은 두루 거쳤다. 게다가 세종부터 연산군(燕山君)까지 7명의 제왕을 섬겼
으니 그 기록은 황희(黃喜)를 능가한다. 또한 사사로이 손님을 맞거나 선물을 받지 않는 공정
함을 지녔고, 가무(歌舞)는 좋지 않다고 하여 멀리 했으며,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
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극배 신도비를 품고 있는 맞배지붕 비각(碑閣)


▲  이극배 신도비(神道碑)

이극배 묘역 서쪽에 자리한 신도비는 14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예조판
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글을 썼다.
장대한 세월이 무심하게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
가 자욱한 비석 피부에는 그의 일대기가 깨알
같이 적혀있고, 이수(螭首)에 새겨진 구름무늬
와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용이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두 눈에 적지 않은 자극을 준다. 거기
에 비문(碑文)의 서체와 정교한 석공기술은 15
세기 후반 비석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여러
가지로 가치가 높다.

원래는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으나 2009년 이후
든든하게 비각을 씌워 그를 지키고 있다.


▲  뱀이 이리저리 또아리를 튼 듯, 섬세하고 복잡한 신도비 이수의 위엄

▲  신도비에서 이극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이극배 묘역

이극배 묘역은 1495년에 조성되었다. 부인인 경주 최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
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를 비롯해 상석(上席),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1쌍과 무인석
(武人石) 1쌍이 묘역을 지킨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체격이 우람하며, 묘비는 특이하게 이극배
의 봉분(封墳) 앞에만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뒷쪽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어 묘역의 분위기를 크게 북돋는다.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묘역을 장엄하게 꾸미는 문인석과 무인석들은 다른 사대부의 석인보다 큰 편으로 이극배의 오
랜 명성을 가늠케 한다. 조선 초기 석인(石人)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문인석과 무
인석으로 구별은 되고 있지만 둘 다 복장이나 자세가 비슷하여 문인석 2쌍을 배열한 것 같다.
묘역과 가까운 석인은 500년의 장대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어둡고, 그 옆에 석인은 눈이
크게 충혈되어 재밌는 표정을 보인다. 세월의 검은 때가 점점이 입혀진 것을 빼면 대체로 피
부는 햐얗다.


▲  석인들의 뒷모습

▲  묘역 동쪽에 자리한 후손들의 묘역 (이수겸, 이세충, 이시무 등)

광릉부원군파 묘역 동쪽을 이루고 있는 이극배 후손들의 무덤은 9기 정도 된다. 가장 앞에 선
무덤은 이극배의 아들인 이수겸(李守謙)과 청주한씨 내외의 묘역으로 그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을 지냈으나 공적이 즐비한 아비와 달리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다.

▲  이수겸 묘역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  이세충 묘의 문인석

이수겸과 이세충 형제의 무덤 문인석은 이극배 묘역의 장대한 문인석과 달리 덩치가 매우 작
다. 문인석의 표정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데 이수겸 묘 문인석은 관모(官帽)의 윗부분이 부러
졌다.


▲  이수겸 묘역 뒷쪽에 자리한 이세충(李世忠)의 묘
이세충은 이극배의 아들로 크게 벼슬은 못했으며, 나중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  이시무(李時茂)와 이정립(李廷立) 묘역

이시무(?~1593)는 이극배의 현손으로 이건(李乾)의 아들이다. 자는 군우(君遇)로 1576년 별시
(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1593년에 병사했
다.

이정립(1556~1595)은 이시무의 아들이자 이수겸의 증손으로 어머니는 왕족인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으로 157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582년 이이의 추천을 받아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강의해 속칭 3학사의 하나로 칭송을 받았으며, 바로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
조좌랑과 정언(正言)을 지냈다. 1583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
다.
이조좌랑 시절에는 호남어사(湖南御使)가 되어 백성을 구휼했고, 1589년에는 기축옥사(己丑獄
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다가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사직(宗廟社稷
)의 위판(位版, 위패) 등이 개성(開城)에 남아있음을 알고 서둘러 선조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조는 크게 발작하여 빨리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정립은 서둘러 개성으로 달려갔으나, 피난민들은 이미 왜군이 개성을 접수했으니 가봐야 소
용없다고 말렸다. 허나 이를 듣지 않고 개성으로 홀연단신으로 들어가 위판을 찾아 평양으로
가져오는 기염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1593년 부친 이시무가 죽자 부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잠시 떠났고, 1594년 한성부좌윤(漢城府
佐尹)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 세상을 뜨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산12-4외


▲  광릉부원군파 묘역 사이를 지나는 고덕산 산길
이극배묘역 남쪽에 광릉약수터가 있어 지나는 길손의 목을 축여준다.


 

♠  고덕산 마무리

▲  고덕산 서쪽 봉우리 밑 (계단 너머가 봉우리)

광릉부원군파묘역에서 산길을 마저 오르면 'T'자형으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인데, 운동시설이 여럿 있어 이곳까지 올라온 나
그네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허나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으로 북쪽은 한강과 강변도로
가 바로 밑에 보이는 천길낭떠러지이다.


▲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

▲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천하 (명당의 욕심은 이곳까지..?)

고덕산에서 그나마 하늘과 가까운 곳이긴 하지만 나무의 방해로 겨우 북쪽만 속시원히 바라보
인다. 차량들의 질주 소리로 정신이 없는 올림픽대로가 바로 밑에 보이며, 한강과 암사대교,
강일동 지역. 구리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고덕산 능선길

고덕산은 광주이씨와 양천허씨 등의 문중 묘역과 사유지가 많다. 게다가 군사구역도 섞여 있
다보니 본의 아니게 속인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하는 철조망이 많다. 광릉부원군파 묘역에서
서쪽 봉우리로 오르는 길도 대부분 사유지라 길의 통행을 두고 한때 말썽이 있었으나 광주이
씨 문중은 이극배의 후손답게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묘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길까지 열어두어 고덕산이 지역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도록 배려했다.


▲  가재울에서 한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원 풍경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도 가면 높이가 좀 낮아지면서 4거리
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능선길을 따라 고덕산 동쪽과 고덕천으로 이어지며, 오른쪽(남쪽
)은 가재울마을과 고덕동 시내로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은 올림픽대로로 이어지는데, 그 길로 접어들어 1굽이를 넘으니 온갖 채소들이 무
럭무럭 자라고 있는 밭두렁이 진하게 전원풍경을 드러내어 안구를 놀라게 한다. 밭두렁 한쪽
에는 농가도 하나 있는데, 그 주변에 농민 2~3명이 한참 밭을 메고 있었다.

그 밭두렁을 지나 작은 1굽이를 추가로 넘으면 바로 올림픽대로이다. 도로 너머로 한강과 산
책로가 보이나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지하도나 구름다리는 없다. 그러니 뚜벅이로 왔다면 미련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야 되며, 한강이 보고 싶다고 1분에 수백 대씩 지나가는 올림픽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완전 미친 짓이다.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길 서쪽에 양천허씨묘역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를 손짓한다. 안내문 옆
에 나있는 작은 산길로 들어가면 묘역이 있다고 하는데, 오래된 묘역이긴 하지만 비지정문화
재라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덕산이 준 보너스라 여기고 그 산길을 잡았다. 산길을 50m 정도
들어서니 양천허씨묘역이 나타난다.


▲  양천허씨(陽川許氏)묘역

고덕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양천허씨 묘역은 상우당 허종(尙友堂 許琮, 1434~1494)의 손자인
허순(許淳) 3대의 묘역이다. 묘역이 제법 명당(明堂)자리인 듯 싶은데, 한강이 흐르는 북쪽을
애타게 향하고 있으나 나무들은 그들의 뜻도 모른 채, 앞은 물론이고 묘역 주변을 꽁꽁 둘러
싸 숲 너머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양천허씨는 후삼국시대에 서울 가양동(加陽洞)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허선문
(許宣文)을 시조
로 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적극 도운 공으로 고을 이름인 양천<그 당시는 공암(孔巖)
>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 집안에서는 허종을 비롯하여 허균(許筠), 허준(許浚) 등 삼척동
자도 알만한 유명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묘역 제일 밑에 자리한 허운(許雲)과 영천이씨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허순의 아들인 허운의 묘가 묘역 제일 말단에 자리해 있다. 허운은 결성현감(結城縣監,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지낸 평범한 인물로 부인 영천이씨와 같이 묻혀 있는데, 무덤 밑에는 근래
에 만든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고, 16세기에 조성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묘비와 문인석이
묘역을 지킨다.

▲  표정이 밝아보이는 좌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


▲  장대한 세월에 의해 검게 타버린 허운 묘비(묘표)

▲  허순의 정부인이자 전처인 한산이씨의 묘
허순 묘와 허운 묘 사이에 자리한 무덤으로 묘비는 봉분 정면이 아닌 정면에서
다소 우측에 치우쳐져 있다. 부인묘라 그런지 묘비와 상석 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호석은 근래에 두룬 것임)

▲  허순의 무덤 (제일 앞쪽, 바로 뒤에 무덤이 청송심씨 묘)

허순(許淳, 1485~1546)은 허종의 손자이자 허광(許曠, 1468~1534)의 아들이다. 그의 무덤 뒷
쪽에는 후처인 청송심씨의 무덤을 두었고, 앞에는 전처인 한산이씨의 무덤을 만들어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양천허씨 제양군공파의 시조인 허순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비롯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
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제양군(
齊陽君)에 봉해졌다. 묘역의 주인답게 묘역 중앙에 자리해 있으며, 검은 피부의 묘비와 문인
석이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  약간 인상을 지은 듯한 우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과 많이 닮아 보이는
좌측 문인석


▲  묘역 윗쪽에 자리한 허흔(許昕)과 부인 영월엄씨의 묘

허흔(1543~1622)의 묘는 허순 묘역에서 제일 윗쪽에 자리해 있다. 그는 허순의 손자이자 허운
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구정(李龜楨)의 딸이다.

157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감찰과 형조좌랑, 성균
관직강(成均館直講),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경상도도사(都使) 시절에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인 정인홍(鄭仁弘)이 영송(迎送)에 무례하게 구므로 그 아전을 벌주니 백성들
의 칭송이 대단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도사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
가 되어 왕실의 신주(神主)를 지켰다. 이후 정주목사가 되었고, 1615년 죽주부사(竹州府使,
안성 죽산)를 제수받았으나 나이가 칠순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바로 넘어갔다.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조정의 여론을 휩쓸자 크게 상심하여 벼슬을
버렸으며, 1622년 7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공신 명단에서 떨려나기도 했다.

▲  허흔묘 상석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 대신 작은 동자석 1쌍을 두었다. 고된
세월에 많이도 지쳤는지 그들 표정에 주름이 묻어난다.

▲  허종과 허광 숭모비(崇慕碑)

묘역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허종과 허광(許曠)의 숭모비가 자손들의 무덤을 바라보
고 있다.
허종과 허광의 묘는 휴전선 북쪽인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대강면 우근리에 있는데, 남한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성묘길이 막혀 가지를 못하자 상의 끝에 그들의 자손이 묻힌 이곳에 2005
년 숭모비를 세웠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빚어낸 안타까운 현실로 이곳은 양천허씨 제양군공파
를 비롯한 허종의 후손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들의 조촐한 성지가 되었다.

숭모비 정면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두었는데, 우측 것은 두툼하게 생긴 세호로 보이
는 동물이 새겨져 있고, 좌측 것은 기둥을 휘감은 용을 새겨 선조에 대한 자긍심과 정성을 보
였다. 허나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쉽사리 적응이 가려 하질 않는다.

허순 3대의 묘역은 호석과 비석을 새로 한 것 외에는 16~17세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
고 있어 광릉부원군 묘역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마땅히 지방문화재로 삼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지는데, 문제는 서울에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사대부(士
大夫)와 왕족의 묘역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쟁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지정
문화재의 명함도 못내밀 정도이다. 게다가 문화재 지정을 환영하지 않는 후손들도 많다고 한
다. (묘역 소유자나 후손 문중, 지역에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해야 됨)

* 양천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산93-2


▲  가재울 마을

양천허씨묘역을 둘러보고 고덕산 등산로와 만나는 고개를 지나면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재울 마을이 나타난다.
가재울(가재골)은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가재는 커녕 그들이 머물 시냇물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비록 푸른 숲과 밭두렁, 농장 등이 펼쳐져 있어도 시냇물은 고덕지구
개발로 말라버려 그것만은 제대로 재현을 못하고 있다.

가재울을 지나 고덕동 시내로 나와 이른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편의점에서 커피 음료를
사서 원샷으로 들이키니 그나마 좀 몸이 시원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고덕산에 둘러진 서울둘
레길을 따라 더 걷고 싶으나 이미 18시가 넘은 상태라 욕심을 곱게 버리고 나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이렇게 하여 5월에 벌린 강동구 암사동/고덕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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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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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

▲  인왕산 (가운데 봉우리가 정상)


 

♠  인왕산(仁王山) 입문

▲  인왕산 만수천약수터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내 즐
겨찾기 뫼의 하나인 인왕산을 찾았다.
인왕산은 10대 시절 선바위 답사를 시작으로 50번 넘게 인연을 지었는데, 낮 뿐만 아니라 야
간(19시 이후)에도 적지 않게 올라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특히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도심 야경(夜景)은 아주 일품으로 꼽힌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인왕산길로 들어서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방면으로 가다보면
인왕천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짓을 한다. 이 코스는 인왕산에서 가장 잘나가는 약수
로 추앙을 받던 인왕천약수터를 거쳐 인왕산 능선(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데 길이 좀 각박하
다. 하여 그 코스는 쿨하게 통과하고 다음에 나오는 석굴암입구(수성동계곡 상류)에서 인왕산
의 깊은 품으로 들어섰다.

석굴암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나오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이름도 꽤 낯이 익은 석굴암(石窟庵)이란 석굴 암자가 나온다. 허나 그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막혀있어 정자 옆 북쪽 산길로 올라가야 된다. (석굴암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길
이 있긴 하나 통행 금지임)
석굴암입구 정자에서 북쪽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160m 고지에 자리한 만수천약수터가 마중
을 한다. 인왕산에 무수히 널린 약수터의 하나로 부적합 빨간줄과 양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어 앞날이 좀 어려워 보인다. 물론 샘터 주변을 계속 관리해주고 비도 적당량 내려주면 청
색 신호가 뜨는 것은 시간문제이나 날씨 변덕도 심하고 서울 도심이 바로 코앞이라 인왕산 지
하수에도 비상이 걸렸다.

약수터 주변은 나무가 삼삼하여 하늘이란 단어를 거의 잊게 할 정도로 덩치가 큰 바위들이 주
변에 여럿 포진해 있어 약수터의 잔잔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으며, 간단한 체육시설과 의자
등이 놓여져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도록 배려했다.


▲  만수천약수터 주변 풍경

큰 바위 밑에는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
는 기도나 굿 장소로 쓰였다. 인왕산이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굴 앞을
지나니 동굴이 내뱉은 약간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  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과 경복궁, 종로)

만수천약수터에서 갑자기 흥분한 산길을 7~8분 정도 오르면 능선(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숲속에 가려진 산길이 아닌 천하를 굽어보며 걷는 능선길이 시작되는 것
이다.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성곽길(인왕산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성곽길과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내려가면 창의문과 부암동(付岩洞)으로 이어지
며, 왼쪽(서쪽)은 인왕산 정상이다. 우리야 정상이 목적이니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곽길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경사가 슬금슬금 각박해져 호흡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길을 10여 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밖 계단을 내려가면 기차바위 능선이며, 성
곽길을 고수하면 정상이다. 이미 인왕산의 어깨까지 올라탄 상태라 서울 시내가 고루고루 내
려다보여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올라간다.


▲  인왕산의 허리를 따라 흘러가는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  인왕산 북쪽 능선 성곽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콧대가 높은 천하 굴지의 대도시 서울이 내 발 밑에 펼쳐져 있다. 마치 이 도시가
나의 세상이 된 듯 거만한 착각이 피어올라 잠시나마 기분이 즐거워진다.
허나 현실은 마음 편히 드러누울 땅도 제대로 없다는 것.

▲  정상 북쪽 성곽길 - 저 바위 꼭대기가 인왕산 정상이다.

기차바위로 인도하는 갈림길에서 성곽길은 잠시 진정을 되찾으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다시금
격한 흥분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좀처럼 닿
지 않을 것 같던 인왕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어둠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 동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치마바위이다. 병
풍처럼 넓어서 병풍바위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바위에는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슬픈 사연
이 깃들여져 있다. 그 사연은 서울 장안에서 꽤 알려진 이야기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첫 부인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의 딸인 단경왕후(端敬
王后) 신씨(1487~1557)이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燕山君
)을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익선관(翼善冠)을 씌운 채로 급히 왕위에 올리
니 그가 곧 중종이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름>
단경왕후의 아비인 신수근은 반란파에 협조하지 않아 그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들
에 의해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은 부인을 지키고자 재빨리 왕후로 봉했으나 반란파들은 역적
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당장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왕후나 그 소
생 왕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종은 그들을 달래고자 반정 때 몰수한 연산군 측근과 반란 비협조 인물들의 재산을 나눠주
고 기녀(妓女) 300여 명을 주며 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유자광(柳子光)은 중종의
생모이자 대비(大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찾아가
'중전 신씨를 쫓아내지 않으면 임금을 내쫓겠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미 반란으로 왕을 한번 갈아치웠으니 그들에게는 그런 것은 일도 아니
었다.
상황이 점점 고통스럽게 변해가자 신씨는 울면서
'소첩이 전하(殿下)를 위해 나가겠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전하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
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두겠사오니. 상황이 좋아지면 꼭 찾아오세요 ㅠㅠ'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옛날에 살았던 인왕산 동쪽 본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는 매일마다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같이 살던 시절,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중종은 수시로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생각
에 눈시울을 붉혔다.
반란파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서둘러 새 왕비를 맞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장경왕후(章敬
王后) 윤씨가 새 왕비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10여 명의 후궁까지 맞아들이면서 신씨에 대한
추억과 그녀의 존재감은 완전히 흐릿해진다.

신씨는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내러 올 때를 기다려 말죽을 쑤어 사
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래서 왕의 말에게 직접 먹이는 등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했지만
결국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1557년 70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한 많은 삶을 마감
하고 만다. (중종은 1544년 56세의 나이로 승하함)
신씨가 죽자 세상에서는 치마를 널었던 병풍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으며, 소년왕 단종(端宗)
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더불어 왕실 여인들의 '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토
막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치마바위 밑에는 20세기에 조성된 미륵마애불이 숨겨져 있으며, 바위 피부에는 옥의 티로 황
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와 왜왕 만세 등의 바위글씨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글씨
는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린 것을 기념하고자 왜정과 친일 패거리들이 지원하
여 새겨진 것으로 서울 장안 어디에서든 다 보이는 바위라 하여 이곳에 새겼다고 한다. 글씨
는 해방 이후에 죄다 쪼아 지웠으나 그 흔적은 조금씩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인왕산 정상부

▲  정상 동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북쪽 자락과 북악산(백악산)
왼쪽에 보이는 바위 능선이 기차바위이다.

▲  인왕산 정상 남쪽
인왕산 정상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진입이 가능하다. 서쪽은 성곽 바깥이고
동쪽과 북쪽은 꽤 각박한 낭떠러지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해발 338m(또는 340m)의 바위 봉우리로 북악산(342m)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개를 경계로 북악산(백악산)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통해 북한산(삼각산)과 이
어진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이란 명칭이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
제왕이 정전(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
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
롯되었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 웃대)과 사직동,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
워있으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꽤 가파르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가 작아
서 금방이면 올라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현상을 노린 인왕산의 속임수이다. 그의 품에
들어가보면 보기와 달리 넓고 장대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사직공원(사직단)과 독립문역에서 인왕산 정상까지 40~50분 정도 걸리며, 정상을 찍고 홍제동
환희사(歡喜寺)나 개미마을, 홍지문,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 보통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돌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와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
한 경관을 돕고 있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해 우백호
에 걸맞는 위엄을 드러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
)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담아
인왕산을 극찬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약수터가 제법 많아 곳곳에서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
다. 하지만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
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사라져 수성동(水聲洞)계곡과 큰절골(환희사계곡)만 그나마 좀 남
아있고 청풍계(淸風溪)와 청계동천(淸溪洞天), 백운동천(白雲洞天) 등은 일부만 살아있다.


▲  인왕산 정상 바위
저 바위가 인왕산의 실질적인 정상으로 높이는 1.5m 정도 된다. 바위의 남쪽과
북쪽 피부에는 움푹 패여 하얗게 서린 곳이 많은데, 이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오가면서 생긴 상처이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이 폐쇄
되면서 선바위와 환희사 주변, 인왕산길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
다가 김영삼 정권 때 다시 속세에 개방되었다. 허나 서울 도심을 지키는 요충지라 군부대 시
설이 성곽 능선과 산자락 곳곳에 남아있어 금지된 땅이 다소 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또한 매주 월요일은 인왕산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인왕산 주능선)은 입산이 통제되며, 월요
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다음 날 통제된다. 다만 성곽 능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제한이 없
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國師堂), 치마바위,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
던 수성동계곡, 벽화로 유명해진 홍제동(弘濟洞) 개미마을,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
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
속(巫俗), 불교가 어우러진 이색 현장으로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
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
과 남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정도전(鄭道傳)은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꺾이고 만다.
이에 발끈한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
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터져 백성이 어
육이 될 것이다'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정확히는 6대) 만에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
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사대부의 억불숭유 정
책을 신랄하게 까고자 불교 쪽에서 그럴싸하게 지은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  성곽과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있는 정상 북쪽 성곽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
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서인 패거리를 이끌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로 줄
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치고자 인왕산 서쪽 안산
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말하며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다. 그리고 군사<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
들을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하니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
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다. 그 시절 백성들은 하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산을 가득 메운 그
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하여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잠구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부하에게 살해되어 결국
목없는 귀신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
後金)으로 도망가 청태종(淸太宗)에게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
(丁卯胡亂)이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
에 수시로 나타나 난리를 치기 일쑤였고, 심지어 종묘(宗廟)까지 침입했다. 백성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
왔으니 인왕산은 그야말로 조선 호랑이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고양이만 종종 보일 뿐이다.
또한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
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과 같은 재미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
현(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고 우는데,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린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가 지례 겁을 먹으

'엥 수진궁 귀신..? 이건 말도 안돼'
꼬리를 접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인왕산 북쪽 능선

인왕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를 비롯하여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여의
도, 영등포구, 강서 지역, 동작구, 강남 지역, 동대문구, 성북구, 광진구, 강동 지역, 국립현
충원,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 우면산, 아차산 등 많은 존재들이 고루고루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는 338m(340m)에 불과하나 조망만큼은 한라산과 백두산이 부럽지 않다.
또한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진국이며, 남산(南山)과 함께 서울 도심의
새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도심이 바로 밑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야경 맛이 아
주 좋다. (서울 도심 야경은 인왕산을 제일로 쳐줌)

* 인왕산 정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부암동, 서대문구 홍제동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서울의 장대함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남산(가운데 솟은 산)
저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남한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과 서대문구, 마포구, 여의도,
영등포, 강서 지역


 

♠  인왕산 기차바위

▲  기차바위 능선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기차바위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성곽길을 버리고 기차바위로
방향을 잡았다. 철계단을 타고 성 밖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인왕산의 으뜸 바위로 추앙을
받는 기차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능선 (북쪽 방향)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칭송을 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그렇다고
기차처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차는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사골)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라
보면 꽤 두툼한 바위 능선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급이나 단 양쪽이 일
체의 자비도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 능선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시내

가까이로 북악산(백악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울 도심부부터 멀리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산줄기, 강동구 지역, 남양주와 하남, 성남 지역 산줄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눈 속에
서 아주 살살 녹는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부암
동과 신영동, 평창동(平倉洞),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산줄기가 장쾌하게 시야에 들
어온다. 이렇게 보니 서울의 한복판이 아닌 산악 지방의 소도시를 보는 기분인데, 뫼를 오르
는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보기 위함이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왼쪽)과 안산(鞍山)

▲  기차바위에서 홍제동,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기차바위 능선을 지나 북쪽 갈림길에서 홍제동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다
시 왼쪽으로 빠져 환희사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옥동약수터를 만났는데, 물이 실타래보다 적게
나오고 수질 또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라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 약수터에 있던 노
인이
'약수터 주변 정비를 안해서 그렇지, 마셔도 괜찮다. 난 이 물을 20년 동안 마셨다'
며 괜찮다고 그런다. 허나 부적합이란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 끝내 마시지는 않았다.

노인의 말로는 이곳을 관리하는 동네 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거나 생명이 다해 거의 해체되어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왕년에는 인왕산의 제일 가는
약수임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많이 초췌해졌다면서 서대문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철밥통에 걸맞게 앵무새처럼 알겠다고만 할 뿐, 약수터 관리에 그리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  옥동약수터 주변 동굴

옥동약수터에서 잠시 두 발을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다보니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났
는데, 그 약수터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들이 있고 그들
뒤로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는데, 그곳도 기도와 무속 행위로 말썽이 많자 아예 철조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산산이 불어와 몸을 꼬질꼬질하게 뒤덮던 땀방울을
제대로 단죄한다.

동굴을 뒤로하고 5분 남짓 내려가니 인왕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비구니 산사, 환희사(歡
喜寺)가 모습을 비춘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 2개를 간직한 20세기 현대사찰로 오랜만에
발을 들일까 했으나 이미 18시가 넘어서 쿨하게 통과했다. 환희사는 18시 정도가 되면 대문을
걸어잠군다.
속세애서 절까지는 차량이 마음껏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있는데, 그 길을 5분 정도 내
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홍제원현대아파트와 인왕산현대아파트가 나온다. 이제
완전히 속세로 내려온 것이다. 두 아파트 사이를 가르는 통일로34길을 내려가니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인왕산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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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9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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