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권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23.06.07 도심 곁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창원 비음산 불곡사 (불곡사 일주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 2018.11.03 옛 무덤일까? 탑일까? 깊은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돌무더기, 산청 구형왕릉~왕산 늦가을 나들이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3. 2014.10.17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곰절이란 애칭을 가진 창원 불모산 성주사
  4. 2013.11.15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연화산 숲길)
  5. 2013.03.18 봄맞이 매화꽃 나들이 ~ 남해바다를 품은 조그만 해안공원, 통영 달아공원
  6. 2012.11.27 늦가을 산사 나들이 ~ 남해 용문사 (미국마을, 남해바다)
  7. 2012.09.24 지리산에 포근히 감싸인 고을 ~ 산청 역사기행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남명조식유적)
  8. 2012.07.30 함양 상림공원
  9. 2011.07.28 여름 피서의 영원한 성지 ~ 밀양 얼음골
  10. 2011.07.21 경남 내륙 제일의 경승지 ~ 거창 수승대

도심 곁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창원 비음산 불곡사 (불곡사 일주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창원 불곡사



~~~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창원 불곡사 ~~~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따스한 봄의 한복판인 4월의 끝 무렵, 경남의 중심 도시인 창원(昌原)을 찾았다. 창원은
거의 6~7년 만에 방문으로 다른 곳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들리게 되었는데, 고양이가 생
선가게를 그냥 못둔다고 접근성이 좋은 간단한 볼거리를 고르다가 2005년에 갔던 불곡사
를 골랐다. 그때도 4월에 갔었는데 이번에도 4월이다.



 

♠  불곡사(佛谷寺) 입문

▲  불곡사 일주문(一柱門)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3호

불곡사는 숲이 우거진 대방동 언덕 남쪽에 자리한다. 이 절은 '비음산(飛音山) 불곡사'를 칭
하고 있는데 여기서 비음산(510m)은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뫼이다. 얼핏 보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나 불곡사가 안긴 언덕 또한 비음산의 일원이다. 무분별한 개발의 칼질로 그 사이에
주거지가 조성되면서 서로가 끊긴 것이다.

불곡사 언덕 남쪽을 지나는 대암로를 들어서면 절로 인도하는 언덕길이 나타난다. 그 길의 손
을 잡으며 언덕을 오르면 경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다른 일
주문은 기둥 2개, 문 하나가 전부이나 여기는 부산 범어사(梵魚寺)의 일주문처럼 기둥이 4개,
문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은 원래 창원객사(昌原客舍)의 정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1822년 웅천향교(진해)로 이전
되어 향교 정문으로 살다가 1940년에 그 향교가 사라지면서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 것을 1943
년에 우담이 이곳으로 가져와 일주문으로 삼았다. 그래서 다른 일주문과 달리 객사, 향교(鄕
校), 그리고 절까지 다양한 곳의 정문을 두루 거쳐 경력도 화려하다.

그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계 문으로 절의 일주문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다. 아무래도 관
청 출신 문이라 그런 듯 싶다. 원래 지붕을 제외한 문 높이가 4m 정도 되었으나 기둥의 아랫
부분이 썩어버려 2m 정도를 잘라냈다. 그러다보니 지붕 덩치에 비해 문의 높이가 현저히 낮아
진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지붕까지 합치면 4m 정도로 만약 아랫부분을 잘라내지 않았다면 거
의 6~7m의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을 것이다.

문이 여러 번 이사를 가면서 적지 않은 변형을 겪은 것으로 여겨지며, 나무를 다루는 수법이
다양하기는 하나 정교함이 덜하다. 지붕 기와에서 '강희(康熙)24년 을축일~~'이라 쓰인 글씨
가 나와 숙종 시절인 16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의 평방(平枋) 좌우 끝에는 귀엽게 다듬어진 호랑이와 거북 조각이 있는데, 이들은 불곡사
가 문 수식용 및 비보풍수의 목적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  일주문 서쪽 평방에 닦여진 귀여운
호랑이와 용 꼬리 조각

▲  일주문 동쪽 평방에 닦여진
거북 조각


▲  고된 세월에 꽤 지쳐 보이는 늙은 승탑(僧塔, 부도탑)

일주문을 지나면 덥수룩한 모습의 옛 승탑이 손짓을 한다. 그는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으
로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기단과 탑신(塔身)이 남아있으나 사라진 부분은 새 돌을 끼워넣
어 낡은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탑 중간과 밑도리에는 중생들이 얹혀놓은 막
돌탑이 그들의 소망을 양분으로 삼으며 어수선하게 싹을 내렸다.


▲  경내를 가리고 선 세음루(洗音樓)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그 밑도리를 지나면 불곡사의 조촐한 경내가 펼쳐진다.


불곡사는 인근 성주사(聖住寺)와 함께 창원의 대표적인 오래된 절이다. 935년에 진경국사(眞
鏡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이후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까지 이렇다할
내력(來歷)이 전하지 않는다. 허나 경내에 신라 후기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이 있어 신라
말에 창건된 것은 분명해 보이며, 조선 중/후기 것으로 보이는 승탑과 대한제국 시절 탱화들
이 여럿 전하고 있어 고색의 깊이를 그런데로 우려낸다.
1932년 우담(優曇)이 비로전과 세음루, 산신각, 승당, 요사채 등을 중건했고, 1943년에 버려
진 웅천향교 정문을 가져와 일주문으로 꾸몄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비로전을 비롯해 명부전, 관음전, 칠성각, 세음루 등 8~9동 정
도의 건물이 있으며, 국가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지방문화재인 일주문, 오래된 승탑과
대한제국 시절 탱화가 전한다.
불곡사가 자리한 언덕도 비음산의 엄연한 일원이었으나 개발의 칼질로 서로가 끊기면서 도시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그래도 절 주변 언덕은 숲이 우거져 있어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
은 풍긴다. 만약 불곡사가 아니었다면 이 언덕 또한 아파트로 도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불곡사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대방동 1036-1 (대암로 55 ☎ 055-282-7402)



 

♠  불곡사 둘러보기

▲  비로전(毘盧殿)

불곡사의 중심 건물인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법당치고는 규모가 작
다. 앞서 일주문처럼 지붕이 밑도리보다 너무 큰 모습으로 이곳에 불곡사 제일의 보물이 깃들
여져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436호

비로전의 주인이자 불곡사의 1급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 딱
딱한 돌피부에 비해 부드럽고 정교한 모습을 지닌 석불로 머리는 나발이며, 상투 모양의 육계
(무견정상)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알맞은 크기와 모습으로 배
치되어 있으며, 귀는 짧고 목에 있는 3개의 주름선인 삼도(三道)는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와 석불 전체에 걸쳐져 있고, 옷주름은 다리까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
며 흐르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석불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8각형으로 연꽃무늬와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석불의 높이는 약 101cm, 연화대좌(蓮花臺座)는 약 90cm로 석불 등에는 예전에 광배(光背)를
붙인 흔적인 구멍이 남아있다. 그 광배는 세월의 고된 무게에 석불의 등을 놓아버렸고, 지금
은 옆에 따로 누워있다.
무려 1,000년이 넘는 지긋한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어 그의 건강 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광배까지 온전하게 달려있었다면 정말 금상첨화였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하지만 천하무적으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세월을 누가 이기랴. 이 정도라도 남
아있는 것도 다행이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광배
석불의 광명을 상징하며 그 등에 붙어있던 광배로 지금은 석불 옆에 뉘어져 있다.
돌에 새겨진 무늬들은 세월을 예민하게 타면서 불곡사의 잃어버린 내력처럼
다소 희미해졌다.

▲  비로전 지장탱
1904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범종각과 명부전(冥府殿, 오른쪽 집)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1990년대에 지어졌다.

▲  금동으로 다져진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두광(頭光)을 지닌 지장보살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자리해 있다.

▲  칠성각(七星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칠성과 독성(나반존자), 산신의 거처이다.

▲  칠성각 독성탱

망중한에 잠겨있는 듯한 독성(나반존자) 할배와 동자,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 등이
그려져 있다. (폭포와 소나무도 있음) 그림은 고색이 좀 있어 보이는데 화기(畵記)를 확인하
지 않아서 자세한 건 모르겠다. (20세기 초기 것으로 여겨짐)


▲  등장 인물이 꽤 많은 칠성각 칠성탱
독성탱만큼이나 늙어 보인다. (20세기 초나 중기로 여겨짐)

▲  칠성각 산신탱
온후해 보이는 산신 할배와 동자, 괴수처럼 무서워 보이는 호랑이 등 산신 가족이
담겨져 있다.

▲  불곡사 관음전(觀音殿)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05년에
왔을 때는 지붕이 청기와로 뒤덮여 윤이 반짝반짝 빛났는데
그새 기와갈이를 했던 모양이다.

▲  관음전에 봉안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무려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을 지닌 천수천안관세음보살, 그만큼
그가 지켜주고 어루만져야 될 중생들이 많다는 뜻일 거다.


관음전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불곡사 관람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창원
에서 더 이상 정처(定處)를 잡지 않고 바로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하여 창원 불곡사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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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무덤일까? 탑일까? 깊은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돌무더기, 산청 구형왕릉~왕산 늦가을 나들이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산청 가을 나들이 ~~~~~
(전 구형왕릉,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전 구형왕릉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0월의 끝 무렵에 지리산 동쪽에 넓게 누운 경남 산청(山淸)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터미널에서 진주(晋州)행 직행버스를 타고 냉정분기점까지 줄기차게 이
어진 교통체증을 뚫으며 1시간 50분 만에 진주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산청으
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9시 40분에 산청터미널에 이르렀다.
산청터미널에서 구형왕릉이 있는 화계리로 가는 군내버스가 10시에 있는데 마침 시간이 딱
맞아 떨어진다.
쌀쌀한 아침 기운에 여남은 졸음을 털어내고 있으니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타는 곳에 쑥 머
리를 들이민다. 차에 오르니 거의 노인들 뿐이고, 젋은층은 정말 손에 꼽을 지경이다.

10시가 되자 군내버스는 강인한 심장 소리를 내며 산청터미널을 출발했다. 마침 읍내 주변
은 오리무중(五里霧中)처럼 안개가 자욱했는데, 금서면(今西面) 중심지(매촌리)를 지나 고
개를 오르니 특리(特里)에 이르러 안개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명을 되찾았다. 즉 안개 위로
올라온 것이다.
거의 흔치 않게 경험한 안개 위에 세상은 구름이 거의 없는 푸르른 가을 하늘이 눈 시리게
펼쳐져 있고, 내가 왔던 안개 밑 세상은 여전히 두터운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졸
지에 환경이 달라지니 속세에서 천상(天上) 세계로 승천(昇天)이나 해탈(解脫)을 한 듯한
묘한 기분이 교차한다.

산청군에서 야심차게 닦은 산청한방테마공원을 지나 다시 뱀꼬리 같은 험준한 고개를 넘으
니 구형왕릉을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덕양전이 나온다. 여기서 노인 3명과 같이 내려 늦가
을이 내려앉은 덕양전을 찾았다.


 

  가락국 구형왕(仇衡王)을 봉안한 사당 ~ 덕양전(德讓殿)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0호

▲  홍살문과 굳게 입을 닫은 외삼문(外三門)

구형왕릉 입구에 자리한 덕양전은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의 마지막 군주인 구형왕 내외를
봉안한 사당이다.

구형왕은 신라에 항복하고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 자리에 있었다는 수로왕(首露王)의 별궁, 수
정궁(水晶宮)에서 5년 정도를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이후 후손들이 사당을 만들
어 제사를 지냈으나 여러 번 중단되었다고 하며, 1798년에 왕릉 밑에 사당을 새로 짓고 다시
제향(祭享)을 올렸다. 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는 구형왕의 다른 이름이라는 양
왕(讓王)에서 따온 이름으로 그의 덕을 기린다는 뜻이다.
그 이후 193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1991년 문화재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
게 되었다.

덕양전은 1,200평 규모로 영정각(影幀閣)과 안향각(安香閣), 연신문(延神門), 추모재(追募齋)
, 정숙당(靜肅堂), 해산루(海山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등을 갖추고 있으며, 덕양전 본
전(本殿)에 봉안된 구형왕 내외의 영정은 1798년 왕산사터에서 발견된 목함(木函) 속에 있었
다고 한다. 그 안에는 영정 외에도 왕산사기(王山寺記)도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영정은 그때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정체가 아리송한 돌무더기를 구형왕릉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
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옛 가야의 쓸쓸한 성지(聖地)인 덕양전은 추모재(왕산재)가 있는 경내 우측 부분만 출입이 가
능하다. (공개 범위는 변경될 수 있음) 본전과 안향각, 서재 등 덕양전의 핵심인 해산루 안쪽
은 제향 때를 제외하고는 문을 굳게 닫아건다. 허나 담장이 낮아 밖에서도 거의다 보이며 옛
가락국의 성역인만큼 출입통제 안내문을 거스르면서까지 억지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덕양전의 매력은 바로 담장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당은 기와를 얹힌 담장을 둘렀으나 이곳은
아산 외암리마을의 돌담처럼 그냥 돌만 쌓은 형태이다. 돌담의 높이는 1.5m 내외로 돌을 차곡
차곡 쌓아 마치 조그만 성곽(城郭)처럼 보이며, 기와를 얹힌 부분이 없고, 높이도 성인 키보
다 좀 작은 높이를 유지하여 동네 돌담처럼 수수한 모습이 그저 정겹기만 하다. 또한 구형왕
릉의 곡장(담장)도 이곳의 돌담과 비슷한 모습인데 덕양전은 그 왕릉의 사당인만큼 그곳의 담
장을 본떠서 만든 듯 싶다.

제향은 매년 봄 음력 3월 16일과 가을 음력 9월 16일에 춘추향례(春秋享禮)를, 음력 초하룻날
과 보름날에 삭망향례(朔望享禮)를 지내며, 제례 때는 산청 지역 주요 인사들과 후손들, 유림
(儒林), 기관단체장 등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다.
* 덕양전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370 (동의보감로 995)


▲  덕양전 추모재(왕산재)로 들어가는 삼문(三門)

늦가을 아침 햇살이 살포시 어루만지고 있는 덕양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는 홍살문이다.
보기만 해도 정덜미가 뚝 떨어질 것 같은 차디찬 인상의 소유자, 홍살문은 관청과 향교 등 국
가 기관과 사당, 향교(鄕校), 서원(書院) 등 양반과 관련이 깊은 장소에 세우는 것으로 이곳
을 찾은 이에게 예의와 엄숙을 요구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이 나오는데, 향례 때를 제외하고 늘 문이 닫혀있다. 문에 새겨진 큼
직한 태극마크는 사당의 엄숙함을 더욱 진하게 해준다.


▲  왕산재<(王山齋), 추모재(追募齋)>
덕양전을 관리하는 후손들이 머물거나 모임을 하는 공간이다.

▲  덕양전 사적비를 품은 비각(碑閣)

▲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자리한 해산루

▲  해산루 담장 너머에 자리한 서재(西齋)

▲  해산루 돌담 너머에서 본 내삼문과 그
주변 (내삼문 뒤쪽에 덕양전 본전)


▲  외삼문 돌담 너머로 본 해산루 주변
해산루는 외삼문, 내삼문과 달리 문이 활짝 열려있다. 하긴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죄다 통제해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니 해산루까지 문을 닫아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하마 서식지가 아닌 말에서 내리란 뜻(下馬)의 비석으로 보통은 홍살문 곁에 두지만
이곳은 다소 거리를 두며 자리해 있다. 덕양전 주차장에서 화계리로 나가는 길가에 빛바랜 모
습으로 있어 자칫 지나치기가 쉽다.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 낀 하마비는 관청과 향교, 궁궐, 서원, 사당, 왕릉이나 사대부의 묘역
입구에 세우며, 이 앞은 무조건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  알록달록 옷을 걸쳐입은 덕양전 동쪽 돌담
지체 높은 사당의 돌담보다는 일반 민가의 돌담 같은 정겨운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사당의 돌담으로 보겠는가? 담장 높이도 성인 키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라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콧대 높은 덕양전 내부가 속시원히 바라보인다.

▲  망경루(望京樓)

덕양전 동쪽에 구형왕릉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구형왕릉로)이 닦여져 있다. 그 길을 5분 정
도 가면 길 서쪽 계곡에 2층 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은 망경루란 누락으로 조
선 태조가 고려의 충신인 민안부(閔安富)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누각의 이
름인 망경(望京)은 서울을 바라본다.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민안부의 서울은 당연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開京, 개성)이 된다.

민안부는 본관이 여흥(驪興, 여주). 자는 영숙(榮叔), 호는 농은(農隱)이다. 학문이 매우 뛰
어나 일찌기 관직에 진출해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 때 예의판서(禮儀判書)까지 올랐
으나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이에 반발하여 고려의 유신 70여
명과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세상은 그를 포함한 72명을 두문
동 72현(賢)이라 부른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그에게 벼슬을 내려 나올 것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두문동을 나
와 산청 대포리(大浦里)에 은둔하면서 매월 첫날과 보름에 개경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고려
를 그리워했다. 또한 자손들에게도 조선 조정의 벼슬을 하지 말 것을 경계했으며, 현감(縣監)
에 등용된 아들을 사직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누각은 근래에 손질된 것으로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에 유림에서 조직한 '한계회'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망국(亡國)의 제왕이 묻혔다는 왕릉으로 가는 길목에 이렇게 망국의 충신을 위한 누각이 있으
니 참으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일부러 망국 제왕의 능 밑에 지은 것이 아닐까 싶지만 당시
구형왕릉은 정체가 아리송하던 시절이므로 그건 아닌 듯 싶다. 비록 서로의 신분은 달라도 망
국을 강제로 겪었고, 그 한을 달래는 부분에서는 서로가 공통되니 이 골짜기는 망국을 그리는
이들의 조촐한 공간인 셈이다.

▲  김유신이 화살을 쐈다는 장소에 세워진
사대비(射臺碑)

▲  비각 안에 담긴 가락국 유적비(遺蹟碑)

망경루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돌로 다진 단(壇) 위에 심어진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 피부
에는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렬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新羅 太大角干 純忠壯烈 興武王 金庾信
射臺碑)'라 쓰여 있는데, 김유신이 여기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자 단을 닦고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임)


▲  늦가을이 곱게 봉숭아물을 들인 구형왕릉 가는 길
길을 가다가 갑자기 신선 형님이나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가락국의 마지막 군주,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신비의 돌무덤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 사적 214호

덕양전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왕산 북쪽 골짜기에 '전 구형왕릉(이하 구형왕릉, 석총)'이
라 전하는 거대한 돌무덤이 신비로움과 수수께끼를 고요히 품은 채 웅크리고 있다. 산청의 대
표적인 명소로 주변의 빼어난 풍광 때문인지 나 같은 범인(凡人)들이 감히 발을 들이는 것이
뭐할 정도로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이 무덤은 일반적인 흙무덤이 아닌 돌로 쌓은 이른바 석총(石塚)이다. 이 땅에서 석총의 대표
적인 존재로 고구려의 장군총(將軍塚)이 있는데, 그건 덩치로 보아 고구려의 태왕(太王) 무덤
이 확실하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의 왕릉으로 보고 있음> 하지만 이곳 석총은
여전히 정체가 아리송하다. 그래서 구형왕릉이란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인 것이다. 즉 구형왕
릉으로 아련히 전해오는 존재란 뜻이다.

석총의 형태는 경사진 언덕에 돌로 쌓은 기단식 석단(石壇) 형태로 동쪽으로 뻗어있는 경사면
에 잡석으로 앞면을 7단 쌓고, 정상은 봉분(封墳)처럼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
이는 7.15m 정도로 어떤 이는 산청의 피라미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연 경사를 활용하여 만
든 것이라 평지에 만든 계단식 돌무덤<장군총이나 서울 석촌동고분군>과는 차이가 있다.
석총 중간 부분에는 네모난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는 폭 40cm, 깊이 68cm의 감실(龕室)로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처음에는 내부로 들
어가는 문으로 생각했지만, 깊이가 1m도 안되니 그것도 아니다. 만약 불교와 관련된 돌탑이라
면 불상을 봉안한 공간이겠지만 그런 증거도 마땅치가 않다. 예전부터 구형왕릉에 가게 되면
반드시 저 구멍을 살펴보겠노라 다짐했으나, 석총으로 올라가는 양 사이드에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장이 있어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람도 없으니 그 경고를 무
시하고 올라가도 되겠지만 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석총 주위에는 돌로 쌓은 키 작은 돌담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데, 돌담의 모습은 아까 덕양전
의 돌담과 비슷하여 덕양전이 1930년 그 자리에 터를 닦을 때, 이곳의 돌담을 따라 만들었음
을 알 수 있다.
석총 앞은 경사가 좀 기울어져 있는데 경사면 앞 평지에 비석과 장명등, 문인석(文人石)과 무
인석(武人石) 1쌍을 두어 석총을 지키게 했다. 이들은 모두 근래에 심은 것으로 석총과는 시
대 차이가 상당하다. 무엇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존의 문인석, 무인석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훤칠한 키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문인석은 너무 나이가 지긋해 보
인다. 그리고 세월에 지쳤는지 조금은 경직된 표정이다.
석총 북쪽 계곡에는 돌로 터를 다지고 능을 관리하고 제기(祭器)를 관리하는 재실(齋室) 2동
을 만들었고, 근래에 주차장과 무덤으로 건너가는 홍예다리를 가설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  구형왕릉 우측 석인(石人)
왼쪽이 문인석, 오른쪽이 무인석이다.

▲  구형왕릉 좌측 석인의 뒷모습

◀  구형왕릉 비석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쓰여 있다.
여기서 양왕릉은 구형왕릉의 다른 이름이다.

이 석총의 정체에 대해서는 왕릉이란 설과 석탑이란 설이 있다. 탑으로 보는 설은 안동(安東)
과 의성 지역에 비슷한 모습의 탑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근처에 왕산사란 절이 있어서 석탑
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탑의 모습은 이 땅의 흔한 스타일이 아닌 이형(異形) 스타일일 것이다.
그리고 구형왕릉이나 왕릉(신라 왕릉으로 구전됨)으로 보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구전이나 기록
을 통해 왕릉으로 전해오고 있어서 그렇다. 지금은 왕릉 쪽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으나 불
교 석탑의 견해도 만만치 않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현(山陰縣) 부분에 '현 서쪽 10리, 왕
산 산중에 돌로 쌓은 언덕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상에서는 왕릉으로 전한다'
는 기록이 있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옛날부터 왕릉으로 구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이곳이 구형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홍의영(洪儀永, 1750~1815)의 '왕산심
릉기(王山尋陵記)'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서는 무덤 서쪽에 왕산사란 절이 있고 그 절에서 전
하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쓰여있다고 했으며, 산사기권(山寺記券)에도 그렇게 나와있
다. 또한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에는 무오년(戊午年, 1798년)에 구형왕릉을 수리하고 사당을
세워 수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허나 이들도 딱히 신뢰도는 떨어진다. 경주에 있는 많은 신
라 무덤들이 신라 왕족 후손들(박씨, 석씨, 김씨)에 의해 대충 '신라 어느 왕'의 능으로 둔갑
되었듯이 구형왕릉 역시 후손(김해김씨)에 의해 둔갑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석총의 조성시기는 구형왕릉이 맞다면 6세기 중반이 될 것이고, 만약 탑이라면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이곳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구형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도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는가?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따르던 신하와 군사들은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산에서 뒹굴던 잡석을 하나씩
얹혀서 지금의 석총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 이곳은 구체적인 발굴작업이나 학술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하루 빨리 발굴조사가 이
루어져 그 속을 속시원히 들추었으면 좋겠다. 왕릉이라면 조촐하게 석실(石室) 같은 것이 있
을 것이고 거기서 괜찮은 단서나 당시 유물이 앞다투어 나올 지도 모른다. 옛날 제왕이나 귀
족의 무덤은 보물단지라 불릴 만큼 유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  신비한 기운에 감싸인 듯한 구형왕릉

그럼 이곳에 묻혔다는 구형왕(?~537년)은 누구일까? 구형왕을 살피기 전에 일단 가락국을 포
함한 가야(伽倻)에 대해 아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에 당당한 일원임에도 삼국(三國)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야, 당연히 사국(四國)시대라고 불려야 되지만 가야는 늘 외면을 받고 있다.
가야는 변한(弁韓)을 이루던 12개 나라의 일원인 구야국(狗倻國, 경남 김해)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김수로(金首露)가 지역 촌장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가락국(駕洛國)을 건국했
다. 그 가락국(금관가야)의 건국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개황록(開皇曆)에 따르면 서기
42년이라고 한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가락국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변한을 통합했으며, 점령한 곳에는 왕족이나 귀족을 보내 그
곳의 왕이나 관리로 삼거나, 항복한 세력의 군장에게
통치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소위
말하는 13가야를 이루게 되었다. (예전에는 6가야라고 했음)
13개(혹은 그 이상)의 연맹국가(聯盟國家)로 구성된 가야는 경남 대부분을 차지하고, 경북 성
주(星州)와 상주, 문경<고령가야(古寧伽倻)>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북쪽에 있는 신라(新
羅)와 자주 충돌했는데, 초기에는 가야가 우위를 차지했으며, 서로는 마한(馬韓)과 백제와 다
투었다. 또한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열도(倭列島)로 진출, 곳곳을 개척하여 속령(屬領)으로
삼았으며, 이때 건너간 가야인 중 유력한 사람이 왜왕(倭王)이 되어 가야의 명을 받았다.
특히 철이 많이 생산되어 철생산국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는데, 그 철을 바탕으로 강력한 기마
군단을 만들어 주변 나라를 벌벌 떨게 했다.

이렇게 부강하던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제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지 못
한 한계점이 있었다. 이들 삼국은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영토 확장에 매진했으나, 가야는 각 연맹국가가 따로국밥처럼 놀아 단결이 쉽게 되
지 못했던 것이다. 가락국과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盟主) 노릇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맹주일 뿐, 다른 연맹국가를 제어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같은 가야라도 이익 관계에 따라 서
로 치고 박고 싸우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3세기 초반에 안라국(安羅國)이 일으킨 포
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가락국이 주변 나라와의 해상교역권을 송두리째 차지하며 혼자서만 배를 불리자 안라국 등 경
남 남부 해안 지역에 있던 8개의 나라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가락국을 공격했다. 가락국은 서
둘러 신라에 구원을 청했으나, 8국 연합군의 수군이 신라 땅인 울산까지 치고 들어가 그 기세
를 떨치니 가락국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  계곡 위에 닦여진 홍예다리
홍예다리는 근래에 만든 것으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자아낸다.


4세기 후반, 가락국은 왜열도의 군사를 징발해 약 2만의 군사로 신라 왕경(王京, 경주)을 공
격했다. 신라 내물왕(奈勿王)은 급히 고구려에 살려달라 요청을 했고, 고구려의 태왕인 광개
토태왕(廣開土太王)은 친히 기병 5만을 이끌고 서라벌로 달려가 가야군을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의 기마군과 가야의 기마군이 처음으로 격전을 벌였는데, 둘 다 같은 철갑기병(鐵
甲騎兵)에 철갑옷을 갖췄지만 승자는 고구려였다. 가야의 철갑은 판갑(板甲)으로 방어력은 끝
내주지만 너무 무거워 기동력이 떨어진데 반해 고구려 철갑은 환갑(環甲)으로 방어력은 좀 떨
어지지만 가벼워서 기동력이 좋다. 게다가 고구려군이 전쟁경험도 풍부하니 어찌 가야가 당해
내겠는가.

고구려군은 줄행랑치는 가야군을 쫓아 가야를 풍비박산을 내었고 바다를 건너 왜열도까지 공
격해 쓸어버렸다고 전한다. 그 과정에서 가야연맹국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후 소리 없이 쇠
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런 마당에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좌우에서 가야를 압박하
니 하나로 뭉치지 못해 따로 노는 가야연맹은 더욱 힘들어 질 수 밖에 없다. 

가야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6세기가 도래하고, 521년 구형왕이 가락국 10대 제왕이 되었다. 가
락국이 42년에 세워졌다고 쳐도 480년 동안 왕은 겨우 9명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50~55년이라는 소리인데, 이게 말이 될까? 이는 기록의 실수로 중간에
누락된 제왕이 제법 많을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왕은 구형왕 포함 10명 뿐이니 후세에서 이
를 잘못 계산한 것이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구해왕(仇亥王),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왕비는 분질수이질(
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이다. 그는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노종(奴宗), 2남은 무
덕(武德), 3남은 무력(武力)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은 가락국 왕자(또는 왕족)에게 화친의 의미로 신라 왕족 여인을 시집보
냈다. 허나 구형왕은 시집 온 신라 왕녀에게 가야 옷을 입혔고, 이를 들은 법흥왕은 괜한 것
도 아닌데도 뚜껑이 폭발하여 532년 사다함(斯多含)을 시켜 가락국을 공격케 했다.
가야연맹의 오랜 맹주로 위엄을 떨쳤던 가락국은 신라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결국 국고(國
庫)의 보물을 들고 신하를 대동하여 신라에 항복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500년 역사의 가락국
은 532년 그 문을 닫게 되고, 가야의 맹주는 대가야(大伽倻)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가락국을
방패 삼아 간신히 나라를 꾸리던 다른 가야연맹국도 차례대로 무너져 561년 안라국(경남 함안
),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가야연맹은 역사에서 영원히 퇴장한다.


▲  늦가을이 깃든 재실 주변
이곳을 지나던 늦가을도 구형왕릉의 신비로움에 반한 것일까?
잠시 길을 멈추고 곱게 작품을 남겼다.


구형왕이 항복하자 신라 조정은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가락국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
어 심심치 않게 사례를 했다. 또한 구형왕 일가를 신라 진골(眞骨) 귀족으로 대우했다. 허나
왕은 가락국에 있지 않고, 바로 길을 떠나 수로왕의 별궁이라고 전하는 수정궁(水晶宮)에 들
어와 은둔했다고 한다. 수정궁은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터라고 전한다. 반면 그의 아들은 김해
에 남거나 신라 조정에 출사했다.
그가 김해를 떠나 산청 산골로 들어간 것은 나라를 말아먹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수정궁이 대가야 서쪽이고, 백제 땅과도 가까워 이들의 도움을 받아 후
일을 도모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여기서 5년을 머물다가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구형왕의 3째 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은 신라 조정에 출사해 많은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나
중에 벼슬이 상위 등급인 각간(角干)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인 김서현(金舒玄)은 신라 왕족인
만명(萬明)과 혼인했으며, 그 역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김유
신으로 그도 숱한 전공을 세우고, 왕족인 김춘추(金春秋)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면서 군권
을 장악했다. 그가 죽자 왕족이 아님에도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신라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했
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그의 시호는 흥무왕(興武王)이다.
그를 통해 가야계 김씨들의 세력이 왕성해졌으나 그가 세상을 뜬 이후, 그 세력도 많이 약해
졌으며, 김유신의 자손들도 별로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건너편 남쪽 재실(호릉각)

구형왕릉은 새도 들어오기 힘든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졸졸 흘러 한
여름에도 시원하다. 산청에서 띄워주는 명소로 휴일에는 사람이 좀 오지만 평일에는 사람 구
경 하기가 힘들어 새소리와 산바람의 소리만이 이곳에 내려앉은 정적을 살짝 깨뜨린다.
자연을 벗삼아 사색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으로 왕산 등산로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여기
서 유의태약수터나 망경대를 통해 왕산으로 오를 수 있다.

홍살문에서 구형왕릉으로 갈 때는 정면 돌다리를 건너 호릉각을 거치거나 홍살문을 지나 삼문
을 거쳐도 된다. 어차피 거리는 둘 다 비슷하다. 다리 건너에 돌로 터를 다져 석축을 3단으로
쌓고 재실인 호릉각을 지었는데, 그곳에 서린 늦가을 풍경이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저곳에 들어가면 나도 단풍마냥 알록달록 물드는 것은 아닐까?

▲  왕릉으로써의 애써 위엄을 보이려는
붉은 피부의 홍살문

▲  왕릉 앞에 세워진 삼문(三門)

▲  제사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호릉각(護陵閣, 남쪽 재실)

▲  호릉각과 북쪽 재실을 이어주는 문


▲  왕릉의 우측 돌담
돌담과 왕릉 뒤쪽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이젠 나이가 상당하여
돌담과 왕릉에 발을 올리기만 해도 스르륵 무너질 것 같다.

▲  약간 우측에서 올려다본 구형왕릉
가을 볕이 살포시 내려앉은 구형왕릉, 워낙 비밀이 많은 곳이다 보니
왕릉을 이루고 있는 돌들도 모두 범상치 않게 다가온다.

▲  북쪽 재실에서 바라본 돌다리와 홍살문

※ 전 구형왕릉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① 산청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일 8회 떠난다.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진주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운행
② 현지교통
* 산청터미널에서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1일 9회 정도 있으며, 화산마을(덕양전)에서 하차하여
  도보 20분
③ 승용차 (주차비 없으며, 덕양전에도 주차장 있음)
* 대전~통영고속도로 → 산청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매촌3거리에서 우회전 → 덕양전에서
  좌회전 → 구형왕릉
* 구형왕릉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늦가을에 젖은 왕산(王山)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살짝 구부러진 왕산 포장길 (구형왕릉로)

왕산(923m)은 산청군 금서면에 자리한 높은 산이다. 왕산이란 이름은 구형왕릉에서 유래되었
다고 하며, 태왕산(太王山)이라고도 한다. 왕이 오른 고개란 뜻의 왕등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이름이 여럿 전해오며, 특히 고령토(高嶺土) 산지로 예로부터 명성이 높아 특리와 향양리, 방
곡리에 가마터 유적지가 있다.
왕산에는 전 구형왕릉과 왕산사터, 유의태약수터 등의 명소가 있으며, 능선과 정상 주변은 봄
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구형왕릉에서 유의태약수터까지 가는 길은 2갈래이다. 하나는 산길이고 다른 하나는 포장길을
인데, 서로 떨어진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로 만난다. 포장길은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
게끔 산 중턱을 지나 자혜리로 이어진다.
산길은 돌이 많고 계곡을 옆에 낀 헝클어진 길이지만 거의 직선이다. 포장길은 잘 닦여진 길
이라 발의 무리는 별로 없지만 험준한 왕산의 눈치 때문에 2배 이상으로 빙빙 둘러가야 된다.
그리고 기왕 산에 왔으니 가을 낙엽이 귀를 접고 누운 산길이 더 호젓할 것이다.

가을이 떠나려는 산길에는 장차 밀려올 겨울을 원망하며 땅으로 곤두박질 친 낙엽들이 가득하
다. 점차 차가워지는 가을산을 따스히 덮어주며 흙으로 들어갈 그 순간을 기다리는 낙엽의 마
지막 여정.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마지막에는 결국 한줌의 흙이 되고 만다. 시작과 중
간은 크게 다를지언정 그 종점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허무한 모양이다.


햇볕 한점 들어오기 힘든 무성한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구형왕릉에서 갈라진 포장길과 다시
만난다. 왕산과 유의태약수터를 띄우고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콘크리트로 밀어버렸지만 그
냥 흙길이거나 오솔길 같은 길이었으면 더 운치가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포장길에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거대한 자연산 카페트를 이루고 있고, 마치 산불이 일어나
듯 알록달록 타오른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광속과 같은 시간을 원망한다. 아
름답게 다가오는 늦가을 풍경에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멀 지경이다. 인간의 한낱 언어나 단
어로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건방질 정도로 말이다.


▲  낙엽이 가득 깔린 왕산 포장길

평일이라 그런지 이 서정적인 길에 사람은 나 하나 뿐이다. 구형왕릉은 그래도 나들이객들이
여럿 보였지만 그 이상은 차도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자연의 소리만이 살며시 귀를 간지럽히
는 이 좋은 길을 비록 잠시긴 하지만 내가 완전 무료 전세를 낸 것이다. 소원 같아서는 이 길
을 내 소유로 만들거나 집으로 살짝 가져와 두고두고 거닐고 싶지만, 그저 헛된 망상일 뿐이
다. 그저 오늘만이라도 이곳의 주인공이 된 양 누구의 눈치 없이 마음 편히 둘러보고 사라지
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아무도 없는 길이지만 자연과 벗삼으며 자연 속에 녹아들며 걸으니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아
니 그런 것을 느낄 겨를도 없다. 포장길과 산길이 만난 곳에서 유의태약수터 입구까지 20분
거리이지만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걷고 보니 금세 약수터 입구이다. 이런 길은 정말 몇 시
간을 걸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  유의태약수터 입구를 코앞에 두고

▲  유의태약수터로 가는 산길 (왕산사터 주변)

유의태약수터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면 초반에는 조촐하게 깔린 계단길이 펼쳐
진다. 경사는 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여유로우니 힘든 것은 별로 없다. 계단길을 오르면 돌
이 박힌 정겨운 풍경의 산길이 펼쳐지는데, 그 길의 끝에 유의태약수터가 있다.
그곳으로 가는 중간에는 구형왕과 관련되어 있다는 왕산사터가 있으니 유의태약수터의 후식으
로 삼아 둘러보기 바란다.


▲  왕산사터(王山寺址) - 경남 지방기념물 164호

구형왕릉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왕산 북서쪽 자락에 왕산사터가 숨어있다. 이곳은 유
의태약수터 바로 밑으로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찾기는 쉽다.
예전에는 이곳이 절터긴 하지만 정체가 확실치 않아 이름 앞에 아련히 전한다는 뜻에 전(傳)
을 붙였으나 이제는 완전히 확증이 가는지 과감하게 전을 빼버리고 그냥 안내문과 관련자료에
모두 왕산사지라 표현했다.

이곳에 있던 왕산사는 언제 지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망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전하
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승려 탄영(坦暎)이 쓴 왕산사기가 절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산양현(山陽縣, 산청) 서쪽 모퉁이 방문산(方文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는데, 왕산이라고
부른다. 산 위에 왕대(王臺)가 있고, 아래에 왕릉이 있어 왕산이라고 한다. 능묘를 수호하였
기 때문에 왕사(王寺)라고 하였는데, 절은 원래 왕산의 정궁(正宮)이었다. 능은 가락국 10대
왕인 구형왕이 자리잡았던 현궁(玄宮)이었다'

즉 구형왕릉을 관리하고 지키던 원찰(願刹)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구형왕이 말년을
보냈다는 수정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하는 궁으로 거의
별궁 수준으로 여겨진다. 그 수정궁이 구형왕이 죽은 이후에 왕산사로 전환되었다고 하며 궁
자리가 넓어서 수정궁 건물을 그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이곳이 왕대암(王臺庵)으로 나오
며, 1755년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왕대암이 폐사되고 왕산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왕산사는 적어도 16~17세기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대암은 왕
산사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793년에는 왕산사에서 오랜 세월 전해오던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구형왕 내외의
초상화와 옷, 활, 왕산사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유물은 덕양전에 있는데, 아마도 발
견되었다기보다는 구형왕릉 둔갑 프로젝트 차원에서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구형왕릉은 불
교 탑으로도 강하게 의심을 받고 있어 그것이 맞다면 왕산사와 관련된 탑으로 보인다.

근래에는 가야문화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벌려 건물터 6개와 문터로 추정되는 흔적, 계단 흔
적, 비석 받침과 부도 등을 건졌으며, 산청군에서 2007년과 2009년에 발굴작업을 벌여 수많은
기와조각과 그릇 조각을 꺼냈다. 다만 구형왕과 관련된 가야 유물은 나오지 않아 이곳에 씌워
진 구형왕 관련 이야기에 다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현재 절터는 대자연이 잡초와 나무로 따스하게 보듬어주어 그 허전함을 덮어주고 있으며, 주
춧돌과 석물은 잡초에 묻혀있다. 왕산사가 아무리 크고 대단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곳을 가득 채웠을 왕산사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기록이 없으
니 누구도 알 수 없다. 단순히 건물터나 주춧돌 등으로 그 모습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발휘해 이곳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괜찮
을 것이다. 절의 건축물이야 뭐 기와집일 것이니 그것을 참조하여 상상을 펼쳐보이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니 말이다.

인적이 없는 고요한 절터를 둘러보며 부도(승탑)를 찾다가 갑자기 맷돼지가 생각이 난다. 요
즘 그들의 개체수가 쓸데없이 늘어나 산에 자주 출몰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지리산과 가깝고
숲이 무성한 데다가 워낙 외진 곳이라 자칫 멧돼지가 나타날 수도 있다. 자연의 소리만 들리
는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난다면 참 대책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다가오는 그 오싹한 기분에 절
터 답사를 팽개치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  숲의 일부가 되버린 왕산사터 산중턱 부분

▲  왕산사터 주춧돌
절터를 가득 메운 잡초와 나무들이 계속 자라서 나중에 왕산사 시절
건물을 그런데로 재현해주지는 않을까?

▲  왕산사터 서쪽 부분

▲  산중턱에 남은 왕산사터 석축


▲  유의태(柳義泰)약수터

왕산사터에서 3분 정도 더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유의태약수터라 불리는 약수터가 마중을 한
다. 왕산에 왔다면 구형왕릉, 왕산사터와 더불어 꼭 둘러봐야 되는 명소로 허준(許浚)을 주인
공으로 한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그의 스승 유의태의 이름을 딴 것이 이채롭다.
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은 근래에 박석을 깔아 정비했으며, 약수터 역시 그냥 길가에 물이 솟은
평범한 샘터이던 것을 마치 오래된 유적처럼 손질했다.

이곳이 유의태약수터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유의태가 약수와 치료에
사용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샘터에는 자연이 베푼 옥계수가 가득 솟고 있는데, 물을 한 바
가지 떠서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르짖는다. 그렇
다고 물이 오색(五色)약수나 방동약수처럼 쓴 맛도 아니다. 그냥 일반 샘터에서 마실 수 있는
그런 물이다. 다만 유의태약수 어쩌구 하니까 심리 때문인지 맛이 조금은 달콤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물을 마시면 정말 병이 싹 나을 것 같은 기분도 교차한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는 동의보감 소설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이다. 그의 모델은 18세기에 산
청 지역에서 활약했던 유이태(柳爾泰, 또는 柳以泰 1652~1715)라고 한다. 그러니까 허준 시절
보다 약 100년 뒤에 인물이 된다.
그는 거창유씨로 호는 신연당(), 원학산인(). 인서(西), 자는 백원()이
며, 거창(居昌) 위천 서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소에는 '泰' 한자를 썼고 의서에는 '
泰'를 사용하여 이름 한자 2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가가 있는 산청 생초면으로 넘어와 그곳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이때 그가 진
료에 사용한 물이 바로 이 약수라는 것이다.
1706년 전국적으로 천연두(天然痘)와 마진(痲疹, 홍역)이 유행하여 많은 생명을 앗아가자 마
진경험방()을 토대로 하여 의학서적인 마진편(痲疹篇)을 썼다. 이 책은 1931년 활
자본으로 출간되었다.
숙종(肅宗) 때 어의(御醫)가 되었으며, 안산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
와 백성들을 치료했다. 의술이 뛰어나 허준과 중원대륙의 명의 판작()에 비유되기도 했으
며, 실험단방(), 인서문견록(西)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후 소설 동의보감에서는 허준이 산청에 잠시 머물던 시절, 이 지역 명의였던 유이태를 이름
만 약간 바꿔 유의태로 삼아 그의 스승으로 둔갑시켰다. 그러니 유의태란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닌 것이다. 다만 산청군청과 몇몇 사람들이 유의태가 실존 인물로 정말 허준의 스승이었다
고 주장을 해 눈길을 끈다. 유의태는 1516년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 출신으로 서자(庶子)였
다고 하며, 산청 지역 제일의 명의로 활동하면서 허준을 제자로 삼아 많은 것을 전수했다는
것이다. 임종에 임할 때 허준에게 자신의 몸뚱이를 해부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해부의학(解剖
醫學)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유의태는 왕산의 자생 약초에 이 약수터의 물로 탕액을 만들었다고 하며. 자신이 고치지
못한 병에 이 물을 이용해 낫게 했다는 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약수를 위암을 다스리는
물이라고 했으며,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인근에서 인기가
높다.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의태가 과연 동의보감에서만 나오는 인물인지 아니면 정말 숨을 쉬던 인물인지는 알 수 없
다. 현재로써는 유이태를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 약수터입구까지 차량 접근 가능, 구형왕릉에서 도보 약 30분

* 왕산사터, 유의태약수터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1외


▲  성큼 다가선 유의태약수터

▲  샘터 위에 약수터의 이름이 점잖게
쓰여 있다.

▲  콸콸 솟아지는 약수


▲  왕산을 뒤로 하며

약수터에서 물이 닳도록 마시니 배가 부르다. 여기서 동쪽 산길을 오르면 망경대와 왕산 정상
으로 이어지는데, 거기까지는 답사 계획에 없으므로 쿨하게 하산하기로 했다. 이때 해는 중천
에 떠서 점심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내려갈 때는 중간에 새는 거 없이 포장길로 구형왕릉까지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에도 사람
이나 차량을 하나도 구경을 못했다. 이렇게 운치 그윽한 길을 홀로 걸으니 기분 또한 색다르
며 늦가을의 향연에 잠긴 나무들은 낙엽을 휘날리며 떠나는 나를 전별한다. 다음에 인연이 된
다면 꼭 다시 찾아와 왕산 정상까지 오르고 싶다.


▲  잠시 낙엽에서 해방되다.

▲  포장길(구형왕릉로)이 크게 구부러진 곳에서 바라본 천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와 함양군 유림면 지역

▲  구형왕릉에서 덕양전으로 내려가는 길
나무들이 서로 불을 지르고 있다.

포장길을 거의 2/3 내려온 지점에서 길이 크게 구부러지는데, 여기서 화계리와 유림면 지역이
두 눈에 조망된다. 그 구간을 지나면 구형왕릉이 나온다.

잠시나마 정들었던 왕산과 다음을 막연히 기약하며, 덕양전을 지나 화계리 마을로 나왔다. 화
계리는 금서면에서 2번째로 큰 마을로 경호중학교와 보건지소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북쪽에
있는 임천교를 건너면 바로 함양군 유림면의 중심지로 임천을 사이에 두고 산청과 함양(咸陽)
행정 경계가 맞대고 있는 것이다.

눈이 시리도록 깨끗한 은빛 물결에 임천을 건너 유림면사무소앞 유림3거리에서 함양읍으로 가
는 군내버스를 타고 함양읍내로 나갔다. 화계리에서 산청읍으로 가는 것보다는 유림에서 함양
읍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더 많이 다니는데, 서울이나 인천에서 온다면 함양을 거쳐 이곳 유림
3거리에서 왕산 나들이를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덕양전까지는 도보 15분 정도면 도착하고 여
기서 50분 정도를 더하면 거뜬히 유의태약수터까지 간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구형왕릉, 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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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곰절이란 애칭을 가진 창원 불모산 성주사

 


' 한여름의 산사 나들이 ~
창원 불모산 성주사(聖住寺) '
창원 불모산 성주사
▲  영산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과 불모산

 


여름의 제국이 한참 위엄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창원(昌原) 제일의 고찰, 성주사를
찾았다. 원래 창원도 그렇고 성주사도 갈 계획이 없었으나 어찌어찌하여 그곳까지 흘러들어가
게 되었다. 창원에 오랜만에 발을 들이니 2001년에 가봤던 성주사 생각이 불끈 솟아나 미련없
이 그곳으로 길을 향했다.

마산터미널에 이르러 창원시내버스 115번(평성마을↔성주동)을 타고 시내를 가로질러 시내 동
쪽 변방인 성주동 두산인프라 종점(안민터널4거리 직전)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성주사까진 불모산의 물을 꾸역꾸역 먹고 사는 진해저수지를 지나 불모산 자락으로 올
라가야 되는데, 수레로 가면 금방 가지만 두 발에 의지해서 가려면 족히 40분은 걸린다. 창원
도심과 가까운 절이고 창원의 꿀단지 같은 곳이라 거의 1~2분 간격으로 수레가 굉음을 울리며,
내 곁을 지나갔으며, 진해저수지 직전은 경사도 각박하여 뚜벅이의 진을 거진 빼놓는다. 허나
자존심과 불만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깊은 산주름에 묻힌 성주사가 가슴을 피며 모
습을 비춘다.


▲  성주사 1번째 주차장에 있는 '불모산 성주사' 표석의 위엄


♠  성주사 용화전(龍華殿), 마야원(摩耶園) 주변

▲  지금은 추억이 되버린 궁색한 모습의 용화전

성주사 1번째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성주사로 통하지만 왼쪽은
사람을 위한 숲길이고, 오른쪽은 2번째 주차장으로 인도하는 수레를 위한 길이다. 수레의 눈치
와 핍박이 싫다면 숲길로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숲길을 거닐면 담장에 둘러싸인 작고도 허름한 용화전을 만나게 된다. 얼마
나 건물이 궁색한지 깨지거나 부실한 기와들이 많고, 지붕 한복판에 풀까지 자라나고 있다. 게
다가 용화전에 안긴 석불도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었는지 자물쇠로 봉해둔 철창 안에 갇힌
고독한 처지라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물론 석불이 오래된 보물이라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茶
飯事)처럼 터지는 이 땅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한 필요악이긴 해도 저건 좀 너무했다. 무
슨 죄수도 아니고 말이다. 허나 다행히도 근래에 경내 명부전 뒷쪽에 새 용화전을 마련해 그곳
으로 자리를 옮겼다. 늦게나마 처우개선이 이루어진 셈이다. (기존 용화전은 철거됨)


▲  성주사 관음보살입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335호

용화전의 주인장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 한
다. 고려 때 조성된 석불로 키는 약 148cm인데,
당시 석불 치고는 작은 편이다. 몸 뒤에는 길다
란 광배(光背)를 달고 있으며, 발 밑에는 대좌(
臺座)도 갖추고 있다. 이들을 관음보살과 함께
하나의 돌로 만들어 돋음새김으로 새겼지만, 장
대한 세월 앞에 이리저리 치여 마모가 심하다.

용화전에 궁색하게 자리한 그는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인근에 진해저수지를 만들 때
발견되는데, 가까운 이곳으로 옮겨와 성주사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용화전이란 건물 명칭은
그가 관음보살이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허나
건물이 절집이라기보다는 시골마을 당집 같은 소
박한 분위기이다.
석불의 형태를 보면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
고 있으며, 얼굴은 원만하고 목에는 목걸이가 새
겨져 있다. 둥근 어깨와 굵은 곡선으로 새겨진 '
U'자형의 옷 주름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지만 상
체에 비해 하체가 짧아 신체비례가 다소 떨어진
다.

◀  용화전 우측의 부도군(浮屠群)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한 다양한 부도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성주사 가는 숲길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바람이 여름 제국의 부산물(땀)을 말끔히 털어주고
녹음이 깃든 숲길의 아름다움에 중생의 마음도 앞다투어 녹는다.

▲  마야원(2층)과 고란야(1층)

용화전과 숲길을 지나면 길은 왼쪽으로 90도 꺾이면서 담장에 가려진 경내 외곽이 조금씩 모습
을 비추기 시작한다.
꺾이는 지점에서 그대로 직진하면 기와집이 하나 나오는데, 그 집은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마야
원이다. 이 건물은 2003년에 지어진 것으로 겉으로 보면 1층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2층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으며, 밑층에는 고란야(皐蘭野)란 전통 찻집이 있다. 찻집 뜨락에는 동그란
연못이 있고, 그 곁에는 창원에서 가장 깨끗한 계곡이자 창원의 주요 상수원인 성주사계곡이 흘
러간다. 이 계곡은 진해저수지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남해바다로 흘러간다.


▲  정와당
마야원 옆에 자리한 정와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붕 색깔이 퇴색되어 근래 건물임에도 조금은 오래되어 보이며,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두 발을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숲속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나오는 성주사계곡
성주사계곡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성주사 관할 구역에 묶여있어 출입이
통제된 금지된 계곡이다. (계곡 탐방은 성주사 종무소에 문의 요망)


♠  성주사 범종각(梵鍾閣), 연지(蓮池) 주변

▲  담장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민 성주사 경내

▲  연꽃의 보금자리 연지(蓮池)

마야원에서 경내로 들어서면 길 왼쪽에 연잎으로 가득한 연못, 연지가 있다. 연꽃은 거의다 꺾
여 푸른 연잎만이 무성히 보일 뿐이고, 홍련(紅蓮)과 백련(白蓮)은 가뭄에 콩 나듯 구경하기도
힘들다. 그나마 보이는 것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있으니 사진에 담는 것도 여간 어렵
지 않다.


▲  물이 철철 넘치는 약수터
불모산이 중생들에게 내린 약수로 가뭄에도 거의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바가지에 물을 한가득 담아 목구멍에 넣으니 내 몸을 유린하던
무더위도 싹 가시고 몸속도 시원하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동종의 보금자리, 범종각


▲  성주사 동종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267호

6각형의 범종각에는 1783년(정조 7년)에 조성된
조선 후기 동종(銅鍾)이 소중히 담겨져 있다.
높이 111cm, 안지름 84cm, 무게 약 600근의 조
그만 종으로 종의 머리 부분인 용뉴는 2마리 용
이 서로를 등지고 있으며, 음통은 없다. 종 가
운데 부분에 9개의 유두를 단 유곽(乳廓)을 달
았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광(頭光)을 지
닌 보살상을 두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없다.

조선 후기에는 조성 연대가 새겨진 작은 종들이
많이 출현했는데, 성주사 동종 역시 그중의 하
나로 조선 후기 범종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
한다.


▲  5층석탑(석가진신사리탑)과 석등(石燈)
하얀 피부의 늘씬한 5층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머금은 사리탑으로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불사를 벌이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5층 탑신(塔身) 위에 있는 노반(露盤)은 탑신처럼 생겨서
자칫 6층탑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  경내로 오르는 33계단

얕아 보이는 저 계단을 오르면 담장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던 경내가 속시원히 속살을 비춘
다. 계단은 5단계로 각각 3,4,6,8,12단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2007년에 산만하게 늘어선 계단을
손질하면서 주지승의 의견에 따라 그리 만든 것이다. 물론 숫자도 모두 의미가 있지. 이들 숫자
는 불교의 교리인 삼학(三學)과 사성제(四聖制), 육바라밀(六波羅蜜), 팔정도(八正道), 12연기(
緣起)를 상징하며, 계단 옆에 기와담장을 두르고 자연석을 이용해 차곡차곡 계단을 쌓아 그야말
로 전통식으로 만들었다.


▲  춤추는 분수대와 연못, 그리고 누각

계단 담장 밑에는 네모난 연못을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2층 누각을 두어 연못을 지켜보게 했다.
연못만 있고 주변을 담장과 석축으로 둘렀다면 5% 허전했을텐데 누각을 배치하고 연못 주변에
꽃과 식물을 심는 등, 공간과 시각의 미를 최대한 배려했다.


▲  네모난 연못 중앙에는 바위를 두어 조촐하게 분수대로 삼았다.

경내 중심부로 들어서기 전에 잠깐 성주사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 곰절, 성주사의 역사
불모산(佛母山)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성주사는 인구 100만을 지닌 경남 최대의 도시, 창원
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2가지의 설이 전해온다. 1번째는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 수로왕(首露王
)이 처남이 되는 허보옥<許寶玉, 장유화상(長游和尙)>을 위해 창건했다는 설로 허보옥은 수로왕
의 왕후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의 오라비이다. 허보옥이 가락국 뒷산에 들어가 불법
(佛法)을 펼치니 그 연유로 불모산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수로왕의 아들 7명이 불모산에서 수도
하여 성인(聖人, 또는 승려)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에서 성주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2번째는 827년(신라 흥덕왕 2년)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왜구가 남해바다
를 침범하자 흥덕왕(興德王)은 신하들과 왜구를 격퇴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허약한 신라의 국력
앞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근심에 싸인 왕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지리산에
무염이란 승려가 있으니 그를 불러 상의해 보시오'
1마디를 듣고, 바로 무염을 소환해 방안을
물었다.
그러자 무염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세우고 왼손으로 자신의 배를 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소
리가 나면서 철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온 산을 뒤덮었다. 그 광경을 본 단순한 왜구들은 혼
비백산하여 바로 줄행랑을 치니 크게 기뻐한 흥덕왕은 그에게 밭 360결과 노비 100호를 하사하
여 성주사를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허나 둘 다 막연히 전해오는 구전일 뿐, 정답은 없다.

1번째 설 같은 경우는 인도의 불교가 바로 가야로 전래되었다는 소위 남방전래설에 따른 것인데,
그 역시 여전히 의견이 분분해 국사 관련 서적에는 아예 거론조차 되질 않는다. (우리나라는 불
교 최초 전래시기를 여전히 372년으로 보고 있음) 게다가 가락국의 중심지인 김해(金海)와도 산
하나를 사이에 둘 정도로 가까운 편이지만 정작 창건 시기를 입증할 적당한 근거가 없으니 가락
국과 관련된 절로 내력을 꾸미고 역사를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지어낸 설로 보인다.

어쨌든 창건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으며, 1604년 진경(
眞鏡)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원래 자리는 지금보다 400m 안쪽 산자락에 있었는데, 옛
절터에서 석탑과 석등을 찾아내어 중창을 벌인 것이다. 또한 절을 중창할 때 곰이 나타나 도와
주었다고 하는데, 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진경은 원래 옛 절터에다가 중창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곰이 나타나 모든 목재를 하
룻밤 사이에 40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다 놓았다. 이에 진경은 부처의 뜻으로 여기고 곰
이 목재를 옮겨놓은 현재의 자리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웅신사(熊神寺)','곰절'
이라 불리기도 했다. '웅신사'란 이름은 옛날에만 쓰인 듯 싶으며, '곰절'이란 이름은 여전히
성주사의 애칭이자 상징으로 조금씩 쓰이고 있다.
이렇게 다시 몸을 일으킨 성주사에는 곰절에 어울리게 곰과 관련된 이야기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불모산에 살던 곰이 시장기가 돌아 성주사를 찾았다. 그 곰은 재주를 잘부려 가끔 법회
때 승려 뒷자리에 앉아 수행 포즈를 흉내내기도 했는데, 마침 승려들은 모두 참선 중이었다. 그
래서 배고픔을 잊고자 참선(參禪)을 흉내내니, 이것이 공덕이 되어 나중에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사람으로 환생한 그는 그 인연 때문인지 성주사에서 부목(負木, 절에서 땔나무를 하는 사람) 일
을 하게 되었다. 배가 고플 때는 자신도 모르게 참선에 열중해 배고픔을 잊곤 했는데, 한 번은
주지승이 그 모습을 보고는 지팡이로 머리를 치니, 그 순간 깨달음을 얻어 더욱 정진해 고승(高
僧)이 되었다고 한다. (또는 부목이 미련하여 자주 밥을 태워먹자 탄 밥에 열불이 난 주지승이
'이 곰 같은 놈아' 소리를 지르며 지팡이로 등줄기를 후려치니 그 이후 부목은 용맹정진하여 고
승이 되었다고 한다)


중창 이후 1681년(숙종 7년)에 중수를 벌였으며, 구한말에는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있던 등암
찬훈(藤巖璨勛)이 이곳으로 넘어와 절을 중건하고 불모선원(佛母禪院)을 창설했다.
1997년에 원종이 설법전과 요사 등을 새로 지었고, 2002년에 성주사 진입도로가 확장되어 재흥(
再興)의 기운이 슬슬 도래함에 따라 다시 불사를 벌였다. 2003년에 마야원을 짓고, 2004년과 그
이듬해에 지장전을 신축했으며, 2007년에 입구 계단을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과 영산전, 설법전, 삼성각, 마야원 등 10여 동의 크
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된 감로왕도와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몽산화상육
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보물 1737호) 등 국가지정 보물 3점과 대웅전과 3층석탑, 동종, 관음
보살입상, 감로왕탱, 석조석가3존16나한상, 석조지장시왕상, 지장보살상 복장물 전적류(典籍類)
등의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불모산 안쪽에 숨겨진 성주사 옛터에는 조선시대 부도
여러 기가 전하고 있는데, 이곳은 통제구역이라 답사를 원한다면 성주사 종무소에 문의하기 바
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이지만 시내와도 2km 정도의 거리를 두며 깊숙한 산주름 속에 조용
히 묻혀있다. 그래서 마치 심산유곡(深山幽谷) 벽지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밑 세상과는 공
기가 확연히 틀려 공업도시 창원을 무색케 하며, 불모산이 베푼 청정한 성주사계곡이 절 옆구리
를 살짝 스치며 속세로 내려간다.

성주사는 속인들을 대상으로 템플스테이를 열고 있으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보리수학교를 방
학기간에 운영한다. 그리고 매년 10월에는 곰절산빛가람제를 개최하는데 산사음악회와 사진전,
그림전시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열어 도시인들의 안구와 귀를 정화시켜준다.

※ 창원 성주사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① 창원까지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대전역에서 마산/진주행 고속전철 이용, 창원이나 마산역 하차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대전역, 구미역, 동대구역, 부전역, 구포역, 진주역, 순
  천역, 광주송정역에서 마산/창원 경유 경전선 열차 이용
*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마산/창원행 고속버스 이용 (마산행은 20~30분 간격, 창원행은 20~40
  분 간격)
* 부산(사상, 노포동, 동래전철역), 대구(서부, 동대구), 울산, 광주, 대전(동부복합)에서 창원
  이나 마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수원, 부천, 원주, 청주, 천안, 전주, 포항, 진주, 구미에서 창원
  /마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마산역입구, 마산시외터미널에서 115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산인프라 하차
* 창원역에서 115, 151, 213, 757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산인프라 하차
* 창원터미널에서 115, 151번 시내버스 이용
* 두산인프라에서 도보 45번 (두산인프라 → 안민터널4거리에서 좌회전 → 성주사입구에서 우회
  전하여 직진)
③ 승용차 이용 (주차공간은 두둑함)
* 남해고속도로 → 장유나들목 → 창원 방면 1020번 지방도 → 창원터널 → 삼정자육교에서 진
  해 방면 → 성주사입구에서 좌회전 → 성주사
* 남해고속도로 → 동마산나들목을 나와서 창원역 방면 → 소계광장교차로에서 우회전 → 창원
  대로 직진 → 삼정자육교에서 진해 방면 우회전 →성주사입구에서 좌회전 → 성주사

★ 성주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성주사 템플스테이는 1박 2일 일정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형과 짜여진 일정이 없이 자유롭게
  머물다 가는 휴식형(평일에만 운영)을 운영한다. 자세한 일정과 가격은 성주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102 (곰절길 191, ☎ 055-262-0108~10)


♠  성주사 경내 둘러보기

▲  귀여운 복돼지 1쌍

33계단을 오르면 깜찍한 돌돼지 1쌍이 중생을 맞이한다. 이들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성주사의
자리가 풍수지리상 제비가 알을 품는 형상이고, 앞산은 그 제비집을 노리는 뱀의 형세라고 하여
뱀의 상극이나 다름이 없는 돼지상을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 풍수지리상 부실한 부분을 보충하
는 이른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 된다. 허나 돼지상이 너무 귀여워 아무리
뱀이라도 그들 앞에서는 길을 접고 돌아갈 것 같다.

◀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료(安心寮)


▲  대웅전과 뜨락

계단을 올라서면 경내의 중심인 넓직한 대웅전 뜨락이 펼쳐진다. 대웅전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
준으로 우측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료가 있고, 좌측에는 교육과 강당의 역할을 하는 설법
전(說法殿)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다들 규모가 크다. 뜨락을 바라보며 자리한 맞배지붕의 대
웅전은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고 그 앞에 3층석탑이 서 있으니 이는 조선 중기
가람배치로 1604년 중건 이후부터 계속 유지하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의 절반도 안되는
조촐한 크기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문과 기둥에 고색의 때가 만연한 것
으로 보아 빠르면 1604년 중창부터, 늦어도 1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퇴락된
것을 1966년에 보수했다.

삼성각은 중생과 무척 친근한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그
들이 그려진 그림이 내부를 장식한다. 이들 그림은 근래에 제작된 것으로 조금은 낡아 보이는
삼성각과는 시기가 많이 차이가 나서 예전에는 다른 용도로 쓰인 듯 싶다.

▲  삼성각 중앙을 장식한 칠성탱

▲  독성탱

◀  산신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속시원히 속살을 드러낸 영산전(靈山殿)

대웅전 좌측 옆구리에는 삼성각과 비슷한 크기의 영산전이 자리해 있다. 삼성각과 같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이며, 1939년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조석가3존불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0호(16나한상 포함)

영산전 불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나란히 협시해 있는데. 이들은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의 생김새가 대웅전
불상과 비교하면 너무 형식적이다. 거의 네모난 얼굴은 신체에 비례해 너무 크고 표정도 모두
똑같다. 게다가 앉아있는 모습도 약간은 자연스럽지 않아 보인다. 불상의 위엄과 중생을 다독거
리는 흐드러진 미소보다는 33계단의 돼지상처럼 귀여움이 가득해 중생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
게 한다.

▲  영산전 우측 부분 (16나한상과 나한도)

▲  영산전 좌측 부분 (16나한상과 나한도)

영산전 불단 좌우에는 나한상(羅漢像)이 각각 11상씩, 22상이 배열되어 있다. 이들은 부처의 열
성제자인 16나한으로 우리나라 7,000만 인구만큼이나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지녀 똑같은 모습이
없다. 그들 뒤에는 나한도(羅漢圖) 6개가 든든히 자리한다.


▲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4호

삼성각과 영산전을 옆구리에 거느린 대웅전은 성주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多包)식 건물이다. 1681년에 지어졌으며, 1817년에 중수를 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촘촘하면서도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뒷면 내부의 공포만 간략하게 설치된 교두형(
翹頭形)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이는 조선 후기 불전의 특징이다.
 
내부 불단에는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단(神
衆壇)과 무염국사의 진영(眞影), 지금의 성주사를 있게 한 서봉당 의정과 등암친훈의 진영이 나
란히 자리한다. 건물 외부 벽화 가운데 왼쪽 면에 1604년 절을 중창했을 때 도와주었다는 곰과
그의 일화가 그려져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729호

대웅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불좌상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협시
하고 있다. 중생의 고통과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쭉하고
커다란 귀가 인상적이다. 이들은 수인(手印)과 덩치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엷은
미소가 드리워진 얼굴은 거의 네모나며, 그들 뒤로 후불탱화가 든든히 자리한다.

이들 불상은 1655년에 조성된 것으로 봄에 불상 제작에 들어가 가을에 완성하여 복장(腹臟) 점
안을 마쳤다고 한다. 조성에 참여한 승려는 녹원(
元)과 현지(知玄), 찬인(贊印), 혜정(惠淨),
도성(道聖), 명신(明信), 긍성(肯聖) 등이며, 17세기에 활약했던 녹원의 최초 작품이다.

    ◀  성주사에서 가장 오래된 3층석탑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지금까지 살펴본 성주사는 조선 중기 이후 보물
이 주류를 이루었다. 용화전 관음보살도 있지만
원래 이곳과 관련이 없는 존재이니 논외로 친다.

대웅전 앞뜰에 뿌리를 내린 3층석탑은 고려 초
기에 조성된 탑으로 성주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
물이자 곁에 있는 석등(石燈)과 더불어 옛 성주
사의 유일한 증인이다. 탑의 높이는 3.1m로 2중
의 기단(基壇)위에 탑신을 올렸다.
그들은 1604년 진경이 절을 일으킬 때 옛 절터
에서 수습해 온 것으로 옆에 고르게 자리한 석
등은 고려 초기 것이다.

탑 앞에는 네모난 돌이 놓여져 있는데 배례석(
拜禮石)이다. 탑과 배례석 사이에는 석등을 놓
았던 대석(臺石)이 있다.

고색의 때가 적절히 입혀져 중후함이 엿보이며, 상태도 괜찮다. 다만 탑이 대웅전의 완전 정면
이 아닌 좌측으로 다소 치우져진 점을 볼 때 탑 2개를 나란히 세우는 이른바 1금당 2탑 형식으
로 하려고 했던 듯 싶다.


▲  오관당 앞에 놓인 샘터
둥근 넓적한 바위를 가져와 샘터로 만들었다. 좌측에 앉은 고양이로 보이는
동물이 바가지를 들며 하염없이 물을 쏟아낸다.

▲  물을 쏟아내는 고양이상 - 표정이 곰처럼 귀엽다
그가 주는 물을 바가지에 담아 들이키니 정말 시원하기 그지 없다.

▲  지장전(地藏殿)

경내 동쪽에 자리한 지장전은 경내 불당 가운데 가장 큰 40평 규모를 자랑한다. 원래는 설법전
앞쪽에 있었으나 1997년 이후 불사를 벌이면서 요사로 옮겼다가 2006년에 새로 지었다.

지장전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
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석조지장시왕상이란 이름으로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1호로 지
정되었다. 또한 좌측 벽에는 2011년에 지방문화재에서 보물로 승진된 감로왕도가 있다.


▲  빛바랜 감로왕도(甘露王圖) - 보물 1732호

빛바랜 일기처럼 오래된 티가 풍기는 감로왕도는 죽은 이의 극락 천도를 위한 목적과 함께 나쁜
짓을 경계하고 속세의 여러 가지 풍물을 표현하는 성격을 담고 있다.

지장전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이 그림은 1729년(영조 5년)에 신정(愼淨), 한영(漢英), 인행(
印行), 세관(世冠), 국영(國暎) 등이 그린 것으로 조성시기와 참여한 승려의 이름은 그림 한쪽
에 쓰인 화기(畵記)에 소상히 나와있다. 삼베 바탕에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여 채색했으며,
그람 상단에는 칠불(七佛)과 관음보살을, 중앙에는 아귀(餓鬼)를 중심으로 그 밑에 지옥(地獄)
을 담았다. 하단에는 인간 세상의 여러 고통스런 장면을 담아 속세살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
게 했다. 허나 솔직히 그림의 내용을 모르면 뭐가 뭔지도 모른다. 뭐 알아야 경각심을 느낄 것
이 아닌가..? 나에게는 그저 조선 후기 불화일 뿐이다. 그만큼 옛 그림은 어렵다.


▲  지장전 좌측의 네모난 연못
연꽃이 드문드문 보일 뿐, 푸른 연잎의 세상이다.

▲  집으로 고이 훔쳐오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
다시 아비규환의 속세로~~!


내가 성주사를 찾은 날은 마침 보리수학교 첫날이었다. 앳된 티가 보이는 초등학생들로 경내는
그야말로 시장통처럼 시끄럽다. 절은 참선과 수양을 중시하는 공간이라 조용히 머물다 가는 것
이 정석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고정관념에 돌을 던지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천진난만한 애들로
활기가 불어난 경내를 애써 뒤로하며 1시간 30분에 걸친 성주사 관람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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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연화산 숲길)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玉泉寺) '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 전나무숲길과 계단

▲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 전나무 숲길과 계단
▶ 옥천사 독성각, 산령각

옥천사 독성각과 산령각


늦가을이 한참 절정을 쏟아내던 10월 끝무렵에 경남 고성(固城) 옥천사를 찾았다. 마산남부터
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를 타고 고성 북쪽 관문인 배둔에서 내려 개천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렸다. 차는 거의 1시간 마다 있는데, 마침 20분 뒤에 있다.
차를 기다리기 심심하여 정류장 화단에서 놀고 있는 잠자리를 희롱하며 노닥거렸는데, 화단에
서 놀던 잠자리는 5마리였다. 잡힌 잠자리는 자비를 베풀며 무조건 석방시켰으나 그들은 멀리
가지 않고 주변에서 놀다가 또 내 손에 잡힌다. 그렇게 잡고 풀어주는 것을 반복하여 20여 번
정도 잡았으니 1마리 당 거의 4~5번 나의 거친 손을 거쳐간 셈이다.

드디어 개천행 버스가 정류장에 바퀴를 들이자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잠자리 사냥을 그만두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승객은 나를 빼고는 모두 노공(老公)들.. 내가 승객의 평균 연령치를 크
게 깎아준 셈이다.
버스는 외마디 부릉 소리를 배둔정류장에 남기며 1007번 지방도를 따라 마암면을 지나 개천면
으로 간다. 연화산의 품으로 바로 들어서는 듯 싶더니 좌연리에서 갑자기 우회전하여 교행 조
차도 불가능한 조그만 시골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좌연리에서 바로 질러가면 옥천사 입구인
데 생각치도 못한 곳으로 강제 투어를 당하니 나도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버스는 그런 날 외
면하며 봉치리와 용안리 구석구석을 강제 구경을 시켜주고 나서야 다시 1007번 지방도로 복귀,
옥천사3거리에 나를 내려놓는다.


♠  연화산(蓮花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옥천사 입구에서 바라본 연화산(528m)

옥천사3거리에서 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연화산 나들이가 시작된다. 가을 추수의 기쁨을 누
린 전답과 시골집들, 옥천사 관광객을 겨낭한 찻집과 주막들을 반대 방향으로 흘려 보내며 15분
정도 살랑살랑 걸으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숙박촌이 자리한 연화산 집단시설지구가 나타난다.
공룡상이 있는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서쪽 가장자리에 공룡발자국화석이 있으니 그
것도 반드시 살펴보도록 하자.


▲  주차장 다리 앞에 놓인 귀여운 공룡상

▲  방생장(放生場) 비석과 돌탑들

주차장 입구에는 10여 기의 돌탑과 방생장 비석이 자리해 있다. 방생은 살려서 놓아준다는 의미
로 이곳이 계곡 옆이니 여기서 방생의식을 했던 모양인데, 그 비석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崇禎
紀元後 四 辛酉 四月(숭정 기원후 4신유 4월)'이라 쓰여 있어 1861년 4월에 만든 것 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명나라
가 풍비박산이 난 1644년까지 쓰였는데, 명이 사라진 이후에도 조선 조정과 사대부(士大夫)들은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숭정'이란 연호
는 무려 20세기 초까지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그리고 '四 辛酉(4신유)'는 1628년 이후 4번째 신
유년이란 뜻으로 계산을 하면 1861년이 된다.


▲  옥천사계곡 공룡발자국 화석지

주차장 서쪽 계곡 암반에는 1억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의 발자국 화석(化石)이 있다. 이들
은 용각류(Sauropoda, 잡식성 공룔) 공룡의 발자국들로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얕게 패인 부
분이 그들의 발자국이다. 그리고 화석이 있는 암반 위쪽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얹힌 돌탑들이
널려 있다.


▲  공룡발자국 화석을 품은 계곡 암반

▲  공룡의 발자국화석
그들의 발자국 하나가 내 얼굴보다 크다. 여기서 뛰어 놀던 그들은 전설처럼
사라지고 그들의 발자국만 남아 아련하게 그 시절을 읊어줄 따름이다.

경남 고성은 스스로 공룡나라를 칭하며 공룡을 고을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고성은 우리나라 최
초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고을 전역에서 발견된 것만 5,000여 개에 달해 미국 콜
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더불어 세계3대 공룡발자국 화석 산지(産地)로 손꼽힌다. 게다
가 바닷가에 있는 상족암은 공룡 화석의 성지(聖地)로 고성공룡박물관까지 들어서 있다. 이렇게
공룡의 흔적이 부지기수로 많으니 고성이 공룡나라를 칭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  인간의 상상으로 깜찍하게 포장된 공룡

공룡발자국화석지 옆에는 깜찍한 공룡상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 마주칠 일도 전혀 없는 먼 옛날
의 존재로 가볍게들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인간과 공룡이 공존을 한다면 분명 호환마마 그 이상
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렇게까지 귀엽게 만들지도 않았겠지. <공룡(恐龍)의 공(恐)은 매우
두려워한다는 뜻임>


▲  옥천소류지(沼溜地)

▲  매표소 쪽에서 바라본 옥천소류지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서 5분 정도 오르면 옥천사계곡물을 모은 저수지가 나온다. 그의 명칭은
옥천소류지로 연화산이 베푼 계곡물이 옥천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며 처절한 아름다움을 비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
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연화산 산줄기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
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옥천소류지의 경치에 취한 것도 잠시~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가 내 흥을 깨뜨리며 발길을 막는
다. 바로 옥천사매표소이다. 매표소에는 아저씨 1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입장료를 보니 무려
1,300원(학생은 1,000원)이다. 입장료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고성읍 무량리(우리 집안 고향임)
가 집안 고향이라 들이대면서 슬쩍 대학생 할인 여부를 물으니 고향과 본관이 고성이란 말에 아
저씨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평일이고 하니 그냥 들어가라고 그런다. 뜻밖에 호의에 감
사의 뜻을 표하고 별탈없이 매표소를 통과했다.


▲  옥천사 일주문(一柱門)

매표소를 지나면 옥천사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오르면 옥천사의 관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4년에 지어진 것으로 현판에는 '연화산 옥천사'라 쓰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며, 문을 들어서면 아름답기 그지 없는 옥천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  가는 길목에 중생들의 목을 축여주는 샘터도 있다.

옥천사 숲길은 하늘을 가리며 솟아난 늘씬한 나무들로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다. 숲 밖은 훤
한 대낮이지만 숲 안은 오히려 그늘지게 어두워 따사로운 햇빛마저 우걱우걱 삼켜버린다. 산사(
山寺)로 가는 숲길 치고 아름답지 않은 길은 거의 없겠지만 옥천사 숲길은 그중에서도 천하 으
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움이 깊다. 길을 가다가 선녀 누님이 툭 튀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무들이 베푼 선선한 산바람에 번뇌는 날려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허나 결국은 날려간 모
양이다. 마음이 가뿐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 날라가지는 못하고 매표소 밖 소류지에서 물
놀이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번뇌의 무게가 참 무겁긴 무거운 모양이다.

숲길 중간에는 샘터가 있다. 연화산이 중생들의 갈증을 우려하여 베푼 옥계수로 석조(石槽)에는
늘 물로 가득하다.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마시니 몸 속의 온갖 때가 싹 가신 듯 마음이 시원
하다. 샘터를 지나면 길 왼쪽에 사적비와 부도군이 있으며, 부도군에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승탑(부도)들이 시간을 초월하며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옥천사 사적비와 부도군(浮屠群)
옥천사의 내력이 적힌 사적비와 옥천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의 승탑(僧塔)이
숲속에 터를 닦았다.


♠  옥천사 입문 (천왕문, 범종루 주변)

▲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절의 2번 째 문인 천왕문이 마중한다. 이 문은 1989년에 만든 것
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문 안에는 천왕문의 주인이자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이 눈을 부아리고 중생을 검문하며, 문 앞에는 속인(俗人)들이 끌고 온 수레들이
뒷꽁무니를 들이밀며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왼쪽부터 보탑(寶塔)을 들고 선 다문천왕(多聞天王), 비파 연주의 달인 지국천왕(持國天王),
칼의 달인 증장천왕(增長天王), 철쇄(鐵鎖) 비슷한 것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  증장천왕 발에 짓밟힌 악귀(惡鬼)

사천왕은 부처 및 불법을 지키는 경호대장에 걸맞게 대단한 외모과 풍채를 자랑한다. 눈초리가
매섭긴 하지만 쳐다보면 볼 수록 정이 드는 밉지 않은 얼굴이다. 허나 사천왕에 밟힌 악귀들은
사정이 그렇지를 못해 한결같이 인상들이 더러운데 그들 눈빛은 원망과 살기로 가득해 보인다.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비각(碑閣)

        ◀  비각에 안긴 선경비(善敬碑)
천왕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조그만 비각을 만나게 된다. 비각 안에는 지붕
돌을 얹힌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이 비는 옥천
사에 시주를 많이 한 어느 사대부를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은 '贈 戶曹判書 安公
善敬碑'라 쓰여 있어 나중에 호조판서로 추증(
追贈)된 안씨 성을 가진 사대부가 비석의 주인
임을 알 수 있는데,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22년
이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그렇
다고 선경비를 위해 세워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자리는 원래 제왕의 수복(壽福)을 빌던 축성
전(祝聖殿)이 있던 곳이라 그 앞은 무조건 말에
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운 것이다.


▲  축성전터를 지키는 하마비의 위엄
지체 높은 고관대작(高官大爵) 마저 꼼짝 못하게 만든 하마비 3글자에
자못 위엄이 서려 보인다.

◀  경내를 목전에 둔 전나무 숲길

비각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길 좌우로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비록
10m 남짓의 짧은 거리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
며 옥천사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데 일조한다.
가을도 반하여 머무는 그 숲길 바닥에는 한 시
절 폼나게 살다간 낙엽들이 깔려 알록달록 카페
트를 이룬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을 보면서 올
해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실감나게 하니
세월의 자비 없는 조급함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런 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자방루 뜨락이
나온다.


▲  범종각(梵鍾閣)

전나무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연병장처럼
넓은 자방루 뜨락이 펼쳐진다. 뜨락 왼쪽에는
범종각이 자리해 있는데, 범종(梵鍾)과 법고(法
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범종 같은 경우는 1776년에 주조
된 대종(大鐘)이 있었으나 현재는 보장각에 있
으며, 1987년 재일교포 박명호가 시주하여 만든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박명호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당
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거금을 시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물 외에도 조선 때 싸리나무로 만든
큰 구시가 있는데, 이것은 큰 불사나 법회 때
밥이나 물을 담던 커다란 나무 통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옥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자방루 뜨락 좌측에 자리한 샘터


※ 연화산에 안긴 고성 제일의 고찰, 옥천사(玉泉寺) - 경남 지방기념물 140호
고성 제일의 명산(名山)인 연화산(蓮花山) 북쪽 자락에 고성 사찰의 갑(甲)인 옥천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676년(문무왕 15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10년에 걸친 당나
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670년에 귀국하여 화엄종(華嚴宗)을 널리 알리고자 영주 부석사(浮石寺)
를 시작으로 좁아 터진 신라(新羅) 땅에 10개의 화엄종 사찰을 지었는데, 옥천사는 그중의 하나
로 세워졌다고 한다. 절의 이름은 지금도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옥천(玉泉)이란 샘에서 유래되
었다고 하며, 과연 의상이 창건했는지는 속시원히 입증할 수는 없지만 최치원(崔致遠)이 하동
쌍계사(雙磎寺)에 남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47호)에 '쌍계사는 본래 절
이름을 옥천사라 했으나 근처에 옥천사란 절이 있어 헌강왕(憲康王)이 쌍계사라 제액(題額)을
내렸다'
는 문구가 있어 옥천사가 그 이전부터 숨 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말기인 898년에는 창원 봉림사(鳳林寺)를 세운 진경국사(眞鏡國師) 심희(審希)가 낭림선사
(朗林禪師)와 함께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크게 가람이 확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964년(광종 15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혼응(混應)과 더불어 3번째 중창을 벌였고,
1110년(예종 5년) 혜은(慧隱)이 쇠퇴한 절을 다시 일으키니 이것이 4번째 중창이다. 그리고 예
종 시절에는 묘응(妙應)이 이곳에서 천태종(天台宗)을 강의했다고 한다. 1237년 최씨정권이 대
장경(大藏經) 불사를 위해 진주에 대장도감 분사(大藏都監 分司)를 두었는데, 옥천사 보융대사(
普融大師)가 일연대사(一然大師)와 함께 팔만대장경 교정 작업을 벌였으며, 그 공로로 5번째 중
창이 이루어졌다. 1371년(공민왕 20년) 지운(智雲)과 원오(圓悟)가 6번째 중창을 했다.

1392년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옥천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1592
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천사 승려들은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하여 왜군(倭軍)과 싸웠으나 1597
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의 공격으로 절 전체가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1640년 학명(學明)이 절 아래 대둔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
타나 웅장한 절터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학명은 이튿날 꿈 속에서 갔던 그
곳을 더듬어 찾으니 글쎄 그때 본 거대한 절터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리도
일품이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의오(義悟)와 함께 중창불사를 벌이기로 하고 1644년에 우선
동상당(東上堂)이란 초가를 짓고 이듬해 심검당을 세웠다. 허나 재정이 넉넉치 못해 1654년에
겨우 법당을 지었고, 1664년에 정문을 세워 7번째 중창을 마무리 지었다.

1677년 묘욱(妙旭)이 법화회(法華會)를 개설하여 향적전, 만월당을 짓고, 1680년 인근에 청련암
(靑蓮庵)과 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를 세웠다. 1764년에는 자방루를 짓고 그 앞에 뜨락을 넓
게 닦았는데, 여기서 승병 훈련을 했다. 조선 정부는 승군(僧軍)을 부리고자 바다와 가까운 절
에 의무적으로 승병을 두게 했는데, 영조 시절 옥천사 승군은 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절 규모는 요사 5동, 산내암자 7개였으며, 물레방아가 12개나 있을 정도로 크게 흥했다.
이때가 8차 중창이었다.

달은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1800년(정조 24년) 나라에 종이를 바치는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로 선정되었다. 병역과 각가지 부역(負役)도 힘든데 거기에 종이까지 만들어야 되니
그 부담이 실로 상당했을 것이라 심한 부역을 이기지 못한 승려들이 자꾸 도망을 치면서 절이
크게 기울게 된다. 그래서 1842년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종이 물량도 크게
감량해 주었으나 여전히 감당이 되지 않아 1880년에는 겨우 10여 명만 남았다고 한다.
1863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신관호(申觀浩)가 절을 방문해 '연화옥천(蓮花玉泉)'
이란 글을 남겼는데, 이때 주지인 농성(聾醒)이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빼줄 것을 호소했다. 그
말이 옳다 여긴 신관호는 바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종이 부역에서 해방되었다.

옥천사는 19세기에 진주와 고성 지역 사대부(士大夫)와 여러 관청에서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지배층과 관(官)과 한통속이라 백성들은 생각을 했던 듯 싶다. 백성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온갖 수탈로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옥천사는 종이 부역과 승병 군역이 있을 뿐,
그런데로 지원을 받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62년 진주민란(晉州民亂)이 터지자 농
민들은 절로 몰려와 경내 외곽의 건물과 대종을 파괴했으며, 1888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농민들이 다시 몰려가 많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에 뚜껑이 열린 용운대사(龍雲大師)가
정면으로 나서
'이 절에는 전하(殿下)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소. 더 이상 불을 지르면 당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할 것이오!!'
호통을 치니 이에 간이 쫄깃해진 농민들은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
다. 그 덕분에 대웅전, 자방루는 온전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어쨌든 사대부와 관의 지원으로 적묵당과 탐진당을 중수했고, 힘들다고 도망친 승려를 소환하면
서 예전의 명성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조정이 전국에 교지(敎旨)를 보내 왕실
을 위해 기도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경상도관찰사이자 진주목사인 박규희(朴珪熙)가 개인
자금을 털어 옥천사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건물을 지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흐뭇해하며
축성전이란 사액을 내렸으며,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을 끊임없이 중건하면서 이른바 9번째 중
창은 마무리되었다.
이 당시 옥천사 소유 전답은 800여 마지기로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小作)을 주어 5:5 비율로 받
아 매년 1,000석의 수입을 챙겼다. 또한 산을 개간해 560정보를 전답으로 만들었으며, 세곡 수
입을 바탕으로 계속 전답을 불렸고, 승려 수도 나날이 늘어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911년 왜정(倭政)이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고 전국 31본산(本山)을 정할 때 옥천사가 그 하
나로 지목되었다. 허나 당시 주지인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이 서울 주지회의에 참
석하여, 대본산 지정을 거절했다. 그로 인해 옥천사 승려들의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1920년
경에는 진주에 포교당을 만들어 연화사(蓮花寺)라 하였다.

옥천사는 왜국으로 승려 15명을 유학보내기도 했으며, 이들은 장차 절 주지와 교육계로 진출했
다. 그리고 잠시나마 옥천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등 나라의
독립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또한 절은 통도사의 말사(末寺)이지만 워낙 파워가 대단하여 통도사
에서 주지를 파견하지도 못했다. 옥천사 자체에서 중론으로 주지를 선출하여 통도사에 승인을
요구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1950년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자 사찰답 800여 지기가 소작인들에게 죄다 넘어갔다. 그
로 인해 절은 졸지에 거지가 되고 운영에 큰 위기를 맞았다. 다른 절은 약간의 불량답(佛糧畓)
이라도 건졌으나 옥천사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허나 연화산 주변 565ha의 산림을
가지고 있어 빈털털이는 그나마 면했다.

근래에 이르러 청담(淸潭)이 불교정화와 신도 교화운동을 벌이면서 전답을 잃어 방황하던 절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렸으며, 1984년 일주문을, 1987년 사적비, 1999년 유물전시관과 축성전을 지
으면서 지금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옥천사 칠성각

▲  옥천사 보장각(성보박물관)

경내에는 대웅전과 팔상전, 자방루, 조사전, 유물전시관 등 20동에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으며, 청련암과 백련암, 연대암 등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외에 고성읍내와 하동에 보광
사, 낙서암 등의 포교원을 운영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495호로 지정된 청동금고(靑銅金鼓)와 보물 1693호인 지장보살도 및 시
왕도 등 국가지정문화재 2점과 대웅전과 자방루, 향로, 대종, 명부전 등 지방문화재 7점을 간직
하여 고색의 짙은 향기와 절의 장대한 역사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또한 절 전체는 경남 지방기
념물 140호
로 지정되었다.

옥천사는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연화산의 북쪽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으며,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울창해 경남 남부의 경승지로 명성이 높다. 특히 알록달록 물감이 완연히 번진
가을은 그 백미이다. 첩첩한 산주름에 묻혀있어 고요하기 그지없으며 풍경소리와 산바람 소리,
산새의 지저귐, 범종 소리가 그 고요를 가끔 깨뜨리는 게 전부이다.

절을 품은 연화산은 복분자딸기와 송이버섯이 유명하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하나이다. 연화
산 일대는 경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화8경의 절경을 간직하고 있다. 

※ 연화산 옥천사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① 고성, 배둔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성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과 마산남부터미널에서 배둔 경유 고성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② 진주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진주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대전동부터미널, 부산서부터미널,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이용
③ 고성/배둔/진주에서 옥천사3거리까지 (옥천사3거리에서 도보 35분)
* 고성터미널과 배둔에서 개천행 군내/완행버스(1일 10여 회)를 타고 옥천사3거리 하차
* 진주시외터미널에서 옥천사3거리 경유 배둔, 고성 방면 완행버스가 1일 11회 다닌다.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진입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연화산나들목을 나와 우회전 → 영오 → 개천 → 옥천사3거리 → 옥천
  사 주차장

★ 옥천사 관람정보 (2013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300원 / 학생,군인 1,000원 (20인 이상 단체 800원) / 어린이 700원 (단체
  600원)
* 옥천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한다. 휴식형은 최대 3박4일까지
  머물 수 있으며, 체험형은 매월 2,4주 주말에 1박 2일로 진행된다. 체험형 참가비는 성인 5만
  원, 초중고 4만원이며, 세면도구와 수건, 운동화 등을 지참해야 된다.
  자세한 문의는 옥천사 종무소(☎ 055-672-0100)나 홈페이지 참조
* 옥천사에서 연화산 정상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 소재지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연화산1로 471-9) <☎ 055-672-0100>
* 옥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옥천사 승군들이 사용한 언월도(偃月刀)


♠  옥천사 둘러보기 (자방루, 대웅전 주변)

▲  옥천사 건물의 갑(甲)인 자방루(慈芳樓)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3호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으로 가려면 자방루의 옆구리를 싫든 좋든 거쳐야 된다. 옥천사의 속살을
속세에 드러내기가 싫었던지 대웅전 주변을 꽁꽁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당당한 모습을 지닌 자방루는 1764년에 지어졌다. 1888년 농성이 중건하
고 1984년에 보수를 벌였는데, 이 건물은 승장(僧將)이 승군을 지휘/통제하던 곳으로 최대 340
명까지 담을 수 있다. 훈련 외에는 불교 강의나 행사 장소로 쓰였으며, 너른 앞뜨락에서는 승병
들이 훈련을 하거나 군사 사열을 받았다.

건물 내부에는 1888년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과 비룡상(飛龍像)을 비롯해 새 그림 40여 점이
내부를 수식하며, 자방루란 이름은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뜻으로 불도를 닦는 누각이
란 뜻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보장각 제외)로 옥천사의 오랜 명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  단청으로 화사한 자방루 내부

▲  자방루 대들보에 걸린 현판

자방루는 대웅전 방향만 개방된 형태이고 천왕문 방향은 문을 열고 닫는 형태이다. 내부는 누마
루로 바닥을 짰고 단일부재인 대들보에 기둥이 없는 통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간
결한 분위기를 준다. 대들보에는 비룡상과 비천상이 그려져 있으며, 문 위쪽에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이 있으니 잘 살펴보도록 하자.
자방루 현판은 영조 시절 이조참판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조명채(曹命采, 1700~1764)가 옥천
사에 들렸을 때 쓴 것이다.


▲  자방루 옆문에서 만난 사마귀의 위엄
흑자(黑子, 사마귀)공이 옥천사에는 어인 일로 행차했을까? 사마귀의 위엄 돋는
행차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  옥천사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2호

자방루 옆구리를 지나면 대웅전이 바로 모습을 비춘다. 장대한 규모의 자방루와 드넓은 자방루
뜨락에 비해 대웅전 주변은 정말 협소하다. 뜨락 좌우로 적묵당과 탐진당이 꽉차게 들어앉아 있
어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4동이 뜨락을 빈틈 없이 포위한 형태이다.

높은 기단 위에 높직히 들어앉아 법당(法堂)의 위엄을 드러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옥천사의 중심지이다. 1649년에 중창되었으며, 1677년 묘욱(妙旭)이 개
수하고 1736년 보수를 했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1864년 용운대사가 새롭게 만들었다. 대웅전 현
판은 영조 시절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대가인 동화사(桐華寺) 기성대사(箕城大師)의 글씨라
고 전하며, 대웅전 계단 좌우에는 2쌍의 돌기둥인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는데 이는 괘불이
나 깃발을 거는 용도로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기단을 이루고 있는 돌에는 푸른 이끼가 자욱히
끼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조선 영조 시절 기성대사가 쓴 대웅전 현판의 위엄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활력이 넘쳐 보인다.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불
온후한 표정의 석가불이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
부처나 관음보살 이야기 대신 꽃과 화병, 채소, 붓 등이 그려져 있다.
무슨 사연이 깃들여진 것일까? 절의 주요 고객이던 사대부를 위한 그림일까?

▲  적묵당(寂默堂)
1764년에 세워진 'ㅁ'구조의 건물로 고참
승려들이 머물던 큰방이었다. 현재는 재를
올리거나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쓰이며,
2006년에 해체보수했다.

▲  탐진당(探眞堂)
1754년에 세워진 건물로 신참 승려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지금은 종무소 및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으로 쓰인다.


♠  옥천사 둘러보기 (팔상전, 명부전, 조사전 주변)

▲  옥천사 팔상전(八相殿)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담은 8폭의 그림을 담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0년(고종 27년)에 세워진 것으로 8상 탱화는 도난을 방지하고자 보장각에 따로 보관
하고 있으며, 탱화의 사진을 대신 걸어두었다.


▲  옥천사 명부전(冥府殿) - 경남 문화재자료 146호

대웅전 좌측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한 명부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730년에 지어졌으며, 1895년에 중수했다. 명부전 옆에
는 흙과 기와로 빚은 정겨운 옛 굴뚝이 나란히 자리하여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을 그리워
한다.


▲  명부전 불단에는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시립(侍立)해 있다.

▲  옥천사 조사전(祖師殿)

경내에서 가장 뒤쪽에 자리한 조사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절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의 진영
(眞影)과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 청담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  조사전 중앙을 장식하는 의상대사의
진영

           ◀  옥천사 나한전(羅漢殿)
대웅전 뒷통수에 자리한 나한전은 16나한(羅漢)
의 거처로 불단에는 정조 시절에 조성된 석가3
존불(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이 봉안되
어 있다.
나한전은 1895년에 지어진 것으로 16나한 가운
데 9상은 조선 후기 것이고, 7상은 근래에 나한
을 손질하면서 새롭게 붙여 넣었다. 이곳 나한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  옥천사 칠성각(七星閣)

조사전 밑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
다. 내부에는 1981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걸려있다.


▲  조촐한 모습의 독성각(獨聖閣)과 산령각(山靈閣)

명부전 뒤에는 눈에 넣어도 적당할 정도로 조그만 모습의 독성각과 산령각이 나란히 자리해 있
다. 이들은 서로 생김새도 비슷하여 마치 쌍둥이 같다.
왼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897년에 지어졌으며, 사람 1명이
들어가 앉으면 그냥 꽉 차버린다. 우측 산령각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역시 1897년에 세워
졌는데, 독성각보다도 작아서 사람이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밖에서 예를 올려야
된다. 두 건물 모두 120년 남짓의 건물이지만 너무 노후해 보여 300년 이상은 되어 보인다.


▲  시원하게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독성도(獨聖圖)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도(山神圖)


▲  옥천각(玉泉閣)

팔상전 뒤쪽에는 옥천각이란 조촐한 건물이 있는데, 바로 그 안 옥천사의 명물인 옥천(玉泉)이
담겨져 있다. 옥천은 물이 솟는 샘터로 절에서는 그를 위해 옥천각이란 수각(水閣)까지 씌웠는
데, 이 샘터는 옥천사 창건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며, 옥천사란 이름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물과 함께 일정량의 쌀이 흘러나와 그걸로 공양을 했다고 하며, 어느 욕심꾸러기 승
려가 더 많은 쌀을 취하고자 샘을 파헤쳤는데, 샘이 크게 노해 쌀은 커녕 물도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승려가 지극정성으로 잘못했다고 기도를 올리며 샘을 달래니 샘도 화를 풀었는지
연꽃 1송이가 활짝 피어나면서 물이 콸콸 솟아나 만병통치의 약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성 지역에 이름난 약수로 왕년에는 샘물에서 목욕을 하는 중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
며, 지금은 목욕은 못하고 물만 떠 마실 수 있다.

산사에서 마시는 샘물은 맛이 다 고만고만하지만 부산 미륵사(彌勒寺)와 고성 옥천사의 물맛은
신선이 마시는 물처럼 뭔가 특별해 보인다. 물을 마셔보니 자연이 내린 특별한 양념이 담긴 듯
맛이 달콤하다. 물을 3번이나 떠 마시고, 가져온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집에서도 두고두고 마
셨다.


▲  옥천사의 명물, 옥천(玉泉)
둥그렇게 파인 샘에서 연화산이 베푼 옥계수가 쉬지 않고 솟구친다.

▲  청담대사 승탑

▲  청담대사 사리탑비

경내에서 보장각으로 가는 길목에 옥천사에서 출가한 근대 불교의 1인자 청담대사의 승탑과 탑
비가 있다. 옥천사에서도 가장 특별한 존재라 경내에 그의 사후 공간을 만들어 두고두고 그를
기린다.
하얀 피부의 수려한 조각을 자랑하는 승탑에는 그의 사리가 담겨져 있으며, 그 옆에 청담의 일
대기를 담은 탑비가 있다. 입에 보주(寶珠)를 물고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린 귀부에 생동감이 넘
쳐 보인다.


♠  옥천사의 보물이 담긴 보장각(寶藏閣)

경내 북쪽에는 2층 규모의 보장각이 늠름한 모습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보장각은 옥천사의 귀
한 보물을 간직한 꿀단지로 오래된 큰 절에 흔히 있는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다. 옥천사 제
일의 보물인 청동금고(임자명반자)와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를 비롯하여 청동향로, 신중탱화, 대
종 등의 불화와 고문서, 불상, 여러 불기(佛器) 등 200여 점의 유물이 소중히 담겨져 있다. 이
중 법고(法鼓)와 시왕탱화 등 119점은 '옥천사소장품'이란 이름으로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로 지정되었다.

보장각은 1999년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졌으며, 입장료는 없다. (어차피 옥천사 입장료에 포함됨
) 매주 월요일은 문을 걸고 쉬지만 1층 정도는 상황에 따라 요령껏 관람이 가능하다. (2층은 문
이 잠김) 내가 갔을 때는 공교롭게도 박물관의 공통적인 휴일인 월요일이었다. 1층은 다행히 문
이 열려있어 구경은 했지만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전시실 문도 굳게 잠겨져 들어가지도 못했다.
전시실은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나 요령껏 1층 유물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허나 태반이 흐
리거나 흔들리게 나와서 건질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나마 괜찮게 나온 것 일부만 간단히 소개
한다.


▲  1904년에 제작된 모연문(募緣文)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  비변사절목(備邊司節目)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  옥천사 청동금고(靑銅金鼓) - 보물 495호

옥천사 보장각 1층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라 불리는 청동금고가 아닐까
싶다. 청동금고는 말그대로 청동으로 만든 쇠북으로 1252년(고려 고종 39년)에 제작된 고려 후
기 금고(쇠북)이다. 다른 말로 반자(飯子)라고도 하나 잘 쓰이지는 않는다. 표면지름 55cm, 측
면너비 14cm로 전면에 굵은 융기선(隆起線)으로 4줄의 동심원(同心圓)을 두르고 후면은 비웠다.

금고는 불교의식 때 사용하는 것으로 금고 측면에는 187자에 이르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데, 첫머리에 '高麗二十三王 環甲之年 壬子四月十二日 在於京師工人家 中鑄成智異山 安養社之飯
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1252년 고려 황제인 고종(高宗)의 환갑을 기념하여 만들었음을 알
려준다. 만든 이후 지리산에 있던 안양사(安養社)에 두었는데, 그런 금고가 어찌 옥천사까지 흘
러들어 왔는지는 전하는 바가 없다.
금고 제작자인 공인별장(工人別將) 한중서(韓仲敍)는 내소사범종(來蘇寺梵鍾) 등 여러 점의 유
물을 남긴 인물로 고려 후기에 뛰어났던 장인으로 여겨진다. 귀족과 승려들이 발원한 내용이 기
록되어 있고, 안양사의 사(社)라는 이름에서 고려 말에 유행했던 신앙결사(信仰結社)의 한 형태
로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제는 760년이 넘은 노구(老軀)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이렇게 박물
관의 한 부분을 장식한다.


▲  옥천사 장대청안목책(將大廳案目冊) - 1857년 작

▲  다라니경목판 - 19세기 작

▲  옥천사 인장(印章)

 ◀  옥천사 향로(香爐)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9호

옥천사 향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입 안쪽에는 점선으로 '
의령수도사(宜寧修道寺)'란 글씨가 있어 그곳에
서 왔음을 알려주며, 가경(嘉慶) 21년, 즉 1816
년(순조 16년)에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때 향로 받침을 새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향로는 무늬를 먼저 새긴 다음 은을 입히는
방법으로 문양을 새겼으며, 표충사(表忠寺) 은
입사 향로와 같은 수법을 보여주는 괜찮은 작품
이다.

보장각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랐다.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전시실 문은 굳게 입을 봉했다.
문 옆에는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로 지정된 대종(大鐘)이 있으나 사진에 담지는 않고 괜히
2층까지 설치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 듯 싶어서 꼬랑지를 내리고 바로 철수했다. 대종은 1701년
에 조성된 것이다.

◀  옥천사에서 누린 차1잔의 여유

옥천사를 살피고 가까운 곳에 있는 청련암(靑蓮庵)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핸드폰이 밥기
운이 다되었다며 졸도를 해버렸다. 실신한 핸드폰을 계속 흔들어 깨웠으나 깨기가 무섭게 실신
을 한다. 그래서 청련암종무소에 도움을 청했으나 아무도 없어서 서둘러 옥천사로 내려와 그곳
종무소에 부탁을 넣었지만 충전기가 없다고 그런다. 요즘 무척 잉여로운 몸이라 연락올 때도 거
의 없지만 요즘 세상에 핸드폰이 없으면 그것만큼 허전한 것이 없다.
이거 어찌해야 되나 궁리하다가 문득 보장각 지하층(말이 지하지 지상임)에 있는 찻집을 생각하
고 거기로 갔다. 찻집에는 주인 아줌마와 그의 귀여운 어린 딸이 있었는데, 주인 아지매에게 충
전을 부탁하니 마침 충전기가 있어서 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고 충전이 되는
(20분 정도) 동안 찻집에서 두 발을 쉬었다. 그런데 그냥 앉아 있으려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장 저렴한 2,000원짜리 차 1잔을 주문했다. (그때 마신 차 이름은 기억이 안남) 여태까지 찻
집에서 나홀로 차를 마신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홀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게 된 것이다. 

차(茶)를 주문하니 잠시 뒤 잣이 띄워진 차와 에이스 과자가 담긴 그릇이 앞에 차려진다. 차의
향을 음미하며 산주름에 묻힌 산사에서 오랜만에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린다. 차에는 떡이
찰떡궁합이지만 떡 대신 과자가 나왔으니 다소 조화가 떨어진다. 에이스 과자에는 딱 커피가 어
울리는데 말이다. 에이스는 옛날에 많이 먹었던 과자라 감회가 새롭다.

과자를 먹으며 차를 마시는 동안 30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누구와 같이 왔으면 2시간도 있을
수 있지만 홀로니 더 머물러 있기도 그렇다. 게다가 주인 아줌마는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시간은 17시) 하여 자리를 정리하여 차 계산을 하며, 핸드폰 충전에 고마움을 표하고 밖
으로 나온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 어디긴 내가 있어야 될 아비규환의 속세지~~ 다시 지루한 일상으로 돌
아가야 된다는 생각에 잠시 눈앞에 어둠이 내린다. 허나 안갈 수는 없다. 그게 내 운명인 것을..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며 늦가을 옥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다음에 다시 인연
이 된다면 이때 못본 보장각 2층도 살펴보고 청련암 보리수(菩提樹)와 백련암, 연화산 정상까지
말끔히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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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매화꽃 나들이 ~ 남해바다를 품은 조그만 해안공원, 통영 달아공원

 


' 통영 달아공원 봄맞이 나들이 '
통영 달아공원
▲  관해정에서 바라본 달아전망대


겨울 제국의 차디찬 위엄이 서서히 누그러들던 3월 초에 통영 미륵도(彌勒島) 남단에 자리한 달
아공원을 찾았다. 이곳이 통영에서 그렇게나 유명한 곳이라고 찬양을 해서 부산에 내려온 김에
1번 가보기로 했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확인도 할 겸 말이다.

달아공원은 남대해(南大海)가 바라보이는 해안 언덕에 터를 다진 공원이라 주변 바다와 섬이 거
침없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 하나는 그럭저럭 큰 점수를 줄 만하다. 게다가 좌우로 바다를 끼고
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의 큰 매력, 허나 그것 뿐인거 같다. 기대
가 너무 컸는지는 모르지만 좀 허탈하더군. 또한 바닷가에 있음에도 정작 바다로 내려가는 길은
없다. (군부대로 통제됨) 

공원의 이름인 달아(達牙)는 이곳의 지명으로 지형이 코끼리의 어금니와 닮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거 외에도 임진왜란 때 아기(牙旗)를 꽂은 전선(戰船)이 당포(唐浦)에 도달(到
達)했다 하여 달아라 했다는 설도 있으며, 지금은 달을 구경하기 좋은 곳이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현재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원으로 한려해상 동부사무소의 관리를 받고 있으며, 1973년 북한
여간첩이 침투한 남북분단의 시린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으로 침투한 간첩은 1974년 2월 대전(
大田)에서 주민신고로 꼬리가 잡혔다.

속세와 이곳을 잇는 달아공원 정류장에서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1997년에 지어진 관해정이란 정
자가 나오고, 정자를 지나면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달아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있다. 그
주변에는 산책로가 있으며, 그것이 달아공원의 전부이다. 허나 조망 하나는 일품이므로 수레를
끌고 부근을 지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려 쉬어갈 만하다.


♠  달아공원(達牙公園) 둘러보기

▲  달아공원 입구 (관리사무소 부근)

▲  저 고개를 넘으면 바다가 나온다.
산책로 주변 나무들은 겨울의 압제(壓制)에서 깨어나 봄맞이에 여념이 없다.

▲  달아공원 관해정(觀海亭)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촐한 크기로 그의 이름처럼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이다.
이곳에 오르면 남해바다가 베푼 해조음에 청각이 정화되고 시원히 불어오는
바다바람에 마음과 생각마저 아낌없이 정화된다.

▲  달아전망대 서쪽 산책로
공원을 뒤덮은 잔디는 아직도 겨울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여전히 누런색을 고수한다.

▲  달아전망대 동쪽 산책로
전망대 주변 산책로는 전망대를 가운데에 끼고 순환하는 형태이다.

▲  달아전망대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이렇게 보니 큰 산이나 요새, 하늘에 떠 있는 전망대나
망대(望臺)를 보는 듯 자뭇 웅장해 보인다. 이런게 바로 착시현상이겠지~~

▲  달아전망대에서 바라본 공원 북쪽과 관해정

▲  달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대자연이 빚어놓은 섬들이 미륵도 주변에 노니는 모습이 매우 정겹고 한가롭다.
여기서는 곤리도와 추도, 사량도 등이 보인다.

▲  달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용초도와 비진도, 오곡도, 한산도(閑山島) 등이 보인다.

▲  달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용초도와 비진도, 오곡도 등이 보인다.

▲  달아공원의 꼬리 부분
소나무로 무성한 공원의 꼬리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접근이 통제되어있다.
접근 통제를 알리는 경고문을 무시하고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달아공원에서 만난 순백의 아름다움, 매화꽃
봄 해방군의 선봉인 매화꽃이 미륵도에 상륙하여 달아공원을 하얗게 물들인다.
그해 처음으로 만난 봄꽃으로 그들을 대하니 '벌써 봄이 왔구나~' 싶어
매화가 엿들을 정도로 나의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린다.


※ 달아공원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서 통영행 고속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다닌다. (남마산 경유와 거가대교
  경유 2가지가 있음)
* 대전동부터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통영행 직행버스 40~50분 간격으로 운행
* 광주와 울산, 진주, 창원, 마산(남부)에서 통영행 직행버스 이용
* 통영터미널에서 척포로 가는 통영시내버스 530번을 타고 달아공원 하차 (15~70분 간격) 그외
  에 513번(거제대교), 536번(황리임중) 시내버스도 있으나 터미널을 경유하지 않으며, 각각 1
  일 2~3회 밖에 운행안함 (서호시장, 무전동 경유)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 있음)
① 대전통영고속도로 → 통영나들목을 나와서 통영시내 방면 → 통영시내 → 통영대교를 건너
   우회전 → 산양읍 → 달아공원
② 부산 → 거가대교 → 고현 → 거제대교 → 통영시내 → 통영대교를 건너 우회전 → 산양읍
   → 달아공원

* 공원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소재지 -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연화리114 (문의 ☎ 055-649-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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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늦가을 산사 나들이 ~ 남해 용문사 (미국마을, 남해바다)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남해 용문사(龍門寺) '
남해 호구산
▲  용문사를 품고 있는 호구산(虎丘山, 617m)


겨울의 제국(帝國)이 강한 패기를 보이며 가을을 몰아내던 11월 끝자락에 경남 남해를 찾았다.
우선은 노량포구에 있는 남해대교와 이순신 장군이 처음 안장되었던 충렬사(忠烈祠)를 둘러보
고 남해대교 남단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남해읍(南海邑)으로 이동했다.

남해터미널에 이르니 용문사를 거쳐 가천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대기하고 있어서 바로 표를 구
입하고 그 버스에 나를 담았다.
가천행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용문사 밑에 자리한 용소리(龍沼里)에 발을 내린다. 이
곳은 절 밑에 둥지를 튼 마을로 마을 남쪽에는 쪽빛을 띈 남해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
여 속세에 찌든 마음을 시원하게 씻겨준다.

용소리에서 내린 것까지는 좋으나 정작 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같
이 내린 노공(老公)에게 문의하니 바로 서쪽으로 보이는 고개에 길이 있다고 그런다. 마침 버
스에서 내린 곳에서 산으로 가는 길이 있어 이 길로 가도 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그런다. 그
래서 고개까지 안가고 바로 마을에서 올라갔다.

마을을 벗어나 계단식 논을 여럿 지나니 고개에서 시작된 길과 만난다. 여기까지는 대략 10분
정도 걸렸다.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하얀 피부의 석장승 1쌍이 미리 나와 마
중을 한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절 수호이다. 그들을 지나 5분 가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남쪽
아래로 주차장이 바라보인다.

일주문을 지나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길의 경사가 조금 급해진다. 경내에 이르기까지 중간중
간에 부도(浮屠)의 무리와 남근석 등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며, 길 우측으로 청정한 용문사
계곡이 바다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허나 가을 가뭄이 극성이라 수량은 답답할 정도며 겨울의
제국이 도래하고 있는 시절이라 나무들 모두 우수에 젖으며 몸을 사리고 있다.

일주문에서 10분 정도 발품을 팔면 드디어 내부를 제대로 가린 용문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우
선은 절을 지키는 오랜 장승의 거처인 조그만 기와집과 천왕교(天王橋)란 돌다리가 있는데 이
들 바로 우측에 돌을 높이 쌓고 터를 다진 곳에 절이 둥지를 텄다. 기와집에서 경내까지는 다
리를 건너서 경내로 가도 되고 조금은 돌아가지만 수레길을 이용해도 된다.

경내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용문사의 내력(來歷)을 간추려 짚어보도록 하자.


▲  꽉 차게 들어선 용문사

* 지장도량(地藏道場) 용문사의 내력
용문사는 남해에서 가장 큰 절로 호구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다. 호구산(虎丘山, 617m)
은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의 산으로 절을 끼고 바다로 흐르는 용문사 계곡은 남해 제일의 계
곡으로 일컬어진다. 용문사를 후광으로 속세에 조금씩 알려진 호구산은 남해군 지정 군립공원
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남해의 명산(名山)인 금산(錦山)에 세웠다는 보광
사(普光寺)의 후신(後身)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 이를
증명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한 창건 이후 1660년까지 이렇다 할 내력이 전해오지 않는 점
도 절의 내력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본격적으로 절의 사적(事績)이 전하는 것은 1660년이다. 그 당시 절은 남해읍에 있었는데, 남
해향교(南海鄕校)와 마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불교를 싫어하던 남해 유생들이 절을 다른 곳으
로 옮기라고 징징거리자 그들의 징징거림에 귀가 따갑던 백월당(白月堂)은 용소마을 위쪽, 지
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용문사라 했다고 한다. 용문사란 이름은 절 아래쪽에 있는 용연(龍淵)
위에 둥지를 텄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1661년 탐진당(探眞堂)과 적묵당(寂默堂)을 세웠는데, 세우고 보니 이곳이 터가 너무 좋던 것
이다. 그래서 1666년 읍내에 남아있던 대웅전과 봉서루를 죄다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1708
년 부속암자인 염불암(念佛庵)을 중창했으며 관음암(觀音庵)과 백운암(白雲庵)을 고을 사람들
의 발원으로 세웠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肅宗) 임금은 임진왜란 때 용문사 승려가 승군(僧軍)에 참여하여 왜군과 싸운 점을 크게
치하하며 이곳을 나라의 수국사(守國寺)로 정하고 왕실(王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당(祝願
堂)을 세웠다. 또한 연옥등(蓮玉燈) 2개와 촉대 1개를 하사했는데 왜정(倭政) 때 그것에 군침
을 흘린 왜인들이 훔쳐갔다.
어쨌든 왕실과의 인연에 힘입어 남해 제일의 사찰로 성장했으며, 그 이후로 별탈없이 지내 지
금에 이른다. 왜정 때는 용성(龍城)이 이곳 백운선원(白雲禪院)에 1년 가량 머물기도 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영산전, 용화전, 적묵당, 요사, 봉서루, 천왕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446호인 괘불탱을 위시하여 대웅
전과 명부전, 천왕각, 용화전석불, 목조지장시왕상, 목조(구유), 부도군, 건륭25년명운판, 목
조아미타3존불좌상, 동종 등 무려 20여 점의 지방문화재를 품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용문
사 승려가 사용했던 삼혈포(三穴砲), 축원당에 걸어두었던 궁중매듭인 번(幡), 경릉관(敬陵官)
과 익릉관(翼陵官)이 발급한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가 전하고 있다. 용문사의 유일한 국가지
정문화재인 괘불탱(掛佛幀)은 사월초파일이나 절 행사 때만 구경할 수 있으며, 금패와 번, 삼
혈포는 관람이 어렵다.

호구산 남쪽 자락 깊숙한 곳에 둥지를 트고 있어 아늑하고 호젓한 산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누
릴 수 있으며, 남해바다가 가까이에 바라보여 마음마저 시원하게 해준다. 속세를 잠시 등지거
나 마음을 싹 정화하고 싶을 때 안기고 싶은 절로 예로부터 지장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경내 뒤쪽에는 남해자생식물단지가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바다의 푸른 물결처
럼 펼쳐진 차밭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 용문사 찾아가기 (2012년 11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남해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수원터미널에서 1일 2회, 대전복합(동부)터미널에서 1일 3회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에서 남해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나며, 진주에서는 20~40분 간격
  으로 떠난다. (마산/창원에서는 1일 10회 정도 운행)
* 남해터미널에서 이동 경유 남면, 가천방면 군내버스(1일 9회 운행)를 타고 용문사입구(미국
  마을)에서 도보 3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남해고속도로 → 진교/하동 나들목을 나와서 남해방면 → 남해대교 → 남해읍 → 신전3거리
에서 우회전 → 용소리 → 용문사입구/미국마을에서 우회전 → 용문사
② 남해고속도로 → 사천나들목을 나와서 삼천포 방면 3번 국도 → 삼천포시내 → 삼천포/늑도
대교 → 창선면 → 창선대교를 건너 우회전 → 이동(무림)에서 미조방면 좌회전 → 신전3거리
에서 우회전 → 용소리 → 용문사입구/미국마을에서 우회전 → 용문사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용문사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행복한 미소'란 이름의 정규 프로그램과 그냥 자유롭게
  하루 머물다가는 휴식형 2가지가 있다. 행복한 미소는 사찰 예절과 차담(茶啖), 바다 산책,
  저녁/새벽/사시 예불 등을 한다. 휴식형은 요일에 상관 없이 언제든 찾아와 1박 2일 머물다
  가는 것으로 공양시간과 예불시간, 취침/기상 시간 정도만 지키면 된다. 행복한 미소는 5만
  원, 휴식은 1박2일에 4만원이다. (자세한건 용문사 홈페이지와 전화로 문의 요망)
* 용문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하거나 바로 밑에 있는 석장승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 055-862-4425)


♠  용문사 가는 길 (석장승 ~ 일주문 ~ 부도군)

▲  절에서 멀리감치 나와 중생을 맞이하는 석장승 1쌍
그들의 검문을 통과하면 속세에서 그저 멀어만 보이는 산중의 절집,
용문사가 그만큼 가까워진다.

▲  늦가을의 끝을 잡은 용문사 가는 길
추운 북쪽과 달리 따뜻한 남국(南國)의 땅이라 늦가을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다.

▲  용문사 일주문(一柱門)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이 없다. 속세의 어느 존재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주문은
중생을 걱정하는 부처의 마음이다. 인간들이 일주문의 마음의 절반만 따라한다면 이 세상은 그
런데로 아름다울텐데 인간이란 짐승과 신(神)의 중간에 들어앉은 어정쩡한 존재라 그러지를 못
한다. 그런 주제에 만물의 영장을 칭하며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악을 행하니 그러다 자
연의 대보복을 제대로 받을 것이다.


▲  이것은 무엇인고? ㅋㅋㅋ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 중간에 낯이 많이 익은 묘한 돌을 보게 된다. 바로 남
근석이다. 마치 그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솟은 남근석은 정말 그대로의 모습으로 화석(化石)
으로 굳은 것 같아 절을 찾은 중생들의 관심을 제대로 끈다. 이런 돌은 옛날부터 성기신앙(性器
信仰)의 대상물로서 금욕(禁慾)을 중시하는 절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이 무척 이채롭다. 절에
득남(得男)을 기원하러 다니던 여인네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던 이 돌은 오늘도 남녀노소
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리를 지킨다.


▲  용문사의 오랜 역사가 담긴 부도군(浮屠群)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5호

남근석을 지나 2분 정도 오르면 오른쪽 높은 곳에 터를 닦은 승탑(僧塔, 부도)의 보금자리가 보
인다. 이들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지어진 석종형(石鐘形)부도가 주
를 이루는데, 한결같이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주변과 잘 어우러진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  바위에 새겨진 바위글씨와 위에 심어진 비석


♠  용문사 장승 ~ 천왕각 ~ 봉서루
▲  장승의 조촐한 보금자리

경내로 인도하는 천왕교 좌측에는 조금은 낡아보이는 1칸 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그 안에
는 나무로 만든 오랜 장승이 서 있는데, 이 건물은 바로 그를 위한 거처이다. 건물 곁에는 요상
하게 생긴 돌이 하나 놓여져 있는데, 아마도 남근석인듯 싶다.

이 장승은 용문사가 이곳에 뿌리를 1661년 이후
에 절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천왕각 입구에 세
운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서 돌로 만든 것 보다
는 건강은 조금 좋지 않지만 건물 안에 갇힌 모
습이 너무 답답하고 안스럽다. 그의 건강을 위
해서인지 그에게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문에 창
살까지 만들어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모습이다.

장승 주위로 중생들이 던지고 간 동전과 1,000
원짜리 지폐가 수두룩한데, 절에서 오랫동안 수
거를 하지 않아서 지폐고 동전이고 다들 상태가
안좋다. 장승은 안에 있는 것 보다는 아까전 석
장승처럼 밖에 서 있어야 자세와 위엄이 나오는
법이다. 그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두는
것 보다는 밖으로 빼서 햇살이라도 받게 해주
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절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저렇게 가뒀으니 절에 놀러온 악
기(惡氣)를 어떻게 쫓아서 막겠는가..?


▲  천왕각(天王閣)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150호

천왕교를 건너면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인 천왕문(天王門)이 중생을 맞는다. 그런데 여기서
는 특이하게도 문이라고 하지 않고 각이라 칭하여 천왕각이라 부른다. 허나 그렇게 부른다고 해
서 천왕문과 크게 다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명칭만 '각(閣)'으로 했을 뿐이다. 이 문은 1702
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천왕은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나중에 부처의 경호원으로 영입되었다. 보통은 악귀를 발
로 짓밟고 있는 모습이지만 이곳은 악귀(惡鬼) 대신 부정한 양반이나 관리를 보기 좋게 밟고 있
어 눈길을 끈다. 그 이유는 절이 읍내에서 이곳으로 밀려나게 만든 양반(향교 유생들)과 관리들
의 대한 감정, 그리고 절을 찾는 중생 대부분은 지배층의 수탈을 받는 백성들이라 양반으로 대
체한 것이다.

▲  천왕각을 지키는 목조(木造)사천왕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8호

왼쪽부터 비파를 든 지국천왕(持國天王), 칼을 든 증장천왕(增長天王), 여의주를 들고 있는 광
목천왕(廣目天王), 삼지창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지국천왕의 표정은 온후해 보이며, 나
머지는 장비(張飛) 마냥 눈을 크게 부릅 떴을 뿐 오금이 저릴 정도의 무서움보다는 익살스러움
이 강하게 배여난 표정이다.
이들은 천왕각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목조 사천왕으로 그들이 시원하게 밟아주고 있는 양반(
지배층)의 모습도 사진에 담았어야 했는데, 사천왕에게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러지를 못해 못
내 아쉽다.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들을 도탄에 밀어넣으며 자기네들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이 땅
의 쓰레기 권력자들을 으스러지게 밟아주었으면 좋으련만..


▲  용문사 봉서루(鳳棲樓)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94호

천왕각을 지나면 길은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다시금 다리를 건너게 한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속세의 번뇌를 말끔히 계곡에 흘러보내라는 의미이다. 허나 계곡의 수량이
별로 없으니 번뇌가 남해바다 멀리 떠내려 갈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계곡을 건너면 계단이 나오면서 육중한 모습의 길쭉한 누각이 중생의 눈을 압도한다. 바로 봉황
이 산다는 뜻의 봉서루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에 이르는 용문사에서 가장 큰 건물로 1720년에
지어져 1833년에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절의 강당(講堂) 역할을 하고 있으며, 경내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가리고 있어 경내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1층 동쪽에는 종무소(宗
務所)가 자리해 있다. 봉서루의 중앙 아랫도리를 거쳐 경내로 올라가도 되고 종무소를 거쳐 진
입해도 된다.


▲  용문사 목조(木槽, 구유)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7호

봉서루 1층 왼쪽에는 거대한 나무 통이 누워있어 경내로 향한 눈길을 잠시 돌리게 만든다. 바로
구유(구시통)라 불리는 목조이다. 얼핏 보면 말이나 소, 돼지가 밥을 먹을 때 사용하는 나무통
으로 오인 할 수 있다. 허나 이 통은 사람들이 먹을 밥을 담던 밥통으로 1,000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이 저 통에서 밥을 먹었다고 하며, 그 이후에는 불사(佛
事)나 법회 때 사용했다.
구유 가운데 바닥에는 통을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5.5cm 크기의 원공이 뚫려있으며, 절이 한참
잘나가던 시절(지금도 잘 나가고 있음)의 소중한 보물로 이제는 밥풀 대신 먼지만이 수북해 아
련히 옛날을 그리워한다.


▲  중생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는 옥계수로 가득한 석조(石槽)
파란 바가지에 물을 담아 입에 넣으면 마음의 떼가 싹 내려간 듯,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른다,


♠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85호

봉서루를 들어서면 대웅전과 부속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 돌이 정갈하게 깔린 대웅전 뜨
락을 중심으로 북쪽에 대웅전이 위엄을 갖추고 있고, 적묵당(寂默堂)과 요사(寮舍)가 그 좌우를
메운다. 또한 대웅전 좌우로 영산전과 명부전, 용화전, 칠성각 등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을
정도로 가득히 들어서 포근함이 일 정도이다.

용문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봉황이 시원스레 날개
짓을 하는 것 같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기둥의 머리부분인 주두(
柱頭) 마다 용머리가 달려있어 웅장하고 화려함을 더해주며, 기둥과 문짝에는 고색의 떼가 가득
하여 중후한 멋을 선사한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법당 건축으로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아미타3존불과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77호인 동종(銅鍾)이 있으며, 대웅전 중앙 계단 좌우
로 괘불을 걸 때 사용하는 2쌍의 석주(石柱)가 심어져 있다. 이들 석주는 17~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대웅전 목조아미타3존불좌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46호
그 뒤쪽에 영산회상탱화(靈山會上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47호

대웅전 우측 문으로 내부를 들어서니 현란한 아미타3존불좌상과 여러 불화(佛畵)가 눈을 부시게
만든다. 불단(佛壇)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은 17세기 불상으로 다른 데이터에는 석가3존불로 나
오는데 반해, 문화재청에는 아미타3존불로 나와있다. 아미타불로 나온 것은 아마도 그의 수인(
手印)이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석가불(釋迦佛)이 아미
타수인을 취한 것은 조선시대 불상에서 흔히 나타난다. 이들 불상에는 복장공(腹臟空)이 열려있
으며, 그 안에 들어있던 복장유물은 거의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
하는 가운데 본존불(本尊佛)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
賢菩薩)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자리를 지킨다.

그들 뒤로 든든하게 자리한 후불탱화(後佛幀畵)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장
면을 그린 영산회상탱화이다. 1897년에 그려진 것으로 문성(文性)을 비롯하여 연호 봉선(蓮湖奉
宣), 연파 화인(蓮波華印), 범해 두안(帆海斗岸), 장원(章元), 태일(太一), 문형(文炯), 영주(
永柱), 상조(尙祚), 긍엽(亘燁) 등 남부지방에서 활약했던 화승(畵僧)들이 대거 참여했다.


▲  대웅전 우측 벽의 건양2년신중탱화(建陽二年神衆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53호

1897년(건양 2년, 여기서 건양은 고종의 연호)에 그려진 것으로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
이 그렸다. 무기를 갖춘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12신이 배치되었고, 위쪽에 범천(梵天)과 제석천(
帝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동(天童), 천녀(天女)가 자리해 있다.


▲  대웅전 좌측 벽의 삼장보살탱화(三藏菩薩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52호

후불탱화와 더불어 1897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앙에 천장보살(天藏菩薩)을 두고, 좌우에 지지보
살(持地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배치했다. 삼장탱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불화로 지장보
살을 받드는 지장신앙(地藏信仰)이 유행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  대웅전 주변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151호

대웅전 바로 좌측에는 맞배지붕의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확한 건축 시기는 전해지는 것이 없
으나 19세기 이후로 여겨지며, 지장보살을 비롯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10왕상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과 목조시왕상은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6호이다.


▲  용문사 용화전(龍華殿)

▲  용화전에 봉안된 용문사 석불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8호

명부전 뒤쪽에는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용화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유난히도 하얀 불상이 봉
안되어있다. 이 불상은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며 17세기 후반에 지금의 절을 짓다가 땅 속에
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하얗게 도배를 하여 백불(白佛)로 만들면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허나 불상의 양식을 보아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진다.
거의 네모에 가까운 얼굴에는 따로 미소는 드리워있지 않으며, 표정은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듯,
다소 멀뚱해 보인다. 볼에 살이 많으며, 머리에는 근래에 얹힌 보관(寶冠)을 얹혔다. 머리칼은
하얀 몸과 달리 검은색을 칠했다. 왼손에는 연꽃모양의 동그란 병을 들고 있는데, 예로부터 미
륵보살로 일컬어졌으나, 보관이나 왼손에 든 병을 통해 관음보살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  봉서루 뒤쪽에 심어진 석대(石臺)
석대에 고인 물에는 낙엽 몇몇이 의지하여 인생의 마지막을 지낸다.
석대의 물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블랙홀인가 보다.

▲  적묵당 뒤쪽의 영산전(靈山殿)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칸(가운데칸)에 하나 뿐이다.
양쪽 칸은 벽으로 막아 조그만 창문을 낸 특이한 모습이다.

▲  차밭을 뒤로하며 경내를 굽어보는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칠성각은 영산전처럼 근래에 지어졌다. 꼭 닫힌 내부에는 칠
성탱화와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걸려있으며, 이들은 각각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신)와 산
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가 그려져 있다. 그중에서 독성탱화와 산신탱화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각각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410호411호로 지정되었다.


♠  용문사의 또 다른 볼거리 ~ 남해자생식물단지

▲  용문사 뒤쪽에 넓게 터를 닦은 남해자생식물단지

용문사를 둘러보고 있으면 경내 뒤쪽으로 푸른 물결이 넘쳐 흐르는 차밭이 보일 것이다. 처음에
는 절에서 관리하고 가꾸는 차밭으로 여겼는데, 그 서쪽에도 무슨 식물원 같은 곳이 있다. 이들
은 바로 남해군에서 2007년에 조성한 남해자생식물단지이다. 왜 절 뒤쪽에 터를 닦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아마도 절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새로운 볼거리가 생겨
절을 찾은 중생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가득 누리게 한다. 용문사 입장에서는 그리 손해보는
것은 아니다. 볼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말이다.

식물단지는 약용식물원과 자생식물원, 삼자원(三子園)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자원에는 남해의
3자인 비자(榧子), 치자(梔子), 유자(柚子)가 가득 자리를 메운다. 여름이나 가을에 왔다면 식
물단지에 깃들여진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텐데, 겨울의 제국이 도래하는 시점에 찾아
오는 통에 차밭과 삼자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벌거숭이가 되었다.


▲  보성 차밭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남해자생식물원 차밭

▲  자생식물원

▲  중생들이 쌓아놓은 무수한 돌탑들

남해자생식물원을 지나면 바로 용문사의 부속암자인 백련암(白蓮庵)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은
그다지 구미가 땡기지 않아 가지 않았고, 그곳으로 넘어가는 계곡 다리 부근에 무수히 널린 돌
탑만을 사진에 담아 발길을 돌렸다.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이들 돌탑에는 중생의 조촐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아무렇게나 생
긴 돌로 쌓은 멋없는 탑이지만, 그들의 소망을 하나씩 품으며, 겨울의 시련을 견디는 그들이야
말로 정녕 아름답고 거룩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겉멋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  용문사를 뒤로하며 ~

▲  용문사 주차장 동쪽에 자리한 호수
호구산에서 용문사를 거쳐 바다로 흘러가는 계곡물을 모아놓은 호수이다.
호수 주변으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 삼아 자신의 초췌해진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용문사와 남해자생식물원을 정신없이 둘러보니 거의 2시간에 시간이 흠뻑 흘러갔다. 이제 용문
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며, 다시 속세로 길을 돌린다. 내가 있어야 될 것은 절이 아닌 아비
규환의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일주문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호젓한
산길로 겨울의 제국 앞에 나무들이 앞다투어 벌벌 긴다. 그들을 보니 '이제 올해도 저물었구나~
곧 나이 1살이 누적되겠군' 생각이 잔뜩 일어나 우울한 마음을 한층 더해준다. 산길에는 귀를
접고 처량히 누운 낙엽이 인생의 부질없음을 보여준다.

산길을 5분 정도 내려가면 수레 하나 없는 썰렁한 주차장이 나타난다. 수레로 경내까지 오를 수
있지만 남해 제일의 관광지다 보니 이곳에 따로 주차장을 두었다. 피서철과 휴일에는 이곳도 수
레들로 넘쳐날 것이다. 주차장에서는 쪽빛의 남해바다가 시원스레 바라보여 아까전의 우울함을
어느 정도나마 털어주며, 주차장 한쪽에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지는 선비의 동상이 하나 있는데,
누구의 동상인지는 모르겠다.


▲  용문사 주차장 너머로 보이는 남해바다

▲  속세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  이국적인 분위기의 미국마을 ▼

용문사 주차장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이국적인 분위기의 마을이 나타난다. 길을 중심으로 좌우
에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이국적인 집들, 바로 미국마을(American Village, 예전에는 '아메리칸
빌리지'라고 불렸음)이다. 남해 동쪽 물건리에 있는 독일마을과 더불어 남해군에서 조성한 이국
적인 마을로 재미교포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 마을은 미국식 가옥 21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당수 민박을 겸하고 있으며, 호구산과 용
문사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정면에는 논과 함께 남해바다가 바라보이는 배산임수(背山
臨水)의 자리에 터를 닦아 꽤 아늑하고 탐이 나는 마을이다. 마을 주민 상당수는 재미교포나 외
지인으로 나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런 곳에 집 하나 마련하여 살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  바다와 모래의 속삭이는 소리만이 가득한 용소리 해변

미국마을에서 남해바다는 눈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로 도로에서 3분 정도만 들어가면 바로 바다
앞이다. 바다 파도가 살며시 모래를 어루만지며 서로의 정을 속삭이는 현장으로 나의 발자국 소
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다.


▲  썰물로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 남해 갯벌

▲  비단처럼 곱다는 금산(錦山)이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  금평 앞바다에서 바라본 호구산의 위엄
좌우로 길게 누운 모습이 누워있는 호랑이를 좀 닮은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남해 용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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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1월 2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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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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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포근히 감싸인 고을 ~ 산청 역사기행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남명조식유적)

 


' 지리산에 안긴 고을, 산청(山淸) 나들이 '
세심정에서 바라본 덕산마을
▲  세심정에서 바라본 덕산마을과 덕천강
시내 뒤쪽으로 보이는 산에 남명 조식 선생의 무덤이 있다.


가을이 슬슬 그 절정을 준비하던 10월 초, 지리산 동쪽에 안긴 산청(山淸)을 찾았다. 서울남부
터미널에서 진주로 가는 직행버스에 나를 실어 딱 3시간 15분 만에 산청과 진주 중간에 자리한
원지에 이른다. 원지(院旨)는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로 육중한 등산 배낭을 맨 등산객들
이 많이 내린다. 나도 지리산에 떡 안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으나 이미 갈 곳이 정해진 몸이라
마음 만 등산객들 배낭에 몰래 달아 지리산으로 보낸다.
원지에서 경호강을 건너면 단성면소재지가 있는 사월리가 나오는데 단성 시내를 벗어나면 산청
에 주요 명소인 목면시배유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문익점이 붓통에 목화를 숨기고 들어와 하얀 목화를 이 땅에 널리
보급시킨 목화의 성지(聖地) ~ 산청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地)
- 사적 108호

몽고에 사신으로 간 문익점(文益漸)이 붓통 속에 목화씨를 넣어 가지고 고향에서 목화를 재배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여 3살배기도 줄줄 외울 정도이다. 그의 목화재배는 이 땅의 의류복식사(
衣類服飾史)에 크나큰 혁명을 일으켰으며, 갈포나 삼베로 추운 겨울을 나야했던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따뜻한 무명옷과 그에 따른 수명 연장을 선물로 안겼다.

문익점(1329~1398)은 남평문씨로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1329년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
양마을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이곡(李穀)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김해부사
록(金海府司錄),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거쳐 1363년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몽고(원나라)에 갔다.

이때 몽고왕인 순제(順帝)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던 고려 여인 기황후(奇皇后)는 최유(崔濡),
김용(金鏞) 등과 공모해 눈에 가시같은 공민왕(恭愍王)을 제거하고 몽고에 머물던 충선왕(忠宣
王)의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들은 문익점에게 동조하길 권했으나
거절했다고 하며, 1364년 기황후가 덕흥군을 앞세워 고려를 공격하나 최영(崔瑩)에게 보기 좋게
깨진다.


▲  문인으로써의 패기가 돋보이는 문익점 선생의 영정
영정 앞에 하얀 덩어리는 바로 목화씨를 품고 있는 목화솜이다.

고려에게 패한 기황후는 뚜껑이 폭발한 나머지 문익점을 교지국(交趾國, 베트남)과 운남(雲南)
으로 귀양을 보냈다. 거기서 2년 가량 머물다가 1366년 귀양에서 풀려났는데, 탐스럽게 열린 목
화에 입맛을 다시며 몰래 가지고 갈 방법을 연구했다. 당시 목화는 외국으로 반출이 금지된 금
수품(禁輸品)으로 잘못 걸리면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허나 밭을 지키는 노인의 제지를 뿌리치
고 목화씨를 몇 송이 따서 붓통에 넣어 귀국길에 오른다. 몽고 입장에서는 그는 얄미운 산업스
파이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문익점을 크게 추앙하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이야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6월 13일자 기록에는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씨 10여 개를 따서 주
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되어있으며, 태종 1년 윤 3월 1일자에는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가지고 왔다~~'란 구절이 있다. 그러니까 가져온 씨앗 수만 다를 뿐, 붓통에 감추어 귀국했다
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인 산청으로 내려와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고향마을인 배
양마을에서 목화를 재배했다. 허나 씨앗만 가져왔지 재배기술을 알지 못해 겨우 1그루만 살았다
고 하며 3년 동안 열심히 재배에 기울여 드디어 재배에 성공했다. 또한 고려에 머물던 몽고 승
려 홍원(弘願)을 달달볶아 목화씨를 빼서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방법을 터득해 마을 주
민에게 가르쳤고, 10년도 안되어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의복은 삼베옷에
서 따뜻한 무명으로 대폭 업그레이드 된다.

1375년(우왕 1년) 목화 보급의 공으로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되었으며, 1389년(창왕 1년) 좌간
의대부를 지냈다. 허나 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성계 패거리가 추진하려는 사전(私田) 개혁을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문을 닫아걸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며 왕이 친히 사람을 보내 벼슬을 권해도 거절했다. 그러다가 1398년 69세의 나이
로 고려 충신의 한사람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이후 1440년 세종은 그에게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추증했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목화의 가공법은 그의 손자인 문래의 창안이라고도 하고 장인인 정천익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
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목화의 전래와 재배, 가공 등에 관한 내용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실려 있다.


▲  목화기념관 좌측에 자리한 재실(齋室)

이곳 목면시배유지는 사위와 장인인 문익점과 정천익이 힘들여 심고 가꾼 아름다운 현장으로 바
로 인근에 문익점의 고향 배양마을은 우리나라 목화의 성지답게 700년 넘게 목화를 재배하며 문
익점의 숭고한 뜻을 기린다. 그래서 세상은 이곳을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 재배지로 추앙하고 있
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가 목화를 가져오기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목화와 그 비슷한
것을 재배하고 그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하지만 널리 보급은 안된 듯 싶으며, 왕족과 귀
족, 부자들만 주로 입다가 문익점을 통해 전국으로 퍼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배지(始培地)가 아
닌 목화를 널리 퍼트린 목화의 성지로 보면 될 듯 싶다.

예전에는 문익점 선생의 효자비(孝子碑)와 함께 단성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가에 있었으나 그
주변을 정화하여 목화전시관을 만들었다. 전시관을 세우고 정화사업을 벌인 것까지는 좋으나 그
걸 구실로 소정의 입장료까지 받아먹고 있다.
전시관은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전시실은 면화의 역사와 물레, 무명이 되기까지
의 과정을 담았고, 제2전시실은 무명으로 만든 우리 고유 의상이 전시되어 있다. 허나 높은(?)
입장료에 비해 솔직히 볼게 없고 썰렁하기 그지없다. 매표소는 전시관 내부에 자리해 있으며,
목면시배지만 보려고 해도 무조건 돈을 내야된다. 야외에는 목면시배지를 비롯하여 효자비와 사
적비, 재실 등이 있으며 동물을 기르는 사육장이 한켠에 자리해 있다.

※ 산청 목면시배유지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원지 경유 진주행 직행버스가 2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원지에서 묵곡으
  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배양에서 내리면 바로 목면시배유지이다. 또는 원지에서 대원사/중
  산리 방면 직행버스(30분 간격)를 타고 단성에서 내려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13분 도보
  (또는 원지에서 35분 도보나 택시 이용)
* 부산서부터미널과 진주에서 대원사, 중산리행 직행버스를 타고 단성에서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바로 우회전하면 목면시배유지이다.
② 진주 → 산청방면 3번 국도 → 원지 → 다리를 건너 단성 시내로 진입 → 단성나들목 입구에
   서 직진 → 목면시배유지


▲  삼우당문익점선생 목화시배사적비

★ 목면시배유지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000원(20인 이상 단체 800
  원), 군인/청소년 600원, 어린이 500원
*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목화로 887) <☎ 055-973-2445>


▲  목면시배유지 정문

좌/우문이 시원스레 뚫린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늘씬한 크기의 목화시배사적비가 나그네를
반긴다. 정문의 가운데 문은 제사나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늘 닫아건다.
사적비와 눈인사를 나누고 왼쪽으로 길을 꺾으면 바로 목화전시관이 나온다. 목면시배유지는 전
시관의 바깥부분을 꼭 거쳐가야 되는데, 전시관 정문에는 별로 반갑지도 않은 매표소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며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니 울며 겨자먹고 토하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르고 안으로 들어선다.

전시관에서 다루는 것들 태반은 목화와 관련된 것들로 디오라마와 복제품이 주를 이루며 오래된
유물은 없다. 다만 목화를 실제로 본적이 없는 나를 비롯한 나그네들에게 목화에 대한 여러 정
보와 경험을 제공한다. 허나 그 외에는 그리 내세울 것은 없다.


▲  목화 뿌리

▲  목화에서 무명을 빼는 모습

▲  그치말기

▲  베짜기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옷이 만들어지기까지도 많은 과정과 숙성을 거친다.
우리 옛 여인의 고운 손길과 정성을 거쳐 태어난 무명옷은 옛 사람들을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부터 따뜻하게 보호해 주었다.

▲  디오라마로 다시 태어난 옛 사람들
단란한 한 가족을 보듯 다들 무명옷을 걸치고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한다.

▲  재실 툇마루를 가득 뒤덮은 목화솜
하얀 덩어리가 무엇인가 했더만 바로 목화솜이다. 저들 솜은 인공이 아닌
자연산으로 목화씨를 품으며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다. 문익점이 몽고에
머물 때 목화밭에 펼쳐진 목화에 군침을 흘리며 가져온
그의 심정이 십분이해가 간다.

▲  우리나라 목화의 성지 ~ 목면시배유지
문익점의 뜻을 받들며 오늘날도 꾸준히 목화를 재배한다.

▲  목화씨앗을 잉태하며 복스럽게 열린 목화솜

숭고한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선물, 목화를 처음으로 보고 만져본다. 목화솜에 대한 첫인상
은 놀라움과 신기함의 연속으로 인공솜과 같은 하얀 솜이 자연 생성된다는 것에 자연 앞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정도이다. 실제 솜처럼 촉감도 좋고 무척 따뜻하며, 그 모습이 마치 눈송이가 가
지에 걸린 듯 하다. 목화에는 조그만 가시가 있으므로 솜을 만지거나 딸 때 주의하기 바란다.


▲  삼우당효자비(三憂堂 孝子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  비각 안에 놓여진 효자비
큼지막한 글씨로 효자리(
孝子里)로 쓰여있다.
(문화재청 사진 참조)

목면시배유지 좌측을 담에 둘러쌓인 조그만 비
각(碑閣)이 있다. 바로 문익점의 효행을 기리고
자 세운 효자비이다.
그는 목화를 가지고 돌아온 후, 어머니가 세상
을 떠나자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
묘살이를 하였다. 그 당시 남부지방은 왜구(倭
寇)의 노략질이 극심하여 다들 피난가기가 바뻤
는데, 유독 그만은 어미의 무덤을 바짝 지켰다.
마침 왜구가 이곳에 들이닥쳤는데, 아무리 미개
한 왜구패거리라도 그의 효행에는 적지 않게 감
동을 먹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표식을 세우고 돌아갔
는데, 그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그후 1383년 고려 정부는 그의 효행을 기리고자
효자비를 내렸으며,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里
)라 하였다. 비각은 1563년에 씌운 것이다.

비각 안에 자리한 비석은 낮은 사각 받침돌 위
로 비신(碑身)을 세운 모습으로, 비신의 윗변은
살짝 둥글게 다듬었다.
 


♠  조선 후기 서원, 상해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현판으로 가득한
배산서원(培山書院)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1호

목면시배유지를 둘러보고 다시 단성으로 발길을 돌리면 문익점 선생의 고향인 배양마을이 나온
다. 마을의 북쪽 산자락으로 붉은 색의 홍살문과 함께 고색이 깃들인 기와집들이 떼거지로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이 바로 배산서원이다. 목면시배유지와 지척이고 문익점 선생의 고향이라 그를
배향(配享)한 서원으로 오해하기 쉽겠으나 실상은 다르다.

이 서원은 부근 신안면에 있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조선 정부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자 그곳
에 배향된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과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를 따로 모시고자 1771년(영조
47년)에 지은 것이다.
처음 이름은 덕연사(德淵祠)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었으며, 1919년 합천
이씨의 대표인 진암 이병헌(眞菴 李炳憲)이 유교의 복원을 위해 서원 복원을 제의하여 문묘(文
廟)와 도동사(道東祠), 강당(講堂)을 짓고 이름을 배산서당(培山書堂)이라 했다. 이때 중국 곡
부(曲阜)의 연성공부(衍聖公府)의 협조를 얻어 그곳에서 공자(孔子)의 진영(眞影)을 가져와 문
묘에 배향했다.
도동사에는 청량당 이원과 친분이 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죽각(
竹閣)을 배향하고 있다. 특히 강당에는 중국에 유명한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가이자 공양학자
(公洋學者)인 강유위(康有爲)의 자필로 된 배산서당 현판(縣板)이 있고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
政府)의 주요 인물인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과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營), 우천 조완구(藕
泉 趙琬九).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 선생의 배산서당 낙성축문(落成祝文)이 현판으로 남아있
어 보기와 달리 꽤 유서가 깊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5량가구조(五樑架構造)이며 왜정 때 지어진 제법 휼륭
한 한옥 건축으로 손꼽힌다. 문묘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익공식(翼拱式)이며 서당으로
지어질 당시 유교의 부흥을 염원한 유림(儒林)의 소망으로 1개도 아닌 2개의 사당(祠堂)을 갖추
어 이곳만의 큰 특징을 보여준다. 매년 봄 3월 상해일(上亥日)에 유림들이 춘향(春享)을 올린다.

※ 배산서원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단성까지 교통편은 앞에 목면시배유지를 참조.
* 단성정류장에서 목면시배유지 방면으로 12분 가량 걸으면 단성나들목 입구 못미쳐 길 오른쪽
  으로 배양마을이 있는데, 그 뒤쪽 산자락에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서원 앞 도로에 주차하면 됨)
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배양마을(배산서원)
② 진주 → 산청방면 3번국도 → 원지 → 다리를 건너 단성 시내로 진입 → 배양마을(배산서원)
*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544-3


▲  공자왈 맹자왈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배산서원의 강당(講堂)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색은 있지만 낡고 허름한 서원의 모습이 커다랗게 다가선다. 엄숙을 요구
하는 홍살문을 지나 태극마크가 새겨진 솟을대문 앞에 이른다. 서원 문은 분명 잠겨있겠지 싶어
대문을 밀어보니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활짝 정도는 아니지만 1명이 들어갈 정도로
문틈이 생기면서 문 뒤에 가려진 서원의 속살이 가을햇살에 비춰 나에게 다가온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교육 공간인 강당이다. 강당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백범 김구 등의 상해임
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낙성축문이 현판으로 소중히 남아있으며, 중국의 변법자강 운동가
인 강유위가 쓴 '배산서당'의 현판이 걸려있어 서원에 대한 상해임시정부 지사들과 중국유학자
들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허나 지금은 잠시 들린 가을 바람만이 맴돌 뿐, 정적만이 감싸고
돈다. 섬돌은 신발이 가득 놓였던 옛 시절을 그리워한 채, 먼지에 뒤덮여 세월을 원망하며, 툇
마루 역시 먼지와 한몸이 된지 오래다. 강당 앞뜰에는 운치가 서린 소나무가 강당의 허전함을
약간이나마 달래준다.

▲  서원 중간에 자리한 도동사(道東祠)

▲  서원 꼭대기에 자리한 문묘(文廟)

강당 옆구리로 뒤로 가면 문묘와 도동사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 삼문(
三門)을 지나면 맞배지붕의 도동사(道東祠)가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나그네를 맞는다. 도동사는
청량당 이원과 친분이 있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의 죽각(竹閣)을 배향하고 있으며, 늘
굳게 닫혀 강당과 달리 폐쇄적인 인상을 자아낸다.

도동사 옆구리로 뒤쪽으로 가면 문묘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문묘가 서원 경내와 배양마을을 굽어보며 자리한다. 서원에서 제일 중요한 건
물로 중국에서 보낸 공자의 진영이 들어있다. 서원은 유교의 학당이라 공자나 맹자 등의 성현을
봉안한 건물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보통 서원이나 향교 제일 높은 곳 또는 제일 뒤쪽에
그들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문묘는 도동사와 비슷한 크기이며, 그 뒤로 푸른 대나무들이 가득하여 왜정 시절 서원을 세우고
유교의 부흥과 나라의 광복을 열망한 유학자와 애국지사들의 청청한 정신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단성 일대의 주요 명소 2곳을 둘러보았다. 목면시배유지만 생각하고 온 터라 배산
서원의 존재는 미처 생각치도 못했지. 의외의 수확물을 거두고 단성에서 덕산으로 들어가는 직
행버스를 타고 지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덕산으로 이동했다.

덕산은 시천면의 중심지답게 마을이 제법 형성되어 있다. 터미널 남쪽으로 넓직한 시장이 형성
되어 나온 온갖 물품들이 선보이고 있으며, 시내 남쪽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넓은 세
상을 향해 조용히 자신의 갈 길을 재촉한다.

내가 덕산을 찾은 것은 산청을 빛낸 대학자 남명 조식의 유적지를 보고자 함이다. 덕산 서쪽인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고, 동쪽 사리에는 산천재와 별묘, 그의 묘소가 자리해 있다. 
(이들은 '산청 조식 유적'이란 이름으로 사적 305호로 지정됨)


♠  남명 조식을 기리고자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89호

▲  덕천서원의 본당인 경의당(敬義堂)

▲  수업재(修業齋)

▲  진덕재(眞德齋)

덕산에서 중산리 방면으로 1km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남명 조식을 배향한 덕천서원이 나온다.
이 서원은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1576년에 유림들이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2년
다시 지었다.
1609년 조선 정부는 조식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덕천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내리면서
서원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래서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더불어
삼산서원(三山書院, 산자 돌림의 3개의 서원)의 하나로 정조 때 영상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이
이곳 원장을 지내는 등, 적지 않은 명성을 누렸다. 허나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사업으
로 문을 닫았으며, 지금의 서원은 1926년에 재건된 것이다.


▲  덕천서원 은행나무

서원 앞에는 차디찬 인상의 붉은 홍살문이 이곳
을 찾은 이들에게 엄숙을 요구하고, 홍살문과
서원으로 들어서는 외삼문(外三門) 사이에는 가
을옷을 걸친 은행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위엄을
부린다. 유교와 관련된 서원과 향교에는 꼭 은
행나무가 있기 마련인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연을 했다는 행단(杏壇)을 상징한다.
가을도 남명의 학식을 흠모했는지 서원 앞에 아
름다운 작품을 빚어놓아 그 마음을 표현한다.
장대한 세월과 서원 사람들의 보살핌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으며 어엿하게 자란 이 나무는 나이
가 무려 400년에 이르러 거의 서원의 역사가 담
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살문 건너편에는 단아한 모습의 이름도 어여
쁜 조그만 정자,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서원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주역의 '성인세심(
聖人洗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취성정(醉醒
亭), 풍영정(風詠亭) 등의 풍류적인 이름도 가
지고 있으며, 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바로 밑
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흐른다.

지금은 정자 앞에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서원과 별개인 듯 보이나 실은 서원의 엄연한 일부이다.
마음을 씻고 닦는다는 정자의 이름처럼 유생들은 정자에서 시를 지으며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시
원한 바람에 번잡한 마음을 맡겼을 것이다. 산에 걸쳐진 달을 벗삼아 곡차(穀茶) 1잔 즐기고 머
리를 식혔을 세심정은 정자 앞으로 뚫린 신작로로 수레들이 1분이 멀다하고 굉음을 뿜으며 지나
가니 옛날의 운치는 아쉽게도 많이 사라졌다. 아무리 도로를 뚫더라도 그런 것은 좀 감안하여
강 건너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참 아쉽다. 정자에선 수풀 사이로 덕천강이 바라
보이며, 덕산 시내와 주변 풍경이 아낌없이 두 눈에 다가온다.


▲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 세심정

▲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한
세심정 현판의 위엄

▲  서원 홍살문과 외삼문 ~ 이곳 홍살문에는
태극마크가 달려있지 않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덕천서원 내부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
는 서원의 본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우측에는 수업재가 좌측으로 진덕재가 자리해 있다.
수업재와 진덕재는 서원 유생들의 숙식공간으로 잘나가던 옛 시절에는 섬돌에 그들의 신발이 가
득 널렸을 것이고, 방에는 그들의 온기로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먼지가 입혀진 섬돌과 툇마루가
옛날을 그리워할 뿐이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뒷전으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
쓸해 보인다.

남명의 학문은 크게 경(敬)와 의(義)로 집약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
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있게 실천하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서원의 본
당도 거기서 이름을 취해 경의당이라 했다.
이 건물은 유생들의 학습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모서리로 날
씬한 기둥 4개를 설치하여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아마도 배흘림 기둥인듯 하다. 유생들의 창랑
한 글 읽는 소리로 떠들썩했을 경의당에는 바람의 소리만이 내 귀에 작게 속삭일 뿐이다.

▲  경의당 천정에 달린 현판

▲  서원 제일 끝에 자리한 숭덕사(崇德祠)

경의당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내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남명을 배향(配享)
한 사당, 숭덕사가 의연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선다. 서원 제일 뒤쪽에 자리한 숭덕사는 서원에
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곳의 존재의 이유가 바로 남명을 배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덕사 양쪽 벽에는 절의 불전(佛殿)처럼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잡아맨다. 우측 벽에는 호
랑이가 나무 아래서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좌측 벽에는 푸른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용은 아마도 조정에 진출하여 출세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 하며, 호랑이 역시 비
슷한 의미를 지닌 듯 하다. 입을 벌려 으르렁거리고 있다지만, 그다지 무서운 모습은 아니며 마
치 고양이가 열심히 야옹거리는 모습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  숭덕사 우측 벽에 그려진 호랑이

▲  숭덕사 좌측 벽에 그려진 푸른 용

※ 덕천서원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원지까지는 앞에 산청 목면시배유지 참조, 원지에서 중산리/대원사행 직행버스를 타고 덕산에
  서 하차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덕산행(중산리/대원사 방면) 직행버스가 1일 7회 떠나며, 진주에서는 중
  산리/대원사행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다닌다. 덕산에서 하차하여 중산리 방면으로 도보
  12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서원 앞 길가에 주차)
① 대전~통영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중산리 방면 20번 국도 → 덕산 → 원
   리교를 건너 직진 → 덕천서원 
② 진주 → 산청 방면 3번 국도 → 원지에서 중산리 방면 → 덕산 → 원리교를 건너 직진 → 덕
   천서원

★ 덕천서원 관람정보
* 관람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대략 9시부터 18시까지이다.
* 지리산둘레길 9코스(덕산~위태,상촌)가 덕천서원 동쪽 천평교를 지나간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  남명 조식 묘소 (산청 조식 유적) - 사적 305호

▲  남명 묘역으로 오르는 길 ~ 남명 선생의 드높은 의기(義氣)를 상징하듯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들이 선사하는 솔내음에 정신이 싹 맑아지는 것 같다.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다시 덕산으로 나와 단성 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남명의 묘소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의 안내로 잘 닦여진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남명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묘역은 특이하게도 산비탈에 높다랗게 석축(石築)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무덤을 쓴 형태로
마치 돌로 쌓은 조그만 성곽을 보는 듯 하다. 무덤 주변에는 얕게 돌담을 둘렀는데, 그 모습이
현무암으로 묘역을 두른 제주도의 무덤을 보는 듯 하다.


▲  남명 묘역으로 가는 도중에 바라본 지리산의 동쪽 줄기 ~
저 산은 지리산이 아닌 구곡봉(961m)이다. 산 아래로 덕산 시내가 포근히 다가온다.

▲  성처럼 쌓여진 석축 위에 자리를 닦은 남명의 묘역

석축 위에 마련된 묘역에는 남명과 그의 숙부인(淑夫人) 은진송씨의 묘소가 있다. 숙부인의 무
덤은 묘역 아랫쪽에 있으며, 가장 위쪽에 남명의 유택(幽宅)이 자리한다. 묘자리는 남명이 직접
정한 것으로 전해지며, 대곡 성운(大谷 成運)이 지은 묘갈명(墓碣銘)가 있다.
무덤의 봉분(封墳)은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며, 무덤 주변을 장식한 석물도 망주석(望
柱石) 2기와 비석, 상석(床石) 등 기본적인 것이 전부로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남명 선생의 일생을 짚어보도록 하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창녕 조씨로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
다.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조언형(曺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 이씨(인주
이씨)이다.
조식의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으로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
자 그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림파(士林派)가 대거
숙청을 당하고 그의 숙부까지 이에 연류되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는 잘못된 정치의 폐단에 회
의를 느낀다.

30살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가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힘쓰면서 제자
를 길렀다. 48살에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사림파를 이끄는 지도자로 크게 명성을 얻었다. 조정에선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았
고, 55살에 단성소(丹城疏)를 올려 조정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리고 1561년 산청 덕산으로 들어
와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후진을 양성했다.

그의 교육철학은 개인의 자질에 따라 가르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그것을 자기 것
으로 만드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기존의 고리타분한 유학자와 달리 학문의 실천과 학문과 삶이
일치되야 함을 강조했으며,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궁마(弓馬) 등 다
양한 학문을 가르치고 또한 열심히 배울 것을 권했다.
선조(宣祖) 임금은 그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68세에 무진봉사(戊辰
封事)를 올려 정치의 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한평생 선비의 삶을 지키며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다가 71세인 1572년 2월 8일 산천재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부고를 들은 선조는 크게 애통해하며 자신을 소자(小子)라 칭하고 그에게 '인자한 나라의
큰 어른'이라 칭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은
그에게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남명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되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위민정치를 강조하였다. 그
의 문하에서는 정말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정탁(鄭琢)과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등
은 남명의 학덕을 계승하여 그들만의 학파를 이루어 사림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곽재우(郭再
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등 50여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니 이는
남명의 정신을 충실히 이어받은 결과이다. 그의 학문과 정신이 유학의 중심이 되면 참 좋으련만
조선의 위정자와 유학자들은 전혀 그러지를 못했고 그저 쓰잘데기 없는 괘변 논쟁이나 일삼으며
나라와 백성, 국방을 소홀히하다 결국 나라를 말아먹고 만다.


▲  묘역 아랫쪽에 자리한 숙부인 은진송씨의 묘역

▲  남명 묘역 밑에 서 있는 비석들
이들은 모두 남명 선생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  남명 묘역 좌측 밑에 담장이 둘러진 공터
가 있다. 상석이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 공간인 듯 싶다.


▲  조촐한 모습의 남명 선생의 무덤
무덤 곁에 귀부와 지붕돌을 갖춘 비석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며,
망주석은 540년 세월의 때로 꽤 얼룩해졌다.

▲  남명 선생 무덤 뒤쪽에서 바라본 천하
저 아래로 사리마을과 시천~단성간 우회국도(지리산대로)가 보인다.

◀  남명 선생 무덤 앞에 세워진 묘비
무거운 빗돌을 받쳐든 귀부는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에 웃음이
만연하다.


♠  남명기념관

▲  남명기념관

▲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남명 선생 신도비(神道碑)

▲  기념관 우측으로 정겹고 아늑한
돌담길이 늘어져 있다.

남명 묘역을 둘러보고 아까와 달리 조그만 산길을 타고 내려가면 담장으로 몸을 두룬 남명기념
관이 나온다. 이 기념관은 그의 유물을 보존하고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500주년(
2001년)에 설립이 추진되어 2004년에 문을 열었다.
남명 선생과 관련된 유물들을 한 자리에 모았으며, 그의 서책과 유품, 덕천서원과 산천재 관련
서적들이 아낌없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서는 전시 유물 중 극히 일부만 소개한다.
*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쉬며, 관람료 없음)


▲  남명 선생이 늘 달고 다녔다는 성성자(惺惺子) 방울

남명은 2개로 된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그 이름을 성성자라 했다. 여기서 성
(惺)은 깨닫는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방울소리가 날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 학문
에 전념했다고 한다. 저 성성자는 근래 복원된 것이다.


▲  남명 선생이 역시 늘 지니고 다닌 경의검(敬義劍)
칼에는 그의 사상인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가 새겨져 있다.
저 칼도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  남명 선생의 철학이 담긴 신명사도(神明舍圖)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에서 성곽의 안쪽은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며, 신체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나타낸다.
남명은 사람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나타낸 것은 신체 외부에서 마음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된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신명사도의 내용을 생활화하려고 했으며, 그가 합천에서 지은 뇌룡전은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다.


▲  사성현유상병풍(四聖賢遺像屛風)
남명 선생이 직접 그린 병풍으로 공자(孔子), 주렴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주자(朱子)의 유상병풍이다.

▲  광해군이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을
 영의정으로 삼는다는 교지(敎旨)
 여기서 만력 46년은 1618년으로 명나라 신종
(神宗)의 연호이다.

▲  남명기념관 가운데에 자리한
남명 선생의 영정
선비의 지조와 스승의 인품이 느껴지는 그의
영정은 상상에 의지하여 그려진 것이다.

▲  덕천원생록(德川院生錄)
덕천서원을 찾은 원생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  남명 선생의 상소문과 여러 문서를 정리하여 담은 서적들


♠  남명 조식의 별묘(別廟)와 산천재(山天齋) - 사적 305호

남명기념관 좌측에는 남명 선생의 별묘가 있다. 별묘는 집안 조상에게 제를 올리는 가묘(家廟)로
창녕조씨 문중에서 해마다 제례를 올린다.


▲  남명 선생과 그의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가 모셔진 여재실(如在室)

▲  남명기념관과 별묘 정문인 성성문

▲  선조가 남명의 죽음에 크게 애통해하며
보낸 사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담은
비석으로 산천재 입구에 있다.


▲  산천재(山天齋)

남명기념관 남쪽 국도 너머에 자리한 산천재는 남명이 1561년에 이곳에 들어와 지은 것으로 정
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규모는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을 정도
로 조촐하다.
남명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열심히 후학을 양성했는데, 여기서 무려 100여 명의 인재가 배
출되었다. 그들은 남명의 학풍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을 이루었고, 곽재우 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건물 주변에는 붉은 소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수목이 운치를 자아내며, 건물 앞에는 덕천강이 유
유자적 흐른다. 건물 기와에서 1576년과 1597년에 만든 것들이 보여 1576년과 보수를 하고 임진
왜란 때 불탄 것을 1597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  산천재 좌측에 있는 건물로 제자들이
머물던 숙소이다.

▲  남명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藏板閣)

산천재 좌측에는 아담한 건물 2채가 있는데, 앞쪽은 제자들의 숙소이다. 그 뒤로는 정면과 측면
이 1칸인 손바닥만한 건물이 있는데, 남명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이다. 그의 문집은 1604
년 해인사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여러 차례 업데이트를 거쳤다.
이곳에 보관된 문집은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64호로 보관을 위해 굳게 입을 봉했다. 허나 문집
상당수는 아마도 남명기념관에 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보관하는게 더 도난의 위험이 적기 때문
이다. 이렇게 하여 문익점과 남명 조식을 테마로 한 산청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산청 조식 유적(산천재, 남명기념관, 남명 묘소)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덕산까지 교통편과 차량 접근법은 앞에 덕천서원 참조, 원지에서 덕산행 직행버스를 타고 들
  어갈 때 사리에서 내리면 바로 산천재, 남명기념관이 있으며, 묘소는 기념관 우측으로 올라가
  는 산길이 있다.

★ 관람정보
* 관람료는 없으며 남명기념관 외에는 휴관이 없다.
* 매년 10월에는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남명선비문화축제가 열린다. 축제기간은 2일 정도로 남
  명 제례와 의병출정식, 전국한시백일장, 학생풍물경연대회, 학생백일장, 선비체험, 민속놀이
  경연대회, 마당극, 국악 공연 등이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 남명선비문화축제 문의는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055-748-9147~8 (☞ 홈페이지 가기)>
* 지리산둘레길 8코스(운리~덕산)가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지나간다.
* 산천재, 남명기념관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72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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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9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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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함양 상림공원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 함양 상림공원(上林公園) ~~~

함양공원 산책로

▲  상림공원 산책로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 상림공원 연지

▲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

▲  연지를 가득 메운 홍련(紅蓮)


♠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인공림(人工林), 최치원(崔致遠)이
함양 땅에 남긴 크고 아름다운 선물 ~ 함양 상림공원(上林公園)
<함양 상림 (천연기념물 154호)>

▲  상림 표석

▲  녹음이 깃든 상림 산책로

함양읍내 서북쪽에는 함양(咸陽) 고을이 자랑하는 상림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인 상림(上林) 일대로 넓이는 6만여 평, 숲의 길이는 1.6km, 폭은 80~200m에 달한다. '고
향은 잊어도 상림은 잊지 못한다'는 함양 사람들의 소중한 휴식처이자 마음의 고향이며, 함양의
젖줄인 위천(渭川)이 늘 어루만져주어 오랜 세월을 걸쳐 지금까지도 푸르름을 간직한다.

상림은 신라 후기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 ?)이 조성했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
로 근래에 최치원공원이란 이름도 지니게 되었음) 그는 12세에 부친의 등살에 못이겨 당나라로
건너가 6년 동안 공부에 파묻힌 끝에 18세에 외국인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
황소(黃巢)의 난 때는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이름 석자를 천하에 떨치며, 당나
라에서 무척이나 전성기를 누렸으나 885년 이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진성여왕(眞聖女王)의
소환을 받아 신라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리며 기울어진 나라를 다
시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망조(亡兆)가 단단히 든 나라의 현실에 실망하여 외직(外職)을
자처하게 된다.

지금의 함양인 천령군(天嶺郡) 태수로 부임한 그는 고을을 살피다가 홍수에 크게 취약함을 발견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함양은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를 위천이 관통하여 흐르
고 있어 홍수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던 것이다. 실제로도 자주 홍수가 터져 고을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동원해 강물의 줄기를 지금의 위치로 만들고 둑을 쌓
았으며, 둑에는 나무를 가득 심어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하여 대관림(大館林)이라 하니 그게 바
로 상림이다.
숲이 무성해지면서 홍수의 피해는 크게 줄었으나, 위천의 흐름보다 더 두려운 세월의 장대한 흐
름 속에 숲의 가운데 부분이 휩쓸려 파괴되면서 상림과 하림(下林)으로 나눠졌으며, 그나마 하
림은 거의 사라지고(일부 복원됨) 상림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120여 종에 달하는 나무들로 수해(樹海)를 이루는 상림은 숲이 얼마나 무성한지 정말
정글이 따로 없으며 여름 제국(帝國)의 강렬한 햇빛도 고개를 숙인다. 숲 그늘에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면 정말 신선(神仙)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여름의 눈치와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는 해
방된 곳이다. 그리고 위천의 물줄기가 숲의 옆구리를 부드럽게 지나가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
지 않는다는 상림의 시냇물은 녹음벽수(綠陰碧水)를 이루어 공원 곳곳을 누벼 여름 제국의 침범
을 경계한다.

1,100년의 오랜 숙성을 지닌 숲이지만 정작 초창기에 심어지거나 600년 이상 묵은 나무는 없다.
처음 심어진 나무의 후손들이 조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숲을 손질할 때 수명이 다되거나 비
리비리한 나무를 뽑아내고 새로운 나무를 심으면서 여러 차례 물갈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함양의 제일 가는 경승지이자 풍치림(風致林)으로 봄의 신록(新綠), 여름의 녹음(綠陰),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이 아름다워 읍내 사람은 물론 외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앞다투어 찾아오는
전국적인 명소이다. 함양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드넓은 공원에는 함화루와 사운정, 화수정, 초선정 등의 온갖 누각과 정자가 있어 나그네의 지
친 발을 쉬게 해주며 최치원선생신도비, 이은리석불, 대원군척화비, 읍내에서 옮겨온 비석군(碑
石群) 등의 오랜 문화유산이 곳곳에 숨어있어 보물찾기를 하듯 공원을 둘러보면 더욱 영양가 높
은 나들이가 될 것이다.
게다가 함양이 낳은 인물들의 흉상(胸像)이 담긴 역사인물공원이 위천 변에 조성되어 또다른 볼
거리를 제공하고 있고, 공원 동쪽에는 1만여 평에 거대한 연지(蓮池)가 있어 여름의 제국시절에
는 연꽃의 화려한 향연이 아낌없이 펼쳐진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상림공원의 산책로는 대체로 위천 둑방길(숲 서쪽), 숲길, 연지와 맞닿은
숲 동쪽 길 등 3가지가 있다. 공원에 자리한 문화유산은 대부분 숲길에 있으며, 위천 둑방길을
따라가라면 역사인물공원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숲 동쪽 길은 연지와 살을 대고 있어 연꽃의
향기가 그윽하다.
그럼 지금부터 녹음이 깃들여진 상림공원을 구석구석 살펴보도록 하자.

※ 함양 상림공원 찾아가기 (2012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가 1일 4회 떠난다.
* 인천과 수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가 1일 6~7회 다닌다.
* 부산(사상), 대구(서부), 광주, 대전(동부), 전주, 남원, 진주, 마산(창원)에서 함양행 직행
  버스 이용
* 함양터미널을 나오면 왼쪽으로 터미널4거리이다. 여기서 읍내로 이어지는 왼쪽 길(고운로)을
  따라 1km 직진하면 함양3교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 둑방길(동위천1길)을 따라 500m 정도 가
  면 상림공원이다. 택시로 가면 4~5분 정도 걸린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대전~통영고속도로 → 함양분기점에서 88올림픽고속도로 광주 방면 → 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함양터미널4거리에서 읍내로 직진 → 함양3교에서 우회전 → 상림공원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함양터미널4거리에서 읍내로 직진 →
   함양3교에서 우회전 → 상림공원

★ 상림공원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료는 없음 (주차공간은 120대 정도)
* 공원 동쪽에는 1만여 평 규모의 연지가 있다.
*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대덕리


♠  상림공원 남쪽 둘러보기

▲  함양 척화비(斥和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264호

공원을 알리는 표석을 지나 상림 속으로 발을 들이면 제일 먼저 삼척동자도 줄줄 외고 다닌다는
척화비가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심란하게 만든다. 멀뚱히 서 있는 이 비석은 높이 1.1m로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우둔하고 부질없는 쇄국정책의 메세지가 짙게 담겨져 있다.
나라의 문을 꼭꼭 닫아걸던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 丙寅洋擾)와 신미양요(1871, 辛未洋擾)에
서 프랑스와 미국을 격퇴한(간신히 격퇴한 수준임...) 자신감의 표현으로 쇄국책을 더욱 고취시
키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석의 내용은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다.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吾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
 (우리의 만대 자손들에게 경고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우다)

대원군의 졸작인 척화비는 왜정(倭政) 때 왜인들이 땅바닥에 넘어뜨리거나 부셔버렸는데, 상림
에 세워진 함양 척화비는 온전한 모습으로 자빠져 있던 탓에 상태가 양호하다. 낮은 받침돌 위
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반달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그리 유쾌한 비석은 아
니다. 척화비 부근에는 조선 고종 때 함양 고을의 19명의 선비가 세운 초선정(招仙亭)이 있다.


▲  공원을 지키는 호법대신(護法大神) 장승
익살스런 장승의 모습에 상림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악귀는
그를 보고는 자신의 소임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  공원 동쪽 길 ~ 개울 너머로 꽃무릇의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다.
꽃무릇 군락지는 여름을 장식하는 연꽃에 뒤를 이어 가을에 절정을 이룬다.

▲  장차 다가올 가을을 가슴 깊이 품으며 여름 제국의 시련을 견디는
꽃무릇 군락지

▲  상림 산책로(숲길) - 한더위에 거닐면 땀이 나 살려라 도망을 친다.
그만큼 시원한 기운이 산책로를 거니는 나그네를 휘감는다.

▲  함화루(咸化樓)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58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척화비에서 좌측길로 가면 숲 한복판에 자리한 드넓은 잔디광장이 나온다. 이곳에는 야외강당인
다볕당이 자리해 있는데 다볕당은 함양(咸陽)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함(咸)은 '모두','다
'의 뜻이, 양(陽)은 '볕'이란 뜻이 있음>

다볕당 북쪽에는 고색이 짙은 2층 누각 함화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누각은 원래 함양읍성
의 남문(南門)이었는데, 원래 이름은 큰 산인 지리산(智異山)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악루(望嶽樓
)였다. 왜정에 의해 읍성(邑城)이 파괴되고 망악루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던 중, 1932년 함양
읍에 살던 노덕영(盧悳泳)이 구입하여 지금에 자리로 옮겨 함화루로 이름을 갈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성문(城門) 시절에는 벽과 문짝이 있었으나 모두 사라
지고 기둥에서 그 흔적을 아련히 더듬어 볼 수 있다. 지금은 공원을 수식하는 누각으로 내가 갔
을 당시는 몸을 가리고 한참 몸단장 중이었다. 그래서 문화재청 사진으로 대신한다.


▲  함화루 좌측에 자리한 약수터

▲  이은리석불(吏隱里石佛)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이은리 석불은 아랫도리와 두 팔을 잃은 가련한 상태로 나그네로 하여
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 불상은 1950년경 함양읍 이은리 하천에서 발견된 것으로 부
근에 망가사(望迦寺)란 절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절의 유물로 여겨진다.
그를 받들던 절은 자연의 거친 흐름 속에 모조리 휩쓸려 사라지고 집을 잃은 석불은 자연의 짓
궂은 장난에 생매장을 당하면서 함양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잊혀졌다. 허나 어떻게든 살고자 바깥
세상으로 가까스로 살을 드러내 구조를 청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세월과 자연의 괴롭힘이 상당했던 듯, 아랫도리
와 두 팔은 떨어져 나갔다. 허나 다른 부분은
그다지 파손되지 않아 고려 불상의 아름다움을
은은히 드러낸다. 그는 광배(光背)와 대좌(臺座
)를 갖추고 있으며, 타원형의 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연화문으로 된 두광(頭光)과 몸통 주변
의 당초(唐草)무늬가 새겨진 신광(身光)이 그를
수식한다.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은 아
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하기만 하다. 두 눈은
지그시 감고 있으며 입술에는 엷은 미소가 드리
워져 있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두 귀는 길쭉하여 얼굴에 비해 다소 빈
약해 보이는 어깨에 닿는다.
몸통에는 법의가 'U'자형으로 주름을 이루며 두
텁게 묘사되어 있다. 대좌는 거의 자연석 그대
로의 모습으로 별다른 꾸밈은 없다.

◀  이은리 석불의 뒷모습


♠  상림공원 둘러보기 (북쪽 부분)

▲  나그네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상림약수터

▲  사운정(思雲亭)

사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힌 단촐한 모습으로 1906년에 박정규와 김득창 등
함양 지역 유림들이 최치원을 추모하며 사모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모현정(慕賢亭)
이라 했다가 나중에 사운정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깊숙한 숲속에 자리하여 한더위에도 시원하다.


▲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文昌侯 崔致遠 神道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75호

사운정 우측에는 최치원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이 비석은 최치원의 공덕을 기리고자 1923년에
후손인 최순현(崔旬鉉)이 세운 것으로 겨우 9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
고 있다.
비석의 구조는 귀부(龜趺) 위에 비석의 주인공을 적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자아낸 이수(螭首)를 두었다. 귀부의 용머리는 무슨 좋
은 일이라도 있는지 표정이 귀엽고 해맑아 보인다. 혹 내가 와서 반가운 것은 아닐까? 그럴 리
는 없겠지만..
푸른 빛을 띈 비신은 별로 오래되진 않았지만 고색의 때가 군데군데 끼어있어 비석의 품격을 드
높인다. 비석의 높이는 3m, 폭은 1.5m이다.


▲  여러 명이 앉을 정도로 넓은 마당바위
높이가 낮고 뚜껑돌이 길쭉한 고인돌(지석묘)로도 보인다.

▲  상림 구석구석을 흐르는 시냇물이 3거리를 이루며 각자의
방향으로 졸졸졸 길을 재촉한다.

▲  역사인물공원(歷史人物公園) 입구

여기서 표석의 안내를 받아 왼쪽 길로 가면 역사인물공원이 나온다. 위천 변에 터를 닦은 공원
으로 함양 출신 역사인물의 흉상과 함양 각지에서 가져온 오래된 비석들로 이루어져 있다.

▲  역사인물공원 우측(위천 쪽)에 자리한 오래된 비석들

남북으로 2열 종대로 늘어선 비석들은 함양군수와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의 선정비(善政碑)/ 불
망비(不忘碑)이다. 이들 중 정말로 백성들을 살피며 선정(善政)을 베푼 위정자도 있겠지만 대부
분은 이렇다 할 치적도 없는데도 과시나 조세 징수를 위해 만든 형식적인 비석일 것이다.

◀  열녀학생임술증처 유인밀양박씨지려(烈女學
生林述曾妻 孺人密陽朴氏之閭)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240호
비석군 좌측에는 돌로 만든 일종의 비각(碑閣)
안에 담긴 비석 하나가 따로 자리를 하고 있다.
뭔가 특별해 보이는 비석, 그 옆에 안내문을 보
니 무려 16글자의 긴 이름을 지닌 정려비(旌閭
碑)이다. 정려비는 효자와 열녀(烈女), 충신을
기리고자 국가가 내린 비석으로 이 비는 열녀
밀양박씨를 기리고자 세워진 것이다.
임술증(울진임씨)의 부인 밀양박씨는 열부(烈婦
)로 명성이 자자했던 여인으로 연암 박지원(燕
巖 朴趾源)이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내며 물
레방아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1793년에 그를 주
인공으로 한 한문소설 '박열부전(朴烈婦傳)'을
썼다. 그녀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박지원
이 박열부전을 쓰던 시기에만 함양군수 윤광석(
尹光碩), 산청현감 이면제(李勉齊), 선비 이학전
(李學傳), 벽송사(碧松寺) 승려 응윤(應允) 등이
그를 모델로 한 '박열부전'을 썼다.

같은 시대에 박씨부인에 대한 사실적 내용을 유학자의 입장과 관리의 입장, 승려의 입장에서 각
각 기술한 것으로 유학적이고 실존적인 시대상황을 평가하는 글들로 분석되고 있어 국문학적 의
미가 크다.
이 비석은 1797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정여창(鄭汝昌)의 7대손인 정덕제(鄭德濟)가 썼
으며, 2번이나 비석을 옮긴 기록이 비석에 쓰여져 있다. 1932년에 함양읍 백연리로 이전되었다
가 근래에 역사인물공원으로 이전되었으며, 후손들이 정성스레 닦고 문지르며 관리를 하고 있어
비석의 건강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  역사인물공원 좌측에 자리한 역사인물 11위의 흉상(胸像)

공원 좌측에는 함양과 인연이 깊은 역사 인물 11위의 흉상이 자리한다. 5위의 흉상이 2줄을 이
루며 맞은편의 흉상을 바라보며 있으며, 가장 좌측 회장자리에는 상림공원을 만든 최치원의 흉
상이 있다. 그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에 활약했던 정여창, 김종직(金宗直), 박지원, 유호인(兪好
仁)등의 흉상이 자리를 지킨다.


▲  공원 최북단에 자리한 물레방아

공원 최북단에 자리한 물레방아 자리에는 공원 상가가 있었다. 그러다가 정비를 벌이면서 상가
는 모두 갈아엎었고 1998년 함양 고을을 상징하는 물레방앗간을 지어 우리의 옛 향수를 선사한
다.

함양은 우리나라 물레방아의 고향으로 함양 북쪽에 있는 안의 용추계곡이 그의 탄생지이다. 청
나라에 사신으로 간 박지원으로 그곳에서 물레방아를 접하고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그
도안과 사용방법을 익혀 귀국을 했는데, 귀국 이후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자 안의 북쪽 용추계곡
에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만들어 시범서비스에 들어갔다.
물레방아 서비스가 큰 호응을 얻자 전국으로 보급하여 마을마다 물레방아가 없는 곳이 없을 정
도가 된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던 공간으로도 많이 애용되던 물레방앗간은 기계문명에 밀려 이
제는 귀한 몸이 되었다.


♠  상림공원 둘러보기 (동쪽 부분)

상림 동쪽의 상동마을은 옛부터 연꽃밭을 뜻하는 연밭머리라 불려 옛날부터 연꽃의 보금자리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함양군은 이를 근거로 상림 동쪽에 66,000㎡에 달하는 연지(蓮池)를 만들고
백련과 홍련, 황련(黃蓮), 분홍련, 수련을 심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안그래도 아름답고
장쾌한 상림을 더욱 아름답게 수식하여 상림의 이름 2자를 천하에 떨치고 있으며, 연꽃의 절정
기인 여름에는 연꽃의 즐거운 향연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1년 가까운 와신상담을 거쳐 화사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의 아름다운 물결, 마치 심청(沈淸)이
나올 것 같은 연꽃의 자태는 뭇 사내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앙증맞게 생긴 연잎에는 개
구리들이 열심히 뛰어 놀며, 여름 제국이 내린 빗방울이 잎에 신비롭게 고여 있다. 사람키만큼
이나 자란 연들은 비오는 날 우산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다. 연지 남쪽에는 서양 수중식물을 풀
어놓은 연못이 있다.


▲  홍련지(紅蓮池)와 백련지(白蓮池) 사이에 자리한 연못 ~
서양 수중식물의 보금자리이다. ▼



▲  앙증맞은 모습의 엘리사이나

▲  연못에 베풀어진 징검다리 - 아장아장 징검다리를 걷는 순간
철모르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  상림만큼이나 무성하게 자란 연 사이로 놓여진 흙길

내 키만큼이나 자란 연들로 흙길은 거의 연터널을 이룬다. 연들이 너무 커서 그 길로 들어서기
가 겁난다. 내가 저 길로 들어서다가 자칫 커다란 연들에 휩싸여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  품종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된 흙길

▲  거대한 백련(白蓮)의 하얀 물결 - 백련지

▲  상림에서 불어오는 숲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백련

▲  백련 사이를 거니는 흙길

▲  장대한 홍련(紅蓮)의 물결 ~ 홍련지 ▼



▲  연분홍 단장을 한 홍련 ~ 저기서 어여쁜 심청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뭇 사내의 마음을 콩닥거리게 만든다.

▲  무슨 근심이 있는지 꽃잎을 굳게 오므린 홍련

▲  연지로 떨어지지 못하고 커다란 연잎에 고인 빗물 덩어리
연잎에 머물며 투명의 덩어리를 이룬 빗물이 무거운지 연잎이 조금 기울어진 것 같다.
잎을 움직여 물방울을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그 광경이 정말로 신비롭다.

▲  연지와 맞닿은 상림 동쪽 산책로


♠  서울에서 머나먼 곳에서 만난 조선 왕족의 묘역, 한남군묘(漢南君墓)
-
경남 지방기념물 165호

▲  한남군 묘역 (앞에서 본 모습)

▲  한남군 묘역 (뒤에서 본 모습)

상림 동쪽 한남군고개라 불리는 산자락에 엉뚱하게도 조선 왕족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바로 세
종의 아들인 한남군의 묘역이다.(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세종왕자 한남군묘역') 그의 무덤은 연
지 동쪽 도로에서 동쪽 산자락을 유심히 바라보면 어렵지 않게 바라보이는데, 석물이 유난히도
많은 무덤이 바로 그의 유택(幽宅)이다. 그럼 어째서 조선 왕족의 묘가 서울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게 된 것일까?

한남군(1429~1457)은 세종(世宗)의 12남으로 혜빈 양씨(惠嬪 楊氏)의 소생이다. 자는 군옥(君玉
), 이름은 어(於)이며, 시호는 정도공(貞悼公)이다. 1441년에 세종 내외가 온수현(溫水縣, 충남
아산시내) 가마곡(加磨谷)에 행차하였을 때 궁궐 수비를 관장한 공으로 한남군에 봉해졌다.

1455년 그의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인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재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4째 형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혜빈양씨, 영풍군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려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금산(錦山)으로 유배되고 만다. 그 뒤 아산(牙山)을 거쳐 함양 새우
섬(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한남마을)으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1457년 5월 을유일(乙酉日)에 세조
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마시고 쓰러지고 만다.

지금의 무덤은 1557년(명종 12년)에 조성된 것으로 상석(床石)과 망주석(望柱石) 4기, 문인석(
文人石) 2기, 동자상(童子像) 2기가 무덤을 지킨다. 조선 중기 왕족의 묘제(墓制)를 잘 보여주
고 있으며, 근래에 묘역 앞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  한남군 묘역을 지키는 동자석 2기

그가 묻힌 봉분(封墳)은 조그만 석축 위에 쌓은 것으로 그 앞에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碑
石)이 서 있는데, '한남군 정도공 휘어지묘(漢南君 貞悼公 諱於之墓)'라 쓰여있다. 이 비석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원래의 비석은 봉분 우측으로 옮겨져 봉분을 바라본다. 아마도 노후한 비석
의 건강이 썩 좋지 못해 그리한 듯 싶다.
묘비 앞에는 제물을 올리는 상석이 누워있으며, 그 좌우에는 다소 훼손이 심한 동자상 2기가 서
로를 마주보고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자연의 짖궂은 장난 앞에 형체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좌측 동자상의 얼굴에는 동자상이란 이름 그대로 천진난만함과 귀여움이 묻어나 보인다. 우측의
동자상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자신의 몰골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자연과 세월, 세상에
대한 불만을 표하는 듯하다.


▲  묘역을 밝히던 옛 장명등(長明燈)의 흔적

무덤을 둘러보고 있으면 뭔가 허전함이 밀려올 것이다. 바로 장명등이 없기 때문이다. 장명등은
현재 석등(石燈)이 꽂혀있던 구멍과 바닥돌만 덩그러니 남아있는데, 마치 이가 빠진 듯 시려보
이는 구멍에는 빗물만이 가득하여 그 허전함을 달래줄 뿐이다. 나머지 석물은 그래도 살아남아
무덤을 지키는데 장명등은 어느 귀신에 잡혀갔는지 알 길이 없다.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망주석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망주석

묘역 좌우에는 문인석 2기와 망주석 4기가 자리한다. 고색의 때를 가득 뒤집어쓴 문인석은 그런
데로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데, 그의 표정에는 멀뚱하면서도 여유로움이 묻어나 보인다. 문인석
옆에는 특이하게도 망주석이 2기씩 자리해 있는데, 몽당연필처럼 매우 조그마한 망주석이 원래
의 것으로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저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옆에 하얀 피부의 늘씬한 망주석
을 세워 노쇠한 선배를 거든다.


▲  봉분 우측에 자리한 옛 묘비
수백 년 세월의 때와 상처가 가득 입혀져 근래에 봉분 우측으로 옮기고
새로운 묘비를 만들어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묘역 앞쪽에 자리한 신도비(神道碑)

▲  솔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는 한남군 묘역으로 오르는 산길

한남군 묘역을 끝으로 오랜만에 찾은 함양 상림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단풍으로 곱게 치장을 한 늦가을 풍경을 꼭 보고 싶다.

* 한남군묘역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리 산7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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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피서의 영원한 성지 ~ 밀양 얼음골

' 여름 피서의 영원한 성지, 밀양 얼음골 '
밀양 얼음골 결빙지
▲ 얼음골 결빙지



여름 제국의 삼복(三伏) 더위가 절정을 이루던 7월 하순, 제국(帝國)의 핍박에서 벗어나고자
밀양(密陽)의 신비로 통하는 천황산 얼음골을 찾았다.

밀양에 가기 이틀 전에 부산(釜山)으로 내려가 친한 형님 집에서 2일을 머물렀는데, 바로 전
날에는 울산 서생(西生) 해변으로 놀러가 게잡이를 했다. 길쭉한 막대기와 투명색 봉투를 들
고 바닷가 바위를 이리저리 들쑤시며 바닷게를 잡았는데, 첫 경험이라 겨우 7마리 밖에 잡지
못했다. 반면 경력이 풍족한 형님과 형수는 수십 마리를 잡아 나와 대조를 이룬다.
게잡이 전선에서 신고 간 운동화가 바닷물에 완전히 쩔었는데, 수면 밑의 암석들이 한결같이
가시처럼 뾰족하여 맨발로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마침 상경(上京)할 때 슬리퍼를 지원
해주겠다고 하여 운동화를 든든한 갑옷으로 삼아 동해바다를 누볐다.온몸까지는 아니지만 몸
의 절반은 바다와 찐한 스킨쉽을 즐기며 여름 제국에 맞서 피서를 즐긴다.

2시간의 걸친 게잡이를 정리하고 두둑히 생포한 게를 큰 통에 담아 부산으로 개선했다. 그들
로 간장게장을 해먹으려 했으나 무더위와 귀찮니즘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나중에 들으니 게
들이 죄다 죽어나가서 게장도 못했다고 함)


▲ 게잡이를 벌인 울산 서생 나사리 해변


다음날 아침, 아침을 든든히 채우고 다음을 기약하며 그들과 작별을 고한다.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엄격한 원칙 앞에 자유로운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운동화는
바닷물에 쩔어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에 세탁비누로 닦고 세탁기에 넣고 빨았다. 허나 마르는
데 시간이 걸려 신을 수 없으므로 쇼핑백에 담아서 가방에 넣어 운반했으며, 그들이 준 슬리
퍼를 신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아무리 간편한 복장을 추구하는 여름이라 해도 나들이나 시내를 다닐 때 슬리퍼로 나다닌 적
이 없었다. 슬리퍼는 어디까지나 동네에서만 끌고 다녔지,외출 때는 운동화나 샌달을 신었다.
허나 이번에 내 역사상 처음으로 슬리퍼 하나에 의지하여 서울까지 1,000리 길을 가게 된 것
이다.물론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슬리퍼로 돌아다니니 괜한 신경은 쓸 필요는 없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보니 조금은 어색하다.

부산서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어디로 갈까 궁리 하다가 밀양의 얼음골로 가기로 하고 1시간 마
다 떠나는 밀양(密陽)행 직행버스에 나를 싣는다. 버스는 구포역에서 사람을 더 태우고,부산
~대구고속도로를 질주하여 40분 만에 밀양터미널에 나를 내려놓는다.

터미널에 들어가 얼음골행 시간표를 확인해보니 5분 뒤에 직행버스가, 35분 뒤에 시내버스가
있다. 직행(거의 1시간 간격)이 먼저 있으니 그걸 타면 되겠지만 차비가 무려 4,000원대, 반
면 시내버스는 그 절반 가격이다. 운행 코스도 같고 소요시간도 비슷하니 기왕이면 저렴하게
가는 것이 좋겠지, 게다가 하루에 달랑 3번 다니는 시내버스와 시간도 맞아떨어지니 굳이 꿩
대신 싼 닭으로 하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35분을 흘러 보내고 얼음골로 가는 밀양시내버스를 탔다. 차비는 내릴 때 마이비카드
(Mybe Card)로 냈는데, 직행의 절반인 1,800원(현금 1,900원)이다. 터미널에서 얼음골까지는
거의 50분이 걸렸는데, 그중의 45분은 정신없이 졸았다.


♠ 여름의 제국도 굴복시킨 밀양의 4대 기적의 하나이자
여름 피서지의 성지(聖地), 얼음골 둘러보기


▲ 얼음골 용바위

얼음골 버스종점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동쪽으로 가면 그 유명한 호박소계곡이 나오고 남쪽
다리를 건너면 얼음골로 통한다. 나의 목적지는 얼음골이니 당연히 천황산(天皇山)의 품으로 인
도하는 다리를 건너야 된다. (호박소도 가고 싶지만 거리의 압박이 ;;)

다리를 건너려고 하니 안내문 하나가 잠깐 나좀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든다. 안내문을 보니 계
곡에 발을 담근 용바위의 전설이 담겨져 있었다. 다리 밑에 흐르는 냇물은 호박소에서 내려왔는
데, 이곳에서 용바위를 빚어 얼음골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른다. 여기서 잠시 용바위의 믿거
나 말거나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동해 용왕(龍王)의 궁녀인 용녀(龍女)가 용왕의 아들과 밀애를 즐기다가 된통 걸
렸다. 아들은 용왕의 자식이라 하여 10년 유배형을 받고 어딘가로 추방되고, 용녀는 궁녀라 하
여 그의 3배인 30년 유배형(流配刑)으로 속세로 쫓아내면서 그 시간 동안 놀지 말고 베를 짜라
고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호박소 상류에 있는 베틀바위에 터를 잡고 베를 짜며 돌아갈 날을 꿈
꾸었다.

그러던 여름날 밤, 목욕을 하던 용녀는 우연히 호박소 상공에서 조화를 부리는 이무기를 발견했
는데, 다름이 아닌 자신과 밀애를 즐겼던 용왕의 아들이었다. 그는 용녀와 가까운 호박소에 머
물러 있었던 것이다.
용녀는 반가운 마음에 매일 밤 찾아가 다시 만나자고 청했지만 부왕의 눈치 때문인지 그는 단호
하게 거절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무기와 정을 나누는 꿈을 꾸었는데, 이상하게도 태기가 생
겨 10달 뒤에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드디어 용왕의 아들이 10년 형기를 마치고 동해로 돌아가는 날, 승천(昇天)하는 뒷모습을 바라
보며, 애절하게 울부짖던 용녀 모녀는 울다 지친 나머지 떡실신하여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안내문을 기준으로 30m 전방에 우측의 큰 바위가 용녀이고, 좌측의 두 바위가 쌍둥이 아들이라
고 하며, 비구름이 오는 날에는 이들의 울부짖음인 양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물론 이 전설
은 얼음골과 호박소를 찾은 옛 사람들이 빚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절경(絶景)을 이루는 곳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용이나 학(鶴), 선녀, 신선(神仙)과 관련된 전설이 꼭 서려있으니 이는 그 절
경이 옛 사람들을 무한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 시원하게 쏟아지는 얼음골

용바위가 보이는 다리를 건너 5분 정도 가면 '아이스리조트'란 숙박업소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
면 얼음골 매표소가 애타게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바라본다. 입장료는 1,000원(어른 기준), 동전
을 싹 털어서 입장권을 구입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신비로움이 감도는 얼음골 내부
로 들어선다.

매표소를 지나니 풍경부터가 싹 달라진다. 우선 길이 시멘트에서 산길로 바뀌면서 경사가 속세(
俗世)살이처럼 잠깐 각박해진다. (그러다가 다시 진정을 되찾음) 숲도 더욱 삼삼해져 햇빛도 거
의 들어오질 못한다. 그늘이 진하게 드리워 벌써부터 시원해진다. 산길 옆에는 얼음골 계곡이
흘러가고 계곡 바위에는 아침부터 피서객들이 여기저기 진을 치며, 여름제국에 맞선다.


▲ 천황사 입구 (명상교와 네모난 돌샘)

매표소를 지나 10분 정도 가면 천황사 입구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가마불협곡(가마볼이라
고도 함)이고, 정면의 명상교(冥想橋)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천황사가 나온다. 얼음골 결빙지(
빙혈)로 가려면 천황사를 지나 오른쪽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면 된다.

이정표 옆에는 파란 바가지가 놓인 물이 가득한 조그만 돌샘이 있는데, 물이 계속 솟아올라 샘
을 가득 채운다. 목도 마르고 해서 한모금 마셨는데, 정말 얼음골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상당
히 차갑다. 마치 얼음물을 마신 듯 너무 찬 나머지 속쓰림을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야말
로 냉수 1잔에 정신이 싹 든다.

천황사(이곳은 나중에 언급함)를 지나 나무다리를 건너니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저 위에서 시
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름에 맞아본 바람 가운데 가장 시원했던 바람, 바람
의 세기도 적당하고 에어컨 보다 더 냉기(冷氣)가 진한 바람이 잠깐도 아니고 위쪽 돌밭에 이
르기 까지 계속 불어대니 역시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느낀다. 길이 가파르긴 하지만 바람의 보
우로 땀은 아예 얼굴도 비추질 않는다.


▲ 찬 바람이 풍기고 얼음이 어는 얼음골 결빙지 - 천연기념물 224호

바람에 힘입어 3분 정도를 오르면 거대한 돌밭이 나온다. 돌밭은 가파른 경사진 부분에 넓게 펼
쳐져 있는데, 보호 철책에 둘러싸인 부분이 얼음골의 핵심인 결빙지(結氷地)이다. 그리고 철책
안 가까운 곳에 조그만 빙혈(氷穴)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산길을 따라 내려오던 냉풍이 나오는
곳이다.

빙혈에서는 쉬지 않고 시원한 바람이 나와 온 천하를 녹일 것 같은 여름의 제국을 무색케 만든
다. 여름도 오금을 저리며 피해가는 그곳에서 얼음이 언다고 해서 내 눈은 열심히 구멍 안쪽과
돌밭을 헤매고 있었으나 얼음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얼음은 인간들을 피해 구멍 안쪽으로
피신하여 자라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구멍 앞에서도 얼음이 얼었다고 하는데, 인간들이 얼음
을 따느라고 하도 구멍을 들쑤시고 망가뜨려 아작을 내니 그곳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얼음 구
멍이 많은 부분 주변에 보호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 이후로 얼음도 안심이 가
는지 예전보다 많이 생겼다고 한다.

얼음골은 천황산(天皇山) 북쪽 중턱 해발 600~750m 고지에 자리해 있다. 옛날에는 시례빙곡(枾
禮氷谷)이라 불렸으며, 계곡의 동, 서, 남 3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그 끝에 가마볼협곡과 폭
포가 있다. 산 남쪽 자락은 돌밭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여름의 제국이 마수(魔手)를 뻗는 5~6월부터 바위 틈에 슬슬 얼음이 생기기 시작하여 삼
복 더위에 여름을 비웃듯 가장 많은 얼음이 생성된다. 특히 더위가 극성일 수록 얼음도 정비례
로 많이 생긴다고 한다. 제국의 기운이 떨어지는 처서(處暑, 8월 말)가 지나면 냉기가 줄어들어
얼음이 사라지며, 반대로 겨울에는 바위 틈에서 따스한 공기가 나와 계곡을 겨울의 제국으로부
터 보호한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계곡이 얼지 않는다. 또한 빙혈 부근의 나무는 빙혈의 기운 때
문에 나뭇잎이 매년 덜 피고 마는 기현상을 빚고 있는 것이다.


▲ 무수한 얼음 구멍을 품은 돌밭

그럼 왜 이곳은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까?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여름으로 바깥 온도가 높아지면 바위 틈의 작은 틈서리를 통해 바깥 공기는 저온인 바위 표면을
스쳐 지하로 들어간다. 이때 공기는 8도 정도로 냉각된다. 이렇게 차가워진 공기는 지하를 흐르
는 차가운 지하수와 함께 하류로 흘러가다가 얼음골에 와서 작은 틈서리를 통해 바깥으로 방출
되는데, 이때 공기는 단열냉각(斷熱冷却)되어 영하로 내려간다. 이렇게 되면 대기 중의 수분이
응결되어 바위틈 사이로 얼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바깥 온도가 높을 수록 현저하게 일어난다.
겨울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며, 따스한 공기가 지표로 나와 서늘한 공기와 만날 때 안개가
형성되므로 얼음골의 겨울은 항상 안개에 쌓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으로 증명은 되었지만 여전히 신비로운 얼음골은 예로부터 밀양의 4대 기적의 하나
로 손꼽다. 그 4대 기적이란 얼음골을 비롯하여 국가의 위기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表忠
碑),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나타난다는 태극나비, 한겨울 눈 속에서 새 죽순이 돋는 무봉사(舞
鳳寺) 대나무숲을 일컫는다.

이렇게 여름에 얼음이 얼고 찬 바람이 나오는 곳은 이곳 외에 의성 빙계계곡이 대표적이다.


▲ 유일하게 눈에 띈 얼음 구멍
바로 저기서 바람이 나오며, 저 안쪽에 얼음들이 둥지를 텄다.
허나 너무 깊이 있어서 얼음 구경도 못했다.


얼음구멍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한결같이 빙혈에 시선을 두며 서로
앞자리로 가려고 한다. 더 머무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일단은 자리를 비키고 가마불협곡으로 넘어
갔다. 그곳을 보고 다시 결빙지로 오려고 했는데, 결국 오지도 못했다.

가마불협곡으로 가는 길은 인적이 없다. 다들 얼음과 찬 바람이 나오는 빙혈에만 관심이 가 있
었지 가마불협곡은 안중에도 없던 것이다. 실제로 가마불까지 오는 사람은 빙혈을 찾는 사람의
채 절반도 되지 않을 듯 싶다.


▲ 결빙지에서 바라본 천하
건너편에 보이는 오른쪽 산은 백운산(885m), 왼쪽에 멀리 보이는 산은
운문사(雲門寺)를 품은 운문산(1188m)이다.

▲ 얼음골의 신비를 더욱 올려주는 돌밭들

▲ 가마불협곡으로 가는 돌밭길

▲ 가마불폭포를 앞두고

협곡으로 넘어가는 길은 별로 험하진 않다. 무책임하게 펼쳐진 돌밭을 지나고 녹음(綠陰)에 짙
은 숲길을 조금 거닐면 깎아지른 듯한 높다란 벼랑이 나타나고 길은 그 안으로 속인(俗人)들을
안내한다. 그곳이 바로 얼음골의 또다른 명물인 가마불협곡(峽谷)이다. 가마불이란 말에 처음에
는 찜질방과 무슨 관련이 있나 싶은 말도 안되는 생각도 품기도 했지.

그리 길지 않은 협곡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그곳에 가마불폭포가
숨겨져 있다.

▲ 깊숙한 곳에 가려진 가마불폭포

▲ 가마불폭포 인근 벼랑의 다른 폭포


이름도 재밌는 가마불협곡은 마치 가마솥을 걸어 놓는 아궁이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
다. 협곡 가장 깊숙한 곳에 박힌 가마불폭포는 30m가 넘는 폭포로 경사가 완만하여 마치 물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듯 하다. 폭포 앞에는 출입금지를 알리는 금줄이 쳐져 있어 애써 안
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기분 같아서는 안쪽으로 다가가 폭포수를 만지고 싶었지만 금줄의 통제
에 별다른 미련 없이 따랐다.

두 벼랑 사이로 내려오는 폭포의 모습을 담는 게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폭포의 모습이 벼랑에
부분부분 가려 시원스럽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과 협곡을 빚은 높다란 벼랑 앞에
햇빛은 들어오는 것을 포기했다. 빙혈 정도는 아니지만 시원한 기운이 충만해 땀을 흘리는 것은
여기서만큼은 다른 세상 이야기이다.

가마불폭포 못미쳐 왼쪽(폭포 방향 기준)에도 벼랑을 타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있다. 높
이가 20m 정도 되는 폭포로 떨어지는 수량이 적어 조금은 답답해 보인다. 폭포의 전경(全景)을
담으려고 했더만 나무들이 시야를 방해하여 시원하게 나온 것이 없고, 폭포도 온전히 보이질
않아 바로 앞에서 고개를 90도 올리며 목이 아파라 위로 올려다 봐야 된다.

가마불에서 빙혈로 가지 않고 천황사로 내려갔다. 얼음골 등산로는 '천황사~빙혈(결빙지)~가마
불~천황사'로 1바퀴 도는 순환 형태로 빙혈에서 옆길로 새서 재약산(1189m)과 표충사(表忠寺)로
넘어갈 수도 있다.

천황사로 가는 길도 숲이 삼삼하여 양지는 없다. 계속 그늘진 시원한 길과 계곡의 연속이다. 내
려가는 도중에 폭포가 하나 있는데, 거기서 잠시 쉬었다 갈까 했지만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자리
를 점거하고 있던 터라 더 내려갔다. 마침 인적이 없는 적당한 곳을 발견하여 그곳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두 다리를 쉬게 했다. 신발은 슬리퍼를 신었고 반바지이니 계곡물에 그냥 다리를 담
구면 된다. 물이 얼마나 차갑던지 체 3분도 버티기가 힘들다. 얼음골은 무더위는 정말 발 붙일
곳도 없는 그야말로 피서의 성지이다. 여름의 제국도 굴복시키는 얼음골의 위엄과 자연의 신비
앞에 만물의 영장을 참칭하는 인간의 하나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 가마불에서 천황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폭포
폭포 줄기가 별로 시원치 못하다.


▲ 내가 잠시 쉬었던 가마불 아래 계곡

계곡에 발을 담구고 적당한 바위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며 1시간 정도 머물렀다. 정말 신선놀음
이 따로 없었지, 더 머물까 하다가 갈 길도 멀고 피서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도 많고 해서 자
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천황사로 내려왔다.


♠ 얼음골에 시원하게 둥지를 튼 조그만 절집, 우리나라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보물을 품은 천황산 천황사(天皇寺)

▲ 천황사 대적광전(大寂光殿)

피서의 성지 얼음골에 보금자리를 튼 천황사는 조그만 산사(山寺)로 절과 관련된 정보를 이리저
리 찾아보았지만 속시원한 정보가 걸려들지 않았다. 아마도 법등(法燈)의 역사가 지극히 짧은
모양이다. (반면 천황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관련 정보는 무수히 나옴)

얼음골과 신라 불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내세운 천황사는 아늑하고 고요한 산중암자이다.
내력은 짧지만(언제 창건되었는지 정보가 나오질 않음, 아마도 옛 절터나 부근에 있던 석조비로
자나불좌상을 수습하여 여기에 절을 세운 듯 싶다) 법당인 대적광전과 산신각, 요사 등 4동 정
도의 건물을 갖추고 있으며, 얼음골의 수량이 풍부하고 시원해 물 걱정과 여름 걱정을 할 필요
가 없다. 빙혈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얼음골을 찾은 사람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천황사를
거쳐야 된다. 얼음골이 천하의 명승지다 보니 자연히 얼음골을 찾는 사람 수 만큼의 사람들이
절을 지나는 셈이고 얼음골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절도 어지간해서는 망할 일이 없을 것이다.

천황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에는 이곳의 유일한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
으며, 그 옆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가 있다. 법당 뒤쪽 가장 높은 곳에는 산신각(山
神閣)이 손바닥만한 경내와 얼음골 아랫쪽을 굽어본다.

▲ 단촐한 1칸 크기의 천황사 산신각

▲ 천황사 요사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정면에 구름을 꼭대기에 걸친 운문산이 보인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각 산신탱화(山神幀畵)
산신 할배는 포근한 표정으로 호랑이를 쓰다듬는데, 호랑이는 불만이
있는 듯, 눈을 크게 부아렸다. 아마도 밥을 제때 잘 안준 모양이다.
산신 양쪽에는 비서인 동자 2명이 부채와 연꽃을 들고 있다.

▲ 천황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 - 보물 1213호

대적광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천황사와 달리 매우 오래된 보물이다. 신라 후기에 조
성된 불상으로 .광배(光背)만 없을 뿐이지, 불상과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다. 결가부좌(
結跏趺坐) 자세로 앉아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뒤로 올린 향마좌(向魔座)도 겸하고 있다. 두 손
을 오른쪽 엄지로 위 아래로 이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대좌와 몸통은 고색의 떼가 가
득해 다소 검해 보이나 얼굴은 대비를 이룰 정도로 하얗다. 얼굴은 파손되어 새로 만들어 붙였
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 아래가 조금은 어색해 보인다.

불상의 체구는 인체 비례와 비슷한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는 옷으로 가린 우견견
판(右肩偏袒)을 하고 있으며, 조금은 날씬한 허리에 걸쳐진 얇은 옷의 표현으로 사실성을 높여
준다. 이처럼 우아하고 사실적인 형태는 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보이며, 얇은 층단신 주름의
세련된 표현은 8세기 후반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한다.
특히 이 불상의 백미(白眉)는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사자좌(獅子座)이다. 사자좌는
상대와 중대, 하대로 구성되었으며, 상대(上臺)는 둥근 원판형 위부분에 약간 높여 정교한 연주
문(蓮柱文)을 새기고, 그 아래에 활짝 핀 연꽃무늬를 2겹으로 새겼다. 중대(中臺)는 7cm 높이의
얇은 것으로 둥근 원형받침형태인데 2줄의 띠를 새기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예이다. 하
대(下臺)는 아랫 부분에 복판연화문을 두고 그 위로 11마리의 사자를 환조(丸彫)로 새겨 대좌의
호화로움을 끌어 올린다. 정면에는 향로 같은 것을 끼우던 받침으로 보이는 구멍 받침이 있다.

얼굴을 제외하고 대체로 건강 상태가 양호하며,
8세기 후반의 가장 우수한 석불로 꼽힌다. 또한
유일하게 사자좌를 갖춘 불상으로 그 가치는 얼
음골 만큼이나 상당하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닌 듯 하며,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 골짜
기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천황사도 바로 이
불상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 봐도 과언은 아니다.

불상 뒤에는 근래에 만든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 있으며, 그 흔한 협시물(夾侍佛)은 갖추지
않았다. 대좌 하대에 새겨진 사자들은 불상의
품에 안기려는 듯 서로 올라가려는 모습을 취하
고 있는 것이 꼭 이 땅의 중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사자 11마리라고 하는데, 왜 11마리를 했
는지는 모르겠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주변 (닫집 지붕이 2겹으로 설치되어 있다)

천황사를 끝으로 3시간에 걸친 얼음골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겨울의 제국이 도래할
때 이곳에 다시금 숨어들어 따스한 온기(溫氣)에 의지하고 싶고, 내년 여름에도 발걸음을 하여
여름의 제국주의(帝國主義)에 대항하며 다시금 신선놀이를 즐기고 싶다. 얼음골과 인연이 다시
닿는다면 얼음골과 쌍벽을 이루는 절경, 호박소계곡도 같이 겯드리고 싶다. 너무 욕심이 많은
건가..?

※ 밀양 얼음골(천황사) 찾아가기 (2011년 7월 기준)
① 열차로 밀양까지
* 서울역, 광명역, 수원역, 대전역, 동대구역에서 밀양 경유 경부선 열차 이용 (고속전철 이용
시 밀양 경유 확인)
* 부산역에서 경부선 상행 열차 이용 (10~20분 간격)
* 밀양역에서 교동행 1,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밀양터미널 하차
② 버스로 밀양까지
* 부산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직통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마산에서 밀양행 직행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다닌다.
* 대구남부정류장과 경산에서 1~2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 울산에서 얼음골 경유 밀양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있다.
* 밀양터미널에서 얼음골행 직행버스가 1일 14회 다니며, 시내버스는 1일 3회(6:10, 9:35, 15:
30) 떠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 있음)
① 경부고속도로 → 언양나들목 → 밀양 방면 24번 국도 → 석남터널 → 남명리 → 얼음골
② 대구~부산고속도로 → 밀양나들목 → 울산 방면 24번 국도 → 산내면 → 남명리 → 얼음골

★ 얼음골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000원 / 어린이와 중고생 500원 / 주차비 1,000~3,000원
* 얼음골 아래 계곡에서 취사가 가능하다.
* 빙혈은 천연기념물이므로 괜히 철책을 넘어 훼손하거나 얼음을 따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 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산95-1외 (☎ 055-356-1915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블로그는 1달까지, 원본
은 2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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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개일 - 2011년 7월 26일부터


Copyright (C) 201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경남 내륙 제일의 경승지 ~ 거창 수승대


' 거창 제일의 명승지, 수승대(搜勝臺) '
거창 수승대
▲ 수승대의 상징, 귀연암


부산 선배 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아침,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한다. 만나면 언젠가는
작별하는 이른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원칙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한 지붕 아래 같이 살아온 가족과 숙성이 진한 죽마고우(竹馬故友)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
는 생각에 사는 것이 참 부질없는 것 같다.

부산(釜山)의 북쪽 관문인 노포동으로 넘어와 바로 서울로 올라갈까 하다가 그냥 가면 무척 허전
할 것 같아서 어디로 갈까 머리를 굴린다. 아는 곳이 많다고는 하지만 딱히 정처를 찾지 못해 방
황하다가 우선 대구로 넘어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구로 가는 고속버스로 1시간 10분 만
에 동대구에 이른다.

대구에 이르니 옥포에 있는 용연사(龍淵寺)가 생각이 난다.그곳에 숨어들 요량으로 지하철로 대
곡역까지 갔으나 정작 절로 들어가는 버스 시간이 맞지가 않아 발이 단단히 묶이고 말았다. 아무
래도 인연이 아닌 듯 싶어 대구를 버리고 고령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고령에서도 두 다리를 부릴
마땅한 안식처를 찾지 못했다.간만에 지산동고분군을 찾아갈까도 했으나 감히 무더위에 맞서 오
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고령(高靈) 바로 옆 동네이자 92년 이래 오랫동안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거창으로 시야를 돌렸다.

고령터미널에서 거창(居昌)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가 손님이 없다고 여겼는지 속
된 말로 그냥 쌩까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아서 잡아탔다. 40분을 달려 도착한 거창에선 거열산성(
居烈山城) 일대와 수승대, 두 곳을 두고 무게를 재다가 수승대의 무게가 무거워 그곳으로 낙찰이
되었다.
거창읍에서 20~30분 간격으로 있는 위천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30여 분을 달려 수승대에 이
른다. 시골의 노령화가 심각함을 보여주듯, 버스 안은 일부를 빼고는 죄다 노공(老公)들이다.

수승대로 들어서려고 하니 주차장 길목에 주차료와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가 나타난다. 마침 매표
소를 지키던 공익은 오늘은 평일이니 그냥 들어가시라고 호의를 건넨다. 아주~ 기분 좋게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주차장과 황산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은 대부분 민박까지 겸하고 있는데, 평일이라
다들 한가하기만 하다. 마을을 벗어나니 수승대를 빚으며 보다 넓은 세상으로 흐르는 계곡, 위천
천(渭川川)이 나온다. 여기서 계곡을 건너 옛날 이곳을 찾은 선비처럼 여유롭게 수승대를 둘러본
다. 계곡 서쪽에 우거진 송림(松林)은 거의 원시림을 방불케하며,눈썰매장과 수영장, 보트장 등
몇 가지 위락시설이 자리해 있다.


▲ 위천천에 다리를 담군 현수교
수승대의 남해대교일까? 남해대교와 무척이나 닮았다.
휴일에는 사진을 찍은 보(洑)에서 다리까지 보트장으로 사용된다.

▲ 황산마을과 아름드리 은행나무 - 경남 보호수 12-00-38호
가운데 솟아난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년으로 높이가 32m, 둘레가 6m에 이른다.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500년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저렇게
어엿하게 성장했다. 이제는 나무가 은혜를 갚을 차례라 마을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며 정자나무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 계곡 너머로 보이는 황산마을(민박촌)
둑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집들이 간간히 고개를 내민다.


♠ 수승대로 들어서다

▲ 송림 속에 숨겨진 산책로를 거닐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솔내음의 달콤함에 취할 지경이다.

▲▼ 송림 산책로에서 바라본 수승대 계곡


▲ 계곡 너머로 수승대의 상징인 귀연암이 보인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수승대 계곡, 계곡 모래밭에 돗자리를 깔고 한숨 청하며,
속세에 찌든 두 다리를 물에 담구고 물장구도 치고 싶은 꿈속의 명승지이다.

◀ 하늘을 떠 다니던 구름도 수승대의
절경에 반했는지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 수승대를 바라보며 서 있는 요수정(樂水亭)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3호

노송의 물결이 넘치는 산책로를 2분 정도 거닐다보면 단촐한 모습의 기와집, 요수정이 나그네를
맞는다.
이 집은 수승대에 터전을 잡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 선생이 1542년에 별장으로 지은 것으로 풍
류를 즐기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처음에는 구연재와 척수대 사이에 있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세웠으나 또다시 수해로 떠내려 간 것을 1805년 후손(거창신씨)들이 지금
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정자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가득하여 운치가 가득 깃들여져 있으며, 따로 부속건물이나 담을 두
르지 않고 홀로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 요수정의 앞쪽

▲ 요수정에 걸려있는 현액(現額)


▲ 계곡 건너 귀연암에서 바라본 요수정

신발을 벗고 정자로 들어선다. 이제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아무도 살지 않는 빈껍데기 집이
지만 후손들의 관리가 지극정성인 듯, 거의 깨끗하고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기둥에 기
대어 서니 수승대의 절경이 두 눈에 거침없이 밀려와 눈이 그야말로 호강을 누린다. 자연과 동
화되어 살고자 했던 선비들의 마음가짐이 돋보이는 곳으로 자연에 크게 반(反)하지 않고 그 일
부로 자리한 요수정의 모습은 정말로 탐이 난다. 여건이 된다면 기꺼이 사들여 내 집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지나치기 아쉬운 요수정을 억지로 뒤로하며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수승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귀연암이 나온다. 여기서 수승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조물주가 오랜 세월 그려놓은 한 폭의 수채화, 선비들의 소풍 장소로 이름 높던
거창 수승대(搜勝臺) ~ 명승 53호

소백산맥이 지나가는 거창 고을에는 수많은 명승지가 아낌없이 서려있다. 그중에서 이번에 찾은
수승대는 가히 으뜸이라 할 만하다. 선비들이 경상도 제일의 동천(洞天)으로 치켜세운 안의삼동
(安義三洞)의 하나이자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에 박힌 수승대는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많은
선비와 문인(文人)들을 감동시킨 곳이다.

이곳은 백제(百濟)와 신라(新羅)가 서로 국경을 맞댄 곳으로 6세기 이후, 백제가 신라로 보낸
사신을 전별하던 곳이라 전한다. 동아시아 최대의 해양대국으로 번영을 누린 백제, 허나 554년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 참패 이후 졸지에 딱한 처지가 되버린다. 얼마나 우울했던지 신라가
우리 사신에게 해꼬지를 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곳에서 전별회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곡차 한
잔 걸치며 서로 부둥켜 안고 울지는 않았을까?
'부디 무사히 잘 갔다 오시오','내가 잘못되면 내 식솔을 부탁하오'
하면서 하염없이 많은 눈물
과 한탄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래서 근심걱정으로 사신을 보낸다는 뜻에서 수송
대(愁送臺)란 이
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속세의 근심을 잊을 만큼 빼어난 곳이란 의미로 불교와 연관
시키기도 한다.

조선 중종 시절에 이르러 요수 신권(樂水 愼權)이 이곳에 둥지를 트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지어 후학을 길렀고, 수송대의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이 일대를 구
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1543년(중종 37년)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안의현(함양군
안의면) 삼동에 놀러왔다가 인근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수송대의 이름을 듣고 찾아가려고
했다. 허나 조정일로 급히 상경하게 되면서 이곳에 오진 못하고, 대신 신권에게 이름이 별로라
며 음이 비슷한 수승대(搜勝臺)로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냈다. 이에 감동한 신
권은 바위에 수승대를 새김으로써 그때부터 수승대가 되었다.
그 이후 이곳은 선비들의 소풍지로 널리 명성을 날렸으며 선비들의 산수유람 문화가 담긴 명승
지로 2008년 문화재청 지정 명승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수승대는 귀연암을 중심으로 요수정과 관수루, 귀연서원 등의 옛 유적이 남아있으며, 소나무숲
과 계곡, 바위가 한데 어울린 경승지로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다. 또한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썰
매장, 야영장, 수영장, 야외극장을 설치했으며, 마을에는 식당과 민박집이 많다.
자연과 동화되어 살고자 했던 선비들의 마음가짐이 담긴 자연 명승지로 잠시 속세의 삶을 잊고
이곳에 발을 들여 머무는 것은 어떨까? 요수정 기둥에 기대어 바라본 수승대, 그리고 거북이를
닮은 귀연암의 자태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 수승대 찾아가기 (2011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승대행 직행버스가 1일 1회(15시 40분)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 서초동 남부터미널에서 거창 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 부산서부터미널, 대구서부정류장, 대전동부터미널, 전주, 김천, 남원에서 거창행 직행버스가
운행한다.
* 거창터미널을 나오면 강변도로가 나온다. 왼쪽으로 8분 정도 걸으면 읍내로 통하는 중앙교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 3~4분 정도 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거기서 수승대 방면 군내버
스가 2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버스표는 정류장에 있는 가게에서 구입 (막차는 19시 3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대전~통영고속도로 → 지곡나들목을 나와 안의 방면 → 안의 → 거창 방면 3번국도 → 마리
에서 좌회전 → 위천 → 수승대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거창나들목 → 거창읍 → 마리에서 우회전 → 위천 → 수승대

♠ 수승대 관람정보
* 입장료(여름 7~8월에만 징수함) - 어른 1,000원(단체 900원), 청소년/군인 700원(단체 600원)
, 어린이 500원(단체 400원) <단체는 30인 이상>
* 주차료 - 소형차 당일 3,000원, 대형차 당일 5,000원 (1박 이상은 배를 받음)
* 입장시간은 9시 ~ 18시 (겨울에는 9시 ~ 17시)
* 소재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890일대 (수승대 관리사무소 ☎ 055-940-8530,32)
* 수승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수승대의 상징 ~ 귀연암(龜淵岩)

귀연암은 거북이를 닮은 바위로 거북바위라고도 한다. 높이는 약 10m, 둘레만 해도 100m는 족히
넘어보이는 커다란 바위로 푸른 소나무와 계곡이 만든 푸른 소(沼), 주변에 널린 하얀 피부의
잘생긴 암반들이 한데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절벽을 이룬 바위 면에는 퇴계 선생이 신권에게 수승대로 이름을 바꿀 것을 권하는 시를 비롯하
여 이곳을 찾은 문인들의 시귀(詩句)로 가득하여 내가 한 글자 남길 공간조차 보이질 않는다.
그만큼 이곳의 절경이 지금은 가고 없는 그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
의 글씨가 바위면에 너무 빼곡하여 조금은 흉물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적당하면 좋을 것을 너무
지나쳐서 바위의 피부를 좀 괴롭힌 꼴이 된 것이다.

바위 정상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바위 주변은 하얀 암반들이 여기저기 누워 귀연암을 더
욱 돋보이게 만든다. 그야말로 돗자리 깔고 한숨 청하고 싶은 그런 곳이다. 평일이라 사람이 거
의 없는 이곳은 암반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졸졸졸~♪ 적막감을 깨트리곤 부리나케 하류로 줄
행랑 칠 뿐이다.


▲ 계곡 사이에 걸린 귀연교

덕유산에서 흘러온 위천은 귀연암에서 그 폭이 2m 남짓으로 현저히 줄어든다. 바로 그곳에 귀연
교란 돌다리가 유연하게 걸쳐져 있다. 계곡의 폭이 협소하고 돌이 많아 두 발로 충분히 건널 수
있으나, 건너기 버겨운 약자들을 배려하여 다리를 놓은 것이다. 예전에는 시멘트 다리가 흉물처
럼 있었으나 지금은 하얀 돌다리로 탈바꿈하여 주변 암반과 조화를 꾀했다.


▲ 거의 난공불락의 철옹성과 같은 귀연암의 뒷모습

귀연암 뒤쪽 부분에도 낙서가 가득하다. 바위 남쪽은 모래벌판과 자갈밭이 이어져 있으며, 바위
로 오르는 길이 나 있어 조심스레 오르면 된다.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칼로 다듬은 듯한 절벽
이라 오르기도 내리기도 불가능하다.
바위 정상에는 옥의 티처럼 콘크리트로 발라진 대(臺)가 있으며, 바위 서쪽면에는 신종선(慎宗
先)이란 커다란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신권의 후손으로 이곳에 정착한 신종선이란 사
람이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귀연암 꼭대기 서쪽 면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바위글씨 ~ 신종선(慎宗先)


▲ 귀연암 꼭대기

▲ 귀연암 꼭대기에서 바라본 수승대 북쪽

귀연암의 등껍데기 정상에 해당되는 콘크리트로 된 대(臺)에는 몇 개의 커다란 돌이 벤치처럼
누워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수승대 일대가 두 눈에 쏙 바라보여 조망도 시원하다. 이곳은 좀 더
높은 곳에 올라 수승대의 풍광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놀이터였던 모양이다. 돌에
걸터 앉아 곡차 1잔 마시며 계곡의 시원한 바람을 안주 삼아 시를 읊조리고, 밤에는 밤대로 달
놀이를 즐기며 곡차 1잔 걸치던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 수승대 한쪽에 마련된 귀연서원(龜淵書院)

▲ 귀연서원 사당

귀연암 부근에는 고색이 깃들여진 귀연서원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요수 신권을 비롯하여 성팽
년(成彭年), 신수이(慎守
)를 배향한 서원으로 1694년에 세워졌다. 서원의 이름은 신권이 지은
귀연서원에서 따왔다. 지금의 것은 흥선대원군 때 철거된 것을 근대에 다시 지은 것으로 서원
끝에는 그들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가운데에 교육을 하던 강당이 자리한 이른바 전학후묘(前學
後廟)의 형태이다.


▲ 귀연서원 강당

▲ 귀연서원 우측 담장 너머에 자리한
효자비와 열녀(烈女)비

▲ 귀연서원 뜰 좌측 가득메운 비석 4기


가을이 내려앉은 서원 강당 앞뜰 좌측에는 비석 4기가 키순서대로 서 있다. 제일 좌측에 산고수
장(山高水長)이라 쓰인 비석이 제일 높고 덩치가 큰데, 산고수장은 산이 높고 물이 길다는 뜻으
로 거창고을을 그야말로 한 마디로 표현한 단어이다. 비석들은 다들 귀연암을 닮은 거북이(귀부
)를 갖추고 있는데, 모두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 귀연서원의 정문인 관수루(觀水樓)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2호

귀연서원에서 제일 눈여겨 볼 것은 서원의 정문인 관수루이다. 얼핏보면 평범한 누각처럼 보이
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대로 개성이 넘치는 문루이다. 이 문루는 1740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
면 3칸, 측면 2탄의 누각이다. 커다란 바위 사이에 터를 닦아 지은 것으로 따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두지 않았다. 그 이유는 좌우로 경사가 낮은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딛고 누각으로 올라
서면 되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담장의 역할도 겸한다.


▲ 자연과 절묘히 조화를 이룬 관수루의 뒷모습 ~
누각 좌우에 비스듬히 누운 자연바위는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 관수루 우측에 커다란 바위와 근래 세운 비석

누각을 받치는 1층 기둥은 곧게 서지 못하고 다소 꼬부라져 있다. 바위를 타고 누각으로 오르는
것도 특이하지만 꼬부랑 기둥은 더욱 눈길을 잡아맨다. 바위를 손질하거나 옮기지 않고 있는 그
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며 그 사이에 문루를 지은 옛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 하겠다.


▲ 관수루 바위에 새겨진 바위글씨
요수신선생 ? 수동(樂水慎先生 ? 修洞)이라 쓰여있다. 여기서 요수 신선생은 요수 신권을
말한다.


▲ 가을 속을 거닐다 ~ 귀연서원에서 황산마을로 가는 둑방길


▲▼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수승대 둑방길
둑방길 가로수는 서서히 자신의 몸을 물들이며 단풍의 향연을 준비한다. 전통 흙담장으로
꾸며진 마을 담장은 벌써부터 추운건지 푸른 담쟁이덩굴 옷을 두텁게도 걸쳤다.

수승대에서 머문 시간이 대략 3시간 정도 되는 것 같다. 귀연암 꼭대기와 귀연암 건너편 암반에
걸터앉은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등을 돌리며 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수승대의 절경, 다음에
다시 온다면 곡차 1병과 시집(詩集) 하나 챙겨와서 옛 사람들을 따라해 보고 싶다.시를 짓는
실력은 아주 형편없으니(고등학교 시절에 제일 싫어했던 것이 시임) 시집에 나온 시나 열심히
읊조리련다.

수승대에서의 아쉬운 시간을 정리하며 속세로 나가기 위해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나온다. 정류장
에는 시간표가 걸려있는데 그 시간보다 5분 일찍 버스가 다가온다.그 차를 잡아타고 다시 거창
읍으로 나와 마음만은 수승대에 몇일 있으라 하고 몸뚱이만 우선 동서울로 가는 직행버스 막차
에 실어 보냈다. 이렇게 하여 수승대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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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2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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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1년 7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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