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포근히 감싸인 고을 ~ 산청 역사기행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남명조식유적)

 


' 지리산에 안긴 고을, 산청(山淸) 나들이 '
세심정에서 바라본 덕산마을
▲  세심정에서 바라본 덕산마을과 덕천강
시내 뒤쪽으로 보이는 산에 남명 조식 선생의 무덤이 있다.


가을이 슬슬 그 절정을 준비하던 10월 초, 지리산 동쪽에 안긴 산청(山淸)을 찾았다. 서울남부
터미널에서 진주로 가는 직행버스에 나를 실어 딱 3시간 15분 만에 산청과 진주 중간에 자리한
원지에 이른다. 원지(院旨)는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로 육중한 등산 배낭을 맨 등산객들
이 많이 내린다. 나도 지리산에 떡 안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으나 이미 갈 곳이 정해진 몸이라
마음 만 등산객들 배낭에 몰래 달아 지리산으로 보낸다.
원지에서 경호강을 건너면 단성면소재지가 있는 사월리가 나오는데 단성 시내를 벗어나면 산청
에 주요 명소인 목면시배유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문익점이 붓통에 목화를 숨기고 들어와 하얀 목화를 이 땅에 널리
보급시킨 목화의 성지(聖地) ~ 산청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地)
- 사적 108호

몽고에 사신으로 간 문익점(文益漸)이 붓통 속에 목화씨를 넣어 가지고 고향에서 목화를 재배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여 3살배기도 줄줄 외울 정도이다. 그의 목화재배는 이 땅의 의류복식사(
衣類服飾史)에 크나큰 혁명을 일으켰으며, 갈포나 삼베로 추운 겨울을 나야했던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따뜻한 무명옷과 그에 따른 수명 연장을 선물로 안겼다.

문익점(1329~1398)은 남평문씨로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1329년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
양마을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이곡(李穀)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김해부사
록(金海府司錄),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거쳐 1363년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몽고(원나라)에 갔다.

이때 몽고왕인 순제(順帝)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던 고려 여인 기황후(奇皇后)는 최유(崔濡),
김용(金鏞) 등과 공모해 눈에 가시같은 공민왕(恭愍王)을 제거하고 몽고에 머물던 충선왕(忠宣
王)의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들은 문익점에게 동조하길 권했으나
거절했다고 하며, 1364년 기황후가 덕흥군을 앞세워 고려를 공격하나 최영(崔瑩)에게 보기 좋게
깨진다.


▲  문인으로써의 패기가 돋보이는 문익점 선생의 영정
영정 앞에 하얀 덩어리는 바로 목화씨를 품고 있는 목화솜이다.

고려에게 패한 기황후는 뚜껑이 폭발한 나머지 문익점을 교지국(交趾國, 베트남)과 운남(雲南)
으로 귀양을 보냈다. 거기서 2년 가량 머물다가 1366년 귀양에서 풀려났는데, 탐스럽게 열린 목
화에 입맛을 다시며 몰래 가지고 갈 방법을 연구했다. 당시 목화는 외국으로 반출이 금지된 금
수품(禁輸品)으로 잘못 걸리면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허나 밭을 지키는 노인의 제지를 뿌리치
고 목화씨를 몇 송이 따서 붓통에 넣어 귀국길에 오른다. 몽고 입장에서는 그는 얄미운 산업스
파이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문익점을 크게 추앙하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이야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6월 13일자 기록에는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씨 10여 개를 따서 주
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되어있으며, 태종 1년 윤 3월 1일자에는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가지고 왔다~~'란 구절이 있다. 그러니까 가져온 씨앗 수만 다를 뿐, 붓통에 감추어 귀국했다
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인 산청으로 내려와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고향마을인 배
양마을에서 목화를 재배했다. 허나 씨앗만 가져왔지 재배기술을 알지 못해 겨우 1그루만 살았다
고 하며 3년 동안 열심히 재배에 기울여 드디어 재배에 성공했다. 또한 고려에 머물던 몽고 승
려 홍원(弘願)을 달달볶아 목화씨를 빼서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방법을 터득해 마을 주
민에게 가르쳤고, 10년도 안되어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의복은 삼베옷에
서 따뜻한 무명으로 대폭 업그레이드 된다.

1375년(우왕 1년) 목화 보급의 공으로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되었으며, 1389년(창왕 1년) 좌간
의대부를 지냈다. 허나 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성계 패거리가 추진하려는 사전(私田) 개혁을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문을 닫아걸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며 왕이 친히 사람을 보내 벼슬을 권해도 거절했다. 그러다가 1398년 69세의 나이
로 고려 충신의 한사람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이후 1440년 세종은 그에게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추증했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목화의 가공법은 그의 손자인 문래의 창안이라고도 하고 장인인 정천익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
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목화의 전래와 재배, 가공 등에 관한 내용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실려 있다.


▲  목화기념관 좌측에 자리한 재실(齋室)

이곳 목면시배유지는 사위와 장인인 문익점과 정천익이 힘들여 심고 가꾼 아름다운 현장으로 바
로 인근에 문익점의 고향 배양마을은 우리나라 목화의 성지답게 700년 넘게 목화를 재배하며 문
익점의 숭고한 뜻을 기린다. 그래서 세상은 이곳을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 재배지로 추앙하고 있
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가 목화를 가져오기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목화와 그 비슷한
것을 재배하고 그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하지만 널리 보급은 안된 듯 싶으며, 왕족과 귀
족, 부자들만 주로 입다가 문익점을 통해 전국으로 퍼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배지(始培地)가 아
닌 목화를 널리 퍼트린 목화의 성지로 보면 될 듯 싶다.

예전에는 문익점 선생의 효자비(孝子碑)와 함께 단성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가에 있었으나 그
주변을 정화하여 목화전시관을 만들었다. 전시관을 세우고 정화사업을 벌인 것까지는 좋으나 그
걸 구실로 소정의 입장료까지 받아먹고 있다.
전시관은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전시실은 면화의 역사와 물레, 무명이 되기까지
의 과정을 담았고, 제2전시실은 무명으로 만든 우리 고유 의상이 전시되어 있다. 허나 높은(?)
입장료에 비해 솔직히 볼게 없고 썰렁하기 그지없다. 매표소는 전시관 내부에 자리해 있으며,
목면시배지만 보려고 해도 무조건 돈을 내야된다. 야외에는 목면시배지를 비롯하여 효자비와 사
적비, 재실 등이 있으며 동물을 기르는 사육장이 한켠에 자리해 있다.

※ 산청 목면시배유지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원지 경유 진주행 직행버스가 2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원지에서 묵곡으
  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배양에서 내리면 바로 목면시배유지이다. 또는 원지에서 대원사/중
  산리 방면 직행버스(30분 간격)를 타고 단성에서 내려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13분 도보
  (또는 원지에서 35분 도보나 택시 이용)
* 부산서부터미널과 진주에서 대원사, 중산리행 직행버스를 타고 단성에서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바로 우회전하면 목면시배유지이다.
② 진주 → 산청방면 3번 국도 → 원지 → 다리를 건너 단성 시내로 진입 → 단성나들목 입구에
   서 직진 → 목면시배유지


▲  삼우당문익점선생 목화시배사적비

★ 목면시배유지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000원(20인 이상 단체 800
  원), 군인/청소년 600원, 어린이 500원
*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목화로 887) <☎ 055-973-2445>


▲  목면시배유지 정문

좌/우문이 시원스레 뚫린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늘씬한 크기의 목화시배사적비가 나그네를
반긴다. 정문의 가운데 문은 제사나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늘 닫아건다.
사적비와 눈인사를 나누고 왼쪽으로 길을 꺾으면 바로 목화전시관이 나온다. 목면시배유지는 전
시관의 바깥부분을 꼭 거쳐가야 되는데, 전시관 정문에는 별로 반갑지도 않은 매표소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며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니 울며 겨자먹고 토하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르고 안으로 들어선다.

전시관에서 다루는 것들 태반은 목화와 관련된 것들로 디오라마와 복제품이 주를 이루며 오래된
유물은 없다. 다만 목화를 실제로 본적이 없는 나를 비롯한 나그네들에게 목화에 대한 여러 정
보와 경험을 제공한다. 허나 그 외에는 그리 내세울 것은 없다.


▲  목화 뿌리

▲  목화에서 무명을 빼는 모습

▲  그치말기

▲  베짜기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옷이 만들어지기까지도 많은 과정과 숙성을 거친다.
우리 옛 여인의 고운 손길과 정성을 거쳐 태어난 무명옷은 옛 사람들을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부터 따뜻하게 보호해 주었다.

▲  디오라마로 다시 태어난 옛 사람들
단란한 한 가족을 보듯 다들 무명옷을 걸치고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한다.

▲  재실 툇마루를 가득 뒤덮은 목화솜
하얀 덩어리가 무엇인가 했더만 바로 목화솜이다. 저들 솜은 인공이 아닌
자연산으로 목화씨를 품으며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다. 문익점이 몽고에
머물 때 목화밭에 펼쳐진 목화에 군침을 흘리며 가져온
그의 심정이 십분이해가 간다.

▲  우리나라 목화의 성지 ~ 목면시배유지
문익점의 뜻을 받들며 오늘날도 꾸준히 목화를 재배한다.

▲  목화씨앗을 잉태하며 복스럽게 열린 목화솜

숭고한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선물, 목화를 처음으로 보고 만져본다. 목화솜에 대한 첫인상
은 놀라움과 신기함의 연속으로 인공솜과 같은 하얀 솜이 자연 생성된다는 것에 자연 앞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정도이다. 실제 솜처럼 촉감도 좋고 무척 따뜻하며, 그 모습이 마치 눈송이가 가
지에 걸린 듯 하다. 목화에는 조그만 가시가 있으므로 솜을 만지거나 딸 때 주의하기 바란다.


▲  삼우당효자비(三憂堂 孝子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  비각 안에 놓여진 효자비
큼지막한 글씨로 효자리(
孝子里)로 쓰여있다.
(문화재청 사진 참조)

목면시배유지 좌측을 담에 둘러쌓인 조그만 비
각(碑閣)이 있다. 바로 문익점의 효행을 기리고
자 세운 효자비이다.
그는 목화를 가지고 돌아온 후, 어머니가 세상
을 떠나자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
묘살이를 하였다. 그 당시 남부지방은 왜구(倭
寇)의 노략질이 극심하여 다들 피난가기가 바뻤
는데, 유독 그만은 어미의 무덤을 바짝 지켰다.
마침 왜구가 이곳에 들이닥쳤는데, 아무리 미개
한 왜구패거리라도 그의 효행에는 적지 않게 감
동을 먹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표식을 세우고 돌아갔
는데, 그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그후 1383년 고려 정부는 그의 효행을 기리고자
효자비를 내렸으며,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里
)라 하였다. 비각은 1563년에 씌운 것이다.

비각 안에 자리한 비석은 낮은 사각 받침돌 위
로 비신(碑身)을 세운 모습으로, 비신의 윗변은
살짝 둥글게 다듬었다.
 


♠  조선 후기 서원, 상해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현판으로 가득한
배산서원(培山書院)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1호

목면시배유지를 둘러보고 다시 단성으로 발길을 돌리면 문익점 선생의 고향인 배양마을이 나온
다. 마을의 북쪽 산자락으로 붉은 색의 홍살문과 함께 고색이 깃들인 기와집들이 떼거지로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이 바로 배산서원이다. 목면시배유지와 지척이고 문익점 선생의 고향이라 그를
배향(配享)한 서원으로 오해하기 쉽겠으나 실상은 다르다.

이 서원은 부근 신안면에 있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조선 정부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자 그곳
에 배향된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과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를 따로 모시고자 1771년(영조
47년)에 지은 것이다.
처음 이름은 덕연사(德淵祠)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었으며, 1919년 합천
이씨의 대표인 진암 이병헌(眞菴 李炳憲)이 유교의 복원을 위해 서원 복원을 제의하여 문묘(文
廟)와 도동사(道東祠), 강당(講堂)을 짓고 이름을 배산서당(培山書堂)이라 했다. 이때 중국 곡
부(曲阜)의 연성공부(衍聖公府)의 협조를 얻어 그곳에서 공자(孔子)의 진영(眞影)을 가져와 문
묘에 배향했다.
도동사에는 청량당 이원과 친분이 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죽각(
竹閣)을 배향하고 있다. 특히 강당에는 중국에 유명한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가이자 공양학자
(公洋學者)인 강유위(康有爲)의 자필로 된 배산서당 현판(縣板)이 있고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
政府)의 주요 인물인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과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營), 우천 조완구(藕
泉 趙琬九).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 선생의 배산서당 낙성축문(落成祝文)이 현판으로 남아있
어 보기와 달리 꽤 유서가 깊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5량가구조(五樑架構造)이며 왜정 때 지어진 제법 휼륭
한 한옥 건축으로 손꼽힌다. 문묘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익공식(翼拱式)이며 서당으로
지어질 당시 유교의 부흥을 염원한 유림(儒林)의 소망으로 1개도 아닌 2개의 사당(祠堂)을 갖추
어 이곳만의 큰 특징을 보여준다. 매년 봄 3월 상해일(上亥日)에 유림들이 춘향(春享)을 올린다.

※ 배산서원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단성까지 교통편은 앞에 목면시배유지를 참조.
* 단성정류장에서 목면시배유지 방면으로 12분 가량 걸으면 단성나들목 입구 못미쳐 길 오른쪽
  으로 배양마을이 있는데, 그 뒤쪽 산자락에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서원 앞 도로에 주차하면 됨)
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배양마을(배산서원)
② 진주 → 산청방면 3번국도 → 원지 → 다리를 건너 단성 시내로 진입 → 배양마을(배산서원)
*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544-3


▲  공자왈 맹자왈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배산서원의 강당(講堂)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색은 있지만 낡고 허름한 서원의 모습이 커다랗게 다가선다. 엄숙을 요구
하는 홍살문을 지나 태극마크가 새겨진 솟을대문 앞에 이른다. 서원 문은 분명 잠겨있겠지 싶어
대문을 밀어보니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활짝 정도는 아니지만 1명이 들어갈 정도로
문틈이 생기면서 문 뒤에 가려진 서원의 속살이 가을햇살에 비춰 나에게 다가온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교육 공간인 강당이다. 강당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백범 김구 등의 상해임
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낙성축문이 현판으로 소중히 남아있으며, 중국의 변법자강 운동가
인 강유위가 쓴 '배산서당'의 현판이 걸려있어 서원에 대한 상해임시정부 지사들과 중국유학자
들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허나 지금은 잠시 들린 가을 바람만이 맴돌 뿐, 정적만이 감싸고
돈다. 섬돌은 신발이 가득 놓였던 옛 시절을 그리워한 채, 먼지에 뒤덮여 세월을 원망하며, 툇
마루 역시 먼지와 한몸이 된지 오래다. 강당 앞뜰에는 운치가 서린 소나무가 강당의 허전함을
약간이나마 달래준다.

▲  서원 중간에 자리한 도동사(道東祠)

▲  서원 꼭대기에 자리한 문묘(文廟)

강당 옆구리로 뒤로 가면 문묘와 도동사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 삼문(
三門)을 지나면 맞배지붕의 도동사(道東祠)가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나그네를 맞는다. 도동사는
청량당 이원과 친분이 있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의 죽각(竹閣)을 배향하고 있으며, 늘
굳게 닫혀 강당과 달리 폐쇄적인 인상을 자아낸다.

도동사 옆구리로 뒤쪽으로 가면 문묘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문묘가 서원 경내와 배양마을을 굽어보며 자리한다. 서원에서 제일 중요한 건
물로 중국에서 보낸 공자의 진영이 들어있다. 서원은 유교의 학당이라 공자나 맹자 등의 성현을
봉안한 건물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보통 서원이나 향교 제일 높은 곳 또는 제일 뒤쪽에
그들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문묘는 도동사와 비슷한 크기이며, 그 뒤로 푸른 대나무들이 가득하여 왜정 시절 서원을 세우고
유교의 부흥과 나라의 광복을 열망한 유학자와 애국지사들의 청청한 정신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단성 일대의 주요 명소 2곳을 둘러보았다. 목면시배유지만 생각하고 온 터라 배산
서원의 존재는 미처 생각치도 못했지. 의외의 수확물을 거두고 단성에서 덕산으로 들어가는 직
행버스를 타고 지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덕산으로 이동했다.

덕산은 시천면의 중심지답게 마을이 제법 형성되어 있다. 터미널 남쪽으로 넓직한 시장이 형성
되어 나온 온갖 물품들이 선보이고 있으며, 시내 남쪽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넓은 세
상을 향해 조용히 자신의 갈 길을 재촉한다.

내가 덕산을 찾은 것은 산청을 빛낸 대학자 남명 조식의 유적지를 보고자 함이다. 덕산 서쪽인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고, 동쪽 사리에는 산천재와 별묘, 그의 묘소가 자리해 있다. 
(이들은 '산청 조식 유적'이란 이름으로 사적 305호로 지정됨)


♠  남명 조식을 기리고자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89호

▲  덕천서원의 본당인 경의당(敬義堂)

▲  수업재(修業齋)

▲  진덕재(眞德齋)

덕산에서 중산리 방면으로 1km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남명 조식을 배향한 덕천서원이 나온다.
이 서원은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1576년에 유림들이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2년
다시 지었다.
1609년 조선 정부는 조식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덕천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내리면서
서원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래서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더불어
삼산서원(三山書院, 산자 돌림의 3개의 서원)의 하나로 정조 때 영상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이
이곳 원장을 지내는 등, 적지 않은 명성을 누렸다. 허나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사업으
로 문을 닫았으며, 지금의 서원은 1926년에 재건된 것이다.


▲  덕천서원 은행나무

서원 앞에는 차디찬 인상의 붉은 홍살문이 이곳
을 찾은 이들에게 엄숙을 요구하고, 홍살문과
서원으로 들어서는 외삼문(外三門) 사이에는 가
을옷을 걸친 은행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위엄을
부린다. 유교와 관련된 서원과 향교에는 꼭 은
행나무가 있기 마련인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연을 했다는 행단(杏壇)을 상징한다.
가을도 남명의 학식을 흠모했는지 서원 앞에 아
름다운 작품을 빚어놓아 그 마음을 표현한다.
장대한 세월과 서원 사람들의 보살핌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으며 어엿하게 자란 이 나무는 나이
가 무려 400년에 이르러 거의 서원의 역사가 담
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살문 건너편에는 단아한 모습의 이름도 어여
쁜 조그만 정자,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서원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주역의 '성인세심(
聖人洗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취성정(醉醒
亭), 풍영정(風詠亭) 등의 풍류적인 이름도 가
지고 있으며, 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바로 밑
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흐른다.

지금은 정자 앞에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서원과 별개인 듯 보이나 실은 서원의 엄연한 일부이다.
마음을 씻고 닦는다는 정자의 이름처럼 유생들은 정자에서 시를 지으며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시
원한 바람에 번잡한 마음을 맡겼을 것이다. 산에 걸쳐진 달을 벗삼아 곡차(穀茶) 1잔 즐기고 머
리를 식혔을 세심정은 정자 앞으로 뚫린 신작로로 수레들이 1분이 멀다하고 굉음을 뿜으며 지나
가니 옛날의 운치는 아쉽게도 많이 사라졌다. 아무리 도로를 뚫더라도 그런 것은 좀 감안하여
강 건너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참 아쉽다. 정자에선 수풀 사이로 덕천강이 바라
보이며, 덕산 시내와 주변 풍경이 아낌없이 두 눈에 다가온다.


▲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 세심정

▲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한
세심정 현판의 위엄

▲  서원 홍살문과 외삼문 ~ 이곳 홍살문에는
태극마크가 달려있지 않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덕천서원 내부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
는 서원의 본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우측에는 수업재가 좌측으로 진덕재가 자리해 있다.
수업재와 진덕재는 서원 유생들의 숙식공간으로 잘나가던 옛 시절에는 섬돌에 그들의 신발이 가
득 널렸을 것이고, 방에는 그들의 온기로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먼지가 입혀진 섬돌과 툇마루가
옛날을 그리워할 뿐이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뒷전으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
쓸해 보인다.

남명의 학문은 크게 경(敬)와 의(義)로 집약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
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있게 실천하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서원의 본
당도 거기서 이름을 취해 경의당이라 했다.
이 건물은 유생들의 학습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모서리로 날
씬한 기둥 4개를 설치하여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아마도 배흘림 기둥인듯 하다. 유생들의 창랑
한 글 읽는 소리로 떠들썩했을 경의당에는 바람의 소리만이 내 귀에 작게 속삭일 뿐이다.

▲  경의당 천정에 달린 현판

▲  서원 제일 끝에 자리한 숭덕사(崇德祠)

경의당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내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남명을 배향(配享)
한 사당, 숭덕사가 의연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선다. 서원 제일 뒤쪽에 자리한 숭덕사는 서원에
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곳의 존재의 이유가 바로 남명을 배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덕사 양쪽 벽에는 절의 불전(佛殿)처럼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잡아맨다. 우측 벽에는 호
랑이가 나무 아래서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좌측 벽에는 푸른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용은 아마도 조정에 진출하여 출세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 하며, 호랑이 역시 비
슷한 의미를 지닌 듯 하다. 입을 벌려 으르렁거리고 있다지만, 그다지 무서운 모습은 아니며 마
치 고양이가 열심히 야옹거리는 모습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  숭덕사 우측 벽에 그려진 호랑이

▲  숭덕사 좌측 벽에 그려진 푸른 용

※ 덕천서원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원지까지는 앞에 산청 목면시배유지 참조, 원지에서 중산리/대원사행 직행버스를 타고 덕산에
  서 하차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덕산행(중산리/대원사 방면) 직행버스가 1일 7회 떠나며, 진주에서는 중
  산리/대원사행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다닌다. 덕산에서 하차하여 중산리 방면으로 도보
  12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서원 앞 길가에 주차)
① 대전~통영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중산리 방면 20번 국도 → 덕산 → 원
   리교를 건너 직진 → 덕천서원 
② 진주 → 산청 방면 3번 국도 → 원지에서 중산리 방면 → 덕산 → 원리교를 건너 직진 → 덕
   천서원

★ 덕천서원 관람정보
* 관람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대략 9시부터 18시까지이다.
* 지리산둘레길 9코스(덕산~위태,상촌)가 덕천서원 동쪽 천평교를 지나간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  남명 조식 묘소 (산청 조식 유적) - 사적 305호

▲  남명 묘역으로 오르는 길 ~ 남명 선생의 드높은 의기(義氣)를 상징하듯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들이 선사하는 솔내음에 정신이 싹 맑아지는 것 같다.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다시 덕산으로 나와 단성 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남명의 묘소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의 안내로 잘 닦여진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남명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묘역은 특이하게도 산비탈에 높다랗게 석축(石築)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무덤을 쓴 형태로
마치 돌로 쌓은 조그만 성곽을 보는 듯 하다. 무덤 주변에는 얕게 돌담을 둘렀는데, 그 모습이
현무암으로 묘역을 두른 제주도의 무덤을 보는 듯 하다.


▲  남명 묘역으로 가는 도중에 바라본 지리산의 동쪽 줄기 ~
저 산은 지리산이 아닌 구곡봉(961m)이다. 산 아래로 덕산 시내가 포근히 다가온다.

▲  성처럼 쌓여진 석축 위에 자리를 닦은 남명의 묘역

석축 위에 마련된 묘역에는 남명과 그의 숙부인(淑夫人) 은진송씨의 묘소가 있다. 숙부인의 무
덤은 묘역 아랫쪽에 있으며, 가장 위쪽에 남명의 유택(幽宅)이 자리한다. 묘자리는 남명이 직접
정한 것으로 전해지며, 대곡 성운(大谷 成運)이 지은 묘갈명(墓碣銘)가 있다.
무덤의 봉분(封墳)은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며, 무덤 주변을 장식한 석물도 망주석(望
柱石) 2기와 비석, 상석(床石) 등 기본적인 것이 전부로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남명 선생의 일생을 짚어보도록 하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창녕 조씨로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
다.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조언형(曺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 이씨(인주
이씨)이다.
조식의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으로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
자 그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림파(士林派)가 대거
숙청을 당하고 그의 숙부까지 이에 연류되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는 잘못된 정치의 폐단에 회
의를 느낀다.

30살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가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힘쓰면서 제자
를 길렀다. 48살에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사림파를 이끄는 지도자로 크게 명성을 얻었다. 조정에선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았
고, 55살에 단성소(丹城疏)를 올려 조정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리고 1561년 산청 덕산으로 들어
와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후진을 양성했다.

그의 교육철학은 개인의 자질에 따라 가르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그것을 자기 것
으로 만드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기존의 고리타분한 유학자와 달리 학문의 실천과 학문과 삶이
일치되야 함을 강조했으며,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궁마(弓馬) 등 다
양한 학문을 가르치고 또한 열심히 배울 것을 권했다.
선조(宣祖) 임금은 그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68세에 무진봉사(戊辰
封事)를 올려 정치의 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한평생 선비의 삶을 지키며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다가 71세인 1572년 2월 8일 산천재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부고를 들은 선조는 크게 애통해하며 자신을 소자(小子)라 칭하고 그에게 '인자한 나라의
큰 어른'이라 칭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은
그에게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남명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되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위민정치를 강조하였다. 그
의 문하에서는 정말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정탁(鄭琢)과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등
은 남명의 학덕을 계승하여 그들만의 학파를 이루어 사림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곽재우(郭再
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등 50여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니 이는
남명의 정신을 충실히 이어받은 결과이다. 그의 학문과 정신이 유학의 중심이 되면 참 좋으련만
조선의 위정자와 유학자들은 전혀 그러지를 못했고 그저 쓰잘데기 없는 괘변 논쟁이나 일삼으며
나라와 백성, 국방을 소홀히하다 결국 나라를 말아먹고 만다.


▲  묘역 아랫쪽에 자리한 숙부인 은진송씨의 묘역

▲  남명 묘역 밑에 서 있는 비석들
이들은 모두 남명 선생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  남명 묘역 좌측 밑에 담장이 둘러진 공터
가 있다. 상석이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 공간인 듯 싶다.


▲  조촐한 모습의 남명 선생의 무덤
무덤 곁에 귀부와 지붕돌을 갖춘 비석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며,
망주석은 540년 세월의 때로 꽤 얼룩해졌다.

▲  남명 선생 무덤 뒤쪽에서 바라본 천하
저 아래로 사리마을과 시천~단성간 우회국도(지리산대로)가 보인다.

◀  남명 선생 무덤 앞에 세워진 묘비
무거운 빗돌을 받쳐든 귀부는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에 웃음이
만연하다.


♠  남명기념관

▲  남명기념관

▲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남명 선생 신도비(神道碑)

▲  기념관 우측으로 정겹고 아늑한
돌담길이 늘어져 있다.

남명 묘역을 둘러보고 아까와 달리 조그만 산길을 타고 내려가면 담장으로 몸을 두룬 남명기념
관이 나온다. 이 기념관은 그의 유물을 보존하고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500주년(
2001년)에 설립이 추진되어 2004년에 문을 열었다.
남명 선생과 관련된 유물들을 한 자리에 모았으며, 그의 서책과 유품, 덕천서원과 산천재 관련
서적들이 아낌없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서는 전시 유물 중 극히 일부만 소개한다.
*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쉬며, 관람료 없음)


▲  남명 선생이 늘 달고 다녔다는 성성자(惺惺子) 방울

남명은 2개로 된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그 이름을 성성자라 했다. 여기서 성
(惺)은 깨닫는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방울소리가 날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 학문
에 전념했다고 한다. 저 성성자는 근래 복원된 것이다.


▲  남명 선생이 역시 늘 지니고 다닌 경의검(敬義劍)
칼에는 그의 사상인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가 새겨져 있다.
저 칼도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  남명 선생의 철학이 담긴 신명사도(神明舍圖)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에서 성곽의 안쪽은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며, 신체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나타낸다.
남명은 사람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나타낸 것은 신체 외부에서 마음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된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신명사도의 내용을 생활화하려고 했으며, 그가 합천에서 지은 뇌룡전은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다.


▲  사성현유상병풍(四聖賢遺像屛風)
남명 선생이 직접 그린 병풍으로 공자(孔子), 주렴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주자(朱子)의 유상병풍이다.

▲  광해군이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을
 영의정으로 삼는다는 교지(敎旨)
 여기서 만력 46년은 1618년으로 명나라 신종
(神宗)의 연호이다.

▲  남명기념관 가운데에 자리한
남명 선생의 영정
선비의 지조와 스승의 인품이 느껴지는 그의
영정은 상상에 의지하여 그려진 것이다.

▲  덕천원생록(德川院生錄)
덕천서원을 찾은 원생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  남명 선생의 상소문과 여러 문서를 정리하여 담은 서적들


♠  남명 조식의 별묘(別廟)와 산천재(山天齋) - 사적 305호

남명기념관 좌측에는 남명 선생의 별묘가 있다. 별묘는 집안 조상에게 제를 올리는 가묘(家廟)로
창녕조씨 문중에서 해마다 제례를 올린다.


▲  남명 선생과 그의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가 모셔진 여재실(如在室)

▲  남명기념관과 별묘 정문인 성성문

▲  선조가 남명의 죽음에 크게 애통해하며
보낸 사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담은
비석으로 산천재 입구에 있다.


▲  산천재(山天齋)

남명기념관 남쪽 국도 너머에 자리한 산천재는 남명이 1561년에 이곳에 들어와 지은 것으로 정
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규모는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을 정도
로 조촐하다.
남명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열심히 후학을 양성했는데, 여기서 무려 100여 명의 인재가 배
출되었다. 그들은 남명의 학풍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을 이루었고, 곽재우 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건물 주변에는 붉은 소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수목이 운치를 자아내며, 건물 앞에는 덕천강이 유
유자적 흐른다. 건물 기와에서 1576년과 1597년에 만든 것들이 보여 1576년과 보수를 하고 임진
왜란 때 불탄 것을 1597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  산천재 좌측에 있는 건물로 제자들이
머물던 숙소이다.

▲  남명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藏板閣)

산천재 좌측에는 아담한 건물 2채가 있는데, 앞쪽은 제자들의 숙소이다. 그 뒤로는 정면과 측면
이 1칸인 손바닥만한 건물이 있는데, 남명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이다. 그의 문집은 1604
년 해인사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여러 차례 업데이트를 거쳤다.
이곳에 보관된 문집은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64호로 보관을 위해 굳게 입을 봉했다. 허나 문집
상당수는 아마도 남명기념관에 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보관하는게 더 도난의 위험이 적기 때문
이다. 이렇게 하여 문익점과 남명 조식을 테마로 한 산청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산청 조식 유적(산천재, 남명기념관, 남명 묘소)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덕산까지 교통편과 차량 접근법은 앞에 덕천서원 참조, 원지에서 덕산행 직행버스를 타고 들
  어갈 때 사리에서 내리면 바로 산천재, 남명기념관이 있으며, 묘소는 기념관 우측으로 올라가
  는 산길이 있다.

★ 관람정보
* 관람료는 없으며 남명기념관 외에는 휴관이 없다.
* 매년 10월에는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남명선비문화축제가 열린다. 축제기간은 2일 정도로 남
  명 제례와 의병출정식, 전국한시백일장, 학생풍물경연대회, 학생백일장, 선비체험, 민속놀이
  경연대회, 마당극, 국악 공연 등이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 남명선비문화축제 문의는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055-748-9147~8 (☞ 홈페이지 가기)>
* 지리산둘레길 8코스(운리~덕산)가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지나간다.
* 산천재, 남명기념관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72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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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9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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