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곰절이란 애칭을 가진 창원 불모산 성주사

 


' 한여름의 산사 나들이 ~
창원 불모산 성주사(聖住寺) '
창원 불모산 성주사
▲  영산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과 불모산

 


여름의 제국이 한참 위엄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창원(昌原) 제일의 고찰, 성주사를
찾았다. 원래 창원도 그렇고 성주사도 갈 계획이 없었으나 어찌어찌하여 그곳까지 흘러들어가
게 되었다. 창원에 오랜만에 발을 들이니 2001년에 가봤던 성주사 생각이 불끈 솟아나 미련없
이 그곳으로 길을 향했다.

마산터미널에 이르러 창원시내버스 115번(평성마을↔성주동)을 타고 시내를 가로질러 시내 동
쪽 변방인 성주동 두산인프라 종점(안민터널4거리 직전)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성주사까진 불모산의 물을 꾸역꾸역 먹고 사는 진해저수지를 지나 불모산 자락으로 올
라가야 되는데, 수레로 가면 금방 가지만 두 발에 의지해서 가려면 족히 40분은 걸린다. 창원
도심과 가까운 절이고 창원의 꿀단지 같은 곳이라 거의 1~2분 간격으로 수레가 굉음을 울리며,
내 곁을 지나갔으며, 진해저수지 직전은 경사도 각박하여 뚜벅이의 진을 거진 빼놓는다. 허나
자존심과 불만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깊은 산주름에 묻힌 성주사가 가슴을 피며 모
습을 비춘다.


▲  성주사 1번째 주차장에 있는 '불모산 성주사' 표석의 위엄


♠  성주사 용화전(龍華殿), 마야원(摩耶園) 주변

▲  지금은 추억이 되버린 궁색한 모습의 용화전

성주사 1번째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성주사로 통하지만 왼쪽은
사람을 위한 숲길이고, 오른쪽은 2번째 주차장으로 인도하는 수레를 위한 길이다. 수레의 눈치
와 핍박이 싫다면 숲길로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숲길을 거닐면 담장에 둘러싸인 작고도 허름한 용화전을 만나게 된다. 얼마
나 건물이 궁색한지 깨지거나 부실한 기와들이 많고, 지붕 한복판에 풀까지 자라나고 있다. 게
다가 용화전에 안긴 석불도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었는지 자물쇠로 봉해둔 철창 안에 갇힌
고독한 처지라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물론 석불이 오래된 보물이라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茶
飯事)처럼 터지는 이 땅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한 필요악이긴 해도 저건 좀 너무했다. 무
슨 죄수도 아니고 말이다. 허나 다행히도 근래에 경내 명부전 뒷쪽에 새 용화전을 마련해 그곳
으로 자리를 옮겼다. 늦게나마 처우개선이 이루어진 셈이다. (기존 용화전은 철거됨)


▲  성주사 관음보살입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335호

용화전의 주인장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 한
다. 고려 때 조성된 석불로 키는 약 148cm인데,
당시 석불 치고는 작은 편이다. 몸 뒤에는 길다
란 광배(光背)를 달고 있으며, 발 밑에는 대좌(
臺座)도 갖추고 있다. 이들을 관음보살과 함께
하나의 돌로 만들어 돋음새김으로 새겼지만, 장
대한 세월 앞에 이리저리 치여 마모가 심하다.

용화전에 궁색하게 자리한 그는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인근에 진해저수지를 만들 때
발견되는데, 가까운 이곳으로 옮겨와 성주사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용화전이란 건물 명칭은
그가 관음보살이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허나
건물이 절집이라기보다는 시골마을 당집 같은 소
박한 분위기이다.
석불의 형태를 보면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
고 있으며, 얼굴은 원만하고 목에는 목걸이가 새
겨져 있다. 둥근 어깨와 굵은 곡선으로 새겨진 '
U'자형의 옷 주름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지만 상
체에 비해 하체가 짧아 신체비례가 다소 떨어진
다.

◀  용화전 우측의 부도군(浮屠群)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한 다양한 부도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성주사 가는 숲길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바람이 여름 제국의 부산물(땀)을 말끔히 털어주고
녹음이 깃든 숲길의 아름다움에 중생의 마음도 앞다투어 녹는다.

▲  마야원(2층)과 고란야(1층)

용화전과 숲길을 지나면 길은 왼쪽으로 90도 꺾이면서 담장에 가려진 경내 외곽이 조금씩 모습
을 비추기 시작한다.
꺾이는 지점에서 그대로 직진하면 기와집이 하나 나오는데, 그 집은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마야
원이다. 이 건물은 2003년에 지어진 것으로 겉으로 보면 1층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2층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으며, 밑층에는 고란야(皐蘭野)란 전통 찻집이 있다. 찻집 뜨락에는 동그란
연못이 있고, 그 곁에는 창원에서 가장 깨끗한 계곡이자 창원의 주요 상수원인 성주사계곡이 흘
러간다. 이 계곡은 진해저수지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남해바다로 흘러간다.


▲  정와당
마야원 옆에 자리한 정와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붕 색깔이 퇴색되어 근래 건물임에도 조금은 오래되어 보이며,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두 발을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숲속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나오는 성주사계곡
성주사계곡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성주사 관할 구역에 묶여있어 출입이
통제된 금지된 계곡이다. (계곡 탐방은 성주사 종무소에 문의 요망)


♠  성주사 범종각(梵鍾閣), 연지(蓮池) 주변

▲  담장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민 성주사 경내

▲  연꽃의 보금자리 연지(蓮池)

마야원에서 경내로 들어서면 길 왼쪽에 연잎으로 가득한 연못, 연지가 있다. 연꽃은 거의다 꺾
여 푸른 연잎만이 무성히 보일 뿐이고, 홍련(紅蓮)과 백련(白蓮)은 가뭄에 콩 나듯 구경하기도
힘들다. 그나마 보이는 것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있으니 사진에 담는 것도 여간 어렵
지 않다.


▲  물이 철철 넘치는 약수터
불모산이 중생들에게 내린 약수로 가뭄에도 거의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바가지에 물을 한가득 담아 목구멍에 넣으니 내 몸을 유린하던
무더위도 싹 가시고 몸속도 시원하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동종의 보금자리, 범종각


▲  성주사 동종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267호

6각형의 범종각에는 1783년(정조 7년)에 조성된
조선 후기 동종(銅鍾)이 소중히 담겨져 있다.
높이 111cm, 안지름 84cm, 무게 약 600근의 조
그만 종으로 종의 머리 부분인 용뉴는 2마리 용
이 서로를 등지고 있으며, 음통은 없다. 종 가
운데 부분에 9개의 유두를 단 유곽(乳廓)을 달
았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광(頭光)을 지
닌 보살상을 두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없다.

조선 후기에는 조성 연대가 새겨진 작은 종들이
많이 출현했는데, 성주사 동종 역시 그중의 하
나로 조선 후기 범종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
한다.


▲  5층석탑(석가진신사리탑)과 석등(石燈)
하얀 피부의 늘씬한 5층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머금은 사리탑으로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불사를 벌이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5층 탑신(塔身) 위에 있는 노반(露盤)은 탑신처럼 생겨서
자칫 6층탑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  경내로 오르는 33계단

얕아 보이는 저 계단을 오르면 담장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던 경내가 속시원히 속살을 비춘
다. 계단은 5단계로 각각 3,4,6,8,12단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2007년에 산만하게 늘어선 계단을
손질하면서 주지승의 의견에 따라 그리 만든 것이다. 물론 숫자도 모두 의미가 있지. 이들 숫자
는 불교의 교리인 삼학(三學)과 사성제(四聖制), 육바라밀(六波羅蜜), 팔정도(八正道), 12연기(
緣起)를 상징하며, 계단 옆에 기와담장을 두르고 자연석을 이용해 차곡차곡 계단을 쌓아 그야말
로 전통식으로 만들었다.


▲  춤추는 분수대와 연못, 그리고 누각

계단 담장 밑에는 네모난 연못을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2층 누각을 두어 연못을 지켜보게 했다.
연못만 있고 주변을 담장과 석축으로 둘렀다면 5% 허전했을텐데 누각을 배치하고 연못 주변에
꽃과 식물을 심는 등, 공간과 시각의 미를 최대한 배려했다.


▲  네모난 연못 중앙에는 바위를 두어 조촐하게 분수대로 삼았다.

경내 중심부로 들어서기 전에 잠깐 성주사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 곰절, 성주사의 역사
불모산(佛母山)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성주사는 인구 100만을 지닌 경남 최대의 도시, 창원
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2가지의 설이 전해온다. 1번째는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 수로왕(首露王
)이 처남이 되는 허보옥<許寶玉, 장유화상(長游和尙)>을 위해 창건했다는 설로 허보옥은 수로왕
의 왕후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의 오라비이다. 허보옥이 가락국 뒷산에 들어가 불법
(佛法)을 펼치니 그 연유로 불모산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수로왕의 아들 7명이 불모산에서 수도
하여 성인(聖人, 또는 승려)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에서 성주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2번째는 827년(신라 흥덕왕 2년)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왜구가 남해바다
를 침범하자 흥덕왕(興德王)은 신하들과 왜구를 격퇴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허약한 신라의 국력
앞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근심에 싸인 왕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지리산에
무염이란 승려가 있으니 그를 불러 상의해 보시오'
1마디를 듣고, 바로 무염을 소환해 방안을
물었다.
그러자 무염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세우고 왼손으로 자신의 배를 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소
리가 나면서 철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온 산을 뒤덮었다. 그 광경을 본 단순한 왜구들은 혼
비백산하여 바로 줄행랑을 치니 크게 기뻐한 흥덕왕은 그에게 밭 360결과 노비 100호를 하사하
여 성주사를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허나 둘 다 막연히 전해오는 구전일 뿐, 정답은 없다.

1번째 설 같은 경우는 인도의 불교가 바로 가야로 전래되었다는 소위 남방전래설에 따른 것인데,
그 역시 여전히 의견이 분분해 국사 관련 서적에는 아예 거론조차 되질 않는다. (우리나라는 불
교 최초 전래시기를 여전히 372년으로 보고 있음) 게다가 가락국의 중심지인 김해(金海)와도 산
하나를 사이에 둘 정도로 가까운 편이지만 정작 창건 시기를 입증할 적당한 근거가 없으니 가락
국과 관련된 절로 내력을 꾸미고 역사를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지어낸 설로 보인다.

어쨌든 창건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으며, 1604년 진경(
眞鏡)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원래 자리는 지금보다 400m 안쪽 산자락에 있었는데, 옛
절터에서 석탑과 석등을 찾아내어 중창을 벌인 것이다. 또한 절을 중창할 때 곰이 나타나 도와
주었다고 하는데, 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진경은 원래 옛 절터에다가 중창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곰이 나타나 모든 목재를 하
룻밤 사이에 40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다 놓았다. 이에 진경은 부처의 뜻으로 여기고 곰
이 목재를 옮겨놓은 현재의 자리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웅신사(熊神寺)','곰절'
이라 불리기도 했다. '웅신사'란 이름은 옛날에만 쓰인 듯 싶으며, '곰절'이란 이름은 여전히
성주사의 애칭이자 상징으로 조금씩 쓰이고 있다.
이렇게 다시 몸을 일으킨 성주사에는 곰절에 어울리게 곰과 관련된 이야기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불모산에 살던 곰이 시장기가 돌아 성주사를 찾았다. 그 곰은 재주를 잘부려 가끔 법회
때 승려 뒷자리에 앉아 수행 포즈를 흉내내기도 했는데, 마침 승려들은 모두 참선 중이었다. 그
래서 배고픔을 잊고자 참선(參禪)을 흉내내니, 이것이 공덕이 되어 나중에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사람으로 환생한 그는 그 인연 때문인지 성주사에서 부목(負木, 절에서 땔나무를 하는 사람) 일
을 하게 되었다. 배가 고플 때는 자신도 모르게 참선에 열중해 배고픔을 잊곤 했는데, 한 번은
주지승이 그 모습을 보고는 지팡이로 머리를 치니, 그 순간 깨달음을 얻어 더욱 정진해 고승(高
僧)이 되었다고 한다. (또는 부목이 미련하여 자주 밥을 태워먹자 탄 밥에 열불이 난 주지승이
'이 곰 같은 놈아' 소리를 지르며 지팡이로 등줄기를 후려치니 그 이후 부목은 용맹정진하여 고
승이 되었다고 한다)


중창 이후 1681년(숙종 7년)에 중수를 벌였으며, 구한말에는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있던 등암
찬훈(藤巖璨勛)이 이곳으로 넘어와 절을 중건하고 불모선원(佛母禪院)을 창설했다.
1997년에 원종이 설법전과 요사 등을 새로 지었고, 2002년에 성주사 진입도로가 확장되어 재흥(
再興)의 기운이 슬슬 도래함에 따라 다시 불사를 벌였다. 2003년에 마야원을 짓고, 2004년과 그
이듬해에 지장전을 신축했으며, 2007년에 입구 계단을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과 영산전, 설법전, 삼성각, 마야원 등 10여 동의 크
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된 감로왕도와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몽산화상육
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보물 1737호) 등 국가지정 보물 3점과 대웅전과 3층석탑, 동종, 관음
보살입상, 감로왕탱, 석조석가3존16나한상, 석조지장시왕상, 지장보살상 복장물 전적류(典籍類)
등의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불모산 안쪽에 숨겨진 성주사 옛터에는 조선시대 부도
여러 기가 전하고 있는데, 이곳은 통제구역이라 답사를 원한다면 성주사 종무소에 문의하기 바
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이지만 시내와도 2km 정도의 거리를 두며 깊숙한 산주름 속에 조용
히 묻혀있다. 그래서 마치 심산유곡(深山幽谷) 벽지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밑 세상과는 공
기가 확연히 틀려 공업도시 창원을 무색케 하며, 불모산이 베푼 청정한 성주사계곡이 절 옆구리
를 살짝 스치며 속세로 내려간다.

성주사는 속인들을 대상으로 템플스테이를 열고 있으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보리수학교를 방
학기간에 운영한다. 그리고 매년 10월에는 곰절산빛가람제를 개최하는데 산사음악회와 사진전,
그림전시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열어 도시인들의 안구와 귀를 정화시켜준다.

※ 창원 성주사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① 창원까지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대전역에서 마산/진주행 고속전철 이용, 창원이나 마산역 하차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대전역, 구미역, 동대구역, 부전역, 구포역, 진주역, 순
  천역, 광주송정역에서 마산/창원 경유 경전선 열차 이용
*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마산/창원행 고속버스 이용 (마산행은 20~30분 간격, 창원행은 20~40
  분 간격)
* 부산(사상, 노포동, 동래전철역), 대구(서부, 동대구), 울산, 광주, 대전(동부복합)에서 창원
  이나 마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수원, 부천, 원주, 청주, 천안, 전주, 포항, 진주, 구미에서 창원
  /마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마산역입구, 마산시외터미널에서 115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산인프라 하차
* 창원역에서 115, 151, 213, 757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산인프라 하차
* 창원터미널에서 115, 151번 시내버스 이용
* 두산인프라에서 도보 45번 (두산인프라 → 안민터널4거리에서 좌회전 → 성주사입구에서 우회
  전하여 직진)
③ 승용차 이용 (주차공간은 두둑함)
* 남해고속도로 → 장유나들목 → 창원 방면 1020번 지방도 → 창원터널 → 삼정자육교에서 진
  해 방면 → 성주사입구에서 좌회전 → 성주사
* 남해고속도로 → 동마산나들목을 나와서 창원역 방면 → 소계광장교차로에서 우회전 → 창원
  대로 직진 → 삼정자육교에서 진해 방면 우회전 →성주사입구에서 좌회전 → 성주사

★ 성주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성주사 템플스테이는 1박 2일 일정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형과 짜여진 일정이 없이 자유롭게
  머물다 가는 휴식형(평일에만 운영)을 운영한다. 자세한 일정과 가격은 성주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102 (곰절길 191, ☎ 055-262-0108~10)


♠  성주사 경내 둘러보기

▲  귀여운 복돼지 1쌍

33계단을 오르면 깜찍한 돌돼지 1쌍이 중생을 맞이한다. 이들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성주사의
자리가 풍수지리상 제비가 알을 품는 형상이고, 앞산은 그 제비집을 노리는 뱀의 형세라고 하여
뱀의 상극이나 다름이 없는 돼지상을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 풍수지리상 부실한 부분을 보충하
는 이른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 된다. 허나 돼지상이 너무 귀여워 아무리
뱀이라도 그들 앞에서는 길을 접고 돌아갈 것 같다.

◀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료(安心寮)


▲  대웅전과 뜨락

계단을 올라서면 경내의 중심인 넓직한 대웅전 뜨락이 펼쳐진다. 대웅전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
준으로 우측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료가 있고, 좌측에는 교육과 강당의 역할을 하는 설법
전(說法殿)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다들 규모가 크다. 뜨락을 바라보며 자리한 맞배지붕의 대
웅전은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고 그 앞에 3층석탑이 서 있으니 이는 조선 중기
가람배치로 1604년 중건 이후부터 계속 유지하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의 절반도 안되는
조촐한 크기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문과 기둥에 고색의 때가 만연한 것
으로 보아 빠르면 1604년 중창부터, 늦어도 1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퇴락된
것을 1966년에 보수했다.

삼성각은 중생과 무척 친근한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그
들이 그려진 그림이 내부를 장식한다. 이들 그림은 근래에 제작된 것으로 조금은 낡아 보이는
삼성각과는 시기가 많이 차이가 나서 예전에는 다른 용도로 쓰인 듯 싶다.

▲  삼성각 중앙을 장식한 칠성탱

▲  독성탱

◀  산신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속시원히 속살을 드러낸 영산전(靈山殿)

대웅전 좌측 옆구리에는 삼성각과 비슷한 크기의 영산전이 자리해 있다. 삼성각과 같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이며, 1939년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조석가3존불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0호(16나한상 포함)

영산전 불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나란히 협시해 있는데. 이들은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의 생김새가 대웅전
불상과 비교하면 너무 형식적이다. 거의 네모난 얼굴은 신체에 비례해 너무 크고 표정도 모두
똑같다. 게다가 앉아있는 모습도 약간은 자연스럽지 않아 보인다. 불상의 위엄과 중생을 다독거
리는 흐드러진 미소보다는 33계단의 돼지상처럼 귀여움이 가득해 중생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
게 한다.

▲  영산전 우측 부분 (16나한상과 나한도)

▲  영산전 좌측 부분 (16나한상과 나한도)

영산전 불단 좌우에는 나한상(羅漢像)이 각각 11상씩, 22상이 배열되어 있다. 이들은 부처의 열
성제자인 16나한으로 우리나라 7,000만 인구만큼이나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지녀 똑같은 모습이
없다. 그들 뒤에는 나한도(羅漢圖) 6개가 든든히 자리한다.


▲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4호

삼성각과 영산전을 옆구리에 거느린 대웅전은 성주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多包)식 건물이다. 1681년에 지어졌으며, 1817년에 중수를 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촘촘하면서도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뒷면 내부의 공포만 간략하게 설치된 교두형(
翹頭形)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이는 조선 후기 불전의 특징이다.
 
내부 불단에는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단(神
衆壇)과 무염국사의 진영(眞影), 지금의 성주사를 있게 한 서봉당 의정과 등암친훈의 진영이 나
란히 자리한다. 건물 외부 벽화 가운데 왼쪽 면에 1604년 절을 중창했을 때 도와주었다는 곰과
그의 일화가 그려져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729호

대웅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불좌상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협시
하고 있다. 중생의 고통과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쭉하고
커다란 귀가 인상적이다. 이들은 수인(手印)과 덩치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엷은
미소가 드리워진 얼굴은 거의 네모나며, 그들 뒤로 후불탱화가 든든히 자리한다.

이들 불상은 1655년에 조성된 것으로 봄에 불상 제작에 들어가 가을에 완성하여 복장(腹臟) 점
안을 마쳤다고 한다. 조성에 참여한 승려는 녹원(
元)과 현지(知玄), 찬인(贊印), 혜정(惠淨),
도성(道聖), 명신(明信), 긍성(肯聖) 등이며, 17세기에 활약했던 녹원의 최초 작품이다.

    ◀  성주사에서 가장 오래된 3층석탑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지금까지 살펴본 성주사는 조선 중기 이후 보물
이 주류를 이루었다. 용화전 관음보살도 있지만
원래 이곳과 관련이 없는 존재이니 논외로 친다.

대웅전 앞뜰에 뿌리를 내린 3층석탑은 고려 초
기에 조성된 탑으로 성주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
물이자 곁에 있는 석등(石燈)과 더불어 옛 성주
사의 유일한 증인이다. 탑의 높이는 3.1m로 2중
의 기단(基壇)위에 탑신을 올렸다.
그들은 1604년 진경이 절을 일으킬 때 옛 절터
에서 수습해 온 것으로 옆에 고르게 자리한 석
등은 고려 초기 것이다.

탑 앞에는 네모난 돌이 놓여져 있는데 배례석(
拜禮石)이다. 탑과 배례석 사이에는 석등을 놓
았던 대석(臺石)이 있다.

고색의 때가 적절히 입혀져 중후함이 엿보이며, 상태도 괜찮다. 다만 탑이 대웅전의 완전 정면
이 아닌 좌측으로 다소 치우져진 점을 볼 때 탑 2개를 나란히 세우는 이른바 1금당 2탑 형식으
로 하려고 했던 듯 싶다.


▲  오관당 앞에 놓인 샘터
둥근 넓적한 바위를 가져와 샘터로 만들었다. 좌측에 앉은 고양이로 보이는
동물이 바가지를 들며 하염없이 물을 쏟아낸다.

▲  물을 쏟아내는 고양이상 - 표정이 곰처럼 귀엽다
그가 주는 물을 바가지에 담아 들이키니 정말 시원하기 그지 없다.

▲  지장전(地藏殿)

경내 동쪽에 자리한 지장전은 경내 불당 가운데 가장 큰 40평 규모를 자랑한다. 원래는 설법전
앞쪽에 있었으나 1997년 이후 불사를 벌이면서 요사로 옮겼다가 2006년에 새로 지었다.

지장전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
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석조지장시왕상이란 이름으로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1호로 지
정되었다. 또한 좌측 벽에는 2011년에 지방문화재에서 보물로 승진된 감로왕도가 있다.


▲  빛바랜 감로왕도(甘露王圖) - 보물 1732호

빛바랜 일기처럼 오래된 티가 풍기는 감로왕도는 죽은 이의 극락 천도를 위한 목적과 함께 나쁜
짓을 경계하고 속세의 여러 가지 풍물을 표현하는 성격을 담고 있다.

지장전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이 그림은 1729년(영조 5년)에 신정(愼淨), 한영(漢英), 인행(
印行), 세관(世冠), 국영(國暎) 등이 그린 것으로 조성시기와 참여한 승려의 이름은 그림 한쪽
에 쓰인 화기(畵記)에 소상히 나와있다. 삼베 바탕에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여 채색했으며,
그람 상단에는 칠불(七佛)과 관음보살을, 중앙에는 아귀(餓鬼)를 중심으로 그 밑에 지옥(地獄)
을 담았다. 하단에는 인간 세상의 여러 고통스런 장면을 담아 속세살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
게 했다. 허나 솔직히 그림의 내용을 모르면 뭐가 뭔지도 모른다. 뭐 알아야 경각심을 느낄 것
이 아닌가..? 나에게는 그저 조선 후기 불화일 뿐이다. 그만큼 옛 그림은 어렵다.


▲  지장전 좌측의 네모난 연못
연꽃이 드문드문 보일 뿐, 푸른 연잎의 세상이다.

▲  집으로 고이 훔쳐오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
다시 아비규환의 속세로~~!


내가 성주사를 찾은 날은 마침 보리수학교 첫날이었다. 앳된 티가 보이는 초등학생들로 경내는
그야말로 시장통처럼 시끄럽다. 절은 참선과 수양을 중시하는 공간이라 조용히 머물다 가는 것
이 정석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고정관념에 돌을 던지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천진난만한 애들로
활기가 불어난 경내를 애써 뒤로하며 1시간 30분에 걸친 성주사 관람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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