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사진,답사기'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23.08.23 제주도 제주올레길18코스를 거닐다 <조천비석거리~연북정~죽도~닭머르~원당봉 불탑사, 불탑사5층석탑 구간>
  2. 2023.01.23 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3. 2021.07.31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서귀포 천제연폭포, 제주올레길8코스 나들이 (천제연관개수로, 선임교, 베릿내오름)
  4. 2020.08.16 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5. 2020.02.05 아름다운 제주도의 서쪽 끝을 거닐다 ~~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나들이 (차귀도, 와도) 2
  6. 2019.04.21 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7. 2008.02.17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탐라계곡~서해바다)
  8. 2006.02.23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제주도 한라산 (서해바다 ~ 제주 ~ 백록담) 2

제주도 제주올레길18코스를 거닐다 <조천비석거리~연북정~죽도~닭머르~원당봉 불탑사, 불탑사5층석탑 구간>

제주도 겨울 나들이 (연북정, 제주올레길18코스, 불탑사)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연북정, 제주올레길18코스, 불탑사)

조천 앞바다 (제주해협)

▲  조천 앞바다

제주올레길18코스 제주 불탑사5층석탑

▲  제주올레길18코스

▲  불탑사5층석탑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 그곳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불과 1시간이면 닿
는 곳이나 2005년 여름 한라산(漢拏山) 이후, 이상하게도 오랜 세월 손과 마음이 가지를
않았다. 이러다가 제주도란 존재를 새카맣게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새해 벽두에 겨울 제
국의 핍박도 잠시 피해볼 겸, 사흘 일정으로 따뜻한 그곳에 나를 던져놓았다.

김포공항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로 제주도(제주국제공항)로 넘어가 제주시내 서부에서 서
일주도로를 따라 여러 미답처(未踏處)를 흔쾌히 지워가며 서귀포 시내로 이동했다. 하루
를 꽉꽉 채우며 일정을 짜니 이 구간에서 이틀을 소비했는데, 마지막 날에는 천지연폭포
입구에 떠있는 새섬을 아침거리로 둘러보고 동일주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점심거리로 제주도의 시조인 3신인(三神人)의 혼인 설화가 깃든 온평리의 혼인지(婚姻池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조천읍(朝天邑)으로 이동했는데, 본글은 바로 조천읍에서부
터 시작된다. (첫날과 둘째 날, 새섬과 혼인지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조천포구 둘러보기 (연북정, 조천진터)

▲  조천비석거리 - 제주도 지방기념물 31호

조천읍내 중심인 조천환승정류장에서 연북정으로 인도하는 조함해안로를 2~3분 정도 들어가면
검은 피부의 비석들이 우루루 나와 마중을 한다. 그들이 조천비석거리로 이름 그대로 비석이
늘어선 거리인데, 모두 9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7기가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2기는 20세기 이후 비석들)

비석의 주인공은 제주목사 김수익(金壽翼, 1600~1673)과 이원달(李源達, 1783~1857), 채동건
(蔡東健, 1809~1880), 백희수(白希洙, ?~?), 이의식(李宜植, 1848년에 재직함), 제주판관 김
응빈(金膺斌, 1846~1928) 등으로 이 땅에 흔한 관리들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
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비석 뒷면이 다들 아작나면서 비석의 건립 연대는 알 수가
없으며, 비석 6기는 대머리 스타일, 나머지 3기는 지붕돌 머리로 지붕돌 비석은 빗돌 부분을
감실(龕室)처럼 만들고 그 안에 빗돌이 따스하게 안겨져 있다.

관리들이 이곳을 통해 육지를 오가다 보니 여기에 그들의 비석을 세웠는데 (인근 화북포구도
비슷한 이유로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음;) 의미는 참 좋은 선정비이나 그 비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저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상당수는 고개를 떨구겠지. 딱
히 공적도 없으면서 백성들을 들들 볶아 비석을 세우거나 돈 떼먹기용으로 비석을 남발한 관
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 조천비석거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3470 (조함해안로 26)


▲  평화로운 모습의 조천포구

조천비석거리 서쪽에는 제주해협을 향해 가슴을 연 조천포구(조천항)가 펼쳐져 있다. 지금이
야 조그만 어항(漁港)으로 머물러 있지만 화북(禾北)포구와 함께 대한제국 시절까지 제주도와
육지를 잇던 포구로 바쁘게 살았던 제주도의 대표 관문이다. 조정에서 보낸 관리와 육지 사람
들이 이곳과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도를 오갔으며, 제주도 사람들도 이 포구로 육지와 다른 세
상으로 나갔다.
조천이란 이름은 천자(天子)의 나라에 조회하러 간다는 뜻으로 그 천자란 제주도를 다스렸던
고려와 조선을 뜻한다. 조정에서 보낸 관리와 왕명(王命)이 이곳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왔으며
, 그 중요한 현장에 조천진성과 나를 이곳으로 부른 연북정이 있다.


▲  조천진성(朝天鎭城) - 제주도 지방기념물 68호

조천진성(조천진)은 제주도의 특산물인 현무암으로 다져진 단단한 성곽으로 연북정을 품으며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제주도에 설치된 9개 진성(鎭城) 중
하나인데, 포구 관리와 수비를 담당했다.
1374년에 조천관(朝天館)이 세워졌으며, 1590년 제주목사 이옥(李沃)이 중수하여 둘레 428척,
높이 9척, 성문 1개를 지닌 성곽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후 초루(礁樓)와 객사(客舍), 청
사(廳舍), 군기고(軍器庫), 포사(砲舍) 등이 세워졌으며, 조방장(助防將) 1명을 중심으로 치
총(雉摠) 2명, 성정군(城丁軍) 92명, 유직군(留直軍) 103명, 서기(書記) 12명이 배치되었고,
사후선(伺候船) 1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연북정을 제외한 시설물은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모두 지워
져 연북정과 성곽만 겨우 남아있다. 성곽은 거의 잘 남아있으며, 성곽 동쪽에 동문터가 있고
북쪽은 북쪽은 바다와 접해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의 둘레는 128m, 외벽 높이 2.2~4.3m, 상부 폭 1.6~3.1m 정도이며, 2017~
2018년에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성곽을 손질했다.

흔히 연북정만 알려져 있으나 그는 엄연한 조천진성의 망루이자 시설물이며, 조천진성과 연북
정은 하나의 몸이나 다름이 없다. 나도 연북정만 생각했지 조천진성의 존재는 생각도 못했다.


▲  조천진성 발굴 현장 (2018년)
이곳의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려는 굳은 집념으로 성곽 내부를 싹 뒤집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

▲  연북정(戀北亭) -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3호

조천진성 성곽(城郭) 위에 기단을 다지고 높이 들어앉은 연북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정자이다. 정자 안에는 마루가 있으며, 사방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기둥의 배열과 건축
재료, 배열 방법은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다.
제주목사 이옥이 1590년 조천진성을 중수하면서 조천관을 중창해 쌍벽정(雙璧亭)이라 했으며,
그 쌍벽정이 1599년 중수되면서 연북정으로 이름이 갈렸다.

제주도는 조선 때 유배지<流配地, 귀양지>로 인기가 높았는데, 유배를 온 관리들이 연북정에
올라 육지에서 기쁜 소식(서울로 돌아오라는 제왕의 조서)이 날라 오기를 애타게 고대하며 북
쪽(서울)에 있는 임금을 그리워했다. (한편으로는 격하게 원망했을 듯) 그 연유로 연북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천진의 망루 역할을 했으며 평소에는 제주목사 등의 높은 관리와 지역 양반들이 유흥을 즐
기거나 유배자들이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제주도에 가면 이 연북정은 꼭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서 이렇게 들리게 되었는데, 조금은 각박
한 성곽 계단을 오르면 연북정에 이르게 된다. 정자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과 바닷바람 맛이 일품이다. 또한 제주올레길18코스가 연북정 옆구리를 지나가 예전
보다는 찾는 이가 좀 늘었다.


▲  연북정 현판의 위엄

하얀 피부 현판에 짙은 검은색으로 연북정 3자가 쓰여있다. 북(北)자는 마치 '터지(址)'처럼
보이며, 연(戀)은 가운데 '言'이 너무 격하게 솟아나 제자리로 속히 돌아가고 싶은 유배자들
의 마음과 자신들의 밥줄을 쥐고 있는 제왕에 대한 연모(한편으로는 원망)의 마음이 활활 타
오른 듯한 모습이다.

* 연북정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


▲  연북정의 옆 모습

▲  연북정에서 바라본 조천포구와 원당봉

저 멀리 아른거리는 산이 원당봉(원당오름)이다. 조천에서 제주올레길을 따라 무려 저곳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다행히 일몰 직전에 도착해 원당봉에 깃든 불탑사5층석탑까지 싹
둘러보고 기분 좋게 나들이를 마무리 지었다.


▲  서쪽에서 바라본 조천진성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연북정이다.

▲  두말치물

연북정 서쪽 해안에는 용천수가 치솟는 두말치물이라는 큰 샘터가 있다. 용천수란 빗물이 지
하로 스며들어 대수층(帶水層)을 따라 흐르다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바깥으로 나오
는 물로 그 틈새가 해안 지역에 많이 나타나 호랑이가 담배를 태우기 이전부터 그 주변에 마
을이 형성되었다. 제주도는 까칠한 현무암 피부라 비가 내리면 거의 지하로 내려가 물 문제가
늘 컸는데, 그 문제를 이런 샘터들이 해결해준 것이다.

두말치물은 물을 1번 뜨면 2말을 뜰 수 있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그만큼 물이 풍부했다. 용
천수가 솟는 주위로 현무암으로 둑을 다져 바다와 경계를 그었는데, 지금도 물은 넉넉히 나오
고 있으나 상수도 시설에 밀려 거의 이용하지 않아 이제는 동네 명소나 옛날 유물 같은 신세
가 되어 버렸다. 사람도 그렇고 사물이나 건물이나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
인다.


▲  두말치물에서 바라본 조천진성과 연북정



 

♠  제주올레길18코스 거닐기

▲  제주올레길18코스 조천리 해안 구간

제주올레길18코스는 조천만세동산에서 제주시내 간세라운지까지 이어지는 19.8km의 긴 올레길
이다. 이 코스에는 조천만세동산과 연북정, 닭머르, 불탑사, 사라봉 등의 명소가 있으며. 읍
내(조천읍)와 포구, 해안마을, 바다, 산, 들녘, 도시 한복판을 두루 거쳐 제주도의 다양한 모
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나는 18코스 구간 중 약 ⅓ 정도인 연북정~삼양해수욕장 구간만 거닐었
는데, 코스를 이리 짠 것은 연북정과 불탑사5층석탑을 모두 잡기 위함이다.
연북정에 이른 시간은 거의 15시, 일몰까지는 2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아 서둘기는 했으나 전
투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아닌 듯. 한편으로는 여유롭게 할 것은 다하면서 움직였다.


▲  조천리 황씨종손(黃氏宗孫) 가옥 - 제주도 민속문화재 4-5호

올레길에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상한 기와집이 살짝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에 이끌려
가보니 조천리 황씨종손 가옥을 알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나를 이곳으로 부르기는 했으
나 사람이 사는 집이라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현무암으로 다진 제주도 스타일의 담장이
높이 둘러져 있어 아무리 까치발을 하여도 그 속살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월담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입을 봉한 대문과 담장만 둘러보고 바로 물러났다.

이 가옥은 네모난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 자리한 안거리(안채), 북쪽의 밖거리, 서쪽의 모커
리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동쪽에 대문을 지닌 문간거리(문간채)가 있다.
4칸 규모의 안거리는 16세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며, 3m(약 10척)가 넘는 상방의 주칸은 제사를
지내는 종가(宗家)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뒤 공간과 연결된 2칸의 뒷낭간은 집안의 사적인 공
간이며, 3칸짜리 밖거리는 1940년에 지어졌다. 밖거리는 머릿방과 협문이 있는데, 이는 대한
제국 이후 제주도 상류 주택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집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제주도 상
류 기와집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조천리 황씨종손 가옥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373 (조천9길 7)

황씨종손가옥과 멀지 않은 올레길 주변에 수륙
물이란 용천수 샘터가 있다. 샘터 주변을 돌담
으로 둘러 동네 여인들의 목욕 공간으로 만들
었는데, 아들을 얻지 못한 여인들이 자식을 점
지해줄 것을 빌던 곳으로 그 연유로 수덕물이
라 불리기도 한다.
허나 지금은 식수는 커녕 목욕 장소로도 거의
쓰이지 않아 한가로운 모습이며, 사진 중앙에
움푹 들어간 곳에서 용천수가 쏟아져 나와 찾
는 사람 거의 없는 수륙물을 늘 채워준다.

▲  조천리 수륙물(수덕물)

▲  제주올레길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신촌리 방향)

▲  제주올레길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조천리 방향)

조천리 구간을 지나면 바다와 땅이 뒤엉킨 곳이 나온다. 그곳의 중심에는 '죽도'란 섬이 있는
데, 남북으로 500m 정도 되는 작은 섬으로 동과 서, 남쪽이 둑방길로 제주도와 단단하게 이어
져 있다. 제주올레길18코스가 그런 죽도의 한복판을 지나가며, 섬 남쪽에 집 몇 채가 있을 뿐
대부분이 경작지와 주름진 바위 해변이다.


▲  지그재그 이어진 제주올레길 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  제주해협을 향해 작게 입을 벌린 신촌포구 방파제

▲  신촌리 앞바다
저 까마득한 수평선 너머로 육지가 있다. 그곳이 혹시 보일까 싶어서 눈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살펴보았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에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솔직히 보일 수가 없음)

▲  닭머르 해변

신촌리 마을을 지나면 닭머르란 해안이 나온다. 닭이 흙을 파헤치고 그 안에 들어앉은 모습처
럼 생겼다고 해서 닭머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기암괴석이 쭉 늘어서 있고 물고기들이
많아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해변 정상에는 정자가 닦여져 있는데, 저곳까지 가는 것이 도
리가 되겠으나 원당봉까지 갈 길이 멀어 쿨하게 통과해버렸다.

이 날은 아침에는 날씨가 청명했는데 조천에 이른 직후부터 잔뜩 흐려졌다. 바다 또한 흥분기
를 보여 거친 파도로 해변을 마구 때려대고 제주도 특유의 바람까지 거세어 체감 날씨는 겨울
이상이었다. 제주도가 따스한 남쪽이라고 하나 바다 바람이 그 따스함을 크게 떨어트린다. 하
여 해변이나 한라산 나들이 때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만 뒷탈이 없다.


▲  닭머르 해변을 거세게 쪼아대는 바다

▲  서쪽에서 바라본 닭머르 해변과 정자

제주올레길18코스 구간 중 신촌리 어촌계 탈의장에서 닭머르입구 구간(1.8km)은 해안누리길의
일원인 '닭머르길'이란 간판도 지니고 있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에서 선정한 걷기 좋
은 해안길의 일원으로 여기서 '문서천'이란 개천을 따라 5~6분 들어가면 습지 형태의 남생이
못이 있는데, 닭머르에 왔다면 그 습지도 같이 둘러보면 여로(旅路)가 더욱 살찔 것이나 나는
일몰 시간의 압박으로 닭머르만 총알처럼 지나가 버려 남생이못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핑계이
긴 하지만 언제나 시간이 문제이다.


▲  닭머르 서쪽 해변

▲  점점 멀어지는 닭머르

▲  시비코지 주변 해변

▲  들판과 억새밭을 지나는 제주올레길18코스 (시비코지 남쪽)

조천부터 계속 바다를 따라 다녔던 제주올레길18코스는 시비코지 이후부터 잠시 바다를 버리
고 내륙으로 빠진다. 올레길 주변에는 현무암 돌담으로 구획된 밭들이 정겹게들 펼쳐져 있고
누렇게 뜬 억새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나를 반긴다.


▲  들판 사이를 지나는 제주올레길18코스 (시비코지 남쪽)



 

♠  이 땅에서 유일한 늙은 현무암 탑을 지닌 곳
원당봉 불탑사(元堂峰 佛塔寺)

▲  맞배지붕을 지닌 불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들판을 달리던 제주올레길18코스는 원당봉(171m) 자락으로 들어가 불탑사 앞으로 나를 인도한
다.
삼양동 동쪽에 낮게 솟은 원당봉(원당오름)은 겉으로 보면 꽤 평화로운 모습이나 그는 측화산
(側火山) 출신이다. 즉 용암을 내뿜던 무시무시한 화산이었다. 그는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뫼로 왕년에는 용암과 화산재를 요란하게 내뱉었으나 몸이 노화되면서 한라산처럼 죽은 화산
이 되었다. 정상부에 있던 분화구는 물이 고여 습지가 되었으며, 이 습지를 '거북못'이라 불
렀는데, 근래에 연못으로 바뀌어 이곳이 먼 옛날 화산의 입이었음을 살짝 귀띔한다.
원당봉이란 이름은 몽골(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가 세운 원당사란 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
선 때는 원당악(元堂岳)이라 불렸으며, 정상부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이를 원당봉수라 하
였다.

원래 이번 나들이에서 불탑사와 원당봉을 제일 처음 찾아가 그 정상까지 가려고 했으나 코스
가 반대로 바뀌면서 마지막 답사지가 되었다. 또한 일몰 직전에 도착하여 원당봉 정상부는 가
지도 못하고 불탑사만 둘러보고 빠져 나와 다소 아쉽다. 허나 인연이 그것 밖에 안되는 것을
어찌하리요. 나머지 부분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쿨하게 넘겼다.


▲  불탑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불탑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원당봉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불탑사는 14세기 중반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설
화에 따르면 몽골(원나라)의 제왕인 순제(順帝)가 아들이 없어 무척 애태우던 중, 꿈 속에서
승려가 나타나
'북두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봉(三疊七峰)의 터를 찾아 절과 탑을 세워 기도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하여 신하들을 닥달하여 천하를 수소문해 제주도 동북 해변에서 그 삼첩칠봉을 찾았고, 그곳
에 탑과 절을 세워 사람을 보내 기도를 하니 마침내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순제의 2번째 황후가 그 유명한 기황후로 이 양반이 행주기씨 집안이자 친원(親元) 패거리의
핵심인 기철(奇轍)의 여동생이다. 몽골에 공녀(貢女)로 들어갔으나 고려 출신 환관이자 기황
후와 같은 지역 사람인 박불화(朴不花, ?~1364)의 도움으로 궁궐로 들어갔고, 순제의 총애까
지 받게 되어 아들까지 낳게 된다. 그 기세를 몰아 순제를 현혹시켜 기존 황후(皇后)를 내쫓
고 자신이 황후에 올랐으며, 권력까지 손에 쥐어 몽골을 통치했다.
순제가 아들을 얻고자 제주도 원당봉에 절을 세운 것은 기황후의 득남을 기원하고자 그리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순제는 이미 건장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기황후의 모함을
받아 크게 고통을 받았음) 어쨌든 아들을 얻자 기황후가 원당사를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제주도는 몽골이 설치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원당사는 현재 불탑사와 맞은편 원당사 자리까지 아우른 규모로 법화사(法華寺), 수정사(水精
寺)와 함께 제주도의 대표적인 절이었다. 조선 중기까지 무탈하게 있었으나 숙종(肅宗) 시절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도에 있던 절과 당집을 대거 정리하면서 파괴되고 만다. 그
시절 제주도에는 당(堂) 오백, 절 오백이 있었다고 전해 그만큼 무속신앙과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교와 성리학(性理學) 사상이 뼛속까지 파고든 이형상의 눈에 곱게 보일 턱
이 없었다.
조선 후기에 재건되었으나 3번이나 불을 만나 쓰러졌으며, 1914년에 비구니 안봉려관(安蓬廬
觀)이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불탑사로 갈았다. 이후 1949년 4.3사건 때 파괴되었다가 1950년
대에 승려 이경호가 재건했고, 승려 양일현이 중창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심우당, 사천왕문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그 흔한 일주문
(一柱門)을 아직 갖추지 못해 사천왕문이 절의 정문 역할을 도맡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현무암 피부의 5층석탑이 있으며, 발굴조사로 발견된 옛 원당사 시절의 금당터
와 요사터가 있다. 절 남쪽에는 불탑사의 옛 이름을 취한 원당사가 있으며, 제주올레길18코스
가 절 앞을 지나간다.

* 불탑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1동 696 (원당로16길 41, ☎ 064-755-9283)


▲  불탑사 5층석탑 - 보물 1187호

대웅전 뜨락에는 불탑사의 꿀단지이자 상징물인 5층석탑이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오래된 현무암 탑이자 제주도에서 가장 늙은 탑으로 불탑사란 이름은 바로 이 탑에
서 비롯되었다.
제주도에 걸맞게 현무암으로 닦여진 시커먼 피부의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과 5층 탑신(塔身
), 머리장식을 지니고 있는데, 기단은 뒷면을 뺀 3면에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으며, 무늬의
바닥선이 꽃무늬처럼 솟아나도록 조각했다.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감실(龕室)을 두었고, 지붕
돌은 윗면의 경사가 크지는 않으나 네 귀퉁이가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으며, 꼭대기에 올려
진 머리장식은 아래의 돌과 그 재료가 달라서 후대에 별도로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인 탑 모습이 조형성이 적고 무겁게 보인다고 하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
며, 불탑사 창건설화에 탑이 등장하는데 그 탑이 이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시대가 비슷하므
로 그런데로 맞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천하의 유일한 늙은 현무암 탑으로 제주도 지방유형문
화재 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1993년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검은 피부가 매력적인 불탑사 5층석탑 (정면에서 본 모습)

▲  옛 원당사의 요사(寮舍)터

불탑사 경내를 싹 뒤집어 발굴조사를 했을 때, 여기서 건물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독립 기초
가 나왔다. 이곳은 요사(요사채)터로 여겨지며, 기단석과 주춧돌을 수습해 저 밑에 고이 묻고
그 위에 곱게 잔디를 입혔다.


▲  옛 원당사의 금당(金堂, 법당)터
건물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독립 기초와 요사채터와 연결된 계단이 발굴되었다.
이곳 역시 주춧돌을 묻고 그 위에 잔디를 입혔다.

▲  서쪽에서 바라본 옛 원당사의 금당터

불탑사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이곳을 끝으로 제주도 나들이는 모두 마무리가 되
었으며, 계획한 답사지는 3곳을 제외하고 모두 발자국을 남겼다. 알차고 보람차게 여로를 마
무리 지으니 마음이 뿌듯했으나 한편으로는 '벌써 제자리로 돌아가야 되나?' 싶어 아쉬운 마
음도 실로 컸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더 머물고 싶었으나 이번 나들이는 계획대로 여기서
쿨하게 정리했다. 제주도는 바다를 건너거나 하늘을 넘어야 되는 부담감이 있어서 그렇지 언
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니 다음 인연을 기다리면 된다.

제주올레길18코스를 마저 타고 삼양동 시내로 내려왔으나 너무 아쉬운 마음에 삼양해수욕장을
저녁거리로 둘러볼까 했다. 허나 바닷바람도 차고 몸도 지쳐서 시내버스를 타고 제주국제공항
으로 넘어갔다.
공항에 들어서니 서울이나 부산, 광주 등 육지로 가려는 사람들과 외국 방면 사람들로 북새통
을 이룬다. 예약한 비행기표를 발권받아 탑승 수속을 밟고 비행기 기다리는 곳에서 제주도 감
귤 초콜렛 2상자를 기념품으로 구입했다.
시간이 되자 김포공항으로 가는 티웨이(T-Way)항공 비행기에 나를 담았는데, 비행기가 탑승동
에 몸을 대지 않고 활주로에서 대기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인도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2~3분 정
도를 가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보다 30분 늦게 제주공항을 출발했고, 50분 정도를 날다가 서울의 하늘 관
문인 김포공항에 가뿐하게 착륙했다. 사흘 만에 서울 공기를 다시 맡으니 확실히 차긴 차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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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서귀포 겨울 나들이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 서귀포 겨울 나들이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남해바다

▲  새섬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혼인지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  혼인지

 



 

묵은 해가 극한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대륙
,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간만에 발을 들인 제주도에서 3일 동안 미답처(未踏處)를 중심으로 정말 알뜰하게 돌아다
녔는데, 둘째 날 늦은 오후(17시)에 서귀포시내에 있는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주차장에
이르렀다.
천지연폭포는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인연을 지었던 곳이라 애써 고개를 돌리며 새섬이 있
는 남쪽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날은 새섬까지 소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허나
약천사(藥泉寺, ☞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부터 하늘에 주름진 구름들이 꽉 들어차더만 새
섬방파제에 이르자 지독하게 검은 피부를 보이며 빗방울을 투하한다. 상황이 그러자 새섬
이고 나발이고 싹 내일로 내던지고 바로 시내로 나와 적당한 모텔을 잡아 일찍 휴식에 들
어갔다. (20시에 저녁을 먹으러 잠시 서귀포 시내로 나갔음)

거의 16시간 동안(10시간 정도 잤음) 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10시, 새섬을 잡으러 출동
했다. 모텔 1층 로비에는 감귤의 대표 산지인 서귀포(西歸浦)에 걸맞게 감귤이 든 바구니
가 있었는데, 투숙객들은 마음껏 집어먹으면 된다. 하여 나는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딱 3
개만 집어서 밖으로 나왔다.
전날 저녁과 달리 광합성에 최적화된 아주 쾌청한 날씨로 관광객들로 벌써부터 정신이 없
는 천지연폭포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새연교와 새섬방파제, 서귀포유람선 선
착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그들에 대한 시선을 접고 벼랑이 펼쳐진 서쪽 해안을 주목해
보자. 그곳에는 매머드(Mammoth)가 담배를 피던 시절, 옛 생물들의 흔적들이 가득 깃들여
져 있다.


▲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천지연폭포 입구
(사진 중앙에 있는 다리가 칠십리교)



 

♠  천지연폭포 남쪽 바닷가에 깃든 옛 생물들의 희미한 흔적들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西歸浦層 貝類化石産地)
- 천연기념물 195호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변

새섬방파제 서쪽에는 주름진 벼랑과 큼직한 바위들로 가득한 해변이 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해안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이곳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서귀포층(西歸浦層)이 형성
된 벼랑으로 30여m 높이로 약 1km 정도 펼쳐져 있다. 절벽을 따라 약 40~60m 정도 두께를 보
이고 있으며, 그의 피부와 속살에는 조개 등 많은 화석들이 들어있다.

1928년 왜인(倭人) 학자인 하라구치(原口九萬)가 발견하여 지역 이름을 따 서귀포층이라 하였
는데, 처음에는 이곳 등 일부에만 그런 지층이 확인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지하수를 캐내고
자 제주도 곳곳을 들쑤시면서 잠자고 있던 서귀포층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제주도 형성 초기
에 무수히 일어났던 화산활동으로 나온 현무암질 화산재 지층과 바다에 쌓인 퇴적암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도의 옛날 기후와 해수면 변동을 소상히 알려준다.

서귀포층은 물을 통과시키지 않는 특징이 있어 물이 거의 새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층
주변은 물이 풍부하여 해안가 지층 틈새로 물이 쏟아져 나오니 이를 용천수(湧泉水)라고 부른
다. 제주도는 누수에 최적화된 현무암 피부의 땅이라 물이 넉넉치가 못한 편인데, 서귀포층은
그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대자연 형님의 소중한 선물이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
기 이전부터 용천수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안가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


▲  화석들이 고이 잠들어있는 서귀포층 바위들

이곳 벼랑과 바위에는 옛 생물의 화석이 무수히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매머드가 뛰어놀던 약
200~3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조개류가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달팽이, 전복, 우렁이 등
의 복족류와 굴족류, 완족류, 성게와 해삼, 불가사리 등의 극피동물, 산호화석, 고래와 물고
기 뼈, 상어 이빨 화석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대 김봉균 교수에 의해 저서성유공충(底棲性有孔蟲, 호수나 바다의 바닥을 기어다니
는 유공충) 41속 73종과 부유성유공충<浮游性有孔蟲, 플랑크톤 생활을 하는 원생동물(原生動
物)> 8속 18종 등의 미화석(微化石,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미생물 화석)도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나온 화석 대부분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생물들이나 현재 서귀포 지역에서는 살지
않는 것들도 여럿 있다. 특히 조개 화석 같은 경우 이곳보다 훨씬 남쪽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들이 발견된 것을 통해 서귀포층 초창기의 바다가 지금보다 따스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옛 생물의 화석이 풍부히 담긴 탓에 1968년 국가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해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행정당국의 오랜 직무유기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
면서 마구잡이 화석 채취와 훼손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근래에 벼랑 쪽으로 출입금지
안내문이 세워졌으나 그뿐이며,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보호용 난간이나 철책을 두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새섬방파제 바로 서쪽에 눈에 띄게 있음에도 천지연폭포나 새섬, 유람선에 눈이 어두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니 새섬이나 천지연폭포를 보러왔다면 이곳도 꼭
둘러보기 바라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들을 눈으로만 살피기 바란다. (저들을 떼거나 만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람)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707 (남성중로 43)


▲  큰 돌에 담긴 화석들
돌에 박힌 하얀 존재들이 모두 화석이다. 물고기 뼈와 조개 화석으로 저들은
죽어서 대자연의 조화를 받아 조촐하게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  옛 수중동물의 넋이 서린 서귀포층 바위
마치 회색빛 어항 속에서 올챙이나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거니는 것 같다.

▲  다양한 화석과 고된 세월의 주름선이 뒤섞인 서귀포층 바위들 ▼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안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저 멀리 그림의 떡처럼 자리한 범섬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처럼 생긴 섬이다. 절벽으로 이루어
진 무인도로 고려 끝 무렵인 1374년 최영(崔瑩) 장군이 제주도에 잔류하며 저항을 하던 몽골(
원나라)의 목호(牧胡) 패거리를 최종 처리한 현장이기도 하다.


▲  제주도와 새섬을 잇는 새연교 (새섬방파제 쪽)

새섬을 가려면 무조건 새연교를 통해야 된다. 그는 2009년에 닦여진 다리로 새섬과 제주도를
끈끈하게 붙잡고 있는데, 다리 이름인 '새연'은 새섬을 잇는 연륙교의 줄임말로 알고 있었으
나 알고 보니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다리'란 의미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뚜벅이 전용 다리로 서귀포항의 랜드마크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이 다리
가 닦임으로써 바다의 눈치 없이 마음껏 새섬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  새섬방파제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왼쪽), 서귀포층 벼랑

▲  새연교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서귀동) 시내



 

♠  서귀포항 앞바다에 상큼하게 떠있는 작은 섬, 새섬

▲  새섬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새섬은 서귀포항 앞바다에 바짝 떠있는 작은 섬으로 천지연폭포에서 흘러내려온 연외천과 남
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
이름이 새섬이다 보니 새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실상은 초가 지붕을 잇는 새(띠)가
많이 나와서 새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한자로는 초도(草島), 모도(毛島)라 불리며 섬
의 면적은 104,581㎡,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7m이다.

제주도의 심장인 한라산(漢拏山)이 폭발하면서 거기서 나온 암석이 떨어져 섬이 되었다는 전
설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사람들이 건너가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섬으로
들어가려면 간조 때 새섬목을 건너거나 배를 이용해야 했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 사람이 살
았으나 모두 철수하여 금지된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새연교가 닦이면서 도시자연공원으로 천하에 개방되었으며, 천지연폭포와 서
귀포항을 수식하는 명소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은 되었으나 새벽 일출시
부터 22시까지만 개방한다. 그러니 21시까지는 입장해야 무난하게 서귀포항 야경(夜景)도 즐
기며 섬 1바퀴를 돌 수 있다. 또한 섬이다 보니 태풍이 오거나 해상 날씨가 영 좋지 않은 경
우에는 출입이 통제될 수 있다.


▲  새섬 산책로에서 바라본 새연교의 위엄 (바로 밑이 새섬방파제)

새연교를 건너면 섬을 1바퀴 도는 1.1km의 산책로가 나오는데, 어느 쪽으로 가던 다시 새연교
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천천히 둘러보면 최소 20~30분 정도 걸리며, 섬 북쪽은 연외천과 바다
가 만나는 서귀포항, 동쪽은 서귀포항 중심부, 서쪽과 남쪽은 푸른 바다라 주변 풍경도 아름
답다.

섬 전체는 난대림(暖帶林) 보호구역으로 나무가 울창하며, 새섬목, 담머리코지, 새섬뒤, 노픈
여, 안고상여, 섯자릿여, 자릿여, 모도리코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있다.

* 새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산3-2


▲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황우지, 서귀포 서부 해안

▲  해안을 따라 닦여진 새섬 산책로
이곳 산책로는 흙길과 자갈길, 나무데크길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평지라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주변 풍경이 고와서 체감 거리가 꽤 짧게 느껴진다.

▲  난대림과 소나무 그늘 속을 지나는 새섬 산책로

▲  새섬에서 바라본 문섬

손에 잡힐 듯 진하게 아른거리는 문섬은 서귀포항에서 1.3km 떨어진 작은 무인도이다. 문섬이
란 이름은 옛날부터 유별나게 모기가 많아서 모기를 뜻하는 한자를 취해 그리된 것으로 녹도(
鹿島)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  새섬에서 바라본 서귀포항 방파제와 섶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존재가 파초일엽(芭蕉一葉) 자생지로 유명한 섶섬이다.

▲  새섬 동쪽에 자리한 서귀포항 중심부
서귀포항은 새섬과 새섬방파제, 문섬, 서귀포항 방파제가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항구의 입지로 아주 좋다.

▲  새섬 주변 바다의 요염한 속살

▲  새섬 북쪽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시내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

▲  새섬 북쪽 산책로

▲  새섬 서쪽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  제주도 시조의 혼인설화를 품고 있는 제주도의 영원한 성역
혼인지(婚姻池) - 제주도 지방기념물 17호


▲  혼인지(혼인터) 표석

새섬에 퐁당퐁당 빠져 거의 1시간을 머물다가 아쉽지만 그곳을 등지며 천지연폭포 주차장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시내버스 여러 대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고들 있었는데, 서귀포시내버
스 641번(천지연폭포↔서귀포시청2청사)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부릉부릉 심장 소리를 낸다.
하여 그것을 타고 시내인 동문로터리로 나왔다. 시내까지 거리는 가까우나 천지연폭포는 바다
와 맞닿은 낮은 곳에 있고 시내는 그보다 훨씬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 지형적인 영향으로 버스
와 차량은 서귀포항과 서귀포초교로 다소 돌아간다.

동문로터리에서 다음 답사지인 혼인지를 가고자 제주도 간선 201번(제주버스터미널↔서귀포버
스터미널)을 잡아탔다. 혼인지까지는 40km 거리로 1시간 정도를 신나게 달려 혼인지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한적하기 그지 없는 혼인지입구에서 혼인지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혼인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제주올레길2코스(광치기해변↔온평포구, 15.2km)가 이 도로의 신세를 지며 혼인지로 가
는데, 표석에는 하얀 글씨로 '혼인지' 3자가 한문으로 쓰여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못을
뜻하는 '池'가 아닌 터를 뜻하는 '址'가 쓰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잠시 혼돈에 빠졌으나 분명 그 혼인지가 맞다. 제주도 시조들이 혼인을 했던 터라 표석
에 그렇게 쓴 것이며, 혼인지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혼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혼인지는 500평 정도의 자연산 못으로 갈대와 수초들이 못 외곽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평
지에 누운 평범한 모습의 못이나 이곳은 제주도의 시조라는 고을나(高乙那)와 양을나(良乙那
), 부을나(夫乙那) 등 이른바 삼신인(三神人)이 장가를 가던 곳이라고 전한다. 하여 그들의
탄생설화가 깃든 삼성혈(三姓穴)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연못 주변에는 제주도에서 넘쳐나는 현무암으로 낮게 담장을 둘러서 속세와 경계를 그었으며,
그 주변을 공원으로 산뜻하게 손질하여 산책로와 숲을 닦았다. 오래된 존재로는 혼인지와 삼
신인이 신방을 꾸렸다는 신방굴이 있으며, 근래에 지은 3공주 추원각과 추원비, 전통혼례관,
탐라생활사료관, 생태연못 등이 혼인지를 수식한다. 그리고 제주올레길2코스가 혼인지 설화를
흠모하며 그의 옆구리를 슬쩍 지나친다.


▲  혼인지 서쪽에 닦여진 탐방로(제주올레길2코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혼인지, 그곳에 서려있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는 대략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300여 년 전, 고을나와 부을나, 양을나가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이라는
곳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그들이 있기 전에는 제주도에 그 흔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동물 사냥과 어로로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다가 동쪽 바다에서 자주빛 진흙에 봉해진 오색찬란한 큰 목함(木函)이 떠내려온
것을 발견했다. 목함이 상륙한 곳은 혼인지와 가까운 온평리 연혼포(延婚浦, 갯고랑)라고 한
다.
호기심이 불끈 솟은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목함을 열었더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들어있었
고, 자주빛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자(使者)가 나타났다. 그리고 석함을 열었더니 푸른 옷을
입은 15~16세 정도의 아리따운 공주 3명과 송아지, 망아지, 오곡(五穀)의 씨앗이 있었다.


▲  늪지대 기운을 지닌 혼인지 (서쪽에서 본 모습)

이들을 데리고 온 사자는 3신인에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에서 왔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공주 3명을 두었는데 혼기가 차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서해 높은 산(한라산)에 3명의 신인이 나와 장차 나라를 세
우려고 하나 배필이 없다는 것을 듣고 저에게 명해 세 공주를 모셔왔으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요~~!'
말을 끝내고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기쁨에 잠긴 3신인은 나이에 따라 공주 자매를 배필로 정해 바로 이곳 혼인지에서 혼인과 예
민한(?) 신방을 치루고 삼사석(三射石, 제주시 화북동)에서 활을 쏘아 거처할 곳을 정했다.
또한 공주가 가져온 소(송아지)와 말(망아지)을 기르고 오곡 씨앗을 뿌리니 이때부터 제주도
에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이 혼인지에 서린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누렇게 뜬 갈대와 수초들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자연산 연못의
풍경을 거들어준다.


삼신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삼성혈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이때가 4,300년 전이라고 하는
데, 우리 역사가 단군조선에서부터 4,300년 이상 묵었음을 강조하고 있어 그것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3신인이 4,300년 이상 되었다는 자료와 유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경에 한라산 대폭발로 제주도 사람과 동물들이 대부분 강제 죽음을 당했는데, 겨
우 일부가 살아남아 화산재와 용암으로 지옥이 된 제주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때 3신인
이라 표현된 인물 3명이 사람들을 잘 이끌어 제주도 세력의 군주가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공주를 보냈다는 벽랑국에 대해서도 왜열도설과 동해(東海)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
으며, 왜열도는 공주와 오곡, 소, 말을 보낼만한 수준이 전혀 되지 못한다. 하여 동해안(경상
도나 영동지방, 함경도 등)에 있던 작은 나라나 세력으로 여겨진다. 그곳에서 바다 너머 멀리
떨어진 제주도 세력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라면 서로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탐라(耽羅)라 불리던 제주도 세력은 바닷길을 적극 이용해 4,000리의 영토를 지녔던 삼한(마
한, 진한, 변한)과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멀리 중원대륙과 동남아 제국(諸國)들과도 교역
을 했었다.


▲  삼공주추원비(三公主追遠碑)
어딘지 모를 벽랑국에서 건너와 삼신인의 배필이 되어 제주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3공주를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세웠다.


벽랑국이 망하여 그 세력이 제주도로 넘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은 가축과 오곡 씨앗, 여
러 좋은 문물을 싣고 떠돌다가 제주도에 상륙했을 것이고, 제주도 세력은 그들을 받아들여 통
합 차원에서 혼인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농업과 목축 기술까지 챙기면서 제주도에 제대
로 된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남긴 탁라가(乇羅歌)의 2번째 시
김종직이 제주도를 다녀가면서 탁라가 14수를 남겼는데, 그 2번째 시가
바로 혼인지 설화를 머금고 있다.

먼 옛날 신인이 세 곳에 도읍하셔
해돋는 물가에서 배필을 맞으셨다네
그 시절 삼성(삼신인)이 혼인했던 일은
전해내려오는 주진의 전설과 같네

▲  혼인지의 분위기를 한껏 경건하게 다듬어주는
소나무숲길 (신방굴 주변)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신방굴

혼인지에 왔다면 소나무숲에 있는 신방굴이란 자연산 굴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혼인지 연못
과 함께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산 존재로 3신인이 벽랑국 공주를 하나씩 품고 예민한(?)
첫날 밤을 보냈다는 곳이다.

굴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나 내부가 협소하고 어둡다. 그런 곳을 1쌍도 아니고 3쌍이 좁은
곳에서 예민한 일을 치룬다는 것이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동물도 아니고 일명 성
진국(性進國)으로 전세계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천박한 왜열도 원숭이들도 아닌데 말이다.
하여 못 주변에 대충 집을 짓거나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예민한 첫 밤을 보냈을 것이다. 혼인
지가 3신인과 3공주가 혼인을 했던 현장이라 연못 부근에 있는 이 굴까지 설화의 현장으로 넣
었던 것이다.


▲  속세를 향해 입을 벌린 신방굴
신방굴은 땅 바로 밑에 있는 굴이다. 저런 누추한 곳에서 정말 첫날 밤을
보냈을까? 그것도 제주도 세력가와 벽랑국 세력가의 딸이 말이다.

▲  신방굴 내부로 들어서다
굴 높이가 낮으므로 굴에 절대 피해가 없도록 몸을 푹 쑥이고 들어가야 된다.

▲  어두컴컴한 신방굴 내부

▲  신방굴에서 나오는 3신인과 3공주를
재현한 사진


▲  흑백사진에 담긴 1960년대 초 온평리(혼인지마을) 혼례 모습

▲  돌담 너머로 바라본 삼공주 추원사(追遠祠)
2009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벽랑국 3공주의 위패를 머금고 있다. 돌담 안쪽
오른쪽 건물이 추원사로 매년 6월 10일 후손들이 추원제를 지낸다.

▲  삼공주 추원사

▲  혼인지 남쪽에 세워진 정자

혼인지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 때문에 지역 사람들의 혼인 장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전
통혼례관을 두어 혼인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속세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명소이나
제주도에 신혼여행이나 부부여행으로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
다.

* 혼인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혼인지로 39-14, ☎ 064-710-6798)


▲  소나무와 동백꽃이 무성한 혼인지 산책로
동백이 도도한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었다 놓는다.

▲  혼인지를 마무리 짓다 (전통혼례관 주변 산책로)
혼인지 이후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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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서귀포 천제연폭포, 제주올레길8코스 나들이 (천제연관개수로, 선임교, 베릿내오름)

서귀포 천제연폭포



' 서귀포 천제연폭포 겨울 나들이 '

천제연폭포 제1폭포

▲  천제연폭포 제1폭포 (천제연)

천제연폭포 제2폭포 천제연폭포 제3폭포

▲  천제연폭포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제3폭포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州
島)를 찾았다.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을 내달려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제주도에 나를 던져놓았으나 정처(定處)는 싹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첫날은 계획대로 외도동 월대(月臺)를 시작으로 서일
주선을 따라 모슬포(摹瑟浦)까지 여러 주옥 같은 명소와 올레길을 둘러보고 20시 넘어
서 산방산(山房山) 부근에 자리한 '산방산 탄산온천 게스트하우스(게하)'에 여장을 풀
었다.
첫날 여로(旅路)가 너무 배불렀는지 눕자마자 바로 꿈나라로 직통하여 9시간 가까이를
푹 잤다. 여관(모텔)이나 호텔, 펜션, 민박 등은 많이 이용해보았으나 게하는 첫 이용
인데, 그렇게 게하란 존재를 체험하고 아침 일찍 탄산온천에서 몸을 푹 끓이고 말리고
다진 다음 길을 나섰다. (탄산온천 숙박객에게 온천 이용권을 줌)

둘째 날은 첫날 못지 않게 아주 빵빵한 수준의 답사 코스를 준비했다. 천제연폭포를 시
작으로 서귀포(西歸浦) 시내까지 움직이는 일정으로 외도 월대부터 이곳까지 신세를 쭉
진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천제연폭포 정류장에 두 발을 내렸다.



 

♠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제1폭포와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정문

천제연폭포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부담스럽게 노려본다. 여기서 입장
료를 내야 폭포로 들어설 수 있기에 비싼 입장료를 치루고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제주도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서귀포에는 천제연폭포와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정방폭포(正
房瀑布) 등 3개의 유명 폭포가 있다. 이들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지역 명소로
크게 두각을 보인 존재로 그중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는 까마득한 과거가 되버린 초등학교 시
절(1988년)에 인연을 지었고 천제연폭포는 무려 30여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인연을 짓는다. (이
들 폭포 외에 소정방폭포와 엉또폭포, 원앙폭포도 있음)

정문을 지나면 천제연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고 이내 2갈래로 갈라져 오른쪽(북쪽)은 천
제연폭포(1폭포), 왼쪽(남쪽)은 천제연2폭포, 3폭포로 이어진다. 제2폭포 남쪽에 걸린 선임교
를 건너 여미지식물원과 롯데호텔제주 일대까지 접근이 가능하며, 제3폭포를 지나 제주올레길
8코스와 베릿내오름, 대포 해변(주상절리)까지 접속이 가능하다. 그래서 천제연폭포만 보고
돌아갈 요량이 아니라면 '폭포 정문 → 제1폭포 → 제2폭포 → 선임교 주변과 천제루 → 제3
폭포 → 폭포 후문 → 제주올레길8코스(베릿내오름, 대포해변)' 순으로 이동하길 권한다. 그
러면 영양만점의 여로가 될 것이다.

* 천제연폭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 2232 (천제연로 132, ☎ 064-760-6331)


▲  천제연폭포 제1폭포

제주도 최대의 관광단지인 중문관광단지 한복판에 천제연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는 1개의 폭포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곳은 무려 3개의 폭포를 지녀 조금은 단조로운
저들과 크게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천제연폭포 3형제는 편의상 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라 불리나 제1폭포가 원래 천제연폭포
이다. 폭포의 높이는 22m에 이르며, 그 앞에 펼쳐진 못을 천제연(天帝淵, 웃소)이라 부르는데
, 못의 밑바닥이 흔쾌히 보일 정도로 수질이 좋으나 겉보기와 달리 21m의 깊이를 지녀 만만히
보면 안된다.

호랑이가 담배를 알기 훨씬 이전에 옥황상제 직속의 선녀 7명이 밤이면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 선녀의 주인이 옥황상제라 그 명칭을 따서 '천제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는데, 이는 상상 속의 존재인 선녀와 옥황상제가 군침을 흘릴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지녔다는
뜻이다. (옛 사람들은 경승지에 학이나 용, 신선, 선녀 등을 엮어놓는 것을 좋아했음)
조선시대에는 천제연 동쪽에 중문원(中文院)을 두었는데, 제주목사(濟州牧使, 현 제주시장)가
이곳에 쉬면서 폭포의 경치를 즐겼다. 이때는 폭포 양쪽 언덕에 표적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활
쏘기를 시켰으며, 양쪽 언덕 사이로 긴 줄을 걸어놓고 줄에 매달려 건너가 화살을 수거하도록
했다. 바로 중문원에서 서귀포 시내의 서부를 이루는 중문(中文)이란 지명이 생겨났으며, 천
제연폭포를 빚은 계곡을 중문천이라 부른다.

제1폭포는 대자연이 절묘하게 빚은 주상절리(柱狀節理)식 벼랑으로 실로 감탄을 머금게 한다.
그런데 그 폭포 위(북쪽)에 천제교란 다리가 걸려있어 적지 않은 옥의 티를 내고 있다. 그 다
리는 서귀포시내와 모슬포를 잇는 다리로 차량의 왕래가 빈번하여 이곳의 적막을 수시로 아작
을 낸다. 도로와 다리를 놓는 것은 좋지만 꼭 폭포 윗도리에 저렇게 볼썽사납게 개설해야 했
는지 의문이 든다. (다리가 보이지 않게 좀 북쪽에 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폭포라고는 하지만 정작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없고 음악 무대의 뒷배경처럼 주상절리 벼랑만
덩그러니 있다. 이는 겨울 가뭄으로 중문천 상류에 물이 거의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이상한
건 폭포 앞 못(천제연)에는 물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보통 폭포가 쏟아낼 물이 없으면 그 밑
의 못도 갈증을 겪기 마련인데 말이다. 허나 이곳은 절벽과 점토층 사이에서 물이 꾸준히 나
와 천제연을 채우고 있고 폭포 동쪽 동굴에서도 물이 나와 아무리 상류에 물이 증발해도 전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곳 물은 제2폭포, 제3폭포를 빚으며 유유히 바다로 흘러간다.

제1폭포의 폭포다운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비가 한바탕 온 직후에 가기 바란다. 그 외에는 병
풍처럼 멀뚱히 서 있어 이곳이 폭포인지 단순히 못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  천제연폭포 제1폭포와 옥처럼 맑은 천제연(웃소)

폭포 동쪽 벼랑에는 조그만 바위동굴이 있다. 그 천장에서는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
고 있는데, 예로부터 물맞이 명소로 백중(百中)과 처서에 이 물을 맞으면 만병통치가 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허나 지금은 폭포 보호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접근을 통제
하고 있어 물맞이를 할 수 없다.


▲  물맞이 명소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그림의 떡이 되버린
천제연 동쪽 바위동굴

▲  천제연 제1폭포 앞 계곡(중문천)

천제연폭포와 계곡 좌우에는 푸른 빛의 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제주해협 건너 북쪽은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남쪽 바닷가를 제외하고는 자연산 푸른 잎사귀가 거의 사라졌으나 제주도는
겨울의 힘이 미약해 푸른 잎의 나무와 숲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 땅이다.

이곳을 장식하고 있는 숲은 보통 숲이 아닌 따뜻한 기후대에서 뿌리를 내리는 난대성식물(暖
帶性植物)의 보금자리로 희귀식물인 솔잎란과 백량금, 죽절초, 담팔수나무, 구실잣밤나무, 조
록나무, 참식나무, 가시나무, 감탕나무, 바람들칡, 마삭줄, 남오미자, 왕모람 등이 식구를 이
루고 있다. 희귀식물과 난대성식물이 어우러진 이 땅의 대표적인 난대림지대로 '천제연 난대
림(暖帶林)
'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기념물 37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제1폭포 서쪽 벼랑에는 높이 13m, 둘레 2.4m 규모의 담팔수(膽八樹)나무가 있는데, 그는
별도로 '천제연 담팔수나무'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기념물 14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담팔
수나무는 아주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에만 있다. 천제연계곡에는
20여 그루의 어린 담팔수가 자라고 있는데, 주변에 여러 나무와 뒤섞인 상태라 일반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  세월을 간지나게 탄 제1폭포와 제2폭포 사이 계곡(중문천)

▲  제1폭포에서 제2폭포로 인도하는 산책로
천제연계곡(중문천) 벼랑에 닦여진 길이라 벼랑 구간이 많다.

▲  천제연 관개수로(灌漑水路) - 등록문화재 156호

천제연폭포 구역에는 대자연이 빚은 중문천(천제연계곡) 외에 사람들이 만든 조그만 관개수로
도 존재하여 2개의 물줄기를 보여주고 있다.
천제연폭포의 작은 운하인 관개수로는 마르지 않는 샘인 천제연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고자
닦은 것으로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蔡龜錫, 1850~1920)이 이재하(李載廈), 이태옥(李太玉)
등과 함께 중문과 창천, 감산, 대포리 지역 사람들을 동원하여 2회에 걸쳐 만들었다.

채구석은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관리를 지낸 제주 토박이로 제주판관(判官)과 대정군수를 지냈
다. 1894년 제주판관 시절에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봉급을 털어 백성을 구제했고, 대
정군수 시절인 1895년에는 주민들이 갑오개혁(1894년)으로 생겨난 신제도에 반발해 경무청을
파괴하자 이를 진압했다. 또한 1901년 이재수(李在守)의 난을 진압한 공로가 있으나 군수에서
파직되어 3년간 금고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중문에 거주하면서 바다로 매일 버려지는 천제연 물을 보며 '저 물을 이용해 논 농사를
할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3년 동안 폭포 주변 지세를 직접 조사했고 천제연 물을 활용하여
논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여 1907년 천제연 토지신(土地神)에게 토신제(土神祭)를 지내고
공사에 들어갔다.
 
천제연계곡에는 암반과 벼랑이 많아서 공사가 꽤 힘들었는데, 소주 원액을 쏟아붓고 장작불로
바위를 폭파하기도 했으며, 제1폭포 주변 창구목과 화폭목은 가장 난공사 구간으로 화약을 구
해 화포를 만들어 바위를 건드리거나 장작불로 바위를 부셨다. 그렇게 1년의 공사 끝에 1908
년 수로가 완성되었고, 성천봉(星川峯, 베릿내오름) 밑에 5만여 평(약 231,000㎡)의 논을 닦
으면서 논농사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다.
그리고 1917년 2월, 2차 공사에 들어갔는데, 이때도 채구석과 이재하, 이태옥이 돈을 내어 추
진했다. 하지만 1920년에 채구석이 사망하는 등, 여러 진통이 있었으나 1923년 공사가 마무리
되어 2만여 평의 논밭이 추가로 개척되었다. 하여 중문마을은 동쪽에 자리한 강정마을과 함께
제주도의 대표 쌀 생산지로 번영을 누렸다. (공사에 참여한 일꾼의 일당은 3돈이었다고 함)

1차 공사 때는 천제연폭포(웃소)에서 베릿내오름골 앞을 돌아 국제컨벤션 앞 밀레니엄관까지
수로를 닦았고, 2차 공사는 천제연 제2폭포(알소)에서 국제컨벤션까지 닦았는데, 이들 수로는
채구석, 이재하, 이태옥이 중심이 된 '성천답회'에서 관리하다가 1957년 국유화되어 서귀포시
에서 관리하고 있다.
천제연의 물을 먹고 자란 성천봉 밑 옥답은 중문관광단지가 닦이면서 싹 사라지고 말았다. 제
주도 논농사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인데 일부를 기념으로 남겨두어 약간의 논농사라도 했으
면 좋았을 것을 개발 지상주의는 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수로의 길이는 1.9km로 최근 정비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콘크리트 떡칠이 되었으나 논농사가
힘들었던 제주도의 자연환경을 극복한 현장으로 그 시절 농업환경을 전해주는 존재라 등록문
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허나 이제는 물을 대줄 논도 모두 사라져 무늬만 남은 상태이며,
일부 수로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그래도 산책로 옆에 이렇게 100년 묵은 수로가 물을 머금고 흘러가 조촐하게 볼거리를 선사하
니 천제연폭포에서 생각치도 못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  오늘도 묵묵히 흘러가는 천제연 관개수로
한때는 농업용수 수송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이제는 천제연폭포를 수식하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  제2폭포로 인도하는 벼랑 산책로

산책로 오른쪽(서쪽)은 깎아지른 듯한 천제연계곡 벼랑, 왼쪽(동쪽) 역시 주름선이 진한 벼랑
이다. 저 단단한 벼랑과 암벽을 뚫고 힘들게 관개수로를 닦았으니 제주도 농업 발전과 식량확
보에 대한 강인한 집념이 없었으면 불가능하다.


▲  산책로 옆 바위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관개수로
바위들이 목이 많이 말랐는지 이곳 수로는 물이 말라버렸다.

▲  위에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제2폭포

제2폭포는 제1폭포와 비슷한 높이로 그 앞에 '알소'라 불리는 못(소)이 형성되어 있다. 제1폭
포와 달리 물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귀신도 놀라 도망칠 정도인데, 만약 비가 와서 수량이 많
았다면 지금보다 소리가 더 요란했을 것이다.
알소 남쪽에 닦여진 관람공간까지 접근이 가능하나 그 이상의 접근은 통제하고 있다. 제1폭포
는 그래도 못과 계곡의 물을 만질 수 있으나 아랫 폭포로 내려갈수록 자유의 공간이 절반 이
상씩 줄어든다. (제3폭포는 아예 접근도 불가능하여 위에서 바라봐야됨)


▲  확대해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의 위엄
폭포 좌우에 우거진 나무들은 '천제연 난대림'의 일원이다.

▲  제3폭포로 흘러가는 제2폭포 앞 계곡(중문천)



 

♠  선임교(仙臨橋) 주변

▲  선임교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선임교는 천제연협곡(중문천)에 높이 걸린 다리로 제2폭포와 제3폭포 사이에 무지개처럼 걸려
있다. 7명의 선녀가 천제연폭포에서 노닐었다는 전설에 맞추어 다리 밑도리에 하얀 피부의 칠
선녀상을 달았는데, 밑도리 옆구리에 각각 7명씩, 총 14명의 선녀상이 새겨져 있다.
선녀의 길이는 1명당 20m로 각자의 악기를 든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
을 웅장하게 자아냈다. 하여 칠선녀다리, 칠선녀교, 구름다리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작교(烏鵲橋) 스타일의 아치형 다리로 가운데 부분이 하늘로 향해 볼록 솟
아있으며, 다리 길이는 128m, 폭 4m로 230톤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또한 야경까
지 고려하여 100개의 난간 사이로 34개의 석등을 설치해 햇님의 퇴근 이후, 일제히 빛을 쏟아
내게 했다. 하여 이곳 야경은 천제연폭포에서 가장 일품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천제교와 천제2교 사이, 천제연협곡에 걸린 유일한 다리로 이렇게 구름다리처럼 높이 닦은 것
은 협곡이 깊고, 천제연 난대림이 우거져 있어 그들의 피해가 덜 가게끔 하고자 함이다.
오로지 뚜벅이를 위한 다리로 그것을 건너면 천제루 구역이며, 중문관광단지의 일원인 여미지
식물원과 이어진다. 허나 천제루 구역만 천제연폭포 관람료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이상을 가
려면 폭포 서문을 나와서 접근해야 된다.

▲  잘생긴 석등이 마중하는 선임교 동쪽

▲  볼록 솟은 선임교 한복판


▲  선임교에서 바라본 바다 방향 천제연협곡(중문천)
계곡은 천연기념물 난대림에 둘러싸여 있어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선임교에서 바라본 제1폭포 방향과 한라산(漢拏山)
멀리 구름에 감싸인 높은 뫼가 제주도의 심장이자 성역인 한라산이다.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  선임교에서 바라본 제2폭포와 무성한 천제연 난대림

▲  나그네의 동전을 노리는 오복천(五福泉)

선임교는 그 길이가 128m라고 하지만 다리 높이가 상당해 은근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하
여 체감거리는 2배 이상으로 다가온다.
다리를 건너면 천제루 구역으로 오복천이란 분수대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복(五福)이란 장
수를 뜻하는 거북이와 부자를 뜻하는 돼지, 귀함을 뜻하는 용, 사랑을 뜻하는 원앙, 자식복을
뜻하는 잉어를 뜻한다. 그 동물상 앞에는 복주머니로 포장된 돌통이 각각 설치되어 있어 거기
에 동전이 들어가면 해당 동물상의 복을 받는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그렇게 긁어
모은 동전은 나중에 불우 이웃을 돕는데 쓴다고 안내문에 당당히 적혀있다. (정말로 그럴까?)


▲  천제연폭포의 칠선녀 전설과 폭포 안내문을 머금은 돌병풍식 석물

▲  꽃길만 걷자~~ 동백이 화사하게 꽃길을 이룬 천제루 주변 산책로
동백(동백꽃)은 친 겨울파의 꽃으로 초봄까지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①
동백이 붉은 입술을 도도하게 드러내며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②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③

▲  밑에서 바라본 천제루(天帝樓)
선임교 서쪽 높은 곳에 자리한 천제루는 천제연협곡 전망대용으로 세워진 2층
누각이다. 1층은 매점으로, 2층은 전망대로 쓰이며, 2층에 오르면
천제연협곡과 제2폭포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천제루에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와 천제연 난대림

▲  선임교 동쪽에서 바라본 천제연협곡(중문천)과 천제연 난대림

▲  선임교에서 천제연폭포 제3폭포로 내려가는 길

▲  제3폭포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  제3폭포 입구 주변 천제연 관개수로
이곳 관개수로는 제2폭포에서 성천봉 옥답을 잇는 수로로 1917년에 닦기 시작하여
1923년에 완성을 보았다.

▲  제3폭포 입구 갈림길



 

♠  천제연폭포 제3폭포와 대포해변

▲  천제연폭포의 막내, 제3폭포

제3폭포는 높이가 10여m로 제2폭포보다 넓은 못(소)을 가지고 있다. 폭포수는 실타래를 굵게
풀어놓은 듯 제2폭포보다 장쾌하게 쏟아지고 있으며 못은 청정하고 요염한 색깔을 보이고 있
다.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해도 엄연한 겨울의 한복판이라 폭포의 유혹이 먹히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여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그 유혹에 일부러 넘어가 접근 금지를 무시하고 풍덩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접근이 어느 정도 허용된 제1폭포, 제2폭포와 달리 폭포 주변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폭
포가 보이는 전망대에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제1폭포와 제2폭포, 선임교 주변까지는 관광객들이 많았으나 선임교 남쪽부터는 사람 구경하
기가 힘들다. 다소 구석진 제3폭포 주변까지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제3
폭포도 엄연한 천제연 식구이고 제2폭포 못지 않은 외모를 지녔으니 꼭 살펴봐야 나중에 저승
이나 하늘나라에 가서 옥황상제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선임교까지만 둘러봐
도 충분하다 여기고 천제루 구역 쪽으로 빠지거나 천제연폭포 정문으로 되돌아감)


▲  시원하게 쏟아내는 제3폭포의 위엄
폭포 앞 못에 모인 중문천(천제연계곡) 물은 여기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지척에 보이는 바다로 길을 재촉한다.

▲  제3폭포 입구에 세워진 성천답관개유적비(星川畓灌漑遺跡碑)

천제연폭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천제연 관개수로를 만들어 제주도 농업사의 커다란 빛
을 주었던 채구석이다. 제3폭포 입구에 채구석을 기리고자 2003년 2월에 세운 '성천답 관개유
적비'가 자리해 있는데, 비좌(碑座)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
를 고루 갖추어 맵시도 좋다.
천제연폭포 정문 주변에도 1957년 8월 대정 지역 유림들이 세운 '통훈대부 채구석기적비(通訓
大夫 蔡龜錫紀蹟碑)'가 있는데 그 기적비는 존재를 몰라서 지나치고 말았다.


▲  제3폭포에서 폭포 후문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와 관개수로(왼쪽)

▲  제주올레길8코스와 만나는 천제연폭포 남쪽 후문

제3폭포 입구에서 나무데크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뻥뚫린 남쪽 후문이 나온다. 철저하게 금
줄을 치며 입장료를 챙기는 정문, 서문과 달리 후문은 지키는 사람도 없고, 제재하는 시설도
없어 그냥 대놓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갔을 때는 그랬음)
이곳은 밖으로 나가는 문이지 폭포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니며 일루 들어가지 말고 정문
을 이용할 것을 권하는 경고판이 인상을 쓰며 지키고는 있으나 정작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그
경고가 먹혀들어갈 턱이 없다.
천제연폭포의 개구멍 같은 곳으로 이곳의 존재를 알았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이곳을 이용하
는 것인데,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서귀포시는 이렇게 후문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매표소를
두어 후문 수요라도 좀 챙기기 바란다.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 제주올레길8코스

남쪽 후문에서 제주올레길 8코스와 만난다. 8코스는 월평에서 대평포구까지 이어지는 19.6km
의 긴 올레길로 천제2교에서 베릿내오름(성천봉) 서쪽 자락을 지나 폭포 후문을 거쳐 베릿내
오름 정상을 찍고 다시 천제2교로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오름 정상은 가지 않고 서쪽 자락길
을 통해 천제2교로 내려가 한참이나 떨어진 약천사까지 올레길의 신세를 졌다.
제주올레길 장거리 탐방은 전날 절부암에서 수월봉까지 제주올레길12코스에 이어 2번째이다.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에서 바라본 천제연계곡(중문천)
계곡 너머 언덕에는 중문관광단지의 일원인 별내린전망대와 씨사이드아덴리조트가
둥지를 틀고 있다.

▲  중문천을 바다로 흘려보내는 천제2교와 너른 남해바다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에서 바라본 모습)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 (제주올레길8코스)

▲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제주올레길8코스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옆 구간)

베릿내오름을 완전히 내려가면 천제2교가 나온다. 여기서 올레길8코스는 '중문관광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다가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직전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그 길을 3분
정도 가면 남해바다와 스킨쉽을 즐기는 대포 해변이 나온다.
대포주상절리까지 제주부영호텔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남쪽을 지나가는데, 이 일대는 예전 천
제연 물을 먹고 자랐던 제주도 제일의 옥토, 성천답이 있던 터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 식량
을 조달하던 농업 현장이 이제는 휴식과 여흥의 장소로 싹 바뀐 것인데, 이곳 옥토에 대한 미
련이 없어질 정도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해진 모양이다. (밥은 굶지 않게 되었으나 삶이 팍팍
한 것은 여전함)


▲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옆 제주올레길8코스 (북쪽 방향)

▲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해변 ①
저 멀리 봉긋 손짓을 하는 산이 산방산이다. 내가 저 부근에서 여기까지
이동을 한 것이다. (천제연폭포 정류장부터 여기까지 도보 이동)

▲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해변 ②

▲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해변 숲길 (대포주상절리 서쪽)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대포 해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포주상절리가 나온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꺼내도록 하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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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7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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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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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제주올레길12코스, 고산리유적, 수월봉)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앞쪽)와 차귀도(뒷쪽)

제주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  제주 고산리유적

▲  엉알해안


 

겨울 제국의 추위 갑질이 한참이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
濟州島)를 찾았다.

햇님보다 훨씬 일찍 김포국제공항으로 달려가 제주도로 가는 6시대 비행기에 나를 담고
1시간 정도를 움직여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 비행시간 50분, 활주로 방황시간
10여 분)
제주도에서 정처(定處)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제주도에
발을 딛자마자 서쪽으로 길을 잡아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15시 경, 한림읍 용수리에 이
르렀다.
용수리에서 절부암(節婦岩)을 먼저 둘러보고 그날의 주메뉴인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
~무릉리, 17.5km)에 발을 들인다. 12코스의 ⅓ 정도 되는 해안길을 따라 수월봉까지 이
동하기로 했으나 햇님의 칼퇴근 본능으로 일몰 전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물
론 가기야 하겠지만 해가 떨어지면 사진 출사도 거의 불가능해지고 속세와도 떨어진 외
진 곳이라 무서움까지 발생할 수 있다. (외딴 산길이나 제주올레길은 가급적 일몰 전에
마치는 것이 좋음) 하여 일단 수월봉 북쪽인 고산리유적을 1차 목적지로 삼고 12코스에
나를 던져놓았다.
12코스를 따라 용수마을 방사탑 2호와 생이기정 등의 조촐한 명소를 둘러보고 올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포즈를 조금씩 달리하는 차귀도와 와도(누운섬)를 옆구리에 끼며 가
다보니 어느덧 당산봉에 이르렀다. 본글은 바로 당산봉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산봉 이전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부분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 유적)

▲  바로 밑으로 바라보이는 와도와 차귀도(遮歸島)

차귀도와 고산리,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당산봉(堂山峰)은 해발 148m의 낮은 뫼이다. 지
금이야 이 땅에 흔한 뒷동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어 실감은 나지 않겠지만 수억 년 전, 화산이
내뿜은 마그마나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 격하게 이루어진 수성화산체이다.
용암이 물을 만나면 용암은 급히 식고 물은 펄펄 끓는다. 이런 냉각과 가열반응은 격렬히 일
어나 수증기를 포함한 큰 폭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수성화산활동이라 한다. 작은 알갱이
와 수증기로 이루어진 분출은 제법 패기가 있어 이들 화산쇄설물(火山碎屑物)은 멀리까지 날
라가 퇴적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오름을 응회구(凝灰邱)나 응회환이라고 한다. 응회
구는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峯)이 대표적으로 높이가 꽤 되며 응회환은 그 다음 수준으로 수월
봉, 당산봉, 송악산이 이에 해당된다.

당산봉은 산방산, 용머리와 더불어 제주도에서 제일 오래된 화산체이다. 예전 이름은 당오름
으로 산기슭에 뱀을 신으로 봉안한 차귀당이 있었는데 그 신을 '사귀(蛇鬼, 뱀신)'라고 했다.
바로 그 당집 때문에 당오름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그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가
되었고, 봉우리 이름도 잠시 '차귀오름'으로 갈렸다고 전하며, 현재 이름인 당산봉은 당오름
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봉우리 정상에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마치 닭벼슬처럼 보여 계관산(鷄冠山)이라 했다는 이야
기도 덧붙여 전해오며, 당산봉 서쪽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북쪽으로 판포봉수, 남동
쪽으로 모슬봉수와 연락을 했다.

올레길12코스는 당산봉 서쪽 기슭을 지나갈 뿐, 꼭대기는 거치지 않는다. 대신 꼭대기와 당산
봉 주위를 도는 둘레길이 별도로 있어 그 길을 이용하면 완벽한 당산봉 투어가 가능하다. 시
간이 되면 당산봉도 보너스로 거닐고 싶었으나 일몰 시간을 구실로 바로 고산리 유적으로 넘
어갔다. 그때 나에게는 그저 수월봉만 보일 뿐, 당산봉 자체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당산봉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고산리


▲  오르락 내리락이 반복되는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구간

▲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수월봉과 고산리유적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수월봉이다. 사진 가운데
벌판은 고산리 유적으로 일몰은 코앞인데 아직도 길이 저만치나 남아있어
발걸음의 고삐를 더욱 조이게 한다.


당산봉을 내려가면 고산리 벌판과 함께 2차선 노을해안로가 나타난다. 제주올레길12코스는 그
길의 신세를 지며 차귀도포구(고산포구)로 이어지는데 그 포구와 엉알해안을 거쳐 수월봉으로
달려간다. 12코스를 정석대로 거쳐야 엉알해안까지 둘러볼 수 있으나 시간도 그렇고 수월봉에
너무 정신이 팔려 올레길12코스를 잠시 내버리고 고산리유적으로 바로 질러가는 편법(?)을 썼
다. 난 그때까지 수월봉 밑도리가 엉알해안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수월봉 북쪽 해안이 엉알
해안)


▲  동쪽에서 본 고산리 유적 (억새 너머 벌판이 고산리 유적임)

▲  제주 고산리(高山里) 유적 - 사적 412호

수월봉과 당산봉 사이 벌판에 고산리 유적이 넓게 누워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98,465㎡로 풀
이 뒤덮힌 들판 수준이라 이곳이 무슨 유적인가 물음표를 던지겠지만 유적은 보존을 위해 그
밑에 고이 묻어두었으며, 유적 변두리에는 개인 경작지가 존재하고 있다.

이곳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으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지이다. 1987년 5
월, 고산리 주민들이 흙을 채취하고자 땅을 파다가 석창과 긁개를 발견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주대학교는 그것이 발견된 곳을 답사하여 찌르개, 긁개, 돌도끼 1점을 발견하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고산리유적이 슬슬 깨어나게 된다.
1988년 1월, 영남대학교 대학원생인 강창화가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서 융기
문토기 1점을 수습했다. 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 이전에 쓰이던 것으로 그때는 기원전 4,000
년 이전 것으로 파악했으나 지금은 기원전 6,000년으로 보고 있다.

1991년과 1992년 겨울,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 지표조사를 벌였다. 그때 자구내포구에서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유물산포지를 확인했고 지번별로 약 6,000여 점의 유물을 건
졌다.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가 신설되면서 고산리 유적을 관통하게 되자 그해 6월부터 8월까
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발굴 범위는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포구에 이르
는 약 200m, 폭 12m 구간으로 출토 유물은 석기와 토기 등 3,000여 점이며,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섬유질토기의 파편이 확인되는 등 성과가 대단했다. 하여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구석
기시대 후기에서 신석기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유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허나 유물의 절대연대자료가 부족하고 유적의 층위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작으로 유
적과 그곳에 깃든 유물이 계속 파괴되고 고통을 받자 1997년 다시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때는
17,000여 점의 석기와 1,900여 점의 토기를 끄집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998년 11월부터 1999년 2월까지 다시 조사를 벌여 170여 점의 타제석기와 토기를 발굴했으며
, 사적으로 지정될 구역 외 지역에 대한 조사를 벌여 유적의 범위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가 사적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2012년 1구역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벌여 원형움집터 26동, 수혈유구 295기, 야외 불피던 곳
10기, 구상유구 2기, 토기류 87점, 석기류 278점을 발견했는데, 1만년 이전 것으로 파악이 되
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특히 석촉과 한쪽을 뚫은
옥귀고리 1점은 그 재료가 제주도에는 없는 것들이라 궁금증을 증폭시켰는데, 2013년 1구역을
다시 조사하여(2차 발굴조사) 주거지 7동, 수혈유구 227기, 야외 불피던 곳 3기, 구상유구 1
기, 유물 215점을 건졌고, 석촉 등의 석기가 남해안 일대 암석으로 확인되면서 전남, 경남 지
역 남해안과 교류가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4년 1구역 3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4동, 수혈유구 78기, 소토(燒土)유구 3기, 구상유구 2기
가 추가로 나왔으며, 2구역 조사에서 문화층의 잔존 범위와 지상식 주거지를 확인했다. 특히
남부지방 신석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토기인 영선동식 토기가 나왔으며, 고산리유적 거주기
간이 2,000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2015년 1구역 4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1동, 수혈유구 19기, 소토유구 1기를 건졌으며, 화덕시
설로 추정되는 돌무지 시설을 중심으로 거의 원형으로 기둥 구멍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그리고 2구역 2차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석기들이 나왔다.
이후로도 계속 조사를 벌여 지금까지 고산리유적이 쏟아낸 유물은 성형 석기 5,000여 점, 박
편 94,000여 점 등 석기 99,000여 점과 토기조각 1,000여 점 등 도합 10만여 점에 이른다.
또한 구석기 후기와 신석기 초기를 연결하는 유적이 없어 무척 애를 태웠는데 그 고통을 바로
고산리가 속시워하게 풀어준 것이다. 기원전 12,000~10,000년경 눌러떼기 수법으로 지어진 석
기와 섬유질 토기가 다량으로 나와 이 땅에서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
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여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등 우리의 옛 땅과 우리나라 등 동북아시아 신석기 초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우리나라 신석기 초기 문화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이곳이 신석기를 비롯한 옛 사람들의 터전이 된 것은 바로 옆 수월봉에서 나온 화산재가 이곳
에 덮히면서 기름지고 평평한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땅에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여기서 터전을 일구던 신석기 사람들은 구석기 후기 시절에 수렵과 채집 집단의 석기 제
작 전통을 이어나갔고,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나온
석기는 석재를 기초 원석으로 직접 타격하여 박편(薄片)을 만든 다음, 간접 타격 또는 눌러떼
기로 2차 가공해 제작했다.
토기는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 조각과 덧무늬토기 조각 등이 나왔고,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는 제주도 스타일의 유일한 토기 형식으로 '고산리식 토기'라 불린다.
덧무늬토기는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 등에서 나온 기하학적
태선 덧무늬토기 형식으로 옆면이 굴곡이 있는 선으로 표현되었다.

* 고산리 유적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28,3650-1 등 (고산리유적안
  내센터 ☎ 064-772-0041)
* 고산리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너른 들판 같은 고산리 유적

▲  고산리 유적에서 바라본 당산봉
내가 용수리에서 저 당산봉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유적 일대는 거의 들판으로 고산리유적안내센터와 안내문이 전부이다. 유적도 그 보존을 위해
모두 흙으로 덮어놓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적 남부를 가로질러 가면 2차선의 신창~고산 해안도로(노을해안로)가 나온다. 그 도로는 차
귀도포구에서 나온 길로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수월봉입구가 마중을 한다.


 

♠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수월봉(水月峰)

▲  영산(靈山) 수월봉 표석의 위엄

수월봉입구에서 길은 5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한경면의 중심지인 고산리로 그
곳에 있는 고산6거리(고산리 중심부)까지 1.1km 거리이다. 대중교통으로 수월봉을 찾을 경우
102, 202번 등 제주도 서일주 노선을 타고 고산환승정류장(고산6거리)에서 내려 도보로 접근
하는 것이 편하다.
북쪽 길은 차귀도포구와 고산리 유적으로, 남쪽 길은 고산리 서남부, 서북쪽은 엉알해안, 서
남쪽은 수월봉이다. 당산봉을 내려와서 잠시 버려둔 제주올레길12코스를 여기서 다시 만나서
수월봉으로 같이 가게 되는데, 설마설마했던 수월봉에 일몰 바로 직전에 도착을 한 것이다.


▲  수월봉 북쪽 엉알해안 (수월봉 화산쇄설층 - 천연기념물 513호)

엉알해안 산책로는 차귀도포구 서남쪽 고산출장소에서 수월봉입구까지 이어지는 1.1km 정도의
해안 벼랑 길이다. 여기서 '엉알'이란 바닷가 언덕 밑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로 그 이름 그
대로 벼랑 밑을 지나는 것인데, 이 벼랑이 수월봉의 백미(白眉)이다. 수월봉에 왔다면 수월봉
도 좋지만 이 벼랑길도 꼭 거닐어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엉알해안 벼랑은 제주도 화산들이 한참 몸을 풀던 시절에 당산봉과 수월봉이 수성화산활동(水
性火山活動)으로 빚어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수월봉과 당산봉은 느긋한 봉우리이나 그 밑 벼
랑은 직각에 가까운 가파른 모습이다. 특히 수월봉은 화쇄난류(火碎亂流, pyroclastic surge)
라 불리는 독특한 화산재 운반작용으로 닦여진 화산체로 화쇄난류층 종류에서 세계 최고의 수
준을 자랑한다. 하여 그와 관련된 논문과 보고서들이 수두룩하게 나와있다.

엉알해안은 수월봉 밑도리까지로 그곳까지는 산책로를 닦지 못하고 수월봉 북쪽 밑까지만 길
을 내었다. 이 산책로도 살펴봐야 했으나 일몰 압박과 코스 혼돈의 무지(無知)로 인해 가지
못하고 이렇게 수월봉 북쪽 입구만 기웃거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민 수월봉

▲  수월봉으로 인도하는 길 (제주올레길 12코스)

수월봉은 제주도 본토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해발 77m의 해안 언덕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
은 차귀도) 북쪽과 서쪽은 절벽이고 동쪽과 남쪽은 부드러운 산세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 사
람들이 붙여놓은 수월과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에 이슬을 맺히게 한
다. 수월봉이란 이름은 바로 '수월'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전설은 정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
으나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조선 중기에 수월과 녹고 남매가 홀어미를 모시고 수월봉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갑자기 중병에 걸리자 온갖 약을 구해보았으나 좀처럼 차도가 없어 애 태우던 중, 집 앞을 지
나던 승려가 그 사연을 듣고 100가지 약초를 알려주었다.
하여 수월 남매는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99가지를 구했으나 나머지 하나인 오갈피를 찾
지 못해 마을 앞 수월봉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우리
벼랑에서 오갈피가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오갈피에 난데없는 등장에 그들은 너무 기뻤으나
문제는 절벽 중간쯤에 있다는 것. 그래도 그것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수월은 남동생인 녹고
의 손을 잡고 벼랑으로 내려가 그것을 뜯어 녹고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은 녹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탄성을 지르다가 그만 실수로 수월이의 손을 놓고 말았다. (또는 수월이가 벼랑을 기
어올라 오갈피를 구했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함)

수월은 그대로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었고, 녹고는 넋을 잃고 17일 동안 누이를 부르며 울었
다. 그 눈물이 바위 틈을 거쳐 엉알해안 벼랑으로 떨어지니 세상은 그 물을 '녹고의 눈물'이
라 불렀다. (현실은 해안 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밑에 진흙으로 된
불투수성 지층인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것임) 그 사연으로 봉우리 이름이 수
월봉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성이 나름 있는 일이라 아마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짓기 좋아하는 지역 선비들이 효도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그럴싸하게 각색하여 수월
봉 전설로 내놓았을 것이다. 허나 병든 어미 때문에 아리따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딸이 꽃도
피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했고 남동생은 누이를 죽게 했다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힘든 삶을
살았으니 그들의 팔자도 나처럼 참 박복하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왼쪽)와 와도(오른쪽)
저들은 용수리 절부암부터 이곳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
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과 비슷했던 와도는
여기서 보니 그저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와도(왼쪽 섬)와 엉알해안, 당산봉

▲  수월봉 지붕에 자리한 수월정(수월봉 전망대)

수월봉 정상에는 8각형 모습의 수월정과 고산기상대가 자리해 있다. 수월정 서쪽은 벼랑으로
안전펜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가 제주도 본토에서 중원대륙과 가까운 곳이다. 우리가 장
차 점유하고 누려야될 중원대륙이 혹여 보일까 싶어 이마에 주름선이 간드러질 정도로 두 눈
을 부릅뜨고 서쪽을 노려봤으나 대륙은 보이지 않았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실제 거리는 엄청
나다.
바닷바람은 일몰 후광에 힘입어 얼마나 매서운지 내가 날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
이다.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일몰 바로 전에 도착하니 마치 수월봉을 모두 가지게
된 듯 무척 기뻤다. 허나 엉알해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실수를 범했으니 하나를 얻고 하나
를 잃은 셈이 된다. 하여 나중에 또 와야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허나 이런 곳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또 오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  수월봉 지붕 남쪽에 자리한 고산기상대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고산리 서남부와 신도리(대정읍) 지역
수월봉은 당산봉을 제외하고 주변이 온통 바다와 들판이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품격은 우수하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차귀도와 와도, 주름선을 진하게
보이며 뭍과 섬을 세차게 때려대는 남해바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와도와 엉알해안, 당산봉

수월봉을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아 마음이 참 뿌듯하다. 수월
봉입구로 나오면서 앞서 지나쳤던 엉알해안을 잠시 거닐까도 했으나 땅꺼미가 자욱하여 언제
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고산리로 움직였다.
바람의 섬인 제주도에 걸맞게 바다 바람이 얼마나 춥고 징한지 바람을 맞은 스마트폰 밧데리
가 순식간에 70%에서 0%로 떨어져 폰이 급 기절하는 참사까지 발생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라 다소 당황했으나 이내 진정을 되찾고 길을 재촉했다.

고산리에서 제주도 급행버스 102번을 타고 모슬포(대정)로 나가 유명한 밀면집에서 저녁으로
시원한 밀면 1그릇을 섭취했다. 거기서 폰 충전을 꾀하니 잠시 혼절했던 폰이 다시 깨어난다.
이래서 먼 길을 갈 때는 무조건 폰 충전 케이블을 가지고 간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산방산(山房山) 서북쪽에 자리한 산방산탄산온
천을 찾았다.
요즘 숙박시설의 하나인 게스트하우스(게하)가 인기라 체험이나 해볼 겸 탄산온천에 딸린 게
하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말로만 듣던 8인용 도미토리 방에서 잠을 잤다. 숙박비도 모텔에
비해 많이 저렴했고 이곳 같은 경우는 온천 이용권 2장을 서비스로 주어 저녁과 아침에 뜨끈
한 온천물에 들어가 몸을 푹 끓이며 편하게 씻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허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돈 더 주고 마음 편하게
모텔에서 잤음)
내 듣기에는 같은 방에 자는 사람들끼리 술도 1잔 하고, 게하에서 자체적으로 저녁에 파티도
한다고 하나 파티 같은 경우 별도의 돈을 내야 되고, 몸도 완전 방전된 상태라 땡기지도 않는
다. 다행히 내가 잔 방은 딱 절반만 차서 번잡함은 별로 없었고, 다들 자는 분위기라 22시 넘
어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첫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 글에서~~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7월 2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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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주도의 서쪽 끝을 거닐다 ~~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나들이 (차귀도, 와도)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절부암 주변, 제주올레길12코스)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서 바라본 와도(왼쪽)와
차귀도(오른쪽)

절부암 용수리 제주올레길12코스

▲  절부암

▲  용수리 제주올레길12코스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를 찾았다.

달님이 하늘 높이 걸린 새벽 3시,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를 줄
줄이 이어타 김포공항으로 이동했다. 비수기 평일임에도 제주도(濟州島)와 따뜻한 남쪽
을 꿈꾸는 사람들로 김포공항 국내선청사는 이른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룬다.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 수속을 마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나를 제주도로 옮
겨줄 6시대 비행기에 몸을 담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만석의 기쁨을 누리며 활주로
를 10여 분 정도 방황하다가 창공 속으로 높이 날개짓을 펼친다.
이륙 시간을 기준으로 제주공항 착륙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고 활주로 이동 시간을 포
함해 1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이 소요시간은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던 1988년과 별로 차
이가 없다.
제주공항 서쪽 활주로에 사뿐히 착륙하니 공항청사로 인도할 셔틀버스가 넉넉히 대기하
고 있었다. 하여 그 버스에 탑승하여 3분 정도를 달려 제주공항청사로 들어선다.

제주도에 나를 떨어트리긴 했지만 이미 정처(定處)는 싹 정해둔 상태이다. 남들은 거의
렌트카를 이용해 이동을 하지만 나는 극서민이라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택했다. 제주
도는 육지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하고 무엇보다 무료환승이 아주 휼륭하여 섬 1바퀴
(180km)를 기본 요금(1,250원, 카드는 1,150원)에 도는 것도 가능하다. (제주도 간선노
선인 201번과 202번을 이용하면 됨)

제주국제공항을 나와서 제주시내 서부와 애월읍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제주도 간선노
선 202번(제주터미널~고산리~서귀포등기소)을 타고 용수리 충혼묘지에서 내렸다. 202번
은 외도 월대(月臺)부터 다음날 가는 천제연폭포까지 쭉 신세를 진 노선으로 제주도 급
행버스 102번과 함께 서일주(일주서로) 구간을 책임지고 있다. (동일주는 급행 101번과
간선 201번이 맡고 있음)

정류장 바로 남쪽에 용수교차로가 있는데, 여기서 용수리포구로 인도하는 용수1길로 접
어들어 15분 정도 걸으니 이곳에 상륙했던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기리는
'성(聖)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이 잠깐 들리라며 손짓을 한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곳이라 통과하려고 했으나 그냥 지나치기가 조금 아쉬워 여로(旅路
)를 좀 살찌울 겸, 기념관의 손짓에 응했다. 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커피까지 기분 좋게
얻어 마시며 바로 서쪽에 자리한 용수리 포구로 이동했다.
표착기념관은 옥상을 개방하고 있는데 거기서 바라보는 차귀도와 와도, 용수리 지역 조
망이 제법 괜찮으니 꼭 누려보기 바란다.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 대한 내용은
생략함)

용수리 포구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절부암이 있는데, 바로 그곳을 시작으로 수월봉까
지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무릉리, 17.5km)를 거닐었다. 앞서 둘러본 명소들은 코스
요리에서 앞에 먹는 맛보기 음식이고 이번에 다룰 제주올레길 12코스는 그날의 중심 메
뉴라 할 수 있다. 
이 코스는 남해바다와 산, 해안 절벽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 올레길로 용수리 방
사탑과 생이기정, 당산봉, 고산리 유적, 엉알해안 등의 상큼한 명소가 있으며, 바다 너
머로 차귀도와 와도가 다양한 각도로 포즈를 취해 눈과 마음이 지루할 틈이 없다.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수없이 앗아가고 놓아준 올레길 12코스, 우리집과 가까웠다면 즐
겨찾기 명소로 삼아 두고두고 누리고 싶지만 서로의 제자리가 너무나 머니 실로 아쉽다.
(내가 조물주라면 우리 동네로 그대로 옮겨오고 싶음)


▲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옥상에서 바라본 용수리 지역
저 멀리 구름에 감싸인 곳이 제주도의 심장이자 성지인 한라산(漢拏山)이다.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  용수리 포구에서 바라본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김대건이 청나라 상해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다가 풍랑을 만나 용수리에
표착했다. (차귀도에 먼저 표착했다고 함) 그때 타고 온 배는 복원되어
저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바닷가 언덕, 절부암(節婦岩)
- 제주도 지방기념물 9호

▲  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에 이르면 유난히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시선을 붙잡는다.
온갖 나무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뒤섞여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그 언덕은 용수리의 오랜
상징이자 나를 이 머나먼 남국(南國)으로 오게 한 절부암이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절부암은 이름 그대로 절개를 지킨 부인을 기리는 바위로 다음과 같은 슬
픈 이야기가 속삭이듯 서려있다.

때는 1863년 경, 용수리에는 강사철(姜士喆)과 16살(또는 19세) 먹은 고씨 여인이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까지 했으나 살림이 영 좋지 못해 차귀도에서 대나무를 베어와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인 며칠 후, 강씨는 바구니를 만들 재료를 취하고자 마을 사람들과 테위(테배)를 타고 차귀
도로 건너갔다. 허나 정오가 지나면서 갑자기 강한 바람이 몰아치자 서둘러 마을로 돌아오다
가 강풍의 희롱에 제대로 흥분한 바다 파도로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만다. (다른 이야기로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강풍으로 침몰해 죽었다고 함)
졸지에 남편을 잃은 고씨는 크게 통곡하며 바닷가에 나가 남편의 시신을 찾을 수 있기를 절절
히 빌었다. 그렇게 3달을 빌었으나 남편의 시신은 소식이 없었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결
국 해안 절벽에 있는 팽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까지 행
방이 묘연하던 남편의 시신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고씨가 목을 맨 자리 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해괴한 일에 지역 사람들은 중원대륙 조아(曹娥)의 일과 같다며 감탄을 했다. 여기서 조아는 조간의 딸로 그가 강을 건너다 급류에 빠져 죽자 조아는 70일 동안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너무 비통하여 강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5일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물 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고씨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대정(모슬포) 사람 신재우(愼哉佑)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신이 과
거에 붙으면 고씨의 열녀비(烈女碑)를 세워주겠다고 공언했다. 하여 바다를 건너 서울로 올라
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정성 부족인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풀이 죽은 신씨는 고향으로 가다가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들렸다. 점쟁이는 한 여인이 따라다
니고 있으니 그를 잘 모시면 급제를 할 것이라 답을 했다. 허나 그 여인이 누군지 전혀 알 수
가 없었고 집에 와서도 계속 머리를 굴렸으나 딱히 떠오르는 여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고씨 부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 여인이 고씨라 여겨져 고씨의 묘를 참배했다. 그리고 다시 상경
하여 과거에 응시해 드디어 급제를 하였다.
그는 대정판관(大靜判官)의 직을 제수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정에 상소하여 고씨의 열녀비를
세우는 한편, 70냥을 지원해 고씨 부부의 묘를 당산봉(고산봉) 서쪽 비탈에 합장해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고산과 용수 마을에 100냥을 내주어 제사를 꼭 챙기도록 했으며,
고씨가 목을 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이름 지었다.

왜정(倭政) 때는 왜정의 태클과 재정 문제로 제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마을 부인회가
돈을 모아 300평 정도의 절부암전을 마련하여 그 소출로 매년 꾸준히 제를 지낸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절부암 언덕에는 사철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포나무, 느릅나무, 박달목서(환경부 지정 멸
종위기 야생생물 2급) 등이 모진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우거져 있다. 예전에는 절부암 바로 앞
까지 바닷물이 넝실거렸으나 개발의 칼질이 여기까지 마수를 뻗치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강제
로 받게 되었다.
절부암 앞에 돌로 다져진 산책로가 닦여 바닷물은 서쪽으로 조금 밀려났으며, 그 앞바다에 도
로가 생기고 항구가 생겼다. 게다가 절부암 뒤쪽에도 집들이 마구 들어서 마치 도시 속에 갇
힌 외로운 공간처럼 되었다. 이곳이 대도시 한복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엄연한 시골 포
구이다. 개발의 칼질에 절부암의 공간이 다소 쪼그라든 느낌을 주며, 절부암 바로 뒷쪽에 옥
의 티를 선사하면서까지 건축 허가를 내줬어야 했는지 제주도 철밥통들에게 실로 회의감이 든
다. (무분별한 난개발로 계속 망가지고 고통받고 있는 제주도의 현실임)


▲  절부암 앞 산책로 (북쪽 방향)

▲  절부암 앞 산책로 (남쪽 방향)

산책로가 닦여진 이곳에는 층층이 주름진 바위들이 있었고 그곳까지 바닷물이 손을 내밀어 절
부암과 진한 정을 나누었다. 산책로 조성으로 절부암 접근이 좀 쉬워지긴 했으나 1980년대 절
부암 사진과 비교해보니 개발이 씌운 굴레에 단단히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  절부암 제단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을 갖춘 이곳에서 절부암 제사가 이루어진다.
평소에는 먼지가 놀이터로 삼을 정도로 한가하지만 3월 15일만 되면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세월을 너무 간지나게 탄 절부암 바위들

▲  절부암 바위글씨의 위엄
감동 김응하(監董 金應河)가 글을 짓고 동수 이팔근(洞首 李八根)이 글씨를 썼다.
제주도에서 유일하다는 전서체 바위글씨로 독특한 글씨라 절부암이면서도
아닌듯한 아리송한 모습이다.

▲  신재우가 남긴 바위글씨

절부암 바위글씨 주변에는 '同治丁卯紀平三字(동치정묘기평삼자, 여기서 '동치정묘'는 1867년
)','判官愼裁佑撰(판관 신재우찬)' 바위글씨가 있다. 이들은 절부암을 있게 한 신재우의 흔적
들로 그 주변 바위에는 절부암 제사를 주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어 절부암의
과거와 현재가 깃든 소중한 일기장 같은 곳이다.

* 절부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41-5


▲  바다를 향해 작게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저들은 용수리에서
수월봉까지 다양한 각도로 아주 지겹도록 구경을 했다.

▲  차귀도(遮歸島)

손에 닿을듯 가까이 떠있는 차귀도는 0.16㎢의 조그만 섬으로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다.
지실이섬, 죽도, 와도 등의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으며, 1970년대까지 약간의 사람들이 거주
하고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시절에 여러 번 터졌던 북한의 도발 행위(1968년 김신조 공비 패
거리 서울 침투, 1974년 공비단 추자도 침투 등)로 외딴 섬들의 안보 취약이 문제가 되자 섬
사람들을 제주도 본토로 이주시켜 무인도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금지된 섬이 되어 완전 자연의 공간으로 남아있다가 2011년 이후 개방되어 섬
나들이가 가능해졌다.
차귀도는 고산리 차귀도 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되며,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참돔과 돌
돔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잡힌다. (1~3월, 6~12월에 많이 잡힘~) 이번에는 그림의 떡처럼 차
귀도를 대했지만 다음에는 저곳에 꼭 발을 들이고 싶다.

차귀도 일대는 '차귀도 천연보호구역'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22호로 지정되었다.


▲  와도(臥島, 누운섬)

와도는 차귀도에 딸린 작은 바위 섬으로 용수리에서 보면 마치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
인다. 얼굴과 가슴(조금 뾰죡하게 나온 부분은 젖꼭지), 다리 부분이 제법 현실감있는 모습으
로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을 느끼게 한다. 허나 용수리에서 볼 때나 그렇게 보이지 당
산봉과 고산리, 수월봉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의 와도 때문인지 그곳과 가까운 고산리에는 예로부터 과부들이 많았다
고 한다.


▲  바다에 나란히 떠서 물놀이를 즐기는 와도와 차귀도(오른쪽)

▲  용수마을 방사탑(防邪塔) 2호 - 제주도 민속문화재 8-9호

제주도에는 방사탑이라 불리는 동그란 돌탑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 흔한 서낭당이나
돌탑 스타일의 탑으로 마을의 재앙을 막고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허한 곳을 채워주는 용
도로 지어졌는데, 답, 답데, 거욱, 거왁, 답단이, 거욱대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으며, (주로
쓰이는 명칭은 '방사탑') 탑 위에는 돌하르방 모양의 돌이나 사람 얼굴 모양으로 다듬은 돌,
새 모양의 돌을 추가로 올려놓는다.

용수리포구에는 남쪽과 북쪽에 총 2개의 방사탑이 세워져 있다. 차귀도 주변은 바다가 툭하면
심술을 부려 배가 자주 좌초되었고 그때마다 죽은 이들의 시신이 마을로 밀려왔다. 하여 마을
주민들은 그런 재앙을 막고자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화성물 가까이에 있어서 화성물답, 화성물탑이라 불리기도 하며, 탑의 꼭대기에 새의 부리와
비슷하게 생긴 길쭉한 돌이 바다와 차귀도가 있는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새 부리 비슷하
게 생긴 돌이 놓여 있어서 '매주제기'라 불리기도 한다.
새는 예로부터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고 인간의 소리를 하늘로 전해주는 존재로 여겨져 용수리
앞바다에 사고가 없게끔 하늘에 민원을 넣는 용도로 단 것으로 보인다.

* 용수마을 방사탑2호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88-6번지

▲  가까이서 본 용수마을 방사탑 2호

▲  방사탑 주변 바닷가


 

♠  제주올레길12코스 거닐기

▲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 방사탑2호~생이기정 구간)

제주올레길 12코스는 용수리 절부암에서 무릉리까지 이어지는 17.5km의 올레길이다. 이 올레
길은 용수리에서 제주올레길 13코스(용수~저지, 15.9km)로 간판이 바뀌며 무릉리에서 제주올
레길 11코스(무릉~모슬포, 17.3km)로 이름이 바뀌어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간다.
나는 12코스 구간 중 가장 꿀단지라 할 수 있는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거닐었는데, 12코스 전
체의 ⅓ 남짓 정도 된다. 허나 일몰 시간의 압박이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는다. 2시간 내에
수월봉까지 가야 일몰의 눈치를 피하며 마음 놓고 사진 셔터를 누를 수 있고, 안전하게 모슬
포(摹瑟浦)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워지면 출사도 힘들고 올레길 이동도 힘들어짐)

햇님의 퇴근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12코스에 나를 던지기로
하고 길에 임했다. 이 구간은 생이기정 북쪽에 이르면 고산리 유적까지는 완전 속세(俗世)와
등을 지게 되므로 적어도 고산리 유적까지는 무조건 가야 된다.
12코스 구간 중, 용수리~수월봉 구간은 해안 구간으로 당산봉을 넘어가며, 수월봉~무릉리 구
간은 내륙이다. 해안길 중 용수리 방사탑~당산봉까지는 거의 벼랑길로 키 작은 줄난간 외에는
안전시설이 없으므로 괜히 사진 찍는다고 안전선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한다. 게다가 속세와 떨
어진 외진 곳이라 가급적 일몰 전까지는 산책을 마쳐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  누렇게 뜬 억새들이 나그네를 반기는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 방사탑2호~생이기정 북쪽 구간)


12코스는 제주도의 야심작인 올레길의 일원이라 길은 잘 닦여져 있다. 방사탑2호 남쪽 구간에
는 무려 박석(薄石)까지 입혀져 있어 마치 시내 해안 공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제주도가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하지만 바닷바람이 얼마나 격한지 두 손이 얼어붙을 정도
이다. 그날 제주도 기온은 영상 4~9도라고 나왔으나 체감온도는 거기서 7~8도 정도는 빼야 했
을 정도이다. 너무 두꺼운 잠바까지는 아니더라도 패딩 잠바나 덜 두꺼운 잠바를 입어야 무리
가 없을 것이다. (모자 달린 잠바를 입으면 더 좋음) 대신 내륙 지역은 바닷바람의 간섭을 덜
받아 조금 따스하다.


▲  여기서도 변함없이 나와 놀아주는 와도와 차귀도
마치 양이(洋夷)들이 말하는 천지창조의 현장 같다. 와도와 차귀도가 막
빚어진 듯한 모습, 하늘은 저들을 만드느라 체력이 방전되었는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와도의 위엄

12코스를 거닐면 꼭 따라다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차귀도와 와도이다. 이들은 수월봉까지 계
속 나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비춰준다. 절부암과 용수리포구에서는 윗 사진처럼
보였으나 올레길을 1굽이 돌 때마다 조금씩 다른 자태를 보여주며, 고산리에 이르면 누워있는
여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바위섬으로 모습이 바뀐다. 사물과 사람을 하나의 각도가 아닌 다양
한 각도로 봐야된다는 진리를 이 올레길12코스가 몸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허나 사람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들이라 그 당연하면서 단
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  해안 벼랑으로 이루어진 제주올레길12코스 (생이기정 북쪽)
이곳은 바다 낚시터로 좋은 곳이라 낚시도구를 챙기고 벼랑 밑으로
내려가는 낚시꾼이 여럿 눈에 띄었다.

▲  제주올레길 12코스 생이기정 북쪽 해안 벼랑
오른쪽에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생이기정 북쪽)
인생이란 이렇게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챙겨야 정신 건강에 좋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썩 좋은 것은 아니다.

▲  저만치 멀어진 용수리

올레길 12코스 경관에 퐁당퐁당 홀리다보니 어느덧 이곳에 우두커니 선 나를 발견했다. 여기
가 용수리~수월봉 구간의 ¼ 정도 되는 곳으로 길은 한참이나 남았다. 과연 수월봉까지 일몰
직전까지 갈 수 있을까? 수월봉은 내 조급한 마음을 외면하며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
고 있다.


▲  생이기정 북쪽에서 바라본 용수리 앞바다
바다 파도는 제법 패기 있는 모습으로 뭍을 때려대고, 바닷바람은 태풍 같은
기세로 홀로 거니는 나를 때려댄다. 오늘도 고통 받는 내 인생...

▲  바람개비로 정신이 없어 보이는 용수리

제주도 해안과 앞바다에는 거대한 바람개비가 많이 닦여져 있다. 제주도의 거센 바람을 활용
해 풍력발전(風力發電)을 얻고자 설치한 것인데, 바다에 설치된 것들은 해질녘이나 저녁, 흐
린 날에 보면 마치 커다란 괴물이 칼 같을 것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듯 무시무시해 보인다.


▲  슬슬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와도와 차귀도 (생이기정 북쪽)

▲  생이기정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이렇게 보니 와도가 전혀 누워있는 여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차귀도 또한
용수리에서 보이지 않던 숨겨진 남쪽 속살을 비추기 시작한다.

▲  생이기정
난간 너머로 억새들이 펼쳐져 있는데 겉으로 보면 완만해 보이지만 그건
억새가 나그네를 낚으려는 함정이다. 완만해 보이는 억새밭 너머에
천길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으나 가급적 난간을 넘지 말자.
 

용수리 포구와 고산리 유적 중간에 '생이기정'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제주도 사투리로 새를
뜻하는 '생이'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진 것으로 새가 날아다니는 절벽길이란 뜻이다.
올레길에서 보면 생이기정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차귀도나 바다에서 보면 꽤 높은 벼랑
으로 화산재와 용암이 바다로 흘러가 켜켜히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생이기정도 그
렇고 엉알해안과 수월봉 모두 용암이 빚은 대작품들이다.


▲  생이기정 남쪽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①
와도의 숨겨진 남쪽 속살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  생이기정 남쪽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②

▲  당산봉에서 바라본 수월봉과 고산리 유적
드디어 수월봉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다를 향해 자라 목처럼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그 수월봉이고, 사진 가운데 들판이 
고산리 선사유적이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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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외도 월대, 수산봉, 납읍리 금산공원)

▲  제주해협이 바라보이는 외도 해변

수산리 곰솔 납읍리 금산공원 (납읍리 난대림)

▲  수산리 곰솔

▲  납읍리 금산공원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사흘 일정으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제주도는 거의 13년 만에 방문으로 비행기나 장거리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되는
부담감 때문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나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수천~수만 리가 되
는 것도 아니고 고작 500km 남짓에 불과하며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내외면 충분
히 닿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천하를 마음대로 주유한다는 내가 제주도에게 너무나 소심하게 대한
것 같고, 이러다가는 제주도란 존재를 깜빡 잊어먹을 것만 같았다. 하여 나를 제주도에
팍 떨어트리기로 작정하고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비행기표 예약밖에
는 없음)

평일 아침 6시대 비행기라 널널하게 새벽 2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
를 1회 갈아타고 다시 일반시내버스로 환승하여 5시에 김포국제공항 국내선청사에 도착
했다. (2시 50분대에 방학사거리에서 N1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로2가로 이동 → 3시 50
분대에 N26번 시내버스를 타고 공항시장까지 이동 → 4시 50분대에 공항시장 건너편 정
류장에서 6629번을 타고 김포공항 진입)

공항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 평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제주도를 꿈꾸러 온 사람들로 거
의 북새통을 이루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30여 분 정도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제
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그 작은 입을 닫
고 넓은 활주로를 10분 남짓 방황하다가 드디어 하늘 높이 비상한다.
제주도에 처음 발을 들였던 초등학교 시절, 김포공항에서 50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
고 있다. 그 소요시간은 여전히 유효하여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하여 바퀴를 멈출 때까지
딱 50분이 걸렸다. (보통은 활주로 방황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1시간 10분을 소요시
간으로 잡고 있음)

활주로 한쪽에 멈춰선 비행기에서 내려서니 공항청사로 인도하는 저상형 셔틀버스가 대
기하고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분 정도를 달려 공항청사로 이동했는데 공항이 바닷가
와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다소 매서웠다. 제주도는 여름에만 와봤지 겨울에는 처음이
다. 따뜻한 남쪽이라 별로 춥지 않을 것이라 방심을 하였으나 바닷가는 바람 때문에 오
히려 본토 이상만큼이나 추웠다. (단 내륙 쪽은 따뜻함)

제주도에서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남들은 렌
트카로 많이 이동을 하지만 난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선택하여 돌아다녔다. 제주도는
비록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버스 배차간격은 긴 편이나 본토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
하고 무료환승제가 아주 휼륭해 섬 1바퀴(180km)를 기본요금(현금 1,200원, 카드 1,150
원)이면 돌 수 있다. (제주도 급행버스와 공항버스는 제외)

제주국제공항에서 첫 답사지인 외도 월대를 가고자 제주시내버스 315번(국제여객선터미
널↔수산리)을 탔다. (다른 노선들도 있으나 그것이 먼저 와서 탔음)
버스는 오랜만에 건너온 나에게 신제주 일대를 신나게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8시가 조금
넘어서 외도초교 정류장에 나를 가져다 주었다. 외도초교에서 남쪽으로 가면 광령천(光
令川)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나를 여기로 부른 월대가 있다.


 

♠  달놀이와 은어로 유명했던 제주시내 외곽 명승지
외도 월대(月臺)

▲  현무암으로 닦여진 월대

월대는 광령천(외도천)과 도근천<都近川, 수정천, 조공천>이 만나는 곳에 닦여진 명승지이다.
월대 앞을 흐르는 광령천을 따로 월대천이라 부르기도 하며, 남해바다도 이곳까지 손을 대고
있어 자연히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심이 깊고 청정해 예로부터 은어
와 숭어, 뱀장어가 많이 노닐고 있다. (지금도 많이 서식하고 있음)

월대 주위로 하천을 따라 200~300년 숙성된 팽나무와 해송이 멋드러지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
지형이 반달과 비슷하다고 하며, 달님이 뜰 때 주위와 어우러져 수면에 비친 달빛이 아주 예
술이라고 한다. 반달을 닮은 곳에 달빛 또한 그윽하니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옛 사람들은 누
대(樓臺)를 짓고 신선이 내려와 달놀이를 하던 곳이란 의미로 '월대'라 하였다.

월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흔한 현무암으로 낮게 네모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동그란 낮은 대
를 다져 4각형 위에 동그라미가 있는 모습처럼 되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돌로 쌓은 석대만 있을 뿐, 건물은 없으며 선비와 관리들, 지역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시
를 짓고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그들은 월대를 포함한 외도동(外都洞) 일대에 적당한 풍
경 8곳을 골라 외도팔경(外都八景)이라 이름 짓고 찬양을 하니 그 8경은 다음과 같다.

1. 월대피서(月臺避暑) - 월대에서의 피서
2. 야소상춘(野沼賞春) - 들이소(월대천 남쪽)에서의 봄구경
3. 마지약어(馬池躍漁) - 마지(연대입구 마이못)에서 뛰는 물고기
4. 우령특송(牛嶺特松) - 우왓동산의 큰 소나무
5. 대포귀범(大浦歸帆) - 큰 포구(조공포)로 돌아오는 돛단배
6. 광탄채조(廣灘採藻) - 넓은 여에서 해조를 캐는 모습
7. 사수도화(寺水稻花) - 절물 벼밭에 벼꽃이 핀 모습
8. 병암어화(屛岩漁火) - 병풍바위에서 고기잡이 불구경


▲  시커먼 피부의 월대 비석
비석 피부에 쓰인 '월'이 그 흔한 '月'이 아니라 거의 초승달 같은 모습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삐뚤어진 눈처럼 보이기도 함)
비석까지도 달을 표현했으니 이곳은 그야말로 달을 찬양하는 공간이다.


월대 주변은 완전 시골이었으나 제주 시내가 동/서/남으로 크게 살을 찌우면서 그 주위로 시
가지가 형성되었다. 하여 옛날의 운치는 다소 깎이긴 했으나 월대와 광령천, 하천을 따라 늘
어선 나무들은 거의 그대로이며, 광령천 동쪽은 전원(田園) 풍경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어 월
대의 위엄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또한 제주도의 야심작인 제주올레길 17코스(제주시내 원도
심~광령, 18.1km)가 이곳을 살짝 지나가며 올레길 뚜벅이들을 인도한다.


▲  월대 주변에 자리한 키 작은 비석 4형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들은
지역 사람들의 공덕비로 기단석은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  월대 해송 - 제주시 보호수 13-1-15-30(2) / 13-1-15-30(3)호

월대 옆에 제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해송 2그루가 있다. 이들은 280년 묵은 것들로(1982년 보
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지정 번호가 앞선 것을 기준으로 높이는 각각 10m와
3m, 나무둘레는 3.2m와 2m이다.


▲  월대 산책로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 (제주올레길 17코스)

▲  월대 산책로와 오래된 해송<제주시 보호수 13-1-15-30(1)호>
정면에 보이는 수형(樹形)이 좋은 소나무가 제주시 보호수인 해송으로 앞서 언급한
해송들과 나이(약 280년)가 비슷하다. 나무높이는 12m, 나무둘레 3.2m

▲  이제는 무늬만 남은 고망물(수정천)

월대가 있는 외도동에는 조부연대(煙臺)와 고인돌(지석묘), 마이못, 고망물, 수정사(水精寺)
터, 제주도에서 유일한 자갈해변인 알작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전하고 있다.
나는 월대와 수정사터만 알고 있었지 다른 명소는 전혀 몰랐다. 여기서 덤으로 알게 된 그들
을 싹 보고 가면 좋겠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마음은 벌써부터 다음 행선
지를 재촉하고 있어서 월대에서 가까운 고망물만 보기로 했다. 그곳은 월대교에서 광령천 천
변길(통물길)을 따라 2~3분 정도만 가면 된다. (제주올레길 17코스가 그 길을 따라감)

고망물은 오래된 샘터로 외도동에 크게 둥지를 틀었던 수정사의 샘터로 전해진다. 그래서 수
정천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수정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 원나라(몽고)의 황후(皇后)가 물이 잘 나
오기를 기원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몽고 왕비(또는 몽고 조정)가 그들과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머나먼 제주도에 왜 절을 세웠나 싶겠지만 그 시절 고려는 몽고의 그늘에 있었고, 몽고
는 고려의 영역이던 제주도, 함경남도, 평안도, 요동(遼東) 지역을 강제로 접수해 그들 땅에
넣어버렸다. <평안도와 요동에 동녕부(東寧府)를, 함경남도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제주
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통치함>
기마병 중심인 몽고에게 말은 꽤 중요한 전투 자원으로 제주도는 말목장으로 아주 휼륭했다.
그러니 몽고의 제주도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으며, 절도 여럿 설치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배경에서 태어난 수정사는 제주도에서 제법 덩치가 있던 절로 서귀포에 있던 법화사(法
華寺)와 함께 제주도 2대 사찰(또는 3대 사찰)로 꼽혔다. 허나 17세기 말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어 부질없이 사라졌으며, 20세기 이후에 새로운 수정사가 들어서 작게나마 옛 터를 지키
고 있다.

고망물은 늘 물이 풍부하게 나와 동네 사람들의 식수가 되었으며, 왜정(倭政) 때 지금의 모습
으로 정비하고 그 기념비를 세웠다. 여전히 물은 나오고 있으나 개발의 칼질이 주변까지 미치
면서 수질은 장담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갈증이 나더라도 이곳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  세월이 씌워놓은 온갖 주근깨로 범벅이 된 수정천 신축기념비
왜정 때 고망물을 손질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옆구리에 조성시기가 쓰여있다.
허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서기 대신 왜왕(倭王)의 연호가 쓰여있었고,
1945년 이후 그 부분은 뜯겨졌다.

▲  고망물에서 바라본 한라산(漢拏山)의 위엄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한라산은
제주도를 빚은 장본인이자 제주도의 어머니와 같은 큰 존재이다.

▲  광령천과 바다가 만나는 외도 해변 <조공포(朝貢浦)>

고망물에서 광령천을 따라 월대를 거쳐 외도 해변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때 제주
도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공물선(貢物船)이 오가던 포구로 조공포라 불렸는데, 그 조공선은 도
근천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여 도근천을 조공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구름 밑으로 푸르기 그지없는 제주해협이 넓게 펼쳐져 있다. 혹시나 추
자도(楸子島)나 본토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 주름선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살펴봤
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바다 파도는 조금 흥분기를 보이며 뭍을 때리고
있었고 바닷바람은 그리 춥지 않았다.


▲  외도 해변 (대원암 동쪽)
왼쪽에 보이는 돌탑은 대원암에서 만든 것이다.


외도 해변 서쪽에는 천하 유일의 해수관음보살(海水觀音菩薩) 와상(臥像)을 봉안한 대원암이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절집으로 내가 갔을 때는 와상의 존재도 전혀 몰랐
고, 그곳에는 딱히 손이 가지 않아 해변만 잠깐 기웃거리고 외도초교 정류장으로 나왔다.

* 외도 월대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외도2동 230, 240, 241일대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오름(봉우리)
수산봉(水山峰)과 수산리(水山里) 곰솔

▲  수산봉 충혼묘지(모감동) 기점 (제주올레길 16코스)

외도초교 정류장에서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하귀를 지나 모감동에서 내렸다. 202번은 제
주터미널에서 제주도 서쪽 일주로(애월, 한림, 고산, 대정, 화순, 중문)를 따라 서귀포 중앙
로터리(서귀포등기소)까지 가는 긴 노선으로 외도부터 다음날 찾아간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까지 쭉 그의 신세를 졌다. (총 5번을 탔음)
이 노선은 달랑 1km를 가던, 40km를 가던, 전 구간을 가던 무조건 기본 요금이며, 제주시내버
스(300, 400번대)와 서귀포시내버스(500, 600번대), 제주시와 서귀포 외곽버스(700번대), 제
주도 장거리 간선버스(200번대)와 무료환승이 가능하다. (100번대 제주도 장거리 급행버스도
환승이 되나 약간의 차액이 나가며 구간요금 있음)

모감동 정류장 남쪽에 야트막한 산이 손짓을 하니 그곳이 수산봉이다.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일주서로)를 신호등의 도움을 받아 건너면 수산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마중을 나오는데,
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15.8km)가 그 길을 따라 수산봉 남쪽까지 이어진다. 16코스는
광령에서 17코스로 간판을 갈아 월대와 제주시내로 달려가며, 고내에서는 15코스로 이름을 바
꾸고 한림읍으로 이어진다.


▲  수산봉 북쪽 산길 (1)

수산봉은 해발 122m의 낮은 뫼로 '수산봉오름','수산오름','물메오름','물메' 등의 별칭을 가
지고 있다. 옛날에는 주로 물메라 불렸는데, 이는 봉우리 정상에 못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 것
이다. (물뫼, 물메)
지금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보이는 평범한 뒷동산이나 그 태생은 무시무시했던 화산으로 화
산 폭발로 못과 지금의 산이 형성되었다. 이런 식의 산은 제주도에 매우 많다.

조선 때는 정상에 물메봉수를 두었는데 동쪽에 도두봉수, 서쪽으로 고내봉수와 연락을 했으며,
기우제를 지냈던 터가 있어 영산(靈山)으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해송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
윽하며 서쪽 자락에는 애월읍 충혼묘지가 닦여져 있어 호국(護國) 신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모감동(충혼묘지), 대원정사, 수산리 곰솔 등 3개가 있는데, 산이
작다보니 어디로 올라가든 10분 안에 정상부에 닿는다. 산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 금지된 곳이
되었으며, 봉수대터는 그 안에 있어 관람이 어렵다.
내가 수산봉을 찾은 것은 봉우리보다는 산 남쪽에 있는 수산리 곰솔을 보고자 함이다. 그곳으
로 가려면 수산봉을 거쳐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  수산봉 북쪽 산길 (2)

▲  수산봉 북쪽 산길 (3)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해송 외에도 많은 나무들이 버젓히 푸른 옷을 걸치고 있어
겨울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이다.

▲  수산봉 정상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정상부에는 쉼터용 정자와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있다.

▲  수산봉 남쪽 숲길

▲  수산리 곰솔 - 천연기념물 441호

수산봉 동남쪽에 곱게 늙은 곰솔이 있다. 수산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도도한 모습을 드러내
고 있는 그는 높이 11.5m, 나무둘레 4.7m, 수관폭 26m로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의 눈덮힌 모습이 마치 백곰이 물을 마시고자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 곰솔이라 불
리며 나무 껍질이 검은색이라 흑송(黑松)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바닷가에 많이 자라고 있
어 해송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지상 2.5m 높이에 원줄기가 잘려진 흔적이 있고, 거기서 4
개의 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호수 쪽 가지가 밑동보다 2m 정도 낮게 물가에 드리워
져 있어 나무의 자태가 곱다.

이 나무는 수산봉 밑에 마을이 지어졌을 때 그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라 전하며, 수산리 사람
들은 그를 수호목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나무 북서쪽에는 나무에게 당제를 지내는 맞
배지붕 당집이 있다.


▲  물을 향한 마음, 호수로 뻗은 남쪽 가지
물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갈증이 심했는지도) 나무의 남쪽 가지가
계속 호수로 손을 내밀고는 있으나 호수는 액체라 그의 손을 잡을 만한
것이 없어 서로 뻔히 보임에도 전혀 닿지를 못하고 있다.

▲  수산봉과 곰솔의 잘생긴 거울, 수산저수지

수산저수지는 현무암 피부를 지닌 제주도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저수지이다. 예전에는 유원지가
들어서 한때 시끌벅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들이 거의 지워져 고요하다. 다만 그 고요
함을 툭하면 건드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제주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들이다.
이곳은 비행기들이 제주국제공항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5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비록 소음
이 있긴 하나 형형색색의 비행기들이 날개를 낮추며 들어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으며, 저렇
게 많은 비행기가 들어오고 그만큼 바깥으로 나가니 제주도의 위엄과 인기를 정말 실감케 한
다. (현재 제주공항은 거의 포화상태임)

수산봉을 넘어온 제주올레길16코스는 저수지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며, 나는 곰솔과 당
집 주변만 둘러보고 다시 수산봉 정상부를 거쳐 모감동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  수산리 곰솔에게 제를 지내는
마을 당집

▲  곰솔 맞은편에 자리한 무덤들
현무암으로 무덤 경계를 닦았다.

* 수산봉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 수산리 곰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1935


 

♠  오래된 난대림을 간직한 납읍리의 상큼한 언덕
납읍 금산공원(錦山公園)


▲  납읍리 돌담길

모감동 정류장에서 다시 202번을 타고 애월을 지나 한림읍내에서 내렸다. 여기서 제주도 간선
291번(제주터미널~한림읍)으로 환승하여 금산공원을 간직한 납읍리에 두 발을 내린다.
모감동에서 여기까지 바로 가는 292번 버스가 있으나 운행횟수가 너무 적고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서 부득이 한림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림읍에서 납읍리로 가는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있음)
애월읍 납읍리(納邑里)는 제주도에서 이름난 양반 마을로 꼽힌다. 14세기에 마을이 조성된 것
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납읍을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 곽지, 애월, 고내, 상가, 하가, 어
음, 봉성 등 7개의 마을이 들어서 있어 그것을 아우르는 뜻에서 동네 이름에 읍을 쓴 것으로
보인다.
납읍리 지역에서 처음 사람이 산 곳은 곽남(郭南)으로 여겨진다. 그곳의 처음 이름은 곽지남
동으로 그것을 줄여 곽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곰팡이','둥덩이' 등지에 사람들이 터
전을 닦으면서 마을이 확대되었다.

현재 납읍리는 본동, 서동, 중하동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동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산공원이 있다. 제주시(북제주)에서 가장 감귤이 잘되는 동네로 제주올레길15-A코스(
한림~납읍~고내, 16.5km)가 납읍리와 금산공원 내부를 지난다.


▲  귤나무밭을 가르는 납읍리 돌담길

▲  금산공원 정문

납읍리사무소 정류장(반대편 정류장은 '납읍리')에서 납읍로2길을 따라 9분 정도 들어가면 무
성한 숲을 드러낸 금산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납읍리사무소에 이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양
쪽 길이 비슷하게 생겨서 햇갈리기가 쉽다. (이정표도 없음) 여기서는 무조건 서쪽(진행 방향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된다.
현무암 돌담과 귤나무, 마을 가옥이 잘 어우러진 제주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귤나무 가지
에 감귤이 달린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어 제주도 한복판에 왔음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금산공원은 납읍리의 허파이자 아름다운 뒷동산으로 33,980㎡(약 13,000여 평) 면적에 후박나
무와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아왜나무, 자금우, 마삭줄, 송
이 등 200여 종의 식물이 우거진 상록수림(常綠樹林)이다. 다른 말로는 난대림(暖帶林)이라고
도 한다. 제주시 서부에서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 온난한 기후에 적합한 식물
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1년 내내 삼삼한 모습을 자랑한다.

허나 금산공원은 원래부터 숲동산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돌만 가득한 돌언덕으로 볼품이 없었
다고 하며, 그 언덕 건너편으로 금악봉(430m)이 훤히 바라보여 마을에 화재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금악봉이 보이지 않게끔 돌언덕에 나무를 심었고 마을
제사를 지내는 포제단을 담으면서 마을의 성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성역을 품은 숲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법칙이라, 마을에서는 나무 벌채나 식물 채취를 엄격히 금하여 숲이 마음
놓고 자라게끔 배려했으며, 숲 주위로 돌담을 둘러 속세와 숲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처음에는 숲 벌채를 금한다는 뜻으로 금산(禁山)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이름을 순화시켜 비단
뫼를 뜻하는 금산(錦山)으로 한자를 갈았다고 한다.

공원을 덮고 있는 숲은 '납읍리 난대림'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37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
으며(예전에는 천연기념물 182-4호였음) 공원 전체가 국가 천연기념물 보호 구역이라 지정된
탐방로 외에는 접근을 금하고 있다. 아무리 공원 감독이 느슨하다고 해도 자연보호를 위해 탐
방로를 벗어나거나 식물을 괴롭히는 행동, 나뭇잎과 식물을 따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
다.


▲  금산공원 정문 갈림길

원시림과 같은 공원으로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린다. 넓은 흙길로 된 중앙 숲길은 이곳의
성역인 포제청으로 이어지며,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은 흙길과 나무데크길이 섞여있다. 어느
길로 가든 남쪽에서 모두 만나며,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문은
정문 1개 뿐이며, 공원 밖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즉 밭 한복판에 숲이 있는 것이다.


▲  송석대(松石臺)

정문 동쪽(진행 방향 왼쪽)에는 송석대란 높은 대가 있다. 이곳은 정헌 김용징(靜軒 金龍徵)
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850년대 말에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구릉지를 다듬어 3개 층으
로 겹돌을 쌓아 터를 다진 다음 반지름 4.5m의 원형 정자를 닦았는데, 현재 정자는 없고 완전
히 개방된 공간으로 있으며 매년 여름마다 애월문학회에서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
어 문학 공간의 기능은 녹슬지 않았다.


▲  인상정(仁庠亭)

송석대 맞은편(정문 서쪽)에는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천문에 능했던 현일문
(玄日文)이 공부를 했던 곳으로 1889년 그의 후학들이 구릉지를 다지고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
간을 지었다. 송석대처럼 정자가 없는 그냥 열린 공간으로 그 한복판에 오래된 나무가 자리하
여 고품격의 그늘을 선사한다.


▲  난대림 속에 나를 숨기다 (공원 서쪽 숲길)
아무리 따스한 남쪽이라고 해도 동남아나 아프리카가 아닌 이상은 이렇게까지
푸른 잎을 대놓고 드러내며 무성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이곳은 계절의
변화도 안중에 없는 별천지 같은 곳이다.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1)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2)

통행 편의와 식물 보호를 위해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 일부에 나무데크길을 닦았다.


▲  정낭이 걸쳐진 포제단(酺祭壇) 출입구

금산공원 한복판에는 돌담에 둘러싸인 포제단이 있다. 이곳은 납읍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마을의 성역으로 서쪽에 제주도 스타일의 정낭이 있는 출입구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서면 된다.
허나 제삿날을 제외하면 정낭이 모두 걸쳐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다행히 정낭이
그리 높지가 않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살짝 안으로 발을 들였다.

▲  포제청 건물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늘 적적한 모습이다.

▲  난대림에 둘러싸인 포제단 뜨락
저 끝부분에 3개의 단이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납읍리 포제','납읍리 마을제'라고 하는데, 남자들이 행하는 유교적
마을제인 포제와 여자들이 하는 무속 마을제인 당굿을 같이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춘제(春祭)를 지냈고, 7월 초정일에 추제(秋祭)를 지냈으나 20세기 중반 이
후부터는 춘제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 일이 생겨서 정월 초정일에 제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그 다음 중정일(中丁日)에 제를 지내는 융통성도 가지고 있다.
포제단으로 들어서면 남쪽(오른쪽)에 포제청이란 기와집이 있다. 이곳은 제를 지내고 준비하
는 건물로 원래는 초가였으나 최근에 기와집으로 손질했다. 북쪽(왼쪽)에는 3개의 조그만 석
단(石壇)이 누워있는데 이들 단은 손님신을 봉안한 포신단(酺神壇), 마을의 수호신을 봉안한
토신단(土神壇), 홍역이나 마마신을 봉안한 서신단(西神壇)이다.
예전에는 포신, 토신, 서신에게 모두 제를 올렸으나 홍역과 마마가 사실상 사라진 상태라 포
신과 토신에게만 제삿밥을 올린다.

이곳 제사는 '납읍리 마을제'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무형문화재 6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현무암으로 닦여진 3개의 제단 (서신단, 토신단, 포신단)
제단 앞에는 술이나 향로 등을 두는 조그만 돌이 있고, 단 위에는 위패 역할을
하는 키 작은 돌이 세워져 있다.

▲  금산공원 동쪽 숲길 (1)

▲  금산공원 동쪽 숲길 (2)

▲  주황색 피부를 드러낸 납읍리 감귤

금산공원을 1바퀴 둘러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쪽 숲길로 들어서 포제청을 찍고 동쪽 숲
길로 나왔으니 공원의 공개된 공간은 모두 본 셈이다. (통제구역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음)

이렇게 금산공원과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 다음 답사지로 가고자 제주도 간선 291번을 타고 한
림읍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금산공원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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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탐라계곡~서해바다)


' 제주도 한라산(漢拏山) 기행 - 2005년 8월 26 ~ 28일'
'하편 ― 언제나 분화(焚火)를 꿈꾸는 한라산 백록담
백록담 ~ 왕관릉 ~ 탐라계곡 ~ 서해바다 1000리 ~ 인천'

* 원본을 보고자 할 경우(따로 익스플로어 창으로 보고자 할 경우) 여기를 클릭바랍니다.
* 사진을 올린 웹 사이트의 점검,기타 사유로 인해 아주 간혹가다 사진이 안뜰 수 있습니다.



'백록담에서' ~신석정(辛夕汀)

한라산은 구름 속에 산다
좀체 얼굴을 내놓지 않는다
176센티미터의 내 키에도 보이고 걸리는 게 하도 많아
자주 눈을 감아야 하는데
아무리 너그러운 한라산이기로
1950미터의 키다리고 보면
때론 지치도록 아니꼬와
자주 구름으로 낯을 가리는 수 밖에.....

나비 한 마리 옴낫 없고
휘파람새도 울지 않는 태고(太古) 속
빗발을 몰고 가는 바람에
구름도 백록담에 내려 앉는다
물안개 자욱한 백록담에 손을 씻는
8월 한 낮이 으시시 치웁다.
인젠 섣불리 악수(握手)할 수 없는
손을 자랑하리라

나도 이대로 한라산 백록담 구름에 묻혀
마소랑 꽃이랑 오래도록 살고파
까마득 하산(下山)을 잊어버리다.


♠ 한라산의 얼굴, 그러나 그 조용한 얼굴 뒤로 화산 분화의 야욕을 꿈꾸는 ~ 백록담(白鹿潭)



우리나라―북한 제외―에서 제일 높은 곳, 그리고 하늘과 제일 가까이 맞닿은 곳은 해발 1950m의 한라산이다.
그 꼭대기의 아랫쪽 그러니까 해발 1850m고지에는 한라산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백록담(白鹿潭)이 신비와 고요에
둘러쌓인 채 그렇게 자리해 있다.

백록담은 말 그대로 하얀 사슴의 못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저렇게 평범한 웅덩이처럼 보이지만 2000년 전까지만
해도 화산폭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무시무시한 분화구(噴火口)였다.

백록담 주변에는 온갖 고산식물들이 자라고 있는데 특히 '눈향나무덩굴'이 백록담을 수비하듯 빼곡히 깔려져
있으며, 봄에는 진달래의 황홀한 향연(饗宴)이 연출되는 곳이기도 하다.
한라산 정상을 물들인 진달래가 지면 녹음(綠陰, 여름)이 되고, 그것이 지나면 온 산은 알록달록 단풍으로
불타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단풍이 낙엽으로 화(化)해지면 보통 이듬해 4~5월까지 겨울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상징인 눈의 지배를 받는다.
이처럼 한라산 정상에 쌓인 봄 눈을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 하여 제주 12경 중, 제 6경으로 꼽는다.

백록담을 바라보는 한라산의 꼭대기, 즉 주봉(主峯)을 '부악'이라고 부른다. 보통 제주도는 산(山)이나 봉(峰)
대신 악(岳)이나 '오름'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는데, 간도(間島)의 장백산맥(長白山脈)에서 시작된 백두대간
(白頭大幹)의 힘찬 줄기는 지리산에서 남해바다를 훌쩍 뛰어넘어 이 곳 한라산에서 그 끝을 맺는다.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금강산(金剛山), 지리산(智異山), 한라산―의 하나로 신성시되고 있는 한라산
(漢拏山)의 뜻은 별을 끌어당긴다. 은하수를 끌어당긴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은하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산이란 뜻이다. 그만큼 하늘과 가깝다는 이야기, 그래서 꼭대기에 서면 하늘이 매우 가깝게 보여 잘만 하면
꿈에 그리던 천상세계(天上世界)가 보일 지도 모른다.

백록담은 예로부터 사슴들이 뛰어 놀던 곳이라고 하는데, 아주 먼 옛날 한라산에 신선(神仙, 그가 한라산의
산신인지 아니면 별개의 인물인지는 모르겠음)
이 살고 있었다.
매년 복(伏)날이 되면 선녀들은 하늘에서 하강(下降)하여 백록담에서 목욕을 했는데 신선은 그 날만 되면
반강제로 한라산의 북쪽인 방선문(訪仙門)으로 내려가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복날, 미처 방선문으로 내려가지 못한 신선은 그만 선녀의 옷 벗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
황홀에 빠져 정신을 잃은 채 그들을 바라보는 신선의 모습을 선녀들이 발견하고는 혼비백산하여 서둘러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그 사실을 고자질하니 이제 발끈한 옥황상제는 그 불쌍한 신선을 사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후 사슴으로 변해버린 신선은 매년 복날마다 백록담에 나타나 슬피 울부짖었다고 한다. 아마도 옥황상제와
그 선녀에 대한 원망에 표현이겠지.
그래서 흰 사슴의 연못이란 뜻에서 백록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부악(정상)'과 백록담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속인(俗人)들의 무수한 왕래로 인해 정상과 백록담
주변 능선이 붕괴될 위험에 이르게 되었고, 백록담 또한 속인들의 더러운 때가 묻힌 손과 발로 점점 더러워지니
몇년 전부터 천연기념물 보호를 내세워 백록담과 정상 부분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백록담의 동쪽 봉우리(1938m)만 접근이 가능하며 거기서 백록담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데, 대신 겨울에는
백록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새하얀 눈이 정상과 백록담을 보이지 않게 가려놓으므로..

'백록담의 물을 반드시 마시고 말겠다' 의지를 다지며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 그저 영월 선돌에서 아래 서강
(西江)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그 아쉬움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그냥 백록담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그 물을
마시는 수 밖에.. 그렇지만 이는 모두 우리 인간들이 자초한 일이다.

* 한라산 주요 등산로
1. 성판악 ~ 사라악 ~ 진달래 대피소 ~ 백록담 (9.6km, 약 3시간 30분 ~ 4시간)
2. 관음사 주차장 ~ 탐라계곡 ~ 용진각 대피소 ~ 백록담 (8.7km, 약 5시간)
3. 어리목 ~ 윗세오름 대피소 (4.7km, 약 2시간)
4. 영실 주차장 ~ 윗세오름 대피소 (3.7km, 약 1시간 30분)

* 한라산 오를 때 유의사항
1. 지정 코스를 멋대로 벗어나거나 통제구역에 함부로 들어가면 한라산의 큰 노여움을 받을 수 있다.
집에 곱게 돌아가고 싶다면 지정 코스만 이용해라.
2. 지정 시간 내에 특정 장소에 도착을 못하거나 못할 것 같다면 과감히 미련을 버리고 내려가라.
3. 샘터가 거의 없으므로 물은 두둑히 가져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다.
4. 한라산 등산로는 거의 돌밭이므로 한라산 전용 등산화를 신고 가는 것이 발에 편하다.
5. 한라산의 날씨는 정말 지멋대로이다. 혹 비가 내릴지도 모르니 우의를 가져가라.
(다행히 우리가 갔을 때는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6. 쓰레기는 성판악 휴게소나 관음사 주차장에 버리도록 해라.
7. 한라산 전체는
천연기념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배를 피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돌, 식물, 동물
채취 등을 하지 마라. 문화재 보호법에 걸린다.
8. 한라산 종주(성판악 ~ 백록담 ~ 관음사)를 하고 난 후, 몇 일간은 다리가 꽤 고달플 것이다. 그것을 각오하고
산행을 하라. 그 때 같이 올라간 이는 그 휴유증으로 한달 가까이 병원에 다니고 한약방가서 침을 맞았다고
하더라.


▲ 저 곳이 해발 1950m, 한라산의 정상인 '부악'
지금은 접근이 통제되어 백록담의 동쪽 봉우리(1938m고지)에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한라산의 정상인 '부악'
저렇게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백록담에서 정상까지는
해발 90m의 차이가 난다.
마치 커다란 운석에 직격탄을 맞은 듯, 움푹 패인 한라산의 정상부(頂上部),
보면 볼 수록 신기함 그 자체..

▲ 백록담(白鹿潭)
구름이 자신의 얼굴을 비쳐 보며 매무새를 다듬는 하늘의 거울이다.
80m 위에서 바라본 못의 크기가 저만하니 바로 앞에서 보면 얼마나 크겠는가?
비록 백두산의 천지(天池)만은 못하지만, 못의 둘레는 약 300m정도이며 물고기는 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산꼭대기에 저런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 이게 모두 자연의
위대한 힘이 아니던가..?

▲ 2천년 전, 제주도 전체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던 백록담
그저 평범하고 조용해 보이는 하늘의 못, 백록담..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 곳에 들어가 물을
마시기도 하고, 세수도 하고, 심지어는 선녀들을 흉내내며 목욕도 했었다.
이처럼 얌전하기만 해 보이던 백록담, 그러나 2천년 전까지만 해도 저 못은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힌 무서운 분화구(噴火口)였다.

한라산은 전형적인 화산(火山)으로 그의 마지막 정력(?) 발산은 서기 1세기 경에 있었는데
그 화산폭발로 제주도 거의 전역이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이면서 섬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흔히 이탈리아의 폼페이우스 화산의 비극만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도 그에 버금가는 화산
폭발의 대비극이 있었다.

화산폭발로 거의 전멸을 당한 어쩌면 지금의 제주도 사람들의 조상에 대해서 내가 즐겨 읽는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 의하면
'마한(馬韓)의 서남 해상(海上)에 큰 섬이 있는데, 이를 주호(州胡)라고 한다. 거기 사람들은
덩치가 작고, 모두 머리를 깎아 마치 선비족(鮮卑族) 같다. 소와 돼지를 잘 기르고 옷은 가죽으로
만들었으나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없으므로 거의 나체와 같다. 언어는 한인(韓人)
과 같지 않으며, 배를 타고 한(韓, 마한, 변한, 진한)에 왕래하면서 교역한다'

화산폭발 이후,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은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삶을 일으켰고 그들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삼성혈(三姓穴)에서 솟아났다는 이른바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로 생각된다. 또한 이들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것은 용암으로 폐허가 된 대지에서
다시 세력을 일으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 옛날을 꿈꾸는 못 ~ 백록담
백록담이 일개 못에 불과하다 하여 무시하지 마라.
현재 한라산은 죽은 화산도 아닌 잠시 쉬고 있는 휴화산(休火山)이다.
한라산이 곱게 얌전히 있는다 하여 그를 무시한다면 큰 오산이다.

한라산은 꿈꾼다. 화산폭발을. 그리고 백록담도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이던 자신의 옛 모습을
그리워 한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힘을 모아둔 한라산은 언젠가 다시 젊은 시절을 상기하며 상상하지도
못할 거대한 장난을 부릴 지도 모른다.
만약 그 때가 된다면 한라산의 용암과 화산재가 당신들 곁으로 불쑥 찾아갈지도 모른다.
인간들이여~ 부디 오만에 빠지지 말고 자연에 거역하지 말고, 제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한라산이 언제 180도 돌변하여 2천년 전의 그 사건처럼 그대들을 처절하리만큼
응징할 지도 모르리라.

▲ 백록담의 남쪽 능선 (2장)
붕괴의 위험이 있어 몇 년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한라산의 정상 아닌 정상(1938m)에 이르니 정말 헤아리기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올라온 일행들과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열심히 사진 모델이 되었지. 그저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면서..
사진을 찍는 건 좋지만 어떤 이들은 출입금지선을 넘는 행동까지 서슴치 않는다. 그만큼 백록담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렇겠지만. 그런 건 한라산에 대한 무례가 아닐까?

정상에서 출입금지선 난간에 의지하며 저 아래에 펼쳐진 백록담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백록담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사슴은 좀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다시 용암을 내뿜을 백록담을 보면서 왠지 소름이
끼친다. 저 조용한 못이 과연 180도 그렇게 변할까 싶어서..
자고로 조용한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는데, 백록담도 혹 그런 것일까? 제발 내 세대에는 그런 일이
없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어보았다.

14시 10분, 2명의 여인과 함께 슬슬 관음사(觀音寺) 쪽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산의 정상에 왔으면 그 다음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은 당연한 것. 너무 오래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반드시 그 탈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내려가면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관음사로 가는 길은 성판악 코스보다 거리도 1km 짧고, 내려가는
길인데 왜 성판악 코스보다 1시간이 더 걸리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내려가보니 그 이유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바로 성판악 코스보다 상태가 길의 상태가 더 안좋기 때문이다.

▲ 어지럽게 널려있는 하얀 고사목들 (정상에서 관음사 방면으로 약 10분 거리)
세월의 아픔을 간직한 그들의 처절한 모습..

▲ 조그만 동굴
2000년 전, 용암이 흘러내렸던 흔적으로 지금은 아담한 동굴로 탈바꿈 하였다.

▲ 백록담으로 통하던 옛 길
예전에는 통제된 저 길을 통해 백록담과 정상(부악)까지 갈 수 있었다.
손에 잡힐 듯 매우 가까이 보이는 정상.
언젠가 저 길이 활짝 개방된다면 다시 한번 찾아와 백록담에 내 손을 담구리라..

▲ 백록담의 북쪽 능선


▲ 왕관릉(삼각봉)
마치 거대한 산상(山上)의 요새를 보는 듯 하다.

▲ 어디선가 구름들이 나타나 왕관릉(삼각봉)을 슬슬 가리기 시작한다.
그 불쌍한 한라산 신선을 사슴으로 만들어 버린 그 얄미운 선녀들이 다시 내려온 것일까?
나도 그 신선처럼 그들(선녀)을 감히 훔쳐보고 싶다. 그러나 미련한 그 신선처럼 처량하게 사슴
으로 변하여 이 곳에서 한평생을 썩기는 싫은 걸.. 그런 것을 훔처볼 때는 요령껏 몰래 봐야
뒤탈이 없거늘.. ~ ^^;;

▲ 마치 연기처럼 피어난 구름..
구름에 몸을 가린 신선 / 선녀들이 성급히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이다.
보면 볼 수록 신기함 그 자체..
그렇지만 이 세상에 선녀가 과연 어디있단 말인가? 같이 산에 오른 여인들이
바로 선녀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혹 전생에 선녀였을지도..

▲ 연기처럼 보잘 것 없던 구름들이 하나둘 모여 하나의 거대한 구름을 형성하였다.
아마도 하늘의 옥황상제가 산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급히 환어(還御)하시는 모양이다.

▲ 용진각 대피소를 지나면 탐라계곡(耽羅溪谷)의 상류가 펼쳐진다.
성판악 코스에도 계곡이 있긴 하나 물은 없고 돌과 흙으로 가득한 계곡 만이 있었을 뿐.
이렇게 내려가는 길에 정말 계곡다운 계곡을 만나니 참말로 반갑기 그지 없다.
시원한 계곡 물에 감히 속세에 찌든 손을 담구며, 잠시 땀을 씻어본다.

이렇게 계곡을 만난 것까지는 좋으나, 계곡을 건너면 하산 길임에도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 그 오르막길에서 '이거 너무하는거 아닌가. 정말 너무한다'
다들 거의 인생 포기의 상태..

한라산은 내려가는 인간들을 곱게 보내주기 싫어서 이렇게 또다시 혹독한 시련을 내려 주었다.
그렇지만 별 수 있겠는가. 그 오르막길을 오르지 않으면 길이 없는 것을.. 꿩 대신 닭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는 없었다.

◀ 그 오르막길의 정상 부분..
길은 그나마 나무바닥을 깔아서 발은별로
아프진 않다.
그러나 성판악 코스에서 상당한 힘을 소비한
상태라 그 오르막길은 정말지옥이 따로
없었다.

◀ 구름으로 얕게 몸을 가린 삼각봉
어느 정도 내려오니 여행사 가이드가 뒤를
돌아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확 뒤돌아보니
세상에~ 하늘을 뚫어버릴 것 같은 기세의
삼각봉이나를 근엄하게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삼각봉의 위엄에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 한라산을 찾은 속인(俗人)들이 정성스레 쌓은 돌탑들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한 단면들..

▲ 나무가 무성한 탐라계곡 등산로
성판악 코스와 달리 탐라계곡(관음사) 코스는 나무들이 무성하다.
그러나 성판악 코스와 마찬가지로 등산로 거의 대부분이 돌길이다.
내려갈 때도 역시 한라산의 시련을 극복해야 된다.

▲ 탐라계곡 중류 ~ 돌의 무덤을 보는 듯한..
이 계류를 지나면 또다시 한라산의 태클이 시작된다. 바로 오르막 길,
이번 오르막 길은 아까 전에 그것과 달리 상당히 구간이 길다.
사람들의 원성은 정말 하늘을 찌를 듯 하였지.

▲ 나무로 무성한 탐라계곡 등산로
오르막길과 막판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보면 다시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산림은 아까 전보다 더 무성하고.. 여기가 정말 한라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관음사로 내려가는 길, 내려가니까 쉬울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정말 성판악 코스보다 더 힘들다.
한라산이 주는 끊임없는 시련―2차례의 오르막길, 그리고 계속되는 돌길..―으로 성판악보다
거리가 짧음에도 등,하산시간은 약 1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게다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도 우리들을 조롱하는 건지, 정말 1km는 내려왔다고 생각이
되는데도겨우 300m 내려 왔다고 나오고,, 한참을 내려가도 거리와 해발(海拔)은 좀처럼 줄어들
줄을 모른다.
세상에 이렇게 1km가 100km처럼 느껴진 적은 처음. 사람들의 마음은 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大'모양으로뻗고 싶은 생각들.. 그들의 마음에서 한라산은 이미 미움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 이끼를 뒤집어 쓴 숯가마터
관음사 주차장을 약 2.5km 앞둔 지점에 위치한 가마터로 1940년대에 조성된 숯전용 가마터이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내려가느라 정신이 없는 나머지 이 가마터를 거들떠도 안보고 모두 지나쳐
버렸다.

▲ 탐라계곡 하류
2000년 전, 한라산의 뜨끈뜨끈한 용암이 흘러갔던 자리로 계곡의 모습이 매우 특이하다.
그 특이한 모습이 나의 시선을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은 내 뜻대로 잘 나오지를 못해 여기서는 저 1장 만을 공개한다.

고대(古代) 제주도 사람들을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용암이 흘러갔던 그 자리에는
지금은 깨끗한 한라산의 계곡물 만이 가득할 뿐이다.


산을 내려오면서 정말 8.7km가 '서울 ~ 부산'보다 더 길게만 느껴진다.
이정표의 농간에 열받아하며―기분 같아서는 이정표를 부셔버리고 싶었음―'다시는 한라산에 오나봐라'를
외치며 계속 내려간다. 처음에는 한라산과 친해지고자 했던 나의 지극한 마음은 내려가면서 슬그머니 사라져만
가고 그 반대의 생각이 나의 마음을 가득 메워 버린다.

백록담부터 같이 내려온 어느 지인은 다리에 이상이 생겨 손수건을 다리에 묶으며 애처롭게 내려간다.
아마도 한라산이 그에게만은 특별히 그런 선물을 내려준 모양이다. 어쩌면 그가 전생에 백록담에서 놀았던
그 선녀가 아닐까 싶어 혹 심술을 부린 것은 아닐까? ^^;

어느덧 17시 경, 아비규환(阿鼻叫喚)과 같았던 한라산에 영역에서 벗어나 드디어 관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한라산 보호구역과 속세를 구분짓는 철선(鐵線)을 통과하면서 마치 지옥에서 극락으로 넘어온 듯,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나.. 지옥과 같았던 한라산에 손아귀에서 벗어나니 정말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정말 극기훈련이 따로 없었던 한라산 등정.. 역시 한라산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감과 오만으로 산에 오르던 인간들, 그러나 그들은 한라산이 내려준 엄청난 시련 앞에서는 그저 겁 많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어린 아이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관음사 주차장에는 이미 우리를 태울 관광버스가 애타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라산에 질려 버린 사람들은 하나,둘 버스에 올라 뻗기 시작한다. 다행히 일행 40여명 모두 안전하게 산에서
내려와 17시 30분 경, 관음사 주차장을 출발, 산천단(山川壇)과 제주시내를 거쳐 다시 제주여객터미널로 나왔다.
여기서 모두 뱃표를 받고 아침에 타고 온, 오하마나호에 다시 승선을 한다.

◀ 제주에서 인천까지 타고 간 오하마나호

이번에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3등실이긴 하지만, 제주로 내려올 때와 약간 분위기가 다른 방이었다.
게다가 방도 좀 약간 넓고, 방 이름은 이른바 '담화실', 쇼파도 2개나 있고 tv도 있고, 일반 3등실보다
약간은 업그레이드된 방이다.

19시가 되자 육중한 덩치의 오하마나호는 제주도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털어버리며 슬슬 미끄러지듯
남해바다로 나간다. 이로써 또다시 1000리가 넘는 대항해가 시작되었다.

배를 타면서 일행들은 한결같이 '아 정말 피곤하다. 차라리 돈을 더 주고 비행기를 타고 싶어. 언제 13시간을
타고 가지..?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을 하였지.
우리들의 거추장스러운 육신(肉身)은 비록 배에 있었지만 마음 만큼은 벌써 집에 도착해 있었던 것.

19시 30분이 되자 일행들이 라면을 먹자고 그런다. 그러나 한라산에서 엄청난 체력소모를 했는데 저녁으로
겨우 라면이라니.. 그걸로 영양보충이나 되겠나 싶어서 정중히 거절하고 따로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는데
영업이 끝나갈 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반찬을 엄청 많이 준다. 고기에다가 생선까지.. 덕분에 영양보충 좀
실컷 했지.

20시 30분이 되자. 대장과 일행들이 뒷풀이 하러 나가자며 자꾸 보챈다.
나는 저녁 먹고 바로 잘 생각을 했으나, 그렇다고 안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바닷바람이 불어대는 갑판으로
같이 나갔다.

배에 앞쪽 갑판에 자리를 깔고 어디서 구했는지 소주에다가 맥주, 온갖 안주꺼리들.. 이번 제주도 기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속칭 뒷풀이 술판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10여명으로 시작되었으나 뒷풀이 술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최대 30명 정도가 참여한
것 같다. 그래서 자리를 계속 넒히다보니 안내데스크에 있는 돗자리를 거의 싹쓸이하다 싶이 빌려오고..

술판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그러나 다들 한라산이 내려준 선물(?) 덕에 술 몇 잔에 몇 마디 하고는 금방금방
사라져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모두 피곤했거든.. 그래서 하나, 둘, 셋 그렇게 사라지고.. 끝에는 겨우 10명 정도만
남게 되었다. 물론 끝까지 남기를 좋아하는 나도 포함하여..

뒷풀이 술판은 전날보다 더 재미가 있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싫으나 좋으나 이틀을 같이 있었으니.
게다가 소주와 맥주가 몸에 차곡차곡 축적되니 그 재미는 한층 더해지는 것 같다. 그 10명은 좀처럼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자정이 넘도록 술판을 즐겼다. 추위를 앞세운 바닷바람의 심통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개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불과하였다.
12시쯤 되자 나도 자려고 슬슬 자리를 빠져나왔으나 그만 어느 누구의 강압에 결국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자정이 넘었음에도 갑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은 한라산을 만나고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도 우리처럼 여행이 끝나감을 아쉬워 하듯, 애써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날을 그렇게 바다 저편으로 흘려 보냈다.

뒷풀이 술판은 새벽 1시가 되서야 겨우 끝났는데, 그래도 뭔가 아쉬운지 대장이 사람들에게 컵라면을 하나씩
사준다. 시중에서는 1000원 이내인 것을 선내에서는 무려 2000원..

라면을 먹고 방으로 들어오니 방은 이미 꿈나라에 빠져든 어린 아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넓어보이는 방은 그들이 이리저리 영토분할을 시도하면서 좀처럼 틈도 없었지.
나는 2개의 쇼파 중 하나를 차지하며 잠을 청했는데, 한라산에서 땀을 많이 흘려서 땀냄새가 좀 나므로
아무도 없는 샤워실에서 시원하게 샤워하며, 1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잠도 얼마나 잘 오던지.. 머리를
기대니 바로


잠에서 깨니 어느덧 아침 7시, 전날에는 일찍 일어나 서해 해돋이를 맞이하는 여유까지 부렸던 사람들이
7시가 넘었음에도 태반이 꿈나라의 신민(臣民)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날 해돋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피곤해 죽겠는데, 그까짓 해돋이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런데 일어나보니 다리가 어째 이상하다. 바로 한라산이 내려준 선물, 특히 계단을 내려갈 때 그 압박이
상당히 심하다.

일어난 사람들은 이불을 접어서 한쪽에 모아놓고, 세수하러 갈 사람은 세면실로. 남을 사람은 그대로 방에,
아침 먹으러 갈 사람은 식당으로..

7시 30분이 되니 우울한 내용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조류의 영향으로 45분 가량 지연되겠습니다. 도착시간은
약 8시 45분입니다'
그 방송에 다들 어안이 벙벙.. 45분을 더 찌그러져 있어야 되는가..?

그렇지만 남국으로 내려갈 때와 달리 인천으로 올라올 때는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다.
내려갈 때는 1분이 1시간 같더니만 올라올 때는 반대로 1시간이 1분 같으니 말이다.
어느덧 시간은 8시를 훌쩍 넘어버리고,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인천도 우리의 시야에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제 제주도 2박 3일의 여행도 그 종점에 이른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그날을 서해바다에 그렇게 흘려 보내며 우리도 이제 그 종점을 맞이해야 된다.

근 37시간 만에 다시 찾아온 인천항, 얼마나 반갑던지. 8시 45분이 되서야 배는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
살짝 그 몸을 갖다 붙인다.

내릴 때는 제주항과 마찬가지로 배의 아랫쪽 창고 쪽을 통해서 하선하였다.
연안여객 터미널 앞에서 그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였고 이내 다들 각자의 집을
향해 뿔뿔히 흩어졌다..

나는 여인 1명과 인천시내버스 14번을 타고, 제물포역으로 나와 전철을 타고 집으로......
집에 이르니 오전 11시..

이렇게 하여 37시간의 제주도 한라산 여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비록 그 때의 여행은 재방송이 불가능하나,
같이 생사고락을 했던 사람들의 추억 속에는 영원히 남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또한 나와 그들의 이야기는 한라산에 수많은 전설의 하나가 되어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다.
비록 같이 갔던 사람들의 거의 99%는 그 인연이 길지 못해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아침 이슬처럼 그렇게 사라져
갔으나 그 짧으면 짧은 인연, 내게는 그저 소중하고 고마울 뿐이다. 어쩌면 한라산이 내게 내려준 큰 선물들..
다음에 그들과 혹 만나게 된다면 그날의 추억을 상기시키며 곡차(穀茶) 한잔 하고 싶다.

1. 요즘 가끔 8월 말에 갔었던 한라산 여행이 혹 하룻밤의 꿈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정신을 차려보면 컴퓨터 혹은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 때 간 것이 정말일까? 혹 꿈 속에서 간 것을 정말로 간 것이라 우기는 것은 아닐까?
요즘 과학, 의학 논문들도 마구잡이로 조작하는 세상인데 그까짓 기행문 하나 조작하는 거야 솔직히 뭐가
어렵겠는가?

하지만 그 당시 같이 갔었던 많은 사람들의 사진에 나의 모습이 많이 담겨져 있었고, 또한 나의 디지털
카메라에도 나의 모습과 함께 거기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 있는 걸 보면 정말 꿈은 아닌 것 같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모든 것이 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그래서 종종 햇갈리는 모양이다.
정말 가기는 간 것 같다. 다만 무심한 세월이 나의 머리를 망각시켜 나로 하여금 햇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행적을 모조리 남가일몽(南柯一夢)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세월이란 녀석이 그저 얄미울 뿐이다.

2. 37도 이하 지역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의 꼭대기에 내 발자욱을 남김으로써 그 지역에서는 더 이상 높이
올라갈 산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그보다 낮은 산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시작인 것을..
태백산(1563m)과 한라산 사이에 공백이 너무 크니 이제 슬슬 그 중간의 산―지리산(智異山), 설악산(雪嶽山),
덕유산(德裕山)..―들을 하나, 둘 찾아갈 것이다.

3. 한라산이 준 애정(?)의 선물―다리 아픈 것―은 몇 일이 지나니 말끔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어느 지인은
그 선물의 양이 너무 큰지 근 한달 가까이 고생을 했다고 한다. 한라산이 너무 사람을 가려 선물의 양을
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한편으로는 매우 씁쓸하다. ^^;;

4. 인천 ~ 제주 13시간의 항해, 비거(飛車)로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빠른 것이 무조건 좋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간혹 13시간의 항해를 즐기며 제주도로 가는 여유를 부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서해에서의 장엄한 일출과 수많은 은하수들이 그대들을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5. 본 글을 작성하면서 그 당시의 추억을 하나,둘,셋 그리고 넷, 그렇게 떠올려 보았다. 정말 재미있던 그
추억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당시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어차피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 답사, 촬영 일시 - 2005년 8월 27일
* 하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11월 3일
* 하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11월 14일
* 하편 숙성기간 ~ 2005년 11월 14일 ~ 2006년 2월 21일
* 공개일 - 2006년 2월 21일부터
* 상,중,하편을 상,하편으로 통합 - 2005년 12월 3일


Copyright (C) 2006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제주도 한라산 (서해바다 ~ 제주 ~ 백록담)



' 제주도 한라산(漢拏山) 기행 - 2005년 8월 26 ~ 28일'
'상편 ― 인천에서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제주도 한라산(성판악,백록담)까지'



한반도를 바라보며 언제나 연륙(連陸)의 정을 꿈꾸는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
1988년 그 섬을 처음 찾아간 이래, 거의 17년 동안 제주도를 잊고 살았다. 설사 가고는 싶어도 제주해협을
건널 재간이 없어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 신비의 섬,

그러다가 2005년에 이르러 제주도가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탐라(耽羅) 상륙 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중, 8월에
이르러 단돈 99000원에 갈 수 있는 제주도 한라산 2박 3일 여행 상품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얼씨구나~ 싶어
신청을 하였다.
제주도까지 정말로 99000원에 오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처음에는 '저 돈으로 과연 여행사와 선박회사가 본전이나
뽑을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으나 갔다와 보니 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제주도와의 재회(再會)를 꿈꾸며 아무런 미련도 없이 8월을 하루, 이틀, 사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세월의
저편으로 내던지고 보니 어느덧 그 날, 8월 26일의 찬란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제주도에 가기는 하지만 가는 목적이 어디까지나 우리나라―미수복지 제외(북한)―에서 제일 높다란 한라산을
등반하는 것이므로 세세한 것까지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한라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北漢山)과 조산
(朝山)인 관악산(冠岳山), 그리고 속리산(俗離山), 태백산(太白山)의 수준을 넘어서는 험산(險山)으로 멀리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마치 여성적인 모습으로 매우 부드러워만 보인다.
그래서 한라산을 여성적인 산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경(遠景)일 뿐, 산으로 들어서면 그
부드러움은 온데 간데 없는 완전한 남성적인 산으로 돌변해 버린다. 그것이 바로 한라산의 이중성이다.

그의 이중성을 무시하고 자칫 만만히 보고 덤빌 경우 한라산의 큰 노여움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 노여움을
받으면 피차 이로울 것은 없지. 지금도 가끔 그런 일이 발생하긴 하지만 예전에는 멋모르고 산에 오르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각별한 준비를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산을 올라야
한라산도별다른 심술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한 존재라고 열심히 자화자찬을 해도 자연 앞에서는 결국 두 발 달린 일개 동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이다.

부친(父親)이 20년 넘게 신고 다니신 오래된 등산화를 신고, 긴 소매옷, 비옷, 책 등을 챙기고 룰루랄라 집을
나섰으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연(delay)의 제왕' 1호선 전철이 변함없이 말썽을 피우는 통에 자칫 배를
놓칠 뻔했다. 동인천역에 예상보다 너무 늦게 도착하여 인천연안부두로 가는 인천시내버스 12번(일신동∼
연안부두)
을 탔는데, 운전사가 나의 마음을 헤아려 준 듯, 열심히 달려준 덕에 배 출항 시간(19시) 바로 10분
직전에 도착하여, 부랴부랴 배에 오를 수가 있었다.

* 원본을 보고자 할 경우(따로 익스플로어 창으로 보고자 할 경우) 여기를 클릭바랍니다.
* 사진을 올린 웹 사이트의 점검,기타 사유로 인해 아주 간혹가다 사진이 안뜰 수 있습니다.
* 인천 출발부터 다시 인천 도착까지 거의 모든 일을 사실에 기초한 이른바 직서(直敍)주의에 따라 작성했습니다.
* 중립의 원칙에 따라 본 글에서는 모임 이름과 같이 간 사람들의 이름은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 본 글은 상,하 2편으로 나눠서 작성했습니다.

◀ 인천 ~ 제주 구간 1000리(520km)를 운행하는
오하마나호 모습 -
배에 탈 때는 배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고,
내릴 때는 주로 사진 왼쪽으로 차가 들어가는
창고를 통해 밖으로 나온다.
(제주여객터미널에서 촬영)

* 인천 연안부두 출발 ~ 매주 월,수,금 19시
(겨울에는 18시 30분)
* 제주 여객터미널 출발 ~ 매주 화,목,토 19시
(겨울에는 18시 30분)
* 배삯(요금) ~ 이곳을 클릭하여 검색 바람

19시가 되자, 도저히 뜨지 못할 것 같던 1만톤 규모의 오하마나호는 600명의 사람을 거뜬히 태우고 인천(仁川)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털어버리며 슬슬 바다로 미끄러지듯 서해바다로 나간다. 이로써 13~14시간에 걸친 대항해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속도가 느려 배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이나 배가 점점 용을 쓰면서 비록 고속전철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시속 40km까지 속력을 낸다. 배에 오르면서 "2시간 이상 배를 타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13시간씩이나 버틸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약간 있었으나 배가 워낙에 크고 넓어서 그런 걱정은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우리가 13시간 동안 머물 방은 3등실, 말이 3등실이지 제일 아랫 등급이라고 보면 된다. 넓다란 방에 30명이
들어가 각자 영토분할을 시도하면서 조금의 빈 공간도 남질 않았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딱 2명, 1명은 예전에 본 적이 있고, 다른 1명은 우리 모두를 인솔하는
진행자로 등산 경력이 대단한 30대 후반의 산악인(이후 대장이라 쓰도록 하겠다)이다.
그 외에는 모두 모르는 사람, 간혹 아는 이들끼리 온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눈만 멀뚱멀뚱, 조용함이
감돈다.

배가 출항하자, 바닷바람도 쐴 겸, 갑판으로 나왔다.

▲ 점점 멀어져만 가는 인주(仁州, 인천)
인천이 나를 그렇게 떠나 보내 듯, 나도 인천을 저 멀리 떠나 보낸다.

▲ 통행세(?)룰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갈매기들
바닷배를 타면 꼭 만나게 되는 무리들이 있다. 바로 갈매기들..
배가 어느 정도 바다로 들어서자, 사람들로부터 통행세(?)를 받기 위해
하나,둘 배 주위를 어슬렁대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새우깡 등으로 나름대로 타협을 시도해 본다.

▲ 어느덧 인천과 저만큼 멀어져 버렸다.

▲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인천 영흥도(靈興島) 지역

▲ '댄서의 순정' 촬영 장소 ~
배의 진행 방향을 기준으로 제일 윗층 갑판 오른쪽 부분에 있다.


20시가 되자 선내 안내 방송이 나온다. 배표를 가지고 중앙로비로 나와서 이불을 가져가라는 방송.
그래서 대장과 함께 일행들에게 배표를 거둬서 로비에서 이불을 가져오는데 1사람에 달랑 이불 1개씩,
베게는 객실 위쪽 천장에 있으므로 꺼내서 쓰면 된다.

21시가 되자 한라산 여행을 맡은 여행사 가이드가 우리 방으로 들어와 한라산 등반 일정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한라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다. 다리가 안좋은 사람은 포기해라.
지정 시간까지 어느 위치까지 오르지 못하면 그냥 내려가라, 사고가 날 경우 우리가 책임지지 않는다.
17시 30분까지 관음사에 도착해라. 날씨 변화가 심하니 우의를 가져가라...'

가이드의 거의 겁을 주는 듯한 설명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벌써부터 지레 겁을 먹기 시작한다. '내가 과연
그 산을 오를 수 있을까. 도저히 자신이 없어. 산행시간이 무려 8시간이래잖아. 어머 어떻게..?'

나는 걱정에 휩싸인 그들의 눈동자를 지긋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는데..

21시 30분이 되자, 대장을 중심으로 몇몇 사람들은 선실의 갑갑함에서 벗어나고자 갑판으로 나가 자리를
깔고 과자와 오징어 등을 안주로 삼으며 맥주파티를 벌였다. 원래는 소주를 마실려고 했으나 선내(船內)
매점―새벽 1시까지 영업―에서는 안타깝게도 소주를 팔지 않아 꿩 대신 닭으로 맥주를 마시게 되었던 것.

22시가 되자 오하마나호 관계자들이 준비한 특별 이벤트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바로 불꽃축제..
이 축제는 매주 금요일에만 열린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하나 깔려 있다. 바로 승객이 600명을
넘어야 된다는 것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음..― 그렇지 않으면 축제는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 항해에서는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승선하여 축제는 별 탈없이 진행되었다.

선상(船上)에서 바라본 불꽃들의 화려한 향연(饗宴), 비록 여의도(汝矣島)의 불꽃축제 만은 못하지만, 바다
위에서 바라본다는 매력 때문인지 불꽃들이 참 특별하게 보인다. 불꽃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계속
터져나오고, 축제 진행자의 노련한 진행솜씨와 신나는 음악으로 갑판은 거의 춤판이 되어 버렸다.
그 때 배는 안면도(安眠島) 앞바다를 통과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즐거운 환호성으로 안면도 사람들 아마도
잠 다 잤을 것이다.

그런 불꽃축제도 약 20분 만에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사람들은 객실로 들어가거나 혹은 갑판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바닷바람을 벗삼아 속칭 술판을 벌인다.
우리도 제일 윗층 갑판에 자리를 잡고 판을 벌이는데 일행 중 10여명이 그 술판에 동참하였다.
다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초반에는 좀 서먹서먹한 감은 없지 않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니 그 서먹함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만난 그들은 우리나라 5000만 인구의 한 명이자 일부로, 그들과 이렇게 만났다는 그 인연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같은 하늘 밑, 같은 나라에, 그것도 같은 민족으로 살면서도 서로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생태이기 때문이다. 혹 그들이 나에게 손해가 되는 존재라 하더라도, 인연이 짧아 금방
서로를 잊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만났다는 그 자체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바닷바람이 약간 심통이 난 듯, 바람이 약간 추워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알콜
성분이 몸에 차곡차곡 누적되니 추위도 금방 잊혀져 쌀쌀하게 느껴진 바람은 이내 시원한 선풍기 바람으로
변해 버린다.

술판이 계속 무르익어 감에 따라 참여하는 사람의 수도 약간 늘어나면서 그 인원은 20명을 넘어섰다.
나를 포함한 이들은 거의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여 여행이 끝날 때까지 거의 같이 동행하며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여행이 끝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억이라는 호리병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가면서 술을 마시는 사람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하나 둘, 객실로 들어가 잠을 청하면서 0시 정도에
이르러 술판을 모두 파하고 객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까 전과 달리 이미 앞서 잠들어 버린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사람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약 10명은
바깥 로비로 쫓겨났고, 나는 간신히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지만 잠은 좀처럼 오질 않는다. 방바닥에 기대니 배의 힘찬 심장소리가 느껴지고 옆에 잠든 사람들이
나의 영역을 침범하며 소음공해(?)까지 일으키면서 잠이 오려고 해도 도저히 올 수가 없는 상황.

그래서 잠깐 갑판으로 나가 어둠에 잠긴 바다를 바라보았다. 망망대해(茫茫大海)에 홀로 떠 있는 배,
주위는 온통 어둠.. 어둠 속에 갇힌 나와 오하마나호, 하늘에는 달이 높다란 위치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서울에서는 만나기 힘든 별들이 여기저기서 빛의 향연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말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바다.
그 자체였지..

바다를 바라보며, 배가 어느 정도 와있나 확인하기 위해 중앙 로비에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 모니터는 배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그 때 겨우 변산(邊山) 앞바다를 통과하고 있었다.

새벽 3시,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오지 않는 잠을 강제로 붙잡으며 겨우 잠이 들었다.


새벽 5시 40분, 스르륵 잠이 깼다. 아직까지는 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벌써부터 잠에서 일어나
서해 해돋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해에서의 해돋이라, 동대해(東大海)나 남해바다에서 해돋이를 맞이한 적은 있었지만 아직 서해에서는 맞이
한 적이 없다. 그저 서쪽으로 지는 일몰(日沒)을 바라 본 것 밖에는...

새벽 6시가 넘자, 8월 27일의 여명이 동쪽에서부터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땅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잤던 해가 슬슬 출근 준비를 하며 졸린 자신의 몸뚱아리를 바다 위로 올리기 위해 열심히 안간힘을 쓴다.

사람들은 해돋이를 보기 위해 삼삼오오 갑판으로 모여들고, 6시 30분 경, 드디어 해는 그 머리를 시작으로
바다 위로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 서해바다 선상에서 맞이한 해돋이
시계(視界)가 망망한 수평선 속으로 쏙 숨어버린 해가 이제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장엄한 얼굴을 내민 햇님 ~
사람들은 그 황홀한 광경(일출)에 하나 둘, 넋을 잃는다.

▲ 둥근 해가 떴습니다. ~ (사진 2장)


햇님과의 아침인사를 마치고, 나를 포함한 약 10여명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조타실(操舵室)로 조심스럽게
이동하였다. 바로 전날에 대장이 선박 관계자와 어떻게 이야기를 하여 아침에 견학을 허가 받았던 것.
조타실은 배를 조종, 통제하는 곳으로, 최첨단을 자랑하는 온갖 기계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선장(혹은 1등 항해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것저것 기계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 호기심 가득한 어린
아이처럼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하고..

약 20분 동안 조타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앉는 의자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
보니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배를 조종하는데 의자에 앉아 졸음에 빠진다면
자칫 100년 전의 타이타닉호처럼 큰 사고가 일어 날 수 있으므로,
그리고 선장(1등 항해사)은 태평양전쟁에 관한 짧막한 이야기도 하나 해주었다. 이야기의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처음 왜국(倭國)은 우세한 위치에서 태평양 전쟁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관측하여
대충 각도를 짜는 이른바 천문관측으로 미사일을 쏘는 방식으로, 미국(米國)의 자동관측기계를 이용하여 긱도를
맞춰서 쏘는 방식에 밀려 결국 왜국은 패망했다'

▲ 조타실 책상 위에 놓인 다도해(多島海), 제주해협(濟州海峽) 주변 지도

▲ 배 주변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니터
노란색은 섬이고, 하얀 점은 부근을 지나고 있는 선박들

▲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
배가 지나온 구간에는 저렇게 거대한 물길이 생겨 났다.


해돋이와 조타실을 둘러보고 식당에서 제주도산 해산물과 채소로 가득한 아침(무려 5000원)을 먹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일행들은 한라산 등반에 대해 다들 조심스럽게 한마디씩 한다 '그 높은 데를 어떻게
올라가지?','저는 산을 잘 못타는데 님은 산 잘타세요?','8시간 산행이니 두둑히 먹어두는게 좋겠죠',
'올라가다 저 쓰러지면 업어 주세요'...
이렇게 아침을 먹고나니 어느덧 7시 30분,,
이제 30분만 있으면 땅을 밟아보게 되는구나.. 아 신난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조류의 영향으로
약 20분 가량 연착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한숨을 쉰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배에서 13시간이나 찌그러져 있었으니..

그러나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제주도도 슬슬 그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기 시작하고 건물과 아파트로
가득한 남국(南國)의 수도, 제주시(濟州市)는 계속 우리를 향해 성큼 다가온다.

그런데 그 청명하던 날씨가 제주도에 가까워짐에 따라 갑자기 구름이 가득히 끼더니만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다. 분명히 그날은 날씨가 좋을 것이라고 기상청에서 그렇게나 강조를 했는데 왜 갑자기 비가..
혹 17년동안 자신을 찾지 않은 나에 대한 제주도의 서운한 마음의 표현은 아닐까? 그러나 비는 이내 그치고,
그 넓은 가슴으로 나를 맞이해주는 제주도..

인천을 출발한지 13시간 20분 만인, 8월 27일 아침 8시 20분, 드디어 제주도의 관문인 제주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릴 때는, 배의 아랫층 창고를 통해 제주도의 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선박 측에서는 창고 쪽으로 하선(下船)을 유도한 것이다.
제주도의 품에 오랜만에 안기고 보니 좋기는 좋다. 그새 '탐라(耽羅)'도 나처럼 많이 변했구나..

배에서 내리니 10여대가 넘는 관광버스와 차량들이 한라산, 제주도 관광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 2대에 나눠 타고, 제주시를 남북으로 관통하여 원시림(原始林)에 가까운 한라산의 북쪽 자락으로
파고들어가, 516도로라 불리는 11번 국도를 따라 아침 9시 30분, 한라산의 동쪽 입구인 성판악(城板岳)에
도착했다.


▲ 성판악 휴게소
성판악에 이르니 한라산에 감히 도전장을 내민 수많은 사람들로 정말 발디딜 틈이 없다.
한결같이 '백록담(白鹿潭)의 물을 마시고 말 것이다'라는 비장한 표정들..
산행에 들어가기 전,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서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고..

드디어 9시 40분, 대장의 출발 신호와 함께 역사적인 한라산 산행이 시작되었다.

* 한라산 성판악 찾아가기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5.16도로 경유 서귀포(西歸浦)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성판악에서 내리면 된다.

▲ 요구조건이 엄청나게 적혀 있는 한라산 등산 안내문
한라산 일대는 천연기념물 182호로 지정되어 특별 보호되고 있다.
그래서 산에서의 야영, 취사도 금지되어 있고, 등산로도 겨우 성판악과 관음사, 영실 정도만
개방되어 있으며, 등산에도 엄청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있어 솔직히 많은 아쉬움을 준다.
그렇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한라산에 왔으면 한라산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산을 찾은 이의 마땅한 도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싫다면 아예 오지 말던가..?

◀ 현무암(玄武岩)으로 된 한라산국립공원
표석 ~ 남국(南國,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의 표석.

▲ 성판악 등산로 입구 (해발 700m고지)
여기서부터 장장 18km의 걸친 한라산 대장정이 시작된다.
그저 평범하게만 보이던 등산로,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 한라산은 다른 국립, 도립, 군립공원의 산과 달리 통제가 매우 심하다.
등산로에는 저렇게 '몇시까지 어디에 도착해라. 아니면 못올라간다'는 식의 안내문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등산객들에게 엄청난 심적 압박감을 주고 있다.
그래서 등산 시작과 동시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속력을 내며 마치 등산대회라도 하는 듯, 거의
속보(速步)로 올라간다. 산을 잘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덩달아서.. 그래서 금방 지치고..
체력이 약한 이들은 차차 뒤로 쳐지고.. 어떤 이는 포기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오직 앞만 보고 열심히 올라가기만 할 뿐, 주변을 살펴보는 여유를 부리지
못한다. 속세에서도 그렇게 사느라 지치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일까? 다들
그저 백록담에 눈이 어두워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등산을 하는 것은 한라산에 대한 큰
무례가 아닐까싶다. 시간이 그렇게 촉박하지 않는 이상은 주변 풍경도 살펴보는 여유를 부리는
것이 답사나등산의 참 목적이 아닐까? 등산로 주변으로 수많은 나무와 꽃, 바위, 계곡들이
잠깐이라도 자신들을보고 가라며 그렇게 손짓을 하건만. 뭐가 그리 급해서 다들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일까? 백록담만 중요하고 그들은 중요치 않다는 것일까?

그렇게 올라갈 바에는 뭐하러 머나먼 남국(南國)까지 왔을까?단순히 백록담이나 보자고..?
한라산 꼭대기를 정복하고 싶어서? 산이 어째서 인간들의 정복 대상이란 말인가? 사람과 산이
뭐 맞짱이라도한판 붙었는가? 정복을 못해서 그렇게도 안달이 났는가?
산을 느끼면서, 그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올라가는 것이 그리도 힘든 일인가? 비록 지정 시간
내에특정 장소에 도착을 못해 다시 돌아나올지언정 그렇게 앞만 보고 올라가고 싶지는 않다.

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정말 지나치기 아까운 풍경들이 하나, 둘, 나의 눈을 유혹한다. 나는 그런
유혹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라,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하며 그저 앞만 보고 헉헉거리며 올라
갈 때, 나는 그들을 하나씩 만나며, 만져가며, 이야기하며, 사진에 담으며 그렇게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약간 뒤로 쳐지긴 했지만.. 누가 빨리 오르나 시합하러 온 것도 아닌데, 뒤로
처지면 어떠하리.. 그런 것이 다 한라산과 친해지는 과정이거늘...

▲ 성판악 출발 겨우 40분 만에, 속밭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 속밭을 지나고..
'성판악~백록담' 등산로는 거의 흙길이 없다. 순 돌로 가득한 돌길..
돌도 워낙에 뾰족해서 한라산 전용 등산화 외에는 다 무용지물.. 이는 한라산이 오만에 빠진
인간들에게 내린 시련의 하나일 것이다.

그나마 근래에 들어 몇몇 구간은 저렇게 나무 길을 깔아놓아 편하게 등,하산 할 수는 있으나
그런 구간은 그리 길지는 않다.

◀ 사라악 약수 ~ 속밭을 지나면 성판악
코스의 유일한 약수터인 사라악 약수터가
나온다.
한라산이 자신에게 도전한 오만한 인간들
에게 하사한 선물로 물은 언제나 넘쳐
흐른다.

이 곳을 지나면 더 이상 약수터가 없으며
왠만하면 여기서 물을 가득 보충해서
올라가야 뒷 탈이 없을 것이다.

◀ 1400m 고지를 지나면 등산로가 갑자기
미치기(?) 시작한다.
거의 40도에 가까운 돌계단으로 가득한
등산로,
성판악 등산로에서 제일 힘든 구간이다.


▲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은 점심 도시락
성판악 출발 7.3km 지점인 진달래밭 대피소에 11시 30분 경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는 좀 이르긴 하지만 점심을 먹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제주도의 어느 도시락 업체에서 정성스레 만든 도시락에는 하얀 쌀밥과 오뎅, 소고기, 멸치,
김치, 단무지, 닭고기, 고추 등의 반찬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옵션으로 누군가가 가져온 고추
참치캔한 통, 그러나 일행들(남자 2명, 여자 6명)의 젓가락질 몇 번에 금세 바닥을 드러내
보인다.

하늘과 가까이서 먹는 음식이라 그런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모두 맛있는 것 같다.
평소에는 잘 거들떠 안보는 음식이라 할 지라도.. 게다가 친한 사람들과 같이 옹기종기 먹으니,
그 맛은 더욱 좋아질 수 밖에..

▲ 진달래밭 대피소
여기서도 간단하게 먹을 꺼리를 팔고는 있으나 가격은 시중보다 많이 비싸며
그 양도 그리 충분치 못하다.

▲ 진달래밭 대피소에 있는 안내문
이 곳에서는 13시 이전에 출발해야 백록담까지 갈 수 있으며, 그 이후는 올라가지 못한다.
이처럼 통제가 심해 좀 야속하긴 하지만 한라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 1500m 고지
점점 하늘과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다 정말
천인(天人)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 하얗게 변해버린 어느 고사목(枯死木)
세월의 아픔이 가지마다 걸려 있다.

◀ 하늘과 가까이 살고 있는 산닥나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저 나무가
산닥나무라고 한다.

▲ 돌로 가득한 등산로
흙 길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돌 길의 연속..
인간들의 산행을 방해하기 위해 한라산이 내린 최대의 시련이자 방해물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으로 호기심 강한 인간들의 산행을 막을 수는 없다.
단지 그들의 발걸음을 약간 지체만 시킬 뿐..

▲ 파란빛 향기를 간직한 어느 파란색 꽃
아름다운 생명의 신비 앞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

▲ 1700m 고지를 넘으니 한라산의 정상이 저만치나 가깝게 다가온다.

▲ 운무(雲霧)가 정상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혹 신선이나 선녀들이 하강(下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정상에 가까워 질 수록, 커다란 나무 대신 키 작은 나무와 수풀들이
마치 한라산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듯 그렇게 늘어서 있다.
이렇게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도 생명의 신비는 살아 숨쉬고 있었다.

▲ 정상 주변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현무암과 바위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마치 폐허의 현장을 보는 듯한..

◀ 드디어 1900m 고지에 이르렀다.

▲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 길
민족의 성산(聖山) 한라산으로 부지런히 올라가는 사람들

▲ 드디어 정상을 100m 앞두다..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답사, 촬영일 - 2005년 8월 26일, 27일
*상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10월 4일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11월 3일
*상편 숙성기간 ~ 2005년 11월 4일 ~ 2006년 2월 20일
*공개일 - 2006년 2월 21일부터
* 상,중,하편을 상,하편으로 통합 - 2005년 12월 3일



Copyright (C) 2006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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