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미양요의 현장 강화 광성보, 손돌목 ~



' 2004년 11월 27일, 강화도(江華島) 역사기행 ' ~ 하편
'강화해안도로 ~ 광성보 ~ 용두돈 ~ 손돌돈'

광성보 대포 ~
▲ 구한말, 양이(洋夷)들을 향해 힘찬 포성을 울렸던 광성보(廣城堡)의 대포들

* 이번 답사 코스
' 서울
→ 강화읍 → 외포리포구 → 석모도 → 보문사(일주문, 은행나무, 윤장대, 석굴, 향나무,
맷돌, 극락보전) → 눈썹바위(마애관음보살) → 보문사
→ 매음리해변 → 외포리 → 강화읍 →
강화해변도로 → 광성보 → 용두돈,손돌목 → 손돌돈 → 강화읍내 →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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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바다를 건너 다시 강화도로 ~

배에서 바라본 북쪽 바다
석포리에서 외포리 나가는 배를 타고 다시 강화도로 되돌아 나온다.
배 삯은 아까전 외포리에서 왕복으로 끊었으므로 따로 낼 필요는 없다.
외포리로 나가는 배 역시 많은 사람들과 수레를 싣고 가뿐하게 바다를 건너며
강화도 외포리에 우리를 내려 놓는다.

이렇게 보면 마치 섬에서 육지로 이동한 것 같지만 강화도 역시 바다에 떠 있는 일개 섬에 불과하다.
다만 덩치가 크고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그게 섬인지를 자각을 못할 뿐,

▲ 외포리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배에 올라탄 수레만 가히 20대는 넘어 보인다.


외포리에 이르러 어시장 부근 외포리 정류장에서 강화읍내로 나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다시 강화도의 서울인 강화읍내 터미널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들의 친구 1명이 그의 수레를 끌고 뒤늦게 합류하면서 우리 일행은 모두 5명으로
늘어났는데 그가 끌고 온 수레로 인해 마음이 바뀌면서 강화읍내(고려궁터, 용흥궁, 왕자샘)로
잡았던 답사코스를 강화해협의 광성보로 변경하였다.
그 이유는 강화읍내에서 맴도는 것 보다는 대중교통으로는 접근하기가 좀 힘든 곳으로 가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 될 것이며 바다가 바라보이는 경치가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비록 계획했던 강화읍내의 유적지들은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과감하게 강화도
동쪽 해변에 있는 광성보(廣城堡)로 길머리를 바꿨다.

강화읍내를 벗어나 갑곶진(甲串鎭)에서 뚫린지 몇년 되지 않은 강화해변도로로 진입.
진행 방향 왼쪽으로는 강 같은 바다가 우리와 함께 나란히 있고 시원스레 뚫린 4차선 해변도로는
차가 별로 없어 정말 시원스레 드라이브를 하였지.
게다가 거의 1~2km 간격으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조그만 포대들이 자리해 있으니 정말 드라이브와
문화유적 답사 두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괜찮은 코스,

기분 같아서는 그 포대를 하나씩 하나씩 일일이 둘러보고는 싶지만, 그럴 여건이 되질 못하여
그것들은 그냥 차창 밖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오직 광성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릴 뿐이다.

오후 4시 30분, 정적이 감도는 분위기의 광성보 주차장에 도착, 1인당 입장료 1100원을 내고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현장으로 들어선다.


♠ 신미양요의 현장 ~ 광성보(廣城堡)



▲ 광성보 손돌돈대

김포와 강화도 사이, 강화해협에는 돌로 만든 성, 진지들이 유난히 많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이런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을까? 지도를 본다면 그 이유는 분명히 드러난다.
고려 중기인 13세기, 북적(北狄)들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강토의 대부분이 전쟁터가 되었을 때
고려정부는 깅화도로 국도(國都)를 천도하여 약 40년 간 고려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때 섬 주위로 성, 진지를 많이 구축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버려진 강화도의 주요 진지들을 다시 수리,증축하기 시작하였고,
야인(野人)들에게 호되게 깨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이후 강화도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수십 개의 진지를 강화도 바닷가 곳곳에 설치하게 된다.

광성보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강화외성(外城)에서 시작되었는데 광해군 10년(1618년)에
증축,보수하여 효종 7년(1656년)에 다시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곳에 배치된 인원과 군비, 온갖 물품들을 살펴보면 별장(別將) 1명, 군관(軍官) 29명,
사병(司兵) 100명, 돈군(墩軍) 18명, 군량미 114석, 콩 20석, 첨향미 103석, 간장 4독,
진선(鎭船) 5척, 기타 군기(軍器)와 군용품 약간이 있었다.

광성보에는 따로 돈대(墩臺)들이 설치되어있는데 이들은 1676년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오두돈,
화도돈, 용두돈, 손돌돈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태어난 것은 1745년이며 이 때 광성보의 정문인 안해루
(按海樓)가 세워졌는데 '안해(按海)'란 말은 말 그대로 바다를 누른다, 잠재운다는 뜻으로
광성보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광성보와 인근 돈대들은 19세기 중반, 서양의 여러 손님들이
불쑥 찾아오면서부터 많이 바빠지기 시작했는데 그 서막(序幕)으로 1866년 프랑스 애들이 강화도를
뒤집어놓고 줄행랑을 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난다.
광성보는 병인양요의 주무대가 된 곳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생략.

그 이후 광성보는 1871년 미국(米國) 애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이른바 신미양요의 주무대가 되었다.

~~ 여기서 잠깐 신미양요의 배경과, 진행, 결과를 간략하게 살펴본다면..~~


*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첫 인연은 1866년 평안도 철산(鐵山)으로 표류한 서프라이즈호에서 시작된다.
청나라로 놀러가던 서프라이즈호는 서해바다에서 표류하여 철산 앞바다에 표착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은 조선이 프랑스 신부들을 죽이고 프랑스와 대치 중이었으므로 그들은 조선 정부가
자신들을 프랑스 애들로 취급하여 모조리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 당시 철산을 다스리던 철산부사(府使) 백낙연(白樂淵)은
안절부절 못하던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그들이 미국 선원임을 밝혀내고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
청나라로 보내주는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 이후 같은 해 7월, 미국 소속 제너럴셔먼호가 조선과 통상을 할 목적으로 조선에 놀러왔는데
하필이면 그들은 대동강(大同江)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平壤)까지 들어와서는 통상하라고 행패를 부린다.

그 당시 평양감사(平壤監司)는 개화파(開化派)의 한 사람이었던 박규수(朴珪壽)로 그는 이 기회에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통상을 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러나 쇄국(鎖國)에 단단히 미쳐버린 조선정부는 그들을 쫓아내라는 칙서(勅書)를 내려보내니
박규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통상은 필요없으니 이만 꺼져라"라고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요구를 거절했으며 나중에는 조선군과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평양 백성들을 향해
함포를 발사하는 행패까지 부리면서 박규수를 엄청 골아프게 만든다.
그러던 중, 평양부 소속 관리 하나가 그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박규수는 몰래
사람을 보내 그를 구출하고 마침 밀물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그 배를 화공(火攻)으로 공격하여
깔끔하게 처리를 하니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

이처럼 배가 보기좋게 불타 파괴되면서 그 안에 있던 미국,동남아 출신 선원들 20여명은 모두
물고기 밥이 되었으며, 용케 도망친 애들은 성이 잔뜩 난 평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조선의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이라 미국정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제너럴셔먼호가 보이지를 않자 왜국倭國)과 청국(淸國)에 전신을 보내 그 배를
수소문하게 하였는데 조선에서 격침되었다는 청나라의 보고를 받은 미국 애들은 심히 발작증세를
보이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 기회에 조선이라는 미지(未知)의 나라를 왜국처럼 개항시키고 5년 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항의할 목적으로 조선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게 되면서 로저스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아시아함대 5척과
해군 1230명을 서둘러 급파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것도 전혀 없었고 몸을 풀 시간도 필요한지라 우선은 1871년 5월,
왜국 나가사끼에서 몸 좀 풀면서 조선에 대해 연구를 하며 실전을 대비하다가 5월 16일 본격적으로
조선으로 출병한다.

인천 부근으로 들어온 미군은 서울로 가는 길을 탐색하기 위해 조선정부에 강화해협을 조사하겠다고
일방적 통보를 한 뒤, 6월 1일, 강화해협의 손돌목으로 불법 진입을 시도하자 조선군은 대포를 쏘아대며
기습공격을 하니 이로써 신미양요의 서막은 오르기 시작한다.

조선군의 기습으로 크게 쫄은 미군은 전진을 멈추고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낸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강화해협을 조사하고 있는데 왜 포격을 하였소? 이는 비인도적인 야만행위로써
이에 당신들과 협상을 요구하오. 그리고 우리가 받은 피해에 대한 사과와 손해배상을 해주시오.
만약 그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오"
남의 바다의 불법으로 침입헤놓고, 엉뚱하게 지네들이 피해자라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개념없는
양키 애들의 협박을 조선정부가 들어줄 턱은 없을 터. 조선정부는 다음과 같이 화답을 하였다.
"강화해협은 우리의 국방상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너네들이 우리의 허락없이 설쳐대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며, 침략행위이다. 좋은 말할 때 사라져라!"

이처럼 협상이 결렬되자. 미군 애들은 "이거 말로는 안되겠다"싶어 그들의 본 모습을 드러내며
드디어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공격을 감행한다.
초지진을 지키던 조선군은 온갖 대포와 화승총(火繩銃), 조총(鳥銃)을 모두 동원하여 미군을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무기는 미군에게는 거의 장난감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에 비해 미군의 대포는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초지진을 향해 힘껏
날아가서는 꽝 터지니 순식간에 초지진은 쑥대밭이 되었고, 대포의 위력에 쫄은 조선군은
큰 혼란에 빠진다.
이 틈을 노려 미군 수백명이 초지진에 상륙, 순식간에 초지진을 점령해버린다.

그 다음 날인 6월 11일, 덕진진(德津鎭)을 손쉽게 점령하고, 다음으로 신미양요의 하이라이트인
광성보 전투가 시작되었다.
광성보에는 어재연(魚在淵) 장군을 비롯하여 약 600명의 조선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군은 열세의 무기를 가지고 약 1시간 가까이 미군의 파상적인 공격력을 잘 막아내었으나
결국 무너지기 시작, 전투개시 2시간도 채 되지 못하여 광성보 마저 미군에게 점령되면서
광성보(廣城堡)의 망루에는 조선군의 수자기(帥字旗) 대신 조그만 별들이 지저분하게 그려진
그들의 국기(國旗)가 펄럭이게 되고 전쟁은 양키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버린다.

이 전투로 조선군의 피해는 병인양요 보다 훨씬 컸는데 전사한 군인이 무려 300여명,
부상당한 군인은 20명이라고 하며 그에 반해 미군 애들은 겨우 3명 사망의 부상 10명이 전부였다.

이처럼 강화도의 주요 진지 3곳을 점령한 미군은 처음에는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강화해협을 무력으로 쉽게 점거했으나 조선의 양이(洋夷)에 대한 엄청난 반발과 쇄국정책을
도저히 뚫을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맘만 먹으면 5년전 프랑스 애들처럼 한강을 거슬러올라가 조선의 국도(國都)를 위협할 수도 있겠으나
미군은 그럴 생각을 접어버리고 다음달인 7월 3일, 왜열도로 도망을 친다.

미군이 왜(倭)로 도망치자. 조선정부는 매우 의기양양해하며 우리가 이겼다고 요란하게 떠들면서
쇄국정책의 강도를 더욱 높여만 가는 우매함을 보이고 결국 5년 뒤 신미양요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하면서 결국 반강제적으로 나라의 문호(門戶)를 개방하게 된다.

신미양요는 거의 애와 어른의 싸움으로 조선의 일방적인 패배라 할 수 있다.
병인양요는 그나마 프랑스 애들에게 인적, 물적 피해를 많이 입혀, 나름대로 이겼다고 우길 수 있겠으나,
신미양요는 그와는 다르다. 미군 3명을 쳐죽이는데 조선군 300명의 희생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치밀한 작전도 없이 적군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무대포적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상대방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결국 대참패를 당한 것이다.
적을 알아야 이길 방도가 생기거늘, 조선정부는 그런 것을 무시한 것이다.
아무리 조선군의 무기가 열세했다 하더라도 어차피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무기들이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아쉬움을 남긴 이 곳은 폐허가 된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오다가 1977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새롭게 재탄생 되었으며, 호국정신을 길러주는 역사의 현장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구한말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 서린 이 곳, 광성보는 사적 227호로 지정되었으며 부근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 등을 같이 겻드려서 본다면 꽤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또한 광성보에는 광성보에 소속된 손돌돈, 용두돈 등도 보너스로 준비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서 130년 전, 그 사건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 언젠가 우리와 미국이 또다시 맞짱을 뜨게 된다면 그 때는 전쟁터가 한반도가 아닌
아메리카 대륙이나 기타 다른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며 그 전쟁에 따른 인명피해는 우리군은 딱 3명만
전사하고 미군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수백만명 정도를 죽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1871년 그 날의 치욕을 되갚을 날이 오기를 염원하면서 말이다.

광성보 찾아가기
① 대중교통 (2005년 3월 현재)
* 강화터미널에서 광성보를 포함한 전적지 방면 군내버스가 1알 10회 운행한다.
강화터미널 발(發) 시간표 : 6:20, 7:50, 9:30, 11:10, 12:40,
13:10, 14:50, 16:30, 18:10, 19:45 (시간표는 추후 변경될 수 있음)

② 승용차 (주차 가능)
* 서울 방면에서 외포리까지 : 서울 → 김포 → 48번국도 → 강화대교 → 갑곶리에서
강화해안도로로 좌회전 → 광성보
* 인천 방면에서 외포리까지 : 인천 검단,양곡 대곶 초지대교(제2강화대교)
강화해안도로 덕진진 광성보

입장료청소년·군인·어린이 어 른
개 인 단 체 개 인 단 체
700 600 1100 900

♠ 패배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잘꾸며진 공원만 놓여 있구나 ~ 광성보(廣城堡)

▲ 광성보의 정문인 안해루(按海樓)
저 문을 들어서면 130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문은 마치 우리를 내려다보듯, 나름대로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고자 하나
나는 그 문이 왜 자꾸 초라하게 보여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130여년전 양키의 국기가 휘날렸던 아픔의 현장이라 그럴 것이다.

▲ 공원처럼 꾸며진 광성보
130년 전 패배의 흔적은 남아있질 않다.
오직 잘 꾸며진 공원만이 있을 뿐,

▲ 광성보에서 바라본 김포시 대곶면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김포시 대곶면 지역,
이렇게 보니 바다가 아닌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것 같다.

▲ 신미양요 무명용사비
130년 전, 이곳에서 전사한 수많은 이름없는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에서 세워준 비석.
 

▲ 쌍충비각(雙忠碑閣)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이런 비석들은 국가의 대한 충성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신미양요 때, 전사한 조선군 300여명이 잠들어 있는 곳,
무덤은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아마도 서양 양이(洋夷)들에 대한
분개심 때문이 아닐까.

▲ 팔각정(八角亭)
광성보에서 용두돈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나오는 베이지 색 계통의 정자(亭子),
이 정자는 박정희 정권 때 세워졌으며 그가 좋아한다는 베이지 색으로 기둥을
칠해 버려 별로 한국식 정자라는 이미지가 나질 않는다.

여기서는 해협을 향해 삐죽 나온 지형에 조성한 용두돈(龍頭墩)이 한눈에
보이며, 해협을 흐르는 바닷물의 힘찬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다.
 

▲ 강화해협의 바닷물은 오늘도 유유히 흘러갈 뿐이다.

▲ 손돌(孫乭)목
강화해협에서 제일로 물살이 빠른 곳,
이 곳의 바닷물 흐르는 소리는 정말 우렁차서 거의 옆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백만대군의 함성(喊聲)도 저것 만은 못하리라..

보기만 해도 물살에 빨려들어갈 것 같은 저 곳은 강화해협에서
제일 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곳으로, 많은 바닷물이 일시에
저 좁은 목을 지나려하니 서로 경쟁이 생겨서 저렇게 물살이 빨라 진 것이다.
 

▲ 급물살의 손돌목
시간이 흐르듯 급하게 흘러가는 손돌목의 물살~
저 바닷물은 무슨 급한 볼일이 있길래 저 곳에서 저렇게 요란법석을 떠는 것일까?

바닷물이 내는 저 요란한 소리는 130여년 전,
이곳에서 전사한 넋들의 고함소리는 아닐까?

손돌목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고려 제 21대 군주인 희종(熙宗)은 북적(北狄)의 칩입으로
자연도(紫燕島, 지금의 인천 용유도)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이 곳 손돌목을 지나게 되었다.
[희종 연간(年間)에는 북적들의 침입이 없었다. 그는 야심차게 추진하던
최충헌(崔忠獻) 제거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나자 잔뜩 열이 오른 최충헌에 의해
제위에서 밀려나 자연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 때를 말하는 것 같다.
또한 다른 자료에는 희종 대신 고종(高宗)이라는 말도 있고 공민왕(恭愍王)이라는
말도 있으며, 그냥 고려왕(高麗王)이라 기록된 것도 많은데 이건 어차피 전설에
불과하므로 여기서는 내가 알고 있는 내용으로 희종을 주인공으로 삼을까 한다.
그리고 전설의 내용은 각 자료마다 약간씩 다르므로 이를 참조하기 바란다]

빠른 물살을 헤쳐가며 겨우겨우 전진을 하고 있는데 마침 손돌이라는 사공이
배를 타고 물길이 막히는 곳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희종은 왠지모를 의심이 생겼다.
그는 그 사공이 자기가 탄 배를 물길이 막힌 곳으로 몰아 넣으려는 의심에
크게 노하여 그를 잡아 죽이게 하였다.
[귀양가는 왕이 무슨 권한으로 백성을 죽일 수 있었을까?]

그러나 희종의 의심은 어디까지나 오해였다. 손돌이 가고자 했던 물길은
손돌목에서 제일로 안전하고 빨리 갈수 있던 물길이었던 것이다.
후에 희종은 그 진실을 알고 손돌의 장례를 후하게 지내주며 매년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이 때부터 이 수로(水路)의 이름을 손돌목이라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손돌목 건너편 김포시 대곶면 덕포진(德浦鎭)에는
손돌의 묘가 있어, 그 전설이 어느 정도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다.
대책없이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애궂은 군사들만 죽게 만든 조선 정부나
괜한 선한 사공을 의심하여 죽인 그 군주나 별로 다를 건 없어 보인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손돌이란 사공이 이곳을 지나다가 물에 빠져죽었는데
그날이 음력(陰曆) 10월 20일이었다.
그래서 그날만 되면 손돌바람이라 불리는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는데
손돌의 원통한 혼을 달래기 위해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 용두돈(龍頭墩) 입구
강화해협을 향해 마치 용머리처럼 삐죽 튀어나온 곳에 만들어진 용두돈,
용두돈에는 박정희 정권 때 세운 거대한 '전적지정화기념비'가 있다.
광성보 유적지에 거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성벽 바로 아래에 손돌목의 급한 물살이 흐르고 있고
돈(墩)으로 들어서면 물살의 거센 소리가 우리의 귀를 사정없이
때려댄다.
 

▲ 길게 펼쳐진 용두돈
신미년(辛未年)으로 완전히 파괴된 용두돈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근래에 새로 조성된 때깔 좋은 성벽만이 있을 뿐이다.
 

▲ 용두돈 끝 부분에는 둥그런 모습을 한 대(臺)가 있는데
이 곳에는 '전적지정화기념비'와 한 그루의 소나무가 다정하게
바닷바람을 쐬고 있다.


▲ 용두돈 끝 부분
 

▲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江華戰跡地淨化記念碑)
광성보와 그 주변 전적지를 복원한 기념으로 용두돈에 세운 기념비,
구한말, 양이들과 직접 싸우던 이 곳에 이런 비를 세운다는 것이
왠지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것은 광성보 입구나
공원 공터에 세웠으면 좋겠는데,
 

▲ 용두돈 화포(火砲)
오랜 세월 강화해협을 지켜오던 화포,
해협을 무단칩입하던 양이(洋夷)들에게 인정사정없이
대포를 쏘아대던 저 대포는 이제 사람들의 구경꺼리로 전락해 버렸다.
 


 

▲ 용두돈 부근 포대(砲臺)
용두돈 남쪽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 모습의 포대가 있다.
구멍이 뚤린 저 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해협에 들어온 이양선(異樣船)을
향해 포를 쏘았다.
 


▲ 대포가 설치된 곳
저 좁은 구멍으로 대포의 끝부분을 내밀어 포를 쏘았다.

 


▲ 포대(砲臺)의 모습
 


▲ 포대 위를 거니는 사람들
서울 풍납토성(風納土城)을 거니는 기분이다.
별 곡선이 없는 여타 토성과 달리 이곳은 들어올 부분은 들어오고
나올 부분은 나오는 등. 포대의 곡선이 매우 부드럽기만 하다.

 

▲ 거대한 돌덩어리들
용두목을 구성했던 돌로 지금은 낙엽 사이에 이렇게 누워
한가로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한 없이 펼쳐진 낙엽을 밟으며
마지막 늦가을의 정취를 느껴본다.

 


 

▲ 손돌돈(孫乭墩)
광성보의 소속된 포대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해 있다.
신미년 당시, 이 곳이 양이(洋夷)에게 점령되면서 광성보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지.

이 돈대(墩臺)는 특이하게도 동그란 원형(圓形)을 하고 있는데 마치
로마의 원형 경기장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다.

▲ 쓸쓸한 분위기의 동그런 손돌돈 내부
이 곳에서 용두돈, 손돌목 뿐만 아니라 건너편에 김포시 대곶면 지역까지 훤하게 다 보인다.
 

▲ 대포가 설치되었던 포구(砲口)
이양선을 향해 힘차게 내뿜던 대포는 오래전에 없어지고 지금은 그냥 비어 있다.

▲ 손돌돈 내부로 들어서는 문
 

▲ 돈 내부로 들어서는 문의 높이가 좀 낮아서 키가 큰 사람은
머리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 가을 단풍의 마지막 몸부림 -
낙엽으로 전락되기 싫어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치는 단풍잎의 심정은 십분
이해가 가지만 이 세상의 어느 누가
감히 자연의 섭리를 어길 수가 있겠는가.

저 붉은 단풍은 2004년 가을에 본 마지막
단풍이 되었다.

 


♠ 마무리~
결코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상처가 담긴 광성보를 한바퀴 쭈욱 둘러보니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면서 슬슬 달의 세계가 다가온다.

광성보를 출발한 시간은 대략 17시 40분, 이미 광성보 관리직원도 집으로 들어가고 없다. 주차장은
이제 차량 5대도 채 남지않았고, 사람들이 거닐던 이 곳에는 다시 기나긴 고요가 찾아온다,

광성보를 떠나서 아까전 해안도로 대신 불은, 선원을 경유하여 다시 강화읍내로 들어서니 저녁 6시,
슬슬 김이 모락모락나는 저녁밥이 그리워질 시간이다.

나는 그날 강화도에 오기 전에 이미 저녁 먹을 곳을 이미 정해둔 상태였다.
강화읍에도 나름대로 맛집을 자처하는 집들이 많이 있겠지만, 나와 예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맛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은 이름도 참 단순하여 외우기도 쉽다. 바로 '우리옥' 혹은 '우리집'이라 불리는
한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인데 이 집은 일반 한옥에서 음식업을 한다.

이 집의 특징은 밥을 장작불로 때워서 한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내가 그 집을 처음 간 것은 아주 어릴 적인 1988년, 부친(父親)과 강화도에 답사하러 와서 나가는 길에
이 집에 들려 저녁을 먹었는데, 그 당시 내 입맛에는 그 집 반찬은 별로 맛이 없었다.
대신 중년 이상 사람들은 맛있어서 밥을 몇 그릇씩이나 먹고는 했다는데,
그 이후 94년에 한번 오고, 이번에 근 11년 만에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지.
그런데 오랜만에 그 곳을 찾아서인지 도대체 읍내 어디에 붙어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렴풋이 그 부근이라 생각되는 곳에 차를 세우고, 시장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다행히도 바로 그 길에
그 음식점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쉽게 그 곳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그 곳, 그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 집도 많이 변한 것 같다.
예전에는 정말 한옥 다운 모습으로 조그만 쪽방에서 밥을 먹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개조를 하여
커다란 방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지만 음식점 내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좁은 편.

방으로 들어와서 한정식 5인분과 따로 생선찌게를 시켜서 맛있게 그날의 4번째 식사를 시작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 느낀 맛만을 상기하며 다른 데로 갈 껄 그랬나? 이들이 맛없다고 하면 어떻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다행히 맛은 매우 좋았다. 다들 만족해 하는 분위기~~
어렸을 때의 그 입맛은 이제 성인 기준으로 이미 업그레이드가 되어버린 상태,
04년 2월, 어렸을 때 입도 안되던 오색약수(五色藥水)를 맛있다고 3컵이나 마신 것처럼, 이제
그 음식들의 맛을 알아가는 것 같다.
이는 성숙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나이를 먹었다는 서글픔을 보여주는 것이겠지.
콩비지를 포함 여러 반찬, 밥, 찌게 모두 숟갈과 젖가락이 쉬지않고 들락날락 거리면서
양이 얼마 안되는 밥과 반찬, 찌게는 금세 동이 나버린다.

뜨근한 방에서 이렇게 배부르게 먹고 나니 식곤증의 일환으로 슬슬 몸 속에 숨어있던 피로라는 넘이
싹 몰려오기 시작한다.
집이라면 뭐 못이기는 척 하고 그냥 뻗어 잠을 청할 수도 있겠지만서도 여긴 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1박 코스로 온 것도 아니라서 잠깐의 게으름에 몸을 의탁할 수는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이끌며 저녁 7시 경, 읍내를 출발
역사의 섬 강화도와 작별을 고하며 다시 육지로 나와 다시 원점(서울)으로 돌아오니

~~ 이로써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았던 강화도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광성보에서 바라본 일몰의 모습

 

* 하편은 2005년 3월 1일에 작성
3월 9일에 완성하여 5월 23일부터 만천하에 공개함

* 6월 11일에 일부 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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