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권 사진,답사기
비화가야의 옛 도읍, 창녕 나들이 (창녕읍내, 남지철교)
도봉산 고양이
2010. 5. 18. 12:13
' 비화가야(非火伽倻)의 옛 도읍 ~ 창녕(昌寧) 나들이 '

▲ 송현동 고분군에서 바라본 창녕읍내
♠ 창녕읍내 둘러보기
▲ 창녕석빙고(昌寧石氷庫) - 보물 310호 |
창녕터미널에서 창녕박물관, 화왕산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고분을 닮은 창녕석빙고가 나온 다. 석빙고는 그 옛날 얼음과 진상품 등을 보관하던 냉동창고이다. 오늘날이야 냉장고 등의 냉 동시설이 휼륭해서 언제든지 얼음을 취할 수 있으나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얼음은 정말 구하 기 힘든 존재로 나라에서 관리하였다. 그래서 개천 주변에 고분 모양의 거대한 석빙고를 만들어 겨울철에 강이나 하천에서 얼음을 떼서 저장했다가 여름이나 기타 필요할 때 꺼내 썼으며 서울 로 보내는 진상품과 냉동 보관이 필요한 여러 물품을 보관했다. 그 많고 많던 석빙고는 현대화 를 거치면서 죄다 녹아 없어지고 현재는 이곳을 비롯하여 경주, 청도, 안동, 영산 정도만 남아 있다. 서울에는 국립 냉동창고인 서빙고(西氷庫)와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창녕석빙고는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을 이루도록 남북으로 길게 조성되었다. 남쪽에는 빙 고(빙실)안으로 들어가는 돌문이 있으며, 문 앞에 이르면 실내에 차디찬 기운이 엄습해와 냉동 창고의 기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빙실(氷室)의 높이는 5.4m, 길이 13m로 경주의 석빙고보다는 좀 작으나 구조는 비슷하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진 않으나 석빙고 앞 비석에는 조선 영조 18년(1742년) 창녕현감 신후서 (申侯曙)가 만든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석빙고 제도가 있었고 이곳이 비화가야 의 옛 도읍임을 비추어 볼 때 적어도 비화가야 시절부터 숨을 쉬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빙고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으로 조성되어 휴식공간을 제공하며, 조그만 개울이 석빙고 주변을 감싸 흐른다.
※ 창녕석빙고 찾아가기 (2010년 5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창녕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에서 창녕행 직행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있다.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창녕행 직행버스가 1시간에 2~3회꼴로 다닌다. * 마산에서 창녕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창녕터미널을 나오면 바로 오리정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화왕산, 창녕박물관 방면)으로 10 분 가량 걸으면 길 오른쪽에 창녕석빙고가 있다. * 승용차 (석빙고 주변 길거리에 잠시 주차) ① 구마고속도로 → 창녕나들목을 나와서 창녕읍내 방면으로 좌회전 → 오리정4거리에서 직진 → 창녕석빙고 *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
▲ 창녕읍내를 굽어보는 창화사(昌和寺) |
창녕석빙고에서 동쪽으로 가면 화왕산 서쪽 자락에 솟아난 절, 창화사가 나온다. 화왕산 등산로 의 하나인 자하곡(紫霞谷) 입구에 자리한 이 절은 천태종(天台宗) 소속으로 2002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아직은 사세가 미약하여 대불보전(大佛寶殿)이란 2층 건물이 고작이다. 법당과 생활공 간을 하나에 담은 대불보전은 단청(丹靑)과 외부장식이 현란하여 절의 초라함을 약간이나마 달 래준다. |
▲ 대불보전 풍경물고기의 위엄 푸른 하늘을 그의 바다로 삼으며 오늘도 그윽한 풍경소리를 속세에 베푼다. |
창화사 바로 뒤쪽 언덕에는 옛 비화가야의 지배층이 잠들어 있는 송현동고분군과 신라후기에 만 들어진 송현동석불좌상이 있다. 모두 경내를 통해서 접근이 가능하며 송현동석불좌상은 절에서 관리하고 있다.
|
▲ 송현동석불좌상의 조촐한 거처 창화사 뒤쪽 숲속에 자하곡의 은자(隱者) 석불좌상이 기거하는 조그만 기와집이 있다.
▲ 바위에 비스듬히 기댄 송현동석불좌상(松峴洞石佛坐像) - 보물 75호 |
조그만 기와집에 은신하고 있는 송현동석불좌상은 바위에 돋음새김으로 새겨진 높이 1.4m 남짓 의 조그만 마애불(磨崖佛)이다. '송현동마애여래좌상'이 적당한 이름인 듯 싶은데 어째 석불좌 상으로 이름이 정해졌는지 모르겠다. 좌상이라고 해서 독립적인 형태로 앉아있는 불상을 떠올렸 는데 정작 빗장을 열어보니 마애불이 나를 반긴다.
이렇게 불상이 있으니 그를 관리하던 절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 절에 대한 기록과 흔적 은 전혀 없으며, 오랫동안 작은 기와집에 기거하던 것을 창화사에서 번듯하게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하얀 피부를 지닌 바위에 기댄 그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꼭대기에 육계가 큼지막하게 솟아있 다. 얼굴은 둥글고 볼은 풍만해 보여 자애로운 인상을 풍긴다. 두 눈썹 사이로 동그랗게 파인 백호가 있으며, 눈과 코는 조금 손상되긴 했으나 알아보는데는 별 지장은 없다. 길쭉한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내려와 붙었다.
|
▲ 송현동석불좌상의 얼굴과 어깨 |
목은 두꺼워 보이나 삼도(三道)는 보이지 않으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지만 조그만 몸집 때문인지 어딘가 허전해 보인다. 두 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다리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降魔觸 地印)의 제스쳐를 선보인다. 우측 어깨를 살짝 덮은 법의(法衣)는 하체까지 내려왔으며 옷주름 은 계단식으로 표현되었다.
경주 석굴암(石窟庵) 본존불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이는 신라 후기 석불로 그 흔한 광배( 光背)가 없는 것이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바위가 그의 광배였다. 바위의 모습이 광배의 하나인 보주형(寶珠形)을 쏙 닮아 그걸 약간 다듬어서 자연산 광배로 삼은 것이다. 광배 무늬를 따로 새기지 않고 바위 그대로의 모습을 광배로 한 것이 무척 인상 깊다.
불상 앞에는 예불을 드리는 공간이 있으며 건물 천정에는 중생들의 소원을 한가득 담은 연등이 대롱대롱 매달려 불상을 비춘다.
|
 ▲ 옛 비화가야의 비밀이 담겨진 송현동고분군(松峴洞古墳群) - 사적 81호
|
창녕읍내 동쪽과 동북쪽 외곽 구릉에는 1,500년 전에 사라진 비화가야의 옛 무덤들이 언덕을 가 득 메우고 있다. 평지에 조성된 신라 고분과는 달리 가야 고분은 대체로산자락혹은 구릉자리 를선호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속시원한 해답은없는 것 같다.
창녕의 고분군은 교동고분군(사적 80호)과 송현동고분군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번에 찾은 송현동고분군은 2개의 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1군은 목마산(牧馬山) 기슭에서 송현동 일대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 일부는 도야리로 통하는 도 로를 넘어 교동까지 이른다. 원래는 80여기 정도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16기에 불과하다. 2 군은 윗사진에 나온 고분들로 송현동석불좌상 옆 언덕에 솟아난 고분이 그것이다. 20여기 정도 가 있으며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면서 제대로 남은 것은 8~9기 정도이다.
비화가야는 13가야(혹은 6가야)의 하나로 삼한시대에 변한연맹(弁韓聯盟)의 하나인 불사국(不斯 國)에서 시작된 나라이다. 김수로(金首露)의 세력이 구야국(狗倻國, 경남 김해)에서 가야(伽倻) 를 세워 변한 일대를 장악하면서 가야연맹의 일원이 된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가야를 풍비박산 낼 때 위기를 극복했으나, 6세기 에 이르러 신라의 압박이 거세지자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백제(百濟)와 왜국과 손 을 잡고 신라를 경계하게 된다. 554년 백제 성왕(聖王)이 약속을 저버리고 한강 유역을 가로챈 신라를 응징하고자 3만의 대군을 몰아 신라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을 공격하자 가야제국(諸國)은 앞다투어 원군과 물자를 보 내 백제를 도왔다. 비화가야 역시 백제를 도왔을 것이다. 허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 군은 형편없이 깨지고 백제 성왕은 신라군에 잡혀 목을 잃고 만다.
가야가 백제를 도운 사실에 뚜껑이 폭발한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대대적인 가야토벌을 벌인다. 바로 이듬해인 555년(진흥왕 15년) 비화가야가 그 첫 희생양이 되었으며, 나머지 제국도 도미노 현상처럼 신라에 무너졌다. 이윽고 562년 대가야(大伽倻)를 끝으로 가야의 존재는 한반도에서 영구히 사라지게 된다.
송현동고분군은 5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데, 고분 태반이 왜정 때 싸그리 도굴당하고 오랜 세월 관리소홀로 인한 자연현상으로 봉분이 무너지거나 경작이나 도시개발 등으로 사라진 무덤이 많아 아쉬움을 준다. 허나 그것이 망국 무덤의 처절한 운명이다. |
 ▲ 송현동고분군에서 바라보이는 교동고분군 - 사적 80호 송현동고분군과 더불어 옛 비화가야의 비밀을 간직한 곳으로 언제나 그 정체가 밝 혀질련지 고분은 오늘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
1918년 교동고분군 5,6,7,8,10,11,12호분과 송현동의 89.91호분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들이 쏟아 져 나왔는데 발굴보고서도 없고 유물 상당수가 사라졌다고 한다. 고작 1918년에 발표된 교동 21 ,31호분 발굴보고서가 창녕고분의 유일한 조사기록이다. 무덤의 형태는 교동12호분은 신라무덤과 같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며, 대부분은 가야식 장 방형의 횡구식석곽분(橫口式石槨墳)으로 비화가야 시절의 무덤이 확실한 것 같다.
출토품의 메모가 남아있는 교동7호분의 목록은 이들 고분의 부장품이 매우 풍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우리나라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1918년 발굴 이후, 권력과 결탁한 도굴 행위가 자행되어 대낮에도 버젓히 도굴이 이뤄질 정도였다고 하며 이렇게 도굴된 유물들은 왜국 상인들을 거쳐 왜열도로 무차별 유출되었다. 현재 왜국의 '오쿠라(小倉) 컬렉션'은 당시 대구에 살던 오쿠라가 빼돌린 가야문화유산(특히 창녕 유물들)이 주류를 이룰 정도라고 하니 정 말 뚜껑이 열릴 일이다.
왜인의 악랄한 도굴은 비화가야 및 고대 창녕지역의 정체와 성격을 밝힐 수 있는 단서마저 산산 히 없애버렸으며, 가야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를 무참히 파멸상태로 만들었다. 나라 잃은 서글 픔은 이 땅의 백성뿐만 아니라 이 땅의 자연과 문화유산까지 수모를 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 중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건 해방 후에 출토된 굽다리접시<고배(高杯)>, 항 아리 등이 고작이다.
|
 |  |
▲ 손으로 더듬고 싶은 모습의 송현동고분군 | ▲ 서로 색깔이 다른 2기의 무덤이 하나로 붙어있다. |
사람이란 죽으면 다 썩어 문드러져 흙의 일부가 되거늘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했 던 지배층의 부질없는 꿈이 이들 고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저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했던가. 하지만 그들의 부질없는 짓거리는 오늘날 우리 들로 하여금 오래 전 그들의 존재를 약간이나마 알게 해주며, 창녕 고을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 는 산증인들로 우리에게는소중한 존재들이다.
이곳에 오르면 창녕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1호분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 비록 보 이는 범위는 창녕읍내로국한되어 있지만, 잠시나마 비화가야를 지배하던 지배자가 된 기분이다. 천하에 모든 것이 나의 발 아래에 있으며, 나무와 무덤, 모든 것이 나에게 예를 표하며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나를 잠시나마 즐겁게 한다.
※ 송현동고분군/송현동석불좌상 찾아가기 (2010년 5월 기준) * 창녕까지 교통편은 앞에 창녕석빙고 참조 * 창녕터미널을 나오면 바로 오리정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화왕산, 창녕박물관 방면)으로 20 분 가량 걸으면 길 모퉁이가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3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으로 창 화사가 나온다. 경내로 들어서면 왼쪽 언덕으로 송현동고분군이 보이고 오른쪽 오솔길 끝에 송현동석불좌상의 거치인 기와집이 있다.. * 승용차 (주차는 창화사입구 도로변에 하면 된다) ① 구마고속도로 → 창녕나들목을 나와서 창녕읍내 방면으로 좌회전 → 오리정4거리에서 직진 → 창녕석빙고 → 창화사(송현동석불좌상/송현동고분군)
* 소재지 : 송현동석불좌상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5-4 송현동고분군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0-1 |
♠ 창녕의 오랜 보물과 역사를 품은 조그만 공원 만옥정공원(萬玉亭公園) |
창녕읍사무소 뒤쪽 야트막한 언덕에는 만옥정공원이라 불리는 조그만 공원이 있다. 산책을 즐기 거나 삼삼오오 벤치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창녕읍민의 소중한 휴식공간으로 창녕 고을의 값 진 보물과 역사를 품고 있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공원에는 창녕 제일의 보물인 진흥왕척경비를 비롯하여 창녕객사, 퇴천3층석탑, 창녕척화비, 비 석군 등의 문화유산과 UN전적비가 있으며 조촐한 야외공연장과 테니스장 등의 군민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
 | ◀ 창녕척화비(昌寧斥和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218호
진흥왕척경비 부근에는 조선말, 쇄국정책(鎖國政 策)의 상징물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19세기 중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질없 는 꿈이 고스란히 담긴 척화비는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우둔한 쇄국정책으로 주변 나라에 뒤처지게 되고 결국 격동의 시절을 겪으면서 나 라 자체가 침몰되는 비운을 맞는다. 물론 100% 모두 그의 쇄국정책 탓으로 돌리는 것도 무리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붙잡을 수 없는 머나 먼 옛날 이야기를 여기서 그 시시비비(是是非非 )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며 그걸 가리고자 이곳에 온 것도 아니다. |
이 비석은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프랑스와 미국과 싸워 간신히 얻은 승 리로 자신감에 취한 대원군이 1871년 서울 종로거리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것으로 비문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다.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吾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 우리의 만대 자손들에게 경고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1871년)에 세우다.
1876년 이후, 그 많던 척화비는 사라지고 옥천, 구미, 양산, 청도, 부산 등 전국적으로 약 10개 정도만 살아 남았다. 비석의 높이는 123cm, 폭 46cm, 두께 20cm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원래 는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을 1945년 이후 이곳으로 옮긴 거라고 한다. 비석의 건강은 양호하 여 비문(碑文)의 내용을 확인하는데 별 지장은 없다. |

 ▲ 신라진흥왕척경비(新羅眞興王拓境碑) - 국보 33호
|
공원 제일 높다란 곳에는 창녕 제일의 국보인 진흥왕척경비가 공원을 굽어보고 있다. 비석의 건 강을 위해 특별히 기와지붕을 얹힌 보호각까지 만들었으니 산책로에 아무런 보호시설도 없이 멀 뚱히 서 있는 척화비와는 대우가 확실히 다르다.
이 비석은 비화가야를 정벌한 진흥왕이 친히 이곳을 순수(巡狩)한 기념으로 561년에 세운 것으 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측에 속하는 비석이다. 신라는 555년 비화가야를 병합하여 하주( 下州)라 했으며, 565년에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이라 했다.
높이가 178cm, 폭이 175cm, 두께가 30cm로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와 비슷하게 생긴 화강암 빗 돌이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심하게 마멸되어 후반부를 제외하고 판독 이 어렵다. 전부 27행의 육조체(六朝體) 해서(楷書)로 새기고 글 둘레에는 비석의 모양을 따라 음각의 선을 둘렀다.
비문의 1단에는 비석이 세워진 시기가 적혀있으며 본문에는 제왕을 수행한 신하의 이름과 직위, 소속과 글을 쓴 이의 이름이 적혀있어 그 당시 관직명과 지명, 신분제를 파악하는데 큰 보탬이 되어준다. 그외에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진흥왕의 순수 사연과 비화가야를 점령한 내용 등이 담 겨져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는 1914년 화왕산 기슭에서 왜인이 발견하여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며 진흥왕 시 절에 세워진 다른 순수비<북한산비, 마운령비(摩雲嶺碑),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달리 '순수관 경(巡狩管境)'이란 제목이 보이지 않아 영토를 넓히고 기념으로 세운 척경비로 일컬어진다. 허 나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있는 것으로 봐서 순수비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창녕척경비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진흥왕 부분을 보완해주는 중요한 금석문(金石文)으로 그 당시 신라의 영역, 창녕지역 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산증인이다. 그 가치가 그만큼 깊기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비각까지 만들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귀중한 비석에 누가 자꾸 돌을 던지고 괴롭히는 모양이다. 비석 앞에는 돌을 던지지 말라는 어이없는 문구가 쓰여있기 때문이다. 1,500년의 노구를 지탱하는 것도 버겨워 할 그에게 돌을 던지다니..? 문화 유산을 소중히 다루고 지키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
 | ◀ 퇴천3층석탑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10호 이 탑은 창녕객사 맞은편에 자리한 석탑으로 원 래는 창녕읍 퇴천리(兎川里) 마을 한가운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 해체보수하여 지 금 자리에 갖다 놓았다. 탑이 있던 마을에는 기 와조각 등이 발견되어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 나 그곳에 관한 기록은 없는 실정이다. 2중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신라 후기 석탑으로 일자로 뻗은 직선미가 돋보 인다. |
자신의 정체를 망각한 채, 공원에서 편히 노후를 보내는 탑의 모습, 공원을 이루는 장식물의 일 부가 되버린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 나온다. 척화비도 창녕척경비도 오랫동안 주 변에 무책임하게 버려져 있던 것을 수습한 것이니 다들 동병상련의 이웃이자 친구이다. |
▶ 창녕객사(昌寧客舍)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31호 퇴천3층석탑 맞은편에 자리한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옛 창녕고을의 객사이다. 객사는 출장나온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고 제 왕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셔 한달에 2번 씩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창녕객사는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 었다. |  |
1924년 12월 당시 창녕군수인 지장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5월 지금의 자리에 안착시켰다. 정면 3칸, 측면 5칸의 제법 웅장한 규모로. 바닥은 따로 만들지 않 고 기단 위에 바로 세웠다.
본 건물의 특징은 내부를 가리는 벽이 없고, 건물 전체에 쇠못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 이곳으로 객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벽을 없앤 것으로 생각했으나 처음부터 벽은 없었던 모양 이다. 사방이 뚫려있는 모습이 한여름에는 무척 시원할 것 같으나, 반면에 너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 건물은 아마도 궐패를 모신 객사의 본관으로만 쓰였던 모양이다. 저런 집에 출장 나온 관리를 묵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지금은 문화재 보호 철책에 둘러싸여 객사로 한참 활용되 던 옛 시절을 그리워할 뿐이다. |
 | ◀ 공원 한쪽 구석에 자리한 비석군(碑石群) 창녕현감의 선정비(善政碑)및 공덕비(功德碑)가 주류를 이룬다. 창녕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 을 이곳에 한데 집합시켜 2열 종대로 배치하였 다. 선정비라고는 하지만 형식적으로 세운 비석 들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
 | ◀ 나무아미타불이라 쓰인 비석 |
※ 만옥정공원 찾아가기 (2010년 5월 기준) * 창녕까지 교통편은 앞에 창녕석빙고 참조 * 창녕터미널을 나오면 바로 오리정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화왕산, 창녕박물관 방면)으로 12 분 가량 걸으면 창녕읍사무소로 가는 길이 나온다. (창녕석빙고 지나서 바로 나오는 큰 3거리 ) 오른쪽으로 꺾어서 3분 정도 가면 창녕읍사무소와 창녕경찰서가 나오는데, 그 뒤에 만옥정 공원이 있다. * 승용차 (주차는 창녕읍사무소 주차장이나 부근 골목에 하면 된다) ① 구마고속도로 → 창녕나들목을 나와서 창녕읍내 방면으로 좌회전 → 오리정4거리에서 직진 → 창녕석빙고를 지나 큰 3거리에서 우회전 → 창녕읍사무소 *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일대 |
♠ 창녕과 마산을 이어주던 빛바랜 옛 다리, 창녕 남지철교(南旨鐵橋) 등록문화재 145호
 |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洛東江)은 경상도를 굽이굽이 돌아 남해로 흐르는 장장 525km의 물줄기로 압록강(鴨綠江) 다음으로 긴 강이다. 낙동강이 흐르는 길목에는 창녕군(昌寧郡)에 속 한 남지(南旨)라는 고을이 있다. 인구 1만을 지닌 읍으로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오래된 철교인 남지철교를 빛바랜 일기처럼 간직하고 있다.
남지철교는 창녕의 남지와 함안군의 칠서면을 이어주는 트러스 교량으로왜정 때 대구~마산을 잇는 국도를 만들면서 가설되었다. 1931년 삽을 뜨기 시작하여 1933년 2월 개통되었으며 5번 국 도의 교량으로 소중히 사용되었다. 6.25 때는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과 치열하게 전쟁 을 벌인 애환의 현장으로 그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남하를 막고자 어쩔 수 없이 다리 가운데 25m 가량을 폭파시켜야 했다.
1953년 복구하여 40년 동안 창녕과 마산을 이어주다가 1993년 7월 안전상의 이유로 수레의 통행 을 금하면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대신 그 옆으로 그를 닮은 새 다리를 만들어 그의 역할 을 대신하고 있으며,수레의 통행은 불가하지만 사람의 통행은 가능하여 다리로써의 기능은 녹 슬지 않았다.
교량은 철근 콘크리트 T형교의 형태로 길이는 391m, 넓이는 6m, 트러스 높이는 6m이다. 교각 부 분의 트러스를 높게 하여 물결이 치는 듯한 모습을 지녔다. (서울의 한강철교와 비슷하다) 트러 스는 리벳 접합방법으로 제작되었는데계절의 변화에 따른 철제의 신축을 조절하는 이음장치로 연결하는 등 당시로는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지철교는 70여 년의 세월 동안 주요 교통로로 그 공로를 인정받고 아름답고 우수한 다리로 평 가를 받아 문화재청 지정 등록문화재 145호로 지정되었다.
다리 주변(남지읍 쪽) 둔치에는 꽃밭과 넓은 운동장을 갖춘 남지강변공원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읍민과 나그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봄에는 유채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여름과 가을에는 눈이 흐드러지듯 펼쳐진 메밀꽃과 나비가 춤추는 코스모스의 향연이 펼쳐진다.
※ 남지철교 찾아가기 (2010년 5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남지행 직행버스가 1일 1회 떠난다. (11시 20분 출발이며 20,700원) * 부산서부(사상)터미널에서 남지행 직행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남지행 직행버스가 1일 8회 정도 있다. * 마산터미널(합성동)에서 함안군내버스가 1일 9회 다니며 직행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있다. <군내버스는 남지까지 1,000원(마이비카드 900원)으로 직행버스의 절반 가격이다> * 남지터미널에서 낙동강둑방길을 따라 서쪽으로 20분 정도 걸으면 남지철교에 이른다. 이정표 가 곳곳에 길눈 역할을 해주어 찾기는 쉽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구마고속도로 → 남지나들목을 나와 우회전 → 낙동강 둑방길 경유 → 남지철교 ② 마산 → 중리,칠서 → 계내3거리에서 좌회전 → 남지신철교 경유 → 남지철교
★ 남지철교 관람정보 * 남지철교 아래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강변공원 넓은 공터에 차를 세우면 된다. * 매년 1월 1일에는 다리에서 새해 해맞이 떡국행사가 있으며, 4월에는 10만평 낙동강 둔치를 노랗게 물들이는 유채꽃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 다리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이 가히 명품급이라고 한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 961외 |
 ▲ 둑방길에서 남지철교와 가을이 익어가는 남지강변공원
 ▲ 낙동강에 심어진 남지철교의 어제와 오늘
|
하늘색 트러스의 다리는 옛 남지철교, 그 왼쪽으로 높다랗게 솟아난 빨간 트러스의 소유자는 신 남지철교이다. 새 다리가 옛 다리보다 높이와 길이가 월등히 높고 길다. 비록 현역에서 은퇴하 긴 했지만 인도교(人道橋)의 역할은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상한 모습 없이 예전의 모습을 간직 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려 애를 쓴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라 기껏 해봐야 얼마나 되겠는 가? 수레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옛 시절을 그리는 그의 모습에 쓸쓸함이 비쳐진다. |
 ▲ 넓은 세상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낙동강
|
둔치에는 강변공원이 드넓게 조성되어 있으나, 정작 강과 살을 맞댄 구역까지는 공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다. 인간으로부터 강을 보호하고자 함일까? 수풀들이 무성하게 솟아나 강으로에 접 근이 어렵다. 저 수풀을 헤치고 갈 용기가 없다면 이렇게 그냥 먼산 바라보듯 보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다. |

 ▲ 커다란 글자의 '꿈'과 '★' 창녕고을의 꿈을 담아서 하늘로 보내려는 메세지가 아닐까?
 ▲ 싸리눈이 한없이 내려앉는 것 같은 메밀꽃밭
 ▲ 코스모스의 즐거운 초가을 향연
 ▲ 방긋 미소를 비친 하얀 코스모스 ~ 꽃잎 색깔이 무지 깨끗하다. 작지만 아름다운 그들, 나의 마음을 왜 이리 설레게 만드는 것일까? ▼

 ▲ 나비와 꽃의 만남 ~ 그들만의 언어로 서로의 정을 속삭인다.
|
남지철교를 품은 남지강변공원에서 대략 1시간 정도 머문 것 같다. 시간적 여유가 넉넉하다면 내 다리로 직접 다리를 건너보는 건데 그러질 못하고 뒤돌아선 것이 너무 아쉽다. 남지가 붕어 향어찜이 유명하다고 하니 다음에 오면 그것도 먹어보고 다리도 직접 건너보련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블로그는 1달까지, 원본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작게 처리된 사진은 마우스로 꾹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글씨 크기는 10~12포인트입니다. (12포인트 기준이나 다음까페 일부는 10포인트로 설정)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굽신굽신~~
* 공개일 - 2010년 5월 13일부터
Copyright (C) 201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