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권 사진,답사기
부산의 듬직한 뒷산, 금정산 나들이 (국청사, 금정산성)
도봉산 고양이
2011. 1. 15. 14:37
' 부산 금정산 나들이 <1> (국청사, 금정산성)'

▲ 국청사 입구에서 바라본 파리봉과 상학산
그 아래로 금성동 마을이 포근하게 터를 닦았다.
4월 중순이면 한참 봄이 무르익는 시기이다. 하지만 지구의 건강을 위협하는 온난화(溫暖 化)의 팽창으로 벌써부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려고 한다. 아직까지는 긴 소매의 옷과 잠 바가 익숙한 시기라 긴팔 옷에 잠바까지 걸치고 머나먼 남쪽으로 길을 떠났지만, 이른 무 더위의 성화에 결국 반팔 옷으로 바꿔입고 말았다.
신라(新羅) 천 년의 향내가 징하게 묻어난 경주(慶州)를 찾아 백률사(栢栗寺)와 헌덕왕릉 (憲德王陵) 등 소금강산(小金剛山) 일대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부산의 3년 묵은 절친한 형님을 보고자 5개월 만에 부산에 발을 들인다. 그의 광안동(廣安洞) 집에서 닭고기에 맥 주 여러 잔을 걸치며 밤늦게까지 회포를 풀고 그렇게 그날을 마무리짓는다.
드디어 금정산에 가기로 한 다음날(일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 햇살의 찬란한 여명은 깊이 잠든 우리를 보채려 든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지만 고양이 세수마냥 세수를 하고 떠 날 준비를 마치자 일찌감치 서울의 북한산(北漢山)과 같은 곳이자 부산의 든든한 뒷산 금 정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덕천역에서 내려 구포시장에서 금정구 마을버스 1번(공해마을↔구포 시장)을 기다린다.정류장에는 차를 기다리는 금정산 등산객으로 가득한데 1번 마을버스가 오기가 무섭게 우루루 몰려타면서 결국 손잡이에 의지한 채 산성까지 서서 가야 했다.
화명동을 지나 푸르름을 머금은 금정산의 서쪽 품으로 들어선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2 차선 정도의 개미허리처럼 좁은 길로 산간지역의 산길처럼 꼬불꼬불 이어져있는데, 길 왼 쪽은 거의 낭떠러지다. 그 길을 계속 비집고 오르면 주변 숲을 만신창이로 만든 고속전철 공사현장이 나오며,금정산성(金井山城)의 서문이 차창 아래로 멀리감치 바라보인다. 이제 산성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우리를 비롯한 태반의 등산객은 금성동의 중심이라 할 수 있 는 금성동주민센터(중리마을)에서 내렸다.
금성동(金城洞)은 부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동네로 해발 300m고지에 높직하게 자리해 있다. 얼핏보면 교통도 허벌나게 불편한 벽지처럼 보이겠지만 덕천전철역과 온천장전철역 에서 마을버스와 좌석버스가 빈번히 운행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금정산 분지에 포근히 안긴 금성동은 조선 때 금정산성을 손질하면서 조성된 산간마을로 동네 이름은 금 정산성에서 비롯되었다. 금성동주민센터를 기준으로 서쪽에 죽전마을이, 남쪽에 공해마을 이 자리해 있으며 그 중간에 중리마을(금성동주민센터가 있는 동네)이 있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강원도 두메산골에 들어선 듯 깊은 산골이며 금정산 분지에 둥 지를 트고 있어 정말로 아늑하고 푸근하게 다가온다.부산의 든든한 뒷산이자 소중한 안식 처인 금정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있어 휴일에는 등산객과 나들이객들로 미어터 지며, 특히 막걸리와 염소고기가 유명하여 산행을 마치고 한 사발, 한 접시 들고 가는 사 람들이 많다.
우리는 금성동에서 부산학생수련원,미륵사 방면으로 통하는 북쪽 길로 방향을 잡았다. 길 로 들어서자 길 우측에 2층 건물 2동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절집이 지나는 이의 시선을 잡 아맨다. 문을 연지 얼마되지 않은 따끈따근한 절집(절 이름은 잊어먹음)으로 길가에는 신 도 아줌마 2명이 녹차와 떡을 나눠주고 있었다. 녹차 한잔과 떡으로 속을 달래며 등 뒤로 펼쳐지는 금성동과 금정산의 서쪽, 남쪽 산줄기를 후식으로 바라보며 6분 정도 오르니 국 청사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는 절을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중생을 멀뚱히 마중한다. |
 ▲ 국청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 흘림체 비슷하게 쓰여진 국청사 3글자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연등이 초롱초롱 길을 안내하는 국청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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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금정산 승병(僧兵)의 중심지 ~ 금정산 국청사(國淸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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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깊은 산 속에 둥지를 튼 국청사는 조그만 절로 미륵사(彌勒寺), 정수암(淨水庵)과 더불 어 금정산성에 남아있는 3개의 오랜 절집의 하나이다. 이곳은 신라 중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창건했다고 막연히 전하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구체적인 창건시기와 이를 입 증할 자료는 전혀 없는 실정이며, 다만 사원(寺院)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나 고려시대 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국청사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703년(숙종 29년)이다. 이때 금정산성의 중성(中城 )을 쌓으면서 산성을 지킬 승병(僧兵)들의 편의를 위해 해월사(海月寺)와 이 절을 중창했는데, '청청한 마음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선다' 또는 '외적의 더러운 발길에 짓밟힘을 막고 깨 끗하게 국토를 수호한다'는 의미로 이름이 국청사로 변경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금정산성 승병 장(僧兵長)이 사용하던 철로 만든 승장인(僧將印)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국청사 가 금정산 승병장이 머무는 금정산 승병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1713년에는 판결사(判決事) 이정신(李正臣)의 건의로 동래와 양산, 기장(機張) 지역의 각 사찰 에 승대(僧隊)를 조직하여 비상시에 금정산성 방위를 맡게 했으며, 평시에는 산성 안에 있는 국 청사와 해월사 승려 1백여 명과 범어사 승려 3백 명으로 수비하였다.
국청사는 호국지장도량(護國地藏道場)으로 나라를 지키다 숨진 이들의 영령을 모시고 제를 봉안 하던 곳이다. 국청사지(國淸寺誌)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전사한 부산진첨사 정발(釜山鎭僉使 鄭 撥), 동래부사 송상현(東萊府使 宋象賢), 다대포첨사 윤흥신(多大浦僉使 尹興信), 승장 만홍(萬 弘), 정안(定安), 성관(性寬), 관찰(寬札) 등 수백 명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냈다 고 한다.
1870년 경에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중건했으며, 그 이후 간신히 법등(法燈)을 유지해오다 가 1980년대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 등 4~5동의 건물 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부산지방유형문화재 93호인 1666년에 제작된 강희5년명금고(康 熙五年銘 金鼓), 부산지방문화재자료 44호인 금정산 승병장이 사용한 '금정산성승장인(金井山城 僧長印)'이란 철제인,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웅전 석가모니3존불좌상, 1872년 에 세워진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
이 땅을 지키다 산화한 이들의 영령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뜻 깊은 곳으로 비록 고찰의 내음은 식었지만 깊은 산골에 자리한 작고 아늑한 절로 잠시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고 편하게 안기고 싶 은 절집이다.
※ 국청사 찾아가기 (2011년 1월 기준) * 구포시장(2,3호선 덕천역 5번 출구), 화명역(2호선/4번 출구)에서 금정구 마을버스 1번(8~10 분 간격)을 타고 금성동주민센터 하차 * 온천장역(1호선/3번 출구)에서 203번 좌석버스(10~20분 간격)를 타고 금성동주민센터(중리마 을) 하차 * 금성동주민센터에서 북쪽(부산청소년수련원, 미륵사 방면) 길로 8분 정도 걸으면 국청사다.
★ 국청사 관람정보 * 절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나 주차공간이 넉넉치 못하다. * 대웅전에 1666년에 만들어진 강희5년명금고(쇠로 만든 북)가 있다. (보관장소는 변동 가능)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397 (☎ 051-517-5003) |

|  |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1987년에 지어진 건물로 산신(山神)과 독성, 칠성신의 보금자리이다. |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요사(寮舍) 국청사 승려의 생활공간이다. |
국청사 표석의 안내로 산내음이 깃든 오솔길로 1분 가량 들어서면 왼쪽으로 200평 규모의 메마 른 연못이 나온다. 봄가뭄이 극심이라 물과 개구리, 수중식물 등은 온데간데 없고 맨바닥에 잡 초만이 무성히 자라나 연못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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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청사 연못에 심어진 호국지장본원 3층석탑 전쟁에서 죽어간 넋들을 위로하고자 세운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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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은 1m 정도로 못 주위에 사람들의 접근을 막 기 위해 철책을 둘렀다. 연못 가운데로 하얀 맵 시의 3층석탑이 우아함을 드러내며 서있는데, 호 국지장본원(護國地藏本願) 3층석탑이라 불린다. 이야기에 따르면 법당에서 염불을 할 때마다 전 쟁 중에 죽어간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날짐승 울 음소리가 나서 도저히 기도를 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승려 창봉과 주지 혜성이 그 영혼 을 달래고자 1982년 우물을 연못으로 만들어 아 름답게 꾸미고 그 가운데에 3층석탑을 세웠다. 그 이후로 이상하게 넋들의 울음소리는 사라졌 다고 하며 그들을 위로했다는 뜻에서 3층석탑에 호국지장본원이란 이름을 달았다.
이 연못은 원래 약수가 나오던 우물이었다. 전 설에 따르면 연못 남쪽에 우물이 솟았는데, 위 쪽은 더운 물이, 아래쪽에는 차가운 물이 나왔 다는 영험한 우물이라 하늘나라 선녀(仙女)들이 밤에 살포시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전한다. 물 론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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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속에 외로운 섬으로 자리한 3층석탑, 허나 연못에 물이 없어 자연히 섬 신세를 면하게 되 었다. 연못 가운데에 석불을 배치한 건 많이 보았지만 커다란 탑을 심어놓은 것은 흔치가 않다. 현란한 조각으로 몸을 치장한 그의 맵시에 나의 눈길이 자꾸만 쏠린다. 4마리의 용이 보주(寶珠) 를 희롱하는 장면이 새겨진 아래 기단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너울거렸다면 지금보다 더 욱 빛나 보였을텐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탑에 용을 새긴 것은 구천(九泉)을 떠도는 넋들을 용에 태워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 연못 우측에 자리한 3개의 석물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석등,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 지장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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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움이 넘쳐흐르는 지장보살상 앞에 고색이 깃들여진 비석이 자리해 있다. 이 비석은 국청 사를 중수한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을 기리기 위해 명신(明信), 평윤(平允) 두 승려가 1872년 에 절 입구에 세운 것이다. 허나 1982년 연못을 만드는 과정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으며, 나중에 요사채 뒤쪽에서 두 동강이 난 채 버려진 비석을 발견, 이를 손질하여 지금에 자리에 두었다.
정현덕은 1867년 동래로 부임하여 6년 동안 동래고을을 다스렸으며 금정산성과 국청사를 중수하 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또한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비석의 성격은 영세불망비로 말그대로 그의 업적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는 뜻의 선정비이다. 비문은 이치영이 썼으며 비석의 높이는 103cm, 너비 39cm, 두께 14cm이다. 앞면에는 '부사정공 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고 좌우편에 4언시가 남아 있는데, 내용 은 다음과 같다.
相鄕趾美(상향지미) 동래고을에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重建佛宇(중건불우) 절을 중건하고 逢海宣恩(봉해선은) 동래에 은혜를 베풀어 廣置寺屯(광치사둔) 절에 많은 땅을 희사하였다 |
 ▲ 연못을 바라보며 자리한 영령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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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웅전 앞뜰에 헝클어진 채 버려진 국청사의 옛 정문
 ▲ 정면에서 바라본 옛 정문과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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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소박한 모습의 국청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런데 대웅전 앞뜰에 무너 지기 일보 직전인 조그만 기와문과 담장이 있는 것이다. 문의 높이는 세월의 무게가 얹혀져 아 래로 조금 내려앉은 듯 하며, 문짝은 너덜너덜 떨어져 있다. 담장과 문 지붕의 기와도 온갖 풍 화에 제대로 시달린 듯, 성치가 못하다. 문 밑으로는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지 수풀이 무성하다. 승려의 말로는 거의 몇백 년 묵은 문이라고 하는데, 얼핏 보니 대략 100년 내외로 보인다. 국청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긴 하지만 딱히 안내문은 없다. 이 문은 예전 국청사의 정문으로 지금보다 사역(寺域)이 좁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 남쪽으로 터를 넓히고 건물 을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규모로 사역이 확장되었으며, 옛 정문은 무슨 영문인지 자리를 옮기거 나 철거하지 않고 대웅전 앞뜰에 일부 담장과 함께 그냥 두었다. 아마도 국청사의 과거가 고스 란히 깃들여진 건물이라 그냥 기념물로 남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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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청사 대웅전(大雄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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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사의 가람배치는 법당인 대웅전이 좌우로 요사를 거느린 형태이다. 법당 앞에 으레 세우는 석탑은 없고 대신 낡은 옛 국청사의 정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탑은 연못에 있는 3층석 탑이 이곳의 유일한 탑이다.
국청사 대웅전은 범어사(梵魚寺)의 대웅전을 본 따서 1990년에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건물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석가3존불좌상을 비롯하여 후불탱 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절의 귀중한 보물인 금고(金鼓)가 있다. (금고 보 관장소는 변동가능) 대웅전 뒤쪽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모신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
 ▲ 화려한 닫집이 돋보이는 대웅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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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륵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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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사를 둘러보고 고당봉 밑에 자리한 미륵사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부산학생수련원까지는 수 레가 마음 놓고 바퀴를 구르게 끔 2차선 포장도로가 말끔히 놓여져 있다. 나들이객들이 끌고 온 수레들이 길 곳곳에 모여 따사로운 봄햇살의 희롱을 즐긴다. 5분 정도 가니 길 오른쪽으로 금정 산성의 중성(中城)이 수풀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
▲ 금정산성(金井山城) 중성 - 사적 215호 |
금정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산성(山城)으로 길이가 18km에 달했다. (북한산성은 약 9.5km ) 허나 지금은 4km 정도의 성벽만 간신히 남아 있다. 지금의 성은 17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확 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67년 경상좌수영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 보수를 조 정에 건의한 적이 있어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신라나 고려 때 왜구의 공격 에 대비하여 쌓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707년 성이 너무 넓어서 성의 중간 부분에 남북을 구 분하는 중성을 쌓았으나, 1774년에 성이 너무 커서 수비가 어렵다면서 폐지했다. 1806년에 성을 다시 손질했으며 왜정(倭政) 때 철저히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복원공사를 벌여 동 문과 서문, 남문, 수구문(水口門)을 복원하고, 1989년 북문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금정산의 허리를 가르는 중성은 의상봉 남쪽 제4망루에서 국청사 북쪽을 거쳐 서문으로 이어지 는 약 2km의 성곽으로 여장과 성문은 사라지고 성벽만 남았다. 성벽 위로 수풀이 무성하게 이루 고 있어 인간의 건축물은 자연 앞에선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중성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내리막길이 펼쳐지면서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수레길로 직진하 면 청수암과 부산청소년수련원이, 숲으로 무성한 비포장길인 오른쪽으로 꺾으면 미륵사와 북문 에 이른다. |
 ▲ 미륵사, 북문으로 가는 오솔길 (400m 고지) 부산청소년수련원으로 가는 길보다 더욱 운치가 서려있으며 수레의 왕래도 거의 없다. 길은 대체로 경사가 없이 평탄하여 산책 삼아 걷기에 좋으며 거의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솔솔나부끼는 바람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 산내음이 가득 깃들여진 미륵사, 북문으로 가는 오솔길
▲ 수레가 여기까지 올라와 한자리씩 점거하고 있다.
 ▲ 수풀에 묻힌 채, 버려진 옛 교회(혹은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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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청소년수련원과 미륵사로 갈라지는 3거리에서 미륵사 방면으로 10분 가량 들어서면 폐허로 방치된 교회가 길 왼쪽으로 스친다. 예전 이곳에는 마을과 농장이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이 후 금정산을 정비하면서 마을과 농장은 옮겨지고 교회는 폐가처럼 버려지게 된 것이다. 주변 사 람들의 말로는 대략 5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
 ▲ 교회를 지나 잠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다.
 ▲ 아직 미륵사까지 가야할 길이 한참이다. 아득하게 보이는 왼쪽 봉우리 밑에 미륵사가 둥지를 텄다.
 ▲ 미륵사 입구 (500m 고지) 옛 교회를 지나 7분 가량 가면 평탄한 길은 끝나고 북문으로 가는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길을 2~3분 가량 오르면 미륵사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산길로 가야 미륵사에 이르며 큰길로 직진하면 북문과 범어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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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사 가는 산길 |
미륵사 가는 산길은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다. 세상살이처럼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주변 경관 을 둘러보며 가다보면 나오지 않을 것만 같던 미륵사가 금세 모습을 드러낸다. 길 곳곳에 엉뚱 하게 생긴 바위들이 포진해 있으며 평평한 반석도 눈에 띄어 거기에 자리를 피고 점심을 먹는 등산객들도 눈에 띈다. 미륵사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면 산길 대신 헝클어진 계단길이 펼쳐지며, 싸리나무로 만든 담장 너머로 부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 미륵사가 보인다.
본글은 여기서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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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1년 1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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