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화산 둘러보기 (개화산전망대에서 호국충혼비까지)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자락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따라 5~6분 가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해맞이공원 개화산전망대 |
약사사 북쪽이자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해 하늘공원과 은평구, 서대
문구, 마포구 지역, 남산, 북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
해 조망의 가성비는 높다.
또한 이곳은 동쪽으로 시야가 트여있어 해맞이에 최적화된 곳이라 개화산해맞이공원이란 이름
으로 살아가고 있다. |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조선에서 제일
작은 고을, 양천현(
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는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일부)의
명소를 아낌없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8경첩(陽川
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이 변한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
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李秉淵)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
긴 것이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호관어(杏
湖觀漁)는 행호(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절두산성지)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복원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하늘공원(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개화산해맞이공원)
이곳에 있는 헬기장과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과 예비군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이들 시설은 건드리면 안된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원래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개화산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 양천고성(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
 |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 봉수대,
봉화산
(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월에 재
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가 금지된 구역이라 북
쪽으로 250m 떨어진 봉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으며, 나중에 개
화산 정상이 해방되면 그곳으로 옮겨져 크게
손질될 것이다. |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 상사마을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6-1호 |
봉화정에서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 개화산숲길을 잠시 접고 강서둘레길 3코스(개화산전망
대↔서남환경공원 북쪽, 4.56km)를 따라 상사마을로 내려갔다.
상사마을은 개화동 북쪽 끝이자 개화산 북서쪽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북쪽에는 행주대교와 한
강이 있고 동쪽은 마을을 포근히 감싼 개화산, 남쪽에는 부석마을과 내촌마을, 서쪽에는
김포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여기서 행주대교와 이어지는 서쪽 도로(개화동로)를 넘어가면
경
기도 김포시임>
마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며, 부석마을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마
을이다. <예전에는 김포공항 서쪽 평야 한복판에 자리한 과해동(果海洞)이 서쪽 끝을 이루었
으나 김포공항 확장으로 마을이 철거됨> 마을 동쪽 끝에는 개화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으며, 그 앞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마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71년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410년이었다. 그
러니 그새 50여 년이 강제로 얹혀져 460년 정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높이 22
m,
둘레 4.45cm로 상사마을이 적어도 400~500년 정도 되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인데, 은행나
무는 스스로 싹을 틔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심은 것이다. 그러니 이 나무도
당시 마을 촌장이나 선비가 심었을 것이다.
나무 옆에는 상은약수터가 있으나 이미 옛날에 숨통이 끊겨 물이 마른지 오래되었으며, 지금
은 마을 창고로 쓰여 이곳이 예전 약수터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

▲ 상사마을에서 개화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강서둘레길 3코스)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 1코스, 개화산둘레길) |
상사마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다시 개화산으로 올라와 개화산숲길에 임했다. 도보길이 천하
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그 야심작을 내놓았으니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강서둘레길은 개화산을 중심으로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1코스는 개화산을 1바퀴 도
는 3.35km의 상큼한 산길이다. 그래서 개화산둘레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오르락내리락이 도
돌이표처럼 반복될 뿐, 힘든 구간은 거의 없으며, 60분 이내면 충분히 1바퀴가 가능하다.
여
러 전망대가 닦여져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약사사 윗쪽과 개화산전망대, 미타
사 윗쪽, 신선바위,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지나간다. 하여 이 길과 개화산자락길을 같이
돌면 개화산의 80% 이상을 둘러보는 것과 같다. |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희대의 세금 낭비의 현장,
아라뱃길이나 구경하라고 만든 의미 없는 전망대이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공항을 비롯하여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크게 누워
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는데, 산신이 이곳을 지나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산신이
나 신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여겨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 개화산 호국충혼비(개화산호국공원) |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호국충혼비(김포지구 전투위령비)를 지닌 개화산 호국공원이 마
중을 한다. 나그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곳은 6.25 때 이곳에서 전사한 국군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가 터지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
이었음) 지역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까지 후퇴했
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탄약과
식량보급이 끊겼고,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1사단 12연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 1,100여 명이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이후 호국신(護國神)이 된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 31일에 충혼비를
세우고 매년
6월과 가을걷이가 끝나는 11월에 지역 주민들과 1사단 군부대 장병들이 같이 위
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충혼비와 태극기,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전부였으나 추모의벽과 명각비, 기
념조형물을 새로 닦고 주변을 산듯하게 정비하여 2017년 12월 개화산 호국공원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충혼비 뒤에 병풍처럼 둘러진 검은 피부의 추모의 벽에는 개화산에서 산화
한 1,100용사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푸른 잔디와 개화산의 녹음(綠陰)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으로 호국신들을 기리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 평화로운 모습의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주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