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권 사진,답사기/강화도

# 서해바다의 관음성지 ~ 석모도 보문사, 눈썹바위

도봉산 고양이 2005. 7. 3. 15:51


' 2004년 11월 27일, 강화도(江華島) 역사기행 ' ~ 상편
'석모도 보문사 ~ 눈썹바위 ~ 마애관음보살 ~ 석모도 갯벌 ~ 인삼동동주'

보문사 눈썹바위와 관음보살 ~
▲ 보문사 눈썹바위와 관음보살상

* 이번 답사 코스
' 서울
→ 강화읍 → 외포리포구 → 석모도 → 보문사(일주문, 은행나무, 윤장대, 석굴, 향나무,
맷돌, 극락보전) → 눈썹바위(마애관음보살) → 보문사
→ 매음리해변 → 외포리 → 강화읍 →
강화해변도로 → 광성보 → 용두돈,손돌목 → 손돌돈 → 강화읍내 →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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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에 찾아간 석모도 ~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던 11월의 마지막 토요일(27일), 아리따운 여인네 3명과 함께
강화도(광성보)와 석모도(보문사)를 찾아갔다.
이번 기행은 개인적으로 매우 가고 싶어했던 곳들―보문사(석모도)와 광성보―을 찾아가는지라
그 기대는 실로 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와 여인네 3명(모두 나보다 1살 연하)은 송정역(5호선)에서 아침 8시에 모이기로 하였는데 다들
송정역에서 거의 30km이상 떨어진 곳에 살고들 있어서 아침 일찍부터 동쪽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여명(黎明)을 바라보며 열심히 부지런을 떨어야 되는 수고를 감당해야 했다. 그래야만 시간을
맞출 수 있기 때문에. 다행히도 다들 제시간에 와주어 별다른 차질은 없었지.

다들 바쁘게 살아가다보니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는 그들, 그들의 표정과
눈에는 온통 가을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움과 설레감으로 가득하였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
속세(俗世)의 온갖 번뇌에 찌들며 살던 나와 그들, 이렇게 속세를 뒤로 하며, 잠시나마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는 생각이 나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우리는 이제서야 서울을 벗어나지만 우리의 마음은 벌써부터 강화도와 보문사를 배회하고 있었다.

송정역에서 강화도로 가는 직행버스(송정역→강화 3300원)를 타고 강화로 가는 1시간의
긴 시간 동안 그들이 정성스레 싸가지고 온 김밥과 간식 등으로 허기진 아침을 달래면서
그들과 이야기 꽃을 몇 송이씩 피워 본다.

강(江)처럼 보이는 강화해협을 거의 2년 만에 건너며 강화도의 서울인 강화읍에 도착,
여기서 다시 외포리로 가는 강화군내버스(1200원)를 타고 20분을 달려 석모도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외포리 포구에 도착하니 바다 건너편으로 평소 동경(憧憬)해 오던 그 섬,
가보고 싶었던 그 섬, 석모도가 내 눈 앞에 바라보인다.
 


▲ 외포리 선착장에서 바라본 석모도
저 바다 건너편에 그 섬과 그 절(보문사)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저 바다를 건너 그 곳으로
간다는 지금의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어린아이처럼 설레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허락이 된다면 보문사에서 서해낙조(西海落照)도 보고오면 좋으련만
그건 1박을 하지 않는 이상은 어렵다.



▲ 강화도(외포리)와 석모도를 이어주는 배
석모도와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써 배 안에는
관광객(등산객)들과 그들이 끌고 온 수레(車)들로 가득하다.


* 석모도(席毛島)가는 방법
'외포리↔석모도' 배편은 약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요금은 성인 왕복 1200원,
차량을 가져갈 경우 수송비 명목으로 1~3만원을 더 내야 된다.
토요일, 휴일에는 거의 20분 간격으로 증편 운행되며
마지막 배는 일몰(日沒)시간에 맞쳐서 드는데
겨울철에는 보통 17시, 여름에는 18시 정도에 뜬다.

그 외에도 강화 화도면 선수리에서 석모도 보문리까지
1시간 간격으로 뱃편이 운행한다. (외포리는 안감)
 

▲ 외포리 선착장 부근 갯뻘과 서해바다 (2)
서해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갯뻘,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갯뻘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추세로 강화도 지역의 갯뻘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세계적으로도 매우 우수한 갯뻘로 평가를 받고 있다.

강화도와 석모도를 비롯한 부근 도서(島嶼)의 갯벌은 모두 천연기념물 419호
지정되었으며 단일 문화재 지정 구역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고 한다. (1억 3600만평)

*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보고 싶다면 각 사진을 클릭하기 바람

 

▲ 갯뻘을 장악한 저 하얀 것들의 정체는?
외포리 어시장 앞 갯뻘에는 하얀 옷의 갈매기들로 가득하다.
저 곳은 조그마한 갈매기들의 왕국.

▲ 외포리 마을과 갈매기 한 마리,
그리고 잔잔한 바다 ~~

외포리를 출발한 배는 석모도를 향해 힘찬 뱃고동을 울리며
거대한 몸집을 바다에 띄운다.
바다로 들어서니 동쪽에서 차디찬 바닷바람이 우리를 사정없이 내려치고
바람에 여파로 밖으로 내민 손은 금세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워진다.

배가 움직이자 갯뻘에서 망을 보던 갈매기들이 배 주변을 포위하며
일종의 통행세(?)를 달라고 시위를 벌인다.

석모도에 가까워질수록 강화도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만 간다.

▲ 바다의 주인 갈매기
바닷배를 타다보면 꼭 만나게 되는 갈매기들.
그들은 통행세(?)를 요구하며 열심히 배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온 새우깡 등으로 그들과 타협을 시도해 본다.

◀하늘 전체가 온통 그(갈매기)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날개를 활짝
펴고 넓은 하늘을 마음대로 노니는
갈매기가 그저 부러울 뿐..

아래는 왼쪽 갈매기를 확대한
것임.

▲ 석모도의 관문 석포리 선착장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약 10분 만에 석모도의 관문인 석포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건넌 바다는 강화도와 석모도, 교동도 등으로 빙 둘러쌓여 있어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닌 마치 소양호나 대청호 같은 넓은 호수나 강(江)을 건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육중한 덩치의 배가 선착장에 당도하자, 배 안에 있던 인차(人車)가
한꺼번에 섬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석포리 포구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 석모도 상륙 ~ 보문사까지
석모도의 관문, 석포리 포구에서 약 200m가량 안쪽으로 들어오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는 석모리 가는 버스와 보문사 가는 군내버스가 각각 출발하는데 석모리는 약 2시간 간격,
보문사는 약 1시간 간격으로 2대가 운행하며 외포리에 들어오는 뱃시간에 맞쳐서 출발한다.

여기서 보문사까지는 불과 15분 거리임에도 요금은 무려 1000원이나 받는다.
보통 농어촌에서 부과하는 구간요금을 적용해도 저렇게까지는 나올 수가 없는데,
거리에 비해 요금이 지나치게 비싼 것 같다.
그렇지만 뭐 별수가 있겠는가? 그것을 안타면 거기까지 걸어야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꿩 대신 닭을 선택할 기회는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버스를 탈려면 우선 버스 옆에 있는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해야 탈 수가 있는데 대략 민모루
이전까지는 800원, 민모루입구는 900원, 보문사까지는 1000원이다.

보문사 가는 군내버스에는 이미 등산복으로 무장한 사람들로 이미 초만원,
출발시간이 되자 군내버스는 아름다운 석모도 관내를 약 1/4바퀴를 돌며
약 15분 만에 보문사 종점에 도착했다.



▲ 보문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상봉산(316m)
보문사를 품에 안고 있는 상봉산은 석모도의 주산(主山)격이 되는 산으로
산세(山勢)가 완만하여 등산하기에는 매우 평이하다.

상봉산의 주요 봉우리로 보문사 뒤쪽에 해발 267m의 낙가산이 있는데
낙가산이란 이름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산다는 보타낙가산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하며
이는 동해바다에 있는 관음성지 낙산사(洛山寺)의 유래와 비슷하다.
 

▲ 보문사 주차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소나무
혹시 청도 운문사(雲門寺) 처진소나무의 일족은 아닐까?

보문사 종점(주차장)에서 보문사까지는 약 1km가량 올라가야 된다.
주차장(종점)에서 일주문까지는 여타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주막(酒幕)들로 가득한데
이들 주막의 아줌마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여기서 먹고 가라며 바짝 튀긴 나물튀김과
몸에 좋다는 인삼동동주를 미끼(?)로 지나가는 이들에게 제공하며 치열한 마켓팅을 벌인다.



▲ 나물튀김
이 튀김의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나질 않아 여기서는
그냥 나물튀김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우리는 주막 아줌마들이 무차별적으로 제공한 나물튀김을 주는 데로 받아 먹었지.
거기에 인삼동동주까지 2잔 얻어 마시고.. 신성한 절간에 이렇게 술을 마시고
들어가도 되는지 벌써부터 취기가 도는 것 같다..


▲ 바다를 굽어보는 보문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 왼쪽에는 매표소가 있다. 성인 입장료는 1500원,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관음성지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 보문사 올라가는 길

▲ 보문사 사적비(事蹟碑)

◀ 보문사 은행나무
수령(樹齡) 400년의 오래된 나무,
가을에 왔으면 노란색의 아름다운
그녀(은행나무)를 봤을 텐데
이렇게 겨울에 오니 은행잎은 다
떨어지고 없는 완전 벌거숭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뭇가지를 하늘로 높이 치켜들며
애타게 봄을 기원하는 은행나무의
처절한 몸부림.

* 참고로 은행나무의 거의 99% 이상은
사람들의 손으로 심어졌다고 한다.


▲ 보문사 은행나무의 간략한 신상명세가 적혀 있는 안내문
나무의 높이가 0m라니..? 한 30m는 되어보이던데..
게다가 나무둘레가 30m?? 어떻게 저런 어처구니없는 수치가 나올 수 있을까?
안내문과 나무를 관리하는 강화군청, 삼산면사무소, 보문사 관계자들의 직무유기가
저런 어이없는 수치를 만들었으리라..
 

◀ 봄을 기다리는 은행나무-
겨울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이기고
나면 어김없이 따뜻한 봄은 다가와
다시 아름다운 옷(은행잎)을
선사해 줄 것이다.
 

 


♠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한 곳 ~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석모도 낙가산(상봉산)의 서쪽자락, 서해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관음성지 보문사가 자리해 있다.
보문사의 '보문(普門)'이란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음보살의 보살행(菩薩行)이 크고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그것을 상징이나 하듯 이 절은 동해바다의 낙산사(洛山寺), 남해바다의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절은 선덕여왕 3년인 635년, 회정대사(懷正大師)라는 승려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도를 닦고 강화도 지역으로 들어와서 보문사 외에도 마니산(摩尼山)에
정수사(淨水寺)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리 신뢰할 수준은 되질 못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전국 곳곳에 절을 세울 만큼의 여건은 되질 못했으며 아직은 국도(國都)와 주요
큰 고을에 한해서만 절이 세워졌을 뿐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주요 고찰(古刹)들은 거의 대부분 절의 내력(來歷)을 크게 뻥튀기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 내력을 모두 믿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감안한다면 이 절의 창건시기는 대략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이후로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그 시절에 활동했던 회정(懷正)이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가 창건했을 것이다.

이 절은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해 있는데 이는 석모도에 어업(漁業)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이 살다보니 그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 곳에 절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절은 어민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이 절은 어민들 외에도 석모도를 근거지로 둔 해상세력이나 상인(商人)세력 등이 자신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용도로 세웠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절이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데 법당(法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비롯하여 요사(寮舍), 대방(大房), 범종각, 석실(石室), 삼성각 등 약 5~6동의 전각이 있으며
마애관음보살, 석실, 맷돌, 향나무 등의 인천지방문화재 4점을 보유하고 있다.

강화군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자 서해일몰과 관음성지로 이름이 높은 이 곳은 그 매력 때문인지
휴일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오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이 곳을 찾아온다.


보문사 찾아가기
① 대중교통 (2005년 5월 현재)
* 신촌터미널, 송정역(5호선)에서 외포리행 직행버스 이용(30~50분 간격),
혹은 10분 간격으로 다니는 강화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에서 20~40분 간격으로 다니는 외포리 방면 군내,직행버스로 갈아타도 된다.
어차피 요금은 한 번에 가나 두 번에 가나 모두 같다.

* 외포리 포구에서 석모도까지는 앞에서 언급했으므로 생략
* 석모도 석포리포구에서 보문사까지 군내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요금은 1000원

② 승용차
* 서울에서 외포리까지 : 서울 → 김포 → 48번국도 → 강화읍 → 냉정리 → 인산리 → 외포리
* 인천에서 외포리까지 : 인천 검단,양곡 대곶 온수리(전등사) 화도(마니산)
양도면
인산리 → 외포리
* 외포리에서 석모도까지는 배를 통해 차량 수송이 가능하다. 수송비는 1~3만원 정도.
* 석모도 석포리에서 보문사까지 : 석모도 석포리포구 → 매음리 → 보문사

보문사 입장료 (2005년 4월 현재)
구분관람료주차료
어린이개인800

대형 4500
소형 2000

단체600
중,고생개인1200
단체1000
어른개인1500
단체1200



▲ 석모도 관광안내도 (보문사 홈에서 인용함)


♠ 서해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조그만 산사 ~ 보문사

▲ 보문사 법음루(法音樓)
사물(四物)의 일원인 목어(木魚), 법고(法鼓), 운판(雲版)의 보금자리,

▲ 보문사 범종각(梵鍾閣)
사물(四物)의 나머지 하나인 범종이 걸려 있다.
이 종은 1975년, 육영수(陸英修) 영부인(令夫人)의 시주로 조성되었다고 하며
종의 무게는 무려 5톤, 높이는 2.1m에 이르는 거대한 종이다.

서해바다를 향해 넓게 울려퍼질 저 종소리는 과연 어떠할까?
한 번 듣고 싶어진다.
 


◀ 보문사 윤장대(輪藏臺)
불가(佛家)의 최대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윤장대,
윤장대는 경북 예천 소재 용문사(龍門寺)
대장전(大藏殿)에 있는 것이 제일
유명하고 화려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윤장대는 용문사의 그것을 모방하여
근래에 만든 것으로 원래는 서적(書籍)
을 넣어두던 서고의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신도들이 저 윤장대를 한바퀴
돌리면 그 안에 넣어둔 불서(佛書)의
내용을 모두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사람들은 저 윤장대를 한바퀴 씩
돌려보곤 한다. 물론 나도 돌려봤음.
그러면 정말 한바퀴를 돌리면 불서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그건 당연히 말이 안되지. 그렇지만
그 어려운 불서(佛書)를 일일이 보고
깨우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게다가 옛날은 문맹자(文盲者)가 전
인구의 9할을 차지하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런 상황이고 보니 그런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위한
마켓팅으로"윤장대를 돌리면 불경을 모두 이해 한 것과 같다" 이런 소문을 내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했던 것이다.

▲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보문사 극락보전(極樂寶殿)
보문사의 법당인 극락보전,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이라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이 전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근래에 새롭게 단장하였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문의 꽃창살은 정말 알록달록 눈이 부실 정도이며
어칸 양쪽 평주(平柱)의 주두(柱頭) 부분에는 서울 개운사(開運寺) 대웅전(大雄殿)의
그것과 비슷한 용머리 2개가 매일같이 극락전을 수호하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극락보전(極樂寶殿)
 

▲ 보문사 극락보전의 측면
극락전을 떠받들고 있는 기단(基壇)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등이 조각되어 있다.
 

▲ 보문사 극락보전 기단에 새겨진 어느 상
저건 12지신상이 아니다. 모습을 보아하니 사천왕의 하나인 광목천왕(廣目天王) 같기도 하고
삼지창(三枝槍) 대신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과 입을 다문 모습으로 봐서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참 애매한 석상이다.

무서운 표정으로 방망이(혹 쇠파이프는 아닐까)를 불끈 쥐며 왼손에 보탑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공포감이 느껴진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나와 나를 향해 방망이 타작을 할 것 같은 저 모습~

 

◀ 극락보전 추녀 밑에
매달린 풍경(風磬)
우리들에게 한가락 하모니를
들려주는 풍경(바람방울),




 

▲ 보문사 석실(石室) - 자연 동굴에 만들어진 석굴(石窟)
보문사에는 유명한 것이 2개가 있으니 하나는 석실(석굴),
다른 하나는 눈썹바위와 관음보살이다.

이 석실은 635년 회정대사가 만들었다고 하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며 다만 1812년에 중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아마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굴로 보여진다.

석실은 자연동굴을 오묘하게 개조하여 만들었는데 입구에는
'1⌒1⌒1⌒1'모양의 3개의 홍예문을 만들었고
그 안에 석가여래, 미륵불, 보살, 나한상 등을 모셨다.

이 석굴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
* 아주 멀고 먼 옛날, 보문사 측에서는 635년이라 주장을 하나, 이는 거짓말.
어쨌든 옛날에 석모도에 살던 어부 모씨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바다에 쳐놓은 그물이 다른 때와는 달리 꽤 무거운지라 이거 큰 넘이 잡혔구나
싶어 즐거운 마음에 힘껏 당겨보니 왠걸 이상한 괴석(怪石) 22개가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화를 잔뜩 내며 "젠장 뭐 이런게 걸려왔냐" 하며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고는
그것을 다시 바다에 내버리고 말았다.

그 날밤, 집에서 자고 있으려니 꿈 속에서 노승(老僧)이 나타나 꾸짖기를
"야 이놈아! 그 괴석이 뭔지나 알고 버렸냐? 그 돌들은 천축국(天竺國)에서
오신 불상들이시다. 내일 다시 가서 그 분들을 모셔와 잘 받들도록 해라.
그러면 너는 복을 받고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만약 또 버린다면 그 때는 각오혀라~"
생시에 가까운 꿈을 꾸고 깜짝 놀라 일어난 그는 다음날 다시 바다로 나가
괴석이 발견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쳤는데 이번에도 또 그 괴석이 걸려 올라왔다.
그래서 노승의 말대로 지금의 석굴을 만들고 그 불상을 모시니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면서 잘먹고 잘살았다는 이야기~

이 전설을 통해 이들 불상은 바다에서 발견 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종종 불상이나 옛 사람들의 물건들이 바다나 강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어느 절에 있던 이들 불상이 절이 파괴되거나 약탈되는 과정에서 바다에
버려진 것을 석모도 어부가 우연히 발견하여 보문사에 모신 것이 아닐까 생각되며
이 전설을 통해 보문사가 해상세력 또는 석모도 어부들을 위한 사찰임을
은연중 내비추는 것 같다.

석실의 기둥은 마치 로마, 그리스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둥을 빼닮은 것 같으며
석실 위 바위에는 세월의 때가 가득히 끼여있다.

이 석굴은 인천지방유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었다.
 

▲ 석실(石室) 오른쪽에 어느 석상(石像)
이 석상의 정체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서해바다의 용왕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래도 어부들을 상대하던 사찰이다 보니 그들이 숭배하던 용왕(龍王)도 취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므로 석실 오른쪽에 따로 용왕상을 배치한 것 같다.
 

▲석실(石室) 내부
돌로 만든 불단(佛壇) 위에는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는 20여개의 불상과
나한상(羅漢像)이 계신다.
실제로는 26개 상인데, 4개 상은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규모는 매우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소원을 들어준다는 소문에 신도들
여러 명이 정성스레 예불을 드리며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의지를 한다.

석실 내부는 촬영금지이며, 기도 중이라 안에는 들어가지 않아
불상의 자세한 모습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단 가운데 약간 커다란 불상은 불상 계열, 양쪽 끝에 것은 나한상이다.

석실 나한상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서려 있는데..
* 조선 후기,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동짓날, 보문사 승려들은 팥죽을 만들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그런데 아궁이에는 불이 없고 성냥도 없어 팥죽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때 보문사 아래에 살던 고씨의 집에 보문사의 동자승(童子僧)이
성냥을 구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 맨발로 찾아왔다.
고씨는 그 동승을 불쌍히 여기고는 따뜻한 방으로 그를 데리고 와 팥죽을
한 그릇 먹이고 성냥을 보내주었다.
몇시간 뒤 보문사 부엌 아궁이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면서
승려들은 신이 났고 서둘러 팥죽을 지어 불공을 올리고는 맛있게 공양을 하였다.

그 후 몇일 뒤, 보문사 주지승은 고씨 집에 놀러갔다.
고씨가 주지에게 "저번 동짓날. 어른 승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어린 동자승을 내려보냈습니까?"

이에 주지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동자승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동자승이 없습니다"

고씨 집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주지승은 승려들에게 고씨의 말을 전하면서
그 동자승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중, 우연히 석실에 들어가보니
왠걸 석실 한쪽 구석 나한상의 입에 팥죽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승려들은 나한의 은혜에 크게 감복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
 

▲ 보문사 향나무 - 인천지방기념물 17호
석실 불상의 법력을 받아서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마치 용트림을 하는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변신한 향나무.

나무의 수령(樹齡)은 6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높이는 겨우 1.7m에 불과한
난쟁이 향나무, 이 나무는 바위 틈에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로
한국전쟁 때 3년 동안 뇌사상태에 빠져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신비의 나무로 유명하다.
 


▲ 보문사 향나무 안내문
 

▲ 석실을 뒷배경 삼아 웅크리고 있는 보문사 향나무
석실 앞에 서 있는 신비의 향나무,
이렇게 보니 용트림을 하는 모습으로는 보이질 않는다.


▲ 보문사 석실
삼성각(三聖閣)에서 바라본 석실과 사람들.
 


▲ 보문사 맷돌 - 인천지방민속자료 1호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
여기서 어처구니란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를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기가 막힐 때 사용하는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가 된 것이다.

보문사 승려들이 불공과 공양에 쓸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을 이 맷돌은
현대화된 조리기구에 밀려나면서 지금은 이렇게 손잡이(어처구니)를 잃어버린 채,
삼성각 아래에서 한가로이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맷돌 위에는 다보탑, 석굴암 본존불의 미니축소판부터 동자상들까지
찾는 이 하나 없는 늙은 맷돌의 말벗이 되어 주며, 그의 좌우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돌절구 2개가 나란히 자리를 함께하며 왕년의 전성기를 그리워 한다.
 

▲ 보문사 맷돌 안내문

▲ 보문사 삼성각(三聖閣)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전각
삼성각은 말그대로 세명의 성스러운 존재―나반존자(那畔尊者), 산신(山神),
칠성신(七星神)―
를 모시는 건물로 삼성각 앞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하얀 미의
석등 1쌍이 있고, 그 앞 극락보전 기단에는 12지신상이 조성되어 있다.
 


 


♠ 눈썹바위 관음보살을 뵈러 올라가는 418개의 계단길



◀ 보문사 경내(境內) 뒤로 보이는 눈썹바위
극락보전 옆으로 눈썹바위로 올라가는 계단길이
하늘을 향해 펼쳐져 있다.

석실(석굴)과 더불어 보문사의 상징물인 눈썹바위와
마애관음보살, 바다를 바라보며 오늘도 보살행(菩薩行)을 펼치고 있을 인자한 관음(觀音)이 계신 곳,

보문사에 온 사람들은 꼭 눈썹바위까지 올라간다.
(물론 안올라가는 사람들도 많음)
여기까지 와서 그 바위와 관음보살을 안본다면
보문사에 왔다고 우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보문사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라 할 수가 있다.

저 계단을 올라 바위에 이르면 관음보살을 뵈올 수
있고 서해바다를 한눈에 보이는 정말 조망이 좋은
곳이다.

 

 

 

 


 

◀ 눈썹바위로 올라가는 계단
108계단도 아닌 418계단, 왜 418계단인지는
잘 모르겠다.
비록 길이 약간 가파라서 올라가는 것은
좀 힘들겠지만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계단 끝 눈썹바위에 있는 인심좋은
아저씨하나가 그대들을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그의 앞에서 훤히 펼쳐진 서해바다를
바라보면 온갖 근심덩어리로 꽉 막힌
가슴이 확 탁 트일것이다.

▲ 눈썹바위 올라가는 길
낙가산의 자연림 사이로 조성된 계단길,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딛일수록, 하늘과 점점 가까워 짐을 느낄 것이다.


▲ 눈썹바위를 향해 올라가는 여인들
 

▲ 눈썹바위 못미쳐
긴 눈썹처럼 생긴 바위에 그 분이 계신다.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 계단에서 바라본 보문사와 서해바다
아직은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 눈썹바위 아래에 있는 기도접수처
보문사를 먹여살리는 재정의 상당수는 눈썹바위의 관음보살이 책임져 준다.

▲ 계단에서 바라본 상봉산
앙상한 가지 사이로 보이는 상봉산의 모습.
우리는 저 낙가산 정상까지 오를 생각을 했으나 길을 잘못들어 결국 눈썹바위만 보고 내려왔다.


 


♠ 눈썹바위와 보문사 마애관세음보살좌상 ~ 인천지방유형문화재 29호
보문사에서 418계단을 따라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올라가면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를 만날 수 있다.
그 바위가 바로 그 유명한 눈썹바위로 바위에는 거대한 관음보살이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환하게 맞이하고 계신다.

불상이 있는 바위 위쪽에는 특이하게도 암석이 눈썹처럼 앞으로 삐죽 나와 약 80년 동안, 관음보살의
우산 역할을 해주어 불상의 건강은 매우 양호하다.

이 불상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주지였던 이화응(李華應)씨와 그 당시 보문사의 주지인
배선주(裵善周)씨가 합작하여 조성한 것으로 옛 관음도량(觀音度量)의 전통에 따라 새겼다고 한다.

불상의 나이는 고작 80년에 불과하지만 어둠의 시절 당시에 세워진 여러 불상 중에 하나이자
제일 큰 규모의 불상으로 재정도 넉넉치 못했을 승려와 부근 주민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것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석불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의식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아직 이렇게 큰 불상을 만들 정도의 저력이 있다. 이런 뜻으로 말이다.

이 불상은 솔직히 덩치만 크지 생긴 것은 좀 별로이다.
수려한 용안(容顔)과 외모를 자랑하던 신라, 고려의 불상과는 달리 뭔가가 부족해 보이고 침울해 보이는
얼굴 표정, 그의 표정은 1920년대 어둠의 시기를 살아야 했던 우리 한족(韓族)의 우울했던 마음이자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 석불은 소원을 들어주기로 이름이 나 있어 바위 아래 기도처에 시주를 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나며
그의 앞에는 언제나 신도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 앞에 서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 그 풍경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고 만다.
여기서 바라보는 낙조(落照)는 김제 망해사(望海寺),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낙조와 버금갈 정도로
그 찬란함을 자랑한다.

언제 1박으로 이 곳에 온다면 관음보살 앞에 서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잠시나마
속세의 일을 잊어보고 싶다.



 

▲ 눈썹바위와 마애관세음보살좌상
눈썹처럼 삐죽 나온 암석과 그 밑에 관세음보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연은 저 곳에 저런 멋있는 바위를 만들었고
20세기 초반, 인간은 저 곳에 관음보살을 조성하여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 눈썹바위 마애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보면 볼 수록 신기한 눈썹바위의 모습.

▲ 바위에 비스듬히 누워 바다를 바라보는 관음보살
석모도 주변에서 조업하고 있을 어부들의 안전을 위해 오늘도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를 하는 마음 넓은 관음보살
 

마애불로 가는 길은 겨우
한 사람만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다.

* 통행시 주의 요망.
 

거대한 삿갓을 쓰고 있는
듯한 관음보살 -

불상의 높이는 약 9.2m, 폭은
약 3,3m에 정말 어마어마한 석불로
저런 불상이 만약 수직으로 서
있었다면 그 위대함에 눌려 은근히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위로 높이 쳐다
봐야 되므로 고개도 꽤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음보살은 중생들의
그런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저렇게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며
근엄이 없는 편안한 자세로
사람들을 맞이하니 굳이 고개를
높이 쳐들 필요가 없어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니 정말 마음이
넓은 보살이라 하겠다.


 

▲ 관음보살 앞에 있는 향로(香爐)
금빛 찬란한 금동향로 양쪽으로 용 2마리가 몸을 꿈틀며 향로를 지키고 있다.
향로에는 수십 개의 향들이 나름대로의 향을 내면서 꽂혀져 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다녀갔는지를 보여준다.
 

▲ 정면에서 바라본 관음보살
불상의 높이가 거의 10m가 이르는 대불(大佛)로 앙련(仰蓮)으로 구성된
대좌(臺座) 위에 선정인(禪定印)을 하며 앉아 있다.
선정인 아래 다리 부분은 옷에 덮여 있는 방식으로 처리했는데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다.
다만 못생긴 발바닥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저 불상이 양반자세로 앉아 있구나를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가슴부분에는 특이하게도
'卍'마크가 새겨져 있어 참 이채롭다.
둥근널쩍한 그의 얼굴은 시름에 잠긴듯, 별로 유쾌한 인상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어둠의 시절에 만들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 당시 힘들게 살던
이 지역 백성들의 얼굴이리라..
 

▲ 관음보살의 발바닥
불상의 발바닥을 보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참 힘든데
이 불상은 발바닥의 모습을 속시원스레 보여주고 있다.

예전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한테 듣기로는 불상의 발바닥을 보면,
죽은 뒤, 저승에서 십왕(十王)들이 사자(死者)의 행적을 평가하는데
만약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지옥(地獄)으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부처(불상)의 발바닥을 보았다면 그 이유만으로 극락(極樂)으로 가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연유로 인해 불상을 찾으면 꼭 발바닥을 찾는 편이지, 나중에 극락갈라꼬~

무릎 위에는 선정(禪定)에 들었음을 보여주듯 두 개의 손이 얹혀져 있고
손 위에 조그만 정병(政柄)이 하나 있으니 이는 관음보살이 좋아하는
감로수(甘露水) 병으로 물방울이 들어가기도 버겨울 정도로 정병의 크기가 너무 작다.
 

▲ 관음보살의 얼굴부분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이마 가운데에 백호,
지긋히 감은 두 눈, 커다란 코, 입술, 풍만해 보이는 얼굴살,
그리고 해학적 분위기의 길쭉한 귀가 있다.
 

▲ 눈썹바위
불상의 우산 역할을 해주는 눈썹바위의 눈썹 부분.
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암석 아래에 무지개 모양처럼 돋음새김이 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친 흔적들로 무엇을 새길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대구 갓바위처럼 갓 모양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
물론 보관이란 모자를 쓰고는 있지만 더 장엄하게 연출하기 위해
저 곳에 새김을 하는 모험까지 했던 것 같다.
어떻게 저기까지 손길을 미쳤을까. 그 당시 사람들의 정성이 정말 대단할 뿐이다.

▲ 눈썹바위 앞 석등의 화사석(火舍石)
화사석에도 불상들이 자리하고 계신다.
석굴암 본존불의 축소판과 금동여래입상, 귀여운 아기동자의 인형까지.
 


▲관음보살 옆에 새겨진 각자(刻字)
왼쪽에는 '造佛華應禪師'라 쓰여 있으니 즉 앞에서 언급한 이화응 선사가 조성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오른쪽 각자에는 '華嚴會上八部四王衆,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華嚴會上護法善神衆'
(화엄회상필부사왕중,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화엄회상호법선신중)이라 새겨져 있어
이 절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하는 곳임을 은근히 드러내 주고 있다.
 

▲ 눈썹바위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구름들이 밀려오면서 뭉개구름 마냥 약간 흐려졌다.
사진이 흐려 시원스레 펼쳐진 전경 분위기는 안나겠지만
실제로 가서 보면 정말 시원스럽고 가슴이 확 트인다.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끝없이 보살행(菩薩行)을 펼칠 관음보살의
넉넉한 마음이 느껴지는 곳,

건너편에 보이는 섬은 대송도라는 섬이다.

▲ 내려가면서 바라본 눈썹바위와 마애불
평소 보고 싶어하던 보문사 관음보살을 한 20분 정도 친견한 것 같다.
바위에 오묘하게 자리한 대(臺)에는 그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돌난간에 의지해 앉은 사람들이 많아서 아래서 보면 정말 아찔하다.
혹 실수로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아무리 인심좋은 그가 그들을 지켜준다 한들
개개인까지는 챙겨주기 힘들 것이다.

마애불과의 대면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12시가 되었다.
슬슬 배도 고프고, 잠깐 쉬고 싶고 그래서 기도처 옆 나무 의자에 오손도손 앉아 아까 전에
먹다 남은 김밥과 과자, 음료수를 말끔히 먹어 치운다.
산에 올라 먹는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모두 꿀맛인 것 같다.

점심을 먹으며 뒤에 확 트인 배경을 바라본다.
서해바다의 푸른 물결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주변으로는 때 묻지 않은 숲이 덮여 있어
자연의 향긋한 냄새로 코가 즐겁다.

점심을 마치고 다시 418계단을 내려와 보문사 경내로 내려온다.
그런데 점심이 부실하여 아직도 속이 허전, 물론 여인들도 마찬가지. 마침 점심시간이라
공양이라도 할까 했지만 애들이 절밥을 싫어하여 그냥 내려왔지. 비록 절밥에 맛있는
고기는 없지만 나름대로 먹어줄만 한데 왜 싫어할까.
그리고 그들 중 2명은 교회를 다니는지라 불상에 대해 약간의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도 그들의 디카나 폰카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지만 유독 불상(佛像)만은 찍을 생각을
하질 않으니 단순히 저들을 불교의 신앙대상물이 아닌 문화유산이나 볼꺼리로 생각하며
접근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마도 눈썹바위 관음보살도 꽤 서운해 했을 테지
자신을 모델삼아 안찍어줘서 말이다. 관음보살이 언제 사람을 차별하던가..


♠ 매음리해변 산책과 인삼동동주 한잔 ~
보문사를 뒤로 한 채, 다시 보문사입구 매음리로 내려온다.
내려오면서 아까전 주막 중에서 마음에 든 곳을 골라 거기서 인삼동동주와 파전,
도토리묵을 먹을려고 했는데, 바로 몇 분전에 김밥을 먹어버려 식욕이 좀 떨어진 상태이다.
먹고는 싶은데, 그 상태에서 먹다가는 혹 그런 일은 없겠지만 좀 남길 것 같았지.
그래서 의논을 하다가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김밥 먹은 거 소화도 시킬 겸
바닷가에 가기로 하였다.

원래 우리계획은 보문사 다음으로 민모루해수욕장에 가는 거였는데,
거기까지는 거리가 좀 있어서 바로 가까이에 보이는 매음리 앞바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보문사 주막촌에서 바닷가는 바로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가보니 한 10분은 걸린 것 같다.
바닷가로 가는 길이라 해서 따로 길이 있는 것은 아니고 보통 시골의 논두렁길 같은
정겨운 길을 10분 가량 걸어들어가면 되는데 그 논두렁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니
길다란 둑방길이 펼쳐지면서 그 앞에는 들어가기조차 겁이 나는 검은색의
갯뻘이 대평원 마냥 드넓게 펼쳐져 있다.

우리는 처음에 해수욕장 비슷한 풍경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으나 정작 와보니
그런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다들 섭섭스런 표정들.
그렇지만 갯뻘 너머로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가 보이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 본다.

둑방길의 서쪽에는 뻘과 바다, 바다 건너에는 소송도, 대송도라 불리는 조그만 섬이
서로를 의지하며 물에 떠 있고, 둑방 오른쪽에는 논과 군데군데 물로 가득한
웅덩이들로 가득하여 전형적인 바닷가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매음리 해변 둑방길
 

▲ 둑방앞에 드넓게 펼쳐진 갯뻘
저 곳에 들어가면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좀 꺼림칙해 보이지만 저 곳에도 생명의 신비가 살아 숨쉰다.

▲ 둑방에서 바라본 낙가산과 보문사 주막촌

▲ 보문사 주막촌에서 바닷가 둑방으로 가는 논두렁길
길 주변으로 갈대들이 잘가라며 고개를 숙이며 아쉬움의 뜻을 표한다.

바닷가를 보고 다시 돌아오니 시간은 오후 1시, 바닷가로
산책좀 하고 왔더니만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버스시간(1시 20분) 때문에 그냥 강화도로 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일다경(一茶頃 = 대략 15분을 일컬으며 조그만 차 1잔을 마시는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옛 말이 있듯이 뭐 지금 나가나 1시간 뒤에 나가나 어차피 오늘 나가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동동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로 하였지. 어차피 급할 것도 없는데
이런데 와서 먹어야 맛도 있고, 주막 아줌마들의 후박한 마음을 움직여서
챙길 것 더 챙겨먹고 그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우리는 정류장에서 매우 가까운 어느 주막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늦은 점심을 먹는다.
아까는 이른 점심, 이번에는 늦은 점심밥.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석모도의 명물인 인삼동동주와 함께 해물파전을 시켰다.
내가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파전을 서비스로 준다는 유혹 때문인데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잘 생긴 파전 하나가 서비스로 제일 먼저 나왔고 그 다음에 동동주와
해물로 도배가 된 파전이 차례로 나와 우리들의 식욕을 돋구어 주었다.

인삼동동주는 인삼을 갈아서 만든 동동주라 알고 있는데 인삼이 들어간 것 때문일까
일반 동동주, 막걸리보다 맛이 좀 쓴 것 같으며 색도 좀 짙다.
동동주 1병에 대략 1인당 2잔씩은 돌아간 것 같은데, 먹고 나니 잠시 피로에 지친 심신에
활력소가 된 듯, 힘이 솟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인삼이 들어가서 그런 것이 아닐까?

파전과 동동주를 다먹고 있으려니 주막 아줌마가 나물튀김을 서비스로
한움큼 제공하면서 그것도 다 먹고 나니 이젠 정말 배불러서 거의 산달이 다가온
임산부처럼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였지.
그럼 이렇게 먹고 총 식비로 얼마가 나왔을까.
4달 전 이야기라 기억은 잘 나지는 않으나 아마 10000원 정도에 먹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마애불에서 먹은 김밥의 영향이 좀 있어서 그렇게 많이까지는 시켜 먹지는 않았지.

주점을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 주점 앞 테이블에 놓인 나물튀김과
인삼동동주를 몇 잔 더 마신다.

▲ 나물튀김과 인삼동동주
동동주는 저 동그란 병에 담아져서 나온다.
나물튀김 왼쪽 조그만 소주잔에 담겨져 있는 동동주,
눈썹바위나 상봉산까지 올라가서 서해바다를 시원스레 내려다 보고 내려와서
저거 한잔 마시면 사람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산행에 피로는 확 풀릴 것이다.

2시 30분이 되자 석모도 선착장(석포리)으로 나가는 군내버스가 들어온다.
승객 절반 정도를 태우고 거의 논스톱으로 달려 다시 석포리에 이르니
이로써 약 4시간에 걸친 석모도와의 짧은 인연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나중에 연이 된다면 다시 찾아 올 것을 다짐하며.. 그림처럼 떠 있는 그 섬을 떠난다.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상편은 2005년 1월 22일에 작성
3월 1일에 완성하여 5월 19일부터 만천하에 공개함
하편은 5월 23일부터 공개


* 6월 11일에 일부 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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